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잊을 수 없는 ‘학원’ 선생이 있다. 한국의 학원에선 선생은 필경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강사라도 불렀다. 일반적인 학교와 차이를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고 상대적인 지위와 존경도 그런 것들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물론 학원의 강사님들도 질도 우수하고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예외적인 케이스에 속했다.
우리가 입시경쟁체제에서 학교를 다닌 한 학원은 존재했던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마도 내가 중앙고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학원은 안국동에 위치한 “실력센터“ , 소규모의 조잡하고, 불결하고, 영세한 학원과 다르게 우선 아주 깨끗하고, 위치가 좋고 (안국동), 규모가 그 당시 기준으로는 큰 편이었다. 그런 것이 좋아서 나는 큰 필요성은 못 느꼈지만 그곳을 한번 다니게 되었다. 영어과목에 등록을 하고 다녔는데, 강사가 아주 수준급이었다. 절대로 지루하지를 않았고 정말 영어실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그러니까 강사 급이 아니고 선생 급이었다. 성함이 100%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김광순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이분은 나중에 정말 우연으로 내가 다니던 중앙고등학교로 오시게 되고 다시 만났다. 그런데 분명히 실력이 대단했던 그 분이 정식 선생님으로 오신 것 같지를 않았고, 역시 ‘강사’로 오신 것을 알았다. 남들은 잘 몰랐겠지만 나는 이미 그분께 배운 적이 있어서 참 반가웠다. 하지만 한 학기가 끝나고 소리도 없이 사라지시고 말았다. 다른 선생님께 물어 보아도 전혀 어떻게 된 것이지 사정을 모르시는 눈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는 학원에 익숙해 졌는데 내가 부족한 것을 느끼면 그 과목만 가서 공부하는 그런 정도였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종합반‘ 같은 것은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제일 성과를 보았던 것은 화학 과목이었다. 정말 나는 그 과목에서 엉기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께 문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아마도 나의 기본실력에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을 계속 만회를 못하고 해 메는 식 이었다. 그것을 학원에서 한 학기 배우면서완전히 기초를 잡았고 결과적으로 학교에서도 아주 순조로이 화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중앙고교에는 최 정상급의 화학 선생님 두 분이 계셨는데, 김후택, 박택규 두 선생님들.. 개성과 스타일이 전혀 다르지만 화학 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주었던 “박사” 급들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별명 “깡패” 김후택 선생님.. 수업에 들어오실 때 백묵만 들고 들어오신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안 보시고 일사천리로 가르치신다. 그 반대로 박택규 선생님은 마치 대학교수가 되시듯 조직적으로 가르치신다. 특히 영어를 많이도 사용하셨다. 박선생님은 가끔 요새 본 영화 얘기를 곁들이며 수업을 기가 막히게도 이끄신다. 그때 “미리” 들었던 영화들: 신영균 주연의 “빨간 마후라“,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 같은 영화들.. 학생입장불가라서 우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던 영화들을 그 선생님이 ‘평’ 까지 곁들이시면서 재미있게도 이야기 해 주셨다.
결과적으로 나는 대학입시 때 화학시험을 거의 만점을 맞아서 합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학원은 비록 영리적인 교육이었지만 필요할 때 잘 쓰면 크게 도움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강사와 학생들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고, 그것에 대해서 크게 추억이나 존경심 같은 것을 가질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학원의 필요성이 나의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에 문교부 유학시험이라는 ‘괴물’ 때문이었다.
그때가 1972년 쯤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 바로 유학준비에 들어간 나는 미국유학의 어려움을 전혀 짐작도 못한 상태였다. $$이 제일 큰 문제였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때는 우선 BI (Before Internet) 25년 정도이니까 ‘정보’ 자체가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정보라는 것이 비쌌던 것이다.아마도 지금 그런 것들은 googling 만 잘하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것이다. 일일이 관계자, 선배들을 통한 귀동냥으로 들은 ‘도시 전설적인 이야기’ 들이 아주 많았다. 그 중에서도 여권을 받는데 100% 거쳐야 하는 조건 중에 버티고 있던 것이 이것, 문교부 유학시험이었다. 3과목의 시험인데 영어, 국사, 시사 등이 있었다.
영어는 물론 기대를 했던 것이고 나머지는 전혀 idea가 없었다. 세 과목을 모두 통과를 해야 했다. 제일 난감했던 것이 국사였다. 대학입시 때 조금 공부했던 것을 다시 해야 한다니.. 이때 선배들이 말하는 것이 있었다. 이 과목을 집에서 혼자 공부하면 99.9% 떨어진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그 이유는 물론 나중에 밝혀진다. 문교부 유학시험의 내막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99.9% 합격을 기대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유학국사 장철환” 이었다. 요새 일본 드라마의 제목을 빌려서 유학국사의 “수험의 신” 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부랴부랴 이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의 학원을 찾아서 등록을 하고 강의를 듣게 되었다. 맙소사.. 완전히 강의실이 초만원 상태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결과적으로 “미국 유학을 가려면 이곳에 와야 한다” 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해외 유학희망 생들의 비공식적 집합 소가 된 장소였다. 강의를 들어 보면서 왜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시험을 pass하기 힘든가 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이 장철환선생은 그 시험에 대해서는 수험의 신격 이었고 우선 무슨 문제가 날지, 그 답을 어떻게 써야 채점 관들의 ‘비위’을 맞출 수 있는지 그런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 놀란 것은 비록 유학국사시험에 맞추어 공부하는 것이었지만 이 장선생의 국사 실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강의스타일이 정말 정열적이었다. 에너지가 어찌나 뜨겁던지 꼭 목욕탕에서나 쓰는 제일 큰 towel을 허리에 감고 들어 오셔서 계속 땀을 닦으시곤 했다. 수준도 높아서 흡사 대학교의 사학과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기분도 많이 들 때가 있었다. 그 분도 자기의 ‘실력’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강의 도중에 학생들의 출입을 거의 신경질적으로 막을 때였다. 보통 학원에서는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안 되는데 이분만은 거의 이상할 정도로 반응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신경을 쓴 상태였다. 그것이 그분의 자존심이었을까.. 내가 열심히 가르치는데 어딜 나가냐..어떻게 늦게 들어올 수가 있느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때 늦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외우는 수준을 훨씬 넘는, 격이 높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비공식적인 해외유학지망생들의 집합 소 역할도 했기 때문에 얽힌 이야기도 많았다. 우선 유학에 대한 정보를 많이 듣고 교환을 할 수가 있었다. 때때로 미국의 같은 대학에 갈 사람들도 이곳에서 미리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미래 배우자까지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수도 있었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개중에는 이런 목적을 가지도 온 사람들도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도 이곳에서 만난 ‘남자’를 미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 case도 있었으니까.
이런 인연으로 처음 유학시험에서 영어는 떨어졌어도 국사만큼은 합격을 할 수 있었다. 다음에 나머지도 합격은 했지만 이때 비로소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중에 미국에서 만나게 된 유학생들도 농담으로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을 모르면 아마도 문교부 유학시험을 친 경력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그들 중에 들은 얘기로, 하도 미국유학생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그들 중에 나중에 ‘대성공’을 해서 귀국을 한 ‘제자’들이 많아서 혹시 무언가 바라는 것이 없으신가 하고 물으면 “조그만 문방구 하나만 차려달라” 고 농담을 하신다고 들었다.
1970년대 말에 이 문교부유학시험은 없어졌다고 했지만 (해외유학자유화), 한때 이 제도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외화를 그런대로 조절할 수 있는 손쉬운 도구로 쓰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김포공항을 빠져 나오기 그렇게도 어렵던 시절에 이런 추억에 어린 뒷 이야기도 있었던 것이다. 유학국사 장철환 선생님도 이제는 연세가 꽤 들으셨을 듯 하다. 비록 정규학교의 은사님은 아닐지라도 그에 못지 않은 선생님이시지 않겠는가?
Nine Eleven, 9주년이 되었다. 그날은 싸늘할 정도의 아주 파아란 하늘의 밝고 밝던 가을 아침이었다. 보통 때와 같이 출근했지만, Rockwell Automation office에 들어 서자마자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곳 저곳의 cubicle이 거의 비어있었고 몇 군데의 TV앞에 동료engineer들이 모두 모여서 그 화면에 완전히 얼굴들이 고정되어 있었다. 공기가 이상했다. 화면을 보니 무언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모습만 보인다. WTC (World Trade Center)의 모습이고, 그 위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있는 화면이었다.
아하.. 경비행기가 잘못해서 부딪친 모양이구나..하고 물어보니 그것이 아닌 듯 하다는 대답들이었다. 조금 후에 다른 tower에 연기가 나기 시작하고, 모두들 얼굴들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게 만화영화가 아닌가? 침묵만 흐르고, 말들을 할 용기가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 모두 일을 할 마음이 전혀 나질 않았다. Internet으로 화면이 옮겨지고.. 결국은 two towers모두 무너지는 climax가 보였다. 완전한 침묵.. National Emergency, All Airports Closed 라는 sign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모두들 침통한 모습으로 어슬렁 어슬렁 직장을 빠져 나왔다. 왜 그렇게 하늘은 파랗던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모두들 생각에, 세상이 한 순간에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Highway는 거의 텅텅 비어가고National Emergency sign은 계속 되었다. 거의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이 terrorist들이 앞으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작정인가.. 짐작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Pearl Harbor와 일본인들, 그 후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일본인들도 떠올랐다.
이슬람교도의 경전 코란을 불 태우자던 “미친” 목사 (이런 친구가 어떻게 ‘개신교’ 목사가 되었나?) 가 서서히 물러나고 있는 비겁한 얼굴을 보니 정말 밥맛이 없어질 지경이다. 거의 정신병자에 가까운 이런 놈을 따르는 ‘개신교’ 교인들의 정신상태도 사실 의심스럽다. 독일에 사는 이 목사라는 사람의 딸도 ‘아버지는 정신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이라는 힌트까지 했다는데. 이것을 보니까 이곳에서 가장 빨리 유명해지는 방법중의 하나는 ‘코란을 불태우자는 계획’ 을 언론에 공표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국방장관까지 이 미친놈에 놀아난 것을 보니 참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정말, 정말, 이놈이야 말로 9/11 terrorists와 같은 급의 ‘사탄’이 아니던가?
3일전에는 결국 우리 fish ‘lucky‘가 세상을 떠났다. 몇 달 전에 이미 그의 partner가 먼저 갔고 그 이후부터 lucky도 움직임이 아주 느려지기 시작해서 이미 나는 가족들에게 경고를 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거의 잠을 자듯이 살아온 셈이다. 아주 가던 날은 머리를 계속 모래에 묻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하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작은 생물에 이렇게 감정적으로 진하게 연결이 된 것은 나로서는 처음 경험한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약’해 졌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다. 생명의 유한성을 다시 한번 그 작은 생물체를 보며 느낀 것이다.
박민우 저, “가까운 행복” 이란 책을 조금 훑어 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가회동” 이란 세 글자.. 소제목 “가회동 거닐며 도넛 먹기“에 있는 단어였다. 이게 무언가, 가회동에서 도넛을 먹다니.. 하루가 너무나 힘 들었던 샐러리맨의 휴식처로 찾은 곳이 그곳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꿈이 아롱거리는 나의 고향, 가회동이 건재하다 못해서 이제는 휴식처가 되었구나. 그 부분을 인용을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국역 2번 출구,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가 보았다. 주택가인데도 도로는 넓고 인적은 드물었다. 평화로웠다. 대로변을 따라가다가 가회동 한옥 마을이라는 표지가 보이자 지체 없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찬란하게 이어지는 한옥들. 드문드문 공사를 하고 있었고, 가끔씩 관광객들과 마추쳤지만 그들 역시 나처럼 나직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반가운 동지들.
흥미로운 말이 ‘안국역 2번 출구’.. 아니 그곳에 안국역이 있었구나. 그러니까 안국동에 연결이 되어서 그랬을까. 아하.. 이곳에도 지하철이 생겼구나.. 아니 가회동 한옥마을은 또 무엇이냐? 동네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나? 의문은 그 다음의 ‘관광객’ 에서 풀렸다. 아하.. 민속촌처럼 이곳도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구나.. 그러니까 관광객이 오겠지. 나의 생각은 온통 50년 전으로 날라간다. 최소한 나의 자라던 곳이 상전벽해가 되지는 않았다는 안도감도 생겼다. 하지만 그곳이 거의 ‘화석’같은 역사물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이 오랜 세월의 장난과 횡포에 소름이 돋는다.
아침이 갑자기 깜깜해 졌다. 6시 반에 일어나려면 너무나 어두워서 조금 귀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해가 그 동안 그렇게 짧아졌나. 지난 며칠은 평균 이하의 기온과 아주 건조한 날씨로 아침에는 추위를 느낄 지경이었다. 이렇게 앞으로 오는 것의 맛을 조금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시 rebound할 것이고 사실 그렇게 되었다.
