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친구, 야마하 기타

나의 오랜 벗, 야마하 기타 20년만에 목소리를 갈았다
나의 오랜 벗, 야마하 기타 20년만에 목소리를 갈았다

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기타의 줄을 갈았다. 오랜 만이란 것이 과연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20년은 넘었을 것 같다. 아틀란타로 이사를 와서 줄을 간 기억이 전혀 안 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1989년에 이곳에 이사를 왔으니까 20년은 분명히 넘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줄을 안 갈았을까? 쉽게 말해서 ‘사는데 바빠서’, 그러니까 별로 기타를 칠 기회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현재 나의 기타는 1981년경에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살 때 산 $200짜리 중고 “야마하” 통기타(acoustic guitar)이다. 그 전에는 총각 때 시카고에서 심심풀이로 쓰던 싸구려 기타가 있었지만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 싸구려 기타는 1970년대에 여름방학 때마다 시카고에서 택시운전을 하던 서충일 형과 같은 아파트에 살 때 같이 흘러간 노래를 부를 때 톡톡히 한 몫을 했던 것이었다.

그것에 비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 YAMAHA기타는 그 당시 나의 경제사정(그 당시도 가난한 학생부부신세)에 비해서 정말 파격적으로 비싼 것이었다. 그때 빠듯한 사정에 그것을 산 것은 그때 콜럼버스 성당에서 성가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미국인 성가 팀이 모두 베이스와 기타로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가 합세를 한 것이라 우리도 같이 기타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값으로 보아서 나에게는 조그만 ‘가보’가 되었고, 가끔 사람들과 어울릴 때 예전에 즐겨 부르던 folk song, 통기타에 맞는 노래들을 부를 때 이 기타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세월이 지날 수록 그런 기회가 드물게 되었고, 기타는 어디에 ‘쳐 박혀’있는 지도 모를 정도로 수모를 당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찾아내서 조금씩 만지고, 추억을 하고 그렇게 다 잊은 것 같았던 기타 코드(chord)들도 기억해 내면서 추억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 동안 하도 노래를 못 하면서 살아서 그런지 완전히 목이 잠겨있었지만 노력을 하니 조금씩 풀려나갔다. 옛 노래와 그에 맞는 기타 코드들도 하나 둘씩 생각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기억이 나는 곡들을 모두 정리를 해 두고, 더 나아가서 추억의 통기타 folk song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 그런 꿈같은 꿈도 꾸어본다.

 

1970년 4월 13일

On April 13, 1970, Apollo 13, four-fifths of the way to the moon, was crippled when a tank containing liquid oxygen burst. (The astronauts managed to return safely.) — today’s New York Times

오늘 뉴욕타임스 이메일 뉴스를 잠깐 보니 위의 ‘오늘의 역사’ 구절이 눈에 띄였다. 1970년 오늘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유명한 Apollo 13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13이란 숫자가 두 번이나 반복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나를 보게 된다..

어찌 잊으랴.. 뚜렷이 기억을 한다. 나는 그 당시 top news였던 아폴로 13호 폭발사고를 전혀 몰랐던 것을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그 뉴스의 심각성을 아직도 피부로 느끼지 못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 뉴스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이면 지금에 비하면 거의 ‘원시적’인 뉴스 매체, 그러니까 신문, 라디오, 흑백 TV가 전부였던 시절이지만 그것을 못 듣고, 보고 하는 것은 특히 그 나이 (20을 갓 넘은)에 힘들었을 것이다.

1970년 4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운해를 내려다보며..
1970년 4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운해를 내려다보며..

사실, 그 당시 나는 죽마고우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깊은 산중에 있었다. 그렇게 이유는 간단했다. 그 해 초에 아주 오랜만에 재회를 한 원서동 죽마고우, 손용현과, 다른 원서동 친구, 박창희.. 그리고 나 셋은 아직도 눈이 쌓였던 지리산 능선 종주등반 중이었다. 라디오를 가지고 갔지만 뉴스 같은 것을 들을 정도로 편한 등산이 절대로 아니었다. 예상을 뒤엎고, 지리산 주 능선에는 아주 깊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서 걷는 자체가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렸다. 화엄사에서 출발을 해서 노고단을 거쳐서 계속 천왕봉을 향해서 능선을 따라 걷고 걸었다. 그때 처음 주능선 등반의 매력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 유명한 지리산의 운해(雲海)란 것을 눈(雪)과 함께 즐긴 것이다. 그때 생각나는 곳들, 노고단, 토끼봉, 지보등, 세석평전.. 천왕봉에서는 다른 코스로 남원쪽으로 하산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 등반은 그렇게 흔치 않았던 것인지, 하산을 하니까 경찰에서 나와서 입산 기록부에 우리의 이름을 적기도 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속세’에 나와보니 참 기분이 달랐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을 떠난’ 경험을 한 것이다. 그 당시 나이에 일주일 동안 세상 돌아가는 것과 차단이 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으니까. 일주일 동안의 뉴스 중에 아폴로 13호에 큰 사고가 난 것과, 서울의 ‘와우 아파트’가 붕괴된 것들이 있었다. 사실 와우 아파트 사고가 우리에겐 더 큰 뉴스였다. 그때 서울 시장이 김현옥씨였는데 그 사고를 계기로 ‘불도저’ 스타일의 밀어 부치는 행정에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다. 그 것이 1970년 4월 이맘때 쯤이다. 조금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면, 지리산 등반은 나와 박창희가 연세대 전기과 4학년 졸업여행(제주도)을 빼먹고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졸업여행이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지리산 등산이야 그 후에 갈 수도 있었던 것이었지만 졸업여행은 그야말로 딱 한번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이런 후회될 만한 일들이 그 후에도 계속이 되었지만, 어찌하랴.. 그때는 절대로 후회란 것을 생각도 못하던 젊은 시절이었으니 말이지..

그 당시를 회상하면 꼭 생각나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지리산의 고요 속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시끄러운 고향 서울로 돌아와서 위의 등산친구 셋이 어느 다방에서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때 우리의 아지트는 중앙극장의 길과 퇴계로가 만나는 곳에 있는 지하다방(절대로 이름을 잊었다) 이었는데, 손용현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웃기는 것은 얼굴이 전혀 안 보이고 하얀 셔츠의 상체만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투명인간’ 영화의 그런 모습이었다. 이유는 용현이가 원래 얼굴이 조금 거무틱틱한 편인데, 이번에 지리산 종주등반을 할 때 쌓인 눈 때문에 완전히 타버리고, 그 당시 지하다방들이 대부분 어두워서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박창희가 나중에 와서 똑같이 그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고, 두고두고 그것이 우리의 ‘일화’로 남게 되었다. 그 당시 다방에서는 손용현이 제일 좋아하고, 우리도 열광을 하던 CCR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Who’ll Stop the Rain이 우렁차게 나오고 있었다.

 

Who’ll Stop the RainCreedence Clearwater Revival

 

4월 초의 잡상(雜想)들

나이에 따른 기후의 변화: 봄이 본격적으로 맛을 보여주던 3월 중순 한때의 따뜻함이 거짓말처럼 거의 빙점으로 떨어지는 꽃 시샘 날씨로 바뀌어서 며칠이 되었다. 이제는 이곳의 날씨에 웬만큼 익숙해져서 그런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젊었을 때는 그저 무관심하게 보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가는 시계처럼 변하는 기후의 거대한 pattern을 그야말로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인생의 연륜이라는 것일까? 60대에 느끼는 기후는 분명히 20대가 느끼는 기후와 다를 것 같다. 똑 같은 기후를 사람마다, 나이마다, 지역마다, 전혀 다르게 느끼는 것은 분명 비과학적인 발상이지만.. 어찌하랴..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닐까. 요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씨는 어떤 것일까?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싸늘하게 비가 내리는 그런 날이 제일 좋다. 나와 TV에 나오는 weatherperson의 의견과는 ‘공식적으로 정 반대’가 된다. 이렇게 사람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피조물인 것이다.

 

레지오와 나의 현재: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 Legion of Mary] 선서를 한지 2달이 되었다. 3개월 대기단원을 포함하면 레지오 단원이 된 것이 벌써 5개월이 되어간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변했을까? 얼마나 레지오 중심의 생활이 나를 바꾸고 있을까? 매주 화요일 정기회합에 참석하는 것은 군대와 같은 규율에 따른 의무라서 기본중의 기본에 속하지만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의무가 되었다. 별로 정기적인 운전을 하지를 않았던 지난 10년간의 ‘동면’을 깨어버린 것이다. 비록 대다수가 자매님들이지만 많은 ‘사람’을, 그것도 ‘한국인’들을 만나고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외국에 온 기분까지 느끼며 불편한 적도 많았지만 그 동안 많이 적응이 되어가고 있다.

성모님께 가까이 가는 지름길인 정기적인 묵주기도.. 어떻게 하면 성실하게, 경건하게, 많이 바칠 수 있는가.. 조금씩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다. 밤 9시30분에 정기적으로 우리 부부가 하는 것 이외에, YMCA gym에서 운동을 하면서 하는 것, 아침에 Tobey(dog)와 subdivision(우리 동네)을 산책하면서 하는 것, 이제는 드디어 운전을 할 때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잘 하면 일주일에 100단의 ‘기록’을 깨기도 했다. 이런 반복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의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보라.. 모두들 다 틀렸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바보’들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 동안 나보다 뒤에 입단한 ‘후배 단원’이 들어 오기도 했다. 역시 ‘자매님’이다. 현재 우리 단원들은 내가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좋은 분들이라 이런 상태가 계속되기만 바라고 있다.

 

본당협조와 아틀란타 전산팀: 레지오 입단에 따라서 본당협조에도 신경을 더 쓰게 되었다. 비록 주일미사는 우리가 사는 곳 근처의 미국본당(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 나가지만 (거의 10년도 넘게), 역시 본당협조는 레지오가 속하는 아틀란타 순교자성당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지난 몇 달 동안 속한 곳이 본당 ‘전산관리팀’이었다. 줄여서 전산팀, 아니면 웹팀이라고 불린다. 성당주보에 새 팀 멤버를 찾는다는 글을 보고 자원을 한 것이 벌써 5개월이 되었다.

기대와 현실의 rollercoaster를 타고 갈등을 계속하고 있고, 이곳에서 나의 역할이 조금은 불투명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 일은 레지오의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을 했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전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절대로 감정적인 결단은 최대한 피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을 해서 벌써 몇 명이 도중하차를 했지만 나는 아직도 건재하다. 현재 나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이다. 현재 core member들에게 큰 불만은 없다. 하지만 skill set, technical background, work experience등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기존멤버들을 내가 설득하거나 할 자신이 없으면 결국은 내가 적응을 해야 하는 현실이다. 내가 보기에 현재 성당의 system이 재정상태에 걸 맞는 ‘최적’ 의 IT system과는 거리가 멀다. 나의 역할을 이것을 조금 더 professional level로 올리는 것인데.. 이것은 technical challenge라기 보다는 political challenge에 더 가깝다. 하지만, 나는 현재 그것을 쉽게 풀 자신이 없다. 그래도 레지오의 정신으로 하면 조금은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올해 우리 집, 지구 온난화의 첫 희생양들..

