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지만, 몇 개월 동안 쳐졌던 나와 연숙의 어깨가 조금은 올라간 날이 되었다. 안도의 큰 숨을 쉴 수도 있었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보람과 은총을 느끼는 하루도 되었다. 몇 개월 동안 우리와 인연을 맺으며 삶을 위한 고통스런 투쟁을 하였던 P 베로니카 자매님, 오늘 조촐한 가족들과 적지 않은 레지오 단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완전히 떠났다. 이번 일을 통해서 ‘달릴 곳은 끝까지 달려야 한다.’라는 레지오 교본의 구절을 굳게 상기하고, 성모님을 의지한 레지오의 막강한 힘을 절실히 느끼는 기회도 되었다.
연도와 장례 미사.. 공식적이고 전통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정성된 신부님의 자상한 미사집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P 베로니카 자매님은 물론이고 두 아들, 동생 자매님, 가까운 친척들도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생각을 한다. 장지 동행에 각별한 신경을 쓰셨던 Lee’s Funeral Home 이 사장님.. 이번에 처음 가까이 대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참으로 자상한 분이셨다. 성당 연령회 분들도 정성을 다 해서 준비해 주셨고, 특히 눈이 시려오는 것은 생소하기만 한 ‘신 영세자’ 베로니카 자매님을 위해서 각별한 사랑으로 참석해 준 자랑스런 우리 본당 레지오 단원님들.. 어느 것 하나 ‘사랑’을 느끼게 하는 하루였다
자매님, 비록 고달픈 인생여정을 보냈어도, 가는 길은 너무나 희망적이고 자상한 여정이 될 것이라 우리들 모두 생각한다. 내가 제일 감동을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100% 확신 여부를 떠나서 ‘나는 하느님을 알고 간다’ 라는 천상의 선물을,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주고 갔다는 사실이다. 특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헌신적으로 어머니를 간호했던 큰 아들에게 주고 간 선물도 그것이 아닐까.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와도 같이 느껴지는 ‘묘한 인연’을 음미하며 우선 안도의 큰 숨을 내려 쉴 수 있게 되었고, 남은 유족, 특히 큰 아드님이 하루 빨리 안정이 되고 어머니의 간 길을 거울 삼아 ‘평화’를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하기를 기도하기로 했다.
André Rieu – Nearer, My God, to Thee (live in Amsterdam)
지나가는 2주 동안 2명의 ‘자매님’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 한 자매님은 지난 주 일요일에 2시간 drive해서 간, 어떤 funeral home의 chapel에서 ‘개신교’의식으로 치러진 예배에 그 자매님의 ‘고이 잠든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25년 전 이곳으로 이사했을 당시부터 연숙이 알고 지내던 K 자매님.. 나와는 직접 상관이 없다곤 해도 간접적으로 그녀의 삶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연숙보다 몇 살 밑인 나이에 어떻게 벌써 귀천 歸天을 했을까? 우리가 알기에 지난 몇 년 동안 앓아온 당뇨병과 신장 kidney의 기능악화로 투석 dialysis 을 받았지만 근래에는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투석을 받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이고 결국은 신장 이식을 해야만 살 수 있는데 그녀는 그 투석조차 못 받았던 모양이었다. 나의 어머님도 이런 처지였지만 신장이식을 하기에 너무나 고령이어서 결국은 운명을 하셔서 이런 처지를 뼈저리게 나는 실감한다. 하지만 이 K 자매님은 충분히 나아질 여지가 있었을 텐데.. 장례예배에서 목사님의 말씀이 그녀는 아마도 투석을 제대로 못 받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번지르르한’ 목사의 조사에서 밝히지 못하는 사정을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관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형제, 자매가 그렇게 많은 그녀가 ‘시골’에 묻혀서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 남편과 살려고 노력을 했던 것을 알기에.. 아마도 주위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우려는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이럴 때 다시 생각한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문제가 없는 가족, 가정은 없겠지만 그래도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가족들이 아닐까?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다고 ‘사탕발림’같은 조사 弔詞 eulogy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우습게 들렸고 2시간 집으로 오는 drive길이 너무나 우리에게는 무거운 시간이 되었다. K 자매님, 아마도 이제는 그런 모든 고통을 훨훨 벗고 저 세상에서 힘차게 비상하는 새, 유유히 춤추는 나비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또 다른 자매님, 돼지띠 동갑 P 자매님.. 지난해 11월에 우리와 ‘묘한’ 인연이 되어 알게 된 분. 어제아침, ‘격심한’ 고통에서 벗어나 근래에 새로 ‘사귄’ 성모님의 품에 안겼다. 병 간호에 지친 두 아들, 특히 큰 아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우리 부부는 이 자매님을 천주교로 인도하면서, ‘기적’까지는 안 바랐어도 그래도 평화를 충분히 맛 보시는 충분한 시간을 바랬는데.. 그것이 아무래도 부족한 시간이 되었다. 지난 5개월 우리는 이 분이 하느님을 알게 하려고 레지오의 조직을 통해서 지속적인 노력을 해 왔다. 비록 육체적인 죽음은 맞았어도 영혼은 건강하게 살아 가시리라 우리는 굳게 믿는다. 이 자매님도 알고 보면 참으로 ‘사연’이 많은 인생이 아니었을까.. 오래 전, 소설가 박경리 여사의 대하소설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의 복잡하고 운명적인 인생, 결국 운명은 바꿀 수가 없었던가? 나도 운명이란 것을 어느 정도 믿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결말이 더 나아지는 노력은 어땠을까? 더욱 더 슬픈 것은 작년 이맘때 남편이 거의 ‘같은 병’으로 운명하신 사실..남아 있는 두 아들에게 이런 가혹한 고통이 어디 또 있을까? 그래도, 세상 모든 것을 등지고 마음의 문을 걸어 닫았던 P 자매님, 3월에 하느님께 모든 것을 열고 병원에서 세례를 받았고,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형언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새로 알게 된 천주교 기도문을 열심히 읽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천천히 귀천을 하였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 이라는 위령기도문을 믿으며 우리는 이 자매님 먼저 가신 부모님들과 재회를 했으리라 굳게 믿는다.
또 ‘그것’을 할 때가 다가왔다. 그것..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어떻게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다. 결코 쉽지 않은 ‘의무’, 가톨릭 신자의 의무다. 이것도 의무지만 자유로운 의무고 다른 쪽으로는 우리 교회만의 권리, 특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성사의 의미와 특징 (좋은 쪽으로)은 열거하면 한이 없이 많다. Matthew Kelly의 Rediscovering Catholicism 책을 요새 다시 읽으며(aka typing) timing 좋게 confession 에 대해서 복습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쓰레기로 쌓이는 집이나 차에 비유해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것과 비교한다. 많이 쌓이면 그런 사실자체에 둔감해져서 더 많이 쓰레기가 쌓인다고. 자주 하면 할 수록 좋은 것이라고.. 누가 모르나? ‘괴롭게 들어갔다가 날라가는 기분으로 나오는 곳’ , 그곳이 바로 고백성사란 것만 기억해도 좋은 것, 이것 하나,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올해는, 아니 내일로 다가온 이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고백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10중 8/9는 하태수 신부님께 하게 될 듯 한데.. 그것이 상관이 있을까?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이것, 나에게도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귀찮은 것인가?
이제는 ‘양심성찰’을 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지난 해 6월이었던가, Conyers의 수도원에서 가진 레지오 피정 때 내가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알쏭달쏭하다. 한 듯하기도 하고, 안 한 듯 하기도 하고.. 하지만 작년 사순절 때는 100% 확실히 했다. 비록 ‘사소한’ 것을 고백한 기억이지만.
그 동안 나의 ‘죄’는 무엇이 있을까? 대죄는 물론 없다. 소죄는 있을 듯 하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십계명으로 출발하면, 어떤 주일을 거룩하게 안 보낸 것은 확실할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이것인가? 하지만 이런 것을 하면 내가 만족할 수가 없다. “고백성사 101″을 다시 한번 볼까나..
아마도 십계명에 ‘정면으로 거역’ 된 일을 없을 것이다. 나에게 우상이란 것은, 분명히 없다. 하느님의 이름을 마구 함부로 ‘팔아 넘기듯’ 부른 적도 없다. 주일이나 종교적 축일들을 소홀히 보냈는가.. 다행히 지난 해에 우리는 ‘부지런히’ 주일, 축일을 보냈을 것이다. 부모님을 공경하는가.. 이것은 비교적 쉬운 듯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는 죽어도 부모님을 잘 모셨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죄로 고백해야 할 것 중에 하나다. 살인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다. 훔친 적도 없고, 요상한 소문을 낸 적도 없고 거짓말 증언을 한 적도 없다. 남의 아내를 엿보거나 흠모하거나 사랑한 적도 없다. 남이 잘 사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을까? 이것은 100% 부인할 수가 있을까? 나는 ‘지나치게 사치하게 잘 사는’ 사람을 가끔 ‘경멸’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로 부러워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를 안 짓는다는 소극적인 것에서, 과연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고 살았던가? 이것은 자신이 없다. 죄를 피하며 살았을지언정 적극적으로 남을 인간으로 사랑하거나 물질적으로 도와 주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재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했을까? 이것도 자신이 없다. 비록 레지오라는 단체에서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언제까지나 만족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사랑의 2계명: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two commandments’(Mt 22:37-40).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is not jealous, [love] is not pompous, it is not inflated, it is not rude, it does not seek its own interests, it is not quick-tempered, it does not brood over injury, it does not rejoice over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It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Love never fails” (1 Cor 13:4-8).
지난 해 판공성사 (사순절부터) 이후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남이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던가? 고정적인 일상생활의 pattern으로 두드러진 것은 생각이 안 난다. 가깝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겸손하지 않다고 보이는’ 연숙의 행동들에 대한 나의 짜증 정도? 이것도 죄가 될까? 마찬 가지로 두 딸들에 대한 나의 실망감..
하지만 조금 밖으로 눈을 돌리면, 미안한 것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작년 여름 레지오 회합에서 큰 생각 없이 한 나의 ‘솔직한’ 말 때문에 장 실비아 자매가 퇴단까지 한 것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고, 나의 말을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인 상대방만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인은 무조건 나에게 있기에 나의 잘못이고 미안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뒤 늦게 들었다. 같은 여름 미국성당에서 ‘사소한 고정석’을 빼앗긴 것이 발단으로 ‘터진’ 나의 ‘분노’도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나의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상대방이었던 필리핀 자매에게는 너무나도 잘못을 하였다. 기분이 쳐지거나 나의 ‘운전 불능’신세를 한탄하며 연숙의 운전 실력을 100% 매도하는 나날들 또한 어떨까.. 나의 일방적인 잘 못이 아닐까? 이런 것들을 떠나서 나는 언급하기 싫은 ‘잘못’을 했고 현재도 하고 있다. 가슴 속 깊이 잠자고 있는 나의 ‘깊은 상처, 수치’를 건들이거나 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근래에 너무나 가까워진 수 많은 ‘자매님들’.. 인간의 한 부류로 신선하게 다가온 수 많은 자매님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신앙적 동지일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을 나는 가끔 어떤 생각까지 하며 ‘즐기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나는 여성에게 여자의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은근히 나는 이성들이 많은 곳에서 어떠한 환상적인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생물적’인 충동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은 나를 진정 놀라게 한다. 그것 때문이 예전의 ‘환상적 잘못’의 세계로 조금이라도 다가 갈까 봐 조바심도 나는 것이다. 성모님에 의지하는 내가 왜 다시 성모님께 의지하지 않는 것일까? 너무나 수치감을 느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상태를 초월하는 다음의 단계로 성숙해야 한다. 이것을 나는 어떻게 신부님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저녁에 예정된 성사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차분하고 경건해야 할 것만 같은 사순절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 왜 이렇게 ‘우리’는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까? 평화가 줄어들고 수심과 걱정이 휩싸이는 느낌.. 이번 사순시기는 무엇인가 이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지만 대부분 나의 탓이기에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 이라고 생각한다. 해야 할 ‘중요한’ 것은 계속 뒤로 미루며 사는 것, 왜 나는 진정한 proactive한 인간이 못 되는 것일까? Matthew Kelley의 The Four Signs of a Dynamic Catholic에게 오랜 만에 자극을 받는가 싶었지만 다시 주저앉는 나의 모습.. 절제된 자기훈련이 된 하루하루를 살고 싶었고 그렇게 할 희망은 충분히 아직도 있다. 비록 치통에 모든 잘못을 탓하고, 비실비실 잠열에 뒤척이는 모습이었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자! 작년에 비한 우리의 ‘위상’은 하늘과 땅이 아니던가? 최소한 무언가 변하게 될 ‘희망’이 있지 않은가?
