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월 17일은 우리 집 둘째 딸 나라니의 25번째 생일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얼마 전부터는 사실 아이들도 나이를 셀 때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25세면 내가 미국에 처음 올 때 정도의 나이가 아니던가? 흔한 말로 25년이면 강산이 두 번 반이 변할 정도의 세월일 것이다. 특히 근래의 강산이 변한 정도는 옛날이 것과 비교가 되지를 않을 듯 하다. 나는 딸만 둘을 두어서 아주 가끔 아.. 나도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까지는 못 미치는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자식 둘이면 만족하던 세대였고, 남녀구별을 싫어하던 우리 부부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남자가 필요한 일들을 만나거나 남자들만이 좋아하는 그런 취미들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워지기도 하긴 했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은 절대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해를 못하는 그런 것들도 있으니까.
큰애와 다르게 나라니는 무척 감성적이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는 그런 타입이다. 책보다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하나에 “미치면” 빠져 나오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한때는 Backstreet Boys의 semi-groupie가 될 정도가 되어서 우리를 애타게 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해 보니 나도 그 나이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지독히pop culture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하곤 했다. 어렸을 때에 나는 아이들과 재미있게 지냈지만 가장 중요한 10대 후반에 그 애들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아니면 그렇게 어려워야만 했을까?
나라니가 태어날 때 너무 난산이어서 더 이상 고생을 원치 않았지만 그 이후 가끔 하나 더 둘까..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 보긴 했다. 하지만, 역시.. 더 이상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근래에 이곳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모든 여건들이 나아지고 있는 추세이고 아마도 고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흑인대통령에 이어 여자대통령도 “절대로” 가능한 세월이 되고 있으니까,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비록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이 더 공평한 것이 아닐까?
나라니에게 주는 노래선물을 고르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1985년 태어난 해의 80s song은 역시 We Are the World가 제일 적격이고, 나라니가 제일 좋아하던 Backstreet Boys의 hit songs중에서는 나도 좋아하던 Show Me the Meaning of being Lonely가 좋을 듯 하다. 나라니, Happy Birthday!
We Are the World – 1985 Usa For Africa
Show Me The Meaning Of Being Lonely– Backstreet Boys
Pet flap (aka: pet door): 쉽게 말하면 “개구멍” 이라고나 할까. 이것을Home Depot에서 산지는 일년이 훨씬 넘었다. 우리 집의 개 5살 백이 Tobey녀석, 수시로 backyard로 나갈 때마다 뒷문을 열어 주어야 하는 게 조금 귀찮을 때가 많았다. 특히 오밤중에 뒷마당으로 급하게 볼일을 보려고 나가고자 한다면 더 귀찮아진다. 이럴 때 이 pet door, flap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pet door in place, finally
내가 산 것은 standard door 용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는 사실 맞지를 않았다. 우리 집의 뒷문은 french door라서 유리를 떼어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멀쩡한 문이 사실 그 품위를 잃게 되니까. 그래서 벽에다 달아야 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drywall을 뚫고 속에 있는 wall frame을 새로 design을 해야 한다. 못할 것은 없지만 정말 귀찮지 않은가? 그래서 계속 미루다가 이번에 새로니가 데리고 있던 고양이 Izzie가 우리와 같이 살게 되어서 그 녀석 때문에 더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고양이는 자기의 전용 litter box(변기)가 집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집안에 놓아도 큰 상관은 없지만 back porch에 놓으면 공기도 맑고 냄새도 덜 나고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 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일이 그런대로 급속도로 진척이 되어서 어제 끝이 났다.
이와 같은 일들이 그렇지만 일단 끝나고 보면, 그렇게 간단했던 것을.. 하는 후회 투성이가 된다. 만드는 과정보다 design하는 과정이 사실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다. 만들어 놓고 보니 이제는 이 녀석, 특히 고양이 Izzie가 이것을 쓰게 만들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이 남았다. 어떻게 이 문을 쓰게 할 수 있을까? 거의 12시간이 지났는데도 저 혼자서 그 문으로는 절대로 가지를 않으니..
오늘은 9월 15일, 그러니까 “구일오” 로구나. 내가 말하는 구일오는 1950년 9월 15일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다. 6.25와 같이 정확히 60년이 되었다. 내가 2살 때니까 기억이 날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 기억이 난다. 어릴 때 그날을 기억하던 그런 기억들 말이다. 그 때는 하도 라디오 드라마나 만화, 교과서, 등등으로 많이 보고 들어서 정말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곤 했다. 특히 6월 25일이 되면 나는 공포에 떨기도 했다. 그날 새빨간 저녁놀을 보면 마치 공산당이 탱크를 몰고 미아리고개를 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으니까.
MacArthur in Inchon, 9/15, 1950
그와 마찬가지로 9월 15일이나 9월 28일이 되면 괜히 신바람이 나곤 했다. 그날은 우리 용감한 국군과 유엔군이 악당 공산괴뢰군들을 소탕하던 때였으니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다. 맥아더가 이끈 인천상륙작전은 우리에게는 정말 멋진 무용담이었다. 멋있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끼고 flagship 군함의 전망대에 앉아서 지휘를 하던 그런 사진들을 보면 정말 산호의 만화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1958년 인천만국공원에서, 5학년때
이승만 대통령과 더불어 맥아더장군에 대한 인상도 나이가 들면서 계속 “진화” 되기도 했고 역시 영웅이란 어두운 이면들이 다 있다는 “진리”도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역시 한국전쟁에 끼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커다란 전환적인 영향이었다. 대다수가 반대하던 “생각하기에도 어려운” 그 작전을 그는 거의 혼자서 달성하지 않았던가?
결국 후에 인천에는 맥아더 장군을 기념하는 “만국공원”이 세워지고,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인천 앞바다를 보는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1958년)에는 그곳으로 단체 당일치기 수학여행까지 가기도 했다. 그때 만국공원에서 맥아더장군의 동상을 보았고 그 옆에서 단체사진도 찍었다. 그곳에서는 인천항의 전부가 아주 잘 보인다.
오늘 듣고 싶은 추억의 노래들은…
Sad Movies – Sue Thompson (1961)
우리에게는 1962년도에 더 유행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 중학교 3학년 때 쯤이었나.. 그 당시 한때는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러니 아직도 기억이 날 수 밖에..
Corina, Corina – Ray Peterson (1962)
역시 우리들은 일년 더 늦게 1963년, 고1때 많이 듣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확실치 않다. 정확한 시기는.. Ray Peterson은 사실 목소리로만 알았는데 video를 보니까 더 실감이 간다. 그는 Texas의 Denton출생이라고 한다. 그곳은 나도 한번 가 본 곳이라 반가웠다.
오늘 아침에 연숙으로 부터 슬픈 소식을 하나 듣게 되었다. 오래 전에 잠깐 알고 지내던 길정일씨가 작년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꽤 오래 전에 알았던 관계로 거의 잊고 살았던 것이다. 길정일씨는 연대후배로써 Madison (Wisconsin)에서 알고 지낸 사이였다. 1988년~1989년에 우리는 1년 정도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University of Wisconsin system중에 제일 크던 Madison campus가 있었고 그곳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한국유학생들이 있었다. 게다가 규모에 비해서 활발하던 한인천주교 공동체가 이 campus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언젠가 이곳의 추억을 글에 담아 보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조금 언급을 하게 될 줄이야. 유능한 정치학도, 탁월한 지도력, 등으로 기억이 되는 그.. 학위를 받고 어떻게 인생을 살았을까. 갑자기 궁금해 진다. 부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편히 쉬기를..
new a/c transformer
지난 주일 고장 났던 위층의 a/c (air conditioner) 24V transformer의 Made in China (where else?) replacement transformer가 어제 배달이 되었다. 생김새는 그런대로 ‘진짜’ 에 가까우니까 중국제건 아니건 크게 문제가 없을 듯하다(너무 희망적인가). 하기야 이런 것들이 중국제가 아닌 것을 찾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급하게 내가 만들어서 썼던 2 series-connected transformers의 자리에 새것을 넣어서 다시 a/c를 test해 보았다. 문제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 쓰던 것은 사실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Voltage가 24V가 아니고 26V 정도여서 조금 신경은 쓰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tolerance는 대부분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바로 programmable thermostat였다.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도 “가볍게”만 들어진 (under engineered) 것인데 역시 2V over voltage stress를 견디지를 못했다. printed circuit board design이 over current 로 인한 heat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버린 것이다.
fried thermostat
결과적으로 멀쩡하던 thermostat 하나를 잡아먹은 셈은 되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런 bad & sloppy design을 한 engineer들을 탓 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오래 전에 쓰던 programmable thermostat가 하나 있어서 그것을 쓰게 되었다. 이래저래 올해 여름의 무더위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남기며 물러가는 듯 싶다. 여름이여.. 안녕!