지난 3월 26일 토요일 밤에 완전히 ‘열대성’ 폭풍우가 밤새 쏟아졌다. 이제는 이런 흔히 말하는 ‘이상(異常)기후’에 별로 놀라지는 않는다. 이런 ‘이상기후’가 이제는 거의 ‘정상기후’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기상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global warming의 한 증상일 것이다. 근년에 들어서 3월 중에 거의 이런 것들이 온 것을 기억을 한다. 하지만 이번 것은 그 정도가 심해서.. 천둥과 벼락이 밤새 시끄러웠다. 다행히 바람은 상대적으로 덜 해서 겉보기에 피해는 별것들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둥과, 벼락과.. 우리 집에 있는 super network system lab이었다. 이제까지는 기껏해야 정전으로 인한 불편함 정도로 그쳤었는데 이번에는 power system에 아주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집 근처 Roswell Road 확장 공사로 electrical power system도 큰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의 자랑인 super computer network lab의 모든 ethernet ports들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servers (physical, virtual)/PC들을 reboot하면 (예전과 같이) 해결이 될 줄로 낙관을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우선, ADSL modem(ActionTec)이 완전히 못쓰게 되었고, 그것에 연결이 된 Linksys DD-WRT router의 WAN port(ethernet)가 못쓰게 되었다. 그러니 Internet이 완전히 shutdown이 된 것이다.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3월 26일 벼락의 희생물들.. aDSL modem, dd-wrt Router, VoIP ATA..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줄줄이 그것과 직접 연결이 된 ethernet port가 있는 것들이 다 문제가 생겼다. 제일 가까이 있었던 network switch 들이 제대로 function을 못하고 심지어는 VOIP phone ATA(analog telephone adaptor)와 이번에 새로 산 KVM virtual server (Proxmox PVE) motherboard의 gigabit ethernet port까지 electrical spike을 맞아서 불능이 되어 버렸다. 이것들을 다시 test하고 repair하는 것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보다는 시간이 문제였다. garage에 있는 server closet과 attic에 있는 mini distribution box를 수없이 들락거리는 것이 웬만한 운동보다 힘 들었던 것이다. 거의 일주일이 걸려서 이제는 조금 안정이 된 셈이다. 이번 사고의 교훈은 간단했다. ‘simple is beautiful‘.. 이제는 복잡한 것이 자랑이 아니고 ‘사고의 원인’이란 것.. network device를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하고, 다음은 더 막강한 방어 수단으로 better surge protector를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의 기후는 이제 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드디어..아틀란타에도 봄이..

다시 싸늘해진 아틀란타의 3월 말: 일 주일을 넘게 거의 초여름의 맛을 미리 보여주던 날씨가 역시 ‘평균치’를 유지하려는 듯 급강하하여 오늘 아침은 거의 빙점까지 떨어지는 추위가 되었다. 아래층은 결국 central heating이 요란하게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맑은 날씨에 바람이 없어서 느낌은 역시 봄이다.

오래 전에 고국에서 느끼던 3월의 날씨도 사실 이와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 아틀란타는 많은 것이 서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뚜렷한 4계절, 지형, 나무, 꽃들의 종류 등등이 그렇다. 다만 연 평균기온이 조금 높다는 것인데.. 사실 서울의 평균기온도 그 동안 (30년) 조금은 올랐을 것 같아서 결국은 비슷하지 않을까? 3월 초부터 Bradford pear,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등이 이미 다 피고 졌다. 지금은 벗 꽃이 조금씩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옛날 서울에서 창경원의 벗 꽃놀이가 4월 초에 있었으니까.. 이것도 시기적으로 비슷하구나.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이 아틀란타지역에 너무나 많은 소나무들.. 이것 때문에 이곳의 봄은 꽃가루가 지독하다. 특히 바람이 잘 불지 않으면 완전한 비상사태가 된다. 나는 다행히 꽃가루 앨러지가 별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한달 동안 고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5월 중순까지 계속 된다.

하지만 4월과 5월은 역시 찬란한 계절.. 비가 조금씩 오기만 하면 너무나 정서적인, 시적인 계절.. 전 이대음대 교수 김순애씨의 ‘4월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추억이 계절이 된다. 언젠가 부터 나는 4월과 5월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이 되어서 그런지.. 특히 성모성월, 어린이 날 (일본의 5월5일 어린이날을 그대로?) 어머니 날(후에 어버이날로 바뀐 것.. 참 마음에 들지 않음) 의 5월 달이 더욱 기다려진다. 그 중에서, 특히 5월 1일은 ‘friends forever’를 생각하게 하는, First of May.. 물론 이것은 The Bee Gees의 1960년대 pop song에 불과하지만 나와 나의 몇 친구들에게는 거의 암호와도 같은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그래서 5월은 더욱 나에게는 빛나는 달이 되어간다.

 

First of May – Bee Gees, 1969 

이 Bee Gees의 classic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사보다는 감미롭고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진 melody에 매료가 되었었다. 그런 나이였다. 하지만 그 후 그 가사를 음미하면서 이제는 가사에 깊이 빠져든다. 가사와 곡이 어쩌면 그렇게도 멋지게 조화를 이룰까.. 이런 것이 진정한 classic이 아닐까.. 이 곡 뒤에 항상 보이는 흩어져 인생을 살아온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래서 5월1일은 Friends Forever의 날이 되어간다.

4월의 노래 – 박목월 시, 김순애 작곡 

서울 중앙고 1학년 때(1963년) 담임 김대붕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곡이라며 가르쳐 주신 또 다른 불후의 명곡.. 어찌 잊으랴. 4월이 되면 어찌나 이 곡을 배울 때가 그립던지.. 또한 타계하신 김대붕 선생님도 함께 그때의 행복하고, 순진 하던 시절의 찬란했던 4월의 봄 동산을 그린다.

 

 

나의 세대: 20 something, 40 years later

20 something, 40 years later.. 40년 전의 20대와 오늘날의 20대는 과연 무엇이 변했나? 특히 나의 20대와 요새의 20대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찔한’ 변화다. 엄청난 변화. 각 세대마다 조금 특징을 지울 수 있는 역사의 흐름이 있을  것이다. 이곳 미국에서 보면,  나의 나이는 baby boomer generation 의 거의 시작에 속한다. 공식적으로는 태어난 해가 1946년부터 1964년까지가 그 세대에 속한다.

Baby boomer뒤는 어떻게 되는가? 별로 큰 특징이 없다. 그저 gen-X, gen-Y 등으로 불린다.  일본에서도 미국에 비슷한 baby boomer 세대가 있었다. 2차대전 패전 후의 시기다. 단까이 세대로 불리는 세대가 거기에 속한다. 하지만, 나와 같이 20 something의 시기가 한국과 미국으로 갈려 있으면 사실 세대의 특징이 더 복잡해 질듯 하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미국의 세대별 이름은 출생 년도에 따라서 다음과 같다.

2000/2001-Present New Silent Generation or Generation Z
1980-2000 Millennials or Generation Y
1965-1979 Generation X
1946-1964 Baby Boom
1925-1945 Silent Generation
1900-1924 G.I. Generation

 

나는 잘 모르지만 한국도 이것과 비슷한 세대별 이름이 있을 듯하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이름의 세대로 불릴까,궁금하기도 하다. 절대로 baby boomer는 아닐 것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 갑자기 출산율이 늘어났다는 얘기는 못 들어 보았으니까. 6.25전쟁을 선두로 가족과 친척을 잃어버리고 전쟁 후의 찌든 가난을 다 겪고, 살인적인 입시, 취직경쟁을 몸의 전체로 경험을 하며,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던 어떻게 보면 이곳의 great generation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일본의 같은 나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비록 패전 후 또 다른 전쟁은 없었지만 이들도 우리에 비해서 그렇게 잘 산 것은 아니었다. 찌들은 가난, 기아를 보았고 미친 듯이 일을 해서 그들의 경제기적의 주춧돌이 되었던 세대다.

미국의 baby boomer는 전혀 다르다. 아니 극과 극이다. 풍요와 자유, 반항, 반전, 방종..등등으로 이어지는 세대인 것 같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초강대국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초강대국이 되었다. 자기의 부모세대들이 겪은 실업이나  세계 대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자랐다. 비록 핵전쟁의 공포를 안고 자랐지만 거의 무제한적인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믿었다. 하지만 이들도 월남전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부모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치렀다. 반전과 인종간의 평등 같은 차원이 높은 이상이 현실화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예전에 don’t trust over 40s..란 말이 유행했었다. 나이가 드는 것 중, 아주 부정적인 면을 부각한 말이다. 연륜과 경험에 반비례해서 늘어나는 권모술수와 거짓말, 능글맞음, 옹고집..등등 수도 없이 많은 ‘꼰대 근성’.. 얼마나 우리들 그런 것들을 경멸했던가? 이제 우리가 그런 것들을 그대로 뒤집어 쓰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말도 있다. 쉽게 말해서 stupid digital generation이라고나 할까.. 기초, 근본적인 교육의 바탕이 전혀 없이 벼락부자가 되는 Internet generation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혀 기본이 되지 않은 ‘철없는 애’들이 $$$에 미쳐서 날뛰는 그런 세대를 말한다. 이들의 half-life도 지난 세대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짧다.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과연 이 ‘철없는 세대’가 ‘성장’을 해서 사회의 중견세대가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이끌어 나갈까.. 참.. 한숨부터 나온다.

 

 

 

 

매디슨의 추억 (1), 1988~89

매디슨의 첫 아파트에서, 1988년 가을
매디슨의 첫 아파트에서, 1988년 가을

Madison, Wisconsin.. 매디슨 위스컨신. 위스컨신주의 수도, 위스컨신대학교 매디슨 캠퍼스가 있는 곳. 거의 찰나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심지어는 전설적으로도 느껴지는 위스컨신 주의 수도에 우리식구는 1988년과 1989년 사이에 1년이 채 안 되게 살았다. 전에 살았던 오하이오 주의 콜럼버스에 비해서 워낙 짧은 기간 살았던 이유인지 그곳이 지금 무섭게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거의 다 잊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는 조금씩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리가 매디슨으로 이사를 간 직접적인 이유는 나의 새 직장 때문이었다. 그 당시 콜럼버스의 나의 회사, Toledo Scales Co. (주로 weighing scale을 만들던 곳)에서 나는 layoff가 되어서 열심히 새 직장을 찾고 있었고 이곳 저곳으로 job interview를 하며 . 나는 그때 새로운 직장으로 두 곳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Oklahoma City에 있는 hard disk maker SEAGATE였고, 다른 곳이 Madison에 있던 Nicolet Instruments였다. 그러니까 두 군데서 job offer를 받은 것이다.

