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저녁놀
1
골수 공여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 아이를 서울로 옮겨왔다.
지체할 까닭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인 골수 이식의 가능성이 사라진 이후 떠났던 병원이고, 그 가능성이 부활해 돌아온 셈이었다.
그게 이틀 전이었고, 민 과장과의 첫 면담인 셈이었다.
찻물 넉넉히 끓여놨으니 천천히 이야기해봅시다. 그렇게 말문을 연 민 과장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녹차를 음미했다.
“의사 노릇 이십 년에 이런저런 일을 겪어왔습니다. 하지만 다움이 퇴원하던 날만큼 가슴이 아픈 적도 흔치 않았어요. 다움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몇 번이나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는데,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더군요.”
민 과장은 퇴원 이후에도 아이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덧붙였다.
“선생님이 특별한 보호자였습니다. 나뿐 아니라 소아병동 모든 의료진에게 말입니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은 흔히 목격하게 되죠. 그러나 선생님처럼 헌신적으로 아이를 간병하는 아버지는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같은 처지라면 선생님처럼 할 수 있을까.
아니,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이를 포기할 상황이다?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특히 시를 쓰는 분이니 여느 사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짐작합니다.”
시를 쓴다는 이유로 동일한 고통을 확대 과장하여 받아들이리라는 단정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녹차를 냉수처럼 마시며 민 과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의 현실상 외국 기관에 의뢰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겠죠.
동일한 샘플을 찾는다 해도 공여를 받기까지는 난관이 산재해 있습니다. 하여간 일본의 골수협회에 다움이의 샘플을 보냈습니다. 미국에도 보냈구요. 특히 일본에 신경을 썼습니다. 일본에는 유학 시절 친분을 맺은 의사들이 제법 있어요. 그들에게 직접 나서줄 것을 부탁했죠.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이만큼 했으니 됐어, 마음의 부담을 이젠 덜어버리자구, 솔직히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기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조직적합성항원은 여섯 항목으로 구분되는데, 모든 항목에서 아이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샘플을 찾아냈던 것이다. 21세의 미도리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 미도리는 외국인에게 골수를 공여한다는 사실에 망설였으니 민 과장의 친구들이 설득에 나서 동의를 얻어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이쪽이 문제였습니다. 선생님한테 달리 연락할 길이 없었으니까요.
연락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때 마침 다움이 어머니가 날 찾아오셨더군요.”
지나간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까마득한 높이의 벼랑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민 과장의 말대로 기적이었고, 한 발짝을 아차 헛디뎠으면 기적은 일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리라. 아이의 샘플을 외국까지 보낸 민 과장의 열의, 공여자를 찾아낸 것, 아내의 출현, 여진희와의 통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민 과장에게 거듭 감사를 표한 후 물었다. 이틀 동안 끊임없이 그의 내부를 휘저으며 설레임과 두려움에 빠뜨렸던 의문이었다.
“아이의 상태가 몹시 좋지 못합니다. 이식을 받으려면 먼저 암세포를 관해시켜야 할 텐데, 항암 치료를 제대로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악성 백혈구의 구치가 높은 건 사실이라고 시인한 후, 민 과장은 뜻밖의 물음을 던졌다.
“그 동안 어디서 지내셨습니까?”
“산에 있었습니다.”
“물 좋고 공기 맑아서 그런가, 다움이의 기본 체력이 상상 이상으로 좋아져 있어요.
육체적 한계에 도달해 있으면, 이식을 받을 수 없을 지경으로 쇠약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전혀 아닙니다.”
산에 있는 동안 약초고 뱀이고 닥치는 대로 먹인 것이 효과를 나타낸 것일까. 그렇다면 반갑고 고마운 노릇이었다.
“중요한 건 환자의 투병 의지입니다. 선생님이 곁에 있는 한, 다움이가 반드시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민 과장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이의 입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원주의 병원에서는 일종의 자폐 증상이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아이는 진작에 투병의지를 스스로 꺾은 셈이었고, 입을 열지 않는 이상 투병 의지는 되살아나지 않을 거였다.
“자폐 증상요? 천만에요.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겁니다. 암세포의 침윤으로 성대 부위가 마비되어 있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내일이나 모래쯤 아빠, 하고 소리칠 테니까요.”
항암제로 악성 백혈구의 수치를 떨어뜨리면 자연스럽게 마비된 성대가 풀릴 거라는 의미였고, 따라서 투병 의지와는 무관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물었다.
“이식만 받으면 완치가 가능한 완치가 가능한 거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식 프로그램이 진행될 겁니다. 이식 전단계 처치가 우선 중요한 관건이고, 그 다음이 생착의 성공이고, 거부반응 여부가 마지막 문제입니다. 이 모든 단계를 무사히 극복해야 완치입니다.”
적어도 담당 의사로서 민 과장의 대답은 적절했다. 그러나 보호자가 당장 듣고 싶어하는 대답은 아니었고, 그의 물음을 교묘히 벗어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과장님께서는 선공 가능성을 확률로 말씀해주시곤 했습니다.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의지가 된 게 사실입니다.”
“의학적으로 생존율은 치료 후 사 년 정도 재발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 년을 넘어서면 재발 가능성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완치라고 보는 거죠. 급성 임파구성 백혈병의 임상 사례로 살펴보건대, 골수 이식 후 생존율이 팔십 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아, 80퍼센트.
그는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20퍼센트에 불과하대도, 아니 고작 10퍼센트라도 그 확률에 모든 것을 걸 각오였다. 그런데 80퍼센트라니?
“곧 이식 준비에 들어갈 겁니다. 이식 프로그램에 따라 치료팀이 구성될 것이고, 다움이는 체계적인 치료를 받게 됩니다. 치료팀 주치의는 내가 맡기로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과장이 직접 나설 일은 아니었지만 자청했습니다.”
“재발, 재발을 거듭했기에 선생님의 심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날 믿어보십시오. 믿고 함께 싸우는 겁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아니, 틀림없이 완치가 되어 웃으면서 병원을 떠날 겁니다. 그때 나 역시 다움이의 인사를 떳떳하게 받을 수 있을 테구요.”
2
아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을 깨면서부터니까 꼬박 두 시간째입니다. 아빠는 어디로 갔을 까요. 엄마가 있다고 아빠 맘대로 돌아다녀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꾸만 화가 납니다. 그렇다고 엄마한테 화가 난 것 표시하고 싶진 않아요.
엄마는 매일매일 오고 있습니다. 프랑스하고 그림은 어떡하고 저럴까요. 프랑스하고 그림이 며칠 새로 날아가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엄마는 엄마한테 중요한 곳으로 빨리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겁니다.
엄마가 옆에 있으면 답답해요. 내 몸을 한 번 접고 두 번 접어서 통속에 집어넣은 것 같아요.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겠죠. 아까부터 오 분에 한 번씩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렇다고 굉장히 바쁜 일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아요. 엄마의 습관이겠죠. 병원에서만 생기는 습관 말예요.
엄마는 병원이랑 도대체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병실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엄마가 병원에 오는 걸 두고 뭐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제발 화장은 약간만 했으면 좋겠어요. 옷도 대충대충 입고, 뾰족 구두도 신지 않고 왔으면 해요.
엄마가 냉장고에서 파인애플 통조림을 꺼내 들고 묻습니다.
“먹을래?”
나는 슬쩍 손을 들어 흔듭니다.
“잣죽 줄까?”
싫다는 표시를 고갯짓으로 합니다.
“그럼 우유라도 마시지 그러니?”
이번에는 가만히 엄마를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엄마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고 있어요. 이크, 화가 난 겁니다. 한 대 얻어맞을지도 모르죠. 옛날이라면 말예요. 아빠는 나한테 큰소리도 치지 않았지만 엄마는 걸핏하면 회초리를 들곤 했죠.
나는 슬그머니 창 밖으로 고래를 돌렸고, 엄마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통수에 쏟아집니다.
“어떻게 된 애가 꼭 지 아빠가 줘야 먹으려 드니?”
그 이유를 정말 몰라요? 그렇게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하지만 난 계속해서 창 밖을 쳐다봅니다.
“이 엄마가 그렇게도 싫으니?”
내 대답을 바라면서 물은 건 아닐 거예요. 내가 말할 수 있게 된 사실도 엄마는 모르고 있으니까요. 하긴 엄마는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투성이겠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 목구멍을 막고 있던 커다란 병뚜껑이 어디론가 없어진 기분이었어요. 아, 아… 나는 작은 소리를 내봤어요. 그랬더니 아,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겠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빠를 기다리고 있어요. 활짝 웃는 아빠의 얼굴을 상상하면서요.
나는 벌써부터 결심을 했답니다. 말을 다시 하게 되면 제 일 먼저 아빠, 하고 부르기로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얼른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봅니다. 실망, 실망, 대실망입니다. 코털 아저씨입니다.
두 번째 코털 아저씨를 만나는 겁니다. 처음 본 건 원주에서 서울로 온 그제였죠. 엄마와 함께 문병을 왔어요. 빵떡 모자에 코털을 입술에 닿을락 말락 기르고 있었고, 난 당장 별명을 지어주었지요.
엄마가 코털 아저씨한테로 잽싸게 갑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다음 엄마는 코털 아저씨의 팔을 잡고 내 쪽으로 다가옵니다. 코털 아저씨를 볼 때마다 걱정입니다. 만약 코털 아저씨가 코를 팽 풀면 코털이, 콧물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겠고, 그러면 양치질을 하듯이 칫솔로 닦아낼 수도 없을 텐데…
“잘 지냈니, 다움아?”
코털 아저씨가 말할 때는 신기하게도 코털이 덩달아 움직입니다. 아직까지 코털 아저씨의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코털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일까요. 엄마랑 어떤 사이일까요?
아빠한테 물어볼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만약 코털 아저씨와 엄마가 무척 친한 사이라면 아빠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테니까요.
아빠는 아직도 엄마를 사랑하고 있나봐요. 엄마한테 절대로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아요. 문제는 엄만데요,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빠를 쳐다보는 눈빛이 깨진 유리처럼 뾰족합니다. 목소리도 쌀쌀맞기만 하구요.
엄마는 옛날이랑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 엄마는 꼬마공룡 둘리처럼
빙하 속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이를 먹지도 않고, 생각이 자라지도 않고, 아빠에 대한 마음도 바뀌지 않은 걸까요?
엄마가 핸드백을 찾아들며 말합니다.
“엄마가 급한 일이 있단다. 다움아, 혼자 있을 수 있겠지?”
웃기는 질문입니다. 이미 핸드백을 들고 있으면서 내 생각은 왜 묻는 걸까요. 내가 안된다고 해도 결국 가버릴 거면서요.
“조금만 있어. 니 아빠가 금방 올 거다.”
엄마가 시트를 목까지 올려 덮어주고는 내 뺨에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는 코털 아저씨의 팔짱을 끼고 병실을 나갑니다.
손으로 엄마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만져봅니다. 내 가슴에 꼬마 전구 하나가 켜진 듯한 기분입니다. 왜일까요, 손에 묻어난 빨간 립스틱 때문일까요? 아, 모르겠어요.
난 얼른 꼬마 전구를 꺼버립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코털 아저씨의 정체에 대해서요. 혹시 엄마는 코털 아저씨랑 결혼을 한 걸까요? 설마, 설마… 코털 아저씨는 엄마보다 열 살, 아니 스무 살도 더 어른일 거예요. 그렇게 나이 많은사람과 결혼했다면, 엄마는 분명 머리가 이상하게 된 게 틀림없어요.
내 병이 재발했고, 그래서 난 다시 치료를 받아야 한 대요. 옛날보다 훨씬 힘든 치료가 될 거래요. 아빠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눈에서는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줄줄줄 눈물이 새어나왔습니다.
지긋지긋한 백혈병.
원주의 병원에서부터 재발한 거라고 생각했지요. 서울로 돌아와 소아병동에 입원하면서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았어요. 끔찍한 치료도 어느 정도 각오했구요. 그런데도 난 울고 있답니다. 바보, 멍청이처럼요.
“다움이 마음 다 안다. 아빠가 모르면 누가 알겠니. 실컷 울어도 돼.”
아빠는 계속해서 손등으로 내 눈물을 닦아내고 있어요. 난 고개를 돌려 아예 베개에 묻어버립니다.
모든 게 다 싫습니다. 아빠도, 하나님도, 내 자신도요.
모두들 왜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걸까요. 나는요,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만 살고 싶어요. 웃고 떠들고 뜀박질하는 친구들을 쳐다보며 한숨이나 푹푹 쉬기는 싫다구요.
왜들 나를 달달 볶고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일까요. 아빠는 뭐하러 나를 다시 병원에 데려왔을까요. 하나님은 왜 나를 고쳐주지 않는 걸까요. 나는 왜 많고 많은 병 중에서 하필이면 백혈병에 걸린 거고, 왜 팍 죽어버리지도 못하고 맨날 백혈병한테 질질 끌려다니는 거죠?
한참 동안 아빠는 내 어깨를 토닥였고, 난 울다가 지쳐버렸어요. 우는 것도 분명 힘든 일인가봐요.
아빠가 날 돌아눕게 하고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 가지 소원이, 또 다른 사람은 한 가지 소원밖에 없다고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동시에 하나님한테 기도를 했어. 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소원을 들어주실까?
열 가지 소원을 다 들어주시려면 하나님도 굉장히 피곤하실 거야. 그렇지만 한 가지 소원이라면 문제가 다르겠지. 아빠에게는 소원이 하나밖에 없다. 소원을 이뤄주세요, 하고 하나님한테 기도를 했단다. 이 소원을 안 들어주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떼를 썼지.
그랬더니 하나님이 꼭 들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했다. 무슨 소원이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궁금해요. 나는 생쥐가 딸꾹질하는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다움이가 빨리 커서 은미한테 장가가게 해달라는 거.”
“아빠, 그런 엉터리 소원이 어딨어요?”
나는 어쩔 수 없이 웃고 맙니다. 누군가 내 겨드랑이를 간지럼 태우고 있는 기분이거든요. 아빠, 은미랑 결혼하려면 십 년도 넘게 기다려야 할 거예요. 속으로 말하고 나서 생각해봅니다.
그러니까 아빠의 소원은, 내가 건강해지는 겁니다. 건강해지기 위해선 백혈병과 싸워 이기라는 뜻이겠구요. 싸워 이기려면 아무리 아파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죠.
“하지만 아빠! 치료받고 치료받고 또 치료받았지만, 자꾸만 재발이잖아요?”
“다움이의 병은 나쁜 나무와 비슷하다. 옛날 치료는 나무를 베어낸 거야. 그런데 나무가 죽지 않고 자꾸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냈지. 의사 선생님들은 뿌리째 뽑아내기로 했단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 치료만 끝나면 재발하는 일이 없다. 다시는, 다시는…”
아빠는 몇 번이나 끝말을 되풀이했어요. 그게 아빠의 마음인 줄 알아요. 하지만 내 눈에선 또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머지않아 다움이가 건강해질 테고, 다움이랑 교회에도 나갈 수 있겠구나… 생각만 해도 힘이 저절로 생긴다. 그런데 다움이는 아빠와 생각이 다른가보지?”
아뇨, 다움이도 살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사락골에서부터 그랬고, 원주 병원에서 깨어날 대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하지만 무서워요.
옛날 치료와 이번 치료가 어떻게 다른지 아빠는 한참 동안 설명해줍니다. 지난번 퇴원한 것은 병이 나아서가 아니었대요. 나와 똑같은 골수를 몸에 넣어줘야만 살 수 있는데 골수를 찾지 못했던 거라나요.
“병원에서도 아빠도, 다움이의 병을 포기했단다. 치료한 방법이 없었지. 사락골에 간 것도 바로 그 이유였구.”
백혈병은 까딱하면 날 죽일 수 있는 무서운 병이니까, 나는 아마 사락골에 계속 있었다면 죽고 말았을 거예요. 그랬다면 아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 머릿속에는 가시고기 한 마리가 둥둥 떠다녔어요. 먹지도 잠자지도 않고 새끼를 돌보는 불쌍한 아빠 가시고기 말예요.
“다움이와 똑같은 골수를 찾은 거야, 대단히 어렵게. 아빠도 다움이가 힘든 건 더 이상 보기 싫구나. 하지만 진짜 완치될 수 있는 기회를 힘들다고 그냥 보내버리면 될까?
다움이가 어른이 되고 결혼도 하고 아빠도 되는 걸, 이 아빠는 정말 보고 싶구나. 그런데 다움이가 이렇게 힘없이 울기만 하면 되겠니?”
내가 고개를 젓자 아빠는 둘째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톡 두드립니다.
“다움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그게 제일 중요해. 난 참아낼 수 있어, 병한테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꼭 건강해지겠어… 그런 생각만 하면 되는 거란다. 아빠는 다움이가 꼭 해낼 거라고 믿어.”
아빠는 날 너무 믿어서 탈입니다. 나는요, 겨우 열 살짜리 꼬맹이예요. 하지만 아빠의 말대로 좋은 생각만 해야 된다는 걸 알아요. 꼭요. 그래야 아빠를 불쌍한 아빠 가시고기로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아빠는 주머니에서 무엇인가 꺼냅니다. 내가 선물한, 아빠의 모습을 조각한 거예요.
아빠는 그걸 내 손에 꼬옥 쥐어줍니다.
“아빠도 그 동안 많이 힘들었단다. 그때마다 이 조각을 보면서 생각했지. 힘내자, 걱정하지 말자, 다 잘될 거야, 하고. 이젠 다움이 차례야. 힘들 때마다 조각을 보면서 생각해. 아빠처럼. 그러면 힘이 저절로 솟는단다. 그리고 아빠가 곁에 있을 거다. 아빠가 꼼짝 않고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3
산 하나 넘어서자 깊은 강이었고, 허우적대며 강을 건너자 깎아지른 절벽이 턱 버티고 있었다. 날은 저물고 돌아갈 길은 끊겼으며, 육신은 곤고했다.
정녕 그의 심정이 그러했다. 아이의 이식 비용을 생각하노라면 깎아지른 절벽을 망연히 올려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살점이 뜯기고 무릎이 깨지고, 손톱이 뽑혀 피투성이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기필코 기어올라야 할 절벽이었다.
거기가 끝이었다. 절망과 고통과 혼돈과 안타까움의 종착지였다. 올라서기만 하면 거기 곤고한 육신이 안식할 만한 곳을 만나리라. 지나온 길 굽어보며 수고했노라고 미소지을 수 있을 터였다.
2천만 원. 이식 수술 예치금으로 선납해야 할 액수였다.
그리고 별도의 2천만 원. 이식 전에 받아야 할 각종 치료와 이식, 생착 및 회복 단계까지를 어림잡은 액수였다. 그 밖에 공여자가 외국인이므로 항공편과 체재비 등의 비용을 예상해야 할 것이었다.
아이의 완치를 생각하면 참으로 하찮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하루치의 치료비조차 감당치 못할 액수였다.
돈이 없다는 건 진정 불편한 일이지 불행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돈이 없다고 기죽을 까닭은 없노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과 유리된 몽상가의 푸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이의 투병이 시작되면서 그는 실감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는 없겠지만 얼마든지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능력은 갖고 있었다.
그는 아침부터 거리를 쏘다녔다. 친구를 만났고, 출판사를 전전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사정했다. 자신의 몸뚱이에 바겐세일 딱지라도 붙여놓은 기분으로 출판사를 기웃댔다.
그렇게 하루하루 덧없이 흘러갔으며, 어스름이 드리울 무력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참담했다.
명인출판사 홍인수 사장은 약속보다 한 시간 늦게 나타났다.
어제 만난 이국성은 말했다. 차라리 취직을 해라. 우리 매형 출판사 편집장 자리가 빈 모양이더라. 내가 잘 이야기해놓으마. 이국성이 미리 연락을 취해놓았을 터지만 홍 사장은 약속 따위는 아예 잊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쉬운 쪽은 그였으므로 먼저 입을 열었다.
“편집장을 찾는다고 국성이한테 들었습니다.”
“처남이 전화를 했더군요. 정말 우리와 함께 일해볼 의향이 있는 거죠?”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난 말이요, 정 선생이 어째서 우리 쪽에 몸은 담으려 하는지 의문이오. 경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유명 출판사 쪽으로 가야 옳은 거 아닌가?”
“어느 곳이나 장단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제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곳, 발전 가능성이 무한한 명인출판사를 택하고 싶습니다.”
얼굴에 다족류의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느낌이었다. 예전이라면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심쩍은 눈초리의 홍 사장에게 확신에 찬 말을 거듭했다.
“그럼 잘해봅시다, 우리.”
홍 사장이 손을 내밀었고, 그는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받았다. 그러나 결정짓기엔 성급했으므로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월급에 대해 드릴 말씀이…”
“지난번 편집장이 백이십을 받았소. 정 선생 능력을 믿고 백오십으로 책정하리다.”
2백만 원을 제시한 출판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홍 사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현재 우리 사정이 녹록치 않으니 당분간 그리했으면 좋겠소만, 정 선생의 생각이 다르다면 참작해볼 수는 있소이다.”
“과분하신 처사입니다. 다만 어려운 부탁을 드릴 게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침묵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달리 홍 사장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아이의 상황을 설명한 후 덧붙였다.
“저의 능력과 몸을 사장님께 저당잡히고 싶습니다. 기획, 편집, 영업까지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신 삼년치 월급을 일시불로 주셨으면 합니다.”
홍 사장은 자다가 뺨맞은 낯을 하고 있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정 선생 사정은 알겠소. 그러나 나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제의로군. 아니, 다른 어느 곳도 마찬가지일 거요. 목돈을 마련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의 일이란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거 아니겠소.”
반드시 무리한 요구라 단정할 수는 없었다. 출판계가 호황일 적에는 별도의 스카우트비로 그만한 약수를 제시하곤 했다.
나 역시 목돈으로 받고 싶지는 않다. 월급 없이 3년을 지낼 생각을 하면 암담하다.
