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後(주후) 2013년, 8월 22일

¶  BC, AD, BCD, CE… OH MY!  내가 감사하며 애용하는 Wikipedia 류의 web service는 물론 가끔 donation을 할 정도로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 옛날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항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필수의 서비스인 것이다. 비록 최고의 전문가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대신 충분히 많은 일반인에게 ‘검증’을 받고 있는 지식들이라 생각하는 것 보다 질이 좋음을 알 수 있다. 그 수많은 기사들의 폭과 깊이, 신속한 update등등.. 책으로 된 백과사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여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soft information에 해당되는 것인데, 지나친 PC (Political Correctness) effect가 여기에도 적용이 되는 듯 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좋은 정보’로 취급되는 성향을 이곳에서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지나친 세속적 편향도 덩달아 춤을 추며 이곳으로 잠입하는 느낌도 든다.

예를 들면 CE 와 BCE의 연대 표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AD (Anno Domini)와 BC (Before Christ) 대신 CE(Common Era) 와 BCE(Before Comment Era)로 표기하는 것이다. 해당 기사를 쓴 ‘봉사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아예 Wikipedia 자체에서 ‘권장, 심지어 강요’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이 쉽게 말하면 PC, politically correct한 것이다. 왜 전통적인 것보다 이런 방향으로 나간 것일까? 이렇게 하면 fund raising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일 지도 모른다. ‘비신자, 비기독교인, 무신론자’의 숫자가 엄청 많고,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 옹졸하기 짝이 없는 ‘새 대가리’ 적 발상이다. 기원 후, 기원 전을 쓰면서 ‘예수님 후’, ‘예수님 전’이라고 생각하며 서기 1968년..을 쓰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한번 어깨를 펴고 당당히 써 보자.. “오늘은.. 주후, AD: ANNO DOMINI, 기원 후 2013년 8월 22일!” 참.. 이래서 political correctness가 필요이상으로 욕을 먹나 보다. 

 

¶  GET A LIFE! FACEBOOKERS..: 아주 오랜만에 들려본 the economist 웹사이트 에서 흥미롭고, ‘나의 느낌이 역시 맞았구나..’ ‘I told you so’ 하는 나의 내면의 소리를 확인하는 기사를 보았다. 한마디로 “Facebook에 목매는 인간들아, (진짜) 삶을 살아라!” 인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대화’를 하는 것과 ‘그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도 나는 처음부터 이런 류의 ‘거대한 가짜 삶의 광장’을 제공하는 Facebook에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기본을 무시한, 잔머리만 굴리는 요새 ‘아이들”의 장난이 거대한 돈과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쓰레기’에 관한 뉴스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난데없이 전혀 모르는 인간들이 ‘친구 합시다’ 하고 오는 추태에는 진저리가 칠 정도였다. 우리 두 딸들도 peer pressure에 약한지 한 때 빠지더니 요새는 많이 벗어난 듯 하다.

심각한 문제는 아예 그 속에서 완전한 ‘다른 삶’을 사는 인간들인 것이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구별을 못하며 사는 거대한 ‘광고의 밥’ 인 이런 부류의 사람들.. 그야말로 Get a Life! 라고 충고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덩치가 커진 이 Facebook은 드디어 실험용 연구대상까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국은 실상이 들어나게 되고, 결과는 그들(ZukerXX & kids)에게 별로 좋지 않은 듯하다.

이 economist의 기사를 읽어보면 아주 조직적인 실험,연구를 한 것인데 결과는 그 곳에서 사는 삶은 한마디로 miserable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곳에 있는 거짓으로 도배가 된 허구의 삶들과 자기 것을 비교하는 자체가 불행인 것이다. 실상과 거리가 먼 자기의 공상을 쫓으며 살려니 결과는 뻔 한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이제는 NSA의 철저한 감시대상의 제1위에 있는 그들의 privacy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  바울라 표 커피: 얼마 전 우리부부의 레지오 마리애 본가인 자비의 모후 단원님 이 바울라 자매님이 조그만 상자를 건네 주셨다. 차량봉사 관계로 자매님을 레지오 주 회합 뒤에 모셔다 드리면 가끔 뒤뜰에서 정성껏 키운 야채나 꽃나무를 즐겁게 나누어 주셨는데, 이번에는 색다른 느낌의 조그만 상자였다. 혹시나 해서 미리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커피’라고 하셨다.

이것은 정말로 뜻밖의 느낌이었는데, 물론 내가 워낙 커피를 즐기다 보니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지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였다. 자매님 식구가 드셔도 됨 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자매님 식구는 별로 커피를 ‘잠’ 때문에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그것은 우리와 친숙했던 Caribou ground coffee pack이었다.

물론 우리가 사서 먹어도 되지만 이런 ‘공짜’ 는 참 즐거운데.. 공짜라서 라기 보다는 그렇게 주신 자매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런 것이다. 매일 아침 나는 칠흑이 간신히 걷힌 이른 아침에 이 커피의 맛을 ‘혼자서’ 음미하며 잠을 깨고 ‘신나게 돌아가는 머리’의 힘을 빌려 나의 생각과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고마운 자매님의 마음을 생각하기에 그 Caribou Coffee를 ‘바울라 표 커피‘라고 이름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바울라 자매님! 

 

¶  CRAZY NEW NORMAL: BRADLEY MANNING 이 알고 보니.. CHELSEA MANNING? 하도 ‘미친’ 뉴스들이 요새는 ‘대부분 정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 희한(稀罕)한 기사에 나는 완전히 오금을 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정도로 희한한 CRAZY NEW NORMAL인 것이다. 별로 거대한 정치적인 안목이나 생각 없이 그저 ‘자신의 불만’만 생각하며 1급 국가기밀 수천 페이지를 양심의 가책 없이 여파나 파장에 상관없이 폭로하며 자신의 자격지심을 위로했던 ‘병신중의 병신’처럼 보이던 그 ‘남자’가 갑자기 ‘여자’로 성전환을 한다?

한마디로 정말 이것이야말로 희한 중의 희한.. 희한 올림픽의 다이아몬드 메달 감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세상의 누가나 평등하다, 절대로 남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는 ‘기분 좋은 슬로건’에 목을 맨 신 현세의 일 면이 되어가고 있다. 비겁 자 중의 비겁 자 처럼 보이는 그가 감방에서 여자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일까.. 참 모골이 송연 해 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  RETRO-BLOG, TAKE ME TO 1968!:  근래 들어서 blogging하는 것이 그런대로 자연스레 습관이 되면서 나만의 retro-blogging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니까 어떤 날, 문득 생각난 것을 쓰다가 다 못쓰고 내버려 둔 것을 ‘후일’에 이어서 쓰게 된 case 가 바로 이것이다. 쓰기 시작했을 때의 생각이 시간이 지나서 조금은 바뀌거나 했어도 생각의 출발점은 간직하고 나중에 읽었을 때 ‘역사적’ 가치가 더 있는 것이다.

특히 바쁠 때, 그런 ‘지나간 블로그’를 더 많이 처리해야 할 때가 많다. 미완성 된 블로그를 나중에 ‘완성’을 시키는 것이다. 현재도 나는 자그마치 5개 이상의 retro-blog과 씨름을 하고 있다. 제일 오래 된 것은 거의 6개월 전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대작’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역사적 기록’인 memoir인 것이고 그 중에서 연세대 2학년 시절에 관한 회고록이 있다. 대학시절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황금기’애 속하기에 이야기도 많고 생각도 많았던 시절이다.

나의 그 때는 20세였던 1968년.. 기억력과 최후의 사투를 벌리며 회고해 내고 있는 이야기들.. 나에게만 의미가 있던 사담들이지만.. 누가 아리오, 그 이외의 관련된 사람들이 보게 될지도. 몇 년 전 일본의 인기 ‘테레비’ 드라마였던 ‘무리한 연애‘ 라는 미니 시리즈를 보면 왕년의 십대의 우상이었던 지금은 환갑이 된 주인공이 택시를 탈 때, 택시 기사가 ‘어디로 모실 깝쇼?’ 하고 물으니 주인공 왈, 무심결에 ‘1968년으로 갑시다!‘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주인공과 100% 같은 심정이다. 비록 북괴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 근처에서 설쳐댔어도, 정말 걱정, 근심.. 있어도 그 때는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5구球 수퍼’ 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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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일제 산요 ‘플라스틱’ 5구 수퍼 가정용 라디오 credit: 일본 라디오 박물관

5구球 수퍼.. 5 tube super… huh.. 이것이 무슨 ‘괴상한’ 말인가? 튜브 5개가 super, 최고라고? 여기의 tube는 사실 vacuum tube의 ‘준말’이고 이것은 그 옛날 한때 전자기술의 총아, ‘진공관’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super는 무슨 말인가? 5개의 진공관이 super, 최고라고.. 이것도 준말이다. super heterodyne(줄여서 superhet)이란 radio기술계통의 전문용어의 준말인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한마디로 라디오, radio란 말이고, 1950~60년대에 널리 보급되었고 쓰이던 가정용 전자기기의 하나였던 radio-receiver 중에서 제일 발전되고 널리 보급된 것 중에 속한다. 1960년대에 집에 ‘잡음 없이 긴 시간 방송을 듣게 해준’ radio가 있었으면 99.9% 그것은 바로 이것이고, 그것을 보통 한글로 ‘5구 수퍼’라고 불렀다. 이것은 AM radio receiver(AM 라디오 수신기)로서 5개의 진공관을 사용하고 super heterodyne 이란 수신 방식으로 AM 전파방송을 받는 방식이었다.

내가 중,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닐 당시 그러니까 1960년대에는 ‘거의’ 진공관을 사용한 전자기술이 ‘판을 칠’ 때였다. 트란지스터(transistor)가 비교적 자리를 잡기 시작은 했지만 상대적으로 비싸고, 성능이 진공관에 비해 큰 차이도 없을 뿐 아니라 진공관에 비해 성능과 출력이 떨어지는 분야 (예를 들면, stereo amplifier, 전축 같은)도 있었다.

Transistor가 제일 각광을 받던 쪽은 역시 portable radio (휴대용 라디오) 쪽이었다. 특히 일본 아이들이 잘도 만들어 내던 ‘정말로 조그만 라디오’는 대중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던 일본의 전자기술은 그때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그들 ‘기술 번영’ 시대 서막을 알리는 주역 노릇을 했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꿈이었던 전기,전자기술 분야는 사실 일반인들에게 그렇게까지 인기 있고 알려진 분야는 아니었다. 그저 유일하게 알려진 것이 라디오와 전축, 녹음기, 전화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 당시는 전기 에너지를 쓰는 분야, 전기 다리미, 전열기, 형광등, 전등불, 선풍기, 초인종.. 같은 것이 전부였다. 전파를 보내고 받는 쪽인 라디오, TV.. 그리고 녹음된 음성, 음악을 듣게 해주는 전축, 녹음기 가 시대를 앞서가는 주역을 했다. 미국은 이미 그 당시 ‘고철’ 컴퓨터의 최 전성기에 돌입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에게 그것은 거의 ‘환상적’인 idea에 불과했다.

대학 진학할 때 많이들 전공을 정 하는데 애 먹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전혀’ 걱정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전기, 전자’에 목을 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공을 고르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대학 자체를 고르는 것은 문제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입학 시험을 보았다가 ‘떨어지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당시의 ‘입시 유행’이 공부를 잘하는 순서로 전공을 고르는 정말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풍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전국 고등학교에서 제일 공부를 잘 하면 (남자 중에서) 그건 ‘서울공대 화공과’, 그 다음은 ‘전기공학과’, 이런 식이고 여자라면 제일이 ‘이대 영문과’, 그 다음은 어쩌구.. 하는 식.. 이런 풍토에서 나는 떨어질 확률이 꽤 높은 경기,서울,경복,용산 고교의 독차지 였던 서울공대 전자공학과에 지원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전기, 전자’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알아도 전혀 정열이 없는 그런 애들, 하지만 수학 모의고사는 top..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전기,전자공학을 하려면 수학을 잘 해야 하지만 거꾸로 수학을 잘 한다고 해서 전기,전자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는 (아마 그 이후에도) 그런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연세대 전기공학과엘 가게 되었다.

당시 우리 같은 전기,전자 공학도에게는 전축, 라디오를 직접 만드는 것이 제일의 꿈이었다. 물론 이것을 ‘설계’를 하고 ‘조립’을 하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설계’의 기술은 더 배울 것 투성이여서 ‘조립’ 쪽에 시간을 더 보냈다. 전축은 하도 종류가 다양해서 ‘표준화’ 된 것이 적었지만 위에 말한 AM 라디오 쪽은 거의 ‘완전히’, ‘5구 수퍼’라는 것으로 표준화가 되어있어서 각종 회로와 기술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거의 모두가 이것 하나만은 직접 만들어 보는 경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비록 이것은 분명히 ‘전자기술’에 속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노력은 ‘기계적 기술’이 필요할 정도로 기계적인 작업이 많았고 전자 쪽이었던 진공관은 100 볼트가 훨씬 넘는 shock energy를 요구하는 등, 조금은 등골이 오싹한 때도 있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제작비를 줄이려고 power transformer(트랜스) 없애고 100 볼트 가정용 전기를 ‘그대로’ 쓰게 하는 방식을 쓰면서(trans-less), 그런 위험이 더 커진 것이다. 이것을 조립하고, 만지고 할 때는 항상 전기 감전의 위험성에 시달리곤 했다.

대학 2학년 때 내가 직접 만들었던 ‘전자기기’들 중에 ‘표준 5구 수퍼’가 제일 기억에 남고 사진도 남아있어서 당시의 ‘흥분감’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5구 수퍼 라디오의 회로는 대부분 ‘표준화’ 되었지만, 문제는 그곳에서 쓰이는 부품들은 대부분 ‘조잡한 국산’ 수준이어서 조립 후에 ‘라디오의 수준’은 엉망진창이었다. 비록 진공관 자체는 대부분 일제였지만 나머지가 문제인 것이다.

조립 후에는 사실 ‘고가의 측정기기’가 필요한데 그것이 없으니.. 그저 흘러나오는 ‘저질의 음성’을 듣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디오의 ‘수학적 이론’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결과의 기쁨’은 상상외로 엄청나서 두고두고, 50년 뒤에도 이렇게 느낄 수 있으니.. computer simulation으로 전자 회로를 공부하는 요새 ‘전자공학도 아해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시절에는 electric guitar의 전성기여서 그것을 hacking하는 것도 매력적인 취미였는데, 전공분야의 이점을 살릴 겸해서 guitar amplifier(기타 앰프)도 만들어 보았다. 지금은 transistor 로 너무나 쉽게 만들 수 있는, $20정도면 살 수 있는 stompbox같은 것이 있지만 그 당시는 적어도 3개 이상의 진공관을 사용해서 같은 distortion effect를 내곤 했다.

50년 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이런 추억의 의미는 복잡하다. 영리한 인간들의 ‘기술적 진보’의 속도가 소위 말하는 Moore’s Law1를 따르며 현재까지 질주를 했는데, 비록 조금 주춤하는 예측도 있지만, 내가 그 동안 ‘속수무책’의 눈으로 경험한 것은 실로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진공관 5개의 ‘두뇌’가 지금은 소금 결정만한 크기에 수백만 개가 넉넉히 자리잡게 되었고, 앞으로 50년 내에 사람 두뇌세포를 닮은 지능까지도 그곳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 뒤는 어떨까? 누가 알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 과연 ‘혼’ 이란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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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산요 Sanyo ‘플라스틱’ 5구 수퍼 라디오 내부 모습 
photo credit: 일본 라디오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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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경 우리집에 있었던 일제 Monarch 5구 수퍼 플라스틱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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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경 내가 만들었던 5구 수퍼 ‘open frame‘ 중파 라디오
쓰인 진공관: 12BE6, 12BA6, 12AV6, 30A5, 35W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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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공관 plate의 150V ‘고압’이 노출된 라디오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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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의 ‘전자기기 공구’의 일부, 흡사 ‘철공소’를 연상하게 하는..

 

  1. 2~3년 만에 기술의 양과 질이 2배로 불어난다는 법칙, 주로 IC silicon chip에 들어가는 transistor의 숫자로 계산을 함.

