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

¶  지난 레지오 화요일 1에는 그 전주에 이어서 계속 연도가 있었다. 이번 연도 대상은 역시 어떤 50대 중반의 자매님이었는데, 조금 슬픈 사연이 있어서 모두들 더 안타까운 마음이었고, 그것에 비례해서 더욱 더 열심히 연도를 바치게 되었다.

이 자매님은 원래 개신교 신자로써 개신교회에 나갔던 것 같은데, 어째서 우리 순교자 성당에서 다시 ‘줄리아’란 영세명을 받았는지 궁금했다. 연도 때 가족들이 나왔는데, 모두가 ‘미국인’들이었다. 한마디로 ‘국제부인‘ 이었던 것이고, 결혼생활에 풍파가 심했던 경우였다. 미국인 남편과 자식이 둘이나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자식을 둔 채로 집에서 ‘쫓겨 났다고’ 한다. 누가 그 사연을 알 수 있겠는가? 혼자가 된 이후 거의 집 없는 ‘걸인’처럼 살았다고 하고 말년에는 암으로 고생을 하다가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쓸쓸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암 투병 말기에 우리 레지오 단원에게 발견이 되어서 천주교 대세를 받고 가셨다니 조금은 다행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 ‘몹쓸 놈’의 식구들이 뻐젓이 연도미사에 ‘당당히’ 나타나고, 후에 식사까지 하던가.. 도저히 그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죽음만은 공평하다고 하지만, 이것을 보니 그런 말도 맞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차별이 많은 것이 또한 ‘죽음’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  겨울이 끝나며 곧바로 한 여름의 맛을 일주일 동안 보았다. 이것도 참 근래에 자주 보는 기이한 기후현상일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global warming 운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도 이것도 정치화, 아니 더 나아가서 ‘사상화’까지 되어서 말 잘못하다가는 완전히 ‘왕따’를 당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저 조용히 ‘중간’만 하면 안전하다. 그저 100년 만에 보는 ‘기록적인 현상’이라고 하면 조용히 끝난다.

나의 기억에도 3월 달에 거의 여름 같은 날씨가 일주일 계속된 것은 없었지 않았나? 그러니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암만 보아도 분명히 지구는 조금씩 더워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전문가가 아니니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과학이 정치화가 되면 위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웃기는 것이 왜.. 공화당 같은 보수진영은 ‘지구 온난화’란 말만 나오면 그렇게 두드러기 앓듯이 신경질을 내는지 알 수가 없다. 정말 한심한 군상들이다.

  1. 내가 속한 레지오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회합은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30분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있고, 곧 바로 정오 미사로 이어진다.

Lenten fast & feast

어제 배달된 우리의 정든 미국본당(parish)  Holy Family CC (Catholic Church)의 newsletter에 작자 미상의 ‘사순절에 실천할만한 14가지 황금률‘ 이 실려 있었다.  이런 종류의 ‘사순절 목표’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하게 Fast(단식,금기)와 Feast(축일)에 절묘하게도 비교를 시켜놓아서 사실 별 큰 관상(contemplation)이나 깊은 생각 없이 음미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것을 읽으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된다. 암만 각오하고 실천을 하려 해도 하루는 고사하고 몇 시간도 못 넘기고 실패함을 느끼니까..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노력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원문을 table-format 으로 요약을 하면:

 

Fast from

Feast on

1

Judging other

Christ living in them

2

Harsh words

Words that build up others

3

Discontent

Gratitude

4

Anger

Patience

5

Pessimism

Optimism

6

Worry

God’s care

7

Complaining

Appreciation

8

Bitterness

Forgiveness

9

Self-concern

Compassion for others

10

Discouragement

Hope

11

Facts that depress

Facts that uplift

12

Suspicion

Truth

13

Thoughts that weaken

Promises that inspire

14

Idle gossip

Silence with a purpose

 

‘억지로’ 번역을 하자치면,

1

남을 심판하기 보다는 그의 마음에도 그리스도가 있음을 느끼자.

2

심한 말 보다는 그를 도와주는 말을 찾자.

3

짜증내기 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찾자.

4

화를 삼가고 대신 참을 성을 기르자.

5

비관보다는 낙관을…

6

걱정보다는 주님의 보살핌을 느끼자.

7

불평보다는 고마움을 느끼자.

8

원한을 갖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자.

9

나만 생각하지 말고 남에게 더 신경을 쓰자.

10

낙망하기 보다는 희망을 갖자.

11

우울하게 만드는 생각을 떨치고 기분을 좋게 하는 생각을 하자.

12

의심이나 의혹보다는 높은 곳의 진실과 진리를 찾자.

13

마음 약하게 하는 생각을 떨치고, 감동을 주는 약속을 생각하자.

14

한가한 소문에 들뜨지 말고, 사명감 넘치는 침묵을 갈망하자.

 

나이가 들면서 점점 힘들어지는 것은 바로 #1, 섣불리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만큼 나의 ‘경험과 주장’이 있다는 얘기겠지만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공평하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머리가 다 커버린 ‘자식’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별 생각 없이 ‘충고’를 해도 그것이 ‘심판’의 소리로 들린다. 우리 젊었을 때도 그 정도였는지.. 요새 세상이 더욱 그렇게 되어서 그런지 모른다. 그래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얘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부부의 지론이다.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제일 많이 ‘덕’을 본 분야는 #3, #7, #9, #14 일 것이다. 이것은 역시 레지오의 특성에서 나온 것으로 역시 ‘동료 인간’들과 수없이 접촉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자연적으로’ 이 분야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든다.

#8.. ‘원한과 용서‘..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죽을 때까지 노력을 해도 큰 성과가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나아간다는데 더 뜻이 있지 않을까? 오랜 된 기억을 동원하고 생각해서 아직도 용서 못할 ‘놈 들‘ 을 추려 내긴 했지만, 그들을 어떻게 ‘용서’ 해야 할지는 확실히 모른다. 그저 가능하리라는 희망만 가지고 있다. 나의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이다.

#12.. 이것도 최근 5년 동안 많은 ‘발전’을 보았다. 그렇게 강철같은 힘으로 모든 믿음을 거부하던 시기는 지나고 있음을 느끼니까.. 이제는 모든 benefit of doubt높은 곳에 주기로 하며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문제의 ‘열쇠’였다.

白手와 digital technology

나는 白手란 말을 참으로 싫어했다. 누가 좋아하겠는가? 놀고 먹는다는 뜻일 것이고, 대부분 이런 부류 중에는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 남자들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는 白手란 말 조차 해당되지 않는다. 놀고 먹는 여자들은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그런 것은 듣지 못했다. 전통적인 의미의 白手는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의건 타의건 간에 조직적인 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경제활동 하는 것을 떠난 남자들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밖에서 일을 했던 것이 남자들이고, 그들이 그런 일을 안 하고 산다면 그날로 白手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언젠가부터 白手가 된 것이다. 그런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할 수 없이 나는 역시 白手인 것이다. 아마도 집에서 ‘작은’ 경제적인 활동을 계속해 왔다고 해도 역시 그는 白手라고 불릴 것이다.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은 크게 상관이 없다. 간단히 말해서 남자가 ‘낮에 집에 있을 수 있으면’ 우선 그는 白手인 것이다.

 과연 요새 白手들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소일할까? 이것 또한 사람들의 성격만큼 다양할 것 같다. 서울에 계신 처남을 보면, 직장에서 일할 때보다 더 바쁘다고 한다. 거의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산엘 가고, 집에 돌아올 때 술을 마신다. 직장 다닐 때도 술을 마시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일이 끝나고 올 때가 아니고 ‘놀다가’ 올 때 마시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고, 각종 ‘회포를 푸는’ 모임에는 다 나간다. 어떻게 보면 부럽게 들리기도 한다. 하기야 이런 것들은 직장시절 그렇게도 기대하고 기다리던 이상적, 환상적인 생활 들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이것이 거의 변함없이 매일 계속될 때도 그렇게 즐거울까? 아마도, 아닐 것 같다.

내가 사는 이곳 아틀란타 지역의,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중에는 白手가 의외로 드물다. 가깝게 지내는 친지 중에는 현재 한 사람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민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사업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 체력과 의지만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이럴 때, 그들이 참 부럽다.

비록 그들은 육체적으로 고달플 때도 많고, 많은 시간 동안 일을 하지만, 우선 돈, 그러니까 현금의 자유가 내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많고, 이렇게 ‘정년퇴직’ 이나, ‘명퇴’같은 음산한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리고 하루아침에 직장이 없어지거나 하는 traumatic한 것도 없고.. 그저 단점은 사업에는 항상 기복이 있으니까,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렇게 여유 있게 돈을 번 후에 白手가 된 사람들은 위에 말한 것처럼 정말 바쁘게 산다.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가서 그곳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선교여행(성지순례), cruise여행, 골프, 각종 악기 배우기 요리 배우기, .. 열거하려면 한도 없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시간과 건강, 돈이 없으면 곤란한 것들이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 것들인가? 이것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개개인마다 여건들이 조금씩 다를 것이니까.

개인적으로 나에게 매력적인 일거리를 고르라면 글쎄, 신앙적인 것과 지적인 것들이 balance를 이루는 그런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돕는 자원봉사, 컴퓨터를 위시한 매초 변하는 digital technology 그리고 자기를 포함한 ‘개개인들의 역사’ 탐구 등등이 있다. 하지만 白手들이 할 수 있는 것들도 시대에 따라서 무슨 흐름과 변천이 있었을까?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세대마다 겪었던 시대적 문화가 있고, 경제적인 제약, 여유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 부모 세대는 전쟁을 몸으로 겪었고, 비록 민주적이지만, 보수적이고, 경제적으로는 항상 모자란, 그런 시대에서 사셨다. 그들에게는 白手가 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니 대부분 혼신의 힘으로 키웠던 자식세대에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자존심을 접는’ 조용한 여생을 보낸다.

