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도원결의는 없었다
1 도원결의는 없었다
유비, 관우, 장비는 삼국시대 촉나라의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 세 사람이 공적으로는 군주와 신하, 사적으로는 의형제 관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송, 원대 이후 민간문학 분야에서 세 사람의 관계 및 이들의 천하평정 과정이 문학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미화되고 과장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서서히 도원결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삼국지연]의 저자 ‘나관중’은 원대에서 명대에 걸친 혼란의 시대를 산 사람으로, 당시 많았던 농민본가의 대부분이 결의의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나관중 자신도 왕이 되려는 뜻을 품었었고, 농민봉기와 깊은 관련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원나라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키려는 ‘반원기의’에 참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이유로 그가 도원결의 이야기를 쓸 때에도 송, 원대부터이며 형성되어 있었던 이야기에 현실사회에서 보여지는 결의의 형식을 전형화해서 이 이야기를 완성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역사를 합리적으로 연장시키고 발전시켜 만들어졌으며, 인물들의 성격을 독자들의 심리에 일치시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 결과 수백 년 동안 누구나 알게 될 정도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 것은 물론, 다른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진수’의 [삼국지]에 약간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장비는 관우를 형으로 대접했다고 하며, 유비는 두 사람을 특히 신뢰했다고 한다. 또한, 이들 세 사람의 관계를 ‘은혜는 형제와 같다’, ‘은혜는 부자지간과 같다’, ‘의리에 있어서는 임금과 신하였다’는 등의 일반적인 형태의 서술만 있을 뿐 세 사람이 정식으로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 때문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도원결의의 이야기는 작자가 꾸며낸 허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반드시 허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은 ‘은혜는 형제와 같다’라는 기록과 역사적 측면에서의 이들의 관계, 그리고 역사적, 문학적 사실성의 측면에서 도원결의 이야기는 실제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이야기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간주되고 있으며, ‘하북성’ 탁현에는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구체적인 지점인 ‘충의점’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말하는 장비의 집 뒤뜰에 있던 ‘복숭아 나무가 있는 정원’이라는 것이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이러한 사실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탁현에는 또 하나의 주장이 있다.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곳은 복숭아 나무가 있는 정원이 아니라 탁현의 남쪽에 위치한 ‘수문구’의 옆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여기에는 세 사람의 의로운 사람의 묘인 ‘삼의묘’가 있었는데, 건물은 세 명의 의로운 사람인 유비, 관우, 장비를 비유해 길이, 넓이, 높이가 모두 1미터 정도 되었다고 한다.
사실 유비, 관우, 장비는 [삼국지연의]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주인공들이다.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으며 힘을 합쳐 재난에 대처하고, 위로는 나라에 보은하며 아래로는 백성들을 재난에서 구하고자 맹세한 이야기, 또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동년, 동월, 동일에 죽자고 서로 맹세한 이야기, 그리고 유비가 관우, 장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오나라를 토벌하는 이야기까지, 나관중은 전체의 반이 훨씬 넘는 지면을 이용해 세 사람의 충의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세 사람은 결의로 형성된 의협심을 위해서는 목숨을 희생하는 것도 아쉬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결의는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다.
바로 이런 까닭에, 도원결의에 관한 이야기가 비록 허구일지라도 사람들은 그 이리 실제로 행해졌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2 맏형은 유비가 아니라 관우였다
중국문학사에서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을 남남끼리 형제를 맺는 관계의 소설이라 일컫는다면, 이러한 소설의 흐름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소설 가운데 <와강채> 이야기, [설악전] 중의 <우고>, <탕회>, <악비>의 이야기, [삼협오의] 중의 <오서취의> 이야기 등은 모두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다.
이와 같이 결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유, 관, 장의 결의이다. 사람들은 도원결의를 의형제의 정을 표현하는 대명사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삼국지연의]의 도원결의 이야기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복숭아꽃이 만발한 정원의 숲 속에서 소와 양을 바쳐 제사를 지내고 하늘에 맹세함으로써 의형제를 맺는다. 이 때 나이 순으로 유비가 맏형, 관우가 둘째, 장비가 막내가 된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민간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을 때, 누가 형이 되고 누가 아우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한바탕 옥신각신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처음에는 세 사람 모두 형이 되고 싶어 그것을 나이가 많고 적은 순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서로 몇 년, 몇 월, 며칠에 태어났는가를 이야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같은 연, 월, 일을 대었다.
이때 유비가 태어난 시간으로 순서를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장비가 가장 먼저 자기가 태어난 시는 새벽녘이었다고 했고, 관우는 “나는 더 빠르다. 태어난 시는 첫닭이 막 울었을 때였다”라고 했다. 그러자 유비는 한술 더 떠 그전의 캄캄한 한밤중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장비는 자신이 막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서둘러 말했다.
“둘 다 거짓말 마시오. 이건 없었던 일로 칩시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유비가 물었다.
장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큰 나무가 눈에 띄었다. 장비는 나무 오르기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무 오르기로 정합시다.”
장비는 이렇게 말하고는 유비와 관우의 동의도 얻지 않은 채 나무에 달려들어 단숨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관우는 어쩔 수 없이 아예 응했지만, 그는 줄기 중간 정도까지밖에 오르지 못했다. 한가운데라면 위로는 형이 있고 아래로는 아우가 있으므로 이것으로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내심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비는 서두르지도 않고 침착하게 나무 밑둥에 다가서더니 선 채로 나무를 부둥켜안았다.
장비는 의기양양해서 크게 외쳤다.
“둘 다 형님이라고 불러!”
유비가 말했다.
“서두르지마! 자네에게 묻겠는데 이 나무는 뿌리가 먼저인가, 아니면 줄기가 먼저 자란 것 인가?”
“물론 뿌리가 먼저 있었지.”
“바로 그거야. 그러니 우선 ‘나’라는 사람이 있고서야 자네들이 있는 것이네.”
장비는 이 말을 듣고 당황했다. 또 다시 번복을 하자니 이미 한번 스스로 약속을 깨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자신이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우도 유비의 지혜가 뛰어난 것을 보고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고, 유비, 관우, 장비의 순으로 서열이 결정된 것이다.
위와 같은 민간의 전설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정보는 얻을 수 있다. 곧 유비, 관우, 장비의 형제 순서는 나이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유비가 최연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들 중 최연장자는 유비가 아니라 관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연의]에 기록된 유비의 나이는 중평 원년의 도원결의 때 이미 28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의 <선주전>에는 태어난 연도는 없고, 장무 3년인 223년에 죽었을 때가 향년 63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사람의 나이는 만으로 계산하지 않는 것을 근거로 하면, 유비가 태어난 해는 연희 4년이 된다. 따라서 중평 원년에는 24세이지 28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관우의 나이는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장비전>에는 “관우는 장비보다 몇 살 연상으로, 장비는 관우를 형으로 모셨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전정방의 [소설총고]에 의하면, 청나라 때 관우의 고향에서 출토된 ‘관후조묘비기’에 , 관우는 연희 3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여림의 [관공연보]에는 “관우는 실은 유비보다 한 살 위였다.”라고 쓰여 있다. 장비는 [삼국지연의]에 56세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221년에 이미 죽었다는 설이나 [관공연보]에 기록된 ‘장비는 유비보다 네 살 연하’라는 설을 가지고 추리해 본다면, 장비는 57세에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의형제가 되었을 때 관우는 25세, 유비는 24세, 장비는 20세가 된다. 그러므로 나이순으로 볼 때의 맏형은 관우이지 유비가 아닌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설은 역사서의 ‘은혜가 형제와 같다’라고 하는 기술을 근거로 한 상상이며,,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 이런 점은 나관중의 삼국지가 정확성에 문제가 있다는 한 예에 불과하다.
3 장비는 추남이 아니었다
[삼국지연이]에서는 장비를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키가 팔 척에 표범 같은 머리, 반짝이는 눈, 근육질의 아래턱, 호랑이 같은 수염에다 목소리는 우레와 같고, 힘은 거친 말과 같다.”
완전히 거친 남자에, 추남의 전형이다. 성도의 무후사에 있는 장비의 인물 조각상의 생김새도 겁을 자아내게 하는 얼굴이다.
무후사의 인물 조각상은 대부분 [삼국지연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에 장비의 얼굴이 검은 것은 주로 야담가와 연극의 인물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연극에 등장하는 과장된 인물 분장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4 평가와 미의식이 담겨 있다.
장비를 표현하는 검은 분장은 바로 검은 얼굴로써 강직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녹색 분장은 잔인함을 표현하며, 흰 분장은 엉큼함을 표현하고, 붉은 분장은 충의를 표현한다는 등의 연극의 분장 약속과 일치한다. 이같은 인물의 조각상과 연극의 분장은 소설 묘사에 의거해 만든 것으로 재창조의 결과인 것이다.
사실 [삼국지연의]에 나타난 장비의 인품에 대한 묘사는 솔직하고 거칠며 악을 미워하는 사람의 전형이다.
예를 들면, 화를 참지 못하고 순찰관을 채찍질한 것이나,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초려의 예를 다하는 장면에서 불평을 하는 태도 등으로 장비의 호탕하고 솔직한 성격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잠시 조조를 섬겼던 관우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이야기나, 고성에서 영웅이 회합하는 장면에서의 장비는 거칠고 난폭해도 세세한 곳에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장판교에서 세 번 호통을 쳐서 적을 움츠러들게 한 그 모습은 정말 용맹스러운 것이었으며, 또한 의형인 관우의 원수를 토벌하기 위해 장비가 죽음을 맹세하는 장면도 의리에 불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가 만들어낸 장비의 인물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난폭하고 거친 장비’였다.
그럼 실제로 장비의 용모는 어떠했을까?
관련 자료를 분석해 보면 [삼국지연의]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추남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나관중은 장비의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식을 토대로 해서, 그가 술을 팔고 돼지를 잡아 파는 장사를 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는 민간설화도 많아서 오늘날에도 중국의 도축업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장비를 자신들의 원조로 숭앙하고 있다.
그러나 장비의 집안이 대대로 탁군에 살았고 전답과 금전도 충분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출신은 낮은 신분이 아닌 일정한 지위를 갖는 상인 계층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관중이 그린 장비의 인품과 기호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에다 거칠고 난폭한 덩치 큰 남자였으나, 원래의 그는 시문에 능할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정사의 장비전을 보면 ‘소인을 귀여워하지 않고 군자를 경애하는’성품이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확실히 장비는 도리를 모르는 거칠고 난폭한 남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관우에게는 청룡언월도가 없었다
[삼국지연의]의 제1회에는 유, 관, 장이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는다. 생사를 함께 하며 서로 협력해 위기에 대처하고, 위로는 나라에 총성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재난에서 구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 후 우선 준마를 사고, 유비는 도공에게 명해 쌍고검을 만들었으며, 관우는 무게 82근의 긴 자루가 붙어 있는 반달 모양의 큰칼인 청룡언월도(별칭 냉염거)를 만들었다고 쓰여있다.
20여 년에 걸쳐 계속되는 정벌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관우의 이 청룡언월도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용맹한 관우는 평생 전장을 누볐다 청롱언월도에 의해 안량과 문추가 목숨을 잃었고, 다섯 관문을 지나는 장면에서는 조조의 부하 장수 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밖에도 청룡언월도에 희생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민간전설에 나오는 청룡언월도는 더욱도 그럴 듯한 치장이 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관우는 마음에 드는 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서 도검 제작의 명인 몇 명에게 부탁해, 두 달에 걸쳐 강철을 담금질해서 겨우 푸른빛의 큰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인들은 이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관우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더 담금질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담금질은 다시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달이 하늘에 높이 뜨던 날, 장인들이 불 속에서 그 칼을 꺼내어 담금질하려고 하자 칼에서 하늘을 향해 한 줄기 빛이 솟았고, 바로 그대 하늘에서 한마리 청룡이 내려와 빛에 맞았다. 용의 피가 칼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놀라서 도망쳤다.
관우가 다가가서 보니 맑고 투명해 마치 보석처럼 보이는 칼이 땅 위에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 칼이 반달을 닮았고 청룡의 피로 담금질해서 완성된 것이라 하여, 청룡언월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민간에는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관우의 오른팔인 주창도 청룡언월도 한 자루를 가지고 있었는데, 관우의 칼이 이미 망가져 버렸기 때문에 관우는 주창의 청룡언월도를 얻기 위해 주창의 사소한 과실을 문제삼아 그에게서 청룡언월도를 받아냈으며, 그 이후 주창의 수중에서는 청룡언월도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민간전설 모두 그냥 믿어버리기에는 어딘가 어색하다.
그럼 관우는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진수의 정사나 다른 역사책에도 명확한 언급이 없다. 정사에서는 두 곳에서 관우의 무기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관우전>에 나오는 안량을 벤 대목이다.
“관우는 안량의 깃발과 수레를 멀리서 바라보더니 말을 채찍질해 다가갔다. 원소의 대군이 보는 앞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여러 장수들은 너무나도 강력한 관우의 위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 중에 관우를 상대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하나는 <노숙전>에 나오는데, 관우와 노숙이 익양에서 회견하는 단도부회(한 자루의 칼을 지니고 회담에 나아가다)의 부분으로 여기에서는 ‘대도, 칼’등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양나라의 도홍경이 저술한 [고금도검록]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우는 유비에게 총애를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몸소 도산의 철을 캐서 칼 두 자루를 만들고 ‘만인적’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전투에 패하자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 속에 던졌다.”
이상의 기술에서 관우가 사용한 무기는 확실히 칼이다. 그러나 그 칼이 자루가 긴 대도였는지, 아니면 청룡언월도라 불리우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도 무후사 박물관의 담량소는, “관우의 칼은 청룡언월도가 아니며, 관우는 청룡언월도 따위는 본 적도 없었다”고 말한다.
고대의 병기는 크게 장단(길고 짧은 무기), 원사(멀리 쏘는 무기), 방구(방어용 도구)등의 종류로 나뉜다.
예를 들면 검이나 박도(자루가 짧고 폭이 좁은 장도), 비수 따위는 단병기이고, 여러 종류의 창은 장병기이다. 활은 주로 멀리 쏘는 무기이고, 방패와 갑옷은 방어도구이다.
삼국시대에는 긴 자루가 달린 칼은 출현하지도 않았다.
주위가 지은 [중국병기사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현대에는 극(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는 창)의 제작이 성행했고, 모(자루가 긴 창)가 그 다음이었다.”
곧 당시의 장병기는 극과 모였다는 것이다.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긴 자루가 달린 칼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장극백만(긴 극이 무수히 많음)’이라든가, ‘극을 얹어서 모를 잡는다’와 같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한대 유적지에서도 긴 자루가 달린 대도는 출토되지 않았다. 창이나 대도가 장병기가 된 것은 당대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서 속의 관우가 사용한 칼은 어떤 무기인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단도이고, 안량을 찌른 무기는 당시 유행하던 ‘모’일 것이라고 담량소는 보고 있다.
5 조조는 동탁을 죽이려 한 적이 없다
조조(155-220)는 자를 맹덕, 아명을 아만이라 하고, 패국의 초현(지금의 안휘성 박현)사람이다. 삼국시대의 뛰어난 정치가, 군략가, 문학자로서 후한말 한대의 관리등용방법인 ‘지방장관이 각 지방의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난 인물을 추천하면 조정에서 관리로 채용하는 효렴에서 선발되었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관동의 제후들과 함께 동탁 토벌에 가담했다. 그러나 나중에 천자를 수중에 두고 제후들을 호령하고, 복황후를 죽여 조정을 독점한 일로 인해 천 년 이상의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으며, 나관중이 쓴[삼국지연의]에서도 희대의 간신으로 그리고 있다.
[삼국지연의]의 제4회는 동탁이 조정을 독점해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고, 폭력으로 백성을 괴롭히며 정치를 문란케 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당시 왕윤을 비롯한 신하들은 나라가 기우는 것을 근심하며 슬퍼했다. 특히 효기교위(근위무관)인 조조는 한이 골수에 맺혀 있었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동탁을 죽여 천하에 사죄하고 싶다며, 왕윤에게 ‘칠보도’를 빌려간다.
조조는 마침 동탁의 부름을 받아 승상부로 갔다. 동탁은 조조가 자기의 부름에 늦게 오는 것을 탓했다.
“마른 말이어서 늦었습니다.”
조조가 변명하자, 동탁은 여포에게 준마를 가져오게 했다. 여포가 없어진 틈에 조조는 동탁을 죽이려고 했지만, 상대가 힘이 장사인 동탁이어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동탁은 뚱뚱했기 때문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옆으로 해서 누었다. 조조는 서둘러 칼을 빼려고 했지만, 동탁이 거울에 비친 조조의 움직임을 보고 방향을 바꾸었다. 동탁은’무슨 짓을 하려고 하느냐’며 조조를 경계했다. 마침 그때 여포가 준마를 끌고 왔다.
조조는 재치를 발휘해 칼을 다른 손으로 바꿔잡고는 무릎을 꿇었다.
“보도 한 자루를 승상께 바치고싶습니다.”
동탁은 보도를 여포에게 건넨 후 조조를 데리고 정원으로 내려와 말을 보여주었다.
동탁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조조는 후환이 두려워 그 길로 낙양을 탈출해 곧장 남동쪽으로 말을 달려 초현으로 도망쳤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민간에 전해져 내려왔다. 또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럼 역사상 이 일은 확실한 것일까?
정사의[위서]<무제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탁은 중평 6년(189)에 영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운다. 또 조조를 효기교위에 임명해 함께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이 결국에는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명령에 불응하고 고향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 일은 정사의 <원소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동탁이 실권을 잡았을 때, 조조가 확실히 효기교위에 임명되었다는 것과 조조는 내심 동탁이 언젠가는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조는 나중에 동탁을 토벌하는 싸움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효기교위를 임명받았긴 했지만 그 자리에 취임한 적은 없었다. 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조가 동탁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미수에 그쳐서 도망쳤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칼을 바치고 동탁을 찌르려고 했다는 장면은 완전히 가공된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조조가 동탁을 살해하려고 했던 일은 사서에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관중이 이 이야기를 꾸며낸 목적은 조조를 깎아내리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실제로는 반 동탁 싸움에서의 조조의 지도적 역할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나타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6 진궁은 조조를 붙잡은 적이 없다
진궁(?-198)은 후한말의 동군(지금의 하남성 복양) 사람이며, 자는 공태이다. 처음에는 조조를 따랐지만 그가 악하고 어질지 못한 것을 보고 조조를 떠났다. 나중에 여포를 따르며 종종 계략을 세웠지만, 그의 계략은 여포에게 채용되지 않았다. 결국 싸움에서 패해 조조에게 살해되었다.
진궁은 조조와 알기 전에 중모현 현령에 부임했고, 도망치는 조조를 붙잡았지만 곧바로 몰래 석방했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의 제 4회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조는 동탁 살해에 실패하고 낙양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중모 현령인 진궁을 만났다.
“왜 동탁을 배신했는가?”
진궁이 추궁하자 조조는 대답했다.
“국가의 큰 적을 없애려 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짓으로 꾸며진 천자의 조서를 천하에 밝히고 병사를 일으켜 함께 동탁을 주살하기 위함이다.”
진궁은 이 말에 깊이 감동하여 몸소 포박을 풀어 석방한다. 또한 조조를 상좌에 모시고 ‘천하에 충성되고 의로운 무사’라며 칭송했다.
이렇게 해서 진궁은 공을 세워 상을 받을 기회를 놓칠 뿐 아니라, 현령의 직무를 내던지고 그날 밤에 중모를 떤 조조를 따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수백 년 동안 널리 전해져서 오늘날에는 경극을 비롯해 사천지방의 연극인 천극, 운남지방의 연극인 전극, 산서지방의 연극인 진극, 호북지방의 연극인 한극 등 많은 지방극에서 ‘조조를 붙잡다’가 상영되고 있다.
이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진궁과 조조는 함께 도망치던 주에 대대로 조조 집안과 교류가 있었던 성고의 여백사에게 들렀다. 여백사는 두 사람을 환대하지만 조조는 의심에 사로잡혀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켜 버리는데, 진궁은 조조의 어질지 못한 모습을 보고는 떠난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진궁은 확실하게 조조를 추종했지만, 나중에 조조가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여포에게 투신했다. 그리고 여포가 패해 죽자 그도 조조에게 살해되었다. 그렇다면 진궁이 조조를 붙잡았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조조가 붙잡힌 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사 [위서]<무제기>를 보면, 조조가 낙양을 빠져나와 중모현에 당도했을 때, 확실히 그 마을 숙소의 관리를 맡은 사람인 정장에게 의심받아 붙잡혀서 현의 관청으로 호송되는 처지가 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 중에 마침 조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힘을 써준 덕분에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중평6년에 조조가 몰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면 이’정장’또는’알아본 사람’이 바로 진궁일까?
정사를 조사해 보면, 진궁이 조조를 처음으로 따른 것은 초평 2년(191)의 일이다. 따라서 조조가 붙잡힌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진궁이 풀어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평 6년 조조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궁은 아직 조조와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동을 함께 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조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는 진궁이 조조를 따른 것에서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단시간의 일로 설명하고 있다.
진궁은 조조가 동군 태수였을 때 처음으로 따랐던 것이고, 흥평원년(494)에 조조가 구강 태수인 변양을 죽인 것에서부터 점차 의심을 가져, 마침내 여포 휘하로 몸을 던졌는데, 그 사이 3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처음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좋았었다.
나관중은 ‘조조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를 창작할 때, 교묘하게 진궁과 조조를 하나로 연결시켜 이야기를 부풀리고 앞뒤를 바꾸는 등 진궁이 조조를 붙잡는 파란만장한 장면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연출한 것이다.
나관중은 진궁의 비극을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조조의 자기중심주의와 잔인함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7 조조는 여백사를 죽일 수 없었다
‘조조를 붙잡은’ 이야기에서 진궁과 조조는 중로현으로 도망쳐 곧장 성고의 여백사 집으로 가 투숙한다.
여백사는 크게 기뻐하며 환대하지만, 집에 술이 떨어져 밖으로 술을 사러 나간다. 조조는 여백사 아들들의 돼지 도살용 칼소리와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자신이 살해당할까봐 일가 여덟 명을 모두 죽여 버린다.
그리고 조조가 마을에서 도망치려 할 때 여백사가 술을 사서 돌아오자 조조는 나중에 있을 재앙을 없애기 위해 여백사까지 죽여버린다.
“여백사인 줄 알면서 죽이는 것은 단순한 불의”라고 진궁이 비난하자, 조조는 “내가 상대를 배반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상대의 배반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의 이 대목은 조조의 잔인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정사를 읽고 사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관중에게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정사의 <무제기> 주에 인용된 왕심의 [위서], 곽반의 [세어] 및 손성의 [잡기]에 의하면, 조조는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올 때 분명히 도중에 여백사의 집에 투숙해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 그리고 “내가 상대를 배반하는 일은 있어도 상대의 배반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확실하다.
[위서]에서는 ‘백사가 부재중일 때에 아이들이 식객들과 함께 조조를 덮쳐 말과 짐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에 ‘조조는 방어를 위해서 ‘수 명을 죽였다’고 씌여 있고, [세어]와 [잡기]에서는 ‘틀림없이 자신을 죽일 작정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죽였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공통되어 있다. 즉, 당시 ‘백사는 부재중’으로 ‘외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조는 여백사의 가족을 모두 죽이기는 했지만 여백사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8 군량미를 적게 나누어준 사람은 관리인이었다
[삼국지연의] 제17회는 조조가 17만 대군을 이끌고 원술을 공격하는 이야기이다.
조조는 원술의 군사를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그들의 기세를 꺾을 수가 없었다. 이때 군량미의 조달이 지체되어 양식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군량관인 왕후가 조조에게 보고했다.
“병사들이 불만을 가지면 어떻게 합니까?”
왕후가 불안해 하며 묻자 조조가 대답했다.
“그때는 나에게 생각이 있다.”
왕후는 들은 대로 시행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병사들의 불평과 불만이 쌓이고 사기가 꺾여 분위기가 좋이 않았다.
조조는 몰래 왕후를 불러 말했다.
“너의 목을 빌어 병사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고 싶다.”
왕후가 놀라서 외쳤다.
“저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조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그의 목을 쳐 높은 장대 끝에 매달았다. 그리고 나서 왕후가 ‘관의 군량미를 훔쳐 가져갔다’고 발표했다.
병사들은 감쪽같이 속았고 이로 인해 불평은 진정되었다. 조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3일 내로 성을 함락시켜야만 한다’고 명령했다.
이처럼 나관중의 손이 닿자 조조는 엉큼하고 악랄하며 교활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럼 진실은 어떤가?”
왕후가 살해된 이야기는 정사의 [위서] <무제기> 주에 인용된 <조만전>에는 “군량미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만 나와 있으며 왕후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또 작은 되로 군량미를 나누어준 것은 조조가 아니라 바로 관리인이의 생각이었다.
조조는 나중에 그의 목을 베어 진영의 문에 매달아서 병사들의 불평을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9 길평은 동승과 조조 암살을 모의하지 않았다
길평은 한말의 낙양 사람이다. 본명은 태, 자는 평으로 사람들은 그를 길평이라 불렀는데, 한나라 헌제 때 태의(궁중의사)였다.
[삼국지연의]에서 길평은 건안 5년(200)에 차기장군인 동승과 함께 조조 암살을 모의하고, 마침 병을 진찰하는 기회가 생겨 조조를 독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동승의 하인이 밀고해 길평은 체포되어 한 시간 동안이나 두들겨맞고, 전신의 피부가 찢겨 피가 바닥을 적실 정도로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길평은 끝까지 자백하지 않는다.
조조는 길평을 동승의 집에 끌고가 서로를 대면시켜서 증거를 잡으려고 하지만 길평은 그 자리에서 조조에게 욕을 퍼붓고는 계단에 머리를 부딪쳐 죽어 버린다.
그러면 궁중의사인 길평은 정말로 조조에게 고문당해 죽음으로 내몰렸을까?
정사에 비추어보면 [삼국지연의]의 묘사가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의 <무제기>를 보면 길평은 길본이라고 해야 하며, 길평이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길본은 동승의 조조 암살계획에 참여한 적은 없고, 건안 23년(218) 탐기, 위황 등의 조조 암살계획에 참여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길본은 탐기, 위황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며, 승상장사 왕필과 영천전농중랑장 엄광이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조가 길본을 죽인 것이 아니며, 시기적으로도 건안 5년이 아닌 건안 23년의 일이 된다.
그 외에[삼국지연의]제69회에는 길평의 아들인 길막과 길목이 탐기와 위황의 계획에 참여했고,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역사에 기록이 없으므로 나관중의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10 관우는 화웅을 죽이지 않았다
화웅은 동탁의 부하 대장 중에 한 사람으로, 나관중은 그를 신장은 9척, 범 같은 체구, 이리 같은 허리, 표범 같은 머리, 원숭이 같은 완력이라고 묘사했다.
[삼국지연의]제5회에는 관동군이 원소를 맹주로 받들어 동탁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원소는 손견을 선봉으로 삼아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사수관을 공격했고, 동탁은 화웅에게 5만의 병사를 주어 이에 대비하게 했다. 화웅은 공격해 온 포충을 죽인 후 손견의 선봉부대를 패주시킨 뒤 각 지방에서 온 구원병까지도 물리쳤다.
각 지방의 제후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때 관우는 유비의 부하로 일게 마궁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진해서 화웅을 죽이겠다고 나섰다. 신분이 낮은 관우는 원소 형제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조조만은 관우가 자진해 나선 것에 대해 뜨겁게 데운 술을 따라주며 격려했다.
“술은 잠시 맡겨두겠습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관우는 이렇게 말하고 말에 올라 칼을 손에 들고 화웅을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북소리와 함성이 일어나며 천지가 갈라지고 산이 무너질 듯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제후들이 모두 무슨 일인가 놀라워 할 때, 이미 관우가 화웅의 목을 가지고 본직으로 돌아와 땅에 목을 내던졌다. 그때 술은 아직 따뜻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동탁의 토벌 싸움에 참가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관우가 화웅을 벤 사실은 없다. 화웅의 죽음의 대해 정사의 <손견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손견은 병사들을 맡아 사수관에서 화웅과 싸웠는데, 처음에는 패했지만 마지막에는 동탁의 군대를 대파하여 도독인 화웅을 죽이고 그 목을 옥문에 매달았다.”
관우는 당시 유비를 따라 공손찬의 밑에 있었으며, 손견의 부하가 아니었으므로 화웅을 죽인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화웅은 손견이나 손견의 부하에게 죽은 것이지 분명 관우의 공적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술이 식지 않은 동안에 해치웠다는 것은 소설가의 과장된 필법이라 할 수 밖에 없다.
11 초선의 연환계는 호구이다
[삼국지연의] 제8회와 제9회에서는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한 후에 점점 천방지축으로 설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왕윤은 동탁을 암살하려고 하지만 도무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 왕윤으로부터 딸처럼 귀여움을 받았던 기생 초선은 왕윤이 고심하는 모습을 보고 큰 일을 결행할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은혜를 갚으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왕윤은 연환계를 짜게 된다.
우선 여포를 연화에 초대해 초선으로 하여금 그를 유혹하게 하고, 여포가 미인계에 걸려들자 왕윤은 재빨리 초선을 여포에게 첩으로 바친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이번에는 동탁을 연회에 초대해 역시 초선에게 유혹하게 하고 동탁이 초선의 가무와 용모에 빠지자 재빨리 그녀를 동탁에게 바쳤다. 그 결과 동탁과 여포의 부자관계(여포는 동탁의 양자)가 이상해졌다.
초선은 그 관계를 이용해 여포가 보면 아름답게 눈살을 찌푸리고 몰래 눈물을 흘림으로써 자신이 동탁에게 가게 된 것은 결코 본의가 아니라고 믿게 함과 동시에 추파를 보냈다.
동탁은 마음 한편으로는 초선을 얻어 기분이 좋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포를 의심스러워했다.
여포의 마음이 점점 달아올랐을 때 왕윤 등이 옆에서 여포를 부추겼다. 급기야 여포의 동탁에 대한 불만은 원한으로 바뀌게 되었고, 동탁을 죽이겠다고 맹세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왕윤은 사손서, 황완정 등과 모의해, 헌제가 황위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동탁에게 거짓으로 고함으로써 동탁이 조정에 들어가고 마침내 여포의 손에 죽게 된다.
[삼국지연의]의 이 부분에 대한 묘사는 구상이 뛰어나고 문장도 통쾌해 독자로 하여금 쾌재를 부르게 한다.
하지만 초선이 교묘히 연환계를 실행한 이야기는 이미 원대의 잡극 속에 있으며, [삼국지평화] 속에도 비교적 정돈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또한 원대의 무명씨에 의해 만들어진 연환계라는 잡극의 이야기와 [삼국지평화]와는 아주 비슷하다.
나관중은 이러한 선인의 창작을 기초로 초선과 연환계익 이야기를 개작해 두 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초선의 역할을 바꾸었다.
초선은 과거에는 수동적으로 사건에 관계하는 조역이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대의 에 밝고 절묘한 계략을 갖추었음은 물론, 적극적으로 사건에 관계하는 주역으로 바뀐다. 그뿐만 아니라 초선을 위험을 무릅쓰고 전력을 다해 동탁의 암살을 꾀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나관중이 묘사한 초선의 행위는 보통 여자의 수준을 넘어서 의협심이 넘치고 강렬하다.
또한 총명하고 기지가 넘치며 자기 희생을 아끼지 않는 여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럼 초선이 교묘히 연환계를 세워서 동탁을 암살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인가?
우선 첫번째로 왕윤과 여포가 공모해 동탁을 살해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정사의[위서]<여포전>에는, 동탁의 기질이 과격하고 성질이 급해서 여포는 동탁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원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 후 왕윤 등이 동탁을 암살하려고 모의하는 것을 알고 내통을 약속한 것, 동탁의 죽음은 여포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암살하는 전체적인 과정에서 미인계인 ‘연환의 계략’을 정말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여포전>에는 ‘여포는 확실히 동탁의 시녀에게 손을 댔고, 발각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불안에 떨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시녀의 이름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 시녀는 동탁의 시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포와 그녀가 밀통했다는 것을 동탁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삼국지연의]의 연환계는 전혀 근거가 없는 허구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암살한 사실과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밀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12 차주는 유비가 죽였다
[삼국지연의] 제21회에서 조조는 건안 4년(199)에 유비에게 명령해 원술을 서주에서 막고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조조는 곧 이를 후회하며 서주자사인 차주에게 편지를 보내 유비를 암살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차주는 진등과 모의해 유비가 성 밖으로 나가 영자의 백성을 둘러보고 오는 것을 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등이 이것을 아버지인 진규에게 말하자 진규는 이를 유비에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유, 관, 장은 미리 음모를 알게 되는데, 성급한 장비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차주를 죽이러 가자고 한다.