12/12/79, 눈발 날리는 백양로, 1968

2012년 12월 12일도 어제로 지나갔다. 12/12/12로 ‘난리’를 치는 사람들.. 참 부럽다. 단순한 부류의 사람들일까, 아니면 참 한가한 사람들일까 생각도 나지만, 12가 세 번씩이나 겹치는 것보다는 각자의 일생에서 드물게,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숫자이기에 그럴 것 같다. 우선 13/13/13은 아예 불가능 할 것이고, month의 숫자와 맞는 햇수라면.. 2101년이 되어야 01/01/01 라는 숫자 놀음이 가능한 것이다.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2012년에서 2101년까지의 공백이 생기고.. 앞으로 89년을 더 살아야 그것을 보는 것이다. 현재의 ‘피상적인 의학’의 발달을 감안 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20대나 30대 정도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로써는 정말 오랜만에 ‘백일몽’같은 생각과 망상을 해 보았지만, 역시 이것도 인간이 겪는 유한성, 잠깐 왔다가 가는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한 ‘피조물’의 신세를 실감케 한다. 하지만, 요새 내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달렸고, 인간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매년 12월 12일이 되면 연숙과 빠짐없이 한가지 얘기를 나누며 웃는다. 1979년 서울의 12월 12일을 서로 회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날 밤에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빌미로 전두환이 무혈 쿠데타를 하던 날이었다. 그들이 한강 다리를 건너오기 바로 전에 우리 둘은 김포공항에서 연숙의 지도교수 김숙희 교수를 만나 인사를 하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른 채,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날 그 쿠데타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기억을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날 저녁 김포공항으로 둘이 걸어 들어가는데, 처음으로 연숙의 손을 잡은, 그것을 회상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결혼 약속은 얼마 전에 했지만 손을 잡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더욱 재미있었던 사실은 그날 날씨가 매섭게 추웠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이라서 손목을 잡힌 연숙은 너무나 ‘고생’을 했다고 한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해맑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날 12/12가 남았다.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의 모습

요사이 나의 workstation pc desktop screen, New York Central Park

오늘 아침에 나의 workstation kvm virtual pc의 desktop background art를 보니, 이것은 거의 흑백으로 눈에 덮인 뉴욕 city, Central Park 의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바뀐 것이 한 달도 채 안되지만, 이것을 보면서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다. 물론 아름답게 기억되는 광경이고, 그것도 역시 흑백의 영상이었다. 그곳은 바로 연세대의 상징인 백양로.. 그곳이 완전히 눈 속에 쌓이고 있던 그 광경이었다.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려 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계속 생각해 본다.

1967년 겨울 아니면 1968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겨울 방학 때였고, 성탄이 훨씬 지난 때였다. 그러니까 1월 쯤이었을 것이다. 한낮에 함박눈이 그야말로 ‘펄~펄’ 내리던 날, 시커먼 공해로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서울거리가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그런 날, 어찌 나와 같이 한가한 사람들이 집의 안방에 앉아있겠는가? 지독히도 한가했던 대학시절의 겨울방학의 ‘누에고치’ 속에서 나는 눈 덮인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때 상도동 버스 종점에 살던 나는 ‘portable’ FM radio를 들고 나갔고 시내 버스 <상도동-모래내 >를 타고 연세대로 갔다. 왜 그곳에 갔는지.. 하기야 그 당시 잠깐 갈 곳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연대 앞 굴다리 앞에서 내려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백양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손에는 작지도 않았던 ‘소형’ 금성 FM radio를 들고, 신나게 pop song을 들으면서.. 눈 속에서 기가 막히게 조용하고 아름답게 보이던 연세대 백양로.. 이제 시간적인 단서가 잡힌다. 그것은 1968년 한겨울 방학 중, 1월 쯤이었을 것이다.

나의 서재에 보이는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와 SPAM can 재털이
나의 서재, 금성 FM radio, 신탄진 담배, SPAM can 재털이 1968

그 당시의 timeline을 확실히 잡아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진인데, 바로 여기에 보이는 사진, 나의 책상에 놓여있는 새로 산 금성 FM radio, 이것을 찍었던 때가 1968년 3월 경. 1967년 성탄 때에 어머니께서 선물로 사주신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나왔던 FM radio였다.

그 당시에 들을 수 있었던 FM 방송은 딱 한군데였지만 물론 미8군의 FM 방송은 그 훨씬 전부터 있었다. 잡음이 많았던 AM 방송에 비해서 FM방송은 정말 음이 깨끗해서 대부분 classical 쪽의 음악을 방송하곤 했다. 이후에 이 radio는 장기간 등산을 갈 때마다 가지고 가서 사진에도 몇 군데 남아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969년 여름에 요델 산악회 친구 박창희와 갔던 소백산, 그때의 사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수준은 그렇게 간단하게 보였던 FM radio를 ‘간신히’ 만들고, 커다란 업적을 이룬 ‘금자탑’으로 소개하던 때였다. 일제를 배척하던 것이 애국이었던 당시에 그나마 ‘국산’으로 그렇게 깨끗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때, 그것을 들고 함박눈을 맞으며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걸으며 ‘백일몽’을 꾸던 그 죄 없던 시절이 왜 이다지도 그리울까.. 육신적으로 다시는 못 겪을 일이지만, 기억이라는 선물이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금성 FM radio를 듣고 있는 박창희, 1969년 소백산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내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본 백양로, 1973년 6월
이종원, 이경우, 이경증, 윤인송, 이진섭, 김호룡, 신창근

 

Postscript: 나의 머릿속의 기억을 뛰어 넘어서 그 당시의 서울 일간지를 인터넷으로 찾으면 아마도 그 함박눈이 내렸던 날짜까지 확실히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한가함을 달래주는 좋은 project가 아닐까.

 

 
그 당시에 듣던 golden oldie, Ruby Tuesday by the Rolling Stones, 1967

 

재동학교 백승호

어린 시절 친구들을 회상할 때면 그 느낌들이 갖가지임을 느끼곤 한다. 물론 생각만 나도 피하고 싶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희미한 기억들이라서 그런지 실제라 기 보다는 파란 담배 연기 속에서 춤추는 듯한 거의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한마디로 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싶은 친구들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지금 급속히 저하되는 듯한 기억력과 싸우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blog은 사실 그것을 위해서 시작했고 계속 그런 노력을 돕는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이 된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나의 감정을 알맞게 나타내는 것도 이제는 쉽지는 않다. 사실 머리 속에서 맴도는 어린 친구들은 그 당시의 사진이나 앨범들을 보면 쉽게 알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분명히 친하게 뛰어 논 기억은 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그래도 그 중에는 더 자세히, 생생히 기억이 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백승호의 기억이 유난히 머리에서 맴돈다.

백승호, 재동국민학교졸업앨범에서, 1960
백승호,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에서, 1960

나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이 백승호는 1958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의 친구였다. 한때 아주 가깝게 지냈고 분명히 서로 좋아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인가,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친구였었던 기간이 1년도 채 안되게 짧았지만 아직도 어제 본듯한 기분인 것이다. 원래가 잘 웃는 얼굴의 이 친구, 백승호 6학년 때 헤어지고 말았지만 멀찍이 볼 양이면 저 애는 나의 친구였다는 생각은 하곤 했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백승호는 완전히 나의 시야, radar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국민학교 동창들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되었던 다른 친구 신문영처럼 이 친구도 거의 꿈같이 연세대 campus에서 보게 되었다. 신문영은 몇 초 정도 잠깐 보고, 혹시 저 친구가 신문영.. 하며 어 떨떨 했었지만 이 백승호는 아예 자주 얼굴이 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ROTC(학훈단, 일명 바보티씨) 생도의 모습으로 자주도 보였다.  

문제는.. 그렇게 나의 눈에 보일 때마다 왜 나는 반가운 마음을 접고 ‘모른 척’을 했었을까? 성격 적으로 그 당시 나의 먼저 나서서 백승호를 아는 척 못했을 것이다. 그저 멋 적은 것이다. 느낌에 어떤 때는 백승호도 나를 보았다고 느꼈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면 그도 멋 적어서 나를 모르는 체 했을까.. 그것이 아직도 궁금한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백승호의 image는 이곳 저곳에 남았다. 재동국민학교 5학년 시절의 사진 2장, 재동국민학교 졸업앨범, 하지만, 연세대 앨범.. 을 기대했지만 그는 1966년 입학으로 나보다 일 년 앞서 졸업을 한 듯, 그곳(1971년 앨범)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사실, 학훈단 베레모를 쓴 모습도 기억을 하는데, 아마도 공학부 토목학과를 다녔던 듯 하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살아온 역사를 알고 싶지만, 그것은 너무나 무리한 바램일 것 같다. 하지만 build it, they’ll come의 교훈을 기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듯..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재동국민학교 5학년 사진, 동그란 표시가 백승호, 1958년

 

First of May

5월 1일을 향한 달, 4월, 그것도 특별히 오래 전 1970년의 4월을 더 기억한다. 연세대 4학년이 되던 그 해의 4월, 지나간 3년간 나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중앙고 동창들, 특히 양건주와 이윤기가 모두 군대로 갔고, 사실 조금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던 때였고, 비록 다른 동창, 죽마고우 박창희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위안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 해 초에 친구 유지호의 도움으로 박창희와 같이 원서동에 살았던 다른 죽마고우 손용현과 거의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거의 10여 년 만에 ‘불알친구’ 삼총사가 다시 모인 것이다. 당시 용현이는 건국대학교 영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미국과 영어를 그렇게 좋아했던 그에게 영문과는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 이후 우리는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오랫동안 헤어졌던 시간을 만회 하려는 듯,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그 당시 그 나이또래가 갈 곳이 어디겠는가.. 거의 다 다방, 아니면 술집이었는데, 모두 담배연기가 자욱한, 건강한 곳들은 아니었다.

그것 대신, 값싸고 건강하게 모여 즐기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산, 그러니까, 등산이었다. 특히 박창희는 거의 프로 급에 가까운 산 사나이였고, 요델 산악회의 멤버이기도 해서, 우리들에게는 조금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우리 셋은 같이 등산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 당시 그것은 대학생들에게 유행이기도 했다.

그래서 셋이서 서울 근교의 산들(특히 도봉산)을 다시기 시작하다가 그 해, 4월 초에 장거리 산행을 하게 되었다. 육이오 때 김일성 공산당의 공비, 빨찌산들의 오랜 거점으로 유명하던 지리산엘 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전해(1969년)에 박창희와 같이 여름방학때 소백산 등산의 경험이 있었지만 용현이는 이런 산행이 처음이었다.

나와 박창희는 비록 연대 전기과 졸업 수학여행을 빼먹고 간 것이었지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그 산행은 일생을 통해 길이 남을 추억거리가 되었다. 당시는 color film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라서 거의가 흑백의 사진으로 그 추억이 담겼다. 그 당시 우리들이 좋아했던 Bee GeesFirst of May, 지리산 등반, 그리고 그 속의 세 죽마고우들.. 비록 모두 헤어져 살았지만, 항상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친구들… 건강하기를 빈다.

 

 

First of May, friends forever day 

 

연세대학의 추억(2): 길었던 1학년 시절

연세대학교 독수리상

연세대학교 상징 독수리상, 1970년 5월 무악축제때 제막식이 있었다

 

내가 연세대를 지망하게 된 것은 복잡한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철학적인 이유보다,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서울공대 전기, 전자공학과는 나에게 조금 ‘위험한’ 선택이었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외에도, 무언가 부드럽고 ‘낭만적인 인상’을 주던 신촌 독수리의 요람, 반짝이는 구두, 바로 옆에 ‘기다리고’ 있던 이화여대생들.. 등등이 자연히 나를 그곳으로 끌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관심은 100% 전기,전자 ‘과학’ 쪽이어서 전공을 선택할 때에 한번도 다른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의 학과를 지망할 때, 본인의 취향이나, 포부보다는 성적 순위로 정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 이었다. 성적순위로 경쟁 학과를 지망하는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그 당시 서울공대 화공과나 전기,전자과의 커트라인이 제일 높았고, 그런 분야를 자기가 좋아하건 안 하건 상관없이 학교 성적만 좋으면 지망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저 그런 과를 졸업하면 보장된 취직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분야에 얼마나 관심이나 있었을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불행한 친구들,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 분야에 진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기회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내가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것은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고 결과였다.

 

Petri camera로 찍은 자화상, 1966
Petri camera로 찍은 자화상, 1966

연세대학 전기공학과의 경쟁률은 상당히 높아서 시험을 치르고 나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느끼긴 했지만, 사실은 끝났다는 안도감과 편안함도 잔잔하게 느끼며 발표를 기다렸는데, 그만큼 입학시험이란 것이 괴로운 것이었다. 그 당시, 입학시험 발표는 대부분 라디오에서 제일 먼저 발표를 했고, 나도 그것을 통해서 합격 발표 결과를 들었다. 입시 전에 합격하면 ‘진짜’ 카메라를 사주시겠다는 어머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나는 정말 합격발표를 기뻐했는데, 진짜로 며칠 후에 나는 일제 페트리(Petri) 란 카메라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나중에 가까웠던 친구들의 대학입시 결과가 속속 알려졌는데, 김호룡은 연대 기계공학과에 합격을 했는데, 나머지 이종원, 우진규 등은 모두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2차 대학을 응시하거나 재수를 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고, 종원이는 2차였던 외국어대에 갔는데, 우진규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남영동에서 본 남산 야경, 1966년 3월
남영동에서 본 남산 야경, 1966년 3월

비록 추운 겨울 날씨였어도 입학식 전까지의 시간은 정말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다. ‘악몽’ 같던 시절이 끝나고, ‘완전 자유’의 대학시절이 눈 앞에 보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드디어 ‘학생입장불가’ 라는 영화도 당당히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용산구 남영동, 금성극장 바로 앞에 살았고, 그곳에서 연세대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사실 고등학교에 다니던 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약간 달라진 것은 까만 교복대신에 곤색 대학제복을 입었던 것, walker(군화) 대신에 진짜 신사화 (단화)를 신었고, 머리는 조금 자라서 스포츠형 정도가 된 것, 그것이 전부였다. 어떤 애들은 완전히 기름까지 바르며 머리를 기르고, 신사복까지 입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그 때 연세대 캠퍼스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이 여기저기 보이던 “멋진” 여대생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내가 속한 과에는 여학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여기저기 강의실 이곳 저곳에 여대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학 오리엔테이션도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곳에서 소개된 도서관, 학생보건소, 채플시간 등등은 나중에 연세대만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입학을 한 후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은 용산구 남영동에서 영등포구 상도동 (숭실대학 앞 버스 종점)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비록 멀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버스노선이 있어서 사실은 더 편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매일 왔다 갔다 한 것이다. 이곳에서 대학졸업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나의 대학시절의 추억은 이곳과 항상 연관이 되어있었다.

 

연세대 입학 직전, 죽마고우 안명성과, 1966년
연세대 입학 직전, 죽마고우 안명성과, 1966년 봄

연대 전기과, 우리는 그저 그렇게 불렀다. 내가 1966년 입학할 당시 연세대학교는 공과대학이 아닌 이공대학이 공학부를 포함하고 있었고, 전기공학과와 비슷한 전자공학과란 것이 생기기 전이었다. 아마도 몇 년 후에 전자공학과가 분리되었을 것이다. 내가 다닐 당시에는 3학년이 되면서 강전, 약전 이란 이름으로 갈라졌다. 그러니까 강전(强電)이란 것은 전통적인 전기공학이었고, 약전(弱電)이란 것은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자공학인 셈이었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강전은 (electric) power system, 그러니까 전력의 발전,송전 같은 ‘강한, 높은 전압’의 것을 다루고 약전은 그 이외의 것, 특히 electro-magnetic, radio, amplifier, control systems 같은 것을 다루었던 것이고, 이 약전이 바로 전자공학(電子工學)인 것이다. 나는 약전, 전자공학에 관심을 두고 입학을 했기 때문에 3학년 때 약전 반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각자의 지망대로 배치를 하지만 워낙 약전, 전자공학에 지망생이 많아서 교수님들도 조금 골치를 썩힌 듯 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이런 환경에서 재학생, 복학생으로 갈라지는 판에 3학년부터는 약전,강전으로 거의 반반으로 갈라게 되어서, 심하면 서로 모르는 학생도 생길 정도였다. 지금 졸업 앨범을 보니 그것을 느끼게 된다. 얼굴만 조금 익혔을 뿐 이름 이외에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학 이전의 동창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설상 가상으로 나는 1학년 가을학기부터 1년 휴학을 했기 때문에 입학동기들은 거의 놓치게 되었다. 이런 조금은 복잡한 이유로 나의 연세대 4년은 조금 비정상 적인 것이 되었다.

