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나에게 2014년은 어떤 세월들이었을까? 어떤 일들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고, 궁극적으로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조금은 심각하고 철학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도 좋을 듯 하다.
요새는 일기를 특별히 쓰지 않아도 최소한 ‘일지’같은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남는다. 제일 좋은 source가 email이나 blog같은 것이 아닐까? 별로 쓰지 않는 사람들도 최소한 email 같은 것을 통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을 할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많은 일들이 거의 모두 social media를 통해서 Internet (cloud)에 archive가 되는 세상이라.. 숨길 수 없이 거의 반영구적으로 남기도 한다.
나는 조금 집착적으로 ‘인생 기록’을 남기려는 부류에 속해서 큰 어려움 없이 나의 개인역사를 들추어 볼 수 있다. 1년 정도는 어제 일을 보듯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며 숨은 의미가 있기에 그것을 모두 남기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것이다. 특히 글을 pro처럼 쓰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너무나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으로 남길 수는 있고 그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나중에 누가 보건 안 보건 상관이 없다. 그것을 남긴다는 그 행위자체가 나에게 중요한 것이니까.
2014년, 내 나이 66세를 보내던 일년.. 66세면 어떨까, 한 세대 전 같으면 벌써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라졌을 것 같고, 예전의 언론인 이진섭씨의 65세 만세론(萬歲論)에 의하면 이제는 덤으로 사는 나이긴 하지만, ‘과학적 세상’이라는 요즈음에는 그런대로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나이 일지도 모른다. 작년에 비해서 내가 얼마나 ‘느려’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2014년.. 무엇을 기억하고 싶고 잊고 싶은 것일까.. 생각을 해 본다.
Atlanta Snowmageddon, Snowcalypse, SnowJam: frozen on highway:
전 요셉, 황 프란치스코 형제님들.. 모두 듣기만 해도 가슴이 편안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름들이 되었다. 특히, 전 요셉 형제님의 이름은 요새같이 추운 날씨에는 따뜻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전 요셉 형제님, 나와 같은 돼지띠 동갑으로 친구, 형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분명히 나보다 생일이 위였으니까, 형 뻘이 되겠지만 그런 것 서로 따지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가깝게 알고 지낸 것이 불과 1~2년도 채 되지를 않았다. 채 깊이 알게 되기도 전에 전 요셉 형제님은 ‘갑자기’ 조상의 땅,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을 해 버렸다.
그때 느낀 기습적인 쌀쌀한 가을바람과 같은 공허감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것이 벌써 1개월 도 지났나? 귀국 후 잠깐 온 소식에 시차 적응으로 매일 잠만 잔다고 하더니 드디어 카톡(카카오톡)으로 잇달아 소식이 날아왔다. 계속 시차 적응 중이고 눈이 내린 고국의 모습이 멋있다며 사진도 보내왔다. 온양으로 간다고 했으니 아마도 온양 교외의 어느 곳인가 짐작을 한다. 처음에는 사업을 시작하려고 ‘땅’을 보러 갔다가 찍은 곳이 아닌가 했던 나의 상상이 너무나 우습기만 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드디어 ‘사람의 사진’이 왔다. 전요셉 형제님의 모습이 ‘대한민국화’가 되었는지.. 완전히 ‘때 빼고 광 낸’ 모습이어서 놀라고 반갑기도 했다. 역시 평생을 살아온 고향 물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탁한 공기를 걱정하며 귀국을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 그런데 이 사진을 누구와 같이 찍었는데.. 처음에는, 귀국하면 꼭 보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분을 만나서 같이 찍은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곧 이어서 사연인즉.. 그 분은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우리부부는 반가웠다. 황 형제..
우리 부부가 봉사자로 수녀님을 보조했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교리 반에 2014년 부활절 영세를 목표로 가족 4명, 전원이 등록했던 황 형제였던 것이다. 그 사진은 황 형제가 대전 노은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전 형제와 같이 찍은 것이라고 했다. 영세명은 교황님과 같은 프란치스코.. 너무나 반가웠다. 황 형제님 부부 가족은 작년 가을 교리반에 등록 후에 사정이 생겨서 교리반 공부 도중에 올해 초에 ‘영구’ 귀국을 했는데.. 아마도 귀국 후에 교리공부를 계속해서 부부가 같이 영세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이 모두 영구 귀국을 했고 이렇게 다시 재회를 하며 찍은 사진.. 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4년여 전 레지오 활동단원을 갓 시작하며 나에게는 생소한 ‘병자기도’ 란 것이 있었고 그 대상 중에 레지오 단원이며 중병환자였던 전요셉 형제가 있었다. 멋도 모르고 나는 열심히 기도를 했다. 생전 처음 ‘남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속으로는 회의도 많이 있었지만 ‘성모님의 군단’의 규율을 따라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열심히.. 1~2년 후에 우리는 기적과도 같은 소식에 놀라기만 했다. 그 ‘중병’이 ‘완치’가 된 것이다. 본인도 놀라고 레지오 단원들도 놀라기만 했다. 겨우 신앙을 찾아가고 있었던 레지오 햇병아리였던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살아있는’ 신앙공부가 됐다. 그 이후 전 형제는 가끔 보는 정도였지만 만나면 최소한 얼굴을 익힌 정도가 되고 건강에 대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 말 우연히 인사를 하다가 나와 돼지띠 동갑임을 알게 되었고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near-perfect chemistry가 있음도 느끼게 되었다. 서로 가끔 식사를 같이 하며 서서히 조금씩 상대방을 알게 되어갔지만, 역시 나이 들어서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됨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이곳에 오래 산 이유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았지만 전요셉씨는 내가 오랜 전에 알았던 ‘그 옛날’ 기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는 너무나 그립고 신선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우리는 무언가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가깝게 하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너무나 서로 다른 개인 역사가 너무나 흥미롭지 않을까? 작년 말에는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준비하며 난타와 중창에서 가깝게 어울리기도 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고, 봉성체, 교구 성체대회 같은 곳에도 같이 참가를 하는 등 오랜 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느낌도 들었다. 전 형제님은 어르신들과 참 잘도 어울렸는데, 그때 받는 느낌은 한마디로 ‘사람이 좋다’라는 그런 것이었다. 순진하기도 하고, 우직하기도 한 세상을 약삭빠르게 사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성품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는지 결국은 귀향을 결심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한마디로 조금은 더 쓸쓸한 기분을 남기고 사라진 돼지띠 사나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우선 섭섭함을 달래는 수 밖에 없나.. 전 형, 그곳에서 하시는 일 순조로이 풀리기를 바랍니다!
¶ 4th Advent candle: 대림절 넷째 주.. 촛불이 켜졌다. 역시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하는 반복되는 탄성과 탄식이 귓가에서 속삭인다. 예년 같으면 제발 시간이 천천히 흐르며 ‘성탄의 기분’을 마음껏 느끼고 싶었을 것이지만 올해는 ‘기억나는 인생’을 통해서 처음으로 비교적, ‘그래.. 조금 빨리 가도 좋다’ 하는 자신감을 유지하였다. 그것이 멋지게 성공을 한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Christmas Past에 완전히 묻히고 빠지고 즐기던 예전과는 조금 다른, Christmas Present 를 사는 느낌.. 바로 이것이 나에게 처음같이 느껴진다. 올해 성탄의 제일 큰 선물이라면 바로 이 느낌이다.
과연 Christmas가 무엇인가.. 어렴풋이, 가늘게 그 ‘진짜’ 의미가 느껴지는 올해 성탄시즌.. 몇 주간 굳세게 hold했던 carol, movie, decors, tree등이 쏟아져 나오고 일년 전의 반가운 모습들, 특히 나의 favorite ‘YouTube‘ holiday movies들을 나는 반긴다. 그 중에 일년 만에 다시 보는 movie, Christmas Wishes, 작년 이맘때 이런 류의 영화를 ‘계속’ 보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작년과 같이 올해도 12 days of Christmas를 보낼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희망, 그 희망은 하늘만이 알 것’인 성탄절에 시작되는 멋지고 값진 시간들이 될 것이다.
성탄 3일 전에 첫 모습을 보이는 작고 귀여운 Christmas tree
¶ family room Redux: 우리 집 family room은 dark wood panel 벽으로 둘러싸인 중후하고 무거운 느낌의 방이지만 우리 가족에게, 아이들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저녁 식사 후에 모여서 가족적 시간을 보내던 보금자리 역할을 충분히 했다. 그러니까 가족 모두에게 추억의 방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주로 Chinese food를 takeout 해서 ‘퍼지고 누워서’ family video (VHS movie)를 즐기곤 했다. 그 시간이 그렇게 편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고 어른이 된 아이들에게도 ‘가족의 추억’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모두 떠난 후 그 방은 완전히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먼지가 쌓이는 ‘빈 방’으로 방치가 되었다.
4 년 전쯤 아래 층 전체를 IKEATundra laminate flooring으로 바꾸었는데.. 우리 집 수준에 알맞은 선택이었지만 내가 직접 install을 한 관계로 ‘문제’가 많았다. Flooring 에는 완전히 ‘시로도, amateur’ 였던 나는 그 당시 몇 개월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을 얼마나 save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다시는 안 하겠다고 다짐을 할 정도였다. 남들은 그렇게 쉽다고 했던가.. 나는 무언가 ‘운이 나빴는지’ 고생을 한 것이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 우리 가족 추억의 보금자리, family room의 floor에 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습한 관계인지.. 마루 자체가 ‘울렁울렁’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floor은 습하면 ‘팽창, 확대’가 되어서 wall edge (가장자리)에 1/2″ (반 인치) 정도 여유를 두게 되어있고 나는 그런 instruction을 충실히 따랐는데.. 그래도 문제가 있는가?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나의 불찰임이 들어났다. 실수로 ‘벽돌 벽’ 쪽에 여유를 두지 않았던 것이고 그곳으로 마루가 팽창, 밀리면서 마루가 뜨는 것이다. 다른 방은 문제가 없는데 왜 유독 family room은 그랬을까.. 역시 그곳에 제일 습한 방이었고, 나의 실수로 벽돌 벽 쪽에 더 여유간격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Pro들은 이런 문제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tongue & groove 방식의 flooring은 ‘원칙적’으로 설치 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고치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산 IKEATundra 는 설치가 제일 쉬운 종류도 아니다. 생각 끝에 새것으로 갈기로 하고 지난 여름에 Home Depot에서 dark tone 색으로 골라서 구입을 했지만, 설치하는 것은 미루고 미루고 하다가.. 무려 4개월 뒤에 끝을 보게 된 것이다. 이번에 산 것은 Hampton Bay laminate floor (from Home Depot) 인데, review가 아주 좋았고, 값도 우리에게 맞는(경제적), 색깔도 family room에 걸 맞는, walnut tone, 밤색 계통으로 방에 편안하게 잘 맞았다. 설치를 하며 놀란 것은 그 동안 제조 기술이 발전을 했는지.. 설치하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4 년 전 IKEA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쉬웠던 것이다. 이런 정도면 2 층의 방들도 이것으로 모조리 해 볼까 하는 꿈같은 상상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80/20 rule (마지막 20% job에 80%의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을 깜빡 잊어서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거의 며칠 일이 걸렸다.
아이들이 떠난 이곳 family room을 어떻게 ‘재활용’할 것인가.. 새로 단장이 된 이곳은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인데.. 역시 ‘사람이 머무는’ 방으로 만들려면 내가 그곳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라서 이번 기회에 아예 ‘다목적 multi-purpose’ 인 곳으로 쓰기로 하고 일단 나의 ‘낮 서재’로 만들기로 했다. 나의 ‘day work’ desk를 이곳으로 옮기고 guest (아이들 포함) 가 오면 desk를 한 쪽으로 옮기면 ‘멋지게’ guest room역할을 할 것이다. 손님이 거의 없는 요즈음 이지만.. 그래도 누가 알랴? 이렇게 해서 추억의 보금자리가 다시 ‘살아있는’ 보금자리로 탈바꿈을 하게 되는데.. 새해에는 생산적, 창조적인 보금자리의 추억이 만들어지는 곳으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해 본다.
¶ ‘Legio’ fatigue: 조금 피곤한가.. 그것도, 왜 레지오 ‘Legio‘, (레지오’는 Legio Mariae, Legion of Mary의 한국식 표현) 가 피곤한가.. 요새 부쩍 그런 느낌을 받고 있어서 그런 나 자신도 싫고, 애써 이런 생각을 피하려고 한다. 하기야 60중반이 넘은 나에게 ‘나이와 때가 늦은 레지오 활동 단원 4년’이면 아주 짧은 기간도 아니고, 그 동안 정말 ‘뒤를 안 보고’ 쉬지 않고 열심히 달리기만 했기에 이 나이에 피곤을 안 느낀다면 그것도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그 4년간’ 나는 정말 많은 것을 깨닫고, 느끼고, 배우고,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보았고, 별로 피곤하게 느끼지도 않았다. 그것이 암만 생각해도 나에게는 별난 현상이었고 예외적인 세월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서히 조금씩 느끼는 것은 나는 분명히 ‘성모님과의 개인적인 친근감‘ 이다. 그냥 친근감이 아니고 ‘개인적’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지난 ‘4년간 노력’의 보람이라고 할까..
그것은 좋은데.. 내가 속한 ‘성모님의 군대’에 조금씩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그야말로 badnews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현재 좋은 idea가 없다. 그것이 2014년이 지나가며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문제없던’ 우리 쁘레시디움(레지오의 기본적 활동 단체).. 나를 그 동안 편안하게 감싸 주던.. 것도 결국은 ‘평균적인, 아니면 평균 이하인 인간의 집단’으로 변하고 있는지, 실망의 연속을 맛 보고 있으니.. 레지오 교본을 암만 읽어도 단기적인 전술적인 해답이 안 보인다. 그 위에 ‘고목처럼’ 버티고 있는 상급 평의회 역시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구태의연한 모습들, visionlessconventional wisdom만을 자랑하는 자세가 답답하기만 하다. 짧지 않은 역사와 ‘덩치’를 갖추게 된 현재, 왜 ‘영웅적’인 도전을 못하는 것일까? 현재 가지고 있는 potential은 생각보다 훨씬 큰데.. 제대로 크지를 못하고 있다. 비싼 시간을 할애한 ‘영웅적’인 단원들의 시간들, 아깝지도 않은가? ‘그들’이 바뀌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바라기 전에는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결국 내가 입장을 바꾸어야 하는 것인가? 참 어렵다. 이것이 fatigue.. 권태기라면 일시적이기를 성모님께 빌어보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문제들은 성모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case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2014년 성탄절이 3일 남았다. 올해의 성탄과 새해는 무언가 확실히 다르고.. 아니 달라야 한다. 그 다른 것은 바로 수 십 년 만에 처음 느낀다고 확신하는 진정한 평화일까? 평화, 진정한 평화가 바로 이것인가? 비록 근래 특히 2010년 이후는 그 전보다 더 평화를 느꼈다고 할 수 있지만 올해는 그 차원이 다르다. 바로 성모님께서 나를 개인적으로 밀어주신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벼랑으로 밀어주시긴 했지만.. 죽이시지는 않고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밀어 주셨다. 하늘에 계신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 성모님께서 나를 친히 돌보아 주신다는 ‘기발한 생각’이 언제부터 들었을까? 처음에는 그렇다고 우격다짐으로 믿으려 노력을 했지만 현재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믿어진다. 아마도 이런 나의 변화가 올해 내가 받은 최고의 천상의 선물일 것이다. 성모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가정의 평화는 나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보인다. Tobey와 Izzie가 뛰고 달리고 자는 모습들.. 최고의 평화스런 선물이다. 연숙과 ‘매일’ 가까운 본당에서 미사에 참가하는 것 어떻게 표현을 하랴? 그렇게 으르렁대던 새로니 나라니도 이제는 여엿한 숙녀처럼 행동을 하고 가족을 돌본다. 이것이 올해 현재 우리가 받고 있는 은총의 선물 들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각하고, 뛰고 미사를 갈 수 있는 건강을 가지고 있다. 이것보다 낳은 선물이 어디에 있을까?
비록 우리는 불안한 심정을 떨칠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것도 솔직히 성모님의 보살핌을 느끼고, 기대하며 산다. 그런 평화를 느끼는 것이다. 비록 고향의 가족들과의 관계를 해결 해야 하는 거대한 숙제가 있지만 그것도 크게 걱정을 하고 싶지 않다. 노력을 하면 될 것이다.
비록 나의 신앙적인 ‘본부’인 레지오에서 많은 문제점을 보고 있지만 이것도 역시 천상적인 도움을 기대하고 싶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안 되는 것들 투성이인 이곳.. 어떻게 문제들을 헤쳐나갈까? 하지만 최소한 현재 우리들은 그곳에서 벗어나 평화를 즐기고 싶다. 특히 이런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더욱 평화를 느끼고 싶다.
¶ Our Lady of Guadalupe: 과달루페의 성모님! 처음 이 성모님 발현에 대한 것을 듣게 된 것은 ‘아마도’ 무척 오래 전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당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저 ‘마음 약한 영혼들’이 애타게 찾는 천상의 예수님의 어머니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89년 쯤 위스컨신 매디슨에 살 적에 한국에서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위스컨신 주립대로 ‘연수 차’ 오셨던 김희선 신부님 (본명을 잊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께서 멕시코에 다녀 오시면서 과달루페 성모님 상 사진을 선물로 사가지고 오셔서 우리집도 한 장을 받았고 기회가 있으면 벽에 붙여놓기도 했었다. 그 당시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신부님으로부터 분명히 들었을 터이지만 역시 ‘관심 밖’이어서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것이 과달루페 성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의 전부였다.
25년을 fast forward한 현재는 어떠한가? 오늘이 바로 천주교 전례력으로 ‘과달루페 성모님 축일 feast’로 나는 처음으로 특별히 신경을 써서 뜻 깊게 축일 미사를 맞았다. 그렇게 바뀐 나 자신이 나도 놀랍기만 하다. 세월의 장난일까.. 아니면? 이제는 이 특별한 발현의 배경, 역사, 뜻, 그리고 인류 구원사, 세계사에서의 의미까지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발현 사건’은 알면 알게 될수록 신비롭고 특히 ‘과학과 신앙’의 각도로 깊이 연구한 결과는 가히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이 ‘발현’을 ‘믿는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지금 나 자신은 100% 이 발현 ‘역사’를 믿는다.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시대 이후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이 ‘계속’ 인간들에게 발현하시는 첫 번째 이유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같이 자신이 없는 신앙인들을 ‘응원’하시는 그것이 첫 번째 발현 이유가 아닐까?
1531년 12월 9일에 지금의 Mexico City 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과달루페 성모님이라고 하는데 이 과달루페라는 이름은 성모님 자신이 발현 당시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특별한 뜻은 없는 것 같다. 16세기 초 멕시코 지역은, 물론 Aztec 아즈텍 원주민들이 살던 땅이었지만 Spain 에게 ‘정복, 개척’되기 시작했던 때였고, 따라서 가톨릭 신앙이 전해지던 때이기도 했다. 그 당시 Aztec ‘나라’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원시,태양숭배 종교로 통치되던 때였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인적 희생물’로 바쳐지던 공포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당시 이들의 태양숭배 인간제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오래 전 Indiana Jones (Temple of Doomed) 영화에 나온 그런 장면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손으로 꺼내는 끔찍한 장면.. 그런 ‘공포 정치’속에서 살던 원주민들.. 그들에게 스페인 정복자들이 ‘사랑과 자비’를 기치로 가톨릭 신앙을 전하던 때에 ‘과달루페 성모님’이 발현하신 것이다. 발현은 그래서 어떤 원주민 ‘아저씨’ Juan Diego (후안 디에고?) 에게 나타나셨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지고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 하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아저씨’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지역이 피지 않는 장미를 ‘증거’로 Juan Diego에게 주시고 그것을 의심 많은 주교에게 전하게 되었는데.. 그 ‘아저씨’가 그 장미를 tilma(망토) 에 담아 왔고 그것을 주교에게 보여주려 펼치자.. 장미를 쏟아지고.. 그 tilma에는 ‘찬란한’ 성모님의 상이 ‘각인’이 되어 있었다. 선인장으로 만든 그 tilma에 그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더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주교님은 그대로 땅으로 쓰러지면 경배를 하고.. 성모님의 요청인 ‘성모님 성당’을 그곳에 짓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과달루페의 역사’가 되었다. 이후 그 ‘성모님 상’에 많은 피해와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기적적’으로 극복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발현 자체도 기적이고 그 ‘상본’이 하나도 변질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도 기적이고.. 발현 이후 수많은 원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것도 기적이고… 기적의 집합체인 것이 바로 과달루페 발현이다. 신학적으로도 신세계인 America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성모님 사랑의 배려로 충분히 설명이 되기도 한다.
이런 ‘흔한’ 배경 이야기 보다 나는 그 유명한 성모님 상본이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더 관심이 많이 간다. 과학적 분석만으로는 기적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설명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과 ‘수학적’ 과학의 차이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특히 무신론적인 일본인 과학자가 digital image analysis를 통해서 분석한 성모님의 눈동자 속에 반사된 Juan Diego(목격자)와 주교의 모습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울 뿐이다. 나에게 정말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성모님 발현의 목적은 분명하고 뚜렷하다는 것.. 특히 초 현대를 살아가는 요새의 인간들에게… 절대로 희망은 있다!
¶ Tobey, 10! 12월 9일.. 은 우리 집‘수컷강아지‘ Tobey의생일이다. 그런데올해는조금특별한생일인 10살생일을맞았다. 이런중요한날을완전히잊고넘어갈뻔했는데 Tobey와오랜역사를같이해온 East Cobb Animal Medical Center에서 ‘축하카드‘가 email로와서알게되었고곧아하.. 올해가 10살생일이구나..하는탄식이나왔다. 10살이면이제인간나이로나와맞먹는것이기에더욱감회가새로웠다.
현재까지 Tobey는건강이좋은편이다. 하지만 10살이라는느낌이그리좋은것은아니다. 한마디로본격적인노년으로접어든것인데, 주변에서듣고보고한것으로앞으로일어날가능성이있는문제들을생각하며우울해지기도한다. 진희네집의개, ‘공주‘는하루아침에눈이멀었고, 다른쪽에서는개가제대로걷지를못한다. 사람은아프면말이라도하지만이애들은어떨까? 사회적, 문화적으로이제개나고양이들은거의 ‘사람같은식구‘대접을받게되어가고우리도큰차이가없다. Tobey에게무슨문제가생긴다면사람못지않게정말슬플것같다. 열살을맞이한 Tobey.. 우리와사는동안건강하게살아다오!
