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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을 생각한다. 오늘 아침 문득 오늘이 4월 19일임을 느꼈고, 아마도 조금은 더 의미가 있는 해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아.. 1960~2010.. 정확하게 50년이 되었음을 알았다. 조금 부끄럽기도 한 것이 오늘에서야 50주년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60년 4월 19일 나는 서울 종로구 계동 1번지 중앙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초봄이었던 4월은 그 나이엔 참 즐거운 계절이었다. 우선 밖에서 full-time으로 뛰어 놀 수가 있기 때문이다.
No TV, No telephone, No game machine, No computer, No nothing, Yes only AM radio.. 유일한 오락은 만화책과 누나들(식모누나까지) 속에서 끼어서 순정 멜로드라마(예를 들면 청실홍실, 장희빈 같은)를 AM radio 에서 듣는 것 밖에 없었던 시절, 집 밖의 골목은 나에게나 동네 꼬마들에겐 거의 천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조금은 덜 뛰어 놀 것 같았지만, 거의 반대였다.사실은 더 나가서 놀았다. 우선 입시공부가 당분간(최소한 3년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종로 화신 백화점 옆 골목에 있었던 우리의 ‘등대’ 우미관에서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 주연의 2차 대전 잠수함과 구축함 영화, 상과 하(Enemy Below), Pat Boone주연의 과학공상영화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등 그 당시 미국영화에 열광하던 시절.. 그 때였다. 사일구 혁명이 일어난 것이.
그 당시 나는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 에 살았다. 모두가 지금에 비하면 꾀죄죄하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모두들 생활수준이 비슷해서 사실 우리들 그렇게 가난한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고나 할까.
길에 나가면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 앉아서 할 것이 별로 없었고 생활공간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기적적으로 침묵이 흐르는 거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처음 맞고 보는 “계엄령” 때문이었다. 골목까지 사람이 사라진 것은 사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 해 1960년 3월에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역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의 교과서적인 극치였다. 어린 우리가 듣고 보아도 그런 것 같았다. 재동국민학교 6학년, 그러니까 1959년, 담임선생님이셨던 박양신 선생님.. 그 선생님까지 우리 코흘리개 학생을 놓고 선거유세를 하다시피 하셨다. 이기붕이 조볌옥(야당 후보) 보다 훨씬 낫다고.. 분명히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선생님.. 너무 하셨다.
그리고 기억나는 비극적인 사건, 마산 부두에서 김주열이란 고등학생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물론 신문에 그런 것들이 요란히 실렸다. 최소한 이승만 정권은 언론통제나 탄압은 안 한 듯하다. 그 당시 우리는 경향신문을 보았다. 특별히 야당 성이 강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요란히 정부를 탄핵하곤 했다. 그 때는 각 신문마다 간판 격인 만화가 매일 실렸는데, 그게 어린 나이에 보아도 무슨 정치적 배경이 깔린 무슨 의미가 있었다. 나는 그때 경향신문의 두꺼비 (김경언 화백)를 즐겨 보았다. 물론 제일가는 인기는 역시 동이일보의 고바우영감(김성환 화백) 이었지만.
결국 부정선거는 짜여진 각본대로 이승만, 이기붕을 대통령, 부통령 으로 만들어 놓았다. 보통 4,5월에 선거가 있었지만 다급해진 자유당은 강제로 3월 15일로 앞 당겨 선거를 치렀는데 이유가 좋았다. 4,5월 달은 농번기라는 것이고 농민들을 돕겠다는 갸륵한 이유.. 그 당시 자유당은 그 정도로 유치하기도 하였다. 기억나는 것이,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기붕은 거의 허수아비고 모든 것은 그의 부인인 박마리아가 움직인다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면 거의 사실인 듯 싶다. 그 단적인 예로 이기붕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을 박마리아가 이승만의 양자로 들여보낸 것인데, 정말로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강석이 가족을 모두 쏘아 죽이고 자기도 죽은 것이다. 대부분, 이강석의 용기를 칭찬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4.19는 시실 급박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각종 데모가 점점 서서히 커져나간 것이다. 4월 18일에는 서울고려대 학생들이 데모 후에 자유당 ‘소속’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 때는 자유당 소속의 정치깡패들이 자주 등장을 하였는데, 제일 유명한 것이 이정재, 임화수의 일본 야쿠자 같은 조직이었다. 이들은 조무래기 동네 깡패가 아니고 거의 법적인 ‘회사’를 가진 조직 폭력배였다. 이들에 관한 일화는 오래 전의 TV 드라마 ‘무풍지대‘에 아주 자세히 나온다. 그 당시 일화로, 코미디언합죽이 김희갑씨가 임화수에게 폭력을 당한 것은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면 임화수가 “야 합죽이, 요새 잘 있냐?” 하고 인사를 한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른다.
4월 19일 (무슨 요일이었을까, 맞다..월요일이었다) 아침에 학교엘 가니.. 수업도 시작하기 전에 (확실치 않지만) 퇴교를 당했다. 우선은 신이 났지만 (그 나이에 학교보다 동네골목이 더 좋았음),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거리의 공기가 조금 이상 했음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선 ‘신나는’ 마음으로 만화가게로 향했고, 미친 듯이 애독하던 만화 김산호의 ‘라이파이‘를 즐겼다. 그러면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까지 데모대가 갔었던 모양이고,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때 총소리를 처음 듣게 되었다 (라디오의 드라마를 제외하고) 아마도 그 소리는 그 당시 경찰들의 표준무기 카빈소총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것이 느껴지고 총소리는 더욱 잦아지고.. 그러면서 저녁이 되었다. 재동 신작로엘 나가니 (지금 돈화문에서 종로경찰서로 이어지는 거리) 완전히 사람들로 들끓고 군용트럭, 화물트럭이 학생들을 가득 태우고 질주를 하고 있었다. 물론 격한 구호를 외치면서. .그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니까 4.19는 사실 대학생들의 데모였다. 희생자들도 거의 그들 이었을 것이다. 거리엔 발을 동동 구르며 귀가를 안 한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들로 가득하고.. 그때 같은 동네에 사는 국민학교동창 한윤석의 어머니가 큰 딸을 부여 앉고 무사히 귀가한 것이 너무 기뻐서 뛰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러다가 계엄령 이란 것이 선포되고 군인들이 거리에 깔리기 시작하며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이런 광경은 사실 그 이후 몇 십 년 동안 흔히 보게 되는 그런 것이 되었다).. 동네 골목까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그러면서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하야 성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명해진 말 ‘국민이 원한다면‘.. 이란 말.. 그 당시 아주 유행어가 되었다. 거의 친 아버지 이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게 교육을 받았던 우리들은 솔직히 동정 어린 심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기붕 개새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잘못은 거의 이승만에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때, 학생이란 위치가 사실 한국역사상 최고의 경지까지 올랐음을 의심할 수가 없다. 일반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대우를 하곤 했다. 특히 대학생들.. 수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던 그 용감했던 대학생 형님들.. 지금 생각해도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고, 흐뭇해지는 심정 누를 길이 없다. 그렇게 나라에 희망이 없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시절, 작업복 염색해 입고, 암시장에서 산 군화를 신고 대학캠퍼스를 누비던 그 멋지던 형님들 (누님들도 있었겠지만).. 지금 다 어떻게 4.19를 기억하고들 계실까.. 궁금하기도 하다.
짧았던 학생혁명 시절, 결국 미성숙하고 이기적이던 야당 정치인들이 거의 망쳐놓다시피 해서 결국은 다음해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의 탱크에 의해 끝이 나고, 사일구의 의미는 희망했던 것처럼 피어 오르질 못했다.(군사정권은 사일구의 의미를 격하하진 않았다. 하지만 5.16의 의미를 올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눌렸을 뿐이다) 피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숨져간 영혼들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명복을 빌고 싶다. 고이 잠드시기를..
당시의 신문으로 본 사일구 혁명
대한민국의 신문들이 거의 모두 digital archive로 Internet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그 동안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로 비싼 보물과 같은 역사적 정보들이 거의 기적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이것을 보는 것은 최고의 time-killer가 될 수가 있고, 이것으로 다시 자기만의 역사를 쓰며, 바로 잡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예로 아래에 보이는 사일구 혁명 당시의 신문을 보면서 희미하거나 숫제 틀린 기억들을 바로 잡게도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당시 12살 정도의 ‘한자 문맹‘에 가까운 나이어서 이런 신문들을 읽지도 못했을 것이라서, 그렇게 큰 잘못 된 기억은 없을 듯하다. 그 당시 나는 분명히 ‘그림, 사진’들만 즐겼을 것이다. 이것들을 보면서 역시 사일구는 아주 오래 전 ‘사건’이라는, 그것도 너무도 오랜 전이라는 가벼운 충격을 받고, 내가 그만큼 오래 살았고, 그 역사의 현장을 피부로 느꼈다는 것에 약간의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50년이 지난 신문 속의 글과 사진은 거의 ‘전근대적 문화’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는데, 변해버린 한글 맞춤법과 당시의 경제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꾀 죄죄’한 모습들, 당시의 ‘조잡한’ 흑백 신문사진 기술.. 너무나 나의 역사, 시대관을 시험하는 것들이었다.
4.19의 전주곡, 4월 18일의 그 유명하고 ‘영웅적’인 고려대 3천명 학생들의 4.18데모에 관한 전면기사들.. 이 고려대의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대규모 데모는 그 날 밤에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이정재 휘하의 임화수, 유지광 깡패부대의 대규모 습격을 받고, 그것이 사일구 혁명의 최후 기폭제가 된다.
이정재 사단 정치깡패의 첫 출동, 시민들과 합류해서 4.18 저녁 서울 중심가를 누비며 행진하며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100여명 깡패의 살인적인 공격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진들이 4월 18일 혁명전야의 생생한 열기를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 의사당 앞에서 끝까지 버티던 용감했던 고대생 형님들.. 그 무서운 힘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폭발된 전국적인 4.19혁명.. 서서히 전면 기사, 정치면으로 등장.. 이때는 이미 수많은 사상자가 나온 이후였고, 비상 계엄령이 서울 전역에 선포된 후였다. 하지만 기사를 읽으면 처참한 사상자들의 실체는 아직도 파악이 덜 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경무대 앞에서 장갑차로 데모 군중을 향해 일제 사격을 했음은 밝힌다.
