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1월 (1594년 1월)

 

1월 초1일 [양력 2월 20일]<경진>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 중에서도 다행 한 일이다. 저녁나절에 군사훈련과 전쟁준비하는 일로 본영으로 돌아 오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사과(사과: 오위의 종6품 군사 직 벼슬) 신(신)씨에게 문안하였다.

 

1월 2일 [양력 2월 21일]<신사> 비는 그쳤으나 흐렸다.

나라제삿날(명종 인순왕후 심씨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사과 신을 청하여 같이 이야기했다. 첨지 배경남(배경남)도 왔다.

 

1월 3일 [양력 2월 22일]<임오>맑다.

동헌에 나가 공물를 보았다. 해질 무렵에 관사로 돌아와서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1월 4일 [양력 2월 23일]<계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저녁에 사과 신·첨 지 배와 같이 이야기를 했다. 남홍점(남홍점)이 본영에 이르렀기 에 그 가족이 달아나 숨어지냈는지를 물었다.

 

1월 5일 [양력 2월 24일]<갑신> 비가 내렸다.

사과 신이 와서 이야기했다.

 

1월 6일 [양력 2월 25일]<을유> 비왔다.

동헌에 나가 남평(남평)의 도병방(도병방)을 처형했다. 저녁 내내 공무를 보며 공문을 써서 내려 주었다.

 

1월 7일 [양력 2월 26일]<병술> 비왔다.

동헌에 앉아 공무를 보고, 공문을 적어 보냈다. 저녁에 남의길 (남의길)이 들어와서 마주 앉아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서야 헤어 졌다.

 

1월 8일 [양력 2월 27일]<정해> 맑다.

동헌 방에 앉아서 배 첨지·남의길(남의길)과 종일 이야기 했다. 저녁자절에 공무를 보았으며, 남원(남원)의 도병방(도병방)을 처 형했다.

 

1월 9일 [양력 2월 28일]<무자> 맑다.

아침에 남의길(남의길)과 이야기했다.

 

1월 10일 [양력 3월 1일]<기축> 맑다.

아침에 남의길(남의길)을 맞이하여 이야기하다가 피난하던 때의 일과 그 때 길바닥에서 고생하던 상황을 죄다 들으니,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1월 11일 [양력 3월 2일]<경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를 볼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바로 곰내(고음천; 웅천)에 대었다. 남의길(남의길)·윤사행(윤사행)·조카 분(분)이 함께 가서, 어머니 앞에 가서 뵈니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며 일어 나지 않으셨다. 화가 나서 소리내는 바람에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기력은 약하고 숨이 금방 넘어갈듯 깔딱거려, 죽을 때가 가까와진 것 같아 감추는 눈물이 절로 내렸다.

말씀하시는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 날 저녁에 손수약(손수약)의 아내가 죽었다는 부음(부음)을 들었다.

 

1월 12일 [양력 3월 3일]<신묘>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 도 떠나는 뜻이 싫어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다.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월 13일 [양력 3월 4일]<임진>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너무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서 땀을 내었다. 종 팽수(팽수)· 평세(평세) 등이 와서 봤다.

 

1월 14일 [양력 3월 5일]<계사> 흐리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조카 뇌의 편지를 보니, 아산의 산소에 설날 제사를 지낼 적에, 군호로 불러 모은 무리가 무려 이백 여 명이 산을 에워싸고 음식을 달라고 오르내렸다고 하니, 놀랍고도 놀랍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장계를 봉함하고, 또 승장 의능에게 천민의 신분을 면해준다는 공문을 봉하여 올렸다.

 

1월 15일 [양력 3월 6일]<갑오> 맑다.

이른 아침에 남의길(남의길)과 조카들과 함께 있다가 동헌으로 나갔다. 남의길은 영광으로 가고자 했다. 종 진(진)을 찾아내는 공문을 만들었다. 동궁(광해군)의 명령이 있었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라는 것이었다.

 

1월 16일 [양력 3월7일]<을미> 맑다.

아침에 남의길(남의길)을 불러 와서 잔치를 벌려 작별했다. 나도 몹시 취했다.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갔다. 황득중(황득중)이 들 어왔다. 소문에 “문학 유몽인(유몽인)이 암행어사로 흥양현에 들 어왔다”고 한다. 잡문서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고 했다. 저물 무렵 방답과 배 첨지가 와서 이야기했다.

 

1월 17일 [양력 3월 8일]<병신> 새벽에 눈이 오고 저녁나절에 비가 왔다.

이른 아침에 배에 올라 아우 여필과 여러 조카와 아들 등을 배웅 했다. 다만 조카 분(분)과 아들 울(울)을 배로 데리고 떠났다. 오 늘 장계를 띄워 보냈다. 오후 네 시쯤에 와두(노량 땅)에 이르니, 역풍에 물이 빠져 배를 운행할 수가 없었다. 닻을 내리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여섯 시쯤에 다시 닻을 올려 노량에 이르렀다. 여도만호(김인영)·순천의 이함(이 )·우후(이몽구)도 와서 잤다.

 

1월 18일 [양력 3월 9일]<정유> 맑다.

새벽에 떠날 때는 역풍(샛바람)이 세게 일었다. 창신도(남해군 창 선도)에 이르니, 바람이 순하게(하늬바람) 불어, 돛을 올려 사량에 이르니까, 바람이 도로 거슬러(샛바람) 세게 불었다. 다만, 사량만호 이여염(이여념)과 수사의 군관 전윤(전윤)이 와서 봤다. 전(전 윤)이 말하기를`수군을 거창으로 붙잡아 왔다고 하며, 원수(권율) 가 중간에서 해치려 한다고 했다. 우습다. 옛부터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같은 것이니, 무엇을 한탄하랴! 그대로 잤다.

 

1월 19일 [양력 3월 10일]<무술>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이고 바람이 세게 불더니 해질 무렵에는 더 거세어졌다.

아침에 출항하여 당포 바깥 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따라 돛을 반 쯤만 올려도 순식간에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활터 정자에 올라 앉아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이야기했다. 저녁에 경상우수사 원균 (원균)이 왔다. 소비포권관 이영남(이영남)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 및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겠다는 말을 들으니,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수사 원균· 공연수(공연수)· 이극성(이극성)이 곁눈질해뒀던 여자를 몽땅 몰래 관계했다고 한다.

 

1월 20일 [양력 3월 11일]<기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추위가 살를 도려내는 듯하여 여러 배에서 옷 없는 사람들이 거북이 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미 듣지를 못하겠 다. 군량미조차 오지를 않으니, 더욱 민망스럽다. 낙안군수·우수 사우후가 와서 보다. 저녁나절에 소비포권관·웅천현감·진해현 감도 왔다. 진해는 명령을 거부하여 머뭇거리며 오지 않았으므로 죄주려고 했다 그래서 만나지 않았다. 바람기가 자는 듯했으나 순천이 들어 올 것이 염려되었다. 병들어 죽은 자들을 거두어 장사지낼 차사원으로 녹도만호를 정하여 보냈다.

 

1월 21일 [양력 3월12일]<경자> 맑다.

아침에 본영의 격군 칠백마흔두 명에게 술을 먹였다. 광양현감 (어영담)이 들어왔다. 저녁에 녹도만호(송여종)가 와서 보고하는 데, “병들어 죽은 시체가 이백열네 명을 거두어서 묻었다”고 한 다.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두 명이 경상우수사 원균(원균)의 진영에서 와서 여러가지 적정을 상세히 말하긴 했으나, 믿을 수가 없다.

 

1월 22일 [양력 3월 13일]<신축> 맑다.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없다. 활터 정자에 올라 앉아 진해현감 으로 하여금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게 했다. 활을 종일 쏘았다. 녹도만호가 병들어 죽은 시체 이백열일곱 명을 거두어 묻었다고 했다.

 

1월 23일 [양력 3월 14일]<임인> 맑다.

낙안군수가 아뢰고 나갔다. 흥양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최 천보(최천보)·류황(유황)·류충신(유충신)·정량(정량) 등이 들어 왔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가 들어 왔다.

 

1월 24일 [양력 3월 15일]<계묘>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산역(산역)하는 일로 자귀장이(이장) 마흔한 명을 송덕일 (송득일)이 거느리고 갔다. 영남우수사 원균(원균)이 군관을 보내 어 보고하기를, “경상좌도에 있는 왜적 삼백 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고 한다. 정말 기쁜 일이다. 평의지(대마도주 종의지)가 지 금 웅천에 있다고 하는데, 밝혀지지는 않았다. 류황(유황)을 불러서 암행어사가 붙잡아 간 것을 물었더니, 문서가 멋대로 꾸며졌다고 하였다. 놀랍다. 또 격군의 일을 들으니, 고을 아전들의 간악한 짓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령을 내려 모집한 의병 백마흔네 명을 붙잡아 오라고 하고, 또 현감에게 독촉하여 전령을 보내게 했다.

 

1월 25일 [양력 3월 16일]<갑진>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였다.

송두남(송두남)·이상록(이상록) 등이 새로 만든 배를 돌아오게 하려고 사부와 격군 백서른두 명을 거느리고 갔다. 아침에 우수 사 우후(이정충)가 와서 여기서 같이 아침밥을 먹고서 저녁나 절까지 활을 쏘았다. 우수사 우후가 여도만호(김인영)와 활쏘기 시합을 했는데 여도만호가 일곱 푼을 이겼다. 나는 활을 열 순을 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스무 순을 쏘았다. 저녁에 종 허산(허 산)이 술병을 훔치다가 붙잡혔기에 곤장을 쳤다.

 

1월 26일 [양력 3월 17일]<을사> 맑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 순천부사(권준) 가 기일을 어긴 죄를 논했다. 오후에 사로잡혔다가 도망해온 진 주 여자 한 명, 고성 여자 한 명, 서울 사람 두 명을 데려 왔다. 서울 사람은 정창연(정창연)과 김명원(김명원)의 종이라고 했다. 또 왜놈 하나가 스스로 와서 항복하였다고 와서 보고했다.

 

1월 27일 [양력 3월 18일]<병오> 맑다.

새벽에 배 만들 목재를 끌어 올 일로 우후(이몽구)가 나갔다. 새 벽에 변유헌과 이경복이 들어왔다고 보고했다. 아침에 충청수사 의 답장이 왔다. 어머니 편지와 아우 여필의 편지가 왔는데, ”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다행이다. 다만, 동문 밖 해운대 (여수시 동북쪽에 있음) 옆에 횃불 든 강도가 들었고 미평(미 평)에 횃불 든 강도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놀랍고 놀랄 일이다. 저녁나절에 미조항첨사·순천부사가 같이 왔다. 솟장과 그 밖의 공문을 써 보냈다. 스스로 항복해온 왜놈을 잡아 왔기에 문초했 다. 수사 원균(원균)의 군관 양밀이 제주 판관의 편지와 마장·해 산물·귤·유자를 가지고 왔다 즉시 어머니께 보냈다. 저녁에 녹도의 복병한 곳에 왜적 다섯 명이 마구 함부로 다니면 서 포를 쏠 적에 한 놈을 쏘아 목을 베고 나머지는 화살을 맞고 는 도망을 가버렸다. 저물무렵에 소비포가 왔다. 우후의 배가 재목을 싣고 왔다.

 

1월 28일 [양력 3월 19일]<정미> 맑다.

아침에 우후가 와서 봤다. 종사관에게 낱낱이 공문을 조회하여 써서 강진 영리에게 주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원식이 서울로 올 라 간다고 왔기에 술을 먹여서 보냈다. 아침에 경상우후(이의 득)가 보고하기를,”명나라 제독 유정이 군사를 돌려 이달 25·26 일 사이에 올라간다”고 하며, 또, “위무사(장병을 위로하러 파견 된 관리)홍문교리 권협이 도내를 순시한 뒤에 수군 영으로 온다” 고 하며, 또, 화적 이산겸(이산겸) 등을 잡아다 가두고, 아산· 온양 등지에서 함부로 다니는 도적떼 아흔 여 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고 했다. 또, “익호장(김덕령) 근일 중에 들어 올 것이다” 고 했다. 저물무렵에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내려 쓸쓸했다. 전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1월 29일 [양력 3월 20]<무신> 비가 종일 오고 밤새도록 왔다.

새벽에 각 배들이 아무 탈 없다고 한다. 몸이 불편하여 저녁에 누워서 신음했다.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거세어 배를 안정하게 매어 둘 수가 없으니, 마음이 몹시도 괴롭다. 미조항첨사(김승룡)가 배를 꾸밀 일로 돌아갔다.

 

1월 30일 [양력 3월 21일]<기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나절에는 개이고 바람도 조금 잠잠했다. 순천부사 및 우수사 우후·강진현감(류해)이 왔다. 미조항첨사가 와서 아뢰고 돌아 갔다. 그래서 평산포의 도망군 세 명을 잡아와서 그 편에 딸려 보냈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땀을 흘렸다. 군관과 여러 장수들은 활을 쏘았다.

 

갑오년 2월 (1594년 2월)

 

2월 초1일 [양력 3월 22일]<경술> 맑다.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청 주의 겸 사복 이상(이상)이 임금의 분부(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에 경상감사 한효순(한효순)의 장계에 “좌도의 적들이 모여서 거제로 들어가서 앞으로 전라 땅으로 침범하려 하니, 경 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오후에 우수사위 우후(이정충)을 불러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사 도첨사(김완)가 전선 세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이경복(이 경복)·노윤발(노윤발)·윤백년(윤백년) 등이 도망군을 싣고 뭍으로 옮겨가는 배 여덟 척을 붙잡아 왔다. 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얼마 안가 그쳤다.

 

2월 초2일 [양력 3월 23일]<신해> 맑다.

아침에 도망군을 실어 내던 사람들의 죄를 처벌했다. 사도첨사가 와서 전하기를 낙안이 파면됐다고 했다.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동궁에게 올린 달본(신본)의 회답이 내려왔다. 각 관포 에 공문을 써 보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바람이 잔잔하지 못했 다. 사도첨사가 기한에 미치지 않았으므로 허물을 따졌다.

 

2월 초3일 [양력 3월 24일]<임자> 맑다.

새벽꿈에 눈 하나가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광풍이 세게 일었다.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으니 걱정되며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우우후가 빚진 물건을 여러 장수에게 보냈다. 원식·원전이 와서 상경한다고 보고했다. 면 천공문 한 장을, 원식이 남해에게 쇠붙이를 바치고서, 받아 갔다. 날이 저물어 막사로 내려왔다.

 

2월 4일 [양력 3월 25일]<계축>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순천부사·우조방장을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본영 전선·거북함이 들어왔다. 조카 봉( )과 이설(이설)·이언량(이언량)·이상록(이상록) 등이 강돌천(강돌천)을 데리고 왔다. 동궁의 달본을 가지고 내려 왔다. 우찬성 정탁(정탁)의 편지도 왔다. 각 관포에 공문을 써 보냈다. 순천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무군사(무군사)의 공문에 따른 순찰사의 공문에는 진중에서 시험을 보게하는 장달을 올린 것이 몹시 나쁘니까 그 허물을 캐물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우습다. 조카 봉( )이 오는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2월 초5일 [양력 3월 26일]<갑인> 맑다.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첩첩인 산마루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동서로 뻗쳐 있고, 산마루 위에는 평평한 곳이 있기 로 거기에 자리잡으려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받아온 흑각궁 백 장을 낱낱이 헤아려 서명하고 화피(활 만드는데 쓰는 벚나무 껍질) 여든아홉 장도 셈하여 서명했다. 발포만호(황정록)·우 수사의 우후가 와서 보고, 같이 식사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순창과 광주 색리들의 죄를 벌주었다. 우조방장 및 우우후· 여도만호 등은 활을 쏘았다.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유격 심유경이 벌써 화친을 결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수 없 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지려드니 한탄 스럽다. 저녁에 날씨가 찌는 것 같아 마치 초여름 같다. 밤 아홉 시에 비가 내렸다.

 

2월 6일 [양력 3월 27일]<을묘> 비가 내렸다. 오후에 맑게 개었다.

순천부사·조방장·웅천현감·사도첨사가 와서 봤다. 어두울 무렵 흥양에서 김방제(김방제)가 왔다. 누르고 향기로운 것(유자?) 을 서른 개 가져 왔는데 새로 캔 것 같았다.

 

2월 7일 [양력 3월 28일]<병진> 맑은데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우조방장이 와서 보고 또 부지휘선에 타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와 홍군우(홍군우)· 이숙도(이숙도)· 강인중(강인중) 등에게 문안편지를 조카 분(분)이 가는 편에 부쳤다. 조카 봉은 분(분)과 같이 떠나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분)은 온양으로 갔다. 마음이 섭섭하다.

각 배에 솟장(소지) 이백 여 장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고성현령(조응도)이 보고에,”적선 쉰 여 척이 춘원포(고성군 광도면 예승리 끄승개)에 이르렀다”고 했 다. 삼천포권관과 가배량권관 제만춘(제만춘)이 와서 서울 소식 을 말했다. 이경복(이경복)을 격군 붙잡아올 일로 내보냈다. 오늘 군대를 개편하고, 격군을 각 배에 옮겨 태웠다. 방답첨사에게 죄인을 잡아오라고 전령했다. 낙안군수의 편지가 왔는데, 새 군수 김준계(김준계)가 내려왔다고 하므로 그에게도 붙잡아 오라고 전 령했다. 보성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2월 8일 [양력 3월 29일]<정사>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 추워 무척 걱정된다. 봉과 분(분) 등이 배를 타고 떠났으니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말하기를,”고성 땅 소소포(소소포:마암면 두호리)에 적선 쉰 여 척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곧 제만 춘을 불러 지형이 편리한지를 물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경상우병사의 군관이 편 지를 가져 와서 저희 장수 방지기(방인)를 면천하는 일을 말했다. 진주에 피란해 있는 전좌랑 이유함(이유 )이 와서 이야기하 고서 저녁에 돌아왔다. 바다에 달이 밝아 잠이 오지 않는다. 순 천부사와 우조방장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변존서(변존서)가 당포에 가서 꿩 일곱 마리를 사냥해 왔다.

 

2월 9일 [양력 3월 30일]<무오> 맑다.

새벽에 우후가 배 두세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에 띠풀을 베 러 나갔다.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다. 돼지머리도 가져왔다. 그 편에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들었는지를 물었다. 또 백성들이 굶 어서 서로 잡아 먹는다고 하니, 앞으로 어찌하면 살 수 있을 것 인지도 물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 순을 쏘 았다. 이유함(이유 )이 왔다가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그의 자 (자)를 물으니, 여실(여실)이라 했다. 순천부사· 우조방장· 우후· 사도첨사· 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사천현감·하동현 감·소비포권관도 왔다. 저물무렵에 보성군수가 들어왔다. 무군사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시위할 긴창을 수십 자루를 만들 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 날 동궁이 문책하는데 대한 답을 써 보냈다.

 

2월 초10일 [양력 3월 31일]<기미> 가랑비와 센바람이 종일 그치지 않았다.

오후에 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와서 저녁때까지 이야기하며 적을 토벌할 일을 논의했다.

 

2월 11일 [양력 4월 1일]<경신> 맑다.

아침에 미조항첨사(김승룡)가 왔다. 술 석 잔을 권하고서 보냈 다. 종사관의 공문 세 통을 써 보냈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 자로 올라가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술 열 잔을 마시니 취하여 미친 말을 많이 했다. 우습다. 우조방장도 왔다. 같이 취했다. 저물어서 활 세 순을 쏘았다.

 

2월 12일 [양력 4월 2일]<신유> 맑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조카 분(분)의 편지에 선 전관 송경령(송경 )이 수군을 살펴볼 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오전 열 시쯤에 적도(거제시 둔덕면)로 진을 옮겼다. 오후 두 시쯤에 선전관(송경령)이 진에 도착했다. 임금의 분부(유지) 두 통과 비밀문서 한 통, 모두 세 통을 가지고 왔는데, 한 통에는 “명나라 군사 십만 명과 은 삼백 냥이 온다”고 하였고, 한 통에는 “흉적들의 뜻이 호남지방에 있으니, 힘을 다하여 파수보며, 형세 를 보아 무찌르라”고 하였으며, 비밀문서에는 “일년이 지나도록 해상에서 근로하는 것을 임금님께서 잊지 못하니, 공로를 세운 장병들이 아직도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거던 적어 올리라”는 것 이 적혀 있었다. 또 그에게서 서울에서 여러 가지 소식과 역적 들의 일을 들었다.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도 왔다. 임금님께서 밤낮으로 근심하며 분주하시다니, 감개무량하다.

 

2월 13일 [양력 4월 3일]<임술>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영의정에게 회답편지를 썼다. 식사를 한 뒤에 선전관(송 경령)을 불러 다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작별을 하고서는 종일 배에 머물렀다. 오후 네 시쯤에 소비포만호(이영남)·사량만 호(이여염)·영등포만호(우치적)가 왔다. 오후 여섯 시쯤에 첫나발을 불자 출항하여 한산도로 돌아올 때, 경상우수사의 군관 제홍록(제홍록)이 삼봉(고성군 삼산면 삼봉리)에서 와서 말하기를,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와 춘원포(춘 원포)에 정박하였으므로, 들이칠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곧 나 대용을 경상우수사 원균(원균)에게 보내어 상의케 하면서 전하게 한 말은,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 큰 이익을 이루지 못 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 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찔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조항첨사·순천부사·조방장이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 다. 박영남(박영남)·송덕일(송덕일)이 되돌아갔다.

 

2월 14일 [양력 4월 4일]<계해>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잔잔했다.

경상도의 남해·하동·사천·고성 등지에는 송희립(송희립)·변 존서(변존서)· 류황(유황)· 노윤발(노윤발) 등을, 우도에는 변유헌(변유헌)·나대용(나대용) 등을 점검하여 내어 보냈다. 본영 군량미 스무 섬을 실어 왔다. 정종(정종)·배춘복(배춘복)도 왔다. 방답첨사와 첨지 배경남(배경남)이 왔다. 장언춘(장언춘)을 천민 에서 면하게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흥양현감이 들어왔다.

 

2월 15일 [양력 4월 5일]<갑자> 맑다.

새벽에 거북함 두 척과 보성의 배 한 척을 멍에나무(가목) 치는 곳으로 가서 초저녁에 실어 오게 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 터 정자로 올라가서 좌조방장의 늦게 온 죄를 신문했다.

흥양배 의 부정을 조사해 보니, 허술한 일이 많았다. 또 순천부사·우 조방장·우수사의 우후·발포만호·여도만호·강진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날이 저물 때에 순찰사(이정암)의 공문 내용에, “조도어사 박홍로(박홍로)의 계본에서 순천·광양· 두치 등지에 복병을 두고 파수보게 해달라는 주문을 바친 바, 수 군과 수령을 아울러 이동시키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는 대답이 내 려왔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2월 16일 [양력 4월 6일]<을축> 맑다.

아침에 흥양현감·순천부사가 왔다. 흥양이 암행어사(유몽인)의 비밀 장계초안을 가져 왔는데 임실현감 이몽상(이몽상)·무장 현감 이충길(이충길)·영암군수 김성헌(김성헌)·낙안군수 신호 (신호)를 파면하고, 순천에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를 논난하고, 나머지 담양부사(이경노)· 진원현감(조공근)· 나주목사(이용순)· 장성부사(이귀)· 창평현령 백유항(백유항) 등 수령의 악행은 덮어 주고 포상하도록 상신한다.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그 가운데에는 수군 가족에 대한 징발과 네 장정 속에서 두 장정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심히 비난하였으니, 암행어사 류몽인(유몽인)은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 없이 눈앞의 임시 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남쪽 지방의 종작없는 말만 듣고서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무목에 대한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위하여 심히 통탄할 일이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순천부사· 흥양현감· 우조방장· 우수사우후· 사도첨사· 발포만호·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광양현감 등과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순천감목관이 진에 왔다가 돌아갔다. 우수사가 당포에 이르렀다고 했다.

 

2월 17일 [양력 4월 7일]<병인> 맑다.

따뜻하기가 초여름 같다. 아침에 지휘선에 연기 그을리는 일 때 문에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각 처에 공문을 써 보냈다. 오전 열 시쯤에 우수사가 들어왔다. 우두머리 군관 정홍수와 도 훈도를 군령으로 곤장 아흔 대를 쳤다. 이홍명(이홍명) 및 임희 진(임희진)의 손자도 왔다. 대로 총통(죽총통)을 만들어 왔기에 시험으로 쏘아 보니, 소리는 비슷한데, 별로 쓰일 데가 없다. 우습다. 우수사가 거느린 전 선이 다만 스무 척이니, 더욱 한스럽다. 순천부사·우조방장이 와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2월 18일 [양력 4월 8일]<정묘> 맑다.

아침에 배 첨지가 왔다. 가리포 이응표(이응표)가 왔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해남현감 위대기(위대기)에게 명령 을 거역한 죄를 벌주었다.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한 뒤에 활 두어 순을 쏘았다.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 때마침 수사 원균(원균)이 와서 심하게 취했기 때문에 한두번 밖에 못했다. 초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왔다.

 

2월 19일 [양력 4월 9일]<무진> 가랑비가 종일 왔다. 날씨가 찌는 듯했다.

활터 정자에 올라가 혼자 앉아 있는데, 우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오고 이홍명(이홍명)도 왔다. 조금 있다가 손충갑(손충갑)이 왔다고 보고하기에 불러 들여서 그 왜적을 토벌하던 일을 물었 더니, 감개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종일 이야기했다. 저물어서 숙소로 내려왔다. 변존서(변존서)가 본영으로 갔다.

 

2월 20일 [양력 4월 120일]<기사> 안개같은 이슬비가 걷히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우조방장과 첨지 배경남(배경남)이 와서 이야기했다. 울(울)이 우수사 영감의 배에 갔다가 몹시 취해서 돌아왔다.

 

2월 21일 [양력 4월 11일]<경오> 맑고 따뜻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순천부사와 우조방장 어영 담(어영담) 영감이 와서, 견내량에 복병한 곳을 가서 살펴봤더 라고 보고했다. 청주 의병장 이봉(이봉)이 순변사에게 가서 육지의 사정을 자세히 일러 주고서 우 영감은 청주영감의 아제이다. 해질녘에 돌아갔다.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의 척후장(제한국)이 와서 구화역(통영시 광도면 노산리) 앞바다에 왜선 여덟 척이 와서 대었다고 했다. 그래서 배에서 내려 삼도에 전령하기를, 진격할 약속을 내리고서 원균(원균)의 군관 제홍록(제홍록)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

 

2월 22일 [양력 4월 12일]<신미>

밤 한 시가 막 넘자 제홍록(제홍록)이 와서 말하는데, “왜선 열 척은 구화역에 이르렀고, 여섯 척은 춘원포(춘원포)에 이르 렀다”고 했다. 또 이미 날이 새어 미처 따라 잡지 못했다고 하므로, 다시 정찰이나 하라고 명령하고서 보냈다. 아침에 순천부사 ·우

 

2월 28일 [양력 4월 18일]<정축> 맑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종사관(정경달)과 종일 이야기했다. 장흥부사(황세득)가 들어왔다. 우수사를 처벌했다.

