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백만 불 저택, KAL 007 30년 전, Shaklee
¶ 지난 주 수요일부터 시작된 우리부부의 ‘어정쩡한 휴가’를 9월 1일 일요일 연숙의 생일로 마감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휴가는 육체적, 물리적이라기 보다는 정신적, 심신적인 느낌이 더 많았던 ‘머리를 비우는’, 집에서 보낸 며칠이었다. 평소 때의 daily routine들이 완전히 멈춘 것으로 정말로 시계조차도 쉬는 느낌을 만끽하였다.
올해 연숙의 생일은 조금 색다르게 외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집이나 새로니나, 나라니의 집도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아이들이 준비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독특한 것은 어느 ‘부자의 9백만 불짜리 거대한 저택‘에서 두 딸들이 함께 준비한 지중해식 steak류의 요리와 적당히 단(sweet) 생일 cake을 즐긴 것이다.
그 ‘저택’은 나라니가 언젠가 직장 동료에게 소개를 받아서 house-sitting이나 pet-sitting을 해 주던 집으로 나라니가 그날도 pet-sitting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리를 ‘주인 없는 집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백 만불 짜리 집들은 그런대로 가 보았지만 9백만 불짜리 집은 사실 처음 구경하는 셈인데 집의 크기도 크기지만 위치가 완전히 별장지나 다름이 없었다. 문제는 나는 그런 큰 집에 머무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고 심지어 불안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인데.. 무슨 ‘부자 콤플렉스’ 비슷한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게 ‘과시하며 사는 모습’에 대한 반감 때문일지도..
¶ 올해 9월 1일은 물론 연숙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기념일’ 도 있었다. 그것은 1983년 9월 1일이었다. 그날 뉴욕 발 KAL 007기가 서울로 나르던 중에 소련 영공 부근에서 그들의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격추가 되어서 탑승객, 승무원 전원이 사망을 하였던 것이다. 30년 전의 일이다.
그 해 1월에 첫딸 새로니가 태어났고, 그날 9월 1일에 우리는 진짜 중화요리 ‘짬뽕, 자장면’ 등 생각이 간절해서 시카고로 드라이브 하고 있었다. 9개월 짜리 애기 새로니를 ‘중고차’ 뒷좌석에 싣고 시카고를 가면서 끔찍한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 얼마 전에 나는 학교를 완전히 떠날 결심을 하고 직장을 구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내 인생 ‘첫 직장’이 된 DTS[Dynamic Telecom Systems]에 job[software engineer]이 되어서 그것도 자축할 겸 집을 떠난 것인데 그런 뉴스를 접하게 되어서 시카고에 가서도 뉴스를 듣느라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다.
그 당시에는 비록 1962년 cuba의 핵 미사일 위기 때와는 비교는 안 되지만 그 나름대로 상당한 위기에 속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은 외교적인 관례를 깨고 소련을 ‘악의 제국, evil empire’로 선언을 한 것이다. 그 선언은 잡음이 많았지만 결국 몇 년 후에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는 시금석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3년 당시 소련은 사실 이미 체제의 한계를 들어내었고 민간 항공기를 ‘위장된 간첩’으로 오인하고 격추까지 할 정도의 경직성과 낙후성을 들어내고 있었기에 ‘붕괴’는 시간 문제이기도 했다.
¶ Shaklee, 한글로 샤클리..라고 쓰는 이 이름이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들어보는 이름이고, 연숙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반년 전에 미국에서 완전히 퇴각을 한 일본의 화장품 POLA, 연숙의 미국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이 일본회사가 정말 멋없이 미국시장에서 사라지면서 허탈감을 감추진 못했던 이즈음에 등장한 것이 ‘미제’ Shaklee란 것이다.
돈은 둘째치고 경제활동은 어느 나이에서나 정신건강상 필요한 것임을 알기에 조금은 더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보고 있고, 연숙은 그 회사의 초청으로 San Francisco를 다녀왔기에 이제는 결정의 단계에 이른 듯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나의 역할’인데..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한다지만 그래도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경제활동’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번은 조금 각오가 다른데.. 맡기자, 맡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