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만에 다시 생각해 보는 유치하기도 하고, 진부하기도 한 이 구절은 물론 1968년에 대한민국에서 나온 영화의 제목이요, 주제곡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연히 Internet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참 감회가 깊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42년이면 강산이 최소한 4번 변할 정도라고 하지만 요새의 강산은 아마도 그보다 더 변했으리라..
나는 이 영화를 아마도 개봉관이었던 을지로 4가쯤이 있었던 국도극장에서 당시 같이 모이곤 했던 혼성그룹의 여대생들과 같이 보았을 것이다. 당시는 사실 외국, 특히 미국문화가 판을 치던 당시라서 국내의 영화는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따라서 대학생이 되면 사실 국산영화는 피하는 것이 ‘멋’이었다. 국내 영화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만은 예외였다. 그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수준 작’이라고 평가를 했었던 것이다.
최고의 배우였던 신영균, 문희, 전계현, 박암.. 우선 cast가 화려했고, 비록 ‘신파조’의 진부한 story였지만,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자아낸 영화였었던 것 같았다. 우리의 나이에서 그 영화를 보면, 그저.. 와 저 남자 참 복도 많구나.. 하는 정도였지만 남녀관계, 특히 결혼과 가정과의 역학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게도 되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끼는 것 중에는 신영균, 생각보다 세련되었고, 연기도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문희의 연기는 기억보다 실망적이었다. 그 당시 영화기술의 수준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넣을 수 없었으므로(동시 녹음) 성우가 대신 대사를 했는데.. 그것이 문희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를 않았다. 당시에 나는 문희가 ‘최고의 미인’으로 기억에 남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사실은 ‘별로’ 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내가 보는 ‘미인’의 눈이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
영화의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나는 영화에서 보이는 그 당시의 배경 물들 (길거리, 버스, 택시, 집안 풍경)이 더 흥미로웠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음을 보고 나의 기억은 퇴색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곡도 영화와 같이 크게 인기가 있었는데, 당시의 역시 최고로 잘 나가던 ‘이미자’, ‘남진’이 같이 불렀고, 나는 영화보다 주제곡이 더 좋았던 기억이다.
멜러드라마의 특징은 모조리 갖춘, ‘눈물을 찔찔 짜게’ 만들기는 했지만 역시 그 목적은 달성한 영화였고,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느낌이 비슷하니 이것이야 말로 한국의 movie classic이 아닐까?
어린 시절 친구들을 회상할 때면 그 느낌들이 갖가지임을 느끼곤 한다. 물론 생각만 나도 피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희미한 기억들이라서 그런지 실제라 기 보다는 파란 담배 연기 속에서 춤추는 듯한 거의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한마디로 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싶은 친구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금 급속히 저하되는 듯한 기억력과 싸우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blog은 사실 그것을 위해서 시작했고 계속 그런 노력을 돕는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나의 감정을 알맞게 나타내는 것도 이제는 쉽지는 않다. 사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어린 친구들은 그 당시의 사진이나 앨범들을 보면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분명히 친하게 뛰어 논 기억은 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는 더 자세히, 생생히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백승호의 기억이 유난히 머리에서 맴돈다.
나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이 백승호는 1958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의 친구였다. 한때 아주 가깝게 지냈고 분명히 서로 좋아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인가,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친구였었던 기간이 1년도 채 안되게 짧았지만 아직도 어제 본듯한 기분인 것이다. 원래가 잘 웃는 얼굴의 이 친구, 백승호 6학년 때 헤어지고 말았지만 멀찍이 볼 양이면 저 애는 나의 친구였다는 생각은 하곤 했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백승호는 완전히 나의 시야, radar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국민학교 동창들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되었던 다른 친구 신문영처럼 이 친구도 거의 꿈같이 연세대 campus에서 보게 되었다. 신문영은 몇 초 정도 잠깐 보고, 혹시 저 친구가 신문영.. 하며 어 떨떨 했었지만 이 백승호는 아예 자주 얼굴이 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ROTC(학훈단, 일명 바보티씨) 생도의 모습으로 자주도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나의 눈에 보일 때마다 왜 나는 반가운 마음을 접고 ‘모른 척’을 했었을까? 성격 적으로 그 당시 나의 먼저 나서서 백승호를 아는 척 못했을 것이다. 그저 멋 적은 것이다. 느낌에 어떤 때는 백승호도 나를 보았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면 그도 멋 적어서 나를 모르는 체 했을까.. 그것이 아직도 궁금한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백승호의 image는 이곳 저곳에 남았다. 재동국민학교 5학년 시절의 사진 2장,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하지만, 연세대 앨범.. 을 기대했지만 그는 1966년 입학으로 나보다 일 년 앞서 졸업을 한 듯, 그곳(1971년 앨범)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사실, 학훈단 베레모를 쓴 모습도 기억을 하는데, 아마도 공학부 토목학과를 다녔던 듯 하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살아온 역사를 알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바램일 것 같다. 하지만 build it, they’ll come의 교훈을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
나는 몇 개월 전 이곳, 나의 blog에서 연세대 시절을 회상하면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신문영을 그의 졸업앨범 사진과 함께 같이 다루었다. 그 많은 재동국민학교 동창생 중에서 신문영은 나의 희석되어가는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기에 얼마 전에 그로부터 소식을 들었을 때,나는 사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가 나의 blog을 ‘우연히’ 보았기에 연락이 되었을 것이라 serony dot com blog의 제일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제일 궁금했던 사실들 대부분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1960년 중학입시에서 어떤 중학교에 갔느냐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경복중학이었다. 다른 재동 동창 심동섭이 경복으로 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또 다른 동창 조성태, 정세종, 장세헌 등도 같이 경복중학교에 갔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조성태, 정세종은 같은 분단에 있어서 아는 동창들이고, 장세헌은 1학년 때 같은 반인 것만 기억을 한다.
이번에 email로 느끼는 신문영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듯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중학교 당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서 삼선 고교로 갔다’ 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와 비슷하게 부선망 단대독자(아버지가 없는 외아들)로 군대를 안 갔었다고 했고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고.. 느낌에 아주 ‘정석적’인 인생을 산 듯했고, 명함을 보니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재동학교 동창회가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는데, 회장은 김영환, 일년에 한번 정도 모인다고 했고, 거기서 이만재, 육동구 등도 보았다고.. 듣기만 해도 흐뭇하고.. 부럽고.. 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광경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모이면 사진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만 바라지만, 세월의 횡포로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문영을 기억하면 꼭 같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6학년 (1959년) 때 같은 분단 (공부를 제일 잘하던 1분단)에 있을 때 어느 날 이른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담임 박양신 선생님이 나와 신문영을 부르더니, 심부름 좀 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듣고 보니, 선생님이 댁에서 가져와야 하는 물건 (서류?)이 있으니 둘이서 곧바로 선생님 댁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우리에게는 큰 일에 속했다. 왜 나와 신문영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을 믿고 그런 일을 주신 것이 내심 기뻤던 것은 사실이다. 그 시간에 학교를 빠져 나와서 인사동 입구의 선생님 댁으로 가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모험 같고 신기롭게만 느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모양이다.
아들 딸 모두 결혼, 손주들까지 있는 신문영, 부럽기도 하고, 보고 싶어 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도 가상적인 해후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니 이만큼이라도 오래 살았다고 위로를 하며 만족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9월 22일 토요일 저녁에는 정말 오랜만에 men’s night의 모임이 있었다. 이것은 진희네 그룹 부부모임에서 ‘wife’ 들만 빠진, 그러니까 남편들만의 모임이고 이름도 men’s night이 된 것이다. 이런 모임은 주로 이번 모임의 host인 최형의 wife가 집을 비웠을 때 이루어지고, 따라서 모이는 장소도 최형의 Sugarloaf Country Club 안에 있는 ‘으리으리’한 ‘진짜’ mansion(?) 에서 모이곤 한다. 이번에도 최형의 wife가 여행을 떠나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이럴 때의 저녁 음식준비가 사실은 문제인데(wife가 없으므로), 역시 으리으리한 mansion에 걸맞게 catering service로 그것은 해결이 되었다.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 모임은 예전대로 꼭 하게 되는 술(주로 wine) 대신에 음악, 특히 악기연주를 즐기는 쪽으로 그 분위기가 바뀌고 있어서 wife들이 조금 호감을 갖게도 되었는데, 이날도 모두들 한가지 악기를 들고 와서 맛있는 음식과, 얘기, 그리고 노래와 연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면서 거의 유행적으로 악기를 배우는 여유를 갖는 모양인데, 나는 아직도 그런 것을 못 해보았다. 최형은 ‘소원대로’ $2000짜리 guitar를 사서 그룹지도를 받고 있어서 모두들 호기심 어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윤형도 $500짜리 ‘연습용’ saxophone을 사서 개인 지도를 거의 일년 째 받고 있다고 했다.
이날 처음 들었는데, 사실 놀랄 정도라 ‘멋지게’ 그 결과를 보여주었다. 나야 옛날부터 유일하게 하던 것이 guitar여서 별로 특기사항은 없고, 이태리 가구의 전사장은 guitar를 옛날에 잘 치던 것 같은데, 요새는 많이 잊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목소리가 좋아서 악기대신에 vocal로 한 몫을 잘 치른다.
나는 근래에 들어서 이 그룹의 영향을 받아서 조금씩 guitar를 찾으며, 기억이 나는 곡들을 찾아서 다시 배우고, 연습을 하곤 한다. 나이 들면서 이런 것은 역시 건전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고, 악기, 가사 외우기, guitar chord외우기 등등도 ‘기억력’ 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빨리 세월이 갔다는 사실, 바보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이 허무한 느낌, 8월 말 그것도 연숙의 생일이 코 앞에 다가 옴을 알며 더 허탈한 느낌을 받는다. 7월 하순에 시작 된 ‘예고 된’ 끔찍한 일들.. 흡사 내가 우리 엄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허무맹랑한 자기 세뇌로 세월을 까먹으며 살았던 오랜 세월이 불과 며칠 간으로 압축된 강렬한 충격, 하지만 비교적 ‘절제되고 조절이 된’ 반응으로 보냈던 7월 말.. 그것에 의한 강한 후유증으로 보냈던 8월 대부분의 시간들.. 나에게는 정말로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하던 시간들이었다.
33일 봉헌…오래 전, 아마도 10년 전쯤일까, 이런 말도 들었고, 책도 본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두 연숙을 통해서였다. 한쪽 귀로 듣고 1초도 채 안되어 다른 쪽 귀로 내보냈을 것이다. ‘전혀’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고, 귀찮기만 한 이야기들로 들렸으니까.
그로부터 10년 뒤로 fast forward한 지금 나는 어떤가? 그것을 지금 ‘체험’적인 적극성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나로서도 놀라운 자신의 변화라고 할 수 있고, 여기에는 더 높은 곳의 뜻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예전 같으면 상상이나 꿈도 못 꾸었을 그런 ‘추상적, 형이상학적, 신비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33일 봉헌, 더 구체적인 말로는 ‘봉헌을 위한 33일간의 준비’ 가 더 맞을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간단하게 그저 ’33일 봉헌’이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하면 33일 연속으로 ‘관상,묵상,기도’를 하고 그의 결과로 ‘공적인 인정’을 받게 되는 그런 것이다. 비록 매일 혼자서(사적으로) 하는 신심행위이지만, 이 행위자체는 완전히 공개적으로 알리고, 공개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대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듯 하다.
그런 것이 올해 나에게 ‘분위기’가 무르익었는지, 자연스레 다가왔다. 예전 같은 콧방귀나 거부감, 무관심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고, 나는 나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보고 싶은 장난기도 발동했다. 종교를 완전히 떠난 ‘세속적인’ 것으로 말하면 Tony Robbins같은 세계적 inspirational coach가 지도하는 $$이 엄청 소요되는 seminar에 ‘개인적’으로 참석한 그런 상황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 기본적인 것은 ‘개인적인 변화’ 그러니까 change인 것이다. 변하지 않고서는 진전이 없다는 대명제가 아닐까? 나도 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아주 세속적인 ‘낮은 곳’이 아니고 천상의, 높은 곳에서 나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 아닐까?