Oklahoma City는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조금 익숙한 곳이고 기후도 훨씬 따뜻한 곳이고 Madison은 정 반대로 아주 추운 곳이었고, 오래 전 Chicago에 있을 때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99%는 모두 다 Madison으로 갈 것을 권했다. 왜 그러냐고 하면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었다. SEAGATE는 99% computer hardware company라서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있었지만 MadisonNicolet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내가 갈 곳은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audio diagnostic division이었다. 쉽게 말하면 최첨단 보청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매디슨 위스컨신 주립대 중앙고 동창 후배들과, 1988년 가을
매디슨 위스컨신 주립대 중앙고 동창 후배들과, 1988년 가을, 뒷줄 왼쪽의 전기석 후배는 곧 그곳을 떠났다

결국은 Madison으로 가기로 정했는데 제일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Nicolet Instrument는 원래는 digital storage oscilloscope를 만드는 회사인데 이 audio diagnostic쪽은 biomedical분야라서 그 회사로써도 조금 모험을 하는 셈이었다. 이 회사는 위치가 바로 위스컨신대학 매디슨 캠퍼스의 바로 옆에 있어서 그쪽 연구단체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 새로운audio diagnostic venture도 이곳 의과대학 교수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직업의 안정보다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조금 더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린 것이다.

결혼 후 그것도 조그만 아이 둘을 데리고 가족이 이사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의 나이가 40정도였으니 사실 힘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혼자가’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미지의 서부를 개척하는 조금은 불안한 심정이었다. 그때 조금이나마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있었다면 조금은 불이 붙었던 나의 가톨릭 신앙심과, 모교의 동창들이었다. 한마디로 처음 가는 매디슨이지만 그곳에 한인천주교 공동체가 있으리라는 희망과, 혹시 큰 학교가 있으니까 중앙이나 연세대 동문들도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추측은 맞았다. 둘 다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Internet으로 googling을 10분만 하면 다 찾을 수 있을 정보들.. 그 당시는 물론 다 수소문을 해서 찾아야 했다. 그래서 둘 다 연락처를 찾았다. 먼저 중앙고 동창회를 찾으니 65회 전기석 후배의 이름이 나왔다. 물론 유학생이었다. 역시 동창은 좋은 것인가.. 그를 통해서 그곳의 여러 가지의 정보를 다 얻을 수 있었다. 중앙고 후배들이 몇 명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인 천주교회 공동체도 역시 유학생이었던 유왕식 씨를 통해서 연락이 되었다. 그곳 공동체는 대부분 학생이 주축이 되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사실은 매디슨에 있던 세계신용조합(Credit Union)의 총본부에서 일을 하시던 강정열 박사님께서 그곳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정신적인 지주로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곳은 밀워키(Milwaukee, WI) 본당의 공소였는데 본당의 김정웅 주임신부께서 정기적으로 오셔서 학생신자를 중심으로 목회를 하고 계셨다.

이렇게 해서 사실 그곳으로 이사를 가서도 우리가족은 큰 어려움 없이 정착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한국인들의 끈끈한 학교와 신앙의 ‘인연’들은 지금 생각해도 자랑할만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없었으면 참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나는 마음 놓고 먼저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것에 온 신경을 쓸 수가 있었다.

매디슨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를 보는 새로니와 나라니
매디슨은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를 보는 새로니와 나라니, 새로니는 아직도 그 곳을 기억한다.

매디슨은 여러모로 내가 살던 콜럼버스와 비슷했지만 도시의 규모는 콜럼버스보다는 작았다. 둘 다 주의 수도였고, Big Ten 계열의 큼직한 주립대학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 비교적 깨끗하고 교육도시였던 점, 아주 유명한 기업이 없었다는 것도 비슷했다. 심지어는 Mid West의 냄새까지, 날씨까지 비슷했다. 차이는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훨씬 혹독하게 추운 곳이라는 것과 매디슨이 훨씬 더 정치적, 사회적으로 liberal, progressive한 색갈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매디슨은 콜럼버스 보다 훨씬 ‘좌익’적인 곳이다. 농담으로 옛날 소련수상 후르시쵸프가 그곳에 왔다가 “소련보다 더한 빨갱이” 라서 울고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매디슨 시내에서는 불법마약이 허용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 정도로 진보적인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은 시간이 좀 걸렸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혼자서 먼저 ‘기러기 아빠’노릇을 몇 주간 한 셈이다. 나 혼자 먼저 와서 아파트에서 혼자 살면서 출근을 하였다. 지리적으로 매디슨은 콜럼버스보다 아주 작았다. 중심부에는 웬만한 작은 마을 크기의 호수가 몇 개나 있었다. 큰 도로로는 동서로 달리는 간선도로 (Beltline Highway)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Interstate Highway가 이 도시에는 없는 것이다. 지형은 조금 낮은 언덕이 조금 있을 뿐 그런대로 평지에 가까웠지만 도로는 그렇지 않았다. 바둑판형의 규칙적인 도로에 익숙한 나에게 이곳은 서울의 구불거리는 도로가 연상이 되었다. 주소만 가지고 위치를 찾는 것이 더 힘든 것이다. 특히 밤에 주소만 가지고 집을 찾는 것은 조금 모험에 가까울 정도였다.

아파트 근처의 호수가에서 새로니, 나라니와 함께..
아파트 근처의 호수가에서 새로니, 나라니와 함께..

약 보름간 혼자 살다가 다시 콜럼버스로 돌아와 대형 트럭으로 짐을 다 부쳤다. 그리고 완전히 온 가족이 다 매디슨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가 1988년 8월 하순 경이었다. 나는 혼자 살던 보름 동안에 이미 중앙동창 후배들과 만나서 저녁을 했었다. 특히 65회 후배 전기석의 도움을 받았고, 후배 강태중은 University of Wisconsin의 campus를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기도 했다. 곧바로 우리는 매디슨의 한인천주교 공동체에서 미사를 드릴 수도 있었다. 교민이 거의 없고 거의 다 유학생인 관계로 따로 교회가 없었고 위스컨신대학 내에 있는 Newman Center에서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었다. 신부님은 근처에 있는 밀워키 한인천주교회의 예수회 김정웅 신부님이셨는데 그 분은 밀워키에 있는 위스컨신대학에서 Computer Science를 공부하시는 분이었다. 신부님이 어떻게 그런 공부를 하시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 신학과 과학을 같이 한다는 것이 그때는 조금 이해가 잘 되지를 않았다.

그 해 가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려서 그것을 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열심히 TV 녹화도 하곤 했다. 가을은 짧았고 곧 겨울이 왔다. 완전히 모든 것이 얼어붙는 시베리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겨울이었다. 모든 것들이 실내로 활동이 옮겨지는데 이곳은 아주 모든 것들이 철저히 월동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이 위스컨신대학 캠퍼스에 있는 실내 테니스 코트였다. 얼마나 그 시설이 거대한 지 모른다. 겨울이 워낙 춥고 길다 보니까 이 정도의 시설 투자는 이해가 갔다. 그곳에서 중앙 후배들과 주말이면 그 추운 겨울에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당시 우리부부는 아주 신앙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곳에 가자마자 교회공동체에 적극 참여를 했고, 그 결과 정기적인 성경공부에도 나가게 되었다. 이곳도 역시 유학생중심의 모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유일한 비유학생은 나와 강정열 박사님 댁 식구가 전부였으니까. (계속)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최근 몇 개월.. 참 세상이 숨차게도 돌아간다.. 특히 세계적인 정치적인 사건들.. 보통 때 상상도 못했던 큼직한 뉴스들.. 누가 이집트가 그렇게 쉽고, 급작스럽게 ‘민주화’가 될 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모든 것들이 1월 쯤부터 시작이 되었나? 누가 누가 그 조그만 튜니시아의 한 서민의 “불합리한 공무원의 억압”에 반발해서 분신자살을 한 것이 모든 것의 불씨가 될 줄을 누가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침묵의 다수가 그곳에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가 그렇게 오랫동안 잠자고 있다가 그런 계기로 터진 것이다.

리비아의 mad dog
리비아의 mad dog

그곳에 있던 거의 비슷한 수준의 독재정권 국가들..전염병처럼 퍼져나가 제일 큰 나라 이집트까지 퍼졌지만 누가 그렇게 모든 것들이 소설처럼 풀려나갈 줄 알았겠는가? 한국만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수십 년이나 걸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게 쉽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너무나 오래 동안 참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 다음 차례가 리비아..인데, 안타깝게도 이곳은 이집트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이 되었다. 가다피.. 무바락이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동안 저지른 일과 무수한 적들이 있음을 알고 그렇게 쉽게 항복을 할 리가 없다. 운이 좋았는지 결사적으로 반기를 제압하더니 거의 성공을 할 찰라.. 결국은 나토를 중심으로 최후의 사태를 막으려는 총 출동.. 이런 대형 뉴스들이 끊임이 없다.

 

그것들과는 전혀 종류가 다른 초대형 천재지변.. 일본의 3-11 대지진과 그에 따른 해일(쓰나미), 최악의 원전사고.. 이런 것들이 어찌 이렇게 끊임이 없을까?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젊었을 당시의 초대형 뉴스는 사실 별것이 없었다. 그 동안 나에게 제일 큰 뉴스는 ‘나의 살아 생전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던’ 소련연방(그 당시는 소련이라고 불렀음)의 붕괴’였다. 이것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그 ‘사건’이후 불가능한 일은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확률이 아주 낮아도 절대 제로가 아닌 한 ‘장담’ 못한다는 말이다.

이번 일본의 대형 재난의 경우, 나는 오래 전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며 일본의 재난 뉴스를 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2007년 이후부터 일본을 보는 나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그 해, 그러니까.. 2007년 봄쯤이었나.. 그때부터 나는 아주 우연히, 뜻하지 않게 일본의 TV drama를 한국의 Clubbox 로 부터 download해서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는 그곳을 통해서 아주 가끔 한국의 video를 보긴 했지만 사실 재미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Clubbox중에 “일마래”라는 곳을 우연히 보고 혹시 볼만한 것이 있나..하고 거의 random으로 하나를 골라서 보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거의 classic으로 기억되는 “간호사 아오이(Ns´あおい)”였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나에게 항상 관심 밖에 있었던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 나의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항상 복잡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나라, 일본의 실상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100% 그들의 TV program만 보게 되었다. 재미보다는 공부하는 자세로 보게 되어서, 쉽게 싫증이 나지는 않았다. 그것들을 보면서 잘못하면 아주 큰 오해를 남기고 갈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방적인 반일교육과, 불균형적인 경제격차 등으로 거의 의도적으로 일본을 무관심한 자세로 살아온 것이 조금 후회가 되었지만, 사실 이제라도 알아가고 있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특히 나와 같은 세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시기적으로 다행인 것이 그들도 한류의 영향으로 아마도 나와 같이 새로운 눈으로 상대방을 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명언을 상기시킨다. 그 동안 새로 알고, 느끼게 된 오해가 풀린 것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나는 그들이 2차 대전 중에 민간인들이 얼마나 많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았나 하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그런 고통을 당한 그들.. 우리 민족에게 많은 고통을 준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그것을 주도한 것은 사실 그들의 군국주의자들이 아니던가? 멋모르고 따르던 국민, 신민들을 일방적으로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도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인 것이다. 그것을 이번 3-11 재난에서 또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은 그들을 정말 동정적인 눈으로 보며 슬픔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TIME magazine의 cover
TIME magazine의 cover, 현재 일본인들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우미관, 문화극장, 아데네 극장..

