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상, 이도영, 이경증.. 나에게는 서울 창신동 삼총사..라는 인상이 깊이 깊이 뇌리에 남아있다. 동대문 옆에 있는 산동네.. 창신동. 나는 물론 그곳의 근처에서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서울운동장에 갈 때 동대문 옆으로 보이는 산동네..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곳이다. 그 곳이 내가 알던 이 삼총사가 자라던 곳이었다.
이중에 이도영, 배경상은 모두 이대부고(이화여자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이경증은 나와 같이 서울 중앙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경증이는 고2때 담임 박영세 선생과의 trouble로 학교를 떠나게 되어서 검정고시를 보고 연세대 지질학과에 입학, 졸업을 했다. 그러니까, 경증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헤어지고 연세대학교 졸업 무렵 쯤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학교를 군대에 가지 않고 계속 다녔지만 경증이는 연세대에 입학한 후에 곧 바로 입대를 했는데, 거기에 멈추지 않고 월남전에 자원을 했고 그곳에서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케산전투 같은 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친구였다. 나는 경증이의 이런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삶’을 참 좋아했다.
다시 만났을 당시 우리들은 상당히 다른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자라온 동네가 서로 아주 다르고 거기에 따른 친구들의 배경이 완전히 달랐다. 한 마디로 그의 동네친구들은 내가 전혀 모르고 경증이도 나의 친구를 모르는 것이다. 그 중간에 중앙중, 고교의 친구들이 서로 다리를 놓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동창 김호룡, 우진규 같은 친구들은 경증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간에는 역시 내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 다시 만났을 때 조금은 서먹서먹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게 진정한 ‘어리고 순진한 우정’이 아니었을까.
그 때부터 나는 경증이의 ‘동네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어울리면서 우선 놀란 것이 그 많은 창신동 친구들의 숫자였다. 그 중에는 그때 한창 인기절정의 통기타 가수 이장희도 그 중의 한 명이라고 들었다. 어찌 그렇게나 많을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자주 다녀서 오래된 동네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경증이는 아마도 그 창신동의 토박이여서 그렇게 친구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 처음 사귀게 된 사람들이 바로 이도영, 배경상이었다. 어떻게 같은 이대부고를 다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녀공학을 다닌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진한 농담으로 이도영은 이대부고 다닐 당시 여학생의 옆에 가면 냄새로 지금 period 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해서 모두들 게면 적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자연스레 여자들을 대할 수가 없었다.
이도영은 이미 어떤 재수하는 어떤 귀여운 여자와 동거 중이었고, 배경상은 그 보다 더 야심이 커서 ‘돈 있는’ 여자를 만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에 걸 맞지 않게 최고급 까만 정장 양복을 입고 다녔다. 키도 커서 멀리서 보면 무슨 영화배우 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경증이는 사실 여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의 그런 초연한 태도가 그렇게 신선하고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다고나 할까. 또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성은 잊어 버렸다. 이름은 경화였다. 꼭 여자이름 같지만 아주 예술가처럼 멋지게 생긴 남자였다. 그 친구는 미술학도인데 참 그림을 재치 있게 잘도 그리는 예술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성격, 배경, 취향이 다른 친구들이 경증이 주변에서 아주 멋있게 어울리며 청춘을 구가하던 그 시절.. 하지만 모두들 쉽게 풀지 못하는 고민들은 한두 가지 다 안고 ‘밤을 잊은 그대’ 의 청춘을 보내던 시절이 우리젊음의 전성기, 1970년대 초였다.
그때 우리들이 명동 같은 곳의 다방에서 모이면 주로 여자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을 골라서 만났다. 물론 여자들에게 장난스럽게 ‘추군’대려는 의도가 갈려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것을 hunting이라고 하던데 우리는 그저 “꼬신다” 고 했다. 심지어는, 그것에 관한 방법론 같은 것은 “꼬셜로지”, 그러니까 sociology같이, 라고까지 했다. 우리는 완전히 아마추어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런 곳에 가보면 완전히 고정멤버 같은 프로 급 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 팀에서는 배경상이 조금은 프로급이 아니었을까? 주로 장난스러운 게임을 하곤 했는데 여자들이 그룹으로 모인 곳에 혼자 가서 미팅을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게임이었다. 다들 잘 했는데 나는 끝까지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의외로 점잖은 경증이가 그런 것을 대담하게 잘 하곤 했다. 대부분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지만 아주 가끔은 성사가 되는 수도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재미가 있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성사가 된 미팅그룹이 생각이 난다. 출신성분이 아주 다양한 여자들의 그룹이었다. 그런대로 정기적으로 만났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바로 김성혜씨였다. 조금은 도도하고 고고한 척 하는 듯한, 툭하면 영어로 대답을 하곤 했다. 어떤 미국사람에게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해서 물어보니 얼마 있다가 간호원취업으로 미국엘 간다고 했다. 또 생각나는 사람, 이대생, 오연희씨.. 우리는 우연희, 라고 불렀다. 밝고, 항상 웃는듯한 얼굴.. 그들은 다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무엇을 할까.. 간호원 김성혜씨는 나중에 미국에서 다시 만나는 인연을 가지게 된다.
1970년대 초에 그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이 아주 적게 남아있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제일 궁금하던 배경상이 빠져있다. 등산가서 찍을 때 왜 배경상이 빠져있을까? 기억이 안 난다. 돈 많은 여자를 쫓아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이도영은 왜 재수생 cute girl friend를 안 데리고 왔을까. 그것도 의문이다. 꼭 붙어 다니고 했는데. 그들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1975년이었다. 잠깐 여름에 귀국을 했을 때 정말 반가운 만남을 했다. 몇 년 전 여자들을 쫓아가느라고 명동을 헤매던 때를 서로 그리며 다시 명동을 누비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보다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3~4년은 더 늙은 것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인생을 살았을까? 이도영은 그 재수생과 결혼을 했을까? 배경상은 정말 부잣집 딸을 만났을까? 경화는 무슨 예술 대상을 받지나 않았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그 중심에 있었던 나의 친구, 이경증.. 1980년 나의 결혼 때 잠깐 보고 다시 없어졌다. 이 친구는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한 셈이었다. 조금은 방랑자 기질이 있다고 할까. 자식 어디로 증발을 했니..이제는 슬슬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니? 죽기 전에 한번 소식이라도 듣자.
1960년 4월 19일을 생각한다. 오늘 아침 문득 오늘이 4월 19일임을 느꼈고, 아마도 조금은 더 의미가 있는 해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아.. 1960~2010.. 정확하게 50년이 되었음을 알았다. 조금 부끄럽기도 한 것이 오늘에서야 50주년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60년 4월 19일 나는 서울 종로구 계동 1번지 중앙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초봄이었던 4월은 그 나이엔 참 즐거운 계절이었다. 우선 밖에서 full-time으로 뛰어 놀 수가 있기 때문이다.
