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nic Table Torched, Hawk Sighted, 할배 Blues

늦은 오후 ‘열대성’ 비가 지나간 직후 backyard 먼 곳에 있는 birdie apartment (3 rooms) 위쪽에 반가운 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사진을 찍긴 했지만 아주 선명하지는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이 손님은… 그렇구나… hawk (red tailed) 그러니까, ‘매’ 인가? 아마도 요새 급증한 토끼 냄새를 맡았는지… 노루나 사슴도 가끔 보이는 이 동네의 뒷마당들, 그렇게 나무를 자르고 잘라도 역시 아직도 다른 곳에 비하면 거의 원시림 수준인데, 솔직히 나는 이 지역의 이런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구나…

지난 4월초부터 out-of-service 되었던 mini picnic table의 수리가 일단 끝났다. 15+ 년 동안 rotting으로 상傷한 부분을 새로운 lumber로 교체를 하고 paint를 하려는 순간, ‘burning wood’ technique ‘그을음’ 생각이 났다. 이렇게 torching 화염으로 그을린 나무목재의 모습이 멋지기도 하고 습기나 해충으로부터 썩는 것도 지연시키지 않던가? 과연 겉모습은 예상대로 은은한 자연의 느낌을 준다. 하지만 natural elements에 의한 피해 상태는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가봐야 알 것이고, 결국은 paint job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목재에 이런 torching, burning technique으로 수명이나 예술성을 더해주는 것, 이미 일본에서 오래 전부터 쓰이던 것이고 이름도 아예 Shou Sugi Ban [이것의 漢字는 무엇인가] 이라고 있는데 과연 그 역사적 사실이 사실일까? 일본 아해들의 옛 것들은 일단 대륙, 반도에서 건너갔을 것이 거의 분명한데, 아쉽게도 서양 아해들과 먼저 접촉이 된 것은 거의 이런 일본용어와 결부가 되어있으니 더 할말은 없다. 대원군 할배여~  서세동점 西勢東漸 위기의 시대에 어이하여 며느리와 싸우시느라~~ 그 사이 일본아해들은 명치유신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근대화를 이루었는데…

‘할배’ 라고 자조 自嘲하는 우리 또래들, 특히 한국의 동창들, 나는 이런 자조적인 ‘꼰대, 할배’라는 말 크게 생각을 하지 않고 듣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없지 않다. 정말 우리가 할배, 꼰대들이 되었단 말인가? 그렇게 볼품없을 거라고 상상하며 살던 시절들이 다 지나갔단 말인가? 꿈이라면 깨고 싶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확실히 우리들은 심리적으로 ‘젊었던 시절과 할배 시절의 모습들’이 엄연히 동시에 현존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사실은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최근에 갑자기 늘어난 ‘육체적 일들’, 일이 끝나고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비록 일반적인 건강상태가 아주 좋은 것은 사실이라도 작업 이후의 피로감이 회복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슬픈 사실… 전에는 실감을 못하던 현상이 아닌가? 어떤 때는 Tylenol이 그리워질 정도의 피로통증까지 몇 시간 지속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이 탓인 거다. 쉬면서 relax하면 자연스레 사라지는 현상, 그래 나쁘지 않다. 쉬라는 ‘몸의 충고’가 아닌가.

덕분에 두어 시간 쉬는 동안 새로 단장된 ‘new’ family room의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TV (주로 YouTube classic movies 주로 film noir)를 보는 재미를 새로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거의 없었던 나의 모습이라고 할까… 이전까지는 거의 예외 없이 desk에 앉아서 (computer) screen앞서 시간을 보내고 쉬고 했는데…  일단 computer screen에서 떠난 것만 해도 커다란 변화요, 새 세상의 발견처럼 느껴진다. 전혀 나쁘지 않다.

오늘 늘어지게 다리를 뻗고 졸듯 말듯 ‘그래도 전부를’ 본 영화는 1965년 경 James Stewart주연의 The Flight of the Phoenix란 것, 오래 전에 (old tube) TV 에서 보았던 것으로 거의 모든 이야기 줄거리는 기억을 하는 것인데 지금은 YouTube로 ‘거의’ HD 로 보는 것이니 느낌이 정말 다르구나..  사막에 고장으로 불시착한 석유회사 운송기를 필사적으로 수리를 해서 다시 나르게[짧은 거리지만] 하는 ‘믿을 수 없이 기막힌’ 과정을 그린 것이다.  수리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수리라기 보다는 아예 기존 ‘철물’을 뜯어서 거의 새로 비행기를 만드는 처절한 노력이 코믹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정확히 1주일 만에 아침미사, gym엘 가는 날..  잠깐씩 ‘쉬고 싶다’라는 무서운 유혹이 넘실거린다. 안 나가는 것 자체가 편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유혹이요 공포다. 이것에 잘못 걸려들면 나는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모님이시여, 저의 손을 놓지 마세요~~
7월도 20일이라고? 웃긴다 웃겨… 어떻게 벌써 7월의 2/3가 가고 있단 말이냐? 어떻게? 웃기는 건 바로 나다, 그것이 그렇게 새롭고, 놀랍냐, 병신아! 그래도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면 어디가 덧나냐?
Sonata Cafe까지 곁들인 오늘의 아침미사와 YMCA gym 외출은 비록 오전 전부가 필요한 외출이었지만 분명히 정신적으로 큰 에너지를 재충전 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집에 오는 길에 느낌이 ‘오늘은 외식이나 Kroger에서 무엇이라도 사다 먹자’ 라는 의견을 서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그것은 오산이었다. 대신 집에서 가정주부가 만든 볶음밥 의 멋진 점심 식사가 되었다.

Madame Anemone at Home Depot

오늘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Home Depot garden center를 둘러보니… 와~ 그 동안 못 보았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각종 화초들이 모조리 나와 있는 것 아닌가? 오늘 나의 눈에 뜨인 것은 다름이 아닌 ‘아네모네’ 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귀에 익숙한 꽃 이름인데 실제로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아주 귀엽고 예쁜 모습이어서 값만 적당하면 우리 집에도 심자고 의견을 모았다. 아네모네 꽃도 그렇지만 그 이름이 더욱 관심이 간 것이, ‘아네모네 마담’ 이라는 오래 전의 ‘주요섭 문학 소설’ 제목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역시 나는 과거에 얽힌 추억에는 맥을 못 추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인간인 모양인가…
이 ‘고전 소설’을 읽은 적은 없지만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KBS 문학관이란 TV drama로 편하게 보게 되었다. 처음 이것을 보면서 소설 속의 아네모네 마담이라는 것도 사실은 아네모네 다방의 마담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대배경이 일제시대(요새는 ‘일제강점기’라고 하던가..)인 것은 이 소설이 나왔을 때가 그때였기에 그런 듯하지만 오히려 그 당시 다방의 모습과 우리 시절의 그것과 비슷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씁쓸하기도… 우리는 역시 완전히 지나간 세대의 유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듯 해서 그런가…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야말로 ‘신파조’이지만, 아네모네 마담이 보는 다방 단골 손님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subplot이고 줄거리 자체는 아네모네 마담의 ‘환상적 사랑’의 이야기에 엮여 있다. 어떤 대학생이 마담을 연모하고 있다는 상상에 빠진 것, 결국은 심각한 사연이지만 거의 코믹한 요소까지 곁들여서 전체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신파조’를 초월하는 듯하다.

이 아네모네 꽃은 절대로 얌전한 모습이 아닌 듯 보여서, 혹시 이 꽃의 의미와 이 소설의 이야기에 연관성은 없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저자, 주요섭 분명히 들었던 이름이어서 재미 삼아 ChatGPT로 보니 엉뚱하게도 서울대 법대 교수이름만 잔뜩 뿜어내고 있었으니완전히 우리 세대들은 이런 ‘AI robot’ 조차도 완전히 잊어버린, 옛날 속에서 살고 있는 모양이다.

 

Ash Wednesday 2023, Lent Begins…

매일 참례하는 우리 동네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의 아침미사가 오늘은 ‘재의 수요일 미사’가 되었다. 물론 전례가 특별하고, 다른 것은 물론이고 처음 보는 교우들도 꽤 많았다. 우리가 이곳의 주일미사에 오지 않아서 이들 대부분이 아마도 ‘주일미사 교우’들일 듯하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40일 간의 Lent 사순절, 교우 신자들의 이마에 그어진 재의 십자가,  Remember that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Miguel 주임신부님, 이 두 가지 말씀을 곁들이며 이마에 재의 십자가를 그었다.  이어진 강론도 이 두 말씀에 관한 것,  인간 존재의 무상함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 antidote는 다름이 아닌 ‘복음 Gospel’이라는 간단한 진리… 아~ 이것을 잊고 살았던 것, 오늘은 진정한 사순절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Lent, 사순절 시작, 오늘과 40일간 매주 금요일은 ‘절제, 금육’이라는 교회의 지침을 나는 왜 이렇게 가볍게 알고 있었던 것인가?  절제 abstinence 는 음식을 절제, 단식하는 것이지만 우리 같은 ‘고령’은 제외되지만 [사실은 60세 미만]  금육재 禁肉齋는 예외 없이 지켜야 한다. 그래, 오늘과 금요일은 절대로, ‘한때 의식을 가졌던 생명의 살’을 취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절대로..  오늘은 비록 나이조항으로 면제는 되지만 가급적 단식을 지향한 하루가 되도록, 가급적, 될 수 있는 한…

 

오늘 뉴스를 보니 President Joe Biden의 이마에 검은 십자가 모양이 보였다. 사진 설명에 의하면 Ukraine을 깜짝 방문한 후 Poland의 hotel에서 개인미사를 하며 재의 예식을 받았다고 나온다. 역시 그는 ‘전통적 가톨릭 신자’임을 알 수가 있다. 비록 교리에 벗어난 ‘정치적’ 신념으로 논란은 있지만 역시 그는 교회를 다니는 진정한 신자인 것이다. 그것과 ‘교회 앞에서 징그러운 pose로 사진을 찍는 연극을 하는’ 정말 구제불능의 DONALD 개XX를 모습이 극적으로 비교가 되니…  정말 이것은 하늘과 땅, 아니 지옥의 차이가 아닐지..  오늘 보게 된 Boston based CatholicTV.com의 This is the Day program에 나온 regular personality들의 이마에  Biden보다 더 선명하게  ‘재의 십자가’가 보인다.