이번 여름에는 a/c (에어컨)들이 하도 stress를 많이 받아서 그것을 service하는 business는 아주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서 아래층 unit에 문제가 생겨서 한번 service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일단 truck이 오면 문제가 없더라도 최소한 $100은 각오를 해야 한다. 다행히 큰 고장이 아니고 over current로 인해서 wire가 타버린 정도였다. 조금 아까운 것이, 그 정도였으면 내가 고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professional tool을 쓰니까 나와는 근본적으로 수준이 다를 것이다. 그 service guy가 나온 김에 우리 집의 2 a/c unit의 checkup을 부탁했더니 의외로 결과가 좋았다. 거의 15년이 된 것인데 조금 이해는 안 가지만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대신 energy efficiency가 형편 없는 건 사실이다. 생각에 내년에도 올해처럼 덥다면 newer model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이틀 전 낮부터 기온이 올라서 2층의 a/c가 낮부터 가동이 되었는데, 갑자기 조용해졌다. 암만 해 보아도 모든 것이 조용하다. system이 아주 죽은 것이다. 우와.. 여름이 거의 다 간 다음이라 조금 덜 걱정은 되지만 9월 달도 더위가 만만치 않은데.. 각가지 근심스러운 생각이 들었고.. 혹시 system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리나케 thermostat를 열어서 voltage checkup을 해 보니 전혀 voltage가 없다. 이번에는 전번의 경험도 있고 해서 내가 공구를 들고 attic으로 올라가서 잘 살펴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결론을 내렸다. Integrated Control Unit에 붙어 있는 24V transformer가 24V를 공급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선 조금 안심을 했다. 이 정도면 그렇게 큰 비용이 들지는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pro들에게 맡기면 최소한 몇 백$은 우습게 들것이다. 최소한 transformer만이 문제라면 내가 고칠 수도 있지 않은가? Internet에서 White-Rogers Control Unit의 circuit diagram을 download해서 보았더니 역시 이것은 computer controlled system이었다. 이것이라면 식은 죽 먹기라는 자신이 생겼다. Online으로 replacement transformer를 $40정도에 order를 하고, 이것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 더위를 견디나 하는 생각을 했다. 침실과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한 home office등이 다 그곳에 있어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혹시 집에 24V transformer가 있을까 했지만 없었다. Door bell 에는 20V transformer를 쓰고 있어서 쓸 수가 없었고, 아래층의 a/c unit에서 쓰는 24V transformer를 며칠 동안 빌려서 쓸까 하고 내려가 보니 이것은 완전히 a/c unit에 고정이 되어있어서 쉽게 떼어낼 수가 없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더니.. 결국은 security camera에 쓰려고 오래 전에 사 놓았던 12V transformer 2개를 찾아 내었다. 이것을 series(직렬)로 연결하면 24V가 되는 것이다. 부지런히 wood block에 두 개를 고정시키고 wiring을 해서 a/c unit에 연결을 하였다. 만약에 다른 것이 문제라면 이것은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라서 손에 땀을 쥐고 에어컨을 틀어 보았다. 와~~~ 만세! 역시 문제는 transformer였다. 나의 추리가 맞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order했던 ‘진짜’ transformer가 도착할 때 까지만 쓸 예정이다. 덕분에 이제부터는 에어컨의 control system은 언제라도 자신 있게 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중앙고교 동창 유정원이 email을 주었다. 이 친구의 편지tone은 나이에 맞지 않게 활발하고 장난스럽다. 45년 전의 얼굴로 그것을 상상하려니 조금은 comic하기도 하다. 어머님 장례는 순조로이 끝이 났는지.. 나의 blog이 너무나 과거에 얽매어있는 것이 아니냐는 comment는 사실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해 주었다. 고맙다, 정원아.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그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느냐 하는 것에 있겠지. 기본적으로 요새의 일들은 ‘이야기’ 거리로는 조금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정원이 말 대로 요새도 자세히 보면 얼마나 깊은 이야기가 많이 있겠니? 그저 습관화되고, 타성에 젖어서 못 보는 것일 수도..
중앙고 3학년 때의 반창(같은 반 동창, 요새 새로 배운 용어) 권명국도 return email을 보내주었다. 명국이는 정원이와 다르게 경사인, 결혼식으로 인해서 소식을 받았다. 갑자기 옛 동창들이 주변에 나타나는 것 같아서 정말 반갑다. 이 Atlanta지역에는 사실 내가 유일한 중앙57회라서 더욱 그렇다. 명국이는 아직도 ‘신나게’ 일을 하는 모양이다. 정말 부럽다. 그 친구의 듬직하고 남성스러운 얼굴이 머리에 선~~ 하다. 1987년에 미국에 왔다고.. 이 친구도 “판에 박힌 표준” 적인 인생을 보낸 것이 아니었구나. 고대 토목과를 다닌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어제는 꽤 오랜만에 Cobb Library를 찾았다. 일부러 간 것이 아니고 그 근처에 가는 김에 들린 것이다. 전에 빌렸던 실화적인 소설 “이민자(Immigrants)”를 다 보기도 전에 return을 했는데, 혹시 다시 빌릴 수 있나 했는데.. 이미 대출이 된 상태였다. 그 책이 1980년대 큰 인기 있었던 소설이라고 하던데 나는 전혀 깜깜하였다.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독일태생의 저자가 영국에 ‘이민’을 해서 쓴 소설이라 아주 관심이 간 책이었다. 대신 다른 Korean titles 4권을 빌려왔다. 그 중에 한 권은 전에 한번 빌린 것인데 또 한번 보고 싶었던 책이다. 문요한이란 사람이 쓴 “굿바이, 게으름“ 이란 책이다. 이런 류의 책들은 이곳에 정말 많이 있다. 하지만 한글로 읽은 것은 조금 기분이 다르다고 할까.
같은 류 (self-help)의 책으로 Brenda Shoshanna의 The Anger Diet, 번역제목: “마음의 불을 꺼라” 가 있다. 이것은 번역서이다. 요새는 하도 화를 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이것도 사회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정신세계사라는 출판사의 번역서인데 단기 4339년 발행이란 것이 아주 흥미롭다. 정말 오랜만에 단기 연호를 본다. 우리 국민학교 6학년 때까지 단기를 써서 익숙한 연호가 아닌가. 나의 국민학교 2학년이 4288년 이었다. 분명히 그때를 기억한다.
다음 책은 박민우의 “가까운 행복 Tea Bag“ 이라는 제목의 수필, 산문집이다. 나는 이 저자를 전혀 모른다. 1973년 생이라니까 내가 미국에 오던 해구나. 나의 조카보다 한살이 많은 저자.. 이 저자가 어떠한 인생의 경륜으로 행복을 논 하려나 기대를 하며 빌려왔다.
마지막 책은 Pauline Chen이란 중국계 미국인 여자 외과의사의 죽음에 대한 심각한 수필집이다. 원제는 “Final Exam“이고 번역제목은 “나도 이별이 서툴다“였다. 이 나이에 죽음에 관심이 없다면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종교적인 각도의 죽음 이외에도 다른 각도의 죽음도 무척 많이 관심이 간다. 추상적인 죽음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바로 코 앞에 보이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 것은 아마도 죽음을 구체적으로 매일 다루어야 하는 의사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머리말에도 나온다..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고, 가급적 평화롭게 마지막을 맞도록 하자고.. 나도 동감이다. 기계적인 수명의 연장은 그런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일요일에는 예정대로Atlanta History Center에서 방금 시작한 Lincoln Exhibit에 단출한 우리식구가 다녀왔다. 정식 명칭은 “WITH MILICE TOWARD NONE THE ABRAHAM LINCOLN BICENTENNIAL EXHIBITION LIBRARY OF CONGRESS” 라는 아주 긴 제목이었다. 처음 전시되는 유품도 많고, 이렇게 많은 것이 한 곳에 모인 것도 처음이라고 해서 흥미로웠다. $16 admission ticket이 말 하듯이 아주 비싼 것은 아니지만 아주 싼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작은딸 나라니가 그곳에서 근무 하는 덕분에 무료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현재의 미국이 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Lincoln대통령이라는 것을 알면 더욱 큰 감동을 가지고 구경을 하게 된다. 그 반면에 너무나 인간적인 Lincoln 또한 하나도 미화됨이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준급의 전시였다. 내가 제일 감정을 억누를 수 없던 것은 역시 암살 후에 사체에서 나온 소지품들.. 현재 기준으로 보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안경이 더욱 그랬다. 그 암살 당시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또한 ‘마누라 복’도 없던 그가 불쌍하기도 했다. 또한 그 유명한 Gettysburg의 연설, 271 단어의 짧은 연설문, 2분 15초 동안 연설을 했다는 그 연설문의 필사본도 거기 있었다. 그 잉크들이 어떻게 아직도 그렇게 생생할까. 마지막 부분의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의 글씨 또한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General Sherman을 시켜 초토화 시켰던 적군의 요충지 Atlanta에서 열린 것은 역사의 irony가 아닐까.
내가 제일 혐오하는 것들이extremism, extremist 같은 류의 것 들이다. 최근 10여 년에 걸쳐서 이런 것들이 아주 유행을 하고 있고 어는 곳에서나 판을 친다. 우선 뉴스에 굶주린 대중을 흥미롭게 해서 그런지, 그것이 $$으로 연결이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무엇인가? 정치인들도 그렇지만 더 가증스러운 것이 허울좋은 신앙인들이다. Christian중에 더욱 그렇다. 하기야 Hitler도 그 예수님을 팔아가며 유태인들을 죽였지만 그것이 바로 extremism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요새는 Koran을 불태우자며 거품을 풀고 있는 거의 ‘미친듯한’ 목사가 미국 Florida에 건재하고 있다. 남의 종교를 그렇게 증오하면서 어찌 ‘사랑의 종교’의 목사 짓거리를 하려는가?
대학시절, 그것도 초창기에 많이 듣던 추억의 두 ‘명곡’을 다시 들었다. 이것에 더 설명이 필요할 수가 없다.
Summer Wine – Nancy Sinatra & Lee Hazlewood:
Lee Hazlewood는 몰라도 Nancy Sinatra는 누구인지 잘 안다. 그녀의 husky voice는 그녀의 아버지와 다르게 독특한 매력이 있다. 날씬한 몸매와 맞지 않게 거의 ‘여성운동의 선구자’같은 노래들이 많았다
The Rain, The Park and other Things – The Cowsils:
노래의 제목이 그 당시에 아주 시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 당시 이들 그룹은 미국은 몰라도 한국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Hair같은 것은 크게 유행을 했다. 그들의 노래중에 나는 이곡을 제일 좋아했다. 제목처럼..
오늘은 Labor Day 공휴일을 앞둔 토요일이라 기분부터 느긋해지고 마음도 편함을 느낀다. 게다가 날씨가 예보대로 거의 완전한 가을날씨로 변했다. 3개월 만에 보는 청명하고 드높은 파~란 하늘, 햇살은 거의 여과됨이 없이 내려 쪼이는 기가 막히는 날씨다. 그 옛날 고국의 공해 없던 하늘을 연상시킨다.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엄마의 생일을 오늘로 옮겨 놓았는데 결과적으로 잘도 잡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엄마의 de facto birthday가 된 것이다. 늦은 점심을 준비 했는데 말에 의하면 Southern style cooking 이라고 했는데 아주 맛이 있었다. 나라니는 집에서 나가서 사는 것이 즐거운 것 같이 보인다. 얼굴이 벌써 활기에 차있다. 요새의 경제사정은 사실 나가서 살던 아이들이 부모 집으로 들어오는 추세라고 들었는데, 우리 작은 딸은 반대의 케이스가 되었다. 큰딸 새로니는 얼마 전에 Vanderbilt의 Peabody College에서 대학원 course를 시작하였는데, 생각보다 학생생활에 다시 잘 적응하는 것 같이 보인다.
내일 일요일은 성당에서 온 후에 Atlanta History Center에서 시작하는 Lincoln Exhibit에 가기로 했다. 나라니가 그곳에서 일을 해서 그런 행사들의 정보를 빠짐없이 알려주는데 그 덕분에 작년에는 Andy Williams의 행사에도 갈 수 있었다. 내일 하는 것은 Southern states에서는 유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Lincoln의 유물들을 직접 본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아서 기대가 된다.
휴~~~ 지난 밤에 예기치 않게 전기가 나가버렸다. 맑고 써늘한 밤에 전기가 나간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도 거의 2시간이 지난 다음에 돌아왔다. 날씨에 의해서 벼락같은 것이 치면 사실 몇 초 동안 깜빡 거리는 것이 보통이니까, 이것은 분명히 그런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99% 짐작에 바로 옆의 Roswell Road 확장 공사에 의한 것일 것이다. 4차선을 거의 8차선으로 확장하는 소위 말하는 Obama’s Economic Stimulus Project의 하나다. 그러니까 ‘공짜’로 연방정부에서 받아서 하는 것이니까 우리의 local tax 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이다. 그 정도의 큰 공사라서 분명히 지하로 뻗어있는 고압선을 옮겨야 하고.. 그러다가 앗차! 했을 것이다. 우리 집의 computer network system은 매우 ‘약한’ battery backup (UPS)으로 단전으로부터 보호되어 있다. 주로 잠깐 동안만(최대 10분 정도) 정전을 막아주는 것인데 2시간은 무리, 무리다. 아침에 보니까 network system이 엉망이 되어 있었고 복구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난 몇 달처럼 무더위였으면 아마도 초저녁 잠을 설쳤을 것이지만 다행히 시원한 밤이었다.
9월 1일은 나의 아내 연숙의 생일이다. 나이를 세기는 이제 조금 재미가 없고 그저 우리 집 식구 4명 중 2명은 모두 1월 달에, 나머지 2명은 9월 달에 생일이 있다는 정도지만, 조금 재미있는 사실은 그 같은 달의 두 사람 생일의 날자 사이가 정확히 16일 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말 우연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었을 때는 조금 시끄럽게 보내야 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일이란 것을 즐기는 줄 몰랐다. 너희도 나이가 조금 들어 봐라.. 하면서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전에 비해서 조금 조용해진 편이고, 사실 조금 편한 기분이다. 그래도 서울에 계시는 처형께서는 꼭 전화를 주신다. 처형 댁도 모두 건강한 나날을 보내시기를 기도해 본다.
얼마 전에 IKEA 에 가서Tundra Laminate floor package 15개를 사왔다. 일층의 나머지를 모두 나무 마루로 끝내려는 계획이다. 물론 dining room으로 경험이 생겨서 조금 자신은 있지만 반대로 어떤 surprise가 나를 기다리는지 그것도 조금 걱정이 된다. 이런 일들은 언제나 꼭 예상치 않은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방과 방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transition handling인데, 내가 pro가 아닌 이상 언제고 나를 괴롭힐 듯 하다.