우미관, 문화극장, 아데네 극장.. 19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서 내가 즐겨 다녔던 극장들의 이름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또래로 서울에서 살았으면 분명히 이 이름들을 기억할 것이다. 정확하게 이 극장들의 역사는 잘 모른다. 그저 나의 기억에 항상 그곳에 있었던 것 뿐이다. 더불어 이 극장들은 소위 말하는 일류 개봉관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장료가 비교적 싼 편이었다. 종로2가 화신 백화점 바른쪽 옆 골목에 있었던 우미관, 낙원동 북쪽, 덕성여대 바로 앞, 천도교회관 바로 옆에 있었던 문화극장, 퇴계로 대한극장 길 건너 편 골목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 그 많은 극장 중에서도 이 세 극장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 그곳에서 많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는 주옥 같은 영화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미관과 아데네 극장은 거의 외국영화만 상영을 했고, 문화극장은 거의 국산영화만 상영을 했다. 다만 문화극장은 아주 가끔 연극도 곁들여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미관은 외화를 좋아하는 일반 대중, 문화극장은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일반인 대상이었는데, 아데네 극장만은 조금 특이하게 중고등 학생들이 주 관객이었다. 그러니까 아데네 극장만은 항상 학생입장이 가능하게 검열이 된 영화만 보여준 셈이다. 그 당시 사회, 경제수준으로 이런 중고등학생을 배려한 사업은 지금 생각해도 참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다른 극장은 대부분 ‘학생 입장 불가’ 라는 것으로 ‘성인용’ 영화를 구별하였다. 성인용 영화라 해도 요새 말하는 XXX 급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그저 조금이라도 사회기준으로 보아서 ‘낯을 붉히게’하는 것이 ‘성인용’ 영화였다.

이 세 극장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가고 좋아했던 곳이 바로 우미관이었다. 이곳이 그 당시 유행하던 미국, 그러니까 Hollywood급의 ‘멋있던’ 영화만 보여주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일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 대한극장, 중앙극장 같은 곳에서 이미 보여준 것들이 이곳에서 다시 상영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처음 본 영화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쯤(1958년 쯤) 본”타잔과 잃어버린 탐험대” 라는 영화였다. 그 당시는 서부영화와 타잔 영화가 유행을 할 때였다. 그 많은 것 중에 이것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영화를 보러 갈 때의 과정이 뚜렷이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때는 영화가 들어오면 제일 손쉽게 알 수 있는 광고매체가 영화벽보였다. 가게의 벽이나 길거리의 벽에 붙여놓은 poster같은 것이었다. 그때 “타잔과 잃어버린.. 어쩌구” 하는 영화벽보를 보고 그것을 보고 싶었는데.. “타잔과 잃어버린..어쩌구” 하는 제목 중에 “어쩌구” 하는 대목이 한자로 쓰여있었다. 그것이 바로 “탐험대”였는데 그것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극장을 가겠다고 돈을 달라면서 영화 이름을 “타잔과 잃어버린 코끼리“라고 둘러 댔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촌스러운’ 영화 제목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기는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미국 영화의 마력과 위력에 빨려 들어갔다. 대부분 국산영화는 우리 같은 어린이들이 보아도 유치하기 이를 데 없던 그런 시절이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비록 개봉관보다는 입장료가 쌌겠지만 우리 같은 코흘리개 국민학생에게는 그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 싸게 표를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가게에 붙여놓은 영화포스터에 따라 나오는 무료입장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포스터를 붙여놓은 가게에서 아주 헐값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잔꾀를 동원해서 참 많이 영화를 보았다. TV가 없던 그 당시 만화와 더불어 우리에게 살 맛을 준 것이 이 미국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오디 머피, 게리 쿠퍼, 버트 란카스타, 아란 랏드 주연‘베라크루즈’, ‘쉐인’ 같은 서부명화들, 로버트 밋첨 주연의 ‘상과 하’ 같은 2차 대전 전쟁영화들, 그리고 프랑크 시나트라, 케리 그란트 주연의 ‘자랑과 정열’ 같은 유럽풍의 사극영화들..

그때 본 영화들을 미국에 오면서 쥐 잡듯이 찾아서 TV로 다시 보거나, video tape등으로 다시 볼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 집 식구들, 특히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자라게 되었다. 거의 50년대의 영화들이었으니, 아이들에게는 완전히 ‘활동사진’ 류의 화석 같은 느낌이었겠지만 미국의 그 당시를 공부할 수 있게 해준 ‘역사적’인 가치가 없지도 않았다.

아데네 극장 개관 광고, 1961

1961년 12월 초 개관 된 아데네 극장의 광고, 그 당시에는 미국영화 이외에도 가끔 여기에 보이는 유럽쪽의 ‘명화’들도 상영 되곤 했다. 광고를 자세히 보면, 화폐의 단위가 ‘원’이 아니고 ‘환’.. 1962년 화폐개혁 때 ‘원’으로 바뀌었다.

퇴계로에 있었던 아데네 극장은 주로 중,고등학교 다닐 때 많이 갔다. 그곳에서는 주로 외국영화를 많이 했지만 가끔 국내영화도 보여 주곤 했다. 절대로 학교 선생님에게 잡히지 않는 곳이라는 장점이 있어서 아주 어깨를 쭉~~펴고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서 많이 본 영화들은 주로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영화들이었다. 아깝게도 그 영화들의 이름이 생각 나지 않는다. 이것들과 대조적인 곳이 바로 낙원동에 있었던 문화극장이었다. 이곳은 정말 ‘서민’의 냄새가 풀풀 나던 곳이었다. 100% 국내 영화만 상영하였고, 가끔 연극도 보여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연극이란 것을 보게 되었다. 주로 국민학교 때 많이 갔는데, 내가 살던 가회동에서 정말 가까운 곳이어서 더욱 편했다.

이곳에는 참 기억에 많이 남는 추억들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 당시 전쟁 후 가난에 찌들었던 국민들을 즐겁게 해 주었던 코메디 듀오가 있었는데 바로 “뚱뚱이와 홀쭉이“였다. 뚱뚱이는 “양훈”, 홀쭉이는 “양석천” 두 분이었는데 둘 다 우연히 양씨였지만 한자가 같지를 않았다. 이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어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내가 문화극장에서 본 것이 “천지유정“이란 홍콩 현지에서 찍은 코메디 영화였다. 물론 흑백영화였다. 그것을 그때 집에서 밥을 해주며 같이 살던 ‘필동 아줌마’와 누나, 셋이서 아침에 가서 보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또 보고 싶어서 나만 혼자 남아서 또 보게 되었다. 그렇게 보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을 보게 되었다. 같은 영화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더욱 그랬다. 결국은 저녁 무렵에 필동아줌마가 극장으로 들어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갔다. 몇 번을 계속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을 정도로 하루 종일 본 것이다. 이것이 두고 두고 우리 집의 얘기 거리가 되었다. 덕분에 그 영화는 아직도 눈에 선할 정도로 뚜렷이 머리에 남아있다. 아직도 나는 이 세 극장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 가난하고 순진하던 시절 이곳들은 사실 나에게 거의 마음의 등대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레지오 선서..

어제 드디어 나는 레지오 마리애의 정식 단원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천주교회 소속,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에서 레지오 입단 선서를 한 것이다. 원래는 지난 주에 할 예정이었는데 그날 감기로 인해서 회합(meeting)을 빠진 관계로 어제 한 것이었다.

레지오의 첫 회합에 참가하기 시작한지 3개월이 넘어서, 대기기간이 지나면 예비단원에서 정단원이 되는 레지오 선서(promise)를 할 자격이 생긴다. 나는 그것을 어제 한 것이다. 비록 간단하게 레지오 교본에 있는 선서문을 읽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에게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나는 첫 회합 참가 이후 한번도 선서를 일부러 미루거나 안 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 경험에 미루어 이것도 생각처럼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다. 나의 마음이 갑자기 변한다거나, 무슨 사고가 생긴다거나..하는 조금 극단적인 예외의 가능성..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부정적인 생각들이다.

선서를 하기 바로 전에 지도신부님, 안정호 신부님이 들어오셔서 아주 특별한 timing이 되었다. 신부님 보시는 앞에서 선서를 하고 곧 이어서 강복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 있던 단원들이 조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귀 띰 해 주었다. 이래서 나의 레지오 시작은 아주 좋은 기분으로 시작이 된 셈이다. 게다가 끝나고 나서 근처에 있는 식당에 모두 모여서 즐거운 점심도 즐기고.. 참 좋은 날이었다.

 

Parade of new tech toys..

우리 집은 big screen TV가 “아직도” 없다. $$$도 그렇지만 사실은 우리부부가 거의 모든 시간을 home office desk에서 보내고 있어서 안락한 couch같은 데서 TV를 보는 시간이 거의 없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big screen sports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football같은 것.. 둘 다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big screen으로 movie같은 것을 보는 것 나쁘진 않지만 ‘우선순위’에서 아주 밑에 있는 셈이다. 하지만 가끔, 필요할 때, broadcast TV를 보고 싶을 때는 우리는 desktop pc로 TV를 보는 셈이다. PC에서 TV를 보는 것은 PC TV tuner adapter를 쓰면 간단하다.

HDHomeRun network TV tuner by SiliconDust
HDHomeRun network TV tuner by SiliconDust

문제는 미국에서 broadcast TV(over the air)가 작년 초부터 100% digital로 바뀌어서 그것들이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이 된 것이었다. 물론 analog VCR을 연결하면 전에 녹화가 된 video를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방송은 못 보는 것이다. 그래서 ATSC (미국 digital TV standard) tuner adapter를 또 사야 했다. 과도기에는 미국정부에서 거의 공짜로 준 digital converter를 써 보았는데.. 역시 화면의 질이 엉망이었다. 전에 쓰던 analog TV를 계속 쓰게 하려는 것이 이 converter의 주목적이니까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것을 digital monitor에 연결을 하면 정말 못 보아준다. 그래서 부지런히 digital tuner adapter를 찾았는데.. 이것이 천차만별로 종류가 많았다. 제일 간단한 것이 usb tuner인데, 믿지 못할 정도로 hardware가 작고, 간단하다. 하지만 그만큼 문제도 많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pc의 horsepower가 상당히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usb interface는 거의 pc의 cpu가 모든 video processing을 하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Laptop as a poor man's HDTV, not bad..
Laptop as a poor man’s HDTV, not bad..

