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5월 두째 주말은..

¶  5월 13일.. 2016년 5월 13일 Friday.. 아하 ‘또’ Friday the 13th 인가.. 하였지만 곧 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금요일 13일은 맞았지만 문제는 5월 13일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맞다 바로 Fatima.. Fatima.. Portugal, 1917년 5월 13일인 것이다. ‘묵주의 성모님’으로 일컬어지는 파티마 성모님 정확히 99년 전 5월 13일에 3명의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셨다. 그리고 확고한 역사로도 자리를 잡았다. 당시 Lisbon의 유력 정부기관지였던 the Seculo에 보도가 되었을 정도로 큰 ‘사건’에 속했다.

기록(그러니까 역사)에 근거한 영화나 책들이 많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흥행성’을 의식한 영화들은 너무나 ‘색깔’들이 끼어있다. 근래에 발견한 ‘고서’ 중에 The True Story of Fatima 가 있는데 이 책은 주로 목격자 중 제일 오래 생존했던 Lucia수녀님의 증언에 의한 것이고 발현 당시 다른 일반인들의 증언에 의한 교회의 치밀한 발현승인 과정을 거친 것이라 거의 정확한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인 발현이었지만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일까? 발현 성모님의 모든 예언들이 역사적으로 다 실현이 된 것을 보면 ‘등골이 써늘해 짐’을 느낄 때도 있다. 일관되게 비교적 간단한 요구사항을 요구하시는 성모님의 message들, 과연 쉽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 message 의 중심에서 초 현대의 세속세계는 내가 보아도 ‘너무나 너무나’ 멀어져 있고 무섭게 멀어져 간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성모님은 희망의 상징이다. 희망은 원하면 언제나 자비와 함께 우리가 받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닌가?

 

¶  마리에타 2구역 점심봉사: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구역미사에 이어서 곧바로 구역이 담당하는 ‘의무적’인 순교자 천주교회 본당 점심봉사 날이 다가왔다. 이것이 주는 stress로 구역장을 못하겠다는 의견도 많이 있을 정도로 사실 이것은 큰 일이다. 200여 개 이상의 serving을 예상하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 한마디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서 각가지 knowhow가 축적이 되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공식’같은 것도 있음 직하다.

우리는 advanced age라는 이유로 봉사의 의무에서 excuse가 되고 있었지만(우리가 희망하기에), 이번에는 조금 사태가 다르게 되었다. 구역이 둘로 나뉘고 우리가 속한 ‘반’은 숫자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특히 형제님의 숫자가 안심할 정도가 못되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이번에는 봉사하기로 하고 준비하는 날, 점심 봉사하는 날 full-time으로 일을 하였다. 솔직히, 기분 좋게 일을 해서 그런지 일은 비록 많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 동안 못 했던 미안한 심정도 어느 정도 위안을 받게 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지만 ‘호사다마 好事多魔’라고 하던가.. 모든 것이 끝나고 하얀풍차에 몇 명이 모여서 뒷풀이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즐겁지 않은 뉴스, persona-non-grata 를 접하면서 조금은 흥이 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고 main event자체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이 나서, 이틀간의 service는 우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  감사합니다, 예수님! 메주고리예:  매달 2일에 메주고리예에서 visionary Mirjana에게 ‘공개적으로 publicly’ 발현하시는 성모님, 이제는 게으르지만 않으면 Youtube를 통해서 주로 Italian pilgrim들과 함께하는 group이 찍은 video를 볼 수 있게 되었다. 5월 달은 초부터 무언가 바빠서 깜빡 하고 이것을 check하는 것을 잊었다. 이제야 보니.. 무언가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렸다. 바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하는 우리말 노래가 아니었던가. 비록 영어 accent가 섞였지만 아주 정확한 우리말 노래, 그것도 통역을 전담하는 형제가 유창하게도 불렀다. 어떻게 이렇게 우리말 노래가 불려지도록 주선이 되었을까? 추측에 대한민국도 ‘메주고리예 신심’이 상당해서 이곳 메주고리예에서도 인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완전한 나의 상상, 추측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은 상당히 높을 듯하다.

 

 
성모님 발현 – 메주고리예 2016년 5월 2일

 

¶  The Seekers: I’ll Never Find Another You 1967,  우연히 우연히 이 노래 video를 보게 되었다. 요새 비교적 잊고 살았단 나의 지난날의 추억이 나를 아득~하게 만든다. 나에게도 그런 꿈같던 시절이 있었지.. 하는 조금은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나만의 추억들.. 추억의 얼굴들.. 이런 것들이 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것, 특히 ‘유행가’와 연관이 되어서,  뇌세포 깊숙한 곳에서 꺼떡없이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옛 유행가를 그렇게 아직도 좋아하나 보다.

오늘 본 것은 Australian vocal group, The Seekers의 경쾌한 country style ballad ‘I’ll Never Find Another You‘. 가사야 큰 의미가 없지만 이 노래의 lead singer의 목소리가 이 노래의 tone과 style을 그렇게 classic으로 만들었나 보다. Judith Durham, 바로 이 그룹의 간판 격 ‘청순한 tone’.. 몇 년 뒤에 미국의 The Carpenters의 Karen Carpenter 가 바로 이런 독특한 음성의 소유자였고 역시 그녀의 모든 노래들, 주옥같이 역사에 남는다.

이 모두 1960년대 말 경이었다. 그 시절, 그 시절, 어떻게 time travel을 꿈 속에서라도 할 수 있을까? The Seekers의 경우, 그 lead singer, Judith Durham의 얼굴과 자태가 내가 한때 ‘좋아했던’ 어떤 아가씨와 그렇게 닮았다. 키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그 때의 그 노래가 그래서 그렇게 그리운가 보다.

 

 
The SeekersI’ll Never Find Another You – 1967

 

또 하나의 성체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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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7일, 폴란드 Poland 에서 2년 전에 발생한 성체기적 Eucharistic Miracle 이 공식적인 교회(현지 교구, bishop Zbigniew Kiernikowski 주교) 의 승인을 받았다는 뉴스가 catholic blogger, Philip Koloski 의 보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내가 이 소식을 접한 것은 National Catholic Register newsletter 를 통해서였고, 따라서 그것의 source인 website를 통해서 뉴스의 전부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성체기적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이 비교적 간단히 보도되었다.

2년 전, Poland의 Legnica 교구 본당에서의 일이다. 성체 분배과정에서 축성된 성체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졌고, 곧바로 다시 집어 올려서 물이 들어있는 그릇에 다시 담겨졌다. 곧바로 성체에서 빨간 흔적들이 나타났다. 법의학 전문가들이 이 성체를 과학적으로 분석을 하니: 그 성체 부스러기 fragments 들은 사람 심장 근육의 조직과 비슷한 것 cross striated muscle로 판명이 되었다. 이 분석은 또한 이 조직, 조각은 사람, 인간의 것이고, 아주 고통을 느낀 그런 것이었다.

 Philip Koloski의 성체기적에 대한 논평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의 ‘기적’이 예전의 것과 다른 것은 예전 것들 (예를 들면 Miracle of Lanciano)은 성체가 축성이 되는 과정에서 피로 변하거나, 축성을 하는 신부사제의 믿음이 부족할 때 변하는 것 들이었다. 이번의 case는 성체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생긴 것이니.. 이것은 ‘취급 부주의’에 의한 것이다. 이번의 기적은 우리가 성체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정말로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그에 맞게 조심해서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교훈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성체가 예수님의 ‘고통 받았던 몸’이라는 사실을 잊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에 의한 예수님의 message는 아니었을까?

나는 이 news를 접하며 또 생각하게 된다. 물론 ‘교리적’으로 분명히 성체는 성체,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안다. 최소한 머리로는 배웠고 인정하고 믿고 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고해성사와 더불어 이 가톨릭 전통 교리는 나를 항상 더 고민하게 하고 더 생각하게 한다. 영성체를 할 때마다 겪는 고민과 갈등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집중적인 묵상을 하며 준비한 영성체에는 어렴풋이 강한 느낌이 온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은총인가? 일단 믿는다고 ‘선택’을 한 이상 믿고 싶고, 일단 믿음의 문지방을 넘으니 이런 ‘성체기적’을 믿고 싶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근래에 나에게는 작은 기적이다.

Divine Mercy, Harbor Freight

Divine Mercy.. 하느님의 자비.. 작년 말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께서 자비의 희년, Divine Mercy Jubilee year를 선포한 이후 ‘하느님의 자비’라는 말을 참 많이 듣게 되었고, 급기야는 ‘자비의 주일’이 내일로 다가왔다. 사실 자비의 주일 Divine Mercy Sunday는 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St. John Paul II께서 2000년 부활절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폴란드 출신으로 성인 품에 오른 성녀 파우스티나 께서 생전 1930년대 에 개인적으로 발현하신 예수에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주위의 의심과 질시를 견딘 그녀가 남긴 일기 ‘자비는 나의 사명’에 그 예수발현과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지만 그녀 생전에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고 살아 남는가.. 그녀의 ‘동족’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끈질긴 노력으로 모든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었고 세월이 갈 수록 이 ‘자비의 신심’ 열기는 높아만 가고 있고 현 교황은 급기야 ‘자비의 해’까지 선포를 한 것이다.

오늘 Vatican YouTube를 보니 자비주일의 ‘전야’라고 할 수 있는 성대한 기도집회가 베드로 광장에서 열리는 것을 본다. 엄청난 군중이 그곳에서 성녀 파우스티나를 기리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생각을 한다. 하느님의 자비란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하면 ‘사랑’이란 말이 먼저 떠오르고, 그것에 비한 것일까.. 하느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낸 자비심을 보여주신 것일까? ‘자비는 나의 사명’이란 성녀 파우스티나의 일기를 보면 하느님의 자비는 원하기만 하면 주신다고 한다. 이것도 은총의 하나일까, 아니면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일까? 그러면 예수님 부활이란 것도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자비의 극치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구약시대, 유다인들에게 그렇게 무섭던 하느님이 어떻게 예수시대에 와서 자비의 하느님으로 변하셨을까..

 

¶  오늘 아침에 벼르고 벼르던 shopping을 ‘혼자서’ 하였다. 오랜 동안 Internet으로 shopping을 했던 tool retailer, Harbor Freight Tools, 몇 년 전에 서서히 이곳에 하나 둘씩 retail store가 생기더니 요새는 엄청난 기세로 이곳 저곳에 생기고 있는 ridiculously ‘low’ price tool retailer, 이곳은 사실 나를 ‘살려준’ 곳이다. 이곳이 없었으면 나는 pro들이 쓰는 tool들 하나도 못 샀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짐작에.. 어떤 Asian immigrant가 Chinese source와 ‘결탁’해서 직수입한 junk tool들을 파는 곳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99.9999% Made in China는 분명히 맞지만, 우려한 대로 직수입해서 그대로 파는 방식이 아니고 이곳에 따로 Quality control 을 책임지는 lab을 만들어서 나름대로 품질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Owner도 white 미국인이지만, Home Depot와 같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싼 것이 좋은 것‘이란 철학으로 밀어 부치는 경영철학.. 싸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것.. good enough.. 철학이다. 사실 Home Depot에가서 쓸만한 tool들을 보면 눈이 나올 정도로 비싸기만 한다. 전통적인 미제 품질을 고수하기에 그럴 것이다.

