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
– 기형도 산문집
1-1: 출발 (8/2/1988, 화)
자는 지금 떠나고 있다. 휴가는 어제부터 시작되었다. 월요일 하루를 그냥 버린 셈이다. 잠과 혼미한 각성도 하루 만에 권태로 판가름 났다. 오랫동안 참기 어려웠고 참아왔으므로 몇 일간의 자유가 허용되었을 때 예상대로 당황하였다. 8월 2일 화요일 오후 3시 30분에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닿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제일 먼저 광주로 해서 해남, 혹은 순천 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날씨는 무더웠고 남도 행은 무의식적으로 장마와 함께 떠올라 왔던 터였다. 그래서 대구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장정일이라는 이상한 소년이 살고 있다. 대구는 중간 내리기 말고 두 번 간 적이 있다. 한 번은 81년 초여름 내가 군입 軍入 하기 직전 S 와 H 그렇게 셋이서 부산으로 무작정 여행길에 올랐을 때, 반나절을 보냈을 때였는데, 그때 당시 나에게 수십 통 편지질을 하던 여대생 H를 불러내 ‘레테’ 다방에서 장난을 쳤었다. 매우 더웠던 느낌만이 남아 있다. H는 그날 오후 부산까지 부득불 따라 왔었는데 광복동 쪽으로 자신의 문우 文友 들이 많다고 그리로 우릴 이끌었었다. 우리가 그 번잡하고 무덥고 짠 거리에 갔을 때 H의 친구들은 어느 카페에도 없었다. H는 갑자기 대구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나와 S, H는 그녀를 터미널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녀는 매우 쓸쓸한 얼굴을 하고 대구로 돌아갔는데 그게 내가 본 처음이자 마지막 H의 모습이었다. 나는 본래 뚱뚱한 여자들을 쫓아다닌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녀와의 해후는 준비되지 않았다. 지금 그녀를 만나면 H구나 할 수 있을까.
1-2: 대구행 (8/2/1988, 화)
대구행 고속버스 안이다. 생가보다 차체가 많이 흔들리고 신제품이라는 이 필기구는 말을 잘 안 듣는 편이다. 몹시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좌석 붙박이 휴지상자를 열어보니 담뱃재가 가득하였다. 안심하고 담배를 꺼내어 몇 모금 피우다 꺼버렸다. 연기가 너무 많이 났기 때문이다.
버릇인데, 글을 쓰려고 하면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나는 공포에 질리곤 한다. 한 가지 생각만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아주 분석적이고 통찰력이 가득한 문장으로 쓸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내 정신은 너무 얇고 힘이 없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허겁지겁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다. 아침에 늦잠을 잤다. 오후 2시쯤 여행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최대한 줄이려고 했는데 여벌의 바지, T 셔츠 각각 1착 과 속옷을 넣고 카메라를 챙기는 벌써 가방이 무거웠다.
책상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며 짧게 절망했다. 결국 W 페이터의 문예비평서 <르네상스> 그리고 장 그르니에 의 산문 <까뮈를 추억함>과 <일상적 삶>, 이렇게 세 권을 가방에 넣었다. 터미널에서 반팔 흰색 T셔츠를 샀다. 케네디 스타일의 칼러가 눈을 끌었기 때문이다. 면도기와 칫솔 등속도 구했다.
그리고 신문을 산 것이다. 성실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통속적인 미덕인가. 스낵 코너에서 밥을 먹으며 신문을 6개나 읽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대구행 버스는 저녁 5시 25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시간이 너무 남아 욕탕에 가서 찬물 속에 한참을 지냈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 불편하기 왼손을 노트를 바치고 이 글을 쓴다.
나는 왜 이 노트를 샀나. 내 습관이 여전하다면 이 노트는 여행의 종료와 함께 고의적으로 분실될 것이며 나는 마찬가지로 이번 여행을 잊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여행을 떠나고 있다. 대구에 가서 무엇을 할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장정일 소년에게 전화를 걸 것 같다. 안 걸 수도 있다.
1-3: 희망에 지칠 때까지 (8/2/1988, 화)
사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차라리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 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나는 어떤 시에선가 불행하다고 적었다.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누군가 내 정신을 들여다보면 경악할 것이다. 사막이나 황무지, 그 가운데 띄엄띄엄 놓여있는 물구덩이, 그렇다. 그 물구덩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아직 죽음 쪽으로 가지 않고 죽은 듯이 살아있는 이유를 그 물구덩이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희망을 위하여 나는 대구행 첫 차표를 끊은 것이다.
두 번째 내가 대구에 간 것은 83년 여름 (혹은 82년) 쯤이었다. 친구 B가 대구에서 카투사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때는 안양에서 사귀었던 친구 S와 H(이니셜이 우연히도 첫 번째 대구 동행자들과 같다)와 함께였다. 밤차 완행으로 도착해 중앙공원 벤치에 누워 잠을 잔 기억이 있다. B를 불러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미군 美軍 막사에도 들어갔었던 것 같다. 흑인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이 카지노를 할 때 우리는 둥근 라켓으로 핑퐁을 했었다. 서울로 오는 길에 입석 칸을 떠나 특실 빈자리에 앉았던 기억도 난다.
