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ker time, crab feast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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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liday LIFE Kickers:   12월 들어서 처음, 우리들이 정기적으로 찾는 YMCA gym을 갔었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12월’의 냄새와 모습이 그대로 우리들에게 쏟아지는 듯 했다. TV같은 곳에서 그런 ‘너무 이른 요란함’을 일부러 피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별 수 없이 미국 최대의 휴일의 공기를 안 마실 수가 없었다. decoration, light 각종 ‘최신’의 것들이 선을 보였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데 성공은 했지만 basketball court에 있는 indoor running track에서는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나의 gym routine이 30분 걷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데, 오늘 그곳에 가 보니.. 무언가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아~~~ 하는 한숨이 나오고.. 이것을 오랜 세월 잊고 살았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다. 오랜 전에는 ‘재수가 좋아서’ 이것을 보게 되었고 12월의 멋진 holiday 기분을 만끽하곤 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 어쩐 일인지 이 공연을 놓치고 살았던 것이다.

이것은 YMCA member중에서 대강 60대부터 80대까지의 ‘아줌마’들, 30명 정도가 모여서 이맘때면 공연을 하는 Kicker club인데, 주로 Christmas에 맞는 곡들에 맞추어서 30분 정도 dance를 하곤 한다. 물론 몇 개월 전부터 ‘맹연습’을 하는 것은 가끔 목격하곤 했다. 순전히 ‘재미와 사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춤 솜씨 같은 것은 큰 문제가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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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나 혼자 track을 걷기에 (연숙은 이제 100% 수영만 하게 되었다) 아깝게도 연숙은 못 보았지만 나는 이 ‘100% 백인 아줌마 (사실은 할머니지만)’들의 performance 전체를 running track에 서서 볼 수 있었다. Dancer들 숫자나 관객들 숫자가 거의 비슷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신나게 즐기며 춤을 추는지..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이들 공연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이들의 주 연령대가 70대 정도니까 나보다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Irish처럼 생긴 파란 눈의 white ladies.. 오랜 전의 미국의 모습과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이들이 몇 십 년 전에 이 땅의 ‘주인’들의 모습이었다고 할 것이다. 생각나는 것이 오랜 전에 없어진 화보잡지 LIFE magazine이었는데, 아마도 이들이 바로 LIFE generation이 아닐까? 이들만 해도 지금은 완전히 normal이 된 ‘깡패 같은‘ feminism같은 것에 ‘물들지’ 않았던 세대였을 것이고, 99% 가정주부들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분명히 white power를 만끽하며 살았을 것인데.. 지금은 어떨까? 앞을 보고 뒤를 보아도 UN 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종 인종이 득실거리는 YMCA gym에서 옛날을 얼마나 그리며 살고 있을까? 40년 전부터 미국을 보아왔던 것을 생각해도.. 참 이곳 미국, 많이 변했고, 그것도 지금은 더 무섭게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놀라움까지 느낀다.

 

¶  Crabby Feast plus:   Thanksgiving Holiday가 끝나자 마자 마리에타 Y형 댁에서 우리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세시봉’ 그룹이 다시 모였다. Y형 댁은 작년에 큰 ‘喪상’을 당했던 관계로 2년 만에 방문을 하는 셈인가.. 그 동안 그 바쁜 중에도 수만 불짜리 kitchen remodeling 이 끝나고 pikapikagranite island가 위용을 자랑하고, custom made cabinetry가 초현대식 편리함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 집의 old clucky 한 것들을 비교하면 조금 기분이 쳐지긴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우리의 현재 더 중요한  value는 이런 것들 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역시.. 우리도 저런 것들을 가지고 싶은 바람이 없다고 하면 솔직하지 못할 것이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2014-11-29 18.25.54-1이날 정말 과장을 해서 ‘수십 년’ 만에 배가 터지도록 humongous Alaskan king crab을 포식을 하게 되었다. ‘옛날’ cash가 풍성하던 시절에는 가끔 이것을 사다가 집에서 즐긴 기억이 있었고, 심심치 않게 seafood restaurant에서 온 가족들이 먹기도 했다. 이날의 king crab은 정말로 king다운 큰 놈들이었는데 seafood wholesaler에서 직접 사온 것이라고 했다. 이것들과 맛있는 wine이 곁들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덕분에 오랜만에 취한 기분을 느끼는 저녁이 되었다.

오랜 만에 간 이곳에서 kitchen remodeling만이 아닌 다른 것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home music studio라고나 할까.. 최신 digital technology를 총 동원한 amateur music production system 이었다. 모든 것들이 excess로 치닫는 근래의 사회풍조인가.. 모자람 없이 모든 것들이 ‘사치’쪽으로 흐르는가? 돈과 시간이 넘쳐흐르는 ‘적지 않은’ 60대들은 보기에도 행복하게 보인다. 젊은 시절보다 더 짜릿한 ‘자극’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새로 악기를 배우는 것이 있는데 이 집주인은 saxophone에 심취되어서 배운지 불과 몇 년 만에 이제는 거의 수준급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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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 없이 불던 saxophone은 조금 dry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 장만한 이 home studio는 우선 값이 $1500에 달하는 ‘준’ 프로 급’으로 거의 완전한 background sound  (karaoke sound)를 갖추고 있다. 10000여 곡을 저장하고 있는 software와 4 channel audio mixer, usb amplifier, Bose portable speaker.. 이것을 써서 ‘live’ saxophone연주를 ‘눈 감고’ 들으면 어느 full-sound Cafe에 온 느낌을 준다. 나에게는 ‘그림의 떡‘ 으로 보이지만, 생각한다.. 조금 더 머리를 쓰면 1/3정도의 가격으로 비슷한 성능의 gear를 장만할 수 있지 않을까.. 백일몽일지도 모르지만.. 생각하는 것은 cash가 필요 없으니까..

 

my first Kindle book
my first Kindle book

¶ My first ever ‘Kindle book   Kindle.. Kindle book..  이 말도 꽤 오랜 전부터 들었고 Amazon.com에 가보면 항상 눈에 뜨이는 것이다. electronic book의 ‘한 종류’라고 하지만 지금은 한 종류가 아니라 그것 electronic book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 느낌이다. 며칠 전 처음으로 kindle book title하나를 $5 정도에 구매를 하였다. 종이 책은 $12 정도니까.. $7 save한 것인가? Kindle은 순전히 software format이지만 Amazon.com의 hardware Kindle tablet 과 짝을 이루면서 이렇게 electronic book의 champion format이 되었다.

여기의 ‘교훈 lesson’은 역시 Apple Company, Steve Jobs의 철학.. software/hardware의 ‘완전한 지배, 장악, control’ 이라고 할 것이다. Microsoft의 모든 ‘문제’는 hardware를 ‘지배’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것이 납득이 간다. ‘옛날’에는 사실 software와 hardware는 완전히 ‘다른 장사’의 영역이었고.. 그것은 거의 gentlemen’s agreement 같은 불문율이었는데.. 완전한 profit, control crazy monster Apple company (사실은 Steve Jobs’)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후로, 그들, Steve Jobs’ Apple의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profit을 보고 침을 흘리며 모든 사람들을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 떼돈을 벌려면 software/hardware가 완전히 ‘붙어버린’ whole system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kindle book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버금가는 ‘책’의 역사는 ‘변함 없는’ 종이역사였지만 그 오랜 역사가 ‘느리지만 무섭게’ 변하고 있다. 종이가 없어지는 역사인 것이다. 종이 책과 ‘전자’ 책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analog와 digital의 차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간단하고, 성의가 없는 대답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대답이 정답이다. ‘부드러운 느낌의 analog’와 ‘명암이 뚜렷한 차가운 digital’의 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부드러운 analog 촉감의 종이 책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제공하려는 노력을 한 것이 바로 Amazon.com의 Kindle book이다. 근래 수많은 ‘종이 책’들이 Kindle option을 주고 있고, 종이 책보다 항상 싼 값이다. 구매 즉시 download를 받을 수 있고 이제는 PC나 Smartphone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Kindle hardware tablet 이 없어서 PC에서나 읽을 수 있지만 대부분 시간을 desktop PC에서 보내고 있는 관계로 이것이 나에게는 최적의 solution이다. 하지만 ‘화장실’ 에서 이 ‘책’을 볼 수가 없는 것은 분명히 아쉽고, 따뜻한 아랫목 (전기장판)에 누워서 볼 수 없기에 역시 digital은 차게만 느껴진다.

 

¶  Candle Reflections:   Candle, 초, 양초, 촛불.. 우연히 나의 주변에서 ‘초, 촛불’이 눈에 뜨임을 느끼게 되었다. 눈에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 ‘가슴으로 보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기에 이렇게 초와 촛불이 ‘나의 눈에 보였다’ 는 사실이 나에게는 대견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촛불이 보이는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인가? 나는 이것이 나에게 전보다 가슴이 조금 더 열렸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나 둘씩 초와 촛불이 주변에 늘어나고, 날씨가 싸늘해지면서 그것들의 느낌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성당에 가도 제일먼저 하는 일도 촛불을 켜는 것이고, 요새같이 대림절이 되면 4개의 초가 하나 둘씩 켜져 가는 것을 보게 되며 그 의미도 생각하게 되고, 나의 서재에도 초의 숫자가 더욱 늘어난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soothing candles' light & aroma

soothing candles’ light & aroma, my desk

이와 더불어 반세기 전의 추억을 더듬기도 한다. 6.25 (a.k.a. Korean War)가 끝난 후에 대한민국에서 산 사람들이면 서울이나 지방, 시골이나 거의 예외 없이 겪었어야 했던 ‘전기부족’.. 제한 송전 등으로 ‘초’는 100% 필수품이었음을 알 것이다. 낮은 물론이고 저녁, 밤에도 정기적으로 전기가 나갔다. 낮에 전기가 나가는 것은 가정집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가전제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라디오’ 나 전기 다리미가 있었지만 낮에 하는 방송은 거의 없었고 당시에는 battery radio가 흔해서 (군수품) 전기가 필요 없었다. 문제는 밤인데.. 가족이 모두 모인 때 전기불이 없으면 초를 켜야 하고 그것으로 제대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없다.  아이들은 어두울 때에도 밖에 나가서 놀거나, 대부분 일찍 자는 수 밖에 없었다.

조그만 방에 초를 한 개 켜놓으면 그 주변에 모두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숙제도 하곤 했는데..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오손도손’한 가족의 따뜻함을 촛불과 함께 나누던 시절이었다. 특히 겨울에는 방 한가운데 ‘화로’를 놓고 무언가 ‘구어 먹으면’ 그 정취는 지금 도저히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1960년대가 되어서 전기사정이 좋아져 ‘촛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살 때는 아주 가끔 날씨관계로 정전이 되면 ‘혹시’ 초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너무나 편리한’ flash light들이 있어서 역시 초를 볼 기회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희한하게도 ‘신앙, 종교’적 연계로 촛불이 포근하게 나에게 다가온 것..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올 겨울에는 유별나게 촛불을 키고 촛불을 바라보며 ‘회상, 명상’을 하고 싶어 진다.

내 나이가 어때서..

¶  내 나이가 어때서..

조금은 ‘늙은이의 하소연, 푸념’같이 들리는 이 말은 근래 대한민국에서 나온 유행가의 제목이다. 물론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지만 요새  갑작스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온 것 뿐만 아니라 이제는 ‘달달 노래 연습’을 할 처지까지 되었다. 또 그 season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라는 긴 이름, 아마도 요새는 ‘연총’이라고 부르는 이것이 12월 7일에 열리는데 이때 각 쁘레시디움 별 talent show(장기자랑)에서 우리와 다른 team이 합작으로 이 곡을 ‘합창’으로 하게 되었다.

레지오 ‘연차 총친목회’의 원래 의도는 member reunion인데 이제는 완전히 모여 노는 것, talent show로 인식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올해로 나는 4년째 이것을 맞게 되었는데 해마다 조금씩 무언가 달랐다. 그 중에서 지난 2년은 추억으로 남겨도 될 것 같은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reunion의 정신을 100% 살렸기 때문이다. 간혹 얼굴만 보던, 아니 전혀 생소한 단원들을 ‘그런대로’ 알게 된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연총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특히 작년에는 생소하기만 하던 ‘희귀동물’, 남성단원들이 ‘노래 연습’차 같은 방에 모일 기회도 만들어 주었기에 더욱 기억이 새롭다.

그에 비해서 올해는 조금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지만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두 쁘레시디움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되어서 멀리서만 보던 ‘모르는 단원’들과 가까이 할 기회가 되었다. 최 장년 축에 속하는 두 그룹이 모여서 이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기로 한 것인데.. 조금은 self-pity 하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이 노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중론이 모두 좋아한다고 하니 어찌할 수가 없다. 우리가 택한 version은 오승근이라는 ‘장년 세대’의 것인데.. 알고 보니 이 오승근이라는 사람은 우리세대에 그러니까 70/80에 속한 그야말로 senior그룹의 오래된 가수였다.

더욱 알고 보니.. 소싯적에 내가 좋아하던 Two Aces, ‘금과 은‘ Duet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아직도 기억한다.. Two Aces시절 그들이 TV show에서 부른 Everly BrothersDream Dream (All I have to do is). 나중에 바뀐 이름인 ‘금과 은’ 처럼 너무나 청순한 목소리로 잘 불렀었다. 그 듀엣, 둘중의 하나가 ‘오승근’이었단 말인가? 너무도 잊고 살았다. 더욱 놀란 것이 그가 ‘트롯트‘ style의 ‘전통가요’를 부른다고? 믿어지질 않는다. 너무나 큰 변신으로 느껴질 정도로 세상이 그렇게 변했구나. 이래서 Two Aces의 추억을 더듬고 그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게 되니.. 감회가 깊다. 그가 이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보니 ‘만든 모습’인지 ‘자연스런 모습’인지 혼동이 올 정도로 ‘젊게’ 보인다. 하기야 요새 나이든 가수들을 보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며칠 전, 우리 두 ‘장년층’ 쁘레시디움이 처음 모여서 연습을 하였는데 ‘가라오케’ 반주의 막강한 보호와 도움으로 그런대로 무난히 소화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높은 음정의 이 곡을 과연 몇 명이나 smooth하게 넘길 것인가와, 비교적 짧은 이 곡을 어떻게 짧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게 re-arrange해서 무대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인데.. 글쎄.. 나는 전혀 이런 것에는 문외한이라서…

 

 
Karaoke – 내 나이가 어때서 – 오승근 version

 

 
Karaoke – 내 나이가 어때서ballad version

 

¶  Very Early, November ‘Polar Vortexpolar-vortex-1Polar vortex.. 근래 특히 겨울에 많이도 듣던 말이다. 비교적 근래에 쓰이는 ‘기상용어’ 라고나 할까, 아니면 mass media의 유행어라고나 할까? 작년에 특히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유난히 추웠을 적의 기억이다. Wikipedia에 의하면 북극과 남극에 ‘상주’하는 지독히 찬 공기덩어리가 있는데 이것의 이름이 바로 Polar Vortex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커지고(겨울) 줄어들고(여름) 하는데 가끔 이것이 ‘암세포’처럼 커져서 퍼지면 지금처럼 되는 모양이다. 북극으로부터  몰아치는  ‘지독히 추운 공기의 바람’ 이 연상이 되고 한때는 Arctic Blast, Alberta Clipper란 말도 들었는데 이런 현상이 이제 유행이 아닌가? 좌우지간 이런 말들은 한 겨울에나 듣던 말인데.. 올해는 thanksgiving holiday도 2주나 남은 한창 가을에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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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강추위로 고드름이…

한반도에는 아마도 ‘시베리아의 강풍’이라고 연상하면 알맞은 어감이라고 할까? 혹시 이것도 global warming의 한 징조일까… 그래서 모든 것이 extreme쪽을 치닫는 것인가. 지금 현재 Canada 와 인접한 upper Midwest 쪽에는 거의 한겨울 같은 눈이 쏟아지고 기온도 급강하.. 며칠 후에는 낮의 최고가 freezing point까지 내려 간다고 한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따뜻한 Southeast’ 쪽으로 밀려 왔다는 사실이다. 오늘 아침에는 드디어 hard freeze가 되었고, 올 들어 처음으로 ‘고드름’을 목격하게 되었다.일기예보는 우리가 사는 지역도 이번 주말이 지나면 최저 18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이런 기온은 1월 말 정도에나 ‘가끔’ 겪는 것인데..