어제는 파란 하늘의 아침으로 시작되었지만 오후부터는 갑자기 습해지고 찌는 듯이 더워졌다. 남쪽으로부터 열대성 구름이 갑자기 몰려 온 것이었다. Airport쪽은 결국 이날의 최고기온 기록을 세우고 (96F), 우리가 사는 쪽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려왔다. 우선은 시원해서 아주 반가웠으나 강풍과 번개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쓰러질 만한 키가 큰 나무들은 몇 년 전에 다 잘라서 그 걱정은 이제 없으나 번개는 별 수가 없다. 전기가 나가면 조금 골치가 아프니까. 그런데 어제는 결국 조그마한 번개의 피해를 입고 말았다.
나의 kitchen office에 있는 pc의 network connection이 번개로 인해서 spark를 보이더니 network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Home server로부터 받아보는 video가 끊어지고 물론 Internet도 끊어지고.. 처음에는 pc의 Ethernet card만 zap이 된 것으로 희망을 하고 그것부터 바꾸었지만 역시 no network, Internet. 다음은 server까지 연결된 모든 wiring을 check, OK. 그 connection에는 두 대의 network switches가 연결되어 있는데 알고 보니 모두 zap이 된 것이었다. 나의 추측에, pc쪽에 있는 network switch의 power adapter (small wall transformer)로 big spike가 들어온 듯 하였다. 거기는 사실 surge protected power strip이 있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보호를 못 해준 모양이었다. 이것을 다시 바로 잡는데 오늘 성당에 다녀와서부터 거의 2시간이나 걸렸다. 벼락의 직접적인 피해는 이번이 사실 처음이었다. 이 정도인 것 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다.
오늘 주일도 큰 일이 없이 연숙이와 둘이서 근처에 있는 우리의 미국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8시반 미사를 다녀왔다. 예외가 없는 한 우리는 미사 후에 Panera Bread에 들려서 Bagel과 coffee로 아침을 때운다. 요새는 이것이 우리부부의 유일한 social outing역할을 하고 있다. 본당에서 받아 온 주보를 보니, 표제에 Grandparents Day란 글이 들어왔다. 별로 ‘유명한’ 기념일이 아니지만 본 기억은 있다. 이게 나이가 이정도 되니까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니 바로 오늘이 그 날이었다. 부리나케, googling 을 해보니 아래와 같은 구절로 설명이 되어있었다.
National Grandparents Day originated in the United States in 1978. President Jimmy Carter signed the proclamation on August 3, 1978 after Congress passed the legislation proclaiming the first Sunday after Labor Day as National Grandparents Day.
The official statute cites the day’s purpose of Grandparents Day as: “…to honor grandparents, to give grandparents an opportunity to show love for their children’s children, and to help children become aware of strength, information, and guidance older people can offer”.
아하, 역사가 그런대로 된 기념일이었구나.. 우리는 아직도 grandparents가 덜 된 상태고 우리의 grandparents는 전혀 안 계시고 하다 보니 이지경이 되었구나. 우리 아이들에게는 우리 부모님들이 grandparents일 텐데.. 하며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진다. 손녀들의 재롱도 거의 못 받아보신 것을 생각하면 더욱 우울해진다.
Barack Obama, 지독히도 재수가 없는 미국 대통령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정말 놀랍기만 하다. 물론 그에 대한 기대가 너무도 컸다. 거의 실현 불가능한 그런 기대들 말이다. 꿈과 현실은 그 골이 너무나 깊었던 것일까. 그의 능력도 생각보다 일반적인 기대치를 밑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2년에 가깝게 유심히 관찰하면서 느낀 것은 그는 절대적으로 ‘성공’을 할 수가 없는 조건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야당이 되어버린 Republican(공화당)의 ‘작태’는 정말 역사적인 최저, 최악이었다. 옛날, 고국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의 야당은 비교도 되지를 않는다. 이것은 정말 이조 시대 장 희빈이 중전마마를 해하기 위해서 구중궁궐의 뒤에 숨어서 저주의 화살을 쏘는 정도였다. 한 마디로 Obama가 ‘절대로 성공하는 것을 막는다’ 라는 것을 비공식 당 정책으로 쓴 셈이다. 이것은 정말 이곳에 오래 살면서 처음 보는 거의 추태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이곳, 이 나라, 이상과 희망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다.
산호의 라이파이 2003년 복간본
6월초에 home office를 옮기면서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거의 3 개월 넘어서 조금씩 보고 있는데,대부분이 책이나 서류 같은 ‘종이’ 류이다. 그러다가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 복간 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운 동창 친구 양건주가 2003년에 김산호 화백의 친필 사인까지 받아서 보내준 것이었다. 그때 어머님을 잃고 정신적으로 심한 우울증으로 방황을 하던 나를 구해준 건주의 우정에 정말 깊은 감동을 받았고,사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었다.
우리또래 남자들이라면 사실 라이파이를 모른다면 아마도 깊은 산골에서 살았던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했던 대작, 걸작, 산호의 라이파이..를 살아 생전에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았다. 그 지옥 같았던 국민학교 6 학년, 입시공부의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웃고, 기뻐했던 순간들은 아마도 ‘산호의 라이파이의 다음 편 들이 나오던 날들’ 이 아니었을까? 너무 감동적이라 산호선생께(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생 정도의 나이) 편지까지 보내고 했었다. 그것이 정확히 반세기 전이었다.
세상은 조금 더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최고의 악당 소련이 없어지고, 공산당도 크게 무서울 것이 없게 된 세상을 우리는 어렸을 때 ‘절대로’ 기대를 못하던 것이 아니었는가? 그런 류의 작은 사건들 다른 것들도 참 많아서, 빨리 죽는 것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예외는 진빨갱이,마피아괴수, 김일성일가..겠지만. 하지만 Cuba의 카스트로(Fidel Castro)의 말을 들어보자. 이란의 ‘과대망상증’ 대통령, Ahmadinejad의 계속된 반 유태계 (anti-Semitic) 적인 태도와 정책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을 했는가? “유태인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어려운 존재위협 속에서 살았다. 2 차대전 때 독일의 유태인 학살 (Holocaust)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 세상 많이 변했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볼 것이다.
오늘 같은 날, 갑자기 듣고 싶은 노래는.. 역시 oldies.. 아마도 1975년 경이 아니었을까? 멋있게 생긴 Barry Manilow가 멋있게 불렀던 “I Write the Songs”, 밝았던 그 시절을 추억하고 싶어진다.
Nine Eleven, 9주년이 되었다. 그날은 싸늘할 정도의 아주 파아란 하늘의 밝고 밝던 가을 아침이었다. 보통 때와 같이 출근했지만, Rockwell Automation office에 들어 서자마자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곳 저곳의 cubicle이 거의 비어있었고 몇 군데의 TV앞에 동료engineer들이 모두 모여서 그 화면에 완전히 얼굴들이 고정되어 있었다. 공기가 이상했다. 화면을 보니 무언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모습만 보인다. WTC (World Trade Center)의 모습이고, 그 위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있는 화면이었다.
아하.. 경비행기가 잘못해서 부딪친 모양이구나..하고 물어보니 그것이 아닌 듯 하다는 대답들이었다. 조금 후에 다른 tower에 연기가 나기 시작하고, 모두들 얼굴들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게 만화영화가 아닌가? 침묵만 흐르고, 말들을 할 용기가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 모두 일을 할 마음이 전혀 나질 않았다. Internet으로 화면이 옮겨지고.. 결국은 two towers모두 무너지는 climax가 보였다. 완전한 침묵.. National Emergency, All Airports Closed 라는 sign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모두들 침통한 모습으로 어슬렁 어슬렁 직장을 빠져 나왔다. 왜 그렇게 하늘은 파랗던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모두들 생각에, 세상이 한 순간에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Highway는 거의 텅텅 비어가고National Emergency sign은 계속 되었다. 거의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이 terrorist들이 앞으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작정인가.. 짐작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Pearl Harbor와 일본인들, 그 후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일본인들도 떠올랐다.
이슬람교도의 경전 코란을 불 태우자던 “미친” 목사 (이런 친구가 어떻게 ‘개신교’ 목사가 되었나?) 가 서서히 물러나고 있는 비겁한 얼굴을 보니 정말 밥맛이 없어질 지경이다. 거의 정신병자에 가까운 이런 놈을 따르는 ‘개신교’ 교인들의 정신상태도 사실 의심스럽다. 독일에 사는 이 목사라는 사람의 딸도 ‘아버지는 정신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이라는 힌트까지 했다는데. 이것을 보니까 이곳에서 가장 빨리 유명해지는 방법중의 하나는 ‘코란을 불태우자는 계획’ 을 언론에 공표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국방장관까지 이 미친놈에 놀아난 것을 보니 참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정말, 정말, 이놈이야 말로 9/11 terrorists와 같은 급의 ‘사탄’이 아니던가?