 

2월 29일 [양력 4월 19일]<무인> 맑다.

아침에 종사관과 같이 식사를 하고, 또 전별의 술을 마시며 종일 이야기했다. 장흥부사도 함께 했다. 벽방의 척후장 제한국 (제한국)의 긴급보고 내용에, “적선 열여섯 척이 소소포로 들어 왔다”고 하므로 각 도에 전령하여 알리도록 했다.

 

갑오년 3월 (1594년 3월)

 

3월 초1일 [양력 4월 20일]<기묘> 맑다.

망궐례를 드렸다. 활터 정자로 곧바로 올라가 검모포만호에게 캐묻고서 만호에게 곤장치고, 도훈도를 처형했다. 종사관(정경 달)이 돌아왔다. 막 어두울 녘에 출항하려할 때, 벽방척후장 제한 국(제한국)이 보고하기를, “왜선이 이미 도망가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초저녁에 장흥의 2호선이 실수로 불을 내어 다 타버렸다.

 

3월 초2일 [양력 4월 21일]<경진> 맑다.

아침에 방답·순천·우조방장이 왔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좌조방장· 우조방장· 순천부사· 방답첨사와 활을 쏘았다. 이 날 저녁에 장흥이 와서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강진의 모종으로 쌓아 둔 곳에 실수로 불을 내어 모두 다 타버렸다.

 

3월 초3일 [양력 4월 22일]<신사> 맑다.

아침에 전문(명절하례로 임금께 올리는 글월)을 절하여 보내고 곧 활터 정자에 앉았다. 경상우후 이의득이 와서 말하기를, “수군 이 많이 잡아 오지 못했다고 그의 수사(원균)에게서 매를 맞고, 또 발바닥까지 맞을 뻔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 좌조방장· 우조방장· 방답첨사· 가리포 첨사· 좌수사 우후· 우수사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척후장(제한국)이 보고한 내용에, “왜선 여섯 척이 오리량(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고리량)·당항포 등지에 정박 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곧 배를 소집시키라고 전령하고, 대군을 흉도 앞바다에 진치고 정예선 서른 척을 우조방장(어영담)이 거 느리고 적을 무찌르도록 했다. 초저녁에 배를 움직여 지도에 이르렀다가 새벽 두 시쯤에 출항했다.

 

3월 초4일 [양력 4월 23일]<임오> 맑다.

밤 두 시쯤에 출항했다. 진해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여섯 척을 뒤쫓아 잡아 불태워 버렸고, 돝섬(저도: 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저도. 용두산 해발 203m)에서 두 척을 불태워 버렸다. 또 소소강 에 열네 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조방장과 경상우수사 원균(원 균)에게나가 토벌하도록 전령했다. 고성땅 아잠포(아자음포;고성 군 동해면 당거리)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3월 초5일 [양력 4월 24일]<계미> 맑다.

겸 사복(윤붕)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쳐부수고 불태웠는지를 탐문케 하였더니, 우조방장 어영담(어영담)이 긴급보고한 내용에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틈타서 도망했으 므로 빈 배 열일곱 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경상우 수사(원균)의 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우수사가 와서 볼 적에 비 가 많이 퍼붓고바람도 몹시 불었다. 바로 자기 배로 돌아갔다. 이 날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토벌을 독려하는 공문이 왔다. 우조 방장과 순천·방답·배 첨사도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에 경상우수사 원균(원균)이 배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 갔다. 저녁에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3월 초6일 [양력 4월 25일]<갑신> 맑다.

새벽에 망군이 보니, 적선 마흔 척 남짓이 청슬(거제시 사등면 지석리)로 건넜다고 했다. 당항포 왜선 스무한 척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긴급보고를 했다. 저녁나절에 거제로 향하는 데 맞바람이 거슬러 불어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니, 남해현감이 보고하되, “명나라 군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명이 패문을 가지고 왔기에 그 패문과 명나라 군사 두 명을 보낸다.”고 했다. 그 패문을 가져다 보니, 명나라 도사부(도사부)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 조차 불편하다. 저녁에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명나라 군사를 만나 보고서 보냈다.

 

3월 초7일 [양력 4월 26일]<을유> 맑다.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꼼짝하기 조차 어렵다. 그래서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패문을 지어라고 하였더니 지어 놓은 글이 꼴이 아니다. 또, 경상우수사 원균(원균)이 손의갑(손의갑)으로 하여금 작성했는 데도 그것마저 못 마땅하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정사립(정사립)에게 이를 쓰게 하여 보냈다. 오후 두 시쯤에 출항하여 밤 열 시쯤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

 

3월 초8일 [양력 4월 27일]<병술> 맑다.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아팠다.

 

3월 초9일 [양력 4월 28일]<정해> 맑다.

기운이 좀 나은 듯 하므로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아프긴 해도 다른 증세는 없다.

 

3월 초10일 [양력 4월 29일]<무자> 맑다.

병세는 차츰 나아지는 것 같은데, 열기는 치올라 그저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 뿐이다.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3월 11일 [양력 4월 30일]<기축> 종일 큰 비가 왔다.

어두울 무렵에는 개였다. 병세가 아주 많이 나아졌고 열도 또 한 내리니 참으로 다행이다.

 

3월 12일 [양력 5월 1일]<경인>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매우 불편하다. 영의정에게 편지를 썼다. 장계를 정서하 는 일을 마쳤다는 말을 들었다.

 

3월 13일 [양력 5월 2일]<신묘> 맑다.

아침에 장계를 봉해 올렸다. 몸은 차츰 나아지는 것 같으나, 기 력이 매우 고달프다. 그대로 회( )와 송두남을 내어 보냈다. 오후에 원균(원균) 수사가 왔다. 그의 잘못된 일을 말했다.

그래 서 장계를 도로 가져 와서 원사진(원사진)과 이응원(이응원) 등 거짓으로 왜인 노릇한 놈을 목잘라 바친 일을 고쳐서 보냈다.

 

3월 14일 [양력 5월 3일]<임진> 비가 내렸다.

몸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기분이 좋지 않다. 저녁에 광양현감(송전)· 강진현감(류해)· 첨지 배경남(배경남) 같이 갔다. 소문에 “충청수사(구사직)가 이미 신장(신장)에 왔다”고 한다. 종일 몸이 불편했다.

 

3월 15일 [양력 5월 4일]<계사>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미조항첨사가 돌아갔다. 종일 신음했다.

 

3월 16일 [양력 5월 5일]<갑오> 맑다.

몸이 매우 불편하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수사가 전선 아홉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3월 17일 [양력 5월 6일]<을미> 맑다.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변유헌(변유헌)은 본영으로 돌아가고 순천도 돌아갔다. 해남현감(위대기)는 새 현감과 교대하는 일로 나가고, 황득중 등은 복병에 관한 일로 거제도로 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3월 18일 [양력 5월 7일]<병신> 맑다.

몸이 몹시 불쾌하다. 남해현감 기효근(기효근)·보성군수(김득광) ·소비포권관 이영남(이영남)· 적량첨사 고여우(고여우)가 와서 봤다. 기효근(기효근)은 파종 때문에 돌아갔다. 보성군수는 말을 하려 했다가 사정을 말하지 않고 돌아갔다. 낙안 유위장(유위장)과 향소(향소) 등을 잡아 가두었다.

 

3월 19일 [양력 5월 8일]<정유> 맑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3월 20일 [양력 5월 9일]<무술> 맑다.

몸이 불편하다.

 

3월 21일 [양력 5월 10일]<기해> 맑다.

몸이 불편하다. 명단을 작성하는 관리로 여도만호(김인영)·남도 포만호(강응표)·소비포권관 이영남(이영남)을 뽑아 담당시켰다.

 

3월 22일 [양력 5월 11일]<경자> 맑다.

몸이 약간 나아진 것 같다. 원수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 지휘 담종인의 자문(중국과 왕래하던 문서)과 왜장의 서계(서계:일본과 왕래하던 문서)를 조파총이 가지고 간다”고 하였다.

 

3월 23일 [양력 5월 12일]<신축> 맑다.

기운이 여전히 불쾌하다. 방답첨사(이순신)·흥양현감(배흥립)· 조방장(어영담)이 와서 봤다. 견내량이 미역 쉰세 동을 캐어 왔 다. 발포만호(황정록)도 와서 봤다.

 

3월 24일 [양력 5월 13일]<임인> 맑다.

몸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미역 예순 동을 캐 왔다. 정사립 (정사립)이 왜놈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다.

 

3월 25일 [양력 5월 14일]<계묘> 맑다.

흥양현감과 보성군수가 나갔다. 사로잡혔던 아이(희순)가 왜의 진중에서 명나라 장수(담종인)의 가지고 왔던 자인데, 흥양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에 올라갔는데 몸이 몹시 불편 하여 일찍 숙소로 내려왔다. 저녁에 아우 여필·아들 회( )· 변존서(변존서)·신경황이 와서 어머니 안부를 자세히 들었다. 다만 선산이 모두 산불에 탔는데, 아무도 끄지 못했다고 한다. 몹시 가슴 아프다.

 

3월 26일 [양력 5월 15일]<갑진> 맑다.

따뜻하기가 여름 날씨 같다. 조방장·방답첨사가 와서 왔다. 발포 만호가 휴가를 받아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마량첨사·사량만호· 사도첨사·소비포가 아울러 와서 봤다. 경상우후(이의득)· 영등포만호(우치적)도 왔다가 창신도로 돌아가 겠다고 했다.

 

3월 27일 [양력 5월 16일]<을사> 흐리되 비는 아니 오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초저녁에 비가 왔다. 봉( )이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한다.

 

3월 28일 [양력 5월 17일]<병오> 종일 비가 내렸다.

조카 봉( )의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 몹시도 걱정된다.

 

3월 29일 [양력 5월 18일]<정미> 맑다.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였다. 웅천현감· 하동현감·소비포권관 등이 와서 봤다. 장흥부사·방답첨사도 와서 봤다. 저녁에 여필과 봉( )이 같이 돌아갔다. 봉( )은 중 병이 들어 돌아 갔으니 밤새도록 걱정으로 새웠다. 어두워서 방 충서와 조서방의 사위 김함(김 )이 왔다.

 

3월 30일 [양력 5월 19일]<무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충청군관·도훈도를 처벌하고 낙안유위장·도병방 등을 처벌했다. 저녁나절에 삼가현감 고상안(고상안)이 와서 봤다. 저녁에야 숙소로 내려왔다.

 

갑오년 4월 (1594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20일]<기유> 맑다.

매일 먹는 밥인데도 밥을 먹지 못했다. 장흥부사(황세득)·진도 군수(김만수)·녹도만호(송여종)이 여제(악질병에 걸려 죽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고 아뢰고 돌아갔다.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4월 초2일 [양력 5월 21일]<경술>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삼가현감과 충청수사 와 같이 종일 이야기했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4월 초3일 [양력 5월 22일]<신해> 맑다.

오늘 여제를 지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천여든 동이를 먹였다. 우수사와 충청수사도 같이 앉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숙소로 내려왔다.

 

4월 초4일 [양력 5월 23일]<임자> 흐렸다가 어둘녘에 비가 왔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 송홍득(송홍득)과 변홍달(변홍달)이 새로 급제한 홍패(과거 합격증)를 가지고 왔다. 경상우병사의 군관 박 창령(박창령)의 아들 박의영(박의영)이 와서 그의 장수의 안부 를 전했다. 식사를 한 뒤에 삼가현감이 왔다. 저녁나절에 활터정 자로 올라가니 장흥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종일 오손도손 이야기하였다.

 

4월 초5일 [양력 5월 24일]<계축> 흐리다.

새벽에 최천보(최천보)가 죽었다.

 

4월 초6일 [양력 5월 25일]<갑인> 맑다.

별시(별시: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마다 보이던 문무 시험)를 보는 시험장소를 개설하였다. 시험관은 나와 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구사직)이요, 참시관(시험감독관)은 장흥부사(황세득)· 고성현령(조응도)·삼가현감(고상안)·웅천현감(이운룡)을 시험을 감독하게 하였다.

 

4월 초7일 [양력 5월 26일]<을묘> 맑다.

일찍 모여 시험을 받았다.

 

4월 초8일 [양력 5월 27일]<병진> 맑다.

몸이 불편한 채 시험장으로 올라갔다.

 

4월 초9일 [양력 5월 28일]<정사>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큰 비가 왔다. 조방장 어영담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통탄함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으랴!

 

4월 초10일 [양력 5월 29일]<무오> 흐리다.

순무어사(각지의 군대와 백성을 순찰하려고 파견되는 중앙관리) (서성)가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4월 11일 [양력 5월 30일]<기미> 맑다.

순무어사가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문안하는 배를 내어 보냈다.

 

4월 12일 [양력 5월 31일]<경신> 맑다.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이억기)·경상 수사(원균)·충청수사(구사직)가 함께 왔다. 술이 세 순배 돌자, 경상수사 원균은 짐짓 술취한 척하고 미친 듯이 날뛰며, 억지 소리를 해대니, 순무어사도 무척 괴이쩍어 했다. 삼가현감이 돌아갔다.

 

4월 13일 [양력 6월 1일]<신유> 맑다.

순무어사가 전쟁연습하는 것을 보고싶어 한다. 그래서, 죽도(통영 시 한산면)바다 가운데로 나가서 연습했다. 선전관 원사표(원사 표)·금오랑 김제남(김제남)이 충청수사(구사직)를 잡아갈 일로 왔다.

 

4월 14일 [양력 6월 2일]<임술> 맑다.

김제남과 함께 자세한 말을 했다. 저녁나절에 순무어사의 배로 가서 군사 기밀을 자세히 의논했다. 잠시후에 우수사가 오고, 순 천부사·방답첨사·사도첨사도 아울러 왔다. 나는 하직하고 배로 돌아왔다.

 

4월 15일 [양력 6월 3일]<계해> 맑다.

충청수사(구사직)가 선전관(원사표)·금오랑(김제남)·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왔다. 충청수사 우경(우경) 구사직(구사직)과 작별 했다.

 

4월 16일 [양력 6월 4일]<갑자>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정자로 올라갔다. 밀려 쌓인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경상수사(원균)의 군관 고경운(고경운)과 도훈도 및 변고(변고)에 대비하는 색리·영리를 잡아다가, 지휘에 응하지 않고 적변도 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쳤다. 저녁에 송두남(송두남)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장계에 따라 낱낱이 하교한 대로 시행했다.

 

4월 17일 [양력 6월 5일]<을축> 맑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거제현령(안위)가 급히 와서 보고한 내용에, “왜선 백 여 척이 본토(일본)에서 처음 나와서 절영도(절영도)로 향한다.”고 했다. 저물 무렵에 거제에 살다가 사로잡혔던 남녀 열여섯 명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4월 18일 [양력 6월 6일]<병인> 맑다.

새벽에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적정을 자세히 물으니, 대마도 평의지(종의지)는 웅천땅 입암(진해시 웅천동 제덕 리)에 있고, 평행장(소서행장)은 웅포에 있다고 한다.

충청도 신임 수사(이순신)·순천부사 및 우수사우후(이정충)가 왔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도 왔다.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세차게 왔다.

 

4월 19일 [양력 6월 7일]<정묘> 비가 내렸다.

첨지 김경로(김경로)가 원수부에서 와서 적을 토벌할 대책을 논 의하고서 그대로 한 배에서 잤다.

 

4월 20일 [양력 6월 8일]<무진> 종일 가랑비가 걷히지 않았다.

우수사·충청수사·장흥부사·마량첨사(강응표)가 와서 바둑을 두고, 군사에 관한 일도 의논했다.

 

4월 21일 [양력 6월 9일]<기사> 비가 오락가락 했다.

혼자 봉창 아래 앉아 있으도 저녁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방답첨사가 충청수사로 되어 중기(중기)를 수정하는 일로 아뢰고 돌아갔다. 저녁에 김성숙(김성숙)과 곤양의 이광악(이광악)이 와서 봤다. 저물녁에 흥양이 들어 왔다. 본영 탐후선도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4월 22일 [양력 6월 10일]<경오> 맑다.

바람이 시원하여 가을 날씨 같다. 첨지 김경로가 다시 돌아왔다. 장계를 봉하고, 또 조총을

동궁에게 줄 긴 창과 더불어 봉해 올렸다. 장흥부사가 왔다. 저녁에 흥양현감도 왔다.

 

4월 23일 [양력 6월 11일]<신미>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권준)·흥양현감(배흥립)이 왔다. 저녁나절에 곤양군수 이광악(이광악)이 술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도 왔다. 임치첨사(홍견)도 같이 왔다. 곤양이 몹시 취해서 미친 소리를 마구 해대니 우습다. 나도 잠깐 취했다.

 

4월 24일 [양력 6월 12일]<임신> 맑다.

아침에 서울 편지를 썼다. 저녁나절에 영암군수(박홍장)·마량 첨사(강응표)가 와서 봤다. 순천부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각 항목의 장계를 봉해 보냈다. 경상우수사가 있는 곳에 순찰사 종사관이 왔다고 한다.

 

4월 25일 [양력 6월 13일]<계유> 맑다.

꼭두새벽부터 몸이 불편하여 종일 괴로워했다. 아침에 보성군수가 와서 봤다. 밤새도록 앉아서 앓았다.

 

4월 26일 [양력 6월 14일]<갑술> 맑다.

통증이 극히 심하여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곤양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

 

4월 27일 [양력 6월 15일]<을해> 맑다.

통증이 잠깐 덜하다. 숙소로 내려갔다.

 

4월 28일 [양력 6월 16일]<병자> 맑다.

기력과 아픈 증세가 많이 덜했다. 경상수사(원균)과 좌랑 이유함(이유 )이 와서 봤다. 울(울)이 들어왔다.

 

4월 29일 [양력 6월 17일]<정축> 맑다.

기운이 상쾌해진 것 같다. 아들 면이 들어왔다. 곧 고을의 종 넷과 관의 종이 들어왔다. 오늘 우도에서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갑오년 5월 (1594년 5월)

 

5월 초1일 [양력 6월 18일]<무인>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의 방에 올라가니 날씨가 무척 맑고 시원했다. 종일 땀이 비오듯이 흐르더니, 좀 나아진 것 같다. 아침에 아들 면과 집안 계집 종 넷, 관 계집 종 네 명이 병을 간호하러 들어왔다. 덕이(덕)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내일 돌려 보내라고 일렀다.

 

5월 초2일 [양력 6월 19일]<기묘> 맑다.

새벽에 회는 계집 종 등과 더불어 어머니 생신에 상차려 드릴 일로 돌아갔다. 우수사(이억기)·흥양현감(배흥립)·사도첨사 (김완)·소근첨사(박윤)이 와서 봤다. 몸이 차츰 나아져 갔다.

 

5월 초3일 [양력 6월 20일]<경진> 맑다.

흥양현감이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장흥부사와 발포 만호가 와서 봤다. 군량명세서와 공명고신(이름이 안 적힌 사령 장) 삼백 여 장(장)과 임금의 분부 두 통이 내려왔다.

 

5월 초4일 [양력 6월 21일]<신사> 거센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리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밤새도록 더 심하게 내렸다.

경상우수사의 군관이 와서 고하기를, “왜적 세 명이 중선(중선)을 타고 추도(통영시 산양면)에 온 것을 만나 잡아 왔다.”고 했다. 이를 추문(추문)한 뒤에 압송할 일로 일러 보냈다. 저녁에 공 대원(공대원)에게 물으니, 왜적들이 바람을 따라 배를 몰고 본토 (일본)로 향하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를 조 종할 수가 없어 떠 다니다가 이 섬에 닿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 나 간사한 사람의 말이니 믿을 수 없다. 이설(이설)·이상록(이상 녹)이 돌아갔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5월 초5일 [양력 6월 22일]<임오> 비바람이 세게 불어쳤다.

지붕이 세 겹이나 말리어 조각 조각 높이 날려가고, 빗발은 삼대 같이 내려 몸을 가누지 못했다. 우습다. 사도첨사가 와서 문안 하고 돌아갔다. 큰 비바람이 오후 두 시쯤에야 조금 멈추었 다. 발포만호(황정록)가 떡을 만들어 보내 왔다. 탐후선이 들어 왔다. 어머니가 평안하심을 알았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5월 초6일 [양력 6월 23일]<계미>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개이다.

사도·보성·낙안·소근 등이 와서 봤다. 오후에 경상수사 원 균(원균)이 왜놈 세 명을 잡아 왔기에 문초를 해 보니, 이랬다 저랬다 만번이나 속이므로 수사 원균(원균)으로 하여금 목을 베고 보고케 했다. 우수사도 왔다. 술을 세 순배 돌렸다가 상을 물리고 돌아갔다.

 

5월 7일 [양력 6월 24일]<갑신> 맑다.

기운이 편안한 것 같다. 침 열여섯 군데를 맞았다.

 

5월 8일 [양력 6월 25일]<을유> 맑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변응각)이 원수의 공문과 장계 초본과 임금 의 분부(유지)를 가지고 왔다.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 적이 무서워 도망 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경상수사와 전라우수사 를 불어 의논했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밤에 큰 비가 왔다.

 

5월 9일 [양력 6월 26일]<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 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아득하여 술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5월 10일 [양력 6월 27일]<정해> 비가 내렸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 보니, 우리의 많은 배들이 바다에 가득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 온다 해도 섬멸할만하다. 저녁나절에 우우후(이정충)과 충청수사(이순신)이 와서 두 사람이 장기를 두었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도 같이 점심을 먹었다. 보성군수(김득광)가 저물 무렵에 왔다.비가 종일 걷히지 않았다. 아들 회( )가 바다로 나간 것이 걱정된다. 소비포권관이 약품을 보내 왔다.

 

5월 11일 [양력 6월 28일]<무자> 비가 저녁 때까지 내렸다.

3월부터 밀려 쌓인 공문을 낱낱이 적어서 내려줬다. 저녁에 낙안군수(김준계)가 와서 이야기했다. 큰 비가 퍼붓듯이 내려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5월 12일 [양력 6월 29일]<기축> 큰 비가 종일 내리다가 저녁이 되서 야 조금 그쳤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5월 13일 [양력 6월 30일]<경인> 맑다.

이 날 검모포만호의 보고에, “경상우수사 소속의 보자기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가다가 현장에서 붙들렸는데, 많은 보자기들이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복들을 보 내어 잡아 오게 하였더니, 원균(원균) 수사가 도리어 사복(사복) 들을 묶어서 가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관 노윤발을 보내어 이 를 풀어 주게 했다. 밤 열 시쯤에 비가 왔다.

 

5월 14일 [양력 7월 1일]<신묘> 종일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이순신)·낙안군수(김준계)·임치현감(홍견)·목포만호( 전희광) 등이 와서 봤다.

영리(영리)에게 시켜 종정도(벼슬이름을 품계와 종별을 따라 그려 놓고 윷놀이 하듯이 말을 쓰는 놀이)를 그렸다.

 

5월 15일 [양력 7월 2일]<임진> 종일 비가 내렸다.

아전에게 시켜 종정도를 그렸다.

 

5월 16일 [양력 7월 3일]<계사>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에는 큰 비가 밤새도록 내려 지붕이 새어서 마른 데가 없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가 매우 괴로울 것이 염려된다. 곤양군수 (이광악)가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사명당 유정이 진진 안으로 왕 래하면서 문답한 초기(초기:각 관청에서 업무상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을 사실만 간단히 적어 올리던 글)를 보내 왔기로 보니, 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5월 17일 [양력 7월 4일]<갑오>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바다의 안개가 캄캄하여 눈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 저녁내 그치지 않았다.

 

5월 18일 [양력 7월 5일]<을미> 종일 비가 내렸다.

미조항첨사(김승룡)가 와서 봤다. 저녁에 상주포권관이 와서 봤다. 저녁에 보성현감이 돌아갔다.

 

5월 19일 [양력 7월 6일]<병신> 맑다. 장마비가 잠깐 걷혔다.

마음이 몹시 상쾌했다. 아들 회와 면과 계집 종 등이 돌아갔다. 그때때, 바람이 순탄치 않았다. 이날 송희립과 회가 같이 착량에 가서 노루를 잡을 적에 비바람이 몹시 일고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초저녁에 돌아왔는데도 활짝 걷히지 않았다.

 

5월 20일 [양력 7월 7일]<정유> 비가 오고 또 거센 바람이 조금 그 쳤다.

웅천현감(이운룡)과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온종일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민다. 호남의 관찰사들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에 더 많이 유감스럽다.

 

5월 21일 [양력 7월 8일]<무술> 비가 내렸다.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와서 종정도를 했다. 거제 장문포에서 적에게 사로잡혔던 변사안(변사안)이 도망쳐 와서 하는 말이, 적의 형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했다. 센 바람이 밤낮으로 불 었다.

 

5월 22일 [양력 7월 9일]<기해> 비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오는 29일이 장모의 제삿날이다. 아들 회와 면을 내보냈 다. 계집 종들도 내 보냈다. 순찰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또 순변사에게도 편지를 써 보냈다. 황득중(황득중)·박주하(박주하)· 오수(오수) 등은 격군을 잡아 올 일로 내 보냈다.

 

5월 23일 [양력 7월 10일]<경자> 비왔다.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왔다. 저녁나절에 해남현감(위대기)이 와서 술과 안주를 바치므로, 충청수사(이순신)를 청하여 왔다.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5월 24일 [양력 7월 11일]<신축> 잠시 맑다가 저녁에 비가 내렸다.

웅천·소비포가 와서 종정도를 놀았다. 해남도 왔다. 오후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구사직(구사직)에 대한 장계를 가져 갔던 진무가 들어왔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5월 25일 [양력 7월 12일]<임인>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서 돌아갔다. 소비포도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마음이야 오죽 답답하랴. 조카 해가 돌아갔다.

 

5월 26일 [양력 7월 13일]<계묘> 걷히기도 하고 비오기도 하였다..

마루에 앉았는데 서쪽 벽이 무너져 있었다. 바라지 창으로 들어 오는 바람을 다시 쐬니 기분을 맑게 하여 무척 좋았다. 과녁판을 정자 앞으로 옮겨 놓았다. 오늘 이인원(이인원)과 토병 스무세 명을 본영으로 보내어 보리를 거두어 들이라고 일러 보냈다.

