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er 2013, Proof of Heaven

¶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 첫 부활로부터 2000년 이상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의 최고의 축일이다.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 계속된 사순절도 오늘로서 끝이 난다. 지난 목요일부터 시작된 ‘피곤하기도 한’ 각종 의미를 갖는 ‘무거운’ 날들, 특히 토요일 밤의 Easter Vigil 은 영세,견진의식까지 있어서 부활 일요일 아침에는 피곤하기까지 하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식구들이 나를 ‘끌고’ 부활절 미사에 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서 우리부부가 두 ‘아이’들을 ‘끌고’ 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내가 C&E Christian (크리스마스와 부활 때만 성당엘 가는 신자) 였는데 지금은 우리 두 아이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제 시간에 같이 집에 온 ‘아이’들.. 기꺼이 미사에 참석을 하였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 정도인 것이 조금은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모든 식당들이 문을 닫기에, 언젠가부터 이날도 다른 holiday같이 ‘잘 먹기로’ 하고 fillet minion steak 와 wine으로 이른 점심을 하고 아이들은 집을 떠났다. 엄마의 제의로 매달 넷째 일요일에 집에서 ‘이렇게’ 먹자고 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기꺼이 동의를 해서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아이’들이 아닌가.. 그렇게 커버렸나.. 생각하며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기도 했다.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  얼마 전 ‘갑자기’ Costco에서 갔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책 proof of heaven, 진부하기도 한 제목이었지만 조금 독특하게 기분이 좋은 표지에 끌려서 읽고, 결국은 사게 되었다. 읽기에 부담이 없는 200 page가 안 되는 것도 그렇고, 저자의 경력이 더욱 독특했다. Neurosurgeon, 그러니까 신경외과의 정도가 될까.. 한마디로 뇌수술 전문의인 것이다. 그가 정말로 희귀한 ‘감염’으로 일주일간 사경, coma 끝이 역시 ‘기적적’으로 ‘완전 회생’, 그때 그가 ‘보았던 것’을 적은 것이다.

작년에 나온 책으로 New York Times Best Seller #1, 그러고 보니까 언젠가 뉴스에서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런 ‘현상’을 NDE, Near Death Experience라고 부르는데,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 없이 이런 사례가 보고가 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과학적’으로 연구까지 한다고 한다. 이 책이 특출한 것은 그것을 겪은 사람 자체가 뇌외과 전문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분야의 과학자중의 과학자인 것이다. 그가 비과학적인 것을 겪었으니, 그의 고뇌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적 경험을 그는 어떻게 ‘절충, 타협’을 했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예수성체를 지키며 하던 성당 새벽 성체조배를 앞뒤로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때의 나의 느낌과 경험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전율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절대적 하느님의 존재는 이제는 거역할 수 없는 ‘진리’임을 겸허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번 부활에 나에게 주어준 은총임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이것이 65년 만에 알게 된 진리였던가?

Good Friday, Tipping Point of..

Seven Last Words..
Seven Last Words..

¶  Good Friday..   of the Passion of the Lord. 주님 수난의 성금요일.. 바로 오늘이다. 부활 성삼일 중간에 있는 ‘조용한’ 날이기도 하다. 한글로는 성금요일인데 영어로는 Holy Friday라기 보다는 항상 Good Friday라고 부른다. 이 성삼일에 있는 천주교 전례는 모두 독특한 이름이 있다. 목요일 것은, The Mass of the Lord’s Supper, 금요일 것은 The Passion of the Lord, 토요일은 Easter Vigil.. 우리의 본당인 영어권과 한국어권 두 곳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둘 다 알고 있어야 하는 부담이 항상 있지만 나는 그것이 부담이라기 보다는 ‘더 많이 알게 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오늘이 Good Friday 인데 왜 하필 ‘Good‘ Friday라고 부르는 것일까? 오랜 전부터 나는 그것이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의아스럽지 않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예수님은 처참하게 죽어갔지만 그것의 결과인 부활과 그것으로 200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천주교의 ‘인류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Good인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우리의 젊은 신입 레지오 단원 엘리사벳 자매님이 우리 Holy Family 본당에서 있었던 일일 피정에 참가하면서 그 때 교재로 쓴 Dennis Billy 저, subtitle “Meditation on the Seven Last Words of Jesus”란 가벼운 책자 하나를 나에게 빌려주었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천천히’ 죽어가면서 하신 일곱 마디 ‘말’들.. 을 가지고 reflection questions 을 제시하며 서로의 의견 나눔을 도와준다. 사순 절에 일일 피정의 교재로 쓰기에 정말 안성맞춤인 책이라고 할까. 그 일곱 마디의 말은:

 

  1. “Father, forgive them, they know now what they do.” (LUKE 23:34)
  2.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LUKE 23:43)
  3. “Woman, behold, your son… Behold, your mother.” (JOHN 19:26-27)
  4.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MATTHEW 27:46)
  5. “I thirst.” (JOHN 19:28)
  6. “It is finished.” (JOHN 19:30)
  7.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end my spirit.” (LUKE 23:46)

 

이 말들은 예수님의 ‘생전’에 하신 마지막 ‘역사적’인 말들이다. 그 이후, 그러니까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들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차원이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신에서 해방이 되신 이후의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가진 상태에서 하신 이 마지막 말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오늘 새벽 아니 한밤중이었던 새벽 2시부터 3시까지 나는 연숙과 같이 난생 처음으로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성당에서 성금요일 성체조배(Eucharistic Adoration) 를 ‘감행’ 하였다. 연숙은 오래 전에 친지교우들과 같이 한 번 해 보았던 것을 나도 기억을 하지만 나는 처음이다.

이것은 천주교만의 전통일까..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미사가 끝나면 성당내의 ‘모든 전례 도구’들은 ‘철거’가 되고 성체가 모셔진 ‘감실(tabernacle)’ 도 비게 된다. 그때 성체가 성체 조배실로 옮겨지게 되고 그때부터 ‘쉬지 않고 계속’ 성체조배가 행해지는데, 문제는 이렇게 자정 이후 한 밤중에는 그것이 중지될 수도 있기에, 미리 ‘예약’을 받아두고 조금도 그 성체가 ‘방치’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지난 달 꾸리아 월례회의에서 새벽 시간의 예약을 받을 때 나는 거의 ‘무심코’ 이름을 써 넣었다. 주로 레지오 단원들이 참가하기에 나는 큰 부담 없이 한 것인데 밤 11시면 ‘세상없어도’ 잠자리에 드는 나의 육신에는 사실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무심코’ 감행을 하였고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두고두고 보아야 할 테지만 나는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도 사실 나의 근래의 좌우명 ‘It’s Now or Never‘ 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  Tipping Point..   한참 유행했고 이제는 ‘흔한’ 용어가 된 말이다. 무언가 ‘거대한 것, 힘든 것’이 오랜 노력과 시간 끝에 ‘움직이기’ 시작하며 뒤돌아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상을 말한다고 할까.. 나는 65년 일생을 통해서 이런 것을 나의 몸으로 경험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좋건 싫던 간에 나와 직접 상관이 없는 것들이 ‘넘어가는’ 것은 물론 많이 보았다. 정치적으로는 요지부동의 공산당 제국들(김일성 개xx는 제외)이 넘어가는 것도 보았고, 사회학 적으로는 ‘말단,주변 생물’이었던 ‘동성’들이 이곳 저곳에서 어깨를 펴고 기어 나오는 것도 보았고, 자연과학에서는 global warming같이 세계적 기후가 변화 되는 것도 현재 목격하고 있다. 이런 global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의 personal tipping point는 무엇일까..

요새 목격하고 있는 나 자신의 세계,우주관의 지각변동일 것이다. 이것이 tipping point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이 변동이 참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세계, 우주관이라고 하면 조금은 막연한 느낌도 들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표현은 ‘종교, 신앙관’이 맞을 지도 모른다. 반세기 넘게 희미하게 흩어져 있던 조그만 ‘점’들이 조금씩 연결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서로 연관들이 없었던 것들이 하나 둘씩 연결되며 조금 더 큰 점으로.. 그 커진 점들이 다시 다른 것들과 연결이 되며 더욱 커지고.. 결국은 그 점들의 ‘질량, mass’가 tipping point에 다다르고 있다고 할까. 이제는 확실히 느끼며 믿게 되었다. 이 불가사의한 우주와 우리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것이 이번 사순절을 지내며 내가 받고 있는 ‘은총’이다.

 

꽃샘 추위, 아치에스, 판공성사

¶  꽃샘 추위   3월 25일, 어제는 Palm Sunday였고 드디어 2013년 성주간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에 ‘그 것’이 모조리 있는 것이다. Easter or Paschal Triduum이라고 불리는 성삼일(Holy Thursday, Good Friday, Easter Vigil)에 이어 부활절 일요일.. 조금 생각만해도 숨이 찬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모두 일년 내내 기다리던 그 때가 아닐까?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없다면 사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성주간에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아니, 사실 지나간 2월 달이 1월 보다 더 추웠고, 지금의 3월 달이 2월 달보다 더 춥다. 오늘은 낮 기온이 화씨 40도(섭씨 5도?)도 안 되는 듯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일까? 옛날 옛적 서울에서 살 때 이것을 ‘꽃샘’ 추위라고 했지만 지금 것은 조금 다르다고 할까.

제일 큰 ‘희생물’은 봄을 기다리던 꽃나무들이다. 찬란하게 초봄을 알리던 수많은 꽃, 나무, 잔디들.. 모조리 거의 ‘잠잠’하다. 아니 불쌍할 정도다. 작년을 생각해보니 너무나 대조적, 정말 찬란한 작년 3월 말을 기억하니까.. 방방에 놓여있는 space heater를 ‘거의’ 치우려고 했는데, 그랬다면 정말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동복’들도 고스란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아마도 아마도 부활절, 4월 초가 되면 정말 봄이 오지 않을까?

 

acies-2013¶  아치에스(Acies)   지난 일요일 3월 17일에는 일년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의 주요 행사중의 하나인 ‘아치에스’ 행사가 열렸다. 아치에스, Acies라는 말은 라틴어로 로마시대 군대의 전투대형을 뜻한다. 레지오 마리애 조직의 원형이 로마 군대의 것을 따랐기에 이것도 그것의 일부인 것이다. 비록 군대식으로 조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조직의 운영에 대한 것이다. 조직의 힘을 모으려면 역시 군대식이 최고일 것이다.

그래서 일년에 한번 거의 군대식으로 모두 모여서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인데, 올해로 나는 세 번째 이것을 맞이한다. 지난 2년 동안 참가하고 보면서 느낌이 참 신선하고, 무엇엔가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총 사령관이신 성모님께 충성을 서약하는 것인데, 평소에 잘 못 보던 동료 단원들을 이곳에서 모두 보게 되는 것도 그렇고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감동적이기도 했다.

 

¶  부활절 판공성사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이름도 다양하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7성사 중의 하나인 ‘성사’다.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톨릭만이 ‘자랑’하는 아주 독특한 것이고, 제일 인기가 없는 성사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자기의 ‘치부, 부끄러운 곳’을 ‘남에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 영화에서 보는 듯이 그렇게 dramatic한 것도 없고,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야기되는 ‘꽤 죄죄’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고백을 할 것인가?

