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부터 시작된 불볕더위가 거의 2주째로 접어들면서 슬그머니 6월로 접어들었다. 날씨, 기온, 기후에 조금은 둔감해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아직도 멀었다. 심할 때는 조금 내가 너무 더위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될 정도였다. 심지어 연숙에게, “더운 날씨에 대한 예보를 보면 나에게 말하지 말라” 고 간청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 한마디로 나는 기분이 쳐지는 것이 무서워서 그랬지만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는 날씨에 둔감해 지도록 의도적으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조금은 효과가 있나..
6월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제일 큰 이유는 이번 주말에 있는 3일간의 ‘레지오 봉쇄피정’ 때문일 것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 가보는 조금은 ‘겁이 나는’ 그런 곳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집을 거의 ‘못’ 떠나는 나의 생활에 이런 것도 심리적으로 아주 ‘큰 사건’이라 그런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좋던 싫던 나는 이런 것을 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한 것이다. 아니 확고하여 지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다. 결과가 어떨지는 조금 ‘흥미’ 롭기도 하지만 연숙의 ‘예상’에 의하면 그렇게까지 기대를 하지는 말라고 하니까.. 한번 ‘당해’ 보자.
드디어 그것이 찾아왔다. 얼마 전, 비가 많이 온 이후에 차고의 water heater밑에 물이 흐른 것을 보고.. 이거.. 비가 샌 것이 아닌가 의아해 했었다. 그것이 어제 다시 보고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은 water heater가 새는 것이었다. 예전 처럼 폭포수처럼 새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 그렇게 내가 예상한 대로 수명이 다 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하다. 최소한 $800이상은 ‘잡아 먹어야’ 하니.. tank 자체는 $500정도일 것이고 나머지는 labor charge일 것이다. 내가 한번 해 볼까? plumbing은 정말 간단해 보인다. 물론 실제로 해 보면 아닐 가능성이 더 많지만.. 아니면 tank-less model로 ‘내가’ 해 볼까.. 이것은 너무 비싸다. 그저 지금 쓰는 것이 제일 무난한 방법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혼자 하기에는 너무나 무겁다는 간단한 사실이다. $300 의 labor가 과연 우리에게 적당한 것일까? 머리가 복잡해진다. 지금 차고에는 책과 상자로 가득 차 있는데.. 갑자기 이것이 터지면.. 물바다가 되면.. 정말 큰일인데.. 어찌해야 하나?
현재 나를 제일 ‘괴롭히는’ 것 중은 역시 내가 ‘스케줄’ 에 따라 일을 못한다는 자책감이고, 또 스케줄에 따라 ‘정말 해야 할’ 것들을 계속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아직도 일년 전에 바꾸어 놓은 나의 office room의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차고의 정리를 하나도 못했다는 사실, 따라서 지금 나의 ‘보물 같은’ 책들과 서류들의 위치가 다 같이 확실치 않다는 는 것.. 본격적으로 나만의 project을 본격적으로 못 하고 있다는 것 등등.. 그리고 집을 수리하거나 고치는 일.. 정말로 미루고 사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못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정말 없다. 할 수 있다.
박기원 씨는 사랑하는 남편 이진섭씨를 통해서 그 당시를 “살아 가야만” 했던 대한민국 남자들, 가장들의 한(恨) 같은 것을 몸으로 느꼈다. 평범하게 매일 매일을 생활하는 엄마, 주부로서만이 아니고 한 지식인, 문인으로서 남보다 더 깊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의 입장을 비록 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더 이해하려 노력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진섭씨는 1922년 생이고 박기원씨는 1929년 생, 모두 왜정(주: 그때는 ‘일제강점기’라는 고급스러운 말을 이렇게 불렀다)때 태어나셨다. 특히 이진섭씨는 청년기까지를 모두 왜정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다. 일본식 교육과 충성을 강요 받고 잘못하면 ‘남의 나라’ 전쟁터로 끌려갔을 그런 ‘기가 막힌’ 시대를 사셨던 것이고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도 거의 다 그랬을 것이다.
… 어쩐지 한국 남자의 한(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뒤늦게 얻은 이해심도 아량도 아니다. 술을 마셔야만 살았을 것 같은 그 시대에 살았던 남자들!
그 안에서 제일 다치기 쉽고 멍들기 쉽고 상처 받았을 그이의 외로웠던 가슴을 뒤늦게나마 아내인 나는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
그이는 생전 이런 말을 가끔 했다.
“우리 시대는 턱걸이 제네레이션이야. 무언가 해 보려고 안간 힘을 썼다가는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
그것은 아마 불안정했던 한국의 역사와 격동기를 겪고 살아야만 했던 고뇌에 찬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이의 진정, 깊은 남자의 마음을 나는 그가 살았을 때보다 그가 간 지금 되새겨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진정 그의 아픔이었지 아내인 나에게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남자만의 고독이었다. (본문 97쪽)
그이는 살아 있는 동안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겼을 때, 그것을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원인을 타인에게 미루는 것처럼 비겁한 것은 없다. 모든 결과는 먼저 자시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세대만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원인을 시대에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비극을 지니고 있다.
‘턱걸이 제네레이션’이라고 할까? 즉, 철봉 틀에 매달려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오르려 하면 철권으로 내리쳐 주저앉게 만든다. 한 번도 그 푸른 하늘을 못 보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생각 있는 남자의 몰골은 마치 주문진 해변가에 널려 있는 오징어의 모습 같다. 축 늘어져 말라 가는 오징어들 그것일 것이다.” (본문 169쪽)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
1983년 3월 이진섭씨의 장례 시, 동창, “많이 통하며 많이 비슷하고, 멀리 있어도 가슴 한구석으로 걱정을 해주며 살던 친구” 한운사(韓雲史)씨의 비문(碑文)이 명필 송지영(宋志英)씨의 글로 세워졌다.
비문
무엇인가를 쓰고
예술을 논하고
노래를 짓고, 노래 부르고
인생의 멋과 맛을 찾아 다니며
소유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 진섭(李眞燮)이
그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마침내 여기 영원히
잠들었다.
새야, 바람아, 교교한 달아
찬란한 태양아
이 사람과 더불어 놀아 주라.
1983년 3월 10일
이 글에서 “우리 세대 최후의 낭만인” 이란 말이 이채롭다. 영어로 하면 “last Romanist among our generation“정도나 될까. 이분의 일생을 알고 나면 이 표현은 정말 설득력이 있다. 또한, 멋과 맛을 찾아 다닌다고 했지만 그 정도와 걸 맞는 철저한 책임 있는 한 가장이기도 했다. 문제는 “한 잔 술, 두 잔 술로 외로움을 달래다가” 건강을 해친 사실이다. 나의 기억에 그 당시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 중에는 이런 분들이 꽤 있었다. 지나친 자학과 불만을 거의 모두 ‘술’로 달래다가 일찍 운명을 하신 불쌍한 세대였다. 우리 세대도 이런 것들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많이 술 문화에 영향을 받긴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0% 그런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이진섭씨는 아마도 최후의 “자유인” 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이진섭씨는 비록 말년에 세례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흔히 말하는 독실한 신자 처럼 같이는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부인의 눈으로 보아서도 그런 것이다. 종교도 ‘자유’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었을까? 틀에 얽매는 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까?
그이는 감히 남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했고, 그 속에서 헤엄치듯 살았다.
술잔을 들면서 혼자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고 그랬다. 나는 그런 그이 모습이 우스워,
“여보, 술잔 들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우? 그건 하나님에게 대한 모독 예요. 하나님을 접할 때는 몸도 마음도 정결하게 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죠”
그러면 그이는 너무도 당당하게
“모르는 소리. 술 안 먹은 맑은 정신 속에서도 음모, 살의, 도둑 심보 등 갖은 잡스런 생각을 지닌 채 기도하는 놈들도 있을 거야. 나는 술은 먹어도 마음만은 맑은 거울같이 깨끗해. 성경 말씀에도 있지. 착하고 순진한 어린애 같아야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말야. 나는 술잔을 들고 있지만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실 수 없을 거야”
나는 이론이 정연한 그의 말에 말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누구에게 구애 받거나 간섭 안 받고 자기 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믿었다.
그러고 보니, 그이같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도 드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본문 110쪽)
위의 글을 보면 이진섭씨는 위선자 부류를 아주 싫어한 것 같다. 올바른 소리에 비해 행동이 다른 사람들, 이진섭씨도 올바르고 이론 정연한 이론을 펼쳤어도 행동이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고 나면 그의 ‘자유론’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특히 율법에 얽매여서 ‘법의 기본 정신’을 모두 잃어버린 ‘바리사이파’ 같이 예수를 팔아 넘길만한 사람들이 ‘수두룩 닥상’인 이 세상을 살면서 어찌 이런 자유인의 행동을 마다할 수가 있을까?
시발택시 위의 해프닝
자유와 멋을 제대로 승화시킨 ‘사건’은 아마도 시발택시 위에서 샹송을 부른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얼마나 이진섭씨가 술과 자유와 샹송을 사랑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 해 겨울이었나 보다. 눈이 많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낮에 나간 그이가 통행금지 시간(필자 주: 어린이 들, 그때는 midnight curfew란 것이 있었음)이 다가오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애들을 재우고 온 정신이 문 밖에 쏠리고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다급히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감적으로 뛰어나갔다. 당시엔 시발택시가 한창인 때였다. 시발택시 지붕은 널찍하고 편편했다.
그이는 흰 눈이 덮인 시발택시 지붕 위에 누워서 늘어지게 샹송을 부르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은 달빛이 은색으로 빛나고, 이 진섭씨는 하늘을 향해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운전 20년에 저런 양반은 처음 예요. 아주머니 빨리 요금 주시고, 같이 끌어 내려요”
어린애 달래듯이 겨우 택시 지붕에서 끌어 내렸다.
그랬더니 이 진섭씨 왈,
“자네는 차만 끌 줄 알았지 이런 멋진 밤을 모르는 불쌍한 놈야. 자 요금”
그이는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내 한줌 집어 준다.
그 돈이 타고 온 요금의 몇 배가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제서야 운전수는 갑작스런 횡재에 입이 벌어지며,
“아저씨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 주무십시오”
하며, 깍듯이 정중한 인사를 하고 가버린다. (본문 159쪽)
물론 이때 이진섭씨는 한잔을 거나하게 걸친 취중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행동을 보면 이상하기 보다는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누구라도 마음 속 깊이 이렇게 한번 ‘멋지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까.
여기 나오는 시발택시가 무엇인지 상상이 전혀 안 가는 “어린애”들이 많을 듯 하다. 이승만 정권 때 나온 ‘국산 차’의 이름이었다. 군용 Jeep을 완전히 승용차로 개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body(차체)만 군용drum통을 사용해서 우리 디자인으로 씌운 것이다. 대강 찝 차와 비슷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택시들이 이차였다. 이것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일육 군사혁명 뒤부터 일제 차, “blue bird”가 들어오면서 부터 였다.
65세 만세론(萬歲論)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읽고 읽고 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면 넘어가곤 했다. 아직도 나에게 멀었다는 막연한 생각과 죽음이나 수명 같은 화제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것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나이나, 세대가 바뀌면서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영어에도 여기의 화제와 비슷한 말이 하나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 “dirty old man” 이란 말이다. 이진섭씨도 이런 ‘어감’을 제일 싫어하지 않았을까?
그 이는 가끔 65세 만세론(萬歲論)이란 말을 했다. 즉, 65세까지만 살면 인생은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이상은 ‘덤’으로 사는 거지,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곧 사실상 죽은 인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이는 가까운 친구분이던 윤 현배 선생님과 몇 분이 서 항상 65세 만세론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그이는 그 소원이던 65세도 채우지 못하고 가 버렸다.
