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기간 (1925~1928)
청원기(1925~1926)
헬레나가 입회한 자비의 성모회 수녀회는 프랑스의 라발에서 시작한 수도회로서 1818년 데레사 롱도 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회가 폴란드에 들어온 것은 1862년 에바술코프스카 포토츠카에 의해서였다. 이 수도회의 가장 중심 되는 영성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특별한 사업이 문제 여성의 재활이었고, 주요 특징으로는 수도회의 수호자이신 자비의 어머니시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으로서, 이를 사도적 활동의 정신으로 삼고 있었다. 1862년까지만 해도 이 수도회는 두 가지의 활동, 즉 교육과 봉사 사도직에 주력하고 있었다. 교육활동으로는 여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르치는 일을 했고, 봉사활동으로는 수녀원 내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기도, 희생, 고행을 하였는데 헬레나는 이 봉사 분야에서 일하였다. 헬레나는 입회한 지 3주쯤 ;되었을 때 수녀원을 떠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러 조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기도할 시간이 적어 보다 엄격한 수도원을 찾고자 했다. 어느 날 밤, 헬레나는 자신의 결심을 원장 수녀에게 말하려고 했으나 하느님의 섭리 때문인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수녀원 성당은 수녀들이 거처하는 곳과는 별도의 건물이었기 때문에 수녀들이 살고 있는 공간 내에도 조그마한 방에 성체가 모셔져 있었다. 수녀들은 그곳을 ‘소성당’이라 불렀다. 헬레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이 소성당에 가서 하느님의 뜻을 여쭈며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불안감에만 휩싸였다. 그래서 다음날 미사가 끝나면 원장 수녀를 찾아가 자기 결심을 말하리라 마음먹었다. 수녀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불은 이미 꺼졌다. 그러나 헬레나는 고뇌와 불안에 잠긴 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침실 마루에다 얼굴을 대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때 갑자기 침실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침대 커튼에 예수님의 슬프디 슬픈 얼굴이 비쳐졌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상처가 있었고 흐르는 눈물이 흰 침대보를 적셨다. 헬레나는 영문을 몰라 “주님, 누구 때문에 그리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네가 수녀원을 떠나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바로 이곳이지 다른 어떤 곳도 아니다. 나는 너에게 내릴 많은 은총을 준비하여 놓았다”(19) 이 말씀에 깊이 감동한 헬레나는 주님께 용서를 청하며 그곳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이튿날 헬레나는 고해신부에게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고백했다. 사제는 이 수녀원에서 생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헬레나는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청원자인 헬레나는 앞으로 수도자로서 지녀야 할 영성수련과 의무를 익혀 나갔다. 헬레나는 먼저 주방 일을 맡았다. 그 외에 야네 바르키에네츠 원장 수녀의 방을 청소하고 원장 수녀가 병이 났을 때 간호하는 일 등을 맡았다. 여러해 동안 수도회 원장을 맡고 있던 바르키에네츠 수녀는 총장 대리까지 역임한 연로하고 경험이 풍부한 수녀로서 청원자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며 지도했는데 그녀는 헬레나를 영적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간단하고도 명쾌하게 평하였다. 헬레나는 내적으로 겪는 여러 갈등과 깊은 영적 열망, 그리고 생활양식의 변화 때문에 건강이 쇠약해졌다. 쇠약해진 헬레나의 모습에 놀란 장상은 두 수녀만이 살고 있는 스콜리무프로 보내어 쉬도록 했다. 그 집은 보호받아야 할 여성들을 위해 빌린 집으로서 바르샤바의 수녀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의 헬레나의 소임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헬레나는 그곳에 있으면서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튿날 밤에 그에 대한 답을 주셨는데, 헬레나가 연온 영혼에 대한 환시를 본 것도 바로 이때이다. 헬레나는 일기에 기록하라는 말씀을 듣고 그때 일어난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자신을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수호천사를 보고 난 다음 순간, 나는 불로 인해 연기가 자욱한 장소에 서 있음을 느꼈다. 그곳에서는 많은 영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애타게 기도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직 살아 있는 우리들만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들에게 타오르는 화염은 우리에게까지 닿지는 않았다. 나의 수호천사는 한동안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영혼들에게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우냐?”고 물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주님을 뵙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연옥 영혼들을 방문하시는 성모님을 보았는데 영혼들은 성모님을 ‘바다의 별’이라고 불렀다. 성모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계셨다. 내가 그들 몇몇과 더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수호천사는 이제 떠나자고 손짓하였다. 우리는 고통의 감옥을 벗어나면서 다음과 같은 내적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자비는 이것을 바라지 않지만 내 정의가 이를 요구하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고통 받는 영혼들과 더욱 가까워졌다(20).