손주로부터 위안을 얻고, 경로당에서 친지들과 어울릴 수 밖에 없는 것이 거의 남은 삶을 사는 방식이었다. 지금에 비해서 평균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았던 시절이고 보니, 白手로 산 기간도 길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계속 길어지는 평균수명이다. 白手가 되는 절정기인 60대가 이제는 길어진 평균 수명에 덕분에 비교적 ‘젊어’ 진 것이다. 번듯하고 의미 있는 ‘경제적인 일’을 할 수 있으면 제일 바람 직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악의 세계적 불경기가 기약도 없이 계속된다. 지금 나의 세대, 60대가 그런 변화의 최전방으로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제일 바람 직할까?

이때 나는 고국의 친지들을 부러워 하게 된다. 비록 세대는 많이 흘렀어도 이곳 미국에 비해서 그곳은 아직도 끈끈한 정으로 모두들 얽히어 산다. 학연, 혈연, 지연..등등 오래 동안 형성되어온 ‘인연’이 이 나이에는 완숙이 되어서 사는데 큰 활력소가 될 듯하다. ‘철저한 개인’의 나라 미국에 사는 한 그런 것은 완전한 희망적인 것일 뿐이다. 비교적 교민들끼리 모여 산다는 이곳에서도 큰 차이는 없다. 완전히 ‘99.9% 한국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조금 다르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그렇게 살려면, 아예 고국에 가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나을 테니까.

이런 때에, 최근 20년간 급성장한 인터넷의 보급은 이렇게 ‘고립되어’ 사는 우리들에게 조금 희망적인 발전일 수 있다. 지독히도 개인적 자유와 간섭 받기 싫어하는 미국인들이 Facebook, Twitter같은 social networking에 열광하는 것도 인간의 사회적 본성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적 공간, virtual space‘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만큼, face-to-face: 얼굴을 마주보며 만나는 것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인터넷에 의한 매체의 역할은 독특한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 공간을 손쉽게 뛰어넘어,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인터넷은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얼마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가 하는 ‘기술의 정도’는 우리세대를 무참히 도 차별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재 인터넷의 발전 정도로는 아직까지도 사용자는 기본적으로 컴퓨터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일 큰 장애물이다. 그래도 지금은 10년 전이나 그 이전보다 훨씬 쓰기가 수월해졌다. 컴퓨터처럼 보이지 않는 기기들 (embedded devices)이 인터넷으로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mobile devices, GPS, smart phone, HD-TV, car, audio system 등등인데, 이런 추세는 가속되고 있다. 본인도 모르게 인터넷을 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기들은 특별한 목적에 맞춘 것이고, desktop pc의 ‘널찍하고, 화려한 화면’ 에 나타나는 ‘화려한’ 인터넷의 효과에는 아직도 미칠 수가 없다.

 인터넷 이전에는 컴퓨터 없이 살아도 조금 자존심은 상해도 그런대로 살 수 있었다. 멋지게 프린트 해낸 편지 같은 문서들, 재미있게 ‘조작’한 사진 만들기, cd-rom등으로 백과사전 보기.. 계산을 다 해주는 가계부, 이런 것들은 생활하는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컴퓨터를 살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다르다. 인터넷을 못쓰거나 안 쓰면 이제는 생활하는데 불편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컴퓨터를 쓰기 위해서 이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쓰기 위해서 사서 써야 하는 실정이 된 것이다.

주변의 아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추세를 실감한다. 그들도 ‘싫지만’ 이것을 써야 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제는 편리할 정도로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값싼 물건을 찾아내고, 이메일을 쓰고, 옛날에 헤어진 사람들을 찾아내고, 집에 앉아서 고국에 있는 ‘고수’들과 바둑을 두게 되고, ‘공짜’로 영화, 드라마 같은 것을 보게 되고.. 이런 것들을 어떻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그런대로 인터넷을 쓰는 우리 동료세대들의 특징은, 이들 대부분은 인터넷의 ‘소비자’ (net consumers) 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보거나, 받거나’ 하는 ‘수동적‘인 입장에 있다는 뜻이다. 소비자에서 ‘생산자‘ 적인 (net producer) 입장으로 능동적으로 쓰는 사람은 아직도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예는 이메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의외로 직접 ‘쓰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영어로 편지를 쓰는 것은 우리세대에선 말도 안 되고, 어차피 감정이 통하는 한글로 써야 하는데, 오랜만에 ‘한글문장’을 만드는 것도 그렇지만 우선 키보드에 글자를 넣는 데서 부터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것이 현재 ‘능동적’으로 인터넷을 쓰는데 최대의 장애물인 것이다. 물론 ‘말하는 것’ 보다 ‘글을 쓰는 것’이 훨씬 힘 들기도 하다.

 내가 아는 우리 또래들도 ‘대부분’이 인터넷 소비자에 속하는, Internet radar 아래에 ‘숨어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진정한 인터넷 세대는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맞는 그런 부류들일 것이다. 이곳에서 오랜 동안 살며 보아왔지만, 우리 세대(boomer)의 미국인들은 느릿느릿하지만 꾸준히 인터넷 문화에 동화하는 노력으로 이제는 ‘대부분’이 큰 문제없이 인터넷을 ‘능동적’으로 쓰게 되었다.

이메일은 그들에게도 거의 ‘필수’가 되었고, social networking에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고, 인터넷 shopping도 다른 세대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 그에 대응한 한인들은 비록 느낌이지만, 훨씬 뒤 떨어진다. ‘쓰면서’ 경험하는 것은 고사하고 우선 pc조차도 쓰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현실이고 너무나 바쁘게 사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마도 하루 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닐 듯 싶다. 조금 더 빠른, 그러니까 현재의 3G, 4G정도보다 훨씬 빠른 mobile-based Internet으로 발전을 하면 아마도 mobile device들이 desktop PC보다 더 쉽게 쓸 수 있게 (예를 들면, keyboarding대신 voice recording, recognition, dictation같은) 될 것이다.

하지만 단점은 역시 우리 세대의 특징인 ‘떨어지는 시력‘ 이다. Mobile device들은 글자 그대로 ‘가볍고, 작은’ 것이라서 젊을 때보다 훨씬 ‘조작’하기도 불편하고, ‘보기도’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희망은 ‘보는 것’ 대신에 말하고, 듣게 하면 될 것인데 그쪽의 발전 속도는 생각보다 느려서, 과연 우리 세대들이 그것의 혜택을 본격적으로 받게 될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우리세대는 과장된 표현으로 ‘문화적 격변기’를 때 늦게 맞고 있다. 역사상 이렇게 빠른 속도로 기술에 의해 사회, 문화적 기반이 영향을 받은 적은 18세기 이후의 산업혁명 이후 처음일 것이고 질적, 양적으로 그때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이 어중간한 우리 boomer세대들, 특히 白手들, 과연 어떻게 이 격변기를 ‘안전하게’ 보낼 것인가?

St. Patrick’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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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Patrick’s Day shamrock

3월 17일, 오늘은 St. Patrick’s Day, 하루 종일 이곳 저곳에서 초록색을 많이도 보는 날이다. 초록색은 역시 느낌이 좋다고 할까, 봄의 연상시키고, 생명이 움트는 그런 느낌, 시원한 느낌, 삶의 느낌, 하나도 부정적인 것이 없는 완벽한 색깔, 그것이 St. Patrick’s Day의 색이다.

물론 St. PatrickIreland의 수호성인(patron saint)임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정확히 어떤 사람이란 것은 잘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조금 부끄러운 고백일 수도 있는 것은 내가 명색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간단히 Wikipedia로 찾을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국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에 불과하다. 다른 말로, 종교적인 배경 없이, 그것(역사적 사실)만으로는 충분히 그 사회적, 문화적인 영향과 의미를 간파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우선 이 수호성인은 아주 오래 전인 AD 387-461년에 사셨던 ‘역사적’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의 삼국시대와 비슷한 오래 전시대인 것이고, 그 당시 IrelandIrish 원주민, 영국 땅은 로마제국의 일부였다. 영국 땅 Wales 에서 태어난 Patrick은 16세 때 Ireland에서 쳐들어온 원주민에 의해 납치가 되어 Ireland로 끌려 갔지만 6년 뒤에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 이후 그는 기독교 (로마 정교회)의 주교가 되어 Ireland도 가서 그곳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기독교화 시킨다. 그 이후 Ireland는 천주교의 세계적인 중심국가로 성장을 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3월 17일은 그가 죽은 날이자, 후에 로마, 동방 정교회 천주교, 영국 성공회, 또한 루터교회의 공식 축일(feast day)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St. PatrickIreland의 상징적인 식물 shamrock의 세갈래 꽃잎을 천주교리의 으뜸인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칠 때 사용했다고 하고 이 외에도 전해지는 전설은 많이 있다. 최근에 Ireland 는 염려할 정도로 급속히 세속화(secularization) 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엄연히 세계 ‘최강’의 천주교 국가이다. 수많은 천주교 선교사, 신부, 성직자, 성인이 배출되었고, 현재 나의 정신적 고향이 된 레지오 마리애1Ireland출신의 신앙인 Frank Duff에 의해 생긴 것이다. 그뿐이랴.. 우리의 ‘미국 본당(Holy Family Catholic Church, Marietta, Ga)’ 의 주임신부님(pastor Fr. Darragh Griffith)와 보좌신부님(parochial vicar, Fr. Stewart Wilbur) 또한 ‘모두’ Ireland출신의 역전의 경험을 가진 신부님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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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ng Crosby in ‘Going My Way’

