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ary, 묵주(기도)의 성모님

성모발현, 태양의 기적 뒤에 촬영 된 신문사진, 세명의 visionaries. 1917년 10월 13일
성모발현, 태양의 기적 뒤에 촬영 된 신문사진, 세명의 visionaries(from left): Lucia, Francisco, Jacinta 1917년 10월 13일, Fatima, Portugal

Our Lady of the Rosary, 묵주(기도)의 성모님.. 오늘 레지오1 단원수첩을 보니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었고 미국 교회달력은 ‘Our Lady of the Rosary‘ 라고 되어있다. 대강 짐작은 했지만, 달력을 보고 알아 차렸으니 이것을 또 잊고 살았다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늘 아침의 미국 본당 평일 미사에서도 잊지 않고 아프리카 출신 보좌신부님2 기도 중에 묵주기도를 주도하셔서 10월은 묵주기도의 달 임이 상기가 되었다.

사실 10월을 맞으며 ’10월은 묵주기도와 성모님과 관련된 달’임을 알았고, 공식적으로도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이라고 불린다. 나의 기억과 알량한 지식이 맞는다면 이것들은 1917년 10월 13일에 당시 사회주의3 독재정부의 교회탄압 속에서 고생하던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나타나신 성모님 발현에서 유래된 것이다. 같은 해 5월 13일 처음 세 명의 ‘목동,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발현하고, 매달 13일째에 계속 발현하다가 10월 13일에 ‘마지막’으로 발현 했을 때 성모님은 자신이 ‘묵주기도의 동정마리아’라고 분명히 밝혔고, ‘작은 자연의 기적4‘ 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라고 분명히 밝혔으니.. 이것으로 우리는 실제로 성모님이 자신의 자녀, 즉 인간들이 묵주기도를 성모님께 바친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고, 나아가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는 의미가 포함 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모님의 발현은 이렇게 ‘실제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해 주는데 최상의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특히 나에게는 그렇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잘못 되었는지 ‘어머니같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나의 묵주기도의 작은 역사가 이제 6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사실 거의 제로에 가까운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한 이 작은 ‘사고’는 상상을 초월한 큰 변화를 나에게 주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 나의 경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나누어 줄까 하는 방법인데, 사실 이것도 인간적인 고민이다.. 이것 역시 묵주의 성모님의 “힘과 전구(intercede)”를 믿으면 되는 것이니까.

 


 

  1. 레지오 마리애, Legion of Mary ‘성모님의 군단’이라는 아일랜드에서 유래된 오랜 전통을 가진 가톨릭 평신도 단체, 나와 연숙이 현재 속하고 활동을 하고 있는 유일한 신심단체.
  2. 이 신부님의 성모 마리아 신심은 그의 레지오 마리애 경력에 의해서 짐작이 되었었다.
  3. 그들은 교회, 특히 천주교회를 증오하였다.
  4. 태양의 유희, 지상으로 떨어지는, 춤추는 것 같은 것으로 수많은 군중이 동시에 경험을 하였고, 정부기관지에까지 대서특필 되었다.

진로 소주와 강남스타일

jinro-soju보드카 야.. 물러가라, ‘강남스타일’ 진로소주가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진로소주의 본격적인 미국 주류시장 공략에 대한 이야기가, 미국 주요 뉴스 매체[major news outlet]가 보기에 ‘하찮은’ 것들 즐겨 찾는 NPR[National Public Radio]에 보도가 되었는데 그냥 지나치려다가 ‘파아란’ 쏘주 병 사진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보고야 말았다. 그 ‘파아란, 두꺼비 표’ 진로 쏘주 병 색깔을 보니 어쩔 수 없는 향수 심이 돋아나는 것이었다.

이 보도를 보면 내가 그 동안 몰랐던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 진로 소주는 술 종류 SPIRITS (증류주?) 중에서는 판매량이 ‘세계에서 1위’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쟁 주’는 Smirnoff, Jack Daniel’s, Bacardi등이 있는데 그들의 판매량 보다 거의 갑절이라는 것은 사실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판매량이 적은데 전체의 5%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시장이 거의 압도적으로 제일 크고, 다음이 일본, 중국 정도 인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나는 한국사람들의 술 문화를 비록 오래 전이었지만 ‘알맞게’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술고래’ 전통이 계속 그렇게 유지되지는 않을 듯.. 그래서 이제는 제일 큰 미국시장을 겨냥하는 것일지도… 술을 파는 것은 사실 술 맛도 중요하지만 ‘멋진 광고’도 중요할 것이고, 그래서 제일 효과적일 수 있다는 강남스타일을 광고로 골랐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은 그 ‘강남 어쩌구’ 하는 것, 한마디로 ‘병신 지x’로만 보이지만 그것에 넘어가는 작은 머리들이 생각보다 많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광고인 것이다. 그저 ‘넘어가면’ 그 역할을 끝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한국 팝 문화’를 이용하고, 곁들이는 방식인데, 글쎄요.. 그것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쉬울까?

한 전문가는 지금까지의 넘버 원이었던 러시아 보드카를 예로 들었는데, 그것이 처음 들어왔을 때가 1950년대였고, 현재에 이르러서 그것이 top이 되었으니..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가?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그것이 ‘술 문화’가 변하는 ‘속도’인 것이다. 그런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시아의 요상한 맛을 가진 소주를 ‘강남 스타일’ 등으로 팔겠다는 것도 생각보다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소주에는 보드카에 없는 장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소주의 알코홀 ‘도수’가 20%라는 것인데, 이것은 정식 주류 면허에 못 미치는 맥주, 와인 정도의 면허만으로 팔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낮은 알코홀 도수이기에 보드카로 만드는 칵테일 대신에 색깔이 같은 소주를 대신 쓸 수가 있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소주를 bar에서 많이 쓴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한국문화의 관계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장사 속’으로 생각해서 훨씬 경제적이라는 뜻이다.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아마도 진로소주는 내년에도 ‘전세계 판매량 제1위’를 계속 유지할 확률이 크다고 한다.

이러한 보도를 읽으며 생각을 해 본다. 나 자신의 ‘술 문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옛날 대학시절 무렵, 팔팔할 적에는 술에 너무나 약해서 제대로 ‘술 맛과 멋’을 몰랐다. 쉽게 퍼 마셔도 별로 탈이 없었을 나이에 제대로 못 마신 것이다. 취하면 기분이 날라갈 듯했지만 대신 ‘술 탈’로 고역을 겪어야 했다. 유혹에 약해서 술을 제대로 거절할 수 도 없었다. 그런 문화에서 계속 살았으면 나는 나의 절친한 친구 김호룡1 처럼 50세도 못 채우고 황천으로 갔을 확률이 90% 이상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술 문화가 ‘전혀 다른’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나는 그런 함정은 피할 수 있었고, 대신 ‘서서히, 알맞은’ 속도로 주량을 늘려 나가서 이제는 맥주 5병을 마셔도 괜찮고, 기분도 좋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의 ‘체질’이 변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주막집 문화’를 느끼며 마시는 ‘재미’는 물론 거의 없고, 대신 집에서 하는 모임 같은 곳에서나 그런 재미를 ‘상상’하긴 한다. 그 옛날 서울 포장마차에서 마셨던 ‘진짜 진로 소주‘는 없어지고, 이곳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와인’ 정도로 ‘약 하게’ 변해서 도저히 그 옛날의 ‘목 젖이 아파오는‘ 그런 짜릿한 맛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0% 소주가 그런 것들이다. 술에 얽힌 이야기들은 적지 않지만 대부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잊은 것도 많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들도 ‘치매 예방’ 차원에서 하나 둘 씩 기억을 해내어 개인 역사에 남겨 놓는 것도 나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1. 중앙 중학, 고교, 연세대 동창, 연세대 기계공학과 교수역임

초가을 비, Pope 2.0

¶  8월보다 더운 느낌의 9월 초의 가뭄을 끝내는 시원한 초가을비가 ‘잔잔히’ 내린다. 9월도 하순으로 접어들고 내일은 9월 22일, 가을의 시작이고 밤과 낮의 시간이 같은 추분 Autumn Equinox 이다. 2013년 올해의 이곳 아틀란타 지역 기후는 아마도 ‘통계적인 평균치’ 에 가까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온건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축축하지만 시원했던 여름에는 ‘감사기도’를 드리기에 바빴다. 온갖 지구의 열병에 대한 ‘유언비어’ 속에서 거의 기후 공포증에 시달리던 때, 이런 ‘여유’를 주신 Mother Nature 에 감사를 드린 것이다.

‘통계적 평균치’를 언급하면서, 올해의 8월과 9월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마디로 8월의 평균기온과 9월의 평균기온이 비록 평년에 비해서 낮았어도 그 자리가 바뀐 것이다. 통계치를 언급할 필요가 없이, 8월에 a/c(air conditioner)를 사용한 날 보다 9월 사용한 날이 더 많았으면 그것은 완전히 8월과 9월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8월 9월의 합친 기온 평균치는 ‘아마도’ 평년과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힘일까.. 예년에 비해서 아직도 새파란 주변의 모습이지만 그 만큼 더 빠른 속도로 가을 색, 황금의 빛깔로 변하지 않을까.. 그것에 오늘처럼 내리는 잔잔한 가을비까지 곁들이면 이것이 바로 ‘가을비 우산 속‘ 같은 감정이 되지 않을까..

 

2013-09-21 14.40.52-1

초 가을비가 뒷뜰에 촉촉히.. 멋진 빗소리와..

 

¶  Pope Francis, 교황 프란치스코.. 요한 바오로 2세를 능가하는 역사에 남을 교황이 되시려는가? 교황이 된 뒤 반년이 지나가는 이즈음 그에 대한 시각, 평가와 언론에 비치는 그의 모습들..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다. 처음 교황이 되었을 때, 대부분은 조금 실망을 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건강상 이유로 도중하차하신 전 교황, 베네딕트 16세를 계승하는 지도자가 ‘또’ 76세이 교황이라면 얼마 되지 않아 또 ‘건강상’ 문제가 나올 터인데.. 왜 그랬을까? 그렇게 많은 추기경들이 그런 염려를 하지 않고 새 교황을 선출했을까?

 “the church as a hospital in a battlefield,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 Pope Francis

하지만 나이에 맞는 보수성은 취임 초부터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조금씩 ‘프란치스코의 놀라움’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명의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트 16세 모두 ‘머리가 지독히 좋은, 학자 출신’ 이었고, 그에 못지 않게 ‘보수적’이었는데 현 교황은 그 모든 것도 아니었다. 거의 ‘진보적’이고, ‘머리보다는 가슴’인 그런 교황임이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올 것이 왔다. 그것도 지독히 큰 것이.. 8월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 바티칸에서 예수회의 기자와 장시간의 기자회견을 가지고, 그것이 세계 예수회에서 발행하는 회지에 실리고 미국에서는 America [magazine] 라는 곳에 실렸다. 곧바로 그것은 ‘세속 언론’에 알려지고 ‘폭탄 선언’으로 그것이 묘사되었다. 세속적인 눈은 교황이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교적 ‘공정’한 입장의 New York Times는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21세기 가톨릭 교회의 ‘고민’을 이해하려 애를 쓰기도 하며, 이번 교황은 잠재적으로 전 2 교황의 보수성향을 견제하며 교회를 ‘모든 사람들의 교회’로 만들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사실 나도 혼동이 오는 느낌도 들지만 사실 나는 희망적이다. 무언가 변하긴 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Vatican 2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불만을 품고 떠나거나 예전의 가톨릭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 돌아가는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극단적인 신자들도 많아서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는 교회 때문에 현재의 모든 세속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고 하기까지 한다. 과연 그럴까? 세속화가 가속되는 것은 사실 현재 교황이 시사하는 대로 ‘고독한 현세인 들을 사랑으로 품지’ 못한 결과는 아닐는지?

