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 Connex, Inc.

Scan1몇 달을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은 60,000 mile이 70,000 mile 이 되었다. 우리의 ‘대중교통수단’ workhorse,  2009 Hyundai Sonata.. 세월을 어찌 따라가랴 이것을 산 것이 벌써 6년이 되어간다. Mileage로 보면 이제는 ‘고물’, ‘중고차’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들에게는 항상 새 차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조용하게, 기운차게’ 달려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차와의 인연’이란 것일까? 차도 “인연이 있고 없고” 에 따라서 고생을 하고 안 하고 하니까. 정말 이 차는 우리에게 best service를 주었고 주고 있다. 이차가 그 옛날 이승만 대통령 시절, 미군 군용차를 뚜드려서 만든 ‘시발’ 택시를 만들었던 조국 대한민국에서 만든 차라는 사실, 그것도 주먹구구식으로 ‘불가능’을 밀어 제치며 ‘박정희 수출정책’을 주도했던 현대 ‘건설’의 차라는 사실.. 간간히 내가 살아온 짧지 않은 국가적인 역사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비록 이곳 Georgia에서 ‘조립’된 것이라지만 design은 역시 ‘국산’이 아닌가.. 너무 문제가 없어서 mileage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이렇게 60,000 mile을 놓치게 된다. 한 번 ‘손을 볼’ 때가 10,000 mile이나 지났지만 우리의 ‘등대, 정직한 자동차박사’ Car Connex에 맡겼는데, 검사 결과는 아주 좋은 것이었다. ‘아무런 문제 없음’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Car Connex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아주 멀지 않은 Atlanta suburb , Smyrna에 있는 한인 pro mechanic,  Mr. Won이 운영하는 car repair shop인데 이곳과 다른 인연을 맺은 것도 이제 수 년째가 되어간다.

처음 이 ‘정비소 car repair shop’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작은 딸 나라니가 Smyrna에 살 당시, 자기가 가는 car repair shop이  ‘한국사람’ mechanic 이 하는 것이고 ‘너무 정직하고 잘 고친다’ 는 말을 듣고서였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자세히 듣고 보니 과장된 칭찬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니가 살고 있던 Smyrna Condo의 이웃 ‘미국사람’들이 그곳의 loyal customer란 사실과 그들이 한결같이 그곳을 recommend했다는 사실이 나의 귀를 솔깃하게 한 것이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Mr. Won (애들은 그저 first name, Chang이라고 불렀다), 우리 차를 맡기고 얘기를 해 보니 역시 소문 그대로였다. 완전한 ‘차 박사’였다. 아니 차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거기다가 차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기계적, 과학적’으로 잘도 설명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리비는 큰 issue가 되지를 않는다. 정확하게 진단을 하고 알맞게 수리를 하니까..

내가 진짜로 혀를 찾던 case는 우리 Sonata의 ‘이상한 버릇’에 대해서 설명하고 부탁을 했던 것이었다. 거의 새 차였을 당시 transmission에 이상한 느낌이 있었는데, 차가 2단 기어에서 1단 기어로 감속을 할 때 99% ‘쿵!’ 하는 충격이 느껴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잠깐 그러려니 했지만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었는데 Mr. Won을 만났고, 그가 ‘멋지게’ 고친 것이다. 고친 과정을 설명하는데.. 실로 대단한 추리로 Sonata를 control하는 computer가 우리의 운전습관을 잘 못 판단한 case로, mechanical problem이 아니었던 것이다. computer를 완전히 reset을 하고 나서 그런 문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dealer한테 갔으면 ‘아마도’ 시간을 계속 끌며 시간을 허비하고 (결국은 고칠 테지만..) 엄청난 charge를 했을 듯 하다.

그 이후로 우리 집은 완전히 그를 믿게 되었고 문제가 있건 없건 간에 차에 관한 것이면 그에게 상담을 받게 되었다. Tire를 바꿀 때에도 그의 advice를 꼭 받았다. 그의 의견은 거의 틀림없이 정확하고 현명한 것이었다. 차에 문제가 생기면 99% 꼼짝달싹을 못하는 Atlanta Metro에 사는 한 우리는 ‘차의 노예’가 된 기분이지만 우리는 Mr. WonCar Connex 가 가까운 곳에 있는 한 다리를 쭉 뻗고 살 것 같다.

Mr. Won과의 인연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번 60,000 mile service를 받으러 갔을 때, 그가 우리 부부를 유심히 보더니.. 한다는 이야기가.. 우리를 오래 전에 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를 전혀 기억을 못하는데. 듣고 보니.. 1998~9년 경에 서울에서 연숙의 조카 딸 수경이가 어학연수차 Georgia Tech에 왔을 때, 그들 group과 어울려서 우리 집엘 왔었다는 사연이었다. 우리 집의 모습을 정확히 그려낸 그의 기억력도 놀라웠지만.. 이런 인연이 세상에 또 있을까? 너무나 즐겁고 유쾌한 해후가 되었고 그가 제발 이곳에 오래 오래 성공적인 car (repair) business를 계속하게 되기를 기원했다.

Carolina High & Einstein Bros.

Mid-June full blasting heat-index

Mid-June full blasting heat-index

 

¶ 하루 아침에 갑자기 ‘한’ 여름이 시작되었다. 하루 아침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고 며칠을 거치며 build-up된 Carolina High (Pressure).. 그러니까 조지아 Georgia 의 northeast쪽으로 펼쳐진 Carolina (North & South), mid Atlantic 상공에 요지부동으로 자리를 잡은 ‘고기압’이 모든 바람을 차단하며 여과 없이 쏟아지는 태양열이 대지의 기온을 치솟게 한다. 위층은 물론, 아래층의 a/c 가 full-blasting, 6월 중순이면 이런 heat wave의 맛을 한번은 보여준다. 문제는 과연 ‘몇 도’까지 치솟을까.. 하는 것이다. Magic Number, 100도는 어떨까, 사양하고 싶은 숫자가 아닐까.

다른 문제는 공기 중의 Ozone level 인데, 이것이 치솟으면 호흡기에 좋지 않다. 오늘이 그런 날로 Code Orange warning 이 나왔다. 움직이지 않는 공기에 의한 ‘불쾌’하게 높은 온도와 더불어 그야말로 double whammy라고 할까. 이럴 때 유일한 대책은 밖에 나가지 않고, 실내에서 그야말로 take it easy하는 것이다. 이럴 때, YMCA와 같은 실내 track, swimming pool은 우리에게 거의 필수적인 시설이 된다.

근래에 100도를 넘은 기억이 없기에 이번에는 조금 뉴스 감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날씨, 나는 짜증이 나긴 하지만 조금 생각을 고쳐서, 여름은 더워야 ‘자연적’이라고 위안을 삼으니 훨씬 부드럽다. 이것도 ‘나이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그저 조그만 희망이 있다면 오후 늦게 ‘씨원하게’ 쏟아지는 예기치 않은 소낙비가 아닐까.. 그야말로 Johnny Rivers 의 60’s  oldie ‘Summer Rain‘ 이 귓가에 들리는 듯, 그 당시를 회상만 해도 벌써 시원하고 포근해 진다.

 

 
Summer RainJohnny Rivers – 1967

 

einstein-bros-1

¶ 그런 오늘 우리는 Holy Family ‘sisters’ 들과  아침 미사를 마치고 예정에 없던 breakfast를 Johnson Ferry road에 있는 Einstein Bros Bagels(EBB) 에서 하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시원한 곳에서 향기로운 Hazelnut coffee, Signature bagel: SPINACH, MUSHROOM & SWISS를 즐기는 이런 시간은 비록 가끔 오는 것이지만 정말 즐거운 시간이다.

오늘은 근래 자주 보게 되는 크리스티나 자매가 ‘한 턱’을 낸 것이 되었고, 레지오 단원 카타리나 자매님이 함께 해서 오랜 만에 ‘lady’s talk’ 을 즐겼다.  화제야 대부분 신앙과 교회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가끔 gossip같은 이야기도 나눈다. 이런 것은 ‘새겨서’ 들으면 되고,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하고, 친교를 이루게 하는 역할도 한다. 자기만이 최고인 듯 착각하며 사는 수많은 동지 ‘남자 형제들’ 보다 이 세련되고 자상한 lady들이 대화를 나누기에 훨씬 더 편하고 즐겁다. 덕분에 YMCA workout은 2시간 지연이 되었지만.. no problem!

What were they thinking? 2 episodes

green green grassy Ireland - sick surprise

green green grassy Ireland – sick surprise

 

¶ Irish Disaster 어떻게 이런 일이.. 그 동안 나를 괴롭히던 우려가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이런 종류의 ‘믿기지 않는 현실화’는 근래에 꽤 있었다. 그저 이럴 때 내가 고작 되뇌는 말은 What are they thinking? 정도다. 서유럽에서 가장 ‘종교적, 보수적’인 초록색 ‘초원’의 나라, Lady of Knock성모님의 나라, 레지오 마리애 의 본고장 Ireland.. 어떻게 그들은 ‘국민투표’까지 해가며 남자끼리, 여자끼리 를 결혼 시킬 만용이 생겼을까? 그것이 fair하고 common sense인가? 그들은 St. Patrick을 완전히 잊었는가? 이제는 right is wrong, wrong is right의 세상이 되었는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악인가.. 어떻게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여자와 여자가 결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식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2명(이상)의 아버지나 2명(이상)의 엄마를 둔 자식들은 어떻게 세상을 볼 것인가? 이것은 종교적인 것을 완전히 초월한 ‘인간 자연 본능’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임을 그 많은 사람들이 잊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탄식하기 전에 나는 그저 놀라운 세상을 사는 내 신세를 탓한다.

 

¶ 몇 달 만에 마리에타 two 구역 모임에 갔다. long Holiday weekend라서 마음의 여유도 조금 생겼고, 몇 달 동안 완전히 이 ‘동네’ 모임을 잊고 살아서 조금은 가고 싶은 마음도 생긴 것이다. 더군다나 나의 ‘유일한’ 레지오 협조단원 K형제 댁에서 모이는 것이기에, 가는 마음이 조금은 더 가벼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 동안 레지오 ‘협조단원 돌봄’에서 최선을 다 못하고 있어서, 항상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나를 ‘두말없이’ 참석하게 하였다.

 그 동안 자주 못 보았던 반가운 형제, 자매님들, 특히 평소 가족과 떨어진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P 형제를  다시 이곳에서 보게 되어서 아주 반가웠고, 이번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고 Holy Family C.C.  평일미사에서 요사이 자주 보는 K Francesco 형제도 반갑게 다시 만났다. 하지만 나중에 일찍 구역모임을 떠날 때의 나의 심정은 ‘역시’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왜 ‘또’ 내가 이곳엘 왔었는가.. 심지어, 그곳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도 들 정도였는데..

