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5단기도 (이 기도는 묵주를 이용하여 드리는 기도이지만 묵주기도는 아니므로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작하면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각1번 매단을 시작할 때마다 주님의 기도 대신에 아래 기도문을 바친다. 영원하신 아버지, 저희가 지은 죄와 온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바치나이다. 매단마다 성모송 대신에 아래 기도문을 바친다. 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위의 기도(5단)가 끝난 뒤에 성모찬송 대신에 아래 기도문을 바친다. 거룩하신 하느님,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이여,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3번) 1984년 7. 10. 인천교구장인가
차례 자비는 나의 사명 • 머리말 • 생애의 초기시절(1905-1925) • 수련기간(1925-1928) • 유기서원(1928-1932) • 종신서원(1932-1933) • 빌니우스 시기(1933-1936) • 변화의 해(1936) • 중개의 고통과 불타는 사랑(1937) • 마지막 순종(1938) • 맺음말
머리말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영성적으로나 사회적, 정치적인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 당신의 사람을 일으키시어,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시고 또한 그러한 위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셨다. 그 예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 루르드의 성녀 벨라뎃타,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를 들 수 있다. 20세기에 와서도 하느님께서는 무신론과 유물론 그리고 인본주의를 막기 위해 성모님을 파티마의 세 어린이들에게 보내셨고, 히틀러의 군사물결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는 후에 파우스티나 수녀로 알려진 폴란드의 한 소녀에게 나타나셨다. 이 책의 주인공인 파우스티나 수녀는 1905년 폴란드의 글로고비에츠의 이름없는 마을에서 열 명의 형제들 중 세 번째로 태어나 스물 살이 되던 해에 바르샤바의 자비의 성모 수녀원에 들어갔다. 별로 학식이 없던 파우스티나는 수녀원에서 식사 준비, 빵 굽는 일, 정원사, 문지기 등의 허드렛 일을 주로 맡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하게 살면서 가장 가까운 동료들도 모르게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있었다. 파우스티나는 예수님의 사도이자 비서가 되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새로이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던 것이다. 1934년부터 파우스티나는 영적 지도신부와 장상들의 권고 그리고 특히,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 자기 안에 일어난 일들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후 영적 지도신부가 성지순례를 떠나고 없을 때, 파우스티나는 천사의 암시를 받았는지 자기가 기록한 노트를 불태웠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이 소식을 들은 지도 신부는 불에 타 없어진 부분을 다시 쓰도록 하고, 앞으로 계속 기록해 나가라고 말하였다. 하느님의 종 파우스티나는 그렇게 기록하면서도 날짜를 기입하지 않고, “언젠가…”라는 말로 시작할 때가 많았고 기록한 내용을 다시 검토한 일이 적었다. 따라서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 그것을 인쇄한 분량만 해도 600페이지나 된다. 필자는 파우스티나 수녀의 생애와 사명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일기 부분만을 골라 가능한 한 연대 순에 따라 다시 배열시킴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를 보다 상세히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전기의 주석이나 파우스티나를 잘 아는 사람들의 말도 함께 실었다. 그리고 괄호 속의 번호는 폴란드 및 영어판의 단락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수려고딕체로 인쇄하였다. 그리고 일기에서 발취한 부분은 단락을 따로 하여 제시하였으며 파우스티나 수녀와 예수님의 말씀은 가능한 한 주석을 달지 않고 일기에서 그대로 뽑아 제시하였다. 일기의 내용 그 자체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에게 말씀하셨다. “신뢰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인류는 평화를 누리지 못 할 것이다….. 내 딸아, 내 자비에 관한 나의 말을 한 문장도 빠짐없이 기록하여라. 수많은 영혼들이 내 말을 듣고 큰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읽는 모든 이들의 마음과 영혼에 깊은 감동을 불러 일으켜 예수님께 대한 신뢰로 가득 차고, 말과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하는 사도직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생애의 초기시절 (1905-1925)