교리주일, 인천 상륙 1950

¶  Catechist, catechesis, catechistic, catechistical, catechistically, catechize, catechumen, catechetic, catechetical hew..

 가톨릭 교회의 매력 중에는 아주 풍부한 alphabet soup 같은 각종 용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이 alphabet soup은 라틴어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라틴어를 조금 이해하거나 좋아하면 이것도 매력 중에 하나다. 다만 조금 다른 종교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문제일 수는 있다. 이 라틴어는 영어권에서 보면 동양권에서 한자를 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 용어나 단어들은 조금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긴 역사를 자랑하는 그득한 내용이 담긴 단어들이라 그 옛날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할 때, WORD POWER를 공부하던 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어의 어원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들이 그 책에 그득했고 그것으로 단어를 배운 것이 ‘영원히’ 나의 머리에 남았고, 모르는 영어 단어를 보면 곧 바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주교 ‘영어’를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모조리 라틴어였다. 그것들이 이곳의 성당에서 영어처럼 쓰이는 것이다.

오늘은 Catechetical Sunday였다. 이 단어도 처음에 정말 괴상하게 느껴졌다. 발음도 그렇지만, 그것과 비슷한, 파생어는 수 없이 많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의미 ‘영세예비자 교리공부’ 에 대한 단어들이란 것만 알면 끝난다. 교리공부라고 했지만 이것은 ‘교실에서 말로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매년 이 ‘교리반 주일’이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이 지났는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우리가 한국본당에서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본당은 거의 ‘봉사자’들이 교리반을 나누어 가르치는데 한국본당은 올해부터는 수녀님이 가르치신다. 그러니까 올해의 영세예비자들은 ‘행운아’들인 것이다. 열명 안팎의 알맞은 인원이라서 토론하기도 좋고, 모두들 진지한 태도와 열의를 보인다. 이들이 내년 부활절에는 ‘모두’ 영세식을 통해 하느님의 새 자녀들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려 본다.

 

¶  아.. 인천..1950

오늘은 9월 15일 일요일, 하지만 1950년 9월 15일 금요일은 그 유명한 육이오 동란 (일명 한국전쟁)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던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Gen. Douglas MacArthur] 장군의 걸작품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때는 63년 전.. 내가 2살 8개월 되던 때였다.

그 당시 우리식구는 아버지가 납북이 되시고 어머니가 누나와 나, 남매를 데리고 비원 옆 원서동에서 숨을 죽이고 사셨다. 물론 나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2년 정도 뒤부터는 그 원서동의 분위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인천..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박경원씨의 구수하고도 경쾌한 노래를 들으면 인천의 냄새가 그대로 나는 듯하다. 서울 재동학교 5학년 때, 그러니까 1958년에는 5학년 전체가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다. 인천 부두와 월미도가 내려다 보이는 만국공원, 그곳에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의 동상 아래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1950년대의 인천은 참으로 멀었다. ‘증기, 화통’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갔을까..

그래서 그랬을까? 인천을 번개와 같이 점령한 유엔군(사실은 미군과 국군)은 예상을 뒤엎고 서울을 탈환하는데 무려 2주가 결렸다. 그렇게 멀었을까? 빨갱이들이 6.25 발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지나치게 서울에서 꾸물대다가 ‘부산 해방’을 놓쳤다는 해석이 있는데, 이것과 맞먹는 유엔군의 실수는 그렇게 느린 서울 탈환이 아니었을까? 서울탈환, 그러니까 구이팔, 9.28 수복이 되던 때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독 안의 쥐가 된 빨갱이들은 여유 있게 ‘양민학살과 38선 이북으로 도주’를 했을 것이다.

순전히 결과론이지만 맥아더 장군의 ‘오만과 아집’이 조금 덜 했더라면, 남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었더라면, 중공군의 개입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했을 것이고 흥남철수1.4 후퇴 같은 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 후에도 미국이 조금 더 ‘모험’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만주를 폭격하거나 원자탄으로 위협을 하는 맥아더의 구상이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때 통일이 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고 한민족 만고의 1급 역적, 원흉 김일성 일당을 처단 못한 그것이 이후 한반도, 한민족 비극의 씨앗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악의 씨는 그대로 남아 민족반역자 3대, 그 중에 마지막 인간은 새끼돼지 같은 젖먹이, 현대 역사 박물관 전시물 제1호가 될 만한 ‘북조선 김씨 왕조‘를 유지하며 장난감 핵무기로 장난을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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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으로 상륙하는 미국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Voyager 1, Pale Blue Dot, 1977

NASA/JPL Voyager 1
NASA/JPL Voyager 1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리고 갈 것이 갔다. 영원히.. 1977년 9월 5일 발사 된 미국의 무인 우주 탐색선 Voyager 1.. 작년부터 이 ‘자동차 크기의 물체’에 대한 뉴스가 가끔 나오곤 했지만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오늘 뉴스는 조금 다르다. 그 전까지의 뉴스는 ‘서서히’ 태양계를 떠나는 과정과 예측이었지만 오늘 것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36년이 걸렸다. 36년 만에 ‘우리 태양의 영향권, 태양이 숨을 쉬는 heliosphere라고 불리는 태양권’을 떠나, 사고만 없다면 무한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보며, 그 모든 ‘과학적, 기술적 잔소리, 자세함’을 떠나서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 중의 압권壓卷은 두 개로 볼 수 있다. 36년 전, 그러니까 조지아 출신 Jimmy Carter와 박정희가 대통령1이었던 천-구백-칠십-칠년, 1977년의 추억이 그 하나고 조금은 비약적이지만 허공과도 같은 망망대해 무한한 우주 자체인 하느님이 그것 이다. 분명히 인간이 만든 물체가 태양계를 ‘거의’2 완전히 떠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Life-Off, Voyager 1, 9/1977
Life-Off, Voyager 1, 9/1977

이 ‘인간이 만든 물체’는 과연 어떤 것인가? 무게가 1600 파운드, 아마도 작은 차 정도의 무게가 아닐까? 크기는 7.5 ft x 12 ft x 66 ft 정도이다. 그 속에는 1977년 당시 최첨단의 기술로 만든 기재들(거의가 sensors들)로 가득 찼고 비록 요새 기준으로 보면 ‘거북이’속도3지만 지구와 통신을 유지한다.

이 물체의 속도는 시속 3만 8천 마일, 현재의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120억 마일 정도다. 이런 시속 수만 마일이나 거리 백억 마일 같은 것은 사실 우리에게 실감을 주기에 부족하지만, 우주의 ‘미친 듯이 거대함‘을 조금이라도 시사하기에는 족하다. 현재의 이 물체의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빛이나 전파가 도달하는 데에도 거의 16시간이 걸리고, 현재의 속도로 계속 ‘허공’을 뚫고 나르면 4만 년 뒤에나 1.6광년 거리의 ‘첫 별4 ‘을 만난다고 한다.

1977년 9월 출발 후 몇 년 후인 1979년에는 첫 번째 목표 목성(Jupiter)를 근접 탐색을 했고, 1980년 11월에는 다음 목표 토성(Saturn)을 근접 탐색을 해서 아주 커다란 수확을 얻었다. 이때 얻었던 근접 촬영 사진들은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다. 10년 뒤인 1990년에는 ‘태양계 가족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희미한 푸른 깨알 점, Pale Blue Dot‘ 그러니까 우리의 파란 지구가 그곳에 있었는데, 이 푸른 깨알 같은 작은 점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 Carl Sagan이 ‘정치적’인 각도에서 ‘인류의 영구한 평화’를 호소하는 매체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 작은 푸른 점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겸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작은 점 ‘표면’ 에서 수십억의 인류가 때로는 ‘아귀다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Carl SaganThe Pale Blue Dot

 

그 동안은 주로 태양권 내의 solar wind에 관련된 자료를 탐색해 왔고, 출발 후 몇 년 후 1979년에는 첫 번째 목표 목성(Jupiter)를 근접 탐색을 했고, 1980년 11월에는 다음 목표 토성(Saturn)을 근접 탐색을 해서 아주 커다란 수확을 얻었다. 이때 얻었던 근접 촬영 사진들은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다. 10년 뒤인 1990년에는 ‘태양계 가족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희미한 푸른 깨알 점, Pale Blue Dot‘ 그러니까 우리의 파란 지구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태양의 영향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서 무엇을 감지할지는 미지수이다. 또한 36년의 세월 뒤에 기기들이 하나 둘씩 기능을 정지하고 있어서 언제까지 탐색 자료가 송신될 지도 의문이고 2015년 경에는 data recorder기능이 정지가 되고, 궁극적으로 2025년 이후에는 전력이 소진되어서 탐색기능과 조종기능이 없어지고 완전히 ‘죽은 채 나르는’ 상태가 될 것이다.

 Voyager 1 태양계의 끝을 통과하는 Voyager 1

 

Voyager 1이 발사된 때는 정확하게 1977년 9월 5일이었다. 36년 전이다. 그때 나는 West Virginia에서 학교를 마치고 다음 학교인 Ohio State (University)에서 1978년 1월에 시작되는 graduate program 을 앞두고 ‘여름방학의 고향’인 시카고 서(충일)형의 아파트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70년대의 추억이 아롱진 시카고, 그것도 서충일 형의 Broadway에 있던 그 아파트.. 그곳은 즐거움도 있었지만 1977년 9월의 시카고 가을은 나에게 ‘어두운 밤‘이었던 시간이 많았다. 어두운 밤이라면, 실로 외롭고, 괴로운 시간들, 희망이 안 보이는 그런 시간이고, 나는 실로 그 모든 것을 그곳에서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 때는 30살도 채 되지 않았던 ‘자유로운’ 총각시절.. 상상할 여유도 있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Voyager 1이 어두운 밤의 허공을 나르는 동안 나의 반생이 지나갔다. 사랑하던 어머님도 가고, 대신 반려자를 만나고, 자식들도 세상에 나왔고, Voyager 1이 태양계와 작별을 할 즈음, 나는 인생과 삶의 목적이나 의미도 조금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 ‘물체’는 어두운 허공으로 사라지고, 나는 ‘저 세상의 허공’을 향하여 진군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갈 허공은 ‘깜깜한 밤’의 허공이 아니고 ‘사랑의 숨결이 전 공간에 꽉 찬 하느님의 공간5‘이 될 것이다.

 

My 3 favorite oldies of ’77

 

1977 oldies, Torn Between Two LoversMary MacGregor

 

 

I’d Really Love to See You TonightEngland Dan & John Ford Coley 

 

Year of the CatAl Stewart

 

  1. 이 두 대통령은 악연이 있었는지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지아 ‘무지랭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했던 카터가 서울을 방문 했을 때 ‘노전역장’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정치학 101 기초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2. 태양계 크기의 정의에 따라서 아직도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학설도 유력하다.
  3. 그 옛날에 즐겨 썼던 PC 용 Hayes modem의 1200 baud rate, 기억을 하는지..
  4. Gliese 445, Camelopardalis성단의 별
  5. Dr. Eben AlexanderProof of Heaven, 저자가 몸소 체험한 near death experience에서의 물리적, 신앙적 체험에서..