9월은 식구 두 명의 생일도 있지만, 그 악몽의 9/11 terrorist attack 기념일이 버티고 있다. 정말 괴로운 기념일이다. 그렇다고 피하거나 생각을 안 할 수도 없고,사실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세월이 아직도 그것을 잊을 만큼 흐르지 않았다. 그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의 영혼들을 기억한다. 그 surreal한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또한 회교도들을 어떻게 보고 생각할 것인가.. 참, 정말 괴롭고 어려운 문제다.
9월 하면 생각나는 노래는 역시 Come September란 노래가 있다. 하지만 가슴에 더 와서 닿는 듯한 9월의 기분은 역시 패티 김의 “구월의 노래” 가 아닐까. 같은 노래를 혜은이도 불렀는데 역시 참 듣기 좋다. 아내 연숙이 대학시절 대학교 정문의 수위아저씨가 당신은 꼭 혜은이를 닮았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나와 직접적으로 노래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간접적인 인연으로 들어 보았다.
지긋지긋한 8월이 드디어 간다. 벌써 어제 아침부터 시원한 바람이 산들거리는 듯 느껴지고 실제로 아침의 바깥 기온도 화씨 70도 밑으로 떨어졌다. 지난 세달 동안 계속 70도를 넘었으니까 이것도 조그만 뉴스 꺼리다. 그러니까 지구는 변함없이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증명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중앙 57회 동기 회에서 교우 유정원의 모친상 소식이 왔다. 이제는 세월이 그렇게 된 모양인지 부모님 타계 소식 아니면 자녀들의 결혼식 소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친상의 소식은 나에게 더 진한 슬픔을 준다. 내가 7년 전에 이미 겪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불현듯 email로 나마 위로를 하고 싶어서 보냈다.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누구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애도기간이라 바빠서 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원이는 곧바로 회신을 주었는데, 내가 놀란 것은 내 이름(이경우)의 “경”자가 한자로 “빛날 炅”이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유정원의 “밝을 晶” 자를 기억하고 있다. 아득하게 무슨 time machine를 탄 기분이었다. 45년 이상 완전한 연락의 단절이 이렇게 쉽게 연결이 되는 것은 참 경험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 참 좋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 마지막 편인 고3 편을 오늘 천신만고 끝에 ‘탈고’를 해서 올려 놓았다. 이미 예상은 한 것이었다. 기억력을 더듬는 것이 이번에는 그렇게 힘이 들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노력을 하니까,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이 하나 둘씩 살아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잊을세라 부리나케 쓴 것이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우리 교우 친구들이 이것을 보고 그들의 기억도 같이 합세를 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큰 기대는 못 한다. 우리세대는 알려진 대로 digital generation은 절대로 아니니까.
Hurricane Katrina: 허리케인 카트리나..5주년이 되었다. 정말 지독한 것이었다. 아마도 카테고리 3급 이었을 것이다. 5년 전 그날(2005년 8월 29일), 미국의 큰 도시 하나가 자연재해로 완전히 물에 잠겼다. 공상과학 영화 같은 데나 나올듯한 각본이 현실화 된 것이다. 예측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재해라서 사실 대비하기는 불가능 했을 듯 하다. 1800여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곳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흑인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사망률은 이런 것에서도 다른 집단과 비교가 되지를 않는다. 흑인 대통령은 나왔지만 아직도 그들이 갈 길은 먼 것인가.
8월 달, 지독한 더위였지만 그런대로 집 일을 한 결과도 있었다. 나는 현재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전적으로 맡고 있고, 나머지 식사의 dish wash또한 나의 담당이다. 처음에는 시간도 걸리고 기분도 찜찜한 것도 있었지만 습관이 되고 나니 사실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나도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는 만족감일지도 모른다. 집안 일이란 주로 handyman(일당목수일) 들이 하는 일들이다. 나의 carpentry실력은 조금 초보를 면할 정도다. 하지만 시간에 별로 쫓기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큰 이점도 있다. 올 여름의 major project는 역시 아래층에 laminate floor를 까는 일이다. 보기에 그렇게 쉬운 것이 손을 대고 보니 완전한 monster였다. 8월 중순까지 dining room이 끝이 났다. 그 다음을 계속해야 했는데 floor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손을 보아야만 했다. 결국 subfloor를 뚫고 들어가는 대공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며칠 전에 끝이 나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마루공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사실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른다.
오늘 아침 New York Times에 기고된 한 논평을 보았다. 저자의 이름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Paul Wolfowitz 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neo conservative그룹에 속하는 ‘매파‘ 라고 할 수 있다. 이 논평은 이락 전쟁이 일단 끝나면서 한국전쟁과 비교를 한 것이다. 결론 부터 말하면 철수를 하되 상당수의 전투병력을 남기라는 것이고, 한국전쟁이 휴전이 되면서 미군이 상당히 남아서 전쟁의 재발을 막고 결과적으로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 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말은 되는 이야기다. 문제는 60년 전의 전쟁이란 것과, 전혀 다른 지정학적, 문화적인 조건 등을 어떻게 감안할 것인가.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그렇게 쓰기가 힘 들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계속 나를 push하곤 했지만 그 시작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왜 그럴까? 추억거리가 별로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나 많아서 그랬을까? 기억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이것들 중의 어느 것도 아닌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장 보물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그 시절 이야기들의 끝을 맺는 것이 섭섭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추억할 수 있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1965년은 지난해의 6.3사태 같은 정치적인 불안을 그대로 안고 있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최소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경제발전에 모든 운명을 걸고 있었고, 한일외교정상화가 그것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해방 된지 겨우 20년 만에 국민감정이 그렇게 쉽사리 변할 리가 없었다. 지난해의 도쿄올림픽으로 일본은 튼튼한 경제기반으로 경제대국으로의 첫걸음을 걷고 있었고 그것에 걸 맞게 ‘고자세’로 한국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냉전체제의 국제정세가 우리의 국민감정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반공’에서 출발을 했으니까.
그 해 가을에 박정희 정부는 완전히 미국과 보조를 맞추려, 본격적인 전투부대인 청룡부대를 월남으로 보냈다. 그 전해에는 이미 비전투 부대인 비둘기부대를 보냈다. 서서히 월남전이 국내의 뉴스에 정기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다. 반공의 이념을 실력으로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경제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숙적인 일본이 우리의 6.25전쟁 중에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챙긴 것을 보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 들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고교3학년을 맞은 우리들은 간접적으로나마 나라가 처해있는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공부 잘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그것이었다. 그것의 첫 조건이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특히 1965년에 우리 중앙고교는 벌써 최복현 교장선생님의 원대한 ‘6개년 계획’의 3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학년이 이루어야 할 목표 (서울대 몇 명, 연고대 몇 명 같은)는 사실 아주 어려운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확한 목표는 사실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목표가 주는 심리적인 효과였다. 그것은 참으로 효과적인 campaign이었고, 심지어는 ‘재미’로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고교 3학년이 되면서 시작된 수업에서 느끼는 그 신선한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한다. 무슨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떠나는 가미가제 특공대원 같은 그런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 가짐은 사실 대학입시까지 신기하게 이어졌다. 이것에 대해 나는 아직도 우리 최복현 교장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비록 최교장 선생님은 2학기가 되면서 서울시 교육감이 되셔서 모교를 떠나셨지만 그 분이 남긴 것은 참 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큰 계획의 뒤에는 후유증도 있었다. 불과 몇 번의 시험과 지난 해 학기성적으로 3학년 학급배정을 한 것이 그 중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성적 순위로 분반을 한 것이다. 그런 반 배정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친구들은 실망과 좌절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분반은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졌는데 이과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의 8반은 이과에 속했다. 나는 원래부터 전기,전자공학 쪽으로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과를 선택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이 압도적으로 이공계 쪽은 선호한다는 사실이었고, 각 대학도 그것을 반영하듯 최우수 학생들이 가는 곳은 예외 없이 이공계, 특히 공대 (화공과, 전기과, 기계과 같은) 쪽이었다. 최고의 커트라인은 몇 년 째 서울공대 화공과가 독차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문제점은 공부만 잘하면 거의 무조건 공대로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풍토였다. 공대 쪽에 적성이 맞고 안 맞고가 크게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전기, 기계 같은 것을 싫어해도 수학만 잘하면 그곳으로 간 것이다.
나의 앞자리에는 고2때부터 옆에 있었던 김진수가 앉았고, 뒤에도 오래된 친구인 이종원이 앉았다. 바른쪽 옆에는 원병태가 앉았는데 모두 나에게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갈 때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김진수는 해군, 이종원은 외대, 원병태는 고대로 가버렸다. 원병태는 사실 키가 상당히 큰데 어떻게 나의 옆에 앉게 되었는지 모른다. 담임선생님은 별명이 짱구인 정운택 선생님이셨는데, 조금 흥분을 잘 하시지만 속 마음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 긴장되는 고3시절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왼쪽 옆으로는 목창수, 문영직, 허영식, 차정호, 윤중희 등등이 앉았다. 바로 뒤 이종원의 뒤에는 고석찬, 이영윤이 앉았는데 이 두 친구들은 대학시절 종로2가에서 우연히 만났다. 고석찬의 유머러스 한 표정도 여전했고 이영윤의 멋진 미소도 여전했다. 어떻게 그 둘이 같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났던 모양이다.고석찬, 그 당시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된James Bond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영화를 가지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실 처음 개봉되었을 때 미성년자는 볼 수가 없었고 나중에 그것이 풀어져서 가서 보았다. 물론 검열과정에서 많이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모르고 그 영화를 보기도 전에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장난으로) 고석찬이 비웃으면서 미성년자가 어떻게 그것을 보았냐고 꼬집었다. 금새 거짓말이 들통이 나고 나는 조금 창피했다. 나는 분풀이라도 하듯이 나중에 가서 본 것이다.
이영윤은 미국 pop song을 비롯해서 노래를 좋아한 듯하다. 그가 잘 따라서 부른 노래는 “Love Potion No. 9” 이란 그 당시 유행하던 팝송이었다. 그리고 고2때 정귀영이 Al Martino의 I love you more..를 너무 좋아해서 따라 불렀다면 이때는 정귀영이 황석환으로 바뀌었다. 노래는 Matt Monro의 Walk Away로 바뀌고.. 나도 그 당시 그 노래를 무척 좋아했지만 황석환은 더 좋아했나 보다. 교실에서 크게 부르며 다녔으니까. 나는 그 때 Matt Monro가 영국가수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다시 45년 만에 찾아서 들어보니 역시 기가 막힌 노래와 목소리였다. 여자로 치면 아마도 미국의 Karen Carpenter에 버금가는 그렇게 티없이 맑은 목소리였다. 나중에 그의 노래, Born Free, Wednesday Child, Portrait of My Love같은 것도 무척 좋아했는데 다만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곳의 풍조에 따라 다른 나라의 노래들을 거의 잊고 살았을 뿐이다.
From Russia With Love – Matt Monro
1965 봄 쯤에서 그 소문이 자자하던 James Bond 007 시리즈의 “007 위기일발” 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이 되었다. 반드시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니까 아마도 1964년 쯤 나온 영화가 아닐까. Sean Connery도 멋이 있었지만 Matt Monro의 영화 주제곡 또한 못지 않게 멋이 있다.
Love Potion No. 9 – The Searchers
이영윤이 잘 따라 불렀던 이 노래, 사랑의 향수 9번, 그 당시에 라디오에서 잘도 흘러 나왔다. 비디오를 함께 보니 The Beatles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차림새가 아주 비슷하다.
Walk Away – Matt Monro
황석환이 좋아하던 거의 명곡에 가까운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더욱 가슴이 찌릿해진다. 숙명적으로 맺지 못할 사랑을 떠나 보내는 남자의 절규.. 참, 슬프다.
그 당시 중앙고 3학년 교사 진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아마도 최교장선생님의 배려였을 지도 모른다. 국어의 백정기 선생님, 정열적으로 가르치시고 입시국어에는 외부에도 잘 알려지신 분이다. 입시전문지인 월간 진학 지에 글도 실으셨는데 그 글을 안 읽은 학생들을 나무라기도 하셨다. 백선생님의 정열적인 강의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관조“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수업은 역시 주왕산 선생님의 고문(古文)시간이었다. 확실히 는 모르지만 주 선생님은 주시경님의 자제분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고문강의는 더 무게가 있었다. 특히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의 강의는 재미와 더불어서 이런 것을 평생 공부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김창현 선생님의 국문학사도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명 강의였다. 특히 김선생님은 개인적으로도 향토역사 같은 것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그런 해박한 지식이 강의 때마다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담임 정운택 선생님, 숫제 일본 수학참고서를 그대로 들고 문제를 내시고 가르치셨다. 왜 그런지 그 당시는 일본의 입시풍조가 그대로 시험에 반영이 되곤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특히 미적분을 다루는 해석시간은 숯 장사 원성욱 선생님의 독무대였다. 얼굴이 까매서 그런지 숯 장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명 강의였다. 기하 (geometry)는 “썩은 살, 깨막이“, 손영섭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얼굴에 걸맞지 않게 항상 멋지게, 맞춘 듯한 옷을 입으시고 가르치셨다. 영어(문법)는 옆 반인 7반의 담임 “대추방망이“, 박시희 선생님이 작은 키에 맞지 않게 폭 넓고, 크게 잘 가르치셨다. 항상 산더미 같이 print물을 들고 들어오셨는데, ‘마누라가 밤새고 typing‘한 것’ 이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셨다. 특히 이 선생님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입시용 영어비결이 있었다. 특히 문법을 외우는 방법을 ‘한시’ 나 시조같이 음률을 넣어서 외우도록 했다.