이 성사를 교회에서는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을 하라고(보라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따르는 모범신자들이 많이 있을까? 하기야, 주일미사를 빠질 때마다 이 성사를 보는 교우를 보기는 보았지만, 그것은 예외에 속할 듯 하다. 내가 본 많은 사람 중에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년에 중요한 때 (부활, 성탄 같은) ‘겨우’ 보는 사람들.. 그렇게 이것은 사실 부담스러운 것일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는 듯하다. 괴롭게 느껴지는 ‘죄’는 고백을 하면 시원하게 느껴질 것이고, 분명히 사제는 주님을 대신해서 ‘용서’를 하신다. 그러니까 고백성사를 하는 것은 정말 괴롭고 어려운 것이지만 이것을 마쳤을 때의 ‘환희’는 어디에도 비교하지 못한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기억을 하며 다시 성사를 준비하고 한다. 이것이 이 성사의 매력이라고 할까? 나는 최근에 신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며 일년이 최소한 2~3번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고, 사실 나는 이것도 자랑스럽다. 특히 어둡기만 한 고백소에서 하는 것을 피하고 ‘대담하게’ 신부님의 사무실에서 면담하는 식으로 한 것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올해 부활절 판공성사는 지난 목요일에 ‘가족행사’로 보았다. 연숙의 대녀님인 권 모니카 자매를 대동하고, 게다가 올해는 오랜 지인 설재규씨가 합류를 해서 4명이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지난 일년간 성사를 못 보았다던 설재규씨가 참가한 것은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으로 느껴졌고,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같이 하게 될 수 있을 것을 꿈꾸기도 했다.

‘ 후리타, 집을 사다’, 떠나는 새로니

Cornerstone Village Condo

돌아온 새로니.. 제목이 그럴 듯하다. 영화제목 ‘돌아온 장고‘ 처럼.. 우리 집의 큰딸, 새로니가 거의 6년 만에 ‘일단’ 정든 집으로 돌아와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잠깐 머문 적은 많았지만 자기의 살림살이 짐을 ‘완전히’ 우리 집으로 옮기고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근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Y 세대는 물론이고 심지어 비교적 젊은 축 X 세대들까지 자기가 자라던 집, 그러니까 부모의 집으로 ‘퇴각하는 것’이 요새 많이 보이는 현상중의 하나라는 보도도 심심치 않은 이때, 큰딸 새로니가 집으로 들어온 것은 그런 보도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듯 느껴진다.

젊은 ‘애’들이 ‘지독한 불경기’를 못 견디고 집으로 ‘퇴각’하는 것과 새로니는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무섭게 예리한 경제감각을 가진 요새 애들, 특히 여자애들’ 중의 하나인 새로니에게도 경제적인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니에게는 그다지 신나는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 career의 방향이 바뀐 후 처음으로 맞는 불경기 하의 job market에 대한 불안 감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일단 우리의 혈육이 자기가 자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조금은 경제적으로도 새로니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오랜만에 다시 이사를 가야 하는 압박감 없이 자유스럽게 ‘옛날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조금 비약적인 희망일 것이지만.

 

위의 메모는 작년, 그러니까 2012년 4월경에 남겨둔 것이고 ‘미완성’의 글로 남았었다. 그것을 오늘 다시 본다. 집을 떠난 지 6년 만에 같이 산 것이 이제 거의 1년이 되어간다. 6년 떨어져 산 돌아온 ‘아이’를 옆에서 보며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우리가 난 ‘아이’가 돌아온 것은 물론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긴 하지만, 당혹한 순간들도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괴로운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과연 ‘혈육, 가족’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새삼스레, 아주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가장 놀란 것이 있다면 그 동안 내가 심각하게 가족관계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복어 사전>으로 번역이 된 일본에서 나온 수필집을 보면 역시 ‘머리가 큰’ 자식과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보여준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제일 좋은 방법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다른 지붕’ 아래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읽을 당시에는 정말 실감을 못했지만 요새는 그 책 저자의 의도와 생각에 150% 동감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럴까? 지난 일년 새로니와 같이 살면서 나는 그런 질문만 계속하며 살았다. 왜 그렇게 어려울까? 왜 어렸을 때와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답은 간단할 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고 모두 그 동안 ‘변한’ 것이다. 부모인 우리도 ‘나이에 따른’ 고집과 경륜이 쌓였고, 성장한 아이도 혼자 살아도 되는 독립된 어엿한 사회인으로 그 애 만의 독특한 경험과 주관이 생긴 것이다. 예전 같으면 특별한 ‘배려 없이’ 의견이 모아지던 것이 이제는 ‘협상’이 필요한 때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옛날의 ‘즐거운’ 때만 생각하며 ‘쉽게’ 생각하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지 않았을까? 집을 떠난 6년 동안 그 애만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배운 습관들.. 역시 옛날의 것에 비교하면 무리가 있다. 나는 그저 그런 모든 ‘조그만 문제’들은 가족의 사랑으로 아무 문제가 안 될 것으로 ‘확신’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역시 모자랐다.

하느님은 공평하신가.. 괴로운 때와 즐거운 때의 비율이 반반 정도라고 하면 조금 과장 된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즐거운 순간들이 기가 막히게도 괴로운 순간들을 ‘중화’시키며 살아가게 해 준다. 하지만 역시 결론은 각각 독립적으로 살려면 물리적 환경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불경기 속에서 job을 용케 찾았고, 안정된 재정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자마자 새로니는 ‘결사적‘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게 되었다.

우리의 희망은 결혼을 하면 더 안정될 것 같지만,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요새 젊은 여성들의 생각은 우리의 희망과는 전혀 무관하게 흐르고 있었다. 인생에서 결혼의 우선순위는 과장된 표현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낮아지고 있다. 하물며 자식을 낳은 다는 것은 그 보다 더 낮은 곳에 있었다.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다지 급할 것도 없고 중요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남의 간섭을 덜 받고, 편하게 살려는 일종의 ‘쾌락주의‘라고나 할까. 간혹 행운적으로 예외는 있지만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일 수록 더 그런 경향이 심하다. 그런 것을 알면서 push한 다는 것은 더욱 큰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결국, 옛날 우리의 즐거움이었던 큰 딸 새로니는 우리의 품을 ‘완전히’ 떠나기로 하고, 불경기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부동산 경기를 의식하며 혼자 몇 년은 살 수 있는 1 bed-room condo를 사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의 혼자서 직장시간을 쪼개어서 집을 찾고 보고 하더니 너무나 피곤한지 realtor를 구하게 되었다. 미국인 realtor만 상대하더니 나중에는 아무나 상관이 없는 듯해서 우리 한인성당에서 알게 된 Emily Kim 자매님을 연숙이 소개해 주었고, 조금 씩 오르기 시작하는 집값을 의식하며 거의 3개월 동안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 Atlanta mid-town에 있는 condo를 찾게 되었다.

그 property는 비교적 싸게 나온 것으로 역시 지독한 불경기 속에 foreclosure된 것으로 bank소유였고 소위 말하는 short sale되는 그런 곳이었다. 한창 부동산 거품일 적 그곳은 아마도 $100,000이상에 거래 되던 곳이었을 것이 거품이 빠지면서 거의 $85,000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원래 주인은 아마도 mortgage를 낼 수가 없어서 그냥 집을 떠났던 그런.. 지난 5년 동안 이런 ‘비극’은 미국 전역에서 수없이 일어났는데, 지금 그런 곳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조금씩 팔리게 된 것이다. 그뿐이랴.. Mortgage interest rate가 옛날 우리가 듣고 보던 것의 반도 채 안 되는 저렴한 것과, 지역마다 부동산 경기를 살리려고 ‘정부 레벨’에서 각가지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까지 생겨서 그런 정보들만 잘 찾아내면 더 싸게 살 수도 있게 되었다.

악착같이 새로니는 그런 것을 찾아내어서 거의 $15,000을 절약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연방정부에서 주정부로 보조해 주는 것인 모양인데, 조건은 집을 처음으로 사는 것과, 그 집에서 5년은 살아야 하는 것, 지역도 Atlanta 시내 인 것 등으로 새로니에게는 아무 하자가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조건이고 역시 관건은 ‘구비 서류’에 있었는데 그것을 그 애는 정말 꼼꼼히도 챙기며 노력을 해서 결국은 그 혜택을 받아내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부부는 입만 벌리기만 했는데, 우리보고 하라면 ‘절대로’ 못할 서류들이었기 때문이다.

Bank loan을 신청하고 승인을 받는 것이, 우리가 20년 전 집을 살 때와는 정말로 sea change였다. ‘무섭게, 까다롭게, 시간을 질질 끄는’ 그런 식.. 어찌 안 그렇겠는가? 지난 부동산 거품이 그런 것을 너무나 해이하게 하였기에 생겼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군소리를 못 할 것이 그렇게 해야 다시는 전과 같은 ‘거품’이 생기지 않기에 말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2주 전에 드디어 closing이 성사가 되었는데, 그때 새로니의 기쁨은 우리가 옆에서 보아도 큰 듯 했다. 거의 ‘혼자서’ 한 것이다. 아니 100% 혼자서 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집을 같이 보았던 것.. 그것 뿐이니까. 그런 날이 우리 집에서는 Lemon Grass moment 라고 불려져서 모처럼 단출한 4식구가 ‘모두’ 모여서 외식을 하고 ‘꼬마’ 집주인이 된 새로니의 ‘독립’을 축하해 주었다.

그저께 드디어 moving truck이 와서 많지 않은 짐을 mid-town으로 날랐다. 동생 나라니 집에서 언니에게 주는 used couch도 날라와서 그런대로 살만한 환경으로 변하고, 새로 페인트를 칠하며 ‘혼자 사는’ 꿈을 꾸는 듯.. 옆에서 보는 우리의 심경은 조금 mixed라고나 할까.. 어찌 안 그렇겠는가.. 우리 가족의 변천사에 큰 획을 긋는 그런 시간들이 아닐까. 막상, 마지막 이삿짐이 나가면서 우리는 정말 착잡한 심경을 맛 보았다. 같이 있을 때, 조금 더 친절하게 해 줄 수는 없었을까.. 역시 우리는 후회를 만들며 살고 있는 것이다. 속으로 계속, “새로니, 서로 섭섭하게 한 것들이 있으면 빨리 잊자, 우리는 가족이니까” 라고 되뇐다.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 에서 보는 것처럼, 고향 서울 커다란 한옥 줄줄이 이어지는 사랑방에서 각자 기거하며 ‘오순도순’ 살던 대가족들, 비록 가난했지만 절대로 외롭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4명 밖에 안 되는 ‘형편’에 그것도 떨어져 살아야 마음이 편하게 느껴진다는 그런 사실이 슬프게 하는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시간은 흐르고, 사는 방식도 변한다. 이제는 절대로 옛날 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일까. 역시 슬픈 심정을 떨칠 수 없는 시간들이다.

 

Blind가 아직 없는 창문으로 보이는 mid-town view

Blind가 아직 없는 창문으로 보이는 mid-town view, 정말 오랜만에
urban feeling을 회상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아틀란타 midtown, 기대 보다 훨씬 깨끗하고 젊게 느껴진다

아틀란타 midtown, 기대 보다 훨씬 깨끗하고 젊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 일본 TV 연속 드라마 ‘후리타 집을 사다(フリ-タ-、家を買う)‘라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후리타는 freeter의 일본식 표기 발음이고, ‘공짜로 부모 집에’ 얹혀 사는 young adult children을 말한다. 대부분 ‘바이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립할’ 날만 손꼽는 자녀들, 경제적인 이유로 그렇게 사는데,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그런 현상이 있는 모양. 하지만 그 드라마는 아주 ‘착실한 후리타’를 잘도 그려냈다.

열심하고 건실하게 사는 애 띤 청년이 삼류대학 출신이라 대기업 직장을 못 구하고 조그만 토목회사에 ‘아르바이트’ 로 들어가 일을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 엄마를 위해서 좀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일념으로 각가지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참 눈물겹게도 그려냈다. 끝이 정말로 흐뭇한 것으로 결국 집을 사게 되는 것이다. 가족관계가 경제성장으로 많이 해이해진 일본, 연로해가는 부모를, 자기 희생까지 하며 돕는 이런 드라마는 아마도 현재 일본의 개인적 사회 현상에 ‘경고, 충고’를 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본다.