Nine Eleven의 ‘썩은’ 유산들

오늘아침에 일어나서 모처럼 network TV morning show를 잠깐 보다가 오늘이 9월11일, nine-eleven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2001년, 나인 일레븐 에서 12년이 흐른 바로 ‘그’ 나인 일레븐..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어떻게 올해 나는 ‘철저히’ 이것을 잊고 있었을까? 내가 나 자신에 놀란 것이다. 저녁 TV 뉴스를 보니 이곳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인가..별로 ‘감동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Syria 문제로 또 다른 전쟁행위의 가능성을 알기에 그런가? 솔직히 12년 전부터 시작된 ‘빠가, 조지 부시의 미친 보복 전쟁들’ 이 지겹게 느껴지는 마당에 또 ‘쳐들어’ 가겠다니.. 이번에는 ‘병신, 바락 후세인 오바마’의 차례인가? 왜 세상이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청명한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Twin Tower의 까만 연기를 보며 ‘인간이 아님을 자랑으로 아는’ 광신교 이슬람의 극단성과 ‘너무나 명백한 악의 존재’를 느꼈다. 그 ‘미친 놈’들이 아마도 antichrist정도의 purest evil이 아닐까.. 극단주의와 상대주의가 맞물리고 꼬이던 21세기의 벽두에..

빠가 부시는 측근의 ‘늙은 전쟁광과 그의 부관’들에1 의해 놀아났지만, 솔직히 말해서 빠가 부시 자신은 머리 속이 비교적 ‘간단한’ 인물이어서 예측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현재의 병신 바락 후세인 오바마란 인물은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고, 그의 ‘뒤에 숨은 안건’은 예측하기가 힘든 정말 겁나는 인물이다.

혼돈과 파괴의 2000년대의 과정에서 이 인물의 급부상을 보며 나인 일레븐 같은 대 참사가 주는 극단적인 여파를 생각한다. 한편의 극단에서 빠가 부시에게 던덜머리가 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빠가 부시만 아니면 OK‘라는 지친 심정으로2 ‘병신 바락 후세인 오바마’란 미지의 인물을 택했지만, 이것은 커다란 ‘도박’이었음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빠가 조지 부시와 그를 사주하던 ‘전범’들이 나갔고 그 자리에는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이 들어와 4년 이상 그들의 정체를 조금씩 들어내고 있지만, 그들이 역사적으로 미국이란 나라에 남기고 갈 ‘무서운 유산’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쉽게 예측이 가능한 것 중에는 ‘극단적 도덕상대주의 독재체제‘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는 사실이다. 바락 후세인 오바마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밀어 부쳤는지, 아니면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는지는 시간이 흐른 후에 역사가들이 밝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시도하고 행했던 여러 정책들 중3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도 있다는 것과 선거를 위한 ‘술책’으로 그는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100% 새빨간 거짓말임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락 후세인 오바마 정체 중에 들어난 몇 가지일 뿐이다. 3년 뒤에 그는 없어질 것이지만, 그가 남기고 갈 ‘썩은 유산’은 두고 두고 씻어내어도 없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1.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치인 Dick CheneyDonald Rumsfeld, Paul Wolfowitz 같은 neo-conservatives
  2. 이것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구 정치인들에게 지친 국민들이 노무현같은 ‘알 수 없는’ 인물을 ‘감정적’으로 대통령으로 뽑은 기가 막힌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
  3. 지나친 다원주의, 자연법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책들, 모든 것은 공평하다라는 허구 신봉’ 등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8

니즈맞춤혁신논리 : Seek Norm & Get-to-Norm

2013.09.11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혁신에 대한 성공률은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연구개발(R&D)과 실용화(implementation)단계를 거쳐 상용화(commercialization)된 후 성공하는 경우는 겨우 4%선이라고 Booz Allen & Hamilton은 전한다. 그리고 상용화된 혁신의 평균성공률은 17%라는 혁신성공 조사보고서도 있다. 그리고 경영컨설팅업계에는 혁신과 관련하여 벼라 별 다양한 주의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게 현실인데 이는 아직 혁신에 관한 이론다운 이론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이나믹 매니지먼트(dynamic management)는 어떤 경우든 고객이 원하는 제품/서비스를 기업이 제공하여 고객으로 하여금 돈을 내게끔 하지 않으면 결코 돈을 벌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제품/서비스에 대해 고객이 언제 왜 구매의향 또는 지불의향(willingness to purchase or willingness to pay: WTP)을 갖는가에 대한 구명(究明)부터 시작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고객은 어떨 때 지불의향을 갖게 될까? 고객이 최소한 이것만은 우선적으로 꼭 충족되길 바라는 기본니즈속성(basic needs attributes: BNA)이 100% 충족되지 않으면 결코 돈을 지불할 의향을 갖질 않기 때문에 BNA가 우선 100%로 충족된 상태에서 그것이 충족되면 될수록 만족이 점점 더 커지는 어필니즈속성(appealing needs attributes: ANA)이 충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불의향을 갖게 된다. 그리고 기본속성(BNA)도 100% 어필속성(ANA)도 100%로 충족되면 고객은 감동을 느끼며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이게 되는데 이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이는 제품/서비스를 최소비용으로 제공하면 최대로 돈을 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이는 제품/서비스를 최소비용으로 제공하는 사업패러다임(business paradigm: 현시니즈와 확장가치사슬과의 연결 메커니즘을 말하는데 그냥 사업모델정 도로 이해해도 무방함)은 이상적인 모범답안(Norm as Ideal)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고객이 최대지불의향수준을 내보일 어필속성과 기본속성의 집합을 찾고(Seek Norm), 이를 충족시켜 줄 제품/서비스를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충족시켜주기만(Get-to-Norm) 하면, 바로 이상적인 모범답안이 얻어지면서 기업은 최대로 돈을 벌게 된다.

그런데 어필속성의 특성에 따라서 지불의향의 탄력성은 다르다. 예컨대 어필속성의 미소한 차이에도 지불의향수준이 대단히 탄력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명품이나 고기술 니즈)가 있는가 하면 대단히 둔감하게 반응하는 경우(생필품 니즈)도 있다. 어필속성의 미소한 차이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주로 핵심기술이나 긴요한 기술과 관련한 경우인데 이런 분야의 글로벌 틈새(niche)시장에서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Seek Norm & Get-to-Norm으로 이상적인 모범답안을 선취(先取)하여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이 바로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이다.

 히든 챔피언이 주목 받게 된 배경은 이렇다. 2008 8월 월가붕괴(Wall Street meltdown) 후 5년이 지난 2013년의 글로벌 촌은 참으로 많은 구조변화를 겪어온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많은 변화 중에서 특히 국별 수출규모의 서열변화를 갈음해 보자.

Luddites, 러다이트의 교훈

섬유공장 기계를 부수는 Luddites
섬유공장 기계를 부수는 Luddites, photo credit: wikimedia

Luddites..  textile workers in early 19th century England. 그들은 누구였나? 한글로는 또 어떻게 쓰는가 Naver 사전은 이것을 러다이트 로 표기하고 있다. 이들은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Luddite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산업혁명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산업화, 기계화 되기 전 방직공장(섬유공장)의 artisan(장인)들이었는데, 과장된 표현으로 ‘하루아침’에 기계에 밀려서 직업과 직장을 잃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산업혁명의 ‘예기치 않았던’ 첫 희생자들이라고나 할까? 장인들.. 지극히 인간적인 손끝의 힘으로 그들은 섬유제품을 ‘뽑아내고’ 있었던 자랑스러운 집단이었지만, 효율성이 50배에서 무려 1000배까지 늘어나고 제품의 질에도 큰 손색이 없었기에 ‘공장장, 자본주’들은 그들을 가차없이 몰아냈고 결과로 그들을 길바닥으로 몰아낸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200년 전에 시작 되었던 일이다.

 그때 길바닥으로 나 앉게 된 그들 중에 택한 방법은 극단적인 것으로, ‘무력행사’로 일관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밤 몰래 주로 섬유공장을 쳐들어가서 기계를 부수곤 나아가 공장을 부수기도 했다. 나중에는 섬유공장만이 아니고 기계화된 농기계 공장이 표적이 되었고, 이것은 하나의 ‘노동자 운동권’을 형성해서 정치성까지 보이기도 했지만 영국은 정부차원에서 그들을 법으로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에게 그들은 ‘전설 속의 로빈 후드’를 연상하게 하는 ‘영웅’으로 남았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그들은 역사에서 ‘혁신을 거부한 보수, 패배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이때 이후 luddite ‘족’은 ‘기술적인 진보, 변화 등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부류를 뜻하게 되었다.

 이런 통상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사실 더 자세히 알고 보면 그렇게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위에 나온 이야기는 ‘설화’에 가깝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믿고 싶은 그런 식의 이야기로 변한 것이다. 그 당시의 자세한 역사는 Smithsonian 지에 자세히 실렸는데Luddite들이 기계를 부수고 공장을 부순 것은 기계에 대한 원망이 아니고 그 당시 그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프랑스에서 출발한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의 경제상태는 나빴고 특히 노동자 계급은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는데, 그들은 참다 못해서 노동임금의 인상과 더 많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항의 데모를 했는데 정부는 그것을 과도하게 진압을 했고, 분격한 그들은 자기들의 일자리였던, 부의 상징이었던 공장과 기계를 부순 것이다. 이런 군중심리는 전염성이 강해서 다른 곳으로 퍼지게 되고 정부는 ‘기계를 파괴하면 사형’이란 극단 법안을 만들게까지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항의한 것은 기계나 기술혁명이 아니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노동자 멸시, 차별’이었을 것이고, 기술자체를 그들이 혐오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Luddite에 대한 역사나 ‘전설’의 여부를 떠나서, 이들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나 교훈이 있을까? 노동자의 처우문제를 떠나서, 숨차게 변하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digital information technology 분야를 무시하거나 등한시하며 살 수 있을까? 특히 인간을 ‘근육 노동’에서 해방시켰던 것이 19세기 초 산업혁명이었다면, 우리를 ‘두뇌 노동’에서 해방시키려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거의 매일 무의식 중에’ 쓰고 있는 PC, Internet, mobile device같은 digital information technology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듯 느껴지는’ technology는 과연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 기계혁명이었던 산업혁명의 역사와 현재의 ‘디지털 혁명’과 유사한 것일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회는 어떤 영향을 주고 주게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은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 를 미리 알아서 예방을 하면 좋지 않을까?

최신, 최근 luddite 중에는 ‘컴맹’ 다음으로 ‘인터넷의 레이다’에 보이지 않는 부류가 있다. 처음 인터넷이 보편화1 되기 시작 시작 되면서 사람들은 desktop pc 컴퓨터를 써야만 인터넷을 쓸 수가 있었다. 그러니 pc같은 컴퓨터를 못 쓰던 사람들이 이런 인터넷 ‘혜택’에서 소외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pc 컴퓨터의 ‘전체 기능’은 다 필요하지는 않지만 인터넷만 쓰려는 부류들이 생겼다. 그것이 지금은 mobile device, 특히 mobile phone을 쓰게 되면서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연결’이 되고 있어서 이제는 전통적인 ‘컴퓨터’의 의미는 희미해 지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인터넷-privacy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의 24시간 손에 잡히는 ‘핸드폰’이 무의식 중에 ‘세계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음은 아차 하면 자기의 모든 것이 들어나는 가능성이 항상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 사회 안보를 의식한 듯 정부차원으로 거의 모든 ‘인터넷 활동’이 감시2되게 되어서 이제는 인터넷에서 숨어살기가 거의 불가능해 졌다. 이것이 21세기 초의 ‘불편한’ 새로운 현실, new normal이 되었다.

