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ongest day, then snow day 2011..

어제는 모처럼 아주 바쁘게 느껴지는 일요일을 보냈다. 평소 때의 일요일은 조금 relax하는 기분으로 보내곤 하는데, 어제 일요일은 조금 달랐다. 최근에 내가 경험하고 있는 out-of-closet의 한 예라고나 할까.. 처음 가보는 집도 두 군데, 처음 만났던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주 유쾌하고 진땀 나는 경험이 되었다. 단 요새 예외 없이 대부분이 즐기는 karaoke를 제외하고.. 나는 이것에 익숙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Almost empty Atlanta’s I-285 morning after snow

이런 것들과 아울러 이곳의 날씨가 어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치도 어김없이 일기예보가 들어 맞았다. 9시경부터 snow shower/storm(눈보라?)이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 들이 닥친 것이다. 이 눈보라 때문에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 완전히 눈에 쌓인 고속도로 운전을 해야 하는 모험을 하게 되었다. 시카고, 오하이오, 위스컨신에서 살 때는 이 정도는 큰 문제가 못 되었지만 이곳에선 절대로 장난이 아니다. 제설 대비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다가 지형적으로도 언덕이 많은 탓이다 (아틀란타 메트로는 piedmont, 그러니까 구릉지역에 속함).

어제 낮에는 레지오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설재규씨 댁으로 가서 그 집의 home network (주로 adsl modem/wifi router 같은 것들)을 손 보아 주었다. 나는 옛날 생각만 해서 설재규씨가 이런 것들 잘 했으려니 했지만 본인의 말로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런 류의 일들은 언제나 깜짝 놀라게 하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Earthlink/Netopia combo.. 요새 아직도 이런 구닥다리 broadband supplier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서도 Netopia adsl modem/router가 특이하다. 아주 요상한 setup mode가 있는데.. 이것은 정말 쓰는 사람이 아무리 ‘바보’라도 문제가 없게 만들어 놓았다. 흡사 요새의 Apple computer와도 같다고 할까. 문제는 동시에 두 대 이상의 pc에서 Internet을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정말 20세기적 발상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dumb mode를 full “bridge mode”로 바꾸면 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다음에 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끝나고 몇 주 전에 이미 예정된 아틀란타 한인성당 전산팀의 신년 회의/식사 참석차 Dacula, Georgia에 있는 홍보분과위원장 댁으로 연숙과 합류를 해서 설재규씨와 갔다. 그곳은 I-85 Exit 120 근처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최근 이곳은 한인들이 집단적으로 정착을 하는 곳이다. 밤 9시 이후로 예정된 대설 주의보를 염두에 두면서 전산팀 모임이 진행 되었다. 이날의 hostess인 서 안젤라 자매(본당 사목위원)의 power를 보여 주는 듯, 본당의 세 분 신부님께서 모두 오셨다. 그러니 분위기는 자연히 아주 활발하고 무게가 있었다.

이 댁의 지하에는 완전히 꾸며진 Video/Audio/Karaoke시설이 있었고, 한 쪽에는 아주 잘 꾸며진 ‘기도방’도 있었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와 식사가 끝나면서 Karaoke방으로 모두들 모이게 되었는데(사실은 우리 신부님들이 이런 것들을 좋아 하신다고 함).. 나와 설재규씨는 눈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미리 일찍 가자고 합의를 한 상태여서.. 9시 넘어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이때부터 위에 언급한 snow adventure/nightmare 가 시작된 것이다.

20여 년이 넘게 나는 눈이 깊이 쌓인 고속도로를 운전한 경험이 없었다. 어제의 눈발은 흡사 거의 폭우와 같이 쏟아졌는데. 도로는 완전히 눈으로 덥히고, 앞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 중간쯤에 와서는 차기 조금씩 미끄러짐을 느끼게 되었다.다행히 일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일기예보를 미리 들 보아서 그런지.. traffic은 그리 많지 않았고, 특히 집채만한 대형 트럭들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더 눈보라가 심해지고, 드디어 나는 속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그만큼 다급해 진 것이다. 잘못 하다가는 차를 세울 지경이 된 것이다. 이미 도로변에는 세워진 차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ramp에서는 이미 충돌사고로 엉킨 차들을 피해가야 했다. 집 근처의 완만한 언덕들을 천신만고 끝에 기어서 거북이처럼 집으로 goal-in을 하였다. 이때는 정말 ‘만세’를 불렀다. 최악의 상태가 오면 차를 버리고 둘이서 집까지 걸어 올 각오를 했을 정도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 보니 아직도 karaoke를 하며 놀고 있어서, 빨리들 출발 하라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으로 돌아 갈 때 몇 명은 아주 고생을 하였다고.. 새벽 3시경에 도착한 형제님도 있었다. 신부님들도 역시 눈 때문에 거북이처럼 운전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이번 모임은 사실 취소하거나 연기를 했어야 했다. 정말 무모한 모험을 한 결과가 된 것이다. 만약에 더 큰 사고라도 있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지만 다행히 이번의 모임은 추억에 오래 남을만한 것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밖을 보니 완전히 모든 곳이 깊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성탄절의 눈과 더불어 이번 겨울의 제2탄인 것이다. 조금 용기를 내어서 우리 집 “깡패” Tobey(개)를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다리가 짧은 Tobey가 가슴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느라 고생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오늘 월요일은 snow day, holiday가 되었다. 대부분 따뜻한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뜻밖의 ‘휴가’를 즐길 것이다. 이것이 snow day의 즐거움일까. 겨울에만 있는 뜻밖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지난 밤에 쌓인 6″의 눈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Walking Tobey on snow day 2011

 

챔피온, 위스컨신 성모님 발현, 그 후..

성모님 발현 당시를 재연한 모습
성모님 발현 당시를 재연한 모습

지난해 (2010년) 12월 초순 경에 New York Times를 통해서 19세기 (1859년)위스컨신의 성모님 발현이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았다는 비교적 짧은 기사를 읽었다. 바로 전에 시작된 2010년 대림절과 더불어 정말 가슴을 따뜻하게 느끼게 해 준 반가운 소식이었다.

성모님의 발현소식은 언제나 추문이 함께 따른다. 그래서 교회(바티칸)는 언제나 극도의 신중성으로 이런 소식을 처리하는 것을 안다. 나는 그래서 천주교를 더 좋아하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거짓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유혹을 하는가? 조금 더 교회로 부터의 자유를 원하며 떨어져 나간 개신교 형제들.. 그 자유에는 아주 무서운 유혹이 더 넘실거린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번에 공식 인정을 받은 것도 그렇다. 첫 발현이 1859년이었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루르드 발현 다음해이다. 그 당시만해도 미국 위스컨신은 아주 ‘오지, 황무지’에 불과한 미개척지 정도였을 것이고, 그런 성모님의 발현소식은 유럽에서는 뉴스 감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르드 같은 ‘인파’가 그 황무지 위스컨신 얼어붙은 곳에 몰릴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성모님 발현은 요새 다른 곳의 ‘거짓’ 발현과 달리 자연히 오랜 시간을 두고 그 진실성을 밝힐 기회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번에 나는 미국이 주요 ‘세속적’ 신문이 아닌 가톨릭 뉴스(Catholic News Agency)의 기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줄거리는 대강 같으나, 우리 가톨릭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 조금 새롭다. 그 기사를 나 나름대로 이렇게 정리를 해 보았다.

 

위스컨신 주의 그린베이(Green Bay, Wisconsin) 데이빗 리큰 주교(Bishop David L. Ricken)의 인정으로 이곳, 챔피온마을(town of Champion)의 한 교회가 미국에서 첫 성모님 발현지가 되었다.

2010년 12월 8일 –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 대 축일- 에 주교님은 ‘도덕적 확실성’으로, 동정녀 마리아가 정말 1859년 10월, 3번에 걸쳐서 젊은 벨기에 여성 이민자, 어델 브라이스(Adele Brise)에게 발현하셨다고 선포를 하였다.

