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여, 안녕!

¶  오월이여 안녕!   한 달이 온통 ‘가정, 가족, 졸업식, 어린이, 어머니, 성모님‘ 같은 정말 듣기만 해도 포근한 것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의 어머님께서 9년 전에 선종하셨던 달이기도 해서 가족과 삶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던 그런 한 달이기도 했다.

비록 거의 기정사실화 된 기후변동(a.k.a global warming)으로 예전의 6월 같은 날씨들이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특히 요새는 ‘날씨’에 둔감해 지려고 거의 ‘일부러’ 날씨에 관한 작은 뉴스는 피하고 있고, 그것이 ‘확실히’ 심리적으로 나를 편안하게 함을 느낀다. 더우면 어떻게 추우면 어떠랴.. 참거나, 잊고 살면 되는 것을.. 또한 작년에 비하면 날씨에 관한 big news는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하긴 했다. 작년의 그 ‘monster‘ tornado등을 아직도 기억하기에 더욱 그렇다.

 

¶   Robin Gibb  5월 20일에, 오래 전 60/70시절 우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Bee Gees [BGs: Brothers of Gibbs] 형제의 중간인, Robin Gibb이 암 투병 중 합병증으로 결국은 62세란 요새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을 한 것이다. 그 그룹의 세 형제 말고도 아주 오래 전에 네 번째, ‘막내 동생’ Andy는 이미 (여자문제로)사망을 했고, 2000년대 초에는 세 번째 Maurice도 병으로 사망.. 이제 맏형 Barry만 남은 것이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심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과 같은 ‘예술인’들은 영원히 뒤에 남기고 떠나는 것들이 있어서 부럽기도 하다. 나에게 그들이 남긴 것 중에는 60년대의 것이 ‘진짜’의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70년대의 ‘disco 외도’는 잊고 싶은 것들 뿐이다. 최근 몇 주간 지저분한 소식들 투성이였던 모든 news (Internet, TV etc)를 피하며 지내는 바람이 그가 운명한 소식을 이제야 알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또한 우리 세대의 인물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가고 있음을 어찌 모르랴.

 

 
Run To MeBee Gees – 1972

 

1984 model Kenmore washer¶  공돌이의 오기惡氣  얼마 전에 우리 집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세탁기(electric washer)가 말썽을 부렸다. 빨래를 할 때마다 ‘지독히도’ 요동을 치면서 그동안 아주 조금씩 새던 물이 이제는 ‘콸콸’ 샌 것이다. 공구들을 손에서 놓고 산 것이 꽤 오래 되어서 (거의 1년) 사실 이런 ‘사고’는 너무나 귀찮게 느껴졌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세 가지 뿐이다. (1) 나보다 ‘더 바보 같은’ handyman을 불러서 고치게 하던가, (2)고칠 수 없으면 새것을 사던가, 아니면 (3) 내가 팔을 걷어 붙이던가. 1번 선택은 나에게는 거의 절대로 no no인 것이다. 대부분이 ‘엉터리, 사기꾼’ 같은 놈들 뿐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잘 모르는 바보들 뿐이기 때문이다. 2번의 선택도 가급적 끝까지 피하고 싶은 것이다. 돈을 쓰는 것 이외에, 멀쩡할 수도 있는 세탁기를 분명히 내다 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에게 choice는 역시 내가 팔을 걷고 muscle과 brain을 써야 하는 수 밖에 없다.

Washer power-train still in good orders우리의 washer는 1984년에 Columbus, Ohio에서 학생시절에 Sears에서 산 Kenmore classic model인데, 한마디로 완전한 ‘탱크’와 같이 우직하게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고장이 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모양이고, 사실 거의 30년 가깝게 딱 한번 timer/controller 만 교체를 한 것으로 나머지 기계적으로는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이제 정까지 들게 된 우리 집의 ‘값싼 가보’가 된 존재인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비장한 각오로 이것을 살려 보기로 하고 ‘공돌이의 오기’로 분해를 해서 살펴 보았다. 결과적으로 나의 추측이 맞았다. 크게 ‘망가진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나사 같은 것이 모조리 풀어져서 물이 샌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Washing cycle중에서 가끔 balance가 맞지 않으면 격하게 요동을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아주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그 fastener들이 모조리 풀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30년에 가까운 이 세탁기는 안락사 직전에 다시 한번 생명을 연장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딱 한가지다. 이것이 심하게 vibration을 못하게 ‘꼭 잡아주는’ 장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되면 앞으로 최소한 몇 년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참, Sears Kenmore people들, 어쩌면 그 당시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이것이야말로 Made in U.S.A의 표본이다.

