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전에 Duluth Korea Town의 어떤 supermarket에 갔을 때 그곳에서 ‘요란하게 진열된’ 한국계 신문들을 보게 되었다. 나는 거의 이 신문들을 볼 기회가 없이 살았기에 아직도 이런 것들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새까만 옛날에 미국에서 ‘고향 신문’을 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모두 여행자들이 직접 들고 온 것들을 두고두고 본 기억도 있다. 뉴스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글로 된 신문이기에 신기해서 보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그것도 급팽창한 아틀란타 지역에서는 고국의 굵직한 대 신문들이 모두 ‘지사’형태로 생겨서 고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지역성을 살려 현지 광고들과 지역뉴스들이 가미되는 차이는 있다. 참 세상이 많이 변했다.
가끔 보게 되는 이 신문들.. 솔직히 고국사정에 어두운 탓인지.. 과장된 표현으로.. ‘하나도 읽을 것이 없다’는 한숨만 나온다. 모조리 광고에다가.. 고국 뉴스는 나에게 relevant한 것은 거의 없고, 현지 지역 뉴스는 original한 것은 거의 없고 그저 출처도 불분명한 곳에서 ‘기계적’으로 번역을 한 것들이고, opinion, editorial이란 것도 거의 마찬가지 수준으로 보인다. 그저 제일 practical한 것은 ‘광고’ 들 뿐인가.
그 광고 중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SupHerb 란 상표의 ‘치약 toothpaste’ 였다. 언뜻 보기에 ‘사기성 과대광고’의 모습을 띄어서 지나쳤지만 이번에는 조금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 치약의 용도가 ‘약용’이란 것이고, 증상들이 내가 가끔 겪는 것들이었다. 나는 traumatic 한 ‘치과’ 경험들이 있어서 그곳에 가는 것은 최후의 방법으로 여기기에 이 광고가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통상적인 chemical toothpaste가 아니고 natural한 toothgel이란 것인데, 바로 약초 herb와 aloe란 진통제가 가미된 것이라 만약 이런 성분이 진짜 광고대로 라면 속는 셈치고 try해 볼만 한 것이었다. $13의 가격이 일생일대 썼던 치약 중에 제일 비싼 것이긴 하지만, 일반 치약과 어찌 비교를 하랴.
자꾸 약해져 가는 잇몸에는 외과적인 방법보다 자연적인, 부드러운 방법이 필요하다는데 공감이 간다. 광고를 보면 사용한 사람들의 testimonial들이 있는데 한결같이 잇몸이 건강해 졌다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찌 다 믿으랴. 하지만 10%만 믿어도 한번 써 볼만 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나답지 않게 $13 거금을 주고 이것을 사서 현재 쓰고 있는데, 아직은 큰 변화는 없지만 잇몸 신경이 조금은 둔화되는 느낌도 들기도 한다. 이것을 전부 다 쓰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 모르지만 다 쓰게 되면 무언가를 알게 될 듯 하다.
¶ Rainy Night in Georgia: California의 기록적인 가뭄을 생각하면 이곳 지역 특히 Georgia는 정말 lucky하다고 할까.. ‘진짜’ 여름이 한 달이나 남은 5월 말에 이곳은 거의 매일 ‘장마’ 같은 비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내린다. 중년이 넘으며 비를 ‘기본적으로’ 좋아하게 된 나는 물론 대환영이다. 기온까지 시원해서 밤에 창문을 열고 잘 때 들리는 빗소리는 흡사 Brook Benton의 1970 hit oldie, Rainy Night in Georgia를 연상케 하는 짜릿하고, 아련한 감정까지 일게 한다. 이 oldie는 옛날부터 들을 때마다 ‘밤에 내리는 비에 젖은 한과 서글픔’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어머니, 성모님의 5월, 촉촉한 비에 젖어 다음날의 싱그러움을 예고하며 서서히 사라진다.
이곳도 사실은 얼마 전까지 가뭄으로 식수제한 까지는 아니어도 잔디나 garden등에 물을 주는 것을 격일제로 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이후로 갑자기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가뭄을 사라지게 하는 충분한 비가 내려 주었다. 주로 겨울과 봄에 많이 내렸고 특히 봄비는 꽃가루 pollen를 적당히 control해 주어서 앨러지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해 주었다. 지금 이곳의 weather system은 사실 Texas 지역 에서 오는 것인데, 그곳은 완전히 홍수가 되어 많은 피해를 보고 있지만, 이곳은 이런 ‘기분 좋고, 혜택이 많은’ 늦봄 비를 누가 마다하랴..
Our ‘master’, Tobey cookie
¶ 어제는 Tobey의 annual ‘medical’ checkup 으로 5 mile 떨어진 animal medical clinic 에 일년 만에 다녀왔다. 일년에 한번씩 맞는 vaccine shot (rabbi 같은) 은 의무적이지만 그것과 더불어 다른 문제가 있는지 general checkup을 받는다. 우리가 가는 곳은.. Tobey가 태어나고 몇 달 후부터 그러니까 2005년부터 다녔던 East Cobb Animal Medical Center인데 그러니까 10년째 다니고 있는 곳이다. 그곳의 Dr. Heard는 구수한 인상의 중년이 넘은 ‘전통적인 수의사’ 모습으로 참 pet 들을 잘 다룬다. 특히 Tobey는 이 수의사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모두들 웃는다. 그러니까 Tobey는 주로 여자보다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결론이다. 한번 visit에서 대강 $250 정도 charge를 예상하지만 가끔 예외가 발생하기도 했다. 올해가 그런 예외로.. 무려 2배 이상을 예상하게 되었다.
대부분 Tobey는 건강하다고 진단을 받았는데, 피부의 이상과 귀의 이상.. 모두 bacterial skin & ear infection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귀 속에 염증과 피부의 가려움, 염증.. 어쩐지 근래에 지독히도 scratch를 하더라니.. 나는 그저 flea때문일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현미경으로 귀의 액체 fluid sample을 보니.. bacteria가 우글우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귀를 청소, 소독하고 항생제를 맞고.. 그러니까 vaccine shot은 하나도 못하고 급한 이것부터 치료해야 하게 된 것이다. 일주일 후에 recheck을 할 때 annual vaccine shot을 맞게 되었다.
이런 저런 것을 보며 생각한다. 주위 pet을 가진 사람들에서 정들었던 식구 같은 pet들이 ‘늙거나 병들어’ 죽을 때의 모습들이다. Pet들을 거의 사람 식구들처럼 간호를 하고 슬퍼한다. 옛날에 내가 그런 사람들을 비웃었던 것 기억을 한다. 지금은 물론 그런 내가 부끄럽게 느껴진다. 말 못하는 이런 pet들의 고통을 누가 알랴? 같이 오래 살았던 pet.. 사실 식구나 다를 것 하나도 없다, 아니 어떨 때는 사람보다 더 민감하고 자상하다. 10살을 넘은 우리 Tobey도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 하는데 (누가 먼저 갈지는 모르지만..) 생각만 해도 코가 찡~ 해진다.
¶ Irish Disaster 어떻게 이런 일이.. 그 동안 나를 괴롭히던 우려가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이런 종류의 ‘믿기지 않는 현실화’는 근래에 꽤 있었다. 그저 이럴 때 내가 고작 되뇌는 말은 What are they thinking? 정도다. 서유럽에서 가장 ‘종교적, 보수적’인 초록색 ‘초원’의 나라, Lady of Knock성모님의 나라, 레지오 마리애 의 본고장 Ireland.. 어떻게 그들은 ‘국민투표’까지 해가며 남자끼리, 여자끼리 를 결혼 시킬 만용이 생겼을까? 그것이 fair하고 common sense인가? 그들은 St. Patrick을 완전히 잊었는가? 이제는 right is wrong, wrong is right의 세상이 되었는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악인가.. 어떻게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여자와 여자가 결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식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2명(이상)의 아버지나 2명(이상)의 엄마를 둔 자식들은 어떻게 세상을 볼 것인가? 이것은 종교적인 것을 완전히 초월한 ‘인간 자연 본능’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임을 그 많은 사람들이 잊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탄식하기 전에 나는 그저 놀라운 세상을 사는 내 신세를 탓한다.
¶ 몇 달 만에 마리에타 two 구역 모임에 갔다. long Holiday weekend라서 마음의 여유도 조금 생겼고, 몇 달 동안 완전히 이 ‘동네’ 모임을 잊고 살아서 조금은 가고 싶은 마음도 생긴 것이다. 더군다나 나의 ‘유일한’ 레지오 협조단원 K형제 댁에서 모이는 것이기에, 가는 마음이 조금은 더 가벼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 동안 레지오 ‘협조단원 돌봄’에서 최선을 다 못하고 있어서, 항상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나를 ‘두말없이’ 참석하게 하였다.
그 동안 자주 못 보았던 반가운 형제, 자매님들, 특히 평소 가족과 떨어진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P 형제를 다시 이곳에서 보게 되어서 아주 반가웠고, 이번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고 Holy Family C.C. 평일미사에서 요사이 자주 보는 K Francesco 형제도 반갑게 다시 만났다. 하지만 나중에 일찍 구역모임을 떠날 때의 나의 심정은 ‘역시’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왜 ‘또’ 내가 이곳엘 왔었는가.. 심지어, 그곳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도 들 정도였는데..