수련기(1926~1928)
자비의 성모 수녀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문제 여성들을 위한 거대한 규모의 교육기관이 크라쿠프 라기에브니키에 있었다. 그 기관은 1890년 알렉산더 루보미르스키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성요셉을 수호성인으로 한 그 큰 건물은 과수원과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수녀들은 그 집을 ‘요셉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곳은 또한 미래에 자비의 성모 수녀회의 정식 회원이 될 수련자들의 수련소이기도 했다. 마지막 3개월의 청원기를 그곳에서 보낸 헬레나와 동료 청원자들은 수련기로 들어가기 위한 8일 피정을 마치고 1926년 4월 30일에 착복식을 하였다. 헬레나가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을 하느님께서 드러내신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이 계시의 순간에 헬레나에게 주어진 격렬한 고통은 잠시였지만 헬레나는 자기 앞날에 펼쳐질 사건을 그 짧은 순간에 깨닫게 되었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는 영혼 깊이 위로를 주셨다. 착복식 때 헬레나를 도와 주었던 클레멘스 부제 수녀는 헬레나로 하여금 빨리 옷을 입도록 하자, 실신한 것처럼 되어 버려 급히 약을 가지러 갔었다고 회상했다. 그 후 클레멘스 수년는 가끔 헬레나에게 세속을 떠나기 싫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냐고 장난스럽게 말하곤 했는데 헬레나가 세상을 떠난 뒤 클레멘스 수년는 이 사건이 단순한 실신이 아닌 그 이상의 것임을 깨달았다(22 참조) 헬레나는 착복식 때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새 수도명을 얻었다. 헬레나 코발스카에서 파우스티나 수녀 혹은 간단히 파우스티나 수녀로 불리게 되었다. ‘파우스티나(Faustina)’는 ‘행복’, 또는 ‘축복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자비의 성모 수녀회의 수련기간은 2년이다. 첫 해에는 묵상과 여러 가지 수련 생활을 통해 영성생활을 심화하고, 회헌을 공부하며 수도생활의 규칙뿐만 아니라, 서원과 덕의 실천, 특히 겸덕의 의미를 익힌다. 그리고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신앙의 근본원리를 공부한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 수련자는 어떤 정규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에 나가거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 이듬해에는 수도생활 및 영성생활을 공부하면서 선생수녀의 지도 하에 활동도 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이 수련자가 수녀회의 기준에 합당하다고 인정되면 일 년을 기한하고 첫서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유기서원을 종신서원 전까지 해마다 다섯 차례 갱신한다. 파우스티나 수녀의 수련장은 마가렛뜨 김부뜨 수녀였다. 그녀는 양순하고 겸손하며 기도생활에 열심했고 희생과 자기부정의 덕을 겸비한 모범적인 수녀였다. 그러나 두 달 후인 1926년 6월 20일 부터는 수련장이 마리아 요셉 브르조자 수녀로 바뀌었다. 이 수련장은 수련자들을 잘 양성하기 위해 프랑스의 라발에서 그가 속한 수도회의 정신을 익히고 돌아왔다. 이 수녀 역시 모범적인 수도자로서, 엄격하면서도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수녀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몇 가지 일화를 보면 수도생활을 출발한 당시에 이미 드러났던 파우스티나의 특별한 면을 볼 수 있다. 수련기중 일 년 반을 파우스티나와 함께 생활했던 레지나 자브로스카 수녀는 모든 수녀들이 한결같이 파우스티나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했다고 말한다. 파우스티나가 말을 할 때면 손짓을 많이 했는데 수녀들은 그러한 파우스티나를 일컬어 ‘변호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파우스티나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하느님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도 자세는 보는 이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엄위로움을 불러일으켰다. 레지나 수녀는 파우스티나와 함께 수녀원에 돌보고 있는 여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주방 소임을 했었는데 때로는 식량을 저장해 둔 지하 창고에서 늦게까지 일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소리내어 기도했고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 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어느 날에는 파우스티나가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입을 다물고 뛰어나갔는데 대화할 허락을 받지 않았었기에 급히 수련장 수녀를 찾아간 때문이었다. 플라치도 수녀도 파우스티나와 함께 주방일을 했는데 한번은 담당 수녀가 아파 눕게 되었다. 그래서 플라치도 수녀와 파우스티나는 서로 자기가 일을 하겠다고 다툰 적이 있었는데 이때 파우스티나가 얼른 “수녀님, 이러한 일로 거룩한 평화를 깨뜨리지 맙시다. 예수님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서만 일을 합시다” 하고 말하면서 양보했었다. 휴식시간이 되면 항상 생동감 넘치는 파우스티나 곁에 모두들 있고 싶어했고 수련자들은 “신학자에게 가자”라고 말하며 파우스티나를 찾았다. 파우스티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연옥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 주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말했다. 파우스티나에게는 야외에서 갖는 휴식 시간이 더 즐거웠다. 그럴 때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파우스티나는 손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오!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 주님께서 만드신 이 작품들이 너무나 신비스럽습니다!” 하고 외쳤다. 어는 날 휴식 시간에 파우스티나는 연못가에 앉아 곤충의 신비함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플라치도 수녀가 돌을 집어 물 위로 던졌는데 그로 인해 파우스티나의 얼굴과 머리에 진흙물이 튀었다. 그것을 본 수련장도 플라치도 수녀에게 흙이 묻은 파우스티나의 머리 수건을 그녀의 것과 바꾸어 쓰도록 명령했다. 파우스티나가 수련장에게 이 일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수련장이 자기 뜻을 굽히지 않자 파우스티나는 플라치도 수녀에게 “이 일이 수녀님께 얼마나 큰 희생인지를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위해 이 어려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할께요” 라고 조용히 말했다. 파우스티나는 수련기간 동안 주로 주방일을 했는데 솥이 너무 커서 마음대로 다룰 수 가 없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솥에서 물을 퍼내는 일이었다. 