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2011년.. 결국은 왔다. 결국은.. 이제부터는 내일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려고 하지만, 조금 더 확대를 해서 내년을 못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2011년이 나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살았어야 했다. 하지만 은근히 2012년을 의식도 하며 살았다.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은근히 의식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말 이것은 찢어지는듯한 외로움이다. 그렇게 외롭게 느껴진다. 곁에 연숙과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소용이 없다. 나에게 엄마와 누나가 옆에 없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정말 광활한 이 우주공간에 외톨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왜 이렇게 나는 더 성숙하지 못할까? 엄마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러니 내가 죽기 전에는 다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보고 싶다. 나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만한 사람은 엄마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나는.. 있어도 볼 수가 없다. 어찌해야 할까? 억지로라도, 모든 것 다 잊고, 다 포기하고 고향에 간다 해도 나의 꿈의 고향이 이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는 정말 슬프기만 하다. 내가 상상하는 고향과 친구들은 사실 내가 쓴 소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아마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외롭다. 나는 혼자다. 나를 아는 사람은 이제 세월의 횡포로, 거리의 횡포로 다 피안의 세계로, 나의 상상의 세계로 다 사라진 것이다. 이런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이런 고통이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아무도 이런 것에는 나에게 도움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을 나는 안다. 내가 매듭을 풀어야 한다. 나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외로움, 과연 언제부터 내가 씨를 뿌렸을 까. 내가 무엇을 크게 잘 못하며 살았을까? 그렇게 내가 잘못 했을까..
모든 것이 다 나로부터 사라졌다. 나는 친구가 이제 단 한 명도 없다. 친척도 다 사라졌다. 가까운 누나도 나를 모른다. 아니 그곳에 갈 수도 없다. 아니 간다 해도 그곳이 이미 내가 그리는 고향이 아닐 수도 있다. 아~~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이천 십일 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고향 땅에 잠들어 계신 사랑하올 우리 어머님, 북녘의 어디에 잠들어 계시는지도 모르는 우리 아버님.. 생사도 모르는 우리 고모님 가족들, 원산 토박이 어머님 가족들, 항상 기도 중에 뵙고 뵙습니다.
나의 유일한 혈육, 편찮으신 우리 사랑하는 누님과 오랜 세월 저희 가족을 돌보며 사신 존경하올 매부님, 이제는 이렇게 산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 동안 저희 가족들에게 베풀어 주신 헌신적 사랑을 그날까지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그리운 조카들, 준형과 은지, 이제는 한 집안의 가장들이 되었구나. 항상 생각을 하며 산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누님 가족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한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외가댁 친척분들, 처남 흥식 형님, 형수님과 처형, 동서형님, 처조카 들: 처형 가족 분들, 형진, 혜진과 수경이네 가족들 기도 안에서 항상 듣고, 보며 산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새해에는 모두가 건강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매일 우리 집의 ‘깡패’ 강아지 Tobey와 동네를 산책하면서 조금 의아했던 사실은 왜 고양이와 산책하는 사람은 하나도 볼 수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조금 안다는 사람에게 물어볼라치면 곧바로 조소의 눈길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된다’ 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올해 이곳에 엄청난 눈이 왔을 때, 어떤 사진에 ‘고양이와 걷는’ 것을 보게 되었고, 어제는 드디어 prestigious online New York Times의 video를 보고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 하였다. 문제는 어떻게 training을 시키느냐는 것인데..
This is one good example of how a nice-sounding family-friend run small business on Internet. The business is has no physical store as I know, but very good web-based store along with sweet-looking background friend-family story. They apparently are electronic enthusiasts at least if not full engineers selling mostly Arduino related small electronics parts to Arduino community. So far so good.
After long hiatus from exciting electronics building days, I decided to start with this wonderful, inexpensive Arduino open-source micro-controller boards. First, I got introduced to MakerShed and SparkFun which sells good-quality Arduino parts, and bought some basic components like Arduino board, ZigBee radios from them. Their prices were very reasonable if not expensive.
Then comes yourduino.com.. My impression was like: good international friends turn their passion of Arduino into good global-reaching business taking advantages of ‘dirt-cheap Chinese labor’. Well, looks good and sounds good until I found out otherwise. What I have not realized that the proprietors have near-zero control over their own stock, fulfillment process, record-keeping etc.. In short, they have no idea what they have shipped for my order! This is exactly “you get what you have paid for” situation. In conclusion, I have no intention to have another business with this virtual shop in future.
¶ 이산가족의 외로움: 크리스마스 이른 아침, 연례 ‘가족 선물포장 풀어보기 의식’ 을 무슨 엄숙하고 의무적인 행사처럼 치른다. 이런 행사는 이제 거의 자동적으로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습관화 되었다. 이곳에서 오래 살게 되면 모이는 가족이 한 명 이상이면 (그래야 모임이 되는 것이지만) 이날 아침에는 무언가 ‘교환’을 해야 제대로 된 사람 대우를 받게 된다. 이것을 소홀히 하게 되면 그야말로 ‘왕따’를 당할 정도가 아닐까?
문제는 너무 이런 ‘세속적 의식’에 빠져서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 거의 잊을 정도가 된데 있다. 이래서 바티칸의 교황님도 크리스마스 season이 되면 계속 우려를 하시는 것이다. 선물을 사려고 store밖에서 새벽부터 문 열기를 기다리는 군중들에 대한 뉴스를 보면 이건 완전히 ‘정신이 나간’ 군상처럼 보일 정도다. 사랑하는 가족, 친지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선물’을 주려고 발버둥치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은 하나.. 한마디로 완전히 지나친 모습들이다.
그와 다른 면으로, 이날이 되면 어찌 그렇게 쥐 죽은 듯한 고요와 평화의 기분이 느껴질까.. 분명히 99%의 ‘군상’들이 가족, 친지들과 함께 모여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이 피부로 느껴진다. 길거리와 심지어 동네의 산책길도 텅텅 비어버리니까.. 이것은 가족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부러운 전통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맘때가 되면 ‘대가족’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제일 부럽고, 질투가 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고통스럽기까지 한 것은 현재 우리가 알고 비교적 가까이 지내는 분들이 대부분.. 대가족 환경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더 상대적으로 우리는 ‘작은 가족’의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된다. 그들이 부럽다 못해서 질투가 날 정도니까..
딸 둘 대신, 아들 딸 구별 없이 5명 정도를 낳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우습고 쓸데없는 상상도 해본다. 현재 5명의 자녀는 사실 ‘촌스럽게’ 까지 느껴지기는 하고 그들의 키우는 것 장난이 아닐 테지만, 그래도 덜 외로울 것을 생각하면 감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면 extended family라고 할 수 있는 친척들은 어떨까? 직계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까운 가족들이다. 문제는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할 정도로 멀리 사는 친척들이 이럴 때 느끼는 외로움에 큰 도움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골치 아픈 친척들 때문에 골치를 썩는 사람들도 보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것도 사실 응석받이처럼 들린다. 그들은 작은 가족들의 ‘외로움’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친척들은 비록 Internet등으로 옛날에 비해서 조금은 가깝게 느낄 수도 있지만, 역시 그것은 virtual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계는 절대로 virtual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입김을 느껴야 그것이 진정한 relationship인 것이다. 그래서 타향살이란 것은 보기보다 힘든가 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찌하랴.. 이것이 운명이란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을..
¶ 내가 받은 선물은: 올해는 비록 모든 경제활동이 쪼들리는 때였지만 그것에 큰 상관 없이 풍성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없는 것이 거의 없이사는 요새, 무슨 선물이 필요할까, 그래서 더 고르기 어려운 것이 선물이다. 한마디로 없어도 되는 ‘사치품’에 가까운 선물들.. 하지만 가끔 뜻밖의 것도 있다. 그 예로 하모니카..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하모니카, 그것도 아주 작은 하모니카를 받았다.
어렸을 때 그것을 얼마나 갖고 싶어했던가? 아직도 잊지 않은 곡이 하나 있어서 즉석에서 ‘연주’를 했는데, 정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불 수 있었다. 완전히 전자화 된 picture frame 을 받았는데, 편리한 것이 많은 것은 알지만 글쎄, 나는 이것이 ‘사치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멋진 얇은 스웨터, 이곳의 날씨에 딱 맞는 것이라 아주 실용적인 선물, 그것과 더불어 나이가 들면서 신경을 쓰게 되는 ‘목 주위’의 추위를 해결해 주는 스카프.. 이것도 실용적이다.