하지만 아이의 치료비를 할부로 지불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각서라도 쓰라면 쓰겠다. 나를 믿어달라. 반드시 출판사를 일으켜 세우겠다.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해 늘어놓았다. 홍 사장에게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메아리였을까. 종내 고개를 흔든 홍 사장이었다.
일시불 조건이 수락되지 않는다면 취직 자체가 무의미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자신의 무능을 재삼 확인한 셈이었으며, 희망의 한 조각이 또다시 뜯겨나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홍 사장이 말했다.
“정 선생, 취직보다는 지난번 이야기했던 시집에 신경쓰는 편이 낫지 않겠소?”
홍 사장은 예의 그 시집을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전략적으로 스무 편쯤의 간질간질한 시를 써서 전면에 배치하고, 꽃 한 송이 얹어놓은 표지의 시집.
그는 엉거주춤 다시 앉으며 말했다.
“시를 쓸 수는 있습니다만 과연 돈이 될지 의문입니다.”
“정 선생이 얼마나 감칠맛나게 쓰느냐, 우리 쪽에서 어떻게 기술적으로 포장하느냐에 달렸소. 일단은 정 선생이 어렵지 않게, 쉽게 쉽게 읽힐 수 있는 시를 쓰는 것이 중요하오. 일테면…”
일테면 감상적이고 소녀 취향에 합당한 시를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나 홍 사장은 전혀 뜻밖의 제의를 해왔다.
“시한부 삶의 아들,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애틋한 부정… 정 선생의 심정을 곧바로 시로 형상화하는 거요. 수기를 쓰듯 말이오. 이거 감이 오는데? 왠지 대박이 터질 느낌이오.”
그까짓 간질간질한 시 몇 편 정도는 쓸 수 있었다.
정호연이 돈을 위해 세상의 발가락을 핥기로 작정을 한 거야. 결국 그럴 거면서 고고한 척은 혼자 다 했군. 그래, 마음껏 비난하라. 몸을 팔 수 있다면 영혼 역시 그리한다고 뭐 대수랴. 그러나 그 속에 아이를 끼워넣으라는 건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소파 깊숙이 허리를 묻었다. 마음속에선 분노가 들끓었지만, 끝까지 지켜보자는 오기 또한 발동했다.
“정 선생 입장에선 선뜻 내키지 않겠지만, 진정한 감동이란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함에 기초하는 것 아니겠소? 굳이 시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도 아닐 테구. 내 말대로 합시다. 출판에 뛰어든 지 십수년 말에 이런 확실한 감은 처음이오. 날 믿어봐요.”
홍 사장은 침을 튀어가며 열을 올렸다. 어쩌면 분주히 머리를 굴려 광고의 문구까지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편집자로서 원고를 대하는 순간, 분명한 카피를 끄집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두고 출판의 가부를 고민했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시종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홍 사장의 물음에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우선 아들을 살리고 봐야 할 거 아니오?”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모욕이든 분노든 오기든, 그 모두 감정의 사치였고 한가한 넋두리였다. 현실은 분명하고 엄격했다. 아이를 살리는 일이었다.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목숨마저 내놓으리라 줄곧 다짐해오지 않았던가.
“선인세를 넉넉히 내리다.”
“얼마나…?”
“오백까지는 마련해보겠소.”
그가 고개를 돌리자 홍 사장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이어졌다.
“정 선생도 출판계 사정이야 빠꼼할 테지만 시집에 선인세 오백이면 굉장한 액수 아니겠소? 요즘엔 세 권짜리 소설도 그만한 선인세 받기는 힘들지. 시집이야 오죽하겠소.
자비로라도 출판하겠다는 원고들이 지금도 캐비닛 가득 쌓여 있소.”
그는 인세를 포기하고 일시불로 받는 매절에 대해 물었다. 필자로선 가능한 피해야 할 선택이었다.
홍 사장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오백에 오백을 더 내겠소. 그 이상의 모험은 절대 무리라는 사실은 정 선생이 더 잘 알 거요.”
1천만 원과 4천만 원의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산모퉁이를 돌아 바라다보이는 외딴집의 가물거리는 불빛까지의 거리, 혹은 지구에서 태양계의 마지막 혹성까지의 거리…
조만간 답을 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일어섰다.
4
난 잘하고 있답니다.
어제 골수 검사를 받을 때도 그랬고, 오늘 히크만 도관도 잘 참아냈죠.
히크만 도관은 겁이 났어요. 골수 주사야 수없이 맞아봤지만 히크만 도관은 처음이었거든요. 오른쪽 가슴 위에 구멍을 뻥 뚫는다고 생각해봐요. 겁을 내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뻥 뚫린 구멍을 통해 내 몸 깊숙이 있는 큰 핏줄에 고무 대롱을 연결하는 것이 히크만 도관이랍니다. 고무 대롱은 퇴원할 때까지 빨랫줄처럼 내 가슴에 매달려 있을 거예요. 이제부터는 고무 대롱을 통해 약들이 내 몸으로 흘러들어 가요. 지긋지긋한 정맥주사는 더 이상 맞을 필요가 없대요.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일본 누나의 골수가 이 대롱을 통해 들어가 날 살리게 된다는 거지요.
난 잘 찾아냈고, 내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너무너무 힘들어요. 고무 대롱이 박힌 가슴 위로 펄펄 끓는 물을 계속해서 부어대는 것 같아요. 자꾸만 구역질이 나고, 머릿속 가득 개구리들이 들어 있는 것처럼 시끌벅적 골치가 아파요. 오늘 아침부터는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어요. 자고 일어나 보니 베개가 새까맣게 변해 있었죠.
내 손에는 아빠 모습을 새긴 조각이 들려 있습니다.
힘들고 아프고 속이 상하고 울음이 터져나오려 할 적마다 조각을 들여다봅니다. 그래요, 난 지금 내 자신을 마구마구 응원하고 싶은 거예요. 나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가 있잖아, 하면서요.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내곁에 꼼짝 않고 있겠다던 아빠는 요즘 걸핏하면 나를 혼자 놔둔답니다. 엄마가 대신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혼자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엄마는 창가에 서서 등을 보인 채 코털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지 소곤소곤 쑥덕쑥덕, 끝날 줄을 몰라요. 상관할 것 없잖아요. 그런데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내 귀는 자꾸만 엄마 쪽으로 달려가려고 해요.
이따금씩 엄마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생긋 눈웃음을 짓습니다. 엄마는 웃고 싶은가봐요. 마음대로 하라죠. 엄마는 이제 나랑은 땡땡땡, 완전히 끝났으니까요.
조금 전 드디어 코털 아저씨의 정체에 대해 물어봤답니다. 나로선 굉장히 망설이다 물은 건데 엄마는 너무나 간단히 대답했어요.
“아저씨랑 결혼했어.”
“아빠는요?”
“니 아빠가 말해주지 않았나보구나, 엄마는 니 아빠랑 오래전에 헤어졌단다.”
“왜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어요.
“아빠는요…”
엄마를 사랑하고 있어요, 라는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자신이 바보 천치가 되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아뇨, 너무 슬픈 말이라서, 나를 위해서나 아빠를 위해서나 입다물고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겨우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빠는 엄마를 미워하지 않아요.”
“엄마도 니 아빠를 미워하지 않는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생각이 맞지 않아. 그래서 헤어진 거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죠.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사람마다 서로의 생각이 맞지 않는 건 당연하잖아요. 나도 그래요. 성호와 내 생각은 서로 달랐고, 은미랑도 그렇고, 하다못해 아빠와도 다를 때가 많은 걸요. 생각이 맞지 않아서 헤어져야 한다면 사람은 아무하고도 친해질 수 없을 거예요.
“아저씨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프랑스에서도 유명한 화가란다.”
흥, 좋겠군요. 난 더 이상 엄마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어요. 엄마는 내 속도 모르고 계속 말했죠.
“아저씨가 엄마를 많이 도와주고 있지.”
엄마는 코털 아저씨가 유명한 화가이기 때문에 결혼한 건지도 몰라요. 아빠와 생각이 달라서 헤어졌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구요.
아빠랑 헤어졌으면서 뭐하러 나한테 자꾸만 오는 거죠?
난 눈을 똑바로 뜨고 물으려 했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대답할지는 관심없었어요. 아빠와 내가, 엄마와는 다른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을 뿐예요. 그런데 불쑥 코털 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답니다.
엄마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집니다. 코털 아저씨도요.
“그게 뭐길래 아까부터 보고 있는 거니?”
엄마가 허리를 굽혀 조각을 쳐다보았고, 난 재빨리 시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습니다.
“이리 줘봐.”
안돼요, 싫어요. 소리지르고 신경질을 내고 싶었지만 바보처럼 엄마한테 조각을 넘겨주고 맙니다. 난요, 옛날부터 엄마가 무서웠어요. 엄마가 명령하는 건 꼭 해야 되는 걸로 알았어요.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예요.
엄마가 조각을 요리조리 살펴보다 묻습니다.
“어디서 난 거니?”
“내가 만든 거예요.”
“이걸 네가 직접 조각했단 말이야?”
엄마의 입이 딱 벌어집니다.
거짓말예요. 사실은 길에서 주웠어요.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마구 몰아붙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생각도 있습니다.
엄마가 오랫동안 나를, 그리고 아빠를 무시해왔다는 생각이죠.
난 결국 엄마한테 말하고 맙니다.
“그까짓 게 뭐 힘든 일인가요?”
엄마는 고개를 흔들더니 조각을 코털 아저씨한테 건네줍니다. 내 허락도 받지 않구요. 코털 아저씨는 조각과 나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입을 엽니다.
“정말 다움이 솜씨가 맞니?”
한 번 말해줘서 믿지 않는다면 백번 천번 말해도 입만 아플 테죠. 난 잠자코 손을 뻗습니다. 조각을 돌려달라는 뜻이에요.
“조각을 배웠니?”
코털 아저씨가 돌려줄 생각은 하지 않고 다시 물렀고, 난 고개를 젓습니다.
“배우지도 않았다? 아저씨로선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나.”
“나무를 보고 만지고 냄새 맡다보면 그 속에 들어 있는 모양이 느껴져요. 난 그냥 그것 밖으로 꺼내주는 거예요.”
정말 그래요. 아빠를 생각하면 아빠가, 은미를 생각하면 은미가 나무 속에 들어 있어요. 조각칼로 나머지 부분을 베어내면 아빠와 은미가 툭 튀어나오죠. 어려운 일도, 칭찬받을 일도 아니랍니다.
코털 아저씨가 엄마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나무를 보고 그 속의 형상을 읽어낼 수 있다? 사실이라면 놀라운 천재성이군.”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눈은 코털 아저씨를 향해 있습니다.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할 때는 절대로 머리를 쓰다듬는 짓은 하지 않죠. 아빠라면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
코털 아저씨의 물음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림을 배워본 적이 있니?”
“없어요.”
“그럼 배워볼 생각은 있니?”
“아뇨.”
“아저씨가 보기엔 다움이는 엄마를 닮은 것 같다. 대단히 소질이 있어. 아저씨가 도와주고 싶구나.”
나는 코털 아저씨의 손에서 조각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엄마처럼 도와주겠다구요? 난 엄마랑은 달라요.
5
아내는 긴히 할말이 있다며 그를 병원 앞 일식집으로 이끌었다. 박인석이 동행하였다. 일식집 내실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주문한 후 아내가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겠어요. 서로 언성을 높이거나 낯을 붉히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나 역시 그래. 그럴 말한 일도 없을 테구.”
“조만간 프랑스로 돌아가야 해요. 그 전에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어요.”
아내는 박인석에게 눈길을 돌렸다. 박인석은 파이프에 꼼꼼히 담뱃잎을 다져넣고 있었고, 선뜻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아내였다.
“다움이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다움이는 잘해낼 거야.”
그의 말에 아내의 시선이 더디게 돌아왔다.
“당신이 잘해낼 것 같지 않아서 탈이죠.”
“…”
“오후에 원무과에서 당신을 찾았어요. 무슨 일인가 해서 가봤죠. 망신스럽게도 치료비가 밀렸더군요. 생각 같아선 당장 해결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꾹 참았죠. 당신 입장을 생각해서요.”
“망신스러웠다면 미안해. 그리고 꾹 참은 건 썩 잘한 일이야. 정산할 날짜를 깜빡했을 뿐이니까.”
“깜빡했다구요? 좀더 솔직해질 수는 없나요?”
박인석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아이를 서울로 옮기면서 끊어버린 담배였다.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하는 아이였고, 어렵사리 투병을 시작한 아이에게 공연한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당신에 대해 알아볼 만큼은 알아봤어요. 딴맘이 있어 뒷조사를 한 건 아녜요. 다만 아이를 책임질 수 있을까, 그게 궁금했을 뿐예요. 아파트를 날리셨더군요. 어디다 어떻게 날렸는지는 묻지 않겠어요. 하여간 지금은 집도 절도 없는 상태고, 직장도 없고, 가진 건 더더욱 없으면서 아이의 치료비는 어쩔 셈이죠?”
“내가 알아서 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냐.”
“상관할 바 없다? 참 쉽게 말하는군요. 다움이는 내 아이기도 해요. 내 속으로 고생 고생해가며 낳은 아이란 말예요.”
“맞는 말이야.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의 삶이 있잖아?”
그는 박인석을 흘낏 보았다. 박인석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현재의 남편을 옆에 두고 아내가 전 남편과 옛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인석은 어떤 심정일까. 자신이 박인석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박인석처럼 굳세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니, 진작에 떠나고 말았으리라. 어쨌거나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그래요, 나는 내 삶이 있어요. 하지만 아이도 내 삶의 한 부분이에요.”
아내가 긴 한숨을 몰아쉰 뒤 덧붙였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엄마 노릇에 안달이 난 건 아녜요. 그렇지만 저 꼴로 누워 있는 아이를 그냥 둘 수는 없어요. 그리고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다움이는 당신보다 날 더 많이 닮았어요.”
“아이가 누구를 닮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요점만 말해, 빙빙 돌리지 말구.”
“…당신한테는 더 이상 아이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무슨 근거로?”
“이미 말했잖아요. 알고 있겠지만, 예치금을 내지 않으면 병원에선 이식센터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현재 이천만 원을 감당할 수 없는 빈털터리구요. 이대로 있다간 아이는 이식은커녕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할 거고, 당신은 예전처럼 아이를 산골짜기로 끌고 가겠죠.”
“그런 일은 없어, 절대로.”
“장담하지 말아요. 사람이 돈을 속이나요, 돈이 사람을 속이지. 당신이 아이를 위해 애쓴 건 알고 있어요. 그 점에 대해선 충분히 보상할 용의가 있어요. 그렇다고 아이를 놓고 흥정하자는 뜻으로 오해하진 말아요. 다만 현실적인 선택을 하자는 이야기예요.
아이를 위해서나 당신을 위해서나.”
보상? 흥정? 현실적 선택? 그는 소리내어 웃었고, 웃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독히 쓸쓸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에 서서 저무는 서녘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당장은 아이부터 살려놓고 봐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무능한, 미안해요, 당신보다 내가 아이를 책임지는 편이 당연하겠구요.”
“당신 생각처럼 내가 무능한 아버지일 수는 있겠지. 그래, 맞아. 난 늘 부족한 아버지였어. 하지만 아이를 허망하게 죽도록 방치할, 그런 나쁜 아버지는 아냐.”
아내의 목소리가 억눌린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죠?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예요, 뭐예요?”
“포기? 아이를 두고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말아요, 치사하게.”
“… 다움이와 나, 우리에겐 우리의 삶이 있어. 당신에게 당신의 삶이 있듯이 말이야.
난 당신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해. 당신의 미래 역시 그러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당신도 우리를 그런 식으로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힘든 건 사실이야. 하지만 장차도 그럴 거라고 지레 단정짓지 마.”
아내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쏘아보았다. 그는 아내의 시설을 맞받았으며, 부질없는 대화를 서둘러 끝내고 싶었다.
“궁금한 게 있어. 당신이 느닷없이 아이에 대해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나로선.”
“아이를 떠나 있으면서 잠시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어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가위에 눌려 악쓰며 깨어났는지 알기나 해요?”
“당신 마음이 편하자고, 다시는 가위에 눌리지 않으려고 아이를 책임지겠다는 건가?
그럼 나는 어찌되는 상관없다는 뜻인가? 우습군, 몹시.”
아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제발 아이가 당신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하지 마요. 역겨워요.”
“나와는 상관없이 당신은 분명 다움이에게 하나뿐인 엄마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먼 훗날까지도, 난 당신과 다움이가 언제나 서로 아끼고 걱정하는 다정한 사이길 바라왔어. 이 생각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야. 아이가 엄마를 찾는 것처럼 당신이 아이를 그리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엄마로선 당연한 권리겠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두고 싶군. 당신이 나에게서 아이를 데려갈 권리는 없어. 지금이나, 앞으로도 영원히.”
“그 잘난 각서 한 장 갖고 있다고 득의양양한 모양인데, 과연 뜻대로 되어줄지 모르겠네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면 최후의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다시 말해 법으로 해결하겠다는 뜻예요. 당신은 전과가 있는 사람이에요.”
“전과라니?”
“그렇지 않구요. 병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치료를 중단해 아이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으니까요. 게다가 당신은 현재 무능력자니, 법원은 아이의 양육권을 당연히 나한테 되돌려주겠죠.”
아내가 소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다짐을 내보이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내가 떠났음에도 삼인분의 식사는 어김없이 날라져 왔다.
아이의 양육 문제로까지 비약될 일이 아니었다. 설령 아내가 처음부터 작심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해도 진작에 결정난 바였다. 굳이 아내의 자격을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내의 지적대로 치사한 짓거리에 불과하리라.
그러나 양육권 포기각서를 들먹인 아내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각서를 요구한 적이 없을뿐더러 막상 아내 편에서 각서를 보내왔을 때조차, 과연 이따위 종이 쪽지가 무슨 의미일까, 씁쓸히 미소짓고 만 그였다. 그러나 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아내의 말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깊이 꽂혀 있었다.
아내를 미워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헤어질 사이였다면, 채 미움을 익히지 전에 헤어진 점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뒤늦게 아내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턱없이 심란하게 만들었다.
아내 몫의 복지리탕을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을 때, 박인석이 파이프를 재떨이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밥은 그렇고, 술이나 한잔 하겠소?”
“드십시오. 난 식사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 차례 해작거리다 수저를 내려놓고 말았다. 박인석이 자작을 거듭하다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받기만 해요. 정 선생한테 한잔 건네고 싶어서 그렇소.”
박인석이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우는 동안, 그는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다투다 종국에는 술잔을 주고받고 있는 듯한 기묘한 착각에 잠시 빠져들었다. 당치도 않았다.
그렇다고 적개감이나 분노 따위의 감정으로 박인석을 대할 이유도 없었다. 아내를 단념한 그 순간부터 박인석은 그저 익명의 낯선 사내였다. 다만 박인석과 마주칠 때마다 짙은 안개 속을 한량없이 떠돌고 있는 듯한 난감한 느낌이 들곤 했다.
박인석이 아내 몫의 잔을 끌어다 술을 채우고는 말했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나로 인해 정 선생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점을 먼저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소. 이야기를 주욱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집사람보다 정 선생 입장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더이다. 내 나이가 내일 모레면 오십이오. 부끄럽게도 이 나이 먹도록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했소. 따라서 정 선생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을 거요.
그러나 말이요, 다움이가 정 선생에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듯하오.”
달리 대꾸할 말이 없기에 그는 멋쩍게 웃었다. 박인석이 베레모를 슬쩍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정 선생도 겪어봐서 알겠소만, 집사람은 원래 뒤끝이 없는 사람이오. 재판이니 뭐니 했던 것 역시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해본 소리일 거요. 혹시 그럴 결심을 했대도 내가 책임지고 막겠소.”
“다움이 엄마한테 전해주십시오. 단순히 치료비 때문이라면 괜한 염려할 것 없다구요.”
“반드시 치료비 때문일 리야 있겠소. 그 뭐랄까, 잠들었던 모성이 아이를 다시 만나는 순간 깨어났다고나 할까…”
잠들었던 모성? 사실이라면 반가운 노릇이었다. 진심으로. 그 깨어난 모성으로 아이의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머니를 원망하면서도 한편 한없이 그리워했던 유년의 기억. 그는 자신이 어렵사리 통과해온 유년의 상처를 아이에게 고스란히 대물림하고 있는 듯했고,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하여튼 치료비 문제를 몹시 걱정하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오.”
박인석이 그를 빤히 쳐다보다 덧붙였다.
“나 역시 옛날에는 지독한 가난뱅이였소. 지금은 그림으로 그럭저럭 돈푼깨나 손에 쥐고 있소. 오해하진 말길 바라오. 정 선생을 돕고 싶소.”
“고마운 말씀이군요. 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순수한 뜻으로 돕겠다는 것이오. 그리고 집사람의 소생인데 모른 척하기가 힘들군요.”
순간적으로 그는 강렬한 유혹에 휩싸였다.
이 사내의 제의를 순수하게, 또한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존심 대문이라면, 알량한 자존심일랑 개나 먹으라고 던져줘라. 억지를 부릴 필요는 없다. 당장이 문제다. 따라서 빚으로 간주하고 차후에 갚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평생 회한의 가슴을 보듬고 살아가야 하리라. 그리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지켜내야 할 아이였다.
그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아이의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박 화백께서 내 경우라면 남의 도움으로 아이를 살리
고 싶을까요, 과연?”
“집사람은 남이 아니지 않소? 집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주길 바라오. 집사람도 아이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옳지 않겠소?”
“구태여 치료비일 까닭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말고도 엄마노릇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박인석은 낭패한 낯으로 파이프를 집어들어 불을 붙였다. 한숨처럼 길게 담배 연기를 내뱉고는 물었다.
“정 선생 뜻을 충분히 잘 알겠소. 집사람을 설득해보겠소이다. 한데 치료비를 마련할 방도를 찾아낸 거요?”
“일일이 설명해야 합니까?”