1861년 발현 이후부터 그곳에는 ‘좋으신 협조자 성모님'(Our Lady of Good Help) 이라는 이름의 성모님을 위한 교회가 있었다. 2년간에 걸친 조사 끝에 리큰 주교님은 이곳은 ‘믿을만한 가치’가 있고, 교구의 공식적인 성지로 선포한다고 하였다.

3번에 걸친 발현 당시, 그 ‘여인’은 밝고, 하얀 옷을 입으셨는데, 세 번째 발현 때에, 그 ‘여인’은 자기가 죄인들의 개종을 위해 기도를 하는 ‘천상의 모후'(the Queen of Heaven)라고 밝히셨다.

“너도 개종을 하기 바란다”, 라고 그 28살이 된 어델 브라이스 여인에게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그 브라이스 여인은 미연방의 주가 된지 11년 밖에 안된 이곳 위스컨신에 가족들과 함께 이민 오기 전, 수녀가 되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동정 마리아는 그녀에게 ‘선교와 교리 가르침’의 사명을 주셨다. “이 황무지에 있는 어린이들을 모아 구원을 위해서 가르쳐라, 내가 너를 도와 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마라” 고 말씀을 하셨다.

어델 브라이스는 이어서 재속프란치스코(Third Order of Penance) 수도회원이 되어서, 미국의 미개척지를 돌아다니며 어린이, 어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하늘의 사명을 완수하려 노력을 하였다. 그 당시, 위스컨신에는 사제가 거의 없어서 교회를 다니려면 멀고 힘든 여행을 해야 했다.

세워진 성당근처에 프란치스코 회 여성들은 학교도 세웠다. 1871년경에 큰 불이 이곳에 났는데, 이곳의 거의 모든 곳이 불에 타버렸으나 학교, 성당, 그리고 수녀원 등 성모님께 봉헌 된 곳은 기적적으로 타지를 않았다.

그녀가 죽기 6년 전인 1890년, 그녀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었던 로빈슨빌(Robinsonville)이 그녀의 원래 고향이었던 유럽 벨기에의 마을이름 챔피온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동정 마리아에게 수녀가 되겠다고 약속한 것을 기념한 것이었다.

리큰 주교님은 기자에게 “어델 브라이스 수녀의 일생이야 말로 동정녀 발현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 자기 자신이나 성모님 발현 자체에 세상의 주목을 받게 하기 보다는 자신의 여생을 조용히, 겸손하게 성모님에게 바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말한다. “그녀는 근처지역을 모두 걸어서 돌아다니며 집을 방문하며 프란치스코 회의 단순하고 겸손한 정신으로 며칠 동안 아이들에게 교리공부를 시키거나 그들의 부모들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녀야 말로 사도정신으로 가득 찬 일생을 살았다. 성모발현 이후만이 아니고 그녀의 일생이 그러하였다. 또한 마리아의 간단 명료한 메시지야 말로 이 발현의 진실성을 말해준다. 마리아가 어델 수녀에게 준 지시는 간단하지만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무게 있는 것이었다.”

리큰 주교는 이어서 수없이 많은 기도에 대한 응답을 상기시킨다. 그 중에는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기적에 속하는 것들도 포함이 되어있다고 한다.

이번 주교의 공식 발현 인정은 새로운 사실이지만, 이곳은 150년 동안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이 이미 묵시적으로 알고 있던 이 교구의 성지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셈이다.

리큰 주교는 수없이 많은 믿기 힘든 기적적 치유와 개종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1859년 10월 9일 성모님 발현 이후 아직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생을 바꾸는 듯한 그런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 유명한 프랑스 루르드 성모발현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 챔피온의 성지에도 순례객들이 치유를 받고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버린 지팡이들이 쌓여있다고 한다.

이곳 성지 성당의 존 더플러(Fr. John Doefler) 주임신부님은 이곳에 발현하신 동정 마리아와 루르드 발현 성모님과는 아주 의미심장한 관계가 있다고 하고, 루르드의 벨라뎃따 수베루에게 나타나신 뒤 일년 후에 이곳으로 에이들 브라이스에게 나타나실 때, 성모님께서 이러한 연관성을 암시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주임 신부님은 이어 “루르드에 발현하신 마리아는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되심’으로 밝히셨고, 이곳에서는 자신을 ‘천상의 모후’라고 밝히셨다. 이 두 사실은 사실상 마리아의 신비를 전부 간직한다. 즉, 마리아의 생애의 시작으로부터 하늘로 들어올리심과 천상모후의 관을 쓰신 사실이다.”라고 설명한다.

발현지 성지 성당 Champion, WI

발현지 성지 성당 Champion, WI

 

레지오가 만나게 해 준 세 사람

2010년의 황혼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올해 나에게 제일 크고,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그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내가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자비의 모후 레지오에 예비단원으로 입단을 한 사실이다. 물론 나는2007년 초부터 아내 연숙의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둘이서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나의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시간적, 육체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오묘하게 나를 조금씩 바꾸어 주고 있었다.

올해 10월경부터 아주 조그만 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레지오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나의 10월 19일 레지오 예비단원으로의 입단이었다. 그때 받은 레지오 단원 수첩으로 기록이 된 나의 ‘활동’을 다시 본다. 비록 예비단원이라 ‘공식적 실적’에는 못 오른다고는 하나 나에게 그런 것은 별 차이와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비록 그 이후 묵주기도의 횟수가 조금씩 많아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금씩 나의 lifestyle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마디로 신선하고, 무언가 생의 목적이 다시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선 새로 적응해야 할 일이, 사람들(형제,자매님들이라고 부른다)을 새로 만나게 되는 일이었다. 지난 10년간 나는 ‘새로 만난 인간’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것을 그저 편안하게 느끼면서 살았다. 심지어는 새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지기도 했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피해망상증까지는 안 갔어도 그 근처까지 간 것이 아닌가 나도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 배경에서 이렇게 새로 만난 사람들.. 내가 변했나.. 모두 그렇게 정답고, 친근하고, 친절하고, 죽마고우를 보는 듯한 기분까지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 물론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니고 무언가 내가 변한 것일 것이다.

그 중에서 내가 속한 곳의 자매님들(내가 유일한 남자단원 임), 대부분 나의 신앙, 인생 선배님들.. 나의 누나를 보는 듯해서 너무나 마음이 편하다. 성모신심으로 완전 무장된 그 자매님들..내가 배울 것 투성이다. 죽은 영혼들을 더 편히 보내드리는 레지오 연도에도 몇 차례 참가를 해서 그 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던 ‘죽음의 절차’를 다시 배우게도 되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3개월이 되어서 정식단원 선서의 절차를 앞두고 있지만, 나는 큰 문제없이 정식 단원이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그런 시점에서 나는 레지오가 그 동안 다시 만나게 해 준 세 사람을 생각한다.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우리 예수님을 낳아주신 성모 마리아님이다. 거의 신화적, 역사적, 성서적, 심지어는 추상적으로만 느껴왔던 마리아님을 이제 나의 어머니로 다시 맞아들이고,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레지오 교본을 혼자서 열심히 ‘독학’을 한 덕분에 나는 모르고 있던 ‘보화’와도 같은 심오한 성모신심을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같은 성인의 저서 (직접, 간접으로)도 읽게 되었고.. 얼마나 내가 성모님을 슬프게 해 드렸는지도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로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 어떠한 “무지한 가톨릭 신자, 개신교신자, 개신교 신자와 같이 행동하는 가톨릭신자”를 만나더라도 이제는 자신이 있다.