어떤 때 외출을 같이 나갔다가 길에서 나이 많은 노인이 조깅하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늙은이다워야지, 저렇게 무리한 운동을 하면서까지 오래 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은 좋게 안 보이는군” 하던 말이 기억난다.
더구나 모든 면에서 노욕(老慾) 같이 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늙어갈수록 저물어 가는 낙조(落照)를 보듯 담담해야 된다고도 말했다. 또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누구나 두 주먹을 쥐고 나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누구나 두 손을 편안하게 펴고 죽은 것처럼, 그 동안 두 손 안에 담았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욕심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야만 된다고도 말했다.
그러니까 자식 덕을 보겠다는, 그러기 위해서 오래 살아야겠다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자기 몸 움직여 60 평생까지 살고, 그 이상 못 움직이게 되니까 ‘이만하면 너희끼리 살 수 있겠지’ 하고,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훨훨 가 버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몸 져 눕기 두 달에서 이틀 모자라는 날만 채우고…
어떻게 생각하면 매몰차고, 너무나 명확하게 자기 인생 몫을 살고 간 것 같다. (본문 311쪽)
이진섭씨 세대에선 분명히 60세, 즉 환갑이란 나이는 커다란 개인적 업적에 속했다. 평균수명을 생각해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유교질서에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개념을 생각해도 그렇다. 나이가 듦은 ‘무조건’ 가치가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요새는 사실상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젊은 것이 ‘무조건’ 좋게 보이는 세상인 것이다. 강제로 늙어감을 늦추는 것.. 정도의 문제다. 지나치면 ‘노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자연스러운 것보다 더 추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자꾸 들어가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어떨 때는 깜짝 놀랄 때도 있으니까.. 10년 전 보다 더 젊게 보인다면 이건 좀 이상하다. 그런 배경에서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으면서 가급적 자연스럽게 늙는 것을 바라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계속)
나에게는 1983년 서울 학원사(學園社) 발행 넌 픽션, 여류 소설가 박기원씨가 쓴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지라도> 라는 긴 제목의 책이 하나 있다. 사실은 나의 책이 아니고 아내 (전연숙)의 책이지만 실제적으로 이제 거의 나의 책이 되었다. 이 책은 1984년 초 연숙이 서울에 갔다 올 때 그녀의 학교선배가 사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이제 거의 30년이 되어오는 준 고서(準 古書)에 가까운 책인 것이다.
나에게는 이 정도의 역사를 자랑하는 책들이 그런대로 있지만 이 책은 좀 특이하다. 우선 내가 산 책이 아니고, 다른 오래된 책들과 다르게 거의 끊임 없이 자주 읽어 온 책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이렇게 읽고 또 읽고 한 것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할 case가 된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이 책이 화장실에 항상 있어서 더 도움이 되었다면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거의 수십 년 동안 반복적으로 읽는 새로운 즐거움을 배우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우리가 젊었던 시절 널리 알려진, “직함도 많았던 팔방미인”, 이진섭씨다. 이진섭씨는 아주 유명한 신문인, 칼럼니스트, 방송작가, 시나리오작가로 나이에 상관없이 잘 알려진 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진섭씨의 부인이자 여류문인 박기원씨로, 그녀가 남편의 타계 직후에 이진섭씨와의 삶에 대해서 평범하고, 진솔하게 쓴 책이다.
보통 부부들이 살다가 배우자가 먼저 타계를 했을 때, 누가 먼저 간 배우자를 그리며 책을 쓸 수 있겠는가? 요새라면 책을 쓰는 것이 비교적 쉬워졌지만 그 당시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진섭씨의 경우는 다행히, 그의 부인도 역시 문단에 잘 알려진 문학가였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문인부부는 뉴스 감도 되고 흔히 말하는 ‘인기, 연예인’ 그룹에 속하기도 해서 신문, 방송 같은 것에서 어렵지 않게 듣고 볼 수 있어서, 나에게도 이진섭씨의 타계(60세를 못 채우시고 비교적 일찍)는 아주 애석한 소식이어서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대하기 시작했다.
신문, 방송을 통해서 내가 아는 이진섭씨는 ‘불란서 샹송’을 좋아하는 박학다식, 재능이 많고 양심적인 언론인, 문인.. 정도일까? 그런 것들은 이 책을 통해서 다 사실임이 밝혀지지만, 가장 가까운 아내의 입장에서 본 것은 어찌 보면 평범한 남편, 아빠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또한 이진섭씨가 그렇게 교과서적인 평범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밝혀진다.
운명적인 만남
조금 놀란 사실은, 저자 박기원여사와의 결혼이 그에게 초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또한 육이오 동란이 남긴 한 부부의 파경임을 알 때, 역시 사상적인 전쟁의 파괴력을 실감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일명,빨갱이 개xx) 가족 출신인 부인이 육이오 이후 가족을 따라 월북을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6.25 전쟁! 그 전쟁으로 사실상 우리들의 만남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첫 결혼은 결국 결혼한지 1년도 못되어 전쟁으로 파경에 이르렀다. 그의 첫 번 아내는 폭격이 한창이던 7월에 첫아들을 낳고, 그리고 1.4 후퇴 때 친정을 따라 월북한 것이다. (그녀의 친정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고향이 이북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결혼을 파기하고 남편을 떠나 친정을 따라서 월북해 버린 그 여자만이 아는 비애와 깊은 아픔을 알 길은 없지만 이해는 할 것 같았다. (25쪽, 본문 중에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육이오 동란 때 잠깐 부역 죄로 인천에서 복역한 것이 조금 특이하다. 그러니까 한 때 사상적인 ‘외도’를 잠깐 한 것이다. 경위는 이해가 간다.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인 그의 많은 친구들이 공산주의자로 많이 월북을 했었는데, 전쟁 때 대거 남하를 해서 이진섭씨를 포섭을 했는데, 잠깐 협조를 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사상적이 아니고 실제적인 이유로 이진섭씨의 친형님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의 형님은 그 당시 외교관이었는데 잠깐 귀국을 했다가 6.25 동란을 맞고 곧 바로 납북이 되셨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100% 이해를 하게 된다. 나의 아버님도 외교관은 아니셨지만 그 당시 ‘지식인’이라는 죄목으로 납북이 되셨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이유는 어떻든 간에 부역은 한 걸로 됐죠. 그래서 인천서 재판을 받고 1년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셈이죠.”
다음해 우리가 결혼하기 한 달 전, 수복 후 서울에서 그이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이는 그때 일로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결혼 후에도 그 후유증은 오래 갔었다. (31쪽, 본문 중에서)
나는 어떤 부부들을 만나거나 알게 되면 제일 궁금한 것이 어떻게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가끔 내가 집요하게 그것을 알려고 해서 핀잔을 받을 때도 있지만 별 수가 없다. 그저 궁금한 것을 어찌하랴..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더 궁금할 수 밖에. 그 만남의 역사를 감싸고 있는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이 나는 그렇게 흥미롭다. 이진섭, 박기원 부부의 역사는 민족의 비극, 육이오 동란 때의 피난지 부산이다. 그때 그곳에서 박기원씨의 심정이 이렇게 한 마디로 묘사가 되어있다.
직접 눈으로 목격했던 6.25의 공포, 그리고 아직도 전쟁의 판가름이 안 나 생(生)과 사(死)의 확증이 없는 나날은 슬프고도 우울했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을 것 같은 내 25세 청춘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나를 고독하게도 했다. (28쪽, 본문 중에서)
운명의 재회
그곳에서 그들은 ‘운명의 재회’를 하게 된다. 이미 서울에서 거의 타인으로 만났었지만 거의 우연히 피난지 부산에서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을 잃은 젊은 유부남과 젊디 젊은 신참내기 미혼의 여기자는 여기서 서로 상대의 필요성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와 기혼자였다는 미안함은 있지만 그래도 적극적인 이진섭씨의 구애, 전쟁의 공포 등등이 그런 것들을 더 부축이지 않았을까? 특히 박기원씨는 그 당시의 이진섭씨에 대해서 깊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왜 나는 그 남자만 보면 비길 데 없는 쓰라림이 오는 것일까? 나는 항상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모든 일은 나하고 만나기 그 이전의 그의 인생이었고, 나는 상관도 동정도 하기 싫은 모두 그의 것인데…
나는 왜 그이만 보면 가슴앓이 같은 아픔이 오는 것일까? 그이는 너무나 지쳐 있었고, 그리고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그것은 그대로 그의 분위기, 그의 체취였는지도 모른다. (35쪽 본문 중에서)
나는 비록 남자이지만 남녀에 상관이 없이 ‘연민의 정’ 같은 것이 이해가 간다. 비록 연민이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의 다른 형태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심정의 박기원씨는 그때 이미 이진섭씨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소설 같은 논픽션
이렇게 아득한 옛날의 아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에 대한 글은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넘나드는 급박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돌변을 하기도 한다. 이런 서술방식은 자칫하면 평범한 전기(傳記)같은 인상을 덜 주고 흥미로운 소설적인 맛을 주어서 이 책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고, 내가 20년이 넘게 오랫동안 애독을 할 수 있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저자인 박기원여사는 문인인데다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어서 모든 지나간 사실들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진섭씨의 말투, 본인의 말투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것들도 정기적인 일기를 씀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들을 오래 동안 읽으면서 무의식 중에 내가 배우고 나의 것으로 만든 것 중에 이렇게 매일 삶의 생각을 글로 남기는 것도 포함이 되었다. 꼭 거창하게 ‘일기’까지 안 가더라도 무언가 내 삶의 행적을 짧은 글로 남기는 그런 것이다.
술의 낭만, 갈등과 문화
아깝지만 이진섭씨는 오랜 동안의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그 당시의 풍토는 사실 술과 담배를 못하면 남자로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그런 시대였다. 문제는 그러니까 그 정도에 달렸는데, 아마도 이진섭씨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술로 달랜 듯 하다. 그 괴롭던 시대를 사는 예술인들이 어찌 이런 생명수 같은 술을 피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여자한테서 질투를 느껴 본 적은 없지만 젊어서 술에 대해서는 질투를 했다. 술은 어떤 마력, 어떤 괴력이 있길래 저이를 저토록 사로잡고, 나에게 있어야 할 시간과 정신을 저토록 앗아 가는 것일까?
박기원여사는 아마도 술을 전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술의 맛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이진섭씨는 그것이 조금은 섭섭하고, 심지어는 못 마땅했는지 모른다.
한가지, 가가 나에게 유감스러워했던 것은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나는 전연 못했던 사실이다.
그럴 때 나는”하나님이 잘 조화를 이루어 주셨지, 나까지 술꾼이 돼서 부부가 같이 노상 술판을 벌이고 앉았으면 이 집은 어떻게 되겠우?”
“허허, 그렇게까지는 안되겠지만 적어도 글도 쓰고 술꾼 남편하고 살려면 술 맛 정도는 알아야 할 텐데…”
“걱정 말아요. 나는 마시지 않아도 당신 술 냄새만 맡고도 취한 것 같이 살아 왔으니까요. 술 안 마셔도 마신 것 같은 기분 속에 젖어 산다는 내 고역을 당신은 알아야 해요.”
“알구말구. 그러니까 내 마누라지”
위의 대화를 보면 두 분의 부부금슬은 정말 좋으신 듯하다 비록 술에 대한 불만은 있어도 몸을 생각해서 적당히 드시라는 부부사랑의 다른 표현일지도.. 그리고 핀잔을 받는 이진섭씨의 반응도 어찌 보면 참 유머러스 하지 않은가? 나는 그런 여유를 이 분들께서 배우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술에 대해서 아주 심각한 때도 있었다.