나는 3학년이 시작되고 서울고 출신으로 그 당시 서울공대 섬유공학과에 다니 던 송부호 형의 지도를 몇 달간 받았다. 솔직히 수학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과외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어머님 친구의 아들이 서울고 출신이라 그쪽으로 부탁을 했더니 송부호형이 걸린 것이다. 조금은 수줍은 듯한 형인데 참 자상하고 때로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 그 형에게 참 많이 배웠다. 수학 자체보다도 입시 체험담 같은 것이 더 재미있고 도움이 되었다. “James Bond: 007 위기일발” 영화도 사실 그 형과 같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본 것이었다.
빼놓을 수 없는 선생님들 중에 체육선생님 “똥자루” 정경섭 선생님이 계셨다. 오신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이셨는데, 고3때 체육시간은 완전히 서자취급을 면치 못하는 시간이고, 심지어 어떤 때는 체육시간에 골치 아픈 머리를 식힐 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셨다. 나는 그 시간이 그래서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간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하곤 했으니까. 이 정선생님의 얘기는 정말 실감나게 재미있었다. 그 화제가 대부분 깡패들의 싸움이야기, 무협적인 이야기.. 등등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선생님의 경험을 듣는 것 같아서 더 재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시간 내내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비록 키가 조금 작아서 “똥자루” 라는 별명은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유쾌한 기억을 간직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주 다른 기억으로 남는 선생님, 물리담당 이지홍 선생님이다. 물리는 사실 이공계의 꽃인데 입시에서는 “국(어),영(어),수(학)”에 밀려서 어디까지나 ‘선택’ 과목이 되어버렸다. 그 선택과목의 시간은 대부분의 필수과목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있게 마련이다. 오전에 이미 머리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점심까지 먹은 뒤에는 사실 잠이 기가 막히게 잘도 온다. 그 때에 이 물리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 시간은 달랐다. 이지홍 선생님의 노력과 실력 때문이랄까? 이 선생님은 얼마 전에 PSSC라는 미국에서 하는 물리교사를 위한 과정을 미국 하와이에서 이수를 하고 오신 아주 상당한 실력 파 셨다. 그 프로그램은 미국이 space program에서 소련에 뒤지기 시작하자 뒤 늦게 과학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대부분 ‘실습’을 위주로 하는 ‘산 교육’이었다. 물리시간 중에는 꼭 미국에서 연수를 받으실 때 쓰신 듯한 실험기재들을 가지고 들어 오셔서 정말 ‘실감나게’ 보여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내 눈으로 ‘목격’한 물리 실험들은 대학에 가서도 한번 못 보았다. 특히 음극관에서 음극선이 자석에 의해서 굴절하는 것, 고압에서 공기가 방전을 하는 것..등등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지홍 선생님께 머리 숙여서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1965년 6월 중순경 방학을 몇 주일 앞두고 한일기본협정이 체결되면서 아예 학교에 미리 휴교령을 내려 버렸다. 반대 데모를 방지하려는 심산이었고 물론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사실 나쁠 것 하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사실 지쳐있던 상태에 방학을 몇 주 앞 당긴다는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담임인 정운택 선생님 들어오셔서 침통하신 표정으로 이런 것들을 이해 못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흑판에 커다란 글씨로 “절호의 기회” 라고 한자로 쓰셨다. 그 뜻은 모두다 알았다. 밀린 공부를 이때에 만회를 하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일기본조약의 의미를 생각하고, 다른 편으로는 bonus로 생긴 몇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길어진 여름방학 중에 “우리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며 돌아가셨다. 우리들은 국민학교 6년을 우리의 아버지로 여기며 존경하던 대통령이었다. 독재자로 낙인이 찍히고, 군사정부는 국민감정을 이유로 귀국도 못하게 하였다. 장례식만은 그리던 서울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그 때의 비 오던 날, 길고 긴 운구행렬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학 중에도 데모가 계속 되곤 했다. 하지만 개학이 되면서 어느 정도 가라 앉게 되고 우리들은 다시 입시공부에 돌입을 하였다.
그 당시 입시준비 풍경은 학교 밖으로 입시전문 학원과 입시전문 도서실이 있었다. 도서실이란 것은 책을 빌려보는 곳이 아니고 그저 조용한 방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그 중에 나는 동아 학원이란 곳에 잠시 다녔다. 그곳은 입시용 참고서를 제일 많이 출판하는 동아 출판사에서 직영을 하던 새로 생긴 학원이었다. 그 곳이 다른 곳과 다르게 기억이 나는 것은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입학시험’을 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새로운 개념의 학원이 그때까지 없었다. 그래서 나도 한번 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이었다. 사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것이 상업적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었다. 무슨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 기분이었으니까.
누가 생각을 한 것인지 몰라도 별로 생각이 없이 만든 학원임이 곧 들어났다. 그 정도 학원이면 다른 학원과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과목은 다른 곳에 비해 더 나쁜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 친구 장맹열을 만났는데 그도 나의 생각과 마찬가지였다. 얼마 못 가서 다 그만두고 말았다. 한 때는 도서실에 다니기도 했다. 서대문 로터리로 가는 곳에 서강 도서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같은 반 친구 차정호를 만났다.
2학기가 되자마자 (아니면 바로 전) 6개년 계획의 주역 최복현 교장선생님이 서울시 교육감으로 뽑히셔서 학교를 떠나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교장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떠나기 싫으셨던 듯 한 것이 발령을 받고 한때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후임으로 최형련 선생님이 부임하셨는데 너무나 우리들과는 짧은 기간이어서 별로 특별한 기억이 남지 않았다. 다른 교우들도 마찬가지라 짐작을 한다. 그리고 고교 본관과 학교 운동장 사이에 3층짜리 석조 과학관을 시공하였고 졸업 즈음에는 골격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3학년 때도 역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 함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정기 선생님, 평소에는 침착하시고 공정하신 선생님이시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문제의 발단은 국어 모의고사에 관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사실 모의고사가 끝나면 꼭 수업시간 중에 문제를 같이 풀어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모의고사에 관한 것은 완전히 무시하시고 정상적인 수업을 시작하신 것이다. 궁금하긴 마찬가지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차정호가 끈질기게 문제를 풀어 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백 선생님은 막무가내로 거부를 하시고.. 그러다가 아마도 차정호가 “선생님이 모르니까” 라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뒤는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백선생님, 완전히 이성을 잃으셨다. 완전히.. 차정호의 뺨을 치시는데 거의 제 정신이 아니신 듯 했는데, 아무도 말릴 용기가 없었다. 그 시간도 꽤 길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참 씁쓸한 추억이었지만, 선생님도 인간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나중에 백선생님께서 차정호를 불러서 ‘사과’ 비슷한 것을 하셨을까.. 아니라고 추측을 한다. 그때의 학교의 풍토는 체벌을 교육의 일부로 여겼을 시기였으니까. 그와 비슷한 사건은 바로 옆 반인 3학년 7반에서 났는데, 역시 지나친 체벌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는 7반의 담임 영어 박시희 선생님과 그 반의 이수열이었다. 왜 그것을 알게 되었는가는 간단하다. 옆 반에서 때리는 소리가 우리 반에 고스란히 다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때 우리 반에는 우리담임 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선생님도 그 때리는 소리에 조금은 거북스러운 표정을 보이셨다. 아마도 몽둥이로 큰 소리로 오랫동안 때렸던 모양이다. 나중에 그 반에 있던 김호룡에게 물어보니 바로 이수열이 그렇게 맞았던 것이다. 왜 맞았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이 사건도 역시 선생님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우리반의 반장은 멋있게 키가 컸던 이유성이었다. 나와 이종원은 그를 ‘아우성‘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그 당시 국어시간에 배웠던 유치환의 시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이란 구절에서 나왔다. 아마도 제목이 ‘깃발’이 아니었을까. 우리 반에는 키가 아주 훤칠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유성, 김용만, 안승원, 김명전, 고송무, 김영철, 한정환, 박상돈, 김연응, 조남재, 황석환, 신창근, 김종호..등등 “쭉쭉 잘 빠진” 친구들이었다. 그 당시 나이에서는 학교 내에서 키가 주는 영향이 상당했다. 쉽게 말하면 대부분 비슷한 키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는 뜻이다. 번호를 키의 순서로 정하고, 그 순서에 따라 자리를 잡으니까 더 그런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간혹 예외는 있지만 키가 크면 힘도 세고, 외향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키가 컸던 친구들을 기억하면 무언가 조금은 서먹서먹 할 때가 있다.
박상돈은 키고 크고 공부도 그것도 수학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 역시 그는 서울공대 전기공학과에 합격을 하였다. 나에게는 거의 ‘이상형’이라고나 할까. 김연응, 김영철, 조남재, 신창근, 이윤기 등은 나와 같이 연세대로 갔는데 김연응과 김영철은 기계공학과, 나머지는 모두 전기공학과였다. 신창근은 대학시절 일찍 군대를 가서 헤어졌는데, 나중에 1973년과 1975년 두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호남정유에 근무를 했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해사에 간 최민은 연세대학 졸업식 때 우연히 만났는데, 7반의 송영근, 강교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 고송무도 1975년에 정교성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북구라파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타계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조금 섭섭한 것은 송희성과 배희수, 둘 다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 들인데 그들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배희수는 연세대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송희성은 국민학교 6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고교 졸업 후에는 정말 한번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신동훈은 요새 57 동기교우회의 총무로 맹활약을 해서 email로 나마 만나게 되었다. 정말 오랜 만이랄까. 또한 천주교신자임도 알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이 친구는 그 이외에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이름이 그 당시 제일 잘 나가던 학원 영어 강사에 신동운 이라고 있어서 더 연관이 되어 기억이 되곤 한다. 이 친구 역시 pop song과 연관이 되는 것이 있다. Eddie Arnolds의 Sunrise Sunset과 I really don’t want you to know란 노래였는데 왜 이 노래와 신동훈이 같이 생각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
제일 꼬마인 김윤필은 대학졸업 후에 한번 김진수, 정양조 그룹과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비록 신사복차림이었지만 그 때도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목창수를 통해서 해병대 입대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놀라운 소식도 들었다. 정말 슬픈 소식이었다. 장난꾸러기 오수만은 역시 그가 장담한대로 서울치대, 치과의사,그리고 ‘중앙치과’. 윤중희는 대학 졸업 후에 가끔 만났는데 그때 그는 미국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에 그대로 국내에 남았다고 들었다. 목창수는 화학을 좋아했던 친구인데 서로 잊고 살다가 1987년경에 정말 우연히 Columbus, Ohio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창수는 Ohio State University로 과학 교사단을 인솔하고 연수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온 것인데 정말 우연히 나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목창수와는 가끔 연락이 되었고, 몇 년 전에 둘째 딸이 서울에 갔을 때 정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 신세를 갚을 길이 난감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권명국은 57회 동창회의 소식을 통해서 미국 LA지역(남가주)의 동창회 지부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이름은 정말 오랜만에 듣게 된 것이다. 또 얼마 전에는 동기 회에서 명국의 딸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늦게나마 email로 연락이 되었고, 또한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이종원은 1980년 초 나의 결혼식에도 왔었는데, 그 이후로 직접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우진규를 통해서 월남의 싸이곤 (호지민 씨티)에 정착을 해서 산다고 들었다.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키가 큰” 원병태는 고교 졸업직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고대 화학과에 “꽁지” 로 합격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대학졸업 후에 그를 다시 만났는데 그는 미국에 가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척집에서 하는 주유소를 도와주러 간다고 했다. 그 당시 그를 따라 고려대학에 자주 가서 테니스를 치곤 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고 그를 알던 친구들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차형순은 연세대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LA 지역으로 이민을 와 있었다. 아직도 business를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희진은 정교성을 통해서 현재 캐나다의Calgary에 거주하면서 geological engineer로 일을 하는 것을 알았다. 가끔 정교성이 살고 있는 Toronto에 놀러 온다고 들었다. 나머지 반창(3학년 8반) 들은 애석하게 개인적으로 소식을 모르며, 궁금하기가 말할 수 없다. 혹시 타계라도 한 친구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이상 대강 기억에 나는 것을 적어 보았는데 이외에도 사실 더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것이 현재 내 기억력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력이 더 앞으로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긴장되고 살벌한 고교3학년의 생활이었지만 졸업 후에 대학으로 간다는 가벼운 흥분,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 간다는 그런 기대감이 일년 내내 있었다. 담배를 마음대로 피울 수 있고, 다방, 술집, 연애,당구장, 영화..등등 우리를 기다리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일본처럼 공식적인 성인식은 없다지만 우리에게는 고교 졸업이 바로 성인이 되는 시기였다. 그것들을 기대하며 열심히 공부를 한 때가 바로 고교 3학년 때였다. 특히 중앙고교가 우리에게 준 그 알찬 교육의 결실을 맺게 한 그때를 어찌 잊으랴. 우렁차게 중앙, 미래의 상징 과학관이 신축되는 것을 보며 졸업반을 보낸 우리들, 45년 동안 모두들 얼마나 민족교육의 요람인 중앙의 꿈을 실현하며 살았을까? 이미 타계한 친구들의 명복을 빌고, 남은 우리들 모두 건강하고 보람된 후년을 보내기를 기원해 본다.
Hyundai SONATA 1 year anniversary: 작년 이맘때 연숙이 현대 Sonata 를 샀다. 그때는 Cash for Clunker program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우리 집의 workhorse Plymouth Voyager를 그 프로그램으로 trade-in을 할까..하면서 dealership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서 Sonata를 타 보게 되었다. 그 salesman은 완전한 Sonata 신봉자 (그의 가족이 모두 Sonata customers) 였고,그것이 곧 바로 우리에게 sales로 연결이 되었다. 바로 옆의 Alabama에서 조립된 차였다. 일년째 타 보면서 연숙은 대만족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 차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할까. 즐거운 일이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서 맥주를 덜 마신 듯하다. 여름의 즐거움은 사실 일을 끝내고 저녁때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아닐까? 전에 주로 Samuel Adams의 variety 맥주가 정말 좋았다. Micro brewery로 시작한 brand가 이제는 대량생산이 되고 있어서 조금은 매력이 줄었다.그러다가 나에게 가격과 맛으로 딱 맞는 brand가 나왔다. Yuengling이란 맥주인데 Pennsylvania주에서 나온다고 한다. 처음에는 꼭 중국제 같아서 아하.. 이제는 맥주도 중국제품인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3개월 계속된 올해의 무더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올해 더위의 특징은 거의 하루도 여유를 주지 않는 변치 않는 기상 pattern이었다. 그래서 올해에 제일 보기 싫은 사람들이 TV weather person들이다. 물론 그들이 날씨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조금도 ‘과학적인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왜 올해는 이런 독특한 pattern이었나 하는 분석의 노력 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같이 home office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얼어붙는 듯한 시원한 곳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면 사실 거의 더위를 느낄 수가 없으니까.
