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명상이란 무엇인가
토마스 머튼 글 그림 / 오무수 옮김
가톨릭 출판사
만일 누군가가 성신과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이 세상이 건네 올 것임에 틀림없는 모든 만족과 이익들로부터 생겨나는 자신의 욕망을 잦아들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물들은 일시적 만족이라든가 단순히 인간적일 따름인 만족에 사로잡혀 있는 정신에 의해서는 제대로 평가되거나 이해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본문에서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미국인이었으며 부친은 화가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초등 교육을 받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독일 이탈리아 여행 후 1935년에 미국으로 간 그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필사주: 수학박사인가 아니면 공부했다는 뜻인가.. 후자임이 거의 분명하지만, 참 졸문에 속함], 1938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 후 그는 프란치스코회가 경영하는 보나벤투라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미국 굴지의 저작가로도 활약한 그는 1968년에 사망하였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토마스 머튼
WHAT IS CONTEMPLATION?
By Thomas Merton
(c) 1985 Permission given by
The Merton Legacy Trust and Templegate Publishers
Springfield, Illinois
추천의 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실제로, 그분은 무엇이 참된 삶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오셨으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생활에 어떤 경고나 위축을 주지 않으면서 우리가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시려고 오셨다.
흔히 우리를 아주 만족하게 해주고, 충만하게 해주는 체험은 어떤 확실한 깨달음을 통해서 주어진다. 우리가 희망하며 헌신하고자 하는 보다 좋은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에 대해서도 바로 이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우리가 기쁨을 느낄 때, 무엇을 통찰할 때, 아름다움과 우정을 체험하게 될 때 그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하고 잇는 영원으로부터 존재하고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의 반향이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행복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욱더 진실한 삶을 갈망한다. 이 진실하고 참된 삶이란 생의 한가운데에 단순히 있는,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그 무엇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 무엇을 알아 깨닫고, 그 누구로부터 사랑 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탐욕과 손실로 가득 찬 세속에 얽매여 있는 한 인간 생활은 항상 불안정하다. 바로 이러한 얽매임 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영원히 해방시키기 위해서, 비록 그 길이 길고도 험한 외길이지만, 우리는 그 해방의 길을 찾으면서 부지런히 전진해 가고 있다.
늘 변화하는 우리 정신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찾아 주지만, 자체 안에서 그것을 수용하여 계속 유지해 나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 정신보다도 훨씬 큰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것은 이 세상보다도 큰 것이며,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다.
오직 무한히 선 善하고, 영원한 것만이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을 뿐이다.
과학과 기계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날의 세계는 우주의 신비스런 비밀을 많이 파헤쳤으며, 또한 우리 인간 육신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 그 길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계 문명이 찬 삶의 길로 이끌어 주지도 못하고 있다.
과학 문명이 인간에게 편리한 생활과 유익함을 제공해 주고 있지만, 이만큼 많은 문제를 안겨 주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이익과 특전을 인류 사회에 제공하는 만큼 새로운 불행을 심어주고 있다.
실제로 현세를 특징짓는 모든 발전은 어느 정도 고통을 수반하면서 인류가 열망하고 있는 인간성 人間性의 발전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다.
따라서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그 길이 비록 어떤 점에서는 보람된 자기 향상일 수도 있지만 결코, 자신을 참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참 삶의 길로 이끌어 주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 안간의 영혼은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 항상 불안하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 가는 그 길을 찾아가도록 불림을 받았고, 또한 임무도 받았다.
하느님께로 가는 그 길은 결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예수님은 그 길을 아주 가까이 우리 안에 옮겨다 주셨다. 실제 그분 자신이 우리의 길이며, 세례 때 당신 성령을 받은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생명을 심어 주셨다. 더욱이 그분은 진리 자체이시며, 진실한 삶을 추구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며 그들 가까이 계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풍요로운 생명과 진리를 가져다 줄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기도는 단지 우리가 입으로 외는 경문 그 이상의 것이다. 기도는 지리를 따라가는 참 삶의 길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생명을 보다 풍요롭게 나누어 받기 위해서 가는 참 행복에로의 통로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며, 그분께 끝없는 영광을 드리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면서 그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이 이 책 안에서 우리의 이해를 도와 주려고 하는 것처럼 명상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뜨거운 마음을 표현해 주는 단어이며, 특별히 그분의 진리와 생명 안으로 우리 자신이 온전히 흡수되어 들어가는 것을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
우리 각자는 바로 이 사랑과 진리, 그리고 이 생명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생명을 받을 때 비로소 참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삼라만상과 우리의 영혼 안에 스며있는 풍요로운 하느님의 생명을 찾아내어 나날이 이 생명을 호흡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곧 참된 행복의 원천이다.
명상은 깊고 단순화된 마음의 활동이며, 우리 인간을 완성시켜 주는 모체 母體며 근원이다. 명상은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 안에서 그분의 모습을 직접 고게 되는 날까지 항상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 하느님의 생명 生命이다
미국 제네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요한 에우데스 밤베르거 아빠스
차례
추천의 말
명상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약속
성 토마스 아퀴나스
명상의 종류
주부적 명상
시험
무엇을 할 것인가? –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
정적주의의 위험
옮긴이의 말
명상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거룩해지고 당신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불리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받은 불림의 엄청난 존귀로움을 잘 모르고 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다운 완성된 삶을 위하여 마련해 주신 가능성 – 그분을 알고 사랑함에 누릴 기쁨을 위한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쏟아지는 하느님의 가이없는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을 이롭게 하며 그들에게 복을 더해 주시는 그 사랑의 힘에 대하여 실제로 전혀 생각들이 없다.
무슨 까닭으로 우리는 명상이라는 선물, 주부적 注賦的[필사주: 注賦 – 부어서 넣어 줌] 명상, 신비로운 기도를 소수 계층의 거의 비자연적이다시피 한 사람들에게나 돌려져 있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금제되어 있는, 본질적으로 이상스럽고 비교적 秘敎的 [필사주: 신비한 믿음, 종교?]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명상이란 것이 그분의 지혜와 깨달음의 선물을 통하여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각별한 배려로써 길러주시고 완성시키시고자 우리 영혼 안에서 작용하시는 성신의 행업 行業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까닭인 것이다. 이런 선물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성 聖性 에 이르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장비 중의 한 부분이다. 그것들은 세례 때에 모든 이에게 주어졌는데 그렇게 주어진 것은 하느님께서 그 선물들이 더욱 크게 자라게 되기를 바라시는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들의 성장은 언제나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무상의 선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분의 지혜로운 섭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보다 성인들에게서 그것들이 덜 자라도록 마음 쓰신다는 것은 정말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흔히 그분의 선물들을 받으려는 우리의 열망에 따라서, 그리고 그분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협력에 따라서 그 선물들을 헤아려 주시며, 성령은 그분의 선물에 대하여 거의 혹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분의 선물을 조금도 헛쓰지 않으시리라는 것 역시 정말이다.
신비적 명상은 명상 중에 반드시 지속적으로 불가사의한 현상 – 탈혼 상태, 황홀경, 성흔 聖痕 등등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일 것이다.이런 현상들은 전혀 다른 사물의 질서에 속한다. 그것들은 ‘카리스마적’ 선물, 하느님께 거저 받은 선물 Gratiae grtis datae 이며, 그런 현상들이 곧바로 그것을 체험한 사람의 성화 聖化에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주부적 명상은 성화의 강력한 수단이다. 그것은 사랑의 행업이며,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기르는 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주부적 명상은 하느님께서 영혼에 베푸시는 위대한 선물인 당신의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과 친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일치 – 그러한 선물을 받지 못한 이들이 마침내 하늘에 들기 전까지는 결코 깨닫지 못할 터이나 우리는 그 일치 안에서 그분에 대한 일들을 배우게 되는데 – 에 의해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여 이르게 되는 깊고도 친밀한 인식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누가 이런 선물을 받고 싶어하여 기도하겠는가?” 하고 물을 것 같으면 답은 명약관화 하다. “모든 사람이.”
그러나 딱 한가지 조건이 있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를 갈망한다면 그대는 그에 맞갖은 대가를 기꺼이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대가는 약간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사실 그건 도무지 대가라고 조차 할 수가 없다. 다만 우리에게 그렇게 느껴질 따름이다. 아무튼 우리가 우리의 모든 기쁨이 깃들어 있고 –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옆으로 젖혀 놓았던 그 모든 것들을 되돌려 받게 되는 터전이신 그 좋으신 분을 얻기 위하여 우리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들을 다 포기해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니!