진정으로 우리를 초조하게 하는 것은 배해숙 자매의 병세 때문일 것이다. 생각보다 더 약한 모습으로 변하는 자매님, 돼지띠 동갑 자매님.. 놓칠 수가 없다. 우리 부부는 그런 심정으로 지금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더 오래 살지는 하느님만 아시겠지만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이 자매님이 짧지 않은 ‘진정 행복한 나날’을 아드님들과 즐길 수 있는 ‘건강한 나날’을 주시라는 것이다. 수 십 년도 아니고 아니 몇 년이라도 좋다. 진정한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 되돌아 볼 수 있는 건강한 기간, 시간을 주시라는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무리일까? 아니지요.. 성모님.. 어머님.. 인자하신 성모님, 기도해 주세요.
오늘 예정대로 ‘병원’에서 배 자매님의 세례식이 ‘거행’될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실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더 건강한 새 생명이 함께 하시게 되시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하신부님의 배려로 성사되는 이번의 세례식.. 조금 있으면 떠나게 되는 하 신부님, 지금부터 서운하기만 하다. 어쩌면 나와 그렇게 모든 ‘코드’가 잘 맞았는지 아무도 모들 것이다. 이런 신부님 앞으로 나는 다시 못 만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지나지 않았던가..
이것을 보고 이런 말이 ‘즐거운’ 한숨처럼 흘러 나온다. 집 앞의 BP gas station의 현재 gas price을 보니 조금은 익숙지 않은 숫자.. $1.99란 숫자다. 자동차 기름값.. gas price, regular gas 값 (갤론)이 2불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서서히 내려간 것이 아니고 갑자기 떨어진 것을 보며 느낀다. ‘조금 살겠다..’ 하는 즐거운 모습들을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드디어 news에도 이것이 등장할 정도다. 언젠가 gas price가 $5을 넘으리라는 예측도 보았다. fixed income에 익숙한 우리로써는 이것은 정말 ‘신나는 달밤’일 수밖에 없다. 근래 몇 년에 걸쳐서 우리는 차를 탈 일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어서 ‘기름값’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이렇게 값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 그 자체가 즐겁기만 하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1970-80년대만 해도 수십 년 안에 석유가 고갈 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도 있었는데 어떻게 석유 공급이 늘어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중동이나 외국의 석유에 덜 의존하려는 미국의 발버둥이 효과를 보아가고 있는지 미국내의 석유 생산이 생각보다 많은지도 모른다. 아니면… Why.. why not, why now?New York Times의 분석기사를 보니 이제 조금 그림이 그려진다.
결론은… 역시.. It’s simple economics.. stupid! 이라고 할까? 간단한 경제원리가 이곳에서도 역시 작용을 하는가? 2009년 이후 최저로 떨어진 원유값, $50/barrel 밑으로 떨어져다. 무려 55% 가 급속도로 떨어진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는 역시 수요와 공급의 기본원칙일 것이다.
공급은.. 미국내의 자체원유 생산량이 지난 6년 동안 거의 2배로 늘어났다. 그 만큼의 국외 원유 (특히 사우디, 나이제리아, 알제리아 등)는 서로들의 경쟁으로 값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수요는.. 유럽과 developing countries들의 불경기로 에너지 수요가 줄었고, 자동차의 energy-efficiency가 크게 좋아진 것으로 예전 같은 gasoline-guzzler (덩치가 큰 고철 같은 차들)를 보기가 힘든 것 같은..
100% 다 믿기가 힘들지만, 사실은 지금 gas값이 내려가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간단한 수요 공급의 법칙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결과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물론 ‘주머니 사정’에 큰 여유가 생길 것이다. $4을 넘던 것이 $2 이하로, 반이 떨어지면 나머지 돈은 분명히 다른 곳에 쓰이거나 저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소비’가 될 것이다. 이런 것에 민감한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것을 절대적으로 환영할 듯.. 특히 지역적으로 예외적으로 추운 겨울을 예상하는 Northeast (특히 Boston같은) 지역은 난방비 걱정이 훨씬 덜 해질 것 아닐까?
국제정치 쪽을 보면: 원유값에 거의 모든 경제를 의존하는 산유국들은 정치적인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확실치 않지만 러시아 같은 나라가 제일 큰 피해자가 아닐까. 미국 내의 사정도 비슷해서, 알라스카, 텍사스,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 같은 주도 재정적인 고통을 받지 않을까?
한때 세계경제, 정치까지 영향을 주던 그 유명한 OPEC은 어떨까?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분명히 원유생산을 줄여서 값을 올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power가 없는 듯 하다.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도 conspiracy theory (음모 론)이 있을까? 예를 들면, 사우디 아라비아나 미국이 ‘공모’를 해서 그들의 ‘적국’ 러시아, 이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원유값을 내렸다는 음모론.. 사실 1980년대에 급락한 원유값은 ‘소련’을 붕괴시키는데 한 몫을 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것이다. 미국과 사우디가 그런 ‘공모’를 한 예가 없었으니까.
언제 다시 원유값이 예전의 수준으로 오를 것인가? 당장 오를 것 같지는 않지만 올해가 지나가면서 다시 조금씩 오를 것이라는 Wall Street의 전망이다. 예전의 역사를 보면 이것은 오르고 내림을 반복하는 그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을 보며 생각을 한다. 오래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1불도 채 되지 않는 휘발유 값을 기억하며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서 이 휘발유 값이 미치는 영향력을 다시 실감을 한다. $4까지 치오르는 것을 보며, 이제 ‘자가용’의 시대가 끝이 나는가도 생각을 했다. 다른 나라처럼 대중교통수단의 시대가 올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무섭게 갑자기 늘어나는 원유생산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not so fast..란 말이 어울리는 착각이 아니었을까?
전 요셉, 황 프란치스코 형제님들.. 모두 듣기만 해도 가슴이 편안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름들이 되었다. 특히, 전 요셉 형제님의 이름은 요새같이 추운 날씨에는 따뜻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전 요셉 형제님, 나와 같은 돼지띠 동갑으로 친구, 형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분명히 나보다 생일이 위였으니까, 형 뻘이 되겠지만 그런 것 서로 따지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가깝게 알고 지낸 것이 불과 1~2년도 채 되지를 않았다. 채 깊이 알게 되기도 전에 전 요셉 형제님은 ‘갑자기’ 조상의 땅,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을 해 버렸다.
그때 느낀 기습적인 쌀쌀한 가을바람과 같은 공허감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것이 벌써 1개월 도 지났나? 귀국 후 잠깐 온 소식에 시차 적응으로 매일 잠만 잔다고 하더니 드디어 카톡(카카오톡)으로 잇달아 소식이 날아왔다. 계속 시차 적응 중이고 눈이 내린 고국의 모습이 멋있다며 사진도 보내왔다. 온양으로 간다고 했으니 아마도 온양 교외의 어느 곳인가 짐작을 한다. 처음에는 사업을 시작하려고 ‘땅’을 보러 갔다가 찍은 곳이 아닌가 했던 나의 상상이 너무나 우습기만 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드디어 ‘사람의 사진’이 왔다. 전요셉 형제님의 모습이 ‘대한민국화’가 되었는지.. 완전히 ‘때 빼고 광 낸’ 모습이어서 놀라고 반갑기도 했다. 역시 평생을 살아온 고향 물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탁한 공기를 걱정하며 귀국을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 그런데 이 사진을 누구와 같이 찍었는데.. 처음에는, 귀국하면 꼭 보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분을 만나서 같이 찍은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곧 이어서 사연인즉.. 그 분은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우리부부는 반가웠다. 황 형제..
우리 부부가 봉사자로 수녀님을 보조했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교리 반에 2014년 부활절 영세를 목표로 가족 4명, 전원이 등록했던 황 형제였던 것이다. 그 사진은 황 형제가 대전 노은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전 형제와 같이 찍은 것이라고 했다. 영세명은 교황님과 같은 프란치스코.. 너무나 반가웠다. 황 형제님 부부 가족은 작년 가을 교리반에 등록 후에 사정이 생겨서 교리반 공부 도중에 올해 초에 ‘영구’ 귀국을 했는데.. 아마도 귀국 후에 교리공부를 계속해서 부부가 같이 영세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이 모두 영구 귀국을 했고 이렇게 다시 재회를 하며 찍은 사진.. 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4년여 전 레지오 활동단원을 갓 시작하며 나에게는 생소한 ‘병자기도’ 란 것이 있었고 그 대상 중에 레지오 단원이며 중병환자였던 전요셉 형제가 있었다. 멋도 모르고 나는 열심히 기도를 했다. 생전 처음 ‘남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속으로는 회의도 많이 있었지만 ‘성모님의 군단’의 규율을 따라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열심히.. 1~2년 후에 우리는 기적과도 같은 소식에 놀라기만 했다. 그 ‘중병’이 ‘완치’가 된 것이다. 본인도 놀라고 레지오 단원들도 놀라기만 했다. 겨우 신앙을 찾아가고 있었던 레지오 햇병아리였던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살아있는’ 신앙공부가 됐다. 그 이후 전 형제는 가끔 보는 정도였지만 만나면 최소한 얼굴을 익힌 정도가 되고 건강에 대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 말 우연히 인사를 하다가 나와 돼지띠 동갑임을 알게 되었고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near-perfect chemistry가 있음도 느끼게 되었다. 서로 가끔 식사를 같이 하며 서서히 조금씩 상대방을 알게 되어갔지만, 역시 나이 들어서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됨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이곳에 오래 산 이유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았지만 전요셉씨는 내가 오랜 전에 알았던 ‘그 옛날’ 기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는 너무나 그립고 신선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우리는 무언가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가깝게 하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너무나 서로 다른 개인 역사가 너무나 흥미롭지 않을까? 작년 말에는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준비하며 난타와 중창에서 가깝게 어울리기도 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고, 봉성체, 교구 성체대회 같은 곳에도 같이 참가를 하는 등 오랜 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느낌도 들었다. 전 형제님은 어르신들과 참 잘도 어울렸는데, 그때 받는 느낌은 한마디로 ‘사람이 좋다’라는 그런 것이었다. 순진하기도 하고, 우직하기도 한 세상을 약삭빠르게 사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성품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는지 결국은 귀향을 결심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한마디로 조금은 더 쓸쓸한 기분을 남기고 사라진 돼지띠 사나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우선 섭섭함을 달래는 수 밖에 없나.. 전 형, 그곳에서 하시는 일 순조로이 풀리기를 바랍니다!
¶ HolidayLIFE Kickers: 12월 들어서 처음, 우리들이 정기적으로 찾는 YMCA gym을 갔었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12월’의 냄새와 모습이 그대로 우리들에게 쏟아지는 듯 했다. TV같은 곳에서 그런 ‘너무 이른 요란함’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별 수 없이 미국 최대의 휴일의 공기를 안 마실 수가 없었다. decoration, light 각종 ‘최신’의 것들이 선을 보였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데 성공은 했지만 basketball court에 있는 indoor running track에서는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나의 gym routine이 30분 걷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데, 오늘 그곳에 가 보니.. 무언가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아~~~ 하는 한숨이 나오고.. 이것을 오랜 세월 잊고 살았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다. 오랜 전에는 ‘재수가 좋아서’ 이것을 보게 되었고 12월의 멋진 holiday 기분을 만끽하곤 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 어쩐 일인지 이 공연을 놓치고 살았던 것이다.
이것은 YMCA member중에서 대강 60대부터 80대까지의 ‘아줌마’들, 30명 정도가 모여서 이맘때면 공연을 하는 Kicker club인데, 주로 Christmas에 맞는 곡들에 맞추어서 30분 정도 dance를 하곤 한다. 물론 몇 개월 전부터 ‘맹연습’을 하는 것은 가끔 목격하곤 했다. 순전히 ‘재미와 사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춤 솜씨 같은 것은 큰 문제가 될 수가 없다.
요새는 나 혼자 track을 걷기에 (연숙은 이제 100% 수영만 하게 되었다) 아깝게도 연숙은 못 보았지만 나는 이 ‘100% 백인 아줌마 (사실은 할머니지만)’들의 performance 전체를 running track에 서서 볼 수 있었다. Dancer들 숫자나 관객들 숫자가 거의 비슷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신나게 즐기며 춤을 추는지..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이들 공연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이들의 주 연령대가 70대 정도니까 나보다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Irish처럼 생긴 파란 눈의 white ladies.. 오랜 전의 미국의 모습과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이들이 몇 십 년 전에 이 땅의 ‘주인’들의 모습이었다고 할 것이다. 생각나는 것이 오랜 전에 없어진 화보잡지 LIFEmagazine이었는데, 아마도 이들이 바로 LIFE generation이 아닐까? 이들만 해도 지금은 완전히 normal이 된 ‘깡패 같은‘ feminism같은 것에 ‘물들지’ 않았던 세대였을 것이고, 99% 가정주부들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분명히 white power를 만끽하며 살았을 것인데.. 지금은 어떨까? 앞을 보고 뒤를 보아도 UN 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종 인종이 득실거리는 YMCA gym에서 옛날을 얼마나 그리며 살고 있을까? 40년 전부터 미국을 보아왔던 것을 생각해도.. 참 이곳 미국, 많이 변했고, 그것도 지금은 더 무섭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놀라움까지 느낀다.
