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빌, 조지아: Doraville, GA

Entering Doraville
Entering Doraville

도라빌, 조지아… Doraville, GA USA.. 도라빌은 조지아 주 아틀란타 수도권에서 아틀란타 시에 바로 인접한, 행정구역상 DeKalb county내의 아주 작은city,시에 해당하는 곳이다. 아틀란타 시의 바로 동북 쪽에 접한 이곳은 아틀란타 수도권 지역에 사는 한인들에게는 거의 ‘고향’같은 곳이다.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 전까지 이곳은 명실공히 Korea Town구실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때의 역사와 기억을 간직하며 아직도 Korea Town의 ‘가느다란’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1996년 올림픽 훨씬 이전에 아틀란타로 왔기에 그 당시의 역사와 모습들, 느낌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현재는 거의 주일마다1 ‘느끼고, 다니고, 듣고, 먹고’ 하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도라빌은 1871년에 ‘생긴’ 역사가 오래된 곳이지만 1940년대까지는 아틀란타지역의 농산물 공급처 구실을 하던 농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나면서 GM(General Motors)이 이곳에 assembly plant (자동차 조립공장)2을 계획하고, 그에 따른 철도가 가설되면서 급성장을 시작한다. 1950년도에 인구가 472, 1964년의 인구가 6,000여명으로 불어나고, 1980년대가 되면서 아틀란타 지역으로 유입하는 이민자들이 이곳을 ‘관통’하는 Buford Highway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미국 전역을 통해서 아시아 이민에 가장 밀집한 지역으로 꼽히게 되었고, 중남미 계통의 이민 인구들도 급성장 하게 되었다.

그것에 걸맞게 1992년에는 수도권을 연결하는 MARTA system (고가전철과 시내버스) service가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자동차업계의 불경기로 GM의 Doraville Assembly Plant가 2009년에 문을 닫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 처음에는 Atlanta Falcon football stadium이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지금은 town center 가 계획되기도 하지만 당분간은 공터로 남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래도 그 주변에 대형 소매업체들이 들어오고 한인계열의 H-Mart 도 개업을 해서 활기를 띠고 있다. 도라빌과 ‘인연이 있는’ 사람 중에는 우주비행사(astronaut) John Casper가 이곳에 살고 있고, 1970년대부터 활약하던 Southern Folk/Rock group인 The Atlanta Rhythm Section(ARS)가 이곳을 거점으로 활약을 하기도 했다.

올림픽 이후, 타 주의 부자들이3 쌓여가는 cash를 앞으로의 호황 경기를 기대하며 이곳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성급한 사람들은 아예 이사 짐을 들고 이사를 오기 시작했다. 그 때가 바로 subprime bubble이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 오르던 때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 (우리는 제외)이 어디선가 무섭게 흘러나오는 ‘돈, 돈, 돈’에 치고, 취하며, 쓰고, 투자하던 그런 몇 년이었다. 돈으로 돈을 ‘만들겠다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형태의 ‘돈벌이’를 못하면 완전히 바보취급을 받던 그런 시절, 의젓하고 학자적인 engineer가 하루아침에 private loan(사채) 업자로 변신을 하고, 20+ 애 띤 ‘여대생’이 건물 한 층을 완전히 세를 내어 ‘융자 회사’를 차리던 그 시절이었다.

그런 ‘미친’ 탁류 속에서 예전의 도라빌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투자가치가 별로 없는 곳으로 ‘융자 업자’들이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부동산의 핵은 서서히 도라빌의 ‘훨씬’ 북쪽으로4 올라가며 새로운 한인타운도 따라 올라가기 시작하고, 즐비하던 한인 업체들도 하루가 급하게 올라가 버렸다. 새로 개발된 곳에는 기업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업체들, 주로 supermarket5 들이 그곳의 명소로 자리를 잡게 되기도 했다.

 우리가 1989년 여름에 위스컨신 주 매디슨에서 이사를 왔을 당시에 이미 이곳 도라빌 은 Buford Highway6 주변으로 한인 경제활동의 중심, 주거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이후 서서히 한인타운은 축소가 되어갔고 그 자리에 한인 이민 역사보다 짧은 역사의 월남과 나머지 중국, 히스패닉(주로 멕시코) 이민들이 그 자리를 서서히 채워가게 되었다. 그들은 한인 같은 조직적인 자본력이 거의 없이 가족단위로 사업을 하기에 아무래도 값싼 부동산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세 좋게 도라빌을 떠나서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갔던 사업체들은 위에 언급한 subprime bubble으로 인한 지독한 불경기로 완전히 성장을 멈추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이곳 도라빌은 거꾸로 예전보다 안정되고 심지어는 조금씩 ‘보기 좋은’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는 정말 예상치 못한 현상을 목격하게도 되었다.

우리는 이런 도라빌의 Korea Town ‘경기 변동’에서 조금 중립적인 입장에 있다. 도라빌에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이곳(도라빌)도 아니고 저곳(북쪽 지역)도 아닌 마리에타 지역(서쪽)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도라빌이 다른 곳보다 훨씬 가까운 만큼 이곳이 더 이상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 입장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의 많은 시간이 현재 도라빌에 건재한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성당‘ 주변에서 보내진다는 사실이다. 비록 제2의 한인 성당이 분가를 해서 둘루스에 생겼지만, 그곳은 역사가 워낙 짧아서 앞으로 어떻게 지역적 역할을 할지는 미지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인들의 자랑인 H-Mart가 도라빌 다운타운 근처에 새로 생겨서 사실 우리는 그 먼 둘루스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기에 현재의 상황은 별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한인 사회, 경제가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고 그것에 따라 이런 지역적인 변화도 예측을 할 수 있을 듯하다.

Atlanta Rhythm Section, 1977 CREDIT: WikiMedia
Atlanta Rhythm Section, 1977 CREDIT: WikiMedia

위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도라빌은 원래 ‘농촌’에 속한 한가한 곳이었는데 철도가 들어오면서 교통, 운송의 거점이 되었고, 아틀란타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던 정말 ‘한가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시골’이었던 셈이고 이곳의 토박이들도 ‘진짜 백인들’ 조지아 무지랭이, redneck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민자들이 비싼 아틀란타에서 살기 힘들어지면서 이곳으로 나오게 되면서 현재와 같이 ‘유엔 총회’를 방불하게 하는 인종의 분포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골’티가 나는 곳에도 유명한 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는 1960~70년대에 미국 전국적으로 유명하고 알려졌었던 Southern folk, rock group ‘The Atlanta Rhythm Section‘ 이 바로 이곳에서 출발을 하고7 이곳에서 활동을 했었다. 나 또한 그들의 hit song, ‘Do it or Die‘를 1970년대 말에 많이 좋아 했었다. 지금 그들은 이곳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이름에는 항상 도라빌이 따라 다니고 있는데, 그들의 노래 중에는 ‘Doraville‘이란 1974년에 발표된 것도 있어서 그들은 도라빌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DoravilleAtlanta Rhythm Section, 1974

 

Do It or DieAtlanta Rhythm Section, 1979

 

  1. 이곳에 있는 첫 한인천주교회, 순교자 성당 때문이다.
  2. 이곳에서는 Chevrolet Uplander, Pontiac Montana SV6, Buick Terraza, Saturn Relay같은 minivan이 조립되었다.
  3. 주로 뉴욕이나 LA 출신의 자본가들.. 통설에는 전두환의 비자금도 큰 몫을 차지한다고 했다.
  4. 주로 Alpharetta, Duluth, Suwannee지역, 특히 Suwannee지역은 돈 많은 타 주의 retiree(은퇴자)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이 되었다.
  5. H-Mart, MegaMart, Assi 같은 덩치가 큰 것 업체들
  6. 이름만 ‘하이웨이’고 사실은 시속 35마일의 거북이 도로인데, 시 정부에서 돈이 궁하면 가차없이 과속 티켓을 뿌려댄다.
  7. 이곳에 그들의 레코드 취입 스튜디오가 있었다.

4월, 그리고 노래들..

Nasty, bone-chilling, dreary, surreal..우아~ 올 봄은 참 유난스럽다. global warming이 무색하게 global chilling이 더 자연스럽게 들릴 정도가 아닐까.. 작년 3월 말을 자꾸 기억함은 그 당시의 ‘찬란했던 꽃나무들의 향연’ 과 지금이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에 ‘이제는 설마..’ 하며 space heater를 부지런히 closet 속으로 퇴각을 시켰고, 침대의 무겁던 이불도 가벼운 것으로 바꾸어 놓고, 조금씩 겨울 옷들도 눈 여겨 보고 있다가 결국은 오늘 bone-chiller를 다시 만난 것이다.

싸늘한 비바람에 채 피지도 못한 배나무 꽃망울들이 처참하게 떨어진다. 게다가 올 2~3월의 평균을 밑도는 기온은 아마도 ‘무지하게 더운’ 봄과 여름을 예상케 한다. Mother Nature의 연 평균기온은 거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조금 우울한 뉴스가 아닐까?

 

채 못핀 꽃나무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2013년 봄

4월은 조금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tax return chore, home-association due, ‘big’ insurance dues.. 모두 $$을 ‘빼앗아’ 가는 것들 뿐이라 정말 즐겁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내야 할 것은 내야 하는 것이. 4월 7일 일요일은 작년부터 생각하며 지나게 된 ‘자비의 주일’이다. Divine Mercy Sunday.. 폴란드 출신 성녀 Faustina가 예수님께 ‘직접’ 지시를 받았다던 그 자비의 기도를 줄줄이 생각하게 하는 그 날이다. 이 날을 향한 9일 자비기도를 우리는 묵주기도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하게 되었는데, 거의 일년 만에 하는 것이라 처음에 생소했지만 곧 익숙하게 되었다.

그 다음 주일 4월 14일에는 월례 꾸리아 월례회의가 있어서 몇 달 전부터 시도한 ‘한 달에 한 번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미사참례’ 를 할 예정이다. 아주 조심스레 ‘고향’을 찾는 기분으로 시작을 했지만 아직도 ‘100% 한국식 미사의식’이 ‘신기하고 생소’하게 느껴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처음보다는 조금 익숙해졌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날은 multitasking의 기분으로 ‘오래된 형제’ 설재규씨를 만나기로 해서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주일 4월 21일, 우리가 속한 레지오 전체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park로 ‘야외행사’를 가는 날이다. 말이 야외행사지만 사실은 picnic에 가까운 것이 비록 ‘레지오 의식’으로 시작은 하지만 결국은 친교를 위한 ‘여흥’인 것이다. 작년에 나는 처음으로 참가를 했는데, 청년 단원들이 아주 조직적이고 재미있는 program을 준비해 와서 아주 즐거웠던 기억이다. 날씨도 참 화려했었는데, 올해는 어떨까.. Shelter가 있으니까 최악의 사태에 대한 걱정이 없어서 다행이다.

4월부터 6월 초까지는 사실 부활의 연장에 있는 사실 ‘즐거운’ season이고 특히 5월 한달.. ‘성모성월‘이 도사리고 있어서 이제는 예전처럼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보다 더 나를 포근하게 만든다. 참.. 나도 많이 변했다. 그래서 또 되 뇌 인다.. Never Say Never라고..

4월이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매년 듣는 것으로 상고사적 때, 중앙고 음악선생님 김대붕 담임 선생님의 애창곡 ‘이대교수 김순애‘ 작곡, 박목월 시인 작사 ‘4월의 노래‘..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 기억에 남아있던 Pat BooneApril Love.. 우리 가곡 4월의 노래는 정말로 우리가 느끼는 그 옛날 고국산천의 4월을 연상케 하고, Pat Boone 것은 이곳에 오래 살면서 배어온 이곳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나는 과연 어느 곳에 있는가..

 

 

April LovePat Boone, 1957

 

‘목련꽃 그늘 아래서..’, 4월의 노래

Proof of Heaven, 2nd reading: part 1

A Scientist's Proof of Heaven
A Scientist’s Proof of Heaven

Eben Alexander, a neurosurgeon(신경외과전문의)의 2012년 #1 New York Times Bestseller, Proof of Heaven.. 이 책은 바쁘게도 느껴지고 피곤하기까지 한 성삼일(Paschal Triduum), 부활주일(Easter Sunday)에 걸쳐서 ‘번갯불에 콩 볶듯’ 대강 눈으로 읽은 다음, 이제 ‘정신을 가다듬으며’ 나의 보금자리 서재에 앉아 다시 자세히 읽는다.

