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그 동안 말기 암 환자들을 돌봐드리면서 겪었던 일들입니다.평범한 우리 이웃과 가족들이 말기 암의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임종 준지를 잘하고 가는 모습들과, 화해와 용서, 가족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가는 환자 분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사람들이 호스피스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고, 또한 말기 암 환자들에게 편안한 선종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이끼를 기원합니다.
성모꽃마을 박창환(가밀로)신부/성모꽃마을 원장
책을 내면서
호스피스에 대한 관심과 희망을
“아들놈 첫 휴가 나올 때까지 한 달만 더 살았으면…”
마흔다섯, 대장암 말기환자의 절규입니다.
“큰 아들놈 장가갈 때까지 두 달만 더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쉰다섯, 위암 말기환자의 기도입니다.
첫 번째 환자의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두 번째 환자의 소원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매년 11만 명이 암에 걸려서 그 해에 약 6만4000명이 사망하는데 그 가운데 편안한 죽음,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불과 5% 이내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엄청난 암 통증과 증상들 예컨대 구토, 불면증, 변비, 가래, 부종 등에 시달리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죽고 싶은가 하고 물으면 흔히들 ‘자다가 죽고 싶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죽을 때 고통 받지 않고 자는 것처럼 편안하게 죽고 싶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실 모두의 바람이 그러한 것처럼 가장 행복한 죽음은 마지막까지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작별인사를 들으며,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진 가운데 편안하게 임종을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인간답고 품위 있는 행복한 죽음이요, 준비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성모꽃마을에서 임종하신 많은 분들이 이러한 죽음을 맞이하셨는데 이렇게 되도록 도와드리는 것을 호스피스라고 합니다.
제가 처음 호스피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제가 된 후 첫 본당에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할머니 한 분을 돌봐드리게 되었는데 이 할머니는 자궁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자신은 호적에서나 자식이지 차라리 업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오랜 전에 발길을 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서류상 걸림돌이 되어 꽃동네 같은 무의탁 구호시설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지독한 냄새와 통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글할 길 이 없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할머니를 위해서는 그 누구도 도움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도 포기한 환자, 더 이상 의학적으로 도와줄 것도 없고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 것이 말기환자라는 사실에 기가 막힐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를 찾아갔을 때 할머니께서는 솜이불을 한번 덮어 보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스펀지로 된 요와 솜이불을 사다 드렸는데 할머니는 하루 밤을 깔고 덮어보시고는 그 이튿날 돌아가셨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호스피스에 관심을 갖고, 말기 암 환자를 위한 시설을 하기로 마음먹으면서 6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친 끝에 지금의 성모꽃마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현실은 지금까지도 호스피스에 대해 정부의 관심이 미비한 실정이고 대다수 많은 말기 암 환자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이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명 중에 한 명이 암으로 사망한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결코 남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내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모두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말기 암 환자들의 통증과 편안한 선종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며 호스피스 제도가 입법화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그 동안 말기 암 환자들을 돌봐드리면서 겪었던 일들입니다. 평범한 우리 이웃과 가족들이 말기 암의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임종 준지를 잘하고 가는 모습들, 화해와 용서, 가족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가는 환자 분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사람들이 호스피스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고, 또한 말기 암 환자들에게 편안한 선종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 책을 성모꽃마을에서 선종하신 분들과 가족들에게 바치며, 이 책이 엮어지도록 큰 도움을 주신 김일영 교수님과 사진작가 배영준 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도움을 청하는 손을 뿌리치지 말고 도와줄 힘만 있으면 망설이지 말아라” (잠언 3, 27)
박창환(가밀로)신부/성모꽃마을 원장
성모꽃마을 기도
생명과 부활의 주인이시며
모든 앓는 이의 위로자 이신 주님!
지금 이 순간에도
질병의 고통과 임종을 앞두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치유의 손길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사랑의 숨결로 그들의 선종을
평화로이 이끌어주소서.
피 흐르는 상처를 손수 싸매주시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신 주님을 본받아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눔으로써
주님을 따르고자 사랑으로 모인
성모꽃마을 회원들에게 축복하시고
저희들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들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1……..
이 목 좀 따줘!
이 목 좀 따줘!
“거기 가면 사이다 먹을 수 있어? 나는 사이다밖에 못 먹어!”
꽃마을로 가기 위해 할머니를 등에 업고 대문 밖을 나설 때 하신 말씀입니다. 한줌밖에 안 되는 육신을 부지하기 위해 1년을 넘게 사이다만 드시고 사신 할머니. 올해 연세가 94세입니다.
며칠 전 아는 복지사로부터 위암에 걸린 할머니가 계신데 한번 방문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찾아간 것이 할머니와의 첫 만남입니다. 꺼져가는 육신을 데우기는 연세가 너무 많았음인지 몸에 온기라고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보일러 불을 45까지 올려 놓아 방안은 사우나 실을 방불케 했습니다. 먼저 인사를 드렸습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꽃마을에서 온 박 신부예요.”
“응? 신부님이 왔구먼. 나도 왕년엔 성당에 다니면서 활동도 많이 했어.”
그리 큰 소리로 말할 것도 아닌데 단번에 알아들으시더니 자신의 지나온 삶을 죽 늘어놓으셨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한 50~60년 전쯤,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은 물론이고 사목임원으로(성당간부직) 30년간이나 활동을 했어. 그 당시에…”
실타래를 풀어놓듯 모처럼 들어주는 사람이 생겨서 그런지 물어 보지도 않은 말을 혼자서 신나게 하셨습니다. 같이 갔던 사람들은 할머니가 년도와 이름까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을 보면서 그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어떻게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세요?”
“응! 나도 모르갔어. 나도 머리가 너무 맑아서 죽갔어. 머리가 좀 희미해졌으면 좋갔어.”
할머니는 그 비상한 기억력 때문에 지금도 분하고 원통해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친척이 있었지만 40년 넘게 이곳에 방치해 둔 채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30년 전쯤 어느 요양시설에 들어갔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나를 묶어서 때렸는데 바로 이 끈이라면서 박스에서 매듭이 지어진 치마끈 같은 것을 찾아내 보여주며
“아주아주 나쁜 놈들.”
이라고 울분을 토해냈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할머니가 이승에서 풀고 가야 할 숙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그 해결책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이 머리가 희미했으면 좋갔어. 그럼 다 잊을 수 있는디.”
하며 차라리 자신의 기억력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열을 식히려는지 할머니는 사이다를 병째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꽃 마을에 들어오신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할머니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여기 아픈 데는 좀 어떠세요?”
“응! 아픈 거는 덜한데 집에 갔으면 좋갔어!”
“왜 여기가 불편하세요? 봉사자들이 잘 못 해줘요?”
“아니야. 여기 있으면 지랄 육갑을 못 떨어 죽갔어!”
“아니 지랄 육갑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응! 집에 있을 때, 답답할 때는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하며서 소리소리 지르고 욕을 해댔는데 여기서는 마대로 못해. 그게 지랄 육갑이야.”
“그럼 여기서도 맘놓고 하세요.”
“아니 그럼 못써. 사람이 체면을 지켜야지.”
그 동안 분노를 지랄 육갑으로 해결해왔는데 여기서는 체면을 지키려고 참아야 하니 속이 답답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신부님! 나 이 목 좀 따줘! 칼 있으면 확 따줬으면 좋갔어.” 하면서 자신의 목을 잡아당겼습니다.
“정말이세요, 할머니? 그럼 제가 도와 드릴께요!”
“뭘 도와줘?
“부엌칼이 있는데 갖다 드릴까요?”
“그려. 얼른 갖다 줘.”
“대신 갖다 드리면 할머니가 직접 따셔야 돼요.”
“그건 안 돼. 그럼 자살하는 거잖아! 그리고 자살하면 다른 사람들을 귀찮게 해.”
“그렇다고 제가 해주면 살인이 되잖아요?”
“그건 그렇구만. 휴….! 산다는 것이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목을 쥐어뜯으며) 이게 안 끊어져. 얼른 끊어졌으면 좋갔는디. 잠이나 실컷 자다 죽었으면…..”
“할머니 제가 기도해드릴게요. 할머니 소원이 이루어지게요.”
며칠 후 할머니가 그 좋아하던 사이다를 잘 못 드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오늘 아침부터 상태가 안 좋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저녁 무렵부터 의식도 점점 희미해지시더니 계속 잠만 주무셨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의식이 없는 상태고 잠만 주무시더니 끝내는 깨어나지 못 하시고 그대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마도 그 일주일이 할머니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미움도 고통도 잊은 채 잠이나 실컷 자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이루어졌으니, 희망하는 것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룻밤만이라도 지상(地上)에서
육종암에 걸려 죽음을 얼마 앞둔 19살 소녀가 의사를 붙잡고 하소연했습니다.
“응급실이라도 좋으니 지상에서 하룻밤만이라도 더 지내게 해주세요.”
그러나 더 이상 이 아이를 위해 병원에서는 치료해줄 게 없다는 말고 아무도 해줄 게 없는 환자를 응급실에 둘 수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해 들을 뿐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절망감에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 오른쪽 어깨 위 두 주먹만한 암 덩어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딱지와 진물은 아이로 하여금 매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아이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또 다시 지하 단칸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모처럼 주위의 권유와 도움으로 병원에 오게 되었을 때 이 아이를 들뜨게 했던 것은 기침과 암 통증을 치료하는 것보다도 따사로운 햇살과 막은 공기였습니다. 비록 병원 한구석의 응급실에서라도 맑은 하늘을 실컷 볼 수 있고 시원한 공기를 맘껏 마실 수만 있다면 심한 기침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기대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이 아이의 작은 바램은 손익을 따져야 하는 사회의 비정함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딱한 모습이 병원 원목실 수녀님 눈에 띄어 꽃마을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빠 등에 업혀 숨을 헐떡이며 들어오는 아이. 이제 갓 피어나는 꽃봉오리마냥 앳되고 맑은 그런 아이였습니다. 전도사로 조그마한 개척교회를 이끌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2남 3년 중 막내로 귀여움을 한 몸에 받던 아이였습니다. 어머니가 신도들과 예배를 드릴 때 피아노 반주를 하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던 아이, 자기의 아픈 모습을 남의 눈에 보이지 않으려 친구가 올 때면 옷을 잔뜩 껴입고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웃어 보이며 오히려 남을 배려해주는 사려 깊은 아이였습니다. 학생 때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모님께 선물도 드리고 이 다음에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바램이라며 조그마한 소망을 밝히기도 했던 꿈 많은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신을 차리지 못 할 정도로 심한 기침과 오른쪽 어깨 위에서 짓누르는 암 덩어리 때문에 팔이 저려 잠시도 누군가가 주무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짙게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했는지 하루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 사람이 죽을 때는 어떨까요?”
“왜 죽는 게 두렵니?”
“아니요. 두렵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죽을 때 힘들까 봐 그게 무서워요.”
아마도 친척이나 조상 중에 누군가 힘들게 임종을 맞이하는 것을 본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알기로 사람이 죽을 때는 그렇게 힘든 게 아니라고 한단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올 때는 순간적이란다. 자기의 영혼이 육체에서 1m 정도 높이 위에 떠서 자기의 육신을 바라보는데 주변에 누가 무엇을 하는지 다 보고 느낄 수가 있단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를 벗어버린 그 순간 영혼이 느끼는 상태는 지극히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고 그래. 아마도 육체의 욕망을 벗어버렸기 때문일 거야. 영혼만 남게 되면 육체의 욕망은 사라지고 오로지 영적인 갈망만 남게 되는데 그 영적인 갈망이란 것은 아기가 엄마 품을 그리워하듯 오로지 하느님의 품을 찾으려는 열망만 남게 된다는 거야. 네가 교회에서 하느님을 알고 믿었으니 너같이 준비가 된 죽음이라면 네 영혼은 틀림없이 하느님 품에 안길 것이고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클 거란다. 네가 사랑하는 엄마 아빠, 형제들을 남겨두고 가는 슬픔보다도 더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힘을 내. 그리고 기도 하거라. 죽을 때 두렵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도록. 그리고 나도 네 옆에서 같이 기도해주마.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보았지만 임종하는 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단다. 잘 준비가 되어 있으면 절대로 임종할 때 힘들지 않아. 그건 내가 확실하다고 약속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신부님 말씀을 들으니 죽는 게 하나도 안 무서울 것 같아요.”
“그런데 네 엄마가 전도사님이니까 기도는 많이 했겠구나? 지금도 기도 많이 하니?”
“예.”
“그래 무슨 기도를 했는데?”
“편히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
저는 순간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적어도 이런 상황이라면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건강을 달라고 기도할 법도 한데 이 아이는 이미 죽음을 초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그 고통이 얼마나 힘겨웠으면 저런 기도가 나올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다 두려움에 떨고 무섭기 마련인데….
5분 아르바이트와 마지막 선물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무렵,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의 일입니다.
“신부님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살고 싶어요. 부모님께 속만 썩여 드리고 효도도 한번 제대로 못 했는데, 게다가 부모님보다 먼저 죽으니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잖아요.”
“그래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사실이란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해볼까? 조금이라도 덜 속상하게 뭔가 의미 있는 마지막 선물을 준비하는 거야. 선물에 네 마음을 담아서 드리면 부모님이 평생 그 마음을 간직할 수 있고, 네 마음이 부모님 마음 안에 살아 있게 되니까 덜 속상하시겠지? 어떠니?”
“좋아요. 그런데 제가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 있겠어요. 저는 가진 돈도 없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너 아르바이트 해본 적 있다고 했지? 네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니까 나를 위해서 5분 동안만 기도하는 거야. 그럼 내가 1분에 만 원씩 쳐줄게.”
“그래도 되겠어요?”
“그럼! 시간이 내일까지다. 추석이 내일 모레니까 서둘러야 돼.”
이 아이는 부모님께 마지막 선물을 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심한 기침을 하면서도 다음날 아침까지 5분 동안 기도를 바쳤습니다.
약속대로 5만 원을 주고 아이는 저녁 무렵 엄마 아빠의 등에 업혀 봉고차를 얻어 타고는 마지막 선물을 준비하러 나갔습니다. 저녁 늦게 도착한 부모와 아이는 싱글벙글 좋아하면서 예쁜 생활한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장면 냄새도 나는 것이 중국집에 가서 맛있게 외식을 하고 온 모양입니다. 아이가 잠이 든 후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옷을 사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딸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이라며 엄마 아빠에게 마지막 효도 선물을 하고 싶으니 같이 나가자고 했습니다. 상황을 알아차린 부부는 아이와 함께 차를 끌고 나갔습니다. 이왕이면 평생을 간직하며 아이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으나 5만원 가지고는 살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길거리에서 생활한복을 파는 곳을 발견했는데 저거다 싶어 아저씨에게 가서 값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벌에 5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진 돈이 없으니 5만 원에 두 벌을 주면 안 되느냐고 사정을 해보았지만 손해를 보고 줄 수는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이 광경을 딸 아이가 차에서 보고 있었나 봅니다. 기다시피 혼자 차에서 내려와 아저씨에게 웃옷을 벗어 암 덩어리를 보여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저씨 저는 19살인데 육종암에 걸려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죽는대요. 이 돈 5만 원은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인데 죽기 전에 부모님께 마지막 효도 선물을 하고 싶은데 아저씨가 저를 불쌍하게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세요.”
잦은 기침과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던 아저씨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습니다. 피딱지가 달라붙은 암 덩어리에, 연신 진물이 흘러내리는 오른쪽 어깨를 바라보는 아저씨도 기가 막혔는지
“나도 너만한 딸이 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니. 그래 너를 봐서라도 5만 원에 두 벌을 줄게. 부모님께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용기를 내거라.”
하며 선뜻 두 벌을 주었습니다.
말을 마친 아이 엄마는 이런 결심을 들려주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이 옷을 추석 때만 꺼내 입을 겁니다. 아주 오래도록 입어야 하니까요. 아껴두었다가 추석 때만 꺼내 입으며 아이를 기억할 겁니다.”
눈물을 흘리며 옷을 개는 엄마는 혹 여라도 옷에 때가 묻을까 봐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마지막 효도 선물이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며칠 후 점점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통증이 점점 심해졌고 잠시도 제대로 눕지를 못했습니다. 가슴에서 불이 나는지 답답하다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자꾸 창문을 열어달라고 했습니다. 오른쪽 어깨 위 암 덩어리가 두 됫박만하게 커졌을 때 목 이곳 저곳에도 달걀만한 혹(암)이 생겼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암이 퍼지는 속도도 빨랐습니다. 팔이 저리고 아파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엄마가 아이의 팔을 주물러주었는데, 엄마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 딸 아이가 엄마를 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울지 마. 어차피 사람은 한번은 죽는 거잖아… 엄마가 울면 내가 더 힘들어… 이 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면 되잖아… 그러니 울지 마. 그리고 신부님께 너무 미안해하지 마… 며칠만 있으면 돼…..”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경우 환자들은 곧잘 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내뱉듯 말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비슷하게 들어맞았습니다. 과연 3일 후 급속도로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임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엄마…. 사랑해! 아빠도! 모두 고마웠어요.”
아직 맑은 정신이 남아 있을 때 힘을 다해 작별인사를 고했습니다.
한 시간 후 혼수상태가 되면서 천천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헐떡이던 입술은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듯 편안한 모습입니다. 죽을 때 힘들까 봐 무섭다던, 그래서 편안한 임종이 되기를 기도했던 바램이 이루어졌는지 정말로 잠을 자듯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아마도 낮게 오열하는 엄마 아빠를 뒤로하고, 천국에서 만날 날을 약속하며 천사가 되어 하느님의 품으로 달려갔을 겁니다.
씹떡 같은 놈!
“씹떡 같은 놈.”
대장암 말기로 처음 성모꽃마을에 입원하던 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 데 대한 보답의 소리였습니다.
‘엉! 무슨 같은 놈?’
깜짝 놀라서 나 말고 뒤에 누가 또 있나 둘러보았는데 분명 나 혼자였습니다.
“지금 저보고 욕한 소리예요?”
“염병할, 그럼 너밖에 더 있어?”
하고 말하는 눈에서는 잡아먹을 듯한 독기가 똑똑 떨어졌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히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더니 진짜 ‘허허!’ 하고 웃음밖에 안 나왔습니다. 그 후로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욕을 먹고 나오는데 세상에!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욕들을 어떻게 그리 유효적절하게 잘도 써먹을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나도 이런 욕을 먹고 수모를 당할진대 봉사자들은 그야말로 이 환자의 밥(?)이었습니다.
병이 든 후로 청주에 있는 병원이나 의원은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원하기 위해서. 그러나 가는 곳마다 쫓겨났으니… 이유는 의사고 간호사고 걸리는 사람마다 마구 욕을 해대는데 누가 그 꼴을 받아주겠습니까? 친척들조차 옆에 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눈에 띄면 오지 말라고 욕을 해댑니다. 그야말로 세상에 대한 한(佷)과 원망, 저주로 똘똘 뭉친 집합체였습니다. 대장안과 장천공(대장이 녹으면서 뱃가죽에 들러붙어 구멍이 뚤림)으로 인해 대변은 항문으로, 배로 쉴 새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냄새란…?
남묘호랭갯교(일련정종, 일본식 변형불교) 신자였던 이 환자는 평탄치 못한 가정생활로 이십 대 초 결혼하였으나 지독히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임신을 하여 아기를 낳으려고 제왕절개수술을 하다가 사고로 아기는 죽고 다시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어미니와 남편의 갖은 구박으로 쫓겨난 다음 두 번째 배우자를 만났으나 얼마 안 가서 역시 파탄이 났고, 세 번째 배우자를 만났는데 이번엔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네 번째 남자는 시댁의 구박으로 할 수 없이 헤어졌던 전 남편과 미래를 꿈꾸며 재결합을 했으나 이 남편 역시 몇 달 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이 환자 역시 대장암에 걸렸고 그 후로 5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원망과 사람들에 대한 불신, 자신의 태어남과 불행했던 삶을 저주하고 그것을 욕으로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환자의 뱃속에 있는 종양 덩어리는 미움과 분노의 결정체인 것 같았고 흘러내리는 배설물은 한 많은 생의 눈물같이 느껴졌습니다.
성모꽃마을에 와서도 일체 사람들을 거부했고 그 많은 욕을 하면서도 유일하게 고맙다는 말을 할 때는 방에서 사람들이 나가줄 때였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어두워도 불을 켜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저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이었고 통증이 와도 약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으면서 오히려 고통을 통해 자신의 한을 삭히려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봉사자들은 주님께 이 자매의 마음속에 가득 찬 한과 미운 마음을 녹여 없애주실 수 있도록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화살기도를 바쳤습니다. 또한 환자가 어떤 욕을 하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절대 내색하지 말도록 했습니다. 모두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길 15일 정도 지났을 때 한 가지 심리요법을 썼습니다.
여느 때처럼 방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자 벌써 인상이 굳어집니다. ‘저 인간 왜 왔나’하는 투입니다. 그때까지 내 명칭은 아저씨였습니다.
“어디 불편한 것은 없으세요? 식사는 했어요?”
하고 연거푸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 시팔! 저리 가유! 귀찮어유!”
하고 도끼눈을 한 채 빽 소리를 치며 욕을 해댔습니다. 그래도
“왜 뭐가 맘에 안 들어요? 변은 잘 나와요?”
하고 물으니
“아이 조-ㅈ 까-ㅌ 네. 귀찮다니까 빨리 가유!”
하고 소리치며 욕을 합니다. 이때다 싶어 나도 할 수 있는 한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뭐? 시팔? 이 시팔! 나는 욕을 할 줄 몰라서 못 하나? 왜 말끝마다 욕을 하고 지랄해.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것 있어? 잘해주는 것도 죄야? 집에 보내줄까? 이 시팔! 구걸하다가 안 아프게 해주고, 밥 먹여주니까 되레 큰소리를 쳐?”
하고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이때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듯하더니 금세 목소리가 수그러듭니다.
“아니 이봐유. 내가 지금 피곤해서 잠을 잘려고 하니깐 그렇지유.”
“아니 잠을 잘려면 자고 싶다고 하면 되지. 욕은 왜 해? 내가 당신 동생이야? 응?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욕하는 게 끝이 없어! 다시는 욕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하고 윽박지르자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립니다. 쉬울 리가 있겠죠. 평생을 하던 짓이니.
봉사자가 일껏 똥 닦아주고 옷 갈아 입히고 가면 돌아서서
“저 년이 늦게 온다. 나쁜 년이다.”
하고 다른 봉사자에게 욕을 했던 사람입니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것이 사람 심리인가? 그 후로 몇 번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욕하는 횟수나 강도가 약해져 갔습니다. 그러고는 언젠가부터 곧잘 ‘고마워유!’를 연발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처음 상태에 비한다면 지금은 천사표 같았습니다. 조건 없이 잘해줘서 그런지 몰라도
“집에 가고 싶어요?”
하고 물으면 안 간다고 잘라 말합니다.
27일 정도 되었을 때 반조(返照)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반조현상은 지병을 오랫동안 앓던 사람이나 이 같은 환자들이 죽기 하루나 이틀 전에 기력이 회복되는 듯이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기가 오면 이제 병이 나으려나 보다 하고 착각할 정도로 음식을 못 먹던 사람이 음식을 먹고, 기운이 없어서 말도 못하던 사람이 말도 잘 하고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의 변화를 보입니다.
가족들이 이런 광경을 본다면 환자에게
“어서어서 많이 먹고 일어나야 된다.”
고 희망을 주면서 하루나 이틀을 보내게 되는데 사실은 이 시기가 죽음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주시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마지막 은총의 시기이지요.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 불꽃을 환하게 태우고 사그라지는 것처럼 사람도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살라서 생을 정리하고 주변사람들과 작별을 고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생애 최후의 준비시기입니다. 마치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여행준비를 하는 것처럼….
이 환자도 임종 3일 전에 봉사자들이 깜짝 놀랄 만큼 기력이 회복되었습니다. 2시간 동안 박수를 치며 봉사자들과 뽕짝을 메들리로 불렀는데, 지신도 왕년에 한가락했다며 봉사자들에게 뒤질세라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 오오오, 얼싸아 좋아! 얼씨구나 좋다….”
아직도 그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임종 2일 전,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하자 자청해서 세례를 받고 천국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고마웠어유! … 여기가 천국이유…”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봉사자들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하고는 9월 2일 새벽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 많은 생의 눈물 같았던 분비물도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고, 늘 일그러져 있던 얼굴도 이제는 편안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이 하셨어요. 천국에 가서 행복하게 사세요.”
영원히 잠든 얼굴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어려 있었습니다.
정을 떼려고
서울대학병원에서 4달 전에 간암 말기진단을 받고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했지만 치료불가 판정을 받은 사람이 저희 성모꽃마을에 입원을 했습니다. 나이는 39세,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들과 3학년짜리 딸을 가진 아빠였습니다.
병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암 덩어리가 폐, 위까지 전이가 되어 있었고,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는데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보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암이라면 암 센터가 제일 낫겠다 싶어서 국립 암 센터로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입원해 있는 15일 동안에도 통증조절이 제대로 안 되어 잠 한번 제대로 잔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어떤 보호자가 청주에 성모꽃마을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가면 안 아프게 해준다는 얘기를 듣고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꽃마을에 들어오시는 날 보니까 환자의 배는 복수가 차서 임신 13개월 된 것처럼 빵빵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왔기 때문에 밤 9시가 되어서 도착을 했는데 환자를 보니 정신은 말짱한데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어차피 나는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아프지나 않고 있다가 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나는 여기 죽으려고 왔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여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당신 같은 암 환자인데 아파 보이는 사람 있어요?”
하고 물으니 주위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는 환자들을 보더니 안심이 되는 모양입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에는 통증도 없애드리고 약도 전부 공짜고 간호는 물론 먹는 것도 다 공짜로 해드립니다. 당신 부인이 옆에서 지낼 수 있도록 숙식도 공짜로 제공해드릴 테니까 마음 푹 놓고 지내세요. 아셨죠?”
“예, 고맙습니다.”
환자의 인사를 들으며 지금까지 먹던 약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진통제를 드시도록 해놓고는 서류작성 때문에 내 방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병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 환자가 집에 가겠다고 우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한 시간 전에 들어왔는데 집에 가겠다니 뭐가 맘에 안 드나 싶어서 내려가보았습니다.
가서 보니 환자가 하는 말이
“아까 신부님이 놔주신 주사 한 대 맞고 처음엔 기분이 이상하더니 지금은 하나도 안 아파요. 말기 진단을 받고 지금까지 단 하루도 통증 없이 지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하나도 안 아프니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집에 갈려고 합니다.”
아플 때는 죽고만 싶었는데, 통증이 없어지니까 생각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부인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고 주변 사람들이 설득해도 막무가내 였습니다.
그러자 아빠를 끔찍이도 좋아했던 어린 딸이
“아빠 병원에 있을 때는 많이 아팠잖아요. 그냥 여기 있어요! 네? 아빠가 아픈 것 보면 엄마나 오빠나 나도 아빠 보기 힘들어요.”
제법 어른스럽게 설득을 했습니다.
환자가 잠시 주춤하기에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습니다.
“좋습니다. 갈려면 지금 빨리 가십시오. 약 기운 떨어지기 전에 빨리 가셔야 합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약 기운이 없어질 텐데 그때는 또 약을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갈려면 지금 빨리 가세요.”
하고 말했더니 그제서야 아치 싶은가 봅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순간적으로 잘못 생각했나 봐요. 내내 아프다가 통증이 사라지니까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겼나 봐요. 그냥 여기 있게 해주세요.”
그러면서 잠시 후에 잠에 곯아떨어지는데 다음날 아침까지 세상 모르고 잠이 들었습니다. 모처럼 편안하게 잠이 든 남편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부인이 자기 남편의 살아온 과정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자식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등교육만큼은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신 부모님 밑에서 대학까지 졸업을 했습니다. 중학교 때 가출을 해서 부모님 속을 석여드린 적도 있었지만 평소에 순한 성격을 지녔고 남에게 신세를 지고는 못 산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에게도 늘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고요. 그 덕에 건축일을 하면서 한때는 인부를 데리고 일을 할 정도였지만 흑자보다는 적자를 보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신세를 지고는 못 사는 성격 탓인지 돈을 벌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에 있는 돈으로 월급으로 갖다 주다 보니 집안 형편은 늘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왕이면 좀더 크게 돈을 벌기 위해서 한 공사현장에 투자를 했다가 그만 IMF가 터져버렸습니다. 지금까지 투자한 것은 고사하고 일한 월급까지 못 받게 되자 괴로운 나머지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여행을 떠났는데 괴로운 마음에 비가 퍼붓는 강원 산길을 100km 이상 속력을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빗길에서 사고로 죽으면 덜 괴로울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 다음엔 자동차를 끌고 동해 바닷가 벼랑까지 갔답니다. 차를 탄 채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작정을 하고 벼랑까지 쫙 달려가는데 어린 자식들의 얼굴이 눈앞에 확 나타나더랍니다. 그래서 벼랑 끝에 서 가지고는 통곡을 하고 울면서 ‘나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구나. 저 어린 자식들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죽는 것보다도 더 괴롭구나. 차라리 어떻게 해서든 살아봐야겠다.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는가’ 하고 다짐을 하고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죽겠다고 나간 지 일주일만 에 돌아 온 셈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찌나 아찔한 지…
그때부터 공사판 막일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이것저것 돈 되는 거라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동안 속이 많이 상할 때마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 4개월 전부터 남편이 속이 안 좋다고 하면서 혼자 병원에 가끔씩 다녀오곤 했습니다. 병원에 갔다 와서도 그냥 위장병이라고 하면서 약만 먹으면 된다고 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남편은 자신이 간암 말기라는 것을 판정을 받은 뒤였어요. 제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서 충격을 받을까 봐 말을 안 했던 것이죠. 그런데 피를 토하고 헛구역질을 하고 얼굴이 노래지면서 낌새가 이상해서 추궁을 하니까 그제서야 말을 하더라고요.
‘사실 병원에선 간암이라고 하는데 걱정하지 마. 난 살 수 있어. 당신하고 어린 새끼들 두고 나 혼자 갈 것 같아? 걱정하지 마.’ 그때는 정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로 들렸습니다. 뒤늦게 항암치료다 뭐다 해보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다만 죽기 전에 통증이라도 없게 해주려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가 다른 사람의 소개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제 남편 아프지나 않고 있다가 가게 해주세요…… 그런데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어요. 남편과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부싸움 한번 안 할 정도로 저에게 잘해주었지요. 남들 얘기로는 아내에게 끔찍할 정도로 잘해주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매일 우는 저를 오히려 위로해주었고, 내가 없어도 이렇게 살면 돼, 저것은 이렇게 처리하고 이것은 또 이렇게 하고, 하면서 그러게 자상하게 자신이 죽은 다음 살아가야 할 방법까지 다 가르쳐줄 정도로 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꽃마을에 오기 며칠 전부터 그렇게 구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도 못 자게 하고, 쉬지도 못 하게 하고, 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괴롭혔어요. 왜 그렇게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다음날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내를 많이 사랑하시죠?”
“예.”
“그런데 여기 오시기 전부터 많이 구박을 하셨다면서요? 지금까지 잘해주시다가 갑자기 왜 그렇게 구박을 하셨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하긴 오해할 만도 할 거예요. 사실 정을 뗄라고 그랬습니다. 아내가 마음이 너무 착하고 여리기 때문에 나 죽고 나서 많이 울지 말고 독하게 살라고 일부러 그랬습니다.”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는데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남은 시간이라도 마음 아프지 않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시고 일부러 정을 떼지 않아도 잘 살 거니까 잘해주세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시겠죠?”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아내가 저한테 속상한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자기 시누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가 살아 있을 때 언니에게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다면서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여동생 얘기로는, 오빠가 성모꽃마을에 오기로 하고 서류를 준비하는 동안에 자기(여동생)을 부르더니 현금 100만 원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돈이냐고 하니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이 돈을 꼭 서다오, 내가 투병생활을 하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까 좋은 일을 한 기억이라고는 없는 것 같구나. 오로지 앞만 보고 돈을 벌기 위해 뛰기만 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 가서 설 것을 생각하니 내세울게 없단다. 이 100만 원은 집사람이나 자식들에게 꼭 필요한 돈이지만 내가 죽거든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쓰도록 하고 집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라, 고 해서 이 돈을 맡아놨는데 나중에 알면 언니가 속상해할까 봐 미리 얘기를 한다고 하더랍니다. 아내는 순간 그 얘기를 들으며 묘한 심정에 사로잡혔다고 했습니다. 나를 못 믿어서 그런 간가? 나를 주면 다 써버릴 것 같아서 그랬나? 별 생각이 다 들면서 속상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겨 말씀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자매님! 남편이 부인을 못 믿어서 100만 원을 동생에게 맡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편도 집 사정을 뻔히 알 겁니다. 없는 살림에 먹고 살아야지, 자식들 둘을 학교에 보내야지, 병원비 내야지, 비싼 마약 값 들어가야지, 빚도 갚아야지, 아마도 그 돈을 부인에게 줬더라면 그 돈 100만 원 게눈 감추듯이 없어졌을 겁니다. 단 돈 1000원 이 아쉬운 판에 현금 100만 원이면 괘 큰 돈인데 그 돈을 동생에게 맡겨둬야 나보다도 더 어려운 사람을 휘해 쓸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남편의 그 좋은 뜻이 희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겁니다. 결코 남편이 아내를 못 믿어서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남편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두 자녀의 아빠로서 평생을 두고 해야 할 몫을 단 한번에 다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치를 둬야 할 것은 돈을 벌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도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고 도와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요즘처럼 억, 억 하는 시대에 돈 100만 원 우습게 알 수 있겠지만 이 집에서 현금 100만 원이면 전재산과 같은 큰 돈인데 그 돈을 불쌍한 사람을 위해 쓴 것은 아이들에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어떤 일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돈 100만 원보다 훨씬 더 큰 교육을 자식들에게 몸으로 보여줬습니다. 남편의 이 훌륭한 행동을 자식들이 잊지 않도록 오래오래 두고두고 얘기를 해주셔야 돼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남편의 행동을 보고 남편이 세상을 살면서 자식들에게 해줄 몫의 100배를 자식들에게 은총으로 갚아줄 겁니다. 자매님의 아이들 잘 살 겁니다. 남편이야말로 마지막 죽음을 멋있게 장식하는 겁니다.”