문제는 그런 것들.. pro들 에게 좋지만 weekend handyman같은 사람에게는 overkill인 것이 태반이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weekender 나 조금 돈이 없는 pro들을 겨냥한 것이다. 얼마 전에 드디어 고장인 난 (바람이 새는) 4-galllon air compressor를 대신한 것을 찾던 차에 오늘 가서 직접 만져 보기도 하니 참 감개무량하기도 했다. Internet으로 order하면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이곳의 위치가 사실은 편한 곳이 아닌 north Cobb, Kennesaw 라서 조금은 불편하지만 오늘 가서 본 인상이 괜찮아서 급하고 덩치가 큰 것들은 이곳에 와서 ‘만져보고’ 살 생각도 했다.

무거운 성 금요일.. 어쩔까?

40일의 사순절 내내 잠재적으로 머리에 그려지던 광경, 성 목요일 최후만찬, 세족례, 뒤에 어두운 대성전에 앉아 새벽 1시나 2시까지 수난감실 성체조배 시간을 기다리던 나의 모습, 아니 우리의 모습들.. 어김없이 그 시간은 다시 우리를 찾아왔고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Good Friday의 답답하게 쩨쩨할 만큼 조금의 비를 뿌린 대기는 답답한 느낌만 주며 다시 ‘더운’느낌을 예고하는 내가 싫어하는 시간을 예고한다.

지난 2년간의 이 성삼일은 너무나 fresh하고 holy한 느낌을 주었기에 올해는 은근히 기대를 너무나 하였는지.. 역시 expectation game에 내가 눌리고 지고 있는 느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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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성금요일 아침, 이날 새벽 1시~2시의 수난감실성체조배를 ‘무사히’ 마치고 조금은 피곤한 몸으로 늦은 잠을 자고 ‘제시간’에 일어나서 쓴 모양이다. 성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부활절 미사를 예상하며 쓴 글이었지만 끝맺음이 없었다. 올해는 이렇게 조금은 무언가 끝맺음에서 문제가 있는 모양인가?

이제 성삼일도 일주일이나 훨씬 지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3월도 지나고 4월이 넘어가고, 내일은 4월 3일 Divine Mercy Sunday까지 코 앞에 다가왔다. 어쩌면.. 어쩌면.. 나는 놀라고 놀라고 놀란다.. 이렇게 세월이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68 마일의 시간 흐름인가.. 아니면 요새 나의 생활 style이 그렇게 느끼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나 정도의 인생을 살았으면 ‘모두’ 그렇게 느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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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성삼일..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기대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근래 사순절은 거의 매년 나에게 무언가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고.. 그만큼 나도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다. 오늘 식사를 같이 하면서 연숙이 한 말을 다시 음미한다. 나의 요새 모습이 오래 전에는 정말 기대할 수가 없이 살았다고.. 절망적인 나의 모습을 보며 사실 큰 기대를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물론 기분이 좋아짐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도 이런 나의 현재 모습을 나의 지난 자신이 자꾸 보며 놀라는 것을 나는 그림으로 그릴 수가 있다는 사실이 더욱 재미있다. 어떻게 이렇게 내가 변할 수가 있었을까? 놀랍다. 놀랍다.

올해의 성삼일은 사실 성공작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었다. 부활 성야미사 토요일 것..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무엇이 나를 ‘미치게 화나게’ 만들었나? 우선 답답하고 숨막힐 듯 더운 공기, 성전이 그렇게 느껴져서 나는 괴롭기만 했다. 그렇게 오랜 미사는 은근히 예상은 했지만.. 나는 우선 답답했고..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요셉’이라는 남자.. 이렇게 표현하는 나를 용서하기를.. 아니 그 인간은 나와 무슨 연고가 있는지.. 참.. 보게 된 세월도 꽤 오래 되었지만 어쩌면 그 ‘인상’은 그렇게 나를 차갑게 만드는 것일까? 좋게 생각하려 무던히 애를 쓰기도 했지만 그 ‘묘하게 차가운’ 느낌의 얼굴과 행동을 나는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날 미사 전에 만났을 때의 무표정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얼굴표정은 아직도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 오래 오래 전.. 나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듯한 ‘꼰대’들의 모습을 나는 다시 떠올린다.

그렇게 시작된 부활성야미사를 나는 완전히 망친 것처럼 느껴졌다. 옆을 보니.. S 형제의 딸.. Mary .. 이미 나의 가슴은 닫히고.. 그 애의 무표정한 모습이 나를 다시 불쾌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나는 그날 밤 ‘작은 악마’에게 시달린 꼴이 되었고.. 다음 날 아침 나는 ‘근세사 처음’으로 부활절 미사를 빠지게 되었다. 반항적인 자세로 미사를 빼먹은 것이 끝내 나를 슬프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성모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안녕, 보나 자매님..

보나 자매님과의 ‘생각하기 싫었던’ 작별시간은 시계처럼 어김없이 왔고 사랑하던 가족, 열심히 보살피던 레지오 도우미 자매님들과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던 연도, 장례미사, 운구, 장지동행 등이 모두 큰 차질 없이 끝났다. 허탈감, 피로감, 아쉬움, 슬픔 등이 뒤섞였던 며칠이 오늘로 다 막을 내렸다. 끈질긴 기도와 몇 개월에 걸친 레지오 ‘도우미’ 자매님들의 정성스런 방문도, 끊임없는 카톡의 chatter도 오늘로 다 끝이 났다. 또 한 명의 영혼이 저 세상, 하느님의 영역 domain 으로 간 것이다.

언제였나.. 약 1년 반 전 한참 찌듯이 덥던 한여름이었나.. 그 보나 자매님을 처음 만났던 것이.. 하 미카엘 본당신부님과 연숙이 보나 자매님 댁 병자성사 주러 처음 방문했었고 그 때부터 우리 둘의 비 非 규칙적인 봉성체 방문이 시작되었다. 병자같이 않게 항상 재잘거리고 명랑하고 지나치게 순진하게만 보이는 ‘젊은’ 자매님이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치명적’인 두 가지 병고를 10년도 훨씬 넘게 짊어지고 살았는지 솔직히 상상하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본인은 물론이지만 가족들의 견디기 어렵게만 보이는 간병 노고도 너무나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그런 상황,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어떨까? 자매의 남동생까지 몇 년 전에 병으로 타계를 했다고 들어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굳건한 믿음을 가진 어머님이 계시지만 가까이 살지를 못해서 그저 전화만 하시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모든 간병은 남편 형제님과 남매 자녀가 운명처럼 여기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욥기가 생각이 날 정도로.. 왜 이 영혼들에게 이런 고통이 왔을까..

이 요한 본당신부님의 push로 레지오에게 정기 환자 방문 ‘도우미’ group이 3개월 전에 구성된 이후 운명하던 날까지 매주일 2~3회 ‘도우미 자매님’들이 정기적으로 방문, 말동무와 간단한 식사 등을 보살펴 주었다. 금전적인 도움이 금지된 레지오의 봉사는 아무래도 ‘신앙대화’, 그러니까 영혼을 간호하며 돌보는 일인데, 그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이 자매님.. 절대로 죽음을 정면으로 대하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언급이나, 대화를 못했던 것이다. 조금은 예외적인 case라고도 생각이 되었지만, 생각을 해 보니.. 왜 안 그렇겠는가? 쉰 살도 안 된 나이에 쉽게 죽음을 대할 용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급적 ‘저 세상,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대화를 하려 했지만 그런 approach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배운 기회가 되기도 했다.

거의 단장 급의 간부 자매님들로 구성된 팀이었지만 모두 다른 인생, 다른 기술, 다른 성격을 가진 관계로 항상 매끄러운 teamwork은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참 ‘멋진 노력’을 했다고 나는 보았다. 운명 시에 신부님도 재빨리 모셔와서 보나 자매님 정식으로 사제의 전대사를 받으며 평화스럽게 임종을 했다 (우리는 traffic jam에 길이 막혀서 2시간 뒤에나 도착을 하였지만.) 관심을 많이 쏟으신 관계로 신부님의 ‘다정스런’ 장례미사도 잘 끝날 수 있었다.

오랜 기간을 예상할 수 없는 중병이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느끼는 것..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놀라움.. 암만 짐작을 해도 누가 운명의 정확한 순간을 알 수 있겠는가? 하느님만이 아신다고 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표정으로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 노력은 참 눈물이 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주위의 가족들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안도감도 어쩔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동안 정이 들었던 자매님.. 숨겨놓은 눈물을 더 이상 감출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자매님의 영혼, 평화로이 받아주소서..

 

 

Nearer, My God, to Thee – André Rieu

 

Jubilee of Mercy at Monastery

(Extraordinary) Jubilee of Mercy, (특별)자비의 희년 喜年 2016년 (2015년 12월 8일 부터 2016년 11월 20일까지) .. 작년 말에 교황 프란치스코  Pope Francis 께서 발표했던 것, 올 들어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의 ‘화두 話頭 talking point’ 가 되었다. 처음에 이 ‘뉴스’에 접했을 때 나는 그저 덤덤하기만 했다. 그렇게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비의 희년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고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일까?

솔직히.. 몇 년 동안 ‘혼신을 다해서’ 나는 ‘한때 거의 버렸던’ 가톨릭 믿음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이제는 자신까지 얻었다고 조심스런 안심까지 했지만, ‘이런 생소한 말’들에 접하며 다시 ‘나는 역시 아직도 무식하구나1‘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옴을 느낀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는지 확실치 않은 이런 ‘희년’이란 말도 그렇고 게다가 ‘자비의 희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거기다 ‘전대사 全大赦 indulgence’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모두 들어보았던 단어들이지만 확실한, 자세한 의미는 사실 나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 어떤 글, 사진에서 고 김수환추기경 사진의 설명에, ‘2000년, 대희년 great jubilee 의 추기경’이란 말을 기억한다. 이 ‘대희년’이란 또 무슨 말인가? ‘큰 희년’이란 말인데..

이러한 나의 ‘교리, 전승, 가톨릭 신심 문화에 무식한 배경’ 속에서 올해 ‘진짜’ 희년의 소식을 코 앞에서 접한 것이다. 어쩔 것인가? 예전처럼.. 속으로 ‘아~ 그렇구나..이런 것이 있었구나~’ 정도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이것들이 무엇인가, 더 늦기 전에 한번 알고나 죽자’하고 ‘무조건’ 덤빌 것인가? 결과적으로 근래2 나의 mottos가 된 ‘It’s now or never, don’t think twice, don’t look back‘를 다시 한번 발동해서 나는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알아보는 (study) 노력을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그 노력의 백미 白眉 는 3월 14일, 화창하고 써늘했던 조용한 월요일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단원님들(2쌍 부부 포함)과 함께 방문했던 아틀란타 교외 Conyers에 있는 Holy Spirit Monastery ‘자비의 문 doors of mercy‘ 통과에서 이루어졌다.

 

Conyers 수도원 '자비의 문'

Conyers 수도원 ‘자비의 문’

 

이번 우리들의 ‘Conyers trip 쾌거’는 사실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쁘레시디움차원 ‘공식 활동’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지만 대다수의 찬성에도 힘을 입은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새롭다. 또한, 이번 기회에 나는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자비의 희년, jubilee of mercy의 반포배경과 그 이전에 있었던 크고 작은 희년 들의 역사적 배경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또 하나의 ‘무식 ignorance stupid point’가 사라지는 기회가 되었다.

 

평화스러운 수도원

평화스러운 수도원

 

이번의 자비의 희년은 Extraordinary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그 이유는 정기적으로 25년마다 찾아오는 희년과 달리 특별하게 제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특별 자비의 희년은 로마 바티칸 만이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각 교구마다 지정된 성전, 역사 깊은 성당에 ‘자비의 문’이 설정이 되었다. 이 자비의 문을 통과하면 전대사 全大赦를 받을 수 있는데 부수 조건은: (1)  교황님의 지향기도, (2) 고해성사, (3) 영성체, (4)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함, 등이다.