사학 전공의 나라니가 ‘조지아 시골의 뒷얘기’ 에 관한 책, The Georgia Rambler를 선물했는데, 이곳 조지아의 시골은 남북전쟁에 관련된 시골의 숨어있는 ‘전설’들이 많이 있어서 아주 흥미로운 책일 듯 하다. 그 중에 코카콜라의 성분에 관한 비법이 적혀있는 책도 있어서 더 기대가 된다.
¶ 염라대왕과 김정일: 지금 쯤 염라대왕 앞에서 김정일 개XX는 어떤 모습을 하고 변명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염라대왕 동무.. 조금만 봐 주시라요” 하고 말을 시작할 듯 하고, 염라대왕은 이미 아바이 동무 김일성 개XX가 먼저 와 자리를 잡고있다고 알려줄 듯 하다. 김정일 개XX 장례식에 ‘남조선’의 조문객이 간다고?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이 미친 놈들은 과연 어떤 인간들인가?
역사 박물관에서나 찾을만한 현대판 세습제로 인민들을 굶어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서른 살도 안 된 젖먹이 김정운 개XX를 차기의 ‘왕’으로 만든다고.. 참.. 북조선 닌민 동포 동무들이여.. 어쩌면 그렇게도 참을 성이 많습네까? 지렁이 보다 못한 이 한심한 동무들아.. 죽을 때가 되면 그래도 소리라도 내고 죽으라우요!!
¶ 아이-트리플-이 스펙트럼.. 이것은 IEEE Spectrum의 한글 표기이다. 여기의 IEEE는 미국에 본부를 둔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전기,전자공학도 학회를 뜻하는, 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의 약자이고 읽을 때는 대부분이 I triple-Eee로 말한다. 이곳에는 아주 많은 세분된 학회들이 모여있는데, 물론 전기,전자공학에 관련된 것 들이다. 이 학회의 ‘간판’ 격 회지의 이름이 바로 Spectrum magazine이다.
이 학회에 가입을 하면 (년 회비를 내면), 이 ‘잡지’는 무조건 받게 되고 분과 학회에 가입된 곳의 회보(주로 논문집)를 따로 받는다. 나는 이곳에서 학교에 다닐 때 거의 ‘자동적’으로 학생회원으로 가입을 했다가 졸업을 하면서 일반회원으로 남게 되었는데, 거의 10+년 전부터 이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상당히 비싼 연회비로 그렇고,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 (embedded systems)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나오게 되면서 그리 아쉬운 것을 못 느꼈지만, 단 한가지.. 이 간판 격 월간지 Spectrum magazine만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이 월보는 상당히 그때그때의 인기를 끄는 기사들을 아주 ‘쉽게’ (일부러 ‘수학’ 공식을 피한 듯한) 계제하곤 해서 ‘누워서 편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오랜 세월을 잊고 살다가, 며칠 전 정말 우연히 이곳을 website에서 보게 되었고, 정말 고향을 찾은 기분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다시 회원으로 가입을 하지 않고, 아주 질 높은 technology, 특히 consumer electronics에 관련된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이곳이 ‘무료’일지는 모르겠지만 (New York Times처럼), Google처럼 우리 같은 99%를 조금 더 생각해 주는 그런 ‘자선’적인 자세로 일관하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IEEE Spectrum mag site
¶ 20년 전통의 Nativity scene: 우리가 사는 subdivision에 이사온 지도 내년 3월이면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도 거의 다 자란 셈이고 우리도 늙은 청춘을 다 보낸 느낌이다. 별로 크지 않은 곳이라 사실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대개 알 정도가 되었고, 우리는 이제 ‘고참’ 축에 속하는 집이 되었다.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낸 지도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그때마다 20년 동안 변함없이 앞 뜰에다가 아기예수님 태어나신 모습으로 장식을 한 집이 있었다. 물론 독실한 크리스천 일 것이고, 걷다가 인사도 자주하는데, 내가 놀라는 것은 어쩌면 20년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똑같은’ 장식을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없어지는 날은 우리 동네의 큰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2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예수탄생 전시
¶ Wordle: 워들? 아마도 word riddle을 줄인 말이 아닐까? 이 site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이것은 blog site에서 많이 쓰이는 에 많이 쓰이는 computer software인데, 쓰이는 빈도에 비례해서 글자, 단어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어떤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오는데, 문제는 아직까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IBM에 근무를 하며, 여가시간에 이것을 만든 모양인데, 아깝게도 이것은 open source software가 아니고 IBM에 그 copyright가 있어서, 한글용으로 바꾸거나, 한글 기능을 첨가하는 것이 쉽지 않을 듯하다.
¶ Goodbye Nashville: 지난 주말에는 이번에 Peabody College at Vanderbilt University에서의 1년 반 teacher’s degree (석사과정)가 끝나고 졸업을 하게 되는 큰딸 새로니의 이사를 도우러 Nashville에 연숙과 다녀왔다. 물론 우리의 ‘짐 차’ Plymouth Voyager van을 가지고 가서 새로니 이사 짐을 모두 싣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작년 여름에 Washington DC에서 이사를 내려 올 때도 똑같은 과정을 겪어서 사실 조금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것 외에는 익숙한 것들이었다. 편도 3시간 반정도의 드라이브가 이번에는 덜 지루했던 것이, 처음으로 연숙과 같이 묵주기도를 하며 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장거리 드라이브는 ‘절대로’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도 했다.
그 동안 집에 다녀갈 때마다 조금씩 짐을 가져 오곤 했지만 이번에는 주로 무겁고 큰 것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과연 다 가져올 수 있을까 우려를 했지만, 기가 막히게도 잘 싣게 되었다. 새로니는 일년 반 동안이나 Nashville의 off-campus apartment에서 혼자 살았지만, 요새의 일년 반은 예전의 한달 반 정도로 짧게 느껴져서 나중에 그곳에 그렇게 기억에 남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생각보다 짧은 일년 반이 지나고 보니, 우리로써는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이 country music 의 본고장을 제대로 한번 못 보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 했으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조금 늦지 않았을까? 새로니는 이제부터 teacher’s job을 구해야 하겠지만, 하도 피곤한지 우선은 아무것도 안하고 휴일을 즐기겠다고 미리 선언..
다행히 동생 나라니의 condo가 비교적 커서 그곳으로 대부분의 짐을 옮겼고, 당분간 그곳에서 같이 살자고 해서 아마도 휴일이 다 끝나면 그곳에서 동생과 같이 있게 될 듯하다. 안정되고 편안한 ‘연방 공무원’ 자리를 걷어차고 ‘고생길’이 훤한 선생님의 길을 택한 큰 딸의 사명감 있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다른 편으로는 조금 측은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Go Serony Go!
¶ Catholic Newton: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것인가? 최근 가열되고 있는 이곳의Republican Primary (공화당 예비선거)을 보며 이것이야 말로 ‘원숭이들의 서커스’ 가 아닌가 생각을 하며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한 마리가 박수를 받으며 올라가면 사소한 실수로 떨어지고, 다음 것이 올라가 똑같은 짓으로 떨어지고.. 한 마리 한 마리에게 한번씩 떨어질 기회는 차례차례로 주어진다.
완전히 떨어져 나간 놈(like the pizza man, Herman Cain)도 있고 나머지들은 현재 올라간 놈을 끌어 내리려 각가지 모양으로 날 뛴다. 이것이야 말로 서커스가 아닌가? 현재 높은 줄에 올라가 안 떨어지려 안간 힘을 쓰는 그래도 조금은 침착하고, 덜 미친 놈처럼 보인 것이 바로 Newt(Newton) Gingrich인 것이다.
이 인물은 1990년대에 House Speaker (연방 하원 국회의장)를 역임한 화려한 경력을 가졌고, 한때는 ‘지적이고, 혁신’적인 idea로 많은 주목도 받았지만, 그에 반하는 ‘지독히 이기적인’ 결혼, 이혼경력, 허세, 위선, 돈 문제로 항상 ‘도덕적 결함’의 대표적인 인물로도 지목이 되어서 미국 대통령이 되기는 힘든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번 공화당서커스에서 지독히 운 좋게 상승세에 있으니..내가 사는 곳 구역 연방하원이라 그는 낯 설지 않다. 언제는 가까운 supermarket Publix에서 wife (전 부인)와 grocery를 보고 checkout counter에 서있는 그를 본 적도 있었다. 비교적 서민적인 인상을 보여 주기도 했다.