“신부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정말 그러네요. 남편이 마지막까지 감동시키고 가네요.”
모처럼 아내의 입에 웃음이 묻어났습니다.
언젠가 말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 때 환자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솔직히 더 살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지금 상태까지 오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다 하나님의 은총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가게 되더라도 자식들이나 내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다 하나님이 마련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아프지 않은 상태에서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는 않겠습니다. 기적이란 것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천주교로 개종하고 싶습니다. 여기 오기 전부터 개종하기로 생각해왔던 거니까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내도 찬성했어요.”
“정 원하시면 세례를 드리겠습니다만 댁의 부인이 교회를 다니고 있고 또 목사님을 불러다가 기도도 받고 싶어하시니까 목사님 오시면 안수기도 받고, 목사님 가고 나면 제가 기도해드리는 것으로 합시다. 둘 다 하죠. 부인 체면도 있으니까요.”
“예. 그렇게 하지요.”
얼마 후부터 말할 기운조차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의식은 있었기 때문에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상태로 봐서 오래 가시지는 않을 것 같아서 어린 자식들이 왔을 때 작별 인사를 하게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맞지를 않았습니다. 낮에 자고 밤에는 깨어 있으니까 자식이 오면 자고 있고, 가면 깨어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식들이 아빠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녹음을 해서 들려주기로 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딸의 작별인사
“아빠 저 00 이에요. 아빠 건강할 때 하고 싶은 얘기 충분히 못해서 지금 할게요. 아빠가 지금 빨리 깨어나서 내 소원 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빠 천국 가서 우리 꼭 지켜보세요. 아니면 지금 일어나서 우리와 행복하게 살아요. 아빠 지금 일어난다면 나 아빠 엄마에게 효도하고 오빠와 안 싸울 자신 있어요. 그러니 빨리 일어나세요. 아빠가 많은 병원들 가 있었을 때 아빠랑 잠자고 싶었고 아빠 엄마 오빠랑 놀러도 가고 싶었고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아빠와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저녁만 되면 우리 가족이 다같이 과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거였어요. 아빠 위해 기도할 테니까 제발 힘 좀 내세요. 아빠 천국 가시더라도 마음 편히 가셔야 해요. 엄마하고 우리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사게요. 아빠 사랑해요.”
녹음을 한 딸아이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알아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아이의 구구절절 한 내용에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 많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기운이 있었을 때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끝까지 남편 노릇, 아빠 노릇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 제일 가슴이 아픕니다.”
딸아이의 간절한 기도와 염원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며칠 후 편안한 선종을 하셨습니다. 막상 임종을 하고 나니까 부인이 하는 말이
“남편이 돌아가시면 많이 슬플 줄 알았는데 이젠 오히려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 모진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이제는 하늘나라 천국에 가셨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됩니다. 죽음 준비를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인생이 완성은 길고 짧음에 있는 것잉 ㅏ니라 ㄱ트맺음을 얼마나 잘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버림받은 남자
“여기까지 따라와준 것만 해도 고맙지! 뭘 더 바래요.”
“당신 남편이잖소. 올 때 그리 약속은 했지만 당신 남편이 저리 원하니 며칠만 함께 있어주소. 예? 환자가 마지막 소원이라고 안 합니까?”
환자를 방에 모셔다 놓고 같이 온 성당 빈첸시오 회원들이 부인을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같이 온 회원 중 한 사람이
“신부님! 저 부인에게 한마디 좀 해주세요? 둘이 부부였는데 별거 후에 여자는 이미 딴 사람하고 살림을 차리고 있고요… 그런데 남편이 마지막 가는 길에 꽃마을까지 따라가주면 좋겠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환자가 며칠만 더 있어달라는 거예요. 여자는 막무가내로 가겠다고 하고… 그러니 신부님이 한마디 해주세요.”
“글쎄 이게…. 환자나 가족이 여기 좀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적은 있지만 아무튼 해보지요, 뭐!”
억지로 불려온 아내는 볼이 부었습니다.
“난 여기 원장 신부입니다. 지금 당신 남편이 살아봐야 한두 달밖에 못 사는데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단 며칠만이라도 옆에 있어주면 좋겠습니다.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그렇고, 살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적선도 해주는데 그래도 지금 법적으로는 당신 남편이고 아이들도 있으니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며칠만이라도 옆에 계셔주세요. 여기 있는 동안 다른 것은 우리가 다 해주니까 여기서 밥 먹고 지내면서 환자 옆에만 있어주면 됩니다.”
그야말로 뭐 씹은 얼굴로 잠시 고민을 하더니
“알았어요. 며칠만 있을게요!”
하며 쏘아붙이고는 나가버렸습니다.
“허허 참!”
예고편이 이상하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같이 따라왔던 봉사자가 민망한지 그간의 속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병에 걸리기 전 환자는 부인과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말이 운영이지 아내가 모든 것을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남편은 매일 도박에 빠져 있었고 거기다가 술까지 퍼먹으면서 폭력을 행사했으니 누구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아내는 집을 나가 다른 사람과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큰 딸도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작은 아들도 아빠를 미워하면서 나가 신문을 배달하며 그곳에서 숙식을 하며 지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연이어 터지면서 술과 화병에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이 환자도 위암이 발병되어 홀로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위암 말기 진단을 받은 후 이제 얼마 안 있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내는 옛정을 생각해서 죽기 전까지라도 보살피려고 찾아갔으나 살기 어린 눈을 보고 겁에 질려 다시 돌아간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정이란 정은 다 떨어졌으니 어찌 보면 아내는 아내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따라와준 것만도 감사할 일이겠지요.
어찌 되었든 남은 시간 동안 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숙식 제공은 물론 환자의 수발은 봉사자가 하면서 아내는 다만 환자와 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커튼까지 따로 해 주었습니다. 가끔씩 보면 아내가 남편의 좁은 침대 옆에 누워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쥐고 있었고, 다시는 아내를 떠나 보내지 않으려는 듯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진작 저렇게만 했더라고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죽음을 앞두고서야 아내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달았나 봅니다.
“야! 보기 좋으시네요. 꼭 신혼부부 같아요.”
하면
“그렇죠? 우리 신혼 같죠?”
하며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아마도 결혼생활 중에 꽃마을에서 지냈던 2박 3일이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2박 3일이 지나자 아내는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미련 없이 남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일을 보고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리고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다시 올 거라는 말을 굳게 믿고 있었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고 전화조차 받지 않는 아내에게 배신감을 느꼈는지 나만 보면 쫓아가서 죽기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미움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숨을 몰아 쉬기까지 했습니다. 미움, 분노, 자책감, 허탈감 속에서 하루하루 를 보내던 중 하루는 저를 붙잡고 울부짖었습니다.
“신부님! 왜 내가 아내와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어야 합니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이 뭐였습니까?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내가 남편이고 아빤데…. 앞으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죽는다 생각하니 눈을 못 감을 것 같아요.”
“그래요. 내가 그 입장이라도 미치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그 비참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지금 상황에서 아내나 자식들 보고 오라고 한들 안 올 것은 뻔하고, 그렇다고 이 상태로 죽는다면 끝까지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죽은 비참한 인간으로 남을 테니 차라리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하는데요?”
“먼저 아내와 자식에게 글을 쓰세요. 욕을 퍼붓든 원망을 하든 응어리진 마음이 풀릴 때까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쓰도록 하시고 또 한 가지는 내가 가족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적고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 안 하면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꼭 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00씨는 누구보다도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데, 맞지요?”
“예. 맞습니다. 난 누구보다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요. 미움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애정이 크다는 말입니다. 다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렀던 것이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 상처받은 자존심을 감추기 위해 또 화를 내고,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데 누굴 탓하겠어요.”
“맞아요. 가족들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물론 겉으로 달라질 건 없어요. 그렇지만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 자를 남긴다고 했는데 이런 상태로 죽는다면 사람들은 00씨를 아내와 자식에게 버림받고 죽은 못난 놈, 가정 하나 지키지 못 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외면당한 쓸모 없는 놈으로 알 겁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남들이 모르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아빠가 얼마나 노력하고 고생했는지를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에게 버림은 받았지만 아빠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가족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가족은 나를 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가족을 용서하고 화해를 청하면서 간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훗날 이 일에 내가 증인이 되어줄게요. 아빠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못난 아빠로서가 아니라 끝까지 최선을 다 했다는 모습을 알게 하면 아내나 자식의 생각이 바뀔 겁니다. 그래도 내 아빠가 자식들을 사랑했었구나, 아내를 사랑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기억 속에 매일 술만 먹고 노름하고 가정을 내팽개친 아빠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이었지만 좋은 아빠의 면도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러면 아내나 자식들이 받았던 상처들도 치유하게 될 겁니다.”
“정말 그렇게라도 된다면야… 그런데 저는 지금 연필 잡을 힘도 없어요.”
그러면서 오후 내내 5시간을 앉아서 A3 용지로 13장을 써 내려 갔습니다. 나중에 자기도 어떻게 그것을 다 썼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지막지하리만큼 가족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 마음을 털어놓았지만 끝내는 아내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소중하고 고마웠음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제대래 해주지는 못하고 요구만 했던 자신을 탓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응어리가 많이 풀렸는지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마음이 편안하면 통증도 줄어드는 법…. 환자의 관심은 이제 먹는 것에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병이 들어도 오욕칠정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어떤 욕구가 있게 마련인데 이 환자는 식욕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환자였습니다. 위암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오기 전부터 먹고 싶은 것은 가리지 않고 먹어댔습니다.
밀가루 음식, 사탕, 아이스크림, 고기 등등 … 꽃마을에 와서도 매 끼니마다 음식 주문이 달랐습니다. 아침에는 무슨 죽, 점심에는 카레, 저녁에는 불고기 등 음식 주문이 그렇게 다양하고 화려할 수가 없었는데 바닷가에 무든 생선만 빼고는 다 해준 것 같습니다. 덕분에 음식담당 봉사자가 애를 먹었지만… 음식 못 먹다 죽은 귀신이 붙은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음식이든 먹고 나면 30분 안에 다 토한다는 것입니다. 먹을 때는 정말 맛있게 먹지만 30분이 지나면 그대로 다 토해내니 먹기는 잘 먹는데 몸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처음 병이 들기 전에는 몸무게가 80kg이었는데 지금은 40kg이 될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점심까지 잘 드시고 나더니 오후 3시부터 임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임종하고 계시는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죽으면 연락하세요!”
“부인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 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도 그렇고!”
“애들도 안 간대요.”(딸깍!)
죽어가면서도 용서받지 못하고 간 때문일까? 눈꺼풀이 닫히지를 않았습니다. 워낙 마른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본인은 모두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으로 가셨기에 잠든 모습은 편안해 보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 그냥 자살해버릴까?
31살 총각이 말기 신장암으로 꽃마을에 입원을 했습니다. 이 환자는 꽃마을에 들어올 때까지도 말기 암이 뭔지, 얼마나 중한 병에 걸렸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요양을 잘 하면 금방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어떻게 투병생활을 하면 나을지, 이것저것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운동하기, 먹는 것 조절하기, 긍정적인 생각과 말, 행동하기 등 등….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말기 암이 어떤 병인지를… 다만 무리하지 말라는 말밖에는. 처음 입원할 때는 옆구리에 통증이 심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음식을 먹으면 구토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는데 그런 증상이 가라앉자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얼마 동안은 정말 기분 좋게 다니고 PC 방도 가고, 친구 결혼식도 참석하고….
사실상 그런 일들과 만남들이 아는 이들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본인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PC방에 가서 자신의 병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병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본 후 더 확실한 치료방법과 계획을 세운다고 정말 기분 좋게 나갔습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는데 힘이 다 빠진 축 처진 모습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었느냐는 물음에 입맛이 없다며 더 이상의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불을 끈 채 밤이 하얗게 새도록 침대에 앉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생긴 것인지, 왜 내가 이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자신만 홀로 남겨두고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자신에게 이러한 운명을 준 신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 그냥 자살을 해버릴까? 아니면 얼마 안 남은 인생, 막가파처럼 되는 대로 살다가 죽어버릴까? 이런 저런 한탄과 절망감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고 하며 며칠 후에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뭔가를 결심한 듯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습니다.
“31년이란 세월을 혼자 힘들게 산 것도 억울한데 죽을 때도 비참하게 아무런 의미 없이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더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왕 죽을 거라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무리를 잘 장식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처럼 죽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너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하며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 계획을 밝혔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마음에 평화를 얻었는데 밝은 모습으로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또한 젊은 나이에 총각이 아파하는 것을 본 봉사자들이 안타까워할 때면 나는 괜찮다며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며 농담으로 대꾸하는 여유도 보여주었습니다.
꽃마을에 입원해서 대략 한 달 정도는 움직이고, 걷고, 식사도 조금씩 할 수 있었지만, 그 후부터는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고 잠도 계속해서 앉아서 자야 했습니다. 구토도 점점 심해져서 물조차 넘기지를 못했습니다. 먹으면 바로 토했는데 이것은 암세포가 위로 전이가 되었기 때문인데도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그저께 먹은 수박이 얹혀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애써 떨쳐버리려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을 여유 있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젊은 나이였습니다.
어느 날은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바다를 좋아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젊은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과,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확 털어버리고 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울다 보면 풀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들 차를 얻어 타고 갔다 오겠다고 하는데 사실 동해바다까지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습니다. 이미 걷는 것은 고사하고 앉아 있는 것도 축 늘어질 정도였습니다. 보름 이상 식사를 제대로 한 적이 없는데다 수박 한 조각이 식사의 전부였으니 체력이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때문인지 진통제 외에 포도당이나 영양제도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런 몸을 이끌고 어느 날 저녁 친구 따라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고는 그 길로 동해바다까지 갔습니다.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진통제였습니다. 마약성 진통제좌약을 거의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 투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갖고 있는 약이 4개밖에 없었습니다. 몸을 무리해서 움직였으니 약효가 더 빨리 떨어질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오전 10시 쯤 들어왔는데 거의 초주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보고 오니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움직일 수 있었던 마지막 몸짓이었고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 후로 통증이 더 심해졌고 자신도 모를 헛소리와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통증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진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이미 1000mg 의 마약성 진통제가 들어가고 있었음에도 치솟는 통증을 따라잡기에는 버거웠습니다.
임종 전날, 어제 밤에 엄마 아버지를 만나 얘기도 나누었다며 행복해했습니다. 이는 죽기 전에 반짝 기력을 회복하는 듯이 보이는 반조현상입니다. 다음 날 오전 11시쯤부터 임종이 시작되더니 오후 5시 45분에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마도 엄마 아버지가 배웅을 나왔을 것입니다. 엄마 아버지의 정을 그렇게도 그리워했는데 이제는 원 없이 만나 행복해 할 것입니다. 6월 5일 입원해서 7월 20일까지 불과 한 달 보름 정도를 산 셈입니다.
미치게 만드는 환자 가족들
이런 시설을 운영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지도 않은 일이 사람을 미치고 환장하도록 만드니 문제입니다. 꽃마을에서는 한달 평균 10~15명이 돌아가시는데 평균수명이 2달에서 3달 사이입니다.
병원에서도 이미 손을 뗀 사람들, 현대의학으로는 더 이상 해줄게 없는 분들이기 때문에 상황은 항상 급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환자를 입원시킬 때는 가족들에게 동의서를 받습니다.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돌봐드리지만 언제 어느 때 돌아가실 지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점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과,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곳에서 환자를 위한 간호하는 일에 이의제기를 하지 않을 것을 약속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옆에서 계속 환자를 지켜보는 보호자가 문제가 아니라 어쩌다 한번 불쑥 나타나는 가족들과 친척들이 문제입니다. 정작 필요할 땐 코삐기도 안 보이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왜 이러냐? 약은 제 때 주느냐? 반찬은 뭐냐? 증상이 이런데 병원엔 안 가냐? 언제 갔다 왔냐? 하며 취조를 합니다.
뭘 알고서나 떠들면 좋으련만….
그 행태들이 가지가지입니다.
사례 1) 뻔실이 형
하루는 간호사가 식식거리며 어째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 성질 나서 못하겠다고 투덜댔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물어보니 오늘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환자가 들어왔는데 그 환자 가족들 때문에 속상하다는 것입니다. 환자를 병실에 눕히고 났는데 가족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간호사실로 오더니 잠깐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환자 데리고 왔는데 됐죠? 이 환자는 여기가 안 좋고 저기는 의사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주의하고, 그리고 음식을 잘 못 드시니까 그럴 때마다 영양제 좀 곡 놔주고요. 말씀을 잘 못하시니까 자주 들여다보세요. 아셨죠?”
그러고는 바람과 함께 집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너무도 당당한, 뭐 맡겨놓은 사람처럼 요구하고 시켰습니다. 가만히 하는 골을 보면 환자 데리고 왔으니 고마워하라는 투입니다. 도대체가 뭘 고마워해야 하는지, 그 뻔뻔함에 기가 찹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은 무료시설이라고 하면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면서 잘 믿기지가 않는지, 정말 아무 것도 안 받느냐? 100% 무료로 해주느냐? 하고 반문합니다. 이렇게 반문하는 이들의 머리 속에는 환자 한 명 받으면 정부로부터 얼마씩 보조를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환자 보호자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환자를 데려왔으니 고마워하라는 식의 말투가 나오는 것이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환자를 위해 간호해주다가 돌아가셨을 때 가족들은 그 고마움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럴 때 가족들에게 한 가지를 당부합니다.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 가족들이 제일 힘들어할 때 우리가 아무 조건 없니 사랑하고 돌봐주고 나누어주었던 것처럼 당신들도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거든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줄 수 있을 만큼 나누어주라고…. 그것이 성모꽃마을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가르쳐줍니다.
사례 2) 황당형
어쩌다 한번씩 뇌출혈로 쓰러진 사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상태는 매우 안 좋지만 병원에서 계속 있어봐야 늘어나는 병원비와 간병인에게 들어가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퇴원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암은 아니지만 형편이 너무 안 좋고 생활보호대상자에다가 갈 곳도 없는 처지라 받아주게 됩니다.
꽃마을에 입원을 추천하는 사람들은 환자에게 다른 가족이나 친척들이 있으나마나 이고, 정말 병원비 10원 한 장 보태준 적도 없고, 병문안을 온 적도 없는 사람들이니 꼭 받아주어야 한다고 죽는 소리를 합니다.
한번은 뇌출혈 환자가 들어왔는데 상태 좋지 않았습니다. 의사 선생님들도 길어야 몇 달 혹은 그전에라도 합병증으로 가실 수가 있다고 경고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가 들어온 지 보름 만에 갑자기 임종을 시작했습니다. 보통 임종을 시작하면 1시간에서 이틀까지 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환자는 임종을 시작하고 운명하는 데까지 1시간도 안 걸렸습니다. 이럴 때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 지 막막합니다. 쓰러진 지 몇 년 되셨지만 그래도 한두 달은 더 살 것 같았는데 갑자기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소에 나와 있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친척에게 전화를 했는데 몇 시간 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 에쿠스를 선두로 외제 스포츠카에다가 체어맨에 무쏘를 끌고 몇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류층 혹은 큰 부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고급 승용차들입니다. 그리고는 간호사실에 와서 따지듯
“언제 돌아가셨냐? 왜 돌아가셨나? 왜 빨리 죽었느냐? 병원에서는 식사대용을 캔을 하루에 7개씩 먹였다는데 여기서는 얼마씩 주었느냐? 사람이 왜 이렇게 말랐느냐? 간호는 제대로 해주었느냐?”
하면서 마치 여기서 잘못하여 죽인 것처럼 말들을 합니다. 병문안 한번 안 오고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죽은 뒤에는 무척이나 아끼고 위하는 관계인 것처럼 구는 꼴들이라니!
물에 빠진 놈 구해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인지? 불쌍해서 기껏 도와줬더니 오히려 탓을 합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어렵게 지내는 동안 친척이라고 있는 것들이 고급 승용차를 끌고 다니면서도 병원비 10원 한 장 도와주지 않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죽은 사람만 불쌍할 뿐입니다.
사례 3) 억장이 무너질 형
위와 비슷한 처지의 환자가 온 적이 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병원에서 퇴원을 강요 받았지만 갈 곳이 없어 2달 정도만 말미를 주기로 하고 받아준 적이 있었습니다.
환자 상태는 L-튜브를 꽂고 있고 치매기에, 뇌출혈에, 대소변을 기저귀로 받아 내고 매시간 체위변경을 해야 했습니다. 왼손만 간신히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간혹 의사표시는 되지만 말씀을 거의 못하는 중증환자입니다. 말기 암 환자보다야 그래도 사정이 낫다고 치지만 언제 어떻게 돌발상황이 생길지 몰라 동의서를 받아둡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하도 나부대기 때문에 손을 묶어놓았다고 했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콧줄을 잡아 빼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했던 것이고, 그 밖에 엉덩이에 조그만 욕창이 있고 다른 상태는 양호하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의 이런 말만 듣고 환자를 받았는데 저녁 무렵 환자의 욕창을 치료하려던 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욕창이 굉장히 큰데요?”
손바닥 정도의 크기라고 합니다. 가족들에게서는 분명 동전 크기라고 들은 것 같은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추측하건대 환자를 이송하다가 들것으로 옮기는 중에 약한 엉덩이 피부가 스치면서 살가죽이 벗겨진 것 같았습니다.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려야 할까 말까 하다가 다음 주에 온다고 했으니 그때 말하기로 하고 치료만 한 것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한 주가 지나고 가족들이 와서 하는 말이 욕창이 왜 이렇게 커졌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 때부터 그랬다고 간호사가 얘기해도 그때는 분명 동전 정도의 크기였는데 어떻게 간호를 했기에 이렇게 되었느냐는 식의 여운을 남깁니다. 그야말로 복장이 터지고 억장이 무너질 노릇입니다. 이차저차 설명했지만 한번 떠오른 의구심은 계속 남는 듯한 인상입니다. 그래서 환자가 이곳 상황과는 안 맞는 것 같으니 모셔가라고 하자 조금만 더 있게 해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할 수 없이 더 두라고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또 터졌습니다.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편한 상태를 제공하기 위해 손을 묶어놓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잠깐 사이에 콧줄을 잡아 뺀 것입니다. 할 수없이 병원 응급실로 가서 다시 꽂고 오기를 무려 3번째 . 그런데 20일째 되던 날 병원 응급실로 콧줄을 끼러 따라갔던 봉사자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환자가 임종할 것 같다고…. 가기 전에 점심까지 잘 드시고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응급실에 가서 죽을 것 같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나중에 알았지만 의사 선생님들이 L-튜브를 끼우는데 잘 들어가지 않아 한쪽 침대에서 쉬었다가 다시 하기로 했답니다. 사실 이 튜브를 끼우기 위해서는 환자가 아….! 소리를 내고 침을 꿀꺽 삼켜주어야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런 협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고서 3시간 후 환자상태가 이상하다고 연락이 오더니 30분 후 임종을 했다는 것입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의사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심장마비가 온 것 같다고 합니다. 가족들에게는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질 일인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건강해지거나 정상상태로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더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가족들에게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설명하기람 어려운 일입니다. 가족들의 심리는 마지막 보고 간 시점을 생각합니다. 그때 보고 왔을 대는 정상이었고 밥도 먹고 움직였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죽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화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죽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성통곡을 하며 이해할 수 없다고 원 투의 말을 합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만있자니 꼭 우리가 잘못해서 사람 일찍 죽게 만든 것 같게 되고 설명하자니 들을 생각도 안 하고… 그나마 병원 응급실에 가서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 치료를 했었기 망정이지 집에서 임종했더라면 꼼짝없이 살인자(?)가 될 뻔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절대 뇌졸증이나 기타 다른 질병은 받지 않습니다. 실컷 돌봐주고 원망 듣고 마치 잘못해서 빨리 죽게 만든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가족이 늘 옆에 붙어 있는 환자가 아니면 환자상태에 변화가 왔을 때 가족들에게 즉시 연락을 합니다. 가족들은 항상 환자를 마지막 보고 간 그때만을 생각하기 때문인데 중간중간에 환자의 상태가 나빠져가는 것을 알고 있어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원망을 안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례 4) 숨 넘어갈 형
사랑하는 가족이 아프면 가족들의 마음이 오죽이나 아프겠습니까? 호스피스의 대상이 환자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포함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가족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요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보호자가 원하면 대개 가족 1명에게는 숙식을 제공합니다. 특히 젊은 부부들 중 누군가 한 명이 암에 걸리면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들을 함께하고 싶어 곁에 있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보호자 한 명에게도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죠.
그런데 가끔은 나이가 조금은 있는 50대 후반의 환자가 오면 장성한 자녀들과 가족들이 많은 편인데 환자를 보살펴주는 입장에서는 꽤나 피곤한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가족들이 화목하고 효자 효녀 집안이면 꽃마을 봉사자들과 간호사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환자 보호자들이 환자 옆에 계속 지키면서 돌아가면서 환자상태를 알립니다. 5분마다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쫓아와서는 지금 환자가 인상을 찡그리는데 아픈가 봐요. 진통제 좀 놔주세요. 가래가 조금 끓는 것 같은데요? 링거가 너무 빨리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요? 아까보다 소변이 더 안 나오는 거 같아요! 아까보다 숨소리가 이상해요. 어제는 이렇지 않았는데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왜 그렇죠?
지금 다른 환자 보고 있으니 끝나면 금방 갈게요! 하다가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체되는 것 같으면 금방 달려와서 숨 넘어가는 소리로 환자가 급한 것 같으니 빨리 좀 와주세요 하고 재촉을 합니다. 정말로 급한가 싶어 달려가보면 아까하고 똑같습니다. 환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다가 어찌어찌 해달라고 하면 그야말로 생골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알아서 해줄 테니 한 명만 교대로 남으라고 해도 떠날 줄을 모릅니다. 이런 것을 효자라고 해야 하나(?)
환자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안타까움이야 오죽하랴마는 지나치게 예민해져 결국은 내 환자만 보라는 식이 되고 맙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줘도 조금 지체된다 싶으면 원망하는 것 같은 눈초리의 시선이 더 괴롭습니다. 도대체!
호흡기 떼면 빨리 죽잖아, 그래도 떼?
7월 말에 입원해 꽃마을에서 약 2주 가량 지냈던 36세의 환자가 있었습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두 아이의 엄마로 건강할 때는 근면 성실하게 살림을 꾸렸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도 많이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 전 뇌종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중 더 이상 가망이 없어 꽃마을로 입원하시게 된 분입니다.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미 전신이 굳은 상태로 마비가 되어 있었고 양쪽 팔만 겨우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뇌종양이 머리, 가슴, 허리까지 전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증은 물론, 숨쉬기조차 어려워 목을 뚫어주었고 코에는 L-튜브를 끼워 음식물을 넣어 주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뇌압이 높아 이미 개두술을 한 상태였고, 뇌의 손상으로 인해 눈이 감겨지질 않아 눈동자엔 이미 두터운 막이 생겨 보이질 않았습니다. 턱이 벌어져 다물어지질 않았고 아래는 소변 줄까지 끼워져 있어 식물인간보다도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의식이 또렷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금의 처지와 통증, 죽음에 대한 두려움, 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 자식을 남겨두고 가야 한다는 절망감 등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는 것은 차라리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이 자매는 전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남편 말로는 정말로 참을성이 많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남편이 찾아왔을 때 환자가 의도적으로 코에 끼워져 있는 L-튜브를 빼려고 했습니다.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팔을 간신히 들어 줄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어보도록 했습니다.
“당신 이 줄 빼면 음식을 못 먹잖아.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잖아. 그래도 빼고 싶어? 그렇게 하고 싶으면 손을 올려봐.”
아내는 아주 천천히 힘겹게 머리 위까지 손을 올렸습니다. 잘 쓰지도 못하는 팔이 그렇게 많이 올라갈 줄은 몰랐습니다. 목에는 계속 산소를 연결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당신 산소도 뗄까? 이 산소 떼면 숨을 못 쉬어 빨리 죽는데 어떻게 해. 그래도 떼?”
잠시 후 팔이 머리 끝까지 올라갔습니다. 아까보다 더 높이…
그것을 본 남편이 아내의 목을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자매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괴로우면 빨리 죽도록 해달라고 할까. 사력을 다해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했던 이 자매의 소원이 하늘에 닿았음인지 며칠 후 임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잠시라도 편히 있게 하기 위해 몸에 부착되었던 모든 튜브를 다 뗐습니다. 서서히 꺼져가는 눈빛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편안함이 어려 있었습니다.
“애들 걱정하지 말고 편안하게 가. 당신 고생 많이 했어. 사랑해.”
남편의 작별인사를 들으며 가족들과 봉사자들의 기도 속에서 조용히 36세의 삶을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영원히 잠든 모습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어머니에게 내 병을 알리지 말아주세요
46세의 폐암 말기 환자가 계십니다. 발병하기 전에는 감기 한번 안 앓을 정도로 건강했던 분입니다. 인테리어 업을 하고 있던 분인데 지붕에서 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어지러움증이 심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폐암 말기인데 너무 늦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남들이 그러는 것처럼 절망과 좌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남겨두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도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었습니다. 팔순의 노모에게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워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자기의 병을 알리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 말에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환자도 어머니보다 먼저 가는 자식으로 인해 가슴에 못을 박을까 두려웠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까지 잘못 될까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입원 당시 소양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을 한다고 하고는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꽃마을에 들어오신 후에도 전화를 가끔씩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기운이 좀 나고 목소리가 잘 나올 것 같으면 전화를 드리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기운 없는 목소리를 들으면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어머니는 늘상 같은 말을 하신답니다. 몸은 좀 어떠냐, 밥 잘 챙겨먹어야 한다, 빨리 완쾌돼서 집에 오너라.”
이미 밥 먹기가 많이 힘들어졌는데, 통증도 점점 심해져 마약성 진통제를 처음에는 60mg을 쓰다가 지금은 240mg을 써야 할 정도로 늘어나 말하기도 힘겨운데 어머니의 바람을 들어드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전화를 끊고 나면 눈물이 앞을 가려 한참을 울어야 했습니다. 결혼에 실패하지만 않았더라면 손주를 안겨드려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는데, 어머니보다 앞서 가도 덜 죄송했을 건데 그것이 못내 후회된다고 했습니다.
지난 며칠 전에는 어머니 생신이라서 가족들이 다 모이는데 갔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 몸으로 그 먼 거리를 갔다 온다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기 때문에 전화나 드리라고 해도, 혹시라도 눈치를 채실 수도 있고 마지막 생신을 챙겨드리는 일이라 안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머리가 다 빠졌어도 약 부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 통증이 와도 이를 악물면서 진통제로 버티는 아들을 보시고도 눈치를 못 채셨으니 마지막 효도를 성공적으로 하고 온 셈입니다.
이제는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옆에서 며칠을 같이 지내시던 환자 분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보면
“나도 나갈 때는 저렇게 가겠지, 다음은 내 차례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지만 그러나 어차피 갈 거라면 편히 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뿐이에요.”
하면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시 한번 건강을 주신다면 정말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위해 보람 있게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내가 가진 기술로 집도 고쳐주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제는 부질없는 바램이겠지요?”
그로부터 며칠 후 임종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가족들이 모두 와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보다 먼저 간 불효자식을 용서해달라고 훗날 어머니가 마지막 때에 찾거든 전해주세요. 그리고 나는 화장을 해서 일부는 꽃마을에 일부는 집이 내려다보이는 앞산에 뿌려서 거기서 어머니와 가족들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몇 시간 후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이분의 영혼은 먼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어머니 얼굴을 보고 떠나기 위해 집으로 달음질쳐 갔을 것입니다.
하룻밤만이라도 누워서
45세 폐암환자가 있었습니다. 상당부분 폐로 전이가 되었기 때문에 항상 숨이 차서 앉아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엉덩이 살은 이미 말라 뼈가 배기는지 10분 이상은 한자리에 앉지 못하고 밤새 조금씩 비겨가며 앉아 있어야 합니다. 간혹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한 끼만 숨 안 차고 배부르게 먹고 싶어요.”
“다만 하룻밤만이라도 누워서 편하게 자고 싶어요.”
“한 숨, 한 숨, 숨쉬기가 이렇게 힘이 들고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편안한 상태로 하루만 더 살고 싶어요.”