나는 이제까지 이런 ‘교황이 선포하는’ 전대사 같은 것에 큰 의미나 흥미를 느낀 적이 사실 없었다. 솔직히 핵심 교리적인 것 빼놓고는 믿어지지도 않았던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교리의 한가지는 믿고 다른 것은 안 믿는다는 것 cafeteria Catholic 은 어불성설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믿으려면 다 믿고 안 믿으려면 차라리 믿는다고 ‘까불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이야 말로 ‘무조건’ 믿는다. 전대사를 받는다면 그야말로 이제까지 ‘쌓였거나, 남아있는’ 나의 죄는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간단하다.

생애 처음으로 전대사를 받은 우리들, 반응은 확실치 않았지만 우리는 조금 남들과 다른 ‘양도’를 하였다. 전대사를 남에게 주어도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에 알게 되었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님께 양도를 하였고 연숙은 작년에 선종하신 배 베로니카 자매님께 양도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나와 연숙은 우리 자신이 전대사를 못 받은 셈이 되었나.. 하지만 상관이 없다. 이것이 우리를 더 기쁘게 한 것이니까…

3월의 어느 평화스러운 월요일, 신앙과 사명감으로 뭉친 레지오 단원 그룹이 이렇게 자비의 해에 선포된 자비의 문을 ‘통과’ 하려고 유서 깊은 Conyers의 수도원을 방문한 것,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정오에 있는 수도자들의 기도의식에도 참여를 했고, 준비해 간 음식으로 한적한 곳에서 점심식사를 즐긴 월요일 하루, 너무나 좋았다.

  1. 나 말고도, 이런 가톨릭 전통, 신심들에 무식한 교우들 참 많이 있을 것이다.
  2. 최소한 6년 전부터, 특히 레지오를 시작하면서부터..

Ash ash.. Wednesday, 2016

Ashes-2016

 

2월 10일, Ash Wednesday 2016 올해 재의 수요일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예년처럼 Holy Family CC 아침 9시 미사엘 가서 이마 위에 재의 십자가를 받고 왔다. 올해는 느낌이 사람이 예년에 비해서 더 많아진 듯 했다. 느낌인가.. 사실인가.. 무언가 가톨릭 교회의 근래 움직임이 활발해 진 것은 아닐까? 냉담자를 교회로 돌아오게 하려는 대교구의 운동, 물론 바티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지만.. 전 같지 않게 나는 이런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내가 변했다는 증거 중에 하나일 것이다.

올해의 40일은 어떻게 보내나.. 매년 생각하는 것들.. coffee를 줄이자.. 잠을 줄이자.. 같은 것은 이제 ‘촌스럽게’만 보인다. 더 깊은 것을 찾고 싶다. 눈에 안 보이는 것, 나의 깊은 속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싶고, 더 높은 것으로 바꾸고 싶고.. 어떻게? 2년 전의 사순절, 1년 전의 사순절과 비교하기도 한다. 2년 전.. 다급하지만 무언가 이루어 질 것, 성모님의 손이 나를 꼭 잡았다는 느낌 같은 것.. 결국은 그 해 9월에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들은 사순절에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작년도 마찬가지.. 비록 첫 산은 넘었지만 두 번째의 미지의 산을 기다리던 사순절이었다. 다급한 것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올해는 어떤가? 성모님의 손에 끌려 (낯 가려운 표현이지만..) 두 번째의 산을 다치지 않고 넘었다. ‘그것’과 ‘저것’ basics들이 정말 그림같이 해결이 된.. 그런 기적의 성탄을 맞게 해 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홍해바다를 건넌 심정을 잊으면 안 된다. 올해의 사순절은 이런 배경으로 묵상을 해야 한다. 우리의 앞에 있는 산은 무엇이며, 그것을 맞는 의미와 사명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며 ‘그날까지’ 하느님 앞으로 갈 것인가?

冊,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김정훈 부제 유고집, 1978
김정훈 부제 유고집, 1978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서정적인 시를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사실 어떤 ‘유고집 遺稿集’ 책의 제목이다. 언뜻 들으면 “산에 가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하느님을 생각하는 나” 정도로 연상이 되기도 하지만 과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주일 전에 아틀란타 도라빌 소재 한인 천주교회, 순교자 성당의 ‘성물방 책 코너 book corner’엘 들렸다가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다. 이런 것들이 우연일 것이다. 전혀 계획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연이 정말 우연일 chance는 과연 얼마나 될까?

평소에 보통 나는 성물방엘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예외적으로 10시 반 미사에 맞추어 성당 주차장 교통정리 봉사를 하게 되어서 아침 8시 30분 미사에 참례했어야 했고 12시 45분에 예정된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때문에 ‘장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성물방에 있는 book corner에 들린 것이고 그곳에서 이 책을 잠깐 보고 대출을 받게 받게 되었다.

Scan10020-1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 유고집 저자의 이름, 김정훈, 김정훈 베드로 부제 副祭.. 나의 거의 60년 된 깊숙한 곳 뇌세포에서 이 오래된 이름을 찾아 내었다. 1959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6학년 동창이었다. 이 책을 대출 받으며 곧바로 나는 옆에 서있던 연숙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이 책의 제목을 알아본 것이다. 1990년 쯤 아틀란타에 이사 와서 처음 살던 Norcross의 직장 바로 근처에 있던 Four Seasons Apartment.. 우리 살던 아파트 건물 아래 쪽에 한국 상사직원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두 딸이 곧바로 우리 애들과 학교를 같이 가게 되었고 알고 보니 그 집 엄마가 나의 중앙고 동창 박우윤의 여동생이었다. 그 집에 책이 많이 있어서 연숙이 가끔 빌려보곤 했는데.. 그 당시 연숙이 그 책을 보고 ‘나와 비슷한 나이로 일찍 타계한 아까운 젊은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까물거리는 기억..  그 당시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김정훈’이란 나와 동갑인 신부의 이름이 ‘나의 재동국민학교 동창’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책은 곧바로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연숙은 그 책을 읽었을 것이다.

고 김정훈 부제
고 김정훈 부제

이런 인연으로 이번에 다시 나의 ‘손에 들어온’ 이 책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 어쩌면 재동 동창생 김정훈을 다시 발견하게 될 기회라는 ‘사명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되었다. 김정훈, 김정훈 부제.. 1960년 재동국민학교 졸업, 1966년 경기중고교 졸업..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인스부르크 대학교 유학, 부제 서품, 1977년 6월 2일 예기치 않았던 등산길에서 조난 사.. 김수환 추기경까지 참석예정이었던 사제 서품을 바로 코앞에 두고 선종.. 흡사 작은 ‘개인 서사시’ 같은 느낌.. 흠~ 30세에 선종..이란 말이 나의 코를 찡~~하게 만든다. 어찌 채 날개도 못 펴고 그렇게 갔단 말인가?

내가 아는 김정훈은 사실 단편적인 평범한 오래 된 동창의 기억 정도다. 나와 ‘친한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이라는 정도지만 이 ‘친구’는 조금 더 기억이 나는 것이.. 6학년 때 ‘아마도’ 전학을 왔던 것 같다. 학년이 시작되고 중간에 들어온 case였던가? 당시 우리 반은 6학년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애들이 몰려있었는데.. 당시 담임 박양신 선생님 왈: ‘김정훈은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말로 소개를 했던 것. 아니나 다를까.. 이 애는 기기 막히게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말이 별로 없었고.. 그러니까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겸손’하다고 할까? 그것이 전부였다. 말썽을 피우지 않으니 크게 기억할 사건이 없는 것이다. 우리 반에는 당시 ‘경기중 지망’ 수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집안들이 떠들썩하던 치맛바람이 아니면 아이들이 그다지 겸손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 김정훈은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경기중학교에 간 것이다. 그런 사실만 나중에 알았고 곧 잊었는데.. 중학교 당시 나는 이 친구를 서울 낙원동 파고다 공원 (일명 탑골공원) 수영장 앞에서 ‘멀리서’ 보았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으로 들어가던 모양.. 그 이후로 나는 김정훈을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다시 이렇게 불현듯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죽은 모습’으로…

재동학교 앨범사진
재동 앨범사진

연숙이 처음 이 책을 대하면서 아주 인상적이었던지 나에게 몇 번 언급을 하긴 했지만, 저자 김정훈이 나의 재동학교 동창인 김정훈이라는 100% 확신도 없었고 신부지망생이었다는 말도 나에게는 가슴 가까이 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그만큼 성소 聖召 란 말의 느낌도 나는 피하고 싶었던 ‘마음과 가슴이 황폐하던’ 기나긴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주 아주 달랐다. 두말없이 그 책을 ‘2주 대출’을 받아왔고 관심 있게 이리저리 요모조모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김정훈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의 버릇인 ‘난독’으로 거의 한번은 읽은 듯하고 이제는 조금은 체계적으로 읽어볼 까.. 현재의 느낌은 김정훈의 30세가 되어가던 그 당시 그의 생각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너무나 애와 같은 생각으로 살던  나 자신을 보았다는.. 숨길 수 없는 사실 하나다. 아무래도 하느님을 이미 찾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세를 나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참 너무나 차이가 나는 30세까지의 우리 둘의 인생이었다.

Stormy Christmas, misc..

¶  Unseasonal Christmas, 밤새도록 천둥과 번개, 폭우가 오락가락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성탄 eve 전날이 아닌가? Stormy holiday, 분명히 심상치 않은 성탄의 기분을 주지만, 문제는 이 stormy 란 것이 겨울이 아닌 여름, 그러니까 ‘열대성 tropical‘이란 사실이다. 이것도 몇 년 만인가? 기억에 3~4년 정도 전 이 맘 때였나? 맞다.. 2012년이었다. 그 때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풍우 속에서 ‘처량하게’ 가족 모두가 극장엘 가서 Spielberg의 Lincoln영화를 보았다. 왜 그랬을까? 절대로 포근한 추억이 아닌 것이다. 최소한 나의 style은 아니었다.

가족을 위해서 나갔다는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것을 보면 싫은 추억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unseasonal holiday은 싫은 것 중에 하나다. 하지만 꼭 그럴까? Christmas란 것이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 몇 초 정도라도 생각을 하며 보낼까? ‘집단’ 군중심리에 밀려서, 무슨 zombies같이 ‘shop, shop, shop, 줄을 서서’ shopping이나 하는 지독히 세속화 된 크리스마스.. 기다림(advent)이 내일로 끝난다는 단 하나의 희망, 그것이 나를 위로하는 것이 되었나?

 

¶  며칠 전 일요일 저녁에 ‘세대 차를 뛰어넘는’ ‘100% 비공식’ 순교자 성당 구역 ‘친구’들의 간단한 저녁식사와 간담회가 있었다. 나의 레지오 협조단원이기도 한 ‘다多 차원적’인 host 형제님, 무섭게 바쁜 생활에서 틈을 내어서 이렇게 ‘마음이 맞는’ 형제, 자매들을 초대한 것 감사를 안 할 수가 없다. 비록 같은 구역에서 만난 사이지만 이야기들은 구역 politic을 초월한 것들, 개인적인 것들, 신앙적인 것들로 아주 화기애애하고 유익한 것들이어서 집을 나올 때 마음이 아주 가벼웠다.