내 남편 되는 사람이 술에 취해 들어온다는 이 현실에 당혹감과 실망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로맨틱하고 다정한 눈이 뜨물처럼 흐려지고, 정신 없이 쓰러져 잠이 들었을 때, 나는 두렵고도 서러운 마음에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술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북어 국이 좋다는 말을 듣고, 어머님께 그 국 끓이는 법을 배워 아침상에 놓기도 했다. …. 남자하고 산다는 현실감에서 오는 놀라움, 그리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그이….. 그 모든 것이 놀랍고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십시일반(十匙一飯)
가슴에 남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결혼식장보다는 초상집에” 라는 소제목의 대목을 보면,
그이는 생전에도 남의 죽음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론이 있어, 결혼식장에는 잘 안 가도 초상집에는 빠지지 않고 가서 뒷일을 돌봐 주었다.
그것은 죽음같이 절대적이고도 엄격한 긍정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정성과 예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60세를 못 채우고 이진섭씨는 타계했지만 그런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죽음에 대한 생각은 담 달리 더 생각을 하며 사신 모양이다. 이런 대목을 사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통해서 읽어와서 내가 죽음을 그때 그때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점검을 하는 좋은 기회도 되었다. 특히 요즈음 들어 나의 “망자의 가시는 길”에 대한 생각도 이런 글들이 음양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사블랑카
피난지 부산에서 둘만이 결혼의 약속을 한 후 박기원씨 가족은 먼저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서 잠시 헤어지게 된다. 그 당시의 부산역에서 헤어지는 광경은 흡사 영화 카사블랑카를 연상시킨다.
그때였다. 역사(驛舍) 기둥 한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길고 큰 형체가 보였다. 그는 나와 있었다. 어제의 이별이 아쉬워 그이는 약속도 없이 나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고함이라도 치며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창 밖을 향해 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러나 그이는 창가까지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웃으며 손을 크게 한 번 흔들었다. 그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어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차가 떠나기 직전에 그이는 역사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허락 받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가족의 눈에 띄기 싫어한 그의 섬세하고도 단정한 마음이 나를 소리 없이 울게 했다.
육이오 동란 직후의 기억
이 부산역 이별의 광경은 그 당시, 그러니까 육이오 동란의 휴전이 되는 그런 시기를 기억하면서 더 실감이 난다. 비록 그때 나의 나이가 불과 5살도 채 안 되었지만 서울 원서동에서 뛰놀던 생각과 휴전 전후 서울의 풍경들이 아주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때 들은 이야기에 부산은 비도 많이 오고 불도 하루 건너 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우리 먼 친척도 그 당시 그 절망적인 시기에 결혼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서 나는 더 실감나게 이진섭, 박기원 부부의 연애, 결혼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언제나 책에 묘사된 그 당시 정경을 통해서 나의 ‘어린’ 생각과 기억을 같이 투시하곤 했다.
아버지중의 아버지
이 책을 통해서 이진섭씨의 흔히 알려진 불란서 풍의 섬세함과 학자 풍의 다재 다능한 면이 많이 들어난다. 그 당시 문인들의 풍조였는지도 모르지만 역시 이진섭씨는 이진섭씨만의 자란 배경과 전통적인 집안 내력을 풍기며 그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양반집안, 족벌의 의미가 거의 퇴색되어버린 일제시대.. 거기서 믿을 것이라곤 아마도 ‘우수한 머리’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진섭씨는 아주 앞서가는 ‘모범적인 아버지 상’을 남기며 사신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역사적 격동기를 비록 술로 삭히기는 했지만 가정을 ‘절대로’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완전히 성공을 했다는 사실.. 두고 두고 나의 가슴에 남아서 내가 배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곤 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이 책의 제목에는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이진섭” 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100%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비록 커다란 식구의 가장으로 경제적인 압박이 그렇게 커도 절대로 돈에 목을 메는 짓은 못하던 그런 면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어떻게 그렇게 멋과 돈의 균형을 잘 맞추며 살았을까? 그것은 이진섭 특유의 타고난 재주였는지도 모른다. 아주 잘 알려진 요절한 ‘천재시인’ 박인환님과의 인연도 그렇다. 그것은 이제 일화가 아니라 역사가 되었으니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술집 문화에서 출발한 이 박인환님의 즉흥시가, 이진섭씨의 즉흥 샹송에 접목이 되어 결국은 불후의 클래식이 된 것은 역시 길이 남을 한국 전후 문화사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동료 극작가 한운사 씨의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을 보면..
빈대떡 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시를 읊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진섭의 머리를 스치는 번개같은 인스프레이션(inspiration, 필자주) 그는 즉석에서 멜러디를 붙여 노래를 불렀다. 우뢰 같은 박수가 빈대떡집 지붕을 뒤흔들었다. 젊음과 낭만과 꿈과 산다는 것의 슬픔을 그가 타고난 재간으로 융합시킨 이 순간은 명동이 기억해둘 영원한 시간이다.
이 최인환 시, 이진섭 곡의 샹송풍의 노래는 곡이 만들어진 때보다 훨씬 뒤에 리코딩이 되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최양숙씨가 제일 먼저 리코딩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샹송 스타일에 제일 잘 맞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제일 먼저 들었던 것은 역시 박인희씨의 곡이 아니었을까.. 기억이 가물거린다.
여기서 어떻게 이 클래식이 출발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박기원씨의 표현을 통해서 짐작을 하면 이진섭씨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특별한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술 한 잔 들어가면 악보도 없는 자작곡에 바이브레이션을 넣어 피아노도 잘 쳤다. 애들과 우리만이 아는 ‘이 진섭 자작곡의 밤’이 수시로 열렸던 것이다. 싫어도 들어야 했는데, 애가 탔던 것은 그이는 술이 들어가면 시간을 초월해서 완전히 그 시간 속에 빠져 든다는 점이었다……
그이가, 시인 박 인환(朴寅煥)씨가 생존 시 명동 술집에서 낭만의 명동이 사라져 가는 것을 서러워하며 지은 시 <세월이 가면>에다 그 자리에서 작곡을 한 것은 지금도 아름다운 일화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나는데, 그날 밤 그이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내가 시집 올 때 갖고 온 어린이용 장난감 피아노에 키를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오선지에 채보까지 했던 것이 기억난다.
샹송 풍의 그 노래는 당시엔 어려워서인지 그리 알려지지 않더니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서서히 대학생들간에 유행이 되었고 몇몇 가수가 불러 레코드까지 나왔다……..
그의 영결식에서는…….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를 최초로 불렀던 최양숙(崔洋淑)씨가 그 노래를 다시 불러 그의 마지막 길을 장식해 주었다
Memorial Day Weekend, 또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슬그머니 바뀌어 비공식적인 여름의 시작인 Memorial Day 주말이 되었다. 하기야 이미 5월 중에 에어컨이 필요했던 여름의 맛을 보았으니까 별로 특별한 여름의 시작도 아니다. 우리 습관으로 하면 ‘현충일’ 정도나 될까? 그렇구나 까마득한 그 옛날에는 6월6일이 현충일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이곳과 비슷한 시기로 그런 날을 정했을까? 나의 어머님의 8주기 기일도 이맘때 쯤..그래서 더욱 기분이 그렇다. 참 괴로운 추억이 얽힌 이맘때, 어떻게 이런 날들을 보내야 할지.. 대부분 이곳에선 즐겁기까지는 못해도 가벼운 휴일의 기분을 숨기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즐기는 인상까지 받는다. 더운 여름을 알리는 듯 수영장들이 일제히 문을 열고, 가족 친지들은 모두 뒷마당에 모여 바베큐를 즐긴다. 그러면서 먼저간 구국영령들을 과연 얼마나 생각할까.. 조금은 웃기는 휴일인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자동차 (특별히 제작된 formula) 경주 Indianapolis Five Hundreds (Indy 500) 가 Indianapolis에서 이 주말에 열린다. 나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그렇게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사람은 다 다르니까. 하지만 여자 car racer는 참 흥미로움을 느낀다. 무슨 wonder woman같은 기분으로.. 지금은 아주 젊은 Danica Patrick이 대표적인 여자 racer지만 오래 전에 Janet Guthrie란 pioneer 여자 Indy 500 racer가 있었다. 나는 그 당시 그녀에게 너무나 ‘감명’을 받아서 딸을 나면 이름을 Janet이라고 짓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사실이 되었다. 요새는 여러 분야에superstar급의 여자들이 “수두룩 닥상” 인 세상이 되었지만 30년 전만 해도 Indy 500에서 여자가 자동차 경주를 한다는 것은 national sensation이었던 것이다.
Toward 250, 이번 5월 달에 나에게 신기록을 세울 기회가 바로 코앞에 왔다. 나의 블로그 monthly hit count가 250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에 현재까지의 기록은 230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것도 물론 아주 인위적인 숫자에 불과하지만 심리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 100, 200.. 등과 같이 250, 500, 1000 등은 더 큰 것이니까. 남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지만 나에게는 생각보다 자랑거리에 속한다. 나는 사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 보다는, 나를 한번이라도 알았던 사람들이 찾아 오는 것을 더 원하고 있다. 그것이 이 블로그를 만든 처음의 목적이었으니까. 그 다음은 나와 나이가 비슷한 ‘바보세대’들과의 대화의 광장인데, 조금씩 그것의 희망은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Oprah Winfrey, 오늘 뉴욕 타임스 기사에 이 여자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물론 며칠 전에 그 여자의 기록을 깨는 오래된 텔레비전 talk show가 끝난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고백을 하자면 나는 그 여자의 그 show를 한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사실, 왜 그것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는 아주 ‘종교적’으로 보는 시각도 생기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프라 교” 아니면 “윈프리 교” 라고나 할까…
이런 현상은 모든 것이 너무나 제약이 없고 막강한 TV의 위력 하에 있는 이곳, 미국에서나 가능할 듯 하다. 종교, 아니 사교같이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그 show에 나온 사람들의 일반적인 표정이나 행동을 보면 짐작이 간다. 나는 그런 것들이 아주 싫었다 거기다 완전히 상업적인 것까지 합치면 가히 ‘가관중의 가관’ 이라고 할까? ‘가난과 고통과 수치’를 거의 상업화시킨 것이 그렇게도 벼슬이라도 한 듯하게 느껴질까? 참.. 재미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The Beatitudes, A One-Day Retreat coming soon to Holy Family!
윗글의 제목은 이번 주 우리가 주일미사를 보는 미국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주보에서 본 기사의 제목이다. 일일 피정이 곧 열릴 예정이라는 말인데, 그 제목이 The Beatitudes.. 흠.. beatify, beatification등등의 말들은 최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에서 본 말들이라 그 뜻이 짐작이 된다. ‘복자로 만들다’, 복을 받게 하다 라는 뜻인데 여기의 the가 붙은 말은 분명히 어떤 특정한 ‘고유명사’라는 말이다. 역시 영어로 성경을 읽었으면 금새 알만한 말이었다.
마태복음 5장 처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의 그 유명한 ‘행복하여라’, 즉 참 행복 (다른 말로, 삶의 대헌장)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The Beatitudes란 단어를 몰랐던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그 여덟 가지 ‘참 행복’에 대한 산상수훈의 이야기를 어찌 잊으랴?
그 여덟 가지의 ‘참 행복’을 영어 성경 Jerusalem Bible 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The Beatitudes
How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the Kingdom of Heaven is theirs.
Blessed are the gentle: they shall have the earth as inheritance.
Blessed are those who mourn: they shall be comforted.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uprightness: they shall have their fill.
Blessed are the merciful, they shall have mercy shown them.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they shall see God.
Blessed are the peacemakers, they shall be recognized as children of God.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in the cause of uprightness, the Kingdom of Heaven is theirs.