바른쪽 설재규씨 부부, Thanksgiving dinner Atlanta, 1989
바른쪽 설재규씨 부부, Thanksgiving dinner Atlanta, 1989

두 번째 사람은 본당교우이자 오래 전부터 알던 설재규, 아오스딩 (Augustine) 형제다. 설재규씨는 비록 나보다 나이가 한참 밑이었지만, 내가 이곳 아틀란타에 1989년 직장을 따라 이사를 오게 되면서 거의 처음 만나게 된 정말 오래된 형제님이다. 내가 다니던 직장, AmeriCom Corporation에서 만난 유일한 한국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software engineer였고, 그는 test engineer였는데,. 비록 같은 부서는 아니었어도 곧바로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으로 가깝게 지냈고, 더욱이 그도 우리와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 설재규씨의 부인은 우리부부와 같이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직장도 그렇고 성당, 한국학교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아주 오래가지를 못했다. 거의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설재규씨와는 무슨 인연이 있는지 그 후의 다른 직장이었던 Scientific Atlanta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물론 다른 부서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남다른 chemistry가 없었나 보다. 별로 더 가까워지질 못했다. 게다가 그 후 우리는 거의 완전히 한인 community와 멀어지게 되었고 서로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레지오 입단을 계기로 아틀란타 본당의 전산팀에 합류를 하게 되었는데.. 글쎄..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참, 이것도 인연이라면 어떨까? 서로가 젊은 패기는 다 수그러졌고, 조금은 완숙된 심경으로 만나면 이것도 무슨 큰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 번째 사람은 역시 본당의 교우,형제님이었던 김찬웅, 베드로씨다. 역시 우리가 아틀란타에 이사오면서 거의 곧바로 만났다. 중앙고 후배 이성풍(aka 윤주 아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분은 그 당시 아마도 삼성 지사에서 근무를 했었던가 했다. 그래서 가끔 윤주네 식구와 더불어 모이곤 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서로 잘 맞았고, 술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는 분위기가 우리와도 (비록 내가 나이가 제일 위였지만) 잘 어울린 것이다.

그러다가 역시 우리가 성당과 멀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중간다리 역할을 하던 윤주네가 완전 귀국을 하게 되면서 사실상 연락조차 끊긴 채 산 것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아내 연숙과 김찬웅씨 부인 안젤라씨가 한인천주교회 레지오에서 만나 베드로씨네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다. 알고 본즉 베드로씨도 나와 같이 레지오 협조단원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제는 서로 부부가 만나서 점심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희망에 베드로씨도 언젠가는 안젤라씨와 같이 레지오를 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이고 지금은 ‘해후의 즐거움’이 더 크다.

 

Secret Santa’s, 고백성사, 올해의 마지막 일..

이것이 웬 떡이냐? 이것이야 말로 Santa’s Surprise가 아닐까? 얼마 전에 아래층 마루(IKEA Tundra)를 하면서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hallway의 조그만 closet의 바닥도 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몇 년(아마도 십여 년?)동안 쌓여 있던 각종 잡동사니가 있었다.

Secret Santa's Surprise
Secret Santa’s Surprise

주로 Halloween decoration stuff같은 것과 겨울용의 heavy jacket같은 것들이어서 평소에는 별로 열어 보지를 않던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 완전히 그곳의 모든 것들을 다 들어낸 셈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던 뚜껑도 뜯지 않은 CHIVAS REGAL Scotch Whiskey 한 병이 나온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는 이런 술을 사본 적이 없었고, 유일하게 집에서 마시던 맥주도 이제는 거의 사지를 않는다. $$도 그렇지만 이런 것들의 ‘단점’하나가 조금씩 이런 것에 의존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그냥 싫었다. 담배와 마찬 가지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아주 쉽게 습관성이 되어가는 것이 싫은 것이다. 담배를 끊을 때의 trick을 다시 써서, 술은 남의 집에 놀러 가서 ‘얻어’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대부분 얻어먹는 다는 사실이 ‘치사’하게 느껴져서 피하게 되곤 하고, 설사 피할 수 없게 되더라도 절대로 과도하게 마시게 되지를 않는다. 그런 배경이지만 가끔 정말 외롭게 느껴지거나 할 때, 술 생각이 나곤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결심은 확고해서 ‘절대로’ 술을 사지를 않았는데.. 그런 나를 가상히 여기셨는지.. 이렇게 뜻하지 않게 술병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Santa할아버지가 주신 것은 아니고, 사실은.. 아마도 작년에 ‘선물’로 받은 것을 그냥 그곳에 넣어두고 완전히 잊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pleasant surprise가 아닐까? 덕분에 올해 겨울 저녁은 조금 훈훈한 느낌을 받으리라 희망을 해 본다.

어제 오후에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거의 20년 만에 아틀란타 순교자 천주교회에서 ‘한국어 고백성사’ 를 하였다. 결론부터 말을 하면, 이것이다. 이것을 잘하고 못하고는 거의 ‘언어’에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준비를 잘 했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영어로 하게 되어도 조금은 ‘미묘한 표현의 제한’을 느낄지는 몰라도 시간을 두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준비를 잘하는 것이 그저 느끼는 대로 말할 수 있는 한국어 고백성사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쉽다는 것이다. 어제의 경우가 그랬다. 모처럼 ‘자유스러운 모국어’로 하는 것이니까 그저 큰 문제가 없을 줄 잘못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과같이 준비를 철저히 하지를 못했다. 신부님께서 그것을 모르실까.. 아닐 것이다. 조금 신부님께도 미안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사제경험이 적은 ‘막내’신부님, 김영훈 스테파노 신부님에게 성사를 보게 되어서 조금은 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이것을 피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거의 무조건 나는 고백성사를 해야만 하는 심정이었다. 그저 시작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제부터 나는 ‘정상적,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잘 준비하고 잘 할 것이다. 이것도 레지오에 들어가면서 다시 생각한 ‘부산물’중의 하나라고 할까.. 참 성모님의 묵주기도는 오묘하다고 할까.. 정말 모른다.

The last 10% of work takes 90% of time. 이 경험적인 명언이 정확히 도 잘 들어맞는다. 물론 이것은 경험적으로 어떠한 과제를 과소평가 했을 때 꼭 들어맞는다. 년 말을 목표로 하고 있는 아래층 나무 마루 놓기, laminate flooring이 그것 중의 하나다. 비교적 작은 면적의 화장실의 마루가 그것이다. toilet 아래로 마루를 놓는 것이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던 것이다. Toilet을 분해, 그것도 완전히 들어내고, drain hole주변으로 동그랗게 cutting하는 것이 당연히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을 왜 예측을 못 했을까? 전에 toilet를 바꾸는 것을 해 본적이 있었지만 거의 10년이 되어가서 자세한 것을 다 잊어버린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drain hole에 wax ring도 필요하고, water line plumbing도 다시 해야 했다. 한마디로 조금은 ‘뼈빠지는’ 일 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것을 하고 나니 정말 보람을 느낀다. $$$도 엄청 save했겠지만 이 나이에도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더 나를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win-win이 아닐까?

 

Aging blues, 고백성사, 평창이씨 족보 연구

12월, 아니 2010년도 열흘 정도 남았나? 나의 마음도 무언가에 쫓기듯이 종종 발걸음이 빨라진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쫓기는 심정이 되는 것일까? 아무리 나의 쫓기는 심정을 분석하려 해도 확실한, 그럴듯한 대답이 없다.올해는 조금 느긋하게 년 말을 보내려고 했지만 여지없이 나는 또 이렇게 2011년을 향해 내몰리는 듯한 심정이 되고 만다. 급기야는 어제 밤에 또 무언가에 쫓기는 꿈까지 꾸고 말았다.캐나다의 친구 정교성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수십 년간 꼬박 보내던 그, 최근 몇 년은 소식이 없었다가 올해 다시 그의 카드를 받은 것이다. 언제나, CANANA의 symbol이 꼭 들어간 그런 카드를 보내온다. 언제 한번 그와 그의 새 wife를 만나보게 되려나?

나는 오랫동안 성탄 카드를 친지들에게 보내지 못하고 살았다. 그것이 그렇게 힘이 들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역시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가 소식을 끊어버리고 산 것이다. 그 결과 하나하나 친지들이 주변에서 사라짐을 알았다. 오랜 동안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친하던 친지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짐을 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또한 그렇게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과 다시 연결이 되기는 생각보다 쉽지를 않다. 하지만 노력을 다시 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성탄카드를 조금씩 보내기 시작했다. 올해도 조금은 늦었지만 이제부터 보내기 시작을 할 것이다.

