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 redux

오늘은 드물게도, 거센 바람이 분다..  지나간 겨울은 정말로 조용한 하늘이었다. 바람도, 눈도, 큰 비도 없었던 정말 얌전한 날씨로 일관했던 2017년 첫 3개월을 보낸 지금 4월초가 되면서 빚이라고 갚으려는 듯, 어젯밤부터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기온까지 급강하, 아침에 외출 할 때는 거의 사라졌던 두꺼운 스웨터까지 입어야 했다.

얌전하게 지나간 겨울, 비록 재미는 없었지만 덕분에 heating $$$는 분명히 많이 절약이 되었을 것이다. 이럴 때 $$$를 언급하는 나를 나는 경멸한다. 그것이 나이 탓인가 세월 탓인가 시대 탓인가…

 

Surge

우울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는 것 중에 이것이 있다. 나의 blog counts.. 왜 그런가? 하루 평균 30~40 를 수년 동안 보아왔다. 하지만 아주 가끔 놀라운 burp가 있긴 했다고는 하지만 한 달 평균 1,200 정도로 만족을 해왔다. 그러니까 하루 40 hit count정도인 것이다. 한 시간에 1~2 정도의 visitor가 있었다고 할까? 짐작하건대, 거의 모두 search engine애 의해서 찾아 온 것일 것이다.

나의 blog은 내가 생각해 보아도 조금은 strange, unique한 것이.. 상식적으로 조금 이해하기가 힘들게 public보다는 private에 더 신경을 쓰는 그런 것.. serony.com은 분명히 DNS 에 등록이 된, wide-open된 public한 것이지만 실제로 나는 의도적으로 가급적 널리 알려지지 않게 노력을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간단하다. 그렇게 많지 않았던 나의 life-long friends 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만이라도 찾아와서 내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이 blog의 목적은 달성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아마도 한 달 정도 되었나.. hit count가 ‘갑자기’ 뛰었다. Daily average가 50에 육박한 것이다. 지난 달에는 한 달에 2,000이 훨씬 넘어서 (2,260!)  하루 평균 70에 육박했는데 물론 나는 이것이 sustainable한 것이 ‘절대로’ 아님을 안다. 하지만 그 다음 달인 지금 생각보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하루 평균 50이 이제부터는 new normal이 된 것인가? 모른다.. 모른다.. 이 blog count는 절대로 예측할 수가 없는 dynamic한 것이고 왜 하루 평균 50인지 이유를 분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blog을 찾아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특정된 post를 찾아왔는지는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나의 post에도 popular한 것이 있는 것이다. 나의 일상 생활보다는 신앙적, 영성적, 교회적인 것에 대한 나의 생각, 반성, 묵상 등을 찾는 사람들.. 분명히 현재 나의 같은 길을 걷고 있거나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는 만족함을 느낀다. 70이라는 인생 여정을 뒤돌아 보며 나의 ‘이상한’ 8년 역사의 개인 blog은 어떤 길을 언제까지 가야 하는가..

 

bizarre & kafkaesque..

2017년 3월의 hump day로 힘겹게 넘어가려는 날 3월 14일, 오늘이 내가 꼽는 올해의 첫 그날, truly  bizarre kafkaesque day가 아닌가 싶다. 아주 가끔(십 년쯤에 한번 정도) 경험하는 이런 ‘괴상하고 이상한 날 Franz Kafka도 놀랄만한’, 이날은 간단히 말하면 memorably truly BAD day가 되고 말았다. 바라건대 이와 같은 날은 가능하다면 다시는 맛 보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니면 10년 이후에나 다시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이날의 ‘괴상한 사건’은 timeline으로 펼치면 길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간단한 것이다. 한마디로: 레지오 주회합 시간에 방문을 온 어떤 꾸리아 간부의 ‘해괴망측한 행동’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bizarre, bizarre 그리고 또 bizarre 그것도 부족해서 이거야 말로 kafkaesque란 괴상한 단어가 100% 딱 들어 맞을 것이다. Franz Kafka의 classic ‘The Trial‘의 불행한 주인공 K의 심정을 느낀다. 도대체 이 해괴한 행동에서, 나는 (아니 우리 모든 단원들은)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고 순식간에 attack을 당한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사건 주인공의 정신상태까지 생각해볼 정도였고, 하도 밥맛이 떨어져서 입을 딱 씻고 6개월 장기유고를 선언할 태세까지 갖추고 있는데, 참 어쩌다 우리 레지오가 이 지경까지 흘러온 것인지..

 

큰 눈이 안 오는 1월은..

¶  마지막으로 (blog) posting을 했던 때가… 와~~ 믿어지지 않는 ‘작년’ 2016년 11월 Thanksgiving Day 때가 아닌가?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있던 12월과 가족적으로 너무나 바쁘기만 한 1월 이 온통 다 posting 없이 지나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지난 2개월 동안 비록 posting을 없었지만 간간이, 틈틈이 남겨 둔 calendar journals, sticky note들이 이곳 저곳에 남아있고 ‘digital traces [emails, voice recording, snap photo 같은]’의 도움으로 지난 2개월의 blog post (retro-blogs)들도  ‘곧’ 채워질 것으로 희망을 하며 이렇게 1월을 보내게 되었다.

 

¶  지난 26일에 2016년도 Federal Income Tax Return을 2시간 만에 끝을 내어 버렸다. 미리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충동적’으로 한 것인데 그것이 나의 습성이기에 크게 놀라진 않는다. 올해의 tax return은 약간 의외적이었는데 tax refund가 아니고 오랜만에 tax를 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지난 해 ObamaCare coverage때문이어서 우리 집의 financial fundamental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이어서 크게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  올해의 겨울날씨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던가? 1월의 마지막에 들어서 돌아보니 분명히 heating bill이 작년보다 가벼워진 것 같다. 올해 겨울 long-term forecast는 못 보았지만 분명히 ‘이상난동’에 가까운 것으로 보도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아틀란타 지역의 뚜렷한 4계절이 이제는 ‘아열대성 subtropical’형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4계절 보다는 ‘우기와 건기’인 듯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예전의 한 겨울이 ‘차가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그런 것으로 변한 것이다. 1월 초 한때 잠깐 강추위와 눈이 조금 뿌렸지만 그 정도는 경미한 것으로 끝나고 앞으로도 ‘큰 뉴스 예보’는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그래도 ‘천지개벽’할 정도의 일기뉴스가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불편을 겪을 정도만은 피해갈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한다. 2014년의 그런 ‘교통대란’은 다시 겪고 싶지 않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솔직히.. 소리 없이 고요히 밤의 적막을 헤치고 펑펑 내리는 함박눈의 환상은 지울 수가 없다.

1월초 섭씨 영하 10도의 강추위와 약간의 눈발이 내렸던 기억..