거의 40년 동안 ‘전혀’ 못 들어보았던 ‘심하고 원색적 vulgar, obscene 욕설과 위협적인 언사’를 바로 코 앞에서 목격을 한 후에 나는 밥맛이 완전히 떨어져서 식사도 거의 안 하고, 독한 술 몇 잔 들이키고 ‘what were they (2 guys) thinking?‘ 만 되뇌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것은 분명히 verbal violence 였고 옆에 있던 우리들은 collateral victim이 된 것이다 . 대부분 자매님들과 아이들이 있었던 그 자리에서 우리들은 맛있는 음식을 접시에 덜고 있었다가 그런 일을 어처구니 없게 목격을 한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처음에는 관련 당사자 2명의 ‘싸움’이 100% practical joke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얼굴을 보니 그것이 전혀 아니었고, 그것은 완전한 threatening curse 였고,.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욕 자체라기 보다는 ‘증오에 가득 찬 언동 hateful demeanor’ 이었다. 이것이 과연 ‘사랑, 평화’의 천주교우 모임인가.. 그 동안 이 구역모임의 ‘인구의 증가’에 의한 ‘질의 변화나 진화 (or 퇴화)’를 예상 못한 것은 아니나 이것은 완전한 disaster 였다. 바로 옆 구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이야기를 전에 듣고 나는 사실 믿지를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믿어진다.
코 앞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솔직히 ‘육체적인 위협’까지 느껴질 정도여서 앞으로 장기간 이런 광경은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식사 전, 매일 복음 ‘성령과 평화’를 이야기 한 후에 생긴 이런 믿기지 않는 happening은 ‘아마도’ 이 sprawling group 의 ‘쉽지만은 않은’ 앞 날을 예고하는 신호가 아닐까? 아마도 이 group 은 현재 critical mass 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고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은 왜 본당 공동체에 구역모임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a ‘written’ mission statement would help)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지만.. 우선은 foreseeable future 까지 그저 잊고 살고 싶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 2015년 Memorialweekend가 성큼 우리에게 다가왔다. 올해의 5월 마지막 월요일이 다른 해에 비해서 가장 이른 월요일이어서 휴일이 끝나고도 일주일이 지나야 6월이 된다. 이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지는 않지만 그대로 5월이 계속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5월 말에 있는 나의 어머님 기일과 더불어 올해는 더 의미를 갖는다고 할까. 성조기가 더 돋보이는 시기이고, 태고 적 고국의 ‘현충일’ (아직도 6월 6일일까?) 과도 겹치는 복합적인 감상에 젖는다. 한 나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유일한 목숨을 바친 영혼들의 국적을 따지는 것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도 그런 ‘궁극적인 애국’을 못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 5월 초부터 시작된 약간 열대성 습한 더위가 완전히 물러가고 초가을을 연상케 하는 ‘기가 막히게, gorgeous’ 한 날씨를 맞는 휴일을 맞는 주말, 우리의 daily routine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다만 teacher들의 특권인 긴 여름방학을 맞는 새로니가 친구와 Destin, Florida로 2박 3일 여행을 가며 우리 집에 자기의 강아지 Ozzie 덩치가 큰 1살짜리, 를 맡기고 가서 조금 색다른 신경을 쓰는 일이 생겼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철저히 계획적인 새로니는 이미 전에 예행연습을 한 바가 있어서 사실 우리 집에 3마리, (2 dogs & 1 cat)의 pet이 며칠 사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듯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귀찮은 일이다. 같은 town에 사는 한 식구들은 이럴 때 조금은 편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다.
¶ 우리들이 봉성체, home Eucharistic communion service를 하는 환자 H 자매님이 지난 화요일 ‘비상 뇌수술’을 받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많은 병으로 고생을 하는 이 자매님.. 갑자기 반신 마비까지 왔는데, 아마도 항암치료제의 부작용으로 뇌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비상 진단으로 수술을 받아서 속으로 꽤나 우려가 되었고 ‘집중 화살 기도’를 며칠 동안 바치기도 했다. 그런 ‘탓’인가.. 결과가 의외였다. 신체에 마비가 온 이유가 뇌의 문제는 맞는데.. 의외로 뇌 내부가 아니고 외부였기에.. 수술이 아주 위험한 것도 아니고 비교적 간단히 끝냈다고 하는 희소식이었다. 이럴 때 우리는 다시 ‘기도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환자가 그것을 믿기에 가능한 것이다. 퇴원 한 후 그 동안 마비가 온 신체를 재활치료 하러 Rehab center에 입원을 하고 재활 치료를 시작했는데, 방문을 해 보니 H 자매, 아주 얼굴도 밝고, 기분도 좋은 듯 했다. 특히 남편을 위시한 가족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간호를 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가족 사랑의 힘을 느끼기도 했다. 원래의 병들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참고 견디면 낳거나 호전 되지 않을까 희망을 버릴 수 없다.
¶ Series Binge! 오랜만에 TV (broadcast)를 보았다. 그 동안 가끔 보는 network morning, nightly news (주로 NBC)나 PBS Knowledge channel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떠났던 이곳에서 50년 전에 즐겨 보았던 TV series (situation drama)를 Channel 69-2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모두 1960년대 미국의 TV program들, 우리들은 물론 한국어로 dubbing된 것을 서울에서 보던 것들이다. 1960년대 서울에서 당시 미국의 TV program을 보려면 위와 같이 dubbing 된 것 (분명히 일본 업자들을 통해서 수입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서울 미군 TV 였던 AFKN을 통해서 ‘원어’로 듣고 보아야 했다. 요새 내가 여기서 다시 보는 것은 Rod Serling의 The Twilight Zone과 David Janssen주역의 The Fugitive (도망자)인데.. 이 program들의 제목이 재미있다. Series Binge! 그러니까 당시의 연속 드라마를 ‘하루 종일’ nonstop으로 방영하는 것이다. The Fugitive는 도망자 (일본 아이들의 번역제목)로 당시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었고, The Twilight Zone은 당시에 한국 TV에서는 보여주지 않고 AFKN에서만 방영을 했다. 그러니까.. 영어 듣는 것에 문제가 있으면 이것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반세기 만에 다시 보는 이런 것들을 보면 반갑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시대는 이제 ‘완전히’ 가는구나 하는 조금은 슬픈 감정이 일기도 한다.
¶ 희망천사 도우미, 나는 솔직히 이런 말을 처음 들어 보았다. 희망천사가 무엇인가? 지난 주인가.. 다른 레지오 C 단장님으로부터 희망천사 도우미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 레지오에서 나까지 3명이 돕기로 하고 나갔다. 배경 설명을 간단히 들었지만 굳어진 머리로 처음에는 잘 이해를 못했다. 가서 자세히 들어보니.. 우리 순교자 성당의 장애우 N 자매가 여름camp에 가는데 특수 camp라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그것을 옆에서 돕는 것이 골자였다. 이런 사회봉사 program은 뉴스 같은 데서 보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접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N자매를 고용하고 있는 A supermarket의 특별한 배려로 hotdog sale을 해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인데.. 참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cash’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고 sales를 통한 스스로의 도움..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 비록 덜 한가한 금요일 오전 시간이었지만 몇 명의 열심한 ‘예쁜’ 자매님들의 ‘미인계’로 오전 목표액은 달성했으리라 추측을 하며 shift를 인계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별로 한 것은 없었어도, 그런 광경을 코앞에서 보는 것으로 흐뭇하고 시원한 holiday weekend 시작을 맞게 되었다.
Korea: rogue & fake..어쩌다 나를 낳아준 조국이 국제 양아치, 깡패 아니면 겉치레, 허구, 허상, 성형의 나라로 불리게 되었나? ‘양코배기’ 식민주의를 원숭이처럼 닮으려던 ‘원숭이 쪽발이’ 천황 군국주의 일본과 그 보다 더 무서운 소비에트 스탈린의 빨갱이 공산주의의 ‘완전한’ 희생물이 되었던 불쌍한 ‘대한 제국’, 두 동강이 나고 70년 후.. 한쪽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거지, 양아치, 고아, 깡패’ rogue nation 국가로 전락하고.. 다른 쪽은: ‘남들에게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가치요, 진리’라는 희한한 종교, 철학을 신봉하는 나라 fake nation 으로 전락.. 도대체 내가 고향을 떠난 수십 년 후 무슨 일들이 그곳에선 있었던 것일까?
나의 이런 판단은 물론 극단적 중의 극단에 속한다. 하지만 이 극단도 사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40년 넘게 떠나온 조국을 나는 ‘너무나 잊고 싶어서’ 사실 잘 알지 못한다. 박정희 유신 체제가 들어설 때부터 나에게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이 사라지고 그저 ‘밖에서, 멀리서’ 바라보는 정도의 방관자적인 의견만 명맥을 유지하였다. 망향이나 향수적인 것에만 치중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것, 사실적인 것.. 나에게는 멀게만 보이고 느껴지던 것들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각종 역경을 이기고 어렵사리 ‘민주주의’란 것의 뿌리를 내린 것과 경제적으로 부유해 진 것은 누가 보아도 대견하다. 문제는 그것에 비해서 너무나 다른 것들이 희생을 한 것이 아닌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풍조, 못 사는 사람을 무시하는 풍조,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풍조, 소리만 크게 내면 이긴다는 풍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들 중의 대표적인 것, 언제나 없어질까.. 꿈에서나 없어질 것이다.
우연히 미국 예수회America magazine website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를 30초간 볼 기회가 있다면..’ 이라는 주제의 Youtube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이런 street interview를 한 것인가 의아 했지만 곧 의문이 풀렸다. 올해 9월 미국을 방문하는 교황에 대한 것이었다.
America Media asks:
“If you had 30 seconds with Pope Francis, what would you say?”
May 13 2015 – 10:19am
가톨릭 신자로서 교황의 위치와 의미는 잘 알려진 것이지만, 교황도 ‘겸손한’ 인간이기에 각 재위 교황마다 한결같이 다른 굴곡1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내가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교황들은 주로 John Paul II (요한 바오로 2세) 로 부터 시작이 되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오랜 냉담 시절에는 교황의 위치를 하찮게 보기도 했었는데 나는 그 이후 그런 나의 ‘바보 같은’ 경솔함을 정말 후회하고 있다.