또한 미국에서 Irish immigrants(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들의 역할이 보통이 아니다. 비록 Jewish 같은 두뇌나 재력에는 못 미치지만 다른 분야, 특히 음악, 영화와 문학, 그리고 신앙분야에서 많은 기여를 했으며, 천성적으로 인생을 즐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런 대표적인 사람이 20세기 초, 중반에 활약한 Bing Crosby (우리에게 White Christmas로 잘 알려진)로서 그가 출연한 대표적인 영화 ‘Going My Way‘란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우선 가톨릭 신부로 등장하고, 감미로운 노래를 부른다. 그러니까, 신앙, 음악2, 영화 모두 이 Irish가 하는 역할인 것이다. 이들의 음악, 특히 노래를 들으면 우선 Danny Boy같은 목가적인 것들, 우리의 정서와 참 잘 맞는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개인적으로 Irish에 관한 것들은 참으로 호감이 많이 간다. 신앙적, 예술적으로 무언가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낀다. 최근에는 이들도 많이 ‘상업화’3가 되어가는 듯 하지만 그 오랜 전통이 어디에 가랴? 이런 저런 생각으로 오늘 하루는 온통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The Unicorn SongThe Irish Rovers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 자장가 처럼 들려주던 감미로운 곡 

  1. Legion of Mary, Legio Mariae: 성모님의 군단. 성모님을 정신적 지주로 군대식으로 모인 가톨릭 평신도 단체, 세계적 조직이며 Ireland의 수도인 Dublin에 세계 총본부가 있다
  2. 오래된 이민 역사로 이미 19세기부터 미국의 bluegrass, country music의 주류를 이루었고, 20세기에는 musicals, 예를 들면 Yankee Doodle Dandy같은 것들로 전통이 이어졌다.
  3. PBS-TV로 미국에 많이 알려진 Celtic productions, 예를 들면 EnyaCeltric Women같은 것과 River dance group같은 것들.

내가 아는 3월 15일은..

내가 사는 아틀란타의 35년에 가까운 역사, 전통을 자랑하는 한인천주교회1, 그곳에서 매년 신자들에게 발부하는 달력이 바로 나의 코앞에 걸려있다. 이것은 최근의 일이고, 그 전에는 다른 달력을 쓰거나 아예 걸지도 않았다. 그래서 근래에는 조금 신경을 쓰고 자세히 보게 되었다.

과연 이 달력이 어떤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을까2..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천주교의 전례력을 중심으로 만들어져서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게 되어있다. 그 다음은 아무래도 세속적인 것을 떠난 신앙생활은 힘드니까, 다수의 명절이 표기가 되어있다. 문제는 ‘어느 나라의 명절’ 이냐는 것이다.

제일 충격적인 것은 고국인 ‘대한민국’의 명절이 제일 큰 빨간 글자로 표기가 되어있는 반면, 현지인 미국의 명절은 보통글자로 빨갛게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천주교의 전례력도 숫제 대한민국 전례력 중심이고, 그렇게 유명하고 중요한 Irish ‘천주교’ 명절인 St. Patrick’s Day(3월 17일)는 ‘완전히’ 빠져있다3.

그리고 오늘인 3월 15일에는 ‘3.15의거 기념일’이란 글씨가 올라가 있다. 내가 아는 3월 15일은 사일구(4.19) 학생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1960년의 부정 (정,부통령)선거 밖에 없는데, 언제 또 ‘데모와 혁명’이 그날에 있었을까? 더 웃기는 것은 4월 22일에, ‘정보통신의 날, 자전거의 날, 새마을의 날‘ 이 함께 쓰여있다. 여보세요, 도대체 이런 것들 이곳, 미합중국 아틀란타, 조지아에서 왜 필요하단 말씀입니까?

그것 이외에도 이렇게 ‘지역감정’을 완전히 무시한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은 본당신부의 지역,정체성 착각일까, 사무실의 무식이나 향수병에 의한 억지일까. 본당 지역역사가 거의 35년에 가까운 이곳의 의식이 이 정도면 조금 신경이 쓰인다. 앞으로 수십 년이 흘러야 이 달력도 조금은 ‘현지화, 미국화’ 가 되려나.. 과연 언제나 이곳에 Irish St. Patrick’s Day가 ‘조그만 글자’로라도 올라올까?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신부님들이 오셔서 쉽지 않은 사목하시느라 고생하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현지가 어떤 곳이라는 정체성’은 조금 배려하며 사목을 하시는 것이 장기적 교포사목이 가야 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오네가이시마스(おねかいします)!

  1.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 천주교회, Korean Martyrs Catholic Church of Atlanta
  2. 대한민국의 달력업체에 주문을 하는 것이 관행이라고 함.
  3.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이날 Irish Association 주최퍼레이드까지 있다는 사실

Summer Time

¶  Daylight Saving Time  이곳에 살면 일년이 두 번씩 조금 귀찮은 날을 거쳐야 한다. 봄과 가을에 한번씩, 시계를 바꾸어 주어야 하는 날이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시절에 한국에도 그것이 있었고, 그때의 이름은 Summer Time이라고 했다. 간단히 말해서 봄,여름,가을에 아침보다 저녁시간을 조금이라도 햇빛으로 밝게 쓰자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전기 에너지’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설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선 오래 전 그것이 없어졌지만 미국과 유럽은 줄기차게 이것을 계속하고 있는데, 사실 귀찮기 말할 수가 없다.

집안에 시계가 이제는 10개1가 넘고 어떤 것들은 digital이라 바꾸는 방법도 다양하다. 다행히 Internet과 연결된 computer나 phone network에 연결된 cellular phone같은 것은 시간이 자동으로 바뀌어서 다행이다. 이것에 얽힌 추억이 하나 있는데, 내가 이곳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한번 시계 바꾸는 것을 잊고 (이것을 잊기가 참 힘들지만) 아침 강의를 갔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한 시간 늦게 강의실에 간 것이었다.

시간이 바뀐 것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강의실을 들어가려니, 낯익은 얼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것도 잠깐이었지만 이유를 알고 나서 더 당황을 했다. 비록 예정된 시험은 없었지만, 누가 알겠는가.. 가끔 pop quiz라고 해서 예정에 없던 시험도 보곤 했으니까, 그것을 놓쳤으면 낭패가 아닌가? 그 당시 나는 미친 듯 ‘공부에 몰두2를 하던 시절이어서 뉴스 매체 (radio, TV etc)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살던 때여서 summer time이 시작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것이 기억에 ‘판각’이 되어서 그 이후에는 봄에 한 시간을 앞으로 바꾸냐, 뒤로 바꾸냐 하는 아리송한 의문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그때가 봄이었고, 9시 강의시간이 10시가 되었으니까 한 시간이 빨라진 것이다. (9시가 10시가 된 것이 빨라졌다고 하는 이것부터 황당한 것이 아닐까?)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책¶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3  몇 주전에 연숙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소속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 에서 책 한 권을 빌려왔다. 저자는 예수회 신부이며 서강대 신학 대 교수(신약)인 송봉모 신부님이고 그 책의 제목이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이다.

이 송신부님은 신부로서는 아주 많은 책을 저술한 것과, 활발한 강론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에 나도 이분의 강론을 audio tape으로 들은 적이 있었는데, 박학다식한 것은 전적으로 인정을 했지만, 무언가 나하고는 ‘주파수나 파장(chemistry4)’이 맞지 않는 것을 느끼고 그 이후로 더 이상 듣거나 읽지 않았다. 그 때 나의 피상적인 느낌이 ‘너무도 잘난 체‘ (김용옥5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죄송합니다) 한다는 조금은 나의 과격한 반응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신앙적으로 유치하고, 가슴을 넓게 열고 있지 않았을 때였다.

지난 성탄 season에 송 신부님이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 오셔서 며칠간 강론을 하셨는데, 남들은 거의 ‘열광적’으로 가서 들었지만, 나는 예전에 느낀, 그 ‘별로 였던 첫 인상’ 때문이었을까, 기회를 흘려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그분의 비교적 신간 (2010년 판) 저서가 가까이 온 것이었다. 송신부님의 저서라고 해서 우선은 읽지 않다가 우연히 화장실에서 잠깐 보게 되었는데, 그 것이 시작이었다. 읽기 쉬운 글자체와 문단 배치 같은 책의 외관상 구성 같은 것이 도움이 되었고, 내용도 나에게 비교적 거부감 느끼지 않는 것들이어서 이번에 처음으로 송신부님의 책한 권을 전부(cover-to-cover) 읽게 되는 첫 case가 된 것이다.