매년 재의 수요일 미사 예식에서 쓰이는 ‘재’는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는 모두들 안다. 작년 Palm Sunday에서 쓰이던 palm leaves를 신자들로부터 회수를 받아서 그것을 태워 만드는 것인데 오늘 이 Catholic TV program 에서 그 과정을 보여주었다.  거의 순식간에 재로 변한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 종려나무가지들’, 이런 상징적인 것에 예수 수난의 신학적 의미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지…

이렇게 해서 드디어 오늘부터 40일간 ‘사막의 여정’이 시작되는가? 그 첫날인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는 Lenten regulation 중에는 No Meat 조항밖에 없지만 그래도 Fast 조항은 어떨 것인가? 비록 ‘고기’는 안 먹었어도 절제, 단식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나이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공교롭게도 오늘따라 더 배가 고픈 듯이 느껴졌으니… 심지어 다른 때보다 더 맛있게 식사를 한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Dark & Long Winter Begins, Time’s Zelensky

어제 저녁 어둠이 잔잔히 깔릴 무렵 우연히 밖을 보니 수 많은  하얀 그 무엇들이 도로변으로 줄을 서 놓여있다.  그것들은 모두 촛불들이었다. 아~ 촛불이 다시 켜지는 때가 되었구나. 어둠이 깔린 후에 다시 보니 역시 모두 아련히 촛불들이 켜져 있었다. 이것이 성탄과 상관이 있었나 생각을 해보니, 그것이 아니고 분명히 오늘이 동지라서 그랬을 거라는 결론~~  Pandemic이 시작되면서 시작된 우리 subdivision의 겨울시작, 동지의 전통이 되고 있다. 제일 기나긴 밤 동안 이 불들이 우리의 가슴을 훈훈히 녹여줄 것을 생각하니 이것을 준비해 준 우리 동네 억척[아지매] volunteer들의 ‘동네사랑’ 봉사정신에 머리가 숙여진다.

어떻게 이번, 아니 올해는 ‘동지’를 완전히 잊고 살았을까? 오늘은 몸이 성치 않았으니까 그렇다 치고 지난 며칠 동안도 거의 이런 큰 절기의 변화를 잊고 살았으니 말이다. 이곳의 동지는 사실 제일 긴 밤이라는 것 뿐, 기온이나 날씨와는 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연말 때의 경험은 더 따뜻한 적도 많았다. 한가지, 이제부터는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나는 왜 그런지 아쉽기만 하다. 왜 그럴까? 긴 밤이 나는 왜 좋은 것일까? 나는 이래저래 ‘긴 밤, 어두운 비’ 등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다.
 

오늘 ‘순병원’ regular checkup day, 항상 이곳에 가면 기대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를 않음을 안다. 요새는 거의 모든 일을 NP들이 하고 MD를 만나는 것은 예외에 속한다. 이것으로 나날이 오르는 의료비를 control한다고 하지만, 가끔 짜증도 난다. 이들 NP들, 어떨 때는 기대이상으로 기분이 좋은 것이고 반대일 때도 그만큼 있다. 오늘은 그런대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긴 시간을 기다린 것은 옥의 티라고 할까… 하지만 이 정도면 OK. 오늘은 blood test만 했는데, 지난 번의 검사결과의 진행상황을 보려는 듯하다. 제일 희망적인 것은 연숙의 kidney 에 관한 문제의 가능성이 거론되지 않은 것, 콩팥 수치가 borderline이라서 그런지… 한때 이것으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추후로 큰 문제가 없는 듯해서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쉰다. 식생활 습관에 신경을 쓰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인지, 이런 정도의 건강상태면 노력을 해서 그대로 유지하면 되는 것이니까… 조심 조심…

집으로 들어오면서 Kroger에 들려서 ‘푸짐한 먹거리’를 사서 들어오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Sushi, fried chicken, pecan pie, croissant etc.. 구세군에 $5 도 헌금을 했고, Holy Family 성당에도 $100 헌금을 하자고 연숙이 제안을 해서 모처럼 훈훈한 느낌이 우리 둘 사이를 오간다.

들어오면서 온통 관심은 날씨와 Ukraine 대통령 Zelensky의  ‘깜짝’ 미국방문에 관한 소식들이다. 대신 DONALD ‘개XX’의 소식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으니 나에게는 정말 살맛이 나는, 신나는 시간을 살고 있다.

미국인의 영웅으로 부상한 젤렌스키, 어찌 그가 올해의 TIME magazine의 인물로 선정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웅이 아니라 세기의 악당들이 미국이 득실거리며 온 세상으로 수출을 하고 있는 이때에 이런 귀한 영웅은 조금 더 많이 나와도 좋지 않을까? 진정한 NATIONALISM이 무엇인지를 성서급으로 격상해서 보여준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나에게 Wind Chill-Day라고 불리는 날이 내일로 다가온다.  다행히 내일은 외출 해야 할 일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쉬운 것은 이런 때 흐리거나 눈발이 날렸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도 day off를 할 것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집안만 포근한 느낌이 들면 이런 날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젊었을 적의 생각이었는데.. 아~ 그때가 좋았지, 멋졌지, 편했지, 사랑스러웠지… 그립다 그런 느낌의 시절들이…

내일 날씨에 대한 큰 문제는 바람과 추위에 과연 우리 집이 어떻게 견디는가 하는 것이다. 바라는 만큼 insulation을 못하고 사는 것이 제일 마음에 걸리는데 결국은 once-in-generation-arctic-cold-blast  의 상태까지 온 것이 나도 부끄럽기만 하다.

목감기~ 목의 통증은 거의 사라졌고 이제는 콧물과 재채기 같은 것만 남아있다. 젊었을 때를 기억한다면, 확실히 flu shot의 효능은 대단한 것 같다. 그 옛날, 이런 것은 거의 일주일을 넘어가며 기침을 계속했지 않았던가? 만약 오늘로 거의 다 낫게 된다면 나의 flu shot에 대한 생각은 맞을 듯하다.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난의 시간들’, 벌써 19일째가 된 것, 또 ‘벌써?’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벌써, 벌써? 싱겁게 짧은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고통이 격해지면서’ 점점 길어지는 것들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이 처음이라는 것을 핑계로 깊은 묵상을 할 엄두는 내지를 못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OK, OK…

 

 

Two Votes for Warnock, Destroy Trumpism!

쓰레기 통을 바깥으로 내놓으면서 mailbox를 보니 기다리던 runoff election ballots 2통이 얌전히 들어있었다. 또한 Asian community에서 보낸 선거운동 post card가 연숙의 이름으로 보인다. 이제 열흘이 남은 runoff, 만의 일이라도 2016년의 ‘ DT 개XX 사고’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조금 걱정은 되지만 이번에는 ‘한번 속지 두 번 속냐?’ 라는 깡으로 버틴다. 며칠 전 가족 turkey dinner에서 Luke의 의견도 마찬가지.. 어떤 말종 인간들이 그 개XX를 뽑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 물론 나도 동감… 이것의 흑백 논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만의 일이라도… 아~ 상상조차 싫구나~~

오늘 우리도 파격적으로 일찍 Christmas Decoration을 시작하려 했지만 의외로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을 핑계로 내일로 미루기로 결정을 했는데 어둠이 내리면서 밖을 보니… 아~ 앞집 Josh 집에서 온 가족이 나와서 장식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른쪽 Day 집도 이미 방 속에는 tree의 light가 보이고… 아~ 우리 동네도 본격적인 holiday season이 시작되고 있구나… 또 한 해의 흐름과 함께…

오늘도 어김없이 어김없이 ‘죽음의 진짜 모습, 의미’에 관한 ‘논문 급’ 글들일 포근하고 행복한 심정으로 읽고 읽는다. 그러면 그렇지, 인간, 아니 생명이란 것이 그렇게 영원히 사라질까, 그것은 너무나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절대 사랑의 본질인 그 하느님이 어떻게 태어난 생명이 없어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현재 대량의 논문, 자료들이 BICS prize winner들의 것인데 이것을 전부 읽고 나면 나는 또 어떻게 변할 것, 아니 더 신심을 돈독하게 할 것인지 지금부터 가슴이 울렁거린다.

어제의 특전미사 ‘덕분’에 모처럼 편하게 아침잠을 즐길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른 아침의 신비는 늦잠을 허락하지 않는다.  잠을 자는 동안 후두둑거리는 빗소리를 간간히 들었지만 예상한 것처럼 쏟아지는 비는 아니었다. 잔잔히 촉촉이 적시는 정도의 얌전한 비, 이것도 일요일 새벽의 기분을 적당히 만져주는 듯하다. 이런 느낌은 한마디로 행복함 그 자체임을 인정하면 된다.

 

Old McDonald’s, Moving Marshall

오늘은 모처럼 아침미사 이후에 McDonald’s 엘 가서 ‘2 No. 2’로 아침식사를 했는데 모처럼 맛본 이것, 한마디로 맛이 있었다는데 동감을 했다. 그렇다, 자주 대하는 것, 먹는 것 등등은 쉽게 싫증이 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가급적 매식, 그것도 fast food는 피하고 살자는데 큰 이견이 없다.  이곳 Canton Road의 McDonald’s, 추억이 얽힌 곳이지만, Pandemic 동안 완전히 remodeling 을 해서 그때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진 곳이 되었다. 아이들 생일 party도 하던 playground가 완전히 없어진 것.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추억이 어린 곳이다. 이곳의 모습, 다행히도 Google Map에서 찾은 것, 혹시 옛날의 모습이 아닐까 했지만 최근 renovate된  [May 2022]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다행인지, 옛날의 모습이 조금 그리워진다.  아이들과 함께했던 그 모습을 다시 찾을 수는 없을까?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있는 Marshalls에 들렸는데, 오늘도 나는 살 것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연숙이는 무언가 return을 하고 산 것도 있었다. 오늘 알게 된 사실은 이곳이 Home Depot가 있는 Merchant Walk으로 이사를 곧 간다는 조금은 섭섭한 소식이었다. 하기야 가까운 이곳이 그 동안 편리한 곳이었는데…  이곳의 매력은: brand name, 그러니까 명품급에 속하는 것들을 ‘조금 흠이 있기에’ 정말 싸게 살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이들조차, 이렇게 하나 둘씩 우리를 떠난다는 것이 조금 슬프기도 하다.
오늘 Marshalls에서 나의 눈과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PUMPKIN COLOR가 아닐까? 왜 올해는 이렇게 가을의 상징, pumpkin 색깔에 관심이 가는 것일까?