 

¶   Vice Presidency  미국의 부통령 직, 어떤 자리일까? 이것의 정의와 의미를 따지자면 책 몇 권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다. 그만큼 독특한 위치이기 때문일까? 역사적으로도 그것이 증명이 된다.

Robert Caro
Robert Caro

얼마 전에 Time 잡지에 Robert Caro라는 LBJ(Lyndon B Johnson) biographer(전기작가)의 말이 등장했다. 그는 일생을 1960년대 미국 정계를 주름잡았던 부통령, 대통령 Lyndon B. Johnson의 연구로 보낸 인물이다.  ‘사고’1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되고, 다시 한번 선거로 한번 대통령을 하고 스스로 물러나 난 전설적인 Johnson 대통령, 비록 월남전에서 고전했지만, 국내 정치는 빛나는 업적이 수도 없이 많은 인물이다.

1965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그를 기억한다. 수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묵묵하게 하나하나 성과에 성과를 쌓고 조용히 물러난 것, 참 멋지다. 그 인간상을 연구했던 Robert Caro의 한마디가 참 인상적이다. 지난번 선거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John McCain이 그의 running mate로 완전한 ‘들러리 간판’격이었던 Sarah Palin이란 ‘바보 같은 여자’를 선택한 것에 대한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 역사상 가장 무책임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나도 절대로 동감이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것은 McCain자신은 ‘아직도’ 그 선택이 자기 일생에서 가장 ‘멋지고, 신중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의 radar에서 McCain이란 인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1. 1962년 달라스에서의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Not so smart guy, Obama

yet another stupid presy
바보들의 행진, 미 대통령

Stupid, stupid Bush 되 뇌이며 고개를 절래 절대 흔들며, 거의 ‘무조건 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오바마의 이름을 외치던 때가 거의 4년이 흘러간다. 그 후, 그 동안 남았던 그 ‘신앙심’은 어떻게 되었나? 그는 그렇게 He is notBush.. 하나로 수 많은 피곤했던 사람의 기대를 받으며, 혜성같이 등장했던, ‘전통적인 흑인’ 같지 않은 흑인 대통령이었다.

완전 ‘잡종’이라고 할까, 그만이 새로 ‘개척한 새 종자’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 이것도 요새 유행하는 A New Normal 중의 하나일지 모르지만. 역시 미국만이 할 수 있던 쾌거인지, 아닌지 라고나 할까.. 하지만, 짧았던 4년이 지나가며 그가 남겼고, 남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2000년 선거(대선)때 거의 50/50로 정확히 갈라졌던, 거의 150년 전의 남북전쟁 직전을 연상시켰던 미국의 정치여론, 그렇게 잡음 없는 여유를 자랑하던 선거 체제가 정확히 갈라지면서 삐거덕 거리고, 후진국 선거 시스템을 연상시킬 정도로 추악하게 변했다.

그 이후 비록 2001년의 최악의 테러 사태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책임질 만한 지도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려는 소인배 적인 정치인들과 증오로 똘똘 뭉친 극우파들이 완전히 워싱턴을 점령하고, 그것이 10년 이상 지속되고 있을 즈음 오바마 란 미지의 흑인이 무거운 짐을 지고 희망의 워싱턴 입성을 했다.

그는 엄청난 경제적 파탄으로 치닫는 미국 건국이래 최악의 상황에서 무거운 임무를 시작해야 했다. 그는 과연 비장의 무기와 그것을 적절히 쓸 수 있는 경험과 ‘신앙심’이 있었을까? 그저 nice guy 의 인상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급급했고, 그것으로 무슨 후세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거의 ‘깡패’와 같이 그를 ‘무조건’ 방해하던 정치세력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약했다’.

비록 시험기간은 짧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지금 필요한 인물, 그러니까 50/50으로 갈라진 미국 유권자들을 다시 뭉치는 인물로서 역부족인 듯 싶다. 직장을 가졌던 중산층들이 길거리로 내 몰릴 정도의 경제 위기에서 그는 먼저 의료개혁을 밀어 붙였는데, 과연 그것이 그 정도로 급박했을까? 그것은 여론을 더욱 분열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이고, 심지어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까지 되었다.