분명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자신들의 내적 생활을 고작 판에 박은 듯 습관적으로 베푸는 동정, 그리고 고작 의무적인 일로 행해지는 종교 예식, 미사 참례와 같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는데 그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명상은 선물로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은 하느님을 스승으로서 존경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그분에게 속해 있지가 않다. 그들은 정말로는 그분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그들이 하늘나라를 잃고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그들 자신 보증 받으려는 것에 대한 관심 말고는 말이다. 실상 있는 대로 말하자면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그들 자신의 열망, 그리고 문제 거리, 안락, 즐거움과 그들의 모든 세상 관심거리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꽉 차있다. 하느님은 오직 어려움들을 쉽게 풀어주고 상급을 나누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나 이 특권사회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초대될 따름이다.
그리스도의 약속
마지막 저녁을 드시는 자리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그분의 영적 유언은 온 영적 삶의 요약이었다. 그것은 모든 신비 신학에 그 기초를 놓는 말씀이었고,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완성을 규정해 주는 말씀이었다.
그분은 그분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모든 선물들 중에서 가장 큰 선물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영을 보내주시리라 하셨는데, 영은 무한하시고 지음 받지 않으신 사랑이요, 그 사랑은 하느님 자신이시고,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하시고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그들의 선물로서 실체화된 그들 자신의 본성인 무한한 사랑의 유대로 그 두 위격을 일치케 하신다.
“진리의 영, 그를 세상은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 세상은 그를 보지 못하고 그를 알지도 못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알 것이다. 까닭인즉 그는 너희와 함께 살며 너희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14, 17)
“성신,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요한 14, 26)
그 영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두 분 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고 또한 우리는 그들을 알게 되고 사랑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겠고 그에게 나 자신을 나타내 보이겠다… 내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시겠고 우리는 그를 찾아가 그와 더불어 살겠다.” (요한 14, 21. 23)
그러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그와 같은 앎과 사랑은 하늘 나라에서 누리는 복된 기쁨과 본질적으로 같은 복락이다. “영원한 삶이란 바로 사람들이 당신, 오직 한 분이시고 참되신 하느님, 그리고 당신이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것입니다.” (요한 17, 3)
성삼 Holy Trinity과 육화 하신 말씀, 예수에 대한 이 친밀한 인식이 명상에 잠긴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기쁨과 평안의 그 무한한 깊이를 개시 開示 해 줄 것이니, 이 얼마만한 놀라움인가?
“이런 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 11)
“평화를 내, 너희에게 남겨 두고 간다. 내 평화를 내가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 (요한 14, 27)
명상의 기쁨은 완전한 일치 속에서 성취된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나는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이듯이 그들 또한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당신이 내 안에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가 되어 완전하게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 22. 23)
이 완전한 삶의 씨앗은 세례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혼 속에 뿌려졌다. 그러나 씨앗은 그대들이 결실을 거둬들이기 전에 자라고 또 자라지 않으면 안 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온몸에다가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두르고는 지구 표면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명상과 성성의 씨앗은 그들의 영혼 안에 뿌려졌으니 그 씨앗들은 그저 잠자고 있을 따름이다. 씨앗들은 싹이 트지를 않고 있다. 그것들은 자라지도 않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성화 은총은 그들 영혼의 실체 안에 자리잡고는 있지만, 그 능력과 지력과 의지를 불태우고, 이에 자양분을 대어주고, 그것들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느님은 이러한 영혼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니, 그들이 정말 깊은 열망으로 그분을 찾지 않는 까닭이다.
그들은 하느님과 세상 둘 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 영혼의 실체에 대한 그분의 권리를 하느님께서 계속 지켜 가시도록 허락하기야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욕망은 그분에게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 그리고 외적인 사물들에 속해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닌 지식에 관한 한 이 세상 사람들이 처해 있는 것과 똑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서도 역시 진리의 영은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그들은 그분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는 까닭이다.” 그들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육적인 사람은 하느님의 영의 것들인 이와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지를 않으니, 그가 보기에는 그것이 어리석음인 까닭이며, 또한 이해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1고린 2, 14)
성 토마스 아퀴나스
마지막 저녁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그분의 명상에서 길어 올려진 선물과 더불어 성신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약속에는 거부가 따라다닌다. 성신은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서는 성령은 거부될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 요한의 복음 말씀 (14장 참조)에 대하여 주석하면서 이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명상은 사람이 세상에 속해 있는 정도에 따라서 그에게서 거부될 것이다. ‘세상’이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사 事와 물 物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이신 성령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학 있듯이 “서로 모순된 두 개체는 동일한 주제에 대하여 동시에 양립할 수 없다.”
만일 누군가가 성신과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이 세상이 건네 올 것임에 틀림없는 모든 만족과 이익들로부터 생겨나는 자신의 욕망을 잦아들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물들은 일시적 만족이라든가 단순히 인간적일 따름인 만족에 사로잡혀 있는 정신에 의해서는 제대로 평가되거나 이해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Spiritualia vider non possunt nisi quis vacet a terrenis (영적인 것은 이 세상 것에서 떠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도 볼 수가 없다).
그 천사 박사는 설명하기를 성신은, 세상 것을 붙좇는 사람들이 그분을 알고자 열망하지 않는 까닭에 그분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신다고 한다. 그들은 저급한 사물들에다 그들의 정신을 다 쏟아 붓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 한다. 하지만 열망은 명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열망이 없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그 위대한 선물들을 결코 받지 못할 것이다. Dona spiritualia non accipinntur nisi deside rata (영적인 선물들은 열망되지 않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성 토마스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Nec desiderantur nisi aliqualiter cognita (인식되는 것이 조금도 없으면 열망되지도 않는다). 비록 아주 보잘 것 없을 정도로나마 인식이 없는 거기에는 전혀 열망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적어도 그와 같은 일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약간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바가 없다면 분명 그러한 일치를 열망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 것을 붙좇는 사람, 그리고 오로지 자기가 하는 활동과 일시적인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은 명상을 하고 싶어하는 열망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마저 스스로 내던져 버리기까지 한다. 명상의 기쁨에 대하여 무언가 발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체험이다. 우리는 주님이 맛스러우심을 보고 맛들여야 한다. Videte et gustate quoniam suavis est Dominus (보고 맛들여라. 무릇, 주님이 맛스러우심을).
성 토마스는 세상 것을 붙좇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저 맛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앓고 있는 사람의 혀가 좋은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듯이…그처럼 세상의 부패에 물든 영혼은 천상 기쁨의 맛스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 맛스러움을 내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사랑이다.
예수 그분 자신이 영적인 삶을 지탱해 주는 단 한 가지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해주셨다.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는 아버지께 구할 것이고, 그분은 너희에게 다른 빠라끌레또 (협조자)를 보내 주실 터이니…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받을 것이고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 자신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 15. 16. 21)
이어서 그분은 최후의, 그리고 완전한 시금석, 참사랑의 증거이자 결정적인 요건 한 가지를 덧붙이셨는데, 이는 명상자와 세상에 속한 자, 하느님께로 향해진 자와 아류의 그리스도인 사이를 가름하는 기준인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요한 14, 23)
이것이야말로 정말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들을 맛볼 미각을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 그분의 뜻에 온전하고도 빈틈없이 양순히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저, 참된 명상이 되게끔 하는 하느님 사랑의 아주 극미한 움직임에 내맡겨 이끌려 가는 섬세한 본능이다. 성 토마스가 말하듯이 말이다.
Per obedientiam homo efficitur idoneus ad videndum Deum.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뵐 수 있기에 합당케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순명 順命이다.”)
명상의 종류
정말은 딱 한 가지의 명상이 있을 따름이다. 그 말은 제 의미로 쓰였을 때, 그 엄밀하고 정확한 뜻에서 주부적 주부적 혹은 신비적 명상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수동적’ 명상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것은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며, 우리가 깨닫게 되겠듯이, 하느님은 영혼 안에 그것을 부어 주시는,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하심으로써 영혼의 능력들을 다 차지하시고 당신 뜻에 따라 그 능력들을 다 차지하시고 당신 뜻에 따라 그 능력들을 곧추 움직이게 하시는 제일 동인 第一動因 이시다.
능동적인 명상
명상이라는 말에는 또 다른 주요한 뜻이 있다. 여기 한 영혼이 있어, 일상적인 은총에 힘입어 친숙한 자연 양태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어떤 이는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구가하며, 의지 속에 자리잡고 있는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단순한 마음으로 바라보기 위하여 신학과 철학과 예술, 음악의 모든 자료를 다 활용하고 있다. 내적인 삶에 관한 모든 전통적인 방법과 실천들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한에서 능동적인 명상의 부류에 속한다.
