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ker time, crab feast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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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liday LIFE Kickers:   12월 들어서 처음, 우리들이 정기적으로 찾는 YMCA gym을 갔었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12월’의 냄새와 모습이 그대로 우리들에게 쏟아지는 듯 했다. TV같은 곳에서 그런 ‘너무 이른 요란함’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별 수 없이 미국 최대의 휴일의 공기를 안 마실 수가 없었다. decoration, light 각종 ‘최신’의 것들이 선을 보였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데 성공은 했지만 basketball court에 있는 indoor running track에서는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나의 gym routine이 30분 걷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데, 오늘 그곳에 가 보니.. 무언가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아~~~ 하는 한숨이 나오고.. 이것을 오랜 세월 잊고 살았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다. 오랜 전에는 ‘재수가 좋아서’ 이것을 보게 되었고 12월의 멋진 holiday 기분을 만끽하곤 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 어쩐 일인지 이 공연을 놓치고 살았던 것이다.

이것은 YMCA member중에서 대강 60대부터 80대까지의 ‘아줌마’들, 30명 정도가 모여서 이맘때면 공연을 하는 Kicker club인데, 주로 Christmas에 맞는 곡들에 맞추어서 30분 정도 dance를 하곤 한다. 물론 몇 개월 전부터 ‘맹연습’을 하는 것은 가끔 목격하곤 했다. 순전히 ‘재미와 사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춤 솜씨 같은 것은 큰 문제가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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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나 혼자 track을 걷기에 (연숙은 이제 100% 수영만 하게 되었다) 아깝게도 연숙은 못 보았지만 나는 이 ‘100% 백인 아줌마 (사실은 할머니지만)’들의 performance 전체를 running track에 서서 볼 수 있었다. Dancer들 숫자나 관객들 숫자가 거의 비슷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신나게 즐기며 춤을 추는지..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이들 공연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이들의 주 연령대가 70대 정도니까 나보다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Irish처럼 생긴 파란 눈의 white ladies.. 오랜 전의 미국의 모습과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이들이 몇 십 년 전에 이 땅의 ‘주인’들의 모습이었다고 할 것이다. 생각나는 것이 오랜 전에 없어진 화보잡지 LIFE magazine이었는데, 아마도 이들이 바로 LIFE generation이 아닐까? 이들만 해도 지금은 완전히 normal이 된 ‘깡패 같은‘ feminism같은 것에 ‘물들지’ 않았던 세대였을 것이고, 99% 가정주부들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분명히 white power를 만끽하며 살았을 것인데.. 지금은 어떨까? 앞을 보고 뒤를 보아도 UN 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종 인종이 득실거리는 YMCA gym에서 옛날을 얼마나 그리며 살고 있을까? 40년 전부터 미국을 보아왔던 것을 생각해도.. 참 이곳 미국, 많이 변했고, 그것도 지금은 더 무섭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놀라움까지 느낀다.

 

¶  Crabby Feast plus:   Thanksgiving Holiday가 끝나자 마자 마리에타 Y형 댁에서 우리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세시봉’ 그룹이 다시 모였다. Y형 댁은 작년에 큰 ‘喪상’을 당했던 관계로 2년 만에 방문을 하는 셈인가.. 그 동안 그 바쁜 중에도 수만 불짜리 kitchen remodeling 이 끝나고 pikapikagranite island가 위용을 자랑하고, custom made cabinetry가 초현대식 편리함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 집의 old clucky 한 것들을 비교하면 조금 기분이 쳐지긴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우리의 현재 더 중요한  value는 이런 것들 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역시.. 우리도 저런 것들을 가지고 싶은 바람이 없다고 하면 솔직하지 못할 것이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2014-11-29 18.25.54-1이날 정말 과장을 해서 ‘수십 년’ 만에 배가 터지도록 humongous Alaskan king crab을 포식을 하게 되었다. ‘옛날’ cash가 풍성하던 시절에는 가끔 이것을 사다가 집에서 즐긴 기억이 있었고, 심심치 않게 seafood restaurant에서 온 가족들이 먹기도 했다. 이날의 king crab은 정말로 king다운 큰 놈들이었는데 seafood wholesaler에서 직접 사온 것이라고 했다. 이것들과 맛있는 wine이 곁들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덕분에 오랜만에 취한 기분을 느끼는 저녁이 되었다.

오랜 만에 간 이곳에서 kitchen remodeling만이 아닌 다른 것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home music studio라고나 할까.. 최신 digital technology를 총 동원한 amateur music production system 이었다. 모든 것들이 excess로 치닫는 근래의 사회풍조인가.. 모자람 없이 모든 것들이 ‘사치’쪽으로 흐르는가? 돈과 시간이 넘쳐흐르는 ‘적지 않은’ 60대들은 보기에도 행복하게 보인다. 젊은 시절보다 더 짜릿한 ‘자극’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새로 악기를 배우는 것이 있는데 이 집주인은 saxophone에 심취되어서 배운지 불과 몇 년 만에 이제는 거의 수준급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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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 없이 불던 saxophone은 조금 dry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 장만한 이 home studio는 우선 값이 $1500에 달하는 ‘준’ 프로 급’으로 거의 완전한 background sound  (karaoke sound)를 갖추고 있다. 10000여 곡을 저장하고 있는 software와 4 channel audio mixer, usb amplifier, Bose portable speaker.. 이것을 써서 ‘live’ saxophone연주를 ‘눈 감고’ 들으면 어느 full-sound Cafe에 온 느낌을 준다. 나에게는 ‘그림의 떡‘ 으로 보이지만, 생각한다.. 조금 더 머리를 쓰면 1/3정도의 가격으로 비슷한 성능의 gear를 장만할 수 있지 않을까.. 백일몽일지도 모르지만.. 생각하는 것은 cash가 필요 없으니까..

 

my first Kindle book
my first Kindle book

¶ My first ever ‘Kindle book   Kindle.. Kindle book..  이 말도 꽤 오랜 전부터 들었고 Amazon.com에 가보면 항상 눈에 뜨이는 것이다. electronic book의 ‘한 종류’라고 하지만 지금은 한 종류가 아니라 그것 electronic book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 느낌이다. 며칠 전 처음으로 kindle book title하나를 $5 정도에 구매를 하였다. 종이 책은 $12 정도니까.. $7 save한 것인가? Kindle은 순전히 software format이지만 Amazon.com의 hardware Kindle tablet 과 짝을 이루면서 이렇게 electronic book의 champion format이 되었다.

여기의 ‘교훈 lesson’은 역시 Apple Company, Steve Jobs의 철학.. software/hardware의 ‘완전한 지배, 장악, control’ 이라고 할 것이다. Microsoft의 모든 ‘문제’는 hardware를 ‘지배’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것이 납득이 간다. ‘옛날’에는 사실 software와 hardware는 완전히 ‘다른 장사’의 영역이었고.. 그것은 거의 gentlemen’s agreement 같은 불문율이었는데.. 완전한 profit, control crazy monster Apple company (사실은 Steve Jobs’)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후로, 그들, Steve Jobs’ Apple의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profit을 보고 침을 흘리며 모든 사람들을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 떼돈을 벌려면 software/hardware가 완전히 ‘붙어버린’ whole system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kindle book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버금가는 ‘책’의 역사는 ‘변함 없는’ 종이역사였지만 그 오랜 역사가 ‘느리지만 무섭게’ 변하고 있다. 종이가 없어지는 역사인 것이다. 종이 책과 ‘전자’ 책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analog와 digital의 차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간단하고, 성의가 없는 대답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대답이 정답이다. ‘부드러운 느낌의 analog’와 ‘명암이 뚜렷한 차가운 digital’의 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부드러운 analog 촉감의 종이 책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제공하려는 노력을 한 것이 바로 Amazon.com의 Kindle book이다. 근래 수많은 ‘종이 책’들이 Kindle option을 주고 있고, 종이 책보다 항상 싼 값이다. 구매 즉시 download를 받을 수 있고 이제는 PC나 Smartphone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Kindle hardware tablet 이 없어서 PC에서나 읽을 수 있지만 대부분 시간을 desktop PC에서 보내고 있는 관계로 이것이 나에게는 최적의 solution이다. 하지만 ‘화장실’ 에서 이 ‘책’을 볼 수가 없는 것은 분명히 아쉽고, 따뜻한 아랫목 (전기장판)에 누워서 볼 수 없기에 역시 digital은 차게만 느껴진다.

 

¶  Candle Reflections:   Candle, 초, 양초, 촛불.. 우연히 나의 주변에서 ‘초, 촛불’이 눈에 뜨임을 느끼게 되었다. 눈에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 ‘가슴으로 보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기에 이렇게 초와 촛불이 ‘나의 눈에 보였다’ 는 사실이 나에게는 대견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촛불이 보이는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인가? 나는 이것이 나에게 전보다 가슴이 조금 더 열렸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나 둘씩 초와 촛불이 주변에 늘어나고, 날씨가 싸늘해지면서 그것들의 느낌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성당에 가도 제일먼저 하는 일도 촛불을 켜는 것이고, 요새같이 대림절이 되면 4개의 초가 하나 둘씩 켜져 가는 것을 보게 되며 그 의미도 생각하게 되고, 나의 서재에도 초의 숫자가 더욱 늘어난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soothing candles' light & aroma

soothing candles’ light & aroma, my desk

이와 더불어 반세기 전의 추억을 더듬기도 한다. 6.25 (a.k.a. Korean War)가 끝난 후에 대한민국에서 산 사람들이면 서울이나 지방, 시골이나 거의 예외 없이 겪었어야 했던 ‘전기부족’.. 제한 송전 등으로 ‘초’는 100% 필수품이었음을 알 것이다. 낮은 물론이고 저녁, 밤에도 정기적으로 전기가 나갔다. 낮에 전기가 나가는 것은 가정집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가전제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라디오’ 나 전기 다리미가 있었지만 낮에 하는 방송은 거의 없었고 당시에는 battery radio가 흔해서 (군수품) 전기가 필요 없었다. 문제는 밤인데.. 가족이 모두 모인 때 전기불이 없으면 초를 켜야 하고 그것으로 제대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은 어두울 때에도 밖에 나가서 놀거나, 대부분 일찍 자는 수 밖에 없었다.

조그만 방에 초를 한 개 켜놓으면 그 주변에 모두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숙제도 하곤 했는데..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오손도손’한 가족의 따뜻함을 촛불과 함께 나누던 시절이었다. 특히 겨울에는 방 한가운데 ‘화로’를 놓고 무언가 ‘구어 먹으면’ 그 정취는 지금 도저히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1960년대가 되어서 전기사정이 좋아져 ‘촛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살 때는 아주 가끔 날씨관계로 정전이 되면 ‘혹시’ 초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너무나 편리한’ flash light들이 있어서 역시 초를 볼 기회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희한하게도 ‘신앙, 종교’적 연계로 촛불이 포근하게 나에게 다가온 것..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올 겨울에는 유별나게 촛불을 키고 촛불을 바라보며 ‘회상, 명상’을 하고 싶어 진다.

Fleeing for freedom

탈북자 박연미 양

Fleeing for freedom.. 아주 오래 전,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했던 표현.. ‘자유를 찾아서‘.. 여기서 이런 표현을 쓴 사람은 ‘박연미‘라는 젊은 ‘탈북자’ 여성이다. 탈북자들의 이야기들은 이제 아주 흔하게 들을 수 있고 인터넷의 도움으로 널리 알려지게도 되었다. 이제는 지리적으로 너무나 먼 느낌이 들어서 피부로 느껴지는 정도는 미미해졌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참 슬픈 이야기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이런 강도집단들이 21세기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심정 뿐인 것이다. 도대체 UN이란 국제단체는 왜 만들어 놓은 것인가? 이런 강도집단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UN군의 개입이 아니던가? 이런 휴전선 바로 넘어서 역사상 유례없는 Kafka 의 연극이 재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남쪽의 ‘주사파와 좌파’의 인간들.. 어떻게 밥이 목으로 넘어가는가?

박연미 양의 슬픈 이야기도 역시 인호형의 email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은퇴자들의 잡담’ 정도로 생각을 했지만 조금씩 자세히 내용을 알아가고 보니.. 이것은 ‘큰 뉴스’ 감에 속했다. ONE YOUNG WORLD라는 국제 젊은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본인 자신이 ‘영어’로 폭로를 한 북한의 실상이었다. 처음에는 보내진 YOUTUBE의 VIDEO를 보았고 나중에 그녀가 참석한 국제회의를 찾아서 그곳에 발표된 그녀의 blog을 보게 되었다. 그 국제회의는 18세부터 30세까지의 전세계의 ‘지도자 급’ 젊은이들이 초청을 받고 모인 명망이 있는 회의였다. 비록 역사는 4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young DAVOS (Davos World Economic Forum)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권위를 자랑한다고 한다. 2년 전에는 미국의 Pittsburg에서 열렸는데 그 당시에는 미국의 전 대통령 Bill Clinton이 초청연사였고 올해 Dublin, Ireland회의에는 전 UN 사무총장이었던 Kofi Annan이 초청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어떻게 박연미 양이 ‘초청’이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현재 어느 나라에 속한 것도 궁금하지만 현재 나이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그녀가 폭로하는 북한의 참상, 실상은 comic할 정도로 믿기가 힘든 것들이지만 나는 그것들이 단편적일 수는 있어도 모두 사실이라고 믿는다. 충분히 그것이 가능한 ‘강도 집단 3대’ 가 북녘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연미 양이 국제사회에 눈물로 호소하는 골자는: 김씨 왕조 이야기를 그만 보도하고 탈북자, 강제노동의 참상 들을 보도 하고 그들을 ‘구해주자‘는 것이다. 이런 것에,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중국 짱께들은 도움이 거의 안 되는 듯하고 다음이 남녘에 있는 동포들이 아닌가? 쏟아지는 돈에 치여서 정신을 못 차리거나 북녘을 아직도 사모하고 있는 정신병자들이 지도자 층에 득실거리는 현재 사정으로 이곳도 거의 도움이 안 될 듯하다. 남은 곳은 역시 지구 반대쪽에서 그런대로 ‘객관적’인 눈을 가진 해외 동포들이 아닐까? 하지만 이곳 동포들 중에서 정신 나간 주사파, 좌파들이 득실거리기는 마찬가지니.. 과연 어떨까?

