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하고 깜깜한 가을 새벽

포근함과 따뜻함을 주는 radiant heater finally..
포근함과 따뜻함을 주는 radiant heater, finally..

¶  싸늘하고 깜깜한 가을 새벽:  새벽 5시에 깨어나니 칠흑 같은 어둠이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진다. 아~ 이제 2014년도 ‘겨울’이 서서히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의 Central Heating이 kick-in 된 것이 지나간 10월 5일 아침이었고, 그때 유난히도 끈적거리던 2014년 여름 기운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 간간이 이어지던 Indian Summer 로 말미암아 ‘월동 준비’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동안 심지어 tornado siren을 새벽에 듣기도 해서 아직도 따뜻한 10월의 나날을 보냈지만 역시 며칠 전부터 평년 같은 기온으로 급강하.. long sleeves shirts, pants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럴 때면 사실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더 편한 짧은 차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워낙 길었던, 은근히 덥던 여름이어서 올해의 ‘단풍’은 정말 늦게 오는 모양.. 아직도 주변이 거의 초록색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 새에 곳곳이 주황색으로 변하기 시작 하였다. 아마도 11월 중순 경이면 완전히 deep fall color로 변하고.. 천주 교회력으로 대림절(Advent)이 시작되는 11월 30일부터는, 성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9월 초에 시작된 우리 가정의 ‘일생일대의 최대 project‘ 가 시작된 이후 세월이 어떻게,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감’을 잊고 사는 요즈음.. 이것이 현재 나의 주변에서 내가 느끼고 보는 66마일로 질주하는 세월의 모습이다.

 

¶  Front side gutter re-gutted!

또 하나의 앓던 이가 빠졌다. 우리 집 앞쪽 지붕의 gutter를 완전히 새로 설치한 것이다. 내가 손수 달았던 이 vinyl gutter는 거의 15년이 넘어서 이은 부분이 여기저기서 물이 샌다. 뒤쪽 지붕은 올 봄에 모두 손을 보았지만 앞쪽은 그런대로 견딜 만해서 미루고 있었는데 바로 앞 문 위로 새는 빗물 때문에 벽돌 콩크리트 계단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구동성으로 ‘사다리’에 올라가지 말라는 주변의 우려는 잘 알지만.. 어찌하랴.. handyman을 살 돈도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면서 돈을 쓸 수는 없지 않는가? 2006년에 작지 않은 사다리 사고의 경험이 있어서 이번 봄에는 정말 ‘초긴장’을 하며 사다리를 올라서 지금은 사실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근래 들어 YMCA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 탓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큰 무리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번 job은 하루 종일이 걸리는 큰 작업이었고 며칠 후까지 피로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도 절약하고 나의 몸이 아직도 큰 무리 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기만 하였다. 며칠 후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거의 완벽하게 ‘물 새는’ 것이 없어져서 기쁘기만 하였다.

 2014-10-09 12.47.37-1

 

¶  Cute pergolas at Marian Hill

연숙의 레지오 꾸리아 부단장 임기가 7월 중에 끝이 난 이후 우리는 오랜만에 무슨 vacation이나 방학을 맞는 느낌으로 몇 주일을 보냈는데 그 여파로 주일 미사를 근처의 미국본당에서 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한 달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에만 순교자 성당엘 가게 된 것이다. universal church를 자랑하는 천주교회는 사실 어느 곳엘 가던지 미사는 똑 같으니 사실 성사생활에 큰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한국교우들과 ‘친교’를 못 이루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나는 ‘큰 손해’를 보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오랜 만에 간 듯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기존의 ‘성모 동산’에 무언가 ‘멋진 것’이 세워진 것이다. Bench까지 달린 앙증스럽게 귀여운 두 pergola였다. 성모님을 옆에 두고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하니 흐뭇한 idea가 아닌가? 주변이 ‘너무나 삭막한’ 성모동산..이었는데 그래도 이것으로 조금은 포근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본당 목수가 손수 design을 했을까.. 아니면 home depot에서 kit를 샀을까? 하지만 아주 알맞은 design으로 보였다. 돈이 없어 항상 쩔쩔매든 인상을 주던 본당에서 어떻게 이런 $$을 쓰게 되었을까? 누가 이런 것을 제안하고 밀어 붙였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한마디로 dollars well spent라고 말해주고 싶다.

 2014-10-12 12.37.48-1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성모동산

 

¶  Tobey, a Live laptop2014-10-20 10.39.04-1우리 집 bully doggie, Tobey도 이제 12월에 10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사람의 나이로 나보다 더 늙었다는 것,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생후 1개월 쯤에 우리 집엘 왔나.. 이제는 좋던 싫던 완전히 우리 식구가 되었다. 성미가 유별나고 폭력을 가끔 쓰기도 해서 다른 식구들에게 미움도 사곤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정이 들었다.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이해’하는 이 Tobey는 어떨 때는 나의 분신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24시간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나 부담이 되고 귀찮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나도 적응이 되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섭섭해지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서는 flea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제는 flea와 ‘같이 사는 지혜’도 터득해서 처음보다는 덜 고통스럽다. 나와 같이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이제는 거의 8 년째가 되어간다. 완전히 습관이 된 것이다. 나도 운동이 되고 Tobey도 아마도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자세히 움직임을 관찰하곤 하는데 다행히 아직도 걷는 것은 변함없이 씩씩하다. 주위에 ‘늙은 개’를 키우는 집들을 보면 우리도 조금씩 ‘노후 대책’을 마련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눈이 멀어가는 개, 움직이지 못하는 개.. 등등.. 주인을 잘 만난 개들이라 크게 고통을 받지는 않지만 그것을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떨까? 나와 Tobey가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좋아하는 습관 중에는 나의 무릎에 올려 놓는 것이다. 책상 위에 다리를 얹으면 뛰어올라 그곳에서 퍼지는 것이다. 이때 가끔 나는 뒤에서 번쩍 몸통으로 들어서 나의 가슴에 앉곤 하는데 처음에는 너무나 불편해 하더니 지금은 은근히 그런 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 녀석이 나보다 먼저 떠난다면 나는 이 순간들을 가장 값지게 추억으로 남겨둘 것 같다.

extreme multitasking, 친전, sad vindication…

¶  Extreme multitasking

끈적거리는 올해의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부터 나는 ‘본의 아니게’ 갑자기 시간이 황금같이 느껴지게 바빠짐을 느낀다. 우리의 일상적인 routine을 제외한 예외적인 ‘일’들이 하나 둘씩 더해지더니 급기야 과장해서 수없이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내가 ‘좋아서’ 만든 일들은 결코  아니다. 급하거나 꼭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생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큰 불평은 없다. 이것이 내가 사실은 가장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여건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보다, 두 가지, 두 가지보다 세 가지… 등등으로 나는 많을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훨씬 ‘즐겁고 능률적’으로 느껴지고 실제로 결과도 나쁘지 않은 것이다. 특히 일의 성질이 ‘비슷한 것’이면 그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된다. 한마디로 adrenaline이 샘 솟듯 솟구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현재 나는

  1. 일생 일대 ‘가장 중요한 서류’를 찾는 일,
  2. 나의 서재가 될 아래층 거실의 flooring을 교체하는 일,
  3. front door의 ‘무너지는 듯 한’ structure를 고치는 일,
  4. backyard vegetable garden의 완전 ‘자동화’ , drip watering irrigation works,
  5. garage major cleanup..

이 외에도 몇 가지가 더 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이것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연숙은 이런 나를 의아스러운 눈으로 보는 듯하다. 자기는 한가지를 ‘완전히’ 끝내야 다음 일에 착수한다고 하니까. 내가 이런 extreme multitasking을 하는 것은 아주 정연한 내 나름대로의 ‘이론’이 있다. 과학적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나에게는 과학적인 것이다.  나는 분명히 믿는다. 이런 방식이 전체적인 시간을 ‘훨씬’ 줄여 준다는 사실을.

 

Scan10061¶  친전 親傳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 친전이란 말은 ‘아마도’ 한자로 親傳을 말 할 것이다. ‘친히 전한다’는 말이니까, 이 친전의 글을 읽으면 김 추기경이 바로 나의 옆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이것은 얼마 전 연세대 이원선(도밍고) 동문의 부인 이 베로니카 자매가 연숙에게 빌려 준 것을 내가 다시 빌려서 읽어 보게 된 책의 제목이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것이라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추기경님은 어떤 분일까 생각을 해 보았다. 별로 자세히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기억에 나는 것으로는 내가 대학을 다닐 시절에 대한민국에 첫 추기경이 나왔고 그분의 이름은 김수환 신부였다 정도다. 그 당시 추기경이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고 사실은 관심도 없었다. 나와 천주교는 너무나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천주교는 고사하고 종교, 신앙에 전혀 눈이 뜨이지 않았을 때 김수환 추기경님이 뉴스에 나온 것이다.

 그 이후 미국에 살며 더욱 더 잊고 살다가 ‘간신히’ 내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면서 추기경의 뜻도 가깝게 느껴지게 되고 김수환 이란 이름도 친숙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것이 전부랄까.. 그저 반정부 데모 때에 데모 학생, 군중을 지지하는 ‘민중의 편’에 섰던 천주교를 초월한 민중의 지도자라는 것도 뉴스를 통해 간간히 듣게 되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선종’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죽음은 ‘전 국민의 슬픔’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비교적 객관적인 ‘김수환 론’은 한글 Wikipedia에 잘 나와있는데, 조금 읽기 거북한 ‘반 김수환 평’이 균형을 맞추려 실렸는데.. 참 비신자도 아니고.. 신앙인을 이끄는 사목자라고 하는  이름도 비꼬인듯한  ‘함세웅‘이란 인간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답답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대적 사상이 인간 기본적인 가치를 넘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시대착오적인 사제가 ‘원로’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사실 철저한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 ‘친전’ 책을 통해서 생생한 그분의 ‘육성’을 대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 추기경 재직의 역사적 의미, 신앙적인 측면, 인간애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비록 철저하게 천주교에 근거한 신앙관, 도덕관, 정치, 세계관으로 삶을 살려고 했지만 그가 산 시대는 그를 만성 불면증으로 시달리게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삶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위에서 본 그의 인간상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는 것이다. copyright에 구애 없이 나는 또 reading by typing으로 나 이외에도 한 사람이라도 더 그의 삶을 보여주고자 이곳에 남겨 두었다. 시간 날 때마다 한 구절 한 단락,한 페이지씩 읽으면 매일 묵상거리로도 좋을 듯 하다.

 

 ¶  Sad Vindication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구역 미사를 보았다.(미사를 ‘보았다’ 라고 하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그렇게들 쓰는 것 같고 영어에서는 미사를 ‘말한다, say mass’ 라고 하니.. 무슨 차이일까?) 우리가 속한 구역은 아틀란타 Metro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주로 Civil war에 관련된) Cobb county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에타 2구역’ 이다. 역사적인 전통은 그렇다지만 사실 살기에 편한 곳이라고 볼 수는 없을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은 ‘덜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다. 다른 쪽으로 말 하면 family를 키우기에는 조금 더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계 사람들에게는 지금은 거의 ‘bedroom community’ 로 ‘전락’한 느낌도 든다.

이곳의 유일한 매력은 아직도 ‘학군’의 가치에 있는 듯하지만 우리는 1992년 이사올 당시 이 지역의 ‘학군’이 그렇게 좋은 것을 모른 채 ‘나의 새 직장의 위치’때문에 이사를 왔었다. 하지만 아틀란타 올림픽 이후 급속도로 증가한 한인들이 99% 우리가 사는 곳의 ‘반대쪽’으로 정착을 하면서 이곳의 몇 안 남았던 business를 모두 그곳으로 흡수하게끔 만들어서 지금은  ‘무언가 하려면’ 거의 30 miles drive해서 Korea town으로 가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불편’함은 확실히 있지만.. 그래도 이곳에 살다 보니 ‘지나치게 밀집된 minority들’ 이 없는 이곳의 장점도 적지 않다.