No TV, No telephone, No game machine, No computer, No nothing, Yes only AM radio.. 유일한 오락은 만화책과 누나들(식모누나까지) 속에서 끼어서 순정 멜로드라마(예를 들면 청실홍실, 장희빈 같은)를 AM radio 에서 듣는 것 밖에 없었던 시절, 집 밖의 골목은 나에게나 동네 꼬마들에겐 거의 천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조금은 덜 뛰어 놀 것 같았지만, 거의 반대였다.사실은 더 나가서 놀았다. 우선 입시공부가 당분간(최소한 3년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종로 화신 백화점 옆 골목에 있었던 우리의 ‘등대’ 우미관에서 로버트 밋첨(Robert Mitchum) 주연의 2차 대전 잠수함과 구축함 영화, 상과 하(Enemy Below), Pat Boone주연의 과학공상영화 “지저탐험(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 등 그 당시 미국영화에 열광하던 시절.. 그 때였다. 사일구 혁명이 일어난 것이.
그 당시 나는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뒷문 쪽, 에 살았다. 모두가 지금에 비하면 꾀죄죄하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모두들 생활수준이 비슷해서 사실 우리들 그렇게 가난한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고나 할까.
길에 나가면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 앉아서 할 것이 별로 없었고 생활공간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기적적으로 침묵이 흐르는 거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처음 맞고 보는 “계엄령” 때문이었다. 골목까지 사람이 사라진 것은 사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 해 1960년 3월에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역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의 교과서적인 극치였다. 어린 우리가 듣고 보아도 그런 것 같았다. 재동국민학교 6학년, 그러니까 1959년, 담임선생님이셨던 박양신 선생님.. 그 선생님까지 우리 코흘리개 학생을 놓고 선거유세를 하다시피 하셨다. 이기붕이 조볌옥(야당 후보) 보다 훨씬 낫다고.. 분명히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선생님.. 너무 하셨다.
그리고 기억나는 비극적인 사건, 마산 부두에서 김주열이란 고등학생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물론 신문에 그런 것들이 요란히 실렸다. 최소한 이승만 정권은 언론통제나 탄압은 안 한 듯하다. 그 당시 우리는 경향신문을 보았다. 특별히 야당 성이 강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요란히 정부를 탄핵하곤 했다. 그 때는 각 신문마다 간판 격인 만화가 매일 실렸는데, 그게 어린 나이에 보아도 무슨 정치적 배경이 깔린 무슨 의미가 있었다. 나는 그때 경향신문의 두꺼비 (김경언 화백)를 즐겨 보았다. 물론 제일가는 인기는 역시 동이일보의 고바우영감(김성환 화백) 이었지만.
결국 부정선거는 짜여진 각본대로 이승만, 이기붕을 대통령, 부통령 으로 만들어 놓았다. 보통 4,5월에 선거가 있었지만 다급해진 자유당은 강제로 3월 15일로 앞 당겨 선거를 치렀는데 이유가 좋았다. 4,5월 달은 농번기라는 것이고 농민들을 돕겠다는 갸륵한 이유.. 그 당시 자유당은 그 정도로 유치하기도 하였다. 기억나는 것이,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기붕은 거의 허수아비고 모든 것은 그의 부인인 박마리아가 움직인다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면 거의 사실인 듯 싶다. 그 단적인 예로 이기붕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을 박마리아가 이승만의 양자로 들여보낸 것인데, 정말로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강석이 가족을 모두 쏘아 죽이고 자기도 죽은 것이다. 대부분, 이강석의 용기를 칭찬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4.19는 시실 급박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각종 데모가 점점 서서히 커져나간 것이다. 4월 18일에는 서울고려대 학생들이 데모 후에 자유당 ‘소속’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 때는 자유당 소속의 정치깡패들이 자주 등장을 하였는데, 제일 유명한 것이 이정재, 임화수의 일본 야쿠자 같은 조직이었다. 이들은 조무래기 동네 깡패가 아니고 거의 법적인 ‘회사’를 가진 조직 폭력배였다. 이들에 관한 일화는 오래 전의 TV 드라마 ‘무풍지대‘에 아주 자세히 나온다. 그 당시 일화로, 코미디언합죽이 김희갑씨가 임화수에게 폭력을 당한 것은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면 임화수가 “야 합죽이, 요새 잘 있냐?” 하고 인사를 한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른다.
4월 19일 (무슨 요일이었을까, 맞다..월요일이었다) 아침에 학교엘 가니.. 수업도 시작하기 전에 (확실치 않지만) 퇴교를 당했다. 우선은 신이 났지만 (그 나이에 학교보다 동네골목이 더 좋았음),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거리의 공기가 조금 이상 했음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선 ‘신나는’ 마음으로 만화가게로 향했고, 미친 듯이 애독하던 만화 김산호의 ‘라이파이‘를 즐겼다. 그러면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까지 데모대가 갔었던 모양이고,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때 총소리를 처음 듣게 되었다 (라디오의 드라마를 제외하고) 아마도 그 소리는 그 당시 경찰들의 표준무기 카빈소총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것이 느껴지고 총소리는 더욱 잦아지고.. 그러면서 저녁이 되었다. 재동 신작로엘 나가니 (지금 돈화문에서 종로경찰서로 이어지는 거리) 완전히 사람들로 들끓고 군용트럭, 화물트럭이 학생들을 가득 태우고 질주를 하고 있었다. 물론 격한 구호를 외치면서. .그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니까 4.19는 사실 대학생들의 데모였다. 희생자들도 거의 그들 이었을 것이다. 거리엔 발을 동동 구르며 귀가를 안 한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들로 가득하고.. 그때 같은 동네에 사는 국민학교동창 한윤석의 어머니가 큰 딸을 부여 앉고 무사히 귀가한 것이 너무 기뻐서 뛰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러다가 계엄령 이란 것이 선포되고 군인들이 거리에 깔리기 시작하며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이런 광경은 사실 그 이후 몇 십 년 동안 흔히 보게 되는 그런 것이 되었다).. 동네 골목까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그러면서 라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하야 성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명해진 말 ‘국민이 원한다면‘.. 이란 말.. 그 당시 아주 유행어가 되었다. 거의 친 아버지 이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게 교육을 받았던 우리들은 솔직히 동정 어린 심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기붕 개새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잘못은 거의 이승만에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때, 학생이란 위치가 사실 한국역사상 최고의 경지까지 올랐음을 의심할 수가 없다. 일반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대우를 하곤 했다. 특히 대학생들.. 수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던 그 용감했던 대학생 형님들.. 지금 생각해도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고, 흐뭇해지는 심정 누를 길이 없다. 그렇게 나라에 희망이 없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시절, 작업복 염색해 입고, 암시장에서 산 군화를 신고 대학캠퍼스를 누비던 그 멋지던 형님들 (누님들도 있었겠지만).. 지금 다 어떻게 4.19를 기억하고들 계실까.. 궁금하기도 하다.