 

 

박연미 양의 ‘폭로’ speech, Oct. 2014, 더블린 아일랜드

Advent 2014

Scan10112-12014년 대림절이 시작된 첫 주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슬그머니’란 표현이 어찌 이렇게 잘 어울릴까… 요란하게 온 것이 아니고 ‘조용히’ 우리를 덮치듯 온 느낌인 것이다. 비교적 mild한 날씨와 더불어 오랜만에 평화스럽게 보이는 날이 되었다. 세속적, 저편으로는 Thanksgiving Holiday가 끝나자 마자 요란하게 ‘소비자를 유혹하는’ 각종 신조어로 표현되는 해괴한 날들이 도래하고.. Black Friday, Cyber Monday..(이 말들, 참 웃기지 않는가?) 를 기다리며 목을 매는 소비자 ‘우매한’ 대중들.. 머릿속은 온통 ‘물질’로 가득 차 있는 모양이다. 극과 극을 이루는 대림절 시기의 모습이다. 신부님은 이 시간을 ‘차분히, 딴 것들에 한눈 팔지 말고’ 지내라고 하지만 수도원에 있지 않는 한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대림 4주간을 상징하는 4개의 초.. 그 중에 첫 번째 초에 불이 붙었다. 대림 1주인 것이다. 올해 나는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낼 것인가 잠깐 생각을 해본다. 특별한 것이 있을까? 지나간 시절의 감사드릴 일은 며칠 전에 생각, 감사를 했고 이제는 ‘humanity의 희망‘이라는 구세주의 도래를 생각하는 것이 4주 간에 할 일일 것이다. 달력을 보니 4주 간..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세속에 사는 우리들.. 세속적인 것과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가, 마치 곡예를 하는 기분도 든다. 작년부터 나는 이런 균형 맞추는 일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노력을 한 결과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지내왔던 12월의 4주간 관습이 어찌 그렇게 쉽게 바뀔까 했지만 노력의 정도에 따라서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Scan10110-1앞 집 Winter family는 일주일 전에 벌써 holiday decoration을 장식하고 밤이 되면 휘황찬란한 light를 자랑하고 있다. 그 집이 독실한 Christian 인 것을 감안하면 나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비교적 젊은 가정으로 새로 난 baby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를 한다. 그는 분명히 차분한 쪽 보다는 축제의 쪽으로 12월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게 이른 Christmas light가 아닐까?  이런 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 집의 Christmas tree & light는 성탄 4일 전인 12월 21일에 하리라 결정을 해 버렸다. 분명히 ‘Christmas girl, 나라니’가 불평을 하겠지만 그것이 올바르고 알맞은 날일 듯 싶다.

올해도 예의 ‘five minutes with the Word‘라는 대림절 묵상 소책자가 Holy Family 본당에서 배부되었다. 몇 년 전부터 이것을 받고 읽고 하는데 ‘매일 말씀과 묵상’이 있는 것이지만 대림절에 맞추어 특별히 나온 것이라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우리 ‘한국 본당’을 중심으로 매일 말씀이 email로 보내지고 있고 그곳은 한국의 신부님들이 묵상이 실려 있지만 이곳에는 ‘영어 문화권’에 속한 말씀과 묵상들이라 읽는 기분이 아주 다르다.  매일 말씀 중에서 하나를 골라 (주로 복음) ‘해설과 묵상’을 하는 짧은 글인데 어떻게 그렇게 ‘잘’ 썼는지.. 감탄을 하곤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코 앞에 다가온 12월 성탄과 새해를 미리 그려본다.

Thanksgiving 2014

¶  Give Thanks,  Count my blessings..

이제야 이런 속어, 숙어들의 의미를 새로 생각하게 되는가..  올해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것에서 완전히 세속화 되었고 되고 있는 Thanksgiving Day 2014를 진정한 고마움을 느끼며 맞는다. 일에서 쉬고, 푸짐히 먹는 그런 날만이 아니고 피부로 느끼는 ‘고마움’의 기분이 가득한 그런 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왜 다른 해보다 더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올해는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 아닌 듯하다.

 예년에 비해 너무나 추운, 한겨울 같은 11월은 더욱 holiday의 분위기를 주어서 큰 불만은 없지만 다른 편으로 holiday blues의 가능성을 전혀 떨칠 수는 없다. Holiday = Family라는 등식의 의미를 생각하면 다른 차원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됨을 느낀다.  대가족에 대한 부러움이 더욱 커지는 이런 season에 이제는 우리보다 더 쓸쓸한 가족의 외로움에 동참하고 싶다.

 

Thanksgiving SongMary Chapin Carpenter

 

올해는 가족 역사상 ‘처음으로’ Thanksgiving Day Mass에 가 보았다. 이런 날 미사를 거르는 우리 가족의 전통이 근래 들어서 조금씩 부끄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가족전통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것이 올해는 얼음이 녹듯이 해결되었다. 전통적인 ‘장시간 터키 요리 준비’를 올해는 ‘단시간 Spanish seafood roasting’으로 바꾸어서 아침부터 음식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간 Holy Family Church 미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아마도 그들은 매년 왔던 ‘고정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Thanksgiving을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성찬의 전례, Eucharist‘가 있는 가톨릭 미사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시작하는 ‘추수감사절’은 예년에 비해서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Spanish seafood feast
Spanish seafood feast

올해의 feast menu는 ‘완전히’ 바뀐 것으로 ‘아이들 (두 딸)’이 합작으로 생각한 것으로 전통적인 turkey에서 seafood으로 바뀌고 준비시간도 크게 단축이 되고 따라서 energy소비도 격감이 되었다. 결과는 ‘먹어 보아야’ 알겠지만.. 우선 ‘맛 없을 수 있는’ turkey가 없는 것이 left-over를 먹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어서 마음도 가벼웠다. 올해는 ‘정신적 여유’가 조금 있으면 guest를 한 명 정도 부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역시 ‘여유가 없는 세월’에 채여서 실현을 할 수 없었다.

지나간 해, 세월에서 감사를 드릴 것은 가지 수로 따지면 많지 않지만 그 몇 가지에 대한 감사의 정도와 농도는 아마도 쉽게 글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진정으로 가슴으로 높은 저곳의 ‘누군가’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고 드리고 싶다. 나를 개인적으로 ‘사사건건’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어머니’.. 2007년부터 나를 보이게 안 보이게 인도해 주신 ‘그 어머니‘ 그리고 나를 항상 안쓰럽게만 바라보시는 어머님.. 나를 우리를 인도해 주신 것.. 첫 번째의 감사 대상이 아닐까. 특히 ‘하느님의 어머님’은 조금이라도 빗나가기만 하면 바른길로 잡아 주셨다. Holy Family CC에서 soul friend가 된 ‘한국말을 쓰는 자매님‘들.. 진정한 친구로서 서로를 격려하며 살았다. 오랜 가족의 숙원, 숙제를 큰 어려움 없이 풀어갈 수 있게 도와준 가족들, 높은 곳의 어머님들.. 감사합니다. 이제는 ‘오늘 죽어도’ 큰 고통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일년 열두 달.. 매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Eat Turkey, Become American..

Author, Marie Myung Ok Lee
Author, Marie Myung Ok Lee

어제 날자 New York Times PRIVATE LIVES Opinion Page에 조금은 익숙한 이름 Marie MYUNG-OK LEE라는 ‘한국 이름’의 저자가 쓴 글이 실렸는데 그 제목이 바로 Eat Turkey, Become American이었다. Thanksgiving Day 에 맞추어 어떤 Korean-American author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것인데, 생각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절의 얘기라 나의 관심을 끌었다.

글을 보니 ‘매끄러운 문제’여서 혹시 professional writer 가 아닐까 했더니 나의 짐작이 맞았다. ‘잘 나가는’ 저자였던 것이다. 저자는 한국인 부모를 둔 여성으로 어린 시절 집에서 Thanksgiving Day와 다른 ‘미국 명절’을 지내며 한국, 미국의 두 문화권을 살았던 이야기를 재치 있게 그렸는데, 그 시절은 한국전쟁 이후에서 시작되는 ‘오래 전’의 역사였다.

그녀, 저자의 아버님은 원래 의사였는데 한국전쟁 때 미군 장성의 통역관으로 일을 해서 미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가 1953년 경이니.. 휴전 할 당시일 것이다. 당시에는 아시아 이민의 길이 ‘전혀’ 없어서 올 수 있는 길은 모두 ‘임시 비자’에 의한, 그러니까 유학생 같은 것 뿐이었을 것이다. 임시 정착한 곳이 춥기로 유명한 미네소타 북부지역의 조그만 ‘의사가 거의 없는’ town이었고 그곳에서 자녀들이 태어났고 Thanksgiving Day같은 holiday를 turkey를 먹으며 ‘ 미국인처럼’ 살았다. 임시비자가 만료되어 이민국에서 출국명령을 받고 ‘위기’를 맞았지만 현지 congressman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받고 1965년 아시아계 이민이 개방되는 법으로 시민권을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알면 왜 그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한국에 대한 것을 잊게’ 하려는 노력을 했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1970년대 유학생들도 그런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국말을 ‘못 쓰게’한 가정도 많이 보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이 글의 저자가 겪는 문화갈등은 더 했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어린 시절 자기들이 ‘우주선을 타고 미국에’ 내렸다는 기분이었다고 했을까? 자기들의 ‘근본’을 모르고 자란 것이다. 가난하고 찌든 조국을 잊게 하려는 ‘의사 부모님’의 심정을 지금 이해하려면 조금 힘들지만 그런 시절을 나는 반 정도는 겪었기에 조금 쉽게 이해한다.

이 글을 읽으며 곁들여 생각나는 것 중에는 1970년대 유학생들이 ‘선배 유학생’들에게 들었던 ‘미국 개척사’들.. 50/60년대 유학생들의 이야기들.. 특히 이 글의 배경이 된 미네소타 북쪽의 맹 추위와 돈이 없어서 pet food를 먹었다는 이야기.. 김치와 쌀을 완전히 잊고 살았던 시절..나의 시절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특히 처음 보는 Thanksgiving Day culture는 당시에는 ‘100% 미국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기에 저자의 부모들이 그렇게 turkey 요리 준비에 신경을 썼던 것이 아닐까.. 참 오래 전의 ‘흘러간’ 이야기들이다.

경제대왕 숙종

얼마 전에 인호형의 email을 받았다. 예의 ‘김인호 컬럼’이 아닐까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한양대 명예교수 정기인 교수‘에 관한 것이었다. ‘국제무역 특히 상사(商事) 중재 분야의 국내전문가’라고 소개 된 이 정교수가 ‘대변신’을 해서 어떤 책을 출간한 것에 관한 소식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공인 경제와 다른 분야인 역사를 접목하고 거기다 ‘문학’ 장르를 감싼 그야말로 대 변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경제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어떤 역사를 경제인의 눈으로 본 것이라고 하면 큰 무리가 없을까 생각을 했다.

소개된 글에 의하면 정 교수는 아마도 조선기에도 ‘경제통’이 있었을까 연구를 한 후에 그 사람이 바로 조선 19대 왕 숙종이었고, 수많은 사화를 통해 피를 뿌린 정치 뒤에는 ‘거대한 새로운 화폐 경제‘의 창출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가 바로 조선 전역에서 화폐가 보편된 때라고 한다. 화폐가 있어야 가치가 나오고 경제적 발전이 온다고 한다. 또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정책’에 장희빈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정기인 명예교수 시사 talk 대담

 

나는 역사통도 아니고 경제통도 아니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이런 사실은 가능하다고 추측은 한다. 한가지 사건을 여러 쪽의 각도에서 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사극에서 본 것처럼 장희빈과 숙종의 이야기는 분명 흥미위주의 가느다란 각도로 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의문은 이 ‘소설’이 몇 percent가 fiction인가 하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명쾌한 답은 찾을 수가 없다. 그가 출연한 TV Talk Show에서도 그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에 그저 나는 아마도 ‘거의가’ 다 사실적, 역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저자인 정기인 교수는 “과거역사에서 음모술수와 권력투쟁, 전쟁으로만 묘사된 불건전하고 부끄러웠던 역사를 완전히 씻어냈다’고 자부를 했고, “전문가”로부터 “재미: 95점, 신지식: 100점,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치: 90점“을 받았다고 했다.

 

신간: 정기인 저, 경제대왕 숙종

신간: 정기인 저, 경제대왕 숙종

이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웠던 역사를 씻어냈다”고 하는 것은 어떤 뜻일지 조금 의아해진다. 역사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일지. 만약에 fiction으로 쓰여진 것이라면 그런 표현을 해도 되는 것인지.. 숙종의 “경제업적”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성과와 비교하는 표현도 흥미롭기만 하다. 

 


세계 최초의 『경제 역사 대하소설』

 

경제 대왕 숙종

숙종,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멸망한 조선을 경제대국으로 만들다

 

매일경제신문사 발행

 

노벨문학상에 도전하는 세계 최초의 ‘경제역사’소설!

-이제까지 역사소설은 음모술수, 권력투쟁, 전쟁뿐이었다-

-이제까지 노벨문학상작품들은 암울한 인권만 묘사했다-

-진정한 인권은 먹는 것과 전쟁예방이다-

 

숙종은 백성의 진정한 인권은 ‘먹는 것’과 ‘전쟁예방’이라 생각했다!

왜, 역사소설들은 음모술수, 권력투쟁, 전쟁 등 불건전한 주제만 다루었을까? 이 소설은 진정한 인권은 먹고 사는 것임을 확신하고 쓴 ‘경제역사소설’이다. 소설은 숙종이 화폐경제로 저축과 투자, 생산, 고용, 외상거래라는 초기자본주의 거시경제운용을 해서 불과 30년 만에 단축성장으로 경제대국을 이뤄냈음을 발견했다.

숙종은 박정희대통령에 300년 앞서 조국근대화와 경제개발에 성공한 경제대왕이었다. 왜란과 호란으로 멸망한 조선을 거시경제운용으로 성장동력을 일으켜 영조와 정조의 부강한 왕조를 열어주었다. 박대통령이 한국에 세계10대 경제대국의 길을 열어준 것과 비슷했다. 숙종 뒤에는 무역 장사꾼이었던 장옥정의 내조가 있었다. 이 소설에는 그 과정이 매우 재미있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추천사>

“이 책은 경제역사대하소설이다. 300년 전에도 배곯는 백성을 위해 경제개발에 성공한 임금이 있었음을 알고 자긍심이 생겼다. 나는 한국경제의 개발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이 어려운 시기에 대학생과 직장인, 공무원, 군인, 정치가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서강대학교 전 총장 손병두

 

 

줄거리 요약

이제까지의 역사소설들은 권력투쟁, 음모술수, 전쟁 등 불건전한 주제만 다루었다. 과거의 국가통치자들도 富國强兵을 첫째로 삼았었을 텐데도 ‘富國’은 전혀 다룬 소설이 없었다. 저자는 300년 전에 숙종이 화폐경제로 저축과 투자, 생산, 고용, 외상거래라는 초기자본주의 거시경제운용을 해서 경제대국을 이뤄냈음을 발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대국을 이룬 것보다 더 처절하고 리얼하다.

 

숙종 당시의 사회경제상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폐해는 숙종 때까지 전해졌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기근이 극심하여 사람고기를 먹기에 이르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괴이함을 알지 못하더라. 길바닥에 굶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메어 먹어 완전히 살이 붙어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산사람을 도살하여 장과 위, 뇌의 골도 함께 씹어 먹는다”고 씌어 있고, “백성들은 굶다 못해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잡아먹었다”고 전하고 있다.

농토는 양란으로 170만결이 40만 결로 축소되었고 경상도는 6분지 1로 축소되어 충청도에 전세를 대신 내도록 명령하자 충청도 농민들은 야반도주했다.

그럼에도 사대부과 아문들은 권력을 이용해 농민과 상인들을 다시 수탈하기 위해 고문과 횡포를 자행한 지옥 같은 상이었다.

숙종은 자본과 교통, 통신, 항만 등 산업인프라와 학교, 병원 등 생활 인프라가 제로인 상태에서 경제적 성공을 이룩한 것이다.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숙종의 거시경제운용과 단축성장 성공

저자는 과거 왕조들의 경제문제를 파고들다가 조선시대에 뛰어난 경제대왕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조선 제19대 왕 숙종은 화폐경제와 거시경제운용으로 조국근대화에 착수해 국토개발과 과학기술개발, 자주국방의 시대를 이룩했다.