사상이나 정책적으로 그는 사실 나머지 ‘미친놈’들 보다는 훨씬 온건파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그렇게 혐오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 속에서 헤매는 공화당에 이런 ‘실용주의자’는 나오기 참 힘든 상황인데, 그가 홀연히 물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대학교수를 역임한 ‘지식인’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감한 용기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가 생각하는 가톨릭의 ‘매력’은 내가 보는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또한, 그의 ‘이민법’에 대한 생각(제한적 사면)은 공화당 내에서는 거의 ‘치명적‘인 생각으로 또한 과감한 용기의 표현일 것이다. 그저, 그저, 인정머리 없이 여자들을 ‘걷어 찬’ 그의 ‘철없는’ 과거가 그의 현재에 가장 걸림 돌인 것이다.
생각한다.. 혹시 혹시 이 인물이 지금 현재 미국에서 오바마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외의 생각.. 그렇게 미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지어다.
¶ Silver Bells: 이맘때가 되면 가끔 생각나는 것,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곡이 있다면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은 어떤 곡일까? 이 우리에게 친숙한 캐롤들은 물론 대부분 미국에서 불리고 알려진 것들이 육이오 동란 이후 미군들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진 것들이다.
하도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것이라 사실 이것들이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하고 자라서 아직도 친근하기만 하다. 개신교의 찬송가 스타일 것들은 물론 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멋있던’ 것은 역시 그 이외의 것들이다. 예를 들면 영화 주제곡에서 나온 것들, 전래 민요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이런 노래들은 학교 다닐 시절(주로 고등학교, 대학교) 성탄절이 될 즈음이면 성탄 하루 이틀 전부터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 나오고 대부분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요란하게 나오곤 했다. 그 중에 Bing Crosby의 classic carol White Christmas나 Jingle Bells같은 것은 너무나 알려져서 한창의 젊은 나이에는 조금 진부하게, 그러니까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학 2학년 무렵, 1968년 경, 우리에게 새로운 carol Silver Bells가 서서히 알려지고 퍼지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부터 그 곡이 나에게는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된 것이다. 이유는 물론 확실치 않지만, 그 당시 우리시대를 대표하던 ‘통기타 듀엣, Twin Folios‘, 그러니까 송창식과 윤형주가 그것을 유행시키는데 일조를 해서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도 한다. 그들이 그 곡을 record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기억에 그들의 Silver Bells는 미국의 내노라 하는 가수들보다 훨씬 나았던 것이다. 최소한 그 당시 내가 듣기에.. 이런 확실치 않은 이유로 아직까지도 나는 이 곡을 소중히 추억한다.
Christmas tree & lighting, finally: 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성탄 일주일 전에는 집 안에 무언가가 반짝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까지는 우리 집 de-facto Christmas-tree-in-chief인 작은 딸이 자진해서, 도맡아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더니, 역시 세월이 흘렀는가.. 부모 집에서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올해는 우리보고 하란다. 큰 딸애는 이런 것에 원래 재주도 없고, 흥미도 없어서 며칠 후에 집에 온다고 해도 할 가망성이 없어서 오늘 우리들이 손수 하게 된 것이다.
이런 크리스마스 decoration들은 일찍 할수록 노력의 대가를 더 오래 즐길 수 있다. 10년 전만 해도 ‘젊은 혈기’로 사다리까지 동원해서 2층 지붕의 처마를 따라서 icicle(고드름) lights를 달기도 했는데, 그것은 꼬박 반나절이나 걸리는 대 작업이었고, 지금은 사실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하도 주위에서 높은 사다리를 조심하라는 얘기도 그렇고 사실 사다리 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죽은 case도 가까이서 들어서 내가 하고 싶어도 걱정하는 식구 때문에 더 엄두가 나지를 않는 것이다. 이런 ‘겁쟁이 심리’도 나이를 먹는 curse중에 하나일 것이다.
사실 이런 가시적인 장식들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너무나 ‘귀찮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별로 느낌이 좋지 않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극과 극’이라고나 할까, 성탄 다음날만 되면 하루아침에 몇 주간의 들떴던 기분이 땅에 꺼지듯 하는 그런 것, 나는 참 싫었다.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아서 그럴까.. 그런 ‘세속적’으로 들뜬 기분들의 <시한부 운명>을 미리 알기에 싫은 것이다.
나이에 의한 축적된 기억과 경험들의 장난일까? 이런 것들에 대한 처방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며 가급적 조용히 지내는 것이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이제 성탄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에 조금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쉬워지고 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얽인 지난 간 추억을 추적해 보는 것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큰 즐거움이 되어감을 느낀다.
잿빛 하늘이 완전히 holiday기분을 유발하게끔 하는 12월 12일.. 그러니까.. 십이십이 로구나. 연관이 되어서 십이십이 사태.. 아니 전두환의 쿠데타. 그때가 1979년 12월 12일이었던가? 이날이 되면 나는 잊지 않고 그때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벌써 와~~ 32년 전이 되었다. 그 해 가을, 10월 26일에 유신정권의 총수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부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피살이 되었고, 그를 수사하던 또 하나의 박정희 심복이었던 전두환이 그날, 12월 12일에 무혈 쿠데타로 흔들리던 정권의 권력을 잡은 것이다.
당시 추억의 oldie, Heart of Glass – Blondie – 1979
그 해, 1979년 초가을에 나는 일시 귀국을 하고 서울에 머물고 있어서 이 격변하던 역사의 소용돌이를 몸소 다 겪은 셈이 되었다. 지금은 완전히 없어진 우리 집 세운상가 아파트에 머물면서 그 당시 나는 가끔씩 맞선을 보기도 했는데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지면서 완전히 모든 관심은 사실 10.26 사태에 쏠리고 있었다.
박정희가 아무리 독재자라고는 하지만 국민정서는 그것보다는 그가 불쌍하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도 오래 전(1974년)총격으로 사고를 당해서 더 그런 생각이 우세했을 것이다.
Sultans of Swing – Dire Straight – 1979
이런 상황에서 맞선을 계속 보는 것도 쉽지를 않아서 포기를 하려는 때에 우연히 누나가 인연이 되어서 지금의 연숙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가 11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일련의 일들은 사실상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었고, 그 역사의 일부로 십이십이사태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섭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던 우리부부의 인연은 가족 상견례로 이어지고, 12월 12일전에 결혼에 대한 결정이 서로 이루어졌다. 이런 것이 바로 인연이라고 할 것이다. 날씨가 매섭던 12월 12일, 그날 우리는 결혼 결정 후 처음으로 데이트 겸 해서 김포공항으로 나갔는데, 왜 하필 김포공항?
그날 연숙의 이대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김숙희 교수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이어서 나간 것인데, 사실은 나를 인사시키려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다. 몇몇 학생들과 함께 우리도 인사를 한 셈이 되었는데, 김교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도 우리의 선입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우리의 결혼을 탐탐치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사랑하던’ 제자를 하루아침에 잃게 된 입장이었으니까..
그날, 김포공항에 도착을 해서 걸어 들어갈 때 매섭게 추운 날씨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게 되었는데, 순순히 손을 잡아 주어서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너무나 손이 시려서 불편했지만, 내가 미안할 까봐 말을 못했다고 실토를 했고, 이 ‘일화’는 두고두고 잊지 않고 아직까지 ‘재미있는’ 일화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날 밤에 일어난 전두환의 무혈 쿠데타 12.12사태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김포공항에서 돌아 온 후에 바로 전두환이 한강다리를 건너온 것이었고,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는 집에 못 돌아올 신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고 두고 이날이 기억에 남게 된 것이다.
It’s a heartache – Bonnie Tyler (Live in Paris, France)
지난 Thanksgiving 때부터 불편했던 나의 뱃속 사정이 아직도 여파가 남았는지 깨끗하지를 못하다. 특히 밀가루 (yeast?) 음식에 더 고생을 하고, 옛날 우리 불쌍한 엄마 생각이 난다. 항상 소화로 고생을 하시던 우리 불쌍한 엄마.. 불편한 것은 사실 나의 ‘의지’로 얼마든지 견딜 수는 있지만, 사실 나의 걱정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만약.. 만약.. 더 큰 문제라면.. 하는 끔찍한 상상을 떨쳐버리려 노력을 한다. 어쩔 것인가? 그저 담담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견딘다. 그것이 우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아~~ 무언가 무언가를 멋있게, 나의 심중을 다 표현하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것이 이렇게도 어렵던가? 나의 깊은 심중을.. 심중을.. 어떻게 표현을 한단 말인가? 추운 겨울이 좋으면서도 차가워지는 나의 ‘발’이 귀찮고, 불편하다. 따뜻한 온돌방이 그립다.. 아~~ 우리 가족, 엄마야, 누나야.. 언제가 그곳에서 만나서 다시 그 옛날을 살자.. 그런 날이 언제 과연 다시 올까?