이때 관우가 장비를 말리며 말했다.
“계략에는 계략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야음을 틈타 조조의 군이라고 속여 차주를 성 밖으로 불러내 죽이도록 하자.”
계략을 세운 관우와 장비의 군사는 장료의 군사들로 위장하고는 성 밖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라.”
그러나 차주는 문을 여는 것을 주저했다.
이때 진등이 말했다.
“괜찮소. 문을 여시오!”
진등의 말에 차주는 말에 올라 병사 천여 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적교를 빠져나오며
큰소리로 물었다.
“장료 장군님, 어디 계십니까?”
그 순간 불길이 오르며 관우가 한 손에 청룡언월도를 들고 말을 달려왔다. 관우가 차주를 공격하자 얼마 되지 않아 차주는 말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서둘러 적교를 건너려 했던 차주는 성벽 위에서 진등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하는 것을 보고 성벽을 따라 도망쳤다.
관우는 곧바로 도망가는 차주를 뒤쫓아가서 한칼에 말에서 떨어뜨리고, 그 목을 베어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유비는 다시 한 번 서주를 손에 놓게 되었다.
그렇다면 관우가 차주를 속여 성을 빼앗고 차주를 죽인 것은 사실일까?
서주자사인 차주의 죽음에 대해 정사의 <무제기>와 <선주전>, <관우전>에는, “원술이 진류에서 패한 후, 조조는 유비에게 명해 서주에서 원술을 막아 싸우게 했다. 그러나 정욱, 곽가의 간언을 듣고 나서 조조는 유비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그렇다고 해서 뒤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조조가 우려한 대로 유비는 동으로 진출해 재빨리 하비를 점령하고, 서주자사인 차주를 공격해 죽인 후, 관우에게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알 수 잇듯이 [삼국지연의]의 묘사방법은 정사와 크게 차이가 있다. 속여서 성을 빼앗고 차주는 죽인 것은 유비이지 관우가 아니었다. 그런데 원, 명 이래의 잡극, 문학작품, 연극 등에서는 예외없이 차주는 관우가 베어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나관중도 이 이야기를 창작할 때 선인들의 창작성과를 헤아려서, 앞뒤는 안 맞지만 차주를 벤 공적을 관우의 이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렇게 한 목적은 관우의 이상적 상을 만들어내기 위함에 있었다.
제 2 장 관우는 여섯 명의 장수를 벤 적이 없다
13 관우는 여섯 명의 장수를 벤 적이 없다
관우는 유비가 원소의 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의 감, 비 두 부인을 지키면서 천리 길을 전전하며 유비가 있는 하북을 향했다. 그러나 황하를 건널 때 유비가 이미 원소의 곁을 떠나 여남의 유벽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많은 고생을 하면서 결국 고성에서 유비와 장비를 만나게 된다.
이 동안에 관우 일행은 조조 군의 다섯 관문을 지나갔는데, 관우는 조조의 곁을 떠날 때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으므로 통행증이 없었다. 그 때문에[ 도중에서 종종 길이 저지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우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여섯 명의 무장을 죽이는데, 이 다섯 관문의 여섯 장수들은 동령관의 공수, 낙양의 맹탄, 한복, 사수관의 변희, 영양의 왕기, 황하 나루터의 진기이다.
이 이야기는 관우의 충의를 말하는 전형적 사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업적 중에서도 중요한 구성요소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을까?
정사의 [촉서] <선주전>을 보면 당시 유비는 하북의 원소를 떠나서 여남에 가 있었다. 관우가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허창에서 곧장 황하를 건너면 되며 그 거리는 결코 멀지 않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낙양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가 사수, 영양을 지나 황하의 나루터로 향한다. 삼각형 모양으로 크게 돌은 후 남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길을 택한 것일까. 과연 그럴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이는 나관중의 과장이 너무 심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정사의 <관우전>, <유비전>을 보면, 관우가 도망쳐 유비에게 향할 때, 조조의 부하 장수 하나가 그를 쫓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조는 ‘그는 그 나름대로 자신의 주군을 위해 진력하고 있으므로 쫓아가서는 안된다”면서 말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관우는 조조의 묵인하에 떠났으며, 낙양과 영양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허창에서 여남으로 간 것이었다. 길이 실제의 상황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육장의 이름도 정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다섯 개의 관문을 지나면서 여섯 명의 장수를 베었다는 것은 허구이다.
나관중이 이처럼 관우가 유비 곁으로 돌아간 이야기를 과정하고 허구화한 것은 관우의 충의심, 무용, 고상한 성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14 유비, 관우, 장비는 고성에서 만난 적이 없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서주전투에서 패해 동서로 흩어져 도망쳤다. 장비는 우선 망갈산으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유비가 있는 곳을 찾아 고성으로 와서 현의 관리를 내쫓고 성을 점령한다.
관우는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를 찾으러 여남을 향하는 도중에 장비가 고성을 빼앗아 병마와 군량미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바로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일을 알린다.
그러나 장비는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하며 관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의리를 알지 못하는 놈’이라며 공격한다. 관우가 유비의 두 부인이 아무리 해명해도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조조의 부하 장수인 채양이 유벽을 공격하기 위해 여남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관우는 장비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성을 지나가는 채양을 베었다. 그때서야 장비는 겨우 관우를 믿었다.
그 후 관우는 유비를 찾으러 여남으로 가지만 유비는 이미 원소의 곁으로 돌아간 후였다.
어쩔 수 없이 하북으로 되돌아가 유비를 데리고 함께 고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유, 관. 장 세 형제는 고성에 모이게 되었고 헤어져 있던 기간의 일을 서로 이야기한다.
그러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정말로 고성에서 만났을까? 사서의 기록 기록과 대조해 보면, 고성에서 만났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첫째, 정사의 여러 곳을 찾아보아도 유비와 장비가 서로 떨어졌다거나, 장비가 고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없다.
둘째, 관우가 채양을 베었다는 것은 정사의 <관우전>에는 보이지 않으며, 다만 <유비전>에 “조조가 채양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니 유비가 그를 죽였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채양은 유비에게 죽은 것이지 관우에게 죽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죽은 시기 역시 관우가 유비 곁으로 돌아온 후이지 세 사람이 만나기 전은 아니다.
셋째, 관우와 장비가 충돌했다는 이야기나, 유, 관, 장 세 사람이 고성에서 만나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은 모두 허구이다. 요컨데 유, 관, 장이 고성에서 회합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송대의 [삼국지평화]에 나오며 줄거리는 [삼국지연의]와 비슷하다. 나관중이 고성에서 유, 관, 장이 만났다는, 전혀 없었던 이야기를 [삼국지연의]에서 채택한 목적은 간단하다. 그것을 통해 유, 관, 방의 충성스러운 생애를 한층 파란만장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의 일생이 얼마나 곤경에 처했었던가를 사람들에게 알리려 했다.
15 손권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손권(182-252)의 자는 중모인데, 오군의 부춘 사람으로 손견의 둘째 아들이고 손책의 동생이며 오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손책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15세에 오주의 중임을 맡아 강동 6군의 땅에 웅거했다.
그는 인재를 불러모아 산월(오의 산지에 웅거하는 부족의 총칭)을 진압하며 서서히 힘을 키워 건안 13년(208)에 유비와 연합해 조조군을 적벽에서 대파했다. 뒤이어 형주를 공격해 관우를 사로잡고 유비를 이릉에서 패배시켰다. 그리고 황룡 원년(229)에 무창에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오라 하고 건업(지금의 남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지연의] 제7회에서는 손견 일족을 소개하고 손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다. 사실[삼국지연의]에서 손권이 등장하는 장면은 약 50회에 이른다. 그러나 적벽대전의 전투와 유비와 손부인의 혼인 등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대개 그냥 덧붙인 정도에 불과하다.
손권 세력의 내부에서는 시종 유비와 연합해 조조에게 대항할까, 아니면 조조에게 항복할까 하는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손권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더러운 짓으로 여겼고, 또 오의 땅에 제약이 가해지는 것을 싫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조의 군사력을 감안할 때 자신을 중과부적이라고 보았다.
화의와 전쟁 양면을 두고 항상 망설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를 읽는 사람은 손권에게 인재를 등용하는 부분에서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는 인재를 손에 놓는 것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열쇠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나라를 세운 후 널리 인재를 받아들였으므로, 계략이 출중한 천하 명장이 속속 모여들었다. 인재가 풍부하다는 것이 강동의 자랑이었다고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도 손권의 인물상을 그릴 때 이 특징을 포착해, ‘그가 항상 선을 따르며, 의심하지 않았으며 결코 소홀히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권의 등장은 손책의 죽음 이후부터로, 처음부터 사람을 보는 눈과 넓은 도량을 갖춘 군주로 나타난다. 이처럼 나관중이 그린 손권은 어질고 재능있는 사람을 발탁해 강동을 지킨다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손권이 인재등용에 뛰어났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삼국지연의] 제29회에서 손책은 죽기 직전 자신의 자리를 어린 아들 손소가 아니라 동생인 손권에게 물려주면서 말한다.
강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군과 아군의 대립 속에서 유리한 시기를 잡아 천하의 여러 영웅과 승부를 겨루는 일이라면 내가 너보다 낫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을 찾아내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시켜 강동을 지키는 일이라면 네가 적임이다. 아버지와 형의 창업의 고통을 잊지 말고 스스로 이를 잘 도모하라.”
사실 손권은 형의 부탁에 응해 제업을 완수한 것이었다.
제갈량의 유비를 위해 천하의 대세를 분석한 융중대책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손권은 3대에 걸쳐서 강동에 확고한 기반을 잡았습니다. 그 땅은 장강의 요새가 지켜주고 있고 민생은 안정되었으며, 유능한 막료가 보좌하고 있습니다.”
진수가 “세기를 초월하는 영걸”이라 평가한 조조도 손권의 큰 뜻과 인재를 등용하는 자세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아들을 낳는다면 바로 손중모와 같아라’며 그에게 감탄했다.
정사의 작자 진수는 손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위나라에 대해 창피를 무릅쓰고 겸손해 할 줄 알며, 재능있는 사람을 임용하고 계략을 중히 여기는 등 월왕 구천과 닮은 비범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진수 역시 재능에 맡기고 계략을 숭상하는 손권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손권은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손견, 손책이 남긴 모사나 장수 그룹에는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택한 보다 젊은 모사나 장수에게 의지한다. 특히 그는 주유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평범하게만 보이는 노숙을 등용한다. 또한 여몽을 병사 중에서 발탁하고 육손을 총애했다.
적벽의 전투, 이릉 전투의 빛나는 승리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삼국지연의]에서의 손권은 아버지나 형보다도 용감하고 생기가 넘친다.
그런데 [삼국지연의]를 자세히 읽어보면, 손권의 영웅 자질과 재능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유비와 연합해 조조에 대항하는 장면과 조조에 반대하는 장면에서만 손권은 영웅이 되는 것이다.
또 [삼국지연의]는 말년의 손권에 대해 다루지 않았다. 그래서 후기의 인재기용 실패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다. 그 때문에 독자는 손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재를 등용하여 재능에 맡기는 총명한 군주였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럼 손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한 군주였던 것일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229년에 손권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신하들을 신뢰하지 않고 점점 독단에 빠지게 되었다. 인재등용의 측면에서 이러한 변화는 오나라에서 손권의 지배력이 점차 쇠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수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의심 많은 성격이어서 가차없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다.”
그는 국경을 지키는 장수를 신뢰하지 않아서 그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아두었다. 그리고 반역하거나 도망가는 일이 있으며 즉시 인질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사나 찰전과 같은 감시직을 설치하여 기회만 있으면 마구 잡아들였으며 죄없는 사람을 함정에 빠뜨려 죽였다.
예를 들면, 당시의 중서전교인 여일은 성격이 모질고 법을 마음대로 적용하여 항상 사람을 함정에 빠뜨렸는데, 태자인 손등과 육손, 보즐 등이 종종 간언했지만 손권의 인사정책은 고쳐지지 않았다. 나중에 여일은 살해되었지만 대신들은 여전히 손권의 의심병을 두려워해 안심할 수 없었다.
나중에 손권은 자신이 택한 유능한 장수인 육손마저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번이나 육손의 책임을 추궁해 억울하게 죽게 한 것도 바로 의심병 때문이었다. 손권의 인사정책은 초기에는 매우 좋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이다.
16 유비는 말을 타고 계곡을 넘은 사실이 없다
원대의 [삼국지평화]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유비가 말을 달려 계곡을 뛰어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지평화]에서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간옹에게 편지를 들려보내 성 하나를 빌리는데, 유표는 유비를 양양으로 초대해 장남인 유기와 차남인 유종을 같이 자리에 앉게 한다. 그 자리에서 유표는 형주의 패인(주를 맡은 장관의 옥패와 도장)을 유비에게 준다.
그러나 유비는 유기에게 주어야 한다면 사양한다.
유종은 이 때문에 유비를 원망하게 되고 과월과 체모로 하여금 인마를 매복시켜 유비를 죽이려 하는데, 이를 알아차린 유기가 유비에게 귀뜸해 도망치게 한다.
유종은 가신인 왕손에게 명해 유비가 타고 있던 말인 적로를 훔치게 하지만 유비가 사정을 설명했기 때문에 왕손은 유비를 성 밖으로 내보낸다. 그렇게 도망치던 유비는 계곡에 이르러 잡힐 뻔하지만, 말을 뛰어오르게 해 건넘으로써 위험을 피한다.
[삼국지연의] 제34회에서는 위의 이야기를 대대적으로 고쳐서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지했을 때였다. 채부인은 유비를 몹시 싫어해 유표의 측근인 괴월, 채모와 함께 유비를 제거할 계획을 짠다. 그리고 형주 각 군의 관리를 양양에 모은다는 구실로 그들을 유표 대신에 유비에게 응대시킨다. 그 틈을 보아 죽이려는 계획이었다.
그날 유비가 양양으로 향하자 체모와 괴월은 밀의를 거듭해 양양의 동, 남, 북 세 성문을 막아놓았다. 다만, 서쪽 성문 밖은 계곡으로 막혀 있었으므로 병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주연이 시작되고 머지않아, 유비는 연회석의 모습이 이상하게 살기가 넘치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구나 유표의 손님인 이적의 눈짓에 따라 급히 뒤뜰로 나가자 이적이 모든 사정을 유비에게 말했다.
유비는 서둘러서 적로를 타고 서문을 향해 도망쳤고, 그 소식을 들은 채모는 병사를 이끌고 뒤를 쫓았다. 계곡까지 도망친 유비는 추격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을 탄 채로 골짜기의 흐르는 냇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도 가지 못해 말의 앞발이 꺾어졌다.
“적로야! 적로야! 나를 방해할 작정이냐?”
유비가 이렇게 외친 순간 적로는 물 속에서 벌떡 일어나 단숨에 삼 장(열 자의 길이) 너머 서쪽 절벽으로 뛰어올랐다. 추격자는 당연히 계곡을 넘지 못했고, 유비는 간신히 살아났다.
정사의 <유비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유비가 싸움에 패해 유표의 곁에 몸을 의탁하자, 유표는 예를 갖추어 그를 받아들이고 군사도 증강해 주었다. 그러나 그 후로 형주의 뛰어난 인재가 계속해 유비의 휘하에 가담하는 것을 보고 유표는 유비에게 형주를 빼앗을 속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그 야망을 막으려고 했다.”
즉, 유표와 유비 사이가 믿을 수 없게 된 것을 기록하고 있을 뿐, 유표가 양양의 모임을 만들어 유비를 죽이려 했다는 서술은 없다. 더구나 유비가 말을 뛰어오르게 해서 계곡을 뛰어넘었다는 기록은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유비전>에서 배송지가 인용하고 있는 [세어]에 기록되어 있다. [세어]에 나오는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만, 나관중이 이 이야기를 근거로 창작한 것은 분명하다.
[삼국지연의]의 이야기에 근거가 있기는 하지만, 진나라 때의 손성은 “모두 세속의 망설이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유비와 유표의 대립을 작자가 합리적으로 그럴싸하게 꾸몄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유적은 양양의 서남쪽 2리 밖에 위치한 구궁산(현재는 진무산)에 있다. 이곳의 산기슭 바위 위에는 후세 사람이 새긴 ‘마약단계처’라는 다섯 글자와 깊이 파인 말굽 흔적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적로가 몸을 날려 계곡을 건넌 곳이라 한다. 이 이에 적로교라는 다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17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한 시기가 다르다
서서는 영천(현재의 하남성 우현) 사람으로 자는 원직이며, 초명은 서복이었다. 원래 제갈량과 친구 사이였고 나중에 유비에게 귀의했는데, [삼국지연의] 제36회부터 유비를 보좌하는 역으로 나온다.
그는 조조의 부하장수인 여강, 여상, 조인을 격파하고 번성을 공격해 빼앗는다.조조는 서서의 뛰어남을 알고, 정욱의 계략을 이용해 서서의 모친을 허창으로 잡아와 그녀의 필적을 흉내낸 편지를 보내 서서로 하여금 모친을 구하려면 항복하라고 했다.
효자였던 서서는 편지를 받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유비의 곁을 하직하는데, 유비는 송별연을 열어 그를 보내면서 못내 이별이 아쉬워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를 따라간다. 결국 서서가 간 후에 유비는 말을 멈추고 비 같은 눈물을 흘렸는데, 서서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도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서서는 가다가 문득 중요한 것을 생각해내고는 말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그리고 유비에게 관중이나 악의보다 뛰어난 인물이라며 제갈량을 추천했다.
“그 사람이야말로 천지를 헤아리는 재능을 가졌으므로 천하에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서둘러 들리시어 대면하십시오.”
또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유비는 사마휘가 말했던 ‘복룡과 봉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얻는다면 천하를 편안히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생각해 내고는 즉시 관우, 장비와 함께 제갈량에게 세상에 나올 것을 요청하러 간다.
그 후에 서서는 허창에 가지만, 모친은 ‘거짓 편지에 눈이 멀어 전후 생각도 하지 않고 현명한 군주를 버렸다’며 꾸짖고는 자살해 버린다. 이 일로 인해 서서는 몸은 조조의 진영에 있으면서 마음은 유비에게 있어, 종신토록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하나의 계략도 바치지 않았다.
이상이 수백 년 동안 세간에 널리 전해져 온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서서는 지극한 효심과 제갈량을 추천했다는 두 가지 점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200년에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를 물리쳐 북방을 통일하고, 이어서 대군을 이끌고 남방에 있던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조조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유표에게 의지해 신야에 주둔한다. 서서가 유비에게 투신한 것이 바로 그때로 재능이 뛰어나 유비에게 중용되었다. 그리고 유비의 한실의 부흥과 패업 달성을 돕기 위해 207년 즈음에 유비에게 친한 친구인 와룡 제갈량을 추천한 것이다.
이처럼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그러나 문제는 서서가 언제 제갈량을 추천했는가이다. 나관중이 말하듯이 유비와 서서가 이별했을 때일까?
앞에 밝힌 대로 제갈량을 추천한 것은 207년 일이다. 당시 서서는 유비의 유능한 모사였다.
그럼 서서는 언제 유비의 곁을 떠났을까?
역사의 기록을 보면 208년이 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 해에 유표가 병사하자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했고, 유표의 아들인 유종은 강대한 군사력 앞에 굴복해 조조에게 투항했다. 번성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남방으로 철수했는데, 그때 서서와 제갈량은 군중에서 함께 유비를 보좌하고 있었다.
조조의 대군은 장판까지 추격하며 유비 군을 완전히 깨뜨렸다. 그리고 조조는 서서의 모친을 인질로 잡고 서서에게 귀순하도록 협박했는데, 서서는 모친이 조조의 진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유비에게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 서서의 공로라고 했지만, 실은 많은 사람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나관중의 이야기는 이밖에도 자세한 줄거리에서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첫째, 정사의 [촉서] <제갈량>과 배송지의 주에서는, 서서의 모친이 조조에게 붙잡히자 서서는 바로 그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 조조가 거짓 편지를 쓴 사실은 없었다고 되어 있다.
둘째, 서서는 조조에게 귀순한 이래로 조비의 황초 연간까지 계속 관직에 있었으며 우중량장과 어사중승을 역임했다. 평생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한 가지 계략도 진언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러한 높은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나관중이 시기를 나중으로 돌리고 역사적 사실을 고친 이유는 서서와 제갈량의 재능의 고하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며, 또 한 조조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었다.
18 제갈량의 원래 성은 갈 씨였다
제갈량의 성씨에 대해 정사는 아무런 의문점도 제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의 자는 공명이고 낭야군 양도 사람으로 한의 사령교위 제갈풍의 후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배송지는 정사에 주를 달면서 제갈량의 본래의 성은 ‘제갈’이 아니라 ‘갈’이라고 했다. 그 주에서는 응소의 {풍속통], 위요의 [오서]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갈량의 일족은 원래 갈 씨 성으로 진말에 진승과 오광의 봉기에 가담한 장군인 갈영의 자손이다. 갈영은 전공을 올렸지만 진승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한의 문제 때 그 공적을 인정해 자손을 제현후(제현은 낭야군에 속한다)에 봉했다.
그 후 여러 대가 지나서 그들의 일족이 제현에서 양도로 옮겨갔는데, 양도에는 원래부터 갈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둘을 구별하기 위해 양도의 사람들은 그들을 제갈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후 언제부터인가 두 글자인 제갈이 통용되게 되었다.
이 설에 대해서 중국 성씨의 뿌리를 고찰하는 입장에서 이의가 제기되었는데, ‘길’이라는 성은 상고시대 중원에 있었던 갈천 씨라는 부족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들은 평화를 즐기고 생업에 힘쓰며, 춤과 노래를 즐기는 부족이었다. 유명한 ‘갈천 씨의 가무’가 여기에서 생겨났다. 갈천 씨의 자손이 바로 갈 씨이다. 하 왕조에 이르러 백익의 자손이 제후가 되어 갈백(갈은 하남성 영릉현의 동북쪽)에 봉해졌다. 갈백의 자손도 갈 씨라 칭했다.
제갈이라는 성씨는 백익의 후예인 갈백의 나라가 멸망한 후, 갈씨의 일족이 산동의 여러 성에 옮겨 산 것에서 비롯되었다.
진말에 진승이 봉기했을 때 갈영은 여러 번 공적을 세웠는데, 중상모략을 당해 진승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 후 한의 문제 때 갈영의 자손을 제현후에 봉한 이래고 그의 자손을 제갈 씨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이라는 성은 제현에서 양도로 옮긴 후에 그곳의 다른 갈씨와 구별하기 위해 고친 것이 아니라, 양도에 옮겨 살기 전부터 봉지와 관련해 고쳤다는 것이다.
19 제갈량의 호 ‘와룡’은 방덕공이 지었다
사서에 의하면 제갈량은 숙부가 죽은 후에 남양군 등현의 융중에 숨어 살면서, 낮에는 밭일을 하고 밤에는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동료들 중에서도 그는 뛰어난 존재였으며, 뜻도 원대해 항상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었기 때문에 ‘와룡선생’이라는 칭호가 붙었다고 한다.
그럼 제갈량을 왜 와룡이라 칭했는가? 와룡이라는 칭호는 자칭인가?, 타칭인가?
[삼국지연의]에서는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하는 장면에서 그의 입을 빌어 설명하고 있는데, 서서는 제갈량이 살고 있는 곳에 와룡강이라는 언덕이 있어서 스스로 와룡선생이라고 칭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와룡강이라는 지명은 후세 사람이 [삼국지연의]에 억지로 갖다붙였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당시 융중 일대에는 와룡강이라는 이름의 언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제갈량을 와룡이라고 칭했는가?
사서에 의하면,, 당시 융중에서 제갈량의 지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그의 두 스승, 곧 방덕공과 사마덕조였다. 그들은 오랜 기간의 접촉과 이해를 통해 ‘제갈량은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않을 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고 있고 계략을 잘 짜는 열걸’이라고 간파했다. 그래서 방덕공은 제갈량에게 와룡이라는 아호를 내렸으며9동시에 방통을 봉추라 칭
송했다), 사마덕조는 그를 세상 정세에 밝은 준걸이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와룡의 칭호는 타칭이며 제갈량의 재능과 덕에 대한 평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한, 융중이 위치하는 양양 일대는 지방의 유력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유명한 대호족을 들자면 방, 황, 괴, 채, 마, 습 등의 세력이 있었다. 후한의 중, 후가 이후로 지방은 거의 호족세력에게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만일 그들의 지지와 인정이 없었다면 그 땅에 발판을 쌓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표가 형주 입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방, 채 양 세력의 지지
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다.
제갈량도 총명한 사람이었으므로, 외지인에 이러한 지지와 인정이 없다면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융중에 있을 때에 형주의 호족세력 중에서 영향력있는 인물, 특히 덕망있는 명사와 많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청함으로써 자신의 식견을 넓히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하라고 애썼다.
양양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물산이 풍부했고 엘리트 문화인이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이 지방에는 많은 인재가 나온 것 이외에도 다른 곳에서 이주한 준걸이 많았다.
제갈량도 그 중 하나로 적지 않은 사람들과 우정을 맺어 자신의 영향력을 넓혔다. 예를 들면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 조카인 방통, 의성의 마량, 마속 형제, 박릉의 최주평, 영주의 서서와 속도, 여남의 맹건 등 젊은 명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들과는 우정이 특히 돈독해 왕래가 잦았다.
청년 시절의 제갈량은 비범한 뜻을 가져 스스로를 관중, 악의에 견주고 있었으므로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제갈량을 잘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었다.
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제갈량은 혼인이라는 루트를 활용했다. 그의 큰 누이는 괴기와 결혼했고, 둘째 누이는 방산민에게 시집을 갔다. 그 자신은 황승언의 못생긴 딸을 처로 선택했다. 황승언은 체모의 매부였기 때문에 체모는 제갈량에게 처의 외숙부가 된다. 그렇게 제갈량은 양양의 여섯 대호족 모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 제갈량은 방덕공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방씨 가문의 방덕공은 양양의 호족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인 인물로 상당한 명망을 지닌 인물이었다. 교류 범위가 넓고 식견이 높아 유표는 몇 번이나 그를 맞이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거절당했다. 그의 신변에는 재주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여들어 학문을 서로 교류하고 시국을 논했으며, 방덕공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 당시 그이 인물 품평은 사대부들 사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제갈량은 방덕공을 끊임없이 방문해 가르침을 청했다. 게다가 늘 겸허한 태도로 마루 밑에서 절을 했고 가르침을 받을 때에는 무릎을 꿇었다.
방덕공도 항상 그에게 책을 빌려주며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 인연으로 인해 서서히 그는 제갈량의 성격, 재능, 포부를 깊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와룡이라 칭한 것이다.
이 품평은 제갈량을 큰 호수에 엎드려 있는 용에 비유한 것으로, 시기가 오면 반드시 구름 위로 날아올라 그 비범한 본 모습을 발휘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처럼 와룡이라는 아호가 평가받아 널리 알려지자 제갈량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는데, 제갈량이 이같이 와룡이라는 아호를 얻은 것은 그가 이상을 위해서 분투한 결과물이며, 당시의 사회로부터 지지받고 인정받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20 제갈량은 유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웠던 후한 맒에는 제위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아 재능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군주를 택해 섬겼다.
그러나 당시 재능있는 인사 중에서도 발군으로 여겨지던 제갈량이, 왜 영웅의 기상을 가지고 크게 천하를 경략하던 조조나, 어질고 능력있는 사람을 등용하기로 소문난 손권과 손잡지 않고 기반도 정치력도 없는 유비를 택했을까?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의 예를 다한 후 천하의 대세에 대해 가르침을 청한다. 그리하여 ‘천하삼분지계’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고는 출사를 재촉한다.
하지만 제갈량은 애초에 출사할 의사가 없었다.
“저는 오랜 세월 밭일을 즐겨 세상일에 게을러졌습니다. 아무래도 명을 받들기 어렵겠습니다.”
유비는 실망의 빛을 나타내며 말한다.
“선생께서 나오시지 않으면 고통받는 저 백성들을 어찌하란 말입니까?”
유비는 이렇게 호소하며 눈물을 흘렸고, 제갈량은 유비의 뜻이 매우 진실됨을 알고는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며 응한다. 제갈량은 집을 나서며 동생인 제갈균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삼고의 은혜에 감동하여 나아가지 않을 수 없구나.”
또 제갈량은 나중에 유선에게 바친 전출사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제께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일부러 세 번이나 모옥을 방문하셔서 천하의 형세를 물으셨습니다. 저는 이에 감격하여 선제를 섬길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을까?
[삼국지연의]와 전출사표에 나오는 ‘삼고의 은혜’설은 사실이라는 것이 대개의 견해이다.
제갈량은 은거하면서 농사만을 지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견주었으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천하삼분의 융중대책은 제갈량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야심가라는 것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그가 융중에 숨어 지냈던 것은 위업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의 출현과 자신이 나설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당시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략가였다. 그러나 조조의 곁에는 이미 인재가 모여 있었다. 순욱, 곽가, 순유, 최염 등은 모두 문무의 계략을 갖춘 일류 인재들이었다. 만일 제갈량이 조조에게 투신한다면 그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하고, 일거수일투족이 결정적인 힘을 갖는 카리스마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조조는 잔인한 성격으로 의심이 많음은 물론 늘 권모술수를 부렸다. 그리고 제갈량의 정치저기이상이 조조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조조와 행동을 같이하기는 어려웠다.
손권도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천하통일의 웅대한 뜻이 결여되어 있었다. 부친과 형님이 쌓은 기반을 지키기에 급급해 강도의 한쪽 구석에 안주하고 있었다. 이것도 제갈량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더구나 손권의 주변에는 노숙, 장소 등이 있었기 때문에 관중, 악의의 재능을 부릴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유비는 제갈량의 이상에 부합되는 사람이었다. 당시 유비는 몇 번이나 좌절을 반복해 자신의 몸 하나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천하를 제패할 재능과 책략이 있었다. 또한, 천하의 영웅이라는 칭호도 얻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유비의 뜻은 위로는 국가에 보은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에 있었다.
그러므로 천하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런 점이 제갈량의 정치 목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비는 재능있는 인물을 만나면 허리를 굽혀 맞이했으므로 인심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그이 신변에는 재능있는 신하가 부족해 제갈량이 그에게 투신하면 중용될 것이 확실했다.
당시 형주의 선비 일부는 유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더불어 유비 자신도 제갈량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결국 출사한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를 택한 이유는 심사숙고 끝에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처럼 유비의 삼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동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21 융중대책은 제갈량 혼자만의 지혜가 아니었다
유비의 삼고초려가 있고, 나서, 제갈량은 천하의 대세를 분석하여 유명한 융중대책을 내세웠다. 당시 천하의 대세에 의거해 정치, 경제, 군사, 지리, 인사 각 측면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반복과 비교를 거듭하면서 일련의 정합성이 있는 전략과 책략을 내세운 것이다.
우선 단기목표로는 첫째가 형주의 유표를 쓰러뜨리는 것이었으나 유비는 그 일을 바로 실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유표가 죽고 적벽대전의 전투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형주의 일부가 유비의 손에 떨어졌다.
둘째는 익주의 유방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익주는 남서에 편재되어 있었지만, 이곳이야말로 유비가 뿌리를 내릴 장소이며, 기회를 보아 빼앗아야 한다고 제갈량은 보았다.
셋째는 손권의 역량을 인정하고 그와 동맹하는 것으로, 손, 유 동맹은 쌍방이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장기목표라는 촉을 지내하는 것, 중원을 북벌하는 것, 한실을 부흥시키는 것 등이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융중대책은 확실히 길을 열기 위한 진취적인 방법이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벌어지는 일이 많고 정세도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융중대책이 예상만큼의 효과를 올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만큼의 효과는 아니라도 그 효과가 매우 현저했다는 것은 융중대책이 길이 전해질 가치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래서 주자학으로 알려진 사상가 주희는 제자에게, “역대에 몇 마디 말로써 천하는 도모할 계략을 정한 것으로는 우선 제갈량의 융중대책을 철거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를 향해 융중대책을 피력했다는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융중대책의 내용은 제갈량 혼자의 지혜인가?
융중대책은 제갈량의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학자들은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고 깊이 연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갈량이 살고 있던 형주의 선비 그룹과 당시 사람들이 남긴 천하의 형세에 대한 논의와 구상 등을 분석해, 융중대책은 결코 제갈량 혼자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한말 동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말발굽으로 중원을 유린하고 서로 다툰 결과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낙양과 장안은 온통 폐허로 변했다.