우선, 이 책을 성삼일 전날 ‘우연히’ 사게 된 것이 절대로 ‘우연’이 아님을 이제 믿는다고 말하고 싶고, 나의 머리를 지배하는 심정은, 빠른 속도로 겉 핥기 식으로 읽는 동안 느낀 것은 복잡한 것도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흥분, 기쁨, 그리고 안도감.. 그것이었다. 이제는 조금 흥분된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 더 이성적인 자세로 샅샅이 분석하며 천천히 다시 읽는다.

표지, 차례를 거치고, 기나긴 prologue도 빼놓지 않고 정성을 들여 자세히 계속 읽는다. 200쪽 미만의 책이지만, 35 chapters..라면 지루할 듯 보이지만 한 chapter가 불과 몇 쪽이 안 되기에 정말 소화하기 즐겁기까지 한 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Prologue를 읽기 시작하며 다시 ‘왜 skydiving에 대한 설명이 이다지도 길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처음에 읽을 때는, 혹시 이것이 filler는 아닐까 하는 의심도 했다. 그저 page만 늘리려고 한 ‘잡소리’가 아닌가 한 것이다. skydiving에 대한 경험을 2쪽이나 계속하면서, 책의 주제인 ‘천국의 증명’에 대한 hint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설명 뒤에 간단한 몇 마디가 두 번째 읽는 나에게 납득할 만한 hint를 주긴 했다. 그러면서 조금 용기와 참을성을 더 하며 읽어 나가면, 서두의 뒷부분에는 책 전체의 결론과 맞먹을만한 ‘거창하고, 심각한’ 이 책의 결론을 조금 보여준다. 하지만 본문이 170쪽 밖에 안 되는 책에서 prologue가 10쪽이라면 서두가 길다는 느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미리 보여주는 결론은 이것이다.

My experience showed me that the death of the body and the brain are not the end of consciousness, that human experience continues beyond the grave. .. it continues under the gaze of a God who loves and cares about each one of us and about where the universe itself and all the beings within it are ultimately going…

This life isn’t meaningless. But we can’t see that face from here – at least most of the time… But now that I have been privileged to understand that our life does not end with the death of the body or the brain, I see it as my duty, my calling, to tell people about what I saw beyond the body and beyond this earth.

나의 경험에 의하면 육체와 뇌의 죽음이 의식의 끝이 아니고 인간적인 경험은 무덤에 묻힘의 이후로 계속되며, 우리 개개인과 우주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가호아래 영원히 계속된다. 우리의 인생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의 얼굴을 최소한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대부분 못 느낀다. 하지만 지금 육체와 뇌의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된 이상, 내가 나의 육체와 지구를 떠난 저쪽에서 본 것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이 서두의 결론이 일반인, 비전문가, 비자연과학자, 신앙인, 신부, 수녀, 수도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크게 놀랄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 하바드 대학, 최첨단 ‘자연’ 과학자라고 할 수 있는 화려한 이력서를 가진 뇌신경외과 전문가 의 체험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에 의해서 나온 것이라면 아마도 귀가 솔깃해질 것이다. 현재 ‘양쪽(과학과 신앙)’ 에 어정쩡하게 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 나로써는 한마디로, ‘당혹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안도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Dr. Eben Alexander
Dr. Eben Alexander

이런 류의 NDE(Near Death Experience) 이야기에서 제일 흔히 언급되는 것이 ‘신앙적 체험’이지만 이 저자는 철저히 그것을 뒤로 미루어 놓는 ‘참을성’을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미치게 만들 수도 있는’ 체험에서 깨어난 이후 그는 ‘지혜롭게도’ 그의 기억이 오염되는 것을 막으려 그가 겪었던 모든 체험이 글로 기록, 고정화 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비슷한’ 체험에 대한 정보를 100% 차단을 하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런 조치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저자 ‘Eben Alexander, 에븐 알렉산더‘ 는 비록 철저히 불가사의, ‘비과학적’인 며칠의 경험을 했지만 결국은 곧 바로 다시 철저히 이성적인 과학자로 돌아 왔고, 다시 과학과 이성에 염두를 두고 분석작업에 들어갔으며 그 결과 중에 하나가 이 작은 책자이고 그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동료 과학자들과 이 ‘포복절도’할 경험을 보존하고 알리려는 노력으로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저자는 최대한 기존 신앙, 교회의 가르침, 교리를 언급 안 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가끔 ‘하느님’을 언급하지만 그 하느님은 종교관점의 하느님이 아닌 그저 ‘절대자’를 의미할 듯 하다. 지금 신앙에 눈을 조금 씩 떠가며,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 그 진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 책의 ‘과학적 접근, 경험’을 나의 체험과 연관을 시키며 공부하고 싶다.

이번의 ‘두 번째 읽기’에서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분석’하고 철저히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나와 비슷한 배경이나 신앙적, 과학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과정을 알리고 싶은 심정으로 이 multi-part blog을 쓰기로 했다.

흑백논리와 다원주의

오랜만에 인호형의 글이 발표되었고, 나도 볼 수 있었다. 제목은 ‘옳은 것은 흑백논리와 다원주의 중 어느 편일까?’, 부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과학적 판단’ 으로 <김인호의 경영 경제 산책> 컬럼 11번째가 된다. 사순절 훨씬 전에 잠깐 연락이 되었지만 다시 ‘잠잠’ 했는데, ‘불현듯’ 소식이 온 것이다. 얼마나 바쁘게 사시는지 간혹 email 교환의 호흡, 박자가 어긋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50년이 가까워오는 ‘몇 달간의 만남’ (아르바이트 대학생과 까까머리 고3 수험생으로)의 인연에 별로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비록 경영학 쪽의 전문가로 성공하셨지만, 이공계의 배경은 어찌할 수 없는가 보다. 오늘의 글은 그런 형의 단면을 보여주는 느낌인 것이다. 경제,경영에서 벗어나, 보편적 논리와 열역학적 법칙으로 본 우주의 창조론 같은 것은 기성 전문가들에게 거론하는 것 조차 거의 taboo시 될 수도 있지만, ‘좁은 과학의 눈’ 을 정면으로 도전하듯 바라보는 용기를 느끼게 한다. 1965년 형에게 몇 개월간 받았던 수험과목 이외의 ‘첨단,공상과학 강의’는 나의 머리에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기에 나는 형의 열역학으로 설명이 되는 창조,진화론을 더 흥미 있게 보게 된다.

 

 

옳은 것은 흑백논리와 다원주의 중 어느 편일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과학적 판단

 04.02.2013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세상에는 ‘끝이 좋으면 만사가 좋다’라는 입장에서 어떤 행위의 결과가 좋으면 그 행동은 좋은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결과중시론(consequentialism)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의 결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행위 자체의 성격과 동기에서 이미 비롯된다는 비결과중시론(non-consequentialism)의 주장도 있다. 또 목적이 좋으면 그 달성을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be justified)된다는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같은 것도 있다.

 이들 각 의견이나 주장은 다 그 나름대로 그 주장에 대한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모두 옳을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더라도 어쩌면 그 많은 주장들 중에는 아예 옳은 것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 중에 옳은(right) 것이 있다면 나머지 것들은 다 그른(wrong)것이라는 논리적 추론이 가능해 진다. 이는 선다형문제에서 정답은 항상 정답이고 나머지들은 항상 오답인 것과 같다.

 예컨대 (3)번이 정답인 선다형의 경우 다수가 (1)번을 정답으로 답했다 해서 정답이 (3)번에서 (1)번으로 바뀌겠는가? 정답과 오답은 다수냐 소수냐에 관계없이, 정답은 항상 정답이요, 오답은 항상 오답인 것이다. 정답이므로 정답이라고 받아들이고 오답은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오답으로 받아들이는 판단은 옳은 판단이다. 그런데 정답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오답인데도 불구하고 정답이라고 우긴다면 이는 모두 오류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안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범할 수 있는 오류에는 알파(α)오류와 베타(β)오류의 두 가지가 있다. 만약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 한다든가 또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실이라고 판단한다면 이는 모두 그릇된 판단이며 오류이다. 전자의 오류를 우리는 알파(α)오류, 후자를 베타(β)오류라 하는데, 오류는 반드시 오류로 판명되기 마련이다.

 오류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류는 그 자체가 이미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오류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관한 한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라는 흑백논리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관해서도 흑백논리로 얘기하는 것은 잘못이며,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과 주의 주장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더 바람직한 것으로까지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한다.

 각자의 다양한 의견이나 주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의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면 옳은 것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는 입장의 상대주의(相對主義; relativism)에 익숙해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현대는 다양한 주의주장들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옳은 것뿐만 아니라 알파오류나 베타오류도 수용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오류의 견지에서 볼 때, 무신(無信; atheism)은 알파오류이며, 미신(迷信; superstition)은 베타오류이다.

 잠시 다음의 실험결과를 음미해 보자.

 들려주는 음악의 형태를 바로크 음악과 헤비메탈 음악으로 달리하고, 나머지 조건들은 모두 동일하게 한 상황에서 여러 씨앗들의 발아실험을 실시하였다. 일정시간이 경과한 후 조사해보니 바로크 음악을 들려준 쪽의 성장이 헤비메탈음악을 들려준 경우보다 3배나 더 자랐으며,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크 음악을 들려준 쪽에서는 모든 싹들이 음악이 들려오는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반하여 헤비메탈음악을 들려준 경우에는 모두 소리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실험 결과를 통해서 모든 씨 안에는 절대자의 절대의지가 투영되어 있고, 그 씨들은 철저하게 절대자의 의지만을 따르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모두 그것을 존재케 한 메이커(maker)가 있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메이커(maker)의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어떤 물건이든 그 만든 메이커(maker)의 의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면, 그것은 좋은 존재이고, 그렇지 못하면 나쁜 존재이다.

 이 명제를 연장시켜 생각해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메이커(maker)가 있듯이, 우주도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이므로 그것을 존재케 한 메이커(maker)가 존재한다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존재하는 조물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바로 알파(α)오류를 범하는 것이요, 한편 이상한 돌이나 나무 산 태양 별 등 심지어는 영물이라고 섬기는 우상에겐 아무런 영적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엇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바로 베타(β)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지 창조 여부와 관련하여 세상에는 여러 주의·주장들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창조론(creationism)과 진화설(evolutionism)과 윤회설(transmigrationism)을 들 수 있다.