능동적인 명상에는 이제 사고와 행위, 그리고 의지 작용이 요청된다. 명상의 기능은 정신을 일깨워 준비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올리도록 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좀더 잘 알고자 하는, 그리고 그분 안에 쉬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켜 주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영적인 삶의 기쁨에로 이끌어 준다. 그것은 또한 초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것들을 맛볼 수 있는 건강한 미각을 가져다 주며, 육적 만족이나 단지 자연적일 따름인 지식에서 오는 만족을 끊어 버리게 한다.
무엇보다도 능동적인 명상은 사랑에로 통하는 길을 닦아 준다. 그것은 순명과 겸손을 가르쳐 준다. 사람들에게 하느님 뜻 안에서 그분을 어떻게 찾을 수 잇는가를 보여주고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이 바라시는 것들에다가 주의를 기울이게끔 한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세상 것들에서 오는 만족을 즐기기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열망하도록 가르쳐 준다. 그리고 우리한테 어떻게 하느님께 신뢰를 둘 수 있는지 보여주며 우리가 점점 더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맡겨 드릴 수 있도록 이끌어 간다.
수동적인 명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능동적인 명상은 적어도, 그것이 만일 이론으로가 아니라 실천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에 절대 불가결한 본질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전례
전례는 그 풍부한 신학 내용과 성서의 계시를 통하여 다른 어떤 것보다도 능동적인 명상을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예술과 음악과 순박한 시와 엄숙한 힘으로 에둘려 있으니, 이는 퇴락한 시대의 예술 패션으로 해서 뒤틀어진 맛 감각을 갖고 있지 않은 어떤 영혼에게나 깊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동시에 전례는 저 가장 핵심적인 행위인 미사의 효력으로써 수동적이거나 주부적인 명상에로 우리 영혼을 이끌어 가려 하는데, 미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세상과 시간 속에 살고 계시며, 미사를 통하여 그분은 모든 것들을 그분에게로 끌어당기신다.
우리가 기도와 명상의 모든 은총이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은 바로 미사 안에서다. 참으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명상의 바로 그 체현 體現 –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와 광휘를 띤 하나의 위격 안에서 일체를 이룬 인성 人性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아들이심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명상적이 되는데, 그 참여는 거룩한 미사 중에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저녁을 드시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뛰어난 교설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 곧 그분 자신을 주셨다. 복된 성사 (성체)는 명상의 표지도 형상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명상의 비롯음이요 마침이신 분, 바로 그분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주부적 기도에 몰입하는 가장 평범한 길 중의 하나가 거룩한 친교 (성체)로 주어지는 은총을 통하여 마련된다고 하는 사실에 조금도 놀랄 까닭이 없는 것이다.
활동 안에서 누리는 하느님과의 일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서 순수하게 명상적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소명이 본질적으로 활동적인 사람들이 깊은 내적인 삶의 은총과 모든 주부적 기도에서 스스로 돌아서서 단념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삼위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모두에게 당신들을 나타내 보여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활동적인 생활 속에서 영혼의 지극한 순수함과 완전한 자기 희생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직업은 그들이 전적으로 그들의 정신에서 피조물을 비워 내어 하느님 한 분 안에서 그들 자신 느긋이 지낼 수 있는 고독과 침묵, 그리고 여유를 얻게끔 전혀 내버려 두지를 않는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분의 자녀로서 그분을 섬기기에는 너무 바쁘다. 동시에, 그들의 정신과 기질은 그들이 순수 히 명상 생활을 해 나가는 데 맞지가 않는다. 그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활동을 하지 않으면 평안을 누릴 수 없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모를 것이다. 그들은 그럭저럭 지낼 테고, 그들의 내적 삶은 냉랭함만 더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종일 내내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잠겨 있을 수 있는 자기 희생적인 일들 가운데서 그분께 몰입함으로써 하느님을 발견할 줄 안다. 그들은 그분의 동반자로서 살며 일한다. 그들은 그분이 그들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그분과 함께 있는 것에서 깊고도 평화로운 기쁨을 맛본다. 그들은 지극히 단순하게 삶을 이끌어서 염경 기도와 묵상 기도의 평범한 수준 그 이상으로 뛰어오를 필요가 없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그 겸손한 기도는 아주 깊고 내적인 것이어서 그들을 명상의 문턱에까지 데려다 준다. 그들은 결코 명상적인 생활에 깊이 빠져들어 가지는 않으나, 명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은총에 대해 낯설지 않다. 비록 그들이 활동적인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그들이 행하고 고통 받은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순명, 형제적 사랑, 자기 희생, 그리고 하느님 뜻에 완전히 내어 맡김을 통하여 체득된 마음의 지극한 순수성으로 인하여 버금-명상가들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깨달아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 그들은 일종의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진’ 명상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외양으로나 좀더 깊은 내적인 삶을 붙좇아 왔던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성성의 단계에 이르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버금-명상가들과 단지 외적 관심 거리이거나 형식적으로 습관화된 일일 따름인 동정을 베푸는 데 그치는 피상적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세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란 곧 그 사람들은 하느님을 바라며, 그리고 그분의 사랑만을 바라며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지 않을 재간이 없다.
주부적 명상
엄밀한 말뜻에서 볼 때, 명상은 하느님께 대한 초자연적 사랑이요 인식이니, 그분에 의하여 영혼의 그 꼭대기에 부어져 내린, 단순하고 어둑한 것으로서, 그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직접적이고도 체험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준다.
신비적 명상은 순수 사랑에서 난 하느님에 대한 직관이다. 그것은 영혼의 그 모든 자연적 능력들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며, 누구 하나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도대체 얻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한 모든 애착을 깨끗이 비워 내는 정도에 따라 영혼에게 그 선물을 주신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초자 역시 그분의 선물인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고로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Ipse prior dilexit nos (그분 자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꼭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는데, 명상은 순수 사랑의 발전이요, 완성 그 차제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위대한 기쁨, 지복의 완성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느님만을 위하여 – 혹은 하느님 그분 자신이 사랑이신고로 사랑만을 위하여 모든 것들에서 손을 떼는 것임을 깨달아 알고 있다. 명상이란 하느님은 무한하신 사랑이라는 것, 그분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 주셨다는 것, 그리고 이제부터는 사랑, 그것만이 오직 문제일 따름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 체험이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12세기의 위대한 시토회 신학자는 사랑은 그 자체에 대해 충족되어 있으며, 그 자체 목적이며, 그 자체 공 功이요, 그 자체 보상이라고 지적한다. 사랑은 그 자체 외의 원인도, 그 자체 밖에 잇는 어떠한 결실도 구하지를 않는다. 모든 사랑의 으뜸 된 대상이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하고 무사 無邪 한 사랑으로써 사랑하는 것만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기쁨이요, 모든 보상 중에서 최고의 보상일 수 있는 까닭에, 사랑한다는 바로 그 행위가 사랑에 대한 가장 탁월한 상급인 것이다. Amor praeter se non requirit causam, non fructum: fructus ejus, usus ejus (사랑은 자기 이외의 원인도 결과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체 결과요 그 자체 수단인 것이다). 그는 외쳐 말한다. “나는 그저 내가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한다.” Amo quia amo, amo ut amem (나는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한다) (아가에 대한 설교 83).