이런 ‘다른 얼굴의 디지털혁명’을 러다이트luddite의 역사적 교훈에 비추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우선 분명한 것은 이것을 예전의 luddite들 처럼 무조건 피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떤 알고 지내는 수녀님을 나의 blog에서 ‘찰나’의 정도로 언급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을 아시고 ‘간곡하게’ 이름을 지워달라고 하셔서 한동안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google-bot에 의해서 빠르게도 그 수녀님의 이름이 indexing이 되었던 모양이고 그것을 본 다른 ‘수녀님’이 귀 띰을 했던지.. 이 ‘사건’은 서로에게 불편한 화제였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개인의 privacy’와 나의 ‘표현의 자유’가 정면으로 부딪치는 케이스인 것이다. 물론 나는 수녀님의 부탁을 존중하고 ‘이름’을 지웠지만, 두고두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privacy가 그렇게 중요하면 당장 전화나 email에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것이 아닐까? 모든 전화 통화기록과 email, 특히 gmail이 ‘공공연하게’ monitoring이 된다는 사실을 아실까?

이런 것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중간 정도’에 있다는 진리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아라..는 말처럼.. 이것이 명쾌한 “명절 같은 해답”인 것이다. 그렇게 ‘무조건’ 피하지도 말고, 멋지게 보이겠다고 ‘잘 알지도 못하며’ 앞서가며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follow the crowd” 란 교훈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1. 주로 WWW:world wide web, email로 시작 된
  2. 이제는 거의 모든 통신수단이 인터넷으로 연결이 되어서 전화(landline, cellular), email, websites등이 대상이 되었다.

구상具常 신앙의 시詩 8

具 常(1919~2004) 시인
具 常(1919~2004) 시인

최근에 발견한 가톨릭 시인 구상 님의 주옥 같은 시들이 있다. 내가 본 것은 구상 문학관의 웹사이트였는데, 이것들이 copyright restriction이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염치불구하고 신앙과 믿음의 시 8편을 옮겼다. 서정적인 윤동주 님의 세계로 부터 영원을 노래하는 신앙의 세계로 와서 느끼는 구상 님의 시 여덟 편은 아름답기만 하다.

 시만이 갖는 특징 중에 시 속의 같은 낱말과 구절이 함께 어울려 각자에게 다른 느낌과 상상의 여지를 준다는 사실을 나는 좋아한다. 이런 시의 특성을 무시하고 학교에서 국어시간에 배웠던 시들은 시험을 위한 정답 찾기에 급급했었던 기억인데, 시를 가지고 시험을 본다는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 아니었을까…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천주교 교리반 봉사를 시작하며 나를 구상 신앙의 시에 눈을 뜨게 한 ‘고백’이 바로 이 시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솔직한 시가 있었던가? 이런 ‘눈을 뜨는’ 경험이나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오랜 세월 살면서 거의 나는 못 느꼈다. 들으면 공감은 갔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세상이나 인생은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라지만 나는 거의 지루하고 힘들고 심지어 지옥으로 만들고 살았던 때도 기억을 한다. 하지만 나도 이제는 ‘두이레 강아지만큼’ 눈을 떠가기 시작 함을 느낀다. 이것이 인생인가.. 이렇게 살고, 가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는 곳이 그곳이었던가..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 부터가 아니라

오늘로서 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Here and Now.. Today while the blossoms cling to.. 이런 귀와 눈에 익은 멋진 구절들을 생각하게 하는 시.. 시공간에 억매인 유한한 곳에서 우리는 영원의 한 점을 살고 가는 존재, 거기서 큰 의미를 찾는 자체가 행복이고 은총이 아닐까..

나는 영원의 미립자도 못한 짧은 시간을 이곳 ‘이승’ 에서 ‘하루 하루’ 보냈지만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의 시간, 무한대의 공간임을 몇 초라도 느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인류의 맹점에서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흙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 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 난 배처럼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 달까?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내가 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들에게 새 십계명(十誡命)은 무엇일까?

아니, 새 것이 있을 리가 없고

바로 그 십계판(十誡版)을 누가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

 

여기에 이르면 판단 정지!

오직 전능과 무한량한 자비에 맡기고 빌 뿐이다

 

 

‘시방’은 ‘지금’의 고어인가.. 전에 많이 썼던 구수한 말… 인간의 맹점, 약점, 허점, 죄악, 그것도 점점 심각해지는 듯한 느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인은 고뇌를 한다. 20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것은 ‘똑 같은’ 문제였을 것이다.

시대마다 나름대로 황금 송아지가 있었고, 그것을 경고하는 ‘성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성인들이 보이지 않는 듯한 비극이 있다. 누가 십계판을 던질 것인가? ‘판단정지!’.. 어두운 밤을 의식하며 그저 ‘맡기고 싶은’ 시인의 고뇌를 본다.

 

 

기도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St. AugustineJUST WAR 논리.. 현대판 empire, only superpower가 되어버린 ‘기독교의 나라 미국’, 어찌도 그렇게 cruise missile을 좋아하게 되었는가?

인간의 존엄성을 먼저 생각하면 just war는 그렇게 쉽게 거론되지 않을 듯 한데.. 기본적 이성적인 믿음이 없는 정치와 정치인들을 어떻게 vote out을 할 것인가?

 

 

그 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고독과 적막과 어두운 밤, 우리는 혼자다. 그 ‘주님’도 갈 때는 철저히 버림받고, 배반되고, 조롱 받으며 혼자서, 혼자서 갔음을 시인은 아마도 자신의 ‘홀로 있음’에 비교하며 위로를 받았을까?

궁극적인 심판과 결과는 정의의 이김이요, 모든 것이 고통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인.. 현재는 병신 바보같이 느껴져도 묵묵히 어둠의 길을 걸어간다.

 

 

오늘서부터 영원을

 

오늘도 친구의 부음을 받았다.

모두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차피 가는구나.

 

나도 머지않지 싶다.

 

그런데 죽음이 이리 불안한 것은

그 죽기까지의 고통이 무서워설까?

하다면 안락사(安樂死)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두려운 것은

죽은 뒤가 문제로다.

저 세상 길흉이 문제로다.

 

이렇듯 내세를 떠올리면

오늘의 나의 삶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내세를 진정 걱정한다면

오늘서부터 내세를

아니 영원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암만 내세와 신앙으로 무장을 해도 결국 우리는 한번 거쳐갈 그 끝의 단계를 피하려는 본능은 피할 수 없다. 어떻게 가는지, 고통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미지의 세계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 삶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부터 저승의 삶을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시인도 고민하고, 나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요

 

평일 한낮

명동 성당 안에는

고요만이 있었다.

 

온 세상이

일체 멈춤과 같은

침묵과 정적속에서

제단 위에 드리운 성체등이

이 역시 고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라장(修羅場)을 방불케 하는

문 밖 거리의 인파와 소음은

마치 딴 세상 정경인 듯

오직 죽음과 같은 고요 속에

고요가 깃들어 있었다.

 

그 고요 속에 나 또한

고요히 잠겼노라니

그 고요가 고요히 속삭였다.

 

이제 너의 참 마음을 열어보라고!

 

그러나 나는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천주교회 성당, 특히 안은 개신교회의 분위기와 어쩌면 그렇게도 다를까? 고요와 엄숙함,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라는 것이다. 성당 특유의 제단과 성체등 빛, 그 위에서 실제로 성체의 변화까지 느끼기라도 하면 제아무리 성당의 바깥이 시끄러울지라도 상관이 없을 듯.. 이런 고요함을 성당 외에 어느 곳에서 느낄 수 있을까? 구상 시인은 고요를 ‘이용’해서 마음을 열어보려 노력하지만 눈물만 흘리고 있다.

 

 

노경(老境)

 

여기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영원의 동산에다 꽃 피울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

 

젊어서는 보다 육신을 부려왔지만

이제는 보다 정신의 힘을 써야 하고

아울러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형이상(形而上)의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독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과 걱정을 능사(能事)로 알지 말자.

 

고독과 불안은 새로운 차원의

탄생을 재촉하는 은혜이어니

육신의 노쇠와 기력의 부족을

도리어 정신의 기폭제(起爆劑)로 삼아

삶의 진정한 쇄신에 나아가자.

 

관능적(官能的) 즐거움이 줄어들수록

인생과 자신의 모습은 또렷해지느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불태워

저 영원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이제 초목(草木)의 잎새나 꽃처럼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무상(無常)한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넘어 피안(彼岸)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白金)같이 빛나는 노년(老年)을 살자.

 

인생의 황혼기를 맞는 심경 그 자체가 신앙이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젊은 시절에 비해서 나아지는 것은 아마도 자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신앙심일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옴을 느끼며 그런 심정이 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쉬울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안 보이지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들.. 시인은 영혼과 형이상의 것들에 눈을 떠야 한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것은 ‘초능력’이다. 그래서 세속문화와는 반대로 여기서는 인생의 황혼기가 더 멋져 보인다.

 

 

나자렛 예수

 

나자렛 예수!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 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우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일을 하다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 이라고 ‘하느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라고 엄청남 소리를 하신 당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문둥이를 말짱히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스스로의 말대로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다가 마침내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볼 꼴 없이 죽어 간 철저한 실패자,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때로는 멀리 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주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사회혁신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고 고통 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 시요,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 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이고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 하였다.

 

구상시인의 처절하고 치열한 ‘예수님 찾기’의 절정인 듯한 서사시.. 이 서사시를 보며 어찌 감동, 전율, 공감, 감사를 안 할 수 있을까? 위에 실었던 8편의 시에 덧붙이게 된 이 걸작은 ‘여기에 불이 있다’ 라는 천주교 예비신자 교리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훨씬 이후에 읽게 되었고, 추가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숨겨진 보물이었다. 예비신자들이 이 시를 접하고 어떤 정도의 느낌을 받았을까 생각해 본다.

 

Apologetics, 하느님은 있는가?

들어가며

Apologetics.. 아폴로제틱스..흠.. 이 단어를 보면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은 apology 아폴로지.. 가 아닐까? apology 하면 우선 사과, 사죄, 변명, 변론 정도의 뜻이다. 여기의 apologetics는 마지막 것인 변론에 가까운 것으로 거의 99% 이것은 ‘자기 믿음, 신앙의 방어, 변론’을 뜻 한다. 이 blog에서는 내가 현재 믿고 있는 가톨릭, 천주교 신앙에 대한 변론을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개신교에서는 이 말조차 ‘구교, 천주교’ 냄새가 난다고 오래 전에 팽개쳤을 지도1 모른다. 이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가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당대의 다른 apologist 변론가 들을 언급하고 나 나름대로 형성을 하게 된 것 (이것도 사실 지금도, 매일 변화, 발전을 해나가고 있다) 을 남기고자 한다.2

 

가까이 온 죽음과 신앙

처음 이 ‘신앙 변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내가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가톨릭 신앙을 되찾고자 시도를 할 때였다. 나의 유일한 등대, 나의 분신이셨던 어머님의 타계와 더불어 나는 죽음이란 것을 인생 처음으로 피부로 느끼며 나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50이 훨씬 넘은 후에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던 나는 한마디로 철부지였다. ‘죽음’의 ‘죽’자만 보면 나는 외면하고 그런 것은 나의 사전에 없다고 피하고 살았고, 죽음에 관련된 어떤 것, 장례식 같은 것도 나에게는 없었다. 죽음은 한마디로 ‘수백 년 뒤에 있을’, 나에게는 그저 ‘추상 명사‘였다.