 

5월 27일 [양력 7월 14일]<갑진> 맑다가 비오기더 했다.

사도첨사가 충청수사·발포만호·여도만호·녹도만호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 날 소비포권관이 누워서 앓았다고 했다.

 

5월 28일 [양력 7월 15일]<을사> 잠깐 개이다.

사도첨사·여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겠다고 여쭈었다. 그래서 우수사·충청수사를 청해 와서 활쏘고, 취하여 종일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광양 4호선의 부정사실을 조사했다.

 

5월 29일 [양력 7월 16일]<병오>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엿다.

장모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저녁에 진도군수(김만 수)가 아뢰고 돌아갔다. 웅천현감(이운룡)·거제현령(안위)·적량 첨사(고여우)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물녁에 정사립(정사립)이 보고하는데, “남해 사람이 배를 가지고 와서 순천 격군을 싣고 간다”고 했다. 그래서 잡아서 가두었다.

 

5월 30일 [양력 7월 17일]<정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왜놈들과 도망가자고 꾄 광양 1호선 군사와 경상도 보 자기 세 명을 처벌했다.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충청수사가 왔다.

 

 

갑오년 6월 (1594년 6월)

 

6월 초1일 [양력 7월 18일]<무신> 맑다.

아침에 배 첨사(배경남)와 같이 밥을 먹었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활을 쏘았다.

 

6월 초2일 [양력 7월 19일]<기유> 맑다.

아침에 배 첨사(배경남)와 같이 밥을 먹었다. 충청수사도 왔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의 진으로 갔더니, 강진현감(류해)이 술을 바쳤다. 활 두어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 원균(원균)도 왔다. 나는 곧 몸이 불편하여 돌아가 누워서 충청수사와 첨사 문길(문길) 배경남(배경남)이 내기 장기두는 것을 구경했다.

 

6월 3일 [양력 7월 20일]<경술> 초복이다. 아침에 맑더니 오후에 소 나기가 퍼부어 종일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바닷물 빛조차 흐리니, 근래에 드문 일이다. 충청수사·첨사 배경 남(배경남)이 와서 바둑을 두었다.

 

6월 4일 [양력 7월 21일]<신해> 맑다.

충청수사·미조항첨사와 웅천현감이 와서 보기에 종정도를 놀게 했다. 저녁에 겸 사복이 임금의 분부(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 사연에 이르기를,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전날의 버릇을 버려라.”는 것이다. 통탄하기 그지없다. 이는 원균(원균)이 술에 취하여 망발한 때문이다.

 

6월 5일 [양력 7월 22일]<임자>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사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가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급창(관청의 심부름하는 종) 김산(김산)과 그 처자 등 세 명이 유행병으로 죽었다. 세 해나 눈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사람인데, 하루 저녁에 죽어가다니, 참으로 슬프다.

무우밭을 갈았다. 송희립·낙안군수·흥양현감·보성군수가 군량을 독촉할 일로 나갔다.

 

6월 6일 [양력 7월 23일]<계축> 맑다.

충청수사·여도만호와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소나기가 왔다.

 

6월 7일 [양력 7월 24일]<갑인> 맑다.

충청수사·첨사 배경남(배경남)이 와서 이야기했다. 남해군관과 색리 등의 죄를 처벌했다.

송덕일(송덕일)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임금의 분부(유지)가 들어온다고 했다. 오늘 무우씨 두 되 다섯 홉을 부침했다.

 

6월 8일 [양력 7월 25일]<을묘> 맑으며 물쿠었다.

우우후가 왔다. 충청수사와 다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저녁 에 종 한경(한경)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심을 알았다. 참으로 기쁘고도 다행이다. 미조항첨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회 령포만호(민정붕)가 진에 왔다. 전공(전공)에 따라 포상하는 관교 (관교:교지)도 왔다.

 

6월 9일 [양력 7월 26일]<병진> 맑다.

충청수사·우우후가 와서 활을 쏘았다. 우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 기했다. 밤이 깊은데 피리소리 가득한 바다, 거문고를 타며 장수를 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6월 10일 [양력 7월 27일]<정사> 맑으며, 물쿠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6월 11일 [양력 7월 28일]<무오> 맑으며,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울)이 본영으로 갔다. 작별하는 회포가 씁쓸하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몹시 사나와지며 걱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앉아서 오래도 록 있다가 헤어졌다.

 

6월 12일 [양력 7월 29일]<기미> 바람이 세게 불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가뭄이 너무 심하다. 농사의 근심이 더욱 염려스럽다. 이 날 어둘 무렵에 본영의 배 격군 일곱 놈이 도망갔다.

 

6월 13일 [양력 7월 30일]<경신> 바람이 몹시 불고 더위는 찌는 듯하다.

6월 14일 [양력 7월 31일]<신유> 더위와 가뭄이 너무 심하다.

바다의 섬도 찌는 듯하다. 농사일이 아주 걱정된다. 충청수사·사 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와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충청 수사가 가장 잘 맞혔다. 이 날 경상수사는 활꾼을 거느리고 우수 사가 있는 곳으로 왔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고 했다.

 

6월 15일 [양력 8월 1일]<임술> 맑더니 오후에 비가 내렸다.

신경황(신경황)이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라를 근심함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것이다. 지사 윤우신(윤우 신)이 죽었다니, 애석할 따름이다. 순천부사·보성군수가 달려와 보고하는데, “명나라 총병관 장 홍유가 호선(호선)을 타고 백 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거쳐 벌써 진도 벽파정(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이르렀다.”고 했다. 날짜로 짚어보면 오늘이나 내일에 이르를 것이지만, 바람이 맞불 어 맘대로 배를 부리지 못한 것이 닷새째이다. 이 날 밤 소나기가 흡족하게 내렸다. 어찌 하늘이 백성을 살리려는게 아니겠는가.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했다. 또 아내의 편지에는 면( )이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괴롭고 답답하다.

 

6월 16일 [양력 8월 2일]<계해>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에 개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6월 17일 [양력 8월 3일]<갑자> 맑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충청수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탐 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으나, 면은 많이 아프다고 했다. 몹시 걱정된다.

 

6월 18일 [양력 8월 4일]<을축> 맑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 조추년(조추년)이 전령을 가지고 왔다. “원 수가 두치(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러 광양현감(송전)이 수군 중에 복병을 뽑을 적에 사사로운 정을 썼다 말을 들었다. 그래서 군관 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물으니, 놀라운 일이다. 원수가 그 서처남 조대항(조대항)의 말을 듣고 이렇게도 사사로이 행하니 통탄스럽 기 그지 없다. 이 날 경상우수사가 청했는데 가지 않았다.

 

6월 19일 [양력 8월 5일]<병인> 맑다.

원수의 군관과 배응록(배응록)이 원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변존서(변존서)· 윤사공(윤사공)· 하천수(하천수) 등이 들어왔다. 충청수사가 와 보고서 그 어머니 병환 때문에 곧 그의 사처(사 처)로 돌아갔다.

 

6월 20일 [양력 8월 6일]<정묘>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보고 활을 쏘았다. 박치공(박치공)이 와서 말하 고 서울로 갔다. 마량첨사도 왔다. 저녁에 영등포만호는 본포(영 등포)에 물러나 있었던 죄를 다스렸다. 탐후선 이인원(이인원) 이 들어왔다.

 

6월 21일 [양력 8월 7일]<무진>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명나라 장수(장홍유)가 바닷길로 벌써 벽파정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잘 못 전한 것이라고 했다.

 

6월 22일 [양력 8월 8일]<기사> 맑다.

할머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오늘 불꽃과 같은 삼복 더위가 전보다 더하여 큰 섬이 찌는 듯하여 사람이 견디기가 여 간 어렵지 않다.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사를 두 끼니나 먹지 않았다. 초저 녁에 소나기가 내렸다.

 

6월 23일 [양력 8월 9일]<경오> 맑더니 저녁나절에 소나기가 왔다.

순천부사·충청수사·우우후·가리포첨사가 아울러 와서 봤다. 우후(이몽구)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나갔다가 견내량에서 왜놈을 사로잡았다. 왜적의 동태를 캐묻고, 또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더 니, 염초굽는 일과 총쏘기를 다 잘한다고 했다.

 

6월 24일 [양력 8월 10일]<신미> 맑다.

순천부사·충청수사가 와서 활 스무 순을 쏘았다.

 

6월 25일 [양력 8월 11일]<임신> 맑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이여념(이여념)도 와서 활을 쏘았다. 종사관(정경달)을 모시는 아전이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 데, 조도어사의 말이 몹시 놀라왔다. 부채를 봉하여 보냈다.

 

6월 26일 [양력 8월 12일]<계유> 맑다.

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사·여도만호·고성현령 등이 활을 쏘았다. 일찍 김양간(김양간)에게 단오날의 진상물을 봉해 올렸 다. 마량·영등포가 여기 왔다가 곧 돌아갔다.

 

6월 27일 [양력 8월 13일]<갑술> 맑다.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6월 28일 [양력 8월 14일]<을해> 맑다. 더위가 찌는 듯하다.

나라제삿날(명종 제일)이라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진무성(진 무성)이 벽방산의 망보는 곳의 부정사실을 조사하고 와서 적선은 없더라고 보고했다.

 

6월 29일 [양력 8월 15일]<병자> 맑다.

순천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우수사·충청수사와 같이 와서 활을 쏘았다. 윤동구(윤동구)의 아버지가 와서 봤다. 울(울)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갑오년 7월 (1594년 7월)

 

7월 초1일 [양력 8월 16일]<정축> 맑다.

배응록(배응록)이 원수에게서 들어 왔다. 원수가 뉘우치는 말을 하고서 보냈다는 것이다. 우습다. 이 날이 나라제삿날(인종 제 일)이라 홀로 종일 앉있었다. 저녁에 충청수사가 여기 와서 서로 이야기했다.

 

7월 초2일 [양력 8월 17일]<무인> 맑다.

늦더위가 찌는 듯하다. 이 날 순천의 도청(원을 보좌하는 아전)과 색리·광양의 색리 등의 죄를 다스렸다. 좌도 사수들의 활쏘기 를 시험하고, 적의 장물을 나누어 줬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충 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배 첨지가 휴가를 받아 갔다. 노윤 발(노윤발)에게 흥양군관 이심(이심)과 병선 색리·괄군색리 등을 붙잡아 올 일로 전령을 주어 내 보냈다.

 

7월 초3일 [양력 8월 18일]<기묘> 맑다.

충청수사·순천부사가 활을 쏘았다. 웅천현감 이운룡(이운룡)이 휴가를 신고하고 미조항으로 돌아갔다. 음란한 계집을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저녁에 새로 지은 다락으로 나가 보았다.

 

7월 4일 [양력 8월 19일]<경진>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은 뒤에 마량첨사·소비포권 관도 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왜적 다섯 명과 도망병 한 명을 아울러 처형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옥과의 계원유사 조응복(조응복)에게 참봉의 직첩을 주어 보냈다.

 

7월 5일 [양력 8월 20일]<신사> 맑다.

새벽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심을 알았다. 참으로 다행이다. 심약(심약: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감시하기 위하여 각 도에 파견하는 종9품의 벼슬인데, 전의감 혜민서의 의원중에서 뽑음)이 내려왔는데 매우 용렬하니 한심스럽다. 우수사·충청수사가 같이 왔다.

여도만호는 술을 가져와 같이 마셨다. 활 열여 순을 쏘았다. 너무 취해서 수루에 올랐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7월 6일 [양력 8월 21일]<임오> 종일 궂은비 오다.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큰 도둑 세 놈을 최귀석(최귀 석)이 잡아 왔다. 또 박춘양(박춘양) 등을 보내어 그 괴수를 잡아 왼쪽 귀를 잘라서 왔다. 아침에 정원명(정원명) 등을 격군을 정비하지 않은 일로 이를 잡아 가두었다. 저녁에 보성군수가 들어온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 11시 쯤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빗발이 삼대 같 아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치밀었다. 이영남(이영남)이 와서 봤다.

 

7월 7일 [양력 8월 22일]<계미> 저녁에 비가 뿌렸다.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다고 아뢰고 모이지 못했다. 우수사는 순천부사· 사도첨사· 가리포첨사· 발포만호· 녹도만호가 함께 활을 쏘았다. 이영남(이영남)이 배를 거느리고 올 일로 곤양으로 간다고 아뢰고 돌아갔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고성 보인(보인)을 문초했다. 보성이 왔다.

 

7월 8일 [양력 8월 23일]<갑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곤하여 장수들을 보지 않았다. 각 고을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오후에 충청수사에게 가서 봤다. 저녁에 고성 사람으로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사람을 직접 문 초했다. 광양의 송전(송전)이 그의 지휘관인 병사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낙안과 충청우후가 온다고 했다.

 

7월 9일 [양력 8월 24일]<을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충청우후(원유남)가 교서에 숙배하였다. 저녁나절에 순 천·낙안·보성의 군관과 색리들이 격군을 소홀히 하고 또 기일을 어긴 죄를 처벌했다. 가리포·임치·소근포·마량첨사 및 고성현령이 아울러 왔다. 낙안의 군량 벼 이백 섬을 받아서 나누었다.

 

7월 10일 [양력 8월 25일]<병술>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비가 조금 내렸다.

아침에 낙안의 겨냥 벼 찧은 것과 광양 벼 백 섬을 되었다. 신 홍헌(신홍헌)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송전(송전)과 군관이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아침에 아들 면의 병이 중태에 빠졌다는 말을 들었다. 또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고 하므로, 울(울)과 심약 신경황· 정사립· 배응록(배응록)을 아울러 내 보냈다.

 

7월 11일 [양력 8월 26일]<정해> 궂은비가 내렸다.

바람이 세게 불고 종일 그치지 않았다. 울(울)이 가는 길이 고 되고 힘들 것이 많이 염려되고, 또 면의 병이 어떠한지 궁금 하다. 장계를 손수 초잡아 고쳐 주었다. 경상 순무(서성)의 공 문이 왔는데, 원 수사가 불평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오후에 군관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봉학(봉학)도 같이 활을 쏘았다. 윤언침(윤언 )이 점고 받으러 왔기에 점심을 먹여 도로 보냈다. 저물무렵에 비바람이 몹시 치더니 밤 내내 계속 되었다.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7월 12일 [양력 8월 27일]<무자> 맑다.

아침에 소근첨사가 와서 보고 화살 쉰네 개를 만들어 바쳤다. 공문을 적어서 나누어 주었다. 충청수사는 순천·사도·발포·충 청우후와 아울러 와서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기 에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면의 병세는 중하여 몹시도 애타지만 어찌하랴.

영의정 류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 다. 이는 류 정승을 미워하는 자들이 반드시 말을 만들어 비방하는 말일 것이다. 이런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날 어둘 무렵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제대 로 걷잡을 수 없다. 염려가 더욱 답답하여 밤이 깊어 가도 잠들 지 못했다. 류 정승이 만약 어찌 되었다면 나랏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7월 13일 [양력 8월 28일]<기축> 비가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임금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 다. 두 괘가 다 좋았다. 마음이 좀 놓인다. 또 류 정승의 점을 친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은 괘가 나 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 왔다.무척 좋았다. 저녁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저녁나절에 송전(송전)이 돌아가는데, 소금 한 휘 를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첨사와 순천이 와서 보고 어두워 서 되돌아갔다. 비가 올 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뿜어 내는 것과 같은 괘가 나왔다. 앞으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저녁에 발포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7월 14일 [양력 8월 29일]<경인> 비가 내렸다.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삼대 같았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점괘를 얻은 그대로이니 참으로 묘하다. 충청수사와 순천부사를 청해 와서 장기를 두게 하고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근 심이 뱃속에 있으니, 어찌 조금인들 편안하랴!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에 수루 위로 걸어 나가 몇 바퀴나 어설렁거리다가 돌아왔 다. 탐후선이 오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자정에 비가 또 내렸다.

 

7월 15일 [양력 8월 30일]<신묘>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개었다.

조카 해·종 경이 들어와서 아들 면의 병이 차도가 있다 는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조카 분(분)의 편지 에, 또 아산 고향의 선산이 아무 탈 없고, 가묘도 편안하며, 어머 니께서도 편안하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이흥종(이 흥종)이 환자하는 일로 매를 맞다가 숨졌다고 했다. 놀랍다. 그 삼촌(충청수사 이순신)이 처음 이를 듣고서 비통한 나머지, 그 어 머니도 듣고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고 한다. 활 열 여 순을 쏜 뒤에 수루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거닐 적에, 박주사리(박주사 이)가 급히 와서 명나라 장수의 배가 이미 본영 앞에 이르러 이 리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곧 삼도에 전령하여 진을 죽도(통영시 한산면)로 옮겼다. 밤을 지냈다.

 

7월 16일 [양력 8월 31일]<임진> 흐리고 바람이 차겁다.

늦은 아침부터 큰 비가 내리더니 종일 퍼붓듯이 왔다. 경상수사 원균(원균)·충청수사·우수사가 모두 와서 봤다. 소비포가 소의 다리 등을 보내 왔다. 명나라 장수가 삼천진(사천시 삼천 포)에 이르러 머물러 묵는다고 했다. 여도만호가 먼저 왔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7월 17일 [양력 9월 1일]<계사> 맑다.

새벽에 포구로 나가 진을 쳤다. 오전 열 시쯤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홍유(장홍유)가 병호선(병호선) 다섯 척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들어와서 곧장 영문에 이르러서는 육지에 내려서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수사들과 함께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올라오기를 청했더니, 파총이 배에서 내려 곧 왔다. 이들과 같이 앉아서 먼저 바닷길 만리 먼 길을 어렵다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신데 대하여 감사함을 비길 길이 없다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작년 7 월 절강에서 배를 타고 요동에 이르니, 요동사람들이 말하기를, 바닷길에는 돌섬과 암초가 많고, 또 앞으로 강화가 이루어질 것이니 갈 필요가 없다고 억지로 말리는데도 그대로 요동에 머물면 서 시랑(시랑) 손광(손광)과 총병(총병) 양문(양문)에게 보고하고, 올 3월초에 출항하여 들어왔으니, 무에 수고라고 할 것이 있는 가 했다. 나는 차를 마시라고 청하고 또 술잔을 권하니 감개무량 하다. 또 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느라고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7월 18일 [양력 9월 2일]<갑오> 맑다.

다락 위로 올라가자고 청하여 점심을 먹은 뒤에 나가 앉아 술을 서너 차례 권했다. 대체로 내년 봄에 배를 거느리고 곧장 제주에 이르러, 공히 우리 수군과 합세하여 으시대면서 추악 한 적들을 무찌르자고 성의있게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헤어졌다.

 

7월 19일 [양력 9월 3일]<을미> 맑다.

아침에 환영 예물 단자를 올리니, 감사해 마지 못하겠다면서 주시는 물건이 매우 풍성했다.

충청수사도 드렸다. 저녁나절에 우 수사가 예물을 주는데 몇몇은 나와 같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 경상 원 수사가 혼자서 술 한 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한가지라도 아래쪽 힘쓸 것이 없었다. 우습고 우스웠다. 또 자(자)와 호(별호)를 물으니, 써서 주는데, 자는 중문(중문)이 요, 호(헌호)는 수천(수천)이라고 했다. 촛불을 밝히고 다시 이야 기하다가 헤어졌다. 비가 많이 올듯하여 배로 내려가 잤다.

 

7월 20일 [양력 9월 4일]<병신> 맑다.

아침에 통역관이 와서 전하여 말하기를, 명나라 장수(장홍유)가 남원에 있는 총병 유정(유정)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곧장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말을 전하기를, “처음에 파총(장홍유)이 남원으로 온다는 소식이 이미 총병관 유 정에게 전해졌으니,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 중간에 남의 말들이 있을 것이므로, 바라건대 가서 만나 보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그러니 파총이 나의 말을 전해 듣고, 과연 옳다고 하 며, “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만나 본 뒤에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하고서 파총이 내 배로 내려와서 조용히 이야기 하고, 이별의 잔을 권했다. 파총이 일곱 잔을 마신 뒤 홋줄을 풀 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두번 세번 애달픈 뜻으로 송별하였다. 그리고 경수(경수:이억기)· 충청수사· 순천부사· 발포만호·사 도첨사와 같이 사인암(사인암)으로 올라가 취하며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7월 21일 [양력 9월 5일]<정유> 맑다.

아침에 원수에게 명나라 장수와의 문답 내용을 공문을 만들어 내 보냈다. 저녁나절에 마량첨사·소비포첨사가 와서 봤다. 발포만호가 복병 내보내는 일로 와서 아뢰고 갔다. 저녁에 수루 로 올라 있는데,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오후에 흥양의 군량선이 들어왔다. 그래서 색리와 배 주인에게 발바닥을 호되게 때렸다. 저녁에 소비포가 와서 보고는 하는 말이, 기한에 대지 못 했다고 해서 수사 원균(원균)에게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고 했다. 몹시 해괴한 일이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군량 스무 섬을 꾸어 갔다.

 

7월 22일 [양력 9월 6일]<무술> 맑다.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임치첨사와 목포만호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사량만호와 영등포만호이 와서 봤다. 오후에 충청 수사·순천부사·충청우후·이영남(이영남)이 함께 활을 쏘았 다. 저물 무렵 수루에 올라가 밤이 되어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7월 23일 [양력 9월 7일]<기해> 맑다.

충청수사가 우수사·가리포첨사와 같이 와서 봤다. 활을 쏘았 다. 조카 해( )가 돌아갔다. 목년(목년)이 들어 왔다.

 

7월 24일 [양력 9월 8일]<경자> 맑다.

여러 가지 장계를 직접 봉했다. 영의정(류성룡)과 심 병판(심충 겸)·윤 판서(윤근수) 앞으로 보냈다. 저녁에 활 일곱 순을 쏘았다.

 

7월 25일 [양력 9월 10일]<신축> 맑다.

아침에 하천수에게 장계를 지니게 하여 내 보냈다. 아침 식사 를 하고서 충청수사·순천부사 등과 함께 우수사에게로 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 몹시 취하여 돌아왔는데 밤새도록 토해냈다.

 

7월 26일 [양력 9월 11일]<임인> 맑다.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밥을 먹은 뒤에 수루 위로 옮겨 앉았다. 순천과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녹도만호가 도망병 여덟 명을 잡아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 세 명을 처형 하고 그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아들들의 편지를 보니, 어머니께서 편안하시고 면( )의 병도 나아 진다고 한다. 허씨 댁이 병이 점점 더해졌다고 한다. 걱정이다. 유홍(유홍)과 윤근수(윤근수)가 세상을 떠나고 윤돈(윤돈:1551-1612)이 종사관으로 내려 온다고 한다. 신천기(신천기)도 들어왔다. 어둘 무렵 신제운(신제운)이 와서 봤다. 노윤발(노윤발)이 흥양의 색리와 감관을 붙잡아 들어왔다.

 

7월 27일 [양력 9월 11일]<계묘>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밤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다. 이 조짐은 매우 좋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날 충청수사·순천부사와 함께 수루 위에서 활을 쏘았다. 충청수사가 과하주(여름을 지내도 시어지지 않는 약주)를 가지고 왔다. 나는 몸이 불편하여 조금 마셨다. 역시 좋아지지 않았다.

 

7월 28일 [양력 9월 12일]<갑진> 맑다.

흥양의 색리들의 죄를 다스렸다. 신제운이 주부의 직첩을 받고 서 갔다. 저녁나절에 수루에 올라가 벽 바르는 일을 감독했다. 의능이 와서 그 일을 맡았다. 저물 무렵에 숙소로 내려 왔다.

 

7월 29일 [양력 9월 13일]<을사> 종일 가랑비가 왔다.

바람기는 없었다. 순천부사와 충청수사가 바둑을 두는데, 구경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낙안군수도 와서 같이 했다. 이 날 밤 신음했는데 아침까지 했다.

 

갑오년 8월 (1594년 8월)

 

8월 초1일 [양력 9월 14일]<병오> 비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수루의 방으로 옮겨 앉았다가 곧 뒷동 헌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낙안군수(김준계)가 강집(강집)을 데려다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군율에 따라 문초하고 내어 보냈다. 비가 종일 내리더니 밤까지 왔다.

 

8월 초2일 [양력 9월 15일]<정미>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하루 한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부안사람(이순신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그래서 꿈이지만 내쫓아버렸다. 몸이 나은 것 같다. 저녁나절에 수루 위로 옮겨 앉 아 충청수사·순천부사 및 마량첨사와 함께 이야기 하며 새로 빚 은 술을 몇 잔 마셨다. 비가 종일 내렸다. 송희립(송희립)이 와 서 아뢰기를, 흥양의 훈도도 작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고 했다.

 

8월 초3일 [양력 9월 16일]<무신> 아침에는 흐렸으나 저물녁에야 개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서너 순을 쏘았다. 수루(수루)의 방을 도배 했다.

 

8월 초4일 [양력 9월 17일]<기유> 아침에비가 뿌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발포만호 등이 와서 활을 쏘았다. 수루의 방의 도배를 마쳤다. 경상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에 여자들에게 떡과 음식물을 머리에 이고 오게 한 죄를 처벌했다. 화살장이 박옥래(박옥래)가 와서 대를 가져 갔다. 이종호(이종호) 가 흥양에 안수지(안수지) 등을 잡아 오려고 갔다.

 

8월 5일 [양력 9월 18일]<경술> 아침에 흐렸다.

밥을 먹은 뒤에 충청수사·순천부사와 같이 활을 쏘았다. 오 후에 경상수사 원균(원균)에게로 갔더니, 우수사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이야기하다가 한 시간쯤이나 지나서 돌아왔다. 이 날 웅천현감·소비포권관·영등포만호 및 윤동구(윤동구) 등이 선봉장으로서 여기에 왔다.

 

8월 6일 [양력 9월 19일]<신해> 아침에 맑다가 저물녁에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에 장흥부사가 들어 왔다. 보성군수가 나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편 안하시고 아들 면은 차츰 나아진다고 한다. 고성현령과 사도 첨사·적도만호가 아울러 왔다가 갔다. 이 날 밤 수루의 방에서 잤다.

 

8월 7일 [양력 9월 20일]<임자> 종일 비가 내렸다.

8월 8일 [양력 9월 21일]<계축> 종일 비가 내렸다.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이 들어왔다.

 

8월 9일 [양력 9월 22일]<갑인> 비가 내렸다.

우수사 및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 사가 같이 이야기했다.

 

8월 10일 [양력 9월 23일]<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이 날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8월 11일 [양력 9월 24일]<병진> 종일 비가 많이 내렸다.

이 날 밤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지붕이 세 겹 이나 벋겨져 삼대 같이 비가 샜다. 밤새도록 앉아서 새벽을 맞았 다. 양 창문은 모두 바람에 깨져 다 젖었다.

