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생각한다. 1974년 봄을.. 미국생활 일년이 조금 안 되던 그 해의 초여름, 5월부터 나는 시카고 N. Clark Street 있던 조그만 한국식당, 서울식당이란 곳에서 dishwasher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해 3월 말에 나는 텍사스주의 달라스에서 홀로 차를 몰고, 전혀 연고가 없던 이곳으로 왔다. 달라스에서 잠깐 알고 지냈던 University of Dallas 유학생, 경기고 출신 유승근 형 그룹 중에 경기고 배형(이름은 잊어버림)이라고 있었는데 그 형의 조언으로 이곳에 혼자 오게 된 것이다. 자기가 여름방학 때 시카고에서 일을 했던 경험을 내게 일러준 것이었고, 그 것이 나와 시카고의 인연을 맺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는 사실 유학생들이 여가시간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수두룩 닥상’ 으로 많았다. 비록 이민법에 유학생들의 임시 취업에 제한은 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거의 자유스러웠다고 할까. 특히 여름방학 같이 긴 기간에는 돈을 꽤 많이 버는 학생들도 많았다. 고국에서의 $$ 송금이 아주 힘이 들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이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일 중에서 제일 손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유학생이면 거의 예외 없이 해 보았던 ‘전설적’인 dishwasher, 그러니까..접시딱기 였다. 이 접시딱기라는 단어를 typing하니까 계속 spelling error가 나와서 살펴보니 사전에 그런 말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행어, 구어 정도이고 아마도 요새는 그런 말 조차 없어진 것을 느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그 해 3월 말, 음산하게 춥고 눈이라도 올 것같이 흐리던 시카고에 도착을 해서 배형이 가르쳐준 대로 Lincoln Avenue 근처 Cornelia Avenue에 있던 낡은 한국교회를 찾아가서 그 교회의 지하에 있던 “기숙사” 칸막이 방에 짐을 풀고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이 바로 아마도 그 당시 서울 청계천변에 있던 봉제공장의 기숙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곳은 음산하고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좁지는 않았으나 완전히 칸막이로 만든 방이라 천정이 서로 다 통해서 서로의 말 소리가 모두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말을 해서 그렇고 그 당시 그 젊은 시절에는 그것도 ‘재미’로 느꼈다.
나이들이 거의 내 또래인 남자들이 너 댓 명이 있었고, 놀랍게도 여자도 한 명이 있었다. 나의 바로 옆방에는 농업연수생으로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청년, 그리고 자동차 정비공으로 취업이민 온 청년, 그리고 아직도 이름이 생각나는 사람, ‘최 식‘씨가 있었다. 이 분은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위였는데 아주 정이 많고 친절한 분이었다. 그 당시 많은 시카고의 교포들은 소규모 제철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템펠 steel이란 곳에 제일 많았다. 이 분도 그곳에서 일을 했었던 듯 싶다. 비록 힘이 든 일이었지만 그 당시 고국의 경제에 비해서 훨씬 많은 보수를 받으니까 사실 모두들 만족스럽게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한국의 경제수준으로 보아서 아무리 이곳에서 고생을 해도 그것은 보람이 있었고, 장래가 밝아 보였다.
나는 비록 수중에 $$은 거의 없었지만 힘차게 잘 구르는 “8기통” 차(’68 Ford XL)가 있었고 한창 젊은 나이로 모든 것들이 새롭고 멋있게 보여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교회의 지하 기숙사는 월세가 거의 공짜에 가까웠고 식사는 같이 살았던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먹으니 그것 또한 거의 돈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이란 나라의 분위기는 ‘일 없이 놀고 먹는다’는 것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무언가 일을 해야 서로 말도 통했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달라스를 떠날 때 배형으로부터 시카고의 한 남자를 소개 받은 적이 있었다. 이름은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이성용” 씨가 아니었을까? 우리들 보다 나이가 조금 밑이었던 이민을 온 친구였다. 이미 결혼을 했는데 부인과 합류를 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도움을 좀 받았고, 그 때 배형이 이곳에서 여름방학에 일을 할 때 어울렸던 우리 나이 또래의 여자까지 소개를 받게 되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박영선” 씨였는데, 물론 처녀였고 시카고 영사관 직원의 친척이었다. 그리고, 그 집의 ‘가정부’ 로 일하는 조건으로 미국엘 왔다고 들었다. 그래서 한 번은 그 아가씨의 아파트에 혼자 초대까지 한 번 받기도 했다. 그녀와 배형, 이성용씨가 어떤 관계인지 나는 전혀 아는 바는 없지만 별로 큰 생각 없이 초대를 받았고 대접도 받은 것이다. 후한 대접을 받고 이들 그룹이 아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아주 불미스러운 소문들을 듣게 되었고, 나도 거의 봉변에 가까운 일을 당하게 되어서.. 그 때를 생각하면 조금 기분이 아직도 언 짠다. 간단히 말해서 남자관계가 아주 복잡한, “난순이” 형의 여성이라고나 할까… 정서적으로 아주 불안한, 미안한 표현으로 조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 타입이라고나 할까.. 이 여성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시카고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계속 비슷한 스토리로 듣게 되었다.
