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온한 현실과 무위에 가까운 선량한 서민성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소설의 주제로 하여 형상화할 흥미는 없다.
그들의 생활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인간 심리의 기미를 섬세하게 다룰 능력이 나에게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딘지 그것은 평범한 가족 사진을 찍는 것 같아 몹시 무미 건조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액운이나 불행 같은 것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매한가지다. 데데하고 무능한 탓으로 액운을 당하고 앉은 채 뭉개는 인간의 경우란 연민보다도 노여움이 앞선다. 그러한 성질의 불행을 그려서 인간의 운을 말할 생각도 없다.
현실을 남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의 절실한 문제로 보고 힘을 다하여 부딪쳐 가는 데에 나의 관심은 간다. 그것은 성실성과 정열에 성실하면 할수록 고뇌와 낙망과 좌절이 더하기 마련이다. 정열이 넘치는 곳, 때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벽에 부딪쳐 부서지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엄숙한 인간의 논리와 미가 있다.
나는 여기서 8.15 해방 뒤의 혼돈 속에 내던져진 한 젊은이를 그려 보았다.
그는 벅찬 현실 상황 속에 비틀거린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노하고 또 울부짖는다. 굶주린 짐승같이 어둠 속을 헤맨다.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는 한가운데 서서 몸부림친다.
그러나 그는 끝내 물러나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그의 삶을 전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알몸을 던져 그 무엇을 찾아 방황한 그의 혼에 대해 일국의 눈물을 금치 못한다.
그에게는 깃발이 없었다. 그러나 값싸게 높이 내어 흔들어진 어떠한 깃발보다도 그에게는 보다 훌륭한 보이지 않는 깃발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그렇게 나는 지금 생각해 본다.
1
“저치쯤이야.”
윤은 기를 쓰는 마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미군 병사는 차차 이리로 가까와 오고 있었다. 간격이 더욱 죄어질수록 윤의 걸음은 위태로와지면서 발돋움하듯 발끝 걸음으로 되어 갔다. 그는 다가오는 미군 병사가 두억시니처럼 공중으로 뻗어 올라가는 착각조차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끝내 미군 병사가 무심한 표정으로 그의 옆을 스쳐가자 윤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체!”
멀리서 얕본 것이 탈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병사도 역시 윤보다는 귀 위 한 뼘이나 더 컸던 것이다. 윤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언저리를 지날 때마다 윤은 늘씬히 키가 뽑힌 오가는 미군 병사들의 체구에 어찌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고 마음이 언짢았다.
그뿐 아니라 한 마장이나 되는 돌각담 밑을 무수히 스쳐가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지나고 나서 첫 번째 가게의 한 구석에 공교롭게도 끼여진 커다란 거울을 힐끗 들여다보는 때면 거기 누르스름한 볼품 없는 빈상의 조그만 사나이를 발견하곤 했다. 그것은 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일부러 그 거울을 외면하게 된 것은 벌서 오래였다.
그는 자기가 그처럼 마음을 쓰듯 그 미군 병사들이 자기의 존재를 느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니 의식할 것인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러한 생각이 들면 그는 스스로가 몹시 민망스러운 존재로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윤은 어느 때고 이 돌각담 밑을 지날 때면 잔뜩 기를 쓰는 것이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일부러 거울을 외면하고 지나고 난 윤은 문뜩 저만치 앞을 걸어가고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발견했다.
후리후리한 키의 미군 병사 옆에 검은 머리의 여자가 찰싹 붙어 가고 있었다. 검은 스커트 밑으로 뻗은 다리가 하이힐 위에 얹힌 것이 탐스러웠다.
윤은 여자의 뒷덜미로부터 양 어깨를 스쳐 허리 아래로 흘러내리는 굴곡에서 얼른 그 여자가 흔히 이 언저리에서 곧잘 미군 병사를 낚아 가는 낯익은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윤은 탐스러이 퍼머로 넘겨진 물결치는 검은 머리의 저편의, 지금은 보이지 않는 여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느 때나 유난히 젖어 있는 여자의 두 눈을 그려 보며 저 도 모르게 꿀꺽 생 침을 삼켰다. 그러나 부끄러움보다는 울화가 앞섰다.
‘쓸 만한 처녀는 모두 저놈들 차지란 말이야.’
윤은 무심코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가 뒤따르는 것을 알 리 없는 쌍진 두 남녀는 뚜벅뚜벅 발을 맞추어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윤은 그의 발걸음마저 그들의 보조와 같이하고 있음을 깨닫고 입가에 스스로 고소를 지었다.
한산한 골목으로 꺾어 들자 언뜻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여자와 시선을 맞부딪친 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쉬며 걸음을 멈추자 날쌔게 고개를 거둔 여자는 윤이 다시 발길을 내어 디디려 했을 때 재차 휙 고개를 이리로 돌렸다. 이번에는 여자의 조그만 얼굴 너머에 희붉은 미군 병사의 얼굴이 돌려져 있었다.
윤의 상반신이 기울며 발이 다시 땅에 위태로이 못박혀지려 할 때 쌍진 남녀는 당황히 얼굴을 되돌려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잠시 멋없이 서 있던 윤은 느린 걸음으로 다시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또 한 번 골목이 꺾어지며 그 바른편으로 그들이 사라지자 윤은 뜀뛰기 하듯 다가간 골목에서 하마터면 저편에서 마주 나선 사람과 맞부딪칠 뻔하고는 ‘아차’하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어!”
“윤 아냐?”
“누구야? 용수!”
“부리나케 어딜 그렇게 달려가는 거야?”
윤은 힐끗 저 멀찍이 걸어가는 쌍진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다보고는 멋 적게 용수를 건너보고 엉뚱한 대답을 하였다.
“가만 있게, 사건이야.”
“사건?”
“그래, 바루 저기 양키하구 여자가 하나 가고 있지.”
“그래서?”
윤은 덮어놓고 용수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떻든 같이 감세.”
“왜 이래, 이거.”
“글쎄 가면서 얘기할께.”
“원 참, 내 신문 기자란 이래서 싫대두.”
용수는 윤이 이끄는 대로 그의 뒤를 따랐다.
“여보게, 저것 양갈보 아닌가?”
“글쎄, 그런데 곡절이 있대두.”
“곡절?”
윤은 또 한 번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내 고장 여잘세.”
“어거어, 왜 이래.”
한껏 미심쩍어하는 표정인 용수도 다소의 호기심이 쏠리는 듯 반 달림으로 윤의 뒤를 쫓았다.
한참 후 큼직한 양옥집 계단 앞에 이름 쌍진 남녀는 약속이나 한 듯 독같이 고개를 이리로 돌렸으나, 벌서 그때는 윤과 용수가 전신주 옆 벽과 벽 사이에 몸을 감추고 난 뒤였다.
계단을 오르는 잔 가락의 구둣발 소리, 황급히 문이 열렸다 닫히는 쇳소리가 나자 잠시 후 윤과 용수는 엇비슷이 길로 나서서 똑같이 파란 대문의 양옥집을 바라보았다.
“저기로군.”
윤이 뱉듯이 뇌까렸다. 그때 파란 대문 안의 외향한 창문에 확 커튼이 드리우는 것이 보였다. 거기 노리듯 시선을 붓고 있는 윤의 어깨를 용수가 가만히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래 어떻다는 거야?”
윤은 시선을 거두며 슬며시 발길을 돌렸다.
“음, 알아 두자는 거지.”
“그래서 어쩌자는 게야?”
“음, 실은 고향 여자도 아무것도 아냐. 생면 부지지.”
“원, 싱거운 친구 다 있네그려, 대낮에 이게 무슨 꼴이야.”
“아니지, 내 언제고 기어코 해칠 테니까.”
“해치다니 여보게 없애 버린단 거야?”
“한번 엽전의 진가를 보여 줘야겠어. 양놈에 못지않게 으스러지도록 젖가슴을 문질러 줘야겠단 말이야.”
“또 기를 쓰는군. 누가 자넬 상대나 해 준다든가?”
“그러니까 더욱 울화통이 터지거든.” 윤은 한 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긴 해. 이래선 피차간 꼴이 아니지, 이러다간 찌꺼기 차지나 하겠어.”
“누가 아니래.”
잠시 말없이 보고 있던 용수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다시 신문사로 들어가나?”
“아냐, 오늘은 그만이야.”
“그럼 해방옥으로 가서 한잔 하세.”
“그 친구들 벌써 와 있겠지.”
“여부가 있나.”
골목을 빠져 나가 큰길로 나서는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나지막이 전투기 한 대가 폭음을 내면서 스쳐갔다. 둘은 동시에 올려다보며 한결같이 양미간을 찌푸렸다. 둘이 해방옥이란 납작 내려앉은 주점에 들어섰을 때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형운과 순익과 곰은 앉아 있었다. 이미 셋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왜들 그렇게 늦어?”
“우리가 늦은가 어디, 자네들이 이르지.”
“어서 앉게, 우선 후래 삼 배로. 오늘은 생선 찌개가 그만이야.”
시무룩히 두서너 잔을 받아 제치고 말없이 저쪽 벽을 건너보고만 있는 윤을 잠시 훔쳐본 형운이 말을 던졌다.
“뭐야, 자넨 또 그 굉장한 논문 구상이란 건가?”
“아냐.”
윤이 맥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용수가 가만히 잔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동족적 의분이지.”
“또 예쁜 양갈볼 보았군.”
“추격했지. 나도 곁다릴 들었어.”
“그래 한 다리씩 떼어 가졌나?”
“아냐, 연놈이 붙어 가던걸.”
“자네들, 거 그러지 말게. 으레 그런 거야. 예나 지금이나 전쟁이란 계집 빼앗아 가는 거지 별다른 것인 줄 아나?”
윤이 입을 떼었다.
“그래 그렇게만 여기면 마음은 편하겠군.”
“그런 거지 뭔가. 그래 난 두루 돌아다녀 봐서 알지만 일본 계집이든 중국년이든 노서아 것이건, 유태인이건, 계집은 계집이지 뭐 별것인 줄 아나?”
곰이 한 마디 끼여 들었다.
“엽전년들도 그게 그렇구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이런 점은 있지. 양갈보란 두고 보면 차차 얼굴색이 달라져 가기 마련이야.”
“머? 흰 것 만나면 희어지고, 검은 걸 만나면 검어진단 건가?”
“천만에, 어떤 여자든 찾아 더 누르스름해 가기 마련이지.”
“그건 어째서?”
“왜, 우리말에 궁합이란 게 있지. 늙은이들이 사주 팔자를 따져서 맞느니 안 맞느니 하는 궁합 말야. 그게 알고 보면 남녀 간 그것의 수치가 맞느냐 안 맞느냐는 거야.”
곰이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웃했다.
“치수가 안 맞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같이 둔한 친구는 5분이 더 지나야 알게 될 거야. 웬만해선 큰 체중을 당하기 어렵거든. 융통성이 있단 것도 정도 문제야.”
“음, 그건 그럴 법도 한데.”
“결국 알고 보면 애처로운 얘기지.”
행운은 잔을 비워서 용수에게 건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도된 경우엔 희극도 있기 마련이지. 내가 할빈에 있던 때 들은 얘긴데, 어떤 엽전이 노서아 백작 부인이란 여자한테 걸려들었다는 거야. 이 친구 아무리 해도 감당해 내기 어려우니까 허는 수 없이 속임수를 썼다는 거야. 한참 있다 백작 부인 얘기가 반지를 빼 라더란 거지, 그런데 이 친구 암만 생각 해두 반지를 낀 기억이 없는데 알고 보니 — 팔뚝 시계를 두고 이르더란 거야.”
“뭘 팔뚝 시계?”
다음 순간 곰을 제외한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파상적인 폭소가 그칠 무렵에 가서야 모두의 웃는 양을 한참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던 곰이, ‘웨헤헤헤’하고 메기처럼 입을 벌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또 모두들 웃음을 이어 갔다.
한바탕 웃고 나자, 먼저 거둔 윤이 얼굴에 고소를 지으며 혼잣말처럼 뇌었다.
“결국 이런 실없는 소리로 떼어 버리는군.”
“허는 수 없지, 샌님처럼 말짱한 정신으로 곰곰이 생각하다가는 돌기 마련이지.”
“참 양키 친구들 계집에겐 오금을 못 쓴단 말야.”
“로스케 녀석들은 그 점은 덜하다지?”
“덜하다구?”
“그놈들은 도둑질에 눈이 어둡다던데?”
“말 말게. 놈들은 그것도 도둑질한단 말이야. 다봐이 다봐이 모두 다봐이지. 양키들은 그래도 값을 치르니 난 편이지.”
순익이가 끼여들었다.
“난 그게 되레 언짢은걸.”
“뭐가?”
“쇠푼을 번적거리는 게 더 견딜 수 없단 말야.”
그것도 그렇긴 하군, 하고 윤은 얼핏 생각되었으나 무엇인지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었다.
“그럼 자넨 강간을 당해야 시원탄 말인가? 난 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만주서 쫓겨 온 일본년들이 박박 머리를 깎고 남자 치레를 한 것을. 이 검은 눈으로 봤단 마량. 그건 머리만 늘이고 치마만 두르면 나이를 가릴 것 없이 깔구 않는 로스케들 눈을 피할려구 한 짓이었어. 원 편을 들어두 분수가 있지.”
“아마 건방진 양키들보다는 무흠하고 사람이 좋을 거다.”
“비슷이 꾀죄죄 못난 탓으로 가깝다는 것 말야?”
잠시 침묵이 흐르자 곰이 대합조개같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새끼들이 까부서야 돼. 난 다섯 놈이나 받아서 대동강에 처넣었거든.”
“자식들은 자기 패거리가 몇 놈 없어져도 찾으러 들지도 않거든.”
곰이 또 그 말을 맞받았다.
“철로길에서 낮잠 자다 죽은 놈 발을 잡아당겨 질질 끌고 가던데.”
“생호박 그대로 먹고 삶은 옥수수 쐐기째로 먹기가 일쑤, 인절미 흐늘거리는 걸 보고 살아 있다고 주먹질하는 놈들야.”
순익은 빈정대는 눈치로 중얼거렸다.
“흥, 그래! 자동차니 비행기를 몰고 온 놈들이 말이지.”
“그렇게 빈정댈 건 없어. 기계만 돌리면 그만인 줄 아나 자넨?”
“푸슈킨이나 차이코프스키의 나라야.”
“그런 족속들은 벌서 죽어 없어졌어.”
“시이모노프는 어떡허구.”
“그럼, 가서 놈들 발바닥이나 핥아 보시지.”
“흥 알고 보면 자네들은 놈들의 발길에 채어 쫓겨나 그러지.”
“뭐 쫓겨났다구?”
윤과 곰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자 형윤이 타일렀다.
“이거 왜 이래. 약속이 틀리는걸. 그런 쌈 않기로 했쟎나.”
윤이 다시 엉덩이를 내리며 음성을 낮추었다.
“아냐 난 순익이가 알지도 못하고 그놈들 편드는 게 싫단 말야.
로스케란 오징어 두 마리 들고 구둣방 찾아가 창 갈아 달라는 놈들이란 걸 알아 둬. 난 양키도 언짢지만 로스케는 더 싫단 말야.”
“그건 사실이지. 한 놈 기어가니까 두 놈이 들어왔어.”
형윤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댔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말이지. 로스케는 받아 치우면 되고, 양키는 아랫동강이를 걷어차면 되거든.”
“곰다운 얘기로군.” 형운이가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그러나 놈들이 모두 뭐 있긴 있지.”
형운이 하는 소리에 윤이 안타까운 낯빛을 지었다.
“우리 엽전에게도 뭐 있긴 있을 텐데 말야.”
“있긴 뭐 있어.”
“아냐, 난 그것을 찾고 말 테야.”
“어디 논문이 비슷이 되어 가는 게로군.”
윤은 대답을 않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단김에 한 사발의 술을 들이켰다. 그것을 보고 형운이 농을 걸었다.
“여보게, 그러다 잔마저 들이마시지 말게, 잔에는 죄가 없어.”
다시 한참 분주히 잔이 오고 가고 안주 접시가 말끔히 비워지자 모두 흠뻑 취해서 해방옥을 나섰다. 몽롱한 채로 윤과 순익이는 몇 번이나 굳게 서로의 손을 쥐어 보고 어깨를 두들기며 말다툼의 화해를 하는 시늉을 했다.
방향이 같은 윤과 형운과 용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오가는 사람들 틈을 뚫으며 걸어갔다.
“지금쯤 또 어디서 어느 집 3대 독자가 귀신도 모르게 없어지구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윤이 뇌까렸다.
“처녀가 한 명 어두운 골목에서 어느 놈팽이한테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고 형운이 말했다.
“눈알이 올롱해서 삼팔설을 오고가는 친구들도 있겠구.” 하고 용수가 말을 받았다.
윤의 몽롱한 눈에 비치는 행인들의 얼굴에는 모두 들뜬 표정이 흐르고 잇는 듯했다. 이게 해방된 민중이란 건가. 윤은 그것이 역겨운 듯 얼굴을 들어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총총했다. 그는 길게 한 번 한숨을 드내 쉬었다.
큰길에서 벗어져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거기 한 대의 지프차가 길을 막고 있었다.
“뭐야, 여기다 차를 버려 세워 놓고.”
앞장섰던 용수가 투덜거렸다. 윤은 저만치 어두운 처마 밑에 버티고 잇는 미군 병사와 그보다 더 멀리서 누구를 지키듯 서 있는 젊은이를 보았다. 세 사람은 똑같이 그것을 보았던지 동시나 다름없이 걸음을 멈추고 벽에다 몸을 붙였다.
이윽고 가벼운 구둣발 소리가 가까와 오더니 양복 차림인 듯한 젊은 여자 한 명이 나타났다. 젊은이가 쓰윽 미끄러지듯 그 앞으로 다가서며 무어라 몇 마디 던지는 것이 보였다.
먼빛을 받은 희미한 가운데 젊은 여자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이어서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두운 골목을 울렸다.
“머라구? 이 녀석이 사람을 어떻게 보구.”
당황한 듯한 젊은이가 더 바싹 여자한테로 다가서며 또 무어라 잔 가락으로 투덜거렸다.
“어째서 이 자식, 너 같은 자식이.”
와락 젊은이가 팔을 벋쳐 여인의 옷소매를 쥐어 잡는 듯했다. 그제야 세 사람은 다투어 와르르 다가서서 젊은이와 여인을 둘러쌌다.
“머야 머야?”
“머요? 응.”
날새게 세 사람을 둘러보는 잠바 차림의 젊은이의 얼굴이 희미한 고목 안에서도 창백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힘을 얻은 듯 빽 하고 금속성의 목청을 돋구었다.
“글쎄, 이자식이 나보고 서양놈하고…… 원 참, 이런 자식이 다아……”
윤이 한 발짝 ‘잠바’한테로 다가섰다.
“너어, 머어지?”
“나 미군 통역이요.”
‘잠바’의 음성은 낯색에 비해 오히려 뚜렷했다. 용수가 와락 잠바의 멱살을 틀어 잡았다.
“이런 짓 하는 게 통역이야? 말이나 옮기고 자빠졌지 이자식이.”
“뚜쟁이 노릇이야 겨우.”
형운이 세차게 ‘잠바’의 정강이를 걷어차자 용수의 주먹이 그의 얼굴 한가운데서 터졌다. ‘잠바’가 두 손으로 얼굴을 싸며 주저앉았다.
세 사람의 주먹과 발길질이 ‘잠바’에게 쏟아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부릉 하고 지프차의 엔진 소리가 나더니 타이어가 숨가쁘게 땅을 긁으며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놀란 세 사람이 동시에 몸을 돌려 그곳을 쳐다보다 틈이 바쁘게 ‘잠바’는 벌떡 몸을 일으켜 굴 듯이 골목 저편을 향해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잡아라!”하는, 소리가 동시에 세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오며 윤과 용수는 골목 안으로, 형운은 지프차가 달리는 한길로 엇갈려 뛰어갔다.
그제야 이곳 저곳의 대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젊은 여자는 두 손을 팔랑개비처럼 돌리며 모여든 사람들에게 한바탕 사연을 늘어놓았다.
한참 후 윤과 용수와 형운은 빈손을 털며 다시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죽일 놈의 새끼 같으니!”
“고런 쥐새끼 같은 녀석.”
젊은 여자를 감싸듯 모여든 동네 사람 한가운데 버티고 선 세 사람은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투덜거렸다.
“요즘, 그 통역한다는 놈들 참 큰일이요.”
군중 속의 노인이 영탄조로 모두 들으라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대두요. 그 놈들이 갑절 더한걸요. 양놈들한테 나쁜 버릇 가르치는 게 글쎄 그 놈들이라우.”
어떤 중년 부인이 거기 대꾸했다.
“에, 참 쯧쯧쯧.”
하고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담뱃대를 휘저으며 혀를 찼다.
윤이 젊은 여인에게 은근한 태도로 물었다.
“어디 뭐 다치신 데 없으세요?”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옷차림을 고치는 시늉을 하며 윤의 물음에는 얼른 대답을 않고 혼자 말처럼 뇌었다.
“아유 참 혼났네요. 꿈자리가 사납더니 별꼴을 다 봤어.”
그리고 생각난 듯 세 사람을 번갈아 건너보더니 생긋이 눈인사를 보냈다.
“참 고마워요.”
그때 윤은 언뜻 그 여인의 바른편 관자놀이에 콩알만한 검은 기미를 보았다.
그대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큰길로 나서는 여인의 뒤를 멀찍이 따라 한길에 나선 세 사람은, 잠깐 고개를 돌려 끄떡 인사하고 난 여인이 오가는 군중 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은걸.”
윤이 동조했다.
“응 미인이야.”
“젖가슴이 좋단 말야.” 기고는 형운이 흥 하고 코를 울렸다.
“머야 이거, 종족의 미를 지켰다는 건가.”
“먼저 걷어찬 건 자네야.”
“나? 난 그 녀석을 찬 게 아니라, 여자에게 그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거지.”
“어떻든 다행이었어.”
“모르지, 되레 우리가 훼방 논 게 아닌가.”
“어디 그러기야 할라구.”
“몰라, 그건 모르는 걸세.”
얼른 대꾸를 못 하고 있는 윤에게 형운은 타이르듯 덮어씌웠다.
“어떻든 자네들, 너무 그런 데 구애는 말게. 기를 쓰고 지킬 것도 못 돼. 계집이란 다 그렇고 그런 거지.”
“그럼 될 대로 내버려 두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너무 신경을 쓴다는 건 아직 자네들이 풋내기가 돼 그래. 여자의 알몸을 모르는 탓이야.”
“모르긴 왜 모른단 거야.” 용수가 어림도 없다는 듯이 항의했다.
“자네 정도 가지곤 아직 안 되지.”
형운은 천천히 걸으면서 그럴 듯이 말을 이어 갔다.
“난 풋내기 때 어떤 처녀에게 홀딱 반한 일이 있었어. 결국엔 모든 것이 어울리지 않아 어쩔 수 없게 되었지만 아주 대단했었지.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지만 그땐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애절하기 짝이 없었거든. 이 내가 여자를 두고 시를 쓴다구 야단이었어. 그러나 지치고 지친 끝에, 에라 빌어먹을 것 하구 돈을 털어서 거리의 여자를 샀어. 처음엔 그래두 그렇게 된 자신을 제법 서글퍼했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짓거리를 하고 나면 얼마간은 단념한 여자에 대한 애절감이 덜해지더란 말야. 지나고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더군. 공연히 몸이 비틀리고 가만히 있기가 거북해서 웬만한 여자를 보아도 한숨이 지어지고 시가 튀어 나올 지경이면 누구 치맛자락이라도 좋으니 들추고 들어가면 씻은 듯 거뜬한 거야.”
“그럴 듯한 얘기긴 하군.”
윤이 고소 비슷한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흘려 보냈다.
“하긴 하군이 뭐야, 이 사람.”
“자네한테 걸리면 무엇이고 별것이 없어져. 손만 닿으면 썩은 돌부스럭지가 된단 말야.”
“알고 보면 모두가 썩은 돌부스러기지. 여자를 두고 거룩하다거나 신비하게 여기는 놈들의 낯짝이나 보았으면 해.”
“그렇긴 해. 우리 동네 애새끼들은 야단법석이지만 내 누이동생년 포즈 열 두 개 먹는 걸 보니까 안 되겠어.”
“농을 말게.”
셋은 함께 웃었다. 웃고 난 윤은 확 뇌리를 스쳐가는 검은 그림자를 느끼자 자기도 모르게 말문이 열렸다.
“그러면 어머니란?”
형운이 잠시 있더니 침울한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어머니들이란 남달리 고생도 많았으니 어머니 얘기만은 서로 말기로 하세.”
셋은 한참 동안 말없이 묵묵히 걸어갔다.
용수와 헤어지게 되었다. 용수는 여느 때나 처럼 미안해했다.
자기는 돌아갈 따뜻한 자기 집이 있었으나 윤과 형운에게는 남루한 하숙방만이 싸늘한 냉기를 품고 기다리고 있는 때문이었다.
“따뜻한 제 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슨 자네 죄는 아닐세.”
되레 두 사람은 이렇게 용수를 위로했다. 용수와 헤어져 몇 걸음 발을 옮기기도 전에 형운이 윤을 보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적당한 데서 자고 가지.”
“이 밤에 어디서 말야?”
“글쎄 날 따라와.”
고개 하나를 넘으면 장춘단인 이 언저리 골목마다에는 휘황 찬란히 전등불이 켜 있었고 때 지은 취객들은 이 집 저 집을 들여다보고는 한참 실없는 농을 걸다가 창녀들의 만류와 욕지거리의 세례를 받고 입에 담기 힘든 음란한 말로 응수하며 쏘다니고 있었다.
형운은 처마 밑에 서 있다가 남자만 나타나면 몰려드는 창녀들을 헤쳐 가면서 윤에게 말했다.
“난 여기 세 번 온 일이 있어. 두 번은 자러 왔고 한 번은 시찰로 왔지.”
“시찰은 또 뭐야?”
“내가 폐창 연맹 위원의 한 사람이란 걸 아직 누구도 모르지.”
“굉장한 위원도 있군그래. 시찰 차 와서 연구차 자도 보는 게로군.”
“따지고 보면 열 명 가까운 위원 가운데 정말 자격을 갖춘 자는 나뿐이지. 종교가니 학자니 하는 친구들은 엉뚱한 딴전을 하고 앉았단 말이야. 매음 행위가 악이니, 가련한 길 잃은 양 떼를 구출해 내야 하느니, 선진 국가에는 이런 제도가 없으니 창피하다느니 따위야. 어떤 여류 명사는 개별 방문을 한다고 찾아가서 어째 이렇게 됐느냐, 참 가엾어 죽겠다고 붙들고 앉아서 눈물을 뿌리다가 재수 없이 늙은 것이 극성을 떤다고 그 창녀한테 목침으로 골통을 깨인 일까지 있었지. 정말 이들의 생리를 모르고 덤비니까 그런 꼴을 당하게 되는 거야. 그러나 나만은 다르지. 정말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은 나뿐이야. 지금 형편으로 당장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무어냐 하면, 그건 그네들과 자 주는 일이야.”
형운은 여기서 뚝 말을 끊더니 걸음을 멈추고,
“어, 저것 쓸 만한데.” 하고는, 몸매의 굴곡이 쭉 드러나도록 진홍색 옷으로 휘두른 창녀한테로 다가가서 그 엉덩이를 툭 손으로 쳤다. 여자는 음란하게 눈을 굴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형운은 여자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면서 윤을 건너보고 한 눈을 찡긋했다.
“자, 얼른 하나 골라 잡지그래.”
