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2 Google Voice accounts set up, integrated into my home Asterisk PBX (a PIAF aggregation) which runs on a Linux virtual machine. It provides us free US and Canada calls and very low price International calls (comparable to Skype). Making and receiving call via GV (Google Voice) are nearly transparent thanks to Asterisk integration (it simply means the users can hardly notice they are using GV).
This may not sound significant but with this ‘GV trunk‘ setup, virtually all long distance calls are now free. With that in mind, I cancelled my long distance account saving at least $10 a month. I know the proven reliability of existing long distance carrier from my long experience, but how about this free one? For the test, I have used this GV for the last 6 months almost every day while walking my dog around my neighborhood. The call from my cell phone goes to my local GV number (DID) which in turn transfers the call to my other receive-only DID (another free account). This then directly calls my Asterisk PBX. In spite of its complexity, user hardly notice any delay or interruption. This of course only test voice part of calls, but how about notorious fax calls?
I just assumed analog fax would be very hard to go through this ‘unknown’ water. Until now, I just direct my fax calls to my existing local carrier, PSTN. That’s fine with any local faxing, but how about long distance fax? Never tested before. VoIP trunk is notorious dealing with analog fax, they would say, like ‘fax & pray for the best’. Now, time has come to fax to Korea. Is it possible to use GV trunk for this?
I’ve setup a test to send test fax to HP fax-test number (a toll-free number:8884732963). This HP fax-test number is really convenient for quick fax setup test. Upon receiving any fax, it faxes back to the caller. I used WinFAX software via home PBX GV trunk to HP test number. Would it work? Well, it works without any problem! Now, I can send faxes to anywhere at near-free cost..thanks GV!
지난 10월 3일은 고국의 개천절이었을 것이다. 아니.. 혹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한국달력을 보니 분명히 개천절이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다만 일요일이라 빨간 숫자인지 아니면 아직도 국경일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국경일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국경일이던 한글날이 평일로 추락을 한 사실을 오래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한단고기
그날을 전후로 거의 우연히 10년 전의 KBS 인기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약 5년 전 고국의 clubbox라는 download site에서 150 편 모두 download를 해서 DVD disc에 copy를 해두었는데, 다시 보려면 그 많은 disc를 찾아서 DVD drive에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그것을 모조리 home server에 copy를 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하였다. 요새의 hard disk가 커지고, 싸지고..해서 이제는 video file을 번거롭게 optical disc (like DVD)에 “구울(burn)”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 중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열풍”을 다시 보게 되었고 마침 개천절을 맞은 것이다. 요새는 그 당시의 “열풍”이 어떻게 “진화”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1992년에 정말 우연히 임승국씨의 “한단고기”란 책을 사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열풍”의 훨씬 이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환”자를 “한”자로 읽은 것부터 그렇고 또한 그 상고사의 기술자체가 그렇게 자세할 수가 없었다. 흡사 그리스 신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KBS 프로그램을 보게 된 것이다. 왜 그 당시에 그 책이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조금씩 거북하게 느껴지던 중국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전문적인 역사학도는 절대로 아니지만 아주 심각한 아마추어 역사 mania 정도는 된다. 작은 딸애가 대학에서 역사전공인 것도 도움이 되었고, 나의 나이도 절대로 도움이 되었다. 나는 확실히 이제 진정한 역사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나의 환단고기에 대한 입장은 어떤 웹사이트에서 읽었던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한단고기의 가치성” 이란 글의 저자 입장과 거의 비슷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의 알려진 여러 가지 “결함” 때문에 일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도적인 입장인 것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연구를 하자는 것이다. 역사도 과학적인 고증 기술의 발달로 어떤 새로운 발굴과 그에 따라서 현재의 정설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까. 완전히 위서라는 것을 증명치도 못하고 그의 반대도 증명을 못하는 마당에 조금 열린 마음으로 연구를 해 봄이 옳지 않을까?
평창이씨…. 몇 년 동안 정리를 못하던 서류들을 정리하던 중에 2004년의 것들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나의 본관 평창이씨에 관해서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고국의 관계 웹사이트에서 결국 평창이씨의 족보의 일부를 copy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감격은 사실 대단했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평창이씨 족보
나는 어릴 때부터 평창이씨라는 것을 잘 듣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6.25때 납북이 되신 후에 족보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리고 평창이씨가 다른 이씨에 비해서 조금은 희귀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강원도 평창에 시조가 있으려니 하는 정도로만 알 정도였다. 아버님은 두 누이동생 (나의 고모님)이 계셨지만 거의 왕래가 없이 살았다. 나도 나의 조상에 거의 관심이 없이 산 셈이었다. 족보를 따지는 시대가 이미 아니었기에 그것이 쉬웠는지도 모른다. 결혼을 할 당시에도 본관, 족보를 따지지 않는 그런 집안과 인연이 되었다.