그때의 대구도 폭염이었다. 그리고 대구는 나에게 대통령을 뽑은 무서운 도시,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 그리고 폭염의 도시로 달려들었다. 이성복, 이하석, 이태수, 장정일, 고광본, 그리고 김춘수, 한때의 이문열, 그리고 작가 석경 고향도 그곳이었다. 버스는 금강 휴게소에 잠시 멎었다. 강가에 붉고 푸른 텐트들과 벗은 사내들로 가득하였다. 담배 한대를 피우고 버스는 대구로 갔다.
비가 왔으면 싶다. 희망은 있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도저한 삶과 삶들,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은 오래 전에 나에겐 부재 不在 했을 것이다. 나에게 지금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한때 나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때라니? 그랬다. 나는 더 이상 시에 접근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안다.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욕망이 사라졌다. 그건 성 성 도 아니다.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이다. 어쨌든 나는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탈출 위에 있다. 나는 부닥칠 것이다. 공허와 권태뿐이다.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
1-4: 장정일 소년 (8/2/1988, 화)
대구에 도착하였다. 밤 9시 20분. 버스터미널은 환하였다. 예상했던 막막함이 덮치듯 나를 마중하였다. 먼저 내일 떠날 전주행 차편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내일 전주로 떠날 것이다.
장정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집에 있었다. 10시에 대구백화점 앞에서 그를 만났다. 푸른 체크 무늬 와이셔츠를 입은 짧은 머리의 소년. 우리는 가까운 호프로 가서 한 잔 하였고 내가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줄 그는 금방 눈치챘다. 연전에 원재길이, 그 후에 박인홍이, 그리고 달 전에는 박기영, 박덕규가 대구에 왔었다고 했다. 나에게 왜 술을 많이 안 하느냐고 그는 물었다. 나는 그와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은 직업으로 시를 쓰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열음사에서 포르노 소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나도 그것을, 아니 <그것은 나도 모른다> (1천 매)가 곧 나올 거라고 했다. 서울서 봤을 때는 말이 없었는데 대구라 그런지 말을 많이 하였고 발랄했다. 나는 그에게 전화할 때 중앙이다라고 했다. 그가 <문학정신>에 발표한 <중앙과 나>를 빗댄 것이다. 그는, 중앙이요? 하다가 웃었다. 누구세요? 중앙이라고요. 나는 말했다. 그는, 기형도형이군요, 했다. 호프집에서 나와 윈저궁(宮)을 본뜬 지하레스토랑에서 장정일 소년과 나는 맥주를 시켰고 <파리텍사스> <베티불루> 등의 영화 이야기, 세기말 이야기를 했다. 그는 뮤지컬 드라마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른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해온 섹스 방법(편안한)으로는 그를 사랑할 수 없어 절망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는 했고 요즘 젊은 시인들 이야기를 했다. 그는 솔직히 말해 이윤택, 김영승, 윤성근의 시가 싫다고 했고, 이문재의 초기 시는 너무 아름답다고 했으며 그러나 이문재는 더 이상 시를 못 쓸 것 같다며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는 내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1시쯤 우리는 그곳을 나왔고, 그는 원재길과 시인들을 재워준 곳이라며 무슨 여관으로 나를 끌고 갔고, 방 앞에서 안녕히 주무시라고 이야기한 뒤 도망치듯 뛰어나갔다. 왜 대구에 왔느냐고, 휴가 때 그 좋은 도시 다 버리고 하필이면 대구에 왔느냐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아무 곳이든 서울만 벗어난다면, 떠나고 싶었다고 했다. 전주에는 약속시간을 정하고 가느냐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절이 그곳에 있다고 말했다.
장정일은 책은 지문 묻을까 봐 손을 씻은 뒤 읽으며, 초판만 읽지 재판은 읽지 않으며, 책에는 볼펜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한 번 본 시들은 모두 외우다시피 한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대구는 크고 넓었다. 밝고 우글거렸다. 장정일은 대구는 부산의 절반도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 고통의 윤곽을 조금 말해주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만 마시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대구에서의 1박은 이렇게 지나갔다.
2-1: 지리(智異)를 지나며 (8/3/1988, 수)
버스는 이제 지리(智異)를 지나고 있다. 대구를 떠난 지 벌써 2시간이 지났다. 고속버스 안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겁다. 밖으로 보이는 지리산은 역시 험준하기 이를 데 없고, 겹쳐져 멀리 물러난 산과 산들은 아득한 백색의 산이며, 구름으로 된 파도들이다. 입산자들의 성산 성산, 잠든 사나운 산, 산 위의 발들을 본다. 산 아래 풀들을 본다. 이제 대구로 가는 낙동 洛東 의 산에서는 나뭇잎들 사이로 마을이 보였고 저녁 는개가 희부윰하였다[필사자 주: 오타인가.. 외국어인가…]
지금은 오후 4시 30분의 폭염. 정치부 있을 때 취재차 잠시 들러 모았을 뿐 전라 전라 는 나에게 미지의 땅이다. 어지 정일군은 그랬다. 광주에 못 갈 것 같다고. 지금 성지순례의 땅이 돼버린 광주로 가는 길이 무슨 속죄의 길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그는 단 한 번도 광주로 가지 않았다. 나 역시 전주와 광주는, 나이 삼십 세에, 초행길에 다름 아니다. 지리를 지나며 이 불볕더위를 잠시 ‘시련이다, 가혹한 대가다’ 라고 생각해 보았다. 옥수수 밭을 지나고 그리고 남원이었다. 춘향과 몽룡의 그림을 오려 붙인 나무 입간판을 지난다. 이제 한의 땅, 설움의 땅이라는 이곳을 나는 가고 있다. 나는 우리 국토를 너무 몰랐다. 차선은 대구서부터 줄곧 2차선이다. 냉방이 되었다지만 이건 말씀이 아니다.