 

후리타 집을사다, 인기 일본 TV 연속 드라마

후리타 집을사다, 인기 일본 TV 연속 드라마

Freeter, 후리타 주연배우 들

후리타 집을사다, 주연배우, 왼쪽

 

보리수와 들장미

영화 보리수 광고, 1959
영화 보리수 광고, 1959

보리수, 들장미.. 허~ 웬 꽃 나무 이름들.. 그 말이 맞긴 하지만 여기서는 사실 영화의 제목들이다. 머리를 짜내고 내며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 들추어서 다시 새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 두 영화이름은 사실 그렇게 큰 노력을 할 필요도 없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거의 50년 이상을 견디어온 그 기억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두 영화는 모두 독일(그 당시는 서독, West Germany)의 영화로써 1950년대 중반에 나왔고 수 년 후에 곧바로 ‘일본을 거쳐’ 대한민국에도 들어와서 특히 ‘재미있는 것이 거의 없던’ 그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 대인기를 끌었었다. 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보리수’란 영화를 국민학교 4학년, 그러니까 1957년경, 화신 백화점 옆 골목의 우미관에서 보았었다. 들장미란 영화는 사실 나는 못 보았지만 내가 ‘거의’ 본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 우리 누나가 이것을 보고 완전히 ‘빠져’ 버렸기에 사진처럼 그 장면들이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있던 옛 극장 (주로 1950~60년대)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신문에 나오는 영화 광고를 보다가 보리수와 들장미의 광고를 찾아 내었다. 보리수의 광고는 1959년 신문에 ‘문화극장’에서 재개봉되는 것으로 나왔지만 내가 본 것은 아마도 1957~1958년 사이였고 극장은 분명히 우미관이었다.

누나와 우리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았던 ‘필동 아줌마’와 아침에 갔다가, 아줌마는 한번만 보고 극장을 떠나셨고, 누나와 나는 거의 연속으로 계속 몇 번을 보았다. 그 정도로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것이 ‘독일어 영화’인지도 모르고 그저 ‘외국’ 영화라는 것만 알았다.

‘수많은’ 예쁜 남녀 아이들이 등장하며 노래를 부르고, 장난을 치고.. 우리로써는 그 당시 ‘침만 삼키는’ 부러운 광경들을 몇 시간이고 즐긴 것이다. 영화 제목인 보리수 라는 것은 그 주인공 대가족이 살았던 저택의 앞에 있던 커다란 나무의 이름이었고, 그들은 보리수란 명곡을 불렀던 듯 하다. 그것은 슈베르트(F. Schubert)의 Der Lindenbaum(보리수, 菩提樹) 이란 명곡이었다.

그 이후 나는 미국의 서부영화, 전쟁영화에 완전히 빠져서 이 영화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영화가 미국의 musical, The Sound of Music과 plot이 거의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Ohio State (Univ.)에서 만난 중앙고 후배 김종수의 wife(선희 엄마)가 나에게 그것이 맞는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니까 ‘영화 보리수 = 영화 The Sound of Music‘이었던 것이다.

이제 Googling의 힘을 빌려서 찾아보니, 너무나 오래된 것이라.. 별로 나오는 것이 없었지만 ‘간단히’ 한가지만 찾아 내었다. 그 옛날 독일영화 보리수의 원제목은 역시 보리수가 아니고 The Trapp Family( Die Trapp Familie) 였는데, 이것은 이 영화에 나오는 가족의 이름이 Von Trapp 이었으니 말이 된다. 서양식은 이렇게 ‘구체적’인 영화이름을 쓰지만, 동양식으로는 조금 곤란했을 것이다. ‘트랩 가족’.. 이런 영화제목을 하면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보리수.. 아마도 99% 이것은 ‘일본아이’들의 발상일 것이다.

 

 

독일영화 보리수, Die Trapp Familie 1956
독일어로 나오지만 줄거리는 미국영화 The Sound of Music과 거의 비슷하다

 

영화 들장미 광고, 1959

영화 들장미 광고, 1959

들장미 주인공 Michael Ande
들장미 주인공 Michael Ande

들장미.. 이것도 천신만고 끝에 딱 한가지 가느다란 단서만 찾아내었다. Keyword는 역시 내가 찾아낸 신문광고에 가느다랗게 나오는 ‘원제목’.. ‘Der schoenste Tag meines Lebens‘ .. 와~~ 이것이 ‘들장미’란 말인가.. 아닌 듯 하다. 이것도 역시 서양식 영화이름과 동양식은 차이가 있기에 들장미 조차 일본아이들의 발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원제목의 ‘뜻’은 무엇인가? 비록 고등학교 1,2학년 때 독일어를 배웠건만 나는 지지리도 그것을 못했다. Der Des Dem Den Die, Der, Der, Die.. 같은 정관사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Der 만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영어의 The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Googling이 도와준다. 독일어로 찾으니 단서가 드러난다.

역시 1957년 독일영화, 우리 말고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 이것을 그 옛날에 많이 보았던 모양, 특히 일본사람들.. 그들의 제목은 Heidenröslein, 野ばら, 한글로 역시 ‘들장미’였다. 이것은 아마도 대만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듯, 순 짱께 표현도 있는데, 그것은 野玫瑰, 한글로 읽으면 ‘야매괴‘ 이 듣기 거북한 말이 바로 ‘장미’의 순 한자어인 것이다. 이제 ‘매괴의 여왕’이 왜 성모님인가 이해가 간니, 장미의 여왕인 것이다.

이 영화 들장미에 나오는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주인공이 바로 이 영화의 매력인 듯 싶다. 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Michael Ande 는 정말 귀엽게 생겼다. 그는 1944년 생으로 그 당시 나이가 13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누나가 이 영화에 ‘홀딱 반했던’ 것은 바로 이 Michael Ande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누나가 이 영화를 보고 와서 (누나는 중학생, 나는 못 보았다) 아마 한 동안 정신이 멍~ 한 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런 긴 ‘잠’에서 깨어나더니 하는 소리가 걸작이었다. 비엔나 소년합창단에 ‘식모’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식구)들은 하도 기가 막혔지만 덕분에 실컷 웃기는 했다.

그런 추억의 영화를 신문에서 광고로 다시 보니 감개무량하긴 하지만, 누나를 생각하니 참 옛날이 그립고 이렇게 운명적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것이 슬퍼지기만 한다. 이런 어릴 적의 ‘보물’들을 기억이나 할지..

 

 

영화 들장미, Michael Ande가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1957

Pope Francis from Argentina

새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
새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

¶  프란치스코, 프란시스, Francis  새 교황님: 드디어, 아니 생각보다 ‘훨씬’ 빨리 새 교황님이 선출되었다. 며칠 전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월례회에서 교황선출에 대한 특별 기도 활동이 하달 되었는데, 이틀도 되지를 않아서 ‘결말’이 난 것이다. 별로 알려진 선두주자가 없었기에 쉽게 절대다수(2/3)표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은퇴하신 베네딕트 명예교황은 사실 그 전의 요한 바오로 2세의 총애를 받았던 분이기에 예측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의 교황님은 결국 12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계가 아닌 곳에서 뽑히신 분이 된다. 이것은 분명하고, 강력한 ‘신호’일 것이다. 이제 가톨릭의 본고장 유럽의 무대는 서서히 끝이 나고 있는 것이고, 신세계 그것도 남반구 쪽으로 교회의 주류세력이 내려가고 있다는 징조가 아닐까?

Vatican의 독특한 신호, 하얀연기는 교황의 선출을..
Vatican의 독특한 신호, 하얀연기는 교황의 선출을..

나이 76세면 생각보다 ‘한창의 나이’는 지나간 것이지만, 개개인 마다 활력과 건강은 다 다른 것이라 전 명예교황님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진으로 보기에도 아주 아주 건강해 보이신다.

이름은 조금 이태리 냄새가 나는 Bergoglio(버골리오), 역시 이분은 이태리 이민의 후손이시다. 결국은 이태리 가톨릭의 전통으로 자랐을 것 같고, 이태리 중심인 로마 바티칸의 ‘이태리 문화’를 잘 이해하고 무리 없이 잘 교회를 이끄실 것 같은 희망은 준다.

제일 큰 관심사는 그런 주변적인 것 보다는 역시 교회의 당면한 과제들에 대한 새 교황님의 대응책인데, 이것은 역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종교적인 문제로서 더 높은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실 것이다. 교회의 방향을 시대에 맞게 바꾸자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답답한 것이 그들은 비록 ‘사람’들의 교회이긴 하지만 아마도 무슨 정치, 사회단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비록 시대를 한 걸음 뒤 늦게 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바뀌어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은 시대성이라는 요구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이 새교황님은 두 분의 전 교황님들과 그런 면에서 비슷한 견해를 가지셨다고 하고, 결국은 일반인들이 말하듯 이것은 ‘보수적’인 것이라, 당분간 교회의 전반에 걸쳐서 큰 변화는 없을 것 같다.

동포의 교황선출에 환호하는 브에노스 아이레스
동포의 교황선출에 환호하는 브에노스 아이레스

알젠티나 수도지역인 브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 출신의 추기경인 버골리오, 프란치스코 새 교황님은 ‘청빈하고 단순한’ 실 생활을 하셨다고 보도가 되고 있어서 더욱 호감이 간다. New York Times는 그를 A Conservative With a Common Touch라고 평하기도 했다.가난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런 면에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빠른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모처럼 나는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게 되었다. 걸핏하면 ‘평등’을 내세워 가톨릭 교회를 괴롭히던 그가 재빨리 새 교황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그래도 그의 성명서는 ‘진심으로’ 역사, 정치 속의 하느님을 ‘인정’하는 느낌을 주었기에 흐뭇한 기분을 가지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성모신심, 특히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견해와 관심도에 신경을 쓴다. 이분은 예수회 출신(SJ Society of Jesus)이라고 한다. 예수회는 비록 성모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신다고 하지만, 프란치스코 회 같은 그런 밀착된 관계는 없는 듯 하다. 하느님을 팔아먹는 듯한 악마 같은 존재들인 ‘성추행 사제’들을 그는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당면한 ‘치명적’인 과제들일 것이고, 인터넷 시대에 맞게 ‘홍보, 전교’하는 문제는 보수적인 아닌 진보적인 사고로 대응을 하는 ‘상식’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 years ago, Storm of the Century

Storm of the Century최근에 ‘요상한 기후’에   대해서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문득 storm of the century란 것을 기억했다. 일명 super storm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였나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치매 예방’ 기억력 test였다. 나에게 제일 알쏭달쏭한 것이 지나간 10년에서 20년 전 일들의 기억이다. 각가지 연상technique를 동원해서 아마도 1992년에서 1994년 사이일 것이라고 일단 결말을 지었다. 그 super storm이 온 것이 3월 이때 쯤인 것도 기억했다.

문제는 100% 자세한 것이 어떤 것일까.. 1992년은 우리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온 해였고, 장모님과 나의 절친한 친구, 지금은 타계해서 없는 김호룡 식구가 거의 같은 때에 우리 집에 온 해이기도 했다. 1992년 3월 1일에 이사를 왔는데, 곧 이어서 이 super storm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1994년을 생각해보니 여름에 누님의 아들, 준형이가 다녀갔던 것 이외에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결국은 1993년임을 알았다.

나의 제일 큰 문제는 이 1990년대의 기억이 제일 희미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억해내기 싫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아닐까도 생각을 했다. 그만큼 큰 기쁨이나 즐거움, 그렇다고 특별한 괴로움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세파’속에 휩쓸려 간 듯한 그런 10년간인 듯한 느낌인 것이다.