어떠한 구역모임이 “이상적인, 본당이 바라는 모습”일까.. 이런 것도 허심탄회 虛心坦懷 하게 다루어졌고, 무언가 meaningful correction의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는데 의견이 모아졌지만, 필요 이상의 ‘논쟁 성’ 대화는 아니었다. 이런 민감할 수도 있는 사안은 ‘순리’란 것에 맡기는 것도 좋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새해부터는 우리 구역도 조금은 “inclusive, faithful, ecclesiastical 한” 그런 쪽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이고, ‘잘 될 것’이라는 가느다란 희망도 가져본다.

 

¶  Busy busy Tuesday: 우아.. 이렇게 어깨에 천근만근 무게를 느끼며 보냈던 화요일이 있었을까? 레지오 회합으로 시작되는 화요일은 주로 봉성체로 끝을 내고 거의 저녁때 귀가하는 일정인데 이번 화요일은 그것을 넘는 일정들이 꽉~~ 차 있어서 그 전날에는 심지어 심한 stress까지 느낄 정도여서 왜 이렇게 schedule을 잡았나 하는 후회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 좋은 것들’이란 100% 확신이 있기에 주로 ‘don’t think twice, don’t look back, just say yes‘란 말만 되뇐다.

평소의 일정에 오늘은 ‘성탄 판공성사, 신부님 면담‘, 냉담교우 형제와 점심식사 에다가 저녁에는 친지들과의 Christmas dinner party까지 겹쳤다. 조금은 아찔한 일정이었지만 끝났을 때의 ‘날라갈 듯한 기분’을 미리 그리며 나를 달래기도 했다.  판공성사는 고백소에서 줄을 서서 해도 되겠지만 언제나 그것은 무언가 미흡한 뒷맛을 주기에 올해는 따로 면담 식으로 하고, 냉담하고 있는 ‘아오스딩, Augustine‘ 형제까지 불러 점심을 하고 같이 성사도 보게 되었다. 몇 년 만에 이런 기회를 갖게 된 이 형제와 조금은 깊은 대화를 하려 했지만 의외의 불청객이 있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 형제님, 기나긴 냉담을 하고 있지만 항상 나의 기도 속에 있기에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굳게 믿는다. 고해성사의 ‘백미 白眉’는 역시 Matthew Kelly 1의 말처럼  ‘지난 세월의 때와 먼지’가 씻겨나가는 홀가분한 뒷맛이 아닐까?

저녁에는 올해 새로 이사를 한 C 사장, 나이는 한참 밑이지만 우리 ‘동년배’ 그룹에서 당당히 끼어서 오랜 교분을 유지했던 Ohio State 동창 후배, Riverside Drive에 있는 멋진  upscale 집을 찾아가서 늦은 저녁 시간을 즐겼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고 자칭하는 이 그룹은 뒤늦은 나이에 모든 것들이 잘나가게 되는 case여서 나에게는 조금 미묘한 감정이 교차됨을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오~랜 ‘친지’들이 아닌가?

 

¶  ‘갑자기’ 커진 우리 자비의 모후 레지오 쁘레시디움, 비록 새 단원들이 모두 자매님들이지만 이들 덕분에 평균연령이 훨씬 떨어진 것은 감사할만한 것이었다. 무슨 ‘긴급 수혈’을 받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밝아졌다고나 할까? 들락날락하며 전체 분위기를 흐려놓았던 눈에 성가셨던 일도 올해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을 ‘가급적 원칙대로’ 하는 우리 레지오의 전통을 모르긴 몰라도 두고두고 감사한,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체득하는 삶을 살게 하리라 나는 믿는다. 지난 9월부터 서서히 ‘수혈’을 받아오면서 현재는 출석률 100%가 새로운 정상이 되었다. 전원 출석하면 박수를 쳐야만 했던 사실, 들락날락하던 것이 정상이던 것이 이제는 출석률 100%가 정상이 된 것이다. 레지오 교본의 말씀들이 정말 100% 모두 맞는다.. 이것은 누구의 도우심인가?

 

¶  아주 아주 오랜 만에 전호배 요셉형제KaTalk으로 통화를 했다. 나와 동갑 돼지띠 전 요셉 형제님, 작년 11월 쯤에 ‘갑자기’ 귀국을 했었다. 이곳에서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랬으리라는 짐작만 할 정도지만, 그래도 그가 황량 히 떠나버린 작년 12월은 찬바람만 부는 듯한 외로운 느낌을 주었다. 우리와 가까워진 지 일년도 채 안되었을 때 홀연히 떠난 것이다. 늦은 인생의 느낌을 말없이 공감할 수 있는 영혼을 만났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조금 나에게 사치였는지.. 귀국한지 일년이 되는 지금에야 ‘무엇이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이 확실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편안히 안주해야 할 나이에 큰 변화는 사실 어렵거나 괴로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상상도 못할 심리적, 혹은 육체적인 challenge가 왜 없겠는가? 그림이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사는 모습이 느껴진다. 인근 성당(노원성당?)의 레지오에도 가입을 해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고, ‘조그만’ 직장도 잡아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자매님은 양로원 같은 곳에서 일을 하신다고.. 정치적으로는 나와 잘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곧은 지조와 믿음으로 만사를 해결하는 돼지띠 형제님, 모든 가족이 성탄, 새해를 잘 맞으시기 빕니다.

 

super-cute Christmas tree
super-cute Christmas tree

¶  ‘역사상’ 제일 ‘늦게’ 우리 집 mini 성탄 tree가 장식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탄 2일 전이다. 아이들이 이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듯 하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우리가 나가는 두 곳의 성당이 3일 전에 장식을 했으니까 우리는 ‘당당히’ 하루가 더 늦은 ‘쾌거’였다. 진정한 대림의 정신으로 잘 견디어낸 결과였고 ‘원칙’대로 1월 10일 이후에 치울 것이다. 어제부터 그렇게 보고 싶었던 작년의 movie collection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보고 싶었던 것이 The Christmas Box란 1995년 family classic. 여기 출연을 하는 Maureen O’Hara가 올해 타계를 했기에 더 이것을 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지루하지만 차근차근하고 자상하게 보여준다. Family의 의미를 그렇게나 강조했던 1995년은 지금 생각하며 ‘고전적’인 시대였을지도 모른다. Transgender, LGBT, SS “Marriage’new normal이 되어가는 참 해괴한 세상이 도래한 이 시점에서 무엇을 더 언급하랴? 그래서 Advent의 희망이 더 무게를 더하는 (최소한 나에게는) 그런 2015년 성탄이 내일로 다가왔다. 우리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래도 Christmas vigil Mass에 모두 간다는 사실이 거의 기적같이 느껴진다. 우리 아이들이 한마디로 C&E2 Christian3이 된 사실, 역사적인 irony에 속한다. 이것이 나의 personal Advent에 속하는 것이다.

 

2015-12-24 08.13.44

Lights along the stairway to heaven

 

  1. Australia-born American Catholic Author, Commentator, businessman, Author of ‘The Four Signs of A Dynamic Catholic
  2. Christmas & Easter
  3. 일년에 딱 두번 미사참례 신자

묵주기도 성월 2015

2016-10-02-13-42-16-1

 

2015년 10월 12일, 며칠 있으면 ‘또’ 10월의 반이 지나간다. ‘진부한 표현’으로 세월은 잘도 흘러간다. 세월이 갈 수록 daybook 과 calendar 를 유심히 챙기는 습관이 더욱 세월의 흐름을 실감나게 느끼게 한다. 인생의 남은 시간이 하루 하루 줄어든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무언가 남기고 싶은 심정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시간과 세월의 감각을 흔적이라도 남기려 애를 쓰지만 모든 것은 순리적으로, 절대적 존재에 맡기는 자세를 취하려 애도 쓴다. 이런 mental balancing은 어느 나이에도 중요한 것이기에.. 이런 횡설수설이 나는 요새 필요한가 보다.

내일은 10월 13일, 1917년 바로 같은 날에 PortugalFatima에서 성모님이 three shepherds 세 목동  어린이 shepherd children들에게 발현 apparition 하신 날이기도 하다. Portugal의 ‘국, 관영 신문’에 당시에 성모님이 어린이들에게 약속을 하셨던 ‘태양의 기적’ 보도가 된 것이 특이하고, 이에 관한 극 drama 영화도 몇 개 있어서 나는 그것들을 흥미 있게 보기도 했다. 2017년이면 100주년 기념이 되기에 서서히 그곳으로 관심이 쏠릴 것을 예상한다. 역사이래 성모님 발현은 수없이 세계 전역에서 보고가 되지만 실상 교회가 공식인정을 한 것은 불과 수십 건밖에 안 된다. 그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곳은 몇 군데에 불과하고, 아마도 Fatima(파티마)는 프랑스의 Lourdes(루르드)에 이어 두 번째로 유명한 발현지일 것이다. 근래에는 30년도 넘게 ‘계속 매일’ 발현하시는 곳, Medjugorje 메주고리예 가 수많은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도’ 교황청의 공식인정을 받지 못한 곳이다.

Fatima 의 성모님은 발현 당시부터 Rosary(묵주)를 들고 나오셔서 묵주기도의 중요성을 알리시기도 해서, 10월이 묵주기도의 성월로 정해 졌을지도 모른다. 묵주기도.. 2007년 초부터 거의 매일 매일 하는 묵주기도, 이제는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거의 10년에 가까워오는 나의 묵주기도 역사, 솔직히 나 자신이 보아도 이건 기적 중에 기적에 속한다. 예상도 못했고, 아직도 변함없이 계속되는 것도 그렇고, 그런 ‘와중’에 세계관이 완전히 변한 나 자신, 이 모든 것은 솔직히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주기도에 무슨 마력이라고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너무나 단순 반복되는 간단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point는 이 기도가 성모님이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시작한지 몇 년 동안은 외우느라고, 지루함을 이기느라고 애를 쓴 기억이고 점차 습관이 되면서는 짧은 묵상 같은 것도 할 정도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지루하고 반복되는 그 시간 중 몇 초씩 들어가는 ‘생각지도 못한 느낌’, 바로 그것이 내가 기대하는 시간이 되었고, 그렇게 지루한 것을 극복할 수가 있었다. 집에서 연숙과 둘이서 하던 묵주기도에서 레지오의 ‘강도 높은’ 묵주기도로 바뀌며 나는 ‘기도’란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아가게 되었다. 레지오 5년 동안 계속되는 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묵주기도, 이제는 알 듯하다. 왜 성모님이 ‘친히’ 이 ‘고역’을 청하시는지를..

Sacred Heart 聖心

Sacred Heart of Jesus by Pompeo Batoni, 1767
Sacred Heart of Jesus by Pompeo Batoni, 1767

The Most Sacred Heart of Jesus.. 예수(의) 성심. 오늘은 The Pentecost (성령강림 대축일)로부터 19일째인 예수성심 대축일이었다. 미국 우리지역 province 은 의무 축일이 아니기에 아주 특별한 미사는 아니었고 평소 ‘매일 미사’보다 ‘조금’ 격상된 정도라고 할까.. 