그러나 커져만 가는 암 덩어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숨을 조기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다른 암이었다면 그래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 느꼈을 텐데, 다른 곳은 말짱하고 정신도 말짱한데 숨을 ‘꺼억~~꺽’ 하고 폐부를 쥐어짜듯 쉴 때마다 느껴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보는 사람마저 겁을 먹게 했습니다.
봉사자가 위로 삼아
“처음 오실 때는 죽을 준비도 잘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잘 견디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힘내셔야죠.”
하니
“미안해. 내가 못 참았나 봐. 자꾸 약해지는 것 같다. 잘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간혹 잊어버려. 고마우신 분들, 신부님, 자족 또 봉사하는 분들 위해 늘 기도해. 혹 기적이라도 생겨 나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봉사하고 싶어. 그러고 싶어. 가끔은 아내도 그렇게 기도한대. 기적을 달라고…. 불가능할까?”
“지금 무엇이 제일 걱정되세요?”
“제일 걱정되는 것은 아내야. 뭔가 아픈 것 같은데 내색을 안 해. 내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신은 병원에도 가지를 못 했어. 혹여 라도 나처럼 될까 봐 그게 제일 걱정돼. 만일 그렇다면 10년 만에 얻은 아들이 세상을 혼자 살아야 하는데. 제발 아내는 건강했으면… 내 아들 정말 착한 아이야. 늘 그랬던 것처럼 잘 커서 성직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인데, 나 없이도 잘 자라줄까? 못된 삶은 살지 않을까? 자식이 눈에 밟혀. 그게 제일 힘들어. 이곳에 오기 전에 의사로부터 올 3월까지 살 수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이 10월이니 7개월을 덤으로 더 산 셈이야! 이것만 해도 감사해.”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가 끝내는 10월 13일 밤 10시 10분에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임종하기 2시간 전에 봉사자들을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남겼습니다. 그 동안 너무 고마웠다고, 잘 해준 것 천국 가서도 잊지 않겠다고.
점점 더 거칠어지는 숨소리로 봉사자들의 기도를 따라 하며 비로소 똑바로 누었습니다. (임종 전 1시간 30분) 뒤늦게 도착한 아들과 아내의 손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에는 묵주를 쥐고 고통스럽지만 흐뭇한 마음으로 둘러선 이들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맑은 정신으로 정말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깨끗이 닦고 가야
꽃마을에 있는 환자 분들은 모두가 아름다운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고 가시는데 나도 저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부러움까지 갖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드라마 같은 죽음을 연출하신 분이 있습니다.
건강할 때는 정말로 잘 나가던 분입니다. 건설업을 하셨는데 이 지역에서 누구 하면 같은 계통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부러워했던 분으로 평소에도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IMF 때 불경기를 맞으며 사업에 실패하게 되었는데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직장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2년 6개월 동안의 투병생활. 엄청난 통증. 만신창이가 된 하반신. 하지마비로 인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는 더 이상 할 게 없으니 퇴원하라는 말을 듣고 꽃마을로 오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죽음선고를 받은 후 한 동안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조금 씩 죽음준비를 하면서 하루하루 주변 정리를 해나갔습니다.
임종 12일 전부터 점점 악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음식을 삼키지 못하였고, 복수까지 차서 호흡곤란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환자는 정신이 들 때마다 아내에게 항상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야 한다고 일러주고 아이들 건강하게 키워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하루는 배에 있던 인공항문에서 변이 흘러나와 더럽혀지자 그것을 닦아주고 있던 아내에게
“여기 좀 잘 보고 닦아. 저 윗분도 내가 깨끗이 닦고 가야 좋아할 것 아냐?”
하며 자신의 죽음 앞에 여유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임종 전 날
“하늘나라 가실 준비는 다 되셨어요?”
하고 물으니
“신부님 아직 안 됐습니다. 내일쯤이면 될 것 같아요. 아직 정리 안 된 게 남았어요!”
그러더니 다음 날 아침
“신부님 저 오늘 하늘나라에 갈 것 같으니 기도 좀 해주세요?”
“오늘은 준비가 되셨어요?”
“네. 준비되었어요. 신부님 저 손 좀 잡아주세요. 그리고 당신 손도 이리 주고.”
하면서 직접 아내의 손을 끌어다 포개어 놓았습니다.
“신부님! 그 동안 고마웠어요. 저 그곳에 가면 사랑하는 우리 가족과 꽃마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줄게요. 그 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내가 보답할 게 그것밖에 없네요. 그리고 신부님 내 아내도 이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이라도 봉사하게 해주세요. 우리 같이 약속하는 겁니다. 당신도 알았지?”
“네. 약속할게요.”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으세요?”
하니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여보 고생시켜 정말 미안하고 당신과 사는 동안 너무 행복했었어. 그리고 투병생활 하는 동안 끝까지 지켜줘서 고마웠고… 처음으로 불러 본다. 여보! 사랑해.”
눈에 눈물을 글썽이는 아내를 보면서 한 손으로 머리맡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아내에게 꺼내보라고 했습니다. 예쁜 시계였습니다.
“당신 생일선물로 준비했어. 이번 달에 당신 생일 있는데 못 챙겨주고 갈 것 같아서 친구에게 부탁해서 사다 놨어. 당신이 평소에 갖고 싶어하던 거잖아! 시계 예쁘지? 할머니 될 때까지 손목에 차고 있어야 해?”
눈물을 펑펑 흘리는 아내에게 직접 시계를 꺼내어 채워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아내와 입맞춤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주위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내는 벼만 앙상하게 남은 남편의 등을 끌어안고 긴 작별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만나 행복했었음을 고백했고 남편은 죽어서도 아내를 사랑하겠노라고 속삭였습니다.
잠시 후 주위 사람을 둘러보더니 고맙다는 말을 한 후 환자는 자신의 손으로 코에 꽂은 산소 호흡기를 직접 빼버렸습니다.
1시간 후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둘러서 봉사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그의 영혼은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영화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소화해 낸 연기자처럼 그는 할 말 다하고, 할 것 다하고 떠나갔습니다. 모두에게 죽음은 이렇게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식을 위해 암을 키운 어머니
성모꽃마을에 들어오시는 날부터 임종하실 때가지 계속해서 앉아서만 지내야 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른쪽 유방암이 폐에까지 전이가 되어 자리에 누우면 암 덩어리가 압박을 가해 통증이 생겼고 또 숨이 가빠져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 팔은 암으로 인해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늘 저리고 아팠고 더 구나 부종이 심해 손등에서는 물이 배어 나왔습니다. 근 한 달을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깜박 잠이 들어도 앉은 상태에서 머리를 배꼽까지 숙인 상태로 자야 했습니다. 그 불편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본인에겐 제일 편한 자세라고 했습니다.
꽃마을에 들어온 첫 날 다행히 통증이 잡혀 잠이 들었는데 무려 5시간을 앉은 상태에서 꼼짝 않고 내리 자기만 했습니다. 자식 말로는 지금까지 이렇게 곤하게 주무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분의 삶은 정말 기구하다 못해 가슴이 아팠습니다. 경남에서 5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이 자매는 어머니의 성품을 이어 받아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성격으로 남과 다투거나 해를 끼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조금 손해 보는 것이 마음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말할 정도로 착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계모슬하에서 자란 남편을 만나면서부터 이 자매의 불행이 시작되었는데…
결혼 생활 동안 따뜻한 말 한 마디 다정한 표현 한번 받아보지 못했고 외출할 때 입을 만한 변변한 옷조차 한번 얻어 입어본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너무나 어려워 부업이다 공장일 이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나갔는데 그래도 그 고생을 견디고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와 희망을 온통 두 아들에게 걸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 역시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들만 하고 다녔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자가용 사달라, 사업을 해야 하니 돈을 얻어달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속에서 빚더미만 자꾸 늘어났습니다. 가뜩이나 남에게 신세를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늘어만 가는 빚더미는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고 길을 가다가도 눈물을 흘리는 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몸에 이상을 느끼면서 혹시 암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설마설마 해지만 또 한편으로는 암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암 보험을 타서 자식이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제발 암 이길 바라면서 암을 키워나갔습니다. 물론 가족에게는 비밀로 하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던 날 의사로부터 유방암 4기말이라는 진단과 함께 너무 늦어 수술을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암 보험을 타서 자식이 진 빚을 갚았습니다. 결국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 빚을 갚은 셈입니다.
처음 이상을 느꼈을 때 초기에 치료만 했어도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자식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놓기로 하고 암 덩어리를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자식이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만 한다면… 하는 마음으로.
임종이 가까워올 무렵에 이 자매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남편과 자식들이 많이 밉지요?”
하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미움이 큰 것은 그만큼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미운 만큼 자식들이 잘 되도록 기도 많이 하실 거죠? 자식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은 엄마의 마음을 하느님이 보셨으니까 이제 그 마음을 마지막으로 자식과 남편을 위해 내어놓고 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과 자식들이 복을 받을 수가 있어요. 암을 키워가면서까지 보여주었던 그 헌신적인 사랑의 대가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 용서하고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매님의 그 괴로운 마음은 천국에 가시면 하느님께서 다 보상해 주실 거예요.”
자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면서 퉁퉁 부은 손을 간신히 들어 십자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무언의 약속. 임종이 가까이 올 무렵 혼수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똑바로 누울 수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통증이 없었기에.
자식을 위해 암을 키웠던 한 엄마의 애절한 사랑은 이렇게 해서 59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무지막지한 암 통증, 기대에 어긋났던 자식들에 대한 미움과 남편에 대한 원망을 모두 가슴으로 끌어안고 가셨습니다. 사랑했고 또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모정을 남겨둔 채….
아기를 살리려고 죽음을 택한 엄마
성모꽃마을에 들어오는 날 29살 된 젊은 엄마가 아기 사진을 어루만지며 울고 있었습니다. 병명은 자궁경부암 말기. 자궁암이 전이가 된 상태에서 장폐색까지 겹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 코에는 위장관을 삽입해 가스와 위산을 뽑아내고 있었고 복부에는 가스가 가득 차 빵빵한 상태. 관장을 시도했지만 잘 빠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옆구리에는 신장에서 직접 소변 줄을 박아 빼내고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못 먹는 상태에서 옆으로 눕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를 않아 등에서는 막 욕창이 생길 듯 벌겋게 짓물러 있었고, 목에는 C-line을 꽂아 수액이 들어가고 있었는데 유일한 생명줄 이었습니다.
엄마는 그 아픈 와중에도 벽에 붙여놓은 이제 한 살쯤 되어보이는 아기의 얼굴 사진을 어루만지며 눈물지었습니다.
“내가 얼른 나아서 아기를 키워야 하는데…”
“그래. 마음 굳게 먹고 이겨내야 한다.”
하며 남편이 옆에서 위로를 합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신부님! 제 아내는 인내심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합니다.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질 않아요. 지금 암과 투병 중이면서도 고통을 참으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아마도 현재의 고통이면 다른 사람들은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일 텐데도 아내는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아프다고 하면 정말로 엄청난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겁니다. 아프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우선 통증을 없애기 위해 점차적으로 진통제의 양을 늘려갔습니다. 듀로 패취제를 25마이크로에서 50마이크로로 올렸고 중간중간 타라신이나 디클로페낙 같은 보조 진통제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급격한 통증이 올 때마다 황산 몰핀좌제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장에 차인 가스를 빼기 위해 항문에다가 줄을 삽입해 장 깊숙이 관장약을 넣어 많은 양의 가스와 피가 섞인 묽은 변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편안해 보입니다. 남편 말로는 지금까지 이렇게 편안한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옆에 누워 있는 할머니가 아프실 것 같다고 걱정해주는 것을 보니 이제 살만한가 봐요.”
오랜만에 남편의 얼굴에 웃음이 환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의 일생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내 아내는 참으로 불쌍한 여자입니다. 어릴 때 술주정뱅이인 아버지 밑에서 온갖 주정과 폭력으로 많이 맞으면서 지내왔습니다. 오죽하며 보다 못한 처가 쪽에서 강제로 이혼을 시켰다고 하니까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지자 14살에 가출을 했습니다. 본인의 힘으로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와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나마도 2학년까지밖에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검정고시를 쳐서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한양여대를 입학했지만 1년 정도 다니고는 휴학계를 냈습니다. 혼자 힘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버거웠던 것이지요. 여자 혼자 힘으로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유흥업소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그럭저럭 생활이 안정되면서 친정 동생을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기도 했답니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갈 때 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잘나가던 때라 아내가 있는 술집에 자주 갔었는데 아내의 성격이 굉장히 착한 것을 보고 그것 하나보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신 6개월이 될 즈음 자궁에 출혈이 생겨서 병원에 가보니 자궁경부암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병원에서는 2기라고 하더군요. 의사 선생님 하는 말이 아기를 포기하면 산모가 살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아기를 계속 자궁에서 키우면 치료시기를 놓쳐 산모가 죽을 수밖에 없으니 택일을 하로고 하더군요.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기를 지우고 우선 치료를 하자고 했습니다. 아기야 없어도 살고 데려다가 키울 수도 있으니 우선 살고 봐야 되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죽어라도 아기는 살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 살자고 우리 아기를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아내의 뜻이 너무 강해서 그냥 낳기로 했는데 체력이 따라주지를 못해서 결국 달 수를 채우지 못하고 임신 8개월 반 만에 제왕절개수술을 해서 낳게 되었습니다. 아기 때문에 약도 제대로 못 먹고 손도 못쓰다가 뒤늦게 손을 쓸려고 하니 이미 말기가 된 상태였습니다. 삼성의료원으로 국립암센타로 옮겨 다니면서 항암제에 방사선 치료에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보았지만 도저히 가망이 없었습니다. 이미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서 모두 포기하고 마지막으로나마 편안하게 지낼 수 있길 바라면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기 사진을 바라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지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되는데, 아기를 내가 키워야 하는데 하고 곧잘 중얼거리면서 웁니다. 딸 녀석도 엄마 젖 한번 빨아보지 못하고 떨어져서 크고 있습니다. 제 아내 정말 불쌍한 여자입니다. 솔직히 이곳에 올 때는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말을 마치는 남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임종 당일
오전 11시쯤 급격히 호흡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임종 호흡이었습니다. 남편은 일이 있어서 새벽에 서울로 올라갔는데 큰 일입니다. 이틀 후에나 아기를 데리고 온다고 하고 갔는데… 임종이 시작되면 짧게는 1시간에서 이틀 후에는 사망하게 됩니다. 거기다 청색증이 나타나는 걸 보니 3시간을 버티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오후 1시쯤 남편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를 들으며 아기 엄마는 마지막 숨을 쉬었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봉사자들의 외침과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는 합창 기도소리에 섞여 29살의 젊은 영혼은 이승의 끈을 놓고 있었습니다. 1분만 더 버텼어도 남편의 작별인사를 받을 수 있었는데, 사랑하는 아기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지체할 수 없었나 봅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장과정 때문이지만 외로움도 많이 타고 사람을 좋아했던 여자. 자신의 아픔을 숨기고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를 잘 했던 여자. 속이야 어찌되었든 겉으로는 너무 밝고 당당한 그런 여자였습니다. 아내를 닮은 예쁜 아기가 있으니 아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늘 내 곁에 있는 것입니다.”
돈을 안 내면 딸이 암에 걸려!
호스피스는 종교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꽃마을에도 그 동안 개신교, 불교, 무교, 남표호랭갯교, 여호와의 증인 등 많은 종교를 믿는 이들이 환자로 들어왔었습니다.
통증조절에는 약을 주면 되지만 영적인 안정과 평화를 주기 위해서는 종교 지도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불교 신도면 스님을 모셔오게 했고, 개신교 신자면 본인이 아는 목사님을 초청하게 했습니다. 어떤 대는 목사님이 위암말기 환자로 들어온 경우가 있었는데 사모님이 전도사여서 목사님을 간호하는 동안 옆방에 있는 다른 교회 신도를 위해서 기도해주도록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환자가 다녔던 교회가 너무 멀어서 그 교회의 목사님이 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사이비 종교 지도자에게 현혹되어 말기 암 환자들이 이중 삼중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종교적인 믿음은 중요하지만 허무맹랑한 믿음을 요구하거나 현실성이 없다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경계하는 마음으로 성모꽃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개합니다.
환자가 믿었던 종교는 여호와의 증인과 개신교를 섞어서 본뜬 듯한 종교로 지도자를 단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교회 신도와 목사님인 줄 알고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하였는데 후에 봉사자와 환자가 나눈 얘기를 전해 듣고 이상하다 싶어 확인한 결과 사이비임이 밝혀져 단주라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농촌의 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하여 공장을 다니면서 생활하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생활능력이 부족하였고 거기에다 의처증까지 심하여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 했습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남편은 허구한 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러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남편이 먼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 환자도 8년 전에 수술한 직장암이 재발되어 자궁과 폐 등으로 전이가 되어 꽃마을에 입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생활하던 중 문제의 그 교회를 다니는 이웃 사람의 권유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자녀들도 같은 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꽃마을에서 투병생활하는 동안에도 자주 단주님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기도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아래 글은 간호사와 환자가 대화했던 내용들입니다.
환자: 교회 단주님이 내가 더 살게 해달라고 금식기도(21일) 들어갔대요. 단주님이 나 때문에 금식기도하시는데 뿌리칠 수가 없네요. 그런데 대신 숙제를 내 주셨는데 찬송가를 율동해가면서 500번을 하면 기도해주신다고 했어요. 며칠 전에는 단주님이 오빠한테 동생 병을 낫게 해주면 뭘 해주겠느냐? 고 묻기에 오빠가 내 동생 병을 낫게 해주면 교회를 지어준다고 했대요. 지금 땅만 사놓고 돈이 없어서 못 짓고 있거든요.
봉사자: 숙제 잘 하고 단주님한테 기도 받으셨어요?
환자: 숙제하고 기도는 받았는데 숙제를 또 주셨어요. 찬송가와 율동을 600번 하라고 했어요. 숙제하기도 힘드네요.
봉사자: 힘들게 하시면 안 되는데 숙제를 반으로 줄여서 내달라고 하시면 어떨까요?
환자: 단주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만 살 수가 있대요.
봉사자: 그럼 살 수 있다고 기대하세요?
환자: 저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단주님이 하라는 대로 할 뿐이지요.
환자: 토, 일요일 하지 않아서 그런지 찜질 좀 빨리 해주세요. 단주님이 찜질이 좋으니까 매일 열심히 해달라고 하래요. 단주님이 기도 중에 암 덩어리가 하나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대요.
봉사자: 암 덩어리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드세요?
환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믿지는 않아요.
봉사자: 또 숙제 받으셨어요?
환자: 예, 600번이요. 숙제도 갈수록 더 힘드네요.
봉사자: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준다고 약속을 해서 조금 가져왔어요.
환자: 봉숭아 물 들이는 것 참 좋아해요. 아이들도 해달라고 하는데 귀찮아서 못해주었지요.
봉사자: 숙제는 잘 하셨어요.
환자: 했는데, 오늘은 숙제가 찬송가 1000번이에요. 말이 1000번이지 얼마나 힘들다고요. 이제는 짜증이 나요. 내가 단주님한테 못하겠다고 하니까 살 수 잇는 길은 숙제를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고 해요. 또 기도 해주시는 대신 알아서 돈을 내라고 하니까 돈이 있어야 알아서 내든지 하지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힘들어서 숙제 하지 않을 거예요.
봉사자: 숙제는 1000번 했어요?
환자: 숙제 안 했다고 혼났어요. 다시 숙제를 받았는데 열심히 읽어야 한대요.
환자: 아침에 단주님한테 숙제를 또 받았어요. 숙제는 시편 23편 부터 26편까지 100번 외우고 찬송가 528장 자주 부르고 기도하는 성도들 실망시키지 말고 믿음에서 굳세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했어요.
환자: 아침에 단주님이 잠깐 기도만 하고 가셨어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또 알아서 내라는 돈이 천만 원인가 봐요. 단주님이 둘째 딸한테 천만 원을 내라고 이야기했대요. 일요일 교회에서 딸이 2000원을 내니까 단주님이 2000원이 뭐냐고 만 원 아니면 2만 원 정도는 내야지, 하면서 일요일은 축복받는 날이니까 다른 데 돈 쓰지 말고 그 돈을 교회에다 내야 된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일년 동안 다니면서 낸 돈은 얼마 되지 않아요. 한 달에 많게는 30만 원 적게는 20만 원 일주일에 내는 돈은 6만 원 에서 없을 때는 3만 원 정도에요. 나는 적게 내는 거예요. 다른 신도들은 한 달에 50~100만 원 내는 사람도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내는 것은 보통 10~20만 원씩 이에요. 내게끔 강조를 하니까 안 낼 수가 없어요.
환자: 어제 단주님이 잠깐 기도 방문 왔는데 나보고 100일기도하면 낫는다고 하길래 나는 힘들어서 100일기도 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대신 나는 더 살고 싶지 않으니까 아프지 않고 천국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막 화를 내고 가셨어요. 이제는 점점 부담스러워져요.
이런 일들이 있고 나서 간호사가 아무래도 이상함을 발견했는지 귀띔을 해주어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봉사자들에게 물어보아도 역시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확인 차 나중에는 딸과 환자, 환자의 친정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는데 돈 천만 원을 내야 병이 낫는다고 한 것도 사실이었고, 게다가 만일 돈을 안 내면 환자의 막내딸이 자궁암에 걸릴 것이라는 협박성 얘기까지도 사실임이 드러났습니다.
통증이 심한 환자에게 건강한 사람도 하기 힘든 찬송가와 율동을 몇 백 번씩 시키며 부담을 주었고, 생활보호대상자로 배급을 타 먹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기도해주고 병을 낫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거액을 요구했고 그것도 모자라 요구조건에 응하지 않으면 딸이 암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협박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파렴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이비 종교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죠.
모든 말기 함 환자들은 누구나 다 병이 낫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준비도 적절하게 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미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낫는다면야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현실성이 없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맞지 않는 믿음을 요구하거나 강요한다면 이는 분명 사이비임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종교를 갖든 자유지만 혹시라도 위 예와 같이 생명을 담보로 장난질하는 믿음을 요구하거나 환자와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종교나 지도자가 있다면 단호히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임종 전 날
“신부님 고맙습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사랑 많이 받고 지냈던 시절이 여기서 지낸 두달 반 동안의 기간이었어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겁니다. 여기가 천국이에요. 이제는 너무 힘들어서 얼른 갔으면 좋겠어요. 나 좀 빨리 가게 기도해주세요.”
“그래요.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버티세요.”
임종 당일
오전, 가쁜 숨을 쉬는 가운데 둘러앉은 가족들을 한번 죽 둘러보더니 천천히 평화로운 가운데 숨이 빠져나갔습니다.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아마도 먼저 간 남편이 두 팔을 벌리며 마중을 나왔나 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환자들
(1)
꽃마을에 들어오는 날 환자의 상태를 보니 오른 족 가슴이 움푹 파인 상태로 피와 진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유방암 3기 말. 생활보호대상자로 지내던 중 암이 발병되어 혼자서는 감당키 어려워 복지사의 소개로 오게 된 분입니다.
이분은 연세나 병명에 비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동이 짱짱했습니다. 가는귀가 먹어서 귀에 대고 소리쳐야 겨우 들릴 수 있었고 당신 목소리도 그에 비례해서 커졌습니다. 병실 이쪽에서 저쪽까지 다 들릴 정도입니다. 조용하던 꽃마을이 할머니의 등장으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성격상 진득하니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도 가만히 계시질 않고 움직이고 부산을 떠십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새벽3시) 짐정리를 하는데 짐이라고 해봐야 집에서 가져온 옷가지와 돈과 먹을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짐을 매일 밤, 매일 새벽마다 풀었다 쌌다를 반복하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냅니다.
환자 관리를 위해서 문을 열어놓기 때문에 조용한 새벽의 성모꽃 마을 내부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숨소리가 들릴 정도입니다. 그런 고요를 매일 아침마다 이 할머니가 깨워놓습니다. 한번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면 잠들기 힘든 말기 암 환자들이 옆에 줄줄이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가끔씩 공갈협박을 해봅니다.
“자꾸 이러시면 여기 못 계세요. 낮에 짐 정리할 시간 드릴 테니까 밤이나 새벽에는 제발 하지 마세요!”
하면
“으— 응! 그려, 알았어!”
그러나 어김없이 그 시간만 되면 또 시작입니다.
원인이 뭘까를 찾아보니 일찍 잠에 드십니다. 저녁식사 끝나면 조금 있다가 잠이 들고 낮에도 틈틈이 주무시니 새벽에 잠이 올 리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초저녁부터 일찍 잠이 들어 혼자 실컷 주무시고 일어나는데 새벽에 왜 안 주무시냐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봉사자들에게 안 재우기 작전을 펴봤습니다. 누워계시면 봉사자가 흔들어 깨우고 말을 붙이고 … 처음엔 그런대로 효과가 있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하거나 말거나 입니다. 버럭 소리를 치시며
“왜 이렇게 못 살게 구는 거여!”
하고 호통을 치십니다. 그야말로 막가파 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식사시간만 되면 주방 봉사자가 죽어났습니다. 끼니마다 식사 주문이 다릅니다.
“저녁에는 밥 좀 한 공기 먹어야 되겄는디?”
밥을 갖다 주면
“아니 죽 좀 줘!”
다시 죽을 해다 바치면
“아니 이거 말고 누룽지 좀 끓여줘!”
매 끼마다 최소한 2~3번씩은 식성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된장과 고추장은 당신이 집에서 가지고 온 것을 반찬 통에 넣어서 꼭 당신 머리맡에 두셨는데 그 냄새란? 가뜩이나 환자들은 비위가 약한데, 봉사자들이 식사 시간마다 꺼내드릴 테니까 냉장고에 넣어두자고 해도 어림 반 푼도 없습니다. 절대 노터치. 아는 신자가 와서 먹을 거라도 주고 가는 날이면 머리맡에 빙 둘러 차려놓고는 혼자 시도 때도 없이 꺼내 드십니다. 물론 다른 사람 나눠주는 것은 국물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나만 보면
“얼른 죽어야 하는디, 왜 안 죽는지 모르것어요? 얼른 콱 죽어야 하는디?”
그러면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요것만 고치면 딱 일어설 긴디! 요것 좀 어떡히 고쳐줘유?”
“할머니 그 병은 의사 선생님들도 못 고친대요.”
하고 소리치면
“글씨, 의사 선상님한티 한번 보여봤이먼 금방 고칠 낀디.”
하시며 들은 체도 안 하고 딴 소리를 하십니다.
신기한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얘기다 싶으면 작은 소리를 해도 귀신같이 알아듣고 조금 불리하거나 듣기 싫은 소리면 귀에 대고 악을 써도 못 들은 체하고 딴청을 피우십니다. 한마디로 대책이 없는 분입니다.
이 할머니의 상식과 수준을 벗어난 행동은 그 외에도 엄청났습니다.
소변 통에 소변을 보고는 다시 세숫대야에 옮겨 붓기. 세숫대야에 버린 소변을 비우고 거기다 물을 떠오라 하고는 그 물에 세수를 하고 양치질하기. 양변기에 가서 볼일을 보시고는 물을 내린 후 고인 양변기 물에 세수를 하고 머리에 물 묻혀 머리 뒤로 빗기. 아무리 더럽다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냅니다. 부축해드리려고 따라간 봉사자가 따라가서 헛구역질을 하고 오니…
20일 정도 지났을까, 하루는 날 보더니,
“신부님, 나 집에 좀 다녀올라요!”
“왜 그러세요?”
“집 정리 좀 하고, 집에 가서 세금도 내고, 매달 나오는 배급도 타야 혀요. 그리고 몸 좀 추스를라고요. 가서 뼈 좀 고아 먹고, 먹고 싶은 것 좀 해먹고 오면 기운이 날 것 같은디…. 여기선 당최 자꾸 어지러운 게 음식이 안 맞아서 안 되것어.”
하십니다.
“여기서도 고기 해드리잖아요!”
“그걸로는 안 뎌! 사골도 좀 자 ㄹ고와야 뎌.”
“나 집에 좀 가야 쓰겄응께 동생한티 전화 좀 걸어줘.”
“전화비가 비싸서 안 되겠는데요?”
“전화비 줄 거여. 사람이 염치가 있지 공짜로 쓰면 되남?”
하면서 얼마냐고 묻습니다. 이 참에 잘됐다 싶어
“한 통화에 5만 원인데요?”
하니까
“그려? 줘야지!”
하며 속바지 춤에서 꼬깃꼬깃한 돈 5만 원을 꺼내더니 주었습니다. 보아하니 돈 뭉치처럼 보이는 게 달려 있습니다. 나중에 봉사자에게 물어보니 할머니 허리에 두 군데, 앞쪽 뒤쪽에 두 군데, 다리 쪽에 한 군데, 무려 다섯 군데에 돈 주머니를 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대충 잡아 만 원짜리 다발로 100만 원은 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 돈 때문인지 할머니는 옷을 갈아 입혀 드리려고 허리에 손을 댄다든가 옷을 만지면 화를 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씻겨드리려고 목욕탕에 데리고 가도 다 내보낸다고 합니다. 돈에 손이라도 댈까 봐 그러시는지…
그런데 이분이 성화에 못 이겨 성모꽃마을에 오신 지 한 달 만에 집으로 가셨습니다. 기운을 차리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한다며, 평생을 혼자 남 눈치 안 보고 살다가 남 신경 쓰며 살려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통증도 별로 없고 소독만 열심히 해주면 그런대로 사시겠다 싶어 할머니의 원대로 보내드렸습니다. 제발 변기통에다가 양치질에 세수나 안 하고 머리나 안 감았으면 좋으련만… 우~웩!
(2)
성모꽃마을에서는 환자의 입원기간을 석 달로 잡습니다. 석 달을 입원기간으로 잡은 것은 통증이 어느 정도 조절되고 증상을 완화시키면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 퇴원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퇴원했다가 상황이 다시 악화되거나 더 안 좋아지게 되면 재입원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석 달을 넘기지 않는 이유는 일부 환자들의 공통된 심리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두 달 정도까지는 입원했을 때 자신에게 베풀어주는 호의와 사랑에 미안하고 감사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바뀌는 모양입니다.
나에게 해 주는 그런 사랑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요구사항은 점점 더 많아지고 채근하기 시작하는데 석 달이 넘어서면 10가지 중 한가지만이라도 소홀하거나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짜증을 내고 다른 사람을 붙들고 흉을 보기 시작합니다. 방문 오는 가족이나 친척들을 붙잡고 험담을 하는데 처음 오는 사람이 들으면 뭐 이따위 곳이 다 있는가 하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저년이 불러도 빨리 안 오고 늦장을 부린다.’
‘밥도 조금밖에 안 주고 배가 고파 죽겠다.’
‘000 년아 목말라 뒈질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냐?’
“기저귀 좀 발리 보라는데 뭐하고 있느냐, 이년아!’
‘너 같은 것은 내 발가락에 때나 핥아야 한다.’
‘그 따위로 하면서 무슨 봉사를 한다고 하느냐’ 는 등 등…
상상을 초월한 말고 행동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3개월이 지났다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모양입니다. 가끔씩 정도를 지나치는 사람을 보면 맥이 빠집니다.
그래서 3개월이 지나면 집에 갔다가 다시 오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집에 가서 어려운 처지에 있어봐야 여기서의 고마움을 새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0번의 호출
40대 중반의 자궁경부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다리 쪽으로 암이 전이가 되어 잘 쓰지 못하는 상태라서 시간마다 체위를 바꾸어주어야 했습니다. 체위를 변경한다는 것은 요령이 필요하지만 전신이 늘어져 있는 환자의 자세를 바꾸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환자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왼쪽으로 누울 때 오른쪽 팔로 난간을 잡고 잡아당겨주면 돌아눕기가 수월해집니다.
말기 암 환자는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나면 팔다리조차 움직일 힘이 없게 됩니다. 누군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그 상태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때 봉사자가 귀에 대고
“오른쪽으로 체위를 바꿔드릴게요.”
“머리를 돌릴게요.”
“이번엔 팔을 옮깁니다.”
하고 얘기하면서 움직여주면 훨씬 수월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환자가 움직일 힘은 없지만 환자의 마음이나 의지가 지시하는 대로 따를 준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움직일 수 없다는 똑같은 조건하에서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다룰 때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궁경부암 환자는 두 팔은 움직일 수 있었던 상황인데도 두 달이 지난 어느 순간부터 전혀 움직일 기미조차 없이 하나부터 열까지 무조건 호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손이 닿은 거리에 있어도
“물 달라.”
“옆으로 돌려달라.”
5분도 안 되어서
“허리가 불편하다. 다시 반대 쪽을 해달라.”
“긁어달라.”
“저리니까 주물러라.”
“귀가 간지럽다.”
등 등 등… 주문사항이 채 5분도 안 되어 쏟아집니다. 그야말로 봉사자들 혼을 쏙 빼놓고 다른 환자들은 쳐다볼 시간적 여유조차 없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예전의 환자 중에 이와 비슷한 사람이 있었는데 본인이 혼자 팔고 끈을 이용해서 옆으로 돌아눕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다리에 암이 퍼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며 극구 혼자 했었던 분입니다.
사실 맘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남의 손을 빌리려고 했기 때문에 오는 봉사자들이 전부 탈진상태가 될 정도였고, 그것을 아는 봉사자들은 그 방에 들어가기를 꺼려했습니다. 뒤에 들은 얘기로는 어떤 봉사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 들어갔다고 몸살이 다 났다고 하니…
어떤 봉사자는 자기가 낮에 있는 동안 호출 횟수를 세어보았다고 하는데 무려 100번의 호출.