책 한 권을 정독하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 manual typing임을 안 이상, 이것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니까, Reading-by-Typing인 것이다. 이것을 읽는 며칠 동안에 나는 꿈을 하나 꾸었다. 미움과 용서가 주제인 만큼, 나의 잠재의식 밑바닥에 있던 어떤 ‘원수’를 꿈에서 만난 것이다. 이곳의 한 직장 (Scientific-Atlanta6, a Cisco company)의 나의 악질 boss, Blake Causey7란 놈이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한 것이 두고두고 용서 못할 놈 제일인자가 되었는데, 그 놈이 꿈속에서 ‘너무나 친절하고, 인정 있는 따뜻한 인간으로’ 나를 반긴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잊고 싶은 놈이었는데, 어쩌자고 다시 나타난 것일까? 하지만 역시 이 인간도 송 신부님의 책이 말하듯이 ‘나를 위해서 용서’를 해야 할 인간임을 느낀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1. 벽시계, 손목시계, 전화시계, cooking ware etc
  2. 거의 도서관에서 살았다.
  3. 2010년 서울 바오로딸 발행 송봉모 지음, 1판 6쇄
  4. 영어권에서는 무언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화학적’으로 생각한다.
  5. 도올, 내가 이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중의 하나
  6. 아틀란타에 있는, cable TV set-top box 만드는 큰 회사
  7. 악명 높은 South Carolina의 사립 사관학교 출신 엔지니어, 덜 성숙한 외골수 공명심의 화신

거짓 예언자들 (false prophets)

rush limbugh
R. Limbugh, false prophet No. 1

I truly hate this SOB1: 비록 hate란 말과 SOB란 말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단어들은 끝까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듯하다. 이것들이야 말로 100%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Rush Limbaugh, 이름 또한 더럽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rush를 해서 이제는 더 rush를 할 곳이 없다고나 할까?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최근 십 수년에 걸쳐 지금의 미국 정계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며 compromise의 정신을 철저히 파괴하고 있다. 추잡한 정치인들은 이것을 철저히 이용하며 공생을 해왔다. Culture of Extreme을 기가 막히게도 자신들의 부와 연결시키며, ‘우매하고, 병신 같은 대중’ 들을 이리저리 이용해 먹더니, 결국은 big mouth에 의한 ‘아차!’ 의 실수2를 하고, 조금 살이 빠졌나 했더니 결국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른 인간들의 말에는 끄떡하지 않아도, 자기의 돈줄인 광고주가 하나 둘씩 빠져나가니 조금은 걱정이 되긴 할 듯하다. 이런 SOB를 나도 오랜 전에 한때는 열심히 그의 hate gospel을 들은 적이 있었다. 1994년, Gingrich revolution3때였나? 그 당시가 그의 radio talk show의 초기였는데, 그 때만 해도 지금 같은 미친놈 같이 과격한 정도는 아니었다. 보수적 정치철학을 기가 막히게 잘도 떠벌렸을 정도다.

Glenn Mad Beck
G. Beck, false prophet No.2

그것이 머리가 점점 벗겨지고, 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미친놈’으로 변해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과격 철학’에 빠지는 사람들이 그다지도 아직도 많았던가 하는 것이다. 김일성 개XX에 못지 않는 ‘과격한 폭력언어’를 구사하던 그에게 박수를 보내던 인간들은 도대체 어떠한 인간들이었을까? 

이 인간에 뒤지면 서러워할 다른 한 인간, Glen Beck이란 것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이들이 가공할 정도로 위험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이들은 바로 그들이 ‘보호하고 옹호’한다는 보수주의와 종교, 신앙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누누이 나오는 ‘거짓 예언자’들의 표상인 것이다.

 

  1. son of bitch, what else?
  2. 종교단체 임직원들의 건강보험에서 피임 보조를 찬성하는 증언을 하던 Georgetown University의 여학생을 slut(창녀?)이라고 떠벌임
  3. 1994년 의회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Newt Gingrich의 주도로 상하 양원을 장악한 것

삼월 오일, 이천십이년

어쩌면 시간을 이다지도 정직하게 흐르는 것일까? 참, 조금만 늦게 흘러도 좋으련만, 쉬지도 않고 하루하루가 간다. 이것을 의식하는 내가 참 밉기도 하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일까, 한가하다는 뜻일까?  삼월도 5일이 지나간다. 며칠 전 완전 열대성의 광폭한 날씨가 앞으로 다가올 것을 예고라도 하듯이 선을 보이더니, 결국은 다른 곳에서는 작년 4월의 끔찍한 피해와 비슷하게 상처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곳은 또, 아슬아슬하게 총알을 피한 셈이다. 조금은 불안하다. 언젠가는 이것이 우리 쪽으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제일 바람직할까? 암만 생각해도 내가 현재 하는 사순절의 신앙여정은 만족스럽지 않다. 몇 년 전에는 성경을 읽고, typing 도 하고 했는데, 그때가 또 그립다. 한번 해 볼까? 작년에는 레지오 교본을 열심히 typing한 적도 있었다. 그때도 그립다. 조금은 그 당시의 열기와 열의, 흥분 등등이 가라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다시 활기차게 만들 수 있을까?

그래도 올해의 ‘발전’이라면 3월 1일부터 ‘가급적’ Holy Family 성당으로 매일 미사에 간다는 사실이다. 벌써 오늘까지 3번 갔다. 의외로 Mrs J 를 만나고 있는데, 그것은 역시 분심을 들게 하고 있음을 알고 실망을 금치 못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아무래도 내가 연숙에게 실망하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렇게 그렇게 둥글게 살지 못할까? 얼마나 오래 산다고..

요새는 블로그에 시간을 쓰고 있다. 그런 내가 조금은 걱정이 될 정도로.. 이 정도면 내가 자라면서 배운 ‘한글 쓰기’가 많이 쉬워졌어야 할 텐데, 그것이 아닌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분명히 영어보다 자연스럽게 나오기는 하겠지만, 마음먹은 그런 감정의 글로 쓰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어떨 때는 나를 미치게, 슬프게 한다. 그 잘난 ‘단어, 숙어’들이, 그 주옥같이 멋진 단어들이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그저, 중학생 애들이 쓰는 그 정도나 될까.. 나는 모른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이런 나보다 훨씬 못쓰거나, 숫제 쓸지 않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들도 ‘닥상’이라는 사실 뿐이다.

요새는 연숙과 예전에 못 느끼고 살았던 진정한 ‘평화’를 조금씩 느낀다. 아마도 연숙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나이가 이렇게 만들었나, 아닐 것이다. 분명히 우리의 변화한 신앙중심의 삶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절박한 당면한 산더미 같이 느껴지는 문제들을 ‘물리적’ 으로 해결은 못해 주어도 이것은 우리가 받고 있는 축복이다. 그래서 이런 축복받는 생활에서 빠져 나오고 싶지 않다. 현상 유지라도 좋다. 이 평화, 얼마나 얼마나 가뭄 끝에 쏟아지는 단비와 같은가? 성모님이여, 부디 이런 축복을 거두지 마시고, 저희를 불쌍히 보시고 하느님께 전구해 주소서!

Fedex service. Get your parcel NO#3229

This morning, I got a suspicious email into my Junk E-mail folder, which I would normally ignore. This time, however, it got my attention because we were indeed expecting a package delivery. Even though we already knew the package carrier is not Fedex, what if it changed the carrier? But again, it looks to me like a typical scam email because our package carrier is not supposed know my email address. The suspicious email has an attached payload zip file. The email says in not-so-perfect English:

 

Dear Customer,

The delivery service couldn’t deliver your package.
The package weight exceeds the allowable free-delivery limit.

You have to receive your packagen personally.
Print out the “Invoice Copy” attached and collect the package at our office.

Please read carefully the attached information before receiving your package.

Thank you for attention. FedEx Global.

 

The attached payload file name was: “FedEx_Invoice_Copy_N44-134.zip

The zip file was only 3 byte long.. What’s going on here? If the zip file ever gets clicked (opened), 100% virus-generating code would infect the running PC.

 The email forensic reveals that it has originated from www-data <www-data@mail.ecom.hu>. Googling reveals it is not even a legit domain name, in other words this email contains 100% lie. What kind of world are we living in these days?

 

삼일절과 왜(倭)

오늘은 3월 1일, 그러니까 삼일절이다. 왜 이렇게 생소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흡사 무슨 먼~나라의, 먼~옛적의 일로 완전히 남의 것처럼 느껴지고, 곧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잠긴다. 무언가 복잡한 심정이 됨을 또한 느낀다. 아직도 달력이 빨갛게 물들어 있음이, 분명히 고국의 ‘국경일’임이 틀림이 없다. 나의 코앞에 걸려있는 달력은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한국성당 것인데, 이곳 현지인 미국의 국경일에도 없는 빨간 날짜가 대한민국의 국경일들에는 요란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것이 이곳에 사는 대한민국출신 사람들의 국가의식이다. 이것에도 저곳에도 확실하게 소속감은 못 느끼는.. 그런 어정쩡한 자세.. 이런 자세에서 그들은 과연 삼일절은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올해는 삼일절 93주년이 된다. 1919년 기미년 삼월 일일, 이 1919년 기미년은 나에게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 나의 어머님이 바로 이해에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거의 1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 그러니까 살아계셨으면 올해 93세가 되실 것인가. 상고사만큼 오래 된 것도 아니지만, 나로써는 실감나게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오래 전의 역사다. 멀쩡한 독립국가를 꿀꺽해 버린 ‘왜(倭)놈’들과 얽힌 악연의 시절 때의 사건이었다. 93년이 지난 지금, 약한 사람들의 기억력은 희미해지고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소리를 실감하며 산다. 우리 민족에게 증오와 질시, 질투 대상의 화신이었던 일본은 그런 역할을 조금씩 옆 나라 ‘짱깨’ 들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과연 삼일절에는 무엇을 생각하며 보내야 하나?

내가 고국에서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삼일절 하루 종일을 거의 경쟁적으로 ‘왜놈 증오’하는 행사로 보냈다. 특히 국민학교 때인,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그것은 거의 광적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반일감정은 보기에 아주 원색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필요하면 ‘친일파’를 과감하게 중용을 할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 이후 그런 것은 눈에 띄게 완화가 되었다. 그 이유는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이후의 정권에선 이런 삼일절 같은 ‘과거사’를 어떻게 대했을 까, 나는 거의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국경일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을 보니 조금 의아한 심정이다. 한글날이 없어져서 삼일절도 없어질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일까?

나는 지난 5년간의 ‘피상적인 일본공부’의 결과(대부분 텔레비전 프로그램), 과거 오해했거나 모르고 지냈던 것들을 지금은 많이 새로 알게 되었다. 특히 각종 전쟁으로 인한 그들 민간인들이 겪었던 고통이 사실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음도 그 중의 하나다. 오랜 기간의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완전히 자만심에 빠진 그들은 근래에 들어서 조금씩 주변의 나라, 특히 한때 그들의 ‘만만한’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미국보다 훨씬 전에 버블경제의 충격을 겪었고, 그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작년 3월의 천재지변으로 다시 한번 충격을 겪으면서 조금은 겸손해졌다고나 할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앞으로 한반도와 일본은 어떠한 관계로 이어가게 될 것인가, 혹시 기고만장한 짱깨를 공동의 적으로 의식하게 될 불편한 친구관계가 되지는 않을까?