¶ Bernadette.. 버나뎃, 벨라뎃따, 흔히들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님 발현의 목격자 소녀의 이름을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의 Bernadette는 캐나다에 사는 나의 중앙고 동창 정교성 딸의 이름이다. 인 친구는 매년 꼬박꼬박 크리스마스 카드를 12월 초만 되면 보내준다. 요새 우표를 붙여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련만 이 친구는 고집불통으로 ‘인터넷’을 외면하고 이렇게 고전적인 방식을 고집해 왔다. 오랜 전에는 나도 우편 카드로 답을 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작은 친 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언제나 성숙한 친구, 전통적인 천주교인’ 정교성.. Wife를 병으로 잃은 후 재혼한지도 꽤 오래 전인데 이제는 딸 (큰 딸인지 작은 딸인지 확실치 않지만) Bernadette이 결혼을 한다고 결혼 안내장을 동봉해 주었다. 청첩장이 아니고 청첩장을 예고하는 card였는데.. 신부와 신랑감에 대한 아주 자세한 설명이 그곳에 있었다.
신랑감은 테네시주 내쉬빌 출생의 미국인, 그리고 evolutionary biology (진화생물학) 박사학위 소지자 로서 캐나다 시민인 Bernadette을 Toronto의 Royal Ontario Museum에서 post-doctoral research하면서 만났다고 한다. 교성이는 딸이 두 명이 있는데 Bernadette이 장녀인지 차녀인지.. 확실치 않다. 오래 전에 보내준 가족사진이 어디로 갔는지.. 우리 집도 두 딸이고 해서 ‘동지’같이 느꼈는데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을 보니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두 딸은 요새의 풍조대로 결혼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더욱 부러운 것이다.
신랑이 우리가 사는 인접한 테네시 주 출신이라서 혹시 결혼식을 그곳에서 하게 된다면 이 친구가 미국을 방문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십 년 만에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우리 둘은 서로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을 것 같은데.. 교성이는 옛날 부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별로 변하지 않았을 것에 비하면 나는 ‘완전히 변한’ 모습이라서 더욱 그렇다. 하기야 내년에는 더 늦기 전에 캐나다 쪽으로 여행을 할 계획도 있어서 딸의 결혼과 상관없이 한번 보게 될지도 모른다.
친구야.. 정말 축하한다. 정든 딸을 보내는 아비의 심정 나는 현재 상상이 잘 안 가지만.. 어찌 섭섭하지 않겠니?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순리가 아니겠니.. 덤덤하게 행복을 빌어주며 보내렴.. 인자하신 성모님과 주님의 가호가 딸 부부에게 함께하기를 빌어본다.
올해로 다섯 번째 맞는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 2014.. 나의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올해 마지막 ‘의무’ 행사가 오늘 있었고 ‘무사히’ 막을 내리면서 2014년 ‘beginning of end‘ 를 장식하게 되었다. 진정 2014년이 우리에게서 떠나게 되는가.. 아직도 실감은 안 가지만 아마도 그런가 보다. 66년 동안 보낸 12월이 그렇게 대수인가.. 그저 지나가는 세월의 한 부분인걸..
레지오 단원의 생활은 일년 열두 달 그렇게 ‘재미 만’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렇게 레지오 마리애의 창시자이신 Irish, Frank Duff는 ‘절묘하게도’ 년 말에 조금은 긴장을 풀고 ‘신나게 놀라고’ 공식적으로, ‘의무적인’ 여흥 시간을 마련했던가. 여흥을 곁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가진 annual member reunion 의 이 시간은 평소에는 잘 못 보던 Curia 동료 단원들이 한자리에 모이기에 아주 느낌이 색다른 행사다.
요새 세상이 그러하듯이 이곳도 대다수의 단원들이 ‘자매님, 여성’들이어서 남자들만이 갖는 ‘형제 의식’은 기대할 수 없지만, 사실 이제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이런 환경에 아주 익숙해진 것일까?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평생 못 느끼던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란 것이 너무나 신선한 것이다. 통상적인 ‘이성’이 아닌 그들도 ‘나와 같은 human being, 인간’이었구나 하는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 이것도 레지오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갈 뻔했다.
올해의 총 친목회는 이제까지와 다른 입장으로 맞게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연숙이 Curia간부인 관계로 나도 ‘말려들게’ 된.. 그러니까 남들 보다는 조금 더 행사자체에 깊이 개입했었지만 올해는 오랜 만에 ‘홀가분하게’ 둘이서 조금 더 쉽게, 여유 있게 맞게 되었다. 그런 다른 쪽에는 조금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특히 작년에 극소수의 ‘희귀동물’ 남성단원 몇 명이 ‘의기투합’, 모여서 중창을 했던 것.. 올해는 ‘상전벽해’ 같은 느낌으로, 조금은 황량한 기분이 되었다. 특히 돼지띠 동갑으로 나와 chemistry가 잘 맞았던 전요셉 형제가 영구귀국을 한 바람에 나는 더욱 외롭게 되어서, 작년의 ‘신나던 총친목회’가 이제는 나에게는 그리운 과거가 되었다.
올해는 우리 쁘레시디움 자비의 모후, 그리고 ‘옆 동네’, 평화의 모후가 함께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오승근의 hit곡으로 ‘장기자랑’을 했는데, 4번의 연습을 거쳐서 그런대로 즐기며 공연을 끝냈다. 예전 같으면 이런 곡을 합창으로 하려면 ‘반주’가 골치겠지만 이제는 완전히 karaoke문화가 성숙이 되어서 웬만한 pro들 같이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다른 team은 숫제 미리 vocal, 노래까지 recording으로 가져와 lip singing만 할 정도였다. 하기야 출연해서 즐기고, 관람해서 즐거우면 목적은 달성된 것이니까,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지 않을까?
친목회를 하면서 새로운 단원을 알게 되면 친목회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인데 올해는 의외적으로 연세대 ‘대선배님’을 알게 되었다. 같이 노래 연습을 하면 자연적으로 사람을 알게 되는데 이 선배님도 나의 노래 partner로 인사를 하게 되었고 연세대 11년 선배님임을 알게 된 것이다. 올해 친목회에서 느낀 두드러진 것 중에는 Curia전체가 ‘젊어진’ 느낌을 받은 것인데 물론 이것은 반가운 현상이지만 다른 쪽으로는 우리들 세대, 그룹은 이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 조금은 편치 않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일까.. 할 수 있는 그 때까지 뒤를 안 보고 ‘성모님의 지시’를 받으며 뛰면 그것이 전부가 아닐까?
¶ HolidayLIFE Kickers: 12월 들어서 처음, 우리들이 정기적으로 찾는 YMCA gym을 갔었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12월’의 냄새와 모습이 그대로 우리들에게 쏟아지는 듯 했다. TV같은 곳에서 그런 ‘너무 이른 요란함’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별 수 없이 미국 최대의 휴일의 공기를 안 마실 수가 없었다. decoration, light 각종 ‘최신’의 것들이 선을 보였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데 성공은 했지만 basketball court에 있는 indoor running track에서는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나의 gym routine이 30분 걷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데, 오늘 그곳에 가 보니.. 무언가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아~~~ 하는 한숨이 나오고.. 이것을 오랜 세월 잊고 살았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다. 오랜 전에는 ‘재수가 좋아서’ 이것을 보게 되었고 12월의 멋진 holiday 기분을 만끽하곤 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 어쩐 일인지 이 공연을 놓치고 살았던 것이다.
이것은 YMCA member중에서 대강 60대부터 80대까지의 ‘아줌마’들, 30명 정도가 모여서 이맘때면 공연을 하는 Kicker club인데, 주로 Christmas에 맞는 곡들에 맞추어서 30분 정도 dance를 하곤 한다. 물론 몇 개월 전부터 ‘맹연습’을 하는 것은 가끔 목격하곤 했다. 순전히 ‘재미와 사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춤 솜씨 같은 것은 큰 문제가 될 수가 없다.
요새는 나 혼자 track을 걷기에 (연숙은 이제 100% 수영만 하게 되었다) 아깝게도 연숙은 못 보았지만 나는 이 ‘100% 백인 아줌마 (사실은 할머니지만)’들의 performance 전체를 running track에 서서 볼 수 있었다. Dancer들 숫자나 관객들 숫자가 거의 비슷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신나게 즐기며 춤을 추는지..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이들 공연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이들의 주 연령대가 70대 정도니까 나보다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Irish처럼 생긴 파란 눈의 white ladies.. 오랜 전의 미국의 모습과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이들이 몇 십 년 전에 이 땅의 ‘주인’들의 모습이었다고 할 것이다. 생각나는 것이 오랜 전에 없어진 화보잡지 LIFEmagazine이었는데, 아마도 이들이 바로 LIFE generation이 아닐까? 이들만 해도 지금은 완전히 normal이 된 ‘깡패 같은‘ feminism같은 것에 ‘물들지’ 않았던 세대였을 것이고, 99% 가정주부들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분명히 white power를 만끽하며 살았을 것인데.. 지금은 어떨까? 앞을 보고 뒤를 보아도 UN 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종 인종이 득실거리는 YMCA gym에서 옛날을 얼마나 그리며 살고 있을까? 40년 전부터 미국을 보아왔던 것을 생각해도.. 참 이곳 미국, 많이 변했고, 그것도 지금은 더 무섭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놀라움까지 느낀다.
¶ Crabby Feast plus: Thanksgiving Holiday가 끝나자 마자 마리에타 Y형 댁에서 우리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세시봉’ 그룹이 다시 모였다. Y형 댁은 작년에 큰 ‘喪상’을 당했던 관계로 2년 만에 방문을 하는 셈인가.. 그 동안 그 바쁜 중에도 수만 불짜리 kitchen remodeling 이 끝나고 pikapika한 granite island가 위용을 자랑하고, custom made cabinetry가 초현대식 편리함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 집의 old clucky 한 것들을 비교하면 조금 기분이 쳐지긴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우리의 현재 더 중요한 value는 이런 것들 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역시.. 우리도 저런 것들을 가지고 싶은 바람이 없다고 하면 솔직하지 못할 것이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날 정말 과장을 해서 ‘수십 년’ 만에 배가 터지도록 humongous Alaskan king crab을 포식을 하게 되었다. ‘옛날’ cash가 풍성하던 시절에는 가끔 이것을 사다가 집에서 즐긴 기억이 있었고, 심심치 않게 seafood restaurant에서 온 가족들이 먹기도 했다. 이날의 king crab은 정말로 king다운 큰 놈들이었는데 seafood wholesaler에서 직접 사온 것이라고 했다. 이것들과 맛있는 wine이 곁들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덕분에 오랜만에 취한 기분을 느끼는 저녁이 되었다.
오랜 만에 간 이곳에서 kitchen remodeling만이 아닌 다른 것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home music studio라고나 할까.. 최신 digital technology를 총 동원한 amateur music production system 이었다. 모든 것들이 excess로 치닫는 근래의 사회풍조인가.. 모자람 없이 모든 것들이 ‘사치’쪽으로 흐르는가? 돈과 시간이 넘쳐흐르는 ‘적지 않은’ 60대들은 보기에도 행복하게 보인다. 젊은 시절보다 더 짜릿한 ‘자극’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새로 악기를 배우는 것이 있는데 이 집주인은 saxophone에 심취되어서 배운지 불과 몇 년 만에 이제는 거의 수준급에 들어섰다.
반주 없이 불던 saxophone은 조금 dry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 장만한 이 home studio는 우선 값이 $1500에 달하는 ‘준’ 프로 급’으로 거의 완전한 background sound (karaoke sound)를 갖추고 있다. 10000여 곡을 저장하고 있는 software와 4 channel audio mixer, usb amplifier, Bose portable speaker.. 이것을 써서 ‘live’ saxophone연주를 ‘눈 감고’ 들으면 어느 full-sound Cafe에 온 느낌을 준다. 나에게는 ‘그림의 떡‘ 으로 보이지만, 생각한다.. 조금 더 머리를 쓰면 1/3정도의 가격으로 비슷한 성능의 gear를 장만할 수 있지 않을까.. 백일몽일지도 모르지만.. 생각하는 것은 cash가 필요 없으니까..
¶ My first ever ‘Kindle book‘Kindle.. Kindle book.. 이 말도 꽤 오랜 전부터 들었고 Amazon.com에 가보면 항상 눈에 뜨이는 것이다. electronic book의 ‘한 종류’라고 하지만 지금은 한 종류가 아니라 그것 electronic book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 느낌이다. 며칠 전 처음으로 kindle book title하나를 $5 정도에 구매를 하였다. 종이 책은 $12 정도니까.. $7 save한 것인가? Kindle은 순전히 software format이지만 Amazon.com의 hardware Kindle tablet 과 짝을 이루면서 이렇게 electronic book의 champion format이 되었다.
여기의 ‘교훈 lesson’은 역시 Apple Company, Steve Jobs의 철학.. software/hardware의 ‘완전한 지배, 장악, control’ 이라고 할 것이다. Microsoft의 모든 ‘문제’는 hardware를 ‘지배’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것이 납득이 간다. ‘옛날’에는 사실 software와 hardware는 완전히 ‘다른 장사’의 영역이었고.. 그것은 거의 gentlemen’s agreement 같은 불문율이었는데.. 완전한 profit, control crazy monster Apple company (사실은 Steve Jobs’)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후로, 그들, Steve Jobs’ Apple의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profit을 보고 침을 흘리며 모든 사람들을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 떼돈을 벌려면 software/hardware가 완전히 ‘붙어버린’ whole system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kindle book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버금가는 ‘책’의 역사는 ‘변함 없는’ 종이역사였지만 그 오랜 역사가 ‘느리지만 무섭게’ 변하고 있다. 종이가 없어지는 역사인 것이다. 종이 책과 ‘전자’ 책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analog와 digital의 차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간단하고, 성의가 없는 대답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대답이 정답이다. ‘부드러운 느낌의 analog’와 ‘명암이 뚜렷한 차가운 digital’의 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부드러운 analog 촉감의 종이 책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제공하려는 노력을 한 것이 바로 Amazon.com의 Kindle book이다. 근래 수많은 ‘종이 책’들이 Kindle option을 주고 있고, 종이 책보다 항상 싼 값이다. 구매 즉시 download를 받을 수 있고 이제는 PC나 Smartphone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Kindle hardware tablet 이 없어서 PC에서나 읽을 수 있지만 대부분 시간을 desktop PC에서 보내고 있는 관계로 이것이 나에게는 최적의 solution이다. 하지만 ‘화장실’ 에서 이 ‘책’을 볼 수가 없는 것은 분명히 아쉽고, 따뜻한 아랫목 (전기장판)에 누워서 볼 수 없기에 역시 digital은 차게만 느껴진다.
¶ Candle Reflections: Candle, 초, 양초, 촛불.. 우연히 나의 주변에서 ‘초, 촛불’이 눈에 뜨임을 느끼게 되었다. 눈에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 ‘가슴으로 보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기에 이렇게 초와 촛불이 ‘나의 눈에 보였다’ 는 사실이 나에게는 대견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촛불이 보이는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인가? 나는 이것이 나에게 전보다 가슴이 조금 더 열렸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나 둘씩 초와 촛불이 주변에 늘어나고, 날씨가 싸늘해지면서 그것들의 느낌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성당에 가도 제일먼저 하는 일도 촛불을 켜는 것이고, 요새같이 대림절이 되면 4개의 초가 하나 둘씩 켜져 가는 것을 보게 되며 그 의미도 생각하게 되고, 나의 서재에도 초의 숫자가 더욱 늘어난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soothing candles’ light & aroma, my desk
이와 더불어 반세기 전의 추억을 더듬기도 한다. 6.25 (a.k.a. Korean War)가 끝난 후에 대한민국에서 산 사람들이면 서울이나 지방, 시골이나 거의 예외 없이 겪었어야 했던 ‘전기부족’.. 제한 송전 등으로 ‘초’는 100% 필수품이었음을 알 것이다. 낮은 물론이고 저녁, 밤에도 정기적으로 전기가 나갔다. 낮에 전기가 나가는 것은 가정집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가전제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라디오’ 나 전기 다리미가 있었지만 낮에 하는 방송은 거의 없었고 당시에는 battery radio가 흔해서 (군수품) 전기가 필요 없었다. 문제는 밤인데.. 가족이 모두 모인 때 전기불이 없으면 초를 켜야 하고 그것으로 제대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은 어두울 때에도 밖에 나가서 놀거나, 대부분 일찍 자는 수 밖에 없었다.
조그만 방에 초를 한 개 켜놓으면 그 주변에 모두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숙제도 하곤 했는데..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오손도손’한 가족의 따뜻함을 촛불과 함께 나누던 시절이었다. 특히 겨울에는 방 한가운데 ‘화로’를 놓고 무언가 ‘구어 먹으면’ 그 정취는 지금 도저히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1960년대가 되어서 전기사정이 좋아져 ‘촛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살 때는 아주 가끔 날씨관계로 정전이 되면 ‘혹시’ 초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너무나 편리한’ flash light들이 있어서 역시 초를 볼 기회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희한하게도 ‘신앙, 종교’적 연계로 촛불이 포근하게 나에게 다가온 것..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올 겨울에는 유별나게 촛불을 키고 촛불을 바라보며 ‘회상, 명상’을 하고 싶어 진다.
Fleeing for freedom.. 아주 오래 전,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했던 표현.. ‘자유를 찾아서‘.. 여기서 이런 표현을 쓴 사람은 ‘박연미‘라는 젊은 ‘탈북자’ 여성이다. 탈북자들의 이야기들은 이제 아주 흔하게 들을 수 있고 인터넷의 도움으로 널리 알려지게도 되었다. 이제는 지리적으로 너무나 먼 느낌이 들어서 피부로 느껴지는 정도는 미미해졌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참 슬픈 이야기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이런 강도집단들이 21세기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심정 뿐인 것이다. 도대체 UN이란 국제단체는 왜 만들어 놓은 것인가? 이런 강도집단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UN군의 개입이 아니던가? 이런 휴전선 바로 넘어서 역사상 유례없는 Kafka의 연극이 재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남쪽의 ‘주사파와 좌파’의 인간들.. 어떻게 밥이 목으로 넘어가는가?
박연미 양의 슬픈 이야기도 역시 인호형의 email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은퇴자들의 잡담’ 정도로 생각을 했지만 조금씩 자세히 내용을 알아가고 보니.. 이것은 ‘큰 뉴스’ 감에 속했다. ONE YOUNG WORLD라는 국제 젊은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본인 자신이 ‘영어’로 폭로를 한 북한의 실상이었다. 처음에는 보내진 YOUTUBE의 VIDEO를 보았고 나중에 그녀가 참석한 국제회의를 찾아서 그곳에 발표된 그녀의 blog을 보게 되었다. 그 국제회의는 18세부터 30세까지의 전세계의 ‘지도자 급’ 젊은이들이 초청을 받고 모인 명망이 있는 회의였다. 비록 역사는 4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young DAVOS (Davos World Economic Forum)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권위를 자랑한다고 한다. 2년 전에는 미국의 Pittsburg에서 열렸는데 그 당시에는 미국의 전 대통령 Bill Clinton이 초청연사였고 올해 Dublin, Ireland회의에는 전 UN 사무총장이었던 Kofi Annan이 초청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어떻게 박연미 양이 ‘초청’이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현재 어느 나라에 속한 것도 궁금하지만 현재 나이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그녀가 폭로하는 북한의 참상, 실상은 comic할 정도로 믿기가 힘든 것들이지만 나는 그것들이 단편적일 수는 있어도 모두 사실이라고 믿는다. 충분히 그것이 가능한 ‘강도 집단 3대’ 가 북녘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연미 양이 국제사회에 눈물로 호소하는 골자는: 김씨 왕조 이야기를 그만 보도하고 탈북자, 강제노동의 참상 들을 보도 하고 그들을 ‘구해주자‘는 것이다. 이런 것에,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중국 짱께들은 도움이 거의 안 되는 듯하고 다음이 남녘에 있는 동포들이 아닌가? 쏟아지는 돈에 치여서 정신을 못 차리거나 북녘을 아직도 사모하고 있는 정신병자들이 지도자 층에 득실거리는 현재 사정으로 이곳도 거의 도움이 안 될 듯하다. 남은 곳은 역시 지구 반대쪽에서 그런대로 ‘객관적’인 눈을 가진 해외 동포들이 아닐까? 하지만 이곳 동포들 중에서 정신 나간 주사파, 좌파들이 득실거리기는 마찬가지니.. 과연 어떨까?
2014년 대림절이 시작된 첫 주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슬그머니’란 표현이 어찌 이렇게 잘 어울릴까… 요란하게 온 것이 아니고 ‘조용히’ 우리를 덮치듯 온 느낌인 것이다. 비교적 mild한 날씨와 더불어 오랜만에 평화스럽게 보이는 날이 되었다. 세속적, 저편으로는 Thanksgiving Holiday가 끝나자 마자 요란하게 ‘소비자를 유혹하는’ 각종 신조어로 표현되는 해괴한 날들이 도래하고.. Black Friday, Cyber Monday..(이 말들, 참 웃기지 않는가?) 를 기다리며 목을 매는 소비자 ‘우매한’ 대중들.. 머릿속은 온통 ‘물질’로 가득 차 있는 모양이다. 극과 극을 이루는 대림절 시기의 모습이다. 신부님은 이 시간을 ‘차분히, 딴 것들에 한눈 팔지 말고’ 지내라고 하지만 수도원에 있지 않는 한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대림 4주간을 상징하는 4개의 초.. 그 중에 첫 번째 초에 불이 붙었다. 대림 1주인 것이다. 올해 나는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낼 것인가 잠깐 생각을 해본다. 특별한 것이 있을까? 지나간 시절의 감사드릴 일은 며칠 전에 생각, 감사를 했고 이제는 ‘humanity의 희망‘이라는 구세주의 도래를 생각하는 것이 4주 간에 할 일일 것이다. 달력을 보니 4주 간..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세속에 사는 우리들.. 세속적인 것과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 마치 곡예를 하는 기분도 든다. 작년부터 나는 이런 균형 맞추는 일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노력을 한 결과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지내왔던 12월의 4주간 관습이 어찌 그렇게 쉽게 바뀔까 했지만 노력의 정도에 따라서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앞 집 Winter family는 일주일 전에 벌써 holiday decoration을 장식하고 밤이 되면 휘황찬란한 light를 자랑하고 있다. 그 집이 독실한 Christian 인 것을 감안하면 나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비교적 젊은 가정으로 새로 난 baby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를 한다. 그는 분명히 차분한 쪽 보다는 축제의 쪽으로 12월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게 이른 Christmas light가 아닐까? 이런 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 집의 Christmas tree & light는 성탄 4일 전인 12월 21일에 하리라 결정을 해 버렸다. 분명히 ‘Christmas girl, 나라니’가 불평을 하겠지만 그것이 올바르고 알맞은 날일 듯 싶다.
