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장례미사, ‘세월호’ 분향
¶ 작은 기적을 낳은 죽음
4월 들어 두 번의 장례미사와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듯한 분향이란 것.. 우울하게만 느껴지는 이 ‘장례와 분향’이란 말들이 4월의 찬란한 태양과 어찌 그리 대조적 느낌을 주는가? 장례식이나 장례미사는 이제 나에게는 그리 서먹한 것이 아니지만 분향은 사실 느낌이 아주 달랐다.
4월이 시작되자마자 오랜 병고 끝에 선종하신 데레사 자매님, 병고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그 자매님이 사랑하셨던 성모님 곁으로 가셨다는 안도감과 그래도.. 여기서 더 보고 싶었을 단출한 유가족 생각이 교차 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오랜 병고를 치르면 사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을 것 같지만 어찌 그런 감정이 다 똑같을 수가 있을까? 살아온 세월, 사랑했던 가족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다를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여정이 아니었던 조금은 독특한 인생여정을 살았던 데레사 자매님, 얼마나 사연이 많았을까? 끝까지 옆에서 묵묵히 그 자매님을 지켰던 독일인 남편과 외동 따님, 예상은 했겠지만 슬픔 감정은 억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데레사 자매님은 1950년대 초 숙명여고, 이화여대를 나오시고 60년대에 혈혈단신 미국에 오신 용감함이 있었고 남과 같은 평탄한 인생을 고집하지는 않으셨던 듯하다. 뉴욕에 사시며 현재의 독일 출신의 남편을 만났고 딸을 하나 두셨다. 가톨릭 신심, 그것도 성모님을 통한 신심으로 일생을 보내셨고 성지순례를 많이 하고 자서전 신앙고백인 책도 남기셨는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 옆에서 같이 일생을 보낸 남편은 ‘요지부동’으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고집이 센’ wife의 등살을 어떻게 견디었는지..착한 심성으로 아내를 보살피긴 했지만 아마도 신앙적인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연숙을 통해서 어렴풋이 이 자매님과 남편을 알게 되었지만 가끔 ‘봉성체’ 를 통해서 근황을 알게 된 정도였다. 한번은 그 독일남편과 가까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2차 대전 종전 전후 독일의 사정을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그는 미군 점령지역에 있어서 소련군 지역의 수많은 ‘참상’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미군이 보여준 ‘인간애’에 감동을 했고 결국은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점령군이 아닌 구세군 격인 미국을 동경하며 왔을 듯하고 정착지였던 뉴욕에서 다른 꿈을 가지고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데레사 자매와 만났을 것이다. 독일과 한국은 사실 판이하게 다른 역사, 문화를 가졌겠지만 둘 다 비참한 전쟁의 후유증을 겪은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조금은 동병상련 의 감정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데레사 자매님의 임종 즈음에 병자성사가 있었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모습이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홀로 남는 사랑하는 남편과 사후에 완전히 이별을 할 것 같은 걱정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것을 간파한 그 남편은 아내와 이별하기 전에 ‘세례를 받겠다고’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고 초 특급의 세례식이 병상 옆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이 끝난 후에 편안하게 선종을 했다.. 고 들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일화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데레사 자매님은 분명히 죽어서 남편과 ‘재회’를 못할지 모른다고 확신을 했던 것이다.
그 남편이 아내가 쉽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것 만으로 세례를 받았을까? 50년 이상을 버티어 왔는데 말이다. 여기에는 더 한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따님과 같이 마지막 병상을 지키던 중에 그 부녀는 데레사 자매님의 병상주변에서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니까 어떤 ‘에너지’가 병상에 온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아마도’ 그 에너지가 그 자매님이 그렇게 사랑하던 성모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세례를 받게 된 제일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병원 환경에서는 이런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아주 흔한 이야기라고 한다. 세상을 떠나는 그런 자리에 무언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독일인 남편은 마이클(미카엘)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되었다. 장례식을 거치며 그는 정말 바뀐 듯 했다. 이제야 50년 이상 자기 wife가 무엇을 믿으며 살았는지 늦게나마 알아 차리는 듯했다. 가까운 가족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장례절차가 조금 쓸쓸할 것으로 우려 되기도 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 자매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가는 길이 너무나 훈훈하기만 했다. 이화여대 동창회에서는 막강한 합창단이 와서 멋지게 조가를 불러 주었다. 한마디로 아주 멋진 장례미사가 된 것이고 유가족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경험과 위로를 남기는 그런 시간들이 되었다. 곧 이어서 부활절을 맞이하게 된 그 유족들.. 비록 한인 사회에서 조금은 멀어지겠지만.. 새로 찾게 된 ‘아내의 선물, 하느님’과는 더욱 가까워 지리라..
