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윤석씨는 비록 전기과의 undergraduate에서 공부를 하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는 나이 때문에 그의 classmate들 보다는 우리들과 더 잘 어울리고 학교의 규칙에 어긋나지만 우리들과 같이 대학원생의 office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활발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호남(好男) 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데는 남모르게 힘들어했다. 우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상대적으로 수학실력이 같은 학년의 한국학생들보다 떨어졌고, 그 다음은 전공에 대한 정열이 그렇게 많지를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 당시 전기과의 직업전망 때문에 이 과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끔 유근호씨에게 ‘전기’에 대한 정열이 없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나는 속으로 조금 우스웠다. 내가 보기에는 정 반대로 보였는데..
고윤석씨의 부인은 연대 사학과 출신의 연상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고윤석씨의 활발한 성격으로 열렬한 구애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기억에, 유학생들의 파티에 가서 보자마자 춤추기를 청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구애를 한 끝에 결혼을 하였다니.. 나는 조금 상상하기가 힘들지만,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OSU Admissions Office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누가 다음학기에 이 학교로 오느냐 하는 것 뿐만 아니고 대부분 유학생들의 상세한 학력이나 이력 같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부부와 나는 가깝게 지낸 편이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나, 특히 나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아직도 고윤석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다. 언젠가 편할 때 정식으로 사과를 하려 했지만 그것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은, 비록 나와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나는 사람이다. 화학과의 박호군씨.. 고등학교는 모르겠지만 서울대 출신으로, 거의 영화배우 같은 느낌을 주는 호남형이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그러니까 거의 ‘이상적인 남자’ 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이분은 내가 입학하자마자 부터 유근호씨 덕분에 자주 보게 되었다. 내가 유근호씨와 가까이 지낸 때문에 사진에도 남아있다. 기억에 유근호씨가 참 이 분을 좋아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아마도 둘 다 천주교 신자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가까이 지냈는지도.. 그리고 이분의 부인이 남편과 같은 화학과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유학생이었고, 남편은 유기화학, 아내는 무기화학을 한다고 해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에 아주 우연히 인터넷 으로 한국천주교 주교회 발행 월간 경향잡지를 보다가 어떤 여자분이 화학에 대한 수필을 쓴 것을 보았는데 저자의 이름이 조금 귀에 익어서.. 약력을 보니 역시 Ohio State 출신이었고, 이분이 바로 박호군씨의 부인인 황영애 씨 (상명여대교수)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첫 학기, Winter quarter는 나의 ‘기본실력’을 테스트하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이곳에서 잘 견딜 수 있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때였다. 내가 좋아하던 나의 passion 이던 control system의 여러 과목을 ‘대거’ 신청, 수강을 하게 되었다. 이것만은 내가 자신을 하던 것들이라 아주 ‘과중’하게 신청을 하고 단단히 별렀는데, 과정과 결과가 아주 ‘참담’하였다. 수강과목이 너무나 많았고, 대부분 ‘어려운’ 것들이어서 겨울을 거의 office에서 먹고 자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과목은 결국 withdraw를 하게 되었다. 제일 공을 많이 들인 과목이 digital control system이었는데, 교수가 아주 어려운 사람, Dr. Fenton이어서 사실 A학점 받는 것은 미리 포기할 정도였다. 이것 때문에 나는 사실 classical control system에서 많이 열기가 식었지만, 뜻하지 않게 친하게 된 digital system쪽으로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 겨울학기는 유난히도 힘이 들었는데,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에게는 작은 ‘교통’사고가 있었다. 차 사고가 아니고, 내가 타고 다니던 bike(자전거)사고였다. 이것은 시카고 있을 때부터 타던 그런대로 편리한 12 speed, disc brake이 있었던 것이어서 이렇게 큰 캠퍼스에서는 정말 안성맞춤인 것이었다. 그런데 추운 어느 날 캄캄한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 학교 내의 어떤 길에서 신나게 달리던 중, 바퀴 밑에 무언가 걸리고, 나는 공중으로 떠서 완전히 얼굴로 아스팔트 도로에 떨어지게 되었다.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얼굴에 심한 마찰,타박상을 입게 되었다. 정신은 말짱해서 다시 office로 돌아와서 얼굴에 흐르는 피를 씻고 보니, 이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office에 남아서 공부를 하던 고윤석씨와 이규방씨가 보고 놀라서 학교병원에 전화를 하고 구급차까지 와서 나는 졸지에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여자 의사가 다짜고짜로, “Who i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하며 물었다. 아마도 나의 머리를 의심한 듯 했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해서, “Jimmy Carter“라고 대답을 하고 얼굴에 상처를 소독을 한 후 나를 내보냈다. 그 상처는 거의 한 달이 갔는데, 붕대를 얼굴에 처매고 매일 학교 식당을 드나드는 것도 웃기고, 그것을 계기로 한 과목을 withdraw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그 해 봄학기 때는 조금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Dr. McGhee의 Automata Theory란 과목에서는 100점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Graduate Research Associate (RA) 자리를 소개받게 되기도 했다. 그 자리는 인도 출신의 digital system교수인 Dr. Jagadeesh 가 일하던 OSU 약학대학의 연구실이었다. 그러니까 전기과와 약학대학간의 공동 연구실인 셈인데 그곳엘 가니 전에 말한 김미영씨와 최희경씨가 있었다. 나는 사실 이 연구실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1979년 여름까지 계속 되었다. 최희경씨는 경기여고, 서울대 약학과 출신의 전형적인 수재 형이고, 그녀의 남편도 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의사로 조금 있으면 OSU로 올 예정인, 부부 둘이 소위 말하는 KS 마크 부부였다. 김미영씨는 최희경씨의 선배였는데 이분도 은근히 공부도 잘하고 노는 것도 잘하는 그런 재주 있는 분이었다. 그 당시는 처녀였지만 1년 뒤에 수학과의 최봉대씨 와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된다.