우리는 3년 전부터 내가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 하면서 구역모임에는 거의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실은 항상 우리를 우울하게 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하면 ‘안 나가는 것이 편하다’라는 사실 하나였다. 우리가 구역모임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2006년경이었고 한 동안은 그런대로 참가를 해서 몇몇 친근한 교우들도 생겼지만.. 차츰 차츰 구역모임의 성질이 변질하는 듯 하더니.. 급기야 이곳 저곳에서 이상한 말들을 들렸다.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지나친 socializing 에는 항상 위험한 요소가 있는 법이다.  특히 순교자 성당에 소속된 한 구역이라는 정체성(과 제한성)을 벗어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솔직히 우리는 그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예를 다른 구역에서 듣기도 했지만 설마 ‘조용하게만 보이는’ 우리구역에서 그런 잡음이 발생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우리의 우려대로 모든 것은 최악의 상태로 치달은 듯 보였고 피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발생한 듯 했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구역미사에 참가를 해서 그 ‘결과’를 우리 눈으로 목격을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항상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안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우리는 vindication이란 말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그것도 때 늦은  sad vindication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였다.

고온 다습한 늦여름에..

¶  고온 다습 高溫多濕.. 요사이 이 지역의 날씨를 보면 가관이다. 한 여름 중에는 가을 같이 이상하게 싸늘하더니 9월도 넘어선 늦여름은 그야말로 ‘hot and muggy, 고온 다습한’ 한 여름이 되었으니 말이다. 최근 들어서 날씨에 둔감해지려고 안간힘을 쓴 결과 많이 침착해 졌지만 요새의 기후만은 언급을 피하기가 힘이 들었다. 올해는 조금 a/c(air conditioning) 에서 $$을 절약하는가 은근히 쾌재를 불렀지만 mother nature는 역시 그런 ‘공짜’가 없나 보다.

‘고온 다습’이란 귀에 익은 말이 딱 들어 맞았지만 이 말을 쓰고 보니 그 옛날 고국의 한창 여름에 많이도 듣던 기상용어가 아닌가? 고온 다습한 태평양 고기압.. 바람이 남쪽, 그러니까 멀리 있는 태평양에서 부는 바람.. 그것이 서울에서 겪었던 한증막 같은 더위의 원인이었다. 장마도 마찬가지로 그 ‘고온 다습’ 한 것.. 그것이 지금은 Gulf of Mexico 멕시코 만灣의 고온 다습한 바람으로 바뀐 것이다. 요새의 공기는 그야말로 에어컨이 없으면 괴로운 그런 것.. 그 옛날 서울에서 어떻게 에어컨이 없이 살았던가?

 

  Crumbling infrastructure.. 이런 표현 근래에 national 뉴스에서 많이 접하곤 했다. 그런 뉴스에서는 주로 bridge같은 것이 너무나 낡아서 위험하다는 것들이었는데.. 요새 나는 우리가 사는 집이 그런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의 겉모습은 물론 페인트가 벗겨지고 siding같은 것은 숫제 새들과 ‘기후’의 공격으로 구멍이 생기는 것도 목격이 되었다. 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은 집의 얼굴인 front door 쪽의 brick, concrete들, 그리고 front door threshold(문지방)등의 모습이 정말 목불인견이라는 사실..

집의 구조상 garage(차고)로 출입을 하니.. 앞문 쪽은 거의 사용을 안 하니 자주 볼 수도 없다. 손님들이 가끔 그곳을 쓰지만 대부분 어두울 때에 사용을 하니 자세히 볼 기회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앞 문 쪽으로 gutter물이 떨어져서 water damage를 예상은 했었다. 이번에 자세히 보게 되니.. 정말 ‘뚱뚱한 사람’이라도 그곳을 쓰게 되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길 정도다. 썩어버린 문지방은 wood filler를 쓰면 고칠 수 있을 듯하고 떨어져나가는 벽돌도 큰 비용은 들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concrete slab도 조금 노력을 하면 내가 모두 고칠 수 있다는 결론이 내리고 대대적 수리의 준비에 돌입을 하였다. 오랜 만에 집 앞쪽이 대대적 face-lifting service를 기다리고 있다.

 

 

¶  앓던 이(이빨)가 빠질 때.. 지난 4월부터  앓았던 독감 중에 지독한 치통이 나를 괴롭혔고 독감이 나은 이후에도 통증의 차이는 있었어도  계속되고 있었다. 치과를 가면 분명히 ‘고쳐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피하고 싶은 곳이 바로 그 치과이기에 ‘가급적’ 나는 참는 것이 오히려 덜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번에 느끼는 치통,구강 통증은 보통을 훨씬 넘게 나를 ‘매일’ 괴롭혔다. 분명히 이것은 ‘민간 요법’도 없을 듯 하고 ‘자가 요법’도 없을 것이었다. 내가 고작 하는 것은 ‘소금물 양치’가 전부였다. 보통 때는 그런대로 잊고 지낼 수가 있었지만 식사시간이 문제였다.

무언가 닿은 듯 하면 통증이 온다. 나의 나이에 내 치아의 상태는 보통 정도.. 일 듯한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대학 2학년 때 ‘병신 같은 사고’로 앞니에 ‘큰 문제’가 생긴 이후 나는 사실 항상 ‘치과’에 가게 되는 사태를 피하려 전전긍긍하며 살았던가.. 마지막으로 치과에 갔던 것이 거의 8년 전.. 이후 나는 그곳을 피하며 산다. 이번의 통증은 물론 윗니 중의 하나 (사랑니 근처)가 빠지려고 발버둥치는 결과였는데..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날로 치과에 가서 그것을 뽑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 ‘저절로’ 그것이 얌전하게 빠졌다. 거의 순식간에 그 지독한 통증이 100% 사라졌다. 비록 이빨 하나를 잃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날라 갈듯한 기분.. 이래서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라는 표현을 너무나도 절감, 실감, 만끽하게 되었다. 물론 앞으로 나는 치과의사를 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우선’ 지금엔 문제가 전혀 되지를 않는다.

 

¶  Show Stopper.. 며칠 전에 처음으로 성령대회란 것을 가 보았다. 오랜 전, 1988년과 1989년에 우리는 인디애나 주에 있는 노틀담 대학, University of Notre Dame (South Bend, Indiana) 에서 열렸던 미국 성령쇄신대회 (Charismatic Renewal Convention)에 참석을 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이번 것은 순전히 한인들이 주관하는 미국 동남부지역의 것, ‘제5차 미 동남부 성령대회‘였다.

성령에 관한 경험과 기억이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올해는 그 옛날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알게 된 최 데레사 양이 음악 지도자로 와서 정말 오랜만에 재회를 하게 되어서 한번 가 보자.. 하는 다분히 즉흥적은 결정을 하게 되었다. 매년 Labor Day에 맞추어서 열리는 비교적 큰 대회라 많이 알려지고 듣곤 해서 사실은 기대보다 생소하지는 않았다. 최 데레사의 12 string guitar 연주도 멋졌고 음악, 율동 팀들, 조직적으로 일사분란 하게 움직이던 red shirts의 봉사자들.. 모두 좋았다. 심지어 부산 교구에서 초빙된 주관 신부님의 ‘통성기도, 심령기도’ 소개,실습까지도 나는 거의 거부감을 느끼지 못해서.. 이제 나도 많이 ‘마음과 가슴’이 열렸구나 하고 만족한 심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복병이 나의 다리를 잡았는데.. 결과적으로 한마디로 최소한 나에게는 show stopper, disaster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2일 간의 행사였지만 우리 부부는 이틀 째날 행사는 모조리 포기하고 말았다. 이유는? 나의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작은 Satan이었을까? 이유는 우습게도 첫날 두 번째로 ‘등단’했던 신부의 ‘지겨운 performance’ 에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이 ‘사람’이 어떻게 ‘신부’가 되었을까 할 정도로 혼란한 시간과 싸우게 된 것이다. How did he ever become a priest? 저 사람이 신부인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음담패설’과 해외교민만이 겪는 아픈 곳들만을 철저하게, ‘밥맛 없고 저질적으로’ 찌르던 그의 강론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뒤늦게 나온 지독히도 짧은, 본론이라고 나온 것은 전혀 무게가 없고 깊이가 없던.. I’m Joseph..you’re.. 어쩌구 하는 전혀 새로울 것 하나도 없던 넋두리들.. 옆자리에 앉아있던 자매님들만 없었으면 자리를 박차고 자리를 떠날 생각도 있었지만.. 참고 참고 또 참았다.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 김영훈 스테파노 신부님과 같은 맑은 영혼의 느낌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올해의 성령대회는, 결과적으로 거의 완전히 실패한 나의 ‘첫 성령대회 체험’이 되었다.

두 장례미사, ‘세월호’ 분향

¶  작은 기적을 낳은 죽음

4월 들어 두 번의 장례미사와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듯한 분향이란 것.. 우울하게만 느껴지는 이 ‘장례와 분향’이란 말들이 4월의 찬란한 태양과 어찌 그리 대조적 느낌을 주는가? 장례식이나 장례미사는 이제 나에게는 그리 서먹한 것이 아니지만 분향은 사실 느낌이 아주 달랐다.

4월이 시작되자마자 오랜 병고 끝에 선종하신 데레사 자매님, 병고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그 자매님이 사랑하셨던 성모님 곁으로 가셨다는 안도감과 그래도.. 여기서 더 보고 싶었을 단출한 유가족 생각이 교차 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오랜 병고를 치르면 사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을 것 같지만 어찌 그런 감정이 다 똑같을 수가 있을까? 살아온 세월, 사랑했던 가족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다를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여정이 아니었던 조금은 독특한 인생여정을 살았던 데레사 자매님, 얼마나 사연이 많았을까? 끝까지 옆에서 묵묵히 그 자매님을 지켰던 독일인 남편과 외동 따님, 예상은 했겠지만 슬픔 감정은 억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데레사 자매님은 1950년대 초 숙명여고, 이화여대를 나오시고 60년대에 혈혈단신 미국에 오신 용감함이 있었고 남과 같은 평탄한 인생을 고집하지는 않으셨던 듯하다. 뉴욕에 사시며 현재의 독일 출신의 남편을 만났고 딸을 하나 두셨다. 가톨릭 신심, 그것도 성모님을 통한 신심으로 일생을 보내셨고 성지순례를 많이 하고 자서전 신앙고백인 책도 남기셨는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 옆에서 같이 일생을 보낸 남편은 ‘요지부동’으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고집이 센’ wife의 등살을 어떻게 견디었는지..착한 심성으로 아내를 보살피긴 했지만 아마도 신앙적인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연숙을 통해서 어렴풋이 이 자매님과 남편을 알게 되었지만 가끔 ‘봉성체’ 를 통해서 근황을 알게 된 정도였다. 한번은 그 독일남편과 가까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2차 대전 종전 전후 독일의 사정을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그는 미군 점령지역에 있어서 소련군 지역의 수많은 ‘참상’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미군이 보여준 ‘인간애’에 감동을 했고 결국은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점령군이 아닌 구세군 격인 미국을 동경하며 왔을 듯하고 정착지였던 뉴욕에서 다른 꿈을 가지고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데레사 자매와 만났을 것이다. 독일과 한국은 사실 판이하게 다른 역사, 문화를 가졌겠지만 둘 다 비참한 전쟁의 후유증을 겪은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조금은 동병상련 의 감정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데레사 자매님의 임종 즈음에 병자성사가 있었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모습이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홀로 남는 사랑하는 남편과 사후에 완전히 이별을 할 것 같은 걱정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것을 간파한 그 남편은 아내와 이별하기 전에 ‘세례를 받겠다고’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고 초 특급의 세례식이 병상 옆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이 끝난 후에 편안하게 선종을 했다.. 고 들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일화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데레사 자매님은 분명히 죽어서 남편과 ‘재회’를 못할지 모른다고 확신을 했던 것이다.