더욱 ‘괴상한 것’은 보통 같으면 blip같은 ‘짧은’ 현상이 이번에는 거의 일주일 이상 계속된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 평년의 11월 이맘때면 그야말로 ‘찬란한 황금색의 낙엽’을 자랑하는 비교적 따뜻한 모습이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한창 가을색을 자랑하려던 ‘낙엽’들은 아마도 이번에 모조리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더욱 춥게만 느껴지고 한참 남은 끝을 못보고 있는 outdoor work들도 더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대로 문제없는 고물 ‘clunker‘ central heating이 버티고 있으니까.. 큰 걱정은 안 한다. 전혀 plus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날씨에는 진하고 뜨거운 black coffee 맛의 ‘정수精髓’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THANKSGIVING BLEND  올해는 비교적 coffee를 많이 마시게 되었다. 한때 물을 많이 마시려고 일부러 줄인 적도 있었지만 나의 lifestyle은 아무래도 plastic water bottle보다는 coffee cup이 더 맞는 것을 느낀다. 특히 오랜 직장생활에서 morning ritual은 구수한 ground coffee의 냄새로 시작된다는 것도 어쩔 수없이 몸에 배인 모양이다. wine의 미묘한 맛의 차이는 잘 몰라도 이제는 coffee의 향과 맛의 차이는 잘 알게 되었다. 건강을 이유로 지나친 coffee를 자제하려는 자책감이 항상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정도는 아닌 듯 싶다.

Ah... Starbucks..
Ah… Starbucks..

현재는 주로 새벽과 아침 식사 때, ‘정식, 공개적’으로 마시고 가끔 (요새는 더욱 자주) 늦은 오후에 ‘혼자서’ 마신다. 연숙은 지독하게 caffeine 에 민감해서 점심이 지나서 마시면 잠을 못 자기에 아침식사 때만 나와 같이 마신다. 나는 물론 ‘전혀’ 그런 것이 ‘아직’은 없지만 인생 선배님들은 ‘언젠간’ 나도 그렇게 변할 것이라 경고를 해서 이것도 시간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까지 즐기는 것이 현명할 듯.. 며칠 전에 작은 딸 ‘나라니’가 집에 들렸을 때 coffee bag을 들고 왔는데 그것이 THANKSGIVING BLEND STARBUCKS  whole bean 커피였다. 이런 때가 나에게는 정말 즐거운 순간이다. Starbucks coffee를 마셔 본지도 꽤 된듯한 기분이라서 그 독특한 맛도 거의 잊어가는 때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이것을 마셔보니, 그 동안 마시던 것과는 물론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는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STARBUCKS class가 되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다.

몇 년 전에 새로니 나라니가 번갈아 가면서 STARBUCKS 에서 part-time으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공짜로 주는’ coffee를 ‘무진장’ 즐겼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 그것을 사서 마시기에는 아무래도 그랬다. 그래서 생각이 우리는 경제적으로 STARBUCKS class가 못 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저 그것을 ‘사 먹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 어떨까.. 글쎄 그래도 불편할 듯 하다.

 

¶  Relevancy of Legion of Mary

Is the Legion of Mary[Legio Mariae] still relevant today?  레지오 마리애 지금도 큰 의미가 있는가? 이런 ‘끔찍한’ 생각이 요사이 들어서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답은 불행하게도 almost No! 인 듯해서 어깨가 더 쳐지는 듯 느껴진다. 4년여의 ‘Never look back’의 각오로 노력한 경험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다는 자체는 가소롭지만 나에게는 정말 심각한 것이다. 아직도 ‘레지오’ 하면, 20세기 초에 머문듯한 ‘구닥다리’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왜 그럴까? ‘영웅적’인 레지오 창시자 Frank Duff같은 ‘준 성인’이 다시 필요한 때가 된 것일까? 레지오 마리애가 ‘영적인 군대’이며 군대와 같은 조직을 유지하고 있으면 이런 군대도 ‘현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대 로마 군단의 조직을 유지하고 그 충성심과 용맹 성을 본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레지오 만의 특징이고 자랑일 수 있지만, 초 현대 세속사회를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그런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마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가 교회에 끼친 공헌 중에 제일 큰 것은 아마도 ‘평신도의 활성화’ 가 아닐까?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완전히 맞아 떨어졌다. 레지오의 위상도 역대 교황들의 ‘묵인과 승인’의 혜택을 충분히 받았고 각 본당에서도 ‘필수적’인 평신도 단체로 대우를 받아서 꾸준히 영향력을 늘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신화적인 존재, 창시자 Frank Duff의 퇴진(1980년 11월 7일 선종, 91세) 이후.. 아마도 momentum이 서서히 줄어들고 지금은 거의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한 사람’의 부재가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가? 아마도 현재 Dublin, Ireland 세계 본부(꼰칠리움)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mindset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우리 주변의 상황을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저 status quo, status quo.. 현상유지에 급급한 모습들. 세상이 급속히 ‘진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가만히 있으면, 즉 ‘status quo’ 그것은 다름이 아닌 ‘후퇴‘인 것이다. 큰 의미가 없는 사소한 것들 가지고 모든 ‘바쁘기만 한 단원들’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 낭비하는 평의회 모임들, 왜 우리들이 레지오 활동을 하는지 그 큰 목적은 완전히 잊은 듯 하고 우선순위에서 제일 밑에나 있을 듯한 것들 가지고 열을 올린다. 이런 것들을 계속 목격하면 이런 생각도 든다. 그런 ‘사소한 규칙을 지키려고 레지오 활동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소한 시행규칙들이 우리 레지오의 ‘제일 큰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모든 ‘진짜’ 군대들이 ‘완전히 전산화’가 되어서 모든 행정,사무가 이루어지는 이때에 군대의 효율성을 본받았다는 레지오의 현재 ‘서류 흐름’을 한번 보라. 이곳에 쓰는 시간 자체가 레지오 활동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조직의 관리에 드는 시간을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최소한으로 줄이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영혼을 위한 활동‘에 나서야 하는데 내가 본 실정은 거의 반대쪽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인 것이다. 레지오 단원 생활 4년 쯤 되면 모두들 이런 ‘권태기‘를 가지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이런 때를 어떻게 잘 극복하는 가.. 역시 우리 어머니 성모님에게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C’est Si Bon Redux

둘루스 명소, 아틀란타 쎄시봉 70/80 Live!
둘루스 명소, 아틀란타 쎄시봉 70/80 Live!

나의 눈앞에 다시 ‘다가온’ 아틀란타 ’70/80 style’ Live music restaurant 세시봉.. 거의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추억의 음악과 추억의 경양식의 멋진 곳, 세시봉.. 어제의 일이었다. 자기 집안 식구 ‘전부, 아내와 딸’이 사업상 해외 여행을 떠난 renaissance guy 최형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 다음 날 저녁 7시까지 세시봉으로 나오라고 해서 예의 모이던 그룹이 다시 모였다.

이번이 나에게는 세 번째인가.. 하지만 항상 머리 속에 잔잔한 흥분의 여운을 남기던 그런 곳이라 하나도 생소하지 않았다. Owner이며 performer인 Mr. 김도 예전과 같은 수수한 옷차림으로 같은 미소를 간직하며 우리 그룹을 기억하는 듯 했다. ‘사업’이 잘 되시느냐 물었더니 ‘우리들이 이렇게 너무 가끔 찾아주니 잘될 리가 있겠습니까’ 하는 농담 섞인 응답이었다. 실제로 지난 7월 8월은 ‘너무나 slow’ 했다고 한다. 하기야 그렇게 더운 때 대부분 vacation을 떠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이곳에 들어갈 때 입구에 조그만 종이글씨가 붙어 있었는데 잠깐 보니 ‘오늘은 나도 가수 왕‘ 이란 글이었다. 언뜻 아하.. 이곳에서도 손님이나 아마추어 들이 노래라 연주를 하는 program을 마련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나도 주인에게 그런 comment를 한 기억이 있었다. 이런 곳을 아틀란타의 ‘명소’로 만들려면 고정적인 fan group을 형성하고, 그들 중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게 무대에 올라가게 하면 어떤가 하는 idea였다. 쉽게 말하면 amateur night 같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대답을 들었다. 잘못하면 분위기 찾으러 온 손님들을 쫓는 결과도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그날 가서 음식 menu를 보니.. 전에 비해서 음식 가지 수가 너무나 많이 늘었다. 전통적인 ‘일본식 경양식, donkatsu‘에서 출발해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전에는 owner의 부인이 chef라고 알았는데 이번에 들으니 chef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주 전문적인 chef를 포함해서 추억의 음악, 연주,분위기..등등을 조금은 고급스럽고 exclusive한 전통을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다. 이렇게 다른 곳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계속 유지시키면 ‘아틀란타 명소’가 될 가능성이 꽤 높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Owner는 Smartphone으로 손님들이 찾아와 남기 여러 가지 ‘논평, comment’ 들이 Yelp에 나온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부분 음식에 대한 사진과 평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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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돈까스, 생각보다 큰..(credit Yelp)

 멋 모르고 소문이나 겉 모습을 보고 찾아온 ‘젊은 세대’들의 평이 대부분인데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대부분 contemporary favorite 예를 들면 ‘빙수‘, 오늘 처음 알게 된 New York strip steak 같은 것들이지만 우리 세대는 예외 없이 서울거리에서 60~70년대 맛을 보았던 ‘일본식 경양식’들, 예를 들면 ‘함박스테이크, 돈까쓰‘ 를 찾는다. 기억에 희미해졌지만 당시에 느꼈던 음식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잘 ‘재현’해 놓았다. 특히 portage cream soup은 그 중에 제일 추억을 되 새기게 하는 것이다. 비교적 경제적인 wine과 추억의 생음악, 자유자재로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owner performer, 깨끗한 환경들.. 이곳은 확실히 두고두고 아틀란타의 명소가 될 potential이 있다.

그 동안 performer들, 특히 거의 pro에 가까운 ‘인재’들이 이곳을 찾았고 연주, 노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찾았던 금요일 저녁에는 ‘자칭 아마추어’ 들이 나온다고 했다. 물론 미리 audition 받고 무대에 올라갈 듯 했다. 우리가 간 날에는 retire한 남자 분이 saxophone을 들고 출연을 해서 기대보다 수준 있는 연주를 들려 주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case가 바로 ‘좋아서 하는’ 진정한 amateur’ 정신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도 했다. 그저 좋으니까.. 사랑하니까..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크지는 않지만 격조있는 분위기의 performing stage

크지는 않지만 격조있는 분위기의 performing stage (credit Yelp)

 

Music Live! 왼쪽에 owner Mr김이 보인다(credit Yelp)
Music Live! 왼쪽에 owner Mr김이 보인다 (credit Yelp)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그룹에서도 언제 한번 아마추어로 무대에 올라가 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언뜻 윤형의 saxophone이 생각나고 그의 ‘연주 수준’이면 큰 무리가 없을 듯 해 보였다. 문제는 그 동안 얼마나 연습을 했는가 하는 것이고 작년 이맘때부터 부부가 완전히 full-time 으로 일을 하게 되어서 그 전과 같은 여유가 없어 보인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 화살이 우리에 오더니.. 순식간에 언젠가 한번 올라가라는 ‘강요’까지 나왔다. 속으로 it’s now or never라는 말도 있는데.. 못할 것도 없다는 오기를 달랬지만, 과연 그럴까? 최형의 idea는 우리 둘이 Everly Brothers의 classic oldie  (All I have to do is) Dream dream 과 ‘젊은 연인들‘을 부르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이 두 곡은 눈을 감아도 언제라도 할 수는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무대에 올라?’.. 허.. 그런 ‘장난스러운 생각’과 놀아 보는 것도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고 그곳의 분위기와 너무나 어울려서.. 역시 다른 세시봉 추억을 만들고 금요일 저녁을 보냈다.