2년 전인가.. 당시 교황 Pope Benedict XI (베네딕트 16세) 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며 퇴임하고 급작스레 선출 된 분이 현 교황 Francis (프란치스코)인데 최초로 남미출신(Argentina)인데다가 교황청과는 outsider 에 속해서 어떻게 재위를 할지 미지수였다. 전임 교황들,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분의 뒤를 이으며 그분들이 닦아 놓은 업적을 유지, 계승, 향상 시키려면 그분의 어깨는 정말 무거웠으리라. 그 후의 경과, 결과는 어떤가?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를 능가하는 인기와 명성을 구가하게 된 것이다. 전임 같은 ‘두뇌’ 보다는 ‘인정, 솔직’함으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의심 많은 초현대의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비 신자들을 매료한다. 그러한 인기를 잘 활용해서 드디어 세계 정치에도 서서히 관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누가 뭐래도 변화 무쌍한 인류 가치관에 그는 변함없는 진리, 그리스도 가치관을 너무나 부드럽게 포용시킨다.
용감하게 유럽을 no longer fertile and vibrant, weary and becoming irrelevant 라고 가차없이 질타하고, 의혹 많기로 유명한 바티칸의 ‘재정비밀’을 투명하게 만드는 노력을 하는가 하면, 가톨릭 교리를 ‘요지부동’의 인상 보다는 ‘자비’를 강조하는 묘기도 보인다. 예수님의 기본 철학, ‘부자보다는 가난함을 사랑하는’ 실천적으로 가르치기도 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 소위 말하는 populism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 ‘부자 사제’는 척결하고 본인은 ‘소형차, 시민 아파트’를 택했다. 이런 배경으로 그의 agenda를 밀어 부치는 교황, 어떨까.. 퇴임 시에는 아마도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기를 능가하지 않을까?
이런 배경으로, 작년에 아틀란타 대주교에도 불똥이 튀겨, ‘공짜로 받은’ 주교관 mansion을 반납해야 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일반 신도들이 대담하게 교황의 모범을 무기로 항의를 했던 것이다. 어떨까.. 이런 와중에 한국출신 교포사목 동남부 사제단인가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김대건 성당도 포함) 하는 곳에서는 작년에 멕시코의 칸쿤 Cancun 에서 사제단 회의를 하였다. 그것도 자랑스럽게 말씀하던 신부님.. 속으로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하필 세속사회의 상징인 멕시코 관광도시 칸쿤에서 비싸게 모여야 했을까? 누군가 설명을 해 주면 어떨까? 그들의 최고 통수권자 교황님의 행적을 그들은 전혀 몰랐던가, 무시했던가?
이 교황을 보려면 제일 직접적인 방법인 바티칸을 가야하고 그곳에서도 사실 가까이 보는 것은 운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중에 이번 9월에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혹시.. 우리도 그곳에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실험’을 하게 되었다. 크게 무리는 아닐 듯.. World Meeting of Families convention을 계기로 Philadelphia 대회에 참석하고, Washington DC, White House, Congress, New York을 방문 하다고 하니 교황을 비교적 가까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내가 교황과 30초간 함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이런 질문이 이제 100% 공상이 아닌 것이다.
C. S. Lewis.. Clive Staples Lewis or Jack Lewis.. 불과 1년 전만 해도 내 관심의 radar ‘위’에는 없었던 이름이었지만 사실은 ‘radar의 밑’ 에서 전부터 분명히 있었던 이름이다. 2005년에 나온 children’s fantasy movie였고 우리들이 ‘아이들’ 에게 ‘억지로 끌려가서’ 보았던 big screen blockbuster move.. 바로 The Chronicle of Narnia1, 의 첫 편,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가 C. S. Lewis의 1950년대 초 작품이었던 것.. 이 영화를 볼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이 C. S. Lewis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었다. 그저.. ‘영국계통’의 ‘영감, 꼰대2 같이 생긴 영문학 교수, 문필, 소설가’ 정도로만 알고 지나갔었다. 이 영화를 같이 볼 당시, 큰 딸 새로니의 설명에 의하면 학교 elementary school 다닐 당시 이 책은 ‘필독’의 대상이었다고 했는데 나의 귀에 남았던 것은 ‘아마도 이 책의 발상은 기독교 성경이 아닐까’ 하는 뜻밖의 말이었다. 그 예로 lion king이었던 Aslan이 예수의 전형 model이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전부였다, 최소한 그 당시에는..
그 후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우습게도 나도 ‘꼰대’가 된 이 시점에서, 이 ‘꼰대, 영감’에게 완전히 매료가 된 상태가 되었다. 그런 이유 중에 제일 돋보이는 것이 바로 그의 1950년대의 classic , Mere Christianity라고 할 수 있다. 그는 Oxford 대학의 대표적 영문학교수였지만 그의 관심은 이것을 뛰어넘어 (Christian) apologetics 에 후대에 더 그의 명성을 날리게 하는 영향력 있는 글을 남겼다. 쉽게 말하면… 좀 ‘배운 사람’에게 종교 (주로 그리스도교)를 알리는데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 타의 주종을 불허하는 설득력을 가진 그 자신이 지식인 중의 지식인인 그런 사람이랄까.. 다른 말로.. 대부분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안 믿어지면 ‘무조건 믿어라’ 라는 식의 전교를 큰 효과가 없으니까, 그들의 수준에 맞게 ‘논리,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그것이 그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의 apologetics에 남긴 빛나는 유산인 것이다.
C. S. Lewis가 1949년부터 1954년 까지 발표한 children’s fantasy series: 41가지 언어로 전 세계적으로 1억을 넘는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저자의 가장 인기 있던 작품 ↩
어제는 모처럼 우리 4식구가 함께 일주일 늦은 Mother’s Day를 조금은 특별한 곳에서 보냈다. 이제는 머리들이 다 커 질대로 커진 두 딸, 생각보다 바쁜 생활 일정에 정신 없이 ‘삶’을 사는 그 애들.. 어릴 때 퇴근 후에 집에 오면 그 애들을 침대 위에서 번쩍 들어서 ‘flying!’을 외치며 내 던지던 때가 조금 과장해서 엊그제 같은데.. 어릴 때부터 holiday나 Mother, Father day를 귀찮을 정도로 챙기던 애들.. 이제는 그런 good ole days 순진하고 포근했던 시절은 다 간 모양이다. 그런 애들.. 너무나 바빠서 올해는 제대로 제 날짜에 Mother’s Day 를 못 챙기고 지냈지만 그래도 일주일 연기해서 모인 것이다.
몇 년 전부터는 집에 모여서 특별한 음식을 자기들끼리 준비, 요리해서 먹곤 feast 했는데, 올해는 먹는 것만은 재미가 없다고 해서 나라니의 idea로 Atlanta Botanical Garden: the Garden 을 구경하고 Garden근처에 있는 새로니 midtown condo에 가서 음식을 준비해서 먹게 되었다. 2009년 경에 우리는 그곳 the Garden 에 갈 기회가 있어서 사실 그곳은 생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 때는 저녁때 잠깐 본 정도라 기억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에는 낮에 제대로 보게 되었고 시간이 충분해서 아주 찬찬히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볼 것은 많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것 중에는: Canopy Walk, Earth Goddess statue, Fuqua Conservatory & Orchid Center, 그리고 특별 전시 중인 Bruce Munro의 cool light show 가 있다. Canopy Walk, 이것은 Garden forest의 skywalk 라고나 할까.. 숲 위의 고가 보행로인데 이곳을 걸으며 Garden 숲 전체를 ‘하늘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 Canopy Walk는 몇 년 전 공사 중에 대형사고(structure collapsing)가 나서 수 명이 사망했던 뉴스로 본 기억이 있었다. 그만큼 이것은 Garden전체에서 중요한 attraction이 되었는데, 사실 느낌은 전체 거리가 짧다는 것이고 ‘고가 도로’라고 하지만 그렇게 ‘고가’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 그것에 비해서 structure 자체는 아주 정교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비록 일주일 늦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바쁜 와중에 이렇게 저희들끼리 경제적으로 기억에 남는 날을 만들어 준 것 우리는 감사하게 느꼈고, 이런 날들이 앞으로 얼마나 우리들에게 남았을까를 생각하니 한시 한시가 귀중하고 기억과 추억에 남기고 싶은 순간들임을 절감하게 되기도 한 멋진 날이 되었다.
5월의 절반이 지나가며, 나를 낳아준 조국,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조’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게 하는 오일육 군사혁명 기념일, 5.16 도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 나는 다시 예수님의 어머니 Jesus’ Mother, ‘하느님의 어머니 Mother of God‘,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Immaculate Mary를 생각하는 날들을 맞는다. 5월 달 전체가 사실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달이고 그 중에서도 성모의 밤은 그 절정에 해당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나의 ‘한국어’ 본당 도라빌 소재 순교자 성당에서 2015년 성모의 밤이 ‘신선하고, 뜻 깊게’ 열렸고, 우리도 참가를 하여 ‘humanity’s 어머니 마리아’를 기렸다.
이 행사에 내가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레지오 입단 다음 해인 2012년 부터 였으니까.. 4년 째 가 되어가나..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서 약간의 거부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나는 이 행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가톨릭에서의 위치를 알려면 가톨릭 ‘마리아 4대 교의’를 상기하기도 하지만 그런 ‘무거운’ 것이 이날에 그렇게 중요할까.. ‘어머니의 자애’.. 하나만 생각하며 모든 생각이 필요가 없지 않을까?
올해 ‘성모의 밤’ 행사 자체도 예년과 ‘아주’ 다르게 ‘정중함’이 풍기는 완전한 절차 임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제까지 내가 겪었던 것들은 모두 레지오 마리애 주최의 ‘약식’ 행사였었다. 하지만, 올해는 새로 부임한 ‘신입 보좌신부’ (정말 ‘어리게 보이는’) 와 전례부가 합작을 해서 ‘정식’으로 승격을 시켰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도 되었다. 왜 갑자기 ‘약식 전통’을 바꾸었을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주임신부의 이임과 상관이 있었을지 않았을까..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임 신부님의 ‘마리아 신심’은 우리들의 기대에 ‘항상’ 못 미치기에 새로 부임한 ‘이 요한’ 주임신부의 그것은 어떨까 궁금하기만 하다.