“궁금하오. 알아야 집사람을 설득하기도 쉬울 것이구.”
“시집을 출간하기로 했습니다. 좋은 조건이니 치료비는 쉽게 해결될 겁니다.”
결정된 바가 아니었다. 시집 출판으로 치료비 전부를 충당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찾아내지 못한 방법이 반드시 있으리라 믿으며, 한편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은 까닭이었다.
무겁고 답답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어디쯤에서 일어서야 할지를 궁리할 때, 박인석이 입을 열었다.
“다움이가 조각에 놀라운 재능을 지녔더군요. 완치가 되거든 정식으로 재능을 살려줄 방도를 찾아야 할 성싶소이다.”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본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한낱 강요에 불과할 겁니다. 부모의 욕심을 앞세워 아이를 괴롭히고 싶지 않습니다.
“다움이의 재능은 천재성에 가깝소. 그러나 천재성도 개발시켜 주지 않으면 그 상태에서 정지하고, 끝내는 묻혀버리게 마련이죠.”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이유의 대부분이 지나친 욕망에서 비롯된 듯,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자식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기 십상이었다. 설혹 천재성을 발휘한다손, 그것이 강요에 의한 선택이라면 먼 훗날 아이는 결국 후회의 눈초리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될 것이었다.
박인석이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움이의 재능에 욕심이 생기오. 아내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소. 그래서 더더욱 아이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테구.”
아이가 자신을 더 많이 닮았다고 말한 아내의 저의를 비로소 짐작할 만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논리였고, 불순한 의도였다. 아이의 재능이 아니라면 딱히 관심을 기울일 까닭이 없다는 뜻인가. 박인석이야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아내마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참으로 서글픈 노릇이었다.
“완치된다면 나한테 다움이의 장래를 맡겨볼 의향은 없소?”
박인석의 손에 들린 파이프에서 가느다란 실처럼 피어오르는 연기를 쳐다보다 그는 마침내 물었다.
“왜 다움이 엄마와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 않습니까?”
“갖고 싶어도 그럴 처지가 못되오.”
박인석은 앞에 놓은 술잔을 비운 뒤 씁쓸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십여 년 전 이혼을 했소. 그 곧바로 정관수술을 받았다오.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오직 그림에만 전념하겠다는 결단의 표시였다고나 할까. 지금 집사람을 만나고 나서, 나이를 더해가면서 그게 얼마나 무모한 치기였는지 실감하고 있소이다.”
박인석이 재차 아이의 장래로 화제를 돌렸고, 그는 서둘러 자리에게 일어섰다.
6
‘악성 혈액질환에서 사이톡산과 전신 방사선 조사 진처치를 이용한 동종 골수 이식 치료동의서’, ‘악성 혈액질환에서 부썰판과 사이톡산 전처치를 이용한 동종 골수 이식 치료동의서’.
골수 이식에 대한 의학적 배경, 치료 과정, 위험성과 부작용, 주치의 의견, 환자 및 가족의 동의 등이 여러 장에 걸쳐 빼곡이 적혀 있는 두 종류의 동의서였다.
이식에 앞서 본격적인 전 처지 과정의 시작을 의미했다. 전신 방사선 조사와 고용량의 항암제 투여로 악성 세포를 완전히 제거, 새로운 골수 세포가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 이식 거부반응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병행될 것이다.
그는 동의서의 추가적인 위험에 대한 경고를 읽고 또 읽었다.
이식된 골수가 기능을 못할 경우 때로는 치명적인 수 있음.
이식 후 거부반응인 이식편대 숙주질환은 경미한 경우에서 심각한 경우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
신장, 간, 폐, 뇌 등의 장기 기능에 악영향을 줄 수 있음.
정맥폐쇄성 질환의 경우 심각한 상태를 초래할 수 있음.
전신 방사선 치료가 불임을 유발할 수 있음.
보호자로서 치료의 결과와 치료 기간중 발생할 수 있는 여하한 합병증에 대해 주치의와 병원에 법률적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서명을 마쳤다.
내일 오전중으로 아이는 소아병동에서 이식센터로 옮겨 전 처치과정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예치금 2천만 원을 완납해야 할 일이 남았다.
그는 한 시간째 원무과 송 계장의 책상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상전의 선처를 바라는 종놈 꼴로 예치금 연기를 애원했다. 그러나 송 계장은 한 시간의 대부분을 전화를 받거나 자리를 비우거나 동료들과 잡담으로 보내며, 이따금씩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왔다.
“참 답답하시네. 글쎄,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니깐요.”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출발부터 헛딛고 비틀거리고 헉헉대고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결국 홍 사장의 기획 의도에 맞춘 시를 썼다.
시상을 떠올리고 그걸 언어라는 도구로 토해낼 때마다, 발가벗고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모멸감으로 영혼은 진저리를 쳤다. 한 편을 완성키 위해 몇 달 동안 끙끙대며 씨름하던 옛날이었다. 그럼에도 열네 편의 시를 단 며칠 만에 쓴답시고 썼다.
아니, 써갈겼다. 게으름을 부릴 여유도 없었고, 스스로의 비참한 모습을 재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까닭이기도 했다.
홍 사장은 오전중으로 매절 인세 1천만 원을 지급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은행 마감 시간까지 입금되지 않았다. 삼십 분 간격으로 출판사에 전화를 했고, 홍 사장은 번번이 부재중이었다.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송 게장이 그를 향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종놈이 상전의 처사를 두고 뭐랄 수는 없으므로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송 계장은 모임을 알리는 전화를 걸고 있었고, 군대 동기생들의 모임이었고, 그 군대가 바로 해병대였다.
그는 송 계장이 수화기를 내려놓기를 기다렸다 물었다.
“몇 기죠?”
눈치 빠른 송 계장이 재빨리 되물었다.
“선생님도 해병대 출신이신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 계장은 사뭇 긴장된 목소리로 자신의 해병대 기수를 밝힌 뒤 그의 기수를 물었다. 시쳇말로 서울역에서 앞으로 나란히, 하면 포항 오천 앞바다에 가서 빠져 죽을 만큼 까마득한 아래의 송 계장이었다.
“어디에서 근무하셨죠?”
그가 백령도라고 대꾸하였고 송 계장의 입에서 어,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는 백령도 수색대에 있었습니다만…”
그 역시 그랬다. 해병, 그것도 가장 고되다는 수색대 출신이라는 인연에 송 계장은 놀랍고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커피나 한잔 하실래요?”
송 계장이 동의를 구하지 않고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지체 없이 송 계장의 뒤를 좇았다. 로비 자판기 앞에 다다르자 송 계장이 동전을 투입해 커피 두 잔을 뽑았다.
그들은 커피를 나눠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 밖 어스름이 갈리기 시작한 세상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침묵을 밀어낸 쪽은 송 계장이었다.
“선배님인지도 모르고…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천만에요. 선배로서 떳떳한 모습을 보이지 못해 미안할 뿐입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선배님.”
보호자를 주눅들게 만들던 원무과 직원이 졸지에 공손한 후배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해병 수색대 출신이라는 이유가 서로의 아득한 거리를 훌쩍 줄여놓은 셈이었다. 타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들로선 당연한 친밀감의 표시며 감정의 교류였다.
한 기수만 높아도 곧바로 하나님과 동기동창으로 알아 모시는 해병대. 제대 후 수십 년이 지나도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임을 이마의 표적처럼 달고 사는 놀라운 결집력.
해병대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첫 대면에서부터 상하가 명확히 구분되는 기이한 추억의 집단.
그들은 한동안 수색대 이야기에 열중했다. 신물나도록 바다를 노려보며 보낸 백령도에서의 3년. 얻어터지지 않고는 불안해서 도저히 잠들 수 없던 쫄따구의 심정,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받았던 혹독한 IBS훈련, 만고강산 할랑할랑 지냈을수록 자랑거리가 되는 고참 시절, 진촌리 쌍과부집에서 군화에 따라 마시던 말술의 기억…
그러다 문득 현실과 돌아왔고, 그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후배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런 말하기가 더 힘들어. 내일 당장 치료를 시작해야 될 모양이야. 이번 치료가 아이로선 마지막 기회인 셈이지. 송 계장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어. 날 좀 도와줘.”
“제가 단독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내일 계획대로 이식센터에 입원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고마워, 진심으로 당장 예치금 전부를 마련할 수는 없어. 절반쯤은 내일이나 모레까지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원무과 직원으로 선배님을 만나왔습니다만, 내심 참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무과에 있다 보니 별별 사람을 다 만납니다. 몇 차례씩이나 정산 기일을 넘기고도 오히려 당당하게 큰소리 치는 사람, 무조건 봐달라며 울고불고 하소연하는 사람, 우리에게 방법을 마련해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이 부지기수죠… 어쨌든 선배님을 믿고 보증을 서는 겁니다.”
그는 예치금을 마련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솔직히 밝혔다. 그의 이야기를 끝가지 묵묵히 듣고 난 후 송 계장이 물었다.
“아이가 병원에 드나든 지 얼마나 됐죠?”
“이 년이 넘었어.”
“백혈병으로 이 년 넘게 투병했다… 돈을 다발로 싸놓고 사는 부자가 아닌 이상 경제적으로 감당키 어려운 일이죠.”
송 계장이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덧붙여 물었다.
“이식 날짜가 얼마나 남았습니까?”
“치료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삼주 뒤가 될 거라고 하더군.”
“삼주라, 삼주라… 젠장, 예치금도 예치금이지만 앞으로도 더 걱정이군요. 방법은 마련해두셨나요?”
그는 빙그레 웃고 말했다. 즉시로 송 계장이 그의 웃음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저를 원무과 직원이 아니라 후배를 생각하고, 있는 대로만 말씀 해주세요.”
“아직은 없어. 하지만 걱정 마. 이 년을 버텨왔는데 설마 삼주 정도 못 견디겠어?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는 송 계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퇴근해야지. 만나서 반가웠어. 여러 모로 마음써줘서 고맙구.”
이식센터 입원 첫날, 아내를 떠났다.
이식센터 입원을 예치금 완납으로 이해한 탓일까. 아침까지도 출국의 기미를 보이지 않더니 홀연히,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터전인 프랑스로 날아갔다. 놀기에 정신 팔렸던 아이가 밤이 된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허겁지겁 집으로 줄달음을 치듯.
예치금 마련으로 진종일 헤매다 돌아온 그에게 아이가 쪽지를 건넸다. 전화번호와 마음이 변하면 연락하라는 메모였다. 아내는 작별의 인사조차 생략하고픈 모양이었다. 아이 문제로 언성을 높인 이후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던 아내였다.
그는 담담한 심정으로 아내의 떠남을 받아들였다. 아내와 세월이 그를 단련시킨 결과였다. 문제는 아이였다. 아이가 엄마로 인해 또다시 상처받았다며, 그래서 행여 투병 의지가 꺾었다면 그건 큰일이었다.
“엄마가 갑자기 떠나서 많이 섭섭하겠구나?”
“아뇨, 엄마는 원래 그렇잖아요.”
“엄마 없어도 힘낼 수 있겠어?”
“당연하죠. 아빠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아이는 태연하게 대꾸하면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이의 태연함을 마냥 다행으로 여길 수 없었다. 어쨌든 아내는 아이의 엄마였고, 삶의 고단한 순간 눈감고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위로가 되는 것이 어머니의 존재였다.
그는 잠든 아이를 뒤로 하고 병신을 빠져나와 원무과로 향했다.
이식센터에서의 치료가 시작된 지 사흘이 흘러갔다. 내일부터 방사선 치료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예치금을 문제 삼아 치료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그랬다.
결국 송 계장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홍 사장은 차일피일 인세 지급을 미루고 있
었다. 맥놓고 처분만을 기다릴 수 없기에 이곳저곳 기웃거렸지만 결과는 매번 허망했고, 자신의 무능함을 거듭 확인할 뿐이었다.
문득문득 예치금을 끝내 마련하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마음이 변하면 연락하라던 아내의 메모를 떠올리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아이에 대한 사랑을 앞세워 자신이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차라리 아이의 양육을 아내에게 맡기는 편이 옳을지도 몰랐다. 아이를 영영 잃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아내의 의도 자체가 불순하다. 아이의 재능에 따라 어머니의 사랑이 부풀어오르거나 축소될 수는 없었다. 아내는 여전히 어머니로서의 준비가 덜 돼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모정은 잠시일 뿐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터였다. 아이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 있는 냉정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아이가 머나먼 이국 땅에서 기댈 곳 없이 홀로 울게 되리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어금니를 물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설혹 그 지경에 도달한대도 아직은 맞서 싸워야 할 현실이었다.
그는 원무과 주위를 서성이다 마침 문을 밀고 나오는 송 계장을 불러세웠다.
“바쁘지 않다면 우리 차 한잔 할까?”
송 계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왕이면 좋은 데 가서 마시자며 병원 밖으로 그를 이끌었다.
전망 좋은 창가에 앉아 신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약속한 날이 어제인데 아직 돈을 구하지 못했어. 나 때문에 많이 곤란하지?”
“조금은요.”
“받기로 약속한 돈이 자꾸만 미뤄지네. 어쨌든 면목이 없어. 며칠만 시간을 더 줄 수 없을까?”
“할 수 없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선배님은 남한테 절대로 아쉬운 소리 할 사람이 못됩니다. 틀렸나요?”
“이제까지 송 계장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왔잖아.”
“받기로 한 돈이 천만 원이라고 하셨는데, 나머지 천만 원은 어쩔 셈인가요?”
“이리저리 융통해봐야지.”
주문한 커피가 도달하자 송 계장은 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커피를 마셨다.
진종일 추적추적 내린 어제의 비로 하늘은 말갛게 씻겨 있었고, 가을은 부쩍 깊어졌다.
선배님, 불러놓고 머뭇대던 송 계장이 말했다.
“며칠 정도야 그럭저럭 넘어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서둘러 완납하지 않으면 저도 더 이상 도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고액의 치료비가 드는 환자는 저 말고도 예의주시하는 사람이 많아요. 병원도 따지고 보면 장사 아닙니까. 치료비를 건질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결국 치료를 중단할 겁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요? 없는 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나요?”
“…”
“제가 원무과 직원이라서, 선배님 편의를 봐줘 문책이라도 당할까봐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걱정되고 답답해서 그래요. 차라리 저한테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솔직히 물으시든지요.”
송 계장이 깍지를 껴 턱을 올려놓고 그를 오 초쯤 응시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왜 다시 이런 일에 끼어드는지 모르겠어. 송 계장은 혼잣말을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선배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오해 말고 들으세요. 사촌형님 한 분이 있어요. 공작기계 다루는 일을 했는데 그만 손가락이 뭉텅 잘리는 바람에 지금은 상가 경비원으로 겨우겨우 먹고 살아요. 그런데 딸애가 지난해 뇌종양 판정을 받고 우리 병원에 입원했어요. 당장 수술을 받아야겠는데 수술비 마련할 길이 막막한 겁니다. 하루는 형님이 몸뚱이를 팔기로 했다고 말하더군요. 병원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장기 알선 스티커를 보고 연락을 했더니 신장을 사겠다고 했다나요. 사기라고 말렸죠. 한데 이 형님이 도대체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아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니 오죽했겠어요. 도리없이 제가 나섰습니다. 여기저기 병원일 보는 친구들한테 연락을 취했어요. 장기 매매가 음성적으로 이뤄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친구들을 통하면 적어도 사기당할 염려는 없으니까요.”
장황한 이야기 속에 담긴 송 계장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라 몹시 당혹스러웠다.
생면부지의 아이에게 자신의 골수를 나눠주겠다는 일본인 처녀의 결심을, 그는 벅찬 감격으로 받아들여왔다. 자신의 몸의 일부로 타인의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것만큼 숭고한 희생이 있을까. 그러나 돈이 개입되는 순간 숭고한 희생이 아닌, 비도덕적이며 반인류적인 행위가 되고 마는 셈이었다.
비난받아 마땅한 줄 알면서도 그는 차마 외면키 어려웠다. 아이를 구할 수 있다면, 몸뚱이를 내다 파는 것보다 백번 천번 더 심한 짓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물었다.
“그 신장 매매라는 게 얼마나 받을 수 있지?”
“사촌 형님은 삼천을 받았습니다.”
3천만 원. 그리고 홍 사장에게서 받기로 한 1천만 원.
송 계장이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마치 브로커가 된 기분입니다. 선배님과의 인연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치료비 마련할 것이 정히 없다면, 최후의 방법으로 고려해보시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돈벼락을 맞지 않는다면, 은행을 털거나 사기를 치지 않는다면, 현재로선 최후이자 최선의 방법이었다. 단순히 생각하자며 그는 스스로를 격려하고 또 격려했다.
콩팥. 하나를 떼어낸대도 정상적인 삶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창조주의 인간의 몸뚱이에 허락한 유일한 여유분. 그 여유분으로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고민하고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었고, 재빨리 손을 내밀어 붙잡아야 할 기회였다.
7
나는요, 바보가 되어버렸어요.
며칠 전 읽은 동화책 내용을 생각해낼 수 없습니다. 달력을 한참 동안 쳐다봐도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모르겠어요. 정삼각형의 면적 구하는 공식, 방정식 푸는 방법도 새까맣게 잊어버렸구요, 은미, 성호와 성호 엄마, 영재 누나, 전도사님, 사락골 할아버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가물가물해요.
내가 바보가 된 순전히 방사선 탓입니다.
그제와 어제, 그리고 오늘까지 계속해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요. 하루에 두 번씩 모두 여섯 번, 방사선은 내 몸의 나쁜 병균들만 죽인 게 아니라, 내 머릿속 생각 주머니에 뻥 구멍을 뚫어놓은 줄줄줄 생각들을 새어나가게 만든 모양예요.
방사선 치료를 받을래, 골수 주사를 맞을래? 아이들은 하나같이 방사선 치료라고 대답하겠죠.
골수 주사를 맞을 때는 꽁치나 고등어가 된 느낌이에요. 내 몸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커다란 칼로 허리를 두 동강 내는 것 같아요. 아픈 걸로 따지면 방사선 치료는 아무것도 아니죠. 삼십 분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끝나버리니까요.
하지만 나는 방사선 치료가 더 싫어요. 골수 주사를 맞을 때는 아빠가 내 손을 꼭 잡아주지만, 방사선 치료실에선 나 혼자 모두 알아서 해야 되거든요. 아무리 아빠가 날 사랑한대도 거기까진 쫓아올 수 없어요. 방사선 치료실에서 온몸 곳곳이 꽁꽁 묶인 채 가만히 있으면 눈물이 펑펑 쏟아져요. 사람들이 나를 무시무시한 지옥 속으로 밀어넣는 느낌예요.
방사선 치료실에 들어갈 대마다 난 생각한답니다. 내가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하고요. 그리고 삼십 분, 아니 30년도 더 될 것 같은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무서운 생각들만 듭니다. 수천 수만 번,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나중에는 머리가 펑 하고 터져버릴 듯 하지요. 너무 세게 불어버린 풍선처럼요.
주일학교 전도사님은 지옥이 불바다와 같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내 생각으론, 지옥은 바로 방사선 치료실이랑 비슷할 거예요. 온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생각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래요. 골수 주사는 몸을 아프게 하고, 방사선 치료는 마음을 아프게 하죠. 마음이 아픈 게 훨씬 오랫동안 날 못살게 굴어요. 그리고 바보 천치로 만들어놓구요.
의사 선생님한테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걱정 말래요. 치료받고 난 후에 잠깐 동안 생기는 증상이래요. 영원히 바보 천치가 되진 않을 거라니까 안심이 되긴 해요. 어쨌든 지긋지긋한 방사선 치료도 내일로 끝날 테니까요.
아빠의 노트북이 사라진 것을 조금 전에야 눈치챘습니다.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노트북이 보이지 않아요. 이상한 일입니다. 아빠 곁에는 언제나 노트북이 있었거든요. 군인 아저씨가 총을 갖고 있는 것처럼요.
아빠는 매일매일 노트북 앞에서 일을 해요. 깊은 밤 깨어나 보면 그때까지 타닥타닥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답니다.
내가 소아병동에서 이식센터로 옮겨오기 며칠 전이었을 거예요. 그날 엄마는 아빠가 더 이상 병원비를 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빈털터리 아빠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엄마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할 필요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했죠.
“이 엄마가 있잖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건강해지기나 하렴. 그래서 엄마랑 프랑스로 가자꾸나.”
이게 무슨 바퀴벌레가 발라당 뒤집어지는 소린가요?
“이제부터 엄마가 다움이를 돌봐줄 거다.”
“아빠는요?”
“말했잖니, 니 아빠는 빈털터리라구.”
엄마가 얼마나 부자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니 코털 아저씨가 부자겠지요. 하지만 아빠가 빈털터리기 때문에 날 돌봐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엄마는 바보예요.
엄마의 속셈은 뻔해졌어요. 엄마는 아빠한테서 나를 빼앗으려는 거예요. 아빠와 내 생각에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겠죠. 엄마에게는 언제나 엄마 생각만 중요하니까요. 난 분명히 말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죠.
“프랑스에는 가지 않겠어요. 난요, 아빠가 중요해요. 새아빠는 필요없어요.”
엄마도 마찬가지구요. 마지막 말은 꾹 참았죠. 그쯤이면 엄마도 내 생각을 알아차렸
을 거예요.
하여튼 이식센터에 입원한 그날 엄마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일주일이 흘렀어요. 엄마는 곧 다시 오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전화 한통 없는 엄마예요.
많이 섭섭하지는 않아요. 그럴 줄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나저나 아빠는 노트북을 어떻게 했을까요. 노트북이 없으면 돈도 못 벌고, 그러면 병원비를 댈 수 없을 텐데… 어쩌자고 아빠는 아까부터 싱글벙글인지 모르겠어요.
마침내 나는 노트북에 대해 물었습니다.
“친구 빌려줬단다.”
“아빠는 어떡하구요?”
“좀 쉬기로 했다.”
그렇게 쉬다간 다움이를 엄마한테 빼앗기고 말 거예요. 아빠!