 거의 40년 동안 ‘전혀’ 못 들어보았던 ‘심하고 원색적 vulgar, obscene 욕설과 위협적인 언사’를 바로 코 앞에서 목격을 한 후에 나는 밥맛이 완전히 떨어져서 식사도 거의 안 하고, 독한 술 몇 잔 들이키고 ‘what were they (2 guys) thinking?‘ 만 되뇌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것은 분명히 verbal violence 였고 옆에 있던 우리들은 collateral victim이 된 것이다 . 대부분 자매님들과 아이들이 있었던 그 자리에서 우리들은 맛있는 음식을 접시에 덜고 있었다가 그런 일을 어처구니 없게 목격을 한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처음에는 관련 당사자 2명의 ‘싸움’이 100% practical joke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얼굴을 보니 그것이 전혀 아니었고, 그것은 완전한 threatening curse 였고,.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욕 자체라기 보다는 ‘증오에 가득 찬 언동 hateful demeanor’ 이었다. 이것이 과연 ‘사랑, 평화’의 천주교우 모임인가.. 그 동안 이 구역모임의 ‘인구의 증가’에 의한 ‘질의 변화나 진화 (or 퇴화)’를 예상 못한 것은 아니나 이것은 완전한 disaster 였다. 바로 옆 구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이야기를 전에 듣고 나는 사실 믿지를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믿어진다.

 코 앞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솔직히 ‘육체적인 위협’까지 느껴질 정도여서 앞으로 장기간 이런 광경은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식사 전, 매일 복음 ‘성령과 평화’를 이야기 한 후에 생긴 이런 믿기지 않는 happening은 ‘아마도’ 이 sprawling group 의 ‘쉽지만은 않은’ 앞 날을 예고하는 신호가 아닐까? 아마도 이 group 은  현재 critical mass 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고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은 왜 본당 공동체에 구역모임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a ‘written’ mission statement would help)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지만.. 우선은  foreseeable future 까지 그저 잊고 살고 싶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슬픈 해후邂逅, 침묵피정

¶  묘~한 인연과 슬픈 해후邂逅

피정이 끝나고 우리는 그 전날 약속이 되어 있었던 어떤 환자 자매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리에타 지역에 사시는 어떤 병중의 자매님께 ‘급하게’ 천주교 영세를 받게 하는 조그만 과제가 생긴 것이다. 아마도 아들과 둘이 사시는 어떤 우리 또래의 자매님이 중한 병에 걸려서 아마도 오래 못 사실 것이라는 판단으로 다른 주에서 급히 방문하신 친 가족(오빠와 여동생)들이 순교자 성당에 연락을 해서 혹시 외인(비신자)에게 ‘급하게’ 영세를 줄 수 있는가 문의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연숙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2년 전 모니카1 자매님이 그런 case였고 그 후의 결과가 너무나 좋았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해 주었으면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때가 바로 레지오 단원들이 제일 사명감을 느낄 때라고 할까..

이때 우리가 방문한 목적은 상황판단이 전부였다. 어느 정도 병이 위중한지.. 그것이 제일 궁금한 것이다. 과연 짧더라도 교리공부를 받을 상황인지..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면 과연 신부님이 ‘비상 영세’를 주실 수 있는지.. 모든 것이 우리들이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데 달려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불안한 심정으로 찾아간 곳은 우선 middle-high-class 주택가로서 아마도 financial한 문제는 없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반갑게 맞이한 오빠 형제님 2 여동생 자매님들.. 모두 인상도 좋았고 친절하였다. 전화로 이미 들었던 ‘사연’에 덧붙여 더욱 자세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비교적 대 가족이었지만 모두들 지역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서 그것이 우선 문제였다. 아픈 환자가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간호를 할 것인가? 비록 두 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침대에 누어있는 환자자매님.. 모든 것이 아주 불편해 보였고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계속 물끄러미 주시를 했는데.. 우리는 무언가 우리를 ‘의심’이라도 하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 아픈 자매님은 알고 보니 우리도 낯이 익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다니던 YMCA에서 본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자매님 부부가 YMCA에서 janitorial staff으로 일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것이 불과 2~3년 전이었지만 서로가 첫 눈에 못 알아 본 것이다. 그 자매는 처음에 나를 먼저 알아보고 나중에 연숙을 알아 보았다.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반가워서 한동안 어쩔 줄을 몰랐고 옆에서 보고 있던 가족들도 너무나 기쁜 얼굴들이었다.

놀란 것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그 자매님의 부군 형제님이 올해 4월에 이미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형제님은 남자 locker area에서 너무나 자주 보았고 이야기도 나누었던 사이었는데.. 나이도 아마 나와 비슷해서 더욱 친근감을 느낀 그런 분이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남편의 병간호가 너무나 힘이 들었는지 곧 바로 자기도 이런 중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비극이 있을까?

오빠와 여동생이 모두 이미 천주교 신자였고 이 아픈 자매님은 아직도 외인이었지만 가족들은 그 자매님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비록 중병이라 할 지라도 하느님, 특히 천주교의 하느님을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게다가 우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동생 암브로시아 자매님3과 이야기를 하다가 오하이오 주 Dayton, Cincinnati 지역에서 성당을 다녔다고 했고 우리의 영세 신부님 왕영수 신부님과 같이 신자생활을 한 것도 알게 되었다. 근래에도 한국으로 비행근무를 할 때 가끔 왕신부님과 만난다고.. 이런 뜻밖의 인연이 어디에 있을까? 성령운동에서 음악찬양을 하는 최데레사도 잘 안다고 했다. 이런 것들로 우리는 순식간에 ‘친구’처럼 느끼게 되었고 우리가 레지오 단원으로 자매님을 도울 수 있을것을 알게 된 그들은 어린이들처럼 기뻐했다. 다음날 직장 관계로 모두 떠날 그들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던가.. 이런 인연으로 우리 부부는 레지오 단원의 한 조 로써 이 위중한 병으로 고생하는 자매님을 위해 봉사할 기회가 찾아 왔고 우리가 옛날 레지오 단원들에게 받았던 ‘은혜’를4 갚을 chance가 왔음을 느낀다. 얼마나 우리가 도울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이지만 최선을 다할 각오는 되어있다고 느낀다.

 

¶  CLC 일일’一日’ 침묵피정  Scan10108-1어제는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아틀란타 CLC 가 주최한 ‘일일 침묵피정’이란 곳에 연숙과 참가하였다. 지나간  순교자 성당 주일 미사 후 점심 시간에 낯이 익은 CLC 자매가 갑자기 와서 ‘일일 침묵피정 신청서’를 건네주며 꼭 오라고 해서 조금 당황한 적이 있었다. ‘원칙적’으로 ‘못 간다’고 나는 이미 생각을 하고 있다가 후에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기회가 또 올지 안 올지 확신이 서지를 않았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it’s now or never란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가지 안더라도 연숙은 물론 갔을 것이지만 나의 결정으로 생전 처음 CLC주최 피정을 둘이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번의 일일 피정은 ‘CLC 골수단원’ 대상이 아니고 ‘일반인’ 대상이라 마음이 가벼웠지만 ‘침묵’이란 말이 조금 신경이 쓰인 것도 사실이었다.

CLC (Christian Life Community)하면 로욜라의 아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Loyola)의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을 바탕으로 예수회의 영적지도(spiritual guidance)를 받는 전세계 ‘평신도 단체’란 것을 나는 예전부터 연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다. 연숙이 전에 이런 ‘과정’을 거쳤었기에 나는 옆에서 조금씩 보고 듣게 된 것이다. 인간적인 갈등으로 비록 그’단체’를 떠나서 지금은 나와 전심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하고 있지만 그곳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크게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어제 그곳에 참석을 해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알아 보았다. ‘옛 동료’들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비교적 많은 참석 인원(100+?)이 모인 그곳에서 우리가 속한 마리에타 2구역 ‘자매님’들도 만나서 너무나 반가웠는데, 그 중에는 전 스테파노 부부, 마르쎌리나, 히야친타 자매들도 보였고, 이곳 ‘역시’ 대다수가 자매님들이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정상’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피정 자체는 ‘피정의 달인’이라고 소개된 방문신부 ‘정구평 마르코’ 신부님이 담당을 했는데 우리와는 최형 댁에서 ‘개인 적’으로 만난 경험도 있고 해서 큰 거리감 없이 강론을 따를 수 있었다. 피정 주제는 ‘기도와 관상’ 이었고 아마도 아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중 ‘제 1과’ 정도가 아닐까 추측이 되었다.  배부된 handout text를 보면 피정 강의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기도와 관상 1 

  • ‘나’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
  • ‘나’에 대한 조명
  • 하느님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 나’
  • 기도란 무엇인가?
  • 기도의 방법
  • 기도의 목적

기도와 관상 2

영신수련에서 기도의 외적 형식

  • 기도와 호흡
  •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호흡의 방법
  • 생각 조절하기
  • 기도 준비단계

기도와 관상 3

영신수련은 이성을 도구로 다양한 감정들을 분석하는 피정인가?

  • 기도할 때에 올라오는 다양한 감정들
  • 분심과의 싸움

기도와 관상 4

  • 성 이냐시오의 관상
  • 두 개의 깃발

기도와 관상 5

  • 영적 여정의 시작(원리와 기초)
  • 일상 안에서의 성찰
  1. 첫째 감사
  2. 둘째 조명
  3. 셋째 반성 및 성찰
  4. 넷째 결심
  5. 다섯째 마침기도

기도와 관상 6

  • 생각, 말, 행동

 

 이런 주제와 내용들에 대한 강의를 듣고 두 번에 걸친 30분 가량의 침묵기도 시간이 주어졌다. 아침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이 조용했고 침묵을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뚜렷했다. 그런 중에 두 번 30분 기도는 놀랍게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바로 전에 들었던 내용이 머리 속에 가득 찬 도움으로 평소에 꿈도 못 꾸었던 나의 모습도 바라볼 기회가 있었다. 문제는 그런 나의 모습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가 못 느꼈지만 그래도 사랑을 받았던 나 였는가.. 긴 인생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기도에 대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인 것으로 이것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묵주기도와 기도문 기도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것에 비하면 이런 것들은 아주 제한이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무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 같은 것이다. 비록 짧았던 하루 피정이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쪽으로 눈을 뜨는 듯한 신선한 피정이었다. 아마도 ‘구면’이었던, 친근한 인상의 정구평 마르코 신부님의 피정 스타일이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다가 깨어 생각해도 ‘신부생활, 하느님과의 시간’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신부님의 말씀도 큰 과장이 아닌 것으로 들리기도 했다. 시간이 나면 이쪽으로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의욕도 느끼나. 글쎄..