숙종의 화폐경제 정립은 경제학적으로 큰 업적이었다. 국가경제는 부가가치창출이 핵심으로 저축(투자)과 소득(소비·고용)에서 나온다. 저축은 화폐가 유통돼야 한다. 위대한 세종대왕이 경제대왕이 못된 것은 저축이 없었기 때문이다.

①화폐(상평통보)유통으로 저축과 투자, 교환, 손익계산, 대부 및 외상거래가 가능한 상업시대를 열었다. ②이로 인해 노동의 상품화가 이뤄지고 인신의 지배예속이라는 중세적 신분제도는 서서히 변화되었다. ③민간부문이 살아나고 공공부문도 숨쉬기 시작했다. 공사의 구분 및 기업과 가계의 분리가 이뤄지며 성장동력이 생겼다.

 

장희빈의 경제적 역할과 성과

숙종 뒤에는 칠패시장(현 남대문시장)에서 무역업을 한 장사꾼 장옥정(장희빈)이 있었다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다.

장옥정은 장현의 조카로 칠패시장(현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와 무역을 했다. 장현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있을 때 6년을 모신 역관이었다.

장현은 효종의 비호아래 칠패시장에서 인삼무역, 비단무역, 무기무역으로 국중거부가 되었다. 장옥정은 외국어를 잘 해서 무역과 장사를 총괄했다.

장옥정은 1680년 22세의 늦은 나이에 장현의 권력야욕으로 궁녀가 되었으나 그녀의 뇌는 시장마인드와 정글법칙에 염색돼 성리학의 사대부들과 충돌한다.

성리학은 송시열을 필두로 선비는 장사나 농사를 해선 안 되며 오직 학문에 정진해야 한다고 주장해 인적자원 낭비의 주범이었다.

숙종 당시 인구는 680만 명인데 선비가 대략 10만 명인 경우 1인당 연간 생산액(GNP)을 30냥(쌀 30석)이라고 어림잡아도 연간 3백만냥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셈이었다.

장옥정은 숙종에게 사농공상의 신분차별을 타파하고 선비들도 장사와 농사를 하도록 하여 국가의 인적 낭비를 없애도록 권고하였다.

장옥정은 화초처럼 자란 숙종에게 경제마인드를 심어주었으며, 화폐유통 등 경제혁신을 반대하는 노론의 지주인 송시열을 사사하도록 하는 등으로 방해자를 제거해 경제개발에 성공을 이뤄냈다.

그 결과 1,000여개의 장시가 생기고 3백만 명이라는 놀라운 고용이 창출돼 숙종은 불과 30년 만에 단축성장을 이뤄내 영조와 정조에게 부강한 문예부흥시대를 열어주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자주국방 노력

숙종은 자주국방을 위해 강소대국의 국방전략을 세웠다. 군인의 숫자보다 강력한 폭탄을 개발해서 국방을 강화하려 했다. 요즘으로 치면 핵을 보유해 국방을 강화하려는 것과 유사했다.

장옥정은 숙종의 자주국방에 대한 염원을 이루기 위해 화란의 폭탄전문가를 초청해 비밀리에 폭탄개발에 성공했다.

폭탄개발의 성공을 알게 된 청국은 병자호란 항복강화조약(기축약정) 제8항의 위반이라고 폭탄을 해체할 것을 강력히 압박함(요즘 핵개발을 금지하는 것과 유사)

청국은 이 폭탄이 청국에 대한 공격용인 동시에 외몽골과 위구르에 전달돼 위협이 된다며 폭탄의 해체와 숙종과 장희빈을 북경으로 입조하라고 압박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노론은 청국과 힘을 합쳐 장희빈을 사사하도록 해서 숙종은 압력에 못 이겨 그녀를 사사한다.

 

장희빈에 대한 노론의 저주와 악담조작

장희빈은 노론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에 의해 지금까지도 악의적으로 비하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인현왕후전』과 『수문록』, 『숙종실록』(편집책임자: 인현왕후 오빠 민진원), 『사씨남정기(노론 김만중)』등이 노론의 대표적 허위기록들이다. 한 예로, 수문록은 노론의 사림학자들이 썼다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저급하다.

“장희빈은 사약을 먹지 않기 위해 발악했고,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고자로 만드는 패악을 부리다 억지로 사약이 부어졌다. 드디어 장녀가 죽으니 하늘의 천벌을 받아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 냄새가 궐내를 진동하는지라 즉시 궁밖에 내다버렸다.”

 

숙종 사후 조선의 몰락

경제대왕 숙종의 경제적 업적 역시 폄훼된 것은 정조가 독살 된 후 정순왕후와 노론의 세도 정치가들이 상인들의 재산을 탈취하고 경제행위를 억압함으로써 성장동력을 말살한 때문이다.

그 결과 경제적 쇠퇴와 자주국방이 불가능해져 일본에게 나라를 바친 것이다.

 

Obama’s Charity, Ja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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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예고 되었던 ‘그 소식’이 현실화 되었다. 이 소식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미국에 ‘불법’으로 5년 이상 체류해 오던 시민권, 영주권자 자녀를 가진 부모 들에게 3년간 제한적이지만, 합법적인 신분을 부여한다 것을 국회를 통한 이민법이 아닌 정부자체의 행정명령으로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생각을 한다. 과연 이것이 고국 (a.k.a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적용이 되며 도움이 될까..하는 것이다. 이런 뉴스는 이곳에서 발행되는 한글로 된 신문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식 중에 하나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정도의 뉴스면 아마도 front page 제일 위에 실릴 만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이민법’에 관한 것은 우리 같은 minority community에게는 민감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할까?

 일년도 훨씬 전에 이미 상원에서 comprehensive immigration bill이 통과 되었지만 하원에서 거의 ‘초 죽음이 된 상태로 아사餓死 되기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있다. 그 당시 통과된 법안은 ‘범법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불법체류자’를 구제하는 것이 골자였다. 오래 전(Reagan era)의 일방적인 ‘사면 amnesty’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기한의 제한이 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이것을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은 ‘인정머리 하나도 없는 공화당 Republican 패거리’의 인간들이었지만 Obama 도 머리만 굴렸지 별로 ‘타협이나 설득’을 못하는 졸렬한 정치력으로 일관을 해서 궁극적인 책임은 바로 그에게 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희생자는 오랜 시간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힘없고 지친 그들 (거의가 undocumented Mexican)이었다.

 오랜 전에 나는 이들 undocumented 들의 ‘신세’에 큰 관심이 없었고 그저 ‘불법’이니까 ‘합법’으로 만들면 되지 않는가 하는 naive한 생각만 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이것은 ‘기술적 technical‘한 문제가 아닐까.. 그러니까 서류상의 문제’가 아닐까. 그것을 그렇게까지 야멸차게, 비인간적 대우, 차별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9/11 사태로 모든 ‘서류’들이 중요해지고 거의 필수적인 것이 되어가며 이들의 일상 생활은 점점 ‘지옥처럼’ 변해가고 급기야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들이 속출하며 생각이 바꾸었다. 법이나 그에 따른 ‘서류, 종이조각’이 인간의 기본권의 위에 있는가 하는 원초적인 명제가 된 것이다. 나의 생각과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머무르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

 Victor HugoLes Misérables, 우리에게는 쟌발잔Jean Valjean 으로 알려진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서 나는 다시 이 쉽지 않은 문제를 조명하기도 했다. 범법자가 법을 어긴 사람들이 회개한 후에 어떤 처우를 받아야 하는가, 배가 고파 훔친 빵으로 강제노동 형을 받았던 주인공과 그를 ‘법’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일생’을 쫓아다니는 형사.. 극과 극의 입장에 있지만 과연 그럴까? 나중에 나는 그 형사Javert가 사실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인물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성서에서도 ‘사랑보다는 법’을 먼저 따지는 ‘바리사이 파’들을 질타하는 예수님을 본다. 이것과 현실은 물론 차이가 많지만 따지고 보면 맥락은 비슷하다. 현재 ‘법과 정의의 사자’로 자처하는 ‘공화당 극우파’들이 바로 그 형사 ‘Javert, 자베르’나 ‘바리사이 파’ 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쟌발잔은 바로 힘없이 쫓기는 undocumented들일 것이고.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렇게도 그들, 공화당 기회주의자들, 인정머리가 없는 것일까? 정치적인 입장으로 그런다면 조금은 이해를 할 여지도 있지만 ‘진정으로 인정머리가 없는 본심’의 인간들이라면 역시 그들이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Obama란 인물, 처음에는 Bush를 몰아낸 ‘공신’으로 좋아했었지만 시간이 지나가며 하나 둘씩 껍질이 벗겨지며 속의 실체를 보고 실망의 연속이었다. 속에 들은 것이 기대보다 텅 비었던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tactic과 speech같은 것은 능할지 몰라도 미국 대통령의 vision은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그저 하나 humanism하나면 다 통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동성결혼’을 지지하던 해괴한 언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모든 정치적 trouble은 아마도 이런 빈, 텅 빈 character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그가 이런 ‘행정적 용단’은 어떻게 밀어부친 것일까? 아마도 그가 신봉하는 humanism이 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비록 원래 원했던 법은 아니더라도 일시적 3년이나마 이렇게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햇빛을 비춘 것은 너무나 다행스럽다. 그는 비록 ‘신앙적, 영적’ 믿음이 없는 대통령이었다 해도 이런 용단은 우리 천주교의 입장과도 100%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 그의 이런 ‘자비’는 그에게 점수를 주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슬픈 해후邂逅, 침묵피정

¶  묘~한 인연과 슬픈 해후邂逅

피정이 끝나고 우리는 그 전날 약속이 되어 있었던 어떤 환자 자매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리에타 지역에 사시는 어떤 병중의 자매님께 ‘급하게’ 천주교 영세를 받게 하는 조그만 과제가 생긴 것이다. 아마도 아들과 둘이 사시는 어떤 우리 또래의 자매님이 중한 병에 걸려서 아마도 오래 못 사실 것이라는 판단으로 다른 주에서 급히 방문하신 친 가족(오빠와 여동생)들이 순교자 성당에 연락을 해서 혹시 외인(비신자)에게 ‘급하게’ 영세를 줄 수 있는가 문의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연숙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2년 전 모니카1 자매님이 그런 case였고 그 후의 결과가 너무나 좋았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해 주었으면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때가 바로 레지오 단원들이 제일 사명감을 느낄 때라고 할까..

이때 우리가 방문한 목적은 상황판단이 전부였다. 어느 정도 병이 위중한지.. 그것이 제일 궁금한 것이다. 과연 짧더라도 교리공부를 받을 상황인지..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면 과연 신부님이 ‘비상 영세’를 주실 수 있는지.. 모든 것이 우리들이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데 달려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불안한 심정으로 찾아간 곳은 우선 middle-high-class 주택가로서 아마도 financial한 문제는 없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반갑게 맞이한 오빠 형제님 2 여동생 자매님들.. 모두 인상도 좋았고 친절하였다. 전화로 이미 들었던 ‘사연’에 덧붙여 더욱 자세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비교적 대 가족이었지만 모두들 지역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서 그것이 우선 문제였다. 아픈 환자가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간호를 할 것인가? 비록 두 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침대에 누어있는 환자자매님.. 모든 것이 아주 불편해 보였고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계속 물끄러미 주시를 했는데.. 우리는 무언가 우리를 ‘의심’이라도 하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 아픈 자매님은 알고 보니 우리도 낯이 익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다니던 YMCA에서 본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자매님 부부가 YMCA에서 janitorial staff으로 일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이 불과 2~3년 전이었지만 서로가 첫 눈에 못 알아 본 것이다. 그 자매는 처음에 나를 먼저 알아보고 나중에 연숙을 알아 보았다.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반가워서 한동안 어쩔 줄을 몰랐고 옆에서 보고 있던 가족들도 너무나 기쁜 얼굴들이었다.

놀란 것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그 자매님의 부군 형제님이 올해 4월에 이미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형제님은 남자 locker area에서 너무나 자주 보았고 이야기도 나누었던 사이었는데.. 나이도 아마 나와 비슷해서 더욱 친근감을 느낀 그런 분이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남편의 병간호가 너무나 힘이 들었는지 곧 바로 자기도 이런 중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비극이 있을까?

오빠와 여동생이 모두 이미 천주교 신자였고 이 아픈 자매님은 아직도 외인이었지만 가족들은 그 자매님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비록 중병이라 할 지라도 하느님, 특히 천주교의 하느님을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게다가 우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동생 암브로시아 자매님3과 이야기를 하다가 오하이오 주 Dayton, Cincinnati 지역에서 성당을 다녔다고 했고 우리의 영세 신부님 왕영수 신부님과 같이 신자생활을 한 것도 알게 되었다. 근래에도 한국으로 비행근무를 할 때 가끔 왕신부님과 만난다고.. 이런 뜻밖의 인연이 어디에 있을까? 성령운동에서 음악찬양을 하는 최데레사도 잘 안다고 했다. 이런 것들로 우리는 순식간에 ‘친구’처럼 느끼게 되었고 우리가 레지오 단원으로 자매님을 도울 수 있을것을 알게 된 그들은 어린이들처럼 기뻐했다. 다음날 직장 관계로 모두 떠날 그들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던가.. 이런 인연으로 우리 부부는 레지오 단원의 한 조 로써 이 위중한 병으로 고생하는 자매님을 위해 봉사할 기회가 찾아 왔고 우리가 옛날 레지오 단원들에게 받았던 ‘은혜’를4 갚을 chance가 왔음을 느낀다. 얼마나 우리가 도울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이지만 최선을 다할 각오는 되어있다고 느낀다.

 

¶  CLC 일일’一日’ 침묵피정  Scan10108-1어제는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아틀란타 CLC 가 주최한 ‘일일 침묵피정’이란 곳에 연숙과 참가하였다. 지나간  순교자 성당 주일 미사 후 점심 시간에 낯이 익은 CLC 자매가 갑자기 와서 ‘일일 침묵피정 신청서’를 건네주며 꼭 오라고 해서 조금 당황한 적이 있었다. ‘원칙적’으로 ‘못 간다’고 나는 이미 생각을 하고 있다가 후에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기회가 또 올지 안 올지 확신이 서지를 않았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it’s now or never란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가지 안더라도 연숙은 물론 갔을 것이지만 나의 결정으로 생전 처음 CLC주최 피정을 둘이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번의 일일 피정은 ‘CLC 골수단원’ 대상이 아니고 ‘일반인’ 대상이라 마음이 가벼웠지만 ‘침묵’이란 말이 조금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CLC (Christian Life Community)하면 로욜라의 아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Loyola)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을 바탕으로 예수회의 영적지도(spiritual guidance)를 받는 전세계 ‘평신도 단체’란 것을 나는 예전부터 연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다. 연숙이 전에 이런 ‘과정’을 거쳤었기에 나는 옆에서 조금씩 보고 듣게 된 것이다. 인간적인 갈등으로 비록 그’단체’를 떠나서 지금은 나와 전심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하고 있지만 그곳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크게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어제 그곳에 참석을 해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알아 보았다. ‘옛 동료’들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비교적 많은 참석 인원(100+?)이 모인 그곳에서 우리가 속한 마리에타 2구역 ‘자매님’들도 만나서 너무나 반가웠는데, 그 중에는 전 스테파노 부부, 마르쎌리나, 히야친타 자매들도 보였고, 이곳 ‘역시’ 대다수가 자매님들이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정상’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피정 자체는 ‘피정의 달인’이라고 소개된 방문신부 ‘정구평 마르코’ 신부님이 담당을 했는데 우리와는 최형 댁에서 ‘개인 적’으로 만난 경험도 있고 해서 큰 거리감 없이 강론을 따를 수 있었다. 피정 주제는 ‘기도와 관상’ 이었고 아마도 아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중 ‘제 1과’ 정도가 아닐까 추측이 되었다.  배부된 handout text를 보면 피정 강의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기도와 관상 1 

  • ‘나’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
  • ‘나’에 대한 조명
  • 하느님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 나’
  • 기도란 무엇인가?
  • 기도의 방법
  • 기도의 목적

기도와 관상 2

영신수련에서 기도의 외적 형식

  • 기도와 호흡
  •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호흡의 방법
  • 생각 조절하기
  • 기도 준비단계

기도와 관상 3

영신수련은 이성을 도구로 다양한 감정들을 분석하는 피정인가?