다행히 연숙의 pc는 그런대로 이것을 잘 받아주어서 ‘무난히’ tv program을 볼 수가 있었다. 문제는 나의 pc하고는 ‘절대로’ 맞지를 않았다는 사실이다. tv tuner 자체가 거의 software로 drive되기 때문에 각각의 pc마다 ‘절대로’ setup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거의 일년 동안 desktop에서 tv를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즐겨보던 PBS program(public TV)들을 자주 못 보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우연히 newegg.com에서 새로 나오는 network connected TV tuner box를 보게 되었다. 사실 이런 tuner box를 나는 처음부터 찾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에는 그것이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아주 비쌌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50정도로 떨어진 것이다. 이름이 별로 sexy하진 않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HD HomeRun” 무슨 놈의 이름이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하지만 이 box는 사실 전통적인 tv tuner adapter와 다른 것이 IP network에서 video server역할을 한다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IP network에 연결된 모든 PC들은 간단한 video client(viewer) 로 digital TV 를 볼 수 있다. (이 특정한 model에서는 동시에는 못 봄) digital video는 상당히 빠른 속도의 IP network이 필요한데 현재 standard인 100 Mbps 면 문제는 없는 듯하다. 우리 집은 재작년에 gigabit fast ethernet wiring이 설치 되어서 이런 때에는 아주 큰 덕을 보는 셈이다.

큰 희망을 가지고 산 이것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setup은 network connection과 TV antenna cable만 연결이 되어서 정말 편하지만 TV를 보는 모든 PC에서는 TV viewing software (simple video viewer)를 install하는데, 제일 큰 문제는 이것도 역시 각각 pc에 따라 조금씩 ‘경험’이 다르다는 것이다. 주로 network video를 보는 laptop pc는 완벽하게 모든 channel이 보이는데 그 밖의 다른 desktop pc에서는 어떤 channel은 보이고 어떤 것이 전혀 안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 보인다. 아직까지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다. 일단 보이는 channel은 programming에 따라서 HD(high definition)의 ‘고화질’ 화면을 즐길 수 있다. 위에 언급한 문제만 해결이 되면 이 box는 거의 ‘이상적’인, 지금 서서히 우리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IP TV (Internet TV)의 early model이 되지 않을까 싶다.

ANY CHARACTER HERE

Telescope..망원경.. 이중에서 아직도 망원경이란 말이 더 친근감을 준다. 어렸을 적 우리또래의 남자 아이들이라면 한번쯤은 이것을 만들어 본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과학을 좋아하건 안 하건, 그것에 상관이 없이.. 하지만 요새는 그 동안 강산이 몇 번이고 변해서 그런지 여자아이들이 이런 것들을 더 좋아한다는 ‘비과학적인’ 통계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아무리 초중고교에서 교과서로 망원경을 배웠어도 이것을 직접 사용해보지 않으면 그저 머리 속의 상상으로 끝난다. 먼 곳의 물체를 가까이로 본다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기능이지만 그 결과는 그렇게 간단치를 않다.

처음 본격적인 망원경을 만들어 본 것이 아마도 서울 남영동 살 당시였으니까.. 중앙고 2학년 때 쯤이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가졌던 친구 김호룡과 같이 설계를 하고 렌즈를 청계천변 어느 안경점에서 맞추어서 refractor (굴절 식 망원경) telescope를 만들었다. 말이 설계지.. 너무나 간단한 공식에 맞추어서 배율을 계산하고 그것에 맞는 초점거리를 갖는 돋보기를 주문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수학적 공식과 실제적 engineering개념과의 차이를 전혀 몰랐다. 공식대로만 하면 될 줄 알았다. 야심도 좋게 배율을 x100으로 맞추었으니.. 이 정도 배율의 ‘진짜 망원경’은 엄청나게 비싸다.

Orion SpaceProbe 3 Altaz reflector
Orion SpaceProbe 3 Altaz reflector

그렇게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겁도 없이 마분지와 두 개의 돋보기로 만들려고 했으니..결과는 처참한 실패.. 보려던 것은 안 보이고 대신 아물거리는 무지개가 보였다. 그때의 실망이란.. 그 후에 덜 야심적으로 대폭 개량을 해서 (배율을 대폭 줄여서) 성공을 하긴 했다. 공해로 가득 찬 서울 하늘에서 별을 보기는 쉽지 않았지만 대신 집에서 바로 보이는 남산의 팔각정은 아주 가까이 보였고 그것을 들고 팔각정에 올라가서 보니 서울 시내가 아주 잘 보였다. 그리고 망원경에 대해서 거의 잊고 살았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가끔 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망원경 하나 있으면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또 잊고 살았다. 10년 전쯤 중앙중고시절의 친구였던 윤태석과 연락이 되었는데 그 친구가 서울 근교에 개인천문대를 만들 구상을 한다고 해서 아주 놀랐다. 이 친구는 학교에 같이 다닐 당시 모형비행기 만드는 것에 심취되어 있었고 한때 나도 함께 만들기도 했던 친구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두 딸들이 크리스마스와 나의 생일의 선물로 ‘진짜’ 망원경을 주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물론 amateur entry level인 것이지만 나에게는 과분한 Newtonian Reflector Telescope였다. 이런 것은 사실 취미로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춥고 흐린 날씨 때문에 아직 밖에서 별을 보지는 못 했다. 우선 제일 보기 쉬운 달을 보는 것부터 시작을 해 볼까..

ANY CHARACTER HERE

아주 오랜만에, 그러니까 보자.. 최소한 2년은 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home office pc hardware를 upgrade한 것이.. 나는 이제까지 brand name compatible pc (i.e., IBM pc clones like DELL, HP, Compaq etc)를 사 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유일하게 ‘완성품’ personal computer를 산 것이 아마도 1983년경 Columbus, Ohio에 살 때 MicroCenter에서 산 Apple IIe (two-ee)였을 것이다. 곧바로 IMB PC가 나오고부터 나는 motherboard(Mobo)를 사서 직접 조립을 해서 쓰게 되었다. 우선 그 당시 나의 income으로는 그림의 떡이었고, 만들어 쓰는 것이 훨씬 $$가 덜 들 뿐만 아니라 나의 요구사항에 맞게 살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무섭게 떨어지는 pc hardware의 가격은 항상 나를 즐겁게 했다. 물론 Apple Mac은 이런 것에 상관없이 항상 premium을 자랑하며 ‘독점’적으로 서서히 monster로 변하고 있다. 물론 ‘경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Apple Company는 내가 제일 증오하고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kvm compatible combo: AMD Athlon II X4 635 & GIGABYTE GA-MA785 MOBO

kvm compatible combo: AMD Athlon II X4 635 & GIGABYTE GA-MA785 MOBO

이번에 다시 home pc hardware 손을 보게 된 이유는 절대로 ‘사고’ 때문이었다. PIAF (전설적인 불란서 샹송 가수 Edith Piaf가 아니다)..PBX-in-a-Flash의 약자이다. 요새의 PBX (Private Branch Exchange)는 무섭게 IP (Internet, VoIP)쪽으로 가고 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전화교환기 자체가 small piece of software로 변한 것이다. 우리 집의 phone system은 작년부터 이 system을 쓰고 있다. 물론 Open Source라 무료일 수 밖에 없는데 더욱 매력적인 것은 virtual machine(pc)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것을 test를 하다가 잠깐의 실수로 나의 desktop pc의 hard drive가 모조리 reformat(erased)이 되는 사고가 생겼다. 이런 대형사고는 나의 기억으로는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나의 home system은 거의 private cloud 로 바뀌어 있어서 당장 큰 문제는 없었다. 나의 진짜 work pc는 cloud server의 virtual machine이기 때문이다. 오랜 만에 다시 pc를 가지고 ‘놀다가’ 지금이 pc hardware를 upgrade할 좋은 기회가 된 것을 느꼈다. 이번의 upgrade는 desktop pc가 아니고 home virtual server를 ‘진짜’ kvm (kernel virtual machine) mode를 support하는 것으로 하기로 하고 가장 경제적인 cpu/mobo combo로 : AMD Athlon II X4 635 CPU와 GIGABYTE GA-MA785 motherboard, 4GB RAM을 $250 정도로 샀다. 여유가 생기면 4GB를 나중에 추가를 할 예정으로 모두 8GB system이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현재 kvm/OpenVE 를 support하는 ProxMox (essentially Debian linux system)를 install하고 test를 하고 있는데.. 결과는 참 dramatic한 것이었다. 현재까지 4개의 virtual machine이 돌고 있는데.. stand-alone system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다. 4개의 virtual machine은: Windows XP, Windows 2003 Server, Ubuntu Desktop 10.10, 그리고 PIAF (Asterisk PBX)인데 8GB RAM이 되면 아마도 8개의 virtual machine이 문제없이 running하지 않을까..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지나간 3주는..

거의 3주 만에 이곳을 찾았다. 이 3주는 정말 의외로 조금 긴 듯한 느낌이다. 무언가 쫓기는 듯 하면서도 왜 이렇게 시간이 길까..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지난 1월 9일 밤부터 시작된 이곳의 세기적인 폭설과 강추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의 1주일 동안 사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정지된 상태였다. 덕분에 뜻밖의 snow, ice day holiday를 즐기긴 했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오랜 만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mild depression이 그것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것은 전처럼 그렇게 mild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은 ‘고통적’인 것이었다. 그 동안 위로를 받던 “묵주기도의 보호”도 크게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하지만 역시 처방은 시간과 세월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 깊게만 느껴지던 수렁 속에서 밝은 하늘이 보인다.

나의 생일과 결혼 기념일이 줄줄이 이어지며 1월 달을 보냈다. 생일의 의미를 나 나름대로 바꾸어서 보낸 것이 얼마 되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생일의 의미이다. 일체 선물도 그렇게 반갑지 않게 되었다. 조용히 보내고 싶은 것이다. 딸 둘이 예전과는 많이 덜 하지만,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 그것까지 거절하는 것은 조금은 무리다. 이번에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받기로 했던 telescope가 out-of-stock이 되어서 나의 생일 즈음에서 받게 되어서 그것을 생일 선물로 받게 되었다. 결혼기념일도 마찬가지다. 25주년, 은혼식 때에는 ‘압력’에 굴복을 해서 그렇게 보냈지만 이것도 나의 스타일이 절대로 아니다. 다행히 30주년에는 무슨 ‘이름’이 없었다. 다음의 큰 것은 50주년이 아닐까? 올해는 31주년이 되었고, 정말 조용히 보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제일 나에게 중요하게 느껴지던 날은 1월 25일이었다. 그날은 내가 레지오 마리애의 정식단원이 되는 “레지오 선서”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역시 사탄은 조용히 있지 않았다. 그날 나는 sick day가 되어서 참석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레지오에 나가기 시작한지 3개월이 넘은 것이다. 참, 이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까지 ‘발전’을 하게 될 줄을 몇 개월 전만해도 절대로 예측을 못했으니까. 살면서 가끔 이런 작은 ‘기적’이 있어서 조금은 살맛도 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정식 단원이 되면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 3주간 그 놈의 mild depression이 나를 괴롭혔지만 아주 무기력하게만 있지는 않았다. 14일에는 처음으로 기후에 의한 화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모였던 레지오 회합에 참석을 하였다. 그것도 조금은 신선한 느낌이 아닐까? 이래서 군대와 같은 규율이 있는 레지오가 나는 너무나 좋다. 거의 모든 단원(자매님들)이 참석을 하셨다. 15일부터는 뜻하지 않은 home pc accident로 시작된 일련의 major computer work이 시작 되었다. 지금 생각을 하니 이 뜻밖의 일이 나를 mild depression에서 조금 더 빨리 빠져 나오게 하는 힘이 되었던 듯 싶다.