한편 행주는 기본적으로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중언 사람들은 전란을 피해 속속 형주로 몰렸는데, “선비의 고장 형주로 피난한 사람은 무도 천하의 준걸이었다.”라고 역사서는 전하고 있다. 물론 형주 자체도 인재 배출의 땅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방덕공, 사마덕조, 황승언, 서서, 방통, 제갈량 등 쟁쟁한 인물들이 형주에 운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표와 함께 대업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직에 오르라는 요청을 계속 거부했다.
그렇다고 마냥 세간으로부터 초연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때를 기다렸다가 봉황의 나래를 펴기 위해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며, 명군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대문에 그들은 자주 회합을 가지며 고전이나 역사서를 연구하여 천하의 대세를 논하고, 당시 군벌 지배의 암흑시기를 공박했다.
이렇게 해서 형주, 양양 일대에서 명사와 청년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그룹이 형성되어 중소 지주층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갈량은 그런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 석광원, 서서, 맹공위 등과 함께 방덕공, 사마덕조 등의 명사와 친하게 지내며 가르침을 받았다. 게다가 황승언의 사위이기도 했다.
제갈량은 그들과 끊임없이 왕래하며 토론을 주고받음은 물론, 학문을 닦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는 스승이나 친구를 통해 적지 않은 정치적 소양을 길렀고,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제갈량은 학식이 비범하고 지혜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사회적 명성을 얻었으며, 형주, 양양 선비 그룹의 관심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유비가 형주에서 제왕의 혈통과 천하의 영웅이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현명한 사람을 찾고 있을 때, 유비에게 호감을 가진 형주, 양양의 선비 그룹은 그 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와룡 제갈량과, 봉추 방통을 추천한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서 융중대책을 강구했고, 방통은 방통대로 ‘지금 천하는 동으로는 오 손씨, 북으로는 조씨가 있으므로 익주를 손에 넣어야 비로소 셋이서 대립하는 형세를 만들 수 있다고’고 진언했다.
이같은 방통의 견해가 그만의 생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의 융중대책도 제갈량 혼자만의 것은 아니며, 그것은 형주, 양양의 선비 그룹에 의한 집단적 지혜의 결정체였다.
더욱이 후한말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란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제갈량 외의 다른 식견있는 선비들도 모두 각자의 경험과 그 시야가 미치는 만큼 시국의 동향을 관찰하고 장래의 움직임을 헤아려 자신이 갈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에서는 노숙이 제갈량의 융중대책 이전에 손권을 향해 ‘한실의 부흥은 불가능하다는 것’, ‘조조를 제거하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강동에 자리를 잡고 천하를 도모할 기회를 엿보는 것’ 등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유표를 정벌하고 장강 전역을 지배하에 두고, 제위에 올라 천하를 도모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있다.
정사와 배송지의 주에 의하면, 후한말 오의 감령, 주유, 형주의 방통, 익주 유장의 재능있는 신하 법정 등은 모두 ‘천하삼분’이라든가, ‘그 하나의 다리를 공격한다’라든가 하는 논의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구상이 비슷한 것은 제갈량의 융중대책이 당시의 정치적, 군사적 투쟁의 산물이며, 한 사람의 천재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방통과 제갈량은 모두 형주, 양양의 선비 그룹에 속하는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노숙은 오나라 사람이지만 형주, 양양의 선비들과 밀접한 유대가 있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게다가 융중 대책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방통, 노숙의 견해가 제갈량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제갈량의 융중대책을 그 혼자만의 지혜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유비를 위해 천하삼분지계를 구상해 망설임을 없애 준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제갈량이 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당시의 정세를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으므로, 천하는 반드시 삼분된다고 예측한 그의 판단을 평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22 박망파 싸움은 유비의 계획이었다
[삼국지연의]의 제39회는 박망파에서 벌인 화공 이야기이다.
제갈량을 삼고의 예로 맞이한 후에 유비는 제갈량을 스승으로 섬겨 예를 다했는데,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환대는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품을 정도였다.
이때 조조는 하후돈에게 병사 10만을 주어 신야를 공격하게 했는데, 유비는 제갈량에게 이에 대적하도록 지휘를 맡긴다.
제갈량은 조운을 선봉으로 삼아 적을 유인하게 하고, 관평과 유봉에게 병사 5밸 명을 주어 박망파에에 숨기고 화공을 펼치도록 했다. 관우, 장비에게는 각각 병사 천 명을 주어 박망파의 좌우 여산과 안림에게 숨게 하고, 불길이 오르면 일제히 공격해 조조 군의 군량미를 태우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유비는 뒤에서 원군을 이끌게 하고, 제갈량 자심은 미축, 미방과 함께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신야 현성의 수비에 임했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까지도 이 계략이 잘될까 의심했고, 장수들 중에서도 제갈량의 용병술을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조조 축의 하후돈과 부장인 우금, 이전 등이 군사를 이끌고 박망파에 있을 때, 조운이 나가 싸움을 걸어 패한 척하고 후퇴했다. 유비도 병사를 이끌고 응전하다가 바로 후퇴하자, 하후돈은 상대의 병력을 우습게 여기고 추격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것은 이전과 우금이었다. 이미 날이 저문데다가 길이 좁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하후돈에게 화공에 대한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하후돈이 그것을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조조 군이 관평과 유봉에게 화공을 당해 대혼란에 빠지자 즉시 조운이 반격으로 전환하고, 관우, 장비도 각각 병사를 이끌고 공격했다. 결국 조조 군은 대패했고 전장은 시체로 가득했다. 하후돈은 당황하여 부산을 떨며 도망쳤다.
싸움은 모두 제갈량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이 화공에 의한 최초의 성공으로 관우, 장비와 병사들은 완전히 제갈량에게 복종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 군대 내에서도 제갈량의 위신이 확립되었다.
그럼 역사상 이렇나 일이 실제로 있었는가?
박망파 싸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사의 <유비전>에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유비가 유표에게 몸을 의지해 신야에 주둔하고 있을 때, 당시 유비를 연모하는 형주의 인재들이 유비의 밑으로 들어왔는데, 유표는 유비가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는 유비를 없애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조의 한 부하 장수인 하후돈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고, 유표는 유비를 시켜 이들을 박망파에서 무찌르도록 명령했다. 유비는 사전에 복병을 배치한 후 진지에 불을 지르고 일부러 퇴각했고, 이를 추격해 온 하후돈을 복병에게 공격하게 해 대파했다.
박망파의 전투는 이처럼 유비가 제갈량에게 출사를 요청하기 전의 일이며, 유비 스스로 작전계획을 짜고 군사를 지휘해 성공을 거둔 복병전이다. 게다가 스스로 진지에 불을 붙이고 일부러 퇴각한 것이지 박망파에서 조조 군에게 화공을 가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삼국지연의]의 이야기가 사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있다.
원래 이 이야기의 창작은 [삼국지연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원대의 잡극 중에 이미 ‘제갈량이 박망파에서 둔영을 태우다’라는 극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극의 줄거리에는 [삼국지연의]와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예를 들면 불을 지른 것은 미축 형제이고, 관우는 물을 뿌리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장비는 적군을 조롱하는 등등의 일들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와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승리의 공로를 유비로부터 제갈량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나관중은 제갈량의 지혜로운 모습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사실을 대폭 수정한 것이었다.
이 박망파의 화공 이야기에 의해 사람들은 제갈량의 출사 후 유비는 신야에서 큰 패배를 당해 남쪽으로 도망쳤다는 역사의 진실을 잊어버렸다. 이러한 점에서 나관중의 창작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제 3 장 제갈량은 신야에서 화공을 쓴 적이 없다
23 제갈량은 신야에서 화공을 쓴 적이 없다
[삼국지연의] 제40회에는 제갈량이 신야를 불로 공격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후돈은 박망파에서 화공을 당해 참패한 후 허창으로 돌아가 조조에게 죄를 청하고, 조조는 치욕을 풀기 위해 건안 13년(208) 7월에 몸소 대군 50만을 이끌고 다섯 갈래로 나누어 형주를 정벌했다. 그때 유표의 아들 유종은 싸우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했는데, 유비는 신야에서 그 소식을 듣고는 제갈량과 대책을 논의할 때 제갈량이 말했다.
“앞에서도 화공을 이용해 하후돈을 혼내주었습니다만, 이번에도 같은 수법을 써보겠습니다. 신야에는 이제 머무를 수 없으니 일단 번성으로 옮기도록 하지요.”
그래서 신야의 주민을 번성으로 피난시킴과 동시에 장수들을 배치해 다시 한 번 조조 군을 불로 공격하기로 했다.
조조 군의 선봉인 허저와 장군인 조인, 조홍이 신야로 밀고 들어와 보니 사방의 성문이 열려 있고, 이미 빈 성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바로 입성해 주둔했다. 그런데 밤중에 조운이 서, 남, 북의 세 성문에서 불화살을 쓰며 공격해 오자 성 안은 졸지에 큰 불이 일어나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조인은 후퇴를 위해 동문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으로도 조운의 군사가 습격해 왔고, 미방, 유봉의 부대는 측면에서 공격해왔다.
새벽 무렵에 조조 군은 백하 부근까지 도망쳤다. 사람과 말 모두가 지쳤음은 무론 군사의 태반이 얼굴이나 머리에 화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강에 다다르자 조조 군은 줄줄이 강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상류에서 모래 주머니로 물을 막고 있던 관우는, 하류로부터 사람과 말 소리가 나자 군사에게 명해 모래 주머니를 치우도록 했다. 물은 엄청난 기세로 흘러내려갔고 조조의 군대는 순식간에 물에 빠져버렸다.
조인이 물의 흐름이 느린 곳을 향해 도망쳐 겨우 박릉의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 또 장비의 군사가 습격해왔다. 조조 군은 계속된 공격을 받고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면 통쾌하게 그려진 이 이야기는 과연 사실인가?
정사의 <제갈량전>을 보면, 조조 군이 남쪽 정벌에 나섰을 때 마침 유비는 제갈량 등과 함께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번성에서 유종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조조군에 대항하지 않고 무리를 이끌고 남으로 갔다는 것이다.
당시에 유비 군이 조조 군에 저항한 기록이나, 조조 군을 신야에서 화공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신야를 화공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인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유비가 처음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지할 때에 신야에 주둔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201년의 일이다. 207년에 유표가 죽고 아들인 유종이 뒤를 이어서 형주목이 되었을 때 유비는 다시 번성에 주둔했다. 유비가 삼고초려하여 제갈량의 출사를 청한 것이 바로 그때의 일이며, 조조 군의 남쪽 정벌은 208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신야를 화공한 이야기는 정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적 측면에서는 제갈량이 출사한 후의 뛰어나 인재상을 그리는 것에 성공하고 있다. 이것에 의해 독자의 마음 속에는 제갈량의 비범한 인상이 각인되는 것이다.
24 제갈량의 백우선은 먼지떨이개였다
제갈량의 인물상에 대한 더 오래된 기록은 [예문류취]에서 인용하고 있는 동진시대 배계가 지은 [어림]에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에서는 “제갈량이 사마의와 위빈에서 대치했을 때, 흰 수레를 타고 갈건(배로 만든 두건)을 두르고 모선(털 부채)을 쥐고 삼군을 지휘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산에서의 싸움은 말이 아닌 가마를 타고, 모자가 아닌 두건을 두르며, 싸움을 앞두고 몸을 보호할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손에 모선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장에 이러한 차림으로 나타나면 다른 계책이 있는 듯 보이게 마련이며, 한편으론 신선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수천년 동안 사람들은 제갈량의 이러한 차림을 극구 칭찬하며 우상화했을 뿐 제갈량의 손에 들고 있던 백우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인민일보] 해외판에 구석방이 [흑룡강일보]에 발표했던 글이 옮겨 실렸는데, 그 대강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림]에서 제갈량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은 ‘우선’이 아니라 ‘모선’이라고 한다. 우선과 모선은 크게 다르다. 우선은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부채이지만, 모선은 부채가 아니라 주미(먼지떨이개)의 별칭이다. 고라니의 꼬리털이 먼지를 잘 떨어낸다고 해서 당시 마음의 깨끗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지니고 다녔다. 또한, 나중에는 불교도들도 많이 가지고 다녔다.
지금도 전해지는, 당나라의 염립본이 지은 [역대제왕도전]에는 손권이 손에 주미를 쥐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한말에서 남북조에 걸쳐 문사들이 취미, 예술, 학문을 이야기할 때는 주미를 손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명사이면서 종실의 신하를 겸하는 제갈량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모선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구석방은 송대의 간행본인 백씨변첩사류집]과 [태평어람]에서 인용한 [촉서]를 증거로 들고 있으므로, 제갈량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은 틀림없이 모선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25 조자룡의 장판파 싸움은 과장된 것이다
조운(?-229)은 자를 자룡이라 하며 상산군 진정현 사람으로, 원래 공손찬의 부하였지만 나중에 유비에게 귀의했다. 삼국시대의 풍운아였던 조운과 관련된 미덕과 일화는 천 년이 넘게 세상에 널리 알려져 왔다.
유비가 조운을 오호대장의 한 사람으로 봉한 것에서, 조운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것으로 굳어졌다. [삼국지연의] 제 41회에는 조운이 홀로 말을 타고 유선을 구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조조의 대군이 형주로 밀고 들어갔을 때, 유비는 10여만의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신야에서 강릉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때 장비에게는 후방을 맡기고 조운에게는 가족을 부탁했다.
당양에 이르렀을 때, 조조 군에게 추격을 받아 저항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은 혼란에 빠졌다. 유비는 처자를 내팽개치고 남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혼란의 와중에서 유비의 가족과 떨어진 조운의 주변에는 기병 30-40만이 따를 뿐이었다.
그는 어지러운 전쟁터를 이리저리 헤매며 간옹과 감부인을 찾아내고, 조인의 부하 장수인 순우도를 찔러 죽인 후 미축을 구해낸다.
감부인 등을 장판파까지 데려다준 조운은 되돌아가 미부인과 유선을 찾아다니다 도중에 조조의 부하 장수인 하후은을 죽이고, 조조의 자랑거리인 청홍보검을 빼앗는다.
이때 조운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창 한 자루와 말 한 필뿐이었지만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로지 유선을 찾아 다니다 토담 위의 마른 우물 옆에서 미부인과 유선을 발견했다. 더구나 미부인은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조운이 몇 번이나 “이 엄중한 포위망에서 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짐이 될 뿐 이라며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다.
조운은 미부인이 목숨을 끊는 것을 보고, 조조의 군사에게 시체를 욕보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토담을 무너뜨려 마른 우물을 덮었다. 그리고 나서 즉시 가슴에 대는 갑옷 끈을 풀어 엄심갑(가슴을 보호하는 쇠판) 아래 유선을 품고, 말에 올라 쏜살같이 포위망 속으로 돌진했다. 도중에 조홍의 부장인 안명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길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장합의 부대가 습격해 왔다.
조운은 장합을 피해 옆으로 도망치다가 사람과 말 모두 구덩이에 떨어졌다.
장합이 즉시 창을 내찌르려고 했을 때 한 줄기 붉은 광선이 구덩이에서 떠오르며 말을 탄 조운이 하늘을 가르고 뛰어올랐다. 이 광경을 본 장합은 몹시 놀라 도망치고 말았다.
경산 정상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조조는 조운의 기세를 보고 부하에게 말했다.
“활을 쏘아서는 안 된다. 생포하라.”
엄중한 포위를 뚫고 탈출했을 때, 조운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유비를 만나자마자 그는 말에서 내려 엎드려 울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빌고는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유선을 유비에게 바쳤다.
이처럼 조운이 장판파에서 유선을 구한 이야기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사의 기술이 아주 간략한 것으로 보아 모두가 사실 그대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운전>에는 유비가 당양의 장판에서 추격을 받는 장면의 기록이 있다.
“유비가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을 때, 조운은 갓난아기를 가슴에 안고 그 생모인 감부인을 보호하며 같이 난을 피했다.”
조운이 직접 주인을 구한 것과 관련된 기사는 원문에 불과 한 문장만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행위와 동작, 결과를 나타내는 말은 ‘안고’, ‘보호하고’, ‘모두 피할 수 있었다’ 정도일 뿐으로 아주 간략하다.
이것에 대해서는 원대 [삼국지평화]의 묘사도 아주 간단해 원문에 2백자 내외의 서술이 있을 뿐이다. 이야기 자체도 조운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관중은 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실을 기초로 허구화하고 과장하여 긴장감있게 일련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조운의 문무를 겸비한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다.
나관중이 과장한 조운의 지혜는 미부인이 자살했을 때 담을 무너뜨려 시체를 덮은 것에 나타나 있고, 그의 용맹은 밤부터 새벽녘까지 계속 싸운 것에 나타나 있다.
게다가 피곤에 지쳐 있으면서도 적에게서 보검을 빼앗고,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도 말을 달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장수를 베고 창을 빼앗으며 단신으로 조조 진영의 명장 50여명을 죽였다
그러나 사실은 조운이 유선을 안고 감부인을 보호하며 재빨리 물러난 곳은 괸산이었다.
이런 상황에 적군 속에서 종횡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조운이 장판에서 적과 육탄전을 벌여, 목숨을 걸고 유선을 구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26 장비의 장판교 이야기도 나관중의 과장이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무장 중에서도 장비는 특히 개성이 뚜렷한 인물이다. 민간전설의 영향을 받아 다분히 중국 봉건시대의 소박하고 솔직한 농민의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랜 옛날부터 인기가 있었다.
나관중은 장비를 그릴 때는 조심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덜렁이’ 이미지가 특히 많았는데, 그 예 중의 하나가 장판교를 크게 시끄럽게 한 이야기이다.
[삼국지연의] 제42회에서 유비는 조조 대군의 남쪽 정벌을 피해, 10여만의 군사와 백성을 데리고 강릉으로 향한다. 그러나 유비는 바로 조조 군에 쫓기게 되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유비는 장비가 지켜줌으로써 싸우면서 후퇴한다. 주위에는 백여 필의 말과 사람이 남았을 뿐이다.
이 때 미방이 조운이 이미 항복했다고 말하자 장비는 유비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조운을 찾으러 간다. 장비는 장판파에 이르러 20여 명의 부하에게 명령해, 말꼬리에 나뭇가지를 묶어서 숲속을 돌며 달려 자욱히 흙먼지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적에게 복병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다리 위해서 말을 멈추고 방패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장비는 조운이 배반한 것이 아니며, 조조의 진영을 뚫고 갔건 것은 어린 주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조운이 유선을 구해 오겠다고 할 때 “빨리 가라! 뒤는 내가 맡겠다.”라며 계속해서 장판교 위에 머물렀다.
그때 그곳으로 조조의 부하 장수인 문빙이 쫓아왔다.
문빙이 보니 장비가 법 같은 수염을 곤두세우고 고리눈을 치켜 뜨고, 손에는 1장 8척의 창을 들고 말에 올라 있었으며, 다리 동쪽의 숲에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복병이 숨어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을 본 문빙의 병사들은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조인, 이전, 하후돈, 악진, 장료, 장합, 허저 등이 부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 또한 이 광경을 보고 제갈량의 계략이 아닌가 의심하고는 아무도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조조는 몸소 앞으로 나와 상황을 살폈지만, 그 역시 전진이냐 후퇴냐를 결정하기가 함들었다.
장비는 조조가 직접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큰소리로 외쳤다.
“장익덕이 여기에 있다! 나와 겨룰 자가 없느냐?”
마치 우레와 같은 장비의 포효에 조조의 군사들은 모두 양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무서워했고, 조조가 주저하며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장비는 또 한 번 눈을 부라리며 크게 외쳤다.
“장익덕이 여기에 있다! 나와 겨룰 자가 없느냐?”
조조는 기세가 꺾여 재빨리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장비는 그것을 보고 창을 더욱 바싹 당기며 큰소리로 외쳤다.
“싸울 테냐! 도망칠 테냐! 확실히 해라!”
조조 옆에 있던 하후걸이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에서 굴러떨어졌고, 조조가 당황하여 말머리를 돌리자 부장들 전원이 뒤를 이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면서 갑옷을 벗어던지고 투구를 떨어뜨린 자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현장은 대혼란에 빠져 같은 편끼리 서로 죽이기로 했다.
그러면 장비가 장판교에서 펼친 이같은 활약은 사실일까?
정사의 <장비전>을 보면, 유비가 조조의 공격을 받아 남으로 후퇴할 때에 확실히 장비에게 후미를 맡겼다고 한다.
이때 장비는 강을 방패로 삼아 다리를 잘라놓고, 창을 겨드랑이에 낀 채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나는 장익덕이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는 덤벼라.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
이런 것을 보면, 장비의 활약상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으면 전체가 허구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창작할 때, 나관중은 여러 가지로 살을 붙여 과장했다.
첫째로, 사서에는 장비가 장판교에 멈춰서서 조운을 도와 주인을 구하게 했다는 기술이 없다.
둘째로,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 온 것은 확실하지만, 조조와 그의 부장들이 다리 부근에서 장비에게 놀라서 물러났다는 기록은 없다.
셋째로, 하후걸이라는 인물은 실존하지 않는다.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것도 허구이다.
그러므로 장비가 크게 장판교를 시끄럽게 했다는 것은 전부 허구는 아닐지라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시 장비의 활약은 사실과는 아주 달랐지만, 나관중의 교묘한 각색에 의해 수백 년 동안이나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이를 더욱 과장해 장비가 세 번이나 큰소리를 질러 조조 군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고함 때문에 장판교가 무너지고 강물이 역류했다는 식으로 부풀렸다.
27 주유는 지용을 겸비한 뛰어난 군략가였다
[삼국지연의]에 그려진 주유는 역량이 작고 질투가 많으며, 경쟁심이 강해서 눈앞의 득실을 따지는, 정치적 안목이 결여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의 도량이 좁은 모습을, 적벽대전 이후 제갈량에 대한 네 가지 질투로 표현하므로써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네 가지 질투가 생겨난 시기는 다음과 같다.
손권이 조조에게 대항할 결심을 굳힌 뒤에 생겼다
“제갈량이 손권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두려워할 만한 사내이다. 내버려두면 언젠가 강동의 재앙이 될 것이 틀림없으므로 그 전에 죽이는 것이 좋다.”
주유는 이렇게 결심했지만, 그 후 노숙에게 충고를 듣고는 마음을 돌렸다.
삼강구에서 조조를 무찌르기 전에 생겼다
주유는 다른 사람을 통해 제갈량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조조 군이 엄한 경계태세를 굳히고 있는 취철산의 식량기지를 태우라고 제갈량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장간이 주유에게 속아 조조가 채모와 장윤을 죽인 후 생겼다
제갈량을 죽이려 했던 것이 자신의 계략이라는 것을 제갈량에게 간파당한 주유는 화가 났다.
“녀석을 죽이지 않으면 면목이 서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제갈량에게 요구했다.
“열흘 안에 10만 개의 화살을 준비하라! 그렇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
그러나 제갈량은 풀을 쌓아놓은 배를 이용해 화살을 빌리는 것으로 주유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제갈량이 동풍을 일으켰을 때 생겼다
주유는 정봉과 서성에게 병사를 주어 제갈량의 뒤를 쫓게 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사전에 조운에게 마중나올 것을 일러두었기 때문에, 주유는 헛걸음만 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상 네 가지의 질투로 인한 지혜 대결을 보면 도량으로도, 계략으로도 주유는 제갈량의 상대가 아니었다. 주유의 좁은 도량은 제갈량의 지혜를 더욱 빛나게 할 뿐이었고, 이러한 나관중의 인물 창조는 확실히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 주유는 과연 도량이 좁은 사람이었을까?
정사의 <주유전>은 “성격은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권은 역시 주유를 평가할 때 “영웅의 기개와 담력과 지략을 겸비하고 있다.”고 했고, 여몽은 더욱 그를 숭배하여 “주유와 노숙은 독자적인 견해로써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방침을 제안했다. 실로 기재라 할 것이다(사실 이것은 진수의 비평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주유가 도량이 좁았다는 것에 대해 언급한 자료는 삼국시대의 역사서 중에는 보이지 않는다.
북송 때의 [자치통감] 저자는 적벽대전을 서술하면서, 주유를 특히 높게 평가했는데, “강적에 직면해 의연한 태도와 결단력있는 지휘,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담력으로써 적은 병력으로 강적인 조조를 크게 이겼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면 분명 주유는 뛰어난 군사 지휘자로서 인품과 기지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상 주유는 나관중의 말처럼 도량이 좁은 인물이 아닌, 지혜와 용맹을 겸비하고 기지가 뛰어난 군략가였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주유의 모습과 실상의 차이가 큰 이유는 오와 촉의 모순이 심화되는 시기에 맞추어, 주유와 제갈량의 싸움을 통해 제갈량의 비범함을 돋보이게 하려 한 결과이다.
28 장간은 주유의 계략에 빠진 적이 없다
[삼국지연의] 제45회는 장간이 주유의 반간계에 빠진 이야기이다.
조조가 삼강구에서 실패를 한 뒤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계략을 물을 때 모사인 장간이 스스로 나섰다.
“저는 주유와 어릴 적부터 동문수학하던 사이입니다. 그러니 제가 강동으로 가 주유를 만나 항복을 권유하겠습니다.”
주유는 장간이 방문한 목적을 알고 몸소 맞이하러 나간다. 인사를 나눈 후 주유가 조조의 말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장간은 당황하며 부인했다.
주유는 장간을 진중으로 맞이해 연회를 베풀며, 나란히 앉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의 연회는 옛정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조조와의 싸움에 대해 언급하는 자는 즉시 베어 버릴 것이다.”
이 때문에 장간도 연회석에서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연회가 한창 절정일 때 주유는 장간을 데리고 나와 진중을 둘러 보며 말했다.
“주군과 나는 밖으로는 군신의 의리를 지키고, 안으로는 골육의 은혜를 맺었네.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고 명령에는 반드시 따르며, 화와 복을 함께 하기로 한 관계이기 때문에 조조에게 항복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네. 아무리 권유해도 이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네.”
이 말을 들은 장간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결국 투항을 권유하는 이야기는 꺼내보지도 못하고 두 사람은 다시 연회석으로 돌아와 술을 마셨다.
연회가 파한 후에 주유는 일부러 취한 척하며 장간과 함께 침실에서 잠들어 버린다.
장간은 주유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으므로 잠을 못 이루다가 주유가 우레와 같이 코를 고는 것을 보고 살짝 일어나 책상 위에 놓여진 편지를 훔쳐보았다. 그 중에는 조조의 부하 장수인 채모와 장윤이 주유 앞으로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편지의 내용은 조조를 죽이고 투항하겠다는 것이었다.
장간은 급히 편지를 품 속에 넣고 침상으로 돌아와 잠든 척했다. 새벽녘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주유를 깨워 장막 밖에서 두 사람이 밀담을 나누었는데, 장간이 몰래 엿들으니 채모와 장윤의 이야기였다. 장간은 점점 편지의 내용을 믿게 되었다.
장간은 주유가 다시 잠이 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군영을 빠져나와 조조의 진영으로 돌아가서 훔쳐온 편지를 조조에게 내밀었다. 조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사실 여부를 밝히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
사실 조조의 수군도독인 채모와 장윤의 편지, 그리고 그밖의 자세한 얘기는 모두 주유가 사전에 준비한 것으로, 장간은 감쪽같이 그의 반간계에 빠진 것이었다.
그럼 장간은 정말로 주유가 준비한 반간계에 빠졌던 것인가?
정사의 <주유전>에서 인용하는 <강표전>을 보면 사실은 다음과 같다.
건안 15년(210), 조조는 모사인 장간이 주유와 동향인 것을 이용해 주유에게 투항을 권유하러 보냈다.
주유는 장간을 맞이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주유의 진영에 있던 며칠간 주유는 장간을 데리고 군마, 군량을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나서 주유는 자신의 손씨 정권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장간은 웃고만 있을 뿐 끝내 투항을 권유하지 않고 조조에게 돌아가 보고했다.
“그는 도량이 넓은 사내이며, 몇 마디 말로써 손권과의 사이를 깰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조조가 장간으로 하여금 주유에게 투항을 권유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적벽대전이 일어난 2년 후의 일이었지,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은 아니었다. 또한 주유가 장간을 위해 연회를 베푼 군영회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편지를 훔친 이야기는 허구일 뿐이다. 주유가 장간에게 반간계를 사용한 사실은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장간이 계략에 넘어간 일도 없었던 것이다.
29 제갈량은 10만 개의 화살을 구할 수 없었다
[삼국지연의] 제46회에서 주유는 제갈량의 지모가 뛰어나서 언젠가는 자신들에게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 보고, 또 그의 재능을 시기해 여러 번 제갈량을 제거하려고 한다.
어느 날 주유가 제갈량에게 열흘 안에 10만 개의 화살을 준비하라고 요구하자 제갈량은 그 자리에서 승낙하며 3일이면 충분하다고 장담했다.
주유는 내심 기뻐하며 제갈량에게 군령장을 내리는 한편, 군 내에 있는 장인들에게 일부러 시간을 끌어 납기일에 맞추지 못하게 했다. 이것을 구실로 제갈량을 죽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태연했다. 다만, 은밀히 노숙에게 이렇게 부탁할 뿐이었다. 즉, ‘배를 20척 준비해 그 배에 각각 병졸 30명씩을 태워 푸른 장막을 치게 할 것, 배의 양측에 볏단을 천 개씩 나란히 늘어놓을 것’등이었다.
3일째 되는 날 새벽 장강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제갈량은 노숙을 배 안으로 불러, 20척의 배를 긴 밧줄로 서로 연결하고는 안개 낀 강을 거슬러 북상했다. 날이 샐 무렵 배는 조조의 군영 가까이에 다다랐다. 제갈량은 배를 일렬로 나란히 세우고, 일제히 북을 치면서 함성을 지르게 하고 자신은 노숙과 술을 마셨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복병이 있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며 만여 명의 사수를 동원해 활을 쏘게 했다.
조조 군이 손 화살을 다 받은 제갈량은 뱃머리를 반대로 돌리도록 명령해 또 화살을 받게 하고 나서는 안개가 걷히는 것을 기다렸다가 즉시 후퇴하도록 했다. 20척의 배 양측에 나란히 놓아둔 볏단에 화살이 가득 꽂혀 있었으므로 10만 개의 화살을 제갈량은 간단히 손에 넣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안 주유는 “공명의 기지묘계는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다.”며 감탄했다.
여기에서 제갈량은 명백하게 이 계획의 입안자이며 실행자로 그려져 있으며, 수백 년 동안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실제로 제갈량이 기지로써 화살을 빌렸다는 이야기는 역사서에는 나오지 않으며, 이야기 자체에도 결점이 있는데, 그 결점은 다음과 같다.
만 단 이상의 볏단이 필요하다
각각의 배에 볏단을 천 단 이상 싣고자 한다면 20척에는 2만 단 이상의 볏단이 필요한데, 볏단 하나의 무게를 다섯 근(한 근은 약 5백 그램)으로 치면, 10만 근 이상의 볏짚이 필요하다.
게다가 20척의 배에 둘러치는 장막의 양도 상당한데, 과연 이 정도의 재료를 노숙이 그날 중에 준비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그 사이에 얼마만큼의 인력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노숙에게 이 정도의 많은 인력과 배를 조달할 권한이 정말 있었는지, 설령 조달할 수 있었다 해도 주유 몰래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삼국시대 쾌속선의 길이는 20장(1장 2.25미터)을 넘지 않는다
수, 당대의 대형 용선이나 대형 선박은 20장을 넘지 않는다. 천여 개의 볏단을 양쪽에 나란히 놓아두려면 한쪽에 적어도 5백 단이 필요하다. 볏단 한 개의 직경이 최소 0.5척(1척은 22,5센티미터)으로 하면 5백 개의 볏단은 25장(56.25미터)의 길이가 된다. 이보다 작으면 볏단이라 부를 수 없고 활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러면 삼국시대에 이런 길이의 배가 있었을까? 또 이 정도 길이의 배를 쾌속선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
20척의 배를 긴 밧줄로 서로 묶는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
배의 길이를 25장이라고 가정하면 전체 길이가 적어도 1.65킬로미터가 된다. 이런 긴 배를 나란히 해서 서에서 동으로, 또 동에서 서로 방향을 바꾸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또 장강의 강폭이 그 정도로 넓었을까?
설령 방향을 바꾸었다 해도 이에 필요한 시간과 조조 군 만여 명의 사수가 화살을 쏘는 데에 필요한 시간(15-16개의 화살을 쏘는 것만으로 15-16만 개가 된다)은 서로 일치할 수 없다.
이런 사정으로 볼 때 지략으로 화살을 빌린다는 것은 제갈량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대의 [삼국지평화]에도 이 이야기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화살을 빌린 주인공을 주유로 바꾸어 그를 칭송하고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도 간단하고 조잡한 것으로 보아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주유가 행한 일일 수도 없다.
