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 정말 못 봐주겠다..
요새 가끔 보는 인터넷 Youtube의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60년대의 ‘방화, 국산영화’ 들 중에 예전에는 별로라고 생각되었던 배우들이 이제는 다른 느낌을 주는 예를 즐겁게 발견하기도 하고, 정말 내가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었던 서울 시내의 정들었던 모습도 다시 보게 되는 즐거움도 느낀다.
예를 들면 나의 대학시절 초기에 없어졌던 그 정든 ‘거북이 전차‘들의 모습들과, 서울 사람이면 예외 없이 정 들었던 일제의 잔재 서울역사와 바로 옆, 염천교 밑으로 검은 연기를 뿜으며 지나가던 ‘화통기차‘, 남산에서 본 반도호텔만 보이던 ‘아담했던’ 서울시내와 멀리 바라보이던 인왕산, 북악산과 그 뒤에 까물거리며 보일 듯 말 듯한, 병풍처럼 둘러선 북한산(백운대, 인수봉, 도봉산 등).. 명동입구에서 보이는 지지리도 못생겼던 시내버스, ‘도라무 깡’을 두들겨 패서 만들었던 국산차 제1호 ‘시발택시‘들.. 이런 것들이 비록 흑백의 배경에서나마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이가 든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영화배우들은 그 시대의 ‘최첨단’의 유행을 자랑하는 특별 난 직업의 소유자이기에 우리들은 그렇게 돈을 내며 그들을 보고, 관심을 갖는지 모른다. 비록 시나리오와 감독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준準 로봇 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럴까? 그렇지 않기에 ‘성공한 인기배우’와 나머지로 구분이 되는 것이다.
60년대의 영화를 다시 보며 내가 제일 놀란 것은 신영균과 최무룡 이다. 내가 그 당시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나이제한 때문이 거의 못 보았지만, 그 당시 나는 신영균은 겹치기출연의 명수, 돈에 환장한 배우, 유들유들한 인물로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요새 다시 여러 편에서 그를 보니,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연기가 정말 요새의 수준으로 보아도 진실된 ‘수준급’, 아니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최무룡은 김지미와의 간통사건으로 어린 우리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왜 여자들이 그렇게 최무룡이라면 오금을 못 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남’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기와 함께 그의 연기를 자세히 보니, 역시 매력적인 남성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너무 어려서 잘 못 알았거나, 내가 그를 보는 눈이 ‘성장’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희 – 영화 초우(草雨), 감독 정진우, 신성일 주연, 1966
그 반대의 case가 바로 당시 (60년대 말)의 잘 나가던 여배우 문희였다. 그녀는 내가 그 당시 실제로 보았던 영화의 주연급이었고, 안 본 영화도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지켜 보았던 것이다. 당시의 기억에 나는 분명히 ‘멋지고, 귀엽고, 신비롭고, 알고 싶던’ 그런 문희였다. 그녀가 나온 영화를 안 본 것도 분명히 잡지를 통해서 관심 있게 본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인기의 절정기에서 하루아침에 한국일보 장기영의 부잣집 아들 장강재에게 시집을 가 버리고 완전히 망각의 세계로 가버렸다. 그리고 반세기 뒤에 다시 그녀의 연기를 자세히 보게 된 것이다.
신성일의 연기까지 망치게 한, 그럴싸한 이름의 영화 <초우>, 남궁원과 남진 등 남씨들 조차 살리지 못했던 <벽 속의 여자>, 그리고 신영균과 전계현의 도움으로 간신히 hit를 했던 <미워도 다시 한 번>등을 다시 보고, 최소한 현재까지는 그녀의 신화는 완전히 100% 깨지게 되고 50년 간의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제 자리를 다시 잡게 되었다. 한 마디로 ‘못 봐 주겠다‘.. 인 것이다.
처음에는 혹시 내가 중요하지 않은 그 당시 ‘촬영 기술’ 때문인가 의심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 ‘지겨운, 성우들의 예쁜 목소리 dubbing’ 같은 것이다. 동시녹음이 너무나 비쌌던 당시의 경제사정은 이해하지만 왜 그렇게 ‘인형 같은 목소리‘만 고집을 했을까. 문희의 경우에는 그 수준이 극치에 달했다. 영상의 느낌과 너무나 동떨어진 그 ‘예쁜 성우의 떨리는 목소리’.. 그것과 문희의 연기와 너무도 잘도 어울리는 ‘신파 극’의 모습들이었다.
다른 인기배우 김지미도 같은 운명의 동시녹음 희생자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그 목소리의 문제를 잘 cover해 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문희는 누가 어떻게 발굴을 했었는지는 몰라도, 완전한 ‘허구, 껍데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황급히’ 부자 아들과 결혼을 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50년 만에 나만이 알게 된 ‘진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