그 남편이 아내가 쉽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것 만으로 세례를 받았을까? 50년 이상을 버티어 왔는데 말이다. 여기에는 더 한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따님과 같이 마지막 병상을 지키던 중에 그 부녀는 데레사 자매님의 병상주변에서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니까 어떤 ‘에너지’가 병상에 온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아마도’ 그 에너지가 그 자매님이 그렇게 사랑하던 성모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세례를 받게 된 제일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병원 환경에서는 이런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아주 흔한 이야기라고 한다. 세상을 떠나는 그런 자리에 무언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독일인 남편은 마이클(미카엘)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되었다. 장례식을 거치며 그는 정말 바뀐 듯 했다. 이제야 50년 이상 자기 wife가 무엇을 믿으며 살았는지 늦게나마 알아 차리는 듯했다. 가까운 가족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장례절차가 조금 쓸쓸할 것으로 우려 되기도 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 자매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가는 길이 너무나 훈훈하기만 했다. 이화여대 동창회에서는 막강한 합창단이 와서 멋지게 조가를 불러 주었다. 한마디로 아주 멋진 장례미사가 된 것이고 유가족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경험과 위로를 남기는 그런 시간들이 되었다. 곧 이어서 부활절을 맞이하게 된 그 유족들.. 비록 한인 사회에서 조금은 멀어지겠지만.. 새로 찾게 된 ‘아내의 선물, 하느님’과는 더욱 가까워 지리라..

 

¶  레지오와 신부님, 그리고 작은 장례미사

또 다른 장례미사는 너무나 느낌이 달랐다. 성삼일, 부활절의 연속으로 쌓인 피로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89세 할머님의 선종으로, 또 다른 장례미사 소식이 들려왔다. 이럴 때 우리는 선택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장례미사나 연도의 소식이 전해지만 우선 물어보는 것이.. 이분이 누구일까.. 가족들은.. 경제사정은.. 실제적인 물음이지만 유족들을 잘 알 수 없기에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문제는 레지오 단원인 우리는 의심 없이 ‘무조건’ 장례절차에는 신경을 쓰며 참석하려 노력을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성당 공동체에 비교적 잘 알려진 가정이면 별로 문제가 없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들려오는 소식에 유족의 ‘경제적’인 문제와 친숙한 교우가 아니라는 사실과 조금은 피로했던 때 (부활절 직 후).. 모든 것이 조건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장례식이 또 쓸쓸할 것 같은 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갈 ‘기운’이 나지를 않았다. 혹시 ‘숨었던 유족 친지’들이 의외로 많이 참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결국은 우리는 못 갈 것 같은 예감이 지배를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주임신부님이 팔을 걷고 나서서 레지오 단원들을 ‘밀어’ 부치는 ‘의외적인 일’이 벌어졌다. 레지오는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은 4명의 유족들이 홀로 치르게 되었을 뻔했던 쓸쓸한 장례식이 레지오 단원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미사’로 승격되어 진행이 되었고 유족들도 많은 위안을 받았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군대같은 조직을 가진 레지오의 기동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번 ‘사건’은 사실 주임신부님의 ‘독자적 결단’으로 성사가 된 것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평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부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오랜 전 또 다른 주임신부 같았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명품과 부자와 명예’를 사랑했고 곤경에 처한 사람은 냉대했던 그 다른 신부의 행적을 상기하면 현 신부님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일 정도가 아닐까?

 

¶  머나먼 세월호 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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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들같이 어린 영혼들..어떻게..

이번의 ‘레지오 주동’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오니 장의사 바로 옆에 위치한 한인회관에 한 장의 공고가 붙어있음을 보니.. ‘분향소’라는 글자였다. 자세히 보니 ‘세월호 영혼을 위한’ 분향 공고였다. 그것도 우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부님이 ‘쏘신’ 점심 회식 후에 잠깐 들려서 분향을 하였다. 한마디로 안 할 수가 없었다. 아틀란타와 진도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엄청난 거리였고 느낌도 멀 수 밖에 없었지만 속 마음들은 그것이 아니었다. 할 말을 잊는 우리 심정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 ‘분향’이었다. ‘추악하고 인간답지 못한 어른들‘의 ‘도움’으로 채 피지 못하고 하늘로 일찍 가버린 어린 꽃다운 영혼 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크고 작은 사연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을 숨겨진 영혼들.. 육체적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자고 위로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할까? 하지만 ‘정의’는 끝까지 찾아야 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는 그런 살기 좋은 조국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또한 날벼락을 맞은 박근혜 정부도 필요이상의 큰 타격이 없기를 바란다.

 

나를 정말로 슬프게 했던 절망적인 장면.. 할 말을 잊는다

나를 정말로 슬프게 했던 절망적인 장면.. 할 말을 잊는다

이 덩치가 큰 배가 그렇게 순식간에 death trap이 되었을까.. 역시 말을 잊는다.

첫 Holy Triduum

Triduum..트리듐, the Three Days: 부활 일요일을 향하는 목,금,토요일 3일을 뜻한다. 다른 말로 Easter Triduum, Paschal Triduum이라고도 한다. 우리말로는 그저 ‘성삼일’ 정도가 될까? 그 첫째 날 목요일이 바로 오늘이다. 그러니까 2014년 Easter season의 절정 문턱에 있는 첫 날이 되는 것이다. 참.. 세월도 빠르지 엊그제 주님 성탄을 향한 대림절을 지낸 기억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스도 교의 결정체인 주님의 수난, 묻힘, 부활을 기리는 바로 그날이 코 앞에 온 것이다.

가톨릭 전례에서 성삼일은 성 목요일, Maundy Thursday, 성금요일, Good Friday 그리고 성 토요일 Easter Vigil 로서 정확한 시작은 목요일 저녁 미사로 시작되어 토요일 미사로 끝난다. 인상적인 것은 시작점인 목요일 마사로 전통적으로 이날 신부가 신자 12명을 뽑아서 발을 씻기는 것이 있고 (세족례) 대영광송이 끝남을 시작으로 오르간과 종 소리가 금지되고 부활아침까지 결혼예식도 금지가 된다. 성 목요일 미사의 마침을 기해서 성전 내부 제단 주변의 모든 ‘장식물’이 모두 철거가 된다 (움직일 수 있는 것들만). 처음에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나는 이런 상징적인 의식들이 하나하나가 모두 성서적, 신학적, 전통적인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고, 너무나 인상적이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예수의 수난 passion의 의미를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금요일 Good Friday는 실제로 예수님이 ‘죽는’ 날로서 전례적인 행사는 거의 없는 것인데 (정확하게 미사는 없는 것이다) 전날 축성이 된 성체를 분배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며 특히 십자가 경배 veneration of cross라는 것을 통해서 십자가 죽음을 애도하며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성토요일 밤의 미사는 부활을 기다리는 주제로 깜깜한 밤, 성전의 밖에서 만들어진 ‘촛불’이 성전으로 들어오면 촛불 미사가 진행이 된다. 이런 광경도 너무나 인상적인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원칙적’으로 성삼일을 체험적으로 기리는 것으로 정하고 ‘절대로 빠지지’ 않고 3일 ‘행사, 미사’에 참가를 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큰 부담도 느꼈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제는 은근히 기다리게 될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분명히 이 부활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면서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절감하게 되었다.

작년 2013년의 성목요일은 나의 첫 체험 시도로 성삼일 시작인 저녁 미사 후부터 시작되는 “감실성체조배”에 참가를 하였다.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계속’되는 성체조배, Eucharistic Adoration이었는데 한 사람이 계속하기가 쉽지 않아서 1시간 정도로 시간을 정해서 대부분 레지오 단원들이 책임지고 감실을 지키며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정 후 1시부터 한 시간 참가했는데.. 그때 내가 받았던 느낌은 글로 쓸 수없이 강해서 오늘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 이후 나는 내년에도 ‘꼭 참가’하리라 각오를 했다. 그 ‘내년’이 오늘 밤으로 다가온 것이다.

작년 성목요일 감실 성체조배 때에는 그 당시 발견한 Dr Eben Alexander의 The Proof of Heaven이란 신간 NewYork Times bestseller를 읽으며 묵상도하고 했는데, 그때 나는 거의 확신을 하게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처럼 ‘이성과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신경외과의 그러니까 자연과학자인 저자의 ‘간증’이 그렇게 나에게 실감 있게 다가온 사실은 정말 나에게도 뜻밖이었는데 아마도 그 때의 성체조배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 그 이후 나는 이성과 신앙만이 아닌 ‘과학과 믿음’의 접근 분야에 대해서 거의 일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어서 현재까지 이르렀다. 이것의 출발 점이 바로 작년 성목요일이라서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올해는 ‘첫 성삼일’이라고 이름을 부쳤다.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첫 ‘한인 순교자 성당’ 성삼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한국 순교자 성당에서 부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것도 우리에게는 두고두고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해 본다. 암만 동네의 미국본당에서 긴 세월을 보냈지만 어찌 우리말이 울려 퍼지는 고향 같은 다른 본당과 비교가 되겠는가? 아직도 반반 정도 미국본당과 순교자 성당 본당을 번갈아 가지만 조금씩 순교자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감을 느낀다. 앞날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더욱 더 한국본당으로 가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추측도 해 본다. 워낙 미국본당에 정이 든 탓에 한국전례문화가 너무나도 생소한 우리 두 딸들을 설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져서 우리의 큰 과제로 남게 되었다.

 

아틀란타 부활 영세식 2014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4년 부활 영세, 세례식

 

2014년도 부활절 영세식이 4월 12일에 뜻 깊게 막을 내렸다. 천주교에서 영세, 세례의 의미는 아마도 개신교회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쉽게, 편하게 하느님을 만나려는 그들과 상징, 과정, 연수, 고행이 따르는 우리 천주교의 하느님 만나는 과정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나와 연숙에게 올해의 영세식은 분명히 다른 해와 다르게 가슴으로 찡~ 함을 느끼게 다가왔다. 영세식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 멀리서 몰래 찍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한결같이 행복하게만 보이는 이 모습들.. 나이나 성별에 상관이 없다. 세례를 주관하신 주임신부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아마 그런 모습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30여 년 전을 부지런히 떠올리며 이들의 심정을 헤아렸지만 아무래도 30년의 세월은 조금 긴 것 같이, 자세한 그때의 정경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거의 100% 기억하는 것은 그 때의 우리의 ‘행복한 느낌’이었다. 그 희미한 감정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례자들도 아마 마찬가지의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이번 영세식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상당했다. 나와 연숙이 지난 해 8월부터 모두 봉사자란 이름으로 예비자 교리반에 참가하여 무사히 이들을 ‘요르단 강’ 가로 배를 함께 저었다는 느낌이고, 예비자 거의 전부가 끝까지 항해를 했다는 안도감과 자부감등으로 우리가 다시 세례를 받는 것처럼 가슴이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번 교리반 봉사자로 참가해서 우리가 얻은 것은 이 예비자 들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많이 얻고 배웠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리는 수녀님과 신부님이 담당했지만, 우리 부부도 두 번 정도 담당할 기회가 있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수녀님과 자유분방한 신부님의 스타일은 정말 대조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신부님 스타일이 훨씬 마음에 들고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맡았던 ‘교리 강의’에서 나는 신부님 스타일 흉내를 잠깐 냈는데, 역시 예상대로 수녀님의 재빠른 질책을 받았다. 아직도 나는 그런 수녀님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저 그저 benefit of doubt 만 되 뇌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대상한 예비자들은 거의 ‘고학력, 젊은 층’이 대부분이어서 우리와 호흡이 잘 맞았다. 우리에 비슷한 또래들도 마찬가지로 personal chemistry가 좋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었던 것은 대부분 예비자들이 봉사자들을 격의 없이 믿어주고 사의를 표하는 자세들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신선한 것이.. 요새 ‘젊은 층’을 많이 보았기에 너무나 비교가 될 정도로, 건전한 말투, 모습들.. 보기만 해도 했다. 중장년 층의 예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머있고, 협조적이고, 한마디로 멋진 신사 숙녀들이었다. 이들이 하느님을 찾으려 8개월 동안 눈이오나 비가오나 매주 목요일 밤에 모였다는 것은 속된말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비슷한 비율의 남녀 형제, 자매들.. 우리에게는 모두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영혼들이다. 한창 ‘외우는 공부’가 더 쉬울 듯한 15세의 등치가 큰 소녀, ‘마누라’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지만 이제는 ‘교리반 재수’을 끝낼 각오로 참여 각가지 유머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던 Clint Eastwood를 연상시키는 60세 형제님, 무게가 실려있는 comment로 일관 한 귀공자 스타일, 옛날 알랑 드롱을 닮은 ‘백수’ 형제님, Tom Cruise를 연상시키는 30대 유학생 화학공학도, 항상 질문이 많고 심각하지만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50대 자매님.. 영화배우처럼 멋지게 생기고, 아버님과 같이 교리공부를 한, 멋진 약혼자의 후원을 받았던 (내가 제일 부러운 case) 형제, 20대의 젊음의 향기로 교리반의 공기를 채웠던 몇몇 유학생 자매, 형제들.. 그들을 보면서 우리도 30년 전을 회상하기도 했고, 그들 신앙여정의 앞날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제 세례, 영세식은 끝났지만 사실 학교 졸업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가 진짜가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이들의 교회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서..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속사회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20~30대의 젊은 층은 참 길 수도 있는 ‘파도’길을 가야 한다. 중장년 형제자매들.. 이들은 그렇게 시간이 길지 않다. 사실 내가 제일 큰 관심을 갖는 것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가 아니고 이들이 ‘무사히’ 세파를 헤쳐나가는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받고 쓸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내가 30년의 세월을 ‘실패’로 보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분 들이 ‘하느님’이 생각보다 가까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 본다는 깨우침을 하루빨리 가질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 본다..