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간행 성경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참 행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행복을 누릴 사람들, 세속적인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멋있게 보이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 치 않으시는 모양이다. 이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행복은,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받을 행복이다. 슬플 때, 위로를 받을 것을 알면 훨씬 그 슬픔이 가벼워진다.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것, 결국은 소리 없이, 점잔은 사람들이 더 성공을 할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뜻은 역시, 겸손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 ‘행복 대헌장’은 역시 무조건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아닐까?
surreal: after Joplin monster twister hits, May 22, 2011
오늘 뉴스를 잠깐 보니 Joplin, Mo. (미조리州, 자플린市) 란 글자가 보였다. 그것도 큰 글씨로.. Big news란 뜻이다. 또 다른monster twister가 그 지역을 강타,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커다란 지역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끔찍한 광경은 얼마 전 알라바마 주에 monster twister가 휩쓸었을 때와 비슷하다. 그때는 300명 이상이 사망했었다. 내가 사는 이곳 Atlanta지역은 최고로 더운 5월을 보내고 있다. 한 여름처럼 에어컨이 며칠째 계속 돌고 있는 것이다. 나의 기억에 이렇게 더운 5월은 별로 없었다. 지난 겨울에 그렇게 심한 추위로 극성을 부리더니.. 올해는 정말 정말 이상, 극단적인 기후를 계속 보이고 있다. 마치 지구가 고통으로 신음을 하듯, 불평을 하듯..
이번에 피해를 입은 Joplin은 나에게 추억에도 남는 그런 곳이라 더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1973년 성성모, 이승조씨와 Volkswagen Beetle을 타고 Oklahoma에서 New York으로 장거리 drive를 할 때 우리가 지난 곳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drive를 하던 Interstate-44가 이 Joplin의 남쪽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 때의 파란만장하던 여행의 이야기가 나의 일년 전 blog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더 이 town의 이름이 기억에 나는 것이 Joplin이란 이름이다. 그 당시 유명하던 여자 rock star중에 Janice Joplin이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나이에는 rock star의 이름 정도는 즐겁게 기억을 할 때였으니까…
stupid TV를 안 본지 일주일이 넘었을까? 그리고, 생각한다. 과연 인터넷이 전통적인 의미의 TV service를 점차 죽이고 있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나의 생전에 진정한 의미의 인류전체적으로 통신혁명이 일어나고, 그것이 빠른 속도로 진행 중임을 보게 된 것이 조금 흥미롭고, 편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Telstar – The Ventures
‘6백만 불의 사나이’, Telstar. 소련의 Sputnik에서 시작된 우주경쟁, 세계통신 혁명의 시발점도 되었다. 1962년 AT&T(Bell Lab)제작 6백만 불의 통신위성.. 이론적으로 전세계인구가 실시간 통신권 안에 들어섰다.
이렇게 빠른 pace로 바뀌어 나가면 10년 앞도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힘들 정도가 아닌가? 나의 ‘한창’ 시대, 그러니까 20~30년 전쯤엔 어땠을까? 기껏해야, 위성통신 덕분에 전세계로 전화나 TV service가 가능해지던 그런 시기였을 것이다. 기억에 Elvis Presley의 Hawaii 공연이 위성으로 전세계의 tv로 방영된 것이 그 당시에는 큰 뉴스였으니까.
보수와 절대가치의 아성인 가톨릭, 바티칸이 Facebook/Twitter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 정말 새로운 통신혁명의 깊이가 실감이 간다. 이제는 웬만한 tv program들이 Internet streaming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있다. 10+년 전쯤에 Scientific-Atlanta에서 일을 할 당시 convergence란 말이 유행했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것’들이 Internet service로 ‘통합’이 될 것이란 말이었다. 그것이 요새는 조금씩 실제로 느껴진다. 사실 telephone과 tv service만 Internet으로 흡수되어도 convergence는 거의 실현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나이 드신 옹고집 어르신들’ 이다. 물론 나의 세대를 포함한 말이다. 어떨 때는 현실을 피하고, 이것만은 옛 것이 좋다고 하는 그들이 Amish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 옹고집의 아성인 바티칸이 이렇게 현실을 전적으로 포용을 하는 마당에.. 제일 문제는 어중간한 ‘우리 세대’들이다. 옹고집 어르신 세대와 완전히 새로운 문화 속에서 자란 자식세대의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우리세대.. 이 새로운 문화에서 거의 ‘전맹’ 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닥상’이다. 더 세월이 흐르기 전에 조금은 노력을 하는 것이 바람 직 하지 않을까?
가끔 생각을 한다. 내가 살아온 기나긴 세월 중에서 제일 즐겁게 기억이 되는 한 해를 고르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물론 앞으로 그런 질문을 받을 기회는 사실상 없을 듯 하지만, 이 질문은 내가 나에게 하는 것이니까 상관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는 sixties 중에서도 1968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해는 국제적으로 미국주도의 월남전이 본격적으로 확전(擴戰, escalation)으로 치닫고 있었고, 동서냉전이 언제라도 핵전쟁으로 터질듯한 그런 완전한 미국,소련의 양극체제의 절정상태에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조국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양분되어 양쪽 ‘주인’의 제2차 대리 전쟁이라도 치를 듯 칼을 갈고 있었고… 북녘의 <민족반역자, 전범, 개XX!> 김일성은 4.19혁명 때의 절호의 기회를 잃은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나의 스무 살 생일이었던,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을 보내 박정희를 죽이려 했다.
이런 것들, 즐거운 기억들은 아니지만 그때의 나이가 딱 20세, 그 나이에 그런 것들의 ‘심각성’을 제대로나 알까? 철없고, 걱정 있어도 몇 시간 후에는 잊고, 모든 것이 솜사탕 구름처럼 느껴지는 그런 시절이 아니던가? 그 당시 과연 우리를 걱정이나 우울함에서 피난시켜주던 것들은 과연 무엇들이었을까?
유치하고, 순진하던 나이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사실 그렇게 큰 것들이 아니다. 아주 작고, 단순한 것들, 자연스러운 것들.. 그 중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것은 아마도 이성에 대한 ‘요상한’ 감정이 아닐까? 사람마다 다 그것을 처음 심각하게 느끼는 나이는 조금씩 다를 것이지만 나는 ’68이 바로 그런 해였다. 이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정, 그것은 흔한 말로 사랑이 아닐까.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를 알고 사귀게 되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은 이성을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최소한 우리가 겪었던 그 시절, 그때에는.
그 당시 이성을 포함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시절의 다방문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음악감상실, 다과점(빵집) 등도 있었지만 제일 손 쉬운 곳은 역시 다방이었다. 요새야 커피 맛을 따라 가겠지만 그때는 분위기 ‘맛’이 더 중요했다. 여러 세대별로 가는 곳들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그곳의 공통적인 서비스 중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휴식공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경험하게 되는 각종 ‘젊은 음악’들.. 그것이 사실 우리에게는 그 멋 모르던 시절의 생명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젊은’ 경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가 나에게는 1968년, 연세대 2학년 시절.. 그때 ‘일년’의 추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돌아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즐기고’ 싶은 심정, 그것이다. 나의 주위에서 맴돌던 친구들, 그 중에는 여자들도 있어서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반려자로써의 여자’ 같은 생각도 미리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학교 공부는 조금 시들해 졌지만 그렇게 큰 후회는 안 한다. 인생 공부로 보충을 했다고 위로를 하니까.
그 당시 다방이나, 음악감상실, 남녀클럽 등을 거치면서 열광하며 듣고 즐기던 주옥 같은 음악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듯 거의 미국의 60년대 반전, 반항세대의 음악들이다. Folk, Rock, Psychedelic, Soul.. 등등.. 나는 이런 곡들을 아직도 많이 듣는다. 이런 곡들을 통해서 그 시절을 생각하게 되어서 좋은데, 특히 우울할 때는 아주 특효약이 되었다. 그 시절 우리를 고민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주던 역할을 이 나이에 아직도 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나의 Best 5 of ’68 은….
Daydream Believer – The Monkees
60년대 중반부터 유명해진 그룹, The Monkees는 4명 모두들 독특하게 생긴 모습에다 아주 따라 부르기 쉬운 곡들이 주류인데, Believer 시리즈 2탄인 이 곡은 lead가 Dolentz에서 Jones로 바뀌어서 그런지 아주 느낌도 다르다. 우리가 들을 때는 69년에 더 유명해진 곡이었다. 특히 이 곡이 나올 무렵 VUNC(유엔방송)에서 pop song을 담당하고 있던 여자disk jockey가 이 곳을 무척 좋아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Delilah – Tom Jones
고향의 푸른 잔디(Green green grass..)로 미국의 hit chart를 석권한 영국인, Tom Jones의 hit 제2탄.. 이 곡은 사실 어린아이들로부터 나이 든 사람들까지 다 좋아하던 특별한 곡이었다. 아마도 그 주제가 성경의 Samson & Delilah에서 따온 것 같은 느낌을 주어서 그랬을까. 우리가 들었을 무렵에는 국내의 내노라 하는 가수들도 다투어 한국어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역시 ‘압권’은 조영남의 열창이 아니었을까?
Am I That Easy To Forget – Engelbert Humperdinck
미국의 country ‘Release Me‘, 와 더불어 크게 히트한 노래였다. Tom Jones와 쌍벽을 이루던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folk/rock/soul 같은 것들을 제치고 독특한 vocal로 그들의 genre를 굳세게 지켜서 이제는 거의 classic이 되었다. 그 당시 여자(친구)에게 ‘차였던’ 나의 심정을 구구절절 잘도 표현을 해서 이직도 기억에 남는다.
Hey Jude – The Beatles
그 많은 그들의 hit song중에서 이 곡은 나에게 a best에 속한다. extra long format도 그렇고, 그들, classic Beatles의 절정기에 부른, 4명만의 독특한 harmony, McCartney의 lead는 비교적 ‘둔탁한’ background instruments와 정말 잘 맞아떨어진다. 특히 stage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 Yesterday와 버금가는 예술성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곡을 시도한 국내가수는 그 당시 하나도 없었다.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Don’t Forget To Remember – The Bee Gees
forget-remember-don’t: 아주 oxymoron적인 제목이다. 이들은 사실 비틀즈와 쌍벽을 이루는 위치였지만 아주 스타일이 달랐다. 미국 blues/rock 영향을 상당히 받은 비틀즈와 달리 이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부드럽고, 목가적인 화음으로 일관을 했다. 그 중에서 이 곡과 First of May는 비슷한 느낌을 주어서 classic의 경지까지 느끼게 한다. Guitar로 따라 부르는 것이 비교적 쉬워서 그 당시 우리들의 기타 standard number였다. 하지만 70년대에 disco로 돌변을 한 그들의 모습에 실망.. 그 이후의 모습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다.
오늘아침, 코앞의 달력을 보니 오늘이 5월 16일이다. 무심코.. 아하.. 박정희의 오일육 군사혁명 기념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작년 사일구(4.19)가 50년이 되었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곧바로 그러면 올해의 오일육이 50년이 되는구나 하는 조금은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반세기란 기간의 느낌이 그렇지만, 50년이란 것이 사실 그렇게 긴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늙어가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인간 10진법의 문화에 울고 웃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다.
작년 4월 19일 나의 blog은 분명히 4.19, 사일구 학생혁명 50주년을 회상하면서 쓴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중앙중학교 1학년 때였고, 5.16은 그 다음해인 1961년,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날은 사일구 때와는 달리 아침부터 학교의 문을 아예 열지도 않았다. 사일구 때 최소한 등교를 한 후에 퇴교를 당했던 것에 비하면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일구 혁명은 4월 19일 낮에 그 열기가 절정에 달 했지만 오일육 혁명은 그날 새벽에 이미 일어난 상태였던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KBS가 유일한 라디오 방송이었을 것이고, 그 방송에서는 앵무새처럼 군사혁명 공약이 되풀이 되면서 방송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의 나이에 모든 것들이 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기억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고” 라는 혁명공약이었다. 물론 “국시”라는 말이 확실히 이해는 안 되었지만 “반공이 제일 중요하다” 라는 말로 들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의 반공국가였는데, 왜 이런 말을 제1의 혁명공약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학교 2학년 ‘어린아이’가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역시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못 가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며 우리들의 영웅, 산호의 라이파이를 보러 만화가게로 갈 수 있는 것만 생각해도 마음이 흥분 되었다. 국민감정을 의식해서였을까, 사일구 때의 계엄령과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운 계엄령 치하가 시작되었다 (최소한 아이들의 눈에는).