1학년 1학기 때, 그러니까 1966년 봄 학기, 그야말로 freshman의 기분으로 인생에서 조금은 새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대학생이 되어야 비로소 ‘성인’, 그러니까 사람 취급을 받았다. 머리도 기르고, 신사복도 입고, ‘단화’ 구두도 신을 수 있고, 극장도 마음 놓고 들어가고, 다방, 술집.. 이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또한 마음 놓고 남들이 보이게 ‘연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대학에 들어와서, 아차..하고 한눈을 팔면 완전히 자제력을 잃기가 아주 쉬웠다. 내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라고나 할까..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갑작스런 개인적 자유를 슬기롭게 감당할 준비가 덜 되었던가.. 자유의 전당에서 나는 첫 학기를 혼돈과 방황으로 보냈다. 대학 강의란 것도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고3때의 스파르타 식, 우스꽝스럽게 어려웠지만, 멋지던 수학, 화학 같은 것이 대학에선 수준이 ‘낮아진 듯’이 느껴졌다. 1학년의 교양학부 과정 전체가 고등학교와 수준이 비슷한 듯했다. 한가지 다른 것은 강의를 ‘땡땡이’를 쳐도 당장 아무런 ‘처벌이나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던 것이었는데, 그런 ‘안심’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나중에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 새로운 환경에서 전기공학과 1학년에는 중앙고 동기동창 2명, 그것도 3학년 8반 때의 ‘반창’이었던 신창근조남재가 있었다. 중앙고의 같은 반에 있었어도 개인적으로 별로 가깝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중앙고 1년 선배인 구장서, 더 위의 선배인 (2~3년?) 차재열 형.. 등등, 그러니까 중앙고 출신이 전기과 1학년에 나까지 5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은근한 ‘힘’을 가진 집단이어서, 무슨 투표,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절대로 무시 볼 수 없는 숫자였고, 과 대표를 뽑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보슬비 오는 거리 – 성재희

1965년 말에 발표된 성재희씨의 데뷔 힛트, 입학시험 즈음에 거의 매일 듣었던 곡으로, 그 당시를 추억하게 하는 대표적인 가요가 되었다. 레코드가 크게 힛트한 후에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I Could Easily Fall in Love with YouCliff Richard

 연세대 입학 후에 참 많이 듣고 좋아했던 곡, 전 해에 Cliff Richard는 이미 The Young Ones라는 영화로 일본과 한국에 많은 fan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연세대에 입학한 중앙고 동창 중에는 기계과에 나의 절친했던 친구, 김호룡을 비롯해서 김연응이 있었고, 다른 과에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나중에 총학생회장을 뽑을 때에 은근한 세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별로 그런 것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작은 규모의 정치적 발상이고 행동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체질에 별로 맞지 않았지만 기성 정치인을 흉내 낼 정도로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 투표에서 표 하나가 사실은 땀과,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사실도 그때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전기과 3학년에 어머님의 절친한 원산 루씨여고 동창 친구분의 아드님이 있었는데, 이름은 위재성 형, 보성고교 출신으로, 학훈단(ROTC) 생도였고, 성적도 뛰어나고, 지도력까지 있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형이었다. 그 형의 여동생인 위희숙씨는 1967년에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을 해서 나와 같이 1971년에 졸업을 한 졸업동기생이 되었다. 어느 날 그 형이 나를 보자고 불러서 갔더니, 그곳은 전기과 학생회 선거본부였다. 알고 보니 그 형이 학생회장(이공대 회장)으로 출마를 해서 겸사겸사 나를 보자고 한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실 곤란한 것도 없지 않았다. 이미 나는 다른 과에서 중앙고 출신의 선배가 출마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대학 학생회 선거는 일반 선거의 풍토와 별반 다름이 없고, 완전히 ‘출신지’에 좌우되는 판이었다. 출마 후보의 경력, 자질, 포부 같은 것은 사실 뒷전에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선거풍토를 그대로 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출신고의 압력에 굴복한 셈이 되었는데, 이것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1학년 1학기의 시작 무렵에 나는 ‘사진 찍기‘에 완전히 빠졌고 그것이 조금 수그러질 무렵에는, 나의 다른 blog에서 다루었던 ‘모형 비행기‘ 로 시간을 다 보냈다. 온통 정신이 그곳에 가 있어서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교시절의 학과목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역시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니 시험도, 출석도 문제가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체육 같은 것은 출석미달로 시험도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반대로 ‘성공’을 하겠다고 정신무장을 하고 들어온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가 군대(공군)를 마치고 입학한 사람, 이름이 강성모 였다. 나이나 성품, 성숙함 등으로 전기과 1학년 과대표로도 뽑히고, ‘공부도, 활동’ 도 잘해서, 결국 강성모씨는 나중에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학과장의 추천으로 미국유학(Fairleigh Dickenson College, NJ)을 갔고, 그 이후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대학교수가 되었다. 이 강성모씨는 내가 한창 ‘놀던’ 그 학기에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절대로 재수가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67년 가을학기, 이윤기와 함께
이윤기와 찍은 사진, 중앙동창 김복희가 찍음, 1967년 가을학기

학기가 끝나면서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휴학계를 제출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나에게 최적의 선택이었다. 1966년 입학 동기들은 사실 이때부터 1년 휴학을 하면서 완전히 ‘놓치게’ 되었고, 1967년 가을 2학기에 복교를 하고 보니, 전기과의 학생들은 사실상 1년 뒤에 입학했지만 나와 나이는 거의 비슷했다. 거의 모두 생소한 얼굴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도와서 나의 중앙고 반창인 이윤기와 나의 죽마고우 박창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는 3학년 때 그런대로 친하게 지낸 친구였는데, 재수를 해서 들어왔고, 박창희는 나의 중앙고 1년 후배여서 제대로 입학을 한 것이었다. 같은 고등학교엘 다니면 1학년의 차이에도 존댓말을 써야 했지만, 나와 창희가 죽마고우의 친구여서 그럴 수는 없었고, 이것 때문에 창희와 윤기도 서로 말을 놓게 되었다. 그 외에도 중앙 1년 후배인 김태일, 이상일 등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외에도 전기과에는 조금 낯이 익은 얼굴 두 명이 보였는데, 그 들은 이헌제, 김현식.. 이름보다는 얼굴이 낯이 익어서 생각해보니 작년, 나의 입학동기생이었다. 그들을 어떻게 일년 뒤에 다시 보게 되었을까? 나와 같이 휴학을 하지 않았으면, 유급일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이헌제는 유급이 분명했는데, 김현식은 그 당시 이유를 분명치 않았다. 그래도 이헌제는 나를 알아보아서 나도 아주 반가웠는데.. 그 해(1967년) 겨울이 지나면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겨울방학 중이었는데 갑자기 같은 과의 한창만으로부터 연락을 받아서 한강 파출소로 가보니, 이헌제 가 한강 철교다리 위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충격적이고 어이가 없었다. 이헌제.. 얼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참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어떻게 그가 자살을.. 나중에 들어보니 열렬히 연애하던 여대생(이대 음대생)과 결별을 하면서 비관 자살인 것 같다고 했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며 담배 피던 모습이 흡사 외국 영화배우 같았고, 삶을 마음껏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 그가 얼마나 충격과 절망이었으면, 그 나이에 자살을 했을까.. 아직도 그의 얼굴을 생각하며 채 피지 못한 그 영혼의 명복을 빈다.

 이윤기, 박창희 같은 뜻밖의 ‘친구’들 때문에 나의 대학 1학년 2학기의 시작이 아주 순조롭게 시작 될 수 있었고, 1년 전의 ‘악몽’을 되씹으며, 단단히 결전의 자세로 학교생활에 임하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가끔 실수도 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학교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학교의 강의,과목을 충실히 공부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되었다. 사실 이것이 정상적인 대학생활이었고, 나는 처음 그런 대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새로 만나게 된 과 친구들과도 큰 무리 없이 어울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이윤기와 박창희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이미 이윤기와 친하게 지내던 그룹이 있었는데, 흔히 그들을 ‘식당파‘라고 불렀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그 당시의 학생식당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모두 쾌활하고, 다양한 남자들.. 그 중에는 과 대표였던 고종태, 기타를 귀신처럼 잘 치던 보성고 출신 심재흥, 항상 옷을 멋있게 입던 문욱연,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일찍 군에 입대하고 나의 졸업앨범에 남지를 않아서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다. 그 중의 한 명, 이름은 비록 잊었지만 그 당시 가요 히트곡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 홈” 을 좋아했던 친구, 그 노래는 나도 좋아하던 것이라 더 그를 기억한다.

 

최희준의 이별의 플랫트홈 

 

이윤기, 박창희와 더불어 그 당시 어울리게 된 사람들 중에는 화공과의 중앙고 동창 양건주, 전기과의 강원도 출신 김철수, 중앙고 후배 김태일, 그리고 지방(전라도) 출신의 김진환 등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그룹이 형성이 된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연세대 굴다리 바로 앞에 있던 다과점(빵집)에 둘러 앉아 얘기를 하고 했는데, 그 때의 추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곤 한다. 어떻게 그런 ‘순진’한 순간들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우리들은 어린이처럼 모이곤 했는데, 재미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그날 돈을 낼 사람을 뽑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하게 모인 우리 그룹은 다음해에는 완전한 남녀 혼성 클럽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67년 1학년 2학기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해서 사실 나에게는 보기 드문 완벽한 학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 꼭 좋은 일에는 악재가 낀다고, 작은 사고 하나로 나는 조금은 우울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강의실에서 어린애들처럼 분필 던지는 놀이를 하다가 내가 앞 이빨을 부러뜨리는 조그만 사고가 났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치과를 계속 다니게 되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서 더욱 학교공부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1학년 1학기에 겪었던 학교공부의 어려움을 1년 뒤의 2학기에 완전히 만회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다시금 대학생활에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하게 되었고, 학기가 끝나면서 대망의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계속)

 

연세대학의 추억(1): 졸업 앨범

 

연고전 Classic

연고전 Classic

 

관악산 바라보며 무악에 둘려 유유히 굽이치는
한강을 안고 푸르고 맑은 정기 하늘까지 뻗치는
연세 숲에 우뚝 솟은 학문의 전당. 아~ 우리들 불멸의
우리들 영원한 진리의 궁전이다 자유의 봉화대다.
다함 없는 진리의 샘 여기서 솟고 불멸의 자유의 불
여기서 탄다.

우리들은 자랑에 찬 연세 아들딸. 슬기 덕성
억센 몸과 의지로 열성 진실 몸과 맘을 기울여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 승리와 영광으로
길이 다한다. 찬란한 우리 이상 밝은 누~릴 이룬다.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연세대 졸업 앨범, 1971년 2월 졸업

너무 너무 오랜 만에 연세대학교 졸업 앨범을 보며 교가 연세의 노래를 듣는다. 얼마나 오랜 만인지는 정확히 그 햇수를 모른다. 다만 1971년 2월 졸업 후에 처음으로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물론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금은 보았을 것이지만 느낌 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10여 년 동안 가끔이라도 즐겨 본 졸업 앨범은 거의 국민학교, 중고등학교의 것이었고 이상하게도 대학 졸업 앨범에는 손이 가지를 않았다.

어떻게 나는 이렇게 대학시절의 추억과 그 이전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이렇게도 다를까?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그 나이의 추억은 그 이전의 추억과 근본적으로 깊이가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심하게 말하면 조금은 유치하지만 순진한 추억과 더 성숙하지만 조금은 덜 순진했던 시절의 추억, 그런 차이가 아닐까? 그래서 조금은 더 복잡해진 대학시절의 추억을 글로 간단히 표현하기도 그 이전에 비해서 더 힘들었고,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준비도 필요하다고 느껴서 이렇게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이전의 졸업앨범에 비해서 대학의 것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지는 제일 큰 이유는 대부분 ‘생소한’ 모습들이라 그렇지 않을까? 앨범의 주인공들은 같은 학과가 아니면 사실상 전혀 모르는 ‘동문’ 인 것이다. 같은 학과라도 재학생과 복학생(민바리 vs. 군바리 라고 불렀다) 으로 갈라지고 거기다 나이차이까지 있다. 물론 여학생들은 조금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래서 대학 앨범을 자주 안보게 되는지 모르겠다. 특히 학교 내에서 활동을 안 하거나 하면 다른 과의 동문들은 이름도 모르고 졸업하게 된다. 입학 동기들의 얼굴은 교양학부의 과정에서 조금 익히고 나머지들은 채플 시간(연세대는 개신교 재단의 학교), 그리고 과외활동을 통해서 보게 된다.

후회스럽지만 나는 연세대학 시절,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을 하나도 한 적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학생회나 과외 서클(그때는 동아리라는 말조차 없었다) 같은 것들이다. 한때 전통 있는 교내 사진(동호회) 서클인 연영회 의 가입 모임에 가기도 했지만, 그 이후 전혀 나가지 못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일초도 주저 없이’ 그런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부분 대학시절의 ‘멋과 보람’을 학교 밖에서 찾으려 했고, 또한 결과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되었다. 결혼 후에 ‘아내’ 연숙이 학교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교내 활동의 멋과 보람 같은 것도 충분히 실감 하게 되기도 했지만, 재학 당시 나는 그런 교내 활동은 그저 고리타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번에 졸업앨범을 다시 보면서 그 오랜 세월 잊었거나 몰랐던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연세대 졸업사진, 1971년

신문영, 정말 우연히 이 재동국민학교 동창을 이번 앨범에서 보게 되었다. 일부러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게 된 것이다. 신문영은 나의 지나간 재동국민학교의 추억 blog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던 바 있었고, 그 후에 또 우연히 googling으로 다시 이 친구이름이 연세춘추(연세대 교내신문)와 연관됨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재학 당시 연세춘추 교내 신문에 관련된 과외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문과대학생들이 하는데 어떻게 상과대학 생인 그가 그곳에 관련에 되었을까? 연대 입학 후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이 사실 이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였다. 내용도 그렇지만, 외모가 완전히 ‘현대식’이었다.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고수한 것이다. 아마도 최현배 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남과 조금 다르고, 앞서가는 연세대의 일반적인 모습이 좋았다. 연세대 다닐 당시 (아마도 도서관이 아니면, 학생회관에서) 잠깐 신문영의 얼굴과 완전히 닮은 사람을 보았었는데, 이제야 100% 그의 존재가 이 졸업앨범을 통해서 확인이 된 것이다. 상경대학의 상학과를 다녔고, 연세춘추에 관련된 사진에도 그의 얼굴이 보였다. 1971년 졸업이었으니까 이 친구도 일년 재수를 했거나 휴학 같은 것을 했던 모양이다. 이제 유일한 의문은, 어떤 중,고등학교를 다녔나 하는 것인데, 그것을 알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연세춘추 1970년 12월 7일자 headline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박종섭 연세대 졸업 사진, 1971년

꽤 많은 중앙고 동창도 이곳에서 처음이나, 다시 보게 되었다. 대부분 재수 입학을 해서 보통보다 1년이 늦게 졸업을 하게 되는 듯 싶었다. 나처럼 1년을 휴학을 한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재수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 중에 경영학과의 이수열과 박종섭이 있다. 이수열은 나의 중앙고 3학년에 대한 blog에 이미 회고한 바가 있다. 졸업식 날 이수열과 같이 사진도 찍어서 사진도 남아있다. 이수열은 중앙고 3학년 때, 이과(理科)로 분반이 되어서 대입준비를 했는데, 어떻게 상경대로 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박종섭은 중앙고 3학년 때 우리 반이었다. 그러니까 역시 이과였는데, 어떻게 이 친구도 상경계열로 가게 되었는지? 특히 박종섭은 국민학교 때부터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재동국민학교, 중앙 중학교, 중앙 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그것도 졸업동기.. 이 정도면 참 우연치고는 대단하지 않을까? 그것에 비해서 우리는 한번도 친구가 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참 대단한 인연이다. 박종섭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크게 성공한 동창, 동문이 되었다. 나중에 현대 반도체(Hynix) 의 사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는지.. 확실치 않다. 그 이외에도 상학과 권세용, 정외과 구만환, 지질학과 윤병훈 등이 졸업앨범에서 반갑게 보이는데, 이들 역시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다. 기계과의 김영철.. 중앙고 3학년 ‘반창’인데, 사실 연세대 재학 시 그를 본 기억이 거의 나지를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 친구도 세속적으로 표현해서 ‘대성공’을 한 친구로, 동국제강의 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중앙고 1년 후배들, 내가 1년을 휴학을 한 바람에 ‘동급생’이 된 친구들이다. 전기과 박창희, 김태일, 기계과 양규식 등… 박창희는 나의 죽마고우로써 후배라는 생각보다는 ‘불알친구’ 라는 생각뿐이다. 김태일, 재학 시 같은 클럽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양규식, 재동국민학교도 1년 후배인 활발한 친구, 역시 재학 시 학생회에서 맹활약을 했다. 학훈단(ROTC, 일명 바보티씨)을 거친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오래 전 시카고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1976년 쯤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들으니 LA로 이사를 갔고, 지금도 거기서 ‘매일’ 동창들과 골프를 즐긴다고..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김상우(옛 김시영), 앨범 사진, 1971년

상경대 상학과 김상우.. 전혀 모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금새 알아 보았다.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는 중앙중학교를 나와 같이 다닌 김시영 이었다.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안 바뀌었다. 중앙중학교 3학년 때 나의 다른 친구 이경증과 단짝이던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가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친구였다. 그런데 이렇게 졸업앨범에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연세대 시절 사실 그를 캠퍼스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시영이 김상우로 이름이 바뀌었던 친구다.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

건축과의 장학근씨.. 64학번이라고 하니까 나의 2년 정도 연배인 셈이다.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곳 아틀란타에 왔을 때, 이곳 연세대 동문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부인 장(피)영자 동문도 66학번 연세대 기정대 출신으로 나와 사실 입학 동기인 셈이었다. 학번이 거의 비슷한 연대 선배가 이곳에 같이 있다는 것이 반가워서 조금 가까이 지내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선배의 얼굴을 이번에 졸업앨범 건축과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장 선배는 이곳의 ‘유지’ 격에 속해서 신문에도 자주 나오고, 한인사회의 이곳 저곳에 많이 관여가 된 듯 싶었다. 그러니까, 결혼식, 장례식 같은 데서 꼭 이 장 선배를 만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오래 전, 이곳의 다른 ‘유지’ 격이었던 김예순씨 (치과의사)의 장례식에서는 ‘울면서’ 조사를 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연세대 동문 (박만용씨)의 장례식에서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전공(건축과)도 충실히 살려서 이곳 주택에 관련된 연방정부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기계과 민옥기..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나의 졸업앨범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Ohio State 다닐 때 그를 잠깐 보았다. 역시 같은 기계과에 있었다. 학교 기숙사 버스에서 가끔 보기도 하고 같은 공대라서 얼굴이 익었고, 연세대 피크닉에서도 보았다. 그것이 전부다. 동문이라서 웬만하면 조금 친해질 수도 있으련만.. 전혀 mutual chemistry가 없었을까.. 느낌이 그랬다. 나쁘게 말하면 ‘거만한 표정’ 일 수도 있고, 좋게 말하면, 그저 사람을 피하는 듯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나와 연세대 졸업동기라는 사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같은 기계과 출신 나의 친구 김호룡에게 물으니 ‘검정고시 파‘ 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연세대 재학 당시에도 그렇게 ‘행동’을 했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김호룡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을 때, 뒤 늦게 그 소식을 확인하려고 이 사람에게 연락을 한번 해 본적이 있었다. 둘 다 연세대 기계과 교수단에 있어서 그리 한 것인데, 나를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의 그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들어맞았다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앨범, 1971년

 

Mary Hopkin – Those Were The Days – 1968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British Oldie, Beatles 의 Paul McCartney가 제작한 이곡은 역시 비틀즈의 Apple Record label 판매로  Mary Hopkin 의 debut곡이 되었고,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2위까지 올랐다. 그 당시를 생각케하는 추억의 노래가 되었다.