 

¶  Crash Courses: ROK (South Korea), DPRK (North Korea) 101:  오래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우연히, 저절로’ 생기는 일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물론 이것이 더 가능했던 것은 ubiquitous Google 의 power일 수도 있다. 불과 20여 년 전에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닌 것이 요새는 수시로 일어난다. 좋은 예로, YouTube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것들 중에 [탈북자] 가 있었다. 이런 ‘탈북’이란 유행어,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나의 코 앞에 다가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KOREA에 대한 관심 전혀 없이 살아온 수십 년 덕택에 완전히 고향감각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이런 것들은 완전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남쪽은 남쪽대로 ‘빨갱이 정치인’들이 득실거리고 (정말 밥맛 떨어지는 종북좌파 정치인 개XX들은 내가 이 우주에서 제일 증오하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들이다.) 북쪽은 북쪽대로 ‘해괴한 모습의 지도자 동지들’ 치하에서 ‘인민’들을 굶겨 죽이며 ‘장난감’ 무기로 불장난을 하니.. 그래서 제일 피하고 싶던 뉴스는 거의 모두 KOREA에 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이제는 그 말이 역시 명언 중에 명언임을 실감하는 나날과 앞날을 마주 보게 되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나의 고향, 나의 조국을 ‘심각하게’ 공부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Eve, Christmas 2016

Uh oh.. 와~ 오늘이 며칠인가.. 2016년 12월 24일, 사실 이날의 느낌이 12월 25일 보다 훨씬 더 설레고 진하던 시절을 오래 전에 보냈던가? 이제는 그런 설렘은 기억 뿐이지만 그래도 잔잔한 설렘은 어쩔 수가 없다. 요새 비교적 평화로움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온 것만도 나에게는 더 큰 성탄 선물일 것이다.

오래 오래 오래 전 우리 둘 모두 교회, 성당을 모르던 시절 신혼 초, 정말 고요한 밤을 보냈다. 아니 너무 고요해서 심심하고 쓸쓸한 밤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Eve 밤 늦게 차를 몰고 downtown (당시는 Columbus, Ohio)을 배회하는 것이었는데.. 왜 그런 해괴한 idea가 우리 둘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아마도 찬란한 holiday decoration, tree light같은 것을 보려고 했을 것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더 쓸쓸해지는 것을 알았다. 외롭기도 하고..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짜 이유를 찾고 알게 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그 이후는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었다.

최근에 들어서는 최소한 우리 직계가족 전부 (4명)이 모여서 우리 집 근처 Holy Family성당에서 합창단과 더불어 함께 노래를 부른 후, 자정미사를 보는 것이 정상이 되었다. 오늘 밤도 같은 routine을 거칠 것이다.

 

+ 강 마리아 자매님..

오늘 저녁에 우리부부는 개인연도를 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 ‘갑자기’ 타계하신 강 마리아 자매님, 향년 90세로 하늘로 떠나셨다. 인생 90년은 비록 짧지는 않게 느껴지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더 오래 사실 것, 100세는 사실 것으로 안심을 하며 지내던 터에 더욱 슬프고, 당황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고인의 영결행사 대신 이렇게 집에서 연도를 한 것이다. 부디 연옥의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시도록 간절히 빌었다.

강 마리아 자매님, 우리와 처음 만난 것 레지오 수첩을 찾아보니 아마도 2013년 11월 경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모습들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한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준비로 난타 연습이 진행 중이었고 지금은 귀국하고 없는 전요셉 형제와 친해지려고 하던 그 때, 레지오의 다른 단원과 친분이 있었던 ‘할머니 교우’ 였던 강 마리아 자매님이 senior home에 사시는데 ‘치매기’가 있고 성당엘 나올 수 없으니 봉성체를 부탁한다고 알려 왔다. 나는 ‘봉성체 자격증’ 이 없지만 다행히 연숙은 그것이 가능해서 나는 봉성체 동행으로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알고 보니 강마리아 자매님은 전요셉 형제와도 이미 친분이 있었다. 몸이 성할 당시 성당 미사시간에 옆 자리에 앉으시곤 했다고 했다. 그래서 한번은 전요셉 형제도 함께 봉성체를 가기도 했다. 사시는 곳은 ‘비싼’축에 속하는 senior home이었는데 비록 환경은 좋다지만 외롭게 사시는 것은 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조그만 방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 보기에도 쓸쓸하게 보였다. 하지만 강 마리아 자매님은 활달한 성격이고 항상 웃으시는 것이 우리 어머님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 친하게 되었다. 비록 경미한 기억상실증dementia 같은 것은 있었어도 우리가 방문 당시에는 거의 정상인 같이 보였다. 이래서 거의 2년 여의 봉성체 인연을 맺기 시작하게 되었다.

치매, 그러니까 망각증상은 분명히 있었으나 특별한 질환이나 쇠약함이 별로 없는 자매님, ‘약 하나도 안 먹는다’ 고 자랑을 하시기도 하고 일제시대 부산에서 미래의 남편 되시는 분이 지나가는 자기를 ‘꼬시려고’ 할 때의 ‘기꾸꼬 짱!’ 하며 불렀던 기억, 일본 군가 같은 노래를 가사를 똑똑히 팔을 흔들며 부르시던 모습 또한 새롭다.

‘잘 나가는 가족들’을 두신 자매님, 어쩌다 이렇게 미국 아틀란타의 어느 조용한 양로원에 오시게 되었는가?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자랑스러운 아드님 부부도 가까이 살고 있지만 같이 살지는 않았다. 경험 있는 관록이 붙은 회계사였던 아드님,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어머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 바빴던 모양이지만, 우리 어머님을 내가 모시지 못하고 보낸 나의 처지에서 그런 것을 comment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진다.

한 번은 자매님이 가출했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양로원 근처를 방황하다가 발견되어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분명히 망각증이 더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24시간 주위의 보호를 받고는 있지만 그런 사고는 날 수가 있는 모양.  한번은 가보니 무거운 장거리 여행용 가방을 챙겨두고 계셔서 어디 가시냐고 여쭈었더니 ‘나도 여행을 가야겠다’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지만 양로원 측의 말이 자주 저러신다고 했다. 짐작에 아들네 부부가 ‘세계일주’를 갔는데 따라가시려고 한 모양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지난 몇 개월 봉성체를 거르게 되었는데, 이유는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도 바빴고 ‘치매 환자의 봉성체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신부님께서 가급적 치매환자 봉성체를 자제하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강마리아 자매님을 찾지 못하고 지나다가 이번에 정말 놀랍게도 타계하신 소식을 접했는데, 솔직히 머리가 땅! 하고 얻어 맞은 느낌이 들었다. 죄송, 죄송..죄송합니다.. 라는 말 밖에 할 말을 잊었다. 봉성체를 못해드려도 찾아라도 뵐 걸.. 하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실 몸이 성한 우리 같은 신자로서 봉성체 봉사는 그 분들에게 드리는 도움보다도 그로 인해 내가 받는 은혜와 은총이 더 많음을 항상 절감하곤 한다. 대부분 인생 선배님들은 그들에게서 나는 산 역사 공부를 하고, 신앙공부도 하게 되며 앞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배우는 등.. 참 알고 보면 내가 더 도움을 받으러 그 분들을 찾아 뵙는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아직도 환~하게 웃으시는 강마리아 자매님의 얼굴.. 나에게는 항상 살아서 ‘찾아 주어서 고맙데이…’ 하시면 양로원 문까지 배웅해 주시던 조그만 체구의 마리아 자매님..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다.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이여, 이 자매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를 빌어 주소서…

 

중앙고 독일어, 강성위

책, 二十世紀 哲學 역자, 강성위.. 1978년 대한민국 왜관 분도출판사에서 발행된 철학 번역서. 강성위 는 번역한 사람의 이름이다. 지난 주일날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에도 참석할 겸해서 그곳에서 주일미사엘 갔는데, 근래에 자주했던 것처럼 ‘성물방, 도서실’ 엘 들렸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의 제목이었다.