이런 불쾌한 일도 있어서 다 잊고 일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역시 이성용씨가 도움을 주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묵고 있던 교회의 한 분이 자기가 일하는 곳을 소개 시켜주어서 가보았는데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성용씨가 같이 서울식당이란 곳에 가보자고 해서 가서 주인 아저씨,아줌마를 만나게 되었는데, 일자리가 현재는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곳에서 일을 하겠느냐고 연락이 와서 그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Clark Street는 생각이 났는데 확실히 어디쯤인지 생각이 안 나서 36년도 넘은 기억을 살려서 Google Satellite를 보니 거의 확실해 졌다. 그곳은 Clark & Montrose였다. 이 Google Satellite view를 extreme zooming을 하면 곧 street view가 나오는데.. 나의 짐작이 맞았다. 식당의 입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필리핀 식당으로 변한 것을 보게 되었다. 식당에서 일을 하므로 parking을 건물의 뒤에 하기 때문에 사실 나는 뒤쪽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정말 작은 식당이었다. dining table이 대강 10개 정도가 되었을까? 그래서 일하는 사람도 극소수였는데 주방장은 주인 남자아저씨였고, 손님은 주로 주인 아줌마가 상대를 했다. 그리고 주방 보조를 Mrs. 안 이란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새댁’이 보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거기에 내가 주방보조의 보조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주로 접시를 닦는 것과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아침 11시부터 밤 11시까지 완전히 12시간의 중노동에 속하는 일이었는데 일주일(6일)에 $120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루에 $20을 받으니까 시간당 $2 정도인가.. 그 당시 minimum wage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이것 보다는 높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큰 불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일주일에 $120은 나에게는 상당히 큰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2주일을 일하고 번 돈으로 나는 그때 처음 나온 ‘personal’ electronic calculator를 Sears에서 $175을 주고 샀다. 그러니까 지금 쓰는 $10짜리 calculator가 처음 나올 당시에는 그렇게 비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일은 나에게 상당히 큰 경험과 교훈을 남겨 주었다. 교훈이란 것은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꼭 돈을 번다는 것 보다 인간의 존재는 ‘일’에 의해 더 돋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랄까.. 내가 그때까지 정말 ‘심각하게’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특히 고생을 해서 번 돈은 쉽게 번 것보다 더 값어치를 느낀다는 사실도 알았다. 여기서 만난 사람, 주인 부부.. 일명 세란이 엄마, 아빠 애석하게도 성함을 다 잊었다. 두 분은 월남에서 군속으로 일을 하다 만나서 결혼을 했다고 했는데, 젊은 아줌마는 무용을 하던 연예인 출신이었고, 아저씨는 훤출 한 키의 멋쟁이였다. 어떻게 그 식당을 시작했는지는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이 부부는 일이 10시 넘어서 끝이 나면 자주, 거의 정기적으로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Chicago downtown으로 drive를 나가서 영화나 공연 같은 것을 보고 왔다. 어떤 날 밤에는 새로 나온 영화 Exorcist를 보고 와선 완전히 공포에 떨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의 피로를 푸는 모양이었다. 말이 쉽지 하루 12시간을 그 좁은 곳에서 일을 하며 산다는 것.. 참 힘든 일이었고, 후일 에 나는 식당엘 가면 꼭 그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 얼마나 힘든 일을 하나 생각을 하곤 했다.
설거지만 하루 종일 하다가 나중에는 조금씩 음식 하는 것에 관여를 하게 되었다. 주로 쉬운 것들이었지만 그 당시 등 넘어 보고, 해 본 것들은 지금도 두고두고 도움이 되었다. 특히 만두를 ‘빨리’ 빚는 비결, 비빔밥 재료 준비, 냉면 끓이는 법, 우족 만드는 법.. 등등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 식당은 우족이란 것이 유명했는데 불행히도 나는 그것이 비위에 맞지를 않아서 한번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음식을 좋아하는 손님 중에 이지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이민 초기에 보험(State Farm)을 하던 젊은 남자였고 한국일보같은 신문을 보면 꼭 광고가 나곤 했다. 그는 우족을 좋아해서 자주 오곤 했는데 꼭 주방에 들려서 주인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서서 먹곤 했다.