김용운 교수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어를 읽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정독은 못 했지만 대강 저자의 얘기는 이해할 수 있었다. 김용운 교수의 책은 1970년대에 수학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읽은 경험이 있다. 그때 저자 글의 스타일이 참 좋았다. 어려운 문제를 정말 쉽게 설명을 한다. 그것은 저자가 논제나 문제를 확실히 이해를 한다는 쉬운 증거다. 저자의 폭 넓은 해박한 지식은 참 본 받을 만 하다. 특히 일본출생이라 그런지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깊게 그리고 쉽게 설명을 한다. 신라통일로 일본과 한국의 말이 완전히 갈려 나갔다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조명은 참 흥미롭다.
백강전투 이후 한국어는 신라어 중심으로, 일본어는 백제어 중심으로 발달해 갔다.
지리적으로 중국으로부터 한반도 보다 더 떨어진 일본열도는 자체적인 언어체계를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일본어의 문법과 한국어의 문법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한반도는 중국,한자음운의 영향을 거의 받아들인 반면 일본은 거의 백제어 수준에 머물렀다.
얼마 전 중앙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64년경을 회상하면서 그 당시 무슨 노래들이 우리들을 즐겁게 했나 생각을 해 보았다. 거의 pop/rock/country 같은 미국중심의 것들이었다. 그 때는 Beatles가 긴 머리에 uniform을 입고 I Want To Hold You Hand를 부를 때였고, hard-rock, psychedelic같은 것은 나오기 전이었다. 맞다.. 그때 미국의 60’s country란 것이 한창 유행을 하였다. 조금씩 전통적인 country song과 현대판 pop이 섞이면서 나오던 것들은 우리들이 듣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Skeeter Davis의 노래들은 여성 취향이었지만 우리” 싸나이”들도 잘 따라 부르곤 하였다. 주옥 같은 그녀의 hit song 중에서 The End of the World와 He Says the Same Things to Me 는 아직도 노래의 가사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He says the same thing to me – Skeeter Davis – 1962
30년 전, Ohio State University의 한인천주교회 교우들, 오랜 세월의 여파로 참 많이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을 도와줄 사진들은 몇 장이 남아있다. 그것을 보면 물론 와~우리들이 이렇게 젊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형제자매님들은 그 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지금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에 그 형제자매님들을 만난 것이 우연은 아닌 듯 싶다. 이 형제자매들, 비록 잠깐 만나고 헤어졌지만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시작을 멋있게 인도해 주었다. 이들과 만나면서 우리는 “뜻밖”의 천주교 영세도 받을 수 있었다. 유아영세가 아니고 우리 둘 모두 30대가 되어서 받는 것이라 이것은 100% 자발적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우리 과(Dept of Electrical Engineering)에 있던 육사출신 유근호형(대한민국 현역 소령)과 알게 되면서였다. 1977년 겨울부터 같이 공부를 했지만 그 당시 그 형은 전혀 나에게 천주교신자 티를 낸 적이 없었다.그러다가 나는 1980년 초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유근호형의 학위과정이 서서히 끝이 날 무렵, 그 형이 한번 콜럼버스 한인성당에 가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었지만 가지를 않았다.그 이후, 나는 서서히 결혼에 의한 경제적인 책임감과 장래의 목표(학위, 직장)에 대한 회의로 정신적인 방황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Turkey출신 교수의 밑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가 새로 구상한 digital control laboratory를 만드는 project에 참여를 해서 우선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을 했지만 그만큼 학위를 위한 과정은 더 길어지게 되었고 난생 처음 ‘깊은 고민’ 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서서히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고 바로 옆에서 충고를 해 줄만한 ‘친구’가 없는 것을 느꼈다. 정말 외로웠다. spouse가 이럴 때 친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유근호 형이 softball game을 하는 picnic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했고 우리 부부는 스스럼 없이 그곳엘 따라 갔다. 나는 어디로든 간에 탈출을 하고 싶었다. 그곳은 사실 콜럼버스 한인천주교회의 왕영수 신부님 송별 야유회였다. 그때가 아마도 1981년 여름이었을까?
그곳에는 한인성당 주임신부인 왕영수 신부님도 와 계셨다. softball game도 하고 한 나절을 그곳에서 거의 처음 보는 천주교 교우들과 지냈다. 콜럼버스는 일반 교민들이 비교적 적은 도시라 학생교우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보였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지만, 그때는 우리 부부도 몰랐다. 그것이 평생 천주교 신자로 가게 되는 첫날이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의 야유회는 왕영수신부님의 송별회를 겸한 것이었다. 왕영수 주임신부님은 신시내티 한인성당으로 가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인 신부님이 없어진 콜럼버스 한인성당은 미국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시게 되고, 그 때부터 우리는 유근호 형을 따라서 일요일에 성당엘 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생소한 천주교 미사였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개신교의 설교중심의 예배보다 신선하게 느꼈다. 그렇게 모르겠고 이상하게만 보이던 성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것은 나와 연숙(wife)의 신앙여정의 시작이 거의 비슷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정도도 거의 비슷했다. 천주교에 대해 알고 싶은 의욕도 거의 비슷했다.
천주교 교리공부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때에 우리와 비슷한 예비학생신자들이 몇이 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정기적으로 왕영수 신부님을 초청해서 교리공부를 받기로 했고 그것은 정기적으로 꾸준히 진행이 되었다. 그때 같이 공부를 한 사람들은 우리부부(이경우, 전연숙), 고완석씨 부부, 김명환 중앙고 후배, 김준성씨(김태성씨 wife), 김원백씨 부인(도성이 엄마), 이화준씨, 석영중씨 등등이 있었다. 결석 한번 없이 꾸준히 1982년 부활절 영세를 목표로 왕영수 신부님을 모시고 성당 사제 관에 모여서 공부를 했고, 낙오자 한 명 없이 전원이 부활절에 모두 영세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착실히 신자생활을 시작하였다. 특히 연숙은 나보다 더 열심히 성령세미나 같은 곳에도 갔다. 그래서 이미 영세 받기도 전에 “무엇을” 체험한 것 같았다. 더 많은 학생, 교민교우들과도 알게 되고 어울리게 되었다. 특히 softball game은 우리들을 모이게 하는 제일 좋은 기회였다. 틈만 나면 그 넓은 Buckeye Village 잔디에서 game을 하곤 했다. 거의 pro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남백희씨, 이성철씨,김태성씨, 이동준씨, 김명환 중앙고 후배, 이철의씨..등등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중앙고 후배 김명환은 원래 soccer 선수로 학교 신문인 The Lantern에 크게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우리 성당의 softball team은 사실 막강한 실력이 있었다. 선수 대부분이 과거에 야구를 좋아하고 잘 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softball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도 있었다. 선수 중에는 성당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끼어있었다. 김태성씨와 이동준씨. 김태성씨는 우리와 같이 영세를 받은 김준성씨의 남편인데 야구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우리들과 항상 어울리고, 이동준씨도 마찬 가지인데 야구실력이 상당하였다. 독신인 그는 비록 신자도 아니고 성당과 관계도 없는데 야구를 좋아해서 우리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위에 언급된 softball대회에서 우승하던 날, 우리들은 너무 기뻐서 모두 남백희씨 집에 모여서 축하를 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이때는 남자고 여자고 다 모여서 노래를 불렀다. 특히 그때 최 데레사(옥진)씨의 독창은 참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최옥진씨는 콜럼버스에서 태권도 도장을 오래하고 한인회장을 역임한 최준표씨의 여동생이었고, 그 집 식구들은 또한 모두 성당의 주요 원로 급 교우들이었다.
대부분의 학생신자들은 성가대의 member이기도 했다. 하기야 그 나이에 음악을 싫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음악실력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얼마나 좋아하느냐.. 그것이 더 중요했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organ을 따라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가 있었다. 물론 우리도 멤버였는데, 특히 천주교에서 중요한 날에는 특별히 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때 이병남씨와 남백희씨 wife가 성가대를 아주 멋있게 이끌었다. 그녀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명동성당의 아퀴니스 성가대 멤버였고 대학에서는 음악을 전공 했다고 했다. 이병남씨의 성악은 가히 pro급 이었다. 특히 “주 찬미하라 (라우다떼 도미눔)”를 연습하면서 가톨릭성가의 맛을 찐하게 느끼기도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 곡의 화음을 기억할 정도다. 그러던 것이 연대동창(기계과출신) 이성철씨가 미국인 성가그룹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같이 ‘앞에서’ guitar를 들고 노래를 하게 되었다. 완전히 고전적 성가대에서 통기타 스타일의 현대판 성가대로 변한 것이다. 그때의 한국팀 멤버는 기억에: 우리부부, 이병남씨, 이성철씨, 남백희씨 부부, 박재승씨, 최옥진씨, 김명환 후배 등등이 있었다. 분명히 더 있었을 것인데, 사진이 남아있지를 않아서 모르겠다.
우리와 같이 노래를 한 미국 팀을 우리는 Mary’s Group이라고 불렀다. 멤버 중에 Mary Karen Carey라는 lady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부부들이 member였는데 어느 특정한 교회에 소속이 된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서 옮겨 다니던 철저한 volunteer같은 그룹이었다. 이성철씨가 그 그룹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기적으로 Columbus east side에 있던 그들의 집에 가서 성가연습을 하곤 했다. 그들의 성가 스타일은 ‘화음’ 이었다. 누가 부르는지 모를 정도로 화음을 중요시 했다. 그때 우리 큰딸 새로니가 갓난아기로 그곳에 같이 가곤 했는데 그들이 참 귀여워 했다. 특히 Ms. Mary Carey는 새로니에게 나무팻말에 글까지 써서 선물로 주었는데 아직도 우리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앞면은 새로니의 신상명세를 적어 놓았고 뒷면에는 종이에 typewriter로 짧은 편지를 써서 붙여놓았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Dear Serony,
This is your American friend Mary Karen! She is being given to you by people who knew you when you were very small. You were so very special, such a pleasant happy baby that it was easy to love you. We know that American must have seemed strange to you and your parents, but we hope that your stay here was a happy one.
We want you to know dear little Serony Lee, that you will always have friends in America, and someday when you come here we hope you will visit.
Also, we want you to know that if ever again your country is having problems, and you need us, that we will be here for your and your family. Or, perhaps it will be us calling on you and yours.
Our address is
Mary and Gene Carey 5239 Brownfield Ct. Columbus, Ohio 43227 Telephone 614-861-1662 America
May you always be Christs special child!
Love from us all!
어느 곳에서나 사람이 모이면 ‘정치’란 것이 끼어드는 법인데 그 조그만 한인성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왕영수 신부님이 콜럼버스 성당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다분히 그런 것이었다. 학생교우들의 입장과 현지 이민자 교우들의 입장이 다른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특정한 원로 교우 분들(선우창원 박사, 임진창 교수)의 입김도 무시 못할 정도였다. 우리부부는 전혀 그런 것들을 모르고 다녔지만 시간이 가면서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 학생교우는 우리의 그렇게 수수방관적인 입장을 너무 ‘이기적’이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도 역시 세대간의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특히 교민들이 보기에 학생들은 잠깐 있다 떠나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리가 아주 큰” 학생이 나타나서 왕영수 신부님을 떠나게 한 것을 성토하면서 문제가 커지게 되었다. 결국은 원로 급 교우가 그 학생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주 원색적인 말로 비난을 하게 되었고 성당은 한때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위기라 함은 학생교우들 전체가 성당을 boycott 하자는 조금은 극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임시적 체제’의 한계 때문에 이런 문제는 오래 가지를 못했다.
나는 1983년 여름 무렵에 Columbus에 첫 직장(DTS: Dynamic Telecom System)이 정해지고 완전히 학교(Buckeye Village graduate residence)에서 나와서 ‘일반인’ 같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은 거의 학생 같고 생활은 현지교민과 같은 그런 것이었다. 직장생활은 사실 학교 다니던 생활의 연장선에 있었다. 다른 정착한 교민과 같이 나의 business가 없기 때문일까. 성경공부도 Buckeye Village 학생들의 그룹에서 하고 있었다. 그때 쯤에는 전에 알고 있던 80년대 초의 학생들이 아니고 80년대 중반에 새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조금씩 우리들은 성당에서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 하였다. softball game도 없어지고 가끔 모여서 노래를 부르던 즐거운 시간도 거의 없어진 후였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1988년 콜럼버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쯤에는 학생들 보다 정착한 교민들과 그런대로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 특히 이봉모씨 부부, 조동훈씨 가족(특히 씩씩 하셨던 손마리아 할머님), 돌아가신 김상식씨, 태권도 사범 최준표씨 가족, 특히 최 데레사(옥진)씨 등등 잊을 수 없는 교우들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천주교 신앙생활의 기나 긴 여정을 시작한 셈이다. 즐거웠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기억들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그 이후로 그곳을 한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조금은 ‘전설적’인 기억이 되어가기도 한다. 언젠가는 한번 가야지..하는 ‘희망’을 남기었다고나 할까. 그런 ‘희망의 곳’이 여기저기 많아졌지만 Columbus, Ohio는 우리 가족이 시작된 요람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그런 곳을 어찌 잊으랴.