내일은 정말 오랜만에 ‘한국어 고백성사’를 할 예정이다. 레지오에 입단을 하면서 생각한 것 중에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심각하게 다시 시도할 것도 들어있었다. 최소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피할 생각이 없다. 천주교 교리에 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니까 하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근래에는 거의 미국본당에서 미국인 신부님들께 영어로 고백성사를 드렸었다. 비록 형식적인 기분이 많이 들었지만 하고 나면 그렇게 마음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것 조차도 사실 3년 전부터 못하고 있지만.. 영어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고백성사’ 그 자체가 문제였다. 나의 ‘치부’를 들어내야 하는 작업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신자들 중에도 잘못한 것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어떤 때는 나도 이 말에 수긍이 가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인 것을 또한 나는 안다. 비록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나의 마음에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이 남에게도 그렇게 이해가 되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나같이 이렇게 오랫동안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참 힘들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그렇게 쌓인 것을 하려고 무척 고생을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것을 조금 체계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었다. 2천년 전통의 가톨릭교에 이미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많은 성인,성녀들이 이미 다 겪었을 것이 아닌가? 그 중에서 ‘양심성찰’이라는 아주 체계적인 이론까지 있었는데, 그것이 고백성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죄’를 찾는 것도 그렇지만 사실 나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고백성사 그 분위기의 ‘어색함’에도 있다. 특히 고백성사를 하기 전에 느끼는 것.. 하지만 또한 안다. 고백성사 후의 그 날라갈 것 같은 그 기쁨.. 죄를 용서 받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 한국 과천에 사시는 평창이씨 익평공파 29세손 종친님(사실은 아주 젊은 entrepreneur) 이종환 님이 족보의 무려 1700여 쪽을 확인하면서 나의 아버님의 성함이 보이는 몇 쪽을 scan을 해서 보내 주셨다. 그 동안 추측으로만 알던 것을 다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직계조부님들의 거주가 경기도 평택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부터 인가.. 해답보다는 의문이 훨씬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 중에 제일 궁금한 것은, 아버님의 사촌들이 거의 6명이나 되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전혀 기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 하는 것일까? 물론 나의 이름도 거기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증조부이신 이종득 할아버지의 후손이 28세손에서 최소한 족보에서는 ‘전멸’인 것이다. 그분들의 ‘남자’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면, 나머지는 역시 동족의 비극 육이오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모두 북한에서 사셨을까? 최소한 나의 직계 할아버지 ‘이경호’ 님은 서울에서 사셨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그리고 나의 삼촌 ‘이준모’.. 호적에도 없는 그 삼촌은 사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잠깐 들은 적이 있었다. 육이오 전쟁 때, ‘월북’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의 호적에서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무슨 해괴한 역사일까?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당하시고, 그 동생은 빨갱이였단 말인가? 정말 그 짧은 공산당 혁명 역사가 이렇게 한 가정을 파괴할 수 가 있을까? 할말을 잊는다..

 

雜想: 눈발이 흩날리는 일요일 오후에..

눈발이 흩날리는 일요일 오후에..  어느덧 2010년 대림 3주로 접어들었다. 그러니까 대림 초 3개가 켜지는 일요일이 된 것이다. 지난주에는 주일 미사를 빠지고 말았다. 그 전날 아틀란타 한인성당에서 있었던 레지오 마리애 연차 총 친목회에 거의 하루 종일 참석을 한 것이 조금 피곤했다는 것이 핑계가 되었다.

대림 2010 3주일
대림 2010 3주일

물론 핑계에 불과하고, 아침에 조금 피곤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명심을 하고 미국본당의 미사엘 갔고 Panera Bread (Cafe)에 들려서 평상적으로 small breakfast (bagels & coffee)를 즐겼다. 그런데 회색 빛 하늘에서 하얀 것들이 조금씩 내려옴이 보였다. 분명히 눈발이었다. 싸늘한 바람과 함께.. 아.. 기억에 남을 12월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경험적으로 십중팔구는 싸늘한 비가 올 시기에 어렸을 때 보던12월의 눈은 참 아름다운 느낌으로 과거와 함께 내려오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온다.

여기까지가 즐거운 것이고.. 다음은 다르다. 12월 자체가 완전히 무엇에 밀려가는 무거운 느낌인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제일 극치는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다. 그날로 그렇게 떠들고 북적대던 것들이 거짓말같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그것은 거의 고통이다. 물론 이것은 ‘세속적’인 풍경이지만, 믿는다는 크리스천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오죽하면 유타주(State of Utah)의 한 주교는 ‘공문’으로 “12월 24일 이전에 크리스마스 기분을 즐기지 말라” 고 말까지 했을까? 나도 사실 이 말에 동감이다. 그것이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일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완독(完讀)  어제로 레지오 교본을 한번 다 읽은 셈이 되었다. 비교적 얇은 종이로 된 책이라서 보기보다 분량이 많았다. 거의 500쪽이 넘는 분량이었다. 올해 10월 19일에 아틀란타 본당 꾸리아 소속의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에 예비 행동단원(공식 선서까지 3개월간의 대기단원)이 되면서 받은 책이 바로 이 공식 레지오 교본이었다. 이 책을 받으면서 단원들이나 단장으로부터 아무런 말을 들은 것은 없었다.

레지오 교본
레지오 교본

그저 공식교본이니까 읽어야 한다는 ‘묵언’ 정도만 나 나름대로 느꼈을 뿐이었다. 하기야 정기회합 중에 항상 조금씩 읽고, 돌아가면서 공부를 해 와서 발표하는 것은 보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렇게 하다가는 시간이 너무나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입단 1주일 뒤부터 미친 듯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냥 읽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지루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든 것이다. 그래서 조금 변화를 준 것이 keyboarding 으로 하는 ‘필사’였다. 한글타자를 치면서 읽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읽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이것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에 비해서 keyboarding을 하면 오타에 대한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까 더 정성을 드리게 되는데, 여기에 글이 의미를 파악하려면 더 ‘머리’를 써야 한다. 조금은 “고행”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거기다 다 읽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완전한 나만의 text copy가 남는 것이다.물론 이것은 copyright가 된 것이라 공개는 못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로 쓸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읽은 것은 ‘정독’은 절대로 될 수가 없다. 그저 ‘속독’ 정도가 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읽음으로써 정말 내가 그 동안 가톨릭 신자로써 무심하거나 무식한 것들이 참 많았다는 것도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이 교본의 ‘역사’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레지오의 90년에 가까운 역사를 고려한다면 이 책이 오랜 동안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에 근거해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심오한 신학적 고찰과 거의 cookbook에 가까운 실제적 방법론이 기가 막히고 교묘하게 접목을 이루고 있는 이 책은 나에게 거의 제2의 성경에 가깝게 느껴진다. 1월 중순에 있을 정식단원 선서 전까지는 ‘완전 정독’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른 책들도 이것과 같이 잘 쓰여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Amazingly Stupid Chinese (Government)…  솔직히 말해서, 나는 ‘듕귁’ 이라는 말조차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듕귁정부라는 말은 더 좋아할 수가 없다. 더구나 빨갱이 듕귁과 듕귁정부는 지독히도 싫어했다. 각종 이유로 자기네 인민들을 수백만 명이나 굶겨 죽이고 문화혁명이라고 해서 모택동을 신격화하고.. 정말로 그들의 해괴한 행적은 끝도 없었다. 근래에 들어서는, 드디어는 “인민의 적인 자본주의” 를 교묘하게 이용을 해서 흡혈귀와 같이 $$$를 거지같이 모으더니 아주 선진국같이 행세를 하려 든다. 머릿속은 19세기에 머물고 있으면서 21세기의 국제사회를 대하려 드니 문제가 없을 수가 없겠다. 그 “해괴한 행적 올림픽” 중에서 금메달은 “바티칸과 상관없이 가톨릭 신부,주교를 임명하는 것”이고 은메달은 노벨 평화상에 대해서 “몇몇 광대들에 의해서 듕귁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듕귁 외무성의 성명이다. 이들은 $$$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진 모양이다. 빨갱이 시절에는 무시무시하게 많은 인구 덕분에 핵전쟁도 무섭지 않다고 떠들더니 이제는 무시무시하게 많은 $$$ 덕분에 국제적인 관행을 마음대로 무시할 수 있다는, 역시 “빨간 짱꼴라” 적 발상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Elizabeth Edwards…  요새는 참 용감한 여성들이 많다. 과거에 비해서 더 많아진 듯 하다. 어떨 때는 남자들 보다 더 용감한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여성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나와 나이도 비슷해서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이렇게 공적인 인물이 그것도 암과 싸우다 죽으면 더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모든 사람이 다 미리 알 수 없는 수명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모두들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산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내일 이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실감나게 든다. 물론 평균수명이라는 것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통계이고, 나는 그 통계와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나는 제일 가까운 사람,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느끼기 시작을 했고, 지금은 그런대로 유한하고, 비교적 짧은 인간수명을 느끼면서 하루하루 사는 셈이다.물론 이 ‘용감한’ 여성은 암이라는 병에 의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삶이 끝이 났지만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용감함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Early Siberian Blast