3일전에는 결국 우리 fish ‘lucky‘가 세상을 떠났다. 몇 달 전에 이미 그의 partner가 먼저 갔고 그 이후부터 lucky도 움직임이 아주 느려지기 시작해서 이미 나는 가족들에게 경고를 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거의 잠을 자듯이 살아온 셈이다. 아주 가던 날은 머리를 계속 모래에 묻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하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작은 생물에 이렇게 감정적으로 진하게 연결이 된 것은 나로서는 처음 경험한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약’해 졌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다. 생명의 유한성을 다시 한번 그 작은 생물체를 보며 느낀 것이다.
박민우 저, “가까운 행복” 이란 책을 조금 훑어 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가회동” 이란 세 글자.. 소제목 “가회동 거닐며 도넛 먹기“에 있는 단어였다. 이게 무언가, 가회동에서 도넛을 먹다니.. 하루가 너무나 힘 들었던 샐러리맨의 휴식처로 찾은 곳이 그곳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꿈이 아롱거리는 나의 고향, 가회동이 건재하다 못해서 이제는 휴식처가 되었구나. 그 부분을 인용을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국역 2번 출구,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가 보았다. 주택가인데도 도로는 넓고 인적은 드물었다. 평화로웠다. 대로변을 따라가다가 가회동 한옥 마을이라는 표지가 보이자 지체 없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찬란하게 이어지는 한옥들. 드문드문 공사를 하고 있었고, 가끔씩 관광객들과 마추쳤지만 그들 역시 나처럼 나직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반가운 동지들.
흥미로운 말이 ‘안국역 2번 출구’.. 아니 그곳에 안국역이 있었구나. 그러니까 안국동에 연결이 되어서 그랬을까. 아하.. 이곳에도 지하철이 생겼구나.. 아니 가회동 한옥마을은 또 무엇이냐? 동네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나? 의문은 그 다음의 ‘관광객’ 에서 풀렸다. 아하.. 민속촌처럼 이곳도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구나.. 그러니까 관광객이 오겠지. 나의 생각은 온통 50년 전으로 날라간다. 최소한 나의 자라던 곳이 상전벽해가 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도 생겼다. 하지만 그곳이 거의 ‘화석’같은 역사물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이 오랜 세월의 장난과 횡포에 소름이 돋는다.
아침이 갑자기 깜깜해 졌다. 6시 반에 일어나려면 너무나 어두워서 조금 귀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해가 그 동안 그렇게 짧아졌나. 지난 며칠은 평균 이하의 기온과 아주 건조한 날씨로 아침에는 추위를 느낄 지경이었다. 이렇게 앞으로 오는 것의 맛을 조금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시 rebound할 것이고 사실 그렇게 되었다.
이번 여름에는 a/c (에어컨)들이 하도 stress를 많이 받아서 그것을 service하는 business는 아주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서 아래층 unit에 문제가 생겨서 한번 service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일단 truck이 오면 문제가 없더라도 최소한 $100은 각오를 해야 한다. 다행히 큰 고장이 아니고 over current로 인해서 wire가 타버린 정도였다. 조금 아까운 것이, 그 정도였으면 내가 고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professional tool을 쓰니까 나와는 근본적으로 수준이 다를 것이다. 그 service guy가 나온 김에 우리 집의 2 a/c unit의 checkup을 부탁했더니 의외로 결과가 좋았다. 거의 15년이 된 것인데 조금 이해는 안 가지만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대신 energy efficiency가 형편 없는 건 사실이다. 생각에 내년에도 올해처럼 덥다면 newer model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이틀 전 낮부터 기온이 올라서 2층의 a/c가 낮부터 가동이 되었는데, 갑자기 조용해졌다. 암만 해 보아도 모든 것이 조용하다. system이 아주 죽은 것이다. 우와.. 여름이 거의 다 간 다음이라 조금 덜 걱정은 되지만 9월 달도 더위가 만만치 않은데.. 각가지 근심스러운 생각이 들었고.. 혹시 system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리나케 thermostat를 열어서 voltage checkup을 해 보니 전혀 voltage가 없다. 이번에는 전번의 경험도 있고 해서 내가 공구를 들고 attic으로 올라가서 잘 살펴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결론을 내렸다. Integrated Control Unit에 붙어 있는 24V transformer가 24V를 공급하지 못하는 것이다.
Temporary a/c transformers
우선 조금 안심을 했다. 이 정도면 그렇게 큰 비용이 들지는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pro들에게 맡기면 최소한 몇 백$은 우습게 들것이다. 최소한 transformer만이 문제라면 내가 고칠 수도 있지 않은가? Internet에서 White-Rogers Control Unit의 circuit diagram을 download해서 보았더니 역시 이것은 computer controlled system이었다. 이것이라면 식은 죽 먹기라는 자신이 생겼다. Online으로 replacement transformer를 $40정도에 order를 하고, 이것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 더위를 견디나 하는 생각을 했다. 침실과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한 home office등이 다 그곳에 있어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혹시 집에 24V transformer가 있을까 했지만 없었다. Door bell 에는 20V transformer를 쓰고 있어서 쓸 수가 없었고, 아래층의 a/c unit에서 쓰는 24V transformer를 며칠 동안 빌려서 쓸까 하고 내려가 보니 이것은 완전히 a/c unit에 고정이 되어있어서 쉽게 떼어낼 수가 없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더니.. 결국은 security camera에 쓰려고 오래 전에 사 놓았던 12V transformer 2개를 찾아 내었다. 이것을 series(직렬)로 연결하면 24V가 되는 것이다. 부지런히 wood block에 두 개를 고정시키고 wiring을 해서 a/c unit에 연결을 하였다. 만약에 다른 것이 문제라면 이것은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라서 손에 땀을 쥐고 에어컨을 틀어 보았다. 와~~~ 만세! 역시 문제는 transformer였다. 나의 추리가 맞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order했던 ‘진짜’ transformer가 도착할 때 까지만 쓸 예정이다. 덕분에 이제부터는 에어컨의 control system은 언제라도 자신 있게 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중앙고교 동창 유정원이 email을 주었다. 이 친구의 편지tone은 나이에 맞지 않게 활발하고 장난스럽다. 45년 전의 얼굴로 그것을 상상하려니 조금은 comic하기도 하다. 어머님 장례는 순조로이 끝이 났는지.. 나의 blog이 너무나 과거에 얽매어있는 것이 아니냐는 comment는 사실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해 주었다. 고맙다, 정원아.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그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느냐 하는 것에 있겠지. 기본적으로 요새의 일들은 ‘이야기’ 거리로는 조금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정원이 말 대로 요새도 자세히 보면 얼마나 깊은 이야기가 많이 있겠니? 그저 습관화되고, 타성에 젖어서 못 보는 것일 수도..
중앙고 3학년 때의 반창(같은 반 동창, 요새 새로 배운 용어) 권명국도 return email을 보내주었다. 명국이는 정원이와 다르게 경사인, 결혼식으로 인해서 소식을 받았다. 갑자기 옛 동창들이 주변에 나타나는 것 같아서 정말 반갑다. 이 Atlanta지역에는 사실 내가 유일한 중앙57회라서 더욱 그렇다. 명국이는 아직도 ‘신나게’ 일을 하는 모양이다. 정말 부럽다. 그 친구의 듬직하고 남성스러운 얼굴이 머리에 선~~ 하다. 1987년에 미국에 왔다고.. 이 친구도 “판에 박힌 표준” 적인 인생을 보낸 것이 아니었구나. 고대 토목과를 다닌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어제는 꽤 오랜만에 Cobb Library를 찾았다. 일부러 간 것이 아니고 그 근처에 가는 김에 들린 것이다. 전에 빌렸던 실화적인 소설 “이민자(Immigrants)”를 다 보기도 전에 return을 했는데, 혹시 다시 빌릴 수 있나 했는데.. 이미 대출이 된 상태였다. 그 책이 1980년대 큰 인기 있었던 소설이라고 하던데 나는 전혀 깜깜하였다.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독일태생의 저자가 영국에 ‘이민’을 해서 쓴 소설이라 아주 관심이 간 책이었다. 대신 다른 Korean titles 4권을 빌려왔다. 그 중에 한 권은 전에 한번 빌린 것인데 또 한번 보고 싶었던 책이다. 문요한이란 사람이 쓴 “굿바이, 게으름“ 이란 책이다. 이런 류의 책들은 이곳에 정말 많이 있다. 하지만 한글로 읽은 것은 조금 기분이 다르다고 할까.
