시리즈, 내가 읽은 책: 박기원씨의 이진섭(2)
턱걸이 제네레이션
박기원 씨는 사랑하는 남편 이진섭씨를 통해서 그 당시를 “살아 가야만” 했던 대한민국 남자들, 가장들의 한(恨) 같은 것을 몸으로 느꼈다. 평범하게 매일 매일을 생활하는 엄마, 주부로서만이 아니고 한 지식인, 문인으로서 남보다 더 깊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의 입장을 비록 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더 이해하려 노력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진섭씨는 1922년 생이고 박기원씨는 1929년 생, 모두 왜정(주: 그때는 ‘일제강점기’라는 고급스러운 말을 이렇게 불렀다)때 태어나셨다. 특히 이진섭씨는 청년기까지를 모두 왜정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다. 일본식 교육과 충성을 강요 받고 잘못하면 ‘남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갔을 그런 ‘기가 막힌’ 시대를 사셨던 것이고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도 거의 다 그랬을 것이다.
… 어쩐지 한국 남자의 한(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뒤늦게 얻은 이해심도 아량도 아니다. 술을 마셔야만 살았을 것 같은 그 시대에 살았던 남자들!
그 안에서 제일 다치기 쉽고 멍들기 쉽고 상처 받았을 그이의 외로웠던 가슴을 뒤늦게나마 아내인 나는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
그이는 생전 이런 말을 가끔 했다.
“우리 시대는 턱걸이 제네레이션이야. 무언가 해 보려고 안간 힘을 썼다가는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
그것은 아마 불안정했던 한국의 역사와 격동기를 겪고 살아야만 했던 고뇌에 찬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이의 진정, 깊은 남자의 마음을 나는 그가 살았을 때보다 그가 간 지금 되새겨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진정 그의 아픔이었지 아내인 나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남자만의 고독이었다. (본문 97쪽)
그이는 살아 있는 동안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겼을 때, 그것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원인을 타인에게 미루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다. 모든 결과는 먼저 자시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세대만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원인을 시대에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비극을 지니고 있다.
‘턱걸이 제네레이션’이라고 할까? 즉, 철봉 틀에 매달려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오르려 하면 철권으로 내리쳐 주저앉게 만든다. 한 번도 그 푸른 하늘을 못 보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생각 있는 남자의 몰골은 마치 주문진 해변가에 널려 있는 오징어의 모습 같다. 축 늘어져 말라 가는 오징어들 그것일 것이다.” (본문 169쪽)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
1983년 3월 이진섭씨의 장례 시, 동창, “많이 통하며 많이 비슷하고, 멀리 있어도 가슴 한구석으로 걱정을 해주며 살던 친구” 한운사(韓雲史)씨의 비문(碑文)이 명필 송지영(宋志英)씨의 글로 세워졌다.
비문
무엇인가를 쓰고
예술을 논하고
노래를 짓고, 노래 부르고
인생의 멋과 맛을 찾아 다니며
소유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李眞燮)이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마침내 여기 영원히
잠들었다.
새야, 바람아, 교교한 달아
찬란한 태양아
이 사람과 더불어 놀아 주라.
1983년 3월 10일
이 글에서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란 말이 이채롭다. 영어로 하면 “last Romanist among our generation“정도나 될까. 이분의 일생을 알고 나면 이 표현은 정말 설득력이 있다. 또한, 멋과 맛을 찾아 다닌다고 했지만 그 정도와 걸 맞는 철저한 책임 있는 한 가장이기도 했다. 문제는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건강을 해친 사실이다. 나의 기억에 그 당시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 중에는 이런 분들이 꽤 있었다. 지나친 자학과 불만을 거의 모두 ‘술’로 달래다가 일찍 운명을 하신 불쌍한 세대였다. 우리 세대도 이런 것들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많이 술 문화에 영향을 받긴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0% 그런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진섭씨는 아마도 최후의 “자유인” 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이진섭씨는 비록 말년에 세례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흔히 말하는 독실한 신자 처럼 같이는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부인의 눈으로 보아서도 그런 것이다. 종교도 ‘자유’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었을까? 틀에 얽매는 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까?
그이는 감히 남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했고, 그 속에서 헤엄치듯 살았다.
술잔을 들면서 혼자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고 그랬다. 나는 그런 그이 모습이 우스워,
“여보, 술잔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우? 그건 하나님에게 대한 모독 예요. 하나님을 접할 때는 몸도 마음도 정결하게 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죠”
그러면 그이는 너무도 당당하게
“모르는 소리. 술 안 먹은 맑은 정신 속에서도 음모, 살의, 도둑 심보 등 갖은 잡스런 생각을 지닌 채 기도하는 놈들도 있을 거야. 나는 술은 먹어도 마음만은 맑은 거울같이 깨끗해. 성경 말씀에도 있지. 착하고 순진한 어린애 같아야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말야. 나는 술잔을 들고 있지만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실 수 없을 거야”
나는 이론이 정연한 그의 말에 말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누구에게 구애 받거나 간섭 안 받고 자기 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믿었다.