끓는 물에 적셨다 꺼낸 종이처럼 옷들이 고통스럽다. 나의 첫 남도행이 무슨 고행의 제의를 의미하는 것일까. 내 감정은 지극히 평온하고 특유의 격정도 물 밑에 모두 가라앉아 있다. 버스는 이미 국도로 접어들었는지 흙먼지들이 자주 차창을 더럽히고 도로 양편으로는 공사진행을 알리는 손수건만한 삼각 붉은 깃발들이 소스라치며 튀어나온다.
어젯밤은 잠 못 들었다. 대구의 밤공기는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몹시 해로웠다. 선풍기를 틀고 잠을 청했는데 깨어보면 선풍기가 멎어 있고 한 시간 남짓한 토막잠들을 몇 편 잤다. 동대구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1시 30분이었는데 전주행 버스는 2시 10분 차가 남아있었다.
길 옆으로 흰 약가루를 뒤집어 쓴 듯한 개망초 꽃들이 한창이다. 버스는 오수라는 마을을 지났다. 10세 가량의 소년이 붉은 꽃무늬가 어지러운 흰빛 양산을 쓰고 지나간다. 소읍들이 늘 그렇듯이 자전거포집, 우체국, 화장품 대리점 등이 있는데 얼마 전 장마를 기억하게 대주는 듯 상점 유리마다 말라붙은 흙탕들이 굵은 파리떼처럼 가득하다. 내 옆자리에는 30대 후반의 몸집 좋은, 그러나 마음씨가 고와 보이는 여자와 그의 딸로 보이는 네 살쯤 되는 소녀가 탔다. 이 계집아이는 아주 말을 안 듣는 편으로 어린아이의 것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굵고 짜증스러운 음성을 갖고 있다. 차체가 약간만 흔들려도 여자의 굵은 팔뚝이 닿는다. 두툼하고 말랑말랑하게 잘 구워진 빵 같다. 그랬다. 나는 ‘이제는 희망을 노래하련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모며 몇 시간이고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도로사정이 엉망이다. 전주 24km. 도로와 나란히 협궤열차가 지난다. 호남정유라고 쓴 검은 쇠 원통 화차들이 느리게 엇갈렸다.
나는 이제 다르게 살고 싶다. 그럴 경우 모든 굳은 체념들이 살아날 것이다. 어차피 존재들은 유한하다면 인식의 바꿈을 통해 나는 두 배의, 아니 그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다. 전주에 닿으면 강 강 선생에 전화해야 한다. 산으로 갈 수 없어도 나는 여전히 좋을 것이다.
2-2: 서고사 西固寺 가는 길 (8/3/1988, 수)
서고사는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이 지은 네 개의 절 중 하나라고 한다.
전주에는 6시에 내렸다. 전화를 넣으니 강석경 선생이 크게 기뻐하셨다. 수박 한 덩어리와 복숭아, 그리고 담배 몇 갑을 사고 황방산 (누른 삽살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산 이름) 서고사를 향해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가 공부하러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공부하는 분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택시로 20분 못 가 길모퉁이에서 소매 없이 헐렁한 셔츠에 밀집 모자를 쓴 강선생이 튀어나왔고 나도 택시에서 내렸다. 절로 올라가는 길에 전주대 국문과에 다닌다는 청년 선혜 善慧 법우를 만나 동행했다. 그도 서고사에 거하고 있다고 한다. 서고사 가는 길은 복숭아 밭과 개망초,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과 풀들, 나무들, 옥수수와 담배 밭, 고구마 밭으로 가득하였다. 복숭아들은 가지가 휘어져 여러 개가 땅속에 반쯤 묻혀있었고, 크고 단단한 바위들이 길을 막았다. 절애 도착해서 의성 懿星 스님 (30대 초반의 비구니주지스님)과 상좌 스님, 그리고 보살(의성스님의 생모라고 들었다) 님과 절에 사는 소녀 하욱 夏旭 등을 만났고, 보살님 아들인 서울서 숭실대 공과대 다닌다는 청년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얼굴을 씻고 절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가 강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박생광 朴生光 선생 이야기, 그리고 소설 <가까운 골짜기> 이야기,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바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들판은 거대한 바다로 보였다. 먼 데 호수가 있었고 농가들과 송전탑이 내려다 보였다. 태양도 싸늘히 식은 붉은 빛으로 대지 위에 떨어지는 중이었다. 구름들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어왔고 어느덧 7시 40분이었다. 대웅전 옆방에서 비빔 국수를 들었다. 강선생이 사는 방은 나한상을 모신 곳 바로 위쪽이었는데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뒤집혀질 것처럼 종이곽으로 만든 쪽배 같았다. 들창을 여니 커다란 두꺼비가 있었고 언젠가 귀신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강선생이 또 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평상 위에 앉아 의성스님 등과 함께 작설차 (참새의 혀처럼 조그만 풀잎)와 솔차(솔잎과 설탕을 버무려 쪄낸 것) 를 들고 이런 저런 인생살이 이야기를 했다. 