 이제 우주의 에너지는 증감 없이 항상 일정하다는 열역학 제1법칙과 폐쇄시스템(closed system)에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엔트로피(entropy: capacity to change 의 역수(逆數)로 표현되는 무질서의 정도를 말함)는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여 그 진위를 분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열역학 법칙은 이제까지 무수히 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과학법칙이기 때문이다. 일명 엔트로피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 내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높은 질서(higher order)에서 낮은 질서(lower order)로 비대칭(非對稱)의 일방적 방향으로 바뀌어 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열역학 법칙의 견지에서 볼 때 낮은 질서에서 높은 질서로 진화한다는 진화설은 열역학 제2법칙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질서가 계속 생기려면 우주에서 에너지가 계속 증가해야 하는데 이는 우주의 에너지는 증감 없이 항상 일정하다는 열역학 제1법칙에도 상치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때로는 낮은 질서에서 높은 질서로 지그재그(zigzag)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윤회설도 열역학 법칙의 견지에서 볼 때 자연 질서에 엄청 어긋나는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글/김인호 한양대 명예교수·다이나믹 매니지먼트 학회장(ihkim5611@dreamwiz.com)

 

Easter 2013, Proof of Heaven

¶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 첫 부활로부터 2000년 이상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의 최고의 축일이다.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 계속된 사순절도 오늘로서 끝이 난다. 지난 목요일부터 시작된 ‘피곤하기도 한’ 각종 의미를 갖는 ‘무거운’ 날들, 특히 토요일 밤의 Easter Vigil 은 영세,견진의식까지 있어서 부활 일요일 아침에는 피곤하기까지 하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식구들이 나를 ‘끌고’ 부활절 미사에 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서 우리부부가 두 ‘아이’들을 ‘끌고’ 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내가 C&E Christian (크리스마스와 부활 때만 성당엘 가는 신자) 였는데 지금은 우리 두 아이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제 시간에 같이 집에 온 ‘아이’들.. 기꺼이 미사에 참석을 하였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 정도인 것이 조금은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모든 식당들이 문을 닫기에, 언젠가부터 이날도 다른 holiday같이 ‘잘 먹기로’ 하고 fillet minion steak 와 wine으로 이른 점심을 하고 아이들은 집을 떠났다. 엄마의 제의로 매달 넷째 일요일에 집에서 ‘이렇게’ 먹자고 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기꺼이 동의를 해서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아이’들이 아닌가.. 그렇게 커버렸나.. 생각하며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기도 했다.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  얼마 전 ‘갑자기’ Costco에서 갔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책 proof of heaven, 진부하기도 한 제목이었지만 조금 독특하게 기분이 좋은 표지에 끌려서 읽고, 결국은 사게 되었다. 읽기에 부담이 없는 200 page가 안 되는 것도 그렇고, 저자의 경력이 더욱 독특했다. Neurosurgeon, 그러니까 신경외과의 정도가 될까.. 한마디로 뇌수술 전문의인 것이다. 그가 정말로 희귀한 ‘감염’으로 일주일간 사경, coma 끝이 역시 ‘기적적’으로 ‘완전 회생’, 그때 그가 ‘보았던 것’을 적은 것이다.

작년에 나온 책으로 New York Times Best Seller #1, 그러고 보니까 언젠가 뉴스에서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런 ‘현상’을 NDE, Near Death Experience라고 부르는데,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 없이 이런 사례가 보고가 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과학적’으로 연구까지 한다고 한다. 이 책이 특출한 것은 그것을 겪은 사람 자체가 뇌외과 전문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분야의 과학자중의 과학자인 것이다. 그가 비과학적인 것을 겪었으니, 그의 고뇌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적 경험을 그는 어떻게 ‘절충, 타협’을 했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예수성체를 지키며 하던 성당 새벽 성체조배를 앞뒤로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때의 나의 느낌과 경험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전율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절대적 하느님의 존재는 이제는 거역할 수 없는 ‘진리’임을 겸허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번 부활에 나에게 주어준 은총임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이것이 65년 만에 알게 된 진리였던가?

Good Friday, Tipping Point of..

Seven Last Words..
Seven Last Words..

¶  Good Friday..   of the Passion of the Lord. 주님 수난의 성금요일.. 바로 오늘이다. 부활 성삼일 중간에 있는 ‘조용한’ 날이기도 하다. 한글로는 성금요일인데 영어로는 Holy Friday라기 보다는 항상 Good Friday라고 부른다. 이 성삼일에 있는 천주교 전례는 모두 독특한 이름이 있다. 목요일 것은, The Mass of the Lord’s Supper, 금요일 것은 The Passion of the Lord, 토요일은 Easter Vigil.. 우리의 본당인 영어권과 한국어권 두 곳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둘 다 알고 있어야 하는 부담이 항상 있지만 나는 그것이 부담이라기 보다는 ‘더 많이 알게 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오늘이 Good Friday 인데 왜 하필 ‘Good‘ Friday라고 부르는 것일까? 오랜 전부터 나는 그것이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의아스럽지 않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예수님은 처참하게 죽어갔지만 그것의 결과인 부활과 그것으로 200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천주교의 ‘인류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Good인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우리의 젊은 신입 레지오 단원 엘리사벳 자매님이 우리 Holy Family 본당에서 있었던 일일 피정에 참가하면서 그 때 교재로 쓴 Dennis Billy 저, subtitle “Meditation on the Seven Last Words of Jesus”란 가벼운 책자 하나를 나에게 빌려주었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천천히’ 죽어가면서 하신 일곱 마디 ‘말’들.. 을 가지고 reflection questions 을 제시하며 서로의 의견 나눔을 도와준다. 사순 절에 일일 피정의 교재로 쓰기에 정말 안성맞춤인 책이라고 할까. 그 일곱 마디의 말은:

 

  1. “Father, forgive them, they know now what they do.” (LUKE 23:34)
  2.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LUKE 23:43)
  3. “Woman, behold, your son… Behold, your mother.” (JOHN 19:26-27)
  4.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MATTHEW 27:46)
  5. “I thirst.” (JOHN 19:28)
  6. “It is finished.” (JOHN 19:30)
  7.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end my spirit.” (LUKE 23:46)

 

이 말들은 예수님의 ‘생전’에 하신 마지막 ‘역사적’인 말들이다. 그 이후, 그러니까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들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차원이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신에서 해방이 되신 이후의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가진 상태에서 하신 이 마지막 말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오늘 새벽 아니 한밤중이었던 새벽 2시부터 3시까지 나는 연숙과 같이 난생 처음으로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성당에서 성금요일 성체조배(Eucharistic Adoration) 를 ‘감행’ 하였다. 연숙은 오래 전에 친지교우들과 같이 한 번 해 보았던 것을 나도 기억을 하지만 나는 처음이다.

이것은 천주교만의 전통일까..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미사가 끝나면 성당내의 ‘모든 전례 도구’들은 ‘철거’가 되고 성체가 모셔진 ‘감실(tabernacle)’ 도 비게 된다. 그때 성체가 성체 조배실로 옮겨지게 되고 그때부터 ‘쉬지 않고 계속’ 성체조배가 행해지는데, 문제는 이렇게 자정 이후 한 밤중에는 그것이 중지될 수도 있기에, 미리 ‘예약’을 받아두고 조금도 그 성체가 ‘방치’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지난 달 꾸리아 월례회의에서 새벽 시간의 예약을 받을 때 나는 거의 ‘무심코’ 이름을 써 넣었다. 주로 레지오 단원들이 참가하기에 나는 큰 부담 없이 한 것인데 밤 11시면 ‘세상없어도’ 잠자리에 드는 나의 육신에는 사실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무심코’ 감행을 하였고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두고두고 보아야 할 테지만 나는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도 사실 나의 근래의 좌우명 ‘It’s Now or Never‘ 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  Tipping Point..   한참 유행했고 이제는 ‘흔한’ 용어가 된 말이다. 무언가 ‘거대한 것, 힘든 것’이 오랜 노력과 시간 끝에 ‘움직이기’ 시작하며 뒤돌아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상을 말한다고 할까.. 나는 65년 일생을 통해서 이런 것을 나의 몸으로 경험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좋건 싫던 간에 나와 직접 상관이 없는 것들이 ‘넘어가는’ 것은 물론 많이 보았다. 정치적으로는 요지부동의 공산당 제국들(김일성 개xx는 제외)이 넘어가는 것도 보았고, 사회학 적으로는 ‘말단,주변 생물’이었던 ‘동성’들이 이곳 저곳에서 어깨를 펴고 기어 나오는 것도 보았고, 자연과학에서는 global warming같이 세계적 기후가 변화 되는 것도 현재 목격하고 있다. 이런 global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의 personal tipping point는 무엇일까..

요새 목격하고 있는 나 자신의 세계,우주관의 지각변동일 것이다. 이것이 tipping point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이 변동이 참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세계, 우주관이라고 하면 조금은 막연한 느낌도 들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표현은 ‘종교, 신앙관’이 맞을 지도 모른다. 반세기 넘게 희미하게 흩어져 있던 조그만 ‘점’들이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서로 연관들이 없었던 것들이 하나 둘씩 연결되며 조금 더 큰 점으로.. 그 커진 점들이 다시 다른 것들과 연결이 되며 더욱 커지고.. 결국은 그 점들의 ‘질량, mass’가 tipping point에 다다르고 있다고 할까. 이제는 확실히 느끼며 믿게 되었다. 이 불가사의한 우주와 우리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것이 이번 사순절을 지내며 내가 받고 있는 ‘은총’이다.

 

꽃샘 추위, 아치에스, 판공성사

¶  꽃샘 추위   3월 25일, 어제는 Palm Sunday였고 드디어 2013년 성주간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에 ‘그 것’이 모조리 있는 것이다. Easter or Paschal Triduum이라고 불리는 성삼일(Holy Thursday, Good Friday, Easter Vigil)에 이어 부활절 일요일.. 조금 생각만해도 숨이 찬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모두 일년 내내 기다리던 그 때가 아닐까?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없다면 사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성주간에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아니, 사실 지나간 2월 달이 1월 보다 더 추웠고, 지금의 3월 달이 2월 달보다 더 춥다. 오늘은 낮 기온이 화씨 40도(섭씨 5도?)도 안 되는 듯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일까? 옛날 옛적 서울에서 살 때 이것을 ‘꽃샘’ 추위라고 했지만 지금 것은 조금 다르다고 할까.

제일 큰 ‘희생물’은 봄을 기다리던 꽃나무들이다. 찬란하게 초봄을 알리던 수많은 꽃, 나무, 잔디들.. 모조리 거의 ‘잠잠’하다. 아니 불쌍할 정도다. 작년을 생각해보니 너무나 대조적, 정말 찬란한 작년 3월 말을 기억하니까.. 방방에 놓여있는 space heater를 ‘거의’ 치우려고 했는데, 그랬다면 정말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동복’들도 고스란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아마도 아마도 부활절, 4월 초가 되면 정말 봄이 오지 않을까?

 

acies-2013¶  아치에스(Acies)   지난 일요일 3월 17일에는 일년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의 주요 행사중의 하나인 ‘아치에스’ 행사가 열렸다. 아치에스, Acies라는 말은 라틴어로 로마시대 군대의 전투대형을 뜻한다. 레지오 마리애 조직의 원형이 로마 군대의 것을 따랐기에 이것도 그것의 일부인 것이다. 비록 군대식으로 조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조직의 운영에 대한 것이다. 조직의 힘을 모으려면 역시 군대식이 최고일 것이다.

그래서 일년에 한번 거의 군대식으로 모두 모여서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인데, 올해로 나는 세 번째 이것을 맞이한다. 지난 2년 동안 참가하고 보면서 느낌이 참 신선하고, 무엇엔가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총 사령관이신 성모님께 충성을 서약하는 것인데, 평소에 잘 못 보던 동료 단원들을 이곳에서 모두 보게 되는 것도 그렇고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감동적이기도 했다.

 

¶  부활절 판공성사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이름도 다양하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7성사 중의 하나인 ‘성사’다.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톨릭만이 ‘자랑’하는 아주 독특한 것이고, 제일 인기가 없는 성사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자기의 ‘치부, 부끄러운 곳’을 ‘남에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 영화에서 보는 듯이 그렇게 dramatic한 것도 없고,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야기되는 ‘꽤 죄죄’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고백을 할 것인가?

이 성사를 교회에서는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을 하라고(보라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따르는 모범신자들이 많이 있을까? 하기야, 주일미사를 빠질 때마다 이 성사를 보는 교우를 보기는 보았지만, 그것은 예외에 속할 듯 하다. 내가 본 많은 사람 중에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년에 중요한 때 (부활, 성탄 같은) ‘겨우’ 보는 사람들.. 그렇게 이것은 사실 부담스러운 것일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는 듯하다. 괴롭게 느껴지는 ‘죄’는 고백을 하면 시원하게 느껴질 것이고, 분명히 사제는 주님을 대신해서 ‘용서’를 하신다. 그러니까 고백성사를 하는 것은 정말 괴롭고 어려운 것이지만 이것을 마쳤을 때의 ‘환희’는 어디에도 비교하지 못한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기억을 하며 다시 성사를 준비하고 한다. 이것이 이 성사의 매력이라고 할까? 나는 최근에 신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며 일년이 최소한 2~3번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고, 사실 나는 이것도 자랑스럽다. 특히 어둡기만 한 고백소에서 하는 것을 피하고 ‘대담하게’ 신부님의 사무실에서 면담하는 식으로 한 것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올해 부활절 판공성사는 지난 목요일에 ‘가족행사’로 보았다. 연숙의 대녀님인 권 모니카 자매를 대동하고, 게다가 올해는 오랜 지인 설재규씨가 합류를 해서 4명이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지난 일년간 성사를 못 보았다던 설재규씨가 참가한 것은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으로 느껴졌고,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같이 하게 될 수 있을 것을 꿈꾸기도 했다.