이 33일의 ‘기나긴 묵상,기도’는 100% 17세기 프랑스 신부님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 (St. Louis Marie Grignion de Montfort) 성인의 ‘작품’이다. 이 분의 성모신심(Marian Devotion)은 정말 역사적인 것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 레지오 마리애 운동으로 현실화 되었고, 근세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일반적인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이 성인의 대표적 저서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은 저술 후 100년이 지난 후에 ‘기적적’으로 발견이 되어서 지금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신심, 방법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 신심의 기초가 된 이 신심은, 내가 레지오에 가입하면서 이렇게 자연스레 다가온 것이다. 이것을 접하게 되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리아 신심을 비방하는 무식한 사람’들을 내가 전적으로 무시하게 되었다. 비방을 하려면 ‘좀 알고’ 하라는 소리밖에 나오질 않는 것이다.
33일이 끝나고 봉헌하는 날이 일년에 6번으로 ‘고정’이 되어있어서 이것을 시작하는 날도 그만큼 고정이 되어있다. 내가 시도하는 때는 7월 13일에 시작이 되어서 8월 15일, 봉헌에 맞추어져 있다. 하루 최소, 약 1시간내지 1시간 반이 걸리는 이 신심 행위는 매일 미사를 강력히 권하는 조건도 있어서 아마도 ‘꽤 가치가 있는’ 무더운 여름을 예상케 한다.
나의 하루 일과를 어떻게 이것에 맞추어야 할지는 ‘무조건 해보고’ 조정해 나가기로 했고, 사실 그것이 제일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이런 것은 ‘자세한 계획’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 자신의 ‘천상적’ 변화를 기대하며.. “Totus Tuus“
인호 형, 김인호 형을 다시 인터넷을 통해서 다시 찾게 되었다. 실마리는 나의 blog 을 정말 ‘하느님의 뜻’으로 인호 형이 보게 된데 있었다. 시간적으로도 사실 아주 빨랐다. 요새는 가끔 이렇게 surreal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긴 하지만 이것도 점점 빨라지고 거대해지는 global information network를 감안하면 이런 추세는 가속화 될 듯 싶다. 비록 전화를 통한 음성은 못 들어도, 가깝게 느껴지는 문자 소식으로 50년이 가까워오는 거대한 세월의 징검다리를 넘는 듯 느꼈고, 가벼운 흥분 감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인호 형이 나를 ‘분명히’ 기억하는 사실에 더욱 반가웠다.
유명인이었던 박계형 여류 작가의 조그만 신문광고가 이렇게 나를 50년 전 나를 잠깐 가르쳤던 ‘가정교사 김인호’ 형을 찾게 되어서 형의 부인이신 박계형 여사에게도 특별한 감사의 심정을 전하고 싶지만.. 조금 시기상조가 아닐지 모르겠다. 그 옛날, 나는 여사의 ‘청춘 물’ 책을 ‘하나도’ 읽었던 적이 없지만 근래에 들어서 쓰신 책들은 무척 많은 관심이 간다. 특히 이번에 알게 된 여사의 심혈작인 ‘환희’는 더욱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대학생과 고교생으로 만났던 때를 50년 훌쩍 뛰어넘어서면 ‘호칭’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나는 비교적 쉽게 그때와 같이 ‘인호 형’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인호 형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난데 없이 나타난 환갑을 훌쩍 넘긴 ‘동생, 제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곤혹스러웠을까.. 이해가 간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그저 나보고 ‘경우 야..’ 하고 불러주면 너무나 반가울 터인데..
친절하게도 두 번째 편지에서 형의 ‘과거와 종교관’ 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을 보내주셨는데, 아마도 형의 출신고교인 서울고교 동창회지에 투고된 글인 듯 싶었다. “인생은 Given Way“라는 제목의 일종의 ‘고백록’은 형의 고통과 영광스러움이 조화된 아주 멋진 신앙여정을 그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대강 나의 ‘형이 긴 인생여정에 대한 호기심’ 은 충족이 되었다. 대강 추측을 해 보면 우선 박계형 여사는 천주교 집안 출신이었고, 형은 관면혼배로 결혼을 했던 것 같아서, 그때까지만 해도 교인은 아니었던 듯.. 이 글로 나의 궁금증이 풀린 것은 다음과 같다.
나를 가르칠 때 상대생(인문계)으로 왜 그렇게 과학이론을 여담으로 가르쳐주었나 하는 것은, 형이 원래는 서울고교 재학 당시 이과에 속했고, 이공대를 지망했었다는 글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갑자기’ 공대 지망에서 상대로 바꾸어서 진학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박계형 여사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원래 형이 6.25 피난시절 대전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 박여사를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했고, 대학졸업 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이 공부를 하던 1965년 형이 서울상대에 다닌 그때에는 사실 박계형 여사와 다시 만나기 이전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나중에’ 형의 친구였던 건우형을 통해서 우리 집에 전해졌을 것이다.
인호 형이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은 역시 공군 장교 근무 중에 당한 ‘대형사고’ 의 후유증과,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던 문학소녀 박계형 씨와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부부결합’ 된 신앙가족이 꾸준히 신앙을 지키게 되었던 것은 다음에 일어난 첫 아기(아들)의 ‘생명을 건 수술’ 이 도움이 되었을까.. 그리고 거의 ‘공짜’로 받게 된 형의 영세도 ‘생각하며 서서히 진행된’ 긴 신앙여정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을 듯하다.
제일 궁금한 것은 역시 형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경영학 이론, dynamic management theory인데.. 단순히 요새의 networked economy를 의식하고 가볍게 만든 것이 아니고, 형의 인생관, 종교관, 세계관 나아가 우주관이 총 집결된 그런 조금은 ‘높은 곳’의 이론이 아닐까.. 특히 엉망진창인 세계경제, 특히 미국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이제는 새로운 ‘절대적 기준’의 이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다신 ‘만난’ 형은 나에게 부인인 박여사의 심혈작 ‘환희 1.2부‘를 보내 주시겠다고 했고, 나는 정말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 이것도 형의 인생 반려자였던 여사의 인생,종교관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인호 형을 처음 우리 집에 소개시켜 주었던 건우 형, 내가 ‘이건우‘ 가 아닌 ‘박건우’로 성을 잘못 알고 있어서 정말 당황하기도 했다. 그저 ‘건우 형’으로만 알고 있어서 성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정말 ‘창피’한 노릇이었다. 나의 어머님이 아직도 살아계셔서 이 사실(인호 형을 찾은)을 알았으면 얼마나 반가워 하셨을까..
“대구 같은 더위”가 최근 이 지역에 들이닥쳤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3자리 숫자의 더위, 그러니까 화씨 100도, 섭씨로 36도 쯤 되나.. 심리적으로 이 세자리 숫자는 꽤 으스스한 효과가 있다. 시원하게 올해 초여름을 즐겼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 난 듯하다. 다행히도 이번의 불볕은 습기가 별로 없는 듯해서 견딜 만한데, 이것은 아마도 미국 Southwest, 그러니까 미 남서부 ‘아리조나’ 주 지역 같은 더위일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이 3자리 숫자의 더위는 까마득히 오래 전 대한민국 대구를 생각하게 한다. 좀더 자세히 기억하면 1972년 쯤이었나.. 그 해 여름은 한반도가 전체적으로 무척 더웠다. 에어컨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서울의 기온도 34~5도까지 올라갔는데, 그 해 처음으로 ‘습기’를 동반한 ‘찜통’ 더위가 며칠 계속되었고, ‘난생 처음’으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기억이다.
당시에는 사실 조금 ‘겁’을 먹기도 했는데, 그것은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어디 도망을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추우면 무언가 덮고, 입고 하면 될 터인데, 이렇게 견딜 수 없는 더위에는 어찌할 것인가? 해답은 물론 ‘신비의 이기’, 에어컨에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은 당시의 경제수준에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 1972년 이후로 나는 사실 지독한 더위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추운 것이 더운 것 보다 낫다는 결론이 머리 속에 새겨진 것이다.
그 당시 대구의 더위는 어떠했을까? 당연히 그곳의 기온은 한반도에서 제일 높았다. 지형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때, 대구에 잠깐 가게 되어서 처음으로 ‘대구 더위’를 맛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세자리 숫자의 더위였다. 섭씨로 36도 훨씬 이상이었을 것이지만 습도는 그리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 대구에서 느꼈던 ‘화덕’ 같은 공기를 오늘 처음으로 이곳에서 맛을 보게 되었다. 거의 똑같은 기분이었다. 절대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습도가 없는 이 불 같은 공기는 사실은 생각보다 기분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요새 대구의 더위는 어떠할까? 서울보다 아직도 더 높을까? 1972년의 한반도 불볕 더위와 그 당시 대구에 살았던 ‘그 아가씨’도 오랜만에 기억한다.
“15소년 표류기”.. 까마득히 옛날 옛적, 중학교 1학년 (서울 중앙중학교) 때 읽었던 세계명작중의 하나, 정말 재미있던 모험, 소설책의 제목이다.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머리에 거의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을 정도면 이것은 참 대단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는 인터넷에서 이것을 찾아보면 대강 짐작을 할 수 있다. 이 책은 아직도 널리 사랑을 받으며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 만화책과 골목 밖에는 별로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재미있는 것과 곳이 없었던 그런 찌들었던 시대가 아닌,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으로 밤을 새는 요새 아이들에도 꾸준히 읽히고 있는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다. 내가 읽었던 때 이후, 50년 뒤에도 아직도 그 나이또래들의 ‘고전적인’ 탐험 심과 호기심은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일까?
이 책은 나의 중학입시 준비를 도와주었던 (재동학교 6학년, 1959년) 가정교사였던 경기고 (김)용기형이 나에게 중학교 입학 선물로 주었던 것인데, 하도 재미있어서 하루 이틀 새에 다 읽었던 기억이 나고, 용기형 자신도 이전에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거의 무슨 의식처럼 읽는 ‘명작’ 전집이 있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학원사에서 발행된 거의 100권이 넘는 것이었고, 그것도 한국 명작과 세계명작으로 따로 있었다. 중학교를 마치기 전까지 그것을 다 읽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나는 별로 그런 것들에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이유는 ‘만화’가 훨씬 더 재미있고 배울 것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의 15소년 표류기는 그 ‘표준’ 명작전집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한창, 모험심, 공상적 상상이 극에 달하던 그 시절에 이 책은 사실 그렇게 ‘과학적, 공상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은 1세기 전 사람들이 겪었던 거대한 바다, 미개척 된 대륙, 특히 섬들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바다를 뗏목으로 항해하는 꿈을 많이 꾸기도 했다.
특히, 실제로 구체적으로 서해안, 인천에서 출발해서 제주도 쪽으로 가는 뗏목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물론 중학생에게 그것은 어림도 없는 자살행위였겠지만, 그런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하는 것 만도 너무나 행복하였다.
이번에 이 책을 어렴풋이 회상하면서 과연 그것이 어떤 책이었는지 궁금해져서 조사를 해보니,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나 많았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책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어서 누가 언제 쓴 책인지도 몰랐다. 이러한 사실을 찾는데 책의 제목부터 문제였다.
도대체 ’15소년 표류기’라는 영어 제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Fifteen Boys로 아무리 찾아도 없었고, 표류기 같은 castaway, adrift 로 찾아도 헛수고였는데, 혹시..하고 한글로 ’15소년’을 찾았더니 bingo! 재수가 좋았던 것이 이 책이 ‘요새에도’ 읽히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옛날에 읽었던 나 같은 나이의 ‘꼰대’들이 그런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놓았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인데, 요새는 아마도 ‘극성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생각해서 ‘권장하는 아동도서’로서 이런 ‘독후감’ 같은 것을 쓰는 모양이었다.
이런 모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에서 제일 ‘웃기는’ 것이, 책의 제목이었다. 원래의 제목은 Deux ans de vacances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나온 책이었던 것이고, 영어로는 Two Years’ Vacation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저자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바로 그 유명한 Jules Verne!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 Jules Verne 하면, 우선 ‘해저 2만리(Two Thousand Leagues under the Sea)’,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80일간의 세계일주’ 같은 ‘기가 막힌’ 책들의 저자가 아닌가? 나는 그 당시에 전혀 모르고 읽었던 것이다.