그런대로 점잖은 사진, 경무대 진입로 전에 있는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무장경찰과 대치한 것만 front page에 실었다. 이 효자동 종점에는 나의 외 이모님 댁의 조그만 가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어떠한 광경을 목격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1960년 4월 19일 저녁 6시까지의 ‘사회면’ 뉴스는 조금 더 생생한 데모의 격렬함을 보여준다. 수도지역 (그 당시에는 수도권이란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대학생 전체와 수 없이 많은 고교생들, 심지어 중학생들 (그 이하 아이들도) 까지 합세한 그야말로 혁명적인 봉기의 조짐을 여지없이 보여준 날.. 사월 십구일 낮의 일이었다.
내가 오후 한시경부터 들었던 총소리.. 경무대 쪽이었고 역시 그때부터 대학생 형님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한 때였다. 만화 속에서만 보던 진짜 총 소리를 듣는 기분이 처음에는 신기하고 흥분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공포’적인 기분으로 변했다.
처음에 서울에 내려졌던 경비계엄령이 전국적인 ‘비상’계엄으로 바뀌어 선포가 되고 경찰을 대신 군인들이 치안의 주역을 맡기 시작하고, 신문 같은 언론매체(그 당시 몇 가지 신문과 국영방송밖에 없었다)에 대한 군 검열이 시작되어서 ‘불온한’ 것들은 무자비하게 조판과정에서 삭제 당했다.
치열한 시가전을 방불케 하던 4월 19일이 저물어가면서 계엄령에 의한 중무장 군인들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하며 데모대도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하지만, 군검열로 생생한 사진보도는 아직 없었다. 글로 쓰여진 기사만으로는 그날의 엄청난 일들을 묘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데모대들이 ‘탈취’한 각종차량에 올라 타고 거리(원남동~안국동)를 질주하던 대학생들의 격렬한 구호, 그 모습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고, 온통 골목길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던 부모님들의 모습들.. 역시 생생하다.
비교적 민중 편에 서있었던 계엄군의 느슨한 검열을 통과하기 시작한 4월 19일의 생생한 사진들이 신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김영삼(a.k.a., 빠가)이 ‘뭉개버린’ 식민통치의 상징 ‘중앙청(이것을 없애버리면 후세에 누가 그 비극적인 역사를 느낄 수 있냐?)’ 옆에 널려진 서류들, 불에 타던 반공회관, 서울신문사, 서울 의대생들이 숫제 하얀 가운을 입고 데모에 참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의 물건들이 불에 타던 생생한 기록들이다.
4월 20일 석간신문, 드디어 본격적인 군검열을 거친 신문들.. 조판 후 에 군 검열관이 아마도 ‘송곳’ 같은 것으로 긁은 모양..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이 신문의 모습은 그 당시 나에게 참으로 신기하게 보였다. 이때의 계엄군 사령관, 송요찬 중장..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한 일련의 명령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정당’한 것들 뿐이었다. 특히 민중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경찰들을 철저히 단속,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의 많은 경찰은 실제로 일제 고등계 출신 악질들이 많아서 수시로 미성년자들까지 ‘공산당’으로 몰아 고문을 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4.19 ‘사태’에 대한 정치적 포석과 견해는 역시 정치적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정한 대화’를 원하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그러한 담화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 때까지도 이대통령은 사태의 진상 (원인을 포함한)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비서실을 비롯한 ‘인의 장막’에 가리워져 있었고, 고령의 나이가 별로 사태파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상계엄령의 여파, 4월 20일부터 저녁 7시 통행금지 시작.. 그렇게 복잡하던 세종로 네거리가 7시 전에 이미 완전히 비었다. 이 ‘낮’의 통행금지는 사실상 골목 골목까지 적용이 되어서 집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조심스러웠고, 꼬마들이 나가서 노는 것도 힘들었다.
처음으로 ‘공식’ 피해 진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출발점’이 이곳에 보이는 대로 111명이다. 물론 나중에 이것은 큰 폭으로 올라간다. 역시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어린 학생’들이어서 국민에게 느껴지는 심리적인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들이 발포를 할 정도로 폭도이며 위협적이란 말인가?
이러한 민심에 부응하듯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을 철저히 질책하며 ‘보복 금지’에 대한 엄단을 경고한다. 신문검열로 삭제된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계엄 사령부는 민심을 잘 파악하고, 각 병원에 안치된 데모 사망자, 거의가 학생들, 을 유족들에게 돌려 주었다. 이때 민간정부에 대한 증오심이 상당했고, 관(서울시) 주도하의 합동영결식도 유족들이 거부했다.
4월 23일자 호외(extra), 그 당시는 참 호외란 것이 많았다. 요새 같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이 없어서 빠른 뉴스는 라디오나 이런 신문의 호외 같은 것이 의지했다. 정국 파탄의 원인의 중심인물, 부정선거의 주역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 국회의장,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모양이다. 불똥이 튈 것에 대비해서 현 부통령 장면박사는 다음의 정치포석을 한다.
당시는 찌들 리게 대부분 가난했지만 빈부의 차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생존경쟁에 발버둥은 쳤지만 기본적인 인간애와 동족애는 어느 때 보다 높고, 없는 것을 나누는 인정도 참 많고 흔했다. 위의 사진들은 절대로 pose한 사진들이 아닌 snap이었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어린 부상자를 돌아보는 한 가족들, ‘용감한 형님’을 자랑스레 찾아간 국민학생, 사망자 가족의 장례비용을 걱정하는 어떤 착한 엄마와 아들의 모습.. 참으로 눈물겹고 그립던 시절이었다.
무풍지대, 드디어 부상.. 자유당 정권과 손을 잡은 야쿠자 스타일의 이정재 휘하의 정치깡패의 부관들 드디어 여론과 군의 압력으로 얼굴이 들어나고 구속까지 된다. 이들과 동대문 경찰서는 숫제 서로 직통전화까지 가설하고 고대생 습격사건을 주도했다.
3.15 부정선거도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 중, 평화극장 사장 임화수와 두목격인 이정재는 1년 뒤의 5.16 혁명 뒤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지만, 운이 좋았던 유지광은 살아 남는다.
불란서 혁명을 방불케 하는 이 사진은 4.19가 절정에 이르던 때, 권력의 심장부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는 제일 용감하고 희생자가 많았던 때의 현장 사진이고, 계엄군 검열이 완화된 상태에서 신문에 실렸다. 이 당시 데모대의 유일한 방어무기는 탈취한 소방차 뿐이었다.
한민족에게 낯설지 않은 광경, 억울하게 어린 나이에 먼저 보낸 귀여운 자식들을 어찌 그냥 보내랴.. 이때의 슬픔은 전체 국민들의 슬픔이었고, 꼬마였던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슬픔이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이런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상한 의사가 요새도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금 이 의사 분은 잘 살아 계실까? 그 당시 기타를 치는 의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점차 자세한 4.19 때의 현장사진들이 신문에 실리기 시작한다. 데모의 정점은 역시 권력 심장부 경무대를 향한 길이었다. 대부분 효자동 종점을 통한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 후퇴를 하며 총을 쏘는 경관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을 한다. 발포 명령을 받은 그들에게 과연 어떤 죄가 있었을까?
4.19 학생데모 가 일주일째로 접어 들면서, 자유당 정권의 미온적이고 느린 반응에 결국 학생뿐 아닌 대학교수, 일반군중들이 못 참고 일어났다. 이번의 소요는 비상계엄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 그 심각성은 더 큰 것이었다. 모든 치안의 책임은 계엄군에 있는데, 그들에게 모든 앞날의 열쇠가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계엄군은 ‘절대로’ 동포에 대한 발포명령을 받지 않았다.
계엄령 하에서 벌어진 새로운 데모는 사실상 계엄군의 ‘보호’하에 벌어진 셈이 되었고, 이것은 현 정권의 심장을 겨누는 또 다른 총부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계엄군의 ‘결단’이 4.19 를 진정한 혁명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이래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민간인들이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 타고 얼싸안고 있던 사진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정말 멋진 군인아저씨 들이었다. 용기를 얻은 군중들은 서서히 ‘원흉’으로 지목된 이기붕 국회의장의 저택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만세! 결국은 올 것이 왔다. 계엄군의 멋진 결심에 굴복한 듯, 국민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육성 방송과 성명이 라디오와 신문 호외로 나오고. 나도 이 방송을 들었다, 그 유명한 말.. “국민이 원한다면”.. 나도 생각했다. “맞습니다. 그것이 국민이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 이 방송과 성명으로 4.19는 100% 완전한 학생들의 승리가 되었고, 4.19는 ‘유혈’ 혁명으로 승격한다.
이승만 정권 궤멸.. 이것이 이제는 공식, 사실화가 되어서 4월 27일자 신문의 전면에 나온다. 3.15 부정선거는 완전히 무효가 되었다. 이 역사적 결정에 이르기까지 학생대표들과 이승만 대통령은 ‘울음’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분명히 노 혁명가 이승만 박사도 그들의 눈물을 진정으로, 가슴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이제는 승리의 축제가 세종로 네거리를 완전히 덮는다. 총알이 난무하고 핏방울이 튀던 같은 거리가 기쁨과 감격의 거리로 변한 것이다. 역시 계엄군 탱크가 이번 의거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까.. 역시 국민의 군대였다.
4.26 대통령 하야 결심소식을 듣고 계엄군 탱크 위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이것은 세종로 네거리에서 남쪽을 향해 찍은 사진인 듯, 멀리 중부 소방서의 소방탑이 보인다. 기껏해야 4층 정도의 높이에서 불이 난 곳을 볼 정도로 그 당시에 고층빌딩이 없었다.
아래의 사진은 계엄군의 ‘안전함’을 느낀 후 계속된 대모 군중, 가운데를 보라.. 국민학교 학생들이다! 멀리 “빠가”김영삼이 없애버린 일제의 상징 중앙청과 북악산이 보인다.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은 제2의 8.15 라고 환호를 했다. 해방, 부정,부패, 깡패, 경찰 정권에서 해방.. 이날 기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고문경찰과 자유당의원, 그 소속 깡패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 이기붕 이란 이름은 특별히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군중들은 서대문근처 그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집안 가재들을 모두 끌어내서 불태웠다. 나의 동네 친구들 중에는 그곳의 물건들 중에서 ‘최고급 야구 glove’를 “전리품”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눈물과 웃음을 함께 자아내는 사진들.. 특히 왼쪽의 국민학생 코흘리개 악동들의 데모가 그렇다. “군인 아저씨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마세요!” 란 플래카드.. 어찌 이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을까? 이들은 분명히 용감하게 피 흘리며 쓰러진 대학생 형님,오빠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100% 자유를 쟁취한 군중들, 탱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타서 환호를 한다.