아틀란타 부활 영세식 2014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2014년 부활 영세, 세례식

 

2014년도 부활절 영세식이 4월 12일에 뜻 깊게 막을 내렸다. 천주교에서 영세, 세례의 의미는 아마도 개신교회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쉽게, 편하게 하느님을 만나려는 그들과 상징, 과정, 연수, 고행이 따르는 우리 천주교의 하느님 만나는 과정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나와 연숙에게 올해의 영세식은 분명히 다른 해와 다르게 가슴으로 찡~ 함을 느끼게 다가왔다. 영세식이 끝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 멀리서 몰래 찍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한결같이 행복하게만 보이는 이 모습들.. 나이나 성별에 상관이 없다. 세례를 주관하신 주임신부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아마 그런 모습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30여 년 전을 부지런히 떠올리며 이들의 심정을 헤아렸지만 아무래도 30년의 세월은 조금 긴 것 같이, 자세한 그때의 정경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거의 100% 기억하는 것은 그 때의 우리의 ‘행복한 느낌’이었다. 그 희미한 감정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례자들도 아마 마찬가지의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이번 영세식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상당했다. 나와 연숙이 지난 해 8월부터 모두 봉사자란 이름으로 예비자 교리반에 참가하여 무사히 이들을 ‘요르단 강’ 가로 배를 함께 저었다는 느낌이고, 예비자 거의 전부가 끝까지 항해를 했다는 안도감과 자부감등으로 우리가 다시 세례를 받는 것처럼 가슴이 뿌듯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번 교리반 봉사자로 참가해서 우리가 얻은 것은 이 예비자 들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많이 얻고 배웠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리는 수녀님과 신부님이 담당했지만, 우리 부부도 두 번 정도 담당할 기회가 있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수녀님과 자유분방한 신부님의 스타일은 정말 대조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신부님 스타일이 훨씬 마음에 들고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맡았던 ‘교리 강의’에서 나는 신부님 스타일 흉내를 잠깐 냈는데, 역시 예상대로 수녀님의 재빠른 질책을 받았다. 아직도 나는 그런 수녀님을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저 그저 benefit of doubt 만 되 뇌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대상한 예비자들은 거의 ‘고학력, 젊은 층’이 대부분이어서 우리와 호흡이 잘 맞았다. 우리에 비슷한 또래들도 마찬가지로 personal chemistry가 좋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었던 것은 대부분 예비자들이 봉사자들을 격의 없이 믿어주고 사의를 표하는 자세들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신선한 것이.. 요새 ‘젊은 층’을 많이 보았기에 너무나 비교가 될 정도로, 건전한 말투, 모습들.. 보기만 해도 했다. 중장년 층의 예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머있고, 협조적이고, 한마디로 멋진 신사 숙녀들이었다. 이들이 하느님을 찾으려 8개월 동안 눈이오나 비가오나 매주 목요일 밤에 모였다는 것은 속된말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비슷한 비율의 남녀 형제, 자매들.. 우리에게는 모두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영혼들이다. 한창 ‘외우는 공부’가 더 쉬울 듯한 15세의 등치가 큰 소녀, ‘마누라’에게 등을 떠밀려 나왔지만 이제는 ‘교리반 재수’을 끝낼 각오로 참여 각가지 유머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주던 Clint Eastwood를 연상시키는 60세 형제님, 무게가 실려있는 comment로 일관 한 귀공자 스타일, 옛날 알랑 드롱을 닮은 ‘백수’ 형제님, Tom Cruise를 연상시키는 30대 유학생 화학공학도, 항상 질문이 많고 심각하지만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50대 자매님.. 영화배우처럼 멋지게 생기고, 아버님과 같이 교리공부를 한, 멋진 약혼자의 후원을 받았던 (내가 제일 부러운 case) 형제, 20대의 젊음의 향기로 교리반의 공기를 채웠던 몇몇 유학생 자매, 형제들.. 그들을 보면서 우리도 30년 전을 회상하기도 했고, 그들 신앙여정의 앞날을 그려보기도 했다.

이제 세례, 영세식은 끝났지만 사실 학교 졸업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가 진짜가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이들의 교회생활의 시작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서..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속사회를 이들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20~30대의 젊은 층은 참 길 수도 있는 ‘파도’길을 가야 한다. 중장년 형제자매들.. 이들은 그렇게 시간이 길지 않다. 사실 내가 제일 큰 관심을 갖는 것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가 아니고 이들이 ‘무사히’ 세파를 헤쳐나가는 하느님의 지혜를 어떻게 받고 쓸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내가 30년의 세월을 ‘실패’로 보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분 들이 ‘하느님’이 생각보다 가까운데 계시며 그들을 지켜 본다는 깨우침을 하루빨리 가질 수 있도록 성모님의 전구를 청해 본다..

 

C’est Si Bon 세시봉 아틀란타

C’est Si Bon.. 세시봉..시봉..시봉.. C’est Si Bon은 물론 French jazzy classic.. 1947년에 발표된 이것은 우리에게는 루이 암스트롱과 이브 몽땅 Yves Montand 이 같이 불렀던 것이 익숙한가? 어렸을 때 참 많이도 들었던 이 노래의 멜로디는 아직도 생생하다.1 세시봉의 뜻은 불어101 학생도 알듯이 영어로 하면 It’s so good 정도가 될 것이다. 이 곡을 들으면 나중에 ‘시봉 시봉..’을 계속하는데.. 그것도 so good so good 정도일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 뜻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살다가 요새야 깨닫게 되었다. 참 오랜 세월이 걸린 French를 모르고, 무시하고 살았던 curse 라고나 할까.

 

 
Louis ArmstrongC’est si bon (1962)

 

하지만 여기 제목의 세시봉은 이미 한글의 ‘고유명사‘가 된 말로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960년대에 서울에 있었던 어떤 ‘음악감상실‘의 이름인 것이다. 반세기 전이면 사실 ‘골동품’ 냄새가 나겠지만 나에게는 과장을 하면 ‘엊그제’ 같은 느낌의 시절이다. 당시 서울은 99% ‘미국 류’를 따랐겠지만 간혹 이렇게 색다르게 ‘불 류’를 더 ‘멋지게’ 보던 ‘지식층’들도 상당했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것들이 그랬다. 그래서 이 말이 음악감상실 이름이 이것이 되었는지는 그때의 사정을 잘 모르니 알 길이 없다. 희미한 기억으로 내가 ‘아직도’ 고등학생이었을 당시 대학생이었던 누나가 그곳을 다녔고 그때 나는 ‘세시봉’의 이름을 들었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서울 장안의 ’20세 안팎 특별히 할일 없었던 아이들’2이 이곳에 모여서 한창 유행을 타던 ‘기타’를 치고 배우며 시간을 소일하던 것이 작은 역사가 되었고 그 중에 상당 수는 ‘프로’로 전향.. 반세기 뒤에는 ‘완전한 역사’가 된 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세시봉’이다. 나중에는 여기에 70/80이란 것이 붙는데.. 글쎄, 왜 70/80인지.. 아마도 1970~80년대를 말하는 모양.. 하지만 세시봉에는 60/70이 붙어야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아직도 서울의 세시봉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름의 ‘가게’는 전 세계에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주로 식당의 이름에 제일 많은 것 같다. 그 중에는 아틀란타에 있는 세시봉 을 빼어 놓을 수 없다. 이 blog의 제목이기도 하니까. 이곳이 바로 얼마 전에 개업한 ‘김철환’씨의 60/70/80 style 세시봉 음악 경양식 집이다.

며칠 전, 아틀란타 세시봉 70/80-style music cafe.. 두 번째로 가 보았다. 지난 년 말에 진희네 그룹3과 처음 가보았고 2개월 만에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첫 번째 왔을 때보다 분위기가 익숙해져서 그런지 더 여유 있게 몇 시간을 즐긴 셈이다. 처음에 왔을 때 없었던 새로운 음식 메뉴들이 있어서 모두들 그 중에서 골라 식사를 하였다. 이채로웠던 것은 1970년대 우리들에게 익숙했던 ‘경양식’ 메뉴, 특히 큰 접시에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담아내는 수프 (아마도 portage soup이라고 했을 것이다), 함박스테이크 hamburger steak, 돈카츠 don katzu.. 등등 모두 서울 장안 60/80 style로 추억에 어린 것들이었다. 주인 겸 singer는 ‘김철환‘ 씨인데.. ‘소싯적’에 pan flute 프로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그의 연주 record album이 걸린 것도 보았다. 이채롭고 놀라운 것은 그는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수 많은 악기를 연주 ‘했고’, one-man band의 경지가 digital technology를 총동원 한 효과만점의 연기 실력이었다. 그의 vocal도 세월이나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의 가창력을 보여 주었다.

 

처음 가 보았을 때보다 더 가열된 관심이 생기고 같이 갔던 그룹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가게.. 조금 오래 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요새 한인 business의 수명이 1~2년이 보통이라는데.. 어떨까? 이런 곳이 ‘명소’로 자리를 잡으려면 우선 ‘경제성 사업성’이 절대적인데, 어떨까.. 암만 연기가 좋아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니까.. 나의 생각에는 1) 이곳은 ‘우리 또래를 위해서도’ 오래 지속해야 하고, 2)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또래들이 ‘단골’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전함이 필요하다.. 는 것이었다. 경제성이 맞으려면 기본적인 정기고객이 ‘절대로’ 필요한데.. 아틀란타의 고객덩치가 그것을 가능케 할지는 전혀 idea가 없다. 음식이 약간 pricey하지만 그것이 이곳의 특징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면 문제가 없고.. 70/80 style 을 이곳에 정착시키고 우리 또래의 연령층 이외의 세대들 에게도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는 곳으로 만들게 되면, ‘명소’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Owner/Performer인 김철환씨의 ‘약력’은 자세히 모르지만 ‘조영남’씨와 관계가 있는 듯 했고, vocal보다는 instrument쪽으로 경력을 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vocal실력은 예상외로 ‘열창’에 가깝다고 할까.. 인상적이었다. 가끔 ‘신청 곡’도 받는데 4 가끔 ‘이것은 잘 모르겠는데..’ 하는 솔직함도 있었지만 대부분 큰 차질 없는 그는 그 신청을 받아 주었다.

 

경제/영업성은 아직 개업한지 1년도 안 되었으니 확실치 않지만.. 현재까지 주위의 ‘여론’을 들어본 바에 의하면 생각보다 빨리 ‘소문’이 퍼지는 것을 알았고, 대부분의 ‘잠정고객’들도 이런 곳을 아틀란타의 ‘명소’로 승격을 시켜가는데 관심을 보였다. 그 정도로 우리 세대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일까? 하지만 들어보면 ‘서울에 가도’ 그런 곳이 ‘별로’ 없다는 말도 있어서.. 어떨까.. 부활절도 끝났으니, 또 한번 그곳을 찾을 때가 다가오지 않았나..


 

  1. 1960년대에 이 곡은 미국에서 상당히 hit여서 Dean Martin같은 ‘유행가’ 가수들도 많이 불렀다.
  2. 대표적 인물들: 송창식씨, 윤형주씨, 김세환씨, 이들은 나중에 같은 명동에 있었던 OB’s Cabin이란 곳에서 ‘합창, 중창’을 하기도 했다.
  3. 나의 아틀란타 15년 역사의 친지 그룹
  4. 그 옛날 음악다방에 앉아서 이런 ‘짓’을 참 많이도 했는데..

두 번째 ice, snow day 2014

2 주 전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다시 ‘으시시’한 날씨 경보들이 만발을 하더니 결국은 그들의 예보가 정확함을 또 깨닫게 되었다. Never again의 심리적 도움으로 이번에는 꼼짝도 않고 집에 ‘웅크리고 hunker down‘ 있게 되었고 아마도 그런 식으로 이번의 날씨문제도 해결이 되리라..

두꺼운 얼음위에 밤새 내린 눈, 길이 전혀 안 보인다

아침에 예전처럼 늦은 새벽에 일어나려고 하니 방이 조금은 밝음을 느꼈고 아하~ 밖에 눈으로 ‘하~얀’ 모양이구나 짐작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windows blind를 열자마자 찬란한 하얀 빛들이 눈을 찌른다.

어젯밤 잘 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하늘을 보니 아직도 조금씩 하얀 눈이 뿌리는 중이었다. deck rail에는 명암이 뚜렷이 눈의 ‘높이’가 보이는데 족히 2 inch는 될 듯 싶었다. 하지만 2 inch 의 높이는 어제 이미 얼어 붙었던 ice sheet가 더해진 것이어서 아마도 눈은 2 inch보다는 적을 듯 했다. 2011년의 ‘대설’ 이후 3년 만에 보는 ‘설경’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흔치 않은 ‘고드름’을 원 없이 많이 충분히 즐기게도 되었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비록 영상 above freezing 으로 올라간다고 하지만 밑에 깔리 얼음 때문에 차도가 다 녹으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했더니 결국은 오늘도 우리에게 관련된 business는 cancel되는 것 같다. 우리가 관련된 오늘 business는 사실 순교자 성당의 매주 목요일 저녁에 있는 예비자 교리반 봉사가 전부지만 저녁 미사와 더불어 교리반도 취소가 된 것이다. 또 하루 ‘공을 치는, 아니 쉬는’ 그런 날이 된다. 화요일부터 3일째 계속 집에 갇히게 된 것이지만 사실 별다른 choice가 없는 듯 하다.

2주 전의 snow jam(교통 대란)의 기억이 생생한 듯, 이곳 거의 모든 ‘인간’들 ‘꼼짝도’ 안 하고 집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걱정하던 것처럼 electric power에 큰 문제가 ‘아직까지’ 없어서 심심하거나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또한 예전처럼 ‘어린애’ 같이 신나거나 한 것도 거의 없다. 학교를 다니거나 출근을 꼭 해야 한다면 조금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양 들뜬 기분도 들겠지만 우리는 그런 시절이 ‘다~~’ 지나간 것 같아서 조금은 서글픈 심정도 든다.

차도가 전혀 안 보이게 내린 이월 중순의 눈.. 올 겨울의 마지막일까..


 

꽁꽁 얼어붙은 아틀란타, 2주 전의 교훈으로 재빨리 제설작업에 나섰다.

 

2주 전 worst snow jam과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freeway

Snow Jam, 아틀란타 교통대란 2014

매주 화요일은 예외 없이 우리부부가 레지오 주 회합에 참석하러 30분 freeway 드라이브로 도라빌에 있는 한국 순교자 성당에 나가는 날이다. 주 회합이 끝나고 곧 이어 정오 미사에 참례한 후 부근 Korea Town에서 가끔 shopping 을 하거나 점심을 먹기도 하고 귀가를 하면 보통 6시 정도가 된다. 돌아올 때쯤이면 보통 rush hour에 ‘걸려서’ 30분 드라이브가 1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다. mass transit system이 거의 없는 아틀란타 Metro인 만큼 우리 집이 있는 곳이 지역적으로 Korea Town과 꽤 멀리 떨어진 탓에 별도리가 없이 치러야 하는 ‘세금’ 같은 것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화요일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1시간이 아닌, 무려 19시간 걸렸던 인생 최악의 드라이브 경험을 한 날이 되었다.

 

운명의 날,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오전 11시 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일기예보를 통해서 들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모두들 ‘안심하고’ 출근해서 그저 집에 조금 일찍 돌아가면 될 것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모두들 학교나 직장에 있는 상태에서 시간보다 빨리 내린 눈을 만난 것이다. 이러한 ‘절묘한’ 시간문제 이외에 설상가상으로 당국(주정부, 시정부들)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집에 빨리 가라고 모조리 ‘풀어놓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였다. 아무리 도로망이 잘 되어있어도 차들이 모조리 길로 나온다면.. 불 보듯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닌가? 이 당국자들은 하루 종일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발뺌을 하기에 바빴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예보를 잘 못 들었다고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하기도 했다.