원제가 ‘2년간의 휴가‘인데 어떻게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15소년.. 어쩌구 로 나왔는지 궁금했지만, 이것은 쉽게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이 책은 일찍이 개화를 한 일본 아해들이 이미 열광적으로 일본어로 출판을 했었고 그 책의 제목이 바로 十五少年漂流記, 가난했던 우리 출판사 아저씨들은 ‘그대로’ 찍어낸 것이다.
일본 쪽으로 자료를 찾으면 1951년에 나온 것이 있는데 내가 읽었던 것은 분명히 이 것을 ‘100% 그대로’ 한글로 직역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출판계는 분명히 그랬다. 거의, 아니 100% 일본 것들을 ‘베낀’ 것들 뿐이었다. 문제는 일본 판의 번역이 충실했으면 그런대로 괜찮을 법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읽었던 ‘세계명작’ 들은 완전히 ‘오역’으로 즐겼던 셈이다.
이 책의 대강 줄거리는 생생히 기억을 하지만, 자세한 지명이나 사람이름들은 거의 잊어버렸다. 분명히 생각나는 이름 중에는, 거의 주인공이나 다름이 없는 프랑스 소년 ‘브리안, Briant‘ , 나중에 등장한 ‘Friday 아줌마’ 등이 있다. 대부분이 영국소년들이고, 이들과 ‘정치적’인 갈등까지 겪지만 어른들과 다르게 그들은 빛나는 화해와 협력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참 듣기 좋은 Utopia적인 얘기다.
이런 것들은 요새 생각을 해본 것이고,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은 제치고, 무인도의 동굴 속에서 2년간 살면서 겪는 각가지 탐험, 위험, 모험 등에 ‘열광’을 했었다. 특히 실감나게 잘도 그린 무인도의 지도는 흡사 ‘보물섬’ 을 연상시키는 것이라서 그 당시 나이에서는 완전히 우리를 압도하곤 했다. 1880년대에 나온 책이라 당시의 바다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찬 이 책을 기억하면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기분이다. 요새의 모든 관심사는 그저 ‘우주’가 아닌가.. 바다에 대한 경외심은 이제 많이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을까.
Maxwellton’s Braes 로 시작되는 이 감정 짙은 스코틀랜드 시와 노래를 언제 처음 듣고, 따라 부르고 했는지 확실한 때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분명한 것은, 대학 시절 전前은 아니라는 사실 뿐이다. 이런 ‘외국의 명곡’들은 대부분 중학교에 들어 가면서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배웠지만, 이 곡을 우리는 그때 배우지 않았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대학시절, 언제 듣고 배웠을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분명히’ 기타를 배운답시고 이곳 저곳에서 ‘쉬운 기타 코드’로 부를 수 있는 곡들을 찾고, 배울 당시에 이것이 있었다. 우선 멜로디의 정서가 비록 장조이지만 슬픔이 깔린 은은함으로 그 당시의 감수성 많던 나이에 좋았고, 또한 기타의 코드가 우스울 정도로 초보 단계의 것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영어 가사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사연이 있음직한 역사적인 시 라는 사실조차 몰랐고, ‘괴상한 스코틀랜드 식 영어‘에만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많은 유명한 외국 곡을 한글로 번역하여 sing-along style로 노래를 지도하던 전석환 선생도 이 노래는 몰랐는지, 그런 것도 없었다. 당시에, 그렇게 해서 나는 이 향수에 어린 노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홀연히 요새 다시 나의 눈앞에 다가왔다.
이번에는 옛날같이 그냥 기타를 치며 노래만 부를 것이 아니고 이 노래의 배경을 알고 싶어서, 알아보니 (주로 Wiki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연을 가진 노래였고,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얼마 전 다시 보게 된 오래된 1940년 명화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를 연상케 하는 18세기 즈음 영국의 시대적 배경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 옛날에는 남자들이 여자를 그리며 쓴 시와 민요들이 꽤 있는데, 이것도 그런 ‘애가’ 중의 하나일 것이다.
Wiki로 이 노래를 찾아보면 영어판과 한국어 판이 거의 다르다. 그만큼 두 언어권의 문화와 관심사가 다르다는 뜻일 것이다. 이 노래의 역사는 양쪽이 비슷하지만 각 문화권에 소개되고 평가되는 것은 다르다. 역사적인 것은 Wiki를 보면 자세히 나와있지만, 나의 관심사는 내가 어떤 경로로 이것을 접했는가 하는 것인데, 한국어 Wiki에 그것에 대한 hint가 보인다.
이 명곡이 한국어로 번안이 되었고 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최소한 1970년대 이후일 것이다. 내가 전혀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이것을 접하게 된 과정은 다른 기록에서 밝혀진다. 아마도, 이 노래를 ‘유행곡’으로 만든 스코틀랜드의 folk (song) group이었던 The Corries에 의해서 한국에도 그들이 record가 들어왔을 것이고, 우리들은 그것을 들었을 듯 하다. 그것이 1970년이었으니까,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내가 이 노래를 듣고, 배울 당시를 회상하면서 music video를 만들어 보았다. 너무나 높은 음정 때문에 vocal은 엉망이지만 그런대로 나의 사랑하는,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YAMAHA guitar가 잘 cover를 해 주었다. Audacity software로 ‘음향효과’를 낸 것을 들어보니 조금은 pro맛이 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듣는 이에게는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서 naked vocal version을 사용했다.
¶ 4월이나 5월보다 더 시원한 6월, 셋째 일요일, 2012년의 Father’s Day를 맞는다. 한글로 ‘아버지 날’ 이라고 하면 그 느낌이 조금은 다르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냥 Father’s Day도 괜찮다. 그만큼 그 말이 더 익숙할 만큼 이곳에서 오래 살았다고나 할까. 조금은 복잡한 심정이 된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나는 가족으로부터 받는 ‘인사’보다는 우리의 미국본당에서 ‘진짜 아버지, Father(신부님)’로 부터 ‘단체로 받는blessing (강복)이 더 기다려졌고, 결국 오늘 그렇게 강복을 받았지만, 자식이 없는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그냥 앉아 있던 모습들이 조금은 외로워 보이던 순간이었다. 신부님께서는 그들의 통상 호칭이 Father(신부)라서 아침에 신자들로 받았던 Happy Father‘s Day란 인사가 조금은 착잡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여기서의 Father는 물론 영적인 아버지란 뜻이었을 것이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남자인데, 어찌 biological father를 기리는 이 날의 뜻을 모르겠는가? 이래서 주제 넘는 말이지만, 이 날만 되면 신부님(들)에게 죄송하고, 심지어는 동정심마저 느낄 정도다.
Oh! My Papa – Eddie Fisher – 1954
오늘의 강론(homily)에서 신부님은 예년과 다르게 Father’s Day의 종교적, 신학적인 측면에 대한 것으로 전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사회적인 것으로 가정에서 아버지의 ‘전통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들으며, 요새 해괴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일침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안 그렀겠는가? 너무도 쉽게 편모, 편부 가정이 형성, 용납이 되고, 이제는 ‘바보’ 지도자들(Obama, Biden)의 ‘수긍’ 하에, 남자 끼리 (동물적) 성관계를 하는 두 명 아버지의 가정들이 생기게 된 이 삐뚤어져가는 세상을 왜 신부님이 모르겠는가? 그래서 올해의 Father’s Day에는 한 ‘진짜’ 가정에서 ‘남자’ 아버지의 역할이 ‘진짜’ 자녀들에게 미치는 ‘진짜’ 역할을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정말 오랜만이 우리 집 네 식구가 모두 식탁에 모였다. 이런 날이 아니면 정말 이런 기회가 이제는 힘들어졌다. 특히 자매간의 ‘불화’가 있을 때는 더욱 힘든데, 요새가 바로 그런 때인가 보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기대해 본다. 꽤 오랫동안 ‘굶었던’ Starbucks Coffee pack을 ‘선물’로 새로니가 나에게 주었다. 요새 사실 값싼 Maxwell House 커피에 싫증이 나던 때, 새로운 향기를 맡게 되어서 좋았다. 요새 연숙이 새로 ‘개발한’ 돈까츠를 맛있게 해서 먹었고, 나라니가 사온 조그만 케이크가 후식으로 나왔지만, 워낙 단 것이라서 모두들 조금씩 맛만 보았다. 새로 boy friend가 생겼다고 싱글벙글하는 나라니를 보면서..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며칠 전에는 요새 정말 많이 줄어든 junk mail(광고성 우편물) 중에 나의 눈을 끈 것이 있었다. Neptune Society란 곳에서 온 것인데, 자세히 보니 간단히 말해서 cremation service(화장,火葬 장례)에 관한 것이었다. 더 쉽게 말하면 장의사에서 온 것이다. 은근히 놀란 것이.. 와~~ 내가 이제 장례식에 관련된 나이에 들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깜짝 놀랐겠지만 지금은 사실 그렇지 않다. 그것이 사실인지도 모르니까.
이들은 ‘과학적인 통계’를 무기로 하는 엄연한 business이니까, 나는 분명히 그런 나이에 속한 것이다. 하지만 business는 ‘전통적인 장의사’와는 달랐다. 이것도 ‘효율성’을 자랑하는 franchise인 것이다. Iowa에 본사를 가지고 있는 전국에 널려있는 chain service.. 말이 된다. 이것도 엄연한 service business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런 조금은 ‘비 감정적’인 조직의 형태가 그렇게 상관이 되겠는가? 이 편지를 보낸 곳은 ‘전통적인 장례의식’이 너무나 비싸고, 복잡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이 그런 것 때문에 고통을 더 받고 있다고 말하며, 가급적 간단한 ‘화장’에 의한 ‘아주 간단한’ 의식의 장점을 설명한다.
듣기에 모두 맞는 말인 듯하다. 근래에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면서 ‘누구나 꼭 직면해야 하는’ 의식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서적으로는 땅으로 묻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화장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사실 결정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듯하다. 그래도 선택을 하라면 나는 나의 어머님처럼 ‘깨끗한 화장(火葬)’을 택할 것 같다.
¶ 어제는 national news에서 Gay-friendly Obama가 ‘드디어’ 2012년 대선의 첫 정치적 포석으로 이민(법이 아니고, 시행령 Dream Act)정책에 대한 커다란 발표가 있었다. ‘젊은 불법체류자’에게 합법적 지위를 주는 ‘법이 아닌 시행령,act’ 인데, 이것은 대통령의 권한을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Congress,국회를 완전히 피해간 완전 100%정치적인 포석이었다.
우리 같은 minority(소수집단,민족)은 물론 이런 정책을, 그 동기에 상관없이,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매일 매일 겪는 (비록 자기나 주변이 만들어놓은 상황에 의한 것이지만) 삶에서의 고통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짐작을 못할 것이다. 범죄경력자를 제외하고는 사실 이들은 대부분 ‘고급 인력’에 속하고, 그들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수모와 공포’속에서 살아왔을 터이니까. 원래의 ‘원주민 인디안(native American)’들과 극소수의 청교도 이민후예를 말고는 거의가 나중에 ‘흘러 들어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나라.. 그들이 어떤 ‘자격’으로 나중에, ‘흘러 들어온’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낼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100% ‘법적’인 문제로 보면 영원히 이 복잡한 이민문제는 해결을 못한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런 식으로 보는 ‘부류’들이다. 얼마 전에 이 젊고 용감한 ‘불법인’들이 하나 둘씩 흡사 근래 gay들 처럼 ‘벽장’ 속에서 나오기 시작하고, 결국은 최근의 Time magazine의 cover story가 되었다. 그것을 혈혈단신 두 주먹으로 밀어부친 사람, 필리핀 출신 그(Jose Antonio Vargas)는 정말 용감한 젊은, 언론인 이었다. 어떻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부모들이 만들어 놓은 ‘불법성’을 온통 혼자 짊어지고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는 이제 하나의 현상,phenomenon이 되어가고 있고, 조금씩 밝은 쪽으로 가는 듯 싶다.