오늘은 12월 7일, December Seven, 1941년, 그러니까 70년 전의 일본제국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습 기념일이다. 10년 전의 9-11, Nine Eleven 보다 더 충격적인 기억을 남기게 한 날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날을 The Day of Infamy라고 부르게 되어서 아직까지 쓰이고 있는데, 결국 70년이란 세월은 사실 길게도 느껴진다. 그래서 그날 생존자(군인들) 단체들로 올해 말로 정식 해체를 한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에 그날의 충격도 둔해진 것도 사실이고, 그보다는 그 생존자 자체가 이제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슬픈 사실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육이오의 생존자, 월남전의 생존자.. 등등 차례를 기다릴 것이다. ‘위대한 세대‘라고 불리던 2차 대전 세대는 진정 다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참 세월이란 것.. 정직하지 않은가? 우리의 세대는 아마도 월남전 세대로 합류할 듯 해서 그 세대가 사라질 무렵이면 또다시 이런 뉴스거리가 될까 미리 궁금해진다.
동짓달..이란 말, 참 오랜만에 써본다. 동짓달 하면 팥죽생각이 나야겠지만 나는 그것 보다 먼저, 국민학교시절 아마도 국어 교과서의 이순신장군 이야기가 생각나곤 한다. 참, 나도 못 말리는 인간인가, 어찌 그것까지 옛 생각과 연관을 시키고 ‘지랄’일까? 그 교과서, 이순신 장군이 동짓달에 거북선을 몰고..가는 그런 글이 아직도 생각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음력의 동짓달이었을 것이니까 사실은 양력으로 정월일 것이다. 그렇게 추운 겨울에 거북선을 몰았단 말인가.. 참으로 놀랍다. 좌우지간 지금은 동짓달 이레, 7일이다. 요새의 날씨는 거의 규칙적으로 삼한사온을 지키고 있다. 며칠 따뜻하던 흐리고 비가 오던 날씨가 차가운 비로 서서히 변하고, 급기야 싸늘한 바람이 부는 그야말로 동짓달 기분을 내게 한다. 분명히 나는 이런 날씨를 ‘사랑’하는 것이다.
요새는 조심스럽게 ‘평화로운 집’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날들이다. 이것이 평화라면 아주 오랜만에 우리 부부가 서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엄청난 ‘고민’을 안고, 시한 폭탄 같은 짐을 지고 늙음과 죽음을 향하는 우리 부부라고 할 수도 있으련만, 그런 것이 아주 큰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듯 살 수 있는 지혜의 은사가 우리 부부에게 선물이 된 진도.. 물론 연숙이 변하거나 변하는 것이 아닐 것이고, 분명히 내가 변하고 있어서 이런 평화가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지나간 세월이 조금 아까워 진다. 특히 지난 10년이 정말 정말 아쉽고, 아깝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라도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이런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느냐에 하는 것인데, 느낌에, 조금 자신이 있다고 느껴진다.
지난 7월 초 온수기를 새로 갈면서 완전히 손을 놓았던 ‘집안 일’들.. 산더미 같이 쌓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일, 내일 하며 미루었던 것이 순식간에 5개월이 지나간다. 이제의 목표는 해가 가기 전까지 조금은 ‘움직여’ 놓아야 한다는 것이 되었다. 이거이야 말로 시작이 반인 그런 일들이다. 한번 손을 잡으면 많은 일을 끝낼 수 있다고 자신을 한다. 그것 말고도 계속 미루는 것, 나의 사랑하는 ‘tech note’에 넣을 수 있는 나만의 tech projects들.. webbot, Arduino, php, WordPress PlugIns.. Sebald’s novels, 일본어, Medjugorje, Social Network Bible..참 많이도 나를 기다린다. 차분히 앉아서 다 읽고, 만들고 싶다. 그것은 항상 나를 흥분하고 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니까..
어제 12월의 첫 일요일은 거의 하루 종일을 진정한 ‘일을 떠난 안식일’로 지냈다. 글자 그대로 안식일이면 일을 쉬는 날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와 반대로 하루 종일 일을 한 셈이 되었다.물론 여기서의 일은 성당과 관련이 된 것들이다. 물론 집 근처의 미국본당에서의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이번에는 한국 본당까지도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2011년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소속의 ‘천상 은총의 모후’ 꾸리아 주최 연차 총 친목회에 갔는데, 이번에는 평 단원으로 그냥 즐기러만 간 것 이외에도 연숙이 꾸리아 부회장을 맡은 관계로 봉사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연숙은 총 친목회의 EmCee(사회)까지 맡게 되어 있었고, 나는 우리 쁘레시디움에서 발표하게 되어있는 ‘(거지)타령’ 에 끼어 있어서 둘 다 심리적으로 은근히 stress까지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다행히 연숙의 사회 진행은 큰 ‘사고’없이 잘 진행이 되어서 결과가 좋았는데, 우리 쁘레시디움의 타령 공연은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어서 조금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어려운 여건에서 참가를 한 것만으로 위로를 받기로 했다.
오랜 만에 스트레스 성 일들이 이렇게 겹쳐서 그런지 모든 행사가 무사히 끝나고 나서 아주 안도감과 피곤함이 함께 몰려 들어서 그저 Tobey와 Izzie가 목매도록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싶었는데, 우리 둘은 갑자기 예정이 된 어느 자매님(베로니카)의 장의사 연도에 참석을 하러 가게 되었다. 우리 성당과 직접 연관이 없는 듯 보이는 자매님이라고 들어서 가는 것이 잠깐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연고자들이 별로 없다는 말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런 것이야 말로 우리 레지오가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던가? 역시 갔다 와서 가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아주 단출한 가족이 전부인 곳, 예쁜 할머님 자매님이 그곳에 잠자듯 누워계셨다. 문득 꿈에 본 어머님 얼굴이 잠깐 어른거렸다.
어느 funeral home (장의사)의 조그만 chapel에서 조금밖에 모이지 않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 열심히 연도를 바치고, 고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viewing을 하고, 유족을 위로했는데, 따님이 너무나도 서럽게 울며 서투른 한국말로 “레지오 마리애, 너무 감사합니다” 를 연발해서 우리들 모두 눈물을 감추기에 바빴다.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님과 따님은 무척 사이가 좋았던 듯 싶었다. 이런 광경들은 거기 모인 모두들, 자기 나름대로의 처지에 비추어서 생각하며 속으로 울었을 것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라서 눈물을 감추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이 돌아가신 베로니카 자매님은 어떤 인생여정을 보내시고 여기까지 오셨을까.. 하는 생각도 하며 한정된 인간 수명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했다.
¶ 달력을 넘긴다. 한 장이 남아있었다. 세월은 참 정직하구나. 올해도 정확히 31일이 남았다. 12월의 기분에 알맞게 매섭게 차가운 공기가 아침의 고요를 깨고 밀려오며 나를 움츠리게 한다. 자주 찾아오게 되는 도종환 시집, 이 양반은 무섭고도 정확하게 나의 ‘쓸쓸한’ 감정을 보여주는 시를 많이도 썼다. 나를 둘러싼 사소하고도, 자연적인 것들의 감정을 참 섬세하게도 보여주어서 큰 부담 없이 읽는다. 오래 전에도 ‘벗 하나 있었으면’ 을 읽었다. 소름 끼치게 공명하는 마음에 놀라기만 했다. 특히 밖이 떠들썩하게 느낄 때 더 이런 감정에 빠지곤 한다. 그럴 때 더 나의 속 깊은 곳은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끼게 되어서 그럴 것이다.
¶ 요새는 전보다 더 자주 TV morning shows (주로 NBC Today show) 들을 본다. 몇 년 동안 전혀 그런 것 피하며 산 때에 비하면 참 많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우리 집은 그 흔한 big screen ‘flat’ TV도 없고, cable TV, satellite TV는 물론 없다. 유일한 것은 ‘free’ over-the-air(공중파?) channel 뿐이다.
모든 것이 digital broadcast로 바뀐 후에는 그 ‘공짜, 공중파’ channel들이 아주 많아졌다. Cable service에 익숙한 사람들은 상상을 못할 듯 하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대부분 시간을 각자의 cushy chair/desk에서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곳에 ‘big screen’ desktop pc가 있어서 대부분의 TV programming은 그곳에서 본다.
