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루이지애나 로 부터 북상한 tropical storm ‘Lee’가 많은 비를 몰고 결국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알맞은 비 였으나, 덤으로 토네이도까지 주면서 지나갔다. 비는 예상보다는 적게 왔지만, 몇 주의 가뭄에 비하면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근처에 아주 작은 규모의 토네이도가 집 몇 채에 나무를 쓰러뜨렸지만, 이것은 다른 곳의 ‘대형 사고’에 비하면 아주 경미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왔다. 올 것이 온 것이다. 기온이 급강하 하며 아주 음산한 비까지 뿌리는 하루였다. 이것이 바로 가을비의 전형이 아닐까? 몇 달 만에 다 잊어버렸던 ‘써늘함’을 처음으로 느낀 날이었다. 긴 팔, 긴 바지 옷들을 갑자기 찾아서 허둥대던 싸늘한 아침, 이제부터는 조금 ‘가을비 우산 속‘을 기대해도 좋은 계절이 된 것인지.. 기대가 된다.
미국 대통령, ‘바락 오바마‘..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 조금은 불쌍하다. 재수가 지독히도 없었나. 기대가 너무나도 컸었을 까? 제2의 지미 카터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8년간의 ‘머저리’ 부시(stupid Bush) 밑에서 거덜이 난 미국의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 후의 거의 이상적인 대통령 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희망과 현실이 어쩌면 이렇게 처참할 정도로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결국은 오바마는 지금 미국이 필요로 하는 인물의 자격에 미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가 제일 큰 ‘실수’를 한 것이 거의 광신적으로 그의 정책이 실패하기를 원했던 반대당을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나 ‘착하고, 타협적’으로 그들을 대한 것은 지금 보면 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들과 똑 같은 수법으로 ‘무자비하게’ 그 광신도들을 눌렀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실수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고, 시간적으로도 늦었다. 이제, 깡패 같은 공화당이 재집권을 하게 되면 그와 대다수 국민들이 원했던 ‘상식적인 정책’은 물 건너 갈 것이 너무나 뻔하다. 참, 암담한 미래가 보인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하루 하루 가까이 다가오는 것일까?
돌아오는 일요일은 9월 11일이다. 뉴스에서 그것을 10년 동안 끊임없이 하지만 조금씩 낮아지는 정도로 취급을 했지만 역시 10이라는 숫자에는 약한 모양이다. 10주년이 된 나인-원-원.. 어찌 구급,비상 전화번호, 911과 같은 날이었을까? 이제는 10년 정도는 절대로 긴 세월이 아니다. 어제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10년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함도 느낀다. 나도 변했고, 늙었고, 주위도 꽤 변해 있다. 특히 정치, 사회적으로 미국이 겪었고, 변한 것을 보면 조금은 소름조차 끼칠 정도다. 그것은 미국만이 아닐 것이다. 직접, 간접적으로 미친 여파는 후세에 역사가들이 말을 해 줄 것이지만, 아마추어 역사학도가 되어서 생각을 해도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극단주의자들의 일시적 승리’,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는 웬만한 ‘끔찍한’ 것에도 그리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극단주의는 사회, 문화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유행처럼 번졌다. 그런 것들이 언제까지 가게 될까? ‘양순하고, 착한’ 다수들은 도대체 어디로들 숨었을까?
중학교 (서울 중앙중학교) 때 나온 미국영화, Come September의 주제곡을 수십 년 만에 들었다. 거의 분명히 타향살이를 시작하면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의 영화니까 분명히 ‘학생입장불가’로 볼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고, 영화자체도 그 나이에 보기에는 너무나 ‘지겨운’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주연배우는 Rock Hudson(록 허드슨)과 이태리의 Gina Lollobrigida(지나 롤로브리지다) 등의 그 당시 최고 정상급 국제 스타들이었다. 그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의 주제곡 때문이다. 영화 내용은 모르지만 그 주제곡은 그야말로 ‘경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정말 경쾌한 것이었다. 그것이 왜 9월과 연관이 있는지, 그러니까 그 영화의 제목이 왜 ‘9월이 오면‘ 이었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9월이 오면 생각나는 ‘음악’ 중의 하나라는 , 그것이 더 중요하니까.
Come September: 9월이 오면, 1961
어제, 9월 1일은 3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나의 인생 반려자로 살아온 아내 연숙의 생일이었다. 원래 내가 우리 둘의 아침식사를 준비한 것이 이제 몇 년째가 되어서, 이것으로 생일의 “깜짝 서비스” 를 할 수도 없고, $$$도 그렇고, 너무나 흔한 ‘생일 축하 메시지’ 를 만들기도 낯 가렵고.. 그래서 요새는 생일이 맞거나 축하해주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은 부담이 되어간다. 그저 한마디로 XX 년 전에 ‘인간으로 세상에 나온 신비’ 를 서로가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게 요란하게 노래를 부르며, 먹으며, 선물포장을 뜯어야만 할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올해는 작은 딸 나라니 가 ‘먹는 생일’을 마련해 주었다. Cumberland Mall에 있는 커다란 Italian restaurant, Maggiano’s (Little Italy) 에서 오랜만에 ‘밀가루 음식’ 과 bottle of wine으로 포식을 시켜주었다. 이태리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음식의 크기 (flat dish가 아니고 bowl)에 먹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우리는 원래 저녁식사를 거의 안 하고 살아서 아마도 위장이 꽤 놀랐을 것이다. 거기다가 음식값에 carry-out 메뉴가 덤으로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까지 하면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봉’에 시달리는 작은 딸의 저금 통장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이래서, 우리도 이제 오래~~ 살았구나.. 실감을 했다.
Try to Remember – The Lettermen
9월과 12월 사이의 감정을 보여주는 멋진 시
오래된 추억의 9월은 어떤 것들일까? 그 중에서 추석이 으뜸일까? 타향살이에서 제일 그리운 것이 ‘추석의 느낌’ 이다. 이것은 타향에서는 ‘절대적으로 느끼기 불가능’ 한 것 중에 하나다. 그러니까 추억이던가. 실제로 그 추억이 현실적인 추석보다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것들이 ‘느리기만 하던’ 시절.. 시간도 느리고, 버스도 느리고, 비행기, 기차도 느리고, 전화도 느리던 그 시절.. 그런 명절은 정말 천천히 즐기는 느린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설날과 달리 날씨가 알맞게 따뜻해서 얼마든지 밖에서 ‘딱총과 칼’로 무장을 해서 전쟁놀이로 뛰어 놀고, 뛰어 들어와서 송편, 고기 등 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골목으로 뛰어나가던 그런 추석.. 그날 밤에 재수가 좋으면 어둡기만 하던 동네를 완전히 대낮으로 바꾸어 놓았던 보름달 아래서 골목 이웃들이 몰려나와 수다를 떨던 아저씨, 아줌마들.. 세월을 따라 모든 것들이 빨리 움직이면서 그런 순진함 즐거움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대학 다닐 때, 갈비씨(skinny people, 이런 말을 요새도 쓰나?) 인 신세로 주눅이 들었던 시절, 9월은 희망의 계절이었다. 모든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짧은 팔에서 조금은 가려주는 긴 팔의 옷으로 천천히 바뀌던 첫 달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심각했다. 아마도 뚱뚱한 것이 마른 것보다 ‘가치가 떨어진’ 요새 사람들은 절대로 상상을 못할 듯 하다. 분명히 그 당시는 ‘살이 찐 것’이 마른 것 보다 더 멋있게 보였다. 아마도 마른 사람의 대부분이 가난했던 사람들이라 그랬나?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건가? 가난하게 보이게 노력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족이 생기고, 대부분 가장이 겪게 되는 세파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9월과 가을을 거의 잊고 살게 되었고, 그에 따르는 추억도 메말라 가게 되었다.그러다가 50대에 접어 들면서 우연히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詩)에 눈을 뜨게 되었다. 거의 완전히 메말랐던 감정들이 이 신기한 것을 통해서 조금씩 스며 나옴을 느끼게 되어서, 나이와 감정, 감상이 꼭 반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9월은 그런 찐한 감정의 보물창고인 가을과 겨울의 입구와 같은 때인 것을 매년 조금씩 실감해 가게 되었다. 올해는 과연 어떻게 그런 감정의 보고(寶庫)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가을 그림자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 나서는
황혼은
물빠진 감잎에 근심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서는 여윈 추억들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김재진
9월의 노래
누가 처음 발표를 했는지는 몰라도 9월의 classic은 바로 곡이 아닐까? 패티킴의 version이 바로 그것인데 아깝게도 그것은 이마 유튜브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에 버금가는 ‘연숙’을 닮았던 “혜은이”의 것이 건재하니까..라고 했지만 다시 찾게 되었다. 멋진 패티김의 pose와 함께… 감사합니다~~
Labor Day 그렇게 더웠던, 하지만 그런대로 잘 적응하며 더위가 친구처럼 완전히 익숙해질 무렵, 갑자기 9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9월 첫 월요일은 전통적으로 동네의 수영장들이 문을 닫는, ‘비공식적’ 여름의 마지막 날, Labor Day(미국 노동절)이다. 요새같이 실업률이 높아서야, 노동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세월이 되었다. 대부분의 육체적 노동을 하던 멕시코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고, 그 다음의 ‘소수 인종’들이 조금은 경쟁이 완화되었지만 이번에는 일자리가 없는 것이다. 불필요한 전쟁을 몇 번씩 치르며 돈을 그렇게 찍어냈으니, 아무리 천하장사 미국 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몇 년 동안은 완전히 남의 돈으로 집과 빚을 얻어서 흥청망청 썼으니.. 과연 그 ‘없는 돈’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이건 경제학의 ‘경’자도 모르는 중학생이 더 잘 알 것이다.
불경기는 분명히 걱정할 만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중산층의 폭’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돈을 가진 인간과 ‘절대로 가난한’ 인간들의 폭만 그 동안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3세계의 문제들인데.. 이것이 현재의 상태로 나가면 미국의 문제가 될 전망이다. 깡패집단에 ‘납치가 된’ 공화당은 절대로 ‘대기업과 부자들을 보호’ 해야 하는 입장이고, ‘불쌍한’ 민주당은 절대적으로 없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미국 정치는 완전한 ‘야쿠자 난투’ 형국이 되어가고 있는데.. ‘정치를 초월한, 윈스턴 처칠’ 정도의 지도자가 발견되지 않는 한, 지난 반세기 동안 잘 나가던 ‘무적의 미국’은 동생나라 일본을 따라서 ‘천천히’ 쇠퇴의 첫 단계로 들어가지 않을까..(아니,이미 들어섰을 것일지도) 나중에 쾌재는 아무래도 ‘짱 꼴라’ 들이 부를 것 같아 정말로 우울해 진다.
Brian Hyland – Sealed with a kiss 아련한 추억의 찬란했던 여름을 보내고 다가오는 계절을
아침의 신비: 비록 당분간도 덥겠지만 하루하루가 달라질 것이다. 벌써 아침 7시 쯤에도 어둠이 가득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해가 짧아진 것이다. 10월의 Daylight Saving Time(DST: aka, summer time)해제 쯤까지는 해 뜨는 시간이 무서운 속도로 늦어질 것이다. 이것이 가을의 맛이다. 어두운 아침..에 일어나는 맛.. 나는 ‘절대적’으로 morning person이라서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을 못 느끼면 살 맛도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연숙은 나와 절대로 궁합이 맞지를 않는다. 그녀는 절대적인 night person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꾸어 보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듯 하지만 아마도 힘들 듯 하다.
나도 한 때, 대부분은 학교 다닐 때, 정말 밤늦게 자는 올빼미 스타일이었고, 한때는 정말 그것을 즐겼다. 그러던 것이 서서히 아침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른 아침 공기와 분위기를 느끼고 즐기게 되었다. 특히 이것은 직장생활에서 받은 영향도 있는데, 이른 아침 아련히 진동하는 잠을 깨는 커피향기만 기억을 해도 아침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직장분위기가 다 끝난 지금에도 그것이 완전히 몸에 배어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침에 하는 1시간의 ‘일’은 다른 때에 하는 것과는 ‘양과 질’로 절대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가을, 겨울과 같이 밝지 않은 아침의 시간은 정말 보석과도 같이 값지고, 심지어 ‘신비스러운’ 시간인 것이다. 그런 어둡고 긴 아침의 계절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으니 어찌 이것 하나만으로도 가을이 기다려지지 않겠는가?
느긋함과 늙음, 젊었던 시절 항상 그렇게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을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회상을 하며, 생각하며, 천천히 관용적으로, 이해를 하는.. 그런 ‘신사중의 신사 같은 나이 듦’ 등을 그리곤 했다. 싫어하는 사람보다는 그런대로 싫지만 이해하게 되는 그런 너그러움.. 이 나이가 들었다는 ‘보람’이 아닐까..하는 조금은 희망적인 희망을 해 본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느긋함 보다는 점점 굳어져가는 ‘나만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느끼고 적지 않게 실망을 하곤 한다.