¶ 1964년 4월 경에 발간된 고국의 한 신문에서 한 사진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서울, 1964.. 이런 소설의 제목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실제로 1964년 경의 서울 심장부의 실제 모습을 말한다. 1964년의 대한민국 서울의 심장부는 역시 세종로 네거리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외국에서 말하는 Boulevard의 전형이 이곳에서 ‘중앙청’까지 펼쳐지고, 외국의 원수들이 방문하면 이곳을 ‘꼭’ 거치면서 사진기록을 남긴다.
보신각(사진, 왼쪽 아래) 같은 역사유물과, 일제에 맞서 조선인의 입과 귀를 살리려 애쓴 민족신문 동아일보사, (사진, 왼쪽 중간)가 이 네거리에 당시에 흔치 않던 5층, 고층빌딩으로 버티며, 6.25, 4.19, 5.16같은 굵직한 역사적 격동의 모습을 이곳에서 보며 기록을 하기도 했다. 새로 ‘도입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고자 몸부림치던 현장, 4.19당시 고대생들이 진을 치고 자유당의원들을 ‘감독, 질책’하던 그곳, 삼성 밀수사건 때는 깡패출신 야당의원 김두한이 파고다 공원 ‘변소’에서 퍼온 민중의 분뇨를 정일권 국무총리 얼굴에 뿌렸던 곳, ‘원래’의 국회의사당 tower가 바른쪽 먼 곳에 보인다.
¶ 1964년 당시의 traffic jam의 모습.. 당시에 느끼기에 그곳에 이렇게 움직이는 것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거북이 전차 (일제 유물, 귀엽게 생긴 ‘에노 전차‘ 들과 San Francisco style 미국 대형 전차들)가 당시에 ‘활개를 치며’ 이 세종로 네거리에서 공중가설선에서 불꽃을 튕기며 좌,우회전을 하는 모습도 있다. 그 ‘장관’은 어린 시절 하도 ‘멋져서’ 하루 종일 네거리에 서서 입을 벌리고 서서 구경을 하기도 했다. 이런 거북이 전차는 2년 뒤까지 모두 철거가 되고 완전히 자동차 전용도로로 변했다.
네거리의 바른쪽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간판 격 극장, 국제극장이고, 그것의 조금 왼쪽으로 ‘신성일, 엄앵란’ 단골인 ‘아카데미 극장’, 그 바로 옆, 붙어서 Cinema Korea(시네마 코리아)라는 외화 전용 재 개봉관이 있었다. 이 사진이 찍힐 시절, 나는 용산구 남영동에서 효자동행 전차를 타고 중앙청 앞에서 내려서 중앙고등학교까지 걷거나, 시간이 급하면 시내버스를 타고 아예, 안국동, 재동 까지 가기도 해서 이곳 네거리는 ‘꼭’ 지나가곤 했다. 그 당시 그렇게 넓게 보이고, 멀게 보이던 것들이 지금 자세히 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좁고, 가까울까.. 그곳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세월과 함께 변해서 그럴 것이다.
¶ 정말 오랜만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천주교회 공식 월간지, 경향잡지를 보게 되었다. 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날짜가 많이 지난 실제의 책을 보기도 했지만, 요새는 인터넷으로 그런대로 편하게 접할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진짜 책’으로 느끼는 그 편안하고 게으른 느낌은 ‘절대로’ 이 곳을 통해서 얻을 수는 없다. 진짜 책이 주는 느낌을 ‘전자 책’ 의 형태로 옮기려면 생각보다 더 긴 세월과 더 큰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에 발행된 2012년 6월호를 훑어 보다가 정말 우연히 ‘성염‘이라는 저자의 글의 시작 부분을 읽게 되었다. 기사의 제목은 “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하느님 나라의 초석: 사회적 사랑, 「신국론(De civitate Dei)」” 이라는 아주 거창한 것이다. 나는 이 ‘성염’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제목이 주는 느낌이 ‘역사적인 종교론’ 이고 특히 로마제국이 등장을 해서 나의 눈길을 잡았다. 요새 급속히 세속화 되어가는 선진국 문화에 대한 경고를 4세기 때의 ‘사건’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희망을 하며 읽다가 다음의 ‘해괴한 변증‘에서 손을 놓고 말았다.
제3천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국이 이른바 ‘9·11 테러’를 당한 후유증으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를 상대로 벌이는 무차별한 군사행동, UN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제정치와 세계윤리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린 그 포학성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인류 지성계의 심각한 번뇌를 염두에 두면, 「신국론」은 현대에도 읽힐 만한 명분이 되고 남는다.
세계문학전집에 이 책이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 ‘하느님의 도성(civitas Dei)’을 다룬 「신국론」은 다섯 단원, 22권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1-10권)는 로마 몰락이 그리스도교 탓이라던 로마 지성인들에게 건네는 호교론으로, 그들의 종교와 역사가 정치사회에도, 도덕적 문화에도 불완전했음을 밝혀 보인다.
기묘하게 반달족의 쇠퇴하는 로마제국 약탈사건을 미국의 9.11 테러와 대비시키는 저자는 과연 ‘어떤 머리’를 가진 ‘로마 교황 대사’인가? 그런 해괴하고, 일방적인 논리로 어떻게 그는 학생들을, 그것도 ‘사랑의 하느님’에 관해 가르친단 말인가? 나는 “인류 지성계의 심각한 번뇌를 염두에 두는” 이 성염이라는 인간이 절대로 대한민국의 main-stream 의 일부가 아니라는 희망만 할 뿐이다.
내가 본 글이 주는 느낌이 out-of-context에서 나왔을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류지성계의 심각한 번뇌‘와 이 저자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context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out-of-context’ 가 주는 느낌은 느낌 정도가 아니라 ‘성염’이라는 사람 자체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현재 대한민국, 그것도 천주교계가 아직도 ‘사상’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한 물 지나간 ‘사상’을 종교와 기묘하게, 그것도 ‘지식인’의 이름으로 cocktail하는 것이 어떻게 ‘경향잡지의 desk를 통과했는지 앞으로는 더 주의를 해서 읽기로 했다.
아틀란타 성체대회,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AEC2012.. 올해의 아틀란타 성체대회가 아틀란타 국제공항 옆에 위치한 거대한 Georgi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에서 30,000+ 명이 넘는 아틀란타 대교구 지역의 가톨릭 형제, 자매들이 참가해 뜨거운 열기에 찬 파견미사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올해로 50주년이 되는 세계 성체대회, IEC 2012 가 아일랜드, 더블린 (Dublin, Ireland)에서 서서히 막을 올리고 있다.
이런 대규모 모임은 모두 예수님의 성체(성사), Eucharist에 관한 주제로 열리는 것으로, 모든 행사의 초점은 역시 ‘예수님의 몸과 피(성체, 성혈)’에 모여진다. 이런 까닭에 이 대회는 전례력으로 매년 6월 쯤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The Solemnity of the Most Holy Body and Blood of Christ“을 전후로 열리게 되고 올해는 그날이 바로 6월 10일로써 그전의 이틀, 6월 8일, 9일에 걸쳐서 열렸다.
아마도 더블린의 세계 성체대회도 이날에 맞추어 열리는 것일 것이다. 나는 작년에 ‘난생’ 처음 이곳 아틀란타 성체대회에 참가해서 기대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얻게 되어, 올해도 꼭 가리라 계획을 했었고, 결국은 ‘무사히’ 연숙과 같이 참가를 하게 되었다.
작년 6월 아틀란타 성체대회에서의 느낌을 적은 나의 blog에도 있었듯이, 내가 이 대회에서 제일 기대하는 것은 ‘성체’에 관한 것 보다는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는 나와 비슷한 ‘인생,세계,우주관’을 가지 형제,자매들과 그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의 ‘열기’를 느끼고 보는 것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서, ‘종교와 믿음의 자유’가 사회적, 정치적으로 제한, 차별을 당하는 느낌을 받으며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 졌다. 한마디로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라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더욱이, 소위 ‘자유세계의 지도자’라는 바락 오바마(Barak Obama) 와 조 바이든(Joe Biden) 이라는 인간들이 자기들은 ‘동성 결합’ 에 ‘절대’ 문제가 없다는 발언이 나온 뒤에는 무언가 세상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들이 모여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올해의 성체대회는 또 다른 사명을 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6월에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장마 monsoon 성 날씨로 수영장이 파리를 날릴 정도로 시원한 날씨가 계속되어서 더욱 쾌적한 성체 대회가 되었고, 3만+ 명, 거대한 수의 사람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아무런 사고 없이 움직이는 것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이런 것은 나의 육체를 그곳에 끌고 가지 않았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미국본당과 한국본당 두 곳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우리들은 백인, 한국인 이외 제3의 형제,자매들을 그곳에서 경험한다. 엄청난 수의 Hispanic (주로 중남미, 카리비안), 나날이 늘고 있는 Vietnamese(월남인) 계통의 가톨릭 신자들이다. 아틀란타 대주교님까지 흑인이고 보면, 이런 경향이 미국 가톨릭의 미래 모습을 보여준다 고나 할까.
특히 작년에 이곳에 왔을 때 느낀 것이지만 월남계 가톨릭의 눈부신 발전은 정말 눈에 부시다. 그들보다 이민 역사가 더 긴 한국계나 중국계를 완전히 제치고 동양계에서, 아마도 그들이 앞서서 우리들까지 이끌고 나갈지도 모른다. 프랑스 식민통치에 의한 ‘빌려온’ 신앙이지만 그들이 이미 이곳 성체대회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따로 모임을 갖게 된 것,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한국계 신자들의 참여는 확실히 작년에 비하면 현저하게 늘었다. 본당도 한 곳에서 두 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과 둘루스 성 김대건 성당, 이 되어서 그 들을 대표하는 banner를 가지고 입장도 해서, 참 보기에도 좋았다. 특히 어린애들을 가진 부모들이 많이 참여를 해서 흐뭇했는데, 그들이 앞으로 언젠가는 우리 공동체를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남는’ 나이 든 (우리를 포함) 세대와 어린애들 부모들을 제외한 주류세대(30~50대)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물론 가정을 책임진 입장에서 시간이 남아 돌 리는 없을 것이지만.. 나도 그 당시에 그렇게 살았기에, 지금은 서서히 후회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았지만,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 생산적, 의미 있게’ 쓰며 살았을까 하는 것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올해 성체대회의 slogan은 위에 있듯이 We though many are one body under Christ 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할이 다른 ‘지체, branch’는 여럿이지만 몸, body는 하나라는 뜻이다. 나날이 줄어드는 신학생, 목자, 사제, 수도자, 수녀님들의 수는 누구나 의 관심 사일 수밖에 없어서 작년부터는 성체대회의 모든 에너지가 ‘성소, vocation‘에 모아지고 있다.
듣기에 아프리카,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는 오히려 목자의 수가 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예외에 속할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는 세속적, 상업적 문화는 가히 경악할 정도인 것일까? 특히 유럽의 세속화, 탈 교회 경향은 가공할 정도라고 한다. 미국도 질세라 그 뒤를 따르기 시작을 했는가.. 이것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단결된’ 교회세력, 특히 잘 조직화 된 가톨릭 교회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올해도 낯익은 얼굴이 대회를 이끌었다. 바로 local TV Fox 5의 News Anchor인 Russ Spencer,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이 성체대회의 고정 멤버일 정도로 매년 ‘봉사’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극우적’인 Fox TV를 싫어하지만, 이 anchor는 아주 reasonable한 신앙인으로 보였다. 6명이나 되는 자녀를 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천주교인인지 대강 짐작이 간다. 말도 잘하고, 용모도 좋고, 신앙심도 좋은 인기인,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대주교님도 항상 그를 my best friend라고 부른다. 대주교가 뉴스를 타게 되면 반드시 Fox news를 통해서 나오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작년에는 프로그램 전부를, 점심때를 제외하고, 경청해서, 대회장 밖에서 열리는 다양한 활동을 못 보았다. 그래서 올해는 중간 중간에 hallway로 나와서 여러 가지를 보기도 했다. 대부분 수녀회,수도회, 신앙단체를 소개하는 desk였지만, 상업적인 것으로 종교서적, 각종 video, audio disc, 묵주, T-shirts등도 있어서 신선한 공기와 더불어 기분 전환을 하기에 좋았다. 특히 Adoration Chapel (성체조배실)도 올해는 잊지 않고 방문을 해 보았다. 그곳에서 우연히 우리 미국본당의 주임신부 Fr. Darragh도 볼 수 있었다.