20년 전부터 예고를 했던 TV convergence가 많이 진행이 되어서 웬만한 것들은 거의 Internet (or from home server)으로 desktop PC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이 다 커서 떠난 집에 쓸쓸한 family room의 family TV는 거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어떨 때 조금은 가족들이 TV앞에 모여서 즐기던 시간이 그립기도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니까.
주변 친지들의 집에 가보면 모두들 예외 없이 monster-size flat-screen TV들이 있고 심지어는 한국에서 오는 channel들도 보고 있어서, 사실은 우리 집이 예외가 아닌가 생각도 든다. 일반적인 TV channel들이 결국은 Internet으로 다 통일이 되는 것은 예상보다 서서히 진행이 되고는 있지만 Internet speed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서 시간 문제일 듯하다.
¶ 며칠 전에 TV morning Today show에 반가운 얼굴이 나왔다. Neil Diamond.. 나이에 비해서 아주 젊은 모습이고, 풍기는 활력도 마찬가지고, 목소리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아주 약간 템포가 느려졌음을 느끼는 것은 나의 선입견일까.. 196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된 그의 soft-rock/pop singer로써의 길고 긴 인생여정, 큰 무리 없이 꽃을 피워가는 중일까?
기억에 60년대의 pop group The Monkees의 많은 hits, 그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진정한 talent는 그 자신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분명히 나타났고, 일시적인 인기가 아니고 길고 긴 진정한 프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는 시기에 발표된 그의 classic oldies가 좋았지만, 80년대 이후의 그의 활동도 예외적으로 기억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Cliff Richard와 비슷하게 거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그는 내년 6월 6일에 이곳에서 Philips Arena에서 live concert를 한다고 TV에서 보았고, 혹시 갈 수 있을까..했지만 $100이나 하는 ticket때문에, 그저 군침만 삼키고 있다.
¶ 오늘은 가톨릭 달력으로 새해의 시작이 된다. 비록 세속적 새해는 아니지만 천주교 전례력은 오늘이 4개의 촛불로 상징되는 대림절의 시작,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일이고 이곳 최대의 명절인 성탄까지 4주를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일이 되고 성탄 이후부터는 다시 예수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가 시작이 되고.. 이런 식으로 사실 성경의 말씀대로 ‘계속 기다리는’ 기간의 연속이 된다.
이런 것들이 이곳 미국에서는 거의 200여 년 동안 생활화가 되어있어서 크리스천이면 이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명절, 휴일들에 별로 큰 무리가 없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조금 눈에 거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역사적 현실이고 문화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 그래서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은 의미가 큰 것인데 불행히도 우리는 미사를 거르게 되었다. 핑계는 꼭 있지만, 게으름이라는 핑계가 더 맞을 듯해서 사실 기분이 찜찜하다.
아침에 새로니가 Thanksgiving holiday를 집에서 보내고 오늘 아침에 Nashville로 떠나는 날이라서 시간이 조금 그랬지만, 역시 핑계일 것이다. 올해의 Thanksgiving은 큰 ‘문제’ 없이 지났고, 아주 적당하게 구워진 turkey가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조금 배탈이 나서 그것이 흠이 되었다. 다름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나만 그랬을까.. 암만 생각해도 그렇지만 혹시 stress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왜 내가 stress를 느꼈을까 하는 것인데..
Thanksgiving feast 2011
¶ 오늘 우연히npr.org (National Public Radio)에서 (via Tweet) 1960년대 말의 LA출신 rock group Iron Butterfly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들의 big hit In-A-Gadda-Da-Vida를 제외하고는 사실 이 그룹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heavy-metal rock group 정도라는 것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 big hit oldie 이외에는 다른 것을 더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도 있었다.
이 글에서 나의 짐작이 맞았는데, 역시 이 유명한 한 곡을 빼면 그들의 이름은 유명무실할 정도였다. 그룹 멤버들의 관계가 안 좋았던지,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유명한 classic 이후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 legendary하다고 할까..
이 곡의 특징은 무슨 classic의 symphony정도로 연주시간이 엄청 길었다는 것, 그러니까 17분 정도 되었나.. guitar로 내는 background noise같은 것, dramatic 하게 들리는 drum solo, guitar solo등등이 아주 다채롭고.. 듣고 있으면 무슨 환각에 빠지는 기분, 등등이 있어서 1970년 초에 들을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이 것을 친구 손용현과 같이 동네(상도동)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걷는데, 앞서 가던 (못생긴) 아줌마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화를 내며 ‘히야까시‘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알고 보니 우리 둘이서 그 아줌마를 쫓아가며 ‘성 희롱’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었던 것이어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이제 다시 이 곡을 17분 동안 들어도 그때의 ‘젊은 감정’이 거의 변함없이 솟는 것을 느끼며 헤어진 휘문고 출신 친구 손용현을 생각한다.
IRON BUTTERFLY – IN A GADDA DA VIDA – 1968 (ORIGINAL FULL VERSION)
박시희 선생님.. 나의 중앙고등학교 3학년 때의 영어선생님, 별명은 “대추 방망이“.. 정열적으로 영어(문법)를 강의 하시던 모습이 45년이 넘도록 눈에 선한데, 나의 중앙고 3학년 때 추억의 글을 보고 박 선생님의 자제분(박용규 교수님)께서 글을 남겨 주셨다. 반가움은 물론이었지만, 곧바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선생님의 안부였다.
나는 그 당시 선생님들께서 건강하게 살아들 계실까 궁금한 것들이 많지만 시원하게 그 대답을 들을 길이 없었다. 선생님들의 연세를 계산을 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데.. 평균적으로 나보다 15~20년 정도 나이가 위라면, 지금은 대부분 80세를 넘으셨으리라.. 그러면 요새의 평균수명 정도일 것이고, 돌아가신 선생님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오늘 박시희 선생님 자제분으로부터는 선생님께서 1993년에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면 박 선생님께서는 60대에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을까? 혹시 무슨 사고나, 아니면 병? 아마도 고국에 있는 동창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이렇게 나는 모르고 살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타향살이의 서글픔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 담임 “짱구” 정운택 선생님도 혹시 타계하신 것이 아닐까? 정직하기만 한 세월이 참 무섭게 느껴진다. 박시희 선생님, 죄송합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 감사하며 “지나가는” 일년, 숨차게 지나가는 일년을 생각하며 모든 것들, 지극히 한정된 나와 나의 주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무한한 존재 하느님께 감사한다. 흔히 년 말에 이런 생각을 더 하겠지만, 오늘이 마침 ‘[추수]감사절’이니까 조금 더 일찍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을 듯하다.
우리의 작기만 한 가족들 건강한 것과 생전 처음 경험하는 불경기에서도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항상 무언가 불안한 여건하에서 무언가 최선을 다하려는 우리들.. 이것 이외는 사실 큰 상관이 없고, 문제도 없다.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 항상 찾고, 바르게 고치며, 그것에서 큰 무리 없이 최선을 다한 지난 일년이었을까?
겸손, 순명, 사랑, 절제.. 다 어렵기만 한 먼 곳에 있는 이상 같지만, 의외로 가까이서 우리를 이끌었던 지나가는 일년이었다. 그것만으로 사실 우리는 ‘가난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 어제 저녁에는 갑작스러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연도에 연숙과 같이 다녀왔다. 불과 며칠 전까지 성당의 청소 봉사를 하시던 교우형제님께서 조그만 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으신 어르신이었지만 알고 보니 우리 구역에 있는 안금환 형제와 거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안 형제 남동생의 장인이셨던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하면 요새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급서로 인한 놀라움은 크지만, 오랜 고통 속에서 타계하는 사람에 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나에게 선택을 하라면 짧은 과정을 택할 것 같다. 이곳의 biggest holiday를 앞둔 날이었지만 연도와 viewing (시신을 보는 것)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열기 찬 연도가 되어서 고인도 조금은 더 따뜻한 마음으로 하느님 품에 가게 되지 않았을까?
장례 미사가 오늘 바로 추수감사절에 있어서, 오늘 그곳에 가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는 판단인데, 어떨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을까.. 고인에 연관된 가족은 평균보다 훨씬 많으니까, 큰 걱정은 안 한다. 어제도 “내가 오늘 죽으면 몇 명이나 나를 보러 올까” 하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지난 몇 주일 동안 오래된 VHS video cassette 들을 ‘무섭게’ computer로 옮기는 작업을 해 왔는데, 이제 조금 끝이 보이는 듯하다. 이것을 ‘자동’으로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므로 꼬박 과정을 지키고 앉아서 해야 하는 ‘고역’을 치러야 한다. 지루하긴 하지만 덕분에 오랜 만에 20년까지 된 오래된 ‘가족이 보던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되어서 생각만큼 고역은 아니었다.