Falling Leaves on high: 지난 밤에는 아마도 여름의 잔재인 듯 요란한 천둥소리와 빗소리를 잠결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가느다란 꿈 속에서도 ‘여름의 추억, 섭섭함’등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날씨는 비구름이 서서히 물러가기는 했지만 대신 바람이 하루 종일 세차게 불었다. 오늘 창 밖으로 보이는 ‘낙엽’의 모습은 며칠 전과 완전히 다른 것, 나르는 나뭇잎이 하늘을 가득 채운 장관이었다.  바깥의 모습도 처음에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는데, 결국 오후부터는 태양이 가득한 전형적 가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마디로 요사이 날씨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그런 그림 같은 날씨의 연속… 감사합니다~~

The Winds of War: 며칠 전에 low quality[VHS resolution] video나마 전부 download했던, 1980년대 초의 TV Drama miniseries ‘The Winds of War‘를 조금씩 보기 시작한다. 이것도 The Exorcist와 비슷한 nostalgic value가 있는 것이고, 40년 전의 세계관과 현재의 것의 차이점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보다는 ‘흥미, 재미’의 요소가 현재 나를 이곳으로 이끌고 있을 것이다. Robert Mitchum, Ali McGraw, Jan Michael Vincent 같은 당시의 top stars 들이 대거 출연, 아득한 추억에 잠기게 한다. 2차 대전을 역사적인 눈에서 조금 벗어나 보는 것도 나에게는 유익한 인류사 공부가 되고 있다.

 

Ukrainian Liberal Nationalism, Roswell Road

이제는 하늘의 구름이 조금 그리워진다. 정말 진짜 한 점의 하아얀 물기가 없는 ‘시퍼런’ 하늘이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착각, 더구나 그런 상태로 매일 매일 매일 매일 지나가는 나날들이 이제는 지겹게 느껴지는 것, 나의 응석인가? 그렇다, 삶은 변화, 그것이 없는 것은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고통일 수도 있고.. A day in the Life 일 수도 있고…

어제 오랜만에 읽게 된 David Brooks 의 NYT column piece: Liberal Nationalism, Ukrainian War에 관한 글을 계속 생각한다. 수박 겉 핥기 단계이지만 아마도 조금 나의 제한된 정치적 세계관으로 더 자세히 분석을 하고 싶기도 하다.  내가 과연 얼마나 Liberalism, Nationalism을  학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피부로 느끼고 75년의 ‘장구한’ 세월의 세계사는 일단 보았기에 그것이 출발점이니까, 사실 큰 문제는 없다.

Liberalism과 Nationalism은 언뜻 보기에 정 반대의 개념으로 보인다. 한쪽은 progressive하고 다른 쪽은 conservative 개념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국수주의가 과연 타협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두 생각의 중간 단계를 절묘하게 밟고 있는 예가 바로 현재 Ukraine의 경우인 것이다. 문제는 이 두 대조적인 사상을 어떻게 조화를 시키는가 하는 것인데 지금 전쟁 중인 Ukraine의 case가 바로 그런 과업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나라는 결사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고수하는 한편 또한 같은 노력을 자국의 영토와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에 바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미국의 전통적 민주주의의 형태이기도 하다.  이 column은 이렇게 요약을 한다.

Liberal nationalism believes in what liberals believe, but it also believes that nations are moral communities and the borders that define them need to be secure. It believes that it’s sometimes OK to put Americans first – to adopt policies that give American workers an edge over workers elsewhere. It believes it’s important to celebrate diversity, but a country that doesn’t construct a shared moral culture will probably rip itself to shreds.

 

오늘은 아침미사, YMCA gym routine을 포기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 무리.. 라는 사실에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어제 맞은 5차 COVID 백신의 영향은 생각보다 경미한 것인지 어제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든 것으로 해결이 되는 것 같아서 나는 오후에 gym routine은 도전해 볼 가능성을 남겨 두었는데  결국 오후에 홀로 gym으로 가게 되었다. 나의 ‘노구’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자극성 운동’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요즈음 항상 가지고 다니는 spycam으로 drive를 하며 Roswell Road의 정든 거리를 video에 담았다.  드물게 홀로 drive를 하게 되어서 모처럼 느끼는  기분은… 자유, 자유 바로 그것이었다면 조금 과장된 표현일까? 왜 그렇게 나를 듯한 쾌감이 느껴졌을까? 간단히 말해서 좋고 나쁘고를 떠난,  ‘변화된 삶의 단면’을 느꼈기 때문일 거다.

이 거리를 이렇게 달린 지가 도대체 얼마나 되었나… 1992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40년이 넘어가는 엄청난 세월, 이 거리를 잊지 마세요~ 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이곳, East Cobb이 40년 동안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던 것도 요새 세상에는 조금 예외적이고…  그래도 정치적으로 보면 이곳도 옛날보다 많이 젊어졌고, colorful해 것도 사실이다. 보수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던 곳이 지금은 이상적으로 많이 진보 쪽으로 변한 곳이긴 하지만, 아직도 이곳은 family에게는 안전한 곳이다.

 

Favorite Web Links, An Evolution…

얼마만인가? 나의 personal web landing page: personal www links, 이곳을 나는 거의 잊고 살았다. 이곳에 있는 각종 website links들은 이제 10여 년의 무게를 가지고 진화를 하고 있는데, 근래에 들어서 조금씩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몇 개, 특히 bill paying sites같은 곳은 가끔 필요할 때도 있지만 나머지 것들은 이제 서서히 잊혀져 가는 듯 싶다. 십여 년의 세월이 어디 짧은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favorite website의 진화, 변화가 있었는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links들이 꽤 많이 보인다.  그 중에는 이제 거의 관심 밖으로 나간 것들도 있고, 아직도 자주 찾는 곳들도 있다. 요즈음에는 technical site엘 거의 가지 않았기 그쪽은 정말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내가 그 동안,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관심사가 변했다는 말인데… 나 자신도 놀랄 뿐이다.

오늘 쪽에 나열된 것, Technical/Social Links들이 이제는 거의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Technical 은 물론 나의 관심사가 그곳을 거의 떠났기에 당연한 것이고, Social한 것은 아예 모든 것들이 Google/YouTube로 진화가 되었으니 마찬가지 현상이다. 이제는 이곳은 거의’추억의 가치’만 생각하게 되었다. NerdVittle’s VOIP이란 곳, 2000년대 말기까지 내가 심취했던 곳, 이제는 완전히 관심을 끊었다. PC에서 mobile쪽으로 옮겨간 여파가 이곳에서도 완연히 드러난다.

대신 나의 favorite links쪽은 지난 decade에 나의 관심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탯줄’역할 을 했던 곳이다. 제일 바빴던 곳이 WIKIPEDIA, COURSERA, YOUTUBE, WORDONFIRE, CATHOLICTV 등등으로 집중이 되었으니, 사실 이런 LINK LANDING PAGE가 이제는 거의 필요가 없게 되었다. 최근에 더해진 곳이 ‘조중동’ sites인데 너무나 고국정세를 무시하고 살았던 긴 세월이어서 조금이라도 되찾으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외계인 site를 보는 듯한 느낌이어서 아직도, 아직도 선뜻 손이 가지를 않는다.

YMCA gym 에서 운동을 하다 보면 흔히 이런 모습을 본다. 분명히 벽에는 NO CELLPHONE PLEASE!라고 적혀 있기에 우선 신경이 쓰이지만, 이 젊은이는 그런대로 얌전한 편이다. 사적인 대화를 earphone으로 조용히 하고 있고, 무언가 급한 것을 check해야 하는 전형적인 요새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가끔 정말 지독한 얌체들,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부류들이 있고, 그런 모습을 보면 운동을 하는 혜택을 완전히 상쇄하는 나쁜 효과를 느낀다. 이럴 때마다 불과 20여 년 전 정도로 돌아간 ‘덜 바쁜’ 세상을 잠깐만 회상해도 조용한 호수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한마디로 mobile phone etiquette의 문제를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운동하는 그 시간만이라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의도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없는 탓이다.

 

 

Adoration Chapel, McMuffin, Home Depot, YMCA

오늘도 역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지는 날이 되었다. 아침 시간이 바뀐 것으로 이렇게 일주일 동안 고생을 한 기억이 전혀 없기에 은근히 걱정까지 된다. 나의 몸이 이제는 사계나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떨어진 것은 아닌가? 게다가 일어나 걸어나올 때 몸의 균형감각도 귀찮을 정도로 떨어진 듯 느껴진다. 이것도 역시 노화현상?  하지만 이런 것도 곧 적응을 하며 살게 될 것이다. 지나친 상상은 역시 좋지 않지…
세속뉴스로부터 잠시 ‘피정하는’ 기분으로 떨어지고 싶은 날이다. 별로 좋지도 않은 세상 돌아가는 뉴스로부터 조금 쉬고 싶구나. 나를 기쁘게, 상쾌하게, 들뜨게 하는 뉴스만 모아놓은 곳은 없을까? 내가 그런 것을 만들어볼까.. 하는 상상도하지만 그런 쉬운 방법이 있을까?

오늘은 거의 2년 만에 처음으로 거의 정상적인 월요일이 되었다. Holy Family 성당 아침미사를 시작으로 오늘은 2년 만에 처음으로 성체조배 경당 adoration chapel에 가보았다. 정말 짙은 감회를 느낀, 눈물이 날만한 순간이었다. 마침 월요일 아침이라서 성체를 신부님이 모시고 와서 성체현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조배실 경당 내부는 크게 변한 것은 없었어도 그래도 조금은 바뀐 듯 하기도 했다.
성당을 나와 오랜만에 우리에게는 30년의 기억이 아롱진 Roswell RoadMcDonald’s 에서 Egg McMuffin을 아침으로 먹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오랜만이라 그런지 정말 맛이 있는 경험이 되었다. 이곳은 Pandemic이 시작될 무렵에 완전히 remodeling을 해서 예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초현대식으로 바뀌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놀던 playground 도 사라진 모습 등이 조금은 섭섭하기도 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 neighborhood도 모두 나이가 들었는지,  이제는 어린애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의 생일파티도 해주고 집에서 먹기 싫으면 수시로  온 가족이 와서 먹을 수도 있었던 추억들… 아~ 이제는 아이들의 조금 더 있으면 자기들의 애들을 데리고 올 때가 올 것이니… 우리는 그만큼 세상에서 더 밀려가고 있구나…  이곳을 나와 화창한 날씨의 덕분으로 잠깐 들렀던 Home Depot의 garden center는 활기를 띤 모습이었다. 아마도 지금부터 이곳은 갑자기 늘어나는 customer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하지만 오늘 외출의 백미 白眉는 마지막에 들렸던 곳, 바로 YMCA였다. 이곳이야말로 Pandemic 2년 동안 우리가 제일 그립고, 아쉬워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성당이야 online이란 것이 있고, 식당도 takeout을 하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겠지만 YMCA는 online이란 것이 가능이나 한가? 나의 몸으로 drive해 가서 땀을 흘려야 하는 곳이 아닌가? Pandemic상황이 완화되면서도 제일 늦게 open을 하는 것은 물론 ‘방역’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얼마 전에 ‘거의’opening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조심스럽게 가서 본 인상은… 아~ 이제는 가도 되겠다는 결론!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적은 데다가 각종 방역시설들이 거의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보며 일단 코로나바이러스의 그림자는 거의 물러갔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East Cobb YMCA in 2 Years…