대학시절, 연호회라는 남녀클럽에서 정말 우연히 평창이씨 여대생(이인자씨, 일명 이재임씨)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별로 많지 않은 종친을 만난 것이다. 그때 우스개 소리로 우리는 인연이 없다.. 결혼을 할 수 없으니까..하면서 웃었다. 그 당시만 해도 동성동본끼리의 결혼은 위법이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태어날 때도 우리의 본관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 복합문화, 다민족의 미국에서 너희는 평창이씨의 후손이라도 말을 해 보았자 거의 의미가 없었으니까. 한 마디로 우리 집은, 아니 나는 족보가 없었다. 그러다가 1988년 Madison, Wisconsin에 잠깐 살 때 그곳에서 정말 우연히 평창이씨를 만났다. 이번에도 역시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다. 그곳의 유지 격인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강정렬 박사님의 부인이 되시는 분이 바로 평창이씨였다. 그 때 비록 나이차이는 많이 있었어도 친척을 만난 듯 서로 너무나 반가웠다. 그때 처음으로 본관, 동성동본이 아주 먼 친척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 뒤, 일년 후에 아틀란타로 직장이 옮겨져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인연이 이어져서 강박사님 부인의 남동생이 아틀란타에 사신다고 소개를 해 주셨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에서도 평창이씨 가문을 만나게 되었다. 이주황 선생님.. 맙소사.. 이분도 고인이 되셨다. 그 집에 아들 둘(이만수, 이동수)과 따님이 하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모두 평창이씨의 후계가 되는 것이다.
그 이후로 또 이런 것들을 잊고 살았다. 세파라는 것이 그런 모양이다. 사실 족보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절대로 생각은 변하는 모양이다. 시간과 역사라는 것이 얽히고 나도 조금씩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감을 느끼게 되었고, 나의 뿌리는 과연 어떤 것인가 정말 자연스러운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결정타는 어머님의 타계였다. 건강이 좋지 않은 누님을 생각하면 정말 나는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이 알고 계시는 평창이씨의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거의 일생을 남편 없이 살아오셔서 더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조금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러다 2004년에 처음 나의 족보를 볼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마도 울진이씨종친회라는 곳에서 만든 excel-format file이었을 것이다. 족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나에게 그것은 조금 생소했지만 항열 같은 것은 조금 들어서 곧바로 아버님과 같은 항열 대를 찾았고 동명을 찾게 되었다. 분명히 이정모 라는 성함이 있었다.
파는 익평공파(翼平公派) 였다. 27세(世)의 항열이 바로 “모” 자였다. 그곳에 정모, 준모 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모님은 있었어도. 그래서 동명이인이 아닌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잊었다. 그것을 며칠 전에 다시 서류정리 끝에 찾은 것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에게 친삼촌이 있었을까.. 그런데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 났다. 있었다. 물론 호적엔 없었다. 아버님도 호적에는 사망으로 되어있으니까. 그렇다. 민족분단의 비극이었다. 삼촌은 사실 “월북”을 하신 것이다. 6.25때가 아니었을까. 지식층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인 공산주의”에 빠져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많았다. 삼촌은 바로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반공이 국시였고, 연좌제의 서슬이 퍼~렀던 그 시절에 우리의 삼촌은 서류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삼촌이 호적에 있었으면 나는 여권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그런 말씀을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일년 전쯤 나에게 들려주신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본 족보의 “정모, 준모” 형제는 99% 나의 아버지와 삼촌일 것이다. 그 위로 그러니까 나의 친할아버지는 “경호” 로 나와있고 그 할아버지에게 “철호”, “창호”, “천호” 라는 형제가 있었다. 경호 할아버지는 4형제 중에 세 번째였다.
평창이씨, 이승훈 베드로
족보에 의하면 아버님은 6명의 사촌들이 계셨다. 모두 “모” 자 돌림이고. 그렇다면 그 분들은 그 동안 어디에 사셨을까. 그 후손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6명의 사촌들이 계셨으니 분명히 그 후손이 꽤 많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외로운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들만 찾을 수 있다면..