 

Bye, Daydream Beli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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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y Jones with Union Jack, 1967

오늘 잠깐 뉴스를 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이고,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였다고 했다. 지난주에도 심근경색증으로 ‘갑자기’ 사망한 교우님의 장례미사에 다녀왔는데 또 심장마비.. 누군가 했더니 반가운 얼굴, 60년대의 유명한 rock group, The Monkees의 ‘꼬마’ Davy Jones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위인 66세였다. 언젠가 TV에서 보았을 때 모습이 참 건강해 보였는데, 살도 별로 안 찌고 심장마비의 체질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니까, 이렇게 하나 둘씩 같은 세대의 사람들, 그것도 이렇게 유명했던 인물이 사라짐은 역시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1968년 즈음에 정말 정말 The Monkees를 좋아했었다. 그들의 TV show를 당시의 미8군 방송이었던 AFKN에서 빠지지 않고 보았고, 유엔군 방송이었던 VUNC에서 그의 열렬한 fan이었던 여성 disc jockey (이름을 잊었다) 덕분에 그들의 hit songs들에 깊이 빠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바로 오늘 세상을 떠난 Davy JonesDaydream Believer, 어찌 잊으랴.. 그들의 hit 중에서도 제일 멋진 곡이었다.

작년 봄 나의 blog, The Best 5 of ’68’s 에서 나는 바로 그 곡을 제1위로 올려 놓았다. 오늘 뉴스의 기사에서, 그는 자기의 심장이 25세 정도의 심장처럼 건강하다고 의사들이 말을 했다고..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정도의 나이가 되면 ‘누구라도 내일을 못 볼 수 있다’는 그런 의미심장한 경고가 아닐까.. 다시 한번 우리 세대의 idol이었던 그의 명복을 빌며.. RIP..

 

Daydream BelieverThe Monkees – 1968

 

터키 멘데레스 수상 서울방문 추억

멘데레스 수상 환영
멘데레스 수상을 기다리며, 1958년 4월 25일

멘데레스 수상.. 엄청 지난 세월에도 그 이름만은 기억을 한다. 멘데레스, 정확히 말하면 1958년 당시 터키 수상 멘데레스, 그가 아시아 순방길에 서울에 들린 것이다. 그 당시에 외국의 수상급이 한국에 온다는 것은 사실 큰 뉴스거리였다. 그만큼 외국에서 올 만한 거물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전쟁을 겪은 거의 폐허로 변한 찌들게 가난한 나라에 무슨 일이 있어서 온단 말인가? 설령 누가 꼭 방문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어도 곤란한 것이, 그렇게 높으신 분이 묶을 변변한 숙소, 그러니까 호텔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유일한 호텔은 시청 근처에 있던 반도호텔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추억에, 나는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이 갓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 (이원의 선생님) 께서 외국에서 ‘대통령’이 오신다고 하시며 그 나라의 국기를 다같이 그리자고 하셨다. 나라의 이름은 ‘털기‘ 라고 했다. 이것이 조금 웃기는 추억이었다. 도대체 ‘털기’가 무엇인가.. 우리는 한바탕 웃고 그저 ‘먼지 털기‘ 로 연상을 해 버렸다. 국기는 초생 달이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유일한 뉴스의 원천은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듣는 것인데, 신문은 한자가 너무나 많아서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우리들도 그 나이에 그런 ‘정치뉴스’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털기라는 나라는 정확하게 ‘터키’였고, 신문에서는 한자로 ‘토이기(土耳基)‘라고 쓰기도 한, 육이오 동란 때 유엔군 16개국의 일원으로 전투사단을 보내어 이미 우리땅에서 피를 흘렸던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세계정세로 미국, 소련의 냉전 하에서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으로 ‘완전히’ 갈린 상태에서 터키는 우리나라와 같은 쪽에서 빨갱이와 대적한 입장이고 보니,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 수상 멘데레스는 자연스레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이 소련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기 위한 전략으로 아시아에서는 서쪽 끝으로는 나토, 터키 를 출발로 해서 월남, 자유중국(대만), 한국(과 일본)를 동쪽 끝으로 거대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 외국의 ‘우두머리’가 온다는 것과, 그 분을 환영하러 우리들이 거리로 나간다는 사실은 사실 신나는 소식이었다. 우선 거리로 나가려면 학교 공부를 빼먹어야 한다는 것이 제일 신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가서 거물급들이 탄 차들을 보는 것도 신났다. 하지만 일단 거리로 나가서 환영을 하려면 그들의 차들이 지나가는 몇 시간 전에 나가서 기다려야 하는 고역을 겪어야 했다. 또한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도 차들이 지나가는 시간은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으니, 참 허무하기도 했다. 그 몇 초를 위해서 몇 시간을 목이 빠지기 기다렸으니.. 그 다음날 가도에서 멘데레스 수상을 기다리던 우리들의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심지어는 내가 사진에 나왔다고까지 했다. 그것이 조금은 우리 집의 ‘역사’가 되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 신문을 본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비슷한 것이 실렸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면서 54년이 흐른 것이다. 그것을 지금 그 당시의 신문을 다시 보게 되면서 확인을 할 수 있었다. 분명히 우리들이 사진이 나왔고, 그것은 1958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나는 경향신문으로 알았다) 였다.

문제는 그 사진을 암만 보아도 나의 존재를 확인 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신문의 사진은 원래 바로 찍은 것을 보아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해상도가 ‘저질’에 속하는데 그렇게 오래 전의 것은 더 나쁠 것이니 말이다. 또한 그 때의 경향신문을 지금은 볼 수가 없는데, 아마도 그곳에 내가 있는 사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때의 생생한 기록과 사진을 찾은 것만 해도 큰 수확인 것이고, 이 사진을 보면서 그 당시 우리들의 ‘꾀 죄죄’한 모습들이 너무나 반가운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 당시의 그 두 거물 이승만 대통령과 터키의 멘데레스 수상 모두 몇 년 후에 정권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19 학생 혁명으로 물러났고, 멘데레스 수상은 같은 해, 군사 쿠데타로 실각, 체포, 나중에는 사형까지 당했다. 참 역사는 이런 것인가.

 

사순 제1주일, 장례미사

¶  2월 26일, 재의 수요일 이후의 첫 일요일이다. 그러니까 2012년 사순절(Lent) 첫 주일인 것이다. 비록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미사에서 이마에 ‘재의 십자가’를 받고, ‘고난의 40일 여정’ 은 시작 되었건만, 별로 크게 한 것도 없이 순식간에 사순 첫 주일을 맞았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사순(40일)의 시기를 다음의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지내게 된다. 즉, (1) 기도, (2) 자선,선행, (3) 절제, 단식과 금육 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절제, 단식, 금육’ 란 것 중에 절제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서 흔히들 하는 것들은 거의 정해져 있다. 가장 흔한 것이 평소 ‘즐겨서 탐닉’하던 것(도박, 술, 담배 같은)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아주 끊어 버리는 것이다.

단식(fast), 금육(abstinence)은 글자 그대로 끼니를 거르고, 먹더라도 고기 (생선은 제외) 류를 안 먹는 것이다. 단식은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부활 전 금요일) 에 적용이 되고 그것도 하루 한끼만 거르면 된다. 금육은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매 금요일에 적용이 된다.

하지만, 이것도 꽤가 많은 이곳 사람들, 여러 가지의 예외를 만들어 두었다. 그 중에 있는 것이 14세 미만의 아이들과, 60+세 이상의 ‘노약자’에 대한 배려인데, 이것이 조금은 웃긴다. 여기서 60+세의 기준은 분명히 수십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요새 나이 60+세는 대부분 건강하지, ‘노약자’로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금 덜 먹거나, 한두 끼 굶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예외조항은 나이보다 각자가 처한 건강상태에 두어야 할 듯하다. 우리 부부는 원래 ‘소식(小食)’ 이라서 사실 완전히 몇 끼 굶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고, 금육도 그리 자주 고기를 먹지를 않아서 큰 문제가 없다. 절제에 대해서, 나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gourmet coffee 인데, 이것을 완전히 끊는 것을 예전에 내가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이것은 실행하기 전, 처음 느끼는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아침에 커피의 카페인에 의한 자극이 없어지면서 무언가 불안하고, 정신의 집중이 잘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적응이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맑아지는’ 머릿속을 느끼곤 했다. 그것이 바로 ‘절제’의 매력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커피는 절제대상에서 제외를 했는데, 조금 꽤가 났던 것일까.. 그것 보다는 사순절을 그렇게만 보내는 것이 너무 소극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고, 레지오에 입단하면서 생각도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봉사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레지오는 ‘절제’같은 것 보다는 적극적으로 밖으로 나아가 사람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은 사실 ‘무언가를 안 하거나 끊는 것’ 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특히 나 같이 원래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고, 그래서 더 보람이 있을 것 같다. 올해는 과연 그런 지향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  지나가는 주에는 정말 오랜만에 장례에 관한 뉴스가 두 건이나 있었다. 사실 그 동안은 연도나 장례행사가 뜸했었다. 그것(뜸한 것)은 정말 좋은 것이지만, 레지오 행동단원에게는 그만큼 한가한 시간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의사들이 병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두 가지의 장례에서 하나는 이번에 이곳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일가족 5명이 살해된 끔찍한 사건에 관한 것이고, 다른 것은 조금은 평범할 수도 있는 어떤 60대 남자교우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사실은 이 60대의 평범한 분에 관한 것이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이 ‘평범한’ 교우님은 해방둥이 남자로, 김태균 요한 교우이신데, 심근경색증으로 며칠 전 갑자기 돌아가셔서 23일에 연도가 있었고, 24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다. 우리부부는 장례미사엘 갔었고, 예와 같이 고인의 명복을 빌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인의 가족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중에 고인의 형님이 바로 내가 한때 알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거의 40년 전에 알았던 분이었다.