가정 생활
단순히 파우스티나로만 알려진 하느님의 비서, 성체의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는 1905년에 폴란드의 섬유 도시인 우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글로고비에츠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투렉지방의 우츠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지도에 이름이 오른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파우스티나의 아버지 스타니슬라우스 코발스카는 1868년 5월 6일 스비니체에서 태어났고 어머니 마리안나 바벨은 1875년 3월 8일 므니에비에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그들은 1892년 10월 28일 결혼한 후 글로고비에츠에서 살았다. “글로고비에츠”는 산사나무라는 말인데 넓은 의미로는 잡초 또는 가시 달린 관목을 가리키는 “glog”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산사나무는 사과나무 과에 속하는 관목으로서 향기로운 흰 꽃과 붉은 꽃이 피는 나무이다. 이 이름이 마을의 특징을 얼마나 잘 나타내는가 하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이 이름없는 마을의 잡초와 관목에서 하나의 “꽃”이 피어났다. 심장에서 붉고 엷은 광선을 발하는 예수님상에 잘 나타나 있듯이,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파우스티나의 메시지가 이미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지금은 하느님의 사자인 파우스티나의 생애에 대해 더욱 널리 전파해야 할 시기라고 본다. 스비니체에서 글로고비에츠로 가는 길은 약 3km쯤 되는데 이따금 숲이나 나무덤불이 보이고 모래 벌판이 가로지르고 있다. 이 척박한 땅은 기껏해야 감자나 호밀 정도밖에 경작할 수 없는 땅으로서 밭과 밭 사이에는 소들이 뜯을 풀이 자라 소를 키울 수 있는 목초지가 있었다. 고산지대는 전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아래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들판 한가운데에 작고 말끔한 정원이 달린 농가들이 들어서 있는데 어떤 집들은 길 따라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코발스카네 집은 바로 이 길가의 집들 중의 하나이다. 이 집은 작은 벽돌을 쌓아 올려 지은 전형적인 시골 집으로서 지붕은 판자로 덮여 있다. 집과 헛간 사이에는 삼면의 안마당이 나있고 현관 양쪽으로 두 개의 방이 있는데 부엌의 바닥은 흙으로 되어 있다. 코발스카 부부는 결혼한 지 9년이 되도록 자녀가 없어 주님께 자신들의 결혼생활을 축복해 주시고 자녀를 낳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였다. 마침내 1901년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졌다. 마리안나는 목숨을 잃을 정도의 진통이 사흘간이나 이어지는 난산 끝에 딸을 낳았다. 그 아기의 이름은 요세핀이다. 2년 후에 다시 딸을 낳았고 그때의 진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셋째 아기를 임신했을 때에도 몹시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1905년 8월 25일 그녀는 아무 어려움 없이 셋째 딸을 낳았다. 이 셋째 아기는 이틀 후, 스비니체의 성 카지미르 성당의 요셉 호딩스키 신부에게서 ‘헬레나’ 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대부모는 마르친 루코브스키와 마리아 쉐브츠크 쉬체파니아크였다. 헬레나가 태어난 후로도 일곱 아이가 더 태어났는데, 세월이 흐른 뒤 어머니 마리안나는 “헬렌카(헬레나의 애칭) 가 바로 내 몸에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하곤 하였다. 열 명의 자녀 중 카시미라와 브로니슬라바는 어릴 때 죽었고 나머지 여덟 자녀를 나이 순으로 보면 요세핀, 제르비에브, 헬레나, 나탈리, 스타니슬라우스, 메르치슬라우스, 마리아 그리고 반다이다. 1900년대 초기는 불안하고 혁명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시대로서 파업이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러한 소식이 글로고비에츠까지 들려오지는 않았다. 농부인 파우스티나의 아버지 스타니슬라우스는 호구지책에 급급하였다. 경작할 수 있는 땅 7에이커와 목초지 5에이커가 있었지만 늘어나는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힘겨웠다. 다행히 그는 손재주가 있어 목공일로 가족이 끼니를 거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낮에는 목공일 을 하고 농사일은 한밤중까지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언제나 아침 일찍 일어나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를 찬미하는 “고친키”(Godzinki)라는 노래로 하루를 시작했다. 사순절에는 이 노래 대신 주님의 수난에 관한 애가(Gorzkie Zale)를 불렀다. 아내 마리안나가 “노래 좀 그만 불러요. 모두 잠 깨겠어요” 하고 핀잔을 주어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제일 먼저 하느님께 경의를 표해야 해요” 하고 말하면서 계속 “아침이 오면” (Kiedy Ranne)이라는 성가를 부르곤 했는데 이는 그의 일과 중 하나였다.