왜 그럴까? 오히려 젊었을 때에 더 ‘관용과 용서’가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나만의 ‘사상과 주관’이 나이에 비례해서 뚜렷해져서 그런지 모른다. 그러니까, 더 타협을 하기가 힘든 것이다. 나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해서 그럴지도.. 이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가? 이런 것에서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노력을 해야 하는가? 개개인 마다 다를 것이고, 정답도 없을 것이다. 이래서 인생은 재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Cheney와 Powell, 정말로 극과 극의 인상을 주는 이름들이다. 그러니까 전자는 Dick Cheney, 부시, 미국을 말아먹은 인간의 꼬붕 격 이었고, Colin Powell은 같은 꼬붕 자리에 있었지만 정 반대로 그 나름대로 의 피해를 가급적 줄이려고 노력을 하려고 한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부시를 전쟁으로 몰아넣게 한 장본인들 중의 오야붕 격이 바로 Cheney인데, 이 인물은 알면 알수록 ‘무섭게’ 느껴지는 ‘전쟁 광’ 에 가깝다. 마키아벨리를 뺨치는 ‘수단과 방법에 문제 없는’ 그런 전근대적 과격주의 신봉자이기도 하다. 공공연히 고문 사용을 지지하는 만용도 가졌고,심지어 ‘전범’으로 국제재판소에 기소되는 것을 우려할 정도다.
부시의 ‘비극’은 바로 그 같은 인물을 직속 ‘상관’으로 기용을 했다는 실수였다. 같은 체제 내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직책을 걸고 제동을 걸려던 사람이 Colin Powell이다. 그 두 사람이 지금 완전히 전투태세를 갖추고 제 2의 대결을 할 모양이다. ‘철면피 같은 더러운 늙은 여우’ 같은 Cheney, 그런대로 명분과 이름을 살리려고 자서전을 발행할 모양인데, 완전히 자기만의 역사를 다시 쓴 모양인데, 그것이 그렇게 쉬울까? 지금 미국은 이런 ‘과격파’가 아니면 행세를 못할 지경에 이르고 있고, 이것은 정말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다.
8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맞는다. 다른 쪽에서는 허리케인 아이린 으로 떠들썩 하지만 이곳은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에 가을기분의 따가운 햇볕이 작열을 하는 한가한 느낌의 일요일.. 우리 집의 ‘숙명의 적’ pet duo 토우비(Tobey, dog)와 이지(Izzie, 고양이) 를 보아도 한가한 느낌을 받는 것이, 둘 다 완전히, 절대적으로 ‘평화롭게’ 낮잠에 떨어진 모습이 정말로 한가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한가한 순간들도 ‘좋아하는 시간’에 속한다.
오늘 일요일의 미국본당 미사에서는 올해의 대림절 (교회력 신년의 시작, 올해는 11월 27일)부터 부분적으로 바뀌게 되는 영어 미사의식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사의식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미사의식에서 하는 문구(text) 들이 바뀌는 것이다. 현재 영어 미사는 1975년부터 사용된 것이라고 하니까, 상당한 기간 신자들이 쓰던 것이라 이것이 조금이라도 바뀌게 되면 아무래도 처음에는 불편할 것이다. 문제는 “왜” 바꾸어야 하는가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바티칸 교황청에서 지시를 한 것이 아니고, 그 동안 쓰던 영어미사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문구를 원래 ‘라틴어 미사의 정신’에 더 가깝게 번역을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영어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고, 그것을 늦었지만 바꾼 것이다. 나의 의문은 그러면 다른 언어, 예를 들면 한국어 미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이 영어로부터 번역을 한 것이었다면 그쪽도 바꾸어야 할 것인데,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도 한국말 미사는 이미 바뀌었다고 들은 것 같다. 현재 이곳의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이미 바뀐 것을 쓰고 있을 듯한데, 현재 우리가 주일미사를 그곳으로 가지를 않아서 100% 확실치는 않다.
라틴어 미사는 1970년에(그 훨씬 전에 있었던 바티칸 2차 공의회(the Second Vatican Council, 1963)의 정신에 의해서) 바뀐 이후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놀라운 사실은, 1970년 이전에는 세계적으로 모두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어떻게 그 어려운 라틴어로 미사를 보았는지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그때는 라틴어를 쓴 것이다. 영어와 라틴어는 그 근원이나 비슷하지만 한국과 같이 ‘전혀 다른 계통의 언어권’ 에서는 어떠했을까? 하지만 역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현지 언어’가 원래 라틴어의 ‘정신’을 충실하게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참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천천히, 재미있게’ 하려는 미국 천주교인들, 이것도 ‘응석을 부리면서’ 9월부터 조금씩 ‘연습’을 하면서 목표인 대림절까지 갈 모양이다. 9월 초부터 일주일에 ‘한가지 씩’ 을 ‘연습’해 보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크게 바뀐 것도 아니던데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참 본 받을 만하다.
Changes in the People’s Parts
PART OF MASS
OLD TEXT
NEW TEXT
Greeting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Penitential Act,Form A (Confiteor)
I confess to almighty God,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sinnedthrough my own fault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and I ask blessed Mary, ever 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I confess to almighty Godand to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hat I have greatly sinned
in my thoughts and in my words, in what I have done and in what I have failed to do, through my fault, through my fault, through my most grievous fault;therefore I ask blessed Mary ever-Virgin,
all the Angels and Saints, and you, my brothers and sisters, to pray for me to the Lord our God.
Penitential Act,Form B
Priest: Lord, we have sinned against you: Lord, have mercy. People: Lord, have mercy.
Priest: Lord, show us your mercy and love. People: And grant us your salvation.
Priest: Have mercy on us, O Lord. People: For we have sinned against you.
Priest: Show us, O Lord, your mercy.
People: And grant us your salvation.
Gloria
Glory to God in the highest,and peace to his people on earth.
Lord God, heavenly King, almighty God and Father,we worship you, we give you thanks, we praise you for your glory.
Lord Jesus Christ, only Son of the Father, Lord God,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you are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receive our prayer.
For 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Jesus Christ, with the Holy Spirit, in the glory of God the Father. Amen.
Glory to God in the highest,and on earth peace to people of good will. We praise you, we bless you, we adore you, we glorify you, we give you thanks for your great glory, Lord God, heavenly King, O God, almighty Father.
Lord Jesus Christ, Only Begotten Son, Lord God, Lamb of God, Son of the Father,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receive our prayer;
you are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ave mercy on us.
For 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Jesus Christ, with the Holy Spirit, in the glory of God the Father. Amen.
At the Gospel
Deacon (or Priest): A reading from the holy Gospel according to N.People: Glory to you, Lord.
Deacon (or Priest): A reading from the holy Gospel according to N.People: Glory to you, O Lord.
Nicene Creed
We believe in one God,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ne in Being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was born of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ied, and was burie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in fulfillment of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ith the Father and the Son he is worshiped and glorified. He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We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I believe in one God,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I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bor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consubstantial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and by the Holy Spirit was incarnate of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eath and was buried, and rose again on the third day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adored and glorified, who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I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I confess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and I look forward to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I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He was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nd born of the Virgin Mary. 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to the dea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re he wi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life everlasting. Amen.
Invitation to Prayer
May the Lord accept the sacrifice at your hands
for the praise and glory of his name, for our good,
and the good of all his Church.
May the Lord accept the sacrificeat your hands
for the praise and glory of his name,
for our good and the good of all his holy Church.
Preface Dialogue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Lift up your hearts.
People: We lift them up to the Lord.
Priest: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People: It is right to give himthanks and praise.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Priest: Lift up your hearts.
People: We lift them up to the Lord.
Priest: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People: It is right and just.
Sanctus
Holy, holy, holy Lord, God of power and might. Heaven and earth are full of your glory.
Hosanna in the highest.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Holy, Holy, Holy Lord God of hosts.
Heaven and earth are full of your glory.
Hosanna in the highest.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Mystery of Faith(formerly the Memorial Acclamation)
Priest: Let us proclaimthe mystery of faith:
People: A – Christ has died, Christ is risen, Christ will come again.
or B – Dying you destroyed our death,rising you restored our life.Lord Jesus, come in glory.
or C – When w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we proclaim your death, Lord Jesus, until you come in glory.
or D – Lord, by your cross and resurrection, you have set us free. You are the Savior of the World.
Priest: The mystery of faith.
People: A – We proclaim your death,O Lord,and profess your Resurrectionuntil you come again.
or B – When w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we proclaim your death, O Lord, until you come again.
or C – Save us, Savior of the world,for by your Cross and Resurrection, you have set us free.
Sign of Peace
Priest: The peace of the Lordbe with you always.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peace of the Lordbe with you always.
People: And with your spirit.
Invitation to Communion
Priest: This is the Lamb of Godwho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ppy are those who are called to his supper.
All: Lord, I am not worthy to receive you, but only say the word and I shall be healed.
Priest: Behold the Lamb of God,behold him who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Blessed are those called to the supper of the Lamb.
All: Lord, I am not worthy that you should enter under my roof, but only say the word and my soul shall be healed.
Concluding Rites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also with you.
Priest: The Lord be with you.
People: And with your spirit.
허리케인 아이린, 일주일도 넘게 비 구경을 못하던 차에 monster hurricane Irene이 미 동부 해안을 따라 올라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이쪽으로 와서 많은 비를 뿌리려나 희망적인 기대를 해 보았지만 예년과 비슷하게 이곳의 근처는 완전히 비켜 지나갈 것으로 예보가 되었다. 하기야 이것이 정말로 지나가게 되면 비만 뿌리겠는가.. 강풍으로 피해도 엄청날 수도 있다. 그것보다는 그저 ‘더운 쪽’이 더 나을 것이다.
문제는 이 허리케인이 Interstate Highway I-95를 따라서 워싱턴, 뉴욕 쪽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이 I-95 고속도로는 완전히 미국 동부의 대도시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지나가니까, 막대한 피해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만약, 2005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 가 루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즈(New Orleans, Louisiana) 를 덮치듯이 뉴욕 시를 덮치게 되면 정말 예측불허의 피해가 날 수도 있다. 일요일 쯤이면 그 결과를 알게 될 것인데.. 과연 어찌될 것인가..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하지만, 사실은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비약적인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지독한 불경기에 이런 자연재해로 피해까지 보게 되면, 미국경제 (따라서 세계경제)는 당분간 같은 상태의 불경기로 이어질 듯하고, 이것은 내년의 대선으로 이어져서 ‘희망의 등대’였던 오바마 도 재선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지고, 전대미문의 ‘깡패집단’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는 공화당은 승리의 쾌재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짱 꼴라” 집단이 ‘We’re Number One!” 이라고 선언을 할 날이 곧 오게 되지 않을까? 정말 살 맛이 없는 날들이 오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최악이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뉴스를 잠깐 보니.. Steve Jobs가 물러난다고.. 일선에선 물러나지만 ‘회장’자리를 지킨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당분간 필요한 그 회사의 사업상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 회사의 주식을 가진 인간들이 그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그는 나와 같은 computer engineer로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직업에 대한 정열,애착 같은 것을 많이 공감하는 편이다.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외골수 적인 인생을 어찌 이해를 못하겠는가? 그것이 $$$ 으로 이어지면 더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실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만드는 그 자체’ 에 만족을 하면 되니까. 나는 그와 거기까지만 공감을 하며, 그 나머지 그의 제품에 대한 ‘접근방식’은100% 불만이고, 그와 정반대인 편에 있다.
지금까지 그가 한 방식, 결과를 보면 그는 완전히 ‘자기도취’에서 만족하고 살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한 회사에 막대한 $$$를 벌게 해주고, 그에 따라 주주들도 같이 덕을 본 것 뿐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케 한 것은 그의 제품에 ‘팔린’ 대부분 ‘기술적으로 문제가 많은 돈 많은 인간들’에게 있다. 여기서 기술적으로 덜 떨어진 인간들은 주로 ‘언론인, 연예인, 예술가’ 들이 많고 그들은 완전히 ‘신앙적’으로 믿으며 제품 선전을 해 주었다. 완전히 삼박자가 맞아 떨어진 ‘완벽한 무용’ 이었다.
나는 ‘골동품’ 애플 시절부터 그것들을 싫어했다. 완전 아마츄어 급의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의 연구한 결과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완전히 ‘예술품’ 급의 판매 가격으로 매킨토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니 회사가 한때 거의 도산지경에 까지 가지 않았던가? IBM-PC의 성공, 보급으로 5%정도의 보급율로 회사를 살리려니 제품의 가격은 절대로 항상 premium급이었다. 하기야 언론인, 예술가중에는 $$$이 많았던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PC clone이 나오면서 ‘살려고’ 한 짓은 절대로 Apple clone을 막아야 한다는 ‘철칙’이었다. 그때부터 100% ‘닫힌 시스템’이 고수되었다. 이것은 사업상으로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사실은 Steve Jobs의 기본 철학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만든 제품은 절대로 열어볼 수 없게 만든다‘ 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완전히 애플(매킨토시)로 부터 등을 돌렸다. Unix를 완전히 자기 것처럼 ‘변종’을 시켜서 쓰면서 ‘절대로’ 그것을 ‘열어’놓지 않았다. 이것도 Steve Jobs의 철학이었을 것이다.