물론 모습으로 알 수는 없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장례미사 안내서에서 그 분 따님의 이름을 내가 알아본 것이다. 지금도 나는 어떻게 아직까지 그분 따님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나의 전 ‘서울식당’ blog에서 그 당시를 회상하며 쓴 것이 있었는데 그때 기억을 해 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분의 이름을 모르고 지냈으니, 사실 그분을 알아 볼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비록 70대의 나이였지만, 자세히 보니 역시 그분이었다. 훤칠한 키에 멋쟁이 스타일 (옷), 그대로였다. 그 부인, 그러니까 세란이 엄마는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나이보다 젊어 보여서 그랬는지도. 가서 인사를 드릴 까 생각을 했지만, 역시 주저하고 말았다. 옛 사람을 찾는 것과 서로 다시 알고 지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임을 나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만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일까.. 하지만 지난 40년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Stars of 64

Star of 64

1964년 한국 최고의 여배우: 전계현, 엄앵란, 김혜정, 태현실, 방성자

 

이들이 누군가? 한눈에 알아보았다. 반세기 전에 보았던 신문 속의 흑백사진, 아직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1964년 1월 1일 동아일보에 실렸던 설날 특집기사 중의 하나, ‘새해의 꿈’ 에서 그 당시 ‘최고의 여배우 5명‘ 들이 1964년에 바라는 꿈을 짧게 적어놓았다. 글 보다는 역시 이 사진이 이 기사의 주역이었다.

기억한다. 그 당시 동아일보는 ‘매년’ 1월 1일에 그 당시 최고 인기 여자배우들 5명을 뽑아서 큼직하게 사진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싣곤 했다.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이 바로 이사진이었다. 다시 보고 놀란 것이, 내가 기억한 것이 ‘거의’ 정확했다는 사실.. 이것이 star power일까..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현재의 미(美)의 기준으로 보아도 이들은 아직도 멋진, 미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왼쪽부터, 전계현, 엄앵란, 김혜정, 태현실, 그리고 방성자.. 정말 그들은 그 당시 어린이, 어른 상관없이 사랑을 받던 우리들의 ‘멋지고 예쁜’ 누나들이었다. 그들은 과연 어떠한 인생들을 살았을까?

 

Young LoversPaul and Paula – 1963
젊은 연인들‘ – 당시를 풍미하던 ‘old fashioned love’  oldie

 

Wolfram Alpha

Stephen_Wolfram
Stephen Wolfram

Wolfram Alpha? 이것은 한글로 어떻게 쓸까? 아마도 월프램 알파? 상관없지 않을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것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니까. Wolfram은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은 예외적인 천재 과학자’, software designer, entrepreneur..(소프트웨어 디자이너, 기업,창업가)의 수식어가 붙는 유대 계 영국인이다. Full name은 Stephen Wolfram(another Steve, oh no!).

머리가 좋은 것은 그의 이력으로 충분히 짐작이 간다. 영국에서 배경 좋고 머리 좋은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나 그곳 유명한 Eton school에서 아인슈타인을 능가할 정도의 두뇌로 학교와 선생님들을 ‘괴롭히며’, 어린 15세 때 이미 ‘물리 논문’을 발표했고, 곧이어 Oxford로 진학해서 particle physics (입자물리학)을 공부했는데, 그 학교 교수들의 가르침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결국 미국으로 와서 남들이 대학 3학년일 나이에 그 유명한 Caltech(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에서 Ph.D.(박사학위)를 받고, 그 3년 후에는 역시 유명한 MacArthur Prize(맥아더 賞)를 수상했다.

1959년생으로 나이 ‘겨우’ 50세 갓 넘은 그는 , 이 정도면 우선 천재 중에서도 예외적인 천재일 것이다. 수학, 물리학이 주 전공분야였지만, 나중에 그의 주관심사는 computer, computing분야가 되었다. Wikipedia로 그의 약력을 보면 전형적인 천재지만, 그는 조금은 겸손치 못한 천재인 듯 싶었다. 그 정도로 자가의 머리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머리 좋은 유대인 가정이 그러하듯이 그도 ‘머리 좋은’ 수학자와 결혼을 해서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생각에, 머리 좋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 자녀들의 IQ가 과연 어느 정도가 될까, 의문이 생긴다.

이 사람이 원래는 수학, 물리학으로 시작을 했지만, 점점 이론적인 computing system쪽으로 관심이 바뀌어서, Cellular Automata 분야를 그 유명한 Richard Feynman의 옆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1987년 Wolfram Research를 세우고 부터는 Mathematica 라는 symbolic mathematics (대수학)를 다루는 computer software를 개발, 판매하는 등 그만의 독특한 분야를 개척해 왔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그는 일생일대의 최대 과업을 수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독특하고, 심지어는 논란의 여지를 낳은 저서 ‘A New Kind of Science, NKS’ 의 출판이었다. 1000 페이지가 훨씬 넘는 이 방대한 연구의 결과는 사실 그 여파를 가늠하기도 벅찰 정도다. 우주는 analog가 아니고 digital이라는 조금은 ‘유행적’으로 보이는 결론, 암만 복잡한 system도 비교적 간단한 computer software로 설명할 수 있다는 등등.. 논란의 여지가 없을 수 없는 논조일 것이다. 

그의 computer중심의 물질,우주관: universe is computer라는 말은 예전에 Sun Computer, Scott McNealynetwork is computer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다른 말로, 이들은 모든 것들을 너무 자기중심의 ‘사상’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이 책이 출판된 뒤 몇 개월 뒤에(2002년)Charlie Rose와 interview한 것(아래에 보이는 비디오)을 보는 것이 이 책의 골자를 빨리 이해하는 첩경인데, 물리학자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Charlie Rose Show에서 그 방대한 분량의 책을 쉽게 설명하려는 Walfram의 노력은 정말 가상할 정도다.Charlie Rose 인터뷰 video가 그 동안 server에서 사라진 관계로 대신 더 최근 video, 야심작 Wolfram Alpha를 소개하는 하바드 대학 강의를 아래에 실었다.

 

Stephen Wolfram introducing Wolfram Alpha at Harvard University

 

최근에는 그의 정열을 조금 다른 각도로 Google의 성역으로 도전을 하는 것인지, Wolfram Alpha라는 거대한 작품을 선 보였고, 결국은 다른 Steve(a.k.a., Rotten Apple)가 곧바로 이것을 Siri라는 것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Google의 search engine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목적과 결과가 사뭇 다르며 다른 말로 answer-knowledge engine에 가깝다.

Google은 keyword로, 찾으려는 ‘모든 관련된’ website의 location, link (address)를 알려준다. 알려준 곳을 찾아가서 ‘네가 찾는 것을 더 찾으라’는 것이다. 일단 출처를 알려주고 나면 Google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찾으려는 그때부터는 정보를 찾으려는 사람이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Wolfram Alpha는 한 단계 이상 더 나아가서 그 결과를 찾아내어, 자기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report형식으로 건네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하려면 ‘방대한 super computer network’이 뒤에서 찾아내서 정리를 해야 하지만, 찾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부분 거의 ‘자동적으로 불과 몇 초 만에’ 결과를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rottenApple iPhoneSiri 가 ‘신기하게 답을 제공하는’ 원리인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21세기의 최고의 과학자가 될 잠재력’ 을 지닌 그를 이제까지 별로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것이 불과 몇 달 전에 내가 home office에서 즐겨 이용하는 IP PBX (software-based PBX)인 PIAF (Pbx-in-a-Flash) 이라는 것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rottenApple iPhone의 Siri(이것의 발음은 일본에선 ‘엉덩이’라는 뜻이다) 처럼,이 PIAF software에서도 Wolfram Alpha에서 제공하는 service를 쓰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PIAF에 연결된 전화기에서 4747(Iris, Siri를 거꾸로 쓴것)를 누르면, ‘질문’을 말하라는 prompt가 나오고, ‘영어’로 문제나 keyword를 말하면, 그것을 copy해서 반복을 하고, 확인을 하면 곧바로 그 ‘음성질문’을 Google의 speech-to-text service로 보내어(이것은 아직까지 무료) text로 바꾸어 다시 그 text를 Wolfram Alpha로 forward를 하면 그에 대한 ‘해답’이 text로 PIAF로 return이 된다.  

그 시간이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Siri와 거의 같은 PIAF만의 App인 것이다. 현재는 익숙지를 못해서, 아주 초보적인 질문 (weather, today’s history 같은) 밖에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일상적으로 유익한, 학문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정보를 computer가 아닌 ‘전화’로 얻게 되지 않을까.. 희망을 해 본다. 참, 흥미진진한 세상을 살고 있다.

 

아틀란타, ‘혼또니 입빠이’ 변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아틀란타 metro지역의 한인사회도 그 동안 참 많이 변했다. 물론 이런 말 자체가 참 진부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정상이니까), 문제는 별로 좋지 않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표현도 조금은 과장된 것일까? 어떤 사회가 좋지 않게 변한다는 것,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평균화’ 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니까.