 

8월 12일 [양력 9월 25일]<정사>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웅천현 감·소비포권관도 와서 활을 쏘았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 심 준(심준)이 여기 왔다. 그 전령에, 군사 약속을 직접 만나서 논 의하자고 하므로 오는 17일에 사천으로 나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8월 13일 [양력 9월 26일]<무오> 맑다.

아침에 심준(심준)이 돌아갔다. 노윤발(노윤발)도 돌아갔다. 오전 열 시쯤에 배에서 내려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가서, 별도로 날랜 장수들을 뽑아 춘원포(춘원포:통영시 광도면 끄승개) 등지로 가서, 적을 엿보아 무찌르게 할 일을 사도첨사에 게 전령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사람을 보내고 그대로 머물러 잤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 없어 잔잔하여 해( )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다. 밤이 깊어서야 그만 뒀다.

 

8월 14일 [양력 9월 27일]<기미> 아침에 흐리다가 저물녁에 비가 왔다.

사도첨사·소비포권관·웅천현감 등이 달려 와서 보고한 내용에, “왜선 한 척이 춘원포(춘원포)에 정박해 있으므로 불의에 엄습하였더니, 왜놈들은 배를 버리고 도망쳐 달아나기에, 우리 나라 남녀 열다섯 명을 빼앗아 돌아오고, 적의 배도 빼앗아 왔 다.”고 했다. 오후 두 시쯤에 진으로 돌아왔다.

 

8월 15일 [양력 9월 28일]<경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출항하여, 경상수사 원균(원균)과 함께 월명포(통 영시 산양면 수월리)에 이르러 잤다.

 

8월 16일 [양력 9월 29일]<신유>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소비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 에 돛을 올려서 사천 선창((선창: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이르 니, 기직남(기직남)이 곤양군수(이광악)와 함께 와 있었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8월 17일 [양력 9월 30일]<임술> 흐리다가 저물 무렵에 비가 왔다.

원수가 오정에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곤양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물고 있는 사천현감(기직 남)이 맞아주는 곳으로 나아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 간의 예를 마치고, 그대로 함께 이야기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다. 원균(원균)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 지 못하였다. 우습다. 술을 가지고 마시자고 청했다.

여덟 순을 돌리니 원수가 몹시 취하여 상을 물리고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니, 박종남(박종남)과 윤담(윤담)이 와서 봤다.

 

8월 18일 [양력 10월 1일]<계해>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원수가 청하므로 나아가 이야기했다. 또 조촐한 술잔치를 벌였는데 잔뜩 취해서 아뢰고 돌아왔다. 경상수사 원균(원균)은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만 곤양군수(이광악)·거제현령(안위)·소비포권관(이영 남) 등과 함께 배를 돌려 삼천포앞에 이르러 잤다.

 

8월 19일 [양력 10월 2일]<갑자> 맑다. 저녁에 잠깐 비가 왔다.

새벽에 사량(통영시 사량면) 뒷쪽에 이르니,원균(원균) 수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칡을 예순 동이나 캐니, 원균(원균) 수사가 그제야 왔다. 늦게 출항하여 당포(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이르러 잤다.

 

8월 20일 [양력 10월 3일]<을축> 맑다.

느지막이 출항하여 진(한산도)에 이르렀다. 우수사(이억기)와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이 와서 보고는 정은 곧 돌아갔다. 우수사 및 장흥부사·사도첨사·가리포첨사·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저녁에 피리를 불고 노래했다.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미안스러운 일이 많았다.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흥양으로 곧장 도로 돌아갔다.

 

8월 21일 [양력 10월 4일]<병인> 맑다.

외가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곤양군수·사도첨사· 마량첨사· 남도만호· 영등포만호· 회령포만호· 소비포권관가 아울러 왔다. 양정언(양정언)이 와서 봤다.

 

8월 22일 [양력 10월 5일]<정묘> 맑다.

나라제삿날(성종정현왕후 윤씨)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 우우후가 와서 봤다. 낙안군수·사도첨사도 왔다가 갔다. 저녁 에 곤양군수·거제현령·소비포권관·영등포만호가 와서 이야 기하고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8월 23일 [양력 10월 6일]<무진> 맑다.

아침에 공문 초안을 잡았다. 밥을 먹은 뒤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 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그대로 활을 쏘았다. 바람이 몹시 험악하게 불었다. 장흥부사·녹도만호가 같이 왔다. 저물 무렵에 곤양군수과 웅천현감·영등포만호·거제현령·소비 포권관도 왔다. 초저녁에 헤어져 돌아갔다.

 

8월 24일 [양력 10월 7일]<기사> 맑다.

각 고을에 수군을 징발하는 일로 박언춘(박언춘)·김륜(김륜)·신 경황(신경황)을 내어 보냈다.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이 돌아갔다. 저물 무렵에 소비포가 와서 봤다.

 

8월 25일 [양력 10월 8일]<경오> 맑다.

아침에 곤양군수·소비포권관을 불러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사도첨사가 휴가를 받아 갔다. 9월 초7일에 돌아오도록 일러 보냈다. 현덕린(현덕린)이 제 집으로 돌아갔다. 신천기(신천기)도 곡식을 바칠 일로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흥양이 돌아왔다. 활 터정자로 내려가 활 여섯 순을 쏘았다. 정원명(정원명)이 들어왔다고 했다.

 

8월 26일 [양력 10월 9일]<신미> 맑다.

아침에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써 보냈다. 흥양 보자기 막 동이란 자가 장흥의 군사 서른 명을 몰래 그의 배에 싣고 도망간 죄로 처형하여 효수했다. 저녁나절에 내려가 활터정자에 앉아 서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와서 같이 쏘았다.

 

8월 27일 [양력 10월 10일]<임신> 맑다.

우수사는 가리포첨사·장흥부사·임치첨사·우후 및 충청우후가 와서 활을 쏘는데, 흥양현감은 술을 바쳤다. 아침에 아들 울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 보냈다.

 

8월 28일 [양력 10월 11일]<계유> 밤 두시쯤부터 비는 조금 오다가 바람이 세게 불었다.

비는 아침 여섯 시께 개었으나, 바람은 종일 세게 불고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들 회가 잘 갔는지 아닌지 몰라서 몹시 염 려된다. 진도군수(김만수)가 와서 봤다. 그 편에 원수의 장계로 해서 문책 하는 글이 내려 왔는데, 대체로 장계를 낸 것에 잘못 풀이한 때 문이었다.

 

8월 29일 [양력 10월 12일]<갑술> 맑으나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마량첨사·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도양장의 머슴 박돌이의 죄를 다스렸다. 도둑 세 놈중에 장손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얼굴에 도둑 자를 새겼다. 해남현감이 들어왔다. 의병장 성응지(성응지)가 죽었다니, 참으로 슬프다. 8월 그믐날 [양력 10월 13일]<을해> 맑고 바람조차 없다. 해남현감 현즙(현즙)이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 및 장흥부사(황세득)가 와서 봤다.

저물 무렵 충청우후(원유남) ·웅천현감(이운룡)·거제현령(안위)·소비포권관(이영남)도 왔다. 허정은도 왔다. 이 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했다. 벌써 죽고 사는 것이 결딴이 났는지 모르 겠다.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아들 셋·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꼬! 쓰리고 아프구나. 김양간(김량간)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심 충겸:병조판서)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분개한 뜻이 많이 적혀 있다고 했다. 원균 수사의 하는 일이 매우 해괴하다. 나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니, 천년을 두고서 한탄할 일이다. 곤양군수가 병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너무 너무 섭섭하다. 밤 열시쯤부터 마음이 어지러

워 잠을 못잤다.

 

 

 

갑오년 9월 (1594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14일]<병자> 맑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이리 저리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씻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환속하는 것과 같고,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덜해질지 어떤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었다. 순무 사서성(1558-1631)의 공문과 장계초고가 들어왔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15일]<정축> 맑다.

아침에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 녁나절에 낙안군수가 와서 봤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다고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염려스럽다.

 

9월 초3일 [양력 10월 16일]<무인> 비가 조금 내렸다.

새벽에 임금의 비밀분부(유지)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병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나날을 보내지마는, 적이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있으니, 경솔히 나아가 칠 수도 없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초 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 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밤 열시쯤에 흥양현감이 내가 혼자 앉아 있음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9월 초4일 [양력 10월 17일]<기묘> 맑다.

아침에 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밥을 먹은 뒤에 소비포권관도 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원균(원균)이 와서 이야기하자고 했 다. 그래서 활터 정자로 내려가 앉아 활을 쏘았다. 원균(원균) 수사가 아홉 푼을 져 술이 취해서 갔다. 피리를 불게하다가 밤이 깊어 헤어졌다. 또 미안한 일이 있었다. 우습다. 여도만호가 들어왔다.

 

9월 초5일 [양력 10월 18일]<경진> 맑다.

닭이 운 뒤에 머리가 가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이 를 긁게 했다. 바람이 고르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9월 초6일 [양력 10월 19일]<신사> 맑고 바람이 잔잔하다.

아침에 충청수사 및 우후·마량첨사와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아 활을 쏘았다. 이 날 저녁 종 효대(효대)·개남(개남)이 어머니의 평안하시다는 편지를 가지고 왔다. 기쁘고 다행함을 어디다 비기랴! 방필순(방필순)이 세상을 떠나고 방필순이 그 가족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온다고 한 말을 들었다. 우습다. 밤 열시쯤에 복춘(복춘)이 왔다. 저물녘에 김경 로(김경로)가 우도(우도)에 이르렀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9월 7일 [양력 10월 20일]<임오>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의 편지가 왔는데, 순찰사(홍세공)가 초열흘 쯤에 본부(순천)에 도착된다고 했다. 좌의정(윤두수:1533-1661)도 도착된다고 했다 심히 불행한 일이다. 순천부사가 진에 있을 때 거제로 사냥을 보냈던 바, 그들은 남김없이 다 잡았다는데, 그 사정을 전혀 보고하지 않은 것이 몹시 해괴하다. 그래서 편지 를 보낼 때에 그것을 지적하여 보냈다.

 

9월 8일 [양력 10월 21일]<계미> 맑다.

장흥부사(황세득)을 헌관(헌관)으로 삼고, 흥양현감(배흥립)을 전 사(전사)로 삼아서 초아흐레 날 둑제를 지내려고 입재(입재) 시켰다. 첨지 김경로가 여기 왔다.

 

9월 초9일 [양력 10월 22일]<갑신> 맑다. 저물녘에 비가 오다가 그쳤다.

여러 장수들이 활을 쏘았다. 삼도가 아울러 모였는데, 원균(원균) 수사는 병으로 오지 않았다. 첨지 김경로도 같이 쏘고서 경상으로 돌아가 잤다.

 

9월 초10일 [양력 10월 23일]<을유> 맑고 바람도 잔잔하다.

사도첨사가 활쏘기 대회를 열었는데, 우수사도 모였다. 김경숙(김 경숙)이 창신도로 되돌아

갔다.

 

9월 11일 [양력 10월 24일]<병술> 맑다.

일찌기 수루 위로 나갔다. 남평(남평)의 색리와 순천의 격군으 로서 세 번이나 양식을 훔친 자를 처형했다.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저녁나절에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소비포권관은 달빛을 따라 본포로 돌아갔는데, 까닭은 원 수사가 몹시 모함하려는 때문이었다.

 

9월 12일 [양력 10월 25일]<정해> 맑다.

일찌기 김암(김암)이 방에 왔다.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의 종놈 이 돌아가는 길에 편지답장을 써 보냈다. 우수사·충청수사가 함께 왔다. 장흥부사가 술을 내어 함께 이야기하다가 몹시 취해서 헤어졌다.

 

9월 13일 [양력 10월 26일]<무자> 맑고 따뜻하다.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충 청우후가 와서 봤다. 또 조도어사 윤경립(윤경립)의 장계 두 통 을 보니, 하나는 진도군수를 파면해 달라는 것이고, 하나는 수륙 양군이 서로 침해하지 말라는 것과 수령들을 전쟁에 보내지 말라 는 것이니, 그 뜻은 자못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저녁 에 하천수가 장계 회답과 홍패(과거 합격자 명단) 아흔일곱 장을 가지고 왔다. 영의정 편지도 가져 왔다.

 

9월 14일 [양력 10월 27일]<기축> 맑다.

흥양현감이 술을 바쳤다. 우수사·충청수사가 같이 활을 쏘았다. 방답첨사가 공사례를 했다.

 

9월 15일 [양력 10월 28일]<경인> 맑다.

일찌기 충청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는 약속을 하고도 병을 핑게하니 한탄스럽다. 새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홍패를 나누어 주었다. 남원 도병방과 향소 등을 잡아 가두었다. 충청우후(원유남)가 본도로 돌아갔다. 종 경(경)이 들어왔다.

 

9월 16일 [양력 10월 29일]<신묘> 맑다.

충청수사 및 순천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밤 꿈에 아들을 보았는데, 경의 어미가 아들을 낳을 징조다.

 

9월 17일 [양력 10월 30일]<임진> 맑고 따뜻하다.

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우후 이몽 구가 둔전에 마당질하는 일로 나갔다. 효대(효대) 등이 나갔다.

 

9월 18일 [양력 10월 31일]<계사> 맑고 지나치도록 따뜻하다.

충청수사 및 흥양현감과 함께 종일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저물 무렵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왔다. 이수원(이수원) 및 담화(담화)가 들어왔다. 복춘(복춘)이 들어왔다. 이 날 밤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을 못 이루었다.

 

9월 19일 [양력 11월 1일]<갑오> 종일 비가 내렸다.

흥양현감·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해남현감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흥양현감·순천부사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9월 20일 [양력 11월 2일]<을미>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비가 잠깐 들었다.

홀로 앉아 간 밤의 꿈을 기억해 봤다. 꿈에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 오다가 눈 앞에 와서 주춤 섰는데,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우뚝 서서 끝내 그것을 구경하니,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다. 충청수사와 흥양현감이 왔다. 거제현령도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체찰사의 공문에 수군에게 군량을 받아 들여 계속 대라고 했다. 잡아 가두었던 친족과 이웃을 다 풀어 주었다고 했다.

 

9월 21일 [양력 11월 3일]<병신> 맑다.

아침에 활터정자에 나가 앉아 공문을 처리하여 주고, 저녁나절 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순천부사·충청수사가 종일 이야기 했다. 어둘 무렵 여러 장수들이 뛰어넘기를 하게 하고, 또 사병 들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9월 22일 [양력 11월 4일]<정유>

아침에 활터 정자에 앉았다. 우수사·장흥부사·경상우후가 와 서 명령을 듣고서 갔다. 원수의 비밀서류가 왔는데, 27일에는 꼭 군사들을 출동시키라는 것이었다.

 

9월 23일 [양력 11월 5일]<무술> 맑으나 바람이 사나왔다.

아침에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문을 써 보냈다. 경상수사 원균 (원균)이 군사기밀을 논의하고 갔다. 낙안의 군사 열한 명과 방답 의 수군 마흔다섯 명을 점고했다. 고성 사람들이 연명으로 하소연하였다. 진주 강운(강운)의 죄를 다스렸다. 보성에서 데려온 소관(소관) 황천석(황천석)을 끝까지 추궁했다. 광주에 가두었던 창평현 색리 김의동(김의동)을 사형하 라는 전령을 내보냈다. 저녁에 충청수사와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깊은 방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초저녁에 복춘(복춘)이 와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돌아갔다.

 

9월 24일 [양력 11월 6일]<기해> 맑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충청수 사와 같이 먹었다. 오늘 더그레(호의: 각 영문의 군사와 마상재의 군이 입는 세 자 락 난 웃옷)을 나누는데, 전라좌도는 누른 옷 아홉 벌, 전라우 도는 붉은 옷 열 벌, 경상도에는 검은 옷 네 벌이었다.

 

9월 25일 [양력 11월 7일]<경자> 맑으며, 바람이 조금 잤다.

첨지 김경로는 군사 일흔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저녁에 첨지 박종남(박종남)은 군사 육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조붕(조 붕)도 와서 같이 자면서 밤에 모여 앉아 이야기했다.

 

9월 26일 [양력 11월 8일]<신축> 맑다.

새벽에 곽재우(곽재우)·김덕령(김덕령) 등이 견내량(거제시 사 등면 덕호리)에 이르렀으므로 박춘양(박춘양)을 보내어 건너온 까 닭을 물었더니, 수군과 합세할 일로 원수(권율)가 전령하였다고 하였다.

 

9월 27일 [양력 11월 9일]<임인> 아침에 맑더니 저물녘에 잠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출항하여 포구에 나가자 여러 배들도 일제히 출항하여 적 도(거제시 둔덕면) 앞바다에 대었다. 그러니 첨지 곽재우(곽재우) ·충용 김덕령(김덕령)·별장 한명련(한명련)·주몽룡(주몽룡) 등 이 와서 약속하고 각각 원하는 곳으로 갈라 보냈다. 저녁에 병사 선거이(선거이)가 배에 이르렀으므로 본영의 배를 타게 했다. 저물무렵 체찰사의 군관 이천문(이천문)· 림득의(임득의)· 이홍사(이홍사)· 이충길(이충길)· 강중룡(강중룡)· 최여해(최여해)· 한

덕비(한덕비)· 이안겸(이안겸)· 박진남(박진남) 등이 왔다. 밤에 잠깐 비가 내렸다.

 

9월 28일 [양력 11월 10일]<계묘> 흐리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치는 일로 길흉을 점쳤 더니, 길한 것이 많았다. 첫 점은 활이 살을 얻은 것과 같고, 다 시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바람이 고르지 않았 다. 흉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 잤다.

 

9월 29일 [양력 11월 11일]<갑진> 맑다.

출항하여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앞바다로 마구 쳐들어 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누각을 높이 양쪽 봉우리에는 진지를 쌓고서 항전하러 나오지 않는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뭍으로 내려가 도망가버렸다. 빈 배들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칠천량에서 밤을 지냈다.

 

갑오년 10월 (1594년 10월)

 

10월 초1일 [양력 11월 12일]<을사>

새벽에 출항하여 장문포에 이르렀다. 경상우수사와 잔라우수사가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충청수사와 및 선봉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곧장 영등포로 들어가니, 흉악한 적들은 바닷가에 배를 대어 놓고 한 놈도 나와서 항전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에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서, 사도의 2호선이 뭍에 배를 매려할 즈음에, 적의 작은 배가 곧장 들어와 불을 던지는데, 불은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매우 분통하다. 우수사의 군관 및 경상우수사의 군관은 그들의 실수를 간단히 꾸짖었지만, 사도의 군관에게는 그 죄를 무겁게 시행했다. 밤 열시쯤에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월 초2일 [양력 11월 13일]<병오> 맑다.

다만 선봉선 서른 척으로 하여금 장문포의 적정을 가서 보고 오게 했다.

 

10월 초3일 [양력 11월 14일]<정미> 맑다.

몸소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일찌감치 장문포로 가서 종일 싸우 려는데, 적의 무리들은 두려워 항전하러 나오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월 초4일 [양력 11월 15일]<무신> 맑다.

곽재우(곽재우)·김덕령(김덕령) 등과 함께 약속하고서, 군사 수 백 명을 뽑아 뭍에 내려, 산을 오르게 하고, 선봉을 먼저 장문포 로 보내어 들락날락 하면서 싸움을 걸게 했다. 저녁나절에 중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의 무리들은 갈팡 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동서로 바삐 달아났다. 육군은 적이 칼을 휘드르는 것을 보고는 곧 배로 내려왔다. 돌아와 칠천량에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이계명)이 표신과 선유교서를 가지고 왔다. 안에는 임금님이 하사하신 잘(초피: 담비의 털가죽)이 있었다.

 

10월 초5일 [양력 11월 16일]<기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계초고를 초잡았다.

 

10월 초6일 [양력 11월 17일]<경술> 맑다.

일찍 선봉으로 하여금 장문포 적의 소굴로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꽂았는데, 그 글은, “일본은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할 것이니, 서로 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놈 한 명이 칠 천도 산기스락에서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군수가 잡아 배 에 싣고 왔다. 물어보니, 영등포 왜적이었다. 흉도로 진을 옮겼다.

 

10월 초7일 [양력 11월 18일]<신해> 맑다.

병사 선거이(선거이)·곽재우(곽재우)·김덕령(김덕령) 등이 나 갔다. 띠풀 백여든세동을 베었다.

 

10월 초8일 [양력 11월 19일]<임자> 맑고 바람조차 없다.

아침에 출항하여 장문포 적의 소굴에 이르니, 적들은 여전히 나 오지 않았다. 군대의 위세만 보인 뒤에 흉도로 되돌아왔다가 그 대로 출항하여 한산도에 일제히 이르니, 밤은 벌써 자정이 되 었다. 흉도에서 띠풀 이백예순 동을 베었다.

 

10월 초9일 [양력 11월 20일]<계축> 맑다.

아침에 정자로 내려 오니 첨지 김경로·첨지 박종남·조방장 김응함·조방장 한명달(한명달)·진주목사 배설(배설)·김해부사 백사림(백사림)이 아울러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김과 박은 종 일 활을 쏘았다. 박자윤(박자윤)은 마룻방에서 자고 춘복(춘복)이 함께 잤다. 김성숙(김성숙)은 배로 내려가 잤다. 남해현령·하 동현감·사천현감·고성현령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10일 [양력 11월 21일]<갑인> 맑다.

아침에 나가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박자윤(박자윤)과 곤양군수는 그대로 머물고 떠나지 않았으며, 흥양현감·보성군수·장흥부 사는 아뢰고 돌아갔다. 이 날 밤 두 가지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울(울)과 변존서(변존서)·유□(유헌?) 및 정립(정립)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10월 11일 [양력 11월 22일]<을묘> 맑다.

아침에 몸이 불편했다. 아침에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공문을 처리하였다. 일찍 잘 방으로 들어갔다.

 

10월 12일 [양력 11월 23일]<병진> 맑다.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하였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여기에 왔다. 경상수사 원균(원균)이 적을 토벌한 일을 스스 로 직접 장계를 올리고자 했다. 그래서 공문을 만들어 와서 주었다. 비변사의 공문에 따르면, 원수가 쥐가죽으로 만든 남바위 (이엄: 귀가리개)를 전라좌도에 열다섯 개, 전라우도에 열 개, 경 상도에 열 개, 충청도에 다섯 개를 나누어 보냈다.

 

10월13일 [양력11월24일]<정사>맑다.

아침에 아전을 불러 장계초안을 지었다. 저녁나절에 충청수사를 내보냈다. 본도우수사가 충청수사를 와서 보고도 나를 보지 않고 돌아갔다. 술이 몹시 취한 까닭이었다. 종사관(정경달)이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천 1호선을 내어 보냈다.

 

10월 14일 [양력 11월 25일]<무오> 맑다.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하여 육혈포(육혈포) 다섯 자루를 바치고, 환도도 바치며, 말을 전하는 자는 김서신(김서신)이라고 하는 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0월 15일 [양력 11월 26일]<기미> 맑다.

박춘양(박춘양)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10월 16일 [양력 11월 27일]<경신> 맑다.

순무사 서성이 해질 무렵에 이곳에 왔다. 우수사·원균(원균) 수사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10월 17일 [양력 11월 28일]<신유> 맑다.

아침에 사람을 어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아침을 먹은 뒤에 당도한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어사도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경상수사 원균(원균)의 속이 는 말을 많이 했다. 몹시도 해괴하다. 원균(원균)도 왔다. 그 흉악 하고도 패악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아침에 종사관이 들어왔다.

 

10월 18일 [양력 11월 29일]<임술> 맑다.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다가 저녁나절에 그쳤다. 어사에게로 갔더 니, 이미 원 수사에게 갔다고 했다. 그곳에 갔더니 조금 있다가 술이 나왔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종사관이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고서, 서로 인사했다.

 

10월 19일 [양력 11월 30일]<계해>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대청으로 나가 앉았다가 저녁나절에 돌아와 수루의 방으로 들어 갔다. 어사가 우수사한테 가서 종일 술마시며 이야기했다고 하였 다. 아침에 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저녁에 종 억지(억지) 등을 좨쳐서 왔다. 박언춘(박언춘)도 왔다.

 

10월 20일 [양력 12월 1일]<갑자> 아침에 흐렸다.

저녁나절에 순무어사가 나갔다. 작별한 뒤에 대청으로 올라 앉 았있으니 우수사가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공문 작성 때문에 나갔다고 생각된다. 밤 열시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21일 [양력 12월 2일]<을축> 맑다가 조금 흐렸다.

종사관·우후·발포만호가 나갔다. 투항해 온 왜놈 세 명이 원균 (원균) 수사에게서 왔기로 문초하였다. 영등포만호가 왔다가 밤 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그에게 어린 아이가 있다고 했다. 데려 오도록 일러 보냈다.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22일 [양력 12월 3일]<병인> 흐렸다.

의능(의능)·이적(이적)이 나갔다. 초저녁에 영등포만호가 그 아이를 데리고 왔다. 심부름이나 시키고자 머물러 두었다.

 

10월 23일 [양력 12월 4일]<정묘> 맑다.

그 아이가 아프다고 했다. 종 억(억)의 죄와 애환(애환)·정말동 (정말동)의 죄를 다스렸다. 저녁에 그 아이를 본디 있던 곳으로 보냈다.

 

10월 24일 [양력 12월 5일]<무진> 맑다.

우우후를 불러서 활을 쏘았다. 금갑도만호도 왔다.

 

10월 25일 [양력 12월 6일]<기사> 맑으며 하늬바람이 세게 일었다.

저녁나절에 그쳤다. 몸이 불편하여 방을 나가지 않았다. 남도 포만호(강응표)·거제현령이 왔다. 영등포만호(조계종)도 와서 한참 이야기하는 적에, 전 낙안군수 첨지 신호(신호)가 와서, 체찰사(윤두수)의 공문·목화·벙거지 및 정목(정목) 한 동을 가지고 왔다. 그와 같이 이야기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순천부사 권준이 잡혀 갈 때에도 보러 왔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10월 26일 [양력 12월 7일]<경오> 맑다.

빙부(방진)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첨지 신호(신호)에 게서 들으니, 김상용(김상용)이 이랑(이랑)이 되어 서울로 갈 때 에 남원부내에 들어가 자면서 체찰사를 보지 않고 갔다고 했다. 시절이 이러하니 참으로 해괴하다. 체찰사가 밤에 순변사의 숙소 로 갔다가밤이 깊어서 돌아와 그의 숙소로 왔다고 했다. 체모가 이럴 수가 있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종 한경(한경)이 본영으로 갔다. 오후 여섯 시께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0월 27일 [양력 12월 8일]<신미>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미조항첨사(성윤문)가 와서 교서에 숙배하고, 그대로 그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28일 [양력 12월 9일]<임신> 맑다.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금갑만호·이진만호가 와서 봤다. 식사를 한 뒤에 우우후·경상우후가 와서 목화를 받아 갔다. 저 물 무렵에 잠자는 방에 들어갔다.