같은 류 (self-help)의 책으로 Brenda Shoshanna의 The Anger Diet, 번역제목: “마음의 불을 꺼라” 가 있다. 이것은 번역서이다. 요새는 하도 화를 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이것도 사회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정신세계사라는 출판사의 번역서인데 단기 4339년 발행이란 것이 아주 흥미롭다. 정말 오랜만에 단기 연호를 본다. 우리 국민학교 6학년 때까지 단기를 써서 익숙한 연호가 아닌가. 나의 국민학교 2학년이 4288년 이었다. 분명히 그때를 기억한다.
다음 책은 박민우의 “가까운 행복 Tea Bag“ 이라는 제목의 수필, 산문집이다. 나는 이 저자를 전혀 모른다. 1973년 생이라니까 내가 미국에 오던 해구나. 나의 조카보다 한살이 많은 저자.. 이 저자가 어떠한 인생의 경륜으로 행복을 논 하려나 기대를 하며 빌려왔다.
마지막 책은 Pauline Chen이란 중국계 미국인 여자 외과의사의 죽음에 대한 심각한 수필집이다. 원제는 “Final Exam“이고 번역제목은 “나도 이별이 서툴다“였다. 이 나이에 죽음에 관심이 없다면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종교적인 각도의 죽음 이외에도 다른 각도의 죽음도 무척 많이 관심이 간다. 추상적인 죽음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바로 코 앞에 보이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 것은 아마도 죽음을 구체적으로 매일 다루어야 하는 의사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머리말에도 나온다..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고, 가급적 평화롭게 마지막을 맞도록 하자고.. 나도 동감이다. 기계적인 수명의 연장은 그런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Lincoln Exhibit
지난 일요일에는 예정대로Atlanta History Center에서 방금 시작한 Lincoln Exhibit에 단출한 우리식구가 다녀왔다. 정식 명칭은 “WITH MILICE TOWARD NONE THE ABRAHAM LINCOLN BICENTENNIAL EXHIBITION LIBRARY OF CONGRESS” 라는 아주 긴 제목이었다. 처음 전시되는 유품도 많고, 이렇게 많은 것이 한 곳에 모인 것도 처음이라고 해서 흥미로웠다. $16 admission ticket이 말 하듯이 아주 비싼 것은 아니지만 아주 싼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작은딸 나라니가 그곳에서 근무 하는 덕분에 무료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현재의 미국이 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Lincoln대통령이라는 것을 알면 더욱 큰 감동을 가지고 구경을 하게 된다. 그 반면에 너무나 인간적인 Lincoln 또한 하나도 미화됨이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준급의 전시였다. 내가 제일 감정을 억누를 수 없던 것은 역시 암살 후에 사체에서 나온 소지품들.. 현재 기준으로 보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안경이 더욱 그랬다. 그 암살 당시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또한 ‘마누라 복’도 없던 그가 불쌍하기도 했다. 또한 그 유명한 Gettysburg의 연설, 271 단어의 짧은 연설문, 2분 15초 동안 연설을 했다는 그 연설문의 필사본도 거기 있었다. 그 잉크들이 어떻게 아직도 그렇게 생생할까. 마지막 부분의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의 글씨 또한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General Sherman을 시켜 초토화 시켰던 적군의 요충지 Atlanta에서 열린 것은 역사의 irony가 아닐까.
내가 제일 혐오하는 것들이extremism, extremist 같은 류의 것 들이다. 최근 10여 년에 걸쳐서 이런 것들이 아주 유행을 하고 있고 어는 곳에서나 판을 친다. 우선 뉴스에 굶주린 대중을 흥미롭게 해서 그런지, 그것이 $$으로 연결이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무엇인가? 정치인들도 그렇지만 더 가증스러운 것이 허울좋은 신앙인들이다. Christian중에 더욱 그렇다. 하기야 Hitler도 그 예수님을 팔아가며 유태인들을 죽였지만 그것이 바로 extremism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요새는 Koran을 불태우자며 거품을 풀고 있는 거의 ‘미친듯한’ 목사가 미국 Florida에 건재하고 있다. 남의 종교를 그렇게 증오하면서 어찌 ‘사랑의 종교’의 목사 짓거리를 하려는가?
대학시절, 그것도 초창기에 많이 듣던 추억의 두 ‘명곡’을 다시 들었다. 이것에 더 설명이 필요할 수가 없다.
Summer Wine – Nancy Sinatra & Lee Hazlewood:
Lee Hazlewood는 몰라도 Nancy Sinatra는 누구인지 잘 안다. 그녀의 husky voice는 그녀의 아버지와 다르게 독특한 매력이 있다. 날씬한 몸매와 맞지 않게 거의 ‘여성운동의 선구자’같은 노래들이 많았다
The Rain, The Park and other Things – The Cowsils:
노래의 제목이 그 당시에 아주 시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 당시 이들 그룹은 미국은 몰라도 한국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Hair같은 것은 크게 유행을 했다. 그들의 노래중에 나는 이곡을 제일 좋아했다. 제목처럼..
오늘은 Labor Day 공휴일을 앞둔 토요일이라 기분부터 느긋해지고 마음도 편함을 느낀다. 게다가 날씨가 예보대로 거의 완전한 가을날씨로 변했다. 3개월 만에 보는 청명하고 드높은 파~란 하늘, 햇살은 거의 여과됨이 없이 내려 쪼이는 기가 막히는 날씨다. 그 옛날 고국의 공해 없던 하늘을 연상시킨다.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엄마의 생일을 오늘로 옮겨 놓았는데 결과적으로 잘도 잡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엄마의 de facto birthday가 된 것이다. 늦은 점심을 준비 했는데 말에 의하면 Southern style cooking 이라고 했는데 아주 맛이 있었다. 나라니는 집에서 나가서 사는 것이 즐거운 것 같이 보인다. 얼굴이 벌써 활기에 차있다. 요새의 경제사정은 사실 나가서 살던 아이들이 부모 집으로 들어오는 추세라고 들었는데, 우리 작은 딸은 반대의 케이스가 되었다. 큰딸 새로니는 얼마 전에 Vanderbilt의 Peabody College에서 대학원 course를 시작하였는데, 생각보다 학생생활에 다시 잘 적응하는 것 같이 보인다.
내일 일요일은 성당에서 온 후에 Atlanta History Center에서 시작하는 Lincoln Exhibit에 가기로 했다. 나라니가 그곳에서 일을 해서 그런 행사들의 정보를 빠짐없이 알려주는데 그 덕분에 작년에는 Andy Williams의 행사에도 갈 수 있었다. 내일 하는 것은 Southern states에서는 유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Lincoln의 유물들을 직접 본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아서 기대가 된다.
휴~~~ 지난 밤에 예기치 않게 전기가 나가버렸다. 맑고 써늘한 밤에 전기가 나간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도 거의 2시간이 지난 다음에 돌아왔다. 날씨에 의해서 벼락같은 것이 치면 사실 몇 초 동안 깜빡 거리는 것이 보통이니까, 이것은 분명히 그런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99% 짐작에 바로 옆의 Roswell Road 확장 공사에 의한 것일 것이다. 4차선을 거의 8차선으로 확장하는 소위 말하는 Obama’s Economic Stimulus Project의 하나다. 그러니까 ‘공짜’로 연방정부에서 받아서 하는 것이니까 우리의 local tax 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이다. 그 정도의 큰 공사라서 분명히 지하로 뻗어있는 고압선을 옮겨야 하고.. 그러다가 앗차! 했을 것이다. 우리 집의 computer network system은 매우 ‘약한’ battery backup (UPS)으로 단전으로부터 보호되어 있다. 주로 잠깐 동안만(최대 10분 정도) 정전을 막아주는 것인데 2시간은 무리, 무리다. 아침에 보니까 network system이 엉망이 되어 있었고 복구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난 몇 달처럼 무더위였으면 아마도 초저녁 잠을 설쳤을 것이지만 다행히 시원한 밤이었다.
9월 1일은 나의 아내 연숙의 생일이다. 나이를 세기는 이제 조금 재미가 없고 그저 우리 집 식구 4명 중 2명은 모두 1월 달에, 나머지 2명은 9월 달에 생일이 있다는 정도지만, 조금 재미있는 사실은 그 같은 달의 두 사람 생일의 날자 사이가 정확히 16일 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말 우연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었을 때는 조금 시끄럽게 보내야 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일이란 것을 즐기는 줄 몰랐다. 너희도 나이가 조금 들어 봐라.. 하면서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전에 비해서 조금 조용해진 편이고, 사실 조금 편한 기분이다. 그래도 서울에 계시는 처형께서는 꼭 전화를 주신다. 처형 댁도 모두 건강한 나날을 보내시기를 기도해 본다.