“어둠 속 빛살”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내용에 비추어 어떤 사람은 주부적 명상이 엄청난 맛스러움이요 깨달음이며 위안이요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명상을 통하여 체험되는 하느님의 현존은 언제나 영혼에게 평안과 강한 기운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다. 하나 때로 그 평안은 고통과 어둠과 메마름 속에 온통 파묻혀 버리기도 한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기운 찬 힘은 때로 우리 자신이 극도의 무기력, 무능을 느끼게 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
명상을 처음 시작하면서는 특히 그것이 그대에게 하느님에 대한 분명하고도 똑 부러진 어떤 인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또한 그대는 그대의 사랑이 아무런 힘도 안 들이고 하느님께 날아들 수 있을 만큼 기운 차고 위안이 되는 행위들을 자아내는 데 한결같이 열정적이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의 영혼이 언제나 민첩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기쁨에 차서 그분께 들어올려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명상은 영혼 위에서 곧바로 비추어지는 하느님의 빛이다. 그러나 모든 영혼은 피조물들에 들러붙어 있음으로 해서 약해지고 눈멀어 있으니, 그 영혼은 원죄로 말미암아 절제치 못하리 만큼 사랑하기가 쉽다. 이에 햇빛이 병든 눈을 자극하듯 하느님의 빛은 저 영혼을 자극한다. 그 빛은 통고 痛苦를 일으킨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순수하다. 스스로의 이기심 때문에 순수하지 못하고 병든 영혼은 그만 하느님의 그 순수성으로 하여 타격을 당해 나가떨어진다. 영혼은 하느님의 빛으로 하여 빚어진 고통스러움을 깨달을 수 없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관념들을 형성한다. 자신의 자연적 인식에 근거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 자신의 자기애에 빌붙는 관념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관념들과는 모순된다. 그분의 빛은 영혼이 그분에 관하여 스스로 짜낸,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연적인 그 모든 개념들을 거부하시고 부숴 버리신다. 주부적 명상 안에서 얻는 하느님 체험은 영혼이 그분에 관하여 상상해 왔던 일체의 것에 대한 전면적인 모순이다. 그분의 주부적 사랑의 불꽃은 인간적인 위안들에 연연해 하고 있는, 그리고 초보자였을 때에는 필요로 했었던 그런 빛과 느낌들을 그릇되이도 기도의 무슨 커다란 은총인 양 상상하면서 그런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영혼의 자기애에다 가차없이 공격을 퍼붓는다.
그렇게 되면 조만간에 주부적 명상은 영혼 안에 겁나리만큼 무서운 내적 변혁을 가져온다. 기도의 감미로움은 사라져 버린다. 묵상은 불가능해지고, 싫어지기조차 한다. 전례에 참여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짐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정신은 생각할 수가 없다. 의지는 사랑을 하지 못할 것만 같아진다. 내적인 생활은 어둠과 메마름과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된다. 영혼은 모든 건 끝났다고, 그리고 자신의 불충에 대한 벌로 모든 영적인 생활은 종막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려 들게 된다.
이때가 기도 생활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정말, 흔히 여기서, 하느님에 의해 명상에 초대된 영혼들이 이 “어려운 말씀”으로 좌절하여 등을 돌리고는 “더 이상 그분과 함께 가지 않게 된다.” (요한 6, 61-67) 하느님은 그분의 빛살로 그들의 마음을 맑게 비추신다. 그러나 그 빛살이 너무 강렬하여 그들이 눈멀어 버린 까닭에 그들에게 그 빛은 어둠 속 빛살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처지에 저항한다. 그들은 깜깜 어둠을 믿으려 하지도, 그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볼 수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신뢰하면서 헛되이 걷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자립적일 수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정신과, 그들 자신의 의지, 그들 자신의 판단과 그들 자신의 결단을 신뢰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길 안내자이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육적인 사람들이며 “하느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어둠과 무력함이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분의 십자가를 건네 주셨던 것이고, 그것은 하나의 걸림돌로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볼 때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께 충실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고자 애쓴다. 그러나 그들은 내적인 것들에 등을 돌리고 외적인 것들에다 자신을 몰아붙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종교 행사로 열띠게 하거나, 혹은 그들이 느끼기에 모든 명상이 좌초된 것 같은 처지에서 그들 자신이 겪게 되는 괴로움과 패배감에서 빠져 달아나기 위하여 스스로를 일 속에 파묻어 버린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으나 어둠은 그 빛을 알지 못하였다 (요한 1, 5).
시험
일반 원리들은 하나하나의 구체적 사례에 적용될 때에야 비로소 유용한다. 묵상을 하는 도중에 겪는 건조함이나 덕을 쌓기 위하여 분투하면서 느끼는 무력 無力 은 그 자체로 명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확실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각기의 개별적인 경우는 나름대로의 가치에 의하여, 그 상황에 비추어 판단 내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내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메마름과 무력은 죄나 불충실의 결과이거나, 혹은 단지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영혼이 전혀 묵상을 할 수 없거나 어느 때든 전혀 아무런 감각적 열정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할 때는 훨씬 더 그렇기가 쉽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어려움들은 건강이 나쁜 데서 발생한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주부적 명상에는 그에 합당한 시험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시험은 처음에는 부정적인 것 같아 보일는지 몰라도, 한결같이 그 안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게 될 것이다. 괴로움 그 밑에서, 어둠의 장막 그 뒤에서, 고통 그 너머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확실하고도 긍정적인 표지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이 표지들은 그 시련들이 주부적 기도의 질서에 속하는 정화 정화 일 수 있게끔 해 줄 것이다.
평안, 잠심 그리고 열망
우리 어디 상상해 보기로 하자. 어떤 한 영혼이 일단 묵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으로써는 도무지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그보다는 오히려 메마름과 어둠, 좌절 속에서 하느님을 찾아 구하는 가운데 그분에 대한 불과 같은 사랑의 정을 길어 내고 있다고 말이다. 그때 영혼이 보이는 본원적 本源的 인 태도는 어떠할까? 영혼은 체념하고 뚫고 나갈 수 없는 검은 구름 속에 남아있을 것인가? 영혼은 그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내맡겨 드림으로써 평화를 찾아낼 것인가? 영혼은 순수한 믿음과 맹목적인 희망에 머물러 쉬는 것을 만족스러워하겠는가? 묵상하고, 생각하고, 열정을 길어 내려는 시도가 영혼에게서 평안을 빼앗고 혼란과 혐오에 빠져들게 하는 것과는 달리, 어둠 속에서 인내로이 기다리는 단순한 마음가짐이 영혼에게 질서와 조화를 되찾아 줄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은 하느님께서 주부적 기도방식을 통하여 그와 같은 영혼을 이끌고 싶어하셨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혼은 자신이 처함 경우에 대하여 스스로가 결정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만일, 그렇게 어둠 속으로 이끌려 든 영혼이 거기에서 깊은 잠심을 찾아 얻고 세상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뒷전으로 잦아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 물론 흐트러짐이 있어, 영혼의 열망에 맞서서 끊임없이 영혼을 괴롭힐지라도 – 이 역시 주부적 기도를 드러내는 증거가 될 것이다. 또한 만일 묵상하려는, 그리고 결과를 얻고자 하는 시도가 영혼에게서 잠심을 빼앗아 가고 그 영혼을 혼란에 휩싸이게 한다고 하면 이는 한결 더 참된 증거가 될 것이다.
결국 구름 뒤덮인 듯한 어둠에 가려진 주부적 명상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표지는 기운차고 신비로운, 하지만 단순한 매력이니, 그것은 영혼을 이 캄캄 어둠 속에 포로마냥 잡아두고 있다. 그 영혼은 비록 괴로움과 패배감에 휘둘려 있을지라도 이 메마름에서 전혀 빠져 달아나려 하는 열망을 보이지 않는다. 자연적 질서에서의 정당한 즐거움이라든가, 광영 光榮, 그리고 휴식에 마음 빼앗기기는커녕 영혼은 도리어 그런 것들에서 거리낌을 느낀다. 모든 피조물은 그저 영혼을 성가시게 할 따름이다. 그것들은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기쁨과 평안과 충만함은 오로지 메마름과 믿음의 이 고독한 밤 그 어딘가에서 만이 찾아져야 한다는 확신이 자라난다.
때로 이 매력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어서 영혼이 겪어 느끼는 모든 고통을 에껴 내는데, 영혼은 자기가 당하는 아픔과 무기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 또한 그 영혼은 아무러하든 간에 이 고독과 어둠 속에서 찾아질 수 잇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 무어라 설명할 길 없는 평안에 대한 갈망 속으로 온전히 잠겨 들게 된다. 영혼은 그 매력을 붙좇는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어둠에 가려진 사랑의 힘에 의하여 믿음의 밤을 거처 지나도록 스스로를 이끌려지게끔 한다.
그때 갑자기 깨달음이 온다.