Mary Hopkin – Goodbye – 1969

다음 해, 역시 비틀즈의 Paul McCartney 곡으로 Mary Hopkin의 두 번째 hit song이 되었다. 그 후에 다른 hit song 도 있었으나 우리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 생인 그녀는 그 당시를 풍미하던 세계적 fashion model이었던 영국의 TwiggyBeatles에게 소개 했다고 한다.

 

 

사랑과 죽음을 응시하며..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 어제는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시점의 이 두 가지를 같이 생각하는 날이 되었다. 물론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직까지는 예외에 속하니까, 이렇게 결혼과 죽음을 같은 위치에 놓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세상이 하도 변해서,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을 했다고’ 우기고, 할 것 다하며 같이 살면서 죽어도 결혼 안 했다고 우기고, 자식 팽개치고 이혼한 것이 무슨 ‘벼슬’을 한 듯, “괜찮다 괜찮아” 하며 행세하는 묘한 세상에, 이렇게 결혼과 죽음을 같은 위치에 놓아 보는 것은 사실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만큼 결혼과 죽음은 인간이기 때문에 확실히 거쳐야 하는 중대사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이다.

 

You Don’t Bring Me Flowers
Neil Diamond, Barbara Streisand
데레사에게 주는 선물, 오랫동안 변치 않을 사랑을.. 

 

어제는 우리 집과 안면이 있는, 김찬웅(베드로)씨 딸 데레사의 결혼 피로연, 초대를 받고 갔었다. 이미 나의 오래 전 blog에서 언급이 되었던 베드로씨네, 부인인 안젤라씨는 내가 속해있는 레지오의 단장님이기도 하다. 거의 20+년 전, 우리의 두 딸들과 어울려 놀았던 데레사가 결혼을 해서 친지들이 모여서 멋진 파티를 한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우리부부가 선생님을 하던 아틀란타 한국학교에도 다니던 아이들이.. 이렇게 커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을 보며, 또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이런 자리에 가게 되면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것은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모일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집을 안 역사는 오랜 되었지만 그것에 비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짐작으로, 우리의 문화적 배경인 동창회, 종교 단체 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곳은 이민 1세의 특성상, 거의가 자영업을 가지고 있어서 직장,조직에 의한 연고는 그렇게 많지 않다. 경기, 서울대를 거치는 동창회는 그런대로 아틀란타 지역에 ‘막강’한 세력이 있는 것 같고, 베드로씨는 아마도 활동적인 멤버인 것 같아서 그곳을 통한 사람들이 많이 온 것은 짐작한 대로였다. 거기다 베드로씨는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삼성 아틀란타 지사에서 근무를 했으니까 그곳에도 ‘동창’들이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짐작보다 사람들이 많이 참가를 한 ‘성공적’인 피로연이 되었다.

그곳에서 ‘의외’로 만나거나 본 사람 중에는: 오래 전 아틀란타 한국학교 교장 김경숙씨, 그의 남편(경기고 출신)이 있었다. 뜻밖의 마음과,보기 싫은 마음이 싸우며 결과적으로 인사를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살면서 끝맺음이 잘 못되면 이런 꼴이 된다는 것, 참 불쾌한 기억이요 잊고 싶은 추억이다. 연세대 2년 선배, 장학근 선배(건축과)를 거의 5년도 넘게 만나서 인사를 했는데..글쎄.. 나를 기억을 하는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그의 부인이 나와 연세대 66학번(가정대) 동문이기도 했는데 어제는 인사를 못했다. 한때 잘 나가던 부동산인 김경자씨..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만났는데..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 관계를 모르겠다. 우리가 현재 사는 집은 1992년에 이분이 소개를 해 주어서 사게 된 것이라 잊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반가운 집 연세대 후배 Mr. 고, 그의 부인..이 집은 2005년 초에 우리 집 ‘깡패,귀염둥이 강아지’ Tobey를 준 집이다. 반가운 인사 전에 Tobey의 안부를 먼저 물을 정도였다. 이 집 부부도 사실 안지가 꽤 오랜 되었지만, 특별한 관계가 별로 없었다. 이 Mr.고, 김찬웅, 베드로씨와 삼성지사에서 같이 근무를 해서 아는 사이라 온 것이다. 그때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은 가끔 ‘동창회’처럼 모인다고 했는데, 이런 것도 미국인들이 이해를 잘 못하는 한국문화 중에 하나일 것이다. 연숙은 금새 잘 알아 보았는데,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할 듯.. 그만큼 내가 변했다는 표정으로 보였다. 그것도 세월의 진리일 것이다. 예전보다 많이 이런 반응에 익숙해 졌고, 익숙해 지려고 기를 쓴다.

 

Perhaps Love
John Denver & Placido Domingo

 

조금은 예상했던 집들, 설재규씨 가족도 보았다. 아직도 어떻게 설재규씨 집안이 베드로씨 네 집과 연관이 되었는지 그 사연을 모른다. 이런 ‘인연’을 추리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연숙의 이대 선배 박교수님 댁도 보았지만 인사를 못 했다. 이분들이 올 것은 쉽게 예상이 된 것이, 남편끼리는 경기고,서울대 동창이며, 부인들은 숙명여고 동창인 것이다. 이것 보다 더 연관이 된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 이외의 ‘개인적’인 친분의 정도는 정말 미지수일 수밖에 없다. 베드로씨와 ‘불알’ 친구라고 공개적으로 선포를 했던 EmCee 김용주씨, 역시 오래 전에 알게 되었지만 나이와 학벌 같은 이유로 공감대가 별로 없었다. 한때 아틀란타 본당의 ‘사목회장’까지 역임을 했었지만 요새는 조용한 듯 하다. 우리의 마리에타 2구역, 구역회장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조덕성, 바오로’ 씨를 이곳에서 볼 것이라는 것은 100% 확실했다. 며칠 전 구역미사에서 이미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토요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모여서 술과 노래를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도 Three Tenors를 모방한 연기도 있었는데, 조금은 어려운 노래, “Perhaps Love“를 고른 것이 조금은 무리였나.. 가사를 잊고 중단도 되었지만 신부 데레사가 재치 있게 이어받아 불러 주었다. 이때 데레사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반가운 사람들이 더 많았다. 물론 우리 막강한 레지오 단원들이 전원 참석해 주었기 때문이다. 단장님 딸의 경사라서 사실 ‘피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은근히 놀란 것이, 그런 자리는 사실 조금은 ‘젊은’ 취향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단원 자매님들의 ‘형제님(aka 남편)’들을 뵙게 되었다. ‘생각보다’ 첫 인상들이 참 좋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입단한 나의 거의 동년배인 우동춘 형제 부부가 ‘용감하게’ 참석을 하였다. 나이가 너무나 나와 비슷해서 시간만 나면 조금 가까이서 얘기를 해 보려던 참에, 이 자리는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했고, 길지 않았던 시간이었지만 인사치레를 넘어선 진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한 세대가 바뀌는 과정을,그것도 결혼을 통해서 한 가정이 태어나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한 사람의 삶이 마감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이날 아침에는 말기 간암 판정을 받은 지 불과 한달 만에 불과 61세로 세상을 떠난 형제님이 있었다. 그는 다름이 아닌 우리 레지오 쁘레시디움의 부단장 자매님의 작은 시동생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들이 병자기도를 하다가 며칠 전부터는 선종기도로 바뀐, 너무나 빨리 진행된 죽음의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비록 짧은 고통을 겪게 되고, 주위 가족에게 오랜 고통을 주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게 짧았던 이별의 시간은 어떠한가? 예전 같으면 60세가 넘었으니 우선은 살만큼 살았다고나 하겠지만 요새는 사실 빠른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얼마큼 보람 있는 생을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예전에는 깊이 하지 못하며 살았다. 내가 오늘 죽으면 어떠할까? 보람이 있었을까? 알 수가 없지만 살아있는 만큼 동안은 ‘결사적’으로 ‘보람’을 만들며 살고 싶다.

 

용기 형!

김용기, 형.. 형은 내가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형이 경기고 2학년 때, 그러니까 1959년 봄, 우리 집에서 처음 만났다. 참 오래 전이었다. 6학년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용기형을 집으로 데려 온 것이고, 그날부터 나는 용기형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용기형은 그날부터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나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는 나의 방문 가정교사가 된 셈이다. 그런 단순한 인연으로 만났던 용기형은 사실 그 후로 우리 가족에게도 거의 친척이상으로 가끔씩 왕래를 하며 지냈다. 우리들이 용기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1966년 내가 연세대에 입학한 해였다. 그 후로는 완전히 소식이 끊어져서 우리 집에는 거의 ‘전설적’ 인물로 인상이 남게 되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가정교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았다. 대부분 방문, 입주 가정교사들은 대학생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기형은 불과 고등학교 2학년 생이었지만, 우선 내가 국민학생이기 때문에 큰 무리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의 제일 명문고교인 경기고등학교엘 다니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용기형에게도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형의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고학생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제사정이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왜 어머님이 그렇게까지 나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주셨는지는, 사실 그 당시 나의 학교 성적이 중하위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5학년까지는 그런대로 나를 지켜보다가 6학년이 되고, 중학교 입시를 치러야 할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점점 더 심해졌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입시지옥’이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한창 놀기에 바쁜 그 시절이었지만 어찌 우리들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까? 하지만 어머님이 나의 공부를 돌보아 주기에는 너무나 바쁘시고, 누나도 사실 공부에 큰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은 나에게 공부를 분위기를 주질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열심히 한다고 해도, 주위의 ‘놀고 싶은’ 유혹에서 항상 벗어나질 못했고, 그것이 ‘시험위주’의 성적제도에서 항상 중 하위에 머물게 한 것이다. 용기형이 매일 방문 가정교사로 오면서 부터, 바로 옆에 ‘어린 선생님’이 붙어 있으니, 밖으로 뛰어나가 놀고 싶은 유혹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었고, 곧바로 ‘공부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노력을 한 만큼 결과가 온다’ 라는 간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르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 몇 시간은 꼭 용기형과 같이 앉아서 공부를 하니 결과가 안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나라가 조금씩 안정되던 그 당시부터 과외공부라는 것이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조직적이고 상업적인 학원 같은 것은 거의 없던 시절.. 하지만 나같이 개인적인 과외공부보다는 과외선생님 댁에 단체로 모여서 공부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예외적으로 행운아였을지도 모른다. 방과 후에 골목에서 뛰어 놀던 즐거움은 조금 없어졌지만, 용기형과 둘이서 그날 학교공부를 복습하며, 다음날 공부를 예습하는 것은 점점 즐거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거의 그 다음날 시험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6학년, 특히 우리 ‘박양신 사단’ 1반은 가히 시험 전쟁터의 현장을 방불케 해서, 다른 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루 ‘종일’ 시험의 연속이었는데, 아침 첫 시간부터 시험을 보곤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시험에 의해서 곧 좌석의 배치가 바뀌는, 가히 시험 지옥이었던 것인데, 이것은 우리 반 담임 ‘박양신’ 선생님만의 방식이었고 다른 반에서는 이런 방식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박양신 선생님의 ‘수험의 신’, 에 가까운 선생님이었고, 그렇게 일년 내내 우리는 단련을 받았다.

그 당시 이미 대한민국의 학교들은 대강 일류,이류, 삼류 등으로 ‘일본식’ 등급 (지금에야 깨달은 것이지만)이 형성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교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고려대 등이고, 고등학교는 경기고,경기여고, 서울고, 이화여고,숙명여고, 경복고,용산고 같이 거의 서울에 있는 학교들이고, 지방에서도 경북, 경남, 대전, 광주일고 등과 같은 일류들도 있었다. 어떻게 이 같은 학교들이 일류로 평가가 되었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고교는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정도를 보면 될 것이고, 대학교는 취직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민학교도 분명히 이런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일류 중 고교에 합격하는 것을 보면 된다. 하지만 국민학교는 아직까지 별로 등급이 형성되지 않았다. 예외는 덕수 국민학교와 수송, 혜화국민학교였다. 어떻게 이 학교가 그 시기에 이미 일류로 되었는지 과정은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서 ‘부자 집’ 자녀들이 많이 이곳을 다니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따라서 ‘좋은 선생님들, 수험의 신’ 들이 그곳에서 가르쳤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들이 일류 중 고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면 가히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배경에서 내가 다니던 재동국민학교는 어땠는가? 일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바로 밑을 맴돌고 있었고, 수험의 신 박양신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일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박양신 선생님이 재동국민학교를 1류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뒤에는 정말로 일류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학기 초에 성적이 딱 중간 밑을 맴돌았는데, 용기형과 같이 공부하면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거의 10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반에서 자리를 분단 별로 앉게 되는데 이것이 완전히 성적에 의한 배치였다. 1분단은 거의 10등까지 앉고, 다음의 20등까지는 2분단에 앉는 그런 ‘잔인’한 배치였다. 게다가 1분은 딱 가운데 앉혀서 남들이 ‘우러러’ 보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의 잠재적인 심리적 효과를 누가 알겠는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자리의 변동이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는데, 시험에 의한 성적이 그렇게 자주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용기형은 나와 ‘궁합’ 이 잘 맞아서, 제일 큰 목적이었던 나의 학교 성적이 오르고 해서, 우리 집에서는 아주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형을 아주 친척같이 따뜻하게 대하곤 했다. 용기형은 절대로 얌전한 학생은 아니었다. 깡패와 같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 정도의 ‘깡’은 가진 학생이었다. 용기형이 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이 ‘대’ 경기고 학생이니까 그것 만으로 문제가 없었던 것이고, 이때 내가 배운 것은 공부뿐이 아니고, 사실은 조그만 교훈, 모든 일의 결과는 운이나 배경만큼, 노력에도 많이 좌우된다는 간단한 진리였고, 이것은 나중에 내가 사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같이 공부하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기억에는, ‘선거권, 피선거권 논쟁‘, 그것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며 이런 한자로 된 어려운 정치용어로 용기형과 싸운 것이다. 나는 분명히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말했는데, 용기형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논쟁이었는데, 누가 보아도 이것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잘못 기억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논쟁’ 자체가 재미 있어서 내 고집대로 밀어 붙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용기형의 ‘깡’을 몰랐기에 계속 ‘똥’ 고집을 부렸다. 결국에는 용기형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기를 무시 본다는 것이었고, 나에게 따귀를 계속 올려 붙였다. 그 당시는 학교에서도 잘못하면 따귀를 맞는 것은 흔했지만, 가정교사에게 따귀를 맞는 것은 절대적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내가 자기의 ‘고객, 학생’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던 것 같았다. 나도 기가 막혔지만 이것을 집에다 ‘일러’ 바칠 수도 없었다. 그랬으면 그날로 용기형과의 공부는 끝장이 났을 것이고, 사실 관계도 끊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그냥 조용히 잊고 지나서 말썽은 없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용기형은 미안하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아서 더욱 아쉬운 기억이다.