“새벽이 잠에서 깨어날 때 온 세상이 주님께 노래합니다. 끝없는 대양이 주님께 노래하고 만물이 주님을 찬미합니다. 주님께서 당신 선함과 보화를 무한히 베푸시고 창조하시고 구원하셨으니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자 누구 이리까!”
이러한 생활을 스타니슬라우스의 단순하면서도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는 주일이나 교회 축일에 미사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교회 전통대로 부활, 성탄, 기타 주요 축일에는 꼭 영성체를 했다. 나이가 들어 교회에 갈 기력이 없을 때에도 그는 침대 머리맡에 시계를 두고 교회에서 미사가 거행되는 시간에 맞춰 마음으로 참여했다. 그는 폴란드의 오랜 전통인 하느님과 교회의 계명에 따리 집안을 다스렸다. 후일에 본당의 반주자가 된 자녀는 아버지 스타니슬라우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종교에 관한 한 나와 헬레나에게 매우 엄격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대단히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들 스타니슬라우스는 어릴 적에 이웃집의 버드나무 가지를 한 아름 꺾어서 아버지게 호되게 야단맞았던 일을 회상했다. 아버지가 이처럼 엄격했던 반면에 어머니는 매우 자상하고 인자했다. 자녀들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 마리안나는 용기 있고 부지런하며 대단히 헌신적인 여인이었다. 아이들을 잘 교육시켰으며 남편의 일을 열렬히 도왔고 남편이 어디에서 일을 하든 항상 따뜻한 밥을 지어 날랐다.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에는 어김없이 땔감을 한 짐씩 지고 돌아오곤 했다. 겨울철에 눈이 무릎까지 덮여도 그녀의 부지런함은 한결같았다. 가난하고 배운 것은 없었지만 올곧은 이들 부부는 자녀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과 부지런함 등을 말과 행실로써 가르쳤다. 헬레나, 곧 파우스티나의 생애를 보아도 이러한 미덕이 짙게 깔려 있다. 헬레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화살기도 하는 법을 배웠고 자라면서 가족들과도 늘 함께 기도했다. 어린이들은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대단히 짧기 때문에 오래 기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헬레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이는 다섯 살 때의 그녀의 꿈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때 헬레나는 가족들에게 “아름다움 정원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손을 잡고 거니는 꿈을 꾸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곱 살이 채 되기도 전부터 한밤중에 일어나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가족들이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렸고 그러한 유별난 행동을 중지시키기 위해 “어서 누워 자거라.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겠다”하고 타일렀다. 그러면 헬레나는 “아니에요, 어머니. 제 천사가 기도하라고 저를 깨운 것 같아요” 하고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헬레나의 마음을 사로잡으셨고 일곱 살이 채 되기도 전에 하느님으로부터 보다 완전한 삶을 살도록 초대를 받았다. 그 일은 저녁기도 때 성체현지 중에 일어났다. 후에 헬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은총의 초대에 항상 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에 대해서 설명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헬레나는 아홉 살이 되어갈 무렵에 첫영성체와 고해성사를 받을 준비를 했다. 그로 인해 이 열심한 어린이가 밤에 갖는 기도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그의 부모는 그것을 올바르지 못한 행위로 여겨 못마땅해 했다. 그리하여 헬레나는 첫 영성체를 하기 전에 부모님의 마음을 상해 드린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며 부모님의 손에 입맞춤을 했다. 헬레나는 첫영성체 이후부터 매주 고해성사를 보았고 폴란드의 전통에 따라 용서를 바란다는 표시로 부모님의 손에 입맞춤을 했다. 자녀들 중에 아무도 그렇게 하는 아이가 없었는데 헬레나만은 달랐다. 또한 헬레나는 어릴 때부터 부엌일을 돕고 열심히 집안일을 도왔다. 동생들을 돌보면서 “부모님께 순종하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잘 순종하였으며 남의 일을 돕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부모님의 총애를 받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헬레나는 어느 날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신자의 의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강론을 들었다. 