‘ 후리타, 집을 사다’, 떠나는 새로니

Cornerstone Village Condo

돌아온 새로니.. 제목이 그럴 듯하다. 영화제목 ‘돌아온 장고‘ 처럼.. 우리 집의 큰딸, 새로니가 거의 6년 만에 ‘일단’ 정든 집으로 돌아와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잠깐 머문 적은 많았지만 자기의 살림살이 짐을 ‘완전히’ 우리 집으로 옮기고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근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Y 세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비교적 젊은 축 X 세대들까지 자기가 자라던 집, 그러니까 부모의 집으로 ‘퇴각하는 것’이 요새 많이 보이는 현상중의 하나라는 보도도 심심치 않은 이때, 큰딸 새로니가 집으로 들어온 것은 그런 보도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듯 느껴진다.

젊은 ‘애’들이 ‘지독한 불경기’를 못 견디고 집으로 ‘퇴각’하는 것과 새로니는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무섭게 예리한 경제감각을 가진 요새 애들, 특히 여자애들’ 중의 하나인 새로니에게도 경제적인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니에게는 그다지 신나는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 career의 방향이 바뀐 후 처음으로 맞는 불경기 하의 job market에 대한 불안 감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일단 우리의 혈육이 자기가 자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조금은 경제적으로도 새로니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오랜만에 다시 이사를 가야 하는 압박감 없이 자유스럽게 ‘옛날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조금 비약적인 희망일 것이지만.

 

위의 메모는 작년, 그러니까 2012년 4월경에 남겨둔 것이고 ‘미완성’의 글로 남았었다. 그것을 오늘 다시 본다. 집을 떠난 지 6년 만에 같이 산 것이 이제 거의 1년이 되어간다. 6년 떨어져 산 돌아온 ‘아이’를 옆에서 보며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우리가 난 ‘아이’가 돌아온 것은 물론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긴 하지만, 당혹한 순간들도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괴로운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과연 ‘혈육, 가족’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새삼스레, 아주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가장 놀란 것이 있다면 그 동안 내가 심각하게 가족관계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복어 사전>으로 번역이 된 일본에서 나온 수필집을 보면 역시 ‘머리가 큰’ 자식과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보여준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제일 좋은 방법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다른 지붕’ 아래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읽을 당시에는 정말 실감을 못했지만 요새는 그 책 저자의 의도와 생각에 150% 동감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럴까? 지난 일년 새로니와 같이 살면서 나는 그런 질문만 계속하며 살았다. 왜 그렇게 어려울까? 왜 어렸을 때와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답은 간단할 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고 모두 그 동안 ‘변한’ 것이다. 부모인 우리도 ‘나이에 따른’ 고집과 경륜이 쌓였고, 성장한 아이도 혼자 살아도 되는 독립된 어엿한 사회인으로 그 애 만의 독특한 경험과 주관이 생긴 것이다. 예전 같으면 특별한 ‘배려 없이’ 의견이 모아지던 것이 이제는 ‘협상’이 필요한 때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옛날의 ‘즐거운’ 때만 생각하며 ‘쉽게’ 생각하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지 않았을까? 집을 떠난 6년 동안 그 애만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배운 습관들.. 역시 옛날의 것에 비교하면 무리가 있다. 나는 그저 그런 모든 ‘조그만 문제’들은 가족의 사랑으로 아무 문제가 안 될 것으로 ‘확신’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역시 모자랐다.

하느님은 공평하신가.. 괴로운 때와 즐거운 때의 비율이 반반 정도라고 하면 조금 과장 된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즐거운 순간들이 기가 막히게도 괴로운 순간들을 ‘중화’시키며 살아가게 해 준다. 하지만 역시 결론은 각각 독립적으로 살려면 물리적 환경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불경기 속에서 job을 용케 찾았고, 안정된 재정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자마자 새로니는 ‘결사적‘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게 되었다.

우리의 희망은 결혼을 하면 더 안정될 것 같지만,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요새 젊은 여성들의 생각은 우리의 희망과는 전혀 무관하게 흐르고 있었다. 인생에서 결혼의 우선순위는 과장된 표현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낮아지고 있다. 하물며 자식을 낳은 다는 것은 그 보다 더 낮은 곳에 있었다.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다지 급할 것도 없고 중요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남의 간섭을 덜 받고, 편하게 살려는 일종의 ‘쾌락주의‘라고나 할까. 간혹 행운적으로 예외는 있지만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일 수록 더 그런 경향이 심하다. 그런 것을 알면서 push한 다는 것은 더욱 큰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결국, 옛날 우리의 즐거움이었던 큰 딸 새로니는 우리의 품을 ‘완전히’ 떠나기로 하고, 불경기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부동산 경기를 의식하며 혼자 몇 년은 살 수 있는 1 bed-room condo를 사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의 혼자서 직장시간을 쪼개어서 집을 찾고 보고 하더니 너무나 피곤한지 realtor를 구하게 되었다. 미국인 realtor만 상대하더니 나중에는 아무나 상관이 없는 듯해서 우리 한인성당에서 알게 된 Emily Kim 자매님을 연숙이 소개해 주었고, 조금 씩 오르기 시작하는 집값을 의식하며 거의 3개월 동안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 Atlanta mid-town에 있는 condo를 찾게 되었다.

그 property는 비교적 싸게 나온 것으로 역시 지독한 불경기 속에 foreclosure된 것으로 bank소유였고 소위 말하는 short sale되는 그런 곳이었다. 한창 부동산 거품일 적 그곳은 아마도 $100,000이상에 거래 되던 곳이었을 것이 거품이 빠지면서 거의 $85,000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원래 주인은 아마도 mortgage를 낼 수가 없어서 그냥 집을 떠났던 그런.. 지난 5년 동안 이런 ‘비극’은 미국 전역에서 수없이 일어났는데, 지금 그런 곳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조금씩 팔리게 된 것이다. 그뿐이랴.. Mortgage interest rate가 옛날 우리가 듣고 보던 것의 반도 채 안 되는 저렴한 것과, 지역마다 부동산 경기를 살리려고 ‘정부 레벨’에서 각가지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까지 생겨서 그런 정보들만 잘 찾아내면 더 싸게 살 수도 있게 되었다.

악착같이 새로니는 그런 것을 찾아내어서 거의 $15,000을 절약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연방정부에서 주정부로 보조해 주는 것인 모양인데, 조건은 집을 처음으로 사는 것과, 그 집에서 5년은 살아야 하는 것, 지역도 Atlanta 시내 인 것 등으로 새로니에게는 아무 하자가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조건이고 역시 관건은 ‘구비 서류’에 있었는데 그것을 그 애는 정말 꼼꼼히도 챙기며 노력을 해서 결국은 그 혜택을 받아내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부부는 입만 벌리기만 했는데, 우리보고 하라면 ‘절대로’ 못할 서류들이었기 때문이다.

Bank loan을 신청하고 승인을 받는 것이, 우리가 20년 전 집을 살 때와는 정말로 sea change였다. ‘무섭게, 까다롭게, 시간을 질질 끄는’ 그런 식.. 어찌 안 그렇겠는가? 지난 부동산 거품이 그런 것을 너무나 해이하게 하였기에 생겼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군소리를 못 할 것이 그렇게 해야 다시는 전과 같은 ‘거품’이 생기지 않기에 말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2주 전에 드디어 closing이 성사가 되었는데, 그때 새로니의 기쁨은 우리가 옆에서 보아도 큰 듯 했다. 거의 ‘혼자서’ 한 것이다. 아니 100% 혼자서 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집을 같이 보았던 것.. 그것 뿐이니까. 그런 날이 우리 집에서는 Lemon Grass moment 라고 불려져서 모처럼 단출한 4식구가 ‘모두’ 모여서 외식을 하고 ‘꼬마’ 집주인이 된 새로니의 ‘독립’을 축하해 주었다.

그저께 드디어 moving truck이 와서 많지 않은 짐을 mid-town으로 날랐다. 동생 나라니 집에서 언니에게 주는 used couch도 날라와서 그런대로 살만한 환경으로 변하고, 새로 페인트를 칠하며 ‘혼자 사는’ 꿈을 꾸는 듯.. 옆에서 보는 우리의 심경은 조금 mixed라고나 할까.. 어찌 안 그렇겠는가.. 우리 가족의 변천사에 큰 획을 긋는 그런 시간들이 아닐까. 막상, 마지막 이삿짐이 나가면서 우리는 정말 착잡한 심경을 맛 보았다. 같이 있을 때, 조금 더 친절하게 해 줄 수는 없었을까.. 역시 우리는 후회를 만들며 살고 있는 것이다. 속으로 계속, “새로니, 서로 섭섭하게 한 것들이 있으면 빨리 잊자, 우리는 가족이니까” 라고 되뇐다.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 에서 보는 것처럼, 고향 서울 커다란 한옥 줄줄이 이어지는 사랑방에서 각자 기거하며 ‘오순도순’ 살던 대가족들, 비록 가난했지만 절대로 외롭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4명 밖에 안 되는 ‘형편’에 그것도 떨어져 살아야 마음이 편하게 느껴진다는 그런 사실이 슬프게 하는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시간은 흐르고, 사는 방식도 변한다. 이제는 절대로 옛날 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일까. 역시 슬픈 심정을 떨칠 수 없는 시간들이다.

 

Blind가 아직 없는 창문으로 보이는 mid-town view

Blind가 아직 없는 창문으로 보이는 mid-town view, 정말 오랜만에
urban feeling을 회상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아틀란타 midtown, 기대 보다 훨씬 깨끗하고 젊게 느껴진다

아틀란타 midtown, 기대 보다 훨씬 깨끗하고 젊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 일본 TV 연속 드라마 ‘후리타 집을 사다(フリ-タ-、家を買う)‘라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후리타는 freeter의 일본식 표기 발음이고, ‘공짜로 부모 집에’ 얹혀 사는 young adult children을 말한다. 대부분 ‘바이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립할’ 날만 손꼽는 자녀들, 경제적인 이유로 그렇게 사는데,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그런 현상이 있는 모양. 하지만 그 드라마는 아주 ‘착실한 후리타’를 잘도 그려냈다.

열심하고 건실하게 사는 애 띤 청년이 삼류대학 출신이라 대기업 직장을 못 구하고 조그만 토목회사에 ‘아르바이트’ 로 들어가 일을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 엄마를 위해서 좀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일념으로 각가지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참 눈물겹게도 그려냈다. 끝이 정말로 흐뭇한 것으로 결국 집을 사게 되는 것이다. 가족관계가 경제성장으로 많이 해이해진 일본, 연로해가는 부모를, 자기 희생까지 하며 돕는 이런 드라마는 아마도 현재 일본의 개인적 사회 현상에 ‘경고, 충고’를 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본다.

 

후리타 집을사다, 인기 일본 TV 연속 드라마

후리타 집을사다, 인기 일본 TV 연속 드라마

Freeter, 후리타 주연배우 들

후리타 집을사다, 주연배우, 왼쪽

 

보리수와 들장미

영화 보리수 광고, 1959
영화 보리수 광고, 1959

보리수, 들장미.. 허~ 웬 꽃 나무 이름들.. 그 말이 맞긴 하지만 여기서는 사실 영화의 제목들이다. 머리를 짜내고 내며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 들추어서 다시 새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 두 영화이름은 사실 그렇게 큰 노력을 할 필요도 없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거의 50년 이상을 견디어온 그 기억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두 영화는 모두 독일(그 당시는 서독, West Germany)의 영화로써 1950년대 중반에 나왔고 수 년 후에 곧바로 ‘일본을 거쳐’ 대한민국에도 들어와서 특히 ‘재미있는 것이 거의 없던’ 그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 대인기를 끌었었다. 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보리수’란 영화를 국민학교 4학년, 그러니까 1957년경, 화신 백화점 옆 골목의 우미관에서 보았었다. 들장미란 영화는 사실 나는 못 보았지만 내가 ‘거의’ 본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 우리 누나가 이것을 보고 완전히 ‘빠져’ 버렸기에 사진처럼 그 장면들이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있던 옛 극장 (주로 1950~60년대)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신문에 나오는 영화 광고를 보다가 보리수와 들장미의 광고를 찾아 내었다. 보리수의 광고는 1959년 신문에 ‘문화극장’에서 재개봉되는 것으로 나왔지만 내가 본 것은 아마도 1957~1958년 사이였고 극장은 분명히 우미관이었다.