영혼은 어느 날, 이 어둠 속에서 그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 뵈었다는 것을, 도대체가 기대해 본 적도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깨닫기 시작한다. 영혼은 온통 사로잡혀 버린다. 그분이 거기 계시고,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사방 팔방에서 자기를 에두르고 있고 자기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에… 그 순간에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중요한 실재 實在라고는 존재하지를 않는다. 그 밖의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문제되는 것이 없다. 어둠과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어둑한 그대로다. 하나 그것은 가장 밝은 한낮보다도 더 밝아진 것같이 느껴진다. 영혼은 새로운 세계, 모든 자연적인 지식과 모든 자연적인 사랑의 단계를 뛰어넘는 풍부한 경험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때부터 그의 온 삶은 변화된다. 비록 외적으로야 고통과 시련과 노고가 배가될지라도 그 영혼의 내적인 삶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그것은 한 생각, 한 사랑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 홀로만으로. 모든 것들 안에서 그 영혼의 눈은 그분을 향하고 있다. 그분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리고 영혼의 이 응시는 그 자체로 모든 공경, 모든 청원을 내포한다. 그것은 계속적인 희생이고, 그것은 하느님께 끊임없는 보답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사랑이니, 이 사랑은 성 베르나르도가 말한 것처럼 영혼의 다른 모든 활동을 자기 안으로 이끌어서 흡수해 버린다. Amor caeteros in se omnes traducit et captivat affectus (사랑은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열정을 사로 잡는다) (아가에 대한 설교 83). 하느님에 의하여 그 영혼에게 쏟아 부어진 이 (주부적) 사랑은 그 모든 힘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그것들을 그분께로 들어 높인다. 그의 열망과 애착심을 점점 더 세상과 썩어 없어질 것들에서 떼어 놓으면서 말이다. 영혼은 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급속히 진보해 나아가고, 많은 덕들로 가꿔지게 된다. 그러나 영혼은 자신이 그렇다고 여기지를 않는다. 영혼은 오직 하느님 한 분 이외에는 그 어떤 것, 또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영혼은 빛 밝히는 길인 영적 삶의 성숙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영혼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에로 끌어당겨지고 있으니, 그 일치 안에서 성성과 참 그리스도인다운 완성이 발견되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
십자가의 성 요한, 하느님께서 그분의 교회에 주신 가장 위대하고도 확실한 신비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그는 영혼이 하느님의 이 아름다운 선물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일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 선물을 유익히 쓰기 위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아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명상 기도를 할 때 훌륭한 지도, 훌륭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와 걸림돌들을 피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 까닭은, 비록 영혼의 지향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그의 타고난 조야 粗野 함과 서투름이 여전히 그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내밀한 밑바닥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의하여 수행되는 미묘한 작용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분의 활동에 협력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그대 영혼 안에서 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 일이다. 모든 자연적인 확신에 관하여 그대의 정신을 어둡게 하고 비워 내는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실제 체험적으로 대면하는 문턱에로 그대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그대를 불명료한 영역으로 인도하는 이 어스레하고 때로는 극고 極苦를 일으키는 믿음의 빛의 놀라우리 만큼 엄청난 가치를 배우라. 실제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서슴없이 이 어둠은 지성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으로 야기된 것이니, 그분의 무한한 활동과 진리의 밝음에 의하여 우리의 유한한 힘들이 눈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어둔 밤이란 영혼의 자연적이고 영적인 무지와 불완전에서 영혼을 정화하는 작용으로서 하느님께로부터 영혼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니, 이는 명상가들에 의하여 주부적 명상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 여기서 하느님은 은밀히 영혼을 가르치시고 사랑의 완성 안에서 그 영혼을 이끄시나 영혼은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으며 어떤 식의 것이 이 주부적 명상인지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어둔 밤> 제2편 5장 1 – *최민순 역, <어둔 밤>, 성 바오로출판사, 1973 참조)
그러한즉, 그대가 그대 영혼 안에서 활동하는 은총의 이 커다란 작용에 협력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거대한 빛이 그대에게서 애써 내몰려 하는 것들을 갈망하거나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그분이 그런 것들 대신 그분 자신의 진리를 그 자리에다 두려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기도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정확하고 이성적인 지식이 공허해질 때, 그리고 그대가 도무지 명확하고 규정적인 개념들로 그분을 파악할 수 없을 때에도 탄식하지 말라. 그대의 의지가 더는 하느님의 것들 안에서 감미로움이나 위로를 찾지 못하게 되었을 때나 그대의 상상이 어둠에 가리고 난삽하게 되었을 때 놀라거나 허둥거리지 말라. 그대는 그대 심연에서 빠져 나와 있다. 그대의 정신과 의지는 자연적인 질서 영역 너머로 이끌려 가게 될 것이고, 그것들은 자체를 압도하는 객체의 현존에 맞닥뜨려 있는 까닭에 그것들이 늘상 해온 그와 같은 기능을 더 이상 발휘하지를 못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그대로이니, 그분 자신이 저 객체이신 까닭이고, 그리고 그분이 그때 무언의 매력과 평안이 충만한 열망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주부적 체험 속에서 그 영혼에게 그분 자신의 빛과 그분 자신의 사랑을 부어 넣어 주시기 시작하시는 까닭이다. 지금으로서는 이보다 더 정확한 그 어떤 것도 찾으려 하지 말라.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의 행위로 하느님에 대하여 그대가 갖고 있는 지식의 정확도를 높이려고, 그리고 사랑의 느낌을 강화하려고 애쓴다면 그대는 그분의 일에 훼방을 놓게 될 것이고, 그분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보잘것없는 자연적 활동의 결과를 얻도록 버려 둔 채 그대에게서 그분의 빛과 그분의 은총을 거둬들이시고 말 것이다.
그대의 정신과 의지가 그것 자체의 어떤 특별한 류의 만족을 위하여 느끼는 자연적인 욕망은 언뜻 보기에 무정한 이 체제에 맞서 고통을 겪기도, 들고 일어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성인이 말하고 있듯이, 다음을 기억하라. “이 어둡고 사랑겨운 인식에 의하여 하느님은 아주 높은 신적인 경지에서 영혼과 결합되신다. 까닭인즉 믿음인 이 어둡고 사랑겨운 인식은 마치 저 다음 삶에서 영광의 빛이 하느님의 모습을 밝혀 드러내는 매개로 작용하듯이 이 세상 삶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어 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까르멜 산을 오름>, 제2권 24장 4 *최민순 역, <깔멜의 산길>, 성바오로 출판사, 1971 참조)
하니, 그대 자신을 무익한 내적 활동으로 몰아붙이지 말라. 그대 삶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할 것은 어떤 것도 피하도록 하라. 그대가 할 수 있는 최대로 평안과 고요와 은거 안에 살라. 그리고 설령 하느님께 제아무리 커다란 영광을 드릴 것 같아 보이는 수고와 직분이라 하더라도 그런 것들에 휘둘려 그대의 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하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그대의 열망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사심 없는 사랑과 커다란 평안 속에서 그대에게 맡겨진 직무들을 수행하라. 평안스러이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어라. 그대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잠심을 유지하라. 그대가 하는 일을 고요로이 그리고 법석 없이 행하라.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고독을 찾아 구하고, 그대 자신의 영혼의 침묵 속에 머무르라. 또한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 부어 주시고 있는 단순한, 그리고 단순화하는 빛살을 누리며 거기서 쉬어라. 그대가 위대한 신비가들의 생애에서 읽은 장려한 ‘체험들’을 갈망하는 누를 범하지 않도록 하라. (선물로 주어진, gratis datae라는) 저런 은총들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느님 사랑 안에서 그대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바로 이 목적만을 위하여 그대에게 주어진 이 어둑하고 정화하는 하느님의 빛과 그분의 사랑에는 도무지 미치지를 못하는 것이어서, 결코 그대를 성화 聖化 시킬 수 없다.
“영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알려질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넘어 지나서 영혼은 온 열망을 다하여 알려질 수도 없고 그 마음에 떠오를 수도 없는 저것에 이르기를 갈망할 것이다. 또한 영혼은 시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그 모든 것과 이 세상 삶에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온 열망을 다하여 모든 느낌과 경험을 뛰어넘는 저것에 이르게 되기를 갈망할 것이다.” (<까르멜 산을 오름>, 제2권 4장 6)
기도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대가 얼마나 진전을 보았는가 하는 문제로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까닭인즉 그대는 이미 이때껏 있어 왔던 길과는 결별하고 지도에 그려질 수도 측량될 수도 없는 길을 걸어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도달한 성성과 명상의 단계를 정하는 일일랑은 [필사주: 이것은 무슨 말투인가?]하느님께 맡겨 드려라. 만일 그대 스스로가 그대 자신이 이룬 진보를 헤아리려 애를 쓴다면 그대는 쓸데없는 내성 內省으로 그대의 시간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오직 한 가지만을 찾아 구하라. 하느님께 대한 그대의 사랑을 더더욱 정화하는 것. 더욱더 완전하게 그분의 뜻에다 그대 자신을 내맡겨 드리는 것. 그리고 보다 오롯하고 보다 완전하게, 뿐만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보다 평안하게, 그리고 보다 온전하고 굽힘 없는 신뢰를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만일 그대가 이 길을 신실히 따라 걷는다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시련들과 십자가들을 맞아들이는 데 기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런 것들이 그대의 영혼에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한 고통을 일으킨다고 할지라도 그대는 지극한 평안과 온유와 내적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런 것들과 더불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깨닫고 있는 까닭이고, 또한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서 더욱더 완전하게 그분의 모습을 되찾아 주기 위한 도구로 이런 것들을 사용하고 계시다는 확신으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까닭이다.