 인간의 수명을 생각해보니 기껏해야 70~80세 정도였고 그것은 나에게 불과 20~30년 정도의 여유를 주었지만, 20~30년 정도의 세월은 전에 생각하던 것 보다 ‘훨씬’ 짧다는 것도 50년 이상 살아본 경험에 의해서 쉽게 짐작이 갔다. 나의 20~30년 정도 전의 ‘개인 적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엊그제 같이 느껴지니, 사실 나의 수명은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음은 암만 죽음의 죽 자를 피하려 해도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였다.

한마디로 죽음의 그림자는 나를 덮치기 시작하는 것이고, 아니 이제부터는 내일의 태양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몇 안 되는 가족들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그렇게 과장된 표현이 아닌 듯 싶었다. 이런 것이 지나친 우려처럼 들렸으면 하고 바라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것, 죽음이 진리이고 사실임을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철학적 실존과 죽음

이제는 죽음을 의도적으로 가까이 보려고 노력을 하고, 그 동안 꽤 보아왔기에3 조금은 그 보이는 모습과 배경도 생각하게 되었다. 천차만별의 모습을 한 죽음의 과정, 여정도 알게 되었고, 남아있던 사람들의 모습과 반응도 보게 되고, 그것을 보는 나 자신도 보게 되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나는 조금은 냉정하게 죽음을 대하게 되었고, 무조건 피할 때보다 훨씬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의 제일 큰 명제는 이것이다. 죽음은 과연 그 죽음의 주체에게 모든 것의 끝일까? 그 당시까지 신앙심이 거의 사라진 나에게 대답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 깜깜한 암흑‘이란 것이 대답이었다. 모든 것의 끝.. 모든 것의 끝.. 이 거대한 우주 안에 유일한 존재였던 나, 이경우란 생물,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그러니까 실존이 허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나를 괴롭고 슬프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고통은 사실 젊었을 적, 대부분 10대에 잠깐 찾아오긴 하지만, 사회란 거대한 보호 막 속에서 자연스레 잊게 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나란 사람의 의미는 무엇이고 내가 왜 실존이 되었다가 허무로 사라지는 것인가? 철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과연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대답을 주었을까? 모두 ‘말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었을까?

절대로 철학이 이것에 대답을 주지 못함, 그것이 바로 ‘유한한 인간’의 슬픔일 것이다. 이런 ‘안 보일 수 있는 것에 대한 생각들’을 잊고 살 수도 있겠지만, 중년이 훌쩍 넘었던 나에게 그것은 사치였다. 죽음이 striking distance에 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결정의 순간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파스칼의 내기, Pascal’s Wager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신앙적 변론들이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쉽고 그런대로 수긍이 가는 것으로 Pascal(파스칼)의 Wager 란 것이 있다. 여기서 wager라면 ‘도박이나 내기’ 정도의 뜻이 아닐까? Pascal 하면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름일 것이다. 그는 신이 있다 와 없다 중에서 어떤 것이 맞는지 ‘내기’를 한다. 내기에 참가를 안 하면 ‘신은 없다’로 간주가 된다. 만약 내가 ‘신이 있다’를 고르고 그런 믿음으로 살다가, 그것이 틀렸더라도, 그러니까 하느님이 없었더라도.. 아무런 ‘손해’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사실 ‘거룩한’ 삶을 살았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신이 있었다면? 나는 이긴 것이고 내가 가고 싶었던 천국이 나의 것이다. 내가 신이 없다는 것을 선택했고, 없는 것처럼 일생을 살았고 실제로 하느님이 없었다고 해도 내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틀렸다면, 그러니까 하느님이 계셨다면.. 나는 하느님을 안 믿는 ‘죄’를 지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현명’ 한 것이고, 믿어서 손해를 볼 것이 ‘하나도’ 없다는 논리다. 나도 이런 식의 ‘논리’를 혼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현자와 성인’들이 하느님이 있다는데, 그것 믿어 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 만약 믿었다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 손해 보는 것은 극소적이 아닐까 하는 지독히 타산적인 생각을 해 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논리는 너무나 ‘타산적’인 것으로, 가슴으로 하느님이 믿어지지 않을 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 외의 훨씬 더 이성적이고 수긍이 가는 변론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적 이성으로, Cosmological Reasoning

파스칼의 조금은 타산적인 이유보다도 훨씬 이성적이고 심지어 과학적인 논증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바로 깜깜한 밤에 찬란히 떠오른 달과 별들로 가득 찬 하늘, 막막한 우주인 것이다. 이 ‘우주적 논증’이 내가 얼마 전까지 ‘사랑’하던 것이었다. 종교적 믿음에 회의가 들면 나는 ‘무조건’ 하늘과 우주를 생각했다. 그러면 십 중 팔구 회의감을 무마할 수 있었다. 우주적 논증은 우주 과학 같은 것과 상관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는 할 수 있다.

이 논증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명백한 ‘공리’로부터 출발한다. ‘원인과 결과’, 모든 현상이나 결과는 분명히 원인 제공이 필요하다는 너무도 명백한 이론인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를 생각해 보면 인간이 알 수 있는 크기는 무한대에 가깝다.. 무한대가 아니고 가까운 것은 사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한계를 알 수가 없고, 실증적으로 관념적으로도 알 수가 없다.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 어디까지가 우주의 끝인지 ‘모른다.’

그것이 현대인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기술적 과학의 끝이다. 그러니까 그 끝을 이어 받아 해답을 주는 것이 종교적 신앙인 것이다. 최첨단 기술과학이 밝힌 것은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것, Big Bang 이론이 있다. 태초에 ‘꽝!’ 하고 gas가 터지고 그곳에서 현재의 모든 우주의 물질들이 생겨났고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이 ‘천문학’이 되었고, 생물이 나오며 생물학이 되었다. 그러면 당연한 의문이 생긴다. 그 ‘태초의 꽝!’ 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그것은 과학이 아니란다. 과학의 영역 밖이란다.

그리고 우주의 크기까지 계산을 해낸 천문과학자들, 크기가 있으면 그 변두리도 있을 것인데.. 그 변두리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도 과학 영역의 밖이란다. 이런 근본적인 과학의 한계를 알면, 사실 누구나 ‘겸허’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머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모르는 것 투성이’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 바로 ‘하느님의 만드신 우주와 피조물인 인간’ 설, 바로 종교인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실험으로 알려진 기술적 과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 사실보다 엄청 커다란 진리의 일부가 과학인 것이다. 그 진리가 바로 ‘하느님의 세계’를 말하는 종교 신학이 아닐까? 여기까지 모든 것인 ‘과학적 실험’에서 벗어나지만 완벽한 이론과 이성에 부합되는 것 들이다.

 

역사적인 접근, Historical Signs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하느님, 그것도 유대교-기독교적인 생각에서 보는 하느님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하느님을 말하는 ‘믿음 체계, 종교’는 지구상에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은가? 그 중에서 왜 나는 그리스도교 적인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왜 그것이 나에게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해답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불교는 아니고, 왜 일본 신도나 이슬람은 아닌가?

이것은 비교적 길지 않은 인간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다름아닌 유대-기독교에서 모두 사용하는 ‘구약성경’을 말한다. 이 구약성경은 신앙적인 bible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서’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이것은 현대적 세속적 과학적인 ‘보이는 것’을 찾는 관점으로 보면 ‘설화’에 가깝지만 그 속에서 ‘안 보이는 것’을 찾는 것 또한 의미가 크다.

제일 큰 의미는 바로 하느님의 존재와 ‘우주 창조’에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인 절대 유일 존재, singularity, 시 공간 이전의 창조의 모든 근원이 하느님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계시 받은 것이라면, 그 절대존재, 야훼라고 불리는 그것이 하느님이 아닐까? 물론 이런 접근 방식은 어느 정도 ‘믿음의 문’을 열고 있어야 이해가 가능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것도 ‘은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나가며

기독교에는 ‘믿음은 은총‘ 이라는 말이 있다. 은총이란 하느님이 주시는 ‘공짜의 선물’이란 뜻이다. 이 말은 누구나 받는 선물이란 뜻이지만, 인간 고유의 특성인 ‘자유의지’에 따라서 이 선물을 받고, 안 받고 한다. 애써서 거부만 안 하면 받는 선물이 바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는’ 능력인 것이다.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하느님이 주신 ‘이성’이라는 인간의 능력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이성이란 것은 신앙적 차원에 못 미치는 불완전한 것일 수 있다.

위에 나열한 여러 가지의 ‘변론, 이유’들은 개개인 마다 다른 의미로 비쳐지기도 하고 이런 이유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믿음이란 것이 ‘이성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서 믿음의 부정이 오히려 비이성적임도 보여주기에, 파스칼의 말 대로 ‘믿어서 손해 보는 것이 없다’는 것만 인정해도 어떤 무신론자에게는 거의 천지개벽 같은 변화를 주지 않을까..

 

  1. 추측에 그들은 주로 신앙간증이란 형식으로 이것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2. 나의 유일한 희망은 이것이 어떤 한 사람에게라도 ‘이 험한 세상이 알고 보면 생각보다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 그것뿐이다.
  3. 주로 장례행사: 장례미사, 연도 등을 통해서.

9백만 불 저택, KAL 007 30년 전, Shaklee

2013-09-01 13.39.14¶  지난 주 수요일부터 시작된 우리부부의 ‘어정쩡한 휴가’를 9월 1일 일요일 연숙의 생일로 마감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휴가는 육체적, 물리적이라기 보다는 정신적, 심신적인 느낌이 더 많았던 ‘머리를 비우는’, 집에서 보낸 며칠이었다. 평소 때의 daily routine들이 완전히 멈춘 것으로 정말로 시계조차도 쉬는 느낌을 만끽하였다.

올해 연숙의 생일은 조금 색다르게 외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집이나 새로니나, 나라니의 집도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아이들이 준비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독특한 것은 어느 ‘부자의 9백만 불짜리 거대한 저택‘에서 두 딸들이 함께 준비한 지중해식 steak류의 요리와 적당히 단(sweet) 생일 cake을 즐긴 것이다.

그 ‘저택’은 나라니가 언젠가 직장 동료에게 소개를 받아서 house-sitting이나 pet-sitting을 해 주던 집으로 나라니가 그날도 pet-sitting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리를 ‘주인 없는 집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백 만불 짜리 집들은 그런대로 가 보았지만 9백만 불짜리 집은 사실 처음 구경하는 셈인데 집의 크기도 크기지만 위치가 완전히 별장지나 다름이 없었다. 문제는 나는 그런 큰 집에 머무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고 심지어 불안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인데.. 무슨 ‘부자 콤플렉스’ 비슷한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게 ‘과시하며 사는 모습’에 대한 반감 때문일지도..

 

¶  올해 9월 1일은 물론 연숙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기념일’ 도 있었다. 그것은 1983년 9월 1일이었다. 그날 뉴욕 발 KAL 007기가 서울로 나르던 중에 소련 영공 부근에서 그들의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격추가 되어서 탑승객, 승무원 전원이 사망을 하였던 것이다. 30년 전의 일이다.

그 해 1월에 첫딸 새로니가 태어났고, 그날 9월 1일에 우리는 진짜 중화요리 ‘짬뽕, 자장면’ 등 생각이 간절해서 시카고로 드라이브 하고 있었다. 9개월 짜리 애기 새로니를 ‘중고차’ 뒷좌석에 싣고 시카고를 가면서 끔찍한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 얼마 전에 나는 학교를 완전히 떠날 결심을 하고 직장을 구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내 인생 ‘첫 직장’이 된 DTS[Dynamic Telecom Systems]에 job[software engineer]이 되어서 그것도 자축할 겸 집을 떠난 것인데 그런 뉴스를 접하게 되어서 시카고에 가서도 뉴스를 듣느라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다.