나는 직장에서 가끔 매킨토시를 ‘써야만 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건 ‘컴퓨터 엔지니어’의 머리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아하! 바로 이것이 ‘stupid people’을 위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stupid한 사람들이 절대로 많은 세상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그들의 business에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다른 쪽인 Windows쪽은 최소한 open된 것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이곳도 나중에는 많이 ‘이기적’으로 변했지만 매킨토시에는 비교도 못하게 ‘열린’ 것이다. 최소한 hardware를 내 마음대로 고르고 만들 수가 있으니까..
문제는, 이런 ‘닫히고, 고가를 자랑하는’ 시스템의 방식이 그들이 처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smart phone (iPhone)으로 연결되어 stupid mass가 완전히 그것에 ‘빠졌다는’ 현실이다. 그것은 거의 monopoly나 다름이 없고, brainwash에 가깝다. 분명히 바보 같은 ‘언론인, 예술인’들이 앞장을 섰을 것이고, 거의 ‘공짜 선전’을 해 주었을 것이다. 그의 salesmanship은 절대로 인정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방식은 절대로 많은 open system people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거의 반대편에 있는 Open System쪽은 어떠한가.. 이래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모든 것을 나누어서 공익을 취하자는 거의 ‘사회주의적’인 방식이 기술 쪽에 들어왔을 때, 그것의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 나 같은 ‘돈 없는’ 사람을 ‘살려준’ 것은 Linux를 선두로 대부분의 Open System 운동이었다.그와 정반대의 쪽이 있던 것이 바로 Steve Jobs 같은 selfish, egomaniac한 인간 부류들이고, 그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버티고 있는 것은 ‘머리를 잃어버린’ Microsoft쪽이다.
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좋은 꿈’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엉터리’ 같은 주제의 꿈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오래 된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classic한 것들도 몇 가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계속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 ‘좋은 꿈’ 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정말 ‘이상한’ 것도 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좋은 꿈은 대부분 깨고 나면 너무나 깬 것이 아쉬워서 섭섭하고, 나쁜 꿈은 반대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반갑다. 이렇게 꿈도 참 공평한 것이다.
한창 자랄 적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어서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의 키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떨어지는 그 자체는 대부분 ‘날라서 사뿐하게’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생생한 상상할 수 없이 색깔이 ‘진했던’ 그런 ‘초원과 하늘’ 을 본 것인데 어찌나 그 색깔들이 그렇게 ‘찐~’ 하던지.. 지금도 머리에 남아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공상과학 만화, 특히 어릴 적에 완전히 심취했던 ‘라이파이, ‘철인 28호‘, 왕현의 ‘저 별을 쏘라‘ 등의 만화를 볼 당시의 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잠자리 채’ 로 ‘잠자리 비행기’를 잡던 꿈이었다. 그러니까 ‘방충망’으로 ‘헬리콥터’를 잡아 채는 꿈이었다. 그 당시 제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잠자리 비행기’ 였는데, 그것을 잠자리채로 결국은 하나를 ‘잡았다’. 잠자리채 속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이었고 손으로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처음, 이런 멋진 꿈에서 잠을 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 ‘좋은 꿈’ 중에 하나였다.
청춘의 절정기에는 ‘성장, 남성 male’ 호르몬(hormone)의 영향으로 많이 ‘이성을 그리는 환상’에 가까운 꿈을 많이 꾸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로틱 fantasy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남자형제가 없던 나는 이런 것을 그저 속으로만 넣어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하면 ‘건강’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남자 친구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끔 내가 ‘변태’가 아닐까 하는’틀린’ 걱정도 했기 때문이다.
10대에서 20대로 인생의 초기에 해당하던 그 시기다. 그때의 ‘최고’의 꿈은 역시 ‘지적이고, 멋진 여자’가 나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준 그런 류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기쁨의 ‘순간’에 깨곤 하였다. 좋은 꿈은 항상 그렇게 깨지곤 했다. 이런 꿈은 결혼 훨씬 후에도 가끔 꾸었고, 결혼 전과 달리 깨고 나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서 전과같이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 자체는 정말 신선하고, 가벼운 흥분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20대에 나를 괴롭힌 꿈은 다른 것이 아닌 ‘가위 눌림‘ 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면서 이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형 뻘이 되는 일본사람 (히다카 켄조 상)이 듣더니 자기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역시 ‘고민’은 나누어야 가벼워 지는가.. 이 꿈은 무엇인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몸 전체가 ‘천천히, 완전히’ 굳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일본인 켄조 형은 이럴 때, 절대적으로 남에게 알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이런 꿈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의학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몸이 허약할 때 생긴다고 했지만, 나는 전적으로 다 믿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꿈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The Exorcist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일주일 동안 밤에 불을 켠 채로 잔 괴로운 경험이 있어서 혹시 그것도 한 몫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악몽’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 괴롭힌 것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벗겨지는,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대머리’가 되는 꿈이었다. 물론 50대에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빠지는 머리카락에 겉으로는 나타내고 싶지 않지만 암암리에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대머리가 된 꿈은 꿈 속에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깨고 나면 꼭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되지 않고, 점차 ‘서서히’ 빠진다는 사실만은 이런 꿈에서 깨어나면 나를 조금 위로하곤 하였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이것이 아니다. 이 악몽은 이제 나의 ‘친구’가 된 정도로 역사와 ‘실감’을 자랑한다. 이것은 학교에 대한 것, 그것도 ‘공부, 성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성적’이 얼마나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기적으로 겪는 악몽인데, 악몽의 특징인 “깨어 났을 때의 안도감” 은 이것이 최고다. 1980년 부터 PBS TV에서 재방영이 되었던 The Paper Chase..란 TV시리즈 (드라마)가 있었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 초에 소설로 나왔고, 곧 영화화가 되고, 1978년부터 CBS TV가 드라마화 한 것인데 한국에서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고전’이 되었고, 특히 1980년, 신혼 초에 콜럼버스(오하이오 주)의 학교근처 1 bedroom Riverview Apartment에서 연숙과 같이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 누워서 빠짐없이 PBS TV로 이것을 보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이 드라마 첫 회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었던 ‘진짜’ 경험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Hart)이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에 ‘간신히’ 들어가서 그 첫 강의에서 겪는 ‘고통’은 가히 dramatic한 것이다. 호랑이 같은, 킹스필드 교수(Prof. Kingsfield)가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신입생(하트, Hart)을 심리적으로 거의 ‘죽이는’ 것이다. 급기야 주인공의 꿈에서 교수가 나타나 ‘진짜로 무덤 속으로 넣는’ 것 까지 경험하는 것인데, 그 정도면 시험과 그에 따른 성적(표)으로 인한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극치의 수준이 아닐까? 문제는 내가 그와 거의 비슷한 꿈을 ‘아직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지난 30년 이상 꾼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정말 괴로웠는데, 지금은 사실 ‘완전히’ 익숙해져서 견딜 만 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깰 당시의 ‘안도감과 기쁨’ 때문에 기다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지금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렇게 기쁘고, 무슨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쁨까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꿈일 것이라, 체념하면서 오래 살았는데 우연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서울고, 서강대 출신 최동환 씨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꾼다고 들은 후부터 조금은 안심까지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위에 말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특별한 교수와의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과목을 듣는데 전혀 공부와 시험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되었을 때의 그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그런 ‘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괴로운 잠재의식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나는 모른다.
겉으로만 돌면서 나를 피해가던 종교, 신앙에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초자연적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꿈도 포함이 되었다. 인생, 역사, 자연, 거기에다 꿈 등이 전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을 사실 기다리며 즐긴다. 또 하나, 덤으로 나와 같이 나란히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역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립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꿈에서 기다린다. 그 중에는 나를 거의 잊고 사는 나의 사랑하는 누님과,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나는 오늘, 내일 의 꿈속에서 다시 기다린다.
2011년 마드리드,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 가 ‘무사히’ 막을 내렸다. 전야 미사 중의 날씨가 나빠져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사고는 없었던 모양이다. 오늘 CatholicTV.com을 보니 드디어 어제 일요일의 “폐막 미사”의 비디오가 올라와 있었다. 이 행사를 며칠 유심히 보면서 나는 거의 내가 ‘가톨릭 청년’ 이 된 기분이 되어서 참 기분이 좋았다. 폐막미사의 광경은 참 ‘장엄’하면서도 100만의 젊음의 활기가 완전히 ‘공항’을 휩싸는 그런 것이었는데..이것은 실제로 그 현장에 있지 않으면 ‘절대로’ 전부를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난 6월 이곳 아틀란타에서 열린 연례 대교구 주최의 ‘성체대회’에 참가하면서 이런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수만 명의 형제,자매 신자들과 같이 함께 모여서 미사를 본다는 사실은 글로 그 느낌을 다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한 비행장 전체가 ‘완전히’ humanity로 채워진 모습은 비록 작은 화면으로 보더라도 실감이 되었다. 그 광활한 평지를 완전히 메웠던 백만 명의 ‘멋진’ 젊은이들.. 잘못 보면 무슨 rock concert에 온 젊은이들 같이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히 그들은 다르다. 1960년대 말, 미국 Woodstock Rock Concert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 광경이 겹치는 것을 느낀다. 완전히 drug, sex & rock music이 주제가 되었던 그 시절, 그 세대.. 사실은 나도 그것들을 보면서, ‘인간의 완전한 자유에 열광’을 하던 오래 전의 추억이 있다. 하지만 ‘다른 모습의 완전한 자유를 보여주는’ 이런 전혀 다른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이래서 항상 ‘희망’이란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멋진’ 젊은이들이 얻었던 며칠간의 체험은 그들, 그들 주변, 그가 속한 사회, 나라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의심하지 않는다. 작은 호기심 하나는, 어떻게 100만 여명에게 성체를 분배할까..하는 별로 의미 없는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전산화: 이것도 잘못 들으면 oxymoronic한 구절이 아닐까. 절대적인 성모마리아께 대한 순명의 정신으로 무장한 이 거룩한 평신도 단체는 언제까지 ‘낭비적인 시간’을 허용할 것인가? 로마군단의 효율적인 체제를 본 받으려면 현재에 가능한 온갖 ‘도구’를 다 써야 할 것이 아닐까? 여기서 ‘도구’란 물론 digital tool을 말한다. 물론 computer가 그것이다. 예전에는 computer하면 막연히 desktop system을 뜻했지만 지금은 아주 다양해졌다. 여기에는 물론 Internet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모든 것들이 ‘연결’이 되었고, 무서운 기세로 연결이 되어 가고 있으니까. 이제 이 ‘도구’는 누가 어떻게 먼저 자기 목적에 맞게 쓰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얼마 전에 나의 예상을 뒤엎고, 연숙이 본당소속 꾸리아의 부회장에 피선이 되고 말았다. 전부터 나는 레지오 평의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극구 말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해야 하는 ‘봉사적’인 직책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덜 바쁜 시간이 필요함을 잘 알기에 나는 반대를 한 것이다. 또한 직책의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중요함을 나날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떤 직책의 ‘일’이란 것이 사실은 ‘타협, 양보, 조절’의 기술이 나머지 것들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헌신적으로 일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극구 말렸지만, 본인의 의사는 별로 반영이 되지 않게 피선이 되었으니.. 이제는 현실로 받아야 할 듯하다. 한마디로 나에게도 영향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비록 평 단원이지만 부부로써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래서 첫 번째로 연숙이 가지고 온 ‘일’ 중의 하나가, “레지오 멤버들의 관리” 에 제일 중요한 레지오 <행동단원 복무기록부> 를 정리하는 일이 되었다. 아주 두터운 3-ring binder에 꾸리아소속의 거의 모든 단원의 신상기록이 있는데, 물론 이것을 ‘전산화’ 하려는 것이고, 그것을 첫 과정이 data entry가 아닌가? 가장 쉬운 Excel-format으로 시작을 하는데, 역시 문제는 한글, 영어가 섞어야 하는 조금은 복잡한 데이터 들에 있고, 불완전한 record, 고유한 개개인의 아이디(id)등인데 이것은 아마도 본당의 교적부의 database를 참고로 하면 좋을 듯하다.