무언가 쓰고 싶고, 남기고 싶은 조금은 우울한 듯한 마음을 달래려 pen을 다시 잡는다. 잔잔한 강박감에 밀려 쓰는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쓰고 나면 조금은 기분이 솟는 듯 하다. 오일육, 5월 16일, 2015년.. 박정희의 얼굴이 보이고 당시의 서울 장안 냄새와 모습이 느껴지고 보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나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의 정체성, identity는 과연 무엇인가? 이경우란 인간은 어디에 소속이 된 생명체일까? 왜 나는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일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 듯 한 심정은 왜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를 당혹하게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지독히도 우울하게 한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 중에는 ‘서울, 대한민국, 우리 누나네 식구들, 나의 죽마고우’들과 다시 맞대면 하는 것이다. 성모님이 나를 진흙탕 골에서 이끌어 주시는 모습을 나는 자주 그려왔다. 나의 손목을 잡으시고 구덩이 속에서 이끄시는 성모님의 옷이 진흙탕에 묻어서 더러워졌음도 나는 그린다. 조금은 서광이 비치는 듯한 나의 머리 위에는 다른 ‘고통’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바위인 것이다. 진흙탕 구렁텅이가 아니고 거대한 높은 바위.. 언젠가는 그곳을 넘어야 한다는 압력.. 거의 일생의 전부를 피하며 살아왔던 그곳..이 바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인 것이다. 모순중의 모순.. 그렇게 몽매 그리워하는 곳을 나는 피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고향이 ‘아주’ 없어졌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를 정말 우울하게 한다. 통근하듯 고국 행 비행기를 자주 타는 주위의 인간들.. 모두 부럽다 못해 밉기까지 한 사람들이다. 꿈속에서 가끔 보는 ‘상상의 나라’ 나의 없어진 고향을 나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위치’를 과연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나의 ‘정체성’을 정리해야 하는가? 나의 어머니를 어찌 다시 뵐 것인가? 멀어지기만 한 누나의 가족들은.. 나를 완전히 잊었을 듯한 친구들은.. 그들이 ‘잘 사는’ 모습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나를 기다리는 다음의 monster일까? 성모님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그 ‘거대한 바위’를 넘게 하실 것인가? 성모님이시여.. 저를 위해 빌어주소서..
“And behold, I am with you always, until the end of the age.” (Matthew28:20)
“(보라, 세상이 끝 날까지)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20) 위와 같은 올해의 thematic verse를 배경으로, 아틀란타 대교구 주관 2015년 미국 동남부 성체대회 Eucharistic Congress 가 6월 초(6월 5일, 6일)로 다가왔다. 나에게 일년이란 세월이 67마일의 속도로 느껴짐은 작년 성체대회의 기억을 더듬으면 알 수 있다. ‘엊그제’ 같은 느낌이니까..
올해 성체대회의 theme은 ‘I will be with you always‘.. 마태오 Matthew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until the end of age.. ‘세상이 끝날 때가지’ 가 생략된 비교적 귀에 익은 표현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나에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예수님이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의지’.. 이 말씀이야 말로 ‘복음 중의 복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로 어느덧 20주년을 맞게 되어서 누가 보아도 이제 이 연례 대회는 완전히 자리를 굳건히 잡은 듯 하다. 아틀란타가 1996년 올림픽을 주최하며 호경기와 급성장을 예상하던 때, 당시의 선견지명을 가진 Francis Donohue 대주교님의 용단으로 조촐하게 시작 되었지만, 급팽창하는 대교구를 함께 모이게 하고 ‘성소 난’에 봉착한 교회에 돌파구를 제시하는 뚜렷한 목적을 유지하며 건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때 재정난 (eg. subprime mortgage crisis, housing bubble)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대교구 여론의 도움이었던가, 난관을 극복하고 예전의 열기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으로 건강한 장래를 내다 보게 되었다.
우리가 이곳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지만, 이것도 우리에게는 ‘금자탑’에 속한다. 예상 밖으로 우리에게 이 행사는 큰 은총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의 3만 명이 ‘운집’하는 이곳엘 가면 ‘천주교’가 절대로 ‘소수 종교, 방어적 종교’라는 의심을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다. 성체 신심이라는 말조차 생소하게 들리던 나에게 이런 대회는 ‘모조리 배울 것 투성이’ 인 기회라서 ‘절대로 참가하자’라는 결심을 하였기에 ‘죽을 정도로 아프지’ 않은 한 이 날을 달력에서 비워 두고 산다.
작년까지는 ‘두말 없이’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에 ‘묻어서’ 참가하는 것이 ‘규칙’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예외’로 바꾸어서.. 단체 행동에서 벗어나 우리들 만의 ‘개인 참가’ 하기로 하였다. 교통편 때문에 가급적 성당 car-pooling이나 bus를 타면 좋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아침에 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올 때가 문제임을 작년에 bus가 ‘예고도 없이’ 끊어진 바람에 당황한 기억으로 Never Again! 을 되 뇌이며 ‘우리 차’로 자유롭게 가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 교우들이 성체대회의 절정인 closing vigil mass를 기다리지 않고 ‘점심을 먹은 후’ 일찌감치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올해부터는 우리에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올해의 congress program을 언뜻 들여다 보니.. 작년과 같은 Hollywood celebrity 급 keynote speaker는 보이질 않는다. 생각하면 이것이 ‘정상’일 듯 하다. 성체대회가 무슨 show나 entertainment는 아니니까.. 하지만.. Not so fast! 다른 의미의 celebrity급 speaker의 모습과 이름이 보였다. 바로.. Father Robert ‘Bob’ Barron! 우아~~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Hollywood star급 보다 brainy하고, 현재 미국 가톨릭 계의 ‘급상승’하는 56세 신부님, 바로 Father Barron이 오는 것이다.
월남 신자들은 규모가 커서 자기들 만의 모임이 있지만 우리들은 어차피 English Track에 속한다. 그러니까.. 언어에 상관없이 ‘영어권’의 인물들에 익숙해야 하는데.. 얼마나 많은 한국어 신자들이 이 keynote speaker들을 알고 있을까? 결국은 부지런히 ‘예습’을 하는 수 밖에 없다. 다른 speaker 중에는 Teresa Tomeo, Kerri Caviesel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Father Barron처럼 익숙한 이름은 아닐 듯 하다. 그래서 올해는 집중적으로 Father Robert Barron에게 관심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Robert ‘Bob’ Barron, 1959 년 시카고 출생 (56세), 시카고 대교구 신부님, Mundelein 신학교 총장, author, scholar and Catholic evangelist.. 나이에 비해서 화려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가톨릭 신학대가 Thomas Aquinas 토마스 아퀴나스 에 매료되었고 결국 1986년에 신부 서품을 받았다.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Washington DC)에서 Master 학위를 받았고, 1992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Institut Catholique de Paris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외국어로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얼마 전에 암으로 서거한 시카고 프란시스 조지 추기경은 그를 one of the Church’s best messengers라고 했듯이 그는 초현대 디지탈 미디어를 이용한 많은 저서, video, website, blog, newsletter, podcasts등을 발행하고 있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인기 있는 강연, 강의를 하고 세속적인 media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가톨릭 교리, 핵심을 전파하고 있다. 그 중에서 2011년에 출시된 10 편 documentary series: The Catholicism Project 는 미국을 위시한 16 개국 대중적 TV를 통해서 방영이 되었다. 그의 TV program은 1950년대의 Fulton Sheen 대주교 이후에 처음으로 ‘상업적 TV’에서 방영이 된 case가 된다고 한다.
이런 그의 resume를 떠나서, 나는 이 ‘젊고 handsome’하고 머리 좋은 신부님을 언제쯤 알았던가? 아마도 위에 언급된 TV program, Catholicism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program을 본 적이 없다.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DVD를 사기에는 비싼 것들이기도 했고, 그 것이 나올 당시만 해도 나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Keynote Speaker: Father Robert Barron
그러다가 그의 website: Word On Fire 를 정기적으로 subscribe하면서 그를 거의 정기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크리스마스나 사순절 쯤이면 그의 newsletter를 받아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그의 style은 조금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Postscript: May 30, 2015
Never Mind! 오늘 성체대회 website를 우연히 보니.. 이것이 웬일인가? Keynote Speakers 명단에서 Father Robert Barron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완전한 disaster.. 하도 실망을 해서 이곳엘 갈까 말까 생각을 할 정도다. 하기는.. 올해의 여러 가지 느낌이.. 20년 주년 기념적인 이 성체대회에 김이 빠진 듯 한 그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실망.. 실망..
¶ 뜨겁고, 피곤한 big cleanup: 이틀 간 집안 대 청소를 하며 먼지를 꽤나 많이 먹었다. 아마도 몇 년 동안 쌓였던 먼지일 것이다. 또한 무겁기만 한 stuff들을 옮기며 생긴 심한 근육통과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감이, 느닷없이 갑자기 찾아온 early heat-wave와 겹쳐서 나를 더 쳐지게 만든다. Mother’s Day 아침, 며칠 째, 거의 90도에 가까운 ‘고열’로 모든 것들이 따끈하게 달구어 진 느낌이고 이번의 더위는 5월 특유의 dry heat가 아니고 조금은 습한 더위라서 밤에도 더웠다. 처음에는 창문을 그냥 열어놓고 견딜까 했지만 그것이 아니다. 낮에 너무나 근육을 쓰는 일을 했던지 나의 몸이 빨리 식지를 않는 것이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일찍 a/c(air conditioner)를 가동했는지.. 우리의 ‘고물, clunker’ 수명을 넘긴 듯한 a/c, 올해도 수고를 많이 해 주어야 하는데.. 과연 올해를 넘길지 궁금하다. 이것은 capital spending에 가까운 ‘거액’을 요구할 터인데.. 이래 저래 ‘피곤하다…’
¶ 어버이날과 어머니날:어머니 날.. 나는 어떤 어머니를 생각해야 하나… 나의 어머니, 우리 집 아이들의 어머니, 주변에서 돌아가신 어머니.. 살아계신 어머니.. 오늘 어머니 날 주일 미사에서 ‘이태리 유학’ 하 신부님, 몇 년째 미국사목에도 불구하고 heavy accent로 ‘머더스 데이’를 말하신다. 한국식 ‘어버이’날에 익숙하신지 아버지까지 함께 언급을 하시지만 이곳에는 따로 아버지 날이 있는지 알고 계신지 궁금하다. 비록 부모님을 함께 기리는 ‘어버이 날’의 의도는 좋았을지는 몰라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유한 차이를 무시한 것 같은 ‘어버이 날’ 은 아직까지 생각해도 별로 좋은 idea가 아닌 듯 싶다. 항상 머리 속에 있는 것 같은 우리 어머님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니, 불현듯 다시 보고 싶다. 비록 하늘나라엘 가면 볼 수는 있을 터이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옆에서 보고 싶은 것이다. 어머님을 제대로 떠나 보내지 못한 후회와 슬픔은 분명히 나의 남은 여생에서 십자가일진대 어떻게 그런 사치스런 바램을 논할 수 있을까. 그저 그저 사랑합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저를 용서하세요.. 라는 넋두리만 내 입가에서 맴돈다.