드디어 온다. 하지만 한 달이나 일찍 온다. 진짜 추위가 Siberian Express.. 라고나 할까. 한반도에서는 Siberian Express라고 하겠지만 여기서는 Canadian Express가 더 맞는 말이다. 기온이 하루 사이에 무려 화씨 20도 이상 떨어지고 있다. 모래 새벽의 기온은 화씨로 15도까지 내려갈 예정.. 화씨로 15도면 섭씨로 얼마나 될까? 아마 영하 10도 정도가 될까? 좌우지간 이곳의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추위인데, 여기 바람까지 합세하면 wind chill(체감온도?)은 훨씬 더 심할 것이다. 12월의 이곳은 주로 싸늘한 비가 많이 오곤 하는데 12월 초에 이런 것은 나의 기억에도 거의 없는 것이다. 작년에 이런 강추위는 평년대로 1월에 시작이 되었다. 여름이 지독히 더워서 이것은 역시 예상이 되긴 했다. 연평균은 아직도 거의 일정하니까. 이곳이 이 정도면 북쪽지방인 mid west지방은 훨씬 더 추우니까.. 상상이 간다. 이런 것들 때문에 조금은 더 12월에 있는 ‘휴일’의 기분이 나긴 하지만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조금 괴로울 것이다.

어제는 나에게 조금 이색적이 날이었다. 모처럼 한국사람이 제법 많이 모이는 모임에 참석을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참가한 곳은 아틀란타 “한국순교자천주교회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 제13차 연차 총 친목회”란 길고 긴 이름의 모임이었다. 이런 모임의 이름들은 사실 그렇게 생소한 것이 아닌 것이 연숙이 가끔 전에 언급을 했던 이름들이었기 때문인데 내가 그곳에 가게 될 줄은 정말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이것은 조금 신비스럽다고나 해야 할지 나도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다. 지난 10월 말 부터 나가기 시작한 레지오 회합도 이제 거의 2달이 되어오고 조금 성모님 군단 일원으로 조금씩 나의 모든 것들이 조정이 되고 있음을 느끼고, 그런 배경에서 참가한 이 연례행사는 나에게 너무나 은총과 기쁨의 시간을 주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많은 ‘전우’들을 보게 된 것도 그렇고 막강한 인원으로 같이 바치는 묵주기도는 정말 감격스러웠다. 나는 사실 처음 그런 것들을 보는 것이다. 비록 동료단원들의 친목이 주 목적이겠지만 공식적인 기도, 신부님 참여 등등이 오묘하게 섞이어서 균형을 잘 맞추었다. 이런 모임이 다른 곳에 어디에 또 있을까? 물론 모두가 ‘행사의 프로’가 아니라서 모임의 진행이 100% 매끄럽지는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다. 특히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중에 Audio system의 중요성을 이번에 느꼈는데.. 이것에 문제가 있으면 모임의 진행이 얼마나 힘든가를 절감했다. 이런 모임을 준비할 때는 이것부터 미리 점검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모든 단원들이 열심히 참가를 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까?

 

Catholic Sunday

Advent 2010 (2010년 대림절)…  오늘은 천주교 달력으로 새해가 되고 예수님 탄생인 12월 25일 성탄절까지의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날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인 것이다. 개신교회에도 이러한 시기에 대한 이름이 따로 있는지 궁금하다. 기억에 들어본 적이 없다.예수님 활동 당시 12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온 이 Roman Catholic, 천주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역사, 전통들은 알면 알수록 , 더 알고 싶은 것 투성이다. 이날부터 제대 옆에는 대림을 상징하는 4개의 촛불이 세워지고 한 주일마다 초가 하나씩 켜진다. 이것도 천주교의 특징인 ‘상징’적인 의식일 것이다.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2010 대림절 시작, 본당 주보에서

우리는 주일미사를 집 근처에 있는 미국인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에서 본다. 이곳도 거의 10년 넘게 다녀서 정이 들었다. 아침 8시 반의 미사에 가면 거의 앉는 자리가 정해질 정도로 익숙한 신자들이 많다. 혹시나 낯익은 얼굴이 안 보이면 신경이 쓰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제는 사실 주임신부님 보다는 부제님 중에 있다. Deacon John이라고 불리는 부제님, full name은 Deacon John Duffield인데 건장한 체구에 단정한 흰머리, 항상 진실된 웃음을 띈, 순진하게도 보이는 얼굴, 그 보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그 ‘경건’한 태도이다. 주임신부님보다 더 경건하게 미사를 돕는다. 이분이 부제가 된 것도 5년 정도 되어간다. 나이도 나와 같고 직업은 사실 nuclear engineer, U.S. navy officer로 nuclear submarine (핵 잠수함)이 전공이다. 그가 이렇게 공학도라는 사실이 나를 참 기쁘게 한다. 가끔 하는 설교도 어찌나 그렇게 틀에 박히지 않았는지..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것들..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속으로 나도 여생을 그분과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내일은 이 미국본당에서 penance service(판공성사)가 있는 날이다. 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한번 하고 부활절 전에 또 있다. 쉽게 말해서 천주교 특유의 ‘고백(고해)성사’인 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만큼 이 성사를 지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이것을 하려면 정말 심각하게 자기를 되돌아 보는 ‘양심성찰’을 해야 하니까. 자기의 죄를 찾아 내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2년간 이 성사를 못 보고 있고, 이것이 항상 나를 찜찜하게 한다. 사실 이것을 하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영어로 하는 고백성사는 아무래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니까..

 

I Understand, by G-Clefs…  며칠 전부터 정말 이상하게도 oldies중의 I Understand란 곡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런 발전이 아닐까.. 년 말이 되어가고, 그러면 분명히 Auld Lang Sine이 불릴 것이다. 그 곡이 background 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G-Clefs가 불렀던 60년대 초의 hit,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인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이 곡을 부른 group G-Clefs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 이번에 알고 보니 이들은 내가 잘 못 추측한 대로 영국계통의 그룹이 전혀 아니고, 미국의 ‘흑인’그룹이었다. 사실, 적지 않게 놀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잘못된 사실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이 곡은 미국에서 1961년에 나온 것이지만 우리 때는 거의 1964년경에 많이 알려진 곡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앙고2 때였다. 년 말에 많이 불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확실한 것은 고2때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역시 1964년이 저물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학급회의, 그러니까 home room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에 모두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을 했다. 분위기는 완전히 고2때 특유의 감상에 젖은 그런 분위기.. 고3이 되기 전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는 듯한 심정으로 이별을 서러워하는 기분에 모두들 휩싸인 것이다. 바로 그때다.. 제일 키가 컷 던 김용만이 G-ClefsI Understand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순진했던 가슴들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 고교2학년은 정말 모두들 문학소년,소녀들이었다. 지독히도 순진하고, 이상적이었던 그 일년.. 그때에 생각하고 꿈을 꾸었던 장차 다가올 인생들.. 과연 어떠한 인생들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기쁨, 행복, 괴로움, 후회를 만들며 살았을까? 갑자기 지독한 감상에 젖는다.

 

I Understand by G-Clefs, 1961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Your love for me, why not be mine?