이것이 시작이지만, 그 이외에 예상할 수 있는 ‘과제’는 적지 않다. 제일 내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모든 서류양식을 writable-pdf 화 하여 computer screen에서 직접 입력을 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역사 깊은 레지오에서 이미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온통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심지어 Ireland(아일랜드)의 레지오 세계 총본부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format file을 download-print해서 손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이’는 아직도 계속 써야 하는 실정인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렇게 digital gadget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고국의 레지오도 마찬가지로 이곳은 거의 아래아 한글(hwp format)로 된 것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이 현재의 레지오 단원 평균 연령층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활발한 레지오 연령대는 어느 곳에서나 시간이 조금은 여유가 있는 세대일 것이다. 그들은 거의 장년층일 것이고 아무래도 그들은 젊은 세대보다는 technology에는 덜 익숙하지 않을까? 꾸리아 레벨에서 산하 쁘레시디움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면 ‘정보적인 도움’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 기계적인 일들은 모두 computer에 맡기고 그 시간에 더 생산적인,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cloud-model로 가는 마당에, 이것을 database application으로 바꾸고, 그것을 webify(web application으로 바꿈) 해서 모든 ‘단원, 임원’ 들이 “위치에 상관없이” 볼 수 있고, 쓸 수있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WYD: Wor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일요일 아침, 근처에 있는 ‘미국 본당(Holy Family CC)’ 주일미사를 가기 전에 잠깐 뉴스를 봤더니, WYD(World Youth Day: 세계청년대회, 스페인 마드리드)의 토요일 밤 vigil mass중에 찌는 듯이 더운 날씨가 돌변을 해서 천둥과 벼락, 폭우가 쏟아 졌다고.. 며칠 전에 미국 Indianapolis, Indiana에서 열린 커다란 야외 집회 중에 갑자기 몰아친 돌풍으로, 높이 세운 구조물(scaffoldings)이 쓰러져서 다수의 사망자 까지 나왔던 일이 생각이 났다. 미사 후에 집에 돌아와 자세히 읽어보니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이것이야 말로 Thank God..이라고 해야 할까.
이 뉴스는 사실 ‘세속적’인 뉴스 채널을 통해서 보았다. 이런 곳에서는 어떻게 이번 행사를 보며, 느낄까 궁금하기도 해서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교황이 가는 곳은 이들 세속적인 뉴스 매체가 꼭 관심을 갖고 따라다닌다’ 라는 사실이다. 역시 바티칸은 ‘정치적’인 위치도 잃지 않고 있다. 그만큼 교황의 ‘말씀’은 아직도 ‘세계적’으로 영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알게 된 것은 ‘보수적인 추측’ 으로 예상했던 참가한 젊은이들의 숫자가 50만 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거의 100만 명이라는 사실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대단한 숫자가 아닐까? 정말 정말 대단하다. 이들은 역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영향을 듬뿍 받은 젊은 세대인 것이고, 다시 한번 그분의 ‘선견지명’에 놀랄 뿐이다. 이 백만 여명의 젊은 ‘세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그 주변을 바꾸어 놓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세상에는 ‘희망’이 있어 보인다. 다음의 이 대회는 2년 후인 2013년 Rio de Janeiro, Brazil에서 열린다고 발표가 되었다. 3년 후인 2014년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그 해에 그 곳에서는 4년 마다 열리는 세계인의 대 축제, World Cup Soccer가 열려서 부득이 일년을 앞 당긴 모양이다. 다시 ‘흑자, 호경기 재정’으로 돌아선 브라질은 이래 저래 좋은 소식만 가득하게 되었다… 부럽다.. 그들이..
성인: 맥시밀리안 콜베 (Maximilian Kolbe), 오늘 주일 미사는 대학의 catholic center(보통은 Newman Center:대학 내 가톨릭 공소, 라고 함)의 신부님께서 방문자의 자격으로 집전을 하셨다. 갑자기 ‘젊은’ 공기가 성전을 가득 찬 기분이었다. 우선 말씀의 ‘속도’가 엄청나게 젊었다.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다음 젊은 목소리, 그것도 에너지가 충만하고, 한 단어 단어가 뚜렷이 구별되는 확실한 영어.. 이것도 새로웠다. 아마도 모두들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이맘때면 ‘휴가 차’ 그의 고향인 Dublin, Ireland에 가신다. 가셔서 ‘공개적’인 안부 엽서까지 주보에 실렸다.
오늘 방문 신부님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의 축일이 지난 8월 14일이었음을 상기하고, 그 성인의 ‘유적지’를 찾아 본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유적지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2차 대전 당시 그’죽음 공장’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나치 집단수용소. 어찌 이 이름을 잊으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멋도 모르고’ 그 당시 나왔던 기록 영화 ‘(히틀러의) 나의 투쟁‘ 을 보고 처음 그곳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영화가 ‘학생입장 대환영’ 이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역사, 교훈적일지는 몰라도 준비가 덜 된 ‘아이들’에게 그런 ‘시각적으로 끔찍한’ 것은 너무나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이 나이에서 그것을 다시 보라고 해도 망설여질 정도인데.. 어떻게 어린 중학생들에게 그것을 보게 했을까? 공상영화였다고 해도 충격적인데 그것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얼마 전에 벌어진 전쟁 범죄’였다는 사실.. 그 당시에도 믿어지질 않았다. 그 희생자 중에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도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기차로 도착을 하면서, 그 옆 철길에는 아직도 집단 학살될 유대인 가족들이 도착하는 ‘짐짝 기차’가 그대로 ‘전시’ 되어 있음을 보고 생각하셨단다.. 화장실, 좌석, 아무것도 없는 화물열차로 도착하던 그 불쌍한 가족집단들.. 어린이들의 울음소리..그것도 역시 another Kafka moment 였을 것이다. 역사가 어떻게 비틀어지면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들이 일어났을까? 천 년 전의 ‘우매, 잔인한’ 몽골전쟁이 아닌 바로 70년 전의 ‘생생한,역사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전쟁 중에..
맥시밀리안 성인의 이야기는 얼마 전 우연히 역시 연숙의 책 중에서 잠깐 본 것이었다. Boniface Hanley 저, Ten Christians이라는 책이었다. 이 10명의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의 삶을 살려고 발버둥쳤고, 결국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현재를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준 그런 분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도 있고, 그 반대로 전혀 알려지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우리 인생의 선생님’으로 사신 분들인 것이다. 그 중에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은 ‘현대적 순교’를 하심으로써 기독교 사랑의 극치를 가르치신 case다.
프란치스코회의 신부였던 그는 수용소에서 짐승 같이 날뛰던 SS들 (비밀경찰)에 의해서 약물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죄는 탈출한 동료들 대신 보복적으로 뽑혀서 죽게 될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살리고 대신 그 자리를 맡아서 ‘굶어 죽는 형벌’을 자청한 것이다. 대부분 일 주일 후에 굶어 죽었지만 그는 3주를 더 버티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나치SS는 약물로 그를 죽인 것이다. 그 때문에 살아나게 된 운 좋은 ‘죄수’는 그의 남은 여생을 끝까지 살게 되었다.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끝까지 비판하며 천국으로 가신 이 성인은 정말 지금에도 거룩한 인생의 선생님이시다.
아틀란타 한국성당, 완전히 분가, 그 동안 아틀란타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숙원이었던 ‘또 하나의 다른 성전’의 꿈이 이제 완전히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노력 끝에 이번에 임기를 마치고 떠나신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의 ‘단행’으로 결말을 본 것이다. 시기적으로 좀 늦은 감도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늘어나는 천주교 신자, 예비자들을 적절히 수용할 기회를 놓쳤다는 평도 있었다. 기존의 한인타운의 한 중심에서 그 역할을 100% 수행했던 구 성전이 이제는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졌던 차에 조금은 활짝 넓은 공간에 새로운 성전이 마련 된 것이다.
새 성전은 사실 제2의 한인타운이 되어가는 동북부 교외지역(Duluth, Suwanee)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쪽으로 새로 유입하는 ‘은퇴세대’ (주로 뉴욕지역으로부터) 를 중심으로 ‘졸부 급’의 신흥 ‘벼락부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경제적, 연령적으로 보아도 아주 안정된 여건을 갖추고 있다. 물론 그런 여건이 ‘신심적’으로 활발할 지는 확실치 않지만..
덕분에 기존 성전은 조금 여건이 나아질 것으로 짐작이 된다. 신자수가 그 만큼 (약 200~300명?) 정도 여유가 생기니까, service나 사목 활동에도 조금 기를 펴고 여유가 생길 것이다. 한가지 문제점은 여러 가지 신심단체들이 거의 ‘강제적’으로 분할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혜를 가지고 해결을 할 문제이다. 내가 속한 레지오 도 2명 정도가 (그것도, 단장, 부단장) 그쪽 지역에 속해 있어서 조금은 염려가 되기도 한다.물론 주일 미사는 새 성전으로 가고 신심단체는 바꾸지 않아도 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WYD: World Youth Day .. 이것이 한국어로 “세계 청년 대회” 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1984년에 시작된 이 세계적인 가톨릭 행사를 이제야 이제야 관심을 가지고 ‘보고 듣게’ 된 것이 나로써는 조금 늦은 감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관심이 가고 알게 된 것도 다행이라고 위안을 한다.
올해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다린’ 것은 사실 여러 가지의 원인이 함께 도움이 되었다. 이 행사가 시작된 것은 다름이 아닌 내가 제일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전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이시다. 그는 어떻게 이런 행사를 생각을 하고 실행을 했을까? 희망은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절박한 진리’ 때문이었을까? 믿음 하나로 공산주의를 꺾고, 인류의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대였던 그.. 진정한 범 세계적인 세계인, 지도자.. 그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오래 갈 것은 바로 젊은이의 등대인 이 행사가 아니었을까? 희망은 역시, 역시, 젊은이들에게 있다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지독한 피상적인 물질주의와 인기, 인본주의에 찌들은 요새의 유행문화를 어찌 그들, 젊은이들이 피해갈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nano-second, 찰나의 기쁨을 추구하려는 그들에게 어떻게 누가 무엇이 장차 그들 앞에 다가올 현실일까를 가르쳐 줄 것인가? 허무.. 허무 뿐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 행사의 전개되는 것을 보니 조금은 요새 보기 드문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오십만 명 이상이 온다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정말 그들이 어떤 것을 느끼고 보고 갈 것은 크게 추측을 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인생을 바꾸기도 할 것이다.그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이바지’ 할 지는 크게 의심할 필요도 없다. 잠깐 잠깐, 상상과 꿈의 나래를 피어본다. 내가 20대 초반의 옛날로 돌아가서, ‘반종교적’ 이던 나의 그때와는 달리, 가톨릭 신자로써 이곳에 참가를 한 그런 꿈이다. 수십만 명의 ‘동료’, ‘친구’, 젊은이들을 보며 그들과 그곳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존경하는 교황을 직접 듣고 본다는 꿈.. 그때 느낀 것들을 두고 두고 생각하며 나의 젊은 인생을 시작한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물론 어려운 위기도 많이 겪었겠지만.. 분명히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는 필요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조금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최소한 ‘인생의 (최후의) 목적’ 만은 알고 살았을 것이다. 나아가서 내가 추구했던 이상, 전문적인 일들, 가족들과의 관계도 조금은 덜 후회를 남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꿈에서 깨면 을씨년스러운 현실로 돌아온다. 나를 성당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십 년이 넘도록 기도하며 도와 주었던 우리 식구들, 연숙과 두 딸들.. 그런 10년이 넘는 기다림 끝에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두 딸들이 떠났다. 이번에는 나와 연숙이 그들을 기다리며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왜 우리 두 딸들은 그렇게 ‘야멸차게’ 성당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런 나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이렇게 WYD같은 세계적인 행사를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다. 왜 우리 두 딸들이 그 속에 있지 못한 것일까? 왜 그렇게 쉽게 세속문화,찰나 문화에 빠져야만 할까? 기다려 본다. 나 같이 남을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case도 있지 않은가?
이번 미국에서 가는 청년의 수는 무려 2만 여명으로 사상 최대이고 한국에서도 천 여명 이상이 참가한다. 내가 사는 이곳 아틀란타 대교구에서도 백여 명 이상이 참가를 한다고 이곳 가톨릭 신문에서 보았고 그 중에는 우리 한국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여대생도 있었는데, 예쁜 얼굴의 Georgia State University 학생이라고 했다. 성당을 떠난 우리 두 딸만 보다가 이런 ‘다른’ 젊은이들을 보는 것이 요새는 나의 ‘낙’이 되었다. 거의 흡사 무슨 ‘젊은 성인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인 것이다. 지난 6월 달, 이곳 아틀란타 한국본당의 레지오 피정에서 그런 젊은 성인’들을 나는 room-mate로 직접 가까이 보기도 했다. 그들의 부모들은 우리와 다르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시켰던 것일까? 그들 부모들이 그 들에게 어떤 role-model로 비쳤기에 그렇게 ‘모범적’이었을까?
한국 주교회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세계청년대회, WYD: World Youth Day‘는 다음과 같이 요약이 된다.
세계 각지에 있는 가톨릭 젊은이들이 2년 또는 3년에 한번 개최 교구(도시)에 모여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함께 축제를 지내는 모임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살게 하고자 개최한 젊은이들의 축제이다. 1984년과 1985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으로 세계의 젊은이들을 초대하였다. 그 뒤 1985년 12월 20일, WYD 협회를 구성, 1986년에 처음으로 공식 WYD가 열리게 되었고 1987년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 번째 WYD가 개최되었는데 이로써 2년 또는 3년 만에 개최하는 정기적인 국제 대회가 되었다.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에서 모여 온 젊은이들은 가톨릭교회의 가치인 보편성과 다양성을 확인하며 함께 어우러진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신앙과 경험을 나누고, 자기들의 고국에 그리스도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를 전파할 수 있는 활기를 얻는다.