 

10월 29일 [양력 12월 10일]<계유> 맑다.

하늬바람이 몹시도 살을 에 듯이 차겁다.

 

10월 30일 [양력 12월 11일]<갑술> 맑다.

적을 수색하여 토벌하라고 군사를 들여 보내고 싶었으나, 경상도엔 전선이 없어서 다른 배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자정에 아들 회가 들어왔다.

 

갑오년 11월 (1594년 11월)

 

11월 초1일 [양력 12월 12일]<을해>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11월 초2일 [양력 12월 13일]<병자> 맑다.

전라좌도에서는 사도첨사(김완)를, 전라우도에서는 우후 이정충을, 경상도에서는 미조항첨사 성윤문(성윤문)을 장수로 정하여 적을 수색·토벌하게 들여 보냈다.

 

11월 초3일 [양력 12월 14일]<정축> 맑다.

김천석(김천석)이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와서 투항해 온 야에몬(야여문) 등 세 명을 데리고 진에 이르렀다. 수색토벌하러 나갔다 오니 벌써 밤 열 시쯤이었다. 이영남(이영남)이 와서 봤다.

 

11월 초4일 [양력 12월 15일]<무인> 맑다.

투항해 온 왜놈들의 사정을 들었다. 전문(전문)을 가지고 갈 유생이 들어왔다.

 

11월 초5일 [양력 12월 16일]<기묘>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송한련(송한련)이 대구 열 마리를 잡아왔다. 순변사(이일)가 그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세 명을 잡아 보냈다. 밤새도록 비가 많이 내렸다.

 

11월 초6일 [양력 12월 17일]<경진> 흐리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이영남(이영남)이 와서 봤다. 이정충(이정충)도 왔다. 첨지 신호(신호)와 함께 이야기했다. 송희립(송희립)이 사냥하러 나갔다.

 

11월 초7일 [양력 12월 18일]<신사> 저녁나절에 개었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갔다. 항복해온 왜놈 열일곱 놈을 남해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금갑도만호·사도첨사·여도만호·영등포 만호가 아울러 왔다. 이 날 오정때에 첨지 신호는 원수가 되 돌아와서는 수군에 머물러 있다더라고 보고했다.

 

11월 초8일 [양력 12월 19일]<임오> 새벽에 잠깐 비가 뿌리더니 저녁나절에 개었다.

배 만들 목재를 운반해 왔다. 새벽 꿈에, 영의정이 이상한 모양을 차려 입었고, 나는 관을 벗은 채 함께 민종각(민종각)의 집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깨었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1월 초9일 [양력 12월 20일]<계미> 맑으나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11월 10일 [양력 12월 21일]<갑신> 맑다.

이희남(이희남)이 들어왔다. 조카 뇌도 영문에 왔다고 했다.

 

11월 11일 [양력 12월 22일]<을유>

동짓날이라 11월중임에도 새벽에 망궐례를 드린 뒤에 군사들에게 죽을 먹였다. 우우후와 정담수(정담수)가 와서 보고나서 돌아갔다.

 

11월 12일 [양력 12월 23일]<병술>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순천 색리 정승서(정승서)와 역자가 남원에 서 폐해를 끼쳤기로 벌주었다. 첨지 신호에게 작별의 술을 대접 했다. 또 견내량에서 경계선을 넘어 고기를 잡은 사람 스무네 명을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11월 13일 [양력 12월 24일]<정해> 맑다.

바람이 차차 자니 날도 따뜻했다. 첨지 신호와 아들 회( )가 이 희남(이희남)·김숙현(김숙현)과 함께 본영으로 갔다. 종 한경(한 경)도 은진 김정휘(김정휘) 집에 다녀 오게 일렀다.

장계도 내보 냈다. 원수가 방어사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네 명을 데리고 왔다. 저녁에 윤련(윤련)이 그 누이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망발이 많 다. 우습다. 버리고자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버려진 세 아이가 마침내 의지할 곳이 없게 된 때문이다. 열닷샛 날은 아버지 제삿날이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밤에 달빛이 한 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11월 14일 [양력 12월 25일]<무자> 맑다.

아침에 우병사(김응서)가 투항해 온 왜놈 일곱 명을 자기 군관을 시켜 데리고 왔다. 그래서 곧 남해현으로 보냈다. 이함(이 )이 남해에서 왔다.

 

11월 15일 [양력 12월 26일]<기축> 맑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음양의 조화가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다. 오 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이므로 나가지 않고, 홀로 앉아 있으니, 슬 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저물무렵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순천 의 교생이 교서의 등본을 가져 왔다. 또 아들 울(울) 등의 편지 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상주의 사촌 누이 편지와 그 아들 윤엽(윤엽)이 본영에 이르렀다.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 읽어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영의정의 편지도 왔다.

 

11월 16일 [양력 12월 27일]<경인> 맑으나, 바람기가 제법 쌀쌀하다.

밥을 먹은 뒤에 대청에 앉았다. 우우후·여도만호·회령포만호 ·사도첨사·녹도만호·금갑도만호·영등포만호·전 어란진만호 ·정담수 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는 날씨가 무척 따뜻해졌다.

 

11월 17일 [양력 12월 28일]<신묘> 맑고 따뜻하다.

서리가 눈처럼 쌓였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나절에 산들바람이 종일 불었다. 밤 열 시쯤에 조카 뇌와 아들 울 (울)이 들어왔다. 한밤에 미친 듯 바람에 세게 불었다.

 

11월 18일 [양력 12월 29일]<임진> 맑다.

바람이 저녁내 세게 불더니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11월 19일 [양력 12월 30일]<계사> 맑다.

바람이 세게 불며,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1월 20일 [양력 12월 31일]<갑오> 맑다.

아침에 바람이 잤다. 대청으로 나갔다. 조금 있으니 경상수사 원균(원균)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밤까지 세게 불었다.

 

11월 21일 [양력 1월 1일]<을미> 맑다.

아침에 바람이 잤다. 조카 뇌가 나갔다. 그리고 이설(이설) 이 포폄하는 장계를 가지고 갔다. 종 금선(김선)·우년(우년)·이 향(이향)·수석(수석)·행보(행보) 등도 나갔다. 김교성(김교성)· 신경황(신경황)이 나갔다. 남도포만호·녹도만호가 나갔다.

 

11월 22일 [양력 1월 2일]<병신> 맑다.

아침에 회령포로 나갔다. 날씨는 무척 따뜻했다. 우우후(이정충) 와 정담수(정담수)가 와서 봤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왜놈의 옷감으로 무명 열 필을 가져 갔다.

 

11월 23일 [양력 1월 3일]<정유> 맑고 따뜻했다.

흥양 군량과 순천 군량 등을 받아들였다. 저녁나절에 이경복 (이경복)이 자기 소실(첩)과 함께 들어 왔다. 순변사 등이 비난을 받는다고 하였다.

 

11월 24일 [양력 1월 4일]<무술> 맑다.

따사롭기가 확실히 봄날 같다. 대청으로 나가서 공문을 적어 보냈다.

 

11월 25일 [양력 1월 5일]<기해> 흐렸다.

새벽꿈에, 이일(이일: 순변사)과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며, “이같 이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날을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뱃심 좋게 음탕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밖 여염집에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또 수군 각고을과 포구에 배정된 육전의 병기를 독촉하기에만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 라고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하품하며 기지개켜다 깨고 보니 한 바탕 꿈이었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에 앉아 공문을 적어 주었다. 조금 뒤에 우우후와 금갑도만호가 왔다. 피리를 듣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11월 26일 [양력 1월 6일]<경자> 소한. 맑고 따뜻하다.

방에 앉아 있으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이 날 메주를 열 말을 쑤었다.

 

11월 27일 [양력 1월 7일]<신축> 맑다.

밥을 먹은 뒤에 대청으로 나가 앉아 있다가 좌도·우도로 갈라 보낸 투항해 온 왜놈들을 모조리 와서 모았다. 그래서 총쏘 는 연습을 시켰다. 우우후·거제현령·사도첨사·여도만호가 아울러 왔다.

 

11월 28일 [양력 1월 8일]<임인> 맑다.

(** 11월 28일 맨 뒷장(제3책 52장)에 나오는 자료로서 13 장에 걸쳐 적혀 있다. 먼저 그 첫장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망하기는 어렵습니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 없으니, 거듭하여 배들을 덮어 그로 하여금 안전치 못합니다. 안으로는 방책을 세울만 한 기둥 재목 같은 인재 없으니, 기계를 고치고 다루며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였습니다. 나를 알고 저를 알면 백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저를 모르 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저도 모르면 싸워봐야 반드시 지게 됩니다. 이것은 만고의 바뀌지 않는 진리입니다. (** 이 다음 장부터는 글쓴 내용이 많이 고쳐 적혀 있다.)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 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짐이 육지나 바다가 똑 같이 되버렸습니다. 대총 유정은 이미 군사를 철수시켜 고국으로 되돌아가니 위급한 세력의 급박함이 호흡하는 순간에 달려 있어 온갖 생각을 해도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또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 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 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호남의 한 도에 의뢰하였으나, 호남에도 큰 난리가 일어나, 전쟁으로 화재를 입은 땅이 더욱 심하며, 이때부터 닥칠 앞 군량과 군사를 의뢰할 곳이 전혀 없습니다. 날마다 줄어드니, 급히 모음만 같지 못하고, 곳곳의 잡색 군사 육로의 요해지를 끊어 막거나 혹 수군을 합세하여 곧바로 적진에 쳐들어 갔습니다. 하나, 영남의 우도의 적세는 전과 같이 별로 다른 흔적이 없고, 다만 다시 그 형상을 보니, 굶은 빛이 많이 있는데, 그 뜻은 반드시 가을 곡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으며, 우리 나라가 미리 방어 해 놓고 있어야 하는 데 극히 두려워하는 자는 수군이요, 수군으로서 전쟁에 임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모이기도 하고 흩 어지기도 하면서 옮겨 다니며 얻어 먹는 무리도 가난하게 되었 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양식을 보지 못하여 질병이 또 일고, 사망이 서로 줄을 이었으니, 여러 장수가 이에 갖추고자 공문을 원수 (원수)와 관찰사에게 돌리고 계략도 베풀 명령도 없습니다. 온갖 생각을 해보지만, 방어하여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수군의 한 가지 일이 세력이 파산되어 이 한 몸 만번 죽음도 달게 받을진대, 이 나라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수군은 사소한 군량일지라도 연 해의 여러 고을에 쌓여 있어도 관찰사와 원수가 군관을 파견하여 곳간을 뒤지어 조사해 실어 가도 저는 다른 도 먼 바다에 있으니 아무런 조치를 하지 못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만약 달리 수군을 보내어 어사가 모든 수군의 일을 구 제할 수 있을 것 같아 망령되이 장계합니다. 그러나 만약 옳지 않다면 영남의 순무어사가 명령을 한 날에 겸하여 불러 모을 군 사는 오로지 물러만 갈 것입니다. 하나, 순변사 이일(이일) 그 집에 있어 적들이 가까운 곳에 있 다는 것 듣고 일시에 달려와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해의 수군의 원 소속 병사들이 일시의 편안이 거의 내버려 두게 되어 그 고을에서 독려한다면 순변사가 연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잡아 오지 않는 것이 일일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나, 정경달(정경달)이 종사관이 되어 다음을 다하여 감독하고 공문에, 도 안의 일이 본디부터 관찰사가 주재하고 통제하여 둔 전치는 일을 검사받게 하는 것은 실로 그 본디 임무가 아닙니다. 하물며 다른 도의 바다에 진을 치고 멀이 있으니 이 또한 검사하면서 지을 수도 없고 이 뒤로는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민망함니다. 추수할 때까지만이라 도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검사하도록 장계합니다. 하나, 파총 장홍유(장홍유)가 이 달 17일 진에 도착하여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탄복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내년 봄 산동·천진 등에서 비호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곧바로 제주도로 경유해서 한 산도로 와서 합세하여 함께 적들을 토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깊이 믿을 건 못되지만, 그 정황은 익히 보아온즉 빈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 3일 머물러 있으니, 송(송)·이(이)의 옹폐 (옹폐: 어른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함이 많이 유감스럽습니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나라는 어지럽건만 바로잡을 이 그 누구뇨. 몇 해를 배를 타며 해놓은 일들도 홀로 생각하니 임만 속이고. 수십년 뱃전에서 해놓은 일들도 이제와 돌아보니 임만 속였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이 아무도 없네.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마음 살을 에는 양 쓰린 이 가슴 나라가 태평한지 200년이요 문물의 화려함은 3000 이라네. 몇 해를 원수 막이 꾀 뿐인걸. 앞에서 나온 것과 본영의 것을 가져와 모으니, 하얀 접는 부채(백 첩선) 358 자루, 보통보다 달리 만든 부채(별선) 453 자루에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5 자루를 보냈다. 기름친 부채(유선) 590 자루에 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0 자루를 보냈다. 옻칠한 부채(칠선) 58 자루에서 5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일반부채(선선) 50 자루에 서 10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갈모(입모) 40개, 손칼(도자) 323 자루, 육장부(육장부) 2개, 들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장유지) 5 권, 기름 먹인 종이(주유지) 5 권을 본영으로 가져 왔다. 들기름 먹인 종이(장유지)와 기름 먹인 종이(주유지)는 앞의 것과 같다. 수은을 빼낸 금(화김) 70은 이미 명나라 장수에게 주었다. 흥양에서 대대로 사는 종 매마(매마)· 대준(대준)· 영세(영세)· 방죽(방죽)·영로(영로)가 큰 대(대죽) 23개, 중치 대(중죽) 23개를 7 월 4일에 만들려고 옥지(옥지)가 받아 갔다. 크고 작은 대 93개를 7월 27일 옥지(옥지)가 만들려고 받아 갔다. 큰 대화살(대죽전) 65 개를 만들어 바쳤다. 중치 대 화살(중죽전) 40개와 22개를 9월 5일 에 무재(무재)가 바쳤다. 6월 6일 삶은 대(숙죽)로서 약간 무거운 것이 50개, 상품(상품죽) 11개, 약간 가벼운 대(경죽) 53개가 좋은 품질이다. 가볍고 작은 대 (경소죽) 48개에서 30개를 충청병사에게 보냈다. 큰 대 78개를 군 관 등에게 주었다. 다음 중치 대(차중죽) 44개를 우수사에게 보냈 다. 좋지 않은 대(하하죽)는 26개다. 본영(여수)의 전선 7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5 척을 정비하여 왔 고, 전에 만든 2 척에서 의병에 1 척, 개조한 것이 1 척이다. 순천에는 10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 1 척 방답의 배 5 척이다. 흥양에는 10 척에서 그 현(현)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본영의 배 1 척, 사도의 배 5 척이다. 낙안에는 3 척에서 그 군(군)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광양에는 4 척에서 그 현(현)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보성에는 8 척에서 그 군(군)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녹도가 2 척, 발포가 2 척이 다. 방답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여도에는 3 척에 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발포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사도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녹도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도양장 논의 벼가 20섬 13말 5되 이고 아울러서 13섬 14말 8되와 콩 1섬 7말을 지었다. 1594년 1월 21일에 싸움에 나갈 수군(분부수군) 21 명을 내 보고, 팔결군(팔결군) 16 명을 도로 보냈다. 5월 3일 곳간 뒤지어 조사하 니, 군량이 349섬 14말 4□, 나무를 팔아서 들인 쌀 8십□□ 모두 432섬 14말 4되에서 지금 보내온 것이 65섬 12말 4되가 있다. 명나라 장수 장홍유(장홍유)의 자(자)는 중문(중문)이고 호는 수천 (수천)이며 □강성 영파부(절강성영파부)에 살며, 머슴은 주증(주 증)·구덕(구덕)이고, 같이 온 기패관은 장도관(장도 )·반준(반준) ·주봉(주봉)이다.

 

12월기록에없음

 

 

을미년 1월 (1595년 1월)

 

1월 초1일 [양력 2월 9일]<갑술> 맑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라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흐르는 줄 도 몰랐다. 또 나이 여든이나 되신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 여러 장수들과 여러 색리·군사들이 와서 해가 바뀐 세배를 했다. 원전(원전)·윤언심(윤언심)· 고경운(고경운) 등이 와서 봤다. 여러 색리와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1월 초2일 [양력 2월 10일]<을해> 맑다.

나라제삿날(명종 인순왕후 심씨 제일)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장계 초고를 수정했다.

 

1월 초3일 [양력 2월 11일]<병자>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1월 초4일 [양력 2월 12일]<정축>맑다.

우우후·거제현령·금갑도만호·소비포권관·여도만호 등이 와서 봤다.

 

1월 초5일 [양력 2월 13일]<무인> 맑다.

공문을 결재했다. 조카 봉과 아들 울(울)이 들어와서 어머니 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이다. 밤새도록 온갖 회포 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1월 초6일 [양력 2월 14일]<기묘> 맑다.

어응린(어응린)과 고성현감(조응도))이 왔다.

 

1월 초7일 [양력 2월 15일]<경진> 맑다.

흥양현감(배흥립)·방언순(방언순)과 함께 이야기했다. 남해의 투항해 온 왜놈 야에몬(야여문) 등이 와서 현신했다.

 

1월 초8일 [양력 2월 16일]<신사>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광양현감(송전)의 공식적인 인사를 받은 뒤에 전령에게 기한을 어긴 죄로 곤장을 쳤다.

 

1월 초9일 [양력 2월 17일]<임오>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야에몬(야여문) 등을 남해로 돌려 보냈다.

 

1월 초10일 [양력 2월 18일]<계미>

순천부사 박진(박진)이 교서에 숙배했다. 경상수사 원균(원균)이 선창에 왔다고 했다. 불러 들여 같이 이야기했다. 순천부사·우 우후·흥양현감·광양현감·웅천현감·고성현감·거제현령도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1월 11일 [양력 2월 19일]<갑신> 우박이 내리고 샛바람이 불었다.

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흥양현감·고성현감·웅천현감·영등 포만호가 와서 이야기했다. 고성현감은 새 배를 독촉하여 만드는 일로 아뢰고 돌아갔다.

 

1월 12일 [양력 2월 20일]<을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영남우후 이의득(이의득)이 와서 봤다.

 

1월 13일 [양력 2월 21일]<병술>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박치공이 왔다.

 

1월 14일 [양력 2월 22일]<정해>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불편하여 누워서 끙끙 앓았다. 영등포만호·사천현감·여도 만호가 와서 봤다.

 

1월 15일 [양력 2월 23일]<무자> 맑다.

우우후 이정충(이정충)을 불렀더니, 이정충(이정충)은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져 한참이나 헤엄치는 것을 간신히 건져냈다. 그를 불러서 위로했다.

 

1월 16일 [양력 2월 24일]<기축> 맑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17일 [양력 2월 25일]<경인>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없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우후·소비포권관·거제현령·미 조항첨사가 아울러 와서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1월 18일 [양력 2월 26일]<신묘> 흐렸다.

공문을 결재했다. 저녁나절에 활 열 순을 쏘고서 헤어졌다.

 

1월 19일 [양력 2월 27일]<임진> 맑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옥구의 피란민 이원진(이원진)이 왔 다. 장흥부사·낙안군수·발포만호가 들어왔다. 기한을 어긴 죄를 곤장쳤다. 조금 있다가 여도 전선에서 잘못으로 불을 내어, 광양 ·순천·녹도 전선 네 척에 불길이 번져 탔다. 통탄함을 이길 수 없다.

 

1월 20일 [양력 2월 28일]<계사> 맑다.

아우 여필과 조카 해( )가 이응복(이응복)과 함께 나갔다. 아들 울(울)은 조카 분(분)과 함께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니 다행이다.

 

1월 21일 [양력 3월 1일]<갑오>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이경명(이경명)과 함깨 장기를 두었다. 장흥부사가 와서 봤다. 그 편에 들으니, 순변사 이일(이일)의 처사가 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 치려고 무척 애쓴다고 하니, 참으로 우습다.

 

1월 22일 [양력 3월 2일]<을미> 맑으나,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원수의 군관 이태수(이태수)가 전령을 가지고 왔다. 여러 장수들이 왔는지 안 왔는지를 알고 간다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다락위에 올라가 잘못으로 불을 낸 여러 장수들과 색리들에게 곤장을 쳤다. 초저녁에 금갑도만호의 옆집에서 잘못하여 불을내어 다타버렸다.

 

1월 23일 [양력 3월 3일]<병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흥부사·우후·흥양현감이 와서 이야기하고 날이 저물어 돌아 갔다.

 

1월 24일 [양력 3월 4일]<정유>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원진(이원진)을 배웅했다.

 

1월 25일 [양력 3월 5일]<무술> 맑다.

장흥부사·흥양현감·우후·영등포만호·거제현령이 와서 봤다.

 

1월 26일 [양력 3월 6일]<기해> 흐리고 바람 불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흥양현감(배흥립)을 잡아갈 나장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희(이희)도 왔다.

 

1월 27일 [양력 3월 7일]<경자> 맑다.

춥기가 한겨울 같다. 대청에 나가, 영암군수·강진현감 등이 공식 인사를 받았다.

 

1월 28일 [양력 3월 8일]<신축> 맑다. 바람이 세게 불고 추웠다.

황승헌(황승헌)이 들어왔다.

 

1월 29일 [양력 3월 9일]<임인>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1월 30일 [양력 3월 10일]<계묘> 맑고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보성군수(안홍국)가 들어왔다.

 

 

 

을미년 2월 (1595년 2월)

 

2월 초1일 [양력 3월 11일]<갑진> 맑고 바람이 불었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보성군수의 기한 어긴 죄를 곤장치고, 도망 치던 왜놈 두 명을 처형했다. 의금부의 나장이 와서 와서 흥양현 감을 잡아 갈 일을 전했다.

 

2월 초2일 [양력 3월 12일]<을사>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흥양현감(배흥립)이 잡혀갔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2월 초3일 [양력 3월 13일]<병오>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흥양 배에 불을 던졌다는 신덕수(신덕수)를 심문했으나, 실증을 얻어내지 못하여 가두었다.

 

2월 초4일 [양력 3월 14일]<정미> 맑다.

몸이 불편하다. 장흥부사·우우후가 왔다. 원수부의 회답 공문과 종사관의 회답 편지도 왔다. 조카 봉·아들 회·오종수 (오종수)가 들어왔다.

 

2월 초5일 [양력 3월 15일]<무신> 맑다.

충청수사가 왔다. 천성보만호 윤홍년(윤홍년)이 교서에 숙배했다.

 

2월 초6일 [양력 3월 16일]<기유>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흥부사·우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2월 초7일 [양력 3월 17일]<경술> 맑다.

보성군수가 술을 가져와 종일 이야기했다.

 

2월 초8일 [양력 3월 18일]<신해> 흐렸다.

2월 초9일 [양력 3월 19일]<임자> 비가 내렸다.

2월 초10일 [양력 3월 20일]<계축> 비가 뿌리고 바람도 세게 불었다.

황숙도(황숙도)와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2월 11일 [양력 3월 21일]<갑인> 비가 오더니 저녁나절에 잠깐 갰다.

황숙도(황숙도)·조카 분(분)·허주(허주)·변존서(변존서)가 돌아 갔다. 종일 공무를 봤다.

저물 무렵에 임금의 분부가 왔는데, 둔전을 검열하라는 것이다.

 

2월 12일 [양력 3월 22일]<을묘> 맑으며 바람은 일지 않았다.

윤엽(윤엽)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활 열 여 순을 쏘았다. 장흥 부사·우우후도 와서 활을 쏘았다.

 

2월 13일 [양력 3월 23일]<병진> 맑다.

일찍 도양의 둔전에서 벼 삼백 섬을 실어 와서 각 포구에 나누어 주었다. 우수사·진도군수·무안현감·함평현감·남도포만호·마 량첨사·회령포만호 등이 들어왔다.

 

2월 14일 [양력 3월 24일]<정사> 맑고 따뜻하다.

식사를 한 뒤에 진도군수·무안현감·함평현감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방비처에 수군을 일제히 징발해 보내지 않은 것과 전선을 만들어 오지 않은 일로 처벌했다. 영암군수도 죄를 논했다. 조카 봉·해·분(분)과 방응원(방응원)이 아울러 나갔다.

 

2월 15일 [양력 3월 25일]<무오> 맑고 따뜻하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가리포첨사·진도군수가 아울러 와서 참가했다. 지휘선(상선)을 연기로 그을렸다.

 

2월 16일 [양력 3월 26일]<기미> 맑다.

대청으로 나가니, 함평현감 조발(조발)이 논박을 당하여 돌아가려 고 하므로 술을 먹여서 보냈다. 조방장 신호(신호)가 진에 이르 러, 교서에 숙배하고서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에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옮기어 정박했다. 밤 열 시쯤에 출항하여 춘원도(통영시 광도면 끄승개)에 이르니 날은 밝아 오는데도 경상도 수군은 와 있지 않았다.

 

2월 17일 [양력 3월 27일]<경신> 맑다.

아침에 군사들에게 식사를 재촉하여 먹이고, 곧장 우수영 앞바다 에 이르렀다. 성 안에 있던 왜놈 칠백 명은 우리 배를 보고는 도 망치므로, 배를 돌려 나와서, 장흥부사 및 조방장 신호(신호)를 불러 종일 대책을 논의하고서 진으로 돌아왔다. 저물 무렵에 림 영(임영) 및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이 들어왔다.

 

2월 18일 [양력 3월 28일]<신유> 맑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2월 19일 [양력 3월 29일]<임술> 맑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거제현령·무안현감·평산포 만호·회령포만호 및 허정은(허정은)도 왔다. 송한련(송한련)이 와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아 군량을 산다고 했다.

 

2월 20일 [양력 3월 30일]<계해> 맑다.

우수사·장흥부사·조방장 신호(신호)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원균 (원균)의 악하고 못된 짓을 많이 전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2월 21일 [양력 3월 31일]<갑자> 비가 조금 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보성군수·웅천현감·우우후·소비포권관·강진현감·평산포만호 등이 와서 봤다.

 

2월 22일 [양력 4월 1일]<을축> 맑다.

대청으로 나가 장계를 봉했다. 저녁나절에 우후·낙안군수·녹도 만호를 불러 떡을 먹였다.

 

2월 23일 [양력 4월 2일]<병인> 맑다.