It’s over now but it was gr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I miss you so, please believe me when I tell you

I just can’t stand to see you go

You know

If you ever change your mind

Come back to me and you will find

Me waiting there at your command

I understand, I understand

SPOKEN: “I understand just how you feel. Let bygones be bygones. But always

remember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We’ll sip a cup of wi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

I understand

마리에타 2구역

Thanksgiving Day 전날 저녁에는 몇 달 만에 연숙이와 같이 우리가 속해있는 아틀란타 한인천주교회 마리에타 2구역 미사에 다녀왔다. 지난 6월부터 이 구역모임에 참가를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도 못 나가면 올해를 넘기겠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음식 하나를 해서 간 것이다. 이번의 host family 고창민 클레멘스 형제 댁, 나는 이번에 처음 가는 집이었다. 미사를 드리기에 쾌적한 장소를 제공하는 훌륭한 집, 실내 디자인도 멋있는 그런 집이었다. 이 댁의 따님, 고근정양은 10여 년 전쯤 내가 이곳의 한 한글학교에서 잠깐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커서 대학에서 ROTC까지 하는 용감한 아가씨가 되었단다. 참 흐뭇한 기분이었다. 고 형제는 집에서 ‘밀주’를 취미로 담근다고 하는데 그날도 예외 없이 달콤한 포도주와 인삼주가 나왔다. 물론 집에서 담근 것들이다.

마리에타 2구역은 우리부부가 속해있는 아틀란타 순교자 한인천주교회 (이하 한인성당, 본당)의 아틀란타 서북부 suburb (마리에타 포함)를 포함하는 구역system중의 하나다. 이 지역의 특징은 1996년 Atlanta Olympic을 계기로 급 팽창한 아틀란타의 다른 수도권지역에 비해서 이곳만은 아직도 거의 인구변동이 없는 ‘안정된’ 곳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사는 한인들의 숫자도 그렇게 많지 않고 안정적이며, 그들은 경제적으로 대부분 안정이 됐거나 되고 있는 그런 연령층이 대부분이다.

우리부부는 현재 한인성당 주일 미사는 안 나가고 있지만 이 구역모임에 나간 지는 거의 5년이 되어온다. 사실 이것마저 안 나가면 우리는 완전히 한인성당과의 연결고리가 없어지게 되는 셈이다. 대부분 성당 구역단체들이 그러하듯 이곳도 active한 멤버는 한정이 되어있고 나머지는 가끔 참석하는 정도이다. 이 구역 시스템의 중요한 목적은 역시 교우들간의 친목도모일 것이지만 그 이외의 기능도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구역 신자들이 손수 만든 음식을 성당 점심으로 판매해서 본당을 돕는 것 같은 것도 있다.

 

Irish Folk/ Pop/Gospel Singer Daniel O’Donnell의 “St. Francisco의 기도”

 

나에게 이 첫구역모임 참가는 조그만 culture shock이었다. 비록 열 몇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만 나에게는 너무 많은 사람들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내가 오랫동안 한국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거의 의도적으로 피해와서 그럴 것이다. 그 모임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조바오로씨 부부가 고작이었다. 나이도 우리가 제일 많은 축에 속했다. 이렇게 해서 조금씩 한인성당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나의 한 달 전 레지오 가입 후에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구역형제자매님들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은 더 친하게 보인다고 나 할까.. 아니면 착각인가.. 하지만 분명히 내가 조금씩은 변하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이번의 미사집전은 올해 이곳에 새로 부임한 김영훈 스테파노 “막내” 신부님이시다. 이분은 30대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시고 다른 두 신부님보다 젊어서, 막내신부로 통한다. 말씀을 어떻게나 또박또박 하시는지 흡사 오래 전 국어시간에서 듣던 그런 발음을 연상시킨다. 역시 예수회 신부님이신데 다른 분과는 달리 미국의  Berkeley에서 공부를 하시고 이곳에 처음으로 부임하셔서, 이곳 미국의 사정을 잘 아시고, 특히 언어문제가 없어서 청소년 사목에서 맹활약이 기대되기도 한다. 조금 이색적인 것은 대부분 신부님들이 술과 담배를 하시는데 이 김신부님은 둘 다 전혀 못하신단다. 그런 것들이 아주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래저래 이곳 본당은 참 하느님의 은총을 최근 들어서 많이 받는 것 같다. 특히 주임신부(Pastor)이신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님의 지치지 않는 헌신적 사목활동은 떠나신 뒤에도 두고두고 이곳에 깊은 영향을 남기리라 기대가 된다.

우리구역 교우의 연령층은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지만 40~5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서 우리는 조금 은퇴세대에 속한다. 유일하게 나보다 나이가 위이신 분은 전 토마스 아퀴나스 형제님이 계신데, 사실상 이 구역을 오랫동안 지키시고 요새는 건강을 이유로 가끔 나오시곤 한다. 이 전 형제님(교우들은 대부분 형제, 자매님으로 불린다)은 조금 독특하신 분이다. 덕수상고, 고려대학을 졸업하시고 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다가 미국엘 오신 듯한데, 정치적인 성향이 상당히 진보적이고, 따라서 보수세력을 아주 혐오한다. 쉽게 말하면 상당히 좌익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특히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지독히 혐오하는데, 이것이 지나쳐서 거의 ‘주사파’로 오해를 살 정도의 발언을 하는데 나는 그것이 상당히 듣기가 거북하였다. 참 세상이 많이 좋아지긴 했다. 이런 발언이면 옛날에는 세계 어느 곳에 있던 간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님이 육이오직후 공산당에게 납북을 당하셔서 김일성이라면 자다가도 이를 가는 형편인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소화가 안 될 지경이다. 같은 신자 입장에서도 그렇다. 조금 다른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을 해 주는 것이 어떨까. 사실 거북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실 교우들과 어울리게 되면 자기와 입장이 아주 다른, 심지어는 아주 거북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다름’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이해하고, 포용을 하는가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거북한 것 중에는, 천주교 교리 중에서 분쟁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파 헤치며 신자들을 괴롭히는  ‘지식인’ 교우들.. 왜 그럴까?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란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가 정말로 필요한 교우들.. 다른 쪽으로는 “초자연적인” 신앙과 popular science를 완전히 혼동을 하는 교우도 본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그럴 때 조금 common sense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조금 거북한 것들이 사람이 모이면 꼭 있는 것이므로 이것으로 신앙공동체의 구역모임을 피하면 안 되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가끔 피하고 싶은 때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구역모임에 나오는 사람의 숫자는 유동적이지만 아마도 거의 고정적인 숫자는 유지하는 것으로 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조그만 기적일 것이다. 둘 셋만 모여도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올해는 아주 기억에 남을만한 추수감사절 이브의 구역미사가 있었고, 성탄절 즈음의 구역모임은 어떨지 조금 기대가 된다. 작년에는 전근섭 형제 댁에서 “100% 세속적”인 모임을 즐겼던 기억이다. 흡사 노래방에 간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모임..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분위기가 사실은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것이 아마도 세대차이가 아닐까?

 

Thanksgiving Day eve

비가 오락가락하고 포근한 깊은 가을.. Thanksgiving Day가 내일로 다가왔다. 작년 이맘때도 지금처럼 아주 포근한 날이었다. 우리의 조촐한 가족만이 모였던 휴일이었고 모두 조금씩 요리를 하는 것을 거들었던 기억이다. 그때는 새로니가 Washington DC에서 일을 할 때여서 급하게 왔다가 급하게 떠났는데 올해는 다시 학생이 되어서 거리와 시간 모두 여유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대신 작은 딸 나라니가 처음으로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첫 해가 되었다. 올해 4월에 따로 나가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집에 오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사실을 본인도 즐기는 듯 하다.