또한 서로 자기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갖는다. WYD는 세계 도처에 평화와 상호 이해의 정신을 표현하는 대회이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나라와 지역의 깃발을 흔들 때, 깊은 공감을 맛보며 이 체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It was so amazing, hilarious, then frustrating and finally angry. Yesterday, while driving home with Yonsook from Tuesday regular Legio meeting at the church, Janet called the power went out at home around 2 pm. Probably another Rosewell road widening construction disrupted neighborhood power, we guessed it would last a hour again. My concern was more with home-servers than usual inconvenience. Thanks to the a bit cooler weather, a/c was not the primary concern this time.
Arriving at near our garage drive way, though, we found a few Marietta Power crew were working at the ‘box’ (transformer). That’s was the reason! They apparently did bother to give us any advance notice, which is probably ok if they figured, or estimated the outage would be reasonably short. One of the crew even let us know it would be around 20~25 minute thing. I thanked them for letting us know even now.
Now, hot afternoon made us very uncomfortable inside the house, but their 20 minute thingy becomes almost 4 hours now.. hmmm.. What’s going on? Looking outside.. well.. it’s quiet.. they’re gone! The day’s work apparently was done. Checking my next neighbor’s a/c units.. they’re humming very nicely! What’s happened? Only my house was without power still yet! Now, I am almost certain those bozos were so eager to call it day, headed home for dinner without turning power switch back on only for our house! This was almost like another small Kafka moment for the day (among others). Called ‘amazing’ Marietta Power, only recorded message welcome their ‘frustrated’ customer after hour. Luckily Janet managed to connect to a ‘real human’, got assured ’emergency crew’ is on the way in 45 minutes. A monster truck rolled in, the crew initially couldn’t believe the story we told them.. why not? It was so unbelievable, even hilarious! They did not turn the power switch back before closing the transformer box. Thanks, for nothing, Marietta Power!
60대에 읽는 카프카.. 이것이야 말로 조금 웃긴다. 카프카.. Franz Kafka의 이름은 많이도 들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모른다. 그저 감수성이 많던 시절, 그러니까 10~20대 정도에서나 관심이 있을 그런 소설가가 아니었을까? 삶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이제 조금 느리게 가는 시기에 우연히 그를 드디어 접하게 되었다.이번 여름의 독서목록에서 아주 중요한 책이 카프카의 ‘심판‘[The Trial]이란 책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이것도 그러니까 모르고 죽으면 조금 아까운 것 중에 하나라고나 할까. 한가지 아쉬운 것은 내가 카프카의 글을 아주 젊었을 때 읽었었더라면 그때의 느낀 것과 비교를 할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 실존주의자였던 그가 근대 서구 문학사에서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까.. 그것이 나는 알고 싶었다. 왜 그는 그렇게 “인간 삶의 부조리(absurdity)” 라는 것을 그리고자 했을까? 그는 왜 삶 자체를 ‘부조리, 무의미’로 보았을까? 그 젊었던 나이에 그가 얼마나 인생을 살아 보았다고 그런 것들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 현재 이 책의 삼분의 일 정도 읽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왜 그렇게 그가 그렇게나 유명했는지 모르겠다. 1990년대 영화 Congo 에서 나온 대사, pure Kafka 란 말이 아직도 나의 귀를 울리는데, 그때의 의미도 역시 ‘상황의 부조리,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등이었다. 그 정도로 그의 ‘부조리’는 유명했을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나도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난번에 우연히 빌려온Esperanto 에 대한 책을 보고, 어릴 적에 본 아버지의 책들과 문서들을 떠올렸다. 사실 에스페란토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지만, 그 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육이오 동란 때 납북되시기 전까지 이것에 깊이 관련되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오래 잊고 살았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무언가 큰 가족 역사를 다시 발견한 기분이었다. 에스페란토 그 자체보다 그것에 얽인 아버지의 활동에 더 관심이 간 것이다. 어렸을 때 본 몇 장 되지 않은 아버지 사진 중에 에스페란토 기념사진이 있었다. 무슨 건물 앞 중앙 현관 계단에 모두들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는데, 거기에 에스페란토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제일 앞줄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무슨 에스페란토 연수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세월의 curse가 아닌 그로 인한 technology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역시, googling 으로 한국 에스페란토 역사의 ‘여명기’에 관해서 ‘과거’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나의 ‘희망적 짐작’은 어김없이 맞았을 뿐만 아니라 상상 이상의 수확이었다.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나의 아버지(의 흔적)를 거기서 찾은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육성’ 까지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나와 같은, 아니 훨씬 더 했을 감동을 나누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너무나 늦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에스페란토의 관계를 나는 느끼며 살았는데, 관련 사진과, 책, 서류들 때문이었지만 어머니도 가끔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언급을 하신 것을 기억한다. 위에 말한 아버지의 책들과 ‘회보’ 같은 것들은 분명히 ‘영어’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 고등학교 세계(역)사 시간에서 드디어 에스페란토 란 말을 듣게 되었다. 비록 간단히 언급을 했지만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의사, 자멘호프 란 사람이 ‘세계평화‘를 염두에 두고 고안한 사상 처음으로 ‘인공 언어’ 인 ‘에스페란토’ 어를 만들었다는 간단한 구절이었다. 사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 말고는 더 자세한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그런 것을 더 알려면 국내 유일의 국립중앙도서관에나 가야만 알 수가 있었고, 백과사전은 너무나 비싼 ‘귀중, 사치품’에 속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대로 오래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무한정의 정보망”, 인터넷은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역사를 조금은 더 정확하게 잡아 놓았다. 첫 번째로 우리 (아버지 쪽) 집의 뿌리가 평창이씨, 익평공파, 아버지는 27세 손이고, 전설적으로만 남아 있던 작은 삼촌의 존재, 그들의 정확한 나이까지 알게 되었다. 현재는 이것으로 나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나의 자식들이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아버지의 ‘업적’까지 덧붙이게 되었으니, 나의 기쁨은 글만으로 표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연대적으로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은 “한국문학과 에스페란토” 라는 글이다. 이 글은 인하대학교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의 학교 웹사이트에 실려 있는데, 이 글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조성호 교수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Google의 indexing을 통하지 않고는 찾기가 힘들게 만들어 놓은 ‘semi-private’한 인상을 준다. 이 저자의 전공이 molecular biology인 것 같아서 조금 의아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니 에스페란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닌가 싶다. 문학적인 각도에서 본 에스페란토 어의 유용함을 ‘과시’하듯 한국문학작품의 번역(에스페란토 어로)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다.
이 글 에서 아버지의 성함이 두 번 언급된다. 첫 번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홍형의 는 「삼천리」사 편집국에 근무하다 사퇴하고 1937년에 「Korea Esperantisto」지를 창간하였다. 비록 일제에 의해 곧 폐간되어 창간호 밖에는 발행되지 못하였으나 이 잡지는 표지 포함 24쪽 전문이 에스페란토로 되어 있어 우리 운동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창간호에는 월북작가인 이태준(李泰俊)의 장편(掌篇) 소설 「천사(天使)의 분노(憤怒)」(1932)가 이정모(李正模)의 번역(「La Indigno de l’Anĝelo」)에 의해 실려 있다.
그러니까, 1937년에 창간호로 폐간이 된 언급된 잡지에 아버지(이정모)가, 1932년에 발표된 이태준의 꽁뜨, <천사의 분노>를 번역해서 실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나는 아버지가 이시기에 이미 에스페란토 어를 거의 통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1937년이면 아버지의 연세가 26세에 불과한데..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대학(보성전문: 고려대학의 전신)시절에 이미 에스페란토에 심취 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평소 직업은 영어 선생님(선린, 경기고)이었으니까, 어학 쪽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지만 어떻게 에스페란토에 접하게 되었는지는 현재까지 알 길이 막막하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99년경에 그 동안 에스페란토 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을 총 망라한 anthology, <Korea Antologio>가 출간이 되었는데 이 글의 저자도 이 작업에 관여가 된 모양이다. 그 책에도 역시 아버지, 이정모의 번역작품이 실린 모양인데 그것이 위에 언급된 <천사의 분노>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스페란토 협회를 중심으로 이종영, 이낙기, 정원조 등 뜻 있는 분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도 Antologio 발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으며, 수년 전 드디어 구체적으로 그 뜻을 모으게 되었다. 필자도 이를 염두에 두고 1970년대 말부터 틈틈이 단편소설의 번역 작업을 해 오던 터이라 김우선과 함께 그 편집의 역할을 수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안송산, 허성, 방명현, 권혜영 등과 함께 편집진을 구성하여 기 발표된 작품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한 지 약 2년만인 1999년 말에 드디어 「Korea Antologio de Noveloj」 (이하 「Korea Antologio」라 함)가 발간되었다.
「Korea Antologio」에는 339쪽에 걸쳐 모두 2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김억의 번역 소설 중 3편, 안우생 번역의 1편, 이정모 번역의 1편, 이재현 번역의 5편, 기타 「La Espero」에 수록된 11편, 「La Lanterno Azia」 수록의 3편과 필자가 번역하여 발표하지 않았던 황석영 원작(1973)의 「삼포(三浦)가는 길(La Vojo al Sampo)」 등 25편의 소설 번역 작품과 부록으로 「La Pioniroj en Vilaĝo」가 포함되었다. 편집 과정 중 가능한 한 원래의 번역 문체를 살리기 위하여 문법적인 오류를 제외하고는 수정을 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인터넷에서 찾아 낸 것이 <제3장 혼란 속의 재건과 성장(1945~75)> 란 제목으로 시작되는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역사의 일부분이다. 누가 저자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에스페란토의 ‘정사(正史)’ 정도 수준의 글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글의 바로 제일 첫 부분에 아버지의 이름과 ‘육성’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패하고,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자 새로운 나라를 수립하기 위한 건국준비가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동시에 에스페란토운동에 대한 탄압도 사라졌다. 이 때 주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출신의 젊은 지성인을 총망라한 [건국추진대 본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우선 [평화의 사도] 연합군(미국, 소련)의 서울 진주를 환영하기 위하여 영어와 러시아로 된 환영휘장을 붙이기로 하였다. 이 때 이정모(李正模)가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창조된 국제공통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고 제의하여 젊은 지성인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들은 즉석에서 주머니를 털어 1천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1945년 8월 하순, 서울 종로에 있는 영보빌딩 정면에 에스페란토로 서울에서 가장 큰 연합군 환영휘장을 붙이고, 가두방송용 확성기를 통하여 에스페란토에 관한 선전을 하였다.
이 글을 찾고 읽었을 때 나는 피가 멈추는 듯한 충격과 감격을 느꼈다. 전설적으로만 느껴지던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로 나는 간접적으로 추측의 나래를 한껏 펴보는 기쁨을 즐겼다. 해방되는 해면 아버지는 첫 딸을 5월쯤에 보았을 젊은 아빠였을 것이다. 그 당시 아버지는 선린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이런<건국추진대> 라는 ‘운동권’에 관계가 되었을까? 전혀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는 없던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로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는 에스페란토의 정신을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분명히 ‘인류평등’, ‘인류평화’를 신봉하던 거의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 본다.
해방 후에 재건된 에스페란토 학회의 창설과정과 후학 연수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때가 아버지의 에스페란토 운동의 절정기가 아니었을까. 이때는 사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서울 중심의 전국적 조직은 흩어진 동지의 규합에 시간이 필요하고, 또 서울에서 사회적, 정치적 혼미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에스페란토운동의 부활이 늦어졌다. 그러나 개혁적인 에스페란티스토와 에스페란토 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이 모여 “약소민족어의 해방 및 에스페란토운동의 재건”을 축하하는 [에스페란토 정치선언]을 채택하고, 이것을 잡지 「혁명」(발행인 김 근)에 게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1945년 12월 15일 자멘호프 탄신을 계기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Korea Esperanto-Instituto)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창립총회에서 홍명희(洪明憙)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고,2) 홍형의(洪亨義)를 서기장에 임명하였다. 동시에 조선에스페란토학회의 사업계획을 채택하였는데 1) 재정 확립, 2) 기관지 발행, 3) 사전 편찬, 4) 학습 교재 발행 등을 하기로 하였다. KEI창립을 위하여 김억(金億), 백남규(白南圭), 석주명(石宙明), 유기동(柳基東), 이균(李鈞), 이종률(李鍾律), 김교영(金敎瑛), 신봉조(辛鳳祚), 이정모(李正模), 장석태(張錫台), 나원화(羅元和), 송창용(宋昶用), 서병택(徐丙澤), 홍형의(洪亨義) 등 서울에 있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발기하고, 그 외 창립총회에는 홍명희(洪命憙), 이기린(李基麟), 유림(柳林), 곽경(郭敬), 김계림(金桂林), 김명진(金明鎭), 이동각(李東珏), 李正馥(이정복), 박명줄(朴明茁), 이동석(李東錫), 문홍주(文弘周), 한일(韓一), 윤봉헌(尹鳳憲), 홍숙희(洪淑熹), 이기인(李基寅), 이극로(李克魯) 및 당시 아직도 중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한 안우생(安偶生), 이재현(李在賢) 등이 참가 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대회가 끝나자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조선에스페란토학회] 주최 첫 강습회가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다음해인 1946년 2월 16일 서울대 대강당에서 [대학생 에스페란토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100여 명의 수강자에게 석주명, 홍형의, 안우생의 강연에 이어, 석주명, 홍형의 지도로 에스페란토 강습을 하였다. <중략>
1946년 8월 제2회 공개강연회 및 강습회가 홍형의, 이정모의 지도로 개최되었고, 이 때 이극로(李克魯)가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고,3) 서울 을지로2가에 있는 청목빌딩에 KEI 사무실을 두게 되었다. <중략>
1949년 5월 서울 국학대학 강당에서 약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 및 KEI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KEI 제4대 회장으로 유기동(柳基東, Saliko, 사업가), 부회장으로 백남규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8월에 KEI 제5회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약 30명이 참가하고 서병택, 석주명, 이정모가 지도하였다.