4.26 승리의 모습들.. 이기붕 저택 습격한 데모대 들은 사실상 ‘절도’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될 그런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충격적인 모습은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종로 파고다 공원 (탑골공원)에서 끌려 내려져서 차에 끌리어 가는 곤욕을 치른 것이다. 우리들이 보기에 그것은 조금 심한 것이었다. 특히 그 동상을 끌고 다닌 차가 ‘분뇨 차(일명, 똥차)’ 였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빛났던 대학생 형님,누님들과 용감하게 민중을 보호했던 우리의 국군 계엄군 아저씨들.. 정말 멋진 순간들을 맞았다. 총탄에 쓰러지며 나라를 구했던 대학생 형님들이 이번에는 뒤처리를 과감히 맡았다. 계엄군이 관리하던 경찰서, 파출소 조차 대학생들을 임시 ‘고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왼쪽 위의 기사를 보면 그 당시 최고의 맛을 자랑하던 뉴욕제과점과 고려당 제과점의 최량의 빵들을 계엄군 ‘아저씨’들에게 선사를 하는데, 그 당시는 살 맛이 나던 때였다.
급속히 정리되는 용맹과 피의 거리들.. 역시 피를 흘렸던 대학생 형님들이 팔뚝을 걷고 나섰다. 경찰이 종적을 감춘 곳에 대학생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쓰레기 청소까지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기붕씨 일가 자살.. 이것은 그 당시에도 끔찍한 뉴스였다. 그렇게 많은 죄 없는 어린 학생들이 죽었지만, 이것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법의 심판을 받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결론을 내린 장남 이강석의 결단이었다. 그가 부모와 남동생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자신을 쏜 것이다. 100% 확실한 정황을 알 길은 없지만 그것이 공식적인 결론이었다. 누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잊고 싶은 끔찍한 비극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기붕씨의 출신 과정을 보면 그도 양심적인 기독교인이었고, 나름대로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음도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장기집권으로 나온 ‘악마’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국민의 ‘보복’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미국 주간 시사화보 LIFE 가 본 4.19 혁명
4.19 당시, 그러니까 1960년에 대한민국에는 신문을 제외한 변변한 ‘커다란 사진이 가득한’ 매체, 그러니까 ‘화보지’가 거의 없었다. 사진 처리를 위한 제작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것이 읽거나 듣는 것이고 눈으로 보는 생생한 뉴스는 드물었던 것이다. 워낙 ‘못 살았던’ 때여서 TV 방송이 있었어도 TV자체가 너무나 드물어서 못 보던 시절, 미군을 통해서 흘러나온 TV로 간혹 미군 방송AFKN을 보거나 부산 같은 곳에서 일본 TV방송을 보는 것이 전부였던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4.19의 모습들은 위의 사진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역시 ‘찌들리게 조잡한’ 신문의 조판사진이 전부였다.
하지만, 4.19의 생생한 모습들이 camera로 찍히고, movie film으로 기록들이 다행히 일본이나 미국으로 간 것들은 비교적 ‘고화질’로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원래부터 ‘질이 좋은 사진’을 위한 시사화보로 유명했던 미국의 주간지 LIFE가 4.19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4.19는 비록 세계 뉴스의 레이다 밑에 있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비교적 자세히 보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사논평의 주제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것을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보이고 역사에 남긴다.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 가족들: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고, 이기붕은 부통령으로 당선.. 고령의 이승만의 유고 시에 그의 대통령직은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농성 중인 용감한 고려대 형님들.. 이들의 에너지가 그 다음 날 4.19의 원동력이 되었다.
데모대를 진압하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찰들.. 그때는 데모 진압 ‘전용’ 전투 경찰이란 것이 없었다. 그저 일반 경찰들이 모든 것을 담당해서 후의 전문 전투경찰 같은 테크닉은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힐 기술 없이 그저 두드려 패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그들은 민주경찰이기 이전에 ‘반공 경찰’이어서, 빨갱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진압을 하면 살인적인 결과를 내곤 했다.
이렇게 부상을 입고 부축을 받으며 가는 사람은 학생인지, 민간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머리에 아주 큰 부상을 입은 듯.. 아마도 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표정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까..
이 불쌍한 어머님은 얼마나 어린 아들을 잃었을까? 이런 광경은 4.19 직후 이곳 저곳에서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정말 슬픈 모습들이었다. 특히 아들을 중요시했던 당시의 사회 관습이나 풍조를 감안한다면 희생자 가족, 부모들의 고통과 슬픔은 상상을 하기 힘들었다.
‘살인 경찰들’이 계엄령 선포로 뒷전으로 사라지고 대한민국의 유일한 양심, 희망이었던 송요찬 장군의 계엄군 헌병이, 흥분한 어린 학생을 ‘정답게’ 제지하는 장면.. 이 학생들은 원흉으로 지목 되었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을 습격하려는 중이었다. 이 헌병의 모습으로 보아서 군대는 완전히 민중의 편에 섰음을 짐작할 수 있다.
4.19 ‘참사’의 제1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이기붕 국회의장,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이 격노한 데모대,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서 습격을 당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는 절도까지도 용납이 될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하였다.
군인 아저씨들.. 우리 부모 형제들에게 총 뿌리를 대지 말라.. 고 외치는 초, 중,고교 학생들.. 특히 앞장을 서서 가며 힘차게 외쳐대는 국민학교 코흘리개 아이들의 모습, 특히 남루한 ‘구제품’ 옷들을 입은 모습들이 가슴을 찡~ 하게 만든다. 그들은 사실 나와 거의 같은 또래의 악동들이었다. 골목에서 뛰놀던 그들이 총탄으로 쓰러진 형님, 누나들을 보고 계엄군을 향해서 호소하는 모습이었다.
평온이 서서히 깃드는 거리, 당시의 시내 거리에는 차량의 숫자가 적었고, 특히 신호등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그런 곳은 교통경찰이 손수 교통정리를 했다. 그 경찰들이 사라진 거리에는 역시 학생, 민간인들이 자원해서 이렇게 힘차게 차량들을 정리했다. 이 형님, 아저씨는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까?
한국전쟁, 인천 상륙작전의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미국의 맥아더 장군의 동사에 데모대들의 화환이 걸렸다. 우리는 절대로 빨갱이, 공산당이 아니라는 뜻과, 거의 중립적, 아니면 침묵으로 이승만 정권을 혐오하던 미국의 태도를 학생들과 일반인들도 느꼈을 것이다. 반공 하나로 버티던 이승만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가 반공이상으로 중요함을 몰랐던 것일까?
거의 폭도로 변한 철모르는 어린 학생들과 데모 군중은 어제까지 ‘우리들의 아버지’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쓰러뜨렸고, 그것도 모자라 목에다 밧줄을 걸어서 ‘분뇨차’에 끌고 다녔다. 이것은 당시의 정서로도 너무 심한 행동이었는데, 결국은 치욕을 당했던 동상은 다시 태극기에 덮여서 정중히 안치가 되었다.
절대권력의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 ‘국민이 원한다면..’의 구성진 대통령직 사퇴, 하야 성명 방송 후 그는 돈암동에 마련된 ‘이화장’ 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차를 타고 경무대를 나와서 이화장으로 갈 때, 사실 국민들은 박수로 그를 환송했다. 그것이 당시의 국민 정서였다. 비록 살인 경찰의 우두머리였지만 ‘우리의 아버지’임도 잊지를 못한 것이다.
4.19 혁명이 이승만 정권의 사실상 총 사퇴로 이어지고 과도정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제1인자로 허정 씨가 두각을 나타내고 제2 공화국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Ohio State (University, OSU)를 회상하며 특히 중앙고등학교 동문들을 생각한다.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나는 1977년 겨울부터 1983년까지 그곳에서 공부를 하였고 Columbus, Ohio에서 직장생활을 1988년까지 했기 때문에 사실 한때는 고향처럼 느끼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앙고등학교 동창생들과의 추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처음에 그곳에 갔을 때는 중앙동창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의 유학생의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물론 다른 학교에 비해서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학교가 미국에서 단일 캠퍼스로는 제일 큰 학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55,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한국유학생들은 거의가 서울대와 경기,경복,서울고등학교 같은 소위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듯 하다. 정확한 것은 아니고 나의 느낌이 그러하였다. 하지만 내가 있던 전기 과(EE)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 당시 3명이 있었는데 (나를 빼고) 한 명은 육사출신이었고 또 한 명은 Rutgers출신, 그리고 나머지는 서울대 출신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이 되면서 해외유학 자유화가 되면서(그러니까, 문교부 해외유학시험이 없어진) 대거의 한국유학생들이 도착했다. 너무나 많아서 이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서로가 조금씩은 이름이나 얼굴을 알고 지냈고, cafeteria에서 식사를 할 때면 거의 dining table의 한곳에 같이 모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드디어 중앙고 출신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물론 모두 후배들이었다. 제일 먼저 온 후배가 여운광이다. 아마도 62회 정도가 아니었나. 토목과 전공이다. 그리고 김문경, 63회, 정치과, 이춘환, 64회, Biophysics , 조광동, 64회, 김종수, 기계과, 하재주, 원자력 65회, 안동규, 강행봉, 채인돈, CIS, 67회, 장경호, 68회 아.. 이제 생각이 가물거린다.
그리고 유학생이 아닌 동창들도 있었다. 정근화, 56회, 주유소경영, 손영찬, 59회, small business, 이명성, 63회, Bell Lab research scientist 등등이 있었다. 이 정도의 머리숫자를 자랑하는 동창회는 이 캠퍼스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이 모이면 언제나 장소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모이게 되면 거의 빠짐없이 참석을 하였다. 그리고 spouse들과 family가 열심히 참석을 해서 더 모임의 재미가 있었다. 이 모임에서는 특히 spouse들의 사이가 아주 부드러워서 더 잘 모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도 생각을 한다.
1988년 여름에 Columbus, Ohio를 떠났는데 그때까지 참 추억에 남을 정도로 동창의 정을 유지하였다. 나는 거의 제일 맞선배격이었지만 워낙 나는 선배 노릇에 익숙지를 않아서 어떨 때는 조금 불편한 적도 없지 않았다. 중앙고 시절을 이야기 하면 역시 사립고답게 선생님들의 변동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이야기가 잘 이어졌다.