그러자 밀가루 바르듯이 촌스럽게 분을 뒤집어쓴 젊은 창녀가 윤한테로 다가오며 그 옷소매를 잡아 끌었다. 둥은 창녀들의 부축을 받다시피 삐걱삐걱 소리 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윤이 안내된 방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일인들이 쓰던 그대로를 물려받은 가옥임이 틀림없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미닫이를 닫아 버린 여자는 돌아서면서 윤보고 한 번 히죽 웃어 보고는 확 달려들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자리나 깔지.” 윤이 멋 적게 말했다.
“그렇게 급하세요?”
하고,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 여자는 장 속에서 자리를 꺼내 한 구석에다 아무렇게나 펴놓고는 화장품 그릇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윤은 자리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한쪽 팔로 팔베개를 하고 여자가 머리핀을 골라 내서 여기저기 퍼머로 그슬려진 머리칼 속에 찌르는 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장품 통에서 조그마한 책 한 권이 윤의 눈앞에 떨어졌다.
“책야?”
“왜요?”
하고, 콧노래를 부르던 여자가 머리를 매만지면서 윤을 굽어보았다. 윤은 무심코 떨어진 책을 들어서 뒤적였다.
“뭐야, 이거 영어책 아냐?”
“예에서.”
또 한 번 꺄르르 하고 웃어 댄 여자는 아주 또렷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인제 좀 있으면 저도 팔자 고치는 거예요. 할로우 캄 온 보오이, 어때요, 알아들을 만해요?”
여자는 턱을 들고 또 한 번 꺄르르 하고 웃었다. 윤은 반사적으로 책을 든 채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너, 양놈 상대할 생각이구나.”
“그러문요, 이왕 이렇게 나선 바에야 마음 내키는 대로 해야죠, 돈도 더 벌리고. 양놈들 참 멋져요.”
윤은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일어서기가 바쁘게 책으로 여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얻어맞은 여자는 올롱한 눈을 하며 한 걸음 물러앉았다.
“왜 때려요?”
윤은 얼른 대답을 못 하고 무슨 더러운 것을 본 듯 여자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 양반이! 왜 때려요, 동네 북인 줄 아는가 봐. 왜 때려요.”
윤이 말없이 또 한 번 책 든 손을 높이 쳐들었을 때 옆방에서 형운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 방에선 왜들 떠들썩이야.”
윤은 여자를 한 번 훔쳐보고는 들었던 책을 확 방 한 구석에 동댕이쳐 버렸다.
“난 가겠네.”
“왜 그러나?”
“여기까지 코쟁이 그늘이 뻗어 있네.”
“코쟁이 그늘이고 도깨비고 어떻든 자네 여긴 지금 야단이 난 판이야.”
윤은 거기엔 대답을 않고 말없이 방 한 구석에 놓인 구두를 들자 미닫이를 차 밀고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섰다.
그의 뒤를 여자의 앙칼진 욕설이 따라왔다.
2
윤은 밖에서 들려 오는 행아의 높은 말소리에 잠을 깨었다. 벌써 여덟 시가 가까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얘야, 자꾸 그러지 마라.”
행아 어머니가 딸을 타이르는 조심스러운 말소리가 들려 왔다.
행아, 또 시작이군 하고 윤은 짐작이 갔다. 윤은 머리맡에 놓인 담뱃갑을 집어서 한 대 피워 물고 밖에서 들려 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님은 가만 계세요. 어머님의 그 미적지근한 태도가 저는 더 못마땅해요. 왜 걱정이 되시면 단단히 아버지한테 여쭙지 못하세요.”
“얘야, 글쎄 그러는 게 아니란다.”
“그러시면서 어머님은 왜 혼자서 걱정만 하세요? 저는 더 이상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성호가 가엾어서 못 보겠어요. 왜 아버지는……”
“행아야……”
안방에서 행아 아버지의 우람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넌, 또 아침부터 무슨 투정이야?”
잠시 조용해졌다.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가만히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부엌 문 앞에서 생선을 굽고 있는 행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것이 보였다.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행아의 부친이 대청 마루에 나와 앉는 것이 보였다. 행아는 그것을 의식하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 않는 품으로 화로 옆에 앉아 있었다.
‘이제부터 볼 만하군.’
윤은 좀 쑥스러웠으나 손톱으로 문틈을 넓혀 놓았다.
생선 굽는 석쇠를 들고 한 번 부엌으로 들어갔던 행아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그리고는 엇비슷이 부친 앞에 다가서더니 땅바닥을 들여다본 채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성호를 자기 하는 대로 버려 둬 주세요.”
“너는 건 또 무슨 소리냐?”
“걔는 기계 같은 것을 매만지고 싶어해요. 기술자가 되는 게 걔 소원이에요.”
“그래서 어떡허라는 거냐, 넌?”
“왜 아버지는 자꾸 성호가 싫다는 것을 시키려구 하시는 거예요?”
“내가 뭣을 시켰다는 거냐?”
“왜 자꾸 걔보고 모임에 나가도록 분부를 하시는 거예요?”
“뭐?”
“남들은 자기 애들이 그런데 관계할세라 걱정인데 아버진 왜 싫다는 애를 그런 데 끌어 넣으려구 하세요?”
“네가 뭐 안다구 야단이냐?”
“왜 제가 몰라요. 아버지 하시는 것을 하는 수 없어요. 그러나 성호만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어 주셔야 해요.”
“넌 나의 마음을 모르고 있어.”
행아는 번쩍 얼굴을 들어 똑똑히 부친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아버지는 손수 못 하신 것을 성호에게 시켜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호는 안 돼요. 걔는 그런 일 할 성질이 못 돼요. 하면 안 돼요.”
“너는 무엇을 그리 걱정하고 있니?”
“저는 두려워서 그래요. 그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애요. 안돼요, 성호에게 그런 걸 시키면 안돼요, 꼭 아버지처럼 잘못될 거예요.”
“뭐라구?”
행아의 부친이 벌떡 마루에서 일어났다. 그 얼굴에서 핏기가 걷히어 있었다. 행아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몸이 잔 가락으로 덜리고 있는 듯했다.
“한다는 소리가……”
“아버지!”
행아의 음성이 떨렸다. 부엌 문이 열리면서 행아의 모친의 겁에 질린 얼굴이 내어졌다.
“얘야, 행아야.”
“어머닌 가만 계세요. 큰 꾸중을 듣고 매를 맞는 일이 있어두 저는 드릴 얘기는 드려야겠어요. 아버지, 어머닐 보세요. 어머닌 할머니처럼 늙으셨어요. 왜 이렇게 늙으셨어요. 아버지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모르세요. 저만은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집을 비고 어딘지도 모르게 떠나실 때에, 또 붙들려서 감옥에 계실 때에 어머니가 쏟으신 눈물을 아버지는 모르세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것을 보아야 했어요. 위로를 드릴 나이도 못 되었지만 제가 학교를 설치는 것은 그리 서럽지가 않았어요. 그저 어머니가 불쌍만 했어요. 아버지가 감옥을 나오시게 되고 집에만 계시는 그것으로도 어머니는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아버지 안 계실 때 그렇게 눈물을 쏟으시고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서는 조금도 나무라시는 기색도 안 보이셨어요. 지금도 그러셔요. 할 말도 못 하고 계세요. 그런 어머니세요. 아버지께 무슨 한이 계시는지 그것도 그저 짐작할 수는 있어요. 그게 어떠시다는 거예요. 이제 또 무엇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왜 성호 마저 그런 길을 걷도록 하시려는 거예요. 왜 내버려 두지 않으세요.”
행아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확 울음을 터뜨렸다. 행아의 모친은 가만히 부엌 문을 닫아 버리고 부친은 노여운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더니 탁 문을 닫아 버렸다.
그때 삐걱 대문이 열리면서 성호가 들어왔다. 누나가 서서 울고 있는 것을 본 성호는 멋적어 마당에 한참 버티고 서 있더니 가만히 누나한테로 다가갔다.
행아는 앞치마로 눈물을 닦고 얼굴을 들어 성호를 쳐다보았다.
“너 어디 갔었니?”
성호는 대답을 안 했다. 그것을 본 행아의 양미간에 갑자기 사나운 빛이 깃들었다.
“너 또 모임에 갔었구나?”
“어떡해 그럼?”
“왜 사내면 사내답게 싫은 일이면 못 하겠다고 말하질 못하니?”
역시 대답이 없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성호!”
그제서야 윤은 확 문을 젖히면서 성호를 불렀다. 수그러지면서 성호는 번쩍 얼굴을 돌려 윤을 쳐다보더니 살아났다는 듯 얼굴에 화기를 돋구었다.
“나하고 한 바퀴 뒷산을 돌까?”
“그래요 아저씨.”
성호는 윤이 있는 방 앞으로 뛰어왔다. 윤은 성큼성큼 옷을 주워 입고 마당 앞으로 나섰다. 행아는 걱정하는 윤의 인사를 받고도 알아차리기 힘든 눈인사를 보냈을 뿐 조금도 표정을 달리하지 않았다.
한달음으로 뒷산에 오른 둘의 무릎 아래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발에 채는 풀포기마다 흠뿍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때마침 떠오른 햇볕에 드러난 굽어보이는 서울 거리는 조용했다.
“아저씨.” 성호가 윤을 불렀다.
“아저씨 땜에 살아났어요.”
“하하, 난처해 보이더군.”
성호는 풀포기 속에서 조약돌 하나를 집어들어서 힘껏 돌팔매를 쳤다. 그리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가?”
“전 어떡허면 좋아요?”
윤은 한참 대답을 않고 있다가 반문했다.
“성호는 지금 몇 살이지?”
“열 일곱이죠.”
“열 일곱……음, 혼자 헤어 나가기에는 어려운 때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어요.”
“더욱 지금 형편은 어려워. 스물 두 살이나 처먹은 내가 그런걸.”
“아저씨도 그러세요?”
“그럼.”
성호는 또 한 개의 조약돌을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윤의 얼굴빛을 살피면서 그의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성호.”
“네?”
“난 성호 일에 한해서만은 누나 얘기가 옳다고 여겨져.”
성호는 들고 있던 조약돌을 멀리 던졌다.
“어느 편 얘기를 따르는 것이 성호가 나중에 가서 잘될 것인지 못될 것인진 몰라. 그러나 성호에겐 지금이 행동할 때라기보다 배울 때라고 생각돼, 성호.”
“네?”
“자네가 나가는 모임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나도 알고 있지. 성호는 거기서 무엇을 느끼곤 하나?”
“몹시 흥분을 느낄 때도 있어요. 그런데 또 몹시 두려운 생각이 들거든요.”
“무엇이?”
성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어두운 그늘이 지나갔다.
“피 냄새가 나거든요.”
“피 냄새가? 어째서.” 윤의 말소리가 튕겼다.
“그저 그래요. 그저 언제든 어디서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 것만 같아요.”
순간 윤의 가슴이 찌르르했다. 날카로운 비수가 그의 가슴에 겨누어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자기가 느끼고 있는 어두운 예감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성호가 하고 싶은 일은 뭔가?” 일부러 윤은 말머리를 돌렸다.
“하고 싶은 일요? 저는 해방 전에 곧잘 글라이더를 만들었죠. 그것만 만드는 날이면 끼니를 어겨도 배가 안 고팠어요.”
성호는 그때를 그리는 듯 실눈을 만들었다.
“선생님이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고 하시면 저는 서슴지 않고 비행사가 되겠다고 했지요. 참 비행기를 타면 얼마나 좋을까. 이 푸른 하늘을 날아갈 수 있을 게 아녜요?”
성호는 크게 가슴을 펴면서 한 번 넓은 하늘을 휘둘러보았다.
지금 형편으로는 이 소년이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을 가망은 없다고 여겨졌다. 하늘은커녕 땅 위에 쓰러지지 않았으면 하고 윤은 기도에 가까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윤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가누며 일부러 명쾌한 가락으로 성호를 불렀다.
“자, 가서 밥이다,. 먹어야 살지.”
둘은 다투어 언덕을 뛰어내려갔다. 밥상을 날라 온 행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윤은 모르는 척 밥상 머리에 쪼그려 앉아 수저를 들었다.
“저어,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요?”
“저어, 성호에겐 아무 얘기도 말아 주세요.”
“무슨 얘긴데요?”
“저어,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옇든 이북 얘기는 말아 주세요. 그런 얘기를 들려 주시면 곤란해서요.”
“예? 이북 얘길요? 그런 말싶므을 하시면 제가 더 곤란한데요.”
“어떻든 말아 주세요.”
행아는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휙 몸을 돌려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사라져 버렸다.
‘너무 똑똑한 것도 탈이야. 넘겨짚고는 괜한 걱정이란 말야.’
윤은 사납게 숟갈을 밥그릇에 처박았다. 성호가 학교엘 가고 곧 뒤이어 행아가 회사로 출근하기가 바쁘게 성호 부친이 대청에서 윤을 불렀다.
“허군, 이리 와서 담배나 같이 태우지.”
윤은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대청 마루로 갔다.
“아침같이 딸애 앙탈을 들어서 안돼네.”
“아뇨.”
“알고 보면 지나치게 똑똑한 게 탈이지. 차라리 성호놈이 걔 반만 되어 먹었어도 좋겠어.”
“왜요 성호군은 착한 앱니다.”
“착하기만 해서 쓰나. 사내자식이 좀 사나울 정도로 슬기로와야지.”
“타고난 성격인 걸 어떡헙니까?”
“아냐, 걔는 암만해도 제 어미를 닮아 먹었어. 아무리 추 세워 주려고 해도 원체 애가 그러고 보니.”
“성호군에겐 별다른 꿈이 있는 모앙이던데요. 비행사가 되었으면 하는……”
“그 기술자가 된다는 것 말이지. 사내자식이 좀더 큰 포부가
있어야지. 잔망스럽게 기계나 매만지고 앉아 있겠다니, 바루 내 걱정은 거기 있단 말일세.”
“시대가 달라져 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하는 소리지. 내가 젊었을 땐 그렇지가 않았거든. 강태와 나와는 둘도 없는 동지였지. 일경의 눈을 피해 가며 지하 운동을 하던 때가 바루 어제 같단 말이야. 무진 고생도 맛보았지만 혈기에 찬 그때 가 그리워.”
“요즘엔 강태씨와 만나시는 일은 없으신가요?”
성호의 부친은 잠시 말을 끊고 얼굴에 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해방된 다음 달에 한 번 만났지. 그런데, 그는 아직도 나를 오해하고 있단 말이야. 같이 검거되어 새둠나에 갇혔을 때 나는 놈들의 음모에 넘어간 거야. 놈들이 내 정신이 부실해졌을 때 자기들 멋대로 작성한 전향서에 나의 지장이 찍히도록 만들어 버렸단 말이야. 그러니 아직도 강태가 나를 배반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조용히 만나서 자세히 사연을 설명하시지요.”
“글쎄, 저렇게 분주한 사람이니까.”
“……”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출감하자, 여러 동지들이 일제 검거를 당하고 말았단 말이야. 마치 내가 놈들에게 동지들을 팔아 버린 것처럼 되어 버렸어.”
“어쩔 수 없게 되었군요.”
“어느 때는 밝혀져서 내가 다시 버젓이 당에 복귀할 날이 오겠지. 그런데……” 하는, 성호 부친의 두 눈에는 어두운 그늘이 안개처럼 감돌았다.
“간부 몇몇이 강태의 곁을 안 놓고 나를 쏠고 있는 모양이야.
배인,이철,김화 이런 놈들의 농간이지.”
까짓것 아예 집어치우시지요 뭐.”
순간 성호 부친의 한쪽 볼이 벌러 경련을 일으켰다.
“아니지, 거기서 떠난 나란 흡사 뭍에 오른 고기야. 지금의 나는 죽어살이란 말야.”
윤은 가만히 담배만 빨았다. 성호 부친도 말없이 한참 담배를 피고 있다가 거북한 침묵을 깨뜨리려는 듯 입을 열었다.
“늘 자넬 붙들고 듣기 싫은 얘기만 지껄이는 것 같네만 신문 기자인 자네에겐 어느 때 가선 쓸모가 있을 얘긴지도 몰라.”
“그러문요.”
하고, 대답한 윤은 성호 부친의 어찌할 수 없이 외로운 심정을 엿본 듯했다.
윤이 경찰서를 들러서 신문사로 갔을 때 사회부장은 편집국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떠들썩 야단을 하고 있었다.
“이거 이래서야 되겠나. 글쎄 천수고무가 뭔가 말야. 일본놈들이 쓰는 한문자를 그대로 옮겨 놓았으니 이래 가지구 신문 기자야. ‘뎀떼꼬마이’란 거지. 모르게씁면 왜 쉬운 우리말을 안 쓰느냔 말이야. 모두 철자법 하나 똑똑히 모르고 앉았으니 이거 어디 되겠나. 좀 공부들을 해요 공부를.”
책상을 마주한 김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윤을 건너보고 한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젠장 배운 게 그러니 하는 수 없쟎아. 자긴 알긴 얼마나 더 안다구 야단이야.”
“내버려 둬. 그러다가 맥이 빠지면 잠잠해지겠지.”
윤은 경찰에서 얻은 소스를 적당히 기사화하여 몇 장 갈겨 가지고 자리를 떠서 사회부장한테로 가져갔다. 돌아서려는데 사회부장이 불러세웠다.
“머? 이거 뭐야. 누구한테 들었어?”
“저 동대문서에서요.”
“그 친구는 어서 들었대?”
“피난민이 그러더라구요.”
“이사람이! 이게 시가야. 그래 김일성이 애새끼가 죽은 걸 누가
봤다는 거야.”
“평양서는 소문이 한창이랍니다.”
“글쎄 이사람, 피난민 얘기를 그대로 듣고 기사를 쓴단 말야. 옐로 페이퍼인 줄 아나 원.”
사회부장은 손쉽게 원고지를 구겨서 획 휴지통에 접어던졌다.
“거 다들 좀 센스를 발휘해. 이래 가지곤 신문 만들긴 글렀어. 참 저 편집부장, 그 기사 크게 들어가죠? 저, 그것 말이요. 쌀만 먹지 말고 과일 같은 걸 많이 먹으란 군정청 고관 나리님 얘기 말이요.”
사회부장은 또 한바탕 편집국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실정에 어두운 군정청 미인 관리들을 깎아내렸다.
자리에 돌아와 한참 멋적게 앉아 있는 윤을 선배 격인 임 기자가 밖으로 불러 냈다.
“어때, 오늘은 일찌감치 한잔 할까?”
“벌써요?”
“이전 할 일 없쟎아.”
“그럼 오늘은 제가 좋은 데 안내하죠.”
윤은 앞장서서 임 기자를 해방옥으로 안내했다.
“흐흠, 이런 데면 낮술을 먹어도 감쪽같겠군.”
몇 잔 술이 오고 간 후 윤은 임 기자에게 물었다.
“저, 임형, 오늘은 무슨 기살 쓰셨어요?”
“음 오늘은 공산당에 들렀다가 선전부장인 이철을 만났지.”
“머 새로운 기사거리나 있던가요?”
“음, 아마 요즘 공산당엔 내분이 있는 모양이야.”
“그치들은 또 왜 그래요?”
“머, 빤하지. 당의 영도권 싸움이지.”
“크게 벌어질 모양입니까?”
“조니 박이니가 몇 명 당을 떠날 뿐일 거야.”
“이철은 어느 팬가요?”
“이철이야 강태와 아주 단짝이니까.”
“그 친구 전 번에 보니까 말마디나 하던데요.”
“비단결같지. 원체 머리에 든 게 있거든.”
“독일 유학까지 했다죠?”
“제대로 거쳐 독일까지 갔었지.”
“하옇든 만만챦은 친구 같아요.”
“재간이 좋거든. 재간이라니 말이지 여자 낚는 재간이 또 비상하지.”
“네에?”
“생기기도 미끈한데다 학벌도 좋고 학생 때부터 연문이 자자했어. 왜, 저 자네 윤임이란 여자 알지?”
“저 미군 고급 관리 퍼킨스인가 하고 산다는 X전 출신 말이죠?”
“그래, 윤임이와는 한때 날렸지.”
“그럼, 지금은 양놈한테 뺏긴 셈인가요?”
“그런 것도 아니지. 아직 둘은 남이 아니야.”
“그러문요?”
“윤임은 미군하고 살기는 하지만 마음이야 아직 이철한테 있지.”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요.”
“미련뿐야? 지금도 때때로 만나고 있어. 저 남산 밑에 호텔이 있지 왜.”
“신장 호텔요?”
“그래, 퍼킨스란 자가 서울을 떠나기만 하면 둘은 반드시 거기서 남몰래 집적거리지.”
“그래요? 그렇다면 그 퍼킨스란 자 우습게 되는 거 아녜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 녀석 참, 꼴 좋다. 그런데 임형, 그러고 보면 이철이란 아주 데데한 녀석 아녜요?”
“아니지, 지독히 약지, 웬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
“그러나 어디 그럴 수가 있어요?”
“자넨 아직 이철의 지독한 생리를 모르는군. 넉넉히 그럴 수 있는 친구거든.”
“어디 그거야……” 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윤일이란 정치적 희생물이 아녜요.”
“일종의 제물이지. 그러나 윤임이도 그것을 하나의 보람으로 느끼고 잇는지도 몰라.”
“원 연놈들이 모두.”
“하하, 자넨 아직 순진해, 세상사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지. 자, 술이나 드세.”
윤은 차차 취기가 감도는 머릿속에 잠시 허우대 좋은 이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자식도 별것이 아니야 하고, 윤은 마음 속에서 혼자 의미 깊은 웃음을 웃었다.
형운이 나타나자 임 기자는 자리를 뜨고 뒤이어 순익이와 곰이 밀려든 얼마 뒤 마지막으로 용수가 나타났다. 용수는 학병 친구들의 모임에 갔다가 늦었다고 했다. 윤은 경미한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오늘은 같은 내무반에 있던 친구가 시골서 올라왔어.”
“법석이었겠군.”
“그럼, 옛날 얘기에 꽃을 피웠지. 녀석은 좀 둔해서 항상 내가 거들어 줬었지. 내가 ‘고쬡오’가 되었을 때도 자식은 그대로 1등병으로 머물러 있었지. 자식은 전쟁이 끝났을 때까지도 일등병 그대로였어.”
“몹시 둔했던 게로군.”
“형편이 없었지.”
윤은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학병 얘기가 길어지면 순익이가 얼려들게 되고 기피한 형운이도 끼여들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면 한참 동안을 윤은 멋없이 입을 다물고 얘기를 듣고만 앉아 있어야 했다.
윤은 스스로를 일으키려는 듯 갑자기 언성을 튕겼다.
“뉴스를 알리지. 공산당은 멀지 않아 분열한다.”
“그럴 리가 있어?” 순익이 그것을 부정했다.
“글쎄 틀림없어. 순익이 좀 미안하게 됐군.”
“그리 좋아할 것 없어. 자네 아예 백색 테러단에나 가담하지그래.”
“널 봐서 그만두겠다.”
“체!”
형운도 끼여들었다.
“또 말다툼이야. 그런 얘기를 말고 제발 술 먹고 X소리나 해.”
“자넨 또 그러나 X에 치여 죽지나 말게.”
“되레 그게 낫지. 핏대를 올리고 개다발 부는 작자들 구역질이 나 못견디겠어. 이젠 신물이 난단 말이야. 데모가 글렀으니(데모크라시) 고민이 수태느니(커뮤티스트) 그따위 소리 않게 돼야 잘 살게 되는 거야.”
“또 이놈 저놈 모두 썩은 돌부스럭지가 되는군.”
“그놈이 그놈이지. 알고 보면 서툴러서 붙들려 얻어터졌거나 콩밥을 먹은 봉창을 해 보겠다는 속셈이야.”
“그 말엔 일리가 있어.” 윤이 형운의 편을 들었다.
“우리 고장에 이런 작자가 있었어. 자기 이름 석 자도 변변히 못 쓰는 망나니 새낀데 이자가 일제 말기에 사진 한 장을 찍게 됐어. 자식이 멋을 더한다구 친구한테 두툼한 책 한 권을 빌렸단 말야. 그놈을 점잖이 팔굽으로 누르고 손바닥으로 턱을 괸 작자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확대되어 사진관 쇼윈도에 내어 걸렸단 말이지. 어느 날 형사가 그것을 들여다봤어. 마르사스의 저서를 맑스의 것이라고 해서 욕을 보던 때가 아닌가. 그런데 그 망나니가 놓고 찍은 책이 공교롭게도 사상 전집이었단 말이지. 사상이라 형사도 깜짝 놀란 모양이지. 녀석이 당장 끌려갔어.
몇 대 얻어맞곤 싹싹 빌며 사진을 찍으려고 빌린 것이라고 실토하고 하룻밤 유치장 신세 끝에 놓여 나왔지.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자 이놈이 해방이 되자 우쭐대기 시작이야. 가라사대 사상 문제로 욕을 본 경험이 있었다는 거지. 녀석이 한때 적위대 부대장까지 한 일이 있으니 가위 볼 만했지.”
“틀림없는 사상 문젠데.” 용수가 히뭇이 웃었다.
“녀석 단단히 봉창을 한 셈이군.” 형운이 한 마디 덧붙였다.
“녀석이 한다는 짓이 로스케를 본뜬 건지 일본놈들 것 모주리 훑어들이다가 덜컥 때어 들어갔지.
“이번엔 무슨 문제야?”
“음, 그게 또 걸작이지. 녀석이 몇 달 뒤 풀려 나오는 길로 이남으로 넘어왔어. 여기서도 그걸 두고 사상 문제를 팔고 다니는 모양이야.”
“그놈 진짜 사상가다.” 형운이 크게 웃었다.
“넌 어째 고런 것만 보고 다녀.” 순익이가 못마땅한 낯빛으로 윤을 탓했다.
“왜 자네 또 어디가 결리나? 그럼 또 한 가지 들려 줄까?”
순익이 외면을 했다.
“우리 하숙집 주인 말이지, 한때 공산당원으로 지하 운동을 했었대. 그런데 붙들려 가자 고문 끝에 간단히 전향하고 이것 저것 불어 버린 게 사실이야. 해방이 되고 보니 낙망이지. 지금이라두 어떻게 해서 다시 당에 끼여들려고 하는 품이 가련할 정도야. 안 되니까 나 어린 자기 자식을 충동하고 있어. 어때 더 옆구리가 결리지.”
“강태나 이철 같은 사람을 봐.”
“머, 이철이!” 윤은 갑자기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곰이 그것을 보고 의미 없이 히죽이 웃었다.
“이건 웃음거리다. 여보게 형운이, 용수, 내 기맥힌 얘기 들려 주지. 순익이! 이철이라구?”
윤은 한 번 쭉 좌석을 돌아보고 방금 임 기자한테서 들은 이철이와 윤임의 관계를 단김에 쭉 내리 풀었다.
“그래 이래두 아직 이철이란 잘 높이 추켜들 작정이야? 그래 그게 사내녀석이 할 짓이란 말야, 그게.”
형운이 윤의 곁을 들었다.
“그래 녀석이 아직 덜 돼 먹었어. 녀석이 ‘고민이수태’ 니 노동자 농민하고 떠들 때보다 도리어 윤임의 젖가슴을 더듬을 때 정말 사람답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자넨 그저 그거 하나뿐이군.” 순익이 형운에게 빈정댔다.
“그럼, 그것밖에 뭐 있어? 그래 잘난 체하고 나서서 떠들어 대는 친구들 하는 짓에 무엇 하나 쓸모 있는 게 있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쓸데없는 짓거리뿐이지. 그러지들 말고 조용히 집에 돌아가 낮잠들이나 자면 세상 형편은 되레 월등 나아질 게다.”
“망해, 망해.” 순익이 발작적으로 소리질렀다.
“머가 망해.”
“이래 가지구두 안 망한단 말야?”
“그럼, 망하기 전에 얼른 자네가 차고 있는 시계를 팔아 계집이나 사러 가세.”
“또 계집야.”