또한 특별 전시물도 있었는데, 그 중에 제일 인상적인 것이: ‘성체의 기적’에 관한 ‘유물’이었다. 이것은 The Real Presence Association이란 곳에서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나도 언젠가 이야기로 들었던 것이었다. 그것 중에는 ‘Miracle of Luciano’ 가 있는데, 미사 중 성체성사 때, 실제로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 case였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예전에는 나도 쉽게 무시해 버렸던 역사적 사실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나는 그것을 믿게 된 것이다. 쉽지 않지만, 나는 이제는 믿는다. 이래서 ‘신앙의 신비’라고 했던가?
Deacon Jones, Fr. Leo, Emcee Russ Spencer
올해, 초청 speaker 중에 제일 ‘유쾌’했던 분은 바로 필린핀 출신 미국 신부님인 Fr. Leo Patalinghug, 이름의 느낌으로, 나는 태국 출신인줄 알았다. 볼티모어 Baltimore, MD 지역에서 유명한 신부님인데, 요리가 프로급으로 아마도 요리를 제일 잘하는 신부님일 것이라고 한다. 요리로 선교도 한다는데, 그것보다 ‘조그맣고 젊은’ 이 동양 사제는 정말 말을 유창한 영어로 잘, 재미있게 해서 웃음이 끝이지 않았다. 젊은 나이로 보아서 앞으로 정말 크게 기대가 되는 star라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개신교, 그것도 ‘지독한’ 쪽인 evangelical Christian에서 ‘개종’을 한 흑인 부제, Deacon Alex Jones라는 사람, 이 부제님도 참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를 ‘경험에서’ 우러나온 솔직함으로 우렁차게 전했다. 요새 개신교, 특히 ‘대형 교회’가 많은 문제를 노출하면서 신앙을 버리거나 개종을 하는 news가 종종 있다. 아마도 이 부제님도 그런 case였을 것이다.
5시에 시작된 마감미사, 특전미사, vigil Mass가 이 성체대회의 ‘절정’이다.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이 미사의 ‘성체성사’를 기다린다. 거의 3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영성체를 하는 것은 정말 보기에도 장엄하다고 할까.. 이것을 안 하고 일찍 자리를 뜬 사람들은 사실, ‘결정적’인 것을 놓치는 것이다. 올해도 작년과 같이 영성체의 느낌이 아주 좋았다. 비록 대주교님으로부터 직접 받지는 않았어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쾌적하게 넓고 큰 대형버스와 점심때의 맛있는 김밥까지 무료로 서비스를 해 준 우리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의 선교부 형제 자매들.. 코가 시큰하게 느껴지는, 고마움 뿐이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으면, 희망을 하고, 우리 (나와 연숙)도 또 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본다.
성체대회에 참가한 성가대 그룹
대주교님의 개회 선언, 아틀란타 성체대회, 2012
아틀란타 성체대회, 입장하는 성체를 보며
수많은 Banner들과 같이 들어오는 순교자와 김대건 한인성당 들
전시 홀에서 보이는 레지오 마리애 선교단
AEC 2012, merchandise and vendors in concourse area
요새 새로 생긴 ‘소일거리, time-killer’ 중에는 옛날 내가 소싯적일 때의 신문을 보는 것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과거에는 ‘너무나 비싸서, 거의’ 불가능 했던 것들이 마음만 먹으면 거의 무료, 아니면 값싸게 다가온다. 이것도 조금 오래 산 보람중의 하나다. 소싯적이란 때도 그리 짧은 것이 아니어서, 요새는 특별히 반세기라는 이정표에 그 시기를 맞추어서, 그 당시를 회상해 본다.
반세기, 역사시간에 그것은 아득하게 긴 시간으로 들렸지만, 이제 보니, 아직도 기억이 또렷한 것들도 많아서 그 정도로 긴 것 같지 않다. 50년 전이라면, 1962년 6월이 되고 그 당시 나는 서울 중앙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그 나이에 당시의 ‘한자 투성이’ 신문을 쉽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읽는다 하더라도 거의 모두 ‘관심 밖’의 일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보며 그 ‘사건’들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은 뜻 깊고, 보람된 일이라고 느껴진다.
50년 전의 이맘때의 ‘시사’를 그런대로 기억한다. 5.16 혁명이 비교적 안정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신선한 기분으로 ‘재건‘이란 말을 염두에 두며 뛰었다. 정치적인 안정은 그런대로 경제 문제로 에너지가 집중이 되면서 ‘우리도 잘 살아보자‘ 라는 구호로 이어진다. 그래서 기억에 그 해 4월 쯤에 경복궁 안에서 ‘산업박람회‘라는 것이 열렸고 나도 그곳에 가 보았다. 그때 나에게 인상적인 ‘상품’은 일본회사의 ‘칼피스’ 같은 자동 주스기 였는데, 물론 값이 아주 비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뉴스’에 속했다. 진짜 문제는 새로 부각된 ‘한미행정협정’이란 골치 아픈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이것에 대해서 나의 가정교사였던 김용기 형으로부터 이것에 대해 ‘쉽게 설명되어’ 듣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의 범죄를 어느 정도 우리 정부가 처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것인가는 어렸던 나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번번히 미군들이 우리동포들의 인권을 ‘무참히’ 유린하는 신문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에 아직도 손이 부르르 떨게 되는 사건은, 미군들이 집단으로 위안부(직업여성들)의 머리를 삭발시키고 도로포장용 tar (까만 ‘타마구’)를 머리에 붓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던 끔찍한 일이었다. 그것이 신문에 사진으로 까지 나왔으니.. 국민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이런 사건이 왜 그렇게 처리하기 어려운가는 간단히 말해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들은 치외법권적인 절대적 특혜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형사문제가 생기면 전적으로 미국의 법에 의해서 처리가 되었고, 그것은 우리들의 ‘울분’을 조금도 씻어주질 못했다. 여기에 역시, 또, 우리의 자랑스런 혈기 왕성한 ‘고대생’ 형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고려대학 전체의 영웅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분명히 그들은 ‘민족적 민주주의 교육의 요람‘ 이었다. 물론 그런 항의데모는 곧 바로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거의 언제나 그들이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사건은 정말 한미당국의 ‘고도의 정치 기술’을 요하는 민감한 사건들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위치는 거의 대한민국의 보호자 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짐을 싸서 가버리면 바로 그 다음날 김일성의 탱크가 의정부 가도로 행진을 할 것은 거의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국가자체의 생존문제가 걸린 것이다.
그날 일어난 고대생 평화적 시위는 이 골치 아픈 문제의 해결을 향한 길고도 긴 여정의 첫 발을 띄게 하는 역사적인 것이었다. “반미는 곧 용공” 이라는 슬픈 등식이 횡행하던 때, 그런 반미시위는 고도의 용기와 기술이 필요한 것이었고, 국민 감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정부 측인 군사정부도 사실을 마찬가지였다. 그 혈기왕성한 군인들이라고 우리 동포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에 대해서 남들과 다르게 느낄 리가 있을까? 그날 곧바로 박정희(최고회의 의장)의 성명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전적으로 학생들과 동감‘이라는 요지는 사실 파격적인 발언이었고, 이 시위가 그런대로 control된 상태로 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사건들은 특히 김일성이 ‘절대로 좋아하는’ 사건들이었고, 그 당시 그들의 방송을 들어보면,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빨리 “미제도당”의 군대를 철수시킬 때가 되었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그 당시 고대생들의 성명을 보면 그들은 ‘절대로 반미, 반정부 적이 아니라’ 고 누누이 강조를 했다. 그것은 또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 동포가 미군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인권이 침해 당하지 않게 하라는 요구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위는 평화적이었다. 고대생들의 결의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하여 공동의 적과 싸워 피로써 맺어진 한국과 미국의 상호관계가 미국으로 보아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며 한국으로서는 심히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접종하는 불상사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손상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일부 몰지각한 미군인들 에 의한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만행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의 격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미 양국이 주권국가로서 서로 존중하여 양국의 권리와 의무를 명백히 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서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한국인의 정당한 요구로서 성명한다.
6.25 이후 미국군대 주변에서 빈번히 일어난 한국인 ‘린치’ 사건과 이를 둘러싸고 자주 논의된 행정협정체결 문제가 아직까지도 뚜렷한 이유 없이 지연되어 왔음은 심히 유감 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미국인의 인도주의에 호소하여 인권의 침해와 인간존엄을 유린하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장 합리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타국에서와 같이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요청한다.
고대생들의 대 정부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봉이며 ‘심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어났던 ‘린치’ 사건은 미 국민 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정부의 무능한 소치다. 정부는 성의를 다하여 주권국민임을 해외에 선언하라.
1962년 6월 6일, 군사정부 계엄령하에서 일어난 고대생들의
한미행정협정 촉구 데모, 평화적인 시위였다
지금 이 사건을 되돌아 보면서 느낀다. 그 당시의 객관적인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통계를 감안하지 않고서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우리를 앞서 갔던 일본의 경우를 보면 간단하다. 국가 안보 다음에 ‘통하는 것’이 경제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그 당시 대한민국은 소위 말하는 ‘후진국’이었다. 일단 전쟁은 끝냈지만,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실정이었던 것이고 국가 안보와 직결이 되었던 미국의 원조와 미군의 존재는 거의 ‘성역‘에 속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어찌 그것을 몰랐으랴.. 대학생의 절규를 그들도 못지않게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불행의 ‘원죄’를 만든 민족반역자, 1급 전범 김일성 개XX 를 견제하며, 경제개발을 해야 했던 군사정부, 박정희 정권이었다. 단 한가지.. 경제적인 안정과 성장 그것만이 고대생들이 절규했던 동등한 지위에서의 한미행정협정을 가능케 하리라는 것이 당시 정권의 믿음이었다. 비록 군사정권 하에서 ‘시위금지’ 라는 법을 어겼지만, 고대생들은 결과적으로 군사정권이 더욱 경제개발에 총력을 하게하는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6월 6일, 달력이 빨갛다. 바보 같은 본당(that is,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달력이 ‘고국에서 주문을 받아와서’, 친애하는 고국의 국경일이 모두 빨갛게 표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올해 (최소한) 한해는 고국의 국경일을 ‘느끼며’ 살게 되었다. 고국에 달력을 주문해서 얼마나 돈을 절약했는지는 몰라도, 참 해도 너무했다. 그곳의 국경일들을 빨갛게 ‘강조’ 했으면, ‘고객이 거의 일년 열두 달 사는’ 현지의 국경일, 기념일도 그랬으면 누가 때리냐? 6월 6일 현충일에 동작동 국군묘지라도 참배해야 한단 말인가?
6월 6일을 왜 이승만 대통령께서 현충일로 정했는지 유래는 확실치 않아도, 이곳에서 6월 6일은 1944년 6월 6일을 기념하는 날이고, 그날은 2차 대전시 3백만의 연합군이 프랑스의Normandy 해안으로 육,해,공의 ‘사상 최대의 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바로 D-Day인 것이다. 그 날이 없었으면 간접적으로라도 우리의 광복절도 연기가 될 수도 있었던 그렇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날인 것이다. 그것도 본당 달력에 ‘정확히’ 빠져있었다.