오늘은 모처럼 YouTube에서 들을 수 있는 가톨릭 성가를 등 뒤에 BT[Bluetooth] speaker 올려 놓고 은은하게, 거의 하루 종일 흘러나오게 해 놓았다. 이것의 심리적 효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물론 차분해지는 효과가 있고 지금이 사순절이라는 사실을 가끔씩 일깨워주기도 한다. 이런 환경효과를 나는 사실 많이 놓치고 산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면 어떨지… 나에게는 생소한 경험이긴 하지만 시도해 볼만 하지 않을까? 오늘은 성 이냐시오의 전기傳記를 주로 쓰고 읽는다. 예수회의 전통을 알려면 역시 창시자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대강의 지식을 넘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는 것 올해 사순절의 작은 선물이 될 지도…

 

내일로 다가온 요한복음산책 영성독서 제15강,  ‘요한복음산책’, 제3권 ‘생명의 빛이 가슴 가득히’ 중  내일의 주제는 ‘라자로의 소생 기적’에 관한 것이다. 너무나 유명하고 단순한 episode이긴 하지만 이것도 저자 송봉모 신부의 손을 거치면 1000% 크기로 상상할 수 있는 것들로 변한다. 성서학에 근거를 두고 저자 자신의 상상력까지 무궁무진하게 펼쳐놓는 것, 이런 방식에 익숙지 않은 나는 아직도 각종 갈등과 싸운다. 제일 역설적인 느낌은 이것이다. 분명히 책의 서두에 ‘성서는 지식 바탕의 공부가 아님’을 선포된 이후,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은 ‘현미경으로 보는 지식물의 덩어리’라는 것, 나의 착각인가, 오해인가? 정관사가 몇 번 쓰였고,  한글번역의 신빙성을 완전히 의심,  떨어지게 하는 원전 희랍어의 숨은 의미들, 이 단어는 전체적으로 몇 번 쓰였고… ‘ 등등..  성서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공부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성서가 100% 틀릴 수 없다는 대 전제에서 출발한 이런 접근방식을 가끔 잊기에 나는 더욱 혼란스럽다.

 

On Christmas 2021

성탄미사, 간신히 제 시간에 생방송으로 참례를 할 수 있었다. 스크린에는 생각보다 많은 교우들의 모습이 보였다. Omicron 위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당에 대한 신뢰는 대단한 것으로 보였고, 상대적으로 우리는 너무 조심한 것은 아니었던지… 하지만 위로가 있다면, 작년보다는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다. 작년에는 생방송 미사 참례를 못했던 대신가족들은 모일 수 있었지만 올해는 Thanksgiving부터 시작해서 가족행사는 완전히 못한 셈이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덜 피곤하고 덜 신경이 쓰이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그것이 나인 것을 어찌하랴~ 비록 모이지는 못했어도 어제 우리[사실은 연숙]가 극성을 부려 각 가정의 선물들과 연숙이 만든 음식들을 배달해서 간신히 크리스마스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선물, 나는 개인적으로 하지 못했지만 받기는 했다. 이제 이런 것들 신경 쓰는 것, 솔직히 머리가 제대로 돌지를 않는다. 

10년 전에 망원경 선물을 받은 것 요새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것을 알았던 새로니가 두툼한 책, Backyard Astronomer’s Guide를 나에게 주었다. 알고 보니 이 저자의 망원경 입문서는 내가 이미 읽고 있었던 것이고 지금 받은 것은 그것의 후편에 속하는 것이어서 이 선물은 안성맞춤 격이 되었다.  하지만 과연 이 책이 앞으로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에게 편하게 맞는 얇은 sweater, 전에 Sherlock에 갔을 때 연숙이 사 주었던 Johnny Walker Black, Shark vacuum cleaner, 올해 World Series Champion Atlanta Braves cap (다 좋은데 색깔이 idiot MAGA를 연상시켜서 별로 쓸 마음이 없지만..) 을 아이들로부터 받았다. 아~ 이렇게 해서 올해의 마지막 가족 행사로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모양…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하고 감사하고 유쾌한 감상이 사그라지기 전에 나는 오수 午睡를 즐기려 2층 침실에 기어들어가 아주 깨끗한 잠을 잤다. 왜 오늘은 의외로 편한 하루를 보낸 것일까?  기분 좋게 오랜만에 포식을 한 스파게티 점심? 아기 예수님의 은총? 머리로는 확실치 않다고 하지만 가슴 속으로는 그럴 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비록 성탄절 당일이었지만 의외로 나는 성스러운 영화나 책을 안 보았다. 그런 것, 내가 내 자신을 기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런 성스러운 표현에 둔감해지는 내가 싫었기 때문일까?  그래, 나는 근래 수 많은 ‘영적독서’를 하고 있지만 성과는 그 노력을 못 따라가는 것을 안다. 왜 그럴까?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노력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왜 가슴이 예전처럼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은 것일까?  오늘 성탄절, 오늘이 성탄8일축제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오늘로서 성탄시즌이 끝난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인지… 역시 Pandemic Omicron으로, 관심이 다른 곳으로 간 것일까?

Pandemic 특히 Omicron을 대하는 새로니와 나라니 두 집은 극과 극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동정심을 금할 수가 없다. 새로니 쪽 사위 건강상 문제도 그렇고 작은 사위의 자유분방한 생활방식도 이런 Pandemic 세상에는 아쉽기만 하다. 최근에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온 이Virus 때문에 사실상 가족모임은 취소되었지만 그래도 선물 교환 등은 마지막 순간에 ‘기적적’으로 실현이 되어서 작으나마 위안을 받는다.

Dementia…  Alzheimer… cancer…high blood pressure, kidney scare,  70대의 화두가 이렇게 바뀔 줄은 미쳐 몰랐다. 희망의 관점도 조금씩 변하는 듯하다. 이제는 완전히 날라오는 화살을 방어하는 자세로 머리가 돌아가고 있다. 특히 신체적인 것, 각종 병들, 사고들… 확률적으로 점점 나에게 불리한 것들 투성이다. 이렇게 여생을 사는 것 예전에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 나이에서 희망이란 것은 무엇이 있을까? 가족들에게 부담을 안 주며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 이런 것도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사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나는 애써 부정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허무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자주 낱말들, 특히 멋진 표현의 단어들을 잊고, 그것들의 양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절감을 한다. 알맞은 표현들[영어건 한글이건]이 생각이 안 나는 것,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이 나이에 새로 사전을 보며 새로 암기를 해야 하는 것, 한마디로 웃기는 세상, 시대, 세대, 나이를 살고 있다.

어제 밤에 온 [마리에타 사랑] 구역카톡을 보며 또 생각에 잠긴다. 이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까?  2019년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이곳을 거의 잊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되었다. 나에게는 가족관계가 공동체 관계보다는 조금은 더 중요한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처지에서 결과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우연히 다시 가상적, 잠정적으로 연결이 되긴 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조심스러운 것이다. 먼 곳에서라도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입김, 숨결’이 전혀 없는 외계, 외계인들처럼…

 

Surprise snow, after Daffodils…

눈이 쏟아지기 시작, 길에 쌓이기 전

드디어 눈이 온다… 그것도 함박눈이. 비록 땅에 떨어지면서 녹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것이 웬 떡이냐? 하느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제 소원을 풀어주셨습니다. 이런 날을 꿈 속에서만 그렸습니다. 비록 이런 날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Trappists 수도원으로 드라이브 하는 것은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대숩니까?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 시간이면 우리 동네 Holy Family 성당의 아침 미사가 시작되었을 텐데… 미사를 보면서 유리로 된 제단 뒤쪽,  밖으로 눈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있을 우리  ‘매일미사 친구 아줌마, 아저씨’들, 얼마나 한눈을 팔까… 궁금하다. 신부님도 미사 집전에 신경을 쓰는 것이 어렵겠다는 즐거운 생각도 든다.

결국은 나의 소원은 풀어졌다. 작년에 안 왔던 이 하얀 추억의 선물을 나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2014년의 괴로운 추억도 이제는 아련하고 포근한 추억으로 퇴색이 되고 있지 않은가? 세월의 마력이고 매력이 아닌가?

 

이번 ‘진짜’ 눈은 거의 2시간 동안 ‘쏟아졌다’. 며칠 전부터 피기 시작한 수선화, 매화 위로 소복한 눈이 쌓인다. 내가 그리던 최소한의 소원은 풀어진 셈이다. 조금만 기온이 더 낮았으면 아마도 불편함을 느끼게 될 정도가 될 뻔했다. 오늘 것은 정말 눈으로, 기분으로 너무나 포근하고 즐겁고 아련한 것이지만 움직이는 사람들에겐 큰 불편이 없는 그런 ‘뜻밖의 사건’이 될 듯하다. 감사, 감사, 감사…

 

 

이천 이십 년?

 

이천 이십 년? 허… 지나가는 10년 동안 부지런히 이천 십…을 되뇌며 살아서 그런지 이천 이십 어쩌구… 하는 것이 이렇게 이상할 수가 없다. 십진법의 ‘십’이란 숫자의 마술인가. 이제 두 시간 정도가 지나면 부지런히 부지런히 이천이십을 되풀이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퉈니 퉈니, twenty twenty 2020, 20/20 (2.0 시력) 로 되니까 조금은 익숙한 느낌인가…

아~  이것이 decade적인 세월인가, 10년마다 겪는 이런 것을 돌아보니 사실은 20년 전에 우리는 대사건을 겪은 경험이 있었다. 1999에서 2000으로 바뀌던 그 무렵..  이런 것들로 1900년대 중반 이전부터 살아온 덕분에 이런 멋진 ‘세월의 숫자’들을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올해의 섣달 그믐날 밤에는 예상을 벗어나 3-2-1, Happy New Year! Countdown 하는 요란한 모습, 그것도 뉴욕에서 생방송 하는 것 보는 것을 지나치기로 하고 자정 몇 시간 전에 잠자리에 들어버렸다. 원래 계획은 바쁘고 피곤한 아이들이 안 온다기에,  모처럼 우리 둘이서만  ‘멋지게’ Champaign잔을 마주치며 ‘HAPPY NEW YEAR!!’을 외치려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설날 아침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의무대축일 미사가 있기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핑계로  이 몇 년 된 전통을 포기한 것이다.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사실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3-2-1의 뉴욕의 생방송은 꺼졌지만 이번에 집 주변에서 요란하게 터지는 firework소리가 생각보다 요란하였다. 올해는 아이들의 장난이 아니고 아주 pro들이 즐기는 모양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몇 시간 동안은 아예 ‘새해의 기분’ 을 즐기는 셈치고 누워있게 되었다.