성성과 명상은 오로지 정화된 사랑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따름이다. 정말 명상적인 영혼은 하느님 본질에 대한 가장 뛰어난 비전들을 갖고 있는 영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과 사랑 속에서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일치되어 있는 영혼이며, 자기 자신을 성령에 의하여 그분 안으로 흡수되고 변화되도록 내맡기는 영혼이다. 이와 같은 영혼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의 근거요 기회가 된다.
“꿀벌은 모든 식물들로부터, 비록 그 식물들 안에 있기는 하나 식물들을 위해서는 소용이 없고 그런 쓰임새 말고 그 식물들 외의 다른 목적을 위해 비축해 두고 있는 꿀을 뽑아 내는데, 그처럼 영혼도 도무지 힘 하나 안 들이고 자기를 스쳐 지나는 모든 것들에 있는 바로 그 사랑의 단맛을 뽑아 낸다. 영혼은 그것들 하나하나에서 즐겁든 즐겁지 않든 간에 하느님을 사랑한다.” (영의 노래 27)
그와 같은 영혼에게는 사물, 사건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즐겁기도 하고 즐겁지 않기도 한 그런 사태들이 점차 퇴조하다가 시계 視界에서 사라져간다. 문제가 되는 단 한 가지 일은 그 임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고, 우리는 모든 일들 안에서 그분이 그 일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건네시는 사랑을 알아봄으로써 그분을 즐겁게 해드릴 수 있으니, 명상을 하는 사람은 죽음에 내붙여진 존재가 맞는 즐거움과 고통 속에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누리는 기꺼움은 물론 슬픔 속에서도 똑같은 기쁨을 찾아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를 못하고, 모든 사물과 일들 속에서의 그의 즐거움은 그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기꺼움인 까닭이다.” (영의 노래 27)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명상의 가치를 말하기 위하여 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위대한 활동가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자기들의 외적인 업적들로 싸감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주도록 하자. 만일 그들이 그런 일들을 하는 데 쏟는 시간의 반만이라도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다면 그들은 훨씬 많은 유익을 교회에 가져다 주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는 훨씬 더 커다란 즐거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틀림없이 그들은 불과 한 가지 일로 그들이 지금 수천 가지 일들로 이루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적은 수고로 이루어 내게 될 것이다.” (영의 노래 29, 3)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이 순수한 (신비로운) 사랑이 다른 모든 업적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더 귀하며 교회에 더 커다란 유익이 된다.” (영의 노래 29, 3)
정적주의 靜寂 主義 의 위험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들은 성인 자신이 살아온 삶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는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모든 의무와 책임, 그리고 모든 활동과 수고를 철저하게 거부하라고 설교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가장 위대한 명상가들인 그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모두 지극히 활동적이었으며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며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 요한이 펴는 의론의 의미는 이러하다. 즉, 우리 자신의 취향과 판단과 야망과 관념들로 하여 불러일으켜진 활동들은 불완전으로 말미암아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해질 것이고, 우리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일치를 한결같이 방해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하느님은 그분과 완전히 일치되고 그분 안에 완전히 흡수된 우리의 정신과 의지가 그분 사랑과 자비의 자유로운 도구로서 그분과 완전한 조화와 협력을 이루어 활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그분과의 이 완전한 일치에로 초대하고 싶어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시기 위하여 명상자들을 도구로 쓰신다.
이와는 달리 정적주의의 사설 邪說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은 물론 하느님 그분조차 도외시하는 전적으로 이기적인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그 자신 안에 가두어 놓게 한다.
정적주의가 그리스도교 명상에 대하여 피상적인 유사성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완전히 대당 對當 된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만의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서 모든 사랑을 비워낸다. 그리고 그의 영혼 맨 위로 곧장 내리비춰지는 하느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의 정신에서 모든 창조된 형상들과 환영 幻影 들을 몰아낸다. 반면에 정적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철저한 ‘무화 無化’라는 거짓된 관념을 붙좇으면서 그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사랑과 모든 지식을 비워 내려고 애쓴다. 그리고는 움직임도 없고, 생각도 없고, 지각 知覺 도 없고, 사랑의 행동도 없고, 수동적인 감응도 없는, 게다가 내적인 삶의 빛이라든가 다사로운, 생기 어느 것 하나 없는 단지 공허만이 있을 따름인 어떤 영적인 진공 眞空 속에 무기력하게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정적주의자는 자기가 하느님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움직여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주부적 사랑의 그 가장 탁월하고 섬세한 활동에 의하여 영혼 안에서 생겨나는 그리스도인의 명상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영혼을 완전하게 하는 동시에 저 똑같은 명상적 사랑 안에서 다른 모든 덕들을 완전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정적주의자가 볼 때 덕에 대한 추구는 ‘자기애’이며, 하늘에 대한 열망 역시 ‘자기애’이다. 하늘에서 누를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희망은 값을 주고받는 거래도 간주된다. 덕을 실행하고 죄를 피하려는 열망은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어쩌면 그것이 ‘무화된’ 영혼의 ‘평안’을 흐트러뜨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명상은 사랑의 완성이고, 정적주의는 모든 사랑에 대한 배척이다. 실제로 그것은 이기주의의 전형이니, 정적주의자는 그 자신의 껍질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믿음과 그리스도인다운 덕으로써 극복하라신 삶의 모든 고통스러운 실상들을 모르쇠하기[필사주: 모르쇠? 오타? 아니면?] 위하여 자기 자신을 무디게 하는 까닭이다.
정적주의자의 ‘기도’는 정신과 의지가 전혀 생기 없이 죽어 있기 때문에 도무지 기도가 못 된다. 말하자면, 분심과 유혹의 지속적인 흐름이 그들에게 온통 쏟아져 내리도록 방치해 둔 채, 하느님 또는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하여 의식 있는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런 현상들에 맞서 나가려 애쓰는 흔적이라고는 추호도 없이 그들은 철저하게 무위도식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의 명상이 하느님에 대한 어떠한 사랑이나 열망도 없이 전적인 공허 또는 단지 영적 혼돈일 것 같으면, 그러면 그것은 그대가 명상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큰 시련을 겪을 때와 마찬가지로 명상을 시작할 때에도 하느님에 대한 열망과 자각은 너무도 깊고, 지극히 소리 없고, 아주 희미한 어떤 것이어서 그런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도대체가 어렵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라. 아무튼 그저 슬쩍 보기만 해도 그런 것들이 거기 있다고 하는 사실을 그대에게 충분히 말해 줄 수가 있다. 실상 참된 명상자는 그가 하느님에 대한 열망 없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그 사실로 하여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그의 그러한 열망을 증거해 준다. 이러한 고통 자체가 흔히는 주부적 사랑의 행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명상은 그가, 자기 기도가 절망적이게도 알속 없고 무익하고 난삽한 것이 아니가 하고 두릴 때조차 그가 하느님을 그려 번뇌하는 바로 그 강렬함으로 하여 그 자신이 느끼는 그런 두려움과는 대당된다. 그대가 만일 그러한 번뇌와 그리움을 느낄 때, 그대는 정적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해 하라. 사랑과 겸손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으라. 그러면 그대는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하니 그대가 묵상하고, 행함과 열정을 낳는 일이 실제로 불가능해졌을 때 정적주의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대 자신 억지로라도 그와 같은 일들을 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생각은 하지를 말라. 그렇게 하는 것은 도리어, 지금까지 설명되어 내려온 명상의 표징이 그대 안에서 검증될진대, 하느님이 그대 영혼 안에서 하시는 일에 치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기다리며 쓸쓸함과 고독과 메마름과 번뇌에 휩싸인 그대로 있는 것에 만족하라. 고난의 밤에 그분께 대한 그대의 말 못할 그리움은 그대의 가장 감동 깊은 기도가 될 것이고 그대에게, 그리고 교회에 훨씬 더 값질 것이며, 지성이나 상상력이 가장 높은 자연적 단계에로 고양된 것보다도 더한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하느님은 이때에도 그대의 지력과 의지를 그분의 성령과 더불은 일치 속에 초자연적 활동의 지고의 완성에로 들어 높이시기 위하여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라. 그대의 영혼 안에 그분의 지혜를 부어 주심으로써 그분은 그분 사랑의 가장 위대한 일을 완성해 나가시며, 그대 안에다 육화 하신 말씀,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을 꼴 짓고 계시며, 그대가 그분 안에서 변화되고 높여진 그대의 자유 의지를 매개로 그분께서 완성하시도록 내어 맡긴 모든 것들을 통하여 그분의 교회를 완전에로 이끌고 계시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의 첫 열매들을 맛본 그대여, 그분을 찬양하라. 그분께 영광을 노래 불러 드려라. 그리고 그대 영혼 안에서 그분의 위대하신 일을 계속 이루어 주시도록 그분께 기도 드려라. 스스로가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모든 근심으로부터 그대 자신 돌아서라. 그분을 위하여 큰일들을 성취해 내려고 걱정하거나 조급해 하지 말라. 그분이 그대를 순명과 사랑과 그분의 섭리가 이끄시는 사건들로써 손수 이끄실 때까지 말이다. 또한 그분이 그대를 위해 계획하셨던, 그리고 그분 사랑의 불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대를 도구로 쓰실 때 매개로 삼을 사건들을 떠맡고자 하여 걱정하거나 조급해 하지도 말라.