위의 글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에 에스페란토 운동의 중심부에서 학회 발기인, 후배 양성에 전력을 쓴 것이 역력히 들어난다. 특히 아버지의 이름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대부 격인 ‘김억, 석주명,’등과 나란히 나오는 것을 보면 나이로나 정열, 열의, 경력 등으로 보아 중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특히 계속된 에스페란토 강습회에서 강의를 한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직업인 ‘학교 선생님’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상주의적인 에스페란토 운동은 사실 사상적으로 조금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완전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니까, 사실 빨갱이건, 아니건 모두가 참여할 여지가 있었고, 해방 후의 사상대립에서 이것은 정말로 아슬아슬한 운동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구의 남북합작과 같은 정도의 남쪽에서 보면 불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거꾸로 빨갱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악질반동들이 섞여있는 이런 단체를 곱게 보았을까? 그러니까 양쪽에서 모두 ‘노리는’ 그런 ‘동네 북’과 같은 ‘중립’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에스페란토의 중추적이었던 몇 사람이 납북과, 처형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차츰 정리, 활성화되어 가던 한국 에스페란토운동도 갑작스런 6.25사변으로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KEI는 1949년 5월 서울에서의 제3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마치고 제4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를 1950년 6월 28일 서울 과학박물관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6.25동란으로 서울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따라서 제4차 대회는 개최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석주명은 살해되고, 김억과 KEI 회장 유기동 등 핵심인물들이 동란 중에 납북되었다. 국내에 머물 수 있었던 안우생, 이균, 김교영, 이계순(여자) 등 인사들도 전란으로 뿔뿔이 분산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스페란토학회(KEI)의 기능이 계속 될 수 없었다.
위의 글에서 왜 아버지의 납북에 관한 언급이 없었을까? 육이오 동란 이후, 국내 에스페란토 관련 인물들이 아버지의 납북사실을 이렇게 전혀 몰랐을까? 나중에 역사를 정리하면서 분명히 ‘이정모’의 실종 사실을 발견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에스페란토 정사(正史)’에서 아버지 이름이 슬그머니 사라졌을까? 나는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가족의 역사는 이곳에서도 ‘찾기 어려운’ 그런 사실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 무겁게 하고, 내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아버지의 희미한 자취를 찾으면서 에스페란토에 대해서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인공적인 국제 공용어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다. 언어를 천재적인 용기로 혼자서 150년 전에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안타깝게도 이 언어는 창시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역시 새로 등장한 영어의 위력 때문이 아닐까? 비록 배우기가 자연언어보다 쉽다고는 하지만 역시 이것을 배우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도 전형적인 chicken-and-egg or Catch-22 problem일 것이다. 어느 정도 쓰이고 있어야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질 터인데 그 단계에 도달하지를 못한 것이다. 15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절대 질량 (critical mass)’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덧 2011년 7월과 작별을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덥긴 했지만 의외로 다른 지역 (특히 Texas, Oklahoma, midwest, & northeast)들이 이곳보다 ‘더’ 더워서 상대적으로, 심리적으로 조금 ‘덜 덥게’ 느껴진, 아니 그렇게 느끼려고 했던 그런 더위였고, 거기다가 다행히 늦은 늦은 오후에 한바탕 쏟아지는 시원한 소낙비가 가끔 우리들을 즐겁게도 했던 그런 올해의 7월 달이 간다. 7월의 초순에 ‘일단’ 끝냈던 water heater project 에서 하도 의외의 고생을 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knockout이 되어 그 이후로는 ‘일부러’ 그것들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이 project는 아직 완전한 끝마무리를 못 지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끝이 나서 현재 우리 집의 더운 물을 쓰는 데는 지장이 없다. 7월이 가기 전에 100% 끝을 내려고 했지만, 사실 아직도 다시 손을 대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 푹~ 쉬는 동안에는 summer reading 에 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갑자기’ 읽어야 할 must-read-list가 늘어나고 있어서 더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올 여름은 아직도 한달 이상이나 남아 있어서 당분간 이 ‘게으른 독서’는 계속이 될 것이다.
이번에 전에 읽었던 책을 반납을 하러 도서관엘 가서 아주 우연히 에스페란토(Esperanto)에 관한 책을 보고 빌려오게 되었다. 나는 이 에스페란토란 말 자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꽤 친숙한 것이었다. 물론 중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잠깐 그 말을 본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세계사에서 잠깐 언급할 정도인 그렇게 중요한 ‘사건’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왜, 그것이 친숙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생전 보지도 못한 나의 아버지(이정모, 평창이씨 익평공파 27세손)께서 육이오 동란 전까지 ‘조선 에스페란토 ‘의 회원이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로 보아서 중요 멤버였을 것이다. 회원들이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을 본 것도 또렷이 기억을 한다. 그 이외에도 아버님께서 쓰시던 책들 속에서 에스페란토에 관한 것이 꽤 많이 있었다. 물론 어린 나이에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중에 세계사 시간에 잠깐 배우게 되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추억과 더불어, 150년 전에 폴란드의 자멘호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세계평화를 위한 인공 언어’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갑자기 궁금해 진 것이다. 빌려온 책은 1980년대에 발행이 된 그런대로 오래된 책인데, 잠깐 훑어보니 나의 예상과 달리 꽤 잘 보존되고 살아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아직도 희망한 만큼 널리 알려진 언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동호회’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다.
아주 우연히 옛날 옛적의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가톨릭 월간 , 1972년 8월호를 인터넷으로 보다가 귀에 익은 노래제목이 눈에 띄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였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대중 유행가로 불렸던 가곡 가사의 첫 부분이었다.
흔히 말하는 유행가가 아니고 오래 전에 작곡이 되었던 가곡을 인기 여가수 문정선씨가 유행가로 편곡이 된 것을 부른 것이 그 당시 크게 인기를 얻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 경향잡지 기사의 제목은 사실 “복음의 증인들” 이라는 연재 기사로서 제목은 “보리밭 사잇길로: 작곡가 윤용하(요셉) 일대기” 였다. 그러고 보니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라는 이름이 조금은 기억이 나는 듯 했다.
우선 이분이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이 뜻밖이었다. 그래서 우선 반가웠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무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 문득, 윤용하 형제, 교우님” 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이 잡지 기사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일대기” 라고 부제를 부칠 정도로 이분의 전체적인 일생을 간략하게 묘사를 해 놓았다. 이 기사는 아주 엄숙하고 심지어 처절하게 시작을 한다.
예술가는 가난했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빈이무원(貧而無怨)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 처참한 곤비(困憊) 속에서도 신앙과 순수와 낭만을 지킨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요셉)는 죽어서 이름을 남겼다.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으면 이렇게 일대기가 시작되었을까? 1922년에 태어나고 1965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43년을 사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너무 일찍 가신 것이라 우선 가슴이 아프다. 그 당시를 살아본 경험은 그 당시 가난하고 병이라도 있으면 참 불운한 생을 보내야 했을 것이라는 것,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분도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신 듯 한데, 왜..라는 것보다는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더 들 정도로 이해를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나의 blog에 썼던 이진섭씨에 관한 글이 생각났다. 이진섭씨도 술로 인해 명을 다 채우지 못하시고 가신 것이다. 나이도 비슷하니 비슷한 격동기를 사신 분들이어서 자꾸만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인생, 일생은 너무도 달랐다. 그 두 인생은 어디에서 왜, 어떻게 바다와 같이 넓게, 멀어져 갔을까?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너무도 안타깝고 나중에는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더 알려지게 된 것도 그렇다. 사후의 그런 때늦은 ‘예술가로서 인정 받음’을 왜 생전 시에는 못 받았을까? 그랬으면 그렇게 가난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안타까움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더 이 불운의 ‘천재’ 예술가에 대해서 알아보게 되었는데.. 바라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가서 본 것을 이런 글로 남겼는데 흡사 천재작곡가 모차르트의 죽음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윤용하가 40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보도의 필요성에 쫓겨 빈소를 찾는 데 신문사의 기동력을 동원했지만 한 번지에 수천 호가 잡거하는 판자촌인지라 이틀을 넘겨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 천재가 누워 있는 곳은 판잣집도 못 되는,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였다. 미의 순수한 응어리가 저렇게 이승을 마칠 수 있었던가 가 원망스러웠던 세 번째의 만남이었다.
이 천재적인 수준일지도 모르는 예술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상세하지를 못하다. 아마도 그를 알고 지냈던 인물들 대부분이 일말의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느껴서 밝히기를 꺼려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물론 각자의 운명은 우선 각자 자신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환경적인 것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예술가가 다 가난했던 것도 아니고, 가난했다고 다 병들어 죽는 것도 아니다. 숙명, 신앙, 순수, 낭만.. 이런 것들 만이 과연 불우한 삶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윤용하씨의 대명사가 될 수 있을까? 다음의 음악 평론가 이상만씨의 글은 나를 다시 더 슬프게 한다.
얼마 전 그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비망록을 살핀 일이 있다. 300원 500원,… 거기에는 만년에 그가 폐인 되다시피 하여 이곳 저곳 구걸하러 다닐 때에 추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가 적혀 있었다. 대부분 동료 음악인들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었는데, 어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는 호기심보다도 그 비망록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된 까닭이 사뭇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신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이 윤 용하였다.
위에 언급한 1972년 가톨릭 경향잡지의 기사를 보면 다른 각도로 본 님의 불우한 생의 마침을 보게 되어서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이 당시 자녀들은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 아마도 어렸을 듯 한데,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누가 보아도 용하의 병색은 완연하였다. 용하가 간장질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의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그를 성모병원에 입원시킬 생각으로 성모병원의 의사를 그의 필동 셋방살이 단칸방에 보내었으나 이미 때가 늦어 치료를 받아도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용하는 입원되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앰블란스가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더라고 한다.
병상에 누운 지 3개월, 최 모이세(광연) 신부에게 최후의 성사를 본지 사흘 만에 아내와 어린 남매를 두고 조용히 운명하니 1965년 7월 23일이었다.
26일엔 명동 대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지내고 금곡리 천주교 묘지, 먼저 간 그의 부친 무덤이 마주 보이는 곳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면 아무리 님의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 공헌을 높이 사고 싶어도 가정적으로 한 가장으로써는 완전한 실패인 인생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윤용하 평전을 읽으면 한층 그런 나의 생각이 굳어진다.
윤용하,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그의 소유로 된 집을 가져본 일이 없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산 중턱 움막판자집 단칸셋방이 이승의 마지막 현주소였다. 그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등진 후 유전만을 거듭했을 뿐, 다시는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실향민이었다.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철이 들면서 부터 부모와 다른 오 남매 동생들과 더불어 함께 한 일이라곤 없는, 그가 살다간 시대만큼이나 불행한 유랑인 이었다.
그가 명색이 작곡가라면서 생전에 자신의 작곡 집 한번도 내보지 못한 부실한(?) 예술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술로 풀어버리려고 술에 함몰 당해 부인마저 집을 나가버릴 정도로 초탈한 생활무능력자였다.
이렇게 아주 듣기에 거북할 정도의 냉정한 글도 모두 사실일 것이다. 본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고 그러다 술로 모든 것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절대로 찬성을 할 수 없는 생활방식이 아닐까? 그런 환경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아닐 것이다. 나의 어머님도 육이오 때, 남편을 잃고 우리 집 두 남매를 여자의 몸으로 다 키우셨다. 그것은 아마도 우선가정을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이 제일 크게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재능을 가시셨고 음악계에서 활동을 하셨던 분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는 자신까지 희생을 해야만 했던가? 이것은 정말 비극중의 비극이다.
