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의 한 가을
깊은 가을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 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부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 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 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 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아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 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 도 종 환 -
늦가을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깊어갑니다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아름답습니다 지금 푸른 나무들은 겨울 지나 봄 여름 사철 푸르고 가장 짙은 빛깔로 자기 자리 지키고 선 나무들도 모두들 당당한 모습으로 산을 이루며 있습니다 목숨을 풀어 빛을 밝히는 억새풀 있어 들판도 비로소 가을입니다 피고 지고 피고 져도 또다시 태어날 살아야 할 이 땅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 차마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 갈라진 이대로 둔 채 낙엽 한 장의 모습으로 사라져 갈 순 없어 몸이 타는 늦가을입니다.
- 도 종 환 -
도종환의 가을 시는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 나의 가슴을 아련하게 가을의 추억과 전설로 물들이는 이 시들은 어쩌면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다. 올해의 가을은 너무도 늦게 도착하고 느릿느릿하게 가고 있지만 그 빛깔들은 정말 한 해를 마음껏 정리라도 하듯 몸부림 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나의 집에서 나가는 길목에 있는 나무 하나는 밤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거의 야광에 가까운 색깔로 어두움을 밝힌다. 아~~ 전설과 추억의 가을이여.. 한껏 나에게 그 이야기를 남기고 가라. 영원히 사라질 2010년의 한가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