2004년에 이미 반세기, 50주년이 지났고 이제는 사실 60주년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특별히 이날을 생각하는 것은 역시 개인적인 추억과 그것과 관련된 영화, The Longest Day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1948년 생인 내가 그날을 어찌 기억하랴마는, 사실처럼 그려낸 영화의 역할이 내가 직접 그때를 겪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는 데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 The Longest Day는 컴퓨터로 특수효과를 ‘조작’ 한 만화 같은 요새 영화들이 아니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만든 1962년 미국 ‘흑백’ 영화 ‘The Longest Day‘ 인 것이다. 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영화를 나는 1963년도 중앙고 1학년 때, 남산 밑, 퇴계로에 있던 ‘개봉관’ 대한극장에서, 학교에서 단체로 가서 보았다.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궁금해서, 그 당시의 일간지를 찾아보았지만, 그 영화의 광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1962년의 영화이기 때문에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려면 빨라도 1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고, 고1때 본 기억이 분명해서, 1963년일 것인데.. 왜 그 영화의 광고는 신문에 없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The Longest Day, the theme song – Paul Anka – 1962
그 당시에 이 영화의 ‘역사적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저 ‘우리의 멋진 친구인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이 ‘나쁜 놈들,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는 기분 좋은 스토리라는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우리들은’그 영화를 참 재미없게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영화는 재미있게 만들어진 얘기 같은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직하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영화처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있는 climax같은 것도 그 영화에는 없었고,특히 끝나는 장면은 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완이라도 해 주듯이, 엄청나게 많은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동원되었고, Paul Anka의 영화 주제곡은 영화의 심각성을 잘 나타낼 수 있어서, 조금은 덜 지루할 수 있었다. 이 주제곡은 다른 영화 ‘콰이강의 다리’ 와 같은 정도로 우리들이 두고두고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기에 좋았다. 특히 기억에, 우리 반에 ‘조광순‘이라는 친구, 원래 노래를 잘 부르는데, 이 영화를 보고 학교로 돌아와서부터 복도건 교실이건 가리지 않고 따라 부르곤 했다.
다른 기억으로는, 우리 학교에서 단체로 대한극장에 들어갔을 때, 이미 전회의 상영이 끝나고 있었는데 보니까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또래의 여학생들이었다. 과연 그 ‘여학생’들이 이 영화를 ‘졸지 않고’ 보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또한, 다른 생각에 이 영화는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크기 돈을 못 벌었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아마도 신문광고를 찾기가 힘들었던 이유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면,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이 있다. 그것 중에는:
The Longest Day는 1959년 저자 Cornelius Ryan이 저술한 1944년 6월 6일 ‘하루 동안’ 일어난 연합군의 Normandy 상륙작전에 관한 역사책의 제목이다. 그러니까 non-fiction, fiction도 아닌 historybook인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과 아주 가까운 실화들인데, 이것이 영화화 되면서 판권이 당시의 금액 $175,000 (십칠만 오천 불)에 달했다.
영화에 사용된 언어들은 모두 각국의 언어를 쓰고 있고, 모두 영어로 자막을 넣었다. 하지만 배우들이 모두 영어를 쓰는 다른 것도 동시에 찍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두 가지 version이 존재하는 셈이다.
당시의 인기인 중에 주제곡을 부른 Paul Anka는 예상 외로 그는 멋지게 army ranger역할을 해 냈다.
Paul Anka
실제 인물인 Benjamin Vanderboort (중령, 82nd Airborne, 공정단)로 연기를 한 당대의 인기배우 John Wayne, 원래 이 역할은 Charlton Heston이 원하던 역이었지만 John Wayne에게 넘겨진 것이다. 대부분의 주역 배우들이 25,000불의 연기료를 받았지만 John Wayne만은 그것의 열 배인 250,000불을 요구하고 받았다고 한다.
밴더브루트 중령 역의 존 웨인, 공수부대장
82nd 낙하산 공정대가 투하되었던 프랑스의 마을 (Sainte-Mere-Eglise)의 교회당 꼭대기로 ‘잘 못’ 투하되었던 사병(Red Button의 역할)을 기념하는 실제 인형이 아직도 그곳에 걸려있다고 한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Allied Supreme Commander) 였던 General Eisenhower의 역할은 처음에 실제 인물인 미국 전 대통령의 역임했던 President Eisenhower를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그는 D-Day로부터 거의 20년이나 지나서 비교적 젊었던 그 당시의 역을 맡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연기 경력이 전혀 없었지만 그와 비슷하게 생겼던 decorator Henry Grace를 기용했다. 그의 연기를 영화에서 보면 꽤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경력 제로의 아이젠하워 역의 Henry Grace
공포영화, 드라큘라(Count Dracula)로 잘 알려진 경력 영국배우였던 Christopher Lee는 영국군으로 등장을 하려 연기심사를 받았지만, ‘군인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낙방을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2차대전시 영국 공군 정보장교로 복무를 했다고 한다.
영국 사병 Private Flanagan으로 등장을 하는 Sean Connery(숀 코네리), 특별한 연기는 아니었지만, 이 영화가 그에게는 007 James Bond로 가는 마지막 출연이 되었고, 그 이후 그는 100% James Bond가 되어 버렸다.
영국측 군인 Sean Connery 숀 코네리
Normandy의 상륙 해변 중의 하나인 Omaha Beach 상륙을 촬영할 때, 미군들 역할을 하던 extra(엑스트라)들이 시퍼런 물에 질려서 물 속으로 뛰어들지를 않았고, 이에 질려버린 Robert Mitchum (로버트 밋첨, Army General Norman Cota역)이 먼저 뛰어들고, 엑스트라들이 서서히 뛰어들었다고 한다.
총 제작비, $10,000,000(천만 불)은 1993년 이전(Steven Spielberg의 Shindler’s List가 나올 때까지)의 흑백 영화로써는 제일 비싼 제작비였다. 그 동안의 inflation을 감안한다면 천만 불은 그 당시로써는 큰 돈이었다.
낙하산 특공대, paratrooper들이 낙하하던 때 숲과 습지에서 요란히 들리던 개구리 소리는 사실 프랑스에는 없는 개구리의 소리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녹음이 된 ‘미국 개구리’ 소리였던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 쪼잔한 것 들이지만 나중에 이렇게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미국 해군당국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전함과 상륙정 등으로 지원을 해 주었지만, 그 당시 ‘빌려준’ 함정들은 이미 1960년 이후의 것으로 1944년 당시의 함정들에 비하면 훨씬 현대적인 함정들이고, 자세히 관찰을 하면 쉽게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계절의 시계는 예측할 수도 없이 별로 쓸모가 없어지고 하루 하루의 날씨가 그날에 맞는 기후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게 되었다. 3월 중순에 섭씨 30도의 날씨가 일주일 계속되고, 4월 말에 거의 빙점의 날씨, 찌는 듯이 덥던 5월이 이제는 가을처럼 시원한 6월로 접어 들었으니.. 기상전문가들은 할 말이 있을까? 하지만 특별한 energy를 쓰지 않는 날씨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요새 며칠 같이..
¶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결혼식에 둘이서 갔었다. 한인 순교자 성당 마리에타 1구역의 문요한 형제님, 지난번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단장을 역임하셨고, line dance mania group을 이끌고 있는 나이에 비해 정열적인 분.. 그분의 ‘장성한’ 아들이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한 것이다.
우리 집 두 딸이 ‘요새의 이상한 문화’에 젖어서 결혼하는 것이 cool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사실 결혼에 대한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마당에 이런 결혼식은 우리에게 참 신선하고, 참석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진다. 그곳에서 30여 년 전 우리의 결혼과 그때 만남의 의미를 생각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특히 가족, 가정, ‘정상적인 결혼’ 등의 정의와 의미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요새, 그런 ‘정상적인 결혼’을 보는 것도 큰 ‘은총’이 아닐까?
결혼식에 간 ‘부수입’으로 정말 오랜만에(1992년 이후 처음으로) 역사 깊은 본당 성가대의 솜씨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사실 새 성전이 지어진 후 처음으로 성전 앞쪽에 있는 성가대를 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성전 뒤쪽에 있었다) 그 동안 우리세대는 완전히 뒤로 물러나고 더 젊은 세대가 들어왔지만, 그래도 약간은 아직도 우리들 세대인 듯 보였고, 특히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형제, 자매인 우요셉, 마리아 부부의 반가운 모습도보였다.
우리가 있을 때의 성가대와 다른 것은 중에는, 거의 ‘프로’에 가까운 audio system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도 있었다. 우리가 주일 미사를 한국본당으로 ‘옮기게’되면 성가대에 ‘돌아와도 좋다’는 묵약은 있고, 이런 활동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 솔깃하긴 한데, 역시 오래 습관이 된 주일미사 의 고향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힘들다.
¶ 오늘은 6월 3일, 일요일이다. 천주교 전례력으로는 삼위일체 대 축일로서 신학적으로도 신비로 여겨지는 Holy Trinity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삼위일체 하면 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 참고서로 ‘삼위일체 영어(문법, 해석, 작문)’ 라는 것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신학에서는, 성부,성자, 성령(예전에는 성신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도 깊은 의미는 오리무중이다. 절대, 전능, 영원, 무한..의 절대자가 3위를 가졌다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온다. 성경을 믿으면 사실 그것도 믿어야 하니까 큰 문제는 없다.
사실 요새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이다. 하느님인 성부, 예수님인 성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성령, 그래서 Holy Spirit인가.. 신부님들의 강론을 잘 들어보면 성령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성령께 기도를 하란 말인가? 우리 순교자 본당 주임 하태수 신부님은, 기도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으라고 누누이 강조를 하신다. 그것도 알듯 모를 듯한 얘기지만, 전 보다는 훨씬 받아들임에 크게 문제가 없는 나를 발견한다. 성령만을 크게 강조하는 성령 세미나 같은 것도 있으니까, 그것의 중요함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 6월 3일.. 육 삼.. 하며 생각난 것이 6.3 사태란 것이 있었다. 4.19 같이 날짜에서 나온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난 날을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6.3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확실히 어떤 해였는지 확실치 않았다. 1964년 아니면 1965년으로 기억은 했었다. 그날은 1960년 4.19 학생혁명 이후 가장 심각한 학생데모가 난 날이었다. 그것도 5.16 군사혁명 이후, 박정희의 ‘민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비상사태’였다.
그 데모가 난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학교가 휴교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 해를 1965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65년 내가 중앙고 3학년 여름방학 전에 학생데모로 인한 비상사태로 휴교를 했던 기억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억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이번에는 확실히 ‘정답’을 찾으려고 그 당시의 일간지로 확인을 하게 되었다. 정답은 1965년이 아닌 1964년 6월 3일이었다. 1965년에 휴교를 한 것은 1964년 때와 다른 한일조약(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의 여파였던 것이다.
약간은 희미해진 1964년의 기억을 거스르며, 그 당시 신문을 보면서 (대) 학생데모로 이어지는 과정들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번도 역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것이고, 그것도 4.19와는 다르게 서울 문리대 학생들이 중심에 있었다. 군사정권에서 박정희 민간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쌓여가는 국민의 불만들을 대학생들이 다시 행동으로 보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고교 2학년이어서 사실 그 심각성이나, 의미를 잘 실감을 못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 그것도 일본 자본에 크게 의지하려는 것, 그것에 따른 한일회담 등이 굴욕적으로 보인 것, 일을 빨리 진행하려 중앙정보부를 섣불리 학원으로 투입하는 등, 사실 정책적인 실수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박정권의 의도는 의외로 간단했을 것이다. ‘경제 자립’ 이었던 것이다. 그 괴로운 과도기를 혈기왕성했던 ‘서울 문리대’ 생들이 고분고분 참을 수 있었을까? 그들이 부르짖던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 였고, 그것이 죽었다고 성토를 했다. 고려대학이 주축이 되어서 시작 되었던 4.19때와 달리 1964년에는 서울 문리대가 완전히 중심에 있었다 . 그래서 서울 문리대의 ‘용공성’ 물의까지 생겼을 것이다.
문리대 데모 주동자중의 하나인 ‘김중태‘ 는 사실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당시에 김중태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가열된 서울 문리대 주동의 데모가 6.3일에 서울 지역 대부분 대학으로 퍼지면 절정에 달하고, 그날 오후에 급기야, ‘비상계엄령’ 선포로 이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던 대학생들의 데모는 계엄령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비상계엄으로 치닫게 한 또 하나의 이유 중에는 대학생들의 구호가 심상치 않게 격해지고, ‘박정권 하야’ 까지 간 사실도 있었다. 민간정부 6개월 만에 당한 ‘정권위기’를 맞아, 박정희 정권은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권은 이런 격한 대학생들의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일본의 도움을’ 받아가며, 굴욕 외교의 모욕을 참아가며 밀어 부쳤다. 그리고 이후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역사가 되었다.