“망하긴 머가 망하냐 말야. 내가 얘기 하나 들려 주지. 어느 시골 양반이 있었다네. 난이 난다고 법석하며 있는 쌀 모조리 퍼서 떡 쳐 먹고 닭이며 할 것 없이 모두 잡아 자시고 잔뜩 대기하고 있었지. 암만 기다려도 어디 난이 나야지. 깨끗이 패가 망신했단 거야. 걱정 말게, 망하진 않네. 순익이, 곰을 봐. 이 떡 벌어진 어깨, 툭 삐져 나온 가슴, 한 끼에 밥 두 사발을 제치는 식욕, 그래 이 곰이 망할 것 같은가 자네?”
형운이 곰의 어깨를 툭툭 치자 곰은 에헤헤헤 하고 웃었다. 그것을 보고 순익은 픽 고소를 지었다.
“따지고 보면 거거장할 건 세상 형편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지.”
용수가 뱉듯이 말했다.
“해방이 좀 빨랐지, 아니 좀 늦었는지도 몰라.” 형운이 무연히 뇌까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생각해 보게. 좀더 늦었으면 죽일 놈 살릴 놈 할 것 없었겠지. 야마모또니 기노시따니 하고 피차간 일본놈 행세한 탓에 너나할것없이 죽일 놈이 됐을 게 아냐. 서루 낯이 뜨거우니까 법석은 안 했을 테지. 그러고 보면 빨랐지. 빠른게 우리들에겐 다행이었지. 피차간 그 점 축배를 들어야 해.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또 늦은 것 같기도 하단 말야. 좀더 빨랐으면 죽일 놈도 덜 났을 게구 우리들 처지로 보면 공연한 일본말 안 배우고 처음부터 손쉽게 우리말이나 영어를 배울 수 있었을 게 아닌가. 품들인 왜말은 못 써먹게 되구, 그래 이제 굳어진 혀루 영어를 씨부려야 한단 말이야.”
“한글도 말이 아닌데 영어란 그나마 다 잊어먹구 이런 야단인걸.”
“난 영어는 안 해.” 순익이 앙칼지게 말했다.
“돈푼이나 있어서 미국 유학이나 한 놈들 판치구 다니는 데 거기 끼여들어 이제 창피하게 하우 두유두 하구 앉았겠어?”
“기어코 안 할 작정이군.”
“그 대신 난 노어야. 이제부터 서둘러도 늦지는 않어. 원체 한 놈이 적거든.”
“그건 어디다 써먹으려구.” 윤이 눈을 흘겼다.
“왜, 어디 써먹을까 싶어 걱정인가?”
“뻔하지, 장차 가까와 가는군.”
“뭐가 가까와 간단 말야.”
“삼팔선 가까이 올라가고 있단 말야. 넌 좀 있으면 틀림없이 39도야.”
“39도?”
“거기가 평양이지. 그저 자꾸 올라가 봐. 40도까지만 올라가란 말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뭐 어떻게 된단 말야? 사람이 40도를 넘기면 정신을 잃고 죽게 된다는 걸 알아?”
“뭐라구?”
“또 시작이군.” 형운이 얼굴을 찌푸리며 뒷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시시한 싸움 말구 술들이나 마셔. 또 한 번 맞붙으면 내 둘 다 갈길 테다.”
모두 자기 앞의 남은 잔을 비우고 자리를 일어서서 나갔을 때 밖은 벌써 어두워 있었다. 도중에서 용수와 갈라지고 형운과 둘만이 거닐게 되자 윤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든 게 못마땅하고 아니꼽단 말이야.”
“거 너무 신경을 쓰지 말라는데 그래.”
“아냐, 참을 수가 없거든. 정말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어.”
“까짓것 못 본 체하고 내버려 둬.”
“어디 그럴 수가 있어야지. 이런 꼴을 보고 모두 웃을 거란 말야. 먼저 보아란 듯이 쫓겨간 일본놈이 웃을 게고. 되놈들이 웃을 게고. 로스케들이 웃을 게고, 양키들이 웃을 게란 말야.”
“웃을 놈은 웃으라지그래.”
“아냐, 무엇이고 따끔하게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해. 우리가 아니면 안 되는 뭣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걸 알아 낼 수가 없단 말이야. 가물가물한데 글쎄 그게 뭐냐 말이야.” 윤은 안타까운 듯 어둠을 향해 애원하는 듯이 뇌까렸다.
형운이 음성을 가다듬었다.
“자네에겐 안됐네만 없지.”
“자꾸 그러지 말게.”
“아무것도 없지.”
“그래서야 살 수가 있나.”
“자네도 병들어 가나 보군,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게. 사람이란 그저 살아가는 거야.”
윤의 다물어진 잇새에서 입술을 비집고 무거운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그저!”
검은 하늘에는 별들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3
윤이 임 기자를 따라 집회장 밖으로 나섰을 때 낮은 하늘은 찌뿌드드 흐려 있었다. 계단을 내려서서 인도로 꺾어 서려는데 집회장에서 환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람은 없었으나 열기가 꽉 차 있던 집회장보다는 선선했다.
“참, 답답하더군요.”
“뭐가?”
“노인네들이 어째 그리 말주변이 없어요. 듣고 있기가 안타까울 정도니 말입니다.”
“노인네들이 그저 애달프기만 하지 벅찬 감격을 나타내기에는 이미 늙어 버려서 말이고 시늉이고 가 맘대로 안 되는 모양이야.”
“그런데 밑에서 치다꺼리하는 젊은 친구들은 또 왜 그 모양이에요. 좌익 계열의 집회는 날씬한데 말입니다.”
“좌익 친구들이 하는 일이야 척척 맞아들지. 한 마디 엮어도 이론 정연하고 비단결같이 매끈하거든.”
“너무나 대조가 심해요.”
“그러나 일장 일단은 있지. 한편은 미리 짜고 들지만 한편은 아무런 조작도 없어 보이는 액면 그대로거든.”
“좀 다듬긴 해야죠. 옆에서 보기가 딱해요.”
“노인네들을 좀 봐 드려야지. 해외 망명의 고생이 여북했겠나. 말이 쉽지 20년, 30년이 어디야.”
“그러나 눈물만 흘려서 되는 건 아니죠.”
“하하, 그야 그렇지. 그럼 난 어디 좀 들렀다 갈 테니 기사는 부탁하네.”
윤은 혼자 신문사로 돌아왔다. 기사를 써서 사회부장의 책상머리에 갖다 놓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참 지켜보고 있는데 부장이 원고지를 들어 벌떡벌떡 제쳐 보더니 색연필로 휙휙 타이틀을 붙여 편집부장한테로 집어던졌다.
다행이군 하고 속으로 웃고는 크게 몇 번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저편에서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나한테 전화라니 희한한 일도 있다고 생각한 윤은 성큼성큼 걸어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누구요?”
“나야, 형운이야.”
“언제 올라왔어.”
“어제야.”
“한잔 해야겠는데.”
“그럴 겨를이 없어.”
“어째서?”
“급히 좀 만나야겠어.”
“무슨 일인데?”
“순익이가 잘못된 모양이야.”
“잘못되다니, 어떻게 됐다는 거야?”
“글쎄 전화론 안 되겠어. 만나서 얘기함세.”
“그래, 그럼 어디서 만날까?”
“우편국 옆에 왜 과잣집이 있지. 거기서 만나지. 몇 분 내로 올 수 있겠어?”
“5분 내로 갈께.”
윤은 수화기를 놓고 잠시 눈치를 살핀다. 아무도 자기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비슬비슬 게걸음을 치다시피하여 편집국을 빠져 나왔다.
약속한 과잣집에 들어서자 한 구석에서 형운이 높이 손을 들어 보였다. 윤은 황급히 그리로 다가갔다.
“어찌 된 거야?”
“순익이가 평청 회원에게 붙들려 갔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동생이 나한테로 뛰어왔어. 점심을 먹고 있는데 난데없이 몇 명이 나타나서 불러 냈다는 거야.”
“평청 회원이란 걸 어떻게 알았대?”
“걔가 몰래 뒤를 밟았다는 거야. 광화문 빌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래.”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야?”
“모르지, 어떻든 구해 내야겠어.”
“끌려들어간 지 얼마나 됐어?”
“두 시간은 넘어. 벌써 웬만큼 욕을 봤을 거야.”
“으음, 껀일걸.”
“가네, 평청에 아는 사람 많쟎나?”
“몇 있지.”
“그럼 가서 좀 알아보게.”
“그래, 그럼 자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날라 온 차를 단김에 들이마신 윤은 과잣집에서 뒤어나오자 곧 그 길로 광화문 빌딩을 찾아들었다. 숨가쁘게 3층 계단을 올라선 곳에 거기 조그만 책상을 놓고 얼굴이 두툼한 청년 몇이 앉아 있었다.
“어딜 가우?”
“나 친구 만나레 왔수다.” 윤은 일부러 사투리를 썼다.
“누구 말이오?”
“회장님과는 같은 고향이우다. 형님으루 모시는 처지디요.”
청년들은 서로 얼굴을 건너보다가 그 중 한 명이 두툼한 입을 열었다.
“머 무기 같은 거 가진 거 없디요?”
“아무것두 없수다.” 윤은 활짝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럼 들어가 보슈.”
윤은 복도를 걸어 도어 앞에 이르자 잠시 서서 숨을 가누었다. 도어를 밀고 들어서려는데 저편 구석진 방 쪽에서 갑자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윤은 곧장 회장 방으로 돌아들었다. 회장은 들어서는 윤을 보자,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가이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군.”
“형님, 안녕하셨어요?”
“윤이 이전 말씨부터 서울 사람이 다 됐는데. 신문사 재미는 어때?”
“네.”
하고, 대답하는 윤의 목소리가 또 구석진 저편에서 들려 오는 자지러지는 비명에 흩나려 버렸다.
“놀랄 건 없어, 안 된 놈한테 좀 맛을 뵈고 있는 거지.”
“저어 형님.”
“갑자기 새침해서 왜 그러나?”
“저어, 급한 부탁이 있어 왔는데요.”
“갑자기 나한테 무슨 부탁이야?”
“저 여기 제 친구가 한 명 끌려온 모양인데요……”
“자네한테 여기 끌려올 그 따위 친구가 있나?”
“학교 동창인데요. 절대 그럴 애가 아닌데 열 두 시 께 불려 온 모양입니다.”
“누군데 그래?”
“저, 이순익이라구 하는 앤데요.”
회장이 옆에 앉아 있는 한 간부보고 물었다.
“그런 애 데려온 일이 있어?”
간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비명이 들리는 구석진 쪽을 가리켰다.
“저 친구 말야?”
“예.”
“흐음.”
회장은 잠시 말없이 방바닥만 굽어보고 있더니 휙 눈길을 윤에게로 보냈다.
“저치 좀 악질이라는데?”
“저 형님, 무슨 착올 텐데요.”
“친구라고 다 믿을 수 있는 세상은 못 돼.”
“그건 그렇죠.”
회장은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간부에게 일렀다.
“맛을 보였으면 어차피 내어보내얄 게 아냐?”
“그대로 둬둘 순 없습죠.”
“이 사람은 내 동생 같은 고향 후밴데 지금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어.
웬만하면 데리고 가도록 해 주지.”
간부는 한참 회장과 윤을 번갈아 떠 보고 있더니 성큼 자리를 일어섰다.
“날 따라오슈.”
윤은 자리를 일어서면서 걱석하고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형님 고맙습니다.”
“고마울 건 없어. 어차피 누가 거들어서 데려가야 할 테니까. 그러나 윤 조심해. 누가 어떤 놈인지 색갈을 분간하기 힘든 때니까 말이야. 도와 주려다가 되려 욕을 보는 수가 많아.”
“알겠습니다, 형님.”
“그런데 자네네 신문도 요즘 좀 이상해 가던데.”
“그럴 리가 없는데요.”
“아냐, 좀 회색 경향이야. 몇 놈 끼여들어 있는 게 아냐?”
“글쎄요.”
“뭐 자넬 탓하는 건 아냐. 어떻든 몸조심하게.”
안내하는 간부를 따라 어두컴컴한 구석진 방으로 들어선 윤은 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한 구석에 구겨지듯이 쓰러져 있는 것은 분명 순익이었다. 거의 의식을 잃은 듯 두 눈을 지레감은 순익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검게 덩어리진 피는 군데군데 말라붙어 있었다. 인중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둘레에 3,4명의 우람한 청년들이 말없이 지키고 서 있었다. 간부가 윤을 보고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하실려우?”
윤은 뜨거운 덩어리가 불쑥 가슴을 치솟는 것을 느끼자 자기도 모르게 휙 몸을 돌려 뛰어나갔다. 허둥지둥 복도를 스쳐 회장실의 문 앞에 이르자 사납게 문을 박차듯이 밀고 들어갔다.
“형님!”
회장은 윤의 창백해진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형님, 저게 뭡니까?”
“왜 그러나?”
“저렇게까지 쳐 눕혀, 저게.”
“윤이!” 회장이 음성을 높였다.
“그리 앉게.”
핏발이 선 눈으로 회장을 쏘아보다가 맥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윤은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윤, 자네 서울 사람 다 됐군.”
“서울 사람이고 시골 사람이고 없어요 형님.”
“자네 고향을 잊고 있단 말야. 귀신도 모르게 없어진 고향 친구들을 벌써 잊고 있단 말야.”
윤은 얼굴에서 손을 떼고 멀거니 띄어진 눈으로 회장의 얼굴을 건너보았다.
“윤, 이건 우리의 탓이 아니야. 미군정의 알뜰한 시책 탓이란 말야. 저쯤 않고 놈들을 막아 낼 다른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나? 버젓이 활개를 치고 비단결 같이 조아려 대는 놈들을 누를 길이란 몽둥이뿐이란 말야.”
윤은 회장의 어깨 너머로 기다란 흰 종이에 모필로 씌어진 굵다란 네 글자가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지상 명령!’
그때 도어가 열리면서 스윽 소리 없이 윤을 안내한 간부가 들어섰다.
“윤! 그럴라면 다시는 오지 마.”
“형님!”
“놓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어. 친구를 데리고 어서 가게.”
윤이 일어나서 방을 나가기가 바쁘게 간부가 회장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치 맛 좀 보일까요?”
“뭐?”
“몇 대 안길까요?”
“닥쳐!”
회장은 벌떡 몸을 일으켜 뚫어질 듯이 간부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간부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회장은 금시 노여움의 빛을 거두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부드러운 말씨가 조용히 새어 나왔다.
“박 동지, 날 좀 혼자 있게 해 주게.”
회장은 푹 의자에 주저앉으며 눈을 감았다.
전신이 땀에 떠서 간신히 송장 같은 순익을 아래층까지 끌어 내린 윤은 잠시 현관 한 구석에 누이고 과잣집으로 달려가 형운을 불러다 함께 차에 태워 가까운 병원으로 날랐다. 한참 후 순익은 의식을 회복한 듯 어슴푸레 눈을 떴다.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는 듯하더니 거기서 몇 마디의 말이 새어 나왔다.
“으으, 놈자식들……으으……자식들……”
힘없이 눈을 감았던 순익은 잠시 후 다시 스르르 두 눈을 떴다.
입술이 또 날름거렸다.
“윤……너어……너 새끼가……”
“뭐?”
“너 새끼가 나를 이렇게……”
순간 윤의 전신에 쭉 소름이 스쳐갔다.
“뭐라구?”
형운이 와락 순익에게 달려들 듯 목을 빼고 다그쳤다.
순익이! 뭐라구, 윤이 어쨌다구!”
순익은 기를 쓰려는 듯이 상반신을 움직이려 했으나 곧 우우 하고 신음하더니 그대로 맥없이 늘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의 두 눈망울만은 악을 담고 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다시 그 입술이 움직였다.
“윤이, 네가 일러서……날 이렇게……난 죽어두……이
일을……잊지……”
그러고는 또 괴로운 듯 가장자리에 아직 피가 말라붙어 있는 입술을 닦았다. 뒤이어 그의 두 눈도 지그시 감겨졌다.
윤은 고개를 돌려 형운을 건너보았다. 형운도 말없이 윤을 건너보았다. 형운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한참 순익의 얼굴을 건너보더니 신음하듯 뇌까렸다.
“건 오해다.”
그러나 순익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얼굴을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윤은 벌떡 몸을 일으켜서 화닥닥 병실을 뛰어나왔다. 아무렇게나 신발을 얻어 꿰고 병원 문을 밀어젖히자 밖으로 나서서 멋대로 포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는 몇 번 마주 오는 사람과 몸을 부딪쳤다. 행인들은 무어라 투덜거렸으나 윤은 그대로 내어 걸었다. 가을은 아직 멀었는데 가로수 잎새가 한 잎 가만히 윤의 어깨를 치고 땅에 뒹굴었다.
“윤!”
윤이 언뜻 정신을 차렸을 때 형운이 어느 새 그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오해야.” 형운이 뱉듯이 말했다.
“오해야.” 그는 또 한 번 뇌었다.
“오해야.” 형운은 그렇게 세 번을 뇌까리더니 문득 생각나는 듯 윤을 불렀다.
“윤! 난 어렸을 때 이런 경험을 했지. 우리 고을에 일본애들이 다니는 심상 소학교가 있었어. 열 한두 살 때인가 그 운동회를 구경간 일이 있었지.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저 만치에 열 네댓 살이나 되어 보이는 일본애 하나가 눈에 띄었어. 눈에 띄었다는 건 모두 떠들썩 야단인데 유독 조용히 앉아 있는 품이 어린 마음에도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지. 퍽 마음이 가서 그 애만을 지켜 보고 있었어. 한참 후에 그 애는 내가 자기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던 모양이야. 물끄러미 보고 있는 나를 몇 번 힐끗힐끗 쳐다보는 듯하더니 좀 언짢은 표정을 짓더군. 그래도 난 그냥 그 애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지. 그런데 그 애 얼굴이 차차 사나와지기 시작하지 않겠나. 그러더니 버럭 소리를 지른 단 말이야. 난 무슨 소린 줄 모르고 그대로 그애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지. 걔는 벌떡 일어서더니 나한테로 다가와 한 손으로 덥석 나의 뒷덜미를 추켜든단 말야. 그리고는 ‘고노야로오 지로지로 미야갓떼(이자식이 힐긋힐끗 노려보고 앉아서)’라고 하면서 질질 끌더니 구경군들이 있는 저만치 뒤켠에다 밀어 박아 버린단 말야. 깨끗이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어 버려 무안을 당했어. 도망가듯이 집으로 돌아와 버렸지. 그때의 그 서글픔이란 아직도 내가 그때 당하던 일과 일본애가 하던 말을 그대로 익히고 있을 만큼 컸던 것 같아. 분명히 오해지. 얼욱한 오해야. 그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오해가 생기기 마련인것인지 몰라.”
윤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가아얼거렸다.
“술을 마시고 싶어졌어.”
“그러지 않아도 권하려던 참이지.”
“해방옥은 싫어.”
“어째서?”
“조용히 먹고 싶으니까.”
“그럼 딴 데로 가지.”
“순익을 누구한테 맡기고 왔나?”
“아, 참 순익의 집으로 돌아서 가세. 동생한테 알려 줘야지.”
“그 어머니 뵐 낯이 없군,”
“까짓것 잊어버리게.”
둘은 순익의 집을 거쳐서 동생에게 일러 주고 그 길로 진고개 어귀에 있는 어떤 조용한 중국집을 찾았다.
“중국 음식인가?” 윤이 좀 망설였다.
“왜 별로 당기지 않나?”
“아냐, 기왕이면 되놈 것 팔아 줄 게 뭐야.”
“그리 너무 따지지 말게.’
윤은 시무룩히 형운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된 방은 2층 구석진 조용한 곳이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하인은 형운이 건네는 능란한 중국말에 설설 기었다.
“이쯤 해 두면 저절로 요리가 나오지.”
윤은 히뭇이 웃으려 했으나 입술 한쪽 언저리가 일그러질 뿐이었다.
그는 길게 한 번 한숨을 내어쉬었다.
“오늘 같은 일을 당하면 정말 해방을 반환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되어 버렸는걸.”
“이거 어디 견디겠나?”
“8월 15일이란 게 좋쟎았어. 말하자면 팔삭동이란 말야.”
“농은 말게.”
“농이나 해야지. 사람 산다는 게 알고 보면 싱거운 거지. 그렇게 심각할 것도 없어.”
“그저 그런 거란 말이지.”
먼저 배갈과 춘장이 들어왔다.
“자, 우선 한 잔.”
“이걸 안주로 하나?”
“내 가르쳐 주지. 자 먼저 차를 한 모금 마시게. 그리구 배갈을 쭉 들구 급하면 코를 막고 얼른 파를 짜장에 찍어서 깨물어 넘긴단 말야. 몇 번 하면 확 가슴이 타는 맛이 야릇하지.”
윤은 형운이 시키는 대로 배갈을 마시고 파를 깨물었다. 가슴을 쭉 긁어 내리며 확 불이 당기는 듯했다. 한참 안간힘을 쓰고 나서 도리어 가슴이 후련한 것을 느꼈다.
“그럴 듯한데.”
“이건 기분 전환에 고만이야. 울화가 치밀 때 해 보면 효능이 대단하지.”
배갈 세 병이 비어질 때 가서 윤이 생전 보지 못한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리에 저를 찌르는 윤의 눈이 풀어져 갔다.
형운이 안주를 씹으며 말했다.
“알고 보면 엽전만큼 먹을 복 있는 족속도 드물지.”
“어째서?”
“못 먹는 음식이 있어? 양요리,중국 요리, 일본 요리, 노서아 수프에 인도 카레, 그래 어느 족속이 이렇게 골고루 먹어 보겠나. 더욱 되비지에 냉면, 냉면 못 먹는 족속은 불행인데. 비프 스테이크가 불고기만 해? 계란프라이가 수란과 다를 게 머야. 밀죽에 설탕 친 우유를 넣어 먹고 대단한 것 잡쉈다는 엽전이 우습지. 그래, 그게 콩죽만하겠어?”
윤은 그저 웃었다.
“됐어, 자네가 웃었군. 먹는 데 있어서의 관대성이란 유엔 헌장이 있기 전부터 우리 엽전이 지닌 위대한 정신이지. 시래기국이건 카레라이스건 덴동이건 치킨, 짬이건 이놈의 굶주린 엽전의 뱃속엔 마다할 사이 없이 막 들어가기 마련이거든.”
“말이사 그렇게 되는군.”
“요즘엔 더 관대해진 게 있어. 우리 엽전 아가씨들이란 누구든지 오너라 가릴 게 뭐냐는 거지.” 윤은 얼핏 취한 그의 뇌리에 돌담 밑에서 미명을 기다리고 서성거리는 젖어 있는 눈의 여인의 못브을 스쳐 보냈다. 순간 취한 아랫도리가 찌르르 시었다.
“형운이.” 윤은 딴 데로 말머리를 돌렸다.
“남을 치는 걸 어떻게 생각해?”
“말이 젊으면 치게 되지. 말문이 막히면 내어밀건 주먹밖에 없단 말야.”
“결국 모자란 탓이군.”
“쓸어 줄 힘이 없으니 치는 거지.”
“전번에 우리가 통역을 친 것도 그 탓일까?’
“그럼, 쓸어 줄 힘이 없었지. 요즘은 모두가 그래. 남을 치는 것만으로도 참질 못하지. 모두들 남을 죽이고 싶어서 자기가 죽을 지경인 거야.”
“어째서?”
“모르지, 알고 보면 누구나가 매일같이 마음 속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있지. 나두 여덟 살 때 벌써 아버지를 죽였으니까. 장난을 치다가 몇 대 얻어맞고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때부터 많은 사람을 죽여 왔지. 요즘도 사흘에 한 명 꼴은 죽이고 있는 셈이야.”
“실지 못 죽이고 있는 건 무슨 까닭이야?”
“겁이 있어서 그렇지.”
“그럴는지도 모르지.”
윤은 무연히 팔짱을 꼈다. 둘은 함빡 취해서 중국 요릿집을 나왔다. 자꾸 계집을 사러 가자 조르는 형운을 달래서 자동차에 실려 보낸 윤은 바지 호주머니에 주먹을 찌르고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취해서 어지러워진 윤의 머리 어느 한 구석은 너무나 말끔히 깨어 있었다. 몸은 터질 듯 울적했다. 정말 누구를 치고 싶었다. 아니 누구를 죽이고 싶었다. 가슴에는 헤아릴 수 없는 불길이 일고 있었다.
어느덧 윤은 돌담 밑 길을 걷고 있었다. 돌담이 그치는 곳에서 윤은 걸음을 멈추었다. 노르스름한 초라한 사나이를 보고 싶었다. 어둠 속에 거울을 더듬었으나 거울은 찾아지지 않았다.
‘헤헤헤’ 하고 윤은 혼자서 미친 놈처럼 웃었다. 그리고 다시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방싯해진 문을 확 낚아채듯 젖히고 들어서기가 바쁘게 덥석 여자의 한 팔을 쥐어 잡았을 때 윤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희미한 먼 불빛에 여자의 경악에 찬 크게 뜨여진 두 눈을 보았다.
“도둑은 아냐.”
윤은 자기의 팔굽을 벗어나려는 여자를 더욱 세차게 죄어당겼다.
“무슨 짓이에요?”
“자고 가야겠어.”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크게 띄었던 두 눈은 예사로와지면서 안쪽을 살피는 눈치로 변했다.
“안 돼요.”
“안 된다구? 지상명령이야.”
“네?”
“기어코 자고 가야겠어.”
여자의 눈은 예민한 동물의 그것처럼 순식간에 휘휘 몇 번 굴러지더니 말없이 윤을 잡아끌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서 윤이 신발을 벗자 여자는 그것을 손에 집어들고 윤을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떠들지 마세요.”
방에 들어선 여자는 굵다란 양초 두 개를 켜놓았다. 윤은 으리으리하게 차려진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여자가 선 채로 물끄러미 윤을 건너보았다. 윤은 호주머니에서 지폐를 한 꿈 아무렇게나 집어 냈다.
“돈은 있어.”
여자는 말없이 건너보기만 했다.
“이 돈이면 안 되나?”
“저리 앉으세요.”
윤은 다시 지폐를 호주머니에 찌르며 침대에 가서 걸터앉았다.
“뵙던 분이군요.”
“거추장스러웠지?”
여자는 빙긋이 웃고 찬장 속에서 양주를 끄집어 내더니 유리컵 두 개에다 넘치도록 붓고는 한 잔을 윤에게 내어밀었다.
“먹여서 녹이려는 건 아니겠지?”
여자는 짤막이 까르르 웃더니 다른 한 잔을 자기의 눈 높이에 들어 올렸다. 둘은 똑같이 잔을 비웠다. 여자는 찬장 위에 잔을 두고 윤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어쩌자고 아닌 밤중에 문을 부수고 들어오셨지요?”
“낮에 올 수야 없지.”
“손님이 있었다면 어찌 됐죠?”
“아마 나한테 맞아죽었을걸.”
“어마나.”
“오늘은 기어코 누굴 죽일 생각이었지.”
“저런, 오! 불쌍한 마리오.”
“마리오고 개뼈다귀고 그 대신 너를 죽일 테야.”
“어쩌나.”
윤은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는 여자를 덥석 그러안았다. 여자의 따뜻한 체온과 보드라운 감촉이 윤의 피를 거꾸로 굽이쳐 달리게 했다.
여자의 뼈가 으스러지도록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여자는 다가온 윤의 얼굴을 피하며 또 한 번 까르르 웃었다.
“가만 계세요.”
여자는 몸을 틀어 스르르 윤의 팔을 빠져나가더니 촛불 있는 데로 가서 한번 고개를 돌려 윤을 쳐다보고는 훅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버석버석 옷 벗는 소리가 나더니 미끄러지듯 다가온 여자는 윤의 옷에 손을 대었다. 윤의 머리는 세차게 핑핑 돌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여자의 입김이 간지러웠다. 윤은 어둠 속에서 여자의 몸을 더듬어 세차게 몸을 부딪쳐 갔다.