여기서의 사람들이란 이곳 아틀란타 메트로 지역에 사는 한국인들(얼굴과 언어에 의한)을 말한다. 어느덧 이곳에 산 것이 내 나이의 거의 삼분의 일에 가까워 오니 주제넘은 소리지만 조금은 잡다하고 소란스러운 일상생활의 잡음을 초월한 높이에서 이곳을 생각하고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지난 세월의 꿈이 담겨있는 이 blog에서 내가 사는 곳에 대한 부정적인 현재에 대해서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제 알게 된 충격적인 뉴스로 조금 생각을 바꾸었다. 그 뉴스는 이곳에서 sauna spa(한국식 찜질 방?)를 경영하고 있는어떤 다섯 명 한인가족의 집단 총기 살인과 범인의 자살에 관한 것이었다. 너무나 끔찍한 것이라서 national news (msnbc)로까지 알려지고 이곳에선 떠들썩하다. 이곳도 위성채널에 이 지역전용 한국방송이 매일 나올 정도가 되어서, (우리만 빼고) 거의 대부분이 그것을 보고 알았을 듯하다.

요즈음에는 미국에선 이런 종류의 뉴스(집단 총격사건)에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문제는 별로 ‘총기 문화(gun culture)에 생소한’ 한인사회에 까지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데 있다. 게다가 사망한 가족 중에는 우리 (정확하게는 연숙)에게 잘 알려진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심지어는 겁까지 나기도 했다. 어제는 사실 2012년 사순절(Lent)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어서 조금 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다가오는 40일(사순)을 준비하는 날인데 이런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건의 내막은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시한폭탄(time bomb)’ 터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올 것이 결국은 온 것이었다. 전혀 희망이 없는, 이미 전에 총기 집단 살인, 자살기도 경력을 소유한 인생패배자, 인간이기를 이미 오래 전에 거부한 패륜아인 그런 시한폭탄과 같이 살아야만 했던 가족들의 고통은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살 방도는 없었을까?

살인,자살극(murder-suicide)’의 주범인 남자동생은, 이번에 우발, 충동적인 요소도 다분히 있었지만, 유서까지 남길 정도로 계획을 한 ‘전과자’로 이것은 누가 보아도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비겁한’ 살인범죄행위였다. 우리가 믿는 천주교의 교리에 의하면 그의 영혼은 연옥의 근처도 못 가고 지옥으로 직행하는 케이스인 것이다. 영혼조차 회개의 가능성이 제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역시 먼 곳과 높은 곳에서 삶과 죽음, 그것들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루하면서도 바쁘고 피곤하고 정신 없이, 로보트처럼 살아가는 대부분의 ‘생활인’들, 예전에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가끔 느끼는 작은 기쁨은 있었을지 몰라도, 인생이란 것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며 살았다. 한 마디로 인생의 보편적, 절대적인 나침반(羅針盤)에 의지하지 않고 나만의 생각으로 산 것이다. 그런 ‘생활인’들이 대거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이곳도 많이 달라졌다. 좋게 말하면 한인사회의 평준화가 되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아니면 ‘하향 평준화’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사실 ‘상상도 못할 life style‘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안다. 이번에 일어난 위의 끔찍한 사건도 그런 논리의 연장으로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기회와 부(富)를 찾아서 온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숫자가 많다 보니 극히 예외적인 인간군상도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1996년 전의 시대가 지금은 그립다. 그때, 아틀란타 올림픽 전의 ‘촌스럽지만’ 평화로웠던 시대 말이다. 최근의 지독한 불경기로 한인사회도 팽창의 추세가 주춤하고 있고, 심지어는 떠나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옛날의 소박한 평화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John Glenn, the Right Stuff

John-Glenn-1962

1962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의 1면 기사, 존 글렌의 미국 첫 지구궤도비행 성공뉴스

 

The Right Stuff.. 책과 영화의 제목.. 미국의 우주개발 초창기 때에 관한 얘기들, 특히 첫 프로그램이었던 머큐리의 7인 우주비행사 (우주비행사를 미국에서는 astronaut, 당시의 소련에서는 cosmonaut라고 했다) 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바로 50년 전, 그러니까 반세기 전, 오늘이 이 프로그램의 절정에 해당하는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2월 20일은 소련에게 완전히 선두를 빼앗겼던 미국의 첫 완전 지구궤도 비행이 성공한 날이다. 그 우주인이 아직도 90세로 건재한 한국전에도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해병대 중령출신인 존 글렌, John Glenn, 그는 1969년에 달에 사상 최초로 착륙한 Neil Armstrong과 같이 Ohio주 사람으로, 나중에는 오랫동안 연방 상원의원으로 정치를 했고, 한때는 미국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기도 했다.

The Right Stuff의 영화를 보면 짐작이 가듯이 그는 7인의 astronaut중에서도 유별나게 ‘도덕적, 신앙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곧디 곧은 성품으로 전 인생을 보낸 셈이고 90세인 지금의 나이에도 전혀 나이에 의한 장애를 느끼지 않는 듯한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보인다. 나는 이 미국의 첫 지구 궤도비행 성공 소식을 서울에서 중앙중학교 3학년이 시작되기 전 2월에 신문과 라디오 방송으로 들었다.

미국, 소련의 심각한 냉전의 공포 속에서 두 초강국은 우주경쟁을 전쟁의 연장으로 보았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이것은 미국의 절대 열세였다. 1957년의 Sputnik 소련 인공위성을 필두로 Yuri Gargarin의 사상 첫 소련 우주인 탄생 등등 계속 소련의 연전 연승이었다. 그럴 때, 미국은 로켓을 쏘아 올릴 때마다, 거대한 화염에 싸여 곧 추락을 하곤 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젊고도 젊었던 40대의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고, NASA가 본격적으로 가동을 하면서, 이렇게 John Glenn의 성공적인 첫 궤도비행이 탄생한 것이다.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것은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끼친 심리적인 효과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으로 보인다. 조금 자신감이 생긴 것이고, 케네디 대통령의 “1970년 전까지 인간의 달 착륙과 귀환” 공약까지 나오게 되고, 결국은 이것을 출발점 으로 1969년 여름에 달에 착륙을 함으로써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space program은 정말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나는 곧이어 중앙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같은 반에 있던 윤태석이 수시로 가져다가 교실 뒤의 벽에 붙여놓은 우주 프로그램의 총천연색 화보 (아마도 미국 공보관을 통해서 나온 것)를 보면서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 당시의 신문을 다시 보게 되면서, 그때의 우리들을 생각한다. 그전 해(1961년)에 5.16군사혁명으로 박정희 의장시절이었다. 그러니까 민정으로 이양이 되기 전, 군사혁명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치되던 시절이었다. 경제는 말도 아니었고, 미국 원조 수준은 떨어지고, 휴전선 너머에는 살이 더 찐 김일성 개XX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고.. 철전지 원수 일본은 우리 동족간의 전쟁 덕분으로 날로 부강해지고, 급기야 올림픽을 눈앞에 두었고, 우리는 구차스럽지만, 일본에게 돈을 꾸어달라는 외교를 해야만 했던 그런 시절.. 하지만 박정희는 ‘한가지를 향해서’ 뒤도 안 보고 달리기 시작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평화의 십자군’ 으로 보이던 미국에서 이런 신나는 소식이 온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박수 갈채를 보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무언가 앞으로 ‘잘 풀릴’ 것이라는 그런 희망들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시절이기도 했다.

 

 Bert Kaempfert – “Wonderland By Night”
‘밤하늘의 트럼펫’, 그 당시의 hit instrumental melody  

 

김두철, Ash Wednesday

¶  우등 한번 못해본 서울대 수석합격: 김두철을 다시 찾았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3학년과 6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특히 6학년 때는 나와 같은 ‘1 분단’에 있기도 했던 ‘머리 좋은’ 동창이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추억에 관한 blog에서 잠깐 언급을 했었는데, 그 당시에는 100%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던 기억력으로 쓴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의외의 도움(Internet, what else?)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1966년 2월 중순경의 일간지는 서울 주요 대학입시 합격자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조그만 기사 중에 김두철의 사진과 이름이 보였다. 그 것이 동아일보였는데,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아주 어렴풋이 그 기사를 그 당시 나도 본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세기가 가까이 되는 엄청난 과거였으니..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그 기사는 김두철이 서울대학 ‘전체 수석’ 합격자 였다는 기사였다.

김두철 서울대 입시 전체수석, 1966그는 서울공대 전자공학과를 지망했는데, 거의 만 명이 넘는 지원자중의 수석 합격자였던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김두철은 ‘항상 일등, 우등생’이었는데, 아마도 경기중,고에 진학하면서 1등은 별로 못했던 듯, 우등을 못해본 수석합격이라고 기사는 강조를 했다. 본인이 ‘점수벌레’를 싫어 한다고 했지만, ‘의외로 수석’이 되었다고.. 참 이렇게 부러운 친구가 있을까? 그러니까, 별로 ‘노력을 안 했어도’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 심리는 아마도 ‘일류 심리’에서 비롯 되었을 듯 하다. ‘거의 항상 top’으로 일관을 했으니, 크게 자랑스러운 것도 없다는 뜻일까? 평소의 실력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 조금은 거슬리기도 하지만, 어찌하랴.. 그렇게 태어났으니. 이 기사로 나는 그가 나와 같이 ‘납북자’ 가정, 편모슬하의 외아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우리 집과 다르게 그의 어머니는 이화여대 교수(金蓮玉, 당시 41세)였다. 그의 아버님은 서울 공대교수로 재직 중 육이오 동란 시 납북이 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과 참 비슷한 환경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게다가 기사는 김두철이 절대로 ‘공부벌레’가 아니라는 것으로, ‘산 사나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장기는 rock climbing이라고.. 기자조차 부러운 듯이 “힘껏 공부하고 맘껏 노는 화려한 대학생활”을 예상했는데, 과연 그는 어떻게 대학생활을 했을까? 그는 지금 어떤 ‘업적’으로 이름을 ‘크게’ 남겼을까 궁금하다.