아빠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어요. 내가 소리치고 울고 싶은지도 모르구요. 엄마의 쪽지에 씌어 있던 것처럼 아, 아빠의 마음이 변해버린 걸까요.
“엄마는 나랑 아빠를 떼어놓으려고 해요.”
“엄마가 다움이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지. 강제로 데어놓으려는 건 아니란다.”
“아빠도 날 프랑스로 보내고 싶은 거예요?”
“다움이 생각은 어떠니?”
아빠는 아빠 생각만 말하면 될 텐데, 왜 내 생각이 궁금한지 모르겠어요. 난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말합니다.
“프랑스에는 죽어도, 죽어도 안 가요. 난요, 아빠랑 살 거예요.”
“아빠도 같은 생각이란다. 아빠도 다움이와 오래오래 함께 살 거다.”
“그럼요, 친구한테 빨리 노트북을 돌려달라고 해요.”
아빠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어놓고는 날 가만히 바라봅니다. 난 고개를 돌려 아빠의 손에 내 뺨을 대봅니다.
“병원비 때문에 걱정이 되니?”
“쬐금은요.”
“다움이가 해야 할 일을 아빠가 대신 하면 다움이의 기분이 어떨까? 별로일 거야. 아빠도 마찬가지다. 병원비는 아빠가 알아서 해. 다움이는 건강해질 생각만 하면 된다. 그리고 병원비는 이미 다 준비해뒀단다. 그러니까 아빠도 이제는 쉬어야 되지 않겠니?”
“정말예요?”
“그럼, 아빠가 다움이에게 언제 거짓말을 하던?”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래요, 이젠 아빠가 푹 쉴 차례예요. 훌쭉하고 새까만 아빠의 얼굴을 보면서 난 벌써부터 걱정이었거든요.
아빠가 냉장고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냅니다. 1인실이니까 참 좋아요. 우리만이 쓸 수 있는 냉장고도 있구요. 1인실은 굉장히 비쌀 거예요. 하지만 내가 알기론 이식센터에는 1인실뿐입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고 나면 입 안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화끈해요. 그래서 얼음 조각을 물고 있거나 틈틈이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열을 떨어뜨려야 된답니다.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떠서 내 입에 넣어주고는 말합니다.
“아빠가 며칠 동안 지방에 가야 되거든. 그래서 말인데, 아빠 없는 동안에도 잘할 수 있겠지?”
나는 아이스크림을 삼키다 말고 아빠를 쳐다봅니다. 4년 전 엄마가 떠난 이후 한 번도 나 홀로 잠들게 한 적이 없는 아빠입니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를 빼놓고는요.
이제까지 잘 참아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이 얼마나 힘든 때인지 아빠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아빠가 옆에 없으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날 혼자 놔두고 지방에 간다니, 말도 안돼요.
“아빠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란다.”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을래요. 하지만 다움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나요?
아빠의 눈을 쳐다보니 그렇게 물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빠는 나한테 어렵게 어렵게 부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얼마 동안요?”
“짧으면 나흘, 길면 닷새.”
아빠에겐 왜 나흘이 짧고 닷새는 길까요? 나한테는 나흘이나 닷새나 길기는 마찬가지죠. 내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옵니다.
“언제 지방에 가게 되나요?”
“내일 당장은 아니다. 영재 누나한테 미리 연락해놓을 거고, 마음씨 좋은 간병인 아주머니도 오실 거란다.”
“딱 한 번뿐예요, 아빠. 다음부터는 절대로 안돼요.”
8
송 계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유갑수 역시 강남의 신흥 종합병원 원무과 직원이었다. 적어도 사기당할 염려는 없어진 셈이었다.
“송 계장이 간곡히 부탁하는 통에 나섰습니다만 내키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선생님 사정이 하도 딱하니… 어쨌든 먼저 선생님께서 약속해주실 것이 있습니다. 장기 거래가 불법이라는 건 익히 알고 계시겠죠? 병원측에서 알면 그날로 난 모가지입니다. 만약 일이 어긋날 경우…”
이것저것 당부하는 것으로 미뤄 유갑수는 그 일에 사뭇 이력이 붙은 모양이었다.
“신장 기증이라는 게 가족 이외에는 좀처럼 이뤄지기 힘듭니다. 피붙이 말고 누가 냉큼 신장을 내놓겠습니까? 가족 중에서 기증받을 수 없다면 고작 뇌사자의 기증을 기다리는 정도인데, 아예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죠. 그러다 신부전이 심해지면 그만 세상 하직입니다. 검사 자체는 까다롭지 않습니다. 혈액 검사와 신장 기능 체크 등 간단한 수준입니다.”
“이식 받을 상대를 찾으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선생님 다급한 사정은 송 계장한테 충분히 들었습니다. 나한테 맡기십시오. 수요는 많고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니 염려 놓으셔도 될 겁니다. 우리 병원만 해도 대기 환자들이 꽤 됩니다. 다른 병원도 알음알음으로 연결할 수 있겠구요.”
그는 내심 작정해둔, 그러나 낯간지러운 물음을 던졌다.
“얼마나 받을 수 있습니까?”
“밀고 당기면 가격이야 조정할 수 있겠지만 선생님 입장도 환자 못잖게 다급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장은 일반적으로 삼천쯤 예상하면 될 겁니다.”
“다른 장기도 가능하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각막 정도죠. 하지만 신장과 달리 각막은 제공하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신장이야 하나 떼줘도 지장이 없지만 각막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그런 만큼 신장보다 두 배 이상의 금액을 받을 수 있긴 하죠.”
마지막으로 유갑수는 3천만 원의 10퍼센트를 요구했다. 각오한 바였으므로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고, 빠른 시일내에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재차 부탁했다.
그는 노트북을 처분해 검사비를 마련했다. 종자 씨앗으로 한 끼의 허기를 달래는 가난한 농부의 심정으로 그렇게.
간단하다는 유갑수의 말과는 달리 꽤 복잡한 검사였다. 혈액과 소변 등의 기초 검사로 시작해 초음파 검사를 거쳤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시티 촬영을 했으며, 종국에는 조직 검사까지 받았다.
이틀 전의 일이었다. 적출 수술을 받고 회복 기간까지 아이를 떠나 있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고, 불법 거래라는 자체가 양심에 찔렸다. 그럼에도 그 이틀 동안 대체로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오늘 오전, 검사를 담당했던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연락은 당연히 유갑수의 몫이려니 생각했건만 뜻밖에도 종양내과였다.
그는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유갑수는 외근중이었고, 오후에나 돌아온다고 했다.
도리없이 종양내과 외래 창구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호연 씨!”
간호사의 호명을 듣고 그는 진찰실로 들어갔다. 의사가 책상에 팔을 괴고 그를 쏘아보다가 의장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의 이름을 확인한 후 의사가 물었다.
“가족 중 한 분을 대동하라는 연락을 드렸을 텐데요?”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해서 오라고 하시죠.”
무엇인가 가슴 깊은 곳으로 쿵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의사를 똑바로 쳐다본 채 또박또박 말했다.
“가족이 없습니다.”
“그래요…”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신장을 기증하려는 뜻은 거두셔야겠습니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첫째로는 신장 기능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검지손가락으로 미간을 연신 문지르며 침묵하는 의사였고, 그는 성마르게 물었다.
“둘째로는요?”
“신장 기능의 약화는 간의 이상에서 비롯된 겁니다. 다시 말해 선생님께서는 신장보다 간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의사는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유갑수가 의사에게 모든 것을 실토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장을 기증하려는 숨은 의도를 알아버린 의사가, 아이의 치료비를 구할 길이 벗어져 버린 한 아버지의 초라한 몰골을 안타까운 눈초리로 마냥 바라보고만 있는 것일까.
“어떤 문제입니까?”
“… 간에서 종양이 발견됐습니다.”
“예? 종양이라고 하셨습니까?”
“악성 종양입니다. 다시 발해 간암…”
거기까지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무엇인가 머리통에 부딪혀 강렬한 파열음을 내며 부서졌다. 무서운 속도로 대기권을 뚫고 날아온 유성이 지구의 표면에 충돌하듯 그렇게.
한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졌다. 빛도 소리도 차단된 무중력 공간으로 두둥실 몸뚱이가 떠오르는 듯했다.
“… 저로선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구요. 감기 몸살조차 앓아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간이란 게 워낙 자각 증상이 없는 부분입니다.”
“혹시, 혹시 말입니다… 오진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묻고 나서 그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 때문이었다. 그랬다. 아이가 백혈병을 처음 통보받은 순간에도 그는 오진이 아니냐고 따졌다.
다르다면 백혈병이 간암으로, 아이가 아닌 그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이리 와보시죠.”
의사는 책상 위에서 스케치북 크기의 필름을 집어들고 벽에 붙은 뷰박스로 다가갔다.
뷰박스 옆의 스위치를 올려 불을 밝히고 필름 넉 장을 일렬로 늘어놓는다. 의사는 윗주머니에서 안테나식으로 된 지시봉을 꺼냈다. 지시봉은 필름 위에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녔다.
“십여 개의 종양이 간 전면에 불규칙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조직 검사에서도 원발성 간암세포가 확인됐습니다.”
의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그는 못박힌 듯 서서 필름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노려본들 판독해낼 재간이 없는 필름이었다.
그가 다시 의장에 앉자 의사가 말했다.
“당장 입원 수속을 밝으십시오. 내일부터 치료를 시작해야 됩니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말을 중얼거렸다. 보다시피 난 정상이에요.
마라톤 완주하래도 하겠어요.
“선생님 심정 이해합니다. 선뜻 믿을 수 없겠죠. 간암은 우연히 드러날 때가 많지만,
그렇다 해도 판명되면 대개 심각한 지경입니다.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분임에도 이미 손쓸 길이 없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바로 그렇죠.”
손쓸 길이 없는 경우라? 그런데도 입원을 하라니 지독한 아이러니였다. 간암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말했다.
“아이가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치료를 받아도 그곳에서 받아야겠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등나무가 소슬바람에 시달리며 잎사귀를 떨구고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중학교 시절, 정확히 말해 사춘기라고 해야 할 소년의 한때, 그는 고아원 뜨락의 등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숨짓다 종내 눈물을 훔치곤 했다. 누군가에게 이유없이 얻어터지고 걷어차인 날이거나, 유년의 기억이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날이거나,
내일에 대한 막막함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거나, 그는 버릇처럼 등나무를 쳐다보면서 남 몰래 눈물을 닦아내며 다짐했다.
나무처럼만 살자.
제 홀로 뿌리 내리고 제 홀로 가지를 뻗고 제 홀로 잎새를 매달고 때 되어 잎새를 떨구는 나무처럼, 돌보는 이 없어도 앙앙대지 않고 알아줄 자 없다고 악쓰거나 티내지 않은 채 안으로 속살을 키워내는 나무처럼, 애오라지 그렇게만 살자.
기껏해야 양아치나 될 자식이라며 늘상 악담을 퍼붓던 원장의 예상을 깨고 고아원을 뛰쳐나왔어도 양아치는 되지 않았고, 문제아들만 모였다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양아치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려 발버둥을 쳤다.
양아치가 되지 않을 것만도 천만다행으로 여긴다면, 그래, 그는 성공적으로 살아온 셈이었다. 과도한 욕망에 애끓이지 않았고, 세상에서의 득세나 부귀와 영화를 꿈꾼 적도 없었고, 누군가를 턱없이 미워하거나 증오하지도 않은 채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살아왔으니 그래, 그런 대로 한세상 아름다웠노라 고백할 만했다.
그러나 이게 뭐지?
죽음은 손을 내밀면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아이가 투병을 시작한 이래 줄곧 그러했다. 삶과 죽음의 와줄 위를 위태위태 걸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며, 그의 삶 역시 위태로웠던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희망이 아이를 감싸고 있고, 아이는 희망의 이름으로 소생하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 역시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와 마주한 셈이었다. 그런데 아이와 무관하게 죽을 거란다. 아이가 자신을 남겨두고 홀로 가버릴까 서럽고 무서웠는데, 이젠 아이를 남겨두고 그 혼자 가야 한단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사각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에는 간암을 선고한 넉 장의 필름이 들어 있었다.
필름을 아이의 주치의인 민 과장에게 보였다. 다시금 간암을 확인받았고, 강남의 병원에서보다 더 두렵고 처참한 확인이었다. 필름을 꼼꼼히 살피던 민 과장이 물었다.
“누구의 필름입니까?”
“친굽니다.”
“절친한 사이입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 과장이 곤혹스러운 낯으로 말했다.
“간암입니다. 그것도 말기군요.”
아, 얼마나 오진이었기를 갈망했던가. 삼십대 초반의 경험 없는 의사가 섣부르게 간암을 선고한 것이라고 단정한 그였다.
“저어, 말기라면, 그러니까, 달리 방법이…”
말들이 서로 앞다투어 입 밖으로 나오려다 발이 걸려 넘어진 양 그는 계속해서 더듬거리며 물었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간암의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은 근치적 절제 수술입니다. 쉽게 말해 종양이 있는 부분을 수수로 도려내는 겁니다. 간의 조직 중 이십 퍼센트만 남기고 잘라내도 환자의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어요. 일테면…”
민 과장은 책상 위에 메모지를 펼쳐 그 위에 간의 형태를 그렸다. 탐스럽게 자란 고구마 모양이었고, 네 귀퉁이에 사선을 그어댄 후에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잘라내도 중심부만 남는다면, 간은 놀라운 재생 능력이 있으니까 시도해볼 만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친구분은 수술이 불가능할 듯하군요. 암 조직이 중심부는 물론 간 전체에 퍼져 있고, 필름상 이렇다면 실제로 배를 열고 들어가면 그 이상이라고 봐야죠. 중기쯤으로 예상하고 수술에 들어갔다가는 개복 후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그냥 닫는 일이 종종 있죠. 일반적으로 수술 대상이 될 수 있는 경우는 전체 간암 환자의 십
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전혀 희망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일단은 방사선과 항암 치료를 받아야죠. 그렇지만… 혹시 친구분이 자신의 병을 알고 있습니까?”
“…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간암은 모든 암 중에서도 예후가 가장 불량한 편입니다. 항암 치료를 받는다 해도 마지막 순간은 피할 길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친구는 이제까지 정상으로 살아왔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간암, 그것도 말기라면 그 동안 무슨 낌새라도 있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암이란 게 흉물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뭐랄까,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최후의 순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마수를 드러낸다고 할까요? 그래서 흔히들 간을 침묵의 장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심하지 않아서 그렇지 증상이야 있었겠죠. 친구분이 미처 자각하지 못했을 테구요. 그러니까 최소한 일 년에 한 번 꼴로는 종합검사를 받아야 하는 겁니다.”
간혹 오른쪽 옆구리를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뜨끔뜨끔한 통증이 있어왔다. 체중이 줄고 피곤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증상이었던 셈이데, 그 정도로 종합검사를 받았어야 옳았다는 말인가.
아이가 투병을 시작한 이후 종합검사의 의미조차 떠올려보지 못했다. 설혹 기억해냈더라도 그건 참으로 낯뜨거운 발상이었으리라. 신음하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건강이 도리어 짐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아이가 겪는 고통을 나눠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게 아버지의 심정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헛기침을 해댄 후 물었다.
“본격적으로 마수를 드러낸다면 어떤 증상을 보입니까?”
“개인별로 차이가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발열과 구토와 참기 힘든 복통이 올 겁니다. 음식물을 삼킬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질 거고, 담도가 막혀 황달이 심해지고, 호흡이 곤란해지고, 복수가 차고, 결국은 간 정맥 혈관이 파열되어 피를 토하고 하혈을 하면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게 바로 나요. 당신 눈앞에 태연스럽게 앉아 있는 나란 말입니다. 그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그립고 애달픈 사람이 감긴 눈을 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두 손을 힘껏 맞잡았다. 그리고 최후의,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회피하고픈 물음을 던졌다.
“…내 절친한 친구는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필름으로 미뤄보건대 육개월을 넘기기는 힘들겠군요.”
육개월. 아이의 골수 이식과 회복 단계까지의 시간이 삼개월.
최악의 경우는 아니군. 그나마 다행이야. 지금 당장 끝나버리는 건 아니잖아. 그는 속말을 되뇌다 다시 물었다.
“육개월까지는 틀림없이 살 수 있는 겁니까?”
“최선의 치료를 받았을 대를 가정한다면요. 육개월이니 하는 발은 친구분한테 삼가십시오. 알게 된대도 주치의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겠지요. 다만 친구분에게 자신의 병을 솔직히 말해주는 것까지는 찬성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지 않겠어요? 반대 의견을 가진 의사도 있긴 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친구분도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오, 멋진 말이군. 죽음에 초연한 척하는 명상가의 에세이 제목으로 쓰면 딱 적격이었다. 그걸 시한부 삶을 막 선고받은 그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다움이 녀석 참 기특해요. 생각이 보통 깊은 게 아닙니다. 오전에 병실에 들렀다 좋은 소실을 전해줬습니다. 다움이가 당장 묻더군요. 아빠한테 말했느냐구요. 아니라고 했더니,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달래요. 이유를 물었죠. 아빠가 기뻐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나요. 어서 빨리 가보세요. 다움이가 좋은 소식을 전해줄 겁니다. 다움이 소원대로 마음껏 기뻐해주세요.”
그러나 그는 곧바로 아이를 찾지 못했다.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떨어지는 등나무 잎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이 덧없이 흘러갔는지도 차마 깨닫지 못한 채.가만히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여진희가 빙긋이 웃더니 어깨를 짚었던 손을 곧게 펴 가리켰다.
“저기서부터 선배를 불렀어요. 선배는 끝끝내 알아차리지 못하더군요.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그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려 앉기를 권했다. 여진희가 앉고는 그의 무릎에 올려 있는 사각 봉투를 바라보면 말했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나요?”
“무슨 소리야?”
묻고 나서 그는 사각 봉투를 여진희의 반대편으로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거 다움이 시티 필름 아닌가요?”
“어, 이거… 검사 결과는 괜찮아. 좋아지고 있어.”
“다움이를 만나고 왔어요. 선배 말대로 좋아 보이던데요. 오늘따라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술 잘도 했구요. 앞으로는 날 환영하기로 마음먹었나봐요. 선배도 다움이를 닮을 수 없나요?”
여진희가 눈을 흘기며 덧붙였다.
“날 봐도 하나도 반갑지 않은 얼굴이잖아요.”
그는 피식 웃으며 날짜를 헤아려보고는 물었다.
“한참 마감 막바지일 텐데, 웬일이야?”
“선배한테 구박을 받지 않았더니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네요.”
여진희는 농담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여진희에게서 눈길을 거둬 발밑에 나뒹구는 잎새를 무연히 바라보았다. 허허로운 농담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더는 심각하지 말고, 더는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고, 더는 다가올 날에 대한 암담한 자각 따위는 훌훌 털어버린 채로.
여진희가 그의 무릎 위에 하얀 봉투를 올려놓았다. 이게 뭐지? 그가 눈으로 물었다.
“구박받을 짓을 했어요. 어제 원무과에 전화를 걸어봤어요. 선배한테 물어봤자 대답이 뻔할 테니까요. 예치금 이야기를 하더군요. 주제넘은 짓인 줄 알지만 어쩌겠어요. 내 천성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걸요. 그건 원무과에서 발행한 영수증이구요.”
여진희의 얼굴을 십 초쯤 쳐다보다가 발치에 구르는 잎새를 또 그만큼 내려보다가 등나무의 성근 가지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진희 씨가 돈이 어딨다고…”
여진희는 서산 어디선가 농사를 짓고 있다는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2남 4녀 중 대학물 먹은 건 자신뿐이고,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공부할 틈이 없었다고 했다. 원급을 받으면 절반을 떼어 집으로 송금하는 처지를 알고 있었기에 원주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내내 마음의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다시 2천만 원을 빌린 셈이다.
그가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자 여진희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결혼 자금으로 모아둔 게 있었어요. 두고두고 갚으세요.”
“두고두고… 결혼 자금이라면서?”
“선배가 날 책임지면 되잖아요?”
“진희 씨!”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말아요.”
그녀가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노크하듯 톡톡 건드려보고는 말을 이었다.
“선배의 머릿속에는 여진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줄 잘 알아요. 그렇지만 다움이가 완치되고 나면 선배에게도 여유가 생기겠죠. 그때 생각해줘요. 이 여진희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는지 있는지 말예요.”
따듯한 여자다. 지나간 세월 중 어느 부분을 뚝 분질러 거기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사랑하고픈 여자다. 아니, 지금 이 순간부터 먼 훗날을 기약할 수만 있다면…
여진희는 서편 하늘을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이 참 곱네요. 저녁놀이 아름다운 건 동에서 서까지 긴 거리를 지나왔기 때문이래요. 하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운 저녁놀은 비 올 징조죠.”
징조? 그 단순한 말이 왜 사무치는 아픔으로 가슴에 박히는 걸까. 그는 사각 봉투를 집어들었다.
“진희 씨, 우리 술 한잔 할까?”
“별일이네요. 선배 입에서 술 마시자는 소리가 다 나오구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한잔 하고 싶어.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잖아.”
한때 술에 젖어 살았다. 맨정신으로 반듯하게 걸어갈 자신이 없는 세상이었다. 아내가 떠난 이후 한동안. 아내와 함께 걸었던 길을 가노라면, 함께 들었던 노래가 귓전에 울려퍼지면, 계절과 계절이 바뀌는 절묘한 순간에,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유리 조각 위에 맨발로 걷고 있는 듯 아프게 느껴졌다. 그때마다 근 s술에 기댔다.
이제 더 이상의 그리움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다움이는 어떡하구요?”
여진희가 물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저녁놀을 향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때때로는 내 인생을 살고 싶어. 바로 정호연의 인생을 마이야.”
그는 저린 다리를 끌며 걸음을 옮기다 쓰레기통에 필름이 든 사각 봉투를 밀어넣었다. 여진희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쓰레기통으로 손을 내밀었고, 그는 재빨리 그 손을 나꿔챘다.