 

레지오 총 친목회가 끝나고..

¶  12Scan10035월 1일, 2013년도 레지오 총 친목회 (Legion of Mary, Reunion)가 2013년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의 시작과 함께 멋지게 어울리며 결과적으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본당 내에서 2013년 12월 크리스마스 season의 막을 제일 먼저 올리는 역할을 해냈다. 12월 1일에 성탄의 공기를 느끼기에는 조금 이른 듯도 하지만 요새의 ‘세속적 secular, 상업적 commercial’인 흐름을 보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듯 싶다. 이미 지난 주부터 크리스마스 carol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고 Thanksgiving 날 부터 아예 shopping season이 ‘요란하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친목회 프로그램의 하나인 합창 공연에서 참가자 모두가 빨간 산타크로스 모자를 써서 더 그러한 성탄절의 기분을 풍긴 듯 싶다.

 우선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 총 친목회는 결과부터 보면 예상보다 잘 치러 진 느낌을 받았다. 꾸리아에서 공식적이고 전체적인 review를 해 보면 더 자세한 것을 알겠지만 친목회의 진행이 비교적 매끄러웠고, 지루한 느낌도 거의 없었다. 참가자나 연기하는 단원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보며 그런 것을 나는 느꼈다. 아틀란타 지역 한인 성당이 2개로 나누어지며 필연적으로 꾸리아 소속 단원 수가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서 참가자의 수는 아마도 예년에 비해서 ‘많이’ 줄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지역 쁘레시디움 (Columbus, Augusta 같은)에서 장거리의 불편을 무릅쓰고 참가한 것은 보기가 좋았고, 참가 단원들의 참여 태도는 ‘수우미양가’ 에서 아마 ‘우’에 속하지 않았을까?

나와 연숙1은 올해 꾸리아 level에서 이 행사를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며 한가지 각오를 하고 임했다. 그것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라는 조금은 진부한 표현의 각오였다. 물론 결과는 충실하고 진지한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너무나 결과에 집착하며 아무래도 모든 것들이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친목회의 제일 큰 목적이 잘 모르는 단원들과의 친교 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친목회 자체는 불과 1~2시간 정도의 친교시간을 주기에, 도저히 그 자리에서 의미 있는 친교는 힘들다. 게다가 친목회 자리에서조차 평소에 모이고 있는 단원들끼리 모이게 된다는 현실을 알면 더욱 친교는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친목회에서 열리는 각종 프로그램에 서로 소속이 다른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연습, 참여를 하며 그곳에서 시간을 두고 친교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결책이었다. 실제로 각종 프로그램에서 평소에 겨우 얼굴 정도나 알던 단원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 나에게 이 친목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도 조금 생각을 하며 이날을 맞게 되었는데, 아마도 나의 ‘깊어가는’ 나이를 더 의식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도 세월이 깊어 갈 수록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그런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한 ‘최선’을 다해서 참여를 하자는 각오를 가지고 임했다. 특히 대다수가 여성 단원들인 우리 레지오에서 나 같은 남자단원들이 가질 수 있는 외로움, 소외감, 위축감 등등을 어떻게 이런 기회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가도 생각을 했다.

사실 이러한 ‘요새 남자들의 문제’는 이곳만이 아닐 것이고 전반적인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나, TV를 보나, 영화를 보나.. 요새는 여자들만 보이는 것 같고, 남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레지오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사회적, 문화적 흐름을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특히 나이 먹은 남자들에게는 더욱 뚜렷하다.

 이런 우울한 남자들을 생각해서 작년 총 친목회 때 의도적으로 남자들만의 시간을 만들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두 남자가 sing-along 을 lead 한 것인데, 결과는 별로였을까.. 올해는 아예 다시 해달라는 요청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목회 2주를 남겨두고 연습 진행상태가 별로였는지 급작스럽게 sing-along team을 다시 만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작년의 2명 남자는 다시 목소리를 맞추게 되었는데 올해는 조금 욕심을 부려서 ‘숨어있는 남자 인재’를 찾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예상을 뒤엎고 3명의 남자를 ‘발굴’ 해 내었다.

이 남자들은 몇 년 동안 그저 얼굴만 간신히 아는 정도였는데 운 좋게 ‘의기투합’이 된 것이고, 이중에 2명은 끝 무렵에 연숙에게 ‘걸려서 등을 떠밀려’ 온 case였다. 그래도 그들도 정말 오랜만에 ‘목청’을 쓰는 듯 신기해하며 동참을 했고 우리의 의도인 ‘친목도모와 즐기자’ 라는 것을 잊지 않고 결국 친목회에서 남자 5명의 sing-along team이 debut를 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은’ 올해 총 친목회의 추억이 될 것이다.

올해도 여흥순서의 사회를 연숙이 맡았는데,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나이도 그렇고, 3년째 계속하고 있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다른 사람을 계속 찾아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저 ‘인재’가 없다고 푸념들만 하는 모양인데, 참 알 맞는 사람이 없기는 해 보인다. 연숙의 부단장 직이 내년 중에 끝이 나기에 그때만 기다리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끝 나도 글쎄.. 작년에는 청년 단원들이 중심으로 강남스타일을 요란하게 멋지게 보여주었는데, 올해는 완전히 스타일이 바뀌어서 엄숙하고 느린 모습의 body worship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많은 단원이 참가한 합창은 기대 이상으로 멋진 화음을 연출하였고, 참가 인원이 적어 고민하던 ‘춤’ team 도 아주 귀엽고 신선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제일 시끄럽고 신명 나고 신났던 것은 역시 우리부부가 다 참가했던 난타가 아니었을까? 이 프로그램은 연습기간과 참여도가 제일 우수했던 것이어서 결과에 상관없이 대 성공을 이룬 case가 되었다. 국악을 전공한 자매님이 열성적으로 2달에 걸쳐서 지도한 열매였다.

 이 행사로써 올해 레지오의 주요 행사는 다 끝났고, 이제는 조용히 대림절 4개의 초가 하나씩 켜지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고, 그 후에는 또 한 해를 다 보낸다. 비록 구세주 탄생은 기쁜 것이나 이제는 솔직히 이 나이가 되니 내년 이맘때 다시 한번 친목회에 참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곁들여서 그런지, 한 해가 가는 이 시점이 꼭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즐거움과 아쉬움이 교묘하게 교차되는 그야말로 미묘한 기분의 12월인 것이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레지오 합창 team

 


베토벤 바이러스, 윤도현 아리랑 – 난타 team

 


Group Game – 참가자 모두

 


사랑으로‘ , 고 김수환 추기경 애창곡 – finale, 모두가

 

  1. 나는 현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서기로 있고 연숙은 같은 쁘레시디움의 단장인 동시에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의 부단장으로 모두 꾸리아에는 직접 간접으로 깊이 관련이 되어있다.

소까나.. 12월인가..

소까나~ 소까 소까 そうかそうか.. 참 이렇게 일본말이 다정하게 느껴지니.. 이럴 때, 그래, 그래 보다 소까 소까도 잘 어울린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일본을 조금이라도 알고 죽자’ 라는 이상한 느낌에 끌려서 이제까지 거의 7년이 지나고 있다. 비록 몇 년 전부터 조금씩 slow-down이 되고 있고 새로 나오는 드라마 video가 없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동안 쌓였던 그 수많은 어떤 것은 classic이 되어가고 있을 정도의 좋은 이야기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단어 정도는 알아 듣지만 그 이상은 아마도 무리 무리.. 조직적으로 배울 의욕과 생각도 사실은 없다. 이 정도면 나의 욕구를 채웠다고 생각하니까.. 최소한 이질감과 거부감 없이 그들의 ‘언동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래.. 12월이 벌써 6일로 접어든다.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다음에 눈을 깜빡 뜨고 달력을 보면 분명히 중순을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정말 정말 어떨 때는 한 달이 오래 전의 하루와 같은 느낌이 든다니까.. 60대에서 60마일로 달린다는 ‘병신 같은 표현’이 그렇게 적절한 듯 느껴진다니까.. 조금은 슬프다. 내가 70대를 산다면 10마일이 더 빨리.. 그러니까 한 달이 아마도 8시간 정도의 느낌으로? 와.. 싫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있다. 순리와 진리를..

조그만 폭풍이 지난 듯한 느낌으로 며칠째 시간을 보낸다. 그 폭풍이란 물론 우리 부부가 ‘거세게 개입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였다. 성탄의 기분을 내기에는 너무나 빠른 12월 1일에 우리가 제일 먼저 성탄기분의 선두주자인 듯 tape을 끊은 것이다.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정말 이를 악물고 악물고 ‘즐겁게 준비하고 즐겁게 치르자’ 라는 결심을 하고 지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비교적 stress를 잘 조종하며 보냈다. 덕분에 얼굴로만 알던 단원들과 지척에서 어울릴 수도 있었고 특히 남자 단원들이 더 값지게 다가왔다. 전 요셉, 김 빠찌피코, 한 그레고리오 형제 같은 사람들은 처음으로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거기다 작년부터 알게 된 박 대건 안드레아 형제까지 5명이 친목회 lower stage에 서게 된 ‘큰 일’을 한 것이다. 나도 노력했지만 연숙의 pushy함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우리가 얼마나 sing-along을 잘 주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선례를 남겼고, 새롭게 서로들이 만났으니 말이다. 난타 program도 마찬가지.. 우리부부 정말 열심히 참가하고 즐겼다. 거의 2달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으니 최선을 다 했다고 자부해도..

첫 추위, 살아난 ‘고물’, 묵향전

2013-10-25 16.21.28-1¶  올해 들어서 첫 ‘계절 추위‘가 선을 보였다. 이 지역 장기 예보는 분명히 올해 평균 이하의 겨울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그렇게 쉽게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통계와 확률에 바탕을 둔 것이라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북미주 동쪽의 거의 전부가 늦가을 같은 첫 추위를 느꼈고 이곳 아틀란타 지역도 만만치 않게 빙점에 가까운 온도와 바람까지 동반된 것으로 ‘명절, 휴일’ 기분까지 나게 하는 약간은 반가운 느낌도 들었다.

작년에 애용했던 radiant space heater를 꺼내어 따뜻한 빛과 열을 처음으로 보고 느낀다. 아직도 새파란 숲들이 아주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10월 31일(10월 마지막 날)이 오랜 전통의 Halloween day.. 관련된 색깔은 pumpkin(호박)의 진 주황색이라 역시 본격적으로 ‘떨어질’ 낙엽을 그린다, 이 날이 다가오면 우리 애 들이 어린 시절 동네를 돌며 trick-or-treat 시키던 기억과 이런 것들이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을 느끼며.. 아, 우리가 이곳에서 오래 살았구나 하는 야릇한 감상에 젖는다.