2020의 요상한 숫자의 느낌을 떠나서 심각하게 ‘늦은 세월’의 의미를 찾아 보았다. 내 나이 이제는 절대적, 긍정적으로 젊어지지는 않는다. 70대의 나이는 또 따른, 가볍지 않은 짐을 지고 나아가는 느낌, 그것은 육체적인 건강상태다. 수치상으로 나는 현재까지는 큰 issue가 없지만 머리 속으로 느낌은 그것이 아니다. 나의 나이는 나이인 것이고 그것이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가 아닐까. 겸손하게 살자, 겸손하게…

Rainy day and Monday..

Tobey가 잠자고 있는 낙엽에 덥힌 뒷마당에 늦가을비가 세차게..

 

¶  비 쏟아지는 월요일:  하루 종일 어두운 하늘에서 싸늘한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비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물론 반가운 선물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flood warning이 나올 정도가 되면 선물의 정도를 넘은 것이다. 게다가 가끔 물이 새는 2층 지붕도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조금 불편한 것이 있어도 이것은 역시 ‘가을비’가 아닌가? 각가지 감상적 생각들이 머리를 꽉 채운다. 물론 대부분 추억에 얽힌 생각들이다. 게다가 이런 을씨년스러운 가을비에 나의 영원한 친구 Tobey가 내 옆에 없다는 새로운 사실이 가슴에 걸린다. 이런 때면 나의 무릎에서 편하게, 평화스럽게 코를 골며 자던 그 녀석.. 비록 육신은 뒤뜰 땅속에 묻혔어도 녀석의 느낌은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듯하다.

 

Saybrook Court에 아직도 남은 가을 낙엽들, 과연 언제까지 버틸까..

 

월요일에 내리는 비, 70년대 초 (1971년) The Carpenters의 classic oldie, Rainy Days and Mondays가 문득 떠오른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다시 없는  목소리’ Karen Carpenter의 잔잔하지만 깊은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그렇다.. 1970년 초.. 미지의 세계를 향한 꿈을 꾸던 멋진 시절에 들었던 ‘비 오는 월요일’은 큰 의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노래의 가사처럼 ‘모조리 우울한 것’들이었다. 그런 감정이 반세기 뒤에 완전히 뒤바뀌어 이제는 반대로 즐기는 ‘선물’이 된 것이다. 세월의 조화가 아닐까?

 

이렇게 세차게, 힘차게 쏟아지는 비는 나의 혼탁한 머리 속을 씻어주는데..

이런 때면 문지방에 편하게 엎드려 하염 없이 비를 바라보던 Tobey는 이제..

 

요새 갑자기 ‘기분과 몸’이 훨씬 나아진 연숙 덕분에 다시 규칙적인 정상적 생활을 찾기 시작해서 오늘 아침도 예의 daily morning mass, adoration chapel, Sonata cafe, 그리고 YMCA workout의 routine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역시 예외는 예외다. 갑자기 연숙에게 ‘감기 기운’이 덮친 모양, 열이 나고 목이 잠기고 기운이 빠지고.. 나 같으면 그런 것 참거나 숨기거나 하겠지만 사람은 다 다르니까.. 이럴 때 제일 중요한 것이 Bishop Robert Barron이 즐겨 강조하는 prudence 란 것이다. 나도 그의 말에 동감이다. 때와 장소에 따른 각가지 ‘덕목’들이 항상 같지 않고, 지혜롭게 ‘조절’을 해야 한다는 wisdom. 그저 참고 해야 할 것을 다 끝내느냐, 아니면 내일을 생각해서 할 것을 포기하느냐.. 결국은 내일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일주일에 제일 중요한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화요일 ‘Legio’ Tuesday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날인 것이다.

 

 

Rainy Days and Mondays – The Carpenter – 1971

 

¶  ‘기타귀재’ 심재흥, 50년 전:  어제 중앙고, 연세대, 연호회 친구, 이윤기와 뜻밖으로 KakaoTalk 에 연결이 되어서 감회 깊은 이야기(texting)를 나누었다. 본지가 50년도 넘은 사람과 어제 헤어진 듯한 느낌으로 대화하는 것, 솔직히 이것이 바로 surreal 한 느낌이 아닌지.. surreal, surreal..  한마디로 실감이 안 나는 것이다.

얼마 전 같은 그룹친구 양건주의 주도로 우리들 4명 (나, 양건주, 이윤기, 윤인송)이 기적적으로 단체 카톡방에서 몇 마디나마 서로의 숨결을 느끼게 되었다. 언제고 이 친구들의 최소한의 안부 정도는 알 수 있겠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모두 친한 친구들이었고 특히 윤기는 헤어진 이후 거의 연락을 못하고 살아서 궁금한 것들이 더 많았지만 ‘거리와 세월의 횡포’ 의 희생자로 일생을 보낸 셈이다.

이 친구가 video하나를 올렸는데.. 1960년대 일본에서 활약했던 그 유명한 The Ventures를 ‘흉내’낸 electric guitar group의 공연이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심재흥‘이란 이름을 떠 올렸다. 50년 전의 그 이름이 이윤기란 친구의 기억과 겹치며 떠오른 것이다. 연세대 전기과 동문들.. 그 중에 ‘기타귀재’라고 불리던 친구, 그가 심재흥이었다. 1969년의 회고담을 쓰려고 하던 참이라서 참 timing이 절묘하다고 할까..

 

그 당시 일제 electric guitar, 심재흥의 도움으로 샀고 역시 그의 도움으로 팔았던 기억..

 

그 당시 나는 이 ‘귀재’로부터 기타(특히 electric guitar)의 매력을 배웠다. 자세한 테크닉을 배운 것은 아니었어도 그가 연주하는 것을 보며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한 것, 나중에, 아니 지금까지 (통)기타를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던, 엄청난 영향을 준 것,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심재흥’이란 이름을 언급하니 놀랍게도 이번에 보낸 ‘벤쳐스’ 동영상’이 바로 그 친구가 보낸 것이라는 것이 아닌가? 얼마 후에 연세대 전기과 동문들이 모이는데 그 친구도 만난다는 얘기에 나는 솔직히 꿈을 꾸는 듯한 느낌조차 들었다. ‘세월과 거리의 횡포’.. 도 이렇게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구나…

 

 

The VenturesWipeout live in Japan 1966

 

¶  사랑의 기다림:  지난 토요일 모처럼 우리는 ‘자매 성당’인 둘루스 Duluth, GA  에 있는 김대건 성당엘 갔다. 이날 그곳에서 ‘추계 일일 침묵피정’이 거의 하루 종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거의 30마일이나 떨어진 곳을 아침 8시에 집을 떠나야 하는 것 물론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가라, 가라, 무조건 참석해라’ 라는 무언가를 거역할 수 없었다. 가만히 보니 근래 나는 이 ‘가슴 속 깊은 곳의 무엇’을 조금씩 느끼며 사는 듯하다. 그것이 거창하게 ‘성령’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유행하는 과학적 표현으로 아마도 quantum message 정도는 아닐까?

4년 전에 이곳으로 같은 피정에 온 기억이 남아있지만 매번 지도신부가 다르니까 피정의 결과는 매번 다를 것이다. 아침 점심 식사를 포함해서 각각 두 번의 신부님 강의와 침묵 묵상이 번갈아 가며 오후까지 계속되고 마지막에 미사로 끝을 맺는다. 이번의 지도 신부님은 우리의 도라빌 본당 보좌신부인 ‘김형철 시메온’ 신부님으로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비교적 젊은 신부다.  ‘사랑의 기다림’이란 포근한 주제로 ‘전혀 지루하지 않고, 졸리지 않는’ presentation을 했다.

요사이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이분들 ‘과학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요새 신학교가 지나간 반세기 동안 급변하고 있는 과학문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갈릴레오 사건’으로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 가톨릭 전통을 상기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이날 김 시메온 신부님의 강론 서두가 이것을 말해준다. ‘거시적 우주론, Cosmology’ 으로 주제를 이끌었던 것이다. 아마도 더 기다리면 아마도 상대성이론, Quantum MechanicsString Theory 까지도 거론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런 추세를 절대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이지만 ‘철학적, 신화적’ 접근을 좋아하는 일반 신자, 대부분 여성들에게 이것이 크게 appeal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C’ wire, monastery, 2 books

¶  Running ‘C’ wire Smart Home, Smartphone (now one word), Smart TV, 그리고 Smart ‘Stat (thermostat) ..

덧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를 스쳐 지나는 이런 단어들,   이것들 중에서 나와 역사적으로 제일 오래된 것이 smart home일 것이고,  다음이 Smartphone, 그리고 지금 나의 코앞에 다가온 것이 바로 Smart Thermostat 이다. 얼마 전에 두 ‘아이’들이 우리에게 준 2대의  ‘dumb’ 40+” TV는 Roku, ChromeCast gadget 덕분에 곧바로 Internet streaming를 하는 smart tv의 기능을 갖추게 되어서 그런대로 우리 집도 ‘현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큰딸 boyfriend Richard가 최신형으로 upgrade 한다고 2개의 smart thermostat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이 EcoBee 라는 ‘웃기지 않게’ 비싼 사치품 thermostat였다. 집안의 heating & cooling system(HVAC) 을 control 하는 것이 thermostat인데 이것의 내부 구조는 간단한 electrical switch에 불과해서 예전까지 이것은 비쌀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복잡한, 그러니까 smart하게 보이는 기능을 잔뜩 넣어서 멋진 fashion을 만들어 고가로 파는 것, 나에게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추세다. 수백 년 전통의 coffee를 Starbucks로 비싸게 파는 것이나 맹물을 bottle에 넣어서 파는 것과 다를 것 하나도 없다. 하지만 비싼 것은 비싼 이유가 있을 것이다.

2 ‘given’ Ecobee smart thermostats

 

현재 우리 집에 있는 것은 기본적인 programmable thermostat로서 하루에 네 번 정도 시간에 따라 온도를 조절하는 model로서 사실 그렇게 불편한 것은 없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집에서는 더 복잡한 timing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retire한 상태에서는 복잡한 것이 더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이것을 program 하는 것이 그렇게 편하지 않다. 대부분 어두운 복도에 설치된 이것을 서있는 상태에서 그 작은 글씨를 보며 program하는 것 거의 torture에 가깝다. 그래서 한번 program해 놓으면 거의 바꾸지도 않고 그러기도 싫은 것이다.  그런 것이 지금은  Smartphone이나 PC의 보기 좋은 screen을 편한 곳에 누워서 program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나는 족하다.

