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사람들의 시대.. What?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별일이..’ 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는데, 이것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기억에, 제일 ‘큰 별일’ 에는 20년 전쯤, ‘공산당 종주국’ 소련(Soviet Union)이 해체 된 ‘역사적 사건’ 이 있었다. 나의 살아생전에 그런 일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그런 것.. 또한, 다른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었다. 고국 한국이 경제적으로 일본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것. 그것이 이제는 예전처럼 아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오랜 conventional wisdom이 ‘하루아침에’ 바뀌거나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는 그런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주의 Time magazine에는 급기야 ‘내성적인 사람의 시대'(Health Special: an article by Bryan Walsh, The Power of Introverts) 라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내가 내성적인 인간이다 보니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아닌가? 내성적(being introvert)인 것과 수줍어(shyness)하는 것을 연관시켜서 다루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시대(문화)가 변하고 있어서 이제는 과거처럼 외향적인 사람이 더 쉽게 유명하게 되고, 성공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내성적, 수줍음)에 다 해당을 해서, 이런 시대가 왜 더 빨리 오지 않았을까, 하는 불만도 생긴다.
사람의 성격이란 것이 어찌 그렇게 2가지만 있으랴마는 많은 사람들은 그 중간에 속할 것이다. 나는 99% 내성적인 부류고, 아내 연숙은 분명히 외향적인 쪽에 치우치는 중간일 듯 싶다. 이런 것은 역시 유전적인 것으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이 별로 없다는 것도 밝혀졌다. 나의 아버님도 내성적이었다고 들었고, 어머님도 외향적은 아니었다. 본인의 의지로 바꾼다고 해도 성격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바뀐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아마도 ‘연극’에 가깝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것이 맞는 것 같다. 사회생활이란 자체가 개인, 단체들이 교류를 하는 ‘외향적’인 활동인데 그곳에서 생존하는 방법은 역시 필요에 의해서 외향적인 것처럼 행동을 하는 수 밖에 없으니까..그래도 내성적인 사람들은 그런 ‘교류 활동’을 마음속 깊이 편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여기서 내성적인 것이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은, 오랜 동안 ‘단점만 크게 부각되는’, 과소평가를 받았기 때문인 것이고, 이것도 시대와 사회문화적 변화에 따라 이렇게 재조명을 받는 것 같다. 두 가자 부류(내성적, 외향적)가 모두 거의 같은 정도로 장, 단점이 있는데 한쪽만 지나치게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나의 지나간 ‘인생’을 생각한다. 어릴 적 지독히도 사람들 앞에서 수줍어 하는 나를 어머니는 정말로 걱정하셨다. 이 ‘험한 남자들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그런 생각이셨을 것이다. 줄을 서도 밀려 밀려 제일 뒤로 밀리고, 수업 중에 바보같이 보일까 봐 질문도 잘 못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겉으론 멀쩡해도 속으로는 계속 불안했다. 나를 포함해서 누구나, 이런 내성적인 성격으로 많이 ‘손해’를 봤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생각을 남보다 많이 하는 편이고, 남보다 더 조심하며 일을 하니까, 남보다 큰 실수는 적었을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 만큼 내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도 별로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이 기사를 통해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정치가들 중에 많은 사람이 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대표적인 예로 ‘그렇게 말을 잘하는’ 현직 ‘미국’ 대통령인 President Obama(오바마)가 그 중에 한 사람이고, 현 국무장관 (Hillary Clinton)힐러리 클린턴도 그쪽에 속한다. 현재 공화당 대통령 후보 중에는 Mitt Romney, Ron Paul이 내성적 인물이다. 그런 조명으로 이들을 보면, 대강 이해가 간다. 남들보다 그들은 조금은 주저하는 듯 하지만 대신 아주 신중하고, 치밀하다. 그러니까 아주 치명적인 실수는 피하는 것이다. 정반대 쪽에는 전직 대통령 빌 클린턴과 전 국회의장, 현 공화당 후보중의 한 사람인 Newt Gingrich가 있는데, 이들이 외향성의 위험한 면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다. 빌 클린턴은 ‘아주 위험한 여자관계’로 탄핵의 고초를 겪었고, Newt Gingrich는 ‘과대망상적인 큰소리, 복잡한 여자관계’로 아직까지 피해를 겪는 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은 인간은 ‘그런대로’ 공평하게 설계한 것일까?
시대가 지식, 정보사회로 점점 접어들면서 아무래도 직접적인 인간관계보다는 자세하게, 치밀하게 생각하고 분석하는 쪽의 중요성이 아무래도 부각이 될 것이다. 대강 30% 정도가 내성적이라고 분류가 되는 것을 보면 대부분은 이 밖의 ‘비 내성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대다수는 외향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동안 내성적인 ‘소수파’가 이들에 ‘눌려서’ 살았지만, 세대와 시대는 변하고 흘러서 어느덧 이들이 ‘동등한 위치’를 찾게 되었는지.. 참 인생 후반에 찾아온 반가운 소식이라고나 할까..
2012년 2월, 이제 ‘완전히’ 과거가 된 2011년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때가 되었다. 대부분 년 말이 다가오면 지난 해를 기억하고 정리를 하지만 한 해가 완전히 지난 때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것을 나의 제일 활동적인 나이에 했으면 얼마나 더 효과적이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하는 것도 다행이라고 자위를 한다. 지난 2011년 나에게 제일 중요한 정치 사회적, 개인적 뉴스, 사건, 일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유지호, 나의 원서동(苑西洞) 죽마고우(竹馬故友)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친구, 별로 잊고 산 적이 없는듯한 착각도 든다. 헤어져서 못 보고 산 세월이 꽤 오래되었지만 그런 사실과 상관없이 아직도 가슴 아련히 찐~하게 느껴지니 참 어릴 적 친구는 별수가 없다. 그 녀석을 정말 오랜만에 얼마 전 꿈에서 생생히 보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 녀석, 유지호와의 어린 추억을 회상한다.
사실 나의 블로그 에서 옛 친구들을 그리며 쓴 글이 꽤 많이 있었지만, 몇몇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쓸 엄두를 내지 못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 감정이 복받친다고 나 할까, 심지어 괴로울 것 같아서 미루어 온 것이다. 친구 유지호가 바로 그런 친구 중에 하나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그를 꿈에서 보게 되었고, 잘못하면 못 보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과 함께,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 유지호(柳池昊).. 구수한 얼굴만 생각해도 정겹게 느껴지는 친구, 이 친구와 이렇게 일생을 떨어져 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80년1월 나의 결혼식 때였을까.. 마지막 소식은 우리 어머님께서 그 해 5월쯤 그 녀석의 딸이 태어났을 때 병원으로 찾아가셔서 본 때였고 그 이후 우리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 이후 우리 어머님은 항상 지호의 안부를 걱정하셨다. 심지어는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커다란 수레바퀴에 치어서 정신 없이 살아온 것이다. 한동안 여러 군데로 수소문을 해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이 지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호는 친구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친구다. 물론 우리들은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나지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숨은 사연이 있었다. 원래 육이오 동란 전에 지호의 아버님과 우리 아버님은 친구였던 것 같고 (우리 아버지는 지호 아버님을 ‘원동 친구’라고 불렀다고 함, 원동은 지금의 원서동), 전쟁 발발 후에 두분 다 납북행렬에 끼어서 북으로 끌려갈 때, 지호 아버님은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납북되신 것을 우리 어머님께 알리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1.4 후퇴(1951년 1월 4일) 당시 지호네 식구는 모두 피난을 가게 되었고, 우리 집은 그대로 원서동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지호의 나이가 (나와 동갑인) 두 살밖에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우리 어머님께 임시로 맡기고 전라도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납북되신 후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어머님께서는 우리 집 남매, 그리고 지호를 데리고 원서동 비원 담 옆 텅 빈 지호네의 커다란 한옥의 사랑채에서 머물며 우리들을 돌보셨는데, 나중에 지호는 전라도로 피난 간 가족의 품으로 갔다가, 휴전 후에 다시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원서동에서 살게 되었다.