칠흑같이 깜깜해진 아침 6시 45분경 2층의 난방이 가동을 하면 나는 조심스레 어둠 속을 헤치고 나의 서재로 간다. 우리 집 잠꾸러기 10살짜리 개 Tobey(토우비)는 포근한 자기 침대에서 완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자동 프로그램이 된 아래 층 전깃불들로 아래층은 이미 밝지만, 때 맞추어 고장이 난 난방시설(gas furnace) 덕분에 냉장고처럼 냉랭하다. 아래 층의 주인인 7살짜리 고양이 Izzie(이지)는 벌써 활동개시.. 활발히 돌아다닌다.

거의 zombie처럼 어둠 속에서 나는 아침의 즐거움인 hand-drip coffee를 커다란 mug에 담아 서재로 올라온다. 그때부터 8시까지 나만의 소중한 1시간이 시작된다. 이런 routine이 이제는 일년도 넘게 ‘완전히 고정’ 되어서 거의 robot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조금 있으면(11월 3일, 11월 첫 일요일 새벽) Daylight Saving Time(DST, summer time)이 끝이 나며 아침이 조금은 더 밝아지고(대신 저녁은 더 일찍 깜깜해짐), 그것이 시작되는 날 한 시간 더 잠을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어김없이 정직하게 또 계절은 바뀌고 있다.

 

¶  지난 주 첫 추위가 왔을 때, 아래층 gas furnace가 문제가 생겨서 ‘가동’을 못 했고 부랴부랴 아래층은 각종 electric space heater들을 동원해서 난방을 하는 귀찮음을 겪었다. 30년 넘은 ‘고물’이 드디어 숨이 넘어감을 느끼며, 수 천불이 들지도 모르는 이것 한번 더 내가 손을 보았는데 다행히 그것의 심장 격인 heat exchanger는 문제가 없었고 fan control system인 전기 쪽에 문제를 발견하고 부랴부랴 그 부품을 order를 해서 오늘 그것이 도착하였다. 요새는 거의 모든 것들이 electronic 그것도 microcontroller를 사용해서 온도를 조정하지만 30년 전에는 ‘완전히 기계식’이었다. digital, analog 이전의 100% mechanical control인 것이다.

이것의 장점은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 옛날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온도를 감지하는 bimetal boom의 길이가 원래의 것 보다 조금 짧았지만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furnace 속의 온도가 4″ 정도의 거리에서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한 시간 걸려 망가진 것과 바꾸어서 power switch를 켜는 그 순간.. 언제나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순간이다. 세상에 100%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랜 만에 난방 system의 blower fan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아마도 최소한 $350은 절약했을 것이다. 이것이 ‘공돌이’ 들이 느끼는 자부심이다.

 

2013-10-28 14.04.49-1‘shiny brand new’ furnace blower fan controller

 

¶  지난 이틀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제4회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이 열렸다. 몇 년 전에 연숙이 이곳에 가입을 해서 토요일 마다 땀을 흘리며 배워왔고 매년 이맘때 쯤 회원전을 열곤 했다. 나도 따라 다니며 보곤 해서 이제는 아주 보는 것이 익숙해졌다. 나보고 해보라고 하지만 나는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보는 것은 조금씩 눈이 열리는지 많이 나아졌다. 내가 그렸던 것은 50년 전에 그렸던 만화가 전부여서 나는 사실 미술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이런 동양화 쪽은 더 그렇다. 하지만 그리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조그맣게 시작한 이곳 묵향회, 이제는 회원들도 늘어났고 그것에 비례해서 출품 작도 많이 늘었다. 거의 50 점이 넘게 전시가 되었고, 많은 회원들이 ‘호’를 받고 그것을 새긴 ‘인’ 도 찍고 해서 아주 ‘프로’의 맛을 보여준다. 성당에서 전시를 하기에 신부님도 나와서 참관을 했는데, 3년 전의 것을 기억을 하시는지.. 처음보다 너무나 나아졌다고 논평을 했고, 솔직히 처음에는 모두 ‘습작’ 수준이었다고 해서 모두들 웃었다. 이곳 교민 인구가 제법 불어나서 이제는 이런 취미 모임들도 큰 무리 없이 유지가 됨을 보고 참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개막이 되던 날은 새로니, 나라니도 이곳을 찾아 주어서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2013-10-26 17.06.47-1 제4회 아틀란타 묵향회회원 작품전 개막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2013

한글로 된 레지오 공인 교본을 보면 ‘연차 총 친목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꾸리아는 가능한 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 축일‘(12월 8일)에 가까운 날에 모든 단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는 연차 총 친목회를 열어야 한다. 이 행사는 필요에 따라 성당 안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행사에는 친교의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만일 성당 내 의식 때에 레지오의 기도문을 바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뗏세라의 기도문을 보통 회합 때처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바쳐야 한다.

연차 총 친목회의 참가 범위는 레지오 단원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좋다. 여흥 순서에 곁들여 레지오와 관련된 이야기나 글을 발표하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단원들이 너무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많은 단원들이 참석하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이 행사의 취지는 참석한 단원들이 모두 서로 낯을 읽히고 친숙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원들이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순서를 짜야 한다. 진행을 맡은 사람들은 단원들이 끼리끼리 무리를 이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단원들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있게 되면 레지오 가족의 단결과 우애의 정신을 북돋우려는 이 행사의 취지를 살릴 수 없게 된다.

 

‘연차 총 친목회’라는 레지오 용어의 ‘원어’는 사실 The Annual General Reunion 이다. Reunion을 ‘친목회’로 번역한 것은 의역(의미를 옮긴 것)이고 그런대로 의미가 잘 전달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reunion이라는 단어의 맛은 역시 ‘오랜 동안 떨어져 있던 친구,동창을 일년에 한번 다시 만나는 행사’ 라는 것이 아닐까? 레지오 활동의 중심점에 있는 꾸리아 산하에는 사실 지역적으로 떨어진 쁘레시디움들도 있을 것이니까 서로 얼굴도 모르기에 일년에 한번 이렇게 ‘모두’ 모여서 ‘친교’를 이루자는 뜻의 행사일 것이다.

우리가 속한 꾸리아1의 사정은 비교적 대다수의 쁘레시디움이 같은 본당 소속이어서 그런대로 얼굴 정도는 조금 아는 정도이지만 그것이 전부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 온 단원들은 더 눈에 잘 띄어서 더 익숙하기도 하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행사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은 각 쁘레시디움 단위로 이루어져서 이것을 통한 통 넓은 친교를 이루기는 무리였다. 그러니까 일년 내내 같은 방에서 보는 사람들과 ‘더 친하게 되는’ 기회만 제공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단점을 알고 작년부터는 쁘레시디움 단위의 프로그램을 완전히 없애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정하고 그곳에 가급적 모든 쁘레시디움이 참여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합창, 춤 같은 프로그램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서로 모르던 다른 쁘레시디움의 단원들도 조금은 알게 되는 기회를 얻는 것이고, 사실 효과적이어서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지내던’ 단원 몇몇을 사귀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작년 12월 초 총 친목회의 추억이 마치 한달 전 같이 느껴지는 가운데 ‘벌써’ 2013년 ‘연말’ 총 친목회를 준비하는 모임이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합창, 춤 그리고 난타의 세가지가 계획되고 희망하는 단원들이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에 나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다른 남자 단원과 함께 듀엣으로 3곡의 노래를 불렀고 올해도 ‘요청’만 들어오면 다시 한번 할까 하는 기대도 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작년에 우리가 한 것이 별로였는지..하는 실망감도 없지 않다. 올해 나는 연숙과 같이 난타 라는 ‘두드리는’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현재까지 4번 연습을 하였다. 알고 보니, 이 ‘난타’라는 것은 부엌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마’를 두드리는 모양이다. 다른 것으로는 ‘통, bucket’ 을 뒤 엎어놓고 치는 것과, 국악에서 쓰는 ‘북’이 있는데 대부분 여성들은 도마와 ‘통’을 치고 나는 북을 치는 그룹에서 북을 치게 되었다. 배경 음악은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경쾌한 것과 우리 민요를 바꾼 ‘윤도현의 아리랑‘인데 박자감각만 있으면 우선은 견딜 수 있는 것이고, 연습하고 나면 기분도 좋았다.게다가 잘 모르는 다른 쁘레시디움들의 단원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시간도 되어서 레지오 교본에 나오는 행사의 의미도 되새기게 되었다.

 

UPDATE, UPDATE!
12월 1일에 열린 총 친목회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12/9/2013

 

베토벤 바이러스

 

윤도현의 아리랑

 난타 연습용 북과 북채집에는 큰 북이 없어서 이렇게 ‘장난감’ 북과 북채로 연습을 한다

 

  1.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교리주일, 인천 상륙 1950

¶  Catechist, catechesis, catechistic, catechistical, catechistically, catechize, catechumen, catechetic, catechetical hew..

 가톨릭 교회의 매력 중에는 아주 풍부한 alphabet soup 같은 각종 용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이 alphabet soup은 라틴어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라틴어를 조금 이해하거나 좋아하면 이것도 매력 중에 하나다. 다만 조금 다른 종교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문제일 수는 있다. 이 라틴어는 영어권에서 보면 동양권에서 한자를 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 용어나 단어들은 조금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긴 역사를 자랑하는 그득한 내용이 담긴 단어들이라 그 옛날 한국에서 영어공부를 할 때, WORD POWER를 공부하던 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어의 어원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들이 그 책에 그득했고 그것으로 단어를 배운 것이 ‘영원히’ 나의 머리에 남았고, 모르는 영어 단어를 보면 곧 바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천주교 ‘영어’를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모조리 라틴어였다. 그것들이 이곳의 성당에서 영어처럼 쓰이는 것이다.

오늘은 Catechetical Sunday였다. 이 단어도 처음에 정말 괴상하게 느껴졌다. 발음도 그렇지만, 그것과 비슷한, 파생어는 수 없이 많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의미 ‘영세예비자 교리공부’ 에 대한 단어들이란 것만 알면 끝난다. 교리공부라고 했지만 이것은 ‘교실에서 말로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매년 이 ‘교리반 주일’이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이 지났는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우리가 한국본당에서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본당은 거의 ‘봉사자’들이 교리반을 나누어 가르치는데 한국본당은 올해부터는 수녀님이 가르치신다. 그러니까 올해의 영세예비자들은 ‘행운아’들인 것이다. 열명 안팎의 알맞은 인원이라서 토론하기도 좋고, 모두들 진지한 태도와 열의를 보인다. 이들이 내년 부활절에는 ‘모두’ 영세식을 통해 하느님의 새 자녀들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려 본다.

 

¶  아.. 인천..1950

오늘은 9월 15일 일요일, 하지만 1950년 9월 15일 금요일은 그 유명한 육이오 동란 (일명 한국전쟁)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던 유엔군 총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Gen. Douglas MacArthur] 장군의 걸작품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때는 63년 전.. 내가 2살 8개월 되던 때였다.

그 당시 우리식구는 아버지가 납북이 되시고 어머니가 누나와 나, 남매를 데리고 비원 옆 원서동에서 숨을 죽이고 사셨다. 물론 나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2년 정도 뒤부터는 그 원서동의 분위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인천..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박경원씨의 구수하고도 경쾌한 노래를 들으면 인천의 냄새가 그대로 나는 듯하다. 서울 재동학교 5학년 때, 그러니까 1958년에는 5학년 전체가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다. 인천 부두와 월미도가 내려다 보이는 만국공원, 그곳에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의 동상 아래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1950년대의 인천은 참으로 멀었다. ‘증기, 화통’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갔을까..

그래서 그랬을까? 인천을 번개와 같이 점령한 유엔군(사실은 미군과 국군)은 예상을 뒤엎고 서울을 탈환하는데 무려 2주가 결렸다. 그렇게 멀었을까? 빨갱이들이 6.25 발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지나치게 서울에서 꾸물대다가 ‘부산 해방’을 놓쳤다는 해석이 있는데, 이것과 맞먹는 유엔군의 실수는 그렇게 느린 서울 탈환이 아니었을까? 서울탈환, 그러니까 구이팔, 9.28 수복이 되던 때까지 낙동강 전선에서 독 안의 쥐가 된 빨갱이들은 여유 있게 ‘양민학살과 38선 이북으로 도주’를 했을 것이다.