현재 평창이씨는 본관의 시조를 고려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 이윤장(李潤張) 어른으로 하는 파와 그의 8세손인 이광(李匡) 어른을 시조로 모시는 파로 갈려있는 상태이다. 이윤장 어른이 시조라면 평창이씨는 경주이씨의 분파가 된다. 물론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공부를 더 하기 전에는 할 말이 없다. 다만 내가 속한 (내가 본 족보가 맞는다면) 익평공파(翼平公派)의 종친회는 이광(李匡) 어른 을 모시는 파로 되어있었다.
우리가 속한 익평공파는 파의 시조이신 이계남(李季男) 이신데, 연산조때 이조판서였고, 중종반정의 공신으로 익평공의 시호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후대에는 조선최초의 천주교 세례신자인 베드로 이승훈이 계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승훈 “할아버지”가 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그 분의 앞 뒤로 4대가 모조리 신앙을 지키다 참수를 당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몇 번 배교를 선언한 탓에 성인 품열에 못 들어간 사실이다. 정말 안타깝다.
이상이 간략한 최근 며칠 동안의 평창이씨 족보여행의 결과지만 문제는 이제 부터가 아닌가 한다. 어떻게 나의 뿌리를 찾을 것인가….나의 족보를 과연 어떻게 구할 것인가? 그리고 나의 먼 친척들을 어떻게 찾아 볼 것인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노력을 해 볼 것이다.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
I have a version of Asterisk pbx running on vmware virtual machine on a Windows host. This configuration (pbx-in-a-flash) is extremely stable running more than 6 months without interruption. Also, this serves my needs of home office more than enough.
Now, bad news part.. Not being a physical machine has tremendous advantage (like easy backup, easy creation, easy porting etc), but its virtual disk is not as easy to maintain as with physical disk. My configuration is dynamic virtual disk mode in which it allocates storage space as needed. But when you delete some files, it just marks them as deleted without actually shrinking it.
The pbx virtual disk keeps growing along with constant addition of audio recording files (like phone recordings, voice mail etc). Only solution to this is to manually shrink the virtual disk offline. In case of windows guest virtual machine, you just log into the guest system, then runs WMware tool on task bar. In a linux guest like Asterisk, it is done from Windows host using WMware tools “vmware-vdiskmanager.exe”.
I’ve followed an instruction from a site found with Google, but strange.. it simply didn’t work. I have deleted almost 1GB out of 5GB total. After shriking done, no error message.. it just displayed like “shrinking succeeded”. But, the virtual disk size remains 99.9% identical! What did I do wrong, here?
작은 딸, 나라니가 이사를 나가면서 방이 비게 되었다. 그 방은 동북쪽으로 창이 있는, 여름에는 비교적 시원한 방이고 나의 전 office 보다 조금 더 넓다. 단점은 조금 어둡고 겨울에는 조금 더 춥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은 두 딸들이 얼마 동안(mostly during elementary school years) bunk bed를 놓고 같이 자던 bedroom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난 6월초부터 방을 옮기기 시작해서 거의 한 달을 걸려서 끝이 났다. 이렇게 오랫동안 방을 옮겨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나이에 의해서 느려진 동작, 짐을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 (이럴 때 많이 버려야 한다),6월 달의 ‘살인적’인 더위.. 등등으로 나름대로 핑계가 있다.
짐을 정리한 것은 단순히 책이나 서류 같은 것들을 내다 버린 것 이외에도 등치가 아주 큰 computer work desk 두 대를 해체하는 작업도 있었다. 이것은 particle board로 만든 정말 신경질 나게 무거운 monster급인데 disassemble자체는 비교적 간단하나 그것들을 garage로 옮기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 weightlifting이라도 가끔 해둔 것이 이럴 때 톡톡히 도움이 되었다. 그것 두 대가 빠져나가니까 방들이 비교적 크게 보였다.
new ‘lawyer’ office
이래서 나의 new office는 정말 무슨 lawyer office같이 단정한 desk하나만 중앙에 놓인 그런 아담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monster tube(glass) monitor가 flat screen monitor로 바뀌어서 더 그런 것이 가능했다고나 할까. 3 unit book shelves, drawer chest, file drawer 그것이 전부가 되었다. desk를 벽에 붙이지 않으니까 computer wiring이 조금 문제가 되었다. 절대로 pc box를 desk 옆에 놓기 싫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그렇고, fan의 소음도 그렇고, desk를 조금씩 옮길 때도 지장이 있다.