우리시절의 ‘어머님 은혜‘, 1950년대 동요
¶ P 베로니카 아드님들: 오늘 여름 같은 Mother’s Day에 지난 주에 돌아가시고 장례미사를 치른 P 베로니카 자매.. 그 자매님의 두 ‘미혼’ 아들이 ‘감사와 인사’를 하러 난생 처음 순교자 성당에서 미사에 우리와 같이 ‘참여’를 하였다. 분명히 우리 옆에서 미사에 동참을 했지만, 어리둥절하고 확실히 무슨 뜻의 미사인지는 잘 몰랐을 것이다. 그래도 열심히 주위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심지어는 무릎을 꿇는 등 최선을 보여 주었다. 아마도 아무도 그들이 성당에 처음 나온 사람들인 것을 몰랐을 것이다. 작년 이즈음에는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며칠 전에는 어머니까지 떠나 보낸 후, 처음 어머니 날을 맞는 그들 두 형제를 보니 가슴이 메이지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사가 끝나고 나서 마침 우리가 속한 마리에타 2구역이 마련한 ‘맛 있는’ 미역국 점심을 하며 생소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대로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는 등 coming out같은 느낌의 시간을 보냈는데, 우리의 바램은 큰 형이 언젠가 우리 가톨릭 공동체에 합류해서 신앙의 눈을 뜨는 것인데,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레지오의 정신, 성모님의 도움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을 것이다.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계시는 예수님… 이 그림은 기묘한 인연으로 알게 된 배 HC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의 작품이다. 몇 년도에 그린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5년 전 이후의 것일 듯 하다. 이 갈릴래아 호수의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온 것은 지난 성탄절 무렵이었다. 배 형제님이 보내주신 성탄 카드에 이 그림이 있었다. 몇 개월 후에는 이 그림이 picture frame용으로 큰 것이 보내져 와서 우리 집 family room 가운데 걸려 있다. 갈릴래아 예수님이 우리 가정을 보살펴 주시기 시간한 것이다.
기묘한 인연.. 정말 기묘한 인연으로 알게 되고 만나게 된 형제님, 나보다 몇 살 위이신 인생선배님이지만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탓일까.. 어떨 때는 친구처럼 느껴지는 형제님. 이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은 우리와 또 다른 ‘묘한’ 인연을 맺고 병상에서 가톨릭에 귀의하고 곧바로 성모님의 품에 안기신 돼지띠 동갑 베로니카 자매님의 친정오빠가 되신다.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하느님을 거부하던 베로니카 자매님의 오빠로써 꺼져가는 동생의 생명을 보며 무엇을 제일 먼저 생각했을까? 병을 낫게 하고 싶지만 인간의 한계를 아셨는지 곧바로 다음의 세상을 생각하고 ‘불도저’같은 우직함과 사랑으로 동생을, 본인이 믿는 하느님께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우격다짐’이 결실을 보아서 우리와 연결이 되었고 그 동생 자매님을 ‘안전하게’ 하늘나라로 보낸 것이다.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은 서울 홍익대 출신 미술 전공이셨는데, 대학 졸업 후에는 ‘상업미술’을 계속하셨다고 했다. 그런 분이 또 다른 묘한 인연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성화’를 그리신다고.. 이 갈릴래아 예수님은 5년 전쯤 사고로 실명의 위기까지 갔던 후에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명은 면했지만 시력이 평상의 몇 %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런 장애와 싸우며 이 그림을 그렸다. 왜 갈릴래아의 예수님일까.. 대답은: ‘새로 시작하는 인생’ 이라고..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보내셨던 것을 생각한 듯.. 새 인생으로 일생일대의 ‘성화’를 계획하고 현재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지난 해 11월부터 시작된 이런 ‘묘한’ 인연으로 우리는 이렇게 의미 심장한 ‘성화’를 얻게 되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을 갈릴래아 ‘고향’에서 새로 시작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2000년 굳건하게 지속되는 하느님의 교회.. 바로 그 것일 것이다. 배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가볍지만, 몇 개월 동안 쳐졌던 나와 연숙의 어깨가 조금은 올라간 날이 되었다. 안도의 큰 숨을 쉴 수도 있었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보람과 은총을 느끼는 하루도 되었다. 몇 개월 동안 우리와 인연을 맺으며 삶을 위한 고통스런 투쟁을 하였던 P 베로니카 자매님, 오늘 조촐한 가족들과 적지 않은 레지오 단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완전히 떠났다. 이번 일을 통해서 ‘달릴 곳은 끝까지 달려야 한다.’라는 레지오 교본의 구절을 굳게 상기하고, 성모님을 의지한 레지오의 막강한 힘을 절실히 느끼는 기회도 되었다.
연도와 장례 미사.. 공식적이고 전통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정성된 신부님의 자상한 미사집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P 베로니카 자매님은 물론이고 두 아들, 동생 자매님, 가까운 친척들도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생각을 한다. 장지 동행에 각별한 신경을 쓰셨던 Lee’s Funeral Home 이 사장님.. 이번에 처음 가까이 대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참으로 자상한 분이셨다. 성당 연령회 분들도 정성을 다 해서 준비해 주셨고, 특히 눈이 시려오는 것은 생소하기만 한 ‘신 영세자’ 베로니카 자매님을 위해서 각별한 사랑으로 참석해 준 자랑스런 우리 본당 레지오 단원님들.. 어느 것 하나 ‘사랑’을 느끼게 하는 하루였다
자매님, 비록 고달픈 인생여정을 보냈어도, 가는 길은 너무나 희망적이고 자상한 여정이 될 것이라 우리들 모두 생각한다. 내가 제일 감동을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100% 확신 여부를 떠나서 ‘나는 하느님을 알고 간다’ 라는 천상의 선물을,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주고 갔다는 사실이다. 특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헌신적으로 어머니를 간호했던 큰 아들에게 주고 간 선물도 그것이 아닐까.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와도 같이 느껴지는 ‘묘한 인연’을 음미하며 우선 안도의 큰 숨을 내려 쉴 수 있게 되었고, 남은 유족, 특히 큰 아드님이 하루 빨리 안정이 되고 어머니의 간 길을 거울 삼아 ‘평화’를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하기를 기도하기로 했다.
André Rieu – Nearer, My God, to Thee (live in Amsterdam)
지나가는 2주 동안 2명의 ‘자매님’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 한 자매님은 지난 주 일요일에 2시간 drive해서 간, 어떤 funeral home의 chapel에서 ‘개신교’의식으로 치러진 예배에 그 자매님의 ‘고이 잠든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25년 전 이곳으로 이사했을 당시부터 연숙이 알고 지내던 K 자매님.. 나와는 직접 상관이 없다곤 해도 간접적으로 그녀의 삶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연숙보다 몇 살 밑인 나이에 어떻게 벌써 귀천 歸天을 했을까? 우리가 알기에 지난 몇 년 동안 앓아온 당뇨병과 신장 kidney의 기능악화로 투석 dialysis 을 받았지만 근래에는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투석을 받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고 결국은 신장 이식을 해야만 살 수 있는데 그녀는 그 투석조차 못 받았던 모양이었다. 나의 어머님도 이런 처지였지만 신장이식을 하기에 너무나 고령이어서 결국은 운명을 하셔서 이런 처지를 뼈저리게 나는 실감한다. 하지만 이 K 자매님은 충분히 나아질 여지가 있었을 텐데.. 장례예배에서 목사님의 말씀이 그녀는 아마도 투석을 제대로 못 받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번지르르한’ 목사의 조사에서 밝히지 못하는 사정을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관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형제, 자매가 그렇게 많은 그녀가 ‘시골’에 묻혀서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 남편과 살려고 노력을 했던 것을 알기에.. 아마도 주위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우려는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이럴 때 다시 생각한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문제가 없는 가족, 가정은 없겠지만 그래도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가족들이 아닐까?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다고 ‘사탕발림’같은 조사 弔詞 eulogy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우습게 들렸고 2시간 집으로 오는 drive길이 너무나 우리에게는 무거운 시간이 되었다. K 자매님, 아마도 이제는 그런 모든 고통을 훨훨 벗고 저 세상에서 힘차게 비상하는 새, 유유히 춤추는 나비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또 다른 자매님, 돼지띠 동갑 P 자매님.. 지난해 11월에 우리와 ‘묘한’ 인연이 되어 알게 된 분. 어제아침, ‘격심한’ 고통에서 벗어나 근래에 새로 ‘사귄’ 성모님의 품에 안겼다. 병 간호에 지친 두 아들, 특히 큰 아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우리 부부는 이 자매님을 천주교로 인도하면서, ‘기적’까지는 안 바랐어도 그래도 평화를 충분히 맛 보시는 충분한 시간을 바랬는데.. 그것이 아무래도 부족한 시간이 되었다. 지난 5개월 우리는 이 분이 하느님을 알게 하려고 레지오의 조직을 통해서 지속적인 노력을 해 왔다. 비록 육체적인 죽음은 맞았어도 영혼은 건강하게 살아 가시리라 우리는 굳게 믿는다. 이 자매님도 알고 보면 참으로 ‘사연’이 많은 인생이 아니었을까.. 오래 전, 소설가 박경리 여사의 대하소설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의 복잡하고 운명적인 인생, 결국 운명은 바꿀 수가 없었던가? 나도 운명이란 것을 어느 정도 믿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결말이 더 나아지는 노력은 어땠을까? 더욱 더 슬픈 것은 작년 이맘때 남편이 거의 ‘같은 병’으로 운명하신 사실..남아 있는 두 아들에게 이런 가혹한 고통이 어디 또 있을까? 그래도, 세상 모든 것을 등지고 마음의 문을 걸어 닫았던 P 자매님, 3월에 하느님께 모든 것을 열고 병원에서 세례를 받았고,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형언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새로 알게 된 천주교 기도문을 열심히 읽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천천히 귀천을 하였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 이라는 위령기도문을 믿으며 우리는 이 자매님 먼저 가신 부모님들과 재회를 했으리라 굳게 믿는다.