올해도 예의 ‘five minutes with the Word‘라는 대림절 묵상 소책자가 Holy Family 본당에서 배부되었다. 몇 년 전부터 이것을 받고 읽고 하는데 ‘매일 말씀과 묵상’이 있는 것이지만 대림절에 맞추어 특별히 나온 것이라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우리 ‘한국 본당’을 중심으로 매일 말씀이 email로 보내지고 있고 그곳은 한국의 신부님들이 묵상이 실려 있지만 이곳에는 ‘영어 문화권’에 속한 말씀과 묵상들이라 읽는 기분이 아주 다르다. 매일 말씀 중에서 하나를 골라 (주로 복음) ‘해설과 묵상’을 하는 짧은 글인데 어떻게 그렇게 ‘잘’ 썼는지.. 감탄을 하곤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코 앞에 다가온 12월 성탄과 새해를 미리 그려본다.
이제야 이런 속어, 숙어들의 의미를 새로 생각하게 되는가.. 올해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것에서 완전히 세속화 되었고 되고 있는 Thanksgiving Day 2014를 진정한 고마움을 느끼며 맞는다. 일에서 쉬고, 푸짐히 먹는 그런 날만이 아니고 피부로 느끼는 ‘고마움’의 기분이 가득한 그런 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왜 다른 해보다 더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올해는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 아닌 듯하다.
예년에 비해 너무나 추운, 한겨울 같은 11월은 더욱 holiday의 분위기를 주어서 큰 불만은 없지만 다른 편으로 holiday blues의 가능성을 전혀 떨칠 수는 없다. Holiday = Family라는 등식의 의미를 생각하면 다른 차원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됨을 느낀다. 대가족에 대한 부러움이 더욱 커지는 이런 season에 이제는 우리보다 더 쓸쓸한 가족의 외로움에 동참하고 싶다.
Thanksgiving Song – Mary Chapin Carpenter
올해는 가족 역사상 ‘처음으로’ Thanksgiving Day Mass에 가 보았다. 이런 날 미사를 거르는 우리 가족의 전통이 근래 들어서 조금씩 부끄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가족전통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것이 올해는 얼음이 녹듯이 해결되었다. 전통적인 ‘장시간 터키 요리 준비’를 올해는 ‘단시간 Spanish seafood roasting’으로 바꾸어서 아침부터 음식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간 Holy Family Church 미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아마도 그들은 매년 왔던 ‘고정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Thanksgiving을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성찬의 전례, Eucharist‘가 있는 가톨릭 미사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시작하는 ‘추수감사절’은 예년에 비해서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올해의 feast menu는 ‘완전히’ 바뀐 것으로 ‘아이들 (두 딸)’이 합작으로 생각한 것으로 전통적인 turkey에서 seafood으로 바뀌고 준비시간도 크게 단축이 되고 따라서 energy소비도 격감이 되었다. 결과는 ‘먹어 보아야’ 알겠지만.. 우선 ‘맛 없을 수 있는’ turkey가 없는 것이 left-over를 먹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어서 마음도 가벼웠다. 올해는 ‘정신적 여유’가 조금 있으면 guest를 한 명 정도 부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역시 ‘여유가 없는 세월’에 채여서 실현을 할 수 없었다.
지나간 해, 세월에서 감사를 드릴 것은 가지 수로 따지면 많지 않지만 그 몇 가지에 대한 감사의 정도와 농도는 아마도 쉽게 글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진정으로 가슴으로 높은 저곳의 ‘누군가’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고 드리고 싶다. 나를 개인적으로 ‘사사건건’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어머니’.. 2007년부터 나를 보이게 안 보이게 인도해 주신 ‘그 어머니‘ 그리고 나를 항상 안쓰럽게만 바라보시는 어머님.. 나를 우리를 인도해 주신 것.. 첫 번째의 감사 대상이 아닐까. 특히 ‘하느님의 어머님’은 조금이라도 빗나가기만 하면 바른길로 잡아 주셨다. Holy Family CC에서 soul friend가 된 ‘한국말을 쓰는 자매님‘들.. 진정한 친구로서 서로를 격려하며 살았다. 오랜 가족의 숙원, 숙제를 큰 어려움 없이 풀어갈 수 있게 도와준 가족들, 높은 곳의 어머님들.. 감사합니다. 이제는 ‘오늘 죽어도’ 큰 고통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일년 열두 달.. 매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Eat Turkey, Become American..
어제 날자 New York TimesPRIVATE LIVES Opinion Page에 조금은 익숙한 이름 Marie MYUNG-OK LEE라는 ‘한국 이름’의 저자가 쓴 글이 실렸는데 그 제목이 바로 Eat Turkey, Become American이었다. Thanksgiving Day 에 맞추어 어떤 Korean-American author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것인데, 생각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절의 얘기라 나의 관심을 끌었다.
글을 보니 ‘매끄러운 문제’여서 혹시 professional writer 가 아닐까 했더니 나의 짐작이 맞았다. ‘잘 나가는’ 저자였던 것이다. 저자는 한국인 부모를 둔 여성으로 어린 시절 집에서 Thanksgiving Day와 다른 ‘미국 명절’을 지내며 한국, 미국의 두 문화권을 살았던 이야기를 재치 있게 그렸는데, 그 시절은 한국전쟁 이후에서 시작되는 ‘오래 전’의 역사였다.
그녀, 저자의 아버님은 원래 의사였는데 한국전쟁 때 미군 장성의 통역관으로 일을 해서 미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가 1953년 경이니.. 휴전 할 당시일 것이다. 당시에는 아시아 이민의 길이 ‘전혀’ 없어서 올 수 있는 길은 모두 ‘임시 비자’에 의한, 그러니까 유학생 같은 것 뿐이었을 것이다. 임시 정착한 곳이 춥기로 유명한 미네소타 북부지역의 조그만 ‘의사가 거의 없는’ town이었고 그곳에서 자녀들이 태어났고 Thanksgiving Day같은 holiday를 turkey를 먹으며 ‘ 미국인처럼’ 살았다. 임시비자가 만료되어 이민국에서 출국명령을 받고 ‘위기’를 맞았지만 현지 congressman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받고 1965년 아시아계 이민이 개방되는 법으로 시민권을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알면 왜 그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한국에 대한 것을 잊게’ 하려는 노력을 했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1970년대 유학생들도 그런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국말을 ‘못 쓰게’한 가정도 많이 보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이 글의 저자가 겪는 문화갈등은 더 했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어린 시절 자기들이 ‘우주선을 타고 미국에’ 내렸다는 기분이었다고 했을까? 자기들의 ‘근본’을 모르고 자란 것이다. 가난하고 찌든 조국을 잊게 하려는 ‘의사 부모님’의 심정을 지금 이해하려면 조금 힘들지만 그런 시절을 나는 반 정도는 겪었기에 조금 쉽게 이해한다.
이 글을 읽으며 곁들여 생각나는 것 중에는 1970년대 유학생들이 ‘선배 유학생’들에게 들었던 ‘미국 개척사’들.. 50/60년대 유학생들의 이야기들.. 특히 이 글의 배경이 된 미네소타 북쪽의 맹 추위와 돈이 없어서 pet food를 먹었다는 이야기.. 김치와 쌀을 완전히 잊고 살았던 시절..나의 시절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특히 처음 보는 Thanksgiving Day culture는 당시에는 ‘100% 미국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기에 저자의 부모들이 그렇게 turkey 요리 준비에 신경을 썼던 것이 아닐까.. 참 오래 전의 ‘흘러간’ 이야기들이다.
얼마 전에 인호형의 email을 받았다. 예의 ‘김인호 컬럼’이 아닐까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한양대 명예교수 정기인 교수‘에 관한 것이었다. ‘국제무역 특히 상사(商事) 중재 분야의 국내전문가’라고 소개 된 이 정교수가 ‘대변신’을 해서 어떤 책을 출간한 것에 관한 소식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공인 경제와 다른 분야인 역사를 접목하고 거기다 ‘문학’ 장르를 감싼 그야말로 대 변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경제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어떤 역사를 경제인의 눈으로 본 것이라고 하면 큰 무리가 없을까 생각을 했다.
소개된 글에 의하면 정 교수는 아마도 조선기에도 ‘경제통’이 있었을까 연구를 한 후에 그 사람이 바로 조선 19대 왕 숙종이었고, 수많은 사화를 통해 피를 뿌린 정치 뒤에는 ‘거대한 새로운 화폐 경제‘의 창출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가 바로 조선 전역에서 화폐가 보편된 때라고 한다. 화폐가 있어야 가치가 나오고 경제적 발전이 온다고 한다. 또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정책’에 장희빈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정기인명예교수시사 talk 대담
나는 역사통도 아니고 경제통도 아니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이런 사실은 가능하다고 추측은 한다. 한가지 사건을 여러 쪽의 각도에서 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사극에서 본 것처럼 장희빈과 숙종의 이야기는 분명 흥미위주의 가느다란 각도로 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의문은 이 ‘소설’이 몇 percent가 fiction인가 하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명쾌한 답은 찾을 수가 없다. 그가 출연한 TV Talk Show에서도 그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에 그저 나는 아마도 ‘거의가’ 다 사실적, 역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저자인 정기인 교수는 “과거역사에서 음모술수와 권력투쟁, 전쟁으로만 묘사된 불건전하고 부끄러웠던 역사를 완전히 씻어냈다’고 자부를 했고, “전문가”로부터 “재미: 95점, 신지식: 100점,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치: 90점“을 받았다고 했다.
신간: 정기인 저, 경제대왕 숙종
이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웠던 역사를 씻어냈다”고 하는 것은 어떤 뜻일지 조금 의아해진다. 역사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일지. 만약에 fiction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그런 표현을 해도 되는 것인지.. 숙종의 “경제업적”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성과와 비교하는 표현도 흥미롭기만 하다.
세계 최초의 『경제 역사 대하소설』
경제 대왕 숙종
숙종,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멸망한 조선을 경제대국으로 만들다
매일경제신문사 발행
노벨문학상에 도전하는 세계 최초의 ‘경제역사’소설!
-이제까지 역사소설은 음모술수, 권력투쟁, 전쟁뿐이었다-
-이제까지 노벨문학상작품들은 암울한 인권만 묘사했다-
-진정한 인권은 먹는 것과 전쟁예방이다-
숙종은 백성의 진정한 인권은 ‘먹는 것’과 ‘전쟁예방’이라 생각했다!
왜, 역사소설들은 음모술수, 권력투쟁, 전쟁 등 불건전한 주제만 다루었을까? 이 소설은 진정한 인권은 먹고 사는 것임을 확신하고 쓴 ‘경제역사소설’이다. 소설은 숙종이 화폐경제로 저축과 투자, 생산, 고용, 외상거래라는 초기자본주의 거시경제운용을 해서 불과 30년 만에 단축성장으로 경제대국을 이뤄냈음을 발견했다.
숙종은 박정희대통령에 300년 앞서 조국근대화와 경제개발에 성공한 경제대왕이었다. 왜란과 호란으로 멸망한 조선을 거시경제운용으로 성장동력을 일으켜 영조와 정조의 부강한 왕조를 열어주었다. 박대통령이 한국에 세계10대 경제대국의 길을 열어준 것과 비슷했다. 숙종 뒤에는 무역 장사꾼이었던 장옥정의 내조가 있었다. 이 소설에는 그 과정이 매우 재미있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추천사>
“이 책은 경제역사대하소설이다. 300년 전에도 배곯는 백성을 위해 경제개발에 성공한 임금이 있었음을 알고 자긍심이 생겼다. 나는 한국경제의 개발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이 어려운 시기에 대학생과 직장인, 공무원, 군인, 정치가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서강대학교 전 총장 손병두
줄거리 요약
이제까지의 역사소설들은 권력투쟁, 음모술수, 전쟁 등 불건전한 주제만 다루었다. 과거의 국가통치자들도 富國强兵을 첫째로 삼았었을 텐데도 ‘富國’은 전혀 다룬 소설이 없었다. 저자는 300년 전에 숙종이 화폐경제로 저축과 투자, 생산, 고용, 외상거래라는 초기자본주의 거시경제운용을 해서 경제대국을 이뤄냈음을 발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대국을 이룬 것보다 더 처절하고 리얼하다.
숙종 당시의 사회경제상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폐해는 숙종 때까지 전해졌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기근이 극심하여 사람고기를 먹기에 이르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괴이함을 알지 못하더라. 길바닥에 굶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메어 먹어 완전히 살이 붙어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산사람을 도살하여 장과 위, 뇌의 골도 함께 씹어 먹는다”고 씌어 있고, “백성들은 굶다 못해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잡아먹었다”고 전하고 있다.
농토는 양란으로 170만결이 40만 결로 축소되었고 경상도는 6분지 1로 축소되어 충청도에 전세를 대신 내도록 명령하자 충청도 농민들은 야반도주했다.
그럼에도 사대부과 아문들은 권력을 이용해 농민과 상인들을 다시 수탈하기 위해 고문과 횡포를 자행한 지옥 같은 상이었다.
숙종은 자본과 교통, 통신, 항만 등 산업인프라와 학교, 병원 등 생활 인프라가 제로인 상태에서 경제적 성공을 이룩한 것이다.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숙종의 거시경제운용과 단축성장 성공
저자는 과거 왕조들의 경제문제를 파고들다가 조선시대에 뛰어난 경제대왕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조선 제19대 왕 숙종은 화폐경제와 거시경제운용으로 조국근대화에 착수해 국토개발과 과학기술개발, 자주국방의 시대를 이룩했다.
숙종의 화폐경제 정립은 경제학적으로 큰 업적이었다. 국가경제는 부가가치창출이 핵심으로 저축(투자)과 소득(소비·고용)에서 나온다. 저축은 화폐가 유통돼야 한다. 위대한 세종대왕이 경제대왕이 못된 것은 저축이 없었기 때문이다.
①화폐(상평통보)유통으로 저축과 투자, 교환, 손익계산, 대부 및 외상거래가 가능한 상업시대를 열었다. ②이로 인해 노동의 상품화가 이뤄지고 인신의 지배예속이라는 중세적 신분제도는 서서히 변화되었다. ③민간부문이 살아나고 공공부문도 숨쉬기 시작했다. 공사의 구분 및 기업과 가계의 분리가 이뤄지며 성장동력이 생겼다.
장희빈의 경제적 역할과 성과
숙종 뒤에는 칠패시장(현 남대문시장)에서 무역업을 한 장사꾼 장옥정(장희빈)이 있었다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다.
장옥정은 장현의 조카로 칠패시장(현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와 무역을 했다. 장현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있을 때 6년을 모신 역관이었다.
장현은 효종의 비호아래 칠패시장에서 인삼무역, 비단무역, 무기무역으로 국중거부가 되었다. 장옥정은 외국어를 잘 해서 무역과 장사를 총괄했다.
장옥정은 1680년 22세의 늦은 나이에 장현의 권력야욕으로 궁녀가 되었으나 그녀의 뇌는 시장마인드와 정글법칙에 염색돼 성리학의 사대부들과 충돌한다.
성리학은 송시열을 필두로 선비는 장사나 농사를 해선 안 되며 오직 학문에 정진해야 한다고 주장해 인적자원 낭비의 주범이었다.
숙종 당시 인구는 680만 명인데 선비가 대략 10만 명인 경우 1인당 연간 생산액(GNP)을 30냥(쌀 30석)이라고 어림잡아도 연간 3백만냥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셈이었다.
장옥정은 숙종에게 사농공상의 신분차별을 타파하고 선비들도 장사와 농사를 하도록 하여 국가의 인적 낭비를 없애도록 권고하였다.
장옥정은 화초처럼 자란 숙종에게 경제마인드를 심어주었으며, 화폐유통 등 경제혁신을 반대하는 노론의 지주인 송시열을 사사하도록 하는 등으로 방해자를 제거해 경제개발에 성공을 이뤄냈다.
그 결과 1,000여개의 장시가 생기고 3백만 명이라는 놀라운 고용이 창출돼 숙종은 불과 30년 만에 단축성장을 이뤄내 영조와 정조에게 부강한 문예부흥시대를 열어주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자주국방 노력
숙종은 자주국방을 위해 강소대국의 국방전략을 세웠다. 군인의 숫자보다 강력한 폭탄을 개발해서 국방을 강화하려 했다. 요즘으로 치면 핵을 보유해 국방을 강화하려는 것과 유사했다.
장옥정은 숙종의 자주국방에 대한 염원을 이루기 위해 화란의 폭탄전문가를 초청해 비밀리에 폭탄개발에 성공했다.
폭탄개발의 성공을 알게 된 청국은 병자호란 항복강화조약(기축약정) 제8항의 위반이라고 폭탄을 해체할 것을 강력히 압박함(요즘 핵개발을 금지하는 것과 유사)
청국은 이 폭탄이 청국에 대한 공격용인 동시에 외몽골과 위구르에 전달돼 위협이 된다며 폭탄의 해체와 숙종과 장희빈을 북경으로 입조하라고 압박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노론은 청국과 힘을 합쳐 장희빈을 사사하도록 해서 숙종은 압력에 못 이겨 그녀를 사사한다.
장희빈에 대한 노론의 저주와 악담조작
장희빈은 노론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에 의해 지금까지도 악의적으로 비하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인현왕후전』과 『수문록』, 『숙종실록』(편집책임자: 인현왕후 오빠 민진원), 『사씨남정기(노론 김만중)』등이 노론의 대표적 허위기록들이다. 한 예로, 수문록은 노론의 사림학자들이 썼다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저급하다.
“장희빈은 사약을 먹지 않기 위해 발악했고,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고자로 만드는 패악을 부리다 억지로 사약이 부어졌다. 드디어 장녀가 죽으니 하늘의 천벌을 받아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 냄새가 궐내를 진동하는지라 즉시 궁밖에 내다버렸다.”
숙종 사후 조선의 몰락
경제대왕 숙종의 경제적 업적 역시 폄훼된 것은 정조가 독살 된 후 정순왕후와 노론의 세도 정치가들이 상인들의 재산을 탈취하고 경제행위를 억압함으로써 성장동력을 말살한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예고 되었던 ‘그 소식’이 현실화 되었다. 이 소식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미국에 ‘불법’으로 5년 이상 체류해 오던 시민권, 영주권자 자녀를 가진 부모 들에게 3년간 제한적이지만, 합법적인 신분을 부여한다 것을 국회를 통한 이민법이 아닌 정부자체의 행정명령으로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생각을 한다. 과연 이것이 고국 (a.k.a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적용이 되며 도움이 될까..하는 것이다. 이런 뉴스는 이곳에서 발행되는 한글로 된 신문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식 중에 하나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정도의 뉴스면 아마도 front page 제일 위에 실릴 만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이민법’에 관한 것은 우리 같은 minority community에게는 민감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할까?
일년도 훨씬 전에 이미 상원에서 comprehensive immigration bill이 통과 되었지만 하원에서 거의 ‘초 죽음이 된 상태로 아사餓死 되기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있다. 그 당시 통과된 법안은 ‘범법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불법체류자’를 구제하는 것이 골자였다. 오래 전(Reagan era)의 일방적인 ‘사면 amnesty’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기한의 제한이 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이것을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은 ‘인정머리 하나도 없는 공화당 Republican 패거리’의 인간들이었지만 Obama 도 머리만 굴렸지 별로 ‘타협이나 설득’을 못하는 졸렬한 정치력으로 일관을 해서 궁극적인 책임은 바로 그에게 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희생자는 오랜 시간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힘없고 지친 그들 (거의가 undocumented Mexican)이었다.
오랜 전에 나는 이들 undocumented 들의 ‘신세’에 큰 관심이 없었고 그저 ‘불법’이니까 ‘합법’으로 만들면 되지 않는가 하는 naive한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이것은 ‘기술적 technical‘한 문제가 아닐까.. 그러니까 서류상의 문제’가 아닐까. 그것을 그렇게까지 야멸차게, 비인간적 대우, 차별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9/11 사태로 모든 ‘서류’들이 중요해지고 거의 필수적인 것이 되어가며 이들의 일상 생활은 점점 ‘지옥처럼’ 변해가고 급기야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들이 속출하며 생각이 바꾸었다. 법이나 그에 따른 ‘서류, 종이조각’이 인간의 기본권의 위에 있는가 하는 원초적인 명제가 된 것이다. 나의 생각과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머무르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
Victor Hugo의 Les Misérables, 우리에게는 쟌발잔Jean Valjean 으로 알려진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서 나는 다시 이 쉽지 않은 문제를 조명하기도 했다. 범법자가 법을 어긴 사람들이 회개한 후에 어떤 처우를 받아야 하는가, 배가 고파 훔친 빵으로 강제노동 형을 받았던 주인공과 그를 ‘법’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일생’을 쫓아다니는 형사.. 극과 극의 입장에 있지만 과연 그럴까? 나중에 나는 그 형사Javert가 사실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인물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성서에서도 ‘사랑보다는 법’을 먼저 따지는 ‘바리사이 파’들을 질타하는 예수님을 본다. 이것과 현실은 물론 차이가 많지만 따지고 보면 맥락은 비슷하다. 현재 ‘법과 정의의 사자’로 자처하는 ‘공화당 극우파’들이 바로 그 형사 ‘Javert, 자베르’나 ‘바리사이 파’ 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쟌발잔은 바로 힘없이 쫓기는 undocumented들일 것이고.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렇게도 그들, 공화당 기회주의자들, 인정머리가 없는 것일까? 정치적인 입장으로 그런다면 조금은 이해를 할 여지도 있지만 ‘진정으로 인정머리가 없는 본심’의 인간들이라면 역시 그들이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Obama란 인물, 처음에는 Bush를 몰아낸 ‘공신’으로 좋아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가며 하나 둘씩 껍질이 벗겨지며 속의 실체를 보고 실망의 연속이었다. 속에 들은 것이 기대보다 텅 비었던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tactic과 speech같은 것은 능할지 몰라도 미국 대통령의 vision은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그저 하나 humanism하나면 다 통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동성결혼’을 지지하던 해괴한 언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모든 정치적 trouble은 아마도 이런 빈, 텅 빈 character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그가 이런 ‘행정적 용단’은 어떻게 밀어부친 것일까? 아마도 그가 신봉하는 humanism이 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비록 원래 원했던 법은 아니더라도 일시적 3년이나마 이렇게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햇빛을 비춘 것은 너무나 다행스럽다. 그는 비록 ‘신앙적, 영적’ 믿음이 없는 대통령이었다 해도 이런 용단은 우리 천주교의 입장과도 100%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 그의 이런 ‘자비’는 그에게 점수를 주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피정이 끝나고 우리는 그 전날 약속이 되어 있었던 어떤 환자 자매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리에타 지역에 사시는 어떤 병중의 자매님께 ‘급하게’ 천주교 영세를 받게 하는 조그만 과제가 생긴 것이다. 아마도 아들과 둘이 사시는 어떤 우리 또래의 자매님이 중한 병에 걸려서 아마도 오래 못 사실 것이라는 판단으로 다른 주에서 급히 방문하신 친 가족(오빠와 여동생)들이 순교자 성당에 연락을 해서 혹시 외인(비신자)에게 ‘급하게’ 영세를 줄 수 있는가 문의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연숙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2년 전 모니카1 자매님이 그런 case였고 그 후의 결과가 너무나 좋았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해 주었으면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때가 바로 레지오 단원들이 제일 사명감을 느낄 때라고 할까..