“자꾸 이러시면 여기서 지낼 수가 없어요. 000 때문에 봉사자가 다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또 그러면 집에 보낼 수밖에 없어요.”
공갈협박까지 해보지만 그때만 ‘절대 안 그러겠다’고 약속을 해 놓고는 내가 방문만 나서면 호출기를 눌러버립니다. 나중에 호출기를 뺏어버리니까 소리소리 지르면서 부르는데… 햐! 정말 대책이 없었습니다.
예쁜 봉사자만?
오는 환자 중에 어쩌다가 상태가 꽤 양호한 분이 있었습니다. 물론 말기이긴 하지만 주변에 돌봐줄 사람도 없고 전이속도도 상당히 느리고, 그래서 임종 때까지는 괘나 시일이 걸리겠다 싶은 분이 계셨습니다. 정상일 때도 걷는 것이 불편했었는데 한동안 혼자서 투병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지금은 기저귀를 차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처지가 딱해서 받아주긴 했는데 문제는 한 보름이 지나서부터였습니다.
이곳 생활에 금방 적응이 되어서 그랬는지 어느 날 인가부터 한 가지 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봉사자들 얘기로는 이 환자가 예쁜 봉사자만 찾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무슨 얘기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소변이나 대변을 보면 누군가 바로 치워주면 될 것을 꼭 여자 봉사자만 부른다고 합니다. 남자 봉사자가 먼저 알고 다가가면 됐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볼일을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하고는 여자 봉사자 오기를 기다렸다가 봐달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대소변을 보지도 않았는데 예쁜 여자 봉사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기저귀를 봐달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모든 봉사자들에게 소문이 나서 징그럽다고 그 환자에게는 안 가려고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한 두어 달 지나려니까 이제는 기어서 나오게 되었는데 옆방 환자의 보호자가 상당한 미인급(?)이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부터 그 보호자만 오면 쫓아갔습니다. 옆방으로 병실로, 기웃기웃하면서 … 평상시에 살던 행동방식이 죽음을 앞두고서도 그래도 나오는가 봅니다. 평생 힘들게 살아왔고 더구나 몸까지 불편한 사람에게 어떤 여자가 눈길 한번 주어봤겠는가!
그런데 꽃마을에 와서 모든 여자들이 불쌍하다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친절하게 속옷까지 갈아 입혀주니 제 정신을 못 차릴 법도 했습니다. 그래도 봉사자들에게 징그럽다고 생각하지 말고 정에 굶주린 환자요, 정신이 온전치 못한 환자이니 할 수 있는 한 성심껏 대해주라고 일렀지만 쉽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환자라고 생각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오욕칠정을 못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몸 속에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는 것뿐이지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의 기본욕구를 모두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기환자들도 통증을 없애주고 편안한 상태가 되면 성적인 욕구도 당연히 나타나는 법입니다.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닌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기환자가, 죽을 때가 다 된 것들이 웃긴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곡 명심해야 합니다.
한줌의 기운만 있으면 생각날 수 있고 행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욕구입니다. 이런 욕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육체적인 통증완화와 증상완화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환자도 임종 전까지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 자연스런 인간임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나를 용서해다오!
올해 나이 70세, 위안 2기 판정을 받았으나 경제적인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치료를 포기한 분입니다. 집에서 민간 요법으로 항암에 좋다는 약재들을 달여 먹었으나 별 차도 없이 악화되어오다가 꽃마을로 입원한 분입니다.
나름대로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전쟁 중에 다친 부상으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이로 인해 가족간의 불화와 갈등은 심해져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0여 년 전 부인과 별거에 들어가면서 자식들과의 왕래도 끊어졌고 그 골은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깊어져만 갔습니다. 지병인 관절염에 위암까지 겹쳐 76 kg이던 체중이 52kg을 빠졌고 물만 먹어도 속이 쓰리고 아픈데다 순간순간 오는 암 통증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욱 느끼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통증보다도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부인과 자식들로부터의 냉대와 외면이었습니다. 지난 날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못한 데 대한 자책과 실망 때문인지 꽃마을에서 지내시는 동안에도 별로 말이 없었고 통증이 와도 이를 악물고 참을 뿐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날에 대한 보속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하고 거의가 앉아서 조는 일이 많아졌을 때 이제 길어야 2~3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들이 보고 싶지요? 연락해 볼까요?”
“아니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시죠?”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싫다고 하시는 거죠?”
“예.”
“그걸 아시면 더 늦기 전에 가족들을 불러다 용서할 게 있으면 용서하고 화해할 게 있으면 화해해야죠. 풀고 가시지 않으면 평생 한이 될 겁니다.”
“….. 예.”
대답하는 환자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 동안의 설움이 북받치는 모양입니다.
“울고 싶으면 실컷 우세요… 풀릴 때까지…”
한참 후 마음의 결심을 굳힌 듯
“아들… 아들 좀 불러줘요.”
하셨습니다.
다음 날, 저녁 무렵부터 임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아들과 며느리가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다 될 무렵, 잠들어 있는 환자에게 다가가
“아버지! 저 왔습니다.”
“아버님! 이제야 찾아오게 돼서 죄송해요.”
아들과 며느리의 출현이 믿기지 않으시는 듯 깜짝 놀라며 바라보셨습니다. 진짜로 아들과 며느리가 와줄 줄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앉혀달라고 하시고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는 듯 어깨를 떨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아들을 만나면 뭐가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막상 대하고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10여 년의 공백을 깨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며느리가 아들의 손을 잡아 아버지에게 갖다 끌었습니다. 뭔가 입술을 달싹이던 환자의 입에서 한마디가 튀어 나왔습니다.
“나를 …. 용서해다오.”
그제서야 아들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동안 저도 많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나 찾아와 뵙다니요.”
“아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아…”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붙잡고 한참을 오열했습니다. 지난 날의 아픔과 응어리가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얼마 후 환자의 상태를 보니 마지막 임종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둘러선 봉사자와 가족들이 마지막 임종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가 한줄한줄 끝날 때마다 성호를 그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신앙생활을 해오던 터였지만 마지막 임종을 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보통의 의지가 아니면 할 수가 없을 뿐더러 정신 또한 맑아야 합니다.
환자는 마지막 순간에 아들과 화해를 하고 작별을 하는 것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는 것인지 십자성호를 몇 번 긋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크게 뜨고 있던 눈을 감았습니다. 다시는 놓지 않으려는 듯 마지막 순간까지 곽 잡았던 아버지의 손이 스르르 풀렸습니다.
“아버지, 저를 용서하시고 편안히 잘 가세요. 저희 부부가 어머니 잘 모실게요.”
“아버님 잘 가세요… 죄송해요.”
오열하는 아들과 며느리의 작별인사를 들으며 떠나는 환자의 얼굴은 환하게 빛난다고 해야 할 만큼 평소에 볼 수 없었던 행복감이 어려 있었습니다. 3시간 정도의 짧은 상봉이었지만 지난 10년의 아픔을 치유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들의 어두웠던 얼굴도 환해졌습니다. 평생 한을 담고 살 뻔했던 화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제 아내는 암 통증을 참으려고 합니다. 약을 먹으면 덜 아픈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약을 먹지 않습니다.”
“아니 왜 안 드세요! 암 통증은 참을 수 있는 통증이 아닌데.”
“어릴 적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이제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위해 희생한다면 통증을 참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수난과 고통에 함께 동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습니다.”
처음 입원상담을 하면서 남편이 해준 말입니다. 남편도 같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이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아프고 힘든 것을 보면 이게 아닌데 싶은데도, 막상 봉인이 신앙적으로 이겨내겠다고 하니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보기에 정말 딱합니다. 제 아내를 보시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덩치가 큰 남편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이제 세 살 배기 딸과 다섯 살 난 아들을 둔 31살의 젊디젊은 엄마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희생을 암 통증을 참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성모꽃마을에 들어오던 날 환자의 모습을 보니 많이 수척해 있었고 안색 또한 좋지를 않았습니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으려 했던 표시가 역력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성격이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탓인지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녁 무렵 환자가 안정을 취한 다음 설득을 시작했습니다.
“자매님! 아파도 약을 안 드신다면서요? 예수님 고통을 생각하면서 참는다고 하던데 맞아요?”
“예.”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 그 고통을 참고 있어요?”
“제 자신이요. 어차피 가망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지은 죄에 대한 보속을 다 하고 죽고 싶어요. 그래야 좋은 데 갈 거 같아요.”
“맞아요. 진짜 그건 잘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묵주를 손에 쥐고 통증을 참으면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잘 돼요?”
“잘 안 돼요. 너무 아파서 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봐도 그럴 것 같아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계신 것을 보면… 그런데 남편이나 자식들, 부모님도 다 좋아하세요? 그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 싫다고 그래요. 그래서 남편이 진통제를 먹이려고 애를 써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런데 자매님이 약을 안 먹는 것은 좋으데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문제가 한가지 있어요. 뭔지 아세요?”
“그게 뭔데요?”
“저 어린 자식들이 문제입니다. 어른들은 신앙심이 무엇인지 아니까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저 애들은 이제 세 살, 다섯 살밖에 안 됐어요. 신앙심이 뭔지 예수님의 고통이 뭔지 모르죠. 다만 저 아이들이 지금 엄마하고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문제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늘 고통스럽고 힘들고 찌푸리다가 험악하게 죽는 모습만 기억하게 될 텐데 그건 어떻게 하죠? 아이들 기억 속에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환하게 웃는 평화로운 모습이 담겨져 있어야 커가면서 힘들 때 힘이 될 수 있을 건데요. 지난번에 젊은 아이가 여기서 죽었는데 그 아이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죽을 때 힘들까 봐 그게 무서워요, 하고 얘기한 적이 있답니다. 자기 부모가 힘들게 돌아가신 모습을 본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자기도 그렇게 힘들게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제일 걱정한답니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
아이들 문제에 부닥치니 갑자기 갈등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습니다.
“고통스럽게 죽은 엄마, 마지막까지 힘들게 앓다가 죽은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하고 기억하는 게 좋겠어요? 아니면 편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간 엄마, 고통 없이 끝까지 우리랑 재미있게 놀아준 엄마, 하고 기억하는 게 좋겠어요? 이런 점은 미처 생각 못 해죠?”
“네! 신부님 말씀을 들으니 그게 옳은 것 같아요. …. 다른 사람은 생각 안 하고 나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약을 먹어야겠어요. 약 좀 주세요.”
환자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심장인들 못 꺼내 주겠습니까? 사경을 헤매다가도 자식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는 게 모성의 힘인 것을…
젊은 부부라서, 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부부가 함께 지내도록 하기 위해 독방을 주었습니다. 남편 또한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기에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꽃마을에 왔던 부부들 중에 한쪽 배우자가 이처럼 끔찍할 정도로 잘해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내가 아파할 때는 안절부절 못 합니다. 머리가 아프다면 머리를 만져주고, 팔이 아프면 팔을,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주물러줍니다. 언젠가는 밤 12시에 감자기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그 시간에 자장면을 손수 만들어서 갖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정신 없이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려서 누가 또 돌아가시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는데 지금 아내가 잠이 안 오니까 수면제 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으잉….!”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조금 있으면 날이 밝는데, 그러고 보니 앞집에서 닭이 쉬어 터지는 목소리로 고기오! 하고 악을 써대고 있었습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밉니다. 수면제란 것은 잠자기 1~2시간 전에 먹어야 효과가 납니다. 그래서 최소한 밤 10시나 11시 이전에는 먹어야 잘 잘 수 있는 것인데 날 샐 때가 되어가지 약을 달라 하니, 허 참! 콧김만 나왔습니다.
콧김을 재우느라 속으로 기도를 바쳐봅니다.
“주님! 그래도 기쁘게 해야겠지요? 병든 아내가 잠 못 자는 게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이 새벽에 신부를 겁도 없이 깨우겠습니까? 그 용기가 가상해서 내려가야지요?”
(하필이면 간호사가 몸이 안 좋아 자정 무렵에 귀가를 시켜버렸으니!)
비몽사몽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환자일수록 잠을 잘 자게 하는 게 원칙인데 남편 입장에서 잠을 못 자는 부인을 바라보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딱하기도 했습니다.
“전혀 잠을 못 잤어요?”
하고 물으니
“두세 시간 정도는 잔 것 같아요!”
하며 아내를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낮잠도 못 주무셨어요?”
“낮에도 조금씩 잡니다.”
“그럼 하루에 대충 몇 시간 정도 주무세요?”
“한 6~7시간은 자는 것 같아요.”
‘으잉!’
속으로 번뜩 생각이 스칩니다.
‘아니 그럼 잘 만큼 자는 거잖아! 나는 기껏해야 4~5시간 정도밖에 못 자는데.’
“아 그래요? 수면제를 드릴 테니까 지금 드시면 금방 잠이 잘 올 겁니다.”
약 효과가 제대로 나려면 1시간 정도는 걸리겠지만 심리적으로 지금 효과가 난다고 해야 잠이 들 수 있습니다. 왜냐면 신부가 주는 수면제니까! 약 효과에다가 신부에 대한 믿음이 플러스 되면 효과는 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약 먹여주고 잠시 손을 잡아주고 있으니 쿨쿨….! 잠이 들었습니다. 밤새 뒤척이느라 많이 지쳤나 봅니다.
이 환자가 꽃마을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지날 무렵 증상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먹은 게 없어도 구토를 했고, 딸꾹질과 가래 끊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증상환화를 위한 약을 써보지만 100% 효과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라 암의 전이속도가 빠른가 봅니다.
임종이 시작될 때 남편의 작별인사가 있었습니다.
“여보! 애들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가… 애들 내가 잘 키울게… (흑흑흑).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 당신하고 함께 하는 시간 동안 행복했어… 천국에서 다시 만나. 알았지? 잘 가!”
작별인사를 받으며 아내의 영혼은 천천히 하늘나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통증을 참았던 정성을 갸륵하게 보시고 남편과 자식들에게 축복으로 되돌려주실 것입니다.
여보, 나 그냥 오늘 갈래!
흉선상피암으로 이미 여러 군데로 전이가 되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환자가 입원을 했습니다.
꽃마을에 올 당시만 해도 상당한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마약성 진통제를 강력하게 써야 했습니다. 자녀는 중학교에 다니는 예쁜 딸 둘을 두었고 모두 착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모범생이란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투병생활하는 동안에도 자주 들르곤 하였는데 아빠의 자랑거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손이 많이 가야 하는 자식들을 남겨두고 가야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 많은 짐을 아내에게 지워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이라며 평상시에 제대로 호강 한번 못 시켜 준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신부님 이렇게 빨리 죽을 줄 알았으면 건강할 때 잘해줄 것을 참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닫다니 한심하죠?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서 끝까지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은 아내밖에 없네요. 그것이 너무나 고맙고 미안해요.”
때마침 들어오는 아내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잡아줍니다. 영문도 모르는 아내는 남편의 작은 웃음에도 행복해했습니다. 그 행복이 얼마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더 소중한가 봅니다.
꽃마을에 입원한 지 한 달이 지날 무렵의 일입니다. 암이 폐에까지 전이가 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은 흉수천자(폐에서 물을 뺌)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늦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미리 증상이 나타납니다.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답답하며 입술과 손발 끝이 산소부족으로 인한 청색증이 나타납니다. 벌써 이런 증상이 생일 때는 조그만 늦어져도 생명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촌각을 다투어야 할 경우가 많아 미리미리 물을 배야 합니다. 이분은 벌써 20여 차례나 물을 뺐습니다.
하루는 아침부터 저를 찾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가보니 이미 아내도 자리에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부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신부님! 저 하느님 뵈러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임종을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어안이 벙벙한 사이에 남편은 아내에게
“여보, 나 그냥 오늘 갈래! 오늘 폐에서 물을 빼야 하는데 … 빼고 싶지 않아! 물 빼면 일주일을 더 살 수 있겠지만… 내가 더 살면 당신만 힘들어져. 어차피 한번 죽는 건데… 일주일 더 살면 뭘 해… 그냥 갈게.. 당신이 허락해주면 좋겠어… 당신하고 하루라도… 더 있고 싶지만 당신이 너무 고생해서 안 되겠어. 아이들과도 계속 떨어져 있어야 하고… 나, 그냥 오늘 갈게!”
숨이 차는지 간신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어차피 끝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안 돼요… 이렇게 당신을 보낼 수가 없어요… 조그만 더 있다 가요. 신부님 어떻게 말 좀 해주세요…. 이이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요. 일주일만이라도 더 살게 해주세요… 여보! 나 고생하는 거 괜찮아… 같이 있으면 얼마나 더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이렇게 훌쩍 갈려고 그래… 나 허락 못 해… 안 돼요.. !(흑흑…..)”
“여보 미안해… 어차피 한번 헤어져야 하잖아…. 이젠 더 이상 연명하는 것도 힘들어… 갈 사람은 빨리 가야 당신도 아이들하고 마음잡고 살 수 있지….”
“여보… 어떡해… 나 어떡하면 좋아…!”
아내의 흐느낌 속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한참 후
“여보, 당신이 정 그렇게 원한다면 당신 뜻대로 해.”
“신부님도 허락해주실 거죠?”
“그래요… 물을 안 빼면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는 거 아시죠? 마음의 준비는 다 하셨어요?”
“예.”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부르세요.”
“아닙니다…. 불 사람은 다 봤습니다. 아내하고 조용히… 같이 있으렵니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신부님… 잊지 않을게요.”
하루 동안 부부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남은 몇 시간을 함께 지냈습니다. 일 분을 하루처럼 한 시간을 10년처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그 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밤 11시. 산소를 꽂고 있었지만 숨이 가빠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임종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앞에 닥친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죽음이었기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평온해 보였습니다. 저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봉사자들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 동안 … 고마… 웠습니다….”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12시쯤, 숨이 잦아지면서 하늘나라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평온한 모습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떠나기까지 15시간 동안 그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고했습니다.
죽기 전 아내에게 유언을 한 가지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앞만 보고 열심히 살긴 했지만 죽음을 앞두고서야 정말 중요한 것이 따로 있음을 깨달았어. 그것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점이야. 그러나 나는 불쌍한 사람을 위해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내 대신 당신이 불쌍한 사람을 힘 닿는 대로 도와주었으면 좋겠고, 아이들에도 그 점을 잘 그르쳐서 죽을 때 나처럼 후회하지 않도록 해줘.”
전과 20범
어느 날 교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살다가 위암에 걸렸는데 가망이 없으니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교도관들과 함께 찾아온 환자를 보니 인상이 무척이나 험악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머리에 뿔만 달아놓으면 마귀 같다고나 할까. 풍기는 냄새가 좋지를 않습니다. 오죽하면 이 환자가 처음 왔을 때 봉사자들이나 다른 방의 환자들이 무섭다고 피해 다녔을 정도였으니… 한마디로, 살아온 험난한 인생이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습니다. 왜 그리 험한 얼굴이 되었는지 그 사연을 알면 이해가 가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밖에 모르시던 아버지가 도박에 빠지면서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해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정에 대해서 무능하고 관심을 안 갖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커져갔고 그 골은 깊어질 수박에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늘어만 가는 가운데 학교는 고사하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산으로 들로, 친구 집으로 놀러 다니다가 결국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어머니가 행상으로 마련한 조그만 식당에서 일을 거들어주게 되었는데 하루는 술에 취한 손님이 어머니에게 갖은 욕설과 행패를 부리는 것을 목격하고 손님과 싸움이 붙어 실컷 두들겨 팼는데 이 일로 경찰서와 교도소라는 곳을 드나들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교도소에 가서 잘못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온갖 악을 배웠고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는 담력과 배짱만 늘었습니다.
그 이후로 술만 마시면 아무하고나 싸우는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사회에 대한 분을 해결했습니다. 그러니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었고 전과 20범이란 딱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운동도 했는데 합기도와 유도를 배워 합이 6단이나 되었다고 하니 덩치는 크고 운동도 했겠다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때 마음을 잡고 결혼도 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이후로 6명의 여자와 살다가 헤어지고, 살다가 헤어지는 반복을 거듭했습니다. 어떤 여자는 길어야 2년, 짧게는 1달 만에 살다가 헤어지기도 했다는데, 한번은 같이 살던 여자 중에 하나가 서울로 가서 딴 남자와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냥 살면 될 일을 이 남자에게 와서 이제부터 이 사람하고 살 거니까 그리 알라고 하는 바람에 격분한 나머지 싸움이 붙게 되었습니다. 본인 말로는 같이 온 남자를 한 대 때렸는데 그 자리에서 뻗더랍니다. 또 여자도 홧김에 배를 한 대 쳤는데 쓰러지더니 병원에 가는 도중에 죽어버렸다고 했습니다. 한꺼번에 둘을 죽이고 또 철창 신세를 졌고, 한번은 동네사람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또 살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인생 이력서에는 살인 3명, 수 없는 싸움질과 폭력, 폭행 등 전과 20범에 무기징역이란 낙인이 찍혀 가족들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채 교도소에서 썩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이 지은 죄의 업보였는지 위암에 걸렸고 교도소에서도 더 이상 감당을 할 수 없게 되자 형 집행정지 명령을 내리고 교도소 밖으로 내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죄인은 나가봐도 더 이상 죄를 지을 처지도 못 되는 중증의 환자이기 때문에 나가도 안전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수소문 끝에 성모꽃마을로 오게 되었는데 꽃마을에 와서도 참으로 많은 사건을 만들어 냈습니다. 평생 하던 짓이 깡패 짓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모든 자원봉사자를 알기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도대체가 고마워하거나 어려운 게 없었습니다. 자기 맘에 안 들면 성질을 버럭 내고 자기가 문을 열고 싶으면 열어야 하고 닫고 싶으면 닫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방에 있는 환자들하고도 싸움이 났습니다. 조상 중에 싸움을 못해서 안달하다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이 환자하고 부딪치는 사람은 반드시 갈등이 생겼고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나한테 덤볐다가는 쫓겨날 테니까… 그야말로 사람 봐가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 사암을 하루 이틀 겪으면서 느낀 것은 그야말로 악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심지어 어머니 얘기가 나오면 불여우 같은 년이라고 욕을 했고 형제들 얘기가 나오면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욕을 해댔습니다.
교도소에 드나드는 동안 가족들은 형에 대한 미움이 넘어서서 빨리 뒈졌으면 좋겠다, 차라리 교도소에서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고 이 환자는 만나기만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가족들에게 저주에 가까운 미움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형이란 자가 어려서부터 56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사람구실을 못하고 개망나니 짓을 해왔으니 안 미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화번호가 바뀌어도 알려주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지경인지라 이 사람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 싶어 작전을 짜야 했습니다. 죽기 전에 최소한 가족들과는 화해하도록 해야 하겠고, 자기가 때려죽인 영혼들에 대해서도 최소한 미안한 마음이라도 갖고 죽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자한테 집 전화번호를 물으니까 가르쳐주는데 옛날 전화번호였습니다. 2년이 넘도록 가족들과 한번도 전화통화를 한 적이 없었고, 집에서도 면회를 간 적도 없었고,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니 통화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전화국에 수소문을 한 끝에 집을 찾을 수가 있었는데 남동생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뭐 하는 곳인데 지금 당신 형이 말기 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고 이제 길어야 두 세 달밖에 못 사니까 한번 와서 방문 좀 하고, 만나 주었으면 좋겠다 하고 전후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대뜸 하는 얘기가
“뒈지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못 간다. 죽으면 연락해라. 우리 집에선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하고 신경질적으로 얘기를 합니다. 형 얘기만 나오면 전후 사정 안 가리고 적개심부터 드는가 봅니다. 그래서 나도
“뒈질 날 얼마 안 남았으니까 오라는 것 아니냐.”
하고 소리쳤습니다. 기선을 놓치면 그나마 전화통화도 못 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동생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까 동생이 형을 굉장히 무서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이 덩치도 좋고 운동도 합이 6단에, 싸움도 잘하지 사람도 몇 명 죽인 경력이 있지, 혹시라도 자기들한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상태로는 개미새끼 한 마리 죽일 형편도 안 되니까 빠른 시일 안에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설득을 했더니 이번 일요일 날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 환자한테 동생들이 찾아온단 얘기를 하니까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합니다. 혹시라도 끝까지 안 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가 봅니다. 교도소에 들어간 이후로 서로간에 한번도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영영 버림받는가 보다 하고 걱정도 될 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놈의 새끼들 오리만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죽일 놈들.”
하면서 또 욕을 해댑니다. 동생들이 찾아와서 고맙고 기쁘다는 표현이 이런 식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러다간 형제들이 오랜만에 상봉하는 자리에서 싸움 나겠다 싶어 또 머리를 썼습니다.
일요일 날 동생 둘이 왔기에 다른 방에 떼어 놓고서, 환자인 형에게 가서 절대로 지난 날 얘기는 꺼내지도 말고 동생들이 오면 딱 이렇게
“와 줘서 고맙다. 형 노릇도 못하고 이 꼴을 보여줘서 미안하다.”
하고 안 마디만 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가서는 절대 지난날 얘기는 꺼내지 말고
“그 동안 찾아가보지도 모 하고 미안해요, 식구들도 잘 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여기서 잘 지내요.”
이 말만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 손이나 한번 잡아주고 가라고 각본을 짰습니다.
마침내 형제들을 상봉시키는 자리에서 처음 각본대로 해야 되는 데 환자가 대뜸 “이눔 새끼들! 그 동안 한 번도 안 오고 말야. 연락도 없고.”
하면서 성질을 버럭 냅니다. 그러니까 동생이
“아! 형이 옛날에 그렇게 속만 안 썩였어도… 그리기에 내가 뭐라 그랬어? 응 응…”
하면서 또 싸움이 붙었습니다.
이거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어서 환자보고 입 다물라고 하고는
“아까 가르쳐준 대로 하라니까!”
하면서 눈을 부라리니
“와줘서 고맙다. 형 노릇도 못하고….”
하고 기어들다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내 눈치를 힐끔힐끔 봅니다.
이번엔 동생들을 짝 째려보니까
“어쨌든 지난 날 덮어두고 잊어버립시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고생이유. 어머니도 잘 계시니까 걱정 말고 잘 계시유.”
하고 말합니다. 이젠 좀 제대로 되는가 봅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옆에서 계속 감시를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집안 얘기를 한 7분 정도 했나? 그러고는 이제 됐으니까 집에 가라고 동생들을 보내면서 다음에 올 때는 어머니하고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나중에 환자에게
“동생들이 오니까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눔 새끼들이 안 오면 어쩔 거야.”
합니다. 정말 성질머리하고는 대책이 없습니다.
평생을 다정다감한 얘기를 한 적이 없으니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전부 원망과 미움뿐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늘 “그 놈들은 죽어도 싼 놈들이었다. 뒈질 짓을 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는 요만큼의 죄책감도 없다.”
하고 독기가 떨어지는 눈을 치켜 뜨면서 얘기를 합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뒈질 짓을 하면 때려죽여도 괜찮겠네요?”
하고 물으니
“내가 왜 죽어? 내가 죽여버리지. 그 놈들한테 내가 죽을 줄 알아요?”
끝까지 자신은 잘했다고 우겨댔습니다. 세상에 대한 한과 증오가 이 사람 마음 안데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또 한차례 다녀갔습니다. 동생들에게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방문 왔을 때 좋은 얘기만 하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해서인지 별 마찰 없이 지나갔습니다. 어머니보고 불여우 같은 년이라고 하더니 어머니의 방문 이후 어머니에 대한 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와서 음료수며 과일주스를 사다가 머리맡에 놓아주고 돈도 10만 원을 주었는데 남들이 자기 것을 먹을까 봐 침대 밑에 내려놓지를 않았습니다. 옆 환자에게 좀 나눠주라고 해도 막무가냅니다. 동생들이 주고 간 돈을 책갈피에 꽂아놓고는 머리맡에 베개로 눌러둡니다. 그리고는 화장실 갈 때 세어보고, 들고 갔다 와서 또 세어보고, 잘 때 또 세어봅니다. 하루에도 몇 번을 세어보는지 돈이 닳아빠질 지경입니다. 그리고 봉사자들이 청소하려고 베개 쪽에 손이 가려고 하면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돈 훔쳐가려고 한다고…
이 환자는 절대 자기 돈을 쓰는 법이 없습니다. 뭐가 먹고 싶은데 사다 주면 돈을 주겠다고 봉사자에게 말합니다. 사다 주면 봉사자가 돈을 받겠는가? 잘 안 받는다는 심리를 십분 이용해서 담배 사달라, 뭐 사달라, 하면서 꽤나 뜯어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돈은 10만 원 에서 한 푼도 줄어든 적이 없습니다. 한 달 보름이 지나도록 영혼 상태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번에는 이 환자 정신 상태를 바꾸어야 될 것 같아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요새는 꿈을 자주 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 자기가 죽인 마누라가 나타나서 자기를 쳐다본다고 하는데 무서워 죽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는
“그 마누라가 지금 당신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바로 지옥으로 끌고 갈려고 하기 때문에 언제 죽으려나 확인하려고 자꾸 꿈속에 나타나는 거다.”
하고 겁을 주었습니다. 다음 번 꿈에 나타나면 난 절대 당신 못 따라가가 하고 소리치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마누라가 나타나서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해도 안 가게 할 수 있는데…! 하면서 여운을 주니까 그거 뭔데요? 하고 즉시 반응이 옵니다.
“방법은 아주 쉬워요. 내가 죽인 사람들보고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다오, 한마디하고 내가 믿는 하느님을 믿으면 되는데.”
그러자,
“흥 하느님이 어디 있습니까? 천당도 지옥도 다 없어요 내가 믿는 것은 내 주먹밖에 없습니다.”
“맞아, 그 주먹 셌지? 스쳐도 중상이고 빗맞아도 사망인데, 셋씩이나 죽였는데 내가 잊어버렸네요.”
하고 슬슬 비꼬았습니다.
“거 너무 그러지 마요.”
하고 토라집니다. 일단 초를 친 셈입니다.
얼마 후에 피를 쏟았습니다. 간경화로 인해 간으로 흘러 들어가는 정맥에서 핏줄이 터진 것입니다. 저절로 지혈이 되지 않으면 위험한 상태가 됩니다. 다행히 피가 멎긴 했지만 환자가 느끼는 심리적인 쇼크는 크기 마련입니다.
2차 심리전을 썼습니다. 먼저 솔직하게 지금 몸이 어떤 상태인지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그냥 죽을 수도 있는데 지금 이 상태로 죽으면 지옥에 갈 게 뻔한데, 어떻게 할까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한마디만 하면 천국 보내줄 수 있는데….”
하면서 다시 심리전을 폈습니다.
“뭐라고 하는데요?”
“내가 죽인 사람들아! 정말 미안하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잘못한 게 많다. 죽은 가족들에게도 미안하고 용서를 청한다.”
하고 한마디만 하라고 했습니다.
“글쎄 그러면 정말 지옥에 안 거는 거요?”
“그럼요. 내 말대로 해도 밑져야 본전 아니오? 천국과 지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있으면 나만 손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없으면 본전이지. 생각 좀 해볼래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생각하세요.”
두 번째로 초를 쳤습니다. 이 정도면 대개 다음 번에 반응이 오기 마련입니다.
며칠 후에 한 번 더 간정맥 출혈이 왔습니다. 이번엔 상태가 좀 심했습니다. 간경화 환자가 3번 피를 토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두 번째 인데도 많은 양의 피가 나왔습니다. 아직도 입가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천당 보내줘요, 말아요?”
“알았어요.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마음대로 해요.”
그래서 급한 김에 교리를 설명해주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반성하고, 용서 청하고 그리고 용서하도록 유도해주었습니다.
사실 호스피스에서 종교를 권하는 일은 없으나 이 환자의 경우 이렇게 죽게 내버려뒀다가는 안 되겠기에 강요 아닌 강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연락을 취했습니다. 이지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 최소한 내일은 여기 왔으면 좋겠다고. 동생들을 오라고 하고는 환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동생들이 한 번 더 온다는데 좋지요?”
“좋긴 뭐가 좋아요. 싸가지 없는 새끼들!”
피를 토하느라 힘이 빠진 상태에서도 원망은 매한가지입니다.
“정말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요?”
“네, 나쁜 새끼들이에요. 나한테 줄 돈이 있었는데 안 주고 말이지.”
“그럼 동생들 왔을 때 내가 한번 혼내줄게요. 그렇게 싸가지가 없는 놈들이 있어? 하여튼 오기만 해봐라.”
하고 환자보다 더 분노를 나타내자, 환자가
“
안 돼요 그러다가 진짜 안 오면 어떻게 해요. 아무 소리 하지 말아요.”
하면서 눈을 번쩍 뜬 채 고함을 친다. 욕은 하면서도 동생들이 진짜 안 올까 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보고 싶은데 입에서는 정반대의 소리가 튀어나옵니다. 이제는 이해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 환자의 애정과 사랑 표현이라는 것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이럴 때 나오는가 봅니다. 봉사자들이 아무리 잘해 주어도 핏줄이 해줄 몫은 따로 있는 법입니다.
다음 날, 달려온 동생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이제 환자 상태로 봐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이 고비일 것 같으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만나야 합니다. 지나온 모든 것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쪽으로 얘기를 하세요. 아시겠죠?”