¶ Crabby Feast plus: Thanksgiving Holiday가 끝나자 마자 마리에타 Y형 댁에서 우리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세시봉’ 그룹이 다시 모였다. Y형 댁은 작년에 큰 ‘喪상’을 당했던 관계로 2년 만에 방문을 하는 셈인가.. 그 동안 그 바쁜 중에도 수만 불짜리 kitchen remodeling 이 끝나고 pikapika한 granite island가 위용을 자랑하고, custom made cabinetry가 초현대식 편리함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 집의 old clucky 한 것들을 비교하면 조금 기분이 쳐지긴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우리의 현재 더 중요한 value는 이런 것들 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역시.. 우리도 저런 것들을 가지고 싶은 바람이 없다고 하면 솔직하지 못할 것이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날 정말 과장을 해서 ‘수십 년’ 만에 배가 터지도록 humongous Alaskan king crab을 포식을 하게 되었다. ‘옛날’ cash가 풍성하던 시절에는 가끔 이것을 사다가 집에서 즐긴 기억이 있었고, 심심치 않게 seafood restaurant에서 온 가족들이 먹기도 했다. 이날의 king crab은 정말로 king다운 큰 놈들이었는데 seafood wholesaler에서 직접 사온 것이라고 했다. 이것들과 맛있는 wine이 곁들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덕분에 오랜만에 취한 기분을 느끼는 저녁이 되었다.
오랜 만에 간 이곳에서 kitchen remodeling만이 아닌 다른 것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home music studio라고나 할까.. 최신 digital technology를 총 동원한 amateur music production system 이었다. 모든 것들이 excess로 치닫는 근래의 사회풍조인가.. 모자람 없이 모든 것들이 ‘사치’쪽으로 흐르는가? 돈과 시간이 넘쳐흐르는 ‘적지 않은’ 60대들은 보기에도 행복하게 보인다. 젊은 시절보다 더 짜릿한 ‘자극’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새로 악기를 배우는 것이 있는데 이 집주인은 saxophone에 심취되어서 배운지 불과 몇 년 만에 이제는 거의 수준급에 들어섰다.
반주 없이 불던 saxophone은 조금 dry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 장만한 이 home studio는 우선 값이 $1500에 달하는 ‘준’ 프로 급’으로 거의 완전한 background sound (karaoke sound)를 갖추고 있다. 10000여 곡을 저장하고 있는 software와 4 channel audio mixer, usb amplifier, Bose portable speaker.. 이것을 써서 ‘live’ saxophone연주를 ‘눈 감고’ 들으면 어느 full-sound Cafe에 온 느낌을 준다. 나에게는 ‘그림의 떡‘ 으로 보이지만, 생각한다.. 조금 더 머리를 쓰면 1/3정도의 가격으로 비슷한 성능의 gear를 장만할 수 있지 않을까.. 백일몽일지도 모르지만.. 생각하는 것은 cash가 필요 없으니까..
¶ My first ever ‘Kindle book‘Kindle.. Kindle book.. 이 말도 꽤 오랜 전부터 들었고 Amazon.com에 가보면 항상 눈에 뜨이는 것이다. electronic book의 ‘한 종류’라고 하지만 지금은 한 종류가 아니라 그것 electronic book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 느낌이다. 며칠 전 처음으로 kindle book title하나를 $5 정도에 구매를 하였다. 종이 책은 $12 정도니까.. $7 save한 것인가? Kindle은 순전히 software format이지만 Amazon.com의 hardware Kindle tablet 과 짝을 이루면서 이렇게 electronic book의 champion format이 되었다.
여기의 ‘교훈 lesson’은 역시 Apple Company, Steve Jobs의 철학.. software/hardware의 ‘완전한 지배, 장악, control’ 이라고 할 것이다. Microsoft의 모든 ‘문제’는 hardware를 ‘지배’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것이 납득이 간다. ‘옛날’에는 사실 software와 hardware는 완전히 ‘다른 장사’의 영역이었고.. 그것은 거의 gentlemen’s agreement 같은 불문율이었는데.. 완전한 profit, control crazy monster Apple company (사실은 Steve Jobs’)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후로, 그들, Steve Jobs’ Apple의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profit을 보고 침을 흘리며 모든 사람들을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 떼돈을 벌려면 software/hardware가 완전히 ‘붙어버린’ whole system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kindle book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버금가는 ‘책’의 역사는 ‘변함 없는’ 종이역사였지만 그 오랜 역사가 ‘느리지만 무섭게’ 변하고 있다. 종이가 없어지는 역사인 것이다. 종이 책과 ‘전자’ 책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analog와 digital의 차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간단하고, 성의가 없는 대답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대답이 정답이다. ‘부드러운 느낌의 analog’와 ‘명암이 뚜렷한 차가운 digital’의 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부드러운 analog 촉감의 종이 책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제공하려는 노력을 한 것이 바로 Amazon.com의 Kindle book이다. 근래 수많은 ‘종이 책’들이 Kindle option을 주고 있고, 종이 책보다 항상 싼 값이다. 구매 즉시 download를 받을 수 있고 이제는 PC나 Smartphone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Kindle hardware tablet 이 없어서 PC에서나 읽을 수 있지만 대부분 시간을 desktop PC에서 보내고 있는 관계로 이것이 나에게는 최적의 solution이다. 하지만 ‘화장실’ 에서 이 ‘책’을 볼 수가 없는 것은 분명히 아쉽고, 따뜻한 아랫목 (전기장판)에 누워서 볼 수 없기에 역시 digital은 차게만 느껴진다.
¶ Candle Reflections: Candle, 초, 양초, 촛불.. 우연히 나의 주변에서 ‘초, 촛불’이 눈에 뜨임을 느끼게 되었다. 눈에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 ‘가슴으로 보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기에 이렇게 초와 촛불이 ‘나의 눈에 보였다’ 는 사실이 나에게는 대견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촛불이 보이는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인가? 나는 이것이 나에게 전보다 가슴이 조금 더 열렸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나 둘씩 초와 촛불이 주변에 늘어나고, 날씨가 싸늘해지면서 그것들의 느낌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성당에 가도 제일먼저 하는 일도 촛불을 켜는 것이고, 요새같이 대림절이 되면 4개의 초가 하나 둘씩 켜져 가는 것을 보게 되며 그 의미도 생각하게 되고, 나의 서재에도 초의 숫자가 더욱 늘어난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soothing candles’ light & aroma, my desk
이와 더불어 반세기 전의 추억을 더듬기도 한다. 6.25 (a.k.a. Korean War)가 끝난 후에 대한민국에서 산 사람들이면 서울이나 지방, 시골이나 거의 예외 없이 겪었어야 했던 ‘전기부족’.. 제한 송전 등으로 ‘초’는 100% 필수품이었음을 알 것이다. 낮은 물론이고 저녁, 밤에도 정기적으로 전기가 나갔다. 낮에 전기가 나가는 것은 가정집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가전제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라디오’ 나 전기 다리미가 있었지만 낮에 하는 방송은 거의 없었고 당시에는 battery radio가 흔해서 (군수품) 전기가 필요 없었다. 문제는 밤인데.. 가족이 모두 모인 때 전기불이 없으면 초를 켜야 하고 그것으로 제대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은 어두울 때에도 밖에 나가서 놀거나, 대부분 일찍 자는 수 밖에 없었다.
조그만 방에 초를 한 개 켜놓으면 그 주변에 모두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숙제도 하곤 했는데..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오손도손’한 가족의 따뜻함을 촛불과 함께 나누던 시절이었다. 특히 겨울에는 방 한가운데 ‘화로’를 놓고 무언가 ‘구어 먹으면’ 그 정취는 지금 도저히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1960년대가 되어서 전기사정이 좋아져 ‘촛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살 때는 아주 가끔 날씨관계로 정전이 되면 ‘혹시’ 초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너무나 편리한’ flash light들이 있어서 역시 초를 볼 기회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희한하게도 ‘신앙, 종교’적 연계로 촛불이 포근하게 나에게 다가온 것..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올 겨울에는 유별나게 촛불을 키고 촛불을 바라보며 ‘회상, 명상’을 하고 싶어 진다.
나의 눈앞에 다시 ‘다가온’ 아틀란타 ’70/80 style’ Live music restaurant 세시봉.. 거의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추억의 음악과 추억의 경양식의 멋진 곳, 세시봉.. 어제의 일이었다. 자기 집안 식구 ‘전부, 아내와 딸’이 사업상 해외 여행을 떠난 renaissance guy 최형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 다음 날 저녁 7시까지 세시봉으로 나오라고 해서 예의 모이던 그룹이 다시 모였다.
이번이 나에게는 세 번째인가.. 하지만 항상 머리 속에 잔잔한 흥분의 여운을 남기던 그런 곳이라 하나도 생소하지 않았다. Owner이며 performer인 Mr. 김도 예전과 같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같은 미소를 간직하며 우리 그룹을 기억하는 듯 했다. ‘사업’이 잘 되시느냐 물었더니 ‘우리들이 이렇게 너무 가끔 찾아주니 잘될 리가 있겠습니까’ 하는 농담 섞인 응답이었다. 실제로 지난 7월 8월은 ‘너무나 slow’ 했다고 한다. 하기야 그렇게 더운 때 대부분 vacation을 떠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곳에 들어갈 때 입구에 조그만 종이글씨가 붙어 있었는데 잠깐 보니 ‘오늘은 나도 가수 왕‘ 이란 글이었다. 언뜻 아하.. 이곳에서도 손님이나 아마추어 들이 노래라 연주를 하는 program을 마련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나도 주인에게 그런 comment를 한 기억이 있었다. 이런 곳을 아틀란타의 ‘명소’로 만들려면 고정적인 fan group을 형성하고, 그들 중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게 무대에 올라가게 하면 어떤가 하는 idea였다. 쉽게 말하면 amateur night 같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대답을 들었다. 잘못하면 분위기 찾으러 온 손님들을 쫓는 결과도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그날 가서 음식 menu를 보니.. 전에 비해서 음식 가지 수가 너무나 많이 늘었다. 전통적인 ‘일본식 경양식, donkatsu‘에서 출발해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전에는 owner의 부인이 chef라고 알았는데 이번에 들으니 chef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주 전문적인 chef를 포함해서 추억의 음악, 연주,분위기..등등을 조금은 고급스럽고 exclusive한 전통을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다. 이렇게 다른 곳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계속 유지시키면 ‘아틀란타 명소’가 될 가능성이 꽤 높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Owner는 Smartphone으로 손님들이 찾아와 남기 여러 가지 ‘논평, comment’ 들이 Yelp에 나온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부분 음식에 대한 사진과 평들이었다.
멋 모르고 소문이나 겉 모습을 보고 찾아온 ‘젊은 세대’들의 평이 대부분인데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대부분 contemporary favorite 예를 들면 ‘빙수‘, 오늘 처음 알게 된 New York strip steak 같은 것들이지만 우리 세대는 예외 없이 서울거리에서 60~70년대 맛을 보았던 ‘일본식 경양식’들, 예를 들면 ‘함박스테이크, 돈까쓰‘ 를 찾는다. 기억에 희미해졌지만 당시에 느꼈던 음식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잘 ‘재현’해 놓았다. 특히 portage cream soup은 그 중에 제일 추억을 되 새기게 하는 것이다. 비교적 경제적인 wine과 추억의 생음악, 자유자재로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owner performer, 깨끗한 환경들.. 이곳은 확실히 두고두고 아틀란타의 명소가 될 potential이 있다.
그 동안 performer들, 특히 거의 pro에 가까운 ‘인재’들이 이곳을 찾았고 연주,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찾았던 금요일 저녁에는 ‘자칭 아마추어’ 들이 나온다고 했다. 물론 미리 audition 받고 무대에 올라갈 듯 했다. 우리가 간 날에는 retire한 남자 분이 saxophone을 들고 출연을 해서 기대보다 수준 있는 연주를 들려 주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case가 바로 ‘좋아서 하는’ 진정한 amateur’ 정신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도 했다. 그저 좋으니까.. 사랑하니까..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크지는 않지만 격조있는 분위기의 performing stage (credit Yelp)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그룹에서도 언제 한번 아마추어로 무대에 올라가 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언뜻 윤형의 saxophone이 생각나고 그의 ‘연주 수준’이면 큰 무리가 없을 듯 해 보였다. 문제는 그 동안 얼마나 연습을 했는가 하는 것이고 작년 이맘때부터 부부가 완전히 full-time 으로 일을 하게 되어서 그 전과 같은 여유가 없어 보인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 화살이 우리에 오더니.. 순식간에 언젠가 한번 올라가라는 ‘강요’까지 나왔다. 속으로 it’s now or never라는 말도 있는데.. 못할 것도 없다는 오기를 달랬지만, 과연 그럴까? 최형의 idea는 우리 둘이 Everly Brothers의 classic oldie (All I have to do is) Dream dream 과 ‘젊은 연인들‘을 부르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이 두 곡은 눈을 감아도 언제라도 할 수는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무대에 올라?’.. 허.. 그런 ‘장난스러운 생각’과 놀아 보는 것도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고 그곳의 분위기와 너무나 어울려서.. 역시 다른 세시봉 추억을 만들고 금요일 저녁을 보냈다.