그러고 보니, 그이같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도 드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본문 110쪽)
위의 글을 보면 이진섭씨는 위선자 부류를 아주 싫어한 것 같다. 올바른 소리에 비해 행동이 다른 사람들, 이진섭씨도 올바르고 이론 정연한 이론을 펼쳤어도 행동이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고 나면 그의 ‘자유론’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특히 율법에 얽매여서 ‘법의 기본 정신’을 모두 잃어버린 ‘바리사이파’ 같이 예수를 팔아 넘길만한 사람들이 ‘수두룩 닥상’인 이 세상을 살면서 어찌 이런 자유인의 행동을 마다할 수가 있을까?
시발택시 위의 해프닝
자유와 멋을 제대로 승화시킨 ‘사건’은 아마도 시발택시 위에서 샹송을 부른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얼마나 이진섭씨가 술과 자유와 샹송을 사랑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 해 겨울이었나 보다. 눈이 많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낮에 나간 그이가 통행금지 시간(필자 주: 어린이 들, 그때는 midnight curfew란 것이 있었음)이 다가오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애들을 재우고 온 정신이 문 밖에 쏠리고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다급히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감적으로 뛰어나갔다. 당시엔 시발택시가 한창인 때였다. 시발택시 지붕은 널찍하고 편편했다.
그이는 흰 눈이 덮인 시발택시 지붕 위에 누워서 늘어지게 샹송을 부르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은 달빛이 은색으로 빛나고, 이 진섭씨는 하늘을 향해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운전 20년에 저런 양반은 처음 예요. 아주머니 빨리 요금 주시고, 같이 끌어 내려요”
어린애 달래듯이 겨우 택시 지붕에서 끌어 내렸다.
그랬더니 이 진섭씨 왈,
“자네는 차만 끌 줄 알았지 이런 멋진 밤을 모르는 불쌍한 놈야. 자 요금”
그이는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내 한줌 집어 준다.
그 돈이 타고 온 요금의 몇 배가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제서야 운전수는 갑작스런 횡재에 입이 벌어지며,
“아저씨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 주무십시오”
하며, 깍듯이 정중한 인사를 하고 가버린다. (본문 159쪽)
물론 이때 이진섭씨는 한잔을 거나하게 걸친 취중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행동을 보면 이상하기 보다는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누구라도 마음 속 깊이 이렇게 한번 ‘멋지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까.
여기 나오는 시발택시가 무엇인지 상상이 전혀 안 가는 “어린애”들이 많을 듯 하다. 이승만 정권 때 나온 ‘국산 차’의 이름이었다. 군용 Jeep을 완전히 승용차로 개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body(차체)만 군용drum통을 사용해서 우리 디자인으로 씌운 것이다. 대강 찝 차와 비슷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택시들이 이차였다. 이것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일육 군사혁명 뒤부터 일제 차, “blue bird”가 들어오면서 부터 였다.
65세 만세론(萬歲論)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읽고 읽고 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면 넘어가곤 했다. 아직도 나에게 멀었다는 막연한 생각과 죽음이나 수명 같은 화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것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나이나, 세대가 바뀌면서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영어에도 여기의 화제와 비슷한 말이 하나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 “dirty old man” 이란 말이다. 이진섭씨도 이런 ‘어감’을 제일 싫어하지 않았을까?
그 이는 가끔 65세 만세론(萬歲論)이란 말을 했다. 즉, 65세까지만 살면 인생은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이상은 ‘덤’으로 사는 거지,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곧 사실상 죽은 인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이는 가까운 친구분이던 윤 현배 선생님과 몇 분이 서 항상 65세 만세론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그이는 그 소원이던 65세도 채우지 못하고 가 버렸다.
어떤 때 외출을 같이 나갔다가 길에서 나이 많은 노인이 조깅하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늙은이다워야지, 저렇게 무리한 운동을 하면서까지 오래 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은 좋게 안 보이는군” 하던 말이 기억난다.
더구나 모든 면에서 노욕(老慾) 같이 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늙어갈수록 저물어 가는 낙조(落照)를 보듯 담담해야 된다고도 말했다. 또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누구나 두 주먹을 쥐고 나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누구나 두 손을 편안하게 펴고 죽은 것처럼, 그 동안 두 손 안에 담았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욕심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야만 된다고도 말했다.
그러니까 자식 덕을 보겠다는, 그러기 위해서 오래 살아야겠다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자기 몸 움직여 60 평생까지 살고, 그 이상 못 움직이게 되니까 ‘이만하면 너희끼리 살 수 있겠지’ 하고,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훨훨 가 버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몸 져 눕기 두 달에서 이틀 모자라는 날만 채우고…
어떻게 생각하면 매몰차고, 너무나 명확하게 자기 인생 몫을 살고 간 것 같다. (본문 311쪽)
이진섭씨 세대에선 분명히 60세, 즉 환갑이란 나이는 커다란 개인적 업적에 속했다. 평균수명을 생각해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유교질서에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개념을 생각해도 그렇다. 나이가 듦은 ‘무조건’ 가치가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요새는 사실상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젊은 것이 ‘무조건’ 좋게 보이는 세상인 것이다. 강제로 늙어감을 늦추는 것.. 정도의 문제다. 지나치면 ‘노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자연스러운 것보다 더 추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자꾸 들어가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어떨 때는 깜짝 놀랄 때도 있으니까.. 10년 전 보다 더 젊게 보인다면 이건 좀 이상하다. 그런 배경에서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으면서 가급적 자연스럽게 늙는 것을 바라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