형제들이 상봉하는데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삼형제의 눈에서 닭 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환자도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으로 느끼는지 동생들의 손을 마주 잡으며
“이 형이 정말 면목이 없다. 형 노릇도 제대로 못 하고, 정말 미안하다. 어머니한테도 그렇고, 내 대신 내 몫까지 효도해라.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형님 미안해요, 그 동안 너무 미워하고 욕을 해서. 우리도 잘못한 게 많아. 어머니나 다른 식구들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가요.”
삼형제의 눈과 코에선 연신 눈물, 콧물이 흘렀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 콧물 속에 그 동안의 미운 마음, 분노와 증오가 녹아 내리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형제애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
“분위기로 봐서 오늘 밤 동생들이 형님 옆에서 간호를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때요? 형님이 얘기해봐요. 동생들이 옆에 있으면 좋겠는지! 아니면 그냥 가는 게 좋겠는지!”
그 소리에 환자는
“내일 출근해야 되잖아?”
하면서 동생들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내가
“형님 눈치로 봐서는 동생들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하룻밤만이라도 형님 옆에서 지켜줘요. 둘이서 교대로 간호하니까 내일 일찍 새벽에 가면 되니까, 그렇게 하세요?”
하고 권하니
“예.”
하고 대답합니다.
“어차피 봉사자도 옆에 같이 있으니까 손만 붙잡아주고 있으면 됩니다.”
그날 밤 동생들은 형님의 손을 잡아주고 다리도 주물러주며 세상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었습니다. 동생들의 간호를 받으며 하룻밤을 보낸 그 다음 날부터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임종 이틀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마른 모습이 나하고 똑같았는데 나도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아요.”
하고 말하며
“아무래도 죽으려는가 봐요. 그렇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영양제 좀 놔주세요.”
합니다.
불만이 가득한 모습은 사라지고 어리고 순한 양 같아 보입니다. 또 옆에 있던 환자 보호자와 갈등과 미움으로 껄끄러웠는데 이날 보호자를 불러 먼저 화해를 청했습니다. 아무래도 죽음을 예감했는지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임종 하루 전
각혈을 많이 해서인지 얼굴이 더 창백했습니다. 이번이 3번째입니다. 갑자기 각혈을 또 하게 되니까 비위도 상하고 죽을 것 같다고 하며 불안해합니다. 혈압은 50에서 40으로 떨어지고 맥박은 약하게 120으로 빨리 뛰었습니다.
간호사가 옆에서
“각혈한다고 불안하게 생각하지 말고 병으로 인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잘못한 죄 다 용서해달고 기도 많이 하세요.” 하고 말하니 환자는
“예.”
하고 대답을 하면서 죽어서도 신부님과 이곳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그 동안 정말 고맙습니다.”
하며 간호사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담배를 피웠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여섯 개피를 구해서 드렸더니 두 손을 곡 잡으며 고맙다고 몇 번을 말하면서 담배 하나를 피우고 나니 불안하고 비위상하고 했던 것이 없어지고 마음이 너무 편하다고 했습니다.
임종 당일
아침부터 영양제를 놔달라고 재촉을 합니다. 그러나 핏줄이 약하고 이미 청색증이 오기 시작해 주사바늘을 도로 빼야 했습니다. 임종 20분 저에 다시 영양제를 놔달라고 청합니다. 숨이 빠져나가고 있는데도 정신은 말짱한가 봅니다. 잠시 후 혈압은 들리지 않고 호흡의 높낮이가 없이 서서히 6회, 5회, 4회, 3회, 2회.. 로 줄어들더니 오후 1시 15분에 조용히 평화로운 얼굴로 임종하셨습니다.
처음에 꽃마을에 왔을 때는 머리에 뿔만 달면 꼭 마귀 같았는데 석 달이 지난 지금 환자의 얼굴은 마치 어린 양처럼 순하고 착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실제로 영원히 잠든 모습이 착한 아이가 누워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56년을 악 속에서 살았고 형제간에, 부모와 자식간에 정은 이미 온데간데없었지만 마지막을 화해와 용서로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화장을 하고 유해를 성모꽃마을로 가져오던 날 형제들이 말했습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여기서 보살펴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짧은 하룻밤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동생들이 형 간호도 해줄 수 있었고, 화해하고 용서하면서 보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교도소에서 나온 채로 그대로 죽었더라면 화해는 고사하고 서로 평생 한이 될 뻔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형제의 도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고맙습니다.”
납골당에 유해를 안치하는 형제들의 얼굴은 형님을 떠나 보낸 슬픔보다는 오히려 안도와 평화로움이 짙게 배어 나왔습니다.
하루 마약 1800mg
일반 사람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마약 하면 말기암 환자들에게 쓰는 거나 쾌감을 얻기 위해 쓰는 마약이나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통증 경감을 위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와 일반 중독환자들이 쾌감을 얻기 위해 쓰이는 마약(필로폰, 대마초 등)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증경감을 얻기 위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는 환청, 환각, 쾌감 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잘못 썼다가는 호흡곤란으로 죽는 수가 있는데 꽃마을에서도 실화가 있습니다.
22살 난 딸이 난소암으로 투병하는 동안 마약성 진통제 MS-Contin 30mg 짜리를 한번에 3알씩 하루에 12알을 복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야 겨우 통증이 잡혔기 때문에 이 환자에게는 적정 수준입니다. 그런데 딸이 죽고 나서 엄마가 몸살을 지독하게 앓았는데 너무너무 아파서 괴로워하던 중 딸이 먹다 남은 진통제가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딸은 한 번에 몇 개씩 먹었는데 자기는 한 알쯤 먹으면 되겠지 하고 30mg짜리 마약성 진통제를 한 알 먹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 3~4일 동안 똥물까지 올라올 정도로 구토에 시달렸고 열이 났다가 오한이 났다가 정신은 몽롱해지고 속은 뒤집힐 것 같고 거기다가 숨까지 막혀 거의 죽다 살아났다고 합니다.
마약성분이 갑자기 그것도 많은 양이 몸 속에 들어오면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는데 제일 심각한 것이 호흡부전입니다. 즉 호흡마비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엄마는 운 좋게 고생만 하다가 다시 깨어나기는 했지만 정확한 사용법과 사용량을 모르면 큰 곤경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또 한 예로 항문 근처에 있는 용종증(일종의 혹) 7개를 떼어내는 수술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파서 앉지도 못 하고 눕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설설 기고 있었을 때 제일 약한 마약성 진통제 한 알로 하루 동안 언제 아팠냐는 식으로 멀쩡하게 생활하는 경우를 본 일이 있습니다. 이 정도로 강력한 게 마약성 진통제입니다.
마약성 진통제는 통증이 커짐에 따라 (전이가 되기 때문에) 서서히 조금씩 올려야 부작용 없이 통증을 없앨 수가 있는데 잘만 조절하면 95% 이상 통증을 없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말기암 환자들에게 마약성 진통제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될 것입니다. 대부분 꽃마을에 왔던 환자는 평균 200~400mg정도를 쓰고 있는데 통증 강도가 꽤 심한 편입니다.
마약성 진통제를 쓸 때 가장 주의할 점은 통증보다도 약의 용량을 조금만 높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통증이 2개라면 진통제는 2개 반을 쓰고 통증이 5개로 올라갔다면 5개 반을 주어야 합니다. 암은 전이가 되기 때문에 통증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약도 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중독증이나 내성이 강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통증에 대해 사용할 때만큼 중독증이나 내성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선진국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꽃마을에 온 환자 중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하루에 1800mg을 써야 겨우 통증이 가라앉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직장암 말기로 이곳 저곳 이미 전이가 많이 된 상태로 오신 분입니다. 전이가 되었다는 것은 통증의 강도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바늘로 찔렀을 때와 못으로 찔렀을 때 칼로 찔렀을 때의 통증의 강도가 다르듯 암 크기가 1cm일 때와 5cm, 20cm 크기일 때 느끼는 통증의 강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병원에서는 암의 크기와 관계없이 일정한 양 이상은 잘 쓰지 않고 있습니다. 법으로 묶어 놓은 탓도 있지만 마약에 관한 부정적인 사고방식도 한몫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많은 환자들이 통증조절이 제대로 안 돼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떻든 이 환자는 하루에 1800mg의 진통제를 써야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온 몸에 암이 퍼졌는데 그것이 하필이면 소변보는 데까지 퍼져 석류가 벌어지듯 벌어지면서 암 덩어리가 비집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소변을 볼 때마다 소변에 섞인 염분이 그곳을 스치면서 나왔기 때문에 그 쓰라림과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자매의 말로는 생지옥이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이독치독의 방법으로 바르기만 해도 하얗게 태우는 강력한 소독약으로 벌어진 그곳을 하얗게 태웠습니다. 연약한 살을 하얗게 지지고 태울 때의 아픔, 그 아픔을 유발시켜놓고 소변볼 때의 통증을 잊어버리게 했던 것입니다. 다른 통증을 만들어 원래의 통증을 잊을 수가 있으니 이독치독인 셈입니다.
이렇게 하루에 10번 정도씩 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이미 온 몸 대여섯 군데 정도에 달걀만한 크기로 암 덩어리가 자리기 시작해 통증을 만들고 있었는데 통증이 시작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50mg짜리 패취제를 3개씩 붙이고, 먹는 약으로 하루에 35알 정도, 중간 중간에 좌약과 주사제를 쓰면 1800mg 정도의 마약이 매일 들어가는 셈입니다. 이렇게 해야 제 정신을 차리고 식사도 하고 TV도 보고 가족들과 얘기도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혹(용종증) 7개를 잘라내는 수술을 한 사람도 제일 약한 마약성 진통제 하나로 하루를 버티게 하는 진정효과를 냈다면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 1800mg이면 얼마나 많은 양인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이런 환자에게 마약성 진통제는 그야말로 신이 내려준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통증이 없어야 죽음도 준비하고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호스피스란 사실 마약성 진통제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라야 합니다. 지독한 몸살에 걸려본 사람은 압니다. 진짜 아파서 숟가락 한 개를 들어올릴 힘도 없을 때는 자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을.
꽃마을에서도 24시간 통증을 없애도록 해주고 있지만 가끔씩 갑자기 통증이 갑자기 찾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환자는 제발 죽여달라고 눈으로 호소합니다. 진땀이 전신에서 흐르고 통증 때문에 입술을 악물었다가 덜덜덜 떨다가 약간 통증이 진정될 때 그 틈을 이용해서 간신히 입술을 움직입니다.
“신……..부……….님……………제발………..죽여……………..주세요………….”
참으로 괴롭고 힘들 때가 이럴 때입니다. 이럴 때는 진통제를 넣어주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약이 모자라거나 없는 상황이라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호스피스 시설에 잇는 환자들은 통증조절이 되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집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환자들은 생으로 그 통증을 겪어야 하니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통증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가족들의 심정은 또 어떻겠습니까?
성모꽃마을은
성모꽃마을은 이런 분을 모십니다.
* 임종이 3개월 내로 예견되는 암 환자
* 수술이나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식이, 대체, 자연 요법을 시행했지만 더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분
* 통증완화와 증상관리가 필요한 분
* 가족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신 분
* 의식의 유무에 관계없음
성모꽃마을은 이렇게 도와드립니다
* 암으로 인한 모든 통증과 증상들을 완화하여 남은 여생을 고통 없이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 마지막 순간까지 호스피스 전문요원들이 함께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 환자의 가족들이 겪게 되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함께 나눔으로써 영원한 삶을 편안하게 준비하도록 도와드립니다.
* 유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가족들이 고통과 슬픔을 극복하도록 도와드립니다.
* 어떤 종교든지 본인의 종교는 그대로 존중됩니다.
성모꽃마을을 도와주시는 분들을 위해
* 매일 <회원님을 위한 기도>를 바칩니다.
* 매달 <회원님을 위한 생미사> 20대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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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늘 아래 첫 동네
하늘 아래 첫 동네
담당 과장님의 추천으로 한 환자가 급히 입원을 했습니다.
환자를 보니 잠들어 있긴 했지만 많이 야윈 것을 보니 꽤나 통증에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봉사자들 얘기로는 교감 선생님 출신으로 정년퇴임을 했는데 퇴임하자마자 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왔다고 합니다.
환자는 아무것도 못 먹을 때만 처방이 나오는 50mcg 패취제를 붙이고 있었고 연신 나오는 기침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다고 했습니다. 식사를 못 하신지도 한 달 보름 정도나 지났습니다. 사실 이럴 때는 예후가 좋지를 않습니다.
“할아버지! 여기 오셨으니 이제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오늘부터는 잠을 잘 주무시게 될 거예요. 그리고 아픈 것도 없을 거구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손을 잡고 고맙다고 하십니다.
과연 그날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푹 곯아떨어지셨습니다. 특별한 약을 쓴 것도 없지만 신기한 것은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병원에서 나타나던 많은 증상들이 완화되거나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모든 환자들이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환자와 가족들에게 제일 부담이 되었던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고, 둘째로 자식들에게 더 이상 신세를 안 져도 된다는 편안함과 셋째로 모든 봉사자들이 극진한 마음으로 사랑을 주니 환자가 느끼는 정신적인 안정감은 암 통증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증상들을 완화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비록 통증과 증상 조절은 되었지만 아침에 보니 오래 갈 것 같지 않아 마음의 준비를 시켜 드렸습니다.
미사를 끝내고 환자에게
“이제 하늘나라 가실 준비를 해야 되는데 어떤 준비를 하셨어요”
하고 물으니 아직 못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 살면서 악하게 살면 죽어서 벌을 받고 착하게 살면 상을 받게 되는데 누구나 죽기 전에 세상에 살면서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뉘우치고 화해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받을 수 있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실 수가 있죠. 태어날 때 죄가 없는 깨끗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처럼 죽을 때도 깨끗한 상태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잘 죽을 수가 있습니다. 어때요 그렇게 죽는다면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
하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럼, 제가 하는 대로 따라 하세요?”
하고는
“지금까지 잘못한 점이나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미워하거나 잘못을 했다면 모두 용서를 청합니다. 살아서 그 값을 다 치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진정 뉘우치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제가 용서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 용서하겠습니다.”
조용히 입술을 움직이며 따라 하시는 눈가에 어느덧 눈물이 고였습니다.
다음날 저녁 무렵에 보니 임종 전 호흡이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불러 지금 이 상태에서 임종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마음의 준비들을 하시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뵐 사람이 있으면 미리미리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게 후회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사실 임종호흡이 들어가면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이틀을 가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붐은 임종이 시작되자마자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어 가족들에게 연락할 틈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밤 9시가 도리 무렵 청색증이 온다고 간호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 길어야 3시간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
“지금 가족들이 모두 모였는데 보이시죠?”
하니 죽 둘러보셨습니다.
“이제 하늘나라 가실 준비는 다 하셨죠?”
하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가족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시고 작별인사로 손을 좀 흔들어주세요.”
하니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가족을 향해 뭐라고 하시며 손을 흔들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아마도 임종하시면서 제일 힘이 넘쳤던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3시간을 넘어 다음 날 아침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셨습니다. 왜 안 가셨을까?
이럴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아직 누군가를 못 보셨거나 풀지 못한 한이 남아 있을 경우입니다. 가족에게 물어보니 올 사람은 이제 다 왔고 멀리서 한 사람이 오고 있는데 근처에서 헤매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일까?
환자에게 길을 몰라 지금 헤매고 있다고 알려주자 환자가 뭐라고 말을 하면서 여기 위치를 가르쳐주려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했는지 환자는 펜과 종이를 달라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가져다 주자 종이에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3번이나 반복해서 쓰셨습니다. 아마도 이곳이 천국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라고 느끼신 모양입니다. 사실 이런 말은 천국에 갈 준비가 된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표현일 겁니다. 그 힘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당신 하고 싶은 표현을 다 하시고 오후 2시 30분쯤 이르렀을 때 간호사를 부르더니 손을 꼭 잡고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셨습니다. 말씀을 하실 기운이 없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손을 잡고 미소로 대신 하시려나 봅니다.
10분 후, 이마에 땀이 조금 비치는가 싶더니 그대로 하늘나라로 달음질쳐 가셨습니다. 이렇게 임종을 쉽게 하는 분이 있다니… 하긴 할 것 다 했으니 지체하실 필요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천천히 사게요. 사기다 넘어지실라.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또 거기 가시면 ‘하늘 아래 첫 동에’를 잊지 마시고 이곳을 거쳐서 오는 사람들을 환영해 주셔야 합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꽃
꽃마을에 입원한 지 2달이 조금 지날 무렵 한 환자의 생일축하 파티가 조촐하게 열리고 있었습니다. 동생들과 친지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환자는 휠체어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채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고 가족들 역시 박수를 치며 축하해주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솟아나는 슬픔까지는 감출 수 없었는지 목이 메여 떨리고 있었습니다.
“생신 축하 드려요.”
“고마워.”
누구도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당연히 뒤따라야 할 축하의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조용히 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다음 생애에 만날 것을 묵언으로 기약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일파티가 조촐히 끝난 다음, 환자는 가족들을 떠나 보내면서 그들과의 만남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임을 알았기에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을 배웅이라도 하는 듯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다음날 환자는 봉사자를 시켜 어제가 내 생일이었으니 자기가 한턱 내겠다며 케이크와 탕수육을 시켜 어기 있는 환자들과 봉사자들이 모두 먹게 해달라고 가족들이 주고 간 돈을 내밀었습니다.
이 환자는 꽃마을에 입원하시는 날부터 줄곧 말없이 조용히 계셨습니다. 본래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까닭에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것도 싫어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 받는 것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처음 입원할 때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계속해서 가스가 찼고 불면증과 구토로 밤잠을 설치다시피 해야 했습니다. 체력이 워낙 쇠약해진 상태라서 증상완화를 위한 주사나 약도 잘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대소변이나 자기가 토한 오물까지도 봉사자에게 부탁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처리했습니다. 물 한 컵 떠다 주는 것도 거절할 정도로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신세를 지려 하지 않았고 조금만 무언가를 해주면 항상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프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변처리는 늘 깔끔하고 반듯하게 정리를 했는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아오면서 몸에 밴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남에게 신세 안 지고 폐 안 끼치는 것이 이분의 생활 모토였나 봅니다. 덕분에 봉사자들에게는 조용하고 아주 점잖은 분으로 인식이 되어 있었고 간호하기가 참 편하다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봉사자가 자그마한 꽃송이가 피어 있는 화분을 한 개 선물했습니다.
“지난번 생신 때 선물을 못 했는데 이것으로 대신할게요. 늦었지만 축하 드려요.”
깜짝 놀란 눈으로 얼떨결에 꽃을 받아 드는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병실을 지나던 봉사자가 환자의 어깨가 소리 없이 들썩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 왜 어디 아프세요?”
“아니에요. 꽃 때문에….”
“꽃이 왜요?”
“너무 좋아서 그래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꽃이란 걸 받아봅니다. 지금까지 남에서 준 적은 있어도, 나 자신을 위해서 뭘 받아본 적이 없었어요. 이런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꽃을 받은 그 후로 환자는 틈만 나면 쪼그리고 앉아 꽃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꽃을 바라보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꽃 덕분에 심한 구토와 불면증도 좀 덜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는 꽃을 준 봉사자를 불러
“꽃을 주셔서 고마워요. 지난 며칠 동안 꽃을 보면서 내 마음이 이렇게 편안한 적이 없었답니다. 그 동안에 쌓인 외로움과 미움 마음, 원망, 분노 같은 것이 눈 녹듯이 녹아 내리는 걸 느꼈어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답니다. 이제 마음에 쌓인 응어리가 다 풀렸어요.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환자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나 봅니다.
꽃마을에 오신 지 3달이 다 될 무렵부터는 불면증과 구토로 인해 거의 밤잠을 못 자고 앉아 계셔야 했습니다. 임종 일주일 전부터는 그나마 조금씩 드시던 미음 두 세 수저도 못 드신 채 영양제를 맞아야 했는데 너무도 힘든 나머지
“도대체가 어떤 물을 마셔야 구토가 나지 않을까요?”
하며 한숨을 짓고는 하셨습니다. 암 통증도 통증이지만 먹은 것도 없이 계속해서 넘어오는 구토는 내장까지 쏟아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임종 전 말 상태가 많이 나빠졌습니다.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했는지 평소에 믿고 의지하던 동생을 불러 달라고 청했습니다. 친인척은 아니지만 형님 아우로 지내던 사이라 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새벽 5시경 동생에게 연락을 취했더니 바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동생이 출발한다는 소리에 환자는
“동생 오면 순대국 좀 사오라고 해서 먹고 싶어요.”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어서 오기를 무척이나 고대하는 눈치였습니다.
“친형제도 아닌데 형제처럼 잘해주시는 것 보니까 전에 참 잘해주셨나 봐요? 평소 때 사랑 많이 베푸셨으니 지금 이렇게 받으시는 것이겠죠?”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살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꽃마을에 계시는 분들에게 너무나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해요. 동생한테도 고맙고요.”
“그나저나 못 주무셔서 어떻게 해요?”
“사실 자는 시간도 무섭고 아까와요. 가끔 앞에서 코 골고 주무시는 할아버지를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워도 했는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실컷 잘 텐데요.”
“지금 상황에서 제일 바라는 것이 뭐예요?”
“토하지 않고 실컷 먹어보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실 준비는 다 되셨어요?”
“아니오. 아직, 아직은 더 있다고 가고 싶어요. 삶의 애착을 끊기가 어렵네요.”
“그나저나 죽기 전에 동생을 봐야 하는데 왜 이리 늦지요?”
연락한 지 30분밖에 안 지났는데도 10분마다 물어보며 왜 안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많이 불안하신가 봅니다.
7시쯤 도착한 동생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안정이 되는지 잠깐 잠이 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하루 절친하게 지내던 동생과 생애에서의 마지막 날을 함께 보냈습니다.
다음날 새벽 2시경, 미동도 없이 옆으로 누운 환자의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을 본 동생이 걱정스레
“형! 왜 그래, 응? 눈 좀 떠봐.”
하며 묻습니다. 똑바로 뉘여 보니 이미 임종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봉사자들과 동생이 둘러선 가운데 마지막 길을 떠나는 환자를 위해 기도를 바쳤습니다. 앞 침대에서 주무시던 할아버지(직장암 말기로 입원하셨던 원로가수 계수남 씨)도 기도에 동참하시며 작별인사를 나누셨습니다.
“여보시게, 먼저 가시게나. 나도 곧 뒤따름세! 내가 잘못한 것 있으면 용서하시게. 그 동안 고마우이. 잘 가시게.”
한 방에서 지낸 석 달 동안의 지기를 먼저 떠나 보내며 할아버지는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형! 그 동안 고마웠어. 잘 가요.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식어가는 두 발을 주무르며 동생이 안타까운 작별인사를 고했습니다. 이별에 대한 슬픔인지, 헤어지기 아쉬운 섭섭함 때문인지 환자의 눈에선 눈물 한 방울이 맺혀 떨어졌습니다. 평소에 말없이 지내시던 분이라 그런지 가실 때도 정말 조용히 가셨습니다. 아마 천국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사실 분입니다.
돌아가신 후 동생이, 형님이 꿈을 꾸는데 꽃이 새빨갛게 보이면서, 네 죄를 다 사하노라, 하는 얘기를 했다며 이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얘기를 할 때 정말 기분 좋게 편안해 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자기 생각에도 형님은 좋은 데 가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제일 걱정이에요
간신히 숨을 헐떡이며 들것에서 실려 들어오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폐암인데다 먼 거리를 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숨이 많이 찼던지 산소를 4리터 정도 대주고 한 시간 가량 지나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나이는 46세,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둔 가장이었는데 지나온 세월의 힘겨움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갔지만 사춘기 때의 반항기와 얼굴에 나는 잡티와 여드름 등으로 인해 방황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결국 졸업을 못하고 직업훈련소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면서 지내다가 나중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검정고시를 쳐서 고등학교 졸업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집안의 간난으로 더 이상 공부는 할 수가 없어 공장에 다니면서 집안 살림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80년도에 아버지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병원에 갔더니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수술은 엄두도 못 내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 후 1년간 아버지는 말기 암 통증과 사투를 벌이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제들은 각기 흩어져 살길을 찾아 살려고 했으나 그것도 잠시 얼마 후 이번에는 어머니가 간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 역시 형편이 어려워 수술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고, 이번에도 역시 자식들은 피눈물을 삼키며 암 통증에 시달리다 돌아가시는 어머니를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 후 조그만 사업을 해보았으나 실패했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중 객지에서 만난 한 여인과 만나 결혼하여 살면서 중학교에 다니는 딸과 초등학생인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나름대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질환을 갖고 있던 부인의 증상이 악화되면서 결국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인도 얼마 후 자궁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엄마 없는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아가던 중 이번에는 지신에게 또 하나의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하루는 대변에서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다가 증상이 점점 심해져 병원에 가서 보니 대장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큰 누님이 집안의 가장으로 형제들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고 도와주셨는데 동생의 수술비와 병원비를 모두 보태고 있었습니다.
6개월이 고비라는 말을 듣고 나름대로 투병생활을 하며 항암치료를 받던 중,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또 하나 날아들었습니다. 집안의 가장이요 마음의 기둥이었던 큰 누님이 갑자기 뇌졸증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충격이 컸던 환자는 병이 악화되어 수술한 지 채 1년도 안 돼 폐로 전이가 되었고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기구한 가족들의 수난이 이어졌습니다.
꽃마을에 들어오던 날 환자는 숨을 몰아 쉬며 말했습니다.
“내가 죽은 것은 두렵지 않지만 내 자식들이 제일 걱정됩니다. 애비 어미 없는 상태로 저희들끼리 살아야 되는데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도 제 어미의 정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컸는데…. 이제 나마저 없어지면 누가 아이들을 돌볼 지 눈을 못 감을 것 같아요. 작은아빠가 있어도 형편이 어려워 저희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 같은지 가슴을 쥐어뜯으며 한숨을 토했습니다.
폐암의 특징은 말기가 되면 보통 눕지를 못합니다. 계속해서 앉아 지내야 하는데 그것은 암 덩어리의 압박으로 인해 누워서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임종할 때까지 앉아서 지냈는데 꽃마을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다가 미음을 조금씩 들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족한 영양분은 목에 C-라인을 잡아 수액으로 공급하고 있었지만 워낙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 그나마도 흡수가 제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악액질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면역력도 또한 크게 떨어져 온 몸이 빨간 점을 만들면서 부풀어 올랐고 주사를 맞았던 자리는 전부 염증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힘겨운 투병 가운데에서도 가끔씩 나를 볼 때면 자식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자식이 보고 싶지만 거리도 멀고 차비도 많이 들어 부르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에는 꼭 보고 싶으니 연락을 취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생과 함께 자식들이 일요일 날 시간을 내어 오기로 했는데 끝내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환자들을 둘러보고 간호사실로 온 사이 간호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환자가 목에 있는 C-라인을 잡아 뽑았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몇 번 빼려고 시도했다가 다행히 즉시 발견이 돼 막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눈 깜빡 할 사이에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목이 부은 관계로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목에 C-라인을 잡기 위해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로 갔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C-라인을 잡고 잠시 쉬던 중 갑자기 호흡이 이상해지면서 임종이 시작되었는데 지금 당장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으면 몇 분 내에 임종할 것이라면서 소생술을 할 지 말 지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호스피스에서 심폐소생술을 하지는 않지만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이고 자식들과 이별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보낼 수는 없었기에 심폐소생술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간호사와 임종팀장을 보내 만약에 심폐소생술이 되지 않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임종을 돕도록 하고 옆에서 지켜주기 위해 응급실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1시간 후 끝내 환자는 깨어나지 못하고 자식들과의 이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먼저간 아버지와 어머니, 누님 그리고 아내가 반겨 맞아주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못 다 누린 행복을 저 세상에서나마 영원히 누리길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아’ 자도 꺼내지 말라!
꽃마을에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간암 말기로 흑달이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얼굴이 흙빛으로 어두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마음의 어두움이었습니다. 들어오는 첫 날부터 환자와 가족간에 무언가 해결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나왔습니다. 하루는 보호자가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환자가 죽기 전에 아버지와 화해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풀고 가도록 유도를 해보지만 아버지의 ‘아’자도 못 꺼내게 합니다.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불같이 화를 냅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하고 안타깝습니다. 정말 살 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아버지의 얘기만 나오면 얼마나 미움이 컸던지 숨이 가빠지면서 마치 눈에서 불을 뿜는 것 같이 빛을 발합니다. 미움이 극에 달한 듯 했습니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을 분노와 증오로 표출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괴로운 것은 자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중재에도 더욱 적개심을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괴로운 모습으로 죽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식인데 자식이 이렇게 한과 증오를 품고 죽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부모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괴롭히는 수단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하나의 신호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앞두게 되면 진실 하고픈 욕구만이 남게 됩니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순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하나의 심리적 반응입니다.
신에게 받은 본능은 선함과 순수함, 깨끗함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응어리진 한과 미움을 담은 채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그 영혼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래서 더 예민하게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 좀 해결해 줄 있기를 바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아버지와 빨리 화해하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시호를 분노와 증오로 과격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아버지의 ‘아’ 자도 꺼내지 말라고….
이율배반적인 이런 심리를 재빨리 읽어내지 못하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둔다면 결국 한을 남기는 셈입니다. 서로에게 큰 상처인 셈입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게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첫 번째는 적절한 권위 있는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권위는 수직적 관계에 있는 것을 뜻하고 동시에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상처받은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시켜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 분의 말씀이라면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그런 분이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는데 어찌 안 들어줄 수 있겠는가?’
마음에서 이런 느낌이 들 때 본인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요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상처의 치유입니다.
가족이나 친척, 이웃은 수평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수평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중재자의 역할을 하려고 하면
‘네가 내 심정을 알기나 해?’
‘네가 내 처지가 돼봐.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시끄럽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하는 반발을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상처를 준(?) 사람과 받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용서와 화해란 일방적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너는 죽을 거니까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 하는 말은 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어차피 화해를 위한 대화란 얽힌 매듭을 풀기 위해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게 결론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아버지에게 미리 귀띔을 해주어 좋은 결말이 나도록 해야 할 것이고, 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에 신에게 부여 받은 본능대로 하게 될 것입니다.
자식들 중 맏이였던 환자는 아버지의 바람기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가장이 가장 노릇을 못하니 그 역할을 맏아들이 떠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결국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고 투병생활 동안에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고 그 빈자리 역할을 아들이 대신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점점 쌓여갔고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절정에 달했습니다. 아버지로 인해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어머니의 죽음은 아들의 가슴에는 돌이킬 수 없는 한으로, 상처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스트레스가 지나쳤는지 이제는 본인이 간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것이 원인이었든지 간에 환자는 이 모든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증오가 얼마나 컸을 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만나게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대한 분노를 토해냈습니다. 그 동안 쌓인 적개심과 울분을 맘껏 쏟아내도록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할 얘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3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던 날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용서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진심 어린 마음으로 용서를 청했습니다.
용서와 화해란 언제 봐도 아름답습니다.
흙빛이었던 환자의 얼굴이 밝게 빛났습니다. 수심과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했는데 말끔히 없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야 환자는 비로소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환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더 이상 마음에 한이 없었기에 임종 또한 쉽게 맞이했습니다. 많은 경우 한이 많으면 쉽게 임종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동자가 곽 조여진 채 빠져나가려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생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라 화해하지 못한 채, 삶을 정리하지 못한 채 죽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아들이 임종하는 자리에는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이번엔 아들의 임종만큼은 놓칠 수 없기에…..
몇 시간만이라도 연장을
한 달 뒤에나 온다던 사람이 갑자기 와서는 받아달라고 합니다.
고아원에서 태어나 외롭게 자란 그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전셋집이며 다니던 공장 퇴직금이며 정리할 게 많아 한 달 뒤이나 온다던 사람이 가깝게 지내던 동생과 함께 온 것입니다.
일단 방을 하나 마련해서 받아주었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후 환자는 지나온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조금씩 내뱉었습니다.
어릴 때 고아원에 버려져 외롭게 자라온 터라 엄마가 제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버렸지만 그래도 보고 싶고,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플 때는 더 없이 그립다고 눈물을 글썽입니다. 자식을 버린 엄마가 밉지 않으냐고 하니 밉지 않다고 합니다. 미움이 큰 만큼 사랑이 더 강렬한 걸까? 처음에는 미움이 컸지만 이제는 미움보다는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죽기 전에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여한이 없을 것이라며 말끝을 흐립니다. 이제 38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외롭고 힘들게 살아온 세월의 냄새가 숨 쉴 때마다 묻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환자답게 들어올 때부터 급박한 상황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2~3일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숨이 차서 병원엘 데리고 갔더니 폐에 물이 찼다는 것입니다. X-레이를 찍어보니 진짜 등 뒤 늑막 쪽에 핏물이 잔뜩 고여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들어올 때는 진단서에 분명히 간암이라고 되어 있는데 상식으로는 복수를 빼야 맞는 것 같았는데, 본인에게 물어봐도 복수는 밴 적이 없고 들어오기 전에 폐에서 물을 뱄다는 것입니다.