누나와 우리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았던 ‘필동 아줌마’와 아침에 갔다가, 아줌마는 한번만 보고 극장을 떠나셨고, 누나와 나는 거의 연속으로 계속 몇 번을 보았다. 그 정도로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것이 ‘독일어 영화’인지도 모르고 그저 ‘외국’ 영화라는 것만 알았다.

‘수많은’ 예쁜 남녀 아이들이 등장하며 노래를 부르고, 장난을 치고.. 우리로써는 그 당시 ‘침만 삼키는’ 부러운 광경들을 몇 시간이고 즐긴 것이다. 영화 제목인 보리수 라는 것은 그 주인공 대가족이 살았던 저택의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의 이름이었고, 그들은 보리수란 명곡을 불렀던 듯 하다. 그것은 슈베르트(F. Schubert)의 Der Lindenbaum(보리수, 菩提樹) 이란 명곡이었다.

그 이후 나는 미국의 서부영화, 전쟁영화에 완전히 빠져서 이 영화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영화가 미국의 musical, The Sound of Music과 plot이 거의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Ohio State (Univ.)에서 만난 중앙고 후배 김종수의 wife(선희 엄마)가 나에게 그것이 맞는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니까 ‘영화 보리수 = 영화 The Sound of Music‘이었던 것이다.

이제 Googling의 힘을 빌려서 찾아보니, 너무나 오래된 것이라.. 별로 나오는 것이 없었지만 ‘간단히’ 한가지만 찾아 내었다. 그 옛날 독일영화 보리수의 원제목은 역시 보리수가 아니고 The Trapp Family( Die Trapp Familie) 였는데, 이것은 이 영화에 나오는 가족의 이름이 Von Trapp 이었으니 말이 된다. 서양식은 이렇게 ‘구체적’인 영화이름을 쓰지만, 동양식으로는 조금 곤란했을 것이다. ‘트랩 가족’.. 이런 영화제목을 하면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보리수.. 아마도 99% 이것은 ‘일본아이’들의 발상일 것이다.

 

 

독일영화 보리수, Die Trapp Familie 1956
독일어로 나오지만 줄거리는 미국영화 The Sound of Music과 거의 비슷하다

 

영화 들장미 광고, 1959

영화 들장미 광고, 1959

들장미 주인공 Michael Ande
들장미 주인공 Michael Ande

들장미.. 이것도 천신만고 끝에 딱 한가지 가느다란 단서만 찾아내었다. Keyword는 역시 내가 찾아낸 신문광고에 가느다랗게 나오는 ‘원제목’.. ‘Der schoenste Tag meines Lebens‘ .. 와~~ 이것이 ‘들장미’란 말인가.. 아닌 듯 하다. 이것도 역시 서양식 영화이름과 동양식은 차이가 있기에 들장미 조차 일본아이들의 발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원제목의 ‘뜻’은 무엇인가? 비록 고등학교 1,2학년 때 독일어를 배웠건만 나는 지지리도 그것을 못했다. Der Des Dem Den Die, Der, Der, Die.. 같은 정관사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Der 만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영어의 The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Googling이 도와준다. 독일어로 찾으니 단서가 드러난다.

역시 1957년 독일영화, 우리 말고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 이것을 그 옛날에 많이 보았던 모양, 특히 일본사람들.. 그들의 제목은 Heidenröslein, 野ばら, 한글로 역시 ‘들장미’였다. 이것은 아마도 대만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듯, 순 짱께 표현도 있는데, 그것은 野玫瑰, 한글로 읽으면 ‘야매괴‘ 이 듣기 거북한 말이 바로 ‘장미’의 순 한자어인 것이다. 이제 ‘매괴의 여왕’이 왜 성모님인가 이해가 간니, 장미의 여왕인 것이다.

이 영화 들장미에 나오는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주인공이 바로 이 영화의 매력인 듯 싶다. 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Michael Ande 는 정말 귀엽게 생겼다. 그는 1944년 생으로 그 당시 나이가 13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누나가 이 영화에 ‘홀딱 반했던’ 것은 바로 이 Michael Ande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누나가 이 영화를 보고 와서 (누나는 중학생, 나는 못 보았다) 아마 한 동안 정신이 멍~ 한 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런 긴 ‘잠’에서 깨어나더니 하는 소리가 걸작이었다. 비엔나 소년합창단에 ‘식모’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식구)들은 하도 기가 막혔지만 덕분에 실컷 웃기는 했다.

그런 추억의 영화를 신문에서 광고로 다시 보니 감개무량하긴 하지만, 누나를 생각하니 참 옛날이 그립고 이렇게 운명적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것이 슬퍼지기만 한다. 이런 어릴 적의 ‘보물’들을 기억이나 할지..

 

 

영화 들장미, Michael Ande가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1957

Pope Francis from Argentina

새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
새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

¶  프란치스코, 프란시스, Francis  새 교황님: 드디어, 아니 생각보다 ‘훨씬’ 빨리 새 교황님이 선출되었다. 며칠 전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월례회에서 교황선출에 대한 특별 기도 활동이 하달 되었는데, 이틀도 되지를 않아서 ‘결말’이 난 것이다. 별로 알려진 선두주자가 없었기에 쉽게 절대다수(2/3)표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퇴하신 베네딕트 명예교황은 사실 그 전의 요한 바오로 2세의 총애를 받았던 분이기에 예측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의 교황님은 결국 12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계가 아닌 곳에서 뽑히신 분이 된다. 이것은 분명하고, 강력한 ‘신호’일 것이다. 이제 가톨릭의 본고장 유럽의 무대는 서서히 끝이 나고 있는 것이고, 신세계 그것도 남반구 쪽으로 교회의 주류세력이 내려가고 있다는 징조가 아닐까?

Vatican의 독특한 신호, 하얀연기는 교황의 선출을..
Vatican의 독특한 신호, 하얀연기는 교황의 선출을..

나이 76세면 생각보다 ‘한창의 나이’는 지나간 것이지만, 개개인 마다 활력과 건강은 다 다른 것이라 전 명예교황님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진으로 보기에도 아주 아주 건강해 보이신다.

이름은 조금 이태리 냄새가 나는 Bergoglio(버골리오), 역시 이분은 이태리 이민의 후손이시다. 결국은 이태리 가톨릭의 전통으로 자랐을 것 같고, 이태리 중심인 로마 바티칸의 ‘이태리 문화’를 잘 이해하고 무리 없이 잘 교회를 이끄실 것 같은 희망은 준다.

제일 큰 관심사는 그런 주변적인 것 보다는 역시 교회의 당면한 과제들에 대한 새 교황님의 대응책인데, 이것은 역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종교적인 문제로서 더 높은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실 것이다. 교회의 방향을 시대에 맞게 바꾸자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답답한 것이 그들은 비록 ‘사람’들의 교회이긴 하지만 아마도 무슨 정치, 사회단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비록 시대를 한 걸음 뒤 늦게 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바뀌어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은 시대성이라는 요구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이 새교황님은 두 분의 전 교황님들과 그런 면에서 비슷한 견해를 가지셨다고 하고, 결국은 일반인들이 말하듯 이것은 ‘보수적’인 것이라, 당분간 교회의 전반에 걸쳐서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

동포의 교황선출에 환호하는 브에노스 아이레스
동포의 교황선출에 환호하는 브에노스 아이레스

알젠티나 수도지역인 브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 출신의 추기경인 버골리오, 프란치스코 새 교황님은 ‘청빈하고 단순한’ 실 생활을 하셨다고 보도가 되고 있어서 더욱 호감이 간다. New York Times는 그를 A Conservative With a Common Touch라고 평하기도 했다.가난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런 면에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빠른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모처럼 나는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게 되었다. 걸핏하면 ‘평등’을 내세워 가톨릭 교회를 괴롭히던 그가 재빨리 새 교황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그래도 그의 성명서는 ‘진심으로’ 역사, 정치 속의 하느님을 ‘인정’하는 느낌을 주었기에 흐뭇한 기분을 가지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성모신심, 특히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견해와 관심도에 신경을 쓴다. 이분은 예수회 출신(SJ Society of Jesus)이라고 한다. 예수회는 비록 성모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신다고 하지만, 프란치스코 회 같은 그런 밀착된 관계는 없는 듯 하다. 하느님을 팔아먹는 듯한 악마 같은 존재들인 ‘성추행 사제’들을 그는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당면한 ‘치명적’인 과제들일 것이고, 인터넷 시대에 맞게 ‘홍보, 전교’하는 문제는 보수적인 아닌 진보적인 사고로 대응을 하는 ‘상식’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 years ago, Storm of the Century

Storm of the Century최근에 ‘요상한 기후’에   대해서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문득 storm of the century란 것을 기억했다. 일명 super storm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였나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치매 예방’ 기억력 test였다. 나에게 제일 알쏭달쏭한 것이 지나간 10년에서 20년 전 일들의 기억이다. 각가지 연상technique를 동원해서 아마도 1992년에서 1994년 사이일 것이라고 일단 결말을 지었다. 그 super storm이 온 것이 3월 이때 쯤인 것도 기억했다.

문제는 100% 자세한 것이 어떤 것일까.. 1992년은 우리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온 해였고, 장모님과 나의 절친한 친구, 지금은 타계해서 없는 김호룡 식구가 거의 같은 때에 우리 집에 온 해이기도 했다. 1992년 3월 1일에 이사를 왔는데, 곧 이어서 이 super storm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1994년을 생각해보니 여름에 누님의 아들, 준형이가 다녀갔던 것 이외에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결국은 1993년임을 알았다.

나의 제일 큰 문제는 이 1990년대의 기억이 제일 희미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억해내기 싫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아닐까도 생각을 했다. 그만큼 큰 기쁨이나 즐거움, 그렇다고 특별한 괴로움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세파’속에 휩쓸려 간 듯한 그런 10년간인 듯한 느낌인 것이다.

고국이나 이곳이나 그 나이쯤이면 ‘샐라리맨’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런 생활을 많이 보내니까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기후에 관한 사건들은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때에는 VCR, video (cassette) recorder가 한창 유행할 때여서 그런 것들의 기록도 남아있어서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것은 1993년 3월 13일, 토요일의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기예보는 그렇게 ‘자신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 미리 커다란 ‘경고, 경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생각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얼어붙는 눈보라’ 에 그냥 당한 것이다. 다행히 토요일 아침이라 교통에 관한 문제는 별로 없었다. 그냥 퍼 붙는 눈보라를 집에 틀어 박혀서 ‘즐긴’ 것이다. 그 전날만 해도 봄 같은 포근한 날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을까? 예보, 경보도 그렇게 없이..

하루 종일 강풍과 함께 쏟아진 얼어붙는 눈에 나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전기도 나가기 시작하고.. 길은 완전히 얼어붙고.. 이곳 지역은 완전한 시베리아를 연상하는 광경으로 변했다. 다행히 우리 집의 전기는 나가지 않아서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덩치가 큰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우리 집 drive-way를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나중에 차가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무슨 요란한 소리가 나서 밖을 보니 남자 몇 명이 power chainsaw로 우리 집의 쓰러진 소나무를 잘라서 치워주고 있었다. 동네에 사는 ‘마음 좋은 아저씨’들이었다. 동네를 돌면서 우선 급한 것들을 치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TV 뉴스에서는 이번의 snow storm은 ‘아마도’ super storm, storm of the century정도로 monster 급이라고 했다. 멕시코 만에서 시작된 사상 최저기록의 저기압과 북쪽에서 하강한 cold front가 ‘완전히’ 결합이 된 그야말로 perfect storm이었다. 결국은 이 system은 우리가 사는 Georgia를 거쳐서 northeast의 덩치 큰 도시들로 갔고 그곳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것으로 느껴졌지만, 200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때의 것은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점점 더 큰 monster storm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찍어둔 video tape을 본다. 그러니까 정확히 20년 전 우리 집 주변이 남아있고, 그 눈 속에서 ‘신나게’ 놀던 우리 집 두 아이들.. Wisconsin에서 이사온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라 그 추운 곳에서 타던 ‘썰매’와 겨울 옷들을 다시 꺼내어서 아주 요긴하게 쓰기도 했다.