짧았던 학생혁명 시절, 결국 미성숙하고 이기적이던 야당 정치인들이 거의 망쳐놓다시피 해서 결국은 다음해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의 탱크에 의해 끝이 나고, 사일구의 의미는 희망했던 것처럼 피어 오르질 못했다.(군사정권은 사일구의 의미를 격하하진 않았다. 하지만 5.16의 의미를 올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눌렸을 뿐이다) 피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숨져간 영혼들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명복을 빌고 싶다. 고이 잠드시기를..
당시의 신문으로 본 사일구 혁명
대한민국의 신문들이 거의 모두 digital archive로 Internet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그 동안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로 비싼 보물과 같은 역사적 정보들이 거의 기적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사실 이것을 보는 것은 최고의 time-killer가 될 수가 있고, 이것으로 다시 자기만의 역사를 쓰며, 바로 잡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예로 아래에 보이는 사일구 혁명 당시의 신문을 보면서 희미하거나 숫제 틀린 기억들을 바로 잡게도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당시 12살 정도의 ‘한자 문맹‘에 가까운 나이어서 이런 신문들을 읽지도 못했을 것이라서, 그렇게 큰 잘못 된 기억은 없을 듯하다. 그 당시 나는 분명히 ‘그림, 사진’들만 즐겼을 것이다. 이것들을 보면서 역시 사일구는 아주 오래 전 ‘사건’이라는, 그것도 너무도 오랜 전이라는 가벼운 충격을 받고, 내가 그만큼 오래 살았고, 그 역사의 현장을 피부로 느꼈다는 것에 약간의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다.
50년이 지난 신문 속의 글과 사진은 거의 ‘전근대적 문화’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는데, 변해버린 한글 맞춤법과 당시의 경제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꾀 죄죄’한 모습들, 당시의 ‘조잡한’ 흑백 신문사진 기술.. 너무나 나의 역사, 시대관을 시험하는 것들이었다.
4.19의 전주곡, 4월 18일의 그 유명하고 ‘영웅적’인 고려대 3천명 학생들의 4.18데모에 관한 전면기사들.. 이 고려대의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대규모 데모는 그 날 밤에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이정재 휘하의 임화수, 유지광 깡패부대의 대규모 습격을 받고, 그것이 사일구 혁명의 최후 기폭제가 된다.
이정재 사단 정치깡패의 첫 출동, 시민들과 합류해서 4.18 저녁 서울 중심가를 누비며 행진하며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4가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100여명 깡패의 살인적인 공격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진들이 4월 18일 혁명전야의 생생한 열기를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 의사당 앞에서 끝까지 버티던 용감했던 고대생 형님들.. 그 무서운 힘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폭발된 전국적인 4.19혁명.. 서서히 전면 기사, 정치면으로 등장.. 이때는 이미 수많은 사상자가 나온 이후였고, 비상 계엄령이 서울 전역에 선포된 후였다. 하지만 기사를 읽으면 처참한 사상자들의 실체는 아직도 파악이 덜 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경무대 앞에서 장갑차로 데모 군중을 향해 일제 사격을 했음은 밝힌다.
그런대로 점잖은 사진, 경무대 진입로 전에 있는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무장경찰과 대치한 것만 front page에 실었다. 이 효자동 종점에는 나의 외 이모님 댁의 조그만 가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어떠한 광경을 목격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1960년 4월 19일 저녁 6시까지의 ‘사회면’ 뉴스는 조금 더 생생한 데모의 격렬함을 보여준다. 수도지역 (그 당시에는 수도권이란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대학생 전체와 수 없이 많은 고교생들, 심지어 중학생들 (그 이하 아이들도) 까지 합세한 그야말로 혁명적인 봉기의 조짐을 여지없이 보여준 날.. 사월 십구일 낮의 일이었다.
내가 오후 한시경부터 들었던 총소리.. 경무대 쪽이었고 역시 그때부터 대학생 형님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한 때였다. 만화 속에서만 보던 진짜 총 소리를 듣는 기분이 처음에는 신기하고 흥분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공포’적인 기분으로 변했다.
처음에 서울에 내려졌던 경비계엄령이 전국적인 ‘비상’계엄으로 바뀌어 선포가 되고 경찰을 대신 군인들이 치안의 주역을 맡기 시작하고, 신문 같은 언론매체(그 당시 몇 가지 신문과 국영방송밖에 없었다)에 대한 군 검열이 시작되어서 ‘불온한’ 것들은 무자비하게 조판과정에서 삭제 당했다.
치열한 시가전을 방불케 하던 4월 19일이 저물어가면서 계엄령에 의한 중무장 군인들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하며 데모대도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하지만, 군검열로 생생한 사진보도는 아직 없었다. 글로 쓰여진 기사만으로는 그날의 엄청난 일들을 묘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데모대들이 ‘탈취’한 각종차량에 올라 타고 거리(원남동~안국동)를 질주하던 대학생들의 격렬한 구호, 그 모습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고, 온통 골목길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던 부모님들의 모습들.. 역시 생생하다.
비교적 민중 편에 서있었던 계엄군의 느슨한 검열을 통과하기 시작한 4월 19일의 생생한 사진들이 신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김영삼(a.k.a., 빠가)이 ‘뭉개버린’ 식민통치의 상징 ‘중앙청(이것을 없애버리면 후세에 누가 그 비극적인 역사를 느낄 수 있냐?)’ 옆에 널려진 서류들, 불에 타던 반공회관, 서울신문사, 서울 의대생들이 숫제 하얀 가운을 입고 데모에 참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의 물건들이 불에 타던 생생한 기록들이다.
4월 20일 석간신문, 드디어 본격적인 군검열을 거친 신문들.. 조판 후 에 군 검열관이 아마도 ‘송곳’ 같은 것으로 긁은 모양..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이 신문의 모습은 그 당시 나에게 참으로 신기하게 보였다. 이때의 계엄군 사령관, 송요찬 중장..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한 일련의 명령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정당’한 것들 뿐이었다. 특히 민중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 경찰들을 철저히 단속,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의 많은 경찰은 실제로 일제 고등계 출신 악질들이 많아서 수시로 미성년자들까지 ‘공산당’으로 몰아 고문을 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4.19 ‘사태’에 대한 정치적 포석과 견해는 역시 정치적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정한 대화’를 원하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그러한 담화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 때까지도 이대통령은 사태의 진상 (원인을 포함한)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비서실을 비롯한 ‘인의 장막’에 가리워져 있었고, 고령의 나이가 별로 사태파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상계엄령의 여파, 4월 20일부터 저녁 7시 통행금지 시작.. 그렇게 복잡하던 세종로 네거리가 7시 전에 이미 완전히 비었다. 이 ‘낮’의 통행금지는 사실상 골목 골목까지 적용이 되어서 집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주 조심스러웠고, 꼬마들이 나가서 노는 것도 힘들었다.