이것을 나에게 주면서 Richard는 현재 우리 집 thermostat에  ‘C’ wire가 연결되어 있냐고 물어서..  속으로 이것이 무슨 말인가 궁금했지만 우선 ‘있다’고 대답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는 extra wire, 24V transformer의 ‘common’ (power return) 임을 알게 되었다.

왜 이 ‘놈’이 필요한가 보니, smart ‘stat(thermostat)는 Smartphone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small computer라서 power, 본격적인 전원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다.  작은 computer라고 했지만 기능적으로 보면 웬만한 예전의 desktop PC의 그것이고, 특히 WiFi 가 필요한 것이라 생각보다 energy를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과 다르게, 오래 전에 쓰던 mechanical ‘stat는 전혀 power가 필요 없었고 요새 많이 쓰고 있는 programmable ‘stat는 거의 모두 battery를 쓰기에 따로 power supply wire가 필요 없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4 wires가 필요한데 (1) 24V hot side, (2) fan on, (3) heat request, (4) cool request 가 그것들이다. 예를 들면 heat가 필요하면 (1)과 (3)을 연결하면 된다.  그러니까 24V hot side가 return되는 ‘common’ 이 사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새로 나오는 smart ‘stat들을 ‘팔아 먹으려면’ 이 extra wire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해결책은 이 wire를 furnace control board로부터  thermostat가 있는 곳까지 끌어내야 한다. 이 작업을 과연 몇 명이나 ‘감히’ 할 수 있을까.. 물론 handy한 공돌이를 제외하고. 

다행히도 우리 집의 in-wall wiring은 home pc networking 시절부터 10base2, 그 후의 CAT5 cabling 까지 모두 내가 설치했기에 사실 이번의 ‘C’ wiring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정도로 쉬운 job이다. 다행히 남아도는 CAT5 cable이 많아서 그것으로 위층은 해결이 되었다. 아래층 것이 끝나면 드디어 EcoBee 를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요새 아이들 자랑스럽게 말하는 ‘Smartphone으로 언제 어디서나 집의 온도를 맞출 수 있다’ 라는 것, 나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토요일을 수도원에서:  싸늘하지만 기가 막히게 화창한 ‘영광스러운’ 가을 하늘아래 일년 만에 다시 한 시간 정도의 drive로 Conyers, GA 의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은 사실 부끄럽지만 ‘자발적’으로 간 적은 없고 무슨 계기가 있으면 가는 그런 곳이다. 위치나 분위기를 보아서 이곳에 갔다 오면 다음에는 반드시 ‘자발적’으로 가보자, 문득 ‘평화로운 곳’ 생각이 들면 그곳을 차를 몰자.. 등등의 상상을 해 보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계기’가 생기만 거의 두 번 생각을 안 하고 OK를 하곤 했다. 올해도 그런 식으로 연숙을 포함한 교사들이 인솔하는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의 예비신자 교리반 일행을 따라서 가게 되었다.

 

a spectacular view of the pond at the monastery..

 

5~6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렇게 생소하던 곳이 이제는 연륜이 쌓여가는지 아주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 든다. 제일 기억에 남던 때가 레지오 피정을 이곳에서 했을 때가 아닐까? 밤늦게 어두운 대성전에 홀로 앉아서 묵상하던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주 강렬한 것이었다. 사람은 역시 ‘주위 환경’에 철저히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오감의 피조물이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을 이런 곳에서 느끼고 받을 수 있음을 경험한 곳이기도 하다.

교리반 학생들은 이런 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울까.. 이날도 방문후의 소감들을 나누는 시간에서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너무나 생소한 것을 보았다는 나눔, 이해가 간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생소함과 더불어 ‘신비적 경건함’도 느꼈다는 나눔은 아주 고무적인 것이 아닌가?  이들의 앞으로의 신앙여정은 어떨까..  과연 얼마나 궁극적으로 ‘절대존재’를 알게 될까… 큰 유혹 없이 세례의 은총을 받게 되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이날 오랜 만에 gift shop에서 책을 한 권 샀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C. S. LewisThe Joyful Christian이란 책을 산 적이 있었고 그때 이곳은 Amazon.com 같은 discount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list price대로 파는 것이다. 이것으로 수도원을 유지해야 함을 누가 모를까? 이날도 그것을 알고 샀는데, 메주고리예 발현에 관한 Janice T. ConnellThe Vision of the Children 이란 책으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주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비교적 읽기 쉬운 책으로 오자마자 거의 1/3을 읽었는데 ‘뜻밖의 보물’이란 느낌이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  2권의 ‘반갑고 고마운’ 책들:  문밖에서 bell 소리가 들린다. 누가 온 것, 귀찮은 sales, 아니면 delivery? 조용히 밖을 보니 벌써 누가 무엇을 문 앞에 놔두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하~ FedEx van이 보이니 무엇이 배달된 것이었다. 익숙한 package이지만 나는 요새 아무것도 산 것이 없는데… 하고 shipping label을 읽으니.. 아니~ 대한민국에서 온 것, 누가?  아하~ ‘도사’ 양건주가 책을 보낸 것이었다.

 

FedEx package from Korea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되어서 너무나 반가웠는데, 이상하게 ‘주소’를 물어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책을 보내려고 그랬던 것이다. 다시 눈가가 찡~ 해 짐을 느꼈다. 친구야, 친구야… 고맙다, 친구야.. 어쩌면 너는 그렇게 자상하고 배려심이 깊은가? 나는 아무래도 못 따라가는데.. 이 친구에게 받았던 ‘책 선물’이 꽤 되는데.. 책 값도 그렇지만 이렇게 실제로 행동으로 귀찮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고물 우정’에 어떻게 응답을 한 것인가?  이해인 수녀님의 ‘기다리는 행복’ 이란 수필집과, 얼마 전에 출판된 ‘따끈따끈한’ 책 ‘글배우’라는 독특한 이름의 저자가 쓴 ‘오늘처럼 내가 싫었던 날은 없다’ 라는 제목을 가진 책, 모두 2권이었다. 책 값만큼 우송료가 대단했는데.. 그것도 FedEx로 속달이 된 것이다.

이해인 수녀님은 사실 종파를 떠나서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분이지만 연숙이 특히 좋아하는 수녀님이다. 그 책은 연숙이 먼저 보기로 하고 나는 현재 ‘글배우’라는 저자가 쓴 ‘오늘처럼…’ 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잠깐 훑어 보니 대부분이 ‘상식적 수준의 조언’들이지만 어떤 것들은 나의 생각이 맞는다는 재확인을 하게 하는 것들도 보였다. 책의 부제가 ‘무너진 자존감을 일으켜줄 글배우의 마음 수업’으로 되어있으니 아마도 대부분 ‘무너진 자존감’에 대한 조언들일 것이다. 나의 자존감은 분명히 예전 보다는 많이 오른 상태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벗’이 지구상 어디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나를 ‘하늘로 뜨게’ 만든다. 건주야.. 고맙다, 고마워. 행복하게 살아다오.

 

Big Canoe, 구역장 단상 斷想

¶  Overnight at Big Canoe:  일년 만에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진희네 그룹’,  윤형 ‘별장’ 이 있는 Big Canoe로 단풍여행을 갔다.  아직 본격적인 단풍철이 아니지만 이 별장은 고도가 1000m를 넘는 높은 산 정상에 있기에 그곳은 이미 단풍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였다.  Gate까지 있는 이곳은 높은 산 곳곳에 ‘별장들이 몰려있는’ 조그만 별천지다. 메트로 아틀란타에서 차로 2시간도 안 떨어진 이곳은 사실 ‘아틀란타 부유한 사람들의 투자용 부동산’들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그런 첩첩산중 산등성이 곳곳,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같은 곳에 그렇게 큰 luxury house들을 지었는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경관이 좋은 집들 중에도 제일 높은 정상부근에 위친한 윤형의 별장에서, 작년과 달리 이번에는 하룻밤을 그곳에서 묵게 되었다. 

 

이곳은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낙엽이 쌓였다

갑자기 산등성이로 구름이 몰려와 운해로 변하고 있다

별장은 완전히 구름에 덮혔다

 

이곳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경치가 너무나 영화처럼 강렬해서 거의 꿈 속을 거니는 기분이지만 다른 한편 이런 시야를 며칠 계속 보고 있으면.. 글쎄, 당장 ‘초라하지만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는’ 나의 집으로 오고 싶을 것이라는 ‘조금은 시기심’이 스며드는 생각에 당황하기도 한다. 이곳의 집들이 별장인 사람도 있지만 아예 이곳에서 항시 살고 있는 집도 많다고 하는데, 부럽기도 하지만 과연 매일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것, 항상 아름답게 보일까 의구심이 든다.

산꼭대기에 있는 집이 어떻게 우리 집보다 엄청 큰 것일까?  어떻게 그런 큰 집을 거의 비워두고 살 수 있는 것일까? 속으로 나는 항상 불편한 생각이 든다. 돈의 위력을 실감하기도 하고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느낌, 자본주의의 downside, 끝이 없는 인간의 ‘편해지려는 욕망’,  이런 것들 즉 과잉 된 편안함…  교차로에서 만나는 ‘구걸인’들, 집 없이 길거리에서 자는 사람들.. 모든  장면이 겹치는 듯한 환상.. 

 

¶  (마리에타) 사랑구역 斷想:  지난 7월부터 시작된 마리에타 사랑구역 구역장 임무,  몇 달이 총알처럼 날라간 기분으로 가끔은 내가 그 동안 무엇하며 살았나 하는 혼미 속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7월부터 9월 말까지는 솔직히 다른 세계로 가서 사는 기분도 들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너무나 다른 세상을 경험한 것이다.

군대의 분대장은커녕 학창시절 반장, 그룹의 장 長 같은 것 한번도 못하고(아니 안 하고, 피하고)  살았던 나에게 이런 일은 사실 저물어가는 나이에도 어색하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듦의 혜택도 없지 않은 것이 소싯적 보다는 ‘겁, 우려’ 같은 것이 훨씬 덜하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늦은 깡’이라고나 할까.. ‘배 째라’ 하는 유행어가 실감이 나는 것이다.