  • 기도할 때에 올라오는 다양한 감정들
  • 분심과의 싸움

기도와 관상 4

  • 성 이냐시오의 관상
  • 두 개의 깃발

기도와 관상 5

  • 영적 여정의 시작(원리와 기초)
  • 일상 안에서의 성찰
  1. 첫째 감사
  2. 둘째 조명
  3. 셋째 반성 및 성찰
  4. 넷째 결심
  5. 다섯째 마침기도

기도와 관상 6

  • 생각, 말, 행동

 

 이런 주제와 내용들에 대한 강의를 듣고 두 번에 걸친 30분 가량의 침묵기도 시간이 주어졌다. 아침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이 조용했고 침묵을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뚜렷했다. 그런 중에 두 번 30분 기도는 놀랍게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바로 전에 들었던 내용이 머리 속에 가득 찬 도움으로 평소에 꿈도 못 꾸었던 나의 모습도 바라볼 기회가 있었다. 문제는 그런 나의 모습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가 못 느꼈지만 그래도 사랑을 받았던 나 였는가.. 긴 인생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기도에 대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인 것으로 이것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묵주기도와 기도문 기도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것에 비하면 이런 것들은 아주 제한이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무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 같은 것이다. 비록 짧았던 하루 피정이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쪽으로 눈을 뜨는 듯한 신선한 피정이었다. 아마도 ‘구면’이었던, 친근한 인상의 정구평 마르코 신부님의 피정 스타일이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다가 깨어 생각해도 ‘신부생활, 하느님과의 시간’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신부님의 말씀도 큰 과장이 아닌 것으로 들리기도 했다. 시간이 나면 이쪽으로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의욕도 느끼나. 글쎄..

  1. 재발 암 환자로 비신자였던 자매님, 속성과 교리공부와 영세 이후 기적적으로 암에서 치유된 case
  2. 오빠와 여동생은 오래 된 천주교 신자였다.
  3. Delta Airline의 여승무원으로 재직
  4. 1994년 큰 딸 새로니가 사경을 헤맬 때  순교자 성당 레지오 단원들이 병원까지 와서 간절한 기도를 해 주셨다.

내 나이가 어때서..

¶  내 나이가 어때서..

조금은 ‘늙은이의 하소연, 푸념’같이 들리는 이 말은 근래 대한민국에서 나온 유행가의 제목이다. 물론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지만 요새  갑작스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온 것 뿐만 아니라 이제는 ‘달달 노래 연습’을 할 처지까지 되었다. 또 그 season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라는 긴 이름, 아마도 요새는 ‘연총’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12월 7일에 열리는데 이때 각 쁘레시디움 별 talent show(장기자랑)에서 우리와 다른 team이 합작으로 이 곡을 ‘합창’으로 하게 되었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의 원래 의도는 member reunion인데 이제는 완전히 모여 노는 것, talent show로 인식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올해로 나는 4년째 이것을 맞게 되었는데 해마다 조금씩 무언가 달랐다. 그 중에서 지난 2년은 추억으로 남겨도 될 것 같은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reunion의 정신을 100% 살렸기 때문이다. 간혹 얼굴만 보던, 아니 전혀 생소한 단원들을 ‘그런대로’ 알게 된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연총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특히 작년에는 생소하기만 하던 ‘희귀동물’, 남성단원들이 ‘노래 연습’차 같은 방에 모일 기회도 만들어 주었기에 더욱 기억이 새롭다.

그에 비해서 올해는 조금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지만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두 쁘레시디움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되어서 멀리서만 보던 ‘모르는 단원’들과 가까이 할 기회가 되었다. 최 장년 축에 속하는 두 그룹이 모여서 이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기로 한 것인데.. 조금은 self-pity 하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이 노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중론이 모두 좋아한다고 하니 어찌할 수가 없다. 우리가 택한 version은 오승근이라는 ‘장년 세대’의 것인데.. 알고 보니 이 오승근이라는 사람은 우리세대에 그러니까 70/80에 속한 그야말로 senior그룹의 오래된 가수였다.

더욱 알고 보니.. 소싯적에 내가 좋아하던 Two Aces, ‘금과 은‘ Duet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아직도 기억한다.. Two Aces시절 그들이 TV show에서 부른 Everly BrothersDream Dream (All I have to do is). 나중에 바뀐 이름인 ‘금과 은’ 처럼 너무나 청순한 목소리로 잘 불렀었다. 그 듀엣, 둘중의 하나가 ‘오승근’이었단 말인가? 너무도 잊고 살았다. 더욱 놀란 것이 그가 ‘트롯트‘ style의 ‘전통가요’를 부른다고? 믿어지질 않는다. 너무나 큰 변신으로 느껴질 정도로 세상이 그렇게 변했구나. 이래서 Two Aces의 추억을 더듬고 그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게 되니.. 감회가 깊다. 그가 이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보니 ‘만든 모습’인지 ‘자연스런 모습’인지 혼동이 올 정도로 ‘젊게’ 보인다. 하기야 요새 나이든 가수들을 보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며칠 전, 우리 두 ‘장년층’ 쁘레시디움이 처음 모여서 연습을 하였는데 ‘가라오케’ 반주의 막강한 보호와 도움으로 그런대로 무난히 소화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높은 음정의 이 곡을 과연 몇 명이나 smooth하게 넘길 것인가와, 비교적 짧은 이 곡을 어떻게 짧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게 re-arrange해서 무대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인데.. 글쎄.. 나는 전혀 이런 것에는 문외한이라서…

 

 
Karaoke – 내 나이가 어때서 – 오승근 version

 

 
Karaoke – 내 나이가 어때서ballad version

 

¶  Very Early, November ‘Polar Vortexpolar-vortex-1Polar vortex.. 근래 특히 겨울에 많이도 듣던 말이다. 비교적 근래에 쓰이는 ‘기상용어’ 라고나 할까, 아니면 mass media의 유행어라고나 할까? 작년에 특히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유난히 추웠을 적의 기억이다. Wikipedia에 의하면 북극과 남극에 ‘상주’하는 지독히 찬 공기덩어리가 있는데 이것의 이름이 바로 Polar Vortex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커지고(겨울) 줄어들고(여름) 하는데 가끔 이것이 ‘암세포’처럼 커져서 퍼지면 지금처럼 되는 모양이다. 북극으로부터  몰아치는  ‘지독히 추운 공기의 바람’ 이 연상이 되고 한때는 Arctic Blast, Alberta Clipper란 말도 들었는데 이런 현상이 이제 유행이 아닌가? 좌우지간 이런 말들은 한 겨울에나 듣던 말인데.. 올해는 thanksgiving holiday도 2주나 남은 한창 가을에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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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강추위로 고드름이…

한반도에는 아마도 ‘시베리아의 강풍’이라고 연상하면 알맞은 어감이라고 할까? 혹시 이것도 global warming의 한 징조일까… 그래서 모든 것이 extreme쪽을 치닫는 것인가. 지금 현재 Canada 와 인접한 upper Midwest 쪽에는 거의 한겨울 같은 눈이 쏟아지고 기온도 급강하.. 며칠 후에는 낮의 최고가 freezing point까지 내려 간다고 한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따뜻한 Southeast’ 쪽으로 밀려 왔다는 사실이다. 오늘 아침에는 드디어 hard freeze가 되었고, 올 들어 처음으로 ‘고드름’을 목격하게 되었다.일기예보는 우리가 사는 지역도 이번 주말이 지나면 최저 18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이런 기온은 1월 말 정도에나 ‘가끔’ 겪는 것인데..

더욱 ‘괴상한 것’은 보통 같으면 blip같은 ‘짧은’ 현상이 이번에는 거의 일주일 이상 계속된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 평년의 11월 이맘때면 그야말로 ‘찬란한 황금색의 낙엽’을 자랑하는 비교적 따뜻한 모습이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한창 가을색을 자랑하려던 ‘낙엽’들은 아마도 이번에 모조리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더욱 춥게만 느껴지고 한참 남은 끝을 못보고 있는 outdoor work들도 더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대로 문제없는 고물 ‘clunker‘ central heating이 버티고 있으니까.. 큰 걱정은 안 한다. 전혀 plus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날씨에는 진하고 뜨거운 black coffee 맛의 ‘정수精髓’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THANKSGIVING BLEND  올해는 비교적 coffee를 많이 마시게 되었다. 한때 물을 많이 마시려고 일부러 줄인 적도 있었지만 나의 lifestyle은 아무래도 plastic water bottle보다는 coffee cup이 더 맞는 것을 느낀다. 특히 오랜 직장생활에서 morning ritual은 구수한 ground coffee의 냄새로 시작된다는 것도 어쩔 수없이 몸에 배인 모양이다. wine의 미묘한 맛의 차이는 잘 몰라도 이제는 coffee의 향과 맛의 차이는 잘 알게 되었다. 건강을 이유로 지나친 coffee를 자제하려는 자책감이 항상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정도는 아닌 듯 싶다.

Ah... Starbucks..
Ah… Starbucks..

현재는 주로 새벽과 아침 식사 때, ‘정식, 공개적’으로 마시고 가끔 (요새는 더욱 자주) 늦은 오후에 ‘혼자서’ 마신다. 연숙은 지독하게 caffeine 에 민감해서 점심이 지나서 마시면 잠을 못 자기에 아침식사 때만 나와 같이 마신다. 나는 물론 ‘전혀’ 그런 것이 ‘아직’은 없지만 인생 선배님들은 ‘언젠간’ 나도 그렇게 변할 것이라 경고를 해서 이것도 시간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까지 즐기는 것이 현명할 듯.. 며칠 전에 작은 딸 ‘나라니’가 집에 들렸을 때 coffee bag을 들고 왔는데 그것이 THANKSGIVING BLEND STARBUCKS  whole bean 커피였다. 이런 때가 나에게는 정말 즐거운 순간이다. Starbucks coffee를 마셔 본지도 꽤 된듯한 기분이라서 그 독특한 맛도 거의 잊어가는 때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이것을 마셔보니, 그 동안 마시던 것과는 물론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는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STARBUCKS class가 되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다.

몇 년 전에 새로니 나라니가 번갈아 가면서 STARBUCKS 에서 part-time으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공짜로 주는’ coffee를 ‘무진장’ 즐겼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 그것을 사서 마시기에는 아무래도 그랬다. 그래서 생각이 우리는 경제적으로 STARBUCKS class가 못 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저 그것을 ‘사 먹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어떨까.. 글쎄 그래도 불편할 듯 하다.

 

¶  Relevancy of Legion of Mary

Is the Legion of Mary[Legio Mariae] still relevant today?  레지오 마리애 지금도 큰 의미가 있는가? 이런 ‘끔찍한’ 생각이 요사이 들어서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답은 불행하게도 almost No! 인 듯해서 어깨가 더 쳐지는 듯 느껴진다. 4년여의 ‘Never look back’의 각오로 노력한 경험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다는 자체는 가소롭지만 나에게는 정말 심각한 것이다. 아직도 ‘레지오’ 하면, 20세기 초에 머문듯한 ‘구닥다리’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왜 그럴까? ‘영웅적’인 레지오 창시자 Frank Duff같은 ‘준 성인’이 다시 필요한 때가 된 것일까? 레지오 마리애가 ‘영적인 군대’이며 군대와 같은 조직을 유지하고 있으면 이런 군대도 ‘현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대 로마 군단의 조직을 유지하고 그 충성심과 용맹 성을 본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레지오 만의 특징이고 자랑일 수 있지만, 초 현대 세속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그런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마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가 교회에 끼친 공헌 중에 제일 큰 것은 아마도 ‘평신도의 활성화’ 가 아닐까?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완전히 맞아 떨어졌다. 레지오의 위상도 역대 교황들의 ‘묵인과 승인’의 혜택을 충분히 받았고 각 본당에서도 ‘필수적’인 평신도 단체로 대우를 받아서 꾸준히 영향력을 늘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신화적인 존재, 창시자 Frank Duff의 퇴진(1980년 11월 7일 선종, 91세) 이후.. 아마도 momentum이 서서히 줄어들고 지금은 거의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한 사람’의 부재가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가? 아마도 현재 Dublin, Ireland 세계 본부(꼰칠리움)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mindset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우리 주변의 상황을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저 status quo, status quo.. 현상유지에 급급한 모습들. 세상이 급속히 ‘진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가만히 있으면, 즉 ‘status quo’ 그것은 다름이 아닌 ‘후퇴‘인 것이다. 큰 의미가 없는 사소한 것들 가지고 모든 ‘바쁘기만 한 단원들’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 낭비하는 평의회 모임들, 왜 우리들이 레지오 활동을 하는지 그 큰 목적은 완전히 잊은 듯 하고 우선순위에서 제일 밑에나 있을 듯한 것들 가지고 열을 올린다. 이런 것들을 계속 목격하면 이런 생각도 든다. 그런 ‘사소한 규칙을 지키려고 레지오 활동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소한 시행규칙들이 우리 레지오의 ‘제일 큰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모든 ‘진짜’ 군대들이 ‘완전히 전산화’가 되어서 모든 행정,사무가 이루어지는 이때에 군대의 효율성을 본받았다는 레지오의 현재 ‘서류 흐름’을 한번 보라. 이곳에 쓰는 시간 자체가 레지오 활동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조직의 관리에 드는 시간을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최소한으로 줄이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영혼을 위한 활동‘에 나서야 하는데 내가 본 실정은 거의 반대쪽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인 것이다. 레지오 단원 생활 4년 쯤 되면 모두들 이런 ‘권태기‘를 가지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이런 때를 어떻게 잘 극복하는 가.. 역시 우리 어머니 성모님에게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Che sarà moment..

¶  Che sarà 케 사라~ 케 사라~ 케 사라~아~.. 이 친근한 Italian melody를 오늘 43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그야말로 Che sarà moment를 예기치 않게 맞이한 것이다. 43년 만에.. 43년 만에..

 오래 살다 보니 ‘우연’이란 것을 심심치 않게 맞이하긴 하지만 오늘의 이 케사라 moment는 그야말로 우연이 되었다. 이 Che sarà는 1971년에 이탈리아 Sanremo 음악제에서 2위를 한 곡으로 아마도 미국만 제외하고 전세계에서도 2위의 영광을 누린 곡일 듯 하다. 왜냐하면 그 이후 미국에서 이 곡을 ‘한번도’ 들을 기회가 없이 그대로 잊혀지고 말았으니까..