윤은 먼 기적 소리를 어슴푸레 들은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윤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깨어났을 때 날은 어느덧 훤하게 밝아 있었다. 언뜻 머리를 들고 화닥닥 일어나려던 윤은 자기의 한 팔을 베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자 일순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을 이어 보고 다시 가만히 누워 버렸다. 한 손으로 아직 잠들고 있는 여자의 볼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윤의 손길을 느끼고 지그시 눈을 뜬 여자는 엷게 미소지으며 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윤은 자꾸 부드러운 여자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때려 줄려구 했는데.”
“왜요?”
하고, 여자는 어리광조로 콧소리를 냈다. 윤은 대답을 않고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여자의 볼을 쳤다. 잠시 후 여자는 번적 눈을 뜨더니 머리맡에서 담배를 찾아 피워 물고 시원스러이 연기를 빨아 후욱 윤의 얼굴에 날려 보내고는 높은 가락으로 한 번 웃어젖혔다.
“뭐가 그리 우스워?”
“제가 어젯밤까진 처녀였거든요.”
“뭐?”
“참,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할까?”
하고, 여자는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자리를 같이한 남자가 아침에 일어나 우리말을 들려 준 건 당신이 처음이거든요.”
윤이 말없이 여자의 몸을 끌어당기자, 담배 든 가냘픈 손이 머리맡의 재떨이로 갔다.
한참 후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는 윤을, 여자는 침대에 일어나 앉은 채 머리를 쓰다듬으며 멍하니 보고 있었다. 옷을 주워 입고 난 윤이 호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찬장 위에 놓인 화장품갑에 찌르자 빙긋이 웃었다.
“세수나 하고 가시죠?”
윤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빗장을 빼시면 문이 열려요.”
윤은 고개를 주억주억하며 여자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다시는 오지 마세요.”
일순 윤의 눈길과 여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윤은 가만히 문을 열고 현관으로 나와 고리를 따고 마당으로 나와 푸른 대문의 빗장을 뺐다.
4
“빨랫감 있으면 내놓으세요.”
밥상을 들이고 돌아서려던 행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 별로.”
“사양하실 건 없어요. 있으면 나가실 때 구석지에 찔러 두세요.
그리고……”
행아는 잠시 망설였다.
“요즘 몹시 바쁘신가요?”
“예?”
“안 들어오시는 밤에 문고리를 잠가 버릴 수도 없고 해서요.”
“아 그건……” 윤은 좀 당황했다.
“시간이 되면 잠그세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 그만……”
하고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어째 요즘 성호군 잘 안 뵈어요?”
그 소리에 행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 부탁이 있어요.”
윤은 또렷이 자기를 쳐다보는 행아의 눈길에 좀 눈이 부시는 듯했다.
“뭔데요?”
“이젠 저의 힘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성호가 요즘 몹시 들떠 돌아가고 있어요. 한 번 조용히 일러 주세요.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무엇을 한다는 건지 통 모르겠어요.” 행아는 맥없이 푹 문턱 앞에 주저앉았다.
“별일이야 있겠어요?”
“아뇨, 좋쟎은 예감이 가요. 조마조마한 눈치로 집에 돌아왔다가도 아버지한테 무슨 얘기를 듣고는 또 열뜬 것처럼 되어 가지고 나가지요. 어머니는 그저 뒤에서 걱정만 하고 계시고, 이전 저는 피로하기만 해요.”
그때 안방에서 자기를 부르는 부친의 소리를 듣자 행아는 길게 한 번 한숨을 드내쉬고 눈인사를 보내고는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행아가 사라진 뒤 윤은 문득 수저를 쓰던 손을 쉬었다. 방금 행아가 길게 한숨을 내어쉬던 때의 하염없는 표정은 몹시 아름다와 보였고 퍽으나 낯익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예전에 어디에선가 본 일이 있는 표정이었다. 잠시 더듬어 보았으나 윤은 얼른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편집국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사회부장은 윤을 보고 일렀다.
“좀 늦었군.”
“전차가……”
“좋아, 곧 대학동을 가 봐. 임 기자 응원을 나가게.”
“국대안 건이군여.”
“지금 야단이야. 빨리 가 보게.”
윤은 튕기듯 신문사를 뛰어나왔다.
자동차에서 내려 교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벌서 그 언저리에는 심상치 아낳은 싸늘한 공기가 감동고 있었다. 교문 안팎에는 군데군데 모여선 2,30며이 학생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학생증 봅시다.”
“저 신문사에서 왔는데요.”
“그래요?”
터부룩 올백으로 머리를 넘긴 학생은 무표정한 얼굴로 윤은 잠깐 훔쳐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강당까지에 이르는 동안 윤은 거기서 터져 나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를 여러 차례 들었다. 강당 문 앞에서 또 한 번 기자증을 보이고 안으로 들어서자 또 한 번 박수 소리가 울렸다.
“……여러분, 이처럼 그들은 학원의 자유를 말살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청중 가운데서 옳소 하고 거기 화창하는 고함 소리가 난다.
“미 제국주의가……”
연사가 이렇게 말을 이으려 할 때 한편 구석에서 우람한 소리가 났다.
“뭐야 이건 정치 연설이야?”
“닥쳐!”
“그 자식 집어쳐라!”
“가서 미국놈들 밑이나 핥어!”
항의는 금시 여기저기서 일어난 노호의 회오리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식민지’, ‘자본주의’, ‘노예화’, ‘주구’ 등등의 어휘를 귀에 담으면서 윤은 몇 사람의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한 구석에 혼자 떨어져서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벽에 기대서 있는 학생 하나를 붙들었다.
“낼부터 아예 학교엘 안 나올 생각이오.떠들고 투닥거리고 나에겐 무의미하죠.”
학생은 윤의 얼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체통이 커다란 학생이 굳게 입을 다물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손가락으로 연단 위를 가리키며 윤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게 학생인 줄 압니까? 천만에? 끼여든 빨갱이요, 민애청원이요.”
그때 마침 박수가 터지자 학생은 흠치 소자우를 살피며 얼려서 자기도 박수를 쳤다. 윤은 여기저기 서성거리고 돌아가는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항 명의 학생을 발견했다.
“어디 신문사죠? 그래요? 이것을 드리죠. 여기 우리 학생들의 입과 투쟁 이유가 적혀 있죠. 말이 됩니까 어디. 국대안이 그대로 실시된다면 대학은 없어지는 겁니다.”
학생은 등사한 종이 한 장을 윤에게 건네주고는 또 부리나케 학생 틈을 뚫고 들어갔다. 마주서서 소곤소곤 얘기를 주고 받는 학생 둘이 있었다.
“저요? 전 예과 출신인데요, 통합에는 반댑니다. 차라리 장터를 벌이는 게 낫지 어중이떠중이 모아 놓고 무엇이 되겠어요. 완전한 전통과 개성의 파괴죠.”
“전 일본서 공부하다 학병을 갔다 온 놈인데 양키들은 뭣 땜에 끼여든단 겁니까, 우습죠.”
기나긴 박수의 물결이 파상적으로 머리 위를 흐르자 허름한 학생 하나가 연단으로 뛰어올라갔다.
“학생 여러분, 우리들의 목적은 뭡니까? 한 마디로 배우자는 겁니다. 그런데 뭐예요? 친일파니 반동 분자니 이건 학생 대회가 아니고……”
“뭐야 저건.”
“어서 나왔어?”
“스파이다.”
“끌어 내려라.” 야유와 노호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여러분! 내 얘길 들으시오. 할 말은 해야겠소. 이건 마치 공산당 대회요.”
“옳소!”
“뭐라구?”
“빨갱이……”
“끌어 내려.”
“죽여 죽여.”
“집어 내라.”
연단을 향해 돌멩이 등속이 날았다. 앞줄에 앉았던 학생 몇 명이 연단으로 뛰어올라갔다. 고함과 발 구르는 소리가 강당 천장에 부딪쳐 반향을 일으켰다. 연단에서는 옥신각신 벌어졌다.
윤이 이 학생들의 틈을 뚫고 강당 밖으로 나오기가 바쁘게 뒤이어 우르르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 몇 명이 소리소리 지르며 아직 안 끝났으니 도로 강당으로 들어가라고 떠들어 댔다. 윤은 저 멀리 잔디밭에 앉아 있는 임 기자를 발견하고 그리고 다가가서 그 옆에 주저 앉았다.
“응원 왔습니다.”
“음, 지금 고비지.”
“대세는 반대로 기울어지고 있군요.”
“군정청 하는 일이 매사 이렇거든.”
“어떻게 될 것 같죠?”
“강행할 생각인 것 같아.”
“공연히 학생들만 들춰 놓는 게 아녜요?”
“문제는 단순치 않지.”
“무슨 정치적 흑막이라도 있나요?”
“이철이가 뒤에서 당기고 있거든.”
“이철이오?”
“이철이가 이 학교 출신 아닌가.”
“참 그렇죠.”
“그자는 후배들에게 상당한 신망이 있거든.”
“그러면 결국 공산당 노름 아녜요?”
“그 친구들이 가만 있을 리 있나.”
“학생들이 고걸 모르고 있나요?”
“비슷이 알고야 있지만 군정청 처사에 대한 반감이 더 크지.”
연이어 강당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이 더욱 떠들썩했다. 아까 연단에 올랐던 허름한 차림의 학생을 둘러싸듯 몇 명의 저편 교사 뒤로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저 뭐예요?”
“흥, 또 코피깨나 쏟게 생겼군.”
윤은 그들이 사라진 뒤를 부리나케 따라가는 서너 명의 학생을 보았다. 그 중 한 명의 뒷모습이 퍽 낯익었다.
“순익이!”
윤이 엉거주춤하며 저도 모르게 순익의 이름을 입에 담자 임 기자가 물었다.
“누구야, 친군가?”
“아뇨, 비슷해서요.”
“자 가세. 잘못 끼여들었다간 욕을 보기 십상이지.”
윤은 임 기자를 따라 교문을 나섰다.
“자동차 하나 부르지.”
명륜동 쪽에서 미끄러지듯 달려오고 있는 자동차를 보고 윤이 손을 들었다. 자동차는 그대로 속도를 멈추지 않고 본 체 만 체 스쳐가 버렸다. 임 기자 눈길이 자동차를 따르며 혼잣말처럼 가니었다.
“흐음, 퍼킨스가 가는군.”
“퍼킨스, 윤임일 데리고 사는 친구요?”
“그래, 어딜 가는 모양인데.”
“어떻게 아세요?”
“해리 김하고 가는 걸 보니까 그렇지. 오늘 대전에서 행사가 있군.
흐음, 오늘 저녁은 산장 호텔에서 또 야단나겠는데.”
“윤임이와 이철이 말이죠?”
“그래, 산장 호텔 18호실, 남향한 아늑한 방이지.”
와아 하고 뒤편에서 함성이 오르고 우왕 좌왕하는 어지러운 발굽 소리가 났다. 윤이 고개를 돌렸다. 잔디밭 솔포기 속에 누가 구겨 박히는 것 같았다.
“저, 임형 먼저 가시죠.”
“왜 그러나?”
“전 뒤로 가죠. 좀더 있다가 가겠어요.”
“그러지 않아두 될 텐데.”
“먼저 가세요.”
윤은 다시 교문 안으로 들어서서 수위실로 갔다. 거기 반쯤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한참 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던 2,30명의 학생이 교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윤은 그 일단 속에 섞여 있는 순익의 열에 뜬 상기한 얼굴을 보았다. 긴 한숨이 윤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윤은 슬그머니 수위실 뒤에서 나와 잔디밭 솔포기 있는 곳으로 갔다. 솔포기 밑에 옷이 찢어진 학생이 한 명 쓰러져 있었다.
“여보시오!”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학생이 얼굴을 들었다. 눈은 힘없이 뜨여지고 인중에는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학생은 찢어진 팔소매로 그 피를 문질러 냈다.
윤은 호주머니에서 원고지 몇 장을 끄집어 내주었다. 학생은 그것을 받아 거칠게 코피를 닦아 내고는 힘을 가누어 일어나려고 했다. 윤이 허리를 굽혀 부축하려는데 학생은 그것을 물리쳤다.
“혼자 되겠소?”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윤의 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학생 두 명이 다가와서 일어서려는 그 학생을 부축했다. 윤은 그들이 교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갑자기 하복부에 통증을 느낀 윤은 변소를 찾아 건물 있는 곳으로 갔다. 마치 공동 변소처럼 너저분했다. 허리춤을 움켜쥐며 그 중 한 간으로 뛰어들었다.
문이 닫혀진 안이 차차 밝아 오면서 윤은 눈앞의 벽에 무수히 끄적거려진 낙서를 보았다. 여체의 그림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벽 전체가 정치적인 구호로 메워져 있었다.
인민 위원회 만세, 공산당 만세, 강태 만세, 반동 분자, 주구, 졸도, 미제국 주의, 친일파, 빨갱이, 양키 고홈 등등의 어휘를 볼 수 있었다. 한참 더듬다가 윤은 위 호주머니에서 연필을 끄집어 냈다. 여기저기 빈 틈을 찾던 윤의 눈길이 문득 한 군데 못박혀졌다. 윤은 거기 써진 낙서를 속으로 두 번을 읽었다. 세 번을 읽고 난 윤의 입에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흘러나오는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한참 후 웃음을 그친 윤은 다시 한 번 그것을 들여다보고 이번에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는 짤막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뒷간에 들었으면 똥이나 싸라.’
신문사를 거쳐 해방옥으로 달려간 윤은 형운이를 붙들고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형운이, 이전 논문의 결론을 얻었어.”
“갑자기 어찌 된 거야.”
“형운이, 진리는 어떤 경우에 발견된다고 생각하나?”
“글쎄 링 유땅은 새우잠 자다 깨어난 이불 속이라 했지.”
“그것도 그럴듯하군. 그런데 난 그것을 냄새나는 뒷간에서 발견했단 말야.”
윤은 낙서 얘기를 죽 내리 했다.
“어때, 진리지? 뒷간에 들었으면 똥이나 싸라. 모든 낙서가 일순에 모색해지더군.”
그 소리를 듣자 형운은 턱을 들고 웃기 시작했다. 윤도 따라서 회심의 웃음을 웃다가 너무 극성스러운 형운의 웃음에 눌려서 웃기를 그치고 말았다.
“어때 우습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되레 엄숙한 걸 느끼게 되지.”
그 소리에 형운은 더욱 자리러지게 웃었다.
“자네두 참.” 하고 형운은 웃음을 그쳤다.
“여보게 윤.”
“뭔가?”
“그건 내가 쓴 거야.”
“머?” 형운은 손바닥으로 입 언저리를 훔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전번에 그 대학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가 변소엘 들어갔지. 하두 너저분한 구호가 적혀 있기에 몇 자 끄적거려 봤지. 자네 바루 그 칸엘 들어갔었군.”
“그래에?” 윤은 내어진 주먹이 허공을 휘젓는 느낌이 들었다.
“왜, 내가 적었다는 걸 알고 보니 느낌이 덜한가?”
“어째 어리둥절하군.”
“진리는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바루 이거지.”
“정말 가까이에 있었는데?”
“자네가 낙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똑같은 말두 하는 사람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기 마련이지. 밭갈이하는 노인이 일도 않고 번둥거리는 자식보고 일 안 할 라면 처먹지도 말라 하면 극성을 떤다고 자식은 웃겠지. 그러나 정치가라든가 학자란 자들이 일 않는 자는 먹지 말라고 하면 모두 그것을 두고 흥분한단 말야. 건달인 친구가 계집이 제일이라면 쌍된 말이라고 비웃지만 시인이란자가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면 여기저기서 정사는 놈이 생긴단 말이지. 모두 그런거야. 그게 권위라는 거지. 어떤 친구들은 맑스니 레닌이니 스탈린이 이래저래 말했다면 꿈쩍 오금을 못 쓴단 말야. 로마 교황이 한 마디 했다면 대수롭지 않은 말에서도 빛이 나기 마련이지. 요즘은 또 기다란 이름을 가진 서양놈이 한 말이라야 시세가 나지. 빈 달구지는 소리가 요란탄 말은 벌써 엽전들이 몇백 년 전부터 해 온 말이지. 그러나 그것으론 되지 않아. 빈 통은 더 큰소리를 낸다. 이렇게 쿠루이로프는 말했다고 해야 특히 순익이 같은 친구는 좋다하거든. 그러니 너나 나나 가련하기 짝이 없는 거지. 결국 애비를 못 고른 탓이야.”
“참, 오늘 순익일 보았어.”
“뭐라든가?”
“아니, 먼발치로 보기만 했어. 학생 하나를 뭇매 치는 데 한몫 끼여 있더군.”
“맞았으니까 때려야겠다는 거겠지.”
“좀 서글퍼지던데.”
“서글플 게 머 있어, 따지고 보면 다 그런 거지.”
“어째 요즘 얼굴이 안됐는데.”
“나? 나야 항시 그렇지. 돈이 떨어진 탓인지 몰라. 한 번 더 인천엘 갔다 와야겠어.”
“위험한 일은 말게.”
“위험하지 않고 돈 생기는 일이 어디 있을라구.”
윤과 형운은 몇 잔을 더 했다. 형운은 벌써부터 혀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곰은 어찌 됐어?”
“평청원을 따라 시골로 간 모양이야.”
“두들겨 패는 파인가?”
“그런 모양이지. 용수는 요즘 뭘 하고 있지?”
“학병단엔가 가서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더군.”
“해방옥도 쓸쓸해 가는데.”
“마치 내 호주머니 속 같아.”
해방옥에서 나와 형운과 헤어진 윤의 발걸음은 비틀거렸다. 취기로 전신이 충만해 가는 것을 느끼며 무엇이고 쳐서 부서뜨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가슴 한가운데 걸려 이가는 어떤 덩어리가 확 풀려 나갈 듯했다. 흥! 망명가니 지사니 한다는 말과 한다는 짓이 답답하기 짝없어. 뭐냐 말야. 그저 눈물만 흘리면 고마니란 말야? 강태, 이철이, 비단결같이 말만 늘어놓구 뒤로 돌아가선 꿍꿍이짓이나 하구 앉아서. 나는 더 기막힌 얘기를 할 수 있지.
윤은 혼자 기를 썼다. 아직 나는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했을 뿐이가니깐 놈들보다야 형운의 낙서가 되레 그럴 듯하거든.
‘뒷간에 들었으면 똥이나 싸라.’
하하하, 참으로 옳은 말이야.
윤의 발끝은 남산 밑을 향하고 있었다. 한참 후 윤은 산장 호텔의 정문이 건너 보이는 맞은편 처마 밑에 서 있었다. 그는 산장 호텔을 찾아들 이철을 기다렸다.
한참 동안 지켜 섰던 윤은 깜박 선 채로 졸았다. 몸의 중심이 기울자 언뜻 그는 눈을 떴다. 으쓱 몸을 떨었다.
어째 이렇게 지켜 서서 그것을 보아야 하는지 자문할 생각은 나지 않는다. 그저 어떤지 이철이 산장을 찾아 드는 꼴을 보아야만 마음이 개운할 것 같았다. 자동차가 세 대 산장 호텔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으나 이철은 나타나지 않았다.
중년 신사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윤이 서 있는 앞을 지나 호텔 안으로 사라지자 한참 동안은 이 언저리가 조용했다. 멀리서 자동차와 전차의 경적 소리만이 들려 왔다.
이러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전에 이철이 찾아 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면 이것이 웃음거리였다.
윤은 덮어놓고 호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현관문을 열기가 바쁘게 보이가 다가왔다.
“룸이 있소?”
“네, 아래층 위층 어디로 할까요?”
윤은 보이가 내어놓는 슬리퍼를 꿰자 안으로 쑥 걸어 들어갔다.
“18호실 비어 있소?”
“벌써 차 있는데요.”
“그럼 17호실은?”
“19호실이 비어 있죠.”
“그 방이 좋겠어.”
긴 복도를 걸어 윤은 보이가 안내하는 대로 18호실을 곁눈으로 보며 19호실로 들었다. 들자마자 지폐 뭉치를 꺼내 몽땅 보이에게 내어밀었다.
“셈을 하게.”
윤은 셈을 하고 난 나머지를 받아 쥐자 그 중 네댓 장을 꺼내 보이에게 주었다.
“이건 팁이야.”
보이는 생긋이 웃으며 머리를 숙였다 .윤은 벌렁 침대에 가서 누웠다.
“머 이 방 저 방 밤이면 시끄러운 게 아닌가?”
“문만 잠그면 감쪽같죠.”
윤은 미식하고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때, 쌍쌍이 손님이 많은가?”
“대중 없죠.”
윤이 손가락으로 바른편을 가리켰다.
“여긴 어때?”
“아직 안 들었어요.”
“18호실은?”
“가끔 오시는 손님인데 아직 바깥 주인은 안 오셨죠.”
“바깥 조인은?”
보이는 의미 있게 빙긋이 웃었다.
“그건 모르죠만 어떻든 부인만 와 계셔요.”
“좀 있으면 오겠지?”
“그건 봐야죠.”
“어째서?”
“부인 혼자 주무시고 가는 때도 있으니까요.”
“그건 안됐는데. 좋아, 차나 갖다 줘.”
보이가 나간 후, 윤은 한 바퀴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실내 장식이 찬란했다. 자기에겐 아쉬운 돈이었으나 값은 가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침대의 시트가 눈이 부시도록 희었다.
잠시 후 주전자와 찻잔을 날라 온 보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옆방은 또 설치는걸요.”
“18호실 부인 말이야?”
“방금 전화가 걸려 온 걸 들었는데, 안 오는 모양이죠.”
“그렇게 되면 여자는 어떻게 돼?”
“머 그대로 자죠.”
“가는 게 아니구?”
“새벽같이 나타날 때도 있는걸요.”
“흐음.”
보이가 나간 후 윤은 커피차를 따라 마셨다. 조금 정신이 가누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처럼 무턱대고 호텔을 찾아 든 자신이 뉘우쳐졌다. 술이 탈이야 하고 윤은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다가는 술 먹고 못 할 짓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는 살인까지 저지를는지 모르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윤은 잠시 뇔에 어린애들과 함께 푸른 숲 속을 거닐던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벌서 먼 옛날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윤은 담배를 한 대 꺼내 붙여 물었다. 18호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가는가? 윤은 얼른 일어나서 바시시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윤은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보이가 뛰어왔다.
“술을 사다 줄 수 있어?”
“무슨 술을 사 올깝쇼?”
“깡통 맥주 잇지?”
“그러죠.”
혼자 따라 마시는 깡통 맥주가 입에 썼다. 오징어 조각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윤은 맥주의 비말을 얼굴에 맞으면서 깡통을 따서 마셨다. 취기는 다시 상승했다. 누그러지려던 몸이 견딜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듯했다. 또 무엇을 부셔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 시작했다.
호텔 안팎은 조용했다. 윤은 18호실의 동정을 살피듯 그곳에 귀를 기울였다. 두툼한 벽을 통해 무슨 소리고 들릴 리 만무했다.
그러나 윤의 마음은 그곳으로 쏠리고 흐려진 뇌리의 한 구석에는 아직 말끔한 정신의 한 조각이 남아 있어서 그것은 더욱 날카로와만 갔다. 눈앞을 스쳐가는 자동차의 유리 안으로 얼핏 훔쳐본 일이 있는 윤임의 얼굴이 자꾸 뇌리를 어지럽혔다. 그 윤기 있는 검은 눈동자와 보드라운 느낌을 주는 어깨, 윤은 그 밑으로 흘렀을 몸매의 굴곡을 멋대로 그려 보고 꿀꺽 생침을 삼켰다. 다음 순간 획 그의 머리 위에 검은 그림자가 뒤덮였다. 퍼킨스와 이철…..윤은 벌떡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 바람에 탁자 위의 깡통이 흔들렸다. 윤은 잠시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았다. 윤은 어느 산 속에 든 착각을 느꼈다. 그는 잠시 후 가만히 방을 나섰다. 한 번 복도의 앞뒤를 휘둘러보고 18호실 도어 앞으로 가서 가만히 주먹으로 노크를 했다.
“누구시죠?”
윤은 대답을 안 했다.
“누구시죠?”
또 한 번 다짐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도어로 가까와 오는 슬리퍼 소리가 나다. 고리가 따지는 소리가 나자 핸들을 돌았다. 순간 윤은 세차게 몸을 부딪쳐 가며 안으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홱 도어를 닫아 버렸다.
“아!” 하는 짤막한 비명과 함께 여자는 두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만히, 난 도둑이 아니오. 기자요. 신문 기자요. 윤임씨죠?”
윤은 이렇게 빠른 가락으로 말을 건네면서 일순에 윤임의 머리털끝까지를 들어보았다. 윤임이 붉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기자가 이게 무슨 짓이에요?”
“우연히 옆방에 들었소. 애기를 하고 싶어졌소.”
윤임이 대답을 않고 윤을 말끔히 건너본 채 옷깃을 여민다.그것을 보고 별수 없이 여자로구나 하고 윤은 마음 속에서 뇌었다.
“나가세요! 안 나가면 사람을 부르겠어요.”
“어디 불러 보시지, 결과가 어떻게 되나. 당신이 더 곤란하게 될걸.”
윤임은 조심조심 탁자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쳤다. 윤의 눈길이 탁자 위에 놓은 핸드백으로 가자, 그는 어떤 위협을 느끼고 날새게 뛰어가 보다 빨리 성큼 그것을 집어들었다. 핸드백이 묵직했다. 윤임이 이번엔 침대 있는 곳으로 뒷걸음쳤다.
윤은 재빨리 핸드백을 열었다. 거기엔 브로닝 4호 정도의 은빛나는 권총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윤은 두어 걸음 윤임에게로 다가갔다. 윤임은 몰리어 침대 머리맡으로 돌아갔다.
“손님 대접이 대단하군. 이철이면 이러지 않았겠지.”
윤임은 독이 오른 눈으로 윤을 쏘아보기만 했다.
“퍼킨스와도 아니 그랬을 거구.”
윤임의 젖가슴이 크게 물결쳤다.
“목적이 뭐예요?”
“목적?”
“돈이면 돈을 드릴께요.”
“돈이면 은행으로 갔지.”
“권총을 드릴께요.”
“벌써 집어넣었어.”
“그럼 나가세요.”
“권총이 목적은 아냐.”
“뭐예요 그럼?”
“야밤에 여자 방에 든 목적이 하나밖에 있겠어? 자는 거지. 난 이철이와는 달라.”
“네?”
“아무것도 캐어 들을 건 없단 말야.”
윤임이 시선을 땅으로 떨구었다.
“침대에 들었으면 껴안고 자는 것뿐이지.”
윤임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 두 눈에 하염없는 빛이 깃들며 시선이 먼곳으로 갔다. 그것으 보고 윤은 왠지 속으로 흠칫 놀랐다. 뜻하지 않은 말이 윤의 입술을 비져 나왔다.
“참 예쁘군.”
순간 윤의 눈동자에 다시 악이 감돌았다.
“정말 껴안고 자고 싶은걸.”
윤은 잠시 말없이 윤임을 건너보았다.
“얼굴을 펴시지, 그대로 갈 테니. 너하구 자기보다 갈보년하구 자는 게 더 편하겠어.”
윤임이 헙 하고 헛숨을 내어쉬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이철이 오면 일러 둬. 침대에 들면 자기나 하라구.”
윤은 날쌔게 몸을 돌려 복도로 뛰어나와 영문을 모르는 보이에게 신발을 찾아 꿰고 산장 호텔을 벗어 나와 어두운 골목길을 더듬었다. 호주머니 속의 권총이 찌르는 손에 차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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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그것을 버리게.”