그러면 기묘한 꾀를 써서 화살을 빌린 사실은 있는 것인가?
정사의 <손권전>을 보면, 건안 18년(213) 손권과 조조가 유수에서 대치했을 때를 배송지는 [위략]을 이용해 이런 주를 달고 있다.
“어느 날 손권이 큰 배를 타고 적의 정세를 시찰하려 가자 조조의 군사들이 활을 마구 쏘았다. 그런데 그 때문에 꽂힌 화살의 무게로 배가 기울어 전복될 지경이었으므로 손권은 배를 돌려 반대 쪽으로 화살을 맞게 했다. 그러자 화살의 무게가 골고루 흩어져 배가 안정되었고, 그때에야 물러날 수 있었다.”
기묘한 꾀로 화살을 빌린 이야기는 확실히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적벽대전 이후의 일이었고, 실행자 또한 제갈량이 아니라 손권이었다. [위략]에 기재되어 있는 손권의 이야기는 그만큼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자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그의 역할을 과장하고, 손권에게 일어났던 일을 제갈량으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을 5년이나 앞당기고, 지점을 환남의 장강 지류에서 적벽으로 옮겼으며, 받은 화살의 양을 크게 늘린 데다가 다른 이야기를 적지 않게 덧붙이고 있다.
30 황개는 고육지계를 쓰지 않았다
오나라의 대장 황개의 자는 공복이며 영릉군 천릉(지금의 호남성 영릉) 사람으로, 처음부터 손권의 거병에 가담해 적벽대전에서의 공로로 무봉중량장으로 승진했고, 나중에 군수가 되었다.
[삼국지연의] 제46회는 황개가 적을 속이기 위해 자신이 몸을 괴롭히는 고육지계를 이용해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한 이야기로,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의 노장 황개는 주유에게,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고 화공을 감행하고 싶다고 자청했다.
“웬만큼 힘든 고초를 겪지 않으면 조조도 신용하지 않을 것이오.”
주유가 이렇게 말하자 황개가 대답했다.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고육지계를 실행하겠습니다.”
다음날 주유는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각자 3개월 분의 군량미를 받아 적에 대비하라.”
황개는 일부러 반대했다.
“만약 지금 바로 조조를 물리치지 못한다면 투항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기를 떨어뜨릴 작정인가?”
격노한 주유는 호통을 치며 황개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그러나 문무백관이 입을 모아 애걸하자 곤장 백 대를 치는 것으로 벌을 바꾸었다. 모두가 또다시 애원했지만 주유는 책상을 뒤집으며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그리고 즉시 형을 집행할 것을 명했다. 50대까지 맞았을 때 황개의 살이 찢기고 피가 흘러나왔다. 배관이 다시 입을 모아 용서를 빌자 주유가 말했다.
“50대는 맡아두겠다. 다시 한 번 사기를 저하시키는 날에는 보태어 벌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형을 받은 후 황개는 계획대로 바로 조조에게 앞으로 항복할 뜻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게다가 채중과 채화가 형을 받은 모습을 자세히 조조에게 보고했으므로 조조는 황개의 투항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 후 적벽의 화공 이야기가 연출되는 것이다.
황개가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사실이다.
정사의 [오서] <주유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적벽에서 손, 유 연합군이 조조 군을 우연히 만났을 때, 주유의 부장 황개는 ‘적은 큰 세력이고 아군은 전혀 힘이 없으니 견디기가 어렵다’고 말하며 화공에 의한 속공을 제안하고는 스스로 실형을 떠맡았다. 그리고 사전에 조조에게 투항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몰래 보내두었다. 조조 군은 황개의 선대가 나타나자 목을 베고 황개의 모습을 살피며 “황개가 투항해 왔다’고 떠들어댔다.”
배송지도 또한 <강표전>을 인용해 황개가 보낸 항복편지의 전문을 싣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황개가 조조에게 투항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 조조 군이 너무 강해 오나라가 대항해 싸울 수 없고, 둘째 이러한 사실은 모두 아는 바이며, 셋째 오나라의 정치는 부패해 현명하고 어리석음을 분간하기 힘든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황개는 정말 고육지계를 사용한 것일까?
위에서 본 역사 자료나 적벽대전에 관계한 사람들의 전기를 조사해 보아도 이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 주유와 황개가 고육지계를 꾸민 흔적도 없으며, 황개가 매를 맞은 사실도 없는 것이다. 또 황개의 편지 중에도 주유에게 마구 맞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요컨대 황개의 거짓 투항은 고육지계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었다.
나관중이 황개의 거짓 투항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고육지계를 만든 목적은 제갈량에 의한 적벽 화공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31 방통은 조조에게 연환계를 사용하지 않았다
방통(179-214)의 자는 사원이고, 양양(지금의 호북성 양번)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제갈량과 교류하며 비슷한 명성을 누렸다.
“복룡과 봉추 중 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
이 말은 당시 양양 일대에 널리 퍼져 있던 말로 봉추란 방통의 아호이다.
방통은 [삼국지연의] 제47회에 처음 등장한다. 여기에서 조조에게 연환계를 사용한다.
주유는 적벽의 전투에 앞서 두 번째로 주유의 진영을 방문한 조조의 모사 장간을 서산암으로 데리고 간다. 사전에 주유는 방통을 그곳에 거주하도록 해두었다. 그날 밤에 방통을 만난 장간은 ‘조조를 섬길 작정이라면 내가 추천하지요’라고 말했고, 방통은 바로 응했다.
조조도 방통의 이름은 전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방통을 몸소 맞이해 군영으로 안내한다. 그 후 군막으로 들어와 연회를 베풀고 방법을 서로 이야기할 때 방통의 유창한 응답을 듣고 조조는 완전히 그에게 빠져들었다.
때를 보아 방통이 말을 꺼냈다.
“승상의 수군 조련법은 훌륭합니다만 아쉽게도 빠진 것이 있습니다.”
조조가 몇 번이나 가르쳐주기를 원하자 방통은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큰 강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풍파가 그치지 않습니다. 북방의 병사는 항상 배를 타는 것이 아니므로 이렇게 흔들림이 심해서는 병이 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크고 작은 배로 조를 짜서 30척을 한 조, 또는 50척을 한 조로 하여 쇠사슬로 뱃머리와 선미를 연결하고 위에 넓은 판을 깔면 사람은 물론 말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물에 나아가면 풍파도, 조수간만의 차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당시 조조 군은 병자가 속출해 골치를 앓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조조는 이 얘기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 즉시 군중의 장인에게 명령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쇠사슬을 만들게 하여 배와 배를 이었다. 방통은 또 주유에게 원한을 가진 장수와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싶다고 청했고, 조조는 흔쾌히 동의했다. 방통은 장강을 건너 유유히 돌아갔다.
방통의 이런 계략이 주유의 화공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정사의 <방통전>에 의하면, 방통은 젊은 시절 성격이 순박해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장성해서는 인물을 알아보는 명인 사마휘에게 주목을 받았다. 사마휘는 “방통은 남주의 선비 중 일인자가 될 것이다.”라고 칭찬했는데, 방통은 그 후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나중에 남군 태수에 임명되었고, 주유가 죽자 그는 유해를 가지고 오나라로 떠났다.
그러나 방통의 이러한 경력 중에 적벽대전에 참가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적벽대전에 참가도 하지 않았는데, 싸움의 과정에서 조조에게 어떻게 연환계를 사용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장간은 적벽대전 후에 한 번 주유를 만났을 뿐, 적벽대전 당시에는 주유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방통이 조조에게 연환계를 사용한 사실은 없는 것이다.
나관중은 적벽대전을 파란과 곡절로 꾸미기 위해 방통이 조조에게 연환계를 사용한 이야기를 써넣은 것이다. 작자의 교묘한 글에 의해 방통의 이미지는 최초의 등장 때부터 비범함을 나타냈으며, 독자로 하여금 그를 잊기 어렵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민간설화에 영향을 미쳐 과장되게 전해졌는데, 오늘날의 적벽에는 지금도 봉추암이 남아 있다.
32제갈량은 적벽의 화공에 참여한 적이 없다
중국 역사 중 208년에 일어난 적벽대전은 약자가 강자를 이긴 대표적인 싸움이다. 바로 이 적벽대전이 끝난 직후 위, 촉, 오 삼국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전쟁문학으로서의 [삼국지연의]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이 전쟁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오군의 대도독 주유가 조조의 강대한 군세롤 보고 앓아눕자 병문안을 간 제갈량은 종이에 열여섯 글자를 써서 병의 원인을 알아 맞혔다.
욕파조공 선용화공
만사구비 지결동퐁
조조를 물리치면 마땅히 화공을 해야 한다.
모든 게 갖추어졌으나 다만 동풍이 빠졌구나
자기의 속을 들킨 주유가 가르침을 청하자 제갈량이 말했다.
“나는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릴 수 있소. 3일 낮 3일 밤 동안 남동의 큰 바람을 빌어 당신의 화공에 힘을 보태어 주겠소.”
용의주도한 준비 끝에 주유는 황개에게 한 부대의 배를 이끌게 했는데, 황개는 청룡기를 꽂은 배를 양곡을 실은 것처럼 위장하고 안에는 인화물질을 쌓아두었다. 이 부대는 투항을 구실로 조조의 수상 군영을 향했다.
한편 주유는 한당, 주태, 장흠, 진무 네 장수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고, 스스로 큰 배를 이끌고 부하들을 독려하여 싸움에 임했다. 그 날은 남동풍이 세차게 불었다.
황개가 미리 밀서를 보냈기 때문에, 조조는 경계하는 것을 잊고 모사와 장수들을 거느리고 큰 배 위에서 관망하고 있었다. 황개의 배가 다가오자 정욱이 양곡선이 아닌 것을 깨닫고 서둘러 보고했고, 조조는 급히 배를 정지시킬 것을 명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황개는 각각의 배에 일제히 불을 지르게 했다. 불은 남동풍을 타고 화살과 같은 기세로 조조 군의 수상 군영을 엄습했다. 조조 군의 병선은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었다. 즉시 맹렬한 기세로 불이 일어나 장강 일대를 새빨갛게 물들였고, 오나라 군은 그 기세를 타고 공격했다.
조조 군은 대혼란에 빠져 활에 맞는 사람, 타 죽는 사람, 익사하는 사람 등이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조는 나머지 병사를 수습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주유는 화공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계절적으로 풍향이 다르기 때문에 단념하고 자기의 생각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량이 남동풍을 빌어 도움으로써 조조로 하여금 갑옷을 버리고 도망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화공의 계략을 세웠다는 말은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다. 더구나 바람과 비를 블러일으키는 능력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정사의 [오서] <주유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황개의 진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지금 적은 다수이고 아군은 세력이 약하므로 대항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군선을 보니 선수와 선미를 연결해 두었습니다. 화공을 쓰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전>과 <강표전>에는 이에 덧붙여, 황개가 투항을 가장해 적벽을 화공한 전과정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적벽대전의 화공계획을 입안한 사람은 황개이며, 주유가 이를 허락하고 다시 황개가 실행한 것이다. 제갈량이 화공의 계획에 참여한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33 제갈량은 적벽대전을 지휘하지 않았다
적벽대전은 삼국시대의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총 8회에 걸쳐서 이 전쟁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어지러운 변화, 계속해서 일어나는 위기, 뛰어난 기지, 의기양양한 모습 등을 그리고 있어 독자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제갈량은 뛰어난 지휘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러 유학자와 설전을 벌이며 기지로써 주유를 격려하고, 손권을 대표로 하는 주전파의 결의를 견고히 하면서 기묘한 꾀로 화살을 비리는 등 그의 재능은 끝이 없다. 또한 넓은 도량으로 속 좁은 주유의 음모와 계략을 배제함으로써 수동적인 입장을 주체적으로 전환시킨다. 게다가 주유를 위해 남동풍을 빌어 화공으로써 최종적인 승리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묘사에서 제갈량이 적벽대전의 사실상의 지휘자이고, 주우는 조역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정사와 배송지의 주에서는 적벽대전을 아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고, [자치통감]의 서술도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들은 모두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하고 있다. 그것은 적벽대전의 한쪽 당사자는 조조이고, 또 한쪽의 주역은 손관 측의 대도독 주유라는 것이다.
역사상 주유는 흔들리지 않는 주전파였다. 조조 군이 남하했을 때 그는 손권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조 군은 원정군입니다. 그들이 말에서 내려 배를 타게 되면 풍토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필연적으로 병자가 속출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조조를 붙잡을 기회입니다.”
또한 주유는 전쟁 발발 전에 스스로 정예 병력 3만을 이끌고 하구에서 조조 군을 물리쳤다. 즉, 주유는 주전파였을 뿐만 아니라,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제갈량은 유비가 조조에게 대패하자 손권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오에 사신으로 갔다.
오에 있으면서 그가 한 활동은 고작 손권의 저항 결의를 굳히는 역할뿐이었다. 사료를 살펴봐도 제갈량이 오에 있으면서 항전계획에 참여한 흔적은 없다. 그렇다면 제갈량이 적벽대전을 지휘했다는 말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설사 그가 손권과 유비의 연합을 성사시켰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유비의 참전 능력은 미미해 싸움을 주도할 힘이 없었다.
정사와 이것에 관련된 사서의 기록은 주유가 적벽대전의 총지휘자였다는 것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조조의 남정은 오나라 내부에 화의와 전쟁이라는 대립을 일으켰고, 손권도 동요했다
손권이 자신을 굳힌 것과 제갈량의 정세분석을 나눌 수는 없지만, 주유의 당당한 의견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손권은 주유를 총지휘자에 임명했고, 주유는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유비와 연합한 것이다.
적벽대전은 화공에 의한 승리이다
그 계획은 황개가 만들었지만, 주유의 허락하에 실행한 것이다. 또한 황개가 화공작전의 구체적인 입안자였다는 것을 사서가 증명하고 있다.
황개가 조조에게 거짓 투항해 화공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주유는 군사들을 지휘하며 몸소 군을 이끌고 황개를 도왔다
요컨대 적벽대전의 지휘자는 주유이다. 제갈량이 구체적으로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며, 더구나 머리를 흩뜨리고 검을 받쳐 든 채 단에 올라 바람을 가른 사실은 없다.
그러나 제갈량이 긴급한 시기에 비교적 정확하게 정세를 분석하고, 오의 결의를 굳게 해 손권과 유비의 연합을 촉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제 4 장 주유는 제갈량이 죽인 것이 아니라 병사했다
34 주유는 제갈량이 죽인 것이 아니라 병사했다
나관중이 그린 주유는 도량이 좁은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을 우상화하려는 의도로 두 사람의 용맹을 겨루게 한다. 그 결과는 항상 똑같다. 늘 제갈량의 대응이 한 단계 위에 있는 것이다. 제51회에서 제 56회까지는 형주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제갈량이 세 번이나 주유를 화나게 해 결국 화를 못 이겨 죽게 만드는 데 그 세 번은 다음과 같다.
적벽 전투 후 주유는 남군을 공격해 조인과 싸우다 독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주유는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내고 조인을 유인해 대승을 거두고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군을 점령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운에게 명령해 이미 성을 점령하게 했고, 또한 관우에게 명령해 조조 군의 병부(군사용 부절, 명령을 받을 때 올바른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함)를 써서 양양을 공격하게 했다.
이 사실을 안 주유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화살에 맞은 상처가 찢어져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렸다.
주유는 거짓으로 손권의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는 미인계를 생각해냈다.
주유는 결혼을 위해 오나라에 온 유비를 구금해 형주를 바치라고 위협하려 했으나, 그 계략을 간파한 제갈량이 조운에게 묘계를 담은 3개의 비단주머니를 주며, 유비가 화촉을 밝힌 뒤에 손부인과 함께 장강을 건너 형주로 돌아가로록 명했다.
주유는 거짓이 정말로 되어 버려 유비를 기다려 습격하려 했지만 제갈량의 복병에 패하고 말았다. 그는 분노와 굴욕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버렸다.
주유는 ‘길을 빌려 달라는 핑계’로 서천(익주)을 빼앗는 척하며 형주를 탈환하려 했다
즉, 형주로 통하는 길에 유비가 군사를 위로하기 위해 성을 나오는 순간 유비를 죽이고 형주를 탈환하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이 계략을 간파한 제갈량은 일부러 성을 나와 군을 위로했다. 하지만 주유가 군대를 이끌고 형주에 들어설 때 이미 성내에는 삼엄한 경계태세가 취해져 있었다. 게다가 관우, 장비, 황충, 위연이 사방에서 주유 군의 배후를 공격하며 ‘주유’를 생포하라’고 외쳤다.
주유는 이번에도 화살에 맞은 상처가 찢어지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 세 번에 걸친 지혜 대결에서 제갈량은 세 번 모두 주유를 화나게 함으로써 주유를 죽였는데, 주유는 죽으면서 ‘하늘은 나를 낳고 왜 다시 제갈량을 낳았는가’라며 탄식했다.
형주는 위, 촉, 오 삼국이 접하는 지점으로, 전략상 아주 중요해 늘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삼국시대의 유명한 옛 전장이다.
적벽의 전투 후에 유비는 손권에게 형주를 빌려줄 것을 청했고, 손권도 노숙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이것을 수락했다. 손권은 삼국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준 것은 손권의 입장에서도 유리하고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제갈량과 주유가 지혜를 겨룬 적이 없으며, 주유를 화를 못이겨 죽게 만든 사실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남군의 귀속에 관해 정사의 <손권전>, <유비전> 및 주에 인용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9년에 주유는 조인을 물리치고 남군을 빼앗아 남군태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건안 15년(210)에 주유가 병사한 후에는 노숙이 대신해 병권을 물려받아 정보를 남군태수에 임명했다. 이때 노숙은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어 함께 조조를 막아야 한다고 손권에게 진언했고, 노숙의 의견을 받아들인 손권은 형주의 남군, 영릉, 무릉을 나누어 유비에게 주었다.”
이 기록을 보면 남군은 주유의 사후에 유비에게 빌려준 것이지 제갈량이 선수를 쳐서 점거한 것은 아니다.
또 손권이 여동생을 시집보낸 것에 관해 정사의 <유비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손권의 여동생이 유비에게 시집온 것은 유비가 형주목이 되고 난 후의 일이다. 어느 틈에 유비는 손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으므로 손권은 유비에게 여동생을 시집보내서 회유하고자 했다.”
이것은 정치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을 뿐 주유가 미인계를 쓰거나, 제갈량이 주유를 화나게 할 필요는 없었던 일이다.
주유의 죽음에 관해 정사의 <노숙전>, <주유전>을 보면, 손권과 유비는 모두 서천을 손에 넣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손권은 주유의 서천을 뺏기 위해 출병하는 도중 파구에서 병사한 것이다. 파구는 파릉이라고도 하며 형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정호의 동쪽에 있었다. 주유는 파구에서 병사한 것이지 형주성 밑에서 분사한 것이 아니다.
35 위남에서의 전투는 조조의 승리였다
[삼국지연의] 제58회에는 조조가 수염을 깎고 옷을 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초가 어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한수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빼앗고 동관을 점령하자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선다. 마초는 몸소 진두지휘하며 조조의 부장인 우금, 장합, 이통 등을 연달아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공격을 계속했다. 조조 군이 힘없이 무너지는 와중에 마초는 조조를 겨냥하고 군사 속으로 돌진했다.
조조가 혼란스러운 진영을 헤치며 도망치기 위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한 병사가 외쳤다.
“붉은 장포를 입은 놈이 조조다!”
그 소리를 들은 조조는 서둘러 붉은 장포를 벗어던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또 한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긴 수염을 기른 놈이 조조다!”
조조는 숨돌릴 겨를도 없이 서둘러 칼을 뽑아들어 수염을 잘라냈다. 그러나 마초가 병사를 이끌고 쫓아왔을 때 또다시 이런 외침이 들렸다.
“짧은 수염을 한 놈이 조조다!”
조조는 당황해 깃발 끝을 찢어 머리에 두르고 도망쳤다. 마초가 그것을 보고 추격하자, 조조는 너무 놀라 말채찍을 떨어뜨렸는데, 그 순간 마침 조홍과 하후연이 달려와서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 이야기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가?
조조와 마초, 한수 연합군과의 교전을 둘러싼 삼국시대의 관련자료에는 이 일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 이 이야기는 나관중의 허구라고 해도 좋다.
뿐만 아니라 조조는 이 전투에서 반대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적벽에서의 패전 후에 조조는 아직 유비와 손권을 물리칠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으며, 실력을 길러 세력을 넓히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11년 봄의 관서 정벌은 이러한 판단에 연결되는 일련의 군사행동이었다.
당시 조조는 사령교위인 종요와 부장 하후연에게 한중의 장로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관중에 병사를 집결시키도록 했다.
관중에 할거하고 있던 마초와 한수는 이 소식을 듣고, 조조의 출병목적은 자신들을 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관중의 여러 장수들과 연합해 동관에 집결했다.
조조는 조인에게 명해 관서 연합군을 공격했지만, 관서의 병사는 굳게 방어만 할 뿐이었다.
211년 7월에 조조는 몸소 전선에 나와 작전을 지휘했다. 조조의 대군과 마초의 관서 연합군은 동관에서 대치했는데, 정면작전에서는 조조 군이 마초에게 시종 압도당했다.
그러나 조조 군은 측면공격으로 전환해 연합군의 추격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유리한 지세를 점령해 마초의 연합군을 교란했다.
결국 마초의 연합군은 어쩔 수 없이 동관을 포기하고 위남으로 철수해 위남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했으나 조조는 적을 깊숙이 유인한 후, 허를 찔러 위남을 쳐서 마초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아 넣었다.
조조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마초는 강화를 제의하지만 거절당했다. 그 다음에 조조는 강화에 응하는 척하며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했고, 두 사람이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 돌연 공격으로 나왔다. 결국 마초와 한수는 서량으로 도망쳤고, 관중의 태반은 조조에게 점령되었다.
조조는 관서를 빼앗은 위남의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걸출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나타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나관중은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버리고 말았다.
원대의 [삼국지연의]와 같은 시대 무명씨의 잡극 중에 이미 조조가 수염을 자르고 옷을 버린 이야기가 만들어져 있다. 나관중은 이것을 기초로 하여 허구의 이야기를 꾸몄다.
36 장송은 조조를 비웃은 적이 없다
역사상 장송은 삼국의 균형 국면을 만드는 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관중은 뛰어난 문장을 통해 그를 특색있는 인물로 만들어냈다. 이 장송의 이야기가 [삼국지연의]제60회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한중에 뿌리를 내린 장로가 끊임없이 서천에 침입하려고 하자 익주목인 유장은 그것을 깊이 우려했다. 그때 별가인 장송이 장로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계략을 말하자, 유장은 크게 기뻐하며 장송을 허창의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로 하여금 장로를 정벌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장송이 허창으로 갔을 때는 조조가 마초를 물리친 직후였다. 그때문에 조조는 기세가 당당해져 장송을 예우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장송은 서천의 지도를 훔쳐가지고 왔었다. 그는 지도를 바쳐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지만, 조조로부터 푸대접을 받자 단념했다.
이때 박학다식하고 언변이 좋기로 유명했던 승상주부 양수가 밖의 서원으로 장송을 데리고 나가 문답을 주고받았다.
먼저 장송이 조조를 비난했다.
“조승상은 문에 있어서는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모르고, 무에 있어서는 손자, 오자의 지혜를 따르지 못하면서 오로지 권모술수로써 승상의 지위에 있소이다.”
“귀공은 벽지에 피난하고 있어서 승상의 큰 재능을 모르오, 내가 공께 꼭 보여드릴 것이 있소.”
양수는 이렇게 대답하고 좌우의 사람을 불러 조조가 [손자편]을 본받아 지은 [맹덕신서]를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그것을 대충 본 장송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런 것쯤 촉에서는 삼척동자도 외우고 있소이다. 무엇이 신서란 말이오. 이것은 전국시대 무명씨의 것으로 승상은 표절의 달인일 뿐이오. 아마도 진정으로 내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귀공 정도일 것이오.”
“이 병법서는 다른 이에게는 함부로 보여주지 않았는데, 촉에서는 아이들조차 암기하고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양수가 이렇게 말하자 장송은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도 틀리지 않고 낭송해 보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조는 발끈한 나머지 서책을 찢어서 태워버렸다.
다음날 조조는 서쪽의 훈련장에 호위군을 집합시켰다. 형형색색의 군복은 현란했고 북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으며, 창은 빛났고 깃발이 드높이 휘날렸다.
조조는 일부러 장송을 불러 그 광경을 보게 한 후 자랑하듯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쥐새끼 같은 무리를 먼지나 지푸라기처럼 생각하고 있다. 나의 대군이 이르면 싸워 이기지 않음이 없고, 쳐서 빼앗지 못함이 없다. 나를 따르는 자는 살지만, 거역하는 자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가? 알았는가?”
조조의 이런 무례한 태도에 장송은 얼굴이 굳어지며 지나치리만큼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승상이 병사를 몰아 이르는 곳마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치면 반드시 빼앗는다는 것을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 복양에서 여포를 공격하셨을 때, 완성에서 장수와 싸우셨을 때, 적벽에서 주랑을 만나셨을 때, 화용도에서 관우와 만나셨을 때, 동관에서 수염을 깎고 옷을 벗어버리셨을 때, 위수에서 배를 빼앗고 화살을 피하셨을 때 모두 천하무적이셨습니다.”
장송이 어처럼 조조가 패배한 경우만을 열거하자 조조는 안색이 변하며 호통을 쳤다.
“썩어빠진 유생놈아! 잘도 나의 단점만을 꼬집는구나!”
조조는 좌우를 돌아보며 장송의 목을 베어버리라고 명령했지만, 양수, 순욱 등이 간언하여 겨우 없었던 일로 했다.
장송은 허창을 뒤로 하고 유비를 만나기 위해 형주로 향했다. 유비는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리하여 유비의 자애로운 마음에 감명을 받은 장송은 서천의 지도를 유비에게 바쳤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의 이야기는 사실과 거리가 많다.
첫째, 역사서에 의하면 장송이 조조에게 사신으로 가서 조조를 만난 장소는 형주이다. 208년 즉 조조의 대군이 남정하여 형부에 입성했을 때로 허창은 아니다.
둘째, 양수와 언쟁하면서 조조를 표절의 달인일 뿐이라고 비아냥거린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에서 인용한 <익부기구잡기>에 보인다. 따라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장송은 양수와 언쟁한 적이 없으며 조조를 비웃은 적도 없다.
셋째, 사서에 장송이 조조를 앞에 두고 비웃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조조가 장송을 죽이려고 한 적도 없다. 더욱이 몇 번이나 조조를 비웃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넷째, 장송이 바친 서천의 지도에 관한 기록은 위요의 [오서]에 나온다. 그러나 여기에도 지도를 조조에게 바쳐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상의 자료를 보면, [삼국지연의]에서 장송이 조조를 비웃었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나관중이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목적은 조조를 깎아내려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37 노숙은 관우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형주 반환문제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손권과 유비가 서로를 이용하려 했던 것에서 나온 결과물로, 손권은 손권대로 장기간 빌려줄 생각이 아니었고, 유비는 유비대로 쉽게 반환할 마음이 없었다.
오라나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주유 등은 적극 반대했지만, 노숙 등은 유비의 요구에 응하자고 주장함으로써 처음부터 손권 진영 내부의 의견도 일치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유비가 서천을 빼앗으면 형주를 돌려준다고 약속했던 것으로 인해, 건안 19년 유비가 촉을 평정하자 형주를 둘러싼 모순은 갑자기 첨예하게 표면화되었다.
[삼국지연의] 제66회에 나오는 ‘관우가 칼 한 자루만 가지고 술자리에 참석한 이야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났다.
노숙은 육구의 임강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관우를 초대해 어떻게든 형주를 돌려받으려고 했는데, 만일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죽일 계획이었다.
관우는 초대장을 받자 관평, 마량 등이 만류하는 것도 듣지 않고, 측근 몇 명만을 대동하고는 큰 칼 한 자루를 차고 술자리에 참석하기로 했는데, 그 전에 관평으로 하여금 선대를 이끌고 강 상류에 대기하도록 했다.
노숙은 관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여몽과 협의해, 여몽과 감녕은 각각 병사를 이끌고 강가에 숨고, 임강정의 뒷편에는 도부수를 숨겨두기로 했다.
다음날 관우는 작은 배를 타고 시간에 맞추어 왔다. 옆에는 주창이 있었고, 그 뒤를 수행원 8,9명이 따르고 있었다. 그 연회석상에서 노숙이 형주 반환문제를 꺼내자 관우는 이렇게 응수했다.
“오림의 전투에서 우리 형님은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적을 쳐부수었소, 그런데 한 뼘의 땅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오? 그래, 공은 이제와서 그 땅을 되찾으시겠다는 것이오?”
노숙은 관우의 말을 반박하며 우선 장사, 영릉, 계양의 세 군을 돌려받고 싶다고 했다.
“천하의 토지는 덕 있는 자가 차지하는 법이오. 오가 독점할 이유가 없소.”
관우는 주창이 들고 있던 칼을 빼앗으며 호통을 쳤다.
“이것은 국가의 대사이거는, 네놈 따위가 감히 쓸데없이 말참견을 하느냐? 나가라! 시끄럽다!”
주창은 관우의 꾸짖음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알아듣고, 바로 일어나 강가로 나가서 붉은 깃발을 크게 흔들었다. 그것을 보고 관평의 선대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관우는 일부러 취한 것처럼 보이면서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으로 노숙을 잡았다. 그리고는 강가에 이르러서야 겨우 손을 놓았다. 오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고, 관우는 유유히 배를 타고 떠났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데, 나관중이 그리는 관우는 정기가 가득해 용기로 보나 계략으로 보나 영웅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원형은 원대의 [삼국지평화]에 이미 성립되어 있다. 또 관한경의 잡극 <단도회>에도 나타나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나 인물 구성은 [삼국지연의]와 다르지만, 모두 관우가 당시 확실히 칼 한 자루만 가지고 술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을 사살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민간에서는 오랫동안 전해내려 왔으므로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어 왔다.
그렇다면 역사상 관우는 확실히 칼 한 자루만 가지고 적과의 술자리에 참석할 것일까?
정사의 <손권전>에 의하면, 유비가 서천을 평정하자 손권은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을 사신으로 보내 형주를 반환하도록 요구했는데, 유비는 양주가 평정되고 나서 돌려주겠다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손권은 유비가 형주를 반환할 마음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의 관원을 임명해 부임하게 했지만, 관원들은 모두 관우에게 쫓겨나 버렸다.
<주유전>, <노숙전>과 주에서 인용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 유비와 관우의 태도가 강경했기 때문에 노숙은 익양에 진입해 관우와 대치하면서 관우를 초대해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의 회담 조건은 “서로 병사와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의 회담 조건은 “서로 병사와 말을 백 보 떨어진 곳에 머무르게 하고, 장군만이 칼 한 자루를 차고 회견한다.”고 되어 있다.
두 사람의 익양 회담은 쌍방 모두 칼 한 자루씩만 차고 회담에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 밖에도 두 사람이 서로 만났을 때 노숙은 당당한 언사로 유비의 신의가 없음을 비난한 것에 비해, 관우는 “대답할 말이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
나관중이 그러듯이 관우는 정기가 가득하고, 노숙은 횡설수설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었다. 게다가 노숙이 덫을 놓아 관우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것은 사서의 어디에도 없다.
38 제갈량은 한중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중군은 익주에 속하며 주위는 산들에 둘러싸이고, 가운데에는 한수가 흐르는 분자로, 토지가 비옥해 농산물이 풍부한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유비가 서천을 차지하고 조조가 한중을 빼앗은 후 관중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 당시의 정세를 분석해 보자.
만약 유비가 한중을 점거하는 경우, 진격하면 관중을 공격할 수 있고 물러서면 서천을 지킬 수가 있다. 반대로 조조가 한중을 점거할 경우, 유비의 서천은 의지할 만한 험준한 산세를 잃기 때문에 북방으로 진출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이유로 유비도 조조도 엄청난 군사력을 투입해 어떻게든 한중을 소유하려고 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 제72회에서 73회까지는 제갈량이 한중을 빼앗는 이야기이다.
건안 24년(219)은 유비와 조조가 한중 탈취에 한참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제갈량은 조조의 의심 많은 성격을 간파하고 거짓 복병을 사용해 승리를 거둔다.
조조가 군을 이끌고 한수에 도착했을 때, 제갈량은 조운에게 명해 5백의 군사를 조조의 본진 가까이에 몰래 주둔시키고, 야음을 틈타 피리소리 북소리를 요란하게 내게 했다.