그 이후부터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고 주일 미사를 빠뜨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어니 주일에는 소를 방목하고 우유를 짜야만 했는데 헬레나는 가족들이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침실 창문을 통해 헛간으로 가서는 소들을 끌고 나갔다. 그리고 풀이 많은 호밀밭 사이에 밭이랑에서 소에게 풀을 뜯게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침 일찍 헛간에 소가 없는 것을 보고 도둑이 들어온 줄로 알았다. 그때 헬레나가 부르는 성가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헬레나가 소 세 마리와 함께 저 멀리 밭 가장자리에 있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소가 호밀밭을 망가뜨리는 줄 알고 화가 나서 가죽허리띠를 채찍으로 사용하려 급히 빼 들고 딸에게로 쫓아갔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소 세 마리를 하나의 줄에 묶어 밭이랑에서 풀을 먹이고 있었고 양쪽 호밀밭의 낟알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얼른 채찍을 뒤로 감추고 어색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고 있을 때 헬레나는 “아버지, 오늘 미사에 가도 되겠지요?” 하고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꾸짖을 수가 없었다. 헬레나는 소를 헛간으로 다시 끌고가 기쁘게 노래를 부르며 우유를 짰다. 미사에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소 한 마리 끌고 다니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줄 하나에 어떻게 세 마리나 묶고 다녔는지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하고 감탄하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가족들에게 말했다. 헬레나의 남동생 스타니슬라우스는, 헬레나가 이웃 밭과의 경계 지점인 밭이랑 사이의 좁은 길에서 소를 풀어 놓고 풀을 먹이곤 했는데도 소들은 결코 이웃집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헬레나는 모든 일을 빈틈없이 성실히 했으며 모든 이를 친절히 대했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의 애정을 듬뿍 받았다. 헬레나가 소에게 풀을 먹이려고 나서면 헬레나의 착한 심성에 반한 아이들이 줄을 지어 따라다녔다. 아이들은 헬레나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헬레나의 이야깃거리는 아주 풍부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책을 좋아하여 성서와 선교사들에 관한 잡지, 성인전등 종교서적에서 읽은 내용을 자녀들에게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헬레나는 자신의 정열적인 감정으로 잘 이야기해 주었고 아이들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리고 평소에 헬레나는 자신이 언젠가는 집을 떠나 은수자가 되어 숲 속에서 나무뿌리와 열매를 먹고 살거나, 아니면 선교사가 되어 이방인들에게 신앙을 전파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어린아이들은 이 말에 감동이 되어 자기들도 헬레나를 따라 어디든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헬레나는 사교성이 좋았고 상상력도 풍부했다. 종이나 옷감으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들어 상점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자기가 만든 물건을 친구들에게 팔아 그 돈으로 불쌍한 어린이들을 돕기도 했다. 헬레나는 동물을 사랑하고 강아지나 병아리가 병들거나 다치면 연민의 정을 가지고 즉시 치료해 주었다. 그런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심한 기근으로 인해 헬레나의 집도 가난이 극심해졌다. 교회에 입고 갈 옷도 제대로 마련할 수가 없었다. 헬레나는 이러한 일로 심한 슬픔을 느끼고 주일 미사에 입고 갈 옷이 없을 때에는 기도서를 가지고 조용한 장소를 찾아가 미사가 거행되는 시간 동안 따로 기도를 바쳤다. 어머니가 집안 일을 도우라고 불러도 미사가 끝났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도가 끝난 후에 어머니에게 뛰어가 손에 입맞춤하면서, “화내지 마세요 어머니, 제게도 하느님께 해야 할 의무가 있잖아요?” 하고 말했다. 1917년이 되자 헬레나는 스비니체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헬레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는데 러시아가 폴란드를 점령함으로써 학교가 문을 닫았었기 때문이었다. 