“뭐 말야.”
“권총 말야.”
“권총? 그걸 어떻게 아나?”
“어젯밤 들어오자 자네가 푹 고꾸라졌어. 옷을 벗기다 알았지.”
“혼자 어딜 갔었어?”
윤은 얼른 말을 못 했다.
“실은……” 하고, 윤은 산장 호텔에 들렀던 전말을 죽 얘기했다.
“그때 문득 자네가 대학 변소에 그적거린 낙서 생각이 나더군. 그래서 침대에 들면 껴안고 자기나 하라고 일렀지.”
“하하, 그래 못 하고 말았어?”
“그만뒀지.”
“어째서?”
“그 먼 눈이 가슴에 집혔어.”
“그것 때문야?”
“실은 거기서 술이 깨었어, 겁이 났던 거지.”
“하하, 실톨 하는군. 여기 왔을 때 함빡 취해 있던데.”
“그대로 올 수가 있어야지. 구멍가게에서 또 제쳤지.”
“그럼 다시 돌아가지 그랬어?”
둘은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여하튼 자네 요즘은 대활약이군.”
“그러지 말게, 술김에 그런 거지. 그런데 차차 이상한 생각이 든단 말야.”
“뭐가?”
“푸른 대문 집 여자나 윤임이나 그렇게 지내 놓고 나자 어쩐지 그리워지단말야.”
“여보게, 웃기지 말게.”
“아냐 실감이야. 그러니 양키나 이철이 같은 자가 더욱 미워진단 말야.”
“곰 잡으려다 곰 되지 말게. 난 내일 인천엘 가 보겠어.”
“며칠 있어야겠군. 그럼 오늘 저녁 또 한잔 나누세.”
윤은 형운의 집을 나와서 신문사에 들렀다가 경찰서를 한 바퀴 돌고 점심때 임 기자를 따라 갈매기란 양식집으로 갔다. 거의 카레라이스 한 그릇을 비웠을 때 임 기자가 윤을 보고 눈짓을 했다.
“패거리들이군.”
윤이 눈길을 입구에 돌리자 이철을 선두로 네댓 명이 주렁주렁 들어서고 있었다. 윤은 좌악 전신을 흐르는 어떤 종류의 적의를 느꼈다. 일행이 한 구석에 자리잡는 것을 보자,
“저 임형, 저 개인 인터뷰를 해두 괜찮겠소?”
“어디 해 보지 그래.”
윤은 얼른 식사를 끝내고 천천히 입 언저리를 훔치며 마음을 가누었다.그러고는 임 기자에게 한 번 뜻있는 시선을 보내고 이철이 일행이 앉은 탁자로 걸어갔다.
“저 이철 선생이시죠?”
“그렇소.”
“저 이런 신문사에 있는데요. 좀 들어 볼 말씀이 있어서요.”
“그럼 식사나 끝낸 다음에 하죠.”
“잠깐이면 됩니다. 한 4,5분간만.”
윤은 탁자에 놓았던 명함을 얼른 다시 집어넣었다. 이철은 하는 수 없이 구석지에 있는 빈 탁자로 가서 윤과 마주앉았다.
“선생님, 먼발치로는 가끔 뵈었습니다만 직접 인사드리는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같은 신문사의 김 기자는 가끔 만나죠.”
윤은 그 헌칠하게 생긴 얼굴과 굵다란 남성적인 음성을 들으며 윤임이 홀딱 넘어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 선생님의 독일 유학 시기는 어떤 때였었나요? 즉 정치 상황이란게……”
“바루 히틀러가 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무렵이죠.”
“독일 공산당이 눌리기 시작한 때군요.”
“눌리기 시작하다기보다……”
하고, 이철은 한바탕 당시의 정치 상황을 설명하며, 독일 공산당의 영웅적 투쟁을 늘어놓았다.
“그럼 하나 묻겠어요. 독일 공산당이 승리했다면 그 바이마르 헌법은 그대로 존속될 수 있었다고 보십니까?”
또 이철은 간간이 독일어를 섞어 가며 설명하기에 바빴다. 윤은 그 말하는 가락이 퍽 음악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윤의 흥미는 이철의 설명에 있지 않았다. 윤은 짬을 타서 엉뚱한 질문을 했다.
“저 선생님 독일선 재미 많이 보셨어요?”
“뭐요?”
“독일 여자의 금발이 좋다던데요.”
“원 별말씀을……” 이철은 위엄 있게 윤의 농을 흘려 보내려 했다. “왜 혁명이나 전쟁엔 반드시 여자가 끼여들어야 한다쟎아요. 가령 정보 수집 같은 역할 같은 것 말입니다.”
“무슨 얘길 하시려는지요?”
“전 옛날 간첩 영화를 봤는데요. 여간첩 엑스 몇 혼가 하는, 왜 마리니 디트릿히가 주연했죠.”
“전 그런 건 본 일이 없소.”
“뭐요?”
이철은 주위를 살피며 나직한 언성에 노여움을 섞었다.
“가끔 산장 호텔에 가신다죠?”
“뭐라구?”
“그럼 이만 하죠. 고맙습니다.”
윤은 엉거주춤 이철의 가기 가까이에 입을 가져가며 속삭이듯 뇌까렸다.
“침대에 들었으면 그거나 하시지?”
윤은 얼른 자리를 떠서 임 기자를 한 번 건너보고 눈짓을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걸어나갔다. 뛸 듯이 한 마장을 걸어 골목을 돌아서서야 어깨로 크게 숨을 드내쉬었다.
“웬일야?” 한참 후 임 기자가 뒤따라왔다.
“임형 미안해요.”
“무슨 말을 했어? 이철이 얼굴이 볼 만하던데……”
“산창 호텔 얘길 했죠.”
“원 자네두!” 임 기자는 노여운 빛을 띠었다.
“왜요, 안됐나요?”
“아냐, 그런 건 아니지만, 자네 그러다 큰일나네. 그래서야 어디 허투루 얘길 들려 줄 수 있나?”
“자식 너절하쟎아요?”
“그렇긴 하지만, 허허 참 자네두.”
임 기자는 엉뚱하다는 눈치로 윤을 한 번 건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윤은 저녁녘이 되어서 느지막이 해방옥으로 갔다. 거긴 뜻밖에도 순익이가 와 있었다. 순익이는 들어서는 윤을 언뜻 쳐다보고는 옆에 앉은 낯 모를 젊은 친구와 얘기를 계속했다.
윤은 형운과 용수의 한가운데 가서 끼여 앉았다.
“용수, 오랜만일세.”
“자네 그 동안 곡절이 많았더군.”
“체, 웃음거리지.”
윤은 스스로를 비웃듯 혀를 찼다. 윤은 술 한 잔을 받아 단김에 들이마시고는 빈 잔을 형운에게 돌렸다. 슬며시 순익을 건너보았다. 순익은 윤을 완전히 묵살하는 눈치였다. 윤은 용수에게 돌린 잔을 되받아 마시고는 불쑥 빈 잔을 순익이한테로 내어밀었다. 순익이 잠깐 눈앞에 내어진 잔을 보고는 얼른 딴 데로 눈길을 돌렸다.
“순익이 잔을 받지.” 형운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나?” 하고 순익은 형운을 건너보았다.
“윤이 자네한테 주는 잔 아냐?”
그제야 순익은 윤이 내어민 잔을 받았다. 용수가 술을 따랐다.순익은 조금 마시고 그대로 잔을 놓았다.
“자, 알고 지내는 게 좋겠군.”
형운이 순익이와 나란히 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윤을 소개했다.
“저 박인이라 불러 주시오.”
젊은이는 상냥하게 웃었다. 윤은 단정한 박인의 얼굴 한가운데 빛나고 있는 호수같이 맑은 두 눈을 보았다. 어린애같이 희디흰 그 흰자위에 마음이 끌렸다. 윤은 힘을 돋구어 순익에게 말했다.
“술잔을 돌리게나, 자넨 날 오해하고 있어.”
“누가 뭐랬어, 오해라면 그만이지.”
순익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쌀쌀했다. 윤의 얼굴에 괴로운 빛이 흘렀다.
“아직 풀리지 않는 게로군.”
“풀리고 뭐고 없어. 얼마 안 있으면 서로 얼굴을 못 보게 될 테니까.”
“어째서?”
윤이 그 뜻을 모르고 되묻자, 박인이 입을 다문 순익의 대신 그 사연을 말했다.
“저희들은 곧 가게 됩니다. 순익이와 가까운 사이니까 말입니다만 여기 더 있을 수 없죠. 거기 가서 해야 할 일이 급하니까요. 거긴 여기보다 한 걸음 앞서서 벌서 혁명의 첫걸음을 굳게 내어디뎠거든요.”
“이북 말이오?”
윤의 언성이 튀었다. 순익은 그것을 곁눈으로 훔쳐보고 빙긋이 웃었다. 형운과 용수는 말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렇죠, 얼마 안 있으면 떠나게 됐소. 그래 오늘 순익군이 친구들한테 마지막으로 찾아가자고 해서 이곳을 들른 거죠.”
윤은 박인의 또렷또렷 이어지는 말에 무어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윤은 취기로 엷게 얼굴을 붉히고 돌려지는 술잔을 차근차근 받아 마시는 조용한 박인의 품에 자꾸 마음이 갔다.그의 호수같이 맑은 눈 속에는 꿈이 깃들여 있고 날씬한 몸매의 가슴 안에서는 굳은 신념 같은 것이 불길처럼 타고 있는 듯했다.
순익이는 오줌을 눈다고 밖에 나가더니, 잠시 후 해방옥 출입문이 떠들썩했다. 귀 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일행은 거기 미 병사 하나와 팔짱을 끼고 들어서는 순익을 보았다.
“어찌 된 거야, 국제 친선인가?”
“순익이 취했어.”
손님들의 시선을 한몸에 담으며 진객은 순익이가 이끄는 대로 낭자하게 술상이 벌어진 탁자에 와서 박인과 순익 사이에 끼여들어 기다란 다리를 꺾었다. 미 병사는 취해 있었다. 가밑작 모자를 벗어 들자 희미한 남포등 불빛에 밤색 머리칼이 드러났다. 순익이 미 병사에게 대포 사발을 내어밀었다.
“이건 조선식이야.”
서툰 순익의 영어가 혀꼬부라진 까닭에 제격이었다. 순익이 미 병사가 받아 든 대포잔에 주욱 약주를 부었다.
“오 이건 과해.”
미 병사는 짤막한 말로 손을 저으며 그만 부으라는 시늉을 했다. 순익은 들은 체 않고 사발에 철철 넘치도록 눌러 부었다.
“꾹꾸 담아야지, 이 밥통아.”
순익은 이렇게 우리말로 하고는 모두들 한 번 훑어보고 웃었다.
“프리이스, 이건 우리가 먹는 맥주란 거야. 너희들 것보다 낫지, 이 얼간아.”
미 병사는 술이 가득한 사발을 받아 놓고는 한참 오오오오 하면서 거북하다는 듯 망설이더니 털에 묻힌 큰 손으로 잔을 집어 두어 모금 들이마셨다.
“어떠냐 맛이?”
순익은 짧은 영어로 물었다. 야릇한 표정을 지은 미 병사는 순익의 물음에 당황한 듯 대답했다.
“오오, 원더풀!”
“그럴 테지.” 순익은 회심의 웃음을 웃었다.
“자, 술을 먹었으면 안주를 먹어야지.”
순익은 젓가락으로 날 두부를 집어 미 병사의 입에 가져갔다. 미 병사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이 친구 독이나 든 줄 아나?”
순익은 어거지로 날 두부를 미 병사의 입 속에 틀어넣었다. 우우 하고 신음하듯 미 병사는 한참 볼을 우물거리더니 눈을 흡뜨듯 하며 꿀꺽 목 너머로 삼켰다.
“엽전 땅에 왓으면 이런 것도 먹어 봐야 하는 거야. 이 거지 발싸개 같은 친구야.”
둘레의 손님들이 또 한 번 히죽이 웃으면서 순익이가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 보고 있었다. 형운이 순익이보고 탓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 따위 장난 그만 해.”
“뭐가? 이 밥통 편 들긴가?”
“얼른 못 보내겠어?”
형운이 말소리가 튕기자 미 병사는 잠시 경우를 떠 보는 듯하더니 순익이 어깨를 가만히 뚜드리며 부대로 돌아간다고 속삭였다.
“밥통, 갈라면 가지.”
미 병사는 커다란 손을 내밀어 순익의 손을 잡아 흔들고는 기다란 다리를 뽑아 모두에게 끄덕끄덕 숙여 보이고 팔을 흔들며 해방옥을 밖으로 사라졌다.
“너 언제부터 그렇데 데데해졌어.”
왜 그래, 형운이. 자네도 재미있게 보고 있었지 않았나?”
“재미? 창피해서 속이 뒤틀렸어.”
“양키 언짢다고 제일 떠든 건 누구야?”
“닥쳐……”
형운은 빈 잔을 세차게 들었다가 거세게 탁자를 내리쳤다.
“물론 아직도 언짢지. 아직도 미워하지. 그러나 이제 그 따위 짓으로 놈들을 조롱하고 싶진 않아. 정말 쥐구멍을 찾고 싶도록 창피했어.”
윤은 울화를 터뜨린 형운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서 어쩐지 자기 자신이 몹시 부끄럽고 가엾음을 깨달았다.
박인이 조용한 어조로 형운의 얘기를 가로막았다.
“형씨, 저도 보고 있으면서도 그리 마음에 탐탁히 생각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순익 동지의 한 일이 취중에 저지른 일이지만 저는 그것도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항의 표현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물론 그 병사 하나만 놓고 볼 땐 쑥스러운 일이긴 하겠죠. 그러나 그 병사의 배후에 있어서 우리를 노리고 있는 거대한 힘에 대해 지금 우리가 돌멩이 하나 던질 수 없는 형편 아녜요. 일그러진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순익 동지의 한 일이 그렇게 쑥스럽다고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형운은 한참 박인의 얼굴을 건너보다가 무거이 입을 열었다.
“초면에 뭐라 말씀드리고 싶진 않소. 어떻든 창피했으니 술이나 하죠.”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싱겁게 술잔이 오고갔다. 한참 후
순익이와 박인은 자리를 일어섰다. 윤이 순익에게 손을 내어밀었다.
“언제 가려나?”
“그야 모르지만 곧 가게 되겠지.”
“가기 전에 한 번 꼭 만나야겠어.”
“언제든 만날 수 있겠지. 원수도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니까.”
윤은 불쑥 치미는 울화를 간신히 삭여 버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박인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며 윤에게 말했다.
“순익 동지는 요즈음 좀 마음이 들떠 있죠. 너무 마음에 담진 마세요.”
둘이 나간 후 세 사람은 자리를 넓혔다.
“자식이 돌았어.” 용수가 뱉듯이 말했다.
“그야 누가 돌았는지야 아직 모르지.”
형운이 무연히 뇌까리고 언성을 높이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어떻든 아까는 창피했어. 지이아이를 곯려 줬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곯은 것은 순익이고 우리들이야. 어거지로 막걸리와 날 두부를 먹이고, 그것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우리의 신세란 뭔가. 나는 뜨거운 납덩어리를 삼킨 기분이야. 지이아이는 부대로 돌아가 소화제 한 봉이면 알아보겠지만, 오욕의 납덩어리를 삼킨 이 가슴은 무엇으로 풀 수 잇단 말야. 지이아이는 그저 재미있는 원주민 취객을 만나 거북하나 소박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뿐일 거야. 그런데 우린 무너가 말야. 그것을 두고 양키들 전부를 곯려 줬다고 생각하니 말이지. 아까 그 젊은 친구는 막걸리 한 잔과 날 두부 한쪽으로 월’가의 자본가들에게 일대 공격을 가한 것으로 알고 있어. 낮잠 자는 사람의 얼굴에 똥을 깔기고 좋아하는 똥파리새끼 같은 거지. 졌어,
완전히 졌어.”
윤은 탁자에 팔굽을 짚고 두 손을 펴서 얼굴을 쌌다.
“아까는 마치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더군. 좀살스레 혼자서 멋없이 까분 나 자신의 꼴을 말이지. 푸른 대문 집이나 산장 호텔이나……”
형운이 윤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그런 점이 없진 않지. 그러나 기를 쓰는 자네의 가슴 어느 구석에는 측은의 정이 깃들여 있지.” 형운은 이렇게 윤을 위로하고는 용수를 보며 말을 건넸다.
“아까는 문득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들은 얘기를 되살렸어. 노일 전쟁 때 바루 우리 고장에 카자흐 기병의 일대가 들어왔다는 거야. 로스케란 무흠하다면 무흠하고 신경이 둔하다면 둔한 편이지. 동네 애새끼들이 나무 꼬챙이를 로스케들 얼굴 앞에서 휘두르는 장난을 쳤다고 해. 무흠한 편인 로스케들이 애들보고 뭐라겠나. 더욱 그 무표정한 친구들이 말이지. 그대로 내어버려 둘 수밖에. 그런데 그것을 보고 어른들이 했다는 말이 들을 만하지. 녀석들 눈알이 파래서 나무 꼬챙이를 못 보는 모양이라고들 했다는 거야. 그래 말이 되나. 눈이 먼 놈들이 그래 몇만 리 길을 말 잔등에 앉아 왔단 말인가. 이런 족속들이거든 이놈 저놈 다 싸우라고 자기 터를 비워 주고는 앉아서 한다는 소리가 이런 게거든. 그렇게 도사리고 앉아서 천하 태평이었단 말야. 못났지, 참 지지리도 못났어.”
용수가 맞받아 한 마디 뇌었다.
“요즘 되어 가는 꼴두 그때와 다를 것 없는 것 같아.”
“촌놈이 한술 더 뜨는 격이야. 어떤 작자들은 이제 당장 동궁 습격이라도 할 것같이 서두르지. 어떤 녀석들은 또 자기가 뉴욕 한복판에 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어. 똥통이 굴러다니고 있는데 말이지. 창피한 줄을 알아야 해, 창피한 줄을.”
윤이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려 턱을 괴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남들이 뭐라 할까?”
“걱정할 것은 없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 말이지.”
“순익의 오해는 그대로 오해로 둘 수밖에 없겠지.”
“자식이 멋대로 생각하라고 하지.” 용수가 내던지듯 말했다.
“그러고 싶진 않아, 오랜 친구인걸. 틀려야 할 건덕지가 없거든.”
“물에 빠진 놈 구해 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란 얘기 못 들었어?”
형운이 용수의 말을 받았다.
“없는 보따리 보태려구 물에 빠졌던 걸 다행히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지. 누구나 핑계를 찾기가 어렵거든. 서방질을 하려는 여자에게는 남편의 매가 좋은 핑계가 된단 말이야. 순익은 깃발을 높이 드는 데 무슨 핑계가 필요했던 거지. 평청원의 죄도 아니고 물론 자네의 죄는 아니야. 자넨 하나의 제물이 된걸세. 가책을 느낄 건 없어.”
“핑계고 뭐고 나는 억울하지 않나?”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라구. 알고 보면 모두 억울하지.
태어났다는 것부터가 억울한 일인지도 몰라.”
윤은 박인을 두고 말했다.
“박인인가 하는 친구를 어떻게 생각해?”
“티없이 매끈하더군.”
“그러기에 말이지. 어떻게 되어서 그렇게 까딱없는가 말야.”
“자신만만한 품이 볼 만하더군. 눈에는 무한한 꿈이 깃들고 가슴에는 무쇠 같은 시년링이 담겨 있는 거지. 눈앞에는 탄탄 대로가 한없이 틔어 있고 무서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투야. 한 점 티없는 얼굴에 날씬한 몸매, 마치 희랍 조각의 아폴로상이지.”
“나는 그 맑은 눈매가 두렵더군.”
그 말을 들은 체 않고 형운은 연극 배우가 대사를 외듯이 이어 갔다.
“그가 거니는 발자국마다 붉은 장미가 피고 길이면 길마다에 인민의 환호성과 박수가 울려 나오게 마련이지……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런데……” 형운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다시 이었다.
“하루아침에 그는 와르르 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되지. 자기를 신에 비긴 오만의 벌이야. 돌이켜보면 발자국 바닥엔 꽃이 아니라 이웃의 핏덩어리요, 환호성과 박수는 아우성과 주먹질인 걸 알게 되지.”
“죽을 때까지 뉘우침 없이 버티는 수도 있겠지.”
“나두 그러길 바래. 일부러 끌어 내릴 것은 없으니까 말이지. 그러나 그렇게 될 때 그는 되레 사람답게 되고 우리와 가까와지는 거야.”
“그러나 그 인상만은 어쩔 수 없는 그자의 것이야.”
“그런 인상에 넘어가지 말게. 거긴 별다른 것은 없어. 그건 말쑥한 계집을 보고 느끼는 착각이나 매한가지야. 거기 보내지는 예찬의 눈길과 박수가 오히려 그들을 망치게 하는 거야. 티없이 맑은 눈으로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생각해 보게.”
“자네는 그저 날려고 하는 자를 땅으로 끌어 내리는 일방이군.”
“그들을 생각해서지. 자, 이런 공연한 소리 말구 술이나 마시지.”
용수는 일찍이 집으로 돌아간다고 도중에서 갈리고 윤만이 형운의 뒤를 따랐다. 번화가에서 벗어나 골목길을 더듬어 어떤 조그만 가게 앞에 이른 형운은 가만히 주인을 찾았다. 한참 후 나직한 대답이 있더니 안으로 문이 열렸다. 들어선 두 사람 앞에 머리가 왁자직 헝클어진 여인이 희미한 등불을 들고 있었다. 여인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말없이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이 나지막한 방으로 들어서자, 형운은 이부자리가 놓인 한 구석에 가서 펄쩍 주저앉았다.
“윤이 앉게.”
“어디야, 여기가?”
그때 밖에서 여인의 질질 신발 끄는 소리가 나자, 윤은 다시 형운에게 물었다.
“저 누구야?”
“나의 옛날의 날개 돋힌 천사지.”
“언젠가 얘기하던 그 처년가?”
“그래.”
“이렇게 된 사연을 말해 줄 순 없나?”
“못 할 것도 없지.”
형운은 담배를 한 대 붙여 물고는 뻑뻑 몇 번을 빨다 후욱 길게 연기를 천장으로 날려 보냈다.
“할빈에서 웬만치 살던 집 딸이지. 내가 어떤 일로 얼마를 떠나 있는 동안에 시집을 갔어. 상대는 일본 사람이었지. 전쟁이 끝났어. 남편은 어디론지 끌려가고 저 여자는 서울로 돌아왔지. 아버지는 죽고 계모는 자기가 갈 데로 가고 말았어. 지금 세 살 난 사내애 하나가 있지. 그것뿐야.”
“머 그렇게 싱거워.”
“나보고 소설을 꾸미라나. 얼마 전 우연히 종로에서 만났어. 이 집을 알게 됐지. 가끔 찾아와 술을 먹고 가는 것뿐야.”
“퍽 살림에 지친 모양인데?”
“통 말이 없어. 허는 수 없이 뱉는 외에는 도무지 얘기를 않는단 말야. 좀 얘기를 시켜 보려고 찾아오지. 아직 잘 안 되는군.”
그때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한참 부엌에서 수저가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술상이 들어왔다. 짠김치 한 사발과 오징어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여인은 곧 자기 방으로 건너갔다. 잠잠한 가운데 둘은 술을 마셨다.
“그저 우린 마시기만 하는군.”
“그 밖에 뭐 할 일이 있어?”
“술이 없었다면 어떡헐 뻔했지?”
“이렇게 있는걸.”
윤은 문뜩 상 밑에 떨어져 있는 종이 쪽지 한 장을 집어들었다.
“어, 이거 뭐야?”
“신문지 조각이군.”
“아냐, 형운.”
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건 호외다.”
“호외가 무슨 호외야.”
“보게, 또 껀이 생겼는걸.”
호외 조각을 받아 든 형운도 언뜻 눈을 치떴다.
“영감이 어찌 된 거야?”
“용수의 할아버지뻘되는 영감 아냐?”
“음, 웬만한 인물이었는데 기어코 죽었군.”
“전번에도 한 번 당할 뻔한 일이 있었는데……”
“너무 바른 소릴 했거든.”
“범인은 어떤 작잘까. 좌익일까?”
“그러지 않기를 빌지.”
“어째서?”
“용수에게 핑계가 생길 테니까.”
“용수도 깃발을 찾는단 말이지.”
“그렇게 되면 남는 건 우리들뿐인세.”
형운은 안방이 있는 쪽을 보고 나직이 말을 건넸다.
“이거 혁이 엄마가 얻어 왔소?”
대답이 없이 잠잠했다.
“호외는 아까 나갔다 얻어 온 거요?”
여전히 대답이 없이 부스럭 소리만이 났다.
“주무시오?” 형운은 눈썹을 치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안 주무시죠?’
“네.”
간신히 틀어 내는 듯한 여인의 음성이 찢겨 있었다. 형운은 한참 묵묵히 술을 마시다가 나직이 윤이 귀에 속삭였다.
“지금 몇 살인 줄 아나? 스물 두 살인데 가끔 대답한다는 음성은 저렇게 무덤에서 울려 오는 느낌이란 말야.”
“호된 마음의 충격을 받은 게로군.”
“난 가끔 밤에 찾아들면 이렇게 가져다 주는 술을 마시고 지폐를 몇 장 상머리에 찌른 뒤 인사도 않고 가게 문을 열고 하숙으로 가지. 한참 걸어가다 들으면 뒤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난단 말이야.”
형운의 얼굴에 처참한 빛이 흘렀다.
6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윤은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궤짝 깊숙이 묻어 두었던 권총을 꺼내 손질을 하고 있었다. 브로닝 권총은 손에 마침한 무게를 느끼게 했다. 차가운 감촉이 팔목을 시리게 했다.
삐걱하는 대문 열리는 소리에 윤은 흠칫 놀라며 권총을 이불 속에 찌르자 문을 비슷이 열고 밖으로 내다보았다. 흠박 비에 젖은 성호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드르륵 하며 건너방 장지가 열리며 행아의 긴장에 뜬 얼굴이 내어졌다.
“성호야!”
행아는 신발을 꿰기가 바쁘게 대청 마루에 가서 푹 주저앉아 버리는 성호한테로 뛰어갔다.
“너 어디 갔었니?”
고개를 푹 수그린 성호는 대답이 없었다.
“어디 갔었어?” 행아가 성호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달랬다.
“너 술을 먹었구나.”
성호가 그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요?”
“왜라니 성호 넌….” 행아의 얼굴은 금시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졌다.
“인석아, 너 어딜 갔다 이렇게 비를 맞구……”
뒤따라나온 성호의 어머니는 울상을 하며 비에 젖은 옷을 벗기려 했다. 성호는 어머니의 팔을 뿌리쳤다.
“그냥 두세요. 곧 또 나가야 해요. 누나나 어머니나 인젠 저한테 참견 말아요.” 행아는 크게 눈을 뜨며 딱 입을 벌렸다.
“인석아!” 하고, 성호 어머니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흥, 피가 흐를 텐데 울음은 다 뭐예요.”
성호는 좀 풀어진 눈으로 행아를 올려다보았다.
“난 누나를 원망해. 누나는 날 내버려 둬야 했을 거야. 꽃가지나 가꾸라고 한건 누나야. 새기르기를 가르쳐 준 것도 누나야. 남을 욕지거리 말고 착하게 되란 건 누나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었어.
그것이 더욱 나를 괴롭히고 있어. 어째 세차게 발길질을 하도록 버려 두질 않았어. 어째서 으스러지게 밟아 주도록 버려 두질 않았어.
어째서 참견을 했어?’
“성호야.” 행아는 울음 섞인 말소리로 동생을 불렀다.
“제발 옷 벗고 들어가 주어. 응, 성호야.”
“이젠 늦었어, 누나.”