이 구역장 일을 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나도 좋고 구역그룹도 좋은’ 그런 ‘황금법칙’을 찾느냐 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9월초부터는 자비의 모후 레지오의 단장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timing이 어쩌면 이렇게도 재미있을까? 아마도 성모님이 ‘이제까지 피하며 살던 빚을 갚아라’ 고 호통을 치시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오래 연체된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느님과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게 나를 잡아준  이 성당 구역에서 나는 한번도 봉사를 못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 듯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의미’를 생각하며 임무를 맡고 있는데.. 글쎄, 의미를 두고 심각하게 일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의 ‘갈등, 실망, 심지어 놀람’은 부터 평화는 커녕 숨어 있던 분노심까지 들추고 있으니..  이 일이 어려운 임무라는 희미한 예측은 항상 있었지만 실제로 겪는 ‘어려움’은 상상 밖 중의 밖이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문득 문득,  ‘다 집어 치우자!’라는 ‘악마적’ 생각도 들 정도다.    

 구역을 이끄는 ‘일 자체’라고 하면 모호하지만 힘을 쓰는, 몸이 힘든 일보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실망감’ 은 정말 평화의 적 중의 적이라는 ‘주위로부터 많이 듣던’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구역 총무님 댁의 private marina, 개인 boat도 있다

 

구역 야유회를 가려고 한 것이 공원예약차질 문제로 호수 변에 있는 그림처럼 아담한 별장 같은 총무님 댁으로 옮겨서 했는데, 한마디로 near-disaster였다. 예약 담당자의 실수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총책임은 내가 져야 함을 절감했다. 마지막 확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이 모임에서 나는 정말 ugly 한 장면을 목격했다. 내가 이제까지 우호적으로 생각해 왔던 어떤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은 허상이었다는 사실, 그 장면은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있다. 이제까지 모였던 모습과 이번에 드러난 실제의 인간성이 어쩌면 그렇게 다른지, 나는 놀라고 또 놀란다.  이런 사실들로부터 나는 ‘정치적’이라는 말의 뜻을 이 나이에야 어렴풋이 실감하게 되었고, 이것은 내가 이런 임무들을 맡은 결정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어렴풋이 이론적으로만 알던 사실을 체험하는 것, 나에게는 커다란 수확으로 남기려 한다.

 

본당의 날, 가라오케 blues

가라오케, Karaoke, ‘가라 오케스트라, 가짜 오케스트라’.. 참 준말의 귀재들, 일본아해들 말도 잘 만들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들이라서 작지만 유용한 것들 잘도 만들었다. 밴드나 반주하는 악단 없이 노래와 율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sound system, 누가 마다하겠는가?  지나간 주일에는 이것과 연관된 일들이 두 번이나 겪었다. 노래를 불렀을 것이라 즐겁고 신나는 일들이었어야 하겠지만 결과는 정 반대다.

첫 번째 case가 지난 23일 일요일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본당의 날과 추석잔치’ 행사 중에 있었던 audio system near-disaster 였다. 이날의 행사는 내가 마리에타 사랑구역장이 된 이후 제일 진을 빼고 신경을 썼던 것으로 ‘불참하자고 징징 우는’ mere mortal, member들의 등을 떠밀며 강행했던 ‘노래와 율동’의 공연이었다.

 

 

다른 구역들의 공연내용을 보면 거의 모두 ‘가라오케’ audio 로 100% 율동을 하는 것으로 이날 이들은 목소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신나게 춤들을 추었다. 하지만 우리를 비롯한 소수의 그룹은 ‘vocal’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microphone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건에 속했다. 문제는 이날 sound system 을 맡은 ‘사목회’ (내가 보기에 ‘시로도’급)는 거창한 mixer를 포함한 wifi-youtube-karaoke 에는 시간을 썼지만 무대에 놓여진 몇 개의 microphone은 모두 ‘먹통’으로 방치해 놓은 것이었다.

 

 

미리 stage rehearsal을 했으면 이런 문제를 방지할 수 있었겠지만 때는 늦었다. 공연 무대에 올라가 악을 쓰고,  기타는 줄이 끊어질 정도로 노력했지만 결과는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린다’라는 혹평, 결국 우리도 ‘율동’만 관객에게 전해진 셈이 되었다.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 구역 총책임자인 나도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미리 점검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구역조차 같은 문제로 고생을 했으니 결국은 무대 연출 총 책임자가 그야말로 책임을 질 노릇이 아닌가?

두 번째 가라오케 disaster는 3명이 매월 마지막 목요일 밤에 모이는 ‘목요회’에서 있었다. 이것은 사실 그 정도로 놀랄 일은 못되었다. 3명 중 한 명이 노래방에 앉아서 침묵으로 일관을 한 것인데..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 아닌가? 이날은 목요회가 모이기 시작한지 1주년이 되는 날이라 특별한 event를 만들고 싶었는데 아무리 우울하다고 해서 그 정도로 노력을 못 한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이날 비로소 나는 이 친구가 정말 심각한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고 무슨 ‘파격적인 수’를 써야겠다는 자괴감에 빠진 그런 목요회 1주년을 보냈다.

 

자비의 모후 1,000차 주회합..

¶  레지오 ‘연 年’ 피정:  안정호 이시도르 예수회 신부님이 지도한 2018년 레지오 연 피정이 “그리스도 내 안에 형성될 때까지 성모님과 함께!” 라는 주제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3일 동안 있었다. 처음 이틀간은 레지오 단원을 위한 것이고 마지막 날 일요일은 전 신자 대상의 강론이었다. 10여 년 전 주임신부로 계셨던 안 신부님, 이날 환영의 열기를 보니 정말 대단한 인기였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지난 달부터 피곤한 나날을 보낸 우리에게 이번 3일 피정 스케줄은 사실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솔직히 말해서 피정의 ‘강론 부분’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오랜 전에 경험한 안 신부님의 강론 스타일을 기억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점심식사 후에 듣는 강론은 아무리 흥미가 있어도 졸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우려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예상을 뒤엎는 결과적으로 너무나 만족스런 피정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예전의 안 신부님이 아니었다. 그 동안 이 신부님 많은 영적인 경험을 거친 더욱 성숙한 사제가 되어 있었다. 믿음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힘찬 강론에 간간히 ‘이상하지 않은’ 유머러스 한 일화들.. 어찌 일초라도 졸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레지오 단원들을 조준 겨냥한 심도 깊은 ‘경고’는 최근에 힘이 빠지는 듯한 일반적 레지오에 대한 장래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현재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소속 레지오가 겪고 있는 ‘실존위기’를 의식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timing이 아주 정확했다. “레지오 단원들이여,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는 것을 현대 사회심리학적인 각도로 재 조명한 강론은 정말 기억에 남을만한 명강론이었다.

 

¶  YMCA, YMCA!  오늘 오랜만에 YMCA gym엘 갔다. 무언가 생활이 정상 routine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낀다.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확하게 얼마만인지는 전혀 idea가 없다. 달력을 보니 (요새는 달력을 안 보면 전혀 알 수가..) 지난 달 23일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2주가 넘게 우리는 운동을 못한 것이다.

보통 일주일에 평균 2~3 번 정도는 가는데 꽤 오래 쉰 것이다. 매년 여름이면 사실 가끔 ‘우리도 쉬자, 방학이다’ 라는 기분으로 쉬기도 하고 YMCA swimming pool을 deep cleaning한다고 해서 쉬기도 했지만 2주 이상 쉰 기억이 없어서 이번은 예외적이다. 이유는 두 가지: (1) 너무나 바빠서, (2) 너무나 피곤해서..  하기야 바쁘니까 피곤한 것이지만 이번은 조금 그 정도가 심했다.

장례식, 레지오 점심봉사 이틀 중노동, car maintenance service trip, 이목사님 부부 외식, 거기다 3일간 레지오피정, 1,000차 레지오 주회합 기념 주회.. 와~~ 이 정도면 우리 나이에서는 피곤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운동을 너무 오래 쉬는 것은 피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 쌓이게 한다는 것도 이번에 깨달았다.

 

¶  자비의 모후 1,000차 주 회합: 이번 주 우리 성모님의 군대,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가 드디어 1,000차 주 회합을 맞았다. 일주일씩 모이는 주회합 1,000차.. 일년이 52주니까, 거의 20년의 세월이 아닌가? 내가 입단한 것이 8년 전쯤이니까 그 이전에도 12년 여의 역사가 있었다니 참  장구한 세월을 ‘견디어’ 온 것이다.

이 레지오의 운명은 사실 보장된 것이 없다. 언제고 문제가 있으면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다. 비록 성모 마리아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있지만 일시적 인간의 방해공작으로 깨질 수 있다. 지나간 8년 동안 내가 겪었던 ‘해체 위기’는 3번 있었지만 작년 8월 말의 ‘더러운 사건, 일명 레지오 미친년 난동사건 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 자비의 모후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자비의 모후 가장 빛나는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몰랐다. ‘악’의 치명타를 견뎌내고 일어섰고 감격적인 1,000 차 주 회합을 맞은 것이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간단하게 미사예물 정도 봉헌하는 것으로 끝낼까 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의도적 과시 誇示‘를 위해서 ‘외부인사’를 초청하고 그들과 함께 기념 주 회합을 하고, 미사가 끝나고 근처 화식집 ‘만천홍’에 가서 푸짐하게 회식하며 기념 주회를 끝냈다.  이날 초청된 ‘인사’는 자비의 모후 창단 간부단원, 내가 입단 할 때의 단장, 부단장님 등이었는데, 이때 창단 시절의 얘기들도 듣기도 했다. 꾸리아에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축하 떡도 보내주고 1,000차 기념 banner도 제공하였다. 아마도 ‘너무나 어려운 위기를 넘긴’ 사실을 감안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을 한다.  하지만 작년에 당한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고, 최소한 나는 절대로 그 사건을 잊지 않을 것이다.

 

‘첫’ 구역미사, 기쁨의 의미는..

  ‘사상 史上 첫’ 구역미사, 지나간 2주일에 가까운 동안 나의 머리는 온통 한가지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구역미사… 오랫동안 별 큰 느낌이나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체험했던 구역미사라는 것, 그것이 이번에는 완전히 개인적인, 가족적인 ‘큰’ 행사로 우리 집에서 집전되는 구역미사가 나의 코 앞에 다가 왔던 것이다.

우선 제일 큰 의미는,  우리 집에서 봉헌된 미사라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 집에 ‘사상 처음’으로 사제가 방문을 했다는 것에 있었다. ‘자기 집에서 신부, 사제 모시고 식사를 같이 했다’ 라는 주변의 말 많이 들었지만 사실 그때는 그런 것 솔직히 그렇게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올바른 생활의 사나이’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가 편히 될까.. 하는 유치한 생각으로 살았던 때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런 유치한 생각은 몇 년 전부터 서서히 사라지고 한번 모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 라는 쪽을 나의 가슴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몇 년 전부터는 한번 모시자.. 라는 희망사항으로 바뀌었다. 신부, 사제가 어떤 직분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제는 ‘열린 가슴으로 정확히, 올바르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 첫 case가 바로 전 주임신부님, 하태수 미카엘 신부님이었다. 결과적으로 모시는 계획은 유산되었지만 그 이후 나는 활짝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 ‘새로운 세계관’의 소유자로 살수 있게 되었다.