고국이나 이곳이나 그 나이쯤이면 ‘샐라리맨’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런 생활을 많이 보내니까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기후에 관한 사건들은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때에는 VCR, video (cassette) recorder가 한창 유행할 때여서 그런 것들의 기록도 남아있어서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것은 1993년 3월 13일, 토요일의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기예보는 그렇게 ‘자신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 미리 커다란 ‘경고, 경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생각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얼어붙는 눈보라’ 에 그냥 당한 것이다. 다행히 토요일 아침이라 교통에 관한 문제는 별로 없었다. 그냥 퍼 붙는 눈보라를 집에 틀어 박혀서 ‘즐긴’ 것이다. 그 전날만 해도 봄 같은 포근한 날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을까? 예보, 경보도 그렇게 없이..

하루 종일 강풍과 함께 쏟아진 얼어붙는 눈에 나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전기도 나가기 시작하고.. 길은 완전히 얼어붙고.. 이곳 지역은 완전한 시베리아를 연상하는 광경으로 변했다. 다행히 우리 집의 전기는 나가지 않아서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덩치가 큰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우리 집 drive-way를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나중에 차가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무슨 요란한 소리가 나서 밖을 보니 남자 몇 명이 power chainsaw로 우리 집의 쓰러진 소나무를 잘라서 치워주고 있었다. 동네에 사는 ‘마음 좋은 아저씨’들이었다. 동네를 돌면서 우선 급한 것들을 치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TV 뉴스에서는 이번의 snow storm은 ‘아마도’ super storm, storm of the century정도로 monster 급이라고 했다. 멕시코 만에서 시작된 사상 최저기록의 저기압과 북쪽에서 하강한 cold front가 ‘완전히’ 결합이 된 그야말로 perfect storm이었다. 결국은 이 system은 우리가 사는 Georgia를 거쳐서 northeast의 덩치 큰 도시들로 갔고 그곳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것으로 느껴졌지만, 200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때의 것은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점점 더 큰 monster storm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찍어둔 video tape을 본다. 그러니까 정확히 20년 전 우리 집 주변이 남아있고, 그 눈 속에서 ‘신나게’ 놀던 우리 집 두 아이들.. Wisconsin에서 이사온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라 그 추운 곳에서 타던 ‘썰매’와 겨울 옷들을 다시 꺼내어서 아주 요긴하게 쓰기도 했다.

큰 애 새로니는 Ohio와 Wisconsin에 살 때 경험했던 눈과 얼음으로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겠지만 작은 애 나라니는 거의 기억이 나지를 않는지 신기하게 눈과 얼음을 바라보며 썰매를 탔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젊었던 45세.. 와.. 정말 젊었다.. 피곤을 모르며 직장생활(‘embedded software’ engineer at Automated Logic Co)을 했고, 연숙은 home-based business, housewife, mom, PTA등으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신앙적으로는, 유일했던 한국본당에 ‘대 파란’이 나던 때여서 아마도 그 근처에 가지도 않던 ‘신앙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는 Internet이란 것이 아주 미미하게 보급이 되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는 것 같은 graphical web browser가 없어서 일반인에게는 그런 것은 ‘학교에서만 쓰는’ 그림의 떡이었다. Email은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만 쓸 정도고, PC 는 Microsoft Windows 95 전의, 조금은 원시적이었던 Windows 3.x이 전부였고, 지금 쓰는 cellular mobile phone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틀란타 올림픽이 열리기 3년 전이었던 그 당시 이곳에 한인의 인구는 현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참 변한 것이 많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이 내가 40대에서 60대가 되었다는 ‘자명한’ 사실.. 어떻게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가 충격으로 느껴지는가.. 그것은 생생하게 뇌리에 남은 20년 전 1993년 3월 13일을 회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Stupid (YouTube) ‘copyright police’ bot

얼마 전에 정말 오래된  vinyl LP record 중에서 통기타 시절 김세환 album을 digital format (mp3)으로 바꾸었다. 과정이 아주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귀찮은 job에 속한다. 이 특별한 LP record는 1975년경에 Chicago에서 산 것으로 아마 1974년경에 발표된 것으로, 김세환 특유의 ‘감미로운‘ 곡들이 실려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자주 들었지만 Cassette tape, CD등이 나오면서 눈앞에서 거의 사라졌다가, 1990년 초에 새로 audio system을 장만하면서 큰 마음 먹고 ‘한동안 없어졌던’ LP disc turntable을 다시 사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가끔 이LP를 듣게 되었다. 문제는 그 turntable이 좋은 것이 아니어서 (너무나 fragile, 장난감 수준의 제품) LP disc를 걸 때마다 손이 떨릴 정도로 조심을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가고, 음악 듣는 방식도 많이 바뀌어서 ‘거창한’ audio system앞에서 듣는 것도 사치로 보이게 되었다. 거의 주로 desktop pc아니면 mp3 player, smartphone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보물처럼 간직했던 그 많은 LP record들을 digital format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나 같은 older generation을 의식했는지 이제는 시장에 LP record를 ‘직통으로’ mp3로 바꾸어주는 ‘smart-turntable’이 등장을 하고, high school student들이 이것으로 돈까지 벌기도 한다.

내가 택한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은 값이 많이 떨어진 personal voice recorder를 쓰는 것이다. 요새 것들은 audio recording을 곧바로 mp3 format으로 flash card에 save를 해 주기 때문에 이 방식은 거의 ‘직통’ 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래된 analog audio, music (on cassette tape, LP record, VHS tape etc)들이 하나 둘씩 mp3 audio로 바뀌면서 제 1호가 ‘오래 된’ 조동진 album audio tape, 제 2호가 위에 언급된 김세환의 LP album 인데, 요새의 standard video cloud 의 대명사가 된 YouTube에 이것들을 upload해서 Internet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도 의외로운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저작권(copyright)문제인데, 40년 전의 analog music을 digitize한 것이 저작권 침해라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문화적 유산을 보존한 것으로 상을 받아야 할 지경이 아닐까? 제일 웃기는 것은 이것이다. 김세환 앨범에 Bee Gees의 word란 곡을 한국어로 바꾸어 부른 것이 있었다. 그 위력을 자랑하는 Google의 database 속에서 그 곡이 ‘걸려들고’ 말았다.

저작권이 ‘영국’의 어느 단체에 있다는 것이다. Bee Gees의 word를 digital format으로 그냥 올려 놓았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 당시(1974) 국제문화계에서 거의 ‘거지취급’을 받던(dollar 보유고가 없어서) 한국의 ‘학생가수’가 부른 곡을 40년 뒤에 mp3로 바꾸어서 인터넷에서 다시 듣겠다는데 ‘저작권 침해’라고? 웃기지 마라.. 이것은 물론 ‘사람이’ 개입이 된 것이 아니고 monster같은 YouTube의 ‘감시경찰 bot’ 이란 software가 ‘실수’를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system은 보통의 사법system처럼 ‘Innocent until proven guilty’ 가 아니고 ‘Guilty until proven innocent‘ 인 것이다. 우선 ‘죄인’으로 취급하고, 억울하면 무죄를 밝히라는 것.. 참.. 웃기는 세상이다.

 

 
김세환 Gold, 1974

 

 
조동진 47 minute classics

추악 중의 추악한 인간들..

아주 가끔 세상에서 제일 ugly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을 한다.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하필 왜 그런 것을 생각조차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런 ‘부류’는 적지 않을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깡패‘들이 나의 #1 ugliest였던 기억이고, 미국에 와서 본 것 중에는 trash TV show에 나오는 얼굴들, 그 중에서도 으뜸은 The Jerry Springer Show에 나와서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는 ‘돼지 같은’ 군상들.. 나는 세상에 아니 꿈에서도 그렇게 추악한 모습들을 상상조차 못했다.

그러다가 나에게 진짜 #1이 등장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북한 괴뢰 3대 김씨 왕조의 세 인간들.. 전범 일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운의 세 개XX들이다. 이 개XX들은 아마도 두 명은 이미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고 나머지는 아마도 그의 ‘애비와 할애비’가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 No Further Question..

Lemon Grass day

Thai Restaurant, Lemon Grass
Thai Restaurant, Lemon Grass

완전히 한 겨울 날씨가 된 3월 1일, 쉽게 말해서 지나간 1월은 거의 늦은 가을이나 이른 봄 날씨였고, 2월 한달 동안은 완전한 겨울인 듯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연속이다. 올해 Groundhog의 예측대로 봄이 일찍 온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였음이 들어난 것이다.

2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는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타이 식당 Lemon Grass에서 연숙과 식사를 하였다. 집에서 밥을 해 먹기 귀찮아서가 아니고 무언가 ‘기념’을 하려고 일부러 간 것이었다. 오늘 3월 1일은 우리가 ‘매일 미사’를 시작한지 만 1년이 되는 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daily Mass 1 year Anniversary정도라고나 할까.. 하도 축하할 것이 없는 요새지만 이런 것도 자축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둘에게는 무엇 보다 귀중한 의미를 가지기에 매년 3.1절과 함께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2010년 가을 내가 레지오 마리애 행동단원 생활을 시작한 것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2012년 3월 1일에 시작한 매일미사 참례 결정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일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레지오 마리애와, 매일 아침 9시까지 비록 집 근처지만 성당에 가서 아침 1시간을 지낸다는 것은 생각하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눈은 별로 없는 이곳이지만 흔한 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성당엘 다닌 것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솔직히 얼마나 갈까 둘 다 자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기우였다. 우리가 의지로 나가는 것 이외에 무언가 우리를 도와주는 느낌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작년 3월 매일 미사를 하면서 가끔, 지금은 작고하시고 없지만, 레지오 동료단원 요안나 자매가 같이 와서 미사를 보곤 우리 집에도 들려서 식사도 하기도 했다. 그 자매님의 말씀으로, 미사와 영성체가 얼마나 신심생활에 도움이 되는 가를 배우기도 했다. 신심생활에 주는 의미를 떠나서, 이렇게 둘이서 매일 집밖으로 ‘나간다는 사실’,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회적’ 의미도 생각해 보니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과거 오랜 시간 집에 틀어 박혀서 백일몽을 꾸던 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참 위험한 생활 방식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타이 식당인 Lemon Grass, 연숙은 항상 ‘팟타이‘, 나는 100% ‘Broccoli Tofu‘를 먹는데, 정말 주방장의 조화인지 언제나 ‘똑같이’ 맛이 있다. 이것은 chef가 변함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라서 그런지 신문에 아주 좋은 review까지 났다. 꽤 많은, 이름있는 식당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못한 때에 이곳은 1994년에 open한 이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어서, 다른 일로 ‘자축’을 할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service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Great Ubuntu Hope

Humanity towards others...
Humanity towards others…

내가 Ubuntu[표준 한글 표기는, 우분투 쯤 될까?]를 알게 된 것이 언제였던가? 생각보다 그리 오래 전은 아닐 듯하다. 아마도 2008년 경이었을까?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것이 일반에게 공개, 배포된 것은 2005년 경이었다고 한다. 이 Ubuntu란 것은 물론 Open & Free computer operating system인 Linux의 한 ‘종류’이다.