특히 선생님들의 별명을 기억할 때가 제일 즐거울 때였다. 깨막이, 나까무라, 썪은살, 짱구, 숫장사.. 등등 추억에 어린 선생님들의 별명들.. 특히 중앙만의 전통이던 교련조회와 토요코스(토요일에 잠을 자며 학교에서 하던 camping) 등등은 후에도 이어졌음을 알고 참 반가웠다.
특이한 사실은, 김문경(연세대)만 제외하고 모조리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졸업하고 중앙고가 2차로 바뀌어서 그야말로 머리 좋은 재수생들이 대거 중앙고로 왔던 까닭이다. 내가 다닐 때는 최복현교장의 6년 계획으로 서울대 합격자가 꾸준히 늘긴 했지만 그 숫자는 사실 비교적 미미하였다. 그것이 2차로 바뀌면서 완전히 바뀐 것이다. 여운광의 이야기로, 서울공대에는 숫제 계공회라는 중앙출신모임이 있다고 했다.
나중에 공부가 끝나고 대거 귀국을 해서 그곳에서 다시 거의 모였다고 연락도 받았다. 정말 반가웠다. 대부분 대학으로 갔는데 여운광은 Ohio State로 다시 교환교수로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부러 우리가 사는 아틀란타까지 drive를 해서 오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이.. 1993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 세월이 질주하다시피 흘러버렸다. 거의 소식이 끊어지고.. 나는 Internet이 등장하면서 다시 virtual reunion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삶의 거센 파도를 거슬러 갈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 아틀란타에 정녕 봄이 오고 있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고3때 국어책에서 본 시의 제목처럼.. 이번 겨울은 동서남북의 구별 없이 무차별하게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하기야 Florida와 Hawaii를 제외한 전역이 눈이 덮여 있다고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지 Obama의 global warming agenda도 따라서 조금 잠잠해졌나 할 정도다.
공식적으로 춘분이 거의 열흘이나 지나고 내일은 사월이다. 진짜 봄인 것이다. 새벽에 아직도 central heating이 나오긴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주 따뜻한 낮과 아주 싸늘한 밤이 계속되는 건조한 그런 나날이 되지 않을까? 4월.. April shower brings May flower라고 오래 전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서 나에게 써 먹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 만큼 싸늘한 4월의 비도 연상이 된다.
하지만 나에겐 한국가곡 “사월의 노래”가 더 생각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1963년 서울 중앙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자 음악 선생님이셨던 김 대붕 선생님이 좋아 하셨다던 가곡, 사월의 노래.. 우리들에게 정성스레 가르쳐 주셨다. 특히 작곡가이신 김순희교수님을 잊지 않을 정도로 언급을 하셨다. 혹시 그 교수님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나곤 한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에 편지를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 노라
돌아 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없는 무지개 계절아
노래와 함께 가사까지 또렷이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지금 연세가 어느 정도나 되셨을까? 짐작에 아마 여든을 바라보실 연세가 아니실까. 그렇다면 요새 같은 세상에서는 건강만 좋으시면 큰 문제가 없으시리라. 기억에 선생님은 해방 직후에 고등학교 학생이셨다. 어떤 글에서 (아마도 중앙학교 교지에서) “국대안 반대 데모 때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서 뒤떨어 졌던 성적을 올렸다” 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내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그때 고등학생이셨으면 최소한 나보다 15살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 가톨릭 성가 집에서 우연히 선생님의 이름을 보았다. 그래서 선생님이 천주교 신자임을 알았고 성심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음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중앙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실 당시에도 천주교 신자였을 것 같다. 물론 100% 확실치는 않지만.
Who designed Artisteer? What kind of software engineers are behind this otherwise excellent software? Ideas behind this are really simply brilliant. This is an example of expert system for website frontend design. It simply added an ‘expert’ layer on top of ‘standard, ordinary’ web design software. Unless you want minute controls over very detailed cosmetic details, this software’s included ‘expert’ layer simply shows you not-too-many features and choice without overwhelming user. Then, what’s annoying? Simple. When it opens first time, it always does as maximized taking up all the screen. Why? I don’t know. Usually windows software remembers previous window size before closing. This simply ignores, forget everything! Why did you do that? Utterly stupid! One more thing, whenever upgrading to newer release, it stupidly demands to enter license key, pretending know nothing about already installed and running version… it amazes me dearly.. what’s kind of software people behind this stupid logic?
I’m back to Joomla! to understand more about it. Previously, DotNetNuke was my choice for my experimental website for some time before I totally abandoned it for its complexity and instability. I’m not sure why it was so unstable, frequently crashed exposing ‘ugly’ asp.net error codes. Then I found this LAMP (Linux, Apache, MySQL, PHP) open source blog and CMS software like WordPress, Joomla!. Miraculously, these software never crashed while on operation! I was hooked very much since, never looked back especially to ASP.NET based bloatware.
Already understanding CMS in general, I dived directly into Joomla! hoping to setup a working website in few days but didn’t work out that way. The system itself was solid-rock stable but it was not as easy as I hoped to learn. So called, steep learning curve fits to this system, so I bought a Joomla! book to jump start my project. The book was <<Joomla! A USER’S GUIDE, Building A Successful Joomla! Powered Website>> by Barrie M. North. Presumably, it appeared to be a good book from Amazon’s review. How wrong I was… In short, this is one of the worst book I’ve ever read. It, however, did a very good job to confuse me. I seriously doubt the author actually followed the example screen shots against sample code. They simply didn’t match! Let me show some example of what I said on my coming blog.
그렇게 포근하고 푸른 하늘의 날씨도 역시 다시 며칠 못 가서 하루 종일 비와 싸늘함의 날씨로 변했다. 기분에 이곳의 가뭄은 100%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듯 하다. 나는 비를 참 좋아하는데 바깥에서 일을 할 때는 조금 성가신 점도 있다. 이번 기회에 조그만 storage shelter를 몇 개 지으려고 생각 중이다. 그러면 비를 맞아서 문제가 되는 yard tool들 보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제값을 주고 산 책WordPress Plugin Development 를 어제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Amazon Review가 비교적 좋았다. 저자의 이름이 아무래도 Slavic 해서 이것 또 broken English로 쓰여진 것이나 아닐까 우려를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거의 American English로 손색이 없는 듯 하다.
하지만 몇 군데는 별 수 없이 bad grammar가 눈에 뜨인다. 이 책의 제일 특징은 ‘잔소리’가 별로 없고 거의 곧바로 본론으로 시작을 하고 ‘결과’를 확실히 보여주는 아주 작은 project 5개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다 읽고 이해를 하면 아마도 몇 개의 practical plugin을 design할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진다.
현재 우리 집에는Tobey라는 개와 Izzie라는 고양이가 같이 살고 있다. Tobey는 2005년에 baby때부터 키운 mixed Dachshund 인데 이제는 사실 정이 너무나 들어서 식구와 같다. 전에 키우다가 2003년에 타계한 Lucky (Cocker Spaniel)는 밖에서 키워서 그런 맛은 몰랐다.
한가지 문제는 그 녀석이 너무나 hyper-active한 것이다. 감정표현이 너무나 요란하다 보니까 문제가 있는 것이다. Izzie는 2006년 여름에 우리 집 앞에서 baby때 주운 고양이다. 누가 버리고 간 듯 싶었다. 몇 년간 Washington DC에 사는 새로니가 데리고 있다가 지난 크리스마스 때 다시 데리고 와서 우리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동안 서로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요새는 그런대로 적응이 되어서 살만하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개를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정 반대였다. 고양이가 어찌나 defensive한지 개가 그 옆으로 가는 것을 꺼릴 정도니까..
내가 사는 곳의 library는Cobb County Library system인데 내가 자주 가는 곳은 그 중에 제일 큰 Central Library다. 그곳에는 외국어로 된 책들도 꽤 있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한국어로 된 책들도 많은 편이다. 공식적인 것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도 거의 300권 정도가 되지 않을까? 대부분이 2000년 말에 출판된 것을 보면 구입한지 몇 년이 안된 것들일 것이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한국어로 된 책들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catalog system에서 한글을 처리를 못해서 거의 한글발음을 그대로 영어로 옮겨 적은 관계로 그걸로 한글을 만들려면 정말 애를 먹는다. 어떤 것은 거의 불가능할 때도 있다.이때는 일본어의 발음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그들의 발음은 영어로 적어도 100% 다시 일본발음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
It’s not exactly strange, but more annoying even infuriating experience with them. The annoying side would be called very childish that is ‘camp fire’ at their backyard anytime they feel like it. Once, I almost called local fire department fearing of uncontrolled spread of fire into their neighbor including ours. They didn’t seem to care of anything around their house. On windier day, the soot from fire were unbearable, ruining laundry hanging on backyard’s.
But mother of all ‘strangeness’ is this. When they moved in, ranch style fence between ours were replaced by ‘Berlin wall’ style 8+ feet, doubled-up one. Of course, they bothered to do it. Well, it’s fine with us. Later, I noticed a strange door along the fence.. well what the hell was that? Of course, lock was on their side with obvious reason. Then it was forgotten.
One day, I noticed something looked ‘strange’ near the fence, but couldn’t tell why. Much much later, I was shocked to find one of a small tree was mercilessly cut down, leaving much mess around it. I almost concluded the storm somehow managed to have it down from previous experience. But after careful observation, it was ‘cut’ not fallen, very clean cut by people’s saw.
Well, who the hell did it? No surveillance picture, no witnesses, nothing. Is it time to call police? Not yet. Somehow, I got a feeling who did it. that camp fire people! After contacting them, it was revealed they actually sneaked into through very convenient door, cut our tree! They argued the tree was spreading mess onto their ‘beautiful’ lawn. What the **** is this strange people thinking? The true purpose of that strange door now exposed. They were conveniently dumping their yard waste onto our side time to time.
Now, the best of all, they were claiming this: A few inches from the current fence line into our side is actually their property! They meant the fence was built along more onto their side leaving a few inches to ‘dump’, ‘cut tree’, on purpose. The strange door was there to come across. What? Are these people real? I found then a ‘true’ property line surveyed by a professional, saying true property line falls much more into their side! Anyway, this is so strange.. No further dialog was attempted, this is not the kind of people to ‘talk’ with. Fortunately, they moved out since, Hallelujah!