조조 군은 습격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여 밤새 불안에 떨었고, 조조마저도 불안해져 진영을 후퇴시켰다.
유비는 군사를 이끌고 한수를 건너 강을 뒤로 하여 진을 치고 일부러 후퇴하는 척했으나, 조조군은 이를 의심하며 뒤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촉군이 습격해 대파한다.
조조가 양평관으로 후퇴하자 촉군이 성 밑까지 추격해 동문에 불을 지르고, 서문에서 함성을 지르고, 남문에 역시 불을 지르고, 북문에서는 북을 울렸다.
결국 사곡구까지 물러난 조조는 촉군과 다시 싸우지만 마초에게 패해 진퇴양난에 빠졌다.
게다가 조조는 위연에게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조조는 할 수 없이 후퇴를 명했으나 도중에 끊임없는 촉군의 습격을 받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한중은 유비가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보면 제갈량은 확실히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러면 실제의 역사는 어떠한가. 우선 정사를 비롯한 관련 사서에 근거하여 한중전투의 전말을 살펴보자.
건안 20년(215)에 조조는 관중을 빼앗은 후, 대군을 이끌고 한중의 장로를 공격해 투항시켰다. 이때 조조의 세력은 한중까지 넓어져 삼파(파군, 파동, 파서의 삼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유비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황권에게 조조가 임명한 삼파의 수령을 공격하게 했고, 그 결과 삼파지역을 제압했다.
조조는 대장인 장합에게 명해 유비 군에게 대항하게 했지만 그도 장비에게 패했다.
조조가 한중에 있을 때, 승상주부 사마의 와 모사 유엽 등이 서천을 빼앗도록 진언한 적이 있다. 이때 조조는 이렇게 말하며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롱’을 얻었거늘 또 촉을 원할 것인가?”
그리고 나서 대장 하후연에게 한중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중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당시 법정은 유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서촉을 침략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후방이 불안하고 내부에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물러난 것입니다. 이 기회에 한중을 공격해 빼앗아야 합니다. 한중을 빼앗기만 하면 앞으로 중원으로 군사를 낼 수 있는 거점을 삼을 수 있고, 한발 물러난다 해도 옹, 량, 두 주를 잠식해 지리적 기반을 확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유비는 건안 24년(219) 1월, 대군을 이끌고 정군산(지금의 섬서성 면현의 남쪽)으로 나아갔다. 조조 측에서는 하후연이 전력을 다해 맞서 싸웠다. 빨리 빼앗아야만 한다는 법정의 진언이 있기 때문에, 유비는 황충을 투입해 조조 군을 무찔렀고 하후연의 목을 베었다.
조조 군은 장합의 통솔하에 양평관으로 물러났다.
조조는 장안에서 사곡으로 나와 앙평관의 전선에 당도했다. 그러나 촉군이 험한 것에서는 싸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조 군은 시간이 지나자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조운의 공성지계에 당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비는 한중을 점거하며 7월에 스스로 한중왕에 올랐다.
이처럼 사사의 기록을 보면 한중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유비와 법정의 지휘하에 정해진 것이지, 제갈량과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제갈량의 ‘지혜의 승리’가 아닌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한중전투 당시에 제갈량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정사에 의하면, 그는 성도유수를 맡아 식량과 군사를 보급하고 있었다. 즉, 유비의 명을 받아 성도에 남아서 한중전투를 위한 장병의 동원과 군수품의 조달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39 마초의 귀순을 위한 제갈량의 계략은 없었다
마초는 부풍군 무릉(지금의 섬서성 흥평현) 사람으로, 후한의 명장 마원의 자손이며 마등의 장남이다. 그는 17세 때부터 전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30세의 나이에 관서에 이름을 떨쳤다.
마초는 위남의 전투에서 패하고 농서로 도망가 서량을 장악했지만, 부장 양부 등의 배반으로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사촌인 마대, 부하 방덕과 함께 한중으로 도망쳐 장로에게 투신했다.
[삼국지연의] 제65회는 제걀량이 계략을 이용해 마초를 손에 넣은 이야기이다.
마초는 장로가 자신을 받아 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진해서 가맹관을 공격해 유비를 생포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갈량은 장비로 하여금 그에게 맞서게 하고 유비도 몸소 싸움을 독려하려 전장에 나왔다. 장비와 마초의 싸움에서 승부가 나지 않자, 장비는 흥분하여 해가 저물어도 싸움을 그치려 하지 않았다. 반면 마초도 약점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자 양쪽 진영에서는 군을 퇴각시켰다.
다음날 제갈량이 도착했다. 그는 용호상박이면 반드시 한쪽이 크게 다친다고 생각하고 마초가 유비에게 귀순하도록 계략을 꾸몄다.
우선 손건을 한중으로 보내 장로의 모사인 양송을 매수하게 했다. 양송은 장로에게 ‘대한의 황숙이 앞으로 장로를 한령왕으로 천거할 것’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양송의 말을 믿은 장로는 마초에게 군사를 물러서게 하도록 명령했지만 마초는 군사를 후퇴시키는 것에 호응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마초는 서천을 빼앗아 촉의 주인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작정이므로 한중을 섬길 마음이 없다’는 헛소문을 사방에 퍼뜨렸다.
이 소문을 믿은 장로는 잔뜩 화가 났다. 그는 마초에게 ‘서천을 빼앗을 것, 유장의 목을 가져올 것, 형주의 군사를 퇴각시킬 것’ 등의 세 가지를 실행해 성의를 보이도록 요구했다.
마초와 마대는 진퇴양난에 빠져 고심했다.
그 즉각 제갈량은 투항해 온 유장의 신하 이회를 보내 설득했는데, 이회는 마초에게 장래의 예측을 분석하고 이해득실을 분명히 밝혔으며, 유비는 예를 다해 현명한 사람을 맞이하는 인물이라고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마초는 마침내 유비에게 귀순했다.
사서에는 마초가 어떤 경로로 유비에게 귀순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정사에는, 확실히 마초가 장로에게 동정을 얻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역으로 의심을 받았으므로, 유비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기록이 있다.
마초가 유비에게 귀순한 것은 결코 제갈량이 계략을 쓴 결과가 아니며, 진퇴양난에 몰려 타개책에 고심한 나머지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걀량이 조그만 계략을 생각해 냈을 뿐이라고 하고 있지만, 계략의 내용을 보면 조그만 계략이 아닌 상당히 치밀한 계략이다. 나관중이 이 조그만 계략으로 제갈량의 기지를 돋보이게 한 목적은 누구가 확실히 알 수 있다. 손건을 한중으로 보낸 것, 마초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린 것, 이회를 설득하려 보낸 것 등은 모두 나관중이 만든 허구이다.
그 외에 마초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맹관을 공격한 것이나, 장비와 밤까지 싸운 것도 모두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마초가 유비에게 귀순한 것은 영웅이 명군을 만나 이상을 실현할 곳을 발견하는 얘기인 셈이다. 인재를 맞이하는 것에 뛰어난 유비는 마초를 중용해 우선 정서장군 겸 표기장군에게 임명하고, 이어서 양주목으로 옮겨 태향후에 봉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오호대장의 한 사람에 봉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도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나관중은 마초를 용맹스러우며 발군의 무예를 가진 뛰어난 무장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이 인물 이미지는 비극성을 띠고 있다. 그는 222년 47세 때에 양평관의 임자에서 병사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보낸 상소문에는 비통함이 가득 차 있다.
40 관우의 뼈를 깎은 의사는 화타가 아니다
화타(?-208)의 자는 원화이며 패국의 초현 사람이다. 그는 후한의 유명한 의학자로서 중국 의학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서에 기록된 바로는, 그는 약초를 이용해 마비산이라는 마취제를 만들어 개복수술 등의 외과수술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또 그가 중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낸 건강체조인 오금희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화타에 관한 전설과 고사가 수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삼국지연의]의 관우를 위해서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삼국지연의] 제75회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
관우는 조조의 칠군을 물로 공격한 후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번성을 공격했다. 그때 오른팔이 독화살을 맞아 거무튀튀하게 부어올라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장수들은 서둘러 의사를 찾아나섰는데, 마침 화타가 나타나서 말했다.
“이것을 치료하려면 기둥에 철로 된 고리를 매달고 팔을 잘 고정해야 합니다. 그후에 작고 예리한 칼로 살을 잘라내고, 뼈에 묻은 화살의 독을 빼낸 뒤에 약을 발라야 합니다.”
“뭐, 그 정도라면 기둥 따위는 필요 없소.”
관우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연회를 베풀어 화타를 대접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량과 바둑을 두면서 팔을 내밀고 수술을 시작하라고 독촉했다.
화타는 사람을 시켜 큰 쟁반을 들고 팔 밑으로 흐르는 피를 받으라고 하고는 작은 칼로 살을 자르고 뼈를 깎아냈다. 가까이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관우는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면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담소를 즐길 뿐, 고통의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수술이 끝나자 관우는 껄껄 웃으며 일어나 화타의 뛰어난 의술을 칭찬했다.
화타는 관우의 비범한 용기에 감탄했다.
그러나 화타가 관우의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하는 이야기는 이미 [삼국지평화] 속에 나온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삼국지연의]와 똑같지만, 그곳만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으며 이미지도 선명하지 않다. 나관중의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관우의 신과 같은 용기를 표현하는 데 있었다.
그러면 화타는 정말로 관우를 위해서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한 것일까?
정사의 <관우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우는 예전에 화살에 맞아 왼팔에 관통상을 당했다. 나중에 그 상처는 치료됐지만, 비가 오거나 구름이 낀 날에는 항상 상처가 쑤시고 아팠다. 상처를 치료한 의사가 말하기를 ‘화살 끝에 묻어 있던 독이 뼈에 스며들어 있으니, 팔의 상처를 찢어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면 이 아픔은 없어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우가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고, 나관중의 이야기도 기본적으로는 사실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역시 역사적 사실을 고쳤다.
첫째,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한 것은 관우가 조조의 칠군을 물로 공격하기 전이었으며, 번성을 공격했을 때 화살에 맞은 사실은 없다.
둘째,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한 것은 화살에 의한 상처가 치료된 후의 일이지, 화살에 맞을 때는 아니다.
셋째, 사서에는 왼팔을 관통당했다고 쓰여 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오른팔의 뼈를 깎고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관우를 수술한 의사라 화타인가 하는 것이다. 이 의사는 결코 화타일 수 없다. 화타는 208년에 조조에게 처형되었는데, 관우가 조조의 칠군에게 수공을 가한 것은 219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화타가 사후 10여 년이 지나 부활해서 관우를 위해 뼈를 깎아 독을 치료했다는 것이 된다.
41 형주 습격작전은 여몽의 계획이었다
여몽(178-219)의 자는 자명이며 여남군 부파(지금의 안휘성 부남의 동남쪽) 사람이다. 집이 가난해 15-16세에 손책의 부하장수이며 누이의 남편인 등당을 따라 토벌에 참가했는데, 그는 등당 사후에 후임으로 별부사마에 임명됐다.
나중에 여몽은 손권을 섬겨 단양토별, 황조정벌 등에 나섰는데, 이때 종종 공적을 올려 횡야중랑장에 발탁되었다. 적벽의 전투에서는 주유, 정보의 밑에서 조조를 크게 격파했고, 조인을 남군에서 포위했었다.
여몽은 어렸을 때에는 공부할 기회가 없었지만, 손권의 권유로 사서와 병서를 많이 읽었고, 오랜 기간 실전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217년에 노숙이 세상을 떠나자 손권은 여몽에게 군대를 통솔하게 하여 육구에 주둔시켰는데, [삼국지연의] 제75회는 여몽이 옷을 입고 장강을 건너는 이야기이다.
여몽은 관우가 번성 원정에 나간 기회를 틈타 형주를 빼앗도록 손권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손권으로부터 즉시 실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육구로 돌아왔을 때 이미 관우는 장강 연안에 봉화대를 쌓고 삼엄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그는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손권은 여몽이 병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내심 실망했다. 그러나 육손이 ‘여몽은 진짜로 병이 든 것이 아니다’라고 하자 손권은 즉시 육손에게 상태를 파악해 보라고 지시했다.
육손이 여몽에게 가서 병자의 기색이 없는 여몽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제가 마침 장군의 병을 낫게 할 처방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써주시겠습니까?”
여몽이 가르쳐줄 것을 청하자 육손이 말했다.
“장군의 병은 형주의 관우가 수비를 강화하고 장강 연안에 봉화대를 설치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저의 계략을 이용하면 틀림없이 장강 연안의 봉화가 오르지 않을 것이며, 형주의 병사를 팔짱을 낀 채 항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여몽은 크게 기뻐하며 계략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했다.
육손은 이렇게 제안했다.
‘일단 여몽은 병이라 말하고 시작한다. 후임자는 정중한 말로 관우를 칭송해 그의 마음을 우쭐하게 한다. 그 후 형주를 빼앗는다.’
여몽은 이 제안을 듣고 기뻐하면서 바로 육손을 후임으로 추천했고, 취임 후에 육손은 계획대로 일을 진행했다.
관우는 여몽이 정말 위독하다고 믿은데다 육손을 가볍게 여기고는 형주 수비군의 대부분을 번성으로 이동시켰다.
육손이 이것을 탐지하고 이를 손권에게 급히 보고하자, 손권은 즉시 여몽을 대도독에 임명해 강동의 군사력을 총지휘하게 했다.
여몽은 쾌속선 80여 척을 갖추고, 병사들에게 흰 옷을 입게 해 상인으로 위장시켜, 배 위에서는 노를 젓게 하고 배 안에는 병사를 숨겨놓은 채 밤낮으로 이동해 장가의 북쪽 연안에 닿았다. 그리고 봉화대의 수비군을 매수해 연안에 정박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윽고 밤이 되자 배 안에 숨겨놓았던 정예병을 일제히 풀어 장강 연안의 봉화대를 모두 점령, 봉화를 올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경보를 보낼 수 없게 했다. 뒤이어 봉화대의 수비병을 포섭해 성문을 열게 하고 순식간에 형주를 점령해 버렸다.
만일 [삼국지연의]의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형주를 빼앗은 제일의 공적은 육손의 것이다. 하지만 정사의 <여몽전>과 <육손전>, 그리고 그 외의 관련 자료를 보면 형주를 빼앗는 작전의 입안자도 실행자도 모두 여몽이다. 그러므로 일등공신은 여몽이라고 해야 한다.
적벽의 전투 이후로 여몽은 유비를 삼켜버려야 한다는 강경론자가 되었다. 214년에 주유가 세상을 떠나 노숙이 대신 병권을 맡았을 때 여몽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은 오와 촉이 일가가 되어 협력관계에 있습니다만, 관우는 맹수와 같은 상대이므로 사전에 대책을 세워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몽은 관우에게 대처할 다섯 가지 밀책을 올렸지만, 노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 후에도 그는 손권에게 오가 강대할 때 형주를 노려야만 한다고 진언했다.
“일단 우리 세력이 약해지면 그때는 무력으로 형주를 빼앗으려해도 이미 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손권은 이를 받아들여 우선 형주를 빼앗을까, 아니면 서주를 빼앗을까 하는 의견을 구했다.
여몽은 우선 형주를 빼앗자고 주장했고, 결국 217년에 노숙을 대신해 군대를 통솔하고, 손권의 지지하에 형주를 습격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면서, 그 사이에 손권이 공격해 올 것을 고려해 후방에 상당수의 군사를 남겨두었기 때문에 여몽은 이 상황을 보고 한 가지 계략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관우의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 손권 앞으로 편지를 써보냈다.
“관우는 북방의 번성을 공격하면서도 남부에 많은 군대를 남겨 두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공격할 것을 경계한 까닭입니다. 저는 병약한 몸이니 이 기회에 병치료를 구실로 제게 건업으로 돌아가도록 명해 주십시오. 관우는 반드시 진짜로 생각하고 후방의 군대를 번성전투에 동원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 군사가 장강을 급히 북상해 빈틈을 공격하면 남부를 손에 놓고 관우를 생포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이 계략에 따라 여몽을 불러들였다.
여몽이 건업으로 돌아가자 육손이 병문안을 왔다. 그 자리에서 육손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았지만 여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몽과 손권이 정한 계략은 육손에게조차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않게 육손의 견해가 자신과 같았던 것을 알고 여몽은 육손을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한다. 이렇게 해서 손권은 육손을 편장군 겸 우부독에 임명하고 육구에 주둔시킨 것이다.
육구에 취임한 육손이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의 용기와 계략을 과장되게 칭송하자 관우는 풋나기에 불과한 육손을 대단치 않게 여기고는 결국 후방의 부대를 이동시켜 전선에 투입시켰다.
손권은 즉시 여몽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형주의 남부로 급파했고, 여몽은 병사들에게 흰 옷을 입혀 상인으로 속이고 장강을 건너 연안 초소를 함락시킨 수 군대를 형주성으로 향하게 했다.
강릉과 공안의 수비를 맡은, 남군태수 미방과 장군인 부사인은 평소 관우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앞다투어 여몽에게 투항해 버렸다.
고립된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과 맹달에게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관우는 어쩔 수 없이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서쪽의 맥성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곧 이어 생포됨과 동시에 형주를 빼앗겼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육손이 여몽을 육구로 병문안 가기 전부터 이미 여몽을 위해서 계략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여몽이 전업으로 돌아온 후 병문안을 가서 여몽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피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형주를 빼앗는 계획은 여몽과 손권이 생각하고 실행한 것이며, 육손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림일 뿐이었다.
진수는 여몽을 이렇게 평가했다.
“용감하고 작전의 결단력이 뛰어났다.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생포한 것은 가장 뛰어난 공적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여몽을 용기는 있어도 계략이 부족한 평범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육손의 비범한 지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42 손권은 관우를 귀순시키려 한 적이 없다
[삼국지연의] 제76회는 관우의 맥성 패주 이야기이다
조조가 조인을 구하기 위해 서황을 보냄으로써 관우는 번성의 전투에서 패했다. 그때 관우는 형주가 이미 여몽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번성에서 후퇴, 마량과 이적에게 명령해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형주의 탈환을 꾀했다.
하지만 형주를 장악한 여몽이 병사들의 가족에 대한 우대정책을 썼기 때문에 병사들은 이미 전투의욕을 상실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나라 군의 포위망에 갇혀서 도망자와 투항자가 속출하는 형편이었다.
관우는 몇 겹의 포위를 뚫고 맥성으로 패주했지만 남은 부하는 불과5, 6백 명뿐이었다. 그는 막다른 곳에 다다라 상용의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두 사람은 산성의 백성들이 이제 겨우 따르기 시작했다며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맥성에서 버티고 있는 관우에게는 구원병도 없고, 식량도 부족한 데다가 남아 있던 군사마저도 태반이 부상병이라 어찌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것을 보고 손권은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을 보내 이렇게 권유했다.
“옛날부터 시세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장군이 통솔하는 한수 일원의 아홉 개 성은 모두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 갔습니다. 고작 성 하나가 있으나 안으로는 식량이 없고, 밖으로는 원군도 없으니 운명은 조석지간에 변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의 권고대로 오후(손권)에게 귀순해 다시 한 번 형주와 양양 땅의 주인이 되십시오. 그러면 가족의 안녕도 보장됩니다.”
이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관우가 말했다.
“나는 해량(관우의 출생지)의 일개 무부로 주군에게 수족 같은 대우를 받았소. 주군을 배반하고 적에게 투항할 수는 없소이다. 성이 함락되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옥은 부숴져도 그 휜 빛을 잃지 않고, 대나무는 타도 그 마디는 남는 법! 이 몸은 죽어서도 이름을 역사에 드리울 수가 있을 것이오. 자, 당신은 물러가시오. 나는 손권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것이오.”
“오후는 장군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 힘을 합쳐 조조를 무찌르고 함께 한실을 돕고 싶을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제갈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평이 검을 빼들고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관우는 제갈량 형제의 정을 생각해 이를 저지하고 내쫓는 것으로 그쳤다.
제갈근의 이러한 보고를 들은 손권은 관우를 ‘진정한 충신’이라며 칭송했다. 그 후 관우는 아들 관평 등과 함께 포위를 돌파했지만 도중에서 생포되어 죽임을 당한다.
정사의 <여몽전>, <관우전>, <손권전>, <주연전>, <반장전> 등의 기록을 보면, 관우가 맥성으로 패주해 손권에게 생포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관우 부자가 맥성으로 후퇴한 뒤에 임저에서 죽을 때까지의 사이에 손권이 제갈근을 보내 관우에게 귀순을 권유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 또 관우도 [삼국지연의]에서 그리는 듯한 비장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의 이야기가 널리 퍼진 후에, 관우의 맥성 패주를 둘러싼 전설과 고사는 대중들 속에 깊이 자리잡아 진실로 신봉되었다.
사람들은 관우를 믿고, 관우가 맥성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고, 그가 마지막 벌인 미치광이 같은 전투를 믿고, 관우가 제갈근에게 말한 정의감에 넘치는 교훈을 믿고, 죽어서도 굴하지 않는 일생의 충의를 믿는 것이다.
43 조조의 무덤인 칠십이의총은 없다
조조는 삼국시대의 뛰어난 정치가, 군사가, 문학자이지만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는 인물이다. 사서에 의하면, 그는 건안 25년(220) 정월에 낙양에서 병사했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66세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조조가 죽어서 어디에 묻혔는지는 오늘날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삼국지연의] 제78회에서 조조는 임종 무렵에 창덕부 강무성 밖에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어 묻힌 장소를 알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도굴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조의 유언은 [삼국지연의]나 [후한서], [화양국지], [자치통감] 등의 정사에는 기록이 없다. 하지만 송, 원대 이후에는 이것을 기록하기도 하고, 논의하기도 하고, 시로 읊기도 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도종의는 [남촌철경록]에 있는 의총이라는 항목에서 긍정적 어조로 “조조의 의총 72개는 장하 근처에 있다.”고 기록했는데, 그는 송의 문인 유응부의 ‘칠십이의총’이라는 시를 인용했다.
살아서는 하늘을 속여 한나라의 정통을 끊고
죽어서는 사람을 속여 의총을 만들었네
살아서의 지모도 죽으면 그만인 것을
어찌하여 쓸데없이 가짜 무덤을 만들었는가
사람들은 의총이라 하여도 나는 의심치 않으니
내게 한 방법 있어 그대에게 가르쳐 주노라
즉시 의총 일흔두 개를 모두 파헤쳐 버리면
반드시 그 중 하나는 진짜 무덤이리라
그러나 조조가 의총을 만들었다는 것의 진위에 대해서는 송나라 사람 중에서도 이론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도비고]와[방여기요], 그리고 양진의[산릉잡이]를 보면, 조조가 죽은 후에 후 세 사람에게 묘가 파헤쳐질 것을 두려워해 의총 72개를 만들어 진위를 분간하기 어렵게 했다고 쓰여있다.
칠십이의총은 임창현 삼대촌 서쪽 8리 지점의 강무성에서 자주에 걸쳐 있는데, 하나하나가 작은 산처럼 되어 나란히 있다고 한다.
그럼 정말로 임창 일대에 조조의 의총이 있었던 것일까?
과거의 무수한 문인과 묵객이 그것에 대해 조사를 했지만 거의 예외 없이 실망만 하고 돌아왔다.
임창현 문물관리소의 설명으로는, 청나라 말엽에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농민들이 의총을 파헤쳤던 적이 있었는데, 무덤 속에는 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 무덤 중의 하나는 제나라 왕릉이었고, 또 하나는 제나라 헌무제의 11번째 아들인 고양왕의 능이었다고 한다.
민국 초년(1912)에 도굴된 의총에서는 묘지가 많이 나왔다. 그것에 의하면, 아들 묘는 도두 북위와 북제시대의 왕공 또는 요인의 묘였다. 위나라의 옹주자사안평왕비인 ‘풍’씨의 묘, 위나라의 난릉군 개국오군왕의 묘, 제나라 태조인 헌무제의 8번째아들 ‘고육’의 묘, 제나라의 운주자사 경공의 묘 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조조의 칠십이의총 설은 사서에 기록이 없어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정사에는 조조의 사후에 조비가 생전의 유언에 따라 시체를 업성으로 옮겨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조조가 생전에 서문표의 사당 서쪽 발판 근처를 경계로 해서 능묘를 만들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으로 추측해 조조의 능묘는 임창의 서문표 사당 서쪽에 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임창 일대에는 서문표사가 수없이 많다. 도대체 어느 서문표사의 서쪽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진의 육기가 편찬한 [위무제를 숭앙하는 글]에는 “조조의 사후에 업의 서쪽 언덕에 묻었는데, 서문표의 사당과 가깝다.”라고 쓰여 있다. 이것에 근거해 조조의 능묘가 지금의 임창 서쪽, 풍락진의 서문표 사당 일대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풍락진의 서문표사는 당의 천보 5년(46)에 지어졌으므로 이것도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청의 양장거가 지은 [삼국지방증]은 이 설을 완전 부정하며, 육기의 [위무제를 숭앙하는 글]에 나오는 조조의 유언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조조의 의총은 장하 근처가 아니라 장하의 강물 속에 있다는 견해가 있다. 그 근거로 위문제 조비의 <조식을 멈추게 하여 선왕의 제사를 지낼 것을 요구하는 조칙> 중에 나오는 “선왕의 제사를 강가에서 지내려 해도 아래위를 두루 살피는 슬픔을 느껴야 하는 것이 애처롭다.”라는 구정을 인용하고 있다.
더욱이 이것을 보강하는 증거가 청나라 때 사람 심송의 [전건필록]에 인용된 [견호속집]에 있다.
“청의 순치 연간에 장하의 물이 말랐을 때, 어부가 강 속에서 큰 석판을 발견했다. 석판 옆에 틈이 있어 들어다보니 깜깜했는데, 그 속에 고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들어가보았다. 수십 보를 걸어 들어가니 이상하게도 석문이 있었다. 그래서 어부 전원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눈에 비친 것은 미녀들이었다. 그녀들은 서 있거나, 기대어 있거나, 누워 있었는데,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재로 변해 버렸다. 그 안에는 돌침대가 있고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래서 어부들은 무릎을 꿇고 이를 베어 시체를 여덟 등분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원래부터 믿기 어렵다.
조조의 칠십이의총 설은 참으로 묘한 이야기이다. 조조의 능묘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 우선 칠십이의총설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부터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44 조식은 조조의 몇 번째 아들인지 모른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조조에게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식이 조조의 막내로 조비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식은 조조의 다섯째 아들이 되지만 오늘날에는 이와 의견을 달리하는 논문과 저작이 많이 나오고 있다.
두 번째 아들이라는 설청의 정안이 지은 [조집전평]에는 “조식의 자는 자건이며 조조의 두 번째 아들이다.”라고 쓰여 있다. 정진탁의 [삽도본중국문학사] 등도 이 설을 따른다.
조비와 조식은 변황후가 낳은 아들이다. 변황후는 조조의 정실은 아니고, 조조가 광화 원년(178)에 동생의 남편이 지은 죄에 연루되어 초현으로 돌아갔을 때에 얻은 측실로, 그것은 광화 2년의 일이었다.
정실인 유부인은 조양과 조련을 낳았다. 정사의 <무제기>를 보면, “건안 2년(197) 정월에 장수는 항복했지만, 나중에 그것을 후회하고 다시 배반했다. 조조는 장수와 싸웠지만 패해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고 장남인 조양과 조안민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쓰여 있다.
조비의 [전론] 머리말에도 “건안 초에 장수는 항복했지만 다시 배반하여, 죽은 형의 아들인 수와 사촌형 안민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쓰여 있다. 이것으로 조비 위에 조앙이 있었고, 조앙은 조조의 장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식은 조비보다 어리므로 적어도 두 번째 아들은 아닌 셈이다.
세 번째 아들이라는 설
세 번째 아들이라는 설이 가장 널리 퍼져 있다. [사해], [사원]은 물론, 유대걸이 지은 [중국문학발전사] 등도 모두 이 설을 취한다.
이 설은 상당히 근거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조조가 후계를 정했을 때, 아들끼리의 다툼은 조비와 조식 사이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사에 의하면, 조식은 열 살 때에 이미 [시경], [논어], [초사] 등 수십만 단어를 외웠다고 한다. 업성의 동작대가 완성되어 조조가 아들들에게 시의 한 가지 종류인 부를 짓게 했을 때, 조조는 오직 조식의 부만 마음에 들어했다.
더욱이 조식은 타고난 솔직함으로 인해 일부러 위엄을 갖추려 하지 않았고 의복도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다.
반면, 조조 앞에서는 어떤 질문에도 척척 대답했기 때문에 아들들 중에서도 특히 총애를 받았다. 이 때문에 조조는 몇 번이나 그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지만 조식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자신을 치장하려 노력하지도 않고, 음주에도 절도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후계자로 삼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조비는 시종 조식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황제가 된 후에 만일 변씨가 없었더라면 조식은 살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후계 다툼으로 인해 조비와 조식 외에 동복 형제나 이복 형제가 더 있었는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이다.
실제로 조조는 재능이 있는 자만을 발탁했기 때문에 태자를 세울 때에도 형제의 순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네 번째 아들이라는 설
정사의 <무문세왕공전>에 의하면, 조식의 위로 동복 형인 조창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창은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조조는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위략]이 전하는 바로는 조창 역시 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식의 위로 조앙, 조비, 조창이 있었다면 조식을 조조의 네 번째 아들이 된다.
곽말약은 <조식을 논한다>라는 논문에서 이 설을 취하고 있으나 이 설은 논증 자료는 아주 희박하다.
기록에 의하면, 조앙에게는 동북 동생인 조삭이 있었다. 조앙이 죽은 것은 건안 2년 정월로 당시 21세였는데, 장가례의 [삼조연보]에 따르면 이 해에 조식은 불과 6세였다.
그렇다면 조앙의 어머니가 조앙을 낳은 15년 후에 다시 조삭을 낳았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15년이나 간격이 있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일은 아니며, 만일 사실이라 해도 조삭은 조식보다 연상일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조식을 네 번째 아들이라고 하는 설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상의 분석으로 미루어보면, 조식은 조조의 다섯 번째 아들일 수 있지만, 조식의 이복 형제 중에 조식보다 나이 많은 형이 없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조식이 조조의 몇 번째 아들인가는 현재로서는 판정할 수 없다.
제 5 장 유봉의 죽음은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45 유봉의 죽음은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유봉은 유비의 양자가 된 후에 각지를 돌며 전투를 수행했다. 형주를 방어했고, 익주를 평정하는 데에 참가했으며, 한중을 빼앗을 때에도 그의 공적은 매우 컸다.
또 건안 24년(219)에는 맹달과 함께 상용을 빼앗아 부군장군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오에게 형주를 빼앗긴 관우가 맥성으로 패주하여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점령한 지역의 백성이 이제 막 따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동요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군사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관우가 죽임을 당하자, 유비는 이 일에 대해 깊은 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맹달은 위나라에 투항해 유봉을 공격했고, 유봉은 맹달에게 패해 성도로 돌아갔는데, 유비는 그의 죄를 추궁하면서 유봉을 죽여버렸다.
[삼국지연의] 제79회에서 유비는 관우가 죽은 것과 조조가 죽은 뒤에 조비가 뒤를 이은 것, 그리고 손권이 위에 복속되어 신하가 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선 오를 쳐서 관우의 원수를 갚고 이어서 중원으로 쳐들어가 역적을 없애기로 했다.
이때 요화가 ‘관우 부자가 죽은 것은 유봉과 맹달의 죄라며 두 사람을 처형할 것’을 주장했고, 유비는 즉시 사람을 보내 둘을 붙잡아 법에 따라 다스리려고 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들을 관대히 처리하도록 주장하면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에 결국 유봉은 면죽의 수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팽양은 맹달과 친했으므로 심복을 보내 이 움직임을 알리려고 했지만, 마초의 부하에게 의심을 받아 체포되어 옥사당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맹달은 그날 밤에 군사를 이끌고 위에 투항했다.
이에 제갈량은 유봉에게 맹달을 공격하도록 명령헀고, 목숨을 건진 유봉은 맹달을 생포하기 위해 양양으로 갔다.
그러나 맹달은 맹달대로 유봉의 목을 쳐서 위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에 맹달은 양양전투에서 유봉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고 화가 난 유봉은 편지를 찢고 사신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맹달을 발견하자 ‘역적아, 무슨 잔말이냐!’라고 호통을 치며 싸움을 했다.
그러나 유봉은 하후상, 서황, 맹달 등 세 장수에게 협공을 당해 상용으로 후퇴했다. 그런데 상용의 수비군은 이미 위에 항복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성도로 도망쳐 돌아온 그는 땅에 엎드려 울자 유비는 크게 화를 내며 유봉의 목을 치게 했다.