처음으로 ‘공식’ 피해 진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출발점’이 이곳에 보이는 대로 111명이다. 물론 나중에 이것은 큰 폭으로 올라간다. 역시 대부분의 사망자들은 ‘어린 학생’들이어서 국민에게 느껴지는 심리적인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들이 발포를 할 정도로 폭도이며 위협적이란 말인가?
이러한 민심에 부응하듯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을 철저히 질책하며 ‘보복 금지’에 대한 엄단을 경고한다. 신문검열로 삭제된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계엄 사령부는 민심을 잘 파악하고, 각 병원에 안치된 데모 사망자, 거의가 학생들, 을 유족들에게 돌려 주었다. 이때 민간정부에 대한 증오심이 상당했고, 관(서울시) 주도하의 합동영결식도 유족들이 거부했다.
4월 23일자 호외(extra), 그 당시는 참 호외란 것이 많았다. 요새 같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이 없어서 빠른 뉴스는 라디오나 이런 신문의 호외 같은 것이 의지했다. 정국 파탄의 원인의 중심인물, 부정선거의 주역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 국회의장,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모양이다. 불똥이 튈 것에 대비해서 현 부통령 장면박사는 다음의 정치포석을 한다.
당시는 찌들 리게 대부분 가난했지만 빈부의 차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생존경쟁에 발버둥은 쳤지만 기본적인 인간애와 동족애는 어느 때 보다 높고, 없는 것을 나누는 인정도 참 많고 흔했다. 위의 사진들은 절대로 pose한 사진들이 아닌 snap이었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어린 부상자를 돌아보는 한 가족들, ‘용감한 형님’을 자랑스레 찾아간 국민학생, 사망자 가족의 장례비용을 걱정하는 어떤 착한 엄마와 아들의 모습.. 참으로 눈물겹고 그립던 시절이었다.
무풍지대, 드디어 부상.. 자유당 정권과 손을 잡은 야쿠자 스타일의 이정재 휘하의 정치깡패의 부관들 드디어 여론과 군의 압력으로 얼굴이 들어나고 구속까지 된다. 이들과 동대문 경찰서는 숫제 서로 직통전화까지 가설하고 고대생 습격사건을 주도했다.
3.15 부정선거도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 중, 평화극장 사장 임화수와 두목격인 이정재는 1년 뒤의 5.16 혁명 뒤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지만, 운이 좋았던 유지광은 살아 남는다.
불란서 혁명을 방불케 하는 이 사진은 4.19가 절정에 이르던 때, 권력의 심장부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는 제일 용감하고 희생자가 많았던 때의 현장 사진이고, 계엄군 검열이 완화된 상태에서 신문에 실렸다. 이 당시 데모대의 유일한 방어무기는 탈취한 소방차 뿐이었다.
한민족에게 낯설지 않은 광경, 억울하게 어린 나이에 먼저 보낸 귀여운 자식들을 어찌 그냥 보내랴.. 이때의 슬픔은 전체 국민들의 슬픔이었고, 꼬마였던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슬픔이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이런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상한 의사가 요새도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금 이 의사 분은 잘 살아 계실까? 그 당시 기타를 치는 의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점차 자세한 4.19 때의 현장사진들이 신문에 실리기 시작한다. 데모의 정점은 역시 권력 심장부 경무대를 향한 길이었다. 대부분 효자동 종점을 통한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 후퇴를 하며 총을 쏘는 경관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을 한다. 발포 명령을 받은 그들에게 과연 어떤 죄가 있었을까?
4.19 학생데모 가 일주일째로 접어 들면서, 자유당 정권의 미온적이고 느린 반응에 결국 학생뿐 아닌 대학교수, 일반군중들이 못 참고 일어났다. 이번의 소요는 비상계엄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 그 심각성은 더 큰 것이었다. 모든 치안의 책임은 계엄군에 있는데, 그들에게 모든 앞날의 열쇠가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계엄군은 ‘절대로’ 동포에 대한 발포명령을 받지 않았다.
계엄령 하에서 벌어진 새로운 데모는 사실상 계엄군의 ‘보호’하에 벌어진 셈이 되었고, 이것은 현 정권의 심장을 겨누는 또 다른 총부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계엄군의 ‘결단’이 4.19 를 진정한 혁명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이래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것이다.
민간인들이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 타고 얼싸안고 있던 사진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정말 멋진 군인아저씨 들이었다. 용기를 얻은 군중들은 서서히 ‘원흉’으로 지목된 이기붕 국회의장의 저택으로 몰려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만세! 결국은 올 것이 왔다. 계엄군의 멋진 결심에 굴복한 듯, 국민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구성진 육성 방송과 성명이 라디오와 신문 호외로 나오고. 나도 이 방송을 들었다, 그 유명한 말.. “국민이 원한다면”.. 나도 생각했다. “맞습니다. 그것이 국민이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 이 방송과 성명으로 4.19는 100% 완전한 학생들의 승리가 되었고, 4.19는 ‘유혈’ 혁명으로 승격한다.
이승만 정권 궤멸.. 이것이 이제는 공식, 사실화가 되어서 4월 27일자 신문의 전면에 나온다. 3.15 부정선거는 완전히 무효가 되었다. 이 역사적 결정에 이르기까지 학생대표들과 이승만 대통령은 ‘울음’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분명히 노 혁명가 이승만 박사도 그들의 눈물을 진정으로, 가슴으로 느꼈던 것 같다.
이제는 승리의 축제가 세종로 네거리를 완전히 덮는다. 총알이 난무하고 핏방울이 튀던 같은 거리가 기쁨과 감격의 거리로 변한 것이다. 역시 계엄군 탱크가 이번 의거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까.. 역시 국민의 군대였다.
4.26 대통령 하야 결심소식을 듣고 계엄군 탱크 위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이것은 세종로 네거리에서 남쪽을 향해 찍은 사진인 듯, 멀리 중부 소방서의 소방탑이 보인다. 기껏해야 4층 정도의 높이에서 불이 난 곳을 볼 정도로 그 당시에 고층빌딩이 없었다.