그 당시에는 비록 1962년 cuba의 핵 미사일 위기 때와는 비교는 안 되지만 그 나름대로 상당한 위기에 속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은 외교적인 관례를 깨고 소련을 ‘악의 제국, evil empire’로 선언을 한 것이다. 그 선언은 잡음이 많았지만 결국 몇 년 후에 소련의 붕괴로 이어지는 시금석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3년 당시 소련은 사실 이미 체제의 한계를 들어내었고 민간 항공기를 ‘위장된 간첩’으로 오인하고 격추까지 할 정도의 경직성과 낙후성을 들어내고 있었기에 ‘붕괴’는 시간 문제이기도 했다.

 

¶   Shaklee, 한글로 샤클리..라고 쓰는 이 이름이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들어보는 이름이고, 연숙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반년 전에 미국에서 완전히 퇴각을 한 일본의 화장품 POLA, 연숙의 미국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이 일본회사가 정말 멋없이 미국시장에서 사라지면서 허탈감을 감추진 못했던 이즈음에 등장한 것이 ‘미제’ Shaklee란 것이다.

돈은 둘째치고 경제활동은 어느 나이에서나 정신건강상 필요한 것임을 알기에 조금은 더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보고 있고, 연숙은 그 회사의 초청으로 San Francisco를 다녀왔기에 이제는 결정의 단계에 이른 듯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나의 역할’인데..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한다지만 그래도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경제활동’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번은 조금 각오가 다른데.. 맡기자, 맡기자.

factor: 마누라, 장모님 지수

한참을 생각했다. mother-in-law factor를 한글로 써야 한다면 무엇일까? mother-in-law는 아마도 아직도 남편이 부를 때, ‘장모, 장모님’일 것이다. 아내가 보면 시어머니겠지만 여기서는 대부분 남자가 주체이기에 장모님이다. factor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수학적으로는 ‘인수’ 이지만 여기서는 이유나 요인, 요소, 원인, 지수 등이 더 맞을 듯 하다. 그러니까 남자가 보면 ‘장모님 지수’요, 여자가 보면 ‘시어머니 지수’라고 할 수 있다.

The mother-in-law factor…

Experienced managers are seldom keen to leave large companies. Wives, mothers and mothers-in-law exert a strong influence on men not to join risky start-ups, says Yoshiaki Ishii, head of new-business policy at the industry ministry.

Japan's Abenomics, CREDIT: The Economist
Japan’s Abenomics, CREDIT: The Economist

 위에 나온 문장은 현재 일본의 경제 동향을 분석한 The Economist (주간 경제지)의 기사에 나온 것이다. 현 총리 아베.. 대기업에 치중된 일본의 불황 경제의 해결책은 ‘발 빠른 소기업의 창업’을 정책적으로 돕기로 한 모양이다. 현 일본의 덩치 큰 기업들이 문제라는 것이고, 그것을 메우어 줄 소기업들이 쉽게 창업이 되는 여건이 어려운 이유 중에는 대기업의 유능한 경영자들의 ‘마누라, 엄마, 장모님’들이 ‘위험성이 많은’ 새로 창업된 업체로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있다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평소에 가졌던 전형적인 일본 남자들의 인상이 맞지 않는다. 그들은 집에서는 ‘제왕’의 위치에 있었지 않았는가.. 그렇게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이곳도 ‘여자의 힘’이 돌이킬 수 없는 ‘위험 수위’에 이른 모양이다. ‘마누라, 엄마, 장모님’ 이면 한 남편을 ‘완전히 포위’한1 여자의 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구상에는 이슬람 권이 유일한 ‘남자의 세계’인 모양이다.

영어 유행어에도 factor가 들어가는 말이 적지 않고 그 중에서 가족관계와 연관이 있는 것도 많다. 생각나는 것 중에 WAF란 것이 있다. 이것은 wife acceptance factor의 약자인데, 간단히 말하면 ‘마누라의 승인,인정 지수‘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이 말은 technology 특히 computer 분야에서, 남편이 어떤 gadget을 집에 사가지고 와서 사용을 할 때 ‘마누라’가 그 것을 얼마나 어려움 없이 잘 사용을 할 것인가 하는 정도를 나타낼 때 쓰인다. 이 ‘마누라 지수’가 높으면 그 ‘기기’는 더 잘 팔릴 확률이 높은데, 이유는 간단하다. 애플의 제품같이 ‘바보’들도 쉽게 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의 ‘마누라’란 말은 사실 ‘부정적’인 의미로 쉽게 말하면 ‘바보’란 뜻에 가깝다. 우리 ‘바보’ 마누라도 쉽게 쓸 수 있는 ‘기계’라면.. 얼마나 사용법이 간단할까, 하는 뜻이다. 이런 논리는 사실 말하면 ‘정치적으로 틀린, politically incorrect‘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류의 말을 농담이라고 발뺌을 해도 잘못하다가는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참 세상은 많이도 변했고 무섭게도 변해간다.

  1. 거기에 딸 몇 명이라도 합세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perfect storm인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어쩌구? 위키 빠가!

생전의 구상 시인
생전의 구상 시인

얼마 전에 시작된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2014년 부활영세자 교리반, 수녀님을 돕는 봉사자 역할을 시작하면서 주 교재인 ‘여기에 물이 있다1를 영세 예비자들과 같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교리’ 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게 참 ‘부드럽고, 친절하게‘ 잘 꾸며진 책이었다. 어제 교리반에서 공부 한 제2과의 서두에 오랜만에 보는 ‘구상’ 이란 이름이 보였다. 구상(具常) 님은 시인이자 천주교인으로 내가 젊었을 때 그에 관한 기사(글과 사진)들을 여러 잡지에서 많이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물론 내가 천주교의 ‘천’ 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잡지에서 보았던 시인의 얼굴모습도 떠 오르고, 천주교 신앙을 깊은 묵상으로 고백하는 듯한 시와 글도 기억난다. 그것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다시 그 시인의 이름을 본 것이다.

불현듯 그 시인의 근황과 그의 시의 세계2 등이 궁금해 졌다. Quick googling으로 시인이 우리 어머님과 같이 1919년 생이시고, 어린 시절을 역시 우리 어머님 고향인 함경남도 원산 임을 알게 되어 너무나 반갑고, 어렸을 때 아마도 어머님 집안과도 장날에 만났을 수 있다고 상상하기도 했다.3 시인은 우리 어머님 보다 일년을 더 사셔서 2004년에 선종을 하신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글 Wikipedia로 가보니 아주 실망스럽게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성의 없이 쓰여진 듯 보이는 글이 뎅그라니 보였다. 누가 이 기사의 저자인지 나는 알 길이 없지만 그의 배경이나 학식, 진솔함 등에 관한 추측은 가능했다. 한마디로 빠가.. 그것도 악질 빠기급에 속한다. 빠가. 빠가.. ‘해방 후 194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산4..’ 어쩌구 하는 글 하나로 이 빠가, 젖먹이 같이 유치한 듯 느껴지는 이 편집자가 현재 ‘한글 Wikipedia’의 대표적인 수준이라면 아뿔사.. 이곳도 역시 ‘주사파, 빨갱이’들이 득실 거리는 구나.. 하는 한숨만 나온다. 아마도 이 기사의 저자는 구상 시인이 ‘악질, 반동 천주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생각한다.. 시인의 형님 신부님과 어머님이 빨갱이들에게 ‘처형’이 된 것을 이 빠가는 아는가? 어떻게 이런 ‘역사 수정주의 빠가’들을 한글 Wikipedia에서 몰아 낼 것인가? 으이구~~ X가 갈린다.

 

  1. 글 차동엽, 그림 김정자, 미래사목연구소 간, 예비신자 교리 & 소공동체 나눔용
  2. 이제는 나에게 시의 세계는 옛날처럼 먼 곳이 아니다.
  3. 그 당시 원산에 살던 사람들은 그런대로 서로 얼굴이 낯 설지 않을 정도로 지냈다고 들었다.
  4. 야 이 빠가야, 어째서 1946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어쩌구란 걸래 같은 말이 관계가 되냐? 구상 시인에 대한 글에, 조선민주주의인민이란 쓰레기 같은 말이 걸 맞냐?

엔지니어가 아니었으면..

What would you do for a living if you were not an engineer? 당신의 career job 이 engineer(electrical, electronics, computer)가 아니었었다면? EDN network (Electronic Design News online) 의 community blog, Voice of the Engineer에서 이런 식으로 참 어려운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한 대답이 참 재미있고, 다양함을 보고 ‘인생은 engineer’가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신선함’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 질문의 대답은 사실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engineer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같은 심리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을 별로 못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대답을 해야 했다면..예를 들면 이런 대답들이 그곳에 있었다.

  • repair person
  • swim suit model
  • teacher
  • shoe repair
  • astronomer
  • fighter pilot
  • media art
  • teaching grammar, spelling to engineer
  • ski patrol or avalanche forecasting
  • driving boat for fishing tourist in Caribbean
  • programmer
  • herb grower
  • burglar
  • psychiatric doctor
  • organic farmer
  • addictions counselor
  • general contractor
  • outdoor job
  • landscaping
  • poet
  • train driver
  • blacksmith and farmer
  • making movie where I sing and act
  • professional musician
  • beach bum
  • architect, chef, artist , anything creative
  • commercial diver
  • teaching technical history
  • recording/mixing engineer
  • surgeon
  • military sniper
  • medical area
  • running a convenient store in a rural area
  • a problem solver
  • drinking cold beer under some enlightenment tree
  • lawyer
  • touring the world in a Rockn’roll band
  • growing medical marijuana
  • teaching engineering
  • chef
  • corpse
  • psychiatrist for engineers
  •  

제일 웃기는 것은 물론 corpse와 burglar.. 물론 농담이었을 것이지만, engineer말고 다른 것을 전혀 할 줄 모른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고,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도둑질’ 밖에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대부분 외골수 인생을 사는 것일까?

 engineer와 그런대로 비슷한 방향에 있는 것으로는, general contractor, blacksmith, surgeon, medical, problem solver, teaching engineering, architect, repair person, fighter pilot, astronomer 정도가 아닐까? 나머지 것 들은 engineer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기에 아마도 해 보았자 타고난 재질과 정열이 없으면 실패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랴 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평생직업이 되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돈만 많이 주면 그런 것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돈과 명예와 상관없이 그런 행운이 진정한 행복이라면 나는 사실 행운아라고 나를 위로하며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결론적으로, career electronics, computer engineer 는, 내 생각에, 불행하게도 다른 직업으로 ‘전업’하기가 참 힘들 것 같다.

 

에이커 빌크, 해변가의 나그네

Acker Bilk 에이커 빌크Acker Bilk, 에이커 빌크.. Stranger on the Shore, 그때 이 연주곡을 ‘해변가의 나그네‘ 라고 불렀는지, 원어인 영어이름으로 불렀는지, 확실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쓸쓸한 느낌’의 연주곡을 들으면 생각, 기억, 연상, 회상되는 것은 (서울 중앙)고등학교 2학년 때쯤 일까.. 이런 류의 ‘외국 곡’에 심취하던 그 나이의 우리들은 거의 오밤중에 시작되는 ‘한밤의 음악편지’ 같은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을 생명수처럼 기다리고 즐겼다. 진행자 DJ는 음악편지라는 ‘엽서’사연을 줄기차게 접수하고 읽으며 그 사연이 ‘요구’하는 해외 pop song를 방송했다.