¶ 고온 다습 高溫多濕..요사이 이 지역의 날씨를 보면 가관이다. 한 여름 중에는 가을 같이 이상하게 싸늘하더니 9월도 넘어선 늦여름은 그야말로 ‘hot and muggy, 고온 다습한’ 한 여름이 되었으니 말이다. 최근 들어서 날씨에 둔감해지려고 안간힘을 쓴 결과 많이 침착해 졌지만 요새의 기후만은 언급을 피하기가 힘이 들었다. 올해는 조금 a/c(air conditioning) 에서 $$을 절약하는가 은근히 쾌재를 불렀지만 mother nature는 역시 그런 ‘공짜’가 없나 보다.
‘고온 다습’이란 귀에 익은 말이 딱 들어 맞았지만 이 말을 쓰고 보니 그 옛날 고국의 한창 여름에 많이도 듣던 기상용어가 아닌가? 고온 다습한 태평양 고기압.. 바람이 남쪽, 그러니까 멀리 있는 태평양에서 부는 바람.. 그것이 서울에서 겪었던 한증막 같은 더위의 원인이었다. 장마도 마찬가지로 그 ‘고온 다습’ 한 것.. 그것이 지금은 Gulf of Mexico 멕시코 만灣의 고온 다습한 바람으로 바뀐 것이다. 요새의 공기는 그야말로 에어컨이 없으면 괴로운 그런 것.. 그 옛날 서울에서 어떻게 에어컨이 없이 살았던가?
¶ Crumbling infrastructure.. 이런 표현 근래에 national 뉴스에서 많이 접하곤 했다. 그런 뉴스에서는 주로 bridge같은 것이 너무나 낡아서 위험하다는 것들이었는데.. 요새 나는 우리가 사는 집이 그런 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의 겉모습은 물론 페인트가 벗겨지고 siding같은 것은 숫제 새들과 ‘기후’의 공격으로 구멍이 생기는 것도 목격이 되었다. 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은 집의 얼굴인 front door 쪽의 brick, concrete들, 그리고 front door threshold(문지방)등의 모습이 정말 목불인견이라는 사실..
집의 구조상 garage(차고)로 출입을 하니.. 앞문 쪽은 거의 사용을 안 하니 자주 볼 수도 없다. 손님들이 가끔 그곳을 쓰지만 대부분 어두울 때에 사용을 하니 자세히 볼 기회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앞 문 쪽으로 gutter물이 떨어져서 water damage를 예상은 했었다. 이번에 자세히 보게 되니.. 정말 ‘뚱뚱한 사람’이라도 그곳을 쓰게 되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길 정도다. 썩어버린 문지방은 wood filler를 쓰면 고칠 수 있을 듯하고 떨어져나가는 벽돌도 큰 비용은 들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concrete slab도 조금 노력을 하면 내가 모두 고칠 수 있다는 결론이 내리고 대대적 수리의 준비에 돌입을 하였다. 오랜 만에 집 앞쪽이 대대적 face-lifting service를 기다리고 있다.
¶ 앓던 이(이빨)가 빠질 때.. 지난 4월부터 앓았던 독감 중에 지독한 치통이 나를 괴롭혔고 독감이 나은 이후에도 통증의 차이는 있었어도 계속되고 있었다. 치과를 가면 분명히 ‘고쳐줄’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피하고 싶은 곳이 바로 그 치과이기에 ‘가급적’ 나는 참는 것이 오히려 덜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번에 느끼는 치통,구강 통증은 보통을 훨씬 넘게 나를 ‘매일’ 괴롭혔다. 분명히 이것은 ‘민간 요법’도 없을 듯 하고 ‘자가 요법’도 없을 것이었다. 내가 고작 하는 것은 ‘소금물 양치’가 전부였다. 보통 때는 그런대로 잊고 지낼 수가 있었지만 식사시간이 문제였다.
무언가 닿은 듯 하면 통증이 온다. 나의 나이에 내 치아의 상태는 보통 정도.. 일 듯한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대학 2학년 때 ‘병신 같은 사고’로 앞니에 ‘큰 문제’가 생긴 이후 나는 사실 항상 ‘치과’에 가게 되는 사태를 피하려 전전긍긍하며 살았던가.. 마지막으로 치과에 갔던 것이 거의 8년 전.. 이후 나는 그곳을 피하며 산다. 이번의 통증은 물론 윗니 중의 하나 (사랑니 근처)가 빠지려고 발버둥치는 결과였는데..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날로 치과에 가서 그것을 뽑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 ‘저절로’ 그것이 얌전하게 빠졌다. 거의 순식간에 그 지독한 통증이 100% 사라졌다. 비록 이빨 하나를 잃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날라 갈듯한 기분.. 이래서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라는 표현을 너무나도 절감, 실감, 만끽하게 되었다. 물론 앞으로 나는 치과의사를 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우선’ 지금엔 문제가 전혀 되지를 않는다.
¶ Show Stopper..며칠 전에 처음으로 성령대회란 것을 가 보았다. 오랜 전, 1988년과 1989년에 우리는 인디애나 주에 있는 노틀담 대학, University of Notre Dame (South Bend, Indiana) 에서 열렸던 미국 성령쇄신대회 (Charismatic Renewal Convention)에 참석을 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이번 것은 순전히 한인들이 주관하는 미국 동남부지역의 것, ‘제5차 미 동남부 성령대회‘였다.
성령에 관한 경험과 기억이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올해는 그 옛날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알게 된 최 데레사 양이 음악 지도자로 와서 정말 오랜만에 재회를 하게 되어서 한번 가 보자.. 하는 다분히 즉흥적은 결정을 하게 되었다. 매년 Labor Day에 맞추어서 열리는 비교적 큰 대회라 많이 알려지고 듣곤 해서 사실은 기대보다 생소하지는 않았다. 최 데레사의 12 string guitar 연주도 멋졌고 음악, 율동 팀들, 조직적으로 일사분란 하게 움직이던 red shirts의 봉사자들.. 모두 좋았다. 심지어 부산 교구에서 초빙된 주관 신부님의 ‘통성기도, 심령기도’ 소개,실습까지도 나는 거의 거부감을 느끼지 못해서.. 이제 나도 많이 ‘마음과 가슴’이 열렸구나 하고 만족한 심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복병이 나의 다리를 잡았는데.. 결과적으로 한마디로 최소한 나에게는 show stopper, disaster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2일 간의 행사였지만 우리 부부는 이틀 째날 행사는 모조리 포기하고 말았다. 이유는? 나의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작은 Satan이었을까? 이유는 우습게도 첫날 두 번째로 ‘등단’했던 신부의 ‘지겨운 performance’ 에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이 ‘사람’이 어떻게 ‘신부’가 되었을까 할 정도로 혼란한 시간과 싸우게 된 것이다. How did he ever become a priest? 저 사람이 신부인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음담패설’과 해외교민만이 겪는 아픈 곳들만을 철저하게, ‘밥맛 없고 저질적으로’ 찌르던 그의 강론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뒤늦게 나온 지독히도 짧은, 본론이라고 나온 것은 전혀 무게가 없고 깊이가 없던.. I’m Joseph..you’re.. 어쩌구 하는 전혀 새로울 것 하나도 없던 넋두리들.. 옆자리에 앉아있던 자매님들만 없었으면 자리를 박차고 자리를 떠날 생각도 있었지만.. 참고 참고 또 참았다.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 김영훈 스테파노 신부님과 같은 맑은 영혼의 느낌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올해의 성령대회는, 결과적으로 거의 완전히 실패한 나의 ‘첫 성령대회 체험’이 되었다.
지나가는 달들, 나날들에서 가끔 분명히 느끼는 것.. 이것이 혹시 그렇게 흔한 단어인.. ‘평화’인가? 너무나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나는 곧바로 이런 말을 붙인다. 내일 아침까지 만불 빚쟁이들이 들이 닥쳐도 같은 심정일까.. 바로 이것이 신앙적인 평화의 뜻이 아닐까? 이것 저것 나를 잡는 괴로움이 산재하고 남아있고 계속 생겨도 그래도 평화로운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면 이상한 것인가? 아하! 바로 이것이 미사 때 마다 귀 딱지 앉도록 듣는 peace be with you.. 가 아닐까? 이제야 나는 이것을 알아 차리고 있는 것일까? 이것도 나의 ‘신앙, 믿음’의 진화의 과정인가? 어떨 때는 이것도 ‘무서울 정도로 느껴지는 잔잔한 평화’ 로 받아 들여진다. 하지만 현재 연숙과 나는 그런 ‘놀라운 평화’를 느끼며 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4년이 다가오는 레지오.. 현재 나는 이곳이 거의 피난처 구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오지나 않았을까? 할 것이 없으니까.. 아니면? 아니다.. 이런 기회가 나의 세계관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았는지 잊었는가? 나는 분명히 변했고, 변하고 있고 계속 변하고 싶다. 과거의 ‘고립된’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나는 산다. 진리를 향해서 나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요새 들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 거의 99% 현재와 미래를 망침을 알기에 그런 것이지만 이제는 4년의 ‘실적과 전적’을 조금은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은 어떨까? 요새 레지오 간부 선출 문제로 신경이 쓰여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 조금은 ‘레지오 fatigue‘란 것을 느끼게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남은 인생에서 ‘레지오’를 빼놓음은 아직 ‘상상’을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모님께 깊이 의탁하고 있고 그렇게 살고 싶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성모님과의 관계를 느끼고 싶고, 아니 관계를 쌓아간다고 조심스러운 희망도 하고 있으니까.. 어떨까? 죽기 전에 나는 과연 ‘레지오 마리애’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회상하게 될 것인가?
작년 정도는 아직 아니지만 그런대로 ‘보통 여름’같은 올해.. 참 이것이 자연의 조화일까.. 모든 것이 ‘평균치’를 유지하는 자연계.. 얼마나 이것이 ‘기적’처럼 느껴지는지.. 모든 것들이 extreme으로 치닫고 유행이 되어가는 요즈음 ‘평균’이란 말만 들어도 신선한 것이다. 이제 푸근하게만 느껴지는 여름에도 적응이 되어가고, 그렇게 손에 안 잡히던 ‘일손’에 조금 힘이 생겼다. 몇 년간 방치되었던 집안의 크고 작은 ‘고치는 일’들이 이제는 자신이 생겨가고, 최근 다시 힘이 생긴 YMCA에서의 bench press로 어깨와 허리에 힘도 느끼고.. 이때가 그야말로 chance가 아닌가.. 올 여름에는 무언가 우리집도 변한 모습을 모여 주어야 할 때가 아닐까? 벼랑 끝에서 창으로 무장한 monster들이 나를 기다려도 나는 평화를 ‘죽기 전까지’ 느끼고 살고 싶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성모님이 바로 나의 어깨를 잡아주고 계시지 않은가? 그렇지요.. 어머니?
4월 들어 두 번의 장례미사와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듯한 분향이란 것.. 우울하게만 느껴지는 이 ‘장례와 분향’이란 말들이 4월의 찬란한 태양과 어찌 그리 대조적 느낌을 주는가? 장례식이나 장례미사는 이제 나에게는 그리 서먹한 것이 아니지만 분향은 사실 느낌이 아주 달랐다.