다시 보는 삼국지 거의 50년 만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때가 아마도 1964년 고2때였을 것이다. 그 해 여름방학 때 시원한 마루에 누워서 3권으로 된 삼국지를 읽었던 생각이 난다. 물론 책으로 읽어서 나 나름대로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즐겼다. 하지만 지금 보는 것은 정말로 그림을 보는 것이다. 언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나온 영화, 아니면 made for TV series 쯤 되지 않을까? 총 83회로 되어있는 정말 대하 drama였다. 이것을 보면서 놀란 사실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 많은 등장인물의 casting을 시도했고 성공했을까? 이것 하나 만으로도 이것은 기록적인 영화다.
유비, 관우, 장비의 casting은 입에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되었다. 사실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묘사를 거의 그대로 따랐다고나 할까? 더욱 놀라는 것은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3형제의 인상착의가 99.9% 들어 맞는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중국인 배우들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그렇게 넓은가?
나의 짐작일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는 나관중 삼국지를 거의 100% 충실하게, 그러니까 거의 ‘기록영화’에 가깝게 재현을 한 것 같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 각본가가 마음대로 이야기를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참 놀라운 일이다.
중국어와 한국어의 발음이 비슷한 것이 참 많았다. 예를 들면: “만세,만세,만만세(먄쉐)”, “승상(슝샹)”, “유비(요베이)” 등이 있었다. 일본어에서도 그렇게 비슷한 말이 많음을 느꼈는데 여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한자어를 우리나 일본이 받아서 흉내를 낸 것들이 많으니까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실제로 발음을 들어보니 한국,중국,일본의 오래된 역사적 관계가 조금 실감이 갔다.
주요 인물들의 연기나, 영화 set는 수준급이었다. 특히 유비 삼형제들이 그랬고, 조조, 주유 모두 수준급의 casting이었다. 또한 조조나 주유의 “춤(군무) 솜씨” 도 일품이었다. 그에 비해서 뒤를 바쳐주는 extra급들은 실망적이었다. 너무나 표정들이 심각하지를 않고, 너무나 나이들이 어려 보였다. 하지만 special effect나 computer animation같은 잔재주는 거의 보이지를 않는다. 적벽대전의 scene을 보아도 아주 실전처럼 보인다.
제갈량으로 분한 배우의 연기솜씨도 인상적인데 그 중에서도 주유의 장례식에서 통곡하는 연기는 가히 걸작이었다. 소설을 읽을 때 제갈량이 “도사 급” 정도로 상상이 되어서 나이가 많고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로 잘못 알았다. 여기서 알고 보니 나이가 겨우 27세의 ‘청년’ 이었다. 그런 나이에 그만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조금 믿어지지를 않는다.
IKEA Tundra Blues 어제 드디어 dining room의 flooring job이 끝이 났다. Swedish IKEA에서 한달 전에 산 Tundra 라는 laminate floor였다. 값에 비해서 보기가 좋았다. 하지만 기록적인 더위 속에서 거의 일주일이나 걸렸다. 날씨가 조금만 시원했다면 2~3일이면 될 듯했다. 하지만 첫 번째 작업이라 실수가 꽤 많았다. 고칠 수 있는 실수와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다 있었다. 문제는 거의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한듯한 ‘그림’ 설명서였다. 문제는 그 설명서가 틀린 것이 아니라 “100% 그대로 안 하면 ‘망친다’는 사실”을 경고하지 않은 것이다. 나의 짐작은 “실제로 실수를 하면서 배우라”는 의미였다. 이제 다른 곳에 flooring을 할 때는 훨씬 전보다 실수가 적을 것이다. 다음에 할 곳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hallway 인데, 이곳은 정말 challenging geometry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도형’이 간단치 않은 것이다. 이곳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이것이 현재 우리가족의 관심사가 되었다.
Thank you, Harbor Freight Tools!
지금의 집에 이사온 지간 거의 18년이 되어가는데 그 동안 대부분의 수리는 내가 맡아서 했다. 나는 그런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고,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또 다른 이유는 그 handyman, contractor들 중에는 상당히 질이 나쁜 축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엉터리로 고쳐놓고 더 비싸게 돈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의 handyman 기술수준은 사실 초보를 벗어날 정도다. 진짜 pro들은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제한이 없으니까 더 천천히 하면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다..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버티어와서 꽤 많은 project를 끝낼 수 있었다. 크고 작은 sheds (간이창고)를 두 개 지었고, 각종 내부 전기배선, basic plumbing, 지붕수리, 내외 부 페인트, gutter, 높은 소나무 자르기..등등 참 그 동안 많이도 했다. 그 때마다 필요한 것이 tools, 주로 power tools (electric or pneumatic) 이 제일 많이 쓰이고 필요하다. 문제는 월급쟁이에다 아마추어수준으로써 좋은 tool을 사는 것이 무리라는 것이다. Home Depot같은 곳에 가 보면 tool들이 너무 좋은 것, 온통 미제 들이다.
과연 그것들을 pro도 아닌 내가 필요할까?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나의 수준에 과분하지만 또한 안 살 수도 없고..그러다가.. China가 나를 도와주러 왔다. 그들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게, 나의 수준에 맞는 그런 것들을 수출하기 시작하고.. 그 덕분에 나는 꿈에도 못 써볼 만한 tool들을 비교적 쉽게 사서 쓰게 되었다. Harbor Freight Tools란 회사가 바로 그 수입업체로써 그것을 사서 쓴 지도 이제 5년이 넘었다. 문제는 최근에 중국의 인건비가 오르기 시작하면서 싼 수출가격의 이점이 언제까지 버티나 하는 것이다.
중앙고 동창 친구 우진규와 email로 연락이 되었다. 이 친구의 소식은 아마도 간접적으로 캐나다에 사는 정교성을 통해서 듣곤 했다. 하지만 직접 연락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앙고 57회 교우회의 신동훈 총무가 부지런히 소식과 연락처를 전해준 덕택이었다. 모습은 어떻게 변했는지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그 철없고 순진한 때의 추억을 서로 간직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아들, 딸의 나이를 보니 오래 전에 이미 할아버지가 된 듯하다. 이 친구는 아직도 사회복지분야에서 일을 한다고.. 부럽다. 그 반대로 연락이 끊어진 친구도 있다. 중앙고 57회 교우회장을 역임한 서울 한성과학고 교장 목창수..의 email이 no good으로 돌아왔다. 어찌된 일 일까? 이것은 이 주소가 바뀌었다는 뜻인데.. 어디로 이사라도 갔나 궁금해진다. 몇 년 전에 우리 작은딸이 그곳에 갔을 때, 너무 잘해 주어서 아직도 고마운 마음 뿐이고 언제 그 빚을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비록 패잔병 같은 심정이었지만 다른 한 구석에서는 ‘대륙탐험’ 을 했다는 재미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물론 나이 탓이었을 것이다. 그 나이에 비관적이거나 한 감정은 몇 시간도 못 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지루한 Greyhound bus는 급행이 아니라서 조그만 곳이란 곳은 모조리 들리면서 달렸다. 학교에서는 차를 두 대나 잡아먹은 여행이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웃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그때 축 쳐진 나를 위로하며 격려를 한 사람이 바로 성성모씨였다. 그때 성형이 나의 옆에 없었다면 참 오랫동안 쳐진 어깨를 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반대로 이승조씨는 한 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다.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을 해서 여행 중에 공동으로 쓴 돈을 갚으라고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것도 차게 바뀐 사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어려워졌을 때 진정한 친구를 알아 본다더니 이것이 바로 그런 때였다. 나는 성형을 그때부터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다. 학기가 무사히 끝이 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약속대로 그 망가진 차를 찾으러 가야 했다. 이승조는 물론 그런 것은 관심에도 없었다. 나와 성형이 다시 Indianapolis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차가 없었다. 다시 bus를 타고.. 와.. 아찔했다. 그때 또 성형이 도와주었다. 약혼자에게 돈을 빌려서 차를 한대 산 것이다. 물론 used car였다. Full size Buick Electra였다.
그 차를 사고 나서 우리 젊음의 모험심이 또 발동을 했다. Indianapolis까지만 갈 것이 아니라 아예 New York까지 또 가자고.. Why not? 그때는 이미 추운 겨울이 시작이 되어서 더 재미까지 느끼게 되었다. 눈에 쌓인 highway를 달린다는 생각만 해도 피가 용솟음 치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갈 때는 시간의 제한이 없었다. 마음껏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Oklahoma를 빠져 나오기 전에 성형과 기숙사를 같이 쓰던 미국학생, Gary Fugate 의 집에 잠깐 들렸다. 그 친구가 어떻게 집에 잘 이야기를 해 놓았던지 그 집에서 아주 환대를 받았다. 성형의 이야기로 기숙사에 있을 때 시간이 나면 그 학생에게 합기도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차를 Nebraska주로 돌렸다. 이번에는 내가 아는 한국간호원들에게 들릴 차례가 되었다. Auburn, Nebraska라는 Kansas주에 가까운 조그만 town에서 3명의 한국간호원이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명을 한국서부터 알고 있었다. 김성혜씨.. 초가을에 나는 이미 이승조씨와 같이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성형은 이번에 처음 가는 것이고.. 처음에 갔을 때는 조금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구면이 되어서 처음 갈 때와는 달랐다. 그 ‘촌’에서 근무하는 3명의 한국간호원들.. 생각만 해도 외로워 보였다.
그때는 이미 눈이 나리기 시작해서 모든 곳이 흰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를 세 간호원이 데리고 어느 곳으로 갔다. 근처에 있는 다른 작은 town.. Peru였다. 남미에 있는 나라이름도 Peru지만 이곳은 도시의 이름이었다. 그곳에는 Peru State College가 있었다. 조그만 liberal art college였는데 그곳에 외롭게 한국인 교수 한 분이 계셨던 것이다. 어떻게 그 교수가 세 간호원을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미 그들은 가끔 만났던 것 같았다. 그 교수님의 이름은 John Hahn이었는데 50년대의 초기 유학생이었다.University of Minnesota출신이었고 시카고에 누님이 사신다고 했다. 너무나 외로워서 시카고엘 놀러 가면 다시 오는 것이 무서워서 이제는 자주 대도시에는 안 가신다고 했다. 전공은 political science였다. 교수님의 조그만 apartment에서 같이 저녁을 해 먹었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때, 그곳을 생각하면 조금 감상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거의 40년 뒤의 John Hahn교수가 조금 궁금해져서 Internet의 힘으로 찾아보니.. 와.. 그 같은 학교에서 retire를 하신 모양이었고, 명예교수로 이름이 남아있었다. 정말 자랑스럽다.
차를 바른쪽으로 돌려서 다시 Interstate 80를 달려서 Indianapolis에 갔다. 약속대로 그 의사부부가 사는 곳으로 가서 차를 끌고 폐차 장에다 처리를 하고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New York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가는 곳마다 눈이 나리고 있었다. 두 번째의 New York trip은 별로 놀랄 것이 없었다. 아주 매서운 바람이 뉴욕의 빌딩 사이로 몰아치고 있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 빠른 결론이었다. 이번에는 성형이 조금 기분이 발동을 했는지 새로 사가지고 간 차를 약혼자와 같이 밤에 몰고 나갔다가 그만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건 완전히 악연이 아닌가.. 또 차가?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차는 또 disable이 될 정도였다. 성형은 약혼자에게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다. 적지 않은 $$이 없어진 것이니까. 우리는 또 차가 없어졌다. 발이 묶인 것이다. 또 생각 끝에 이번에는 내가 서울로 도움을 청하고.. 해서.. 내가 그곳에서 차를 사게 되었다. 68년형 Ford XL이라는 비교적 큰 차였다. 상태도 아주 좋았다. 그때 느낀 것은 미국에서는 ‘절대적’으로 자기 차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우리는 간호원 기숙사에서 ‘몰래’ 숨어서 잤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무모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스릴만점이었다. 성형이 차 사고를 낼 때, 그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지만 그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면허증에 사진이 없는 주가 많아서 나의 면허증을 빌려갈 정도였다. 아마도 Nyack,NY police의 accident report file에 나의 이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2개월 만에 차를 3대나 잡아먹은 성형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우리는 같이 학교를 떠나 Dallas, Texas로 가서 학교를 옮길 준비를 하면서 조그만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먼저 시카고로 떠나게 되고, 성형은 그 당시 Purdue University의 admission을 받고 생각 중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헤어지게 되었는데, 물론 서로 연락은 끊지 않았다. 소식에 성형은 Dallas에서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려서 부부가 되었고 Purdue University(Indiana)에 입학을 하였다고 들었다. 그곳 (West Lafayette, Indiana)은 시카고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1974년 9월 Labor Day holiday때 그곳으로 달려가 반가운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같은 해 Thanksgiving holiday때 또 그곳에 놀러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는 한국유학생이 상당히 있었고 유학생 회도 있었다. 모두들 모여서 신나게, 건전하게 놀던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졸업이 가까워진 어떤 선배유학생 부부의 초청으로 처음 Thanksgiving turkey 를 맛 볼 수 있었다. 그 분들의 정성들인 추수감사절 초청은 아직도 기억에 남고 아직도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이듬해, 1975년 봄 무렵에 성형부부가 시카고로 놀러 왔다. 조금 있으면 Master’s degree를 받게 되고 취직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의 취업조건이 별로 좋지 않아서 대부분 졸업을 하면 현지에서 취직을 하려는 풍조였다. 그리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 서로 연락처를 찾을 방법이 쉽지를 않았다. 게다가 나는 single이라서 이사를 수시로 하던 터라 더 쉽지를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잊었다. 사진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요새는 특히 겨울이 되면 설경의 Peru State College에서 성형과 같이 눈길의 언덕에서 헛바퀴 도는 어떤 차를 밀어주던 생각이 나곤 한다. 왜 그럴까? 나도 모르겠다. 성형은 어떻게 살았을까? 자식이 몇일까? 그대로 미국에 남았을까? 아니면.. 상관없다. 그저 건강하고 보람찬 인생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 끝
**위의 music video는 그 당시 car stereo에서 거의 24시간 들려오던 힛트송 Charlie Rich(일명 silver fox)의 The Most Beautiful Girl…
까마득하게 오래 전, 잠깐 알고 지내던 사람, 성성모씨. 그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카톨릭신자가 되어서 생각하니 그것이 그의 특별한 이름이었다. 성모는 사실 발음상 Mother of God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가 아닌가? 혹시 성형(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다) 은 카톨릭 신자였을까? 그 당시 성형으로 부터 천주교회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아니 들었어도 내가 전혀 무관심이라 잊었는지도..