지금 보니 그것들의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거의 100+여 개가 되는 비디오 테이프들.. 90년대에 그렇게 안방 사랑을 받던 그 당시의 최첨단 기술, VHS video.. 그것이 지금은 DVD/BlueRay의 얇기만 한 optical disc들.. 참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대부분 내가 어렸을 때 고국의 극장에서 보았던 추억의 할리우드 명화들이라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 ‘옛 것’들이라서 아이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큰 후에, 옛날 영화가 더 좋았다고 말할 때도 있어서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 지난 며칠 동안 오랜만에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며 예년에 비해서 별로 볼품이 없이 힘겹게 달려있던 불쌍한 단풍잎들이 거의 모조리 떨어져서 완전한 겨울의 풍경을 나타냈다. 이런 상태로 내년 3월까지 버티게 되고 가끔 완전히 하얀 눈까지 덮일 아주 높은 가능성도 있어서 귀추가 주목이 되지만 제발 큰 피해 없이 멋진 풍경만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 와~~ 벌써11월 20일 일요일.. 2011년 추수감사절이 4일 밖에 남지 않고, 가톨릭 달력으로는 2011년의 마지막 일요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음 주 일요일부터 새 전례력이 시작 되고, 성탄까지는 대림절 (Advent)의 4주가 또한 시작되는 등, 세속적인 제일 큰 두 명절(추수감사절, 성탄절)로 겹쳐서 조금은 휴일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지혜도 함께 쌓여서 조금은 나은 편이다. 각종 휴일의 유래와 전통, 목적, 뜻을 음미하면 훨씬 도움이 된다. 비 직계가족 식구가 아무도 없는 우리 집은 이럴 때 잘못하면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모이면 네 명은 되지 않는가? 혼자서 휴일의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한다.
¶ 지난 11월 11일(이곳은 Veteran’s Day, 유럽에서는 Armistice Day?), 전 아틀란타 대교구의 John Francis Donoghue 대주교님께서 향년 83세로 선종하셨다. 그 동안 별로 주교님의 건강에 대한 뉴스가 없어서, 이런 갑작스러운 뉴스에 놀라게 되었다. 특히 나는 이 뉴스를 4일이나 지난 11월 15일 레지오 회합에서 듣게 되어서 아주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 지역소속 종교지도자의 선종은 사실 큰 뉴스는 아닐지라도 내가 어떻게 4일씩이나 늦게 알게 되었을까? Local TV뉴스를 자주 보면 아마도 알았을 것이지만 제일 큰 이유는 11월 13일의 주일 미사를 못 간 것이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신자들 대부분은 그 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도노휴(도나휴, Donahue와 스펠링이 조금 다른 common Irish name) 대 주교님은 1993년에 아틀란타 대주교가 되시어 2004년 12월에 은퇴하실 때까지 참 많은 일을 하셨다. 그 전 오랫동안 침체 속에 있던 이 아틀란타 대교구를 눈부시게 활성화 시키신 것이다.
미국에서 제일 큰 <아틀란타 성체대회, Eucharistic Congress>를 크고, 단단히 성장시키고, 대교구에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 신심행사를 강력히 권고하셔서 우리 ‘미국성당’ 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형적인 ‘사제 같은 인자한 품성’을 보이시고, 대교구내 수많은 크고 작은 본당의 견진성사를 주관하셔서 우리 아이들도 가까이서 뵙고, 사진도 찍기도 해서 대주교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친근한 할아버지 같은 추억을 갖게 되었다. 은퇴 후에는 ‘명예’ 대주교라는 직함으로 사실 전과 같은 정열로 그 모습을 보이셔서, 이번의 ‘뜻밖의’ 선종은 너무나 아쉽고, 슬프기만 하다. RIP, Rest In Peace.. Archbishop John Francis Donoghue..
¶ YouTube에 조금씩나의 조잡한 video를 올리면서, 조금씩 이곳을 더 자세히 보게 되고, 가끔은 그 동안 못 찾던 것을 찾게 되기도 하는데.. 이번이 바로 그런 때가 되었다. 작년에 나의 중앙고교 3학년을 추억하는 블로그를 쓸 때, 이 추억의 노래를 찾고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는데, 이번에 찾은 것이다. 아마도 그 동안 어떤 분이 만들어 올려놓았던 것 같다. 그것을 찾을 당시, 노래의 제목을 잊은 상태여서 더 찾지 못했을까?
행복의 샘터 , 박재란 이양일 1965년
알고 보니.. 그것은 <박재란, 이양일> 두 분의 <행복의 샘터> 였다. 이제 생각을 하니 제목이 어렴풋이 기억이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은 1965년 초에 나온 거의 ‘가곡 풍’의 유행가였다.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 바로 내가 중앙고 3학년 초였던 것이고, 그 때부터 고3 하면 두 분이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로 46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그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박재란씨와 이양일씨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 DraganFly? <dragonfly, 잠자리> 의 misspelling일까? 내가 만일 내일 아침을 못 보는 신세가 된다면, 이것도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인터넷 파급효과의 하나를 건진 것이다. 거의 10년이 넘는 역사의 이 흥미로운 UAV (Unmanned Aerial Vehicle) technology를 그 동안 나는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름에서 연상이 되고, 어렸을 때 꿈도 많이 꾸었던, ‘잠자리 비행기’와 비슷한 이것의 특징은 회전날개가 1개나 2개인 기존의 헬리콥터와 달리 최소한 4개의 회전날개를 가지고 remote control로 조종이 되는 ‘취미용 비행기’인 것이다. 장난감 헬리콥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취미의 수준과 ‘상업용’ 수준의 구분이 잘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기술’이라는 점이다.
Canada에 본사를 둔 이 DraganFly Innovation이라는 회사는 Zenon & Christine Dragan이라는 발명가에 의해서 무선조종 풍선, 비행접시 등의 취미로 시작을 해서 근래에는 완전히 심각한 상업용 UAV technology회사로 성장을 해서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의 demo video를 보면 따로 이것의 잠재성에 대해서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차원에서 쓰는 UAV는 크고, 비싼 것들이지만 이것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저렴한 것들이다. 현재는 주로 공중 비디오 촬영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것의 쓰임은 상상력에 달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빛의 신비, Luminous Mysteries, Mysteries of Light..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적인 빛의 성분이나 빛의 속도에 따른 상대성 이론, 빛의 구성에 대한 양자역학.. 등등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빛의 신비인 것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천주교의 ‘복되신 성모 마리아'(Blessed Virgin Mary: BVM) 묵주기도(Rosary)의 2번째 신비를 말한다.
묵주기도에는 4가지 신비가 있고 이것을 반복하며 읽고, 묵상을 하는데, 첫 번째 신비: 환희의 신비(Joyful Mysteries), 두 번째 신비: 빛의 신비(Luminous Mysteries), 세 번째 신비: 고통의 신비 (Sorrowful Mysteries), 네 번째 신비: 영광의 신비 (Glorious Mysteries) 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이상하게도 내가 유별나게 더 많이,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심지어는 좋아하게 된 신비가 바로 ‘빛의 신비’ 인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확실하게 글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조금 간단하게 말 하자면 나머지 3가지 신비는 사실 너무나 ‘유명’하다고나 할까..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 탄생, 고통의 신비는 예수님의 수난, 영광의 신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잘 알려진 기독교의 핵심부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빛의 신비는 조금은 ‘평범할 수도 있는 예수님의 공(公)생활’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느덧 내가 묵주기도를 시작한지 4년이 훨씬 지나고, 내년 3월이면 만 5년 ‘기념일’이 다가온다. 세월이 빠른 것은 물론 잘 알지만, 내가 사고 없이 이것을 5년 계속해 왔다는 사실로는 5년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듯 싶다. 그만큼 나의 묵주기도 5년은 나에게 풍부한 개인적 경험을 체험케 했고, 나아가서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나를 계속 끌고 갔기에 이제는 전부터 들어왔던 묵주기도의 신비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묵주기도를 ‘시작해 본’ 자체도 나에게는 신비에 가까웠지만, 그것을 지금까지 4년이 훨씬 넘도록 계속해온 자체는 그 이전의 나 자신을 생각해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처음 이것을 시작할 당시는 기도문을 외우지 못해서 불편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자연히 해결해 주었다. 완전히 외우고 나면서, 조금씩 생각, 묵상 등을 할 여유가 생기고,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자유기도에 대한 지독한 거부감 (대부분 개신교 신자들의 통성기도 스타일 때문에)으로 나는 기도란 것을 못 했는데 이 묵주기도가 아주 자연스레 나를 구해 주었다.