¶ 레지오와 신부님, 그리고 작은 장례미사
또 다른 장례미사는 너무나 느낌이 달랐다. 성삼일, 부활절의 연속으로 쌓인 피로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89세 할머님의 선종으로, 또 다른 장례미사 소식이 들려왔다. 이럴 때 우리는 선택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장례미사나 연도의 소식이 전해지만 우선 물어보는 것이.. 이분이 누구일까.. 가족들은.. 경제사정은.. 실제적인 물음이지만 유족들을 잘 알 수 없기에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문제는 레지오 단원인 우리는 의심 없이 ‘무조건’ 장례절차에는 신경을 쓰며 참석하려 노력을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성당 공동체에 비교적 잘 알려진 가정이면 별로 문제가 없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들려오는 소식에 유족의 ‘경제적’인 문제와 친숙한 교우가 아니라는 사실과 조금은 피로했던 때 (부활절 직 후).. 모든 것이 조건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장례식이 또 쓸쓸할 것 같은 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갈 ‘기운’이 나지를 않았다. 혹시 ‘숨었던 유족 친지’들이 의외로 많이 참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결국은 우리는 못 갈 것 같은 예감이 지배를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주임신부님이 팔을 걷고 나서서 레지오 단원들을 ‘밀어’ 부치는 ‘의외적인 일’이 벌어졌다. 레지오는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은 4명의 유족들이 홀로 치르게 되었을 뻔했던 쓸쓸한 장례식이 레지오 단원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미사’로 승격되어 진행이 되었고 유족들도 많은 위안을 받았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군대같은 조직을 가진 레지오의 기동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번 ‘사건’은 사실 주임신부님의 ‘독자적 결단’으로 성사가 된 것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평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부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오랜 전 또 다른 주임신부 같았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명품과 부자와 명예’를 사랑했고 곤경에 처한 사람은 냉대했던 그 다른 신부의 행적을 상기하면 현 신부님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일 정도가 아닐까?
¶ 머나먼 세월호 분향
이번의 ‘레지오 주동’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오니 장의사 바로 옆에 위치한 한인회관에 한 장의 공고가 붙어있음을 보니.. ‘분향소’라는 글자였다. 자세히 보니 ‘세월호 영혼을 위한’ 분향 공고였다. 그것도 우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부님이 ‘쏘신’ 점심 회식 후에 잠깐 들려서 분향을 하였다. 한마디로 안 할 수가 없었다. 아틀란타와 진도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엄청난 거리였고 느낌도 멀 수 밖에 없었지만 속 마음들은 그것이 아니었다. 할 말을 잊는 우리 심정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 ‘분향’이었다. ‘추악하고 인간답지 못한 어른들‘의 ‘도움’으로 채 피지 못하고 하늘로 일찍 가버린 어린 꽃다운 영혼 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크고 작은 사연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을 숨겨진 영혼들.. 육체적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자고 위로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할까? 하지만 ‘정의’는 끝까지 찾아야 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는 그런 살기 좋은 조국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또한 날벼락을 맞은 박근혜 정부도 필요이상의 큰 타격이 없기를 바란다.
나를 정말로 슬프게 했던 절망적인 장면.. 할 말을 잊는다
이 덩치가 큰 배가 그렇게 순식간에 death trap이 되었을까.. 역시 말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