  1. 재발 암 환자로 비신자였던 자매님, 속성과 교리공부와 영세 이후 기적적으로 암에서 치유된 case
  2. 오빠와 여동생은 오래 된 천주교 신자였다.
  3. Delta Airline의 여승무원으로 재직
  4. 1994년 큰 딸 새로니가 사경을 헤맬 때  순교자 성당 레지오 단원들이 병원까지 와서 간절한 기도를 해 주셨다.

extreme multitasking, 친전, sad vindication…

¶  Extreme multitasking

끈적거리는 올해의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부터 나는 ‘본의 아니게’ 갑자기 시간이 황금같이 느껴지게 바빠짐을 느낀다. 우리의 일상적인 routine을 제외한 예외적인 ‘일’들이 하나 둘씩 더해지더니 급기야 과장해서 수없이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내가 ‘좋아서’ 만든 일들은 결코  아니다. 급하거나 꼭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생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큰 불평은 없다. 이것이 내가 사실은 가장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여건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보다, 두 가지, 두 가지보다 세 가지… 등등으로 나는 많을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훨씬 ‘즐겁고 능률적’으로 느껴지고 실제로 결과도 나쁘지 않은 것이다. 특히 일의 성질이 ‘비슷한 것’이면 그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된다. 한마디로 adrenaline이 샘 솟듯 솟구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현재 나는

  1. 일생 일대 ‘가장 중요한 서류’를 찾는 일,
  2. 나의 서재가 될 아래층 거실의 flooring을 교체하는 일,
  3. front door의 ‘무너지는 듯 한’ structure를 고치는 일,
  4. backyard vegetable garden의 완전 ‘자동화’ , drip watering irrigation works,
  5. garage major cleanup..

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이것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연숙은 이런 나를 의아스러운 눈으로 보는 듯하다. 자기는 한가지를 ‘완전히’ 끝내야 다음 일에 착수한다고 하니까. 내가 이런 extreme multitasking을 하는 것은 아주 정연한 내 나름대로의 ‘이론’이 있다. 과학적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나에게는 과학적인 것이다.  나는 분명히 믿는다. 이런 방식이 전체적인 시간을 ‘훨씬’ 줄여 준다는 사실을.

 

Scan10061¶  친전 親傳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 친전이란 말은 ‘아마도’ 한자로 親傳을 말 할 것이다. ‘친히 전한다’는 말이니까, 이 친전의 글을 읽으면 김 추기경이 바로 나의 옆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이것은 얼마 전 연세대 이원선(도밍고) 동문의 부인 이 베로니카 자매가 연숙에게 빌려 준 것을 내가 다시 빌려서 읽어 보게 된 책의 제목이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것이라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추기경님은 어떤 분일까 생각을 해 보았다. 별로 자세히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기억에 나는 것으로는 내가 대학을 다닐 시절에 대한민국에 첫 추기경이 나왔고 그분의 이름은 김수환 신부였다 정도다. 그 당시 추기경이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고 사실은 관심도 없었다. 나와 천주교는 너무나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천주교는 고사하고 종교, 신앙에 전혀 눈이 뜨이지 않았을 때 김수환 추기경님이 뉴스에 나온 것이다.

 그 이후 미국에 살며 더욱 더 잊고 살다가 ‘간신히’ 내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면서 추기경의 뜻도 가깝게 느껴지게 되고 김수환 이란 이름도 친숙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것이 전부랄까.. 그저 반정부 데모 때에 데모 학생, 군중을 지지하는 ‘민중의 편’에 섰던 천주교를 초월한 민중의 지도자라는 것도 뉴스를 통해 간간히 듣게 되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선종’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죽음은 ‘전 국민의 슬픔’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비교적 객관적인 ‘김수환 론’은 한글 Wikipedia에 잘 나와있는데, 조금 읽기 거북한 ‘반 김수환 평’이 균형을 맞추려 실렸는데.. 참 비신자도 아니고.. 신앙인을 이끄는 사목자라고 하는  이름도 비꼬인듯한  ‘함세웅‘이란 인간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답답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대적 사상이 인간 기본적인 가치를 넘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시대착오적인 사제가 ‘원로’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사실 철저한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 ‘친전’ 책을 통해서 생생한 그분의 ‘육성’을 대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 추기경 재직의 역사적 의미, 신앙적인 측면, 인간애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비록 철저하게 천주교에 근거한 신앙관, 도덕관, 정치, 세계관으로 삶을 살려고 했지만 그가 산 시대는 그를 만성 불면증으로 시달리게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삶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위에서 본 그의 인간상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는 것이다. copyright에 구애 없이 나는 또 reading by typing으로 나 이외에도 한 사람이라도 더 그의 삶을 보여주고자 이곳에 남겨 두었다. 시간 날 때마다 한 구절 한 단락,한 페이지씩 읽으면 매일 묵상거리로도 좋을 듯 하다.

 

 ¶  Sad Vindication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구역 미사를 보았다.(미사를 ‘보았다’ 라고 하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그렇게들 쓰는 것 같고 영어에서는 미사를 ‘말한다, say mass’ 라고 하니.. 무슨 차이일까?) 우리가 속한 구역은 아틀란타 Metro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주로 Civil war에 관련된) Cobb county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에타 2구역’ 이다. 역사적인 전통은 그렇다지만 사실 살기에 편한 곳이라고 볼 수는 없을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은 ‘덜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다. 다른 쪽으로 말 하면 family를 키우기에는 조금 더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계 사람들에게는 지금은 거의 ‘bedroom community’ 로 ‘전락’한 느낌도 든다.

이곳의 유일한 매력은 아직도 ‘학군’의 가치에 있는 듯하지만 우리는 1992년 이사올 당시 이 지역의 ‘학군’이 그렇게 좋은 것을 모른 채 ‘나의 새 직장의 위치’때문에 이사를 왔었다. 하지만 아틀란타 올림픽 이후 급속도로 증가한 한인들이 99% 우리가 사는 곳의 ‘반대쪽’으로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몇 안 남았던 business를 모두 그곳으로 흡수하게끔 만들어서 지금은  ‘무언가 하려면’ 거의 30 miles drive해서 Korea town으로 가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불편’함은 확실히 있지만.. 그래도 이곳에 살다 보니 ‘지나치게 밀집된 minority들’ 이 없는 이곳의 장점도 적지 않다.

우리는 3년 전부터 내가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 하면서 구역모임에는 거의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실은 항상 우리를 우울하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하면 ‘안 나가는 것이 편하다’라는 사실 하나였다. 우리가 구역모임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2006년경이었고 한 동안은 그런대로 참가를 해서 몇몇 친근한 교우들도 생겼지만.. 차츰 차츰 구역모임의 성질이 변질하는 듯 하더니.. 급기야 이곳 저곳에서 이상한 말들을 들렸다.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지나친 socializing 에는 항상 위험한 요소가 있는 법이다.  특히 순교자 성당에 소속된 한 구역이라는 정체성(과 제한성)을 벗어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솔직히 우리는 그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예를 다른 구역에서 듣기도 했지만 설마 ‘조용하게만 보이는’ 우리구역에서 그런 잡음이 발생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우리의 우려대로 모든 것은 최악의 상태로 치달은 듯 보였고 피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발생한 듯 했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구역미사에 참가를 해서 그 ‘결과’를 우리 눈으로 목격을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항상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안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우리는 vindication이란 말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그것도 때 늦은  sad vindication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였다.

smith press

오늘 나는 작은 ‘금자탑’을 쌓고, 하루 종일 그것을 즐거워하며 자축을 하였다. 작은 금자탑이란 85 파운드 barbell 을 bench press로 30번 들어올리기(30 reps)를 했다는 것인데.. 글쎄.. 이것도 그렇게 자축을 할만한 일일까? 나도 우습지만 사실은 나에게는 심각한 milestone 이 되기에 그렇게 우습지만 도 않은 것이다. 하지만 조금 “미안한” 것은 이것이 비록 bench (chest) press이긴 하지만 ‘free weight’ bench press가 아니고 smith press machine 이라는 사실이다. 흔히들 ‘pure’ bodybuilder들은 free weight가 아닌 것은 ‘사이비’라고 일축해 버린다. 그런 말은 부분적으로 나도 동감 하지만 그들은 주장은 과학적인 근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과학적 연구의 결과는 대부분 smith machine의 효과는 free weight의 95% 에 달해서 사실은 smith machine의 장점을 고려하면 운동하는 환경에 따라서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smith machine은 그 design상, 운동시에 거의 사고로 다칠 염려가 없기에 현재 나와 같은 경우에는 거의 필수적인 것 같다. free weight bench press는 아주 무거운 것을 들 때에는 spotter가 옆에서 지켜 주어야 안전한데 smith press는 그것이 필요가 없기에 나에게는 거의 구세주처럼 느껴진다.

현재 나는 집 근처에 있는 YMCA에 가서 weight lifting을 하고 있는데 이 운동이 나에게는 가장 남자다운 운동같이 느껴지기에 다른 것은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골프, 테니스.. 등등 나이가 들면 거의 고정적으로 하는 운동들이 있지만 나에게 그런 것들은 거의 ‘놀이’ 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나의 생각이 100% 옳은 것이 아닐지라도 나는 그런 ‘놀이’를 배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저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때의 희열’과 그 후에 느껴지는 ‘철철 넘치는 adrenalin’ 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는 오래 전 학교 다닐 시절에 이런 운동에 관심도 없었고 사실 ‘갈비씨 신세’에서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 후, 미국에 오기 바로 전에 친구 이경증과 같이 서울 운동장 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을 하면서 weight training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health club에 가입을 하고 몇 개월 각가지 weight machine 으로 training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나의 몸을 보니 예전과는 아주 다른 ‘근육’이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사실 다시 이런 것을 할 시간적이 여유가 없이 ‘인생열차’에 실려 세월을 보내다가 10여 년 전 온 가족이 ‘가끔’ 다니던 YMCA에서 다시 weight lifting과 ‘재회’를 하였고 조금씩 시작을 했는데 수십 년 전에 해본 그 경험이 무엇인지 거의 큰 무리가 없이 그 무거운 것들을 올릴 수 있는 것을 알고 너무나 신기했다. 특히 ‘고령’화 되는 나이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대부분 친지들은 나이를 의식해서 이런 것은 꿈도 못 꾼다고 해서 나는 그들을 설득, 해명 시키느라 진땀을 뺀다. 물론 그들은 예전에 이런 것들과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믿기에 그들도 지금부터 시작을 해도 큰 무리가 없음을 안다. 급속히 노화되는 근육을 살리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 암만 달리고, 뛰고, 수영하고, 골프를 치고 해도 이런 근육을 살리는 것에는 시간이 너무나 걸리는 것이다.