Desk 가 과히 넓지를 않아서 가급적 pc peripherals의 크기가 작으면 좋다. pc monitor는 이미 17″로 고정적이고 mouse도 마찬가지다. PS/2 connection도 거의 모두 usb로 대체가 되어서 과제는 조금 간단해 졌다. usb hub을 monitor뒤나 옆까지 끌어오면 된다. 그래서 이제까지 쓰던 ps/2 keyboard를 정말 small footprint usb keyboard로 바꾸었다. 이것은 정말 작아서 보통의 laptop keyboard보다 작다. 나머지 할 일은 video(VGA) 와 usb cabling을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pc box에서 desk/monitor까지는 비교적 가깝지만 만일을 위해서 12′ 정도는 필요하다. usb의 경우는 이미 16′ active extension cable이 있어서 해결이 되었고, 문제는 long VGA cable인데.. 이번에 googling을 해보니 classic한 thick vga cable 외에도 impedance matching vga-to-CAT5 converter가 보였다. idea가 좋았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vga cable 대신에 Ethernet cable을 쓰는 것이다. pricing이 눈을 끌었다. $20~$30 range였다. high quality vga cable과 큰 차이가 없었고 cabling range도 보통 20’가 넘는다. Too good to be true.. 임에 분명 하지만 모험을 하는 셈 치고 order를 하고.. 써 보았는데, 역시 too good to be true ..였다. 문제는 connector가 너무나 motion sensitive한 것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video가 흔들렸다. 웬만하면 ..하고 생각했지만 역시 안되겠다 싶었다. 결국은 12′ classic thick vga cable을 쓰게 되었다. 이것은 예상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은 혹시 그 converter가 1280×1080이하의 resolution에서는 ok일까..하는 것이다. return하기 전에 한번 test를 해 보아야겠다.
kitchen Summer office
이런 작업이 끝나고 새office에 앉아 보니 경치가 훨씬 좋았고, 조금은 덜 더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더워진 날씨에는 새 office도 마찬가지.. 2층 이라 더위를 피할 도리는 없다. 6월 달 거의 3주간 계속 최고온도가 95도(~35C?)였다. 이것은 조금 예상을 했던 것이다.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추웠기 때문이다. 평균온도를 유지하려면 이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피난을 간 곳이 역시 아래층의 kitchen이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옆이 있고,밝고, pc/tv monitor가있다. 그러니까 TV도 볼 수 있고, home server에 있는 video를 볼 수도 있다.
현재 나의 laptop pc는 사실 prime time이 훨씬 지난, 그러니까 ‘고물’에 속한다. 나라니가 쓰던 것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겨우 1.5GHz/768MB 정도.. 겨우 mid-size video를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desktop replacement로는 사실 horsepower 가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good news는 이 정도면 소위 말하는network thin client로는 적격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client-server/remote desktop mode를 쓰는 것이다. 물론 network speed가 관건이지만 이미 우리 집은 이미 gigabit Ethernet network이 깔려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현재 우리 집에는 physical pc (laptop포함) 7대가 gigabit network에 연결되어서 돌고 있다. 그 중에 3대는 server closet에 있고 하나가 연숙의 office, 또 하나가 나의 office, 그리고 kitchen에 하나, 그리고 나의 mobile laptop이다. Server closet(at garage)에 있는 3대 pc server는 모두 VMware server 가 각종 virtual machine을 가지고 있다.
home server closet
여기서 핵심은 이곳 virtual machine에 있다. 나는 99.9% 이 virtual pc를 main desktop pc로 쓰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도합 8대의 virtual machine이 항상 running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Asterisk pbx도 포함되어있다. 이 Asterisk pbx는 우리 집의 phone (including VOIP phones) 전체를 control하고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Microsoft Windows XP, English & Korean 이고, Ubuntu Linux도 있다. 그리고 각각 virtual pc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email 전용이고, 어떤 것은 web browsing, 어떤 것은 download전용, media server, Photoshop editing 이런 식이다. 이런 approach의 특징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like malware, spam, worm, virus infection etc) 그 특정한 virtual pc를 지우고 다시 만들면 된다. 이것은 사실 요새 많이들 말하는 cloud computing과 다름이 없다. 다만 public이 아니고 private, home cloud인 것이다. 이 home cloud 덕분에 out-of-office에서도 별 문제없이 ‘같은’ computer를 쓸 수가 있게 되었다.