요새 부활시기를 완전히 뒤로한 한가한 느낌의 6월 초여름의 ‘연중’ 시기에는 부활절을 치르느라 피곤하다는’ 본당 주임, 사제들은 꼭 자리를 비워야 ‘멋이 있는지’ 대부분 방문신부님들이 자주 찾아 오신다. 속으로 나는 ‘꼭 그렇게들 쉬어야 하나..’ 하는 짜증이 난다. 무엇을 그렇게 바쁘고 피곤하다는 것인지 나의 머리로는 쉽게 이해가 안 간다. 근래에는 땀을 흘리며 뛰는 신부들을 별로 본 기억이 나질 않아서.. 요새 신부들은 어떤 생각으로 사목을 하시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우리 Holy Family 성당의 경우, 보좌신부님, 박사학위를 받고 완전히 떠나신 Africa출신 상당히 지적인 신부님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영어 발음에 짜증이 조금은 났지만 주임신부의 ‘애 같은’ 강론수준과 하늘과 땅의 차이라 은근히 좋아하기 시작했더니만.. 그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런 판국에 Irish 출신 주임신부라는 목자는 어떻게 편히 쉬실 수 있는가? 드디어 며칠 전부터는 본당의 브라질 공동체 신부님이 임시로 매일 미사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건 완전히 disaster에 가깝다. 그의 영어 발음은 99.9% 알아 먹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찌 Portuguese와 English가 그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완전히 ‘꼬이는’ 발음은 Jesus란 말 정도나 들릴 정도다. 하지만 공평한 것은.. 이 신부님 너무나 ‘진솔하고 착한 미소 띤 얼굴’ .. 이것으로 완전히 balanced-out이 되고 있다. Universal한 미사 자체야 Latin말로 하던 때도 있었으니까.. 못 알아 먹어도 90% 이상은 다 추측이 가능하니까..

 성심.. 예수성심.. 성모성심.. 참 오래 전부터 들었던 단어였다. 성심 聖心 .. 하지만 확실한 뜻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성스러운 마음’ 정도는 한자로 짐작이 가능할 정도였다. 어렸을 때, ‘성심’이 붙은 학교들이 있었고, 대부분 ‘멋지고 부자’들이 가는 학교라는 인상도 남았다. 서울의 성심여학교가 그랬다. 교복도 그렇게 멋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큰 딸 박근혜 (현 대한민국 대통령.. 허.. 세월의 장난이..) ‘양’ 이 아마도 그 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그것 뿐인가.. 성심병원, 성심 여대까지 있으니까.. 이것은 이곳 미국도 예외는 아닐 듯 싶다. 문제는 이 ‘성심’이란 말이 보통명사인가 고유명사인가 하는 것이다.

조금만 research하면 ‘정답’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예수성심은 글자 그대로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심장’ (마음이라기 보다는), 그 육신적인 심장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불이 타는 듯이 타오르는 모습이 바로 예수성심인 것이다. ‘성스러운 마음’ 아닌 예수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심장.. 오랜 세월, 나의 ‘무지’가 부끄럽다. 그러니까 예수성심은 이 ‘심장’에 대한 인간들의 신심 devotion 인 셈이다. 이것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것은 역시 ‘인간’ 역사 중의 하나다.

1673년부터 1675년까지 프랑스 수녀 St. Margaret Mary Alacoque (성녀 알라콕)에게 나타나신 일련의 예수발현으로 비롯되었다. 이 발현 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신심이었다. 계시 revelation 중의 계시가 이런 것이 아닐까? 역사적인 배경과 근대에 들어와서 성심의 발전 양상을 예수회의 ‘예수성심의 역사’ 라는 DVD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레지오 단원 자매에게서 빌린 DVD를 감히 ripping해서 이곳에 올려 놓았다. copyright는 분명히 문제가 되겠지만.. please.

 

예수성심의 역사

Francis on Medjugorje

Pope Francis, 사라예보 방문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자회견
Pope Francis, 사라예보 방문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자회견

요새 ‘우리’ 교황님, 참 뉴스에서 많이 뵙는다. 99.9% 거의 모두 positive한 것이라 안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런 기사들을 대한다. ‘어쩌다가’ 이런 멋진 교황님이 탄생을 하셨는가.. 그러니까 ‘전’ 명예 교황님 Benedict XVI 이 깊은 생각과 교회의 당면한 숙제들을 생각하고 ‘조기 퇴진’을 하신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현 시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목자를 탄생시키셨다. 모든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다행스러운 교회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교황님 사라예보 Sarajevo, Bosnia & Herzegovina 를 방문하시고 바티칸 로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의 사라예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비공식’ 성모 발현지 메주고리예 Medjugorje 에 대한 짧은 언급이 나의 (아마도 많은 사람들) 눈길을 끌었다. 그 ‘짧은 언급’은 다음과 같이 보도 되었다.

It’s almost decision time…  6/6/2015  on PAPAL FLIGHT

사라예보의 짧은 방문을 끝내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보즈니아 (사라예보와 메주고리예가 위치한 나라) 출신 기자의 메주고리예 성모발현에 대한 바티칸의 공식적인 입장 해명의 질문에 대해서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셨다.

“메주고리예에 대한 결정의 시기가 거의 다가왔습니다. 결정이 되면 발표가 될 것입니다.”

교황은 이에 관련되어서 전임 교황 베네틱트 16세가 메주고리예 성모 발현 ‘설’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위한 위원회를 발족 시켰음을 상기시켰다. 이 위원회는 메주고리예 ‘현상’을 교리적, 교회법등에 비추어 연구, 조사를 끝내고 교황님께 보고를 드렸다고 덧붙였다.

 이 결정은 곧 이루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모든 일선의 주교들에게 guideline이 시달 될 것이라고 한다.

이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모든 교회는 메주고리예에서 성모발현의 진실성을 당연시 하는 모임, 회의, 집회 등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기사가 나오고 나서 3일 후에 이에 관련된 기사가 다시 보도 되었다. 이것은 그러니까.. ‘damage control’ 정도가 될는지…

 

Day after Medjugorje comment, Pope downplays predictable visions:

 아마도.. 교황님의 6월 6일 기자회견에서 메주고리예의 공식입장 결정이 다가왔다는 말이 주는 뉴앙스가 너무나 positive했던 것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6월 9일 바티칸의 성 마르타 guesthouse에서의 매일미사에서 교황님은 ‘조금 초현실적인 믿음’에 의존하려는 신자는 현대판 gnostics(무관심론자)라며 결국 믿음의 종착역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고 조심을 시켰다. 성모님께서 ‘이런 것, 저런 것’을 하라고 말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의 본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 뉴스에 접하며 생각을 해본다. 우선 이런 교황님의 스타일은 이제 익숙한 편이다. 우선 issue를 거론하고, 반응에 의해서 필요하면 곧 수정하는 style..  이런 방식은 분명히 issue를 forward시킨다. 무언가 결과가 제 시간에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일을 처리해 나가는 교황님의 agenda는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메주고리예의 성모님 발현은 교회사, 세계역사를 통 털어서 전무후무 前無後無 한 것이다. 30년 이상 거의 매일 같은 지역에서 발현한다는 것.. 이것에 대한 과학적, 이성적인 반론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30년 이상의 사기극’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사기극’을 벌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쉽다. 메주고리예가 나에게 준 자극과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높고, 심각한 것이라 나는 여기에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30년 이상 인간에게 거의 매일 나타나시는 ‘하느님의 어머니,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의미는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짜 인류의 어머니라는 것, 너무나 자상하고 사랑하시는 어머니가 ‘나쁜 길’로 가려는 자식들을 애타게 기다리신다는 것.. 조금만 생각해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What were they thinking? 2 episodes

green green grassy Ireland - sick surprise

green green grassy Ireland – sick surprise

 

¶ Irish Disaster 어떻게 이런 일이.. 그 동안 나를 괴롭히던 우려가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이런 종류의 ‘믿기지 않는 현실화’는 근래에 꽤 있었다. 그저 이럴 때 내가 고작 되뇌는 말은 What are they thinking? 정도다. 서유럽에서 가장 ‘종교적, 보수적’인 초록색 ‘초원’의 나라, Lady of Knock성모님의 나라, 레지오 마리애 의 본고장 Ireland.. 어떻게 그들은 ‘국민투표’까지 해가며 남자끼리, 여자끼리 를 결혼 시킬 만용이 생겼을까? 그것이 fair하고 common sense인가? 그들은 St. Patrick을 완전히 잊었는가? 이제는 right is wrong, wrong is right의 세상이 되었는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악인가.. 어떻게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여자와 여자가 결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식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2명(이상)의 아버지나 2명(이상)의 엄마를 둔 자식들은 어떻게 세상을 볼 것인가? 이것은 종교적인 것을 완전히 초월한 ‘인간 자연 본능’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임을 그 많은 사람들이 잊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탄식하기 전에 나는 그저 놀라운 세상을 사는 내 신세를 탓한다.

 

¶ 몇 달 만에 마리에타 two 구역 모임에 갔다. long Holiday weekend라서 마음의 여유도 조금 생겼고, 몇 달 동안 완전히 이 ‘동네’ 모임을 잊고 살아서 조금은 가고 싶은 마음도 생긴 것이다. 더군다나 나의 ‘유일한’ 레지오 협조단원 K형제 댁에서 모이는 것이기에, 가는 마음이 조금은 더 가벼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 동안 레지오 ‘협조단원 돌봄’에서 최선을 다 못하고 있어서, 항상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나를 ‘두말없이’ 참석하게 하였다.

 그 동안 자주 못 보았던 반가운 형제, 자매님들, 특히 평소 가족과 떨어진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P 형제를  다시 이곳에서 보게 되어서 아주 반가웠고, 이번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고 Holy Family C.C.  평일미사에서 요사이 자주 보는 K Francesco 형제도 반갑게 다시 만났다. 하지만 나중에 일찍 구역모임을 떠날 때의 나의 심정은 ‘역시’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왜 ‘또’ 내가 이곳엘 왔었는가.. 심지어, 그곳에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도 들 정도였는데..

 거의 40년 동안 ‘전혀’ 못 들어보았던 ‘심하고 원색적 vulgar, obscene 욕설과 위협적인 언사’를 바로 코 앞에서 목격을 한 후에 나는 밥맛이 완전히 떨어져서 식사도 거의 안 하고, 독한 술 몇 잔 들이키고 ‘what were they (2 guys) thinking?‘ 만 되뇌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것은 분명히 verbal violence 였고 옆에 있던 우리들은 collateral victim이 된 것이다 . 대부분 자매님들과 아이들이 있었던 그 자리에서 우리들은 맛있는 음식을 접시에 덜고 있었다가 그런 일을 어처구니 없게 목격을 한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처음에는 관련 당사자 2명의 ‘싸움’이 100% practical joke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얼굴을 보니 그것이 전혀 아니었고, 그것은 완전한 threatening curse 였고,.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욕 자체라기 보다는 ‘증오에 가득 찬 언동 hateful demeanor’ 이었다. 이것이 과연 ‘사랑, 평화’의 천주교우 모임인가.. 그 동안 이 구역모임의 ‘인구의 증가’에 의한 ‘질의 변화나 진화 (or 퇴화)’를 예상 못한 것은 아니나 이것은 완전한 disaster 였다. 바로 옆 구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이야기를 전에 듣고 나는 사실 믿지를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믿어진다.

 코 앞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 솔직히 ‘육체적인 위협’까지 느껴질 정도여서 앞으로 장기간 이런 광경은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식사 전, 매일 복음 ‘성령과 평화’를 이야기 한 후에 생긴 이런 믿기지 않는 happening은 ‘아마도’ 이 sprawling group 의 ‘쉽지만은 않은’ 앞 날을 예고하는 신호가 아닐까? 아마도 이 group 은  현재 critical mass 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고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은 왜 본당 공동체에 구역모임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a ‘written’ mission statement would help)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지만.. 우선은  foreseeable future 까지 그저 잊고 살고 싶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30 seconds with Pope Francis

Pope Francis coming to America?

Pope Francis coming to America?