그런데 이같은 나관중의 표현대로라면 유비는 대의를 위해 유봉을 죽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숙부인 관우를 구하지도 못했고 지키던 성도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어투는 작자가 도원결의 이래 만들어낸 의를 존중하는 표현의 극대화이다. 유봉이 관우의 목숨을 구하지 않아 죽음으로 몰았으므로, 유비가 유봉을 죽인 것은 도리에 맞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정사의 [촉서] <유봉전>에 의하면, 유봉은 무용이 뛰어났으며 군사상의 공적 또한 발군이었다. 유봉의 죽음은 관우를 구하지 못한 것과 관계가 있고, 유비는 그것에 화가 나서 유봉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 사실이지만 유봉이 죽임을 당한 중요 원인은 사실 따로 있었다.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후에는 유봉의 강맹한 성격을 제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유비에게 권고해 미리 그를 제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갈량이 유봉을 죽일 것을 권고한 것은 유비가 살아있는 동안에 후계자 문제를 똑바로 처리해 유선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문제의 소지를 없앤 것이다.
이것은 당시 누구나가 알고 있던 바였다. 때문에 맹달은 유봉 앞으로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 속에서 역사의 교훈을 거론하며 유봉의 각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봉은 그 도발에는 편승하지 않았다. 유봉은 감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시종 유비에게 충성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숙부를 죽게 한 죄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죽음은 분명 억울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46 유비에게 간 사신은 제갈근이 아니었다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174-241)의 자는 자유이며 오나라의 대신이었다. 그는 한말에 난을 피해 강동으로 건너가 손권을 섬겼는데, 침착하고 냉정하게 일하는 태도로 손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손권이 “나와 자유는 죽어서도 변치 말자고 맹세한 사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므로 제갈근도 한결같은 자세로 손권을 섬겼다. 역사상 제갈근은 덕행과 도량, 예법의 준수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제갈근은 여몽이 형주를 빼앗을 후 병사하자, 수남장군으로 남군태수를 대행하고, 나중에 대장군으로 승진해 완후에 봉해졌다. 또 손권이 황제에 오른 뒤에는 좌도호로 승진해 여주목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제갈근과 제갈량이 형제였으므로, 나관중은 제갈근의 인간상을 만드는 데 있어서 그를 손, 유 동맹의 중간에 두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손, 유 동맹에 금이 갈 때마다 제갈근이 나타나 활약한다.
형주의 귀속을 둘러싼 전쟁에서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촉에 들어가 유비를 만났고, 관우가 맥성에서 포위당했을 때에도 목숨을 걸고 관우를 만나러 가서 ‘시세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며 손권에게 귀순할 것을 권유했었다.
또한 유비가 군사를 일으켜 동정에 나섰을 때도 몸소 촉의 진영으로 가서 유비에게 휴전을 권고했다. 그러나 제갈근의 이러한 행동은 모두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삼국지연의] 제81회와 82회에는 손권이 이릉의 전투를 앞두고 제갈근을 촉의 진영으로 보내 유비에게 전쟁을 그만둘 것을 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관우와 장비가 죽자 유비는 큰소리로 울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그 후 그는 수륙 양면에서 배와 말을 병행시켜 스스로 70만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손권은 이것을 알고 크게 당황하며 여러 신하를 불러모아 대책을 상의했는데, 모두가 서로 얼굴만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제갈근만은 조금의 동요하는 빛도 보이지 않고 일어나더니 ‘촉의 진영으로 가서 유비에게 병력을 후퇴시키도록 권유해 보겠다’거 나섰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그를 특사로 임명해 촉의 진영으로 보냈다.
제갈근이 유비가 주둔하는 백제성으로 왔을 때 유비는 처음에는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황권의 충고를 듣고 입성을 허락했다.
제갈근은 유비를 만나 먼지 말을 꺼냈다.
“저의 아우 제갈량이 오래 폐하를 섬기는 바라, 거기에 의지해 목숨을 걸고 형주 회복의 일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지난날 관공께서 형주에 계실 때 우리 오후께서 여러 차례 강화를 청했으나 그때마다 거절당했습니다. 나중에 관공께서 양양을 쳐서 빼앗았을 때에도 조조가 여러 차례 오후 앞으로 서신을 보내 형주를 빼앗으라고 권했으나 오후께서는 역시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몽이 관공과 사이가 나빠 형주를 공격해 빼앗자고 주장해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오후께서도 무척 후회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여몽이 저지른 일로 오후의 죄는 아닙니다. 여몽이 죽은 오늘날은 원한도 이미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손부인께서는 전부터 폐하를 잊지 못하고 촉으로 돌아올 것만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제 오후께서 저를 사신으로 보내심은 손부인을 돌려보내 드리고, 아울러 오에 투항한 촉의 장수들도 폐하께 돌려보내려 하는 뜻입니다. 이와 더불어 형주를 촉에 되돌리고 길이 동맹을 맺어 함께 조비를 쳐 없애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나 유비는 노골적으로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나의 아우를 죽여 놓고 교활한 말로 변명만을 할 작정이냐?”
그러나 제갈근은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다.
“저는 일의 가볍고 무거움과 크고 작음을 가지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폐하는 한조의 황숙이십니다. 지금 한의 제위는 조비에 의해 빼앗겼는데, 역적을 없애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성씨인 관공을 위해서 귀하신 몸으로 몸소 대군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큰 의를 버리고 작은 의를 따르는 것입니다.
중원은 중국의 근본이고, 낙양과 장안은 한나라 창업의 땅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쪽을 버려두시고 오히려 형주만을 다투고 계십니다. 이것은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폐하가 즉위하시는 것을 보고, 반드시 한실을 다시 일으키고 한조의 강산을 되찾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위나라의 찬탈행위를 내버려두고 오히려 오를 치려 하십니다. 저는 이런 행동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려하는 것입니다.”
유비는 더욱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아우를 죽인 원수와 하늘 아래 더불어 살 수 없다. 군사를 물리게 하려면 짐을 죽이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그대는 돌아가 손권에게 목을 씻고 죽음을 기다리라고 전하라!”
제갈근의 설득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갈근은 정말로 몸소 촉의 진영으로 가서 화해를 청했던 것인가?
정사의 <유비전>과 <제갈근>에 의하면, 유비는 장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크게 분노하며 군사를 일으켜 계속 동진했고, 손권 측은 전쟁을 원치 않아서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신이 누구인지, 또 그 사신이 백제성으로 갔는지에 관해서는 명확치 않다. 더구나 당시에 제갈근은 남군태수였으므로 그 사신이 제갈근일 확률은 적다.
물론 제갈근도 오와 촉이 전쟁을 벌이는 것에 반대했다. 그래서 그가 남군의 임지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전진하는 유비에게 서신을 보내 원한을 풀고 계속 강화를 맺을 것과 무력행사를 그만두도록 권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비가 동정에 나섰을 때, 제갈근이 서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기는 했지만 촉의 진영에 목숨을 거로 간 일은 없으며, 더욱이 유비와 제갈근이 대면하고 언쟁했다는 상황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의 제갈근의 설득과, 정사 <제갈근>의 화해를 청한 서신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제갈근이 경중대소의 논리로 유비를 설득하려 한 것은 확실하다.
이 대목에서 [삼국지연의]가 그리는 유비의 태도를 통해 새삼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충의를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라는 점이다.
47 관흥과 장포는 오나라 정벌 전에 죽었다
관흥과 장포는 각각 관우와 장비의 아들이다.
[삼국지연의] 제81회에는 관우, 장비가 죽임을 당한 후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유비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술잔을 나누며 함께 생사를 맹세한 두 아우가 비명에 간 이상, 자신만이 살아남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을 것을 결의했고, 유비가 곁에 가까이 두고 있던 관흥과 장포도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유비는 70만 대군을 동원해, 오반을 선봉으로 삼은 후 관흥과 장포에게 친위대를 맡기고 몸소 군사를 지휘하며 동진했다.
촉한의 군사라 이르는 곳마다 오나라 병사들은 투항하고 말았기 때문에 촉한의 대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의도에 이르렀다.
그 동안에 관흥과 장포는 오나라의 좌도독인 손환과 이이 등을 해치우고 사정을 죽였으며, 마충을 물리치고, 효정을 공격해 빼앗아 오군을 대파했다.
이렇게 관흥과 장포는 오군과 교전하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원한과 분노를 씻어 충의의 정신을 발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 관흥과 장포는 정말로 오나라 정벌에 참가한 것인가?
정사의 <관우전>에 의하면, 관우에게는 확실히 관흥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어릴 적부터 평판이 좋아 제갈량이 중히 여겼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살지 못하고 약관의 나이에 죽었다. 그러므로 일찍 죽어버린 관흥이 특별한 군공을 세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욱이 오나라 정벌에 참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포도 마찬가지이다. 정사의 <장비전>에 의하면, 장비에게 확실히 장포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장비가 죽기 전에 요절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장포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 정벌에 참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둘 다 유비의 오나라 정벌에 참가한 일이 없었다.
나관중은 관우와 장비가 화를 입은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 전체를 두 영웅의 위대성으로 관철하기 위해 솟아나는 격정과 거침없는 상상력, 자신의 글재주를 이용해 관우와 장비가 죽은 후 그 아들들의 영웅적 행위를 허구화한 것이다.
즉, 오군에게 손해를 입히고, 황충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어려움 속에서 반장을 베고, 관우를 매도한 미방과 부사인을 죽이고, 관우를 살해한 마충의 목을 베고, 손권을 협박해 장비를 살해한 범강, 장달 두 흉악범을 송환시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따위의 영웅적 행위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관중의 이런 허구화는 이미 낡아 버린 관우와 장비의 인간상과 유, 관, 장의 충의의 정을 강화했고, ‘호장은 호아를 낳는다’는 창작성의 관점을 인상 깊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48 황충은 오나라 정벌에 참가하지 못했다
황충은 유비에게 귀순한 후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갔다. 그리고 선봉장으로 유장을 공격하면서 언제나 제일 먼저 적진을 함락시켰다. 그는 촉을 평정한 후에는 정서대장군이 되었고, 유비의 한중공략 때에는 정군산에서 조조 군을 대파하며 조조의 부장 하후연을 죽여 유비가 승리를 거두는 데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 후 건안 24년(219)에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오호대장의 한 사람으로 봉해졌다.
그런 황충의 죽음에 대해 [삼국지연의] 제 83회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장무 2년(222) 정월에 황충은 유비를 따라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노장은 도움이 안 된다는 유비의 말에 오기가 난 그는 적진을 돌파하여 오의 장수 사적을 죽이고 반장을 쫓아내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는 진영으로 돌아오라는 충고도 무시한 채, 다음날 다시 한번 반장에게 싸움을 걸었다.
반장은 일부러 패주하며 황충이 뒤를 쫓아오도록 했고, 계략에 감쪽같이 속은 황충은 복병에게 걸려 오의 장수 마충이 쏜 화살을 어깨에 맞고 그날 밤에 죽었다.
그러나 사서를 조사해 보면, 나관중이 황충의 죽음을 전면적으로 허구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정사의 <황충전>이나 관련 자료에 의하면, 그는 건안 25년(220)에 죽었다. <황충전>에는 그가 성도에서 병사했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사후 1년이 지나 부활해 유비를 따라 오나라를 정벌하고, 반장을 혼내준 후 전장에서 죽은 것으로 바뀌었다.
황충은 죽은 후에 ‘강후’의 작위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강후의 묘가 어디인가는 정사에도, [삼국지연의]에도 언급이 없다.
청대의 [성도현지]에 기록된 바로는, 청의 도광 연간에 성도시의 황충교 일대에서 그 지방 농민이 사탕수수를 저장할 굴을 파면서 검, 인골, 한나라 때의 벽돌 등을 적지 않게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벽돌들 중에는 ‘황강후’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성도의 유원이라는 학자가 이 사실을 알고 그 일대의 토지를 매입해 계속 발굴했는데, 그는 묘를 만드는 데 쓰인 벽돌과 ‘황강후공휘자한승지묘’라고 쓰인 석비를 발견했다. 그는 황충교가 바로 황충의 묘라고 단정했다고 한다. 바로 이 유원의 모금활동으로 지금은 관의 바깥을 덮는 널의 형태로 황충교가 남아 있을 뿐이다.
49 육손은 제갈량의 팔진도에 갇힌 적이 없다
오나라 정벌에 나선 유비는 오반과 풍습을 선봉으로 삼아 무현을 방어하고 있던 이이와 유아를 물리치고 자귀까지 전진했다. 그후에 황권의 권고를 무시한 채 몸소 대군을 이끌고 장강 남안에서 산을 따라 동쪽으로 전진했으며, 장무 2년(222) 2월에 촉군은 효정까지 전진하여 진영을 구축했다. 촉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군사력도 막강했다.
오의 장수 육손은 유비에게 강공으로 대항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우선 일보 후퇴해 촉을 제압하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유비는 육손의 이러한 작전을 생각지 않고, 이릉의 동서쪽 전선에서 본영에 맹공을 가했다.
하지만 육손은 견고하게 지키려고만 할 뿐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쌍방은 6,7개월 동안 계속 대치했다.
촉군은 전투에 있어서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헛된 시간만 보내게 되었고, 결국 군량미의 공급이 곤란해진데다 더위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여기에서 유비는 수륙벙진의 유리한 조건을 포기하고, 배를 버리고 산 속에 요새를 구축했다.
그러나 반격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본 육손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일제히 공격에 나서, 촉군의 40여 요새를 연속해서 함락시켰다.
유비는 패잔병을 이끌고 백제성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삼국지연의] 제84회에는 이때를 대비해 제갈량이 교묘히 팔진도를 설치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갈량은 서천으로 들어가면서 봉절의 어복포에 오군의 침공을 막기 위한 석진을 펼쳐놓았다. 그리고 ‘팔진도가 있으면 언젠가 오의 대장이 여기에 들어와 헤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유비가 위와 같이 이릉에서 대패하고 퇴각하자 육손은 기문과(지금의 사천성 봉절) 부근까지 추격했다. 육손은 전방의 장강 연안에서 이상한 기운이 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촉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섣불리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정찰병을 보냄과 동시에 군사를 후퇴시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윽고 정찰병이 돌아와 보고했다.
“전방에는 촉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복포 일대에 돌산이 팔구십 개 흩어져 있을 뿐입니다.”
육손은 너무 이상해 몸소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전방에 있는 산의 경사면에 올라 관찰했다. 산에 올라보니 사방 팔방에 돌산이 흩어져 있고 각 방위마다 입구가 있어 통행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건 도대체 뭔가? 돌산으로 놀라게 해서 물러서게 할 작정인가?”
육손은 이상하게 생각하고는 몇 명의 병사를 이끌고 흩어져 있는 돌산 안으로 들어가 한동안 둘러보았지만 그곳에서는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때 어떤 부장이 말했다.
“이제 해도 저물었습니다. 빨리 본영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말을 듣고 육손이 진을 나오려고 하자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고 모래와 돌이 천지를 뒤덮을 듯 날리기 시작했다. 괴석이 칼처럼 우뚝 솟고, 모래와 흙이 산처럼 쌓이고, 성난 파도가 으르렁대며 천군만마와 같이 습격해 왔다.
육손은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렸다.
“제갈량의 계략에 빠졌다!”
육손이 이처럼 진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나타나 길을 안내해 겨우 탈출할 수가 있었다.
육손은 그제서야 이 석진의 형태가 팔진도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 육손은 황승언에게 예를 올리고 군사를 돌이켰던 것이다.
그럼 육손은 정말로 제갈량의 팔진도에 갇혀 곤경에 처했었던 것인가?
정사의 <유비전>과 <육손전>에 의하면, 유비가 백제성으로 도망치자 오군의 장수인 서성, 반장, 송겸 등은 추격해 유비를 생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육손은 이이와 유아의 소부대로 한동안 추격하게 했을 뿐, 대부대는 위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재빨리 후퇴시켰다. 이처럼 애초에 육손이 유비를 추격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제갈량의 팔진도에 혼나는 따위의 일도 있을 수도 없었다.
윈대의 [삼국지연의] 속에 이미 제갈량이 여덟 개의 돌산을 이용해 육손을 격파한 이야기가 들어 있으며, 이 시대에 이미 ‘제갈량이 돌을 이용해 육손을 항복시키다’라는 제목을 가진 잡극이 있었다.
공손술이 촉을 차지하고 있을 때에 백제성이라고 개명된 어복현의 현성은 전한시대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유비 때 다시 영안성이라고 개명했는데, 원래 이 성은 지금의 사천성 봉절현 백제산성에 있었다.
육손이 곤경에 처했다는 팔진도는 이 성의 서쪽 어복포에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수팔진이라고 불렀다.
유비가 이 수팔진의 동쪽 백제성으로 후퇴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육손이 만약 촉군을 추격했다 해도 우선 백제성을 통과하지 않으면 수팔진에 이를 수가 없다. 당시에는 백제성을 넘기 전에 수팔진으로 가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갈량이 교묘하게 팔진도를 설치해 육손을 곤경에 빠뜨렸다는 것은 단순한 전설일 뿐이다.
50 팔진도법은 제갈량이 만든 것이 아니다
제갈량의 팔진도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에서 여러 곳에 걸쳐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전기적 색채가 농후하다. 이처럼 나관중이 그리는 제갈량은 신선 같은 인물이며, 팔진도는 그가 가진 획기적인 보물 중의 하나로 묘사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는 영감으로써 미리 어복포에 팔진도를 설치하여 오의 대장 육손을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었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북벌에 나섰을 때에도 팔진도로 사마의를 혼내주었고, 제갈량이 죽은 후에도 팔진도의 요체를 터득한 강유가 팔진도를 설치해 등애를 혼내주었다.
그러나 역사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들이며 근거도 없다.
하지만 신비적 색채를 없애고 정사의 기록과 연결해 생각했을 때 역사상 제갈량이 어딘가 색다른 병법의 진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즉, 진수가 말하듯 제갈량은 병법을 깊이 연구해 팔진도를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팔진도는 제갈량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인가?
이흥은 자신이 지은 [촉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갈량의 팔진도법은 손자나 오자의 병법에는 없는 것이다.”
곧 손자나 오자의 병법에서 팔진의 방법은 찾아 볼 수 없으므로 이것은 제갈량의 독창적이라는 것이다.
나관중은 이러한 기술을 근거로 제갈량이 교묘하게 팔진을 친 모습을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전인미답의 창조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팔진도의 원류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결코 제갈량의 독창이 아니다.
그렇다면 팔진도는 언제쯤 고안되었을까?
아직 단정지어 말할 수 없지만 당대 독고급의 [팔진도], 이전의 [태백음경], 두우가 편찬한 [통전] 등에서는 모두 팔진도가 ‘황제’때에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황제 때에 만들어졌다는 설은 진나라 이전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더욱 믿기 어렵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한 고전들은 모두 팔진도가 중국 고대부터 전하는 특이하고 위력이 크며 복잡다변한 군진의 법칙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강태공의 저작으로 알려진 병법서 [육도]에도 팔진의 대략이 기록되어 있지만, 명칭은 팔진이 아닌 현익이다.
후한의 정현이 주를 단 [주례]에도 비슷한 것이 있는데, 춘추시대의 군사가인 손무의 병법 중 <구지편>에 나오는 곡직진이 팔진과 닮았다는 것이다.
또 1972년에 산동의 은작산 한묘에서 출토된 죽간의 [손빈병법] 속에 이미 <팔진편>이 있는데, 이것은 팔진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책이다.
정사 <무제기>의 배송지 주에서 인용한 자료에는, “한은 진의 제도를 이어받아 황제는 매년 10월에 장수 남문에서 오영사를 모아 팔진을 만들어 훈련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송의 왕응린이 지은 [옥해]에는, “후한의 두헌은 항상 팔진으로써 흉노를 쳤다.”고 했다. 그러므로 늦어도 한 대에 이미 팔진법은 병법에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 이후의 사서에는 팔진도에 관한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서진 초년에 마릉은 3천의 보병으로써 팔진법을 펼쳐 수기능의 2만 군사를 물리쳤으며, 당나라 때의 이정은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을 따라서 여러 해에 걸쳐 팔진도법을 이용해 싸움으로써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므로 팔진도가 결코 제갈량의 독창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제갈량이 병법을 깊이 연구해 팔진도를 만들었다는 것과 군사활동에 있어서 창조적으로 이 고대병법의 진영형태를 발전시킨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처럼 역사상 제갈량의 특기는 팔진도였다.
[위략]에는 사마의가 실제로 제갈량의 팔진을 사찰한 후에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재이다.”라고 감탄했다고 쓰여 있다.
문헌 중에는 제갈량이 팔진도로써 병사를 조련해 적을 이겼다는 기록이 수없이 많은데, 현재 남아 있는 제갈량의 팔진도 유적은 모두 네 곳이다. 사천의 봉절, 신도, 쌍류와 섬서의 한증, 면현의 정군산이 그곳으로 이들 유적은 제갈량이 팔진으로써 군사를 훈련하고 전쟁을 일으켰던 역사적 증거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동기상은 [사천대석문화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파촉 영내의 열석 유적은 속설에 제갈량이 돌을 나열해 진을 구축하고 군사훈련에 이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사방 1-2리 사이는 군사가 진퇴하거나 충돌할 수 있는 만큼 공간이 넓지 않으므로 이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고대 대석문화의 유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51 사마의는 촉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사마의(179-251)의 자는 중달이며, 하내군 온현(지금의 하남성 온현의 서쪽) 사람으로 모략과 권모술수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비가 제위에 오른 후에 중용되었다.
[삼국지연의]가 창출한 그의 인물상은 비교적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관중은 제갈량의 지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마의와 제갈량의 지혜와 용기를 겨루는 장면에서는 시종 사마의를 제갈량에게 당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마의는 [삼국지연의] 제85회에 처음 등장해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략을 올린다.
조비는 유비가 죽고 유선이 뒤를 이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춤을 추며 기뻐했다. 이때에 여러 신하가 여러 가지 계략을 진언했는데, 사마의도 이 기회에 촉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위나라의 군사력만으로 촉을 치면 즉각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치는 계략을 진언했다.
제1방면
선비족의 왕인 가비능에게 10만의 군사를 요청해, 서평관(지금의 청해성 서령 부근)을 공략하게 한다.
제2방면
만왕 맹획에게 10만의 군사를 요청해 익주, 영창 등을 공략하게 한다.
제3방면
오의 손권에게 10만의 군사를 요청해 서천협(지금의 사천성 악산 동쪽지역)을 공략하게 한다.
제4방면
항복한 장수 맹달에게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상용에서 한중으로 진격하게 한다.
제5방면
대장 조진에게 10만의 군사를 맡겨 양평관에서 서천을 공략하게 한다.
사마의의 생각으로는 , 이 다섯 방면의 협공이라면 제아무리 제갈량에게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해도 모두를 막아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촉의 멸망을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한편 유선은 이 소식을 듣고 새파랗게 질렸다.
그때 제갈량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답답했던 유선은 승상부에 가서야 비로소 이미 제갈량이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대책은, 마초로 하여금 서평관을 지키게 하여 가비능을 막는다. 위연에게 명해 복병을 설치하도록 하여 맹획을 막는다. 이엄의 자필을 가장한 서신을 보내 맹달의 마음을 움직인다. 조운에게 명해 양평관을 지키게 하여 조진을 막는다. 등지를 사신으로 오나라로 보내 양국의 관계를 수복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모두 그대로 시행되었고, 결국 사마의의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치는 계략은 제갈량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사마의는 정말로 이처럼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략을 세웠는가?
나관중이 꾸며낸 이 이야기는 조잡함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삼국지]나 [진서]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으며, [삼국지연의]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첫째, 건흥 원년(223)에 위나라와 오나라는 대치상태였다. 연합해서 촉을 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둘째, 건흥 원년에 맹획은 익주군의 실력자 옹개의 부하에 지나지 않았다. 위나라가 옹개에게 인사도 없이 맹획에게 출병을 요청하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셋째, 정사에 의하면 마초는 장무 2년(222)에 죽었으므로 223년에 군사를 맡아 서평관을 지킨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이릉의 전투 후에 촉은 의기소침해 있었고, 유선이 막 즉위하여 안팎이 모두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위가 촉을 공격할 수는 있었지만 정작 공격하지는 않았다., 또 사마위는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략을 세운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52 제갈량은 맹획을 일곱 번이나 놓아줄 수 없었다
유비가 죽은 후에 제갈량은 유선을 부탁한다는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군사와 정치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 당시 남중(촉의 서남쪽 영창, 익주, 월수, 장가의 사군)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은 옹개였는데, 그는 촉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소수민족의 수령인 맹획, 월수이왕 고정, 장기군승 주포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225년에 제갈량은 2년 동안 관청을 폐쇄하고 내정과 외교를 처리한 후, 대군을 이끌고 남만을 정벌해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맹획을 일곱 번 붙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 준 이야기는 바로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로, [삼국지연의]에서는 제87회에서 90회까지 지면을 대폭 할애해 이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건흥 3년에 몸소 대군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선 제갈량은 만왕 맹획에게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일곱 번에 걸쳐 맹획을 생포했다가 석방했다.
그 첫 번째는, 출격한 왕평과 관색이 싸움에서 지는 척하며 맹획에게 추격을 하게 한 후에 조운과 위연 등에게 후방을 습격하게 함으로써 맹획을 생포했다.
두 번째는, 제갈량의 은혜를 입어 석방된 맹획의 부장 동도나가 싸우지도 않고 후퇴했다는 이유로 맹획에게 채찍질을 당한 것을 이용했다. 동도나는 각 부족의 추장들과 함께 맹획을 붙잡아 제갈량에게 넘겼다.
세 번째는, 맹획이 동생인 맹우를 거짓으로 항복시키고는 안팎으로 병력을 집결시켜 촉군을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려 대패시켰다. 이때 맹획은 도망치다가 마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네 번째는, 제갈량이 후퇴하는 척하자 맹획이 추격했다. 이때 조운에게 명해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대패한 맹획은 도망치다가 제갈량과 맞닥뜨리자 앞 뒤 가리지 않고 덤볐으나 결국 함정에 빠져 붙잡혔다.
다섯 번째는, 계속 촉군에게 대항하는 맹획에 반감을 가진 은야 동주 양봉이 다섯 명의 아들과 함께 3만 군사를 이끌고 맹획을 도와준다며 갔다가 환영 연회가 벌어지자 다섯 아들을 시켜 맹획을 사로잡아 제갈량에게 인도했다.
여섯 번째는, 맹획이 목록대왕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제갈량이 나무로 만든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의 큰 목각짐승으로 진짜 맹수를 쫓아보내서 적을 크게 이겼다. 그 후에 맹획의 처남인 대리동주가 맹획을 꽁꽁 묶고 나타나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제갈량을 죽이려고 하다가 발각돼 전원 생포되었다.
일곱 번째는, 제갈량이 올돌골이 이끄는 등갑병에게 화공을 퍼붓고는 맹획을 기다렸다가 공격하자, 맹획은 단신으로 포위를 뚫고 도망쳤지만 다시 마대에게 붙잡혔다. 맹획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음으로 말했다.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남만에 사는 것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상 정말로 이렇나 일이 있었는가?
옛부터 지금까지 이에 대해서는 긍정하는 이도 있고 부정하는 이도 있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긍정론자들은 칠금칠종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첫째, 배송지의 주에서 인용한 [한진춘추]에 다음의 글이 쓰여 있다.
“제갈량이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모두 풀어주려고 하자, 맹획은 깊이 반성하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은 분이십니다. 남만에 사는 것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둘째, [화양국지]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남만 정벌에 나선 제갈량이 맹획을 생포하여……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주었더니, 맹획은 완전히 굴복하여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은 분이십니다. 변경의 백성은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셋째, [삼국지집해]에는 장악기의 [전운기략]을 인용해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은 각각의 장소를 고증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해서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재미있게 저술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와 관련된 전설이나 고사는 지금도 서남의 소수민족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다.
한편 부정론자들은 이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첫째, 진수의 정사는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권위있는 사서인데, 거기에는 칠금칠종의 이야기가 없을 뿐 아니라 맹획조차 나오지 않는다.
둘째, 청나라 때의 [통감집람]은 이렇게 보고 있다.
“칠금칠종은 이야기로서는 재미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은 원래 ‘만이’를 심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더구나 당시 제갈량이 가장 서두르던 것은 북쪽의 위나라를 치는 일이었다. 누차 풀어주었다가 다시 사로잡을 정도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여유가 없었다. 제갈량은 노수를 건너 전지에 이르기까지 불과 4,5개월 정도밖에 소비하지 않았고, 정세는 절박해 서둘러 군을 되돌려 북벌에 나서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일에 얽매여 있을 여유가 없었다.”
셋째, 정사의 <장의전>에 의하면, 남중 정벌 후의 남중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남이가 다시 한 번 배반하여 수장을 살해했다고 쓰여 있다. 때문에 제갈량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전략이나 칠금칠종의 이야기는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또 1983년 [삼국지] 학술 토론회에서 발표된 사천대학 무월 교수의 논문과 방국유 운남대학 교수의 <제갈량남정로선고기>, 그리고 담량소(성도 무후사 박물관) 연구원의 <제갈량의
칠금칠종에 대한 질의> 등도 모두 두 번째 통감집람에 나와 있는 설의 입장에 서 있다.
이처럼 제갈량이 맹획을 사로잡고 다시 놓아 주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일곱 번 붙잡아 일곱 번 풀어주었다는 것은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 대개의 견해이다.
53 관우의 아들 화관색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명나라 가정 연간에 간행된 [삼국지연의](삼국지연의 가장 오래된 간행본으로 여겨짐)에는 화관색이라는 인물이 보이지 않으나 그 이후에 나온 간행본에 화관색의 일이 다소의 차이를 보이면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통행본인 창대 모종강 부자의 평본에는 화관색이 3회에 걸쳐 다섯 장면에 등장한다. 다섯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내용이 간단하므로 독자가 느끼는 화관색에 대한 인상은 상대적으로 매우 약하다.
[삼국지연의] 제87회에 위해서 설명한 대로 화관색이 처음 등장한다.
제갈량이 50만 대군을 일으켜 남중 정벌에 나서는데, 출발 직전 관우의 셋째 아들인 관색이 찾아왔다.
관색의 설명에 의하면, 자신은 형주가 함락된 후에 포가장으로 도망가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천에 들어가 선제의 한을 풀려고 생각했지만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나설 수가 없었고, 겨우 회복되어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원수들이 모두 죽어 버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천으로 향하는 도중에 제갈량의 군대를 만나 특별히 접견을 청했다는 것이었다.
관색의 이야기를 들은 제갈량은 감탄해 마지않으며 바로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관색을 전부선봉에 임명해 함께 남중 정벌에 올랐다. 이후 남중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그는 눈부신 전공을 올렸다.
그러면 역사상 화관색은 실존인물인가?
[삼국지], [후한서], [화양국지] 등의 역사서에는 화관색 또는 관색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때문에 관우에게 화관색 또는 관색이라는 아들이 없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운남, 귀주, 사천 등의 지방지에 나오는 화관색에 관한 기록이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화관색의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학람만록]에 게재된 주소량의 ‘관색고’는 상세하고 확실한 자료를 통해 관색이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고증했다. 또 많은 곳에서 그의 이름을 지명으로 삼고 있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처럼 관색의 이름이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지만, 결코 송대에 처음 출현했을 리는 없으므로 아마도 이전부터 민간에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당나라 때에 이미 관삼량의 사당이 출현했고, 송나라 때의 장상영은 ‘관삼랑묘건립기’까지 썼다. 송, 원 이후의 희곡, 잡극, 설창예술(이야기와 노래가 섞인 민간문예)이 발달함에 따라 관색의 이야기는 한층 널리퍼졌다.
원대의 [삼국사략] 속에는 이미 제갈량이 불위성에서 남만을 토벌할 때, ‘관색이 거짓으로 패하다’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관색의 실체는 잘 파악할 수 없지만, 그는 ‘삼분’이라고 명명된 옛날 이야기에 처음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1967년 상해 가정현에 있는 성동인민공사의 농민이 땅을 고르는 일을 하다가 명대의 묘 안에 있던 <화관색전>을 발견했다. 이 책에서는 설창형식을 이용해 상세하게 관색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유비, 장비, 관우는 도원결의를 하면서, 가족에게 마음이 쏠리지 않도록 각자 서로의 가족을 죽이러 갔다. 그러나 장비는 관우의 처가 임신한 것을 보고 그냥 돌아왔고, 관우의 처인 호씨는 나중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일곱 살 나던 해 정월 석등 구경을 가서 미아가 되어 색원외랑에게 거두어졌고, 아홉 살 때에 화악 선생의 제자가 되어 문무의 재능을 익혔다. 그리고 열여덟 살 때에 출신이 밝혀져 세 번째로 들어간 집의 성을 따서 화관색이라고 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사천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이때 유비, 관우, 장비는 흥유새를 점령하고 왕이 되어 있었고, 군사인 제갈량과 황충, 마초, 강유, 방통 등이 그들을 보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우의 적토마가 도둑을 맞아 장수들이 여러 갈래로 도둑을 찾다가 장비가 길에서 화관색 모자를 만났다. 그렇게 해서 관우의 일가는 다시 모이게 되었다.