갑자기 철학에 눈이 뜬 것이라기 보다는 번역자의 이름이 나의 눈을 끌었고 곧바로 2주 대출을 하게 되었다. 강성위.. 강성위.. 1963~4년, 무려 반세기가 지난 때의 기억 속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서울 중앙고등학교 독일어 선생님의 이름.. 바로 그 강성위 선생님이 분명했다.

지난 해에도 이 ‘조그마한’ 도서실에서 재동국민학교 동창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그리고 나]을 발견한 바가 있었는데 그런 추억이 담긴 발견의 두 번째가 된 것이다. 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식의 ‘역사 속 발견의 즐거움’을 종종 대하게 된다. 세월의 즐거움 중에 하나일 것이고 ,길지 않은 삶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거의 40년이 가까운 이 책은 비록 ‘소책자’의 느낌을 주지만 내용은 정 반대로 ‘거대한 주제를 압축적으로 다룬’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를 풍미하며 우리를 직접 간접으로 지배해 온 사상, 물론 서양적인 관점에서 본 것들을 정리한 것, 지금 읽으니 우리들도 피할 수 없던 이런 ‘사상 들’ 속에서 평생을 살았구나.. 하는 감회도 든다. 때로는 ‘사상이 밥 먹여 주냐?’ 는 때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의견일 것이다.

강선생님 졸업앨범 사진

강성위 독일어 선생님.. 비록 2년 여의 짧은 기억이지만 추억은 아주 너무나 또렷하게 남는다. 1963-64년..  박정희가 5.16 혁명 2년 후 군복을 벗고 대한민국 제3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요란하게 선전되던 때 [주로 중화학 산업개발], 강선생님, 중앙고 1학년의 독일어 선생으로 만나게 되었다.

독일어.. 는 분명히 입시중심의 교육과정에서 별로 빛이 없었던 ‘제2외국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1960년 당시만 해도 2차대전의 강국 독일문화의 후광은 그런대로 남아있어서 대학과정에서 독일어는 거의 필수적 선택이었고 대학원엘 들어가려면 독일어 시험을 치러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독일어 같은 제2외국어는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했고 그렇게 ‘되길어 [당시 우리들은 풍자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강성위’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고등학교와 독일어, 영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는 것은 신선하고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자랑할 만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독일어 자체는 악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독일어의 재미를 못 느끼며, 게다가 핵심을 못 배운 것이다. 그저 기억 속에는 정관사 der des 같은 것이 전부다. 이런 탓으로 나는 대학시절에도 이 ‘어려운 말’과 고전을 하게 되었고 대학원 입학에 이 독일어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예 대학원은 꿈도 못 꾸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나름대로 나는 노력을 했다고 기억을 하는데 결과적으로 ‘완전 실패’였다. 나는 독일어를 잘 못 배운 것이다. 다른 애들은 어땠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열심히 해도 잘 못 배운 것’은 어쩌면 선생님 탓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이 ‘강성위 되길어’ 선생님의 독일어 강의는 절대로 흥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입식으로 그저 외우는 것 외에는 기억이 전혀 없다.

이 강선생님에 대한 다른 추억은 독일어가 아니고 ‘장난치고 이상하게 때리는’ 당시로써는 ‘전통적 선생님’이 아니었던 것. 독일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수시로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했는데 그 방식이 독특하게 ‘때리는 것이 아니고 꼬집는 것’ 이었다. 이런 식으로 고교 1, 2년을 보내고 이과를 선택한 나는 독일어와는 상관이 없게 되었고 이 강선생님도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졸업 후에 완전히 잊고 살다가 친구 정교성에게 강성위 선생님의 이야기를 잠깐 들었던 기억,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것, 독일에 유학을 갔었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은근히 속으로 놀라긴 했지만[아니.. 그 꼬집던 선생님이 독일유학?]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강선생님의 이름이 들어간 책을 보게 되었고 1978년까지의 ‘약력’을 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과연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국내 대학에서 가르치는 약력이 그 책에 적혀있었다. 정교성의 말이 맞은 것이다. 언제 독일유학을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6년 직후가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googling을 하면 더 자세한 약력과 근황을 알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에서 stop을 하기로 하였다.

중앙고교 천주교반 앨범사진, 1965

 

중앙고교 졸업앨범을 보고 다시 당시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바로 그 모습을 나는 머리에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진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 바로 ‘천주교 반’ group 사진에 ‘지도 교사 격’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아하! 강선생님.. 천주교 신자였구나!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친구 정교성의 모습도 보이고.. 희미하게 기억에 남는 동창들[이태식, 김창호 등등] 의 얼굴도 보인다. 근래 나의 인생의 나침판이 된 천주교를 믿는 영혼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직도 나의 기억에 남는 ‘꼬집는 강성위 선생님’보다는 더 친근한 천주교 교우인 ‘강성위 박사, 형제님’ 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영세 명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지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언젠가는 알 수가 있을 것이고 어떤 본당에 나가시는지도 알게 될 테니까..

 

레지오 연총, 2016

지나간 거의 반년 이상 줄기차게 레지오 서기록 공지사항에 적혀 있었던 것이 바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이것이 드디어 끝이 났다. 대강 이 행사가 끝날 즈음이면 대림절 이후 늘어나는 촛불의 숫자를 필두로, 성탄절과 송년의 기분을 조금 느낄 수 있는 시기가 된다. 올해에도 예외 없이 대림초 2개가 켜지는 날 주일, 12월 4일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산하의 모든 레지오 단원들이 커다란 친교실에 모두 모여서 일년을 무사히 우리들을 지켜준 ‘총사령관’ 성모님께 감사, 전구기도를 드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로써는 올해가 벌써 6년째가 되는 이 연말 행사, 처음이 2010년 12월이었지.. 그때는 정말 햇병아리 신참, 정단원 선서를 기다리던 시절에 이 행사를 보며 ‘난생처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동료의식’을 조금은 느끼며 흥분된 기분이기도 했다. 해가 거듭할 수로 익숙해지고 있지만 매년 조금씩 다른 느낌을 받는다. 거의 대부분이 ‘자매님’들인 이 단체, 나 같은 ‘형제님’들은 이 여성들을 따라가야 한다.