4월이 시작되자마자 오랜 병고 끝에 선종하신 데레사 자매님, 병고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그 자매님이 사랑하셨던 성모님 곁으로 가셨다는 안도감과 그래도.. 여기서 더 보고 싶었을 단출한 유가족 생각이 교차 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오랜 병고를 치르면 사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을 것 같지만 어찌 그런 감정이 다 똑같을 수가 있을까? 살아온 세월, 사랑했던 가족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다를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여정이 아니었던 조금은 독특한 인생여정을 살았던 데레사 자매님, 얼마나 사연이 많았을까? 끝까지 옆에서 묵묵히 그 자매님을 지켰던 독일인 남편과 외동 따님, 예상은 했겠지만 슬픔 감정은 억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데레사 자매님은 1950년대 초 숙명여고, 이화여대를 나오시고 60년대에 혈혈단신 미국에 오신 용감함이 있었고 남과 같은 평탄한 인생을 고집하지는 않으셨던 듯하다. 뉴욕에 사시며 현재의 독일 출신의 남편을 만났고 딸을 하나 두셨다. 가톨릭 신심, 그것도 성모님을 통한 신심으로 일생을 보내셨고 성지순례를 많이 하고 자서전 신앙고백인 책도 남기셨는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 옆에서 같이 일생을 보낸 남편은 ‘요지부동’으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고집이 센’ wife의 등살을 어떻게 견디었는지..착한 심성으로 아내를 보살피긴 했지만 아마도 신앙적인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연숙을 통해서 어렴풋이 이 자매님과 남편을 알게 되었지만 가끔 ‘봉성체’ 를 통해서 근황을 알게 된 정도였다. 한번은 그 독일남편과 가까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2차 대전 종전 전후 독일의 사정을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그는 미군 점령지역에 있어서 소련군 지역의 수많은 ‘참상’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미군이 보여준 ‘인간애’에 감동을 했고 결국은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점령군이 아닌 구세군 격인 미국을 동경하며 왔을 듯하고 정착지였던 뉴욕에서 다른 꿈을 가지고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데레사 자매와 만났을 것이다. 독일과 한국은 사실 판이하게 다른 역사, 문화를 가졌겠지만 둘 다 비참한 전쟁의 후유증을 겪은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조금은 동병상련 의 감정을 가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데레사 자매님의 임종 즈음에 병자성사가 있었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모습이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홀로 남는 사랑하는 남편과 사후에 완전히 이별을 할 것 같은 걱정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것을 간파한 그 남편은 아내와 이별하기 전에 ‘세례를 받겠다고’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고 초 특급의 세례식이 병상 옆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이 끝난 후에 편안하게 선종을 했다.. 고 들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일화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데레사 자매님은 분명히 죽어서 남편과 ‘재회’를 못할지 모른다고 확신을 했던 것이다.
그 남편이 아내가 쉽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것 만으로 세례를 받았을까? 50년 이상을 버티어 왔는데 말이다. 여기에는 더 한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따님과 같이 마지막 병상을 지키던 중에 그 부녀는 데레사 자매님의 병상주변에서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니까 어떤 ‘에너지’가 병상에 온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중에 그들은 ‘아마도’ 그 에너지가 그 자매님이 그렇게 사랑하던 성모 마리아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세례를 받게 된 제일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병원 환경에서는 이런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아주 흔한 이야기라고 한다. 세상을 떠나는 그런 자리에 무언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독일인 남편은 마이클(미카엘)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되었다. 장례식을 거치며 그는 정말 바뀐 듯 했다. 이제야 50년 이상 자기 wife가 무엇을 믿으며 살았는지 늦게나마 알아 차리는 듯했다. 가까운 가족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장례절차가 조금 쓸쓸할 것으로 우려 되기도 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 자매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가는 길이 너무나 훈훈하기만 했다. 이화여대 동창회에서는 막강한 합창단이 와서 멋지게 조가를 불러 주었다. 한마디로 아주 멋진 장례미사가 된 것이고 유가족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경험과 위로를 남기는 그런 시간들이 되었다. 곧 이어서 부활절을 맞이하게 된 그 유족들.. 비록 한인 사회에서 조금은 멀어지겠지만.. 새로 찾게 된 ‘아내의 선물, 하느님’과는 더욱 가까워 지리라..
¶ 레지오와 신부님, 그리고 작은 장례미사
또 다른 장례미사는 너무나 느낌이 달랐다. 성삼일, 부활절의 연속으로 쌓인 피로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89세 할머님의 선종으로, 또 다른 장례미사 소식이 들려왔다. 이럴 때 우리는 선택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장례미사나 연도의 소식이 전해지만 우선 물어보는 것이.. 이분이 누구일까.. 가족들은.. 경제사정은.. 실제적인 물음이지만 유족들을 잘 알 수 없기에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문제는 레지오 단원인 우리는 의심 없이 ‘무조건’ 장례절차에는 신경을 쓰며 참석하려 노력을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성당 공동체에 비교적 잘 알려진 가정이면 별로 문제가 없지만 이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들려오는 소식에 유족의 ‘경제적’인 문제와 친숙한 교우가 아니라는 사실과 조금은 피로했던 때 (부활절 직 후).. 모든 것이 조건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장례식이 또 쓸쓸할 것 같은 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갈 ‘기운’이 나지를 않았다. 혹시 ‘숨었던 유족 친지’들이 의외로 많이 참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결국은 우리는 못 갈 것 같은 예감이 지배를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주임신부님이 팔을 걷고 나서서 레지오 단원들을 ‘밀어’ 부치는 ‘의외적인 일’이 벌어졌다. 레지오는 별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은 4명의 유족들이 홀로 치르게 되었을 뻔했던 쓸쓸한 장례식이 레지오 단원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미사’로 승격되어 진행이 되었고 유족들도 많은 위안을 받았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군대같은 조직을 가진 레지오의 기동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번 ‘사건’은 사실 주임신부님의 ‘독자적 결단’으로 성사가 된 것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평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부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오랜 전 또 다른 주임신부 같았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명품과 부자와 명예’를 사랑했고 곤경에 처한 사람은 냉대했던 그 다른 신부의 행적을 상기하면 현 신부님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일 정도가 아닐까?
¶ 머나먼 세월호 분향
이번의 ‘레지오 주동’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오니 장의사 바로 옆에 위치한 한인회관에 한 장의 공고가 붙어있음을 보니.. ‘분향소’라는 글자였다. 자세히 보니 ‘세월호 영혼을 위한’ 분향 공고였다. 그것도 우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부님이 ‘쏘신’ 점심 회식 후에 잠깐 들려서 분향을 하였다. 한마디로 안 할 수가 없었다. 아틀란타와 진도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엄청난 거리였고 느낌도 멀 수 밖에 없었지만 속 마음들은 그것이 아니었다. 할 말을 잊는 우리 심정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 ‘분향’이었다. ‘추악하고 인간답지 못한 어른들‘의 ‘도움’으로 채 피지 못하고 하늘로 일찍 가버린 어린 꽃다운 영혼 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크고 작은 사연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야만 했을 숨겨진 영혼들.. 육체적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자고 위로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할까? 하지만 ‘정의’는 끝까지 찾아야 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날 수가 없는 그런 살기 좋은 조국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또한 날벼락을 맞은 박근혜 정부도 필요이상의 큰 타격이 없기를 바란다.
2014년도 부활절 영세식이 4월 12일에 뜻 깊게 막을 내렸다. 천주교에서 영세, 세례의 의미는 아마도 개신교회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쉽게, 편하게 하느님을 만나려는 그들과 상징, 과정, 연수, 고행이 따르는 우리 천주교의 하느님 만나는 과정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나와 연숙에게 올해의 영세식은 분명히 다른 해와 다르게 가슴으로 찡~ 함을 느끼게 다가왔다. 영세식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 멀리서 몰래 찍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한결같이 행복하게만 보이는 이 모습들.. 나이나 성별에 상관이 없다. 세례를 주관하신 주임신부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아마 그런 모습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30여 년 전을 부지런히 떠올리며 이들의 심정을 헤아렸지만 아무래도 30년의 세월은 조금 긴 것 같이, 자세한 그때의 정경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거의 100% 기억하는 것은 그 때의 우리의 ‘행복한 느낌’이었다. 그 희미한 감정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례자들도 아마 마찬가지의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이번 영세식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상당했다. 나와 연숙이 지난 해 8월부터 모두 봉사자란 이름으로 예비자 교리반에 참가하여 무사히 이들을 ‘요르단 강’ 가로 배를 함께 저었다는 느낌이고, 예비자 거의 전부가 끝까지 항해를 했다는 안도감과 자부감등으로 우리가 다시 세례를 받는 것처럼 가슴이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번 교리반 봉사자로 참가해서 우리가 얻은 것은 이 예비자 들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많이 얻고 배웠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리는 수녀님과 신부님이 담당했지만, 우리 부부도 두 번 정도 담당할 기회가 있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수녀님과 자유분방한 신부님의 스타일은 정말 대조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신부님 스타일이 훨씬 마음에 들고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맡았던 ‘교리 강의’에서 나는 신부님 스타일 흉내를 잠깐 냈는데, 역시 예상대로 수녀님의 재빠른 질책을 받았다. 아직도 나는 그런 수녀님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저 그저 benefit of doubt 만 되 뇌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대상한 예비자들은 거의 ‘고학력, 젊은 층’이 대부분이어서 우리와 호흡이 잘 맞았다. 우리에 비슷한 또래들도 마찬가지로 personal chemistry가 좋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었던 것은 대부분 예비자들이 봉사자들을 격의 없이 믿어주고 사의를 표하는 자세들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신선한 것이.. 요새 ‘젊은 층’을 많이 보았기에 너무나 비교가 될 정도로, 건전한 말투, 모습들.. 보기만 해도 했다. 중장년 층의 예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머있고, 협조적이고, 한마디로 멋진 신사 숙녀들이었다. 이들이 하느님을 찾으려 8개월 동안 눈이오나 비가오나 매주 목요일 밤에 모였다는 것은 속된말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비슷한 비율의 남녀 형제, 자매들.. 우리에게는 모두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영혼들이다. 한창 ‘외우는 공부’가 더 쉬울 듯한 15세의 등치가 큰 소녀, ‘마누라’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지만 이제는 ‘교리반 재수’을 끝낼 각오로 참여 각가지 유머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던 Clint Eastwood를 연상시키는 60세 형제님, 무게가 실려있는 comment로 일관 한 귀공자 스타일, 옛날 알랑 드롱을 닮은 ‘백수’ 형제님, Tom Cruise를 연상시키는 30대 유학생 화학공학도, 항상 질문이 많고 심각하지만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50대 자매님.. 영화배우처럼 멋지게 생기고, 아버님과 같이 교리공부를 한, 멋진 약혼자의 후원을 받았던 (내가 제일 부러운 case) 형제, 20대의 젊음의 향기로 교리반의 공기를 채웠던 몇몇 유학생 자매, 형제들.. 그들을 보면서 우리도 30년 전을 회상하기도 했고, 그들 신앙여정의 앞날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제 세례, 영세식은 끝났지만 사실 학교 졸업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가 진짜가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이들의 교회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서..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속사회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20~30대의 젊은 층은 참 길 수도 있는 ‘파도’길을 가야 한다. 중장년 형제자매들.. 이들은 그렇게 시간이 길지 않다. 사실 내가 제일 큰 관심을 갖는 것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가 아니고 이들이 ‘무사히’ 세파를 헤쳐나가는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받고 쓸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내가 30년의 세월을 ‘실패’로 보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분 들이 ‘하느님’이 생각보다 가까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 본다는 깨우침을 하루빨리 가질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 본다..
C’est Si Bon.. 세시봉..시봉..시봉.. C’est Si Bon은 물론 French jazzy classic.. 1947년에 발표된 이것은 우리에게는 루이 암스트롱과 이브 몽땅 Yves Montand 이 같이 불렀던 것이 익숙한가? 어렸을 때 참 많이도 들었던 이 노래의 멜로디는 아직도 생생하다.1 세시봉의 뜻은 불어101 학생도 알듯이 영어로 하면 It’s so good 정도가 될 것이다. 이 곡을 들으면 나중에 ‘시봉 시봉..’을 계속하는데.. 그것도 so good so good 정도일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 뜻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살다가 요새야 깨닫게 되었다. 참 오랜 세월이 걸린 French를 모르고, 무시하고 살았던 curse 라고나 할까.
Louis Armstrong – C’est si bon (1962)
하지만 여기 제목의 세시봉은 이미 한글의 ‘고유명사‘가 된 말로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60년대에 서울에 있었던 어떤 ‘음악감상실‘의 이름인 것이다. 반세기 전이면 사실 ‘골동품’ 냄새가 나겠지만 나에게는 과장을 하면 ‘엊그제’ 같은 느낌의 시절이다. 당시 서울은 99% ‘미국 류’를 따랐겠지만 간혹 이렇게 색다르게 ‘불 류’를 더 ‘멋지게’ 보던 ‘지식층’들도 상당했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것들이 그랬다. 그래서 이 말이 음악감상실 이름이 이것이 되었는지는 그때의 사정을 잘 모르니 알 길이 없다. 희미한 기억으로 내가 ‘아직도’ 고등학생이었을 당시 대학생이었던 누나가 그곳을 다녔고 그때 나는 ‘세시봉’의 이름을 들었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서울 장안의 ’20세 안팎 특별히 할일 없었던 아이들’2이 이곳에 모여서 한창 유행을 타던 ‘기타’를 치고 배우며 시간을 소일하던 것이 작은 역사가 되었고 그 중에 상당 수는 ‘프로’로 전향.. 반세기 뒤에는 ‘완전한 역사’가 된 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세시봉’이다. 나중에는 여기에 70/80이란 것이 붙는데.. 글쎄, 왜 70/80인지.. 아마도 1970~80년대를 말하는 모양.. 하지만 세시봉에는 60/70이 붙어야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아직도 서울의 세시봉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름의 ‘가게’는 전 세계에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주로 식당의 이름에 제일 많은 것 같다. 그 중에는 아틀란타에 있는 세시봉 을 빼어 놓을 수 없다. 이 blog의 제목이기도 하니까. 이곳이 바로 얼마 전에 개업한 ‘김철환’씨의 60/70/80 style 세시봉 음악 경양식 집이다.