아래의 사진은 계엄군의 ‘안전함’을 느낀 후 계속된 대모 군중, 가운데를 보라.. 국민학교 학생들이다! 멀리 “빠가”김영삼이 없애버린 일제의 상징 중앙청과 북악산이 보인다.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은 제2의 8.15 라고 환호를 했다. 해방, 부정,부패, 깡패, 경찰 정권에서 해방.. 이날 기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고문경찰과 자유당의원, 그 소속 깡패들 뿐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 이기붕 이란 이름은 특별히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군중들은 서대문근처 그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집안 가재들을 모두 끌어내서 불태웠다. 나의 동네 친구들 중에는 그곳의 물건들 중에서 ‘최고급 야구 glove’를 “전리품”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눈물과 웃음을 함께 자아내는 사진들.. 특히 왼쪽의 국민학생 코흘리개 악동들의 데모가 그렇다. “군인 아저씨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마세요!” 란 플래카드.. 어찌 이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을까? 이들은 분명히 용감하게 피 흘리며 쓰러진 대학생 형님,오빠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100% 자유를 쟁취한 군중들, 탱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타서 환호를 한다.
4.26 승리의 모습들.. 이기붕 저택 습격한 데모대 들은 사실상 ‘절도’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될 그런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충격적인 모습은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종로 파고다 공원 (탑골공원)에서 끌려 내려져서 차에 끌리어 가는 곤욕을 치른 것이다. 우리들이 보기에 그것은 조금 심한 것이었다. 특히 그 동상을 끌고 다닌 차가 ‘분뇨 차(일명, 똥차)’ 였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빛났던 대학생 형님,누님들과 용감하게 민중을 보호했던 우리의 국군 계엄군 아저씨들.. 정말 멋진 순간들을 맞았다. 총탄에 쓰러지며 나라를 구했던 대학생 형님들이 이번에는 뒤처리를 과감히 맡았다. 계엄군이 관리하던 경찰서, 파출소 조차 대학생들을 임시 ‘고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왼쪽 위의 기사를 보면 그 당시 최고의 맛을 자랑하던 뉴욕제과점과 고려당 제과점의 최량의 빵들을 계엄군 ‘아저씨’들에게 선사를 하는데, 그 당시는 살 맛이 나던 때였다.
급속히 정리되는 용맹과 피의 거리들.. 역시 피를 흘렸던 대학생 형님들이 팔뚝을 걷고 나섰다. 경찰이 종적을 감춘 곳에 대학생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쓰레기 청소까지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기붕씨 일가 자살.. 이것은 그 당시에도 끔찍한 뉴스였다. 그렇게 많은 죄 없는 어린 학생들이 죽었지만, 이것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법의 심판을 받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결론을 내린 장남 이강석의 결단이었다. 그가 부모와 남동생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자신을 쏜 것이다. 100% 확실한 정황을 알 길은 없지만 그것이 공식적인 결론이었다. 누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잊고 싶은 끔찍한 비극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이기붕씨의 출신 과정을 보면 그도 양심적인 기독교인이었고, 나름대로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음도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장기집권으로 나온 ‘악마’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국민의 ‘보복’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미국 주간 시사화보 LIFE 가 본 4.19 혁명
4.19 당시, 그러니까 1960년에 대한민국에는 신문을 제외한 변변한 ‘커다란 사진이 가득한’ 매체, 그러니까 ‘화보지’가 거의 없었다. 사진 처리를 위한 제작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것이 읽거나 듣는 것이고 눈으로 보는 생생한 뉴스는 드물었던 것이다. 워낙 ‘못 살았던’ 때여서 TV 방송이 있었어도 TV자체가 너무나 드물어서 못 보던 시절, 미군을 통해서 흘러나온 TV로 간혹 미군 방송AFKN을 보거나 부산 같은 곳에서 일본 TV방송을 보는 것이 전부였던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4.19의 모습들은 위의 사진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역시 ‘찌들리게 조잡한’ 신문의 조판사진이 전부였다.
하지만, 4.19의 생생한 모습들이 camera로 찍히고, movie film으로 기록들이 다행히 일본이나 미국으로 간 것들은 비교적 ‘고화질’로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원래부터 ‘질이 좋은 사진’을 위한 시사화보로 유명했던 미국의 주간지 LIFE가 4.19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4.19는 비록 세계 뉴스의 레이다 밑에 있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비교적 자세히 보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사논평의 주제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것을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보이고 역사에 남긴다.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 가족들: 이승만, 프란체스카,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고, 이기붕은 부통령으로 당선.. 고령의 이승만의 유고 시에 그의 대통령직은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농성 중인 용감한 고려대 형님들.. 이들의 에너지가 그 다음 날 4.19의 원동력이 되었다.
데모대를 진압하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찰들.. 그때는 데모 진압 ‘전용’ 전투 경찰이란 것이 없었다. 그저 일반 경찰들이 모든 것을 담당해서 후의 전문 전투경찰 같은 테크닉은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힐 기술 없이 그저 두드려 패는 것이 전부였다. 또한 그들은 민주경찰이기 이전에 ‘반공 경찰’이어서, 빨갱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진압을 하면 살인적인 결과를 내곤 했다.
이렇게 부상을 입고 부축을 받으며 가는 사람은 학생인지, 민간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머리에 아주 큰 부상을 입은 듯.. 아마도 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표정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까..
이 불쌍한 어머님은 얼마나 어린 아들을 잃었을까? 이런 광경은 4.19 직후 이곳 저곳에서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정말 슬픈 모습들이었다. 특히 아들을 중요시했던 당시의 사회 관습이나 풍조를 감안한다면 희생자 가족, 부모들의 고통과 슬픔은 상상을 하기 힘들었다.
‘살인 경찰들’이 계엄령 선포로 뒷전으로 사라지고 대한민국의 유일한 양심, 희망이었던 송요찬 장군의 계엄군 헌병이, 흥분한 어린 학생을 ‘정답게’ 제지하는 장면.. 이 학생들은 원흉으로 지목 되었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을 습격하려는 중이었다. 이 헌병의 모습으로 보아서 군대는 완전히 민중의 편에 섰음을 짐작할 수 있다.
4.19 ‘참사’의 제1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이기붕 국회의장, 부통령 당선자의 저택이 격노한 데모대,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서 습격을 당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는 절도까지도 용납이 될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하였다.
군인 아저씨들.. 우리 부모 형제들에게 총 뿌리를 대지 말라.. 고 외치는 초, 중,고교 학생들.. 특히 앞장을 서서 가며 힘차게 외쳐대는 국민학교 코흘리개 아이들의 모습, 특히 남루한 ‘구제품’ 옷들을 입은 모습들이 가슴을 찡~ 하게 만든다. 그들은 사실 나와 거의 같은 또래의 악동들이었다. 골목에서 뛰놀던 그들이 총탄으로 쓰러진 형님, 누나들을 보고 계엄군을 향해서 호소하는 모습이었다.