이 행사는 비록 Ireland 냄새가 짙게 나는 유럽에서 유래된 Legion of Mary (Legio Mariae)의 연말 행사지만 우리가 치르는 이 행사는 거의 99.9% ‘대한민국화’ 된 것이다. Universal Church를 지향하는 천주교의 전통에 따라 이것도 세계화 되었기에 전세계 곳곳에서 열릴 것이고 ‘막강한’ power를 자랑하는 한반도의 전역 본당에서도 열릴 것이고, 그들의 연총 행사는 위에 말한 것같이 ‘한국화’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이곳 아틀란타의 그것은 무엇인가? 원칙적으로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곳 미국 땅의 그것의 문화를 따라야 할 것이지만, ‘한국인의 근성’이 어디로 갈까? 더욱이나 ‘막강해진’ Korean Connection은 이곳 아틀란타에서는 피할 수가 없다. 레지오 조직의 법적인 차원을 떠나서 사실 우리는 별 수 없이 대한민국의 그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지만 짐작에 우리가 현재 여기서 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아마도 똑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크게 상관이 없다. 레지오의 교본에 따라 레지오의 연차 총친목회의 정신을 따르면 문화적인 것은 2차적인 관심이다. 평소 잘 못보고 지내던 ‘레지오 동지’들과 친교를 이루면 그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니까…

이 행사는 동료 단원들과 친교를 이루는 한 방법으로 ‘연예 프로그램’을 긴 시간 동안 준비를 한다. 이 긴 시간을 통해서 친교를 하게 되는데 올해 우리는 비교적 잘 알고 지내던 ‘은총의 모후’와 함께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와 ‘개똥벌레’라는 두 곡을 연습하여 당일에 그 솜씨를 발표 하였다. Chorus style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색다르게 rearrange를 해서 2번째 부른 ‘개똥벌레’는 자매님들이 귀엽게 율동을 해서 연속된 노래의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간 여름부터 시작된 ‘기타 club’의 학생자매님들이 guitar로 반주를 했고, 나는 전체적인 guitar 반주를 하는 등, 보는 사람들에게도 신선한 performance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한가지 아쉬움은.. 연총 당일을 위해 지난 몇 개월간 열심히 guitar 반주 연습을 같이 했던 크리스티나 자매님 (나와 guitar duet)이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공연을 포기하게 된 것… 정말 아쉽기만 했다. 그 자매에게 감기는 정상인에 비해서 심각한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차가운 비가 하루 종일 뿌리던 12월 4일 일요일 오후의 이 행사,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아니 2016년 레지오 마리애의 굵직한 행사의 마지막이 끝난 것.. 이제부터는 성탄을 향한 본격적인 대림절로 기다리는, 편안한 12월의 휴일 기분을 만끽할게 되었다.

 

Chilly soaking steady..

‘가을비 우산 속’의 꿈이 거의 사라지고 벌써 하얀 눈과 정겨운 크리스마스 movie들이 이곳 저곳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2016년 대림 2주일째,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아마도 곧 그치지 않을 듯’한 을씨년스럽고 뼈 속까지 써늘한 기분의 잔잔한 가랑비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내린다. 지독한 가뭄의 여파로 어떠한 모습이라도 비라는 것은 다 반갑기만 하다.

 

촉촉히, 잔잔히, 싸늘하게 내리는 겨울비

 

대림 2주가 되는 일요일, 어제는 거의 하루 종일 정말 오랜만에 tool time으로 보냈다. 손볼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던 청명하고 서늘했던 낙엽의 시절의 시간들을 다 허비한 느낌, 나는 그 동안 방 속에 앉아서 과연 무엇을 하였나? 어제의 tool time은 계속 미루어 오던 숙제, 우리 집 backyard feral cats 아롱이와 다롱이가 겨울을 보낼 shelter 를 ‘급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크고 단단한 것이어서 무려 5시간이 걸렸다. 뒤쪽 deck에 위치한 그 shelter에서 2 마리의 sibling들 무사히 겨울을 나기를..

 

making cat shelter in 5 hours

 

 

드디어.. (늦) 가을비가..

Finally, it came, finally!  이번에는 일기 예보를 하기가 조금은 쉬웠던 모양이다 내가 느끼고 보아도 이번에는 비가 올 듯하였다. 역시 역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늘의 물방울들이 제법 세차게 밤새 창문과 뒤 뜰이 깊고 깊이, 마르고 마른 낙엽들에 사정없이 쏟아졌다. 잠결에 연숙의 ‘비가 온다..’라는 comment를 들었다. 얼마나 기다렸으면.. 하는 탄성이 나의 머리 속에도 맴돌며 편안한 잠을 계속한 밤, 이건 가을비는 가을비인데 아주 늦가을비가 아닌가? ‘가을비 우산 속에’ 같은 감상적 기대감이 거의 희미하게 된 이 시점 가을비의 느낌은 어떤 것인가? 역시… 좋~ 구나, 좋~ 다~..

 

깊은 가을비가 지난 밤부터 촉촉히 나리는 backyard

 

괴롭기만 했던 11월의 나날들.. 기억 속으로 넘겨버리고 싶지만 아주 진한 고통의 느낌은 아마도 오래 남을 듯하다. 어두운 밤을 보낸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지금은 조금 먼 동이 트이는 새벽의 빛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이 ‘복음성가’의 가사가 어쩌면 그렇게 나의 귓전을 맴도는 것인가. 벌써 4년 전이 되었나? 태양처럼 떠오르던 ‘새롭고 신기하던 느낌들’에 도취되어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에서 어떤 형제님과 악을 쓰며 불렀던 이 복음성가.. 누가 곡을 쓰고 가사를 썼는지.. 참 기가 막힌 노래임을 새삼 느낀다. 그 때의 그 떠오르던 태양의 느낌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연숙이 ‘고만고만하게’ 기침감기로 고생한 거의 한 달 반 동안 ‘거의’ 쉬었던 YMCA workout이 서서히 다시 시작이 되었다. 연숙은 swimming, 나는 weight lifting을 주로 하는데, 수영은 잘 모르지만 ‘역기’는 조금만 쉬어도 문제가 생긴다. 전에 고통 없이 오르내리던 120 파운드가 지금은 200 파운드로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 알면 된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리라.. 태양은 다시 뜨고, 내일은 오늘과 다른 새로운 날이라는 사실을..

 

Thanksgiving, 2016

Thanksgiving SongMary Chapin Carpenter

 

서기, 주후 主後 2016년 11월 24일.. 11월 24일이란 말의 느낌은 확실히 미국의 ‘추수감사절’임을 느끼게 하는 것.. 그렇다. 죽을 때까지 타향일 수밖에 없는 이곳 미국에서 숨을 쉬면 산 세월, 연륜이 결코 만만치 않은 45년에 가까워짐을 실감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착잡 錯雜 한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 비’ 구경 한지가 2달이 가까워 오는,  매일 매일이 화창한 깊고 푸른 하늘의 가을, 기온은 빙점까지 떨어지는 것, 비만 빼고는 지극히 보통, 정상적인 2016년의 가을의 끝 자락에서 지나간 일년을 감사하는 날 ‘추수감사절’, 바로 오늘이다. 며칠 싸늘하던 날씨가 포근하게 바뀌고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모조리 열고 신선한 공기를 느끼며 오랜 만에 편한 오후를 맞이한다.