 나의 성적은 계속 1분단의 ‘제일그룹’ 을 유지했지만, 사실 나의 성적은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거의 1~2등까지도 하는가 하면 갑자기 10위로 밀려나는 등 그런 식이었다. 이런 상태로 중학입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용기형은 경복이나 서울 중학교에 응시하라고 했지만 담임 선생님은 아주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도 사실 ‘모험’을 하는 것이 싫었다. 안전한 것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립 중앙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그리로 가버리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원의 반 정도를 졸업성적만으로 뽑던 제도가 있었다. 시험 지옥에서 쉽게 벗어난 것만 해도 나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역시 용기형이나, 어머니는 두고두고 불만이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내가 속했던 1분단의 다른 녀석들이 대거로 경기, 서울,경복중학교에 합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 자신은 후회가 없었다. 재수를 할 가능성보다는 조금은 안전한 것이 편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입시에 재수생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용기형과 가회동 집에서, 중학교 1학년때 1960년 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용기형은 가끔 놀러 왔고 고궁 같은 곳에도 같이 가족과 놀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에서 나의 성적이 좋아서 용기형도 안심하는 듯 했다. 어떨 때는 어머니가 용기형에게 나를 데리고 영화를 보게도 했는데, 그런 시간들이 나는 너무도 즐거웠다. 나에게 형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용기형과 대한극장에서 ‘백사의 결별‘ 이라는 요란한 제목의 미국 영화를 보았는데,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과 데보라 카(Deborah Kerr)주연의 2차 대전 영화였는데,그 것을 보면서 내가 하도 형에게 질문을 해서 조용 하라고 핀잔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용기형을 따라서 경기고교 강당에서 프랑스의 영화,”장 가방(Jean Gavin)” 주연의 ‘잔발잔(Jean Valjean)’을 같이 보았는데,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정말 부자여서 없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극장수준의 영사기까지 갖추고, 가끔 영화, 그것도 외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용기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1961년) 때, 경기고를 졸업하고 대학엘 갔는데, 예상을 뒤엎고 서울대가 아닌 고려대엘 갔다. 왜냐하면 경기고생은 거의 서울대를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그 이듬해 연세대 정외과로 편입을 했는데, 사실 편입이었는지 아니면 새로 신입생으로 입학을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어렴풋이 형이 대입준비를 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게 되어서, 두고두고 나중에 내가 대입 준비할 때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의 입시 문화는 거의 100% 일본식이었을 것이다. 입시준비 잡지도 있었는데, 용기형 시절에는 ‘향학‘ 이란 국내 유일의 입시준비 잡지가 있어서 나도 옆에서 훔쳐보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이 대학입시라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말 ‘전쟁’이었다. 몇 년 뒤에 그 잡지는 없어지고, 새로 ‘진학‘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고3때 나왔다.

 그러다가 내가 중앙중학교 3학년(1962년)이 되고, 고교 입시가 다가 왔을 때, 어머니는 다시 용기형을 부르셨다. 나의 학교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야 말로 ‘일류’ 고등학교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다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3년 전과는 아주 달랐다. 용기형은 이미 대학생(연세대 정외과)이 되었고, 나도 이미 꼬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과 같은 열기는 사라진 것 같고 공부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안전’하게 본교로 진학하기로 결정을 해 버렸다. 이런 나의 결정은 후에도 별로 후회를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사학의 명문 중앙에 정이 흠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용기형과 의 왕래는 가끔이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용기형은 언제나 자신의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외교관의 꿈인 프랑스 파리에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외교 계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입김이 강했다. 꿈이 있고 계속 좇으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우리는 모두 믿었다.언젠가는 유명한 국제적인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요새로 말하면 반기문 같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시나마 용기형이 우리 집에 입주해서 나를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다. 기억에 아주 짧았던 기간이었지만, 나와 같이 자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용기형은 ‘가르치는’ 데는 이미 김이 빠져있었다. 별로 열기가 없었던 것이다. 학교공부보다는 인생공부를 많이 한 셈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그 당시 용기형은 연세대에서 데모를 주동하는 ‘정치 학생’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연세대에 입학을 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만나겠구나 생각을 했지만 용기형은 그곳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용기형은 우리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그 이후 항상 ‘얘, 혹시 용기가 죽은 것 아닐까?’ 하시곤 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지는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아주 길게도 흘렀고, 1999년 초쯤에 인터넷의 Yahoo! 같은 search engine과 학교 동창회의 website등을 통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용기형을 찾아 보게 되었다. 운이 좋게 연세대 동창회에서 용기형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전호번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이 심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이다. 곧바로 어머님께서 그 전화번호로 용기형과 이야기까지 하셨다. 전화번호는 한국산업정보센터 라는 곳이고 용기형은 그곳에서 고문으로 일을 하셨다. 나와는 곧 바로 email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사실, 나도 어머님과 같이 용기형이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던 참에 소식을 들은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고, 옛날의 추억들이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

 email에 있는 사연은 간략하지만 그것으로 대강 용기형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60년대 중반에 데모주동으로 몰려서, 군대로 ‘끌려’ 갔고, 복학 후에는 그런대로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프랑스, 파리의 외교관이 되는 꿈은 접은 듯 했다. 용기형 말씀이, 그런 꿈들을 이루지 못해서 연락을 계속 미루었다고, 참 순진한 말을 곁들였다. 고시공부, 동아일보 입사, 국세청 장기 근무, 대경기계 창업, 한국산업정보센터 고문 등으로 이어지고 결혼을 해서 딸, 아들을 두었는데, 따님은 결혼을 해서 미국 LA에 살고, 작은 아들은 그 당시 (1999년)에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용기형의 부인과도 잠깐 전화로 인사를 드렸는데, 까마득한 옛날에 ‘가르쳤던 제자’라고 알고 계셨다.

 하지만 세월의 횡포는 그렇게 그립던 생각을 곱게 보지 않았다. 너무나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약속을 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나에게도 다시 연락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용기형을 생각하고 안부를 걱정한 것과 같은 정도의 생각을 우리는 용기형으로부터 느낄 기회조차 없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세월의 장난일 것이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추억으로 남겨놓을 것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 연락이 된 후 10여 년이 또 흘렀으니, 용기형도 나이가 거의 70세로 육박을 하지 않았을까? 부디 건강한 후년을 즐기는 용기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다.

 

2011년 9월이여, 사요나라

이제는 최소한 한여름의 냄새가 완연히 가신, 하지만 가을의 맛은 아직 덜 익은 듯한 그런 시점이고, 느낌조차 많이 다른 9월과 10월의 사이까지 왔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둥, 느리다는 둥 하는 말이 지겹게 들려서 그런 것 많이 느끼지 않으려 노력을 한다. 올해 여름은 근래에 드물게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을 안 했다. 그 대신 밀려있는 책들을 비록 해변에서는 아니지만 집에서 실컷 읽어서 큰 후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거의 무의식 중에 생각을 해오던 1950년, 구일오 인천상륙, 구이팔 서울 수복 기념일들도 다 지나갔다.
만약 그 때의 역사를 계속 따라간다면 조금 있으면 UN군이 한 맺힌 삼팔선을 지나 노도와 같이 북진을 하게 될 것이다. 올해는 어쩐지 그 때의 <1급 전범, 민족반역자, 김일성 개XX>를 ‘죽이거나, 사로 잡거나, 만주로 쫓아내려는 국군과 유엔군을 계속 따라가며 그 당시의 역사를 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미 해병대의 장진(Chosin Resevior) 저수지 사투와 흥남 철수, 일월 사일 서울 철수(일사후퇴) 등이 포함될 것이다.

며칠 전, 인터넷을 통해서 중앙고 동창 이성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비대칭적 추억‘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 비대칭적 추억이란 간단히 말하면 사람에 따라서 같은 추억을 서로 아주 다른 정도로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첫 경험한 것이, 10여 년 전, 고교, 대학시절의 친구 이윤기와 연락이 되었을 때였다. 분명히 나의 이윤기에 대한 추억과 그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그 전에는 별로 못 했기 때문에 사실 무척 당황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고 두고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그것은 나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부작용’ 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보다 더 그 당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더 뚜렷하게 기억을 한 것이 사실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습지만 이것은 ‘나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이것을 ‘대칭적인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의 기억과 추억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번에 이성복을 통해서 조금은 느끼게 되었는데, 이미 경험을 한 바가 있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것의 극단적인 case는 한번 알던 사람이 나를 완전히 잊은 경우다. 1974년 경에 시카고에서 잠깐 만났던 연세대(철학과) 동문 신경시 씨 부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나중에 연락을 해 보니, 나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사진까지 보여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은 조금 심한 case라서 나는 물론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기억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잠깐의 인연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아서 그랬을까.. 이것은 사실 조그만 비극이다.

 

구월 하순, GXP-285, GPS, 연고전

9월 21일, 구월의 하순으로 접어들었다. 날씨는, 지난 2 주 동안 가을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첫’ 싸늘함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다만 매일 기대했던 비가 내릴 듯 말듯 하며 내리지를 않아서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인다. 지독히도 가물고 더웠던 여름 동안 앞 쪽의 잔디는 색이 바래고, 숨을 죽이고 죽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파랗게 살아날 것이다. 올해 이곳의 날씨는 다행히 ‘뉴스’가 없이 지나갔다. 다른 곳에 비하면 그런대로 준수하다고나 할까. 과연 이번 겨울 날씨는 어떨지 자못 기대가 된다. 작년에는 정말 춥고,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Grandstream GXP-285 SIP Phone
Grandstream GXP-285 SIP Phone

오늘 며칠 전에 Amazon.com에 order했던 Grandstream GXP-285 (SIP) VOIP phone이 도착했다. 미리 review도 보았고, USERS MANUAL도 이미 download해서 보았기 때문에 생소할 리가 없다. 사실 몇 년 전에 이미 GRANDSTREAM의 VOIP phone adapter를 써본 적이 있어서 눈에 익은 제품이긴 하다. 하지만 진짜 phone은 이번이 처음이다. 몇 달 전에 ebay에서 LINKSYS (Cisco)의 SPA-841 2-line VOIP phone, 쓰던 것을 산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SIP VOIP phone은 그것이 처음이었던 셈이다. 그 동안 이 전화기를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에 Google Voice로 한국에 전화를 했을 때, 너무나 음질이 좋았다. 그러니까 Internet phone의 수준이 완전히 PSTN (analog) phone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VOIP 의 대부분이 softphone (on PC)을 쓰는 사람들이 많고, SKYPE 같은 조금 non-standard technology를 쓰기 때문에 전통적인 Bell phone같은 ‘쓰기 쉬운’ 맛이 덜 하다는데 있다. 하지만 이제 VOIP (특히 SIP compatible) phone도보기와 느낌이 거의 똑 같이 analog phone과 비슷해서, ‘전통적인 전화기’의 남은 수명도 그렇게 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나의 home-office에는 이미 Asterisk-based IP-PBX (PBX-IN-A-FLASH: PIAF)가 있어서 (running on Proxmox Virtual Server), 미국과 캐나다는 Google Voice로 무료로 통화를 할 수 있고, 국제전화도 정말 싸게 사용할 수 있다. 이번에 산 전화기는 비록 값이 저렴한 것이지만 (under $50) Home-Office에는 적당해서, 연숙의 office에서 쓰게 할 예정인데, 가끔 ‘음질이 형편없는’ cell-phone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안정되고 깨끗한’ 음성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좋을 듯 하다.

GPS' dead battery
GPS’ dead battery

몇 년 전에 크리스마스 때 연숙에게 선물로 준 GPS가 별로 쓰지도 않았는데 charge가 되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power cord (usb or adapter)를 써야만 이것을 쓸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GPS를 별로 쓸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가끔 쓰려고 하면 이런 것이 짜증이 나는 것이다. 고급 차를 타는 사람들은 요새 아예 GPS가 dashboard console에 있어서 쓰기가 참 편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것을 살 필요까지는 못 느끼고.. 이럴 때는 역시 ‘공돌이 정신 (hacker mentality)’이 발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열어보게’ 되었다. charge가 안 되니까 이것은 rechargeable battery가 ‘죽은’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죽었는지, 역시 이 battery도 Made in China였다. ‘조잡한’ 것을 썼을 것이다. 이것은 portable device에서 많이 쓰는 3..7V의 Polymer type인데, 암만 Internet을 뒤져 보아도 이것과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비슷한 것을 찾아도, 값이 ‘장난’이 아니게 비쌌다. 그렇게까지 해서 고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GPS를 버리기도 그렇고.. 그러다가 얼마 전에 거의 못쓰게 된 Canon digital camera의 Battery가 생각이 나서 보니 거의 power spec이 비슷했다. 3.7V 1200mAh! 모르긴 몰라도 이것을 쓸 수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battery terminal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Soldering 을 해야 하는데, 워낙 terminal이 작아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계속 궁리를 하면 무슨 idea가 생길지도 모른다.

오늘, 요새 거의 자취를 감춘 ‘엽서’ 한 장이 배달되었다. 보낸 사람은 Law Office of Se Ho Moon, PC (Suwanee, GA)라고 인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스와니 (아틀란타 동북단의 suburb)에 있는 ‘문세호 변호사‘ 가 보낸 것이다. 요새 변호사 개업을 했나.. 하며 읽어보니 “친애하는 연세대학교 동문 여러분,”으로 시작이 된다. 아하! 연세대 동문회에서 보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아, 이맘때면 연례 연고전이 있던 때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9월 25일에는 골프대회, 10월 2일에는 구기대회. 나는 골프를 치지 않으니까 그날은 관심이 없지만, 구기대회에는 조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연고전 참가를 한 것이 1997년 쯤이었다. 그러니까, 15년 전이 되었다. 그 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연말 연대 송년회까지 참석을 했는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완전히 잊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이사온 후 나는 사실 동창회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 당시에는 가까이 알고 지내던 연대 이원선 동문이 그 해 동문회 회장이 된 바람에 조금은 손 쉽게 참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처음 나갈 때 모르는 동문을 만나는 것이 물론 반갑기는 하지만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것도 사실이라서 그렇게 참가를 안 한 것도 이유가 된다. 이원선 동문은 68학번 연대 기계공학과 출신인데, 내 친구였던 (타계) 같은 연대 기계과 김호룡을 알고 있었고, 우리와 같이 아틀란타 천주교회에도 같이 나갔던 동문이었다. 아쉽게 그 이후 서로 소식이 거의 끊어지게 되고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거의 잊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요새는 내가 레지오에 입단하면서 성당에 갈 수가 있어서, 가끔 이원선씨의 부인을 뵙곤 하였지만 끝내 이원선씨는 볼 수가 없었다. 올해 이 연고전 엽서를 받고 조금은 생각을 하게 된다. 거의 숨어서 살다가 조금씩 밖으로 나간 김에 올해는 한번 연고전 ‘소프트 볼’ 대회에 참가하거나 구경을 가 볼까 하는 생각이다. 그곳에서 운동과 놀기를 좋아하는 이원선 동문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dream dream

 
Dream Dream – Everly Brothers – 1960

반가운 꿈, 어제 밤에는 오랜 만에 조금은 뚜렷한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가끔 ‘좋은 꿈’은 다시 꾸고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않고 살았다. 하지만 꿈이란 것, 지금은 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99.9% 예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엉뚱하고, 말도 안 되고, 엉터리’ 같은 주제의 꿈을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오래 된 것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classic한 것들도 몇 가지가 있고, 나는 그것을 계속 소중하게 기억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 ‘좋은 꿈’ 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것은 정말 ‘이상한’ 것도 있다. 남들도 그렇겠지만, 좋은 꿈은 대부분 깨고 나면 너무나 깬 것이 아쉬워서 섭섭하고, 나쁜 꿈은 반대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반갑다. 이렇게 꿈도 참 공평한 것이다.

한창 자랄 적에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어서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의 키에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떨어지는 그 자체는 대부분 ‘날라서 사뿐하게’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생생한 상상할 수 없이 색깔이 ‘진했던’ 그런 ‘초원과 하늘’ 을 본 것인데 어찌나 그 색깔들이 그렇게 ‘찐~’ 하던지.. 지금도 머리에 남아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공상과학 만화, 특히 어릴 적에 완전히 심취했던 ‘라이파이, ‘철인 28호‘, 왕현의 ‘저 별을 쏘라‘ 등의 만화를 볼 당시의 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제일 재미있던 것은 ‘잠자리 채’ 로 ‘잠자리 비행기’를 잡던 꿈이었다. 그러니까 ‘방충망’으로 ‘헬리콥터’를 잡아 채는 꿈이었다. 그 당시 제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 ‘잠자리 비행기’ 였는데, 그것을 잠자리채로 결국은 하나를 ‘잡았다’. 잠자리채 속을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장난감 같은 것이었고 손으로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그때 처음, 이런 멋진 꿈에서 잠을 깨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이 ‘좋은 꿈’ 중에 하나였다.