큰 애 새로니는 Ohio와 Wisconsin에 살 때 경험했던 눈과 얼음으로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겠지만 작은 애 나라니는 거의 기억이 나지를 않는지 신기하게 눈과 얼음을 바라보며 썰매를 탔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젊었던 45세.. 와.. 정말 젊었다.. 피곤을 모르며 직장생활(‘embedded software’ engineer at Automated Logic Co)을 했고, 연숙은 home-based business, housewife, mom, PTA등으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신앙적으로는, 유일했던 한국본당에 ‘대 파란’이 나던 때여서 아마도 그 근처에 가지도 않던 ‘신앙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는 Internet이란 것이 아주 미미하게 보급이 되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는 것 같은 graphical web browser가 없어서 일반인에게는 그런 것은 ‘학교에서만 쓰는’ 그림의 떡이었다. Email은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만 쓸 정도고, PC 는 Microsoft Windows 95 전의, 조금은 원시적이었던 Windows 3.x이 전부였고, 지금 쓰는 cellular mobile phone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틀란타 올림픽이 열리기 3년 전이었던 그 당시 이곳에 한인의 인구는 현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참 변한 것이 많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이 내가 40대에서 60대가 되었다는 ‘자명한’ 사실.. 어떻게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가 충격으로 느껴지는가.. 그것은 생생하게 뇌리에 남은 20년 전 1993년 3월 13일을 회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Stupid (YouTube) ‘copyright police’ bot

얼마 전에 정말 오래된  vinyl LP record 중에서 통기타 시절 김세환 album을 digital format (mp3)으로 바꾸었다. 과정이 아주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귀찮은 job에 속한다. 이 특별한 LP record는 1975년경에 Chicago에서 산 것으로 아마 1974년경에 발표된 것으로, 김세환 특유의 ‘감미로운‘ 곡들이 실려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자주 들었지만 Cassette tape, CD등이 나오면서 눈앞에서 거의 사라졌다가, 1990년 초에 새로 audio system을 장만하면서 큰 마음 먹고 ‘한동안 없어졌던’ LP disc turntable을 다시 사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가끔 이LP를 듣게 되었다. 문제는 그 turntable이 좋은 것이 아니어서 (너무나 fragile, 장난감 수준의 제품) LP disc를 걸 때마다 손이 떨릴 정도로 조심을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가고, 음악 듣는 방식도 많이 바뀌어서 ‘거창한’ audio system앞에서 듣는 것도 사치로 보이게 되었다. 거의 주로 desktop pc아니면 mp3 player, smartphone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보물처럼 간직했던 그 많은 LP record들을 digital format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나 같은 older generation을 의식했는지 이제는 시장에 LP record를 ‘직통으로’ mp3로 바꾸어주는 ‘smart-turntable’이 등장을 하고, high school student들이 이것으로 돈까지 벌기도 한다.

내가 택한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은 값이 많이 떨어진 personal voice recorder를 쓰는 것이다. 요새 것들은 audio recording을 곧바로 mp3 format으로 flash card에 save를 해 주기 때문에 이 방식은 거의 ‘직통’ 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래된 analog audio, music (on cassette tape, LP record, VHS tape etc)들이 하나 둘씩 mp3 audio로 바뀌면서 제 1호가 ‘오래 된’ 조동진 album audio tape, 제 2호가 위에 언급된 김세환의 LP album 인데, 요새의 standard video cloud 의 대명사가 된 YouTube에 이것들을 upload해서 Internet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도 의외로운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저작권(copyright)문제인데, 40년 전의 analog music을 digitize한 것이 저작권 침해라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문화적 유산을 보존한 것으로 상을 받아야 할 지경이 아닐까? 제일 웃기는 것은 이것이다. 김세환 앨범에 Bee Gees의 word란 곡을 한국어로 바꾸어 부른 것이 있었다. 그 위력을 자랑하는 Google의 database 속에서 그 곡이 ‘걸려들고’ 말았다.

저작권이 ‘영국’의 어느 단체에 있다는 것이다. Bee Gees의 word를 digital format으로 그냥 올려 놓았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 당시(1974) 국제문화계에서 거의 ‘거지취급’을 받던(dollar 보유고가 없어서) 한국의 ‘학생가수’가 부른 곡을 40년 뒤에 mp3로 바꾸어서 인터넷에서 다시 듣겠다는데 ‘저작권 침해’라고? 웃기지 마라.. 이것은 물론 ‘사람이’ 개입이 된 것이 아니고 monster같은 YouTube의 ‘감시경찰 bot’ 이란 software가 ‘실수’를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system은 보통의 사법system처럼 ‘Innocent until proven guilty’ 가 아니고 ‘Guilty until proven innocent‘ 인 것이다. 우선 ‘죄인’으로 취급하고, 억울하면 무죄를 밝히라는 것.. 참.. 웃기는 세상이다.

 

 
김세환 Gold, 1974

 

 
조동진 47 minute classics

추악 중의 추악한 인간들..

아주 가끔 세상에서 제일 ugly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을 한다.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하필 왜 그런 것을 생각조차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런 ‘부류’는 적지 않을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깡패‘들이 나의 #1 ugliest였던 기억이고, 미국에 와서 본 것 중에는 trash TV show에 나오는 얼굴들, 그 중에서도 으뜸은 The Jerry Springer Show에 나와서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는 ‘돼지 같은’ 군상들.. 나는 세상에 아니 꿈에서도 그렇게 추악한 모습들을 상상조차 못했다.

그러다가 나에게 진짜 #1이 등장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북한 괴뢰 3대 김씨 왕조의 세 인간들.. 전범 일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운의 세 개XX들이다. 이 개XX들은 아마도 두 명은 이미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고 나머지는 아마도 그의 ‘애비와 할애비’가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 No Further Question..

Lemon Grass day

Thai Restaurant, Lemon Grass
Thai Restaurant, Lemon Grass

완전히 한 겨울 날씨가 된 3월 1일, 쉽게 말해서 지나간 1월은 거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 날씨였고, 2월 한달 동안은 완전한 겨울인 듯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이다. 올해 Groundhog의 예측대로 봄이 일찍 온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였음이 들어난 것이다.

2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는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타이 식당 Lemon Grass에서 연숙과 식사를 하였다. 집에서 밥을 해 먹기 귀찮아서가 아니고 무언가 ‘기념’을 하려고 일부러 간 것이었다. 오늘 3월 1일은 우리가 ‘매일 미사’를 시작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daily Mass 1 year Anniversary정도라고나 할까.. 하도 축하할 것이 없는 요새지만 이런 것도 자축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둘에게는 무엇 보다 귀중한 의미를 가지기에 매년 3.1절과 함께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2010년 가을 내가 레지오 마리애 행동단원 생활을 시작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2012년 3월 1일에 시작한 매일미사 참례 결정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일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레지오 마리애와, 매일 아침 9시까지 비록 집 근처지만 성당에 가서 아침 1시간을 지낸다는 것은 생각하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눈은 별로 없는 이곳이지만 흔한 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당엘 다닌 것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솔직히 얼마나 갈까 둘 다 자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기우였다. 우리가 의지로 나가는 것 이외에 무언가 우리를 도와주는 느낌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작년 3월 매일 미사를 하면서 가끔, 지금은 작고하시고 없지만, 레지오 동료단원 요안나 자매가 같이 와서 미사를 보곤 우리 집에도 들려서 식사도 하기도 했다. 그 자매님의 말씀으로, 미사와 영성체가 얼마나 신심생활에 도움이 되는 가를 배우기도 했다. 신심생활에 주는 의미를 떠나서, 이렇게 둘이서 매일 집밖으로 ‘나간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회적’ 의미도 생각해 보니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과거 오랜 시간 집에 틀어 박혀서 백일몽을 꾸던 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참 위험한 생활 방식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타이 식당인 Lemon Grass, 연숙은 항상 ‘팟타이‘, 나는 100% ‘Broccoli Tofu‘를 먹는데, 정말 주방장의 조화인지 언제나 ‘똑같이’ 맛이 있다. 이것은 chef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라서 그런지 신문에 아주 좋은 review까지 났다. 꽤 많은, 이름있는 식당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한 때에 이곳은 1994년에 open한 이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어서, 다른 일로 ‘자축’을 할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service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Great Ubuntu Hope

Humanity towards others...
Humanity towards others…

내가 Ubuntu[표준 한글 표기는, 우분투 쯤 될까?]를 알게 된 것이 언제였던가? 생각보다 그리 오래 전은 아닐 듯하다. 아마도 2008년 경이었을까?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것이 일반에게 공개, 배포된 것은 2005년 경이었다고 한다. 이 Ubuntu란 것은 물론 Open & Free computer operating system인 Linux의 한 ‘종류’이다.

Linux의 ‘핵심(kernel)’은 ‘한가지’이지만 그것 이외 부수적인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이 Free & Open system의 특징일 것이다.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조금씩 바꾸어서 ‘배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Free & Open‘ 철학은 정말 처음 나올 당시에는 ‘혁명’적인 idea였다. 특허로 꽁꽁 묶어 놓거나, copy-protection으로 방어하며 ‘고가’로 팔아야만 했던 computer software (OS 포함, Windows, Apple OS, etc)를 ‘공짜로’ 주겠다는 것은 사실 얼듯 듣기에 ‘미친’ 생각으로 들렸던 때.. 참.. 지금은 많이 많이 변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Microsoft Windows 급인 Linux(리눅스)인데, 물론 이것은 ‘처음부터’ 그런 Free & Open 철학으로 시작된 것이고, 그 ‘철학’만은 굳세게 유지되고 있다. 그들의 철학은 computer software는 모든 사람이 ‘무료’로 쓸 권리가 있고, 더욱 그것을 ‘발전’시킬 권리와 의무도 있다는 것인데, 역시 이런 idea는 Microsoft나 Apple 같은 business model과는 180도 다른, 정반대의 model임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이익추구’ 성질을 어찌하랴.. 기어코 이런 free & open model에다가 profit을 가미한 model도 만들어 내서 의외로 잘 운영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Red Hat 이나 IBM 같은 큰 회사들 인데, 이들은 ‘공짜’ linux를 만들어 대기업에 service를 팔아서 돈을 번다. 그러니까 ‘물건’은 공짜지만 그것을 유지, 수리하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의외로 이것이 그렇게 큰 business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런 새로운 business model은 이제 아주 튼튼한 자리를 잡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위의 예들은 ‘일반대중’과는 거리가 있는 대기업의 server system들인 반면 일반 대중들이 쓰는 PC desktop system은 Microsoft 의 Windows나 ‘머리는 조금 아둔하지만 돈은 많은’ 사람들이 쓰는 overpriced Apple computer 가 든든하게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에서도 비싼 Apple Mac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Windows가 거의 ‘거저’ 돈을 벌고 있었는데, 그것이 최근 2~3년 안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그 원인 중에는 mobile system(smart phone, tablet)의 폭발적 보급과 오늘의 화제인 Ubuntu system같은 open & free software 의 일취월장하는 성능의 향상.. 등이 있을 것이다. Mobile system에서는 역시 stupid but rich 를 봉처럼 생각하는Apple의 iPhone 같은 iXXX가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었지만, 현재는 Google의 Android 가 시장의 거의 3/4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역시 open system인 Android가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지금은 computing system history로서 아주 ‘중요한’ 시점에 있는 듯하다. 소위 말해서 post-PC era를 모두 예견하고 있는데 그 때의 ‘패자’는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봐도 ‘지독히도 이기적’인 Apple model은 그들이 ‘아무리 쌓아둔 돈’이 많다고 해도 장기간 sustain하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의 철학은 그 옛날 ‘고철‘ mode IBM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우리가 발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mindset은 이제 한 물이 갔기 때문이다. 현재 Apple이 바로 같은 mindset, 아니 더 심하게 고립적이고 독선적으로 ‘돈을 긁어 모으고’ 있다. 또한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오랜 기간 (1990년 이후, 현재까지) 거의 monopoly로 monster가 되어버린 Microsoft는 이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 적으로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 처럼 Microsoft customer로 오래 있었는데, 그것은 corporation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고 지금과 같은 credible한 competition도 없었기에 한마디로 choice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corporation을 떠나게 되면서 나는 그런 무상 혜택의 제한이 없어지고, 내가 고를 수 있으면 아무 것이나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Linux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고 나의 ‘구세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유’로운 Linux는 사람들의 구미에 따라 많은 flavor로 분열이 되어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혼란’의 상태가 뒤 따라서, 각종 flavor마다 독특한 맛이 다르고, 새로 배워야 하는 짜증도 따른다. 강력한 ‘통제체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바로 free & open system의 특징이라서 이것을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는데, 결국은 최근 들어서 서서히 Ubuntu system이 ‘de facto‘ winner로 군림을 하게 되고, 많은 노력 끝에, 그것을 더욱 더 일반 대중이 쉽게 쓸 수 있게 ‘매끈하게’ 보이는 데 ‘거의’ 성공을 하는 것 같다.