조방장 신호(신호)·장흥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2월 24일 [양력 4월 3일]<정묘> 흐렸다.

우뢰와 번개가 많이 치면서도 비는 오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다. 원전(원전)이 아뢰고 돌아갔다.

 

2월 25일 [양력 4월 4일]<무진> 흐리고 바람도 고르지 않았다.

아들 회와 울(울)이 들어왔길래 들으니 어머니께서 편안하시 다고 한다. 장계를 받들고 온 이전(이전)이 들어왔다. 조정의 소 식과 영의정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2월 26일 [양력 4월 5일]<기사> 흐렸다.

아침에 편지와 장계 열여섯 통을 봉하여 정여흥(정여흥)에게 부쳤다.

 

2월 27일 [양력 4월 6일]<경오> 한식. 맑다.

원균(원균)이 포구에서 수사 배설(배설)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라고 했더니, 불평하는 빛이 많더라고 한 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2월 28일 [양력 4월 7일]<신미> 맑다.

대청으로 나가 장흥부사·우우후와 함께 이야기했다. 광양현감·목포만호도 왔다.

 

2월 29일 [양력 4월 8일]<임신> 맑다.

고여우(고여우)가 창신도로 갔다. 수사 배설(배설)이 와서 둔전치 는 일을 논의하였다. 조방장 신호(신호)도 왔다. 저녁에 옥포만호 방승경(방승경)·다경포만호 이충성(이충성) 등이 교서에 숙배했다.

 

2월 30일 [양력 4월 9일]<계유> 비가 내렸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을미년 3월 (1595년 3월)

 

3월 초1일 [양력 4월 10일]<갑술> 맑다.

삼도에 겨울을 지낸 군사들을 모아 임금님께서 하사하신 무명을 나누어 주었다.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이 들어왔다.

 

3월 초2일 [양력 4월 11일]<을해> 흐렸다.

3월 초3일 [양력 4월 12일]<병자> 맑다.

3월 초4일 [양력 4월 13일]<정축> 맑다.

조방장 박종남(박종남)이 들어왔다.

 

3월 초5일 [양력 4월 14일]<무인> 비가 내렸다.

노대해가 왔다.

 

3월 초6일 [양력 4월 15일]<기묘> 맑다.

3월 초7일 [양력 4월 16일]<경진> 맑다.

조방장 박종남(박종남)·조방장 신호(신호)·우후(이몽구) 및 진 도군수(박인룡)가 와서 봤다.

 

3월 초8일 [양력 4월 17일]<신사>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갔다. 우수사(이억기)·경상수사(배설)·양 조방장(박종남·신호)· 우후(이몽구)· 가리포첨사· 낙안군수· 보성군수· 광양현감· 녹도만호가 아울러 모두 와서 이야기 했다.

 

3월 초9일 [양력 4월 18일]<임오> 맑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갔다. 방답의 새로 부임한 첨사 장린(장 인)·옥포의 새로 부임한 만호 이담(이담)이 공사례의 인사를 했 다. 진주의 이곤변(이곤 )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3월 초10일 [양력 4월 19일]<계미>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조방장 박종남(박종남)과 함께 이야기했다. 보성군수 안홍국(안홍 국이 아뢰고 돌아갔다.

 

3월 11일 [양력 4월 20일]<갑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사도시(대궐 안의 쌀·간장 등을 맡은 관청)의 주부 조형도(조형 도)가 와서 전라좌도의 왜적의 정세를 말하고, 또 투항해 온 왜놈 들의 말을 전하는데, 풍신수길(풍신수길)이 삼년간이나 출병해도 끝내 효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내어 바다를 건너 부산에다 진 영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 오기로 벌써 정해졌다고 했다.

 

3월 12일 [양력 4월 21일]<을유> 흐렸다.

조방장 박종남(박종남)과 우후(이몽구)가 장기를 두었다.

 

3월 13일 [양력 4월 22일]<병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자윤 박종남(박종남) 영감을 불러 같이 밥을 먹었다. 저녁 에 식사를 한 뒤에 조형도(조형도)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3월 14일 [양력 4월 23일]<정해> 비는 오고 바람은 그쳤다.

남해현령이 진에 이르렀다.

 

3월 15일 [양력 4월 24일]<무자> 비가 잠깐 그치고 바람도 잤다.

식사를 한 뒤에 조형도(조형도)가 아뢰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활을 쏘았다.

 

3월 16일 [양력 4월 25일]<기축>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 김완(김완)이 들어왔다. 그 편에 들으니, 충청수사 입부 이순신(이순신)이 군량미 이백 여 섬을 조도어사 강첨(강첨)에게 발각되어 그 때문에 잡혀 심문당했다고 했다. 또 새로 부임한 충 청수사 이계훈(이계훈)은 배에서 불을 내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 랄 일이다. 동지 권준(권준)이 본영에 왔다고 했다.

 

3월 17일 [양력 4월 26일]<경인> 비가 걷힐 듯하다.

아들 면·허주(허주)·박인영(박인영) 등이 돌아갔다. 오늘 군 량을 계산하여 딱지를 붙였다. 충청우후(원유남)가 달려 와 보고 하는데, 수사 이계훈(이계훈)이 불을 내고 자신은 물에 빠져 죽었 으며, 군관과 격군 백마흔 여 명이 불에 타 죽었다고 하니, 놀랍 기도 하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견내량의 복병한 곳에 서 온, 투항한 왜인 심안은이(심안은이: 시마즈)를 문초했더니, 그 놈은 본시 영등에 있던 왜놈이고, 그의 장수 심안둔(심안돈: 도진 의홍)이 그의 아들(도진충항)을 대신 두고 가까운 시일내에 본국 으로 돌아갈

것이라 한다.”고 했다.

 

3월 18일 [양력 4월 27일]<신묘> 맑다.

권언경(권언경)·아우 여필·조카 봉·이수원(이수원) 등이 들어왔다. 그 편에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말을 들으니, 천만다 행이다. 우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3월 19일 [양력 4월 28일]<임진> 맑다.

권언경(권언경) 영감과 함께 활을 쏘았다.

 

3월 20일 [양력 4월 29일]<계사> 비가 내렸다.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에게로 가다가 길에서 수사 배설(배설)을 만나 배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다. 그는 밀포(밀포)의 둔전치는 곳을 살펴 볼 일로 간다고 했다. 그 길로 우수사에게로 가서, 몹시 취하고, 저물어서 돌아왔다.

 

3월 21일 [양력 4월 30일]<갑오> 맑다.

저녁나절에 아우 여필·조카 봉·이수원(이수원)이 돌아갔다. 나주 반자(원종의)와 우후(이몽구)가 와서 봤다.

 

3월 22일 [양력 5월 1일]<을미>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날씨가 일찍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세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우수사가 여기 와서 같이 쏘았다. 날이 저물어 헤어져 돌아왔다.

 

3월 23일 [양력 5월 2일]<병신>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세 조방장 및 우후와 함께 걸어서 앞산 봉우 리에 오르니, 삼면으로는 바라보이는 앞이 막히지 않고, 길은 북 쪽으로 트여 있다. 과녁을 세우고 자리를 닦고, 거기에 앉아 종일 토록 돌아올 것을 잊었다.

 

3월 24일 [양력 5월 3일]<정유> 흐리고 바람이 없다.

공문을 결재했다. 저녁나절에 세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3월 25일 [양력 5월 4일]<무술> 종일 비가 내렸다.

동지 권준(권준)·우후·남도포만호·나주반자가 와서 봤다. 영광 군수도 왔다.동지 권준(권준)과 장기를 두었는데 권준(권준)이 이 겼다.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했는데 닭이 울어서야 열이 조금 내리고 땀은 흐르지 않았다.

 

3월 26일 [양력 5월 5일]<기해> 맑다.

영광군수(정연)가 나갔다. 저녁나절에 조방장 신호(신호)·박종남 (박종남)과 우후와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저녁에 수사 배 설(배설)·이운룡(이운룡)·안위가 와서 새 감사(감사) 맞이할 일 을 아뢰고, 사량(통영시 사량면)으로 갔다. 밤 열 시쯤에 동쪽이 어둡다가 밝아지니, 무슨 상서로운 조짐인지 모르겠다.

 

3월 27일 [양력 5월 6일]<경자>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가 여기 와서 종일 활을 쏘았다. 어둘 무 렵 조방장 박종남(박종남)에게로 가서 발포만호·사도첨사·녹도 만호를 불러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표마(표마)와 종 금이가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3월 28일 [양력 5월 7일]<신축> 맑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나절에 사도첨사가 와서 보고하기를,”각 포구의 병부(병부)를 순찰사의 공문에 따라, 각 포구에 직접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3월 29일 [양력 5월 8일]<임인>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두 조방장과 이운룡(이운룡)·조계종(조계종)이 활 스무세 순을 쏘았다. 수사 배설(배설)이 순찰사에게서 오고, 미조항첨사(성윤문)도 진에 왔다.

 

 

을미년 4월 (1595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9일]<계묘> 맑으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남원 유생 김굉이 수군에 관한 일로 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와 같이 이야기했다.

 

4월 초2일 [양력 5월 10일]<갑진> 맑다.

종일 공무를 봤다.

 

4월 초3일 [양력 5월 11일]<을사> 맑다.

세 조방장이 우수영의 진으로 가고, 나는 사도첨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4월 초4일 [양력 5월 12일]<병오>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배설)가 활을 쏘자고 청하므로, 권·박 두 조방 장과 함께 배를 같이 타고 경상수사에게 갔더니, 전라수사(이억 기)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같이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4월 초5일 [양력 5월 13일]<정미> 맑다.

선전관 이찬(이찬)이 비밀 유지(유지)를 가지고 진에 이르렀다.

 

4월 초6일 [양력 5월 14일]<무신> 가랑비가 종일 내렸다.

동지 권준(권준)과 같이 이야기했다.

 

4월 초7일 [양력 5월 15일]<기유> 맑다.

저물 무렵 바다로 내려가 어두울 때에 견내량에 이르러 잤다. 선 전관(이찬)이 돌아갔다.

 

4월 초8일 [양력 5월 16일]<경술> 맑으나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왜적들이 밤에 도망갔다고 하므로 들어가 치지 않았다. 저녁나절 에 침도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경상수사 배설(배설)과 함께 활을 쏘았다. 여러 장수들도 모두 와서 참여했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4월 초9일 [양력 5월 17일]<신해> 맑다.

조방장 박종남(박종남)과 함께 활을 쏘았다.

 

4월 초10일 [양력 5월 18일]<임자> 맑다.

구화역(구화역: 구허역) 역졸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세 척이 또 역앞(통영시 광도면 노산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삼 도의 중위장들에게 각각 다섯 척씩 배를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달려가 형세를 보아 무찌르게 했다.

 

4월 11일 [양력 5월 19일]<계축> 맑다.

우수사가 와서 보고는 그대로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 아갔다. 정여흥(정여흥)이 들어왔다. 또 변존서(변존서)의 편지를 보니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줄을 알겠다. 기쁘다.

 

4월 12일 [양력 5월 20일]<갑인> 맑다.

장계의 회답 열여덟 통과 영의정(류성룡)·우의정(정탁)의 편지와 자임(자임: 이축)영감의 회답 편지가 왔다. 군량을 독촉할 일로 아병(아병: 군사의 일종) 양응원(양응원)을 순천·광양으로, 배승 련(배승련)을 광주·나주로, 송의련(송의련)을 흥양·보성으로, 김 충의(김충의)를 구례·곡성으로 정하여 보냈다. 삼도의 중위장 성윤문(성윤문)·김완(김완)·이응표가 견내량에서 돌아와 왜적이 물러갔다고 보고했다. 경상수사 배설(배설)은 밀포(밀포)로 나갔

다.

 

4월 13일 [양력 5월 21일]<을묘> 흐리고 비가 내렸다.

세 조방장이 같이 왔다. 장계와 편지 네 통을 봉하여 거제 군관 편에 올려 보냈다. 저녁에 고성현령 조응도(조응도)가 와서 왜적의 일을 말하고, 또 “거제의 왜적이 웅천에 군사를 청하여 야간에 습격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비록 믿을만 하지는 않으나, 그럴 염려가 없지도 않다.

 

4월 14일 [양력 5월 22일]<병진>

잠깐 비가 내렸다. 아침에 흥양현감이 교서에 숙배했다.

 

4월 15일 [양력 5월 23일]<정사> 흐렸다.

여러 가지 장계와 단오절의 진상품을 봉해 올렸다.

 

4월 16일 [양력 5월 24일]<무오> 종일 큰 비가 왔다.

비가 흡족히 오니, 올해 농사는 큰 풍년임을 점칠 수 있다.

 

4월 17일 [양력 5월 25일]<기미> 맑으나 높새바람이 세게 불었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세 조방장과 활 열다섯 순을 쏘 았다. 경상수사 배설(배설)이 여기에 왔다가 해평장의 논밭 일구 는 곳으로 갔다. 미조항첨사도 와서 활을 쏘고서 갔다.

 

4월 18일 [양력 5월 26일]<경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우수사(이억기)·경상수사 배설 (배설)· 가리포첨사(이응표)· 미조항첨사(성윤문)· 웅천현감(이운룡)· 사도첨사(김완)· 경상우후 이의득(이의득)· 발포만호(황정록 ) 등 삼도의 장수가 모두 와서 모여 활을 쏘았다. 권준(권준)·신 호(신호) 두 조방장도 같이 모였다.

 

4월 19일 [양력 5월 27일]<신유> 맑다.

조방장 박종남(박종남)이 적을 수색·토벌하는 일로 배를 탔다.

 

4월 20일 [양력 5월 27일]<임술> 맑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에게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이 영남이 장계 회답을 가지고 내려 왔는데, 남해현령을 효시하라고 했다.

 

4월 21일 [양력 5월 28일]<계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대청에 나갔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월 22일 [양력 5월 30일]<갑자> 맑다.

오후에 미조항첨사(성윤문)·(웅천현감)이운룡(이운룡)·적량만호 고여우(고여우)·영등포만호 조계종(조계종)과 두 조방장이 아울 러 왔다. 그래서 정사준(정사준)(판관 정승복의 아들)이 보낸 술과 고기를 같이 먹으면서, 남해현령이 군령을 어기었으니 효시하라는 글을 보았다.

 

4월 23일 [양력 5월 31일]<을축> 맑다.

마파람이 세게 불어 배를 운항할 수 없으므로 다락위에 앉아 공무를 보았다.

 

4월 24일 [양력 6월 1일]<병인> 맑다.

이른 아침에 아들 울(울)·조카 뇌·완(완)을 어머니 생신에 상차려 드릴 일로 내어 보냈다.

오정 때에 강천석(강천석)이 달려 와서 보고하기를, “도망한 왜놈 망기시로(망기시로: 손사랑)가 우 거진 풀 숲 속에 엎드려 있다가 잡혀 왔고, 다른 한 놈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곧 그 놈을 압송해 오게 하고 삼도에 갈라 맡긴 항복한 왜놈들을 모두 불러 모아 곧 머리를 베라고 하였더니, 망기시로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죽으러 나왔다. 참으로 독한 놈이었다.

 

4월 25일 [양력 6월 2일]<정묘> 맑도 바람도 없다.

구화역 역졸 득복(득복)이 경상우후(이의득)의 보고를 가지고 왔 는데, “왜적의 대선·중선·소선을 아울러 쉰 여 척이 웅천에서 나와 진해(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진동리)로 향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수(오수) 등을 정탐하도록 내어 보냈다. 흥양현감이 와 서 봤다. 사량만호 이여념(이여념)이 아뢰고 돌아갔다. 아들 회 및 조카 해가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니, 다행이다.

 

4월 26일 [양력 6월 3일]<무진> 맑다.

새벽에 우수사가 조방장 신호(신호)와 함께 자기 소속의 배 스무 여 척을 거느리고 탐색하러 나갔다. 저녁나절에 종지 권준(권준)· 흥양현감(배흥립)· 사도첨사(김완)· 여도만호(김인영(김인영))과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4월 27일 [양력 6월 4일]<기사> 맑으며 바람도 없다.

몸이 불편하다. 동지 권준(권준)·미조항첨사(성윤문)·영등포만 호(조계종)가 와서 같이 활 열 순을 쏘았다. 한밤 자정에 우수사 가 적을 수색·토벌하고서 진으로 돌아아서는, “아무데도 적의 자취가 없다.”고 하였다.

 

4월 28일 [양력 6월 5일]<경오>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송덕일이 하동현감(성천유)을 잡으러 왔다.

 

4월 29일 [양력 6월 6일]<신미> 밤 두 시쯤에 비가 오더니, 아침 여섯 시쯤에 깨끗이 개었다.

해남현감(최위지)이 공사례를 마친 뒤에, 하동현감에게는 두 번이 나 기일에 이르지 않은 죄로 곤장 아흔 대를 때렸고, 해남현감에 게는 곤장 열 대를 때렸다. 미조항첨사는 휴가 가겠다고 아뢰었 다. 세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했다. 노윤발(노윤발)이 미역을 아흔 아홉 동을 따 가지고 왔다.

 

4월 30일 [양력 6월 7일]<임신> 맑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을미년 5월 (1595년 5월)

 

5월 초1일 [양력 6월 8일]<계유>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내렸다.

5월 초2일 [양력 6월 9일]<갑술> 맑다.

아침에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었다. 웅천현감·거제현령·영등포 만호·옥포만호가 와서 봤다. 밤 열 시쯤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며, 종사관이 벌써 본영에 이르렀다고 한다.

 

5월 초3일 [양력 6월 10일]<을해> 맑다.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해남현감이 와서 봤다. 금갑도만호는 진에 이르렀다.

 

5월 초4일 [양력 6월 11일]<병자>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다. 몸소 나아가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멀리 바다에 앉았으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저녁나절에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 해남현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아들 편지를 보니, “요동의 왕작덕(왕작덕)이 (고려)왕씨의 후예로서 군사를 일으키고자 한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5월 초5일 [양력 6월 12일]<정축> 비가 내렸다. 오후 여섯 시쯤 잠깐 개었다.

활 세 순을 쏘았다. 우수사·경상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 였다. 오후 다섯 시에 종사관 류공진이 들어왔다. 이충일(이충일) ·최대성(최대성)·신경황(신경황)이 같이 이르렀다.

몸이 춥고 불편하고 아파 토하고서 잤다.

 

5월 초6일 [양력 6월 13일]<무인> 맑으며 바람도 없다.

아침에 종사관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례를 받고 함께 이야기 하였다. 저녁나절에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월 초7일 [양력 6월 14일]<기묘> 맑다.

아침에 종사관(류공진)·우후(이몽구)와 함께 이야기했다.

 

5월 초8일 [양력 6월 15일]<경진>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출항하여 삼도가 가 같이 선인암(선인암: 통 영시 한산면 하소리 하포)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고 구경도하며, 또 활도 쏘았다. 오늘 방답첨사(장린)가 들어와 아들들의 편 지를 가지고 왔는데, “초나흘에 종 춘세가 잘못 불을 내어 집 열 채가 번져 타버렸다. 다만 어머니께서 계신 집에는 불이 붙지 않 았다.”고 했다. 이거야 말로 다행이다. 어둡기 전에 배를 돌려 진에 이르렀다. 종사관과 우후는 방 붙이는 일로 뒤떨어졌다.

 

5월 초9일 [양력 6월 16일]<신사> 맑다.

아침에 식사를 한 뒤에 종사관이 돌아갔다. 우후도 같이 갔다.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월 초10일 [양력 6월 17일]<임오> 맑다.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많이 적중했다. 종사관 등이 영문에 이르 렀다고 했다.

 

5월 11일 [양력 6월 18일]<계미> 저녁나절에 비가 뿌렸다.

두치(하동읍 두곡리)의 군량, 남원·순창·옥과 등을 합하여 예순 여덟 섬을 실어왔다.

 

5월 12일 [양력 6월 19일]<갑신> 궂은비가 그치지 않더니, 저녁에야 잠깐 개었다.

대청에 나가 공무를 봤다. 동지 권준(권준)과 조방장 신호(신호) 가 함께 왔다.

 

5월 13일 [양력 6월 20일]<을유> 비가 퍼붓듯이 오는데 종일 그치지 않다.

홀로 대청 가운데 앉아 있으니 온갖 회포가 끝이 없다. 배영수 (배영수)를 불러 거문고를 타게 했다. 또 세 조방장을 불러 오게 하여 같이 이야기했다. 하루 걸릴 탐후선이 엿새나 지나도 오지 않아 어머니 안부를 알 수가 없다. 속이 타고 무척 걱정이 된다.

 

5월 14일 [양력 6월 21일]<병술> 궂은비가 그치지 않고 종일토록 왔다.

아침에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사도첨사가 와서 보고하는데, “흥양현감이 받아 간 전선이 암초에 걸려 뒤집 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대장(대장) 최벽(최벽)과 십호선 장수(십선장)와 도훈도(도훈도)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동지 권준(권준)이 왔다.

 

5월 15일 [양력 6월 22일]<정해> 궂은비가 그치지 않아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겠다.

새벽 꿈이 어수선했다. 어머니 소식을 들은지 이레나 되니 몹시 속이 타고 걱정이 된다. 또 조카 해가 잘 갔는지 궁금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보자니, 광양의 김두검(김두검) 이 복병으로 나갈 적에, 순천과 광양의 두 원에게서 이중으로 월 급(삭료)을 받은 것 때문에 벌로써 수군으로 나왔는데, 칼도 안 차고 활도 안 차고서 나왔는데다가 무척 오만하므로 곤장 일흔 대를 쳤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몹시 취하여 돌아갔다.

 

5월 16일 [양력 6월 23일]<무자>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시다고 하고, 아 내는 실수로 불을 낸 뒤로 마음이 많이 상하여 담천이 더해졌다 고 한다. 걱정이 된다. 비로소 조카 해 등이 잘 간 줄을 알았 다.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동지 권준(권준)이 잘 맞추었다.

 

5월 17일 [양력 6월 24일]<기축> 맑다.

아침에 나가 본영의 각 배에 사부·격군의 급료받은 사람들을 점 고했다. 저녁나절에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박·권 두 조방장이 잘 맞추었다. 오늘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부어 만들었다.

 

5월 18일 [양력 6월 25일]<경인> 맑다.

충청수사가 진에 이르렀다. 다만, 결성현감(손안국)·보령현감· 서천만호(소희익)를 거느리고 왔다. 충청수사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세 조방장과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 열 순을 쏘았다. 거제현령이 와서 보고 그대로 잤다.

 

5월 19일 [양력 6월 26일]<신묘> 맑으나, 샛바람이 차게 불었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권·박·신 세 조방장과 사도·방답 두 첨사 와 함께 활 서른 순을 쏘았다. 수사 선거이(선거이)도 와서 같이 참여했다. 저녁에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부어 만들었다.

 

5월 20일 [양력 6월 27일]<임진> 비바람이 저녁내 오고 밤새도록 멎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공무를 봤다. 수사 선거이(선거이)·조방장 권준(권준)과 같이 장기를 두었다.

 

5월 21일 [양력 6월 28일]<계사> 흐렸다.

오늘은 꼭 본영에서 누가 올 것이겠지만 당장 어머니 안부를 몰 라 답답하다. 종 옥이(옥이)· 무재(무재)를 본영으로 보내고, 전복과 밴댕이 젓갈, 물고기알 몇 점을 어머니께 보냈다. 아침에 나가 공무를 보자니,투항해 온 왜놈들이 와서 보고하기를, “저희 같은 또래 중에 산소(산소)란 놈이 흉칙한 짓거리를 많이 하기 때문에 죽이겠다”고 했다. 그래서 왜놈을 시켜서 그놈을 목을 베게 했다.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월 22일 [양력 6월 29일]<갑오> 맑고 화창하다.

동지 권준(권준) 등과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이수원(이수원) 이 상경할 일로 들어왔다.

비로소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이다.

 

5월 23일 [양력 6월 30일]<을미> 맑다.

세 조방장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5월 24일 [양력 7월 1일]<병신> 맑다.

아침에 이수원(이수원)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조방장 박종남 (박종남)과 충청수사 선거이(선거이)를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소금 굽는 가마솥을 부어 만들었다.

 

5월 25일 [양력 7월 2일]<정유> 맑다가 저녁나절에 비가 내렸다.

경상수사·우수사·충청수사가 모여서 같이 활 아홉 순을 쏘았 다. 충청수사가 술을 내어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경상수사 배설 (배설)에게서 김응서(김응서)가 거듭해서 대간들의 혹평을 받고 있고, 원수도 거기에 끼었다는 말을 들었다.

 

5월 26일 [양력 7월 3일]<무술> 저녁나절에 개었다.

홀로 대청에 앉아 있었다. 충청수사·세 조방장과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저녁에 현덕린(현덕린)이 들어왔다.

 

5월 27일 [양력 7월 4일]<기해> 맑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수사 선거이(선거이)와 두 조방장이 취하여 돌아갔다. 정철(정철)이 서울에서 진에 왔다. 장계 회답 내용에, ” 김응서(김응서)가 함부로 강화에 대하여 한 말이 죄가 죄었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영의정(류성룡)·좌의정(김응남)의 편지가 왔다.

 

5월 28일 [양력 7월 5일]<경자> 흐리다가 마침내 저녁에 비가 많이 내렸다.

끝내 밤에 바람이 세게 불어, 전선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는데, 간간히 구호했다. 식사를 한 뒤에 수사 선거이(선거이)·세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했다.

 

5월 29일 [양력 7월 6일]<신축>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 부었다.

사직(사직: 사; 토지의 신, 직; 곡식의 신)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 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인으로 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을미년 6월 (1595년 6월)

 

6월 초1일 [양력 7월 7일]<임인> 저녁나절에 맑다.

권·박·신 세 조방장과 웅천현감·거제현령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충청수사 선거이(선거이)는 이질에 걸려 쏘지 않았다. 새로 번드는 영리가 들어왔다.

 

6월 초2일 [양력 7월 8일]<계묘> 종일 가랑비 내리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에서 공무를 봤다. 한비(한 )가 돌아갔다. 어머니께 편지를 편지를 썼다.

영리 강기경(강기경)·조춘종(조춘 종)·김경희(김경희)·신홍언(신홍언)이 모두 당직을 마치고 나왔 다. 오후에 가덕진첨사·천성만호·평산포만호·적량첨사 등이 와서 봤다. 천성보만호 윤홍년(윤홍년)이 와서 청주의 이계(이계) 의 편지와 서숙부의 편지를 전하며, 김개(김개)가 지난 3월에 죽 었다고 했다. 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저물 무렵에 권언경(권언 경) 영감이 와서 이야기했다.