헬레나는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2학년이 되었다. 헬레나는 훌륭한 모범생이었다. 어니 날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했을 때 헬레나가 “아버지의 귀가”라는 제목의 시를 잘 낭송하여 상을 받았다고 학교장은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1919년 봄, 헬레나가 겨우 3학기를 마쳤을 때 나이 어린 학생들을 위해 교실을 물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헬레나를 포함한 나이든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 후 2년 동안 헬레나는 집안 일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헬레나는 많은 생각과 꿈에 젖어 있었다. 헬레나는 하느님께 완전히 봉헌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때까지 수도생활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도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렬해져 밤을 밝히며 기도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부모에게 이상한 밝은 불빛이 자주 보인다는 말을 하자, 부모는 그런 일은 생각하지 말고 허튼 소리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 이후로는 이 이상한 체험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나 그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헬레나가 아버지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한 일이 단 한 번 있었는데, 언니 요세핀이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주위의 이목을 생각해서 헬레나도 따라가게 하였다. 그러나 두 딸이 돌아온 것은 한밤중이었고 한 청년이 집까지 따라왔다. 그 광경을 본 삼촌이 말을 과장하여 아버지에게 전함으로써 아버지는 몹시 화가 나서 두 딸을 심하게 꾸짖고 벌을 주었다.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헬레나는 아버지를 그처럼 화나게 한 일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일로 헬레나는 “아버지께서 당하셨던 그 수치심보다 백 배의 자랑을 앞으로 느끼시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정부
1921년 봄, 열 다섯 살이 된 헬레나는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셔도 저는 입을 옷이 없어요. 형제들 중에 제 옷이 제일 남루해요. 이제는 저도 나가서 무엇이든 벌어야겠어요” 하고 말했다. 두 딸을 이미 남의 집 가정부로 내보낸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래, 내 딸아,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가거라” 하고 대답했다. 이때 헬레나가 집을 떠나 일하러 간 곳이 우츠 부근의 알렉산드로프에 사는 헬렌 고리쉐프스카 부인의 집이었다. 헬레나는 가정부로 있으면서 항상 기쁘게 순종했고 일을 잘 처리해 나갔다. 고리쉐프스카 부인은 헬레나가 이야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과 자기 아들을 다루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일년이 되기도 전에 헬레나는 그 집을 떠나려 했다. 부인은 헬레나가 머물러 있기를 바라면서 왜 떠나려는 지를 물었다. 헬레나는 “떠나려는 이유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그러나 더 머물 수도 없어요” 하고 말했다. 헬레나는 이러한 신비스런 대답으로 첫 돈벌이를 포기하였다. 그 부인이 깨닫지 못한 것은 헬레나의 기도생활이었다. 헬레나는 일하면서도 늘 기도했고 밤에도 늦도록 기도하는 일이 많았다. 헬레나는 잠을 깨우는 이상한 밝은 빛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열망도 점차 더해 갔다. 그리하여 헬레나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헬레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수녀원에 들어가겠어요” 하고 말문을 열었다. 부모들은 헬레나의 간청에 귀 기울이기조차 꺼렸다. 아버지는 “나는 지참금을 낼 돈도 없고 갚아야 할 빚도 쌓여있다” 는 말로 대신했다. 헬레나는 “아버지, 돈은 필요 없어요. 예수님께서 저를 수녀원으로 인도해 주실 겁니다.”하고 대답했지만 그녀의 부모는 사랑하는 딸이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이에 실망한 헬레나는 1922년 가을에 다시 집을 떠나 우츠로 갔다. 거기서 헬레나는 사촌들과 함께 살면서 프란치스코 제3회에 속한 세 여인들 밑에서 일했다. 보수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매일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인근의 임종 환자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 만족할 수 있었다. 