물을 퍼내려다가 쏟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파우스티나가 수련장 수녀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니 일을 하다보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나날이 악화되어가던 파우스티나는 어느 날 그 일을 일부러 피했다. 파우스티나가 평소에 자기 몸을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나 다른 수녀들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정오의 양심성찰 때 파우스티나는 자신의 몸이 너무 약한 것을 주님께 불평했다. 그때 이러한 말씀이 들렸다. “오늘부터는 쉽게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네게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날 저녁 파우스티나는 가장 먼저 그 큰 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솥을 쉽게 들어올려 한방울의 물까지도 다 쏟아 부었다. 파우스티나가 김이 나가도록 솥뚜껑을 열자 그곳에는 감자 대신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장미꽃 송이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꽃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파우스티나는 그러한 환시에 놀라 그 뜻을 알아들으려 애썼는데 그때 파우스티나는 주님의 이 같은 말씀에 의해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너의 힘든 일을 가장 아름다운 화관으로 만들어 그 향기가 내 옥좌에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때부터 파우스티나는 자신이 당번을 맡은 주간만이 아니라 다른 수녀가 당번을 맡고 있을 때에도 감자솥에서 물을 퍼내는 일을 즐겨하였다. 파우스티나는 이 일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흐뭇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뿐만 아니라 다른 힘든 일에서까지 열심히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하였다(65). 여기서 얻게 된 이 교훈은 그녀의 생활에 커다란 바탕이 되었고 중병에 걸려 있던 1937년 1월에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짓게 했다. 파우스티나에게 있어서 남을 위한 자비는 이미 그녀의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오 주님! 제 손이 자비로워지게 도와 주시고 선행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제 이웃에게 착한 일만 행하며 보다 어렵고 귀찮은 일은 제가 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제 발이 자비로워지도록 도와 주시어 제 이웃을 돕는 일을 서둘러 하게 하시고 제 자신의 피로와 나약을 이기도록 도와 주소서. 저의 진정한 휴식은 이웃을 돕는 봉사에 있나이다”(163)
암흑
수련기가 끝나갈 무렵 파우스티나에게 ‘암흑의 밤’인 영혼의 시련이 닥쳐왔다. 그 시련은 여섯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이때는 기도를 해도 기쁨이나 위로를 얻을 수 없었고 묵상도 무미건조하여 두려움만 쌓였다. 자신을 아무리 깊이 들여다 보아도 비참함밖에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함은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에 하느님 대전에서는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상태였다. 다만 부단히 하느님의 발아래 꿇어 자비를 간청할 따름이었다. 이 어려운 시기 동안에는 수련장 수녀의 격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한 내적 고통은 외부의 문제에까지 연루되기 시작했다. 그 문제들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고 사태가 점점 더 악화되어가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웠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여러 성인들에게 9일 기도를 바쳤지만 어려움은 더욱 심해져 갔다. 그러던 중 성녀 소화 데레사에게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데레사 성녀의 중재 기도를 열심히 했었으나 그후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것을 잊고 있었다. 소화 데레사에게 9일기도를 시작한 지 닷새째 되던 날, 그녀의 꿈에 데레사 성녀가 나타나 자신이 성녀임을 밝히지 않고 파우스티나를 위로하며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근심하지 말고 하느님을 더욱 신뢰하세요. 나도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파우스티나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제가 보기에는 전혀 고통을 느껴본 분 같지가 않은데요”라고 말하자 성녀는 자신도 심한 고통을 체험했노라고 말하면서 “수녀님, 사흘이 지나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고 행복감을 느낄거예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우스티나가 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자 그때 비로소 자신이 성녀임을 밝혔다. 파우스티나는 이 꿈의 끝부분에 대해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 순간 나는 마음에 큰 기쁨을 느끼며 당신이 성녀시냐고 물었다. 그녀는 “맞아요, 나는 성녀예요. 사흘 안에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니 이를 믿으세요” 하고 대답했다. “사랑하는 데레사 성녀여, 저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하고 물으니 “그럼요, 수녀님은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저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수녀님은 성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당신과 같은 성녀가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물론 그렇게 될 것이나 주 예수님을 신뢰할 줄 알아야 합니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도 천국에 갈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서는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하면서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꿈이다 속담에 의하면 환상이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자 데레사 성녀의 말대로 어려움이 쉽게 해결되었고 모든 것이 성녀의 말 그대로 되어졌다. 분명히 꿈이었지만 그 꿈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150).