스님은 참 매력 있는 분이었다. 그는 근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가 부러워 나는 슬퍼졌다.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으며 중앙일보 출판국 안길모 安佶模 차장 이야기를 했다. 안순희 선생의 무기 무기 이야기, 눈이 점점 감겨져 큰일이라고 이야기했고, 분청사기 굽는 법도 화제에 올랐다. 밤 20시 가까이 지나 스님과 붕숭아 물들이느라고 한껏 들떠있던 하욱도 잠자리에 들고, 나와 강선생, 숭실대학생, 선혜법우와 넷이서 종교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선혜법우가 동사섭 同事攝 을 말해주었고 가식과 욕망을 없애고 진실을 향해 사는 삶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그것을 행복, 자기구원으로 깊이 인식하였고 감동했다. 그리고 나는 ‘종교가 공포에서 비롯된 스스로 성자 盛者 되기의 길’임을 조심스럽게 말했고 ‘욕망과 망집이 없는 평정된 삶은 어쩌면 불행한 삶일 것’이라고 피력함으로써 의심이 많은 자 특유의 ‘혼란과 쟁투, 근심에의 탐닉을 통한 유한자로서의 생 일기’의 버릇을 드러내고 말았다. 밤은 깊었고 이미 해가 진 뒤 오래였으니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유성 두 개가 너무도 길게 떨어져 우리 모두 탄성을 질렀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행기의 굉음이 터져나오 모두 크게 웃고 말았다.
속세란 무엇이며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이 없는 삶은 이미 속세가 아니고 욕망과 화해하고 싸우는 자가 수도자가 되는 길은 속세를 버리는 길이다. 속세 속에서의 구원의 몸짓은 자기구원이 아닌 가식으로 가득 찬 이웃 구원일 것이다. 서고사의 밤은 깊고 어디선가 소쩍새들이 끊임없이 울었다. 복순이라는 이름의 통통한 강아지는 코 언저리가 불에 탄 듯 검뎅이였고 해탈이와 다롱이로 불리는 고양이들은 밤중에도 자꾸만 바삐 움직였다. 의성스님이 겨울 눈밭 위에서 잠자던 고집장이 산토끼 이야기를 했었다. 낙천주의자 토끼, 두고 온 서울이 너무 멀다.
나는 너무 좁다. 처음 대구에 내렸을 때나 전주에 내렸을 때 감당하기 힘들었던 막막감, 그토록 증오했던 서울, 내가 두고 온 시간과 공간의 편안함에 대한 운명적 그리움, 난 얼마나 작은 그릇이냐. 막상 그 작은 접시를 벗어났을 때 나는 너무 쉽게 길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서고사의 밤은 깊다. 풀벌레 소리 하나만으로 나는 이 밤을 새도록 즐길 수 있다.
3-1: 무등 無等 에 가기 위하여 (8/4/1988, 목)
이제 광주로 간다. 방금 전 강선생과 헤어졌다. 땡볕이 내려 쪼이는 전주터미널. ‘내가 내 생 生에 얼마나 불성실했던가, 생을 방기했고 그 방기를 즐겼던가를 서고사 일박을 통해 깨달았다’고 터미널 층계를 내려오면서 강선생에게 고백하였다.
노트를 펼치다가 놀랐다. 표지에 HOPE라고 쓰여 있었다. 내 여행이 ‘지칠 때가지 희망을 꿈꾸기’ 위해서였다면 이 노트 또한 내 의지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앉아서 성자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게 경배하러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육체에 물을 묻히고 녹이 슬기를 기다렸다. 서울에서의 나의 행복론은 산산조각 나고 있다. 내가 거듭 변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거듭 변하기 위해 나는 지금의 나를 없애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새벽 4시 상좌승의 예불소리에 잠을 깼다. 2시 가까이 잠들었으므로 몹시 머리가 아팠고 한없이 슬프고 무서운 예불소리에 섞여 아침 9시까지 잤다. 서고사의 아침 9시는 벌써 오전 일과가 한창이었다. 보살님과 의성스님은 법의 法衣 를 삶고 있었고, 숭실대 청년 한진군과 선혜법우는 감잎차 썰기, 마당쓸기에 한창이었다. 세수를 하고 강선생을 깨워 무소르그스키의 곡 曲 을 팝아트로 편곡한 <전람회의 그림>을 들었다. 아침은 거르고 11시에 전주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신라당’이라는 전주 시내 빵집 종업원이었다는 상좌승 얘기를 듣고 ‘사연이 곧 번뇌’라고 생각했다. 의성스님과 강선생 그리고 피아노 치러 학교 갔던 하욱과 나 이렇게 셋이 국일관에서 백반을 먹었다. 역시 전주의 반찬은 엄청나게 많았다. 식사 후 국일관 옆 카페 ‘빈센트 반 고흐’에 들렀다. 스님의 단골다방이었다. 곰팡이 냄새가 났고, 어두웠는데 천정에는 수십 개의 사기컵들이 매달려 있다. 밖으로 나와 문방구에 들러 색연필, 노트 등을 사서 하욱에게 주었다. 그녀는 이제 열 살 국민학교 4학년인데 콩나물을 미칠 듯이 좋아했다. 세 자매 중 막내인데 부모가 셋 모두를 버리고 이혼했으며 세 자매 모두 갈갈이 찢어졌다. 하욱은 그러나 구김살이 없다. 가끔 일기장에 ‘엄마가 왜 날 버렸을까요?’ 라고 쓴다.