올해의 Thanksgiving Day는 오랜만에 guest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새로니의 Emory friend인 Galina가 뉴욕에서 현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집에 놀러 온 것이다. 식사만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머물게 되어서 조금은 신경이 쓰이지만 예년과 조금 다른 휴일이 되어서 흥미롭다. 애들이 어렸을 적에는 이런 때면 한방에 모여서 재미있는 movie같은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절이 거의 먼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집은 이곳의 전통인 turkey요리를 해 왔다. 아마도 그때가 1980년대 초, 그러니까 우리가 Columbus, Ohio에서 살 때였을 것이다. 연숙이 그곳 성당의 원로로 계시던 이봉모 선생님(지금은 고인이 되셨음)의 부인으로부터 recipe를 받아서 첫 turkey 요리를 했던 때가 그때쯤이었고 그 이후로 거의 한해도 빠짐없이 turkey 요리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추석이나 설날의 한식 전통요리보다 이 turkey 요리에 대한 추억과 애착 같은 것도 생기게 되었다. 가끔 한국 손님들이 참석을 하면 별로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다. 특히 김치를 꼭 같이 찾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금 당황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김치와 먹어도 사실 맛이 있었다)내가 개인적으로 turkey 요리를 제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사실 결혼 훨씬 전의 일이었다. 1974년 가을의 Thanksgiving Day였나.. 그 당시 알고 지내던 서울사범대 지학과 출신 성성모씨가 Indiana주 Purdue University에 다닐 당시, 그곳에 놀러 갔는데 , 같은 대학의 한국인 유학생 부부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turkey 요리를 푸짐하게 대접을 받았다. 특히 여러 가지 side dish들이 굉장했는데 그 유학생 부인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미국요리를 배웠는지 모두들 혀를 찰 정도였다. 처음 먹어본 것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리가 잘 되었는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ANY CHARACTER HERE

요새 며칠 사이 내린 비로 그나마 남아서 안간힘을 쓰며 가을을 지키던 아름답던 황금색 나뭇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글자 그대로 “낙엽의 장관”을 이루었다. 특히 우리 집 차고로 들어오는 길은 길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낙엽으로 덥혔다. 이들은 해가 다시 나오면 완전히 마르면서 바람에 휘날려 다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겨울로 향하는 12월의 입구..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시작이다. 천주교 달력에서는 이날이 새해의 시작이 된다. 11월 28일이다.

낙엽, 낙엽, 낙엽...

낙엽, 낙엽, 낙엽…

12월로 들어설 즈음이면 가끔 그리운 곡이 생각난다. 1960년대 말, 대학시절.. 멋진 가사에 매료되어 guitar로 따라 부르곤 하던 Duo Simon & Garfunkel의 rock version “I am a rock”이 그것이다. 그 대학시절, 가끔 지독한 고독 같은 것을 느끼곤 하면 이 노래를 자장가 삼아 들었다. 이 가사의 주인공이 내가 된 듯한 기분으로..특히 친구 유지호와 같이 부르던 것도 즐거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별명 “우중충” 유지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I am a rock – Simon & Garfunkel

 

천안함 도발사건 이후 다시 이번에는 연평도 포격.. 정말 끝이 없다. 김정일이 “개XX”는 그 괴상하게 생긴 머리”통”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중에 해부를 해서 히틀러와 비교해 볼 만하다. 촌스러운 북쪽 사투리로 “영쩜 영 미리메타라도 조국을 침범하는 원쑤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북괴왕조의 방송을 들으면 이런 Shakespeare 희극이 역사상 더 있었으랴..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들과 버금가게 웃기고 한심한 친구들이 바로 대한민국에도 “수두룩 닥상” 으로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금메달 깜은 소위 말하는 “친북 기독교 단체” 들이다. 이 사람들 과연 머리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의 이간을 배격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동족 형제”인 김정일을 사랑하라“고.. 허..여보세요.. 정신 좀 차리십시오.

실비아 심인섭, 익평공파 29세

심인섭, 1965년
심인섭, 1965년

중앙고 57회 동기회에서 또 결혼식 소식이 날라왔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확실한 통계는 물론 없다. 그저 느낌일 뿐이다. 아마도 동기녀석들의 반수 이상이 이미 할아버지가 되지 않았을까. 아~~ 세월이여. 이번의 결혼식 소식은 조금 나에게 의외의 느낌을 주었다. 주인공이 심인섭인데.. 심인섭의 차녀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왜 의외의 느낌을 주었느냐 하면, 이 친구의 소식을 1965년 졸업 이후 처음 듣게 되어서 그렇다.

물론 친구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동창회에도 나왔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연락을 하며 지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이제 처음 그 이름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혹시 ‘사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해 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나타났을까? 그의 이름은 연락처, 주소록 등등에 전혀 없었다. 고2때 같은 반이었다. 경주 수학여행 때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것보다도 이 친구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고2때 교지에 실렸던 그의 시 때문이었다. 시의 제목이 <실비아>였다. 제목도 독특하고 이국적이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천주교신자의 세례명일 수도 있을 그런 이름의 시.. 하지만 그 시의 내용은 기억을 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그 시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그 “사라진” 친구가 홀연히 딸의 결혼식 소식과 같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것은, 결혼식 장소만 있지, 연락처가 없다는 것..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이 친구는 ‘신비’적인 인상을 주는 것일까. 정말 나도 모르겠다. 그 긴 세월, 어떻게 살았을까, 참 궁금하다. 그 친구는 아직도 시, <실비아> 를 기억하고 있을까? 좌우지간, 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며칠 전에는 또 한번 googling의 덕을 보았다. 이건 내가 googling을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googling을 해서 나의 site를 찾은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발견이었다. 고국 과천시에 사시는 이종환씨, 평창이씨 익핑공파 29세 되시는 분이니까 나의 족보가 맞는다면 항열로 내가 이분의 아버지벌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나와 같이 가족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사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던 것이 사실이다. 나의 뿌리 찾기 노력에 대한 성모님께 드린 기도에 답을 받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비약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이분의 할아버지가 ‘모’자 돌림이라고 하셨고, 나의 아버님이 이정모, 모자 돌림.. 너무나 반가웠다. 더구나 현재 익평공파 최근의 족보를 소장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러면 혹시 나의 직계 조부님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꿈과 상상의 나래를 다시 편다.

 

아틀란타 순교자성당 IT support team

어제는 나에게 조금은 특별한 날이 되었다. 나로서는 너무나 오랜만에, “처음 보는 사람들”을, 그것도 한꺼번에 많이 만난 것이다. 그 자리는 한인본당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성당) 월례 ‘전산팀‘ 회합이 있었던 곳이다. 전산팀이란 간단히 말하면 IT support team일 것이다. 성당내의 여러 가지 technology: computer, network system, website등등을 개발 관리하는 본당 신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어제 이곳에 나가게 된 것은 역시 최근에 가입한 레지오의 영향이 지대적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레지오를 통한 “오묘한 일련의 사건의 고리”를 느끼게 되고, 이것이 현재 나를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이런 기회를 전 같았으면 무시하거나, 미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전산팀에 나가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레지오의 ‘본당협조’ 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전에도 자원봉사의 일원으로 본당을 돕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다만 그것을 이루는 다리역할을 못 찾은 것 뿐이었다. 이번에 레지오가 그 다리를 이어준 셈이다. 거의 모든 교회나 성당들이 시대의 흐름으로 IT (Information Technology)의 역할이 필수적이 되었다. 처음 주보 정도를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서 신자, 회계관리 같은 것 등도 다 전산화가 되었다. Internet의 일반화로 이제는 website도 필수가 되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맡아서 전산팀 멤버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특히 성당의 양적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IT support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며 전산팀 회합에 처음으로 참석을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운영을 하고 있는지 참 궁금했다. 2시간 남짓의 회합은 참으로 유익한 것이었다. 나의 의문점을 거의 다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단체에서 나는 ‘은퇴세대’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곳은 조금은 그런 rule에서 예외가 아닐까 희망을 해 본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IT skill set은 지금 성당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과 많이 중복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당장 도울 수 있는 분야는” physical” computer system, (WAN,LAN) networks, phone system intergration정도가 아닐까 생각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첫 빙점, 슬픈 하루, 501 Must-Read Books

아틀란타 지역에 올 들어 첫 영하의 날씨가 들이 닥쳤다. 평년보다 일주일이 빠르다고 한다. 하도 ‘요상’한 기후가 올해를 기록으로 올려 놓더니 이것 조차 그 중의 하나가 되려나. 오늘 낮에는 잠깐 눈 싸라기까지 내려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단풍도 깊이 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겨울의 맛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밖에서 한여름을 지낸 화분의 화초들을 부리나케 집안으로 옮겨 놓았다. 분명히 날씨는 다시 따듯해 질 것이지만 언제 다시 추워질지 모르는 계절이 아닌가? 작년의 겨울은 정말 추웠는데 올 겨울은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어제는 연숙이와 같이 하루 종일 우울한 날을 지냈다. 연숙과 가까이 지내던 성당 교우 최희상씨의 대학생 작은 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청천벽력이라고 하던가? 사고가 난 것이 아니고, 급성 뇌막염이었다. 이병은 가끔 대학교 기숙사의 학생들에게 걸리는 고약한 것이고, 치사율이 정말 믿지 못할 정도로 높다. 거의 아주 급성으로 손을 쓰기도 전에 이런 날벼락을 맞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나 우리에게 가까운 곳까지 온 것이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우리는 그저 기도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성모님과 함께 슬픔에 잠겨있는 부모님을 위로해 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할 수 밖에.. 인간은 이렇게 나약한 것일까..