Linux의 ‘핵심(kernel)’은 ‘한가지’이지만 그것 이외 부수적인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이 Free & Open system의 특징일 것이다.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조금씩 바꾸어서 ‘배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Free & Open‘ 철학은 정말 처음 나올 당시에는 ‘혁명’적인 idea였다. 특허로 꽁꽁 묶어 놓거나, copy-protection으로 방어하며 ‘고가’로 팔아야만 했던 computer software (OS 포함, Windows, Apple OS, etc)를 ‘공짜로’ 주겠다는 것은 사실 얼듯 듣기에 ‘미친’ 생각으로 들렸던 때.. 참.. 지금은 많이 많이 변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Microsoft Windows 급인 Linux(리눅스)인데, 물론 이것은 ‘처음부터’ 그런 Free & Open 철학으로 시작된 것이고, 그 ‘철학’만은 굳세게 유지되고 있다. 그들의 철학은 computer software는 모든 사람이 ‘무료’로 쓸 권리가 있고, 더욱 그것을 ‘발전’시킬 권리와 의무도 있다는 것인데, 역시 이런 idea는 Microsoft나 Apple 같은 business model과는 180도 다른, 정반대의 model임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이익추구’ 성질을 어찌하랴.. 기어코 이런 free & open model에다가 profit을 가미한 model도 만들어 내서 의외로 잘 운영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Red Hat 이나 IBM 같은 큰 회사들 인데, 이들은 ‘공짜’ linux를 만들어 대기업에 service를 팔아서 돈을 번다. 그러니까 ‘물건’은 공짜지만 그것을 유지, 수리하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의외로 이것이 그렇게 큰 business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런 새로운 business model은 이제 아주 튼튼한 자리를 잡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위의 예들은 ‘일반대중’과는 거리가 있는 대기업의 server system들인 반면 일반 대중들이 쓰는 PC desktop system은 Microsoft 의 Windows나 ‘머리는 조금 아둔하지만 돈은 많은’ 사람들이 쓰는 overpriced Apple computer 가 든든하게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에서도 비싼 Apple Mac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Windows가 거의 ‘거저’ 돈을 벌고 있었는데, 그것이 최근 2~3년 안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그 원인 중에는 mobile system(smart phone, tablet)의 폭발적 보급과 오늘의 화제인 Ubuntu system같은 open & free software 의 일취월장하는 성능의 향상.. 등이 있을 것이다. Mobile system에서는 역시 stupid but rich 를 봉처럼 생각하는Apple의 iPhone 같은 iXXX가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었지만, 현재는 Google의 Android 가 시장의 거의 3/4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역시 open system인 Android가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지금은 computing system history로서 아주 ‘중요한’ 시점에 있는 듯하다. 소위 말해서 post-PC era를 모두 예견하고 있는데 그 때의 ‘패자’는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봐도 ‘지독히도 이기적’인 Apple model은 그들이 ‘아무리 쌓아둔 돈’이 많다고 해도 장기간 sustain하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의 철학은 그 옛날 ‘고철‘ mode IBM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우리가 발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mindset은 이제 한 물이 갔기 때문이다. 현재 Apple이 바로 같은 mindset, 아니 더 심하게 고립적이고 독선적으로 ‘돈을 긁어 모으고’ 있다. 또한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오랜 기간 (1990년 이후, 현재까지) 거의 monopoly로 monster가 되어버린 Microsoft는 이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 적으로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 처럼 Microsoft customer로 오래 있었는데, 그것은 corporation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고 지금과 같은 credible한 competition도 없었기에 한마디로 choice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corporation을 떠나게 되면서 나는 그런 무상 혜택의 제한이 없어지고, 내가 고를 수 있으면 아무 것이나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Linux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고 나의 ‘구세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유’로운 Linux는 사람들의 구미에 따라 많은 flavor로 분열이 되어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혼란’의 상태가 뒤 따라서, 각종 flavor마다 독특한 맛이 다르고, 새로 배워야 하는 짜증도 따른다. 강력한 ‘통제체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바로 free & open system의 특징이라서 이것을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는데, 결국은 최근 들어서 서서히 Ubuntu system이 ‘de facto‘ winner로 군림을 하게 되고, 많은 노력 끝에, 그것을 더욱 더 일반 대중이 쉽게 쓸 수 있게 ‘매끈하게’ 보이는 데 ‘거의’ 성공을 하는 것 같다.

특히 최근 version인 12.x는 어떤 feature들은 Windows를 능가하는 것들도 등장하고 있다. 나도 그 동안 virtual system으로 ‘가끔’쓰곤 하다가 현재는 거의 정기적으로 쓰고 있다. Windows를 쓰다가 이것을 쓰면 당장 문제가 소위 말해서 business-standard인 Microsoft Office가 없다는 어찌 보면 ‘치명적인 듯’ 한 결점이 있는데, 쓰고 나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것과 거의 맞먹는 Libre Office 란 것이 있고 Microsoft Office과 ‘호환성’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누가 ‘꼭’ MS Office file을 원하지 않는 한 이것 또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Ubuntu all the way! Mark Shuttleworth

 

그러다가 결국은 Ubuntu의 ‘장기적’인 development model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앞으로는 Microsoft의 Windows desktop system를 적수로 삼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독자적인 ‘미래형’ system으로 가겠다는 정말 ‘대담한’ idea의 출현인 것이다. 이곳에 있는 Youtube video를 보면 알 수 있듯이, Ubuntu 하나로 smart-phone, tablet, desktop 전역을 ‘매끈’하게 해결하겠다는 아주 야심적인 계획.. 이것을 정열적으로 거의 맨손으로 이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Ubuntu 창시자 Mark Shuttleworth (a South African), 그는 억만장자에다가 idea가 많은 사람이고 그야말로 ‘좋은 쪽의’ visionary에 속하는 사람이다. Ubuntu란 뜻, ‘humanity toward others‘처럼, 그는 Steve Jobs같은 egomania, megalomania가 아니며, 그의 passion처럼 모든 일이 풀려나간다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명의 혜택’을 골고루 받게 될 것이다

The Homecoming, 귀향

Homecoming, 다른 말로귀향‘ 정도가 될까? 하지만 영어와 한글의 어감은 분명히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할 것이다. 언어는 그 원산지의 문화를 나타내는 것이고, 영어의 homecoming은 아무래도 서구문화적인 것, 한글의 귀향은 한반도의 배경을 흠뻑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이다. 귀향은 늙어가시는 어머님을 만나러 오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어머니, 그리고 고향이 그리워 시골길을 걷는 나그네가 연상이 되고, homecoming.. 하면 어떨까.. 폭풍설이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속에 있는 자기가 자랐던 통나무 집, 그곳에는 사랑하는 어머님이 계신 그런 집으로 기를 쓰고 찾아가는 다른 나그네, 그런 것이다.

사실 오늘 나와 연숙은 서양적인 homecoming에서 한국적인, 김치냄새기 풍기는 듯한 우리의 고향 집으로 ‘귀향한 온 기분이었다.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일요일 주일 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와서 본 것이다. 거의 20년 만인가.. 물론 2010년 가을부터 이곳에 레지오 단원으로 화요일 마다 들락거리고, 일요일에도 ‘과외 행사’에 참여를 하긴 했지만 “진짜” 미사를 이곳에서 본 것은 아주 우리에게는 커다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고향’에 온 것이다. 1994년 즈음 이곳을 ‘완전히’ 떠날 때, 언제 다시 올지는 전혀 idea가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우리, ‘최소한 나’는 완전히 하느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미국성당에 꾸준히 다니면서 익숙해지고 친근해지고 해서, 더 ‘귀향’할 구실도 없었지만, 하느님은 오묘하신가.. 아주 작은 발걸음으로 우리를 ‘고향’으로 이끌었다. 2010년 가을 레지오에 입단하기 전과 비슷한 느낌.. 무엇인가 변하게 되리라는 불안하기도 한 심정 속에서 무언가 ‘결단’이 필요함을 느끼며 몇 개월이 지났는데, 우연만은 아니게 오랜 옛 ‘후배, 지인’ 설재규씨와 재회를 하게 되고, 그것의 열매가 오늘, 우리의 ‘귀향’으로 goal-in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우연’만은 아님을 느낀다.

20년이 지난 주일미사의 풍경은, 흡사 내가 Rip Van Winkle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어제 본 듯한 연대동문 이원선씨를 그곳에서 보았지만, 역시 그와 알았던 것도 20년 훨씬 전이었다. 어쩌면 10년 20년.. 이렇게도 오래된 세월이 지났단 말인가? 모두가 생소한 얼굴들..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현재의 목표가 한 달에 한번 이곳에 오려는 것이지만, 그것도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가게 될지, 나도 자신이 없다.

 

 

Hagood HardyThe Homecoming

 

귀향과 homecoming이란 단어를 떠 올리면서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 바로 The Homecoming 이란 제목의 연주 곡(instrumental).. 역시 아련히 떠오르는 이 단어와 그 감미로운 연주 곡.. 이 감미로운 곡은 1970년대 말에 총각으로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때, office (graduate student)에서 자주 듣던 것이고, 그 때마다 세상에서 저렇게 감미로운 것이 있을 까 감탄을 하곤 하던 그런 곡이었다. 한번은 나의 옆자리에 있던 전기과 후배 이재현씨에게, 나는 저 곡을 들을 때마다 ‘쉬 마려울 정도로’ 찌릿하다고 ‘고백’을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그 곡의 title을 몰랐고 아주 후에 그것이 The Homecoming임을 알았다. 이 곡은 캐나다 출신작곡가 (Hugh) Hagood Hardy 의 곡으로,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일설’에 의하면 TV movie였던 (Canada) drama: Anne of Avonlea/Green Gable에 삽입된 곡이었다고 한다.

고향.. 하면 어렸을 적에 일제시대 때를 연상하곤 했다. 그 어렵던 시절 고향을 ‘강제로’ 떠나 만주 등지로 갔던 동포들.. 그들은 찌들게 가난했던 고향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곳을 그리워했다. 세월이 지나고, 6.25 동란 때는 ‘지옥’같던 북한 땅을 떠났던 동포들.. 그래도 죽을 때가지 갈 수 없었던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 그 이후에는 어떠한가? 멀리 갈 필요가 없이 나도 지독하게도 넓은 바다를 건너와 또 ‘죽을 때까지’ 고향을 그리며 산다. 아니 이제는 가 보아도 ‘없어진’ 고향을 꿈 속에서 그리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한글 단어 ‘고향, 귀향’ 이 주는 영원한 느낌이고 의미일 듯 하다.

 

2월 중순, 와~ 춥다..

¶  2013년 2월도 반을 넘기고 이제 겨울과는 아주 멀어진 듯한 날씨에 익숙해지더니, 역시.. 자연의 ‘엄마’, mother nature는 못 말리나? 예고도 거의 없이 하루아침에 영하..로 그것도 낮 기온이 영상을 간신히 유지하는 싸늘함, 역시 아직도 춘분이 공식적인 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듯하다.

모처럼 한가한 날 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이런 날이 계속되어도 문제다. 사람은 역시 몸이고 마음이고 계속 움직여야 사는 것이니까. 2013년 사순절이 지난 수요일에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로 시작이 되었지만, 사실 우리의 매일 routine이 크게 바뀐 것이 거의 없다. 지난 일년을 거의 사순절처럼 살려고 해서 그런가.. 이건 너무 자화자찬일 것이지만. 커피도 계속 마셔대고, 즐기던 것을 끊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올해의 사순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성취’할까.. 이것이 계획으로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33일 봉헌 과정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볼 마음은 아직도 있다. 2월 20일부터 시작이 되니 만큼 아직도 생각해볼 여유는 있다. 지난 해 바쁘고 힘들었던 한 여름에 열심히 33일 과정을 거쳤고, 그 후에 내가 느꼈던 것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지만, 알았던 것 보다 의문과 생각할 것들이 더욱 많아졌음을 알았고, 역시 다시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또 역시, it’s now or never의 정신으로 도전해 볼까..