눈이 내리는 데.. 산에도 들에도 내리는 데.. 한명숙 씨의 1960년대의 노래가 생각난다. 이곳의 눈은 평상적으로 ‘뉴스’ 깜이 되는데.. 그게 벌써 올 겨울 들어서 3번째이다. 차 운전에 거의 지장이 없는 데도 학교는 거의 오후가 되자마자 파했다. 2월 달의 함박눈에 비해서 오늘의 눈은 거의 진눈깨비에 가까웠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렸다.
연숙은 오랜만에 작을 딸과 Buford Hwy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한다고 한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봐서 조금은 걱정이 된다. 물론 freeway는 전혀 문제가 없을 듯 하지만 우리 subdivision으로 들어오는 길은 언제나 신경이 쓰인다. 아주 steep한 언덕배기가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도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물론 그때 우리는 ‘식량’이 풍부했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지만 다른 집들은 며칠 동안 grocery를 갈수 가 없어서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이곳에 눈이 내리는 모습과 내린 후의 풍경은 정말 그림처럼 아름답다. Midwest에 살 때는 그런 것을 거의 못 느끼면서 살았다. 너무나 춥고, 얼어붙고 휘날리는 눈은 사실 거의 공포의 대상이다. 차라도 어디에서 고립된 상태로 있게 된다면 거의 panic상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워낙 눈에 대한 대비가 안된 곳이라, 미리부터 예방을 철저히 해서 그런 걱정은 없을 것이다. 눈이 온다 하면 미리 다 집으로 ‘도망’을 가니까 말이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그런 광경을 보고 참 우습기도 했지만 차츰 이곳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게 되었다.
아마도 이번 눈이 올 겨울의 마지막이 될 듯 싶다. 그래서 더욱 더 즐기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른다. 1993년 3월 중순에 그 유명한 storm of the century가 왔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즐길 여유가 없었다. 눈과 함께 바람까지 불어서 모든 것이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 그래서 storm of the century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는 3월 말 정도가 되어야 안심을 하고 한 기억이다.
정말 오랜만에 써보는 이름들이다. 이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모두 한국 남자들이다. 분명히. 그 다음은.. 내가 한때 알았던 사람들, 나와 나이들이 엇비슷한 사람들, 마지막으로 1974년 시카고 중앙(한인)교회의 기숙사에서 잠깐 같이 살았던 분들이다.
박현식 형은 나의 중앙고등학교 1년 선배다. 그러니까 중앙고 56회 졸업생이다. 왕진한씨 (형이라고 하기는 나이차이가 난다)는 출신 학교에 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다만 Ohio주의 University of Dayton의 graduate school로 한국의 어떤 회사에서 유학을 보낸 정도만 기억이 난다.
채 영세 씨는 어떤가.. 나이가 나보다 아마도 두~세 살 정도 위가 아니었을까? University of Texas, Austin에서 Master’s degree를 받고 시카고로 왔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경삼씨, 나이가 아마도 채 영세 씨보다 조금 더 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이렇게 지난 다음 생각해 보면 거의 같은 나이였다고 보는데 맞을 것이다.
그 당시 70년대 유학생들은 요새 기준으로 보면 거의가 ‘고학생’ 수준일 것이다. 여름방학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대도시로 나와서 일 (그러니까 아르바이트)을 해야만 했다. 물론 예외도 적지 않았다. 그 당시 한국의 경제수준으로는 $$를 편하게 쓸 처지가 못되었다. 그래서 시카고 같은 대도시로 나오게 되면 거처가 제일 큰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 Lincoln AvenueNorth Clark Street(at Montrose St.)에 있었던 서울식당에서 dishwasher를 했다. 거처는 Cornelia Ave에 있었던 조그만 한인교회의 지하실을 이용했다. 그곳은 정말 암굴을 연상시킬 정도로 습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넓은 지하실을 칸막이를 하고 살았는데 거기에는 유학생은 한 명도 없었고 대부분 혈혈단신 초기이민을 온 청년들과 여자도 한 명이 있었다. 물론 그곳은 어떤 선배들이 가르쳐 주어서 가게 된 것인데 예상외로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서울식당 주인 분이 다니시는 시카고 중앙교회에 비슷한 기숙사가 있다고 소개를 시켜 주셨다.
West side에 Lawrence Avenue와 Sawyer Ave가 만나는 곳에 있었는데 이 교회가 전번 것 보다 우선 밝고 넓었다. 그리고 지하실이 아니고 이층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도 여름방학마다 몰려드는 유학생들을 이곳에서 자취를 시켰던 듯 싶었다.
서울식당 주인 분의 ‘빽’으로 그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에는 작은 규모이지만 resident manager까지 있었다. 알고 보니 중앙고 1년 선배 박현식 형이었다. 그래서 이런 조그만 ‘인복’으로 아주 재미있고 편한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박현식 형은 알고 보니 이영재 목사님과 친척벌이 되었다. 항상 웃고 성실한 타입의 선배였다. 그 형은 그 당시 시카고 downtown 바로 남쪽에 있었던 역사 깊은 Chicago Tech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방이 비교적 커서 한방에 여러 명이 살았다. 나의 방에도 여러 명이 살았는데 그 중에 한 분이 바로 왕진한 씨였다. 한국의 회사에서 유학을 보내준 아주 행운아였다. 아마도 그때 공부가 University of Dayton에서 끝이 나서 (학위를 위한 공부는 아니었던 느낌), 일단 시카고로 온 듯 싶었다.
그리고 곧 바로 채 영세 씨와 문경삼 씨를 그곳에서 만났다. 둘 다 아주 clean-cut & smart한 사람들이었다. 채 영세 씨는 University of Texas, Austin에서 Electrical Engineering Master’s degree를 받고 일단 온 것이고 문경삼 씨는 확실 치는 않지만 어디선가 undergraduate course를 마치고 Iowa State University graduate school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문경삼씨의 전공이 무엇인지 잊어 버렸지만 이공계는 아니었던 듯 싶었다. 왜냐하면 Iowa State University에는 최소한 engineering course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 기억이 난다.. 아마도 정치학이 아니었나 싶다. 이 형은 인물이 아 주 좋아서 같은 곳에 살던 여자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1974년 여름은 그곳에서 심심치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나는 6일 동안 거의 12시간을 서울식당 부엌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릴만한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밤 11시 경에야 기숙사로 파김치가 돼서 가곤 해서 가끔 맥주를 마시며 잠깐 어울릴 정도였다.
그 해 여름에 아마도 8.15 광복절 날,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이 있어서 모두 모여서 같이 TV를 보기도 했다. 그 당시 고국의 소식은 이런 식으로 아주 나쁘고 커다란 사건이 터져야 볼 수가 있었다. 그 외에는 한국은 이곳에서 뉴스 감이 되지를 못했다.
채 영세 씨는 아주 부잣집 아들이라서 사실 일을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 당시 유학생으로 ‘새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는데 채 영세 씨가 Dodge Duster란 새 차를 몰았다.그런데도 일을 했다. 나는 그게 참 보기가 좋았다. 큰돈은 집에서 받았겠지만 그렇게 푼돈이라도 벌어서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 됨됨이가 짐작이 됐다.
그 이듬해 여름에 잠깐 한국에 갔을 때 다시 만났는데 알고 보니 나의 절친한 친구 박창희와 같은 산악회 (요델 산악회) 회원이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그 이후론 소식이 끊어졌는데 박사학위를 계속하지 않았던 듯 싶다. 아버님이 커다란 공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아마도 경영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을 까 하는 생각이다.
박현식 형은 같은 곳에 잠깐 살았던 여성을 만나서 곧바로 결혼을 했다. 참 일찍도 결혼을 한 셈이다. 아이도 낳고 재미있게 사는 사진을 한번 받아 보고는 연락이 끊어졌다. Iowa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나중에 동창회를 통해서 알아 보아도 그 형의 정보는 거의 없었다.
왕진한 씨도 그 후에 한국에 갔을 때 인천에서 어떤 여성과 결혼을 한 것이 마지막 뉴스가 되었다. 문경삼 씨는 그보다 훨씬 전에 소식이 끊어져서 학위를 받았는지, 귀국을 했는지 전혀 idea가 없다. 가끔 1974년의 시카고 Sawyer Avenue를 회상해 본다. 서울식당의 부엌, 그곳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 꽃을 피우던 Mrs. 안, 식당주인 아저씨와 무용가 출신의 wife 세란이 엄마, 참..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다. 이 좋은 Internet과 Google의 시대에 한번 연락 이라도 돼서 어떻게들 살았는지 궁금증을 조금 푸는 것도 좋을 듯 싶다.
Almost by accident, I’ve realized the troubled dtmf problem with Google Voice now seems resolved, but not sure since when. When I walk my dog around my neighborhood, my Google Voice ‘trunk’ at my Asterisk based home pbx is being tested from my cell phone. My home pbx setup based on Nerd Vittle’s PIAF (Pbx-in-a-flash) distribution takes my GV DID to one of my extension which already has a voice-mail capability. When I’m outside house, the extension will take GV call, prompting to leave messages and also presenting more options like deleting, rewinding messages using dtmf tones. Previously, the dtmf tones got blocked by Google by some unknown reasons. But not any more! So, I’m thinking about GV powered mini-IVR setup (Interactive Voice Response?) to my taste. Thanks, Google!
50대가 훨씬 넘어서야 비로소 ‘시’라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아주 고약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가사나 동요 아니면 아주 짧은 글을 보기 편하게 글로 나열한 것.. 기교적인 단어의 말 장난..그 정도였다.