달력을 다시 보니 역시 5.16에는 아무런 ‘표시’가 안 보이고 그 이틀 뒤인 5.18에는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란 표시가 보인다. 그러니까 5.16 ‘군사혁명일’이란 것은 아예 기념일에서 조차 떨어진 모양이다. 호기심이 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언제부터 달력에서 5.16군사혁명 기념일이 없어지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들어갔을까. 역사는 흐른다. 절대로 멈춘 것이 아닌 것이다.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아하던 “진짜” 탱크가 시내 곳곳에 보였지만 이번에는 아주 평화스럽게 보였다. 처음에는 장도영이란 이름만 요란하게 들렸고 박정희란 이름은 아주 나중에야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우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회전체가 아주 ‘질서정연’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일구 이후에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는 데모대로 조용한 날이 없었기 때문일까. 비상계엄령 속에서 데모를 한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는 느낀다. 사일구 이후에 전체적으로 퍼지던 지나친 자유의 공기를. 심하게 말해서 방종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해도 법과 질서가 유지가 될까 할 정도였다. 그 예로 내가 다니던 중앙학교에도 지나친 자유의 표현으로 ‘교장선생, 물러가라’ 하는 데모가 있었다. 사일구의 독재정권 타도가 일반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변한 것이다. 그 당시 중앙학교(중, 고교)는 심형필 교장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수학자로서 아주 선비 풍의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에게 ‘비리’가 있다고 데모를 하고 물러가라고 학생들이 요구를 한 것이었다.
물론 나의 나이로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도 일반적인 시민의 자유는 많았다. 그래도 치안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일구 뒤에는 기본적인 치안에 문제가 보일 정도랄까.. 왜 그랬을까? 결국은 이승만 ‘부패정권’ 뒤에, 거의 통치력이 없는 과도정권에 공권력이 너무나 약했던 것이 아닐까?
5.16 혁명 직후 시청 앞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대회, 1961
제일 극에 달한 것은 사회적인 것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는 자세히 들 알려지지 않았지만 휴전선 너머의 김일성이 이것을 보고 얼마나 침을 흘렸을까 하는 것은 절대로 지나친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은 후세에 다 사실로 들어났다. 과도정권은 분명히 반공정권이었겠지만 극에 달한 자유의 표현은 결국 남북화해, 남북협상이란 말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현실적인 반공법 위반이었는데.. 휴전선의 포격사정권에 있던 수도를 가진 정권에게 이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었겠지만 일반 시민의 정서는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결국에는 학생들 조차, “가자 판문점으로!” 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조용해 졌다. 우리는 며칠 뒤 등교를 한 후에 긴급 혁명공약을 배우게 되었고, 일년 동안 만끽하던 ‘학원의 방종’을 되 돌려 주게 되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가, 그 동안 “스포츠 가리” 이발에서 완전히 “삭발”형으로 바뀐 것..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전통대로 머리를 다 중처럼 깎았다가, 사일구가 나면서 ‘자유’가 주어져서 스포츠머리로 바뀌었는데, 다시 원래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목격한 것이 중앙학교 구내에 하나 둘씩 들어섰던 ‘잡상인’들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들 들면, 이발소, 식당, 문방구 같은 것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큰 일자리가 없어졌겠지만 사실 이것은 잘 된 것 같았다. 학교 밖이면 몰라도 학원 내에 그런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느슨하던 극장의 학생입장도 아주 까다로워져서 웬만한 영화는 거의 다 ‘학생입장불가’가 되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던 깡패들도 줄줄이 잡혀 들어갔는데.. 조금 심했던 것은 일부 ‘정치깡패’들이 사형에 까지 처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대부분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오일육 군사혁명은 정권이 바뀌면서 해석도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짐을 안다. 군사혁명 10년 뒤인 1971년에는 거의 영구집권체제인 유신정권으로 바뀌고, 그 8년 후인 1979년에는 박정희도 부하에 의해서 사망을 한다. 속담에 “때는 때대로 간다” 라는 말로 그의 공과를 한마디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할까? 한때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그가 싫기도 했다. 나는 기껏해야 김신조 사건 이후에 대학에 생긴 교련에 대한 반대데모와 3선개헌 반대데모로 학창생활이 끝났지만 아내 연숙은 70년대의 유신체제를 반대한 거센 ‘운동권’에 끼어들게 되어서 모든 현장을 목격까지 했고, 경찰과 정보부의 감시 속에서 살았던 때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결혼 후에 나는 사실 고개를 못 들고 살았다. 데모만 나면 나는 ‘신나는’ 등산을 즐겼는데 반해서 연숙은 모든 것 잊고 최루탄 연기를 맞으며 살았던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 운동권 출신들이 줄줄이 현재 모든 정권의 요직에 있다. 심지어 일부는 거의 ‘빨갱이’ 흉내를 낼 정도가 되었다. 오일육에 대한 해석도 극과 극을 치닫고 있다. 그들이 항상 거의 의도적으로 언급을 안 하는 것은 그 동안 그들이 그렇게 동정하던 ‘북녘’ 정권이 어떻게 그들의 ‘인민’들을 통치해 왔던가 하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반대파 탄압을 언급하려면 조금은 그것도 언급하면 조금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먹고 입기 전에는 의미 있는 민주주의를 뒤로 미루겠다는 말은,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또한 반대로 박정희를 거의 ‘영웅시’하는 극우파들.. 그들이 사실 박정희의 진정한 의도와 업적에 먹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혁명 성공 후, 시청앞에서 육사생들의 사열을 받는 박정희 소장과 차지철 공수부대장
이 검은안경 사진은 후세에 남는 오일육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신문으로 보는 오일육 쿠데타 모습들
50년 전의 신문으로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 조금 감당키 어려운 감정의 복받침과 싸우기도 했다. 글과 사진들.. 확실히 이것은 이제 역사가 되었고, 교과서에서 다시 배울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 신문들을 다시 보며 뚜렷하게 느끼는 것, 당시의 신문들.. 정말 중학교 2학년 생의 한자 실력으로는 읽고 이해하기에 역부족, 그러니까 거의 문맹에 가까울 정도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여기 나온 신문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한자가 섞여 있는가? 또한 한글조차 50년을 거치며 맞춤법이 많이 변했음을 절감하고, 언어의 변천에 50년은 그렇게 짧은 세월이 아니라는 것도 느낀다. 하지만 그것 보다 사진을 보며 더 깊은 생각을 한다. 50년 세월 동안 내가 기억한 모습들은 너무나 현재에 적응이 되었는지, 그 당시의 모습들.. 너무나 꾀죄죄하고, 볼품들이 없다. 물론 그 당시의 유행과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조금 이해는 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당시 신문의 사진기술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잡한 사진 조판에다가, 50년이 지난 신문지.. 그것이 ‘생생하게’ 보일 리가 만무하니까.
오일육 석간지는 유동적인 사태로 군 검열을 받지 않았다.
의외로 평온한 전국 주요 도시의 분위기
오일육 낮, 어리둥절한 시민들과 군인들, 세종로,시청 근처
그 당시 모습, 사실 이 사진보다 훨씬 더 깨끗했다
쿠데타 직후 육사생들의 지지 궐기는 혁명성공의 촉진제였다
시청앞에서 혁명지지 궐기대회, 혁명의 얼굴, 장도영 중장과 육사생들
계엄령하에서 언론에 대한 군 검열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사실상 쿠데타 주역 박정희 소장, 장도영 중장과 기자회견에서
그 당시의 사회정서를 한눈에 보려면 영화광고를 보면 간단하다. 유행과 더불어 그 당시 최고 인기배우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서부영화와 대형 종교영화가 판을 치던 그 시절, 한국의 영화풍토는 지금 수준에서 보면 정말 아이들 장난과도 같았다. 한마디로 유치하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매력이었다. 여기의 영화광고를 보면서 손쉽게, 구봉서, 최은희, 신영균, 김진규, 허장강, 김희갑, 김혜정 등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당시 그들이야말로 국민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죽음.. 죽음이란.. 사람의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오늘 하루 종일, 생각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사실은 근래(10여 년?)에 들어서 평소 때에도 죽음을 잊고 산 적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특히 나이 60이 넘어서면서 더 잦아졌다.이것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조금 흥미로운 것은, 죽음을 항상 생각하며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덜 죽음에 대한 걱정을 하다는 사실이다.
오늘 나에게 특별히 하루 종일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 이유는 갑자기 계획에도 없이 참석하게 된 장례미사 때문이었다. 오늘의 장례미사는 정 요한씨를 위해서 바쳐졌는데, 이분은 지난 주 내내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선종기도’를 바치던 그 분이었다. 이 분이 어제 선종을 하셔서, 어제 저녁 곧바로 연도가 바쳐졌고 오늘 오전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안정호 신부님의 집전으로 장례미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몇 개월 전, 레지오(마리애)에 들어오면서 내가 달라진 것 중에 제일 큰 것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시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였다. 전에는 가급적 장례식 같은 것을 모른 척하려 했고, 피했고, 잊고자 했었다. 그것이 지금과 같이 비교적 ‘고립된’ 삶이 가능한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에서는 크게 힘들지 않다. 고국에서 살았으면 그렇게 살다가는 아마도 사람취급도 못 받을 듯하다. 이제는 아니다. 적극적으로 ‘망자의 행사’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그만큼 예전과 같이 무섭지 않은 것이다.
특히 가톨릭적인 ‘연도’는 나를 아주 평화스럽게 만든다. 레지오 회합 참석 후에 자주 연도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생소하던 것이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서, 조금 더 고인에 대해 생각을 할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장례식에서 가끔 하는 viewing(시신을 직접 보는 것)같은 것은 너무나 visual해서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오늘 장례미사는 비교적 조문객이 많지는 않았다. 사실 오늘 우리가 그곳에 가게 된 큰 이유중의 하나가, 미리 조문객이 많지 않으리라는 귀 띰 때문이었다. 조금 이해가 가는 것은 이 고인의 가족이 현재 아무런 신앙적인 곳에 소속이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민사회에서 신앙단체의 제일 큰 역할중의 하나가, 그들에게 교민간의 친교나 사회생활의 촉매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동창회나 사업에 관련된 단체들 밖에는 없다.
장례미사 안내문을 보고 이분이 1948년생이라는 것을 알고 반가웠다. 그래서 더 친근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우리 동갑이 먼저 나보다 저 세상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니 참 심정이 착잡하였다. 63세라면 지금 세상에서는 ‘젊다고’도 말할 정도다. 신부님도 그 점을 상기시키셨다. 하지만 언제 죽는다는 것을 어느 누가 알랴? 우리도 모르게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돌려 드린다는 신앙의 신비를 인정하면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장지까지 가게 될 줄도 몰랐지만, 무언가에 끌려서 그곳까지 갔다. 그런데 가기를 참 잘한 것 같다. 유족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위로를 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모든 행사가 끝난 후에 점심을 같이 하는 곳까지 가게 되었다. Buford Hwy의 한인타운의 중심에 있는 ‘한일관’에서 모였는데.. 이곳에서 조그만 해프닝이 벌어졌다. 식당엘 들어가려는데 아주 오랜만에 중앙고 새카만 후배 ‘선우인호’가 보여서 이 친구도 우리 장례에 관련되어 왔으리라 생각하고 무심코 그들 일행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선우인호 후배가 속한 개신교회의 다른 장례식의 뒤풀이를 하려고 모인 것이었다. 잘못했으면 다른 고인을 위한 자리에서 식사를 할 뻔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게 거의 하루 반나절을 동갑내기 고인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 보내고 나니 참 기분이 가벼웠다. 나도 이렇게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니 나 자신이 조금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 것이다. 가톨릭 신앙적으로도 고인은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한다. 그들이 저 세상에서 더 편히 쉬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비록 고인은 선종 얼마 전에 가톨릭으로 입교를 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남아있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하느님을 알게’하는 커다란 선물이 될지 누가 알랴?