우연히 미국 예수회 America magazine website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를 30초간 볼 기회가 있다면..’ 이라는 주제의 Youtube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이런 street interview를 한 것인가 의아 했지만 곧 의문이 풀렸다. 올해 9월 미국을 방문하는 교황에 대한 것이었다.

 

America Media asks:
“If you had 30 seconds with Pope Francis, what would you say?”

May 13 2015 – 10:19am

 

가톨릭 신자로서 교황의 위치와 의미는 잘 알려진 것이지만, 교황도 ‘겸손한’ 인간이기에 각 재위 교황마다 한결같이 다른 굴곡1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내가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교황들은 주로 John Paul II (요한 바오로 2세) 로 부터 시작이 되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오랜 냉담 시절에는 교황의 위치를 하찮게 보기도 했었는데 나는 그 이후 그런 나의 ‘바보 같은’ 경솔함을 정말 후회하고 있다.

2년 전인가.. 당시 교황 Pope Benedict XI (베네딕트 16세) 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며 퇴임하고 급작스레 선출 된 분이 현 교황 Francis (프란치스코)인데 최초로 남미출신(Argentina)인데다가 교황청과는 outsider 에 속해서 어떻게 재위를 할지 미지수였다. 전임 교황들,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분의 뒤를 이으며 그분들이 닦아 놓은 업적을 유지, 계승, 향상 시키려면 그분의 어깨는 정말 무거웠으리라. 그 후의 경과, 결과는 어떤가?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를 능가하는 인기와 명성을 구가하게 된 것이다. 전임 같은 ‘두뇌’ 보다는 ‘인정, 솔직’함으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의심 많은 초현대의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비 신자들을 매료한다. 그러한 인기를 잘 활용해서 드디어 세계 정치에도 서서히 관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누가 뭐래도 변화 무쌍한 인류 가치관에 그는 변함없는 진리, 그리스도 가치관을 너무나 부드럽게 포용시킨다.

용감하게 유럽을 no longer fertile and vibrant, weary and becoming irrelevant 라고 가차없이 질타하고, 의혹 많기로 유명한 바티칸의 ‘재정비밀’을 투명하게 만드는 노력을 하는가 하면, 가톨릭 교리를 ‘요지부동’의 인상 보다는 ‘자비’를 강조하는 묘기도 보인다. 예수님의 기본 철학, ‘부자보다는 가난함을 사랑하는’ 실천적으로 가르치기도 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 소위 말하는 populism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 ‘부자 사제’는 척결하고 본인은 ‘소형차, 시민 아파트’를 택했다. 이런 배경으로 그의 agenda를 밀어 부치는 교황, 어떨까.. 퇴임 시에는 아마도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기를 능가하지 않을까?

이런 배경으로, 작년에 아틀란타 대주교에도 불똥이 튀겨, ‘공짜로 받은’ 주교관 mansion을 반납해야 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일반 신도들이 대담하게 교황의 모범을 무기로 항의를 했던 것이다. 어떨까.. 이런 와중에 한국출신 교포사목 동남부 사제단인가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김대건 성당도 포함) 하는 곳에서는 작년에 멕시코의 칸쿤 Cancun 에서 사제단 회의를 하였다. 그것도 자랑스럽게 말씀하던 신부님.. 속으로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하필 세속사회의 상징인 멕시코 관광도시 칸쿤에서 비싸게 모여야 했을까? 누군가 설명을 해 주면 어떨까? 그들의 최고 통수권자 교황님의 행적을 그들은 전혀 몰랐던가, 무시했던가?

이 교황을 보려면 제일 직접적인 방법인 바티칸을 가야하고 그곳에서도 사실 가까이 보는 것은 운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중에 이번 9월에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혹시.. 우리도 그곳에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실험’을 하게 되었다. 크게 무리는 아닐 듯..  World Meeting of Families convention을 계기로 Philadelphia 대회에 참석하고, Washington DC, White House, Congress, New York을 방문 하다고 하니 교황을 비교적 가까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내가 교황과 30초간 함께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이런 질문이 이제 100% 공상이 아닌 것이다.

  1. 현대 한국어에서 이런 말을 아직도 쓰는지..

아틀란타 성체대회: a p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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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behold, I am with you always, until the end of the age.” (Matthew 28:20)

 

“(보라, 세상이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28:20) 위와 같은 올해의 thematic verse를 배경으로, 아틀란타 대교구 주관 2015년 미국 동남부 성체대회 Eucharistic Congress 가 6월 초(6월 5일, 6일)로 다가왔다. 나에게 일년이란 세월이 67마일의 속도로 느껴짐은 작년 성체대회의 기억을 더듬으면 알 수 있다. ‘엊그제’ 같은 느낌이니까..

올해 성체대회의 theme은 ‘I will be with you always‘.. 마태오 Matthew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until the end of age.. ‘세상이 끝날 때가지’ 가 생략된 비교적 귀에 익은 표현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나에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예수님이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의지’.. 이 말씀이야 말로 ‘복음 중의 복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로 어느덧 20주년을 맞게 되어서 누가 보아도 이제 이 연례 대회는 완전히 자리를 굳건히 잡은 듯 하다. 아틀란타가 1996년 올림픽을 주최하며 호경기와 급성장을 예상하던 때, 당시의 선견지명을 가진 Francis Donohue 대주교님의 용단으로 조촐하게 시작 되었지만, 급팽창하는 대교구를 함께 모이게 하고 ‘성소 난’에 봉착한 교회에 돌파구를 제시하는 뚜렷한 목적을 유지하며 건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때 재정난 (eg. subprime mortgage crisis, housing bubble)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대교구 여론의 도움이었던가, 난관을 극복하고 예전의 열기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으로 건강한 장래를 내다 보게 되었다.

우리가 이곳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지만, 이것도 우리에게는 ‘금자탑’에 속한다. 예상 밖으로 우리에게 이 행사는 큰 은총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의 3만 명이 ‘운집’하는 이곳엘 가면 ‘천주교’가 절대로 ‘소수 종교, 방어적 종교’라는 의심을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다. 성체 신심이라는 말조차 생소하게 들리던 나에게 이런 대회는 ‘모조리 배울 것 투성이’ 인 기회라서 ‘절대로 참가하자’라는 결심을 하였기에 ‘죽을 정도로 아프지’ 않은 한 이 날을 달력에서 비워 두고 산다.

작년까지는 ‘두말 없이’ 우리의 한국본당 순교자 성당에 ‘묻어서’ 참가하는 것이 ‘규칙’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예외’로 바꾸어서.. 단체 행동에서 벗어나 우리들 만의 ‘개인 참가’ 하기로 하였다. 교통편 때문에 가급적 성당 car-pooling이나 bus를 타면 좋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아침에 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올 때가 문제임을 작년에 bus가 ‘예고도 없이’ 끊어진 바람에 당황한 기억으로 Never Again! 을 되 뇌이며 ‘우리 차’로 자유롭게 가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 교우들이 성체대회의 절정인 closing vigil mass를 기다리지 않고 ‘점심을 먹은 후’ 일찌감치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올해부터는 우리에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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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congress program을 언뜻 들여다 보니.. 작년과 같은 Hollywood celebrity 급 keynote speaker는 보이질 않는다. 생각하면 이것이 ‘정상’일 듯 하다. 성체대회가 무슨 show나 entertainment는 아니니까.. 하지만.. Not so fast! 다른 의미의 celebrity급 speaker의 모습과 이름이 보였다. 바로.. Father Robert ‘Bob’ Barron!  우아~~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Hollywood star급 보다 brainy하고, 현재 미국 가톨릭 계의  ‘급상승’하는 56세 신부님, 바로 Father Barron이 오는 것이다.

월남 신자들은 규모가 커서 자기들 만의 모임이 있지만 우리들은 어차피 English Track에 속한다. 그러니까.. 언어에 상관없이 ‘영어권’의 인물들에 익숙해야 하는데.. 얼마나 많은 한국어 신자들이 이 keynote speaker들을 알고 있을까? 결국은 부지런히 ‘예습’을 하는 수 밖에 없다. 다른 speaker 중에는 Teresa Tomeo, Kerri Caviesel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Father Barron처럼 익숙한 이름은 아닐 듯 하다. 그래서 올해는 집중적으로 Father Robert Barron에게 관심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Robert ‘Bob’ Barron, 1959 년 시카고 출생 (56세), 시카고 대교구 신부님, Mundelein 신학교 총장, author, scholar and Catholic evangelist.. 나이에 비해서 화려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가톨릭 신학대가 Thomas Aquinas 토마스 아퀴나스 에 매료되었고 결국 1986년에 신부 서품을 받았다.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Washington DC)에서 Master 학위를 받았고, 1992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Institut Catholique de Paris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외국어로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얼마 전에 암으로 서거한 시카고 프란시스 조지 추기경은 그를 one of the Church’s best messengers라고 했듯이 그는  초현대 디지탈 미디어를 이용한 많은 저서, video, website, blog, newsletter, podcasts등을 발행하고 있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인기 있는 강연, 강의를 하고 세속적인 media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가톨릭 교리, 핵심을 전파하고 있다. 그 중에서 2011년에 출시된 10 편 documentary series:  The Catholicism Project 는 미국을 위시한 16 개국 대중적 TV를 통해서 방영이 되었다. 그의 TV program은 1950년대의 Fulton Sheen 대주교 이후에 처음으로 ‘상업적 TV’에서 방영이 된 case가 된다고 한다.

이런 그의 resume를 떠나서, 나는 이 ‘젊고 handsome’하고 머리 좋은 신부님을 언제쯤 알았던가? 아마도 위에 언급된 TV program, Catholicism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program을 본 적이 없다.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DVD를 사기에는 비싼 것들이기도 했고, 그 것이 나올 당시만 해도 나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Keynote Speaker: Father Robert Barron

Keynote Speaker: Father Robert Barron

그러다가 그의 website: Word On Fire 를 정기적으로 subscribe하면서 그를 거의 정기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크리스마스나 사순절 쯤이면 그의 newsletter를 받아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그의 style은 조금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Postscript: May 30, 2015

Never Mind!  오늘 성체대회 website를 우연히 보니.. 이것이 웬일인가? Keynote Speakers 명단에서 Father Robert Barron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완전한 disaster.. 하도 실망을 해서 이곳엘 갈까 말까 생각을 할 정도다. 하기는.. 올해의 여러 가지 느낌이.. 20년 주년 기념적인 이 성체대회에 김이 빠진 듯 한 그런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실망.. 실망..

Jesus in Galilee

갈릴래아의 예수님

갈릴래아의 예수님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계시는 예수님… 이 그림은 기묘한 인연으로 알게 된 배 HC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의 작품이다. 몇 년도에 그린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5년 전 이후의 것일 듯 하다. 이 갈릴래아 호수의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온 것은 지난 성탄절 무렵이었다. 배 형제님이 보내주신 성탄 카드에 이 그림이 있었다. 몇 개월 후에는 이 그림이 picture frame용으로 큰 것이 보내져 와서 우리 집 family room 가운데 걸려 있다. 갈릴래아 예수님이 우리 가정을 보살펴 주시기 시간한 것이다.