 

Ricchi e PoveriChe Sarà – Sanremo 1971

하지만 1971년도에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알려진 이 곡은 그 melody의 특성상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런 것으로 두고두고 귓전에서 맴돌았던 것인데.. 40년이 지나가는 긴 인생의 여파로 그것도 많이 희석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몇 구절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되니까.. 특히 amore mio.. 부분이 그러하다.

오늘 이 곡을 찾게 된 계기는 며칠 전에 연숙이 성당에서 ‘구입’한 류해욱 요셉 신부님의 신작 묵상 수필집 ‘영혼의 샘터’에 있었다. 받아 쓰기에 너무나 편한 신부님의 글이라 또 무료함을 달랠 겸 typing away를 즐기다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은 그렇게 되리니’ 라는 소제목의 글을 읽다가 1950년대의 미국 pop song  ‘Que sera sera’에서 신부님의 묵상주제가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케 세라 세라.. 어렸을 적 1950년대에 많이 듣던 Doris Day의 hit였고 신부님 말씀대로 모두들 ‘될 대로 되라’로 잘못 번역된 뜻으로 해석하고 살았다. 하지만 진정한 케세라 세라는 그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되어질 것은 그렇게 될 것’ 이라는 거의 묵상재료에 가까운 뜻이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가 아니고 “우리 삶 안에서 때로 원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거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다면 그것을 자기 인생에서 하느님의 계획표 안에 들어있던 그분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이라는 의미” 로 해석을 하자는 류 신부님의 묵상은 참으로 좋았다. 동양사상으로 아마도 ‘순리’의 지혜가 아닐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는 것도 지혜라는 것.. 어떨 때는 그것이 그렇게도 힘들었음을 오랜 ‘힘든’ 인생의 삶에서 알고 있지만..

 

 José FelicianoChe SaràSanremo 1971

 

 문제는 신부님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Doris Day의 케세라 세라와 이태리 1971년 산레모 음악제 2위의 곡인 Che sarà (What will be) 케 사라.. 를 완전히 혼동, 그야말로 짬뽕을 해 버린 것이다. 나는 류 신부님을 탓할 수 없는 것이 이분의 나이가 나보다 적어도 10살은 밑일 듯하니까.. 1971년이면 아마도 중학생 정도였을 것이고 이런 노래들은 책을 통해서나 들었을 듯하니 어찌 그렇게 정확하게 알 수가 있으랴.. 하지만 Google과 Wikipedia의 세상에서 사실적인 것은 예전보다 비교적 값싸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신부님의 혼동의 덕택으로 나는 이 추억의 명곡을 기억할 수 있었고 하루 종일 1971년경 나와 우리 가족의 모습들을 회상할 수 있었다.

 1971년을 대한민국에서 살았으면 아마도 매년 열리는 이 이태리 산레모 음악제를 기억할 것이고 참 주옥 같은 명곡들도 많았다. ‘문제’의 이 Che sarà 케 사라 는 당시 두 팀이 같은 곡을 경연하였는데 그 중에 한 팀은 vocal solo였던 ‘미국 (사실은 Puerto Rico, 미국령)’에서 외국가수 자격으로 출전했던 Jose Feliciano(호세 휄리치아노)였고1 이 같은 곡을 부른 다른 팀은 이탈리아 출신 혼성 vocal group 인 Ricchi e Poveri(Rich & Poor) ‘리키이포베리’ 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큰 hit를 한 것은 혼성 팀 리키이포베리 팀이었고 나의 귓전에 아직도 생생한 melody도 이것이었다. 거의 같이 Jose Feliciano의 jazzy한 rendition도 큰 hit를 했지만 우리나라의 당시 정서로는 역시 열창가곡 스타일인 리키이포베리 팀이 더 사랑을 받았다. 오늘 이런 연유로 나는 1971년 당시 이 노래를 들을 당시를 회상하며 오랜만에 축 가라앉는 날씨와 더불어 그야말로 nostalgic & sentimental의 극치를 맛 보았다. 가라앉는 기분이지만 사실은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José FelicianoChe Sarà – Italian TV show

 

Ricchi e PoveriChe Sarà – Italian TV show

 

¶  오늘은 또 다른 의미의  Che sarà moment도 있었다. 오늘 이른 아침 정들었던 교우 전요셉 형제가 고국으로 향하는 귀국 비행기에 부인과 함께 피곤한 몸을 실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조금은 가슴 아픈 경험이라고 할까.. 이별도 그렇지만 귀국을 하는 전 형제의 뒷모습이 더욱 추운 날씨와 겹쳐서 나를 춥게 만들었다. 소위 말하는 ‘금의환향’ 까지는 아니어도 더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으면 하는 바람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년 여름이었나.. 정말 우연히 돼지띠 동갑 교우 형제님을 알게 되었고 그가 바로 전요셉 형제였다.

이미 몇 년 전에 레지오 단원으로 우리들은 이 형제님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한 적이 있었고 기적과도 같이 이 형제님은 전통적으로 불치의 병으로 알려진 ‘암’에서 회생을 하였다. 우리들은 물론 ‘묵주기도’의 힘을 더 믿게 된 계기도 되었다. 사실 그것이 전부였고 다른 자리에서 인사를 따로 할 기회가 없었는데 우연히 돼지띠 동갑임을 서로 알게 되고 순간적으로 우리는 ‘형제’처럼 느끼게 되었다. 긍정적인 의미로 very simple한 영혼이었고 우리는 그런 사실에 사실 모두 impress되었다. 작년 이맘때부터 시작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의 program에서 이 형제님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신나는 ‘난타’ team에서 열심히 북을 쳐 댔다. 오랜 미국 생활에서 터득한 지혜 중에는 ‘한 사람에게 너무..’ 라는 것이 나에게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예외적으로 느껴졌고, 정말 정말 오랜만에 고향의 친구, 형제를 만난 기분으로 그 동안 조금은 거리감이 있었던 순교자성당에 더 가까움도 느끼게 되었다.

미국 생활이 10년이 넘는다고 했지만 나이 탓인지 ‘고국 냄새’가 확연히 났지만 그 냄새들이 다 ‘좋은 쪽’의 것이어서 이 형제님을 통해서 수십 년 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흔적과 풍습’을 배울 수도 있겠다는 나만의 희망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 돼지띠 동갑은 사치였는지.. 10여 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는 결심을 한 형제님의 ‘귀국선언’은 을씨년스럽게 변하는 날씨 못지않게 우리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10여 년 동안 이 형제님은 참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는데.. 결과적으로 무리가.. 순리가 아니었는지.. 하느님의 뜻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것도 역시 ‘케 사라’ 인가.. 너무 무리하지 말고.. 흐름을 따르면.. 아직은 그럴 여유를 못 찾는다. 우선은 섭섭하고 쓸쓸한 늦 가을의 황량함만 느껴질 뿐이다. 형제님, 그 동안 돼지띠 동갑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지만 더 많은 시간을 나누지 못한 아쉬움 오래 오래 남을 듯 합니다. 인연이 되며 어디선가 또 만날 수 있으리라.. 믿고.. 바랍니다.

  1. 류해욱 신부님, 사실적인 것이 틀리면 고치는 것이 좋을 듯하고.. 호세 는 Hose가 아니고 Jose일 듯한데요…

Inaugural feast day, John Paul II

st-john-paul-2며칠 전이던가.. 우리의 미국본당의 달력을 보니 10월 22일에 Bl. John Paul II라고 적혀 있었다. 이 달력은 교회달력이라서 일년 열두 달 거의 매일 성인의 feast day가 적혀있다. 매일 미사를 다닌 이후 나는 이렇게 매일 성인의 축일이 있던 사실에 새삼 놀랐고 얼마나 내가 ‘무식한 천주교 신자’였던가 부끄럽기도 하였다. 매일 미사를 다니다 보면 ‘부수입’으로 이렇게 성인열전을 가볍게라도 공부하게 되어서 아주 유익하다.

그런데 오늘 10월 22일 수요일 미사엘 가니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축일’ 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며칠 전에 잠깐 본 Bl. John Paul II가 생각났다. Blessed John Paul Second 그러니까 ‘복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축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inaugural feast day, 시성 후 첫 축일이라서 나는 무슨 ‘역사적인 사건’을 겪는 듯 가벼운 흥분이 스며들었다. 올해 부활절 때 시성이 되신 후 첫 축일.. 역시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살아 생전에 ‘살아 계셨던’ 교황님이었고 나의 살아 생전에 돌아 가셨으며, 또한 살아 생전에 성인이 되신 것은 나로써는 조금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무척 많은 ‘일반 인’들이 이 성인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나도 그들에 못지 않게 이분을 좋아한다. 아니 존경, 아니 공경을 한다. 내가 꿈에도 꿀 수 없는 role model로 삼고 살아간다고 하면 조금 over일까? 2005년 선종을 하실 때, 나는 처음으로 이분에 대해 깊이 공부를 하고 묵상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나는 이분이야 말로 나의 남은 평생 role model로 삼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100% 확신을 하였다. 그 이후 나는 얼음처럼 차갑게 얼었었던 나의 신앙심을 조금씩 녹여 나가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 그 여파로 녹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어떠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세속적인 변화에도 이분만은 변함없이 ‘진실’을 밝히고 선포하실 것이라 나는 믿게 된 것이다. Do not be afraid라는 간단한 명언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처음에는 약간 감상적인 기분으로 이분을 존경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 이 성인을 알아가며 인간 요한 바오로 을 ‘절대적’으로 믿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매료시켰던 면은 이분의 ‘찬란한 지적 은총’이었다. 철저한 신앙적 믿음에 못지 않는 지성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듯 하다. 한 마디로 ‘공부 잘하는’ 교황인 것이다. 후계 교황인 베네딕트 16세가 아마도 지적으로 이분을 능가할 지도 모르지만 베네딕트 16세는 요한 바오로 2세에 비해서 다른 면이 떨어지는 듯 느껴진다. 절대로 굽힐 수 없는 지켜야 할 ‘진리, 교리’를 지켰고, 세계 정치를 신앙적인 눈으로 설득시켜는 힘은 아마도 이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을 따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 이날을 맞아 ncregister.com에 관련 기사가 실렸는데 Catholics Remember St. John Paul II’s Personal Impact on Inaugural Feast란 제목으로 몇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날을 맞아 이 성인에 대해 회고를 하는 기사였다. 평범한 젊은 신자에서 신부님까지 포함 된 이런 개인적 경험 일화를 보면서 1978년부터 2005년까지 이 성인이 세계적으로 미친 영향, 거의 한 세대에 걸친 범세계적인 불굴의 선교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험난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등대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

싸늘하고 깜깜한 가을 새벽

포근함과 따뜻함을 주는 radiant heater finally..
포근함과 따뜻함을 주는 radiant heater, finally..

¶  싸늘하고 깜깜한 가을 새벽:  새벽 5시에 깨어나니 칠흑 같은 어둠이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진다. 아~ 이제 2014년도 ‘겨울’이 서서히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의 Central Heating이 kick-in 된 것이 지나간 10월 5일 아침이었고, 그때 유난히도 끈적거리던 2014년 여름 기운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 간간이 이어지던 Indian Summer 로 말미암아 ‘월동 준비’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동안 심지어 tornado siren을 새벽에 듣기도 해서 아직도 따뜻한 10월의 나날을 보냈지만 역시 며칠 전부터 평년 같은 기온으로 급강하.. long sleeves shirts, pants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럴 때면 사실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더 편한 짧은 차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길었던, 은근히 덥던 여름이어서 올해의 ‘단풍’은 정말 늦게 오는 모양.. 아직도 주변이 거의 초록색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 새에 곳곳이 주황색으로 변하기 시작 하였다. 아마도 11월 중순 경이면 완전히 deep fall color로 변하고.. 천주 교회력으로 대림절(Advent)이 시작되는 11월 30일부터는, 성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9월 초에 시작된 우리 가정의 ‘일생일대의 최대 project‘ 가 시작된 이후 세월이 어떻게,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감’을 잊고 사는 요즈음.. 이것이 현재 나의 주변에서 내가 느끼고 보는 66마일로 질주하는 세월의 모습이다.

 

¶  Front side gutter re-gutted!

또 하나의 앓던 이가 빠졌다. 우리 집 앞쪽 지붕의 gutter를 완전히 새로 설치한 것이다. 내가 손수 달았던 이 vinyl gutter는 거의 15년이 넘어서 이은 부분이 여기저기서 물이 샌다. 뒤쪽 지붕은 올 봄에 모두 손을 보았지만 앞쪽은 그런대로 견딜 만해서 미루고 있었는데 바로 앞 문 위로 새는 빗물 때문에 벽돌 콩크리트 계단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구동성으로 ‘사다리’에 올라가지 말라는 주변의 우려는 잘 알지만.. 어찌하랴.. handyman을 살 돈도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면서 돈을 쓸 수는 없지 않는가? 2006년에 작지 않은 사다리 사고의 경험이 있어서 이번 봄에는 정말 ‘초긴장’을 하며 사다리를 올라서 지금은 사실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근래 들어 YMCA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 탓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큰 무리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번 job은 하루 종일이 걸리는 큰 작업이었고 며칠 후까지 피로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도 절약하고 나의 몸이 아직도 큰 무리 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기만 하였다. 며칠 후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거의 완벽하게 ‘물 새는’ 것이 없어져서 기쁘기만 하였다.

 2014-10-09 12.47.37-1

 

¶  Cute pergolas at Marian Hill

연숙의 레지오 꾸리아 부단장 임기가 7월 중에 끝이 난 이후 우리는 오랜만에 무슨 vacation이나 방학을 맞는 느낌으로 몇 주일을 보냈는데 그 여파로 주일 미사를 근처의 미국본당에서 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한 달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에만 순교자 성당엘 가게 된 것이다. universal church를 자랑하는 천주교회는 사실 어느 곳엘 가던지 미사는 똑 같으니 사실 성사생활에 큰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한국교우들과 ‘친교’를 못 이루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나는 ‘큰 손해’를 보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오랜 만에 간 듯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기존의 ‘성모 동산’에 무언가 ‘멋진 것’이 세워진 것이다. Bench까지 달린 앙증스럽게 귀여운 두 pergola였다. 성모님을 옆에 두고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하니 흐뭇한 idea가 아닌가? 주변이 ‘너무나 삭막한’ 성모동산..이었는데 그래도 이것으로 조금은 포근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본당 목수가 손수 design을 했을까.. 아니면 home depot에서 kit를 샀을까? 하지만 아주 알맞은 design으로 보였다. 돈이 없어 항상 쩔쩔매든 인상을 주던 본당에서 어떻게 이런 $$을 쓰게 되었을까? 누가 이런 것을 제안하고 밀어 붙였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한마디로 dollars well spent라고 말해주고 싶다.