말 그대로 광활한 곡창지대다. 버스는 적당히 흔들리고 있다. ‘밭 가운데 숲’들이 있고 망초들은 흐드러졌다. 산들은 얕고 공손하다. 서고사의 옆 언덕에서는 언제나 해지는 것만 볼 수 있다. 서고사의 하늘은 서역 西域이고 그 길은 인도 印度로 뻗어있다. 서고사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그곳에 서면 한없이 위축되고 겸허해지는, 그래서 오히려 조금은 속세를 향해 우쭐 할 수 있는, 검고 넉넉한 바위들, 의성스님이 법의를 삶기 위해 군불을 때면 하욱은 그네를 탔다. 의성스님은 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 미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힘차게 뻗은 콧날과 눈빛, 입술의 그윽함과 섬세함이 얼핏 잘 생긴 남성을 연상케 하는 의성스님은 불교에서 도 度는 이치를, 도 道는 길을 의미한다고 말해준다. 노장 老莊에서의 도 道 가 불가에서는 도 度라는 것이다. 서고사의 빽빽한 나무들은 별빛이 가득한 한밤중에 딱딱하게 굳은 먹물처럼 보였다.
부산에서 필름 한 통을 쓰고 이제 광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곳은 십자가로 만든 땅인가, 넋들 위에 솟아난 도시인가. 나는 아무런 감정도 예감도 없이 무등 無等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3-2: 제3 묘원에서 만난 사람 (8/4/1988, 목)
무등 無等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검은 산들을 거느리고 회색의 구름 숲 속에 무등은 있었다. 나는 지금 충장로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금남로 3가와 4가 사이 ‘충금’다방 2층에 앉아 있다. 광주고속터미널은 내가 본 그 어느 대도시 터미널보다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었다. 땀이 폭포처럼 옷 사이로 흘러내렸다.
지금은 저녁 6시. 광주에 도착한 지 2시간이 흘렀다. 터미널에서 부산이나 해남 혹은 이리 방면의 차표를 끊으려 예매처를 기웃거렸으나 너무 혼잡하고 더러워서 터미널을 버리고 길을 건너 신문들을 한 뭉치 샀다. 내가 써두고 온 기사가 나와 있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퍼마켓에 들어가 필름 한 통을 샀다. 어디로 갈 것인가. 보도 블럭 위에 주저앉았다. 황지우 黃芝雨 형에게 전화를 넣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시간은 많다.
망월동 공원 묘지를 찾아갈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에 물어도 망월동행 차편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물어 25번 버스가 간다고 알 수 있었고 25번 버스를 타기 위해 현대 예식장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이 사람들이 모두 죽음의 공포를 겪었던 사람들일까. 어찌 보면 그랬다. 어두웠고 흐미하였다. 거리는 복잡했지만 힘이 없이 늘어져 있었다. 망월동까지 버스는 달렸고 그곳은 외곽지대였다. 버스기사는 나에게 내려서 걸어가라고 했다. 가게 집 아낙네는 1시간을 걸어야 한다고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망월동 3거리에 봉고차가 있었다. 공원 묘지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였다. 차가 왔다. ‘묘지 가실랍니까?’ 그는 시내로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나 때문에 한 번 더 운행하겠노라 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가게 집에서 산 카스테라와 비비콜을 먹으며 나는 봉고차에 혼자 앉아 묘지로 갔다. 가는 도중 묘지에서 내려오는 한 떼의 대학생들을 보았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플래카드를 든 방송대학생들이었고 봉고차는 이윽고 묘역에 도착했다. 나는 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제3묘원을 올랐다. 만장 같은 격한, 그러나 햇빛에 바삭바삭 마르고 있는 수십 개의 붉고 검고 흰 현수막들과 무덤들이 있었다. 나는 꽃 한 송이 소주 한 병 없이 무덤 사이를 거닐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무명열사의 묘, 박관현의 묘, 묘비명 사이를 걸으며 나는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묘원 은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였으며 열사 熱沙 였다. 너무 뜨거워 화상처럼 달구어진 내 얼굴 위로 땀이 사납게 흘러 내렸고, 그것들이 내 눈 속에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닦는 사람처럼 자꾸만 눈가의 땀들을 닦아 냈고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마른 꽃 다발과 뜨거운 술병, 금이 간 성모 聖母상들을 넘어 간이 화장실을 들렀다. 변기 속에는 죽은 구더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제3묘원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봉고차에 탔을 때 50대 후반 (혹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낙네가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녀와 함께 봉고차에 올랐다. 퍼머 머리에 찌든 얼굴, 갈라진 두툼한 입술, 넓적한 코, 초점이 흐린 눈동자, 검게 탄 피부, 가는 몸매, 흰 반팔 남방, 갈색 면바지, 굽 없는 흰 샌들을 신은 촌부였다. “앞에 타세요.” 운전사가 말했다. 50대로 보이는 기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한열 李漢烈이 어머니에요.” 