지난 일주일의 대부분을 조금은 심하게 우울한 기분에 시달리다 timing 좋게 그 수렁에서 빠르게 벗어남을 느낀다. 왜 그런 less-than-mild depression에 빠졌고 왜 재빨리 빠져 나오지 못했나 아직도 ‘분석’ 중이다. 앞으로 이런 푹~ 쳐지는 감정에 다시 빠져도 별 도리 없이 이번처럼 그대로 시간만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정말 싫지만, 아직도 뾰족한 대책을 찾지를 못한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4명 가족이 다 모이지 못해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만든다. 오직 4명의 식구가 똘똘 뭉쳐 살던 시절들이 이제는 다 지나갔는가? 한 가족의 궁극적인 진화라고는 하지만 쓸쓸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올해는 작은 딸이 빠졌다. 새로 사귄 boyfriend 의 ‘저택’에 초청을 받았다고 하지만 우리로써는 섭섭한 마음, 많지도 않은 가족인데.. 그래도 남은 3명이 turkey를 제외한 풍성한 음식을 즐겼다.

올해는 어떤 Thanks를 give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올해는 작년에 비해서 조금 이것이 힘든 것을 보면 아마도 그렇게 spectacular 하게 감사할 것이 없는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그것이 절대로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늘 Thanksgiving day Mass에서 Father Miguel의 강론이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하는지 우리는 모르고 지낸다고..

작년에 우리가 받았던 메가톤 급의 ‘은총’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대로 4식구가 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것, 감사를 드린다. 비록 나이는 더 먹어가지만 나이에 비해서 건강함을 유지했던 덕분에 그런대로 매일 미사, 충실히 참례했던 사실, 장기간 봉성체를 하며 돌보았던 ‘보나’ 자매님을 ‘안전하게’ 하느님 품으로 보낼 수 있었던 때, 우리가 속한 자비의 모후 레지오, 위기를 넘기며 탄탄하게 견디며 현재 아주 건강한 힘으로 활동을 하게 된 사실, 우리의 미국본당에 ‘결혼사제’가 부임을 해서 걱정도 많이 했지만 의외로 좋은 결과를 낳게 된 것, 예산에도 없던 에어컨 고장을 brute-force로 고쳤던 사실, 수십 년간 녹슬었던 나의 guitar 실력을 guitar club에 관여하여 되 살릴 수 있었던 기회, 레지오 전 단원 바울라 자매의 부군 조 이시도르 형제님을 안전하게 하느님 품에 안기게 했던 은총, Atlanta History Center에서 즐겁지 않은 직장생활을 했던 작은 딸 Vonnie, 더 좋은 장래성이 있는 곳으로 옮겨간 사실, Science & Religion 분야 중 최근에 개발된 이론들을 총 망라한 저서와 저자, Father Robert Spitzer를 찾고 알게 된 사실: 별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것들 모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들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deep November, film noir time..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다리고기다리’) 11월 그것도 중순을 지나가는 그야말로 ‘멋져야 할’ 깊어가는 가을, deep November 가 되었다. 하지만, 올 가을의 최고의 놀라움,  big surprise는 ‘가을비 우산 속’ moment가 ‘전혀’ 없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이다. 최근의 기억 속에 이렇게 ‘맑은 하늘의 연속’은 처음인 듯 하다. 간단히 말해서 ‘지독한 가뭄’인 것이다. 그렇게 가을 비가 잦았던 지난 해들이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숫제 ‘비가 올 때의 느낌’까지 잊어버릴 정도다. 마지막으로 비가 온 것이 그러니까.. 9월 중순 경.. 와.. 2개월 이상 한번도 비는커녕 흐린 날도 별로 없었으니.. 기록적인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한 여름에 그래도 곧 다가올 ‘가을 비’만 연상해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고 romantic 한 기분까지 예상을 했었는데.

지나간 몇 년간 unthinkable becomes realities.. 경험을 꽤 했고 그런 것을 경험하는 이유 중에는 나의 나이 탓도 있으리라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고 있기에 이런 ‘희귀한 일들’을 경험한다는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지를 않고 조금은 겁이 나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Eschatology (종말론) 를 들먹이지 않고 싶지만, 꽤 많은 ‘이성적인 사람들’도 이런 것을 언급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조금 누그러진 기분이 되었지만 Park(GH) & Trump shock는  이 ‘연속적 종말론’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제는 다 끝난 것인가? Impact는 완화되고 있지만 여파는 아마도 아마도 생각보다 오래 갈 것이다. Praying Rosary가 더욱 더 필요한 ‘더러운 세상’을 살고 있는 나, 우리들..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것인지, 지나간 ‘good ole days’가 다 지나가고 있는 것인지..

오랜 동안 기침감기로 고생을 하던 연숙, 이제 ‘지독한 기침’은 거의 끝났다고 생각되지만.. 정말 이렇게 오래 가는 것 처음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flu shot을 맞으라고 그렇게 보챘지만 우리는 그 shot의 효과를 기본적으로 과신하지 않기에 거절했지만 혹시 그것을 맞았으면 덜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럴 때 우연히 ‘재발견’ 한 것, 바로 film noir.. 1940년 후반부터 1950년 후반까지 미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B급 영화들.. 오래 전 누나와 서울에서 AFKN을 통해서 보았던 미국영화들.. 대부분이 이 class에 속한다. 한마디로 극장까지 가서 볼 만한 영화는 아니고, 비 오는 음산한 날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서 ‘조그만 흑백 TV’로 보는 것이 제격인 ‘유치찬란’한 영화들이다. 그것들을 YouTube에서 ‘왕창’ 발견한 것이다. 올해 11월에는 이것들이나 왕창 copy해서 두고두고 볼까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든다.

 

흑사관의 공포, 알제리아 결사대..

반세기만에 다시 찾아 본 ‘영국’ 영화, ‘흑사관의 공포’, 핏빛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무시무시한 기억들..

 

결국은 찾아내고야 말았다. 아마도 55년 전쯤 ‘오돌오돌 떨며 본  공포 영화’, 당시의 영화 제목, ‘흑사관의 공포 恐怖’, 흑사관의 공포.. 이 ‘외국영화’ 의 영어제목은 Horrors of the Black Museum으로 이번에 기적과 같이 찾고,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흑사관’의 한자어를 모른다. 흑사관.. ‘흑’자와 ‘관’자는 알 듯한데.. ‘사’자의 한자가 오리무중이다. 흑 黑 , 관 館. 하지만 black museum을 흑사관 이라고 했으니까 아마도 사 자는 死, 아니면 事  가 아닐까?

어렸을 적, 대강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에 서울에서 본 영화들, 특히 외국영화들.. 참 많았는데 거의 모두 미국에 온 이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70-80년대에는 거의 TV에서, 그 이후 근래에는 video tape,  Youtube의 streaming video 로, 최근에는 재수가 좋으면 download를 해서 computer에 넣어두고 찾아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인생의 황혼기로 본격적으로 들어가며 stupid nostalgia 때문인지 오래 된 영화일 수록 더욱 잊고 싶지 않게 되었는데, 가끔 분명히 머리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영화의 장면들, 하지만 다시 볼 수가 없었던 것들이 더욱 간절하게 보고 싶어진다. 그 중에 끈질기게 기억이 확실한 영화 2개가 있다. 하나는 ‘흑사관의 공포’, 다른 것은 ‘알제리아 결사대’ 라는 것이다.