얼마 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레지오 회합이 끝난 후에 연도가 있었는데, 그곳 가족의 대표 중에 평창이씨, 이만수씨가 있었다. 2002년 5월 이맘때쯤 마지막으로 보고 처음인 것이다. 그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만수씨 아버님, 이주황 선생님께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장례미사를 했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이번도 비슷한 연도, 하지만 이번은 만수씨의 장인어른의 연도였다.
이만수씨 가족은 우리가 1989년 아틀란타로 이사를 오면서 만난 첫 ‘가정’중의 하나다. 이것도 인연일까. 지난번에 위스컨신주의 매디슨에 살 당시를 회고하는 글을 썼을 때, 그곳에서 나는 강정열 박사님 댁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는데, 이만수씨네 가족은 강정열 박사님의 사모님의 남동생 되시는 이주황 선생님의 가족인 것이다.
이만수씨는 이주황 선생님의 장남이었고 그 집은 나와 같은 평창이씨 가족이었다. 매디슨과 평창이씨의 인연으로 사실 우리는 만수씨네를 우리 가족같이 느끼게 되었다. 2남 1녀의 단란한 평창이씨 가정.. 그런데다 우리와 같은 천주교 집안이었다. 비록 가장이신 이주황 선생님은 성당에 가끔 나오셨지만 가족들이 가는 것은 마다 않으셨다. 한양대학교에서 근무를 하시다 이민을 오셨다고 했는데 과거의 이력을 다 잊으시고 세탁소를 열심히 운영하시면서 가정을 이끄셨는데, 2002년 5월에 비교적 젊으신 연세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장남, 이만수씨, 그 당시는 나와 상당한 나이차이 때문에 반말을 썼지만 이번에 다시 만날 때는 그럴 수는 없었다. 그도 이제는 어엿한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덩치가 상당히 크고 아이스하키를 거의 pro처럼 하던 그가 1994년 그가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면서부터 서로 오가는 것이 끊어져 버렸다. 우리도, 그도 서로가 자연스럽게 잊고 살게 된 셈이다.
결혼 전에는 computer분야에 상당히 관심을 보여서 DeVry Tech에서 computer technology로 학위를 받기도 했는데 사실은 생각처럼 적성에 맞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예상에, technology 쪽으로 직장을 잡을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의외로 완전히 retail business쪽을 투신을 한 것이다. 비록 거기서도 computer를 쓰긴 했겠지만 조금은 기대 밖이었다. 나중에 만수씨 어머님을 성당에서 가끔 뵈었는데, 소식에 business가 상당히 큰 규모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연도 후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 모여서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와 오랜 회포를 풀었다. 서로 무슨 time machine을 탔던 기분까지 들었다. 만수씨는 별로 안 변했지만 나는 그가 보기에 무척 변했으리라.. 나를 알아본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20대에서 40대로, 나는 40대에서 60대로 변했으니.. 그 변화는 짐작이 되지 않는가? 그래도 만수씨는 옛날 나를 형님처럼 따르던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며 다정하게 나를 대해 주었다.
이제는 서로의 소식을 알았으니 가끔은 연락을 하며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고, 궁금한 것 중의 하나.. 만수씨 가족이 평창이씨 무슨 파인지.. 그것이다. 혹시 나와 같은 익평공파가 아닐까.. 희망이지만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그 때 들었던 사실 중에 우리 본당의 성가대장이 또 평창이씨 라는 소식도 있었다. 그 후에 조금 알아보니 40대의 남자라고 들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더 알아보고 싶고, 이런 식으로 종친들이 많이 보이면 모임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상상의 나래도 펴 본다.
얼마 전에 비교적 최근 (2010년 12월)O’REILLY에서 출판된 ZigBee network에 대한 이 책을 샀다. 저자는 이 방면에서 요새 많이 알려진 New York University의 Robert Faludi 교수인데, 제목을 보면 분명히 embedded systems에 대한 것이고 조금 더 살펴보면 embedded systems engineer보다는 hobbyist를 독자로 겨냥을 한 듯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serious하게 embedded system을 ‘만진’ 것은 거의 10년이 넘었다. 나는 거의 한평생을 computer engineer로 일을 했지만 여기서의 computer란 것이 사실은 embedded system이 거의 전부였다. 첫 직장이 Columbus, Ohio에서 Dynamic Telecom Systems(DTS) 이란 start-up company였는데 그곳은 그 당시 AT&T의 시장독점이 끝이 나면서 새로 생긴 경쟁업체, MCI란 회사에 납품을 하던 automatic telephone dialer를 만들던 회사였다. 나는 그때부터 직장생활이 끝나는 날 까지 micro-controller based ’embedded systems’을 design, 처음에는 거의 hardware에서 나중에는 거의 software를 design하며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business software나 Internet programming과는 달리 이런 것들은 집에서 혼자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를 않았다. 우선 최소한의 systems laboratory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상당하니 투자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embedded system을 떠나게 되었고 거의 모든 일들이 Internet, network PC쪽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의 마지막 직장이었던 Rockwell Automaton에서 industrial PC를 design했던 것으로, 비교적 standard, generic system에 대한 경험을 얻게 된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open hardware platform인 Arduino란 tiny system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가격이 아주 좋아서 구입을 하게 되었다. 참, 세상이 많이 좋아진 것이 거의 모든 것이 open system쪽으로 (Linux 덕분에) 변해서 정말 모든 것들이 거의 free가 되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구세주 같은 세상이 된 것이다. 거기에 wireless까지 합세를 해서 정말 smart, remote, connected system을 아주 저렴한 값에 design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여기서 wireless쪽은 ZigBee란 것이 아주 promising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consumer에게 잘 알려진 WiFi와는 비교를 할 수 있지만 그 용도가 아주 다르다. 주로 physical, environmental sensors와 controller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WiFi같은 Internet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그래서 더 재미가 있지 않은가? 한번 ‘속는 셈’치고 오늘 이 책에서 언급된 hardware parts들을 order하였다. 처음 사는 것들이라 조금 투자를 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현재 구상하고 있는 것은 현재 집에 설치된 power-line based X-10 network을 모두 ZigBee-based network으로 바꾸려는 것인데.. 아마도 시간이 꽤 걸릴 듯 하지만, 이 과정에서 ZigBee와 Arduino system의 확실한 경험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을 해 본다.
First of May, my friends’ forever day 다음날 아침, 조금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 올 들어 웬 놈의 찐한 뉴스들이 쏟아지는 것일까? 며칠 전부터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에 대한 뉴스가 온통 나의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었는데 오늘은 난데없이 이 개** Bin Laden이 모든 뉴스를 장식하고 있으니.. 죽어서도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나의 바램은 그저 이런 **는 소리 없이 사라지면 하는 것이었다. 뉴스의 한 점도 장식할 값어치도 없는 개만도 못한 **니까..
사실 교황 시복식을 전후해서 은총이 충만한 계절임을 느끼려고 노력을 하고, 그 만큼 마음도 가벼워지고,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어제의 시복식 후에 이어지는 감사미사까지 아무 ‘잡음과 혼란’이 없이 무사히 정말 멋있는 시복식의 말미를 장식하길 바랬다. 그것이 역시.. 이 개**가 죽으면서 까지 방해를 하나.
교황 시복식에 백오십만 명의 순례 객이 찾았다고 한다. 2005년 4월 교황 서거 이후 최대의 순례 객이라고 한다. 나는 인터넷의 CatholicTV.com에서 시복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정말 엄숙하면서도 축제분위기의 그 곳 광경을 보면서.. 처음으로 나도 저런 곳에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시복식을 가능케 한 프랑스 출신의 Marie Simon Pierre 수녀님도 close-up해서 잘 보여주었다. 우리 본당 레지오 단원 요안나 자매님께 지난 주일에 교황님께 부지런히 화살기도를, 그것도 ‘빛의 신비‘를 중점으로 하시라고 권해 드렸다. 프랑스 수녀님의 경험담을 듣고 그랬는데.. 누가 알까? 이 자매님은 비록 Parkinson’s disease가 아니고 다른 병이지만 교황님의 ‘전구 은총’에 나도 기대보려는 의도였다.
5월은 점점 내가 좋아하는 달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큰 원인은 기후적으로도 그렇지만 제일 큰 이유는 ‘성모성월’이기 때문이다. 세속적으로도 가정 중심, 어버이, 어린이 날 등이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싱그러운 달이다. 시작이 Bee Gee’s First of May로 시작이 되고, 하느님 자비의 날로 천주 교회력도 시작된다. 불교의 석가 탄신 일도 있지만 이것은 내가 고국을 떠난 아주 후에 생겨서 별로 추억이 없어서 별 기분을 느낄 수가 없다. 본격적인 여름으로 가는 때, 정말 멋진 달이다. 돌아가신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을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좋은 한달..
무섭다.. 정말 무섭다.. 이것은 정말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1990년대의 영화, Bill Paxton, Helen Hunt주연의 Twister를 보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이것은 영화가 아니고 ‘진짜’ 인 것이었다. 그것도 우리가 사는 Atlanta Metro area를 남과 북으로 비켜 지난, 정말 아슬아슬한 thrill & suspense였다. 이것이 ‘만약에, 만약에’ 이곳을 지나갔다면, 아마도 2005년의 mega disaster hurricane Katrina와 맞먹는 피해를 냈을 것이다. 그날 밤은 정말 ‘으시시한’ 열기가 하늘에 가득 차 있었다. 그 밤중에 기온이 80도를 훨씬 넘었으니까..
지난 수요일, 4월 27일 오후부터 Mississippi에서 시작된 이 mega tornadoes는 Alabama에서 절정에 달했고 사망자만 330명에 달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을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힘’이 EF-5, 그러니까 최고의 파괴력을 가진 것이어서, 200mph(시속 200마일)를 넘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은 사실상 커다란 집들이 기초부터 깨끗이 ‘날라갈’ 정도였다.
미국에 오래 살면서 이정도 파괴력의 tornado는 본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집안의 안전한 곳에 ‘숨어’있어도 살아 남기가 힘들 정도가 아닌가? 이러면 조금 겁이 안 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의 classic fantasy movie, the Wizard of Oz..의 Kansas에서 Dorothy의 집이 통째로 날라가는 것을 상상하면 될 정도다.
제일 피해가 심한 곳이 그 유명한 football powerhouse Crimson Tide의 주인공인 University of Alabama가 있는 campus town, Tuscaloosa였다. 다행히 대학자체는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지만, football stadium이 완전히 makeshift recovery staging area로 변한 것을 보면 이것도 무슨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이것을 보면서 ‘왜, 왜..’라는 질문이 안 나올 수 없다. 물론 통계적으로 보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심한 것이 아닌가? 이것도 extreme weather pattern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모든 것들이 extreme으로 갈까? TV show를 보아도 모든 것들이extreme 인 것들이다. 사람들이 이제는 웬만한 것들에는 ‘자극’을 못 느끼나? Mother Nature가 조금씩 ‘불평’을 하는 것일까.. 생각이 착잡해지고, 이제부터 tornado 경보가 나오면 재산피해보다는 ‘생명의 안전’을 더 생각해야 할 듯하다.
What did they do with this reliable ‘old’ wordpress.com stat? Months ago, it simply stopped working, then behaved weird a few days. I already had accumulated a year’s worth stat by then, but it now looked so strange. A few googling revealed the ‘old’ style wordpress.com stat server, which apparently runs by AUTOMATTIC (the wordpress company) was upgrading the whole thing. Well, no complaint for this, that’s theirs anyway, but for me it was frustrating anyway.