빛의 신비에 대해서 조금 조사를 해 보니, 의외로 이 신비는 아주 역사가 짧았던 것이었는데, 2002년에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Pope John Paul II) 께서 기존의 3단에 덧붙인 것이었다. 묵주기도의 오랜 역사를 감안한다면 2002년에 더해진 빛의 신비는 사실 바로 불과 몇 분 전에 더해진 것 처럼 느껴지는 ‘새 것’ 인 것이다. 흔히 ‘레지오 박사’로 알려진 최경용 베드로 신부님의 저서 <레지오 마리애 영성> 을 보면 묵주기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묵주기도는 ‘로사리오의 첫 교황’ 이라고 불렸던 비오 5세가 1569년에 만들었는데, 그 2년 후인 1571년 10월 7일의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유럽이 회교국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봉착하자 신자들이 전승을 위한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친 결과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비오 5세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오 13세는 1573년에 매년 10월 첫 주일을 ‘로사리오의 성모 축일’로 정하였다. 그 후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이 10월을 ‘로사리오 성월’로 정하고 성모 호칭 기도에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모후’라는 칭호를 추가함으로써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신심을 장려하였다.
전 교황 복자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성모신심은 너무나 잘 알려진 최근 역사의 일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나 교회 역사적이거나 나는 이 복자를 존경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것도 나의 ‘자유의지’와는 크게 상관이 없이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2005년 선종을 하실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근대사 인물 중에 내가 확실하게 존경하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 복자,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닐까.. 왜 이 신비가 ‘빛’의 신비로 이름이 되었을까? 그것은 요한복음 9장 5절의: “While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공동번역에서) 에서 나온 것이다. 그 분이 첨가한 묵주기도 두 번째 신비 ‘빛의 신비’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고, 나를 움직였을 것이다. 결국, 요새는 참 신앙이라는 것이 오묘하다는 생각 뿐이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의 빛의 신비: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The Baptism of Jesus in the Jordan)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Christ’s Self-Manifestation at the Wedding in Cana)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Christ’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The Transfiguration of Our Lord)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Christ’s Institution of the Eucharist)
내가 연세대를 지망하게 된 것은 복잡한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철학적인 이유보다,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서울공대 전기, 전자공학과는 나에게 조금 ‘위험한’ 선택이었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외에도, 무언가 부드럽고 ‘낭만적인 인상’을 주던 신촌 독수리의 요람, 반짝이는 구두, 바로 옆에 ‘기다리고’ 있던 이화여대생들.. 등등이 자연히 나를 그곳으로 끌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관심은 100% 전기,전자 ‘과학’ 쪽이어서 전공을 선택할 때에 한번도 다른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의 학과를 지망할 때, 본인의 취향이나, 포부보다는 성적 순위로 정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 이었다. 성적순위로 경쟁 학과를 지망하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그 당시 서울공대 화공과나 전기,전자과의 커트라인이 제일 높았고, 그런 분야를 자기가 좋아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학교 성적만 좋으면 지망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저 그런 과를 졸업하면 보장된 취직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분야에 얼마나 관심이나 있었을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불행한 친구들,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 분야에 진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회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내가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것은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고 결과였다.
연세대학 전기공학과의 경쟁률은 상당히 높아서 시험을 치르고 나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느끼긴 했지만, 사실은 끝났다는 안도감과 편안함도 잔잔하게 느끼며 발표를 기다렸는데, 그만큼 입학시험이란 것이 괴로운 것이었다. 그 당시, 입학시험 발표는 대부분 라디오에서 제일 먼저 발표를 했고, 나도 그것을 통해서 합격 발표 결과를 들었다. 입시 전에 합격하면 ‘진짜’ 카메라를 사주시겠다는 어머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나는 정말 합격발표를 기뻐했는데, 진짜로 며칠 후에 나는 일제 페트리(Petri) 란 카메라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나중에 가까웠던 친구들의 대학입시 결과가 속속 알려졌는데, 김호룡은 연대 기계공학과에 합격을 했는데, 나머지 이종원, 우진규 등은 모두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2차 대학을 응시하거나 재수를 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고, 종원이는 2차였던 외국어대에 갔는데, 우진규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비록 추운 겨울 날씨였어도 입학식 전까지의 시간은 정말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악몽’ 같던 시절이 끝나고, ‘완전 자유’의 대학시절이 눈 앞에 보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드디어 ‘학생입장불가’ 라는 영화도 당당히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용산구 남영동, 금성극장 바로 앞에 살았고, 그곳에서 연세대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사실 고등학교에 다니던 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약간 달라진 것은 까만 교복대신에 곤색 대학제복을 입었던 것, walker(군화) 대신에 진짜 신사화 (단화)를 신었고, 머리는 조금 자라서 스포츠형 정도가 된 것, 그것이 전부였다. 어떤 애들은 완전히 기름까지 바르며 머리를 기르고, 신사복까지 입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그 때 연세대 캠퍼스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이 여기저기 보이던 “멋진” 여대생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속한 과에는 여학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여기저기 강의실 이곳 저곳에 여대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학 오리엔테이션도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곳에서 소개된 도서관, 학생보건소, 채플시간 등등은 나중에 연세대만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입학을 한 후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은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비록 멀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버스노선이 있어서 사실은 더 편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매일 왔다 갔다 한 것이다. 이곳에서 대학졸업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나의 대학시절의 추억은 이곳과 항상 연관이 되어있었다.
연대 전기과, 우리는 그저 그렇게 불렀다. 내가 1966년 입학할 당시 연세대학교는 공과대학이 아닌 이공대학이 공학부를 포함하고 있었고, 전기공학과와 비슷한 전자공학과란 것이 생기기 전이었다. 아마도 몇 년 후에 전자공학과가 분리되었을 것이다. 내가 다닐 당시에는 3학년이 되면서 강전, 약전 이란 이름으로 갈라졌다. 그러니까 강전(强電)이란 것은 전통적인 전기공학이었고, 약전(弱電)이란 것은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자공학인 셈이었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강전은 (electric) power system, 그러니까 전력의 발전,송전 같은 ‘강한, 높은 전압’의 것을 다루고 약전은 그 이외의 것, 특히 electro-magnetic, radio, amplifier, control systems 같은 것을 다루었던 것이고, 이 약전이 바로 전자공학(電子工學)인 것이다. 나는 약전, 전자공학에 관심을 두고 입학을 했기 때문에 3학년 때 약전 반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각자의 지망대로 배치를 하지만 워낙 약전, 전자공학에 지망생이 많아서 교수님들도 조금 골치를 썩힌 듯 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서 재학생, 복학생으로 갈라지는 판에 3학년부터는 약전,강전으로 거의 반반으로 갈라게 되어서, 심하면 서로 모르는 학생도 생길 정도였다. 지금 졸업 앨범을 보니 그것을 느끼게 된다. 얼굴만 조금 익혔을 뿐 이름 이외에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학 이전의 동창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나는 1학년 가을학기부터 1년 휴학을 했기 때문에 입학동기들은 거의 놓치게 되었다. 이런 조금은 복잡한 이유로 나의 연세대 4년은 조금 비정상 적인 것이 되었다.