Internet과 Google의 등장으로 찾기가 불가능 하거나 힘든 것들을 쉽게 찾게 되었지만, 이 두 편의 영화는 나의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문제는, 오래 전에 본 그 영화들의 제목이 한글로 되어있고 그 나마 일본 제목을 그대로 따른 것들, 어떻게 그런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까? 영화가 아닌 책의 경우가 그렇다. 중학교 시절 보았던 ’15소년 표류기’라는 것, 일본식 제목인 것 영어로 된 원래의 책을 찾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 결국은 찾아 냈지만 그것은 거의 흥신소나 탐정의 일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번에 55년 만에 찾게 된 ‘흑사관의 공포’는 재수가 좋았다. 우연히 찾게 된 것이다. Youtube에서 오래 전 영화 특히 50~60년대 공포영화를 찾는데, ‘black’이란 단어가 나온 것이다. 흑사관 의 흑 자가 black일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았고 그것을 download해서 보니.. 와~~ BINGO! 그 영화의 몇 ‘무시무시한 장면들’ 이 그곳에 고스란히 있었다. 이 영화는 1958~9년 경 영국영화로 밝혀졌으니까 내가 본 것은 아마도 1960년대 초 쯤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외국영화는 거의 미국 Hollywood 산이지만 가끔 이렇게 유럽 영화도 있었다. 당시에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역시 미국 냄새가 아니고 유럽, 특히 영국의 색갈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이 영화를 확실히 언제, 어느 극장에서 보았는지 애석하게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1960년 전후에 나온 영화니까 분명히 중앙중학교 시절에 보았을 것인데.. 그 당시는 주로 우미관에서 외화를 보았으니까.. 그곳에서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이 ‘공포영화’를 중학생신분으로 보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 ‘공포영화’는 거의 다  ‘학생입장환영’이었으니까..  학생입장불가는 99%가 모두 요새 말하는 ‘성인영화’였다.

나의 기억에 남는 세 장면: (1) 여자가 쌍안경을 볼 때 lens에서 못이 나와 눈을 찌르는 ‘끔찍한’ 장면, (2) 사람을 죽인 후에 액체로 가득 찬 통 속에 넣은 후에 해골로 되어 꺼내는 모습, (3) monster로 변한 범인 (주인공 범인의 조수) 이 amusement park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은 장면.. 그것을 56년 만에 찾아서 다시 본 것이다. 이 영화는 비록 이렇게 끔찍한 것들이 나오지만 일반적인 배경은 ‘깨끗한’ 느낌을 주는 영국의 London 이어서 징그럽거나 불쾌한 그런 인상은 받지 않았다. 그 이후로 Dracula같은 ‘더 무서운’ 영화 때문에 이 영화는 기억에서 거의 사라져 갔지만, 그 이후로 가끔 생각이 나곤 했는데 이번에 기적과 같이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쌍안경에서 튀어나온 굵은 못에 찔린 여자, 끔찍한 느낌이 지금까지 기억 속에..

비명소리가 끝나자 마자 곧바로 쌍안경으로부터 튀어 나온 굵직한 못, 피가 떨어지는 끔찍한 closeup

영화를 본 이후 나를 꿈에서도 괴롭혔던 장면은 이것, 멀쩡했던사람이 몇 분만에 해골로 변한 모습이었다

영화의 climax는 범인의 조수가 monster로 변해서 범인을 고발하며 뛰어 내려 칼로 그를 죽이는 것, amusement park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와 비슷한 case로 ‘알제리아 결사대 決死隊’라는 ‘외국’ 영화가 있었다. 솔직히 외국영화기는 했지만 Hollywood 인지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군소업자’들이 만든 것인지는 전혀 모른다. 그저 ‘외국인’들이 출연을 했다는 정도다. 아깝게도 이 영화는 ‘아직도’ 찾지를 못했다.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못 찾을 가능성도 있다. 이 영화는 확실히 국민학교, 우미관 시절 때 본 것인데 영화제목도 확실히 알제리아 결사대였고, 이 영화를 본 이후로 이 ‘결사대’들의 모습을 흉내 내며 ‘전쟁놀이’를 미친 듯이 하기도 했다.

알제리아 결사대와 비슷한 영화

오래 전에 미국에 왔을 때 혹시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며 TV를 밤 늦게까지 보기도 하며 희망을 했지만 비슷한 것은 찾았지만 내가 본 그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비슷한 것은: Gary Cooper가 나오는 Beau Geste란 영화, 알제리아에 파견된 프랑스 외인부대들 이야기인데..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 홀로 서있는 수비방어 성城 에서 거의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우지만 단 한 명의 군인이 탈출하는 내용.. 내가 본 ‘알제리아 결사대’와 배경이 비슷하지만 암만 기억을 해도 그것은 아니었다. 이 나이까지 못 찾을 것을 보면 다시 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게 느껴진다.

내 나이 또래 중에서 나와 같이 추억의 영화를 다시 찾는 ‘동지’들이 있다면.. 혹시 알제리아 결사대 라는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면.. 나아가 그 영화의 진짜 원어 제목을 알았다면..  희망에 나에게 알려 줄 수 있다면.. 아~ 내가 또 꿈을 꾸고 있구나… 아~ 그 옛날이여!

 

 

another day in the life

인생의 황혼기에 아주 길지 않을 것 같은 이 시간들은 초록빛이 하늘을 덮었던 지나간 시절들에 비해서 일초 일초가 너무나 귀중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이 귀중한 시간을 귀중하게 아끼고 있는 것일까? 어제, 오늘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으로 일초 일초의 의미를 되 찾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무슨 깊은 함정에 빠졌다는 기분은 떨칠 수가 없다. 이것도 그저 며칠이 지나면 또 a day in the life가 될 것이지만 그래도 아깝기만 한 일초일초.. 시간은 거침없이 지나간다.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기복과 인간관계에 의한 놀라움, 잘잘못을 떠나서 전혀 예측할 수도 없고 방지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함정 중의 함정, 예방책이 그렇게 효과적이 아님으로 사후 대책에 안간힘을 쓰지만, 이것은 최소한의 냉각기 같은 시간이 필요함을, 오랜 인생의 경험에서 체득한 바다. 그저 .. let it be, let it pass, let’s wait and see.. 같은 값싼 말만 되 뇌일 뿐이다. 청명하고 빠삭.. 한 깊은 가을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지나가라.. 지나가라..

Sudden death, black day, blow-up day 같은 간단한 단어들이 나의 journal 에 적힐 뿐 다른 활동은 거의 없는 이런 며칠을 어떻게 보낼까.. 이런 지혜는 성경의 어느 구절에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inspirational books같은 것은 없는 것인가? 결국 며칠 동안 실감하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은 비록 사회적 동물일 수 밖에 없지만 때에 따라서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홀로 존재’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결국은 인간은 혼자인 것이다. 그래도 여기에 위로는 있다. 절대로 혼자인 인간은  놀라운 transcendent nature 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오감과 경험에 의한 것들에서 초월한 것들, 감성적이 아닌 이성적인 믿음을 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결국은 나는 ‘며칠 동안’ 이곳으로 몸과 마음을 의탁하며 Robert Spitzer의 글1을 다시 묵상해 본다.