 

¶  요즈음 내가 즐기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있다면 역시 computer system hacking정도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요새 나의 관심은 mobile OS, 그 중에서도 Google의 Android (on Nexus tablets, mobile phones) ecosystem이 제일 관심이 간다. 지난 가을에 연숙 생일 때의 선물이 Google의 Nexus 7 tablet이었고, 올해 들어서 우리 가족이 family plan으로 T-mobile Samsung Galaxy phone으로 바꾼 뒤에 그 쪽으로 관심이 간 것이다. 두 system 모두 Android system이어서 이것 하나만 익히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듯하다.

이런 것들이 요새 들어서 워낙 바쁘게 변하고 있어서 하나를 배우면 2~3년 만에 ‘고물’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것들 모두 한마디로 embedded computing device들이고, 이것을 지난 25년 넘게 ‘직업적으로 만들어’ 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  정말 오랜만에 김인호 형으로부터 email이 왔다. 지난 연말 연시 때 연락이 되지를 않아서, 혹시 아프신가.. 아니면 세계일주 여행을 가셨나 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그 동안에도 계속 ‘연구’만 하신 듯, ‘김인호의 경영, 경제 산책‘이라는 장문의 column을 쓰셨고 그것의 web links(1, 2, 3, 4)도 같이 보내 주셨다. 잠깐 읽어보니 경영, 경제 쪽의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나에게는 모두 생소한 것이 많았다.

나의 ‘경제, 금융’ 등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이 대부분 부정적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전문 용어를 제외하면 이런 평론의 논지는 짐작이 간다. 우리 세대 (인호 형은 나보다 조금 위지만) 입장의 경제, 경영론이겠지만, 그런 매체에 실린다는 사실은 세대에 구별되지 않는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형만 동의를 한다면 그 평론들을 나의 blog에 전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2월 중순에 느끼는 으스스한 추위와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 소식, 영동 산간 지방의 때아닌 폭설..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을 얘기하는 김재진 시의 구절이 멋지게 어울리는 그런 날이었다.

 

세월

김재진

 

그런 잠 있었네. 낮고 흥건한

간다던 이 가고 없는

빈방에 불 켜놓고

후회없이 자리라 저녁 거르고 누운

라디오엔 대설주의보

남쪽엔 꽃소식 분분한데

영동 산간 지방엔 때아닌 폭설

환한 이마 찌푸린 채

가고는 오지 않을

아니면 오고는 가지 않을

그러나 사실은 가든지 말든지

아까울 것 없는 세월

하나도 아까울 것 없는 세월

때로는

잘 나가던 시절의

해 놓고 지키지 않던 맹세 따라

가리라 가리라 노래하다 못간

그런 날 있었네.

품팔던 사람들 돌아오는 길목마다

소리없이 타버린 심지처럼

버려야지 버려야지 마음먹다 울던

그렇고 그런

그래서 그런

낮고 흥건한 세월 있었네.

 

 

¶  40년 전 이 맘 때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1973년.. 그 해 6월에 나는 나를 25년 동안 품에 안아주었던 고향산천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는 나의 긴 이어지는 역사가 되었다. 돌이켜보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슬프기도 하지만, 그 때는 희망과 낭만의 쌍곡선의 연속이었고, 그 당시의 추억은 역시 우리의 등대 pop song에 고스란히 얽혀있다.

그 당시에 어떤 것들이, 그 중에서 Lobo의 노래들은 쓰레기 같은 많은 것들에 눌려서 오랜 동안 숨어있었다. 다시 들어도 그것은 역시 ‘명곡, classic’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 정말 정말 오랜만이다!

 

 
Don’t Expect Me To Be Your FriendLobo 1973

 

 
Me and You and a Dog Named BooLobo 1973

Ash Wednesday 2013, Lenten wishes

 

For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 Genesis 3:19

 

어느덧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 내일, 코앞으로 다가왔다. 2013년 Lenten season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은 ‘금욕과 극기’의 40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살찐 화요일 , Fat Tuesday: Mardi Gras‘, 아마도 New Orleans는 이것으로 오늘 하루 종일 떠들썩 하지 않았을까?

재의 수요일, 2013
재의 수요일, 2013

나의 매년 매년 재의 수요일과, 그에 따르는 사순절은 느낌도 달라지고, 의미도 다르게 느끼며, 무언가 조금씩 ‘발전’하는 듯 느낀다. 이것은 정말 나에게 만족스러운 현상이다. 이 나이에 나에게도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내 자신도 믿어지질 않는다.

작년의 사순절 때와 나는 한 살 더 먹은 것 이외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한다. 작년에 비해 올해 나는 더 많은 영혼들과 작별을 했고, 그런 와중에 나는 ‘역사적’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 (St. Louis Marie de MontFort)의 ’33일 봉헌’과 그 뒤에 따르는 우주관의 격한 변동을 경험하였다. 이것이 작년에 맞은 사순절과 올해의 차이일 것이다. 이것을 발판으로 올해 40일에 나는 무엇을 ‘바치고 바랄’ 것인가?

예년에 하던 통상적인 아침 커피 피하는 것 같은 것은 이제 조금 그 매력이 떨어졌다. 우리 Holy Family 성당 주임신부님도 ‘하지 않는 것’ 보다 ‘더 하는 것’에 신경을 쓰라고 하신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간다. 더 적극적인 삶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라는 뜻일 것이다. 무엇인가 절약을 했거나 삼가 했으면 그것을 누구에게 준다거나, 레지오의 정신으로 이웃에게 본격적으로 선교를 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적극적’인 것 들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나는 어떤 ‘적극적’인 것들을 하여야 할 것인가..

Rediscovering Catholicism작년 7월 중에 했던 위에 말한 ’33일 봉헌’.. 그것을 할 당시에 나는 더위와 싸우며, 계속되는 장례, 연도, 슬픔, 이별 등을 경험할 때였다. 그래서 그 ‘봉헌’이 의미는 더 있었을 것이겠지만 정성을 들여 집중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 사순절에 다시 그것에 ‘도전’을 할까 생각 중인데, 아마도 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 이후에 내가 ‘받았던’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것은 우선 순위 중에 으뜸일 것이다.

그 동안 ‘천천히’ 읽어오던 책, Matthew Kelly의 걸작, 책 Rediscover Catholicism을 정독, 완독을 하면 어떨까?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은퇴 선언으로 다시 교회는 앞으로 갈 길을 찾는 기로에 서있어서 이 책은 정말로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이런 것들.. 다 좋지만 역시 레지오 단원으로써 제일 값진 것은 ‘헤매는 영혼을 구하는 것’, 그러니까 새로운 ‘전사, 단원’을 찾아내는 것인데 이것은 현재 나에게는 거의 Mt. Everest처럼 높게만 보인다. 앞으로 가야 할 시간은 많지 않고, 이렇게 할 것은 많은데 어떻게 이런 것들 현명하게 풀어나갈 것인가.. 역시 어머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What? Why..why not, Benedict XVI

오랜만에 일찍 아침잠에서 깨고 보니 아직도 깜깜하고, 시계를 어렴풋이 보니 6시도 되지를 않았다. 아침잠을 이렇게 설치면 기분이 과히 좋지 않음을 알기에 ‘무조건’ 6시까지 뒤척이며 기다렸다. Flash flood watch까지 예보된 축축한 늦겨울.. 귀를 기울여도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붕의 gutter에서 새는 빗소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이런 새벽이면 유난히 잘 들리고, 심지어 문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기대했지만 그래도 조용하다.

모처럼 깜깜한 가운데 침실에서 나가니, 역시 우리 집 귀염둥이 고양이 Izzie가 배고프다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나는 거의 로봇처럼 내려가 밥을 주고, 오랜만에 ‘진한’ 커피를 갈아 내리고 아직도 켜지지 않은(programmed-timer에 의해서 아침 6시 45분에 켜지는) living room light를 ‘강제로’ 키고, 이번 달의 ‘주제곡’ Telemann symphony CD를 들으며 aroma가 ‘죽여주는’ Christmas blend Starbucks coffee로 이른 아침의 목을 축인다. 시간은 비록 일찍이었지만 이것은 내가 매일 아침마다 거치는 routine이다.

교황 베네딕트 16세
교황 베네딕트 16세

그런대로 해 없는 ‘여명’의 시간이 되면서 desktop PC로 streaming TV channel을 켜 보니.. 갑자기 머리가 띵~ 해지는 news가 흘러나온다. 그것을 듣고 보면서.. 내가 아직도 잠에서 덜 깨었나 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news를 보고 있었다. Pope is resigning at end of the month.. 교황, 2월 28일에 사임..무슨 comedy인가.. 며칠 전까지 Angelus (삼종기도)에서 비록 느리지만 ‘건강한’ 얼굴을 본 것 같았는데..

‘거의’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해서 더 놀란다. 마지막으로 ‘자진해서 사임’한 case는 15세기.. 우아.. 정말 너무하다. 전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Blessed Pope John Paul II)는 혼신과 혼미의 몸과 정신으로도 끝까지 버티셨는데, 거의 ‘멀쩡하게’ 보이시는 베네딕트 16세(Pope Benedict XVI)는 왜 그런 ‘폭풍’과 같은 결정을 하셨을까? 공식적인 이유가 ‘건강상’의 문제고, 분명히 그것이 이유일 것이라도 나는 믿는다.

요새 85세면 그 옛날의 85세는 아닐 것 같고, 교황의 오랜 경험과 명석한 두뇌는 젊은이 못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 주위의 사람들도 거의 몰랐고, 그래서 더 놀랐다고 보도가 되고.. 논평하는 ‘바티칸 전문가’ 들도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전 교황이 그렇게 오래 병마와 싸우면서도 교황 직은 고수하셨기에, 그런 과정을 또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교황이 그런 괴로운 결정을 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전 교황이 겪었던 ‘괴로운’ 과정이 지금 천주교회의 여러 가지 사정과 입장에 맞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교회의 문제들을 보고, 오랜 동안 견딜 수 있는 젊은 교황의 출현을 기대했는지도.. 그분의 예외적인 신학적인 지식과 영성을 알기에 그런 어려운 결정을 믿는 것이 올바르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도 왜 지금인가.. 내일 모래가 사순절(Lent)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인데.. 우리에게 왜 이런 ‘분심’을 주게 한 것인가? Timing으로 보면 아마도 부활절 전까지 새 교황이 선출 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또 적응을 해야 한다. 무언가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것은 교회, 이 세상, 아니 나와 우리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새 교황, 그것도 ‘젊은’ 교황이 선출되면 그는 교회를 어떤 쪽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어두운 아침’을 맞는다.

 

Postscript

몇 시간 후에 교황 베네딕트 16세께서 직접 은퇴, 사임 발표하는 video가 Vatican TV에 실렸다. 역시 ‘건강’하신 모습이다. 이제 조금씩 교황님의 뜻을 알 것 같다. 야심적인 개인 의견을 접고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는 교회를 생각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영화 자유부인과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1956

영화 자유부인, 1956

얼마 전에, 어렸을 적에 귀따갑게 들었던 1950년대 화제의 영화, 자유부인을 기적적으로 보게 되었다. 기적적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것이 이 영화는 1956년에 나온 것으로 그 바로 전에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같은 이름의 정비석 원작의 신문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고, 그 당시에 불과 국민학교 2~3학년 정도였던 나까지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세기가 지난 뒤에 실제로 그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surreal한 기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화제의 단계를 넘어서 그 소설, 영화는 ‘문제작’의 수준까지도 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자유’라는 단어가 붙었던 그 당시였다. 당시의 이승만 여당도 자유당이고, 대한민국은 자유란 말만 붙으면 모든 것이 ‘멋지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급기야 ‘자유부인’이란 말까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자유와 부인“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던 비교적 엄격한 ‘남녀 유별’의 전통이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 보면 간단히 말해서 ‘남녀차별, 남존여비’의 전통이다. 나와 같은 세대는 그런 ‘구식 전통’을 보며, 느끼며 자란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개XX’의 도움으로 6.25 사변을 거치며 거대한 미국의 ‘신식 문화’가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일까.. 그것을 timing좋게 당시 유명했던 대중 소설가 정비석 씨가 인기소설로 이끌어내고, ‘폭발적’인 화제가 되자 곧바로 영화가 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서로 바람 피는 대학교수 부부의 주변을 그린 것이지만, 특히 교수부인, 춤바람 난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결과는 비교적 예상하기 어렵지 않게 끝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바람 피는 여자’에 대한 질타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여자의 권리’ 같은 것도 나란히 잘 그려낸 듯 하다.