1973년 말에 미국의 조그만 대학 캠퍼스에서 만났다. 나보다 한 학기 이상 뒤에 온 한국 유학생이었다. 학기시작보다 조금 일찍 캠퍼스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 유학생이 몇 명 밖에 없던 때 반가운 사람이었다. 나와는 나이가 비슷하고 성격이 털털해서 비교적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춘천고교 출신으로, 서울대학 사범대 지학과를 졸업하고 아마도 이곳에서는 본격적으로 지질학을 공부할 모양이었다.
1973년이 저물어가던 무렵 Christmas다음으로 큰 holiday인 Thanksgiving holiday 를 미국에서 처음 맞게 되었다. 학교는 순식간 ghost town으로 변하고, 결국 우리도 조금 휴일기분에 젖게 되고, 우리는 New York을 가기로 즉흥적으로 의견을 모았다. 다른 유학생인 이승조씨와 셋이서 경비를 분담하고 나의 차로 가기로 했다. 사실은 두 명 다 그곳에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성형은 약혼자가 간호원으로 뉴욕근교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이승조씨도 어떤 간호원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두 명은 이미 New York에 간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처음이었다.
이 ‘유명한(최소한 나에게는)’ New York trip 1973은 사실 영화에서나 볼만한 disastrous trip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거의 생생한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부터 말하자면 “불과 며칠 사이에 2 대의 차를 잡아먹은 여행” 이었다. 우리의 차로 떠났다가 한 명은 비행기, 다른 두 명은 Greyhound bus로 돌아오는 무슨 Napoleon의 Russia campaign을 연상케 하는..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사실 조금 비참한 심정이었다.
기세 좋게 출발한 우리는 Oklahoma를 벗어 나기도 전에 차가 highway에서 서버리는 위기를 맞았다. 그 때의 나의 차는 그 당시 $900 주고 산 used car 1969 Volkswagen Beetle 이었는데 비교적 좋은 차였다. 하지만 long haul을 하기엔 역 부족인 차였는지.. engine oil이 새어나가는 큰 사고였다. 아마도 내가 engine oil을 너무 많이 넣었던 것이 문제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engine이 못쓸 정도로 망가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차(Ford Fairlane 500)로 trade가 되어서 그 차를 몰고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대로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그때의 젊음이 여행을 계속하게 한 것이다.
그 trade한 차는 물론 고물 차에 속했지만 최소한 잘 구르는 차였다. 문제는 manual transmission, 그러니까 clutch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clutch란 것을 써본 적이 없었다. 망가진 차는 비록 gear shifting을 하긴 했지만 clutch는 없었다. 그래서 공터에 가서 연습을 한 시간 정도 한 후에 출발할 수 있었다. 그때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깨가 더 무거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역시 젊음은 좋은가.. 우리들은 그 당시 전혀 힘든 것을 몰랐다.
Joplin, MO를 지나고 St Louis, Indianapolis, Columbus, Pittsburgh, Harrisburg를 거쳐서 New Jersey turnpike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뉴욕 city에 거의 다 온 것이다. 그때의 New Jersey turnpike는 정말 ‘공해’의 본산지였다. Highway 양쪽으로 늘어선 화학공장들에서 나오는 연기가 차의 창문을 닫아도 소용이 없었다. 뉴욕지방의 인상은 그랬다. 오랜 전통과 최첨단의 기술이 기가 막히게 융합이 되어서 미국의 이상(ideal)을 성취시키던 곳.
성형은 자기의 약혼자가 근무하던 Nyack Hospital로 가고 나는 이승조씨가 안다는 간호원 둘이 사는 apartment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그 당시 한국출신의 취업간호원들은 의사들과 더불어 전문직으로 이미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한국의 경제수준으로 보아서 그들은 분명히 훨씬 나은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뉴욕의 상징인 곳을 몇 군데 구경을 하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고생해서 간 것에 비해서 너무나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장거리운전의 경험을 쌓았다는 위안으로 다음에 다시 오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차를 돌렸다.
이제 main attraction이 끝나고 나니 현실이 눈앞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던 차가 갑자기 ‘고물차’로 바뀌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웃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집에다는 뭐라고 변명을 할까..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밤을 새우며 운전을 하는데 도저히 잠이 참을 수 없어서 길옆에 차를 세우고 말았다. 조금 눈을 부치고 가려고 했지만 이승조씨가 월요일에 수업을 꼭 가야 한다며 갈 것을 주장하고, 결국은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거의 운전경험이 없던 그 친구.. 결국 차를 몰고 가다가 운전미숙으로 curb에 차를 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뒷좌석에 누워 자다가 요란한 소리에 깨고.. 우리가 발견한 것은 또 차에 문제가 생겼다는 bad news였다. 이번은 전번같이 engine이 아니고 front axle이였다. 차가 curb 에 올라타면서 그곳이 부딪쳐서 무언가 찌그러진 듯.. 차를 운전해 보니 속도에 비례해서 요란한 소리가 차 밑에서 들렸다. 고속으로 달리면 완전히 싸이렌 소리가 날 정도가 되고 옆의 차들이 다 쳐다 보는 정도가 되었다.
그때의 결론은 이 상태로는 더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Indianapolis 근처여서 기를 쓰고 시내로 들어가 repair shop엘 갔더니 고치지 말고 버리라고 했다. 우리는 결국 차로 집에 가기는 틀렸다고 생각을 하고 우선 시간을 벌기로 하고 궁리 끝에.. 차를 어느 곳에 맡기기로 했다. 그냥 주차장에 놓고 가기는 뭐하고 해서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한인들을 찾아보았다. Kim씨만 찾으면 되니까..하고 여기저기 걸어서 결국 재수 좋게 어떤 분이 겨울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맡아 주겠다고 했다.
그 전화를 받은 분은 어떤 가정부인이었고 의사의 wife였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 가보니 어떤 apartment여서 그곳의 한 구석에 차를 주차시키고 그 부인을 찾았다. 놀란 것은 아무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불고기 저녁을 대접해 주신 것이다. 그 의사인 남편 분까지 와서 계셨다. 아주 젊은 의사부부였는데 정말 불행하게도 성함을 기억할 수가 없다. 저녁을 잘 얻어먹고 이승조씨는 공항으로, 나와 성형은 Greyhound bus terminal로 남편 분께서 친절하게 데려다 주셨다. 아직도 그 분들의 도움에 감사를 드리는 심정이다. — 계속
** 이곳에 있는 YouTube video는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long haul trucker song: Convoy인데 운전중 하도 많이 들어서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배경상, 이도영, 이경증.. 나에게는 서울 창신동 삼총사..라는 인상이 깊이 깊이 뇌리에 남아있다. 동대문 옆에 있는 산동네.. 창신동. 나는 물론 그곳의 근처에서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서울운동장에 갈 때 동대문 옆으로 보이는 산동네..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곳이다. 그 곳이 내가 알던 이 삼총사가 자라던 곳이었다.
이중에 이도영, 배경상은 모두 이대부고(이화여자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이경증은 나와 같이 서울 중앙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경증이는 고2때 담임 박영세 선생과의 trouble로 학교를 떠나게 되어서 검정고시를 보고 연세대 지질학과에 입학, 졸업을 했다. 그러니까, 경증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헤어지고 연세대학교 졸업 무렵 쯤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학교를 군대에 가지 않고 계속 다녔지만 경증이는 연세대에 입학한 후에 곧 바로 입대를 했는데, 거기에 멈추지 않고 월남전에 자원을 했고 그곳에서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케산전투 같은 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친구였다. 나는 경증이의 이런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삶’을 참 좋아했다.
다시 만났을 당시 우리들은 상당히 다른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라온 동네가 서로 아주 다르고 거기에 따른 친구들의 배경이 완전히 달랐다. 한 마디로 그의 동네친구들은 내가 전혀 모르고 경증이도 나의 친구를 모르는 것이다. 그 중간에 중앙중, 고교의 친구들이 서로 다리를 놓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동창 김호룡, 우진규 같은 친구들은 경증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는 역시 내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다시 만났을 때 조금은 서먹서먹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게 진정한 ‘어리고 순진한 우정’이 아니었을까.
그 때부터 나는 경증이의 ‘동네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어울리면서 우선 놀란 것이 그 많은 창신동 친구들의 숫자였다. 그 중에는 그때 한창 인기절정의 통기타 가수 이장희도 그 중의 한 명이라고 들었다. 어찌 그렇게나 많을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녀서 오래된 동네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경증이는 아마도 그 창신동의 토박이여서 그렇게 친구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 처음 사귀게 된 사람들이 바로 이도영, 배경상이었다. 어떻게 같은 이대부고를 다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녀공학을 다닌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진한 농담으로 이도영은 이대부고 다닐 당시 여학생의 옆에 가면 냄새로 지금 period 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해서 모두들 게면 적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자연스레 여자들을 대할 수가 없었다.
이도영은 이미 어떤 재수하는 어떤 귀여운 여자와 동거 중이었고, 배경상은 그 보다 더 야심이 커서 ‘돈 있는’ 여자를 만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에 걸 맞지 않게 최고급 까만 정장 양복을 입고 다녔다. 키도 커서 멀리서 보면 무슨 영화배우 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경증이는 사실 여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의 그런 초연한 태도가 그렇게 신선하고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다고나 할까. 또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성은 잊어 버렸다. 이름은 경화였다. 꼭 여자이름 같지만 아주 예술가처럼 멋지게 생긴 남자였다. 그 친구는 미술학도인데 참 그림을 재치 있게 잘도 그리는 예술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성격, 배경, 취향이 다른 친구들이 경증이 주변에서 아주 멋있게 어울리며 청춘을 구가하던 그 시절.. 하지만 모두들 쉽게 풀지 못하는 고민들은 한두 가지 다 안고 ‘밤을 잊은 그대’ 의 청춘을 보내던 시절이 우리젊음의 전성기, 1970년대 초였다.
그때 우리들이 명동 같은 곳의 다방에서 모이면 주로 여자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을 골라서 만났다. 물론 여자들에게 장난스럽게 ‘추군’대려는 의도가 갈려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것을 hunting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그저 “꼬신다” 고 했다. 심지어는, 그것에 관한 방법론 같은 것은 “꼬셜로지”, 그러니까 sociology같이, 라고까지 했다. 우리는 완전히 아마추어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런 곳에 가보면 완전히 고정멤버 같은 프로 급 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 팀에서는 배경상이 조금은 프로급이 아니었을까? 주로 장난스러운 게임을 하곤 했는데 여자들이 그룹으로 모인 곳에 혼자 가서 미팅을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게임이었다. 다들 잘 했는데 나는 끝까지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의외로 점잖은 경증이가 그런 것을 대담하게 잘 하곤 했다. 대부분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지만 아주 가끔은 성사가 되는 수도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재미가 있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성사가 된 미팅그룹이 생각이 난다. 출신성분이 아주 다양한 여자들의 그룹이었다. 그런대로 정기적으로 만났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바로 김성혜씨였다. 조금은 도도하고 고고한 척 하는 듯한, 툭하면 영어로 대답을 하곤 했다. 어떤 미국사람에게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해서 물어보니 얼마 있다가 간호원취업으로 미국엘 간다고 했다. 또 생각나는 사람, 이대생, 오연희씨.. 우리는 우연희, 라고 불렀다. 밝고, 항상 웃는듯한 얼굴.. 그들은 다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무엇을 할까.. 간호원 김성혜씨는 나중에 미국에서 다시 만나는 인연을 가지게 된다.
1970년대 초에 그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이 아주 적게 남아있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제일 궁금하던 배경상이 빠져있다. 등산가서 찍을 때 왜 배경상이 빠져있을까? 기억이 안 난다. 돈 많은 여자를 쫓아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이도영은 왜 재수생 cute girl friend를 안 데리고 왔을까. 그것도 의문이다. 꼭 붙어 다니고 했는데. 그들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1975년이었다. 잠깐 여름에 귀국을 했을 때 정말 반가운 만남을 했다. 몇 년 전 여자들을 쫓아가느라고 명동을 헤매던 때를 서로 그리며 다시 명동을 누비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보다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3~4년은 더 늙은 것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았을까? 이도영은 그 재수생과 결혼을 했을까? 배경상은 정말 부잣집 딸을 만났을까? 경화는 무슨 예술 대상을 받지나 않았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그 중심에 있었던 나의 친구, 이경증.. 1980년 나의 결혼 때 잠깐 보고 다시 없어졌다. 이 친구는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한 셈이었다. 조금은 방랑자 기질이 있다고 할까. 자식 어디로 증발을 했니..이제는 슬슬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니? 죽기 전에 한번 소식이라도 듣자.
히로시마 65년 전.. 눈 깜짝할 사이에 인간들이 ‘증발, 소각’ 되고 날라가 버렸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거의 장난감같이 작은 것이었지만 그 심리적 효과는 아직까지도 다른 핵무기 사용을 저지해 오고 있다. 불쌍한 것은 아무 죄 없이 증발해 버린 ‘재수없이 그곳에 살던’ 민간인 들이다. 물론 그 당시 군사시설에 관련된 민간인도 많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던가?