창희야, 용현아.. 친구여, 잊었는가? 1970년, 45년 전 우리의 시대를.. 박창희 손용현 그리고 나 이경우 비록 흔히 말하는 삼총사까지는 아니었어도 원서동 죽마고우 세 악동이었지…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헤어진 우리들, 모두 개천이 고즈넉이 흐르던 비원 옆 담을 끼고 추우나 더우나 밤이 되도록 밖에서 뛰놀던 시절을 뒤로하고 의젓한 대학생으로 우리들 다시 만난 것이 1970년 이 시작되던 때였지. 비록 나와 박창희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서 이미 만나서 다시 ‘죽마고우’가 되었지만 너는 더 늦게 다시 만나게 된 것.. 거의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어.
그래도 그때부터 우리들은 헤어진 시절을 만회라도 하듯이 열심히 도 자주 만났었지. 비록 우리들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당시에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청춘’을 공부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던가? 그런 우리들 뒤에 두고두고 그 ‘놀았던’ 값을 치르기 했지만 크게 후회는 안 하고 싶구나. 특히 1970년 4월의 우리들만의 1주일간의 지리산 등반, 나는 아마도 ‘죽어도’ 못 있을 것 같다. Pop song에 열광하던 우리들, 멋진 다방을 찾아 어둠 속에서 진을 치고 백일몽을 꾸었던 시절, 찌들었던 연간 소득 수백 불 밖에 안 되던 그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 별로 걱정한 적이 없었지.. 항상 우리는 무언가 희망이 있었으니까..
Bee Gee’s 의 ‘명곡’ First of May를 애창하던 그 시절의 화창한 봄날들, 비록 대학 졸업을 앞둔 불안한 시절, 정권연장에 골몰하던 박정희 정권의 하늘아래 있었지만.. 그런 것들 우리에게 그렇게 보였던가? 산과 노래와 멋진 다방들만 있으면 족하던 그 시절을 반세기가 지나가도 똑같은 심정으로 생각한다. 우리들 모두 ‘해외로 해외로..’를 외치면 헤어졌고 결국은 ‘완전히’ 헤어졌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머리 속만은 절대로 헤어짐을 못 느끼며 산다. 특히 나는.. 최소한 일년이 하루 오늘만은 절대로 못 잊는다.
작년 5월 1일 이후, 너희들은 어떤 인생의 변화가 있었는지? 창희는 물론 ‘든든한’ 신앙을 더욱 더 성장시켰으리라 짐작이 되지만 용현이, 너는 정말 알 수가 없구나. 혹시나 어떤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는 최소한 나의 믿음이 아주 희망적이고, 날이 갈 수록 더욱 희망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지난 일년 동안 그것이 조금은 더 성숙해 졌다고 자부한다. 나의 세계관은 180도 변하고 있으니까.. 다른 쪽에서 세상을 보는 것, 정말 신기하기만 하구나.
너희들 자식들 모두, ‘정규 코스’를 거치며 살아가는지 궁금한데.. 나의 두 딸들은 그렇지 못해서 우리의 나이 든 인생은 조금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 같구나. 하지만, 이제는 별로 큰 걱정을 안 한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 부부, 가족 모두 ‘영, 육’ 모두 건강한 편이니까.. 그것이면 족하지 않니? 너희들도 모두 영육간 모두 건강한 나날을 보내기 바란다. 내년 5월 1일에 또 ‘보고’를 하면 좋겠구나. Adios Amigo!
배(해숙) 베로니카.. 자매님.. 지금 조금씩 영원의 세계로 가고 있는가? 작년 11월 이후 이 자매, 그 가족들과 우리는 묘한 인연으로 알게 되었고, 연숙의 지극정성으로 3월에는 세례를 받기도 했고,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열심히 했지만 역시 무리인가? 이 자매를 보면.. 참 인생의 역정은 모두 독특하게 다름을 느낀다. 작년에 남편이 거의 같은 병으로 가시고.. 어찌 운명의 장난인가 이 자매마저 이런 운명의 길을 걷고 계신가? 한때 독특한 고집을 가진 이 자매를 나는 오해할 정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어떤 분인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좋게 보아야 하지만 조금은 ‘이기적’인 듯한 ‘덜 겸손한’ 태도가 나를 실망케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일까? 하지만 내가 그 처지라면 조금은 조금은 더 ‘겸손’하도록 노력하리라는 자신을 추스른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나는 최악의 겸손으로 내려 앉는다. 내가 누구를 탓하거나 겸손을 운운할 수 있는가? 이 자매를 보며 나는 나의 엄마를 어떻게 보냈는가 절감을 하며 실망, 고통, 후회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얼마나 당신의 외아들, 편치 않은 누나를 걱정하며 눈을 감으셨을까.. 나는 사실 이런 상상의 근처도 가기 싫었고, 그런 광경을 애써 잊으려, 없는 것처럼 미화, 청소하며 살았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비열한 수법임을 내가 어찌 모르랴..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나 있었던가?
오늘, 내일 하며 선종기도를 바치고 있는 배 자매..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오빠 형철 형제가 어쩔 수 없이 동생의 곁을 떠났다. 그 운명하는 동생의 모습을 어찌 더 볼 것인가? 이해를 한다. 결국은 기진맥진한 두 아들, 특히 큰 아들 호구.. 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인가? 레지오의 조직을 우리는 한껏 이용해서 이 자매를 천주교로 이끌었지만 나의 역할은 아무래도 미미한 것인지도.. 물불 안 가리고 노력하는 연숙이를 어찌 당할 것인가? 하지만 그런 돌파력, 지구력, 조직력 등은 정말 가상하다. 누구도 못 따라갈 것이다.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처음으로 장례의 과정을 우리는 경험할 듯 하다. 비록 식구들이 있다고 하지만 성당과의 관계는 우리가 유일한 연결점이니까.. 어떤 역할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그저 최선을 다하자. 그것이 나의 현재 조금 긴장되지만 담담한 심정이다.
인호 형의 email을 받았다. 요새는 column style 글 보다는 현재 시사적인 글들, 그것도 ‘서로 돌려보는’ 류의 글들을 받아보는데,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나는 곤란한 심정이 들기도 한다. 새로 나온 정보, 뉴스로 보거나 ‘재미’로 보면 간단하게 흘려 보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받았던 글은 대한민국 전 대통령 김대중 씨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email들은 대부분 original 의 출처가 묘연하다. 받은 것을 계속 forwarding을 하면서 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런 것으로 보아서 우선 이런 글들은 ‘차가운’눈으로 읽어야 함을 오랜 전부터 나는 배웠다. 의식적으로 ‘의심’을 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를 바보처럼 느끼게 하는 email을 한국의 처형(wife’s brother)으로부터 받은 적이 있었다. 분명히 기억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출마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다. 물론 처형은 큰 생각 없이 나에게 forward한 것이었지만 그 글이 나중에 알고 보니 참 의심스러운 것이.. 대통령 선거 직전이라는 timing이었다. 그 글의 주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예전에 쓰여진 ‘소설, fiction’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재미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절묘하게 fiction과 nonfiction으로 접목을 시켜서 Internet으로 ‘뿌린’ 것이다.처음에 나는 그것이 100% 사실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대부분이 ‘소설’이었다. 그 글을 읽고 아마도 ‘영웅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인터넷의 함정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던 그것들..
이번의 글은 배경이 조금은 다르다. 아마도 지금은 대통령 선거 같은 것이 없을 것이고.. 김대중의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에 relevant한 것 같지도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기꾼’이라는 인상을 주게 하는 폭로성 글.. 그것도 김대중 씨를 가장 많이 interview했다는 당시의 도쿄 주재원, 영국출신의 언론인, Henry Scott Stokes의 글이고 보면, 잠재적인 효과는 크고 파괴적이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첫머리에 밝혔듯이, 그가 지은 ‘어떤’ 책의 일부를 발췌, 번역을 한 것이고 글의 요지는 한마디로, ‘내가 알았던 김대중은 알고 보니 정치적 사기꾼’ 이었고, 그에게 오랫동안 속아온 내가 너무나 한심하다’ 라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나도 내세우지 않고 있다.
답답한 마음으로 내가 모르는 사실을 찾기 위해서 wikipedia를 찾았지만 비교적 중립적인 그곳에서도 나는 김대중 씨에 관한 특별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문제가 되는 광주사태, 노벨상, 평양방문 등에서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어떤 것들이 ‘사기성’이 있다는 것일까?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정치 소식에서 관심을 접은 나로서 이럴 때.. 나는 참 곤란하다. 근래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끔 ‘김대중은 빨갱이’ 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런 것이 그렇게 심각하게 정확한 것일까?