특히 최근 version인 12.x는 어떤 feature들은 Windows를 능가하는 것들도 등장하고 있다. 나도 그 동안 virtual system으로 ‘가끔’쓰곤 하다가 현재는 거의 정기적으로 쓰고 있다. Windows를 쓰다가 이것을 쓰면 당장 문제가 소위 말해서 business-standard인 Microsoft Office가 없다는 어찌 보면 ‘치명적인 듯’ 한 결점이 있는데, 쓰고 나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것과 거의 맞먹는 Libre Office 란 것이 있고 Microsoft Office과 ‘호환성’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누가 ‘꼭’ MS Office file을 원하지 않는 한 이것 또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Ubuntu all the way! Mark Shuttleworth

 

그러다가 결국은 Ubuntu의 ‘장기적’인 development model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앞으로는 Microsoft의 Windows desktop system를 적수로 삼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독자적인 ‘미래형’ system으로 가겠다는 정말 ‘대담한’ idea의 출현인 것이다. 이곳에 있는 Youtube video를 보면 알 수 있듯이, Ubuntu 하나로 smart-phone, tablet, desktop 전역을 ‘매끈’하게 해결하겠다는 아주 야심적인 계획.. 이것을 정열적으로 거의 맨손으로 이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Ubuntu 창시자 Mark Shuttleworth (a South African), 그는 억만장자에다가 idea가 많은 사람이고 그야말로 ‘좋은 쪽의’ visionary에 속하는 사람이다. Ubuntu란 뜻, ‘humanity toward others‘처럼, 그는 Steve Jobs같은 egomania, megalomania가 아니며, 그의 passion처럼 모든 일이 풀려나간다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명의 혜택’을 골고루 받게 될 것이다

The Homecoming, 귀향

Homecoming, 다른 말로귀향‘ 정도가 될까? 하지만 영어와 한글의 어감은 분명히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할 것이다. 언어는 그 원산지의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고, 영어의 homecoming은 아무래도 서구문화적인 것, 한글의 귀향은 한반도의 배경을 흠뻑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귀향은 늙어가시는 어머님을 만나러 오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어머니, 그리고 고향이 그리워 시골길을 걷는 나그네가 연상이 되고, homecoming.. 하면 어떨까.. 폭풍설이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속에 있는 자기가 자랐던 통나무 집, 그곳에는 사랑하는 어머님이 계신 그런 집으로 기를 쓰고 찾아가는 다른 나그네, 그런 것이다.

사실 오늘 나와 연숙은 서양적인 homecoming에서 한국적인, 김치냄새기 풍기는 듯한 우리의 고향 집으로 ‘귀향한 온 기분이었다.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일요일 주일 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와서 본 것이다. 거의 20년 만인가.. 물론 2010년 가을부터 이곳에 레지오 단원으로 화요일 마다 들락거리고, 일요일에도 ‘과외 행사’에 참여를 하긴 했지만 “진짜” 미사를 이곳에서 본 것은 아주 우리에게는 커다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고향’에 온 것이다. 1994년 즈음 이곳을 ‘완전히’ 떠날 때, 언제 다시 올지는 전혀 idea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우리, ‘최소한 나’는 완전히 하느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미국성당에 꾸준히 다니면서 익숙해지고 친근해지고 해서, 더 ‘귀향’할 구실도 없었지만, 하느님은 오묘하신가.. 아주 작은 발걸음으로 우리를 ‘고향’으로 이끌었다. 2010년 가을 레지오에 입단하기 전과 비슷한 느낌.. 무엇인가 변하게 되리라는 불안하기도 한 심정 속에서 무언가 ‘결단’이 필요함을 느끼며 몇 개월이 지났는데, 우연만은 아니게 오랜 옛 ‘후배, 지인’ 설재규씨와 재회를 하게 되고, 그것의 열매가 오늘, 우리의 ‘귀향’으로 goal-in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연’만은 아님을 느낀다.

20년이 지난 주일미사의 풍경은, 흡사 내가 Rip Van Winkle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어제 본 듯한 연대동문 이원선씨를 그곳에서 보았지만, 역시 그와 알았던 것도 20년 훨씬 전이었다. 어쩌면 10년 20년.. 이렇게도 오래된 세월이 지났단 말인가? 모두가 생소한 얼굴들..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현재의 목표가 한 달에 한번 이곳에 오려는 것이지만, 그것도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가게 될지, 나도 자신이 없다.

 

 

Hagood HardyThe Homecoming

 

귀향과 homecoming이란 단어를 떠 올리면서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 바로 The Homecoming 이란 제목의 연주 곡(instrumental).. 역시 아련히 떠오르는 이 단어와 그 감미로운 연주 곡.. 이 감미로운 곡은 1970년대 말에 총각으로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때, office (graduate student)에서 자주 듣던 것이고, 그 때마다 세상에서 저렇게 감미로운 것이 있을 까 감탄을 하곤 하던 그런 곡이었다. 한번은 나의 옆자리에 있던 전기과 후배 이재현씨에게, 나는 저 곡을 들을 때마다 ‘쉬 마려울 정도로’ 찌릿하다고 ‘고백’을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그 곡의 title을 몰랐고 아주 후에 그것이 The Homecoming임을 알았다. 이 곡은 캐나다 출신작곡가 (Hugh) Hagood Hardy 의 곡으로,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일설’에 의하면 TV movie였던 (Canada) drama: Anne of Avonlea/Green Gable에 삽입된 곡이었다고 한다.

고향.. 하면 어렸을 적에 일제시대 때를 연상하곤 했다. 그 어렵던 시절 고향을 ‘강제로’ 떠나 만주 등지로 갔던 동포들.. 그들은 찌들게 가난했던 고향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을 그리워했다. 세월이 지나고, 6.25 동란 때는 ‘지옥’같던 북한 땅을 떠났던 동포들.. 그래도 죽을 때가지 갈 수 없었던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 그 이후에는 어떠한가? 멀리 갈 필요가 없이 나도 지독하게도 넓은 바다를 건너와 또 ‘죽을 때까지’ 고향을 그리며 산다. 아니 이제는 가 보아도 ‘없어진’ 고향을 꿈 속에서 그리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한글 단어 ‘고향, 귀향’ 이 주는 영원한 느낌이고 의미일 듯 하다.

 

2월 중순, 와~ 춥다..

¶  2013년 2월도 반을 넘기고 이제 겨울과는 아주 멀어진 듯한 날씨에 익숙해지더니, 역시.. 자연의 ‘엄마’, mother nature는 못 말리나? 예고도 거의 없이 하루아침에 영하..로 그것도 낮 기온이 영상을 간신히 유지하는 싸늘함, 역시 아직도 춘분이 공식적인 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듯하다.

모처럼 한가한 날 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런 날이 계속되어도 문제다. 사람은 역시 몸이고 마음이고 계속 움직여야 사는 것이니까. 2013년 사순절이 지난 수요일에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로 시작이 되었지만, 사실 우리의 매일 routine이 크게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지난 일년을 거의 사순절처럼 살려고 해서 그런가.. 이건 너무 자화자찬일 것이지만. 커피도 계속 마셔대고, 즐기던 것을 끊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성취’할까.. 이것이 계획으로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 과정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볼 마음은 아직도 있다. 2월 20일부터 시작이 되니 만큼 아직도 생각해볼 여유는 있다. 지난 해 바쁘고 힘들었던 한 여름에 열심히 33일 과정을 거쳤고, 그 후에 내가 느꼈던 것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지만, 알았던 것 보다 의문과 생각할 것들이 더욱 많아졌음을 알았고, 역시 다시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또 역시, it’s now or never의 정신으로 도전해 볼까..

 

¶  요즈음 내가 즐기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있다면 역시 computer system hacking정도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요새 나의 관심은 mobile OS, 그 중에서도 Google의 Android (on Nexus tablets, mobile phones) ecosystem이 제일 관심이 간다. 지난 가을에 연숙 생일 때의 선물이 Google의 Nexus 7 tablet이었고, 올해 들어서 우리 가족이 family plan으로 T-mobile Samsung Galaxy phone으로 바꾼 뒤에 그 쪽으로 관심이 간 것이다. 두 system 모두 Android system이어서 이것 하나만 익히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듯하다.

이런 것들이 요새 들어서 워낙 바쁘게 변하고 있어서 하나를 배우면 2~3년 만에 ‘고물’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것들 모두 한마디로 embedded computing device들이고, 이것을 지난 25년 넘게 ‘직업적으로 만들어’ 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  정말 오랜만에 김인호 형으로부터 email이 왔다. 지난 연말 연시 때 연락이 되지를 않아서, 혹시 아프신가.. 아니면 세계일주 여행을 가셨나 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 동안에도 계속 ‘연구’만 하신 듯, ‘김인호의 경영, 경제 산책‘이라는 장문의 column을 쓰셨고 그것의 web links(1, 2, 3, 4)도 같이 보내 주셨다. 잠깐 읽어보니 경영, 경제 쪽의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나에게는 모두 생소한 것이 많았다.

나의 ‘경제, 금융’ 등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 대부분 부정적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전문 용어를 제외하면 이런 평론의 논지는 짐작이 간다. 우리 세대 (인호 형은 나보다 조금 위지만) 입장의 경제, 경영론이겠지만, 그런 매체에 실린다는 사실은 세대에 구별되지 않는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형만 동의를 한다면 그 평론들을 나의 blog에 전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2월 중순에 느끼는 으스스한 추위와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 소식, 영동 산간 지방의 때아닌 폭설..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을 얘기하는 김재진 시의 구절이 멋지게 어울리는 그런 날이었다.

 

세월

김재진

 

그런 잠 있었네. 낮고 흥건한

간다던 이 가고 없는

빈방에 불 켜놓고

후회없이 자리라 저녁 거르고 누운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소식 분분한데

영동 산간 지방엔 때아닌 폭설

환한 이마 찌푸린 채

가고는 오지 않을

아니면 오고는 가지 않을

그러나 사실은 가든지 말든지

아까울 것 없는 세월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

때로는

잘 나가던 시절의

해 놓고 지키지 않던 맹세 따라

가리라 가리라 노래하다 못간

그런 날 있었네.

품팔던 사람들 돌아오는 길목마다

소리없이 타버린 심지처럼

버려야지 버려야지 마음먹다 울던

그렇고 그런

그래서 그런

낮고 흥건한 세월 있었네.

 

 

¶  40년 전 이 맘 때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1973년.. 그 해 6월에 나는 나를 25년 동안 품에 안아주었던 고향산천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는 나의 긴 이어지는 역사가 되었다. 돌이켜보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슬프기도 하지만, 그 때는 희망과 낭만의 쌍곡선의 연속이었고, 그 당시의 추억은 역시 우리의 등대 pop song에 고스란히 얽혀있다.