근육운동의 효과는 ‘건장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이외에도 집안 일을 할 때에도 아주 유효하게 쓰인다. 예를 들면 집을 고친다거나 할 때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하는 일이 많은데.. 이런 근육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 것인가? 나는 이런 것을 대비해서 더욱 더 이런 운동을 하기도 한다. 특히 나이가 들면 점점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슬픈’ 지경에 이를 터인데 그런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게 하는 것은 자기 몸에 ‘근육’을 살려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60 중반을 지나간 내가 느끼는 ‘근육의 중요 함’의 이유가 될 것이다.

Tool Time

드디어 ‘hardware, 쇳덩이’ 들을 조금씩 만지기 시작했다. computer가 세상에 오기 전의 진짜 hardware들, 대부분이 tool, 기계 공구, 연장들.. 요새 나는 이것들과 참 멀리 지냈다. 거의 몇 년이 되어가나? 마지막 본격적으로 이런 것들을 만지며 지내던 때가 2010년 경 flooring work을 할 때였다. 아래층 laminate flooring을 할 때, 앞쪽 문 아래 마루 아래 framing을 termite 와 water damage로 인해 상당한 시간을 들여 고친 것과 ‘시로도’의 기술로 IKEA Tundra 와 싸우며 몇 개월을 보냈던 그 때, 그리고 ‘심심해’ 보이는 조그만 deck에 귀여운 pergola(arbor), picnic bench를 만들어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그러니까 거의 3년의 동면에서 깨어나는 셈이 된다. 움직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거의 4개월 전에 Costco에서 sale로 산 kitchen faucet 의 설치를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염치’가 없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것을 하려니 이런 저런 plumbing tool들이 필요한데.. 이것들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그것들을 찾을 ‘용기’조차 나지를 않다가 이제 ‘대대적’으로 tool ‘cleanup’ time을 선언한 것이다.

나의 tool collection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 ‘대부분’ 인터넷으로 고른 싼 것 중에서 조금은 믿을만한 것들이다. 나의 공구 구입의 첫 번째 우선 순위는 ‘값이 저렴‘해야 한다는 철칙이다. 이것으로 나는 연숙과 항상 말다툼을 하곤 하지만, 서로의 ‘구매 철학’이 다를 뿐이다. 연숙은 조금 더 비싼 것을 사서 ‘안심하고 오래’ 쓰자는 것이고 나는 ‘더 싼 것으로 더 많이’ 사고, 일찍 망가지면 ‘할 수 없다‘는 주의다. 결과적으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펑 펑’ 쓸 돈도 없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나의 구매 철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대신.. 살 때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하는 것이 나에게 준비되어 있다. 철저한 ‘계산’을 하는 것이다. 공구나 기계의 구조나, 내구성 등을 연구하고 사는 것이다. 공구 분야, 특히 ‘미제 공구’는 대부분 프로들을 대상으로 만들었기에 그렇게 비싸고 오래 견디는 것이지만 ‘가끔’ 사용하는 나에게 그것은 사치요 낭비이기도 하다.

빨갱이 짱깨, a.k.a 중공, 지금은 중국’ 이 1980년 이후에 값싼 공구를 만들기 전까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탱크 같은 미제’를 써야 했지만 이제는 나의 수준에 맞는 것들을 골라서 값싸게 사게 되었기에 예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공구들의 맛을 보게도 되었다. 이런 나의 습관은 비록 나의 철학을 만족은 시켰지만, 대신 연숙의 ‘코웃음‘ 을 많이 사기도 했다. 일찍이 망가진 공구들이 꽤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찍 죽는 공구’의 대부분은 사실, 제품의 ‘질’ 때문이라기 보다는 나의 ‘최악’의 after-care 습관 때문임을 나는 잘 안다. 공구들을 쓰고 나서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두곤 했고, 그것들이 일찍 죽게 한 원인이 된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한 주요 원인도 나는 잘 안다. 고된 일이 끝나면 사실 그것들을 다시 ‘정리, 보관’하는 힘이 거의 없기에 그런 것이다. 그것이 프로와 나의 차이였다. 그들은 시간 관리를 잘 하고 훈련이 되어 있어서 문제가 없지만 나는 ‘하고 싶으면 쉬지 않고 하는’ 그런 지독히도 ‘시로도‘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들과 비슷하게 고된 일이 끝나도 모든 기기, 공구들을 잘 보관 정리했었다면 대부분의 Chinese-made공구들.. 훨씬 오래 썼을 것이다.

내가 고된 일이 끝나고 ‘비틀거리며’ 집안으로 기어들어올 때 더 힘든 이유가 나의 습관에도 있지만, 다른 이유는 그 공구, 기재들을 임시로 넣어 둘 open (rain) shelter가 없었기 때문이다. 피곤한 상태에서 그 공구들과 ‘잡동사니’들을 급하게 비를 대비해서 치우는 작업이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든 것이다. 비록 몇 년 전에 만든 shed가 하나 있지만 그것 조차 ‘잡동사니’로 그득 차 있어서 거의 쓸모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tool time을 reboot하는 첩경은 임시로 비를 피할 open shelter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 비가 자주 왔던 올해에는 더 그랬다.

그래서 드디어 손을 털고, ‘공구를 거의 쓰지 않는’ 방식1 으로 이틀 만에 ‘번개처럼’ open shed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급하게 비를 피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작업을 하다가 다른 곳으로 치울 필요도 없는 그런 곳이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서 조금씩 필요한 작업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우선 할 일은 ‘쓰레기’로 가득 찬 ‘진짜’ shed 내에 있는 필요한 ‘값싼’ 공구들을 찾아서 정리하는 일이다. 이것이 다른 project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open shed framing 1open shed: all 2×4 no-cut, screw-only  framing stage #1: 3 posts up

 

open shed framing 2open shed: all 2×4 no-cut, screw-only framing stage #2: 6 posts up

 

open shed framing 3open shed: rafters and roofing trials

 

open shed framing 4Yeah! annoying rain pain no more..

  1. standard lumber, 대부분 2×4 stud, 를 하나도 자르지 않고 screw driver만 사용했다.

Holy Family 40th Anniversary

 

 

Dear Father in Heaven,

As we celebrate the fortie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our parish, we thank you for the gifts that you have given us. Most importantly, thank you for the gift of love that brings so many people from such different backgrounds together as one family.

Please help us to learn by your Son’s example to continue to love and care for one another so that we may grow and welcome others into our Holy Family.

We ask this in Your sweet name,

Amen

 

Holy Family statue
Holy Family statue

오늘 2013년 7월 10일은 우리가족의 제1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가 본당 창립 4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여 저녁에는 ‘성대한’ 기념 미사와 행사가 열린다. 우리 가족이 이 성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제 거의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 집에서 불과 5마일인 관계로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parish가 된다.

원래 거의 30마일 떨어진 도라빌(Doraville) 한국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이 우리의 본당이었지만 1990년대 초에 그곳에서 벌어지고 목격이 된 ‘기가 막히는’ 사건들에 식상을 하고 완전히 주저앉아 (냉담) 버렸다. 그 당시 대신 가까운 미국 본당에라도 나가야 했었지만 최소한 나에겐 그렇게 해야 할 절심함과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애써’ 얻은 신앙을 거의 무시하며 살 태세였고, 속수무책, 수수방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일관하며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지금 생각을 하면, 나와 연숙은 그런 것에서 의견을 달리했고 최소한 영세를 받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돕지도 않았지만, 반대도 안 했다. 완전히 나는 ‘교회 business’에서 손을 땐 듯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연숙이 미국 본당 Holy Family 성당을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위기감을 느낀 연숙이 집 부근을 뒤지며 찾아 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같이 googling의 혜택도 그 때는 기대 못하던 때였으니까…

행동이 빠른 연숙은 곧바로 아이들의 신앙 절차를 ‘최소한’ 빠지지 않게 주말 미사엘 (나를 제외하고) 나가기 시작하고 작은 애 나라니의 첫영성체, 두 아이의 견진성사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 때 나는 ‘돈 버는 가장’의 핑계로 간신히 C&E (Christmas & Easter) 신자로 위태로운 신앙생활로 일관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Holy Family 성당은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나의 ‘완전한 본당’이 되었다. 10년 이상의 냉담을 깨고 그곳에서 Pastor, Father Edward Thein께 고백성사를 보고 최소한 Sunday Catholic 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사실 가족들과 미사를 가더라도 나만 영성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그 때가 참 괴로웠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곳은 명실공히 우리 가족의 ‘안정하고 안전한’ 신앙의 피난처가 되어갔다. 덕분에 영어미사와 미국인 미사 문화도 많이 익숙하게 되고 미국 천주교와 그 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서 나는 더욱 자신을 가지고 ‘진짜 본당’인 한국 순교자 성당으로 조금씩 더 관심을 두고 그곳으로 향한 먼 여정의 길을 2011년 가을 그곳 소속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함으로써 디디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미국본당에서 여러 해 받은 경험들이 씨앗이 되었다.

미국 천주교가 지금 경험하고 겪고 있는 시련들, 이곳에서 고스란히 보고 느낀다. 유럽계 가톨릭 세력의 수축과 히스패닉 계열의 급 성장, 아시아 계의 ‘가톨릭 역수출’ 등등으로 사실 미국 천주교의 입장은 무슨 큰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빨리 오는 듯 하다. 특히 연방정부의 급속한 교회간섭 정책, 대법원의 동성결혼 ‘묵인’ 등은 1970년대 초의 낙태 합법판결의 파장을 훨씬 웃도는 그런 위기감을 주고 있어서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앞으로의 사목정책의 중요성은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나와 연숙은 작년 사순절을 계기로 이곳 미국본당의 ‘매일 미사’를 참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일년이 훨씬 넘게 실행하고 있다. 암만 생각해도 이 ‘쾌거’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 졌는가.. 암만 생각해도 나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저, 안 보이는 ‘힘과 손’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설명만 되 뇌일 수 있을 뿐이다.

Holy Family 성당과 사제관
Holy Family 성당(left)과 사제관

이곳 미국 본당도 미국 천주교를 반영하듯 Irish, Polish로 대표되는 ‘급속히 쇠퇴하는’ 유럽계 가톨릭은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새로운 ‘피’는 역시 ‘다른 곳: 히스패닉, 브라질’로 대표되는 중남미계열과 열기가 느껴지는 아프리카 대륙, 뜻밖의 복병 아시아의 월남(베트남), 필리핀, 한국의 신자들이 그 고령화를 상쇄하듯 메우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white-power가 이곳에서도 역시 퇴조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미사를 가는 덕분에 이곳의 regulars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정신자들, 열심한 신자들인 것이다. 역시 여자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이것은 절대로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신자의 숫자 (남자에 비해서)에 나는 처음엔 ‘그게 정상이다’라고 일축했지만 지금은 사실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보기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자랑스럽던 남성 동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생명의 불멸성을 이미 알고 태어났단 말인가?