 

구역미사를 기다리는 우리 집의 living room view, 협소한 공간이지만 just right size..

 

이번 우리 집에서 집전된 구역 미사는 내가 마리에타 사랑구역장을 7월 초부터 인수하고 난 후 처음의 ‘큰 구역 행사’가 되었는데 이런 사실이 우리 집에는 기쁘긴 하지만, 그만큼 나와 연숙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준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아직도 생소한 우리 구역식구들에게 미사참례를 독려하는 중요한 책임으로, 연숙은 hostess로 신부, 구역식구들의 음식준비로 정신이 거의 없었다. 구역식구의 반 이상이 오면 나는 우선 성공한 것이라 미리 점을 치기도 했다.

어려움은 이런 정신적, 심리적 스트레스 뿐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최소한 20여 년) 별로 ‘찾아온 손님’이 거의 없었던 우리 집은 이런 ‘큰 행사’를 치르기에 너무나 피곤하고 깨끗하지 못함을 알기에 생각보다 힘든 ‘육체적 노동’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지난 5월 말에 일단 구역모임을 한 번 경험했고 그 당시에 일단 ‘대강의 청소’는 했지만 이번에는 신부님과 총구역장까지 오게 되어서 가급적 ‘때 빼고, 광 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 이것이 아무래도 나의 나이에 무리였을 것이다. 비록 기쁜 마음으로 노동은 했지만 후유증은 상당했다.

 

  현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은 부임초기부터 병자성사에 동행을 하면서 가깝게 느꼈고, 온화함, 배려심 등으로 언제나 함께하고 싶은 본당신부님으로, 이임하기 전에 한번 집에 모시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이날 다른 계기로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고,  우연일까, 아주 우연만은 아닌 듯한 생각도 들었다. 

미사참례 출석률이 예상을 넘는 2/3 정도가 되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이번의 우리 집 구역미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집은 이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mainstream parishioner가 되었다는 것, 그것이 아닐까? 부차적으로 나의 첫 구역장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사실, 우리 구역식구들과의 mutual chemistry의 ‘냄새’를 조금은 맡을 수 있었다는 것도 앞으로 2년간 약속된 나의 구역장 임기를 무사히 마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 그런 것 아닐까…

 

구역미사의 bonus, 찬란한 수국의 향기와 자태.. 어떤 자매님의 선물이었다

 

7월 초: independence days..

2018년의 6개월, 그러니까 정확히 절반을 벗어난 7월의 첫 주가 또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어쩌면 시간과 세월은 그렇게도 정직한 것일까? 어김이 없다. 절대로.. 절대로 시간과 세월을 가지고 ‘놀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금 일깨우는 요즈음, 나는 경미 輕微한 우울감 憂鬱感을 떨치지 못하며 살고 있다. 그와 비례해서 마음속 깊은 곳 평화의 깊이도 함께 얕아진 것을 느낀다. 주원인은 물론 나의 분신 Tobey1가 거의 ‘갑자기’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간 것, ‘실존적 부재 不在’가 주는 공허, 고통이 어쩌면 그렇게도 괴로운 것인지.. 이렇게 세월은 공평한 것, 사람의 삶의 나날은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다.

그제부터 새로니의 pet dog Ozzie가 우리와 일주일간 머물게 되었다. 물론 새로니가 vacation차2 집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지만, 갑자기 조용해진 우리 집에 다시 개의 소리가 들리게 된 것, timing이 나쁘지 않았다. Tobey와 너무나 personality가 다른 Ozzie, 같이 머무는 것 나의 생각을 한 곳만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지만 어떨까? 오늘도 한여름다운 여름 날씨에 그 녀석을 데리고 동네를 걸었다. 거의 10여 년간 Tobey와 같이 걷던 이 course를 이 녀석과 둘이 만 걸으니 다시 ‘없는’ Tobey가 그리워진다. 한 여름 날씨를 가슴으로 느끼며 불현듯, 갑자기.. 거의 20년 전 쯤 온 가족이 여름마다 갔었던 Florida Gulf coast,  Panama City Beach의 백사장이 떠오르고 며칠 동안 그곳이나 다녀올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역시 ‘귀찮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덮쳐버린다.

 

나의 study에 언제나 앉아 있던 Tobey가 없어진 자리에 Ozzie가 졸고..

Tobey 없는 dog walk, 대신 Ozzie와 같이 걷고 playground에 눕기도..

 

어제는 Fourth of July, Independence Day holiday.. just another holiday일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냈다. 과연 미국이란 어떤 나라일까 새삼스러운 것은 무슨 조화일까? 거의 45년 가까운 동안 살면서 별로 그런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이 없지 않다. 그저 하늘아래 그것도 대한민국과 반대편 쪽 바다에 걸친 거대한 대륙에 250년에 가까운 ‘자유 민주주의’ 전통.. 과연 이런 역사 기록을 가진 나라가 다른 곳에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진다. 각종 문제와 싸우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곳은 이들이 금과옥조 金科玉條로 여기는 ‘헌법 constitution’에 목숨을 건, 용맹스러운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날 동네 본당인 Holy Family 성당 아침 미사에서는 Father Dan (Ketter)은 평상적인 homily대신 Declaration of Independence 전문 全文 을 읽었는데, 250년 전의 그 문장은 그리 옛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특히 첫 부분의 두 번째 문장은 정말 인상적이 아닐 수 없다. truth, equal, endowed, Creator, Rights, Life, Liberty, Happiness… 그 중에서도 Creator란 단어는 그저 장식용으로 쓴 것은 절대로 아닐 듯하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무언가 허전한 기분을 달래려 계획에 없는 barbecue 생각이 났고 거의 일년 만에 charcoal grille의 cover를 꺼내고 마지막으로 남은 wood charcoal에 불을 부쳐서 barbecue보다 더 맛있는 ‘불고기’를 구웠다. 그래도 이렇게 7월 4일의 오후를 연숙, Ozzie와 같이 맥주, grille 로 보낸 것, 조금은 추억에 남지 않을까..

 

 

 

이날 밤은 다행히 비가 올 chance가 많지 않아서 불꽃놀이의 소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 subdivision는 ‘전통적’으로 불꽃놀이 firework이 없었고 먼 곳에서 하는 것들의 소리만 듣곤 했지만 이번에는 우리 앞집의 비교적 젊은 Josh가 주동해서 우리 집 바로 앞의 cul-de-sac 에서 firework을 했는데 비록 개인적으로 한 것이지만 어찌나 요란스럽던지 우리 집의 개와 고양이들이 모두 겁에 질려 숨을 곳을 찾기도 했다. 매년 별 감흥 없이 이런 소리를 듣고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의미가 실린 ‘자유의 외침’ 같은 것으로 들린 것이, 나 역시 나이가 깊이 들었구나 실감을 한다. 앞으로 이런 ‘자유의 소음’을 몇 번이나 듣게 될까..

 지나간 주일(일요일)날은 예전 같았으면 한국성당에 아무 business가 없었기에 조금은 편한 일요일이었지만 이번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7월부터 2년간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 성당의 (마리에타 사랑)구역장을 맡게 되었고 첫 주일날에는 구역장회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직책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에게 맡겨진 직분,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는 변함이 없다. 아마도 내가 ‘봉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려는 노력을 하면 된다. 내 인생의 후반에 더욱 깨닫는 것 중에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이 있는데, 젊었을 때와는 사실 완전히 반대인 것이 재미있다. 2년 뒤 나의 임기가 무사히 끝나게 되면 나는 어떤 구역장으로 기록이나 기억에 남게 될 것이지 궁금하다. 

 

The United State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 우리와 14년 평생을 살아온 pet dog
  2. 이번에는 Mexico로 deep sea diving이라고… 허.. 듣기만 해도 으스스..

Adios, 잊고 싶은 유월이여

달력을 멍하니 보니 오늘은  6월 30일이다. 그러니까 2018년 6월의 마지막 날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지나간 6월의 나날을 생각하니 무언가 머리가  정리되지 못한 혼란스러움이 떠나질 않는다. Father’s Day가 있는 예년의 6월 추억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작년에는 온 가족이 gourmet hamburger 외식을 했던 기억도 있었다. 올해의 6월 달, 그것도 Father’s Day 전후는 아마도 최악이 아니었을까.. 올해의 이날은 나나 가족들이 거의 잊고 지나간 정도로 정신이 빠진 듯한 그런 것이었다. 물론 큰 이유는 가족같이 14년 가까이 우리와 살아온  Tobey가 거의 갑자기 우리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이다.   6월 달,  그것도 Father’s Day 후 며칠은 정말 잊고 싶기만 하다. 

이런 황량한 6월의 느낌은 오래 오래 나의 머리 속에 남아서 나를 우울하게 할 것이지만 그런 와중에도 순간순간의 보람과 기쁨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것이 삶의 본질, 기본이 아닐까? 슬픔이 있으면 기쁨도 반드시 찾을 수 있는 것..

드디어 임명장을 받았다. 그것도 성당 미사 중에 받은 것, 형식적인 것이라도 나는 이제 신부님이 임명하는 20명 내외의 마리에타 사랑구역의 구역장이 된 것이다. 그렇게 도망 다니며 살아오더니 칠순의 나이에  많은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이 직무, 어떤 것일까? 그래.. 한번 해 보자.. 못할 것 하나도 없다.

비록 Father’s Day는 망쳤지만 의외로 6월 달 등대회 모임(60~70대 성당 친목회)은 안도의 숨을 쉬게 하는 잔잔한 기쁨도 있었다. 새로 사귄 교동학교 동갑내기가 회장으로 뽑혔는데 알고 보니 이곳에 나와 나이가 엇비슷한 형제,자매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란 그것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작은 보람이 있었다면 복잡한 머리를 싸매며 목요회 모임이 우리 집에서 모인 것이다. 전에 약속을 했었던 것이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매달 식당에서 모이던 것을 집에서 모이는 것은 사실 큰 변화를 주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별다른 ‘사고’없이 모임을 마쳤다. 내가 스파케티를 해 준다고 했지만 결국은 연숙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다. 나의 서재에서 편하게 wine을 마시며 시간을 보낸 것, 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의 의도는 그들의 집에도 돌아가며 가보는 것인데…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그들의 얼굴을 읽는다. 시간이 걸리면 이것도 다 해결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