Then, boom! Jetpack? Wow.. the old venerable ‘stat’ is now bundled with many other junks! No choice but to have to install the ‘bloated’ stat to keep my old year’s worth stat. Now the fun part here. Yesterday, I accidentally ‘deactivated’ Jetpack (100% accident), so it was immediately reactivated. How stupid the Jetpack was..it never bother to ask ‘you might lose the whole previous stat’ part. Amazing, after reactivation, I have a 100% clean history, it has reset my year’s worth history clean! Who has come up with this stupid ‘design’ anyway?
결국은 부활주일이 되었다. 올해는 사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부활절까지의 40일, 사순절 (Lent)이 조금 길게 느껴졌다. 왜 그랬을까? 짧게 느껴졌다면 아주 착실히 바쁘게 40일을 보냈을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이 아닌 것을 보니 조금 게으르게 보낸 것이 아닐까. 2008년의 사순절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전해부터 시작된 묵주기도의 덕분일까.. 그 해의 사순절은 정말 보람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 불필요한 TV보기 등을 자제하고,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과 바오로 서간문을 열심히 읽고, keyboarding으로 copy를 하기도 했다. 그 해부터 처음으로 성주간 4일의 미사를 빠지지 않고 갔었다. 그것에 비하면 올해는 아무래도.. 하지만 이번에는 레지오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 나를 안심시킨다. 비록 아직 협조,활동단원을 한 명도 이끌어 들이지는 못했지만.. 같은 구역의 ‘미영이 아빠’를 현재 계속 권면 중이라서 조금 기대를 걸어 보기도 한다.
부활주일이 시작되면서 이제는 온통 나의 관심이 5월 1일 자비의 주일(Mercy Sunday)에 이루어 질 우리의 희망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의 시복식(beatification)으로 쏠린다. 현재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중의 하나가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이시다. 역사적인 인물로도 그렇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존경의 차원을 넘는다. 우리 천주교의 자랑이고, 천주교 ‘중흥’을 이룩하신 거룩한 ‘예수님 제자의 후예’이시다. 하지만, 완전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옥의 티라고 한다면 오늘 NPR news에서도 보여 주듯이, 일부 ‘악마가 씌운’ 신부들의 어처구니 없는 ‘성추행’.. 을 조직적으로 뿌리를 뽑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천주교의 ‘비밀’스러운 관행 때문에 쉽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것 이외에는 정말 오류가 없다. 하느님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오류가 없을 수 있으랴. 특기할 사실은 지금 교황께서 거의 ‘오해를 살 가능성까지 감수하면서’ 초특급으로 이것(시복)을 밀어 부친다는 사실이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말 고맙고, 현명한 처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은 이곳에서는 Good Friday, 그러니까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다. 어제부터 시작된 예수님 부활절로 향하는 성3일 중 가장 절정을 이루는 날일 것이다. 가장 어두운 날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날이 있기에 부활이 있고, 따라서 기독교가 있는 것이므로 그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의 만찬이 주제를 이루고, 미사에서는 신부님들이 12명의 신자들의 발을 씻는 의식을 한다. 오늘은 모든 신자들이 십자가 경배 (주로 십자가에 손을 대거나 입을 맞추는)가 주요 의식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3일 미사를 가게 된 것이 몇 년이나 되었을까.. 사실, 불과 몇 년밖에 안 된다. 예전에는 부활절 미사만 갔었다. 이것은 사실 큰 ‘발전’이다. 부활절을 이렇게 ‘준비’하는 것은 정말 많은 이 날에 많은 의미를 주는 것이니까. 특히 얼마 전에 시작된 레지오 활동으로 나에게 부활절의 의미는 더 커지게 되었다. 이제는 조금 더 예수님의 passion(수난)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고 할까.. 예전에는 사실 먼 옛날의 ‘사건’ 정도, 아니면 나와는 너무나 먼 ‘끔찍한’ 이야기 정도로 느끼고 살았다. 이제는 조금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꼭 부르는 성가 “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 란 곡.. 오늘 밤, 십자가 경배 중에 기타에 맞추어 불리던 그 곡, 어쩌면 그렇게 예수의 수난을 잘 그려냈을까..
어제는 <<Legio Tuesday>>로 정기 레지오 회합에 참석차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엘 다녀왔는데, 그때 연숙이 조그만, 아주 조그만 pamphlet을 그곳에서 가지고 와서 나에게도 주었다. format이 아마도 선교용으로 만들어진 듯 했다. 우리에게 친근한 모습, 고 김수환 추기경의 짧은 글이 실려있었는데 제목이 ‘행복’이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을 너무나 쉽게 풀어 주셨다. 사랑과 긍정..이것이 잠시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향하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초대라는 말.. 요새의 세속적인 행복은 주로 건강, 지위, 명예 같은 것이고, 그것은 특히 돈으로 더 가능하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짧아도 짜릿한” 행복을 맛보려는 사람들 투성이다. 생각을 해 보면 그것들은 너무나 짧고, 그 뒤의 허탈감은 사실 불행의 시작일 수 있다는 사실들을 모를까? 나는 그것보다는 지금 앞에 보이지 않아도 먼 후일에 있는 ‘영원한 행복’을 더 기다린다. 오늘부터 예수수난과 부활의 시작인 성삼일, 특히 오늘 저녁은 최후의 만찬, 세족례(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기념하는)로 이루어 지는 성 목요일 미사가 시작이 된다. 부활을 향한 3일간의 첫날인 것이다.
행복
추기경 김수환
행복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일상생활부터 생각 해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얼마 전에 신정과 구정을 지내며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를 전했습니다.
우리 문화권에 ‘복’은 ‘건강하고 무병장수 하는 것’ 이라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바라는 모든 것이 성취되길 기원해주고 축복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에도 그것이 참된 의미의 ‘행복’이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성북동의 한 음식점에 걸려있는 족자에는 아홉 개의 ‘ㅁ’자가 써있었습니다.
‘사람아, 사람아, 사람! 사람이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다! 라는 의미를 지닌 족자였습니다.
아무리 인물이 잘나고, 건강도 좋으며, 돈이 있고, 높은 직위에 있다 할지라도, 만일 그 사람이 그 삶에 있어서 ‘인간’ 답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 삶을 ‘사람답다.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비록 좋은 건강, 많은 돈, 높은 직위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참으로 인간으로서 인간답다면 ‘참사람이다!’ 라고 볼 것입니다.
이달 첫 주에 나온 주간지 뉴스메이커에 ‘행복하게 나이 먹기’ 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커버스토리에 실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늙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돈이 노후에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우리 가운데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버드대학 성인발달 연구소에서 820명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80년 이상의 발달 과정을 분석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성공적인 노화의 열쇠는 금전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관리와 사랑하는 것이고, 신체적 요인들보다도 더 건강을 보장하는 것은 성숙한 [방어기제] 였다고 합니다.
[방어기제]란 불쾌한 상황에 부딪혀도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화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지난해 1월, 대구에 있는 성 베네딕트 수녀원에서 6.25 동란 동안 인민군에게 끌려가 많은 고생을 한 후 풀려나 다시 한국에 와 사시는 독일인 수녀님 두 분의 생환 50주년 축하식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분들은 자신들의 전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그 당시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을 잃고도 하느님 말씀대로 서로를 사랑하고, 심지어 자신들을 박해하는 공산당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기에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행복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은 인간 세상에서 간주되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현세는 현세의 잣대로 행복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관점으로 인간과 인생을 보기에 행복에 대한 관점이 다릅니다.
인간 존엄성과 관련하여 성경말씀을 요약해 본다면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창조의 정점에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당신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참으로 마음에 드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극진한 사랑으로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특히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기까지” (요한 3,16)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영구적이고 절대적이며 극진하십니다.
인생과 그 미래는 하느님으로부터 당신과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며 원대합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가장 존귀하고 숭고한 이유가 있습니다. 존엄한 인간에게 [참 행복]이란 [영원하신 하느님과 하나]되는 데 있습니다.
결국은 현재 이승에서부터 [그 분 안에 살 때], [그분의 사랑 안에 살 때], 그때 우리는 [참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곳에 우리가 찾는 참된 행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쓰고 싶었다. 더 미룰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망각의 세계로 굴러 떨어지기 전에 나는 서형(서충일씨, Choong Suh)과의 추억을 이렇게라도 남겨야 한다. 비록 아주 오래 전, 기간으로 따지면 3년도 안 되고, 그 3년도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잠깐 같이 살았던 정도였지만 그 당시 서로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주 길이 남는 추억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서형께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해서 사죄하고 싶기도 하다.
머리 속에서 간신히 견디고 있는 가물거리는 기억 이외에 남아있는 것은 Kodak Instamatic 110 camera로 찍은 색갈이 바랜 서형의 사진 한 장..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글을 쓰려면 사진 한 장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기억을 그것도 자세히 생각해 내야 한다.
내가 서형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일까? 나는 기억력이 남보다 좋은 편이다. 하지만 서형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 처음 봤을 때 인상이 어땠는지.. 그것이 기억에 확실치 않은 것이다. 이 사실이 오랫동안 나를 조금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대강은 안다. 처음 보게 된 것이 1975년 가을쯤이 아니었을까? 시카고 lake side 쪽의 Broadway에 있는 허름한 working class 벽돌 아파트였나..
그 전해, 1974년 말부터 나는 그 당시 시카고 한국일보지사의 기자였던 고려대 출신 임송백 씨와 roommate로 그 Broadway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 아파트의 문과 마주보는 방에 서형이 혼자 살고 있었다. 그 당시에 어떤 한국사람이 거기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인사를 하거나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아파트에 다른 한국사람, 이기홍(다른 이름은 이창엽씨)이란 분이 잠깐 같이 살았는데 그 분이 서형과 알고 지내기 시작하면서 우리와 인사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75년 말에 임송백씨의 가족이 한국에서 올 때에 헤어지게 되면서 나는 바로 문 마주편의 서형의 아파트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의 자세한 과정은 정말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1976년 초부터 나는 거의 2년간의 시카고 생활을 청산하고 West Virginia Tech으로 학교를 transfer를 하게 되었지만 방학 때마다 서형의 아파트를 나의 고향 집처럼 여기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명실상부한 나의 제2의 고향 집이 된 것이다. 1976년 여름, 겨울방학, 1977년 여름, 겨울방학.. 이렇게 4번의 방학을 서형과 같이 지낸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서형과의 추억은 바로 그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1977년 12월부터 나는 완전히 시카고를 떠나서 Columbus, Ohio로 가게 되었고 사실 서형과는 그때 완전히 헤어지게 된다.
서형은 나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지만나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썼다. 비록 그것이 조금은 거리감을 느끼게도 했지만 나는 그런 깔끔한 성격이 좋았다. 한마디로 예의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키는 나와 거의 비슷했지만, 겉으로 잘 안 보이는 팔 다리의 근육이 대단해서 무슨 물건을 만져도 그 힘이 대단했다. 가끔 무거운 것을 옮기거나 할 때는 나를 막내 동생처럼 생각하듯 자기가 다 힘을 쓰곤 했다. 자랄 때, 부산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누누이 들었고, 필라델피아에 친형님 가족이 사신다고 했는데 형수님과 별로 잘 맞지를 않아서 무작정 시카고로 왔다고 했다. 한번도 대학 때의 이야기를 듣지를 못했지만 영어를 기기 막히게 잘했다. 그것은 절대로 엉터리 broken English가 아니고, 문법이 정확한 good English였다. 그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묘하게 생긴 truck을 타고 다녔고, 정식 job은 개인 taxi driver였다. 그러니까 택시기사인 것이다. 운전을 하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가끔 얻어듣곤 했는데, 서형은 아주 모범적이고, 정직한, customer를 첫째로, 절대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택시비가 모자라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손님을 먼저 생각해서 도와주고,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것을 보고 참 나의 마음도 흐뭇해지곤 했다.