열 일곱 살의 소녀가 이러한 요구를 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또한 헬레나는 비치고프스키 신부에게 자신의 고해신부가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것을 안 삼촌으로부터 헬레나는 계속 시달림을 받았으나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사하기로 결심했으니 꼭 그렇게 할 거예요”하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의 일자리로서는 괜찮았으나 다른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 동안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완전히 봉헌해야겠다고 한 생각이 “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가라”는 내적 목소리가 되어 들려왔다. 헬레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수녀원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여전히 거절했다. 헬레나는 그것에 상심한 나머지 영성생활을 포기하고 자신이 표현했던 말 그대로 “제 멋대로의 세속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은총 따위에는 마음 두지 않으려고 하면서 외모를 가꾼다거나 유행하는 옷을 산다거나 다른 처녀들과 춤추는 데 어울려 다님으로써 영적인 갈망을 억제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으로는 어떠한 행복도 영혼의 평화도 얻을 수 없었다. 헬레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1923년 2월 2일부터 우츠의 마르시아나 사도프스카 부인의 집에서 일했는데 그 부인은 그때 헬레나가 처음 찾아왔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헬레나가 너무 멋진 옷을 입고 왔기에 가정부로 고용해도 좋을까 망설였습니다. 자기 발로 떠나도록 일부러 보수를 낮추어 불렀는데도 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느라 바빴던 사도프스카 부인은 가정부 겸 아이를 돌보는 사람으로 채용한 헬레나를 매우 흡족해 했다. 이 부인 역시 헬레나가 아이를 돌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녁이 되면 헬레나는 세 아이를 앉혀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다. 때로는 아이들을 숨이 넘어갈 듯 웃게 만들었다. 사도프스카 부인은 헬레나가 대단히 신뢰할 만한 처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안심하고 아이들을 맡기고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었다. 헬레나가 자기 자신보다 살림을 더 잘 살아주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함께 장보러 가기도 했는데 헬레나는 단식을 하여 기진맥진한 경우에도 항상 자신이 짐을 들려고 했다. 사도프스카 부인은 헬레나가 금요일은 물론이고 매주 수용일과 토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사순절에는 아예 고기를 입에 대지도 않고 성삼일 에는 유제품조차 먹지 않았다. 하루는 야신스키 부인, 즉 헬레나의 언니 요세핀이 찾아왔기에 사도프스카 부인은 잘 대접하려고 시장을 봐 오라고 시켰는데 헬레나는 야채만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래서 헬레나에게 “고기를 좀 사오지 그랬어?” 하고 말했더니 헬레나는 “오늘은 안돼요. 단식 일이잖아요”하고 대답했다. 이에 사도프스카 부인은 야신스키 부인과 헬레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당신들, 두 자매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지요? 어떻게 자랐기에 사순절을 그렇게 엄격하게 보내요? 헬레나는 사순절 동안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아요.” 그러자 야신스키가 대답했다. “그게 저희 집 풍습이지요. 아버지께서 저희들을 그렇게 기르셨습니다.” 사도프스카 부인은 헬레나가 신심이 깊고 기도생활에 충실하며 교회의 전례에 열심히 참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헬레나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 재치가 넘쳤으며 심성이 착해 남을 잘 돕고 항상 주위에 즐거운 웃음을 선사해 주어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증언했다. 헬레나는 1924년 7월 1일,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지인과 별 상의 없이 그 집을 떠났다. 하지만 사도프스카 부인은 이같이 말했다. “헬레나는 곧 떠날 사람이었지만 참 착하고 정이 깊었어요. 그녀는 내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았어요.”