며칠 전, 아틀란타 세시봉 70/80-style music cafe.. 두 번째로 가 보았다. 지난 년 말에 진희네 그룹3과 처음 가보았고 2개월 만에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첫 번째 왔을 때보다 분위기가 익숙해져서 그런지 더 여유 있게 몇 시간을 즐긴 셈이다. 처음에 왔을 때 없었던 새로운 음식 메뉴들이 있어서 모두들 그 중에서 골라 식사를 하였다. 이채로웠던 것은 1970년대 우리들에게 익숙했던 ‘경양식’ 메뉴, 특히 큰 접시에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담아내는 수프 (아마도 portage soup이라고 했을 것이다), 함박스테이크 hamburger steak, 돈카츠 don katzu.. 등등 모두 서울 장안 60/80 style로 추억에 어린 것들이었다. 주인 겸 singer는 ‘김철환‘ 씨인데.. ‘소싯적’에 pan flute 프로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그의 연주 record album이 걸린 것도 보았다. 이채롭고 놀라운 것은 그는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수 많은 악기를 연주 ‘했고’, one-man band의 경지가 digital technology를 총동원 한 효과만점의 연기 실력이었다. 그의 vocal도 세월이나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의 가창력을 보여 주었다.
처음 가 보았을 때보다 더 가열된 관심이 생기고 같이 갔던 그룹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가게.. 조금 오래 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요새 한인 business의 수명이 1~2년이 보통이라는데.. 어떨까? 이런 곳이 ‘명소’로 자리를 잡으려면 우선 ‘경제성 사업성’이 절대적인데, 어떨까.. 암만 연기가 좋아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니까.. 나의 생각에는 1) 이곳은 ‘우리 또래를 위해서도’ 오래 지속해야 하고, 2)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또래들이 ‘단골’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전함이 필요하다.. 는 것이었다. 경제성이 맞으려면 기본적인 정기고객이 ‘절대로’ 필요한데.. 아틀란타의 고객덩치가 그것을 가능케 할지는 전혀 idea가 없다. 음식이 약간 pricey하지만 그것이 이곳의 특징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면 문제가 없고.. 70/80 style 을 이곳에 정착시키고 우리 또래의 연령층 이외의 세대들 에게도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는 곳으로 만들게 되면, ‘명소’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Owner/Performer인 김철환씨의 ‘약력’은 자세히 모르지만 ‘조영남’씨와 관계가 있는 듯 했고, vocal보다는 instrument쪽으로 경력을 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vocal실력은 예상외로 ‘열창’에 가깝다고 할까.. 인상적이었다. 가끔 ‘신청 곡’도 받는데 4 가끔 ‘이것은 잘 모르겠는데..’ 하는 솔직함도 있었지만 대부분 큰 차질 없는 그는 그 신청을 받아 주었다.
경제/영업성은 아직 개업한지 1년도 안 되었으니 확실치 않지만.. 현재까지 주위의 ‘여론’을 들어본 바에 의하면 생각보다 빨리 ‘소문’이 퍼지는 것을 알았고, 대부분의 ‘잠정고객’들도 이런 곳을 아틀란타의 ‘명소’로 승격을 시켜가는데 관심을 보였다. 그 정도로 우리 세대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일까? 하지만 들어보면 ‘서울에 가도’ 그런 곳이 ‘별로’ 없다는 말도 있어서.. 어떨까.. 부활절도 끝났으니, 또 한번 그곳을 찾을 때가 다가오지 않았나..
1960년대에 이 곡은 미국에서 상당히 hit여서 Dean Martin같은 ‘유행가’ 가수들도 많이 불렀다. ↩
대표적 인물들: 송창식씨, 윤형주씨, 김세환씨, 이들은 나중에 같은 명동에 있었던 OB’s Cabin이란 곳에서 ‘합창, 중창’을 하기도 했다. ↩
2 주 전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다시 ‘으시시’한 날씨 경보들이 만발을 하더니 결국은 그들의 예보가 정확함을 또 깨닫게 되었다. Never again의 심리적 도움으로 이번에는 꼼짝도 않고 집에 ‘웅크리고 hunker down‘ 있게 되었고 아마도 그런 식으로 이번의 날씨문제도 해결이 되리라..
두꺼운 얼음위에 밤새 내린 눈, 길이 전혀 안 보인다
아침에 예전처럼 늦은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니 방이 조금은 밝음을 느꼈고 아하~ 밖에 눈으로 ‘하~얀’ 모양이구나 짐작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windows blind를 열자마자 찬란한 하얀 빛들이 눈을 찌른다.
어젯밤 잘 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하늘을 보니 아직도 조금씩 하얀 눈이 뿌리는 중이었다. deck rail에는 명암이 뚜렷이 눈의 ‘높이’가 보이는데 족히 2 inch는 될 듯 싶었다. 하지만 2 inch 의 높이는 어제 이미 얼어 붙었던 ice sheet가 더해진 것이어서 아마도 눈은 2 inch보다는 적을 듯 했다. 2011년의 ‘대설’ 이후 3년 만에 보는 ‘설경’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흔치 않은 ‘고드름’을 원 없이 많이 충분히 즐기게도 되었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비록 영상 above freezing 으로 올라간다고 하지만 밑에 깔리 얼음 때문에 차도가 다 녹으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했더니 결국은 오늘도 우리에게 관련된 business는 cancel되는 것 같다. 우리가 관련된 오늘 business는 사실 순교자 성당의 매주 목요일 저녁에 있는 예비자 교리반 봉사가 전부지만 저녁 미사와 더불어 교리반도 취소가 된 것이다. 또 하루 ‘공을 치는, 아니 쉬는’ 그런 날이 된다. 화요일부터 3일째 계속 집에 갇히게 된 것이지만 사실 별다른 choice가 없는 듯 하다.
2주 전의 snow jam(교통 대란)의 기억이 생생한 듯, 이곳 거의 모든 ‘인간’들 ‘꼼짝도’ 안 하고 집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걱정하던 것처럼 electric power에 큰 문제가 ‘아직까지’ 없어서 심심하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또한 예전처럼 ‘어린애’ 같이 신나거나 한 것도 거의 없다. 학교를 다니거나 출근을 꼭 해야 한다면 조금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양 들뜬 기분도 들겠지만 우리는 그런 시절이 ‘다~~’ 지나간 것 같아서 조금은 서글픈 심정도 든다.
매주 화요일은예외 없이 우리부부가 레지오 주 회합에 참석하러 30분 freeway 드라이브로 도라빌에 있는 한국 순교자 성당에 나가는 날이다. 주 회합이 끝나고 곧 이어 정오 미사에 참례한 후 부근 Korea Town에서 가끔 shopping 을 하거나 점심을 먹기도 하고 귀가를 하면 보통 6시 정도가 된다. 돌아올 때쯤이면 보통 rush hour에 ‘걸려서’ 30분 드라이브가 1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다. mass transit system이 거의 없는 아틀란타 Metro인 만큼 우리 집이 있는 곳이 지역적으로 Korea Town과 꽤 멀리 떨어진 탓에 별도리가 없이 치러야 하는 ‘세금’ 같은 것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화요일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1시간이 아닌, 무려 19시간 걸렸던 인생 최악의 드라이브 경험을 한 날이 되었다.
운명의 날,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오전 11시 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일기예보를 통해서 들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모두들 ‘안심하고’ 출근해서 그저 집에 조금 일찍 돌아가면 될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모두들 학교나 직장에 있는 상태에서 시간보다 빨리 내린 눈을 만난 것이다. 이러한 ‘절묘한’ 시간문제 이외에 설상가상으로 당국(주정부, 시정부들)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집에 빨리 가라고 모조리 ‘풀어놓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였다. 아무리 도로망이 잘 되어있어도 차들이 모조리 길로 나온다면.. 불 보듯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닌가? 이 당국자들은 하루 종일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발뺌을 하기에 바빴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예보를 잘 못 들었다고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하기도 했다.
그 비상 퇴근 시간이 점심시간이 바로 지난 때였고, 모든 도로망은 귀가하는 차들로 완전히 묶이게 되었는데.. 여기에 급강하하는 기온 (섭씨 영하 10도까지) 에 쏟아지는 젖은 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교통대란이 시작된 것이다. 얼어붙은 도로에서 차를 그런대로 끌고 가려면 어느 정도 최소한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거의 서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타이어가 traction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 불쌍한 것이 18 wheeler semi들.. 그러니까 tractor-trailer들, 그 공룡 같은 덩치의 고철들이 그런 상태에서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I-285 west@Buford Hwy에서 시작된 19시간 드라이브의 시작
이때만 해도 모든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worst of worst.. 아틀란타 전체 도로망에는 각종 귀가 차량들이 끈끈이 주걱처럼 모조리 jam에 빠진 상태로 서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 중의 최악이 아틀란타의 ‘순환도로’인 I-285 system이었는데.. 바로 그곳에 우리 차 Sonata도 갇혀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후 3시에 출발한 우리 차는 다음날 아침 10시에 집에 도착을 해서 19시간의 귀가 드라이브..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 되었다.
그날 따라 성당에서는 연도와 그에 따른 점심회식이 있었던 탓에 더욱 늦게 출발을 해서 I-285를 타고 보니 그곳은 거의 parking lot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런대로 거북이처럼 조금씩은 움직였다. 비처럼 뿌려대던 진눈깨비가 떨어지는 기온으로 길은 조금씩 빙판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차는 비례해서 더 거북이처럼 기어서 밤 9시경에는 Powers Ferry Road exit 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모든 차량이 완전히 서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에 혼자 있을 Tobey(dog)와 Izzie(cat)이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서서히 그 ‘놈’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변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차의 gas는 거의 바닥이 나고 길은 완전히 주차장으로 변한 상태에서 수많은 차들이 버려지기 시작하고 깜깜한 밤은 무섭게 얼기 시작하고.. 나 혼자가 아니고 연숙도 같이 있는 우리의 차 속은 조금씩 공포감이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0% 완전히 정지 된 I-285 traffic
이제는 별 도리 없이정지된 차 속에서 떨며 밤을 새우게 되었다. 1/4 정도의 gas로 출발한 우리 차는 이제 E(empty) 에서 떨고 있어서 gas를 아끼기 위해서 engine을 끄니 추위가 엄습을 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주위를 보니 모든 차량들이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시동을 끄고 쥐 죽은 듯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차를 ‘버리지’ 않고 그저 ‘구원군’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우리도 차를 버리고 ‘걷자’는 생각을 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난 것이 주위가 평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깜깜한 밤이어서 정말 신변에 위험을 느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가까운 곳에 보이는 건물들.. 호텔.. 주유소 같은 곳으로 간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그것도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아틀란타에서 가장 복잡한 freeway가 차들로 100% 주차장으로 변한 얼어붙는 한밤중의 광경은 그곳에 있어본 사람이 아니면 상상이 가지 않을 듯 하다. 배 고픈 것도 잊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일 급한 것이 bathroom문제였던 것이다. 남자는 그런대로 문제가 없지만 여자들은 정말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 많은 차들의 여자들..어떻게 해결을 했을까… 나의 옆에 타고 있던 연숙도 정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지만 한마디로 별 choice가 없이 해결은 해야 했다. 이런 것들로 며칠 동안 수많은 벼라 별 일화들이 website에 등장하기도 했다.
시동이 꺼진 차에서 무섭게 추웠던 밤을 지새는 기분은 기가 막혔지만 별 도리가 있겠는가? 제설차 준비가 거의 없는 이 지역에서 재빨리 소금을 뿌려대는 구원군이 그렇게 빨리 올 리가 없었다. 동이 트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고요하기만 했다. 모두들 그저 그저 기다리는 모양.. 그러다가 최소한 밝은 밖을 보니 ‘걸어가자’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보이곤 해서 희망을 갖고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가 발이 묶여 있던 곳에서 우리 집까지는 최소한 10 mile 이상은 되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빙판으로 변한 언덕을 걸어가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쪽에 사는 레지오 단원 자매님은 우리보다 먼저 출발을 했지만 역시 어떤 hotel 근처에서 차가 묶여서 그 hotel에서 밤을 지냈다고 했다. 최소한 편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걸어가면 그 hotel로 갈 것으로 정했다.