이렇게 거의 체념과 체질에 밴듯한 ‘가난의 생’은 아마도 님의 선조들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님의 부친 대에 이르러 대원군 당시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심심유곡(황해도 구월산)에서 옹기를 구워가며 살게 된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신앙을 고수하려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인데 어찌하여 이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런 불안한 환경 속에서 자란 님은 사실 이때부터 ‘떠돌이’ 기질이 배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이진섭씨와 같이 술을 ‘통제’ 못한 것은 결국 병과 일찍 타계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시대, 울분, 신앙심 등이 조금 짐작이 간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삶을 회고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그의 ‘신앙’과 ‘작곡’과 ‘술’ 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가 막걸리를 들지 않는 날은 이상한 날로 꼽힐 만큼 현실의 불만이나 불우한 처지를 술로 달래며 기염을 토하곤 하였다. 그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주정을 하지 않고, 마실수록 조용해지고 수줍어지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술로 인해 자신의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는데, 사순절 기간인 40일 동안만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던 사실로 그의 신앙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을 죽을 때가지 간직한 윤용하 교우님, 교회 음악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조선인’들의 음악 활동을 그 어려운 때 만주에서 조직, 활성화하려고 노력을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그의 ‘저돌적, 동키호테적’ 인 면모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자유인 예술가’ .. 그것이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사회란 굴레’에서도 못 견디었을 자유인..그런 그가 어떻게 ‘학벌과 연줄’이 판을 치던 곳을 술 없이 견딜 수 있겠는가? 다음의 글을 보면 그 만의 ‘졸업장’에 대한 독특한 고민을 볼 수 있다.
광복 직후 나라가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분야에 인재들이 필요했다. 인재들을 키워낼 고급 인재들은 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졸업장과 대학 졸업장이 공공연히 돈으로 거래되었다. 많은 동료가 그 길로 갔고 그들은 용하 형에게도 그 길을 권했다. 그는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그의 정규학력의 전부였고 그래도 그는 그의 천부적 재능으로 10대 말의 나이에 이미 어엿한 작곡가이자 방송국 교향악단 지휘자의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수가 되어 가르쳐야 할 그에게 세상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그것도 부정한 방법으로 구해 오도록 강요했다. 예술적 재능과 노력보다는 학력과 졸업장 그리고 연줄이 더욱 위력을 발휘하는 풍토에서 그는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휴전 직후 문화예술인단체의 3.1절 기념식장 소동도 상징적 사건이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기념식을 마치고 다과회를 열고 있었다. 하필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이미 술이 거나해 있던 용하는 “예끼, 이 똥만도 못한…”이라 고함을 지르면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휑하니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윤용하 님께서 젊은 시절 활약할 당시의 ‘조선 음악인’들은 거의 현재 한국의 음악계를 주름잡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님의 재능을 한결같이 인정을 하고 있다. 특히 제일 가까이에서 ‘자랐던’ 오현명씨의 증언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거의 드라마에 가까운 비극적인 이 ‘인생 역마차’ 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한 사람은 남산 중턱의 번지 없는 판자집에서 치료 제대로 받지 못하며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다른 사람은 대한민국 음악계의 중심에서 ‘건강’하게 활약을 하는 이런 것이 현실이었다니.. 물론 그이 주변에서 ‘도움’을 주셨을 분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생을 마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노래는 즐겁다 – 윤용하 작곡
물론 ‘보리밭’이라는 유명한 가곡을 남겼지만, 그것보다 나는 이분이 동요 <노래는 즐겁다>의 작곡자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이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국민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전쟁 후의 황량하던 그 어린 시절, 이런 추억의 동심 어린 아름답고, 주옥 같은 노래를 남겨주신 것이다. 그 당시 우리들, 이 동요를 부르고, 들을 때면 정말 그야말로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는 어떠한가? 광복절만 되면 이 노래를 열심히 도 불렀다. 누가 작곡했는지도 모르고.. <나뭇잎 배>란 동요도 기억을 한다. 여자아이들이 즐겨 불렀던 것이라 나는 그다지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아내 연숙에게 물어보니 아주 애창곡이었다고.. 덧붙여 ‘심각한 가곡’ 인 고독’이란 가곡도 들어 보았다. 어떻게 이런 곡이 그 동안 숨어있었을까?
1965년에 돌아가셨는데, 세월은 님을 역시 알아보게 되었고, 2005년에는 ‘윤용하 기념사업회‘ 까지 발족이 되어서 역사에 남게 되어서 그 동안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가게 되는 모양이다. 가실 때가지 간직하신 신앙이 자랑스럽고, 남겨주신 주옥 같은 동요, 가곡들도 자랑스럽다. 천국에서도 이런 것을 아시고 조금이나마 만족을 하시리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님의 명복을 빈다.
요새 며칠 계속 미국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동북부(northeast)에 완전히 더위 비상이 걸렸다. 뉴욕, 보스톤을 포함한 대도시들이 완전히 지독한 더위에 고생을 하는 모양이다. 신기한 것은 지금 이곳 아틀란타를 포함한 동남부 지역은 그렇게까지 덥지 않은 것이다. 그저 평년의 기온에다가 오후에는 시원하게 비까지 오곤 해서 살만하다. 문제는 그 ‘북쪽’ 지방에는 이곳에 비해서 더위에 대한 대비가 허술하다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에어컨 일 것이다. 이런 더위에 그것이 없으면 정말 밤에 잠자기가 힘이 들 것이다. 그쪽은 겨울에 지독한 추위와 폭설로 고생을 했는데 여름에는 더위로.. 이것이 바로 극단적인 기후의 표본이 아닐까? 지구온난화의 한 증상이 이런 극단적 기후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 말이 일리가 있어서 조금은 걱정이 된다.
더위와 더불어 뉴욕 시에서는 내가 보기에 ‘해괴’ 한 법이 통과 되어서 동성결혼이 붐을 이루고 있다. 종교를 떠나서, 이것은 한마디로 ‘변태’ 인 것인데, 어찌하여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일까? 한마디로 ‘정신병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인데, 이러고도 정상적인 사회가 오래 오래 문제없이 유지가 될까? 대부분 ‘인간’들은 아마도 찬성보다는 무관심에 가까운데, 그들 ‘변태그룹’ 인간들이 아마도 정치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것 같고, 그 동안 사회문제에서 아슬아슬한 입장을 취했던 오바마(Obama)가 다음 선거를 의식하고 눈을 완전히 감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 변태들에게 그 동안은 그저 구제불능의 불쌍한 군상들이라고 무시를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다음의 단계는 무엇인가? 아마 근친결혼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지도..아주 아찔한 상상이지만, 모든 것을 ‘자기가 좋은 법대로’ 하겠다면 형제, 자매, 남매끼리 ‘결혼’ 하겠다면 무슨 근거로 막겠는가? 아예, 동물과 결혼하겠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enough is enough의 전형적인 case일 것이다. 이제는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게 되는 세상이 되고 있다. 어느 외딴 섬에라도 가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신세..어찌 돌아가는 세상인가?
자칭 크리스천 이란 미친 놈이 노르웨이(Norway) 에서 총기난동을 부려 무고한 젊은 아이들이 무수히 죽었고 정부청사까지 폭파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이슬람교에 대한 ‘보복’ 같은 인상인데, 왜 죄 없는 아이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죽여야 했을까?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 ‘정신이상’에 속하겠지만 그로서는 아주 정신이 말짱하다고 얘기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혁명’을 해야 했다고? 여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를 판 것으로 우선, 죽일 놈인데, 회교도가 싫었으면 그 총과 폭탄을 들고 극단주의 테로리스트(terrorist)를 찾아 나설 것이지.. 비겁하게 독 안에 든 쥐처럼 갇힌 조그만 섬에 가서 그 ‘지랄’을 벌렸을까? 내가 짐작하건대, 친구하나 없는 외톨이가, 혼자서 주변에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슬람인 들을 보고 분명히 겁을 먹었을 것이다. 거기다.. 사형제도도 없고 최고형이 30년이라니.. 어느 것에도 ‘겁먹게 하는’ 억제 제도와 관용에 대한 교육’이 없어서 더 그런 비극을 재촉하지 않았을까? 참, 이런 것도 ‘어느 외딴 섬에 가서 살고 싶게 하는’ 그런 추악한 뉴스들이다.
¶ 2011년 7월 20일, 드디어 7월의 하순으로 접어든다. 7월 4일 앞뒤로 ‘감행’ 했던 거의 무모할 정도의 water heater를 교제하는 것, 불안과 초조를 동반한 이런 일들은 아마도 그래서 pro가 ‘가치’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마디로 희망대로, 내가 바란 대로 일이 풀려 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열을 받게 되고, 그것이 악순환으로 나를 괴롭혔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아직도 수도관에서 의 납땜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plumbing 에서 의 soldering technique.. 그것이다. 몇 년 전에 under-the-sink hot water dispenser를 고칠 적에 이미 경험을 하였다. 아직도 나는 ‘구리와 납’의 chemistry에 감을 못 잡고 있다. 이것은 electrical 에서와 는 거의 다른 느낌이다. 특히 open flame의 torch가 나는 아주 ‘무섭고, 싫은’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 큰일이 그런대로 순조로웠다. 문제의 마지막 5%에서 나는 시간의 압박과, 자신감의 상실 등으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Sharkbite란 새로운 기술을 써서 결과적으로 살리기는 했지만,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무조건 잊으려 노력을 한 결과가 거의 2주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보기도 싫고 만지기도 싫고..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큰일을 하긴 했다. 결과를 떠나서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최소한 $300이상은 save 했다고 조금은 ‘희망적인’ 기대도 해 보면서.. 7월이 가기 전에 cosmetic한 마무리를 지으려고 희망을 해 본다.
¶ 어제는 우리 레지오가이 마리아 자매님 댁에 초청을 받아서 거의 프로 실력으로 준비 된 맛있는 한식을 모두 모여서 즐기고 왔다. 예상과 다른 곳에 있는 ‘senior apartment가 특이했다. 그 금싸라기 땅인 Buckhead에 있었던 것이다. 흡사 고급 호텔을 연상 시키는 그런 환경이었다. 하지만 실내는 생각보다 좁았고, 역시 많은 살림살이들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 자리에 함께하는 것이 이제는 조금도 낯 설지 않다. 편한 것이다. 거의 누님들 같아서 더 그럴까.. 아니면 믿음으로 모인 것이라 그럴까? 남들이 경험 못하는 것을 내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재미있기도 하다. 그런 나의 ‘심정’을 연숙은 알까? 그런데 연숙은 그렇게 ‘참가’하는 내가 별로 싫지 않은 듯한 모습이라, 참 다행인 것이다. 잘못 생각하면 ‘주책없는 사내’라는 인상을 풍길 가능성도 항상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먹으며’ 모여 보니 참 정이 들것 같은 분위기라서 이것도 정도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 정이 드는 것 ‘바람 직’하지 못하다고 들은 것 같아서..
한 여름의 무더위가 한창이다. 고국은 아마도 이맘때 쯤이면 장마가 한창이지 않을까.. 하지만 전혀 감이 없다. 그저 수십 년 전의 서울의 모습을 회상을 하면서 떠 오른 이맘때면 아마도 매일 ‘구질구질’하게 내렸던 비, 그것이 장마가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다. 이제는 해변가의 하~얀 모래 백사장을 본 것도 아주 오래되어간다. 그 찬란한 여름의 햇살아래 펼쳐진 푸른 파도와 하얀 백사장.. 그것이 여름의 맛일 것이다. 그곳에 못 갈 것도 없건만 다른 한편, 그렇게까지 가고 싶지도 않다. 한마디로 귀찮은 것이다. 이럴 때, 최고의 낙은 역시 게으르게 뒹굴며 읽는 책들이 아닐까?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summer reading이란 말 조차 있지 않던가? 오래 오래 전,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살던 중앙고 2학년 시절이 그랬다. 입시준비의 압력이 오기 전해 여름방학 때, 그야말로 시원한 마루바닥에서 누워서 읽던 책들.. 이것이 바로 ‘독서의 즐거움’의 진수일 것이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그야말로 ‘재미로서의 독서’, 그것이다. 그때 제일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그 흔하던 ‘삼국지‘였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삼국지..하면 1964년 여름의 남영동 집 마루가 생각나는 것이다.
올해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몇 권의 책을 준비하고 읽고 있는데, 현재까지 거의 2권을 읽었다. ‘피서의 효과’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옛날에 느꼈던 ‘게으름’은 조금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영어 판 Dan Brown의 <The Da Vinci Code>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의 한역 본이 그것인데, 두 권 다 ‘재미’ 있기는 하였으나, 끝 맛은 개운치를 않았다.
우선 2003년에 나와서 “시끌벅쩍” 하게 화제를 뿌리고 그에 따라 돈을 ‘억수’로 벌었던 다빈치 코드.. 몇 년 후에는 영화까지 나왔던 그 책이다. 왜 시끄러웠냐 하는 것은 나도 안다. 문제는 그 당시에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주 마음이 상한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것은 좋은데, 그 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까?