며칠 전에 오랫동안 우리와 같이 산 어항속의 물고기가 죽었다. 두 마리 중의 한 마리였다. 나라니가 학교기숙사에서 기르던 것이니까 최소한 3년은 되었을 것이다. 다른 것들은 훨씬 오래 전에 사라졌는데 이 두 마리는 나와 같이 몇 년을 산 것이다. 그래서 더 정이 갔다. 나머지 한 마리를 가만히 보니 그 녀석도 조금 움직임이 느려졌다. 혹시 이 녀석도 곧 따라서? 새로니가 부리나케 같은 종류의 것으로 팔팔한 2마리를 사 왔다. 아.. 그 젊음이여.. 젊은이 둘과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이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태어나고, 사라지고.. 젊음이 늙음으로..그게 자연과 신의 섭리일 것이다.
연숙의 대학시절 buddy가이화여대 총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아.. 세월이여.. 어느새 그런 나이들이 되었는가. 연숙은 총학생회에 단과대학회장이고 그 김선욱 총장 선출자는 총 학생 회장이었다고 한다. 우리 결혼식에도 왔었다. 나도 그 당시 조금은 기억을 하고 있다. 결혼식에 온 그녀 친구들 중에 한 팀이 총학생회 임원그룹이라고 들었던 기억, 와~~ 그것이 1980년.. 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 이질적인 두 문화의 틈바구니에서 필요이상의 고민 거리를 짊어지고 stress받는 어깨들을 보며 미안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솔직히 우리자식들을 포함해서 ‘마음에 드는’ 녀석들을 이제까지 살면서 거의 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대부분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지만 가슴 속 깊이 나의 말에 동감을 할 것이다. 최소한 우리세대는 그렇다는 말이다. 반대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는 부모를 많이 못 보았을 듯 하다. 구체적으로 열거를 하기 시작하면 뜨거운 화제가 될 가능성이 많다. 언젠가는..
러시아의 heat wave 를 보면서 조금 우려가 생긴다. 다른 곳이 더운 것은 조금 이해를 할 수 있는데, 그곳은.. 러시아.. 이건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지독하게 stupid 한 conspiracy, contrarian buffs들과 그와 버금가는 republican gang들, 조금은 과학을 정치에서 떼어놓고 생각하는 최소한의 양심이 없는가. 너희들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더 그렇다. 그렇게 pro-life라면 더 그렇게 노력을 할 이유가 있고 장기적으로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또 한 명의 U.S. supreme justice가 탄생을 했다. ‘역시’ 또, 여자다. 크게 놀랄 것도 없다. 이제 여성의 관심을 대변할 최고의 법관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기뻐할 것이다. 모두 여자들이니까. 나는 어떠한가. 이제는 거의 중립적인 입장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아마도 여자의 세상이 오지 않을까..
A Day in the life – The Beatles
대학시절 한때 Beatles의 이 노래.. 참 많이도 들었다. 꼭 좋아했었다고 말을 할 수는 없는 곡이었다. 그 당시의 짧은 영어실력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그랬을까? 그 보다는 이 노래가사의 배경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랴? 그 당시에는 가사보다는 ‘겉 멋’이 더 중요하니까.. 이 곡에서 John Lennon특유의 목소리를 맛볼 수 있었다.
미치 밀러.. 어렸을 적에 많이도 들었던 이름이다. 그 당시 그의 합창단 (Mitch Miller & Gang)이 부른 영화 주제곡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1962년) 쯤이었을까. 그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라는 영화의 주제곡 콰이강의 행진, The River Kwai March. 가사가 있는 노래가 아니고 완전히 남자들의 휘파람 합창이었다. 그들이 바로 Mitch Miller 합창단이었다.
그 당시 그의 합창곡들은 거의 유행가처럼 불려졌었다. 그들의 영향이었을까.. 곧 이어서 한국에도 Sing Along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전석환씨가 이끌던 Sing Along Y (YMCA)도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한결같이 노래들은 밝고, 복고적이고, 심지어 가정적이었다. 한마디로 나중에 classic으로 남을 만한 그런 곡들이었다.
99세로 세상을 떠난 Mitch Miller,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 어린 주옥 같은 미국적인 노래를 남겨 주었다. 그 많은 곡 중에서 아직도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몇 곡만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르라면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RIP.. Mr. Miller….
콰이강의 행진,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곡영화속의 거의 비참한 행진과는 달리 아주 경쾌한 곡이다. 그 당시 아주 유행을 한 멜러디, 내가 다니던 중앙중고교에서는 그 당시 이곡을 등교시간에 맞추어 계동골목을 향해서 아주 우렁차게 들려주었다. 그 긴 계동골목을 걸어서 등교하던 우리들은 이것을 들으며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져을 것이다.
The Yellow Rose of Texas, 전통 미국민요: 텍사스의 전통민요인데, 전설에 의하면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독립할 당시 텍사스 leader였던 Sam Houston이 전쟁 상대였던 멕시코의 General & President Santa Ana에게 비밀리에 보냈던 (spy?) 텍사스의 여자가 바로 Yellow Rose of Texas였다.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
I have a version of Asterisk pbx running on vmware virtual machine on a Windows host. This configuration (pbx-in-a-flash) is extremely stable running more than 6 months without interruption. Also, this serves my needs of home office more than enough.
Now, bad news part.. Not being a physical machine has tremendous advantage (like easy backup, easy creation, easy porting etc), but its virtual disk is not as easy to maintain as with physical disk. My configuration is dynamic virtual disk mode in which it allocates storage space as needed. But when you delete some files, it just marks them as deleted without actually shrinking it.
The pbx virtual disk keeps growing along with constant addition of audio recording files (like phone recordings, voice mail etc). Only solution to this is to manually shrink the virtual disk offline. In case of windows guest virtual machine, you just log into the guest system, then runs WMware tool on task bar. In a linux guest like Asterisk, it is done from Windows host using WMware tools “vmware-vdiskmanager.exe”.
I’ve followed an instruction from a site found with Google, but strange.. it simply didn’t work. I have deleted almost 1GB out of 5GB total. After shriking done, no error message.. it just displayed like “shrinking succeeded”. But, the virtual disk size remains 99.9% identical! What did I do wrong, here?
와.. 이게 장난이 아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글거리는 아침 해를 보며 오늘은 heat index(불괘지수)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지난 겨울이 그렇게 춥더니 여름은 그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무척 덥다. 올 여름의 전기료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대개는 1층의 에어컨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올해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니까 거의 보통 여름의 2배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를 더 쓰면 그만큼 CO2가 더 유출될 것이고, 그것은 더 지구를 덥게 한다.. 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왜 더울까 암만 생각해도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고 불평이다. 그저 Mother Nature가 가끔 하는 경고이거나 장난하는 그런 것일 것일지도 모르니까. Weather person들도 해답이 없는 모양이다. 예보는 하고 있어도 왜 올해는 이럴까 하는 해답은 ‘절대로’ 안 한다. 모르니까. 과학이 설명을 못하는 것이다.
올해의 특징은 온도, 습도가 같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하면 밤에도 별로 시원하지를 않다. 결국은 그때에 에어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집의 에어컨은 사실 무척 고물에 속해서 사실 언제 고장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별로 신경을 쓰지를 않았는데 요새는 조금 걱정도 된다. 제일 더운 날 이것들이 stop working을 한다면 그야말로 ‘비상’ 일 것이다. $$이 많으면 이럴 때 brand new energy efficient model로 바꾸면 전기료도 덜 들고 더 시원할 것이지만..아~~ 안 좋다, 역시 안 좋아..
추억에 남을만한 더위가 몇 번 있었다. 아마도 1972년 쯤이 아니었을까? 그 해 서울의 여름은 정말 지독하였다. 1973년에 고국을 떠났으니까 그 후에도 그런 더위가 또 있었을 듯 하다. 그때가 특별히 왜 기억에 남는가 하면 밤에 잠을 전혀 못 잤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울의 민가나 아파트에는 에어컨이 거의 없었다. 사실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날이 일년에 며칠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보통 밤에 잠은 잘 수 있었는데 그 해는 예외였다. 그때 조금 겁이 났다. 밤에 잠을 못 자게 되면 이건 큰일이 아닌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증이와 새벽같이 연세대로 테니스를 치러갔던 확실한 기억이다. 그 다음은 1975년 초여름 (6월 초였나?), 시카고에 열대야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때 알고 지내던 일본인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시 밤을 거의 꼬박 새웠다. 아마도 그때의 밤 기온이 80도(화씨)가 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잠은 설쳤으니까..하고 Lake Michigan으로 갔는데.. 그렇게 차게 느껴지던 곳이 그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그 정도였다. 그때 시카고의 많은 집에 에어컨이 없었고, 사실 필요한 곳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지독한 더위가 여기 저기서 더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래서 global warming의 경고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이런 ‘설’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기후(extreme high & low)가 자주 나타남은 믿는다. 올해가 바로 그런 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불쾌지수가 높다 함은 기습적인 폭우의 가능성이 많다는 뜻도 된다. 오늘, 아니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하루 종일 찌더니 급기야 오후 늦게 터지고야 말았다. 우박과 더불어 폭우가 쏟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여름의 즐거움이다. 이런 더위에 이렇게 폭풍과 같은 빗소리를 듣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특별히 싸늘한 가을 비였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 부터는 이런 열대성 여름 비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이럴 때, 태고적 시절 (고2) 여름방학 때 서울 남영동시원한 마루바닥에 누워 ‘삼국지’를 읽던 것을 회상하면 더욱더 시원해짐을 느낀다.
Whooooa… it’s hot, hot and very hot & humid even from Atlanta’s standard. Is it the infamouse Bermuda High again? This year’s hot weather really is testing the stress limits of everything, A/C for one thing. So far our two trusty electric fans got broken (from contant running).. what’s next victim(s)
Even moreannoying is the WordPress’ trouble with uploading meager 16M pdf file (via PHP of course). Our home has 64M allowance which I have set myself (being located at home), but not with hosted, shared production servers (at GoDaddy). Currently it boasts 8M upload size limit. How can I make it larger from web host console (at GoDaddy)? Is it even possible? Another dog day annoyance. By the way, being desperate, I bypassed php upload limit by ftp’ing the file, but strange enough, the WordPress’ media window even didn’t recognize it. A perfect dog day afternoon, bravo!
Contacting godaddy for help brings this concise response:
Thank you for contacting online support. By default, PHP limits scripts uploading files to 8 MB. To change the limitation, edit the following values in your /php.ini file for PHP4 or /php5.ini file for PHP5:
The above settings change your PHP upload limit, allowing you to upload files up to 10MB in size.
The maximum upload value that you can specify for upload_max_size and post_max_size is 192M.
If you are running Hosting Configuration 2.0, you can create custom .ini files for both PHP 4 (php.ini) and PHP 5 (php5.ini) in the root directory of your site. Please note that php.ini and php5.ini files must be in the root directory to function properly. These files will not work if placed in subdirectories, whether or not they are aliased to the root directory. Unfortunately, we cannot help create a php.ini file. we do not provide technical support with third-party scripting issues. We regret we can not assist you further with this issue and thank you for your understanding in this matter.
Which ‘root’ folder are they talking about? Hosting Configuration 2.0 allows you to modify the root foler’s php.ini file? Never knew about it. Are there someone who tried this?
I’ve beeing using Chrome for 2 weeks now without any major hiccups.. until now. It consistently fails to render pdf file (only 2 pages out of 99 displayed).. Firefox & IEx had no problems with this particular pdf file. Someone out there had some experience like this? Dog day afternoon continues..
얼마 전에 YouTube에서 60년대 Instrumental group, The Ventures를 video clip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정말 감회가 깊다고 할까. 나의 60/70 moment인 것이다. 특히 Ventures가 일본에서 맹활약을 하던 60년대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 당시 (rock) guitar를 배운다고 하면 사실 거의 이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도 물론 그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Ventures는 한국에 한번도 오질 않았다. 그 정도로 우리는 $$$가 없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비쌌던가. 그러니 다 해적판 (그때는 우리나라에 license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LP 로 그들의 연주를 즐기는 정도였다. 그때 나의 주위에는 아주 상당한 수준으로 그들의 연주를 흉내 내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요즈음 일본의 TV drama를 가끔 보면 그 당시 그들의 대중문화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들은 정책적인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그런 것들을 거의 모르고 지냈지만 그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 식 이었다. 어떠한 식으로든 간접적인 영향은 상당히 받았던 것을 지금에야 실감을 한다. 한국이나 일본에 모두 상당한 미군이 주둔을 하고 이어서 그들로부터 직접 받는 것 이외에 우리는 일본을 통한 여과된 미국문화가 또 유입되고 있었던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당시 이미 경제발전이 상당히 진행이 되고 있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구미의 연예인들을 마음 놓고 불러다 공연을 시킬 수 있었다.
일제강점의 심리적 영향과 그들의 일방적인 경제부흥은 사실 그들의 ‘왜색문화’를 우위에 있다고 단정을 하고 완전히 차단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까? 사실은 그 당시 일본문화라는 것은 거의 구미의 것을 흉내 내는 것 정도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소위 대중음악, 혹은 전통가요라고 하는 트로트풍의 노래들은 사실 일본의 엔카와 같은 것이다. 그 이외에 미국 folk song의 영향을 받은 젊은 층의 노래들 (통기타 그룹이라는) 조차도 일본이나 한국이 거의 같았다. 그러니까 정책적으로 막았다 해도 실제로는 거의 같은 것들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경제수준이 상당히 나아진 지금에서 조금씩 일본문화가 유입되고 있으나 이제는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이 들어올 것도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숙명적’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The Ventures의 Forever (and ever) with You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 새로워 진다. 60/70의 nostalgic한 기분도 나고 또 다른 미래의 양국관계의 한 chapter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