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우연히 옛날 옛적의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가톨릭 월간 , 1972년 8월호를 인터넷으로 보다가 귀에 익은 노래제목이 눈에 띄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였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대중 유행가로 불렸던 가곡 가사의 첫 부분이었다.
흔히 말하는 유행가가 아니고 오래 전에 작곡이 되었던 가곡을 인기 여가수 문정선씨가 유행가로 편곡이 된 것을 부른 것이 그 당시 크게 인기를 얻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 경향잡지 기사의 제목은 사실 “복음의 증인들” 이라는 연재 기사로서 제목은 “보리밭 사잇길로: 작곡가 윤용하(요셉) 일대기” 였다. 그러고 보니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라는 이름이 조금은 기억이 나는 듯 했다.
우선 이분이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그래서 우선 반가웠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무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 문득, 윤용하 형제, 교우님” 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이 잡지 기사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일대기” 라고 부제를 부칠 정도로 이분의 전체적인 일생을 간략하게 묘사를 해 놓았다. 이 기사는 아주 엄숙하고 심지어 처절하게 시작을 한다.
예술가는 가난했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빈이무원(貧而無怨)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 처참한 곤비(困憊) 속에서도 신앙과 순수와 낭만을 지킨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요셉)는 죽어서 이름을 남겼다.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으면 이렇게 일대기가 시작되었을까? 1922년에 태어나고 1965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43년을 사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너무 일찍 가신 것이라 우선 가슴이 아프다. 그 당시를 살아본 경험은 그 당시 가난하고 병이라도 있으면 참 불운한 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라는 것,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분도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신 듯 한데, 왜..라는 것보다는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더 들 정도로 이해를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나의 blog에 썼던 이진섭씨에 관한 글이 생각났다. 이진섭씨도 술로 인해 명을 다 채우지 못하시고 가신 것이다. 나이도 비슷하니 비슷한 격동기를 사신 분들이어서 자꾸만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인생, 일생은 너무도 달랐다. 그 두 인생은 어디에서 왜, 어떻게 바다와 같이 넓게, 멀어져 갔을까?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너무도 안타깝고 나중에는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더 알려지게 된 것도 그렇다. 사후의 그런 때늦은 ‘예술가로서 인정 받음’을 왜 생전 시에는 못 받았을까? 그랬으면 그렇게 가난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안타까움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더 이 불운의 ‘천재’ 예술가에 대해서 알아보게 되었는데.. 바라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가서 본 것을 이런 글로 남겼는데 흡사 천재작곡가 모차르트의 죽음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윤용하가 40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보도의 필요성에 쫓겨 빈소를 찾는 데 신문사의 기동력을 동원했지만 한 번지에 수천 호가 잡거하는 판자촌인지라 이틀을 넘겨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 천재가 누워 있는 곳은 판잣집도 못 되는,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였다. 미의 순수한 응어리가 저렇게 이승을 마칠 수 있었던가 가 원망스러웠던 세 번째의 만남이었다.
이 천재적인 수준일지도 모르는 예술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상세하지를 못하다. 아마도 그를 알고 지냈던 인물들 대부분이 일말의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느껴서 밝히기를 꺼려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물론 각자의 운명은 우선 각자 자신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환경적인 것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예술가가 다 가난했던 것도 아니고, 가난했다고 다 병들어 죽는 것도 아니다. 숙명, 신앙, 순수, 낭만.. 이런 것들 만이 과연 불우한 삶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윤용하씨의 대명사가 될 수 있을까? 다음의 음악 평론가 이상만씨의 글은 나를 다시 더 슬프게 한다.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 용하였다.
위에 언급한 1972년 가톨릭 경향잡지의 기사를 보면 다른 각도로 본 님의 불우한 생의 마침을 보게 되어서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이 당시 자녀들은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 아마도 어렸을 듯 한데,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누가 보아도 용하의 병색은 완연하였다. 용하가 간장질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의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그를 성모병원에 입원시킬 생각으로 성모병원의 의사를 그의 필동 셋방살이 단칸방에 보내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치료를 받아도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용하는 입원되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앰블란스가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더라고 한다.
병상에 누운 지 3개월, 최 모이세(광연) 신부에게 최후의 성사를 본지 사흘 만에 아내와 어린 남매를 두고 조용히 운명하니 1965년 7월 23일이었다.
26일엔 명동 대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지내고 금곡리 천주교 묘지, 먼저 간 그의 부친 무덤이 마주 보이는 곳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면 아무리 님의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 공헌을 높이 사고 싶어도 가정적으로 한 가장으로써는 완전한 실패인 인생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윤용하 평전을 읽으면 한층 그런 나의 생각이 굳어진다.
윤용하,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그의 소유로 된 집을 가져본 일이 없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산 중턱 움막판자집 단칸셋방이 이승의 마지막 현주소였다. 그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등진 후 유전만을 거듭했을 뿐, 다시는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실향민이었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철이 들면서 부터 부모와 다른 오 남매 동생들과 더불어 함께 한 일이라곤 없는, 그가 살다간 시대만큼이나 불행한 유랑인 이었다.
그가 명색이 작곡가라면서 생전에 자신의 작곡 집 한번도 내보지 못한 부실한(?) 예술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술로 풀어버리려고 술에 함몰 당해 부인마저 집을 나가버릴 정도로 초탈한 생활무능력자였다.