 우리가족은 비록 이렇게 두 본당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형태의 신앙생활 그 나름대로 장점과 특징도 없지 않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많은 가톨릭 한인신자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많을 듯 하다. 20여 년 전에 유일한 한인공동체였던 순교자 성당이 ‘90% 이상 망가졌을 때’, 우리는 choice가 별로 없었다. 계속 나갈 것인가.. 아니면 냉담을 할 것인가..

나와 같이 간이 큰지 못한 인간들은 가장 쉬운 방법, 냉담을 택했을 것이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택했다. ‘분열’의 참담한 파괴 성을 그때 절감을 했지만, 나의 평화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그때 backup shelter(다른 본당)가 있었으면 100% 냉담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다 역사가 되었다.

 Holy Family 성당은 현재 우리가 사는 East Cobb county에 많은 ‘비교적 안정된’ 한인들의 비공식 피난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30분 drive거리에 있는 한인 순교자 성당이 조금 멀다 싶으면 10분 거리의 이곳이 항상 우리를 맞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사람들도 익숙해지고, 정도 많이 들었다. 고정적(regular)인 한인 교우들, 물론 여기도 대부분 젊은 자매님들이지만 그들과도 많이 얼굴도 익숙해져서 진정한 ‘영혼의 고향’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혹시라도 안 보이는 얼굴이 있으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와 연숙에게 이 Holy Family CC는 신앙의 징검다리 역할을 많이 해주었고, 계속 해 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우리가 도라빌 한인 순교자 성당에 더 많이 개입이 되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것은 정말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기에 더욱 ‘맡기고’ 살기로 했다.

끈적거리는 2013년 6월 말에..

¶  이런 끈적이는 여름이면  ‘철 없던, 무언가 세상을 잘 모르던’ 대학시절의 장마가 한창이던 때, 세월이 무한정 길다고 느끼던 시절, 시원한 장판에 대짜로 누워서 즐겨 듣던 Johnny RiversSummer Rain이 생각나고, Nancy Sinatra, Lee Hazlewood의 classic oldie ‘Summer Wine‘도 함께 그립다.

그 때는 1968~9년 경 여름,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경부고속 도로를 비롯해서 대한민국의 부동산 전체가 파헤쳐지기 시작되던, 박정희 ‘민간’ 정부의 경제부흥의 소음이 요란 한 시절, 삼선개헌 반대 대모를 핑계로 학기말 시험을 피하고 산 속으로 도피하던.. 그런 여름이 생각난다. 나는 역시 지금의 나이대로 new normal 보다는 old normal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Good ‘Ole‘ Days.. 가 그리운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과연 진화, 진보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퇴보를 하는 것일까..정말 모르겠다.

 

Johnny Rivers, Summer Rain 1968

 

Nancy Sinatra, Lee Hazlewood, Summer Wine, 1968

 

¶  어제 밤 잠깐 어떤 email을 잠깐 보니supreme court same-sex 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고, 불현듯 역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news blackout을 속으로 선언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실수’로 그것을 더 자세히 읽는 짓을 해 버렸다. 솔직히 나는 이런 류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심지어 배까지 불편하고 더 나아가면 토하고 싶은 심정까지 된다. 그러니까 나는 바로 homophobia인지도 모른다.

나의 물음은 참 간단하다. 어떻게 여자가 여자와 ‘결혼’을 하고,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간단한 질문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들은 정자와 정자로, 난자와 난자로 아이를 갖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진 동물들인가?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심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숨어살았던 그들.. 이유가 있어서 숨어 살았지만, 그 이유는 이렇게 너무나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해괴한 변태적 동물집단’이라면 어떨까? 그들이 우리들의 피땀 어린 세금으로 혜택을 받겠다니, 나의 심정은 이제 동정심에서 증오심으로 변하고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낯짝을 가졌기에 그렇게도 철면피 같을까?

이것을 종교로 연관을 시키는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point를 잊고 있다. 이것은 신앙, 종교, 교회와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이다. 법 중의 법, 헌법과도 같은 정상적인 인간이면 가지고 태어났을 기본중의 기본적인 도덕률이기에 사실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자명한 사실’을 무슨 이유로 헌법 조항에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법 조문에 없으면’ 어떤 수단으로라도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바꿀 수 있는 최근의 시대 조류.. new normal들이 속출을 하는 초현대 인간들.. 그래서 그래서 절대 불변, 법이 필요 없는 ‘진리 중의 진리’를 찾는 신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일까? 너무나 끈적거리는 6월 말, 아침부터 나의 어깨는 쳐지기만 한다. 이럴 때 시원한, 가슴이 열리고 피부가 뽀송뽀송해지는 마른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올까?

 

Jackie, a handsome dog
Jackie, a handsome dog

¶  Jackie,  어떤 handsome한 개, 내가 부르는 이름이다. 얼마 전 우리 동네를 배회하던 이 Jackie는 6월 동안 나의 머리 속에 있었다. 하도 답답해서 주변의 보는 사람에게 이야기도 하며 마음을 달랬지만, 이 개가 혹시 잘못 될까 봐 하는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네를 걸을 때마다 보게 되어서 어떨 때는 걷는 것도 피하곤 했다. 비가 오면 비 맞는 모습을 그리며 걱정이 되었고 해가 쨍쨍하면 어떤 집 그늘에서 더위를 식힐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저 어떤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이 나의 제일 큰 희망이었다. 최후의 사태에는 내가 데려올 생각도 서서히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다시 Jackie를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 동안 자주 보이던 집의 길 건너편 Johnson부부의 집 앞 잔디에 있었다. 반가워서 눈을 마주치니 Jackie도 그런 표정이었는데, 의외로 모습이 ‘건강’하게 보였다. 그런 모습을 간직하며 그 옆에 있는 playground에서 살펴보니 이번에는 Johnson씨가 나와서 잔디를 깎기 시작했는데, 그때 Jackie와 Johnson씨의 행동이.. 서로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이것은 사실 뜻밖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Jackie가 Johnson씨의 개? 하지만 dog tag, collar같은 것이 없지 않았는가? 그래도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분명히 Johnson씨가 최소한 돌보아 주고 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제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제 연숙과 집에 들어오다가 혹시나 해서 차로 동네를 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Jackie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Jackie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 같은 동네, 우리 집 뒤쪽에 우리보다 더 오래 사시는 한인교포 방선생님이 산책하는 것을 보고 차를 세우고 염치불구하고 Jackie에 대해서 묻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나.. 하시더니 나중에 혹시 Johnson네 집에서 ‘돌보아 주는 ‘개 아니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추리는 맞았다. 역시 stray dog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Johnson씨네 집에서 밥을 주고 돌보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adopt는 안 한 듯 했다. 이것은 정말 정말 반가운 소식이어서 연숙과 나는 너무나 안심을 하게 되었다. 최소한 Jackie는 현재 shelter가 있는 셈이 아닌가?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adopt할 가능성도 높을 것이라 짐작이 들었다. 그 후 Jackie가 배회하던 Johnson집 주변에서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완전히 집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혹시 animal shelter로 보내진 것일까? 나의 걱정과 관심은 아직도 끊이질 않는다.

 

Jackie Update: Happy Note

Jackie에 대한 나의 ‘필요 이상의 걱정’은 전염성이 있었는지 주변에도 알려지고 특히 연숙이 제일 관심을 갖는 듯 했다. 내가 그런 ‘측은지심’이 결여된, 아니면 최소한 그런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을 해 왔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거의 ‘이상할 정도로’ 내가 걱정을 하니까 조금은 재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big news가 있다고 소란을 떨면서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얼마간 보이지 않았던 Jackie가 Mr. Johnson과 같이 동네를 걷고 있었다는 목격담이었다.

Mr. Johnson은 원래 자기의 개가 있어서 그 개는 leash에 끌고, Jackie는 그 옆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할 바를 몰랐다. 결국은 Mr. Johnson이 adopt를 한 것일까.. 최소한 그 집에서 키운다고 결론을 내리고.. 긴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animal control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 Johnson은 내가 결여되었던 ‘측은지심’이 있었나 보다.

20 years ago, Storm of the Century

Storm of the Century최근에 ‘요상한 기후’에   대해서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문득 storm of the century란 것을 기억했다. 일명 super storm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였나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치매 예방’ 기억력 test였다. 나에게 제일 알쏭달쏭한 것이 지나간 10년에서 20년 전 일들의 기억이다. 각가지 연상technique를 동원해서 아마도 1992년에서 1994년 사이일 것이라고 일단 결말을 지었다. 그 super storm이 온 것이 3월 이때 쯤인 것도 기억했다.

문제는 100% 자세한 것이 어떤 것일까.. 1992년은 우리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온 해였고, 장모님과 나의 절친한 친구, 지금은 타계해서 없는 김호룡 식구가 거의 같은 때에 우리 집에 온 해이기도 했다. 1992년 3월 1일에 이사를 왔는데, 곧 이어서 이 super storm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1994년을 생각해보니 여름에 누님의 아들, 준형이가 다녀갔던 것 이외에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결국은 1993년임을 알았다.

나의 제일 큰 문제는 이 1990년대의 기억이 제일 희미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억해내기 싫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아닐까도 생각을 했다. 그만큼 큰 기쁨이나 즐거움, 그렇다고 특별한 괴로움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세파’속에 휩쓸려 간 듯한 그런 10년간인 듯한 느낌인 것이다.

고국이나 이곳이나 그 나이쯤이면 ‘샐라리맨’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런 생활을 많이 보내니까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기후에 관한 사건들은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때에는 VCR, video (cassette) recorder가 한창 유행할 때여서 그런 것들의 기록도 남아있어서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것은 1993년 3월 13일, 토요일의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기예보는 그렇게 ‘자신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 미리 커다란 ‘경고, 경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생각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얼어붙는 눈보라’ 에 그냥 당한 것이다. 다행히 토요일 아침이라 교통에 관한 문제는 별로 없었다. 그냥 퍼 붙는 눈보라를 집에 틀어 박혀서 ‘즐긴’ 것이다. 그 전날만 해도 봄 같은 포근한 날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을까? 예보, 경보도 그렇게 없이..