 그 비상 퇴근 시간이 점심시간이 바로 지난 때였고, 모든 도로망은 귀가하는 차들로 완전히 묶이게 되었는데.. 여기에 급강하하는 기온 (섭씨 영하 10도까지) 에 쏟아지는 젖은 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교통대란이 시작된 것이다. 얼어붙은 도로에서 차를 그런대로 끌고 가려면 어느 정도 최소한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거의 서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타이어가 traction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 불쌍한 것이 18 wheeler semi들.. 그러니까 tractor-trailer들, 그 공룡 같은 덩치의 고철들이 그런 상태에서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I-285 west@Buford Hwy에서 시작된 19시간 드라이브의 시작

이때만 해도 모든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worst of worst.. 아틀란타 전체 도로망에는 각종 귀가 차량들이 끈끈이 주걱처럼 모조리 jam에 빠진 상태로 서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 중의 최악이 아틀란타의 ‘순환도로’인 I-285 system이었는데.. 바로 그곳에 우리 차 Sonata도 갇혀 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후 3시에 출발한 우리 차는 다음날 아침 10시에 집에 도착을 해서 19시간의 귀가 드라이브..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 되었다.

 그날 따라 성당에서는 연도와 그에 따른 점심회식이 있었던 탓에 더욱 늦게 출발을 해서 I-285를 타고 보니 그곳은 거의 parking lot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런대로 거북이처럼 조금씩은 움직였다. 비처럼 뿌려대던 진눈깨비가 떨어지는 기온으로 길은 조금씩 빙판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차는 비례해서 더 거북이처럼 기어서 밤 9시경에는 Powers Ferry Road exit 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모든 차량이 완전히 서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에 혼자 있을 Tobey(dog)와 Izzie(cat)이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서서히 그 ‘놈’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변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차의 gas는 거의 바닥이 나고 길은 완전히 주차장으로 변한 상태에서 수많은 차들이 버려지기 시작하고 깜깜한 밤은 무섭게 얼기 시작하고.. 나 혼자가 아니고 연숙도 같이 있는 우리의 차 속은 조금씩 공포감이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0% 완전히 정지 된 I-285 traffic

 

이제는 별 도리 없이 정지된 차 속에서 떨며 밤을 새우게 되었다. 1/4 정도의 gas로 출발한 우리 차는 이제 E(empty) 에서 떨고 있어서 gas를 아끼기 위해서 engine을 끄니 추위가 엄습을 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주위를 보니 모든 차량들이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시동을 끄고 쥐 죽은 듯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차를 ‘버리지’ 않고 그저 ‘구원군’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우리도 차를 버리고 ‘걷자’는 생각을 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난 것이 주위가 평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깜깜한 밤이어서 정말 신변에 위험을 느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가까운 곳에 보이는 건물들.. 호텔.. 주유소 같은 곳으로 간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그것도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아틀란타에서 가장 복잡한 freeway가 차들로 100% 주차장으로 변한 얼어붙는 한밤중의 광경은 그곳에 있어본 사람이 아니면 상상이 가지 않을 듯 하다. 배 고픈 것도 잊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일 급한 것이 bathroom문제였던 것이다. 남자는 그런대로 문제가 없지만 여자들은 정말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 많은 차들의 여자들..어떻게 해결을 했을까… 나의 옆에 타고 있던 연숙도 정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지만 한마디로 별 choice가 없이 해결은 해야 했다. 이런 것들로 며칠 동안 수많은 벼라 별 일화들이 website에 등장하기도 했다.

 시동이 꺼진 차에서 무섭게 추웠던 밤을 지새는 기분은 기가 막혔지만 별 도리가 있겠는가? 제설차 준비가 거의 없는 이 지역에서 재빨리 소금을 뿌려대는 구원군이 그렇게 빨리 올 리가 없었다. 동이 트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고요하기만 했다. 모두들 그저 그저 기다리는 모양.. 그러다가 최소한 밝은 밖을 보니 ‘걸어가자’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보이곤 해서 희망을 갖고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가 발이 묶여 있던 곳에서 우리 집까지는 최소한 10 mile 이상은 되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빙판으로 변한 언덕을 걸어가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쪽에 사는 레지오 단원 자매님은 우리보다 먼저 출발을 했지만 역시 어떤 hotel 근처에서 차가 묶여서 그 hotel에서 밤을 지냈다고 했다. 최소한 편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걸어가면 그 hotel로 갈 것으로 정했다.

 

하지만 차를 버리는 것도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차를 가지러 와야 하고 안전문제도 있지 않은가? 가급적 차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아침 9시경이 되었다. 그런데 앞 쪽에서 무슨 큰 트럭 소리들이 나기 시작하고 우리 앞 쪽의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였다. 드디어 소금을 뿌리는 트럭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서 거북이 속도로 전진을 해서 나아가니.. freeway는 정말 가관이었다. 움직이는 차들이 거의 없이 길가는 완전히 버려진 차들로 즐비한 것이다. 거의 텅 빈 고속도로를 우리는 가고 있었다. 아무리 빙판이 되긴 했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운전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집 앞의 주유소엘 오니 드리어 차의 gas가 바닥이 났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집 앞에는 엄청난 비탈들이 있었지만 역시 차들이 없으니 큰 문제가 없었다. 최소한의 momentum만 유지하면 암만 미끄러워도 control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집에 들어오니 아침 10시가 되었다. 모든 곳에 잠잠한 고요한 아침이었다. 다행히 두 마리 pet들은 잘 견디고 있었고.. 우리는 ‘궁전’처럼 느껴지는 home sweet home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이때처럼 침대의 편안함을 실감한 적은 반생을 살면서 거의 없었다고 할까.. 비록 천재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실수도 무시할 수 없는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되었다. 나중에 뉴스를 들어보니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수 많은 각종 ‘해괴’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무능한 해당 당국과 특히 담당한 사람을 막연히 믿는다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생각이라는 경험도 했다.

 이번의 ‘교통대란’의 주 원인은 물론 ‘절묘한 시간’에 도착한 얼어붙는 진눈깨비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첫째는 공식적인 정확한 예보를 무시하고 서로 맞지 않는 지역예보에 의지한 것, 둘째는 주 정부를 위시해서 군소 지역 정부들(이것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많다)이 ‘전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거나 모른 상태에서 속수무책이었고, 모든 것이 거대한 자동차 도로망에 의존하는 아틀란타 수도권의 갖는 특성이 이런 2″도 안 되는 눈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나는 freeway system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 길’을 택할 것이라는 조금은 소극적인 생각과, 자동차 gas가 1/2 이하로 절대로 내려가지 않게 채우고 다닐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더 한가지.. bathroom kit를 차에 가지고 다닐 것도.. 굶는 것은 참아도.. ‘화장실’ 가는 것은 못 참지 않는가?

 

freeway를 벗어난 Cobb Parkway.. 길이 아닌 주차장으로 변했다

차를 버리고 걸어간 사람들로 길은 완전히..

레지오 총 친목회가 끝나고..

¶  12Scan10035월 1일, 2013년도 레지오 총 친목회 (Legion of Mary, Reunion)가 2013년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의 시작과 함께 멋지게 어울리며 결과적으로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본당 내에서 2013년 12월 크리스마스 season의 막을 제일 먼저 올리는 역할을 해냈다. 12월 1일에 성탄의 공기를 느끼기에는 조금 이른 듯도 하지만 요새의 ‘세속적 secular, 상업적 commercial’인 흐름을 보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듯 싶다. 이미 지난 주부터 크리스마스 carol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고 Thanksgiving 날 부터 아예 shopping season이 ‘요란하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친목회 프로그램의 하나인 합창 공연에서 참가자 모두가 빨간 산타크로스 모자를 써서 더 그러한 성탄절의 기분을 풍긴 듯 싶다.

 우선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 총 친목회는 결과부터 보면 예상보다 잘 치러 진 느낌을 받았다. 꾸리아에서 공식적이고 전체적인 review를 해 보면 더 자세한 것을 알겠지만 친목회의 진행이 비교적 매끄러웠고, 지루한 느낌도 거의 없었다. 참가자나 연기하는 단원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보며 그런 것을 나는 느꼈다. 아틀란타 지역 한인 성당이 2개로 나누어지며 필연적으로 꾸리아 소속 단원 수가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서 참가자의 수는 아마도 예년에 비해서 ‘많이’ 줄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지역 쁘레시디움 (Columbus, Augusta 같은)에서 장거리의 불편을 무릅쓰고 참가한 것은 보기가 좋았고, 참가 단원들의 참여 태도는 ‘수우미양가’ 에서 아마 ‘우’에 속하지 않았을까?

나와 연숙1은 올해 꾸리아 level에서 이 행사를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며 한가지 각오를 하고 임했다. 그것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라는 조금은 진부한 표현의 각오였다. 물론 결과는 충실하고 진지한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너무나 결과에 집착하며 아무래도 모든 것들이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친목회의 제일 큰 목적이 잘 모르는 단원들과의 친교 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친목회 자체는 불과 1~2시간 정도의 친교시간을 주기에, 도저히 그 자리에서 의미 있는 친교는 힘들다. 게다가 친목회 자리에서조차 평소에 모이고 있는 단원들끼리 모이게 된다는 현실을 알면 더욱 친교는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친목회에서 열리는 각종 프로그램에 서로 소속이 다른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연습, 참여를 하며 그곳에서 시간을 두고 친교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결책이었다. 실제로 각종 프로그램에서 평소에 겨우 얼굴 정도나 알던 단원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 나에게 이 친목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도 조금 생각을 하며 이날을 맞게 되었는데, 아마도 나의 ‘깊어가는’ 나이를 더 의식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도 세월이 깊어 갈 수록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그런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한 ‘최선’을 다해서 참여를 하자는 각오를 가지고 임했다. 특히 대다수가 여성 단원들인 우리 레지오에서 나 같은 남자단원들이 가질 수 있는 외로움, 소외감, 위축감 등등을 어떻게 이런 기회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가도 생각을 했다.

사실 이러한 ‘요새 남자들의 문제’는 이곳만이 아닐 것이고 전반적인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나, TV를 보나, 영화를 보나.. 요새는 여자들만 보이는 것 같고, 남자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레지오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사회적, 문화적 흐름을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특히 나이 먹은 남자들에게는 더욱 뚜렷하다.

 이런 우울한 남자들을 생각해서 작년 총 친목회 때 의도적으로 남자들만의 시간을 만들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두 남자가 sing-along 을 lead 한 것인데, 결과는 별로였을까.. 올해는 아예 다시 해달라는 요청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목회 2주를 남겨두고 연습 진행상태가 별로였는지 급작스럽게 sing-along team을 다시 만들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작년의 2명 남자는 다시 목소리를 맞추게 되었는데 올해는 조금 욕심을 부려서 ‘숨어있는 남자 인재’를 찾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예상을 뒤엎고 3명의 남자를 ‘발굴’ 해 내었다.

이 남자들은 몇 년 동안 그저 얼굴만 간신히 아는 정도였는데 운 좋게 ‘의기투합’이 된 것이고, 이중에 2명은 끝 무렵에 연숙에게 ‘걸려서 등을 떠밀려’ 온 case였다. 그래도 그들도 정말 오랜만에 ‘목청’을 쓰는 듯 신기해하며 동참을 했고 우리의 의도인 ‘친목도모와 즐기자’ 라는 것을 잊지 않고 결국 친목회에서 남자 5명의 sing-along team이 debut를 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은’ 올해 총 친목회의 추억이 될 것이다.

올해도 여흥순서의 사회를 연숙이 맡았는데, 조금은 피곤해 보였다. 나이도 그렇고, 3년째 계속하고 있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다른 사람을 계속 찾아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저 ‘인재’가 없다고 푸념들만 하는 모양인데, 참 알 맞는 사람이 없기는 해 보인다. 연숙의 부단장 직이 내년 중에 끝이 나기에 그때만 기다리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끝 나도 글쎄.. 작년에는 청년 단원들이 중심으로 강남스타일을 요란하게 멋지게 보여주었는데, 올해는 완전히 스타일이 바뀌어서 엄숙하고 느린 모습의 body worship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많은 단원이 참가한 합창은 기대 이상으로 멋진 화음을 연출하였고, 참가 인원이 적어 고민하던 ‘춤’ team 도 아주 귀엽고 신선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제일 시끄럽고 신명 나고 신났던 것은 역시 우리부부가 다 참가했던 난타가 아니었을까? 이 프로그램은 연습기간과 참여도가 제일 우수했던 것이어서 결과에 상관없이 대 성공을 이룬 case가 되었다. 국악을 전공한 자매님이 열성적으로 2달에 걸쳐서 지도한 열매였다.

 이 행사로써 올해 레지오의 주요 행사는 다 끝났고, 이제는 조용히 대림절 4개의 초가 하나씩 켜지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고, 그 후에는 또 한 해를 다 보낸다. 비록 구세주 탄생은 기쁜 것이나 이제는 솔직히 이 나이가 되니 내년 이맘때 다시 한번 친목회에 참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곁들여서 그런지, 한 해가 가는 이 시점이 꼭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즐거움과 아쉬움이 교묘하게 교차되는 그야말로 미묘한 기분의 12월인 것이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레지오 합창 team

 


베토벤 바이러스, 윤도현 아리랑 – 난타 team

 


Group Game – 참가자 모두

 


사랑으로‘ , 고 김수환 추기경 애창곡 – finale, 모두가

 

  1. 나는 현재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 서기로 있고 연숙은 같은 쁘레시디움의 단장인 동시에 천상은총의 모후 꾸리아의 부단장으로 모두 꾸리아에는 직접 간접으로 깊이 관련이 되어있다.

첫 추위, 살아난 ‘고물’, 묵향전

2013-10-25 16.21.28-1¶  올해 들어서 첫 ‘계절 추위‘가 선을 보였다. 이 지역 장기 예보는 분명히 올해 평균 이하의 겨울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그렇게 쉽게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통계와 확률에 바탕을 둔 것이라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북미주 동쪽의 거의 전부가 늦가을 같은 첫 추위를 느꼈고 이곳 아틀란타 지역도 만만치 않게 빙점에 가까운 온도와 바람까지 동반된 것으로 ‘명절, 휴일’ 기분까지 나게 하는 약간은 반가운 느낌도 들었다.

작년에 애용했던 radiant space heater를 꺼내어 따뜻한 빛과 열을 처음으로 보고 느낀다. 아직도 새파란 숲들이 아주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10월 31일(10월 마지막 날)이 오랜 전통의 Halloween day.. 관련된 색깔은 pumpkin(호박)의 진 주황색이라 역시 본격적으로 ‘떨어질’ 낙엽을 그린다, 이 날이 다가오면 우리 애 들이 어린 시절 동네를 돌며 trick-or-treat 시키던 기억과 이런 것들이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을 느끼며.. 아, 우리가 이곳에서 오래 살았구나 하는 야릇한 감상에 젖는다.

칠흑같이 깜깜해진 아침 6시 45분경 2층의 난방이 가동을 하면 나는 조심스레 어둠 속을 헤치고 나의 서재로 간다. 우리 집 잠꾸러기 10살짜리 개 Tobey(토우비)는 포근한 자기 침대에서 완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자동 프로그램이 된 아래 층 전깃불들로 아래층은 이미 밝지만, 때 맞추어 고장이 난 난방시설(gas furnace) 덕분에 냉장고처럼 냉랭하다. 아래 층의 주인인 7살짜리 고양이 Izzie(이지)는 벌써 활동개시.. 활발히 돌아다닌다.