 

아틀란타 Snow day No. 3, 100th blog etc..

frozen Atlanta
frozen Atlanta

아무리 생각해도 snow day가 3일째 계속된 적은 이번 말고 기억에 없다. 1989년 이곳에 이사온 이후에는 없었다. 1993년 3월 달의 storm of the century때도 3일 이상 계속되지는 않았다. 이번은 내일까지 모든 학교들과 대부분 직장이 쉰다고 한다. 그러니 4일 연속의 snow day인 셈이다. 이번에는 눈이 온 이후로 강추위가 계속되어서 길들이 모두 스케이트장으로 변한 탓이다. 제설트럭이 10대밖에 없으니.. 얼음이 저절로 녹기를 기다리는 형편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것을 가지고 정치화 하거나 불평을 하는 이곳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사실 더 재미있지 않은가? 나도 사실 큰 문제가 없고, 오히려 뜻밖에 완전한 relax를 하게 되어서 고마울 지경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쌀만 있으면 몇 주라도 끄떡없이 나가지 않고 살 수 있으니 더 그렇다. 이곳 사람들은 조금 다를 것이다. 빵과 우유, 야채가 꼭 있어야 하니..

오늘의 blog이 100번째를 넘었다. 2009년부터 조금씩 쓰던 것이 지난해 7월부터는 거의 정기적으로 쓰게 되고 이제 100번째가 넘은 것이다. 남들에게는 큰 숫자가 아닐지 몰라도 나로서는 milestone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한글로 쓰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다. 영어로 쓰는 것보다 쉽겠지..한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영어로 쓰는 것 만큼 힘이 들었다. 나의 생각이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영어로 생각하는 습관이 많이 들어있었다. 그런데다 멋진 한글 수식어들을 참 많이도 잊어버렸다. 아마도 내가 한글로 된 책을 별로 안 보고, 2000년이 넘으면서 한글로 된 website도 거의 피한 결과일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아이들 수준의 단어 밖에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다. 영어도 잘 못하고 한글표현도 잘 못하고.. 이제는 영어보다는 한글에 더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한인성당의 레지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한국 문화’를 더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제발트 저, 이민자 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Cobb Central Library엘 가게 되었다. 친지가 경영하는 Atlanta downtown에 있는 Kristie란 jewelry store에 computer문제가 생겨서 보아주고 오다가 잠깐 들린 것이다. 작년 여름부터, 집안의 마루를 새로 놓는 일을 시작하면서, 그 때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가던 것이 중단되어서 이제까지 온 것이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출판된 책들이 제법 있어서 새로 나온 책이 있나 보았는데.. 거의 없었다. 이곳도 $$$이 경제사정으로 모자란 모양인가? 그래도 몇 권을 빌려왔다.

한번 빌려 보았던 독일작가 제발트(W.G. Sebald) 저 “이민자 들(Die Ausgewanderten)”, 마쓰히사 아쓰시 저 “천국의 책방“, 그리고 이청준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등이다. 이 중에 “이민자 들”은 한번 본 것인데 다시 읽고 싶었다. 왜 그럴까? 독일인으로 영국으로 이민을 가서 다른 이민자들을 보면서 쓴 것인데..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들이다. 한마디로”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소설”인데 아주 그 format이 특이하다. 주제는 이민자들이 겪는 ‘고향상실의 고통’이다. 나는 그들이 겪는 고향상실이 어떤 것이지 잘 알고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이던 이런 것은 사실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Atlanta snow to ice day..

이곳 아틀란타 수도권 지역의 폭설은 완전히 끝나고 지금은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2일째 모든 기관,학교가 문을 닫고, business도 거의 문을 닫은 듯 하다. 무슨 민방위 연습을 하는 듯 모든 곳이 정적에 잠겼다. 문제는 눈이 온 이후 영하의 기온이 계속되어서 완전히 두꺼운 얼음이 되어 빨리 녹지를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예년과 아주 다른 점이다. 이것도 혹시 global warming의 한 징조가 아닐까.. 생각을 한다. ‘극단의 기후(extreme weather)’가 온난화의 한 예라고 한 것을 어데선가 들은 듯하기 때문이다.지난 여름이 기록적인 오랜 더위여서 조금은 이러한 춥고 눈 많이 오는 겨울을 예측하긴 했다.

오늘은 우리로서는 한인성당에 레지오 정기 회합이 있던 날인데 성당 자체가 문을 닫아서 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우선 우리 집 subdivision도 빠져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설사 레지오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 무리였다. 이럴 때 우리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면..하고 상상도 해 본다.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 뿐이다. 인생에는 가끔 이런 ‘깜짝 즐거움’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들에게 이런 것들은 절대적으로 ‘뜻밖의 즐거움’이리라.

완전히 빙판으로 변한 I-285 near spaghetti junction

완전히 빙판으로 변한 I-285 near spaghetti junction

운전을 포기하고 걸어간 사람들이 남긴 차들 near Pleasantdale Rd@I-85N

운전을 포기하고 걸어간 사람들이 남긴 차들 near Pleasantdale Rd@I-85N

Night before Atlanta snow day 2011

Night before Atlanta snow day 2011

fairly rare sight & treat for this dog in Atlanta

fairly rare sight & treat for this dog in Atlanta

Atlanta snow day fun 2011

Atlanta snow day fun 2011

What's this white stuff under my belly?

What’s this white stuff under my belly?

Never knew you can walk a cat like this

Never knew you can walk a cat like this

 

A longest day, then snow day 2011..

어제는 모처럼 아주 바쁘게 느껴지는 일요일을 보냈다. 평소 때의 일요일은 조금 relax하는 기분으로 보내곤 하는데, 어제 일요일은 조금 달랐다. 최근에 내가 경험하고 있는 out-of-closet의 한 예라고나 할까.. 처음 가보는 집도 두 군데, 처음 만났던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주 유쾌하고 진땀 나는 경험이 되었다. 단 요새 예외 없이 대부분이 즐기는 karaoke를 제외하고.. 나는 이것에 익숙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이런 것들과 아울러 이곳의 날씨가 어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치도 어김없이 일기예보가 들어 맞았다. 9시경부터 snow shower/storm(눈보라?)이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 들이 닥친 것이다. 이 눈보라 때문에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 완전히 눈에 쌓인 고속도로 운전을 해야 하는 모험을 하게 되었다. 시카고, 오하이오, 위스컨신에서 살 때는 이 정도는 큰 문제가 못 되었지만 이곳에선 절대로 장난이 아니다. 제설 대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다가 지형적으로도 언덕이 많은 탓이다 (아틀란타 메트로는 piedmont, 그러니까 구릉지역에 속함).

어제 낮에는 레지오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설재규씨 댁으로 가서 그 집의 home network (주로 adsl modem/wifi router 같은 것들)을 손 보아 주었다. 나는 옛날 생각만 해서 설재규씨가 이런 것들 잘 했으려니 했지만 본인의 말로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런 류의 일들은 언제나 깜짝 놀라게 하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Earthlink/Netopia combo.. 요새 아직도 이런 구닥다리 broadband supplier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도 Netopia adsl modem/router가 특이하다. 아주 요상한 setup mode가 있는데.. 이것은 정말 쓰는 사람이 아무리 ‘바보’라도 문제가 없게 만들어 놓았다. 흡사 요새의 Apple computer와도 같다고 할까. 문제는 동시에 두 대 이상의 pc에서 Internet을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정말 20세기적 발상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dumb mode를 full “bridge mode”로 바꾸면 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다음에 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끝나고 몇 주 전에 이미 예정된 아틀란타 한인성당 전산팀의 신년 회의/식사 참석차 Dacula, Georgia에 있는 홍보분과위원장 댁으로 연숙과 합류를 해서 설재규씨와 갔다. 그곳은 I-85 Exit 120 근처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최근 이곳은 한인들이 집단적으로 정착을 하는 곳이다. 밤 9시 이후로 예정된 대설 주의보를 염두에 두면서 전산팀 모임이 진행 되었다. 이날의 hostess인 서 안젤라 자매(본당 사목위원)의 power를 보여 주는 듯, 본당의 세 분 신부님께서 모두 오셨다. 그러니 분위기는 자연히 아주 활발하고 무게가 있었다.

이 댁의 지하에는 완전히 꾸며진 Video/Audio/Karaoke시설이 있었고, 한 쪽에는 아주 잘 꾸며진 ‘기도방’도 있었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와 식사가 끝나면서 Karaoke방으로 모두들 모이게 되었는데(사실은 우리 신부님들이 이런 것들을 좋아 하신다고 함).. 나와 설재규씨는 눈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미리 일찍 가자고 합의를 한 상태여서.. 9시 넘어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이때부터 위에 언급한 snow adventure/nightmare 가 시작된 것이다.

20여 년이 넘게 나는 눈이 깊이 쌓인 고속도로를 운전한 경험이 없었다. 어제의 눈발은 흡사 거의 폭우와 같이 쏟아졌는데. 도로는 완전히 눈으로 덥히고, 앞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중간쯤에 와서는 차기 조금씩 미끄러짐을 느끼게 되었다.다행히 일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일기예보를 미리 들 보아서 그런지.. traffic은 그리 많지 않았고, 특히 집채만한 대형 트럭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더 눈보라가 심해지고, 드디어 나는 속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그만큼 다급해 진 것이다. 잘못 하다가는 차를 세울 지경이 된 것이다. 이미 도로변에는 세워진 차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ramp에서는 이미 충돌사고로 엉킨 차들을 피해가야 했다. 집 근처의 완만한 언덕들을 천신만고 끝에 기어서 거북이처럼 집으로 goal-in을 하였다. 이때는 정말 ‘만세’를 불렀다. 최악의 상태가 오면 차를 버리고 둘이서 집까지 걸어 올 각오를 했을 정도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 보니 아직도 karaoke를 하며 놀고 있어서, 빨리들 출발 하라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으로 돌아 갈 때 몇 명은 아주 고생을 하였다고.. 새벽 3시경에 도착한 형제님도 있었다. 신부님들도 역시 눈 때문에 거북이처럼 운전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이번 모임은 사실 취소하거나 연기를 했어야 했다. 정말 무모한 모험을 한 결과가 된 것이다. 만약에 더 큰 사고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지만 다행히 이번의 모임은 추억에 오래 남을만한 것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밖을 보니 완전히 모든 곳이 깊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성탄절의 눈과 더불어 이번 겨울의 제2탄인 것이다. 조금 용기를 내어서 우리 집 “깡패” Tobey(개)를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다리가 짧은 Tobey가 가슴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느라 고생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오늘 월요일은 snow day, holiday가 되었다. 대부분 따뜻한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뜻밖의 ‘휴가’를 즐길 것이다. 이것이 snow day의 즐거움일까. 겨울에만 있는 뜻밖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챔피온, 위스컨신 성모님 발현, 그 후..