하루 종일 강풍과 함께 쏟아진 얼어붙는 눈에 나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전기도 나가기 시작하고.. 길은 완전히 얼어붙고.. 이곳 지역은 완전한 시베리아를 연상하는 광경으로 변했다. 다행히 우리 집의 전기는 나가지 않아서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덩치가 큰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우리 집 drive-way를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나중에 차가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무슨 요란한 소리가 나서 밖을 보니 남자 몇 명이 power chainsaw로 우리 집의 쓰러진 소나무를 잘라서 치워주고 있었다. 동네에 사는 ‘마음 좋은 아저씨’들이었다. 동네를 돌면서 우선 급한 것들을 치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TV 뉴스에서는 이번의 snow storm은 ‘아마도’ super storm, storm of the century정도로 monster 급이라고 했다. 멕시코 만에서 시작된 사상 최저기록의 저기압과 북쪽에서 하강한 cold front가 ‘완전히’ 결합이 된 그야말로 perfect storm이었다. 결국은 이 system은 우리가 사는 Georgia를 거쳐서 northeast의 덩치 큰 도시들로 갔고 그곳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것으로 느껴졌지만, 200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때의 것은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점점 더 큰 monster storm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찍어둔 video tape을 본다. 그러니까 정확히 20년 전 우리 집 주변이 남아있고, 그 눈 속에서 ‘신나게’ 놀던 우리 집 두 아이들.. Wisconsin에서 이사온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라 그 추운 곳에서 타던 ‘썰매’와 겨울 옷들을 다시 꺼내어서 아주 요긴하게 쓰기도 했다.

큰 애 새로니는 Ohio와 Wisconsin에 살 때 경험했던 눈과 얼음으로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겠지만 작은 애 나라니는 거의 기억이 나지를 않는지 신기하게 눈과 얼음을 바라보며 썰매를 탔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젊었던 45세.. 와.. 정말 젊었다.. 피곤을 모르며 직장생활(‘embedded software’ engineer at Automated Logic Co)을 했고, 연숙은 home-based business, housewife, mom, PTA등으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신앙적으로는, 유일했던 한국본당에 ‘대 파란’이 나던 때여서 아마도 그 근처에 가지도 않던 ‘신앙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는 Internet이란 것이 아주 미미하게 보급이 되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는 것 같은 graphical web browser가 없어서 일반인에게는 그런 것은 ‘학교에서만 쓰는’ 그림의 떡이었다. Email은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만 쓸 정도고, PC 는 Microsoft Windows 95 전의, 조금은 원시적이었던 Windows 3.x이 전부였고, 지금 쓰는 cellular mobile phone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틀란타 올림픽이 열리기 3년 전이었던 그 당시 이곳에 한인의 인구는 현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참 변한 것이 많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이 내가 40대에서 60대가 되었다는 ‘자명한’ 사실.. 어떻게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가 충격으로 느껴지는가.. 그것은 생생하게 뇌리에 남은 20년 전 1993년 3월 13일을 회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Spring rain, soaker..

Atlanta metro soaking rain
Atlanta metro soaking rain

간밤에 근래에 듣기 힘들었던 소리를 들었다. 폭우.. 쏟아지는 물.. 잔잔하게 계속 내리는 비, 어둠 속에서도 봄비의 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끈끈하게 느껴지기만 하고 실제로 내리지 않는 비를 기다리던 날들이 얼마나 되었던가.. 초봄에 시작된 우리 집 연숙의 자랑인 텃밭의 풍작도, 이 단비를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던가?

그것이 어제부터 낌새가 봄비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기가 막히게도 피해가더니 결국은 아틀란타 메트로 지역전체를 휘감고 ‘물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단맛의 냄새를 내는 봄비였다. 이것을 한참 잊고 살았다.

 이 글의 아래 실려있는 youtube video, Spring Rain은 아주 오래 전 작을 딸애, 나라니, Veronica가 어렸을 때, Father’s Day때 나에게 선물로 준 sleep music series 의 하나인 audio cassette tape을 나의 없는 실력을 총동원해서 music video로 바꾸어 youtube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곳의 image들을 모두 google image에서 실례를 한 것이고, Windows의 ‘공짜 프로그램’인 MovieMaker를 사용했다.

원래의 테입이 양면 (A와 B)으로 되어있어서 한 면씩 따로 copy를 해서 part 1과 part 2로 올려 놓았다. 이 ‘소리’의 특징은 자연적인 빗소리와 그에 걸 맞는 instrumental music을 절묘하게 섞어 놓아서 그야말로 sleep music 이름대로, 눈을 감고 이것을 들으면 촉촉히 대지를 적시는 봄비소리를 생각하며 잠을 잘 수도 있다.

오늘 New York Times의 기사에, 어떤 여론, 설문조사에 대한 것이 실렸다. 일반인들이 느끼는 기후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조금 느낌이 새로운 것이, 자연 현상에 대한 여론조사? 이런 것도 있었나.. 하는 느낌이었다. 자연현상은 100% 객관적, 과학적인 것이 아니던가.. 이것도 사람들이 느끼는 ‘주관적’인 것이 상관이 되는가? 이 세계적 기후변화는 이제 과학적,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거의 ‘주관적, 정치적’인 화제로 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특히 ‘병신같은 무지랭이‘ 일부 미국인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을 한다. 과학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종교적인 것을 ‘거의’ 혼동하는 이 ‘병신같은 무지랭이, 일부 미국인 들’.. 완전한 희극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런대로 배웠다는 정치인 중에도 이런 부류들이 섞여있다. 그들의 출신지역의 ‘병신같은 유권자‘를 의식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작년에 그들이 실제로 보고, 느끼고, 겪었던 extreme weather로 조금 기세가 꺾인 것이 이번 여론,설문조사에서 들어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이제는 기후,기상 system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정말, 이런 한심하고 우매한 ‘병신’들이여..극소수의 ‘목소리가 큰’ 기상 과학자들.. 그들은 이제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종교와 과학의 회색지대에 살고 있는 이들은 정말 위험한 부류의 인간들이고, 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종교철학에 오명을 남기고 있는 ‘배반자’이라는 생각이 든다.

 

 
Spring rain, soothing sound of refreshing rain! 

 

Spring rain at our backyard

너무나 멋진 봄비가 뒷뜰에 내린다

아이 트리플 이, 스펙트럼

¶  아이-트리플-이 스펙트럼.. 이것은 IEEE Spectrum의 한글 표기이다. 여기의 IEEE는 미국에 본부를 둔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전기,전자공학도 학회를 뜻하는, 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의 약자이고 읽을 때는 대부분이 I triple-Eee로 말한다. 이곳에는 아주 많은 세분된 학회들이 모여있는데, 물론 전기,전자공학에 관련된 것 들이다. 이 학회의 ‘간판’ 격 회지의 이름이 바로 Spectrum magazine이다.

이 학회에 가입을 하면 (년 회비를 내면), 이 ‘잡지’는 무조건 받게 되고 분과 학회에 가입된 곳의 회보(주로 논문집)를 따로 받는다. 나는 이곳에서 학교에 다닐 때 거의 ‘자동적’으로 학생회원으로 가입을 했다가 졸업을 하면서 일반회원으로 남게 되었는데, 거의 10+년 전부터 이곳에서 나오게 되었다. 상당히 비싼 연회비로 그렇고,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 (embedded systems)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나오게 되면서 그리 아쉬운 것을 못 느꼈지만, 단 한가지.. 이 간판 격 월간지 Spectrum magazine만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이 월보는 상당히 그때그때의 인기를 끄는 기사들을 아주 ‘쉽게’ (일부러 ‘수학’ 공식을 피한 듯한) 계제하곤 해서 ‘누워서 편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오랜 세월을 잊고 살다가, 며칠 전 정말 우연히 이곳을 website에서 보게 되었고, 정말 고향을 찾은 기분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다시 회원으로 가입을 하지 않고, 아주 질 높은 technology, 특히 consumer electronics에 관련된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이곳이 ‘무료’일지는 모르겠지만 (New York Times처럼), Google처럼 우리 같은 99%를 조금 더 생각해 주는 그런 ‘자선’적인 자세로 일관하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ieee-spectrum

IEEE Spectrum mag site

¶  20년 전통의 Nativity scene:  우리가 사는 subdivision에 이사온 지도 내년 3월이면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도 거의 다 자란 셈이고 우리도 늙은 청춘을 다 보낸 느낌이다. 별로 크지 않은 곳이라 사실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대개 알 정도가 되었고, 우리는 이제 ‘고참’ 축에 속하는 집이 되었다.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낸 지도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그때마다 20년 동안 변함없이 앞 뜰에다가 아기예수님 태어나신 모습으로 장식을 한 집이 있었다. 물론 독실한 크리스천 일 것이고, 걷다가 인사도 자주하는데, 내가 놀라는 것은 어쩌면 20년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똑같은’ 장식을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없어지는 날은 우리 동네의 큰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20 years of Nativity

2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예수탄생 전시

 

¶  Wordle: 워들?  아마도 word riddle을 줄인 말이 아닐까? 이 site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이것은 blog site에서 많이 쓰이는 에 많이 쓰이는 computer software인데, 쓰이는 빈도에 비례해서 글자, 단어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어떤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오는데, 문제는 아직까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IBM에 근무를 하며, 여가시간에 이것을 만든 모양인데, 아깝게도 이것은 open source  software가 아니고 IBM에 그 copyright가 있어서, 한글용으로 바꾸거나, 한글 기능을 첨가하는 것이 쉽지 않을 듯하다.

My current interests in Wordle

My current interests in Wordle

 

Christmas tree, 2011

Christmas tree & lighting, finally:   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성탄 일주일 전에는 집 안에 무언가가 반짝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까지는 우리 집 de-facto Christmas-tree-in-chief인 작은 딸이 자진해서, 도맡아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더니, 역시 세월이 흘렀는가.. 부모 집에서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올해는 우리보고 하란다. 큰 딸애는 이런 것에 원래 재주도 없고, 흥미도 없어서 며칠 후에 집에 온다고 해도 할 가망성이 없어서 오늘 우리들이 손수 하게 된 것이다.

Living Room Christmas tree, 2011
2011년 성탄절을 기다리며..

이런 크리스마스 decoration들은 일찍 할수록 노력의 대가를 더 오래 즐길 수 있다. 10년 전만 해도 ‘젊은 혈기’로 사다리까지 동원해서 2층 지붕의 처마를 따라서 icicle(고드름) lights를 달기도 했는데, 그것은 꼬박 반나절이나 걸리는 대 작업이었고, 지금은 사실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하도 주위에서 높은 사다리를 조심하라는 얘기도 그렇고 사실 사다리 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죽은 case도 가까이서 들어서 내가 하고 싶어도 걱정하는 식구 때문에 더 엄두가 나지를 않는 것이다. 이런 ‘겁쟁이 심리’도 나이를 먹는 curse중에 하나일 것이다.