이때 우리가 방문한 목적은 상황판단이 전부였다. 어느 정도 병이 위중한지.. 그것이 제일 궁금한 것이다. 과연 짧더라도 교리공부를 받을 상황인지..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면 과연 신부님이 ‘비상 영세’를 주실 수 있는지.. 모든 것이 우리들이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데 달려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불안한 심정으로 찾아간 곳은 우선 middle-high-class 주택가로서 아마도 financial한 문제는 없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반갑게 맞이한 오빠 형제님 2 여동생 자매님들.. 모두 인상도 좋았고 친절하였다. 전화로 이미 들었던 ‘사연’에 덧붙여 더욱 자세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비교적 대 가족이었지만 모두들 지역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서 그것이 우선 문제였다. 아픈 환자가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간호를 할 것인가? 비록 두 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침대에 누어있는 환자자매님.. 모든 것이 아주 불편해 보였고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계속 물끄러미 주시를 했는데.. 우리는 무언가 우리를 ‘의심’이라도 하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 아픈 자매님은 알고 보니 우리도 낯이 익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다니던 YMCA에서 본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자매님 부부가 YMCA에서 janitorial staff으로 일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이 불과 2~3년 전이었지만 서로가 첫 눈에 못 알아 본 것이다. 그 자매는 처음에 나를 먼저 알아보고 나중에 연숙을 알아 보았다.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반가워서 한동안 어쩔 줄을 몰랐고 옆에서 보고 있던 가족들도 너무나 기쁜 얼굴들이었다.
놀란 것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그 자매님의 부군 형제님이 올해 4월에 이미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형제님은 남자 locker area에서 너무나 자주 보았고 이야기도 나누었던 사이었는데.. 나이도 아마 나와 비슷해서 더욱 친근감을 느낀 그런 분이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남편의 병간호가 너무나 힘이 들었는지 곧 바로 자기도 이런 중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비극이 있을까?
오빠와 여동생이 모두 이미 천주교 신자였고 이 아픈 자매님은 아직도 외인이었지만 가족들은 그 자매님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비록 중병이라 할 지라도 하느님, 특히 천주교의 하느님을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게다가 우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동생 암브로시아 자매님3과 이야기를 하다가 오하이오 주 Dayton, Cincinnati 지역에서 성당을 다녔다고 했고 우리의 영세 신부님 왕영수 신부님과 같이 신자생활을 한 것도 알게 되었다. 근래에도 한국으로 비행근무를 할 때 가끔 왕신부님과 만난다고.. 이런 뜻밖의 인연이 어디에 있을까? 성령운동에서 음악찬양을 하는 최데레사도 잘 안다고 했다. 이런 것들로 우리는 순식간에 ‘친구’처럼 느끼게 되었고 우리가 레지오 단원으로 자매님을 도울 수 있을것을 알게 된 그들은 어린이들처럼 기뻐했다. 다음날 직장 관계로 모두 떠날 그들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던가.. 이런 인연으로 우리 부부는 레지오 단원의 한 조 로써 이 위중한 병으로 고생하는 자매님을 위해 봉사할 기회가 찾아 왔고 우리가 옛날 레지오 단원들에게 받았던 ‘은혜’를4 갚을 chance가 왔음을 느낀다. 얼마나 우리가 도울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이지만 최선을 다할 각오는 되어있다고 느낀다.
¶ CLC 일일’一日’ 침묵피정 어제는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아틀란타 CLC 가 주최한 ‘일일 침묵피정’이란 곳에 연숙과 참가하였다. 지나간 순교자 성당 주일 미사 후 점심 시간에 낯이 익은 CLC 자매가 갑자기 와서 ‘일일 침묵피정 신청서’를 건네주며 꼭 오라고 해서 조금 당황한 적이 있었다. ‘원칙적’으로 ‘못 간다’고 나는 이미 생각을 하고 있다가 후에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기회가 또 올지 안 올지 확신이 서지를 않았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it’s now or never란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가지 안더라도 연숙은 물론 갔을 것이지만 나의 결정으로 생전 처음 CLC주최 피정을 둘이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번의 일일 피정은 ‘CLC 골수단원’ 대상이 아니고 ‘일반인’ 대상이라 마음이 가벼웠지만 ‘침묵’이란 말이 조금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CLC (Christian Life Community)하면 로욜라의 아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Loyola)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을 바탕으로 예수회의 영적지도(spiritual guidance)를 받는 전세계 ‘평신도 단체’란 것을 나는 예전부터 연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다. 연숙이 전에 이런 ‘과정’을 거쳤었기에 나는 옆에서 조금씩 보고 듣게 된 것이다. 인간적인 갈등으로 비록 그’단체’를 떠나서 지금은 나와 전심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하고 있지만 그곳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크게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어제 그곳에 참석을 해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알아 보았다. ‘옛 동료’들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비교적 많은 참석 인원(100+?)이 모인 그곳에서 우리가 속한 마리에타 2구역 ‘자매님’들도 만나서 너무나 반가웠는데, 그 중에는 전 스테파노 부부, 마르쎌리나, 히야친타 자매들도 보였고, 이곳 ‘역시’ 대다수가 자매님들이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정상’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피정 자체는 ‘피정의 달인’이라고 소개된 방문신부 ‘정구평 마르코’ 신부님이 담당을 했는데 우리와는 최형 댁에서 ‘개인 적’으로 만난 경험도 있고 해서 큰 거리감 없이 강론을 따를 수 있었다. 피정 주제는 ‘기도와 관상’ 이었고 아마도 아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중 ‘제 1과’ 정도가 아닐까 추측이 되었다. 배부된 handout text를 보면 피정 강의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기도와 관상 1
‘나’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
‘나’에 대한 조명
하느님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 나’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의 방법
기도의 목적
기도와 관상 2
영신수련에서 기도의 외적 형식
기도와 호흡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호흡의 방법
생각 조절하기
기도 준비단계
기도와 관상 3
영신수련은 이성을 도구로 다양한 감정들을 분석하는 피정인가?
기도할 때에 올라오는 다양한 감정들
분심과의 싸움
기도와 관상 4
성 이냐시오의 관상
두 개의 깃발
기도와 관상 5
영적 여정의 시작(원리와 기초)
일상 안에서의 성찰
첫째 감사
둘째 조명
셋째 반성 및 성찰
넷째 결심
다섯째 마침기도
기도와 관상 6
생각, 말, 행동
이런 주제와 내용들에 대한 강의를 듣고 두 번에 걸친 30분 가량의 침묵기도 시간이 주어졌다. 아침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이 조용했고 침묵을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뚜렷했다. 그런 중에 두 번 30분 기도는 놀랍게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바로 전에 들었던 내용이 머리 속에 가득 찬 도움으로 평소에 꿈도 못 꾸었던 나의 모습도 바라볼 기회가 있었다. 문제는 그런 나의 모습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가 못 느꼈지만 그래도 사랑을 받았던 나 였는가.. 긴 인생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기도에 대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인 것으로 이것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묵주기도와 기도문 기도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것에 비하면 이런 것들은 아주 제한이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무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 같은 것이다. 비록 짧았던 하루 피정이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쪽으로 눈을 뜨는 듯한 신선한 피정이었다. 아마도 ‘구면’이었던, 친근한 인상의 정구평 마르코 신부님의 피정 스타일이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다가 깨어 생각해도 ‘신부생활, 하느님과의 시간’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신부님의 말씀도 큰 과장이 아닌 것으로 들리기도 했다. 시간이 나면 이쪽으로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의욕도 느끼나. 글쎄..
재발 암 환자로 비신자였던 자매님, 속성과 교리공부와 영세 이후 기적적으로 암에서 치유된 case ↩
조금은 ‘늙은이의 하소연, 푸념’같이 들리는 이 말은 근래 대한민국에서 나온 유행가의 제목이다. 물론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지만 요새 갑작스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온 것 뿐만 아니라 이제는 ‘달달 노래 연습’을 할 처지까지 되었다. 또 그 season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라는 긴 이름, 아마도 요새는 ‘연총’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12월 7일에 열리는데 이때 각 쁘레시디움 별 talent show(장기자랑)에서 우리와 다른 team이 합작으로 이 곡을 ‘합창’으로 하게 되었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의 원래 의도는 member reunion인데 이제는 완전히 모여 노는 것, talent show로 인식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올해로 나는 4년째 이것을 맞게 되었는데 해마다 조금씩 무언가 달랐다. 그 중에서 지난 2년은 추억으로 남겨도 될 것 같은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reunion의 정신을 100% 살렸기 때문이다. 간혹 얼굴만 보던, 아니 전혀 생소한 단원들을 ‘그런대로’ 알게 된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연총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특히 작년에는 생소하기만 하던 ‘희귀동물’, 남성단원들이 ‘노래 연습’차 같은 방에 모일 기회도 만들어 주었기에 더욱 기억이 새롭다.
그에 비해서 올해는 조금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지만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두 쁘레시디움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되어서 멀리서만 보던 ‘모르는 단원’들과 가까이 할 기회가 되었다. 최 장년 축에 속하는 두 그룹이 모여서 이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기로 한 것인데.. 조금은 self-pity 하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이 노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중론이 모두 좋아한다고 하니 어찌할 수가 없다. 우리가 택한 version은 오승근이라는 ‘장년 세대’의 것인데.. 알고 보니 이 오승근이라는 사람은 우리세대에 그러니까 70/80에 속한 그야말로 senior그룹의 오래된 가수였다.
더욱 알고 보니.. 소싯적에 내가 좋아하던 Two Aces, ‘금과 은‘ Duet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아직도 기억한다.. Two Aces시절 그들이 TV show에서 부른 Everly Brothers의 Dream Dream (All I have to do is). 나중에 바뀐 이름인 ‘금과 은’ 처럼 너무나 청순한 목소리로 잘 불렀었다. 그 듀엣, 둘중의 하나가 ‘오승근’이었단 말인가? 너무도 잊고 살았다. 더욱 놀란 것이 그가 ‘트롯트‘ style의 ‘전통가요’를 부른다고? 믿어지질 않는다. 너무나 큰 변신으로 느껴질 정도로 세상이 그렇게 변했구나. 이래서 Two Aces의 추억을 더듬고 그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게 되니.. 감회가 깊다. 그가 이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보니 ‘만든 모습’인지 ‘자연스런 모습’인지 혼동이 올 정도로 ‘젊게’ 보인다. 하기야 요새 나이든 가수들을 보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며칠 전, 우리 두 ‘장년층’ 쁘레시디움이 처음 모여서 연습을 하였는데 ‘가라오케’ 반주의 막강한 보호와 도움으로 그런대로 무난히 소화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높은 음정의 이 곡을 과연 몇 명이나 smooth하게 넘길 것인가와, 비교적 짧은 이 곡을 어떻게 짧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게 re-arrange해서 무대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인데.. 글쎄.. 나는 전혀 이런 것에는 문외한이라서…
Karaoke – 내 나이가 어때서 – 오승근 version
Karaoke – 내 나이가 어때서 – ballad version
¶ Very Early, November ‘Polar Vortex‘ Polar vortex.. 근래 특히 겨울에 많이도 듣던 말이다. 비교적 근래에 쓰이는 ‘기상용어’ 라고나 할까, 아니면 mass media의 유행어라고나 할까? 작년에 특히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유난히 추웠을 적의 기억이다. Wikipedia에 의하면 북극과 남극에 ‘상주’하는 지독히 찬 공기덩어리가 있는데 이것의 이름이 바로 Polar Vortex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커지고(겨울) 줄어들고(여름) 하는데 가끔 이것이 ‘암세포’처럼 커져서 퍼지면 지금처럼 되는 모양이다. 북극으로부터 몰아치는 ‘지독히 추운 공기의 바람’ 이 연상이 되고 한때는 Arctic Blast, Alberta Clipper란 말도 들었는데 이런 현상이 이제 유행이 아닌가? 좌우지간 이런 말들은 한 겨울에나 듣던 말인데.. 올해는 thanksgiving holiday도 2주나 남은 한창 가을에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한반도에는 아마도 ‘시베리아의 강풍’이라고 연상하면 알맞은 어감이라고 할까? 혹시 이것도 global warming의 한 징조일까… 그래서 모든 것이 extreme쪽을 치닫는 것인가. 지금 현재 Canada 와 인접한 upper Midwest 쪽에는 거의 한겨울 같은 눈이 쏟아지고 기온도 급강하.. 며칠 후에는 낮의 최고가 freezing point까지 내려 간다고 한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따뜻한 Southeast’ 쪽으로 밀려 왔다는 사실이다. 오늘 아침에는 드디어 hard freeze가 되었고, 올 들어 처음으로 ‘고드름’을 목격하게 되었다.일기예보는 우리가 사는 지역도 이번 주말이 지나면 최저 18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이런 기온은 1월 말 정도에나 ‘가끔’ 겪는 것인데..
더욱 ‘괴상한 것’은 보통 같으면 blip같은 ‘짧은’ 현상이 이번에는 거의 일주일 이상 계속된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 평년의 11월 이맘때면 그야말로 ‘찬란한 황금색의 낙엽’을 자랑하는 비교적 따뜻한 모습이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한창 가을색을 자랑하려던 ‘낙엽’들은 아마도 이번에 모조리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더욱 춥게만 느껴지고 한참 남은 끝을 못보고 있는 outdoor work들도 더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대로 문제없는 고물 ‘clunker‘ central heating이 버티고 있으니까.. 큰 걱정은 안 한다. 전혀 plus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날씨에는 진하고 뜨거운 black coffee 맛의 ‘정수精髓’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THANKSGIVING BLEND 올해는 비교적 coffee를 많이 마시게 되었다. 한때 물을 많이 마시려고 일부러 줄인 적도 있었지만 나의 lifestyle은 아무래도 plastic water bottle보다는 coffee cup이 더 맞는 것을 느낀다. 특히 오랜 직장생활에서 morning ritual은 구수한 ground coffee의 냄새로 시작된다는 것도 어쩔 수없이 몸에 배인 모양이다. wine의 미묘한 맛의 차이는 잘 몰라도 이제는 coffee의 향과 맛의 차이는 잘 알게 되었다. 건강을 이유로 지나친 coffee를 자제하려는 자책감이 항상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정도는 아닌 듯 싶다.
현재는 주로 새벽과 아침 식사 때, ‘정식, 공개적’으로 마시고 가끔 (요새는 더욱 자주) 늦은 오후에 ‘혼자서’ 마신다. 연숙은 지독하게 caffeine 에 민감해서 점심이 지나서 마시면 잠을 못 자기에 아침식사 때만 나와 같이 마신다. 나는 물론 ‘전혀’ 그런 것이 ‘아직’은 없지만 인생 선배님들은 ‘언젠간’ 나도 그렇게 변할 것이라 경고를 해서 이것도 시간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까지 즐기는 것이 현명할 듯.. 며칠 전에 작은 딸 ‘나라니’가 집에 들렸을 때 coffee bag을 들고 왔는데 그것이 THANKSGIVING BLEND STARBUCKS whole bean 커피였다. 이런 때가 나에게는 정말 즐거운 순간이다. Starbucks coffee를 마셔 본지도 꽤 된듯한 기분이라서 그 독특한 맛도 거의 잊어가는 때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이것을 마셔보니, 그 동안 마시던 것과는 물론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는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STARBUCKS class가 되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다.
몇 년 전에 새로니 나라니가 번갈아 가면서 STARBUCKS 에서 part-time으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공짜로 주는’ coffee를 ‘무진장’ 즐겼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 그것을 사서 마시기에는 아무래도 그랬다. 그래서 생각이 우리는 경제적으로 STARBUCKS class가 못 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저 그것을 ‘사 먹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어떨까.. 글쎄 그래도 불편할 듯 하다.
¶ Relevancy of Legion of Mary
Is the Legion of Mary[Legio Mariae] still relevant today? 레지오 마리애 지금도 큰 의미가 있는가? 이런 ‘끔찍한’ 생각이 요사이 들어서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답은 불행하게도 almost No! 인 듯해서 어깨가 더 쳐지는 듯 느껴진다. 4년여의 ‘Never look back’의 각오로 노력한 경험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다는 자체는 가소롭지만 나에게는 정말 심각한 것이다. 아직도 ‘레지오’ 하면, 20세기 초에 머문듯한 ‘구닥다리’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왜 그럴까? ‘영웅적’인 레지오 창시자 Frank Duff같은 ‘준 성인’이 다시 필요한 때가 된 것일까? 레지오 마리애가 ‘영적인 군대’이며 군대와 같은 조직을 유지하고 있으면 이런 군대도 ‘현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대 로마 군단의 조직을 유지하고 그 충성심과 용맹 성을 본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레지오 만의 특징이고 자랑일 수 있지만, 초 현대 세속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그런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마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가 교회에 끼친 공헌 중에 제일 큰 것은 아마도 ‘평신도의 활성화’ 가 아닐까?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완전히 맞아 떨어졌다. 레지오의 위상도 역대 교황들의 ‘묵인과 승인’의 혜택을 충분히 받았고 각 본당에서도 ‘필수적’인 평신도 단체로 대우를 받아서 꾸준히 영향력을 늘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신화적인 존재, 창시자 Frank Duff의 퇴진(1980년 11월 7일 선종, 91세) 이후.. 아마도 momentum이 서서히 줄어들고 지금은 거의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한 사람’의 부재가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가? 아마도 현재 Dublin, Ireland 세계 본부(꼰칠리움)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mindset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우리 주변의 상황을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저 status quo, status quo.. 현상유지에 급급한 모습들. 세상이 급속히 ‘진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가만히 있으면, 즉 ‘status quo’ 그것은 다름이 아닌 ‘후퇴‘인 것이다. 큰 의미가 없는 사소한 것들 가지고 모든 ‘바쁘기만 한 단원들’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 낭비하는 평의회 모임들, 왜 우리들이 레지오 활동을 하는지 그 큰 목적은 완전히 잊은 듯 하고 우선순위에서 제일 밑에나 있을 듯한 것들 가지고 열을 올린다. 이런 것들을 계속 목격하면 이런 생각도 든다. 그런 ‘사소한 규칙을 지키려고 레지오 활동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소한 시행규칙들이 우리 레지오의 ‘제일 큰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모든 ‘진짜’ 군대들이 ‘완전히 전산화’가 되어서 모든 행정,사무가 이루어지는 이때에 군대의 효율성을 본받았다는 레지오의 현재 ‘서류 흐름’을 한번 보라. 이곳에 쓰는 시간 자체가 레지오 활동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조직의 관리에 드는 시간을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최소한으로 줄이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영혼을 위한 활동‘에 나서야 하는데 내가 본 실정은 거의 반대쪽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인 것이다. 레지오 단원 생활 4년 쯤 되면 모두들 이런 ‘권태기‘를 가지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이런 때를 어떻게 잘 극복하는 가.. 역시 우리 어머니 성모님에게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 Che sarà 케 사라~ 케 사라~ 케 사라~아~.. 이 친근한 Italian melody를 오늘 43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그야말로 Che sarà moment를 예기치 않게 맞이한 것이다. 43년 만에.. 43년 만에..
오래 살다 보니 ‘우연’이란 것을 심심치 않게 맞이하긴 하지만 오늘의 이 케사라 moment는 그야말로 우연이 되었다. 이 Che sarà는 1971년에 이탈리아 Sanremo 음악제에서 2위를 한 곡으로 아마도 미국만 제외하고 전세계에서도 2위의 영광을 누린 곡일 듯 하다. 왜냐하면 그 이후 미국에서 이 곡을 ‘한번도’ 들을 기회가 없이 그대로 잊혀지고 말았으니까..
Ricchi e Poveri – Che Sarà – Sanremo 1971
하지만 1971년도에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알려진 이 곡은 그 melody의 특성상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런 것으로 두고두고 귓전에서 맴돌았던 것인데.. 40년이 지나가는 긴 인생의 여파로 그것도 많이 희석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몇 구절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되니까.. 특히 amore mio.. 부분이 그러하다.
오늘 이 곡을 찾게 된 계기는 며칠 전에 연숙이 성당에서 ‘구입’한 류해욱 요셉 신부님의 신작 묵상 수필집 ‘영혼의 샘터’에 있었다. 받아 쓰기에 너무나 편한 신부님의 글이라 또 무료함을 달랠 겸 typing away를 즐기다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은 그렇게 되리니’ 라는 소제목의 글을 읽다가 1950년대의 미국 pop song ‘Que sera sera’에서 신부님의 묵상주제가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케 세라 세라.. 어렸을 적 1950년대에 많이 듣던 Doris Day의 hit였고 신부님 말씀대로 모두들 ‘될 대로 되라’로 잘못 번역된 뜻으로 해석하고 살았다. 하지만 진정한 케세라 세라는 그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되어질 것은 그렇게 될 것’ 이라는 거의 묵상재료에 가까운 뜻이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가 아니고 “우리 삶 안에서 때로 원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거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다면 그것을 자기 인생에서 하느님의 계획표 안에 들어있던 그분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이라는 의미” 로 해석을 하자는 류 신부님의 묵상은 참으로 좋았다. 동양사상으로 아마도 ‘순리’의 지혜가 아닐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는 것도 지혜라는 것.. 어떨 때는 그것이 그렇게도 힘들었음을 오랜 ‘힘든’ 인생의 삶에서 알고 있지만..
José Feliciano – Che Sarà – Sanremo 1971
문제는 신부님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Doris Day의 케세라 세라와 이태리 1971년 산레모 음악제 2위의 곡인 Che sarà (What will be) 케 사라.. 를 완전히 혼동, 그야말로 짬뽕을 해 버린 것이다. 나는 류 신부님을 탓할 수 없는 것이 이분의 나이가 나보다 적어도 10살은 밑일 듯하니까.. 1971년이면 아마도 중학생 정도였을 것이고 이런 노래들은 책을 통해서나 들었을 듯하니 어찌 그렇게 정확하게 알 수가 있으랴.. 하지만 Google과 Wikipedia의 세상에서 사실적인 것은 예전보다 비교적 값싸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신부님의 혼동의 덕택으로 나는 이 추억의 명곡을 기억할 수 있었고 하루 종일 1971년경 나와 우리 가족의 모습들을 회상할 수 있었다.