2리터나 되는 핏물을 빼내니 그제야 살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3일에 한번 씩 물을 빼러 성모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미사를 끝낸 후 병실을 둘러보고 올라왔는데 조금 있다가 간호사의 급한 호출이 왔습니다. 통증이 갑자기 오기 시작하는데 한번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성통증 인가 싶어 진통제를 투여하도록 했는데 잠시 후 또 연락이 오기를 아까보다 더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순간적으로 임종이 오려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0~40%의 환자에게서 임종 전에 극심한 통증이 치솟는데 아무리 진통제를 투여해도 쉽게 통증이 가라앉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급히 환자를 관찰해보니 이미 손과 발에서는 청색증이 나타나고 있었고 숨은 이미 임종호흡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상태로 보아 폐에도 물이 곽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10분도 넘기기가 힘들 것 같아 급히 병원 앰뷸런스를 불러 응급실로 가면서 폐에서 물을 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연락을 했습니다. 체 2분도 안 돼 응급실에 도착해 의사에게 보였더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 안 되는데!”
아직 이 환자는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됐는데 이렇게 가면 안 되겠다 싶어 마침 잘 아는 선생님보고 우선 폐에서 물 좀 빼달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사진을 찍고 어느 정도의 양을 빼야 하는지 검사도 하고 해야 하지만, 급한 김에 물부터 빼는데 의사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맥박과 심장박동이 이미 정상수준 이하로 훨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환자의 의식은 또렷했습니다.
조심스레 선생님이 심폐소생술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꽃마을에서는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것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다급한 김에 소생술이든 뭐든 빨리 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아직 죽음에 대해 준비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이대로는 갈 수가 없으니 부탁한다고 하고 환자에게 정신을 놓지 말고 버티라고 계속해서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발 빠르게 움직이던 선생님이 30초만 더 늦었어도 심폐소생술도 소용이 없었을 거라고 귀띔을 합니다. 몇 시간 연장하는 선에 불과하겠지만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낼 수는 없었기에 소생술을 요구했습니다.
등 뒤 늑막 사이에서 물을 빼는 동시에 산소 10리터 공급, 산성화를 막는 주사제, 심장 강화를 위한 주사제들이 순식간에 주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물을 1리터 가량 빼내자 호흡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고 맥박도 조금씩 정상 수치로 올라갔습니다.
“김 00 씨 정신차리세요. 숨쉬기가 어때요?”
“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힘을 내세요 이렇게 갈 수는 없으니까 정신을 집중하고 숨을 깊이 쉬도록 노력해봐요.”
환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직도 동공이 반 정도는 열려 있었으나 의식은 또렷했습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꺼져가던 의식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손과 발에 짙어가던 청색증이 조금씩 엷어져 갔습니다. 심장박동 촉진수가 65를 넘어서고 있고 혈액 속에 산소량이 95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90 이상이면 안정적인 상태. 95는 정상인 수치입니다. 안정권에 들어섰습니다.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와서인지 등 뒤에 꽂은 바늘이 굉장히 아프다고 했습니다. 원래 많이 아픈 곳인데다, 마취를 하고 빼야 하는 것을 급한 김에 그냥 찔러 물을 빼고 있으니 무지하게 아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중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40분 정도를 더 기다렸다고 약 2리터 가량의 물을 빼낸 후 일단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긴 했지만 이 상호아이 몇 시간을 갈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한 김에 죽음과 죽음 후의 삶인 영생에 관한 것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들을 정리시켜 주었습니다. 의외로 환자가 차분하게 받아들입니다.
“살아오면서 좀 더 남을 사랑하고 도와주지 못한 일에 대해서 반성합니다. 마음을 상하게 했거나 나로 인해 손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용서 청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했던 일들, 잘못인 줄 알면서도 행했던 모든 죄들을 뉘우칩니다. 내가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천천히, 그렇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한 구절, 한 구절 따라 했습니다. 삶의 마지막 고백이요 정리를 한 셈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 따라 하는 환자의 눈에서는 눈물방울이 떨어졌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온 지 3시간이 지날 무렵 병실에서 다급한 전화벨 소리가 들렸습니다. 빨리 내려오라는….
임종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신체 반응이나 호흡상태로 보아 한두 시간 내에 사망할 것 같습니다.
친구들에게는 이미 연락을 해놓았으나 대구에서 올라오려면 시간이 아직도 더 있어야 합니다. 환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친구 보고 싶죠?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할 얘기 많죠? 어떻게든 조금만 더 버텨야 돼요.”
의지를 놓지 말 것을 요구하자 그렇게 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것이 소용없는 것인 줄 알지만 마지막 가는 길을 알던 친구들이나마 함께 있었으면 하는 게 내 욕심이었기에 말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임종 30분 전, 의식은 있지만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 이미 한 시간 전부터 봉사자가 들러선 채 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임종 5분 전. 동공이 열렸습니다. 의식이 없고 몸에서는 진땀이 흘렀습니다.
호흡상태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고 청색증도 심해졌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
모두의 합창기도 속에 천천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후 2시 20분 임종, 또 하나의 영혼이 홀로 외롭게 살던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지도 모를 어머니,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어머니를 찾아보기 위해 일찌감치 하늘 높은 곳을 택했나 봅니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심폐소생술,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 호스피스에서 이 방법은 쓰지 않지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떠나 보낼 수 없었기에 다만 몇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시켜 준비시킬 때가 있습니다. 몇 시간의 고통의 연장임을 알지만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시간을 버는 것이기에 기꺼이 투자할 만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1분 1초가 얼마나 아깝고 소중한 것인지. 건강한 사람들이 이 사실을 평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위약효과(Placebo)
지금까지 대부분의 환자들이 간호사나 의사가 주는 약보다도 내가 주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이건 특별한 약이에요. 어렵게 구한 거니까 드시면 금방 효과가 날 겁니다.”
하면 약 효과 플러스에 신부에 대한 믿음이 약에 대한 효과 그 이상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육종암에 걸린 소녀가 밥도 잘 못 먹고 기침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초죽음이 되어 있을 때 영양제를 갈아서 준 일이 있습니다. 외제 딱지가 붙긴 했지만 보통 영양제가 다 그렇듯이 칼륨성분이 함유된 것과 비타민 성분이 들어 있는 영양제인데 그것을 소화제와 섞어 갈아 주면서 이런 얘기를 곁들였습니다.
“너, 이 약은 정말 내가 아끼는 약인데 급할 때만 쓸려고 아껴둔 거다. 미국에 사는 사람한테 어렵사리 구한 건데 네가 쓸 줄은 몰랐다. 지금 기침이 심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으니까 이 약을 줄게. 이 약을 먹으면 기운도 나고 기침도 멎을 거야. 워낙 비싼 약이라 한꺼번에 주지는 못하고 내가 매일 한 개씩 갈아줄게. 알았지?”
그러고 약을 먹이면 기침 뚝 입니다. 아이가 생가가 돌고 물론 효과도 만점이지요.
이런 것을 플라쎄보 즉 위약효과라고 합니다. 사실 말기 암 환자들은 오랜 세월을 투병생활하느라 항암제나 기타 약에 내성이 강해진 상태이고 이것저것 안 써본 약이 없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위약 효과도 물론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고비를 넘기는 데는 아주 적절합니다.
한번은 대장암 환자가 있었는데 마약성 진통제가 똑 떨어졌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엄청난 진통이 밀려올 텐데 어찌 해야 좋을 지 도저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자매는 통증이 오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리고 마구 소리를 질러대니 체면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아픈데 체면 차릴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서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다른 환자가 보조식품으로 먹다가 남은 것 (키토산제품, 액체로 되어 있음)이 있었는데 이것은 냉장고에 보관하도록 되어 있어서 차가웠습니다. 때는 여름이었고 해서 이 자매에게 먼저 선수를 쳤습니다.
“이건 정말 아플 때만 쓸려고 했는데 속에 들어가자마자 효과를 내는 좋은 약이에요. 워낙 비싸고 고가 약인데다 한약제로 만든 약인데 함부로 쓰지는 않지만 지금 너무 아프다고 하니까 반만 드릴게요. 한번 드시면 최소한 5시간은 끄떡없을 겁니다. 어때요? 드릴까요?”
환자는 얼른 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바로 주지 않고 조금 더 뜸을 들입니다.
“이거 정말 아껴먹어야 되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먹으면 정말 효과가 좋은 약인데 지금 꼭 드셔야 겠어요? 이거는 목구멍만 넘어가도 효과가 나는 건데.”
하고 한 번 더 약을 치면 환자는 더 애가 탑니다. 지금 아파 죽겠으니까 반만이라도 달라고 사정합니다. 그때 마지못해서 컵에 따라서 반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걸 조금씩 마시라고 하고는 반응을 보았습니다. 조금씩 마시던 환자는 냉장고에서 금방 꺼내온 터라 찬 기운이 속으로 퍼지는지
“와! 정말 좋네요. 통증이 가시는 것 같아요.”
하며 좋아합니다. 효과가 난다는 증거였습니다. 이럴 때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아야 합니다.
“효과 좋다고 아무 때나 달라고 하지 마세요. 구하기도 어려운 건데 앞으로 정말 통증이 심할 때만 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몇 시간은 끄떡없을 겁니다. 아셨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듯 다 마시고 난 환자가 신기하게 통증이 사라졌다면서 환하게 웃으며 빈 컵을 내밀었습니다(주님! 사기친 것 죄송하지만 눈감아주세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컵을 싱크대에 갖다 놓으면서 나도 놀랍니다.
‘거참 신기하네!’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상자가 남았습니다. 한참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한 마음이 듭니다. 지난 번 대장암 환자가 드시다가 돌아가셨을 때 남은 것을 버릴까 말까 하다가 다른 환자라도 주면 좋겠다 싶어 남겨둔 것이 이렇게 효자 노릇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얼른 약을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위약효과를 노려도 어느 정도 마약성 진통제 성분을 몸 속에 넣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마약성 진통제는 주지 않고 처음부터 위약효과를 노린다고 일반 진통제를 마약인 것처럼 속여서 준다고 하는데 그래서는 절대 안 됩니다. 사기도 적당히 보아가며 쳐야 하는 것이죠. 그 후로도 이 환자는 갑자기 심한 진통이 온다거나 몸을 움직이다가 암이 퍼진 부위를 건드려 극심한 통증이 갑자기 올 때는 이 약을 찾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효과를 보았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50대 초입의 직장암 환자가 입원했습니다.
키가 자그마했지만 조용하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분이셨습니다. 원체 말이 없고 조용했기 때문에 옆에서 숨을 귀고 계시는지 확인을 해야 할 만큼 참을성과 인내심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묻는 말과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평화롭고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자매의 이름을 떠올리며 조용한 분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어느 누구도 감당해내기가 어려운 아픔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임종이 임박해서야 알 수 있었으니 아마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었기에 차라리 침묵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인가
“두려워 눈을 감을 수가 없어요!”
하며 말문을 꺼내셨습니다.
“죽는 게 무서우세요? 지금까지 잘 견디시더니 마음이 약해지셨나 봐요?”
“그게 아니랍니다. 내가 죽으면 먼저 간 남편을 만날까 두려워요.”
사실 그 한마디에 지나온 세월의 아픔이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이 자매의 이 말 한마디가 임종을 준비할 무렵에 엄청난 두려움에 떨게 하는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20살에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자매의 인생을 뒤바꿔버린 악연이 되고 말았습니다.
착한 줄만 알았던 남편이 어느 날인가 부터 술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심심풀이로 하려니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신혼의 꿈을 안고 사진관을 차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박으로 가게를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시골로 가서 버섯재배를 하기도 하였지만 술과 도박은 끊을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제는 할 술 더 떠서 폭행까지 시작되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술과 도박, 폭행으로 몸은 점점 더 망가져갔고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피신 다니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찾으러 다녔고 또 도망가고, 찾으러 다니고…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만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2남 1녀의 자녀를 둔 엄마로서 너무나 힘이 든 나머지 죽고 싶었지만 그런 용기도 나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갔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큰애와 둘째가 결혼할 때까지만이라도 버티면 그때는 훨훨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 위안을 가지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습니다.
그런 힘든 와중에서도 한번도 남편을 원망하거나 욕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지독한 사람’이라고만 표현했고 가끔씩 한숨을 쉬며 ‘언제 인연이 끊어지려나’ 하며 탄식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마침내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막내가 자립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자매는 막내아들과 함께 도망쳐 나왔습니다. 본격적인 도피생활인 셈입니다.
그렇게 2년을 숨어서 살았는데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느 때 남편이 불쑥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끝까지 수소문을 해 찾아내서는 집으로 끌고가 괴롭혔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다시 나타날지 몰라 늘 불안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불행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2년쯤 되는 어느 날 남편이 불쑥 직장에 나타났는데 그대의 심정이란 저승사자가 나타났어도 그보다는 덜 무서웠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끝은 있는 법 얼마 후에 남편이 간경화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습니다. 평생을 해온 술과 담배가 원인이었는데 이미 말기가 될 때까지 몰랐던 것입니다. 변변한 치료조차 할 겨를도 없이 남편이 혼자 집에 있을 때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불행한 말로였습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이젠 정말 숨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그 해 가을에 직장암이란 청천벽력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20살에 결혼해서 30년 넘게 남편에게서 받은 학대와 고통 스트레스의 결과였습니다.
1년 후에 다시 재수술을 받고 그때부터 긴 투병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이 기간이 지난 30여 년의 세월 중에서 가장 사람답게 살았던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긴 투병생활은 자식들에게까지도 점점 부담이 되었습니다.
2003년도에 간과 폐까지 전이가 되었을 때 오히려 잘 되었다, 또 수술하자는 소리 할까 봐 두려웠다고 하면서 안 아프고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빨리빨리 다 펴져서 얼른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통증이 오는데도 무조건 괜찮다고 했고 정 못 참겠으면 소화가 잘 안 된다는 정도로만 표현을 했습니다. 진통제를 쓰면 더 오래 살 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참아야 빨리 죽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성모꽃마을에 입원을 한 후에도 음식은 전혀 입에 대지를 못 하고 링겔에만 의지한 채 생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누워 있는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부종이 심해지자 손발이 통통해지니까 살이 찌는 게 아니냐며 링겔을 빼야겠다고 할 정도로 이미 삶에 대해서는 포기한 진 오래였습니다.
말을 시키지 않으면 하루 종일 가도 말 한 마디 안 할 정도로 조용했는데 두 달이 지날 무렵부터 상태가 점점 나빠졌습니다. 임종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생겼습니다. 밤에 잠을 자야 하는데 눈을 감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잠이 드는 약과 주사제를 써도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곯아떨어져야 할 터인데도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지 않으려고, 잠이 들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이 역력했습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정신상태로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왜 그런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는데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그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말했던 자신이 죽으면 먼저 간 남편을 만날까 두려워 눈을 감을 수가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막상 죽음이 가까이 오자 잠이 들어 죽게 되면 남편을 만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나 큰 나머지 낮이고 밤이고 잠이 들지 않기 위해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아무리 다시 만나 살 일이 없다고, 괴롭힐 리 없다고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거의 열흘 이상을 끌었는데 사람이 최악의 상태에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것이 놀라고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남편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게 했으면 환자가 저 정도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짐작케 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분입니다.
임종도 다른 사람보다 두 배는 길었는데 이분의 한과 두려움을 짐작케 했습니다. 결국엔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남편을 만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투병 중에 아내를 먼저 보내며
어느새 황혼이련가? 우리 인간은 과연 시간을 좇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에 밀려 정해진 무대 위를 밟고 지나가는 것일까? 이제 하나님께서 세상 일을 끝내고 빨리 오라고 재촉하신다.(일기 중에서)
꽃마을에 입원할 당시 아직은 한참을 더 살아야 할 이제 52세의 교감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2년 전 직장암이란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오면서 그 동안 수없이 많은 환난을 겪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감사를 잊지 않으셨던 멋진 삶을 살다 가신 분이셨습니다.
이분은 투병생활 동안 자신의 일생을 일기 형식으로 꼼꼼히 적어가며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하셨고 마지막 남은 시간을 꽃마을에서 보내며 감사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1952년 제천에서 5남매의 맏이로 출생해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며 지금의 위치에 서기까지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새벽 별을 보고 나가서 일을 시작하며 저녁 별이 뜰 때까지 고된 농사일을 하시면서 가족들을 부양하셨다는데 이를 좋게 본 동네사람들이 어머니를 효부상(학교장상, 면장상, 군수당 등)의 주인공으로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환자는 마지막 임종 때에도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내야 하는, 그래서 자식을 가슴에 묻어 간직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는 투병생활 내내 아들의 손을 부여잡고 쓰다듬으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앞서가는 자식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주기 위해 팔순의 노구로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곁에서 간호해주었는데,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 때로는 일부러 역정을 내며 귀찮으니 만지지 말고 가만히 쉬시라고 화를 내기도 했으나 그것도 잠시 어느새 아들의 머리맡을 떠날 줄 모르고 간호를 하셨습니다.
1972년 국립대 사범대를 입학해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하면 빨리 돈 벌어 효도해야지 하는 초조감에 신나는 대학생활 한번 제대로 못 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976년 중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으면서 성실하게 교직생활을 하면서 지금의 아내와 두 아들을 얻었고, 2001년에는 교감 자격 연수를 받아 승승장구하면서 한때는 인생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가 하는 기쁨에 사로잡혀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날은 2002년 4월 29일 벌어졌습니다. 치질기와 변비기가 있어 외과에 가서 진찰을 받던 중 아무래도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설마 암은 아니겠지 하는 초조와 불안감을 안고 큰 대학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고 조직검사를 하게 되었는데 1주일 후 의사는 직장암이라는 청천벽력의 선고를 했습니다.
순간 헛웃음만 나왔습니다.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자신의 나이였습니다. 내 나이 몇 살이지? 50이지, 50이면 살 만큼 살았네, 허허허!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아들 두 녀석은 나름대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 되는데 어머니와 집사람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저리고 아파왔습니다. 이제 호강을 좀 시켜줄 수 있나 했는데 그 모든 것을 접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머니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저질러서도 안 되겠거니와 아내를 위해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고 다짐을 하고는 직장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항암치료를 하면서 몸이 일시 좋아지는 듯하여 다시 직장을 나갔는데 마침 교감으로 승진 발령을 받아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5월경에 장폐색에 걸려 5개월 동안 아내가 Retal tube를 통해 뱃속의 가스와 변을 뽑아내며 교직을 수행해야 하는 불편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변을 뽑아낼 때 가스가 찬 튜브를 잘못 처리하면 대변이 아내의 얼굴과 옷에 온통 튀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얼굴에 묻은 변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남편을 보고 환하게 웃어줍니다.
“나는 괜찮아요…. 가스가 많이 나와서 좋으네…”
아내는 남편이 미안해 할까 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웃으면서 오히려 남편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투병생활을 내조하는 동안 아내는 제때에 먹지도 못한 채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서 2003년 11월경에 ‘횡행결장루’를 내는 수술을 다시 받았지만 결국 2004년 1월에 이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는 마지막 판결을 받았습니다. 직장암이 재발되었고 게다가 전립선, 요도, 방광, 임파선으로까지 전이가 되어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아내가 집에 가서 몇 가지 물건을 챙겨오겠다고 돌아갔는데 도착해서 전화가 올 때가 되었는데도 연락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집으로 핸드폰으로 아무리 연락을 해도 깜깜소식이었습니다. 아들에게 해보았더니 서울에서 청주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중이라고 했고, 엄마 전화 받은 적 있느냐고 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습니다.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지체한다 싶으면 걱정할까 봐 항상 먼저 전화를 해주곤 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사는 동생에게 빨리 집에 좀 가보라고 시켰습니다. 나중에 동생에게 들은 얘기입니다만 제 전화를 받고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문은 안에서 잠긴 것 같은데 아무 기척이 없더랍니다.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보아도 반응이 없어서, 우유 투입구를 통해 들여다보았더니 화장실 근처에서 아내의 쓰러진 모습이 보이더랍니다.
아무리 불러도 움직일 줄을 몰랐고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게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몇 시간 후에 아들로부터
“아버지 놀라지 마십시오. 어머니가 먼저 가셨습니다. 사인이 심근경색이라고 합니다.”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멍할 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믿어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전호를 끊고 한참이 지나니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울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으허….어……! 이건 아닙니다. 하느님!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도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나보다도 먼저 데려가시다니요. 그 착한 아내를, 아내만큼은 남겨두셔야 하지 않습니까!”
울고울고 또 울어도 기가 막혔습니다.
통증이 오는 몸을 이끌고 아내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찾아오셨던 어떤 문상객 중 한 분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시련을 계속해서 겪으십니까. 정말 말무이 막힙니다.”
하며 우시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아! 내가 불행하긴 불행한가 보구나…. 맞아! 내가 암에 걸렸지. 아직 한참을 일해야 할 나이인데. 갓 오십을 넘겼는데, 앞으로 한 달이나 두 달 후면 죽어야 된다지….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오다 엊그제 교감으로 발령을 받고 이제 좀 살 만해지니까 그것도 포기하라네… 또 아내가 먼저 갔지… 아내만 믿고 의지하며 버텨왔는데 그런 아내가 먼저 죽었지… 내 장례를 치러줘야 할 아내를 내 손으로 먼저 장례를 치르는 거지… 허허허! 내가 불행하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후 그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부님! 행복은 무엇이고 불행은 무엇인지요? 아내를 땅에 묻은 지 이제 70일 정도 지났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아내를 먼저 데려가신 것이 오히려 감사하단 생각이 듭니다. 나 죽을 때까지 병수발을 더 해야 되지… 늙으신 시어머니 수발해야 되지.. 두 자식들 혼자 키워야지, 그런 십자가들을 혼자 감당하면 더 힘들까 봐 하느님이 미리 데려가신 것 같아요. 차라리 아내가 더 편안한 길을 택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가끔씩 아내를 만나는 꿈을 꿉니다. 꿈을 꾸고 나면 왜 그렇게 그리운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집사람을 만날 건데도 너무나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내 아내는 저와 자식들만을 위하다 먼저 하느님 나라로 갔습니다만, 형제애도 있고 효도도 할 줄 아는 두 자식을 남겨주어 무엇보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부님!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라고 생각됩니다. 정말 어떤 때는 밤에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면 너무나 신이 나사 막 춤을 추고 싶습니다. 몸만 말을 들어준다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처럼 마음의 평화를 느낀 적이 없어요. 남들이 생각할 때에도 정말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이런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하겠지만 저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어도 죽음이 닥쳐와도 마음은 편안합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내 소망이 있다면 더도 덜도 말고 이대로 있다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지 못하고 하느님 곁으로 가고 싶은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좀 더 큰 소망은 어머니 돌아가시고 자식들 장가가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소망은 교회 장로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봉사하며 살다가 떠나는 것인데 이 두 가지는 접어야겠지요? 비록 내 소망을 못 이루고 가지만 그래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대기명령을 받고 있지만 꼭 하나님나라로 불러주실 것을 믿고 있어요.”
환자는 임종 전 날까지도 자신의 하루를 일기에 담으려고 하였습니다. 두 아들이 옆에서 부축해주고 볼펜을 잡아주었습니다. 팔에 힘이 없어 볼펜이 자꾸 미끄러졌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인 것처럼 사력을 다해 단 몇 자라도 적으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온 이 시련을 통해 하느님은 어떤 섭리를 이루려고 하시는지? 왜 암에 걸려 죽어야만 하는지?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고 마침내 죽음을 앞두고서야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임종이 시작되었을 때 환자는 조용히 자기의 분신인 두 아들과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눈빛은 이미 자신이 병상일기에 써놓은 유언을 꼭 실천해줄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잘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아야 된다. 그리고 항상 건강 조심하고 정직하고 봉사하는 인생을 살길…’
‘어머니! 어머니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용서해주십시오. 어머니께서 제게 해주신 큰 사랑 가슴에 안고 갑니다. 천국에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길…’
눈물 한 방울 보이며 마지막 숨을 쉬었습니다. 얼굴이 환하게 평온해 보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아내가 마중을 나왔나 봅니다.
다음 글은 투병생활 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고통에 대해 묵상한 내용을 병상일기에 적은 내용입니다.
왜 내가 암에 걸려 죽어야 할까? 왜 이런 고통을 겪고 죽어야 하는가?
병들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요, 낫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깨달으니 조금도 두렵거나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 감사했습니다. 실은 내가 술을 먹으면 인사불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술로 인해 비참하게 죽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암이라는 병을 주셨다고 믿으니 왜 내가 이 병에 걸려야 되는가? 내가 꼭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가의 의문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오로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암에 걸리지 않은 아저씨 아주머니! 우리 화내지 말고 노여워하지 말고 그냥 웃으며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조금 있으면 죽을 것이라는 경고라도 받았습니다.
교통사고, 비행기 사고, 익사, 심장마비 등 등 수많은 복병들에 의해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이 이 병에 들어 있지 않을까요? 상대방과의 만남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의 생활은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웃으며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무엇일까?
나는 깊은 병을 보고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기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어머니와 두 아들)이 힘차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불우함과 힘든 질병을 보고 나의 형제자매들이 나를 사랑으로 감싸고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보고 사랑과 헌신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먼저 보내드리고 자식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나 하나 희생으로 우리 가정이 행복해진다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 드리겠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에요
“네가 수정이니? 내가 원장 신부란다.”
“안녕……..하세요?”
힘없이 숨을 할딱이며 고개만 간신히 돌려 인사를 하는 앳된 소녀가 누워 있었습니다. 많이 야위었지만 쌍꺼풀이 진 예쁜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무거운 쇳덩이가 가슴에 얹혀 있는 듯한 숨을 쉬기에 이상해서 이불을 들추어보았습니다. 그런 호흡은 임종이 시작될 무렵에 나타날 수 있는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불을 들추자 끔찍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양쪽 겨드랑이에는 아이의 머리만한 암 덩어리가 두 개나 달려 있었고 그곳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섞인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19살 된 고3의 어린 가슴에는 전이된 암으로 인해 커다란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이 암이 자리하고 있었고, 배와 옆구리 쪽에도 주먹만한 크고 작은 3개의 암 덩어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마치 아이의 몸무게보다도 암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몸이 많이 야윈 상태에서 보이는 곳이 전부 암 덩어리만 있었으니 지금까지 이렇게 드러나도록 많이 전이된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이가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호흡 소리가 그렇게 들렸던 것은 커다란 암 덩어리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이를 악물고 간간히 신음소리만 낼 뿐 잘 참아내고 있었습니다.
옆에서는 엄마가 지친 모습으로 아이의 팔 다리를 주무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엄마……… 하지 마……….. 함들 잖아……… 엄마….. 팔 아퍼…..!”
“아니야, 난 괜찮아! 괜찮대두 이 자식아…….”
아이는 그 아픈 와중에서도 오히려 엄마의 팔이 아플까 봐 걱정을 하였습니다. 어른도 참기 힘든 암 통증과 죽음의 두려움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엄마를 더 걱정하는 아이를 보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애절함에 코 끝이 찡해왔습니다.
이제 겨우 19살…. 한창 꿈 많고 수줍어할 나이인데, 친구들은 고3 수능 준비하느라 정신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 아이는 근육육종이라는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진통제를 낮고 겨우 잠든 아이를 보면서 엄마는 딸의 손을 쓰다듬으며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1986년 8월에 3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아이는 아기 때부터 쌍꺼풀에 눈이 동그란 아주 예쁜 아이였습니다.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지만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늘 나가서 돈을 버는 데 시간을 보내야 했고 동생들에게 엄마 대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엄마가 집에서 해야 할 몫을 큰 딸 아이가 다 해주었기 때문에 밑에 동생들은 사실 공짜로 키웠습니다. 동생들은 맏이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하고 잘 따랐습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집을 비우는 동안 동생들에게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며 TV 보는 시간, 오락하는 시간, 공부하는 시간을 정해놓고는 그대로 따라 하도록 시켰고 좀더 크면서는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가정형편에 맞게 용돈을 써야 하고 친구들하고 있을 때에도 눈치 봐가며 절제해야 한다는 등 애답지 않게 엄하게 가르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생들에게 자주 화를 내서 어린 가슴에 상처를 준다며 자신의 이런 단점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야기 하면서 엄마는, 뒤척이는 아이를 토닥여 주며 그렇게 했던 딸이 대견한 듯 엷은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습니다.
딸아이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공부 욕심이 많아서 뭐든 제일 잘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아침 7시에 학교에 가면 밤 11시가 되어서야 집에 오는데 늘 책을 끼고 다녔고 화장실 갈 때나 길을 갈 때에도 공부밖에 몰랐습니다. 휴식시간 5분도 아깝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인지 학원에는 한번도 간 적이 없었지만 늘 1, 2등을 다투었고 예체능 쪽에도 재주가 많아 노래나, 그림 그리기, 무용 같은 것에서도 인정을 받아 대표로 발탁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딸 아이를 보면서 엄마는 삶이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모르고 보람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늘 긴장하고 잘하려고 해서인지 몰라도 어릴 때부터 배 아프다는 소리를 자주했습니다. 병원에 한번 가려고 해도 시간이 안 되어서 못 갔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부터인가 목 밑에 조그만 혹이 하나 생겼는데 세월이 지나면 없어지려니 하고 방치를 했습니다. 더 이상 커지는 것 같지도 않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하루는 이빨이 아프다고 해서 치과에 를 갔습니다. 그런데 치료 중에 이빨을 하나 뽑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혈이 심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출혈을 많아 할 이유가 없었다고 하는데 치과 선생님도 큰 병원에 가서 한번 진찰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종합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이것저것 검사하다가 목 밑에 혹을 발견하고 조직검사를 해보니 암이라는 거예요. 병명은 근육육종이라고 했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설마 했지만 그래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어린 것이 무슨 암이라고, 설마 오진이겠지 싶어 다른 병원에 가서 재검진을 하려고 했는데 친척 중에 의사 한 분이 오시더니 다른 데 가봐야 똑같고 얼른 입원해서 수술날짜 잡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급히 입원시켜놓고 수술 날짜까지 잡아놓고 보니 그제야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조금 늦게 발견이 되었지만 열심히 치료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기에 하나님께 많이 기도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아직 어린 것이 죽을 때가 아니니, 살려만 주시면 지금보다도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아이도 하나님 영광을 위해 일하도록 바치겠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몸이 안 좋다고 할 때 일찍 데려만 갔어도 되었을 것을…. 먹고 사는데 급급하다 보니 딸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던 내 죄가 더 크지요.
다행히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1차 항암치료 때까지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습니다.
딸 아이는 정말 인내심도 강하고 참을성이 많은 아이에요. 빨리 나아서 건강을 찾아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는 그 힘든 항암치료 과정을 짜증 한번 안 내고 힘들고 아프다는 내색도 안 하고 잘 견뎌주었으니까요.
항암치료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요양을 할 때에는 동생들에게 간식도 많이 해 주었어요. 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전에 해주던 라뽁기나 떡볶이 같은 간식을 잘 해 먹이고는 했어요. 공부를 가르쳐도 전 같으면 화를 많이 냈을 텐데, 투병 이후로는 화를 내지 않고 잘 가르치더라고요. 아이들이 잘 못 알아들어도 끝까지 몇 번이고 가르쳤으니까 어쩌면 아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2차 항암치료를 받고 나서부터였어요. 치료를 받고 난 후에 의사 선생님이 보자고 하시더니 더 이상의 치료는 무의미하다고 하더군요. 너무 빠른 속도로 전이가 많이 돼서 가망이 없으니까 치료해도 소용없다고 그냥 집으로 퇴원하라는 거예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달라고 매달려도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친척 의사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어요.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긴 해야 하는데 엄마 입에서 더 이상 가망 없다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더라고요. 친척분이 오셔서 아이에게 설명을 잘 해주셨어요.
“수정아 힘들지?”
“예!”
“너에게 사실대로 말하마. 네가 지금 앓고 있는 병은 암이라는 병인데 일찍만 발견되면 별거 아니야. 그런데 너는 조금 늦게 발견이 되었어. 목 밑에 혹이 있었던 것 너도 알지? 그것을 잘라내고 항암치료를 해도 암페포들이 여기저기 떠다니면서 다른데 가서 달라붙어서 커지곤 해. 지금 너 겨드랑이하고 배에도 혹 같은 게 생겼지? 그것도 암인데 하나만 있어도 치료하기가 힘이 드는데 지금 여기저기 혹이 생기니까 의사 선생님이 치료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대. 네게 잘 참아내도 또 다른 데 생길 확률도 크고, 더 이상 치료는 하지 못해도 마지막까지 아프지는 않게 할 수 있대. 수정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 그러면 저 죽는 건가요?”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만 못 고칠 수도 있어.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돼.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자.”
“흑흑…”
아이는 조용히 흐느껴 울었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딸 아이는 엄마를 바라보았습니다.
“알았어요, 엄마. 자꾸 몸이 안 좋아지고 암 덩어리가 여기저기서 생기는 것을 보고 짐작은 했었어요. 어차피 가망이 없다면 집에 갈래요. 집에 가서 동생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요.”
아빠가 딸아이의 손을 잡으며
“그래 수정아. 지난번에 TV에서 봤는데 어떤 젊은 사람이 암에 걸렸는데 얼굴로 암이 퍼지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나 봐. 그런데 그 부인하고 온 가족들이 함께 지내면서 간병을 해주는데 서로 위로하고 기도해주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았어. 그 환자도 가족들이 함께해주니까 덜 힘들어하고 마지막까지 잘 지내는 것을 봤단다. 너도 우리 가족들이 함께 있어주면 훨씬 나를 거야. 네 말대로 집에 가자. 가서 가족들이 함께 기도하고 위로해주고 간호해줄게. 이 아빠가 항상 네 옆에 있어줄게, 응, 수정아.”