No, still my php upload limit is set to 8M (with godaddy shared host), prevents me from uploading bigger sized file. Changing php settings with shared host environment is downright miserable experience, not recommended (probably close to impossible. But a wonderful WordPress plugin 100% solved this annoying headache in a second! With plugin named “Add from server”, I was able to make any ‘media’ files which were ftp’d onto ‘upload’ folder recognized by WordPress’ media manager. This plugin literally instantly solved this stupid php 8M upload size limit. Thanks to the plugin author: Dion Hulse.
Just moved my home office to a slightly bigger room recently. Now, I can maneuver my main work desk more freely into center as an island. No more wall to hide some ugly pc related stuffs around my beautiful desk! Hiding this mess is no easy task at all, needing some $$ to buy cable conduits, etc. But real annoyance is that fact that the pc hulk has to be as near to the desk as possible: video monitor plus mouse & keyboard, that’s problem!
Solution by chance was in using a product called usb & vga extender. For usb extender, I already had it being used for printer connection. It just worked even though sometimes presented some mysterious hiccups. It would take care of extending keyboard & mouse. Real task is to extend ‘fragile’ analog vga signals beyond 10’. Well, the proliferation of big screen lcd type monitors, extending it already in mature stage with very very reasonable cost.
One I googled today was vgatovideo.com’s very reasonable product called ‘VGA to Video Extension Kit’. It looks like a perfect product for my situation. Only at $33 for 10’ CAT6 version, that’s a perfect fit. Now, question is this: how ‘good’ is this type of product? I would guess it contains some active components like balun(i.e., impedance matcher). Has anyone has some experience with this kind of product?
Follow-up on this blog:
This product turns out too good to be true. After thoroughly having tested this product, I concluded this is not working as advertised at least for my application. I needed to place 1280×1080 resolution LCD monitor at least 12’ from pc box. It initially worked fine at least an hour.. then display turns unstable like flickering. They specified this particular product as resolution up to 1280×1080 at over 12’ distance. I gave up on this so called vga-to-CATx product solution, gone back to ‘classic’ vga coaxial cable which many time supports up to 16’. Too bad, too bad.. I will have to return this ‘bad’ product soon.
휴.. 덥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6월 달에 over 90 (아마도 섭씨32도?) days가 며칠째 행진을 하고 있다. 별로 반갑지 않다. 아마도 내가 젊었으면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 나이에는 아니다. A/C(에어컨)로 식혀주는 시원함은 정말 ‘강제’적이다. 찐득거리는 피부를 조금 편하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머릿속을 편안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조금 오래된 것들이라 energy 를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것을 아는 한 더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이런 high humidity에는 no choice.. 더구나 2층에 있는 home office에선 이런 날씨에 거의 필수적이다.
이런 날씨에 제일 신경이 쓰이는 곳이 바로 2-car garage에 있는 home server closet이다. 이 조그만 closet에는 freezer와 함께 home network hub(Internet router, switches, VOIP devices etc)와 함께 3 physical servers가 있다. 거기서 나오는 heat가 장난이 아니지만 보통 때는 별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우려가 되어서 온도를 재어보니 95도까지 치솟았다. 부랴부랴 방에서 쓰는 값싼 box type electric fan을 갖다 놓았다. 물론 공기온도는 별 차이가 없지만 server같은 hardware들은 stress가 덜 하리라 생각을 한다. 그래도 좋은 쪽을 생각하자. 이런 날 뒤에 오는 선선함의 즐거움은 어떠한가.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6월 달도 절반이 지나간다. 어느새 이렇게 되었나. 4월부터 시작된 physical work이 계속되고 있다. 요새는 더위 때문에 조금 주춤해졌지만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바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pet flap(door)와 Jacuzzi remodeling이다. 둘 다 energy saving과 직접 관련이 있다. 6개월째 같이 살고 있는 Izzie, the cat이 back porch의 view를 너무나 즐기는데, 요새 같은 더위에 일일이 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어서 pet 전용의 ‘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Home Depot에서 작년에 $30주고 산 pet flap이 있는데 그것은 standard door에 맞게 된 것이라서 standard 2×4 wall에다 설치하기에는 맞지를 않는다. 2×4 wall에 맞게 설치하려면 내가 따로 framing을 해야 한다. 나의 carpentry skill이 그 정도가 아닌 모양이다. 대강 design은 해 놓고 벽도 뚫어 놓고 했는데 framing work을 아직 시작 못했다.