하지만 차를 버리는 것도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차를 가지러 와야 하고 안전문제도 있지 않은가? 가급적 차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아침 9시경이 되었다. 그런데 앞 쪽에서 무슨 큰 트럭 소리들이 나기 시작하고 우리 앞 쪽의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였다. 드디어 소금을 뿌리는 트럭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서 거북이 속도로 전진을 해서 나아가니.. freeway는 정말 가관이었다. 움직이는 차들이 거의 없이 길가는 완전히 버려진 차들로 즐비한 것이다. 거의 텅 빈 고속도로를 우리는 가고 있었다. 아무리 빙판이 되긴 했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운전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집 앞의 주유소엘 오니 드리어 차의 gas가 바닥이 났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집 앞에는 엄청난 비탈들이 있었지만 역시 차들이 없으니 큰 문제가 없었다. 최소한의 momentum만 유지하면 암만 미끄러워도 control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집에 들어오니 아침 10시가 되었다. 모든 곳에 잠잠한 고요한 아침이었다. 다행히 두 마리 pet들은 잘 견디고 있었고.. 우리는 ‘궁전’처럼 느껴지는 home sweet home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이때처럼 침대의 편안함을 실감한 적은 반생을 살면서 거의 없었다고 할까.. 비록 천재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실수도 무시할 수 없는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되었다. 나중에 뉴스를 들어보니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수 많은 각종 ‘해괴’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무능한 해당 당국과 특히 담당한 사람을 막연히 믿는다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생각이라는 경험도 했다.
이번의 ‘교통대란’의 주 원인은 물론 ‘절묘한 시간’에 도착한 얼어붙는 진눈깨비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첫째는 공식적인 정확한 예보를 무시하고 서로 맞지 않는 지역예보에 의지한 것, 둘째는 주 정부를 위시해서 군소 지역 정부들(이것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많다)이 ‘전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거나 모른 상태에서 속수무책이었고, 모든 것이 거대한 자동차 도로망에 의존하는 아틀란타 수도권의 갖는 특성이 이런 2″도 안 되는 눈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나는 freeway system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 길’을 택할 것이라는 조금은 소극적인 생각과, 자동차 gas가 1/2 이하로 절대로 내려가지 않게 채우고 다닐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더 한가지.. bathroom kit를 차에 가지고 다닐 것도.. 굶는 것은 참아도.. ‘화장실’ 가는 것은 못 참지 않는가?
¶ 12월 1일, 2013년도 레지오 총 친목회 (Legion of Mary, Reunion)가 2013년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의 시작과 함께 멋지게 어울리며 결과적으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본당 내에서 2013년 12월 크리스마스 season의 막을 제일 먼저 올리는 역할을 해냈다. 12월 1일에 성탄의 공기를 느끼기에는 조금 이른 듯도 하지만 요새의 ‘세속적 secular, 상업적 commercial’인 흐름을 보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듯 싶다. 이미 지난 주부터 크리스마스 carol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고 Thanksgiving 날 부터 아예 shopping season이 ‘요란하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친목회 프로그램의 하나인 합창 공연에서 참가자 모두가 빨간 산타크로스 모자를 써서 더 그러한 성탄절의 기분을 풍긴 듯 싶다.
우선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 총 친목회는 결과부터 보면 예상보다 잘 치러 진 느낌을 받았다. 꾸리아에서 공식적이고 전체적인 review를 해 보면 더 자세한 것을 알겠지만 친목회의 진행이 비교적 매끄러웠고, 지루한 느낌도 거의 없었다. 참가자나 연기하는 단원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보며 그런 것을 나는 느꼈다. 아틀란타 지역 한인 성당이 2개로 나누어지며 필연적으로 꾸리아 소속 단원 수가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서 참가자의 수는 아마도 예년에 비해서 ‘많이’ 줄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지역 쁘레시디움 (Columbus, Augusta 같은)에서 장거리의 불편을 무릅쓰고 참가한 것은 보기가 좋았고, 참가 단원들의 참여 태도는 ‘수우미양가’ 에서 아마 ‘우’에 속하지 않았을까?
나와 연숙1은 올해 꾸리아 level에서 이 행사를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며 한가지 각오를 하고 임했다. 그것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라는 조금은 진부한 표현의 각오였다. 물론 결과는 충실하고 진지한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너무나 결과에 집착하며 아무래도 모든 것들이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친목회의 제일 큰 목적이 잘 모르는 단원들과의 친교 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친목회 자체는 불과 1~2시간 정도의 친교시간을 주기에, 도저히 그 자리에서 의미 있는 친교는 힘들다. 게다가 친목회 자리에서조차 평소에 모이고 있는 단원들끼리 모이게 된다는 현실을 알면 더욱 친교는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친목회에서 열리는 각종 프로그램에 서로 소속이 다른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연습, 참여를 하며 그곳에서 시간을 두고 친교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결책이었다. 실제로 각종 프로그램에서 평소에 겨우 얼굴 정도나 알던 단원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 나에게 이 친목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도 조금 생각을 하며 이날을 맞게 되었는데, 아마도 나의 ‘깊어가는’ 나이를 더 의식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도 세월이 깊어 갈 수록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그런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한 ‘최선’을 다해서 참여를 하자는 각오를 가지고 임했다. 특히 대다수가 여성 단원들인 우리 레지오에서 나 같은 남자단원들이 가질 수 있는 외로움, 소외감, 위축감 등등을 어떻게 이런 기회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가도 생각을 했다.
사실 이러한 ‘요새 남자들의 문제’는 이곳만이 아닐 것이고 전반적인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나, TV를 보나, 영화를 보나.. 요새는 여자들만 보이는 것 같고, 남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레지오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사회적, 문화적 흐름을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특히 나이 먹은 남자들에게는 더욱 뚜렷하다.
이런 우울한 남자들을 생각해서 작년 총 친목회 때 의도적으로 남자들만의 시간을 만들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두 남자가 sing-along 을 lead 한 것인데, 결과는 별로였을까.. 올해는 아예 다시 해달라는 요청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목회 2주를 남겨두고 연습 진행상태가 별로였는지 급작스럽게 sing-along team을 다시 만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작년의 2명 남자는 다시 목소리를 맞추게 되었는데 올해는 조금 욕심을 부려서 ‘숨어있는 남자 인재’를 찾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예상을 뒤엎고 3명의 남자를 ‘발굴’ 해 내었다.
이 남자들은 몇 년 동안 그저 얼굴만 간신히 아는 정도였는데 운 좋게 ‘의기투합’이 된 것이고, 이중에 2명은 끝 무렵에 연숙에게 ‘걸려서 등을 떠밀려’ 온 case였다. 그래도 그들도 정말 오랜만에 ‘목청’을 쓰는 듯 신기해하며 동참을 했고 우리의 의도인 ‘친목도모와 즐기자’ 라는 것을 잊지 않고 결국 친목회에서 남자 5명의 sing-along team이 debut를 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은’ 올해 총 친목회의 추억이 될 것이다.
올해도 여흥순서의 사회를 연숙이 맡았는데,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나이도 그렇고, 3년째 계속하고 있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다른 사람을 계속 찾아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저 ‘인재’가 없다고 푸념들만 하는 모양인데, 참 알 맞는 사람이 없기는 해 보인다. 연숙의 부단장 직이 내년 중에 끝이 나기에 그때만 기다리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끝 나도 글쎄.. 작년에는 청년 단원들이 중심으로 강남스타일을 요란하게 멋지게 보여주었는데, 올해는 완전히 스타일이 바뀌어서 엄숙하고 느린 모습의 body worship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많은 단원이 참가한 합창은 기대 이상으로 멋진 화음을 연출하였고, 참가 인원이 적어 고민하던 ‘춤’ team 도 아주 귀엽고 신선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제일 시끄럽고 신명 나고 신났던 것은 역시 우리부부가 다 참가했던 난타가 아니었을까? 이 프로그램은 연습기간과 참여도가 제일 우수했던 것이어서 결과에 상관없이 대 성공을 이룬 case가 되었다. 국악을 전공한 자매님이 열성적으로 2달에 걸쳐서 지도한 열매였다.
이 행사로써 올해 레지오의 주요 행사는 다 끝났고, 이제는 조용히 대림절 4개의 초가 하나씩 켜지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고, 그 후에는 또 한 해를 다 보낸다. 비록 구세주 탄생은 기쁜 것이나 이제는 솔직히 이 나이가 되니 내년 이맘때 다시 한번 친목회에 참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곁들여서 그런지, 한 해가 가는 이 시점이 꼭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즐거움과 아쉬움이 교묘하게 교차되는 그야말로 미묘한 기분의 12월인 것이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레지오 합창 team
베토벤 바이러스, 윤도현 아리랑 – 난타 team
Group Game – 참가자 모두
‘사랑으로‘ , 고 김수환 추기경 애창곡 – finale, 모두가
나는 현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서기로 있고 연숙은 같은 쁘레시디움의 단장인 동시에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의 부단장으로 모두 꾸리아에는 직접 간접으로 깊이 관련이 되어있다. ↩
소까나~ 소까 소까 そうかそうか.. 참 이렇게 일본말이 다정하게 느껴지니.. 이럴 때, 그래, 그래 보다 소까 소까도 잘 어울린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일본을 조금이라도 알고 죽자’ 라는 이상한 느낌에 끌려서 이제까지 거의 7년이 지나고 있다. 비록 몇 년 전부터 조금씩 slow-down이 되고 있고 새로 나오는 드라마 video가 없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 동안 쌓였던 그 수많은 어떤 것은 classic이 되어가고 있을 정도의 좋은 이야기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단어 정도는 알아 듣지만 그 이상은 아마도 무리 무리.. 조직적으로 배울 의욕과 생각도 사실은 없다. 이 정도면 나의 욕구를 채웠다고 생각하니까.. 최소한 이질감과 거부감 없이 그들의 ‘언동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래.. 12월이 벌써 6일로 접어든다.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다음에 눈을 깜빡 뜨고 달력을 보면 분명히 중순을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정말 정말 어떨 때는 한 달이 오래 전의 하루와 같은 느낌이 든다니까.. 60대에서 60마일로 달린다는 ‘병신 같은 표현’이 그렇게 적절한 듯 느껴진다니까.. 조금은 슬프다. 내가 70대를 산다면 10마일이 더 빨리.. 그러니까 한 달이 아마도 8시간 정도의 느낌으로? 와.. 싫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있다. 순리와 진리를..
조그만 폭풍이 지난 듯한 느낌으로 며칠째 시간을 보낸다. 그 폭풍이란 물론 우리 부부가 ‘거세게 개입된’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였다. 성탄의 기분을 내기에는 너무나 빠른 12월 1일에 우리가 제일 먼저 성탄기분의 선두주자인 듯 tape을 끊은 것이다.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정말 이를 악물고 악물고 ‘즐겁게 준비하고 즐겁게 치르자’ 라는 결심을 하고 지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비교적 stress를 잘 조종하며 보냈다. 덕분에 얼굴로만 알던 단원들과 지척에서 어울릴 수도 있었고 특히 남자 단원들이 더 값지게 다가왔다. 전 요셉, 김 빠찌피코, 한 그레고리오 형제 같은 사람들은 처음으로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거기다 작년부터 알게 된 박 대건 안드레아 형제까지 5명이 친목회 lower stage에 서게 된 ‘큰 일’을 한 것이다. 나도 노력했지만 연숙의 pushy함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우리가 얼마나 sing-along을 잘 주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선례를 남겼고, 새롭게 서로들이 만났으니 말이다. 난타 program도 마찬가지.. 우리부부 정말 열심히 참가하고 즐겼다. 거의 2달 한번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으니 최선을 다 했다고 자부해도..
¶ 11월 26일, 이천 십 삼 년.. 이천, 이천, 2000 을 연상하며 문득 아~~ 지금은 2000년 대였지.. 하는 자괴감이 젖어 든다. 왜 천 구백.. 1900 이 아니고 2000인가.. 그러니까 나는 역시 어쩔 수 없이 천 구백이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충분히 오래 산 ‘늙은’ 인간이다.
그것도 11월이 주는 을씨년스런 느낌 또한 나를 움츠려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것도 아주 깊은 11월, 깊도록 깊은 가을의 느낌, 나는 이런 진한 색깔의 나날을 어떻게 감당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작년과 비교하고 5년 전과도 비교하고 심지어 20년 전도 돌아본다. 작년과는 거의 비슷할 듯하지만, 5년 전과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일 듯 하다. 그 때는 전혀 앞도 방향도 잃고 살았고, 지금은 최소한 앞도 보이고 방향도 제대로 잡은 것이다. 물질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이제는 믿고, 믿고 싶은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한 달.. 계속 그런 희망의 심정으로 살고 싶기만 하다.