당시의 신문보도, 6.3 사태로 치닫는 대학생 데모, 1964년
서울 문리대 생들의 치열한 데모, 6.3 사태 1964년
박정권은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16 이후 처음 맞는 비상계엄령, 1964년 6월 3일
얼마 전에 1960년대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던 확실한 시기를 찾으려고 옛 신문을 인터넷으로 살피다가 (그의 방문은 1966년 11월 1일경이었다) 또, 정말 우연히 조그만 책 광고를 그곳에서 보게 되었다. 희미한 기억에 남았던 ‘규수 신인 작가, 박계형‘ 이었다. 그녀의 책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의 광고였다.
그녀의 책들은 여성, 그것도 사춘기 소녀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 당시에는 거의 뉴스거리였다. 다른 책, ‘젊음이 밤을 지날 때‘ 는 영화화 되었는데, ‘학생입장 절대불가‘ 라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고교생이던 우리들은 그저 침만 흘리던 그런 영화였다. 하지만, 그녀의 젊음, 문학성 등을 떠나서 나는 박계형이란 이름을 다시 보고 너무나 반가운 마음이 든 이유가 따로 있었다.
1965년 경, 내가 중앙고 3학년이 될 무렵에 나를 가르친 가정교사 대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는 그저 형이라고 불릴 정도의 서울 상대생이었는데, 어머님의 동창 아줌마의 아들 이건우 형의 고교, 대학 동창이라고 했다.
그 형들은 서울 명문인 서울고교 동기동창이었고, 서울 상대도 같이 다니고 있었다. 그 형의 이름이 바로 김인호 였는데, 나중에 듣기에 유명한 여자 소설가와 연애하던 사이라고 했다. 사실은 그래서 박계형이란 이름을 기억을 한 것이다. 남자 고교생들이 그런 류의 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 인호 형과 공부를 한 시간은 불과 몇 개월도 되지 않았지만, 참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공부도 공부지만, 여담이 더 흥미롭고 유익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상대생인데도 ‘과학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는지, 비록 ‘진짜인지, 허구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첨단적’인 과학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중에 3가지의 과학 이론은 나를 완전히 압도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고 나의 친구들에게도 내가 발견이라도 한 듯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 주기도 했다. 키도 훤칠하게 크고, 아주 호남형인 그 인호 형에게 ‘날리는 소설가 애인’ 이 있다고 들었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런 멋진 대학생에게 멋진 애인이 없다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가정교사를 못 하겠다고 하고, 대신 다른 ‘서울고, 서울공대’ 동창을 소개시켜주고는 떠났다. 그 형이 바로 나의 다른 blog에서 회상을 했던 서울공대 섬유공학과 송부호 형이었다. 이것은 모두 어머님의 동창 아줌마의 아들인 건우 형이 도와준 덕이었는데, 그 형과도 어머님이 타계하신 이후 소식도 모르게 되었다. 아마도 인호 형, 그러니까 김인호 형과 연락이 닿게 된다면 혹시라도 이건우 형 댁의 소식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있다.
그래서 박계형이란 이름으로 googling을 했더니, 역시 나의 짐작이 다 맞았다. 1969년에 결혼을 했다고 하고, 계속 ‘인기 작가’로 남았고, 김인호 형은 한양대학 교수로 2008년에 정년퇴임을 했고, 현재 70세에 가깝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출신고 서울고 13회 동창회에 가보면 정년퇴임식 사진들이 나오고, 47년 만에 다시 인호 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그 뚜렷한 이목구비를 어찌 잊으랴.. 이 정도가 되면 김인호 ‘형’은 노력만 하면 다시 연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고, 더 나아가서 그의 동창 친구 건우 형의 소식도 알게 되지 않을까? 사실은 그 서울고 동창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건우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아볼 길이 없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안 한다. 기대치를 최소로 유지하는 것이 ‘항상 현명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본 ‘공인’인 김인호 교수는 생각보다 더 유명한 경영학의 권위자였다. 그의 Dynamic Management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도 그만이 개발한 새로운 경영학 분야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이것도 사실 크게 이상하지 않은 것이 나와 공부를 할 당시 ‘공상과학적 논리‘를 많이 폈던 그 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사실은 ‘아마도’ 두 분이 모두 천주교 교인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의 ‘이름에서 본’ 느낌이다. 인호 형의 이름에는 Stephen이 앞에 있고 (스테파노), 박계형씨의 이름에는 ‘아나스타시아‘ 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반가운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생각을 한다.
비록 짧았던 인호 형과의 만남이었지만, ‘유명세’ 덕분에 다시 찾게 된 것은 아주 우연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한번의 기억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사라질 뿐이다. 이것은 물론 6.25 이후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미의회 고별연설에 나온 말이지만, 그 말을 이제야 실감을 한다. 한번의 인연과 추억은 ‘하루 아침에 죽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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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ing 결과, 다음과 같은 ‘인호 형’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분에 넘치도록 만족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간략하게 요약,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2011년6월에 미국LA를 방문했던 김인호, 박계형 부부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학회 참가 차(무슨 학회?) LA에 왔을 때, 박계형씨의 인터뷰에서, 씨는 2001년부터 그 전 20년간의 문필공백기를 깨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그 중에서 ‘환희‘라는 작품은 번역이 되어서 서서히 bestseller로 오르고 있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아마도 젊은 시절, 인기절정 시절에서 결혼 후 ‘평범한 내조 주부’ 로 변신했고, 자식들이 다 성장한 이후 다시 문단 계로 복귀를 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그 주부 시절은 아마도 ‘대학교수 김인호’의 부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나의 큰 관심을 끌었던 소식은 5년 전, 2007년 6월 평화신문(가톨릭 매체)의 기사였다. 이기사는 위에 언급된 ‘번역’된 작품, ‘환희(A Life)’ 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배경을 밝힌다.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영문판으로 출판이 되고, bestseller 1위에 올랐다는 사실도 놀랍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씨의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평화신문이 가톨릭 신문이라 짐작은 갔지만, 이런 대작이 그녀의 신앙과 결부가 되어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일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서, 일생의 동반자로 살아온 인호 형도 같은 level의 신앙을 지녀오지 않았을까? 그 옛날, 대학생 시절의 형이 가톨릭인지 아닌지 전혀 기억이 없다. 그 옛날 19세 ‘소녀’로 세간을 놀라게 한 ‘젊음이 밤을 지날 때’ 같은 ‘학생입장 불가’ 급의 책의 저자가 기나긴 여정 끝에 고향을 찾은 것일까?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라는 씨의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해 준다고 나는 믿는다.
제일 오래 된 씨의 기사는 10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58세였던 씨가 20년의 ‘잠적’에서 나온 때였던 모양이었다. 많은 우리또래의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이, 씨의 문단 등장시의 심경을 들려준다. 한마디로 “제 작품이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어요.” 라는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19세의 ‘소녀적 꿈’으로 세상을 그렸던 것이 58세 뒤에 어떻게 보였겠는가? 나는 부끄럽기보다는, 내가 많이 성숙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인터뷰에서 나에게 더 유익한 것을 알게 되 것 중에는, 1969년에 인호 형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 본명이 ‘박숙자‘ 라는 너무나 평범한 이름이라는 등..
¶ 오월이여 안녕! 한 달이 온통 ‘가정, 가족, 졸업식, 어린이, 어머니, 성모님‘ 같은 정말 듣기만 해도 포근한 것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의 어머님께서 9년 전에 선종하셨던 달이기도 해서 가족과 삶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던 그런 한 달이기도 했다.
비록 거의 기정사실화 된 기후변동(a.k.a global warming)으로 예전의 6월 같은 날씨들이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특히 요새는 ‘날씨’에 둔감해 지려고 거의 ‘일부러’ 날씨에 관한 작은 뉴스는 피하고 있고, 그것이 ‘확실히’ 심리적으로 나를 편안하게 함을 느낀다. 더우면 어떻게 추우면 어떠랴.. 참거나, 잊고 살면 되는 것을.. 또한 작년에 비하면 날씨에 관한 big news는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하긴 했다. 작년의 그 ‘monster‘ tornado등을 아직도 기억하기에 더욱 그렇다.
¶ Robin Gibb 5월 20일에, 오래 전 60/70시절 우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Bee Gees [BGs: Brothers of Gibbs] 형제의 중간인, Robin Gibb이 암 투병 중 합병증으로 결국은 62세란 요새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을 한 것이다. 그 그룹의 세 형제 말고도 아주 오래 전에 네 번째, ‘막내 동생’ Andy는 이미 (여자문제로)사망을 했고, 2000년대 초에는 세 번째 Maurice도 병으로 사망.. 이제 맏형 Barry만 남은 것이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심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과 같은 ‘예술인’들은 영원히 뒤에 남기고 떠나는 것들이 있어서 부럽기도 하다. 나에게 그들이 남긴 것 중에는 60년대의 것이 ‘진짜’의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70년대의 ‘disco 외도’는 잊고 싶은 것들 뿐이다. 최근 몇 주간 지저분한 소식들 투성이였던 모든 news (Internet, TV etc)를 피하며 지내는 바람이 그가 운명한 소식을 이제야 알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또한 우리 세대의 인물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가고 있음을 어찌 모르랴.
Run To Me – Bee Gees – 1972
¶ 공돌이의 오기惡氣 얼마 전에 우리 집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세탁기(electric washer)가 말썽을 부렸다. 빨래를 할 때마다 ‘지독히도’ 요동을 치면서 그동안 아주 조금씩 새던 물이 이제는 ‘콸콸’ 샌 것이다. 공구들을 손에서 놓고 산 것이 꽤 오래 되어서 (거의 1년) 사실 이런 ‘사고’는 너무나 귀찮게 느껴졌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세 가지 뿐이다. (1) 나보다 ‘더 바보 같은’ handyman을 불러서 고치게 하던가, (2)고칠 수 없으면 새것을 사던가, 아니면 (3) 내가 팔을 걷어 붙이던가. 1번 선택은 나에게는 거의 절대로 no no인 것이다. 대부분이 ‘엉터리, 사기꾼’ 같은 놈들 뿐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잘 모르는 바보들 뿐이기 때문이다. 2번의 선택도 가급적 끝까지 피하고 싶은 것이다. 돈을 쓰는 것 이외에, 멀쩡할 수도 있는 세탁기를 분명히 내다 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에게 choice는 역시 내가 팔을 걷고 muscle과 brain을 써야 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의 washer는 1984년에 Columbus, Ohio에서 학생시절에 Sears에서 산 Kenmore classic model인데, 한마디로 완전한 ‘탱크’와 같이 우직하게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고장이 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모양이고, 사실 거의 30년 가깝게 딱 한번 timer/controller 만 교체를 한 것으로 나머지 기계적으로는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이제 정까지 들게 된 우리 집의 ‘값싼 가보’가 된 존재인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비장한 각오로 이것을 살려 보기로 하고 ‘공돌이의 오기’로 분해를 해서 살펴 보았다. 결과적으로 나의 추측이 맞았다. 크게 ‘망가진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나사 같은 것이 모조리 풀어져서 물이 샌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Washing cycle중에서 가끔 balance가 맞지 않으면 격하게 요동을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아주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그 fastener들이 모조리 풀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30년에 가까운 이 세탁기는 안락사 직전에 다시 한번 생명을 연장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한가지다. 이것이 심하게 vibration을 못하게 ‘꼭 잡아주는’ 장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되면 앞으로 최소한 몇 년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참, Sears Kenmore people들, 어쩌면 그 당시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이것이야말로 Made in U.S.A의 표본이다.
¶ Vice Presidency 미국의 부통령 직, 어떤 자리일까? 이것의 정의와 의미를 따지자면 책 몇 권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다. 그만큼 독특한 위치이기 때문일까? 역사적으로도 그것이 증명이 된다.
얼마 전에 Time 잡지에 Robert Caro라는 LBJ(Lyndon B Johnson) biographer(전기작가)의 말이 등장했다. 그는 일생을 1960년대 미국 정계를 주름잡았던 부통령, 대통령 Lyndon B. Johnson의 연구로 보낸 인물이다. ‘사고’1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되고, 다시 한번 선거로 한번 대통령을 하고 스스로 물러나 난 전설적인 Johnson 대통령, 비록 월남전에서 고전했지만, 국내 정치는 빛나는 업적이 수도 없이 많은 인물이다.