지호와는 이런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묘한 인연이 있었다. 어머님의 추억에, 그 길게만 느껴졌던 지호네 사랑채에서의 생활이 참 무서웠다고 한다. 젊은 여자 혼자서 어린 애들 세 명을 데리고 텅 빈집에서 전쟁을 겪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하고,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지호가 우리 집 식구처럼 느껴지곤 할 때도 있었다. 나의 가장 오래된 지호에 대한 기억은 역시 원서동의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던 국민학교 1학년 시절이 아닐까..
우리는 승철이네 집에서 세 들어 살고, 지호네는 비원 담을 끼고 있던 커다란 한옥에 살았다. 그때의 지호는, 우리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구제품 옷을 입고 신나게 개천을 중심으로 뛰어 놀았다. 지호와 우리가 뚜렷이 달랐던 것은, 그의 말투였다. 분명히 우리와 다른 말투.. 알고 보니 그것은 바로 전라도 사투리였다. 전라도에 잠깐 피난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가지고 신나게 놀리곤 했다.
비원에서 흘러나오는 비교적 맑은 원서동 개천은 그 당시 우리들 꿈의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시원한 물장난, 종이배 띄우기, 목욕을 할 수 있었고, 겨울에는 더 신나는 썰매타기, 빙판에서 팽이 돌리기를 하며 놀았다. 하지만 지호는 그런 것 이외에도 개천을 좋아하는 이유가 더 있었다. 바로 “폐품수집” 이었다. 개천가에는 군데군데 폐품, 심지어 쓰레기까지 버린 곳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더럽다고 피하는데 지호는 그곳을 열심히 뒤지면서 ‘보물’을 찾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어른들은 더럽고, ‘거지같다’ 고 핀잔을 주곤 했다.
원서동에서 가까운 국민학교는 옆 동네에 있는 재동(齋洞)국민학교였고, 대부분이 그곳을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지호는 낙원동 덕성여대 옆에 있던 교동(喬桐)국민학교를 다녔고, 우리 집에 같이 살던 승철이네 누나 시자 누나도 교동국민학교엘 다녔고, 졸업을 했다. 사실 왜 그곳을 다녔는지 그 이유를 모르지만, 학군에 관한 정확한 법적 제한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건재한 재동국민학교와 달리 교동국민학교는 비교적 일찍 폐교가 되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중고등학교는 지호 아버님이 서무부장으로 근무하시던 계동(桂洞) 입구의 휘문(徽文) 중 고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시절에 철봉을 하다가 잘못 떨어져서, 팔이 골절되는 바람에 일년을 휴학을 해서 나보다 1년 늦게 (1967년) 졸업을 하였다.
내가 원서동에서 가회동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 이사를 가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연락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한가지 특기사항은 나에게 그 당시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들 서로가 다 친구는 물론 아니었다. 심지어는 지호와 다른 친구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나의 다른 절친한 죽마고우인 안명성과 지호의 아주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들 서로가 좋아하지 않는 그런 사이였다.
그 가운데 내가 있어서 가끔 모두 만날 때에도 느껴지는 분위기기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이들과 별도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생각을 한다. 왜 그들은 그렇게 서로 좋아하지 않았을까? 뚜렷한 이유가 없었는데..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지호보다 명성이와 더 가깝게 중 고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지만, 육이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 때문일까, 무언중에 서로의 우정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음을 서로 느끼며 살았다.
중 고교 시절, 지호네는 육이오 때부터 살던 오래된 원서동 집을 새로 아주 깨끗하고 중후한 느낌의 한옥으로 개축을 하였다. 그 당시 동네에서 아마도 가장 멋진 한옥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식구 수에 비해 방이 많아서, 항상 직장인 하숙생을 두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방송국의 기술자 (아마도 엔지니어)가 하숙을 들어 살았는데, 가끔 그의 빈방을 우리는 몰래 들어가 보기도 했다. 그 당시, 아마도 고교 1년 때, 나는 한창 라디오를 중심으로 전기,전자 쪽에 관심이 많을 때여서 각종 전기,전자 부품으로 가득 찬 그 방의 책상설합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게다가 TV가 귀하던 그 시절, 그 하숙생 아저씨는 아주 옛날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스크린을 가진 흑백 TV 수상기가 있어서 비록 화면은 엉망이지만 그것으로 권투 중계 같은 것도 보곤 했다.
그 ‘악동’의 시절, 더욱 흥미로웠던 기억은 지호와 광순 형(지호의 형)으로 부터 들었던 ‘이웃집 여자 담 넘어보기‘ 이야기였다. 바로 이웃집에는 ‘화류계’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당에 나와서 목욕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 당시는 개인 집에 목욕탕이 거의 없어서 공중 목욕탕을 쓰는데, 더운 여름에는 어두운 밤에 마당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숫제 대낮에 나와서 목욕을 한 모양으로, 지호와 광순형이 손에 땀을 쥐고 담을 넘어 엿본 것은 완전히 김홍도의 그림1 같은 이야기가 된 것이고, 아직도 생생한 지호의 손에 땀을 쥐게 하던 이야기가 귀에 쟁쟁하다.
1966년 봄이 되면서 지호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우리 집이 연세대 1학년 초,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당시 이미 지호네는 원서동에서 상도동 김영삼의 집 근처의 멋진 양옥으로 이사를 가 있었던 것이다. 지호 아버님이 이전에 무진회사(당시의 금융회사) 출신으로 수완이 좋으셔서 그랬는지, 큰 수입이 없으신 것처럼 보였는데도 아주 크고 멋진 집을 잘도 구하셨다.
나의 집은 비록 전세였지만 완전히 단독주택으로 그 당시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 옆에 있어서 지호네 집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웠고, 방 두 개의 작은 우리 집에서 그 녀석의 ‘파란 잔디에 별채까지 딸린 커다란 저택’에 가서 노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지호는 휘문고를 졸업하고 일차대학에서 낙방을 했는지, 한전(한국전력 주식회사) 산하의 수도공대에 입학을 하였는데, 서로 학교가 다르고, 학교 환경에 의한 관심사와 대학 친구들이 달라서 생각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한번도 연락이 끊기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이, 이 녀석은 친구라기 보다는 나의 친척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친척이야, 자주 못 보거나, 잠시 헤어져도 그 기본적인 관계는 없어지지 않기에 바로 우리들의 관계가 그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지호는 그 당시 나이에 비해서 조금 느린 듯 하지만, 대신 여유 있고 폭 넓은 행동과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느낌을 주었다. 느린듯한 인상은 그 나이에 맞는 유행이나 멋 같은 것에 남보다 둔감한 편이고 그것은 옷이나 유행 같은 것에서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쉽게 짐작이 되었다.