성호의 뺨에 주르르 두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성호야.” 성호 어머니와 행아는 앞뒤에서 성호를 얼싸안듯 붙들었다.
그때 삐걱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쑥 성호 아버지가 들어섰다.
“웬일이냐?”
천천히 우산을 접으며 한군데에 얼싸안듯 웅크리고 앉아 있는 세 모자를 보자, 성호 아버지는 버럭 소릴 질렀다.
“뭣들이야, 이게?”
행아가 벌덕 일어서며 그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성호가 울고 있어요.”
“사내자식이 울긴.”
“왜요?” 행아가 대어들 듯 그 아버지한테로 다가섰다.
“전 남자들이 더 좀 울었으면 해요.”
“넌 입을 닥쳐라. 성호야, 어찌 된 거냐?”
성호는 비에 젖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아무것도 아녜요, 좀 술을 마신 탓이죠, 사내가 하는 일이니까요.”
“우릭나 어째 우냐?”
“어른이 될라니까 힘이 들어요.”
“어른이 될라면 울질 말아야지.”
“이것이 마지막 울음이겠죠.”
성호는 물끄러미 빗발치는 마당을 굽어보았다.
“방금 전 누나에게 역정을 냈죠. 이렇게 괴로운 것이 누나 탓이라구요. 그건 어리광을 피워 본 거죠. 그렇다고 아버지 탓도 아니죠. 전 아버지 말씀을 좇느라고 무척 애를 썼죠. 잘 되지가 않았지만 이럭저럭 동무들 뒤를 따라갈 수 있었죠. 이젠 무엇이 될 것 같기도 하죠. 지금이 마지막 고비죠. 이 고비만 넘기면 저도 어른이 되는 거죠. 그렇지만 아버지, 아직 결심이 안 가요. 그래서 이렇게 술 먹고 울게 된거죠. 글라이더 탈 생각은 깨끗이 버렸어두요.”
“아버지.” 행아가 애원하듯 그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성호보고 글라이더를 날리라고 말씀하세요. 제발 나가지 말라, 일러주세요.”
그렇게 애원하는 행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상한 빛을 담은 두 눈으로 성호를 쏘아보고 있는 성호 아버지는 나직하나 힘있는 목소리를 틀어 냈다.
“성호야, 지금 물러서면 안 된다. 힘을 돋구어야지. 지금 버티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생 죽어살이로 지내야 하는 거야. 이 애비를 봐 성호. 나처럼 되어서는 안 돼. 성호야, 죽지도 못하는 송장이 되어선 안 왜.”
성호 아버지는 눈길을 성호에게서 돌려 번갈아 행아와 그의 어머니를 훑었다.
“이런 건 여자들은 모르는 거다. 이 아픈 가슴을 모르는 거야.”
행아는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몸을 돌려서 마당을 가로질러 윤에게로 뛰어 왔다.
“저 아버지한테 좀 일러 줘요. 성호를 못 나가도록 붙들어 줘요. 아버진 어떻게 되었어요, 네?’
행아의 몸부림은 광란에 가까왔다. 윤은 덮어놓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허군.”
성호 아버지는 다가오는 윤을 팔굽을 들어 막는 시늉을 했다.
“가까이 오지 말게. 이건 나와 내 아들과의 문제야. 자네가 참견을 하면 안돼. 성호야, 벌떡 일어서라.”
그래도 성호가 그대로 푹 고개를 숙이고 돌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성호 아버지는 갑자기 우산을 어깨 높이에 메어들었다가 힘껏 기둥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일어서라니까. 못 일어서겠어?”
기둥에 부딪힌 우산을 박살이 되어 헤어졌다.
“아버지.” 하고 벌떡 성호가 일어섰다.
“안 간다는 게 아니죠, 아버지. 아버진 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질 모르실 거예요. 사내답게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다우냐 않느냐를 망설이고 있는 거죠. 덮어놓고 일어서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죠, 지금 가려는 거죠.” 성호는 후닥닥 빗발치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안 돼.” 행아가 소리지르며 뛰어내려가 성호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놔요, 누나.”
성호가 힘껏 밀어젖히자 행아는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쓰러진 행아는 휙 윤을 돌아보았다.
“좀 붙들어 줘요. 성호를 붙들어 줘요.”
행아는 몸을 일으키며 찢어진 목소리를 틀어 냈다. 성호가 휙 몸을 돌리며 절규했다.
“누나! 누나는 몰라. 가야 하는 거야. 사람이 죽게 된 거야. 내가 가야 하는 거야. 내가 안 가면 누가 죽게 되는 거야.
성호는 다시 몸을 돌려 대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성호야!”
행아가 성호의 뒤를 따랐다. 행아가 대문 밖으로 사라진 뒤 윤은 언뜻 정신을 거두고 마당을 뛰어내려 그 뒤를 쫓았다.
빗발 사이로 어느덧 어둠이 스며들어 골목은 컴컴했다. 연거푸 성호를 부르면서 따라가는 행아의 목소리가 차차 울음이 되어 갔다. 몇 고빈가 골목을 돌아서자 성호를 잃어버린 행아는 그만 땅바닥에 엎드려 버리고 말았다. 뒤쫓아 간 윤은 쓰러진 행아를 추세워 주고 성호가 사라진 길목을 따라 뛰어갔다.
한참 후 어둠 속에 성호를 잃고 하는 수 없이 되돌아가는 길에서 윤은 벽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고 있는 행아를 만났다.
“어떻든 일단 집으로 들어가죠.”
“아뇨, 성호를 찾아야 해요. 성호를 찾아 줘요.”
“옷차림을 하고 제가 다시 나가 보죠.”
“찾아 줘요, 꼭 좀 찾아 줘요.”
윤은 함박 비에 젖은 행아를 부축하고 골목길을 더듬었다. 윤은 피부로 스며드는 행아의 체온을 느꼈다. 감미로운 전율이 윤의 전신을 스쳐갔다.
우비를 걸치고 성호의 집을 나섰으나 그 길로 찾아볼 곳은 막연했다. 생각 끝에 경찰서를 찾아들었다. 마침 낯익은 사찰계 형사가 있었다.
“이렇게 늦게 웬일이오?”
“별 사고는 없는지요?”
“만날 사고투성이죠.”
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성호 얘기를 했다.
“무슨 잘못이 없을까 집에서 걱정들 하고 있었어요.”
“요즘 이곳 저곳서 민애청의 이탈자에 대한 제재가 성행하고 있죠. 그런 부류가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어떻든 잘 부탁합니다. 내일 아침 한 번 더 들르죠.”
경찰서를 나선 윤은 그 길로 형운의 하숙을 찾았다. 술이 만취한 형운이 옷을 입은 채 누워 있다가 윤이 들어서자, 구석지에 양초가 있으니 찾아서 불을 켜라고 했다. 촛불이 켜지며 방 안이 비치자 윤은 얼뜬 듯한 형운의 어슴푸레 뜨여진 눈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웬 술을 그렇게 했어?”
” 아냐, 늘 이렇게 먹는 놈이 아닌가.”
윤은 형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턱 언저리에 기다란 파열상을 발견했다.
“턱을 다쳤군.”
형운이 꾹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어서 부딪쳤나?”
“안 되겠어.”
“뭐가?’
“빠져날 길이 없어.”
그 음성은 마치 땅 속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뭐가 말야. 이 사람아.”
“몰리고 쫓기다 이젠 걸렸어.”
“이 사람 무슨 일야, 인천 일이 잘못 됐나?”
“그런 게 아냐.”
“그럼 뭐 걸렸단 말야?”
“내가 언젠가 누구나 남을 죽이고 싶어한다고 말한 일이 있었지.”
“그래, 흘리는 말로 그런 얘길 한 일이 있지.”
“나도 항상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어. 그런데 어린애만은 거기서 제외했던 거지.”
“그래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나?” 윤은 안타까운 어조로 다그쳤다.
“그만 애를 죽였단 말야.”
“무슨 소리야, 그런 헛소린 말게.”
“아니야 들어 줘, 윤. 내가 인천 떠나는 전날 자네와 함께 찾아간 가게가 있었지. 옛날에 나의 날개 돋힌 천사라고 말한 여자 말이야. 자네도 그 여자에게 세 살 난 애가 있었던 걸 알지. 이튿날 떠나기 전 그 집엘 들렀던 길에 애를 함께 데리고 갔었어. 그런데 그만 버스 안에서 그 애를 죽였어.”
“버스 안에서 죽이는 게 뭐야, 이 사람.”
“버스가 소사 가까이 이르렀을 땐가 봐. 난 서울서부터 줄곧 그애를 내 무릎에 앉히고 갔었지. 버스가 비틀거리더니 저편에서 다가오는 트럭과 맞부딪쳤어. 그때 말이지.” 형운의 입 언저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 차마 되새길 수가 없었어.”
“형운이.”
형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참 후 그 손을 거둔 형운은 멀거니 뜬눈으로 한참 촛불을 응시했다.
“그 순간 세차게 앞으로 밀려지는 아의 상체와 의자의 뒷녘 굳은 목판 사이에 애가 낑겨 들었단 말야. 버스가 정차했을 땐 벌써 늘어져 있었어. 죽어 있었단 말이야.”
윤은 숨을 죽이고 말끔히 형운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그 소리가 내 귓전으 띵세차게 두드리고 있지. 어린것 가슴이 부서지는 소리가 말야. 윤, 이전 글렀어.”
“형운이.” 윤은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그건 자네 탓이 아니지 않나. 허는 수 없지 않았나?”
“안 되지, 그런 핑계 가지곤 어림도 없지. 그 핑계 될 수 있는 것이 더 견딜 수 없단 말야. 그곳이 날 잡는 거란 말야. 나는 걔를 퍽이나 귀해했지. 손톱만큼도 미워한 일이 없단 말야. 몹시 나를 따랐기에 데리고 떠났고 귀엽기에 무릎에 놓고 갔단 말야. 그런데 어째 그애가 나의 체중에 눌려 죽어야 했는가 말야. 왜, 어째서?”
“형운이.”
“들어 보게. 걔 어머니란 내가 신경서 학교에 다닐 때 하숙을 든 집 딸이었어. 부모 모르게 서로 기약한 사이였지. 그런데 당시 나는 공산당 서클에 들어 있었어. 헌병들이 냄새를 맡았을 때 지령으로 누구 하나가 나서서 희생이 되도록 되었다는 거야. 내가 뽑혔지. 그런데 알고 보니 희생이란 검거되어 고역을 당하는 게 아니라 자수해서 부는 형식으로 최소 한도 희생으로 머물게 한다는 거야. 나는 펄쩍 뛰었지. 그러나 지령이라는 거지. 영광스러운 희생이란 거야. 그래 자수했지. 자수했다고 자유가 보장되는 건 아니었어 .당할 대로 당하구 개끌려 다니듯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던 끝에 막판에 학병을 나갔다 해방을 맞았어. 신경으로 돌아가 보니까 여자는 벌써 연전에 일인과 혼인을 하고 신경을 떠나고 말았다는 거야. 처음, 동지란 작자들에게 부탁한 편지는 여자의 손에 가질 않았어. 비밀이 탄로될까 싶어 일부러 불살라 버렸다는 거야.
맹렬히 따지고 들었지. 그랬더니 한다는 소리가 배반자가 되어 있는 자식이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거야. 정말 어이가 없더군. 무슨 주의에 산다는 놈들이란 대게 그렇지. 나는 부서진 가슴을 안고 서울로 왔지. 우연히 거리에서 그 여자를 만났어 .당황하는 기색이고 놀라는 기색이고 통 표정이 없고 말은 않는단 말야. 때때로 가게로 찾아가게 되었지. 나는 어떻게든지 그 굳어진 마음을 풀어 주려고 했어. 그런데 나는 그만 그 가슴을 산산이 부서 놓았단 말야.”
“형운이.”
“난 되는 대로 살아 온 놈야. 그래도 지금까지 요행히 걸리지 않고 살아 왔어. 그런데 이전 글렀어. 윤, 내가 언젠가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진단 얘길 했었지. 한 번 당한 줄 여겼더니 그게 아니고 이번 것이 진짜란 말야. 내가 먼저 걸려들 줄은 몰랐지.”
“형운이 그만하게. 난 자네보고 뭐라고 말하면 되겠나?”
“무슨 얘기고 나에겐 괴로울 뿐야. 혼자 그대로 버려 두어 주게.”
“혼자 두기가 두려운걸.”
“아냐. 집으로 돌아가 주게.”
“같이 있어서 안 될까?”
“글쎄 괴롭히질 말아 달래두.”
한참 동안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 세차게 퍼부어지는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윤은 지금 형운에게 한 마디로 들려 주어야 할 말이 무엇인가 하고 재빠르게 수백 개의 어휘를 뇌리에 스쳐 보내고 수십 개의 말 마디로 목구멍 안에서 굴려 보았다. 끝내 간신히 그 한 마디를 찾아 냈다.
“형운이, 죽진 마.’
형운이 눈을 지레감은 채 조용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린것을 죽인 후 나는 되레 삶을 생각해 봤지. 수백 번을 생각해 봐도 흐느적거리는 것이 희미해만 가더군. 죽음을 생각한 건 단 한 번분야. 그런데두 손에 쥔 참새처럼 분명히 느껴진단 말야.”
“그만.”
윤은 전신에 쫙 소름이 스치는 것을 느끼자 세차게 팔을 휘둘러 터져라 하고 함께 형운의 빰을 쳤다. 형운은 히뭇이 웃었다.
“고마워, 윤. 촛불을 끄고 가 주게.”
윤은 쫓겨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 어딘지 모르는 길을 한참 헤매다가 집으로 들었을 때 행아는 어머니와 함게 마루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뛰어와 문을 열었다. 윤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빗발을 쳐다보며 윤도 행아 모녀와 함께 성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며 무어라 소리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윤과 행아는 뛰어나가 대문 빗장 뽑았다. 함씬 비를 뒤집어쓴 중학생 하나가 뛰어들었다.
“큰일났어요.”
“조용히.”
“성호가 몹시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어느 병원인데?”
“김 외과예요.”
행아는 ‘앗’ 하고 짧은 비명을 올렸다. 윤은 행아에게 속삭였다.
“어머니한텐 알리지 말아요. 곧 같이 떠나죠.”
학생이 잡아 온 차를 몰고 김 외과까지 이르는 길에 행아는 얼뜬 사람처럼 거푸 중얼거렸다.
“용서할 수가 없어요. 성호가 죽는다면 아버질 용서할 수가 없어요. 용서할 수가 없어요. 성호가 죽는다면요.”
병원데 닿자 둘이 뛰어들 때 수술은 끝나고 있었다. 꿰맬 데를 꿰매고 치료를 끝낼 때까지 행아는 쭉 수술실에서 지킨다고 했다.
그 동안 윤은 대합실에서 학생을 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차근차근 얘길 해 봐.”
“성호가 희재나 저나 민애청에 가입했었죠.”
“너 몇 살이지?”
“전 열 일곱이죠.”
“그래 말을 계속해.”
“요즘에 와서 모두 투쟁 의욕이 떨어져 간다구 자극을 줘야겠다는 간부들의 모종 결의가 있었던가 봐요.”
“으흠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는 성분도 나쁘고 별로 의욕이 없어 보이는 세포원 한 명을 골라서 배반자로 몰아 따끔하게 맛을 보이자는 계획이 있었던가 봐요. 거기 희재가 걸렸죠. 걔 아버지는 군정청 관린데다가 별로 요즘 적극성을 띠지 못했죠. 집단 제재하는 멤버 가운데 성호도 저도 끼게 되었는데, 지령이라구 해서 성호가 먼저 단도로 희재의 허벅다리를 찌르게 됐어요. 그 순간 성호는 낯빛을 달리하더군요. 저와 성호와 희재는 가장 친했었는데 성호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도 무리는 아녜요. 밤 아홉 시에 사직동에 있는 빈 창고에 끌어다가 허벅다리와 어깨 두 군데를 찔러 반쯤 죽여 놓게 되었죠.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문을 닫고 안으로부터 자물쇠를 잠그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호가 자진해서 맡는다고 했죠. 그렇게 되어 희재를 창고에 몰아넣고 먼저 대표가 꾸며진 죄상을 낭독하자 희재는 벌써 반 죽은 사람같이 됐어요. 표결을 하게 됐죠. 다섯 명 가운데서 저도 하는 수 없이 손을 들었는데 성호만이 안 들쟎아요. 멤버들의 얼굴빛이 달라졌죠. 어떻든 다수결 통과로 대표가 성호에게 찌르라고 눈짓을 했어요. 성호는 한참 가만 있더군요. 그러더니 떨고 있는 희재한테로 다가갔어요. 찌르누나 했더니 그게 아니고. ‘희재야’ 하고 부르고는 얼른 열쇠를 쥐어 주는 것이 한가운데 피워 놓은 희미한 모닥불빛에도 똑똑히 보였어요. 성호는 또 한 번 크게 소리쳤어요. ‘기수야’ 하고 제 이름을 부르더니, ‘희재와 함께 도망쳐.’라구요. 저는 튕겨서 희재를 잡아 끌자 문이 잠긴 데를 향해 뛰었죠. 열쇠를 자물쇠 구멍제 찌르는 희재의 손이 벌벌 떨리며 제대로 들어가질 않아요. 제가 낚아채서 자물쇠를 열기가 바쁘게 문을 밀어젖히고 뛰어나갔죠. 성호만은 그냥 그 속에 갇혀 버렸어요. 순경을 데리고 갔을 땐 성호는 피투성이가 돼서 쓰러져 있었어요.”
“잠깐. 성호는 어째 빠져 나오지 못했을까?”
“좀 늦었던 모양이죠.”
“자네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막아 줬다고 생각되지 않나?”
“참 그랬는지도 모르죠.”
수술이 끝나고 병실로 옮겨진 뒤 윤은 의사에게 수술 결과를 물었다. 희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이 병실에 들어섰을 때 행아는 의자에 기대앉아 먼 눈을 하고 있었다. 윤은 조용히 말을 건넷다.
“제가 집에 돌아가 부모님을 모셔 올까요?”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거죠?”
“그런 게 아니라 어차피 아셔야 할 테니까요.”
“불러 올 것 없어요. 저 혼자 지키고 있으면 되는 거죠.”
“만일의 경우에도 혼자 된다는 말이오?”
“그래요.”
“어째 그렇게 오만해요?”
행아는 얼핏 고개를 돌려 말끔히 윤을 쳐다보았으나 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행아가 다시 저편으로 얼굴을 돌리자 윤은 눈길을 땅에 떨구었다.
“내가 지나친 말을 했소. 용서하세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아버지의 사랑이란 그런 건지도 모르죠. 아까 저는 문득 저의 부친을 생각했죠. 몹시 저를 못마땅해했죠. 시키는 대로 따른다고 했지만 마음에 탐탁지 않으셨던가 보죠. 부친의 분부대로 사범 학교를 거쳐 교원을 지냈죠. 해방 되는 날 저는 어디서 무엇을 한 줄 아십니까. 아직도 가끔 호랑이새끼가 나온다는 산악 지대의 벽촌에서 영양 불량으로 누렇게 얼굴이 뜬 어린것들을 데리고 산에서 솔가지를 따고 있었죠. 어린 놈에게 군가를 불리우며 마을로 들어왔을 때는 벌써 법석이었죠.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해지죠. 그때 나는 다시금 그런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니 결심했죠. 부친은 고향에 남아서 그대로 교원을 지내기를 원했지만 저는 이남으로 간다고 우겼죠. 끝내는 하는 수 없이 가라하시면서 어디 두었던 돈인지 상당한 금액을 꺼내 주시더군요. 해주로 가다가 어수선하기에 일단 고향으로 되돌아갔지요. 그때 부친의 얼굴에 비친 낙망과 노여움의 빛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히 떠오르죠. 못난 녀석이 무슨 낯짝으로 어정어정 되돌아왔는가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때리려구 하시더군요. 다시 그 길로 돌아서서 월남했죠. 저는 그때 오히려 깊은 부친의 사랑을 느꼈어요. 어제 저녁 성호 아버지가 우산을 기둥에 부딪쳤을 때 저는 문득 이북에 있는 부친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땐가 성호 아버지가 저를 불러서 같이 담배를 나누자고 하면서 성호가 자기 누나의 반만 되었으면 하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어요. 사랑이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거요.”
행아는 마치 석고상 모양으로 앉아서 꼼짝을 안 했다. 윤은 가만히 병실의 문을 여닫고 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가기를 재촉하는 자동차 안에서 윤은, 지금쯤 행아는 울음을 터뜨렸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성호 어머니만을 병원으로 보내 놓고 난 뒤 성호 아버지는 마루에 나와 앉아 그저 뻑뻑 담배만 빨고 있었다.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진 윤이 잠깐 잠을 설치고 일어났을 때 어느덧 날은 희미하게 밝아 있었다. 간밤의 비는 멎어 있었다. 성호 아버지는 한 밤을 앉은 채 드새운 듯 간밤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일곱 시가 지나 혼자 대문을 들어선 행아는 곧장 아버지가 앉아 있는 대청 마루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와 딸은 한참 동안 서로 말없이 건너다보기만 했다.
“행아냐?” 아버지가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제야 딸은 마루로 올라가 푹 주저앉으며 확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성호는 갔어요.” 행아의 목소리는 오히려 잔잔했다.
“녀석이 참.”
혼잣말로 한 마디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성호 아버지는 거북한 걸음으로 마루를 걸어서 안방으로 들어서려고 햇다. 휘청 그 몸이 기울며 한 손으로 기둥을 잡았다. 윤이 아 하고 느꼈을 때 성호 아버지는 쿵 하고 막대기처럼 마루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 행아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쓰러진 아버지를 부여안았다.
7
이름 모를 새가 한 마리 맑은 하늘 나직이 날아갔다.
새로 이루어진 무덤 앞에 윤과 행아는 앉아 있었다. 윤은 빈틈없이 자리잡고 있는 수없이 많은 무덤을 쭉 휘둘러보았다. 갑자기 행아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신문사를 그만두시고 딴 일을 하세요.”
“왜요?”
“싸우셨다죠?”
“같이 있노라면 때로 싸우기도 하죠.”
“전 얼마 전부터 신문은 안 보기로 했어요.”
“어째서요?”
“남자들이란 왜 그렇게 쓸데없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지 몰라요.”
“가령 어떤 일인데요?”
“신문에 나는 그 잘났다는 사람들 얼굴을 보세요.”
“왜요, 그게 어때서요?”
“그건 왜 실으세요?”
“그야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니까요.”
“누가 뭣 땜에 알고 싶어하는 거예요?”
“글쎄 그건……” 윤은 행아의 엉뚱한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전 그 얼굴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요. 침이라두 뱉고 싶어져요. 그래 그 사람들이 한다는 짓이 뭐예요?”
“그야……”
“그런 사람들은 모두 그 부인이나 자식들을 울리고 있을 거예요.”
“그렇진 않죠.”
“그럼, 남을 울리고 있겠죠.”
“그들이야, 자기도 웃고 남도 웃길려구 하는 거겠죠.”
“자기만이 웃게 되는 게 아녜요? 추켜올리는 사람들도 나빠요.
그러니까 더 우쭐대는 거죠.”
“그건 그렇지.”
“작년 제가 아직도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이었어요. 저희들이 강당에서 모임을 가지려구 모여 있었는데 급히 밖으로 나가라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쫓겨 났죠. 그 뒤로 우르르 사람들이 모여들더군요. 물론 모두가 남자들이죠. 여기저기 교정에 흩어져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시간도 못 돼서 야단이 났어요. 간간이 박수 소리가 나던 끝에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우르르 밀려나오면서 싸움질을 하는 게 아녜요. 보기엔 점잖은 분들인데 놀랐어요. 그 탓으로 저희들 모임이 늦어지고 모두 늦게 집으로 돌아가 꾸중만 들었죠.”
윤은 웃었으나, 행아는 새침했다.
“웃으실 일이 아녜요. 그때 전 여러 사람들한테 둘러싸이듯 교문 밖으로 사라지는 사람을 봤죠. 그 이튿날 신문을 보니까 그 사람 사진이 크게 나 있었어요. 그 밑엔 그 사람이 했다는 속없는 소리가 적혀 있구요. 글쎄 그게 뭐예요. 왜 그런 걸 내주는 거예요. 그래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어요.”
윤은 그저 듣기만 하며 잔디를 뜯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가 죽으면 장사를 지내고 야단을 하죠. 죽은 사람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잘났다는 사람은 누가 썼는지 모르는 글을 읽죠. 몇 번 연습을 했겠죠. 힘은 들 거예요. 조금도 슬프지 않은데 서러운 체할라니까요. 쌀가마니 갖다 주고 돈닢이나 주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죽은 사람이 되살아 나진 않쟎아요.”
행아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들을 하고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거예요. 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비오는 저녁, ‘누나는 몰라, 내가 가야 해.’ 하고, 눈물을 흘리며 뿌리치고 뛰어가던 성호의 뒷모습을 저는 못 잊을 거예요.”
윤은 무연히 먼산을 쳐다보았다. 행아는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을 이었다. 한참 후 울음을 그친 행아를 달래 윤은 산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윤은 신문사에 들러 봤다. 모두 퇴근하고 사회부장만이 혼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 허군, 어디 다 치웠어?”
“네.”
“수고했어. 이제부터 어디 갈 데가 있나?”
“머 별로 없습니다.”
“나하구 한잔 마셔 볼까?”
“거, 뭐.”
“왜, 술맛이 없을 것 같아 그러나? 사귀어 보면 그렇지도 애지.
가세.”
윤은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사회부장은 신문사 뒤 으슥한 골목으로 윤을 끌고 들어갔다. 납작 내려앉은 집 안은 컴컴했다. 기둥 두서너 개가 비스듬히 서로 힘을 받치고 있었고 문짝도 찌그러져 있었다.
“들어오게, 이런 데 술이 맛이 나지.”
사회부장은 방 한 구석에 가서 벌렁 주저앉았다.
“이런 데 버릇을 붙여야 해. 신문 기자란 죽을 때까지 별수 없는 거야. 그건 똑똑히 알구 들어야지.”
사회부장은 윤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자 드세.” 단김에 쭉 들이켠 사회부장은 윤에게 잔을 건넸다.
“자네 내가 못마땅하지?”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솔직치 못한걸.”
“좀 그렇긴 하죠.”
“하하하 됐어. 난 눈치가 빠르지. 하두 내가 싫은 소릴 하니까 모두 마다하지만 지나고 나면 나보고 고맙다구 할 거야.”
윤은 잔을 비워서 사회부장한테 건넷다.
“그젠간 내 좀 싫은 소릴 했지만 문제는 자기가 느끼는 것처럼 독자가 느끼냐에 있어. 그리구 말이 났으니 말이지 자네 그렇게 신문이란 게 대단한 건 줄 아나?”
“미국에선 신문이 들춘 탓으로 전쟁까지 일어났다면서요?’
“캐어 보면 신문만 가지고 된 건 아니지. 자넨 자네가 쓴 기사를 누가 제일 열심히 읽을 줄 아나?”
“글쎄요.”
“첫째가 자네지. 그 다음은 제호부터 광고까지 훑어보는 돋보기 낀 한가한 영감쟁일 거야. 보통 타이틀이나 보지. 자네도 2,3년만 지나면 안 읽게 돼.”
“그럼 기사 쓸 필요 없쟌아요?”
“체재상 필요하지.”
“어디 그렇기야……”
“그럼 내노라 하는 싱거운 친구들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내어거는 건 무슨 까닭인 줄 아나. 체재상 필요한 거지.”
“부장님두.”
“이런 부장 큰일났단 말이지?”
“아뇨.”
“신문 만드는 거나 사람 살아가는 것이 매한가지지. 산다는 걸 우습게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살고 있는 것처럼, 우습다고 생각하구 신문을 만드는 놈이 진짜 신문을 만들고 있는 거야.”