나는 어린 학생시절에도 작문시간이 되면 시는 전혀 쓰지를 못했고 그걸 쓴다는 자체가 아주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유일한 문제가 되는 것은 국어시험, 입시 같은 것에서 그게 가끔 나오는 것이었다. 특히 대학입시 때 국어시험에는 거의 시에 대한 문제가 나오곤 했다. 그때는 오직 정답을 찾는 ‘감’을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시가 아닌 산문에는 그런대로 나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놈’의 시를 이해 하는 데는 나의 사고방식이 너무나 굳어져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거의 과학공상만화에만 매달리고 기계가 인간의 최고의 작품인 것처럼 인생을 준비하고 그렇게 산 편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만 주신 신의 선물, 예술적인 것들, 추상적인 것들,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그저 안 보이는 것으로 매도하고 무시하곤 했다. 여자들과 어울리거나 사귈 때 이런 것들이 필요한 정도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에 대한 나의 견해도 그렇게 좋지를 못하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글’을 쓰며 생활을 꾸려 나갈까 하는 것이 의아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Never say Never“.. 사람은 열두 번 변한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그리고 ‘나이’라는 big factor를 왜 몰랐을까? 나는 다만 그게 남보다 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것도 50년이나 걸린 것이다. 50이 넘어서 그 짧은 단어의 나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간단히 구체적인 것 보다, 짧고 추상적인 것이 멋있게 보이기 시작하고, 나에게 상상의 여유를 주는 것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단계에 나는 무슨 시를 읽었는가? 거의 10년이 지나서 기억이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짐작 하건 데 아마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황동규 시선 삼남에 내리는 눈>> 이란 색갈이 바랜 오래된 시집이다.
이 시집은 거의 우연히 읽게 되었다. 왜 관심도 없는 시집에 손이 갔는지는 전혀 idea가 없다. 그래서 우연이 아닐까.. 아니면 요새 같은 생각이면 절대로 우연이 아닐 수도.. 이 시집은 사실 아내 연숙의 이화여대 대학원 영양학과 선배인 강명희씨(박사)가 연숙이를 1980년 6월 미국으로’먼저’ 보내면서 준 책이다. 그 사연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책의 표지 이면에 강명희씨의 자필로 적혀 있어서 알게 되었다.
사실 황동규 시인은 문외한인 나도 조금 보고 들은 바가 있었다. 미국유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시절, 미국 유학생에 관한 기사는 열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 중에 황시인도 있었다.
그의 연보를 보면 영국유학 뒤에 Iowa주에서 유학을 한 모양이고 UC Berkeley 를 찾아가서 글을 쓴 것이 어느 잡지에 실렸던 것을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미 이름을 들었으니 조금은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이 시집에서는 어느 특정한 시에 관심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거부감 없이 전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조그만 사랑의 노래 —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그 다음이 <<108편 사랑의 시>> 란 1974년 여성동아 12월호 부록이 있다. 이 책이 어떻게 우리 손에 들어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 것은 역시 십 몇 년이나 되었을까? 제목 그대로 108편의 한글로 쓰인 사랑의 시만 골라져서 실려있다.
이 시집에서 나는 정말 매혹적인, 사랑을 노래한 주옥 같은 시들을 접하게 되었다. 허영자 시인이 시를 고르고 그녀의 감상문을 일일이 적어 놓았다. 이것이 너무나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雪夜愁 — 구자운
눈 내리는 밤은
여자여 잠이 드렴
이끼 슬은 팔 다리의 언저리를 묻어
사랑의 눈물의 눈이 내리면
새로운 맑은 숨은 살아 오리
꿈을 꾸며 노래하는
후미진 조용한 물이랑에 실리어
애달픔은 연신 희살짓는다
어루만지는 아늑한 팔뚝에서
나른히 쉬는 외로운 오릇한 목숨
여자여 눈 내리는 밤은
가널프레 풀잎이 싹터오는데
안겨서 잠이 드렴.
내 짙은 난초 잎은
어우러져 스며들어라
눈이 사풋 사풋
아릿한 젖 언저리에 쌓인다.
은은한 복스러운 밤
비어 있는 해슬픈 맑은 항아린양
스스로이 소리 이루어
벌거숭이 몸뚱아리에 어리는 설움
눈 내리는 밤은
여자여 잠이 드렴
그 다음의 시집은 <<피천득 내가사랑한 시 내가 사랑한 시인 삶의 노래>> 라는 제목의 피천득 시인의 번역시집이다. 1994년에 발간이 되었고 1995년 처형부부께서 이곳 아틀란타로 여행을 하시면서 선물로 남기고 가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읽지를 않았다. 나중에 발견을 한 것이다.
중고교시절 국어시간을 통해서 피천득시인은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아.. 그리고 1970년대 중앙방송의 DJ로 활약을 했던 피세영씨가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으로 Shakespeare의 시를 접하게 되었다.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Alfred Tennyson의 시도 다시 보게 되었고 미국시인 Emily Dickenson, 또한 처음으로 일본시인의 이름도 접했다.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 알프레드 테니슨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차디찬 잿빛 바위 위에, 오 바다여!
솟아오르는 나의 생각을
나의 혀가 토로해 주었으면
오, 너 어부의 아이는 좋겠구나,
누이와 놀며 소리치는
만(灣)에 있는 작은 배 위에서 노래하는
오, 사공의 아이는 좋겠구나
그리고 커다란 배들은 간다
저 산 아래 항구를 항해하여
그러나 그리워라 사라진 손의 감촉
더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저 바위 아래 오, 바다여!
그러나 가버린 날의 그의 우아한 모습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으리
1999년, Internet email의 덕분으로 고국의 옛 친구들과 다시 연락이 되었다. 그 중에 제일 그립던 친구 양건주도 연락이 되고 email을 주고 받게 되었다. 이 친구와는 정말 오래 전에 헤어졌지만 세월의 공백도 그 순진하던 고등학교, 대학교의 사심 없던 우정으로 연결이 되었다.
항상 ‘도사’같이 나이에 비해서 성숙하고 의젓하던 친구.. 양건주 결국은 사회생활도 그 건실함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이끌고, 결혼도 우리들이 알고 있던 여성과 결혼을 하고 참 부러운 친구다. 그 친구는 말과 행동 또한 별로 다르지 않다. 사실 나는 그 친구로부터 받기만 했다. 그 중에 하나가 김재진의 시집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라는 멋진 시집이었다. 건주야, 고맙다.
지나간 노래 — 김재진
지나간 노래를 들으며
지나간 시절을 생각한다
뜨거웠던 자들이 식어 가는 계절에
지나간 노래에 묻어 있는
안개 빛을 만나는 것은 아프다
너무 빨리 늙어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 보다
아프다
누군가 나를 만나며 아파야 할
그 사람을 생각하면
지나간 노래를 들으며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는 것은 아프다.
거의 20년 전에 이곳에서 알게 된 중앙고교 후배가족이 있었다. 나중에 취직이 되어서 귀국을 해서 헤어졌지만 딸들이 서로 친구라 가끔 간접적으로 소식을 접하는 그런 집이다. 그 당시 그 후배의 처남(wife의 남동생) 인 홍은택씨가 visiting scholar로 미국엘 왔는데 잠깐 들렸는데 그때 처음 만났다. 영문학전공이고 미국문학을 공부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가 시인임을 몰랐다. 2003년 쯤 우리 큰 딸(새로니)이 한국의 이화여대로 한 학기 공부를 하러 갔을 때 그 홍은택(교수)가 책을 딸 편에 보내왔다. 두 권인데, 하나는 <<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 란 시집이고, 다른 하나는 계간잡지 <<시안>>이었다.
<<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 Selected Korean Poems in English>>는 Rodney Tyson교수와 홍은택 교수가 공동 집필한 한영 번역시집이었다. 이 책을 보고 어떻게 그 언어감정의 극치를 전혀 다른 영어감정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 감탄을 하곤 했다. 저자의 한 사람이 영어권이고 다른 사람은 한국어 권이라서 그야말로 “아다리”가 맞았다고나 할까.
겨울 한강에서 — 김남조
겨울 강이여
너의 악보는 끝이 없구나
오늘은 결빙의 강바닥 아래
암청의 실타래들이 누워 있음이
무섭고 아름답다
흘러서 저기에 잠겨드는
사람 있으면 어쩌나
배 한 척 지나갔는지
물살 드러난 언저리 얼음조각 떠 있느니
아마도
탈색한 나룻배였을 게야
배에 탄 사람
삭풍에 도포자락 휘날리고
뱃전에 얼음 갈리는 소리
서걱서걱 울렸으니
“여보세요 여보세요” 외치며
누군가 뒤쫓았을지도 몰라
By the Han River in Winter — Kim Nam Jo
Winter river
Your score has no finale
Today under the frozen river bed
Lie dark blue skeins of thread
Frightening and beautiful
What if a person is
Possessed and submerged there?
A boat may have passed by
As pieces of ice floated at the edges of the exposed current
Perhaps
It was a discolored ferry boat
Someone in the boat
Sleeves of his attire flapping in the north wind
And the sound of ice splitting by the sides of the boat
Crunch crunch
Someone may have run after him
shouting “Hello, hello”
계간시집 <<시안>> The Quarterly Review Poetry & Criticism, 1999년 가을호에는 바로 위에 언급한 홍은택교수의 시인등장을 알리는 시들이 실려있었다. <<제 3회 시안 신인상>>에 당선작 중에 홍교수의 시가 있었다. 4편이 실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겨울산>> 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무언가 태고 적의 전설을 연상케 한다. 또한 마치 삼국시대의 병마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After the very affordable, easy-looking WordPress for Dummies, I’ve looking for next level ‘technical’ book about the popular WordPress blogging platform for months. But I’m not impressed, no going further, totally disappointed! Maybe my expectations about this ‘bible’ have been too high or unrealistic.
In a nutshell, overall coverage about various aspects of this excellent platform were off-balanced. The general layout is by any means excellent, but the contents are not. Overall treatment of each subjects is very shallow with some surprisingly ‘too deep’ dive into ‘nonsensically too long’ code snippets all over. For example, I was eager to find some ‘value-added’ tips on non-blogging CMS setup, but it’s not even close even to the Dummies’ WordPress book which in my opinion is the best introductory book.
One more thing, the sample codes were downloaded from the publisher’s site, it shocked me dearly.. why? Its format was docx… well I need MS Office 2007+ to open this ‘codes’. I can’t remember the last time code written in docx. Maybe, the author writes the code with MS Words.
아주 오랜만에 Mocedades의 1973년 히트곡 Eres tu를 youtube를 통해서 다시 듣고, 보게 되었다. 이곳을 통해서 이곡이 1973년 Eurovision contest에서 2위를 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그룹이 6인조(여자 2, 남자 4)라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곡을 처음 들었던 것은 1973년 미국유학 첫해였는데, 아마도 1973년 가을부터 radio를 틀기만 하면 이곡이 흘러 나왔다. Spanish노래가 이곳의 일반 radio에서 이정도로 나오는 것은 그때 당시에도 흔치를 않았다. 어떻게 해서 이곳사람들이 잘 모르는 Eurovision Contest의 곡이 미국 top chart까지 올랐는지 확실치를 않다. 하지만 1973~4년을 생각하면 이 노래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Eres Tu – Mocedades – 1973
처음 들을 당시에는 Spanish로 불리웠다는 것만으로 짐작을 해서 그런지 그저 남미나 멕시코의 가수가 부른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아주 이후에 그들이 진짜 Spanish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Basque 민족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흥미가 간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그룹인지 사진 같은 것은 보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이렇게 세상이 좋아져서 다시 듣고 볼 수가 있게 되었으니. 참 좋기는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신비스러움’ 같은 것이 줄어든 기분도 든다.