조조가 낙봉파에서 유비를 연회에 초대해 죽이려고 했을 때 관색은 제갈량의 지도하에 조조를 공격해 낙봉파를 점령하고 형주를 빼앗았다. 또 서천에 군사를 진격시킨 유비가 낭중에서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관색이 치고 나와 포위를 풀고 여개와 왕지를 항복시킨 후 주패를 참살했다. 그리고 성도에 도착하자 관색은 수비군의 원수인 주창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해서 유비는 서천을 손에 넣었다.
그 후 2년이 지나 관우와 장비는 각각 형주와 낭중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유비는 유봉에게 관우의 상태를 보러 가게 했는데, 그때 유봉과 관색이 싸움을 벌였던 까닭에 관색은 운남으로 좌천되고, 유봉은 음산으로 좌천되었다.
나중에 형주를 잃자 유비는 유봉을 죽이고 오나라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파견할 만한 장수가 없었기 때문에 관색을 불러들였다. 관색은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수를 갚았다.
나중에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그리워하며 병사하고, 관색도 분노와 병으로 죽었다.
<화관색전>은 민간전설일 뿐으로 조금도 역사적인 가치는 없다. 이 책은 민간 예인의 설창사화본으로 명나라 때 중판되었는데, 그 초각본은 아마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썼던 때보다 늦지는 않을 것이다.
담량소는, “나관중이 관색의 이야기를 [삼국지연의] 속에 쓰지 않았던 이유는 ‘정사의 자료를 소설에 채택하고, 문장에 나타난 단어들을 통해 감정을 통하게 한다’는 그의 창작관 때문으로, 설창사화인 <화관색전>은 언사가 비속한데다 야담에 속했기 때문에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역사상 화관색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연의] 속에 나오는 화관색의 이야기는 <화관색전> 같은 민간전설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더욱이 운남, 귀주, 사천 등의 지방지에 있는 화관색에 관한 기록은 민간의 이야기가 주로 남방에서 유행해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4 옹개와 주포를 죽이기 위한 반간계는 없었다
옹개와 주포는 남중의 명문 출신이고, 고정은 촉군의 원수였으므로, 제갈량은 남중 정벌 때 우선 세 사람의 세력을 제거하고 나서야 비로소 맹획을 추격했다.
[삼국지연의] 제 87회에서 제갈량은 건령태수인 옹개와 장가태수인 주포, 그리고 월수태수인 고정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남중 정벌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반란군은 세 방면에서 촉군을 맞아 싸웠는데, 고정은 중앙, 옹개는 좌측, 주포는 우측을 맡았다.
고정은 악환을 선봉으로 해서 우선 촉군의 위연, 장익, 왕평을 맞아 싸웠는데, 이때 위연이 패한 척하고 도망치자 악환이 계속 쫓아갔고, 그것을 장익과 왕평 양군이 협공해 악환을 생포했다.
제갈량은 그의 포박을 풀고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며 교묘한 말로 위로했다. 이렇게 반간계를 편 후에 제갈량은 폭로가 된 고정의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정이 충의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조금 전에 옹개가 사람을 보내 항복하면서 너희 주인인 고정과 주포의 목을 선물로 바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희들이 고정의 부하라 하니 이번에는 놓아 보내겠지만, 다시는 은혜를 배반하지 말라. 만약 다시 잡히는 날에는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돌아온 고정의 부하가 이 일을 보고하자 고정은 그 사실을 반신반의하며 첩자를 보내 촉군의 진영을 염탐하게 했는데, 첩자가 제갈량의 복병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번에도 제갈량은 짐짓 그를 옹개의 부하로 여기는 척하며 말했다.
“너희들의 원수는 고정과 주포의 목을 헌상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날짜를 맞추지 않는데가 반대로 첩자를 보냈다. 어찌된 일이냐?”
제갈량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첩자에게 술과 음식을 먹이고, 계획을 빨리 착수하도록 강요하는 밀서를 써서 옹개에게 보내는 척하며 보냈다.
돌아온 첩자의 보고를 들은 고정은 불끈했다.
“나는 저를 진심으로 대했건만 옹개 놈은 역으로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지?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즉시 악환과 짜고 옹개의 진영을 습격했다. 옹개의 군사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고정과 악환은 옹개의 목을 베어 제갈량에게 보냈다. 그러자 제갈량은 고정이 거짓으로 투항한 것이라며 믿으려 하지 않고, 대신 진심을 보이려면 주포의 목을 베어 오라고 했다.
고정과 악환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주포의 진영을 습격했다. 주포가 우왕좌왕하면 말에서 떨어지자 악환이 베어 죽였다. 두 사람이 주포의 목을 가지고 제갈량을 찾아가자 제갈량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그대들의 충성심을 알아보려고 의심하는 척했을 뿐이다.”
삼군이 귀순한 후에 제갈량은 고정을 익주태수에 임명해 삼군을 다스리게 하고, 악환을 아장에 임명했다.
이것이 옹개와 주포가 죽음에 이른 과정이다. 그럼 옹개와 주포는 정말로 제갈량의 손바닥에서 놀아났으며, 뻔히 알면서도 반간계에 빠져 죽은 것인가?
사서에는 남중의 호족인 옹개와 주포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있는데, [촉서], <여개전>에는 “옹개는 유비가 영안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권에게 투항했고, 손권은 그를 영창태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옹개는 제갈량이 남만 땅에 이르렀을 때에 고정의 친위병에게 살해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 주포의 죽음도 <마충전>과 [화양국지]의 <남중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마충이 장가군을 격파한 후에 죽었다”고 확실히 쓰여 있다. 그러므로 옹개가 죽은 것은 제갈량의 남중 정벌 중에 일어난 일이고, 주포가 죽은 것은 촉나라 장수 마충이 장가를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제갈량이 반간계를 쓴 일은 전혀 없었으며, 그 경위도 [삼국지연의]에서 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 외에 고정(화양국지에서는 고정원이라고 했다)에 대해 역사서는 ‘옹개와 내분을 일으켜 옹개를 죽인 후 얼마 되지 않아 촉군에게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제갈량의 반간계의
도구가 되었던 적도 없고 익주태수가 되는 행운을 얻은 적도 없었다.
55 강유의 투항은 제갈량의 계략 때문이 아니다
강유(202-264)의 자는 백약으로 지금의 감숙성 감곡인 천수군 익현 사람이며, 원래 조조 휘하의 중랑장으로 천수군 참군에 임명되어 있었다.
당시 위나라는 농우지역에서는 촉에 대한 방어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갈량이 이끄는 북벌 주력군이 서북의 기산을 향해 진격했을 때, 농우의 천수, 남안, 안정의 세 군은 연달아 촉에 귀속되었다.
[삼국지연의] 제93회는 제걀량이 계략을 써서 강유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이야기이다.
촉은 제1차 북벌에서 남안군에 자리잡은 위나라의 부마 하후무를 포위했을 때, 제갈량이 병사를 위나라 장수 배서로 위장시켜 천수, 안정 두 군으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했다. 그들이 출병할 때를 포착해 두 군을 공격해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유는 이 계략을 간파하고는 태수인 마준과 싸고,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만을 엿보던 조운의 부대를 격퇴했다. 제갈량은 몸소 천수로 갔지만 그 또한 강유의 야습을 받았다.
강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제갈량은 어떻게든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 위연에게 명해 강유의 어머니가 사는 익현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강유는 노모를 염려해 마준에게 군사를 요청한 후 익현의 방위에 몰두했다.
제갈량은 또한 포로로 잡았던 하후무를 석방하는 한편, 중간에서 강유가 이미 촉에 투항했다는 소문을 흘리게 했다. 동시에 강유를 가정한 부하장수에게 천수를 야습하도록 했기 때문에, 하후무와 마준은 강유가 정말로 촉에게 투항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 후 제갈량은 몸소 대군을 이끌고 익현을 공격했고, 패배한 강유는 창 하나만을 옆구리에 차고 홀로 천수로 도망쳤다.
그러나 마준은 강유가 자신을 속여 성을 빼앗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화살을 마구 쏘아댔다. 그러자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던 강유는 촉에 투항하고 말았다.
한편 정사의 <강유전>과 주에서 인용한 [위략]의 기술에 의하면, “건흥 6년에 제갈량의 북벌군이 기산으로 진격했을 때 천수군 태수인 마준은 촉군이 오자 여러 현이 촉군에 호응했다는 소문을 듣고, 강유 등이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닌가 의심해 상영으로 도망쳤고, 강유 일행은 이유도 모른 채 상영까지 쫓아갔지만 어찌된 일인지 익현에서도 강유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제갈량에게 투항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강유 등이 의심받은 것은 제갈량이 흘린 소문 때문이 아니라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투항했던 것이다.
나관중은 사실을 각색함으로써, 제갈량의 인재를 아끼고 후계자를 찾으려는 전략상의 착안을 칭송함과 동시에, 강유의 비범한 재주를 돋보이게 한 것이다.
제 6 장 왕랑은 제갈량과 싸운 적이 없다
56 왕랑은 제갈량과 싸운 적이 없다
왕랑(?-228)의 자는 경흥이며 동해군 담현(지금의 절강성 승현) 사람으로 한의 헌제 때에 회계태수였으며, 손책에게 패한 후 조조에게 투신했다.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사공에 임명되었고, 명제 때에 사도로 추증되었다.
[삼국지연의] 제93회에서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제갈량의 제1차 북벌에서 위나라의 부마 하후무가 대패하자 위는 대장군 조진을 대도독에, 사도 왕랑을 군사에 임명해 대군을 맡기고 기산에서 대치했는데, 군사회의 석상에서 왕랑은 자기가 단 한 마디로 제갈량을 투항시켜 보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는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에 왕랑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정한 운수는 변하게 마련이다. 지금은 위가 정통이니 무장을 풀어 예를 갖추어 투항하라.”
제갈량은 이를 듣자마자 껄껄 웃으며 왕랑에게 말했다.
“너희는 한실을 배반하고 역적의 짐을 짊어진 놈들이다. 그 죄는 무겁다 아니할 수 없으니, 저승에서 무슨 면목으로 한실의 스물네 분 황제를 뵈려 하느냐?”
왕랑은 그 순간 분노와 수치로 가슴이 막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역사에 정말로 있었을까?
첫째, 정사의 <왕랑전>과 관련 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왕랑은 위나라 명제의 태화2년(228)에 낙양에서 병사했다. 그는 한 번도 조진의 군사에 임명된 적이 없으며, 더욱이 방위군에 종군해 진두에서 제갈량과 싸운 적이 없으므로 제갈량에게 호통을 들어 죽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둘째, 정사 <제갈량전>의 주에서 인용한 [제갈량집]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223년에 유비가 죽었을 때, 유선은 소년이었기 때문에 정무는 대소를 불문하고 모두 제갈량이 결재했다.
이때 촉은 내정과 외교에서 약간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위의 명사와 대신들, 예를 들면 사도 화흠, 사공 왕랑, 상서령 진군, 태사령 허지, 알자복야 제갈장 등이 앞다투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시대의 추세를 알고 천명과 인심에 따라서 위에 항복하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인에 넘어가지 않고, 경전을 인용해 역사의 사례를 열거하며, ‘정의’편을 써서 반론을 가함과 동시에, 투항할 마음은 없고 약으로 강을 제압해 천하를 통일할 결의와 자신감을 밝혔다.”
셋째, 나관중은 왕랑이 228년에 죽었다는 것과 제갈량이 투항 권유를 받았다는 두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제갈량이 진영 앞에서 왕랑을 호통쳐 죽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왕랑의 이야기는 시간을 거꾸로 짚어 나무에 잎을 접목시키는 [삼국지연의]의 창작기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의도가 촉한의 정통적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제갈량을 우상화하려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57 맹달은 제갈량의 북벌 전에 죽었다
맹달(?-228)의 자는 자도이며 부풍군 사람이다. 그는 원래 유장을 섬겼지만, 건안 16년에 법정의 수행원으로 유비를 맞아 싸우러 갔을 때에 유비에게 귀순해 건안 24년에 유봉과 함께 상용을 공략했다.
219년에 오가 형주를 습격해 관우를 죽였을 때, 유봉과 맹달 두 사람은 산성이 함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시종 관망할 뿐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나중에 맹달은 이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위에 투항했다.
그는 위나라에서 산기상시, 건무장군, 평양정후 등에 봉해져 신성(지금의 호북성 빙산 일대)태수에 임명되었는데, [삼국지연의] 제94회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조비가 죽은 후 맹달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제갈량이 북벌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위를 배반하고 다시 한 번 촉을 따라 낙양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제갈량에게 이 계획을 전하는 한편, 상용태수 신탐과 금용태수 신의 두 형제에게 거병에 협력할 것을 제의했다.
신탐 형제는 동의하는 척하며 몰래 맹달의 심복 이보와 외조카 등현과 모의해 사마위에게 사신을 보내 밀고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마의는 우선 참군 양기를 신성으로 보내 맹달에게 촉을 정벌할 준비를 재촉하도록 함으로써 맹달을 안심시키고는 바로 군사를 일으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해 신성을 포위했다.
이보다 전에 제갈량은 맹달에게 서신을 보내 사마의의 움직임에 대비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맹달은 사마의가 있는 완성에서 신성까지는 1천 2백 리나 되므로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사마의가 자신의 거병을 알아도 위나라 황제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므로 출병하려면 한 달은 걸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때문에 막상 포위되자 성을 지키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때 신탐 형제가 구원하러 온 척하며 이보, 등현 등과 함께 기회를 틈타 성곽을 점령했고, 맹달은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맹달은 제갈량의 북벌 이후인 228년 봄 이후에 죽은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사의 <명제기> 및 [진서] <선제기>의 기록에 의하면, “맹달이 위를 배반하고 다시 촉에 귀순하려고 한 것은 위나라 명제 태화 원년(227) 12월의 일이었는데, 사마의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배도겸행(밤낮없이 달려 두 배로 행군함)하여 8일 만에 성 밑에 당도했다.
이후 여덟 방면에서 공격하기를 16일 동안 계속했고, 그 후 맹달의 외조카 등현과 부장 이보의 투항으로 간신히 맹달을 붙잡아 죽였다. 이것이 태화(228) 정월의 일이었다.”고 되어 있다.
위의 자료에 의하면, 맹달이 죽은 것은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기 전의 일이지 북벌에 나서 농우를 빼앗은 후의 일이 아니다. 그 외에 신탐 형제가 맹달의 계획에 가담한 사실도 없고, 등현과 이보는 항복하고 성을 넘겨주었을 뿐 내통한 적은 없다.
그러나 제갈량과 맹달이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는 것은 [삼국지연의]와 [진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 [촉서] <비서전>에 실린 ‘제갈량이 맹달에게 보내는 글’은 225년 말에 쓰여진 것이다.
남중 정벌을 마치고 개선한 후 한양에서 맹달의 근황을 들은 제갈량은 맹달을 다시 한 번 촉을 따르게 함으로써 장차 북벌에서 도움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두 가지 점이 분명해진다.
첫째, 맹달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를 배반하고 촉을 따르려 했다기보다는, 제갈량의 장기간에 걸친 공작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나관중이 창작한 ‘사마의가 해를 붙잡아 맹달을 사로잡았다’는 이야기는 전부가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58 가정전투의 패전은 제갈량에게도 책임이 있다
가정은 오늘날의 감숙성 장량현의 동남쪽 농성진 근처에 있는데, 가정전투는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 위나라 농우의 세 군을 빼앗을 후에 일어났다.
[삼국지연의] 제95회와 96회에 이 싸움이 그려져 있다.
사마의가 맹달을 죽이자 명제는 그를 도독으로 삼고, 장합을 선봉에 임명해 가정으로 출병하도록 명했다.
한편 제갈량은 참군 마속을 주장으로 삼고 왕평을 부장으로 삼아 2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가정을 지키게 했는데,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왕평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산 위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마속은 여러 차례에 걸친 왕평의 요구에 겨우 5천의 병사를 나누어주었고, 왕평은 그 5천의 군사로 산기슭을 지켰다.
사마의는 가정에 도착한 후 장합에게 명해 왕평의 군사를 막게 하고는 대군으로 산을 포위해 샘물을 막았다. 그러자 물을 마실 수 없게 된 마속의 병사들 중에는 산을 내려와 위에 투항하는 자가 속출했다. 이때 사마의가 산에 불을 질렀다.
마속은 도리 없이 패잔병을 이끌고 산을 내려와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왕평은 병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마속을 구원할 수 없었다. 가정은 결국 위나라 군에게 점령되었다.
가정에서의 참패로 제갈량은 공격거점과 유리한 형세를 잃어 빼앗았던 농우의 세 군도 버려두고 한중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첫 번째의 기산 출격은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제갈량은 군기를 엄정하게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의 지위를 세 단계 격하할 것을 황제에게 아뢰고는 동시에 마속을 처형하도록 명했다.
그 후 형리가 처형당한 마속의 목을 제갈량에게 바쳤을 때, 그는 큰 소리로 울었다. 모든 장군 병사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읍참마속’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관한 사서의 기술은 불충분하고, 책마다 차이가 있다. 또한 민간전설이나 [삼국지연의]의 과장된 표현, 허구화 등으로 인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둘러싼 중요한 몇 가지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가정전투에서 위군의 총수는 사마의였는가?
[삼국지연의]에는 가정전투에서 사마의가 위군의 총수로 나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사의 <마속전>, <제갈량전>, <장합전>을 보면, 위군의 총사령관은 사마의가 아닌 장합니다.
<마속전>에 “위장 장합과 가정에서 싸우다.”라는 기록이 있고 <제갈량전>에는 “위의 명제가 서쪽의 장안을 진압하고, 장합에게 명해 제갈량을 막게 했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가정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고 쓰여 있다. 또 <장합전>에도 “제갈량이 마속으로 하여금 가정을 지키게 했다.”고 쓰여 있다.
이 싸움을 기록한 관련 자료에는 사마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러면 사마의는 맹달을 죽인 다음에 어디로 갔는가?
[진서] <선제기>를 보면, 사마의는 완성에서 배도겸행하여 신성으로 가 맹달을 죽인 후에 완성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촉군과 전투를 벌이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나관중은 제갈량의 이미지를 위해 장합에게 제갈량을 격퇴하는 역할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위군의 총수 역할을 사마의에게 주고 장합을 선봉으로 격하했을 것이다.
제갈량은 울며 마속을 베었는가?
[삼국지연의]에는 제갈량이 가정에서 패한 후 군기를 엄정하게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세 계급의 격하를 원하면서 마속의 처형을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이나 연극에서 ‘울며 마속을 베다’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면 제갈량은 정말로 울며 마속을 베었던 것인가?
가정을 잃은 후의 마속의 신상에 대한, 사서의 기록과 정사의 배송지 주에서 인용한 자료를 보면 적어도 세 가지 설이 나온다.
첫째, 정사의 <제갈량전>과 <왕평전>을 보면 제갈량은 한중으로 철수한 후에 마속을 죽여 여러 사람들에게 사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제갈량이 이미 마속과 장림, 이성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마속전>의 주에서 인용한 [배양기]에는 장완이 제갈량에게 “천하가 평정되지 않았는데 재주있는 선비를 죽이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둘째, <마량전>에 첨부된 <마속전>을 보면, 가정의 패전 후에 마속은 투옥되었고, 제갈량은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이 설은 마속이 옥중에서 병사했다는 것을 말한다.
셋째, <상랑전>에는 가정의 패전 후에 마속이 도망쳤다고 쓰여 있다. 상랑은 평소부터 마속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사정을 알면서도 잡아들이지 않았는데, 제갈량은 이것을 문책해 상량을 면직시키고 성도로 돌려보냈다. 여기에서는 마속이 군대 규칙에 의해 처형된 것이 아니라 도망쳤다고 한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설에서 말하는 ‘죽었다’는 것은 마속이 사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 설에서는 마속이 법에 복종하지 않고 죄를 두려워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설에서는 도망쳐서 붙잡힌 뒤에 옥중에서 죽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가정전투 후에 마속이 죄가 무서워 도망침으로써 법에 복종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다. 동시에 처형된 몇 명의 장군과 마찬가지로 마속은 제갈량에 의해 베어진 것이다.
마속을 기용했어야만 했는가?
마속은 어려서부터 병서를 숙독했고, 재주와 기량이 뛰어났으며, 군사 작전을 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생전의 유비는 마속을 보고 ‘이야기를 과정하며 착실함이 없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임종 전에 제갈량에게 “마속의 말에는 내용이 없으니 중한 임무는 맡기지 마시오.”라고 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시종 마속을 중용하여 이론을 거스르면서까지 북벌의 선봉으로 발탁했다.
이처럼 마속은 정말로 기용할 만한 인재였는가?
전통적인 견해는, 마속은 조괄(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 조사의 아들로, 아버지가 전하는 방법의 이론에만 밝을 뿐 실제 전투를 지휘할 수는 없었다) 같은 위험한 인물이었으므로, 제갈량이 여론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를 발탁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가정의 함락은 제갈량이 마속을 잘못 기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중에 스스로 세 단계의 격하를 원한 것도 이 점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갈량 스스로도 인물을 보는 눈이 없어서 인사가 적절하지 못했던 것과 삼군의 총수이면서도 군기를 엄정하게 다스리지 못했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내원은 [북경만보]에 실린 자신의 글에서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마속은 당시에 보기 드문 군사적 재주를 가졌었다. 비록 유비가 그를 평하면서 ‘논쟁에 내용이 없으니 중대한 임무를 맡기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다분히 지적인 특색이 있었다.
제갈량은 그의 재주와 기량을 높이 샀기 때문에 여론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를 기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남중 정벌에 있어서 ‘마음을 공략하는 것을 제일로 한다’는 계책은 마속의 진언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원의 글이 발표되자 즉각 제기된 반론에서는, ‘병서를 숙독하여 두루 병법을 안다’고 선전했던 것과 ‘죽을 곳에 선 뒤에야 살길이 생긴다’는 병법을 응용한 것 등의 여러 자료를 열거해 마속이 조괄 타입의 인물이었음을 증명했다.
내원도 즉시 반박했다. 그는 전통적인 견해에서 증거로 삼는 것은 소설에서 나온 허구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일 뿐이며,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가정 함락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가정전투의 패전 후에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음은 물론,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이 베어졌다. 제갈량 스스로도 울며 마속을 벤 것에 이어 세 계급 격하를 원했다. 이것으로 판단해 보면, 가정전투의 책임은 총지휘자인 제갈량과 선봉인 마속 두 사람 모두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누구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는가?
전통적 견해에서는 마속의 잘못이다. 제1차 북벌의 중요한 전투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마속의 책임이 가장 무거우며, 따라서 처형된 것은 자업자득인 셈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에 선 사람은 다음과 같은 논거로 마속을 비판하고 있다.
“마속은 평소에 호언장담을 잘했고 주위에서도 그를 떠받들었던 조괄 타입의 위험한 인물이었다. 전투에 임해서는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고, 부장 왕평의 계속된 간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또한 ‘죽을 곳에 선 뒤에야 살 길이 생긴다”는 비현실적인 병법을 억지로 응용, 유리한 지형을 포기하고 산 위에 진을 쳐서 적을 가볍게 여겼다. 그리고 스스로 ‘병서를 숙독해 두루 병법을 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것은 마속이 그다지 변변치 못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초에 이것을 부정하는 견해가 나왔다. 그것은 가정 함락의 책임이 제갈량에게 있다는 것인데, 그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비의 훈계를 듣지 않고 마속을 중용했다.
둘째, 전쟁에 임해 여론을 거스르면서 마속을 발탁해 가정전투의 책임을 떠맡겼다.
셋째, 마속에게 전투를 전부 맡긴 채 병력을 투입해 마속을 응원하려 하지 않았다. 제걀량은 기산에 주둔하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마속의 군사는 고립되었다.
넷째, 패전 후에도 마속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마속을 죽임으로써 모든 이에게 사죄했다. 이 점은 제갈량 자신도 인정하는 부분으로 유선에게 올린 상주문에서 ‘인물을 보는 눈이 없어 인사가 적절하지 못했던 것과 삼군의 총수이면서도 군기를 엄정히 다스리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갈량도 책임을 벗을 수 없다.”
최근에는 가정이 함락된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원인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첫째, 농우의 세 군이 함락된 후에 위의 명제는 장안에 있으면서 스스로 전투를 지휘하고, 조진은 조운에 대항하여 미성을 구하게 하고, 장합에게는 5만의 군사를 주어 가정을 빼앗았다. 장합이 이끄는 5만의 군사는 제갈량의 주력보다 적은 숫자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장합에 대항할 임무를 마속에게 내렸다. 3만 대 5만이라는 숫자로 보면 분명히 위가 유리했다.
둘째, 제갈량은 기산에 주둔하면서 관망했을 뿐, 병력을 집중하여 마속을 응원하지 않았다.
셋째, 마속이 가정을 점거한 후에, 우선 고지에 진을 친 것은 병법상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왕평을 산기슭에 두고 협공태세를 취한 것도 책임을 물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마속에게는 임기응변이 부족했고 원군도 없었다. 그가 위군에게 포위당해 패배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므로 책임을 한 쪽에만 지울 수는 없으며, 동시에 벌을 주어야 했다.”
왕평은 어떤 처분을 받았는가?
가정의 전투에서 마속은 주장이고, 왕평은 부장이었다. 패전의 책임은 왕평에게도 있었다
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울며 마속을 베기 전에 우선 왕평을 진영으로 불러 어찌하여 마속을 충고하지 않았는가를 따졌다. 왕평이 자신은 누차 충고했지만 마속이 격노하여 따르지 않았다고 하자, 제갈량은 그에게 호통을 치면서 물러가라고 했다.
후세의 연극에서는 이것을 더욱 과장해, 제갈량이 마속을 베기 전에 왕평에게 곤장 40대의 벌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가정전투 후 왕평은 정말로 이러한 처분을 받았는가?
사서의 기록을 보면, 제갈량은 한중에서 패전의 책임을 마속, 장휴, 이성 등을 처형하는 것으로 끝내고 있다. 왕평에게 책임을 물었다거나, 호통을 치며 물러나라고 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패인 분석 후 왕평을 참군에 임명해 다섯 부대의 군사를 통솔하게 했고, 동시에 부대장을 겸임시켰다. 더불어 토구장군에 임명하고 정후에 봉했다. 즉, 왕평은 가정전투 후 처벌을 받기는커녕 반대로 승진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59 사마의는 제갈량의 공성지계에 빠진 적이 없다
사마의는 위, 진 시대의 유명한 군략가이자 정치가이다.
[삼국지연의]는 유비를 옹호하며 조조를 반대할 목적으로, 병법에 밝고 모략에 뛰어난 인물을 후반부에 종종 등장시키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이 제갈량의 공성지계 이야기로 [삼국지연의] 제95회에 나온다.
제갈량은 가정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대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한편, 스스로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서성(지금의 감숙성 천수현과 예현 사이)으로 가서 식량 운반에 힘썼다.
그러나 갑자기 사마의의 15만 대군이 서성으로 몰려온다는 긴급한 보고를 받았다.
마침 제갈량의 주변에는 문관뿐이고 대장은 한 명도 없었다. 또한 인솔해 온 5천의 병사도 반은 식량을 운반하러 갔고, 성내의 병력은 2천5백 명뿐이었다.
제갈량은 깃발과 북 등을 치우게 하고 성문도 열어두게 했다. 또 각 성문에 2백8명의 병사를 남기되 평민의 옷차림을 하게 하고, 길을 깨끗이 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제갈량 자신은 도포를 걸치고 두건을 쓰더니, 망루의 난간 앞에 편안히 앉아 향을 피우고는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옆에는 두 명의 동자가 각각 보검과 불진을 들고 서 있었다.
성 밑에 몰려든 위군은 이 모습을 보고 아무도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평소 신중하여 모험을 한 적이 없었다. 복병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마의는 이렇게 말하고 바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렇게 해서 제갈량은 간신히 위급한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삼국지연의]가 그리는 공성지계에 대해 삼국시대와 관련된 많은 사서는 아무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오직 배송지 주에서, 동진의 왕은이 [촉기]에 싣고 있는 곽충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제갈량은 양평에 주둔하면서 위연에게 모든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도록 명하고, 스스로는 1만의 군사를 가지고 양평성을 지켰다.
사마의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왔지만, 도중에 위연의 군사와 길이 엇갈렸다. 그는 앙평성의 병력이 적은 것을 알고 바로 양평성으로 돌진했다.
제갈량은 위군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지만, 원군을 부르기에는 이미 늦었음을 알고, 침착하게 군대의 깃발과 북을 감추고 성문을 열어두도록 명령했다.
사마의는 진작부터 제갈량이 신중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정경을 보고 틀림없이 복병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서둘러 군사를 후퇴시켰다.
나중에 제갈량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사마의는 내가 신중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복병이 있다고 생각하여 산으로 도망친 것이다.”
사마의는 후일 그것을 알고 땅을 치며 분해했다.
이처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공성지계의 이야기는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근거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배송지는 [촉기]의 기사를 인용했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믿지 않고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비판했기 때문인데, 그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양평은 한중군에 속한다. 제갈량이 양평에 주둔한 것은 사마의가 아직 형주 도독으로 완성에 주둔하던 때의 일로, 사마의가 처음으로 한중에서 제갈량과 일전을 벌인 것은 조진이 죽은 후이다.
둘째, 사마의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있었고, 제갈량의 군사가 많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설령 복병을 의심했다 해도, 준비를 철저히 한 후 신중하게 공격하면 충분히 빼앗을 수 있었다. 후퇴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사마의가 제갈량의 공성지계에 빠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공성지계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배송지 주는 <조운별전>을 인용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비와 조조가 한중에서 싸웠을 때, 유비는 조조 군이 북산의 기슭에 군량미를 쌓아둔 것을 알고 황충에게 습격하도록 했다. 후방에는 조운이 군사를 거느리고 황충의 작전에 호응할 계획이었지만 황충의 부대가 약속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조운이 병사 10여명을 이끌고 상태를 보러갔더니, 조조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조운은 싸우면서 후퇴해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때 부장 장익이 진영의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조운은 반대로 진영 문을 열고 군기와 군고를 치우게 했다. 조조의 군사는 그 모습을 보고 복병이 있지는 않을까 의심하여 서둘러 후퇴했다.
조운은 즉시 북을 울렸다. 북소리가 하늘을 흔들었다. 그리고 당황한 조조 군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퍼부었다. 조조군은 너무 놀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도망치다가 강물에 빠져죽는 자가 속출했다.
정사 <문빙전>의 배송지 주에도 [위략]을 인용해 이렇게 쓰고 있다.
“손권이 5만 대군으로 석양을 방어하는 위나라 장수 문빙을 포위했을 때 마침 큰 비가 내렸다. 문빙은 젖은 성채를 수리할 틈도 없었다. 문빙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내의 사람에게 동요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자신도 집으로 돌아가 침소에 들었다.
손권은 이를 보고 틀림없이 무슨 계략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포위를 풀고 후퇴해 버렸다.”
나관중은 이러한 조운과 문빙의 공성지계를 자료로 삼아 제갈량의 공성지계를 만들어 감쪽같이 사마의가 당한 것처럼 만들었다. 그 이유는 제갈량의 특출난 지혜와 큰 용기를 사마의의 소심한 모습과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공성지계에 당한 것은 촉군이 가정전투에서 패해 후퇴할 때의 일이었다. 나관중의 의도는 가정전투에서의 패배를 제갈량 측에 서서 비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60 제갈량은 진창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위나라 장수 조휴는 228년 겨울 석정에서 육손에게 대패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북상해 산관(현재의 섬서성 보계의 서남쪽)을 거쳐 진창을 포위했다.
진창은 지세가 험한 요충지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워 옛부터 싸움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다.
제갈량의 이 진창 습격이 [삼국지연의] 제98회에 나온다.
진창을 지키는 위나라 장수 학소가 중병에 걸린 것을 안 제갈량은 위연과 강유에게 3일 이내에 진창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라고 명령하는 한편 관흥과 장포에게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없이 행군해 진창을 급습하도록 했다.
학소는 즉시 이에 대비하도록 명했지만, 촉군의 첩자가 성 안으로 몰래 들어가 불을 질렀기 때문에 성 안은 대혼란에 빠졌고, 학소는 그 충격으로 급사했다.