최후의 수단으로 나는 ‘폭로자’인 Henry Scott Stokes란 인물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찾아 보게 되었다. 시작은 물론 liberal의 아성인 The New York Times의 특파원이라는 사실.. 무조건 그의 말을 믿어야만 할 정도이지만.. 자세히 그의 행적을 알아보면 정말 뜻밖의 사실들을 만나게 된다.
제일 먼저 돋보이는 것은: 당시 일본 ‘극단적 극우파’ 미시마 유키오.. 이와의 특별한 관계.. 이것 하나로 짐작이 간다. 극소수, 극단적, 극우파..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에 자기가 만든 ‘극본, 각본’에 의한 극우파 쿠데타를 시도, 공개할복자살을 한 인물이다. 과거의 일본천황체제로 다시 복귀하자는 것의 그의 의도였다. 2차대전의 과오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인물.. 그와 친하게 된 Henry Scott Stokes는 어떤 사상인가? 역시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한 술 더 떠서 ‘일본은 아시아의 희망이었다‘ 라고 주장, 2차 대전은 연합국이 만들어낸 일방적 역사였다고.. 이것이 만약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는 일찍이 ‘감방’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일본의 아시아 침공, 진주만 공격 등 모두 ‘방어전’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편다. 중국에서 벌어진 ‘남경 대학살’도 조작된 것이라고까지 한다.
이런 경력의 그가 한때 김대중을 ‘보호’하던 입장이었는데 왜 그렇게 방향을 바꾸었을까? 여기에 소개된 글을 보면 대강 짐작이 간다. 극우파, 국수주의적 (fascism)인 그가 ‘평화’를 사랑할 리가 없으니.. 노벨 평화상을 공격하고, 극좌적인 공산당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가 느끼기에 김대중의 남북협상이 그의 심기를 틀어놓았을 듯 하다. 그렇다고 그런 것과 상관없는 다른 모든 부분을 그렇게 도매금으로 공격할 수 있을까? 이것을 보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면, 나는 공산당, 김일성 왕조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사람이기에, 그의 반공적인 것은 수긍이 간다. 문제는 그의 일본적 극단적 극우, 수정적 역사관 인 것이다. 이런 그의 배경으로 나는 이 글의 거의 전부를 배척할 수 밖에 없었다.
최근 Henry Scott Stokes 인터뷰: 일본은 아시아의 희망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투사를 가장한
사리사욕에 눈 멀었던 김대중
전 뉴욕 타임즈 동경. 서울 주재 특파원
Henry Scott-Stokes 기자가 저술한 한 저서
(번역: 라디오 코리아 고문 양준용) 중에서.
카멜레온과 같았던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 한국 대통령은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해에 한국의 대통령 중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 남북간의 긴장 완화에 공적을 남겼다는 게 수상 이유였다.
그런데 오늘날 남북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든 노벨 평화상이란 상은 적당히 주고 받는 상인 모양이다.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 상을 받았었다. 대단한 인기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취임 8개월반만에 이 상을 수상했다. 독일 베를린에서의 연설에서 핵무기 근절을 호소했다는 게 수상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병마를 영구히 추방한다>고 큰 소리를 쳤어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2013년의 노벨 평화상은 화학무기 금지조약에 의해서 설립된 화학무기 금지기관인 OPCW가 수상했다.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직후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시리아의 독 가스 무기의 제거작업은 다만 시작만 했을 뿐 그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인가의 여부는 의심스러웠을 따름이다.
그 전 해에는 유럽 공동체가 수상했다. 그런데 유럽 공동체 역시 경제 파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취재를 위해 30회 이상 단독으로 만났다. 아마도 내가 인터뷰한 아시아의 요인들 중에서 가장 횟수가 많았던 것 같다. 김대중씨는 한국의 서남부 전라남도의 하의도 출신이다. 그는 매스컴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코미디언들처럼 장면 장면 마다 화장을 바꾸며, 상황에 따라 자신을 변신하는 카멜레온(Cameleon, 주위의 환경에 따라 몸의 색깔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새의 총칭)과 같은 변신의 달인이었다.
전 생애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연출한 것은 그가 한국의 현직 대통령으로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바로 이 북한 방문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민주화 운동의 투사를 가장한 김대중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아직 야당생활을 하던 70년대였다. 그는 미국과 일본에 체재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인권활동가로서도 활약해 주목을 받았다. 73년 8월 김대중씨는 동경의 구단시타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행방불명 되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한 것으로 뒤에 밝혀졌다. 일본의 한 항구를 출항한 화물선에서 그를 수장하려 했지만 바로 그 시각에 군용기가 상공에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 의도는 중지되었다. (역자 주:이 주장은 김대중씨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이 수장 계획은 사실 무근으로 판명되었다.)
그 뒤 그는 서울의 자택에서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76년에는 <민주구국선언>을 발표, 다시 체포되었다. 80년 2월 사면되었지만 5월에 재 구금 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광주사태가 발발했다. 군부가 민주화 요구의 데모를 진압했고 유혈의 참사로 진행되었다.
김대중씨는 미국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씨의 항의 주장은 과격했고 주목을 끌었다. 한국 국내에서 그만큼 강력한 항의를 주장한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인 김대중씨는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빈틈없이 연출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박정희 대통령이 돌연 암살되었다. 박 대통령은 61년부터 70년대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박대통령의 암살사건 후 권력은 곧바로 신 군부에 넘어갔고 군부가 모든 것을 장악했다. 당시의 군부는 김대중씨를 반군정의 중심 인물로 간주, 적대시하고 제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김대중씨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자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고 군에 의해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으로 자택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나는 김대중씨가 뉴욕 타임스 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언론 매체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
김대중씨의 자택 밖에는 언제나 보도진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의 특파원이 취재를 위해 방문한 것을 알면 곧장 집안으로 안내되었다. 그의 이 같은 특별한 배려가 미국으로 하여금 김대중 자신의 생명을 구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도록 한 것이었다. 미국의 민간 조직과 언론이 김대중의 보호세력으로 등장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 선두에 선 모습이었다.
나는 1980년 봄에 서울을 거점으로 해서 동경을 오가며 특파원의 업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씨가 가장 위험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에 직접 만나 취재활동을 한 나는 김대중씨를 한국의 민주화 활동의 중심인물로 치켜세웠고, 사설을 통해서도 김대중씨는 어떤 이유에서든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광주 사건을 사주한 장본인
그러나 김대중이란 인물은 가짜(fake) 인물이었다. 진짜 인물(real person)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기꾼(imposter)이었고 위선자(pretender) 였다. 언제나 술수를 노리는 연기자였다. 사람들의 속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뒤에서 조종하는데 몰두했다. 측은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의 연기에 놀아난 한 사람이었다. 수 많은 한국인들도 그에게 속아 넘어갔다. 김대중씨의 대단한 능력은 이 같은 그의 술수가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씨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행위는 민주주의의 대의를 그의 속임수의 소재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광주 사건이야 말로 김대중씨의 기만행위를 그대로 들어낸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김대중씨는 신 군부의 정점에 있던 전두환 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광주에서 소란 사태가 발생하자 김대중씨는 그 배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씨가 탐한 것은 권력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했다. 광주사태가 발생한 시기에 그가 가장 마음을 쏟은 것은 자신이었고 이 광주사태를 이용해서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광주 사건으로부터 20주년을 맞은 2000년에 광주봉기(kwangju Uprising)란 책이 뉴욕의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가 편집한 책인데 당시의 사건 취재에 임했던 10명의 유럽 및 미국의 기자와 10명의 한국인 기자가 집필했다. 이 책의 출간으로 사건 당시에 쓸 수 없었던 사실들이 햇볕을 볼 수 있었다. 공동집필자들은 모두 기꺼이 옛 일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광주봉기의 참 모습은 <김대중 폭동>이었다. 광주사건은 김대중씨 자신이 민주화의 기수라는 가면을 쓰고 폭동을 사주해서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폭동이었다. 우리 저널리스트들도 그의 연출에 영락 없이 속은 꼴이었다. 우리들은 꼭두각시(puppet)에 불과했다.
나의 처는 전업주부이지만 예리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에 그녀는 김대중씨가 깔아 놓은 연극에 놀아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광주봉기는 그 발단부터 김대중씨가 깔아놓은 연극이었다.
광주는 김대중씨의 근거지였고 이곳 주민들은 군사정권의 압정에 시달려 왔다. 김대중 때문에 압정에 시달린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이야 말로 그의 집권 전략에 꼭 들어 맞는 환경이었다. 광주 사태는 김대중씨가 의도해 온 그대로였다. 나는 <광주봉기>가 출판되었을 당시까지도 김대중씨의 역할이 그렇게 큰 것으로 상상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봉기가 폭발했을 당시에 투옥된 상태에 있었고 그 이후의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씨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 뒤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날드 레이건의 측근 관계자들이었다. 1980년 가을, 군을 장악한 전두환 한국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의 측근들 사이에 한 밀약이 맺어졌다. 레이건 신 대통령을 만나는 최초의 외국 원수로 전두환 대통령이 되도록 워싱턴 행 초대장을 받는 것과 수감중인 김대중을 처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교환키로 한 약속이 밀약의 내용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사형수 김대중을 처형하지 못하도록 노력한 것은 미국의 일반인들이 당시의 김대중씨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기수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의 광란사태가 김대중 파의 리더들에 의해 일어났고 광주가 점거 되었을 때에 서방측 미디어가 한결같이 김대중을 한국의 민주화를 추구한 착한 동아리 (good guys) 로 치켜 세웠었다. 물론 당시의 군부는 사악한 무리(bad guys) 로 그려졌다. 이 같은 <착한 동아리>와 <사악한 무리>의 단순한 이분법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아마 아직까지도 이 이분법이 여전히 살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는 김대중이 한국의 민주화를 꽃 피운 영웅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어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은 착한 동아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도 후회막급일 뿐이다. 광주에서 300명 이상이 학살 당했다. 시민 뿐만 아니라 군인도 살해되었다. 그 책임은 김대중이 오직 혼자 져야 할 일이었다.