 2014-10-12 12.37.48-1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성모동산

 

¶  Tobey, a Live laptop2014-10-20 10.39.04-1우리 집 bully doggie, Tobey도 이제 12월에 10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사람의 나이로 나보다 더 늙었다는 것,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생후 1개월 쯤에 우리 집엘 왔나.. 이제는 좋던 싫던 완전히 우리 식구가 되었다. 성미가 유별나고 폭력을 가끔 쓰기도 해서 다른 식구들에게 미움도 사곤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정이 들었다.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이해’하는 이 Tobey는 어떨 때는 나의 분신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24시간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나 부담이 되고 귀찮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나도 적응이 되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섭섭해지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서는 flea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제는 flea와 ‘같이 사는 지혜’도 터득해서 처음보다는 덜 고통스럽다. 나와 같이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이제는 거의 8 년째가 되어간다. 완전히 습관이 된 것이다. 나도 운동이 되고 Tobey도 아마도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자세히 움직임을 관찰하곤 하는데 다행히 아직도 걷는 것은 변함없이 씩씩하다. 주위에 ‘늙은 개’를 키우는 집들을 보면 우리도 조금씩 ‘노후 대책’을 마련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눈이 멀어가는 개, 움직이지 못하는 개.. 등등.. 주인을 잘 만난 개들이라 크게 고통을 받지는 않지만 그것을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떨까? 나와 Tobey가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좋아하는 습관 중에는 나의 무릎에 올려 놓는 것이다. 책상 위에 다리를 얹으면 뛰어올라 그곳에서 퍼지는 것이다. 이때 가끔 나는 뒤에서 번쩍 몸통으로 들어서 나의 가슴에 앉곤 하는데 처음에는 너무나 불편해 하더니 지금은 은근히 그런 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 녀석이 나보다 먼저 떠난다면 나는 이 순간들을 가장 값지게 추억으로 남겨둘 것 같다.

A Thousand Winds..

千の風になっ –  A Thousand Winds.. – 秋川雅史(아키가와 마사후미) – 2006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s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ned grain.

 I am the gentle autumn rain.

 When you awaken in the morning’s hush

 I am the swift uplifting rush

Of quiet birds in circled flight.

 I am the soft stars that shine at night.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cry;

 I am not there. I did not die.

 
Mary Elizabeth Frye – 1932

 

천 갈래의 바람으로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십시오.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잠든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천 갈래로 부는 바람입니다.

나는 흰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여무는 곡식 위에 비친 햇살입니다.

나는 조용히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그대가 아침의 고요에서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선회하다가

갑자기 비상을 감행하는 새입니다.

나는 밤하늘에 부드러운 별빛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십시오.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니까요.

 

얼마 전 아내 연숙으로부터 류해욱 요셉 신부님의 ‘그대는 받아 들여졌다’ 라는 책자를 건네 받았다. 류 신부님은 비록 나와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어도 간접적으로 친근하게 느껴지는 신부님이다. 내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본격적으로’ 나가기 시작한 2010년대 이전에 한때 주임신부님으로 계셨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진’도 보았고 연숙, 많은 교우들로부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최근에는 몸이 아프시다는 소식과 레지오에서는 ‘병자기도’의 요청도 들어와 많은 단원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기도 하다.

 ‘중풍’같은 stroke으로 쓰러지셨다는데 어떻게 또 이런 책이 나왔을까? 친필로 sign이 책 안에 보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떨리는 필체’였다. 아직도 ‘마비 증상’에서 못 벗어나신 것일까? 나이는 나보다 한참 밑이라고 알고 있는 ‘젊은’ 신부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고생을 하시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류신부님의 책 번역 솜씨는 가희 내가 제일 좋아하는 style중의 하나다.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러운’ 번역을 하는지.. 이것은 번역 사이에 있는 2가지 언어를 거의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직역 체와 의역 체의 거의 중간에 있는 거의 완전한 번역인 것이다. 특히 시어체의 번역은 더욱 그러하다.

이번에 접하게 된 책은 ‘51편의 묵상 잠언‘이라는 부제가 있는 대부분 시와 묵상들을 저자의 소견을 곁들여 간결하지만 깊이 있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신부님이 이전에 ‘이미’ 갑상선 암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었고, 건강에 신경을 쓰는 탓인지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나보다 거의 10년이 ‘젊은’ 것을 생각하면 조금 ‘가소롭게’도 느껴지지만 어떻게 느껴지는 나이를 직접 비교를 할 수 있겠는가?

칼릴 지브란의 시가 많이 실린 것으로 지브란의 시를 좋아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지만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A Thousand Winds로도 알려진 Don’t stand at my grave and weep이라는 Mary Elizabeth Frye의 1932년 경의 시였다.

 이 ‘나의 무덤에서 울지 마세요’로 시작되는 시는 내용적으로 추측해서 아메리칸 인디안 (native Indian)의 구전에 의한 것으로 추측을 했지만 사실 지금은 저자가 ‘완전히’ 밝혀진 것으로 1932년에 미국 Baltimore에 살고 있는 Mary Elizabeth Frye라는 여성의 시로 확인이 된  것이다. 내가 신뢰하는 Wikipedia에 의하면 오랜 세월 동안 비밀의 veil에 쌓였던 이 ‘감동적’인 시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2년 경 Frye여성은 같은 집에 독일에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온 유대인 여성과 그녀의 남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항상 독일 나치 치하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 그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고 임종을 지키지 못한 슬픔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알게 된 Frye여성은 거의 즉흥적으로 그녀를 위로하려고 shopping bag 누런 종이에 생각이 나는 대로 시를 적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전에 시를 써본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 슬픔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위로하려고 거의 ‘본능적’으로 쓴 그 시가 그 이후로 전세계적으로 같은 슬픔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하게 된 것이다. 이 시는 Frye여성의 친지, 주변에 천천히 알려지게 되고 ‘장례행사’같은 곳에서 낭송이 되었고 서서히 세계적인 시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누구의 시인지 모르며 애송을 하여서 작자 미상으로 남게 되었고 심지어 American Indian의 전통적인 시로 추측이 되기도 한 것이다. 후에 본격적인 ‘저자 찾기’ 노력이 이루어 졌는데 저자인 Frye여사가 94세로 세상을 떠나며 자신이 저자임을 밝힌 사실이 미국 신문의 컬럼 Dear Abby로 잘 알려진 Abigail Van Buren 의 추적으로 확인이 되었다.

 

저자인 Mary Elizabeth Frye는 이 시에 저작권을 요구 않았기에 완전한 public domain에 남아서 누구라도 인용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가히 모든 사람의 ‘장례식 애송시’가 될 수 있었다. 이 시를 조용히 가만히 읊으면.. 사랑하는 가족, 친지와 이별을 해 본 사람이면 엄청난 위로를 받게 됨을 느낀다. 큰 재난 때마다 낭송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마도 2007년 경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나의 무덤에서..’ 가 아니고 ‘천 갈래의 바람.. a thousand winds’로 나에게 다가왔다. 2006년 말 일본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NHK의 연말 가요 홍백전에 이 시를 classic style로 부른 아키가와 마사후미 에 의해서였다. 처음 들을 때, 나는 이 노랫말이 일본 것인 줄 잘못 알았다.  센~노 가제 (천千의 바람)라는 제목이 붙은 이 classic style 곡은 곧바로 일본 최고의 인기 곡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 곡이 작자미상인 것도 몰랐다. 이 시는 당시의 일본 TV drama 였던 ‘어른들의 여름휴가(おとなの夏休み)’ 에도 나온다. 주인공 여성의 병 간호를 하는 할머니가 애송하던 시집이었다. 곧 바로 세상을 뜨는 할머니가 아마도 자기의 죽음 앞에서 울지 말라는 뜻이었을 듯 하다. 당시 그것을 보면서 나는 이 시가 왜 여기에도 나오는 가.. 일본인들과 무슨 큰 관계가 있는가 의아해 했었다.

결국은 류해욱 신부님의 신간인 ‘그대는..’ 에 의해서 나는 완전히 이 시를 알게 되었고 나를 매료시켰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는 류 신부님처럼 나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이 시는 세상을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 두고 온 슬픔에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한다. 거꾸로 된 것이다. 무덤 옆에서 먼저간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인 것이다. 가슴을 깊이 울리는 아름다운 정경들을 배경으로 죽은 이가 산 이를 위로한다. 나는 죽지 않고 남겨둔 너를 항상 바라 보고 있다고. 영혼의 불멸을 믿게 된 나는 이 시어들을 이제는 100% 실감나게 믿는다. 그래서 더 나에게 ‘산’ 의미가 있다. 어떤 곳에서 세월호 비극 때에 이 노래가 번역이 되어서 불렸다고 들었다. 아마도 일본이라는 거부감 없이 슬픔에 고통을 받는 산 이들이 위로를 받았으리라.

Google Voice XMPP live & well?

piaf20650오늘 ‘또 우연히’.. 요새는 이렇게 우연히 란 말이 강한 느낌을 다가올 때가 많이 있지만 이것도 정말 우연히.. 모두 Google탓으로 돌려야 하나?  이것이야 말로 ‘우연히’를 더욱 많이 쉽게 접하게 하는 monster인 듯 하다. 모두 알다시피 Google은 그 massive한 network server power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그 중에는 ‘자선적’인 것도 있다. 그 예로 Google Voice internet phone service가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 ‘무료’ 전화를 제공한다. gmail account만 있으면 된다. voice quality도  Bell network에 못지 않다. 단점은 ‘거의’ pc같은 computer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computer앞에 있는 사람은 큰 문제가 없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성가신 일이다. ‘보통 전화기’를 사용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던가..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gadget이 곧바로 나왔고 ‘불티 돋치듯’ 팔렸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조금 computer를 아는 사람은 그런 것도 필요가 없다. Linux computer에서 pbx-in-a-flash/Incredible PBX같은 software를 사용하면 그야말로 ‘무료’가 된다. 나는 처음부터 그런 방식으로 Google Voice의 애용자가 되었는데.. 세상에 진짜로 공짜가 무제한으로 있을까? 지난 5월 중순부터 Google에서는 생각을 바꾸어 이런 제3의 gadget이나 software를 사용하는 방식을 없앤다고 ‘엄포, 공포’를 놓았다. 그 ‘방식’이란 것이 바로 XMPP란 것인데 이것이 Google Voice와 3rd Party gadget을 연결해 주는 connector protocol software인데 이것이 support가 안 되면 그런 gadget들은 일순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no more free lunch인 셈이 되어서 실망이 대단했지만 그렇게 하겠다는데..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5월 중순이 되기 전에 미리 ‘보통 전화기’를 사용하는 Google Voice service를 나의 home pbx server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대치용으로 ‘아주 싼’ voip service인 voip.ms란 곳에 sign-up을 하였다. 이것으로 long distance와 international call을 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잊어 버렸는데.. 오늘 우연히 XAPP가 Google Voice에서 그대로 살아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부리나케 pbx에서 test를 해 보았는데.. Bingo! It still works!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왜 Google은 마음을 바꾸었을까? 나는 Google Voice account(그러니까 phone numbers)가 3개나 있어서 정말 편리했지만 한동안 ‘성급하게’ 그것을 포기했던 것이다. PC에서 가끔 쓰긴 했지만 어찌 그것이 ‘진짜 전화’와 같은 기분일까? 이제는 다시 ‘진짜 전화기’로 Google Voice를 쓰게 되어서 너무나 기쁘다.  참고로 Google Voice XMPP service가 없어 지는 것을 예감하며 5월초에 썼던 unpublished blog post를 아래에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한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2014년 5월 15일.. 이날이 무슨 날인가? 몇 년 동안 ‘공짜’로 전화 service를 해 주던 Google Voice에서 XMPP connection 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날이 바로 이날이다. Google Voice core service 자체는 그대로 있지만 그 동안 이것을 ‘진짜 전화 같은 느낌을’ 주게 하던 service가 없어지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Google Voice를 계속 쓰려면 ‘다시’ desktop PC 앞에 앉아서 웃기는 PC 용 headphone이나 더욱 웃기는 plastic mic/speaker를 써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Google Voice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 그런 식으로 썼을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전화를 걸고 쓰는데 누가 ‘반드시’ 컴퓨터 앞에서 앉아서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쓰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나 같은 사람은 사실 큰 문제가 없지만 대부분은 안 그럴 것이다.

 언젠가부터 Google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XMPP란 ‘connector’를 이 service에 연결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 XAMPP가 연결되면서 우후죽순같이 3rd party device들이 등장하고 거의 완전히 ‘보통 전화’같이 이것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책상의 PC 앞에 붙어 앉아서 쓸 필요가 없고, ‘보통 전화기’같이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화국’의 전화를 쓰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지경이 된 것이다. 분명히 ‘거의 공짜’ 전화 service가 된 것이다.

공짜라면 꼼짝 못하는 사람들.. 거의 공짜라는 것은 미국 내에서의 모든 long distance call을 말한다. 국제전화는 공짜가 아니지만 아주 싼 값이다. 이런 service를 쓰려면 cable TV를 보듯이 device를 사야 했지만 별로 비싼 것이 아니었다. 조금 기술적인 사람들은 그것도 필요 없었다. 이미 집에 있었던 Asterisk 라는 iPBX software를 쓰면 되었고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새로 생긴 Google Voice전화번호를 걸면 집에 있는 iPBX로 자동 forward가 되고 voice mail이나 fax로 연결까지 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happy days는 다 지나간 것이다.

 이 우울한 소식을 듣고 나는 몇 달 전에 이미 다시 desktop PC mode로 전환을 시작해서 이제는 ‘완전히’ 준비가 되었다. 최소한 나의 desk앞에 앉으면 이 ‘free service’를 계속 쓸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나의 life-style을 바꾸면 어려울 것이 없다. 그래도 서운한 것은 Google Voice 전화번호 (DID)를 걸면 이제는 우리 집에 있는 iPBX에서 받지를 못하는 것인데.. 할 수가 없지 않은가?

extreme multitasking, 친전, sad vindication…

¶  Extreme multitasking

끈적거리는 올해의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부터 나는 ‘본의 아니게’ 갑자기 시간이 황금같이 느껴지게 바빠짐을 느낀다. 우리의 일상적인 routine을 제외한 예외적인 ‘일’들이 하나 둘씩 더해지더니 급기야 과장해서 수없이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내가 ‘좋아서’ 만든 일들은 결코  아니다. 급하거나 꼭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생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큰 불평은 없다. 이것이 내가 사실은 가장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여건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보다, 두 가지, 두 가지보다 세 가지… 등등으로 나는 많을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훨씬 ‘즐겁고 능률적’으로 느껴지고 실제로 결과도 나쁘지 않은 것이다. 특히 일의 성질이 ‘비슷한 것’이면 그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된다. 한마디로 adrenaline이 샘 솟듯 솟구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현재 나는

  1. 일생 일대 ‘가장 중요한 서류’를 찾는 일,
  2. 나의 서재가 될 아래층 거실의 flooring을 교체하는 일,
  3. front door의 ‘무너지는 듯 한’ structure를 고치는 일,
  4. backyard vegetable garden의 완전 ‘자동화’ , drip watering irrigation works,
  5. garage major cleanup..

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이것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연숙은 이런 나를 의아스러운 눈으로 보는 듯하다. 자기는 한가지를 ‘완전히’ 끝내야 다음 일에 착수한다고 하니까. 내가 이런 extreme multitasking을 하는 것은 아주 정연한 내 나름대로의 ‘이론’이 있다. 과학적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나에게는 과학적인 것이다.  나는 분명히 믿는다. 이런 방식이 전체적인 시간을 ‘훨씬’ 줄여 준다는 사실을.