1971년을 대한민국에서 살았으면 아마도 매년 열리는 이 이태리 산레모 음악제를 기억할 것이고 참 주옥 같은 명곡들도 많았다. ‘문제’의 이 Che sarà 케 사라 는 당시 두 팀이 같은 곡을 경연하였는데 그 중에 한 팀은 vocal solo였던 ‘미국 (사실은 Puerto Rico, 미국령)’에서 외국가수 자격으로 출전했던 Jose Feliciano(호세 휄리치아노)였고1 이 같은 곡을 부른 다른 팀은 이탈리아 출신 혼성 vocal group 인 Ricchi e Poveri(Rich & Poor) ‘리키이포베리’ 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큰 hit를 한 것은 혼성 팀 리키이포베리 팀이었고 나의 귓전에 아직도 생생한 melody도 이것이었다. 거의 같이 Jose Feliciano의 jazzy한 rendition도 큰 hit를 했지만 우리나라의 당시 정서로는 역시 열창가곡 스타일인 리키이포베리 팀이 더 사랑을 받았다. 오늘 이런 연유로 나는 1971년 당시 이 노래를 들을 당시를 회상하며 오랜만에 축 가라앉는 날씨와 더불어 그야말로 nostalgic & sentimental의 극치를 맛 보았다. 가라앉는 기분이지만 사실은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José Feliciano – Che Sarà – Italian TV show
Ricchi e Poveri – Che Sarà – Italian TV show
¶ 오늘은 또 다른 의미의Che sarà moment도 있었다. 오늘 이른 아침 정들었던 교우 전요셉 형제가 고국으로 향하는 귀국 비행기에 부인과 함께 피곤한 몸을 실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조금은 가슴 아픈 경험이라고 할까.. 이별도 그렇지만 귀국을 하는 전 형제의 뒷모습이 더욱 추운 날씨와 겹쳐서 나를 춥게 만들었다. 소위 말하는 ‘금의환향’ 까지는 아니어도 더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으면 하는 바람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년 여름이었나.. 정말 우연히 돼지띠 동갑 교우 형제님을 알게 되었고 그가 바로 전요셉 형제였다.
이미 몇 년 전에 레지오 단원으로 우리들은 이 형제님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한 적이 있었고 기적과도 같이 이 형제님은 전통적으로 불치의 병으로 알려진 ‘암’에서 회생을 하였다. 우리들은 물론 ‘묵주기도’의 힘을 더 믿게 된 계기도 되었다. 사실 그것이 전부였고 다른 자리에서 인사를 따로 할 기회가 없었는데 우연히 돼지띠 동갑임을 서로 알게 되고 순간적으로 우리는 ‘형제’처럼 느끼게 되었다. 긍정적인 의미로 very simple한 영혼이었고 우리는 그런 사실에 사실 모두 impress되었다. 작년 이맘때부터 시작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의 program에서 이 형제님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신나는 ‘난타’ team에서 열심히 북을 쳐 댔다. 오랜 미국 생활에서 터득한 지혜 중에는 ‘한 사람에게 너무..’ 라는 것이 나에게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예외적으로 느껴졌고, 정말 정말 오랜만에 고향의 친구, 형제를 만난 기분으로 그 동안 조금은 거리감이 있었던 순교자성당에 더 가까움도 느끼게 되었다.
미국 생활이 10년이 넘는다고 했지만 나이 탓인지 ‘고국 냄새’가 확연히 났지만 그 냄새들이 다 ‘좋은 쪽’의 것이어서 이 형제님을 통해서 수십 년 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흔적과 풍습’을 배울 수도 있겠다는 나만의 희망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 돼지띠 동갑은 사치였는지.. 10여 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는 결심을 한 형제님의 ‘귀국선언’은 을씨년스럽게 변하는 날씨 못지않게 우리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10여 년 동안 이 형제님은 참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는데.. 결과적으로 무리가.. 순리가 아니었는지.. 하느님의 뜻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것도 역시 ‘케 사라’ 인가.. 너무 무리하지 말고.. 흐름을 따르면.. 아직은 그럴 여유를 못 찾는다. 우선은 섭섭하고 쓸쓸한 늦 가을의 황량함만 느껴질 뿐이다. 형제님, 그 동안 돼지띠 동갑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지만 더 많은 시간을 나누지 못한 아쉬움 오래 오래 남을 듯 합니다. 인연이 되며 어디선가 또 만날 수 있으리라.. 믿고.. 바랍니다.
류해욱 신부님, 사실적인 것이 틀리면 고치는 것이 좋을 듯하고.. 호세 는 Hose가 아니고 Jose일 듯한데요… ↩
몇 개월 전이던가.. 확실치 않다.. 하지만 6개월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 우리가 다니는 미국 본당 Holy Family CC (Catholic Church)의 성체조배실 (adoration chapel) 에서 비교적 낡은 책 하나를 읽게 되었다. 조그만 책자였는데,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HIS HOLINESS JOHN PAUL II.. 그러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저자인 책이었다. 제목이 바로 ‘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였다. 직역을 하면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정도가 될까. 나 나름대로의 의역은 ‘희망으로 넘어 가며’ 조금은 어색한가.. 희망이 없던 사람이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비로소 조금씩 그것을 찾아간다 정도가 아닐까?
성체조배실에서는 주로 성체를 앞에 두고 명상이나 묵상 나가가서 관상까지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무엇을 하던 사실 제한은 없는 것 같다. 연숙과 그곳을 거의 정기적으로 가게 된 것은 우리가 ‘평일 미사’를 시작하면서였고 평일 미사가 끝난 후에, 필수적으로 일주일에 몇 번을 하는 것은 정하지 않고, ‘가고 싶으면’ 가는 것으로 했는데 의외로 정기적인 것이 되었다. 이 본당의 성체조배 활동은 참으로 활발해서,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만 하다. 왜냐하면 순교자 성당에는 ‘성체조배실’이란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항상 비어있는 듯한 컴컴하고 춥고, 더운 순교자 성당의 분위기1와 이곳의 24시간 쾌적하게 돌아가는 성체조배실이 있는 미국본당의 ‘눈에 안 보이는 차이’는 아마도 상상을 초월할 듯 하다. 어떤 자매님은 경험적으로 성체조배 활동이 있는 모든 본당의 신심 수준2은 ‘거의 자동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 란 것이 처음에 너무나 생소했지만 의외로 좋은 ‘선배’들을 만나서 큰 무리 없이 합류가 되었고 이제는 ‘좋은 시간’ 중에 하나가 되었다. 레지오 덕분에 처음에는 ‘기본’ 묵주기도 의무를 채우려 이곳에서 그것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만의 ‘묵상, 생각’의 시간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다른 것 중에는 그곳에 비치된 ‘좋은 책’들을 ‘난독’하는 것이다. 거기서 정독을 할 수는 없기에 눈에 ‘꽂히는’ 것을 읽는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여기에 언급하는 이제는 ‘성인’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책인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직감적으로 ‘괜히 어려운 책을 골랐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교황님이 쓰신 글들은 ‘무조건 어렵다’ 는 선입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교황 회칙이 어쩌구.. 교회 헌장이 어쩌구..’ 하는 글들이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원인이었을까.. 이 책을 조금 읽으며 나는 너무나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웬만한 교구신부님3들이 일반 본당에서 하시는 수준의 글들.. 주제 들은 ‘항상 궁금했지만 창피해서 물어보지 못하던 것’들로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것이.. 아닐 듯 하다.
그렇게 성체조배실에서 ‘가끔’ 즐기던 이 책이 어느 날 보니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빌려간’ 모양인지..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그 책이 돌아왔기에 이번에는 never again의 심정으로 그 책의 제목을 적어와서 Amazon.com에서 찾았다. 1994년 발행된 책으로 그러니까 20년이 된 책이었다. 역시 이것도 contemporary classic 영역으로 들어가는가.. 왜 이렇게 세월이 빨리 가는가. 아직도 ‘출판’이 되는 책인 것을 보니 역시 popular classic이 된 듯하다. 거의 free로 사게 된 (shipping & handling + nothing!)이 책.. 나와는 우연이 아닌 인연으로 성체조배실 보다 더 쾌적한 나의 서재에서 ‘정독’을 하게 되었다. 읽으며 ‘남기는’ 방법.. Reading by Typing..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을까? ‘성경필사‘를 하는 이유와는 다른 것이지만 아마도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읽은 후에 다른 ‘영혼’들과 이 생각과 글을 나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레지오의 사명‘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연유, 과정이 머리글에 자세히 적혀있다. 그것을 읽어보니 ‘왜 이 책이 그렇게 읽기 쉽던가?’ 하는 의문이 저절로 풀린다. 1993년 가을 이탈리아의 TV 방송국에서 ‘교황청 역사상 유례없는’ 기획을 했는데.. 교황과 TV인터뷰를 하는 idea였다. 그것도 ‘전세계로 방영이 되는’ 것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 당시에도 거의 ‘의외적’인 교황으로 ‘예상을 불허하는’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이런 제안을 ‘수락’한 것도 전혀 예상 밖은 아니었다고 한다. 교황과 인터뷰를 하려면 아마도 미리 ‘예상적인 질문’ 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 대답, 반응도 예측 불허였을 것이다.
하지만 또 예상을 뒤엎고 이런 기획이 취소가 되었다. 너무나 바쁜 교황의 스케줄 때문이었다고 한다. 연기를 할만한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TV 인터뷰 계획은 ‘물 건너 간 것’이 되었다. 몇 개월 후에 또 다른 surprise가 있었는데,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예측 불허’한 행적이었을까.. TV 인터뷰 대신에 ‘서면’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교황님의 대답이 왔고 그 결과가 이 책이 된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질문의 ‘수준’이 거의 예비자 교리공부의 것과 비슷할 정도다. 그러니까 교황님이 직접 지도하는 예비자 교리반 같은 분위기인 것이다.
이 책의 비교적 짧은 질문, 대답 을 읽는 것은 한마디로 즐겁기만 하다. 감히 교황님께 이런 질문이… 가당한가.. 하는 것들이지만 ‘기가 막힌 대답’들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이분의 ‘지식’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알기 쉽게’ 설명하는 실력은 더 놀라운 것이다. 내가 제일 놀라워한 질문은 ‘예수님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 교리반 교사들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 ‘그것도 모르며 어떻게..’ 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그것은 ‘무조건’ 믿어야 하는 ‘공리’ 중에 하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대답은 그런 것들을 모두 뛰어 넘는 ‘자상한’ 대답들이다. 현재 1/4 정도 typing을 하고 있고, 덕분에 더 빠른 pace로 모두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독을 하며, 각 질문과 대답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제일 듯 하다.
¶ MERTON by Thomas Merton
Thomas Merton, 가톨릭 교회, 특히 ‘미국 가톨릭’ 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트래피스트 수사님’..이기전에 bestseller author 인 것을 나는 비교적 근래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고 그 분의 사후 posthumous 의 인기와 power를 실감을 하게 되었다. 우선 1968년,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에 ‘선종’한 이 Trappist Monk가 왜 아직도 그렇게 화제이며 유명할까.. 흥미롭지 않은가? 현대판 성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노 라고도 불리는 이분의 일생은 비록 50세를 조금 넘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만 너무나 색채가 진하고 강하고 다양해서 이분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은 아주 애를 먹으리라 생각이 된다. 50세의 인생을 이렇게 강렬한 후광을 뿌리고 갔다는 것 자체가 ‘멋진’ 것이 아닐까?
The Seven Storey Mountain칠층산 이란 제목의 ‘자서전, 참회록’이 초기 대표작이지만 그 이후 수 많은 주옥 같은 시집을 비롯한 저서를 남겼고, 사후 이분에 대한 저서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수도자’라 할 것이다. 일화에 위에 말한 그의 첫 자서전이 세상에 나온 뒤 1950년대에 많은 ‘건강한 젊은 남자’들이 이 책의 영향으로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뒤 주머니에 이 책을 끼고 왔다고 했다. 그 정도면 대강 짐작이 가지 않을까?
여기서 이들의 공통점은 그 책의 저자도 당시 ‘젊다’라는 것이고 영향을 받았던 이들도 젊었다는 것인데.. 지금 60대 중반을 훌쩍 넘어가는 나는 과연 이것들과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나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진리를 찾고 싶고, 그 진리로 생을 살고 싶다.’ 라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수도승이 되고 싶지도 않고 사실 이제는 되고 싶어도 될 수도 없다. 그것 빼고 나머지는 나도 ‘진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Thomas Merton을 가장 ‘짧게 소개한’ 글이 있을까? 대강 2~3 페이지 정도로.. 물론 내가 신뢰하는 Wikipedia를 보았지만 그곳은 ‘객관적’인 역사, 사실, 업적 들을 dry하게 기술했을 뿐이다. 그곳에는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A Thomas Merton Reader란 책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그 방대한 Merton 저서들을 모아서 500 여 페이지 한 권으로 압축한 편리한 이 책의 서두에 있는 Introduction(by M. Scott Peck) 바로 그것이다. 이 ‘소개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Merton은 짧은 글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사람’ .. 이것은 나도 이제 충분히 이해가 가고, 그래서 그렇게 많은 책들이 그를 모든 각도에서 조명하려고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Merton에 대한 Introduction은 이렇게 시작이 된다.
It is impossible to adequately “introduce” Thomas Merton. I have a sense I might almost as well attempt to introduce God. This is not because I worship Merton but because he was an extraordinarily complex and complicated man, multifaceted, diverse, and variable. He was one of those occasional people who could be described as “larger than life”.
이 500 페이지의Reader를어떤방식으로읽을까생각하니이것이장난이아니다. Reading by Typing은물론이지만.. 첫페이지부터읽을것인가.. 아니면난독random 하게골라서, 아니면다른곳에서 ‘도움‘을받아서읽을것인가.. 아직은전혀 idea가없다. 하지만이제까지의경험으로나는 ‘난독‘으로시작할듯하다. 나에게그방법이제일 ‘효과적‘임을나는잘알기때문이다.
한 여름에 순교자 성당 대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해본 사람들이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
며칠 전이던가.. 우리의 미국본당의 달력을 보니 10월 22일에 Bl. John Paul II라고 적혀 있었다. 이 달력은 교회달력이라서 일년 열두 달 거의 매일 성인의 feast day가 적혀있다. 매일 미사를 다닌 이후 나는 이렇게 매일 성인의 축일이 있던 사실에 새삼 놀랐고 얼마나 내가 ‘무식한 천주교 신자’였던가 부끄럽기도 하였다. 매일 미사를 다니다 보면 ‘부수입’으로 이렇게 성인열전을 가볍게라도 공부하게 되어서 아주 유익하다.
그런데 오늘 10월 22일 수요일 미사엘 가니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축일’ 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며칠 전에 잠깐 본 Bl. John Paul II가 생각났다. Blessed John Paul Second 그러니까 ‘복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축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inaugural feast day, 시성 후 첫 축일이라서 나는 무슨 ‘역사적인 사건’을 겪는 듯 가벼운 흥분이 스며들었다. 올해 부활절 때 시성이 되신 후 첫 축일.. 역시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살아 생전에 ‘살아 계셨던’ 교황님이었고 나의 살아 생전에 돌아 가셨으며, 또한 살아 생전에 성인이 되신 것은 나로써는 조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무척 많은 ‘일반 인’들이 이 성인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나도 그들에 못지 않게 이분을 좋아한다. 아니 존경, 아니 공경을 한다. 내가 꿈에도 꿀 수 없는 role model로 삼고 살아간다고 하면 조금 over일까? 2005년 선종을 하실 때, 나는 처음으로 이분에 대해 깊이 공부를 하고 묵상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나는 이분이야 말로 나의 남은 평생 role model로 삼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100% 확신을 하였다. 그 이후 나는 얼음처럼 차갑게 얼었었던 나의 신앙심을 조금씩 녹여 나가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 그 여파로 녹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어떠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세속적인 변화에도 이분만은 변함없이 ‘진실’을 밝히고 선포하실 것이라 나는 믿게 된 것이다. Do not be afraid라는 간단한 명언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처음에는 약간 감상적인 기분으로 이분을 존경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 이 성인을 알아가며 인간 요한 바오로 을 ‘절대적’으로 믿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매료시켰던 면은 이분의 ‘찬란한 지적 은총’이었다. 철저한 신앙적 믿음에 못지 않는 지성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듯 하다. 한 마디로 ‘공부 잘하는’ 교황인 것이다. 후계 교황인 베네딕트 16세가 아마도 지적으로 이분을 능가할 지도 모르지만 베네딕트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에 비해서 다른 면이 떨어지는 듯 느껴진다. 절대로 굽힐 수 없는 지켜야 할 ‘진리, 교리’를 지켰고, 세계 정치를 신앙적인 눈으로 설득시켜는 힘은 아마도 이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을 따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 이날을 맞아 ncregister.com에 관련 기사가 실렸는데Catholics Remember St. John Paul II’s Personal Impact on Inaugural Feast란 제목으로 몇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날을 맞아 이 성인에 대해 회고를 하는 기사였다. 평범한 젊은 신자에서 신부님까지 포함 된 이런 개인적 경험 일화를 보면서 1978년부터 2005년까지 이 성인이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 거의 한 세대에 걸친 범세계적인 불굴의 선교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험난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등대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
¶ 싸늘하고 깜깜한 가을 새벽: 새벽 5시에 깨어나니 칠흑 같은 어둠이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진다. 아~ 이제 2014년도 ‘겨울’이 서서히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의 Central Heating이 kick-in 된 것이 지나간 10월 5일 아침이었고, 그때 유난히도 끈적거리던 2014년 여름 기운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 간간이 이어지던 Indian Summer 로 말미암아 ‘월동 준비’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동안 심지어 tornado siren을 새벽에 듣기도 해서 아직도 따뜻한 10월의 나날을 보냈지만 역시 며칠 전부터 평년 같은 기온으로 급강하.. long sleeves shirts, pants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럴 때면 사실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더 편한 짧은 차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길었던, 은근히 덥던 여름이어서 올해의 ‘단풍’은 정말 늦게 오는 모양.. 아직도 주변이 거의 초록색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 새에 곳곳이 주황색으로 변하기 시작 하였다. 아마도 11월 중순 경이면 완전히 deep fall color로 변하고.. 천주 교회력으로 대림절(Advent)이 시작되는 11월 30일부터는, 성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9월 초에 시작된 우리 가정의 ‘일생일대의 최대 project‘ 가 시작된 이후 세월이 어떻게,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감’을 잊고 사는 요즈음.. 이것이 현재 나의 주변에서 내가 느끼고 보는 66마일로 질주하는 세월의 모습이다.
¶ Front side gutter re-gutted!
또 하나의 앓던 이가 빠졌다. 우리 집 앞쪽 지붕의 gutter를 완전히 새로 설치한 것이다. 내가 손수 달았던 이 vinyl gutter는 거의 15년이 넘어서 이은 부분이 여기저기서 물이 샌다. 뒤쪽 지붕은 올 봄에 모두 손을 보았지만 앞쪽은 그런대로 견딜 만해서 미루고 있었는데 바로 앞 문 위로 새는 빗물 때문에 벽돌 콩크리트 계단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구동성으로 ‘사다리’에 올라가지 말라는 주변의 우려는 잘 알지만.. 어찌하랴.. handyman을 살 돈도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면서 돈을 쓸 수는 없지 않는가? 2006년에 작지 않은 사다리 사고의 경험이 있어서 이번 봄에는 정말 ‘초긴장’을 하며 사다리를 올라서 지금은 사실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근래 들어 YMCA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 탓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큰 무리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번 job은 하루 종일이 걸리는 큰 작업이었고 며칠 후까지 피로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도 절약하고 나의 몸이 아직도 큰 무리 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기만 하였다. 며칠 후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거의 완벽하게 ‘물 새는’ 것이 없어져서 기쁘기만 하였다.
¶ Cute pergolas at Marian Hill
연숙의 레지오 꾸리아 부단장 임기가 7월 중에 끝이 난 이후 우리는 오랜만에 무슨 vacation이나 방학을 맞는 느낌으로 몇 주일을 보냈는데 그 여파로 주일 미사를 근처의 미국본당에서 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한 달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에만 순교자 성당엘 가게 된 것이다. universal church를 자랑하는 천주교회는 사실 어느 곳엘 가던지 미사는 똑 같으니 사실 성사생활에 큰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한국교우들과 ‘친교’를 못 이루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나는 ‘큰 손해’를 보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오랜 만에 간 듯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기존의 ‘성모 동산’에 무언가 ‘멋진 것’이 세워진 것이다. Bench까지 달린 앙증스럽게 귀여운 두 pergola였다. 성모님을 옆에 두고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하니 흐뭇한 idea가 아닌가? 주변이 ‘너무나 삭막한’ 성모동산..이었는데 그래도 이것으로 조금은 포근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본당 목수가 손수 design을 했을까.. 아니면 home depot에서 kit를 샀을까? 하지만 아주 알맞은 design으로 보였다. 돈이 없어 항상 쩔쩔매든 인상을 주던 본당에서 어떻게 이런 $$을 쓰게 되었을까? 누가 이런 것을 제안하고 밀어 붙였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한마디로 dollars well spent라고 말해주고 싶다.
¶ Tobey, a Live laptop: 우리 집 bully doggie, Tobey도 이제 12월에 10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사람의 나이로 나보다 더 늙었다는 것,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생후 1개월 쯤에 우리 집엘 왔나.. 이제는 좋던 싫던 완전히 우리 식구가 되었다. 성미가 유별나고 폭력을 가끔 쓰기도 해서 다른 식구들에게 미움도 사곤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정이 들었다.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이해’하는 이 Tobey는 어떨 때는 나의 분신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24시간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나 부담이 되고 귀찮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나도 적응이 되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섭섭해지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서는 flea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제는 flea와 ‘같이 사는 지혜’도 터득해서 처음보다는 덜 고통스럽다. 나와 같이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이제는 거의 8 년째가 되어간다. 완전히 습관이 된 것이다. 나도 운동이 되고 Tobey도 아마도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자세히 움직임을 관찰하곤 하는데 다행히 아직도 걷는 것은 변함없이 씩씩하다. 주위에 ‘늙은 개’를 키우는 집들을 보면 우리도 조금씩 ‘노후 대책’을 마련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눈이 멀어가는 개, 움직이지 못하는 개.. 등등.. 주인을 잘 만난 개들이라 크게 고통을 받지는 않지만 그것을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떨까? 나와 Tobey가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좋아하는 습관 중에는 나의 무릎에 올려 놓는 것이다. 책상 위에 다리를 얹으면 뛰어올라 그곳에서 퍼지는 것이다. 이때 가끔 나는 뒤에서 번쩍 몸통으로 들어서 나의 가슴에 앉곤 하는데 처음에는 너무나 불편해 하더니 지금은 은근히 그런 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 녀석이 나보다 먼저 떠난다면 나는 이 순간들을 가장 값지게 추억으로 남겨둘 것 같다.