성모님 발현 당시를 재연한 모습
성모님 발현 당시를 재연한 모습

지난해 (2010년) 12월 초순 경에 New York Times를 통해서 19세기 (1859년)위스컨신의 성모님 발현이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았다는 비교적 짧은 기사를 읽었다. 바로 전에 시작된 2010년 대림절과 더불어 정말 가슴을 따뜻하게 느끼게 해 준 반가운 소식이었다.

성모님의 발현소식은 언제나 추문이 함께 따른다. 그래서 교회(바티칸)는 언제나 극도의 신중성으로 이런 소식을 처리하는 것을 안다. 나는 그래서 천주교를 더 좋아하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거짓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유혹을 하는가? 조금 더 교회로 부터의 자유를 원하며 떨어져 나간 개신교 형제들.. 그 자유에는 아주 무서운 유혹이 더 넘실거린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번에 공식 인정을 받은 것도 그렇다. 첫 발현이 1859년이었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루르드 발현 다음해이다. 그 당시만해도 미국 위스컨신은 아주 ‘오지, 황무지’에 불과한 미개척지 정도였을 것이고, 그런 성모님의 발현소식은 유럽에서는 뉴스 감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르드 같은 ‘인파’가 그 황무지 위스컨신 얼어붙은 곳에 몰릴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성모님 발현은 요새 다른 곳의 ‘거짓’ 발현과 달리 자연히 오랜 시간을 두고 그 진실성을 밝힐 기회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번에 나는 미국이 주요 ‘세속적’ 신문이 아닌 가톨릭 뉴스(Catholic News Agency)의 기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줄거리는 대강 같으나, 우리 가톨릭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 조금 새롭다. 그 기사를 나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를 해 보았다.

 

위스컨신 주의 그린베이(Green Bay, Wisconsin) 데이빗 리큰 주교(Bishop David L. Ricken)의 인정으로 이곳, 챔피온마을(town of Champion)의 한 교회가 미국에서 첫 성모님 발현지가 되었다.

2010년 12월 8일 –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 대 축일- 에 주교님은 ‘도덕적 확실성’으로, 동정녀 마리아가 정말 1859년 10월, 3번에 걸쳐서 젊은 벨기에 여성 이민자, 어델 브라이스(Adele Brise)에게 발현하셨다고 선포를 하였다.

1861년 발현 이후부터 그곳에는 ‘좋으신 협조자 성모님'(Our Lady of Good Help) 이라는 이름의 성모님을 위한 교회가 있었다. 2년간에 걸친 조사 끝에 리큰 주교님은 이곳은 ‘믿을만한 가치’가 있고, 교구의 공식적인 성지로 선포한다고 하였다.

3번에 걸친 발현 당시, 그 ‘여인’은 밝고, 하얀 옷을 입으셨는데, 세 번째 발현 때에, 그 ‘여인’은 자기가 죄인들의 개종을 위해 기도를 하는 ‘천상의 모후'(the Queen of Heaven)라고 밝히셨다.

“너도 개종을 하기 바란다”, 라고 그 28살이 된 어델 브라이스 여인에게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그 브라이스 여인은 미연방의 주가 된지 11년 밖에 안된 이곳 위스컨신에 가족들과 함께 이민 오기 전, 수녀가 되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동정 마리아는 그녀에게 ‘선교와 교리 가르침’의 사명을 주셨다. “이 황무지에 있는 어린이들을 모아 구원을 위해서 가르쳐라, 내가 너를 도와 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마라” 고 말씀을 하셨다.

어델 브라이스는 이어서 재속프란치스코(Third Order of Penance) 수도회원이 되어서, 미국의 미개척지를 돌아다니며 어린이, 어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하늘의 사명을 완수하려 노력을 하였다. 그 당시, 위스컨신에는 사제가 거의 없어서 교회를 다니려면 멀고 힘든 여행을 해야 했다.

세워진 성당근처에 프란치스코 회 여성들은 학교도 세웠다. 1871년경에 큰 불이 이곳에 났는데, 이곳의 거의 모든 곳이 불에 타버렸으나 학교, 성당, 그리고 수녀원 등 성모님께 봉헌 된 곳은 기적적으로 타지를 않았다.

그녀가 죽기 6년 전인 1890년, 그녀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었던 로빈슨빌(Robinsonville)이 그녀의 원래 고향이었던 유럽 벨기에의 마을이름 챔피온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동정 마리아에게 수녀가 되겠다고 약속한 것을 기념한 것이었다.

리큰 주교님은 기자에게 “어델 브라이스 수녀의 일생이야 말로 동정녀 발현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 자기 자신이나 성모님 발현 자체에 세상의 주목을 받게 하기 보다는 자신의 여생을 조용히, 겸손하게 성모님에게 바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말한다. “그녀는 근처지역을 모두 걸어서 돌아다니며 집을 방문하며 프란치스코 회의 단순하고 겸손한 정신으로 며칠 동안 아이들에게 교리공부를 시키거나 그들의 부모들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녀야 말로 사도정신으로 가득 찬 일생을 살았다. 성모발현 이후만이 아니고 그녀의 일생이 그러하였다. 또한 마리아의 간단 명료한 메시지야 말로 이 발현의 진실성을 말해준다. 마리아가 어델 수녀에게 준 지시는 간단하지만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무게 있는 것이었다.”

리큰 주교는 이어서 수없이 많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상기시킨다. 그 중에는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기적에 속하는 것들도 포함이 되어있다고 한다.

이번 주교의 공식 발현 인정은 새로운 사실이지만, 이곳은 150년 동안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이 이미 묵시적으로 알고 있던 이 교구의 성지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셈이다.

리큰 주교는 수없이 많은 믿기 힘든 기적적 치유와 개종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1859년 10월 9일 성모님 발현 이후 아직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생을 바꾸는 듯한 그런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 유명한 프랑스 루르드 성모발현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 챔피온의 성지에도 순례객들이 치유를 받고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버린 지팡이들이 쌓여있다고 한다.

이곳 성지 성당의 존 더플러(Fr. John Doefler) 주임신부님은 이곳에 발현하신 동정 마리아와 루르드 발현 성모님과는 아주 의미심장한 관계가 있다고 하고, 루르드의 벨라뎃따 수베루에게 나타나신 뒤 일년 후에 이곳으로 에이들 브라이스에게 나타나실 때, 성모님께서 이러한 연관성을 암시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주임 신부님은 이어 “루르드에 발현하신 마리아는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되심’으로 밝히셨고, 이곳에서는 자신을 ‘천상의 모후’라고 밝히셨다. 이 두 사실은 사실상 마리아의 신비를 전부 간직한다. 즉, 마리아의 생애의 시작으로부터 하늘로 들어올리심과 천상모후의 관을 쓰신 사실이다.”라고 설명한다.

발현지 성지 성당 Champion, WI

발현지 성지 성당 Champion, WI

 

busy January..2011

2011년, 신묘년, 토끼해 새해도 벌써 5일이 지나간다. 1월은 우리 집에선 조금 바쁘게 느껴지는 달이다. 큰딸 새로니와 나의 생일이 있고,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도 있어서 그런가.. 오늘은 1월 5일, 우리 집 큰딸 새로니의 생일이다. 1983년 오늘 Columbus, Ohio의 Riverside Hospital에서 태어났다. 보통 Ohio의 1월은 사실상 거의 옛날 (내가 살던 때) 서울의 겨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하지만 그때는 조금 달랐다. 아주 따뜻했고 눈이 아닌 비까지 내렸다. 머나먼 타향에서 첫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을씨년스럽고, 쓸쓸하게 느껴지는데 날씨까지 추웠으면 우리들의 마음까지 더 쓸쓸하게 했을 것이다. 갓난 새로니가 병원에서 집으로 오던 날, 가깝게 지내던 연세대 후배 김원백씨, 그의 wife, 도성이 엄마가 우리 집 (Ohio State University, Buckeye Village)을 깨끗이 청소를 하고 기다려 주어서 얼마나 포근하게 느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정이라고 하던가.

1월 21일은 나의 생일이다. 1.21 (일-이-일)하면 나의 생일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1968년 나의 20세 생일날 에 터진 김 신조 일당의 북괴 무장공비 청와대 기습사건이다. 어쩌다 나의 생일날에 쳐들어 왔을까.. 물론 이것은 조금 우스운 생각이지만 나의 생일과 연관되어서 바로 어제의 사건같이 느껴진다. 지금은 이렇게 여유 있게 회상을 하지만 사실 그 당시는 아주 심각했다. 이것은 요새의 연평도 포격 사건보다 심리적으로 더 충격적이었다. 특히 공비들 중 김 신조가 유일하게 생포 되었는데 사전의 각본도 없이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라고 짙은 북한 사투리로 말을 하는 바람에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몇 년 뒤에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이 “나도 모르게 극단분자들이 저지른 망동”이었다고 말 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이는 자기 이외는 모두 바보들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 말을 누가 믿는가?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야, 김일성이 개새끼야, 북괴왕조에서 누가 너의 승인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라고..

곧 뒤이어, 1월 25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 된다. 그것은 1980년이다. 그러니까 올해는 31주년이 되나.. 허~~ 참 세월이여.. 우리는 그 당시 기독교 신자도 아니면서도 서울 명동에 있던 YWCA회관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결혼식 사진을 보면 배경에 크게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다. 그 당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을 하니 그것도 무슨 뜻이 있지 않았을까.. 그때는 정말 아주 매서운 전형적인 ‘서울의 겨울’ 날씨였다. 이곳에 오래 살면서 보니 결혼식은 ‘아름다운 계절’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황량하고, 춥게 느껴지는 겨울의 결혼식은 크게 매력적이 아니니까. 물론 우리부부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그것이 사실 결혼을 바로 앞둔 사람들의 심정이리라. 31년을 큰 탈없이 같이 살았다는 것을 요새는 조금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앞 날도 기대를 해 본다.