 청춘의 절정기에는 ‘성장, 남성 male’ 호르몬(hormone)의 영향으로 많이 ‘이성을 그리는 환상’에 가까운 꿈을 많이 꾸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에로틱 fantasy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남자형제가 없던 나는 이런 것을 그저 속으로만 넣어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하면 ‘건강’한 방법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남자 친구들과도 그런 경험을 나누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끔 내가 ‘변태’가 아닐까 하는’틀린’ 걱정도 했기 때문이다.

10대에서 20대로 인생의 초기에 해당하던 그 시기다. 그때의 ‘최고’의 꿈은 역시 ‘지적이고, 멋진 여자’가 나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준 그런 류인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기쁨의 ‘순간’에 깨곤 하였다. 좋은 꿈은 항상 그렇게 깨지곤 했다. 이런 꿈은 결혼 훨씬 후에도 가끔 꾸었고, 결혼 전과 달리 깨고 나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서 전과같이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 자체는 정말 신선하고, 가벼운 흥분을 주는 그런 것이었다.

 20대에 나를 괴롭힌 꿈은 다른 것이 아닌 ‘가위 눌림‘ 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면서 이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당시 시카고에서 알고 지내던 어떤 형 뻘이 되는 일본사람 (히다카 켄조 상)이 듣더니 자기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역시 ‘고민’은 나누어야 가벼워 지는가.. 이 꿈은 무엇인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목이 조이는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몸 전체가 ‘천천히, 완전히’ 굳어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일본인 켄조 형은 이럴 때, 절대적으로 남에게 알리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깨어나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이런 꿈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지만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의학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몸이 허약할 때 생긴다고 했지만, 나는 전적으로 다 믿지는 않는다. 과학적인 것 이외에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꿈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The Exorcist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일주일 동안 밤에 불을 켠 채로 잔 괴로운 경험이 있어서 혹시 그것도 한 몫을 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악몽’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끔 괴롭힌 것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벗겨지는,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대머리’가 되는 꿈이었다. 물론 50대에 들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빠지는 머리카락에 겉으로는 나타내고 싶지 않지만 암암리에 신경이 쓰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대머리가 된 꿈은 꿈 속에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깨고 나면 꼭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머리가 되지 않고, 점차 ‘서서히’ 빠진다는 사실만은 이런 꿈에서 깨어나면 나를 조금 위로하곤 하였다.

하지만 진짜 악몽은 이것이 아니다. 이 악몽은 이제 나의 ‘친구’가 된 정도로 역사와 ‘실감’을 자랑한다. 이것은 학교에 대한 것, 그것도 ‘공부, 성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성적’이 얼마나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주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지난 20년 동안 거의 정기적으로 겪는 악몽인데, 악몽의 특징인 “깨어 났을 때의 안도감” 은 이것이 최고다. 1980년 부터 PBS TV에서 재방영이 되었던 The Paper Chase..란 TV시리즈 (드라마)가 있었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 초에 소설로 나왔고, 곧 영화화가 되고, 1978년부터 CBS TV가 드라마화 한 것인데 한국에서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고전’이 되었고, 특히 1980년, 신혼 초에 콜럼버스(오하이오 주)의 학교근처 1 bedroom Riverview Apartment에서 연숙과 같이 일요일 아침마다 침대에 누워서 빠짐없이 PBS TV로 이것을 보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Prof. Kingsfield & Hart in The Paper Chase, 1978

이 드라마 첫 회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었던 ‘진짜’ 경험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Hart)이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에 ‘간신히’ 들어가서 그 첫 강의에서 겪는 ‘고통’은 가히 dramatic한 것이다. 호랑이 같은, 킹스필드 교수(Prof. Kingsfield)가 모든 것이 준비가 덜 된 신입생(하트, Hart)을 심리적으로 거의 ‘죽이는’ 것이다. 급기야 주인공의 꿈에서 교수가 나타나 ‘진짜로 무덤 속으로 넣는’ 것 까지 경험하는 것인데, 그 정도면 시험과 그에 따른 성적(표)으로 인한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극치의 수준이 아닐까? 문제는 내가 그와 거의 비슷한 꿈을 ‘아직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지난 30년 이상 꾼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정말 괴로웠는데, 지금은 사실 ‘완전히’ 익숙해져서 견딜 만 하고, 심지어는 꿈에서 깰 당시의 ‘안도감과 기쁨’ 때문에 기다릴 때도 있다. 아~ 내가 지금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렇게 기쁘고, 무슨 구원을 받은 것 같은 기쁨까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꿈일 것이라, 체념하면서 오래 살았는데 우연하게도, 가깝게 지내던 서울고, 서강대 출신 최동환 씨가 나와 비슷한 꿈을 꾼다고 들은 후부터 조금은 안심까지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꿈은 위에 말한 드라마와는 다르게 특별한 교수와의 문제에 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과목을 듣는데 전혀 공부와 시험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되었을 때의 그 불안과 고통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에 그런 경험을 몇 번이나 했고, 그 후 미국에서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주기적으로 그런 ‘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에 완전히 뿌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고 있는 이 괴로운 잠재의식을 어떻게 없애 버릴 것인가? 나는 모른다.

겉으로만 돌면서 나를 피해가던 종교, 신앙에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초자연적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중에는 꿈도 포함이 되었다. 인생, 역사, 자연, 거기에다 꿈 등이 전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을 사실 기다리며 즐긴다. 또 하나, 덤으로 나와 같이 나란히 살아가는 나의 인생과 ‘역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립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꿈에서 기다린다. 그 중에는 나를 거의 잊고 사는 나의 사랑하는 누님과,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나는 오늘, 내일 의 꿈속에서 다시 기다린다.

 

Ohio State, First Years (1)

Ohio "Buckeye" Stadium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 나는 1977년 12월 초에 시카고에서 나의 모든 짐을 Plymouth Fury에 싣고 이곳에 도착했다. 같은 해 9월경에 한번 온 적이 있어서 그렇게 낯 설지는 않았다. 그리고 ColumbusI-80 interstate highway로 지나간 경험이 많이 있어서 더더욱 먼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은 그 해 가을학기, Fall Quarter에 입학을 했어야 했는데 admission office의 사무착오로 한 학기를 기다려야 했다. 대부분의 graduate course가 가을학기에 시작이 되었지만 한 학기 늦는다고 그렇게 불편할 것도 없어서 그냥 한 학기를 편히 쉰 셈이다. 나는 그 당시 그렇게 easy going, 조금 부정적으로 말하면 ‘급할 것 없다’는 자세로 살고 있었다.

OSU의 graduate school로 오게 된 것은 조금은 우연이었다. 특별하게 오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우선 application fee가 없었던 것이 첫째의 인연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저 그것도 한 가지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 학교 electrical engineering(EE) program의 brochure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진 중에 일렬로 늘어선 ‘거대한’ radio telescope (전파 망원경)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 EE department의 lab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Carl Sagan의 billions of billions of stars.. 에 심취해 있던 시기였고 extra terrestrial(ET)에 관한 것들이 유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런 것들이 ‘어쩌다’ 나를 그곳으로 가게 만들었다.

이 학교는 그 ‘덩치’가 아주 컸다. 단일 캠퍼스로는 학생 수 50,000 이상인, 아마도 미국에서 제일 큰 캠퍼스에 속했다. (UT Austin이 제일 크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한국유학생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큰 학교는 좋은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그 전까지 한국유학생이 거의 없었던 학교를 다녔던 이유로 나는 사실 큰 학교가 좋았다. 덜 외로울 거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말을 주위에 하면 즉시로 ‘야.. 외로울 시간이 어디 있냐?’ 하는 직격탄이 꼭 나오곤 했지만.

비록 radio telescope의 사진에 반해서 오긴 왔지만 나의 진짜 passion은 그것이 아니고 (feedback) control system이었다. undergraduate에서 나는 이미 advanced control system에 아주 심취해 있었다. 특히 그 당시는 microprocessor(8080-class)의 등장으로 digital control system의 매력이 상당하던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OSU 대학원 한국 유학생회장인 김광철씨에게 연락을 해서 수고스럽지만 rooming house(자취방)를 알아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갈 전기과(Dept of Electrical Engineering)에 있는 한국유학생에게도 연락을 부탁하고 있어서 정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내가 도착한 날이 12월 초였는데 모든 것이 완전히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 OSU campus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Summit street에 내가 살 자취 집으로 가 보니 한마디로 환경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때의 나이에는 사실 모든 것들이 adventure처럼 느껴져서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젊음에 따른 ‘자연적인 낙관성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기시작까지는 사실 한달 이상이 남아있고 그 나이에 완전한 자유의 12월은 느낌이 아주 좋았다. 도착하자 곧바로 학생회장 김광철씨의 연락을 받았는데, 주말마다 학교체육관에 모여서 배구를 한다고, 그리고 그곳에 전기과 학생들도 나온다고 귀 띰을 해주었다. . Lane Avenue에 있던 실내 체육관(Jesse Owens?) 으로 가 보니 한국유학생들이 나와서 배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 중에 전기과에 있던 유근호씨, 이재현씨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학과의 이규방씨도 거기서 처음 만났다.

유근호씨는 나보다 한두 살 위였고, 이재현씨는 반대로 한참 밑이었다. 육사출신의 현역 육군장교인 유근호씨는 성격이 직선적이고 소탈해서 금새 친해질 수 있었고, 이재현씨는 막내 동생 같이 순진한 청년이라 호감이 갔고, 무엇보다도 내가 속한 전기과에 있어서 이들과 더 가까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이외도 꽤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여학생들도 있어서 조금 색다른 느낌도 주었다. 이 당시 한국유학생(대학원)의 숫자는 아마도 100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학생회장 김광철씨도 만났는데 약학대학에 다니고 테니스를 프로처럼 치는 유학생인데 부인도 같이 공부를 하는 유학생부부였다.

이렇게 콜럼버스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12월 달에는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일 기회가 그런대로 많았다. 특히 자주 모인 곳은 Frambese St.에 있는 rooming house였는데, 이곳에 내가 알게 된 유학생들이 많이 몰려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살았던 사람은 유근호, 안서규, 이규방, 이재현, 국찬표 제씨 등등이 생각난다. 배구를 할 때, 모였다가 우르르 몰려서 그곳으로 가서 놀곤 했다. 나의 자취방은 이곳에서 그런대로 떨어져 있어서 나는 항상 차를 타고 가곤 했다. 이들은 대부분 온지가 한 학기밖에 되지 않아서, 오랜 만에 한국에서 바로 온 ‘싱싱한’ 유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신선하고 색다른 기분을 주었다.

이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 이규방 씨와 안서규씨, 나보다 나이는 한 둘이 밑이었던 것 같지만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이규방씨는 대전고, 서울대 경제학 전공이고 안서규씨는 서울고, 서울대 출신으로 이곳에서는 Industrial Engineering을 공부한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은 미지의 인물인 국찬표씨라는 사람, 아마도 경영학 전공이었나. 특히 이 분의 이름이 기억나는 것이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극장표’라고 농담을 한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미혼이었지만 유근호씨와 국찬표씨는 기혼이라고 했다. 둘 다 배우자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때 유학생 연말파티가 두 군데서 있었는데 나는 이 새로 사귄 그룹덕분에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어울릴 수 있었는데, 특히 내가 차를 가지고 있어서 빠질 수도 없었다. 유학생 연말파티에서 인상적인 것 중에는 약학대의 김미영씨, 얌전하게 보이던 분인데 춤을 기가 막히게도 추었다. 여기서는 그날 신시내티에서 올라온 중앙고 후배 토목과 고광백을 만났다. University of Cincinnati에서 transfer를 해서 그날 이곳에 도착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콜럼버스 한인회주최 연말파티도 가보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교포사회, 한인 교수들을 포함해서 다 보게 되었다. 그 당시 한인회장은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최준표씨였는데, 국악의 퉁소를 독주하는 재주를 보여주었고 특이했던 것은 사회를 이규방 씨가 보았다는 것이다. 이규방 씨는 그 이후에도 이야기 거리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유근호씨(울고 넘는 박달재)와 안서규씨(댄서의 순정) 모두 나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 모두 ‘한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게 놀아서 아주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Harrison House에서 여자 유학생들과..1977년 12월
Harrison House에서 여자 유학생들과..1977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여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 그들이 몰려 살고 있던 Harrison House란 off campus 고층 아파트에 한 그룹이 놀러 가기도 했다. 그것이 기억에 뚜렷한 것이 사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남자 중에는 전기과 이재현씨, 이규방 씨(빠질 수가 없는), 미남형 오용환씨, 그리고 여자 중에는 김영라 씨, 백추혜 씨, 김미영씨, 최희경씨, 김진수씨 등등이 있었다. 김영라 씨는 한국의 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재원씨의 딸이고 서양미술사를 전공한다고 했다. 백추혜 씨는 이화여대 영양학과 출신, 김미영씨, 최희경씨, 오용환씨는 모두 서울대 약학대 출신이고 전공이었다. 이 중에 최희경씨와 김미영씨는 나중에 내가 약학대학에서 RA(research associate)를 할 때 가까이서 보게 된다.

이 중에 이규방 씨는 학기가 시작되면서 계속 우리들(전기과 유학생들)과 가까이서 어울리게 된다. 공부하러 숫제 우리들이 있는 EE graduate student office로 거의 매일 오곤 했다. 그는 비록 경제학도였지만 우리와 어울리는데 그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대전고, 서울대, 한국은행을 거친 두뇌형인데, 내가 봐도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었다. 그만큼 말도 많아서 자주 구설수에도 오를 정도였다. 이곳에서의 인연으로 나중에 백추혜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백추혜 씨는 알고 보니 다른 인연으로 아내 연숙과 이대 영양학과 선후배 간이고 조교, 학생 사이로 알고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일류’학교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경기,서울,경복고 출신과 서울대 출신들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특히 대학교는 서울대가 압도적이었고, 나와 같은 연대출신은 그 당시만 해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2년 뒤, 1980년 유학자유화를 계기로 이런 통계는 많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유근호씨(육사), 이재현씨 (Rutgers)같은 비서울대 출신만 보면 더 가까움을 느끼곤 했다. 그 당시 전기과에는 위의 두 사람 이외에 공부가 거의 끝나가던 이용한씨, 김태중씨가 있었다. 이 분들과는 사실 거의 교류가 없었다. 이용한씨는 내가 나중에 일을 하게 될 약학대학을 통해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

1978년 나의 첫 학기는 겨울학기여서 그런지 눈을 동반한 추위가 기억에 남고, Dreese Lab에 있는 EE student office에서 완전히 밤을 지새며 열심히 공부를 하던 것이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식사도 Jones Tower근처에 있던 카페테리아에서 세끼를 먹으니까 사실 우중충한 rooming house으로 자러 가는 것도 사실 귀찮았다. 유근호씨, 이재현씨, 그리고 undergraduate에 있던 고윤석씨 (이들 모두 전기과) 등이 같은 방에서 공부를 했는데 여기에 경제과 이규방씨가 특이하게 우리들과 같이 공부를 하곤 했다. 안서규씨는 Industrial Engineering 전공인데 건물이 바로 전기과 옆에 있어서 가끔 그의 office로 놀러 가곤 했는데, 그 office가 으리으리하게 넓고 커서 무슨 사장실을 연상시켰다. 일개 대학원생이 어떻게 그런 방을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그는 ‘정치적인 재주’ 를 가진 듯 했다. 우리들과 어울릴 때도 ‘무작정’ 어울리지는 않았다.