이것은 세상 세력들이 짐짓 승리한 것 같아 보이는 순간에 그것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마련된 그분 사랑의 위대한 행업이다. 이것은 눈에 띄지 않는, 약하고 이름 없는 뭇 갑남 을녀,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멸시당하며 아무짝에도 쓸 데 없다고 내팽개쳐진 그리스도인들, 즉 감옥과 강제 수용소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 폭격 당한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굶주리는 여인들, 노동자들, 가난한 농사꾼들, 겸비한 사제들, 수도회 수녀들, 검박한 수사들, 가정 주부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게서조차 행해질 사랑의 위대한 행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마지막 날에 가서 이러한 영혼들 안에다가 세상의 주인들의 영혼들 안에서 싸늘히 식어버린 사랑을 되돌릴 커다란 자비의 불을 환히 밝히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범접할 수 없는 빛으로 당신 아드님과 함께 사시는 아버지시며, 사랑을 빚으시는 분이시여, 우리 영혼 안에 성령의 일곱 선물을 보내 주소서. 죄에서는 물론이고 지상에서 얻은 모든 덧없는 지혜에서도 우리의 정신을 깨끗이 하여 주소서.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단순하고 참되이 당신의 지극한 성지 聖志를 유순히 따르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 아드님 예수의 빛이 우리의 삶 속에서 밝게 비추게 되고, 당신께 영광을 들릴 수 있게 하소서.
Veni Domine Jesu! Amen.
옮긴이의 말
<명상의 씨>, <칠층산>, <동서 관상>, <마음의 기도>, <그는 다시 살아나다>, <침묵 속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가장 완전한 기도> (시편으로 바치는 기도) 등의 책으로 우리와 친근해진 토마스 머튼은 이번에 또다시 <명상이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명상을 단지 저 관상 수도원에 있는 수도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삶의 참된 가치와 행복을 일깨워 주고 성덕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명상을 사람들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고 평신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명상이 우리 신자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 중의 하나임을 깊이 깨우쳐 주고 있다. 또한 우리가 항성 어렵고 멀게만 느끼고 있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생활을 보다 쉽게 우리의 영성 안에 꽃 피울 수 있도록 해주고 있으며, 이 책을 통해서 한층 더 ‘명상의 길’에 가까이 들어서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적지 않은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위기 중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는 인간 정신의 위기, 가치관의 위기이다.
잠시 우리의 주위에 깔려 있는 어두운 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결혼한지 몇 년, 아니 수십 년이 지나고 그 동안 육체는 수없이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한 번도 진실하게 만나 보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불행은 이들의 마음 안에 서로가 만나려고 하는 열의가 도무지 없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가정이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간에 진실을 바탕으로 한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문한다. “마음은 만나서 대체 무엇 합니까?”
냉정과 탐욕과 태만, 물질주의와 감각주의에 물든 이기심에서 발로된 정신의 위기라 아니할 수 없다.
부모 자식간은 어떠한가? 일반적인 강요와 수동적인 불평의 연속 관계 속에서 몸은 한집안 안에 같이 살고 있지만 마음은 멀리 떨어져 가족 상호간의 이해도 없고, 사랑스런 대화나 만남도 없이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불행한 가정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이 밖에도 웃사람과 아랫사람들간에, 스승과 제자, 동료들간에 진실한 인간 관계와 내가 네가 되어 주는 고상한 희열이 없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의지는 모두 쾌락의 옥수 獄囚, 욕망의 포로가 되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에만 깊이 치중되어 있다.
결국, 사람들은 사랑을 통해서 마음이 만나는 일을 맨 뒤로 미루고 있으며, 너와 나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진리를 모르고 있다. 언제까지나 자기 안에 폐쇄된 채로 남아서 눈에 보이는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성취해 가는 일에만 급급하다. 한번 이렇게 길이 잘못 들면 세상 일에 더욱 안달하여 결국 허망의 옥수가 되고 스스로 중 重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의 노예가 되어 삶의 조화를 잃고 만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가치관의 혼란과 잘살아야 한다는 본연의 의미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법과 폭력이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고,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계 앞에 노예가 되었다. 신성하도록 불림받은 인간은 기계 문명의 발전에 자신의 인권이 짓밟히고 있으며 경제 성장이란 호화스런 이름 아래 끊임없는 착취와 유린을 당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기쁨을 찾고, 초자연적 열망을 갖기 보다는 육신의 향락과 세상적 부 富를 더 추구해 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비뚤어진 인간 정신과 가치관은 하느님과의 관계까지 그릇되게 오염시켜 가고 있다. 즉, 세상의 바깥 일들, 육에 즐거운 것들, 의지에 맛스러운 것들과 맘껏 어울리면서 적당히 신앙 생활하다가 천당에만 가면 된다고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과의 일치된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다손 치더라도 일상 日常의 맨 끝으로 밀려나고 만다. 기도와 성사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열망보다는 오히려 바깥 활동에 더욱 편중되어서 공로 많이 쌓아 상 많이 받으려는 마음으로 영혼은 고요할 틈이 없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 없이 하는 외적 활동은 결실을 제대로 맺지 못한다. 우리의 의지를 깡그리 떼어 하느님과 일치되었을 때 나오는 활동만이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이웃에게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우리의 수많은 활동이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 기도와 묵상 그리고 명상 안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뤄 가는 일이다.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그 자체가 곧 인간에게 큰 기쁨이며, 하나의 커다란 힘이기 때문이다.
부부, 가족, 이웃이 사랑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나눠 가질 때, 다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 되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참된 인격이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충족되는 길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일이니, 이것이 덕 德을 쌓는 어떤 사업보다도, 무슨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할 일임을 깊이 깨치자!
명상은 곧 하느님과의 합일 合一, 그리고 이웃과의 깊은 일치로 가는 사랑의 길이다.
혹자는 현대인들을 평하기를 ‘활동’이라는 큰 병에 걸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술기운이 떨어지면 허전하고 공허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현대인들은 활동이라는 중독에 걸려서 활동을 멈추면 안정을 못한다. 혹시나 고요한 시간이 주어지면 그 시간마저도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듣는 데 쓰기 위해 안달을 한다. 자신을 고요와 침묵 속에 잠심하도록 가만히 두지를 못한다. 어둠을 통해 스며드는 내적 고독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명상 속에 잠겨 넉넉한 기쁨을 맛본 사람은 지상에서 이보다 더 인간을 행복하게, 평화롭게 해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리라.
두 마음이 서로 만나 ‘하나’를 이룰 때 그 이상의 큰 기쁨이 없듯이 명상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함과 완전성에 일치하여 ‘하나’를 이룰 때 인간은 거기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지 않게 된다. 바로 이것이 명상의 최고의 희열이다.
고요히 명상 속에 잠기어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활동 세계 안에서 명상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이들이 아무런 수확을 내지 못하는 쓸모 없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모순의 톱니바퀴에 물려 광기로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묵묵히 바로잡아 주는 사람들이며, 교회의 핵심적 역할을 다하고 있는 기도의 사람들이다.