“나에겐 아직 한 가지 남은 꿈은 있지. 정치란에다간 커다란 말을 하나 그려 놓구 사회란을 하얗게 두어 둔 신문을 한 장 내보는 일이야. 문화란엔 이 종이로 쇠고기 한 근 싸 갈 수 있습니다라고 써도 좋지.”
“그렇게 되면 모두 밥 바가지가 떨어지겠군요.”
“밥 바가지 없이 잘 먹게 되겠지.” 사회부장은 벌써 얼굴이 붉어 있었다.
“한 가지 물어 보겠는데요, 부장님은 어떤 정치적 경향에 마음이 가나요?”
“그건 또 아주 엄숙한 질문인데. 내 우리 시골 아저씨 얘길 하지. 어느 날 시집을 보낸 딸 생각이 나서 괴나리 봇짐을 메고 길을 떠났어.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젊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대뜸 아저씬 우익이요 좌익이요 하고 묻더란 거야. 조금 생각한 끝에 먼저 우익이냐구 물었으니 그렇게 대답하는 게 무난하리라 믿구 우익이요 라고 대답했대. 그랬더니 이 영감쟁이가 낡아빠져 가지구 하면서 몽둥이로 엉덩이를 한 대 쳐 보내더란 거지. 엉덩이를 쓸면서 다음 마을에 들었는데 또 젊은이들이 우르르 영감님을 둘러싸고는 또 우익이요 좌익이요 하고 묻더란 거야. 아깐 우익이라고 해서 맞았으니 그래 이번엔 좌익이요 했다는 거지. 그랬더니, 이 영감쟁이가 늙어빠지구두 좌익이야 하면서 또 한 대 엉덩이를 휘갈기더란 거야. 두 번 봉변을 겪은 뒤 딸의 집을 찾은 영감님은 암탉 한 마릴 얻어먹구 돌아오는데 또 한 군데서 젊은이들이 우르르 우익이냐 좌익이냐고 하기에 이번에는 영감이 되물었다는 거지. 우익이라구 해야 안맞소, 좌익이라구 해야 안 맞소?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이건 기회주의자라구 또 한 대 안기더란 거야. 세 번을 맞으니 영감님 화가 났겠지. 고개턱에서 또 젊은이들이 둘러싸고 묻자 영감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대. 난 우익도 좌익도 기회주의자도 아니요. 난 죄가 없소 라고 말이지. 머 이것으로 대답을 때지.”
“하하하, 그건 부장님이 만드신 쇨군요.”
“아니, 실지 있은 얘기지.”
“아뭏든 요즘 세태는 살아나가기 어렵게 됐어요.”
“우리 마을에 사람만 만나면 가엾어라 가엾어라 하고 말하는 꼬부랑 할머니가 있었어. 그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 짚고 꼬부랑 고개를 꼬부랑꼬부랑 넘어가서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는데 그 꼬부랑 할머니의 말처럼 모두 가엾은 거지.”
“가엾다면 마다하는 사람도 있었겠죠.”
“그런 나쁜 놈들은 다 지옥으로 갔어.”
“하하하, 지옥이 어디 있어요?”
“아니 지옥만은 있어.”
“어째서요?”
“어디 나쁜 놈들이 편안히 죽어 없어져서야 되겠나.”
부장과 헤어진 윤은 그 길로 형운의 집을 찾았다. 주인은 이틀째 들어오질 않는다고 했다. 혹시나 하고 해방옥을 찾아갔다. 형운이 없었다.
윤은 혼자 술을 청해서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오늘은 일직 파하셨군요.” 주점 아저씨가 윤에게 인사 겸 말을 건넸다.
“형운일 못 보셨어요?”
“어제 낮에 잠깐 들렀다 별로 술도 안 마시고 나가던데요. 요즘 어디 몸이 편찮으신가 봐요.”
윤은 거푸 술을 들이켰다. 반 되나 흘려 넣었을 때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어슬어슬할 무렵 윤은 돌담 밑을 걷고 있었다. 미군 병사들이 수없이 다가오고 스쳐갔으니 윤은 조금도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다. 흥, 큰 건 큰 거고 작은 건 작은 거지.
돌담을 지나 일부러 가까이 거울 앞을 지나갔다. 슬쩍 거울 안을 스쳐 지나가는 누르스름한 친구에게 손을 들어 다정한 인사를 보냈다. 그 친구는 윤을 보고 히죽이 웃었다.
골목길로 들어서서 몇 고비를 돌아 푸른 대문 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젖어 있는 눈의 여자가 나오더니 빗장을 뺐다.
“다시는 오지 말랬쟎아요.”
“어디 그렇게 말대로 되나.”
“오늘은 안 돼요.”
“벌써 와 있군.”
여자는 고개를 주억주억 했다.
“내일 낮에 오세요.”
“회사 출근은 아닌걸, 술을 마셨으니 찾아오지.”
“어떻든 돌아가세요.”
“어디 가까이 친구가 없어?”
“이 양반이.”
“그래야 이리저리 얽혀서 더 가까와지지.”
여자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앞장서서 밖으로 나가며 따라오라고 했다. 몇 집을 건너서 안으로 들어갔던 여자가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윤보고 어서 들어가라고 일렀다. 엇갈려 나가던 여자가 음란한 웃음을 얼굴에 담으며 주먹으로 윤의 옆구리를 툭 쳤다.
조그만 방 안에서 여자는 점잖이 윤을 맞아들였다.
“잠깐 있다 가신다죠?”
“잠깐?”
“열 시가 지나면 안 돼요.”
“어째 이렇게 딱다거려?”
“딱다거리는 게 아녜요.”
“그럼 어서 자리로 들어가.”
여자는 곧 옷을 벗었다. 커튼이 드리워 있었으나 아직 방 안은 어슴푸레 빛이 있었다. 윤은 팔을 뻗어 와락 여자의 목을 그러안았다.
“안 돼요.” 여자는 가까이 가는 윤의 얼굴을 피했다.
“그래.” 윤은 잠시 동안 머뭇했다가 사납게 여자의 허리를 낚아챘다. 깜박 잠에 떨어졌는데, 여자가 윤의 몸을 흔드는 바람에 잠을 깼다.
“이젠 일어나세요.”
윤은 어슴푸레 눈을 떴다.
“왜? 아직 열 시가 안 됐는데.”
“이 양반이, 그때까지 계실래요.”
“그럼.”
“안 돼요, 이젠 가세요.”
“이건 정말 장작 삶은 맛인데.”
여자가 머리맡의 전등을 켜며 침대를 벗어나 거울 앞에 가더니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따라 일어난 윤은 담배를 한 대 붙여 물고 한참 물끄러미 거울 속에서 너울거리는 여자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리 얼굴을 돌려 봐요.”
“왜요?”
“당신 얼굴에 거 뭐요?”
“뭐예요?”
“그거 기미 아니오?”
여자는 처음으로 생긋 웃었다.
“왜요, 보기 흉해요?”
“아니 그게 아니구, 당신 전에 어느 골목에서 통역이란 자와 옥신각신한 적이없소?”
“통역이요?”
“그래, 미군을 끌고 와서 지프차를 세워 놓구 말야. 통역이 당신을 붙들고.”
“그런 일 없는데요.”
“젊은 친구 셋이 나타나 차구 때리구 한……”
“아뇨, 왜 그러세요?”
“아니 그저 물어 본 거지.”
“저 보름 전에 시굴서 서울로 왔어요.”
“그래, 그건 다행이군.”
윤이 돈을 치르고 문 밖으로 사라지자 유리창 너머로 보고 있던 여자는 한번 눈을 끔적하고는 날름 혀를 내어저었다.
큰길에 나서서 자동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골목에 있었는지 택시 한 대가 나타나더니 문을 열었다. 무심코 어두운 차 안으로 들어서려는 윤의 어깨를 억센 팔이 확 내어지면서 끌어당겼다.
“도둑은 아냐.”
“사람 잘못 본 게 아냐?”
“웬걸, 너 허윤이지.”
“어쩌자는 거야?”
“잔소리 말고 아가릴 닥쳐.”
자동차는 차 안의 불을 끈 채 종로를 지나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를 향해 달렸다. 한산한 거리를 지나 왼편으로 꼬부라지더니 얼마 안 가서 차가 멎었다.
윤은 밖으로 끌려 내려졌다. 사나이 셋이 어둠 속에서 윤을 둘러쌌다.
“너 까불지 마.”
“이유를 말해.”
“아직두 정신을 못 채리구! 잘 생각해 보면 알 거다.”
“민애청 창고 사건.”
“흥.”
“이철이.”
“자식이.”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날아온 주먹이 윤의 얼굴 한가운데를 쳤다. 윤은 아찔한 것을 느꼈으나 손에 잡히는 옷소매를 낚아채며 기울어 오는 몸이 허리에 얹히는 순간 몸을 틀었다. 철썩 땅에 뒹구는 소리가 났다. 곤봉이 날아와 윤의 어깨를 쳤다. 탁 무릎을 꿇는 순간 구둣발이 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욱 하고 윤은 벌렁 뒤로 자빠졌다. 연거푸 머리, 가슴, 배, 다리 할 것 없이 윤은 주먹과 곤봉과 발길질의 세례를 받고 어두운 땅 속 깊숙이 떨어져 가는 의식이 어느 일순 훅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의식을 회복했을 때 윤은 어느 주막집 희미한 등잔 불의 조그만 방에 뉘어져 있었다.
“좀 괜찮으세요?’
올려다보는 눈 위에 뜻밖에도 단정한 박인의 얼굴이 미소를 머금고 굽어보고 있었다. 윤은 팔꿈치를 세우며 일어나 앉았다. 얼굴을 얼얼했고 옆구리가 몹시 결렸다.
뻐득뻐득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손바닥에 검은 피가 묻어 나왔다. 입 속에 무엇이 든 것 같아 훅 뱉는데 부러진 아랫니 한 대가 피에 엉켜 튀어 나왔다. 윤은 박인을 건너보았다.
“이렇게 거들어 줘 고맙소.”
“지나가다 사람이 쓰러져 있길래 봤더니 형시가 아녜요. 제 하숙이 바루 그 길 너머거든요, 놀랐어요. 사람을 불러서 가까운 이곳으로 옮겼죠. 몹시 다치셨군요. 아프시죠?”
“옆구리가 좀 결릴 뿐이죠.”
“병원으로 옮기시죠.”
“아뇨, 좀 누웠다 가면 됩니다.” 윤은 다시 몸을 뉘였다.
“박형, 어떻게 이 신세 갚음을 해야 할까요?”
“머, 제가 당했을 때 나타나 주시면 되죠.” 박인은 명쾌하게 웃었다.
“어디 형씨가 이런 일 당해서야 되겠어요?’
윤은 히죽이 웃었다. 얼굴 가죽이 당겨지는 것 같으면서 아팠다.
“그럼, 전 가야겠어요. 주인한텐 제가 얼마를 드렸으니까요. 그런데 혼자 괜찮겠어요?”
“아, 가 보세요. 조금 누워 있다 차를 타면 되니까요.”
박인은 한 번 빙긋이 웃고 일어섰다.
“이거 여러 가지로 안됐어요.”
박인이 나간 후 한참 누워 있던 윤은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활랑활랑 뛰었다. 재빨리 조각진 생각을 맞추어 갔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본 듯 선명했다. 윤은 허허허 맥없는 웃음을 틀어 냈다.
“머 신세 갚음은 제가 당할 때 나타나 주시면 되죠.”
‘그 상냥한 웃음, 그들은 지금 웃고 있겠지.’
윤은 등어리가 오싹했다. 어거지로 일어나서 세숫물을 청해 얼굴을 다꼬 길가로 나와 차를 집어 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행아가 누구한테선가 전갈이 있더라고 하면서 한 장의 종이 쪽지를 내어 밀었다.
‘부탁이 있네. 한 번 언젠가 같이 갔었던 가게로 와 주게.’
순간 불길한 예감이 번개처럼 윤의 뇌리를 스쳐갔다.
“얼마나 되었죠?”
“나가신 바루 뒤예요.”
윤은 목에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틀어 냈다. 바보, 바보, 그런 눈치도 못 채고 하고 윤은 마음 속으로 우둔한 자기를 저주했다.
가게 앞에 이른 윤은 한참 동안 거기 버티고 서 있었다. 마음을 일으켰다가 가만히 한 번 불러 보았다.
“아주머니.”
다음은 주먹으로 몇 번 가게 문을 두드렸다.
“형운이, 아주머니.”
윤은 언성을 높였으나 어두운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문고리를 잡고 밀어 보았다. 덜컹 문이 열렸다. 후닥닥 윤은 안으로 들어섰다.
“아주머니.”
대답이 없었다.
“형운이!”
역시 조용했다. 윤의 전신에 뒤이어 전율이 흘러갔다. 윤은 성냥불을 그어 가지고 도둑 걸음으로 가게를 거쳐 마당으로 나섰다.
“아주머니.”
“형운이! 나야.”
윤은 다시 성냥 한 개비를 그었다. 마루로 올라섰다. 잠시 서서 눈을 감아 보았다. 전신이 떨렸다. 안방 장지의 고리에 손을 대고 드윽 밀어 놓았다.
또 성냥이 꺼졌다. 다시 한 개비를 그어서 팔을 쑥 안으로 들이밀었다.
“형운이!”
윤은 돌처럼 굳어서 한참 방 안에 가지런히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 두 사람을 굽어보았다. 여자는 형운의 한 팔을 베고 있었다. 윤은 성냥불이 손끝을 타 들어 가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이 꺼질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 그는 다시 한 개비를 켜서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서서 전등 스위치를 비틀었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여자의 눈이 조금 흡떠 있었다. 윤은 손가락으로 그 눈을 내리쓸어 주었다.
윤의 마음은 오히려 찾아 조용히 머물러 갔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두 사람의 얼굴을 굽어보았다. 머리맡에 종이 뭉치가 놓여 있었다. 그 속에는 지폐와 한 장의 종이조각이 들어 있었다.
윤은 지폐를 놓고 종이조각을 펴서 전등불에 비쳐 보았다.
‘윤, 오래오래 같이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형운이!”
그제야 윤의 두 눈에서 화르르 눈물이 방울 져 떨어져 내렸다. 윤은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여보게, 나는 어떡허라나 형운이.”
윤은 죽은 형운의 머리맡에서 꼼짝도 않고 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용수가 기별을 받고 달려왔다. 경찰이 오고 의사가 왔다. 영구가 일단 병원으로 가게 되어 가게를 떠난 후 덩그런 방 안에 남은 윤과 용수는 한참 서로 말없이 마주보았다. 용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식이나마 장례를 치러 줘야지.”
“장례비는 놓고 갔어.”
“자꾸 둘레가 쓸쓸해지는군.”
“마음이 비는 느낌이야.”
“해방옥도 갈 맛이 없게 됐군.”
“학병단 일은 잘 되어 가냐?”
“차차 자리를 잡고는 뿔뿔이 헤어지고 있지. 나도 어디든 발붙일 곳을 찾아야겠어.”
“그건 좋은 일야. 난 도무지 마음 둘 곳을 못 찾겠어.”
“자네야 신문사가 있쟎나.”
“발은 거기 붙어 있는 셈인데 마음이 떠 있단 말야. 있어야 할 뭔가가 나에겐 없어.”
“형운이가 깃발이라고 말하던 그것 말인가?”
“깃발!” 하고, 윤은 나직이 입 속에서 뇌어 보았다.
8
“자! 이 패가 광장을 떠난 시각과 이 패가 운동장을 떠난 시작은 이렇단 말야. 코스는 이렇게 되어 있어.”
사회부장은 지도 위에다 색연필로 줄을 그었다.
“그르니 30분 뒤면 이 로터리 부근에서 만나기 마련이야. 그런데 양쪽 선두와 선두는 마주치게 되지 않을 거야. 한가운데 경찰과 엠피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욕지거리쯤 오가겠지. 충돌한다면 로터리의 이편 아니면 저편일 걸세. 멋진 사진이 찍혀질 걸세. 이런 건 찍어서 오래 두어 두면 값나가는 재산이 될 거야. 알았지? 자, 가 보게.”
윤은 사진 기자와 함께 신문사를 뛰어나와 사회부장이 말하던 로터리로 갔다. 거기 웬만한 장소를 잡고 기다리기로 했다.
로터리 부근은 죽은 듯 고요했다. 하늘은 어디까지나 푸르러 있었다. 패트롤카가 한 대 로터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조금 후 트럭이 오고 무장한 경찰관들이 십여 명 우르르 쏟아져 내리더니 쫙 흩어져 여기저기에 깔렸다. 엠피차 한 대가 사이렌으 울리며 나타났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왼편 저 멀리서 환성이 쏴악 밀물처럼 들려 왔다. 거푸 부르는 만세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것이 그치자 드높은 노랫소리가 울려 왔다. 윤은 저도 모르게 전신에 쭉 소름을 스쳐 보냈다.
“앗, 앗, 앗.”
갑자기 짧게 끊어지며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세 번 로터리 오른편에서 터져 나왔다. 윤은 획 그리로 몸을 돌렸다.
벌써 대열의 선두가 나타나 있었다. 무수한 깃발과 플래카드가 대열의 머리 위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붉은 깃발이 크게 한 번 좌우로 흔들려지자 청년 한 명이 대열에서 후닥닥 뛰어나오더니 날새게 몸을 돌려 번쩍 주먹 진 팔을 들며 구호를 외쳤다. 대열 머리 위에 수 없는 주먹이 솟아오르며 군중은 그 구호에 따랐다. 또 한 명이 뛰어나왔다. 그는 손에 틀어쥔 모자를 흔들며 크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전 대열의 합창으로 변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여라.’ 그것은 노래라기보다 노호에 가까왔다.
그때 갑자기 로터리 왼편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윤은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대열의 선두에 휘날리는 태극기와 높이 올려진 플래카드는 물결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만세 소리가 멎자 맞은편에서 들려 오는 노랫소리를 제압하려는 듯이 아우성처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적색의 무리들은 물러가거라.’
제각기 노래를 고창하며 두 대열은 로터리를 끼고 돌았다.
한쪽이 노래를 갈았다.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그러자 곧 또 한쪽이 그에 응수했다.
‘시베리아로 끌려간 형제여.’
서로 악을 다투는 노래는 마구 뒤섞여 얼버무려지고 있었다.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이북에.’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어라.
깃발을 덮어 다오 붉은 깃발을.’
로터리를 돌고 나자 선두와 선두는 모두 상대방의 대열과 가까이 접근하여 엇갈려 가게 되었다. 서로 쏘아보고 주먹을 가히둘렀다. 욕지거리가 오고 갔다.
“반동.”
“빨갱이.”
“개자식.”
“로스케 앞잡이.”
“양키 주구.”
“머?”
“어째서?”
오른쪽으로 밀려간 대열의 선두에서 우람찬 청년 한 명이 저쪽 편 대열 속으로 뛰어들더니, 크게 휘둘러지고 잇?는 붉은 깃발을 낚아채자 깃대를 무릎에 대어 두 동강으로 꺾어 버리고는 두 손으로 깃발을 잡아당겨 쫙 찢어서 땅에 동당이치고 거기다 탁 침을 뱉었다.
“자식!”
“죽여라!”
삽시에 양편 군중은 뒤섞이며 치고받고 걷어차고 굴리고 굴리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삽시에 전 대열에 파급해 갔다. 플래카드는 쓰러져 땅에 뒹굴고 작고 큰 깃발은 너저분히 땅에 널려졌다. 무수한 구둣발이 그 위를 마구 밟았다. 피가 뿌려져 땅에 흘렀다. 비명과 노호가 로터리 위를 회오리바람처럼 감돌았다.
탕! 경관이 쏜 총 소리가 둘레의 건물에 울리며 메아리는 메아리를 일으켜 갔다. 총성은 도리어 불길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와아 하고 군중은 아우성쳤다.
“쐈구나!”
“쏘기냐?”
탕탕 총성은 연이어 튀었다.
윤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윤은 언뜻 오른편 저만치 난투가 벌어지고 있는 도로 가까운 건물 계단에 수두룩이 버티고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일단을 보았다. 뛰다시피하여 그리로 다가갔다. 강태와 이철이 그 한가운데 끼여 있었다.
이철이 강태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얼음같이 냉랭한 표정으로 강태는 그저 끄덕끄덕 턱을 저었다.
길 한가운데로 눈길을 돌린 윤은 거기 소년 한 명이 주저앉은 채로 난투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이리 굴리우고 저리 채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굴리우고 채면서 무엇인지 땅 위에 깔린 것을 꽉 손으로 움켜잡고 있었다.
윤은 다시 휙 시선을 강태 일행에게로 돌렸다. 이철이 카메라를 든 청년 하나를 붙들고 손가락으로 난투가 벌어지고 있는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청년은 알았다는 시늉을 하고 몇 걸음 앞으로 나가더니, 한 군데에 카메라를 겨누고 셔터를 눌렀다.
윤의 혈관에서 피가 역류했다. 일순 눈앞이 아득했다. 다음 순간 윤은 저도 모르게 난투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갔다. 뛰어들자 쓰러져 있는 소년 가까이로 다가가서 덥석 그 덜미를 추켜들었다.
어디서 주먹이 날아와 윤의 가슴을 쳤다. 윤은 욱 하고 느끼며 뒤로 자빠지려는 몸을 가누어 덮어놓고 소년을 난투 밖으로 잡아끌었다. 몇 번 뒤통수를 얻어맞고 허리와 다리를 채었다.
소년을 끌어 내고 크게 한숨을 내어쉬었을 때 강태와 이철의 일행은 섰던 자리를 떠서 윤의 눈앞을 스쳐 저편 골목을 향하여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멍하니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살피고 있는 윤의 귀에 이리로 달려오는 지프차의 경적 소리가 들렸다. 윤은 소년을 들쳐 업고 강태와 이철이 사라진 반대편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한참 골목을 달리던 윤은 그만 휘청이는 다리를 꿇고 말았다. 소년의 몸이 그의 등에서 흘러내려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거기 윤은 그 소년의 손에 그러쥐어진 붉은 깃발을 보았다. 윤은 한참 동안 망연히 쓰러진 소년을 굽어보았다. 또 한 번 그의 피가 역류했다.
확 붉은 깃발을 낚아채 뚤뚤 말아서 아직 오줌 자국이 흥건한 전신주 밑에 내동댕이쳤다. 한참 동안 사납게 어깨를 들먹이며 숨을 드내쉬고 난 윤은 다시 소년을 등에 업고 골목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소년을 어느 조그마한 병원에 맡기고 신문사로 돌아간 윤은 기사를 써 내고 나서 곧 사를 나와 버렸다.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머리에 붕대가 감겨진 소년은 생각하던 것보다 기운이 있어 보였다. 소년은 잠시 윤을 올려다보고 이다가,
“고마워요, 아저씨.”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집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집이 어딘데?”
“마포예요.”
“그 몸으로 갈 수 있을까?”
“괜찮어요, 이것쯤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소년의 집은 마포 끝 저만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토막 같은 가밑들이 들어차 있는 한가운데 끼여 있었다. 좁은 골목의 시궁창에서는 몹슬 냄새가 나고 머리에 붕대를 감고 지나가는 소년을 신기로운 눈치로 올려다보는 어린이들의 옷차림은 남루했다. 소년의 어머니와 올망졸망한 동생들은 뛰어나왔으나 그의 아버지는 방 안에 앉은 채 윤을 맞았다. 월여 전에 일터에서 다리를 다쳤는데 아직 일어나기가 여간 거북하지 않다고 했다.
“고마운 말씀은 이루 다 할 수 없습니다.”
공손히 얘기하는 소년의 아버지의 얼굴에는 너무나 많은 주름살이 홈처럼 파져 있었다.
“별말씀을 다. 전 신문사에 다니고 있는데요, 마침 취재하기 위해 거길 갔다가 이렇게 된 거죠.”
웃방 문틈으로 어린것들이 쪼록한 눈을 하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고, 윤이 누워 있는 소년에게 눈길을 돌리자 그의 아버지는 얼른,
“명철이라고 부르죠.”
하고 소년의 이름을 알렸다.
“어느 학교에 다니고 이나요?”
“학교가 다 뭡니까?”
뱉듯이 말하는 명철 아버지의 어조에 윤은 마음 속으로 아차 했다.
“그럼 어디 직장이라두?”
“기와 공장에 나가 잔일이나 거들고 있습죠.”
“그런데……” 하고, 윤은 잠깐 다음에 이을 말을 망설이다가,
“오늘 같은 데 끼여들지 않도록 잘 명철 아버지께서 일렀으면 생각하는데요.”
“그저 자기가 따라나선 거겠죠.” 명철 아버지는 시무룩히 말했다.
“그러다가 욕을 보거나 큰 화를 입으면 어떡허시겠소?”
“욕이야 보고 있고 화는 지금 당하고 있는걸요.”
윤은 명철 아버지의 내어던지는 투의 어조에 또 한 번 놀랐다.
“이렇게 고맙게 해 주신 선생님 앞에 숭늉 한 그릇 대접 못 하고 이런 소릴해서 미안하오만 어디 이걸 사람이 사는 꼴이라고 말할 수 있을라구요.”
손 둘 곳이 허해진 윤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무심코 도로 집어넣으려다 얼른 명철 아버지한테 내어밀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문 명철 아버지는 시원스러이 후욱 한 번 연기를 토하고는,
“이렇게 궐련을 피워 보는 것도 몇 달 만이죠.”
하고 혼잣말처럼 뇌었다. 윤은 얼른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선생님 고향은 어디시죠?”
“이북입니다. 왜 그러시나요?”
“네에, 그러세요? 조금 말씨가 다른 것 같아서요.”
하고, 한참 동안 담배만 빨고 앉았던 명철 아버지는 무거이 입을 열었다.
“이북에서 오신 지 오래 되시나요?”
“학교 다닐 때 와 있었구, 이번 오기는 해방 다음 해 이른봄이죠.”
“이북은 살기가 어떤지요?”
“예?”
“선생님께니 말입니다만, 우리 같은 놈들은 퍽 살기 낫다고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윤은 선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네, 그건, 글쎄 어떻다고 말씀드려야 할는지.”
“그저 그런 말을 들으면 저희 같은 놈들은 공연히 솔깃해져서요.”
낮은 천장에서 갑자기 세차게 달려가는 쥐 소리가 나자 후루루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그때 소년이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이 늙은 것이 아직 노동벌이를 해서 먹을라니 이젠 몹시 힘이 들어요. 거기에다 웬 새끼들만 저렇게 삐져 나와 가지구 이렇게 몸까지 다치니 그런 말엔 귀가 솔깃해지기도 하는 거죠.”
“요즘은 쭉 일에 손에 못 대시는군요.”
“저것이 벌어 오는 것 가지구 그저 죽을 쑤어서 끼니를 넘기죠.”
누워 있는 명철을 턱으로 가리키는 그 아버지의 얼굴은 처절했다.
“제 자식이라 그러는 게 아니라 저것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똑똑했죠. 거르는 날이 많으면서도 소학교에서는 늘 세째를 내리지 않았지요. 그런 걸 4학년에서 내려서 기와 공장으로 보냈죠. 이런 못난 애비 만난 죄겠죠.”
“그야 어디, 어떡허겠습니까?”
“물론 어떡헐 수야 없는 일이죠. 그러나 애비 된 마음으로는 어떻게든지 해서 공부를 시키고 싶었죠만 어디 어떻게 할 수가 있었어야죠.”
명철 아버지는 가나끝이 탈 정도로 바투 담배를 빨고 아까운 듯이 깡통 재떨이 속에 집어넣었다.
“어떻게 해야겠다 어떻게 해야겠다 하면서 애쓰는 것은 벌써 39년이 넘는데 주변 없는 놈이라 아직 이 꼴이죠.” 긴 한숨이 그 입에서 새어 나왔다.