그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나 같은 비슷한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 이외, 나이와 배경 같은 것이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대학시절부터 지호는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 라는 김준곤 목사가 이끄는 개신교 대학생 선교단체에 관련이 되어서, 나도 끌리다시피 그곳에 몇 번 가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지호가 그때 그렇게 신앙심이 깊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그는 아주 진지하게 활동을 하곤 했고, 흔히 생각하듯이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서 그곳에 들어갔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당시 CCC는 명동입구 부근에 어떤 빌딩의 옥상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도 지호와 몇 번을 가보았다. 지호는 이미 AS (Athletic Society, 체육부)라는 부서의 멤버로 활약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신앙적으로 너무나 유치해서 그곳에서 하는 신앙적인 활동에는 큰 관심을 없었고, 그저 대학생들, 그것도 꽤 많은 여대생이 있는 것만 관심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지호는 ‘인심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이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편하게 사람들과 사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 하지만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조금 ‘영감’ 같은 그런 지호의 모습이었다.
‘I Am a Rock’ – Simon & Garfunkel – 1966 – Live
그 당시 둘이서 즐겨 ‘따라’ 부르던 smash hit oldie
이때에 일어난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끔 발동하는 ‘악동기질’을 발휘해 지호에게 부탁을 해서 CCC소속 여대생들의 주소를 얻어낸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1968-1969에 걸친 겨울 방학이었을 것인데, 그때는 거의 매일 광화문 근처에 있던 교육회관 지하다방2에서 살다시피 할 때였는데, 장난기가 발동해서 주소록에 있는 몇몇 여대생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다방으로 불러낸 것이었다. 편지는 ‘연세춘추3‘에서 보낸 것처럼 하고, 무슨 설문조사(대학생의 팝송취향)를 한다고 꾸며 댄 것이었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내가 편지를 쓰고 보내고 했지만 내가 보아도 거의 ‘완벽’한 각본이었다. 그때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나와, 양건주, 이윤기 등이었는데, 물론 이들은 ‘주저하는 공범’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그 당시 너무나 심심해서 한 장난이었고, 그들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나왔다는 사실이었고, 물론 그들과 ‘설문조사’까지 해야만 했다. 이구동성으로 그 여대생들은, 혹시 속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왔다고 했고, 우리들의 ‘진지한 모습’에 안심을 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우리들 너무 장난이 심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모두 나의 ‘잘못’이었다.
이 ‘연극사건‘은 사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편지를 보낸 여대생 중에는 CCC와 상관이 없었던 전에 잠깐 알았던 윤여숙(창덕여고, 이대 생물과) 이라는 여대생도 끼어있었는데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사실 그녀가 나올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전혀 기대를 안 했던 것인데, 놀랍게도 그녀가 ‘편지를 들고 출현‘을 한 것이었다.
우리와 만나서 ‘설문조사’를 했던 여대생들에게는 편지로 우리가 기다리는 위치를 미리 알려주었지만, 윤여숙씨 에게는 카운터(계산)로 와서 찾으라고만 해 두었는데, 역시 그곳에 편지를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얼굴도 못 들고 옆에 앉아있던 이윤기에게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묻기만 한 것이 고작이었다. 카운터에서 편지를 들고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제서야 내가 너무 지나친 장난을 했구나 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이 ‘지나친 장난’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추억이 되었고,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 나이에 그런 악의 없는 장난은 조금 애교 있게 보아도 되지 않을까?
연세대 2학년 시절, 나는 연호회라는 남녀 대학생 클럽에서 활동을 했다. 말이 활동이지.. 그저 남녀 대학생들끼리 만나는 것이 주목적인 조금은 맥 빠진 듯한 클럽이었지만, 그 나이에 젊음을 발산하는 알맞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활동이란 것에는, 정기적으로 다방에서 만나는 것, 야외로 놀라가는 것 등, 주로 ‘노는 것’ 이외에도, 조금은 심각한, 말도 그럴듯한 ‘견학’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공부하는 활동인데, 우리들이 유일하게 성사시킨 것이 ‘동양방송국 견학‘ 이었다. 그 당시 동양 방송국, TBS는 삼성재벌 산하의 아주 큰 언론기관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간 곳은 서소문에 있던 동양 텔레비전 방송국이었는데, 그것을 성사시킨 것이 바로 지호였다. 지호가 알고 있던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서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 아저씨는 역시 지호네 집에서 하숙을 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지호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들을 많이도 알고 있었다.
대학 3학년 (1969년) 때 즈음,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골은 물론이지만 서울에서도 환갑이란 것은 집안, 친척의 경사요, 동네의 경사이기도 할 정도로 나이 60세를 장수한 것으로 여길 때였다. 그때가 1969년 경이었으니까, 지호 아버님은 아마도 1909년 생이셨을 것인데, 우리 아버님이 1911년 생이셨으니까, 우리 아버님보다 나이가 위셨다. 나는 그 잔치에 특별히 관심은 없었지만 지호가 스냅사진 좀 찍어달라고 해서 갔고, 우리 어머님도 잠깐 들리셔서 돈 봉투를 놓고 가셨다. 나는 사실 처음 환갑잔치에 갔던 것인데, 신발 표까지 나누어 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도 왔다. 그때 지호네 친척들이 또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족들 마다 모여서 합동으로 절을 하였고, 그런 것들을 그 당시에 고가였던 플래시를 써서 모두 찍었는데, 상당히 많은 양의 사진을 찍고 다녔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자격으로 찍은 것이고, 프로 사진기사가 와서 정식으로 사진을 다 찍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프로 사진기사가 찍은 사진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서 모두 못쓰게 되었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내가 찍은 사진이 ‘완전히’ 환갑기념 공식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내가 보아도 괜찮게 나왔던 것이다. 만약 이날 내가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그 큰 환갑잔치의 모습들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계기로 사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되기도 했고, 두고두고 그 지호 아버님의 환갑잔치는 머리에 사진처럼 남게 되었다. 특히 지호 아버님, 기분이 좋으셔서 커다란 안방에 사람들에 둘러싸여 덩실덩실 춤을 추시던 모습, 지호의 형 광순형 또한 완전히 만취가 되어서 나를 붙잡고 ‘기분 좋게’ 술주정을 하던 모습 등등.. 참 기억하고 싶은 잔치였다.
1970년 (대학 4학년) 쯤에는, 항상 폭넓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지호를 통해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원서동) 친구들과도 다시 만나게 되기도 했다. 그 중에는 국민학교 친구, 김천일과 또 다른 죽마고우였던 손용현이 있었고,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원서동 개천친구, 한성우(한성택 형의 사촌) 도 다시 보게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지호가 그들과 끊어지지 않는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천일은 원서동의 토박이로 재동국민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사소한 나의 철없던 실수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지호를 통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이는 조금 밑이었지만 박창희와 같이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 개천을 사이에 두고 살았던 손용현.. 이들은 나중에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 되었다.
지호는 언뜻 보기에 그다지 노래 같은 것을 잘 부르지는 않았어도 아주 좋아하여서, 그런 기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았다. 그 예로 어느새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가입을 해서 활동을 하였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고, 우리들은 사실 장난끼 섞인 말로 ‘비웃기’도 했다. 지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꾸준히 그 ‘서울합창단’이란 곳에 나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공식적이고, 역사 있던’ 단체여서 나도 놀랐다. 그곳은 장상덕이란 분이 지휘자로 있었고, 그분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볼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지호가 나보고도 가입하라고 했는데, 회원이 부족하다고 하던가.. 했는데, 사실은 그 때, 10월 유신이 나고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란 것을 만들어서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는 시기였는데, 그 취임식이 열리는 장충체육관에서 ‘공화당 찬가’를 이 서울합창단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사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공화당찬가를 부른다는 것이 별로였지만 이미 청탁을 받고 연습을 시작한 모양이어서 나도 ‘끌려 가다시피 해서’ 합창 연습을 하곤 했다. 실제로 나는 장충체육관에 가지는 않았지만, 두고두고 이것은 별로 좋지 않은 찜찜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후 지호는 군대로, 나는 미국으로 가서, 헤어졌다가 1975년 여름에 지호를 서울에서 다시 잠깐 만났는데, 어엿한 대기업의 자재과 샐러리맨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5년 뒤, 1980년에는 나의 결혼식에 왔고, 그 후 소식이 끊어졌는데, 주위를 암만 찾아도 그 녀석은 없었다.과연 지호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동국대 사학과를 나온 지호의 형, 광순형 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회고담 속에서나 듣고, 보고, 느낄 수 밖에 없는가?