“내버려둬. 이젠 필요없으니까.”
9
살그머니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만가만 발자국 소리. 그리고 다시 들릴 듯 말 듯 문을 닫는 소리.
나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어떤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또 어떻게 화장실로 들어가는지 훤히 알 수 있어요. 아빠는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래서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는 겁니다.
소용없어요. 난 벌써부터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답니다.
아빠는 하루 종일 날 혼자 내버려뒀어요. 난 계속 아팠구요. 그건 참을 수 있어요. 아빠가 외출할 때는 다 이유가 있고, 나야 허구헌 날 아프죠. 하지만 어떻게 전화 한통 없을까요. 외출하면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전화를 걸던 아빠가요.
눈이 빠지게 아빠를 기다렸고, 전화기를 쳐다봤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거든요. 아빠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죠. 그런데 열두 시가 다 되어서 돌아오다니, 정말 너무해요.
화장실에 있는 아빠의 모습이 상상됩니다. 양치질에다 가글을 하고 손톱 밑까지 깨끗이 닦고 있겠죠. 나에게 나쁜 병균이라도 옮겨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아빠랍니다. 하여튼 빨리 화장실에서 나오는 게 좋을 거예요. 날 더 화딱지 나게 하면 내일 아침가지는 아들이랑 한마디도 못하게 될 테니까요.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어떻게 아빠를 골탕먹일까, 하구요. 내가 속상한 만큼 아빠도 속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요.
그런데 이십 분이 넘도록 아빠는 화장실에 있어요.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옛날 언제처럼 나한테 들킬까봐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고 말예요. 아닐 거예요. 며칠 동안 아빠는 아주 기분이 좋았거든요.
그렇다면 수도꼭지를 붙잡은 채 잠이 든 걸까요? 며칠 전에 아빠가 내 다리를 주물러줄 때였어요. 아빠가 같은 곳만 계속해서 주무르기에 봤더니, 글쎄 졸고 있지 않겠어요.
사실 아빠만큼 힘들고 피곤한 사람도 세상에 없을 거예요. 난 약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아빠는 나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죠. 잠을 자지 않고 새끼를 돌보는 아빠 가시고기처럼요.
결국 아빠한테 지고 맙니다. 아빠는 날 초조하게 만드는 데 천재라니까요.
“아빠, 아빠!”
아빠가 종이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옵니다. 침대에 걸터앉은 아빠는 늦어진 이유를 말하죠.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었대요.
어, 아빠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납니다. 가슴이 철렁합니다. 아빠가 술을 마셨다는 것은 아빠한테 무지무지 슬픈 일이 생겼다는 뜻이죠.
엄마가 우리를 떠난 후로는 매일매일 마셨어요. 엄마도 미웠지만 술취해 돌아오는 아빠도 싫었죠. 내가 아프면서부터 술 마신 걸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빠는 나를 돌보느라 슬퍼하고 술 마실 틈조차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웬일일까요?
“조금, 아주 조금 마셨다. 오늘 이 아빠한테 대단히 좋은 일이 있었거든.”
“무슨 일요?”
“다움이가 치료를 너무 잘 받고 있고, 이번 치료만 끝나면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지. 아빠한테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니?”
“과장 선생님께 들었어요?”
아빠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재빨리 묻습니다.
“다른 말은요?”
“못 들었는 걸.”
휴우, 안심입니다. 과장 선생님이 약속을 어긴 줄만 알았거든요.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려던 좋은 소식을 당장 말해야겠어요..
“과장 선생님이 일본 누나한테 전화를 걸어봤는데, 누나가 한 달 전부터 고기를 입에도 안 대고 과일이랑 채소만 먹는대요. 순전히 나한테 깨끗하고 좋은 골수를 주기 위해서래요, 글쎄.”
“야아, 정말?”
“과장 선생님은요, 골수가 깨끗해야 내 몸 안에서 쑥쑥 자라나는 거래요.”
아빠가 내 손을 꼬옥 잡고 악수를 하듯 아래위로 흔듭니다.
“굉장히 좋은 소식이구나. 아무래도 한잔 더 마셔야겠는 걸.”
아빠는 엄청나게 기뻐하고 있어요. 내 생각대로예요. 아빠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막 힘이 생겨요. 아픈 것도 몽땅 날아가 버릴 것 같답니다. 아빠와 나랑은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나봐요. 아빠가 기쁘면 나도 그렇고, 내가 슬프면 아빠도 슬퍼지구요.
“다움이가 치료를 잘 받고 있고, 일본 누나까지 다움이를 위해 애써주고…아빠는 앞으로 아무 걱정 없다.
아빠가 침대 시티를 잘 펴서 목까지 폭 덮어주고 나서 침대 밑에서 보조 침대를 꺼냅니다. 나는 옆으로 목을 돌려 보조 침대에 누운 아빠를 쳐다봅니다.
오늘 같은 날만 자꾸자꾸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본 누나의 골수만 받으면 다신 재발하지 않는댔어요. 그러면 아빠는 매일매일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구요. 우리는 너무나 행복한 아빠와 아들이 되겠죠. 그래요, 하나님이 드디어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로 했나봐요.
“다움아!”
내가 대답한 한참 뒤에 아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빠를 사랑하니?”
당연하죠. 세상에서 제일 넓은 바다가 태평양이고, 제일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인 것처럼요. 나는 손을 뻗어 아빠의 귀를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이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으련?”
창피하게 아빠는 왜 이러는 걸까요. 아마 술 때문이겠죠. 나는 아빠의 귀를 만지작대다 말합니다.
“아빠, 사랑해요.”
아빠의 귀를 잡고 있는 내 손에 따듯한 물방울이 떨어집니다. 아빠가 하품을 한 모양이에요. 하품을 하면 눈물이 나오잖아요. 어젯밤에 한밤도 못 자서 아빠는 지금 몹시 졸린 거예요.
아빠가 푹 잘 수 있도록 아빠의 귀를 놓고, 안녕히 주무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인사를 했어요. 벌써 잠이 들었는지 아빠에게선 대답이 없습니다.
밖에서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뚝 끊어진 뒤입니다.
“다움아, 엄마 보고 싶지 않니?”
아빠는 왜 내 기분을 잡쳐놓는 걸까요. 쿨쿨 잠든 척 끝가지 대답하지 않을 거예요.
제6장 가시고기
1
연이틀 비 뿌리고 바람 부는 을씨년스런 날씨가 계속되었다. 낙엽들과 더러는 푸른 빛을 간직한 채 가지를 떠난 은행잎새들이 풀칠해놓은 듯 길바닥에 달라붙어 있었고, 설악산 정상에는 올해의 첫눈이 내렸다.
그 이틀 동안, 그는 잠시도 아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아이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팔다리를 주무르거나 체스를 두거나 꾸며낸 동화를 들려주거나, 문득문득 희망을 속삭였다. 그렇다고 줄곧 아이만을 마음에 담아둔 것은 아니었다. 가라앉는 난파선의 뱃머리에 매달려 버둥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막막하고 두렵고 억울해 하면서, 잠깐씩 생각했다. 무엇이 자신에게 남아 있을까. 무엇을 위해 안타까이 손 흔들어야 하는가. 스스로를 위해 준비해둘 희망의 말은 무엇인가.
을씨년스러운 이틀이 지나고 날이 밝자 다시 청명한 가을이었다.
그 동안 누군가의 속울음을 삼켰을 테지만 희희낙락 박장대소한 사람이 분명히 존재했겠고, 누군가는 속절없이 죽어가는 중이거나 쓸쓸히 땅에 묻혔겠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어김없이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고 자나났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변한 것은 없었다. 세상은 끄떡하지 않았다. 세상은 엄격하고 냉정한 것. 여전히 자신의 궤도를 따라 앞으로 돌진해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선고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여전히 한 아이의 아버지임도 분명한 진실이었다. 아버지로서의 책무 역시 고스란히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이었다.
망설이고 애끓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일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절망이 찾아들 틈조차 없는 법. 그 믿음만을 간직한 채, 미처 덜어내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와, 여전히 애착의 눈길로 넘겨다보려는 먼 훗날까지 서둘러 매듭지어야 했다.
송 계장을 만났다. 일전의 전망 좋은 찻집이었다.
송 계장은 유갑수로부터 연락을 받았노라고 고백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뱉었다.
“세상이 왜 이따위인지 모르겠어요.”
세상 탓은 아니었다. 세상과의 불화는 그 홀로 앞장서 겪는 바가 아니었다. 분개하는 쪽만 바보였다. 억울하다고 악을 써봤자 무익한 하소연에 불과했다. 간단히 생각하면 되는 거였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 그렇게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를 불행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노라고.
두 잔의 커피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그는 송 계장이 잡기 편하도록 컵의 손잡이를 돌려놓으며 말했다.
“상의할 게 있어. 치료비를 마련해야 할 텐데…”
“예치금은 해결됐으니까 차차 생각하시죠. 아니, 저한테 맡기세요. 병원에서 극빈자를 대상으로 하는 자선 치료가 있어요. 혜택을 받는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어쨌거나 해보겠습니다. 일단 선배님은 동사무소에 가서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하세요. 우리 병원에서는 다움이 진단서를, 저쪽 병원에서는 선배님 진단서를 발급 받아 첨부하면 제가 알아서 하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 말대로 하세요.”
“자존심은 아무래도 좋아. 정말이야. 하지만 아이의 치료비만큼은 내 손으로 마련하고 싶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유갑수 씨를 다시 한 번 연결해줘. 알아봤는데, 암으로 사망한 사람도 다른 장기와는 달리 각막은 기증할 수 있대. 그래서 유갑수 씨에게 각막 매매를 부탁하려고…”
송 계장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가로챘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각막과 신장은 다른 거라구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다른지 않아. 각막인든 신장이든, 적어도 내게는 동일해. 나에게 남은 시간은 길면 육개월이야. 생각해봐, 육개월을 한 눈으로 살든 두 눈으로 살든 그게 뭐 대수겠어. 별일 아니라구. 그 동안 계속 생각했어. 내게 남은 건 무엇일까, 하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에겐 아이밖에 없었어. 병을 안 이후 더 절실해졌을 뿐이야.”
그는 천천히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이제 와서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내가 아이와 함께 지낼 날들이 많다면 굳이 서둘 필요는 없을 거야. 각막을 파는 짓 따위는 더더욱 하지 않을 테구. 하지만 남은 시간은 너무 짧아. 간암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분노하고 갈등할 시간조차 없어. 중요한 건… 그러니까 아이는 살 수 있다는 것이고, 나는 죽는다는 사실이지. 아이는 겨우 열 살이야. 머지않아 아버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돼. 아비 없는 자식. 나도 겪어봤지만, 아이에게 오랫동안 깊은 상처가 되겠지. 게다가 난 한푼의 유산도 남겨줄 게 없어. 그러니 아이를 위해 아버지로서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죽어야, 그래야 덜 억울하지 않겠어? 이게 내 마음의 전부야.”
그는 정말 그랬다. 그게 마음의 전부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어서. 그 외 무엇을 더 소망하겠으며, 무엇에 더 연연하며 애달파하겠는가.
“이제까지 송 계장에게 많은 신세를 졌어. 달리 갚을 것이 없어서 속상해. 하지만 어쩌겠어, 날 한번 더 도와줘.”
유갑수를 만나고 병원으로 돌아오니 여진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진희는 인사도 생략한 채 휙 돌아 병실을 나갔다. 부지런히 잰걸음을 옮기던 여진희가 소아병동 뒤 등나무 벤치에 이르러 돌아섰다. 이어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한테 난, 나랑 존재는 뭐죠?”
예전에도 비슷한 물음을 던졌었다. 하짓날이었고, 안데스 산맥 어딘가에 있다던 발데미르산을 이야기한 직후였다.
아, 발데미르의 청춘 남녀. 누구는 땅거미가 내리기 전까지 정상에 서겠고, 누군가는 팔부 능선에서 허망한 황혼을 맞고 말리라. 더러는 사랑을 이루고 또 더러는 속절없이 다음 하지를 기다릴 테지만, 그에게는 기다릴 더 이상의 하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시한부 삶이 새삼스레 당혹감과 난처함을 불러일으켰다. 앞으로도 살아 있는 내내 그러한 느낌에 시달릴 것이었다.
기념일을 맞이하거나, 첫눈이 내리는 광경을 보게 되거나, 먼 훗날을 무심코 이야기하거나, 하다 못해 누군가와 이별의 악수를 나누는 순간에도 그는 안타까이 생각하리라. 다시 이 순간을 되풀이 할 수 있을까.
그가 벤치에 앉자 여진희가 다시 물었다.
“어쩜 나한테 한마디 말도 안할 수 있죠?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었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하여간 일단 앉아 화를 내더라도 앉아서 내라구.”
그러나 여진희는 앉지 않았다. 감색 플레어 치마 옆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서너 발짝 떨어진 곳의 쓰레기통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필름 말예요. 선배 거였더군요.”
“… 오해야. 절친한 친구가 있는데, 그 녀석 필름이었어. 겁이 만은 친구야. 자기의 병을 나한테 확인해달라고 할 정도니까.”
“선배!”
소리쳐 불러놓고 여진희가 그의 옆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여진희는 울음을 참으려는 아이처럼 입 주위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다 알아봤어요. 강남의 그 병원에서 정호연 이름 석 자도 확인했다구요.”
기자의 직감이 발동한 때문이었으리라. 사각 봉투에서 병원 이름을 보고 쓸데없이 추적을 시작했겠지. 차라리 버리지나 말 걸 그랬다고, 그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기어코 여진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한 번 시작한 울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그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울지 마, 제발.”
등나무 벤치에서 소아병동으로 이어진 길에는 연보랏빛 보도 블록이 깔려 있었고, 비둘기 한 마리가 보도 블록 위의 가을 햇살을 부지런히 쪼아댔다. 언뜻언뜻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는 가늘고 긴 구름이 서녘을 향해 바르게 흘러갔다.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여진희가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달리 어쩔 도리가 없는 그는 싱긋 웃었다.
“웃음이 나오나요? 정말 웃고 싶나요? 말해봐요, 이 지경이 됐는데 언제까지 웃고만 있을 텐가요?”
그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여진희의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그때 진희 씨는 말했어. 선배님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러면서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지. 질문은 당돌했지만 웃음만큼은 천진난만 그 자체였어. 그 순간 이미 진희 씨하고 친해진 느낌이었어. 하지만 시치미 뚝 떼고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 지금처럼만 웃으면 우린 금세 친해질 수 있다구.”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라 반원을 그리며 사라졌고, 중년의 여자가 휠체어를 밀며 소아병동을 돌아나왔다. 휠체어에는 마스크에 털모자가지 눌러쓴 아이가 앉아 있었다. 임파구성 백혈병, 골수성 백혈병, 혹은 재생불량성빈혈을 앓고 있는 아이일 터였다.
여진희가 폭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최근 독일에서 귀국한 의사가 있어요. 이정호 박사라구요, 간암에 관해선 세계적인 권위자예요. 필름을 보였더니 일단 입원하래요.”
이정호 박사. 독일 유명한 대학의 종신 교수였고, 노벨 의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특진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을 터인데, 여진희가 용케 그 비좁은 자리를 뚫고 들어간 셈이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여진희가 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어놓았다.
“돈 때문이라면 아무 걱정 마요.”
돈? 그것도 분명 문제지. 하지만 부질없는 치료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부질없는 치료에 매달려 아이를 떠나 있어야 한다는 점이야. 솔직히 말하면, 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아. 두 가지 모두를 잃을 수는 없잖아. 나로선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한 거야.
그는 속엣말을 떠올려본 후 입을 열었다.
“병이 깊어. 이정호 박사도 별수 없을 정도로.”
“기적이란 것도 있어요. 그리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다움이를 생각해봐요. 다움이를 고아로 만들 셈예요?”
“지금이 다움이한테 가장 중요한 시기야. 기적적으로 찾아온 마지막 기회. 하지만 아이의 투병 의지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릴 수 있어. 반드시 곁에 있어야 돼. 내가 없으면 아이는 불안해 하거든.”
“선배는요? 마지막인 건 선배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다움이한테 아빠로선 할 만큼 했어요. 선배 병이 깊어지는 것도 까맣게 모른 채 말예요. 더 이상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이제 다움이는 엄마한테 맡겨요.”
그는 잠시 미소짓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눈가에 다시 눈물을 매단 여진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움이는 그토록 살리려 애써왔으면서 정작 선배 자신한테는 왜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죠? 다움이한테 쏟은 정성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만이라도 선배 자신에게 쏟아봐요, 제발.”
그는 여진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동안 제일 견디기 힘든 일이 뭐였냐면, 우습게도 아이의 손톱을 깎는 일이었어. 아이의 손톱을 깎아줄 때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 손톱이 자라난 만큼 아이에게 허락된 날들이 줄어들었구나. 이렇게 손톱은 자꾸자꾸 자라나는데 넌 자꾸자꾸 죽어가고 있구나.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아이의 손톱을 바투 깎았어. 그게 무슨 아이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짓이라도 되는 양 말이야. 그런데 이젠 아이의 손톱을 넉넉히 남겨놓고 깎아. 왜냐면 더 이상 손톱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니, 더 자주자주 깎으면서 아이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자주 확인하고 싶은 거야, 난. 그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무도 모를 거야. 그러니까 나는 사실, 아주, 행복한 아버지인 셈이야.”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이 진정 행복한 사내의 웃음이길 소원하며 덧붙였다.
“진희 씨, 이런 말 알아? 사람은 말이야…”
2
아, 드디어 내일이 수술입니다.
어젯밤 일본 누나가 도착해 병원 어딘가에 입원해 있습니다. 하지만 누나를 만나지 못했어요. 누나는 내일 아침 나에게 골수를 나눠주고 하루 더 입원해 있다가 일본으로 돌아갈 겁니다.
원래 골수를 주는 사람을 만나는 법이 아니래요.
이유를 물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그런 엉터리 법이 어디 있나요. 내 병을 낫게 해주려는 고마운 사람인데 왜 만나지도 못하죠?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오네상.
아빠한테 배운 일본말입니다. 누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거든요. 그것도 누나가 직접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요.
지난번에도 누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계속 졸랐죠. 하지만 고집불통 아빠는 끝끝내 고개를 흔들다가 말했어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성경에 있지? 남을 진짜로 도우려면 그 사람이 모르게 도와야 한다는 뜻이란다. 일본 누나도 그러고 싶은 거야.”
남이 알아주길 바라면서, 잘난 척하면서 돕는 것은 가짜래요. 누나에 대한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이 내가 할일이라나요. 그리고 어서 튼튼해져서 누나처럼 다른 사람을 진짜로 돕는 다움이가 되래요.
유리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난 얼른 고개를 돌립니다. 아빠, 하고 맘속으로 소리치면서요. 그러나 간호사 누나가 슬쩍 나를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갑니다.
사흘 전에 무균실로 옮겨왔습니다.
몇 개의 문을 지나자 유리로 된 방이 나타났어요. 유리방 가운데 침대가 있고, 침대 주위는 비닐 커튼으로 빙 둘러싸여져 있지요. 커다란 비닐봉투 속에 친대가 들어 있는 것과 비슷해요.
무균실은요, 비밀 요새라고 할 수 있어요. 나같이 골수 이식을 받는 환자를 위해서 특별하게 만들어진 방이죠.
백혈구 수치가 거의 빵입니다. 원래 내 핏속에는 좋은 백혈구와 나쁜 백혈구가 있어요. 날 괴롭히는 건 바로 나쁜 백혈구죠. 나쁜 백혈구를 죽이기 위해 항암제라는 폭탄을 던졌는데, 좋은 백혈구들까지 덩달아 죽은 거랍니다.
좋은 백혈구는 병균들과 싸우는 군인이에요. 군인이 없다면 항복하거나 달아날 수밖에 없잖아요. 난 지금 작전상 비밀 요새로 후퇴를 한 겁니다. 지독한 병균들이라도 여기까지는 침투해 들어올 수 없거든요.
비밀 요새라고 다 좋은 건 아니죠. 아니, 좋은 점은 하나고, 나쁜 점은 백 가지 천 가집니다.
아주 갑갑한 곳이에요. 새장에 갇힌 새처럼요. 뚱뚱한 아줌마가 커다란 궁뎅이로 깔고 앉은 찐빵처럼요. 덥긴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어요. 다움이를 계란 프라이로 만들 셈인가봐요. 또 하루 종일 천장만 쳐다봐야 된답니다. 어느 땐 혼자 중얼거립니다. 천장에 바퀴벌레라도 한 마리 지나가면 덜 심심할 거야.
내 생각 주머니 속에는 어서 빨리 여기를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그때가 언제냐고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핏속에는 적혈구, 혈소판, 그리고 다움이도 잘 아는 백혈구가 있지.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골수란다. 다움이는 골수가 고장이 나서 이상한 백혈구가 생겼어. 일본 누나의 골수가 다움이 몸으로 들어가서 다움이의 것이 된다면, 좋은 백혈구를 만들어낼 수 있지. 그때까지 있어야 한단다.”
의사 선생님은 그러면서 삼주일은 걸린다고 했어요.
삼주일. 21일. 504시간.
수술은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힘들지도 않고 오래 걸리지도 않구요, 주사 맞는 것보다 간단하대요. 내 가슴에 뻥 뚫어놓은 히크만 도관으로 골수를 한 방울씩 흘러보내면 끝난다나요.
문제는 수술 다음부터겠죠. 무지무지 아프고 힘들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아빠도 의사 선생님도 바로 그게 걱정이랍니다.
하지만 난요, 잘해낼 자신이 있어요. 아빠는 매일매일 말하고 있답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구요. 결심하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이번에는 꼭 이기고 말 거라구요. 아빠를 다시는 슬프게 만들지 않겠어요.
건강해져서 퇴원할 날만 생각하기로 했어요. 다른 생각을 하면 괜히 골치만 더 아프죠.