부르심
헬레나는 사도프스카 부인의 집을 떠나온 뒤 언지 요세핀과 함께 무도회에 갔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했으나 헬레나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헬레나가 춤을 추려는 순간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헬레나는 자기 곁에 예수님이 서 계시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옷을 젖히시며 상처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꾸짖는 듯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내가 얼마나 더 너를 보며 참고 있어야 하겠느냐? 너는 언제까지 나를 버려 두려느냐?” (9) 그 순간부터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도장을 급히 빠져 나와 언니 옆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변화가 두통 때문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그 집을 빠져 나와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타가의 성당으로 향했다. 거리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고 성당 안에는 몇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헬레나는 주위사람들을 의식하지도 않고 감실 앞에 엎드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고뇌에 찬 마음으로 기도 드렸다. 그때 “바르샤바로 가거라. 그곳에 가면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10) 하는 소리가 들렸다. 헬레나는 짐을 꾸렸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삼촌에게 가서 “저는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바르샤바로 떠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삼촌이 소리쳤다. “뭐라고 헬레나,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네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하고 상심하시겠니?” “삼촌, 지금은 아무 말씀도 드리지 마세요. 나중에 부모님을 뵙게 되면 그때 이 옷을 전해 드리세요.” “그럼, 입을 옷은 있니?” “지금 입은 것으로 충분해요. 앞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도와 주실 거예요.” 헬레나는 입고 있는 옷 한 벌로 바르샤바를 향해 떠났다. 삼촌이 역까지 바래다 주었고 헬레나는 용감히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막상 기차에 오르나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가출했다고 말씀하시리라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부모님이 상심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지만 일곱 살 때부터 동경해 오던 분께 순명 해야 한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기차가 바르샤바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운집한 군중 속에 발을 들여 놓자 덜컥 겁이 났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니 암담했다. 바르샤바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헬레나는 실의에 잠겨 성모님께 기도했다. “성모님, 저를 인도해 주소서. 저를 이끌어 주소서”(11). 그때, 도시를 빠져 나가면 인근 마을에서 안전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리가 마음 속에서 들려왔다. 헬레나는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랐다. 이튿날 아침, 헬레나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오코타 교외의 성 야고보 성당이었다. 성당에서는 마침 미사가 거행되고 있었는데 헬레나는 무릎을 꿇고서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였다. 미사 중에 헬레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사제에게 가서 모든 것을 말씀 드려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바를 가르쳐 줄 것이다”(12). 미사가 끝난 후 헬레나는 제의실로 가서 사제에게 자초지종을 말씀 드린 후 어느 수녀원에 가야 할지에 관해 자문을 구했다. 사제는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다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메모를 해 주면서 “우선 신심이 깊은 부인의 집으로 보내 줄 테니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거기서 머무시오.” 하고 말했다.(13) 이렇게 해서 바르샤바의 성 야고보 성당의 사제 카논 제임즈 동브로프스키 신부는 1924년 여름에 헬레나를 알도나 리프쉬츠 부인에게로 보냈다. 그 부인의 남편과 친구인 동브로프스키 신부는 그 집에 돌볼 아이가 넷이나 있고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헬레나는 그 집으로 가서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는 모르지만 적임자로 생각됩니다”라고 신부님이 적어 준 쪽지를 내밀었다. 리프쉬츠 부인은 건강하고 심성이 좋아 보이며 쾌활해 보이는 헬레나가 맘에 들었다. 그때 헬레나가 가진 옷이라고는 목도리에 묶인 것뿐이었기에 때문에 부인은 헬레나에게 여벌의 옷가지들을 챙겨 주었다. 헬레나는 그 부인에게,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나왔으며 지참금이 모아지면 수녀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아이들에 대한 헬레나의 사랑은 그 집에서도 드러났다. 헬레나는 아이들과 노는 것을 기뻐했다. 아이들이 변장놀이를 원하면 옷까지 바꿔 입고 같이 놀아 주었다. 후일에 그 가족들은 헬레나가 행복한 웃음을 띤 건강한 처녀였다고 회상했다. 헬레나는 리프쉬츠 부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바르샤바에 있는 수녀원들의 문을 하나 하나 두드리기 시작했다. 가꾸지 않은 용모, 변변치 못한 교육, 지독한 가난 그리고 가정부라는 현재의 직업 등으로 인해 “여기서는 가정부를 구하지 않아요”라는 대답을 듣곤 했다. 그것에 실망한 헬레나는 “도와주세요. 혼자 버려두지 마세요”하고 기도했다. 