 

Scan10061¶  친전 親傳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 친전이란 말은 ‘아마도’ 한자로 親傳을 말 할 것이다. ‘친히 전한다’는 말이니까, 이 친전의 글을 읽으면 김 추기경이 바로 나의 옆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이것은 얼마 전 연세대 이원선(도밍고) 동문의 부인 이 베로니카 자매가 연숙에게 빌려 준 것을 내가 다시 빌려서 읽어 보게 된 책의 제목이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것이라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추기경님은 어떤 분일까 생각을 해 보았다. 별로 자세히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기억에 나는 것으로는 내가 대학을 다닐 시절에 대한민국에 첫 추기경이 나왔고 그분의 이름은 김수환 신부였다 정도다. 그 당시 추기경이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고 사실은 관심도 없었다. 나와 천주교는 너무나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천주교는 고사하고 종교, 신앙에 전혀 눈이 뜨이지 않았을 때 김수환 추기경님이 뉴스에 나온 것이다.

 그 이후 미국에 살며 더욱 더 잊고 살다가 ‘간신히’ 내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면서 추기경의 뜻도 가깝게 느껴지게 되고 김수환 이란 이름도 친숙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것이 전부랄까.. 그저 반정부 데모 때에 데모 학생, 군중을 지지하는 ‘민중의 편’에 섰던 천주교를 초월한 민중의 지도자라는 것도 뉴스를 통해 간간히 듣게 되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선종’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죽음은 ‘전 국민의 슬픔’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비교적 객관적인 ‘김수환 론’은 한글 Wikipedia에 잘 나와있는데, 조금 읽기 거북한 ‘반 김수환 평’이 균형을 맞추려 실렸는데.. 참 비신자도 아니고.. 신앙인을 이끄는 사목자라고 하는  이름도 비꼬인듯한  ‘함세웅‘이란 인간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답답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대적 사상이 인간 기본적인 가치를 넘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시대착오적인 사제가 ‘원로’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사실 철저한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 ‘친전’ 책을 통해서 생생한 그분의 ‘육성’을 대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 추기경 재직의 역사적 의미, 신앙적인 측면, 인간애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비록 철저하게 천주교에 근거한 신앙관, 도덕관, 정치, 세계관으로 삶을 살려고 했지만 그가 산 시대는 그를 만성 불면증으로 시달리게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삶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위에서 본 그의 인간상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는 것이다. copyright에 구애 없이 나는 또 reading by typing으로 나 이외에도 한 사람이라도 더 그의 삶을 보여주고자 이곳에 남겨 두었다. 시간 날 때마다 한 구절 한 단락,한 페이지씩 읽으면 매일 묵상거리로도 좋을 듯 하다.

 

 ¶  Sad Vindication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구역 미사를 보았다.(미사를 ‘보았다’ 라고 하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그렇게들 쓰는 것 같고 영어에서는 미사를 ‘말한다, say mass’ 라고 하니.. 무슨 차이일까?) 우리가 속한 구역은 아틀란타 Metro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주로 Civil war에 관련된) Cobb county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에타 2구역’ 이다. 역사적인 전통은 그렇다지만 사실 살기에 편한 곳이라고 볼 수는 없을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은 ‘덜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다. 다른 쪽으로 말 하면 family를 키우기에는 조금 더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계 사람들에게는 지금은 거의 ‘bedroom community’ 로 ‘전락’한 느낌도 든다.

이곳의 유일한 매력은 아직도 ‘학군’의 가치에 있는 듯하지만 우리는 1992년 이사올 당시 이 지역의 ‘학군’이 그렇게 좋은 것을 모른 채 ‘나의 새 직장의 위치’때문에 이사를 왔었다. 하지만 아틀란타 올림픽 이후 급속도로 증가한 한인들이 99% 우리가 사는 곳의 ‘반대쪽’으로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몇 안 남았던 business를 모두 그곳으로 흡수하게끔 만들어서 지금은  ‘무언가 하려면’ 거의 30 miles drive해서 Korea town으로 가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불편’함은 확실히 있지만.. 그래도 이곳에 살다 보니 ‘지나치게 밀집된 minority들’ 이 없는 이곳의 장점도 적지 않다.

우리는 3년 전부터 내가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 하면서 구역모임에는 거의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실은 항상 우리를 우울하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하면 ‘안 나가는 것이 편하다’라는 사실 하나였다. 우리가 구역모임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2006년경이었고 한 동안은 그런대로 참가를 해서 몇몇 친근한 교우들도 생겼지만.. 차츰 차츰 구역모임의 성질이 변질하는 듯 하더니.. 급기야 이곳 저곳에서 이상한 말들을 들렸다.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지나친 socializing 에는 항상 위험한 요소가 있는 법이다.  특히 순교자 성당에 소속된 한 구역이라는 정체성(과 제한성)을 벗어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솔직히 우리는 그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예를 다른 구역에서 듣기도 했지만 설마 ‘조용하게만 보이는’ 우리구역에서 그런 잡음이 발생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우리의 우려대로 모든 것은 최악의 상태로 치달은 듯 보였고 피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발생한 듯 했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구역미사에 참가를 해서 그 ‘결과’를 우리 눈으로 목격을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항상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안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우리는 vindication이란 말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그것도 때 늦은  sad vindication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였다.

C’est Si Bon Redux

둘루스 명소, 아틀란타 쎄시봉 70/80 Live!
둘루스 명소, 아틀란타 쎄시봉 70/80 Live!

나의 눈앞에 다시 ‘다가온’ 아틀란타 ’70/80 style’ Live music restaurant 세시봉.. 거의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추억의 음악과 추억의 경양식의 멋진 곳, 세시봉.. 어제의 일이었다. 자기 집안 식구 ‘전부, 아내와 딸’이 사업상 해외 여행을 떠난 renaissance guy 최형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 다음 날 저녁 7시까지 세시봉으로 나오라고 해서 예의 모이던 그룹이 다시 모였다.

이번이 나에게는 세 번째인가.. 하지만 항상 머리 속에 잔잔한 흥분의 여운을 남기던 그런 곳이라 하나도 생소하지 않았다. Owner이며 performer인 Mr. 김도 예전과 같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같은 미소를 간직하며 우리 그룹을 기억하는 듯 했다. ‘사업’이 잘 되시느냐 물었더니 ‘우리들이 이렇게 너무 가끔 찾아주니 잘될 리가 있겠습니까’ 하는 농담 섞인 응답이었다. 실제로 지난 7월 8월은 ‘너무나 slow’ 했다고 한다. 하기야 그렇게 더운 때 대부분 vacation을 떠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곳에 들어갈 때 입구에 조그만 종이글씨가 붙어 있었는데 잠깐 보니 ‘오늘은 나도 가수 왕‘ 이란 글이었다. 언뜻 아하.. 이곳에서도 손님이나 아마추어 들이 노래라 연주를 하는 program을 마련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나도 주인에게 그런 comment를 한 기억이 있었다. 이런 곳을 아틀란타의 ‘명소’로 만들려면 고정적인 fan group을 형성하고, 그들 중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게 무대에 올라가게 하면 어떤가 하는 idea였다. 쉽게 말하면 amateur night 같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대답을 들었다. 잘못하면 분위기 찾으러 온 손님들을 쫓는 결과도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그날 가서 음식 menu를 보니.. 전에 비해서 음식 가지 수가 너무나 많이 늘었다. 전통적인 ‘일본식 경양식, donkatsu‘에서 출발해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전에는 owner의 부인이 chef라고 알았는데 이번에 들으니 chef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주 전문적인 chef를 포함해서 추억의 음악, 연주,분위기..등등을 조금은 고급스럽고 exclusive한 전통을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다. 이렇게 다른 곳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계속 유지시키면 ‘아틀란타 명소’가 될 가능성이 꽤 높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Owner는 Smartphone으로 손님들이 찾아와 남기 여러 가지 ‘논평, comment’ 들이 Yelp에 나온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부분 음식에 대한 사진과 평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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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돈까스, 생각보다 큰..(credit Yelp)

 멋 모르고 소문이나 겉 모습을 보고 찾아온 ‘젊은 세대’들의 평이 대부분인데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대부분 contemporary favorite 예를 들면 ‘빙수‘, 오늘 처음 알게 된 New York strip steak 같은 것들이지만 우리 세대는 예외 없이 서울거리에서 60~70년대 맛을 보았던 ‘일본식 경양식’들, 예를 들면 ‘함박스테이크, 돈까쓰‘ 를 찾는다. 기억에 희미해졌지만 당시에 느꼈던 음식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잘 ‘재현’해 놓았다. 특히 portage cream soup은 그 중에 제일 추억을 되 새기게 하는 것이다. 비교적 경제적인 wine과 추억의 생음악, 자유자재로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owner performer, 깨끗한 환경들.. 이곳은 확실히 두고두고 아틀란타의 명소가 될 potential이 있다.

그 동안 performer들, 특히 거의 pro에 가까운 ‘인재’들이 이곳을 찾았고 연주,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찾았던 금요일 저녁에는 ‘자칭 아마추어’ 들이 나온다고 했다. 물론 미리 audition 받고 무대에 올라갈 듯 했다. 우리가 간 날에는 retire한 남자 분이 saxophone을 들고 출연을 해서 기대보다 수준 있는 연주를 들려 주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case가 바로 ‘좋아서 하는’ 진정한 amateur’ 정신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도 했다. 그저 좋으니까.. 사랑하니까..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크지는 않지만 격조있는 분위기의 performing stage

크지는 않지만 격조있는 분위기의 performing stage (credit Yelp)

 

Music Live! 왼쪽에 owner Mr김이 보인다(credit Yelp)
Music Live! 왼쪽에 owner Mr김이 보인다 (credit Yelp)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그룹에서도 언제 한번 아마추어로 무대에 올라가 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언뜻 윤형의 saxophone이 생각나고 그의 ‘연주 수준’이면 큰 무리가 없을 듯 해 보였다. 문제는 그 동안 얼마나 연습을 했는가 하는 것이고 작년 이맘때부터 부부가 완전히 full-time 으로 일을 하게 되어서 그 전과 같은 여유가 없어 보인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 화살이 우리에 오더니.. 순식간에 언젠가 한번 올라가라는 ‘강요’까지 나왔다. 속으로 it’s now or never라는 말도 있는데.. 못할 것도 없다는 오기를 달랬지만, 과연 그럴까? 최형의 idea는 우리 둘이 Everly Brothers의 classic oldie  (All I have to do is) Dream dream 과 ‘젊은 연인들‘을 부르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이 두 곡은 눈을 감아도 언제라도 할 수는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무대에 올라?’.. 허.. 그런 ‘장난스러운 생각’과 놀아 보는 것도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고 그곳의 분위기와 너무나 어울려서.. 역시 다른 세시봉 추억을 만들고 금요일 저녁을 보냈다.

고온 다습한 늦여름에..

¶  고온 다습 高溫多濕.. 요사이 이 지역의 날씨를 보면 가관이다. 한 여름 중에는 가을 같이 이상하게 싸늘하더니 9월도 넘어선 늦여름은 그야말로 ‘hot and muggy, 고온 다습한’ 한 여름이 되었으니 말이다. 최근 들어서 날씨에 둔감해지려고 안간힘을 쓴 결과 많이 침착해 졌지만 요새의 기후만은 언급을 피하기가 힘이 들었다. 올해는 조금 a/c(air conditioning) 에서 $$을 절약하는가 은근히 쾌재를 불렀지만 mother nature는 역시 그런 ‘공짜’가 없나 보다.

‘고온 다습’이란 귀에 익은 말이 딱 들어 맞았지만 이 말을 쓰고 보니 그 옛날 고국의 한창 여름에 많이도 듣던 기상용어가 아닌가? 고온 다습한 태평양 고기압.. 바람이 남쪽, 그러니까 멀리 있는 태평양에서 부는 바람.. 그것이 서울에서 겪었던 한증막 같은 더위의 원인이었다. 장마도 마찬가지로 그 ‘고온 다습’ 한 것.. 그것이 지금은 Gulf of Mexico 멕시코 만灣의 고온 다습한 바람으로 바뀐 것이다. 요새의 공기는 그야말로 에어컨이 없으면 괴로운 그런 것.. 그 옛날 서울에서 어떻게 에어컨이 없이 살았던가?

 

  Crumbling infrastructure.. 이런 표현 근래에 national 뉴스에서 많이 접하곤 했다. 그런 뉴스에서는 주로 bridge같은 것이 너무나 낡아서 위험하다는 것들이었는데.. 요새 나는 우리가 사는 집이 그런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의 겉모습은 물론 페인트가 벗겨지고 siding같은 것은 숫제 새들과 ‘기후’의 공격으로 구멍이 생기는 것도 목격이 되었다. 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은 집의 얼굴인 front door 쪽의 brick, concrete들, 그리고 front door threshold(문지방)등의 모습이 정말 목불인견이라는 사실..

집의 구조상 garage(차고)로 출입을 하니.. 앞문 쪽은 거의 사용을 안 하니 자주 볼 수도 없다. 손님들이 가끔 그곳을 쓰지만 대부분 어두울 때에 사용을 하니 자세히 볼 기회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앞 문 쪽으로 gutter물이 떨어져서 water damage를 예상은 했었다. 이번에 자세히 보게 되니.. 정말 ‘뚱뚱한 사람’이라도 그곳을 쓰게 되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길 정도다. 썩어버린 문지방은 wood filler를 쓰면 고칠 수 있을 듯하고 떨어져나가는 벽돌도 큰 비용은 들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concrete slab도 조금 노력을 하면 내가 모두 고칠 수 있다는 결론이 내리고 대대적 수리의 준비에 돌입을 하였다. 오랜 만에 집 앞쪽이 대대적 face-lifting service를 기다리고 있다.

 

 

¶  앓던 이(이빨)가 빠질 때.. 지난 4월부터  앓았던 독감 중에 지독한 치통이 나를 괴롭혔고 독감이 나은 이후에도 통증의 차이는 있었어도  계속되고 있었다. 치과를 가면 분명히 ‘고쳐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피하고 싶은 곳이 바로 그 치과이기에 ‘가급적’ 나는 참는 것이 오히려 덜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번에 느끼는 치통,구강 통증은 보통을 훨씬 넘게 나를 ‘매일’ 괴롭혔다. 분명히 이것은 ‘민간 요법’도 없을 듯 하고 ‘자가 요법’도 없을 것이었다. 내가 고작 하는 것은 ‘소금물 양치’가 전부였다. 보통 때는 그런대로 잊고 지낼 수가 있었지만 식사시간이 문제였다.

무언가 닿은 듯 하면 통증이 온다. 나의 나이에 내 치아의 상태는 보통 정도.. 일 듯한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대학 2학년 때 ‘병신 같은 사고’로 앞니에 ‘큰 문제’가 생긴 이후 나는 사실 항상 ‘치과’에 가게 되는 사태를 피하려 전전긍긍하며 살았던가.. 마지막으로 치과에 갔던 것이 거의 8년 전.. 이후 나는 그곳을 피하며 산다. 이번의 통증은 물론 윗니 중의 하나 (사랑니 근처)가 빠지려고 발버둥치는 결과였는데..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날로 치과에 가서 그것을 뽑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 ‘저절로’ 그것이 얌전하게 빠졌다. 거의 순식간에 그 지독한 통증이 100% 사라졌다. 비록 이빨 하나를 잃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날라 갈듯한 기분.. 이래서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라는 표현을 너무나도 절감, 실감, 만끽하게 되었다. 물론 앞으로 나는 치과의사를 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우선’ 지금엔 문제가 전혀 되지를 않는다.