파우스티나의 수련 둘째 해는 금방 다가왔다. 서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어떻게 서원을 할 수 있겠는가. 파우스티나는 읽고 있던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묵상도 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개도생활에 대해 만족하지 않으시리라는 생각이 들자 고뇌에 잠기게 되었다. 어느 날 하느님 대전에 앉아 있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배척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일어났다.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지옥의 영혼들이 당하는 고통을 겪는 듯했다. 오전 내내 이러한 암흑과 싸워야만 했다. 오후에는 결국 공포에 사로잡힌 채 탈진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한 수녀가 파우스티나의 방에 왔다가 이러한 상태에 놓인 파우스티나를 발견하고 급히 수련장에게 알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련장 수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거룩한 순명의 정신으로 일어나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때 땅에 쓰러져 있는 파우스티나를 어떤 힘이 즉시 일으켜 세웠다. 수련장 수녀는 친절한 어조로 이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이라고 말하면서 시련을 주시는 동안에도 역시 그분은 언제나 우리의 아버지이시니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말했다. 파우스티나는 저녁기도 때 또다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파우스티나는 예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복음서에서 자신을 가장 자애로운 어머니로 비유하신 주님,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생명이니,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 어떤 일이 제게 닥쳐 오더라도, 희망이 단절되더라도 주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제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으신 성모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다. 힘과 용기가 다시 솟았지만 하루뿐이었다. 파우스티나는 이러한 영신적 고통을 앞으로도 수없이 겪어야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24, 25 참조). 수련기간이 다 끝날 때가 되어도 파우스티나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몸까지 쇠진해졌다. 수련장 수녀는 모든 영신 수련을 면제시키고 간단한 화살기도로 대치하라고 말했다. 1928년 4월 16일 성금요일, 파우스티나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을 다신 사랑의 불꽃 속으로 집어 넣으셨다. 이것은 저녁기도 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고 무아지경에 빠졌다.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하셨는지 가르쳐 주셨다. 물론 잠시 동안이었다. 강한 열망,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났다(26).
1928년 4월 30일, 파우스티나는 동료 수련자들과 함게 첫서원을 했다. 그날 그녀는 주님께 온전한 사랑을 바치기 위해 가장 가까운 동료에게서조차도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를 주님게서 받아들여 주셨는지는 알지 못했다. 영혼의 암흑은 여섯 달 동안이나 더 계속되었다. 도움을 맏을 영적 지도자도 없었고 고해 신부에게서도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해 더욱 괴로웠다. 고해신부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위로보다 현재의 상태가 하느님께는 더욱 기쁨이 된다는 말로 위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상태가 거룩한 영혼들이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서 체험하는 영적생활의 한 단계로서의 암흑의 밤이라는 사실을 파우스티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지 못했다. 파우스티나는 첫 서원을 한 후 10월말까지 라기에브니키의 수련소에 머물렀다. 그동안 1928년 10월 6일에서 10일까지 그 수도회의 총회가 있었다. 파우스티나의 입회를 받아 들였던 마카엘 모라체프스카 수녀가 이때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미카엘 수녀는 파우스티나가 살아 있는 동안 가까이에서 파우스티나를 많이 지지해 준 장상으로서 그녀에게 많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