1973년 미국의 광활하고 끝없는 지평선을 차로 가로 지르면서 거의 매일 들었던 이 노래를 생각한다. 그 당시에 그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다 무얼 하며 지내는지 같이 궁금해진다. 특히 성성모씨, Prof. John Hahn, 3 nurses at Auburn, Nebraska, Hank Lee at Omaha, Nebraska. 이제는 거의 ‘전설’처럼 느껴진다.
Cliff Richard, 아니 더 정확하게는 Sir Cliff Richard, 인도태생의 영국의 국민가수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싶은 그는 teen idol이었다. 처음 ‘본’것은 영화에서다. 1964년 명동극장에서 Teenager Story라고 제목이 된 것인데 알고 보니 원래 제목이 The Young Ones였다. 아마도 분명히 일본“아해”들이 그렇게 제목을 바꾸어서 상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한국에 오기 전에는 별로 그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 당시는 일본이 세계로 통하는 지름길목이어서 많은 것들이 그들의 취향에 좌우되곤 했다. 그때가 그러니까 고2때였다. 한창 팝송에 열을 올리던 시기라 물론 그 영화의 영향은 상당했고 그 이후로 그는 한국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Vision – Cliff Richard
그 영화에 삽입된 거의 모든 곡들이 LP album으로 나왔고 (그때는 copyright, license란 개념조차 없어서 그냥 외국 판을 복사했다) 나도 그것을 샀다. 영화 속의 group sound는 실제로 Cliff Richard와 같이 공연을 하던 The Shadows였는데 그 중에 안경을 낀 남자가 있어서 조금 인상적이었다. 보통 group sound라고 하면 장발에 옷들이 요란했지만 그들은 아주 심하게 말해서 거의 ‘은행원’ 같은 인상이었다.
그 후로 Cliff Richard는 영화와 상관없이 많은 top chart (물론 미국계가 아니고 유럽계였지만) 에 오르는 주옥같은 recording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 Vision이란 것이 있었고 아직도 가사를 완전히 외우고 부를 수 있는 불후의 classic이 되었다. 그 외에도 Bachelor Boy, Congratulation, Tin Soldier, Evergreen Tree, I could easily 등등이 생각난다.
거의 5년 뒤에 그는 일본공연차 왔다가 서울에 잠깐 들려서 이화여대강당에서 한차례 공연을 했다. 1969년으로 기억을 하는데 아주 확실치는 않다. 아마도 1970년일지도… 누가 알면 고쳐주시기 바란다. 가을로 기억을 하는데 정말 그때 그가 그렇게 여고생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몰랐다. 관중의 대다수가 여고생들이었으니까. 나는 그때 여자친구가 ticket을 구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다. 여고생들의 ‘괴성’에 정말 시끄러웠지만 사실은 나도 실제인물과 실제노래를 ‘생방송’으로 듣는다는 사실이 가슴이 설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때 부른 처음 곡이 It’s all in the game이란 미국 country song이어서 조금은 실망을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거의 우리들이 기대했던 standard selection이어서 정말 좋았다. The Young Ones, The Day I met Marie, Big Ship 등등이 생각이 나는데 아마도 Vision은 없었던 것 같았다. 사회는 물론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Duo Twin Folios의 윤형주가 맡았는데 사실 그렇게 매끄럽게 한 진행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 반주는 역시 The Shadows가 따라와서 했는데 사실 그들의 지나치게 ‘즐거운’ 연주는 조금 버릇이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촌놈’들에게 이정도의 음악은 과분하지 않겠냐… 하는 모습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은 그 당시 우리나라의 일반 경제수준이 워낙 떨어지다 보니까 국제적인 문화행사에서 아주 ‘죽은 곳’에 가까웠다. 그런 유명한 연예인들을 부르기에 너무나 $$가 귀했던 것이다.
Cliff Richard는 Beatles같은 다른 영국의 group과는 아주 다른 스타일로 자기만의 fan들을 가질 수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 보니까 그는 완전히 nobody에 가까웠다. 1970년대 말에 잠깐 American style 로 진출을 하려 한 모양인데 역시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인터넷 상으로 감을 잡으면, 그는 사실 미국을 제외한곤 전혀 문제가 없었다. Soccer를 생각하면 비슷하다.
잠깐 반짝한 연예인이 아니고 정말 자기가 부른 노래들을 믿고 사랑하는 평생가수, 국민적인 가수로 노력을 하더니 결국은 Sir란 작위를 받았고 아직도 concert를 하며 다닌다. 거의 70세가 된 모양인데 전혀 은퇴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새로 발표하는 노래보다도 왕년에 불렀던 노래를 더 많이 부르고 청중들도 이제는 거의 장년, 노년들로 이루어진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활동을 하는지 알 수 있다.
Peru, Nebraska라는 제목으로 성성모씨의 추억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눈이 오면서 생각이 그 아득한 시절의 1973년 겨울, Peru, Nebraska로 멈췄다. 그러다 성성모씨와 같이 눈길에서 헛바퀴를 돌고 있던 차를 밀어주던 생각으로 흐르고 자연히 그곳에서 교수를 하던 한국인 John Hahn, 그리고 근처 Auburn, Nebraska의 병원에서 근무하던 세 한국인 간호사들.. 참 소설 같은 배경이 아닐까?
글을 쓰다가 조금 느낀 게 그렇게 또렷이 기억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 구체적인 사실로 묘사를 하려니 턱없이 ‘사실’이 부족했다. 나의 머릿속에 그냥 두서없이 기억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조금은 생겼다. 생각과 글과 말은 서로 다 그 정도의 차이가 대단하다는 것도 함께. 그래서 부랴부랴 생생하다고 자부하던 미국유학과정을 시대별로 써 내려가기 시작을 했는데..이걸 어떻게 끝을 낼지 아니면 얼마나 자세히 써야 할지 현재로써는 난감하다. 하지만 시작이 반.. 이 아닐까?
‘눈’을 기대한 월요일 아침, 하지만 ‘물’로 끝이 났다. 연숙의 business일정으로 사실 눈의 ‘사치’는 귀찮기만 할지도 모른다. 며칠 계속되는 민감하고, 차게만 느껴지는 나라니와 같이 점심을 할 용기를 못 느끼고 도서관에서 평소 때 보다 30분 더 있었다. 1월 달 충격적인 거짓말 같은 우리의 ‘고백’을 담담히 받아드린 고마움도 있고 해서 조금 더 친하게 지내려는 희망은 잠시였고, 식사도 같이 안 하려고 하고 무언가 얼굴이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또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제일 중요한 것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WordPress이다. 2~3년 전의 DotNetNuke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때의 것은 사실 ‘물거품’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번 것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결과가 조금은 보이니까. 이것을 기점으로 PHP를 더 배우고 그러면 무언가 내가 할 일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WordPress Bible이란 책을 $30+ 거금을 들여 사서 현재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번에는 결과를 기대해 본다.
책, 인생고수……참 제목이 좋다. 인생을 통달한 듯 한 저자의 자신 있는 실용화 된, 바로 써 먹을 수 있는 오래된 인류의 축적된 지혜와 철학.. 이렇게 책 하나에 그것을 모아 놓은 것은 사실 드물게 만나는 작은 기쁨이다. 목차를 보면 저자의 의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단한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
내 힘든 삶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건강한 생활을 위한 지혜로운 습관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어른 되기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고민 해결법
왜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는 걸까?
삶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
나이 듦에 대처하는 자세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원하는 것 하며 살아가기
왜 나는 항상 불리한 조건에 있는 걸까?
하고 싶은 일과 안정된 직업 사이에서
터닝 포인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하루하루 힘겨운 일상, 미래는 언제 준비하나?
존경 받는 리더 되기
내가 있는 집단은 언제나 옳은 것일까?
오늘도 나 혼자 모임을 준비하는 이유는
너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다
지금 하는 이 사랑, 진정한 사랑일까?
세상의 반항아들과 대화하기
인간관계가 나를 괴롭힐 때
이기적인 이웃과 평화롭게 살아가기
나를 알아주는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싸우자
서로 다른 믿음이 관계를 악화시킨다면
세상의 폭력에 맞서는 가장 큰 힘
큰 제목 밑의 소 항목 들은 사실 서로 많은 연관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소 항목은 차례를 무시하고 읽어도 될 듯하다. 이중에서 나에게 제일 흥미롭거나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들을 열거 해 본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건강한 생활을 위한 지혜로운 습관
왜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는 걸까?