평온이 서서히 깃드는 거리, 당시의 시내 거리에는 차량의 숫자가 적었고, 특히 신호등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그런 곳은 교통경찰이 손수 교통정리를 했다. 그 경찰들이 사라진 거리에는 역시 학생, 민간인들이 자원해서 이렇게 힘차게 차량들을 정리했다. 이 형님, 아저씨는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까?
한국전쟁, 인천 상륙작전의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미국의 맥아더 장군의 동사에 데모대들의 화환이 걸렸다. 우리는 절대로 빨갱이, 공산당이 아니라는 뜻과, 거의 중립적, 아니면 침묵으로 이승만 정권을 혐오하던 미국의 태도를 학생들과 일반인들도 느꼈을 것이다. 반공 하나로 버티던 이승만도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가 반공이상으로 중요함을 몰랐던 것일까?
거의 폭도로 변한 철모르는 어린 학생들과 데모 군중은 어제까지 ‘우리들의 아버지’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쓰러뜨렸고, 그것도 모자라 목에다 밧줄을 걸어서 ‘분뇨차’에 끌고 다녔다. 이것은 당시의 정서로도 너무 심한 행동이었는데, 결국은 치욕을 당했던 동상은 다시 태극기에 덮여서 정중히 안치가 되었다.
절대권력의 ‘우리들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 ‘국민이 원한다면..’의 구성진 대통령직 사퇴, 하야 성명 방송 후 그는 돈암동에 마련된 ‘이화장’ 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차를 타고 경무대를 나와서 이화장으로 갈 때, 사실 국민들은 박수로 그를 환송했다. 그것이 당시의 국민 정서였다. 비록 살인 경찰의 우두머리였지만 ‘우리의 아버지’임도 잊지를 못한 것이다.
4.19 혁명이 이승만 정권의 사실상 총 사퇴로 이어지고 과도정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제1인자로 허정 씨가 두각을 나타내고 제2 공화국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 아틀란타에 정녕 봄이 오고 있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고3때 국어책에서 본 시의 제목처럼.. 이번 겨울은 동서남북의 구별 없이 무차별하게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하기야 Florida와 Hawaii를 제외한 전역이 눈이 덮여 있다고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지 Obama의 global warming agenda도 따라서 조금 잠잠해졌나 할 정도다.
공식적으로 춘분이 거의 열흘이나 지나고 내일은 사월이다. 진짜 봄인 것이다. 새벽에 아직도 central heating이 나오긴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주 따뜻한 낮과 아주 싸늘한 밤이 계속되는 건조한 그런 나날이 되지 않을까? 4월.. April shower brings May flower라고 오래 전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워서 나에게 써 먹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 만큼 싸늘한 4월의 비도 연상이 된다.
하지만 나에겐 한국가곡 “사월의 노래”가 더 생각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1963년 서울 중앙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자 음악 선생님이셨던 김 대붕 선생님이 좋아 하셨다던 가곡, 사월의 노래.. 우리들에게 정성스레 가르쳐 주셨다. 특히 작곡가이신 김순희교수님을 잊지 않을 정도로 언급을 하셨다. 혹시 그 교수님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나곤 한다.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에 편지를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 노라
돌아 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없는 무지개 계절아
노래와 함께 가사까지 또렷이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지금 연세가 어느 정도나 되셨을까? 짐작에 아마 여든을 바라보실 연세가 아니실까. 그렇다면 요새 같은 세상에서는 건강만 좋으시면 큰 문제가 없으시리라. 기억에 선생님은 해방 직후에 고등학교 학생이셨다. 어떤 글에서 (아마도 중앙학교 교지에서) “국대안 반대 데모 때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서 뒤떨어 졌던 성적을 올렸다” 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내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그때 고등학생이셨으면 최소한 나보다 15살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 가톨릭 성가 집에서 우연히 선생님의 이름을 보았다. 그래서 선생님이 천주교 신자임을 알았고 성심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음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중앙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실 당시에도 천주교 신자였을 것 같다. 물론 100% 확실치는 않지만.
반세기만에 써보는 양병환 이란 이름. 그 50년 동안에 비록 머릿속에서 아주 가끔 생각은 했을지 몰라도 이렇게 “써”보기는 처음 인 것 같다. 아마도 손을 쓰는 일기장에도 쓴 기억이 없다. 그만큼 오래전의 일이다. 하지만 일단 생각이 날라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즐거운’ 추억이 샘솟는다.
나이는 아마도 (100% 확실치 않으니까) 나보다 최소한 3살이 위였지 않았을까. 나의 누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으니까.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 가회동 재동국민학교 뒤에 살 때였다. 그 형은 우리가 살던 집에 그 형의 누님과 같이 방 하나를 빌려 자취를 하였다. 그 누님은 그때 벌써 숙명여대생 이었다. 남매가 단둘이 자취를 한 이유는 물론 집이 서울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라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기 때문이다.
양병환 형은 그 당시 한국의 최고명문(그때는 그저 일류라고 불렀다) 경기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두 남매는 인물도 훤칠하고 행실도 좋아서 모두가 호감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도 없고 누나 하나 밖에 없어서 ‘형’이나 ‘선배’란 존재는 대부분 든든하게 느껴지는 ‘좋은’ 존재였다. 아마도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를 가르쳤던 가정교사 ‘김용기’ 형 (그 형도 경기고등학교 생) 이후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형’이었던 셈이다.
그 당시는 지역편견과 감정이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되던 그런 시기였고, 특히 서울에서 전라도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그중에 제일 심하였다. 군사혁명의 주체가 아마도 경상도출신이 많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도 거의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나로서는 ‘드디어’ 전라도 사람을 바로 옆에서 대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그때의 말들이 “전라도 사람들은 처음 사귈 때는 좋아도 끝날 때는 아주 나쁘다” 그런 식이었다. 물론 그 당시 나의 나이는 그런 편견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 나이에 어찌 그런 ‘나쁜’ 생각이 수긍이 되겠는가. 하지만 주위의 어른들은 아마도 지금 표현을 빌리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는 않았을까.
처음 양병환 형과의 만남은 내가 친구 안명성(100% 확실치는 않지만)과 집 마당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그 형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훈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당시는 우리 같은 애들 에게는 주거 여건상 날씨만 허락하면 방보다는 바깥에서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 집 마당이나 골목 같은 곳은 그런 ‘사귐’이 이루어지던 최고의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수줍어하는 성격이라서 먼저 다가가서 사람을 사귀는 것은 힘이 들었는데 이때에는 그 형이 먼저 닥아 온 것이었다. 장기 두는데 여러 가지 비결을 가르쳐 주면서 나의 장기 실력도 덕분에 늘어갔다.