대학시절에 한때 나는 ‘본격적’으로 미국 rock/folk/pop 류를 ‘공부’하며 빠졌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저 ‘아마추어’수준에서 듣고 좋으면 즐기는 그런 식이었다. 그 때 상당히 좋아했던 것 중에 바로 이 ‘잔잔하고, 쓸쓸하고, 감상적’인 연주 곡 stranger on the shore가 있었다. 가끔 죽음을 곁들인 철학적 감상에 빠지던 본격적인 입시공부 직전의 소년의 황금기 고2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일기를 본격적으로 즐기며 쓰기시작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유치한 글들을 쓰던 때였다. 문학이나 시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문외한이었지만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남기려 애를 쓰긴 했다. 바로 그 당시에 듣던 곡 중에 나는 이 ‘쓸쓸한’ 느낌의 연주 곡을 너무나 좋아했었다. 이 곳의 배경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야 이 연주곡 Stranger on the Shore와 연주가 장본인 영국인 Acker Bilk란 사람의 ‘정체’를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나의 주 관심사는 이 곡이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이 곡의 원 제목은 사실 Jenney, 그의 갓난 딸의 이름이었고 1962년 그의 딸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곡한 곡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영국의 TV program에서 쓰려고 제목을 Stranger on the shore로 바꾼 것이 대 히트를 한 것이다. 얼마 후에 이 곡은 미국에서도 top chart에 올라 백만 장 이상이 팔렸다. 내가 자주 듣던 것이 1964년 이었으니 참 오랜 동안 인기가 있었던 곡이었음이 틀림이 없었다. Acker Bilk독특한 저음의 클라리넷은 정말 이 곡이 주는 느낌을 확실히 전달해 주고 있다. 이제 80이 훨씬 넘은 그는 아직도 ‘왕성한’ 연주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 곡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따라다니고 있다.

 

 
Stranger on the Shore, Acker Bilk 1962

 

主後(주후) 2013년, 8월 22일

¶  BC, AD, BCD, CE… OH MY!  내가 감사하며 애용하는 Wikipedia 류의 web service는 물론 가끔 donation을 할 정도로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 옛날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항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필수의 서비스인 것이다. 비록 최고의 전문가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대신 충분히 많은 일반인에게 ‘검증’을 받고 있는 지식들이라 생각하는 것 보다 질이 좋음을 알 수 있다. 그 수많은 기사들의 폭과 깊이, 신속한 update등등.. 책으로 된 백과사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여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soft information에 해당되는 것인데, 지나친 PC (Political Correctness) effect가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 듯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좋은 정보’로 취급되는 성향을 이곳에서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지나친 세속적 편향도 덩달아 춤을 추며 이곳으로 잠입하는 느낌도 든다.

예를 들면 CE 와 BCE의 연대 표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AD (Anno Domini)와 BC (Before Christ) 대신 CE(Common Era) 와 BCE(Before Comment Era)로 표기하는 것이다. 해당 기사를 쓴 ‘봉사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아예 Wikipedia 자체에서 ‘권장, 심지어 강요’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이 쉽게 말하면 PC, politically correct한 것이다. 왜 전통적인 것보다 이런 방향으로 나간 것일까? 이렇게 하면 fund raising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일 지도 모른다. ‘비신자, 비기독교인, 무신론자’의 숫자가 엄청 많고,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 옹졸하기 짝이 없는 ‘새 대가리’ 적 발상이다. 기원 후, 기원 전을 쓰면서 ‘예수님 후’, ‘예수님 전’이라고 생각하며 서기 1968년..을 쓰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한번 어깨를 펴고 당당히 써 보자.. “오늘은.. 주후, AD: ANNO DOMINI, 기원 후 2013년 8월 22일!” 참.. 이래서 political correctness가 필요이상으로 욕을 먹나 보다. 

 

¶  GET A LIFE! FACEBOOKERS..: 아주 오랜만에 들려본 the economist 웹사이트 에서 흥미롭고, ‘나의 느낌이 역시 맞았구나..’ ‘I told you so’ 하는 나의 내면의 소리를 확인하는 기사를 보았다. 한마디로 “Facebook에 목매는 인간들아, (진짜) 삶을 살아라!” 인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대화’를 하는 것과 ‘그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도 나는 처음부터 이런 류의 ‘거대한 가짜 삶의 광장’을 제공하는 Facebook에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기본을 무시한, 잔머리만 굴리는 요새 ‘아이들”의 장난이 거대한 돈과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쓰레기’에 관한 뉴스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난데없이 전혀 모르는 인간들이 ‘친구 합시다’ 하고 오는 추태에는 진저리가 칠 정도였다. 우리 두 딸들도 peer pressure에 약한지 한 때 빠지더니 요새는 많이 벗어난 듯 하다.

심각한 문제는 아예 그 속에서 완전한 ‘다른 삶’을 사는 인간들인 것이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구별을 못하며 사는 거대한 ‘광고의 밥’ 인 이런 부류의 사람들.. 그야말로 Get a Life! 라고 충고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덩치가 커진 이 Facebook은 드디어 실험용 연구대상까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국은 실상이 들어나게 되고, 결과는 그들(ZukerXX & kids)에게 별로 좋지 않은 듯하다.

이 economist의 기사를 읽어보면 아주 조직적인 실험,연구를 한 것인데 결과는 그 곳에서 사는 삶은 한마디로 miserable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곳에 있는 거짓으로 도배가 된 허구의 삶들과 자기 것을 비교하는 자체가 불행인 것이다. 실상과 거리가 먼 자기의 공상을 쫓으며 살려니 결과는 뻔 한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이제는 NSA의 철저한 감시대상의 제1위에 있는 그들의 privacy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  바울라 표 커피: 얼마 전 우리부부의 레지오 마리애 본가인 자비의 모후 단원님 이 바울라 자매님이 조그만 상자를 건네 주셨다. 차량봉사 관계로 자매님을 레지오 주 회합 뒤에 모셔다 드리면 가끔 뒤뜰에서 정성껏 키운 야채나 꽃나무를 즐겁게 나누어 주셨는데, 이번에는 색다른 느낌의 조그만 상자였다. 혹시나 해서 미리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커피’라고 하셨다.

이것은 정말로 뜻밖의 느낌이었는데, 물론 내가 워낙 커피를 즐기다 보니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지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였다. 자매님 식구가 드셔도 됨 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자매님 식구는 별로 커피를 ‘잠’ 때문에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그것은 우리와 친숙했던 Caribou ground coffee pack이었다.

물론 우리가 사서 먹어도 되지만 이런 ‘공짜’ 는 참 즐거운데.. 공짜라서 라기 보다는 그렇게 주신 자매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런 것이다. 매일 아침 나는 칠흑이 간신히 걷힌 이른 아침에 이 커피의 맛을 ‘혼자서’ 음미하며 잠을 깨고 ‘신나게 돌아가는 머리’의 힘을 빌려 나의 생각과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고마운 자매님의 마음을 생각하기에 그 Caribou Coffee를 ‘바울라 표 커피‘라고 이름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바울라 자매님! 

 

¶  CRAZY NEW NORMAL: BRADLEY MANNING 이 알고 보니.. CHELSEA MANNING? 하도 ‘미친’ 뉴스들이 요새는 ‘대부분 정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 희한(稀罕)한 기사에 나는 완전히 오금을 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정도로 희한한 CRAZY NEW NORMAL인 것이다. 별로 거대한 정치적인 안목이나 생각 없이 그저 ‘자신의 불만’만 생각하며 1급 국가기밀 수천 페이지를 양심의 가책 없이 여파나 파장에 상관없이 폭로하며 자신의 자격지심을 위로했던 ‘병신중의 병신’처럼 보이던 그 ‘남자’가 갑자기 ‘여자’로 성전환을 한다?

한마디로 정말 이것이야말로 희한 중의 희한.. 희한 올림픽의 다이아몬드 메달 감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세상의 누가나 평등하다, 절대로 남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는 ‘기분 좋은 슬로건’에 목을 맨 신 현세의 일 면이 되어가고 있다. 비겁 자 중의 비겁 자 처럼 보이는 그가 감방에서 여자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일까.. 참 모골이 송연 해 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  RETRO-BLOG, TAKE ME TO 1968!:  근래 들어서 blogging하는 것이 그런대로 자연스레 습관이 되면서 나만의 retro-blogging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니까 어떤 날, 문득 생각난 것을 쓰다가 다 못쓰고 내버려 둔 것을 ‘후일’에 이어서 쓰게 된 case 가 바로 이것이다. 쓰기 시작했을 때의 생각이 시간이 지나서 조금은 바뀌거나 했어도 생각의 출발점은 간직하고 나중에 읽었을 때 ‘역사적’ 가치가 더 있는 것이다.

특히 바쁠 때, 그런 ‘지나간 블로그’를 더 많이 처리해야 할 때가 많다. 미완성 된 블로그를 나중에 ‘완성’을 시키는 것이다. 현재도 나는 자그마치 5개 이상의 retro-blog과 씨름을 하고 있다. 제일 오래 된 것은 거의 6개월 전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대작’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역사적 기록’인 memoir인 것이고 그 중에서 연세대 2학년 시절에 관한 회고록이 있다. 대학시절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황금기’애 속하기에 이야기도 많고 생각도 많았던 시절이다.

나의 그 때는 20세였던 1968년.. 기억력과 최후의 사투를 벌리며 회고해 내고 있는 이야기들.. 나에게만 의미가 있던 사담들이지만.. 누가 아리오, 그 이외의 관련된 사람들이 보게 될지도. 몇 년 전 일본의 인기 ‘테레비’ 드라마였던 ‘무리한 연애‘ 라는 미니 시리즈를 보면 왕년의 십대의 우상이었던 지금은 환갑이 된 주인공이 택시를 탈 때, 택시 기사가 ‘어디로 모실 깝쇼?’ 하고 물으니 주인공 왈, 무심결에 ‘1968년으로 갑시다!‘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주인공과 100% 같은 심정이다. 비록 북괴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 근처에서 설쳐댔어도, 정말 걱정, 근심.. 있어도 그 때는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半島の春, 반도의 봄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1941년 영화 ‘반도의 봄’

얼마 전에 근래 자주 찾아가는 인터넷 ‘한국영상자료원‘에 새로 ‘올라’ 온 옛 영화1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것이야말로 옛 것 중의 옛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진규, 문정숙, 최은희,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등이 주름을 잡았던 신상옥 전성시절 60년대 중반의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 바로 1941년 영화,반도의 봄, 半島の春2 이였고, 여기의 반도는 지리적 반도, peninsula가 아니고 일본이 조선을 칭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완전히’ 일제시대 (요새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에 나온 것..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일본영화가 아니던가. 물론 ‘조선인’들이 만든 영화니까 일본영화는 절대로 아니다. 영화의 기법, 영상, 배우 등을 보면 사실 내가 보았던 50년대 초의 영화3와 별 차이가 없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커다란 감정의 물결로 다가왔다.