거의 zombie처럼 어둠 속에서 나는 아침의 즐거움인 hand-drip coffee를 커다란 mug에 담아 서재로 올라온다. 그때부터 8시까지 나만의 소중한 1시간이 시작된다. 이런 routine이 이제는 일년도 넘게 ‘완전히 고정’ 되어서 거의 robot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조금 있으면(11월 3일, 11월 첫 일요일 새벽) Daylight Saving Time(DST, summer time)이 끝이 나며 아침이 조금은 더 밝아지고(대신 저녁은 더 일찍 깜깜해짐), 그것이 시작되는 날 한 시간 더 잠을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어김없이 정직하게 또 계절은 바뀌고 있다.

 

¶  지난 주 첫 추위가 왔을 때, 아래층 gas furnace가 문제가 생겨서 ‘가동’을 못 했고 부랴부랴 아래층은 각종 electric space heater들을 동원해서 난방을 하는 귀찮음을 겪었다. 30년 넘은 ‘고물’이 드디어 숨이 넘어감을 느끼며, 수 천불이 들지도 모르는 이것 한번 더 내가 손을 보았는데 다행히 그것의 심장 격인 heat exchanger는 문제가 없었고 fan control system인 전기 쪽에 문제를 발견하고 부랴부랴 그 부품을 order를 해서 오늘 그것이 도착하였다. 요새는 거의 모든 것들이 electronic 그것도 microcontroller를 사용해서 온도를 조정하지만 30년 전에는 ‘완전히 기계식’이었다. digital, analog 이전의 100% mechanical control인 것이다.

이것의 장점은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 옛날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온도를 감지하는 bimetal boom의 길이가 원래의 것 보다 조금 짧았지만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furnace 속의 온도가 4″ 정도의 거리에서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한 시간 걸려 망가진 것과 바꾸어서 power switch를 켜는 그 순간.. 언제나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순간이다. 세상에 100%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랜 만에 난방 system의 blower fan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아마도 최소한 $350은 절약했을 것이다. 이것이 ‘공돌이’ 들이 느끼는 자부심이다.

 

2013-10-28 14.04.49-1‘shiny brand new’ furnace blower fan controller

 

¶  지난 이틀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제4회 아틀란타 묵향회 회원전이 열렸다. 몇 년 전에 연숙이 이곳에 가입을 해서 토요일 마다 땀을 흘리며 배워왔고 매년 이맘때 쯤 회원전을 열곤 했다. 나도 따라 다니며 보곤 해서 이제는 아주 보는 것이 익숙해졌다. 나보고 해보라고 하지만 나는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보는 것은 조금씩 눈이 열리는지 많이 나아졌다. 내가 그렸던 것은 50년 전에 그렸던 만화가 전부여서 나는 사실 미술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이런 동양화 쪽은 더 그렇다. 하지만 그리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조그맣게 시작한 이곳 묵향회, 이제는 회원들도 늘어났고 그것에 비례해서 출품 작도 많이 늘었다. 거의 50 점이 넘게 전시가 되었고, 많은 회원들이 ‘호’를 받고 그것을 새긴 ‘인’ 도 찍고 해서 아주 ‘프로’의 맛을 보여준다. 성당에서 전시를 하기에 신부님도 나와서 참관을 했는데, 3년 전의 것을 기억을 하시는지.. 처음보다 너무나 나아졌다고 논평을 했고, 솔직히 처음에는 모두 ‘습작’ 수준이었다고 해서 모두들 웃었다. 이곳 교민 인구가 제법 불어나서 이제는 이런 취미 모임들도 큰 무리 없이 유지가 됨을 보고 참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개막이 되던 날은 새로니, 나라니도 이곳을 찾아 주어서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2013-10-26 17.06.47-1 제4회 아틀란타 묵향회회원 작품전 개막

 

초가을 비, Pope 2.0

¶  8월보다 더운 느낌의 9월 초의 가뭄을 끝내는 시원한 초가을비가 ‘잔잔히’ 내린다. 9월도 하순으로 접어들고 내일은 9월 22일, 가을의 시작이고 밤과 낮의 시간이 같은 추분 Autumn Equinox 이다. 2013년 올해의 이곳 아틀란타 지역 기후는 아마도 ‘통계적인 평균치’ 에 가까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온건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축축하지만 시원했던 여름에는 ‘감사기도’를 드리기에 바빴다. 온갖 지구의 열병에 대한 ‘유언비어’ 속에서 거의 기후 공포증에 시달리던 때, 이런 ‘여유’를 주신 Mother Nature 에 감사를 드린 것이다.

‘통계적 평균치’를 언급하면서, 올해의 8월과 9월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마디로 8월의 평균기온과 9월의 평균기온이 비록 평년에 비해서 낮았어도 그 자리가 바뀐 것이다. 통계치를 언급할 필요가 없이, 8월에 a/c(air conditioner)를 사용한 날 보다 9월 사용한 날이 더 많았으면 그것은 완전히 8월과 9월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8월 9월의 합친 기온 평균치는 ‘아마도’ 평년과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힘일까.. 예년에 비해서 아직도 새파란 주변의 모습이지만 그 만큼 더 빠른 속도로 가을 색, 황금의 빛깔로 변하지 않을까.. 그것에 오늘처럼 내리는 잔잔한 가을비까지 곁들이면 이것이 바로 ‘가을비 우산 속‘ 같은 감정이 되지 않을까..

 

2013-09-21 14.40.52-1

초 가을비가 뒷뜰에 촉촉히.. 멋진 빗소리와..

 

¶  Pope Francis, 교황 프란치스코.. 요한 바오로 2세를 능가하는 역사에 남을 교황이 되시려는가? 교황이 된 뒤 반년이 지나가는 이즈음 그에 대한 시각, 평가와 언론에 비치는 그의 모습들..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싶다. 처음 교황이 되었을 때, 대부분은 조금 실망을 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건강상 이유로 도중하차하신 전 교황, 베네딕트 16세를 계승하는 지도자가 ‘또’ 76세이 교황이라면 얼마 되지 않아 또 ‘건강상’ 문제가 나올 터인데.. 왜 그랬을까? 그렇게 많은 추기경들이 그런 염려를 하지 않고 새 교황을 선출했을까?

 “the church as a hospital in a battlefield,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 Pope Francis

하지만 나이에 맞는 보수성은 취임 초부터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조금씩 ‘프란치스코의 놀라움’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명의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트 16세 모두 ‘머리가 지독히 좋은, 학자 출신’ 이었고, 그에 못지 않게 ‘보수적’이었는데 현 교황은 그 모든 것도 아니었다. 거의 ‘진보적’이고, ‘머리보다는 가슴’인 그런 교황임이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올 것이 왔다. 그것도 지독히 큰 것이.. 8월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 바티칸에서 예수회의 기자와 장시간의 기자회견을 가지고, 그것이 세계 예수회에서 발행하는 회지에 실리고 미국에서는 America [magazine] 라는 곳에 실렸다. 곧바로 그것은 ‘세속 언론’에 알려지고 ‘폭탄 선언’으로 그것이 묘사되었다. 세속적인 눈은 교황이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교적 ‘공정’한 입장의 New York Times는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21세기 가톨릭 교회의 ‘고민’을 이해하려 애를 쓰기도 하며, 이번 교황은 잠재적으로 전 2 교황의 보수성향을 견제하며 교회를 ‘모든 사람들의 교회’로 만들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사실 나도 혼동이 오는 느낌도 들지만 사실 나는 희망적이다. 무언가 변하긴 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Vatican 2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불만을 품고 떠나거나 예전의 가톨릭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 돌아가는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극단적인 신자들도 많아서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는 교회 때문에 현재의 모든 세속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고 하기까지 한다. 과연 그럴까? 세속화가 가속되는 것은 사실 현재 교황이 시사하는 대로 ‘고독한 현세인 들을 사랑으로 품지’ 못한 결과는 아닐는지?

Me, catechist? not exactly..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2014년 부활절 영세 목표’ 예비 천주교 신자들의 교리교육이 2013년 8월 8일에 시작이 되었다. 최소한 미국 내의 본당들은 거의 이즈음부터 예비자 교리과정이 시작되어 내년 부활절 즈음까지 계속된다. 천주교의 전통일까,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예비자의 교육을 시키는지 그 옛날에 본 기억이 있지만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것은 개신교의 전통은 ‘쉽게 쉽게’ 하는 것이라는 것과, 교육과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총각 시절 잠깐 나간 적이 있었던 어떤 교회에서는 나보고 ‘거저’ 세례를 주겠다고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나와 연숙은 1981년 가을부터 아주 특수한 상황하에서 예비자 교리공부를 시작해서 다음 해 1982년 부활절 때 영세를 받았다. 당시의 우리 본당이었던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의 한인천주교회에는 규모가 하도 작아서 정식 교리반 코스가 없었지만 그 무렵 신시내티 로 옮겨가셨던 전 주임신부 왕영수 신부님으로부터 직접 교리교육을 받은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 우리보고 ‘행운’이라고 했다. 10명도 안 되는 소 그룹이 신부님과 마주하고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행운’이었다. 왕영수 신부님의 절대적인 헌신적 노력이었다. 신시내티로 부터 콜럼버스까지 2시간 거리를 마다하고 일주일 마다 오셔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30 something의 그 나이에 신앙적 교육을 받는 것은 조금 힘든 상태였다. 머리는 굳을 대로 굳어지고 특히 나 자신은 더욱 천주교 교리가 쉽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예비자들에 비해 그렇게 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머리 속에서 돌며 가슴으로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때의 비결이 ‘무조건 믿어라’ 였는데, 그 말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연숙은 나와는 전혀 달랐다. 무언가 각오를 하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고, 결과는 나와 전혀 달랐다. 신부님 말씀대로 ‘정확히, 깊이’ 잘 받아 들였다고 했다. 우리의 신앙여정은 그때부터 사실 정도와 방향이 갈라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이 교리공부는 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30여 년 전, 그 때 ‘들었던’ 왕영수 신부님의 교리 가르침을 가지고 30여 년을 버틴 셈이다. 머리로 공부한 것, 거의 다 잊어버려도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거의 냉담 상태로 오랜 세월 ‘허송’하다고 최근에 조금씩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분으로 교리란 것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모든 신앙적 여건과 조건이 ‘급속히’ 호전되면서 이제는 교리과정이 ‘소로소로’ 나의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들이 참 많았다. 그것도 ‘완전히’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3년 전 레지오 마리애 에 입단을 하면서, 다시 교리교육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레지오 단원의 활동사항 중에 ‘교리반 지도’란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두 선교는 나에게 맞지 않을 것이고 요사이는 그것이 그렇게 효과적이 아닐 수 있기에 더욱 교리반 활동은 나에게 appeal을 하였다. 연숙에게 물어보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라는 대답이었다. 교리교사는 아무나 하나.. 하는 식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오랜 신앙생활을 한 연숙도 그것은 할 수가 없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잊고 대신 나는 정식 교리과정은 아니지만 ‘좌우지간 천주교에 대해서 알아보자’ 하는 식으로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과정이 절대로 어렵지 않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가슴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길지 않은 ‘귀향’ 과정 끝에 결국 때가 슬그머니 찾아왔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께서 나의 사정을 보셨는지, 신부님 1 께서 조용히 부르셔서 우리부부에게 새로 시작하는 교리과정의 봉사자로 수녀님께 추천을 했다고 하셨다. 올해 들어서 새로 오신 수녀님께 완전히 교리반을 일임하신 듯 하고, 예전의 ‘체제’를 완전히 바꾸신다고 했다.

예전의 교리반 director라는 자매님만 남고 종전의 교리교사 제도를 완전히 없앤 것이다. 대신에 수녀님을 돕는 형식으로 ‘봉사자 제도’를 만든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바꾸어야만 했는지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른다. 좌우지간 내가 레지오를 시작하면서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셈이고, 나는 정말로 성모님의 ‘전구’를 더욱 믿고,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 우리부부는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오랫동안 가르쳐본 경험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 자체는 좋아하고 일반적인 technique도 생소하지 않지만 이곳은 다양한 연령층으로 이루어진 ‘성인 교육’이라서 지난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무리일 듯 싶다.

올해 등록된 예비자 숫자는 기대보다 훨씬 떨어져서 시작 단계에서 10명 내외였는데, 사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다행이었다. 조그맣게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봉사자’의 역할은 수녀님의 ‘강의’ 뒤에 있는 나눔의 시간을 이끌어가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도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idea가 없지만 그저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고 있다. 만약 우리들의 경험담이 필요하거나 교리에 관한 질문이 있으면 그것에 성의 있게 도움을 주려는 각오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첫날 모인 예비자들은 대부분 30대에서 60대까지 남자들이었고, 부부를 포함한 가족도 있어서 이채로웠다. 대부분이 가족이 신자였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왔다고 해서, 그들의 가족에 대한 정성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나의 신앙여정을 생각하고, 레지오 단원임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들과 같이 기필코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고 싶다.

  1. 하태수 미카엘 본당 주임 신부님

아틀란타 부부 장례미사

2010년 가을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레지오에 입단하면서부터 죽음에 관련된 의식, 특히 연도, 장례미사를 꽤 많이 다녔다. 나에게 알려진 장례의식은 수동적이건 활동적이건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 다음부터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고, 열심히 함께하였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던 곳은 없었다.

정확히 일주일 전 토요일 밤에 가까운 친지 윤형의 처남부부가 함께 집에서 어떤 ‘똥포’ monster들에게 살해되는 끔찍한 일이 있었다. 이 monster 2명은 피해자의 사업체에서 해고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앙심을 품은 의도적인 살인인 듯 싶었다. 일본의 야쿠자를 연상시키는 ‘칼에 의한 살해’, 미국에서는 조금 드문 case여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어제 우리는 둘루스(Duluth)에 있는 성 김대건 성당으로 부부 장례미사에 다녀왔다. 너무나 급작스런 한 부부의 사망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이고 할 말을 잊는다.

 고인은 나보다 나이가 2살 밑이었고 서울고, 고려대 출신이어서 아마도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는 서울에서 학교생활을 했을 듯 했다. 한국에서 날라온 친구의 정겨운 추억담이 담긴 조사는 우리시대의 정서를 잘도 반영해서 나의 친구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고인 부부의 외아들 조사, 비록 영어로 표현된 부모를 그리는 마음이었지만, 어찌 그 심정을 모르겠는가. 우리 또래의 부모들의 가치관을 그 아들은 잘 표현해 주었다. 그의 결론은, 비록 부모의 생각을 이해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교육열’과 ‘무조건적 사랑’은 고맙게 받았다고 해서, 우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 장례미사에서 두 부부의 ‘덜 준비된‘ 영정사진을 보며, 내가 그들의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어떨까, 과연 몇 사람이 나를 기억해 줄까, 고국의 친구들 몇 명이 관심을 가져줄까, 나의 딸들은 나를 어떤 아빠로 기억을 할까.. 하는 두서 없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왜냐하면 그런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 여름의 봄비, 두 죽음..