아빠 손 잡고 사락골에 가는 날, 흰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눈을 밟아본 적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해요. 사락골에는 눈이 오면 지붕까지 쌓인대요. 문제없어요. 아빠랑 눈을 치우고 그 눈으로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면 될 테니까요. 사락골도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괜찮은 곳이에요. 은미를 못 봐서 탈이지만요.
간호사 누나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비닐 커튼 중간에 있는 둥그런 지퍼를 열고 체온을 잽니다. 한 시간쯤 전에 쟀을 때 38.4도였어요. 이번에도 38도를 넘으면 의사 선생님이 당장 달려올 겁니다. 난 주사 한방 각오해야겠구요.
간호사 누나가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말합니다.
“삼십칠 점 팔. 잘했어.”
잘했으면 상을 줘야 될 텐데 누나는 날 혼자 내버려두고 나갑니다. 난 또 별수없이 천장한테 말을 시켜봐야겠죠.
무균실에선 아빠랑 하루에 삼십 분밖에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 속이 상하지만 그래도 다행이에요. 중환자실에서처럼 아예 떨어져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빠는 언제든 유리문 밖에서 날 볼 수 있고, 나도 비닐 커튼과 유리문 너머로 아빠를 볼 수 있지요.
무균실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선 안돼요. 아빠가 날 보러 오기 전에는 아빠를 볼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당연히 아빠가 날 보러 와야 될 텐데, 아빠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요. 어제부터요.
오늘 아침에도 간호사 누나한테 아빠를 불러달라고 부탁했어요. 무균실에서 문 몇 개를 지나면 보호자 휴게실이 있고, 아빠는 항상 거기에 있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밥 먹을 때면 어느샌가 와서 유리문에 얼굴을 대고 있던 아빠랍니다. 밥 많이 먹고 힘내라고, 그렇게 날 마구마구 응원하기 위해서죠.
무균실에서는 멸균식이라는 이름의 밥을 먹어야 됩니다. 세상에 그렇게 맛없는 밥이 또 있을까요? 그냥 맛없는 정도면 참겠어요. 물 대신 소독약을 붓고 끓였는지 지독한 냄새가 나는 밥을 하루에 여섯 끼씩이나 먹고 있답니다.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하는 게 무균실의 규칙이거든요.
벌써부터 입 안이 걸레를 물고 있는 것처럼 너덜너덜 헐어 있어요. 구역질은 쉬지 않고 나구요. 멸균식 한 숟갈 먹고 한 번 토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고 아빠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숟가락… 먹지 않으면 병을 이길 수 없으니까 억지로라도 끝가지 먹어치웠죠. 하지만 어제 오늘은 반도 먹지 못했어요. 응원해줄 아빠가 없는 탓입니다.
어디로 간 거예요, 아빠. 지난번 말했던 중요한 일로 지방을 간 걸까요? 짧으면 나흘, 길면 닷새. 안돼요. 그렇게 오랫동안 날 내버려두면요, 백혈병을 이기겠다는 결심이 날아갈지도 몰라요. 아빠가 없으면 난 바보 멍청이가 되잖아요.
저녁때가 다 돼서야 아빠가 왔답니다.
소독 가운과 모자와 마스크를 뒤집어쓴, 달나라 여행을 떠나는 우주인 모습으로요.
누구든지 나를 만나기 위해선 우주인이 되어야 한답니다. 혹시라도 병균을 묻혀 들어오면 큰일이거든요.
처음엔 헷갈렸어요. 마스크와 모자 대문에 겨우 눈만 보이는데, 그 한쪽 눈마저 붕대로 가려져 있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아빠를 못 알아보겠어요? 반갑고 화딱지도 났지만, 무척 놀랐습니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아빠, 눈이 왜 그래요?”
“으응, 별거 아니다.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밖에 나가 있었단다. 미안해… 어제 오늘 잘 지냈니?”
아빠가 단청을 부리고 싶어한다는 걸 당장 알아차렸어요. 난 다시 물었죠.
“다쳤어요?”
“다치긴?”
“눈병이 났나요?”
“눈병은 나쁜 병균 때문에 생기는 거니까 다움이한테 올 수 없지. 한쪽 눈이 피곤해서 좀 쉬라고 붕대로 가려놓은 거란다… 그 동안 밥은 잘 먹었니?”
“금방 괜찮아지는 거예요?”
“그럼, 그렇고 말고.”
안심이 됐어요. 하지만 한쪽 눈만 보이니까 반쯤만 아빠 같았죠. 아빠를 진짜 아빠답게 만드는 건 바로 눈이었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난 지금 아빠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빠가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웃으며 묻습니다.
“아빠 얼굴이 이상하니?”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성호의 해적선 레고에 있는 애꾸눈 선장이 자꾸만 생각나요.
아빠의 얼굴에 콧수염을 그려놓는다면… 히히히,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어요.
“애꾸눈 선장 같아요.”
아빠는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만들어 대답합니다.
“그으래? 좋은 편이냐 나쁜 편이냐?”
“당연히 나쁜 편이죠. 애꾸눈 선장은 어차피 해적이거든요.”
아빠는 또 한쪽 눈으로 웃고는, 비닐 커튼의 지퍼를 열고 손을 내밉니다. 따듯해요.
아빠의 손은 언제나 따듯하지만 오늘 특히 더한 것 같아요.
“일본 누나 온 거 알아요, 아빠?”
“안다.”
“만나봤어요?”
“만났지. 다움이 사진을 보여줬더니 아주 잘생겼다고 하더라.”
“누나는 어떻게 생겼어요?”
“아주 예뻐. 하지만 마음이 더 예쁜 것 같더라.”
예쁜 건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이왕이면 마음씨 착한 누나의 골수가 내 몸에 들어오
길 바랐죠. 착하지 않은 사람이 남한테 골수를 줄 리 없긴 하지만요.
누나를 만나고 싶어요. 아빠는 여전히 안된대요. 하지만 누나가 사진을 갖고 있으면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게 어디예요? 앞으로는 누나의 사진을 보면서 누나를 위해 기도해야겠어요. 솔직히 누나의 얼굴을 모르니까 기도가 잘 되지 않았거든요.
아빠가 자꾸만 붕대로 가려진 왼쪽 눈 주위를 만집니다. 그때마다 오른쪽 눈을 찡그리고 있어요. 아빠 말대로 피곤해서, 사람도 피곤하면 자야 하는 것처럼, 푹 쉬라는 뜻으로 가려놓은 걸까요? 난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눈 말예요, 정말 괜찮아요?”
“조금 거북하구나. 애꾸눈 선장도 처음에는 아빠처럼 이랬을 거야.”
아빠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고는 윗입술까지 흘러내린 내 마스크를 코 밑으로 올려줍니다. 쓸데없는 걱정일랑 하지 말라는 뜻일 거예요.
“다움아!”
불러놓고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가 아빠가 말합니다.
“내일 수술 자신있지?”
“… 예.”
“큰 소리로 말해봐.”
아빠는 정말 애꾸눈 선장처럼 굴고 싶은가봐요. 난 씩씩한 부하 해적의 목소리로 소리칩니다.
“자신있습니다.”
“고맙다… 고맙다, 다움아.”
3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서서 수술실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째였지만 미동치 않았다. 생면부지의 아이에게 골수를 나눠주기 위해 수술실까지 들어간 미도리에 대한 고마움을, 그런 식으로나마 전하고 싶었다.
수술실 안쪽에는 미도리가 전신마취로 잠들어 있겠고, 이식팀 의사들은 분주히 손을 움직여 미도리의 엉덩이뼈에서 골수를 뽑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윽, 신음을 토해내며 그는 한 손으로 배를 감쌌다. 오른쪽 갈비뼈 아래를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엄습해 절로 허리가 굽혀졌다.
돌덩이를 삼킨 듯한 거북함으로 시작된 증상이 그제부터 통증으로 바뀌었다. 발병을 통보받은 지 고작 열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발각된 이상 암세포들이 총체적 공격에 나선 듯 하루가 다르게 고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민 과장의 예상대로 본격적인 마수를 드러냈는지도 몰랐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나왔다.
그는 허리를 펴고 간호사에게 진행 상황을 물었다. 채취는 끝났어요. 조금 있으면 이식팀이 나올 거예요. 간호사는 빠르게 말하고는 멀어졌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입원실에서 만난 미도리에게 그는 감사의 말을 표했다. 미도리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운 건 접니다. 진심으로요. 그 동안 망설이고 걱정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사실 전 이기적인 편이거든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앞으로는 누구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참 소중하구나 하는 생각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도 했답니다.”
그리고 미도리는 덧붙였다.
“제가 열 살 때를 생각해봤어요. 그땐 참 욕심꾸러기였어요.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꿈도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아이가 제 골수를 받아서 열 살짜리 욕심꾸러기로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는 아이가 미도리를 몹시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미도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미도리의 말 속에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미도리의 영혼 앞에서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괴감에 휩싸였다.
이틀 전 각막을 팔았다. 농사 지은 배추를 장에 내다 팔 듯 그렇게. 사십대 초반의 사내는 그의 각막으로 세상을 볼 것이었고, 그는 사내의 돈으로 아이의 병원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과연 그와 사내는 서로의 행운을 빌어줄 수 있을까. 그건 엄연한 거래였고, 게다가 세상이 금지하는 밀매였다.
민 과장이 수술실에서 나왔다. 그는 저린 다리를 끌며 민 과장에게 다가갔고, 그를 알아본 민 과장이 사뭇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
“내 평생 이번처럼 깨끗하고 좋은 골수는 처음입니다. 다움이에게 최고의 골수를 이식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민 과장에게, 수술실에 누워 있는 미도리에게.그가 수술실 입구를 쳐다보자 민 과장이 덧붙였다.
“필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채취 과정에서 섞인 지방, 뼈 조각, 세포 덩어리를 필터로 걸러내는 거죠. 끝나는 대로 곧바로 이식에 들어갈 겁니다. 도너 준비는 차질없겠죠?”
아이에게 혈소판을 공급해줄 헌혈자를 일컫는 것이었다. 이식된 골수가 생착해 혈액세포를 만들어낼 때가지 자주 혈소판을 공급해 주어야 했다. 이식 전 동일한 혈액형의 건강한 헌혈자 20명을 구해 놓는 것은 보호자의 몫이었다.
혈소판 헌혈자 구하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익히 알고 있는 송 계장이 나섰다. 제가 도울 일이 달리 뭐가 있겠어요. 송 계장은 인근 전투경찰 부대를 방문해 흔쾌히 헌혈을 약속받아두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 과장이 말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린 먼저 다움이한테로 가죠.”
민 과장이 앞장섰고 그가 뒤따랐다. 잰걸음의 민 과장 뒤를 좇는 게 쉽지 않았다. 자꾸 발을 헛딛는 느낌이었다. 이틀이나 지났건만 외눈에 아직 익숙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유리벽에 이마를 대고 무균실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제 이식을 받느냐고 성화를 부리더니 정작 중요한 시간에 잠이 든 모양이었다.
민 과장이 그와 나란히 서며 말했다.
“정 선생님 안색이 좋지 않아요. 이식이 끝나면 시간 내서 검사를 받아보세요. 다움
이야 돌봐주는 아빠가 있지만, 선생님 건강은 본인 스스로 챙겨야죠.”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민 과장이 말을 더 하려는 순간 이식팀이 우르르 다가왔다.
“잘될 겁니다. 안심해도 좋습니다.”
민 과장이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격려했다.
민 과장을 비롯한 이식팀이 무균실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가 눈을 떴다. 아이는 휘둥그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유리벽 너머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골수가 담긴 수혈백이 링거 거치대에 매달리고 히크만 도관에 연결됐다. 수혈백에서 골수가 한 방울 똑 떨어졌다. 시작이었다. 아이를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삶의 따듯한 양지로 이끌어낼 마지막 시도였다.
이 순간에 도달하길 얼마나 소원했던가. 오, 한 방울의 골수여, 아이의 쇠잔한 몸을 일으켜세우라.
살아오는 동안 그 무엇인가를 이토록 열렬히 갈망한 적이 있었을까. 한 방울 또 한 방울의 골수가 아이의 몸으로 흘러드는 것을 유리벽에 이마를 대고 외눈으로 바라보면서, 덜덜덜 두 다리를 떨면서, 예리한 칼날이 옆구리에 파고드는 듯한 통증을 이 악물고 참아가며,, 그는 거세게 타오르는 갈망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아버지였다. 이 순간 육신과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소멸해버린대도 후회를 남길 수 없기에, 그는 갈망하고 갈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민 과장이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확신을 불어넣으려는 의도겠고, 불
안에 떨 것 없다는 뜻이리라.
민 과장의 몸짓이 아니더라도 불안은 없었다. 마지막 기회였고, 실패로 돌아가면 끝인 줄 알았다. 아이에게나 그에게나, 모두. 그러나 그는 이상하리만큼 불안하지 않았다.
긴장하고 있었지만 불안함에서 비롯된 바는 아니었다.
외길을 걷는 사람은 달리 택해야 할 길이 없는 거였다. 불안한 얼굴로 뒤돌아보는 짓마저 무익했다. 오로지 확신으로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는 거였다.
이식팀이 아이의 침대가에 둘러서 있었고, 그들의 옆구리 틈새로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도 아이도 서로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이식팀이 움직여 시야를 가릴
때면 그도 아이도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를 찾아헤맸다.
아이는 간간이 그를 향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었다. 그때마다 그는 활짝 웃어야 한다고 다짐했건만 희미한 미소조차 선뜻 짓지 못했다. 아니, 외눈에선 끊임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넘쳤다.
감격의 눈물이었다. 아이가 달려온 기나긴 사투의 과정을 떠올린 탓이었다. 골수 이식이 아이를 살리리라. 그 믿음이 가져다 준 가슴 벅참이었다. 하지만 눈물을 들키기 싫은 그는 유리벽에 입김을 불어 브이 자를 아로새겼다.
성공 여부는 예후를 지켜봐야 할 것이었다. 이식된 골수가 아이의 몸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 생착의 순간까지 기다리는 일이 남았다. 빠르면 이주일 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거치대 위에 매달렸던 비닐팩을 걷어냈다. 이식은 끝이 났다.
잊었던 통증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는 배를 감싸며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이어 하나의 생각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그건 참으로 서글픈 자각이었다.
이것으로, 내 몫은 끝이 났는지도 몰라. 내가 아이를 위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지도…
4
이식 후 15일.
아이는 기나긴 고통의 터널 속을 걸어왔다. 이제 남은 것은 간명해졌다. 터널을 벗어나 빛 가운데로 가느냐, 되돌아 한층 깊어진 어둠을 향해 갈 것인가.
그 동안 항생제와 진통제와 영양주사와 혈소판 수혈이 숱하게 이루어졌다. 이식 전에 받았던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의 영향으로 구토와 설사와 두통과 관절통에 시달렸다. 이틀이 멀다하고 체온이 올랐고, 감염과 무관하게 광범위한 항생제가 투약되었다. 입 안이 헐고 식도가 유착돼 계속해서 영향주사를 공급받았다.
이식 사흘째부터 기도폐쇄 증산이 나타났다.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이었다.
기관지삽관술로 폐에 직접 산소를 공급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말은 물론 소리내어 울 수도 없었다. 그나마 위안은, 골수 이식 환자의 절반 이상이 겪는 정맥폐쇄 질환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이는 피곤과 무기력 때문에 물에 젖은 자루처럼 축 늘어진 채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고통은 아이의 육신을 극한 대까지 몰고 갔고, 아이는 저항할 의욕마저 상실한 듯했다. 동물적 본능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는 아이의 동물적 본능에 호소하며 이식 성공을 초조하게 기다렸다.삼십 분으로 정해져 있는 면회 시간과 무관하게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무균실에서 지냈다. 민 과장의 배려였다. 아이의 투병 의지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거나, 무균실 유리벽에 이마를 대고 한량없이 아이를 넘겨다보는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때문일 거였다.
아이가 말을 할 수 없게 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아이가 알아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아버지 없이 살아가야 할 아이였다. 자신의 뿌리에 혼미해 하며 안타까워했던 그였기에, 훗날 아이가 막연한 기억으로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기억이 가닿을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했다. 아이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가벼운 근력 운동을 시켜가면서.
문득문득 그는 머리맡에 앉은 자식에게 유언을 남기는 아버지의 참담한 심정에 빠져들기도 했다. 한편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것으로 사랑의 고백을 대신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떤 대목에선 목이 메었다. 어떤 기억에 이르러선 슬며시 미소짓거나 한숨을 토해냈다. 어느 쪽이든 그는 대체로 침착하고 상세하게, 과장하거나 구태여 덜어내는 일 없이 이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퀭한 눈빛이었지만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식한 지 열흘이 지나면서 아이는 점차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아이는 조금씩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제 아이를 괴롭히던 기관지삽관을 마침내 제거한 직후였다.
“다움아, 갑갑했지? 이젠 말해도 된대. 아빠한테 무슨 말이든 해봐. 먹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걸 말해면 아빤 더 좋구.”
그러나 아이는 그의 요구와는 달리 뜻밖의 첫말을 토해냈다.
“아빠 눈… 아직도… 아… 파요?”
아이는 붕대로 가려져 있는 왼쪽 눈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아이를 위해서라면 나머지 눈마저 뽑아낼 수 있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나 아이의 그 물음이 가슴 저리도록 고마웠고, 병든 육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간암을 통보받은 지 27일.
암세포는 하루가 다르게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체중은 저울에 올라설 때마다 바람이 빠져나가는 풍선처럼 줄어들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왔다. 특히 오른쪽 갈비뼈 아래의 통증이 심했고, 진통제를 한 움큼씩 삼켜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남은 삶을 하루라도 더 연장하려면 항암 치료를 받아야 옳았다. 그러나 그 하루의 연장을 위해선 아이와 줄곧 떨어져 있어야 하리라. 또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부끄럽게 마련한 돈은 여진희에게 진 빚을 감고도 절반 이상 남아 있었고, 홍 사장에게서 뒤늦게 1천만 원이 입금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일지 모를 아이의 치료비로 충당해야 할 몫이었다. 단 한푼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생착을 확인하는 그때까지만이라도 육체적으로 버텨내길 소원했고, 그는 지금 무균실
에서 혈액 검사와 세포유전학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이는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었다. 이쪽 길을 가리키면 삶이고, 저쪽 편으로 가라면 죽음이었다.
그는 비닐 커튼으로 차단된 침대 위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잘된 일이었다. 숨막히고 가슴 졸이는 순간은 그 혼자만으로도 족했다.
유리벽을 스쳐지나는 민 과장을 발견하고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기우
뚱거리더니 바닥에 넘어졌고, 어렵사리 잠든 아이가 반짝 눈을 떴다.
무균실의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민 과장이 깨어 있는 아이를 확인하고 돌아선다면 끝이었다. 그러나 민 과장은 아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아랫입술을 힘주어 깨물고는 민 과장의 눈을 쏘아보았다.
“중성백혈구 수치 육백, 혈소판 이만 오천!”
민 과장의 목소리가 깊은 동굴 속에서 울려퍼지는 메아리인 양 들려왔다.
6백과 2만 5천.
그는 두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혈액검사 결과 중성백혈구 수 5백과 혈소판 2만을 나타낼 때, 생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는 그 한계 수치를 뛰어넘고 있었다.
민 과장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성공입니다. 생착된 거라구요. 세포유전학 검사에서도 확인됐습니다.”
아, 아이는 죽음의 음침한 그림자로부터 벗어난 거였다.
민 과장을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지르고 노래하고 춤춰도 좋았다. 정숙과 절대안정을 요하는 무균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뭐랄 사람이 없었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길고 고단한 길을 걸어온 셈이었다.
천천히, 그는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반쯤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 과장의 목소리가 등을 넘어 들려왔다.
“아빠한테 하는 말 다움이도 들었지? 일본 누나의 골수가 다움이 몸에서 잘 자라고
있는 것이 확인됐단다. 이제 다움이는 아무 걱정없다. 곧 무균실에서도 나갈 수 있을
거란다.”
뚝, 아이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비닐 차단막을 열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 다움아, 내 아들아, 널 좀 안아보자.”
민 과장과 구내 식단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게 정오가 막 지났을 때였으니 꼬박 두 시간째 등나무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셈이었다.
바람이 불든 말든 낙엽이 지든 말든, 그건 그가 아랑곳할 바가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남자이길 원했다. 하많은 망설임과 갈등을 접어두고 가야 할 길을 가고 싶었다.
오후 두 시 십분. 프랑스 시간으로는 오전 여섯 시 십 분.
마지막 순간까지 외면하고픈 시간이, 그러나 거침없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메모지의 번호를 확인하며 민 과장의 말을 떠올렸다.
“그 동안 프랑스에서 다움이 상태를 묻는 전화가 자주 왔었습니다. 생착에 성공하면 연락해주기로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정 선생님께서 직접 하시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소아암을 다루다 보면 이런저런 일을 경험합니다. 아이로 인해 갈등하고 다투는 일도 있지만 아이 때문에 화해하고 재결합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선생님의 사정을 제대로 알진 못하지만, 이번 이식 성공이 두 분에게도 좋은 결과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움이의 회복을 위해서도 그렇구요.”
화해, 재결합? 이미 무효화되었다는 사실을 구태여 밝힐 필요는 없었다. 설혹 아내가 되돌아와 손 내민다 해도 이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지나간 과거조차 제대로 정리하고 떠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쨌든 아내가 민 과장에게나마 아이의 상태를 자주 물었다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아니, 진심으로 고마웠다.
핸드폰의 신호음이 한없이 이어지다가 뚝 그쳤다.
– 알로?
“여보세요?”
그와 아내 사이의 거리만큼 광막한 유라시아 대륙의 이편과 저편이었다.
웬일이죠? 아내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그러나 싸늘하게 물었다. 그는 오른쪽에서 왼편으로 핸드폰의 위치를 바꾼 뒤 말했다.
“이른 시간에 미안해. 잘 지냈어?”
– 다움인 어때요?