 

¶  뼈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차가운 안개 비가 하루 종일 나리는 2월, 중순이 완전히 접히고 하순으로 접어드는 일요일, 무슨 꿈에서 깨어나는 듯이 놀란다. 어느새 2월의 삼분의 2가 없어졌나? Groundhog Day, Lincoln’s Birthday, Valentine’s Day.. 모두 지나갔다. 내일은 President’s Day,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화요일은 Legio (Mariae) Tuesday인 동시에 Mardi Gras, 그러니까 그 다음날 수요일이 중요한 날인 것이다. Ash Wednesday(재의 수요일)인 것이다.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새해부터 거의 예외 없이 high note로 지내왔다. 그러니까, euphoric하다고나 할까? 이 나이에 ‘신난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고, 아마도 ‘잔잔히 들뜨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난 10년간 항상 나는 depression속에서 살았다고 ‘나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지난 한 달여를 보면서 아마도 나는 서서히 그런 길었던 ‘동면’의 기간에서 나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몇 가지의 ‘단순한 계기나, 이유’로 그렇게 어두운 터널에서 나왔다고는 절대 생각 치 않는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고 나의 반려자도 같이 느끼는 듯 하니까, 아마도 맞을 듯 하다. 그 이상의 것은 과연 무얼까?

ash-wednesdayAsh Wednesday, 재의 수요일, 2월 22일은 2012년 부활절 (Easter) 전까지 교회력으로 40일간 계속되는 Lent (사순절)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Passion (수난)을 거치며 부활의 절정에 이르는 기독교신앙의 절정기에 속하는 정말 중요한 40일이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개신교는 어떨지 몰라도, 천주교는 아주 ‘겸손, 절제, 회개’로 이 시기를 보내게 되는데, 이제는 나도 조금 익숙해져서 미리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의 수요일 바로 전날은 Mardi Gras (Fat Tuesday)는 ‘고난의 40일’ 전에 마음껏 ‘세속의 맛’을 느끼자는 축제의 절정인데, 이곳에서는 New Orleans (Louisiana주) 의 Mardi Gras 축제가 유명하다.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는 작년의 Palm Sunday에 썼던 palm tree leaves(종려나무 잎)을 태운 것을 기름이나 물에 섞어서 신부님께서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주신다. 대부분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이마에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재는 아마도 이런 뜻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3장 19절(Genesis 3:19)의 “Remember that thou art dust, and to dust thou shalt return“.. 그러니까 사람은 먼지에서 왔다가 먼지로 돌아 간다는 뜻이 아닐까?

이날로 시작되는 사순절, 40일을 올해는 어떻게 보낼까? 회개와 절제와 고행..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 하려면 복잡해진다. 회개는 물론 고백성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느 해에는 좋아하는 커피를 완전히 끊기도 했고, ‘절대로’ TV를 안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의 요점은 역시 왜 그렇게 하는가를 묵상하며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역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공부’가 중요할 것이다. 또한 나는 레지오 단원이라서 이것 외에도 하려면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얼마나 의지력을 가지고 실행을 하는 가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썩은 사과, 황동규 시인

¶  The Rotten Apple, 이제는 완전히 부풀어 오른 monster기업, 크기가 이제는 MicrosoftGoogle을 합한 것 보다 커진 상태가 되어서 결국은 조금은 defensive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듯, 중국 내 산재해 있는 ‘조립공장’의 열악한 환경을 규탄하는 단체들과 비우호적인 언론의 압력을 의식한 듯하다. 물론 이 문제는 ‘문제의 진실’을 누가 조직적으로 파헤치지 않는 한, 어느 쪽이 옳다고 볼 수가 없는 성질의 복잡한 것이다. 이럴 때는 결국 ‘가진 자’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금고에 넘쳐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억수같이 많은 돈을 경쟁적인 기업을 소송하는 노력만큼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그들의 덩치가 이제는 예전같이 빨리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인다 해도 예전같이 ‘독립적이고 자유스러운’ 입장이 절대로 아니다. 현상유지를 하려면 ‘어떤 술수’라도 써야만 하는 아주 어려운 입장인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앞으로 닥칠 필연적인 문제는 그들의 stock price가 얼마나 올라가느냐가 아니고, 엄청난 technology outsourcing (more than manufacturing) 에 의한 중국기업의 세계적인 일류기업으로 발 돋음인 것이다. 최근의 세계적인 최첨단 기업의 역사를 보면 결과가 어떨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young poet DG Hwang¶  황동규시인  너무도 오랜만에 황동규 시선 “三南에 내리는 눈” 을 꺼내어 읽어보게 되었다. 비록 vinyl cover 덕분에 겉은 멀쩡했지만 속을 펼치니 거의 目不忍見..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거의 30여 년간 빛을 별로 못 보다가 근래에 무슨 골동품 고서처럼 나의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시집에 대한 특별한 사연은 나의 2010년 blog에 이미 밝혀 두었고, 기록을 위해서 재빨리 사진까지 찍어 놓은 이후에는 항상 나의 눈에서 떠나지 않는 곳에 꽂아 놓았다. 지금 보니 2년 전보다 낱장들이 더 ‘노랗게’ 변했다. 질이 낮은 인쇄 종이를 써서 그럴까, 아니면 ‘지독히도 긴 세월’ 덕분일까..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고서’ 같은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래서 부랴부랴 책 ‘전체’ 를 typing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황시인의 그 당시 시 세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시대적으로도 아주 내가 회상하기 좋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그의 시 세계.. 그 시대는 나에게도 너무나 그립고, 잊고 싶지 않은 때가 아니었던가? 황시인도 이제 나이가 70세 중반으로.. 서울고, 동숭동 서울대 출신, 그때의 그 세대 선배들의 대강 몸가짐과 모습들, 그리 상상하기 어렵지 않게 그리운 모습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은 (wikipedia에서) 이 황동규시인이 바로 그 유명한 원로 소설가 황순원씨의 장남이었다는 사실.. 그 동안 왜 내가 그것을 몰랐을까? 너무나 의외롭다. 황시인과 어울리던 ‘친구’ 마종기, 김영태 제씨들.. 나도 익히 듣던 반가운 이름들.. 어떻게 이 세분이 친구가 되었는지, 그것을 찾아보는 것이 다음의 과제다. 현재의 Wikipedia의 황동규 페이지는 사실 너무나 빈약한 듯 보인다. 혹시, 희망에, 내가 더 알아내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더 멋지게 만들고 싶다

겨울밤 노래    황동규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를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午後에는 배가 안
고프고
언덕에서 내려뵈던 깊은 黃昏
캄캄하게 그 黃昏 속을 달려가던 사내여 오라

겨울날 빈 터에 몰려오는 바람소리
그 밑에 엎드려 얼음으로 목을 추기고
얼어붙은 못 가에
등을 들판으로 돌리고 서서
못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바라볼 때
몸과 함께 울던 우리의 옷을 보라

걷잡을 수 없이 떨리던 손
그 떨리는 손에는 네 목을 잡고
머리칼 날리며 빙판에 서서
서로 마주 보며 네 목을 잡고
내 들려주리
쓰러지지 않았던 쓰러지지 않았던 사내의
웃음을

어둡다 말하면 대답소리 들리는
쇳날을 만지면 살이 떨어지는
그런 떨리는 노래는 이제 우리에게
서로 붙잡은 우리의 어지러움
어지러움 속으로 길은 헐벗고 달려가고
그 길 끝에 열려 있는 술집은 이제 우리에게

친구여 너는 술집의 문을
닫아도 좋다
문을 닫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午後에는
배가 안 고프고
그때 땀 흘리던 우리의 배를 記憶하라
열린 채 땀 흘리던 우리의 배를 記憶하라

하면 아침이 눈길 위로 올 때까지
우리 서로 얼음 냄새를 풍기며
때로 주먹으로 壁을 두드리고
기름냄새를 맡으며
줄어드는 심지를 바라보며
단추 떨어진 우리 젊은 날의
어둡다 말하며 벗어던진 옷을 말리자.

Same-sex marriage, disgusting..

Same-sex marriage? 이것도 말이 되나? 이런 것들은 ‘오래 살아서 봐야만 하는 괴로운’, 그런 case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oxymoronic한 것이 아닐까? 어떻게 same-sex가 결합과 결혼이 되냐? 이것은 간단한 ‘변태, pervert‘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할 듯하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일 쉽게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는 것, 그들의 ‘성행위’ 를 그려보면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식적이고 자연적인 이유로 인류 역사이래 그들은 그 오랜 세월 그늘 속에서 숨어 살아왔을 것이다. 이것은 ‘종교나 도덕률’을 떠나서 생물학적, 인류학적으로 생각을 한 것으로 그들은 한마디로 ‘정상적’인 인간들이 아닌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그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우겨도 그것을 정상적이라도 우길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 가는 별도의 문제지만, 출발점은 한가지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한마디로 지독한 변태인 것이고, 인간의 퇴보된 형태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엉뚱하게 ‘민권(civil right)’ 문제로 비약을 시키고, 차별을 받는다고 우기는 단계를 이제 훨씬 넘어서서 그들은 가정(엄마+엄마, 아빠+아빠?)을 가지겠다고 우긴다. 이런 것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나는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들을 왕따 시키거나 공공연히 차별하는 것도 절대 반대지만, 그들을 main stream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인데, 이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타락(이것은 사실 퇴보다)을 하게 되었는지.. 이렇게 모든 것을 ‘상식을 떠난 궤변‘으로 법을 만들라 치면,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아마도, ‘합법적, 근친결혼’이 다음 단계일 것이다. 그 다음은? 내가 homophobia일지도 모르지만, 무섭다.. 어찌 상상을 하랴? 역시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