관흥과 장포는 그 기회를 타고 공격해 위연, 강유 군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진창이 촉군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사의 <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지만, 조진이 이것을 막아냈다. 제갈량은 군량미가 다해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제갈량은 진창을 공격했지만, 위의 조진이 사전에 학소를 수장으로 보냈기 때문에, 몇 번의 공격에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전투는 20여 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게 촉군의 군량미는 점차 바닥을 드러냈고, 게다가 위나라의 원군까지 들이닥쳤기 때문에 제갈량은 어쩔 수 없이 한중으로 후퇴했던 것이다.
<명제기>에 인용되어 있는 [위략]에 의하면, 위나라 명제는 학소에게 진창을 사수한 공로로 열후의 작위를 주었다고 한다. 학소는 병사했지만 그것은 진창 전투 이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는 제갈량이 관흥과 장포를 이끌고 진창을 빼앗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진수의 정사에는 관우의 아들 관흥이 유비가 서천을 빼앗은 몇 년 후에 죽었다는 것과 장비의 아들 장포가 요절했다는 것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관흥과 장포가 진창의 전투에 참가했을 리가 없다.
요컨대 제갈량의 진창 습격은 나관중이 제갈량의 진창 포위 사건이나, 학소의 병사 등 세세한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허구이다.
[삼국지연의]는 이 대목에서 제갈량의 입을 빌어 ‘이것이 바로 병법에서 말하는 출기불의(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와), 공가불비(방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한다)라는 것이다’라고 과시하고 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물론 제갈량의 비범한 재주를 내세우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61 조진과 제갈량은 싸운 적이 없다
조진(?-231)의 자는 자단이며 패국의 초현 출신이다. 조조의 친척으로 위문제 조비 때에 진서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위문제의 유언에 의해 진군, 사마의와 함께 대신으로서 위명제 조예를 보좌해 대장군에 오르고 소릉후에 봉해졌다.
조진은 제갈량의 제1차 북벌 때에 독령제군으로 파견되어, 장합에게 가정의 마속을 공격하게 하고 학소에게 진창을 지키게 했다.
[삼국지연의] 제100회에는 바로 이 조진이 죽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4차 북벌에서 제갈량은 위군도독 조진의 진영을 공격했다.
‘촉군의 공격은 있을 수 없다’며 사마의와 내기를 했던 조진은 그 때문에 너무 창피한 나머지 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조진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안 제갈량은 즉시 편지를 써서 투항한 위군 병사를 통해 조진에게 전하게 했다. 그 편지에는 조진을 배우지 못한 후배라고 칭하며, ‘무슨 낯으로 고향의 노부를 대하며, 무슨 뱃심으로 고향집의 대청에 오르랴”하는 야유가 적혀 있었다.
조진은 이것을 읽자마자 분함을 못이겨 그날 밤 진중에서 죽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229년 봄에 제갈량은 무도, 음평 두 군을 공격하고, 다음해 7월에 제4차 북벌 준비에 임했다.
위나라는 불리한 전쟁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세 갈래로 군사를 보내 사마의, 조진 등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고는 한중으로 몰려갔다.
이 작전은 대사마 조진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촉군에게 여러 차례 침공을 당한 이상,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고 판단한 그는 위명제에게 여러 방면에서 병행하는 작전을 제안한 것이었다.
즉, 사마의는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동쪽으로부터 한중을 공격하고, 장합 등은 야곡에서 한중을 향하고, 조진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북쪽의 자오곡으로부터 곧장 한중으로 쳐들어간다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대승을 거두어 제갈량을 혼내 줄 수 있다고 조진은 확신했다.
조진은 계획대로 8월에 장안을 출발해서 자오곡으로 들어갔으나, 그곳에서 30여 일 동안이나 퍼붓는 비를 만나 한 달이 넘도록 계곡에서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또한, 제갈량은 성고, 적판(현재의 섬서성 양현) 일대에 주둔하며 삼엄한 경계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위명제가 화흠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조진 등에게 후퇴를 명했기에 조진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조건이 촉 정벌에 실패한 다음해, 즉 촉의 건흥 9년(231) 2월에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기산으로 진출해 제4차 북벌을 시작했다.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했을 때에, 위명제는 대사마 조진의 병이 중하다는 것을 알고 급히 대장군 사마의를 형주에서 장안으로 불렀다. 그리고 장합, 비요, 곽희 등의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에게 대항하도록 명했다.
그 후 머지않아 제갈량은 기산 공격에 성공했고 조진은 낙양에서 병사했다. 그러므로 조진이 죽은 것은 제갈량의 제4차 북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제갈량이 진영을 습격하고 서신을 보냈으며, 그 서신을 본 조진이 분함을 못이기고 죽고 말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진은 확실히 촉을 공격했지만 이것은 제갈량의 제4차 북벌 이전의 일이다. 게다가 큰 비가 계속되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제갈량과 싸운 적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역사상 실존 인물인 조진은 병으로 죽은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조진이 제갈량의 서신에 의해 죽었다고 한 것은 나관중이 제갈량을 우상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다.
62 장합을 죽게 만든 것은 사마의이다
위나라 대장 장합은 역사상으로도, [삼국지연의]에서도 용맹한 대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장합(?-231)의 자는 준예이며 하간국 막현(현재의 하북성 입구) 사람으로, 원래 원소의 부장이었지만 관도전투 후에 조조에게 투항했고, 그 후 자주 전공을 올려 좌장군에 임명되었다.
또한 제갈량의 북벌에서는 몇 번이나 촉군과 싸웠고 가정에서는 제갈량의 부장 마속을 크게 이겼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합의 인간상은 나관중에 의해 몇 번이나 고쳐졌다. 가정에서 마속을 해치운 공적은 사마의의 공적으로 변했고, 그의 마지막도 아주 비참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연의] 제10회에 장합의 죽음이 그려져 있다.
건흥 9년(231) 봄에 제갈량은 다시 한 번 북벌에 나서 사마의를 연달아 격파했다. 하지만 군량미를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호이엄은 제갈량에게 급히 오나라가 촉을 공격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제갈량은 양의, 마충에게 활을 다루는 사수 만 명을 이끌고 검각의 목문도에서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지휘하여 차례로 후퇴시키며 위연과 관흥에게 후방을 맡겼다.
위의 선봉 장합은 사마의의 충고를 듣지 않고 추격에 나섰다. 위연과 관흥이 연달아 나타나서는 장합의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장합을 당해 낼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도망쳤고, 방심한 장합은 그대로 목문도의 입구까지 추격했다.
그때 위연이 되돌아와 공격하고 다시 패한 척 도망치자, 장합은 기세등등하게 말을 달려 목문도의 중간까지 추격했다. 그러자 돌연 포성을 울리며 촉군이 나타나 나무와 바위로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촉군은 양쪽에서 비오듯 화살을 쏘아 장합과 그의 부하들을 전멸시켰다.
나중에 제갈량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몰이 사냥에서는 말(사마의)을 쏘려고 했는데, 잘못하여 노루(장합)를 쏘아 죽였다.”
그런데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건흥 9년 3월에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기산으로 출병했고, 위는 사마의, 장합 등이 군사를 이끌고 이에 대항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제갈량은 기산을 공략한 후에 왕평에게 수비를 맡기고, 몸소 주력부대를 이끌며 연달아 위군을 격파했는데, 사마의는 더 이상 싸워봤자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고, 험한 지형에 의지해 수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부하에게 ‘촉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한다’는 조소를 당하고 나서 공격에 나섰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 마침 촉군은 군량미를 조달할 수 없어 수송을 담당한 이엄이 제갈량을 교묘히 속였고, 이 말을 들은 제갈량은 군사를 후퇴시킬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위군에서는 장합이 후퇴하는 제갈량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장합은 청봉까지 쫓아와 제갈량과 일전을 벌이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군량미가 떨어져 후퇴하게 된 촉군은 또 한 번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제갈량은 이엄의 관직을 박탈하고 서민으로 강등했다.
위의 사실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장합은 확실히 제갈량에게 사살되었지만, 그것은 결코 제갈량의 계략에 의한 것이 아니며, 더구나 사마의를 죽이려다 잘못해 장합을 쏘아 죽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장합이 제갈량을 추격한 것은 사마의가 추격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며, 결코 장합이 사마의의 충고를 무시하고 앞질러 가서 복병에게 목숨을 잃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오히려 이것과 반대로, 장합은 추격에 반대했다. ‘성을 포위하면 반드시 한쪽을 열어라. 도망치는 적은 쫓지 말라’는 병법을 준수하여 사마의에게 충고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의는 장합의 의견을 무시하고 추격하게 하여 결국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63 상방곡에서의 불공격은 없었다
제갈량은 화공을 특기로 삼아 삼고초려 이후 연달아 세 번이나 화공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보면, 박망의 공격은 유비가 한 것으로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의 일이었다. 또 신야의 화공은 완전한 허구이고, 적벽의 화공은 황개가 생각해 내어 주유의 지휘하에 실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관중은 북벌과정에서도 제갈량이 상방곡에서 사마의를 불로 공격했다고 묘사했다. 그렇다면 이곳의 화공은 진실일까?
[삼국지연의] 제103회에서 제갈량은 마지막으로 북벌에 나서 위빈에서 사마의와 대결했다.
사마의가 수비를 견고히 하고 나오지 않자 제갈량은 은밀히 마대에게 명해 상방곡에 깊은 도량을 판 후 불타기 쉬운 마른 장작을 쌓았다. 그리고 주위의 산에는 띳집을 짓고 지뢰를 묻게 했다.
그 후 고상으로 하여금 목우류마를 급히 몰게 해서 군량미를 수송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을 본 사마의는 제갈량의 목우류마를 약탈하고, 수송대의 병사 수십 명을 붙잡아 문초했다.
그 결과 제갈량이 상방곡에서 군량미를 쌓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사마의는 여러 장수들에게 기산에 있는 촉의 본영을 공격하게 하여 촉군의 주력을 견제하는 한편, 몸소 두 아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상방곡을 습격해 적의 군량미를 태워 싸움을 유리하게 가져가려 했다.
사마의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는 제갈량은 위연으로 하여금 사마의를 상방곡으로 유인하게 했다. 그리고 사마의가 상방곡에 들어오자마자 계곡의 입구를 막고 정상에서 횃불을 던지며, 불화살을 쏘아대고 지뢰를 폭파시켜 온 계곡이 순식간에 불구덩이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죽음에 직면하게 된 사마의가 말에서 내려 아들들을 껴안고 울자 갑자기 강풍이 불며 분지를 뒤엎는 듯한 큰 비가 내려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이 꺼져 버렸다. 사마의는 그 기회에 군사를 지휘하며 도망쳤는데, 마침 장호와 악침의 부대가 지원을 와 마대의 군사가 열세에 놓였기 때문에 사마의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삼국지연의]에는 이 이야기가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만일 천우신조가 없었다면, 제갈량은 사마의 부자 세 사람을 상방곡에서 불에 태워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야기일 뿐이다.
정사의 <제갈량전>이나 관련 자료에 의하면 건흥 12년(234) 2월에 제갈량은 3년 가까운 준비를 끝낸 후 10만 대군을 이끌고 출격해 마지막 북벌을 개시했다. 북벌군은 무공(현재의 섬서성 무공)을 점거하고, 위수 남안의 오장원(현재의 섬서성 미현의 서남쪽)에 본영을 두었다.
위의 사마의도 대군을 이끌고 강을 등진 채 진지를 구축하여 쌍방은 위수의 남쪽에서 대치했다. 사마의는 촉군이 원정으로 지쳤고, 군량미 수송에 고심하고 있다는 두 가지 약점에 포착해 지구전으로 대응했다.
한편 제갈량은 단기간에 걸전을 벌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 전투는 지구전이 될 것이라 미리 생각하고,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여 장기전에 대비했다. 양군의 대치는 백여 일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시종 사마의와 싸울 기회를 갖지 못했고, 머지않아 제갈량은 진중에서 죽었다.
이것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에서 사마의와 위수 남안에서 서로 대치했지만, 사마의는 그 전에 있었던 대 제갈량전의 교훈을 살려 수비를 강화하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병사할 때까지 쌍방이 싸운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제갈량이 상방곡에서 사마의를 화공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둘째, 사마의는 제갈량과의 지구전을 계획했기 때문에 두 아들을 신변에 두었을 리가 없다. 사서에도 사마의의 두 아들이 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셋째, 현재의 섬서성 오장원의 북쪽에 위치한 고당진에는 확실히 입구가 좁고 내부가 넓은 호로곡이라는 표주박형의 계곡이 있다. 그러나 후한과 삼국시대에는 이곳에 상방곡이라는 지명을 가진 계곡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방곡에서 사마의가 포위되었다는 이야기는 제갈량을 우상화하기 위해 꾸민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64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은 일은 없다
[삼국지연의] 제104회를 보면 제갈량은 한중의 오장원에서 죽기 전에 교묘하게 후퇴를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이 죽은 후에 촉군의 후퇴를 안 위군 도독 사마의는 군사를 이끌고 오장원으로 쳐들어갔다. 사마의는 스스로 선두에 서서 산기슭까지 쫓아가다가 촉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계속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그때 산 그늘에서 포성이 울려퍼지며 함성이 일어났고, 갑자기 촉군이 방향을 바꾸어 쫓아왔다.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중군의 큰 깃발에는 ‘한승상무향후제갈량’이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사마의는 갑자기 얼굴색이 변해 적을 바라보았다. 그때 수십 명의 적장들이 한 대의 사륜거를 둘러싸고 나타났는데, 사륜거에는 학창흑대의 복장을 한 제갈량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사마의는 놀라며 외쳤다.
“제갈량이 아직 살아 있었던가? 계략에 빠졌구나!”
그는 서둘러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 뒤로 강유의 큰 소리가 들렸다.
“적장은 도망치지 마라! 이미 우리 승상의 계략에 빠졌다!”
위군은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앞다투어 도망쳤다. 도망치다 서로 부딪혀 죽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사마의는 50리 남짓 도망친 후에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내 목이 아직 붙어 있는가?”
“도독! 진정하십시오! 촉병은 멀리 갔습니다.”
사마의는 이 말을 듣고 겨우 안정을 찾았다.
이틀 후에 그 지방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제, 수레에 있던 제갈량은 나무로 만든 상이었습니다.”
사마의는 한탄하며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계략을 걸 수가 있겠지만, 죽은 사람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촉에는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역사상 정말로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
정사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제갈량의 사후 대자인 강유와 양의는 제갈량의 말대로 죽음을 숨기고는 전군을 침착하게 후퇴시켰다. 사마의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자, 양의는 군사를 되돌려 위군에게 공격을 가하며 반격하는 척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함정에 걸리 것을 두려워하여 그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촉군은 침착하게 후퇴를 끝내고 야곡에 들어가 제갈량의 죽음을 공표했다.”
더욱이 배송지 주에는 [한진춘추]를 인용해, “사마의가 제갈량이 죽어 촉군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그 지방 사람에게서 입수했다”고 쓰여 있다.
위과 같은 사실에 근거하면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제갈량이 죽어 촉군이 후퇴했을 때에 사마의는 추격을 하기는 했다. 그리고 도중에 군사를 수습해 물러났지만, 그것은 사마의가 행군에 있어서 세심하고 신중했기 때문이며, 나무로 깎은 제걀량의 상에 놀라서는 아니었다.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속담은 제갈량에 대한 경의와 동격에서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다.
둘째, [삼국지연의]에서 사소한 역사 사실에 근거하여 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제갈량을 우상화하고, 사마의를 악역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것은 작자가 제갈량을 너무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과장함으로써 반대로 사람들이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65 촉이 기산을 공격한 것은 두 번뿐이었다
촉한의 건흥 5년(227) 봄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한중에서 출격해 위나라와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북벌은 건흥 12년(234) 8월 제갈량이 오장원의 진중에서 병사하기까지 7년의 긴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사이에 제갈량은 모든 기회를 찾아 출격했으며, 실패해도 그 의지를 꺾지 않았는데, 그 출격은 모두 여섯 번에 이른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91회부터 제104회까지 많은 지면과 장면을 이용해 정열에 넘치는 필치고 이 북벌을 묘사하고 있으며, 너무나 재미있게 묘사했기 때문에 다 읽은 후에는 누구나가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기산은 기산보라고도 부르며, 현재의 감숙성 예현 동쪽 30킬로미터 지점의 한수 북안에 있다. 물가 평원 위에 솟아 있어서 표고는 높지 않지만 아주 험준하며, 지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산에서 동으로 가면 노성과 천수관으로 진출할 수 있고, 서로 가면 농우를 돌아 중원을 다툴 수 있다. 또 남으로 가면 서화현으로 물러나 한중으로 철수할 수 있다.
기산만 빼앗으면 농서를 진압하여 북방의 강족과 손잡고 바로 장안으로 진출할 수가 있다.
그 중요성을 통감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세 차례에 걸쳐 기산을 공격해 빼앗으려 했던 것이다.
그럼 제갈량이 만년의 7,8년 사이에 여섯 번 기산으로 출병했다는 것은 정말일까? 정사와 그 외의 사서에 나타나 있는 제갈량의 북벌 상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건흥 6년(228) 봄
출병하기 전에 위연이 자오곡의 계책을 진언했지만, 제갈량은 이것을 위험한 계책이라며 채택하지 않고 군사를 둘로 나누었다. 즉, 조운과 등지가 병사들을 이끌고 미성을 공격하는 척하고, 제갈량은 주력병을 이끌고 서북의 기산으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농우의 3군(남안, 천수, 안정)은 투항하고, 관중은 부들부들 떨었다.
위의 명제는 서둘러 장안에서 진두지휘를 하여,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방어를 맡게 했다. 즉, 조진을 보내 조운과 제갈량의 공세를 막게 하는 한편, 가정에서 마속을 격파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 때문에 제갈량은 한중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건흥 6년(228) 겨울
이 때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산관에서 출격해 진령을 넘어 진창을 포위했지만, 조진이 사전에 학소를 파견해 수비를 견고히 했기 때문에 몇 번의 공격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촉군은 군량미 부족으로 한중으로 물러났다.
세 번째, 건흥 7년(229) 봄
이때는 무도, 음평을 공격했지만 위의 장수 장합에게 앞길이 막혔다. 제갈량은 두 개의 군을 공격해 함락시킨 후 바로 한중으로 군사를 되돌렸다.
네 번째, 건흥 8년(230) 가울
이때 촉군은 적극적으로 출격하지는 않았는데, 위군이 선수를 쳐 사마의, 장합, 조진이 세 방면에서 한중으로 공격해 왔다. 제갈량은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이엄에게 명해 공격을 가했고, 나중에 연일 큰 비가 내려 위군은 후퇴했다.
다섯 번째, 건흥(321) 3월
이때는 기습작전으로 기산을 포위했다. 위군에서는 사마의와 장합이 방어에 임했다. 제갈량은 기산을 공격해 빼앗은 후 왕평에게 수비를 맡기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위군을 맞아 싸웠다.
사마의는 요새 안에서 굳데 버티며 싸우려 하지 않았으나 부하에게 ‘촉을 두려워하는 것이 호랑이와 같다’는 비난을 받자 화가 나서 공세로 전환했다가 결국 대패를 당했다.
그 후에 촉군은 이엄이 후퇴하는 거짓 칙령을 전달한 것과 군량미 조달의 어려움으로 인해 한중으로 물러났다.
여섯 번째, 건흥 12년(234) 봄
제갈량은 3년에 걸친 휴식과 준비 후에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다.
촉군은 야곡에서 돌진해 무공을 점거, 위수 남안의 오장원에 포진했다. 제갈량은 몇 번이나 싸움을 걸고, 사마의를 욕보이기까지 했지만 위군과 싸울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8월에 제갈량은 오랜 기간의 피로가 쌓여 병으로 쓰러져 죽었고, 제갈량이 죽은 후 대장 강유와 양의는 제갈량의 생전의 지시에 따라 군사를 철수했다.
위군은 추격을 했지만 사마의가 제갈량의 함정에 빠질 것을 두려워해 깊이 쫓아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제갈량의 북벌은 끝났다.
이상의 사료를 보면 ‘육출기산’ 또는 ‘오출기산’은 제갈량이 위에 대해 여섯 번 또는 다섯 번에 걸쳐 행한 북벌을 가리키는 것이지 기산으로 여섯 번 출격한 사실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나라와 싸운 여섯 번의 전쟁 중에 다섯 번은 공격이고 한 번은 방어(230년)였다. 그리고 다섯 번의 공격 중에 기산에 출격한 것은 두 번(첫번째와 다섯 번째)뿐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제갈량은 북벌을 여섯 번 했지만, 기산에 출병한 것은 두 번뿐인 셈이다.
역사의 진실은 ‘이출기산’임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간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갈량의 북벌을 ‘육출기산’으로 믿어 왔다.
지금 기산에는 오래된 성의 흔적은 없다. 그러나 지금도 제갈량이 기산에 출격했을 때의 유적이 수없이 남아 있어 사람들의 동정을 자아내고 있다.
66 위연은 억울하게 죽었다
나관중이 그리는 위연의 얼굴은 잘 익은 대추와 같고, 눈은 밝은 별과 같은 인물이나 후두부에 반골이 돌출되어 있어 반역자의 관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권의 입을 빌어 위연을 ‘용기는 충분하지만 심근이 바르지 않다. 공명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평했다. 나관중은 이 이미지를 끝까지 관철시키려 함으로서 마지막에는 위연의 반역을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삼국지연의] 제104회에서 제갈량은 임종에 즈음하여, 양의를 불러 비단 주머니를 주며 말했다.
“내가 죽으면 위연은 반드시 반역할 것이다. 그때 전장에서 이 주머니를 열어보아라. 스스로 위연을 베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
제갈량이 죽은 후 위연은 진중에서 자다가 머리에 돌연 뿔 두 개가 나는 꿈을 꾸었는데, 행군사마 조직은 길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이것을 상서인 비의에게 알렸다.
비의는 우연의 진중을 방문해 제갈량이 죽은 것과 유언에 따라 후미의 군사를 맡으라는 명령을 전하자 위연이 물었다.
“승상이 하던 일은 누가 맡게 되는 것이오?”
“승상께서 하시던 일은 모두 양의에게 맡기셨고, 군사에 관한 일은 모두 강유에게 맡기소.”
비의의 대답에 위연은 이렇게 큰소리를 쳤다.
“승상은 죽었으나 내가 아직 살아 있소. 양의가 어떻게 그런 큰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이오? 양의에게 그저 관을 지키며 서천으로 돌아가 장례나 잘 치르라고 하시오. 나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사마의를 공격해 반드시 물리쳐 보이겠소. 죽은 승상의 말 때문에 국가의 대사를 폐할 수는 없소. 나는 양의 따위의 후미를 지켜줄 생각은 없소.”
비의가 양의에게 우연의 일을 전하자, 양의는 승상이 남긴 말처럼 역시 위연은 두 마음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다시 강유에게 후미를 맡도록 명했다.
이것을 안 위연은 격노했다.
“썩어빠진 유학작가 잘도 나를 속였구나! 내 반드시 그놈을 죽이고 말겠다.”
이어서 [삼국지연의] 제105회에서 위연은 절벽에 놓인 다리에서 양의의 앞길을 막았다. 양의는 제갈량이 남긴 금낭의 묘계를 숨기고 한중으로 물러나서 위연을 맞이했다. 양의는 하평을 시켜 위연과 싸우게 했지만, 위연과 마대는 하평을 물리치고 남정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양의와 강유가 치고 나왔다.
양의가 위연을 향해 말했다.
“승상께서는 생전에 네가 언젠가 반역할 것이라고 하시며, 내게 그걸 준비케 하시더니 이제 정말로 그렇게 되었구나. 말 위에서 ‘누가 감히 나를 죽일 것인가?’라고 세 번 외쳐 보아가. 그럴 용기가 있다면 진짜 대장부다. 그러면 나는 한중의 성자를 네게 바치겠다.”
위연은 칼을 든 채 큰소리로 외쳤다.
“누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그 소리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등 뒤에서 한 사람이 나서며 그 말을 받았다.
“내가 죽여주겠다.”
그는 말뿐만 아니라 한칼에 위연을 베어 버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바라보니 그 사람은 바로 마대였다. 이것은 모두 제갈량이 죽기 전에 준비해 두었던 것이었다.
이상이 [삼국지연의] 나와 있는 위연이다. 그러면 역사상의 위연은 어떠한가? 정사 등의 사료를 보면, 그는 3군의 우두머리인 촉의 맹장으로, 촉에 충성을 다하며 많은 전공을 올린 인물이다.
한중을 공략한 후에 유비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중 수비의 대임을 위연에게 주었다. 제갈량의 제1차 북벌에서는 자오곡의 기습작전을 헌상했다. 그의 계책은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시종 분전하며 많은 전공을 올렸다.
위연의 죽음에 대해 기술한 정사의 <위연전>을 보면, 양의가 마대를 보내 위연을 쫓고, 결국 붙잡아 죽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게 된 구체적 이유가 [삼국지연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역모 때문이었을까?
정사의 <후주전>과 <위연전>의 주에서 인용한 [위략]에 의하면, 양의와 위연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위연이 제갈량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되자, 양의는 자신이 살해당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위연은 군사를 데리고 북(위나라)으로 투항할 생각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린 후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윈래 북으로 투항할 의사가 없었는데도 쫓기어 살해당한 것이다.
그래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위연은 위에 투항하지 않고 남으로 돌아가 양의를 공격했지만, 실은 역모 따위는 없었다’고 쓰여 있다. 위연에게는 원래 촉에 반역할 의지는 없었고, 그가 죽은 것은 오로지 양의 때문이었던 것이다.
또 [삼국지연의]에서 억센 기질의 소유자로 묘사되었고, 반역의 악명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현재의 많은 학자는 위연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므로 명예를 회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담량소와 장대가의 공동 저작인 [삼국인물평전]의 <위연평전>과 성도 무후사 박물관에서 펴낸 [무후사대관]의 ‘억울하게 죽은 대장 위연’ 등에서도 모두 위연의 명예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위연을, “촉에 있어서 유일한 ‘일기당천’의 장군이며 얻기 힘든 인재였다”고 말한다. 또 그의 촉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고, 머리에 반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소설가의 터무니없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자오곡의 계책은 북벌을 성공시켰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전략이었고, 위연이 거병한 것은 양의 때문이었지 반역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아무튼 오랫동안 위연이 억울한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정사의<양의전>에 의하면, 양의는 승상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받은데다 반역자 위연을 죽였기 때문에 스스로 공적이 아주 크고, 따라서 제갈량을 대신해 정무를 맡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외로 승상의 직위는 장완이 대신하게 되었다. 장완이 실권을 잡게 되자, 양의의 직권은 크게 줄어들었다. 양의는 중군사에 임명되었지만, 아무런 직무도 없어 빈둥빈둥 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양의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비의가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투덜댔다.
“먼저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만일 군사를 이끌고 위에 항복했다면 이렇게 영락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이제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비의가 깜짝 놀라 이것을 유선에게 밀고했다. 양의는 옥에 갇혔고 얼마 후에 자살했다.
양의는 위연과 대립한 한쪽의 주역이었다. 그러므로 위의 기술에서 적어도 두 가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위연과 양의의 다툼은 평소의 모순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위연에게는 역모의 생각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양의야말로 생각이 얕았다.
둘째, 후주 유선과 승상 장완이 양의의 직권을 줄이고 옥에 가둔 것은, 촉한 당국이 위연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을 의미한다. 양의를 처단한 것은 아마도 조정이 위연의 명예를 회복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생각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는데, 최근 이 문제에 관해 [사천문물]에 도유지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현재의 한중 석마파 유적을 고증함으로써, 위연이 죽은 얼마 후에 장완과 비의에 의해 이미 억울함이 풀렸던 것과 역사상의 위연이 언제까지라도 억울한 누명을 쓴 채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도유지는 현재의 한중 북문 밖의 석마파 유적이야말로 위연의 억울함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역사적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석마의 모양과 풍격, 조작기법은 후한 후기의 석각과 일치한다. 석마는 현재 한중시 박물관에서 보존되어 있다.
또 도유지의 논문은 청의 건륭 연간에 왕행검이 펴낸 [남정현지] 중의 ‘석마유적’이라는 대목을 인용했다.
“위연은 원래 노장으로 전공이 있다. 말년에 함부로 날뛰어 자신도 죽고 가족도 몰살되었지만, 장완은 그 본의를 헤아려 양의를 죽이고자 했을 뿐, 위연이 반역을 도모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당시에 과거의 공로를 생각하여, 예를 갖춘 장례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석마의 유적이 후세에 전하는 것도 반드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연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은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신뢰할 수 있는 역사의 기록을 찾아내 그것에 대한 견해를 보강해야만 한다.
삼국지 인물, 사건, 연표 연도 사건
155 조조 출생
161 유비 출생
179 사마의 출생
181 제갈량 출생
182 손권 출생
184 황건의 난이 일어나 조조, 손권, 유비가 토벌에 나서 공을 세움
189 영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 환관 장양이 하진을 모살, 원소, 원술 등 환관 이천여 명을 주멸, 동탁이 조정을 장악하여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움
190 유표, 형주 부임, 원소가 반동탁 세력을 일으키고, 장안천도 감행, 낙양을 태워 버림
191 손권이 동탁 군을 물리치고 낙양에서 승리
192 왕윤, 여포가 동탁을 죽임, 손견이 죽고 손책이 뒤를 이음
193 조조가 서주목 도겸을 공격
194 유비가 서주목을 계승, 손책이 강동 진출
195 여포, 조조에게 패함. 서주의 유비를 밑으로 몸을 피함
197 손책이 강동에서 독립
198 조조, 동탁, 진궁을 죽임
200 조조가 서주에서 유비를 물리치고, 관우를 붙잡음, 유비, 원소 밑으로 몸을 피함, 관우, 안량을 죽이고 유비에게 돌아옴, 조조, 원소 군을 관도에서 물리침, 손책 암살 당함. 손권이 뒤를 이음
201 유비, 유표를 의지해 형주로 들어감
202 원소 죽음
205 조조, 하북을 제압
207 조조, 오환 정벌
208 유표가 죽고 유종이 뒤를 이음. 조조, 승상이 됨. 제갈량이 유비의 군사가 됨.
210 주유가 병으로 죽음. 노숙이 뒤를 이음.
211 조조가 동관에서 마초, 한수를 물리침. 관중 평정
213 조조가 위공이 됨
214 유비가 성동 진격, 방통이 낙성에서 죽음.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 유비가 유장의 항복을 받고 익주목이 됨.
215 조조가 장로를 치고 한중 평정. 형주 분할 협정 성립
217 노숙이 병으로 죽음. 여몽 뒤를 이음
219 유비, 정군산에서 하후연의 목을 치고 한중왕이 됨. 여몽 병사
220 조조 사망. 조비가 제위에 올라 위를 건국. 낙양 천도
221 유비, 황제를 칭하고 촉 건국
222 유비가 이릉에서 육손에게 대패. 오가 위에서 독립. 삼국 정립
223 유비가 백제성에서 죽음. 유선이 즉위
224 오, 촉 동맹 설립
225 제갈량, [칠종칠금]으로 남방 이민족 평정
226 위 문제 조비 죽음. 명제 조예 즉위
227 제갈량 출사표를 냄
228 사마의, 맹달을 죽임. 제갈량, 기산으로 진출했으나 가정에서 패함. 마속 죽임.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으나 항복받지 못함.
229 손권이 제위에 올라 건업 천도. 조운 죽음
232 제갈량 다시 기산 진출. 장합 죽음
234 제갈량, 오정원에서 죽음
235 장완이 대장군이 됨
238 사마의가 요동을 토벌하여 공손연을 죽임
239 명제 죽음. 유제 조방 즉위
245 환관 황호, 유선의 신하가 됨
246 촉의 장완 죽음. 비의가 뒤를 이음
249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조정 장악
251 사마의가 병으로 죽음. 사마사가 뒤를 이음
252 손권 죽음. 손량 즉위
254 사마사, 위제 조방을 폐하고 조모를 세움
255 사마사 죽음. 사마소가 대장군 상서사 됨
256 강유가 대장군이 됨
260 사마소가 조모를 죽이고 조환을 세움
261 환관 황호, 촉의 조정 우두머리가 됨
263 위의 등애, 종회가 촉을 침공. 유선이 항복하여 촉 멸망
264 264년 등애, 종회를 모살의 죄로 고발하고, 강유가 반란을 일으켜 살해됨. 손호 제위에 오름
265 사마소 죽음. 사마염이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진을 건국
280 손호가 진에게 항복하고 오 멸망. 진이 천하 통일을 이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