1965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그를 기억한다. 수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묵묵하게 하나하나 성과에 성과를 쌓고 조용히 물러난 것, 참 멋지다. 그 인간상을 연구했던 Robert Caro의 한마디가 참 인상적이다. 지난번 선거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John McCain이 그의 running mate로 완전한 ‘들러리 간판’격이었던 Sarah Palin이란 ‘바보 같은 여자’를 선택한 것에 대한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 역사상 가장 무책임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나도 절대로 동감이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것은 McCain자신은 ‘아직도’ 그 선택이 자기 일생에서 가장 ‘멋지고, 신중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의 radar에서 McCain이란 인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Reading by Typing으로 ‘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 라는 긴 제목의 한국 예수회 류해욱 신부님 번역서를 5일만에 ‘무사히’ 다 읽게 되었다. 제일 확실하게 끝까지 책 하나를 정독하는 방법 중에 이렇게 typing을 해서 읽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몇 년 전에 알아내고 그 이후로 꼭 읽어야 할 것이 있으면 이런 방식으로 한다. 머릿속에 남는 것 외에 부수입으로 ‘거의 완전한’ digital softcopy가 하나 생기는 매력 있는 방법이다.
이 책도 요새 읽는 다른 좋은 책들과 마찬가지로 ‘우연히 화장실’에서 발견한 책이고, 우리가 속한 레지오 마리애의 꾸리아1 에서 구입한 책 중의 하나였고 연숙이 잠시 빌려온 것이다.
이 책이 나의 눈을 끈 것은 번역자가 류해욱 예수회 신부라는 사실과, 책의 내용이 의학적 과학과 영성적 신앙을 접목시키려는 저자, 레이첼 나오미 레멘의 ‘영웅적’인 노력과 그에 따른 무시 못할 임상, 상담적 성과가 아주 읽기 좋은 분량으로 쓰여진 사실에 있었다.
이 책은 미국에서 1997년에 처음 출판된 New York Times의 bestseller였고, 2006년에는 10th Anniversary Edition(10주년 기념 판)이 나올 정도로 오랫동안 ‘생각하며 사는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가슴이 따뜻해 지는’ 그런 책이다. 원제목은 Kitchen Table Wisdom으로 되어있다.
제목이 풍기는 것은 ‘가까운 가족, 친지들 사이에서 얘기되는 지혜들’ 인데, 시대를 앞서가는 첨단적, 과학적, 전문직에서 종사하는 저자도 그들 동료들로부터 예상되는 의심스러운 색안경 속의 눈초리를 의식 안 했을 리가 없어서 이렇게 조금은 ‘푸근하고, 덜 심각하게 느껴지는’ 제목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유대인들, 그의 혈통을 지닌 저자는 비록 그의 부모는 거의 무신론자에 가깝다고 했지만, 어찌 ‘피를 속이랴’. 그를 보완이라도 하듯 그녀의 할아버지가 도맡아서 그녀 어린 시절 착실하게 ‘영성적인 세계’의 맛을 그녀에게 보여 주신 것이 아마도 현재의 그녀를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을 해 본다.
그렇게 해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의학, 과학’ 위에 있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안 보이는 것’을 보이는 현실세계로 끌어 들이려 했을 것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나도 그런 것을 과학자로서 이단이라고 매도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고, 저자의 의도와 행동을 100% 이해하고 찬성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번역한 (요새는 옮긴다는 말을 더 많이 쓰는 듯), 류해욱 예수회 신부님은 이름도 얼굴도 낯 익은 ‘문학청년처럼 보이는’ 사제이다. 그는 내가 속한 이곳의 한국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한국교구 파견 사제로 2000년 대에 사목을 했었고, 올 봄에 잠깐 이곳을 다녀 가셨다. 그 당시 나는 그곳 성당을 다니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많이 그분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시, 글, 그림 같은 것을 프로처럼 한다는 것을 그때 전해 들었다. 그래서 ‘글’ 과는 가까운 사제라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 배경을 알고 이 책을 자세히 읽어보며, 한마디로 이 책은 ‘두 박자’가 완전히 맞아 떨어진 ‘걸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원저자의 ‘솔직한 고백’같은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 이외에, 영어를 한국어로 옮긴 류신부님의 ‘옮긴 솜씨와 기술’은 근래 보기 드문 ‘걸작’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느낌의 번역은 참 보기 힘든 것이었다. 문제는 의역과 직역의 balance를 어떻게 그렇게 멋지게 소화를 시키셨을까 하는 것인데, 아마도 류신부는 그런 쪽에 talent를 갖고 계신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저자는 주로 암 같은 ‘불치병’을 가진 사람들이 겪게 되는 삶에 대한 새로운 생각, 느낌들을 참 정성스럽게, 성실하게, ‘비과학적’으로 잘도 그려냈다. 내가 그런 환자라고 생각하면 그녀의 불치병으로의 접근 방식을 99.9% 찬성을 안 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한마디로 ‘느린 컴퓨터’가 아닌 그 이상, 과학이나 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모든 삶과 죽음에는 무언가 찾을 수 있는 ‘의미’가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는 것이 주제이다.
나의 주변에 알고 있는 ‘암 환자’ 들을 보면서, 이런 용감한 ‘과학자, 의사’들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거의 완전히 컴퓨터에 의지하려는 (인간보다 덜 실수를 해서 그런가?) 요새의 최첨단 의술을 신봉하는 의료인들, 그들도 사실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갈등을 하고 있을 지 모르겠고, 그들도 조금은 ‘인간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제넘은 생각도 들었다.
책을 다 읽고, 이 책을 추천하며 머리글을 쓴 ‘장영희’란 서강대 교수, 사람이 궁금해 져서 연숙에게 물어보았다가, 그 분이 역시 머리글에 있듯이 ‘척추암’으로 타계를 한지 꽤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장교수가 우리가 오래 전, 학교 다닐 당시 책 등으로 잘 알려진 서울대 장왕록 교수, 그분의 따님이었다는 사실도 뒤 늦게 알게 되었다. 아버지, 딸 모두 영문학자가 된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또한 이제 두 분다 이세상 사람이 아님에 숙연해 지는 마음, 한참 동안 떨칠 수가 없었다.
Dr. Rachel Naomi Remen – The Awe & Power of the Life
Curia, 레지오 마리애의 군대식 조직에서 제일 낮은 등급인 쁘레시디움(소대 격)을 관할하는 상급 평의회 (중대 급) ↩
어렸을 적에 읽었던 책들 중에 학교나 입시공부와 관련이 거의 없이, 그저 교양, 호기심에 의지해서 접했던 것들.. 사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런 ‘보물’들이 더 기억이 나고, 꿈에서라도 그 ‘실물’을 다시 만져보고 싶을 때도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것들도 ‘골동품’ 류의 가치에 포함될 듯 싶고, 왜 그렇게 ‘오래 된’ 것들이 비쌀 수 있었을까 하던 의문들이 조금씩 풀린다. 내가 말하는 개인 적인 골동품은 사실 불과 50년도 채 안 되는 것들인데도 나에게는 수백 년도 넘게 느껴지기도 하니 분명히 그런 것들은 개인적인 골동품, 고서, 유물에 속한다.
그런 ‘유물’들 중에, 1964년 경, 그러니까 나의 중앙고교 2학년 시절.. 50년 가까이 되던 오랜 옛날에 읽었던 책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 용산구 남영동 금성극장 앞쪽, 미8군 ‘연병장’옆 있던, 남산이 가까이 바로 앞에 보이던 2층집에서 살 때였다. 가회동 시절 삼청동 뒷산, 말바위, 북악산, 중앙중학교 뒤의 계산 등에서 놀았던 것과, 친구들과 남산을 오른 것 등이 그때까지 나의 등산경력의 전부였던 때, 이 ‘멋지고, 영웅 적인 산’ 에 관한 책, Banner in the Sky를 읽게 된 것이다. 당시 번역본 제목은 ‘알프스의 붉은 깃발‘ 이었을 것인데, 나는 그 오랜 동안 ‘알프스의 푸른 깃발’로 ‘잘 못’ 기억하고 살았다.
이 책의 저자는 James Ramsey Ullman(1907~1971)이라는 미국, 뉴욕의 언론인 출신, 등산애호가였던 사람이다. 주로 산에 관한 소설 책을 많이 썼는데, 그 중에 이 책은 1955년에 출판 된 것이다. 1963년에 그는 미국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정대의 official historian (공식적인 기록자)으로 참가했지만 건강상 이유로 산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 책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은 물론 ‘가공’이지만 실제적 역사적인 사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시대적으로 19세기 중반, 스위스 알프스 중의 삼각형 모양의 Matterhorn 산이 이 책의 Citadel (시타델) 산이고, 그 것을 처음 등반한 인물인 영국사람도 이 책에 등장하는 Captain Winter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거의 50년이 지난 뒤에 과연 어떤 기억이 살아 남았을까? 10대의 소년이 아버지의 ‘원한을 풀려고’ 유럽에서 가장 어려운 산 시타델(Citadel)을 정복하는데 ‘일조’를 한다는 이야기.. 그가 살던 마을에서 제일 유능했던 mountain guide였던 그의 아버지는 ‘손님’ 인 등반자와 그 처녀 봉을 시도했으나 사고로 조난을 당하고 자기가 입었던 빨간 셔츠를 벗어서 손님 등반자를 보호하며 죽었고, 그것은 거의 전설처럼 남았고 그때 태어난 주인공 루디가 커서 아버지의 못 다한 소원을 채워준다는, 조금은 ‘고전적’인 이야기였다. 물론 자세히 읽어보면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plot들이 많이 있다.
그 당시 한글 번역판으로 나온 것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고, 산의 신비로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씩 자리잡게도 되었다. 당시 나의 공부를 돌봐주며 우리 집에서 잠시 같이 살았던 아르바이트 대학생 용기 형도 그 책을 재미있게 읽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용기 형과 나의 친구 안명성이 같이서 그 해 추운 겨울날, 난생 처음으로 북한산, 백운대로 등산을 가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등산 역사의 시작이 될 줄은 몇 년 후까지도 실감을 못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시작되어 미국에 오기 전까지 거의 10년 간 나의 ‘뜨거운 등산 경험들’은 사실 그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책을 완전히 잊고 살다가, 1980~1990년대에(아마도 1980년대 말) 아주 ‘우연히’ TV에서 Disney movie를 보게 되었는데, 등산에 관한 영화였다. 사실 미국에 살면서 거의 ‘등산’이란 것을 잊으며 살았고, 또한 등산에 관한 영화도 드문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무언가 어디에선가 본 듯한 story였고, 곧 바로 이 책을 기억해 내었다. 바로 그 책의 내용과 비슷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책의 영어제목을 모른 다는 사실이라 더 이상 그 책을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물론 B.I. (Before Internet) 시절이라 Googling같은 것은 상상도 못할 때여서 곧바로 포기를 했던 것이다. 그 Disney movie도 두 편으로 나누어 방영을 했는데 후편은 볼 수가 없어서 아쉽기만 했다. 그리고 또 잊었다.
몇 개월 전에, 또.. 우연히 그 책이 나에게 다가왔다. 운명인가.. 큰 딸 새로니가 이번 여름에 ‘아르바이트’로 ‘책 읽기’ 강사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책이 교재로 선택되어서 집에 가지고 왔는데, 그 때 처음으로 영어 ‘원서’를 실제로 보게 된 것이다. Paperback의 작은 책이었고, 생각보다 조금은 ‘볼품이’ 없었다. 이제 원래의 책이 있고 제목도 있으니, 다음은 Googling이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게 되었다. 우선 그 책의 story로 만든 Disney영화를 찾았다. 제목은 Third man on the Mountain이었다. 다행히 DVD로 나온 것이 있어서 곧 바로 구입을 해서 오랜 전에 TV에서 ‘전 편’ 만 보았던 것의 전체를 보게 되었다. Paperback으로 된 책은 비교적 분량이 적은 것이라 며칠 만에 읽어보게 되었다. 모든 story들이 살아났는데, 내가 어렴풋이 기억한 것들이 거의 모두 맞았다. 나의 기억력은 크게 나빠진 것이 아니었다. 특히 bad guy character로 나오는 mountain guide의 이름, 쌕소(Saxo)를 나는 기억을 해 냈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nostalgic mystery가 풀리게 되었다. 참.. 오래 살고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