나의 본관인 평창이씨 익평공파의 족보를 통해서 최근에 알게 된 나의 “친 삼촌”, 이준모 아저씨.. “듣도, 보도” 못했던 거의 전설적인 인물, 이준모 아저씨의 생일이 분명히 족보에 1월 10일로 나와있다. 그 당시의 관행으로 보아서 이것은 분명히 음력일 것이라서 언제 ‘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의 1월은 예년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를까도 생각을 해 본다. 제일 큰 차이는 역시 새로 시작된 나의 레지오 활동에 있다. 큰 문제가 없는 한 1월이 가기 전에 나는 정식단원 선서를 할 것이다. 활동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을 기대해 본다. 본당의 IT support team (전산팀이라 부른다)에 가입이 되어서 이제부터는 실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외부로 나타나는 제일 큰 차이가 아닐까? 올해는 사실상 잠정적으로 일년간의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데, 이것은 레지오 활동을 생각하면서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시간을 정말 효율적이고, 보람차게, 조금은 높은 뜻에 맞게 쓰려는 노력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adieu 2010.. see you in history

Year 2010, 이천십 년, 이공일공 년… 밀레니엄, Y2K, 21세기 어쩌구 저쩌구..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그것도 10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십진법의 ‘공’자에 집착하는 것일까? 하기야 다른 진법을 썼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기도 ‘공’자는 꼭 쓸 테니까.. 내년은 무슨 해인가? 족보의 부록에 이것들이 자세히 나와있다. 2011년은 분명히 신묘(辛卯)년으로 나와있다. <묘>는 토끼다. 그러니까 토끼의 해가 되는 것인가? 이것도 잊고 산지가 꽤 된다. 특별하게 알고 살 필요가 없는 이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 “고리타분”한 것들을 다시 알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아마도 올해 내가 나의 평창이씨 족보를 찾으려고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올해는 호랑이 해였고, 내년(내일)은 토끼 해.. 이 두 짐승이 주는 극적으로 다른 느낌으로 보아서 내년에는 세상이 조금 부드러운 쪽으로 변화되는 것도 기대를 해 본다.

 

레지오가 만나게 해 준 세 사람

2010년의 황혼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올해 나에게 제일 크고,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그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내가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 레지오에 예비단원으로 입단을 한 사실이다. 물론 나는2007년 초부터 아내 연숙의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둘이서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나의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시간적, 육체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오묘하게 나를 조금씩 바꾸어 주고 있었다.

올해 10월경부터 아주 조그만 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레지오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나의 10월 19일 레지오 예비단원으로의 입단이었다. 그때 받은 레지오 단원 수첩으로 기록이 된 나의 ‘활동’을 다시 본다. 비록 예비단원이라 ‘공식적 실적’에는 못 오른다고는 하나 나에게 그런 것은 별 차이와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비록 그 이후 묵주기도의 횟수가 조금씩 많아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금씩 나의 lifestyle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마디로 신선하고, 무언가 생의 목적이 다시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선 새로 적응해야 할 일이, 사람들(형제,자매님들이라고 부른다)을 새로 만나게 되는 일이었다. 지난 10년간 나는 ‘새로 만난 인간’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것을 그저 편안하게 느끼면서 살았다. 심지어는 새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기도 했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피해망상증까지는 안 갔어도 그 근처까지 간 것이 아닌가 나도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 배경에서 이렇게 새로 만난 사람들.. 내가 변했나.. 모두 그렇게 정답고, 친근하고, 친절하고, 죽마고우를 보는 듯한 기분까지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 물론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니고 무언가 내가 변한 것일 것이다.

그 중에서 내가 속한 곳의 자매님들(내가 유일한 남자단원 임), 대부분 나의 신앙, 인생 선배님들.. 나의 누나를 보는 듯해서 너무나 마음이 편하다. 성모신심으로 완전 무장된 그 자매님들..내가 배울 것 투성이다. 죽은 영혼들을 더 편히 보내드리는 레지오 연도에도 몇 차례 참가를 해서 그 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던 ‘죽음의 절차’를 다시 배우게도 되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3개월이 되어서 정식단원 선서의 절차를 앞두고 있지만, 나는 큰 문제없이 정식 단원이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그런 시점에서 나는 레지오가 그 동안 다시 만나게 해 준 세 사람을 생각한다.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우리 예수님을 낳아주신 성모 마리아님이다. 거의 신화적, 역사적, 성서적, 심지어는 추상적으로만 느껴왔던 마리아님을 이제 나의 어머니로 다시 맞아들이고,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레지오 교본을 혼자서 열심히 ‘독학’을 한 덕분에 나는 모르고 있던 ‘보화’와도 같은 심오한 성모신심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같은 성인의 저서 (직접, 간접으로)도 읽게 되었고.. 얼마나 내가 성모님을 슬프게 해 드렸는지도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로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 어떠한 “무지한 가톨릭 신자, 개신교신자, 개신교 신자와 같이 행동하는 가톨릭신자”를 만나더라도 이제는 자신이 있다.

바른쪽 설재규씨 부부, Thanksgiving dinner Atlanta, 1989
바른쪽 설재규씨 부부, Thanksgiving dinner Atlanta, 1989

두 번째 사람은 본당교우이자 오래 전부터 알던 설재규, 아오스딩 (Augustine) 형제다. 설재규씨는 비록 나보다 나이가 한참 밑이었지만, 내가 이곳 아틀란타에 1989년 직장을 따라 이사를 오게 되면서 거의 처음 만나게 된 정말 오래된 형제님이다. 내가 다니던 직장, AmeriCom Corporation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software engineer였고, 그는 test engineer였는데,. 비록 같은 부서는 아니었어도 곧바로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으로 가깝게 지냈고, 더욱이 그도 우리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설재규씨의 부인은 우리부부와 같이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직장도 그렇고 성당, 한국학교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아주 오래가지를 못했다. 거의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설재규씨와는 무슨 인연이 있는지 그 후의 다른 직장이었던 Scientific Atlanta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물론 다른 부서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남다른 chemistry가 없었나 보다. 별로 더 가까워지질 못했다. 게다가 그 후 우리는 거의 완전히 한인 community와 멀어지게 되었고 서로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레지오 입단을 계기로 아틀란타 본당의 전산팀에 합류를 하게 되었는데.. 글쎄..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참, 이것도 인연이라면 어떨까? 서로가 젊은 패기는 다 수그러졌고, 조금은 완숙된 심경으로 만나면 이것도 무슨 큰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 번째 사람은 역시 본당의 교우,형제님이었던 김찬웅, 베드로씨다. 역시 우리가 아틀란타에 이사오면서 거의 곧바로 만났다. 중앙고 후배 이성풍(aka 윤주 아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분은 그 당시 아마도 삼성 지사에서 근무를 했었던가 했다. 그래서 가끔 윤주네 식구와 더불어 모이곤 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서로 잘 맞았고, 술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는 분위기가 우리와도 (비록 내가 나이가 제일 위였지만) 잘 어울린 것이다.

그러다가 역시 우리가 성당과 멀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중간다리 역할을 하던 윤주네가 완전 귀국을 하게 되면서 사실상 연락조차 끊긴 채 산 것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아내 연숙과 김찬웅씨 부인 안젤라씨가 한인천주교회 레지오에서 만나 베드로씨네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다. 알고 본즉 베드로씨도 나와 같이 레지오 협조단원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제는 서로 부부가 만나서 점심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희망에 베드로씨도 언젠가는 안젤라씨와 같이 레지오를 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이고 지금은 ‘해후의 즐거움’이 더 크다.

 

toward 100th, dismal frozen days, Persian friends

나의 serony.com published blog count가 이번으로 94번째가 된다. 그러니까 100번째가 아주 멀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에 올해가 가기 전에 100회라는 milestone을, 조금은 우습지만,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쓰고 싶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은 최소한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하게 느껴진다. 그것들을 어떻게 ‘한글’로 표현을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던 ‘한글 형용사‘들이 다 어디로 도망을 갔단 말인가? 참 슬프다. 한글도 잘 못하고, 영어도 잘 못하고.. 이것이 진정 30년 넘게 만들어진 나의 bilingual culture 라면 참 나도 나에게 실망을 금할 수가 없다.

약 1년 반전에 시작한 이 ‘초라한’ 나의 public diary는 사실 나의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이미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을 것이라는 ‘놀라움’에서 시작이 되었다. 사실은 더 급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이러한 digital records의 수명은 원칙적으로 거의 무한에 가깝다. 일부러 없애지 않는 한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누가 보건 간에 (희망에는, 나를 태고 적부터 이미 알았던 사람들) 나의 진실된 생각을 알리고,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시작의 모든 것이었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아직도 계속이 되어서 자그마한 100회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200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500, 혹은 1000.. 그저 겸손한 희망일 뿐이다.

올해의 연말 휴일은 한마디로 ‘죽을 쑨’ 격이 되고 말았다.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다. 하나도 앞뒤가 맞지를 않았다. 제일 중요한 천주교회 미사란 미사는 모조리 빠진 결과가 되었고, 반갑지 않은 ‘세속적’인 모임에서 쓸데없이 ‘세속적’인 마음의 상처만 입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이보다 더 망친 휴일이 이제까지 있었을까.. 암만 생각해도 이런 적은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나를 위로한 것이 있다면 강추위를 동반한 하얀 눈뿐일 것이다. 문제는 이미 다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잘 못한 것은 인정을 하고 앞으로 반복을 하지 않는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 나이에 이렇게 ‘잘못’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인 것이다.

 

아주 우연히도 “‘이란’에서 한국의 TV 사극드라마대장금‘이 인기”였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문제는 그때가 또 이미 몇 년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옛날과 그 옛날’의 것을 본 것이다.

with Persian friends, West Virginia 1977
with Persian friends, West Virginia 1977

내가 요새 사는 것이 이런 식이다. 무언가 새로 알았다고 한 것은 대부분 최소한 몇 년 전의 것이었다. 이것도 archived googling 때문일까? 이제 이런 digital contents들은 여간 해서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히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여지가 다분히 있다. 한마디로 Internet에 무언가 ‘남기면’, 거의 영원히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은 생각해 봐야 할 현상이다.

왜 이란과 대장금을 연관하게 되었을까.. 오래 전 1970년대에 West Virginia에서 학교(West Virginia Tech)를 다닐 때 나는 유난히도 많은 Persian(Iranian student를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들을 알게 되었고 어울렸었다. 물론 그때는 Shah (of Iran)가 이란을 통치할 당시였다.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의 바로 전이었다. 그래서 그 Persian들은 연일 학교근처 도시(Charleston, West Virginia)로 몰려가서 데모를 하곤 했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가까운 친구들은 공부벌레들이 많았다.

대장금과 관련된 기사에서 그들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대부분 나의 경험과 일치한다. 종족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중간이라 그런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들 handsome, attractive한 모습이고, 아주 다정다감하였다. Shah의 친미정책으로 그 들도 미국,유럽문화에 상당히 빠진 상태였다. 아마도 그것이 호메이니의 이란혁명으로 완전히 제지를 당한 듯 하다. 짧은 시간 (1년 반정도) 였지만 그들과의 우정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졸업 후 다 연락이 끊어지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사진을 꺼내 보면서 그들을 생각한다. 비록 정치적으로 이란이 곤경을 겪고 있지만 국민성은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나는 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사극 대장금을 보았다니 참 믿어지지 않는 즐거운 소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