순전히 결과론이지만 맥아더 장군의 ‘오만과 아집’이 조금 덜 했더라면, 남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었더라면, 중공군의 개입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했을 것이고 흥남철수1.4 후퇴 같은 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 후에도 미국이 조금 더 ‘모험’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만주를 폭격하거나 원자탄으로 위협을 하는 맥아더의 구상이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때 통일이 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고 한민족 만고의 1급 역적, 원흉 김일성 일당을 처단 못한 그것이 이후 한반도, 한민족 비극의 씨앗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악의 씨는 그대로 남아 민족반역자 3대, 그 중에 마지막 인간은 새끼돼지 같은 젖먹이, 현대 역사 박물관 전시물 제1호가 될 만한 ‘북조선 김씨 왕조‘를 유지하며 장난감 핵무기로 장난을 하고 있으니..

 

 inchon-1
인천으로 상륙하는 미국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어쩌구? 위키 빠가!

생전의 구상 시인
생전의 구상 시인

얼마 전에 시작된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2014년 부활영세자 교리반, 수녀님을 돕는 봉사자 역할을 시작하면서 주 교재인 ‘여기에 물이 있다1를 영세 예비자들과 같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교리’ 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게 참 ‘부드럽고, 친절하게‘ 잘 꾸며진 책이었다. 어제 교리반에서 공부 한 제2과의 서두에 오랜만에 보는 ‘구상’ 이란 이름이 보였다. 구상(具常) 님은 시인이자 천주교인으로 내가 젊었을 때 그에 관한 기사(글과 사진)들을 여러 잡지에서 많이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물론 내가 천주교의 ‘천’ 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잡지에서 보았던 시인의 얼굴모습도 떠 오르고, 천주교 신앙을 깊은 묵상으로 고백하는 듯한 시와 글도 기억난다. 그것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다시 그 시인의 이름을 본 것이다.

불현듯 그 시인의 근황과 그의 시의 세계2 등이 궁금해 졌다. Quick googling으로 시인이 우리 어머님과 같이 1919년 생이시고, 어린 시절을 역시 우리 어머님 고향인 함경남도 원산 임을 알게 되어 너무나 반갑고, 어렸을 때 아마도 어머님 집안과도 장날에 만났을 수 있다고 상상하기도 했다.3 시인은 우리 어머님 보다 일년을 더 사셔서 2004년에 선종을 하신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글 Wikipedia로 가보니 아주 실망스럽게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성의 없이 쓰여진 듯 보이는 글이 뎅그라니 보였다. 누가 이 기사의 저자인지 나는 알 길이 없지만 그의 배경이나 학식, 진솔함 등에 관한 추측은 가능했다. 한마디로 빠가.. 그것도 악질 빠기급에 속한다. 빠가. 빠가.. ‘해방 후 194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산4..’ 어쩌구 하는 글 하나로 이 빠가, 젖먹이 같이 유치한 듯 느껴지는 이 편집자가 현재 ‘한글 Wikipedia’의 대표적인 수준이라면 아뿔사.. 이곳도 역시 ‘주사파, 빨갱이’들이 득실 거리는 구나.. 하는 한숨만 나온다. 아마도 이 기사의 저자는 구상 시인이 ‘악질, 반동 천주교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생각한다.. 시인의 형님 신부님과 어머님이 빨갱이들에게 ‘처형’이 된 것을 이 빠가는 아는가? 어떻게 이런 ‘역사 수정주의 빠가’들을 한글 Wikipedia에서 몰아 낼 것인가? 으이구~~ X가 갈린다.

 

  1. 글 차동엽, 그림 김정자, 미래사목연구소 간, 예비신자 교리 & 소공동체 나눔용
  2. 이제는 나에게 시의 세계는 옛날처럼 먼 곳이 아니다.
  3. 그 당시 원산에 살던 사람들은 그런대로 서로 얼굴이 낯 설지 않을 정도로 지냈다고 들었다.
  4. 야 이 빠가야, 어째서 1946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어쩌구란 걸래 같은 말이 관계가 되냐? 구상 시인에 대한 글에, 조선민주주의인민이란 쓰레기 같은 말이 걸 맞냐?

Me, catechist? not exactly..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2014년 부활절 영세 목표’ 예비 천주교 신자들의 교리교육이 2013년 8월 8일에 시작이 되었다. 최소한 미국 내의 본당들은 거의 이즈음부터 예비자 교리과정이 시작되어 내년 부활절 즈음까지 계속된다. 천주교의 전통일까,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예비자의 교육을 시키는지 그 옛날에 본 기억이 있지만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것은 개신교의 전통은 ‘쉽게 쉽게’ 하는 것이라는 것과, 교육과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총각 시절 잠깐 나간 적이 있었던 어떤 교회에서는 나보고 ‘거저’ 세례를 주겠다고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나와 연숙은 1981년 가을부터 아주 특수한 상황하에서 예비자 교리공부를 시작해서 다음 해 1982년 부활절 때 영세를 받았다. 당시의 우리 본당이었던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의 한인천주교회에는 규모가 하도 작아서 정식 교리반 코스가 없었지만 그 무렵 신시내티 로 옮겨가셨던 전 주임신부 왕영수 신부님으로부터 직접 교리교육을 받은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 우리보고 ‘행운’이라고 했다. 10명도 안 되는 소 그룹이 신부님과 마주하고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행운’이었다. 왕영수 신부님의 절대적인 헌신적 노력이었다. 신시내티로 부터 콜럼버스까지 2시간 거리를 마다하고 일주일 마다 오셔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30 something의 그 나이에 신앙적 교육을 받는 것은 조금 힘든 상태였다. 머리는 굳을 대로 굳어지고 특히 나 자신은 더욱 천주교 교리가 쉽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예비자들에 비해 그렇게 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머리 속에서 돌며 가슴으로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때의 비결이 ‘무조건 믿어라’ 였는데, 그 말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연숙은 나와는 전혀 달랐다. 무언가 각오를 하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고, 결과는 나와 전혀 달랐다. 신부님 말씀대로 ‘정확히, 깊이’ 잘 받아 들였다고 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그때부터 사실 정도와 방향이 갈라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이 교리공부는 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30여 년 전, 그 때 ‘들었던’ 왕영수 신부님의 교리 가르침을 가지고 30여 년을 버틴 셈이다. 머리로 공부한 것, 거의 다 잊어버려도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거의 냉담 상태로 오랜 세월 ‘허송’하다고 최근에 조금씩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분으로 교리란 것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모든 신앙적 여건과 조건이 ‘급속히’ 호전되면서 이제는 교리과정이 ‘소로소로’ 나의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들이 참 많았다. 그것도 ‘완전히’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3년 전 레지오 마리애 에 입단을 하면서, 다시 교리교육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레지오 단원의 활동사항 중에 ‘교리반 지도’란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두 선교는 나에게 맞지 않을 것이고 요사이는 그것이 그렇게 효과적이 아닐 수 있기에 더욱 교리반 활동은 나에게 appeal을 하였다. 연숙에게 물어보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라는 대답이었다. 교리교사는 아무나 하나.. 하는 식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오랜 신앙생활을 한 연숙도 그것은 할 수가 없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대신 나는 정식 교리과정은 아니지만 ‘좌우지간 천주교에 대해서 알아보자’ 하는 식으로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과정이 절대로 어렵지 않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가슴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길지 않은 ‘귀향’ 과정 끝에 결국 때가 슬그머니 찾아왔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께서 나의 사정을 보셨는지, 신부님 1 께서 조용히 부르셔서 우리부부에게 새로 시작하는 교리과정의 봉사자로 수녀님께 추천을 했다고 하셨다. 올해 들어서 새로 오신 수녀님께 완전히 교리반을 일임하신 듯 하고, 예전의 ‘체제’를 완전히 바꾸신다고 했다.

예전의 교리반 director라는 자매님만 남고 종전의 교리교사 제도를 완전히 없앤 것이다. 대신에 수녀님을 돕는 형식으로 ‘봉사자 제도’를 만든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바꾸어야만 했는지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른다. 좌우지간 내가 레지오를 시작하면서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셈이고, 나는 정말로 성모님의 ‘전구’를 더욱 믿고,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부부는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오랫동안 가르쳐본 경험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 자체는 좋아하고 일반적인 technique도 생소하지 않지만 이곳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루어진 ‘성인 교육’이라서 지난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무리일 듯 싶다.

올해 등록된 예비자 숫자는 기대보다 훨씬 떨어져서 시작 단계에서 10명 내외였는데, 사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다행이었다. 조그맣게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봉사자’의 역할은 수녀님의 ‘강의’ 뒤에 있는 나눔의 시간을 이끌어가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도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idea가 없지만 그저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고 있다. 만약 우리들의 경험담이 필요하거나 교리에 관한 질문이 있으면 그것에 성의 있게 도움을 주려는 각오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첫날 모인 예비자들은 대부분 30대에서 60대까지 남자들이었고, 부부를 포함한 가족도 있어서 이채로웠다. 대부분이 가족이 신자였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왔다고 해서, 그들의 가족에 대한 정성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나의 신앙여정을 생각하고, 레지오 단원임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들과 같이 기필코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고 싶다.

  1. 하태수 미카엘 본당 주임 신부님

아틀란타 부부 장례미사

2010년 가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에 입단하면서부터 죽음에 관련된 의식, 특히 연도, 장례미사를 꽤 많이 다녔다. 나에게 알려진 장례의식은 수동적이건 활동적이건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 다음부터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고, 열심히 함께하였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던 곳은 없었다.

정확히 일주일 전 토요일 밤에 가까운 친지 윤형의 처남부부가 함께 집에서 어떤 ‘똥포’ monster들에게 살해되는 끔찍한 일이 있었다. 이 monster 2명은 피해자의 사업체에서 해고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앙심을 품은 의도적인 살인인 듯 싶었다. 일본의 야쿠자를 연상시키는 ‘칼에 의한 살해’, 미국에서는 조금 드문 case여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어제 우리는 둘루스(Duluth)에 있는 성 김대건 성당으로 부부 장례미사에 다녀왔다. 너무나 급작스런 한 부부의 사망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이고 할 말을 잊는다.

 고인은 나보다 나이가 2살 밑이었고 서울고, 고려대 출신이어서 아마도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는 서울에서 학교생활을 했을 듯 했다. 한국에서 날라온 친구의 정겨운 추억담이 담긴 조사는 우리시대의 정서를 잘도 반영해서 나의 친구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고인 부부의 외아들 조사, 비록 영어로 표현된 부모를 그리는 마음이었지만, 어찌 그 심정을 모르겠는가. 우리 또래의 부모들의 가치관을 그 아들은 잘 표현해 주었다. 그의 결론은, 비록 부모의 생각을 이해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교육열’과 ‘무조건적 사랑’은 고맙게 받았다고 해서, 우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 장례미사에서 두 부부의 ‘덜 준비된‘ 영정사진을 보며, 내가 그들의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떨까, 과연 몇 사람이 나를 기억해 줄까, 고국의 친구들 몇 명이 관심을 가져줄까, 나의 딸들은 나를 어떤 아빠로 기억을 할까.. 하는 두서 없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왜냐하면 그런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천주교 예비자 교리교과서
여기에 물이 있다

‘여기에 물이 있다’.. 표지가 노~란 촉감이 아주 부드러운 책의 제목인데, 이 책은 천주교 영세를 원하는 ‘예비자’들을 위한 교리 반 학생용 ‘교과서’이고 내가 가진 것은 ‘교사용’이란 말이 더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용 책에다가 교사에게 도움이 되는 것(cheat sheet,해답) 덧붙인 책이다. 잠깐 훑어보면 교과서치고는 정말 부드럽고 읽기 쉽고, 읽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을 준다.