다른 과의 유학생들은 식당에서 만나게 되는데 항상 같은 table에 모여서 먹곤 했다. 다른 나라 유학생들도 그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니까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때, 생각나는 사람들.. 수학과의 최봉대씨, 금속과의 최호진씨, 농업경제과의 노영기씨.. 이중에 최봉대씨는 나중에 약학과의 김미영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들은 물론 대부분 미혼자들이고 기혼자 부부들은 거의 학교 대학원 아파트, Buckeye Village에서 살았다. 나중에 나도 이곳에서 살게 되지만 이곳은 값도 저렴하고, 학교 bus가 있고, 주거환경이 아주 좋았다. 우리는 유근호씨가 이곳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이중에 생각이 많이 나는 사람, 고윤석씨.. 어찌 잊으랴.. 나이는 나보다 밑이었지만 아주 건장하고 세련된 친구다. 고등학교 때, 조기유학으로 이곳에 와서 지금은 EE undergraduate(학부)의 졸업반이었다. 이미 기혼자였는데, 부인은 연대 출신, 연상의 여인 (나의 연대(사학과) 선배)이었고, OSU의 Admission Office에서 일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학벌, 이력, 신상’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 때문인지 대부분이 대학원생들인 우리들과 어울리고 그 인연으로 우리가 쓰는 전기과 대학원생 office를 같이 쓰게 되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그 부부가 사는 Riverview apartment로 초대를 받아가서 후하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계속)

 

그 당시의 즐겨듣던 hit oldie,

Do It Or Die by Atlanta Rhythm Section

 

 

Best 5 of ’68’s

가끔 생각을 한다. 내가 살아온 기나긴 세월 중에서 제일 즐겁게 기억이 되는 한 해를 고르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물론 앞으로 그런 질문을 받을 기회는 사실상 없을 듯 하지만, 이 질문은 내가 나에게 하는 것이니까 상관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는 sixties 중에서도 1968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해는 국제적으로 미국주도의 월남전이 본격적으로 확전(擴戰, escalation)으로 치닫고 있었고, 동서냉전이 언제라도 핵전쟁으로 터질듯한 그런 완전한 미국,소련의 양극체제의 절정상태에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조국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양분되어 양쪽 ‘주인’의 제2차 대리 전쟁이라도 치를 듯 칼을 갈고 있었고… 북녘의 <민족반역자, 전범, 개XX!> 김일성은 4.19혁명 때의 절호의 기회를 잃은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나의 스무 살 생일이었던,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을 보내 박정희를 죽이려 했다.

이런 것들, 즐거운 기억들은 아니지만 그때의 나이가 딱 20세, 그 나이에 그런 것들의 ‘심각성’을 제대로나 알까? 철없고, 걱정 있어도 몇 시간 후에는 잊고, 모든 것이 솜사탕 구름처럼 느껴지는 그런 시절이 아니던가? 그 당시 과연 우리를 걱정이나 우울함에서 피난시켜주던 것들은 과연 무엇들이었을까?

유치하고, 순진하던 나이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사실 그렇게 큰 것들이 아니다. 아주 작고, 단순한 것들, 자연스러운 것들.. 그 중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것은 아마도 이성에 대한 ‘요상한’ 감정이 아닐까? 사람마다 다 그것을 처음 심각하게 느끼는 나이는 조금씩 다를 것이지만 나는 ’68이 바로 그런 해였다. 이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정, 그것은 흔한 말로 사랑이 아닐까.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를 알고 사귀게 되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은 이성을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최소한 우리가 겪었던 그 시절, 그때에는.

그 당시 이성을 포함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시절의 다방문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음악감상실, 다과점(빵집) 등도 있었지만 제일 손 쉬운 곳은 역시 다방이었다. 요새야 커피 맛을 따라 가겠지만 그때는 분위기 ‘맛’이 더 중요했다. 여러 세대별로 가는 곳들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그곳의 공통적인 서비스 중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휴식공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경험하게 되는 각종 ‘젊은 음악’들.. 그것이 사실 우리에게는 그 멋 모르던 시절의 생명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젊은’ 경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가 나에게는 1968년, 연세대 2학년 시절.. 그때 ‘일년’의 추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돌아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즐기고’ 싶은 심정, 그것이다. 나의 주위에서 맴돌던 친구들, 그 중에는 여자들도 있어서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반려자로써의 여자’ 같은 생각도 미리 느낄 수 있었다. 비록 학교 공부는 조금 시들해 졌지만 그렇게 큰 후회는 안 한다. 인생 공부로 보충을 했다고 위로를 하니까.

그 당시 다방이나, 음악감상실, 남녀클럽 등을 거치면서 열광하며 듣고 즐기던 주옥 같은 음악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듯 거의 미국의 60년대 반전, 반항세대의 음악들이다. Folk, Rock, Psychedelic, Soul.. 등등.. 나는 이런 곡들을 아직도 많이 듣는다. 이런 곡들을 통해서 그 시절을 생각하게 되어서 좋은데, 특히 우울할 때는 아주 특효약이 되었다. 그 시절 우리를 고민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주던 역할을 이 나이에 아직도 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나의 Best 5 of ’68 은….

 

 

Daydream Believer – The Monkees

60년대 중반부터 유명해진 그룹, The Monkees는 4명 모두들 독특하게 생긴 모습에다 아주 따라 부르기 쉬운 곡들이 주류인데, Believer 시리즈 2탄인 이 곡은 lead가 Dolentz에서 Jones로 바뀌어서 그런지 아주 느낌도 다르다. 우리가 들을 때는 69년에 더 유명해진 곡이었다. 특히 이 곡이 나올 무렵 VUNC(유엔방송)에서 pop song을 담당하고 있던 여자disk jockey가 이 곳을 무척 좋아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Delilah – Tom Jones

고향의 푸른 잔디(Green green grass..)로 미국의 hit chart를 석권한 영국인, Tom Jones의 hit 제2탄.. 이 곡은 사실 어린아이들로부터 나이 든 사람들까지 다 좋아하던 특별한 곡이었다. 아마도 그 주제가 성경의 Samson & Delilah에서 따온 것 같은 느낌을 주어서 그랬을까. 우리가 들었을 무렵에는 국내의 내노라 하는 가수들도 다투어 한국어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역시 ‘압권’은 조영남의 열창이 아니었을까?

 

 

Am I That Easy To Forget – Engelbert Humperdinck

미국의 country ‘Release Me‘, 와 더불어 크게 히트한 노래였다. Tom Jones와 쌍벽을 이루던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folk/rock/soul 같은 것들을 제치고 독특한 vocal로 그들의 genre를 굳세게 지켜서 이제는 거의 classic이 되었다. 그 당시 여자(친구)에게 ‘차였던’ 나의 심정을 구구절절 잘도 표현을 해서 이직도 기억에 남는다.

 

 

Hey Jude – The Beatles

그 많은 그들의 hit song중에서 이 곡은 나에게 a best에 속한다. extra long format도 그렇고, 그들, classic Beatles의 절정기에 부른, 4명만의 독특한 harmony, McCartney의 lead는 비교적 ‘둔탁한’ background instruments와 정말 잘 맞아떨어진다. 특히 stage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 Yesterday와 버금가는 예술성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곡을 시도한 국내가수는 그 당시 하나도 없었다.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Don’t Forget To Remember – The Bee Gees

forget-remember-don’t: 아주 oxymoron적인 제목이다. 이들은 사실 비틀즈와 쌍벽을 이루는 위치였지만 아주 스타일이 달랐다. 미국 blues/rock 영향을 상당히 받은 비틀즈와 달리 이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부드럽고, 목가적인 화음으로 일관을 했다. 그 중에서 이 곡과 First of May는 비슷한 느낌을 주어서 classic의 경지까지 느끼게 한다. Guitar로 따라 부르는 것이 비교적 쉬워서 그 당시 우리들의 기타 standard number였다. 하지만 70년대에 disco로 돌변을 한 그들의 모습에 실망.. 그 이후의 모습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다.

 

 

1970년 4월 13일

On April 13, 1970, Apollo 13, four-fifths of the way to the moon, was crippled when a tank containing liquid oxygen burst. (The astronauts managed to return safely.) — today’s New York Times

오늘 뉴욕타임스 이메일 뉴스를 잠깐 보니 위의 ‘오늘의 역사’ 구절이 눈에 띄였다. 1970년 오늘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유명한 Apollo 13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13이란 숫자가 두 번이나 반복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나를 보게 된다..

어찌 잊으랴.. 뚜렷이 기억을 한다. 나는 그 당시 top news였던 아폴로 13호 폭발사고를 전혀 몰랐던 것을 기억한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그 뉴스의 심각성을 아직도 피부로 느끼지 못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그 뉴스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이면 지금에 비하면 거의 ‘원시적’인 뉴스 매체, 그러니까 신문, 라디오, 흑백 TV가 전부였던 시절이지만 그것을 못 듣고, 보고 하는 것은 특히 그 나이 (20을 갓 넘은)에 힘들었을 것이다.

1970년 4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운해를 내려다보며..
1970년 4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서 운해를 내려다보며..

사실, 그 당시 나는 죽마고우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깊은 산중에 있었다. 그렇게 이유는 간단했다. 그 해 초에 아주 오랜만에 재회를 한 원서동 죽마고우, 손용현과, 다른 원서동 친구, 박창희.. 그리고 나 셋은 아직도 눈이 쌓였던 지리산 능선 종주등반 중이었다. 라디오를 가지고 갔지만 뉴스 같은 것을 들을 정도로 편한 등산이 절대로 아니었다. 예상을 뒤엎고, 지리산 주 능선에는 아주 깊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서 걷는 자체가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렸다. 화엄사에서 출발을 해서 노고단을 거쳐서 계속 천왕봉을 향해서 능선을 따라 걷고 걸었다. 그때 처음 주능선 등반의 매력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 유명한 지리산의 운해(雲海)란 것을 눈(雪)과 함께 즐긴 것이다. 그때 생각나는 곳들, 노고단, 토끼봉, 지보등, 세석평전.. 천왕봉에서는 다른 코스로 남원쪽으로 하산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 등반은 그렇게 흔치 않았던 것인지, 하산을 하니까 경찰에서 나와서 입산 기록부에 우리의 이름을 적기도 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속세’에 나와보니 참 기분이 달랐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을 떠난’ 경험을 한 것이다. 그 당시 나이에 일주일 동안 세상 돌아가는 것과 차단이 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으니까. 일주일 동안의 뉴스 중에 아폴로 13호에 큰 사고가 난 것과, 서울의 ‘와우 아파트’가 붕괴된 것들이 있었다. 사실 와우 아파트 사고가 우리에겐 더 큰 뉴스였다. 그때 서울 시장이 김현옥씨였는데 그 사고를 계기로 ‘불도저’ 스타일의 밀어 부치는 행정에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다. 그 것이 1970년 4월 이맘때 쯤이다. 조금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면, 지리산 등반은 나와 박창희가 연세대 전기과 4학년 졸업여행(제주도)을 빼먹고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는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졸업여행이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지리산 등산이야 그 후에 갈 수도 있었던 것이었지만 졸업여행은 그야말로 딱 한번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이런 후회될 만한 일들이 그 후에도 계속이 되었지만, 어찌하랴.. 그때는 절대로 후회란 것을 생각도 못하던 젊은 시절이었으니 말이지..

그 당시를 회상하면 꼭 생각나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지리산의 고요 속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다시 시끄러운 고향 서울로 돌아와서 위의 등산친구 셋이 어느 다방에서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때 우리의 아지트는 중앙극장의 길과 퇴계로가 만나는 곳에 있는 지하다방(절대로 이름을 잊었다) 이었는데, 손용현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웃기는 것은 얼굴이 전혀 안 보이고 하얀 셔츠의 상체만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투명인간’ 영화의 그런 모습이었다. 이유는 용현이가 원래 얼굴이 조금 거무틱틱한 편인데, 이번에 지리산 종주등반을 할 때 쌓인 눈 때문에 완전히 타버리고, 그 당시 지하다방들이 대부분 어두워서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박창희가 나중에 와서 똑같이 그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고, 두고두고 그것이 우리의 ‘일화’로 남게 되었다. 그 당시 다방에서는 손용현이 제일 좋아하고, 우리도 열광을 하던 CCR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Who’ll Stop the Rain이 우렁차게 나오고 있었다.

 

Who’ll Stop the RainCreedence Clearwater Revival

 

주민등록번호, 자비의 모후

동창회 가입을 하는데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라고? Hell, NO! 참 망할 놈의 세상이 되었다. 동문 친구의 연락처를 알아보려고 연세대 총 동문회 (http://www.yonsein.net) 를 반갑게 찾아서 회원등록을 하려다 아주 씁쓸한 심정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개 같은 case란 말인가? 이곳의 social security number같은 것을 왜 동창회에서 물어 봐야 하는가 말이다.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제는 가입해 준다고 해도 할 마음이 없다.

자비의 모후… 오늘은 드디어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소속의 “자비의 모후” 프레시디움 (레지오 마리애의 제일 작은 모임의 단위: 로마군단의 명칭에서 유래) 정기회합에 참가를 했다. 이것은 나로서는 참 힘든 일을 한 셈이다. 3년간의 연숙과 같이 집에서 한 묵주기도의 결실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묵주기도와 이렇게 공동체에서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 같다.

내가 가입한 “자비의 모후” 에는 현재 모두 자매님들 뿐이다. 그리고 거의 나의 인생선배들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모처럼 푸근한 기분을 느꼈다. 누님들을 한꺼번에 많이 만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분들로부터 나는 신앙적으로 인생의 선배로 많이 배우고 싶다. 3개월의 “대기기간”을 마치면 정식단원이 되는 것을 결정한다고 한다. 이제 나에게 하느님을 보는 또 다른 “길”이 생긴 것이다.

 

추억의 가을, 또 시작인가..

단풍 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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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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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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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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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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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종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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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가을임을 며칠 동안 진하게 느낀다. 거의 흑과 백처럼 하루아침에 여름에서 가을이 된 것이다. 사실 서서히 기온이 내려가야 나무들도 겨울준비를 하여야 하는데 이렇게 급작스러우면 그들도 적응하기 쉽지 않으리라. 그래서 올해는 단풍도 예년처럼 예쁘지 않으리라는 우려다. 거기다 부족했던 비까지 평균치를 채우려고 한다면 완전히 망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하늘을 보니 옛날 옛적 고국의 국화가 만발할 때 국전이 열리던 가을의 하늘이 생각났다. 바로 그런 때의 날씨인 것이다. 특별히 그때는 남녀가 같이 어울려서 국전엘 갔었다. 1968년 가을이었다 그 당시 잠깐 있었던 연호회라는 조그만 그룹이 단체로 국전엘 갔던 것이다. 하지만 사진이 없다. 그러니까 완전히 나의 머리에만 사진이 조금 남아있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가을을 보냈지만 그때, 1968년의 가을이 또 가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당시의 인물들.. 연호회 남녀회원들,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어떠한가. 다행인 것은 그 중의 중심적 인물인 양건주가 서울에 건재하다는 사실이고, 그의 부인이 멤버중의 하나인 황인희씨라는 사실이다. 이것보다 더 든든한 사실은 더 없을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 중에 윤인송, 김태일 등이 다시 보고 싶은 친구들이다. 멤버의 한 사람, 김진환은 슬프게도 너무나 일찍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슬프다. 한없이 다정하던 멤버 친구였다. 사실은 남자들 보다 도 여자회원들이 더 궁금하다. 이선화씨는 아직도 Iowa City에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신언경씨, 이인자(aka 이재임)씨, 조인선씨.. 다 잘들 살고 있을까? 어쩌면 벌써 손주들을 보았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다들 명실공히 “할머니”들이 되었을 것이다. 가을이 이렇게 오는 것처럼 너무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pop/rock등에 많이도 심취해 있었다. 비록 김신조의 무장공비가 그 해 내 생일날 박정희 “목을 따러” 내려와서 학원은 다시 “교련” 이라는 것이 자유를 얽매이기 시작하려던 그런 시절이었지만 젊음이란 것이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해 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국전관람과 더불어 그 밝던 가을하늘을 만끽하며 우리 그룹의 회지도 만들고, 박창희네 집에 모여서 pop/rock 음악감상회도 가졌다. 처음에는 연세대 뒷산에 있던 청송대에서 하려고 했는데 음악감상 장비를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를 않아서 그냥 창희네 집에서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가을에 우리들은 서울 중앙방송(테레비)을 견학 가기도 했다. 나의 죽마고우 유지호가 잘 알던 아저씨가 중앙방송의 엔지니어로 일을 해서 그분이 주선을 해 준 것이었다.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TV 방송국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그때 본 것이 Pearl Sisters(펄 시스터즈)가 신나게 soul music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것과, 김용기 논설위원이 시사논설을 하며 녹화를 하던 모습,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은 어떻게 그 방송 TV program이 전파로 각 가정의 TV로 전파가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서 의문이 풀렸다. 거대한 dish antenna가 남산을 향해 서 있었던 것이었다. 남산의 높은 tower에서 받아서 서울 전역으로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그 dish antenna앞쪽으로는 접근을 못하게 되어있었는데 radiated power가 위험 수준을 넘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피부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고 했다.

1968년의 그렇게 밝고, 아름답고, 멋있던 가을은 이렇게 많은 추억을 남기며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비록 그 해 말과 후년부터 남자들이 군대로 속속 가면서 우리 그룹은 자연스럽게 해산이 되었지만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짧았던 시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아주 오랜 동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밝고, 멋있던 가을을 남겼으니까.

 

 

Turn Around Look at Me – The Vogues 1968

The Lettermen과 비슷한 스타일의 남성 화음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특히 이 노래는 더욱 그랬다. 특히 이곡과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이 라디오 프로그램 “나건석의 영어회화” 였다. 한때 이곡의 가사를 주제로 공부를 했던 것이다.