¶  한여름 봄비  7월의 마지막 날, 중복더위가 끝나가는 한창 여름에 주룩주룩 봄비가 내린다. 2013년 이 지역(Atlanta Metro) 여름은 ‘아마도’ 내가 경험한 ‘최고의 여름‘으로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듯 하다. 오늘 아침도, 이제는 눈과 귀에 익은 비, 그것도 봄비 같은 냄새의 비가 주룩주룩 나를 반긴다.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곳의 여름은 바로 내가 어렸을 적에 서울에서 ‘흔히’ 느끼던 바로 그런 것이다. 장마 같은 냄새, 섭씨 30도를 ‘별로 크게’ 넘지 않던 온화한 더위, 소낙비, 가랑비, 보슬비, 풀벌레 소리.. 와~~ 1950, 60년대에 내가 냄새 맡고 느꼈던 서울 원서동, 가회동의 여름 냄새가 아닌가? 이런 자연이 주는 포근한 ‘공짜’ 선물은 확실히 올해 내가 여름을 지내는데 매일 매일 잔잔한 기쁨을 주었다. ‘Mother Nature, 자연의 엄마’께 계속 고개를 숙이고 숙인다.

 

Carmel Retreat Center near metro Atlanta
Carmel Retreat Center near metro Atlanta

¶  레지오 피정:   지난 주에 시작되었던 ‘줄줄이 사탕’ 같이 바쁘고 숨가쁘게도 느껴졌던 ‘큰 일’들이 다 막을 내렸다. 그 중에 지난 주말에 있었던 2박 3일의 레지오 피정은 생각과 기대보다 훨씬 풍성하고 기분 좋은 경험을 남겨주었다. 연숙이, 피정을 ‘맨손으로’ 주도하는 꾸리아의 간부라서, 나는 어차피 수동적인 참가자 이외의 역할을 피할 수가 없었지만 나는 노력을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피정 중에 보니까, 수시로 나오는 식사준비와 뒷일들 같은 모든 잡일들을 이 4명의 꾸리아 간부 ‘아줌마’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어서 사실 고맙긴 했지만 조금 걱정도 되었다. 그들은 거의 99% ‘희생’만 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어서 조금은 더 일들을 분담하는 것이 더 ‘좋은 그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1988년 폴란드 ‘걸작영화’ ‘사랑에 대한 짧은 film‘ 이란 한 시간 반 짜리 영화감상과 감상소감 나눔으로 시작된 하태수 주임신부님 지도의 이 피정은 한마디로 질적으로 A급이었고, 나도 난생 ‘처음으로’ 진짜 피정의 모습과 맛을 느꼈던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숙제를 남긴 계기가 되었다.

 

¶  부부 살인: 오랜만에 집을 떠났다 돌아오니, 의외의 뉴스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또, 이곳 아틀란타 한인사회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그것이다. 어떤 한인교포 중년 부부가 집에서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다. 금전적인 의도가 ‘절대로’ 아닌 것으로 보아 ‘분명히’ 원한에 관련된 듯 했다. 게다가 두 부부는 영세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부부였다. 그래서 ‘연도’와 ‘장례미사’의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 부부는 우리 순교자 성당이 아닌, 새로 분가해서 나간 김대건 성당 소속이라서 우리가 그곳에 가게 될지는 미지수였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돌아가신 부부는 우리와 절친한, 오랜 교분의 역사를 가진 Men’s Night friend 윤형,그 집 부인, Mrs 윤의 오라버니 부부였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실.. 정말 믿어지지 않았던 뉴스였다. 사실 지금까지도 믿어지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엄연한 사실인 모양.. 고인의 어머님, 그러니까 윤형의 장모님은 어떻게 이런 충격을 견디고 있으실까 생각하니 사실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일들, 그것도 우리와 가까웠던 친지의 가족이.. 현재까지는 사업상 원한을 가진 한인 2명의 소행임이 밝혀졌고 그 중에 한 명은 벌써 체포가 되었다고 한다. 사업상 원한이라면 과연 어떻게 그런 불상사를 피하며 사업을 할 것인가.. 참 사업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Tweeting & talking about dying mother, Scott Simon
Tweeting & talking about dying mother, Scott Simon

¶  Simon’s Mother의 죽음:  잠시 CBS-TV를 보니, 내가 잘 아는 NPR(National Public Radio) 단골 journalist인 Scott Simon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도 ‘거의 우는 모습’으로..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한 것.. 조금은 의아한 것이, 어떻게 그의 어머님 사망이 뉴스거리가 되었을까? 하기야 ‘유명인’이니까 유명세를 치르는 것일까 했지만, 이것은 그것과 반대의 case였다.

자기 어머님의 임종을 거의 ‘일부러’ 대중에게 알리는 것..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약 일년 전에 나는 twitter로 그를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는 완전히 이것에 ‘미쳐’있는 듯 했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24시간 이곳에 공개를 하는 듯 했는데 그는 그 자신과 가족의 privacy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했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어린 딸의 신상을 쉬 임 없이 ‘방송’을 하고 있었던 사실..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지나친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런 모습의 극치를 보이듯이, 자기 어머님의 ‘죽어가는 과정’을 24시간 twitter로 방송을 한 모양.. 참..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죽는 과정, 죽음, 장례식 같은 것은 가급적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사적인 엄숙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는 정반대인 case인 셈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tweeting도 모자라서 아예 CBS-TV에 그 자체로 인터뷰를 한 것인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이 사람은 자기 어머님까지 ‘파는’ 완전히 publicity에 미친 사람인가?

A Day in the Life

Florida Keys
Florida Keys

¶  7월도 tipping point를 지나간다. 이제는 서서히 8월을 향해서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새의 한 달의 느낌은 예전의 일 주일 정도라고나 할까.. 어찌 그렇게 세월의 느낌은 나이의 느낌과 비슷할까.. Mother Nature의 축복을 흠뻑 받으며 올해의 여름은 기가 막히게도 시원하고 시원하다. 몇 년간의 갈증을 완전히 복수라도 하듯이 엄청 많은 ‘물’을 쏟아 주셨고,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머지 여름, 기껏해야 한달 반.. 암만 더워도 달게 받으리라. 그러다 생각하니 그렇게 많이들 가는 여름휴가.. 이제는 ‘휴가’라는 말 조차 잊은 것일까. 연숙도 다 잊은 모양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 집 자체가 summer house같이 느끼는 것일까? 집에 있는 자체가 summer vacation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편하게 느끼면 되지 않을까?

올해는 잠시 잠시, 미국의 ‘최남단’ Florida Key West와, Hemingway의 소설이야기를 향해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고 집을 떠날까 하는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학교 때 영화로 보았던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등을 최근에 다시 보게 되면서 더 그곳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어디까지나 머리 속에서만 머문 것이 되나 보다.. 그렇게 올해의 여름도 끝날 것인가?

 

 ¶  이동수 목사.. 이동수 선생, 어떨 때는 형제와 같이도 느껴지는 사람.. 하지만 꿈속에서나 보는 느낌으로 오랜 세월을 못 보고 지낸 그런 사람, 어제는 우리 부부가 정말 오랜만에 꿈에서 깨듯이 그 집을 방문해서 부인, 이미섭 선생이 정성스레 마련한 ‘일식’ 점심을 같이 하며 해후를 풀었다. 한마디로 ‘은혜로운’ 몇 시간을 우리들은 만끽하였다.

골방에서 거미줄을 치우며 조금씩 빛을 향해 개미행진을 시작한 지 2년여가 되어가지만 아직도 나는 그 개미행군을 계속하는 느낌이다. 1990년 초, 우리가 아틀란타에 이사온 후 시작한 아틀란타 한국학교에서 우리부부와 그 집 부부는 같은 선생님으로 만났고 그것이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서 우리들은 ‘인연’이 생기게 되었는데 교장문제 같은 하찮은 ‘정치싸움’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휘말리고 결과적으로 다 그곳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 사실 우리 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생사 여부나 간신히 알 정도로 지내게 되었는데 얼마 전 연숙이 정말 우연히 이동수 목사를 보게 되었고 어제는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의 ‘지인’에 속하는 이동수 목사.. 이렇게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이제는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세상에는 100%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  몇 년 전 우리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얻어온 선교용 CD를 조심스레 rip해서 youtube에 올려 놓았다. youtube 를 배우려 한 목적도 있었지만 내가 들어 본 그 CD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것이라 아주 professional한 것이라 나도 다시 들은 것도 많은 수준 급이어서 혹시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큰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인기’가 있을 것은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고, 사실 그랬다. 불과 200 views도 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 문제가 되는가.. 단 한 명이라도 ‘무언가’ 느끼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toxic comments에 있음을 오늘까지 몰랐다.. stupid, toxic, absurd, destructive comments..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시간을 죽이는 한가한 인간들’의 넋두리를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comment review & approval을 해야 하는데..하는 후회가 있었지만 늦었다. 어떤 ‘불쌍한 자매님’이 불쌍한 comment를 달아놓았다.

‘교황은 지옥에 있다’라고 시작된 이 Kafka-ish한 느낌은 정말 어찌 처리하는가.. 속으로는 ‘지옥은 당신들… 당신이나 잘하시오..’ 하는 감정도 잠시 치솟지만 그래도 나는 레지오(마리애)의 정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곧바로 평정을 가다듬고 이 불쌍한 영혼을 위한 기도가 생각나면서 ‘아하.. 이래서 우리 레지오가 세상에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아.. 세상에는 참으로 불쌍하고 무식한 영혼들이 많이 있구나.. 하지만 무식해도 바르고 깨끗한 영혼들도 많이 있는데..

 

¶  Coursera: 약 6주전에 성당교우 설재규씨가 이곳, online university course website, coursera.org를 소개해 주었다. 이곳은 전 세계(주로 미국)의 여러 대학 online course들을 online student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비교적 새로운 academic course provider이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computer로 강의를 듣게 하는 idea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다양하고 세계 굴지의 교육기관 (주로 미국의 대학들)의 course들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각 대학들은 이미 자체 방식대로 그 동안 credit course들을 ‘유료’로 제공을 해 왔지만 이 coursera.org는 ‘기본적으로’ ‘무료’인 것이다. course를 제공하는 학교들과 이것을 한 곳에서 제공하는 coursera 는 어떻게 무료를 가능케 한 것일까? 특별한 ‘광고’들이 보이지 않기에 광고수입은 관계가 되지 않는데,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이 course들의 학생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고, 이것 자체가 각 대학들을 ‘선전’하는 금전적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닐까? Open & Free가 새로운 문화로 정착하는 이즈음, 이것도 그런 맥락에서 절대로 이해가 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주간 나는 University of Rochester에서 제공하는 Fundamentals of Audio & Music Engineering : Part 1 Musical Sound & Electronics란 ‘거창한’ 제목의 course를 ‘경청’하려고 노력을 해 보았다. 학교 강의실이 아니고 편한 집의 cushy한 환경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 oxymoronic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나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 course로 나의 성적표 기록이 남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이제 취직을 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재미와 보람’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특별히 이 sound & music course를 택한 것은 내가 이곳을 처음 찾던 날 ‘개강’을 한 것이 제일 큰 이유였지만, course description에 final project로 guitar amplifier를 설계, 조립을 한다는 것이 귀가 솔깃해진 것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요사이 나는 야마하 ‘통(acoustic)기타’를 guitar pickup과 Beringer amplifier, buzz pedal을 연결해서 쓰는 중이어서 이런 분야에 관심을 둔 것도 또한 이유가 되었다.

이것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 중에는, calculus를 포함한 대학 level 수학을 정말로 많이 잊어 버렸다는 것.. 학교를 떠난 후 이 ‘이론적 수학’을 써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변명만 찾기에 나는 급급하고 있을 정도로 사실 당황을 하였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 때문일 것이다. 전기공학과 2학년 수준의 AC circuit analysis도 많이 잊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생애 전공’이 거의 digital, microcontroller, embedded software였으니, 그 쪽은 정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너무나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리움 같은 것도 느껴서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다.

My current & upcoming courses from Coursera

My current & upcoming courses from Coursera

 

3일 뒤에는 다음 course, Introduction to Guitar가 시작이 되는데, 사실 이것을 ‘청강’해 보려는 것은 과연 진짜 pro들은 어떻게 guitar를 치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course의 설명을 읽어보면 ‘아마도’ 기타를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 같아서 시간 낭비가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되지만 무슨 상관.. Free & Open이 아닌가? 3주 뒤에는 올해 나의 진짜 관심사, 이스라엘의 대학에서 제공하는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인데, 소개 video를 보면 정말 어떤 각도로 ‘인간역사’를 조명하는가가 궁금해진다. 나의 다른 희망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지만 어떨지 모른다.

 

 
A Day in the Life, Beatles, 1967

 

 

 

17세의 생애, viewing과 연도

김민호 프란치스코, 17세의 소년.. 어떻게 그런 100% 희망의 나이에 우리들의 곁을 떠날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우리의 머리 속을 완전히 지배하던 어제였다. 3일 전, 요사이 뜸하던 ‘위중한 환자기도’의 소식에 우리들은 ‘서서히’ 환자기도를 시작했지만 너무나 빠른 ‘병의 진행’으로 그제에는 신부님의 병자성사가 필요할 정도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고 어제 아침에 그 17세의 소년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병명은 역시 ‘암’의 일종인 ‘투명세포육종’이라는 희귀한 것이었다.

레지오 입단 3년이 다가오는 나는 그 동안 많은 죽음을 보았고 연도, 장례미사를 하였지만, 이렇게 ‘누구나’ 100% ‘언젠가’ 거쳐야 하는 ‘과정’은 정말 100% 모두 다른 사연과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평균’ 수명을 다 채우시고 떠나는 분들은 비록 다행인 case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그 수명 동안 겪은 수많은 사람들, 경험들과 이별을 하는 고통이 따르고, 반대로 이번의 17세 소년의 case는 평균적인 인연과 경험을 못 보고 떠나 보내야 하는 슬픔의 고통이 따른다. 역시 이것도 공평하다고 할까.

이럴 때는 어떤 말로 유족들을 위로해야 할까.. 그저 간단하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는 너무나 형식적인 것일까?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겁니다.’ 는 사실 맞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조금 오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래도 나는 그 애가 내 옆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는 반응이 나온다면 분명히 그 말은 그 부모를 더 슬프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hug이나 눈의 맞춤으로 슬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좋지 않을까. 또한 이럴 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 장례의식 중, ‘연도’임을 어제 또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들 전에 이미 떠난 그 수많은 성인의 이름을 열창하며 17세 소년을 받아 주시라는 기도는 듣거나 참가해본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그 의미나 느낌을 모를 것이다.