연세대학 시절의 추억과 회상에 관한 나의 memoirblog을 쓴지 일년이 훨씬 넘어가고 있다. 첫 두 편의 연세대 회상기(1966~1967)를 쓸 당시 너무나 진을 뺐는지 한동안 그것에 대한 것을 잊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쓰고 싶었던, 누가 보거나 말거나 써서 남겨야만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 임에도 많이 희미해진 기억과 싸우는 것도 힘들었다.
또한 그 당시를 회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느껴지는 흥분과 격정은 어떨 때는 며칠이고 나를 못살게 굴 때도 있었다. 이제 세월의 약이 작용해서 다시 나의 약해져 가는 기억력과 싸울 용기가 충전이 되었다. 연세대학의 추억 제 3편은 2편의(1학년 가을학기) 이후, 그러니까 대부분 대학 2학년 시절, 그러니까 1968년 경과 그 전후의 이야기가 된다.
¶ 1.21사태, 김신조, 프에블로, 월남 확전
대학교 1학년 시절이 2년에 걸쳐서 두 동강이로 갈라지고1 조금 패배의식도 느꼈지만 마지막 한 학기에 나는 모든 것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회복 하고 제 정신을 차리면서 1968년을 맞았다. 1968년 1월에는 나의 생일이 있는데 바로 나의 20세 생일이 되는 달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해 나의 생일이 기억에 더 남는 것이, 바로 생일 전날 밤에 ‘북괴’의 김신조를 위시한 31명의 무장 공비2게릴라 특공대가 청와대 근처까지 잠입해서 그 유명한 1.21사태를 유발했기 때문이었다. 유혈 사태의 대부분은 1월 21일에 보도가 된 것이어서 일.이일 사태라고 이름이 붙었다.
박정희 목 따러.. 나의 생일을 전후로 대강 서울의 날씨는 정말 무섭게 춥다3. 그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것이 무섭게 얼었던 기억인데, 죽음을 각오한 김일성의 로보트(robot)4 공비들에게는 그런 추위가 아랑곳 없었다. ‘박정희 목을 따러’ 기계처럼 행진하며 쳐들어 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김일성 개XX의 전쟁도발이었다. 그때 만약 그 무장공비들이 작전에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나의 인생도5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대부분의 공비들은 사살되거나 휴전선을 넘어 도주를 했고6 유일한 생존자는 김신조 뿐이었다. 기자회견에 황급히 끌려 나온 그의 얼굴은 얻어맞은듯한 멍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첫 마디가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 그런 정도의 것으로 기억을 한다. TV에서 그 투박한 이북사투리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깬 듯이, ‘정부의 선전대로 북의 위협은 사실이구나..’ 하는 조금은 자책적인 심정으로 정말 김일성의 위협이 국가적 생존위협임을 모두 실감을 하게 되었다. 비록 이 김일성의 무모한 작전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의 여파는 나의 남은 대학시절과 그 이후에도 두고두고 우리에게 미쳤다7.
프에블로 나포.. 이 사건 이후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미국의 조그만 첩보선 프에블로(Pueblo) 호가 원산 앞바다 공해에서 북괴에 나포가 되고 그 과정에서 선원들은 죽거나 포로가 되는, 또 하나의 한반도 전쟁 위기를 맞는다. 곧바로 미국의 원자력 항공모함 Enterprise가 원산 앞바다에 나타나고 무력행사를 불사하는 미국의 성명이 발표되는 등 정말 심각한 전쟁의 구름이 몰려왔다. 하지만 월남전에 완전히 발이 빠진 미국은 더 이상의 작전을 중지하고 외교적으로 포로 석방 협상의 노력을 시작하게 되어서 더 이상 악화는 피하게 되었다.
악화일로 월남전.. 사실 그 당시의 국제정세는 미국의 월남전 100% 개입으로 말이 아니었다. 국제적인 비난이 거세지고, 미국내의 여론도 학생을 중심8으로 악화일로, 데모는 끊임이 없는 그야말로 미국판 ‘운동권’의 시대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조금 다른 입장이었는데, 박정희 정부는 ‘명분이 밥 먹여주냐.. 실리가 최고다‘ 의 정책을 거세게 밀어 부친 것이다.
거의 6만 명의 전투부대를 월남에 보내며, 미국과의 협상으로, 수출, 월남전 수입 등으로 경제 제1주의를 고수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국내정치의 분위기로 사실 박정희는 반대를 무리 없이 무마하는 권력과 정치 기술을 잘 이용해 나갔다. 경제적인 효과가 국민의 피부에 느껴지기 시작하면 모든 반대와 파병에 따른 후유증을 처리하리라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실상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대한민국으로 $$$ 가 흘러 들어오고, 경제 규모가 조금씩 커지고, 기간산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며 우리들 눈과 피부로 ‘무언가 잘 되고 있다’ 라는 희망이 느껴지던 그런 시절이었다.
박정희의 고민.. 당시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두목 격이었던 소련과 중공은 무언가 미국의 군사력을 월남전에서 분산시키려 했을 것인데, 김일성은 분명히 그 총 두목들에게, Yes Sir..하며 머리를 굴렸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1.21 사태와 프에블로 선박 나포 사건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사실 이 연속적인 김일성의 불장난의 결과로 곧바로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야당에서 추가 월남파병 보류안 이 나오게 되었지만, 박정희가 그것이 쉽게 통과되도록 놔둘 리는 없었다. 미국 자신은 월남전에서의 고전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파리 평화협상 회담과 더불어, ‘명예로운’ 철수작전을 구상하면서 B-52 전폭기로 월맹(하노이 정부) 폭격을 계속하는.. 참 미국이 고전하던 시절이었다. 그 반면에, 김일성과의 ‘의미 있는’ 평화협상이 100% 불가능했던 우리들은 미국의 ‘꼬붕’ 이라는 국제적 비난과 고립9에도 불구하고, 그저 ‘반공, 경제’ 의 두 가지로 똘똘 뭉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 나를 1968년으로 보내주세요
이런 으시시 한 국제, 국내 정치적 배경에서도 나는 ‘희망’의(why not, 그때는 팔팔한 20세였느니..) 대학 2학년 시절을 맞게 되었으며, 나의 오래된 추억 중에서도 이 1968년의 대학2년 시절은 나에게 제일 ‘신나며 기억하고 싶은’ 시절로 꼽힌다. 사실, time machine을 타고 과거의 한 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내 나이 20세였던, 1968년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정법대 앞에서 박창희, 이윤기, 이경우 2학년이 시작될 무렵 1968년 이른 봄
¶ 연세대 보건학강의
학부 2학년이 되면서 1학년의 ‘교양학부’는 끝이 나고 대망의 전기공학 전공과정이 ‘조금씩’ 시작되었다. 교양학부 1학년의 과정은 마치 고교 3년 과정의 연장선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그래도 상아탑 대학의 맛을 보여주는, 전공과는 상관이 없는 과목들도 많아서 그런대로 느낌이 좋았다. 특히 연세대만이 자랑하는 의대교수들이 가르치는 과목들, 특히 ‘보건’이라는 것도 기억에 상당히 남았다. 전매청 담배 소비의 극치를 이루던 그 나이에 그 과목은 우리들에게 ‘소름 끼치는’ 담배의 해독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그런 교육은 정말로 선견지명적인, 몇 십 년 후에 미국에서 담배가 제한 받기 시작한 것을 보면, 연세대 의대 교수들의 사명적인 결단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교육을 받은 우리들 조차도 ‘성인들의 특전’이었던 담배를 오히려 더 피고 즐기는 대학생 시절을 보내게 된다.
¶ 매력적인 담배와 술
이 무렵에 나는 ‘진정한 성인 남자’의 상징이었던 ‘대망’의 담배10를 배우게 되었다. 1966년 대학 입학 후 거의 2년간 나는 별로 담배를 피울 마음이 없었는데 1968년 들어서야 주위의 친구들 보다 거의 2년 늦게 이 담배에 대한 무관심이 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술의 맛은 그보다 6개월 전 어머님이 미제시장에서 사다 주신 ‘깡통 맥주, Black Label‘로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드디어 담배에 도전한 것이다. 1학기가 시작되기 전, 어느 날 같은 상도동에 살던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 유지호가 놀러 와서 그가 피우던 담배11를 나에게 권한 것이다. 그 때, ‘한번 피워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행에 옮기었다. 결과는 뻔했다. 피우고 나서 나는 거의 ‘기절’ 상태로 빠져서 한 동안 혼미상태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의 흡연은 완전히 성공이었고, 그 맛과 멋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성인 식’의 하나였다. 그 이후로 나는 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축에 속한 대학생이 되었다12.
¶ 담배와 문상희 교수
연세대와 담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면 아마도 당시 연세대 ‘남학생’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공개적’인 사실이었다. 당시 신과대학에 ‘문상희’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요새 말로 하면 담배추방운동의 우두머리 중의 우두머리 격이었고, 그 추방 방식이 독특했고 문제가 되기도 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무조건 ‘저지’를 하고 ‘폭행’까지 했다. 자유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 캠퍼스에서 그것도 신과대학 교수가 ‘불심검문’을 하며 ‘폭행’을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지만 당시에는 사실이었다.
나는 직접 ‘얻어 맞는’ 경험은 못 했지만 실제로 ‘목격’은 했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놀랐지만 대학당국에서 ‘아무도’ 그를 제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개신교 문화’에서 담배는 ‘지독한 악’으로 여겨졌던 것도 한 몫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심지어는 동료 교수들 조차 그의 제지를 받았다고 했을 정도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문교수님은 ‘선각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당시에는 ‘빈축과 냉소’의 대상이기만 했다. 제일 ‘우스운’ 사실에는 어떤 신문사 기자가 도서관 앞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이 문교수에게 얻어 맞고 항의를 하니.. 문교수 왈.. 왜 옆에 있는 사람이 담배 피우는 것을 제지 못했느냐고 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과장인지 확인을 할 길은 없지만 당시에는 꽤 유명한 소문이기도 했다.
¶ 복교생과 재학생, 민바리와 군바리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복교생, 복학생’들이 대거로 들어왔고 그보다는 적은 수의 재학생들이 입영영장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 다행히 나와 나의 친구들의 대부분은 아직 영장을 못 받아서 큰 변화가 없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호적상 사망으로 처리된 6.25때 납북되신 아버지 ‘덕분’13에 병역법상 ‘부선망 단대독자‘ 14 라는 긴 이름의 ‘특혜’가 있어서 영장이 나와도 졸업 후로 입영을 연기할 수 있는 입장이어서 졸업 전까지는 군대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복학생들이 대거 복교를 하면서 순식간에 우리 과의 분위기는 변했으며 완전히 나이별 2파로 나뉘게 되었고, 재학생들은 ‘민바리’, 복학생들은 ‘군바리’로 불리게 되었다. 나이가 거의 2~3년 차이가 나는 두 그룹이 생긴 것이다. 분명히 나이가 위였던 그들이었어도 우리들에게 반말을 쓰지 못했지만 우리들은 깍듯이 선배 대우를 해 주었다. 하지만 같은 고등학교 동창관계가 되면 이것은 완전히 다시 고등학교로 간 기분이 들 정도로 거의 군대식으로 대우를 했다. 나의 경우에는 중앙고 선배(54회 2명, 53회 1명)들이 3명이 들어왔고 우리들은 큰 원군을 만난 듯 그들을 친형들처럼 따르게 되었다. 재학생 중에 중앙고 출신이 5명이나 있어서 총 8명의 ‘중앙고’ 그룹이 형성되었고, 숫자로써도 상당한 세력이었다. 그 3명의 중앙 선배들이 바로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제 형들이었고, 이들과 나는 졸업할 때까지 3년을 같은 전공으로 공부를 하게 된다.
재학생들과 복학생들은 비록 3~4년 정도밖에 나이차이가 없었지만, 생각과 행동은 완전히 서울과 부산처럼 달랐다. 군대를 갔다 온 이유도 있었지만 우선 공부하는 자세가 아주 심각했다. 이 형들은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 재학생들은 어차피 도중이나 졸업과 동시에 군대를 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불투명한 미래를 보며 방황하는 기분이었다. 그 당시 나이에서 군대 복무기간인 2년 6개월 (거의 3년)은 참 영원처럼 긴 것처럼 느껴졌기에 더욱 절망감 같은 것도 느끼곤 했다. 그런 환경에서 시작된 나의 2학년 학교 생활은 조금씩 조금씩 학점에 연연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1학년 1학기 때의 ‘땡땡이’의 쓰라린 경험은 잊지 않고 학점의 최소한 하한선은 유지하려 애는 썼다. 하지만 지난 1학년 2학기, 가을학기 때 진정한 공부의 맛을 느끼던 그 당시의 정열은 어쩐지 많이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 중앙고 동창들과 아미고 클럽
당시 나는 주로 중앙고 출신 동창들과 타교 출신 몇몇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화공과의 중앙고 동창 양건주도 있었다. 왜 화공과의 양건주가 전기과의 우리들과 섞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그냥 중앙고 출신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전기과에는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이 중앙 동창이었지만 사실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은 모두 나의 중앙고 1년 후배들 이어서 친구로 지내기는 조금은 거북한 관계였다. 하지만 여기에 중앙 1년 후배였던 박창희가 사실은 ‘옛날’ 원서동에서 잔뼈가 굵었던 죽마고우 친구였기에 아주 묘한 ‘일년 선배,후배’로 이루어진 그룹이 형성된 셈이다. 나는 창희와 직접적인 친구관계여서 큰 문제가 없었지만 나의 동기 친구인 이윤기는 사실 갑자기 1년 후배들과 친구처럼 지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그런 나이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레 형성된 그룹의 이름의 ‘아미고 클럽’이었다. 아미고는 물론 Spanish로 amigo, 그러니까 ‘남자친구’란 뜻이었다. 아마도 그 시절 유행하던 Jim Reeves의 hit country, Adios Amigo에서 이름을 따 왔을 것이다. 이 클럽에는 타교 출신들도 있었는데, 전라도 유학생 김진환, 강원도 유학생 김철수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이상일은 비록 중앙 동창이었지만 우리 그룹에는 전혀 관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 아미고 클럽은: 화공과 양건주, 전기과 나(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김진환, 김철수 등으로 7명이 연세대 캠퍼스에서 만나거나 학교 입구에 있는 ‘굴다리’ 바로 앞에 있었던 ‘빵집’에서 모여서 ‘잡담’을 즐기곤 했는데, 사실 그것이 보기보다는 참 즐거운 시간 들이었다.
¶ 1968년 봄의 관악산
그 해 봄에 아미고 클럽 전원이 관악산으로 ‘등산’ 을 갔었는데 그 때의 ‘흑백’사진이 고스란히 남아서 그 당시의 우리들 ‘꽤죄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당시에 관악산엘 가려면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과천 행 시외버스를 타고 갔다.
비록 ‘구제품 복장, 교복’등의 신세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의 복장은 참 가관이었는데, 100% 신사복에서 100% 염색된 작업복까지.. 천차만별이었고 등산복도 마찬가지.. 우리 클럽에서 박창희를 제외하고는 등산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저 허름한 옷들.. 우리들은 그저 ‘잠바’라고 부르던 옷 차림 일색이었다. 외모에 각별한 감각이 있었고 등산의 유행에 민감하던 박창희는 우리가 보기에 완전한 ‘히말라야 등산대’ 옷차림으로 관악산을 올랐다.
그때 남은 사진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어제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너무나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술에 취하는 것을 경험했다. 관악산 정상 바로 아래 자리를 잡고 신나게 밥을 해 먹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누가 술을 가지고 왔는지 기분에 취해서 멋도 모르고 마신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취해서 돌아오는 시외버스 속에서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실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술에 취하면 기분이 너무나 좋아진다는 사실을 체험하였고, 평소보다 말이 더 많아지고, 피하거나 못했던 말들이 ‘거침없이’ 나온다는 신기한 현상도 알았다.
아미고 양건주, 김진환, 김철수, 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과천에서 관악산으로.. 1968년 봄
¶ 연세대 연영회와 갈월동 양옥
학기 초에 기억나는 것 중에는 학교 내 서클 중에 연영회라는 서클에 가입하려 했던 추억이다. 그 당시에는 요새 흔히 쓰는 ‘동아리’라는 말이 없었고 그저 서클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 연세대에는 역사가 깊다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연영회(延影會)라고 불리던 서클이 있었고, 나와 양건주가 그곳에 가입을 하려고 그 모임엘 나가게 되었다. 왜 건주와 같이 그곳에 가입하려 했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나는 2년 전 입학했을 때 몇 개월간 사진, 카메라 등에 빠져서 살았다. 입학기념으로 어머님이 사주신 일제 Petri 카메라를 가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곤 했고, 도서관에서 사진 촬영에 대한 책도 많이 대출해서 읽기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연영회에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2학년이니까, 특별활동도 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그 당시 입회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니까, 연영회 신입회원 모임을 한다는 공지가 붙어서 읽어보니 ‘갈월동 어느 어느 빵집‘에서 모인다고 했다. 빵집에서 학교서클이 모이는 것이 조금 그랬지만, 아마도 환영하는 의미로 빵을 먹으며 모이나 보다 생각하고 건주와 그곳엘 갔는데, 가 보니 사실은 그곳에서 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빵집 근처에 있는 연영회 ‘간부’의 집에서 모인다고 해서 안내를 받아서 단체로 그 집을 찾아갔다. 갈월동 그 빵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근사한 양옥집’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연대생들로 꽉 차있었다. ‘근사한’ 여학생들도 꽤 있어서 흥미진진했는데,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커다란 거실 구석에 완전히 프로 같이 전기기타와 드럼까지 갖춘 rock band가 warming up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도 모두 연영회원이라고 했는데 가만히 그 중의 한 명을 보니 낯이 익었다. 건주는 그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중앙고 ‘심상욱’이라는 우리의 동기동창이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건주가 가서 우리도 중앙고 출신이라고 했어도 그는 우리를 알아 보지를 못했다. 신입회원으로 꽉 찬 모임에서 간부, 임원들이 나와서 연영회 소개를 하고 돌아가며 자기 소개도 하고 했는데, 그 임원들은 새로 가입한 ‘멋진 여대생’들에게 꽤나 관심을 보였다. 사실은 그 여대생들도 그 ‘근사한 양옥집에 근사한 rock band’에 완전히 매료된 것으로 보이긴 했다. 그 모임에서 우리 둘은 뜻밖에 우리의 전기과 복학생, 중앙 선배 최종인 형을 만났다. 그도 사진에 꽤 취미가 있다고 했는데, 군대를 갔다 온 신입회원이 없었던 관계를 그 형은 아주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그렇게 멋진 모임이었었지만, 후에 우리는 그 모임에 전혀 나가질 못했다. 다른 곳에서 다른 흥미로운 일을 찾아 다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성에 눈이 뜨이던 시절
아미고 클럽의 남자친구들도 좋았지만 나의 연세대 2학년 시절은 내가 이성에게 완전히 눈을 뜨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성(異性)에게 크게 끌리는 그런 심정이 없었는데, 이때는 달랐다. 분명히 정상적인 20세의 남성 호르몬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작용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1968년, 연세대 2학년을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일년 전부터 나는 조금씩 무언가 여성에게 끌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 첫 번 것은 TV에서 본 어떤 여자 탤런트를 보고 밤에 꿈을 꾼 것이다. 그녀는 조영일 이라는 인기 탤런트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탤런트 오지명이라는 사람의 부인이었다. 두 번째는 지난 가을학기 때 상도동 종점에서 치과를 다녔는데 그때 거기서 치과의사 조수를 하던 어떤 ‘여성’도 나의 꿈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같았던 내가 분명히 ‘어른’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던 그런 때였던 것이다.
¶ 남과 여, 윤여숙과 용정애, double date
그 당시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 친구였던 안명성은 한양대 섬유공학과엘 다녀서 나와는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한번 연락이 와서 double date를 하자고 하였다. 솔직히 내가 깜짝 놀랐던 것이, 내가 알던 명성이는 나와 비슷하게 숫기가 없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어떻게 여자 2명씩이나 알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두 여자는 한양대학생 용정애 씨, 이화여대 생물학과 여대생, 윤여숙 씨였다. 명성이가 먼저 자기와 같은 대학에 다니던 용정애씨를 알았고, 그녀의 창덕여고 동창생인 윤여숙 씨를 데리고 나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double date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당시 유행하던 불란서 영화 ‘남과 여’를 같이 보았다. 서울 근교의 광릉으로 피크닉도 같이 갔고, 관악산으로 등산도 갔다. 그것이 1968년 봄이었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여성들과 가까이 어울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구나 하는 ‘자연의 섭리’를 절실히 실감하기도 했다. 나의 의지도 상관이 없이 여성들에게 ‘무조건 끌리는’ 체험은 사실 나에게 겁을 주기도 했다. 학교 공부가 잘 되지를 않았던 것이다. 바로 6개월 전만해도 나는 공부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자신이 없었다. 학교 공부에 애를 먹기 시작한 것이다.
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
그 double date는 명성이와 용정애씨, 나와 윤여숙씨가 짝을 되었는데, 그 이유는 명성이가 용정애씨를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놀란 것은 명성이가 여자들을 다루는 자세가 정말 나에 비하면 성숙하고 노련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자기 할 일을 다 잘 하면서 여자와 date를 즐기는 모습이었는데, 나는 정 반대였던 것이다. 내가 알아온 명성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본 것이지만, 그때의 나이 20세였으니 한창 우리들을 변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쑥맥’이었던 나는 ‘완전히’ 나의 ‘정상적’인 학교생활의 리듬이 깨어짐을 느꼈고, 학교 공부도 예전처럼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바야흐로 나의 이성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완전히 싹이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 윤여숙씨에게 빠진 것이었다. 나이가 우리와 거의 같았지만 학년은 하나 위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성숙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아마도 그런 점을 내가 좋아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들 네 명은 중앙극장에서 개봉되었던 영화 ‘남과 여’ 를 같이 보았고, 관악산으로 등산도 갔었다. 또한 당시 유원지가 별로 없었던 때 그런대로 갈 수 있었던 ‘광능’이란 곳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그 해의 봄은 정말 찬란한 느낌이었고, 하늘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나로써는 아마도 puppy love같은 심정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꿈같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봄이 거의 가던 무렵, 명성이가 나를 보자고 해서 만나니, 그 녀석 왈, 윤여숙씨가 이제 나를 안 만난다고 했다는 통고였다. 쉽게 말하면 나는 한마디로 ‘차인 것’이다. 감정처리에 지독히도 미숙했던 나는 사실 실망보다는 당황 그 자체였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헤어지자는 이유를 안다는 자체가 우습지만 명목상은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었는데, 우리들이 같이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참 편리한 이유였다. 물론 내가 싫다는 뜻을 그렇게 나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그때 나는 일생 처음으로 동대문 근처의 어떤 술집에서 명성이와 같이 막걸리를 퍼 마셨다. 그리고 비틀 거리며 집으로 왔다. 그래도 그녀는 나보다 성숙했었는지 우리들이 ‘마지막 인사’할 기회를 주는 아량이 있었다. 돈암동 종점 부근에 있었던 한일다방에서 우리는 마지막 대화를 하고 헤어졌다. 그 당시 그 다방에서는 Engelbert Humperdinck의 당시 hit ‘Am I that easy to forget‘ 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완전히 그 때의 situation에 알맞은 제목의 노래였다. 이때 나의 ‘상처’는 두고두고 이성(여자)에 대한 나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전에 나의 다른 blog에서 1968년 당시 나의 죽마고우 친구 유지호를 회상할 때, 윤여숙씨에 대한 나의 ‘선의의 장난’을 언급한 것도 있었다. 사귄 지 불고 몇 개월 만에 이 두 여대생들과는 헤어지게 되었지만 명성이는 저력을 발휘해서 용정애씨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듯 했고 몇 년 뒤에 윤여숙씨도 잠깐이나마 한번 보았지만 이미 그때에는 나도 전에 비해 훨씬 성숙한 남자로 변해 있어서 아주 유연한 자세로 그녀를 대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 오성준 형과 이대생 김갑귀
비록 지난 학기에 비해서 공부에 신경을 덜 썼지만 아미고 클럽의 친구들 덕분에 사실 학교생활은 전에 비해서 훨씬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학점에 연연하던 생활보다 훨씬 더 진짜 대학생 같은 느낌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미고 클럽은 역시 100% ‘거무틱틱하고 냄새 나는’ 남자들 뿐이어서 모이기만 하면, ‘우리도 한번 여성 동무들과 어울릴 수 없을까..’ 하고 성토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왔다. 우리의 ‘자랑스런 군바리’ 중앙선배 오성준 형이 구세주처럼 우리 앞에 ‘답’을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우리에게 형이 아는 친구의 여동생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믿을 수 없는 희소식이었다.
