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작은 딸, 나라니가 email로 사진을 보내왔다. 제목은 Roo-dolph the Black-nosed Kitten 이었다. 사연은 간단히:
We’re ready for Christmas!!!!!
Sometimes I wonder why she loves me. hahahaha
이 정도면 나라니가 얼마나 ‘싱거운’ 가를 알 수 있었고, 한참을 웃었다. 이것이 바로 싱거운 것이 아니던가? 원래는 나라니의 언니인 새로니가 싱거운 말과 짓을 잘해서 어릴 때부터 ‘싱순이‘ 라고 놀렸는데, 요새는 작은 애가 이렇게 더 웃긴다.
나라니는 어릴 때부터 Christmas girl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크리스마스 씨즌을 일년 내내 기다리고 좋아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수그러진 줄 알았는데, 이 사진을 보니 아닌가 보다. 벌써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려고 하니까. 여기의 고양이의 원래 이름이 Roo(루)라서 루돌프 사슴을 생각해서 Roo-dolph라고 한 것이다. 어찌나 그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런 pet들인데, 사람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 같아서 어떨 때는 조금 우려도 될 정도다. 우리도 현재 개와 고양이 둘 다 데리고 사는데 일단 정이 들면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어떨 때는 못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어서 나 자신도 놀라곤 한다. 이것이 고독할 수도 있는 이 시대에 같이 사는 애완용 동물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미국 west coast를 연일 강타하던 저기압이 서서히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더니, 드디어 1993년 이후 처음으로 white Christmas의 가능성이 점점 확실히 지고 있다. 이것 자체만도 이곳에서는 큰 뉴스에 속한다. 그 가능성이 통계적으로 정말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적인 휴일인 성탄절이라서 교통문제는 큰 문제가 되지를 않을 것이다. 대개가 집안에서 눈을 즐기니까 사실 더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차로 drive를 한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진다. 눈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 도시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보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이제까지의 ‘대책’이었다. 그 만큼 통계적으로 눈의 확률이 낮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사실 그날 저녁에 가깝게 지내는 친지, 진희네 집, 의 저녁 초대를 받아놓고 있는 상태라서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 중이다 일기예보가 맞는다면 아마도 집으로 돌아올 때쯤 drive하는데 문제가 있을 듯 하다. 그 집이 워낙 고래등같이 크니까, 비상시에는 거기서 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탄절을 집밖에서 자는 것이 아주 꺼려진다. 또한 다음날은 일요일, 성당 미사를 가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맘때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절정을 이룬다. 듣기에도 제일 편안하고 추억까지 곁들이면 더욱 따뜻하게도 느껴진다. 캐롤의 추억에 대해서는 역시 고국에서 맞았던 중 고교 시절의 순진했던 크리스마스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당시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를 않았고 집에서도 전혀 신앙적인 환경을 주지 못해서, 그저 성탄절은 유럽이나 미국 것이라는 인상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국민학교 시절에는 성탄절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있었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리는 것, 바로 그것이 그렇게 좋았다. 그 당시 고국의 품질 좋은 인쇄산업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므로 주로 주한 미8군에서 흘러나온, 이미 사용된 카드를 잘라서 다시 우리의 카드로 만들곤 했다. 그런 것을 아예 가게에서 팔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걸 ‘재생’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에 이것도 일본사람들이 먼저 시작을 해서 그곳에서 ‘재생’이라는 이름을 썼을 것이다. 우리 같은 국민학생들은 그 ‘진짜 재생’ 카드의 그림을 보고 비슷하게 그리곤 했는데, 성탄 무렵이 되면 누나와 누나친구들 까지 한 방에 모여서 같이 그리곤 했다. 그 이후로는 내내 그때의 기억이 너무도 아름답게 남아서 지금 까지도 그때의 추억을 즐기곤 한다.
그 당시에는 캐롤은 거의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것을 들으려면 ‘전축’이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당시 경제사정이 그것은 대부분에게 무리였다. 군사혁명(1961년) 후에 조금씩 전축이 보급되면서 레코드 ‘판’ (거의 다 LP)이 대량으로 복사되어서 팔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본격적으로 외국의 캐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처음 산 것이 Pat Boone의 Christmas album이었고 그것이 아주 뚜렷하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YouTube를 보니 그때의 앨범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몇 곡만은 다른 앨범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때가 1964년 (중앙고 2년 때) 경이었는데, 성탄 전야에 보통 밤 12시부터 4시까지 있었던 통행금지가 해제 되었고.. 고요한 밤이 완전히 ‘시끄러운 밤’ 으로 변해버렸는데, 재미있던 사실은 이런 비슷한 현상이 일본 도쿄에서도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한다. 그들은 사실 우리 같은 통금해제 같은 해방감도 없었을 것인데..그날 후 언론에서도 모두 반성을 하는 논설을 폈다. 성탄의 본고장에서는 그날이 제일 조용한 날이라는데.. 어찌 이곳은 이렇게 시끄러우냐 하는 논조였다. 물론 이런 추억은 종교적인 것에 대한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성탄에 관한 것이다.
대학시절에는 외국의 캐롤이 많이 정착이 되기 시작했고, 우리 또래의 젊은 가수들이 편곡을 해서 토착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제일 추억에 남는 것이 송창식, 윤형주 Vocal Duo Twin Folio가 불렀던 Silver Bells라는 곡, 이것이 그들의 목소리에 가장 잘 맞았던 곡이었다. 그 후에 미국에 와서는 본고장, 본토박이 캐롤을 듣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본격적인 ‘찬송가’ 스타일의 classic carol들을 듣게 되었다. 그 이후 매년 이맘때면 거의 같은 것들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었다. 1979년 성탄을 고국에서 결혼을 앞두고 맞게 되었는데 그때에 거의 우연히 세종로 네거리, 교육회관 옆의 어떤 서점에서 Paul Mauriat (폴 모리 악단)의 1967년 크리스마스 앨범 카세트 tape을 사게 되었다. 어찌나 편곡과 연주를 감미롭게 잘 했던지.. 그 중에서도 White Christmas와 Trois anges sont venus ce soir.는 “편곡,연주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이 앨범은 그 이후로 우리 집의 classic Christmas favorite 로 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1990년대 중반 쯤이었을까.. 출퇴근을 하면서 나는 주로 PBS 를 듣는데, 거기에서 The Roche라는 여성그룹의 carol CD가 소개 되었다. 세 자매인 듯 한데.. 모든 classic carol들을 정말 신선하게 arrange를 하고 티없이 깨끗한 화음으로 불렀다. 어렸던 우리 아이들도 듣기에 좋았던 모양으로 이것도 역시 family favorite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