나는 좌석 앞으로 옮아갔다. 여인이 힘없이 인사를 했다. “묘지 다녀가세요?” 나는 “한열이 선뱁니다. 연세 대학교 선배예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학교 보내면 뭘해요. 이렇게 돼 버렸는데.” 여인은 말했다. “이따금 이곳에 다녀갑니다.” 늙고 지친 얼굴이었다. 퍼머 머리의 절반이 백발이었다. “한열이 누이의 딸이예요.” 봉고차는 그녀와 나만을 싣고 달렸다. “시내로 곧장 들어갈랍니다. 오늘은 퇴근하는 길이에요.” 기사가 말했다. 3거리에 차가 닿았을 때 서너명의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소리쳤다. “묘지갑시다!” “이런, 난 시내로 퇴근하려 했는데…” 기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저희가 내리지요. 저들을 태워주세요.” 나와 한열이 어머니는 내렸다. 봉고차는 또 다시 묘지로 갔다. 우리는 25번을 기다렸다. 내가 가게에 들어가 음료수 캔 세 개를 샀을 때 버스가 왔고 나는 스트로 도 받지 못하고 허둥지둥 버스로 올랐다.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여인이 있는 곳을 갔다. “이것 드세요.”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캔을 내밀었다. 고맙다고 했다. 나도 말이 없었고 여인도 침묵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 누군가 건드려도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햇빛에 검게 탄 촌부. 치산동에 산다고 했다. 버스가 서방시장에 섰을 때 한열이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시라고, 나는 손녀딸의 손을 한번 잡아 주었다. 그들이 내렸고 버스문이 닫혔다. 갑자기 창 밖에서 한열이 어머니가 난처한 얼굴로 소리쳤다. 버스는 떠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 소년이 승강구 부분에서 무엇인가 주워 창 밖으로 던졌다. 흰색 맥고모자를 썼던 한열이 조카의 앙징맞은 고동색 샌들 한 짝이었다.
버스는 달렸고 나는 금남로 입구에서 내렸다.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무등은 구름 속에서 솟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걸었다. 어깨에 둘러멘 가방이 대리석처럼 무거웠다. ‘충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가방을 던졌다. 커튼은 햇빛에 바랜 핏빛이었다. “1년 전이지요. 7월 5일이에요. 3남매 중 큰 아들이지요.” 한열이 어머니는 한숨을 토하듯, 그러나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멋 모르고 캔만 빨아먹는 어린 손녀딸의 손을 힘들여 쥐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니의 뒷모습과 너무 흡사했고, 그것은 감상 感傷도 계시 啓示도 아니었다. 망월동 공원묘지 제3 묘원은 찌는 듯이 무더웠고 그것은 고의적인 형벌 같았다. 나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묵묵히 묘원의 인상만 자신 없이 기억 속에 집어 넣었다. 광주의 충장로와 금남로 교차로에 있는 이곳 ‘충금’다방에서 광주와의 첫 만남을 적는다.
3-3: 무진 霧津으로 (8/4/1988, 목)
황지우 형은 집에 없었다. 그는 2,3일 전 문득 단식하러 들어간다고 말하고 주인집을 나갔다고 한다. 5일쯤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했다 한다. 광주의 태양은 샛노란 빛이었다. 송수권 宋秀權 씨에 연락을 넣을까 하다가 생각을 거두고 광주역으로 갔다. 문득 순천이 눈에 들어왔고 김승옥 金承鈺 과 김현 생각이 났다. 열차는 0시에 있었다. 셈을 해보았다. 결론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이었고 밤 8시에 광주발 순천행 직행 버스에 올랐다. 순천은 나에게 무엇인가. 안개와 병든 지성의 도시, 부패하고 끈끈한 항구, 그리로 가기 위해 나는 광주를 떠난다. 4시간 만에 나는 광주를 도망치고 있다. 유령의 도시 광주, 그러나 화산의 도시 광주여, 잘 있거라. 소금의 도시 순천을 향해 무작정 나는 떠난다. 망월동 묘역만을 둘러본 것으로 나의 유적지 순례는 끝을 낸 것인가. 금남로의 몇 구역을 걸었던 기억만으로 나는 광주를 기억할 수 있을까. 때묻은 낡은 간판들이 비닐처럼 흘러내리는 상점들을 지나, 조선대의 소금기둥 같은 거대한 석조를 지니, 검푸른 은행나무 가로를 지나, 안경집 유리창에 걸린 저 커다랗고 둥근, 놀란 두 개의 눈동자를 노려보면서, 남자들보다 여인들이 몇 배나 많은 더러운 골목을 비껴가며, 무등의 권태로운 잔등 아래로 외곽을 벗어나는 버스 안에서 돌아본 광주는 어두워지며 밀려드는 는개[안개?] 속에서 땅속 아득히 꺼져가고 있다. 아무도 몰래 틈입해 한 아낙네를 만나고 밀사 密使처럼 혹은 무숙자 無宿者처럼 이 도시에서 도망치고 있다. 산 바로 밑까지 밀고 들어간 짙푸른 논을 지나 이 버스는 순천으로 가고 있다. 나 태어나 한 번도 사진조차 구경 못한 도시 순천으로, 막막한 절망과 음습한 권태가 안개처럼 부두와 상점과 낡은 건물들을 감싸고 있을 도시로 나는 잠시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아니다. 나는 광주에서 그 이상한 청년을 만난 것이다. 어쩌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역사를 만나고, 그 역사의 허망함에 눈뜨고, 지상을 떠난 청년들이 묘역에 잠들어 있다. 나는 무엇인가. 가증스러운 냉담자인가, 나에게 있어 국토란 무엇인가.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 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 지금 이곳의 나는 무엇인가. 너 형이상학자, 흙 뒤에 떠서 걸어 다니는 성자여. 어두워진다. 나의 희망은 좀더 넓은 땅을 갖고 싶다. 이 게으른 손들.