“이식한 골수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 성공이야.”
– 정말예요?
“당신이 기뻐할 줄 알았어. 지금은 회복 치료를 받고 있어.”
– 합병증은 없나요?
“없어. 하지만 있어도 대수롭지 않을 거라는군. 그리고 합병증을 한 차례 앓는 편도
괜찮대. 그래야 재발하지 않는다니까.”
저편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안도의 한숨이며 기쁨의 표시라고 그는 이해했다.
“당신이 와줬으면 좋겠어.”
오 초쯤 아내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움이가 당신을 보고 싶어해. 그리고…”
떨지 말자, 더듬지 말자, 한숨짓거나 애달파하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를 격려하고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많이 생각해봤는데, 아이는 역시 당신이 맡는 게 좋겠어.”
–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그편이 아이를 위하는 거 같아. 당신도 아다시피 난 내 몸 하나 추스르는 것도 버거운 빈털터리야. 이런 내 곁에 있어봤자 장차 아이 꼴이 뭐가 되겠어. 당신이 아이의 장래를 맡아줬으면 좋겠어. 전적으로.”
– 거짓말이죠? 날 떠보려는 말이죠?
진실은, 그러니까 이거야. 내가 죽는다는 것. 그래서 아이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 아이를 내가 겪었듯 고아원으로는 보낼 수 없다는 것. 엄마인 당신이 아이를 잘 지켜주길 바라는 것. 이 정도가 진실이야.
“부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줘.”
– 갑자기 생각이 변한 이유가 뭐죠?
“당신이 말한 그대로 아이는 나의 전유물이 아니잖아. 따라서 내 욕심만 내세울 수는 없지… 하여튼 서둘러 와줬으면 좋겠어.”
– 한 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하세요. 그 동안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우리 그이랑 상의도 해야겠구요. 그러지 말고, 내가 연락할 테니 아예 전화번호를 가르쳐줘요.
전화를 끊고, 그는 등나무의 성근 가지를 무연히 바라보다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를 애타게 찾아헤맨 적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던 대였다. 아버지에게 항의하고 싶었다. 어떡하든 여기까지 내 힘으로 살아왔어요. 그러나 어디에도 아버지의 존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들을 파출소 앞에 남겨놓고 절름거리며 멀어지던 아버지의 심정.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용서할 수는 있을 듯했다. 아버지로선 당신의 말대로 어쩔 수 없었으리라.
아이를 남겨두고 멀어져야 하는 지금의 그처럼. 아, 훗날 아이가 지금의 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용서해줄 수는 있을까.
삼십 분쯤 흘러 전화벨이 울렸다.
– 암만 생각해도 당신의 저의를 모르겠어요. 혹시 여진희와 결혼할 건가요?
여진희는 이틀에 한 번씩 그를 찾아왔다. 때로는 치료받을 것을 설득했고, 그러다 봇물이 터지듯 화를 냈고, 정말 이렇게 죽고 말 거냐며 소리내어 울었고, 또 어느 날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 대답이 없는 걸로 봐서 사실인가보죠? 여진희가 아이를 못 맡겠다고 했나요?
“좋을 대로 생각해.”
– 어쨌든 좋아요. 아이를 맡겠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아니, 당신한테도 조건이 있을 테니까 먼저 말해봐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굳이 조건을 말하라면…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아끼고, 더 많이 이해하는 엄마가 되었으면 해. 그뿐이야.”
– 노력하죠. 대신 당신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각서를 준비하세요.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각서 말예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 이런 일일수록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차후에도 뒷말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만 그게 필요한 거라면, 그래서 당신이 안심하고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쓰겠어.”
5
그제 무균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왔습니다.
일본 누나의 골수가 내 몸 앞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는 뜻이죠. 내 마음속 기쁨도 자크의 콩나무처럼 쑥쑥 커지고 있어요. 아빠도 그럴테구요.
아빠는 어제부터 나에게 걷는 연습을 시키고 있습니다. 처음엔 한 발작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어느새 병실 한 바퀴를 아빠 도움 없이 돌 수 있답니다. 1인실이라 스무 발짝도 되지 않지만 그게 어디예요?
무균실에 있을 때는 무균실 밖으로 나가는 게 소원이었죠. 하지만 이제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고 싶어요. 아빠도 내 마음이랑 같겠죠. 그래서 열심히 날 훈련시키고 있는 겁니다.
아빠가 의자에 앉아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빠도 아직도 애꾸눈 선장 신세랍니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더니 벌써 한 달이 돼가요. 난 정말 걱정됩니다. 붕대를 떼내 아빠의 눈이 얼마나 아픈 건지 확인하고 싶어요.
아빠가 깊이 잠들면 한 번 봐야겠어요.
“다움이한테 해줄 이야기가 있다.”
아까부터 아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아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습니다. 아마 어젯밤 어디에서 이야기가 끝났는지 까먹은 모양이에요.
“갓난아이인 나를 처음 안아본 이야기까지 했어요, 아빠.”
사람들은 모두 아빠를 꼭 빼닮았다고 했지만 아빠는 그냥 신기하고 가슴이 막 떨리기만 했대요. 그렇지만 금방 알게 됐다고 했어요. 그날이 아빠가 살아온 모든 날 중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는 것을요.
“다움이는 똑똑하니까 아빠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거다. 지금부터 아빠 말대로 해야 한다.”
갑자기 아빠의 얼굴이 화난 사람처럼 변합니다. 목소리는 호두 껍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딱딱하구요.
“엄마가 오늘 저녁에 온다.”
“… 왜요?”
“널 보고 싶어서, 널 사랑하니까 오는 거다.”
“아뇨.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어째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엄마가 아주 보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특히 무균실에 있는 동안 저절로 엄마 얼굴이 생각났어요. 무균실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백번도 더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야 나타나겠다구요? 속 보여요.
“엄마는 나빠요. 엄마는요, 날 버렸어요. 아빠한테도 그랬구요.”
“그렇지 않아. 엄마는 누구도 버리지 않았다. 엄마를 버린 건 바로 아빠다. 엄마는 처음부터 너와 함께 살고 싶어했지만 아빠가 반대했다.”
“아빠, 나 졸려요. 그만 자야겠어요.”
난 두 눈을 힘껏 감아버렸어요. 그러면 알 것이지, 아빠는 또다시 말합니다.
“아빠가 왜 다움이를 데리고 사락골 같은 깊은 산속에 들어갔을까. 그 때 아빠는 다움이가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널 포기했단다. 하지만 엄마가 방법을 찾아냈다. 그래서 넌 엄마 덕분에 다시 살아난 거다.”
거짓말입니다. 아빠는 새빨간 거짓말로 날 속이고 있는 거라구요. 좋아요. 날 속일 테면 속여보라죠. 끝까지 안 넘어가면 될 테니까요.
“엄마와 만나면 지난번처럼 엄마를 실망시켜선 절대로 안된다. 엄마한테 친절해야 한다. 엄마가 널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엄마를 사랑해라. 그리고… 앞으로는, 앞으로는 엄마와 살아라.”
“아빠!”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어름들은 자주 기가 막힌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어요. 기가 탁 막히니까 입도 저절로 막혀버렸어요. 아무리 기가 막혀도 눈물은 나오는 모양이죠?
난 팔뚝으로 눈물을 닦아냈고, 아빠는 날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합니다.
“엄마는 부자니까 다움이가 해달라는 건 모두 들어줄 거다. 프랑스에 가서 편하게, 하고 싶은 것 맘껏 하면서 살아라.”
엄마가 쪽지에 썼던 대로 아빠의 마음이 변했을까요. 그래서 날 엄마한테 보내기로 한 걸까요. 아빠는 날 무슨 장난감으로 착각하고 있는가봐요. 놀다가 싫증이 난 장난감을 남한테 주는 것처럼요.
“아빠 말대로 해라. 아빠랑 사 년 동안 살았으니까, 엄마와도 그만큼은 살아야지. 그래야 공평한 거란다.”
난 틀림없이 꿈을 꾸고 있어요. 꿈은요, 현재와는 반대잖아요. 아빠는 나랑 영원히 살고 싶으니까 꿈속에서 반대로 나오는 거예요. 끔찍한 꿈에서 깨어나려면 악을 쓰는 수밖에 없어요.
“싫어요, 싫어!”
“싫어도 해야 한다.”
살기 위해선 싫어도 약 먹고 주사 맞아야 하는 것처럼 싫어도 엄마한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빠 정말 바보예요. 이제까지 엄마 없이도 우리끼리 잘 지냈는데, 아빠는 왜 자꾸 이상한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요?
“그냥 팍 죽어버릴 걸 그랬어요. 일본 누나는 뭐하러 나타나서 나한테 골수를 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아빠입니다. 내 눈은 눈물 범벅이라 아빠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아빠는 가슴이 뜨끔했을 거예요. 쌤통이에요. 난요, 아빠를 놀라게 해줄 방법을 백 개쯤 알고 있답니다.
아빠가 날 떠보려고 괜히 하는 말인지도 몰라요. 술 취한 날처럼,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심술을 부리고 있는지도요.
“아빠, 사랑해요. 아주 많이요. 나한테는 아빠만 있으면 돼요.”
“… 아빠는 이제 지쳤다. 그래서 널 돌보는 게 몹시 힘들구나. 너 때문에 그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빠도 이젠 아빠의 일을 하고 싶다.”
“힘든 건 다 지나갔잖아요. 좋은 일만 생길 거구요. 아빠는 아빠 일을 하면 되잖아요.
앞으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척척 할 수 있어요. 아빠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신경질로 안 부리구요, 아프지도 않구요.”
아빠는 내 침대를 창 밖으로 날려보낼 것처럼 깊고 깊은 한숨을 내십니다.
“아빠 말대로 지난번처럼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친절하게 말하구요. 그러
니까 날 엄마한테 아주 보내지 말아요. 약속해요.”
나는 아빠한테 새끼손가락을 내밉니다. 아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섭니다.
“이 녀석아! 아빠가 하라면 해야지,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아? 아빠는 더 이상 너랑 같이 지낼 수가 없다고 했잖아. 엄마한테 안 가겠다면, 그럼 고아원으로나 갈래? 그래서 아빠처럼 매일 매나 맞고 구박이나 받을래?”
화낼 줄 모르는 아빠가 마구 화를 냅니다.
난 겨우 말합니다.
“아빠, 머리가 너무 아파요. 의사 선생님 좀 불러주세요.”
6
“안녕하세요, 엄마. 보고 싶었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해 아내를 감격시켰다. 아빠의 생각을 바꿔놓으리라는 아이의 믿음을, 도대체 어쩔 것인가. 이별의 이유를 아이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하란 말인가.
살고 싶었다. 어떡하든 살아남아 아이를 바라보고 만지고 얼싸안고 싶었다. 고통과 가슴 저림만으로 한세상 살아가게 되더라도 아이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죽음은 이미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엄마와 살라며 아이의 등을 떼민, 차마 슬픔을 가눌 길 없던 그 아침이었다. 그는 화장실 입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누군가 응급실로 옮겼고, 문맥압이 올라가 식도정맥에서 출혈을 일으킨 거라고 했다. 다행히 출혈을 멎었지만 한동안 응급실 신세를 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민 과장에게 발각됐다. 간암에 걸린 절친한 친구가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사실까지.
당장 입원을 지시한 민 과장이었고, 그는 응급실마저 서둘러 벗어났다. 민 과장은 그의 팔을 끌고 자신의 연구실로 데려갔다. 한참동안 입원 문제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체념한 듯 민 과장이 말했다.
“그 몸 갖고 어떻게 아이를 돌봤는지 나로선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군요. 고통이 극심하시죠?”
그는 웃고 말았다. 그러나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이를 악문 탓에 어금니가 주저앉아 있었다. 어쨌든 아이가 아내를 따라 프랑스로 가는 그 순간까지는 견뎌내야 할 몸뚱이였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고 이제 겨우 안심할 만하니까… 어쩌자고 자신 돌보는 일에는 그렇게 소홀했습니까?”
“아이는 물론이고 아이 엄마한테도 절대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는 거듭 다짐을 받은 연후에 연구실을 나왔다. 그의 뒤꼭지에 대고 민 과장이 말했다.
“참기 힘들면 오십시오. 모르핀이라도 놔드릴 테니까요.”
죽음, 그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막막한 세상 가운데 아이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사무치도록 두려웠다. 아이에게 이별의 이유조차 댈 수 없는 게 서럽고 안쓰러웠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부디 아이가 마음 둘 곳을 잃고 허탈해 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상처에 새살이 돋듯 아이가 아버지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원컨대 아이의 텅 빈 가슴을 아내가 온전히 채워주길…
귀국 직후 아내는 말했다.
“영원히 나와 함께 살 아이예요. 그런데 언제까지 아이가 당신만 쳐다보게 만들 거죠? 생각해봐요, 그게 아이한테 무슨 득이 되겠어요? 어차피 아이를 맡겼으면 분명히 매듭져 줘야 할 부분이 아닌가요?”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지?”
“정을 끊으세요. 특히 아이가 당신에 대해 품고 있는 정을 말예요. 힘든 일인 줄 알아요. 하지만 무엇이 아이를 위하는 길인지 생각해주길 바라요.”
아내의 말을 적절했다.
아이의 곧 새로운 세상과 대면할 것이었다. 세상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정 때문에, 아내와 새아버지에게 천덕꾸러기가 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걸려 넘어질 돌뿌리인 기억 속의 아버지는 지워버리는 편이 마땅했다. 당장은 상처가 되리라. 하지만 그편이 옳았고, 그편이 작은 상처였다.
아이를 모질게 대해야 한다는 것. 아이의 가슴에 못질을 해대는 말. 엉엉 울어대는 아이를 꾸짖고 윽박지르는 짓거리. 그건 죽음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었다. 백번을 고쳐 죽는 것보다 더 잔인한 고통이었다. 붙잡고 매달리는 보듬어야 할 아이의 등을 번번이 아내쪽으로 떼밀었다. 목이 메이도록 사랑의 말을 남겨도 부족할 터인데 냉담함으로밖에 달리 그 사랑의 속내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아이는 아빠와 삼게 해달라고 애걸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잠들어야 비로소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아이였다. 잠든 걸 확인하고서도 선뜻 손을 내밀어 아이를 만질 수 없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서둘러 냉정한 얼굴로 돌아서야 할 그였다.
아내가 그를 병실 밖으로 불러냈다.
“일주일 후에는 프랑스로 돌아갈 거예요.”
아, 그는 눈먼 자가 낯선 길을 가듯 더듬더듬 말했다.
“그렇게, 그렇게 빨리 서둘 필요까지는 없잖아. 아직 아이가 완전한 것도 아니구.”
“주치의와 충분히 상의해서 결정한 문제예요.”
아내는 똑똑 끊어지는 말투로 말해놓고 핸드백에서 흰 봉투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골수 이식을 받는 동안 들어간 병원비에다 좀더 보탰어요. 아이를 맡은 이상 병원비야 당연히 내 책임이죠.”
“이러지 마, 제발.”
“다른 뜻은 없어요. 그저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서예요. 그편이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요.”
“원하는 대로 각서도 썼고, 원하는 대로 아이한테 냉정하게 굴었어.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해 확실히 하겠다는 거지? 날 더는 비참하게 만들지 마.”
“예전이나 지금이나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예요. 간단하게 생각해요. 비참해 할 까닭도, 자존심 내세울 일도 아니잖아요?”
아내에게 되묻고 싶었다.
어떻게 마련한 돈인지 알아? 부도덕과 타협했고, 양심을 팔아치웠다구. 순수한 뜻으로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들을 욕되게 했어. 하지만 나로선 그 수밖에 없었지. 그게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아버지의 마지막 사랑이었어. 그런데 당신이 이제 와서 무의미한 짓으로 되돌리려 하고 있단 말야.
“받은 걸로 하겠어. 대신 그 동은 당신이 보관했다가 아이를 위해 써줘.”
“아이를 최고로 키울 만큼의 돈은 충분히 있어요.”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의 계획대로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어. 최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최고의 인생이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닐 테구.”
“최고의 위치에 서보지 못한 사람은 최고의 인생에 대해 논한 자격이 없어요.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두고 무턱대로 불행하리라. 단정짓는 것처럼요. 그리고 아이는 내가 알아서 키워요.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죠. 내가 확실하게 하겠다는 것은, 지금처럼 당신이 간섭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이유 때문예요.”
“앞으로는 간섭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거야. 약속할 수 있어. 생각해봐, 당신과 약속해놓고 어긴 적이 있는지. 그리고 이번 치료비까지는 내가 마련하게 해줘. 나 돈 있어, 지나치게 많이. 나도 아이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되잖아. 지난번 당신이 했던 말이야. 그때 당신 심정이 바로 지금 내 마음이야. 부탁해.”
아내는 잠시 골똘한 낯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좋아요. 정히 싫다면 할 수 없죠. 하여튼, 지금 이 순간부터 아이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해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잖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별이야 짧으면 짧을수록 좋을 거 아닌가요?”
“일주일은 짧은 시간이야. 절대 긴 시간이 아니라구.”
“어차피 아이를 포기한 건 당신 쪽예요. 당신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한 거라구요. 그리고 아이가 당신을 쳐다볼 대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 이젠 아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아이를 진정으로 돕는 일이에요.”
7
다시 무균실에 갇혔습니다.
그제부터 열이 오르고 계속 기침이 났어요. 감기에 걸린 거죠. 며칠 전 병실이 너무 덥다고 엄마가 히터의 구멍을 막아놓았기 때문이에요. 아빠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아빠는 의사 선생님만큼 내 병에 대해서 척척박사니까요.
감기는 날 죽일 수도 있어요. 내 몸에는 감기를 옮기는 세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부족하거든요.
하지만 겁나지 않아요. 옛날처럼 아픈 것도 아니구요. 이대로 팍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주욱 하고 있답니다. 옛날처럼 심하게 아팠으면 해요. 내가 죽을 정도로 아프다면 아빠는 반드시 날 보러 오겠죠. 아빠는 날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요.
아빠는 가짜 아빠가 되기로 결심을 했나봐요.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됐거나요. 그래서 소리지르고 화를 냈던 거겠죠. 말을 걸지도, 손을 잡아주지도 않구요. 아빠는 내가 지겹댔어요. 날 보고 있으면 울화통이 터진다고 했어요. 왜 갑자기 내가 지겨운 아들이 되었을까요. 난요, 착한 아들은 아니지만 아빠를 울화통 터지게 만드는 아들도 아니랍니다.
매일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 어서 빨리 아빠가 정신 차리게 해주세요. 시간이 없어요. 난 곧 프랑스로 가야 돼요. 그땐 아빠도 어쩔 수 없어요.
기도를 하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요. 내 자신이 아주 불쌍한 아이가 된 기분예요. 아빠는 더 많이 그렇구요.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뿐이고,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뿐이죠.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언제까지나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건 바로 아빠예요.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잊어버렸을까요.
내가 없어지면 아빠는 어떻게 될까요. 아빠 말대로 속이 시원할까요.
자꾸만 가시고기가 생각납니다.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죽어가는 아빠 가시고기처럼 될지도 몰라요. 내가 엄마를 따라 프랑스로 가게 된다면요, 아빠가 쬐금만 슬퍼했으면 좋겠어요. 쬐금만 슬퍼하면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엄마가 말했어요. 아빠는 진희 고모와 결혼할 거래요. 진희 고모는 아빠랑 둘이서만 살고 싶어하구요. 진희 고모와 사는 데 방해가 되니까 아빠를 위해서도 내가 떠나야 한다나요.
엄마의 말이 전부 다 사실은 아닐 거예요. 지난번 왔을 때도 엄마는 프랑스에 가서 살자고 했어요. 그댄 아빠의 결혼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아빠가 빈털터리라서 날 돌볼 수 없댔어요. 그리고 날 아주 유명한 화가로 만들고 싶다는 말도 했구요.
진짜로 진희 고모가 날 방해꾼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내가 떠나는 게 아빠를 위해서 잘하는 일일까요.
한 가지는 분명해요. 아빠가 꼭 결혼을 해야 된다면 진희 고모를 고른 건 잘한 일예요. 진희 고모는 아빠를 무지무지 사랑하거든요. 아빠도 진희 고모를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진희 고모는 엄마처럼 아빠를 버리는 일이 없겠죠.
어쨌든 진희 고모를 만나볼 생각입니다.
이틀에 한 번씩 찾아오던 진희 고모는 엄마가 온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요..
아빠와 비밀 작전이라도 짠 것처럼요. 난 벌써부터 고민중이랍니다. 어떻게 진희 고모를 만날 수 있을까, 하구요.
먼저 진희 고모한테 엄마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래요. 우리 아빠랑 결혼할 건가요?
사실이라면 진희 고모와 살고 싶다고 말해보겠어요. 내가 방해꾼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말하구요. 그래도 안된다면, 아빠를 많이 사랑해달라고 부탁할 거예요.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째 아빠를 만나지 못했어요. 아빠는 아예 꼭꼭 숨어버렸나봐요. 아니, 지금도
아빠는 어디선가 날 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내가 아빠를 보고 싶은 것처럼 아빠 마음도 같을 거예요.
그래요. 아빠가 날 새까맣게 잊어버린 건 아녜요. 나한테 올 수가 없을 뿐예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요.
그제 아빠는 엄마를 통해 내 물건을 보내왔어요. 사락골에서 쓰던 물건들이죠. 읽지 못했던 ‘드래곤 볼’ 여섯 권, ‘대항해시대’ 시디, 백화점에서 샀던 가을옷, 은미한테 주지 못한 코스모스 꽃핀, 내가 만든 조각들… 그리고 상자 하나 가득 주목이 들어 있었어요.
아빠는 내가 심심할까봐 그것만 걱정인 모양예요. 진짜로 걱정할 게 뭔지도 모르는 멍텅구리 아빠 때문에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드래곤 볼’ 38편을 읽을까, 조각을 할까.