“네. 알았어요. 아빠. 안 무서울 자신 있어요. 대신 내가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다 해주셔야 돼요?”
“그럼, 꼭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마.”
딸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요. 오히려 그렇게 잘 받아들이는 것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고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이해를 못 한 것은 아닌지, 혹시라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지만 집에서 재내는 몇 달간의 삶을 보고서야 딸 아이가 정말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딸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 정말로 자신이 평소에 갖고 싶어하던 것, 먹고 싶었던 것을 사달라고 졸랐어요. 그래 봐야 1~2천 원짜리지만요. 하지만 평상시보다 모든 것을 10배 이상으로 진하고도 충만한 삶을 살았어요. 먹는 것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지만 김칫국 한숟갈을 먹고는 마치 세상의 멋있는 것은 혼자 다 먹은 것처럼,
“와~~~너~~~무 너무 맛있다.”
라면국물을 먹어도
“엄마! 이렇게 맛있는 라면은 정말 처음이에요.”
떡볶이를 해주면
“이제껏 먹은 것보다 정~말 최고 최고예요.”
딸 아이는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맛을 음미하며 팔을 가슴에 모으고 감동과 행복에 젖은 표정을 지었어요. 누가 봐도 정말 세상에서 그 순간만큼은 최고로 행복한 아이였어요. 비록 토할까 봐 많이 먹을 수 없었던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항상
“나, 내일 또 해줘요. 알았죠?”
하며 내일 또 맛있는 것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지난번에 쇼핑을 하고 싶다기 에 나가서 T셔츠를 하나 사주었더니
“우와~ 너~무 이뻐요. 이렇게 예쁜 것을 가져도 돼요? 와~ 너무 너무 행복해요!”
하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지난 번에 마지막으로 서울 코엑스을 데리고 갔어요. 선물용이나 작은 액세서리를 전시했는데 아마 그것이 딸 아이에겐 세상에서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었을 것 같아요.
걸을 기운이 없어서 휠체어를 타고 행사장을 돌았는데 많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너무 신기해했어요. 가게마다 돌면서 물건 하나하나를 관찰하는데 뭐라고 혼자 계속 중얼거리면서 좋아하는데 가끔씩 뒤돌아보면서
“엄마! 이거 보세요. 너무 이쁘죠? 정말 멋있어요.”
때로는
“엄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하며, 마치 세상에서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갖고 싶었던 것 다 가진 아이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행사장을 돌고 나왔습니다.
나올 때 손에 든 것은 조그마한 노트와 종이가방, 캐릭터 한 장, 열쇠고리가 고작이었지만 온 세상을 다 얻은 아이 같았습니다. 그런 딸 아이의 표정을 보면서 기쁘기도 하고 마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평생 살면서 맛보아야 될 행복을 단 몇 달 사이에 다 누리고 가려는 것 같았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눈에 띄게 안 좋아졌어요. 동생들을 가르치거나 놀아주는 것도 못하게 되고 혼자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졌어요. 그런데 그런 중에서도 남을 많이 이해하려고 했어요. 특히 동생들이 시험을 못 보니까 많이 속상해하고 잘 볼 때는 함께 즐거워하면서 말로라도 동생을 챙겨주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더 아플 텐데도 항상 동생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엄마! 내가 동생들을 못 챙겨줘서 미안해. 엄마가 다하려니까 힘들지? 내가 조금만 더 건강해도 도와줄 수 있을 건데….”
하면서, 죽어가면서도 맏이 노릇을 하더라구요.차라리 응석받이로 있다가 가면 사랑이라도 실컷 받고 가니까 가슴이 덜 아플 것 같은데 이런 아이를 보내려니 더 미칠 것 같아요. 흑흑….
엄마는 계속 눈물만 흘렸습니다. 하도 울어서 이제 눈물이 말랐을 것 같은데도 딸아이를 떠나 보내야 하는 엄마의 가슴엔 새로 눈물샘이 터진 것 같았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아마도 이 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눈물 샘에 사랑하는 딸아이를 조금씩 묻어가며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저에게
“신부님…. 무서워요…. 눈을 감으면…. 자꾸 뭔가 보여요.”
“뭐가 보이는데?”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어요…. 가라고 해도 안 가고…. 무서워요.”
“그래? 나타나더라도 무서워할 것 없어. 절대로 너한테 해코지는 못 해… 이 집에 누워 있는 사람들도 가끔씩 본대. 다음에 또 나타나면, 예수님 저 사람 안 나타나게 해주세요. 무서워요, 하고 기도해. 그러면 괜찮을 거야, 알았지?”
“네.”
사실 임종을 앞둔 많은 환자들에게서 이와 같은 얘기를 듣습니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기 전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 발을 내세에 들여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어쩌면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은 저승사자(?)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통적으로 기분 나쁘다, 무섭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리 좋은 존재는 아닌 듯싶지만 어쨌든 환자들에게 이런 현상은 죽음을 앞두고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들이기에 영적으로 위안을 주고 영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임종 전 날
점점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의식도 혼미해지고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입니다. 간간히 몸을 뒤척이고 신음소리만 낼 뿐 이제 임종이 가까워옴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잠깐 정신이 맑아지고 약간의 물도 받아 마시는 반조현상을 보였습니다.
“엄마….. 조금만 참아…. 내가…. 천국 가면…. 기도… 할게…. 사랑해…”
“그래, 우리 딸 착하지. 너무너무 고생 많았다. 나두 계속 기도할거야.”
저녁 무렵부터 혼수상태로 들어갔습니다.
임종
다음 날 오전에 임종호흡을 시작하더니 오후 5시쯤 19살 작은 소녀의 가슴에서 숨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 사랑하는 가족들이 오열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소녀의 영혼은 하늘나라로 향했습니다.
“잘 가! 천국에서 보자.”
“고생 많았다. 어린 것이 잘가르래이…”
“언니… 잘 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아이의 입가엔 그간의 고통이 끝났음인지 엷은 미소가 어려 있었습니다. 아마도 천사가 마중을 나와서 아이를 데려갔나 봅니다.”
“이렇게 일찍 죽으려고 애가 애답지 않게 컸나봐요…. 어떤 때는 어른이 부끄러울 정도로 생각이 깊은 아이였어요. 내 딸이긴 했지만 정말 자랑스러워요.”
친구들이 수능시험을 치르기 5일 전에 아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천국에 가기 전에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학교에 들러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떠나갔을 것입니다.
장례를 치른 지 한 달이 지날 무렵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딸을 잃은 슬픔은 컸지만 한 가지 위안을 받는 일이 있었는데 지난번 꿈 속에서 두 번이나 딸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인데요?”
“할머니하고 손을 잡고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는데 흰 모자에,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요. 그런데 엄마를 쳐다보면서 활짝 웃는데 진짜 너무너무 예뻤어요. 두 번째 꿈에서도 엄마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데 딸아이서가 아니라 너무 예쁜 모습이 꿈속에서도 내 딸이 천국에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하고 좋아 보였어요.”
“그래요 제 생각에도 분명 천국에 갔습니다. 전에도 여기서 돌아가신 가족 중에 몇몇 분이 환자가 천국에 갔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꿈 얘기를 해주는 것을 보면 흰 옷에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더라고요. 따님도 천국에 갔을 겁니다. 그래도 그런 꿈이라도 꾸니 좀 견딜 만하시죠.”
“예, 안심이 돼요. 비록 오래 살지는 못 했어도 준비를 잘 하고 갔고 또 행복한 모습으로 꿈속에서라도 보니까 어쩌면 이 힘든 세상 짧고 굵게, 순수하고 깨끗하게 살고 갔다고 생각이 되네요. 감사해요, 정말.”
“그래요 수정이는 정말 작은 일 하나하나를 세상에서 마지막인 것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안 남은 시간을 정말 예쁘게 살았어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요.”
죽음을 앞둔 19살 어린 소녀는 라면국물을 한 숟갈 먹으면서도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먹고 있고, 열쇠고리 한 개를 갖고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요?
사진에 한번 찍혀보는 게 소원이에요
“사진에 한번 찍혀보는 게 소원이에요.”
성모꽃마을을 개보수하고 축복식을 하는 날 주교님께 꽃다발을 바치게 될 환자가 내뱉은 말입니다.
31살의 자궁경부암 말기. 얼굴은 초췌하고 말랐지만 눈빛에서는 생기가 돌았습니다. 꽃마을에서 제일 쌩쌩하고(?) 젊은 환자입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마약성 진통제를 하루에 1200mg이나 쓰고 있지만 그래도 화장실을 마지막까지 걸어 다녔던 환자였기에 제일 쌩쌩해 보이는 환자였습니다. 통증만 없으면 웃고, TV 보고 그 병실에선 제일 어린 데다가 다른 환자보다 일찍 입원한 고참이라 환자들 상황보고까지 다 해주는 착한 환자였습니다. 저 환자가 밥에 몇 번 깼다는 등, 밥을 먹다 말았다는 등, 변을 몇 번 보았다는 등 환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다 일러 주었습니다.
축복식 날 주교님께 꽃다발을 드릴 수 있겠냐는 제의에 흔쾌히 응낙하면서 대중 앞에는 서본 적이 없어 떨린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 흔한 운동회 사진 한 장 없이 살아온 것이 가슴이 아팠는데 주교님께 꽃다발을 드릴 때는 사진을 많이 찍어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사진이나 원 없이 찍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소원대로 진짜 많이 찍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사진첩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꽃다발을 드릴 때 통증이 오면 어떡하죠?”
하며 걱정을 합니다.
“그럼, 아침 행사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진통제 30mg을 더 올려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안심을 시켜주었습니다.
이 환자가 하루에 쓰는 진통제의 양은 엄청납니다. MS-Cortin 30mg(먹는 마약성 진통제)를 30알에다 듀로 패취제를 75mcg(피부에 붙이는 마약성 진통제)를 붙이고 있는데 양으로 따지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아마도 의사 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으면 까무러칠 만큼의 양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당장 중독이니 내성이니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 정도의 약을 써야만 환자가 팔팔하게 하루를 버틸 수가 있으니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 의료보험 공단에서는 마약에 관한 규정으로 듀로 패취제를 쓰는 사람에게는 먹는 약을 처방할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사람에게만 패취제를 쓸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이 환자의 경우 패취제를 안 쓰면 MS-Contin을 10알 정도는 더 먹어야 통증을 가라앉힐 수가 있습니다. 총 40알 정도를 먹어야 통증을 없앨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먹는 MS-Contin을 하루에 4알, 경우에 따라서는 좀 더 추가할 수 있다고 해놓았는데 실제로 병원에서 처방하는 양은 5알 정도 이내에 불과합니다. 다행으로 호스피스에 관심이 있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면 약이 더 추가될 수 있으나 대부분 그렇지를 못한 실정입니다. 그러니 40알을 먹어야 통증이 없는 환자에게 5알을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지막지한 통증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환자는 장이 녹으면서 자궁에 천공을 일으켜 자궁으로 대변이 함께 섞여 나오고 있었습니다.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변이 함께 쏟아졌는데 화장실에서 나올 때는 반 초주검이 되어 나왔습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진땀으로 샤워를 하고 나올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가만히 있어도 변이 자궁을 통해서 조금씩 흘러 나왔기 때문에 계속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했고, 그럴 때 여자의 자존심과 창피함이란 말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행사 당일 날도 이런 문제 때문이 일찌감치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기저귀를 여러 겹으로 대놓고 냄새에도 대비를 했습니다. 봉사자가 생애의 마지막 단장(?)을 예쁘게 해놓고 빌려온 한복으로 갈아 입혀 주었습니다. 말랐지만 말만 안 하면 환자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가꾸어 놓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누가 2~3달 후면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싶을 정도로 환자도 신이 나 있었습니다.
행사 끝에 주교님께 환영의 꽃다발을 드리는 순서가 되었을 때 사회자가
31살의 자궁경부암 말기 환자가 주교님께 꽃다발을 드리겠습니다. 이 환자의 마지막 소원이 사람들 앞에서 환영을 받으며 사진을 많이 찍어보는 겁니다.”
하고 말하자, 봉사자의 부축을 받으며 환자가 걸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상황을 알고는 우렁찬 박수소리와 함께 엄청난 플래시로 환자에게 답례를 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기쁜 날은 없었을 거예요.”
주교님의 손을 붙들고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들은 얘기지만 이상하리만치 통증도 전혀 없었고, 변이 흘러나오는 냄새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변도 전혀 나오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날 하루 컨디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 약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어도 통증을 못 느낄 정도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기분이 좋아 엔돌핀이 많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해서 환자는 부모님께 따듯한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 한 채 성장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갈 때에도 그 흔한 김밥 한 줄 싸갈 형편이 못 돼 배를 곯아야 했고 남들 다 찍어보는 사니 한 장 찍지를 못 해 추억거리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가난과 무지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모님 사랑조차 변변히 받아보지를 못한 채 커왔으니 일찌감치 공부는 뒷전이 되었고 여기저기 돈을 벌기 위해 어릴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의 유혹을 못 이겨서 절도죄를 지었고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칠 때쯤 자궁암이란 진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발견되었을 때에는 이미 많은 부분 전이가 된 상태가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형집행정지로 꽃마을로 오게 된 것인데 처음에는 꽃마을이 교도소와 연계된 것인 줄 알고 무조건 집으로 가려고만 했습니다.
결국 1주일 만에 갈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지만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자 편안해졌습니다. 통증은 비록 심했지만 같은 방에 있는 다른 환자들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지내려 애를 썼습니다.
거의 10개월이란 시간을 꽃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이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를 바쳐주었습니다. 대로는 엄마뻘 되는 사람이, 때로는 언니나 이모쯤 되는 사람이 떠날 때마다 친근하게 호칭을 부르면서 먼저 가 있으면 뒤따라가겠노라고, 지금은 내가 기도 많이 해줄 테니까 천국 가면 자리 좀 잡아 놓으라며, 임종할 때까지 기도를 바쳐주었습니다.
하루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갈 때는 신부님이 임종을 지켜주세요. 내 앞에 가는 사람들처럼 나도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꼭 옆에 있어줄게. 그리고 자매님 기도 받고 먼저 천국 간 사람들도 같이 기도해줄 거예요. 그 사람들 임종할 때 기도 많이 해줬잖아요.”
“고마워요, 신부님. 저는 줄 게 하나도 없이 신세만 지고 가네요.”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데… 준 만큼 100배로 받아내야 직성이 풀리니까. 죽어서 천국 갔는데 기도를 안 했다! 그럼 각오해야 될 걸? 쫓아가서 혼내줄 테니까. 기도 많이 해요. 알았어요?”
“예.”
모처럼 활짝 웃는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사실 이 환자가 밝은 모습으로 지내긴 했지만, 한쪽에는 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엄마와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형집행정지로 풀려 나와 갈 곳이 없었을 때 암 통증을 참으며 집으로 찾아가 보았지만 본인 말로는 문도 안 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아픈 것을 숨기고 간 이유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속을 많이 썩여 온 터라 내놓은 자식이라고 상대조차 안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채 자라왔는데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가니 늘 가슴 한 쪽이 저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연락이 되던 언니를 불러 엄마와의 재회를 준비했습니다. 절대 엄마에게는 딸 때문에 부담을 주기 않게 하겠다는 것과, 지금 죽을병에 걸렸으니 마지막으로 한번 얼굴이나 보여 달라고 사정하게 했습니다. 일단 얼굴을 한번 보고 나면 핏줄은 속일 수 없으니 실마리는 풀리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엄마를 만났고, 서로가 잘못을 청하는 모녀의 눈물로써 그 동안의 아픔들이 치유가 되었습니다. 역시 천륜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 후로 임종할 때까지 시간 날 때마다 엄마가 싸오는 음식을 먹으며 엄마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주교님께 꽃다발을 드리고 플래시 세례를 실컷 받은 후 두 달이 지날 무렵부터 상태가 점점 안 좋아졌습니다.
임종 전 날,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말기 암 환자 중 30~40%는 임종 전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암 덩어리가 마지막 발악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는 진통제를 그야말로 쏟아 부어야 하지만 그러나 2~3시간은 그 끔찍한 통증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잠깐잠깐 통증이 가라앉을 때면 환자가
“신…부님 제발 주…ㄱ…여…주…세…요. 주…ㄱ..여 주…세요” 하고 흐느끼며 애절하게 바라보던 눈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손을 붙잡고
“그래, 조금만 더 참아. 약을 계속 쓰니까 조금 있으면 통증이 가라앉을 거야.”
하는 말을 되풀이하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빨리 데려갔으면….
임종.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서서히 눈을 감았습니다. 뼈에 가죽만 입혀놓은 것처럼 말랐는데도 끝까지 화장실 출입을 할 만큼 강한 정신력을 가졌던 여인이었습니다. 자궁으로 변이 흘러나와 화장실에서 하혈과 함께 피똥을 쏟을 때는 몇 초 만에 진땀으로 샤워를 하고 나오면서도 눈이 마주칠 때는 미소를 잃지 않던 여인이었습니다.
모진 통증이 올 때에도 입 밖으로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면서 잘 참던 젊은 여인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 세상 가서는 아무런 통증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아요. 그 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행복한 시간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이 다음에 천국에서 만납시다. 잘 가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미소를 머금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지금은 사진을 많이 찍었던 지하성당 내 납골당에 안치되어 꽃마을의 하루 일과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 아직도 안 갔어요?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올라오는 환자의 눈매가 매서웠습니다. 사실은 독기가 떨어진다고 나 해야 할까? 남편에 대한 원망과 증오에 가까운 눈빛, 신경질적인 태도와 언사 등. 상황으로 보아 남편과의 관계나 가족들과의 관계가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갔습니다.
이런 사람이 들어오면 사실 할 일이 많아집니다. 암 통증도 통증이려니와 가족간의 갈등까지도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남기 때문입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뭔가 건수를 잡아 화해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보통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봉사자에게서 오늘 입원하는 환자가 생일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0세, 생의 마지막 생일. 사실 이곳에 들어오면 길어야 석 달 정도 살기 때문에 내년에 생일을 다시 맞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오늘이 이 환자가 이승에서 맞는 마지막 생일인 셈이었습니다.
좋은 기회다 싶어 저녁 때 축하파티를 열어주기로 하고는 환자와 가족들 몰래 꽃다발과 샴페인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깜짝 쇼를 여는 셈입니다. 첫날밤은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 가족들이 자고 가는 것이 낫겠다고 귀띔을 해 둔 터라, 저녁식사 후 다 모이게 하고는 남편을 몰래 불렀습니다.
“오늘이 부인 생일인 거 아세요?”
“아! 맞습니다. 집사람 아픈 것 간호하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그래서 말씀 드리는 건데 경황이 없으실 것 같아서 제가 대신 꽃다발과 샴페인을 준비했습니다. 이따가 저녁 때 꽃다발을 부인에게 주세요. 물론 그때까지는 가족들에게도 아무 말 하지 마시고요. 아시겠죠?”
“예. 정말 감사합니다.”
저녁 때쯤 되니 환자가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일시에 모인 다음 남편이 꽃다발을 전해주며
“여보, 생일 축하해!”
하며 뽀뽀를 해주자 환자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더니 이내 입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샴페인을 터뜨리고 축하노래를 합동으로 한 곡 불러주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샴페인을 따라주도록 하고 쨍! 술잔을 부딪치며
“여보! 사랑해!”
하며 꼬옥 안아주도록 했습니다. 남편도 마지막이라 생각했는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합니다. 평소 때 같았으면 닭살 돋는다고 할 만도 할 텐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고분고분합니다. 아내도 남편의 그러한 모습이 평소의 모습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좋은 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습니다. 아마도 지난 날의 원망이나 한이 그 순간만큼은 다 녹아 내린 듯 했습니다.
이 정도면 효과 만점이다 싶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습니다.
오늘은 두 분의 날이니까 이곳에 신혼여행을 왔다고 생각하고 이 침대에서 신혼부부처럼 잘 것을 명령했습니다.
사실상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몸 가는데 마음 간다고 좁은 일인용 침대에 함께 누워 부딪치다 보면 미웠던 마음도 다소 녹을 수 있으리라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슬쩍 보니 두 사람이 한 침대에서 손을 꼬옥 포갠 채 자고 있는 보습이 보였습니다. 그 좁은 침대에서 부부가 손을 잡고 밤새 잔 모양입니다.
아내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제 입원할 땐 독기가 똑똑 떨어지던 눈빛이 온데 간데 없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부부란 참 묘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환자가 평생을 살면서 행복했던 기억이라고는 임신했을 때 남편에게 사과 두 쪽 얻어먹은 것이 행복한 기억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힘든 생활을 해온 모양입니다. 양가 부모가 원치 않는 결혼을 시작으로 시댁의 시집살이, 남편의 부도로 쫓겨 다니며 동생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동안의 힘겨움,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남편의 바람기와 무성의, 시어머니의 구박 등등, 모든 것이 복합되어 ‘시’자만 나오면 화를 삭이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친정어머니와의 갈등까지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한 가지는 환자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거기엔 반드시 무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빨리 읽어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사람을 입에 올리면서 거품을 물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속을 들여다보면 환자가 욕을 하는 그 사람과의 화해를 원하는 표시라고 봐야 합니다. 무너가 이런 상태로는 그냥 죽을 수는 없는데 방법을 몰라 욕만 해대는 것입니다. 환자는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욕을 하거나 원망하는 강도가 사뭇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호스피스 봉사자가 제때 읽어내지를 못한다면 화해는 고사하고 죽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에게 큰 한 恨 을 남기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모든 환자는 마지막에 가서는 진실하고자 하는 마음만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환자의 심리상태는 편안함과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감과 자유입니다. 홀가분하게 먼 길을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해결치 못한 문제가 있을 때는 계속해서 원망을 하고 욕을 하는 것으로 싸인을 보내서 본인의 답답함을 드러냅니다.
이 자매도 비슷한 상황에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남은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시댁 식구들을 불러놓고 한 명 한 명에게 환자와 대화를 하게 하는 방법이 제일 중요합니다. 방법은 꼭 1:1 이어야 하고 방법을 설명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환자가 이제 살아봐야 한 달 이내인데 어차피 가는 사람이라면 하이 없게 배려를 해주는 것이 보내는 사람의 도리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면 더 자존심이 상하니까 한 사람씩 환자와 지난날의 얘기를 하면서, 사실 지난 날 이러이러한 점은 나도 좀 심한 구석은 있었지만 너에게도 야속한 점이 있었다. 사실 본심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나도 잘못한 게 많구나, 미안하다, 우리 화해하자, 하는 식으로 서로의 가슴을 터놓고 대화를 하게 해야 합니다. 일방적인 사과나 화해는 절대 금물입니다.
일방적인 사과나 화해는 오히려 반감만 사거나 놀림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화란 사실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방법이기 때문에 서로의 자존심을 세워 줄 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1:1 로 대화를 유도해나가면 시간은 걸릴지 모르나 죽음을 준비하게 하는데 확실한 방법이 됩니다.
이러게 가족들간에 대화가 다 끝나면 환자의 얼굴이 달라져 있습니다.
마음이 편안하니 얼굴색까지 편안하고 통증도 가라앉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면 육체의 통증도 쉽게 다스려집니다. 그날 이후로 환자는 조용히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남은 생을 정리하고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까지 해줄 것을 당부하곤 했습니다. 이 정도면 대충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끝난 셈입니다.
얼마 후 임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부르게 하고 봉사자들과 함께 마지막 가는 임종을 지켜주기 위해 둘러서서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환자의 호흡상태로 보아 오래 끌 것 같지는 않아 임종경과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날따라 피곤해서 눈을 감고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기도가 끝날 무렵 이제는 가셨겠거니 하고 환자를 쳐다보니 얼레! 함께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게 아닌가!
“어라 아직도 안 가셨어요? 아니! 지금쯤이면 하늘나라로 가셨어야지, 어떻게 된 거예요?”
하니 작은 목소리로
“엄마 정을 알고 가야지… 그냥은 못 가요!”
하고 대답합니다.
아니 볼 사람은 다 본 것 같은데 지난번에 시어머니, 친정어머니도 오셨잖아요? 하고 남편에게 물으니 지난번 친정어머니가 오셨을 때 환자와 다투고 갔다고 귀띔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모처럼 친정어머니가 간호를 해주려고 했는데 환자는 어머니가 고생할까 봐 괜찮다고 가라고 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상하셨던가 봅니다. 그리고는 다신 안 온다고 하고 가셨는데 그 일 때문에 환자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남편에게 친정어머니를 찾아오라고 하고는 어머니 오시거든 마음 상하게 하지 말고 간호 좀 해달라고 부탁하라고 시켰습니다.
아주 간혹 가다 임종막바지까지 갔다가 다시 깨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뭔가 한이 남으면 신기하게도 금방 가실 것 같은데 못 가는 경우가 있고 또 임종 시간을 질질 끌게 될 때가 많습니다.
저녁 무렵 친정어머니가 오셨을 때 모든 봉사자를 철수시켰습니다. 모든 간병은 친정어머니가 하도록 했는데 3일간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셨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저녁 나를 부르더니
“이제는 진짜 갈 것 같아요. 지난번에는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너무 힘들어서 예수님 제발 빨리 데려가 주세요, 하고 부탁을 했더니 아무 대답도 안 하고 쳐다 만 보고 계셨는데 어지 밤에는 미소를 지어주셨어요. 이제 갈 것 같아요. 그 동안 너무 고마웠어요. 봉사자들도 고맙구요. 로사리오 기도가 나를 씻어주는 기도니까 기도를 많이 해주세요.”
하며 봉사자들에게 부탁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신부님! 천국 가서 기도 많이 할게요.”
합니다.
“그 약속 잊지 말고 꼭 기도해야 돼요? 마지막 갈 때까지 옆에 있어줄게요. 그리고 또 사기(?)치면 안 돼요.”
환자도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채고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본인이 한 말 때문인지 다음 날 아침부터 호흡상태가 좋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은 말짱합니다. 남편이 옆에서
“내가 누군지 알겠어?”
하고 물으니까
“당신이지.”
그러더니
“서울 가야지, 서울 가야지.”
하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이 잠깐 세수하러 간 사이에 임종호흡으로 들어갔는데 시작한지 불과 3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숨을 몰아 쉬더니 그대로 가셨습니다.
엄마 사랑을 받고 가야 한다더니 말대로 3일 동안 엄마의 지극한 사랑과 간호를 받은데다 예수님도 대기상태에 계셨고 본인도 준비를 다했으니 그리도 쉽게 가셨나 봅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 행복한가 영원히 잠든 얼굴 모습이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이제 진짜 잘 가세요.”
성모꽃마을 첫 환자, 초등학교 동창생
초등학교 때 아주 예쁘고 얌전한 여학생 얼굴이 생각납니다. 비록 많은 얘기를 해본 적은 없지만 같이 성당에 다녔고 주일학교도 함께 했기 때문에 어릴 때의 얼굴 모습 그대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만나지를 못했으니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그런데 그 예쁜 초등학교 동창생이 암투병중이란 소시를 들었습니다.
성모꽃마을을 하기 위해 발령을 받은 지 얼마 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시간도 많아 방문도 하고 위로도 할 겸 입원해 있는 여의도 성모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동창생의 얼굴을 보니 어릴 때의 모습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는데, 다만 투병생활과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가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많이 야위어 있었습니다. 남편 말로는 처음 발견 당시 대장암이란 판정을 받고 수술에 들어갔지만 이미 간, 난소, 자궁까지 다 퍼진 상태에 있었고, 지난 9개월 동안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를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슬하에는 9살 난 아들과 5살 난 예쁜 딸이 있었는데 아들은 아빠를 닮았고 딸은 엄마를 닮았습니다. 딸이 엄마를 닮아서일까 무척이나 똑똑하고 예쁘장하게 생겼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끼리 뭐라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만 사제로서 위로와 기도를 해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을 만나 점심식사를 하면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내는 자식들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 힘든 항암치료를 끝까지 잘 견디어냈는데, 어지간히 아프지 않으면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갖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아플 때 소리라도 질러, 그러면 덜 아프잖아, 하니까 내가 신음소리를 내면 당신하고 애들이 마음이 아프잖아, 하면서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더라구요.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눈빛은 살아 있었는데 이제 그 기력도 의지도 바닥이 났나 봅니다. 이젠 몸 상태가 계속 까라지기만 하고 체념의 빛이 역력해요. 정말 불쌍한 여자입니다. 호강 한번 제대로 못 시켜주고 고생만 했는데….”
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으니 집으로 퇴원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렇다고 중환자를 집으로 데려가서 간호를 할 길이 없으니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아이들도 어리고 병원비라도 마련하려면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고 지금까지는 장모님이 오셔서 수발과 간호를 해주셨지만 몸도 불편하신 분이 간호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암 통증과 그밖에 여러 증상들에 시달리는 중환자를 집에서 간호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내가 호스피스를 시작하게 된 일과 만일 환자를 위해 다른 계획이 없다면 도와줄 의향이 있음을 설명하고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고 하고는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환자와 보호자가 성모꽃마을로 오기를 희망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2000년 2월 15일 발령을 받고 나서 4월 11일 성모꽃마을 첫 환자가 동창생이 된 셈입니다.
들어오는 날 보니 차를 오래 탄 탓에 지쳐 있었습니다. 우선 환자의 상태를 안정시키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냥 친구 집에 놀러 온 셈 치라고…. 그리고 이곳은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 별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얘기하고는 친정어머니도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해드렸습니다. 물론 아이들도 주말이면 놀러 와서 엄마와 함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환자가 안심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억하기에 원체 말수가 적었던 친구라 별 반응은 크게 없었지만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 환자를 위해 매일 미사를 같이 하고 지극정성 간호를 해주지만 커져가는 암 덩어리를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나이가 젊어서 암이 커지는 속도도 빨랐습니다.
투병생활 하는 동안 내내 자식들 걱정이 앞서는가 봅니다. 그 힘든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이 부르면 눈도 한번 안 뜰 때가 많은데 어린 딸이 ‘엄마’하고 부르면 천근만근 무거운 눈을 간신히 떠서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딸아이를 붙들고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시키느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 딸에게 엄마의 죽음은 큰 충격이요 슬픔이기에 미리 준비를 시켜주는 것이 좋겠다 싶어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나고 없을 때를 생각해서 이별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엄마가 하늘나라 가면 어떻게 해?”
“엄마 하늘나라 안 가.”
“왜 안 가?”
“응…! 날개가 없으니까.”
“그래도 누가 달아주면 어떻게 해? 만일 하느님이 날개를 다아줘서 하늘나라로 데려가면?”
“안 돼!”
“왜 안 돼?”
“응! 엄마 보고 싶어서. 나 열심히 기도할 거야. 엄마 다 낫게. 밥도 잘 먹을 거예요.”
“그럼 성모님 앞에 가서 기도하고 와.”
그러자 아이는 성모상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성호를 긋고 두손 모아 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엄마 다 낫게 해주시고 밥 잘 먹게 해주세요. 엄마 열심히 말 잘 들을래요. 엄마 빨리 나세요. 친구들과 사이 좋게 놀 거예요. 사우지 않을 거예요. 엄마 말 안 들으면 안 돼요. 그러면 엄마가 안 나요? 그러니까 엄마 빨리 나세요. 어마 사랑해요.”
아직 엄마를 떠나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딸아이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꽃마을에 들어온 지 3주일째 되던 날 4월 25일 부활절 아침에 조용히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전 날 부활절 전야미사까지 함께하고 내가 새벽 3시 30분까지 간호를 해주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친정어머니와 교대 후 바로 임종이 시작되더니 7시쯤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떠나는 발길이 어찌 쉬이 떨어졌을까 마는 그래서인지 감겨진 두 눈 사이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습니다.
어린 딸은 그날 아침이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나 봅니다. 엄마의 침대 밑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평소 때 같으면 엄마를 먼저 찾고 어리광을 피웠을 텐데 아이를 안아다 옆방에 뉘여 놓았는데도 엄마를 찾지도, 울지도 않은 채 엎드려 있기만 했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는 장례식장에서 또래의 친척 아이들과 놀면서 아이는 연신 “우리 엄마 하늘나라 갔다. 우리 엄마 하늘나라 갔다”하며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아이가 화장실에 가거나 일어났을 때 투정을 부리고 응석을 떨었지만 그날 이후로 아이는 한번도 엄마를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엄마의 영혼이 아이의 가슴에 자리잡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엄마가 하늘나라에 간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일까?
부모가 죽으면 땅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자식을 먼저 모낸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하랴마는, 하루는 딸 장례식을 치른 아버지가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록 딸자식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복은 없었지만 죽을 때 복은 다 받고 갑니다. 그래서 딸을 먼저 보내긴 했지만 슬픔이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하늘나라 간 것이 분명하니 천국에서 만날 것을 확신합니다. 나중에는 곡 만날 수 있겠지요. 그때 오래오래 행복하게 같이 살 겁니다.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첫 환자였던 동창생은 그렇게 해서 갔습니다. 예쁘장한 소녀였던 친구가 아이 둘의 엄마가 된 후 죽음직전에 만났지만,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내색 한번 않고 죽음을 잘 받아들인 엄마로 기억될 것입니다.
아마도 꽃마을이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기도를 받은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 미사와 연도를 해주고 있으니 제일 오랫동안 기도를 받은 셈입니다.
“동창생 안녕, 천국에서 만나길….”