방과 후에 그 형이 자취방에 있으면 곧잘 그 형 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때 내가 흥미롭게 느끼곤 하던 것은 그 형의 ‘공부습관’ 이었다. 물론 그 형이 경기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주의 깊게 보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책꽂이에 있는 ‘참고서’를 비롯해서 내가 옆에 있는데도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며 열심히 공부하던 그 버릇이 나는 그렇게 부러웠다. 물론 ‘무례’하게 나를 장시간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무언가 한 가지를 끝내곤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때 나는 그 형에게서 참 무언가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물론 다 생각은 안 나지만 아직도 뚜렷이 남는 것 중의 하나가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었다.
물론 그 나이에 그 어려운 이론을 이해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런대로 그 형은 그것을 이해한 듯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뫼비우스 띠를 종이로 접어서 나에게 보여주던 그 진지했던 모습. 이런 것들은 그 당시 학교에서 배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형의 진지함과 거의 매료 된 듯 한 인상. 나에게는 참 신선하고도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 상대성원리만 접하게 되면 그때 소년기에 마음 설레며 감동을 받았던 추억을 떠 올리게 되었다.
그 때 그 형이 방과 후에 꼭 공부하던 책이 있었는데 그 당시부터 인기 있던 책 “삼위일체 영어” 이었다. 꼭 사전처럼 작고 두껍고 단단하게 생겼던 그 책은 그 이후로 수험생들에게는 거의 classic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삼위일체란 게 단순히 문법, 해석, 작문의 세 가지를 뜻하는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그게 기독교의 교리 (성부, 성자, 성령)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웃기도 했다. 아마도 첫 과가 이렇게 시작 되었지. A Newton cannot be a Shakespeare (Newton과 같은 과학자는 Shakespeare와 같은 작가가 될수 없다) 나중에 내가 중 3이 되었을 때 나는 감히 ‘무례’하게도 그 책을 공부하려고 하였다. 물론 결과는 거의 zero에 가까웠지만 내가 얼마나 그 형의 흉내를 내려고 했나 하는 한 예였다.
또 한 가지 즐거운 추억은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철야(밤을 꼬박 새우는 것)를 했던 것이다. 물론 그 형과 같이 ‘거행‘을 한 것이다. 왜 둘이서 그 형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아마도 그 형의 누님이 집에 없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그 형은 예의 바르게도 나의 어머님에게 미리 허락까지 받았다. 그런 행동도 나에게는 그렇게나 어른스럽게 보였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몸이 ‘비정상’적인 routine으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신체적인 충격보다는 심리적인 충격이 더 컷다. 그러니 아직도 이 나이가 되도록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지 않는가. 졸림을 참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장기도 두고 책도 읽고 옛날 얘기도 하고 재미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통금시간이 지나면서 (그때는 물론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그런대로 훤한 새벽을 가로지르면서 신나게 삼청공원을 지나 말바위까지 hiking을 하였다. 그 형은 커다란 나무칼(검도와 비슷한)을 가지고 갔는데 아마도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다. 새벽의 그 시간에 삼청동 산과 말바위를 간다는 것은 참 그렇게 신선하고, 무슨 아주 큰일을 한 듯한 자신감을 나에게 주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그 형네는 근처의 옆 동네로 이사를 갔다. 아마도 자취방을 비워야 했던 것 같다. 새로 이사 간 곳은 다행히 중앙중학교로 통하는 계동골목이었다. 이발소가 붙어있는 곳이라고 들어서 나는 어딘지 알았다. 이사 가기 전에 그 위치를 그 형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그만 그게 틀린 이발소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 형이 그 틀린 이발소 있는 집에 가서 자취방을 찾았는데 물론 없었겠지. 나중에 알고 보니 조금 더 중앙중학교 쪽에 있는 다른 이발소였다.
그 형네가 이사를 간 후에는 한번 놀러 갔었다. 내가 조금 더 숫기만 있었다면 더 자주 놀러가면서 더 친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나의 성격이 그렇지 못하였다. 그 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그게 거의 50년이 되어간다. 그 당시 그 형은 서울의대를 지망한다고 들었고 후에 합격을 하였다고 들었다. 아마도 훌륭한 의학인 이 되었는지 모른다. 경기고교 동창회를 통하면 아마도 소식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오래 산 보람중의 하나가 Internet이 아닌가. 값이 싼 search engine의 덕을 보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백일몽일까..
그 수많은 지난해들 중에서 1962년을 가끔 더 생각한다. 왜 그럴까? 비교적 유쾌한 추억들이 더 많이 기억이 되어서 그럴까? 확실치는 않다. 조금 더 기억이 날 뿐 일지도. 그 당시 알던 사람들 기억에서도 특히 왜 그렇게 이름 황성군이 또렷이 이 나이 까지도 남는 것 일까? 아주 색깔이 바랜 중앙중학교 앨범을 볼 때에도 그 친구의 모습이 더 생각이 나곤 했다. 그것도 근래에 들어서 더욱 그랬다. 사실 나와 그 녀석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친한 친구들이 따로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기억은 그 친구에 더 많이 머무르곤 한다. 조금은 감정이 찐하게 느껴지는 그런 독특한 추억 때문인 것일까? 황성군. 성은 황 씨이고 이름은 성군. 모든 외모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균형이 잡힌 모습이고, 거기에 걸맞게 ‘멋’을 부린 교복도 기억하기에 더 도움을 주었겠지. 지금 사진을 보면 나는 거의 젖먹이 어린애같이 덜 성숙했고 그 녀석은 나이보다 더 성숙한 의젓한 모습이다. 그런 나를 그 녀석은 잘 대해 주었다. 사실 그는 나의 짝(꿍)이었다.
그해, 1962년은 5.16군사혁명(1961년) 다음해, 모든 것이 긴장, 검소, 절제. 그리고 ‘재건’이라는 구호의 물결인 그런 시기였다. 4.19학생 혁명(1960년)으로 거의 아주 자유를 기치로 건 ‘방종’적인 무질서를 짧게 만끽하다가 이제는 국가재건이라는 기치아래 모두가 숨은 조금 죽이며 살았으나, 신선한 의욕이 넘치던 그런 시기였다. 그때는 거의 모두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빈곤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걸 별로 못 느끼며 살았다. 아마도 최소한 나의 나이에는 그렇게 느꼈다. 말로만 ‘멀리, 시골에서’는 밥을 굶는다는 얘기는 듣곤 했지만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우리는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도심 북쪽 북악산 남쪽에 있는 가회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사실 서울의 알짜부자들의 집이 많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 바로 남쪽이 재동이고 동쪽에는 계동, 또 그 동쪽에 원서동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사실 거의 이곳에서 보내졌다. 이곳의 기준으로 보면 소위 ‘중산층’집단이 살던 곳이라고나 할까.