고요히 명상 속에 잠겨 있는 그 자체가 하나의 큰 기도이며, 하느님께 큰 영광을 드리는 일이다. 또한 외적 활동으로만 가득 차 잇는 세상을 향해서 창조주의 위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큰 전교 傳敎이다. 겉으로는 무용지물로 보이는 이들이 실제로는 예수님의 구원 역사의 참 증인 되고 있으며 이 땅의 교회에 가장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다 주고 있다.
명상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계와 교회를 자신의 마음 안에 온전히 깊이 포용하여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있다. 명상의 침묵은 하느님과의 교제일 뿐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이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우리의 하느님과 일치되어 세계의 구원과 교회의 풍요를 위해 어서 명상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 모두는 이 사랑, 이 행복 안에 살자. 그리스도의 사랑, 명상 안에 살 때 우리는 참으로 적나라하게 노출된 자신을 보고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마침내 참 가치를 띠게 되는 곳은 이 사랑뿐이다.
명상은 성령의 활동이다. 우리가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과 깊이 일치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 안에 당신의 힘과 은총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의 활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성령이 오시도록 할 수가 없다. 마치 마술사가 주문을 외어 무슨 귀신을 부르듯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열심히 부른다고 오시는 성령이 아니다.
그분은 당신을 열망하는 순수하고 조찰한 영혼에게 스스로 나타내 보이신다. 성령은 가장 인간적인 방법 속에서 자연스럽고, 아주 평화스럽게 임하시며, 오직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신뢰와 단순한 신앙으로 당신을 찾는 목마른 영혼을 단비처럼 적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분의 사랑에 동의하며 영접하는 것뿐이다.
성령은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신다. 더욱이 불화를 이루고 분열된 곳에는 근처도 가지 않으신다. 오직 조용하고 고요한 기질 안에서 당신을 진실히 갈망하는 영혼에게 소리 없이 다가오시는 분이시며, 성급하고 시끄러운 군상들 속에서는 그만 사라져 버리시는 분이다.
성령께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과의 친교를 갈망하며 인내로이 고요하게 기다리자. 성령이 오시는 길 가운데 이보다 더 빠른 지름길은 없다. 분주하고 산란한 마음을 극복하고 그대 삶의 한가운데에 고요히 머물러 있어라.
오늘날 우리 주위에 그릇되이 가고 있는 일부 성령쇄신 운동을 바로잡는 가장 좋은 지름길은 깊은 명상 안에 잠기는 일이다. 실제로 내적 심연을 살펴 고요히 명상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이 가장 좋은 성령 쇄신 운동이다.
어서 고요히 성령 안에 잠기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1 베드 1, 16).
우리 각자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불림을 받았다.
오늘날과 같이 내적 공허함과 영성의 메마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거룩한 사람을 목말라하고 있다.
거룩한 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그는 우리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며, 그의 삶에 반영된 빛은 우리의 굶주림과 공허를 메꿔 주기에 넉넉할 것이다. 주위의 거룩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분망히 찾아 다니기보다는 나 자신이 한 사람의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수련의 길이 훨씬 더 안전하고 지혜로운 길이다.
거룩한 사람이란 활동을 통해서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성사 안에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성서와 기도, 묵상, 명상 안에 그리고 고백과 성체 성사 안에 거룩한 사람이 되는 참된 길이 있으며, 이 안에 우리 영혼이 먹고 성장할 온갖 자양분이 다 들어있다. 이 자양분을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신앙 생활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한 거룩한 사람은 끊임없이 ‘회개’하는 사람이며, 꾸준히 자신을 ‘정화’시켜 가는 사람이다.
거룩한 한 사람의 힘은 지옥 전체의 힘보다도 그 힘이 더 세다 (토마스 머튼).
이 책의 저자 토마스 머튼은 <명상의 씨> 서문에서 한국 사람 (동양인)은 선천적으로 명상의 기질을 타고 난 사람들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문화 형성의 배경과 기반은 명상과 평화 그리고 소박한 생활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아마도 서양 문명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우리의 소박한 명상의 기질이 점점 파괴되기 시작했다.
서양 문명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많이 가져다 주는 그 이면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음을 우리는 보고 깨달아야 한다.
서양에서부터 그리스도교가 우리에게 전해질 때 그리스도교의활동적인 면만 너무 강조되어 전해졌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이처럼 활동적이고 외적인 면에만 깊이 빠져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그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면은 신비적, 내면적인 측면이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람들 안에서 신비적이고 명상적인 측면이 점점 상실돼 가는 것을 보고 있으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적, 명상적 측면 속에 생생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사랑 없이 활동적인 측면으로만 나간다면 그 활동은 아무런 가치도 결실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활동이 활동하는 만큼의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과 일치된 생활이 그만큼 요구된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동양에서부터 서양으로 번해졌으며 서양에서 다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서양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깊이 토착화 土着化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외형적인 의상이나 언어, 노래 등의 외부적인 적응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토착화는 바로 우리의 내면 세계 內面 世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타고 난 기질을 지닌 우리가 ‘명상의 길’ 안으로 들어설 때 성령께서는 보다 깊이 그리스도교와 호흡하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도록 우리를 토착화의 길로 잘 이끌어 주실 것이다.
역자가 이곳 서양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생활해 가며 느끼고 있는 신기한 사실 하나는 서양에서 수련받고 있는 나 자신이 서양화되어 가기는커녕 점점 동양인으로, 보다 한국인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의 느낌은 은근히 놀라웁고 홀로의 기쁨이 되고 있다.
사실 수도 생활도 알고 보니 동양에서부터 서양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동양 東洋 과 서양 西洋을 초월하시는 분이며 이 둘을 조화 있게 잘 일치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명상의 전부 全部이며 하느님의 내적 생명은 완전한 명상의 산실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본래의 우리가 되는 길도 오로지 사랑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쉽게 명상 속으로 잠길 수 있는 길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다. 영성체 후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깊이 일치할 때 이보다 더 좋은 명상의 시간은 없을 것이다.
역자가 이 기회에 독자들에게 한 가지 고백한다면,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해 나가면서 닥쳐 오는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그리고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는 내적 힘은 성체를 통해서 얻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 일과 중에서 나에게 행복감과 위로와 은은한 기쁨을 안겨 주는 시간은 미사가 끝난 후 내 독방에 돌아와서 영성체에 대한 감사 기도를 바치며 그분의 무한한 사랑 속에 깊이 잠길 때이다.
예수님은 곧 명상의 길 그 자체이시다. 우리 모두 눈은 깨끗하게, 귀는 고요하게, 마음은 잔잔하게 보존하여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 품으로 고요히 스며들자.
그래도 명상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고, 더구나 명상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그대여! 먼저 마음을 비우고 단순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공기로 숨쉬는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무는 법부터 배워라.
그대가 정신의 분산을 극복하고 고요히 그대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명상의 빛은 그대 영혼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 그대는 이 빛 안에서 세상의 거짓과 허무를 분명히 보게 될 것이며 동시에 진리를 정확히 보고 깨닫게 될 것이다.
조금씩, 한 걸음씩 명상의 길로 다가가자. 명상의 길은 멀고도 가까우니 성급해 하지 말고 오직 명상 속으로 잠기려는 열망만 가지자.
비록 명상으로 가는 길이 어둡고 고독하더라도 우리가 명상의 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틀림없이, 꼭 하느님께서 친히 그 뜨거운 사랑의 불꽃을 당겨주실 것이다.
명상에 맛들이면서부터 우리는 일상 생활 안에서 항상 명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길을 가거나, 버스를 기다리거나, 전철을 타고 있을 때나, 일할 때나,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온종일 명상 속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다.
명상 속에 잇는 사람은 명상이 우리의 내면 생활에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저절로 깨치리라.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샘솟게 하는 명상!
하느님과 우리를 완전한 하나로 일치시켜 주는 명상!
우리의 고달픈 영혼에게 끊임없이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명상!
우리의 가슴속에 명상의 불꽃을 피워 명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싸워 이 기도의 시간을 얻어 내야 한다.
밥 한술 덜 먹고, 잠 한숨 덜 자더라도 이 기도의 시간을 떼어 내야 한다.
기도와 묵상, 그리고 참된 명상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명상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것, 우리의 이웃,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을 찾아내자.
가장 위대한 명상가이신 성모 마리아여, 우리를 참된 명상의 길로 인도해 주소서.
1985년 12월
미국 제네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옮긴이
명상이란 무엇인가?
1986년 3월 14일 교회 인가
1986년 11월 20일 초판 펴냄
1998년 4월 8일 3판 4쇄 펴냄
펴낸이 김수환
펴낸곳 가톨릭 출판사
값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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