얼마 전에 IKEA 에 가서Tundra Laminate floor package 15개를 사왔다. 일층의 나머지를 모두 나무 마루로 끝내려는 계획이다. 물론 dining room으로 경험이 생겨서 조금 자신은 있지만 반대로 어떤 surprise가 나를 기다리는지 그것도 조금 걱정이 된다. 이런 일들은 언제나 꼭 예상치 않은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방과 방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transition handling인데, 내가 pro가 아닌 이상 언제고 나를 괴롭힐 듯 하다.
9월은 식구 두 명의 생일도 있지만, 그 악몽의 9/11 terrorist attack 기념일이 버티고 있다. 정말 괴로운 기념일이다. 그렇다고 피하거나 생각을 안 할 수도 없고,사실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세월이 아직도 그것을 잊을 만큼 흐르지 않았다. 그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의 영혼들을 기억한다. 그 surreal한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또한 회교도들을 어떻게 보고 생각할 것인가.. 참, 정말 괴롭고 어려운 문제다.
9월 하면 생각나는 노래는 역시 Come September란 노래가 있다. 하지만 가슴에 더 와서 닿는 듯한 9월의 기분은 역시 패티 김의 “구월의 노래” 가 아닐까. 같은 노래를 혜은이도 불렀는데 역시 참 듣기 좋다. 아내 연숙이 대학시절 대학교 정문의 수위아저씨가 당신은 꼭 혜은이를 닮았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나와 직접적으로 노래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간접적인 인연으로 들어 보았다.
지긋지긋한 8월이 드디어 간다. 벌써 어제 아침부터 시원한 바람이 산들거리는 듯 느껴지고 실제로 아침의 바깥 기온도 화씨 70도 밑으로 떨어졌다. 지난 세달 동안 계속 70도를 넘었으니까 이것도 조그만 뉴스 꺼리다. 그러니까 지구는 변함없이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증명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중앙 57회 동기 회에서 교우 유정원의 모친상 소식이 왔다. 이제는 세월이 그렇게 된 모양인지 부모님 타계 소식 아니면 자녀들의 결혼식 소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친상의 소식은 나에게 더 진한 슬픔을 준다. 내가 7년 전에 이미 겪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불현듯 email로 나마 위로를 하고 싶어서 보냈다.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누구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애도기간이라 바빠서 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원이는 곧바로 회신을 주었는데, 내가 놀란 것은 내 이름(이경우)의 “경”자가 한자로 “빛날 炅”이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유정원의 “밝을 晶” 자를 기억하고 있다. 아득하게 무슨 time machine를 탄 기분이었다. 45년 이상 완전한 연락의 단절이 이렇게 쉽게 연결이 되는 것은 참 경험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 참 좋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 마지막 편인 고3 편을 오늘 천신만고 끝에 ‘탈고’를 해서 올려 놓았다. 이미 예상은 한 것이었다. 기억력을 더듬는 것이 이번에는 그렇게 힘이 들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노력을 하니까,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이 하나 둘씩 살아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잊을세라 부리나케 쓴 것이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우리 교우 친구들이 이것을 보고 그들의 기억도 같이 합세를 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큰 기대는 못 한다. 우리세대는 알려진 대로 digital generation은 절대로 아니니까.
Hurricane Katrina: 허리케인 카트리나..5주년이 되었다. 정말 지독한 것이었다. 아마도 카테고리 3급 이었을 것이다. 5년 전 그날(2005년 8월 29일), 미국의 큰 도시 하나가 자연재해로 완전히 물에 잠겼다. 공상과학 영화 같은 데나 나올듯한 각본이 현실화 된 것이다. 예측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재해라서 사실 대비하기는 불가능 했을 듯 하다. 1800여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곳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흑인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사망률은 이런 것에서도 다른 집단과 비교가 되지를 않는다. 흑인 대통령은 나왔지만 아직도 그들이 갈 길은 먼 것인가.
8월 달, 지독한 더위였지만 그런대로 집 일을 한 결과도 있었다. 나는 현재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전적으로 맡고 있고, 나머지 식사의 dish wash또한 나의 담당이다. 처음에는 시간도 걸리고 기분도 찜찜한 것도 있었지만 습관이 되고 나니 사실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나도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는 만족감일지도 모른다. 집안 일이란 주로 handyman(일당목수일) 들이 하는 일들이다. 나의 carpentry실력은 조금 초보를 면할 정도다. 하지만 시간에 별로 쫓기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큰 이점도 있다. 올 여름의 major project는 역시 아래층에 laminate floor를 까는 일이다. 보기에 그렇게 쉬운 것이 손을 대고 보니 완전한 monster였다. 8월 중순까지 dining room이 끝이 났다. 그 다음을 계속해야 했는데 floor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손을 보아야만 했다. 결국 subfloor를 뚫고 들어가는 대공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며칠 전에 끝이 나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마루공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사실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른다.
오늘 아침 New York Times에 기고된 한 논평을 보았다. 저자의 이름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Paul Wolfowitz 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neo conservative그룹에 속하는 ‘매파‘ 라고 할 수 있다. 이 논평은 이락 전쟁이 일단 끝나면서 한국전쟁과 비교를 한 것이다. 결론 부터 말하면 철수를 하되 상당수의 전투병력을 남기라는 것이고, 한국전쟁이 휴전이 되면서 미군이 상당히 남아서 전쟁의 재발을 막고 결과적으로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 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말은 되는 이야기다. 문제는 60년 전의 전쟁이란 것과, 전혀 다른 지정학적, 문화적인 조건 등을 어떻게 감안할 것인가.
Hyundai SONATA 1 year anniversary: 작년 이맘때 연숙이 현대 Sonata 를 샀다. 그때는 Cash for Clunker program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우리 집의 workhorse Plymouth Voyager를 그 프로그램으로 trade-in을 할까..하면서 dealership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서 Sonata를 타 보게 되었다. 그 salesman은 완전한 Sonata 신봉자 (그의 가족이 모두 Sonata customers) 였고,그것이 곧 바로 우리에게 sales로 연결이 되었다. 바로 옆의 Alabama에서 조립된 차였다. 일년째 타 보면서 연숙은 대만족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 차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할까. 즐거운 일이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서 맥주를 덜 마신 듯하다. 여름의 즐거움은 사실 일을 끝내고 저녁때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아닐까? 전에 주로 Samuel Adams의 variety 맥주가 정말 좋았다. Micro brewery로 시작한 brand가 이제는 대량생산이 되고 있어서 조금은 매력이 줄었다.그러다가 나에게 가격과 맛으로 딱 맞는 brand가 나왔다. Yuengling이란 맥주인데 Pennsylvania주에서 나온다고 한다. 처음에는 꼭 중국제 같아서 아하.. 이제는 맥주도 중국제품인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3개월 계속된 올해의 무더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올해 더위의 특징은 거의 하루도 여유를 주지 않는 변치 않는 기상 pattern이었다. 그래서 올해에 제일 보기 싫은 사람들이 TV weather person들이다. 물론 그들이 날씨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조금도 ‘과학적인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왜 올해는 이런 독특한 pattern이었나 하는 분석의 노력 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같이 home office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얼어붙는 듯한 시원한 곳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면 사실 거의 더위를 느낄 수가 없으니까.
김용운 교수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어를 읽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정독은 못 했지만 대강 저자의 얘기는 이해할 수 있었다. 김용운 교수의 책은 1970년대에 수학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읽은 경험이 있다. 그때 저자 글의 스타일이 참 좋았다. 어려운 문제를 정말 쉽게 설명을 한다. 그것은 저자가 논제나 문제를 확실히 이해를 한다는 쉬운 증거다. 저자의 폭 넓은 해박한 지식은 참 본 받을 만 하다. 특히 일본출생이라 그런지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깊게 그리고 쉽게 설명을 한다. 신라통일로 일본과 한국의 말이 완전히 갈려 나갔다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조명은 참 흥미롭다.
백강전투 이후 한국어는 신라어 중심으로, 일본어는 백제어 중심으로 발달해 갔다.
지리적으로 중국으로부터 한반도 보다 더 떨어진 일본열도는 자체적인 언어체계를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일본어의 문법과 한국어의 문법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한반도는 중국,한자음운의 영향을 거의 받아들인 반면 일본은 거의 백제어 수준에 머물렀다.