1. 17세기 조선,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단오 2. 위치가 좋아서 1960년대 말 대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잘나가던’ 다방 3. 연세대학교 발행, 학교신문
postscript: 오랫동안 기억해낸 추억을 글로 옮기는 것, 몇 시간이면 될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한 가지를 쓰고 나서 다음 날, 다른 추억이 되 살아나고, 그런 것이 며칠이나 걸렸다. 이제 내 기억력의 한계를 분명히 느낀다.
¶ 거의 이른 봄 같은 온화한 날씨 속에 2월로 접어들었다. 무언가 신경 쓸 것들이 많았던 1월을 벗어나니 조금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외로 즐거운 기억을 심어주었던 한 달이 지난 것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웠던 사실이 이번 달에도 계속되리라고는 기대는 안 한다. 지난 달은 여러모로 ‘예외’적인 시간들이었지, 그것이 절대로 new normal은 아니라고 내가 나를 달래고 있다.
내일은 2월 2일.. 아하! 바로 Groundhog Day로구나. 이곳에 오랜 살다 보니 이날도 아주 친숙하게 느껴진다. groundhog은 한국어로 뭐라고 할까? 아마도 두더지 정도가 아닐까? 이것이 ‘봄’을 알리는 첫 동물로써, 이날 땅 위로 기어 나와서 자기의 그림자를 볼 수 있으면 겨울이 6주간 더 계속된다는 재미있는 날이다.
이것만으로는 별 것이 아니지만, 숫제 이것에 대한 행사를 하며, 뉴스중계까지 한다. 각 지방마다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공식적’인 것은 역시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 근처의 Punxsutawney(펑스토니?)라는 곳에서 열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곳에 Phil이라는 groundhog을 아침 7시경에 꺼내가지고 그림자 ‘실험’을 한 후, 결과를 발표하는데.. 겨울이 6주간 더 계속 될지.. 물론 그곳은 관광지가 되어서 많은 외부인들이 방문을 한다.
이것에 대한 얘기는 이것만이 아니다. 1993년 이맘때 나온 영화제목이 또한 Groundhog Day인데, Saturday Nigh Live, Ghost Buster의 Bill Murray가 주연을 한 comedy, fantasy, romance류의 영화로써, 처음, ‘그저 그런 영화’라는 평으로 시작을 했지만, 이제는 거의 ‘최고의 Classic’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인기를 누린 영화인 것이고, 특히 이맘때면 꼭 봐야 하는 (크리스마스 영화처럼) 것으로 되었다.
나도 이것을 꽤 많이 보았는데, 처음에는 별로였다가 보면 볼수록 빠지는 그런 것이었다. ‘반복되는 듯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교훈을 주는 그런 내용이어서, 이것을 자기의 삶과 비교해서 생각하는 것, 참 재미있고, 유익하지 않을까? 꼭 한번 보기를 권하고 싶다(이 영화는 이곳에서 무료로 볼 수 있음). 이것에 대한 자세한 것이Wikipedia에 나와 있는데 이 영화를 만든 location (로케장소)이 사실은 Punxsutawney가 아니고 일리노이 주와 위스컨신 주의 접경에 있는 Woodstock, Illinois라는 사실도 그렇고, 그것으로 그곳 역시 ‘관광 명소’가 되었고, 이제는 그 곳에서도 매년 Groundhog Day행사를 열고 있다는 사실 등등.. 참 재미있지 않은가? 영화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예가 되었다.
¶ 지난 달 27일에는 우리 집에서 친지들이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원래는 매년 1월 21일을 전후해서 우리 집에서 모이는데 올해는 차질이 생겨서 거의 일주일 뒤에 모인 것이다. 1월 21일은 우연히도 나와 최동환씨(최형) wife(진희엄마)의 생일이라서, 그것을 기념(?)해서 매년 모이는 것인데 세월이 흘러 흘러 이제는 January Classic이 되었다.
예전에는 주로 식사로 시간이 갔지만 얼만 전부터 최형이 기타를 배우고 있어서 ‘통기타 노래잔치‘를 하곤 한다. 한마디로 아주 ‘건전’해진 모임이 된 것이다. 하기야, 술만 마시고, 종교 정치얘기로 열을 올리는 것 보다 이렇게 노는 것이 훨씬 뒤끝 맛이 좋은 것이 사실이다. 음악전공 wife가 두 명이나 되고, 윤재만씨도 색소폰을 배운지 얼마 되었고, 이태리가구 전성준 사장은 피아노, 기타로 하는 노래 솜씨가 거의 프로에 가깝다. 약간 아쉬운 것은 부인님들이 별로 노래를 안 부른다는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흥미를 갖고 참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무려 $2000짜리 Martin guitar를 장만한 최형은 생각한 것 보다 자세가 심각하다. 그 동안은 그룹으로 배우더니 이제는 개인 레슨까지 받는 모양이고, 지난 번보다 솜씨가 더 늘었다. 우리야 모여서 부르는 노래가 60/70년대 노래가 주종이고 가끔 그 이후의 노래도 배우고 부른다.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역시 그때의 노래가 ‘진짜’ 노래라는 것이다. 그 이후의 노래는 세월이 암만 지나도 classic이 될 수가 없다는데 모두 의견을 같이 하였다.
요즈음, 그렇게 잘 나가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기업인 애플이 지독한 구설수에 올랐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그들의 중국의 수많은 공순이들에 대한 ‘지독히도 열악한’ 처우가 제일 큰 구설수에 오른 것이다. 극대적인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만, 문제는 그렇게 해서 그들이 번 돈의 ‘천문학적‘ 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 피를 빠는듯한 회사의 지난 사사분기의 수입이, $46,000,000,000.. 제로가 아홉 개가 있는, 그러니까 사백육십 억 달라! 이 액수로 살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상상이나 갈까?
이렇게 많이 수입 뒷면에는 바로 위에 보이는 수많은 공순이들이 있다. 옛날 옛적에 고국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수많은 공순이들, 버스 안내양들..최저임금도 고마워하며 일을 했지만 그들은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부렸던 기업과 지금의 이 애플과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때는 1970년대였고, 지금은 21세기인 2010년 대.. 어찌 비교를 할 수가 있을까? 최저의 임금과 건강을 위협하는 무자비한 환경에서 절대적으로 극대의 이익을 만든 돈이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 그들은 iPhone을 만들기 위해 ‘죽어가며’ 일을 하고 있다. 결국은 여기에 보이는 petition(서명운동)까지 나오게 되었다. 나도 여기에 서명을 한 셈이지만.. 도저히 이것을 피할 용기가 없었다.
Every day, tens of millions of people will swipe the screens of their iPhones to unlock them.