Jacuzzi remodeling은 사실 re-purposing에 가깝다. 거의 20년 동안 그 ‘멋있는’ 곳에서 bath를 한 것이 불과 몇 번이 되지를 않는다. 그러니 그 space가 너무나 아깝다. 더욱이 그곳의 ceiling에는 skylight까지 있어서 view는 아주 멋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여름에 2층 전체를 더 덥게 만든다. 그럴 바에는 아야 storage closet정도로 쓰는 것이 나을 듯 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이것도 framing work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비교적 쉽다. Rigid insulation board와 drywall로 사실상 새로 벽을 만들어야 한다. 천정의 skylight도 마찬가지다.
Wow.. it’s getting hotter and hotter by days for almost 4 days in this Atlanta metro area. Of course, our clunky central a/c is in full force for days only for the living area, not including 2 car garage where our home server closet located.
Now, the small 6×3 closet is in trouble. The garage as well as the closet is not insulated at all. But the closet usually maintains ‘good’ temperature during the whole seasons except this kind of oppressive high heat and humidity condition. Only solution is good ventilation which the closet lacks. The currently the closet’s temperature has reached lower 90s. It has 3 main pc servers which runs NAS, 7 virtual machines (most of them runs desktop pc’s), virtual Asterisk pbx(PIAF), as well as various network devices. So far, they seem functioning normally.
I moved box-type electric fan inside the closet hoping ease down the heat, but thermometer shows almost no difference! This means that somehow the whole garage must be ventilated through window which I did reluctantly last night. I can feel some ‘freshness’ inside the closet but still no temperate moderation. Just hoping everything is alright during this time.
I’m thinking about adding insulation around the server closet. Also adding small opening (with ventilation fan) on the closet wall in future. My only question is this: over 90 (lower 90s) temperature inside this small server closet is acceptable or not? If not, what kind of air temperatures are acceptable?
I feel so stupid after realizing that stupid Google Voice password was the one that the trunk went silent after placing a call. Again and again, the ‘great’ Nerd Vittles’ instruction turns out 99.999% correct, my following it was miserably inadequate. All in all, my home office’s Asterisk pbx now boasts a full carrier grade Bellsouth PSTN trunk for 911, fax, majority of inbound calls, and now 100% free local, long distance mostly outbound calls from this wonderful Google trunks. Thanks Google, you’re my only hope these days, knowing of increasingly arrogant Apple$, and M$ enough by now.
Almost by accident, I’ve realized the troubled dtmf problem with Google Voice now seems resolved, but not sure since when. When I walk my dog around my neighborhood, my Google Voice ‘trunk’ at my Asterisk based home pbx is being tested from my cell phone. My home pbx setup based on Nerd Vittle’s PIAF (Pbx-in-a-flash) distribution takes my GV DID to one of my extension which already has a voice-mail capability. When I’m outside house, the extension will take GV call, prompting to leave messages and also presenting more options like deleting, rewinding messages using dtmf tones. Previously, the dtmf tones got blocked by Google by some unknown reasons. But not any more! So, I’m thinking about GV powered mini-IVR setup (Interactive Voice Response?) to my taste. Thanks, Google!
50대가 훨씬 넘어서야 비로소 ‘시’라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아주 고약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가사나 동요 아니면 아주 짧은 글을 보기 편하게 글로 나열한 것.. 기교적인 단어의 말 장난..그 정도였다.
나는 어린 학생시절에도 작문시간이 되면 시는 전혀 쓰지를 못했고 그걸 쓴다는 자체가 아주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유일한 문제가 되는 것은 국어시험, 입시 같은 것에서 그게 가끔 나오는 것이었다. 특히 대학입시 때 국어시험에는 거의 시에 대한 문제가 나오곤 했다. 그때는 오직 정답을 찾는 ‘감’을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시가 아닌 산문에는 그런대로 나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놈’의 시를 이해 하는 데는 나의 사고방식이 너무나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거의 과학공상만화에만 매달리고 기계가 인간의 최고의 작품인 것처럼 인생을 준비하고 그렇게 산 편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만 주신 신의 선물, 예술적인 것들, 추상적인 것들,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그저 안 보이는 것으로 매도하고 무시하곤 했다. 여자들과 어울리거나 사귈 때 이런 것들이 필요한 정도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에 대한 나의 견해도 그렇게 좋지를 못하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글’을 쓰며 생활을 꾸려 나갈까 하는 것이 의아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Never say Never“.. 사람은 열두 번 변한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그리고 ‘나이’라는 big factor를 왜 몰랐을까? 나는 다만 그게 남보다 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것도 50년이나 걸린 것이다. 50이 넘어서 그 짧은 단어의 나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간단히 구체적인 것 보다, 짧고 추상적인 것이 멋있게 보이기 시작하고, 나에게 상상의 여유를 주는 것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단계에 나는 무슨 시를 읽었는가? 거의 10년이 지나서 기억이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짐작 하건 데 아마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황동규 시선 삼남에 내리는 눈>> 이란 색갈이 바랜 오래된 시집이다.