주방 보조였던 Mrs. 안 이라는 여자는 얼마 전에 결혼을 해서 한국에서 온 새댁이었다. 남편의 집안은 그 당시 이미 시카고에 이미 정착을 한 안광순 씨였다. 그 분은 템펠 제철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꼭 Mrs 안을 차로 데려다 주곤 해서 인사도 하곤 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하고 농담도 잘 통해서 그 분주한 주방 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는 내가 혼자인 것이 측은 했는지 집에 데려다가 손수 밥을 해 주기도 했던, 참 마음씨가 따뜻한 새댁이었다. 하지만 2년 후에 Mrs. 안 부부가 이 서울식당을 인수했을 때, 나의 사소한 실수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전혀 소식을 못 들었다. 어떻게 사시는지 가끔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 아저씨의 도움으로 거처를 환경이 조금 밝은 시카고 중앙교회로 옮기기도 했다. 그곳은 Lawrence Avenue에 있었는데, 그 당시는 거의 한인들이 그곳에 없을 때였다. 나는 거기서 우연히 중앙고 1년 선배 박현식 형을 만났는데, 그 때의 이야기는 나의 다른 blog에 자세히 나온다. 그 해 여름을 완전히 그 서울식당에서 지냈는데, 한번은 많이 듣던 남자 목소리가 식당 쪽에서 들렸다. 알고 보니 가수 조영남의 목소리였다. 주인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는 소리였는데, 아마도 전에 이곳에서 식사를 했었고 주인 아저씨와 안면이 있었던 듯 했다. 그리고 기억나는 사람들.. 그때 시카고의 다른 식당, 행복원(Lincoln Ave)이란 곳이 있었는데 그 곳은 밴드가 나오는 큰 곳이었다. 그곳의 밴드 매스터 부부가 밤에 일이 끝나면 이곳에 들리곤 했다. 목소리가 아주 husky하고 부인이 아주 미인이었는데 무슨 미인대회에도 나갔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얘기가.. 연주를 하고 보수를 못 받는 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관객, 손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교민들의 숫자가 그 정도였다. 어느 곳을 가보아도 ‘청중’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서울식당의 조금 위로 올라가면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가 있었다. 이름이 재미있고 따라서 기억하기 쉬웠다. USAKO, 유사코.. 그러니까 미국과 한국(USA & KOREA)이라는 뜻이었을까? 좌우지간 이 정비소의 주인이 서울식당의 단골이었는데, 더 자주 보게 되는 이유는 주인부부의 애지중지하던 딸인 세란이를 이 유사코 사장님의 부인이 babysitting을 하고 있어서 저녁 때 일이 끝난 무렵 부부가 서울식당에 세란이를 데리고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내차도 가끔 문제가 있을 때 이곳에 맡기곤 했는데, 규모가 생각보다 큰 곳이었지만 손이 모자라면 주인아저씨가 직접 차를 고치기도 했다. 아마도 정비기술을 가진 기술자였던 것 같았다. 주말이면 아주 말끔하게 차려 입고 부인과 같이 식당엘 들리기도 했는데, 남편의 ‘보통’ 모습에 비해서 부인은 약간 남편과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사람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렇게 해서 하루 12시간, 6일 동안 일을 하면서 그 해 여름을 보냈다. 그 해는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나던 여름이어서 더욱 기억이 또렷하다. 처음 해 보는 중노동이었지만 아주 즐겁게 일을 했고, 일의 보람, 일의 중요성,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에서,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등등을 일깨워 준 시카고 서울식당, 가끔 회상을 해 본다. 특히 주인 아저씨부부 세란이 아빠, 엄마, Mrs.안, 그리고 가끔 나와서 도와주던 ‘옥분이’ 아가씨.. 그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If you love me (let me know) – Olivia Newton-John, 1974
그 당시의 top ‘country’ oldie, 그녀의 전성시대가 시작되던 때
시카고의 TV 뉴스 앵커 Jane Pauley 와 더불어 하루의 피로를
풀어 주던 멋진 여성들이었다
그 당시 거의 매일 듣던 hit song:
Seasons In The Sun by Terry Jac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