순천으로 가는 국도는 울창한 숲이다. 어둠 속으로 원추리 꽃들이 지나간다. 먼 산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은 구정물처럼, 폭풍을 기다리며 공포에 질린 빛깔이다. 순천에 도착하면 어쩌면 나는 사나운 빗줄기를 만날 것 같다.
밤 8시 50분. 차창에 빗방울 튕기기 시작하다. 소낙비 들이치다. 여행을 떠난 후 순천행 남도길에서 처음으로 비를 만난다. 예감은 어김없었다.
밤 9시 25분. 이 서늘하고 캄캄한 순천행을 나는 오래도록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비는 그쳤고 밖은 칠흑처럼 어둡다. 마주 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들만이 유일하게 움직인다. 운전기사가 이 어둠 속에서 몇 번이나 위험한 추월을 하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속력이 나는 조금 두렵다. 멀리 불빛 몇 점이 보인다. 순천이다. 나는 내리고 이 차는 여수로 갈 것이다.
3-4: 물고기들은 순천에서 썩는다 (8/4/1988, 목)
‘어서 오십시오. 살기 좋은 순천입니다.’
표지판을 지나 버스는 밤 9시 40분 순천에 멎는다.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가면서 운전기사에게 바다를 물어보았다. 가장 가까운 바다가 5km, 전망 좋은 여천바다가 15km이며 이 시간에는 택시 대절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손쉽게 순천바다는 포기하였다. 도시 가득 소금기 섞인 해풍이 군림하고 있다. 예상보다 규모가 크고 번화한 도시였으나 네온사인을 켠 건물들이 거의 없었다. 검고 낮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삐죽삐죽 솟은 가운데 무슨 여관의 간판들만 허공 간간히 빛을 발하고 있어 그로데스크 한 느낌을 주었다. 벌써 손끝에 끈끈한 자국이 있다. 역으로 가서 새벽 2시 30분 발 부산행 통일호표를 샀다. 이미 자리는 없고 입석으로라도 가야 했다. 순천에서의 일박은 의미가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약 4시간. 그 시간은 순천에 대한 나의 이상한 애정을 충분히 보상할 것이다. 나는 역 부근 식당에서 백반을 먹으며, 다짐을 입 속에서 우물거렸다. 창 밖으로는 시장통이다. ‘해동 다방 2층, 마담과 여급 두엇이 무료하게 TV를 보고 있다. 그렇다. 순천은 나에게 음습한 도시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서 내리니 개천이 흐르고 있다. 순천 시내를 길게 가로지르고 있는 개천 위로 검고 길다란 콘크리트 다리 풍덕교가 놓여 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근처 수산물 창고에서 물고기 썩는 냄새들이 풍겨온다. 사내들은 런닝셔츠 바람으로 검은 바지를 입고 불량하게 아스팔트 위를 어슬렁거린다. 소금기가 가득하다. 하천 밑으로 내려가 흐르는 검은 물을 본다. 멀리 불빛들이 물위에 길게 몸집을 늘이고 공지 천변에는 몇 개의 텐트가 쳐 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무뚝뚝하다. 경관 헌 명이 청과물 상점 가판대 위에 앉아 하품을 한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유독 많다. 그렇다. 건물들은 모두 다 숨어있다. 낮고 고집스러운 단단한 건물들이 불을 끄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어둡다. 끈끈한 바람들이 허공에서 뒤엉키고 불을 켠 건물들은 거개가 여관일 뿐이다. 내게 주어진 짧은 순천의 야경은 쓸쓸하고 부랑자의 그것이었다. 누구든지 몇 달만 이곳에서 산다면 쉽게 권태와 체념에 길들여진 욕망을 체질 속에 받아들일 것이다. 불만으로 가득 차 보이는 눈동자들, 무릎까지 바지를 걷고 다니는 사내들의 느릿한 보행. 이 도시는 짧은 시간의 여행자에겐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는 것이다. 사내들은 두서넛씩 모여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으마 가까이 가도 무슨 내용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말하는 사내들. 흐릿한 하늘엔 한 점의 별도 보이지 않는다. ‘해동’다방 2층, 이젠 일어서자. 풀기 묻은 바람이 횡행하는 거리로 나는 나갈 것이다. 나는 이 도시를 내 몸의 일부분처럼 느낀다.