 

The dark side of life can sometimes be quite daunting, but the love of Christ, prayer, the Church Community, the Holy Spirit, the Holy Eucharist, and the Word of God can bring light into the darkness. This gives rise to a great mystery that most people of faith will well recognize – that challenge oftentimes turns into opportunity, suffering into new viewpoints and ways of life, dejection into strengthened hope, fear into trust in God, weakness into spiritual strength, temptation into strengthened virtue, and confrontation with evil into the triumph of love.

 

  1. Robert Spitzer, S.J., Ph.D. 2016.  God So Loved The World.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p. 340

이제 며칠 남았나..

지난 일이 주일간 나는 조심스러운 곡예를 시작하기 시작하였다. 오랜 동안, 거의 반년 이상 완전히 피해오고 있던 New York Times website를 조금씩 흘끔흘끔 훔쳐 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지난해가 저물던 그때였나.. 완전히 major news outlet, TV network news를 피하기 시작한 때가. 이유는 물론 간단하다. 양아치, 또라이 Trump의 쌍통 보는 것을 피하기 위한 나의 유치하고 웃기는 결단이었다.

 

세찬 바람 부는 새벽

깜깜한 이른 새벽 녘, 5시가 조금 넘었을까…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버렸다. 바람 부는 소리가 분명했다. 잠재적으로 바람에 날라갈 만한 것이 집 주변에 없을까, 아니면 혹시 ‘거대한’ 나무 같은 것이 쓰러지지는 않을까..  이런 바람소리로 나는 반드시 the end of the world, the bad moon rising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도 있다. 세상의 종말,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인가? another eschatological fantasy..

 

Indian Summer, X-10 total victory

¶  Indian Summer 3 days:  거의 2주 이상이나 ‘기가 막히게 멋진’ 가을 맛을 보여주더니 역시 올 것이 왔다. 10월 중순 경 꼭 찾아오는 Indian Summer, 올해는 3일 정도나 머물려나.. 진짜 여름과 완연히 다른 맛의 이 ‘여름’은 건조한 것이 특징이다. 낮에 암만 더워 봤자 그늘은 시원하고 저녁이 되면서 ‘무섭게’ 기온이 깊은 가을로 변한다.

이런 때의 낮잠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맛난 것이다. 어제 오늘 오랜만에 backyard에서 ‘육체적인 일’을 한 후 잠깐 즐긴 낮잠은 두고두고 기억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암만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여정이지만 이런 ‘자연의 조화’ 도움으로 ‘여기에 물이 있다’ 라는 말을 되새기며 십자가 길의  다음 고개를 넘는 것이다. 아~ 은총의 계절이여!

re-engineering X-10 home light control systems, finally succeeded..

 

¶  Unexpected, total victory: 오랜 만에 깨끗하게 이룩한 승리의 성취감을 만끽하는 아침이 되었다. 남들이 들으면 그렇게 ‘쪼잔한 것 가지고 유세를 떨지 마라’ 하고 핀잔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쪼잔한’ 것도 며칠 동안 나를 기쁘게 할 수도 있는 ‘위대한’ 것이다.

우리 ‘피곤한’ 집의 home lighting 을 거의 20년 이상 보이지 않게 뒤에서 automatic control을 해 주던 system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즈음 ‘벼락부자가 된 젖 먹이같은 젊은 engineer’ 들이 겁도 없이 자기 집을 smartphone으로 control한다며 home thermostat를 $300 이상 받아 먹고 있는데.. 참으로 세상이 Trump같은 개로 변하고 있는가..

그것에 비하면 나의 favorite는 역시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lowly X-10 technology인 것이다. 아마도 이것처럼 값싸게 light control하는 것은 아직도 없을 듯 하다. 문제는 old tech의 보편적인 문제..  shelf life, lifespan 의 끝인가 support 가 거의 사라지고 replacement part가 사기가 힘들고.. 고민 끝에 내가 손수 support를 하기로 하고 googling에 매달리니 이곳 저곳에 내 신세와 비슷한 old timer들이 수두룩 닥상.. 결과적으로 우리 집의 X-10 light control system은 거의 무기한 수명이 연장이 된 듯하다..  이런 것이 unexpected, total victory가 아니고 무엇인가?

 

추억들, 잊고 싶은..

돌이킬 수 없이 그런대로 깊어가는 가을, 비록 쓸쓸하게 주룩주룩 내리는 낭만성 비는 없어도 마르고 마른 낙엽이 바람에 휘날리는 멋진 모습이 하루하루 다르게 자주 눈에 뜨인다.  요새 들어 멋진 꿈을 꾸는 횟수가 거의 제로에 가깝게 되고, 아련하고 결사적으로 잊고 싶지 않은 보물 같은 추억들도 머리에서 맴돌지 않는, 조금은 올해 이곳 날씨처럼 마른 생각 속에 사는 나, 그런 것이 조금 불만으로 쌓여간다.

추억들, 물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분명히 잊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잊고 싶다고 깨끗이 잊어질까? 6년 전쯤 이 blog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 추억들을 이곳에 남기려는 소박한 동기로 시작을 하였다. 누가 보건 안 보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 자신이 글로 옮겨서 어딘가 남기려는.. 그것이 전부였다. 제일 기억하고 싶은 것부터 하나 둘씩 글로 옮기는 것, 처음에는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고 그것이 나에게 주는 만족감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시간적으로 노력이 꽤 들어가는 나의 blog의 존재는 충분한 노력의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은.. 하나 둘씩 이곳에, 1973년에 정지된 ‘고교생 수준의 한글 솜씨’로 남게 되었다. 물론 아주 일 부분에 불과하지만.. 하지만 잊고 싶은 추억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것도 남겨야 하는 것일까?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잊고 싶은 추억들이 사실 조심스럽게 기억해보니 적지 않았다. 나이별로 연대별로 따져보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일기 형식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비밀에 가까운 것도 꽤 있는데.. 이제는 사실 그런 것들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 그렇게 부끄럽거나 우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 인데 어쩌란 말인가? 나의 하느님은 나의 개인적인 비밀을 100% 알고 있다고 이제는 믿기에 잊고 싶은 추억들도 조금씩 남겨 보려는 생각에 잠긴다.

 

3rd sick day, 올해의 연총은..

¶  Sick day, 3rd.. 우리는 정말 오랜 만에 편히 쉬는 기분을 느낀다. 역시 쉬는 것은 아플 때 더 그 진가 眞價 를 느끼는 것인가? 적당히 몸이 아픈 것은 마라톤 같은 기나긴 인생여정에서 필요한 윤활유역할이 되기도 한다. 며칠 째 ‘기침, 몸살감기’로 고생하는 연숙 ‘덕분’에 정말 오랜 만에 모든 ‘정상적 일정’을 쉰다. 그야말로 ‘뜻밖의 휴가’같이 되었다.