그 당시에 어떤 것들이, 그 중에서 Lobo의 노래들은 쓰레기 같은 많은 것들에 눌려서 오랜 동안 숨어있었다. 다시 들어도 그것은 역시 ‘명곡, classic’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 정말 정말 오랜만이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Lobo 1973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Lobo 1973

Ash Wednesday 2013, Lenten wishes

 

For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 Genesis 3:19

 

어느덧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 내일, 코앞으로 다가왔다. 2013년 Lenten season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은 ‘금욕과 극기’의 40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살찐 화요일 , Fat Tuesday: Mardi Gras‘, 아마도 New Orleans는 이것으로 오늘 하루 종일 떠들썩 하지 않았을까?

재의 수요일, 2013
재의 수요일, 2013

나의 매년 매년 재의 수요일과, 그에 따르는 사순절은 느낌도 달라지고, 의미도 다르게 느끼며, 무언가 조금씩 ‘발전’하는 듯 느낀다. 이것은 정말 나에게 만족스러운 현상이다. 이 나이에 나에게도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내 자신도 믿어지질 않는다.

작년의 사순절 때와 나는 한 살 더 먹은 것 이외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한다. 작년에 비해 올해 나는 더 많은 영혼들과 작별을 했고, 그런 와중에 나는 ‘역사적’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St. Louis Marie de MontFort)의 ’33일 봉헌’과 그 뒤에 따르는 우주관의 격한 변동을 경험하였다. 이것이 작년에 맞은 사순절과 올해의 차이일 것이다. 이것을 발판으로 올해 40일에 나는 무엇을 ‘바치고 바랄’ 것인가?

예년에 하던 통상적인 아침 커피 피하는 것 같은 것은 이제 조금 그 매력이 떨어졌다. 우리 Holy Family 성당 주임신부님도 ‘하지 않는 것’ 보다 ‘더 하는 것’에 신경을 쓰라고 하신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간다. 더 적극적인 삶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라는 뜻일 것이다. 무엇인가 절약을 했거나 삼가 했으면 그것을 누구에게 준다거나, 레지오의 정신으로 이웃에게 본격적으로 선교를 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적극적’인 것 들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나는 어떤 ‘적극적’인 것들을 하여야 할 것인가..

Rediscovering Catholicism작년 7월 중에 했던 위에 말한 ’33일 봉헌’.. 그것을 할 당시에 나는 더위와 싸우며, 계속되는 장례, 연도, 슬픔, 이별 등을 경험할 때였다. 그래서 그 ‘봉헌’이 의미는 더 있었을 것이겠지만 정성을 들여 집중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 사순절에 다시 그것에 ‘도전’을 할까 생각 중인데, 아마도 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 이후에 내가 ‘받았던’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것은 우선 순위 중에 으뜸일 것이다.

그 동안 ‘천천히’ 읽어오던 책, Matthew Kelly의 걸작, 책 Rediscover Catholicism을 정독, 완독을 하면 어떨까?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은퇴 선언으로 다시 교회는 앞으로 갈 길을 찾는 기로에 서있어서 이 책은 정말로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이런 것들.. 다 좋지만 역시 레지오 단원으로써 제일 값진 것은 ‘헤매는 영혼을 구하는 것’, 그러니까 새로운 ‘전사, 단원’을 찾아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 나에게는 거의 Mt. Everest처럼 높게만 보인다.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은 많지 않고, 이렇게 할 것은 많은데 어떻게 이런 것들 현명하게 풀어나갈 것인가.. 역시 어머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What? Why..why not, Benedict XVI

오랜만에 일찍 아침잠에서 깨고 보니 아직도 깜깜하고, 시계를 어렴풋이 보니 6시도 되지를 않았다. 아침잠을 이렇게 설치면 기분이 과히 좋지 않음을 알기에 ‘무조건’ 6시까지 뒤척이며 기다렸다. Flash flood watch까지 예보된 축축한 늦겨울.. 귀를 기울여도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붕의 gutter에서 새는 빗소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이런 새벽이면 유난히 잘 들리고, 심지어 문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기대했지만 그래도 조용하다.

모처럼 깜깜한 가운데 침실에서 나가니, 역시 우리 집 귀염둥이 고양이 Izzie가 배고프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나는 거의 로봇처럼 내려가 밥을 주고, 오랜만에 ‘진한’ 커피를 갈아 내리고 아직도 켜지지 않은(programmed-timer에 의해서 아침 6시 45분에 켜지는) living room light를 ‘강제로’ 키고, 이번 달의 ‘주제곡’ Telemann symphony CD를 들으며 aroma가 ‘죽여주는’ Christmas blend Starbucks coffee로 이른 아침의 목을 축인다. 시간은 비록 일찍이었지만 이것은 내가 매일 아침마다 거치는 routine이다.

교황 베네딕트 16세
교황 베네딕트 16세

그런대로 해 없는 ‘여명’의 시간이 되면서 desktop PC로 streaming TV channel을 켜 보니.. 갑자기 머리가 띵~ 해지는 news가 흘러나온다. 그것을 듣고 보면서.. 내가 아직도 잠에서 덜 깨었나 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news를 보고 있었다. Pope is resigning at end of the month.. 교황, 2월 28일에 사임..무슨 comedy인가.. 며칠 전까지 Angelus (삼종기도)에서 비록 느리지만 ‘건강한’ 얼굴을 본 것 같았는데..

‘거의’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해서 더 놀란다. 마지막으로 ‘자진해서 사임’한 case는 15세기.. 우아.. 정말 너무하다. 전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Blessed Pope John Paul II)는 혼신과 혼미의 몸과 정신으로도 끝까지 버티셨는데, 거의 ‘멀쩡하게’ 보이시는 베네딕트 16세(Pope Benedict XVI)는 왜 그런 ‘폭풍’과 같은 결정을 하셨을까? 공식적인 이유가 ‘건강상’의 문제고, 분명히 그것이 이유일 것이라도 나는 믿는다.

요새 85세면 그 옛날의 85세는 아닐 것 같고, 교황의 오랜 경험과 명석한 두뇌는 젊은이 못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 주위의 사람들도 거의 몰랐고, 그래서 더 놀랐다고 보도가 되고.. 논평하는 ‘바티칸 전문가’ 들도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전 교황이 그렇게 오래 병마와 싸우면서도 교황 직은 고수하셨기에, 그런 과정을 또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교황이 그런 괴로운 결정을 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전 교황이 겪었던 ‘괴로운’ 과정이 지금 천주교회의 여러 가지 사정과 입장에 맞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교회의 문제들을 보고, 오랜 동안 견딜 수 있는 젊은 교황의 출현을 기대했는지도.. 그분의 예외적인 신학적인 지식과 영성을 알기에 그런 어려운 결정을 믿는 것이 올바르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도 왜 지금인가.. 내일 모래가 사순절(Lent)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인데.. 우리에게 왜 이런 ‘분심’을 주게 한 것인가? Timing으로 보면 아마도 부활절 전까지 새 교황이 선출 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또 적응을 해야 한다. 무언가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것은 교회, 이 세상, 아니 나와 우리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새 교황, 그것도 ‘젊은’ 교황이 선출되면 그는 교회를 어떤 쪽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어두운 아침’을 맞는다.

 

Postscript

몇 시간 후에 교황 베네딕트 16세께서 직접 은퇴, 사임 발표하는 video가 Vatican TV에 실렸다. 역시 ‘건강’하신 모습이다. 이제 조금씩 교황님의 뜻을 알 것 같다. 야심적인 개인 의견을 접고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는 교회를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영화 자유부인과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1956

영화 자유부인, 1956

얼마 전에, 어렸을 적에 귀따갑게 들었던 1950년대 화제의 영화, 자유부인을 기적적으로 보게 되었다. 기적적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것이 이 영화는 1956년에 나온 것으로 그 바로 전에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같은 이름의 정비석 원작의 신문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고, 그 당시에 불과 국민학교 2~3학년 정도였던 나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세기가 지난 뒤에 실제로 그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surreal한 기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화제의 단계를 넘어서 그 소설, 영화는 ‘문제작’의 수준까지도 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자유’라는 단어가 붙었던 그 당시였다. 당시의 이승만 여당도 자유당이고, 대한민국은 자유란 말만 붙으면 모든 것이 ‘멋지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급기야 ‘자유부인’이란 말까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자유와 부인“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던 비교적 엄격한 ‘남녀 유별’의 전통이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 보면 간단히 말해서 ‘남녀차별, 남존여비’의 전통이다. 나와 같은 세대는 그런 ‘구식 전통’을 보며, 느끼며 자란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개XX’의 도움으로 6.25 사변을 거치며 거대한 미국의 ‘신식 문화’가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을 timing좋게 당시 유명했던 대중 소설가 정비석 씨가 인기소설로 이끌어내고, ‘폭발적’인 화제가 되자 곧바로 영화가 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서로 바람 피는 대학교수 부부의 주변을 그린 것이지만, 특히 교수부인, 춤바람 난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결과는 비교적 예상하기 어렵지 않게 끝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바람 피는 여자’에 대한 질타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여자의 권리’ 같은 것도 나란히 잘 그려낸 듯 하다.

한태석 역의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한태석 역의 김동원, 1956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는데, 이 영화에 보이는 location(로케, 촬영 장소)들이 너무도 눈에 익었던 곳이어서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우선 시청과 국회 의사당 주변에서 당시의 차들이 오가는 거리 풍경은 정말 내가 보고 기억한 것과 100% 일치하였다. 특히 행인들의 옷차림: 중절모의 남자, 한복의 여자들을 보면서 ‘맞다, 그때는 그랬다’ 하는 탄성이 나오곤 했다.

시발 택시도 나오기 전 차량들은 거의 ‘미제 시보레’ 급의 세단들과, 일본이 남기고 갔거나, 수입했던 ‘동글 동글한’ 시내 버스들.. 물론 그립던 ‘귀여운 에노 전차’들이 명동, 미도파 앞에서 굴러가는 모습들은 사진처럼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동화 백화점, 남대문 시장입구, 미도파.. 심지어는 화신백화점 옆에 있었던 ‘신신백화점’이 깨끗이도 보인다. 이 영화의 보존 상태는 정말 어제 찍었던 흑백 사진과도 같이 좋았다.

1967년 용가리의 김동원
1967년 대괴수 용가리의 김동원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민 이란 남자배우를 보게 되었다. 귀에 많이 남았던 배우였는데, 자세히 보니 참 잘생겼다. 왜 그 이후에 큰 스타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간판배우 박암,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한 그의 연기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징이 없다. 여자 주연인 ‘김정림‘.. 정말 모르겠다..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그녀가 주연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깜깜 이다. 구닥다리 안경과 새카만 콧수염의 ‘주선태‘.. 좋은 역으로 나오긴 힘든 배우고 배역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 중에 하나다.

문제는 이곳에 나오는 ‘연극배우’ 김동원.. 나는 그가 이런 ‘대중영화’에 그것도 초창기에 출연했는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저 사람이 내가 기억하는 ‘연극배우’ 김동원은 아니겠지 할 정도로 조금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문제는 머리칼 머리 숱.. 내가 아는 김동원씨의 머리는 절대로 ‘대머리, 반대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당시의 가수였고, 배우 황해씨의 부인이고 전영록의 어머니

나의 머리가 빠지다 보니, 더욱 호기심이 나서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분명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연극배우’ 김동원이 분명했다. 그의 머리 스타일은 반 대머리.. 훨씬 이후에 보이는 김동원씨의 모습은 절대로 대머리가 아니고 숱이 많은 모습들이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원래 대머리였고, 그 이후에는 ‘가발’이었을 가능성과, 영화 자유부인에서 ‘역할에 의한 삭발’의 가능성..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물론 100% 확신을 할 수 없지만 나는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유부인 이후의 김동원씨, 가발 수준은 정말 수준 급이라고 해야 할 듯하고, 많은 fan들에게는 그렇게 상대적으로 ‘젊은’ 모습을 남기려 했던 그 노력은 참 상당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렇게까지 한 것에 100%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직업상 어쩔 수 없었을지 않을까.. 그저 benefit of doubt을 주고 싶어진다.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1956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자유부인 1956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바른쪽 끝에 가수 김세환씨가 보인다

 

True Love – Bing Crosby & Grace Kelly, 1956
그 당시 유행하던 영화 High Society의 주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