하지만 난 계속해서 유리벽 밖을 바라보기로 했어요. 혹시 아빠가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하면 큰일이니까요. 그렇지만 간호사 누나와 의사 선생님만 왔다갔다하고 있어요. 엄마도 코털 아저씨도 아침 삼십 분 면회후로는 보이지 않구요.
아빠는 언제나 유리벽에 얼굴을 대고 날 바라보곤 했어요. 밥을 먹을 때도, 주사를 맞을 때도, 자다가 개어나도 거기 틀림없이 아빠가 있었죠. 아빠 토가 유리벽 대문에 돼지코처럼 변하는 줄도 모르구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애꾸눈 선장처럼 한쪽밖에 없는 눈으로 윙크를 했답니다.
유리벽 밖에 의사 선생님들이 떼거지로 나타납니다. 저녁 회진 시간이에요. 한바탕 시끌벅적합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잔뜩 늘어놓구요. 오 분도 안되는 회진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의사 선생님들이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의사 선생님들 중에서 대장은 과장 선생님이죠. 맨 처음 입원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날 돌봐주는 건 과장 선생님뿐예요. 다른 선생님들은 후딱후딱 잘도 바뀌죠.
과장 선생님, 하고 부른 뒤에 나는 죽 다른 선생님들을 쳐다봤어요. 과장 선생님이 자네들 먼저 다음 병실로 가 있지, 라고 한 뒤 말합니다.
“다움이가 나한테 할말이 있나보구나.”
“… 나 많이 아프죠?”
“그렇지 않단다. 다움이 몸 속의 백혈구는 거의 정상이야. 그러니까 감기 정도는 곧
물리칠 수 있다. 내일 모레쯤 무균실에서 나가도 된다. 선생님이 약속하마.”
“아녜요. 많이 아픈 게 틀림없어요.”
“왜 그런 나쁜 생각을 하지?”
“우리 아빠는요, 내가 많이 아픈지도 모르고 있어요.”
왜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걸까요. 마음이 아프다고 우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고 아빠가 가르쳐줬는데도, 난 왜 여자아이들처럼 울기부터 할까요.
“과장 선생님은 우리 아빠랑 친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아빠한테 말해주세요. 다움이가 무지무지 아프다구요. 아파서 죽게 됐다구요.”
8
세상을 사랑하고,
또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다움이가 되길 바란다. – 아빠가
그는 막 세상에 나온 시집 내지에 그렇게 썼다.
그게 그의 전부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적어보는 마지막 기원이었다. 먼 훗날, 아이가 한 편 두 편 시를 가슴에 담아둘 수 있을 즈음에야 그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리라. 그리고 자신을 프랑스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심정 또한 짐작하리라.
홍 사장의 의도대로 시집 표지에는 구름국화인지 금불초인지 분명치 않은 꽃 한 송이가 사뿐 올려져 있었다. 굴욕을 감수해가며 구민 시집이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떠나는 아이에게 건네줄 것이 생긴 셈이었다.
민 과장이 확인해준 바로는 아이는 내일 아침 퇴원할 거였다. 그는 매일 민 과장의 방을 찾았다. 모르핀을 맞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이의 상태를 민 과장의 입을 통해 듣지 않고선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아이는 감기와 이식 합병증인 피부 발진으로 무균실 신세를 졌다. 그러나 아이는 잘 견뎌냈고, 닷새 만에 무균실을 벗어났다.
이틀 전, 민 과장은 말했다.
“드디어 백혈구가 정산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완치입니다.”
아, 길고 막막하고 두려웠던 2년여의 투병이 끝난 거였다.
장한 아들이었다. 달려가 얼싸안고 등을 두드려주어야 마땅한 아들이었다. 오직 이날을 위해 애끓이며 살아왔건만, 그러나 만날 수조차 없는 아들이었다. 그저 망연히, 민 과장 앞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울었을 뿐이었다.
아이의 곁을 지키지 못한 날이 이주일이 흘렀다.
그 동안 사락골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떠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여관비보다 비싼 주차비를 물어가며 그레이스 안에서, 뼛속가지 파고드는 통증을 참아가며 아이의 병실을 올라다보았다. 행여 아이의 그림자라도 창가에 스쳐지날까 노심초사하면서.
수없이 아이의 병실로 뛰어 올라가고픈 욕망에 시달렸다. 그러나 어차피 아버지 없이 평생을 살아야 할 아이였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워, 이주일 동안 단련된 아이의 마음을 처음으로 되돌려 고통을 되풀이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 앞에 나설 수 없을 지경으로 몸뚱이가 망가져 있었다. 65킬로그램이었던 체중이 40킬로그램으로 줄었다. 복수가 차올라 숨쉬기조차 만만치 않았고, 눈동자까지 노랗게 변할 정도로 황달이 심했다.
민 과장은 만날 때마다 모른핀 맞을 것을 강요했다. 그는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 전신에 경련이 일어나고, 이를 악물어도 저절로 신음이 새어나오고,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2년이 넘게 아이가 겪었을 고통을 온몸으로 실감하였고, 단 한 차례의 모르핀도 맞을 수 없을 이유였다.
그랬다. 그는 아이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고통과 맞섰다.
아들아, 그 동안 네가 이렇게 아팠구나.
아빠는 몰랐다. 네가 아프다면 아픈 줄만 알았지, 그 고통의 깊이가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들아, 네가 이다지도 크나큰 고통 속에서 그 많은 날들을 보냈구나. 열 살배기 가녀린 몸으로 그 높은 고통의 산들을 어떻게, 무슨 수로 다 넘어왔니.
아들아, 미안하다. 아빠는 미처 몰랐다. 네가 아프면 그냥 대신하고픈 마음이었는데,
그 마음조차 네가 겪었을 고통 앞에서는 덧없는 것이었구나.
그는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 조수석에 놓은 노트를 집어들었다.
아이와 떨어져 있는 동안 정리한 노트였다. 한자 한자 적으며 참 많이도 울게 만든 노트였다. 거기엔 그가 알고 있는 아이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아이의 성격, 행동, 장점과 단점, 취미, 버릇,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
저녁 무렵 아내를 불러 노트를 건네줄 참이었다. 아내가 노트를 보고 아이를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이해했으면 하는 의도였다. 그리고 아내 자신의 듯보다 아이의 특성에 맞춰 판단하고 가르치고 사랑해주길 바랐다.
그는 허리를 낮춰 차창 밖으로 아이의 병실을 올려다보았다. 정오를 막 지난 햇살이 병실 유리창에 되비춰 눈을 찔러왔다.
오늘 반, 정확히 말하면 내일 새벽 세 시경, 병실에 갈 작정이었다. 아이는 잠들어 있을 테지만, 잠든 아이나마 마지막으로 보기를 원하고 또 원해왔다. 잠든 아이에게 침묵의 작별 인사라도 건네지 않고선 차마 눈감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아니 삼십 분쯤 아이를 바라보다 머리맡에 시집을 가만히 올려놓고 돌아나오리라.
핸드폰이 울렸다. 여진희려니 하고 받았더니 아내였다.
– 오늘 퇴원해요. 병원에서 곧바로 공항으로 갈 거예요.
“… 내일 아침이잖아?”
-퇴원 날짜야 내일로 되어 있죠. 오늘 밤 열 시 비행기예요.
그는 격렬한 두통 때문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살아온 모든 날보다 더 소중한 하룻밤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그마저 앗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 문제가 생겼어요.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예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안 가겠대요.
나로선 도저히 어쩔 수가 없네요.
억지를 부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속 깊고 어른스러운 게 탈인 아이였다.
– 지금 병원으로 와줄 수 없어요?
“…”
– 당신에게 힘든 일인지는 알아요, 하지만…
그는 아내의 말허리를 잘랐다.
“몇 시에 병원에서 나가야 하지?”
– 일곱 시쯤요.
병든 몸뚱이를 어둠 속에 묻어두기엔 적당히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각인될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병든 몰골일 수는 없었다. 그 몰골을 평생 간직하며 애달파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럼 정확히 일곱 시에 만나. 소아병동 뒤에 벤치가 있어. 거기에서 기다릴게. 아니, 당신은 올 것 없어. 아이만 보내. 잠깐이면 돼.”
그는 가로등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로 아이를 기다렸다.
아내와 통화한 뒤 민 과장을 만났다. 모르핀을 맞기 위해서였다. 아이와의 마지막 순간마저 고통으로 신음하며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모르핀으로 병든 몸을 가리진 못하리라. 하지만 숨이 턱턱 막혀 하고픈 말조차 못한 채 허망하게 아이를 더나보낼 수는 없었다.
한없이 더디 흘러가기를 고대했건만 시간은 계곡을 내려가는 거센 물살처럼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한낮의 태양이 맥없이 사라지는 것과, 황혼에 붉게 물든 서편 하늘과, 점령군처럼 쉽사리 몰려드는 어두움을 억울해 하며, 그는 소아병동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애오라지 바라보았다.
오후 한때 바람이 난폭하게 불었던 듯도 했다. 저물 무렵 등나무의 성근 가지에 몇 마리 새들이 날아와 수선을 떨며 날갯짓을 파닥였는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어스름의 하늘을 향해 푸우푸우 담배 연기를 뿜어대다 허적허적 멀어져간 듯도 했다.
소아병동을 돌아나오는 그림자 셋이 보였다. 둘은 멈춰섰고, 하나는 계속 움직였다.
아, 아이였다. 아이가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무치도록 그리운 아이건만,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매일 밤 꿈속에서 목이 쉬도록 불어본 아이의 이름이었다. 두 팔을 벌려 얼싸안던 기억에 한숨짓고 눈물 흘리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아이를 부르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그래, 너로구나, 내 아들이구나… 그렇게 낮게 되뇌었을 뿐이었다.
애타게 듣고 싶었던 아이의 목소리였다. 아빠, 그렇게 단 한 번만이라도 불리워지길 얼마나 소원했던가.
아이는 이제 거의 달려오고 있었다. 냉큼 두 팔을 벌려 품에 안고 볼을 부벼야 마땅한 아이였지만, 그러나 그는 미리 작정해둔 거리에서 냉정하게 말했다.
“거기 서라.”
아이가 엉거주춤 멈춰섰다.
“… 아빠, 보고 싶었어요.”
“아빠는 잘 지내고 있다.”
“… 불빛 때문에 아빠가 잘 안 보여요. 아빠 옆에 앉아도 돼요?”
“안된다. 그냥 거기 있어라.”
아이가 한 발짝 내딛던 발을 뒤로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 나는요, 오늘 밤에 프랑스로 떠나야 한 대요.”
“알고 있다.”
“비행기를 탈 거예요. 아빠도 알잖아요, 내가 미끄럼틀에도 못 올라가는 겁쟁이란 걸요.”
가고 싶지 않다고, 가지 않으면 안되냐고, 꼭 가야 하느냐고 아이는 묻지 않았다. 대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 모두를 호소하고 있었다.
“… 아빠를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썼어요.”
“엄마가 많이 속상했을 거다. 프랑스에 가서는 그러지 마라.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니 다움이가 알아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려라.”
“… 프랑스에 도착해서 아빠 핸드폰으로 전화해도 되죠?”
“안된다.”
“편지는요? 편지는 써도 되죠?”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아이의 눈에선 기어코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아이는 눈물을 감추려는 양 고개를 숙여 발치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그럼 아빠가 날 보러 올 거죠?”
“기다리지 마라.”
“그럼 아빠를 만나려면 사 년이 지나야겠네요?”
아빠와 사 년을 살았으니 엄마와도 그만큼 살아야 공평한 것 아니냐고 아이를 달랬었다. 그게 아이에겐 그나마 위안이었던 모양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이 땅에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말아라.”
“그렇지만 아빠, 스무 살이 되려면 십 년이나 남았어요.”
“십 년은 긴 세월이 아니다… 다시는 아프지 말아라. 넌 평생 아파야 할 것을 한꺼번에 다 아팠던 거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파선 절대 안된다.”
“…”
“할말이 아직 남았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신 소매로 눈물을 훔쳐낼 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비행기 시간에 늦겠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그만 엄마한테 가라.”
아이가 주머니에게 꽃핀을 꺼냈다. 은미에게 선물하겠다던 그 꽃핀이었다.
“진희 고모를 직접 만나서 주고 싶었어요. 아빠가 전해주세요. 진희 고모한테 잘 어울렸거든요. 진희 고모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그리고 아이는 다른 주머니에서 조각을 꺼냈다.
“아빠가 갖다준 주목으로 내 얼굴을 조각했어요. 혹시 아빠가 날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내일이라도 내가 보고 싶어지면… 난 아빠 조각이 있어서 힘낼 수 있지만 아빠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아이가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딜 기세였고, 그는 서둘러 말했다.
“거기 벤치에 있는 쇼핑백 보이냐? 그 옆에 놔둬라. 그리고 쇼핑백을 들어라. 노트는 엄마 주고 팩은 너 갖거라.”
꽃핀과 조각을 내려놓고 쇼핑백을 집어든 후, 아이가 말했다.
“아빠, 부탁이 있어요… 아빠 귀 말예요, 한 번만 만져보고 싶어요. 한 번만 만지게 해주세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이젠 됐다. 그만 가라.”
“… 아빠!”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 돌아서라.”
아이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고개를 숙이고 뒤꿈치로 바닥을 꾹꾹 눌러댔
다. 어서! 그는 단호하게 소리쳤고, 아이는 겁먹은 얼굴로 돌아섰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라… 턱을 들어라… 어깨를 쭉 펴라!”
언제나 이유를 묻던 아이였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납득하기 전까지는 고집을 부리던 아이였다. 그러나 아이는 순순히 그의 명령을 따랐다.
“됐다. 앞으론 그렇게 식식한 모습으로 살아라. 넌 이제부터 어른이다. 어른답게 생각하고, 어른답게 행동해라. 아이처럼 굴어선 안된다. 아이처럼 굴어선 살 수 없는 세상이다. 프랑스는 남의 나라다. 남의 나라에서는 더더욱 어른답게 살아야 한다.
그리 말하면서도 아이가 냉큼 돌아서길, 돌아서 자신의 품으로 달려와 안기길 필사적으로 원했다. 그러나 최후의 모진 말을 남기고 만 그였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게 얼마나 아이를 위하는 일이라고.
“아빠는 널 잊을 거다. 그러니 너도 아빠를 잊어버려라. 아예 아빠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라. 어서 가라. 절대로 돌아보지 말아라. 그냥 씩씩하게 엄마한테 달려가기만 해라.”
아이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울고 또 울면서, 아이는 조금씩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는 알고 있었다. 끝이었고, 그러므로 아이가 한 번쯤 돌아보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는 또 알고 있었다. 오랜 갈망과 안타까움과 애착의 띠를 이젠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아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가 소아병동을 돌아 완전히 사라진 다음, 그때까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두었던 자세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벤치 위에 엉금엉금 기어 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는 조각에 얼굴을 묻고 토해내기 시작했다.
잘 자라, 아들아.
잘 자라. 나의 아들아.
이젠 영영 너를 볼 날이 없겠지. 너의 목소리를 들을 길이 없겠지. 너의 따듯한 손을 어루만질 수 없겠지. 다시는 너를 가슴 가득 안아볼 수 없겠지.
하지만 아들아. 아아, 나의 전부인 아들아.
아빠는 죽어도 아주 죽는 게 아니란다.
세상에 널 남겨놓은 한 아빠는 네 속에 살아 있는 거란다.
너는 이 아빠를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겠지. 하지만 아빠는 언제가지나 너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거란다. 네가 지칠까봐, 네가 쓰러질까봐, 네가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설까봐 마음 졸이면서 너와 동행하는 거란다.
영원히, 영원히…
에필로그
응급실에 누워 있는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이미 죽음의 경계선 저쪽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당연한 노릇인지도 몰랐다. 이틀 전 아이는 떠났고, 인내해야 할 선배의 삶도 그렇게 끝난 셈이었다. 그럼에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선배였다.
“진희 씨, 우리 다움이가 잘 도착했을까?”
나는 도리없이 프랑스로 전화를 했다. 아이와 통화를 하고 싶었으나 아이의 엄마가 가로막았다.
“잘 도착했대요.”
“아무 일 없었대?”
“아무 일 없었대요.”
“높은 데를 아주 무서워하는 아이야.”
“괜찮았대요.”
“멀미는 안했는지 몰라.”
“안했대요.”
“… 그럼 됐어. 그럼 된 거야.”
선배는 사락골이라는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다움이의 주치의였던 민 과장이 반대했다. 간 조직이 파괴되어 출혈이 내비치고 있다며 사나흘 넘기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그러나 선배는 굳이 사락골에 가기를 원했고, 결국 모르핀을 맞고 병원을 떠났다.
나는 선배를 조수석에 앉히고 고속도로와 국도와 산길을 달렸다. 향리에 도착했을 때 분분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맞이하게 될 첫눈이 선배의 머리 위로 처연하게 내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돌아갈 것을 말하는 선배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생각했다. 선배는 죽겠고, 세월의 여울에 씻기면서 내 기억 속 선배는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매년 첫눈을 바라볼 대마다 선배를 그리워하리라는 사실을 나는 통렬한 아픔으로 받아들였다.
선배는 곧바로 사락골로 가지 않고, 더디고 힘든 걸음새로 폐교로 들어갔다. 모르핀을 맞은 타세 그나마 걸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선배는 폐교에 머물렀다. 거기에는 아이와의 즐거웠던 추억이 가득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선배는 교실 외벽 낙서 중에서 아이의 이름을 찾아내고는 한참을 울었고, 철봉을 어루만지며 또 그렇게 울었고, 교실에 들어가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교탁을 한 손으로 짚고 꺼억꺼억 소리내어 울었다.
아이와 한 달 동안 기거했다는 피 노인 집 방에 선배를 눕혔을 때, 첫눈은 폭설로 변해 내렸다.
“여기 처음 왔을 때, 겨울까지만 다움이가 살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그렇게 선배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각을 꼬옥 움켜잡은 채, 아이의 생의 순간순간들을 상세히, 마치 비디오 테이프를 슬로 모션으로 되돌리듯 기억해냈다.
투병만을 빼놓고는 유별난 사연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의 여느 아이 가운데 하나였다. 선배 스스로 다움이가 세상의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만을 골라내 기억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세상 아이들이 당연히 누리고 있는 평범함 속에 다움이 역시 끼워넣고 싶어했던, 지난날 선배의 간절한 희망을 그런 식으로 재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따금 이야기를 멈추고 선배가 물었다.
“아직도 눈이 내려?”
그때마다 나는 들창을 열고 소리없이 내리는 눈을 보여주었다. 고작 그 정도가 선배 자신을 향한 관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주목받던 시인의 감수성으로 잠시나마 첫눈을 바라보고 싶었으리라.
새벽녘이었다. 선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다움이한테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해놓고 한 번도 가지 못했어. 지금이라도 기도를 해야겠어. 날 좀 일으켜줘.”
선배는 두 손을 모아 방바닥에 대고 그 위에 이마를 포갰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약속일까. 약속을 확인시켜줄 아이마저 떠나고 없는데…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첫눈이 하염없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고, 선배는 기도하는 자세로 고요히 죽어갔다.
선배는 그렇게 세상을 버렸다. 그 마지막 길마저 지독히 쓸쓸했다. 나와 피 노인만이 참석한 예식이었다.
죽은 사람의 머리는 동편에 두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고집을 부려 선배의 머리를 북서쪽으로 향하게 한 채로 매장을 했다. 선배의 머리가 가리키는 방향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워하며 눈물지으며 고통을 참아가며 부르던 아이가 있었다.
사흘 뒤, 무릎까지 차오른 눈을 헤치며 사락골을 떠났다. 서두르지 않다. 아니, 나무 하나 바위 하나마저 찬찬히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아, 훗날, 먼 훗날 아이와 함께 되짚어 와야 할 길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사락골이 마지막 산모퉁이에 가려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등뒤에서 메아리인 양 선배의 목소리라 울려퍼졌다. 선배의 발병 사실을 안 그날, 빙긋이 웃으며 들려준 이야기였다.
“진희 씨, 이런 말 알아? 사람은 말이야… 그 아이를 세상에 남겨놓은 이상은, 죽어도 아주 죽는 게 아니래.”
<끝>
후기
오래 사귄 친구가 있었습니다. 불치병의 아이를 둔 친구였습니다.
친구는 고통을 호소하거나, 하다 못해 푸념조차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어때? 내 물음에 친구는 빙긋이 웃으며 말하곤 했습니다. 좋아지고 있어. 그러나 쉽사리 좋아질 병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될 뿐이었죠.
이따금씩 만나 소주를 나눠 마시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딱 한 번 친구가 말했습니다.
“내 희망이 뭔지 알아? 아이를 위해 그 무엇이라도 대신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야. 하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어. 그게 참 견디기 힘들다.”
그게 참 견디기 힘들다…
친구의 그 말이 이 소설에 매달리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중간중간 친구가 감당해야 했을 고통을 떠올리는 숱하게 한숨지었고, 한동안 원고를 덮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친구의 애절한 희망만은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그때가 여섯 살이었습니다.
여섯 살이면 제법 세상살이에 눈뜰 때임에도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전무합니다. 얼굴조차 뵌 기억이 없습니다. 당신은 소슬바람에 가랑잎같이 떠도는 분이셨죠. 바람이 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한세상 살다 홀연 떠난 당신이었습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세상의 비난, 혹은 어설픈 동정은 유년 시절부터 익숙한 것이긴 했습니다. 어쩌면 그 비난이나 동정이 아버지에 대한 갈증을 내 가슴으로부터 몰아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은 채로 말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아버지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한편 모른 척하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어느 순간에 이르러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이치처럼.
그럼에도 무모하게끔, 봄 햇살처럼 따스하다는 부정에 대한 소설을 썼습니다.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부추긴 바였고,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맹세의 격문을 책상 위에 붙여놓고 바라보는 심정이었습니다.
소설의 시작에서 마치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는 애정의 눈길로 지켜봐 준 안산 가정의학과 의원 최광원 원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겨울 외딴섬에서, 조창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