얼마 전 중앙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64년경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무슨 노래들이 우리들을 즐겁게 했나 생각을 해 보았다. 거의 pop/rock/country 같은 미국중심의 것들이었다. 그 때는 Beatles가 긴 머리에 uniform을 입고 I Want To Hold You Hand를 부를 때였고, hard-rock, psychedelic같은 것은 나오기 전이었다. 맞다.. 그때 미국의 60’s country란 것이 한창 유행을 하였다. 조금씩 전통적인 country song과 현대판 pop이 섞이면서 나오던 것들은 우리들이 듣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Skeeter Davis의 노래들은 여성 취향이었지만 우리” 싸나이”들도 잘 따라 부르곤 하였다. 주옥 같은 그녀의 hit song 중에서 The End of the World와 He Says the Same Things to Me 는 아직도 노래의 가사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He says the same thing to me – Skeeter Davis – 1962
히로시마 65년 전.. 눈 깜짝할 사이에 인간들이 ‘증발, 소각’ 되고 날라가 버렸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거의 장난감같이 작은 것이었지만 그 심리적 효과는 아직까지도 다른 핵무기 사용을 저지해 오고 있다. 불쌍한 것은 아무 죄 없이 증발해 버린 ‘재수없이 그곳에 살던’ 민간인 들이다. 물론 그 당시 군사시설에 관련된 민간인도 많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던가?
며칠 전에 오랫동안 우리와 같이 산 어항속의 물고기가 죽었다. 두 마리 중의 한 마리였다. 나라니가 학교기숙사에서 기르던 것이니까 최소한 3년은 되었을 것이다. 다른 것들은 훨씬 오래 전에 사라졌는데 이 두 마리는 나와 같이 몇 년을 산 것이다. 그래서 더 정이 갔다. 나머지 한 마리를 가만히 보니 그 녀석도 조금 움직임이 느려졌다. 혹시 이 녀석도 곧 따라서? 새로니가 부리나케 같은 종류의 것으로 팔팔한 2마리를 사 왔다. 아.. 그 젊음이여.. 젊은이 둘과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이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태어나고, 사라지고.. 젊음이 늙음으로..그게 자연과 신의 섭리일 것이다.
이대 총학생회 친구들과, 아래 왼쪽이 김선욱씨, 1980년
연숙의 대학시절 buddy가이화여대 총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아.. 세월이여.. 어느새 그런 나이들이 되었는가. 연숙은 총학생회에 단과대학회장이고 그 김선욱 총장 선출자는 총 학생 회장이었다고 한다. 우리 결혼식에도 왔었다. 나도 그 당시 조금은 기억을 하고 있다. 결혼식에 온 그녀 친구들 중에 한 팀이 총학생회 임원그룹이라고 들었던 기억, 와~~ 그것이 1980년.. 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 이질적인 두 문화의 틈바구니에서 필요이상의 고민 거리를 짊어지고 stress받는 어깨들을 보며 미안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솔직히 우리자식들을 포함해서 ‘마음에 드는’ 녀석들을 이제까지 살면서 거의 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대부분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가슴 속 깊이 나의 말에 동감을 할 것이다. 최소한 우리세대는 그렇다는 말이다. 반대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는 부모를 많이 못 보았을 듯 하다. 구체적으로 열거를 하기 시작하면 뜨거운 화제가 될 가능성이 많다. 언젠가는..
러시아의 heat wave 를 보면서 조금 우려가 생긴다. 다른 곳이 더운 것은 조금 이해를 할 수 있는데, 그곳은.. 러시아.. 이건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지독하게 stupid 한 conspiracy, contrarian buffs들과 그와 버금가는 republican gang들, 조금은 과학을 정치에서 떼어놓고 생각하는 최소한의 양심이 없는가. 너희들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더 그렇다. 그렇게 pro-life라면 더 그렇게 노력을 할 이유가 있고 장기적으로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또 한 명의 U.S. supreme justice가 탄생을 했다. ‘역시’ 또, 여자다. 크게 놀랄 것도 없다. 이제 여성의 관심을 대변할 최고의 법관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기뻐할 것이다. 모두 여자들이니까. 나는 어떠한가. 이제는 거의 중립적인 입장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아마도 여자의 세상이 오지 않을까..
A Day in the life – The Beatles
대학시절 한때 Beatles의 이 노래.. 참 많이도 들었다. 꼭 좋아했었다고 말을 할 수는 없는 곡이었다. 그 당시의 짧은 영어실력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그랬을까? 그 보다는 이 노래가사의 배경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랴? 그 당시에는 가사보다는 ‘겉 멋’이 더 중요하니까.. 이 곡에서 John Lennon특유의 목소리를 맛볼 수 있었다.
미치 밀러.. 어렸을 적에 많이도 들었던 이름이다. 그 당시 그의 합창단 (Mitch Miller & Gang)이 부른 영화 주제곡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1962년) 쯤이었을까. 그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라는 영화의 주제곡 콰이강의 행진, The River Kwai March. 가사가 있는 노래가 아니고 완전히 남자들의 휘파람 합창이었다. 그들이 바로 Mitch Miller 합창단이었다.
그 당시 그의 합창곡들은 거의 유행가처럼 불려졌었다. 그들의 영향이었을까.. 곧 이어서 한국에도 Sing Along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전석환씨가 이끌던 Sing Along Y (YMCA)도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한결같이 노래들은 밝고, 복고적이고, 심지어 가정적이었다. 한마디로 나중에 classic으로 남을 만한 그런 곡들이었다.
99세로 세상을 떠난 Mitch Miller,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 어린 주옥 같은 미국적인 노래를 남겨 주었다. 그 많은 곡 중에서 아직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몇 곡만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라면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RIP.. Mr. Miller….
콰이강의 행진,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곡영화속의 거의 비참한 행진과는 달리 아주 경쾌한 곡이다. 그 당시 아주 유행을 한 멜러디,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교에서는 그 당시 이곡을 등교시간에 맞추어 계동골목을 향해서 아주 우렁차게 들려주었다. 그 긴 계동골목을 걸어서 등교하던 우리들은 이것을 들으며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져을 것이다.
The Yellow Rose of Texas, 전통 미국민요: 텍사스의 전통민요인데, 전설에 의하면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독립할 당시 텍사스 leader였던 Sam Houston이 전쟁 상대였던 멕시코의 General & President Santa Ana에게 비밀리에 보냈던 (spy?) 텍사스의 여자가 바로 Yellow Rose of Texas였다.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
와.. 이게 장난이 아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글거리는 아침 해를 보며 오늘은 heat index(불괘지수)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지난 겨울이 그렇게 춥더니 여름은 그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무척 덥다. 올 여름의 전기료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대개는 1층의 에어컨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올해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니까 거의 보통 여름의 2배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를 더 쓰면 그만큼 CO2가 더 유출될 것이고, 그것은 더 지구를 덥게 한다.. 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왜 더울까 암만 생각해도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고 불평이다. 그저 Mother Nature가 가끔 하는 경고이거나 장난하는 그런 것일 것일지도 모르니까. Weather person들도 해답이 없는 모양이다. 예보는 하고 있어도 왜 올해는 이럴까 하는 해답은 ‘절대로’ 안 한다. 모르니까. 과학이 설명을 못하는 것이다.
올해의 특징은 온도, 습도가 같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하면 밤에도 별로 시원하지를 않다. 결국은 그때에 에어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사실 무척 고물에 속해서 사실 언제 고장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별로 신경을 쓰지를 않았는데 요새는 조금 걱정도 된다. 제일 더운 날 이것들이 stop working을 한다면 그야말로 ‘비상’ 일 것이다. $$이 많으면 이럴 때 brand new energy efficient model로 바꾸면 전기료도 덜 들고 더 시원할 것이지만..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추억에 남을만한 더위가 몇 번 있었다. 아마도 1972년 쯤이 아니었을까? 그 해 서울의 여름은 정말 지독하였다. 1973년에 고국을 떠났으니까 그 후에도 그런 더위가 또 있었을 듯 하다. 그때가 특별히 왜 기억에 남는가 하면 밤에 잠을 전혀 못 잤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울의 민가나 아파트에는 에어컨이 거의 없었다. 사실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날이 일년에 며칠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보통 밤에 잠은 잘 수 있었는데 그 해는 예외였다. 그때 조금 겁이 났다. 밤에 잠을 못 자게 되면 이건 큰일이 아닌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증이와 새벽같이 연세대로 테니스를 치러갔던 확실한 기억이다. 그 다음은 1975년 초여름 (6월 초였나?), 시카고에 열대야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때 알고 지내던 일본인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시 밤을 거의 꼬박 새웠다. 아마도 그때의 밤 기온이 80도(화씨)가 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잠은 설쳤으니까..하고 Lake Michigan으로 갔는데.. 그렇게 차게 느껴지던 곳이 그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그 정도였다. 그때 시카고의 많은 집에 에어컨이 없었고, 사실 필요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지독한 더위가 여기 저기서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global warming의 경고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이런 ‘설’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기후(extreme high & low)가 자주 나타남은 믿는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불쾌지수가 높다 함은 기습적인 폭우의 가능성이 많다는 뜻도 된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하루 종일 찌더니 급기야 오후 늦게 터지고야 말았다. 우박과 더불어 폭우가 쏟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여름의 즐거움이다. 이런 더위에 이렇게 폭풍과 같은 빗소리를 듣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특별히 싸늘한 가을 비였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 부터는 이런 열대성 여름 비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이럴 때, 태고적 시절 (고2) 여름방학 때 서울 남영동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 ‘삼국지’를 읽던 것을 회상하면 더욱더 시원해짐을 느낀다.