 

장례미사를 다녀와서..

모처럼 하늘의 습기가 가신 후, 청명한 날씨가 된 오늘 정오에 고인 김군의 부모가 속한 본당 ‘아틀란타 한국 순교자 성당’ 에서 장례미사가 입추의 여지없이 대성당을 꽉 채운 가운데 치러졌다. 부모님이 성당 공동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어떤 조문객이 올지 나에게는 미지수였지만, 어제 viewing에 온 상당한 숫자의 ‘미국 친구’들을 보고 아마도 반 수 이상이 ‘영어권’ 일 것이라 짐작을 하긴 했다. 나의 짐작은 맞았지만 결과적으로 ‘영어권’ 조객이 압도적으로 많이 참석을 했다.

성당 parking lot에 아틀란타의 ABC-TV affiliate(계열방송사)인 Channel-2의 crew van이 있었고 camera까지 준비하는 것을 보고, 대강 이 김민호군의 됨됨이를 짐작하게 되었다. 이태리 계통인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은 아직도 영어권 문화가 서먹하신지 전례해설자에게 모든 ‘영어 소통’을 의뢰하신 모양으로 대부분의 ‘영어권 친구 친지’들은 소수의 ‘한국어’ 권 신자들을 따라서 그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는 로마 가톨릭 식의 미사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조금 다른 식의 미사도 사실 큰 무리가 없음을 이번에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가톨릭 전례는 한마디로 universal한 것으로 같이 동참하여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미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고인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과연 김민호 프란치스코 군이 어떤 인물인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성전을 꽉 메운 그들을 보면 그것을 짐작하기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의 성품, 추억, 행적을 간접적으로 그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eulogy)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알게 해 주었다. 김민호, Nicklaus, Francis군, 그는 한마디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17세였다. 한국적인 예절이 몸에 배인 것도 그렇고, 모든 일을 착실히 최선을 다하던 그였고, 그렇다고 해서 ‘지루한 공부벌레’도 아닌 유머감각이 있던 정말 크게 인생을 살 수 있을, 무언가 큰 업적이라도 낼 듯한 잠재력을 지녔던 고교생 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그 조사를 통해서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안타까운 심정은, 주위의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그가 지금 ‘육체적, 물리적’으로 우리들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운명 직전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I love you all..이란 말을 남겼다는 것으로 그는 사랑이 충만한 한 고귀한 젊은 영혼이었음도 알게 해 주었다.

김군을 일찍 하늘나라로 데려가게 한 직접적인 원인, ‘투명세포육종(Clear Cell Sarcoma)’ 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암, 이 비교적 희귀한 병은 그렇게 치유 율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왜 이병에 걸렸으며 왜 그렇게 1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 영역에 속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만 절감하게 된다.

생각한다. 아니 이제는 믿는다. 김민호 군의 ‘불멸의 영혼’은 지금 괴로웠던 육신을 떠나 (미사 후 곧바로 화장이 되었다) ‘훨훨’ 하느님의 영역에 돌아갔거나 돌아가고 있고 아마도 장례미사를 하는 우리들을 미소 머금은 모습과 마음으로 보고 있으며, 괴로워 할 가족들을 보며 위로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제는 믿는다.

Holy Family 40th Anniversary

 

 

Dear Father in Heaven,

As we celebrate the fortie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our parish, we thank you for the gifts that you have given us. Most importantly, thank you for the gift of love that brings so many people from such different backgrounds together as one family.

Please help us to learn by your Son’s example to continue to love and care for one another so that we may grow and welcome others into our Holy Family.

We ask this in Your sweet name,

Amen

 

Holy Family statue
Holy Family statue

오늘 2013년 7월 10일은 우리가족의 제1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가 본당 창립 4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여 저녁에는 ‘성대한’ 기념 미사와 행사가 열린다. 우리 가족이 이 성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제 거의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 집에서 불과 5마일인 관계로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parish가 된다.

원래 거의 30마일 떨어진 도라빌(Doraville) 한국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이 우리의 본당이었지만 1990년대 초에 그곳에서 벌어지고 목격이 된 ‘기가 막히는’ 사건들에 식상을 하고 완전히 주저앉아 (냉담) 버렸다. 그 당시 대신 가까운 미국 본당에라도 나가야 했었지만 최소한 나에겐 그렇게 해야 할 절심함과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애써’ 얻은 신앙을 거의 무시하며 살 태세였고, 속수무책, 수수방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일관하며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지금 생각을 하면, 나와 연숙은 그런 것에서 의견을 달리했고 최소한 영세를 받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돕지도 않았지만, 반대도 안 했다. 완전히 나는 ‘교회 business’에서 손을 땐 듯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연숙이 미국 본당 Holy Family 성당을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위기감을 느낀 연숙이 집 부근을 뒤지며 찾아 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같이 googling의 혜택도 그 때는 기대 못하던 때였으니까…

행동이 빠른 연숙은 곧바로 아이들의 신앙 절차를 ‘최소한’ 빠지지 않게 주말 미사엘 (나를 제외하고) 나가기 시작하고 작은 애 나라니의 첫영성체, 두 아이의 견진성사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 때 나는 ‘돈 버는 가장’의 핑계로 간신히 C&E (Christmas & Easter) 신자로 위태로운 신앙생활로 일관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Holy Family 성당은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나의 ‘완전한 본당’이 되었다. 10년 이상의 냉담을 깨고 그곳에서 Pastor, Father Edward Thein께 고백성사를 보고 최소한 Sunday Catholic 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사실 가족들과 미사를 가더라도 나만 영성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그 때가 참 괴로웠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곳은 명실공히 우리 가족의 ‘안정하고 안전한’ 신앙의 피난처가 되어갔다. 덕분에 영어미사와 미국인 미사 문화도 많이 익숙하게 되고 미국 천주교와 그 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서 나는 더욱 자신을 가지고 ‘진짜 본당’인 한국 순교자 성당으로 조금씩 더 관심을 두고 그곳으로 향한 먼 여정의 길을 2011년 가을 그곳 소속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함으로써 디디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미국본당에서 여러 해 받은 경험들이 씨앗이 되었다.

미국 천주교가 지금 경험하고 겪고 있는 시련들, 이곳에서 고스란히 보고 느낀다. 유럽계 가톨릭 세력의 수축과 히스패닉 계열의 급 성장, 아시아 계의 ‘가톨릭 역수출’ 등등으로 사실 미국 천주교의 입장은 무슨 큰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빨리 오는 듯 하다. 특히 연방정부의 급속한 교회간섭 정책, 대법원의 동성결혼 ‘묵인’ 등은 1970년대 초의 낙태 합법판결의 파장을 훨씬 웃도는 그런 위기감을 주고 있어서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앞으로의 사목정책의 중요성은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나와 연숙은 작년 사순절을 계기로 이곳 미국본당의 ‘매일 미사’를 참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일년이 훨씬 넘게 실행하고 있다. 암만 생각해도 이 ‘쾌거’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 졌는가.. 암만 생각해도 나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저, 안 보이는 ‘힘과 손’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설명만 되 뇌일 수 있을 뿐이다.

Holy Family 성당과 사제관
Holy Family 성당(left)과 사제관

이곳 미국 본당도 미국 천주교를 반영하듯 Irish, Polish로 대표되는 ‘급속히 쇠퇴하는’ 유럽계 가톨릭은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새로운 ‘피’는 역시 ‘다른 곳: 히스패닉, 브라질’로 대표되는 중남미계열과 열기가 느껴지는 아프리카 대륙, 뜻밖의 복병 아시아의 월남(베트남), 필리핀, 한국의 신자들이 그 고령화를 상쇄하듯 메우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white-power가 이곳에서도 역시 퇴조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미사를 가는 덕분에 이곳의 regulars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정신자들, 열심한 신자들인 것이다. 역시 여자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이것은 절대로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신자의 숫자 (남자에 비해서)에 나는 처음엔 ‘그게 정상이다’라고 일축했지만 지금은 사실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보기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자랑스럽던 남성 동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생명의 불멸성을 이미 알고 태어났단 말인가?

 우리가족은 비록 이렇게 두 본당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형태의 신앙생활 그 나름대로 장점과 특징도 없지 않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많은 가톨릭 한인신자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많을 듯 하다. 20여 년 전에 유일한 한인공동체였던 순교자 성당이 ‘90% 이상 망가졌을 때’, 우리는 choice가 별로 없었다. 계속 나갈 것인가.. 아니면 냉담을 할 것인가..

나와 같이 간이 큰지 못한 인간들은 가장 쉬운 방법, 냉담을 택했을 것이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택했다. ‘분열’의 참담한 파괴 성을 그때 절감을 했지만, 나의 평화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그때 backup shelter(다른 본당)가 있었으면 100% 냉담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다 역사가 되었다.

 Holy Family 성당은 현재 우리가 사는 East Cobb county에 많은 ‘비교적 안정된’ 한인들의 비공식 피난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30분 drive거리에 있는 한인 순교자 성당이 조금 멀다 싶으면 10분 거리의 이곳이 항상 우리를 맞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사람들도 익숙해지고, 정도 많이 들었다. 고정적(regular)인 한인 교우들, 물론 여기도 대부분 젊은 자매님들이지만 그들과도 많이 얼굴도 익숙해져서 진정한 ‘영혼의 고향’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혹시라도 안 보이는 얼굴이 있으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와 연숙에게 이 Holy Family CC는 신앙의 징검다리 역할을 많이 해주었고, 계속 해 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우리가 도라빌 한인 순교자 성당에 더 많이 개입이 되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것은 정말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기에 더욱 ‘맡기고’ 살기로 했다.

Wet and Monsoonal Atlanta’s 4th

Monsoonal Atlanta우아~~ 정말 굉장하다. 스고이! 아틀란타 지역에 장마? 1989년 이곳으로 온지 아마도 이런 ‘해괴한’ 날씨는 처음인가. 간단히 말하면 그 옛날 20세기, 50~60 년대에 고국 대한민국에서 여름이면 ‘당연히’ 겪었던 바로 그런 ‘장마’ 인 것이다. 이것의 느낌을 나는 오랫동안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것을 나는 요새 이곳 아틀란타 지역에서 고스란히 맛보고 있는 중이다.

기상 위성의 사진을 보니 바로 이것이 ‘몬순, 장마’ type의 모습인데, 극동지역에서는 태평양의 뜨거운 구름이 올라가는 것이고, 이곳은 멕시코 만의 뜨거운 바다 바람이 올라오는 것, 그것이 다른 것이고 나머지는 꼭 같다. 하지만, 한반도 지역의 장마는 사실 매년 겪는 ‘정상적’인 것이라면 이곳의 것은 아주 드문 예외에 속한다.

7월 2일부터 시작된 이 아틀란타 장마는 이곳의 최대 ‘역사적’ 휴일인 Independence Day 를 완전히 축축히 젖게 만들었는데, 그래도 매년 열리는 이제는 연륜이 깊어가는 Peachtree 10K(6+ miles) Road Race는 다행히 폭우가 멈추고 가랑비가 내리는 덕에 진행이 되긴 했다. 새로니와 나라니도 참가를 했다고 했는데, 6만 명이 ‘실제로 뛰는’ 대규모였지만 날씨 탓에 구경꾼의 숫자는 별로 없었다고. 그것 뿐만이 아니고 제일 큰 attraction인 firework도 대부분 cancel이 되었고, 각 동네에서 자체적으로 하던 ‘꼬마들의 행진’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wet July 4th Peachtree 10K

wet July 4th Peachtree 10K, 2013

왜 이것이 ‘장마’같이 느껴지냐 하면, 이곳에서 이렇게 1주일이 넘게 ‘계속’ 흐리고 비가 내리는 것은 아주 희귀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열흘 넘게 해 구경을 못할 것 같은 예보여서 벌써부터 집안의 곳곳에서 ‘냄새’가 풍기는 기분이 든다. 이것도 바로 그 옛날 서울에서 겪던 장마 때의 그 냄새일 것이다. 예상치 않은 이변적인 날씨에 손해를 보는 곳도 많을 듯 한데, 특히 roofer들이 제일 큰 타격이 아닐까? 이런 때 지붕을 새로 갈거나 고치는 것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이 장마가 시작되던 날도 우리 동네에서 지붕을 고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바로 후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그들은 아마도 그날 완전히 ‘공을 쳤을’ 것이다.

올해는 이번의 이 장마 전에도 사실 비가 많이 내렸고, 기온도 90도 (섭씨 31도)를 넘은 날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예전에는 ‘정상’에 속했는데, 그 동안 (지난 20여 년) ‘지구 온난화’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갔는데, 올해의 기후는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무서운 hurricane도 없고 twister, tornado도 생각보다 잠잠하고.. Mother Nature가 갑자기 왜 이렇게 온순해 졌을까? 의문은 많지만 나는 ‘무조건’ 감사, 감사를 하며 이런 날씨를 즐긴다. 왜 안 그렀겠는가?

 

4월과 5월, 돌아온 봄

4월과 5월.. 쓰고 보니 귀에 익은 말이.. 그렇구나, 정말 오래 전, 1970년대 초의 ‘통기타 그룹’ duet의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그들도 어김없이 60대의 ‘젊은 늙은이’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여기의 4월과 5월은 글자 그대로의 올해 봄, 4월과 5월이다. 올 봄은 내가 기억하는 한도에서 가장 얌전하고 온순하고 촉촉한 계절이었다. 그야말로 ‘진짜 봄’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평균기온에 평균 강수량을 자랑하는 정상적으로 돌아온 봄.. 하지만 사실 이렇게 ‘정상적’인 것이 비정상이 된 느낌이 든다.

특히 즐거웠던 것은 비가 억수같이 많이 왔다는 사실.. 이곳 아틀란타 지역은 봄이면 꽃가루 ‘공해’가 기록적이어서 꽃가루 앨러지가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공포 속에 살곤 했는데 올해는 때맞추어 내리는 비로 전혀 그런 문제가 없었다. 두 달 사이에 “April showers bring May flowers“의 싱그러움과 어머니의 포근함이 넘치는 성모의 달 5월이 완전히 지나고, 2013년 여름의 시작인 하지로 향하는 이즈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요사이 나의 일상생활은 사실 거의 시계와 같이 규칙적인 것인데, 아마도 이런 큰 변화 없는 삶은 내 나이에는 흔한 것일지도 모른다. 육체적인 건강은 이런 생활 방식에 도움을 받기도 하겠지만, 매일 반복되는 regular routine, 시계처럼 진행되는 것은 어떨 때는 정신적으로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시간감각을 잊게도 한다. 그래서, 세상만사는 사실 이렇게 공평하다고 할까..