On the other side of the world, a young girl is also swiping those screens. In fact, every day, during her 12+ hour shifts, six days a week, she repetitively swipes tens of thousands of them.She spends those hours inhaling n-hexane, a potent neurotoxin used to clean iPhone glass, because it dries a few seconds faster than a safe alternative. After just a few years on the line, she will be fired because the neurological damage from the n-hexane and the repetitive stress injuries to her wrists and hands make her unable to continue performing up to standard.
Right now we have a huge opportunity as ethical consumers: The launch of the iPhone 5 later this year will be new Apple CEO Tim Cook’s first big product rollout, and he can’t afford for anything to go wrong — including negative publicity around how Apple’s suppliers treat their workers. That’s why we’re launching a campaign this week to get Apple to overhaul the way its suppliers treat their workers in time for the launch of the iPhone 5.
In many cases, people literally are dying while making Apple products. Reporters have documented cases of deadly explosions at iPad factories, and repeated instances of employees dying of exhaustion after working thirty to sixty hour shifts. In some of the factories Apple contracts with, so many employees have attempted suicide that management installed nets to prevent employees from dying while jumping off building ledges.
Can Apple do this? Absolutely. Apple is the richest company in the world, posting a profit margin for the last quarter of 42.4% yesterday. They’re sitting on $100 billion in the bank. According to an anonymous Apple executive quoted in the New York Times, all Apple has to do is demand it, and it’ll happen – “Suppliers would change everything tomorrow if Apple told them they didn’t have another choice.”
지난 1월 25일부터 개막이 되었던 Davos WEF (World Economic Forum) 2012가 어제로 막을 내렸다. 무언가 세계가 심각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른 해에 비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지만, 기껏해야 뉴스 채널 그것도 인터넷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이 고작이다. 인터넷 speed가 빨라지면서 이제는 video의 화질도 놀랍게 나아져서 그런대로 Davos에 모인 ‘부러운 인간’들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현재의 미국식(시장경제) 자본주의의 한계성과 대체 자본주의의 가능성 등에 관한 토론이 아주 흥미로웠는데, 해답보다는 의문점을 더 제기한 아주 복잡한 주제였다. 자본주의를 대체할만한 특효약은 없는 듯하고, 계속 보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지는 듯 했다. 과연 그럴까? 하기야 모든 것을 빨리 해결하려는 공산주의 실험은 완전히 파탄과 실패로 끝나갔고, 그것 보다 조금은 온건한 사회주의도 큰 희망을 주지 못하고, 끈질기게 남아서 버티는 것이 그저 자본주의일 듯 하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유일한 super power인 미국이 그 종주국으로 있는 한 누가 대체 주의를 밀겠는가?
유일한 변수는 역시 짱께, 쭝국의 기발한 변종 ‘국가’ 자본주의 일까.. 내가 생각하는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해답은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다. 그저, 그저, 돈을 ‘자유롭게’ 벌더라도 정직하게, 남도 좀 생각하며, 자기 분수에 맞게 벌라는 소리다. 그렇게 간단한 해법이 어디 있을까?
아래에 있는 WEF video는 The Global Agenda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계적 기업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열띤 토론을 보여주는데, 눈을 끄는 것 중에는 Facebook를 대표하는 COO(Chief Operating Officer) 여성(Cheryl Sandberg) 의 등장이다. 주식공개가 임박한 Facebook..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빨리 성장을 했을까.. 기술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실 Facebook같은 사업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심하게 말해서 조금 머리 좋은 고등학생도)’ 그런 사업모델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어떤 ‘운’이 있었을까?
암만 요새의 ‘미친 인터넷 경제’를 고려한다 해도 나는 이렇게 거의 ‘임의적인 superstar’의 돌연한 출현은 정말 마음에 들지를 않는다. 아마도 우리세대의 prime time은 이제 멀리 지나갔는지도 모른다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 현재 진행되고 있는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향한 치열한 공화당 후보들의 debate와 이틀 전부터 시작된 2012년 스위스 다보스(Davos, Switzerland)의 World Economic Forum(WEF)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조금씩 복잡한 나의 심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선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것이다. ‘지독한 부자’에 대한 혐오감이다. 여기서 지독한 부자는 ‘돈 장난’을 해서 ‘지독히도’ 많이 번 부자들을 말한다. 자칫하면 ‘질투’로 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그들이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front-runner인 Mitt Romney의 ‘거대한 재산’은 아주 눈에 가시처럼 보인다. 과연 그가 99%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본인은 분명히 머리가 좋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참 힘들 것이다.
Warren Buffet같이 부자들이 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는 양심들도 있지만, 이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우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법적인 것 만이 아니다. 인간과 사회는 법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쟁점이 되는 것이 법 자체를 바꾸자는 의견이다.
그런데 이 법은 단순한 법의 차원을 넘어서, 숫제 자본주의 자체를 수정하자는 정도까지로 나갔다. 문제는, 그 것이 예전 같았으면 ‘배가 나온, 지독한 부자’ 들이 총 동원해서 반격을 할 텐데.. 이번에는 Occupy Wall Street 때문일까.. 비겁하게 눈을 깔고 관망만 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Davos에도 그들 특히 banker, investment fund manager같은 부류들이 대거 불참을 했는데, 내 생각에 그들은 ‘무서워서’ 못 온 것 같다. 나도 그런 ‘대중’의 의견에 100% 동감이 간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 I TOLD YOU SO department: 이 분명한 사실이 믿기는가? 바보 같은 iPxx customers & Apple Lover 들이여, 그대들이 꾸뻑~하고 흠뻑 빠져버린 iPxx (iPod, iPad, iPhone, iWhatnext?)가 $Apple company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마나 되는가? 46 BILLIONS! 이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아시는가?
거기에 비해서 지난 10년 이상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벌던 $Microsoft조차도 년 수입이 $20 BILLIONS이고, 고철 컴퓨터의 대부, computer science를 독자적으로 창시한 IBM 조차 $25 BILLIONS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애플이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번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벌고 있고, 그렇게 번 $$$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이 어떨까가 더 회의적이고 문제라는 것이다.
그 들은 현재의 상태를 결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허재판 전쟁으로 엄청난 돈을 뿌리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모조리 특허로 만들었다. $Apple company가 앞으로도 그들의 ‘대부’ S. Jobs의 그늘에서 계속 머문다면 역시 그들의 운명도 분명히 시간문제일 것이다. Jobs는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그의 국가 대통령인 Obama에게 ‘죽어도 iPxx 는 미국땅에서 만들지 않을 것(결국은 중국에서만)’ 이라고 단언을 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가 그런 생각으로 죽고 싶었을까 하는 측은지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이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경쟁국이며 잠재적인 군사적국인 ‘공산당 중국’의 착취적인 노동력을 이용해서 사상 초유의 이익을 추구하는 Jobs 의 집단, 완전히’무엇인가에 미친 영혼’을 보는 것 같아서 긴 시간을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슷한 배경의 억수 부자라도 Microsoft의 Bill Gates는 완전히 스펙트럼의 반대쪽에서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과연 누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일까?
¶ 나의 친척 같이 느껴지는 죽마고우 친구, 유지호를 생각하며 쓰기 시작한 글, 시작한지 이제 보름도 넘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면 다음날 아침에 꿈결에 새로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이 있어서 보충을 하고, 다음 날 또 새로운 것이 되 살아나고.. 그런 식으로 보름이 지난 것이다. 왜 이리 기를 쓰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기억하고 기록을 남기려 할까.. 생각해 보니 나도 조금 웃음이 난다.