이 시집은 거의 우연히 읽게 되었다. 왜 관심도 없는 시집에 손이 갔는지는 전혀 idea가 없다. 그래서 우연이 아닐까.. 아니면 요새 같은 생각이면 절대로 우연이 아닐 수도.. 이 시집은 사실 아내 연숙의 이화여대 대학원 영양학과 선배인 강명희씨(박사)가 연숙이를 1980년 6월 미국으로’먼저’ 보내면서 준 책이다. 그 사연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책의 표지 이면에 강명희씨의 자필로 적혀 있어서 알게 되었다.
시집: 사랑의 시,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
사실 황동규 시인은 문외한인 나도 조금 보고 들은 바가 있었다. 미국유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시절, 미국 유학생에 관한 기사는 열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 중에 황시인도 있었다.
그의 연보를 보면 영국유학 뒤에 Iowa주에서 유학을 한 모양이고 UC Berkeley 를 찾아가서 글을 쓴 것이 어느 잡지에 실렸던 것을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미 이름을 들었으니 조금은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이 시집에서는 어느 특정한 시에 관심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거부감 없이 전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조그만 사랑의 노래 —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그 다음이 <<108편 사랑의 시>> 란 1974년 여성동아 12월호 부록이 있다. 이 책이 어떻게 우리 손에 들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 것은 역시 십 몇 년이나 되었을까? 제목 그대로 108편의 한글로 쓰인 사랑의 시만 골라져서 실려있다.
이 시집에서 나는 정말 매혹적인, 사랑을 노래한 주옥 같은 시들을 접하게 되었다. 허영자 시인이 시를 고르고 그녀의 감상문을 일일이 적어 놓았다. 이것이 너무나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雪夜愁 — 구자운
눈 내리는 밤은
여자여 잠이 드렴
이끼 슬은 팔 다리의 언저리를 묻어
사랑의 눈물의 눈이 내리면
새로운 맑은 숨은 살아 오리
꿈을 꾸며 노래하는
후미진 조용한 물이랑에 실리어
애달픔은 연신 희살짓는다
어루만지는 아늑한 팔뚝에서
나른히 쉬는 외로운 오릇한 목숨
여자여 눈 내리는 밤은
가널프레 풀잎이 싹터오는데
안겨서 잠이 드렴.
내 짙은 난초 잎은
어우러져 스며들어라
눈이 사풋 사풋
아릿한 젖 언저리에 쌓인다.
은은한 복스러운 밤
비어 있는 해슬픈 맑은 항아린양
스스로이 소리 이루어
벌거숭이 몸뚱아리에 어리는 설움
눈 내리는 밤은
여자여 잠이 드렴
김재진: 누구나 혼자.., 피천득: 삶의 노래
그 다음의 시집은 <<피천득 내가사랑한 시 내가 사랑한 시인 삶의 노래>> 라는 제목의 피천득 시인의 번역시집이다. 1994년에 발간이 되었고 1995년 처형부부께서 이곳 아틀란타로 여행을 하시면서 선물로 남기고 가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읽지를 않았다. 나중에 발견을 한 것이다.
중고교시절 국어시간을 통해서 피천득시인은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아.. 그리고 1970년대 중앙방송의 DJ로 활약을 했던 피세영씨가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으로 Shakespeare의 시를 접하게 되었다.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Alfred Tennyson의 시도 다시 보게 되었고 미국시인 Emily Dickenson, 또한 처음으로 일본시인의 이름도 접했다.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 알프레드 테니슨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차디찬 잿빛 바위 위에, 오 바다여!