4-1: 부산에서 (8/5/1988, 금)
거진 거렁뱅이가 다 되었다. 옷은 남루하고 더러웠으며 육체는 제멋대로였다. 순천에서의 깊은 밤 탑승, 부산까지의 객차는 지저분했다. 땀냄새와 젖은 옷 냄새, 오랫동안 닦지 않은 손발이 부패하는 냄새로 가득했고 새벽 2시반 부터 7시까지 나는 궤짝처럼 객실바닥 한 귀퉁이에 처박혀 헐떡였다. 창 밖에는 캄캄한 소음밖에 없었고 하동, 진주, 마산, 삼랑진 등 이름만 낯익은 고장들이 스쳐갔다. 팔과 다리, 허리, 목, 엉덩이들은 조그만 자세를 바꿔도, 조금만 자세를 고정시켜도 비명을 질러댔다. 고개를 숙이고 잠을 여러 번 청했지만 그것도 내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너, 피곤에 지친 탐미주의자여. 이것도 형벌이다, 소리쳤지만 고통은 마찬가지였다. 불편으로 아우성치는 머리 속으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부산에 닿았을 때 나는 오래되어 굳은 먼지들을 닦아낸 손수건처럼 더러웠다.
부산. 나는 왜 이곳에 또 왔던가. 너무 많이 온 곳. 활기찬 곳, 이곳에선 사소한 절망을 과시할 수 없다. 이 도시는 탐미적 딜레탕트들을 경멸한다. 힘으로, 건강함으로 들끓는 도시.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추악한 방랑자의 모습을 하고 해운대로 갔다. 아침 해운대에는 벌써부터 피서객들에 의해 침범 당하고 있었다. 하의를 걷어 부치고 해변을 걸었다.
8시의 햇빛은 벌써 뜨거웠고 나처럼 아무런 목적도, 즐거움도, 그리움도 없이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 송정 송정 의 달맞이꽃을 보러 갈 예정이었으나 눈꺼풀이 너무도 무거웠고 비참했다. 택시를 타고 번화가인 충무로를 향했다. 가까운 목욕탕에 들어갔다. 동물처럼 깊은 잠에 떨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의 깜짝깜짝하는 잠만 몇 차례 나를 도와주었고 나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이윤택 이윤택 형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했으나 그만두었으며 태종대 바위로 가리라던 계획도 물거품처럼 터졌다. 지갑에 남은 수표 한 장을 환전하여 나는 천천히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결국 부산에도 비는 오지 않았다. 이곳은 레스토랑 ‘황태자’. 나는 지친 거지의 모습이다.
4-2: 신 神 이 아닌 자의 집 (8/5/1988, 금)
검은 새 흰 새 난다. 강 옆의 마을, 해는 뉘엿뉘엿 지고 새들은 물위를 걸어 다니다 옥수수 밭으로도 날아온다. 작은 쇠배들이 지나가고 강물들은 황금빛 태양의 부스러기들을 마음대로 흘리고 있다. 강 옆의 마을, 흰 수건을 쓴 중년 아낙네가 허리쯤 차오르는 갈대밭을 헤치면 가고 있고,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낙동강이다. 강 건너 마을 뒷산엔 무덤들과 나무들이 섞여있다. 사과나무 잎새들이 잠시 햇살을 묻히고 흘려버린다. 모래톱 부근에 떠 있는 포크레인으로도 새들은 날아간다. 혼자 떨어져 사색에 잠긴 목이 긴 새들도 많다. 먼 들판에서 흰 연기가 솟아 강물 위를 흘러가고 사내들은 내의를 벗고 물 속으로 갔다. 산들은 지는 해의 빛 속에서 흰 먼지덩어리처럼 솟아있는데 기차는 달리고 있다. ‘유천’이라는 작은 간이역을 지난다. 흰 자갈밭, 얕은 강물, 원족 나온 행락객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눈물겹다.
산에는 무덤이 너무 많다. 죽은 자들은 국토 國土에 깊다. 살기 좋은 낙동강변 마을이다. 수면도 아니고, 몽상도, 명상도 아닌 가수 假睡 의 상태가 1시간 이상 흘렀다. 밤 10시, 열차는 이미 대전을 지났다.
나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상들을 향해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물 밑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다시 너절하게 떠오르리라. 그렇다면 너 지친 탐미주의자여, 희망이 보이던가. 귀로에서 희망을 품고 걷는 자 있었던가? 그것은 관념이다. 따라서 미묘한 흐름이다. 변화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의 힘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 神이 아니다. 차창 밖 국도에 붉은 꼬리등을 켠 화물트럭들이 달린다.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일생 一生의 일가 一家를 이루고 있다.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 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떠다니고 있는가를.
영등포 역에 내리다. 밤 11시. 또 다시 움직이는 세계. 낮게 소리 없이 서울에 섞여 든다. 축복의 나날들이 내 스스로 피워내기 위하여, 모든 가식과 허위를 버리고, 이 짧은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서울에서 나는 멎는다.
* 이 글은 ‘1988년 8월 2일 (화요일) 저녁 5시부터 8월 5일 (금요일) 밤 11시까지 3박4일 간의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메모가 적혀있는 노트의 전문이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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