한태석 역의 김동원
영화 자유부인, 한태석 역의 김동원, 1956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는데, 이 영화에 보이는 location(로케, 촬영 장소)들이 너무도 눈에 익었던 곳이어서 나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우선 시청과 국회 의사당 주변에서 당시의 차들이 오가는 거리 풍경은 정말 내가 보고 기억한 것과 100% 일치하였다. 특히 행인들의 옷차림: 중절모의 남자, 한복의 여자들을 보면서 ‘맞다, 그때는 그랬다’ 하는 탄성이 나오곤 했다.

시발 택시도 나오기 전 차량들은 거의 ‘미제 시보레’ 급의 세단들과, 일본이 남기고 갔거나, 수입했던 ‘동글 동글한’ 시내 버스들.. 물론 그립던 ‘귀여운 에노 전차’들이 명동, 미도파 앞에서 굴러가는 모습들은 사진처럼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동화 백화점, 남대문 시장입구, 미도파.. 심지어는 화신백화점 옆에 있었던 ‘신신백화점’이 깨끗이도 보인다. 이 영화의 보존 상태는 정말 어제 찍었던 흑백 사진과도 같이 좋았다.

1967년 용가리의 김동원
1967년 대괴수 용가리의 김동원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민 이란 남자배우를 보게 되었다. 귀에 많이 남았던 배우였는데, 자세히 보니 참 잘생겼다. 왜 그 이후에 큰 스타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모든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간판배우 박암,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한 그의 연기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특징이 없다. 여자 주연인 ‘김정림‘.. 정말 모르겠다..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그녀가 주연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깜깜 이다. 구닥다리 안경과 새카만 콧수염의 ‘주선태‘.. 좋은 역으로 나오긴 힘든 배우고 배역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 중에 하나다.

문제는 이곳에 나오는 ‘연극배우’ 김동원.. 나는 그가 이런 ‘대중영화’에 그것도 초창기에 출연했는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저 사람이 내가 기억하는 ‘연극배우’ 김동원은 아니겠지 할 정도로 조금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문제는 머리칼 머리 숱.. 내가 아는 김동원씨의 머리는 절대로 ‘대머리, 반대머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깜짝(cameo) 출연,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는 가수 백설희씨 당시의 가수였고, 배우 황해씨의 부인이고 전영록의 어머니

나의 머리가 빠지다 보니, 더욱 호기심이 나서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분명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연극배우’ 김동원이 분명했다. 그의 머리 스타일은 반 대머리.. 훨씬 이후에 보이는 김동원씨의 모습은 절대로 대머리가 아니고 숱이 많은 모습들이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원래 대머리였고, 그 이후에는 ‘가발’이었을 가능성과, 영화 자유부인에서 ‘역할에 의한 삭발’의 가능성..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물론 100% 확신을 할 수 없지만 나는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유부인 이후의 김동원씨, 가발 수준은 정말 수준 급이라고 해야 할 듯하고, 많은 fan들에게는 그렇게 상대적으로 ‘젊은’ 모습을 남기려 했던 그 노력은 참 상당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렇게까지 한 것에 100% 공감을 하지는 않지만, 직업상 어쩔 수 없었을지 않을까.. 그저 benefit of doubt을 주고 싶어진다.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춤추는 유부남과 유부녀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명동입구의 양품점 사장으로 연기하는 김동원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1956

동화백화점 경양식집에서 김동원과 김정림, 자유부인 1956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김동원씨 가족, 1972
동아일보의 약품광고에서 ‘건강과 행복’을 전하는 듯.. 바른쪽 끝에 가수 김세환씨가 보인다

 

True Love – Bing Crosby & Grace Kelly, 1956
그 당시 유행하던 영화 High Society의 주제곡

‘용가리 통뼈’의 추억

대괴수 용가리, 1967
영화 <대괴수 용가리>, 1967

얼마 전에   ‘옛 한국고전영화’ (redundant , 옛 과 고전은 거의 같으니까)를 접하게 되면서, 그런 것들이 어느새 ‘옛, 고전’이 되었을까 하는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히 현재 살아서 숨쉬는 우리들의 것들이 ‘화석, 고생대, 공룡‘등과 연관이 되어가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세월의 횡포’ 란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괴수 용가리‘란 ‘우리의 영화’를 보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용가리란 단어를 보면서 희미한 느낌에 ‘분명히 이것은 나의 대학시절’의 것이라는 생각이 났다. 하지만 100% 자신은 없었다. 그 영화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떠오른 ‘강한 단어’가 있었다. 바로 ‘통뼈’ 였다. 그러니까 ‘용가리 통뼈‘ 인 것이다. 그것이 언제였던가?

와~ 맞다 용가리 통뼈.. 그것이 처음 유행하던 당시, 참 많이 그 말을 썼다. 내가 그 말을 좋아하며 쓴 기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친구 중에 한 명이 유난히도 그 말을 좋아하며, 잘도 썼다. 그 친구는 바로 나의 죽마고우, 중앙중,고교, 연세 대학, 전기과 동창, 요델 산악회 산악인 박창희 였다.

사실 나는 ‘영화 용가리’보다는 박창희가 ‘가르쳐’ 준, ‘용가리 통뼈’를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그 뜻은 물론 그 어감이 나타내듯이, 바보스럽게 겁이 없는 그런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당시에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꽤 많던 시절이었으니, 그 말은 참 잘도 쓰였고,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나나 우리들은 그런 류의 ‘통뼈 류 인간’들과는 거리가 먼 쪽에 속했다.

기억이 그 정도에서 멈추고, 확실히 그 영화가 나온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이럴 때, Googling은 역시 powerful한 것이지만, 이 정도로 ‘오래된’ 것은 역시 무리인가.. 예상을 비껴가서, 딱 한가지 자료만 찾았고, 그것도 그 당시를 ‘전혀 모르는 듯’한 사람의 ‘해괴한 변증’ 속에 파묻혀 있었다. 부산영화제 site에 실렸던 한가지 글, 그것이 바로 박성찬이란 ‘시민평론가’가 쓴 ‘<대괴수 용가리>: 한국괴수 영화의 고생대지층‘ 이란 요란한 제목의 글이다.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주증녀, 젊었던 시절의 이순재

시민평론가치고는 꽤 이론적임을 보이려는 노력이 뚜렷한 이 글에서, 내가 필요한 것을 찾았다. 우선 이 영화는 1967년에 방영이 된 것이고, 감독 ‘김기덕‘, 주연 진에는 당시 간판 여배우 남정임, TV 쪽에 더 알려진 이순재, 조연 쪽으로는 약방의 감초, 원로격 김동원, 주증녀, 정민.. 그런데 이순재의 신혼부인으로 등장하는 여자배우.. 그녀는 누구일까, 낯이 그렇게 설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명한’ 정도는 아니었다.

1967년이면, 사실 우리 영화는 신영균, 신성일, 엄앵란, 문희 등의 고정된 ‘간판급’ 얼굴의 시대였고, 거의 모두 ‘순정 멜러 드라마’ 였던 시대였는데, 이런 ‘과학공상, SF’ 영화는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 당시 국민학교, 중학교 정도의 나이였으면 물론 100% 열광을 하면서 보았을 것이지만 이마 그 당신에 나는 조금은 ‘탈 공상’ 적인 대학생이었다.

현해탄을 건너오는 소식에서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영화가 열광적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듣긴 들었다. <고지라> 같은 영화가 그런 것인데, 이런 류의 ‘일본 공룡’ 영화는 유치하면서도 재미가 있어서 미국에서도 이것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이 꽤 많고, 이제는 이것으로 돈을 버는 business도 있다고 들었다.

간신히 찾은 이 영화를 보니 모두 말이 영어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English dubbing이 된 것이다. 사연인즉, 역시 ‘원판’이 없어지고 ‘수출용’이 살아 남은 요새 흔히 듣는 case 중에 하나다. 1967년이 이제는 정말 ‘고생대’ 층이 된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사실, 지금 보아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그 만큼 연기를 잘 했다는 뜻일지도.. 문제는 역시 그 당시 ‘기술적인 수준’인데, 이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암만 ‘장난감 set’를 해도 그 당시의 수준은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 일본 영화 고지라를 지금 보면 그 들도 역시 그 한계에서 맴돌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 ‘시민 평론가’ 의 말을 조금 들어보면, 알게 모르게 이 평론가는 ‘영화 이론 평론가답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어떤 것들은 too much stretching, overreaching 한 것들도 있다. 영화의 original이 없어진 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지와 미국 문화의 침투 속에 우리 것을 다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과 너무나 닮아..‘ 와 같은 논리로 비약을 한다. 하지만, ‘우주, 과학, 과학도’ 적인 자세가 당시에 우리나라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암시적인 영화의 효과는 그 당시를 겪어본 나에게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분석이다.

하지만, 3대의 ‘정상적인 부부‘의 등장을 분석하며, 이런 것들은 ‘기득층: 가부장적 부르주아의 과잉억압에서 억눌린 부류: 여성, 동성애, 신체기형자 등등이 종종 괴물로 등장하고, ‘정상 부류’가 ‘비정상 부류’를 물리친다‘는 ‘영화학자 로빈 우드’의 말을 인용한 것은 조금 ‘웃기는 비약‘인 듯하다. 이런 표현은 어떨까.. “여보세요, 지금 용가리 통뼈가 한강 다리를 들어내고 있는데.. 기득층, 피해층이 어디에 있단 말이요?” 이런 것은 정말 ‘이론을 위한 이론의 전개’의 대표적인 case일 듯하다.

더욱 웃기는 것은, 용가리와 어린이 ‘영이 (남자 아이)’ 가 아리랑 트위스트를 추는 장면에서 ‘남북의 이상한 평화’가 찾아오고, 더 나아가서 이런 ‘전통’은 나중에 <남부군>에서 적군과 같이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르는 것, <공동 경비 구역: JSA>에서 남북한 두 병사들이 얼싸안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과장중의 과장은 정말 ‘압권 중의 압권‘ 일 듯. 이런 ‘이론’을 다 잊고 나는 나의 황금기 전야였던 1967년으로 돌아가서 박창희의 ‘용가리 통뼈’ 론.. 확전(escalation)으로 치닫던 월남전, 뿌연 공해먼지 속에도 힘찬 대도시로 탈바꿈하던 ‘강북’ 서울의 모습들, 미니 스커트의 여대생으로 가득 찼던 우리들의 보금 자리 다방 구석에서 꽁초까지 빨아대며 들여 마셨던 신탄지 담배 연기를 생각하고 싶다.

 

Groundhog Day, 2013

Movie, Groundhog Day, 1993
Movie, Groundhog Day, 1993

무려 12시간의 잠에서 깨어난 후 달력을 가만히 보니.. 오늘은 2013년 2월 2일 토요일, 가톨릭 전례력으로 ‘주님 봉헌 대축일(The Presentation of the Lord)’.. 그 밑에 조그만 글씨로.. Groundhog Day가 보인다. 아하! 또 일년이 흘렀구나 하는 신음이 섞인 소리가 나의 귀를 울린다. 일년이 지났다 함은 작년 이날을 그날에 관한 나의 blog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 밤에 12시간을 잤던 이유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마치 1993년 미국영화 Groundhog Day를 다시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고, 일년전이 오늘 같고 오늘이 일년 전 같은 comedy같은 느낌, 그런 생활과 느낌으로 나는 근래를 사는지도 모를 일이다. 12시간을 잤던 것은 몸과 마음이 ‘완전히’ 피곤해서 그랬는데, 결과적으로 ‘현재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느꼈기에 그런 생각에서도 도망하고 싶었다.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잠을 자는’ 것 밖에 없었다.