사실 이런 가시적인 장식들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너무나 ‘귀찮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별로 느낌이 좋지 않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극과 극’이라고나 할까, 성탄 다음날만 되면 하루아침에 몇 주간의 들떴던 기분이 땅에 꺼지듯 하는 그런 것, 나는 참 싫었다.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아서 그럴까.. 그런 ‘세속적’으로 들뜬 기분들의 <시한부 운명>을 미리 알기에 싫은 것이다.

나이에 의한 축적된 기억과 경험들의 장난일까? 이런 것들에 대한 처방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며 가급적 조용히 지내는 것이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이제 성탄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에 조금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쉬워지고 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얽인 지난 간 추억을 추적해 보는 것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큰 즐거움이 되어감을 느낀다.

 

Halloween, 2011

작은 딸, Vonnie(나라니)의 pumpkin art, 2011
작은 딸, Vonnie(나라니)의 pumpkin art, 2011

날자는 흘러 흘러 어느덧 그날이 되었다. 벌써 10월의 마지막 날.. 할로윈, 사실 이날이 이곳에선 ‘진짜 가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모든 ‘식물’들이 진한 색깔로 ‘갑자기’ 변하기 때문이다. 할로윈의 상징은 pumpkin(황금색 동그란 호박) 색갈이고 가을을 대표하는 색이고, 이맘 때면 이곳, 저곳 할 것 없이 모두 이 색으로 뒤 덥힌다. 그 옛날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사실 이날은 완전히 ‘아이들’의 날이었다. 옛날 대한민국의 어린이날 같다고나 할까.. 그것이 천천히 상업화 되어가더니 지금은 어른들이 더 즐기는 듯 하다. 그래서 이날에 쓰는 돈의 액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우리 집은 아이들이 아이들이었을 때는 신경을 써서 준비를 해서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추억을 남기려고 애를 썼는데,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나니 이제는 남들이 즐기는 것을 보는 것이 거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trick-or-treating하러 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어서 candy종류를 올해도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 이 동네는 그런대로 꾸준히 아이들 있는 ‘정상적인 가정’이 아직도 꽤 많이 살고 있어서 어찌 보면 이렇게 찾아주는 아이들이 고맙게도 느껴진다. 옆집의 David (Rhodes)은 40대의 비교적 젊은 아빠여서 완전히 아이들과 어울려서 집 문 앞에 진을 치고 앉아서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올해는 어쩔까 모르겠다. 이제는 고국의 추석보다 이것에 더 정이 들었음을 느끼고, 참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스티브, 2구역

Steve Jobs의 죽음으로 온통 media들이 떠들썩하다. 절대적으로 예상했던 현상이다. 나와 같은 computer engineer의 배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장을 거의 혼자서 개척한 그는 다른 종류의 visionary 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남보다 조금은 잘 사는’ 대중, 특히 journalist, artist, technology-challenged 들을 휘어잡았고, 그들은 완전히 그에게 팔렸다. 절대적인 100%의 자기만의 제품, 시장의 control을 고집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닫힌’ 제품, 완전히 소비자를 control할 수 있는 제품, 그 결과로 완전히 ‘이득’을 control할 수 있는 제품.. 조금만 흉내를 내도 소송 협박을 일삼는.. 나의 Open System철학과 지구 반대 쪽에 위치한 지독히 이기적인 철학의 화신.. 하지만 같은 computer engineer, 그것도 70년대의 microprocessor revolution의 시작을 같이 경험한 ‘한 인간’ 으로서, 60세도 못 채우고 타계한 그를 마음 속 깊이 애도하고 싶다. RIP:  Rest In Peace, Steve Jobs

 

가까이서 본 본당신부님, 하태수 예수회 신부님: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마리에타 2구역 미사가 있었다. 꽤 오래 되어서 지난 번에는 어디서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처음으로, 새로 부임하신 본당 주임신부 하태수 미카엘 예수회 신부님을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가까이 뵐 기회가 되었다. 그것도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한마디로, 멀리서 엄숙한 분위기에서 본 것과 꽤 다른 느낌을 받음을 느낀다. 그러니까 첫 인상은 별로인데 점점 알게 되면서 좋아지는,그런 타입이라고나 할까. 권위적인 냄새가 별로 없고, 술도 적당히, 말씀도 적당히, 무리가 별로 없다.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까? 남의 말을 잘 들으시고, 그에 대해 맞는 말씀을 하시고.. 그것으로 나는 우선 만족이다. 모였던 다른 형제,자매들도 나와 비슷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구역 자매, 형제들 반갑다. 특히 ‘젊고 예쁜’ 자매님들, 보기만 해도 즐겁다. 그렇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우리 구역모임 때, 꽤 자주 듣게 되는 ‘과학적’ 호교론(apologetics) 같은, 해괴한 얘기가 듣기 싫어서 빠지곤 했다. 내 머리로는 왜 그런 ‘상황에 맞지 않는’ 얘기’를 그곳에서 장시간 들어야 하는지를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안 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의 신앙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빠지고 보니 역시 다른 이웃들과의 친교를 하는데 어려움도 없지 않았는데 이것은 가까운 곳에서 ‘전교’를 해야 하는 레지오의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이것은 나와 연숙이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Catholic Sunday, etc..

WYD: Word Youth Day 2011, Madrid, Spain, 일요일 아침, 근처에 있는 ‘미국 본당(Holy Family CC)’ 주일미사를 가기 전에 잠깐 뉴스를 봤더니, WYD(World Youth Day: 세계청년대회, 스페인 마드리드)의 토요일 밤 vigil mass중에 찌는 듯이 더운 날씨가 돌변을 해서 천둥과 벼락, 폭우가 쏟아 졌다고.. 며칠 전에 미국 Indianapolis, Indiana에서 열린 커다란 야외 집회 중에 갑자기 몰아친 돌풍으로, 높이 세운 구조물(scaffoldings)이 쓰러져서 다수의 사망자 까지 나왔던 일이 생각이 났다. 미사 후에 집에 돌아와 자세히 읽어보니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이것이야 말로 Thank God..이라고 해야 할까.

이 뉴스는 사실 ‘세속적’인 뉴스 채널을 통해서 보았다. 이런 곳에서는 어떻게 이번 행사를 보며, 느낄까 궁금하기도 해서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교황이 가는 곳은 이들 세속적인 뉴스 매체가 꼭 관심을 갖고 따라다닌다’ 라는 사실이다. 역시 바티칸은 ‘정치적’인 위치도 잃지 않고 있다. 그만큼 교황의 ‘말씀’은 아직도 ‘세계적’으로 영향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알게 된 것은 ‘보수적인 추측’ 으로 예상했던 참가한 젊은이들의 숫자가 50만 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거의 100만 명이라는 사실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대단한 숫자가 아닐까? 정말 정말 대단하다. 이들은 역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영향을 듬뿍 받은 젊은 세대인 것이고, 다시 한번 그분의 ‘선견지명’에 놀랄 뿐이다. 이 백만 여명의 젊은 ‘세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그 주변을 바꾸어 놓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 세상에는 ‘희망’이 있어 보인다. 다음의 이 대회는 2년 후인 2013년 Rio de Janeiro, Brazil에서 열린다고 발표가 되었다. 3년 후인 2014년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그 해에 그 곳에서는 4년 마다 열리는 세계인의 대 축제, World Cup Soccer가 열려서 부득이 일년을 앞 당긴 모양이다. 다시 ‘흑자, 호경기 재정’으로 돌아선 브라질은 이래 저래 좋은 소식만 가득하게 되었다… 부럽다.. 그들이..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

성인: 맥시밀리안 콜베 (Maximilian Kolbe),  오늘 주일 미사는 대학의 catholic center(보통은 Newman Center:대학 내 가톨릭 공소, 라고 함)의 신부님께서 방문자의 자격으로 집전을 하셨다. 갑자기 ‘젊은’ 공기가 성전을 가득 찬 기분이었다. 우선 말씀의 ‘속도’가 엄청나게 젊었다.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다음 젊은 목소리, 그것도 에너지가 충만하고, 한 단어 단어가 뚜렷이 구별되는 확실한 영어.. 이것도 새로웠다. 아마도 모두들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이맘때면 ‘휴가 차’ 그의 고향인 Dublin, Ireland에 가신다. 가셔서 ‘공개적’인 안부 엽서까지 주보에 실렸다.

오늘 방문 신부님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의 축일이 지난 8월 14일이었음을 상기하고, 그 성인의 ‘유적지’를 찾아 본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유적지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2차 대전 당시 그’죽음 공장’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나치 집단수용소. 어찌 이 이름을 잊으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멋도 모르고’ 그 당시 나왔던 기록 영화 ‘(히틀러의) 나의 투쟁‘ 을 보고 처음 그곳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영화가 ‘학생입장 대환영’ 이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역사, 교훈적일지는 몰라도 준비가 덜 된 ‘아이들’에게 그런 ‘시각적으로 끔찍한’ 것은 너무나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이 나이에서 그것을 다시 보라고 해도 망설여질 정도인데.. 어떻게 어린 중학생들에게 그것을 보게 했을까? 공상영화였다고 해도 충격적인데 그것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얼마 전에 벌어진 전쟁 범죄’였다는 사실.. 그 당시에도 믿어지질 않았다. 그 희생자 중에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도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기차로 도착을 하면서, 그 옆 철길에는 아직도 집단 학살될 유대인 가족들이 도착하는 ‘짐짝 기차’가 그대로 ‘전시’ 되어 있음을 보고 생각하셨단다.. 화장실, 좌석, 아무것도 없는 화물열차로 도착하던 그 불쌍한 가족집단들.. 어린이들의 울음소리..그것도 역시 another Kafka moment 였을 것이다. 역사가 어떻게 비틀어지면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들이 일어났을까? 천 년 전의 ‘우매, 잔인한’ 몽골전쟁이 아닌 바로 70년 전의 ‘생생한,역사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전쟁 중에..

맥시밀리안 성인의 이야기는 얼마 전 우연히 역시 연숙의 책 중에서 잠깐 본 것이었다. Boniface Hanley 저, Ten Christians이라는 책이었다. 이 10명의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의 삶을 살려고 발버둥쳤고, 결국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현재를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준 그런 분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도 있고, 그 반대로 전혀 알려지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우리 인생의 선생님’으로 사신 분들인 것이다. 그 중에 맥시밀리안 콜베 ‘성인’은 ‘현대적 순교’를 하심으로써 기독교 사랑의 극치를 가르치신 case다.