¶ 겨울 같은 느낌의 올해 가을, 이곳 지방 deep south의 첫 눈발이 예보가 되었다. ‘아주’ 추울 것이라는 북 미주 동부지방 장기예보에 눈에 대한 것은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snow flurries란 말이 나온 것일까? 그것은 역시 하늘에 지천으로 깔린 습기 때문이 아닐까? 기온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가능성이 있는 그 ‘물’이 하늘에 항상 떠 있는 상태가 올해 이곳 기상의 특징이었으니까.. Thanksgiving Day가 이틀이 남은 지금, 차갑게 내리는 비가 오늘 밤, 내일 아침 사이에 ‘분명히’ 눈발이 날리는 날씨로 바뀐다는 것이다. 물론 내려도 곧 녹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늘에서 하얀 ‘떡 가루’ 들이 내려 온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교통상 지장은 제로 일 것이지만 ‘포근한 느낌’을 주는 심리적은 효과는 대단할 듯 하고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요란하게 선을 보이기 시작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공동체적 심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듯 하다.
올해 우리 집의 Thanksgiving Day는 어떨까 했지만.. 역시 조금 게으르기로 작정하고 우리 식구, 작기만 한 네 명만 모이기로 했다. 한 때는 손님들과 어울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무언중에 ‘피곤할 듯’한 예감이 들었는지 그렇게 되고 말았다. 한 때는 손님들과 어울린 적도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손 꼽을 정도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노력을 해면.. 식구가 너무나 적은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우리 식구는 최소한 ‘비행기가 필요 없는’ 곳들에 살고 있어서 궂은 날씨도 큰 상관이 없어서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작년부터는 엄마가 주 요리인 turkey와 stuffing같은 것을 준비하고 아이들은 나머지 side dish들을 모조리 준비한다고 해서 나는 크게 할 일이 없다. 유일한 것이 mashed potatoes 정도일까. 그저 먹어주기만 하면 되니, 조금은 편한 하루가 될 것이다. 물론 조금 힘이 들어가는 dish wash는 주로 나의 담당이지만 그것은 이제 나의 몫이 되었으니 별 다를 것은 없다. 그저 그저, 평화스럽게 올해의 100% 일어난 일들에 감사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만 빌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 아닌가 하는 심정 바로 그것이다.
¶ First white stuffs & ‘Kenny G‘ time again.. 하루 종일 세차게 뿌리던 비가 오늘 아침에 드디어 하얀 물체로 변해서 풀밭이나 deck, 차의 유리창에 얹혔다. 아주 이른 아침 세찬 바람소리에 깨어서 어두운 밖을 살펴보니 무언가 하얀 것들이 보였고 곧바로 아하~ 올해 첫 white stuff임을 알았다. 바뀌어가는 계절의 상징들.. 어찌 이 나이에 조금은 철학적, 더 조금은 신앙적으로 안 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무섭게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소리는 6.25 직후의 서울의 ‘덜 난방 된’ 온돌 방에서 화로 불에 이불을 쓰고 모여 앉았던 어린 가족들의 걱정 없었던 천진난만한 모습들을 연상 시키기에 너무나 충분한 것이었다. 작년 보다 더 빨라진 holiday in the air.. 일 주일 안으로 다가온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 준비 연습의 바쁜 움직임에서 느끼는 이른 12월의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결국은 또 Kenny G season이 온 것이다. 올해 들어 처음 듣는 Kenny G의 saxo.. 너무나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올해 들어서 첫 ‘계절 추위‘가 선을 보였다. 이 지역 장기 예보는 분명히 올해 평균 이하의 겨울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그렇게 쉽게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통계와 확률에 바탕을 둔 것이라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북미주 동쪽의 거의 전부가 늦가을 같은 첫 추위를 느꼈고 이곳 아틀란타 지역도 만만치 않게 빙점에 가까운 온도와 바람까지 동반된 것으로 ‘명절, 휴일’ 기분까지 나게 하는 약간은 반가운 느낌도 들었다.
작년에 애용했던 radiant space heater를 꺼내어 따뜻한 빛과 열을 처음으로 보고 느낀다. 아직도 새파란 숲들이 아주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10월 31일(10월 마지막 날)이 오랜 전통의 Halloween day.. 관련된 색깔은 pumpkin(호박)의 진 주황색이라 역시 본격적으로 ‘떨어질’ 낙엽을 그린다, 이 날이 다가오면 우리 애 들이 어린 시절 동네를 돌며 trick-or-treat 시키던 기억과 이런 것들이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을 느끼며.. 아, 우리가 이곳에서 오래 살았구나 하는 야릇한 감상에 젖는다.
칠흑같이 깜깜해진 아침 6시 45분경 2층의 난방이 가동을 하면 나는 조심스레 어둠 속을 헤치고 나의 서재로 간다. 우리 집 잠꾸러기 10살짜리 개 Tobey(토우비)는 포근한 자기 침대에서 완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자동 프로그램이 된 아래 층 전깃불들로 아래층은 이미 밝지만, 때 맞추어 고장이 난 난방시설(gas furnace) 덕분에 냉장고처럼 냉랭하다. 아래 층의 주인인 7살짜리 고양이 Izzie(이지)는 벌써 활동개시.. 활발히 돌아다닌다.
거의 zombie처럼 어둠 속에서 나는 아침의 즐거움인 hand-drip coffee를 커다란 mug에 담아 서재로 올라온다. 그때부터 8시까지 나만의 소중한 1시간이 시작된다. 이런 routine이 이제는 일년도 넘게 ‘완전히 고정’ 되어서 거의 robot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조금 있으면(11월 3일, 11월 첫 일요일 새벽) Daylight Saving Time(DST, summer time)이 끝이 나며 아침이 조금은 더 밝아지고(대신 저녁은 더 일찍 깜깜해짐), 그것이 시작되는 날 한 시간 더 잠을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어김없이 정직하게 또 계절은 바뀌고 있다.
¶ 지난 주 첫 추위가 왔을 때, 아래층 gas furnace가 문제가 생겨서 ‘가동’을 못 했고 부랴부랴 아래층은 각종 electric space heater들을 동원해서 난방을 하는 귀찮음을 겪었다. 30년 넘은 ‘고물’이 드디어 숨이 넘어감을 느끼며, 수 천불이 들지도 모르는 이것 한번 더 내가 손을 보았는데 다행히 그것의 심장 격인 heat exchanger는 문제가 없었고 fan control system인 전기 쪽에 문제를 발견하고 부랴부랴 그 부품을 order를 해서 오늘 그것이 도착하였다. 요새는 거의 모든 것들이 electronic 그것도 microcontroller를 사용해서 온도를 조정하지만 30년 전에는 ‘완전히 기계식’이었다. digital, analog 이전의 100% mechanical control인 것이다.
이것의 장점은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 옛날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온도를 감지하는 bimetal boom의 길이가 원래의 것 보다 조금 짧았지만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furnace 속의 온도가 4″ 정도의 거리에서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한 시간 걸려 망가진 것과 바꾸어서 power switch를 켜는 그 순간.. 언제나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순간이다. 세상에 100%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랜 만에 난방 system의 blower fan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아마도 최소한 $350은 절약했을 것이다. 이것이 ‘공돌이’ 들이 느끼는 자부심이다.
‘shiny brand new’ furnace blower fan controller
¶ 지난 이틀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제4회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이 열렸다. 몇 년 전에 연숙이 이곳에 가입을 해서 토요일 마다 땀을 흘리며 배워왔고 매년 이맘때 쯤 회원전을 열곤 했다. 나도 따라 다니며 보곤 해서 이제는 아주 보는 것이 익숙해졌다. 나보고 해보라고 하지만 나는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보는 것은 조금씩 눈이 열리는지 많이 나아졌다. 내가 그렸던 것은 50년 전에 그렸던 만화가 전부여서 나는 사실 미술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이런 동양화 쪽은 더 그렇다. 하지만 그리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조그맣게 시작한 이곳 묵향회, 이제는 회원들도 늘어났고 그것에 비례해서 출품 작도 많이 늘었다. 거의 50 점이 넘게 전시가 되었고, 많은 회원들이 ‘호’를 받고 그것을 새긴 ‘인’ 도 찍고 해서 아주 ‘프로’의 맛을 보여준다. 성당에서 전시를 하기에 신부님도 나와서 참관을 했는데, 3년 전의 것을 기억을 하시는지.. 처음보다 너무나 나아졌다고 논평을 했고, 솔직히 처음에는 모두 ‘습작’ 수준이었다고 해서 모두들 웃었다. 이곳 교민 인구가 제법 불어나서 이제는 이런 취미 모임들도 큰 무리 없이 유지가 됨을 보고 참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개막이 되던 날은 새로니, 나라니도 이곳을 찾아 주어서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꾸리아는 가능한 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 축일‘(12월 8일)에 가까운 날에 모든 단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는 연차 총 친목회를 열어야 한다. 이 행사는 필요에 따라 성당 안에서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행사에는 친교의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만일 성당 내 의식 때에 레지오의 기도문을 바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뗏세라의 기도문을 보통 회합 때처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바쳐야 한다.
연차 총 친목회의 참가 범위는 레지오 단원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좋다. 여흥 순서에 곁들여 레지오와 관련된 이야기나 글을 발표하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단원들이 너무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많은 단원들이 참석하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이 행사의 취지는 참석한 단원들이 모두 서로 낯을 읽히고 친숙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원들이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순서를 짜야 한다. 진행을 맡은 사람들은 단원들이 끼리끼리 무리를 이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단원들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있게 되면 레지오 가족의 단결과 우애의 정신을 북돋우려는 이 행사의 취지를 살릴 수 없게 된다.
‘연차 총 친목회’라는 레지오 용어의 ‘원어’는 사실 The Annual General Reunion 이다. Reunion을 ‘친목회’로 번역한 것은 의역(의미를 옮긴 것)이고 그런대로 의미가 잘 전달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reunion이라는 단어의 맛은 역시 ‘오랜 동안 떨어져 있던 친구,동창을 일년에 한번 다시 만나는 행사’ 라는 것이 아닐까? 레지오 활동의 중심점에 있는 꾸리아 산하에는 사실 지역적으로 떨어진 쁘레시디움들도 있을 것이니까 서로 얼굴도 모르기에 일년에 한번 이렇게 ‘모두’ 모여서 ‘친교’를 이루자는 뜻의 행사일 것이다.
우리가 속한 꾸리아1의 사정은 비교적 대다수의 쁘레시디움이 같은 본당 소속이어서 그런대로 얼굴 정도는 조금 아는 정도이지만 그것이 전부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 온 단원들은 더 눈에 잘 띄어서 더 익숙하기도 하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행사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은 각 쁘레시디움 단위로 이루어져서 이것을 통한 통 넓은 친교를 이루기는 무리였다. 그러니까 일년 내내 같은 방에서 보는 사람들과 ‘더 친하게 되는’ 기회만 제공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단점을 알고 작년부터는 쁘레시디움 단위의 프로그램을 완전히 없애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정하고 그곳에 가급적 모든 쁘레시디움이 참여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합창, 춤 같은 프로그램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서로 모르던 다른 쁘레시디움의 단원들도 조금은 알게 되는 기회를 얻는 것이고, 사실 효과적이어서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지내던’ 단원 몇몇을 사귀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작년 12월 초 총 친목회의 추억이 마치 한달 전 같이 느껴지는 가운데 ‘벌써’ 2013년 ‘연말’ 총 친목회를 준비하는 모임이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합창, 춤 그리고 난타의 세가지가 계획되고 희망하는 단원들이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에 나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다른 남자 단원과 함께 듀엣으로 3곡의 노래를 불렀고 올해도 ‘요청’만 들어오면 다시 한번 할까 하는 기대도 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작년에 우리가 한 것이 별로였는지..하는 실망감도 없지 않다. 올해 나는 연숙과 같이 난타 라는 ‘두드리는’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현재까지 4번 연습을 하였다. 알고 보니, 이 ‘난타’라는 것은 부엌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마’를 두드리는 모양이다. 다른 것으로는 ‘통, bucket’ 을 뒤 엎어놓고 치는 것과, 국악에서 쓰는 ‘북’이 있는데 대부분 여성들은 도마와 ‘통’을 치고 나는 북을 치는 그룹에서 북을 치게 되었다. 배경 음악은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경쾌한 것과 우리 민요를 바꾼 ‘윤도현의 아리랑‘인데 박자감각만 있으면 우선은 견딜 수 있는 것이고, 연습하고 나면 기분도 좋았다.게다가 잘 모르는 다른 쁘레시디움들의 단원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시간도 되어서 레지오 교본에 나오는 행사의 의미도 되새기게 되었다.
UPDATE, UPDATE!
12월 1일에 열린 총 친목회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12/9/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