 

¶  Show Stopper.. 며칠 전에 처음으로 성령대회란 것을 가 보았다. 오랜 전, 1988년과 1989년에 우리는 인디애나 주에 있는 노틀담 대학, University of Notre Dame (South Bend, Indiana) 에서 열렸던 미국 성령쇄신대회 (Charismatic Renewal Convention)에 참석을 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이번 것은 순전히 한인들이 주관하는 미국 동남부지역의 것, ‘제5차 미 동남부 성령대회‘였다.

성령에 관한 경험과 기억이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올해는 그 옛날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알게 된 최 데레사 양이 음악 지도자로 와서 정말 오랜만에 재회를 하게 되어서 한번 가 보자.. 하는 다분히 즉흥적은 결정을 하게 되었다. 매년 Labor Day에 맞추어서 열리는 비교적 큰 대회라 많이 알려지고 듣곤 해서 사실은 기대보다 생소하지는 않았다. 최 데레사의 12 string guitar 연주도 멋졌고 음악, 율동 팀들, 조직적으로 일사분란 하게 움직이던 red shirts의 봉사자들.. 모두 좋았다. 심지어 부산 교구에서 초빙된 주관 신부님의 ‘통성기도, 심령기도’ 소개,실습까지도 나는 거의 거부감을 느끼지 못해서.. 이제 나도 많이 ‘마음과 가슴’이 열렸구나 하고 만족한 심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복병이 나의 다리를 잡았는데.. 결과적으로 한마디로 최소한 나에게는 show stopper, disaster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2일 간의 행사였지만 우리 부부는 이틀 째날 행사는 모조리 포기하고 말았다. 이유는? 나의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작은 Satan이었을까? 이유는 우습게도 첫날 두 번째로 ‘등단’했던 신부의 ‘지겨운 performance’ 에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이 ‘사람’이 어떻게 ‘신부’가 되었을까 할 정도로 혼란한 시간과 싸우게 된 것이다. How did he ever become a priest? 저 사람이 신부인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음담패설’과 해외교민만이 겪는 아픈 곳들만을 철저하게, ‘밥맛 없고 저질적으로’ 찌르던 그의 강론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뒤늦게 나온 지독히도 짧은, 본론이라고 나온 것은 전혀 무게가 없고 깊이가 없던.. I’m Joseph..you’re.. 어쩌구 하는 전혀 새로울 것 하나도 없던 넋두리들.. 옆자리에 앉아있던 자매님들만 없었으면 자리를 박차고 자리를 떠날 생각도 있었지만.. 참고 참고 또 참았다.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 김영훈 스테파노 신부님과 같은 맑은 영혼의 느낌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올해의 성령대회는, 결과적으로 거의 완전히 실패한 나의 ‘첫 성령대회 체험’이 되었다.

이것이 평화인가..아니면?

지나가는 달들, 나날들에서 가끔 분명히 느끼는 것.. 이것이 혹시 그렇게 흔한 단어인.. ‘평화’인가? 너무나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나는 곧바로 이런 말을 붙인다. 내일 아침까지 만불 빚쟁이들이 들이 닥쳐도 같은 심정일까.. 바로 이것이 신앙적인 평화의 뜻이 아닐까? 이것 저것 나를 잡는 괴로움이 산재하고 남아있고 계속 생겨도 그래도 평화로운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면 이상한 것인가? 아하! 바로 이것이 미사 때 마다 귀 딱지 앉도록 듣는 peace be with you.. 가 아닐까? 이제야 나는 이것을 알아 차리고 있는 것일까? 이것도 나의 ‘신앙, 믿음’의 진화의 과정인가? 어떨 때는 이것도 ‘무서울 정도로 느껴지는 잔잔한 평화’ 로 받아 들여진다. 하지만 현재 연숙과 나는 그런 ‘놀라운 평화’를 느끼며 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4년이 다가오는 레지오.. 현재 나는 이곳이 거의 피난처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오지나 않았을까? 할 것이 없으니까.. 아니면? 아니다.. 이런 기회가 나의 세계관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았는지 잊었는가? 나는 분명히 변했고, 변하고 있고 계속 변하고 싶다. 과거의 ‘고립된’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나는 산다. 진리를 향해서 나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요새 들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 거의 99% 현재와 미래를 망침을 알기에 그런 것이지만 이제는 4년의 ‘실적과 전적’을 조금은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은 어떨까? 요새 레지오 간부 선출 문제로 신경이 쓰여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 조금은 ‘레지오 fatigue‘란 것을 느끼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남은 인생에서 ‘레지오’를 빼놓음은 아직 ‘상상’을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모님께 깊이 의탁하고 있고 그렇게 살고 싶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성모님과의 관계를 느끼고 싶고, 아니 관계를 쌓아간다고 조심스러운 희망도 하고 있으니까.. 어떨까? 죽기 전에 나는 과연 ‘레지오 마리애’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회상하게 될 것인가?

 

작년 정도는 아직 아니지만 그런대로 ‘보통 여름’같은 올해.. 참 이것이 자연의 조화일까.. 모든 것이 ‘평균치’를 유지하는 자연계.. 얼마나 이것이 ‘기적’처럼 느껴지는지.. 모든 것들이 extreme으로 치닫고 유행이 되어가는 요즈음 ‘평균’이란 말만 들어도 신선한 것이다. 이제 푸근하게만 느껴지는 여름에도 적응이 되어가고, 그렇게 손에 안 잡히던 ‘일손’에 조금 힘이 생겼다. 몇 년간 방치되었던 집안의 크고 작은 ‘고치는 일’들이 이제는 자신이 생겨가고, 최근 다시 힘이 생긴 YMCA에서의 bench press로 어깨와 허리에 힘도 느끼고.. 이때가 그야말로 chance가 아닌가.. 올 여름에는 무언가 우리집도 변한 모습을 모여 주어야 할 때가 아닐까? 벼랑 끝에서 창으로 무장한  monster들이 나를 기다려도 나는 평화를 ‘죽기 전까지’ 느끼고 살고 싶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성모님이 바로 나의 어깨를 잡아주고 계시지 않은가? 그렇지요.. 어머니? 

smith press

오늘 나는 작은 ‘금자탑’을 쌓고, 하루 종일 그것을 즐거워하며 자축을 하였다. 작은 금자탑이란 85 파운드 barbell 을 bench press로 30번 들어올리기(30 reps)를 했다는 것인데.. 글쎄.. 이것도 그렇게 자축을 할만한 일일까? 나도 우습지만 사실은 나에게는 심각한 milestone 이 되기에 그렇게 우습지만 도 않은 것이다. 하지만 조금 “미안한” 것은 이것이 비록 bench (chest) press이긴 하지만 ‘free weight’ bench press가 아니고 smith press machine 이라는 사실이다. 흔히들 ‘pure’ bodybuilder들은 free weight가 아닌 것은 ‘사이비’라고 일축해 버린다. 그런 말은 부분적으로 나도 동감 하지만 그들은 주장은 과학적인 근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과학적 연구의 결과는 대부분 smith machine의 효과는 free weight의 95% 에 달해서 사실은 smith machine의 장점을 고려하면 운동하는 환경에 따라서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smith machine은 그 design상, 운동시에 거의 사고로 다칠 염려가 없기에 현재 나와 같은 경우에는 거의 필수적인 것 같다. free weight bench press는 아주 무거운 것을 들 때에는 spotter가 옆에서 지켜 주어야 안전한데 smith press는 그것이 필요가 없기에 나에게는 거의 구세주처럼 느껴진다.

현재 나는 집 근처에 있는 YMCA에 가서 weight lifting을 하고 있는데 이 운동이 나에게는 가장 남자다운 운동같이 느껴지기에 다른 것은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골프, 테니스.. 등등 나이가 들면 거의 고정적으로 하는 운동들이 있지만 나에게 그런 것들은 거의 ‘놀이’ 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나의 생각이 100% 옳은 것이 아닐지라도 나는 그런 ‘놀이’를 배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저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때의 희열’과 그 후에 느껴지는 ‘철철 넘치는 adrenalin’ 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는 오래 전 학교 다닐 시절에 이런 운동에 관심도 없었고 사실 ‘갈비씨 신세’에서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 후, 미국에 오기 바로 전에 친구 이경증과 같이 서울 운동장 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을 하면서 weight training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health club에 가입을 하고 몇 개월 각가지 weight machine 으로 training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나의 몸을 보니 예전과는 아주 다른 ‘근육’이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사실 다시 이런 것을 할 시간적이 여유가 없이 ‘인생열차’에 실려 세월을 보내다가 10여 년 전 온 가족이 ‘가끔’ 다니던 YMCA에서 다시 weight lifting과 ‘재회’를 하였고 조금씩 시작을 했는데 수십 년 전에 해본 그 경험이 무엇인지 거의 큰 무리가 없이 그 무거운 것들을 올릴 수 있는 것을 알고 너무나 신기했다. 특히 ‘고령’화 되는 나이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대부분 친지들은 나이를 의식해서 이런 것은 꿈도 못 꾼다고 해서 나는 그들을 설득, 해명 시키느라 진땀을 뺀다. 물론 그들은 예전에 이런 것들과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믿기에 그들도 지금부터 시작을 해도 큰 무리가 없음을 안다. 급속히 노화되는 근육을 살리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 암만 달리고, 뛰고, 수영하고, 골프를 치고 해도 이런 근육을 살리는 것에는 시간이 너무나 걸리는 것이다.

근육운동의 효과는 ‘건장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이외에도 집안 일을 할 때에도 아주 유효하게 쓰인다. 예를 들면 집을 고친다거나 할 때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하는 일이 많은데.. 이런 근육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 것인가? 나는 이런 것을 대비해서 더욱 더 이런 운동을 하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들면 점점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슬픈’ 지경에 이를 터인데 그런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게 하는 것은 자기 몸에 ‘근육’을 살려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60 중반을 지나간 내가 느끼는 ‘근육의 중요 함’의 이유가 될 것이다.

Do you know where..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 오래 오래 태고적의 미국 pop song, 아마도 Diana Ross의 hit song 제목이었을 것이다. 그 노래는 나도 좋아 했던 기억이다. 멜로디보다도 그 제목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고 현재도 그렇다. 내가 조금만 방황하는 기분이 들면 이 ‘누가’ 이 제목의 말로 나에게 속삭이는 느낌을 받곤 한다. 요사이.. 몇 달간은 더욱 이 속삭임이 나의 귀를 잔잔히 감싼다. ‘경우야..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엄마의 자상한 목소리로 들릴 때도 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완전히’ 알고 있는 우리 엄마가 답답하게 느끼셨는가.. 경우야,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그렇다. 비록 최근에 나는 ‘이상하게 으시시한 평화’를 가끔 느끼곤 하지만 그 뒤쪽에는 항상 이 말이 숨겨져 있다. 너무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일까? 하지만 가끔 만끽하는 ‘평화’는 정말 의외의 것이다. 한달 여 나를 괴롭히던 치통의 고통도 조금 완만해졌고, 익숙해져서 그런가? 아닐 것이다. 지난 3년 넘게 ‘노력’을 한 보람일까? 그것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 성령님의 선물일까? 내일 벼락이 떨어져도 느낄 수 있는 나만의 평화.. 그것의 맛을 조금 보여주시는 것일까?

 

지난 5월 말의 레지오 피정.. 지나간 해 보다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맞았지만, 역시 old wisdom은 맞는가.. 예상보다 양과 질에서 비교가 안 되는 기대 이하의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문제는 안 된다. 내가 그곳에 갔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제 모두 익숙해진 ‘자매님’들을 대하는 것도 조금은 즐거운 일이 되고 있음에 나는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어떨 때는 청춘의 한창 시절 명동의 어떤 곳에서 ‘멋진 아가씨’들을 보고 우리들 끼리 즐거운 상상을 하던 때를 떠올리기도 해서..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지 혼동을 받는다. 나와 하신부님을 제외한 모두가 여성들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가벼운 즐거움이요, 놀람으로 느껴지는 것.. 어떨까..신경을 쓸 것은 많다지만 반드시 나는 솔직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을 ‘이성’으로 느낀다는 사실은 과연 ‘억제’해야만 하는 ‘죄’일까.. 아니기를 바라지만 이것은 100% 나의 ‘속마음’의 영역이다. 하느님만 아실 것이다.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 순간순간의 감정들인 것이다.

싸늘한 5월의 어느 날에..

¶  와~~ 싸늘한 아침.. 부엌의 창문 밖에 있는 온도계를 보니 40도(화씨)도 되지를 않는다. 이 정도면 아마 겨울에나 볼 수 있는 그런 기온이 아닌가? 문제는 지난 1주일 넘게 계속된 80도(화씨)를 훨씬 넘는 ‘초여름’ 같은 날씨에 거의 적응이 되어가고, 서서히 ‘겨울 장비’를 거의 완전히 ‘철거’하고 있어서 어제, 오늘의 ‘추위’는 더 차갑게 느껴진다.

 

여름같은 5월초를 보여 주는 tower fan 옆에는 추위에 떠는 Tobey가..

여름같은 5월초를 보여주는 대나무 돗자리 위의 tower fan 옆에는 추위에 떠는 Tobey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radiant space heater가 closet속 에서 끌려 나왔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radiant space heater가 closet속 에서 끌려 나왔다

 

물론 이것이 ‘또’ global warming의 여파라고 속단하지는 않는다. 경험적으로 나는 5월 달의 깜짝 추위를 많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의 ‘한파’는 1주일의 ‘열파, heat wave’에 바로 이어졌기 때문에 조그만 뉴스 감이 된 것이다. 느끼는, 체감적인 온도는 확실히 5월의 40도와 1월의 40도와 확연히 다른 것이다. 더 춥게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입을 옷도 없었고, 거의 철거되기 직전의 space heater를 다시 가동을 하고, gas 낭비를 없애기 위해서 central heating을 완전히 끄려는 timing등.. 조금은 웃기는 노릇이 아닌가? 아침에는 잠잠하던 central heating이 다시 가동을 하기도 했다. 참.. 재미있는 5월 중순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번 season의 ‘마지막 겨울’이 될 것이고 본격적인 여름 준비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  올해의 Mother’s Day미리 얘기가된 것처럼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했고, 나라니가 사는 apartment에서 ‘아이들’이 준비한 늦은 점심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곳의 ‘전통, 풍습’대로우리는 대부분 밖에 나가서 식사(外食)을하곤했는데 얼마 전부터는조금은검소하고조촐하게 보내기로 합의를 보게 되어서편안하게 집에서식사를 하게된 것이다. 매년 이날, Mother’s Day(5월두째일요일)가 오면 나의머리는 찐~한 생각으로 더 복잡해진다. 우리집 두딸들엄마의 의미와 더불어, Mother란 ‘영어’ 단어가 ‘어머니, 엄마’란 한글말과 거의 같은정도로 가깝게 들리는 ‘비선택적인’ 삶을 살게 된 ‘운명’을 생각하며, 그 운명의 그늘에서 나의엄마, 어머니와의 추억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분명히 인간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는 생각, “인생은선택” 이란말의 허구성도 더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