 

6월 초3일 [양력 7월 9일]<갑진>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각 보고 문서를 처리하고, 하 달 공문을 내보냈다. 느즈막이 가리포첨사·남도포만호가 왔다. 권·신 두 조방장과 방답첨사·사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가 와서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아침에 남해현령이 달려와서 보고 하는데, 해평군 윤두수(윤두수)가 남해에서 본영으로 건너온다고 한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곧 배를 정비하고 현덕린(현덕린) 을 본영으로 보냈다. 사량만호가 와서 양식이 떨어졌다고 보고하고서

돌아갔다.

 

6월 초4일 [양력 7월 10일]<을사> 맑다.

진주의 서생 김선명(김선명)이라는 자가 계원유사(계원유사: 식량 을 잇대주는 직책 이름)가 되고 싶다고 여기에 왔는데, 보인(보 인) 안득(안득)이라는 자가 데리고 왔다. 그 말을 들어 살펴보니, 그 속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 같아 아직 좀 두고 보자고 하고 공 문을 만들어 주었다. 세 조방장과 사도첨사·방답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가 와서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탐후선이 오지 않아 어머니의 안부를 알 수 없다.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난다.

 

6월 초5일 [양력 7월 11일]<병오> 맑다.

이(이) 조방장 등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는데,자윤 박종남(박 종남)(조방장)은 병으로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웅천현 감·거제현령이 와서 같이 종일 이야기했다. 오정 때부터 비가 내려서 활을 쏘지 못했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저녁식사도 먹지 않고 종일 쓰리고 앓았다. 종 경(경)이 들어 와서 어머니께 서 편안하시다고 하니 다행이다.

 

6월 초6일 [양력 7월 12일]<정미>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송희립(송희립)이 들어 왔다. 그 편에 도양 장의 농사 형편을 들으니, 흥양현감(배흥립)이 무척이도 애를 썼 기 때문에 추수가 잘 될 것이라고 했다. 계원유사 림영(임영)도 힘을 많이 쓴다고 했다. 정항(정항)이 이곳에 왔으나, 나는 몸이 불편하여 종일 앓았다.

 

6월 초7일 [양력 7월 13일]<무신>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신음하며, 앉았다 누웠다 했다.

 

6월 초8일 [양력 7월 14일]<기유> 비가 내렸다.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저녁나절에 세 조방장이 와서 보고, 곤양 군수는 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매우 섭섭하다.

 

6월 초9일 [양력 7월 15일]<경술> 맑다.

몸이 아직도 쾌하지 않는다. 답답하고 걱정된다. 조방장 신호(신 호)·사도첨사·방답첨사가 편을 갈라서 활쏘기를 했는 데, 신호 (신호) 편이 이겼다. 저녁에 원수군관 이희삼(이희삼)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이곳에 왔는데, 조형도(조형도)가 수군 한 사람에 양식 다섯 홉씩·물 일곱 홉씩이라고 없는 것을 꾸며서 장계를 하였다고 했다. 인간의 일이란 참으로 놀랍다. 천지에 어찌 이처 럼 속이는 일이 있단 말인가. 저물녘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렸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6월 초10일 [양력 7월 16일]<신해> 맑다.

새벽에 탐후선을 본영으로 내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세 조방장· 충청수사·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광주의 군량 서른아홉 섬을 받 았다.

 

6월 11일 [양력 7월 17일]<임자> 가랑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원수군관 이희삼(이희삼)이 돌아갔다. 저녁에 나가 공무를 봤다. 광주 군량을 훔쳐간 도둑놈을 가두었다.

 

6월 12일 [양력 7월 18일]<계축> 가랑비가 오고 바람 불었다.

새벽에 아들 울(울)이 들어왔다. 어머니의 병환이 좀 덜하다고 한 다. 그러나, 연세가 아흔인지라 이런 위험한 병에 걸리셨으니, 염려가 되고 또 눈물이 난다.

 

6월 13일 [양력 7월 19일]<갑인> 흐렸다.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배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대신으로는 권준(권준)이 되었다. 남해현령 기효근(기효근)은 그 대로 유임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배 설(배설)에게 다녀가서 보고 돌아왔다. 어두워서 탐후선이 들어왔다. 금오랑이 이미 영(영) 안에 와 있다고 한다. 또 별좌의 편지 를 보니, 어머니 병환이 차차 나아간다고 한다. 다행이다.

 

6월 14일 [양력 7월 20일]<을묘> 새벽에 큰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가 활을 쏘자고 청하여 우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다 모였 는데, 저녁나절에 개었으므로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저녁에 금오 랑이 경상수사 배설(배설)을 잡아갈 일로 들어왔다.

권준(권준)을 수사로 임명한다는 조정의 공문과 유서와 밀부(밀부: 유수·감사 ·병마사·수사·방어사들이 차던 병부)도 왔다.

 

6월 15일 [양력 7월 21일]<병진>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식사를 한 뒤에 포구로 나가 배설(배설)을 떠나 보내니 마음이 불편하다. 아들 울(울)이 돌아갔다. 오후에는 조방장 신호(신호)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6월 16일 [양력 7월 22일]<정사> 맑다.

나가 공무를 봤다. 순천의 7호선의 장수 장일(장일)이 군량을 훔 치다가 잡혀 왔으므로 처벌했다. 오후에 두 조방장과 미조항첨사 등과 함께 활 일곱 순을 쏘았다.

 

6월 17일 [양력 7월 23일]<무오> 맑으나 바람이 종일 불었다.

경상수사(권준)·충청수사(선거이)·두 조방장이 같이 활을 쏘았다.

 

6월 18일 [양력 7월 24일]<기미> 비가 오락가락 했다.

진주의 유생 류기룡(유기룡) 및 하응문(하응문)이 양식을 대어 달 라면서 쌀 다섯 섬을 받아 갔다. 저녁나절에 조방장 박종남(박종 남)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고 헤어졌다.

 

6월 19일 [양력 7월 25일]<경신> 비가 내렸다.

홀로 다락 위에 앉아서 몽매간에 아들 면이 윤덕종(윤덕종)의 아들 윤운로(윤운로) 와 같이 왔는데, 어머니의 편지를 보니 병환 이 완쾌하시다고 한다. 천만 다행이다. 신홍헌(신홍헌) 등이 들어 와서 보리 일흔여섯 섬을 바쳤다.

 

6월 20일 [양력 7월 26일]<신유> 비가 오락가락 했다.

종일 다락에 앉아서 충청수사가 말이 분명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몸소 가보니, 중태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습한 곳에 기거함으로 일어나는 뼈마디가 저리고 아픈 풍습이라는 병으로 많이 상했다. 무척 염려가 된다.

 

6월 21일 [양력 7월 27일]<임술> 맑다.

몹시 덥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신홍헌(신홍헌)이 돌아갔다. 거제현령은 또 왔다. 경상수사(권준)가 보고하는데, 평 산포만호(김축)가 병에 걸려 심하다고 한다. 그래서 내어 보낼 일 로 적어서 보냈다.

 

6월 22일 [양력 7월 28일]<계해> 맑다.

할머니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6월 23일 [양력 7월 29일]<갑자> 맑다.

두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저녁에 배영수(배영수)가 돌아갔 다.

 

6월 24일 [양력 7월 30일]<을축> 맑다.

우도(우도)의 각 고을과 포구에 부정사실을 조사했다. 음탕한 계 집열두 명을 잡아다가 그 대장(대장)을 아울러 처벌했다. 저녁나 절에 침을 맞아 활을 쏘지 않았다. 허주(허주)·조카 해가 들 어왔다. 전마(전마)도 왔다. 기성백(기성백)의 아들 기징헌(기징 헌)이 그의 서숙부 기경충(기경충)과 함께 왔다.

 

6월 25일 [양력 7월 31일]<병인> 맑다.

원수의 공문이 들어왔다. “세 위장(위장)을 세 패로 갈라 보낸다” 고 했고, 또 소서행장이 일본에서 와서 화친할 것을 이미 결정했 다고 한다. 저녁에 조방장 박종남(박종남)과 충청수사 선거이(선 거이)에게로 가서 그의 병세를 보니, 이상한 일이 많았다.

 

6월 26일 [양력 8월 1일]<정묘> 맑다.

식사를 한 뒤에 공무를 보고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오늘이 권언경(권언경) 영감의 생일이라고 했다. 그래 서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도 몹시 취하며 거문고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6월 27일 [양력 8월 2일]<무진> 맑다.

허주(허주)·조카 해·기운로(기운로) 등이 돌아갔다. 나는 조방장 신호(신호)·거제현령과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6월 28일 [양력 8월 3일]<기사> 맑다.

나라제삿날(명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6월 29일 [양력 8월 4일]<경오> 맑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갔다. 우수사가 와서 활 열 여 순을 쏘았다.

 

6월 30일 [양력 8월 5일]<신미> 맑다.

문어공(문어공)이 날 삼(생마)을 사들일 일로 나갔다. 이상록(이 상록)도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영등포만호가 와서 봤 다. 방답첨사·녹도만호·조방장 신호(신호)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을미년 7월(1595년 7월)

 

7월 초1일 [양력 8월 6일]<임신>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제삿날(인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다락 위 에 기대어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마치 아 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기둥같은 인재(동 양)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같은 인물(주석)이 없으니, 모르겠다.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갈지.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워서 종일 엎치락뒤치락하였다.

 

7월 초2일 [양력 8월 7일]<계유> 맑다.

오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날이다. 슬픈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저녁나절에 활 열 순을 쏘고, 또 철전 다섯 순·편전 세 순을 쏘았다.

 

7월 초3일 [양력 8월 8일]<갑술> 맑다.

아침에 충청수사에게로 가서 문명하니 많이 나았다고 한다. 저녁 나절에 경상수사가 이곳에 와서 서로 이야기한 뒤에 활 열 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 다고 하나 입맛이 없으시다고 한다. 몹시 걱정이다.

 

7월 초4일 [양력 8월 9일]<을해> 맑다.

나주판관이 배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왔다. 이전(이전) 등이 산 일터에서 노 만들 나무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갔다. 미조항첨사·웅천현감이 와서 활을 쏘았다. 군관들은 내기로 환각궁을 쏘았는데 노윤발(노윤발)이 으뜸이었다. 저녁에 림영(임영)· 조응복(조응복)이 왔다. 양정언(양정언)은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7월 초5일 [양력 8월 10일]<병자> 맑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저녁나절에 조방장 박종남(박종남)· 조방장 신호(신호)가 왔다. 방답첨사는 활을 쏘았다. 림영(임영)은 돌아갔다.

 

7월 초6일 [양력 8월 11일]<정축> 맑다.

정항(정항)·금갑도만호·영등포만호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나 가 공무를 보고 활 여덟 순을 쏘았다. 종 목년(목년)이 곰내(고음 천)에서 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7월 초7일 [양력 8월 12일]<무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경상수사·두 조방장·충청수사가 왔다. 방답첨사·사도첨사 등을 편을 갈라 활을 쏘았다.

경상우병사에게서 임금님의 분부가 왔는데, “전쟁의 재앙이 나라에 참혹하게 만들고, 원수놈은 나라 안에 있어 귀신도 부끄러워 하고, 사람도 원통해 함이 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망한 기운을 빨리 쓸어버리지 못하고, 원수놈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있 음(불공대천)을 끊어버리지도 못하니 통분하다. 그러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로서 누가 팔을 부르걷고 마음을 썩히면서 원수놈의 그 살점을 저미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 진치고 있는 일선 장수로서 조정의 명령도 없이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패역한 말을 지꺼리고, 또 여러번 사사로이 편지를 통하여 적의 기세를 높이고, 적에게 애교를 부릴 뿐더러, 수호·강화설이 명나라에까지 미쳐 부끄러럽 게 하고, 흔단을 열어 놓기에 조금도 꺼리낌이 없도다. 생각건대 군율로 다스려도 아까울 것이 없을 것이지만, 오히려 관대히 용서하고 돈독히 타이르고 경계하도록 책망하기도 했다. 아닌게 아 니라 오히려 고집을 부리고 스스로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니, 내가 보기에는 몹시 해괴하고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에 비변사의 낭청 김용을 보내어 구두로 나의 뜻을 전하니, 경은 그 마음을 고쳐서 정신을 가다듬어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는 것 이었다. 이것을 보니, 놀랍고도 죄송스러움을 가눌 길이 없다. 김응서(김응서)란 어떠한 사람이기에 스스로 회개하여 다시 힘쓴 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만약 쓸개라도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살이라도 할 것이다.

 

7월 초8일 [양력 8월 13일]<기묘>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영등포만호·조방장 박종남(박 종남)이 와서 봤다.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배영수)가 그 장수의 명령을 받고 와서 군량 스무 섬을 주고 갔다. 동래부사 정광좌(정 광좌)가 와서 부임했다고 아뢰었다. 활 열 순을 쏘고 헤어졌다. 종 목년(목년)이 돌아왔다.

 

7월 초9일 [양력 8월 14일]<경진> 맑다.

오늘은 말복이다. 가을 기운이 서늘해지니, 회포가 많이 일어난다. 미조항첨사가 와서 보고 갔다. 웅천현감·거제현령이 활을 쏘고 갔다. 밤 열 시쯤에 바다 위의 달빛이 다락에 가득차니, 생각이 번거로와 다락 위를 어슬렁거렸다.

 

7월 초10일 [양력 8월 15일]<신사>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저녁나절에 우수사를 만나 서로 이야기했다. 양식이 떨어져도 아무런 계책이 없다는 말을 많이 했다. 무척 답답하여 괴롭다. 조방장 박종남(박종남)도 왔다. 술 두어 잔을 마셨더니, 몹시 취했다. 밤이 깊어 다락 위에 누었더니, 초생달 빛이 다락에 가득하여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7월 11일 [양력 8월 16일]<임오> 맑다.

아침에 어머니 앞으로 편지를 쓰고, 여러 곳에도 편지를 써 보냈다. 무재(무재)·박영(박영)이 직접 일하러 나갔다. 나가 공무를 보고, 활 열 순을 쏘았다.

 

7월 12일 [양력 8월 17일]<계미>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경상우수사가 와서 봤다. 그와 함께 활 활 열 순·철전 다섯 순을 쏘았다. 해질 무렵 서로 회포를 풀고 물러갔다. 가리포첨사도 와서 같이 했다.

 

7월 13일 [양력 8월 18일]<갑신> 맑다.

가리포첨사·우수사가 같이 와서 가리포첨사가 술을 바쳤다. 활 다섯 순·철전 두 순을 쏘았는데 나는 몸이 몹시 불편했다.

 

7월 14일 [양력 8월 19일]<을유> 저녁나절에 개었다.

군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녹도만호 송여종(송여종)으로 하여금 사망한 군졸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쌀 두 섬을 주었다. 이상록 (이상록)·태구련(태구련)·공태원(공태원) 등이 들어왔다. 어머니 께서 병이 나아 펀안하시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7월 15일 [양력 8월 20일]<병술> 맑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니, 박·신 두 조방장과 방답첨사·여도만호· 녹도만호· 보령현감· 결성현감 및 이언준(이언준) 등이 활을 쏘고 술을 마셨다. 경상수사도 와서 같이 이야기하고, 그로 하여금 씨름 내기를 했다. 정항(정항)이 왔다.

 

7월 16일 [양력 8월 21일]<정해> 맑다.

아침에 들으니, 김대복(김대복)이 병세가 몹시 위태롭다고 한다. 매우 걱정스럽다. 곧 송희립(송희립)·류홍근(유홍근)을 시켜 간 호 치료케 했으나, 무슨 병인지를 알지 못하여 무척 답답하다. 저 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순천부사 정석주(정석주)·영광도훈 도 주문상(주문상)을 처벌했다. 저녁에 원수에게 가는 공문과 병 사에게 갈 공문를 초잡아 주었다. 미조항첨사(성윤문)· 사도첨사(김완)가 휴가신청서를 제출하므로 성 첨사에게는 열흘, 김 첨사 에게는 사흘을 주어 보냈다. 녹도만호는 유임한다는 병조의 공문이 내려 왔다.

 

7월 17일 [양력 8월 22일]<무자> 비가 내렸다.

거제현령이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거제에 있던 왜적이 벌써 철 수하여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곧 정항(정항)을 시켜 정하여 보냈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내일 출항하여 나

갈 일을 전령했다.

 

7월 18일 [양력 8월 23일]<기축> 맑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 박·신 두 조방장과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오후에 출항하여 지도(통영시 용남면)에 이르러 정박하고 밤 을 지냈다. 한밤 자정에 거제현령이 와서 말하기를 장문포(거제 시 장목면 장목리)의 왜적 소굴이 이미 텅텅 비어 버렸으며, 다만 서른 명 남짓 뿐 이라고 했다. 또 사냥하는 왜놈을 만나 활을 쏘 아 한 놈은 목을 베고, 한 놈은 사로잡았다고 했다. 밤 두 시쯤에 출항하여 견내량으로 돌아왔다.

 

7월 19일 [양력 8월 24일]<경인> 맑다.

우수사·경상수사·충청수사·두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하고서 헤 어졌다. 오후 네 시쯤에 진으로 돌아왔다. 당포만호를 찾아서 잡 아다 현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쳤다. 김대복(김대복)의 병세를 가서 보았다.

 

7월 20일 [양력 8월 25일]<신묘> 흐렸다.

두 조방장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느지막이 거제현령 및 전진해현감 정항(정항)이 왔다. 오후에 나가 공무를 보고 활 다섯 순·철전 네 순을 쏘았다. 좌병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7월 21일 [양력 8월 26일]<임진>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내렸다.

우후가 들어온다고 들었다. 식사를 한 뒤에 태구련(태구련)·언복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수사·두 조방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누어 주었다. 저물 무렵에 아들 울(울)·회와 우후가 같은 배로 섬 밖에 이르러 아들들만 들어왔다.

 

7월 22일 [양력 8월 27일]<계사>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충일(이충일)이 그의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나갔다.

 

7월 23일 [양력 8월 28일]<갑오> 맑다.

저녁나절에 말달리는 일로 원두구미(통영시 한산면 염호리 역졸 포)로 갔더니, 두 조방장 및 충청수사도 왔다. 저녁에 작은 배를 타고 돌아왔다.

 

7월 24일 [양력 8월 29일]<을미> 맑다.

나라제삿날(도조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7월 25일 [양력 8월 30일]<병신> 맑다.

충청수사의 생일이라 음식을 마련하여 왔다. 우수사·경상수사 및 조방장 신호(신호) 등과 함께 취하여 마구 이야기했다. 저녁에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이 왔다.

 

7월 26일 [양력 8월 31일]<정유> 맑다.

아침에 정영동(정영동)·윤엽(윤엽)·이수원(이수원) 등과 흥양현 감이 들어왔다.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와 충청수사도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7월 27일 [양력] 맑다.

어사의 공문이 들어왔다.

 

7월 28일 [양력 9월 2일]<기해>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배로 내려가 삼도를 모아 포구 안에 진을 쳤 다. 오후 두 시쯤에 어사 신식(신식)(1551-1631; 신숙주의 5세손) 이 진에 왔다. 곧 대청으로 내려가 마주하여 이야기하고, 각 수사 및 세 조방장을 청하여 같이 이야기했다.

 

7월 29일 [양력 9월 3일]<경자>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어사(신식)가 좌도 소속의 다섯 포구의 부정사실을 조사·점고했다. 저녁에 이곳에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을미년 8월 (1595년 8월)

 

8월 초1일 [양력 9월 4일]<신축> 비바람이 세게 일었다.

어사(신식)와 같이 식사하고, 곧 배로 내려가 순천 등의 다섯 고을의 배를 점검했다. 저물어서 나는 어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같이 이야기했다.

 

8월 초2일 [양력 9월 5일]<임인> 흐렸다.

우도의 전선을 점고한 뒤에 그대로 남도포 막사에서 머물렀다. 나는 나가 앉아 충청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8월 초3일 [양력 9월 6일]<계묘> 맑다.

어사는 느지막이 경상도 진으로 가서 점고했다. 저녁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몸이 불편하여 곧 돌아왔다.

 

8월 초4일 [양력 9월 7일]<갑진> 비가 내렸다.

어사가 이곳에 왔기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8월 초5일 [양력 9월 8일]<을사>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사와 작별을 이야기하러 충청수사 있는 곳에 이르러 어 사를 전별(전별)하고 나니,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이 아뢰고 돌아 갔다.

 

8월 초6일 [양력 9월 9일]<병오> 비가 흠뻑 쏟아졌다.

우수사·경상수사·두 조방장이 모여 함께 종이 이야기하고서 헤 어졌다.

 

8월 초7일 [양력 9월 10일]<정미> 비가 내렸다.

아침에 아들 울(울)과 허주(허주) 및 현덕린(현덕린)·우후(이몽 구)가 같이 배를 타고 나갔다. 저녁나절에 두 조방장·충청수사가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표신을 가진 선전관 이광후(이광후)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원수가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며 밤을 새웠다.

 

8월 초8일 [양력 9월 11일]<무신> 비가 내렸다.

선전관이 나갔다. 경상수사·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하다가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날이 저물어서 저마다 돌아갔다.

 

8월 초9일 [양력 9월 12일]<기유>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8월 초10일 [양력 9월 13일]<경술> 맑다.

몸이 불편한 것 같다. 홀로 다락 위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 난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 다섯 순을 쏘았다. 정제(정제)와 결성현감(손안국)이 같이 배로 나갔다.

 

8월 11일 [양력 9월 14일]<신해> 비가 오락가락 했다.

종 한경(한경)도 본영으로 갔다. 배영수(배영수)·김응겸(김응겸) 이 활쏘기를 겨루었다. 김

응겸(김응겸)이 이겼다.

 

8월 12일 [양력 9월 15일]<임자> 흐렸다.

일찍 나가 공무를 봤다. 저녁나절에 두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 다. 김응겸(김응겸)이 경상우수사에게 갔다가 돌아올 때에 우수사 (이억기)에게 들러서 뵙고 활쏘기 겨루기를 했는데, 배영수(배영 수)가 또 졌다고 했다.

 

8월 13일 [양력 9월 16일]<계축> 종일 비가 내렸다.

장계 초고를 고치고 공문을 결재했다. 독수(독수)가 왔는데, 도양 장(고흥군 도양면)의 둔전치는 일에 이기남(이기남)이 하는 짓이 괴상한 것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우후가 달려가 부정사실을 조사하도록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8월 14일 [양력 9월 17일]<갑인> 종일 비가 내렸다.

진해현감 정항(정항) 및 조계종(조계종)(영등포만호)이 와서 이야기했다.

 

8월 15일 [양력 9월 18일]<을묘>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이억기)·가리포첨사(이응표)·임 치현감(홍견) 등 여러 장수들이 함께 왔다. 오늘 삼도의 사수와 본도 잡색군을 먹이고, 종일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같이 취했다. 오늘 밤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니, 잠을 이룰 수 없어 밤새도록 휘파람불며 시를 읊었다.

 

8월 16일 [양력 9월 19일]<병진> 궂은비가 걷히지 않고 종일 부슬부슬 내렸다.

생각이 몹시 어지럽다. 두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했다.

 

8월 17일 [양력 9월 20일]<정사> 가랑비가 오고 샛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김응겸(김응겸)을 불러 일을 물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두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하고 활 열 순을 쏘았다.

 

8월 18일 [양력 9월 21일]<무오>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신·박 두 조방장이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8월 19일 [양력 9월 22일]<기미> 날씨가 활짝 개었다.

두 조방장 및 방답첨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조카 봉·아들 회·울(울)이 들어왔다.”체찰사(이원익)가 21일 에 진주성에 이르러 군사에 관한 일을 묻고자 체찰사의 군관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8월 20일 [양력 9월 23일]<경신> 맑다.

종일 체찰사의 전령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경상수사 권준(권준)· 우수사(이억기)· 발포만호(황정록)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밤 열 시쯤에 전령이 들어왔다. 한밤 자정에 배를 타고 곤이도(통 영시 산양면 곤리도)에 이르렀다.

 

8월 21일 [양력 9월 24일]<신유> 흐렸다.

저녁나절에 소비포(고성군 하이면 덕명포) 앞바다에 이르니, 전라 순찰사(홍세공)의 군관 이준(이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강응표 (강응표)·오계성(오계성)이 같이 와서 함께 한 시간 남짓이 이야 기했다. 경수(이억기의 자)·권언경(권언경)·자윤(박종남의 자)· 언심(신호의 자)에게 편지를 썼다. 저물 무렵에 사천 땅 침도(침 도: 삼천포 신수도?)에 이르러 잤다. 밤에 몸이 몹시 차갑고 마음이 쓸쓸하다.

 

8월 22일 [양력 9월 25일]<임술> 맑다.

이른 아침에 각종 공문을 만들어 체찰사에게 보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걸어서 사천현에 이르렀다. 오후에 진주 남강 가에 이 르니, 체찰사는 벌써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

 

8월 23일 [양력 9월 26일]<계해> 맑다.

체찰사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에 백성을 위해 서 고통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났다. 호남순찰사는 헐 뜯어 말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저녁나절에 나는 김응서 (김응서)와 같이 촉석루에 이르러 장병들이 패전하여 죽은 곳을 보니, 비통함을이기지 못하였다. 이윽고 체찰사가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하므로 배를 타고 소비포로 돌아와 정박했다.

 

8월 24일 [양력 9월 27일]<갑자> 맑다.

새벽에 소비포 앞에 이르니, 고성현령 조응도(조응도)가 와서 알 현하고서 소비포 앞바다에서 잤다. 체찰사·부사(김륵)과 종사관 (노경임)도 잤다.

 

8월 25일 [양력 9월 28일]<을축> 맑다.

일찍이 식사를 한 뒤에 체찰사와 부사·종사관은 함께 내가 탄 배를 타고, 오전 여덟 시쯤에 출항하여, 같이 서서 여러 섬들과 여러 진을 합병할 곳과, 또 접전할 곳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면서 종일 의논했다. 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는 평산포 (남면 평산리)에 합하고, 상주포(상주면 상주리)는 미조항(미조면 미조리)에 합하고, 적량(창선면 진동리 적량)은 삼천포(사천시 삼 천포)에 합하고, 소비포(고성군 하이면 덕명포)는 사량(통영시 사 량면 금평리)에 합하고, 가배량(거제시 도산면 노전동)은 당포(통 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합하고, 지세포(일운면 지세포리)는 조라 포(일운면 구조라리)에 합하고, 제포(진해시 웅천 1동 제덕동)는 웅천에 합하고, 율포(거제시 장목면 대금리)는 옥포(거제시 장승 포시 옥포동)에 합하고, 안골포(진해시 안골동)는 가덕진(부산시 강서구 천가동)에 합치기로 결정했다. 저녁에 진중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고 공사례를 한 다음 헤어졌다.