혹시 내가 치매예방을 염두에 두고 두뇌운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하기야 그렇게 두뇌 운동을 하면 조금 치매방지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 동안 오랜 동안 잊고 산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갈 수록 기억이 새로워질 리는 만무하고, 지금이라도 기록을 어디엔가 남겨두면, 그 친구를 ‘죽기 전에’ 다시 소식을 들을 chance가 조금은 올라갈 것이라는 그저 희망에서 쓰기 시작한 것이고, 다시 들을 수 없다면 그저 그가 어디에선가 건강하게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오늘은 일월 이십일일, 一月 二十一日, January 21st, 1.21 일이일김신조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일 ..그리고 또한 나의 생일이다. 예순 네 번째의 생일이 조금은 피곤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오랜 세월이란 기분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내가 어렸을 당시 우리들의 생일축하문화는 딱 한가지였다. ‘입학시험 때는 절대로 먹지 않는 미역국‘을 먹는 것 이었다. 1%의 부자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99%는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한창 시작되던 60년대 말, 조금씩 나아진 경제사정 때문일까, 조금 생일 반찬이 복잡해 지긴 했지만, 생일 카드, cake, candle, presents같은 ‘서구식’ 생일 문화는 거의 없었다. 후에 미국에 와서야 그런 서구식의 ‘요란한’ 생일 문화가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최소한 결혼 전까지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우습게까지 보였다.
사실은, 누가 나의 생일을 기억을 하고 축하해 주는 것이 조금은 계면쩍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것이 배우자가 생기고, 애들이 크면서 생일은 완전히 조금은 ‘느끼한 행사‘로 발전을 하고, 심지어 부담까지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고국도 ‘완전히’ 서구식으로 변한 것을 볼 수가 있어서, 이제는 ‘전통적’ 생일을 찾아보기는 이제 기억 속에서나 가능해졌다.
물론 전통적 생일이란 말이 거창하지만 ‘검소하게, 가난하게, 미역국만 먹는’ 그런 생일이 그리운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완전히’ 커지면서 다시 그런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 애들이 별로 ‘느끼한 행사’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생일cake이란 것, 어쩌면 그렇게도 맛이 없을까.. 먹기도 고역이고, 버리기도 아깝고.. 정말 곤란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나의 생일, 나의 소원대로 비로소 전통적 생일, 미역국만 먹는 생일을 찾게 되었다. 부수입으로 애들은 내가 좋아하는 역사에 관한 것들을 선물로 주었는데, 모두 ‘전쟁역사’에 관한 것들이다. 아빠가 하도 ‘전쟁영화’를 많이 보는 것을 보아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를 이세상에 보내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님과 어머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저의 어버이 날이기도 합니다.”….
¶ Pancake to the rescue: 우리부부는 적어도 10여 년 전부터 아침식사를 ‘절대로’ 거르지 않고, 양식 스타일(boiled eggs, toasted breads, sausage or bacon, fruits and veges and freshly brewed coffee) 로 먹고 점심은 밥과 국을 중심으로 거의 한식 스타일로 그것도 아주 많이 먹는다. 대신 저녁 식사는 정말 적게, 아니면 거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끝나고 난 이후에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완전히 습관이 되었다. 이유는 직감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니면 이곳 저곳에서 들어본 이론에 근거해서, ‘많은 양의 ‘저녁식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과일,야채의 양은 많이 늘어났지만, 전체적인 식사의 양은 조금 줄었다. 나이에 의해서 분명히 기본적인 운동량이 줄었기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식사의 습관은 분명히 일반적인 건강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방에 의한 체중증가‘를 억제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게다가 5년 전부터 아침식사는 내가 ‘혼자’서 만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보다 훨씬 바쁜 연숙을 도와준다는 근사한 명분으로 시작을 했지만 솔직히 한 달만 계속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큰 문제없이 현재까지 잘 버티고 있다.
양식 스타일의 아침식사에 무슨 손끝 맛이 필요하랴? 그저 ‘기계적’ 으로 하는 작은 ‘노동’에 불과한 것을..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pancake을 배우게 되었다. Frozen은 아니더라도 거의 instant화 된 것이라서 그렇게 보기보다 간단한 줄 그 동안 몰랐던 것이다. 판에 박힌 아침메뉴에 변화를 줄 수 있는 pancakes..
며칠 전 연숙이 집을 며칠 비웠을 때 톡톡히 진가를 발휘해서 거의 매일 아침 실습해서 먹었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도 질리지 않는다. 한가지 문제는 아직도 연숙이 만드는 것처럼 예쁘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 될 듯하고, 모양보다 맛이 더 중요하니까 큰 문제는 아니다.
¶ Romney & Gingrich: 롬니와 깅그리치.. 한글로 표기하니까 조금 ‘요상’한 느낌인데, 이것은 문자 문화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미국 대통령 감 후보 가능성이 현재 한창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물론 민주당은 오마바로 완전히 전투대열을 갖추고 현재 공화당 후보의 추세를 관망하고 있는 것인데, 그 동안은 완전히 코믹할 정도로 혼전을 거듭하더니 이제는 조금 무언가 보이는 지경이 되었다. 한 사람은 주지사 출신, 다른 사람은 연방국회의장 출신, 그러니까 아주 heavy급인 배경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다른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극과 극이라고나 할까.. 경제통이지만 조금 근시안적인 롬니, 예측불허 성질이지만 미국의 거대한 꿈을 실현하려는 역사통 깅그리치.. 과연 누가 그들의 선택인가?
그간 롬니는 ‘실질적인 후보’로 여겨져 왔지만 조금 있으면 끝날 South Carolina Primary에서 그들은 완전히 neck-and-neck정도로 예측 불허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둘 중에서 고르라면 아마도 Gringrich가 아닐까.. 그는 역사를 잘 알고 있고, 옛적의 잘못을 다 인정하고, 보기에도 아주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신선함을 보여주는데.. 과연 어떨지? 한가지 더.. 그가 나와 같은 Catholic으로 개종을 한 것도 한 몫을 하지 않을까?
P.S., 극적인 역전승: South Carolina Primary 개표가 거의 끝나면서, 결국 Gingrich의 ‘놀랍고도, 압도적인’ 역전승이 확실시 되고 있다. 이것은 완전한 drama급에 속하는 것이고, 다음 차례, 1월 31일의 Florida Primary의 결과가 정말 흥미진진한 것이 되었다.
Birthday – The Beatles – 1967 – Beatles forever young!
1월 5일은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1월 5일, 큰딸 새로니가 태어난 것은 남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가정에 첫 생명이 태어난 날이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은 더 생각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의미를 주어가며 생각을 하지만 그 당시는 사실 무언가 ‘인간이면 거쳐야 하는’ 인생사의 하나 정도로 생각한 정도였다. 결혼을 했으면 가정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자식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문제는 몇 명을 언제 낳을까 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그런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둘 다 나이가 있으니까 빨리 낳을수록 여러 가지로 유익할 텐데, 그러기에는 신혼의 즐거움이 너무나 짧아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딸 새로니는 아주 적당한 때에 태어난 것 같다. 신혼생활을 거의 3년이나 즐겼으니까.. 그 3년 중에 사실 임신기간을 빼면 2년이 좀 넘을까.. 내가 독자라서 사실 어머님께서 은근히 압박을 넣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으셔서 전혀 그런 것이 없었고, 그런 것을 연숙도 은근히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둘 다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 있는 OSU (Ohio State University main campus)에 재학 중이었고, 그렇게 ‘모든 것이 불안정한 학생 신분’에서 첫 아기를 낳는다는 사실을 나는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이 어찌 치밀한 계획대로 될까. 게다가 그 당시 나는 학교 공부와 학비를 버는 교수 돕는 일로 한마디로 ‘어디론가 (잠깐) 도망가고 싶은 심정‘ 이 들 때가 있었던 시절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자식을 두게 될 한 가장으로써의 책임감에 짓눌리는 괴로움도 느낄 때였다.