자살비상금 10만 원
성모꽃마을에 들어온 두 번째 환자가 있었습니다. 대장암 말기로 두 달을 살다 가신 분이었는데 이분이야말로 한국의 대표적인 호스피스 환자가 처함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분은 3남매의 맏이로 무당 노릇을 해온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는데 열여덟 살 때 동네에서 머슴을 살던 남자와 눈이 맞아 살다가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들어갔으나 시어머니 되는 사람은 근본도 없는 년이 누구를 망치려고 들어왔느냐고 남편과 갈라놓기 위해 온갖 학대를 하며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보약이라고 지어온 약을 먹었는데 감사하게 생각하고 받아먹은 것이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한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한 비상약이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고의로 아이를 유산시킨 후 이 자매는 더 이상 이곳이 자신이 살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어 이혼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다가 28살 때 둘째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유산의 부작용으로 아이가 생기기 않자 딸을 입양해서 살게 되었는데 이것도 잠시 남편이 한번 결혼했던 과거를 어떻게 알았는지 온갖 학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학대를 견디다 못해 다시 이혼을 하고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은 것이 낫겠다 싶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부산으로 내려가 죽어버리자고 결심을 하고 밤차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살을 많이 한다는 태종대를 서성이면서 어디서 어떻게 떨어져 죽을 건가를 찾으며 서성이는데 기구한 운명인지 거기서 지금의 세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도 첫 부인을 암으로 잃고 괴로운 마음에 역시 자살하려고 태종대로 왔다고 합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개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이상하게도 둘 다 자살하러 왔기 때문인지 끌리더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먼저 물었습니다.
“저….. 혹시 무슨 고민 있으신가 봐요? 여기는 처음 오신 것 같은데 혼자 오셨죠?”
어차피 죽을 몸인데 대답 못할 것도 없고 또 한마디로 더 이상 집적거리지 않게 해야겠다 싶어 그냥
“죽으려고 왔어요.”
하고 대답을 했답니다. 정신병자인 것처럼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 한마디가 인연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남자도 대뜸
“나도 죽으려고 왔는데.”
그러더랍니다. 동병상련의 처지가 통했던지 그 길로 소주 한잔 걸치고 죽자는 제안에 부부의 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결혼조차도 순탄하지를 못했습니다. 비록 자살하려고 했던 기이한 인연으로 부부가 되긴 했지만 남편과는 학력차이가 너무나 많이 났고 이 사실은 시어머니에게 또다시 시집살이를 하게 되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온갖 시집살이를 견뎌내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남편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엄마라고 유난히 잘 따랐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낙으로 시집살이를 이겨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5학년이 되던 해에, 남편의 사업실패로 부산에서 청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때부터 또 고생길이 시작됐습니다. 남편은 청주로 이사를 오면서 직장을 구하지 못해 매일 집에서 놀기만 했습니다. 이상하게 자존심 때문인지 야간 경비로라도 취직을 하면 될 텐데 며칠 다니면 그만두고 때려치웠습니다. 주위사람들이 생활보호대상자로 만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귀띔을 해주어도 자존심이 상한다고 그것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아내가 벌어다 주는 쥐꼬리만한 돈이 생활비의 전부였습니다.
이 자매는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술병 뚜껑을 만드는 공장에서 하루 15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25만 원을 받고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6년 정도 일하니까 밤 근무까지 죽어라 고 일해서 70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10년 넘게 외식 한번 못했고 뒤꿈치가 다 닳아서 떨어진 슬리퍼를 여름이고 겨울이고 신고 다녔습니다. 정말 몸서리 쳐지는 가난이 지긋지긋한 삶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의 상처와 고된 생활로 몸은 병들고 아프기 시작해 병원치료를 하기 시작했는데, 1999년 6월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에 들어갔으나 배를 열어보니 이미 간까지 다 퍼진 상태였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모은 돈으로 1500만 원짜리 전세를 얻은 것이 전 재산이었는데, 병원에 있는 동안 수술비와 약값으로 퇴원할 때쯤엔 1600 만 원이 나왔다고 합니다. 평생 아끼고 모은 돈은 병원비와 약값으로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에 빚만 짊어진 그 괴로움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수술할 당시 너무나 통증이 심하고 삶에 희망이 없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는 남이 다 잠든 틈을 타서 자살을 하려고 병원 9층 건물의 창문을 다 열어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열리는 창문이 하나도 없고 창살로 다 막혀 있어서 자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 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을 쓸 게 없다면서 퇴원을 강요해 집으로 돌아왔으나 먹을 것도 변변히 없는 집에서 통증치료는 고사하고 생으로 그 통증을 죽기살기로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능했던 남편은 간호조차 제대로 해주지를 않았습니다. 남편은 화가 날 때마다 연상의 여인이라는 노래만 몇 십 번이고 반복해서 듣는 습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5시간 동안을 계속해서 들었다고도 합니다. 한마디로 저기압이라는 경고였다고 합니다. 이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엄청난 통증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밤새도록 겨울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증에 몸부림치며 밤을 지새고 나면 이불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배가 고파도 때가 되지 않으면 얻어먹을 수가 없었고 입맛이 없어서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아프다고 쳐먹고 싶은 것도 많다며 살이 쪄서 안 된다고 하면서 핀잔을 받았습니다. 하루에 두 끼는 국수를 주었는데 그나마 입맛이 없어서 못 먹으면 다음 끼니 때까지 고스란히 굶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통증에 시달릴 때마다
“내가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온 것도 억울한데 그것도 모자라서 이런 병에까지 걸려 지독한 통증과 서러움에 시달려야 하다는 정말 신이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며 절규한 적이 수십, 수백 번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생각다 못해 사람들이 조금씩 주고 가는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빨리 죽는 게 상책이다 싶어 자살용 비상금을 모았습니다.
방법은 밤중에 몰래 택시를 불러 잡아타고는 멀리 가서 자살하는 게 계획이었습니다. 때문에 멀리 가려면 돈이 10만 원은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0만 원을 모을 때쯤엔 혼자의 힘으로 걸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옆으로 눕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자 이렇게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며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또 저주하였습니다.
그럴 때쯤에 주위 교우의 도움으로 꽃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게 된 분입니다. 꽃마을에 들어와서 두 달간을 지내셨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행복하게 지낸 적이 없다면 평생 지지리도 복이 없더니 이제 죽을 때가 다 되니까 복이 오나 보다고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50평생 얼굴에 화장 한번 하지 못하고 살았기에 하루는 봉사자가 누워있는 얼굴에 예쁘게 화장을 해서 옷을 입혀놓고는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이 사진이 후에 영정사진이 되었지만…
임종 3일 전
간호사가 하루는 뛰어오더니 환자의 얼굴이 천사같이 예쁘게 변했다고 말합니다.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잠든 모습이 갑자기 너무너무 아름답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예쁜 모습으로 변하더니 15분간을 그 상태로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에게 알려야 하는데, 하면서도 그 모습에 도취가 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바뀐 후에 간호사가 사람이 죽기 전에 예쁘게 변할 때가 있는데 예수님을 만나면 그렇게 된다는 얘기를 전에 들은 적이 있어서, 혹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대답했습니다.
임종 이틀 전
새벽 2시 10분, 봉사자에게
“자꾸 불러서 미안하다. 그 동안 고마웠다.”
고 말하며 남편과 자식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녹음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남편을 미워했고 용서는 하고 가지만 마주 볼 자신이 없다면 녹음을 해서 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녹음된 유언
남편에게
여보! 당신에게는 정말 할 말이 많지만 한마디만 하고 싶어요. 그 성질 인제 좀 죽이고 그 자존심도 좀 버리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는 아빠, 난 그걸 원해요. 우리야 어떻게 만사서 어떻게 살았든 그래도 자식을 지켜주는 게 부모의 도리라 생각해요. 아이 앞에서 죽는다는 소리 하지 말고, 저거 어떻게 죽이고 내가 죽나 하는 그런 마음 두 번 다시 갖지 말고, 내가 죽어서 먼 데서 보더라도 저런 좋은 아빠였구나 하는 것을 내가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길 바래요.
그래도 00아빠 미우니 고우니 해도 내 마음 속은 항상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었는지 모리지? 당신은 나를 싫어했지만, 나는 끝없이 한없이 좋아했었다우. 당신 마음 어떻게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은 진실이라는 거 알아줘요.
먼저 가서 미안해요.
임종
새벽 2시경 맥박이 급격히 약해지고 호흡이 점점 얕아지며 숨이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의 기도 속에 그간의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출타 중이라 연락이 안 되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행복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투병생활 할 때 잘 지내다가도 남편만 왔다 가면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통증을 호소하고 불안해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방문도 오지 말 것을 당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괜히 편안하게 잘 가는 사람 놀래키는 것 같아 연락 안 되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마리아 씨 편안하게 잘 가세요 그 동안 고생 많이 했어요. 이제부터는 천국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세요.”
잠든 모습이 그제야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연상의 여인을 즐겨 듣던 남편이 며칠 어디 좀 다녀오겠다며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이 말만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보름 후 옆방 창고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습니다.
근처에서 자꾸 무슨 냄새가 난다는 주위사람의 신고로 찾게 되었는데 시신 옆에는 아들에게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쪽지가 써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먼저 간 아내가 못 견디게 그리웠는가….?!
아버지께 죄송해요
마스크를 쓴 채 아빠와 함께 찾아온 재영이는 키가 무척이나 컸습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21살 재영이…. 건장한 키에 큰 눈매를 가진 재영이는 겉보기에도 잘생기고 씩씩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생긴 젊은 청년이 무슨 병을 앓나 싶을 정도로 건장했는데 몸 안에서는 이미 말기 혈액암으로 서서히 생명의 불꽃이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혈액암은 처음 대하는 터이라 무엇을 어떻게 간호해야 할지, 무엇을 도와주어야 할 지 몰라 아버지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곳에 와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병원엘 다녀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비정상적인 백혈구가 무제한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수치를 자주 점검해서 수치가 늘어나면 떨어뜨려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피 주사와 혈소판만을 걸러내 혈액을 맞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길어야 20개월을 버티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한 번 수혈할 때마다 22만 원 정도, 다른 비용까지 합하면 꽤나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한달 비용이 적어도 100만 원, 이 젊은 청년을 살릴 수만 있다면 돈 100만 원이 아까우랴마는 단지 죽음을 기다리면서, 죽을 때까지 드는 비용이 이 정도니 한숨이 절로 났습니다.
1차 수술할 때 골수이식을 했는데 7,000만 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 조기퇴직을 하셨고 그 퇴직금과 함께 그 동안 모아둔 돈을 모두 아들의 수술비에 떴다고 했습니다. 전 재산을 써서라도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냐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재영이가 제일 미안해했던 것도 바로 아버지의 이런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서 이제는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함께 아버지께 받은 은혜를 어떻게든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6개월 전에 이미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을 받아둔 터라 빨리 치료해서 군에도 갔다 오고, 취직도 하고 아버지께 효도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지냈는데, 두 달 전부터 몸이 다시 안 좋아지더니 병원에서 재발이라는 청천벽력 靑天霹靂 같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수술을 하려고 해도 재발은 보험처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아버지가 평생 모은 퇴직금까지 다 써버린 상태에서 더군다나 보험처리가 안 된다면 재수술은 끔도 꿀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삼키면서도 수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영이도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봐요. 그 동안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전 잘 견딜 수 있어요. 죄송해요. 건강해서 아버지께 보답하고 싶었는데…”
두 부자는 서로를 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오열했습니다.
“미안하구나…. 너무 미안해….”
“괜찮아요, 아버지!”
아버지는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가슴 아파했고, 아들은 아버지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건강으로 보답을 못 하고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앞서 가야 한다는 현실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나마 죽기 전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데 드는 돈이 한 달에 100만 원씩이니 마지막까지 부모에게 폐를 끼쳐야 한다는 생각에 젊은 아들은 더욱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꽃마을에 입원한 후에도 그의 일기장을 보면 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그리움, 죄송스러움으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날 무렵 재영이의 심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건의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달에 100만 원씩 드는 비용을 조금이라도 보탤 수만 있다면 아버지게 효도하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르바이트 안건
1. 원장신부 위해서 기도 10분
2. 팜플릿 접기 하루 100장
3. 자기 일생 자서전 식으로 매일 쓰기
위 내용이 지켜질 경우 일주일에 10만 원씩 지급하기로 함.
2002.5.15
김재영 (인)
재영이는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신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위안을 얻었는지 처음 며칠간은 통증도 적었고 기분 좋게 지냈습니다.
재영이는 어릴 때 가난하긴 했지만 생활력이 강했던 터라 중학교 시적 3년 동안 내내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학비와 용돈을 벌어 쓰는 억척이기도 했습니다.
남달리 덩치가 크고 자신의 말로는 성장속도가 빠른 탓에 초등학교 때는 전교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크다고 했는데 덕분에 시비를 걸어오는 아이들과 싸움도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실업계로 가면서 한때 방황을 하기도 했으나 선생님을 잘 만나 폭발하는 에너지를 운동 쪽으로 돌릴 수 있게 되어 학교에서 인정도 받고 대학에도 들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2년제 대학을 졸업한 다음 군에 입대하기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았을 무렵 돈을 마련하게 위해 직장을 구하게 되었지만 수시로 몸이 떨리고 열이 나는 현상들이 발생해 병원에 갔더니 급성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1차 수술 때까지만 해도 죽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발이 되면서 죽음이 코앞까지 닥쳐오고 나니 왜 내가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는지,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 신에게 원망도 많이 했고 돈이 없어서 끝까지 치료를 못하고 가는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 분노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재영이는 놀랍도록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젊은 나이라서 그런지 상태가 빨리 악화되어 병원에 자주 입원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백혈구 수치가 갑자기 올라가거나 열이 발생되면 어떤 때는 병원에 일주일씩, 열흘씩 입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열이 안 떨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몸에서 염증이 발생했다고 백혈구가 이상증식을 일으키니 몸에서는 자동반응으로 그것들을 죽이기 위해 또 열을 발생시킵니다. 속에서는 불이 나니 계속해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있습니다. 살갗을 만져보면 저체온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가운데도 24시간 선풍기를 틀고 열을 식히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일생을 일기 형태로 조금씩 적어나갔습니다.
하루는 창문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다가 내 기척을 듣고
“신부님 제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부모님 속만 많이 썩여드리고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가 보구나. 내가 보기에 너는 확실히 천국에 갈 어야. 나쁜 짓을 했어도 네 수준에 맞는 것일 테고, 시간으로 따져도 남들보다도 더 짧지 않니. 또 이만큼 잘 준비하고 가니까, 너 같은 사람이 천국 못 가면 누가 가겠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아직 정신이 맑을 때 가족들과 네가 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특히 부모님을 위해서. 살면서 다 못하고 가는 효도… 기도로라도 해드리고 갈 수 있게. 알겠지?”
“예. 그렇게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열에 시달리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병원에 입원해도 치료도 해보고 수혈도 하고, 별별 방법을 다 써도 회복되지를 않았습니다.
작별의 시간이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너무나 속을 썩여서 아버지께 제일 죄송해요. 병이 나아서 효도하고 싶었는데….”
정신이 잠깐잠깐 들 때 마치 유언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의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신세만 많이 지고 갑니다. 다음 생애에 갚을 수만 있다면 곡 갚고 싶어요.”
그게 마지막 말이었나 봅니다. 2~3일을 고열 속에 앓아 눕더니 결국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고통도 불행도 없는 하늘나라에 가서 행복하게 살거라…. 끝까지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못난 애비를 용서해다오… 아들아….”
재영이는 오열하는 아버지의 품에서 작별인사를 들으며 22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천국에서 질병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길….
엄마 아빠를 차례로 암으로 잃고
“신부님! 저희 아빠가 며칠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아빠 임종을 제가 지켜봤어요. 지난달 엄마한테 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신부님이 호스피스 강의하고 계셨잖아요? 그때 ‘사람이 죽을 때 나타나는 임종반응과 임종까지의 단계별 과정’을 들었는데 그걸 저희 아빠한테 써먹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이상했어요. 그날 학교에 가려고 아빠를 봤는데 호흡하시는 것이 임종을 시작하는 것 같았어요. 처음엔 무섭기도 하고 떨려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정말 강의들은 대로라면 아빠가 돌아가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빠를 두고 학교에 갈 수가 없어서 아빠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아빠 나 소영이에요. 아빠 날 알아보겠어요? 하고 물으면 고개만 끄덕일 뿐 말씀은 못 하셨어요.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아빠 옆에서 아빠의 손을 꼭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기도를 해드렸어요. 임종할 때는 기도가 제일 좋다고 하셨잖아요. 아빠한테 편히 가시라고, 천국 가시거든 먼저 가신 엄마 만나서 행복하게 사시라고 말해드렸어요.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오후 2시쯤 되었을 때 점점 숨을 천천히 쉬시더니 그 길로 운명하셨어요. 만일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학교를 갔었더라면 아빠 혼자 임종하셨을 거예요. 신부님 덕분에 아빠 죽음을 지켜드릴 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감사해요, 신부님.”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이 지난 후 찾아와서는 숨도 안 쉬고 전해준 고등학교 2학년 딸아이의 인사말이었습니다.
처음 소영이를 본 것은 지난 2002년 2월이었습니다. 왠지 핼쑥한 모습의 아빠와 엄마의 몇몇 친구들, 그리고 고2가 된 소영이.
꽃마을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서는 환자와 가족들의 분위기가 왠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41세 된 엄마가 자궁경부암으로 얼마 후면 임종을 맞기 위해 들어오는데 얼굴이 밝을 리는 없었지만 왠지 다른 환자들의 가족들과는 다른 분위기였음을 금방 감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소영이의 아빠가 암 환자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위암 선고를 받고 며칠 후면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데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기 위해 꽃마을에 입원을 시키고 나서 자신도 병원으로 들어가 수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행색만으로는 이미 말기 쪽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엄마는 자궁경부암 말기이고 아빠는 생사여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태였으니 그 침울한 분위기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침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딸 소영이는 계속해서 엄마 아빠의 기분을 밝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많이 해서일까! 행동하고 말하는 폼이 어른스러웠습니다. 엄마는 이미 자궁경부에서 폐, 간, 신장까지 전이가 된 상태여서 통증이 심했는데 그때마다 소영이는 엄마를 위로하며 달래주느라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마치 엄마가 자식을 간호하듯 손놀림이 능숙하고 정성이 듬뿍 들어가 있는 것이 여간 대견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엄마 옆에 붙어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다리를 주물러주는 데 몇 시간 동안이고 싫은 내색도, 지치는 기색도 없이 해주고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딸아이가 찾아올 때마다 엄마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소영이에게는 초등학교 2학년생인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엄마는 그 아들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는지 아들 걱정에 우울증과 불면증까지 겹쳐 힘들어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소영이는
“엄마! 걱정하지 마. 나도 다 컸으니까 내가 잘 돌볼게.”
하며 엄마를 위로했습니다.
엄마 아빠를 모두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꿋꿋하게 잘 자라주고 처신하는 딸을 보면 그나마도 마음이 놓이는지 엄마는 딸 얘기만 나오면 통증 속에서도 싱글벙글 웃음을 띱니다. 그래서 축 쳐지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것 같으면 슬며시 딸의 얘기를 꺼내곤 했습니다.
입원한지 얼마 후 아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술을 했지만 이미 많은 부분 전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암의 크기는 7.5cm가 넘으면 말기에 들어가는데 상황으로 보아 이미 말기상태인 것 같았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한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연장하는 선에 그칠 것입니다.
처음 짐작대로 소영이는 엄마 아빠를 모두 암으로 잃게 되는 셈이니 차마 사실대로 이런 얘기를 해주지는 못 했습니다.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아빠한테도 자주 가봐. 그리고 엄마한테는 수술 잘 됐다고 말씀 드리고. 잘 요양하면 괜찮을 거라고 말씀드려. 알았지? 어차피 엄마가 아빠 계신 곳에 갈 수 없으니까 아빠에 관한 얘기면 무조건 다 긍정적으로 말씀 드려. 마음이라도 편하게.”
“예.”
엄마가 먼저 가실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짐이라도 가볍게 하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엄마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두고는 도저히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꽃마을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에도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암이 나을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기적도 바래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고 운을 때면 내 앞에서는 절대 죽음의 지읒 자도 꺼내지 말라고 잘라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환자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어서 마음 편하게 가실 수 있도록 하기만 한다면 어떤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부부가 천국에서 만난다면 두 달 후에 하늘나라로 뒤쫓아온 아빠를 보고 깜작 놀라긴 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벌써 왔느냐고….
임종을 할 때에도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모습이 애처로웠지만 사랑하는 딸의 작별인사를 들으며 가는 마지막 순간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세요…. 제가 동생이랑, 아빠랑, 할머니랑 잘 돌봐드릴게요….. 열심히 살아서 엄마 마음 기쁘게 해드릴게요. 하늘나라에서 꼭 지켜보면서 기도해주세요, 엄마! 이 다음에 천국에서 만나면 가족 모두 헤어지지 말고 같이 모여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아요. 잘 가세요, 엄마…….”
딸의 마음이 고마운 듯 엄마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습니다.
여보 미안해
청주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도 유명한 환자가 꽃마을로 실려왔습니다.
56세의 췌장암 환자. 가슴에는 고무호스 같은 4개의 관이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 가슴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연신 진물이 흘러나왔습니다.
환자는 계속해서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마약성 진통제도 소용이 없었는지 한 달이 넘게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소리소리 지르고, 오죽 대책이 없었으면 중환자실에 보호자가 상주하다시피 해서 간호사 대신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니 환자의 통증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보호자의 말에 따르면 근 한 달째 잠 한번 재대로 못 잤고 지금은 너무 피곤하고 지쳐 제 정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환자도 이미 극한상황까지 온 것 같았습니다.
우선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통제 양을 병원에서 쓰는 것보다도 조금 더 올리고 그날 저녁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환자가 한 2시간 후부터 잠에 곯아떨어지더니 다음 날까지 계속해서 잠을 잤습니다.
보호자는 연신 갸웃거리기만 했습니다. 주사를 맞아도 10분마다 죽겠다고 난리를 쳤었는데 왜 잠만 자지? 하며 이상하다는 듯 환자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잠을 자는 것이 정상인데도 원체 아프다고 나부댔으니 잠잠한 것이오히려 이상한가 봅니다. 그날 저녁 내도록 보호자도 환자 옆에서 곯아떨어졌습니다. 한 달을 새우다시피 긴장 속에서 지내다가 남편이 곯아떨어지니 덩달아 잠이 오는가 봅니다.
실컷 자고 밤 10시쯤 환자 보호자가 저녁시사를 했느냐고 물어보니 괜찮다고 합니다. 말하는 모양새로 보아 저녁밥도 못 먹은 것 같았습니다. 주방에서 같이 먹도록 미리 얘기를 해주었는데도 남편까지 데려다 놓고 어떻게 밥까지 얻어먹을 수 있겠냐며 안 먹어도 괜찮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일부터 낮에 남편을 두고 일을 하러 갈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은 직장에 못 다녔는데 여기서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병원비가 많이 나와서 계속 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점심은 회사에서 주니까 해결이 됐는데, 아침과 저녁은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니 지금까지 안 먹었다고 합니다. 하루에 점심 한끼만 먹고 중환자를 돌보며 버텨온 셈입니다.
병원에 있으면서 아침저녁까지 사먹고 다닐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굶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집에까지 가서 먹고 오자니 차비가 더 들고…
그래서 그날부터 꽃마을에서 아침을 먹고 출근하고 저녁때도 같이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며칠 후, 하루는 성모병원에서 내과 과장님이 오셨는데 그 환자를 보더니
“어! 이 환자 여기 와 있네. 가슴도 이제 다 말라붙었고 많이 좋아졌는데? 이제 괜찮아요?”
하고 물으니 환자가 인사까지 하며 괜찮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병원에 있을 때와는 너무 달라 이상한가 봅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하루는 봉사자가 달려오더니 부부가 끌어안고 펑펑 운다는 겁니다.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도 또 그러고 있다고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달려가 보았더니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 진정이 되자 아내를 불러 그간의 자초지종을 들어보았습니다.
“평소에 남편은 술을 많이 먹고 술주정이 심했습니다. 술을 먹고 나면 가족들에게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고, 저나 자식들이 숨죽이며 살아야 했는데, 하루도 빤한 날이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한때는 정신차리고 사업을 시작했다가 성공 궤도까지 올라갔으나 그만 IMF로 모든 것을 날리고 빚만 지자 성격이 더욱더 난폭해졌고 술주정은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가정 살림은 내팽개쳤고 점점 자포자기하면서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과 함께 먹고 살기 위해 제가 식당일이며 노가다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그만 남편이 간암에 걸려 입원을 하게 되었고 다른 증상까지 겹쳐 중환자실에서 살다시피 해야 했습니다. 평소에 죄를 많이 지어서인지 중환자실에서도 손을 들 만큼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쳐대는 바람에 병원의사들이 제 남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병원에서도 포기하는 바람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남편도 남편이지만 저나 자식들이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사실상 죽을 날만 기다리는데 어제는 저를 부르더니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여보! 나 때문에 너무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남편 노릇, 아빠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당신 고생만 시켜서, 매일 술만 먹고 당신 괴롭힌 것 정말 미안해.’
저도 남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떨어지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지요. 하지만 남편이 말하는 소리가 진심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 동안 쌓였던 설움이 막 북받치더라고요. 건강할 때 이런 소리를 한번이라도 들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힘들고 괴롭지는 않았을 것인데 정말 죽을 때가 됐나 싶은 게 남편이 고맙고 불쌍하고 안 됐다는 생각이 떠올라 둘이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남편의 그 한마디에 지난 날의 모진 고생이 한 순간 봄눈 녹듯이 사라지더라고요. 그런데 오늘 또 저를 부르더니
‘여보! 그 동안 나 같은 남편 만나 고생 많이 했지? 미안해…. 간병하느라 고생한 것 다 알아. 정말 고마워’
하고 또 말을 하더라고요. 그 소리에 또 눈물 콧물 흘리며
‘아니에요. 나도 많이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하면서 또 끌어안고 울고, 마치 사람 감동시켜서 울리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어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말 한마디에 그간의 응어리진 게 다 풀릴 줄은 몰랐어요. 다음 날은 동생을 불러오라고 하고는 동생을 앉혀놓고
“내가 형 노릇, 맏이 노릇 못해서 미안하구나…. 나 대신 어머니께 효도를 해다오. 먼저 가는 불효자식 용서해 달라고 하고, 너희들한테는 정말 면목이 없다. 너희 형수와 조카들 부탁 좀 하자. 어려울 때 좀 도와주고….’
그리고는 동생과 끌어안고 울고… 사람이 죽을 때는 마음이 변한다고 하더니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사실 환자는 가족 한명한명에게 마지막 작별인사와 유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죽음이 얼마 안 남았음을 예견했기 때문일 겁니다. 살아있을 때는 다른 이들과 경쟁해서 이겨보기 위해 많은 계산과 복선을 깔고 살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필요 없어진 마당에서는 영혼의 순수한 상태인 본성만이 남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을 때 원한이나 미움, 용서와 화해해야 할 일이 남아 있게 되면 이 본성과 부딪치게 되어 괴로워하게 됩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지는데 그 증상으로 미운 사람을 더욱 신랄하게 욕을 하거나, 미운 사람 얘기가 나오면 과민반응을 일으키거나 불안해하고 초조해 합니다. 얘기의 화제를 그 대상과 연관된 것으로 자꾸 꺼낸다든지 하는 것도 이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시간은 없는데 화해는 못 했고 풀고는 가야 하는데 자신의 체면이나 여건 때문에 직접 말은 못하고 대신 다른 사람이 빨리 이것을 눈치채서 어떻게 다리 좀 놔줬으면 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 풀고 가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임종할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임종할 때 마음에 응어리나 풀리지 않는 한이 남아 있게 되면 숨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까지 죽음을 연장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준비가 잘 된 상태, 즉 더 이상 마음에 맺힌 것도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이 준비가 다 된 사람은 정말 쉽게 숨이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환자도 비록 살아 있을 때 개망나니처럼 살았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내와 형제들을 차례로 불러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신에게서 받은 본성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중개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 것은 사실 본인 스스로의 용기가 컸기 때문이지만 진실 하고픈 욕구,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 그런 상태가 되어 죽는 것이 바로 죽음을 잘 준비하고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풀고 가는 사람은 얼굴빛이 다릅니다.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이 있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어떤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은 준비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권입니다. 위의 환자도 모든 것을 정리하고 평화롭게 가셨습니다.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작별인사를 들으며…. 조용히 하늘나라를 향해 떠나셨습니다.
하루만 더 버텨달라고 전해주세요
대장암에 걸려 고생하시던 분이 성모꽃마을로 입원을 하셨습니다. 병원에서는 벌써부터 퇴원을 하고 싶었지만 밀린 병원비를 내지 못해 퇴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간 조금 벌어놓았던 돈은 수술비와 약값으로 이미 다 써버렸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을 해오던 이들로서는 밀린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큰일이었기 때문에 아는 지인들과 복지사를 통해 간신히 병원비를 청산하고 퇴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꽃마을에 들어와서 부인은 이틀 정도를 함께 지내더니 바로 서울로 올라가버렸습니다. 한 푼이라도 벌자니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환자들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근처 다른 성당으로 족탕기 장사를 하러 나갔습니다. 그날따라 장사가 잘 되어서 여러 대를 팔고, 일요일 날 새벽에 다시 나가기 위해 꽃마을로 들어와 병실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간호사로부터 이 환자가 임종단계에 들어간 것 같다고 알려왔습니다.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임종 2단계에까지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상태대로라면 앞으로 길어야 3시간 안에 임종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급히 집으로 전화를 넣었습니다.
“여보세요? 여기 꽃마을인데요… 00환자 부인되시죠?”
“네.”
“지금 남편께서 임종을 시작하셨는데요. 앞으로 길어야 몇 시간 정도니까 지금 빨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임종을 지켜보셔야 하잖아요?”
“안 돼요. 못 가요!”
“예? 지금 남편께서 임종하고 계신다니까요?”
“아무튼 오늘은 못 가니까 제 남편보고 하루만 더 버텨달라고 전해주세요.”
“임종을 지켜보시고 안 보시고는 자유지만 아무튼 빨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연락 드릴게요.”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개중에는 사정이 있어서 임종은 못 지켜도 좋으니까 죽으면 열락하라는 사람도 있으니 그 중에 한 사람이려니 생각했었습니다. 그렇다고 죽어가는 사람보고 하루 더 버텨달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생각할수록 어이도 없고 기가 막히긴 했지만 그래도 오려니 생각하고 환자의 임종을 돕고 있었습니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다시 전화를 넣어 보았습니다. 어디 쯤 오고 있는지…. 그런데 집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니 아직 출발도 안 하셨어요? 지금 막 임종하셨어요.”
“아휴……! 그 사람 왜 그래(엉엉 흐느껴 울었습니다) 오늘 하루만 더 버텨주지…. 장례비라도 벌 시간을 줘야 장례를 치르지. 도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흑흑흑….”
“아니 여기 오실 형편이 안 되시나요?”
“예. 그래요. 제가 골프장 캐디를 하면서 돈을 버는데 캐디는 주일날이 대목이에요. 내일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나가서 일을 해야 장례비를 마련하거든요. 그래서 하루만 더 버티라고 한 건데…. 사실 거기까지 내려 갈 돈도 없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흑흑흑…”
기가 막히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참으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앰뷸런스 값과 장례비 일부를 시신과 함께 앰뷸런스에 실어 보내기로 했습니다. 오늘 어쩐지 장사가 잘 된다 싶더니만 이렇게 쓰이려고 그랬나 보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날 벌은 60만 원을 몽땅 보냈는데 아마도 장례를 잘 치렀으리라 봅니다.
그 후 연락은 안 되었지만 뭐든지 임자는 따로 있다, 하는 말을 실감하는 날이었습니다.
호스피스 교육안내
호스피스 교육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론적인 것보다는 실전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기술과 방법들을 배웁니다.
1. 심리교육
(1) 자신은 물론 다름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고 읽어낼 수 있는 기술을 배웁니다.
(2) 말기 암 환자들의 성격에 따른 죽음의 준비과정과 행동양식을 배웁니다.
(3) 대화의 기술과 방법들, 실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훈련합니다.
* 내가 주로 쓰는 말들은 무엇이고 표현 방법은 무엇인지?
* 말이 상대방에 미치는 영향은?
* 효과적인 의사소통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2. 호스피스 교육
(1) 호스피스가 무엇인지? 암이 무엇인지?
(2) 암에 걸리는 원인과 대체방법들은 무엇인지?
(예: 암 예방 음식은? 기타 대체방법은?)
(3) 암 투병과 관련된 잘못된 정보들과 올바른 방법들은 무엇인지?
(4) 죽음을 맞기 위한 육체적인 준비과정은 어떤 것이 있는지?
(최소한 한두 달 전부터 육체적 준비과정을 시작한다는데?)
(5) 임종은 언제 시작되며 어떤 단계를 거치는지?
(6) 기공(기공)에 대해 공부하며 암 환자를 다룰 때 소진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기 기 를 주고 받는 방법 등)
(7) 환자와 가족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접근방법과 기술들
(발 맛사지, 아로마테라피, 수지요법 등)
(8) 환자를 간호하는 방법과 요령들에 대하여
(9) 환자와 대면했을 때를 가정한 다양한 실전 연습
(10) 극한상황에서의 안락사와 자연사 및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올바른 해석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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