“시골서 봇짐을 지고 떠날 때부터 생각하던 일이죠. 시골서 부친한테 붙어서 소작을 지어 먹다가 그것도 헐 수 없게 돼서 어떻게 되겠지 하구 서울로 올라와 노동판을 싸다니다 보니 그만 이 꼴이 되고 만 거죠.”
“몹시 어려우셨겠죠.”
“어떻게 헤어 나갈 재간이 없었죠. 뼈다귀가 부러지도록 해 봤지만 그게 그거란 말예요. 지치고 지쳐나니 미련한 생각에 그저 어떻게든지 세상이 좀 달라졌으면 해 보는 거죠.”
“물론 달라져야지요.”
“그래 전 저놈이 하는 걸 그대로 두어 두죠. 제깐엔 뭐 한다는 거죠. 저런 꼴이 되어 들어오는 걸 보면 이 늙은 가슴은 찢어질 듯하죠만.”
명철 아버지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달리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저놈을 위해 좋을 것이려니 하고 꾹 참죠. 나같이 살다 죽어서야 버러지나 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선생님.”
말없이 듣고만 있던 윤의 가슴은 써늘했다. 눈길을 둘 곳이 없어 한참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던 윤은 누워 있는 소년의 머리맡 벽에 붙어 있는 퇴색 한 두 장의 사진을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윤은 무심한 듯이 물어 보았다.
“저 사진은 명철이가 오려 붙인 건가요?”
“아, 저 강태 선생과 이철 선생 사진 말씀입니까. 저것은 신문지에서 오려 붙인 거죠. 늘, 그 두 선생만을 높이 모신다고 야단입니다. 저 두 분 선생이 힘써서 좋은 세상이 오게 된다구요.”
윤은 더 이상 버티고 앉아 있을 기력이 없었다. 명철 아버지에게 한 번 명철이를 신문사로 놀로 보내라고 말하고 그 집을 나와 버렸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명철이 신문사로 윤을 찾아왔다. 붕대도 풀어지고 상처와 부증이 가시 나명철의 얼굴은 단정했다. 재기 어린 두 눈이 스스로 웃음을 담고 있었다. 윤은 명철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점심 먹었어?”
“점심은 안 먹는 버릇이에요.”
“그럴 수 있어? 내 한턱 하지.”
“그만두세요 아저씨, 공연히 돈만 쓰시구.”
윤은 명철을 끌고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다.
“무얼 먹겠어?”
“전 그저 밥이면 돼요.”
“아니 뭐든지 맛있는 걸 먹어.”
“너무 비싼 걸 먹으면 배탈이 나요.”
“걱정 말어.”
“전 밥이면 돼요.”
윤은 백반을 둘 시켰다. 윤은 반 그릇이나 먹고 수저를 놓았는데, 명철은 차근차근 말끔히 한 그릇을 비웠다.
“더 먹지.”
“아아뇨, 잔뜩 먹었어요.”
윤은 명철을 데리고 창경원으로 갔다. 창경원은 몹시 한산했다. 윤은 명철과 함께 이리저리 거닐면서 먼저 무슨 말부터 건넬까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명철인 어떤 사람을 숭배하지?”
“외국 사람이요? 우리 조선 사람요?”
“어딧 사람이건.”
명철은 얼른 대답했다.
“외국 사람으론 링컨이죠.”
“링컨?”
“네, 왜 오막살이에서 나 가지고 대통령까지 됐쟎아요.”
“그렇지. 그럼 조선 사람 누구야?”
명철은 선뜻 대답했다.
“그건 강태 선생님과 이철 선생님이죠.”
예상했던 대답이었으나 윤은 마음이 선뜩했다.
“링컨과 강태, 이철은 좀 이상한걸.”
“왜요, 링컨은 불쌍한 흑인들을 위해 싸웠구, 강태 선생님이나 이철 선생님은 지금 어렵고 불쌍한 인민들을 위해 싸우고 있쟎아요.”
“글쎄, 링컨은 높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강태 선생님이나 이철 선생님이 얼마나 훌륭하시다구요.”
“어떻게 훌륭한데 그래?”
“강태 선생님은요, 공장 애들 얘기가 옛날엔 저희들처럼 기와 공장에서 일했다는 거예요.”
“오, 그래서 그러나?”
“아뇨, 노동하신 것도 훌륭하시지만 선생님은 지금도 어떤 점심을 잡수시는지 아세요?”
“어떤 것을 먹는데?”
“선생님은 점심에 식빵 한 개와 냉수 한 그릇밖에 안 잡수셔요.”
“그건 식성이 좋지 못하신 모양이군.”
“그게 아니죠. 그건 노동자나 농민을 생각하고 그러시는 거죠.
선생님 말씀이, 우리 노동자나 농민은 끼니를 굶는데, 그것도 자기에게는 과하시다고 말씀하신대요. 선생님은 그 식방을 책상 서랍에 넣고 때때로 생각나시면 뜯어 잡수시기에,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이 몰래 책상 서랍에 식방을 더 넣어 두신다고 해요. 선생님은 그걸 모르고 다 잡수시기에 건강은 괜찮으시단 거예요. 어떠세요?”
“저녁에 집에 가 맛있는 걸 잔뜩 먹겠지.”
“아저씨두 그가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근데 그건 강태 선생이 그러기 전에 옛날 러시아의 레닌이 그랬어, 그 숭내를 내는군.”
“네, 레닌요!”
“그런 일 가지고 놀래선 안 되지. 이철 선생은 어떻게 훌륭하신가?”
“이철 선생은 너무 바쁘셔서, 댁에 들어가시는 일이 한 달에도 며칠 안 된다는 거죠.”
“바빠서? 집엘?”
다음 순간 윤은 턱을 젖히고 웃기 시작했다. 그의 뇌리를 재빠르게 산장 호텔과 18호실과 윤임의 얼굴이 스쳐갔다.
“왜 그러세요?”
그래도 윤은 더 웃음을 이어 가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예사로와질 수 있었다.
“왜 웃으셨어요?” 명철이 의아를 품은 얼굴로 물었다.
“아냐, 그저 웃었지. 그런데 명철이.”
“네.”
“너 요전에 시위 행렬에 참가했었지?”
“전 대열의 맨 선두에 섰었죠.” 명철은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참가했었니?”
“그것이 하나의 투쟁이거든요.”
“무엇 때문에 투쟁을 해야 하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선 투쟁밖에 없나?”
“투쟁을 해서 이겨 내야 잘 살 수 있게 되죠.”
“글쎄……”
“왜요? 아저씬 가난한 사람들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물론 가난한 사람이 잘 살게 돼야지.”
“그럼 투쟁해야죠.”
“그럼 우리 같이 생각해 보자. 너는 그날 신발을 잃었지?”
“그만 넘어졌을 때 벗겨졌나 봐요.”
“그러니 너는 그만큼 손해 본 게 아니냐?’
“아니죠. 제 생각만을 하면 조그만 손해지만 인민 전체를 두고
생각하면 이로운 거죠.” 명철의 대답은 단호했다.
“글쎄……”
“그건 분명한 이치죠. 그러니 얻어맞으면서라도 싸워야 하는 거죠.”
“그럼 그때 강태 선생이나 이철 선생은 어째 안 싸우고 구경만
하다가 가 버렸나?”
“그건 아니죠. 그 선생님들은 몸을 조심해야죠. 나오신다 해도
말려야죠. 그런 선생님들이 다치시거나 하면 큰일이죠.”
윤은 잠시 동안 대꾸를 못 했다.
“명철이.”
“네.”
“나는 하루에도 몇 번 생각하구 또 생각해 보지만 아무래도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그건 아저씨는 잘 지내고 계시니까 그러시죠.”
“그건 아니다 명철이. 아저씨가 잘 사는 탓은 아니야. 나는 농민의 아들이야. 아버지는 젊었을 때 남의 땅을 부치다가 50이 넘어서야 겨우 조금 자작을 하게 된 농민이야. 나도 웃학교는 갔지만 돈이 안 드는 사범 학교를 나왔지. 난 될라면 이북서 얼마든지 공산당원이 될 수 있었어. 내 사범 학교 친구 가운데는 된친구가 많지. 그런데 난 꼭 비위에 어긋나는 싫은 게 있었어. 어떻든 못 살은 것이 누구 때문이든 별로 자랑할 것이 없는데 그것을 자랑하고 나서는 것과 내가 잘 살겠다고 들이덤비는 게 죽도록 싫었던 거야. 창피했던 거야. 그게 싫어서 나는 공산당원이 될 수가 없었지.”
“잘 살겠다는 게 왜 나븐 일예요? 잘 살면 학교도 갈 수 있고 배고프지도 않을 게 아니에요. 병나면 약도 사 쓸 수 있는 게 아녜요?”
“글세, 그건 그렇다. 네 말엔 잘못된 것이 없어. 그런데 아저씨는 사람이 산다는 것이 절대루 그것만은 아니라구 생각해.”
“그럼 뭐예요?”
“글쎄, 짬만 있으면 늘 생각하지. 그런데 아저씬 머리가 나빠 그걸 느낌면서두 말을 할 수가 없구나.”
“신문사에 계시는 아저씨가 왜 머리가 나빠요?”
“아니야. 나는 내가 몹시 가엾어질 때가 많아.”
“왜, 아저씨가 가엾어요?”
윤은 이 소년과 더 이상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경원을 나와 명철이를 전차에 태웠다. 떠나는 전차 창문으로 명철이는 한참 손을 내어 흔들고 있었다. 윤은 전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돌처럼 거기에 서 있었다.
9
집으로 돌아와 행아가 차려다 준 저녁을 먹고 난 윤은 궤짝을 들추다가 밑바닥에 깔아 둔 권총을 보고 무심코 끄집어 내어서 손에 들었다. 싸늘한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지는 순간 갑자기 윤은 마음에 살의를 느꼈다. 문득 이철이를 죽여 없애야 한다는 생가기 들었다. 소년의 머리에 거짓의 영상을 비쳐 준 그 한가지로도 그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윤은 한 밤을 흥분에 떠서 엎치락뒤치락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웠다. 이튿날 아침 밥상을 치우며 행아에게 말했다.
“저 오늘 딴 데로 이사갈까 해요.”
순간 행아는 크게 눈을 떴다. 밥상을 든 두 팔이 잔 가락으로 떨렸다. 그것은 순간, 행아는 휙 몸을 돌려 부엌으로 사라지더니 한참 후 다시 조용히 윤의 방으로 들어왔다. 윤이 있을 때 행아가 방 안에 들어선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것을 생각하고 윤은 스스로 자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어디로 가시는지요?”
“가면 그만이겠지만 알리긴 하죠.”
“뒤숭숭했던 집이니 있기가 언잖으셨겠어요.”
“아니오.” 윤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런 때문은 아녜요.” 하고 윤은 말투를 가누었다.
“몇 시에 떠나시는지요?”
“신문사에 갔다 돌아와 오후 세 시쯤 떠나죠.”
“진작 말씀드려야 할 걸 갑자기 툭 이렇게…… 안됐다고는 생각해요.”
행아는 한참 후 나직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단출한 식구에 집안이…… 쓸쓸해지겠어요.”
“아버지나 어머님한테는 이따 인사드리고 가죠.”
“무어 치울 것 있으면 치워 둘까요?”
“아뇨. 머 치울 거나 있어야죠. 제가 이따 와서 하죠. 그냥 두세요.”
행아는 무슨 말을 더 하려는 눈치를 보였다가 단념한 듯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일직 신문사로 나간 윤은 초조히 임 기자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나타나자, 윤은 달래서 가까이 있는 과자점으로 갔다. 문득 순익이 일로 형운과 만났던 생각을 했다.
“저 임형, 좀 물어 볼 말이 있는데요. 아직도 이철이와 윤임은 산장 호텔에서 밀회하고 있나요?”
“자넨 왜 그렇게 거기 흥미를 느끼나?”
“뭐든지 많이 알아야 할 게 아녜요?”
“모르겠어. 윤임이한테 흥미가 있나? 건 잘 안 될걸.”
“아뇨, 그저 알아 두자는 거죠.”
“벌서부터 산장 호텔은 치웠어. 이리저리 옮기는 품이 소문을 꺼려하는 모양이지 아마.”
“요즘은 어디예요?”
“요즘은 아마 삼오 호텔일 거야. 이번엔 조심성 있게 아주 본관과는 떨어진 별관 구석방이지.”
“몇 호실인데요?”
“특호실인데 말야.”
임 기자는 자기 얘기에 스스로 흥미를 느껴 가는 품이었다.
“편리하게두 본관 현관을 안 통하고도 들어갈 수 있는 방이지. 뒤에 관목으로 엮은 낮은 담이 있는데, 거기 조그만 싸리문이 있어. 그리로 들어가 바루 마주 보이는 문을 들어서면 침실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마련이지.”
“연놈들 하는 짓이……”
“왜 부러운가?”
“천만에요.”
“천만에라니, 좀 부러운 게로군. 어디…… 재간 껏 해 보게나.”
“원 임형두.”
“어려울 거야.”
신문사를 필한 윤은 그 길로 리어카군을 얻어 가지고 집으로 갔다.
성호가 죽었을 때 넘어진 뒤부터 말을 못 하고 있는 행아 아버지는 윤에게 눈으로 섭섭한 뜻을 보냈다. 행아 어머니는 언제든지 방을 비워 둘 테니 불편하면 아무 때고 돌아오라고 하며 리어카가 골목길을 벗어날 때까지 문 밖에 나와 전송을 했다. 행아는 큰길까지 따라나왔다.
윤은 이렇게 떠나는 것이 실은 호의에서였다는 것을 언젠가는 행아는 알게 되리라고 생각했을 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윤은 그 길로 어떤 조그만 여관을 찾아 한 달 하숙을 정했다.
이튿날 신문사가 퇴하자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곧장 삼오 호텔로 찾아들었다. 조용한 방을 청했다.
“지금 아래층 9호실이 비어 있습니다.”
“여긴 별관 같은 게 있다면서?”
“거긴 며칠 전에 예약하시지 않으면 들기 힘드십니다.”
“그럼 9호실 좋소. 갑오로구만.”
안내된 방 9호실은 조용했다.
“여기선 색시 같은 것 불러 올 수 있어?”
“그건 절대 안 됩니다.”
“그건 절대 된다는 얘기로군.”
“여긴 그런 데 아녜요.”
“그런 데 아니면 여기는 신부나 중들이 드는 곳이냐?”
“그렇쟎아요.”
“그런데 며칠 전부터 예약하는 별관에 자러 오는 친구들이란 어떤 족속들야?”
“머 그런 사람 저런 사람 있죠.”
“그런 친구들은 다 짝자꿍이 하러 오지?”
“글세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얘.” 윤은 보이에게 팁을 주었다.
“아 이거……”
“받아 둬. 얘 그런데, 그 별관이라는 거 한 번 구경이나 하자.”
“구경쯤이야 쉽죠.”
보이는 곧 별관으로 안내했다. 본관 뒤에 새로 꾸며진 건물은 아담했다.
“듣기엔 여기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다면서?”
“뒤에 뜰이 있고 뜰에서 저편으로 나갈 수 있는 싸리문이 있죠.”
“나갈 수 있으니까 물론 들어올 수도 있겠지.”
“그야 그렇죠.”
윤은 싸리문 밖으로 나가 보았다. 본관 쪽에서 관목으로 엮어진 울타리를 끼고 도는 그리 넓지 않은 길이 나 있었다.
“흥, 돈 있는 사람은 뒤로 드나들기 마련이구.”
“앞으로도 뒤로도 다 드나들 수 있죠.”
“그렇군. 얘, 너 분주하면 가 봐. 난 여기서 바람이나 좀 쐬고 들어가겠다.”
보이가 떠난 후 윤은 정원을 거니는 체하고 싸리문을 몇 번 드나들어 보고 관목의 울타리와 본관에서 돌아와서 이곳으로 꺽어지는 지점 같은 것을 자세히 재어 두었다.
며칠 간격을 두고 윤은 두 번을 더 삼오 호텔에 찾아가 뒤뜰을 거닐이 보는 한편 보이에게 웬만한 팁을 주기를 잊지 않았다. 세 번째로 간 날 윤은 보이를 조용히 자기 방에 불러들였다.
“이 호텔 별관에 가끔 아주 예쁜 여자가 찾아온다지?”
“여자 손님 몇 분 되는데요.”
“왜 키가 좀 큰 편인데 얼굴이 둥근 편이고 눈이 큰 여자 말야. 왜 머리를 뒤에다 이상하게 만들어 붙이고 있자, 좀 코끝이 오똑하구.”
“아 아 그 여자, 네. 있어요.”
“내가 사실은 탐정인데 말야……”
“네에? 아저씨가 탐정이요?”
“그래, 너 소설 같은 데서 봤지?”
“네, 참 멋져요.”
“딴 게 아닌데, 내 널 임시 조수로 쓸까 해.”
“조수요, 탐정 조수요?” 보이는 눈에 놀란 빛이 어리었다.
“그래. 그 여자가 나타나는 대로 즉시 나한테 전화를 걸어 주면 돼.”
“머 그거야 어렵쟎죠.”
“그리고 혼자 왔는지 둘이 같이 왔는지 그것만 알려 주면 되는 거야.”
“그러죠.”
윤은 지폐를 꺼내 보이에게 한 줌 집어 주었다.
“이건 팁이 아니라 조수 수당이야.”
“이렇게 많이, 고마워요.”
“전화 번호는 여긴데, 맞은편 해방옥의 손님인 허란 사람을 불러 달라고 하면돼.”
보이가 나간 뒤 윤은 벌렁 침대에 드러누워 한참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큰 소리를 내어 웃어젖혔다. 웃음을 그친 윤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흥, 이철이 녀석은 복이 있지. 이렇게 품을 들이니 말야. 그런데 어째 이러고 있는 내 정신이 좀 이상한 것도 같군.”
윤의 얼굴에 우울한 표정이 흘렀다. 그 이튿날부터 저녁만 되면 윤은 해방옥에 박혀 살았다. 어쩐지 하루하루의 생활에 무게가 들어가는 것이 이상했다.
두 주일 후 어느 비 내리는 날, 윤이 거나하게 취해 있는데 가게에 전화가 걸려 왔다는 연락이 왔다. 뛰듯이 달려가 받은 수화기로 윤임이 나타났다는 보이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윤은 전신을 뒤트는 격정을 느끼고 전화를 끊기가 바쁘게 다시 해방옥으로 들어가 벌컥벌컥 술 반 되를 더 들이마시고 부리나게 여관에 들어서 궤 속 깊숙이 묻었던 권총을 들고 삼오 호텔로 갔다.
불러 낸 보이로부터 아직 윤임이 혼자인 것을 알자 윤은 호텔 뒤로 돌아서 미리 정해 두었던 관목 울타리 한 군데에 몸을 붙였다. 내리는 비가 윤의 뒷덜미로 흘러 들어갔다. 윤은 으스스 몸을 떨고 옷깃을 세웠다. 차디찬 비가 흥건히 윤의 옷을 적셔 갔으나 윤의 전신은 불처럼 달고 있었다.
윤은 내어 들고 있는 권총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자 왼팔 옷소매로 그것을 가만히 훔쳐 내고 주먹째로 호주머니에 찔렀다.
오랜 시간을 윤은 그렇게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나 윤이 깜박 졸았다. 몸이 휘청 기울면서 번적 감겼던 눈을 떴다. 전신이 오싹했다.
그대로 서서 또 오랜 시간을 지내 보냈을 때, 이윽고 저편에서 저벅저벅 이리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와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려 왔다. 윤은 일순 숨을 죽였다. 얼른 권총을 꺼내 들었다.
먼 빛에 다가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권총을 그러쥔 손에 저절로 힘이 가면서 후퇴하려는 순간 윤은 흠칫 놀랐다. 우산을 쓰고 다가오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윤은 눈에다 전 신경을 모아 싸리문 위에 걸린 희미한 등불 밑에서 더 자세히 나타나는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이철이와 한 우산을 쓰고 오는 사람은 강태가 아닌가. 윤은 한꺼번에 쏟아지는 수 없는 생각의 갈피를 순간적으로 쫙 훑어내렸다.
다음 순간 윤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들었던 권총의 총구를 밑으로 내렸다. 그때 강태와 이철은 쓱 싸리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은 한참 동안을 그대로 관목의 울타리에 기대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큰일날 번했어.”
윤은 어둠 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잠시 후 권총을 가슴 안 호주머니에 집어 넣은 윤은 터벅터벅 걸어서 저편 어둠 속으로 걸어가 버렸다.
이튿날 윤은 보따리를 꾸려 가지고 다시 행아의 집으로 돌아갔다. 뛰어나오며 윤을 맞은 행아의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윤은 밥상을 날라 온 행아의 얼굴에 엷은 화장의 흔적을 보고 놀랐다. 윤은 밥상을 치운 후 행아더러 방으로 들어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젯밤까지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그 소년이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죠.”
“왜요?”
“이철이가 죽건 강태마저 죽건, 소년에겐 그들이 영원한 순교자가 된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요?”
“그렇게 되면 거기 여러 가지 큰 뜻이 생기거든요. 강태와 이철은 순교자가 되는 듯이 생기고, 나는 붉은 깃발을 쏘아서 날려 버렸다는 뜻이 생길 게 아녜요. 그 사람을 농락하는 우스운 뜻이 말이죠. 큰 웃음거리가 될 번했어요. 한몫 깨어들 뻔했죠.”
“하옇든 큰일날 뻔했어요.”
“정말 큰일날 뻔했죠. 어젯밤 저는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무엇이 하나라도 달라진 건 없어요. 그저 그전의 나로 돌아간 거죠.”
윤은 잠깐 얼굴에 괴로운 빛을 흘려 보냈다.
“그러나 전 그런대로 좋아요.”
윤은 궤짝 속에서 두툼한 원고지 뭉치를 꺼내 놓았다.
“이거 제가 지금까지 애써 써 온 논문이죠. 펴 보세요.”
행아는 몹시 귀한 것을 대하는 조심성으로 겉장을 젖혔다. 흰 종이 한 장을 더 젖혔다. 거기 나타난 또 한 장을 젖혔다. 또 한 장을 젖혔을 때 거기 단 한 줄의 글이 써 있었다.
‘뒷간에 들었으면 똥이나 사라.’
“어머나.”
하고, 행아는 낯을 붉히고 얼른 다음 장으로 넘겼다. 또 흰 종이가 나타났다. 윤이 말했다.
“이젠 아무것도 없어요.”
“네?” 하고 행아가 고개를 들었다. 윤은 하하하 하고 웃었다.
“말이 그렇지, 저 같은 게 무슨 논문을 쓰겠어요?”
윤의 얼굴에 자조의 빛이 흘렀다. 행아가 윤에게 말했다.
“저, 두 가지만 물어도 좋아요?”
“뭔데요?”
“그 마포에 산다는 명철인가 하는 앤 어떻게 되겠죠.”
“글세, 아직은 잘 생각이 안 가는군요.”
“저어…..”하고 행아는 잠깐 망설였다.
“저어, 남의 일같이 생각되지 않아서요. 아버지나 어머니께 얘기해서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으면 했어요.”
“글쎄요, 그건 잘 생각해 하시죠.”
“또 한 가지 있어요.”
“말해 보시죠.”
“권총 어떡하셨어요?”
“어떡허다뇨?”
“버리세요.”
윤은 얼른 대답을 못 했다.
“가지고 있으면 안 돼요.”
“생각해 보죠.”
다음 날 윤은 가슴 깊숙이 권총을 품고 집을 나섰다.
신문사를 퇴하는 길에 해방옥에 들렀다. 문득 형운의 생각이 나자 외로움 같은 것이 가슴에 솟아올랐다. 호되게 거푸 죽죽 들이켠 술이 전신에 배어 가면서 충족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모르는 그림자가 꽉 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어디다 권총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무엇을 부수고 싶은 생각이나 죽이고 싶은 생각이라도 나면 귀찮기만 할 것 같았다.
윤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문 저편 벽에 드리워진 전지 한 장만한 광고 그림을 보았다.
“아저씨.”
“왜 그러시오?”
“저런, 거 뭐 걸었소? 어울리지가 않는데.”
“왜요, 침침한 기분이 덜하지 않소?”
“원 아저씨두, 저기 언제부터 걸어 둔 거요?”
“벌써 오래 됩니다.”
“그래요? 왜 내가 아직 못 봤을까.”
윤은 물끄러미 그 그림을 보고 있다가 문득 그 그림에 그려진 여자의 눈매와 입 언저리를 어디서 본 듯이 느꼈다.
저건 윤임이 같은데, 하고 윤은 입 속에서 뇌었다. 윤의 뇌리는 산장 호텔18호실 안에 원색 피자마를 걸치고 먼눈을 하고 서 있던 윤임의 모습을 스쳐 보냈다.
그때 거기서 얻은 권총으로 이철이를 죽이려던 생각을 하니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이철이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윤임이 때문인지 몰라. 그날 밤 윤임이와 어거지로라도 잤어야 했을 걸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랬다면 공연히 핑계를 찾아 죽이려구 하지 않았을는지 몰랐다는 생각도 들었다. 푸른 대문 집 여자하고 잔 뒤로는 별로 양키들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는 생각도 났다.
그거야 그것 때문이야.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니까 공연히 쓸데없는 뜻을 찾고 지랄을 치는 거야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어느덧 술 석 되를 비웠다.
“허 선생, 전화요.” 주점 아저씨가 윤보고 소리쳤다.
“전화? 무슨 전화야?”
“가게에 전화 걸려 왔대요.”
“이런.” 윤은 그저 반사적으로 일어나 가게로 갔다.
“누구요? 아, 그래 이전 괜찮아. 그 동안 수고했어. 머 지금 혼자가루, 아냐, 이전 일은 다 끝냈어. 좋아.”
가게를 나선 윤은 언듯 길가에 서 버렸다. 후후후 하고 한 번 웃음을 틀어 냈다. 발길이 큰길로 갔다. 윤은 지나가는 자동차를 불러 탔다.
“어디 갈까요?”
“집으로 가.”
“집요? 집이 어딘데요?”
“음, 삼오 호텔로 가.”
윤은 삼오 호텔 앞에서 차를 내리자, 조금 비틀거리며 울타리 뒤로 돌았다.
윤은 관목을 끼고 돌다가 그 한가운데 찰싹 몸을 붙이고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둘레의 동정을 살피고 언뜻 오른손으로 손 권총을 만들어 누구를 겨누는 시늉을 하더니 손을 내렸다. 또 한참 그대로 서 있다가 아주 쉽게 싸리문을 밀고는 자기 집 들어가듯 천연스러이 걸어서 곧장 건물 있는 데로 걸어 들어갔다. 유리창 달린 문을 열었다.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희미한 불빛에 도어가 눈앞에 나타났다. 윤은 똑똑 도어를 두드렸다. 안은 잠잠했다. 또 한 번 노크르 띵했더가.
“누구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요.”
“저가 누구에요?”
여인의 목소리가 좀 짜증에 가까왔다. 윤은 휘어지는 몸을 도어에 기대었다. 잠시 후 안에서는 전등 켜는 소리가 나고 잘잘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도어가 확 안으로 열려졌다. 그 바람에 윤은 확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아!”
하고, 짧게 뽑아진 여인의 목소리에 윤은 언듯 정신을 되살렸다. 침대에서 누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철이!”
윤은 크게 눈을 떴다. 이철이 손이 베개 밑을 더듬는 것이 보였다. 윤의 손이 날쌔게 웃옷 안호주머니 속으로 미끌어 들어가더니 권총을 끄집어 냈다.
탕탕탕탕……
총성이 방 안에 울리며 이철이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다음 순간 말끔히 취기를 거둔 윤은 눈부신 원색 파자마를 걸친 윤임이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방 저편 구석으로 뒷걸음쳐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