매일 아침의 rule이었던 9시 미사가 우리의 하루에서 빠지는 것 때문에 더욱 멀리 떠나온 여행 같은 느낌을 주는지도 모른다. 2012년 부활절 때부터 시작된 이것, 벌써 4년 반이 된 아침의 ritual, 우리 DNA 의 일부가 된, 하루(그리고 인생)를 건전하게 사는 활력소 (빵과 피)가 되었기에 이것이 빠진 하루는 조금 허전하기도 하다.

아침 9시 미사에서 매일 보게 되는 regular Irish, Hispanic ‘아줌마’들,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거의 예외 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던 우리가 안 보이니.. 아마도 ‘드문 여행’ 아니면 누가 아플 것이라고 속으로 기도까지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도 누가 안 보이면 그랬으니까..

이번 주일날에는 일년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 간부교육‘이 있는 날이라 순교자 성당엘 가야 하는 날인데, 만약 그때까지 이 감기, 몸살이 깨끗이 낫지 않으면.. 조금은 골치가 아프게 될 것 같은데, 최악의 경우 빠질 수도 있겠지만 ‘공식적인 일정, 의무’가 있는 연숙은 큰 문제일 것이다. 예비신자 교리반도 그렇고, 레지오 간부교육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있는 중병이나 terminal illness로 고생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위로를 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럴 때에 비로소 ‘아픈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절감, 실감하게 되는 좋은 때가 되기도 하니까 시간 낭비만은 아닐 듯하다.

 

¶  2016년 레지오 연차 총 친목회(줄여서 ‘연총‘)가 이제 한달 반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참 세월이 어찌도 이렇게 빠른가.. 작년, 재작년 때 연총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벌써 또 한 해가 간단 말인가? 레지오 조직에는 참 좋은, 의미 있는 ‘단체 행사’가 있고, 대부분은 군대의 훈련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이 연총은 쉽게 말해서 한 해를 보내며 ‘즐겁게 노는’ 쪽이다.

6년 전 레지오를 시작하면서 이 행사는 나에게 제일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기억에 남는 것이 되고 있다. 매년 12월 8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의무 대 축일이고, 그날을 전후로 연총이 열리게 되어있지만, 사실은 세속적인 분위기에 곁들여 ‘성탄’의 분위기가 조금씩 느껴지는 시점으로 이 행사는 조금 들뜬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꾸리아 소속 모든 쁘레시디움의 행동단원, 협조단원들이 참가하는 올해의 연총, 12월 4일 일요일 오후에 성당 친교실을 떠들썩하게 할 것이다. 이때에는 ‘드물게’ 모든 레지오 단원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이 준비한 talent show를 즐기게 된다. 기억에 남는 ‘제일 신명 나던 때’는 역시 4년 전, 2013년 연총이 아니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가 나의 ‘레지오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뭔가 잘 모르며 ‘레지오의 매력’을 한껏 느끼던 그런 때.. 돼지띠 동갑 전요셉 형제와 한껏 의기투합이 되던 때, 새로 배운 ‘엽전냄새가 흠뻑 밴’ 둔탁한 저음의 난타 큰북 리듬..  ‘희귀동물’ 남자 단원들과 함께 악을 쓰며 부르던 ‘통기타 노래들’.. 참, 그때가 그립다.

그 이후부터는 사실 나로써는 조금은 김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왜 그런지 사실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경험에 젖어가는 정상적인 것’이 아닐까.. 그 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았지만 작년에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고통, guess what?’으로 부득이 talent show에서는 빠지게 되었지만 조금 만 참고 참가를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무리무리 무리였다.. 그 때 해야 했던 것은 ‘탈춤’이었으니.. 몸 전체를 요란하게 움직이는 것, 절대로 무리였다.

올해는 어떨까? 항상 희귀한 남자단원, 사치스럽게 더 찾기 어려운  동갑내기 형제님, 모두 사라지고 다시 지극히 정상적인 ‘꽃밭 속’으로 들어가야 하나..  올해에는 어떤 talent를 보여주나.. 하는 것, 쉽지 않은 것인데.. 올해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다. 레지오 옆 ‘동네’, ‘은총의 모후‘ 자매님들과 guitar lesson을 하였던 관계로 그 자매님 그룹과 다시 뭉치기로 한 것이다. Guitar를 같이 칠 수 있다는 공통점을 잘 써서 chorus를 하기로 하고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Someone is praying for you‘, 와 ‘개똥 벌레‘라는 두 곡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듯하다. 합창과 율동이 곁들여진 이것, 이제는 연습을 시작만 하면 되고.. 시간만 지나면.. 이 모든 것도 다 지나가리라..

 

Spitzers’ Quartet

 

God and Science” by Fr. Robert J. Spitzer, S.J.

 

한번에 3권의 책FINDING TRUE HAPPINESS, THE SOUL’S UPWARD YEARNING, FIVE PILLARS OF THE SPIRITUAL LIFE 그것도 동일한 저자의 책을 order한 것, 오랜 만이 아니라 처음이 아닐까? 예전에 이렇게 여러 권의 책을 샀으면 아마도 꽤 $$이 들었을 것이다. 그 때는 거의 모두 technical한  책들이라 최소한 한 권에 $30~$40 이상은 되었을 것이니까.. 하지만 요사이 나의 관심을 끄는 science & religion분야의  책 들은, 하느님이 도우사 그렇게 내가 못 살 정도로 비싼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책들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것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기에 조금은 mixed feeling일 수도 있겠지만.. 상관이 전혀 없다. 내가 필요한 내용들이고 나의 호기심에 대한 해답을 충분히 줄 수 있는 것이니까 일반 독자에게 인기가 있건 없건 ‘전혀’ 상관이 없다.

The Spitzer’s Quartet

 

우연히 알게 된  가톨릭 예수회사제인 하와이 태생, Father Robert Spitzer, 이 신부님의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이것이 내가 오랫동안 알고 싶던 것에 대한 답이다!’ 라는 감탄과 흥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나에게 의문이 되었던 것이지만 ‘물어도, 찾아도 해답을 찾기 쉽지 않았던’ 그런 것, 분야들, 그것들도 이 신부님의 주관심사였기에, 이것이야말로 ‘아다리’가 딱 맞은 기분이다. 이분은 materialistic science, scientism 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론정연 하게, 이성적으로, ‘수리분석, 과학적으로’, 영성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에 접근을 하는데.. 바로 나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은 착각을 받을 정도다. 이런 분의 책이 30년 전에 이세상에 나왔으면 나의 인생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영성적인 것은 물론이고 ‘학술적, 지성적, 과학적’인 이 신부님의 apologetics는 가히 ‘호교론’의 초 현대판 교과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회는 전통적으로 progressive, scientific한 분위기지만 이런 ‘초현대적인 접근’은 요새같이 smartphone이 과학기술의 전부로 착각하는 ‘덜 성숙한’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아마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holy bible의 ‘글자글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개신교적 creationism의 ‘분명한 오류’를 수정하는 Francis Collins의 BioLogos 개념과 더불어 이러한 ‘깨우친 신진 영성, 과학자’들이 최근 20~30년 간 활발하게 전개하는 new apologetics는 정말 가려운 곳을 알맞게 긁어주는 효자손 같은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