경제적인 이유로 그 당시 나는 새로 부임한 (그러니까.. 끝 발이 없는) Turkey출신 교수 밑으로 들어가서 그가 새로 계획한 Digital Control Laboratory(DCL)를 현실화 시키는데 거의 모든 시간(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을 쓰고 있는데 결국은 어느 날 학과장(Dr Ko, a Chinese)이 와서, 계속 학위를 위한 공부를 계속 할 것이냐, 그곳(DCL)에서 일을 할 것이냐 결정하라고 엄포를 놓고 갔다. 한 마디로 더 이상 그곳에서 일을 하며 시간을 지체하려면 학위를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골치 아픈 와중에서 연숙이 임신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1982년은 나에게 학교에서는 어려운 한 해였음이 분명했지만, 다른 쪽으로 우리는 그 해에 천주교를 알게 돼서, 그 해 부활절 때는 우리 부부가 같이 영세를 받는 (축복 받을) 일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신이 된 것은 절대로 우연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유학생 부인들 중에서 임신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면서 (예를 들면 성당교우 유학생 남백희씨)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부유학생들의 기숙사인 Buckeye Village 우리 바로 옆에 살던 물리학과 유학생 배재고 출신 이후종씨 집 ‘마저’ 임신한 것을 알고 우리도 용기를 갖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리의 여러 가지 사정이 불안정적이었지만, 모든 것을 무언가에 내 맡긴 기분이었다.
임신 중에 입덧(morning sickness)이 너무나 심해서 연숙은 한 때 고생을 많이 한 편이었지만, 그 당시 새로 얻은 신앙이 그런 어려움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한 예로, 아플 때마다 축성된 성유를 바르고 기도를 하면 신통하게도 낫기도 했던 것인데, 이것도 우리의 영세동기이고, 역시 임신 중이었던 상대 고완석씨의 부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한편, 신기하고 신났던 때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였다. 이것도 부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라고 생각이 돼서 신중하게 의논한 끝에 ‘순 한글’ 식으로 짓기로 하고 어머님께 허락을 받는데, 정말 다행으로 어머님도 대 찬성이셨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한글이름 지어주기가 유행으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배우리 씨라는 분께서 그런 운동을 펼치고 계셨는데 어머님께서 극성맞게 그 선생님으로 부터 ‘새로니‘ (새로운+이)란 예쁜 이름을 받아오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자이름의 오랜 전통과 호적, 족보 등을 고려하면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까지 느끼지 않았다. 또한 다행히 호적에도 순 한글이 허용이 되어서 큰 문제가 없었다.
연숙의 산부인과는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Riverside Hospital에 있었고 의사는 Dr Baird, 비교적 잘 한다는 사람이었고, 다른 유학생들도 이 의사에 대한 경험들이 있어서 조금 마음도 놓였다. 비록 임신 초기에 심한 입덧으로 한때 고생은 했지만 나중에는 별로 큰 문제가 없었다.
남편이 출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도와주는 Lamaze (라마즈) class에 같이 가서 출산준비 교육도 열심히 받기도 했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숙은 제왕절개 출산을 하게 되어서 자연분만을 못한 아쉬움도 남게 되었다.
첫 아이라서 그런가.. 연숙은 혼신의 힘으로 임신기간을 절제하는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고, 뱃속에서 움직이는 생명에 대해서 너무나 신기해 하며, 이런 것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자랑’까지 하곤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고생하는 여자들이 너무 불쌍한데..” 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연숙은 남자들 사이에 끼어서 함께 소프트볼을 할 정도로 기본적인 체력이 아주 건강해서 제왕절개출산만 빼놓고 모든 과정이 아주 순조로웠다. 하지만 새로니가 태어났을 때 가장 큰 놀라움은 새로니가 여자아이 였다는 사실이다. 연숙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모두 남자아기일 것이라고 결론을 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저 그렇게들 추측을 했는데, 여자아이가 나온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남자아이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연숙의 친정은 ‘관례’대로 ‘미안한 마음’을 피력하셨고 우리 어머님은 ‘첫딸의 축복’을 강조하시긴 했지만 속마음은 짐작이 되었다. 내가 독자였으니..
29년 전 1월 초, Columbus, Ohio는 예외적으로 유난히 포근함 속에 가랑비가 내리던 날 갓난 새로니를 안고 Buckeye VillageMahoning Court의 ‘우리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금속공학과 유학생 김원백 씨의 부인(도성 엄마)가 우리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려 주었는데 그제서야 모든 긴장이 풀어지면서, 아~~우리가 이제 엄마,아빠가 되었구나, 실감을 했다.
이와 같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이는 인간사가 지금 생각하니 왜 이리도 거창하게 무슨 ‘인간의 성스러운 의무‘를 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결혼을 안 하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미안하지만, 신앙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은 역시 이렇게 ‘유별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와~~ 언제 18일이 되었나? 근래 나의 세월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느낌이 지배적이지만 그래도 가끔 뜻밖의 즐거움도 가볍게 섞일 적도 있어서 빨라지는 시간에 제동을 걸기도 한다. 이미 지나간 일월의 시간들도 그런 느낌이었다. 두 번의 가족 생일과, 우리부부의 결혼기념일까지 있고 이제는 감각이 많이 희미해졌지만 ‘구정’이란 것도 있어서 잔잔하지만 약간은 상기되는 느낌의 정월이다.
이런 가족적인 것 이외에 내가 조금 관심을 가지는 행사로 매년 일월 하순경 스위스의 다보스(Davos)에서 열리는 World Economic Forum (WEF)이 있다. 이 Forum의 역사가 생각보다 길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부터다. 올해도 1월 25일부터 열리는데, 올해는 과연 어떤 ‘세계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처방‘들이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아래의 streaming video는 World Economic Brainstorming: Business, Governance and Leadership – New Pressures and Realities 라는 brainstorming session인데 참가자들의 모습이 아주 다양하고 태도가 진지하다.
¶ SOPA/PIPA: 읽기도 요상한 이런 이름의 ‘법안’이 지금 한창 떠들썩하다. SOPA는 Stop Online Piracy Act의 약자로 미국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에서 심의 중이고, PIPA는 Protect IP(Internet Protocol) Act의 약자로 미국 상원(Senate)에서 심의 중인 법안이다. 그러니까.. ‘소파, 피파’ 로 불리는 이 법안은 조금은 다르지만 골자는 거의 같아서, 인터넷 상에서 저작권자를 ‘강력하게’ 법적으로 보호, 대응하겠다는 것들이다.
물론 이 법안의 의도는 이해가 가고, 필요한 것처럼 들린다. 문제는 역시 이것이다. Devil’s in the detail..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실행하는 단계에 이르면 문제 투성이고, 심지어는 아주 위험한 ‘지나 친’ 법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법은 전체주의나, 독재국가에서는 아주 쉬울 것이지만, 미국에서는 생각처럼 쉽지 않을 듯하다.