내가 방학 때마다 와서 지냈으므로 나야 낮에 시간이 많았지만 서형은 주로 밤에 택시를 몰고 낮에는 자는 편이라 어울린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 비교적 짧은 시간을 같이 보낸 추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했다. 비록 자란 환경은 전혀 달랐지만 비슷한 나이가 서로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식사도 같이 하고, 특히 노래의 취향이 많이 비슷해서 참 많이도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즐겼다. 서형은 부산에서 어렸을 때 많이 본 영화들에 대한 추억이 많았다. 특히50년대 최고스타 최무룡이 부른 영화주제곡 <외 나무 다리>와 <꿈은 사라지고>, 왕년의 액션스타 황해 주연의 영화주제곡, <한 많은 청춘>, 그리고 참 구성지게 들리던 <삼팔선의 봄> 등등 그때 내가 배운 노래들이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새로 산 <가요반세기> 라는 세광출판사 에서 나온 노래책에 나오는 옛 노래를 서로 앉기만 하면 같이 부르곤 했다. 그 책은 기적적으로 아직까지 살아 남아서 나의 고서(古書)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원래 이런 트로트 풍의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잘 몰랐지만 그때 서형과 같이 부르면서 많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특히 둘 다 고향을 떠난 신세가 같아서 더욱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추억에는 이것 이외에 사실은 조금 더 심각하고 로맨틱 한 것도 있었다. 20대의 팔팔한 나이였고 둘 다 “침을 질질 흘리는” 총각들이어서 여자에 관한 추억이 없을 리가 없다. 서형과 조금 알고 지내는 간호사 아가씨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 아가씨의 이름을 잊어 버렸다. 서형과 그 아가씨는 로맨틱한 관계가 아니고 돈 관계로 조금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형이 그 답지 않게 그 아가씨와 사귀어 보라고 해서 집에 데리고 왔다. 나는 사실 조금 당황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대로 셋이서 잘 어울리며 놀았다. 그 후부터 그 아가씨는 우리 퀴퀴한 총각냄새가 진동하는 아파트에 와서 청소도 해주고 음식도 같이 해 먹고, 노래도 부르고 참 건전하게 놀다 가곤 했는데, 문제는 아주 곤란하게도 그 아가씨는 조금 심각한 사귐을 전제로 한 듯하고 나는 그저 젊은이들의 사귐으로 생각을 한 것이다.
삼팔선의 봄
그 당시 나는 서형으로 부터 오래된 가요곡을 많이 배웠다. 그리고 같이 부르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이 바로 이 “삼팔선의 봄”이었다. 다행히 가요악보에 있는 곡이라 그 뒤에도 계속 나의 애창곡이 되었다.
그 아가씨는 아주 활달한 성격이었고 한국에서 학교에서 근무도 한 사회경험이 있는, 우리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이어서 어떨 때는 우리가 어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주 당당하게 희망하는 배우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행동에 나는 사실 상당히 부담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보다 덜 성숙한 편이었다. 그녀는 간호사 출신이지만 그 당시는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 바로 옆에 있는 Bensonville이란 곳의 어떤 nursing home(양로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어떤 미국 여자의 양녀가 되어서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게 셋이서 어울리긴 했지만 서로 생각이 너무나 달라서 곧 좋지 않은 관계로 발전을 하고, 친구관계까지도 금이 가고 말았다. 나는 그러한 미묘한 남녀관계를 멋있게 끌고 나가기에 너무도 미숙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듯하고.. 중간에 다리를 놓은 서형도 나에게 아주 실망을 한 듯했다.
그 당시 서형에게 비밀의 취미가 있었다. 그것은 조금은 중독성의 경마로 하는 도박이었다. 그 당시는 그렇게 심각하게까지 생각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거의 중독이 된 상태임을 안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서 곧 경마장으로 가서 돈을 잃곤 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보고 한번도 경마장엘 가자고 안 했던 사실이었다. 물론 학생이었던 나에게 돈이 많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형의 성격으로 보아서, 경마하는 것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라 짐작을 한다. 위에 말한 아가씨도 사실은 경마를 하기 위해서 돈을 빌린 것으로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액수로 짐작이 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나는 시카고를 떠나서 잘 몰랐지만 그 후에 사실은 서형과 그 아가씨는 서로 깊이 사귀게 되었고 결국은 동거를 하게 되었다. 1977년 말 시카고를 완전히 떠날 무렵 새로 신혼의 보금자리가 된 아파트에 들려서 작별 인사를 했는데.. 그 아가씨는 아직도 그때 받은 자존심의 상처를 되뇌는 듯해서 사실 나와 서형의 관계도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이 느껴져서 한편으로 참 슬프기도 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하는 심정뿐이었다. 나의 희망에는 그 아가씨가 조금 더 관용이 있었으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것이었다. 그 중간에 있었던 서형은 사실 그 아가씨보다 더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 후에 예상대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 나도 잊으며 나의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정말 가끔 그 때를 생각한다. 괴롭던 때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은 그런 것도 참 많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몇 명의 자녀를 두었을까? 어디에 살고 있을까.. 서형.. 서충일 형!
Tobey, 토비, 토우비.. 우리 집 개, 강아지의 이름이다. 종자는 역시 잡종으로서는 조금 드물게 치와와, 닥션드(Chihuahua & Dachshund) 사이에서 2004년 12월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6살이 조금 지난 ‘중년’에 속한다. 하지만 small breed 때문인지 크기가 작아서 (20 파운드 이하) 그런지 누가 보아도 ‘강아지’ 로 본다. 우리 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알고 지내던 연대 후배의 집에서 낳는데 개가 많아서 우리 차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2005년 초에 오게 되었다.
이전에도 개를 길렀으나 모두 밖에서 키웠고, 그 중에서 제일 정이 들었던 Lucky란 개는 우리 집에서 수명을 다하고 천국으로 갔다. 그것이 2003년 여름이었다. 떠나고 나서 제일 후회스러웠던 사실은 밖에서 키워서 우리의 보살핌에 한계가 있었고, 정도 그만큼 덜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 갓 태어난 puppy가 왔을 때는 결심을 하고 집 안에서 키우기로 하였다. 이름은 아이들이 Tobey라고 즉시 지어버려서 우리 부부에게 이름을 지어줄 기회가 없었다.
완전히 갓 태어난 상태로 왔는데, 꼭 생쥐 정도의 크기로, 어찌나 활발하게 집안을 돌아다녔는지.. 덕분에 금새 정이 들게 되었다. 그리고 곧 이 녀석의 독특하고, 고약한 습관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치와와 쪽의 성깔이었는데.. 자근자근하지만 아주 따갑게 bite하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조금 나아지리라 식구들 모두 희망을 했지만 역시 그 치와와 쪽의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이 녀석, 토비는 나와 특별히 정이 많이 들어서 그런지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닌다. 따라다니는 정도가 아니다. 나의 앞 쪽으로 와서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응시’하는 것이다. 이것도 변하려니 했지만 아주 고질로 남아 버렸다. 사람이 똑바로 보는 것과 그렇게 차이가 없이, 아주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른 식구들도 불편하게 느끼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버릇을 어찌 고치랴? 나를 좋다고 앞에 와서 쳐다보는 것이 어찌 나쁘단 말인가.. 그렇다.. 내가 생각을 고쳐먹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이 정도면 별로 이야기 꺼리는 못될 것이다. 큰 사건은 몇 번인 있어서 우리들을 아주 긴장시켰다. 이곳에서 몇 년 전에 크게 hit한 영화(non fiction book으로부터)Marley & Me 것이 있다. 부제(sub title)가 world’s worst dog 인가 해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물론 여기서 ‘최악’이란 것은 거의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난과 사고를 매일 치는 그런 개와 살다 보니 역시 거의 사람이상으로 정이 든 것이다. 우리가 그런 것과 비슷한 경우다.
2006년에 한국에서 연숙의 조카 서수경이 한 살짜리 아들 대현이를 데리고 놀러 왔었다. 매일 조마조마한 것은 물론이다. 무슨 사고라도 날까 봐.. 하지만 예상외로 싸우면서도 정이 들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며칠 전에.. 나의 실수로 대현이 코를 물어버리는 대형사고! 이건 100%..나의 잘못이었다. 별로 문제없이 잘 지낸 듯해서 내가 안심을 하고 토비를 내가 안고 대현이 코에다 토비 코를 맞춘 것이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대현이 코를 물어버렸다.. 헉…기억을 하고 싶지 않다. 수경아.. 이 바보 같은 이모부를 용서해다오.. 다행히 생각보다 상처가 크진 않았지만.. 정말 아찔한 사고였다.
하지만 식구를 bite하는 것과 stranger를 bite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드디어 2008년 여름에 대형사고가 났다. 우리 동네를 거의 매일 걷는 Mr. Gleason이란 같은 subdivision(동네)에 사는 아저씨 (나보다 어린)가 있었다. 거의 정기적으로 걷다가 마주치면 그렇게 사람이 좋을 수 없었고, Tobey도 반겨주곤 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운명의 그날.. 그 아저씨가 우리 집 앞을 지나칠 때, 공교롭게도 Tobey는 우리 집 backyard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집 앞으로 튀었다. 내가 쫓아 갔지만 그 속도를 어찌 따르랴.. 그 아저씨는 자기가 반가워서 뛰어오는 줄 알고 손을 내밀었는데.. 손가락을 세게 물어버렸다. 손을 보니 피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 사람 워낙 사람이 좋아서 별로 내색은 하지를 않았다. 다만 Rabi주사(광견병 접종)를 맞았냐고 만 물었다. 물론 맞았지만..
이런 사고가 나면 많은 사람들이 ‘고소’를 한다. 심하면 우리 Tobey는 ‘사형’에 처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 우리들.. 운이 좋았다. 세상에 그렇게 마음씨 고운 사람도 있는 것이다. 자기는 개를 아주 좋아한다고 우리를 위로하였으니까.. Tobey야.. 너 정말 운이 좋았다. 문제는 우리 집에 dog fence가 없다는 것이다. Backyard로 볼일을 보러 나가면 꼭 사람이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너무나 빨리 뛰는 것을 보았으니까. 비록 너무나 까불고, 날뛰지만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을 물었을까? 역시 치와와의 피? 이것은 훈련으로도 고치기 힘들다. 유일한 방법은 집밖으로 불시에 튀지 않도록 하는 것 밖에..
그래서 부랴부랴 dog fence를 세웠다. 보통 철망으로 하지만 미관상 그렇게 할 수 없어서 lumber를 사다가 외관상 보기 좋게 세웠더니.. 정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없이 backyard로 내 보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일찌감치 만들어 놓을 걸..하는 후회도 있었지만 지금이라도 만들었으니까..
그 이외에 우리식구들도 가끔 조금씩 물리는 작은 사고는 계속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도 적응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녀석이 bite하는 때는 아주 특정한 situation이어서 그런 것을 가급적 피하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반대로 ‘외부인’을 아주 싫어해서 사실 watch dog역할은 잘 할 듯 싶다. 도둑이 와도 아마 우리 집은 제일 나중에 털 것이다. 이런 조금 ‘나쁜’ 것을 제외하고는 이 녀석은 거의 우리 집 식구나 다름이 없고.. 특히 우리 부부의 습관을 너무도 잘 알고, 이용을 하는 아주 명석한 놈이다. 그것 이외에도 나와 거의 모든 시간을 같이 옆에서 보내는 탓에.. 비록 말을 못해도 내가 슬퍼하거나, 고민을 하거나 아주 가끔 울거나 하면 꼭 와서 ‘위로’를 한다. 이것은 사실 웬만한 사람이나 친구보다 낫다. 외로운 이 세상에서 이놈이 나에게는 best friend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