Whooooa… it’s hot, hot and very hot & humid even from Atlanta’s standard. Is it the infamouse Bermuda High again? This year’s hot weather really is testing the stress limits of everything, A/C for one thing. So far our two trusty electric fans got broken (from contant running).. what’s next victim(s)
Even moreannoying is the WordPress’ trouble with uploading meager 16M pdf file (via PHP of course). Our home has 64M allowance which I have set myself (being located at home), but not with hosted, shared production servers (at GoDaddy). Currently it boasts 8M upload size limit. How can I make it larger from web host console (at GoDaddy)? Is it even possible? Another dog day annoyance. By the way, being desperate, I bypassed php upload limit by ftp’ing the file, but strange enough, the WordPress’ media window even didn’t recognize it. A perfect dog day afternoon, bravo!
Contacting godaddy for help brings this concise response:
Thank you for contacting online support. By default, PHP limits scripts uploading files to 8 MB. To change the limitation, edit the following values in your /php.ini file for PHP4 or /php5.ini file for PHP5:
The above settings change your PHP upload limit, allowing you to upload files up to 10MB in size.
The maximum upload value that you can specify for upload_max_size and post_max_size is 192M.
If you are running Hosting Configuration 2.0, you can create custom .ini files for both PHP 4 (php.ini) and PHP 5 (php5.ini) in the root directory of your site. Please note that php.ini and php5.ini files must be in the root directory to function properly. These files will not work if placed in subdirectories, whether or not they are aliased to the root directory. Unfortunately, we cannot help create a php.ini file. we do not provide technical support with third-party scripting issues. We regret we can not assist you further with this issue and thank you for your understanding in this matter.
Which ‘root’ folder are they talking about? Hosting Configuration 2.0 allows you to modify the root foler’s php.ini file? Never knew about it. Are there someone who tried this?
I’ve beeing using Chrome for 2 weeks now without any major hiccups.. until now. It consistently fails to render pdf file (only 2 pages out of 99 displayed).. Firefox & IEx had no problems with this particular pdf file. Someone out there had some experience like this? Dog day afternoon continues..
얼마 전에 YouTube에서 60년대 Instrumental group, The Ventures를 video clip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정말 감회가 깊다고 할까. 나의 60/70 moment인 것이다. 특히 Ventures가 일본에서 맹활약을 하던 60년대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 당시 (rock) guitar를 배운다고 하면 사실 거의 이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물론 그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Ventures는 한국에 한번도 오질 않았다. 그 정도로 우리는 $$$가 없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비쌌던가. 그러니 다 해적판 (그때는 우리나라에 license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LP 로 그들의 연주를 즐기는 정도였다. 그때 나의 주위에는 아주 상당한 수준으로 그들의 연주를 흉내 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요즈음 일본의 TV drama를 가끔 보면 그 당시 그들의 대중문화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들은 정책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그런 것들을 거의 모르고 지냈지만 그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 식 이었다. 어떠한 식으로든 간접적인 영향은 상당히 받았던 것을 지금에야 실감을 한다. 한국이나 일본에 모두 상당한 미군이 주둔을 하고 이어서 그들로부터 직접 받는 것 이외에 우리는 일본을 통한 여과된 미국문화가 또 유입되고 있었던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당시 이미 경제발전이 상당히 진행이 되고 있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구미의 연예인들을 마음 놓고 불러다 공연을 시킬 수 있었다.
일제강점의 심리적 영향과 그들의 일방적인 경제부흥은 사실 그들의 ‘왜색문화’를 우위에 있다고 단정을 하고 완전히 차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까? 사실은 그 당시 일본문화라는 것은 거의 구미의 것을 흉내 내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소위 대중음악, 혹은 전통가요라고 하는 트로트풍의 노래들은 사실 일본의 엔카와 같은 것이다. 그 이외에 미국 folk song의 영향을 받은 젊은 층의 노래들 (통기타 그룹이라는) 조차도 일본이나 한국이 거의 같았다. 그러니까 정책적으로 막았다 해도 실제로는 거의 같은 것들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경제수준이 상당히 나아진 지금에서 조금씩 일본문화가 유입되고 있으나 이제는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들어올 것도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숙명적’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The Ventures의 Forever (and ever) with You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 새로워 진다. 60/70의 nostalgic한 기분도 나고 또 다른 미래의 양국관계의 한 chapter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일까.
어제는 새로니가 Nashville로 떠났다. 차로 이곳에서 4시간 정도의 거리여서 전에 있던 Washington DC 보다 너무 편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리하지 않고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이다. 내일은 새로니 이사 짐의 대부분을 우리의 mini-van에 싣고 우리가 다녀 올 차례가 되었다. 계획은 그곳에서 자지 않고 밤에 돌아올 생각이다. 우선 집에 있는 Tobey와 Izzie (dog & cat)가 조금 마음에 걸리고, 새로니가 살 곳이 studio apartment라서 분명히 방이 좁아서 자는 것이 조금 불편할 거 같아서이다. Google Map을 보니까 direction이 아주 간단했다. I-75 North로 90 마일 가면 Chattanooga, TN가 나오고 거기서 I-24W를 타고 135 마일 정도 가서 Nashville metro가 나오면 I-440 (toward Memphis) 로 갈아타고 6 마일 정도 가면 Vanderbilt University가 나온다. 새로니가 살 곳은 학교에 바로 옆에 있었다. 아마도 걸어서 다녀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새로니가 갈 곳은 Peabody College of Education인데 사립학교라 학비가 무척 비싸다. 하지만 1/3 정도는 각종 장학금으로 충당이 될 듯하고, 나머지는 거의 loan으로 될 듯. 이래서 요새 대학 졸업생들은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빚쟁이 신세가 되고 있다. 거의 그게 정상일 정도로. 우선 2년 course에 도전을 하고 여력이 있으면 더 공부할 생각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본인 조차도.
김수근교수님댁 가족들과 1973년 Sherman, Texas
Vanderbilt University..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수근 교수(님).. 대구 계명대학출신으로 그곳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지금은 한국의 어느 학교에서 가르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 처음 온 1973년 여름에 Sherman, Texas에 사시던 김교수 가족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Oklahoma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이 Texas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Dallas에 가끔 놀러 나가곤 했다. 그 가는 길 (US-75) 에 Sherman 이라는 조그만 town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Austin College라는 조그만 사립대학이 있었고 그곳에서 김교수는 강사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당시, 김교수의 박사학위과정이 아직 덜 끝난 상태였고. 다니던 학교가 바로 이 Vanderbilt University였다. 나는 사실 한국에서 그 대학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야 사립명문대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김교수님 댁에 놀러 가면 우선 그 귀한 한국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김교수님 부인의 음식솜씨가 상당하였지만 그것 보다도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당시 어린 딸 두 명이 있었고 한국에서 아버님이 방문 중이셨다. 나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를 않아서 모든 것이 불편한 때에 내가 차를 사는 것을 도와 주셨다. 그래서 김교수님의 도움으로 그 당시에 산 차가 69년 형 Volkswagon Beetle이었다. Semi-automatic의 그 차는 사실 그 당시 나에게 과분한 차였다.
Nashville하면 미국 country music의 수도나 다름이 없다. Grand Ole Opry 란 country music전당이 그곳에 있다. 일주일에 한번 country music stage concert가 그곳에서 열린다. 가장 기억이 나는 것 중에 하나가 The Carpenters가 그곳에 왔을 때다. 아마도 1973년 정도였을까.. 갑자기 인기절정에 오르면서 (Top of the world) 이곳으로 날라와서 공연을 했고 완전한 top country pop stardom에 오르게 되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하면 한번 그 유명한 Grand Ole Opry공연을 보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작은 딸, 나라니가 이사를 나가면서 방이 비게 되었다. 그 방은 동북쪽으로 창이 있는, 여름에는 비교적 시원한 방이고 나의 전 office 보다 조금 더 넓다. 단점은 조금 어둡고 겨울에는 조금 더 춥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은 두 딸들이 얼마 동안(mostly during elementary school years) bunk bed를 놓고 같이 자던 bedroom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난 6월초부터 방을 옮기기 시작해서 거의 한 달을 걸려서 끝이 났다. 이렇게 오랫동안 방을 옮겨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나이에 의해서 느려진 동작, 짐을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 (이럴 때 많이 버려야 한다),6월 달의 ‘살인적’인 더위.. 등등으로 나름대로 핑계가 있다.