육체적인 건강에 맞먹는 정신적인 지루함.. 이런 문제를 푸는데 제일 효과적인 것 중에는 ‘집을 떠나는 여행’ 같은 것이 있지만, 사실 우리 부부는 남들처럼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 돈과 시간이면 더 나은 다른 방법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은 적지 않은 시간이 새로운 Insurance 찾는데 에 ‘허비’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4월 중에 renew, expire가 되는 Home, Auto insurance의 premium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오른 것을 알고, 매년 하던 대로 자동적인 renewing을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claim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 ‘병신’ 취급을 받았거나 ‘죄’가 되었는지 완전히 ‘봉’으로 여기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무조건’ 다 갈아 치우기로 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니, business 중에서 insurance business model은 다른 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정말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현재 이 분야는 seller’s market인 것이다. 소비자가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며 ‘물건을 사는’ 곳이다. 우리의 auto insurance는 원래 GEICO에서 Liberty Mutual로 좋은 조건으로 바꾼 지 거의 10년 만에 엄청 오른 것 알았다. 우리는 차 사고, speeding, claim이 완전히 zero인데 어떻게 그렇게 올랐을까? 이것은 완전한 mystery였다. 다시 GEICO로 바꾸었더니 premium이 완전히 1/3로 줄었다. 이런 해괴한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이래서 나는 insurance business를 거의 ‘사기 집단’으로 보게 되었다. 처음에 싸게 해주고 시간이 가면 ‘무조건’ 값을 올리는 방식이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손해를 보는 case다. 앞으로는 1년에 한번씩 다른 곳을 알아보며 주의를 하기로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Home Insurance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다른 곳을 찾아보니 현재의 것보다 훨씬 싼 것이 아닌가. 이래서 주변에서 말하는 대로 insurance는 일년 마다 다른 곳들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도라빌, 조지아: Doraville, GA

Entering Doraville
Entering Doraville

도라빌, 조지아… Doraville, GA USA.. 도라빌은 조지아 주 아틀란타 수도권에서 아틀란타 시에 바로 인접한, 행정구역상 DeKalb county내의 아주 작은city,시에 해당하는 곳이다. 아틀란타 시의 바로 동북 쪽에 접한 이곳은 아틀란타 수도권 지역에 사는 한인들에게는 거의 ‘고향’같은 곳이다.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 전까지 이곳은 명실공히 Korea Town구실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때의 역사와 기억을 간직하며 아직도 Korea Town의 ‘가느다란’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1996년 올림픽 훨씬 이전에 아틀란타로 왔기에 그 당시의 역사와 모습들, 느낌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현재는 거의 주일마다1 ‘느끼고, 다니고, 듣고, 먹고’ 하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도라빌은 1871년에 ‘생긴’ 역사가 오래된 곳이지만 1940년대까지는 아틀란타지역의 농산물 공급처 구실을 하던 농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나면서 GM(General Motors)이 이곳에 assembly plant (자동차 조립공장)2을 계획하고, 그에 따른 철도가 가설되면서 급성장을 시작한다. 1950년도에 인구가 472, 1964년의 인구가 6,000여명으로 불어나고, 1980년대가 되면서 아틀란타 지역으로 유입하는 이민자들이 이곳을 ‘관통’하는 Buford Highway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미국 전역을 통해서 아시아 이민에 가장 밀집한 지역으로 꼽히게 되었고, 중남미 계통의 이민 인구들도 급성장 하게 되었다.

그것에 걸맞게 1992년에는 수도권을 연결하는 MARTA system (고가전철과 시내버스) service가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자동차업계의 불경기로 GM의 Doraville Assembly Plant가 2009년에 문을 닫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 처음에는 Atlanta Falcon football stadium이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지금은 town center 가 계획되기도 하지만 당분간은 공터로 남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래도 그 주변에 대형 소매업체들이 들어오고 한인계열의 H-Mart 도 개업을 해서 활기를 띠고 있다. 도라빌과 ‘인연이 있는’ 사람 중에는 우주비행사(astronaut) John Casper가 이곳에 살고 있고, 1970년대부터 활약하던 Southern Folk/Rock group인 The Atlanta Rhythm Section(ARS)가 이곳을 거점으로 활약을 하기도 했다.

올림픽 이후, 타 주의 부자들이3 쌓여가는 cash를 앞으로의 호황 경기를 기대하며 이곳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성급한 사람들은 아예 이사 짐을 들고 이사를 오기 시작했다. 그 때가 바로 subprime bubble이 무서운 속도로 부풀어 오르던 때였다.

거의 모든 사람들 (우리는 제외)이 어디선가 무섭게 흘러나오는 ‘돈, 돈, 돈’에 치고, 취하며, 쓰고, 투자하던 그런 몇 년이었다. 돈으로 돈을 ‘만들겠다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형태의 ‘돈벌이’를 못하면 완전히 바보취급을 받던 그런 시절, 의젓하고 학자적인 engineer가 하루아침에 private loan(사채) 업자로 변신을 하고, 20+ 애 띤 ‘여대생’이 건물 한 층을 완전히 세를 내어 ‘융자 회사’를 차리던 그 시절이었다.

그런 ‘미친’ 탁류 속에서 예전의 도라빌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투자가치가 별로 없는 곳으로 ‘융자 업자’들이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부동산의 핵은 서서히 도라빌의 ‘훨씬’ 북쪽으로4 올라가며 새로운 한인타운도 따라 올라가기 시작하고, 즐비하던 한인 업체들도 하루가 급하게 올라가 버렸다. 새로 개발된 곳에는 기업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업체들, 주로 supermarket5 들이 그곳의 명소로 자리를 잡게 되기도 했다.

 우리가 1989년 여름에 위스컨신 주 매디슨에서 이사를 왔을 당시에 이미 이곳 도라빌 은 Buford Highway6 주변으로 한인 경제활동의 중심, 주거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이후 서서히 한인타운은 축소가 되어갔고 그 자리에 한인 이민 역사보다 짧은 역사의 월남과 나머지 중국, 히스패닉(주로 멕시코) 이민들이 그 자리를 서서히 채워가게 되었다. 그들은 한인 같은 조직적인 자본력이 거의 없이 가족단위로 사업을 하기에 아무래도 값싼 부동산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세 좋게 도라빌을 떠나서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갔던 사업체들은 위에 언급한 subprime bubble으로 인한 지독한 불경기로 완전히 성장을 멈추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이곳 도라빌은 거꾸로 예전보다 안정되고 심지어는 조금씩 ‘보기 좋은’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는 정말 예상치 못한 현상을 목격하게도 되었다.

우리는 이런 도라빌의 Korea Town ‘경기 변동’에서 조금 중립적인 입장에 있다. 도라빌에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이곳(도라빌)도 아니고 저곳(북쪽 지역)도 아닌 마리에타 지역(서쪽)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도라빌이 다른 곳보다 훨씬 가까운 만큼 이곳이 더 이상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 입장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의 많은 시간이 현재 도라빌에 건재한 ‘아틀란타 한인 순교자 성당‘ 주변에서 보내진다는 사실이다. 비록 제2의 한인 성당이 분가를 해서 둘루스에 생겼지만, 그곳은 역사가 워낙 짧아서 앞으로 어떻게 지역적 역할을 할지는 미지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인들의 자랑인 H-Mart가 도라빌 다운타운 근처에 새로 생겨서 사실 우리는 그 먼 둘루스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기에 현재의 상황은 별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한인 사회, 경제가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고 그것에 따라 이런 지역적인 변화도 예측을 할 수 있을 듯하다.

Atlanta Rhythm Section, 1977 CREDIT: WikiMedia
Atlanta Rhythm Section, 1977 CREDIT: WikiMedia

위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도라빌은 원래 ‘농촌’에 속한 한가한 곳이었는데 철도가 들어오면서 교통, 운송의 거점이 되었고, 아틀란타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던 정말 ‘한가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시골’이었던 셈이고 이곳의 토박이들도 ‘진짜 백인들’ 조지아 무지랭이, redneck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민자들이 비싼 아틀란타에서 살기 힘들어지면서 이곳으로 나오게 되면서 현재와 같이 ‘유엔 총회’를 방불하게 하는 인종의 분포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골’티가 나는 곳에도 유명한 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는 1960~70년대에 미국 전국적으로 유명하고 알려졌었던 Southern folk, rock group ‘The Atlanta Rhythm Section‘ 이 바로 이곳에서 출발을 하고7 이곳에서 활동을 했었다. 나 또한 그들의 hit song, ‘Do it or Die‘를 1970년대 말에 많이 좋아 했었다. 지금 그들은 이곳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이름에는 항상 도라빌이 따라 다니고 있는데, 그들의 노래 중에는 ‘Doraville‘이란 1974년에 발표된 것도 있어서 그들은 도라빌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DoravilleAtlanta Rhythm Section, 1974

 

Do It or DieAtlanta Rhythm Section, 1979

 

  1. 이곳에 있는 첫 한인천주교회, 순교자 성당 때문이다.
  2. 이곳에서는 Chevrolet Uplander, Pontiac Montana SV6, Buick Terraza, Saturn Relay같은 minivan이 조립되었다.
  3. 주로 뉴욕이나 LA 출신의 자본가들.. 통설에는 전두환의 비자금도 큰 몫을 차지한다고 했다.
  4. 주로 Alpharetta, Duluth, Suwannee지역, 특히 Suwannee지역은 돈 많은 타 주의 retiree(은퇴자)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이 되었다.
  5. H-Mart, MegaMart, Assi 같은 덩치가 큰 것 업체들
  6. 이름만 ‘하이웨이’고 사실은 시속 35마일의 거북이 도로인데, 시 정부에서 돈이 궁하면 가차없이 과속 티켓을 뿌려댄다.
  7. 이곳에 그들의 레코드 취입 스튜디오가 있었다.

20 years ago, Storm of the Century

Storm of the Century최근에 ‘요상한 기후’에   대해서 연숙과 얘기를 하다가 문득 storm of the century란 것을 기억했다. 일명 super storm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였나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치매 예방’ 기억력 test였다. 나에게 제일 알쏭달쏭한 것이 지나간 10년에서 20년 전 일들의 기억이다. 각가지 연상technique를 동원해서 아마도 1992년에서 1994년 사이일 것이라고 일단 결말을 지었다. 그 super storm이 온 것이 3월 이때 쯤인 것도 기억했다.

문제는 100% 자세한 것이 어떤 것일까.. 1992년은 우리가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온 해였고, 장모님과 나의 절친한 친구, 지금은 타계해서 없는 김호룡 식구가 거의 같은 때에 우리 집에 온 해이기도 했다. 1992년 3월 1일에 이사를 왔는데, 곧 이어서 이 super storm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1994년을 생각해보니 여름에 누님의 아들, 준형이가 다녀갔던 것 이외에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결국은 1993년임을 알았다.

나의 제일 큰 문제는 이 1990년대의 기억이 제일 희미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억해내기 싫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아닐까도 생각을 했다. 그만큼 큰 기쁨이나 즐거움, 그렇다고 특별한 괴로움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한마디로 ‘세파’속에 휩쓸려 간 듯한 그런 10년간인 듯한 느낌인 것이다.

고국이나 이곳이나 그 나이쯤이면 ‘샐라리맨’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런 생활을 많이 보내니까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기후에 관한 사건들은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때에는 VCR, video (cassette) recorder가 한창 유행할 때여서 그런 것들의 기록도 남아있어서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알아보니 그것은 1993년 3월 13일, 토요일의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일기예보는 그렇게 ‘자신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 미리 커다란 ‘경고, 경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생각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얼어붙는 눈보라’ 에 그냥 당한 것이다. 다행히 토요일 아침이라 교통에 관한 문제는 별로 없었다. 그냥 퍼 붙는 눈보라를 집에 틀어 박혀서 ‘즐긴’ 것이다. 그 전날만 해도 봄 같은 포근한 날이 어떻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을까? 예보, 경보도 그렇게 없이..

하루 종일 강풍과 함께 쏟아진 얼어붙는 눈에 나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전기도 나가기 시작하고.. 길은 완전히 얼어붙고.. 이곳 지역은 완전한 시베리아를 연상하는 광경으로 변했다. 다행히 우리 집의 전기는 나가지 않아서 하루 종일 TV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덩치가 큰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우리 집 drive-way를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나중에 차가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후가 되면서 무슨 요란한 소리가 나서 밖을 보니 남자 몇 명이 power chainsaw로 우리 집의 쓰러진 소나무를 잘라서 치워주고 있었다. 동네에 사는 ‘마음 좋은 아저씨’들이었다. 동네를 돌면서 우선 급한 것들을 치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TV 뉴스에서는 이번의 snow storm은 ‘아마도’ super storm, storm of the century정도로 monster 급이라고 했다. 멕시코 만에서 시작된 사상 최저기록의 저기압과 북쪽에서 하강한 cold front가 ‘완전히’ 결합이 된 그야말로 perfect storm이었다. 결국은 이 system은 우리가 사는 Georgia를 거쳐서 northeast의 덩치 큰 도시들로 갔고 그곳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것으로 느껴졌지만, 200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때의 것은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점점 더 큰 monster storm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찍어둔 video tape을 본다. 그러니까 정확히 20년 전 우리 집 주변이 남아있고, 그 눈 속에서 ‘신나게’ 놀던 우리 집 두 아이들.. Wisconsin에서 이사온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라 그 추운 곳에서 타던 ‘썰매’와 겨울 옷들을 다시 꺼내어서 아주 요긴하게 쓰기도 했다.

큰 애 새로니는 Ohio와 Wisconsin에 살 때 경험했던 눈과 얼음으로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겠지만 작은 애 나라니는 거의 기억이 나지를 않는지 신기하게 눈과 얼음을 바라보며 썰매를 탔다.

그 당시 나는 비교적 젊었던 45세.. 와.. 정말 젊었다.. 피곤을 모르며 직장생활(‘embedded software’ engineer at Automated Logic Co)을 했고, 연숙은 home-based business, housewife, mom, PTA등으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신앙적으로는, 유일했던 한국본당에 ‘대 파란’이 나던 때여서 아마도 그 근처에 가지도 않던 ‘신앙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는 Internet이란 것이 아주 미미하게 보급이 되고는 있었지만 지금 보는 것 같은 graphical web browser가 없어서 일반인에게는 그런 것은 ‘학교에서만 쓰는’ 그림의 떡이었다. Email은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만 쓸 정도고, PC 는 Microsoft Windows 95 전의, 조금은 원시적이었던 Windows 3.x이 전부였고, 지금 쓰는 cellular mobile phone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아틀란타 올림픽이 열리기 3년 전이었던 그 당시 이곳에 한인의 인구는 현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편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참 변한 것이 많았지만 제일 ‘충격적인’ 것이 내가 40대에서 60대가 되었다는 ‘자명한’ 사실.. 어떻게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가 충격으로 느껴지는가.. 그것은 생생하게 뇌리에 남은 20년 전 1993년 3월 13일을 회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