원칙적으로도 이것이 fair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비유를 생각하면 쉽다. 도둑이 와서 물건을 훔쳐갔을 때, 도둑을 잡기도 전에 그것을 ‘방조한 듯이 보이는’ 주변을 먼저 처벌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처벌로, 그 주변을 ‘일방적으로 폐쇄’ 하려는 으름장을 ‘합법적’으로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너무나 ‘쉽게’ 풀려는 의도가 보이고, ‘물건을 쌓고 사는’ 가진 자, 부자만을 너무나 보호하려는 의심까지도 보인다. 결국은 엉뚱하게 불똥일 튄 사람들, 그것도 세력이 만만치 않은 Google같은 곳도 반기를 들고, 이제는 ‘대부분 일반인’들까지 반대를 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요새, 가진 ‘부자들'(1%)과 못 가지 대부분 사람들(99%)이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으로 부각이 되고, 미국 대선에서도 쟁점이 될 듯한 것을 보면서 이 법안도 그런 각도에서 보면 조금 더 깊게 이해를 할 수 있다. 인터넷의 raw power를 보여주기 위해서 Google과 Wikipedia는 이 법안에 대한 인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Google은 ‘검은 사각형’을 보여주는데 아마도 인터넷의 죽음을 상징하는 ‘관’이 아닐까, 그리고 Wikipedia는 숫제 site의 service를 폐쇄해 버렸다. 조금은 극단적이지만, 그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 올해는 작년에 비해서 현재까지 날씨가 아주 한마디로 ‘양반’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Weather Channel이 별로 돈을 못 벌고 있다는 사실이다. 날씨에 관한 커다란 뉴스가 많아야 그들이 돈을 벌 터인데, 매일매일의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일기예보 말고는 별로 그것을 볼 필요조차 없는 그런 겨울인 것이다.
겨울이 아직도 많이 남았지만 작년에 비하면 정말 조용하고, 특히 작년 이곳 아틀란타 지역의 폭설을 생각하면 지금도 조금 흥분이 될 지경인 것이다. 작년의 아틀란타 폭설은 아마도 100년에나 오는 그런 것이었고, 완전히 일주일 동안 이곳의 경제활동을 stop시킬 정도였다. 그래서 이름도 snowpocalypse (snow + Apocalypse) 나 snowmageddon (snow + Armageddon)등으로 불릴 정도다.
사실은 작년은 근래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눈이 내렸고, 전세계적으로도 일본재해, 미국의 killer tornados등으로 일기에 관한 뉴스매체는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최악의 경제상태로 정부레벨에서 이런 재난을 대처할 재력이 없다는 것인데, 천만 다행으로 Mother Nature가 아직까지는 잘 협조를 하고 있고, 장기적 예보에도 큰 변화가 없는 듯해서 다행이다.
2012년 1월 15일, 그리운 동창 친구, 양건주의 생일을 축하한다. 아버지 세대 같았으면 ‘정말 오래 살았다’는 축하겠지만 완전히 한 세대가 흐르면서 그런 기분은 조금씩 사라지는 듯 하다. 꼭 오래 사는 것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기왕 조금 길어진 수명은 소중히 써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각자가 그렇게 덤으로 주어진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할 지는 모두 다르겠지만, 아주 작더라도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인 유산은 조금 남기고 갈 수 있게 노력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옛날 비틀즈의 When I’m Sixty Four를 들을 때, 과연 우리에게 그런 때가 올까 했지만 시간과 세월만은 참으로 정직하구나. 바로 그런 순간들이 우리들에게 왔으니 말이지. 다시 한번 그리운 친구 건주의 예순 네 번째 생일을 축하 한다!
The rogue malware “Vista Security 2012” looks like this
You God Damn, Son of Bitch coward, losers whom I hate most in universe, they are the people who intentionally infects people’s computer with this rogue malware called Vista Security 2012. When my daughter called home scared complaining about her infected Vista laptop, I knew it was one of those fairly easy infections. But it was wrong when I actually saw it myself. In a word, the Windows becomes virtually useless, only thing you can do was clicking OK to purchase their ‘anti-malware’ problem! Probably some eastern European mafia hired some third-rate malware writer cheap, wants free money. Knowing the infected Vista laptop is almost impossible to use for finding some help on Internet, I found how other people handle this trash, and some removal tips from my own PC. To be honest, even those sites looks like eastern European mafia showing so many misleading ads. With desperation, I actually tried following their tips, but again it looks like either long process or eventually futile attempt. Then, I came to think of it.. SYSTEM RESTORE built in feature on Vista. This, from my experience, would almost always works, nixing any worst infection by going back to previous PC snapshot mode. But again, I could not ‘execute’ the SYSTEM RESTORE on fully running Windows screen simply because the rogue malware blocks every attempt to do that. Only possible method in this case is to log into SAFE PROMPT mode (hitting F8 key while boot). When you’re on DOS PROMPT screen, run the system restore program by typing “RSTRUI.EXE” (without quotation marks). Then the PC may look ‘dead’ but after some time, it will run the SYSTEM RESTORE. This is what I did, still believe the best, cleanest, and easiest method.
Question:Am I the only one in the world whose installation of newly released PIAF2 (PBX-in-a- Flash 2)on PVE (Proxmox virtual machines) miserably keeps failing?
This feels so strange because I can not remember if it ever failed to install before. The problem is that after the first phase of installation, it just goes the infamous #bash prompt meaning the following phases simply refuse to begin. I first suspected the problem with network connection (ethernet, IP etc), but when I do ‘ifconfig’, it correctly displays dhcp‘ed IP address and ethernet connection information. I have repeated this process at least 4 times before declaring something is gravely wrong with this latest release. It looks to me not even ready for the usual internal alpha-release stage, how they dared?
HAPPY NOTE: I’m sorry, PIAF2! Again, it’s not your fault but my own ‘not-so-perfect’ installation setup. I, somehow, suspected this for some time, but not was so sure. As it turns out, my network’s dhcp server didn’t provide DNS server info correctly, rather it did not supply one! Later PIAF2 installation scripts also was at fault in that it simply gave up trying to connect PIAF server too early without giving any hints what’s wrong! Just one lousy error message would have saved a lot of my wasted time. After I replaced current dhcp server (which is a simple DSL router) with a dedicated DD-WRT router which has more robust dhcp server in it. Now, this latest, greatest release installed without any glitch, I am now eager to find out what’s in there.
흑용의 해라는 새해, 용의 해 임진년이 밝았습니다. 비록 자주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지난 한 해였지만 항상 생각 중에, 기도 중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멀리 타향에서 사귄 친지들이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허물없이 느껴지는 친구들, 항상 멋진 host역을 열심히 하시는 서울고, 서강대 최동환씨네, 진희 아빠 엄마, 항상 커다란 동작과 유머, 그리고 Clark Howard 뺨치는 소비경제의 도사 서강대 윤재만씨 부부, 멋진 노래만 골라서 잘도 부르는 이태리 가구점 Ohio State 동창 전성준 사장님 부부 올해는 경기가 잘 풀려서 순조로이 business가 풀려나가기를 바랍니다.
제가 항상 은총을 듬뿍 받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 레지오, 단원 자매 형제님들: 김용란 안젤라 단장님, 안애자 로사 부단장님, 이연숙 베로니카 서기님, 은효순 요안나 회계님, 이길영 아가다 자매님, 김희대자 고레따 자매님, 이남순 바울라 자매님, 장춘자 실비아 자매님, 우원실 마리아 자매님, 우동춘 요셉 형제님, 그리고 얼마 전 신상의 이유로 퇴단을 하셨던 이순섭 마리아 자매님과, 송희빈 젤뜨루다 자매님..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새해, 더 건강하시고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