작년의 Groundhog Day를 생각하면서, 같은 이름의 영화 Bill Murray주연의 그 영화를 또 보고 싶었다. 작년에 ‘분명히’ Crackle.com에서 그것을 free로 하루 종일 보았던 기억에 그것을 찾았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졌다. 아마도 다른 site (hulu, netflix) 에 가면 paid-movie로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작년 그때에 하루 종일 보았기에 나의 뇌리에 그 story와 scene들은 사진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인생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삼라만상의 ‘주기적, 반복적’인 것들과, 그 나머지 것들: 즉, 시간의 일방성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 생명의 생겨남과 사라짐 같은 철학적, 신앙적 차원의 것들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각자의 최선’을 추구하며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제일 ‘멋있다’ 는 것도 이 영화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Punxsutawney Phil, 2013
Punxsutawney Phil, 2013

올 겨울은 비교적 따뜻한 편이라고 할까.. 겨울답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home-heating에 많이 $$을 쓰지 않아 좋기는 하다. 그리고 조용한 편인데, 큰 눈과 강풍 같은 것이 ‘아직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Groundhog Day에서 남은 겨울의 날씨, 아니 봄까지 얼마나 남았나 하는 것이 어떻게 ‘예보’가 되었을까?

Groundhog이 봄 예보를 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이날 이 ‘두더지’가 ‘밖’으로 나갔을 때, 자기의 그림자를 보게 되면 6주일을 기다려야 봄이 온다는 것, 겨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봄 예보를 할 수 있는 groundhog은 ‘전통적’으로 (이제는 공식적으로) Punxsutawney Phil 로 이름이 된 두더지가 Punxsutawney, PA (펜실베이니아 주, 펑스토니 마을)에서 거의 festival같은 분위기와 수 많은 ‘관광객’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게 되는데, 위에 말한 영화 덕분에 방문객의 숫자가 거의 곱절로 늘었다고 한다.

이 ‘두더지’전통은 옛날 옛날 옛적부터 독일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나중에 많이 정착했던 곳이 펜실베이니아 지방이었기에 그곳에서 100년도 전에 시작을 했던 것이고, 그런 행사로 $$$까지 벌게 되었으니, 참 재미있지 않은가? 12시간을 자야만 했던 올해의 Groundhog Day, 내년에는 제발 그렇게 자야만 했던 이유들이 ‘재탕’ 되지 않았으면.. 그곳에 사는 ‘두더지’에게 빌어 볼까나?

Our Mid-Winter Classic

지나간 일요일, 1월 27일은 ‘피로하게만 보이는’ 우리 집에 때아닌 대청소 하던 소리가 들렸다. 얼마만인가.. 머리 속의 ego만 커진 아이들이 떠난 우리 집은 고요하기만 하고, 별로 어질러 놀 만한 것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먼지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대 청소는 아래층에만 있었다. 위층까지 할 힘도 없고, 절실한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를 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Guest들이 오기 때문이었다. 얼마 만에 오는 손님들인가..

이번의 모임은 내가 붙인 이름이 ‘mid-winter classic‘ 이다. Mid-Winter는 1월 말에서 2월 초 정도에 있다는 뜻이고, classic은 이 모임이 그만큼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아마 15년은 되었을 듯 싶다. 이 정도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닐 것이다.

4집 부부(가족)가 ‘가끔’ 모여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는 이 그룹은 시작이 15년 전쯤, 서울고,서강대 출신 최동환 (Phillip Choi), aka, ‘최형’ 과 연관’이 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 훨씬 전에 우리 부부가 아틀란타 한국학교 에서 가르칠 때, 나의 반에 최형의 외동 딸, 진희(Alicia)가 있었고, 최형은 ‘아빠’로서는 드물게 학교에 얼굴을 보이곤 했었다. 그때 그의 인상이 참 자상한 아빠로 남았고, 항상 웃는 모습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기억이다.

우리가 한국학교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또 다른 인연이었을까.. 우리 작은 딸 나라니와 한국학교에서 같은 반에 있었던 인연으로 나라니의 생일에 진희를 부르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대부분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오곤 하는데, 그 당시 진희는 꼭 아빠가 데리고 왔기에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인연이었다. 엄마가 데리고 왔더라면.. 아마도 이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웃고, 얘기를 좋아하는 최형 성격 덕분에 우리는 금새 통성명을 다시 하고 보니 그는 서울 최고 명문인 덕수국민학교, 서울고등학교, 서강대 화학과 출신으로 현재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그 후에 우리 집 근처의 어떤 한국식당에서 정말 우연히 최형 가족과 우리 가족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다른 ‘우연’을 맞게 되고, 드디어 진희 엄마도 보게 되었다. 둘 다 나이가 우리부부보다 한두 살 정도 아래였던 이곳에서 ‘고르기’ 힘든 부부 ‘친구’를 얻은 기분이었고, 그 이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식사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친구’를 별로 사귀기 꺼리며 살던 나도 이런 모임은 거부감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친구 수준의 한국말’을 다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것은 참으로 좋은 것인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일까.. 추억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좋은 것일까.. 만나기만 하면 어렸을 적 서울거리를 회상하며 열변을 토하곤 했으니까..

최형은 역시 성격 ‘탓’인지 사람들을 좋아하며, 잘 사귀었고, 특히 가깝게 지내던 ‘친구’ 가족들이 몇이 있었다. 곧바로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 중에는 Ohio State동문인 나이가 한참 밑(10살 이상)인 ‘전 사장’도 있었고, 최형의 서강대 동문인 윤형, 지금은 2005년에 타계해서 없는, 이대부고,경희대 출신 박창우씨가 있었다. 그렇게 모인 사연이 참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아주 인상적이었고, 역시 최형의 ‘사람을 끄는 힘’이라는 공통분모가 이모임에 있었다고 느낀다.

직업도 다양해서, 최형네는 jewelry wholesale, 윤형댁은 liquor retail, 전사장네는 Italian Furniture, 박창우씨 댁은 fashion clothing retail..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전형적인 businessmen들이었다. 나만 예외적으로 비교적 시간의 여유는 있지만 항상 cash가 모자라는 월급쟁이여서, 항상 나는 ‘공통관심사 화제’에서 애를 먹으며 그저 이 ‘이상한 나라의 얘기’를 듣기만 하곤 했다.

이중에서 2005년 여름이 정말 아깝게 타계한 박창우씨, 생김새에 비해서 호탕하고, 잘 놀며, 활달한 사람,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의 중심지에 대한 해박한 경험과 기억력은 우리를 항상 놀라게 했다. 특히 어느 곳에 무슨 술집, 다방이 있다는 것은 정말 ‘사진과도’ 같은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양반’의 얘기가 제일 재미있었고 실감나고, 흡사 time machine을 타고 1960-70년대를 간 것과 같은 기분에 빠지곤 했다. 특히 ‘동네 친구’인 트윈 폴리오 folk duo 중에 윤형주에 대한 이야기, 당시의 명소였던 명동 OB’s Cabin 에서 술김에 노래를 부르던 조영남을 ‘팼던’ 이야기 등등.. 나에게는 주옥과도 같은 이야기들.. 언제까지나 들으려 했지만 하느님도 무심하시게 너무도 일찍 데려 가셨다.

이날 모임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소식은, 최형의 외동 딸, 진희 (우리 딸 나라니 친구)가 놀랍게도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단원’이 되었다는 사실..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진희는 아주 자유분망 (easy going)해서 어떻게 이렇게 ‘조직적인 신심단체’에 가입을 했을 까 상상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적인 격차를 초월해서 꾸리아 모임에서 그 ‘애’를 보게 될 생각을 하니..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사실 당황을 할 정도였다. 이것은 정말 ‘좋은 소식’일 것이다.

65세 만세론과 결혼 33년

1월에는 우리 집 큰 딸 새로니의 생일, 나의 생일, 그리고 우리부부의 결혼 기념일이 모조리 몰려있다. 그래서 사실 성탄과 새해를 지내자 마자 마음이 조금은 바빠짐을 느낀다. 사실, 나는 이런 ‘명절’들을 조용하게, 소리소문 없이 보내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우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절대로 불가능했고, 근래에도, 이런 날들을 조용히 보내는 것이 거의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압력을 느끼기도 했다.

전통적 ‘가장’의 위상이 거의 무너져 내려앉은 요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세월을 탓 해야 하나. 특히 ‘자기 생일’도 자기 마음대로 보낼 수가 없음이 제일 우습기만 한 것이다. 내가 원치 않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의 위치와 가치가 뒤바뀌고 있는 이 세상, 어디까지 가나.

올해 나는 ‘결국’ 65세의 산을 넘고 말았다. 왜 65란 숫자가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일까? 아마도 70세를 향한 내리막 길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랜 전 애독하던 이진섭씨에 대한 책, ‘하늘이 우리를 갈라 놓을 지라도‘ (박기원 여사 지음), 에서 보았던 65세 만세론 구절이 더 생각난 것이다. 그것은 이진섭씨의 지론 중에 하나로써, ‘사람은 65세를 살면 충분히 살았다‘는 것으로 그 이상 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서, 사람은 나이답게 사는 것이 보기 좋다고 했는데, 너무나 무리하는 것이 꼴불견이라고도 했다.

예를 들면 늙은이가 무리하게 운동을 하거나 무엇을 지나치게 즐기는 그런 것들이다. 조용히, 잠잠하게, 생각하며, 낙조를 바라보는 듯한 심정으로 지내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 거의 50년 전의 이야기라서 아마도 그 당시 65세는 요새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적은 나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까? 그 당시의 65년은 사실 요새도 65년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65년을 살고 보니 ‘참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다.

이제는 사실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 쉰다는 것은 사실 이세상을 떠난 다는 것인데, 전 같았으면 아마도 그런 생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나는 죽음이 다음 세상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나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얼마를 살았는가 가 아니고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1980년 1월 25일에 결혼을 한 우리 부부는 올해로 33년째를 맞게 되었다. 잔잔한 감회를 느끼며 맞이한 올해는 정말로 조용히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의 ‘극성과 압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33년간의 결혼관계는 사실 과소평가할 것은 아니다. 어떻게 생면부지의 이성과 같이 33년을 같이 산다는 것이 작은 과업’일까? 결혼을 안하고 아이를 안 낳고, 편하게 혼자 사는 것이 cool하게 보이는 이 세상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런대로 not bad임도 안다. 이날 우리는 정말로 ‘조용하게’ 집 근처에 있는 Thai restaurant, Lemon Grass에 가서 평소 즐겨 먹던 것으로 점심을 하였다.

눈이라도 당장 쏟아질 것 같은 그런 회색 하늘아래서 우리는 33년 전을 회상하며, 도대체 그때에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가장 멋지게 보았고, 무슨 희망을 가졌는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한마디로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때였다는 것과, 그 때는 정말 ‘기쁜 우리 젊은 날’ 이었다는 것에 동감을 하였다. 또한 앞으로 얼마나 ‘이렇게’ 같이 살게 될 것인가 하는 ‘말없는’ 의문도 나누었다. 그것이 인생일까. 인생은 사실 그렇게 특별 난 것이 아닌 듯 싶다.

 

 

 1980s.. 기쁜 우리 젊은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