나는 일제시대를 겪지 못했지만 나의 부모님 세대는 그 속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고, 결혼을 했었기에 그 시대의 영향을 우리도 간접적으로 ‘고스란히’ 받았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고, 그 ‘숨기고 싶은’ 영향의 원류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당시 사회상은 교과서에조차 묘사가 된 것이 없고4, 영화는 커녕 가족 몇 명을 제외한 흑백사진 조차 본 적이 없었기에5

사실 나에게 그 당시는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일제시대에 조선에서 어떠한 ‘말’을 쓰며 살았는지, 그러니까 우리 말과 일본어 등이 어떻게 섞여서 쓰였는지 나는 궁금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조금 이해가 갔다. 일본어를 쓰는 대목에서는 한글 자막이 없었고, 우리말이 나오면 일본어 자막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역시 그 당시의 공식언어가 일본어 였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실감을 하게 된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그런 것을 물어보면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그런 혼합 언어 정책이 그런대로 큰 무리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영화를 자세히 보면 어떤 부분에서 일본어를 쓰고 어떤 부분에서 우리말을 썼는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영화의 캐스트나 스탭 진들의 이름을 보면 대부분이 우리 이름이고 간혹 일본 이름이 보이는데, 그것은 1941년 때만 해도 창씨개명6 이 널리 퍼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궁금하다.

3.1운동, 유관순 같은 애국지사에게 행한, 잔학했었다는 일제시대에 대한 ‘일방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어렸을 적에는 빨갱이 이상으로 ‘죽음을 불사한 학대’를 ‘매일’ 받았던 것으로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 역시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일교육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고스란히 경험을 한 어머님께 물어보면, 아주 다른 반응을 보곤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각도로 이 영화를 보면 우리의 반일교육이 완전히 일방적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춘향전 영화 같은 ‘민족적’인 영화를 찍는 조선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1941년이면 일본제국이 한창 진주만을 습격, 미국에 도전을 하던 살기등등하던 시절인데, 춘향전과 연애를 하는 ‘조센징’ 영화를 찍게 허가를 하였을까..

이 영화에서 일제시대의 다방과 서울의 풍경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고 했을 까 조금은 궁금증도 풀리는 듯 했다. 그러니까 백문이 불여일견, 이렇게 보니까 이해가 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를 보면 ‘목포의 눈물‘ 이 아코디언 연주로 구성지게 흘러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한 서린’ 노래도 자유롭게 부르고 듣고 했던 시절이 아니던가?

1930~40년대의 미국영화와 이 영화를 비교해도 사실 기법이나 연기 등이 큰 차이가 없이 보였다. 아마도 그 당시 일본의 영화 수준이 이 정도였을 것이라 추측도 한다. 비록 해방 후, 6.25 동란으로 우리 영화가 타격을 받았을 지라고 그때의 수준이 있었기에 곧 바로 60년대의 영화 전성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마지막 장면이 ‘성공을 위해서’ 동경유학을 떠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방 후 영화에서는 ‘성공을 위해서’ 미국유학을 떠나는 것을 바뀐 것.. 참 시대와 역사의 요술이 아닐까?

 

 spring-peninsular-2서울역, 서울은 케이죠, 경성으로 불리지만 그래도 한글로 쓰였다

 

spring-peninsular-6이 귀여운 여자가 50년대 영화에 많이 출연한 친근한 ‘할머니 배우’ 복혜숙씨였다.

 

spring-peninsular-11이것을 보면 일제시대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 그때도 이런 멋쟁이가 있었구나..

 

spring-peninsular-4너무나 익숙한 50~60년대의 가정집 마당을 연상케 한다

 

spring-peninsular-5학생이 살던 방, 이것도 너무나 친숙한 광경이다

 

spring-peninsular-8영화 속의 영화, 춘향전.. 태극이 선명하고 춘향이도 예쁘다.

 

spring-peninsular-7경양식점, 이런 류의 ‘양식’은 아마도 일본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spring-peninsular-10아저씨와 어르신, 대청마루에 앉은 모습도 전혀 낯설지 않다.

 

spring-peninsular-3당시 소설에 많이 나오는 동경유학생들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1. 새로 올라온 것 중에 ‘미몽’ 이라는 1930년대의 영화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무성영화 수준이었다.
  2. 이것은 공식적인 영화제목이고 개봉된 이름은 ‘아름다운 청춘’ 이었다고 한다.
  3. 예를 들면 1954년 영화 ‘운명의 손‘이나 ‘과부의 눈물‘과 같은…
  4. 이것은 공산주의와 비슷하게, 완전히 정책적이고 의도적이었다.
  5. 우리 가족은 6.25를 겪으며 거의 모든 역사적 유물들이 분실되었다.
  6.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이름을 일본 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던 것.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7

아마존닷컴에서 시작된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확산

2013.08.16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2010년 6월 영어버전 졸저,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 Needs Evolution and Dynamic Management가 독일 Lambert Academic Publishing(LAP)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어 Amazon.com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2008년에 이미 ‘Dynamic Management Theory (Hanyang Univ. Press)’라는 졸저를 Amazon.com을 통해 선을 보이긴 했지만, 국내대학 출판이라 외국인에겐 생소할 것으로 생각되어 서둘러 2년 후 ‘Why Industrial Hegemony Shifts’를 다시 선보이게 된 것이었다.

 니즈진화라는 동태적 관점에서 니즈맞춤혁신을 통해 지속번영을 도모하는 다이나믹 매니지먼트라 는 신(新)기업전략이론을 가장 극명하게 내 보일 수 있는 실증사례가 아무래도 산업주도권 이동일 것으로 판단하고 세계 유수산업들을 대상으로 산업주도권 이동원리를 정성적(qualitative)으로 구명(究明)하고자 한 것을 재차 선 보인 것이다.

그런데 LAP 졸저의 출간에 앞서서, 기업전략과 관련하여 그간 정태적 관점의 이론에 익숙한 학자들 특히 미국과 유럽의 석학들에게 동태적 관점의 졸저가 어떻게 비쳐질까를 고려하며 세계 석학 십여 분에게 출간용 원고를 미리 보내 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고자 하였다.

 약식형태의 서평을 보내 온 분은 미국 하버드 경영대 학의 Gary Pisano교수, Dartmouth 대학의 Margaret Peteraf교수, 영국 Warwick 경영대학의 John McGee교수, 스위스 IMD의 Bala Chakravarthy교수, 동경대 Junjiro Shintaku교수, 북경대 경영대학(GSM) 부원장 Changgi WU교수, 서울대 조동성교수를 비롯하여 몇 분이 더 있었다.

의례 서평에는 호평이 주류를 이루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던 필자의 예상대로 평해준 분들 모두가 호의적인 평을 보내주었는데 그 중에서 필자의 의중을 가장 꿰뚫어 본 이는 Bala교수였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인도태생 미국인으로 한동안 최연소 하버드 박사라는 별칭이 붙었던 분으로 전략 프로세스(Strategic Process) 분야의 석학으로 일찍이 젊은 나이에 세계전략경영학회(Strategic Management Society) 석좌회원이 된 스위스 IMD교수다.

 Bala 교수가 보내 온 약식서평은 이러했다.

8월의 가을바람, Putin

¶  Old Normal  무언가 올해의 여름은 정말, 참말, 진짜로 이상하다. 옛날의 정상적 여름 날씨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요새 유행하는 new normal이 아닌 old normal은 피부로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올해 Acme Cool Air같은 무슨 무슨 에어컨 서비스 업체들 대다수가 도산을 할 지경일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간 new normal이 된 화씨 95도 이상의 여름 더위에 그 냉방 업자들 받기 힘든 은행융자로 큰 투자를 해서 지난 몇 년간 지독한 호황으로 $$$을 억수로 벌었고, 올해는 아마도 더 투자를 하고 100도가 넘는 습기에 찌들은 여름을 기다렸을 것인데,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우리 미국본당 신부님, 만나기만 하면, pray for rain.. 을 거듭하시더니, 소낙비, 가랑비, 써늘한 비, 주룩주룩 장마 성 폭우.. 각가지 선을 보이고 그것도 모자라 기온은 아침 저녁이 꼭 가을처럼 느껴지고, 어제와 오늘은 100% ‘가을이라 가을 바람~~’ 의 노래가 연상되는 첫 가을 맛을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억수같이 나가던 전기료가 ‘푹’ 절감이 되었고, 밤에 잠도 잘 잘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기후가 잠깐 ‘어리둥절’ 했었을 것이라 생각은 되지만, 참 세상은 never say never라고.. 오래 살고 볼 것이다.

 

Vladimir Putin, credit: WikiMedia¶  Putin   요새 가끔 news를 보면 가관인 것이 있다. 나의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할 정도인 것은 이것이다. 종교와 신앙이라면 아편이라고 이 잡듯이 탄압을 하던 맑스 Marx, 레닌 Lenin의 공산주의자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연방, 지금은 러시아가 이제는 종교의 이름으로 homosexual의 정치적, 사회적 파급을 법으로 조직적으로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 두 명의 소위 최고 지도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자유민주의 세계 종주국이라는 미국의 대통령, ‘바락 후세인 오바마(Barak Hussein Obama)’ 라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 그 하나고, 또 하나는 공산당 체제의 소련연방 하에서 정치적 반대파를 잡아내던 옛 소련연방 정보부 출신의 현 러시아의 푸틴(Putin) 대통령이 또 하나다. 원래 공식대로라면 오바마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100+% 보장을 해야 하고 푸틴은 가차없이 ‘아편’인 신앙의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

yet another stupid presy그런데 최근의 사태는 완전히 거꾸로 흐르고 있다. 문제의 불씨는 바로 homosexual들의 ‘권력 확장’이다. 바락 후세인 오바마는 각가지 알 수 없는 논리로 그들(homo-sexual)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결혼’을 지지하며, 급기야는 군대나, 보이 스카웃 (걸 스카웃도 마찬가지일 듯)도 그들을 ‘쌍수로 환영을’ 하게하며, 급기야는 각종 종교, 신앙계열의 기관, 학교, 병원들에 ‘법으로 압력’을 넣고 있다.

이래서 나온 것이 ‘종교의 자유’를 지키자는 slogan인데,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것인데 어찌해서 이렇게 된 것일까? 반대로 푸틴 대통령은 ‘기독교가 러시아에 준 바람직한 영향‘을 언급하면서, ‘법으로’ 그들의 ‘확장’을 제한하려고 한고 있다. 참.. 이러니 오래 살고 볼 것인가? 완전히 두 명의 ‘대통령’의 입장이 바뀐 것이다. 솔직히 현재 나는 푸틴 대통령에게 과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솔직한 심정이다. 소신 있는 용단이라고까지 치부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의 과거 행적을 보아서 ‘깊은 정치적 포석’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은 간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런 용기 있는 지도자가 현재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6

다이나믹 매니지먼트, 과연 유용하며 실용적인가?

2013.08.12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몇 해 전 어느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 인사교육담당 책임자라는 사람이 자사 중견간부사원을 대상으로 한 산업교육 프로그램에 동참해 달라며 강의주제를 혁신경영으로 요청해 온 적이 있었다. 그는 그 회사에서 16년간이나 인사교육에 관해 정평이 나 있는 분이라고 교육생 누군가가 필자에게 귀 뜸해 주었다.

 필자는 강의에 앞서서 그 회사의 기본정보를 알고 강의에 임하고자 그 인사교육담당 책임자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1) 귀사의 주종사업이 무엇이며 어떤 제품/서비스를 어느 시장의 어느 고객의 무슨 니즈를 충족시키려고 생산・제공하고 있는가?

2) 제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이며 어떤 면이 고객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타사 것보다 더 우수하거나 부족한 면은 무엇인가?

3) 제품생산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이 몇 개 정도이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어디의 누구로부터 조달 받는가?

 

그런데 그의 답은 놀랍게도 이들 질문에 대해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거의 막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