가을학기가 되면서 비교적 가족적인 분위기의 우리 전기과에도 조금 찬 공기가 느껴지게 되었다. 새로운 유학생들이 도착한 것이다. 경복고, 서울대 출신의 민위식씨, 용산고, 서울대 출신의 박인규씨.. 완전히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이들은 그런대로 reasonable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절대로 chemistry는 맞지를 않았다. 이것은 참 아까운 노릇이었지만 별 수가 없었다.
Just When I Needed You Most |
가을학기가 지나면서 나는 완전히 Dr. Jagadeesh 밑으로(RA) 들어가서 그의 약학대 연구실에서 digital speed control of DC motor 란 주제로 논문을 쓰는 준비를 하게 되었고 실제로 전에 이용한씨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만들어 놓았던 centrifuge control system을 내가 물려받아 거기에 쓰일 microprocessor-based(Intel-8085) motor speed control system을 design하게 되었다. 이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하는 과제로 논문을 쓰게 되어서 큰 부담이 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약학대학이라는 인상보다 computer lab같은 인상을 줄 정도로 최첨단의 컴퓨터 시설이 되어있었는데, 그 제일 큰 이유는 나의 지도교수의 약대 상대편 교수가 완전히 컴퓨터 ‘광’에 속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대부분 mini computer가 단과대학 연구실의 주 기종이었는데 실제로 전기과나 computer science 쪽 보다 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그 교수는 Dr. Olson이라는 사람인데 어디에서 돈이 그렇게 오는지 계속 새 것만 나오면 사곤 했다. 하기야 이것 때문에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참 덕을 많이 보긴 했다.
온통 낮과 밤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많이 몸을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것과 더불어 실제적인 것을 이때 많이 배우게 되어서 나중에 직장에서 일할 때 두고두고 이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나와는 대조적으로 같이 공부하던 이재현씨는 거의 ‘이론적’인 것에 관해서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아마도 computer hardware쪽에 큰 흥미가 없어서 그런 듯 싶었다. 이런 approach는 나중에 대학에 남게 되면 좋겠지만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제한을 많이 느끼게 된다. Digital hardware와 일을 하는 것은 밤을 새우고도 결과가 별로 없을 수 있는 고된 일이고, 그것에 맞는 software가 성공을 하면 그것의 ‘임자’가 대부분 ‘칭찬’을 받곤 했다. 이런 것들을 이때 뼈저리게 몸으로 경험을 해서 나중에 나는 완전히(more) software (than hardware)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고, 나의 lifelong career가 되었다.
논문의 결과가 서서히 윤곽을 들어낼 쯤, 1979년 Spring quarter쯤에는 computer science쪽으로 새로운 유학생이 도착하였다. 이름은 김정국씨… 나와 비슷한 나이고 유근호씨와 서울공대 전기과에서 같이 공부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서울공대 전기과 출신인 것이다. 청주고 출신이었으니 얼마나 그때 공부를 잘 했던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자마자 우리 그룹과 잘 어울리며 가끔 모여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김정국씨는 비록 전기과 출신이었지만 졸업 후 은행에서 이미 전산(computer)쪽으로 경험을 쌓은 경력자였다. 그래서 완전히 computer science쪽으로 공부를 하려고 유학을 온 것이고 그것도 은행에서 ‘보내준’ case여서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대강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나의 매부가 그 쪽에서 일을 해서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김정국씨는 도착 후 일년 뒤쯤에 부인도 뒤따라서 오게 되었고, 나도 그 당시 결혼을 해서 두 couple이 만나서 식사도 했는데, 섭섭하게도 곧 바로 Georgia Tech으로 transfer를 하고 말았다. 우리는 사실 비슷한 나이의 부부여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참 섭섭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인연이 있었는지 우리는 1989년에 아틀란타에서 정말 오랜만의 해후를 하게 되었다. 서로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김정국씨 부인은 다른 인연으로 아틀란타 한국학교 선생님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부부도 그곳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한참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세월의 바퀴 속에서 나중에는 거의 잊고 살 게 되었다. 김정국씨는 안타깝게도 몇 년 전에 비교적 일찍 암으로 운명을 하고 말았다. 비록 가깝게는 못 지냈어도 항상 마음 속에 있었던 김형..이었다. 세월로 보아서도 참 오래 된 ‘지인(知人)’ 이었고, 무엇 보다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1979년 여름학기가 지나가면서 Master’s degree 과정이 다 끝이 나고 나는 곧 귀국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여서 어딘가 좀 쉴 곳이 그리웠다. 물론 다시 올 것을 예정하고 돌아갔지만 나이 때문에 결혼을 피할 수가 없어서 거의 6개월을 서울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시 Ohio State로 돌아와서 계속 공부를 하게 되지만 전의 2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과 환경이고 주변의 사람들도 거의 ‘완전히’ 바뀌게 된다. 특히 1980년 유학자유화가 이루어 지면서 ‘대거’의 유학생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게 돼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가 더 좋으냐고 말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good ole days를 그리게 되고, 마음이 편할 정도의 학생 수가 있었던 1980년 이전이 더 그리워 짐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