하루는 쥐트니아 거리에 있는 자비의 성모 수녀원으로 갔다. 불안한 마음으로 딱딱해 보이는 건물 앞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다가 문을 두드렸다. 문지기 수녀가 얼굴을 내밀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13). 헬레나가 “수녀원에 입회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 수녀는 “들어와서 잠깐 기다리세요. 장상 수녀님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잠시 후 미카엘 모라체프스키 원장 수녀가 들어왔다. 원장 수녀는 헬레나가 눈치채지 않도록 문 바깥에서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외모로 보아 크게 끌리는 점이 없어 헬레나를 곧 돌려보내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몇 마디 말이라도 걸어보는 것이 도리이겠다 싶어 대화를 나누던 중에 이 후보자가 몇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밝은 미소와 아주 단순하고 성실한 자세로 말하는 태도로 보아 상당한 상식을 지니고 있는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원장인 미카엘 수녀는 헬레나를 받아 들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헬레나는 이 첫 만남에 대해 사뭇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흥미롭다. 후일 헬레나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지금 총장이 되신 미카엘 수녀님은 그 당시 나를 처음 대했을 때 몇 마디 말을 건네신 후 이 집의 주인께 가서 받아들여주실지 여쭈어 보라고 하셨다. 그 순간 나는 주님께 여쭈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고 기쁨에 차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이 집의 주인이시여, 저를 받아 주시겠어요? 이곳에 사시는 수녀님이 주님께 이렇게 여쭈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즉시 “나는 너를 받아들이겠다. 너는 내 성심 안에 있다” 라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성당에서 나오자 수녀님은 “주님께서 받아 주시겠다고 하셨나요?” 하고 물어보셨다. 내가 “예”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받아 주시겠다면 나도 당신을 받아들여야지요” 하고 수녀님이 대답하셨다(14).
헬레나는 가난하여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는 것이 수녀원 입회에 장애가 되었다. 성청에서 이를 면제해 줄 수 있었는데, 그래도 옷과 옷장을 마련할 돈이 필요했다. 수녀원에도 이 돈을 마련해 줄 여유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원장 수녀는 몇 백 즈오티(폴란드 화폐단위)를 모을 때까지 좀 더 일하도록 제안했다. 새 후보자는 이 제안을 대단히 기쁘게 받아들이고 돈이 생길 때마다 수녀원에 적립해 나가기로 하였다. 미카엘 수녀는 헬레나와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를 돌려 보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으나 헬레나는 필요한 금액이 모아질 때까지 리프쉬츠 부인의 집에서 계속 일을 하였다. 몇 달 후 빌니우스의 모원에 가 있던 미카엘 수녀는 한 젊은 처녀가 약속한 돈 육십 즈오티를 가지고 왔더라 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순간 미카엘 수녀는 헬레나와의 만남을 상기해냈다. 그때부터 헬레나의 예탁금은 불어나기 시작하여 일년 후 일정 액수에 도달했다. 그러는 동안 헬레나에게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리프쉬츠 부인 때문이었는데, 이 부인은 주근깨가 있는 건강한 모습의 명랑한 이 빨강 머리 처녀를 무척 좋아했다. 따라서 부인은 수녀원에 가고자 하는 헬레나의 열망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결혼시킬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헬레나가 즐겨 부르는 성가를 좀 더 관심 있게 들었더라면 결혼은 헬레나의 관심 밖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지만 그 부인은 헬레나가 이미 자기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단을 내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헬레나의 이러한 결단은 1925년 6월 25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저녁기도 중에 일어났다. 헬레나가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최상의 선(선)이요 최상의 미(미)라는 신비의 빛을 그녀에게 심어 주셨다. 이때 헬레나는 영원으로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했고 평생 동정을 지킬 것을 마음으로 서약했다(16 참조). 그 후로 “숨어 계신 예수님”(Jezusa Ukrytego)이란 찬미가를 즐겨 부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체성사 안에 숨어 계신 예수님, 찬미 하나이다.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끊고 당신 사랑만으로 살아 가리이다.”
또 하나의 일은 동생 제느비에브가 찾아와 생긴 일이다. 그 동안 헬레나는 집에 간 적은 없었지만 지참금이 모아지면 수녀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부모님께 편지로 알렸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는 제느비에브를 보내어 헬레나가 수녀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미 확고한 결심이 선 헬레나를 설득하지 못한 채 제느비에브가 혼자 집으로 돌아가자 부모는 대단히 상심하였다. 그러나 헬레나는 이러한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1925년 8월 1일, 천사의 성모 축일에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몇 년 후 헬레나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한없이 행복했다. 낙원 생활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았고 내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의 노래가 터져 나왔다(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