프란치스코회의 신부였던 그는 수용소에서 짐승 같이 날뛰던 SS들 (비밀경찰)에 의해서 약물로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죄는 탈출한 동료들 대신 보복적으로 뽑혀서 죽게 될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살리고 대신 그 자리를 맡아서 ‘굶어 죽는 형벌’을 자청한 것이다. 대부분 일 주일 후에 굶어 죽었지만 그는 3주를 더 버티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나치SS는 약물로 그를 죽인 것이다. 그 때문에 살아나게 된 운 좋은 ‘죄수’는 그의 남은 여생을 끝까지 살게 되었다.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끝까지 비판하며 천국으로 가신 이 성인은 정말 지금에도 거룩한 인생의 선생님이시다.

 

아틀란타 한국성당, 완전히 분가, 그 동안 아틀란타 한인 천주교 공동체의 숙원이었던 ‘또 하나의 다른 성전’의 꿈이 이제 완전히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노력 끝에 이번에 임기를 마치고 떠나신 안정호 이시도리 신부님의 ‘단행’으로 결말을 본 것이다. 시기적으로 좀 늦은 감도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늘어나는 천주교 신자, 예비자들을 적절히 수용할 기회를 놓쳤다는 평도 있었다. 기존의 한인타운의 한 중심에서 그 역할을 100% 수행했던 구 성전이 이제는 조금씩 불편하게 느껴졌던 차에 조금은 활짝 넓은 공간에 새로운 성전이 마련 된 것이다.

새 성전은 사실 제2의 한인타운이 되어가는 동북부 교외지역(Duluth, Suwanee)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쪽으로 새로 유입하는 ‘은퇴세대’ (주로 뉴욕지역으로부터) 를 중심으로 ‘졸부 급’의 신흥 ‘벼락부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경제적, 연령적으로 보아도 아주 안정된 여건을 갖추고 있다. 물론 그런 여건이 ‘신심적’으로 활발할 지는 확실치 않지만..

덕분에 기존 성전은 조금 여건이 나아질 것으로 짐작이 된다. 신자수가 그 만큼 (약 200~300명?) 정도 여유가 생기니까, service나 사목 활동에도 조금 기를 펴고 여유가 생길 것이다. 한가지 문제점은 여러 가지 신심단체들이 거의 ‘강제적’으로 분할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혜를 가지고 해결을 할 문제이다. 내가 속한 레지오 도 2명 정도가 (그것도, 단장, 부단장) 그쪽 지역에 속해 있어서 조금은 염려가 되기도 한다.물론 주일 미사는 새 성전으로 가고 신심단체는 바꾸지 않아도 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Bozos from Marietta Power

It was so amazing, hilarious, then frustrating and finally angry. Yesterday, while driving home with Yonsook from Tuesday regular Legio meeting at the church, Janet called the power went out at home around 2 pm. Probably another Rosewell road widening construction disrupted neighborhood power, we guessed it would last a hour again. My concern was more with home-servers than usual inconvenience. Thanks to the a bit cooler weather, a/c was not the primary concern this time.

Arriving at near our garage drive way, though, we found a few Marietta Power crew were working at the ‘box’ (transformer). That’s was the reason! They apparently did bother to give us any advance notice, which is probably ok if they figured, or estimated the outage would be reasonably short. One of the crew even let us know it would be around 20~25 minute thing. I thanked them for letting us know even now.

Now, hot afternoon made us very uncomfortable inside the house, but their 20 minute thingy becomes almost 4 hours now.. hmmm.. What’s going on? Looking outside.. well.. it’s quiet.. they’re gone! The day’s work apparently was done. Checking my next neighbor’s a/c units.. they’re humming very nicely! What’s happened? Only my house was without power still yet! Now, I am almost certain those bozos were so eager to call it day, headed home for dinner without turning power switch back on only for our house! This was almost like another small Kafka moment for the day (among others). Called ‘amazing’ Marietta Power, only recorded message welcome their ‘frustrated’ customer after hour. Luckily Janet managed to connect to a ‘real human’, got assured ’emergency crew’ is on the way in 45 minutes. A monster truck rolled in, the crew initially couldn’t believe the story we told them.. why not? It was so unbelievable, even hilarious! They did not turn the power switch back before closing the transformer box. Thanks, for nothing, Marietta Power!

 

부활주일에..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세

결국은 부활주일이 되었다. 올해는 사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부활절까지의 40일, 사순절 (Lent)이 조금 길게 느껴졌다. 왜 그랬을까? 짧게 느껴졌다면 아주 착실히 바쁘게 40일을 보냈을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이 아닌 것을 보니 조금 게으르게 보낸 것이 아닐까. 2008년의 사순절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전해부터 시작된 묵주기도의 덕분일까.. 그 해의 사순절은 정말 보람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 불필요한 TV보기 등을 자제하고,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과 바오로 서간문을 열심히 읽고, keyboarding으로 copy를 하기도 했다. 그 해부터 처음으로 성주간 4일의 미사를 빠지지 않고 갔었다. 그것에 비하면 올해는 아무래도.. 하지만 이번에는 레지오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 나를 안심시킨다. 비록 아직 협조,활동단원을 한 명도 이끌어 들이지는 못했지만.. 같은 구역의 ‘미영이 아빠’를 현재 계속 권면 중이라서 조금 기대를 걸어 보기도 한다.

부활주일이 시작되면서 이제는 온통 나의 관심이 5월 1일 자비의 주일(Mercy Sunday)에 이루어 질 우리의 희망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의 시복식(beatification)으로 쏠린다. 현재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중의 하나가 바로 요한 바오로 2세이시다. 역사적인 인물로도 그렇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존경의 차원을 넘는다. 우리 천주교의 자랑이고, 천주교 ‘중흥’을 이룩하신 거룩한 ‘예수님 제자의 후예’이시다. 하지만, 완전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옥의 티라고 한다면 오늘 NPR news에서도 보여 주듯이, 일부 ‘악마가 씌운’ 신부들의 어처구니 없는 ‘성추행’.. 을 조직적으로 뿌리를 뽑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천주교의 ‘비밀’스러운 관행 때문에 쉽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것 이외에는 정말 오류가 없다. 하느님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오류가 없을 수 있으랴. 특기할 사실은 지금 교황께서 거의 ‘오해를 살 가능성까지 감수하면서’ 초특급으로 이것(시복)을 밀어 부친다는 사실이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말 고맙고, 현명한 처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난,성지주일: Palm Sunday 2011

Palm Sunday of the Lord's Passion 2011
Palm Sunday of the Lord’s Passion 2011

오늘은 미국성당에서는 Palm Sunday of the Lord’s Passion이라고 하고 한국 성당에서는 수난의 성지주일이라고 하는 부활 전 마지막 일요일이다. 올해의 미국본당에서 나누어 준 five minutes with the Word Lent 2011라는 사순절 묵상용 소책자를 보면 오늘은 하느님의 인류를 위한 거대한 계획의 절정으로 향하는 마지막 주일로 묘사가 되어있다. “Today marks the beginning of Holy Week, the most significant week of the year. Everything that Jesus said and did while on earth was leading up to this week, to the moment of the cross, the climax of God’s great plan for humanity.

이제야 조금씩 이 흔히 말하고 들어왔지만 별로 깊이 생각하지 못하던 말들이 귀에 들어오고 의미를 알 것만 같다. 그리스 신화가 아닌, 진정한 역사 속의 예수이기도 한 이 ‘엄청난 사건’을 어찌 그 동안 그렇게 값싸게 쉽게 수동적으로 들어왔을까. 이것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절로 생기는 지혜일까, 아니면 노력에 의한 보답일까, 아니면 그 것을 훨씬 초월한 높은 곳으로부터의 ‘은총’일까.. 이번 사순절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만족을 해야 할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보다 부활절을 더 기다리게 된 지도 몇 년이 지나간다. 한마디로 군중심리에 쉽게 따르는 세속적 신자에서 그나마 조금은 진솔하게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 노력하는 신앙적 신자가 되고 싶은 그런 시간들이 나의 앞에 갑자기 펼쳐진 것이다. 잔머리를 굴리며 의심하는 습관도 많이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사탄이 얼마나 나의 주변에서 배회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전 보다는 훨씬 나를 유혹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유난히 싸늘하게 변한 이곳의 4월 중순.. 다시 palm tree잎사귀를 받아 들고 주님 수난 성지주일의 미사를 보면서 나와 우리가족의 부활은 어떤 것일까 생각을 한다. 희망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부활.. 예수님과 같은 기적적인 부활은 너무 나에게는 비약된 것이지만 그 이외의 아주 작은 기적 같은 것은 절대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나누어 받은 palm tree이 다시 내년 ash Wednesday에 재로 변해서 나의 이마에 십자가를 만들 때까지 과연 나는 어떤 작은 기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예년과는 다르게 오늘은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가을비 우산 속에..

오늘은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하루 종일 에어컨이 한번도 들어오지 않은 그런 날이 되었다. 결국은 가을이 온 것이었다. 기온도 거의 화씨 15도나 떨어지고, 하루 종일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 그런 날이었다. 1970 년대의 가수 최헌이 부른  “가을비 우산 속에” 를 생각하고, 부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지나간 해들을 기억해 보면 아마도 2주 내에 central heating이 가동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여름의 것”들을 치워야 하고 winterizing을 하여야 한다. 아~~ 세월의 흐름이여~~

오늘은 매월마다 돌아오는 이곳 한국천주교회의 “마리에타 2구역” 구역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돌아가며 각 구역 신자들의 가정에서 저녁을 같이 먹으며 친교를 하는 날인 것이다. 우리 부부는 비록 주일미사를 한국천주교회에서 하지는 않지만 이 구역모임에는 거의 정기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다. 참여를 한지 아마도 벌써 5년 정도 되지 않았을까? 아주 큰 그룹이 아니지만 활동적인 비교적 착실한 구역에 속한다. 성서공부를 한지도 꽤 오래되었다. 나 개인으로 보면 이 구역모임에 나가면서 더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최근 몇 번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못나가게 되었지만, 역시 사람이 모인 곳이라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랑”의 마음으로 극복을 해야겠지만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home office at the latest
home office at the latest

이제 드디어 나의 home office가 최소한 제 자리들을 잡았다. 역시 main desk는 다른 것들과 평행으로 놓아야 심리적으로 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정말 해야 할 것은 다 끝나지 않았다. 서류와 computer 같은 hardware part를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사실 이것이 골치 아픈 일이라, 계속 미루고 있지만 이제는 핑계가 없다. 하지만 일단 시작을 하면 생각보다는 쉬울지도 모른다. 모든 일들이 대개 이런 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