거의 사실을 가장해서 쓴 ‘허구’ 이지만, 자칫하면 소설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이 만약 이슬람교회를 주제로 했다면, 그들의 이제까지의 경험을 보아서 아마도 암살단이 곧바로 이 저자의 저택으로 쳐들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가톨릭을 이렇게 비하한 것은 기독교의 기본 사상인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사상을 역 이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피해를 보았자 그저 흔한 ‘법정소송’ 정도였을 것이다. 이래서 나는 이 저자를 개인적으로 ‘증오’ 하기로 했다. 아무로 $$$가 좋기로 서니..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을까?
70대의 일본인 여성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의 한역 본은 우선 번역이 아주 산뜻하게 잘 되어있어서 읽는데 쾌적하였다. 아마도 일본 글과 한글의 유사성이 번역이란 거창한 과정을 아주 쉽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글이라도 원저자의 ‘문필 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우선 저자가 역사학자인줄로 잘 못 알았다. 그런 시각에서 보니 아주 부자연스러운 점이 너무도 많았다. 암만 ‘이야기 체’로 썼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역사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저자의 정치,역사 철학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야기 체로 그 긴 역사를 풀어 쓴 ‘솜씨’는 가상하지만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 ‘로마인을 찬양’ 하는 것은 조금 다시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게 하였다. 역사와 문학을 거의 의도적으로 접목을 시키고 상업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듯한 냄새, 거기다 저자의 은근한 feminism까지 곁들여, ‘매력적인 로마의 남자’들을 부각시킨 것들을 보면서 참, 너무나 상업화된 출판계 현실도 거슬린다.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저자는 ‘이 남자, 저 남자’를 거론했는가. 왜 그들이 남자임을 그렇게 밝혀야만 하는가? 그것은 심지어 번역자까지도 합세해서 ‘멋진 남자’들을 강조한다. 저자가 결론으로 내놓은 것에 나는 아연실색을 하게 되었는데.. 골자는 이것이다. 현재까지의 로마 역사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필요이상으로 ‘악하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공산주의적 유물론적 탈 신앙적인 저자의 발상인 듯 싶다. 그것과 더불어 로마사의 대가들을 ‘비판, 의심’하는 것은 아무리 저자가 1970년부터 이탈리아에 살면서 로마를 느꼈다고 하지만 너무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역사’과학’자가 아님을 자꾸 잊는 것이 아닐까?
지난 6월 28일부터 읽기 시작한 <알피 램 생애> 란 소책자 (136쪽)를 이제 거의 다 읽어 간다. 마지막 20쪽이 남았다. 이것도 RbT: Reading by Typing 의 방법으로 읽고 있어서 사실 눈으로만 읽는 것에 비해 시간이 더 걸리는 셈이지만 대신 아주 자세히 읽게 되는 이점이 있다.
이 책은 연숙이 2009년 12월 6일, 아틀란타 본당소속 꾸리아 연말 모임에서 꾸리아로부터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는 나의 관심 밖이어서 이런 책이 있었는지도 몰랐지만, 알았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지난해 말에 내가 레지오에 입단을 하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렇게 꼼꼼히 읽을 정도로 관심이 생긴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알피 램이란 사람이고, 알피 램(Alfie Lambe) 의 알피(alfie)는 알퐁소(Alfonsus) 의 애칭(nickname) 이다. 알피 램은 간단히 말해서 레지오에서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라고 한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라틴 아메리카에 레지오의 ‘돌풍’을 일으킨 사람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는 더블린에 있는 세계 레지오 본부에서 파견된 레지오 선교사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갈 듯하다. 특히 6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영웅적’으로 활동을 하다가 역시 젊은 26세의 나이에 선종을 해서 레지오에서는 거의 ‘어린 성인’ 같은 존재로 남은 것이고, 이로 인해서 성인으로 가는 ‘복자 추대’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알피 램이 활동한 시기가 1953년부터 선종한 때인 1958년까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해 부터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가 된다. 그렇게 오랜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이 나온 배경은 아직 자세히 ‘연구’를 못해서 잘 모르지만 원래 ‘힐데 퍼텔’이란 저자가 영어로 쓴 것을 북미주 레지오 교육협의회장 ‘조, 율리오’ 란 사람이 한글로 번역을 해서 대한민국 광주에 있는 ‘새날출판사’란 곳에서 간행을 한 136쪽의 소책자인데, 내용은 그런대로 ‘이해’를 했지만 거의 다 읽고 난 감상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의 내용은 나중에 간추려서 blog으로 소개하겠지만, 여기서 감상이 좋지 않다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이 책의 기본적인 ‘자격’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번역자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독자를 거의 우롱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정도로 ‘조잡한 번역‘으로 일관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출판사의 실수, 잘못인지 번역자의 잘못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예 이 상태로서 출판이 되어서는 안 될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조금 생각한 것이, 머리말에 ‘번역 봉사’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번역자가 번역을 한 것이 아니고 이 봉사자들 여러 명이 함께 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수준 이하의 ‘직역 체’ 번역에다가 각 단원의 문체, 용어, 문단의 구성도 다른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발행 년도가 2003년이면 초고, 원고를 분명히 computer의 word processor로 편집을 했을 것이고, 그러면 거의 자동적으로 spelling checker가 틀린 것을 지적했을 터인데 아예 그런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인쇄소로 넘긴 듯하다.
읽는데 하도 신경이 쓰이고 해서, 아예 모두 ‘내가 고친’ 것으로 다시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떻게 이런 글이 ‘출판사’의 ‘검열’을 통과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레지오에 ‘누’를 끼치는 것 밖에 되지 않을까? 위에 언급한 조잡한 번역, 일관성 없는 구성, 오자 등등 것들의 예를 나는 나중에 모두 열거를 해서 ‘발표’를 할 예정이다.
올 여름 들어서 첫, ‘강더위’가 시작되었다. ‘강추위’와 비슷한 말 ‘강더위’란 말은 들어본 기억이 없지만 할 수 없이 쓰게 되었다. ‘무더위’ 보다 더 더운 말을 찾기 쉽지 않았다. 지난번 나의 blog에서 요새는 날씨에 대한 뉴스가 조금 주춤 해 졌다고 쓰더라니..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되었다. 지난 4월 달의 날씨에 관한 메가 급 뉴스는 비록 아닐 지라도 이런 찜통더위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바람이 전혀 없이 지독한 습도가 가세한 더위에서 사실 ‘도망’ 갈 곳이 없다. 그늘도 소용이 없으니까.. 유일한 방법은 ‘에너지’를 써서 더위를 ‘뽑아내어야’ 하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에너지를 써서라도 편하게 살아야 하는 현대문명이 별로 맘에 들지 않지만.. 어찌하랴.. 인간은 이렇게 자꾸만 ‘약해’져 가는 것을..
오래 전 고국에서 살 때, 도망갈 수 없는 더위를 겪었던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런대로 ‘즐길만한’ 더위였다. 딱 한번 예외는 있었다. 1972년 여름..서울 세운아파트..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을 못 잤다. 밤에 기온이 거의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나중에 ‘열대야’ 라고 부르게 된 것을 알았지만 그 당시는 처음 겪는 현상이라 적절한 ‘용어’도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무언가 기후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있긴 한 것이다.
그 당시 서울에는 아주 고급 사무실과 건물이 아니면 ‘에어컨’ 이란 것이 없었다. 하물며 일반 주택에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전기선풍기만 있으면 대 만족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보다 훨씬 윤택하게 살았던 일본도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도 역시 전기선풍기로 견딜 만 했다. 그러다가 이곳 미국에 와 보니 이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실내 여름이 우리나라 겨울 실외보다 더 추운 듯 느껴졌으니까.. 일단 그것에 적응되고 나니까.. 이제는 전으로 돌아가기가 참 힘들어졌다. 그것이 인간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분명히 지구는 더워지는 것 같고, 인간은 자꾸 그것을 ‘강제’로 식힌 곳에서 ‘안주’하려고 하고.. 이것도 ‘진화’과정을 통해서 ‘인간 진화가 아닌 퇴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근거가 약한 걱정 같지만.. 하지만 우선 걱정을 놓자.. 길어야 2개월만 견디면 되니까..
THE DA VINCI CODE, 올 여름 들어서 나도 그 ‘흔한’ summer reading을 생각하게 되었다. 왜 여름만 되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이것도 혹시 ‘책 장사’들이 꾸며낸 ‘음모’일까? 좌우지간 여름 전부터 요란하게 이번 여름에 읽어야 할 책들이 요란하게 등장한다. 하기야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때 ‘수입’을 잡아야 타산이 맞게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수시로 책을 읽고 있어서 여름의 독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이색적으로 이것 한 권만은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3년에 나온 책, Dan Brown의 “The Da Vinci Code“. 거의 8년이 지나서 읽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에 Tom Hanks주연의 영화까지 나온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큰 딸 새로니가 책이 처음 나올 당시에 hard-cover로 산 것이고 작은 딸 나라니까지 읽은 후에 나에게 넘어온 것을 아직껏 읽지를 못한 것이다. 사실은 첫 2페이지를 읽고, 그만 손을 놓았다. 너무나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해서 사실 흥미가 조금 떨어진 탓도 있었고.. 역시 흥미 위주로 천주교회, 로마 바티칸을 무슨 ‘비밀과 음모의 집단’처럼 매도한 느낌도 받아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저자의 이러한 식의 사실처럼 느끼게 하려는 ‘소설’의 테크닉이 워낙 정교해서 재미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천주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비방의 재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읽기를 미루는 나를 아이들은 재미있는 듯이 놀려댔다. 한마디로 내가 게으르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영화를 보더니 그런 이야기가 없어졌는데, 이유는 영화가 그 소설을 다 망쳐 놓았다는 말투였다. 이것은 이해가 간다. 소설의 그 깊은 뉴앙스(nuance) 가 영화에서 다시 고스란히 재현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애들은 한결같이 Tom Hanks가 그 주인공인 Robert Langdon의 역할에 잘 맞지 않는다고 우겨댔다. 나는 책도, 영화도 안 보았으니.. 할말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짐작은 하겠다. 어떻게 보면 Indiana Jones같은 역할인데.. 그것은 Harrison Ford가 더 적격이 아닐까? 문제는 Ford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슬픈’ 사실.. 어찌하랴..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또다시 ‘재미없으면’ 아주 이 책에서 손을 놓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더 재미있는’ 잡스러운 일도 많은데 이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무언가 ‘동기 제공’ 이 중요한 것이다. 재미 없을 때 손을 놓아버리면 이제는 다시 읽게 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해결책이 생각보다 쉽게 찾아졌다. RbT, Reading by Typing.. 내가 만든 조잡한 말이다. “맹송맹송”하게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다. Computer에서 typing을 하면서 읽는 방식이다. 이런 idea는 사실 성당에서 자주 보는 성서필사에서 찾았다. 성서를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펜으로 종이에다 쓰면서 읽는 것이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훨씬 집중이 되고 기억에도 더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요새 손으로 장문의 글을 종이에 쓰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지 않은가?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RbT 에는 다른 이점도 있다. 끝이 나면 .’나만의 책’이 하나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무슨 연구재료로 쓰거나 할 때 인용하기도 너무 쉽고, 나만의 ‘근사한’ 책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나의 예감은 맞았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 비해서 속도는 떨어졌지만, 중단되는 ‘사고’는 없었고, 앞으로 없을 듯 하다. 한달 만에 거의 책의 반 정도를 읽게 되었다. 여기에 힘을 얻어 다른 ‘끝까지 읽기 고약한’ 책들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역시 속도는 늦어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계속 읽게 되니까..
현재까지 읽은 이 책, The Da Vinci Code는 비록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 염려스럽긴 하지만 소설로써는 최상급이었다. 우선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읽으며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 여지와, 절대로 책 읽기를 중단하지 못하게 하는 절묘한 수법을 쓴 저자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 ‘사실처럼 느끼게 한 거짓말들’를 어떻게 이 저자는 생각해 내었을까? 정말 할 말을 잊는다. 이 책을 읽을 때 성가신 것 중의 하나는 ‘불어’ 사용이었다. 배경이 프랑스에 많이 있기 때문이고 여자 주인공인 Sophie Neveu가 프랑스 사람이라서 더욱 그런데 문제는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쓰는 것도 힘들고, 발음에서는 완전히 걸린다. 이것은 거의 나의 complex가 되었다. 우선 제대로 발음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지독히 불편하고 창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라도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동학교 졸업 앨범, 내가 1954년4월부터 1960년 2월까지 다니던 정든 서울 재동국민학교의 졸업 앨범이 드디어 ‘해체,스캔’이 되어 computer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PDF format으로 바뀌어서 ISSUU server에 upload가 되었다. 일반적인 browser의 pdf-reader plugin으로 보는 것 보다 훨씬 느낌이 빠르고, 실제로 ‘책’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과연 몇 명이나 자기의 얼굴을 이곳에서 보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