짐을 정리한 것은 단순히 책이나 서류 같은 것들을 내다 버린 것 이외에도 등치가 아주 큰 computer work desk 두 대를 해체하는 작업도 있었다. 이것은 particle board로 만든 정말 신경질 나게 무거운 monster급인데 disassemble자체는 비교적 간단하나 그것들을 garage로 옮기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 weightlifting이라도 가끔 해둔 것이 이럴 때 톡톡히 도움이 되었다. 그것 두 대가 빠져나가니까 방들이 비교적 크게 보였다.
new ‘lawyer’ office
이래서 나의 new office는 정말 무슨 lawyer office같이 단정한 desk하나만 중앙에 놓인 그런 아담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monster tube(glass) monitor가 flat screen monitor로 바뀌어서 더 그런 것이 가능했다고나 할까. 3 unit book shelves, drawer chest, file drawer 그것이 전부가 되었다. desk를 벽에 붙이지 않으니까 computer wiring이 조금 문제가 되었다. 절대로 pc box를 desk 옆에 놓기 싫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그렇고, fan의 소음도 그렇고, desk를 조금씩 옮길 때도 지장이 있다.
Desk 가 과히 넓지를 않아서 가급적 pc peripherals의 크기가 작으면 좋다. pc monitor는 이미 17″로 고정적이고 mouse도 마찬가지다. PS/2 connection도 거의 모두 usb로 대체가 되어서 과제는 조금 간단해 졌다. usb hub을 monitor뒤나 옆까지 끌어오면 된다. 그래서 이제까지 쓰던 ps/2 keyboard를 정말 small footprint usb keyboard로 바꾸었다. 이것은 정말 작아서 보통의 laptop keyboard보다 작다. 나머지 할 일은 video(VGA) 와 usb cabling을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pc box에서 desk/monitor까지는 비교적 가깝지만 만일을 위해서 12′ 정도는 필요하다. usb의 경우는 이미 16′ active extension cable이 있어서 해결이 되었고, 문제는 long VGA cable인데.. 이번에 googling을 해보니 classic한 thick vga cable 외에도 impedance matching vga-to-CAT5 converter가 보였다. idea가 좋았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vga cable 대신에 Ethernet cable을 쓰는 것이다. pricing이 눈을 끌었다. $20~$30 range였다. high quality vga cable과 큰 차이가 없었고 cabling range도 보통 20’가 넘는다. Too good to be true.. 임에 분명 하지만 모험을 하는 셈 치고 order를 하고.. 써 보았는데, 역시 too good to be true ..였다. 문제는 connector가 너무나 motion sensitive한 것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video가 흔들렸다. 웬만하면 ..하고 생각했지만 역시 안되겠다 싶었다. 결국은 12′ classic thick vga cable을 쓰게 되었다. 이것은 예상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은 혹시 그 converter가 1280×1080이하의 resolution에서는 ok일까..하는 것이다. return하기 전에 한번 test를 해 보아야겠다.
kitchen Summer office
이런 작업이 끝나고 새office에 앉아 보니 경치가 훨씬 좋았고, 조금은 덜 더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더워진 날씨에는 새 office도 마찬가지.. 2층 이라 더위를 피할 도리는 없다. 6월 달 거의 3주간 계속 최고온도가 95도(~35C?)였다. 이것은 조금 예상을 했던 것이다.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추웠기 때문이다. 평균온도를 유지하려면 이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피난을 간 곳이 역시 아래층의 kitchen이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옆이 있고,밝고, pc/tv monitor가있다. 그러니까 TV도 볼 수 있고, home server에 있는 video를 볼 수도 있다.
현재 나의 laptop pc는 사실 prime time이 훨씬 지난, 그러니까 ‘고물’에 속한다. 나라니가 쓰던 것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겨우 1.5GHz/768MB 정도.. 겨우 mid-size video를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desktop replacement로는 사실 horsepower 가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good news는 이 정도면 소위 말하는network thin client로는 적격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client-server/remote desktop mode를 쓰는 것이다. 물론 network speed가 관건이지만 이미 우리 집은 이미 gigabit Ethernet network이 깔려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현재 우리 집에는 physical pc (laptop포함) 7대가 gigabit network에 연결되어서 돌고 있다. 그 중에 3대는 server closet에 있고 하나가 연숙의 office, 또 하나가 나의 office, 그리고 kitchen에 하나, 그리고 나의 mobile laptop이다. Server closet(at garage)에 있는 3대 pc server는 모두 VMware server 가 각종 virtual machine을 가지고 있다.
home server closet
여기서 핵심은 이곳 virtual machine에 있다. 나는 99.9% 이 virtual pc를 main desktop pc로 쓰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도합 8대의 virtual machine이 항상 running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Asterisk pbx도 포함되어있다. 이 Asterisk pbx는 우리 집의 phone (including VOIP phones) 전체를 control하고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Microsoft Windows XP, English & Korean 이고, Ubuntu Linux도 있다. 그리고 각각 virtual pc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email 전용이고, 어떤 것은 web browsing, 어떤 것은 download전용, media server, Photoshop editing 이런 식이다. 이런 approach의 특징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like malware, spam, worm, virus infection etc) 그 특정한 virtual pc를 지우고 다시 만들면 된다. 이것은 사실 요새 많이들 말하는 cloud computing과 다름이 없다. 다만 public이 아니고 private, home cloud인 것이다. 이 home cloud 덕분에 out-of-office에서도 별 문제없이 ‘같은’ computer를 쓸 수가 있게 되었다.
제목을 달아놓고 보니 오래 전의 미국소설과 영화: “Goodbye, Columbus” 와 비슷해졌다. 사실 우리 집도 Goodbye Columbus의 경험이 1988년에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와 똑같은 Goodbye Columbus, Ohio였다. 그때 우리가족이 나의 새 직장을 찾아서 Madison, Wisconsin으로 이사를 갔다. 그게 1988년 여름,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해.. 와.. 벌써 22년이 되어가나.. 그 일년 뒤에 Goodbye Madison을 이어서 단행했고, 앞으로는 아마도 Goodbye Marietta정도가 기다리고 있을까?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물론 제로는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높아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한 이사’가 아니면 더 이상 Goodbye Someplace..는 피하자고 결심을 했다.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완전한 이사”란 어릴 때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Driving along Shenandoah Valley to DC
그러니까 이번의 Goodbye Washington, DC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이야기다. 새로니는 2006년에 용감하게 ‘분가’를 단행, 집을 떠나서 그곳으로 갔다. 나는 천성적으로 ‘이별’이란 걸 지독히 싫어한다. 가능하면 가족은 모여서 사는 걸 원한다. 나의 인생이 그런 것과 반대로 엮어졌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큰 곳’을 찾아가는 것을 막을 용기는 없었다. 처음에는 federal government의 job이 되어서 집을 떠날 구실을 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 position은 절대로 glamorous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젊은 나이에 말이다. long term job security가 가장 좋은 곳이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젊은 나이에 맞는 곳은 아니란 뜻이다. 예상대로 얼마 못 가서 not-for-profit position을 찾아서 옮겼다. 물론 같은 town에서. 이곳보다 훨씬 liberal,, progressive하고 trendy한 그곳은 그 나이에 잘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career에는 불안정한 시기가 계속되고.. 그러니까 무엇이 새로니에게 perfect (or near perfect) career job인가 하는 그런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었다.
Mother & daughter reunion at DC
이런 문제를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세대에서도 이런 문제는 적지 않았다. 대학교를 갈 때부터 고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럴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솔직한 바램보다는 장래성(돈과 지위)과 부모,선배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보았다. 이때 만약 잘못 고르면 여러 가지 문제가 그때부터 시작된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집사람 연숙의 case가 그렇다. 부모님의 의견과 적성검사를 자기의 솔직한 바램보다 더 따른 것이다. 분명 연숙은 인문,사회 쪽이지 절대로 자연과학이 아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100% 가깝게 뚜렷했다. everything Electrical..(like Thomas Edison)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고민들이 나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새로니의 짐을 가득 싣고 Washington DC를 떠나기 전..
새로니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대학엘 갔는데.. 조금은 심한 편이 아닐까? 사실 아직도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자신이 없는 듯하다. 나는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지만.. 들리는 말에 요사이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듣기는 했다. 이제는 그런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예를 많이 보았으니까. 지금은 자신의 passion이 teaching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듯하고.. 결국은 다시 시도를, 그러니까 teaching degree에 도전을 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이 불경기에 그런대로 안정된 직장을 떠나서 학교에 간다는 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이해하기 힘 들었다. 하지만, 요새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결국은 이번 가을부터 Nashville, Tennessee에 있는 Vanderbilt University 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2 year Master’s course인데 우리는 잘 하리라 믿는다. 졸업 후의 진로는 아직 모른다. 현장에서 teaching을 할지 아니면 higher degree를 따라갈지.. 한가지 좋은 것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5시간 미만 drive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주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 갈 수가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