이것을 어제 연숙과 같이 성당에서 받아가지고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교리교사의 역할을 ‘조금’ 맡게 된 것이다. 정식으로 는 예비자 교리반의 ‘교리반 봉사자’ 가 되는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교리반은 교리교사 여럿이서 책임지고 가르쳤지만 올해부터는 ‘완전히’ 체제가 바뀌어서 새로 부임하신 수녀님이 교리반의 ‘유일한 책임 교사’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봉사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교리반 봉사자가 되었는지 아직도 우리는 모른다. 아니 확실치 않다. 어느 날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신부님(하태수 미카엘)께서 연숙에게 ‘제안’을 했다고만 들었고, 기왕이면 부부가 같이 ‘봉사’를 하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사실 ‘청천벽력’ 같이 느끼기도 했지만, 우리가 속한 레지오(마리애)의 으뜸 사명인 봉사(service), 순명(obedience)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곰곰이 해보니 거절할 명분도 느낌도 없음을 알고 비교적 쉽게 OK를 하였다. 드디어 예비자 교리반이 8월 초에 시작하게 되어서 어제 수녀님을 중심으로 봉사자 모임에 참석하여, 이 책을 받아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제 수녀님께 분명히 ‘우리는 왕초보’라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왕초보라는 말에는 별로 신경을 크게 쓰지는 않으심을 알았고 ‘교리 실력’ 이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도 받았다. 보살핌과 가르치는 방법, 그리고 ‘간단한 정통교리’가 더 중요한 것을 알았고, 자칫하면 쉽게 범할 수 있는 ‘은밀한 개인적 밀착’의 위험성을 수없이 강조함을 듣기도 했다. 모두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는 말씀들이었다.

비록 봉사, 순명의 정신으로 (봉사자 역할을) OK를 했고, 이 ‘교리반 봉사’의 과제와 책임이 우리 둘의 신앙생활, 여정에 어떤 의미와 결과를 남길지는 미지수 이지만, 신부님께서 친히 부탁(지시)을 하신 것을 보면 조금은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17세의 생애, viewing과 연도

김민호 프란치스코, 17세의 소년.. 어떻게 그런 100% 희망의 나이에 우리들의 곁을 떠날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우리의 머리 속을 완전히 지배하던 어제였다. 3일 전, 요사이 뜸하던 ‘위중한 환자기도’의 소식에 우리들은 ‘서서히’ 환자기도를 시작했지만 너무나 빠른 ‘병의 진행’으로 그제에는 신부님의 병자성사가 필요할 정도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고 어제 아침에 그 17세의 소년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병명은 역시 ‘암’의 일종인 ‘투명세포육종’이라는 희귀한 것이었다.

레지오 입단 3년이 다가오는 나는 그 동안 많은 죽음을 보았고 연도, 장례미사를 하였지만, 이렇게 ‘누구나’ 100% ‘언젠가’ 거쳐야 하는 ‘과정’은 정말 100% 모두 다른 사연과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평균’ 수명을 다 채우시고 떠나는 분들은 비록 다행인 case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그 수명 동안 겪은 수많은 사람들, 경험들과 이별을 하는 고통이 따르고, 반대로 이번의 17세 소년의 case는 평균적인 인연과 경험을 못 보고 떠나 보내야 하는 슬픔의 고통이 따른다. 역시 이것도 공평하다고 할까.

이럴 때는 어떤 말로 유족들을 위로해야 할까.. 그저 간단하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는 너무나 형식적인 것일까?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겁니다.’ 는 사실 맞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조금 오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래도 나는 그 애가 내 옆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는 반응이 나온다면 분명히 그 말은 그 부모를 더 슬프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hug이나 눈의 맞춤으로 슬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좋지 않을까. 또한 이럴 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 장례의식 중, ‘연도’임을 어제 또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들 전에 이미 떠난 그 수많은 성인의 이름을 열창하며 17세 소년을 받아 주시라는 기도는 듣거나 참가해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그 의미나 느낌을 모를 것이다.

 

장례미사를 다녀와서..

모처럼 하늘의 습기가 가신 후, 청명한 날씨가 된 오늘 정오에 고인 김군의 부모가 속한 본당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 성당’ 에서 장례미사가 입추의 여지없이 대성당을 꽉 채운 가운데 치러졌다. 부모님이 성당 공동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어떤 조문객이 올지 나에게는 미지수였지만, 어제 viewing에 온 상당한 숫자의 ‘미국 친구’들을 보고 아마도 반 수 이상이 ‘영어권’ 일 것이라 짐작을 하긴 했다. 나의 짐작은 맞았지만 결과적으로 ‘영어권’ 조객이 압도적으로 많이 참석을 했다.

성당 parking lot에 아틀란타의 ABC-TV affiliate(계열방송사)인 Channel-2의 crew van이 있었고 camera까지 준비하는 것을 보고, 대강 이 김민호군의 됨됨이를 짐작하게 되었다. 이태리 계통인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아직도 영어권 문화가 서먹하신지 전례해설자에게 모든 ‘영어 소통’을 의뢰하신 모양으로 대부분의 ‘영어권 친구 친지’들은 소수의 ‘한국어’ 권 신자들을 따라서 그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로마 가톨릭 식의 미사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조금 다른 식의 미사도 사실 큰 무리가 없음을 이번에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가톨릭 전례는 한마디로 universal한 것으로 같이 동참하여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미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고인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과연 김민호 프란치스코 군이 어떤 인물인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성전을 꽉 메운 그들을 보면 그것을 짐작하기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의 성품, 추억, 행적을 간접적으로 그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eulogy)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알게 해 주었다. 김민호, Nicklaus, Francis군, 그는 한마디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17세였다. 한국적인 예절이 몸에 배인 것도 그렇고, 모든 일을 착실히 최선을 다하던 그였고, 그렇다고 해서 ‘지루한 공부벌레’도 아닌 유머감각이 있던 정말 크게 인생을 살 수 있을, 무언가 큰 업적이라도 낼 듯한 잠재력을 지녔던 고교생 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그 조사를 통해서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안타까운 심정은, 주위의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그가 지금 ‘육체적, 물리적’으로 우리들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운명 직전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I love you all..이란 말을 남겼다는 것으로 그는 사랑이 충만한 한 고귀한 젊은 영혼이었음도 알게 해 주었다.

김군을 일찍 하늘나라로 데려가게 한 직접적인 원인, ‘투명세포육종(Clear Cell Sarcoma)’ 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암, 이 비교적 희귀한 병은 그렇게 치유 율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왜 이병에 걸렸으며 왜 그렇게 1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 영역에 속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만 절감하게 된다.

생각한다. 아니 이제는 믿는다. 김민호 군의 ‘불멸의 영혼’은 지금 괴로웠던 육신을 떠나 (미사 후 곧바로 화장이 되었다) ‘훨훨’ 하느님의 영역에 돌아갔거나 돌아가고 있고 아마도 장례미사를 하는 우리들을 미소 머금은 모습과 마음으로 보고 있으며, 괴로워 할 가족들을 보며 위로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제는 믿는다.

Holy Family 40th Anniversary

 

 

Dear Father in Heaven,

As we celebrate the fortie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our parish, we thank you for the gifts that you have given us. Most importantly, thank you for the gift of love that brings so many people from such different backgrounds together as one family.

Please help us to learn by your Son’s example to continue to love and care for one another so that we may grow and welcome others into our Holy Family.

We ask this in Your sweet name,

Amen

 

Holy Family statue
Holy Family statue

오늘 2013년 7월 10일은 우리가족의 제1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가 본당 창립 4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여 저녁에는 ‘성대한’ 기념 미사와 행사가 열린다. 우리 가족이 이 성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제 거의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 집에서 불과 5마일인 관계로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parish가 된다.

원래 거의 30마일 떨어진 도라빌(Doraville) 한국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이 우리의 본당이었지만 1990년대 초에 그곳에서 벌어지고 목격이 된 ‘기가 막히는’ 사건들에 식상을 하고 완전히 주저앉아 (냉담) 버렸다. 그 당시 대신 가까운 미국 본당에라도 나가야 했었지만 최소한 나에겐 그렇게 해야 할 절심함과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애써’ 얻은 신앙을 거의 무시하며 살 태세였고, 속수무책, 수수방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일관하며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지금 생각을 하면, 나와 연숙은 그런 것에서 의견을 달리했고 최소한 영세를 받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돕지도 않았지만, 반대도 안 했다. 완전히 나는 ‘교회 business’에서 손을 땐 듯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연숙이 미국 본당 Holy Family 성당을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위기감을 느낀 연숙이 집 부근을 뒤지며 찾아 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같이 googling의 혜택도 그 때는 기대 못하던 때였으니까…

행동이 빠른 연숙은 곧바로 아이들의 신앙 절차를 ‘최소한’ 빠지지 않게 주말 미사엘 (나를 제외하고) 나가기 시작하고 작은 애 나라니의 첫영성체, 두 아이의 견진성사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 때 나는 ‘돈 버는 가장’의 핑계로 간신히 C&E (Christmas & Easter) 신자로 위태로운 신앙생활로 일관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Holy Family 성당은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나의 ‘완전한 본당’이 되었다. 10년 이상의 냉담을 깨고 그곳에서 Pastor, Father Edward Thein께 고백성사를 보고 최소한 Sunday Catholic 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사실 가족들과 미사를 가더라도 나만 영성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그 때가 참 괴로웠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곳은 명실공히 우리 가족의 ‘안정하고 안전한’ 신앙의 피난처가 되어갔다. 덕분에 영어미사와 미국인 미사 문화도 많이 익숙하게 되고 미국 천주교와 그 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서 나는 더욱 자신을 가지고 ‘진짜 본당’인 한국 순교자 성당으로 조금씩 더 관심을 두고 그곳으로 향한 먼 여정의 길을 2011년 가을 그곳 소속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함으로써 디디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미국본당에서 여러 해 받은 경험들이 씨앗이 되었다.

미국 천주교가 지금 경험하고 겪고 있는 시련들, 이곳에서 고스란히 보고 느낀다. 유럽계 가톨릭 세력의 수축과 히스패닉 계열의 급 성장, 아시아 계의 ‘가톨릭 역수출’ 등등으로 사실 미국 천주교의 입장은 무슨 큰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빨리 오는 듯 하다. 특히 연방정부의 급속한 교회간섭 정책, 대법원의 동성결혼 ‘묵인’ 등은 1970년대 초의 낙태 합법판결의 파장을 훨씬 웃도는 그런 위기감을 주고 있어서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앞으로의 사목정책의 중요성은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나와 연숙은 작년 사순절을 계기로 이곳 미국본당의 ‘매일 미사’를 참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일년이 훨씬 넘게 실행하고 있다. 암만 생각해도 이 ‘쾌거’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 졌는가.. 암만 생각해도 나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저, 안 보이는 ‘힘과 손’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설명만 되 뇌일 수 있을 뿐이다.

Holy Family 성당과 사제관
Holy Family 성당(left)과 사제관

이곳 미국 본당도 미국 천주교를 반영하듯 Irish, Polish로 대표되는 ‘급속히 쇠퇴하는’ 유럽계 가톨릭은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새로운 ‘피’는 역시 ‘다른 곳: 히스패닉, 브라질’로 대표되는 중남미계열과 열기가 느껴지는 아프리카 대륙, 뜻밖의 복병 아시아의 월남(베트남), 필리핀, 한국의 신자들이 그 고령화를 상쇄하듯 메우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white-power가 이곳에서도 역시 퇴조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미사를 가는 덕분에 이곳의 regulars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정신자들, 열심한 신자들인 것이다. 역시 여자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이것은 절대로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신자의 숫자 (남자에 비해서)에 나는 처음엔 ‘그게 정상이다’라고 일축했지만 지금은 사실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보기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자랑스럽던 남성 동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생명의 불멸성을 이미 알고 태어났단 말인가?

 우리가족은 비록 이렇게 두 본당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형태의 신앙생활 그 나름대로 장점과 특징도 없지 않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많은 가톨릭 한인신자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많을 듯 하다. 20여 년 전에 유일한 한인공동체였던 순교자 성당이 ‘90% 이상 망가졌을 때’, 우리는 choice가 별로 없었다. 계속 나갈 것인가.. 아니면 냉담을 할 것인가..

나와 같이 간이 큰지 못한 인간들은 가장 쉬운 방법, 냉담을 택했을 것이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택했다. ‘분열’의 참담한 파괴 성을 그때 절감을 했지만, 나의 평화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그때 backup shelter(다른 본당)가 있었으면 100% 냉담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다 역사가 되었다.