나이 듦에 대처하는 자세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터닝 포인트를 꿈꾸는 이들에게
오늘도 나 혼자 모임을 준비하는 이유는
인간관계가 나를 괴롭힐 때
나를 알아주는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싸우자
서로 다른 믿음이 관계를 악화시킨다면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돈다. 혼자서 읽고 생각한 것보다 이런 것들은 누구와 같이 읽고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을 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읽은 후의 서로의 생각은 비슷한 것 보다 다른 것이 많을 것처럼 생각이 된다. 바로 그것이다. 그 다른 것을 서로 생각해 보면 책을 혼자서 보는 것보다 효과가 그만큼 증가하게 되지 않을까? 사실 성경공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종교를 떠난 것이라 그만큼 제한조건이 줄어든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90년 초 내가 마리에타로 이사를 오게 만든 직장: Automated Logic Corporation(ALC) 에서 일을 할 때 그 사장 (별명이 Jaws였다) 이름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Gerry Hull이었다. Gerry는 Jerry로 발음을 하는 게 아니고 Gary로 발음을 하였다. 그 사장이 우리 그룹의 중요 멤버와 같이 공부를 하던 게 있었다. 나는 거기에 참여를 못했지만 (이미 진행 중이었다) 옆에서 보니 참 신선하고 건강한 회사로 느껴졌다. 그때 같이 공부하며 토론을 하던 책이 바로 그 유명한 Stephen Covey의 “7 Habits of Successful People” 이었다. 이 책은 이미 베스트셀러였고 후에 나도 사서 읽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도 기회가 되면 이런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결과는 역시 제로.. 나의 고질병인 timid &passive.. 최근 10년은 연숙의 ‘눈치’를 보게 되어서 아주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싶지 않다. 경제력도 없는 꼴에 사람들을 모으고 만나서 한가하게 인생철학을 토론한다고? 웃기지도 않는 한가한 얘기가 아닐까? 구차하게 그녀에게 구걸하고 싶은 마음 눈곱만치도 없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discussion group이 virtual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virtual한 것은 현재도 작업 중이 아니던가! (정말 웃기는 인간이 바로 이경우, 이경우 병신XX 다) 그래도 시작해 볼만한 resource는 하나 있다. 바로 이 “진희네 그룹” 이다. 이제 보니 10년이 훨씬 넘은 관록도 자랑한다. 요새야 10년 하면 별거 아니라는 기분도 들지만 10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그 동안 끊어질 듯 말듯 교제를 해온 나의 유일한 ‘친지’들이 되었다. 친구라고까지는 하지 못하지만 10년 동안 꾸준히 만났다는 것은 그런대로 친지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이 그룹에서 만약에 이런 진지한 토론을 하게 된다면.. 아니 이게 우선 말이나 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도 wife들까지 참여를 한다면.. 말이나 되나. 아.. 조금 이건 힘들지 않을까? 성경공부에선 그게 별로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왜 그럴까? 이게 더 공부를 해야 돼서 그런가? 인원이 너무나 적어서 그런가?
물기가 한껏 담긴 무거운 눈이 펄펄 내린다. 일 년에 한두 번 구경할 정도의 big event에 속하는 ‘눈’은 이곳에서 커다란 뉴스 깜이다. 이번의 눈은 일기예보의 정확성을 다시금 느끼게 할 정도로 정확한 시간에 거의 정확한 양으로 내리고 있다.
이른 오후 도서관에서 나올 무렵부터 앞이 안보일 정도로 내리기 시작해서 저녁 무렵에는 완전히 온 세상이 winter wonderland로 변했다. 이렇게 예쁘게 내린 것은 그리 흔치를 않았다. 기온이 아주 적당해서 차도는 차가 가는데 거의 지장이 없어서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이렇게만 내리면 눈을 운전 때문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 밤 모두 얼어 버리면 내일 오전중은 차들이 아주 고생할 듯하다.
지난 주말부터 Midwest, Mid Atlantic에 최고기록의 엄청난 눈이 내려서 그야말로 난리더니 이번에는 이곳도 피할 수가 없는 모양. 그래서 현재 눈이 땅에 없는 state는 하와이 주밖에 없다고 할 정도이다. 이것도 global warming의 한 결과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눈이 오는 게 비가 오는 것 보다 구경하기가 훨씬 아름답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그런 감상에 젖는다.
며칠 조금 포근한 날이 다시 매섭게 추운 날로 돌아왔다. 이곳의 2월 달은 사실 포근한 달이 아니다. 깜짝 놀랄만한 겨울날씨는 이때부터 시작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이번 겨울은 나도 조금은 놀랄 정도로 추운 겨울의 체면을 살렸다. 거의 잊어버렸던 두꺼운 스웨터도 찾아 입게 되었고, 별로 인기가 없던 두꺼운 장갑, 그리고 드디어 생일선물로 ear muff까지 생겼다. 얼마 전에 Tobey 산책을 시킬 때 착용을 했는데 그 ‘위력’은 사실 대단했다. 조금 듣는 것, 특히 ear bud로 음악을 듣는 게 문제가 되지만 산책 내내 아주 편안하게 머리가 따뜻했다.
그렇게 가물고, 따뜻하던 날들이 언제부터인지 싸늘하고 비가 계속 오는 그런 날씨로 변했다. 참, 자연은 공평한가 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평균치’를 이렇게 채워주시니 말이다. 정도의 문제겠지만 가뭄보다는 장마같이 비가 많은 게 좋고 더운 것 보다는 추운 게 더 좋다.
오늘Cobb library 에서 건강에 관한 일본인의 책(“몸이 따뜻해야 몸이 산다.”, “이시하라 유미”저, 김정환 옮김, 2006)을 읽었는데, 체온이 내려가면서 생기는 신체의 각가지 부작용, 그러니까 한마디로 면역력이 떨어진다고 하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것은 동양의학적으로 보면 수긍이 간다.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책의 저자는 이것을 그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연구를 한 모양이다. 음식도 찬 것을 피하고, 목욕도 따뜻하게 하고.. 그런 식이다. 나는 어떤가? 우선 먹는 것은 이빨 때문에 찬 것은 피하는 편인데, 예외적인 것은 냉수와 우유 정도일까.. 문제는 겨울에 집안 기온이 낮다는 것이다. 춥게 사는 게 나는 머리를 맑게 하고 경제적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것도 문제가 있는 모양 인가.
또 하나 비슷한 종류의 책 (역시 일본인 저자: “병 안 걸리는 사람들의 3법칙“, “아보 도루” 지음, 박인용 옮김, 2007) 에서는 병 안 걸리는 사람과 잘 걸리는 사람의 특징을 다루었다. 권장하는 건강법은 ‘반신 욕’, ‘호르메시스’, ‘수면’으로 면역력을 높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질병은 면역력의 저하에서 오니까 면역력을 높이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외부적인 사고로 죽거나 부상을 당하지 않는 한 이 ‘질병’만 잘 다스리면 ‘장수’를 한다는 그런 것일까? 어쨌건, 죽기 전까지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주변가족에게 부담도 필요이상 주지 않고, 더 나아가서 사회에도 경제적인 부담을 덜 주지 않겠는가? 이 권을 책을 빌려서 집에서 차분하게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Whispering piano가 the Whispering Piano Internet channel에서 감미롭게 굴러 나온다. 어쩌면 그렇게 피아노 소리가 감미로울까. 하지만 이렇게 듣기 좋은 것도 오랫동안 들으면 영락없이 시끄러운 ‘소리’로 변하고 만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화창한 월요일 아침 또 Cobb Central로 drive해서 왔다. 이제는 아주 친숙해진 곳.. 어쩌면 그럴까.. 예전에 이곳을 오면 그렇게 ‘빌려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가는 시간만 기다렸지 않은가. 그때는 누구와 같이 왔었고 분명히 내가 ride를 주었을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좋아하는 책을 보는 것은 즐거웠지만 나의 마음가짐이 전혀 달랐다. 오죽하면 가족들이 나보고 왜 그 많은 시간을 좁은 나의 방에만 처박혀 있냐고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지 않았나. 이유는 없었다. 그냥 ‘결단’을 못 내렸던 것뿐이다. 나의 세상만사가 거의 그런 식이었을 것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렇게 된 것 투성이일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나의 차’가 없어졌다는 것일까? 교훈은 “남의 말을 진정으로 생각해 보자” 라는 것일 게다.
현재 나를 조금이라도 지탱해 주는 것 “dadpc-2: Compaq Presario X1300″ laptop이다. 비록 거의 6년이나 된 ‘고물’ 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쌩쌩’한 보물인 것이다. 다행히 이것을 나라니가 살 당시에 wide-screen으로 비교적 비싼 model이었기 때문에 현재도 거의 문제가 없다. 그런데 역시 문제가 있다. 다행히 external한 것이라 조금은 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조금은 화가 난다. 이것은 거의 예측이 가능한 고질적인 laptop mechanical weakest link 라고 해야 할까? 바로 power (from charger) connection problem이다. 전번에 새로니가 쓰던 것도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charger를 쓸 때 이 connector에 아주 예기치 않게 stress가 가는 것을 mechanical designer들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 어쩌면 아직도 이것을 더 잘 만들지 못했을까. 문제는 charger connector에 연결된 pc board에 damage가 간다는 것이다. 이곳에 monster-class strain-relief mechanism이 필요한 것을 왜 그들은 더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 좌우지간 이것이 더 악화되기 전에 손을 보아야 할 듯 하다.
지난 주말에는 예정대로 새로니가 다녀갔다. Vanderbilt University에 campus tour에 참가를 했는데 갔다 온 인상이 아주 좋았던 것 같고 financial aid이 더 좋게 되면 그곳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히는 모양이다. Vanderbilt하면 물론 아주 오래 전 김수근 씨가 생각이 나곤 하는데.. Oklahoma에서 조금 신세도 지고 알고 지내던 그분은 거의 공부를 끝낸 상태의 유학생이었지만 그 당시 Sherman의 조그만 college에서 가르치던 아주 ‘우수’한 경제학도였다. 그가 바로 Vanderbilt에서 공부를 했었기 때문에 그때 그 이름을 알았다. 남부의 명문사립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학교자체는 나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아직까지 조금 이해하기 힘든 것은 현재의 job을 ‘버리고’ elementary school teacher가 되기 위해 Master’s degree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사실이다. 조금은 나의 머리로는 앞뒤가 맞지를 않아서.. 나의 희망은 그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더 ‘재미’가 붙게 되어서 higher degree에 도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우리부부의 ‘염원’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이런 논리는 이제 너무나 구식이 (여기나 고국이나) 되어서 남에게 말하는 것은 조금 치사한 일이다.
나의 지금은 어떠한가? 이게 무슨 해괴한 질문인가? 그래.. 나의 현재 건강상태는 A-minus정도는 될 것이다. 그냥 A라고 해도 되겠지만 조금은 자신이 없다. 아침에 일어난 후의 기분 나쁜 두통과 계속 느껴지는 얼굴의 경련 (연숙은 분명히 눈 주의의 경련이라고 하지만) 등등 그리고 계속 ‘악화’되는 시력.. 등등 때문이다. Physical checkup없이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 나의 주위에 또 있을까? 조금은 창피해서 말을 못한다. 하지만 나나 연숙은 상식적인 건강보험을 규칙적으로 들고 있지 않은가? 거의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life style또한 건강한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도 모르게 몸 안에 무언가 ‘자라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조금은 체념을 한 상태다. 우리의 경제력으로는 조금은 말이 안 되는 ‘사치’처럼 보인다. $1000씩 한 달에 지불하고 ‘안심’을 한다는 것 말이다. 이것도 사실 우리가 좋아하던 Obama때문에 얼마나 갈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