1학년 1학기 때, 그러니까 1966년 봄 학기, 그야말로 freshman의 기분으로 인생에서 조금은 새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대학생이 되어야 비로소 ‘성인’, 그러니까 사람 취급을 받았다. 머리도 기르고, 신사복도 입고, ‘단화’ 구두도 신을 수 있고, 극장도 마음 놓고 들어가고, 다방, 술집.. 이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또한 마음 놓고 남들이 보이게 ‘연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대학에 들어와서, 아차..하고 한눈을 팔면 완전히 자제력을 잃기가 아주 쉬웠다. 내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라고나 할까..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갑작스런 개인적 자유를 슬기롭게 감당할 준비가 덜 되었던가.. 자유의 전당에서 나는 첫 학기를 혼돈과 방황으로 보냈다. 대학 강의란 것도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고3때의 스파르타 식, 우스꽝스럽게 어려웠지만, 멋지던 수학, 화학 같은 것이 대학에선 수준이 ‘낮아진 듯’이 느껴졌다. 1학년의 교양학부 과정 전체가 고등학교와 수준이 비슷한 듯했다. 한가지 다른 것은 강의를 ‘땡땡이’를 쳐도 당장 아무런 ‘처벌이나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던 것이었는데, 그런 ‘안심’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나중에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환경에서 전기공학과 1학년에는 중앙고 동기동창 2명, 그것도 3학년 8반 때의 ‘반창’이었던 신창근과 조남재가 있었다. 중앙고의 같은 반에 있었어도 개인적으로 별로 가깝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중앙고 1년 선배인 구장서, 더 위의 선배인 (2~3년?) 차재열 형.. 등등, 그러니까 중앙고 출신이 전기과 1학년에 나까지 5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은근한 ‘힘’을 가진 집단이어서, 무슨 투표,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절대로 무시 볼 수 없는 숫자였고, 과 대표를 뽑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보슬비 오는 거리 – 성재희
1965년 말에 발표된 성재희씨의 데뷔 힛트, 입학시험 즈음에 거의 매일 듣었던 곡으로, 그 당시를 추억하게 하는 대표적인 가요가 되었다. 레코드가 크게 힛트한 후에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I Could Easily Fall in Love with You – Cliff Richard
연세대 입학 후에 참 많이 듣고 좋아했던 곡, 전 해에 Cliff Richard는 이미 The Young Ones라는 영화로 일본과 한국에 많은 fan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연세대에 입학한 중앙고 동창 중에는 기계과에 나의 절친했던 친구, 김호룡을 비롯해서 김연응이 있었고, 다른 과에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나중에 총학생회장을 뽑을 때에 은근한 세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별로 그런 것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작은 규모의 정치적 발상이고 행동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체질에 별로 맞지 않았지만 기성 정치인을 흉내 낼 정도로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 투표에서 표 하나가 사실은 땀과,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사실도 그때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전기과 3학년에 어머님의 절친한 원산 루씨여고 동창 친구분의 아드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위재성 형, 보성고교 출신으로, 학훈단(ROTC) 생도였고, 성적도 뛰어나고, 지도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형이었다. 그 형의 여동생인 위희숙씨는 1967년에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을 해서 나와 같이 1971년에 졸업을 한 졸업동기생이 되었다. 어느 날 그 형이 나를 보자고 불러서 갔더니, 그곳은 전기과 학생회 선거본부였다. 알고 보니 그 형이 학생회장(이공대 회장)으로 출마를 해서 겸사겸사 나를 보자고 한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실 곤란한 것도 없지 않았다. 이미 나는 다른 과에서 중앙고 출신의 선배가 출마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대학 학생회 선거는 일반 선거의 풍토와 별반 다름이 없고, 완전히 ‘출신지’에 좌우되는 판이었다. 출마 후보의 경력, 자질, 포부 같은 것은 사실 뒷전에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선거풍토를 그대로 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출신고의 압력에 굴복한 셈이 되었는데, 이것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1학년 1학기의 시작 무렵에 나는 ‘사진 찍기‘에 완전히 빠졌고 그것이 조금 수그러질 무렵에는, 나의 다른 blog에서 다루었던 ‘모형 비행기‘ 로 시간을 다 보냈다. 온통 정신이 그곳에 가 있어서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교시절의 학과목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역시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니 시험도, 출석도 문제가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체육 같은 것은 출석미달로 시험도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반대로 ‘성공’을 하겠다고 정신무장을 하고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가 군대(공군)를 마치고 입학한 사람, 이름이 강성모 였다. 나이나 성품, 성숙함 등으로 전기과 1학년 과대표로도 뽑히고, ‘공부도, 활동’ 도 잘해서, 결국 강성모씨는 나중에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학과장의 추천으로 미국유학(Fairleigh Dickenson College, NJ)을 갔고, 그 이후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대학교수가 되었다. 이 강성모씨는 내가 한창 ‘놀던’ 그 학기에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절대로 재수가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학기가 끝나면서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휴학계를 제출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나에게 최적의 선택이었다. 1966년 입학 동기들은 사실 이때부터 1년 휴학을 하면서 완전히 ‘놓치게’ 되었고, 1967년 가을 2학기에 복교를 하고 보니, 전기과의 학생들은 사실상 1년 뒤에 입학했지만 나와 나이는 거의 비슷했다. 거의 모두 생소한 얼굴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도와서 나의 중앙고 반창인 이윤기와 나의 죽마고우 박창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는 3학년 때 그런대로 친하게 지낸 친구였는데, 재수를 해서 들어왔고, 박창희는 나의 중앙고 1년 후배여서 제대로 입학을 한 것이었다. 같은 고등학교엘 다니면 1학년의 차이에도 존댓말을 써야 했지만, 나와 창희가 죽마고우의 친구여서 그럴 수는 없었고, 이것 때문에 창희와 윤기도 서로 말을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중앙 1년 후배인 김태일, 이상일 등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외에도 전기과에는 조금 낯이 익은 얼굴 두 명이 보였는데, 그 들은 이헌제, 김현식.. 이름보다는 얼굴이 낯이 익어서 생각해보니 작년, 나의 입학동기생이었다. 그들을 어떻게 일년 뒤에 다시 보게 되었을까? 나와 같이 휴학을 하지 않았으면, 유급일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이헌제는 유급이 분명했는데, 김현식은 그 당시 이유를 분명치 않았다. 그래도 이헌제는 나를 알아보아서 나도 아주 반가웠는데.. 그 해(1967년) 겨울이 지나면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겨울방학 중이었는데 갑자기 같은 과의 한창만으로부터 연락을 받아서 한강 파출소로 가보니, 이헌제 가 한강 철교다리 위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충격적이고 어이가 없었다. 이헌제.. 얼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참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어떻게 그가 자살을.. 나중에 들어보니 열렬히 연애하던 여대생(이대 음대생)과 결별을 하면서 비관 자살인 것 같다고 했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며 담배 피던 모습이 흡사 외국 영화배우 같았고, 삶을 마음껏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 그가 얼마나 충격과 절망이었으면, 그 나이에 자살을 했을까.. 아직도 그의 얼굴을 생각하며 채 피지 못한 그 영혼의 명복을 빈다.
이윤기, 박창희 같은 뜻밖의 ‘친구’들 때문에 나의 대학 1학년 2학기의 시작이 아주 순조롭게 시작 될 수 있었고, 1년 전의 ‘악몽’을 되씹으며, 단단히 결전의 자세로 학교생활에 임하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가끔 실수도 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학교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학교의 강의,과목을 충실히 공부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되었다. 사실 이것이 정상적인 대학생활이었고, 나는 처음 그런 대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새로 만나게 된 과 친구들과도 큰 무리 없이 어울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이윤기와 박창희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이미 이윤기와 친하게 지내던 그룹이 있었는데, 흔히 그들을 ‘식당파‘라고 불렀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그 당시의 학생식당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모두 쾌활하고, 다양한 남자들.. 그 중에는 과 대표였던 고종태, 기타를 귀신처럼 잘 치던 보성고 출신 심재흥, 항상 옷을 멋있게 입던 문욱연,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일찍 군에 입대하고 나의 졸업앨범에 남지를 않아서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다. 그 중의 한 명, 이름은 비록 잊었지만 그 당시 가요 히트곡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 홈” 을 좋아했던 친구, 그 노래는 나도 좋아하던 것이라 더 그를 기억한다.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홈
이윤기, 박창희와 더불어 그 당시 어울리게 된 사람들 중에는 화공과의 중앙고 동창 양건주, 전기과의 강원도 출신 김철수, 중앙고 후배 김태일, 그리고 지방(전라도) 출신의 김진환 등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그룹이 형성이 된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연세대 굴다리 바로 앞에 있던 다과점(빵집)에 둘러 앉아 얘기를 하고 했는데, 그 때의 추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한다. 어떻게 그런 ‘순진’한 순간들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우리들은 어린이처럼 모이곤 했는데, 재미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그날 돈을 낼 사람을 뽑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하게 모인 우리 그룹은 다음해에는 완전한 남녀 혼성 클럽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67년 1학년 2학기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해서 사실 나에게는 보기 드문 완벽한 학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 꼭 좋은 일에는 악재가 낀다고, 작은 사고 하나로 나는 조금은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강의실에서 어린애들처럼 분필 던지는 놀이를 하다가 내가 앞 이빨을 부러뜨리는 조그만 사고가 났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치과를 계속 다니게 되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서 더욱 학교공부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1학년 1학기에 겪었던 학교공부의 어려움을 1년 뒤의 2학기에 완전히 만회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다시금 대학생활에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하게 되었고, 학기가 끝나면서 대망의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