광주사태를 일으킨 사람들, 김대중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얼마나 세속적인 지위와 돈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일족의 축재를 위해 돈줄 만드는데 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서방측 저널리스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숨겨왔던 것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과오를 부끄러워 할 뿐
그런데 그의 죄상은 개인 축재보다 훨씬 더 무거운 국가반역죄에 해당되는 매국행위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뚜렷하게 들어났다.
김대중씨는 뼈 속 깊은 곳까지 부패해 있었다. 한국의 서민들 사이에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본명은 김대중이 아니라 돈(금)을 너무 많이 사랑한다는 뜻의 금대호로 불리어야 한다는 죠크가 나돌기까지 했었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중국 문화권에 속해있는 나라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해서 역대의 중국과 조선의 권력자들은 횡령이나 착복에 깊숙이 빠져들어 있었다. 김대중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민주화의 기수라는 간판 외에 노벨 평화상이란 명예를 얻고자 그의 부하들을 동분서주케 했다. 그는 물욕과 명예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사리사욕의 화신 그 자체였다.
내가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한국은 아직 가난한 국가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재의 한국을 만든 기초를 구축했다. 박정희 장군은 일본 국내에서 훈련을 받고 만주 국의 군 장교가 되어 있었다. 그는 20년 만에 한국을 현대국가로 변신시키는데 성공했다. 만약 그가 이 때에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은 끊임없이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실제로 나도 암살 대상자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특파원의 입장에서 한국의 정계와 군 관계에 관한 공개되기를 꺼려한 많은 것들을 보도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나를 총이나 칼로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가장한 환경을 조성해서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마이크 맨스필드 주일 미국대사는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보디 가드의 역할을 담당할 대사관 경호원들을 동행토록 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 제의를 나는 거절했지만 암살 위협은 광주사태 이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오늘날 이런 위험은 이미 사라졌다. 서방측 저널리스트의 생명이 총구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에는 독기(toxic air)가 충만해 있었다.
나의 주변 인사 중 한 사람이 오래 전부터 “김대중은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북조선의 포켓 속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북한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지 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해 왔다. 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그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 온 정치지도자이다. 크리스천이며 선량한 사람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김대중에 대한 나의 당시 진단은 과녁 밖으로 한참 빗나가 버렸다. 대통령에 당선 되어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그는 자신이 북한의 괴뢰임을 스스로 들어 내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불민했음을 부끄럽게 여길 수 밖에 없다.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생각이다.
<역자 註>
이 글을 쓴 헨리 스캇 스토우크스 기자는 어떤 사람인가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부연한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 1962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에 입사해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도 옥스포드 졸업생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옥스포드 제1호 여성 졸업생으로 알려져 있다). 64년 동경지국 초대 지국장으로 임명되었고, 67년 영국의 더 타임즈 동경 지국장, 78년 뉴욕 타임즈 동경. 서울 특파원을 역임.
더 타임즈 특파원 시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사건이 발생한 후 집중적으로 이 사건을 취재했고 뉴욕 타임즈 특파원에 임명된 뒤에는 동교동 취재를 거의 독점적으로 취재한 외신 기자로 명성을 날렸다. 내 외신 기자들의 동교동 접근이 거의 불가능 한 시기에 그만이 김대중씨와 자유스럽게 독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언론계에서는 그를 동교동 통으로 부른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봄비, 그것도 4월에 촉촉히, 싸늘하게 내리는 비를 나는 ‘아직도’ 좋아한다. 다시 찾아온 4.19 학생 혁명기념일도 거의 잊은 채, 나는 하루 종일 잔잔히 내리는 봄비를, 가라앉지만 포근한 심정으로 바라보며 일요일 오후 시간을 보냈다. 잔잔하지만 쉬지 않고 relentless 내리는 비, weather person들은 분명히 귀찮은 annoying, nuisance 것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비를 예보 하지만 나는 그러한 그들이 이상하기만 하다. 나는 너무나 반갑기 때문이다. 나도 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역시 ‘소수 minority일 것이란 것을.
내가 언제부터 이 ‘비’를 좋아했던가 생각을 해 본다. 분명한 것은 최소한 나의 사춘기, 황금시절 10~20대에는 ‘절대로’ 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귀찮아 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있을 때, 등산 같은 것을 갈 때.. 이 내리는 비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머리 style에 신경을 쓰던 철없던 그 나이에 머리카락에 떨어지는 물은 절대 사절이었다. 그 당시에 자가용은 꿈도 못 꾸었고, taxi를 탈 처지도 아니고 분명히 콩나물 시루 같은 시내버스를 타야 했던 시절.. 비 오는 날은 분명히 구질구질하기만 했다. 물에 떨어지는 우산을 접은 사람들로 꽉 차고 담배연기 자욱한 ‘시내’ 버스 안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세월은 흐르고 머리 스타일에 신경을 쓸 나이가 훨씬 지난 후에, 그것도 공간적으로도 공해로 가득 찬 서울에서 초록색이 감도는 미국으로 완전히 바뀌어서 시내버스를 탈 기회는 완전히 사라지고 ‘자가용’이 필수가 된 곳에서 잔잔히 내리는 비에 대한 생각은 서서히 바뀌었다. 넓은 하늘, 대지에 내리는 비와, 우중충한 urban 도심지의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 귀찮기만 하던 비가 나에게는 이제 ‘진정제’로 서서히 변했고.. 그것이 조금은 지나치게..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연숙은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비에 대한 말을 안 하게 되었다.
비를 사랑하게 된 것이 정확히 감상적이거나 지리적인 환경에 의한 것일까? 이런 생각도 해 본다. 혹시 나의 성격이나 성질이 조금씩 어둡게 변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걱정을 해 본적도 있었다. 어둡다기 보다는 나이에 따른 ‘내면적 삶’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가 ‘멋지게’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꽃을 보거나, 각가지 종류의 새들을 멀리서 보는 것 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 것들이 가진 독특함으로 위안을 받기도 하고, 더 깊은 생각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40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런 ‘취미’를 가지고 살았고 아마도 ‘그 날’까지도 나는 밖에 오는 비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같다.
4월 15일.. 4월의 딱 절반에 도달했다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있을까? 물론 있다.. (income)tax return day 마지막 날이다. 이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이런 미국적인 날도 나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아니.. 이제야 이날의 진정한 의미를 알 것 같은 후회감도 없지 않다. 나는 인생을 남들보다 조금씩 더 늦게 깨닫고 늦게 행하는 그런 삶을 살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신체적인 ‘발육’도 남들보다 항상 늦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마도 죽는 것도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 죽을 것이라고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인생의 막바지에서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던가.. 주위에 얼마나 본의 아닌 ‘게으름에 의한’ 피해를 주었던가? 할말이 없다.
올해의 부활 주일.. 참 만족스럽게 보람 있게 보냈다고 느낀다. 목요일 부터 일요일 부활까지 우리는 ‘고향’ 순교자 성당엘 갔다. 작년부터 시작된 우리의 새로운 전통이다. 평일미사는 거의 Holy Family엘 가지만 레지오는 물론이고, 가급적 주일미사와 큰 행사는 순교자 성당엘 가려고 하는데.. 이런 format을 성모님은 어떻게 보실까? 큰 이의가 있을까? 현재 우리의 사정에 가정 적합한 방식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심야 수난 감실 성체조배.. 올해도 나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 성체가 빠져나간 깜깜한 본당에서 기다리는 그 시간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참… 나도 많이 많이 변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을까?
나는 현재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얼마 전부터 나는 책, Rediscover Catholicism을 읽으며 조금 더 ‘조직적’인 신앙생활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내가 얼마나 이곳 영성, 신앙적인 곳에 ‘투자’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것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다. 계획에 의한 일은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게 이것은 고역 중의 고역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느낀다. 이것도 나의 인생에서 풀어야 할, 고쳐야 할 고질적인 습관이기에.. 고쳐야 한다고. 2007년 묵주기도와 성모님으로 근본적으로 바뀐 ‘버릇’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 하나씩 좀 더 나은 (better version) 이경우 빈첸시오를 향해서 노력을 하는 그런 시간, 세월도 그리 길지 않을 듯 하다. 레지오를 중심으로 매일/평일 미사에 ‘쓰이는 시간’.. 이제는 계산을 할 때가 되었다. 시간 상 문제가 없다면 이제는 quality에 신경을 더 쓰면 어떨까?
요새 우리 부부의 레지오 활동은 주로 배해숙(베로니카) 자매를 돌 보아주는 일에서 머물고 있다. 지난 11월에 시작된 ‘묘한’ 인연의 배 자매님.. 결국은 3월 15일 ‘극적’으로 병원 침대에서 영세/세례를 하태수 신부님으로부터 받았다. 거의 사경을 헤매는 모습으로 지내던 그 병원.. 당시는 느낄 수 없었어도 참 큰 일이었다. 특히 가족들이 그렇게 바라던 일, 한마디로 연숙이 아니었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나도 인정을 한다. 나는 옆에서 ‘견습생’으로 함께 하며 이런 과정을 보고 배웠다. 이제는 배해숙 자매가 ‘안심하고’ 하느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조금은 짜증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것에 나도 짜증이 나곤 했지만.. 이것도 견습생으로 나는 배우고 있다. 내가 모르는 연숙의 프로같은 환자간호 솜씨에 모두들 놀라곤 한다. 특히 까다로운 배 자매가 연숙에게는 큰 무리 없이 순종하는 것을 보면 나도 놀라곤 한다. 비록 병원에 입원하면서 더 할 것이 없다고 퇴원을 해서 조금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기도의 순리, 하늘에 맡기는 심정이 되니 다른 기분도 들고 실제로 그녀는 퇴원 후에 더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나도 놀란다. 최악의 경우야 모두 생각하겠지만.. one day at a time이란 말처럼 조금씩 조금씩.. 살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