솟아오르는 나의 생각을
나의 혀가 토로해 주었으면
오, 너 어부의 아이는 좋겠구나,
누이와 놀며 소리치는
만(灣)에 있는 작은 배 위에서 노래하는
오, 사공의 아이는 좋겠구나
그리고 커다란 배들은 간다
저 산 아래 항구를 항해하여
그러나 그리워라 사라진 손의 감촉
더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저 바위 아래 오, 바다여!
그러나 가버린 날의 그의 우아한 모습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으리
1999년, Internet email의 덕분으로 고국의 옛 친구들과 다시 연락이 되었다. 그 중에 제일 그립던 친구 양건주도 연락이 되고 email을 주고 받게 되었다. 이 친구와는 정말 오래 전에 헤어졌지만 세월의 공백도 그 순진하던 고등학교, 대학교의 사심 없던 우정으로 연결이 되었다.
항상 ‘도사’같이 나이에 비해서 성숙하고 의젓하던 친구.. 양건주 결국은 사회생활도 그 건실함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이끌고, 결혼도 우리들이 알고 있던 여성과 결혼을 하고 참 부러운 친구다. 그 친구는 말과 행동 또한 별로 다르지 않다. 사실 나는 그 친구로부터 받기만 했다. 그 중에 하나가 김재진의 시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라는 멋진 시집이었다. 건주야, 고맙다.
지나간 노래 — 김재진
지나간 노래를 들으며
지나간 시절을 생각한다
뜨거웠던 자들이 식어 가는 계절에
지나간 노래에 묻어 있는
안개 빛을 만나는 것은 아프다
너무 빨리 늙어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 보다
아프다
누군가 나를 만나며 아파야 할
그 사람을 생각하면
지나간 노래를 들으며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는 것은 아프다.
시전문지: 시안, 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
거의 20년 전에 이곳에서 알게 된 중앙고교 후배가족이 있었다. 나중에 취직이 되어서 귀국을 해서 헤어졌지만 딸들이 서로 친구라 가끔 간접적으로 소식을 접하는 그런 집이다. 그 당시 그 후배의 처남(wife의 남동생) 인 홍은택씨가 visiting scholar로 미국엘 왔는데 잠깐 들렸는데 그때 처음 만났다. 영문학전공이고 미국문학을 공부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가 시인임을 몰랐다. 2003년 쯤 우리 큰 딸(새로니)이 한국의 이화여대로 한 학기 공부를 하러 갔을 때 그 홍은택(교수)가 책을 딸 편에 보내왔다. 두 권인데, 하나는 <<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 란 시집이고, 다른 하나는 계간잡지 <<시안>>이었다.
<<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 Selected Korean Poems in English>>는 Rodney Tyson교수와 홍은택 교수가 공동 집필한 한영 번역시집이었다. 이 책을 보고 어떻게 그 언어감정의 극치를 전혀 다른 영어감정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 감탄을 하곤 했다. 저자의 한 사람이 영어권이고 다른 사람은 한국어 권이라서 그야말로 “아다리”가 맞았다고나 할까.
겨울 한강에서 — 김남조
겨울 강이여
너의 악보는 끝이 없구나
오늘은 결빙의 강바닥 아래
암청의 실타래들이 누워 있음이
무섭고 아름답다
흘러서 저기에 잠겨드는
사람 있으면 어쩌나
배 한 척 지나갔는지
물살 드러난 언저리 얼음조각 떠 있느니
아마도
탈색한 나룻배였을 게야
배에 탄 사람
삭풍에 도포자락 휘날리고
뱃전에 얼음 갈리는 소리
서걱서걱 울렸으니
“여보세요 여보세요” 외치며
누군가 뒤쫓았을지도 몰라
By the Han River in Winter — Kim Nam Jo
Winter river
Your score has no finale
Today under the frozen river bed
Lie dark blue skeins of thread
Frightening and beautiful
What if a person is
Possessed and submerged there?
A boat may have passed by
As pieces of ice floated at the edges of the exposed current
Perhaps
It was a discolored ferry boat
Someone in the boat
Sleeves of his attire flapping in the north wind
And the sound of ice splitting by the sides of the boat
Crunch crunch
Someone may have run after him
shouting “Hello, hello”
계간시집 <<시안>> The Quarterly Review Poetry & Criticism, 1999년 가을호에는 바로 위에 언급한 홍은택교수의 시인등장을 알리는 시들이 실려있었다. <<제 3회 시안 신인상>>에 당선작 중에 홍교수의 시가 있었다. 4편이 실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겨울산>> 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무언가 태고 적의 전설을 연상케 한다. 또한 마치 삼국시대의 병마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