501 Must
501 Must

우연히 Costco에서 501 MUST-READ BOOKSdiscount book을 하나 샀다. 나에겐 거의 보물같이 느껴지는 횡재였다. 이런 류의 책이 한국에서 나온 것은 그런대로 많이 기억이 나고, 아직도 몇 권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이제는 거의 “고서”가 되어가고 있을 정도로 오래 된 것이지만.. 예를 들면 “역사를 움직인 100권의 철학책”, “오늘의 사상: 100인의 100권”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책은 영어권에서 500권이 넘게 각 분야별로 뽑은 것인데, 영국에서 출간된 책이라는 것이 독특하다. 그러니까 조금은 “미국의 입장과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나의 희망은 이 책의 목록에서 내가 얼마나 ‘무식’하게 살았나 하는 것을 빨리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더 유식하게 살다 갔으면 하는 것이다.

Legio Mariae, Power of Google

레지오 교본
레지오 교본

드디어 결정의 순간이 왔다. 어제 연숙에게 돌아오는 주부터 아틀란타 한인성당의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에 참석을 하겠다고 “통고”를 하였다. 내가 나의 등을 “칼”로 떠 민 것이다.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간단히 때가 온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거의 3년이 넘게 뜸을 들인 결과인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 동안 협조단원이었고 거기서 더 적극적으로 정식단원이 될 마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상태로 3년이 지났다. 그 동안은 연숙과 같이 거의 매일 밤 묵주기도를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주 간단한 사실이지만 결과는 나도 예상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묵주기도의 묘미를 1%나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나는 믿게 되었고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협조단원과 정식단원은 아주 다를 것이다. 우선 매주 한번씩 회합에 나가야 하니까. 우선은 그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내가 가입하는 쁘레시디움은 현재 모두 자매님들 뿐이다. 아마도 다른 곳도 별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내가 망설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핑계였다. 자매님들만 있으면 어떻고 형제님들만 있으면 어떨까, 그것이 사실 무슨 문제인가? 3개월의 대기기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끝나면 정식으로 단원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모양이다. 한번 해 보자.. 못 할 것이 무엇이냐.

 

Googling의 위력… 오늘은 아주 우연히 한국에 있는 먼 친척의 이름으로 googling을 해 보았다. 이건 전혀 우연이었다. 나의 먼 친척 동생(1살차), 유명근을 넣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나왔다. 동명이인도 많았지만 “서울농대” 까지 넣으니까 완전히 찾아 내었다. 이것이 Google의 위력이다. 인터넷에 노출된 것은 거의 모두 그 monster server에 다 index가 된 것이다. 나의 어머님 쪽의 가계를 찾는 것은 지금 거의 불가능하다. 모두 이북 원산에 사실 것이니까. 아주 일부만 남쪽으로 내려왔다. 아버님 쪽의 족보를 찾는 것과 병행을 해서 어머님 쪽도 알아보려는 것이다.

다행히 어머님의 사촌 언니일가가 서울에 사셨다. 혈육이 거의 없어서 그런대로 서로 가까이 다닌 것이다. 그 이모님의 자녀 중에 유명근을 Google에서 찾은 것이다. 아주 성공적인 경력이 보였다. 삼성그룹 방계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것으로 나왔다. 문제는 어떻게 연락처를 찾느냐 하는 것이다.

마찬 가지로 재동국민학교 시절의 친구 정문신도 이곳에 금새 보였다. 그 동안의 의문들이 모조리 풀렸다. 성동중고를 졸업하고 한양대를 나왔다. 금새 성동고 동기회로 연결이 되어서 거의 순식간에 그가 하나모듈의 사장이란 것, 큰 아들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는 것.. 모두 나왔다. 거의 꿈처럼 느껴졌다. 이런 세상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조금 무서워진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Madison, Wisconsin에서 만난 중앙고 후배 강태중도 이곳에서 찾은 것이다. 교육학 전공이던 그는 비교적 공적인 삶으로 나온다. 신문의 인터뷰기사에서는 웃음을 띤 그의 얼굴도 보인다. 착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성실한 아빠고 남편이었다. 아들 “참”이의 이름이 생각이 난다. 우리 큰딸과 비슷한 나이였으니 혹시나 결혼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인연이 되면 알 수도 있겠지. 그는 중앙대학교의 교수로 재직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하지만 충격적인 슬픈 소식도 있었다. 중앙고 은사님, 음악선생님, 고1때의 담임 선생님 김대붕 선생님께서 2003년에 타계하신 것을 역시 이곳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물론 모른다. 최소한 그때쯤 돌아가신 것이다.이럴 수가 있나?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이곳에서 그 선생님을 추억하는 글도 썼으니.. 내가 한심하기만 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인터넷의 점진적이고 철저한 확산으로 세상은 많이, 그리고 확실히 바뀌고 있다. 좋건 나쁘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것들, 어떻게 이것을 유용하게 쓰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할 듯 하다.

 

2월이 되었다

글을 쓸 때 무엇으로 쓰느냐, 그러니까 붓, 펜, 연필, 만년필 같은 것으로 종이에 쓰느냐 아니면 요새처럼 keyboard로 쓰느냐 하는 것이 나는 솔직히 그렇게 차이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 특히 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미묘하게 차이를 준다고 한다. 얼마 전에 나도 그런 것을 경험하고 조금은 놀랐다. 정말 오랜만에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되는 것을 우연히 책상 앞에 놓여있는 메모지에 ‘그리기’ 시작을 했는데.. 역시 생각이 모이면서 정리가 됨을 느꼈다. 사람은 역시 ‘기계’가 아닌 것이다.

올해 1월 달도 어제로 끝나고 2월의 첫날이다. 겨울답게 추운 이번 겨울은 고국의 옛 겨울을 연상시켜주어서 사실 포근하게 느껴지곤 했다. 내 생일전후는 1월21일이라서 ‘대한’ 절기가 그날 앞뒤로 떨어진다. 내가 태어났던 서울의 그때 추위는 대단했다고 누누이 들었다. 눈도  많이 왔다고 곁들여서.  상상하며 그려본다. 해방 후, 6.25전의 서울풍경을.. 그때의 풍경이나 내가 처음 기억하던 서울거리나 그렇게 차이가 없다면 대강 그려지곤 한다.

올해 2월은 고국엔 설날이 제일 큰 명절일 것이고.. 이곳은 사실 그 정도 큰 것은 없겠지. 내일은 Ground Hog Day로구나. 이제는 이 날도 조금은 정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소하고 웃기는 날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동양적인 계절적 절기의 하나라고 생각하니 편하게 느껴지고 그 유래 같은 것 등등이 더 정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은 몇 년 전에 영화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나에게는 Ash Wednesday도 아주 중요한 날이 되었다. 개신교에서도 이런 날이 있는지 모르지만 Roman Catholic에서는 이날로 부터 Lenten season(사순절)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Easter(부활절)까지 40일 (4순)이 시작되는 날인 것이다. 이날은 Mass에서 신부님이 앞이마 가운데 재의가루를 문질러 주신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했지만 이제는 기다려지기도 한다. 그 이유를 이해를 하면 모든 것이 받아들여진다. 올해 사순절은 무엇을 하며 지낼까.. 서서히 생각을 정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