1962년은 나의 중앙중학교 3학년인 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별로 가까운 친구가 없었는데 3학년이 되면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같은 반에서 보게 되었다. 2학년 때의 몇 명 안 되는 친구들 중에 ‘문민규’, “이경증”등이 같은 반이 되어서 너무 좋았고, 새로 알게 된 ‘김호룡’, ‘우진규’, ‘채현관’, ‘윤태석’, ‘정만준’ 등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황성군은 사실 3학년이 되면서 나의 짝으로 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억지로’ 사귀게 된 친구인 셈이다. 위에 열거한 친구들 대부분이 3학년이라는 처지를 생각해서 공부들을 열심히 하였다. 요새 발로 study group같은 것이 형성이 되어서 공부를 했는데 한마디로 공부를 이렇게 하는 것은 정말로 효과적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공부까지 더 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의 짝이었던 황성군은 이 group에 없었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학교만 끝나면 사라지고 공부시간도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항상 무언가 다른 것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마음씨도 착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하고, 멋쟁이 교복을 입고 (교복이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맞춤복에 가까웠음) 하던 황성군.
그런데 어느 날 부터 그가 점심을 가져오지 않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점심을 굶는 것이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곤 하고 나가지 않으면 자리에 그냥 앉아서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처다 보곤 하였다. 어리고 철없던 우리들이었지만 모두들 언짢은 기분으로 점심을 먹곤 했다. 특히 짝이었던 나는 입장이 아주 거북하였다. 내가 먹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충고’를 하곤 했다. 충고라기보다는 그냥 ‘평’이었다. 나는 그 당시 (지금도 남아 있지만) 밥을 먹을 때 습관중 하나가 반찬보다 밥을 먼저 먹는 것인데 이것은 절대로 반찬이 모자라지 않기 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나의 노력이었다. 황성군은 그런 나의 식습관이 이상하게만 보였던 모양이었다. 꼭 한마디를 하곤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 보다는 그가 점심을 굶는 게 더 신경이 쓰였고 주변의 나의 친구들도 거의 무언중에 동감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시골에서 보릿고개라고 해서 봄이 되면 실제로 굶는 농민들이 많다고 듣곤 했는데 서울의 노른자위에 있는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다는 게 사실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리그룹 중에 우진규란 친구가 황성군의 점심을 돌아가면서 가져오자고 제안을 하였다.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못 하였다. 그만큼 성숙치 못했다고나 할까. 우진규는 그런 면에서 확실히 성숙했던 친구였다. 무언중에 조금씩 괴로워하던 친구들이 다 동의를 하고 사정이 되는 대로 교대로 점심을 싸오기 시작하였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황성군은 고맙게 점심을 다시 먹게 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소문으로 들게는 되었지만 (그는 절대로 자기의 사정을 직접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집안의 사정이 무엇인가 때문에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워 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나이에서는 실감은 잘 가지를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언가 갑자기 커다란 빚을 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급했으면 그 당시 담임선생님한테 까지 가서 돈을 꾸게 되었을까? 참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때의 어찌 보면 사심이 없고 꾸밈도 없고, 순진하기만 했던 그 서울 1962년. 나는 그곳으로 부터 얼마나 멀리 흘러 왔을까…
나의 time machine은 빠르게 거의 반세기 전으로, 정확하게 1961년으로 되돌아 간다. 그해는 4.19 학생혁명의 다음해, 5.16군사혁명으로 이어지던 암담한 시절, 내가 서울중앙중학교 2년이던 그때로 되돌아 간다. 제목인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라는 시라기 보다는 시조에 가까운 음율을 가진 이 구절이 반세기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시의 저자는 그때 친하게 지내던 벗 ‘변웅지’였다. 변웅지..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나와 재동국민학교를 같이 졸업한 동창생으로 중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국민학교 때는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었지만 6년을 같이 다녔으니 얼굴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의 중학교 2학년은 사실 내가 조금 고생을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학교 공부도 그렇고 깡패 비슷한 녀석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했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이 변웅지같은 친한 친구가 있어서 아직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때 변웅지와 같이 나를 친구로 하던 게 이경증이라는 친구였다. 그러니까 나와 변웅지, 이경증이 거의 3총사 비슷하게 2학년을 보낸 셈이다.
그 당시 국어 선생님은 백정기 선생님이셨다. 백 선생님은 나중에 우리들과 같이 중앙고등학교로 올라가셔서 졸업 때 까지 가르치셨다. 이 국어시간에 국어작문 과제가 있었는데 그때에 나는 작문으로, 변웅지는 ‘시’로 제출을 하였는데 그때의 그 시가 거의 시조의 음률로 “오누나 오시누나 빗님이 오시누나” 였다. 그 후로 비가 올라치면 그녀석의 그 시조 같은 시 생각이 나곤 했다. 이것을 왜 알게 되었나 하면 제출된 작문 중에 뽑혀서 공부시간 중에 선생님이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변웅지의 시도 뽑혀서 읽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글도 뽑혀서 읽혔는데 정말로 나는 당황하였다. 나는 재동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을 썼는데.. 그런대로 쓰긴 썼다. 하지만 중요한 서론, 본론, 그리고 결론의 구조를 지키지 못하고 그만 결론 비슷한 것이 거의 없이 끝을 내고 말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고.. 어떻게 끝을 내는지 그것이 확실치 않아서 그만 그랬는데.. 선생님께서는 읽으신 후에 글이 잘 씌어졌는데 아마도 시간이 없었나 보다고 평을 하셨다. 나에게는 정말로 다행이었다.
변웅지와 같이 중랑천으로 낚시도 같이 갔었다. 나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해 보는 그런 것이었다. 그당시 도서관이 당시 고등학교 본관건물의 다락방에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그곳에 가서 학원사 발행의 ‘전집’ (위인전집, 세계 명장전집)을 빌려 읽고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변웅지와는 중학교 2학년이 끝나면서 반이 갈렸는데 고등학교 졸업 때 까지 한번 도 같은 반이 있던 적이 없었다. 가끔 얼굴이야 서로 보며 지나치곤 했지만 그렇게 서먹서먹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나이에도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는데.. 그 녀석이 너무 갑자기 변해서 (성숙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지만 정말 아쉽기만 하였다. 다른 친구 이경증은 여러 가지 인연으로 대학 졸업 후까지 관계가 계속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키가 아주 커 있었다. 그러니 사실 어울리는 그룹이 우리와는 아주 달랐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어느 대학엘 갔는지도 모른다. 아니 대학엘 갔는지 안 갔는지 조차 모른다. 40대, 50대에 모인 동기 중앙고 57회 단체사진을 아무리 돋보기로 보아도 안보였다. 다만 동창회 주소록에는 주소가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한번은 그 주소로 편지도 보냈는데 무소식이었다.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사실 잊을 수 도 있을 것이고 조금은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오래전의 순진했던 기억이 나에게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함께, 부디 건강하게 잘 살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