 Holy Family 성당은 현재 우리가 사는 East Cobb county에 많은 ‘비교적 안정된’ 한인들의 비공식 피난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30분 drive거리에 있는 한인 순교자 성당이 조금 멀다 싶으면 10분 거리의 이곳이 항상 우리를 맞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사람들도 익숙해지고, 정도 많이 들었다. 고정적(regular)인 한인 교우들, 물론 여기도 대부분 젊은 자매님들이지만 그들과도 많이 얼굴도 익숙해져서 진정한 ‘영혼의 고향’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혹시라도 안 보이는 얼굴이 있으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와 연숙에게 이 Holy Family CC는 신앙의 징검다리 역할을 많이 해주었고, 계속 해 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우리가 도라빌 한인 순교자 성당에 더 많이 개입이 되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것은 정말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기에 더욱 ‘맡기고’ 살기로 했다.

4월, 그리고 노래들..

Nasty, bone-chilling, dreary, surreal..우아~ 올 봄은 참 유난스럽다. global warming이 무색하게 global chilling이 더 자연스럽게 들릴 정도가 아닐까.. 작년 3월 말을 자꾸 기억함은 그 당시의 ‘찬란했던 꽃나무들의 향연’ 과 지금이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에 ‘이제는 설마..’ 하며 space heater를 부지런히 closet 속으로 퇴각을 시켰고, 침대의 무겁던 이불도 가벼운 것으로 바꾸어 놓고, 조금씩 겨울 옷들도 눈 여겨 보고 있다가 결국은 오늘 bone-chiller를 다시 만난 것이다.

싸늘한 비바람에 채 피지도 못한 배나무 꽃망울들이 처참하게 떨어진다. 게다가 올 2~3월의 평균을 밑도는 기온은 아마도 ‘무지하게 더운’ 봄과 여름을 예상케 한다. Mother Nature의 연 평균기온은 거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조금 우울한 뉴스가 아닐까?

 

채 못핀 꽃나무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2013년 봄

4월은 조금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tax return chore, home-association due, ‘big’ insurance dues.. 모두 $$을 ‘빼앗아’ 가는 것들 뿐이라 정말 즐겁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내야 할 것은 내야 하는 것이. 4월 7일 일요일은 작년부터 생각하며 지나게 된 ‘자비의 주일’이다. Divine Mercy Sunday.. 폴란드 출신 성녀 Faustina가 예수님께 ‘직접’ 지시를 받았다던 그 자비의 기도를 줄줄이 생각하게 하는 그 날이다. 이 날을 향한 9일 자비기도를 우리는 묵주기도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하게 되었는데, 거의 일년 만에 하는 것이라 처음에 생소했지만 곧 익숙하게 되었다.

그 다음 주일 4월 14일에는 월례 꾸리아 월례회의가 있어서 몇 달 전부터 시도한 ‘한 달에 한 번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미사참례’ 를 할 예정이다. 아주 조심스레 ‘고향’을 찾는 기분으로 시작을 했지만 아직도 ‘100% 한국식 미사의식’이 ‘신기하고 생소’하게 느껴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처음보다는 조금 익숙해졌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날은 multitasking의 기분으로 ‘오래된 형제’ 설재규씨를 만나기로 해서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주일 4월 21일, 우리가 속한 레지오 전체가 가까운 곳에 위치한 park로 ‘야외행사’를 가는 날이다. 말이 야외행사지만 사실은 picnic에 가까운 것이 비록 ‘레지오 의식’으로 시작은 하지만 결국은 친교를 위한 ‘여흥’인 것이다. 작년에 나는 처음으로 참가를 했는데, 청년 단원들이 아주 조직적이고 재미있는 program을 준비해 와서 아주 즐거웠던 기억이다. 날씨도 참 화려했었는데, 올해는 어떨까.. Shelter가 있으니까 최악의 사태에 대한 걱정이 없어서 다행이다.

4월부터 6월 초까지는 사실 부활의 연장에 있는 사실 ‘즐거운’ season이고 특히 5월 한달.. ‘성모성월‘이 도사리고 있어서 이제는 예전처럼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보다 더 나를 포근하게 만든다. 참.. 나도 많이 변했다. 그래서 또 되 뇌 인다.. Never Say Never라고..

4월이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매년 듣는 것으로 상고사적 때, 중앙고 음악선생님 김대붕 담임 선생님의 애창곡 ‘이대교수 김순애‘ 작곡, 박목월 시인 작사 ‘4월의 노래‘..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 기억에 남아있던 Pat BooneApril Love.. 우리 가곡 4월의 노래는 정말로 우리가 느끼는 그 옛날 고국산천의 4월을 연상케 하고, Pat Boone 것은 이곳에 오래 살면서 배어온 이곳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나는 과연 어느 곳에 있는가..

 

 

April LovePat Boone, 1957

 

‘목련꽃 그늘 아래서..’, 4월의 노래

Easter 2013, Proof of Heaven

¶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 첫 부활로부터 2000년 이상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의 최고의 축일이다.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 계속된 사순절도 오늘로서 끝이 난다. 지난 목요일부터 시작된 ‘피곤하기도 한’ 각종 의미를 갖는 ‘무거운’ 날들, 특히 토요일 밤의 Easter Vigil 은 영세,견진의식까지 있어서 부활 일요일 아침에는 피곤하기까지 하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식구들이 나를 ‘끌고’ 부활절 미사에 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되어서 우리부부가 두 ‘아이’들을 ‘끌고’ 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내가 C&E Christian (크리스마스와 부활 때만 성당엘 가는 신자) 였는데 지금은 우리 두 아이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제 시간에 같이 집에 온 ‘아이’들.. 기꺼이 미사에 참석을 하였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 정도인 것이 조금은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모든 식당들이 문을 닫기에, 언젠가부터 이날도 다른 holiday같이 ‘잘 먹기로’ 하고 fillet minion steak 와 wine으로 이른 점심을 하고 아이들은 집을 떠났다. 엄마의 제의로 매달 넷째 일요일에 집에서 ‘이렇게’ 먹자고 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기꺼이 동의를 해서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아이’들이 아닌가.. 그렇게 커버렸나.. 생각하며 세월의 횡포를 생각하기도 했다.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뇌전문 외과의가 본 천국

¶  얼마 전 ‘갑자기’ Costco에서 갔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책 proof of heaven, 진부하기도 한 제목이었지만 조금 독특하게 기분이 좋은 표지에 끌려서 읽고, 결국은 사게 되었다. 읽기에 부담이 없는 200 page가 안 되는 것도 그렇고, 저자의 경력이 더욱 독특했다. Neurosurgeon, 그러니까 신경외과의 정도가 될까.. 한마디로 뇌수술 전문의인 것이다. 그가 정말로 희귀한 ‘감염’으로 일주일간 사경, coma 끝이 역시 ‘기적적’으로 ‘완전 회생’, 그때 그가 ‘보았던 것’을 적은 것이다.

작년에 나온 책으로 New York Times Best Seller #1, 그러고 보니까 언젠가 뉴스에서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런 ‘현상’을 NDE, Near Death Experience라고 부르는데,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 없이 이런 사례가 보고가 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과학적’으로 연구까지 한다고 한다. 이 책이 특출한 것은 그것을 겪은 사람 자체가 뇌외과 전문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분야의 과학자중의 과학자인 것이다. 그가 비과학적인 것을 겪었으니, 그의 고뇌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과학과, 비과학적 경험을 그는 어떻게 ‘절충, 타협’을 했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예수성체를 지키며 하던 성당 새벽 성체조배를 앞뒤로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이때의 나의 느낌과 경험은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전율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절대적 하느님의 존재는 이제는 거역할 수 없는 ‘진리’임을 겸허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번 부활에 나에게 주어준 은총임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이것이 65년 만에 알게 된 진리였던가?

꽃샘 추위, 아치에스, 판공성사

¶  꽃샘 추위   3월 25일, 어제는 Palm Sunday였고 드디어 2013년 성주간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에 ‘그 것’이 모조리 있는 것이다. Easter or Paschal Triduum이라고 불리는 성삼일(Holy Thursday, Good Friday, Easter Vigil)에 이어 부활절 일요일.. 조금 생각만해도 숨이 찬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모두 일년 내내 기다리던 그 때가 아닐까?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없다면 사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성주간에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아니, 사실 지나간 2월 달이 1월 보다 더 추웠고, 지금의 3월 달이 2월 달보다 더 춥다. 오늘은 낮 기온이 화씨 40도(섭씨 5도?)도 안 되는 듯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일까? 옛날 옛적 서울에서 살 때 이것을 ‘꽃샘’ 추위라고 했지만 지금 것은 조금 다르다고 할까.

제일 큰 ‘희생물’은 봄을 기다리던 꽃나무들이다. 찬란하게 초봄을 알리던 수많은 꽃, 나무, 잔디들.. 모조리 거의 ‘잠잠’하다. 아니 불쌍할 정도다. 작년을 생각해보니 너무나 대조적, 정말 찬란한 작년 3월 말을 기억하니까.. 방방에 놓여있는 space heater를 ‘거의’ 치우려고 했는데, 그랬다면 정말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동복’들도 고스란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아마도 아마도 부활절, 4월 초가 되면 정말 봄이 오지 않을까?

 

acies-2013¶  아치에스(Acies)   지난 일요일 3월 17일에는 일년에 한번씩 있는 레지오의 주요 행사중의 하나인 ‘아치에스’ 행사가 열렸다. 아치에스, Acies라는 말은 라틴어로 로마시대 군대의 전투대형을 뜻한다. 레지오 마리애 조직의 원형이 로마 군대의 것을 따랐기에 이것도 그것의 일부인 것이다. 비록 군대식으로 조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조직의 운영에 대한 것이다. 조직의 힘을 모으려면 역시 군대식이 최고일 것이다.

그래서 일년에 한번 거의 군대식으로 모두 모여서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인데, 올해로 나는 세 번째 이것을 맞이한다. 지난 2년 동안 참가하고 보면서 느낌이 참 신선하고, 무엇엔가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총 사령관이신 성모님께 충성을 서약하는 것인데, 평소에 잘 못 보던 동료 단원들을 이곳에서 모두 보게 되는 것도 그렇고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아주 감동적이기도 했다.

 

¶  부활절 판공성사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이름도 다양하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7성사 중의 하나인 ‘성사’다.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톨릭만이 ‘자랑’하는 아주 독특한 것이고, 제일 인기가 없는 성사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자기의 ‘치부, 부끄러운 곳’을 ‘남에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 영화에서 보는 듯이 그렇게 dramatic한 것도 없고,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야기되는 ‘꽤 죄죄’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고백을 할 것인가?

이 성사를 교회에서는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을 하라고(보라고) 하지만 과연 그렇게 따르는 모범신자들이 많이 있을까? 하기야, 주일미사를 빠질 때마다 이 성사를 보는 교우를 보기는 보았지만, 그것은 예외에 속할 듯 하다. 내가 본 많은 사람 중에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년에 중요한 때 (부활, 성탄 같은) ‘겨우’ 보는 사람들.. 그렇게 이것은 사실 부담스러운 것일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는 듯하다. 괴롭게 느껴지는 ‘죄’는 고백을 하면 시원하게 느껴질 것이고, 분명히 사제는 주님을 대신해서 ‘용서’를 하신다. 그러니까 고백성사를 하는 것은 정말 괴롭고 어려운 것이지만 이것을 마쳤을 때의 ‘환희’는 어디에도 비교하지 못한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기억을 하며 다시 성사를 준비하고 한다. 이것이 이 성사의 매력이라고 할까? 나는 최근에 신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며 일년이 최소한 2~3번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고, 사실 나는 이것도 자랑스럽다. 특히 어둡기만 한 고백소에서 하는 것을 피하고 ‘대담하게’ 신부님의 사무실에서 면담하는 식으로 한 것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올해 부활절 판공성사는 지난 목요일에 ‘가족행사’로 보았다. 연숙의 대녀님인 권 모니카 자매를 대동하고, 게다가 올해는 오랜 지인 설재규씨가 합류를 해서 4명이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지난 일년간 성사를 못 보았다던 설재규씨가 참가한 것은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으로 느껴졌고,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같이 하게 될 수 있을 것을 꿈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