 

8월 26일 [양력 9월 29일]<병인> 맑다.

저녁에 부사(김륵)와 서로 만나 은밀히 이야기했다.

 

8월 27일 [양력 9월 30일]<정묘> 맑다.

군사 5480 명에게 밥을 먹였다. 저녁에 상봉에 이르러 적진이 있는 곳과 적이 다니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바람이 몹시 사납다. 밤을 틈타 도로 내려왔다.

 

8월 28일 [양력 10월 1일]<무진> 맑다.

이른 아침에 체찰사 및 부사·종사관이 같이 다락 위에 앉아 여 러 가지 폐단되는 점을 의논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배로 내려와 서 배를 타고 나갔다.

 

8월 29일 [양력 10월 2일]<기사> 맑다.

일찍 나가 공무를 봤다. 경상수사가 체찰사 있는 곳에서 왔다.

 

을미년 9월 (1595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3일]<경오>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우후가 도양장에서 와서 영에 이르러 공문을 가치고 와 바치는데, 정사립(정사립)을 해 치는 뜻이 많이 있으니 우습다. 종사관(류공진)도 병을 돌아가서 조리하겠다고 하므로 결재해 보냈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4일]<신미> 맑다.

새벽에 지휘선(상선)을 출항시켰다.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 명에게 밥을 먹이고서 끌고 내려왔다. 충청수사·우수사·경상수 사·두 조방장과 함께 이르러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9월 초3일 [양력 10월 5일]<임신> 맑으며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우 여필과 아들 울(울)과 유헌(유헌)이 돌아갔다. 강응호(강응 호)가 도양장 추수할 일로 같이 돌아갔다. 정항(정항)·우수(우 수)·이섬(이섬)이 정탐하고 들어와서, “영등포 적진은 초이틀에 소굴을 비우고 누각과 모든 소굴을 불살라 버렸다.”고 했다. 웅천 의 적에게 투항하여 붙었던 사람 공수복(공수복) 등 열일곱 명을 달래어 왔다.

 

9월 초4일 [양력 10월 6일]<계유)맑다.

경상수사가 와 보기를 청하여 종일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아우 여필·아들 울(울) 등이 잘 갔는지 알 수 없어 몹시 궁금하다.

 

9월 초5일 [양력 10월 7일]<갑술>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권준(권준)이 소고기를 조금 보냈다. 충청수사 ·조방장 신호(신호)와 같이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신 조방장·충 청수사 선거이(선거이)와 함께 같은 배로 경상수사 있는 곳으로 가서 종일 이야기하고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이 날 체찰사의 공 문이 왔는데, 순천·광양·낙안·흥양이 갑오년(1594년)의 전세 (전세)를 실어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답장했다.

 

9월 초6일 [양력 10월 8일]<을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충청수사가 술을 바치므로 우수사·두 조방장이 와서 같이 마셨다. 송덕일이 들어왔다.

 

9월 초7일 [양력 10월 9일]<병자> 맑다.

식사를 한 뒤에 경상수사가 왔다. 충청도 병영의 배와 서산·보 령의 배를 내어 보냈다.

 

9월 초8일 [양력 10월 10일]<정축> 맑다.

나라제삿날(세조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아들 회와 송덕일이 같은 배로 나갔다. 충청수사·두 조방 장이 와서 이야기했다.

 

9월 초9일 [양력 10월 11일]<무인> 맑다.

우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모여서 영내의 군사들에게 떡 한 섬을 나누어 주고 초저녁에 끝내고 돌아갔다.

 

9월 초10일 [양력 10월 12일]<기묘> 맑다.

오후에 나는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과 함께 우수사 있는 데로 가 서 같이 이야기하고 밤에 돌아왔다.

 

9월 11일 [양력 10월 13일]<경진> 흐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못했다.

 

9월 12일 [양력 10월 14일]<신사> 흐렸다.

아침에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을 청해다가 같이 아침밥을 먹고 늦게 끝내고 돌아갔다. 저녁에 경상수사와 우후 및 정항(정항)이 술을 가지고 와서 같이 이야기하고서는 밤이 늦어서야

헤어졌다.

 

9월 13일 [양력 10월 15일]<임오> 맑다.

다락에 기대어 혼자 앉았으니 마음이 불편하다.

 

9월 14일 [양력 10월 16일]<계미> 맑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우수사·경상우수사가 같이 와서 이별하는 술잔을 들고서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수사 선거이(선거이)와 작별하며 준 시는 이러하다.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쪽에 와서도 죽사리 같이 하더 니, 오늘 밤 이 달 아래 한 잔을 나누면, 내일이면 우리 서로 헤어져야 하리.

 

9월 15일 [양력 10월 17일]<갑신> 맑다.

수사 선거이(선거이)가 와서 아뢰고 돌아가는데, 또 이별의 잔을 들고나서 헤어졌다.

 

9월 16일 [양력 10월 18일 ]<을유> 맑다.

나가 공무를 봤다. 장계 봉하는 것을 감시했다. 이 날 저물 무렵 일식을 하여 밤이 되어서야 밝아졌다.

 

9월 17일 [양력 10월 19일]<병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서울에 편지를 써 보냈다. 김희번(김희번)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유자 서른 개를 영의정에게 보냈다.

 

9월 18일 [양력 10월 20일]<정해>

저녁나절에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이 들어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9월 19일 [양력 10월 21일]<무자> 맑다.

조방장 정응운(정응운)이 들어왔다가 돌아갔다.

 

9월 20일 [양력 10월 22일]<기축>

밤 두 시쯤에 둑제를 지냈다. 사도첨사 김완(김완)이 헌관으로 행사했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봤다.

 

9월 21일 [양력 10월 23일]<경인> 맑다.

박·신 두 조방장과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박 조방장을 작별하 려 했으나, 그대로 경상수사를 작별하고서 갔다가 그만 날이 저 물었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 저녁에 이종호(이종호)가 들어왔다. 다만 목화만 가져 왔기로 모두 나누어 주었다.

 

9월 22일 [양력 10월 24일]<신묘>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박자윤(종남의 자) 영감이 나갔다. 경상우 수사도 와서 전별했다.

 

9월 23일 [양력 10월 25일]<임진> 맑다.

나라제삿날(태조 신의왕후 한씨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웅천 사람인데 사로잡혔던 박록수(박록수)·김희수(김희수)가 와 서 알현하고 겸하여 적정을 보고했다. 그래서 무명 한 필 씩을 나누어 주어 보냈다.

 

9월 24일 [양력 10월 26일]<계사> 맑다.

아침에 각처에 편지 열 통 남짓 썼다. 아들 울(울)·면( )과 방 익순(방익순) 및 온개(온개) 등과 함께 나갔다. 이 날 저녁에 우 수사·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9월 25일 [양력 10월 27일]<갑오> 맑다.

오후 두 시쯤에 녹도의 하인이 실수로 불을 내어 대청 다락방 등이 모두 타버렸다. 군량·화약·군기 등의 창고에는 불이 붙 지 않았으나, 다락 위에 있던 장전과 편전 이백 여 개가 모두 타 버렸으니, 애석하다.

 

9월 26일 [양력 10월 28일]<을미> 맑다.

홀로 온 종일 배 위에 앉아 있다가 앉았다 누웠다 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언량(귀선장)이 재목을 깎아 가지고 왔다.

 

9월 27일 [양력 10월 29일]<병신> 흐렸다.

안골포 사람으로 왜적에게 붙었던 자 이백서른 여 명이 왔다. 배는 스물두 척이라고 우수(우수)가 와서 보고했다. 식사를 한 뒤 에 불난 데로 올라가 집 지을 만한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9월 28일 [양력 10월 30일]<정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아들 회·울(울)이 기별을 듣고 들어왔다.

 

9월 29일 [양력 10월 31일]<무술> 맑다.

9월 30일 [양력 11월 1일]<기해> 맑다.

을미년 10월 (1595년 10월)

 

10월 초1일 [양력 11월 2일]<경자> 맑다.

조방장 신호(신호)와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그대로 작별하는 술자리를 베풀었다. 저녁나절에 신(신) 조방장이 나갔다.

 

10월 초2일 [양력 11월 3일]<신축> 맑다.

대청에 대들보를 올렸다. 또 지휘선(상선)을 연기로 그을렸다. 우 수사·경상수사 및 이정충(이정충)이 와서 봤다.

 

10월 초3일 [양력 11월 4일]<임인> 맑다.

해평군 윤근수(윤근수)의 공문을 구례의 유생이 가지고 왔다. “김덕령(김덕령)과 전주의 김윤선(김윤선) 등이 죄없는 사람을 쳐 죽이고 수군 진영으로 도망하여 진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을 수색해 보니 9월 10일경에 보리씨를 바꿀 일로 진에 왔다가 곧 돌아갔다고 했다.

 

10월 초4일 [양력 11월 5일]<계묘> 맑다.

10월 초5일 [양력 11월 6일]<갑진>

이른 아침에 다락에 올라가 역사(역사)하는 것을 보고서 다락 위 바깥쪽 서까래에 흙을 치올려 발랐다. 투항해온 왜놈들로 하여금 물건 나르는 일을 시켰다.

 

10월 초6일 [양력 11월 7일]<을사>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 및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저녁에 웅천현 감(이운룡)이 왔다. 그 편에 명나라 사신(양방형)이 부산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 날 사로잡혔던 사람 스물네 명이 나왔다.

 

10월 초7일 [양력 11월 8일]<병오> 맑다.

화창하기가 봄날 같다. 임치첨사(홍견)가 와서 봤다.

 

10월 초8일 [양력 11월 9일]<정미> 맑다.

조카 완(완)이 들어왔다. 진원(진원)과 조카 해의 편지도 왔다.

 

10월 초9일 [양력 11월 10일]<무신> 맑다.

각처에 답장을 써서 보냈다. 대청을 짓는 것을 다 마쳤다. 우우후 (이정충)가 와서 봤다.

 

10월 초10일 [양력 11월 11일]<기유> 맑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수사·경상수사가 아울러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10월 11일 [양력 11월 12일]<경술> 맑다.

일찍 다락 방으로 올라가 종일 역사(역사)하는 것을 보았다.

 

10월 12일 [양력 11월 13일]<신해> 맑다.

일찍 다락 위로 올라가 역사(역사)하는 것을 보았다. 서쪽 행랑을 만들어 세웠다. 저녁에 송홍득(송홍득)이 들어왔는데, 미친 듯이 망녕된 말이 많았다.

 

10월 13일 [양력 11월 14일]<임자> 맑다.

일찍 새로 지은 다락에 올라가 대청에 흙을 치올려 붙이는데 투항해 온 왜놈들에게 시켰다.

송홍득(송홍득)이 군관으로 따라 나갔다.

 

10월 14일 [양력 11월 15일]<계축> 맑다.

우수사·경상수사·사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 등이 와서 봤다.

 

10월 15일 [양력 11월 16일]<갑인>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저녁에 달빛을 타고 우수사 이억기에게 가서 전별했다. 경상수사·미조항첨사·사도첨사도 왔다.

 

10월 16일 [양력 11월 17일]<을묘> 맑다.

새벽에 새로 지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우수사·임치첨사·목포 만호 등이 나갔다. 그대로 새 다락방에서 잤다.

 

10월 17일 [양력 11월 18일]<병진> 맑다.

아침에 가리포첨사·금갑도만호가 와서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진주의 하응구(하응구)· 류기룡(유기룡) 등이 계원미(계원미) 스무 섬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부안의 김성업(김성업)· 미조항첨사 성윤문(성윤문)이 와서 봤다. 정항(정항)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18일 [양력 11월 19일]<정사> 맑다.

경상수사 권준(권준)과 우우후(이정충)이 와서 봤다.

 

10월 19일 [양력 11월 20]<무오> 맑다.

아들 회( )·면( )이 나갔다. 송두남(송두남)이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갔다. 김성업(김성업)도 돌아갔다. 이운룡(이운룡)이 와서 봤다. 계향유사(양식 잇대는 책임자) 하응문(하응문)·류기룡(유 기룡)이 나갔다.

 

10월 20일 [양력 11월 21일]<기미> 맑다.

저녁나절에 가리포첨사·금갑도만호·남도포만호·사도첨사·여 도만호가 와서 보기에 술을 먹여 보냈다. 저물 무렵에 영등포만 호도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갔다. 이 날 밤바람은 몹시도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은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리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민다.

 

10월 21일 [양력 11월 22일]<경신> 맑다.

이설(이설)이 휴가 신청을 했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우우후 이정충(이정충)·금갑도만호 가안책(가안책)·이진권관 등 이 와서 봤다. 바람이 몹시 싸늘하여 잠을 이룰 수 없어 공태원 을 불러 왜적의 정형을 물었다.

 

10월 22일 [양력 11월 23일]<신유> 맑다.

가리포첨사·미조항첨사·우후 등이 와서 봤다. 저녁에 송희립(송희립)· 박태수(박태수)· 양정언(양정언)이 들어왔다. 전문(전문)을 모시고 갈 유생도 들어왔다.

 

10월 23일 [양력 11월 24일]<임술> 맑다.

아침에 전문(전문)을 보낸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았다.

 

10월 24일 [양력 11월 25일]<계해> 맑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하응구(하응구)도 와서 종일 이야기하고 저물어서 돌아갔다. 박태수(박태수)·김대복(김대복)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25일 [양력 11월 26일]<갑자> 맑다.

가리포첨사·우후·금갑도만호·회령포만호·녹도만호 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에 정항(정항)이 아뢰고서 돌아가므로 전별했 다. 띠풀을 베어 올 일로 이상록(이상록)· 김응겸(김응겸)· 하천수(하천수)· 송의련(송의련)· 양수개(양수개) 등이 군사 여든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

 

10월 26일 [양력 11월 27일]<을축> 맑다.

임달영(임달영)이 왔다고 한다. 불러서 제주도 가는 일을 물었다. 방답첨사가 들어왔다. 송홍득(송홍득)·송희립(송희립) 등이 사냥 하러 갔다.

 

10월 27일 [양력 11월 28일]<병인> 맑다.

우우후·가리포첨사가 왔다.

 

10월 28일 [양력 11월 29일]<정묘> 맑다.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띠풀을 베러 갔던 배가 들어왔다. 밤에 비가 오고 우레가 여름철 같이 치니 괴상한 일이다.

 

10월 29일 [양력 11월 30일]<무진> 맑다.

가리포첨사(이응표)·이진권관가 돌아갔다. 경상수사(권준)·웅천현감(이운룡)· 천성보만호(윤홍년)도 왔다.

 

을미년 11월 (1595년 11월)

 

11월 초1일 [양력 12월 1일]<기사>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느지막이 나가 공무를 봤다. 사도첨사가 나갔다. 함평·진도·무장의 전선을 내어 보냈다. 김희번(김희 번)이 서울에서 내려 와서 조정의 공문과 영의정의 편지를 바쳤다. 투항해 온 왜놈들에게 술을 먹였다. 오후에 방답첨사와 활 일 곱 순을 쏘았다.

 

11월 초2일 [양력 12월 2일]<경오> 맑다.

곤양군수 이수일(이수일)이 와서 봤다.

 

11월 초3일 [양력 12월 3일]<신미> 맑다.

황득중(황득중)이 들어와서, “왜선 두 척이 청등(거제시 사등면 청곡리)을 거쳐 흉도(거제시 동부면)에 이르렀다가 해북도(통영시 용남면)에 정박하여 불을 지르고 돌아가서는 춘원포(통영시 광도면 예승포) 등지에 이르렀다.”고 전하고서 그는 새벽에 지도로 돌아갔다.

 

11월 초4일 [양력 12월 4일]<임신> 맑다.

새벽에 이종호(이종호)·강기경(강기경) 등이 들어와서 봤다. 변 존서(변존서)의 편지와 조카 봉·해 형제가 본영에 이르 렀다고 했다.

 

11월 초5일 [양력 12월 5일]<계유> 맑다.

남해현령·금갑도만호·남도포만호·어란포만호·회령포만호 및 정담수(정담수)가 와서 봤다. 방답첨사·여도만호를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11월 초6일 [양력 12월 6일]<갑술> 맑다.

송희립(송희립)이 들어왔다. 띠풀 사백 동·칡 일백 동을 베어서 실어 왔다.

 

11월 초7일 [양력 12월 7일]<을해> 맑다.

하동현감(최기준)이 교유서에 숙배했다. 경상우수사가 순찰사 있 는 곳에서 왔다. 미조항첨사·남해현령도 왔다.

 

11월 초8일 [양력 12월 8일]<병자> 맑다.

새벽에 조카 완(완)과 종 경(경)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김응겸(김응겸)· 경상도순찰사의 군관 등이 왔다.

 

11월 초9일 [양력 12월 9일]<정축> 맑다.

여도만호 김인영(김인영)이 들어왔다.

 

11월 초10일 [양력 12월 10일]<무인> 맑다.

새벽에 경상도순찰사의 군관이 돌아갔다.

 

11월 11일 [양력 12월 11일]<기묘> 맑다.

새벽에 선조임금의 탄신 축하례를 행했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 다. 주부 변존서(변존서)· 이수원(이수원)·이원룡(이원룡) 등이 왔는데, 그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이다. 저녁에 이의득(이의득)이 와서 봤다. 금갑도만호·회령포만호가 나갔다.

 

11월 12일 [양력 12월 12일]<경진> 맑다.

발포가장(발포가장)으로 이설(이설)을 정하여 보냈다.

 

11월 13일 [양력 12월 13일]<신사> 맑다.

도양장에서 거둔 벼와 콩이 팔백스무 섬이었다.

 

11월 14일 [양력 12월 14일]<임오> 맑다.

11월 15일 [양력 12월 15일]<계미> 맑다.

아버지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앉았으니 그리워서 마음을 달랠 길 없다.

 

11월 16일 [양력 12월 16일]<갑신> 맑다.

투항해온 여몬레니(여문련이)·야지로(야시로) 등이 와서,”왜놈들 이 도망가려 한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우우후를 시켜 잡아다가 그 주모자 준시(준시) 등 두 명의 머리를 베었다. 경상수사·우후 ·웅천현감·방답첨사·남도포만호·어린포만호·녹도만호가 왔 는데, 녹도만호는 곧 내어 보냈다.

 

11월 17일 [양력 12월 17일]<을유> 맑다.

11월 18일 [양력 12월 18일]<병술> 맑다.

어응린(어응린)이 와서,”소서행장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로 나갔는데 거처를 알 수 없다.”고 전했다. 그래서 경상수사에게 전 령하여 이를 수륙으로 정탐케 했다. 저녁나절에 하응문(하응문)이 와서 군량 잇대는 일로 보고했다. 조금 있으니 경상수사·웅천현 감 등이 와서 의논하고 갔다.

 

11월 19일 [양력 12월 19일]<정해> 맑다.

이른 아침에 도망갔던 왜놈이 제발로 와서 현신했다. 밤 열 시쯤 에 조카 분(분)·봉·해와 아들 회가 들어왔다. 어머 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이다. 하응문(하응문)이 돌아갔다.

 

11월 20일 [양력 12월 20일]<무자> 맑다.

거제현령·영등포만호가 와서 봤다.

 

11월 21일 [양력 12월 21일]<기축> 맑다.

된바람이 종일 불었다. 새벽에 송희립(송희립)을 내 보내어 견내량에 있는 왜적선을 찾아내게 했다. 이 날 저녁에 반대좀(벽어) 일만 삼천 이백 마흔 두름을 곡식과 바꾸려고 이종호(이종호)가 받아 갔다.

 

11월 22일 [양력 12월 22일]<경인> 맑다.

새벽에 동지 하례로 북향하여 임금께 숙배했다. 저녁나절에 웅천현감· 거제현령· 안골포만호· 옥포만호· 경상우후 등이 왔다. 변존서(변존서)와 조카 봉이 모두 갔다.

 

11월 23일 [양력 12월 23일]<신묘>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종호(이종호)가 하직하고 나갔다. 이 날 견내량 순찰하는 일로 경상수사를 정하여 보냈으나, 바람이 몹시 사나와 출항하지 못했 다.

 

11월 24일 [양력 12월 24일]<임진> 맑다.

순라선이 나갔다가 밤 열 시쯤에 진으로 돌아왔다. 변익성(변익 성)이 곡포권관이 되어 왔다.

 

11월 25일 [양력 12월 25일]<계사> 맑다.

식사를 한 뒤에 곡포권관의 공식 신고를 받았다. 저녁나절에 경 상우후가 와서 투항해온 왜놈 여덟 명이 가덕도에서 왔다고 전했 다. 웅천현감·우우후·남도포만호·방답첨사·당포만호가 와서 봤다. 조카 분(분)과 이야기하다 보니, 밤 열 시쯤이 되었다.

 

11월 26일 [양력 12월 26일]<갑오> 아침에는 흐리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광양도훈도가 복병하러 나갔 다가 도망간 자들을 잡아와서 처벌했다. 오정 때에 경상수사가 와서 투항한 왜놈 여덟 명 및 그 인솔자 김탁(김탁) 등 두 명이 왔다. 그래서 술을 먹이고 김탁(김탁) 등에게는 각각 무명 한 필 씩을 주어서 보냈다. 저녁에 류척(유척)과 림영(임영) 등이 왔다.

 

11월 27일 [양력 12월 27일]<을미> 맑다.

김응겸(김응겸)이 두 해 먹은 나무를 베어 올 일로 자귀장이(이 장목수) 다섯 명을 데리고

갔다.

 

11월 28일 [양력 12월 28일]<병신> 맑다.

나라제삿날(예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류척(유척)과 림영(임영)이 돌아갔다. 조

카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밤이 깊어졌다.

 

11월 29일 [양력 12월 29일]<정유> 맑다.

나라제삿날(인종 인성왕후 박씨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11월 30일 [양력 12월 30일]<무술> 맑다.

남해의 투항해온 왜놈 야에몬(야여문:미우위문)·신지로(신시로: 신차랑) 등이 왔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체찰사의 전세(전세)로 군량 서른 섬을 경상수사가 받아 갔다.

 

을미년 12월 (1595년 12월)

 

12월 초1일 [양력 12월 31일]<기해>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12월 초2일 [양력 1월 1일]<경자> 맑다.

거제현령·당포만호·곡포만호 등이 와서 봤다. 술을 먹였더니 취하여 돌아갔다.

 

12월 초3일 [양력 1월 2일]<신축> 맑다.

12월 초4일 [양력 1월 3일]<임인> 맑다.

순천 2호선과 낙안 1호선의 군사를 점검하고 내어 보냈으나 바람 이 순조롭지 못하여 출항하지 못했다. 조카 분(분)·해가 본 영으로 갔다. 황득중(황득중)·오수(오수) 등이 청어 칠천 여 두 름을 싣고 왔다. 그래서 김희방(김희방)의 곡식 사러 가는 배에 계산하여 주었다.

 

12월 초5일 [양력 1월 4일]<계묘> 맑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했다.

몸이 불편한 것 같아 종일 나가지 않았다.

 

12월 초6일 [양력 1월 5일]<갑진> 맑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저녁에 아들 울(울)이 들어왔 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니, 기쁘고 만번 다행이다.

 

12월 초7일 [양력 1월 6일]<을사> 맑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다.

웅천현감·거제현령·평산포만호·천성보만호 등이 와서 보고 갔다. 청주 이희남(이희남)에게 답장을 써 부쳤다.

 

12월 초8일 [양력 1월 7일]<병오> 맑다.

우우후·남도포만호가 와서 봤다.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가까운 시일안으로 만나자는 것이었다.

 

12월 초9일 [양력 1월 8일]<정미> 맑다.

몸이 불편하여 밤새도록 끙끙 앓았다. 거제현령(안위)·안골포만호 우수(우수)가 와서 왜적들이 물러갈 뜻이 없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하응구(하응구)도 왔다.

 

12월 초10일 [양력 1월 9일]<무신> 맑다.

충청도순찰사(박홍로) 및 충청수사(선거이)에게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12월 11일 [양력 1월 10일]<기유>맑다.

조카 해( )·분(분)이 탈없이 본영에 이르렀다는 편지를 보니 기쁘고 다행이지만, 그 고생스러웠던 형상을 무었이라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12월 12일 [양력 1월 11일]<경술> 맑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우후도 왔다.

 

12월 13일 [양력 1월 12일]<신해> 맑다.

왜놈 옷 쉰 벌과 연폭(연폭)(이 곳에 원문의 글이 빠졌음). 초저 녁에 종 돌세(돌세)가 와서 말하기를, “왜선 세 척과 소선 한 척 이 등산(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바깥바다에서 합포에 와 정박해 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사냥하는 왜놈인 것 같아 곧 경상수사·방답첨사·우우후에게 찾아 보게 했다.

 

12월 14일 [양력 1월 13일]<임자> 맑다.

경상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합포로 나아가 왜놈들을 타일렀다. 미조항첨사 및 남해현령·하동현감이 들어왔다.

 

12월 15일 [양력 1월 14일]<계축> 맑다.

체찰사에게로 갔던 진무(진무)가 와서, “18일에 삼천포에서 만나 자”고 하므로 달려가기로 했다. 초저녁에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12월 16일 [양력 1월 15일]<갑인> 맑다.

새벽 네 시쯤에 출항하여 달빛을 타고 당포(통영시 산양면 삼덕 리) 앞바다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고 사량도(통영시 사량면) 뒷바 다에 이르렀다.

 

12월 17일 [양력 1월 16일]<을묘> 비가 뿌렸다.

삼천포진 앞에 이르니, 체찰사(이원익)는 사천에 이르렀다고 한 다.

 

12월 18일 [양력 1월 17일]<병진>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삼천포진으로 나아갔다. 오정 때에 체찰사가 보(보)에 이르러 같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체찰사가 또 같이 이야기하자고 청하므로 이야기하는 데, 밤 두 시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12월 19일 [양력 1월 18일]<정사>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실컷 먹이고 난 뒤에 체찰사가 떠나갔다. 나는 배로 내려오니 바람이 몹시 사나와 출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서 밤을 지냈다.

 

12월 20일 [양력 1월 19일]<무오> 맑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 1596년(병신) 1월 1일의 바로 앞에 한 장으로 다섯 줄에 걸쳐 적혀 있는 글이다.)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농사일에 부리는 소가 7 마리인데, 보성 림정로(임정로) 1 마리, 박사명(박사명) 1 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정명열(정명열)은 바로 길다란 서화첩(장첩)을 받아 갔다. 이는 정 경달(정경달)의 아들이다. 갑사 송한(송한). 1월 3일에 배 위에서 이번에는 환도 4 자루, 왜놈칼 2 자루를 만 들었다. 아들 회가 가지고 가던 중에(이 뒤에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