기묘한 인연.. 정말 기묘한 인연으로 알게 되고 만나게 된 형제님, 나보다 몇 살 위이신 인생선배님이지만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탓일까.. 어떨 때는 친구처럼 느껴지는 형제님. 이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은 우리와 또 다른 ‘묘한’ 인연을 맺고 병상에서 가톨릭에 귀의하고 곧바로 성모님의 품에 안기신 돼지띠 동갑 베로니카 자매님의 친정오빠가 되신다.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하느님을 거부하던 베로니카 자매님의 오빠로써 꺼져가는 동생의 생명을 보며 무엇을 제일 먼저 생각했을까? 병을 낫게 하고 싶지만 인간의 한계를 아셨는지 곧바로 다음의 세상을 생각하고 ‘불도저’같은 우직함과 사랑으로 동생을, 본인이 믿는 하느님께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우격다짐’이 결실을 보아서 우리와 연결이 되었고 그 동생 자매님을 ‘안전하게’ 하늘나라로 보낸 것이다.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은 서울 홍익대 출신 미술 전공이셨는데, 대학 졸업 후에는 ‘상업미술’을 계속하셨다고 했다. 그런 분이 또 다른 묘한 인연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성화’를 그리신다고.. 이 갈릴래아 예수님은 5년 전쯤 사고로 실명의 위기까지 갔던 후에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명은 면했지만 시력이 평상의 몇 %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런 장애와 싸우며 이 그림을 그렸다. 왜 갈릴래아의 예수님일까.. 대답은: ‘새로 시작하는 인생’ 이라고..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보내셨던 것을 생각한 듯.. 새 인생으로 일생일대의 ‘성화’를 계획하고 현재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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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11월부터 시작된 이런 ‘묘한’ 인연으로 우리는 이렇게 의미 심장한 ‘성화’를 얻게 되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을 갈릴래아 ‘고향’에서 새로 시작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2000년 굳건하게 지속되는 하느님의 교회.. 바로 그 것일 것이다. 배 대건 안드레아 형제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Longfellow Serenade

Longfellow Serenade – Neil Diamond – 1974

 

롱펠로우 세레나데.. 롱휄로우 세레네이드.. 무척 오랜만에 불러보는 단어들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물론 1974년 Neil Diamond의 hit song 일 것이다. 나의 ‘전성기’였던 그 당시는 뇌리에서도 아직도 가장 활발한 부분에 모여있는지 생생하고 흥미롭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런 주제의 제목에 도달한 생각의 과정이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늙은 두뇌’에는 사실 잡동사니 같은 많은 ‘정보’들이 쌓여있을 것인데, 그런 많은 것들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이 되면 가끔 기발한 추억을 찾기도 한다. 나이 먹는 ‘즐거움’ 중에는 이런 흥미로운 혜택이 있음을 어떤 사람들이 알까 궁금하기도 하다.

Longfellow Serenade에 도달한 과정은 우습게도 최근 edX online course중에 하나인 MyDante (my Dante)를 ‘청강, audit’ 하는 과정에서였다. 이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  style course 는 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인데 Dante의 classic인  Divine Comedy (신곡, 神曲)를 완전히 digital 형식으로 바꾸어 제공해서 ‘초보자’들도 아주 쉽게 이 ‘거창한 고전’을 접할 수 있다.

내가 이 course에 흥미를 가진 이유는 물론 신학적인 호기심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 course technology가 cutting edge digital (Internet) technology를 적절히 이용한 것에 매료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3세기 무렵에 쓰여진 ‘대 서사시’ 그것도 Italian으로 쓰여진 ‘고물’을 본래 식으로 읽는 것은 아마도 박사학위가 필요할 것처럼 어려울 것이지만, 이 course는 21세기 초현대식으로 접근방법을 바꾸어 놓아서, Dante를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감상을 할 수가 있었다.

연옥, 7층산을 바라보는 단테
연옥, 7층산을 바라보는 단테

Dante Alighieri, 단테 앨리기에리.. 단테..라면 사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이다. 단테의 신곡.. 아마도 세계사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의 기억으로는 중세가 끝날 무렵의 이탈리아의 단테가 지었던 거창한 서사시 정도였다. 나아가서 ‘지옥, 연옥, 천국’을 그린 것이라는 기억 정도였다.

나중에 신곡이 Divine Comedy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Divine은 이해가 가는데 왜 하필 Comedy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comedy의 뜻이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최소한 ‘웃기는’ comedy가 아님을 알고 웃기도 했다. 그렇게 접하게 된 단테와 신곡.. 추억도 곁들였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적인 느낌보다는 나에게는 조금 절실한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과연 ‘지옥, 연옥, 천국’이 나에게 지금 어느 정도로 심각한 relevancy가 있는가? 그것도 이제는 ‘소수 종교’로 쳐지는 듯한 천주교의 중심교리, 개신교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연옥 purgatory, purgatorio..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토마스 머튼, 7층산
토마스 머튼, 7층산

얼마 전에 내가 속한 ‘레지오’의 주 회합 ‘훈화’에서 단테의 이야기가 나왔었다. 바로 연옥에 관한 이야기 그러니까 7층산으로 묘사된 ‘일곱 가지의 죄’.. 그 중에서 pride에 관한 이야기였다. pride의 죄를 범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목에 힘을 주며 살았기에 그들의 ‘보속’은 ‘돌이나 납덩어리’ 같은 무거운 짐을 목에 걸고 걷는 형벌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우연이 아닌 듯 싶은 것이 그 전에 Thomas MertonThe Seven Storey Mountain을 알게 될 무렵.. 사실 그 7층산이 단테의 신곡 연옥에서 보여주는 Seven deadly sins임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 확실히 ‘점’들이 연결이 된 것이다.  이 일곱 죄는: wrath(분노), greed(탐욕), sloth(게으름), pride(자랑), lust(음욕), envy(시기), gluttony(게걸스러움) 인데 단테는 이것을 연옥의 7 terrace mountain으로 그린 것이다.

이렇게 단테의 신곡을 공부하며 신곡의 역사를 알게 되는데, 신곡은 대 서사시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의 ‘표준어’를 만드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영국의 Shakespeare 정도 위치를 이탈리아의 단테가 차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신곡은 이태리 어로 읽어야 단테 문학의 정수를 맛본다고 하지만 그에 맞먹는 영어 번역본들도 있다. 그 중에는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시인 Longfellow가 번역한 것도 있는데, 그 번역본이 나올 당시 (19세기 중엽) 미국에서 이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지식인들에게는 유행이었다고 한다. 비교적 간추린 것이지만 나는 이렇게 해서 Merton에서 시작해서 Dante로, 거기서 다시 Longfellow까지 갔고 종착역은 역시 우리 시대의 idol이었던 Neil Diamond가 맡아 주게 되었다. 참.. 연상퀴즈의 묘미는 이런 것인가?

Henry Wadsworth Longfellow
Henry Wadsworth Longfellow

그런 과정에서 다시 Longfellow의 대표적인 시를 ‘구경’하게 되었다. 미국 19세기 시문학을 대표하는 그는 미국 Northeast의 정서를 잘 묘사를 하였고 당시에는 꽤나 ‘유행적’인 시인이었다. 요즘 들어서 매일 내리는 4월 느낌의 비를 보며 유심히 그의 시에서 이런 느낌을 150% 느끼게 하는 시를 찾아 내었다.  The Rainy Day.. 글자 그대로 비 오는 날.. 비교적 직설적인 표현의 이 시를 자세히 읽으며 생각했다. 오늘 오는 비의 느낌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무언가 기억이 나는 시라는 생각이 번뜩 든다. 5분도 걸리지 않았다. 1967-8년 경의 기억이 남아있는 뇌세포에 자극이 갔는데, 아하… 즉시 ‘유영’이라는 단어가 떠 오른다.

영문학과 유영 교수님
영문학과 유영 교수님

유영.. 유영 교수, 연세대 영문과 유영 교수님… 교양학부 과정의 마지막 영어독해 강의에서 유영교수가 가르쳐준 시였다. 그것이 바로 이 시였던 것이다. 이 시의 시작부분이 이 의문의 key였다. The day is cold, and dark, and dreary .. 바로 이 dreary란 단어, 이것이 거의 반세기 동안 나의 깊은 뇌세포에 잠재해 있었다. 유영교수의 이 dreary란 단어의 발음이 너무나 독특해서 우리들 모두 웃었던 기억.. 당시에 이 시를 읽으며 정말 ‘음산한 4월’을 몸이 오싹할 정도로 움츠린 기억.. 그것이 바로 요새 이곳 4월 비의 느낌과 비슷하니.. 참.. 이렇게 해서 오랜만에 따뜻한 ‘아랫목’에서 ‘추억의 백일몽’을 즐긴 날이 되었다.

 

The Rainy Day

by Henry Wadsworth Longfellow

 

The day is cold, and dark, and dreary;

It rains, and the wind is never weary;

The vine still clings to the mouldering wall,

But at every gust the dead leaves fall,

And the day is dark and dreary.

My life is cold, and dark, and dreary;

It rains, and the wind is never weary;

My thoughts still cling to the mouldering Past,

But the hopes of youth fall thick in the blast,

And the days are dark and dreary.

Be still, sad heart! and cease repining;

Behind the clouds is the sun still shining;

Thy fate is the common fate of all,

Into each life some rain must fall,

Some days must be dark and dreary.

 

봉성체 奉聖體, 1년 후

봉성체 봉사자를 구하는 Holy Family 성당의 brochure
봉성체 봉사자를 구하는 마리에타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의 brochure

봉성체 奉聖體, home Eucharistic communion service, ministry 성체를 집으로 모시고 가서 영성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봉성체 라고 하는데 이것은 Extraordinary Minister of the Holy Communion 라는 평신도 중에서 특별히 선발되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류상으로도 본당, 교구, 대교구에 등록을 하여야 하고 대강 3년 정도 유효하다고 한다. 이만큼 사제가 아닌 평신도가 성체를 성당 밖으로 모시고 나가서 영성체 봉사service를 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신중하다고 할까.

4년 전쯤, 말기 암으로 투병을 하던 우리 레지오 단원 은 요안나 자매님이 거동이 불편해져 집에만 있게 되었을 때, 그 자매님에게 성체를 모시게 해 주고 싶다는 일념 으로 연숙이 ‘두말없이’ 봉성체 교육을 받고 교구청에 등록을 했는데.. 좀 늦었던가.. 안타깝게도 한번도 봉성체를 해 주지 못하고 그 자매님은 운명을 하게 되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이후로는 ‘가능하면’ 늑장을 부리지 않고 성체를 원하는 거동이 불편한 신자들을 찾게 되었고 필요한 곳은 찾아가게 되었다.

5년 전쯤만 해도 나는 ‘성체의 심각한 의미’를 잘 몰랐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성체와 성혈은 100%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교리상식은 물론 ‘머리’에서는 알지만.. 그래서..어쨌다는 말인가 라는 선에서 멈추곤 하였다. 미사에서 성체, 성혈을 받을(모실) 때에도 ‘의미 있는 묵상’이 별로 쉽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내가 별로 깊이 생각과 묵상을 안 해서 그런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된 성체,성혈의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조금 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점들이 연결되는 순간부터’ 나는 거의 무조건 성체의 신비를 믿게 되었다. 의외로 간단한 과정이었을까?

그런 배경으로 봉성체 봉사자인 연숙을 따라다니며 ‘봉성체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레지오 활동의 일환으로 봉성체 봉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집이나 병원에서 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일년이 넘은,  작년 2월경 부터 우리는 정기적인 ‘화요일 봉성체’ routine을 시작하게 되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레지오 주회합이 있는 화요일에 정기적인 봉성체 활동을 하고 가끔 비정기적인, 예외적인 봉사를 한다.