오성준 형은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사교성 좋고 유머러스하고 특히 후배들을 아주 잘 돌보아주는 그런 타입의 사나이여서 우리들이 아주 잘 따랐는데, 그 형의 공군 동료친구가 연세대 뒤에 있는 북가좌동(남가좌?)에 살고 있고 이화여대에 다니는 여동생이 그 집에 살고 있다고, 나와 이윤기를 데리고 그 집엘 가게 되었다. 우리들은 그렇게까지 ‘빨리’ 도와줄 줄은 몰라서 그저 ‘황송하고 고맙게’ 따라갔다. 하지만 그 집엘 가보니 문제의 그 형의 친구도, 여동생도 없었다. 그것은 그 오성준 형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일이나 문제가 있으면 질질 끌며 생각하기 보다는 행동에 먼저 옮기고 보는 그런 시원스런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그 문제의 이대생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직도 생생한 ‘김갑귀’.. 아니 무슨 여자 이름이 갑귀인가? 한자이름으로 오형의 말대로 ‘갑오년에 귀하게 태어난’ 것인지는 잘 몰랐지만 한번 듣고 ‘절대로’ 잊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만나보니 이름과는 느낌이 다르게 아주 귀엽게 생겼고, 행동도 귀여웠고, 어리광 부리는 느낌이 절로 흘러 나왔다. 그녀는 이화여대 법대에 다닌다고 했지만 법대 스타일로는 보이질 않았다. 우리들은 그녀에게 우리의 아미고 클럽을 소개하고 거기에 맞는 여대생들 좀 소개시켜 달라고 매달렸다. 이때의 이런 ‘궂은’ 일들은 나와 이윤기가 도맡아서 했는데, 아직도 왜 우리 둘만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덤볐는지 확실치 않다. 지금 생각에, 나는 그 당시 ‘윤여숙 사건’으로 ‘여자 실전 경험’의 소유자가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성숙해 졌을 것이고 이윤기는 그 당시 연애 같은 것은 안하고 있었지만 원래 cool한 사나이라서 ‘묵묵히’ 여자들에게 관심이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아미고 클럽의 나머지 ‘아이’들은 사실 나보다도 ‘덜 성숙’한 상태여서, 여자들에게 그렇게 목매거나 하지는 않았다.
¶ 남녀 클럽, 해양다방, 선화공주님
이렇게 우리는 ‘여대생’들을 우리 클럽에 연관시키려 시도를 했고, 결국 ‘착한’ 김갑귀 씨는 자기 과 科 여대생들을 데리고 나와서 meeting비슷한 것을 했는데.. 이대 앞 어느 음식점에서의 그 첫 모임은 아주 어색한 느낌이었다.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훨씬’ 성숙하고, 키가 훌쩍 컸고, 그래서 그런지 나이까지 들어 보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으로 ‘합의’는 보았지만 무언가 ‘화학적, 체감적’인 것이 맞지를 않았는지,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그 중에 몇 명하고는 따로 만나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 중에 생각나는 사람이 ‘신인옥‘ 씨였는데 왜 그 사람의 이름과 얼굴까지 기억이 나는지 나도 잘 모른다. 특히 그녀의 pop song에 대한 지식은 상당해서 대화가 아주 재미있었다. 또 한 명, 키가 무척 컸는데 불행히도 얼굴이 아주 못생겼던 그 여대생, 미도파 옆에 있었던 ‘거대한 소파의 운동장’, 삼화다방 에서 만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주로 이윤기와 같이 만나곤 했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그들과의 만남도 끝이 나게 되었다.
한번 여대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들 (주로 이윤기와 함께)은 그 ‘매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김갑귀 씨에게 다시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그녀가 유일한 ‘여자들과의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김갑귀 씨는 동정심도 많고 착한 여자였다. 이번에는 숫제 자기의 친한 여고동창생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녀는 창덕여고 출신이었다. 지난번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윤여숙 씨도 창덕여고 출신이어서 나는 창덕여고와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가회동에 오래 살면서 창덕여중고는 나에게 참으로 친숙한 학교이긴 했다. 그 친한 친구가 바로 이선화씨였다. 실은 그 전에 이미 한번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김갑귀 씨와 만날 적에 한번 같이 나온 것을 멀리서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를 ‘공식적’으로 소개를 받게 된 것이다. ‘바보, 선화공주’, 이선화 씨..
이선화씨는 서울간호학교에 다니던 간호원 지망생이었고, 그녀의 간호학교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해서 우리들은 ‘여자에 대한 제 2차의 도전’을 하게 되었다. 1968년 1학기(봄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명동의 어느 식당 2층 방에서 우리들은 단체로 만나게 되었다. 나와 이선화씨는 구면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처음인 셈이다. 이번에는 지난번 이대생 들과의 모임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나가기 전에 조금 계획을 만들어 놓고 그대로 밀어 부쳤다. 계획이란 별로 유별난 것이 아니고, 만나서 통성명을 하며 시간을 끌지 않고 우리가 미리 생각해 놓은 그룹의 성격과 조직을 ‘알리고’ 밀어 부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첫 모임에서 ‘무조건’ 어떤 그룹이 생기게 하는 그런 ‘선제공격’ 의 치밀한 계획인 것이다.
물론 여자들은 뻥~한 모습으로 당황을 했지만 그렇다고 ‘조직적’으로 반대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룹의 습성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명목상 우리들의 남녀혼성 클럽이 생기게 되었는데, 회원은 그날 모인 사람으로 우선 정하고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합의까지 보게 되었다. 한번 모여서 그 정도의 합의는 사실 기대 이상으로 성과가 좋은 것이라고 우리들은 ‘신’이 났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모이게 된 장소는 국제극장 옆쪽 골목에 있었단 해양다방이었고 우리들은 앞으로 최소한 6개월 이상을 그곳을 ‘아지트’로 삼아 모여서 ‘친목도모’를 이루게 된다.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우리는 새 2학기에 만나는 암암리의 약속을 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 여름의 설악산과 3도 화상
여름방학.. 1968년의 여름방학은 나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한 달이 된다. 그 당시를 몇 마디로 요약을 하면, ‘설악산, 축축한 비’, ‘2~3도 화상’, ‘비행기’ 쯤.. 될 듯하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나는 전부터 계획한 대로 죽마고우 안명성과 둘이서 설악산엘 갔다. 물론 ‘등산’을 하러 간 것이다. 친구 안명성은 지금은 산에 대한 취향이 나와 조금 다르지만 그 때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20세의 젊음의 혈기로 아무것도 모른 채 ‘완전 군장’으로 설악산 ‘정복’을 하러 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우리들의 사진에 나타난 ‘꼴’은 등산이 아니라 무슨 하이킹 하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북악산, 남산 보다는 조금 더 심각한 산에 간다는 기분으로 간 것이다. 그 당시 외 설악은 요새에 비하면 거의 처녀 산이나 다름없이 덜 개발이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다른 산에 비하면 ‘하이킹’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코스도 즐비했다. 우리의 복장이나, 장비는 사실 하이킹이나 캠핑에 맞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리는 버스로 속초로 갔고, 거기서 다른 버스로 외설악의 입구인 신흥사 앞, 설악동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갔을 때부터 설악산은 완전히 ‘장마’ 철로 접어들어서 그야말로 ‘매일’ 비가 왔다. 아마도 해를 못 보았던 기억이니까.. 문제는 확실히 ‘언제’ 우리가 그곳엘 갔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질 않다는 것이라서 참 안타깝다.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었으니까 분명히 7월 말 정도가 아닌가 추측만 한다. 캠핑 장비가 별로 없었고, 비가 매일 와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신흥사 입구에 있는 설악동에 즐비한 어떤 여관에서 짐을 풀었고, 날씨로 봐서 우리는 그곳을 base camp로 삼고 매일 ‘출근’을 할 생각을 했다. 그 당시 여관을 잡으려는데 우리는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나의 중앙고 동창 이종원을 만난 것이다. 그는 ‘혼자서’ 그곳엘 왔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와 비슷한 등산객 청년 두 명도 그곳에서 만나 방값도 줄일 겸해서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그러니까.. 5명의 사나이가 한 방을 쓰게 된 것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오락가락해서 우리는 거의 비를 맞으며 이곳 저곳 ‘구경’을 갔다. 그것은 진짜 등반하는 등산이 아니고 하이킹 정도에 속했지만 그래도 ‘난생 처음’ 그 유명한 설악산에 왔다는 자부심으로 가지고 즐기려 했다. 구름이 자욱하게 덮인 울산암은 아직도 그 바위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개울과 바위를 걷던 완만한 계곡들, 물론 모두 구름 속의 모습들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곳은 바로 여관에서 개울 건너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던 ‘권금성‘이었다. 바위는 하나도 없던 ‘토산’이었지만 어떻게 경사가 가파르던지 오르는 자체가 고행이었고 비까지 맞으며 오르는 것은 한마디로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고생을 한 것으로 조금은 ‘날라리’ 하이킹한다는 아쉬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날이 왔다. 권금성에 갔던 날 저녁, 파김치가 되어서 여관으로 돌아와서 예의대로 저녁 준비를 하게 되었다. 물론 비가 계속 뿌리던 그런 날이었다. 비가 오는 관계로 방 안에서 버너로 식사를 만들고 있는데, 이종원이 우리가 쓰는 것과 다른 종류의 버너를 쓰라고 내어 주었다. 그것은 당시에 많지 않았던 프로판 가스 버너였다. 요새는 보통 집에서 불고기를 식탁 위에서 구어 먹을 때 흔히 쓰지만 그 당시는 사실 새로 나온 것이었다. 문제는 프로판 가스통(카트리지)을 버너의 본체에 충격을 주며 밀어 넣는데 조금 프로판 가스가 새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가스 통이 장착이 될 때 만약 근처에 불이 있으면 그대로 인화가 되어 폭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나는 생각도 없이 가스통을 밀어 넣었고, 그것은 그대로 옆 버너의 불에 인화가 되어 흡사 전쟁에서 무기로 쓰는 ‘화염 방사기’ 같이 불을 요란하게 뿜어 댔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가스 통에서 뿜어 나오는 불길은 나의 발 등을 태우고, 나의 얼굴을 데어 버렸다. 불과 몇 초가 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긴 고통과 충격의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에 나의 1968년 여름방학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오른 쪽 발등은 3도, 얼굴은 2도 화상을 입게 되었고, 곧바로 속초 시내로 옮겨졌다. 어느 ‘돌팔이’ 외과의원에 일단 갔는데.. 이곳은 정말 거의 ‘무허가, 돌팔이’ 의사가 진단서를 돈 주고 파는 그런 정말 양심 없는 중년 의사가 있던 곳이다. 그러니 나는 사실 며칠 간 이곳에서 하나도 치료가 안 되었던 괴로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명성이가 우리 집에 연락을 해서 누나가 기차를 타고 오고 있었지만 나는 화상의 여파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발과 얼굴은 심하게 부어 오르고 나는 아무래도 발보다는 얼굴에 신경을 더 쓸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우리들의 원서동 친척 같은 벗, 시자 누나와 함께 그 먼 길을 중앙선 기차를 타고 왔다. 당시에 속초는 극동항공 쌍발 여객기(아마도 DC-9)가 정기적으로 서울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나는 그것을 타고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보았지만 기분은 괴롭고 착잡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나는 곧바로 청와대 근처에 있는 화상 치료로 유명하다는 ‘목상돈’ 외과 의원에 입원을 하여 집중치료를 받았고, 일주일 가량 입원을 끝내고 퇴원을 하여 그 때부터 통원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의 1968년 여름방학이 완전히 끝난 것이다. 정말 악몽 같던 비와 불에 젖은 설악산 여행이었다. 그 당시 그 사고로 인하여 같이 갔던 명성이도 고생 고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다.
나의 오른 발등의 3도 화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는데 초기에 적절한 치료가 늦어서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발 보다는 얼굴에 신경을 더 쓰고 있었다. 나이 20세에 발 등이 중요한가 얼굴이 중요한가는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하지만 여름 방학이 다 끝날 무렵에는 얼굴이 거의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발등 화상의 영향으로 조금 쩔뚝거려도 나는 사실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여름방학은 ‘완전히’ 끝나가고 있었다.
¶ 연호회, 본격적인 이성들과의 만남
1968년도 2학기, 가을학기가 시작되어서 학교엘 갔더니 역시 사람들 속에 어울리는 것은 좋은지.. 지나간 여름의 악몽이 조금씩 잊혀지기 시작하고, 여름 방학 전에 ‘급조’ 되었던 우리들의 남녀 클럽에도 나의 사고 소식이 전해 졌는지, 어느 날 연세대 캠퍼스로 이선화씨가 찾아왔다.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꿈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프고 외로움을 느낄 때, 어떤 ‘아련한 여자’가 위로 차 자기를 찾아 온다는 상상은 어느 남자나 하고 있을 것인데, 그런 꿈이 실제로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때 나는 선화씨를 진정으로 가깝게 느끼게 되었고 조금은 의지하는 감정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1968년 2학기는 이선화씨와의 짧지 않은 ‘영원히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을 만들게 되는 시기가 되어갔다.
2학기에는 약간의 편입생들이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명이 우리와 ‘눈이 맞아서’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윤인송 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우리의 아미고 클럽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우리 클럽에서 ‘탈퇴’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강원도 출신 유학생 김철수였다. 김철수, 너무나 친근한 ‘교과서적 이름’이었고, 우리들은 정말 왜 그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는지 이유를 모르지만 추측에 그는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달갑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해 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참 좋아했고 그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슬프게도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내가 알았던 김철수가 실상의 김철수가 아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그는 한때 전기과에서 다른 과로 적을 옮기는 등 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는데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왜..왜..’ 라는 의문만 남는다.
학기가 시작되면서 이선화씨의 서울간호학교 친구들과 국제극장 옆 골목, 경기여고로 가는 길에 있던 해양다방에서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정식으로 클럽의 이름도 ‘연호회’라고 붙였는데, 윤인송의 제안으로 ‘연세 와 간호’ 에서 연 자와 호 자를 따서 붙인 그럴듯한 이름이었다. 이렇게 해서 1학기 때 실패로 끝났던 이대생들과의 클럽 만들기가 이제야 다른 ‘여대생’들과 조그만 성공을 이루게 되었고, 내가 그리고 상상하던 ‘멋진 대학생활’ 이 우리 앞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 뒤에는 아무래도 이런 ‘과외활동’이 학교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창 잘나가던 청춘 20세의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던’ 그런 때였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연호회 클럽의 여학생들은 모두 간호원 지망생들로, 간호원은 당시 한창 외국으로 잘 나가는 직종이었고 그녀들은 분명히 해외취업이나 이민을 꿈꾸고 있었을 ‘세상을 조금은 냉정하게 보는’ 자세를 가졌음에 비해 우리들 남자들은 모두 ‘병역 미필’의 백일몽을 꾸는 듯한 ‘아이’들이었고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장래의 꿈은 그렇게 심각성의 차이가 있었어도 만나기만 하면 우리들은 같은 나이또래의 꿈과 취미를 나누며 장시간 담배연기 자욱한 해양다방에 죽치고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때의 여성동무 6명들, 존칭을 빼면: 이선화, 조인선, 신언경, 이재임(인자), 황인희, 정수임 등이었는데, 이들은 알고 보면 우리 남자들같이 서로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고, 우리 클럽에 ‘불려 나와서’ 서로 친해진 듯 했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이재임)은 자기가 어떻게 그곳에 나왔는지 이유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리 남자들 에게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그 중에 정수임씨는 학생이라기 보다는 아예 직장인 같은 인상을 주며 주말에는 ‘경마장’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생으로 모임에도 거의 빠져서 아직도 그 녀는 무슨 베일에 가린 듯한 추억을 남겼다.
연호회 가을산행 관악산 1968
곡식이 한창 무르익던 가을의 햇볕이 따갑지만 드높은 가을하늘이 파랗던 어느 일요일에 연호회의 첫 하이킹 겸 등산이 한강의 남쪽, 관악산에서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는 등산 붐이 서서히 일고 있었지만, 주로 ‘남성적’인 북한산 (백운대, 도봉산) 이 인기였고, 관악산은 사실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등산코스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모여서 우리들은 과천 행 버스를 타고 갔는데, 그 당시 우리들은 버스 속에서 서로 어울려 그 당시 유행하던 ‘참새 시리즈‘ 농담 같은 ‘그 나이에 맞는 유치한 이야기들’ 을 하며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언제나’ 프로 산악인 임을 자랑하는 박창희는 역시 ‘너무나’ 멋진 등산복 차림으로 등장했지만 15 나머지 ‘날라리 남녀들’ 은 모두 하이킹 차림으로 관악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때의 등산은, 주말 경마장에서 일을 하는 정수임씨 빼고 모두 참가를 했던, 지나고 보니 우리 클럽의 ‘유일한’ 산행이었다. 게다가 적지 않은 ‘흑백’ 사진도 고스란히 남게 되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그 당시의 우리들의 갓 스무 살의 젊음을 지켜주게 되었다. 그 사진에 있는 애 띤 모습의 ‘호남 사나이’ 김진환은 비교적 젊었던 나이에 운명을 해서 지금은 없기에, 사진을 보면서 ‘하늘나라’에 있을 김진환의 애 띤 모습을 더욱 안타깝게 그리곤 한다.
꿈에 그리던 남녀 혼성클럽을 나 자신은 가슴 뿌듯하게 여겼다. 그것을 만드는데 나의 시간과 정성도 많이 들어갔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그녀들과 해양다방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로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2학년 2학기, 그러니까 1968년의 가을학기를 나는 사실 공부보다는 연호회 과외활동에 더 신경을 쓰며 지냈는데, 그 시절은 비록 학교 공부에 게을러 몇 년 후에 큰 후회를 하기는 하지만참 아직도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후회 없는 청춘의 시간들이었다. 우리 중에 가장 의젓한 모습의 양건주가 회장을 했는데 사실 그는 나이보다 성숙한 편이어서 이런 모임도 조금은 우리보다 심각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래서 여자 회원들이 그를 ‘도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별명은 참 잘 지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들이 모이면 대부분은 그 나이에 걸맞게 노래들, 특히 미국 pop song을 즐기곤 했는데, 나는 가끔 그 당시 유행하던 top tune들의 가사를 print(당시에는 등사기로 찍은) 해서 나누어주곤 했는데,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그런 일을 하는 나를 건주는 사실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 때는 내가 그런 그의 태도가 이해가 잘 가질 않았지만 후에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고, 역시 깊이 생각하는 그의 다른 면을 보는 듯 했다.
¶ 이윤기의 짝짓기 아이디어
남녀가 모인 클럽이고, 분명히 클럽의 목적은 이름도 그럴싸한 ‘친목도모’였기에 남녀의 개인적인 사귐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상치 못한 일들이 나올 것도 예측을 할 수가 있었다. 가을 해가 따갑던 가을 어느 날 나와 윤기는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조금 쉬려고 담배연기로 앞이 안 보이는 끽연실에서 모였는데 느닷없이 연호회 남녀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윤기의 말은 직설적으로서, 서로 속으로 꿍꿍대지 말고 아예 미리 ‘짝을 짓자’라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놀랐지만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좋아하게 되면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협정’의 골자는 윤기 자기는 이재임(본명: 이인자) 씨와 짝이 되고 나는 이선화씨와 짝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정말 재미있는 이 발상은 나중에 다른 남자들에게도 알려져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나머지 여자들을 ‘골라 잡게’까지 되었는데, 창희는 신언경씨, 건주는 황인희씨.. 등등이었다. 물론 이것은 거의 ‘장난의 수준’에서 이야기가 된 것이지만, 그런대로 이 ‘협정’은 지켜진 듯 하고, 장래에 이 ‘짝’이 결혼까지 이르는 경우도 생겼다.
¶ 연고전 보다 대지다방
이런 ‘유치한 사건’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눈에 띄게 이선화씨와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고, 이것은 상호적인 감정임도 서로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와 선화씨는 ‘정식 데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 정식이라 함은 서로의 집안에 이 사실을 알리고 만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우리 집 식구들(어머니와 누나)에게 말한 것일 뿐, 선화씨의 집안 사정은 솔직히 확실하지 않았다. 가끔 일요일 일찍 만나서 하루를 마음 놓고 즐긴 기억인데, 그 당시 우리들은 ‘정말로, 진짜로’ 순수한 감정을 나누었던, 하지만 ‘사랑, 연애’란 말이 어울리지 않던 그런 관계였다. 지금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때 우리들은 과연 ‘연애’를 한 것이었을까.. 아마도 ‘연애’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주말이 아니었던 어느 날에는 선화씨와 연세대 앞에 있었던 2층 ‘대지다방’ (신촌로터리에서 가까운)에서 강의가 모두 끝난 시간에 만나기로 해서 기쁜 마음으로 시간을 기다렸는데, 그만 그날은 연고전 응원연습이 예정된 날이기도 했다.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것을 빼먹고 백양로를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예상대로 그날도 체육과 교수(강교수)의 진두지휘로 ROTC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길을 막고 있었다. 사실 그 며칠 전 연습 시에 그것을 보았고 그날은 친구들과 연세대 뒤에 있는 ‘연희고지’를 넘어서 ‘도망’나간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 데이트가 있던 날은 아주 간교하게 머리를 써서, 죽마고우 유지호의 ‘수도공대’ 학교 배지를 빌려와서 그것을 달고 ‘당당히’ ROTC 스크럼을 빠져나가 대지다방까지 갔었다. 아마 나의 얼굴이 그들(ROTC)에게 잘 알려졌었으면 나는 ‘정학처분’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가끔 나는 기대를 벗어난 ‘악동’기질을 발휘하곤 했는데, 대부분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후회가 없는 것이 아니다. 드높은 푸른 하늘에 펼쳐지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연고전을 마다하고 어둡고 가라앉은, 시끄러운 다방엘 가려고 그런 행각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두 번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런 ‘달콤한’ 시간들을 즐기기에 바빴다.