이렇게 아주 듣기에 거북할 정도의 냉정한 글도 모두 사실일 것이다. 본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고 그러다 술로 모든 것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절대로 찬성을 할 수 없는 생활방식이 아닐까? 그런 환경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아닐 것이다. 나의 어머님도 육이오 때, 남편을 잃고 우리 집 두 남매를 여자의 몸으로 다 키우셨다. 그것은 아마도 우선가정을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이 제일 크게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재능을 가시셨고 음악계에서 활동을 하셨던 분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는 자신까지 희생을 해야만 했던가? 이것은 정말 비극중의 비극이다.
이렇게 거의 체념과 체질에 밴듯한 ‘가난의 생’은 아마도 님의 선조들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님의 부친 대에 이르러 대원군 당시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심심유곡(황해도 구월산)에서 옹기를 구워가며 살게 된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신앙을 고수하려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인데 어찌하여 이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런 불안한 환경 속에서 자란 님은 사실 이때부터 ‘떠돌이’ 기질이 배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이진섭씨와 같이 술을 ‘통제’ 못한 것은 결국 병과 일찍 타계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시대, 울분, 신앙심 등이 조금 짐작이 간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삶을 회고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그의 ‘신앙’과 ‘작곡’과 ‘술’ 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가 막걸리를 들지 않는 날은 이상한 날로 꼽힐 만큼 현실의 불만이나 불우한 처지를 술로 달래며 기염을 토하곤 하였다. 그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주정을 하지 않고, 마실수록 조용해지고 수줍어지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는데, 사순절 기간인 40일 동안만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던 사실로 그의 신앙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을 죽을 때가지 간직한 윤용하 교우님, 교회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조선인’들의 음악 활동을 그 어려운 때 만주에서 조직, 활성화하려고 노력을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그의 ‘저돌적, 동키호테적’ 인 면모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자유인 예술가’ .. 그것이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사회란 굴레’에서도 못 견디었을 자유인..그런 그가 어떻게 ‘학벌과 연줄’이 판을 치던 곳을 술 없이 견딜 수 있겠는가? 다음의 글을 보면 그 만의 ‘졸업장’에 대한 독특한 고민을 볼 수 있다.
광복 직후 나라가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분야에 인재들이 필요했다. 인재들을 키워낼 고급 인재들은 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 졸업장이 공공연히 돈으로 거래되었다. 많은 동료가 그 길로 갔고 그들은 용하 형에게도 그 길을 권했다. 그는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정규학력의 전부였고 그래도 그는 그의 천부적 재능으로 10대 말의 나이에 이미 어엿한 작곡가이자 방송국 교향악단 지휘자의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수가 되어 가르쳐야 할 그에게 세상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구해 오도록 강요했다. 예술적 재능과 노력보다는 학력과 졸업장 그리고 연줄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풍토에서 그는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휴전 직후 문화예술인단체의 3.1절 기념식장 소동도 상징적 사건이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기념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열고 있었다. 하필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이미 술이 거나해 있던 용하는 “예끼, 이 똥만도 못한…”이라 고함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윤용하 님께서 젊은 시절 활약할 당시의 ‘조선 음악인’들은 거의 현재 한국의 음악계를 주름잡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님의 재능을 한결같이 인정을 하고 있다. 특히 제일 가까이에서 ‘자랐던’ 오현명씨의 증언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거의 드라마에 가까운 비극적인 이 ‘인생 역마차’ 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한 사람은 남산 중턱의 번지 없는 판자집에서 치료 제대로 받지 못하며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다른 사람은 대한민국 음악계의 중심에서 ‘건강’하게 활약을 하는 이런 것이 현실이었다니.. 물론 그이 주변에서 ‘도움’을 주셨을 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노래는 즐겁다 – 윤용하 작곡
물론 ‘보리밭’이라는 유명한 가곡을 남겼지만, 그것보다 나는 이분이 동요 <노래는 즐겁다>의 작곡자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이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국민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전쟁 후의 황량하던 그 어린 시절, 이런 추억의 동심 어린 아름답고, 주옥 같은 노래를 남겨주신 것이다. 그 당시 우리들, 이 동요를 부르고, 들을 때면 정말 그야말로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는 어떠한가? 광복절만 되면 이 노래를 열심히 도 불렀다. 누가 작곡했는지도 모르고.. <나뭇잎 배>란 동요도 기억을 한다. 여자아이들이 즐겨 불렀던 것이라 나는 그다지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아내 연숙에게 물어보니 아주 애창곡이었다고.. 덧붙여 ‘심각한 가곡’ 인 고독’이란 가곡도 들어 보았다. 어떻게 이런 곡이 그 동안 숨어있었을까?
1965년에 돌아가셨는데, 세월은 님을 역시 알아보게 되었고, 2005년에는 ‘윤용하 기념사업회‘ 까지 발족이 되어서 역사에 남게 되어서 그 동안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가게 되는 모양이다. 가실 때가지 간직하신 신앙이 자랑스럽고, 남겨주신 주옥 같은 동요, 가곡들도 자랑스럽다. 천국에서도 이런 것을 아시고 조금이나마 만족을 하시리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