이 봉성체 활동을 하며 느끼는 것은 한마디로 가톨릭 신앙에서 얼마나 성체신심이 중요한 가 하는 때늦은 놀라움이다. 1982년 영세를 받고 나서 수십 년이 흐른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이것을 정말 늦게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당의 미사를 못 보며 느끼는 이들 봉성체 대상 교우들의 성체에 대한 갈증, 갈망을 느끼고 보며 나는 너무나 많은 은총을 받는 듯 하다. 이 우리의 봉사는 사실 우리가 봉사를 받는 다는 쪽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고령의 봉성체 대상 자매님, 기억력과 씨름을 하시지만 우리들이 가면 ‘일제 시대(요새는 일제 강점기라고 하던가)’에 남편 형제님을 만나게 된 경위를 일본말을 섞어가며 설명하시던 모습을 보며, 이 분들에게 성체 이외에 ‘인간적 대화’가 필요함도 절실히 느낀다. 성체의 ‘기적’까지는 기대 못하더라도 이런 활동이 외로울 수도 있는 그분들에게 다른 기적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자동차와 다리가 성한 한’ 이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사순절 판공성사, 2015

또 ‘그것’을 할 때가 다가왔다. 그것.. 판공성사, 고백성사, 고해성사.. 어떻게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다. 결코 쉽지 않은 ‘의무’, 가톨릭 신자의 의무다. 이것도 의무지만 자유로운 의무고 다른 쪽으로는 우리 교회만의 권리, 특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성사의 의미와 특징 (좋은 쪽으로)은 열거하면 한이 없이 많다. Matthew KellyRediscovering Catholicism 책을 요새 다시 읽으며(aka typing) timing 좋게 confession 에 대해서 복습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쓰레기로 쌓이는 집이나 차에 비유해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것과 비교한다. 많이 쌓이면 그런 사실자체에 둔감해져서 더 많이 쓰레기가 쌓인다고. 자주 하면 할 수록 좋은 것이라고.. 누가 모르나? ‘괴롭게 들어갔다가 날라가는 기분으로 나오는 곳’ , 그곳이 바로 고백성사란 것만 기억해도 좋은 것, 이것 하나,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올해는, 아니 내일로 다가온 이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고백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10중 8/9는 하태수 신부님께 하게 될 듯 한데.. 그것이 상관이 있을까?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이것, 나에게도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귀찮은 것인가?

이제는 ‘양심성찰’을 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지난 해 6월이었던가, Conyers의 수도원에서 가진 레지오 피정 때 내가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알쏭달쏭하다. 한 듯하기도 하고, 안 한 듯 하기도 하고.. 하지만 작년 사순절 때는 100% 확실히 했다. 비록 ‘사소한’ 것을 고백한 기억이지만.

 

그 동안 나의 ‘죄’는 무엇이 있을까? 대죄는 물론 없다. 소죄는 있을 듯 하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십계명으로 출발하면, 어떤 주일을 거룩하게 안 보낸 것은 확실할 것이다. 제일 쉬운 것이 이것인가? 하지만 이런 것을 하면 내가 만족할 수가 없다. “고백성사 101″을 다시 한번 볼까나..

아마도 십계명에 ‘정면으로 거역’ 된 일을 없을 것이다. 나에게 우상이란 것은, 분명히 없다. 하느님의 이름을 마구 함부로 ‘팔아 넘기듯’ 부른 적도 없다. 주일이나 종교적 축일들을 소홀히 보냈는가.. 다행히 지난 해에 우리는 ‘부지런히’ 주일, 축일을 보냈을 것이다. 부모님을 공경하는가.. 이것은 비교적 쉬운 듯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는 죽어도 부모님을 잘 모셨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죄로 고백해야 할 것 중에 하나다. 살인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다. 훔친 적도 없고, 요상한 소문을 낸 적도 없고 거짓말 증언을 한 적도 없다. 남의 아내를 엿보거나 흠모하거나 사랑한 적도 없다. 남이 잘 사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을까? 이것은 100% 부인할 수가 있을까? 나는 ‘지나치게 사치하게 잘 사는’ 사람을 가끔 ‘경멸’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로 부러워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를 안 짓는다는 소극적인 것에서, 과연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고 살았던가? 이것은 자신이 없다. 죄를 피하며 살았을지언정 적극적으로 남을 인간으로 사랑하거나 물질적으로 도와 주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재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했을까? 이것도 자신이 없다. 비록 레지오라는 단체에서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언제까지나 만족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사랑의 2계명: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est and the first commandment.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depend on these two commandments’(Mt 22:37-40).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is not jealous, [love] is not pompous, it is not inflated, it is not rude, it does not seek its own interests, it is not quick-tempered, it does not brood over injury, it does not rejoice over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It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Love never fails” (1 Cor 13:4-8).

 

지난 해 판공성사 (사순절부터) 이후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남이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던가? 고정적인 일상생활의 pattern으로 두드러진 것은 생각이 안 난다. 가깝게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면 ‘겸손하지 않다고 보이는’ 연숙의 행동들에 대한 나의 짜증 정도? 이것도 죄가 될까? 마찬 가지로 두 딸들에 대한 나의 실망감..

하지만 조금 밖으로 눈을 돌리면, 미안한 것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작년 여름 레지오 회합에서 큰 생각 없이 한 나의 ‘솔직한’ 말 때문에 장 실비아 자매가 퇴단까지 한 것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고, 나의 말을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인 상대방만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인은 무조건 나에게 있기에 나의 잘못이고 미안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뒤 늦게 들었다. 같은 여름 미국성당에서 ‘사소한 고정석’을 빼앗긴 것이 발단으로 ‘터진’ 나의 ‘분노’도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나의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상대방이었던 필리핀 자매에게는 너무나도 잘못을 하였다. 기분이 쳐지거나 나의 ‘운전 불능’신세를 한탄하며 연숙의 운전 실력을 100% 매도하는 나날들 또한 어떨까.. 나의 일방적인 잘 못이 아닐까? 이런 것들을 떠나서 나는 언급하기 싫은 ‘잘못’을 했고 현재도 하고 있다. 가슴 속 깊이 잠자고 있는 나의 ‘깊은 상처, 수치’를 건들이거나 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근래에 너무나 가까워진 수 많은 ‘자매님들’.. 인간의 한 부류로 신선하게 다가온 수 많은 자매님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신앙적 동지일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을 나는 가끔 어떤 생각까지 하며 ‘즐기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나는 여성에게 여자의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은근히 나는 이성들이 많은 곳에서 어떠한 환상적인 생각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생물적’인 충동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은 나를 진정 놀라게 한다. 그것 때문이 예전의 ‘환상적 잘못’의 세계로 조금이라도 다가 갈까 봐 조바심도 나는 것이다. 성모님에 의지하는 내가 왜 다시 성모님께 의지하지 않는 것일까? 너무나 수치감을 느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상태를 초월하는 다음의 단계로 성숙해야 한다. 이것을 나는 어떻게 신부님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저녁에 예정된 성사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전요셉, 황프란치스코

전 요셉, 황 프란치스코 형제님들.. 모두 듣기만 해도 가슴이 편안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름들이 되었다. 특히, 전 요셉 형제님의 이름은 요새같이 추운 날씨에는 따뜻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전 요셉 형제님, 나와 같은 돼지띠 동갑으로 친구, 형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분명히 나보다 생일이 위였으니까, 형 뻘이 되겠지만 그런 것 서로 따지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가깝게 알고 지낸 것이 불과 1~2년도 채 되지를 않았다. 채 깊이 알게 되기도 전에 전 요셉 형제님은 ‘갑자기’ 조상의 땅,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을 해 버렸다.

그때 느낀 기습적인 쌀쌀한 가을바람과 같은 공허감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것이 벌써 1개월 도 지났나? 귀국 후 잠깐 온 소식에 시차 적응으로 매일 잠만 잔다고 하더니 드디어 카톡(카카오톡)으로 잇달아 소식이 날아왔다. 계속 시차 적응 중이고 눈이 내린 고국의 모습이 멋있다며 사진도 보내왔다. 온양으로 간다고 했으니 아마도 온양 교외의 어느 곳인가 짐작을 한다. 처음에는 사업을 시작하려고 ‘땅’을 보러 갔다가 찍은 곳이 아닌가 했던 나의 상상이 너무나 우습기만 했다.

전요셉, 황프란치스코
전요셉, 황프란치스코

그리고 며칠 전에는 드디어 ‘사람의 사진’이 왔다. 전요셉 형제님의 모습이 ‘대한민국화’가 되었는지.. 완전히 ‘때 빼고 광 낸’ 모습이어서 놀라고 반갑기도 했다. 역시 평생을 살아온 고향 물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탁한 공기를 걱정하며 귀국을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  그런데 이 사진을 누구와 같이 찍었는데.. 처음에는, 귀국하면 꼭 보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분을 만나서 같이 찍은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곧 이어서 사연인즉.. 그 분은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우리부부는 반가웠다. 황 형제..

우리 부부가 봉사자로 수녀님을 보조했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교리 반에 2014년 부활절 영세를 목표로 가족 4명, 전원이 등록했던  황 형제였던 것이다. 그 사진은 황 형제가 대전 노은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전 형제와 같이 찍은 것이라고 했다. 영세명은 교황님과 같은 프란치스코.. 너무나 반가웠다. 황 형제님 부부 가족은 작년 가을 교리반에 등록 후에 사정이 생겨서 교리반 공부 도중에 올해 초에 ‘영구’ 귀국을 했는데.. 아마도 귀국 후에 교리공부를 계속해서 부부가 같이 영세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이 모두 영구 귀국을 했고 이렇게 다시 재회를 하며 찍은 사진.. 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4년여 전 레지오 활동단원을 갓 시작하며 나에게는 생소한 ‘병자기도’ 란  것이 있었고 그 대상 중에 레지오 단원이며 중병환자였던 전요셉 형제가 있었다. 멋도 모르고 나는 열심히 기도를 했다. 생전 처음 ‘남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속으로는 회의도 많이 있었지만 ‘성모님의 군단’의 규율을 따라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열심히.. 1~2년 후에 우리는 기적과도 같은 소식에 놀라기만 했다. 그 ‘중병’이 ‘완치’가 된 것이다. 본인도 놀라고 레지오 단원들도 놀라기만 했다. 겨우 신앙을 찾아가고 있었던 레지오 햇병아리였던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살아있는’ 신앙공부가 됐다. 그 이후 전 형제는 가끔 보는 정도였지만 만나면 최소한 얼굴을 익힌 정도가 되고 건강에 대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 말 우연히 인사를 하다가 나와 돼지띠 동갑임을 알게 되었고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near-perfect chemistry가 있음도 느끼게 되었다. 서로 가끔 식사를 같이 하며 서서히 조금씩 상대방을 알게 되어갔지만, 역시 나이 들어서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됨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이곳에 오래 산 이유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았지만 전요셉씨는 내가 오랜 전에 알았던 ‘그 옛날’ 기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는 너무나 그립고 신선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우리는 무언가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가깝게 하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너무나 서로 다른 개인 역사가 너무나 흥미롭지 않을까? 작년 말에는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를 준비하며 난타와 중창에서 가깝게 어울리기도 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고, 봉성체, 교구 성체대회 같은 곳에도 같이 참가를 하는 등 오랜 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느낌도 들었다. 전 형제님은 어르신들과 참 잘도 어울렸는데, 그때 받는 느낌은 한마디로 ‘사람이 좋다’라는 그런 것이었다. 순진하기도 하고, 우직하기도 한 세상을 약삭빠르게 사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성품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는지 결국은 귀향을 결심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한마디로 조금은 더 쓸쓸한 기분을 남기고 사라진 돼지띠 사나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우선 섭섭함을 달래는 수 밖에 없나.. 전 형, 그곳에서 하시는 일 순조로이 풀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