¶ 연호회지, 국전감상, 동양 TV 견학, 음악감상회
연호회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정기적인 모임이 활기를 띠면서 무엇인가 기록과 역사를 남기려는 노력이었을까.. 물론 확실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회보를 만든다는 그 자체가 멋진 생각이었다. 남녀가 정기적으로 어두운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친목도모’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보기보다는 즐겁기는 했지만 그런 모임이 오래 갈 수가 없음도 자명했다. 그렇게 해서 연호회보가 탄생했고, 순식간에 글과 시 들을 모아서 주로 나와 박창희가 편집을 해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원시적’인 수준의 철필, 가리방 과 등사기로16 조그만 책자를 낼 수 있었다. 내가 권두사를 쓰고 설악산에서 겪은 화상, 사고를 그린 설악산 등산기, 박창희의 산에 관한 글 ‘악(岳)’ 이라는 글, 주로 여자회원들의 시들이 실렸다.
우리의 회보 발간 자체에 대한 열의는 상당했지만 그것이 우리 연호회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고 시간과 정력이 생각보다 많이 소요되어서 단 한번 발행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아련한 기억 속의 이 ‘회보’는 세월의 횡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가끔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창간호로 끝이 난 연호회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정말 기적적으로 2000년이 되던 즈음 양건주가 그것의 ‘사본’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제일 웃긴 것은 내가 쓴 글을 내가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17이었고 이것이 바로 세월의 장난이었다.
1968년 가을은 유난히도 청명했던 기억인데 그 찬란한 가을에 우리들은 경복궁으로 국전을 보러 가기도 했다. 평소에 나는 국전 같은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성과 같이 감상한다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었는지 이렇게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볼 줄도 모르는 예술작품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사실 본격적으로 이성의 존재와 의미에 즐겁게 놀라기도 했다. 한마디로 ‘삶이 신나는, 즐거운’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반면에 나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그에 비례해서 식어 들어가기만 했다.
당시 나의 원서동 죽마고우인 유지호가 잘 알고 지내던 젊은 ‘아저씨’가 동양 테레비에서 엔지니어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우리 연호회 회원들이 단체로 ‘견학’을 할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 내가 중간에서 주선을 한 것이고 이것이 성사가 되어서 나는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다. 우리들은 흡사 낙도 어린이들이 서울 수학여행 온 듯이 방송국 내부를 흥미 있게 돌아 보았다. 평소 테레비에서 보던 ‘인물’들, 연예인 평론가 등이 연습, 녹화하는 것도 보았는데 기억 속에 당시 잘 나가던 펄 시스터즈가 신나는 soul에 맞추어 춤추며 노래하는 것도 보았고 뉴스 평론가 김용기 씨도 본 기억이 난다.
또한 인상적이었던 것은 방송국 옥상에 있는 ‘거대한’ 마이크로웨이브 안테나였는데.. 그 기술자 아저씨 설명이 방송국의 모든 program이 이 안테나를 통해서 지척에 보이던 남산의 거대한 안테나로 ‘송신’이 된다고 했다. 그것까지는 보통의 설명이었는데.. 그 아저씨 왈, 그 안테나 근처에 가지 말라고, 특히 앞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전기통닭 구이가 될 정도로 ‘열’이 날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로 energy가 큰 것으로 바로 이것이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 당시 한창 pop song, mostly American 에 심취해 있던 우리들에게 좋은 pop 음악이 나오는 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는 자체가 즐거움이요 멋이었는데 다방 보다는 우리들만의 음악감상을 할 자리를 마련해서 실컷 좋은 음악을 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욕도 거창하게 연세대 뒤편에 있는 ‘청송대‘ 숲 속에서 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같은 과에 있는 김광호가 자기 클럽이 그렇게 했다는 말을 해서 생각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전축’ audio system의 전원을 어떻게 마련하는 가에 있었다. Battery로 가능한 big audio system이 없던 그 시절이었다. 결국은 회원이었던 박창희의 집에서 하게 되었고, 그 집에는 그런대로 멋진 전축이 있어서 큰 문제가 없이 음악감상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날 새로 느낀 것은 나로써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모든 회원들이 다 나만큼 pop song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크리스마스 비밀 데이트, 윤인송의 입대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이런 배경으로 조금은 ‘덜’외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확실한 timeline은 다 잊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아마도 일본에서 유래 된?) 크리스마스 이브에 ‘길거리’로 나가야만 했던 ‘해괴한’ 풍습은 우리도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생각했던 idea는 간단히 말해서 남녀 한 쌍이 각기 다른 다방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다는 것인데.. 사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멋졌고 모두 동의를 해서 실행이 되었다. 이것은 제비를 뽑아서 정해진 couple이 정해진 다방에서 만나는 그런 것이었다. 다만 누가 누구와 한 쌍이 되었는가가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나는 ‘거의 확실히’ 선화씨와 만났던 것 같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생했던 시간들이 왜 그렇게 희미해졌을까.. 안타깝다 안타까워..
이 무렵쯤 윤인송이 군대 징집영장을 받고 입영준비를 하는 ‘신세’가 되어서 우리들의 클럽은 조금씩 김이 새기 시작하게 되었다. 하기야 큰 이유가 없었으면 이 나이에 대개 군대를 가던 시절이었고 우리 클럽의 나머지 남자들도 거의 영장을 기다리던 때였다. 그 중에 윤인송이 제일 먼저 가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68년이 지나가던 연말 연시 즈음이었는데.. 우리 그룹에서 제일 먼저 입영을 하는 case가 되어서 유난히 관심을 많이 받았다. 윤인송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흥분이 된 상태로 년 초로 예정된 입영 날 자를 기다리며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있었다. 당시 제일 기억이 나는 것 중에는 인송이가 평소와는 다른 의외의 면모를 보게 되었던 것이 있었다. 평소에 여자 회원들과 깊이 사귀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입영날자를 받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이 여자 저 여자와 개인데이트를 하기 시작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조용하고 무슨 비밀의 베일에 싸인듯한 모습의 이재임(본명: 이인자, 평창이씨)와 단독 데이트를 했고, 신언경씨의 경우에는 숫제 그녀의 집에 ‘쳐들어가서’ 식사 대접을 받기도 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당신에는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역시 군대를 간다는 ‘엄청난’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동감도 하게 되었다. 다른 면으로 그는 ‘멋진’ 입영 전야를 보낸 셈이 아닐까? 그런 후 인송이는 1969년이 되자마자 수색 군부대로 입영을 하고 우리에게서 일단 사라졌다.
¶ 21세 생일, 교육회관 지하다방과 연세춘추
1969년 1월 21일은 나의 21세 생일이었는데 그날 나는 가까운 친구들 (남녀)을 우리 집으로 불러서 식사를 했었다. 그 당시에는 생일을 사람들과 같이 차려먹는 관습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기억인데 어떻게 내 생일에 그들을 초대했었는지 정말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 연호회 회원들과 가외로 같은 과에 있었던 다른 중앙고 1년 후배 이상일이 합세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음식을 차렸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도 누나가 힘을 썼을 듯 하였다. 당시만 해도 어머님은 밖에서 일을 하실 때였다. 그 추운 겨울에 당시 널리 보급되었던 ‘석유난로’로 마루방을 덥혀서 그런대로 아늑한 분위기였다. 식사도 한식이었지만 풍성하였고.. 그래서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양건주가 무슨 게임을 하자고 해서 모두 더 즐거웠던 기억도 난다. 이채로웠던 것은 많지는 않지만 여대생들이 함께 그 자리를 채웠다는 사실이었는데, 나는 당시에 그 사실 하나 만으로 너무나 즐겁기만 했었다. 그 때는 그런 식으로 나는 본격적으로 이성에 눈이 뜨이던 그런 시절이었었다.그 당시 어떤 ‘여자’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는 수십 년 동안 기억하려 애를 썼지만 100% 확실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재임(이인자)’씨(평창이씨)는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나의 regular 이선화씨가 함께 했었는지.. 나는 그것이 더 궁금하지만 슬프게도 사진도 없고 기억도 확실하지 않았다.
대학 2학년이 끝나가던 겨울방학 중에 나는 친구들과 교육회관 지하다방에서 진을 치고 시간을 보냈다. 당시 겨울방학에는 무슨 여가 활동을 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학구열이 이미 조금씩 시들해지던 시절, 본격적으로 ‘이성’에 눈이 뜨이던 그런 때에 제일 손쉽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pop 음악이 멋지게 흘러나오고 여대생들이 복작거리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지하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시간이 ‘무한정’ 있다고 생각하며 살던 20대 초의 전형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 한심한 작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때 내가 낸 기발 난 ‘time-killer’ idea중에 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루한 시간도 ‘죽이고’, 오랜 전(하지만 1년도 안 된)에 한때 ‘빠졌던’ 사람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졌던 것.. ’20대 초 악동’의 장난이었지만 그 후에 후회도 많이 했다. 장난은 결국 ‘새빨간 거짓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음모’에 수동적으로 가담해서 ‘공범’이 된 사람들은 양건주와 이윤기 였지만 그들은 그저 옆에서 의아해 하고 놀란 모습만 보여 주었다. 모든 것은 100% 나의 작품이어서 아직도 이 두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이 project의 핵심은 가급적 많은 ‘여대생’을 ‘계속’ 만날 수 있게 하는 것 이었다. 하지만, 순진한 ‘사기’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능한 많은 여대생들의 주소를 찾아서 ‘연세춘추(연세대 학보)’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다. 일종의 대학생들의 pop culture 특히 pop song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제일 ‘잘 나가던’ 유행음악이 무엇인가 ‘취재’를 하는 것이다. 이런 plan은 사실 크게 잘 못된 것이 없지만 우리가 ‘연세춘추 기자’라고 한 것은 ‘사칭’에 속하는 일종의 ‘범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굳어진 나이는 아니기에 ‘거침없이’ 계획을 밀어 부쳤다.
죽마고우 유지호가 열심히 다니던 CCC(Campus Crusade for Christ)란 대학생 선교회 회원들의 주소록을 입수한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들이 침을 흘리던 여대생들의 주소가 빽빽이 실려 있었고, 몇 명의 주소를 고르고 그들에게 연세춘추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연세춘추’의 위력이 있었는지, 초대받았던 몇 명의 ‘여대생’이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으로 하나 둘씩 걸어 들어왔다고, 놀란 것은 사실 우리들이었다. 비록 ‘인터뷰’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당황한 우리 모습들이 우리가 보아도 웃겼다. 다행히 당시 나는 pop song의 ‘권위자’ 급에 속해서 크게 실수를 안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물어보고 즐겁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나왔던 ‘여대생’들 중에는 ‘짱!’ 하는 느낌을 주는 무언가 없었다. 그저 ‘시간을 죽인’ 효과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별로 후회는 없었다.
이런 ‘성공적’인 일이 있고 나는 조금 더 ‘대담’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래 전 (사실은 반 년이 조금 넘은.. 당시에는 그 정도면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헤어진 나의 첫 date 윤여숙 씨에게 도전을 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성공리에 끝난 ‘연세춘추 인터뷰’의 방법을 써서 그녀를 불러내 보자는 idea.. 얼마나 장난스러운가? 그것이 전부였다. 그저 한번 해보자.. 는 100% 장난이었다. 나의 이런 idea에 두 친구들은 회의적이고 반대를 했지만 나는 밀어 부쳤다. 이런 아이장난에 쉽게 넘어갈 상대가 아니기에 밀어 부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초대받은 날에 그녀가 ‘출현’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대책이 없었다. 그녀와 맞대면한 용기는 제로에 가깝고.. 이런 식으로 만나는 내 자신이 사실 ‘비참’하게 느껴졌기에 속으로 그녀가 안 나타나기만 바랬는데..
약속시간이 되어 다방 문에 출현한 그녀를 보고 나는 완전히 얼어 붙었고 고개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고 옆에 있던 두 친구들은 왜 그러냐고 계속 추궁을 했다. 만날 곳, 좌석의 위치가 지정되어 있기에 우리 옆까지 온 그녀를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연세춘추 기자’라고 인사를 못하고 있으니 결국 그녀는 급기야 counter에 가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이 모습들은 내가 목격한 것이 아니고 옆에 있던 친구들이 본 것이다).. 화가 난듯한 모습으로 counter에 무언가 ‘따지고’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를 찾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모습들은 내가 생각한 그녀의 평소 모습들이 아니라서 나는 놀라기만 했다. 너무나 적극적인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사라지고 나는 다른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관’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만에 일이라도 이런 ‘사기극’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알려지는 날이면… 우아.. 너무나 아찔한 상상이었다. 이런 이후 나는 그녀를 ‘완전히’ 기억에서 잊게 되었고 그것이 나에게 ‘안전’함을 알았기에 이번의 ‘사기극’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위를 하기도 했다. 몇 년 후에 (도미 직전) 그녀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당시의 일을 전혀 기억을 못하는 것을 보고.. ‘연세춘추’ 사건의 배후에 내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진실’을 밝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저 넘치는 시간을 주체 못한 덜 성숙한 ‘아이’의 애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아~~ 추억이여.. 모든 추억이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 나가며…
2013년 7월 초에 쓰기 시작했던 이 blog.. 일년 반 만에 ‘나가며’ 란 종장을 쓰게 되었다. 짧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과 싸울 줄은 미쳐 몰랐다. 서두에 말했듯이.. 내가 time machine을 타고 돌아갈 수 있는 ‘일 년’이 있다면 서슴지 않고 1968년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나는 더욱 나의 굳어져가는 머리의 기억세포를 짜내었고 그것이 너무나 힘이 들었기에 시간이 갈 수록 더욱 더 쓰기가 싫어지게 되었음도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 내가 짜 낼 수 있는 것은 99% 뽑아 낸듯하다. 이제는 ‘가미사마‘의 심판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이곳에 홀로 남겨두고 나는 떠난다. Good Bye (forever).. 1968!
이때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는 박정희의 자주국방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게 되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국가의 존망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어서 3선 개헌으로 시작되는 ‘장기집권’의 명분과 빌미를 주게 된다. 그러니까 김일성 개xx도 박정희 장기집권을 도와준 셈이 되는 것이다. ↩
부족할 것 하나도 없었던 그 당시 ‘철부지’ 학생들은 거의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의식으로 월남전을 기피하고 반대를 했다. ↩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도 쪼들렸지만 국제적인 입지도 미국의 똘마니 정도, 미국에 완전히 의지하는 약소국가로 취급이 되었고, 반면에 김일성 개xx의 북괴는 의외로 ‘자주국가’로서 제3세계까지 포함한 상당 수의 국가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
담배와 담배연기, 담배 피우는 남자의 모습은 여성들과, 거의 모든 곳(특히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멋진 것으로 묘사되던 시절이었고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할머니는 예외) 그녀는 분명히 화류계로 취급이 되었을 것이다. ↩
이것이 사실 당시의 유일한 desktop publishing 의 한 방법으로 그야말로 Gutenberg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
권두사가 바로 그것인데.. 당시 유행하던 G-Cliffs의 I Understand란 노래중의”let bygone be bygone“을 유치하게 인용한 글.. 그것을 읽고 누가 이런 유치한 글을 썼을까.. 생각했지만 희미한 기억으로 조금은 귀에 익은 글이라는 생각 끝에 나는 그것이 나의 글이었음을 알고 정말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
千の風になっ – A Thousand Winds.. – 秋川雅史(아키가와 마사후미) – 2006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s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ned grain.
I am the gentle autumn rain.
When you awaken in the morning’s hush
I am the swift uplifting rush
Of quiet birds in circled flight.
I am the soft stars that shine at night.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cry;
I am not there. I did not die.
Mary Elizabeth Frye – 1932
천 갈래의 바람으로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십시오.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잠든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천 갈래로 부는 바람입니다.
나는 흰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여무는 곡식 위에 비친 햇살입니다.
나는 조용히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그대가 아침의 고요에서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선회하다가
갑자기 비상을 감행하는 새입니다.
나는 밤하늘에 부드러운 별빛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십시오.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니까요.
얼마 전 아내 연숙으로부터 류해욱 요셉 신부님의 ‘그대는 받아 들여졌다’ 라는 책자를 건네 받았다. 류 신부님은 비록 나와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어도 간접적으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신부님이다. 내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한 2010년대 이전에 한때 주임신부님으로 계셨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진’도 보았고 연숙, 많은 교우들로부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최근에는 몸이 아프시다는 소식과 레지오에서는 ‘병자기도’의 요청도 들어와 많은 단원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기도 하다.
‘중풍’같은 stroke으로 쓰러지셨다는데 어떻게 또 이런 책이 나왔을까? 친필로 sign이 책 안에 보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떨리는 필체’였다. 아직도 ‘마비 증상’에서 못 벗어나신 것일까? 나이는 나보다 한참 밑이라고 알고 있는 ‘젊은’ 신부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고생을 하시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류신부님의 책 번역 솜씨는 가희 내가 제일 좋아하는 style중의 하나다.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러운’ 번역을 하는지.. 이것은 번역 사이에 있는 2가지 언어를 거의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직역 체와 의역 체의 거의 중간에 있는 거의 완전한 번역인 것이다. 특히 시어체의 번역은 더욱 그러하다.
이번에 접하게 된 책은 ‘51편의 묵상 잠언‘이라는 부제가 있는 대부분 시와 묵상들을 저자의 소견을 곁들여 간결하지만 깊이 있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신부님이 이전에 ‘이미’ 갑상선 암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었고, 건강에 신경을 쓰는 탓인지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나보다 거의 10년이 ‘젊은’ 것을 생각하면 조금 ‘가소롭게’도 느껴지지만 어떻게 느껴지는 나이를 직접 비교를 할 수 있겠는가?
칼릴 지브란의 시가 많이 실린 것으로 지브란의 시를 좋아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지만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A Thousand Winds로도 알려진 Don’t stand at my grave and weep이라는 Mary Elizabeth Frye의 1932년 경의 시였다.
이 ‘나의 무덤에서 울지 마세요’로 시작되는 시는 내용적으로 추측해서 아메리칸 인디안 (native Indian)의 구전에 의한 것으로 추측을 했지만 사실 지금은 저자가 ‘완전히’ 밝혀진 것으로 1932년에 미국 Baltimore에 살고 있는 Mary Elizabeth Frye라는 여성의 시로 확인이 된 것이다. 내가 신뢰하는 Wikipedia에 의하면 오랜 세월 동안 비밀의 veil에 쌓였던 이 ‘감동적’인 시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2년 경 Frye여성은 같은 집에 독일에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온 유대인 여성과 그녀의 남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항상 독일 나치 치하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그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고 임종을 지키지 못한 슬픔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알게 된 Frye여성은 거의 즉흥적으로 그녀를 위로하려고 shopping bag 누런 종이에 생각이 나는 대로 시를 적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전에 시를 써본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 슬픔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위로하려고 거의 ‘본능적’으로 쓴 그 시가 그 이후로 전세계적으로 같은 슬픔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하게 된 것이다. 이 시는 Frye여성의 친지, 주변에 천천히 알려지게 되고 ‘장례행사’같은 곳에서 낭송이 되었고 서서히 세계적인 시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누구의 시인지 모르며 애송을 하여서 작자 미상으로 남게 되었고 심지어 American Indian의 전통적인 시로 추측이 되기도 한 것이다. 후에 본격적인 ‘저자 찾기’ 노력이 이루어 졌는데 저자인 Frye여사가 94세로 세상을 떠나며 자신이 저자임을 밝힌 사실이 미국 신문의 컬럼 Dear Abby로 잘 알려진 Abigail Van Buren 의 추적으로 확인이 되었다.
저자인 Mary Elizabeth Frye는 이 시에 저작권을 요구 않았기에 완전한 public domain에 남아서 누구라도 인용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가히 모든 사람의 ‘장례식 애송시’가 될 수 있었다. 이 시를 조용히 가만히 읊으면.. 사랑하는 가족, 친지와 이별을 해 본 사람이면 엄청난 위로를 받게 됨을 느낀다. 큰 재난 때마다 낭송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마도 2007년 경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나의 무덤에서..’ 가 아니고 ‘천 갈래의 바람.. a thousand winds’로 나에게 다가왔다. 2006년 말 일본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NHK의 연말 가요 홍백전에 이 시를 classic style로 부른 아키가와 마사후미 에 의해서였다. 처음 들을 때, 나는 이 노랫말이 일본 것인 줄 잘못 알았다. 센~노 가제 (천千의 바람)라는 제목이 붙은 이 classic style 곡은 곧바로 일본 최고의 인기 곡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 곡이 작자미상인 것도 몰랐다. 이 시는 당시의 일본 TV drama 였던 ‘어른들의 여름휴가(おとなの夏休み)’ 에도 나온다. 주인공 여성의 병 간호를 하는 할머니가 애송하던 시집이었다. 곧 바로 세상을 뜨는 할머니가 아마도 자기의 죽음 앞에서 울지 말라는 뜻이었을 듯 하다. 당시 그것을 보면서 나는 이 시가 왜 여기에도 나오는 가.. 일본인들과 무슨 큰 관계가 있는가 의아해 했었다.
결국은 류해욱 신부님의 신간인 ‘그대는..’ 에 의해서 나는 완전히 이 시를 알게 되었고 나를 매료시켰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는 류 신부님처럼 나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이 시는 세상을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 두고 온 슬픔에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한다. 거꾸로 된 것이다. 무덤 옆에서 먼저간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인 것이다. 가슴을 깊이 울리는 아름다운 정경들을 배경으로 죽은 이가 산 이를 위로한다. 나는 죽지 않고 남겨둔 너를 항상 바라 보고 있다고. 영혼의 불멸을 믿게 된 나는 이 시어들을 이제는 100% 실감나게 믿는다. 그래서 더 나에게 ‘산’ 의미가 있다. 어떤 곳에서 세월호 비극 때에 이 노래가 번역이 되어서 불렸다고 들었다. 아마도 일본이라는 거부감 없이 슬픔에 고통을 받는 산 이들이 위로를 받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