 

 

Honey – Bobby Goldsboro 1968

Bobby Goldsboro의 노래는 거의 이곡과 같은 느낌이다. 특히 이곡은 서정적 노래로 일관을 해온 그의 대표적인 것이다.  The Beatles의 Hey Jude에 이어 1968년 제2위의 인기곡이기도 했다.

 

 

Love is Blue – Paul Mauriat & his Orchestra 1968

이 연주곡은 France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도 1968년 제 3위로 많이 팔린 곡이었다. Paul Mauriat의 연주곡들은 대부분 티없이 맑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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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여, 42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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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가 보았던 영화, 신문광고 1968년 4월

1966년 불란서 칸느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불란서 영화 “남과 여” 를 4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처음 그 영화를 나는 1968년 봄에 죽마고우 친구 안명성과, 그 당시 바로 얼마 전에 알게 된 어떤 여대생 2명과 같이 개봉관인 서울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러니까 이름 그대로 double date를 하면서 그 영화를 본 것이었다. Francis Lai의 영화 주제곡이 먼저 히트를 해서 더 인기를 끌었던 영화였다. 불란서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런 영화였다. full color와 black & white가 교차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실 “남과 여”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에는 턱없이 덜 성숙된 ‘아이’들에 불과 했다. 그저 멋진 Monte Carlo와 race car driver 가 더 머리 속에 더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 속의 남과 여는 사회적인 angle 은 거의 없었다. 그저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심리적인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그 때, 영화를 본 다음 바로 옆에 있던 빵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2명의 여대생 중의 한 명이 영화제목이 왜 “여와 남” 이 아닐까..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남과 북, 북과 남”, “한일관계, 일한관계” 같이 조금은 유치한 우열의 순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런 나이었다. 영화 원래의 제목은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 (Un Homme et Une Femme)”였다.

그런 순진한 남녀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사회적인 angle로 본 남녀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다른 인생을 보냈을까 하는 아주 비약적인 상상도 해 본적이 있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절대로 다행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분명히 종속적인 남녀의 관계가 거의 법적으로 인정이 되던 그런 시절에서 나는 자랐다. 점차 법적인 남녀평등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이었다. 절대로 남자들이 자기들이 즐겨온 위치를 곱게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어떠한가? 근래에 들어서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요새 남자들.. 참 불쌍하게 되었다는 한숨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여자들이 ‘덜’ 불쌍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누가 더 불쌍할까. 아주 해괴한 문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해괴하지도 않다. 그런 추세는 꽤 오래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하게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남자의 한 사람으로 조금 더 불쌍해 졌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4명인데, 그 중에 여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비록 나는 불쌍한 한 남자지만 나머지 가족 3명은 상대적으로 덜 불쌍한 사람이 되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을 삼을지.나의 전 세대에서 이런 구성(딸만 둘)이었으면 아마도 조금은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다고 하고, 직장에서도 드디어 남자보다 숫자가 많아졌다. 여성학이란 조금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된 것도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아주 단단한 기반 위에 자리를 잡은 듯 하지만 남성학이란 것이 없듯이 이제는 여성학의 의미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만큼 전반적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똑 같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공산주의는 나의 눈 앞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 마디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뺏는 것으로 시작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남녀평등은 어떠한가? 물론 일단은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문제의 본질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이렇게 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차별을 받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간혹 여장부 스타일의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남자의 밑에 있어서. 사회적인 역할도 거의 태어나면서 정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게 사실은 사회적인 활동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해서 교육을 잘 받는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 좋은 결혼상대자를 만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상적인 여성의role model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고등교육이 거의 확실하게 결혼 후에는 쓸모가 없어지곤 했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사실 남녀의 차이는 성경부터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담과 하와(이브)의 role model이 그것이 아닐까?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문화와 문명은 어떠한가? 한결같이 남녀의 차별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Amazon같은 신화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을 했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과 싸우면서 이어지는 농경사회에서 힘에 필요한 근육이 모든 가치가 되면서 더욱 남자의 가치가 올라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남녀차별의 근원은 분명 물리적인 생존경쟁을 배경에 두고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출발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곳 미국에 와서 지금도 인상적인 것이 역시 미국여성의 눈부신 사회진출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직업 구석구석에 진출해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써 Janet Guthrie라는 여자 race car driver가 있었다. 남자의 영역에 당당히 도전한 그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또 거기에 비해서 말도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나아졌고 현재도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다.그만큼 남자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권위는 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급기야는 근래 몇 년의 지독한 경제불황의 여파로 직장여성의 숫자가 남자를 역사상 처음으로 능가를 하게 되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남자를 능가한 지는 그 훨씬 이전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기도 하다. 바보 남자의 숫자가 바보 여자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의 구조가 산업혁명의 기간산업에서 거의 완전히 지적인 산업으로, 그것도 컴퓨터,인터넷의 도움으로 무섭게 바뀌고 있고 더 이상 근육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비애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 아내, 딸들이 다 여자이니까 그들의 지위가 높아짐은 환영하나 나 자신을 생각 할 때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같은 어정쩡한 세대인 것이다. 남녀차별을 뼈저리게 보고 자란 세대, 하지만 자식세대에서는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 했던 세대, 그 사이에 sandwich가 된 우리세대, 이제 우리가 남길 legacy는 과연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회적 남녀관계는 무엇일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서 남녀만 따지는 것도 유행에서 지나가고 있는가. different life style?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different lifestyle? 정말 웃기는 세상이 된 지금 남녀의 차별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자체가 그른 것이 되어가는 묘한 세상이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유행이 되어버린 이 세상, 선택의 많음이 최선이 된 이세상, 결국은 자신의 저 깊은 속에서부터 울어나 오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 닳는다.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선배..

꽤 오랜만에 추억해 보는 이 세 이름들: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우선 이 세 사람은 나의 중앙고교 선배들이다. 안 선배는 53회, 오,최 선배는 모두 54회 졸업생. 내가 57회,그러니까 나의 3년, 4년 선배들이다. 그리고, 모두 연세대 전기공학과에서 같이 공부한 선배들이라는 것이다. 1968년부터 1971년 졸업할 때까지 같은 학년, 같은 과에서 공부를 한 것이다. 이 중에서도 나는 오성준 선배와는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그것을 소중하게 추억하고 싶다.

연세대학 2학년이 시작되던 1968년.. 나는 1966년에 입학했지만 1학년 중간에 1년 휴학을 해서 1967년 가을에 복학을 했었다. 입학 때와 달리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것이 공부란 것도 그때 알았다. 1학년 1학기 때의 below average를 한 학기 만에 완전히 만회를 해서 이곳의 표현으로 dean’s list를 넘어서게 되었고 심지어(?)는 쥐꼬리만한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이때의 느낌은.. 아.. 열심히 하면 꼭 무슨 좋은 결과와 보답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1968년 초, 나의 생일날 북괴의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목 따러” 온 후에, 2학년이 되면서 대거 복학생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대부분 군대를 마치고 온 3년 정도 선배들이었다. 그 중에 중앙고 출신이 3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 세 선배들이었다. 그때 재학생으로 중앙고 출신이 나까지 5명이 이미 있었다. 나(이경우), 이윤기, 박창희, 김태일, 이상일 등등이었다. 이중 나와 이윤기는 중앙 57회였고, 나머지는 모두 58회 출신이었다. 그래서 중앙고 출신이 8명이나 된 것이다. 이 정도면 과에서 단일 고교로써는 굉장한 숫자였다. 과대표를 뽑는 선거 같은 것이 있으면 그 이(利)점은 상당할 정도였다.

안낙영, 오성준, 최종인 선배들, 서울 비원에서 1969년
1969년 비원에서, 왼쪽부터 안낙영, 최종인, 박창희, 김진환, 오성준

이 세 명의 선배들은 참 쾌활하고, 농담 잘하고, 다정한 선배들이었다. 그 전까지는 나는 선배라고 하면 우선 겁을 내곤 했다. 고등학교 때 사실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거의 군대식으로.. 일년 선배라도 길에서 보면 경례를 하곤 했으니까. 잘못해서 반말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때는 세상의 끝이라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환경들이 다 일제시대의 학교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때는 처음으로 선배들의 ‘포근함’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반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농담을 할 정도가 된 것이다.

안낙영 선배.. 노란 반팔 셔츠를 좋아한 사나이.. 짓궂고, 야한 농담을 신선하게 하고, 누나 있으면 소개하라는 농담을 즐기는 여유에 반해서 공부는 정말 심각하게 하는 학구파다. 강사나 교수에게 아주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날리는 자랑스러운 선배였다. 최종인 선배.. 정말 구수하고 다정한 얼굴의 선배다. 말도 그렇다. 그런 것에 비해서 말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사진이 취미라는 것도 알았다. 연영회라는 연대 사진 서클에서 새 회원을 모집해서 양건주(화공과)와 갔는데 거기서 만났다. 그때 각자 돌아가며 자기를 소개 하는데 최 선배는 군대에서 사진에 대한 경험이 많다고 말을 했었다. 그 당시 연영회의 모임은 갈월동에 있는 연영회 간부학생의 집에서 있었는데, 그때 한창 인기가 있던 그룹사운드 까지 출연을 할 정도로 대 성황인 모임이었다.

Amigos 1968년 봄, 관악산에서
1968년 봄 Amigos 가 관악산으로 놀러갔다

그리고, 오성준 선배.. 다른 선배에 비해서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별명도 있었다. 오박사..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만물박사처럼 참 여러 가지를 많이도 알고 있었으니까. 봄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서 나는 몇 명의 고정적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양건주, 이윤기, 김진환, 김태일, 박창희, 그리고 김철수 등등 이었다. 이중에 양건주만 화공과였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 과였다. 출신도 다양한데, 양건주, 이윤기는 나의 중앙고 동기이고, 김태일, 박창희는 중앙고 1년 후배, 김진환은 전라도에서 온 유학생, 김철수는 강원도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어쩌다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즐거운 기억 중에는 수업이 끝나면 연대입구에 있던 빵집에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빵 값을 지불하곤 하던 것이었다. 대부분 다방에서 죽치곤 하던 시절, 고교생처럼 웬 빵집.. 그래서 더 재미가 있었나 보다. 그러다가 날씨가 좋은 봄에 관악산으로 등산을 가기도 했다. 그때 찍은 사진 뒤에는 날짜와 함께 Amigo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것이 Spanish로 friend(남성)란 뜻인데 그 당시 모임의 이름이 없어서 우선 그렇게 붙인 것 같았다. Club Amigo..

오성준 선배와 양건주의 약식 씨름, 1969년 비원에서
오성준 선배와 양건주의 약식 씨름: 오선배가 이겼다, 1969년 비원에서

하지만 이 클럽엔 “치명적”,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멤버가 모조리 “우중충하고 쾌쾌한” 냄새 나는 남자들 뿐인 것이다. 조금은 하얗고 부드러운 듯한 여자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나같이 여자친구 하나 없는 그야말로 숫총각 뿐이었으니까. 어떤 친구들은 숫제 여자에게 관심도 없었다. 아직도 미성년인 것처럼.. 그러다가 오 선배에게 하소연을 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쾌히 승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선배는 그 정도로 다정하였다. 그러더니 나와 이윤기를 데리고 연세대 뒤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어느 아담한 양옥집으로 갔다. 알고 보니 오 선배의 공군복무시절 친구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그 집에 이화여대생 딸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여대생을 소개시켜주러 간 것이다. 성격이 이랬다. 아주 화끈하게 일을 즉시로 해 치우는 그런..

그날 그 집에 그 여대생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연락처를 받아서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대생의 이름은 “김갑귀” 씨였다. 이름이 하도 요상해서 물어보니 갑오년에 귀하게 났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는 김갑귀씨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성준 선배는 우리들 클럽의 활동에 ‘고문’격으로 가끔 조언을 하곤 했다. 선배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대생회원 아이디어는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갑귀 씨가 열심히 자기의 classmates들을 소개 시켜주긴 했지만 글쎄.. 어딘가 우리들하고 맞지를 않았다. 키가 너무 크지 않으면 얼굴이 그렇다던가.. 그런 것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들이 더 어려 보일 정도였다. 이것을 김갑귀 씨가 알고 아주 섭섭해 했다. 김갑귀 씨는 조금 어리광 끼가 섞인듯한 표정과 다정함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면이 참 좋았다.

그녀는 역시 정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 그룹에 대한 인상이 좋았는지도.. 곧 바로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 친구가 바로 이선화 씨였다. 선화공주를 연상시키는 그런 간호사 지망생이었다. 그녀는 사실 김갑귀 씨와 창덕여고 동창이었다. 김갑귀 씨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선화씨의 classmates로 대상이 바뀌었고, 지난번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조금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뒤에 “연호회”라고 하는 남녀 대학생 클럽이었다. 목적은 단 한가지: 친목도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인연으로 오 선배는 우리와 아주 친한 선후배관계를 유지하였다.

졸업 후에 오 선배는 곧바로 대학원 진학을 했다. 나머지 선배들은 연락이 끊기고, 나는 미국으로 오게 되어서 이 선배들과는 사실상 관계가 끊어진 셈이다. 아주 나중에 오성준 선배의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직장에서 맹활약을 한다는 것이었다. 안낙영 선배도 거의 우연히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는 내가 Ohio Stat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어떤 한국유학생하나가 Old Dominion University에서 transfer한 사람이었다. 서로 우연히 얘기 하던 중에 안낙영 선배가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이어 직장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바로 전화를 해서 서로 소식을 나누었다. 간호사인 아내가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쪽에서 계속 살고 계시리라 믿는다. 최종인 선배는 완전한 연락 두절.. 다른 선배를 만나기 전에는 알 길이 없을 듯 하다. 그래서 이 최종인 선배는 조금은 전설적인 이미지로 나의 머리에 남는다. 언젠가 한번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운 친구, 양건주..

양건주, 1965년, 졸업앨범에서
양건주, 1965년, 졸업앨범에서

친구야, 친구야.. 그립다. 보고 싶다. 그때로 가고 싶다. 햇수로 세어본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10년, 20년, 30년, 40년.. 10년을 네 번이나 세었다. 그 때에 우리에게 ‘사심’이란 것은 없었다. 그게 진짜 우정이 아닐까. 우정이란 말과 의미와 느낌을 잊고 산지도 손가락으로 세어도 한참 세어야 할 정도로 오래 되었는가.

친구, 건주, 양건주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귄 기간은 이 오랜 세월에서 년 수로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는 짧은 기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는 거의 영원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중앙중고교 동창, 연세대 동창인 양건주. 내가 대학 2학년 때 연세대 캠퍼스 에서 만나서, 같이 연호회란 대학생 클럽활동도 같이 하였다. 1973년 내가 미국에 오면서 헤어졌다. 1979년 결혼 차 귀국했을 때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1970년대 초의 젊은 모습을 아직도 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건주는 중앙고교 2학년 때 SECC란 고등학교 영어회화클럽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세대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나하고 그는 중앙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건만 때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이 없었다. 6년 동안 같은 반을 한번도 못한 것은 사실 그렇게 흔치 않은데..

건주는 나이에 비해서 확실히 성숙한 그런 친구다. 항상 공정, 공평하였고, 우선 ‘정’이 많았다. 그것을 요란스럽지 않게 은근히 풍기는 그런 다정다감한 친구.. 그런 친구가 계속 나의 옆에서 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공상도 해 본다.

1969년, 양건주 군대 가기 전에 찍은 기념사진
1969년초 양건주가 군대가기 전에 연대앞의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바른쪽이 양건주

1999년, 20세기가 저물던 때에 다시 online으로 연락이 되었다. 이것도 나는 거의 운명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때 헤어진 연호회 친구들의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이윤기, 윤인송, 김태일, 박창희, 김진환. 이어서 건주, 윤기, 인송, 태일이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진도 보게 되었다. 김진환의 사망소식도 들었다. 다른 동창 친구 김호룡의 늦은 사망소식에 이어서 나는 한동안 충격 속에서 헤매었다.

1968, 69년,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해양다방을 생각한다.국제극장 옆을 끼고 경기여중고로 향하는 좁다란 골목길에 있었다. 어떻게 그 다방에서 우리가 모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어두운 구석 자리를 거의 전세를 내다시피, 우리들의 명실상부한 휴식처 노릇을 했다. 그 때의 그 여자회원들을 다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그 중에는 현재의 건주wife도 있었다. 그는 사실 그때 미래의 wife깜을 그곳에서 만났던 것이다.

아직도 그때의 추억은 흑백사진시대로 남아있다. 비교적 잘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억의 영상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가 없음을 알 때, 조금 서글퍼지는 이 마음, 어쩔 수가 없다. 영원한 친구 건주의 건강과 행복을 다시 한번 기원하면서..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도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의 ‘벗 하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