역부족이었던 의회 다루기에서 그는 ‘쉽게’ 그저 ‘말 잘하는 재능을 가지고’, 직접 유권자들에게 호소했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1960년대 말의 LBJ (Lyndon B. Johnson)대통령의 탁월한 ‘의회 다루기’ 능력을 그리워 하게 되었다. 그가 통과시킨 ‘실질적, 상징적’ 법안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악의 상태는 그것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다. 소신껏 일을 못하게 되면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고 ‘호언’을 하던 그는 슬그머니 자기가 시작한 일들을 끝내겠다고 하며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이제는 완전한 ‘정치역학’을 배운 듯이 행동하며, 거의 모든 노력을 ‘표밭이 많은 곳’으로 집중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진짜 모습’이 조금씩 노출되고 있는데, 내가 제일 놀란 것이 정부통령 두분 모두 ‘변태’적인 결혼관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나는 오바마 는 ‘절대로’ Christian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고, 그의 morality는 정말 오리무중 속에 있다는 의심을 했다. 하지만 항상 엉뚱한 언행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Biden(부통령)은 어떠했던가? 그는 전통적인 가톨릭 정치인인데 어떻게 법적인 동성결합(결혼이란 말은 어불성설이다)을 ‘절대적’으로 찬성한다고 언명을 했을까? 그러면서 ‘관의 뚜껑을 완전히 닫는’ 행동이 오바마의 법적인 동성결합 지지 성명… 게임은 이제 완전히 끝난 것이다.

이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미국 분열’의 시작을 자초한 ‘엄청난 고백, 발언’ 이다. 더 이상 분열을 막아야 할 ‘대통령’이, 왜 지금 그런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해석은 구구하지만, 그는 분명히 세속적인 의미에서 ‘바보’는 아니다. Harvard 졸업생은 우선 ‘바보’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정치적인 쪽으로 보면, 그는 ‘무조건 평등 교육’으로 ‘세뇌’된 젊은 유권자를 노렸을 것이다.

그는 지난번 대선 당시 그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함을 어찌 그가 모르랴? 그것 이외에 나는 이것으로 그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 듯싶다. 그는 정말 ‘과거의 변태가 현재에는 정상’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이것이 사실 나를 제일 놀라게 하는 것이고, 그 동안 설마 하던 사람들 이제 조금씩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변태’들을 ‘동정’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을 ‘정상’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어떨까? 이것도 new normal이란 말인가?

오바마, 목불인견目不忍見, 꼴불견의 행진

올해 들어서 실망과 의혹의 연속극을 연출하던 미국 최초의 “쌔카만” 대통령 바락 오바마가 드디어 3년 동안 숨겨두었던 마각을 들어내는가? 희망의 상징으로 기대되던 그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최악의 연출이 바로 동성결혼 지지.. 란 목불인견, 꼴불견인, 실로 해괴한 것이다. 동성결혼.. 이것도 말이 되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더냐? 선거를 앞두고 발표를 한 것을 보니 분명히 정치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부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두뇌 속 깊이’ 진정으로 동성도 결혼을 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이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딱 한가지다. 정말 오랜 동안 ‘꼰대’들이 흔히 말 하던 ‘말세다..’ 라는 것 뿐이다. 세상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을까..결국, 바락 오바마는 극단적 인본주의에 그의 운명을 건 것이다.

 목불인견, 꼴불견이 더 많이 보이고, 느껴지는 것도 나이가 듦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이가 듦을 싫어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저 막연히, 나이를 먹음은 인생을 좀더 거시적, 폭넓게, 긍정적으로 보는 지혜를 줄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더 많은 것을 ‘저절로’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더 폭넓게 인생사를 보고, 특히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관용적으로 볼 것도 기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인간 역사는 말한다. 두고두고 ‘옳은 것’은 결국 옳았고, 두고두고 틀린 것은 결국은 틀린 것이다. 남편과 남편이 결혼을 하고 아내와 아내가 결혼을 하는 세상, 절대로 올바른 세상은 아닐 것이다.

거짓 예언자들 (false prophets)

rush limbugh
R. Limbugh, false prophet No. 1

I truly hate this SOB1: 비록 hate란 말과 SOB란 말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단어들은 끝까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듯하다. 이것들이야 말로 100%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Rush Limbaugh, 이름 또한 더럽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rush를 해서 이제는 더 rush를 할 곳이 없다고나 할까?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최근 십 수년에 걸쳐 지금의 미국 정계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며 compromise의 정신을 철저히 파괴하고 있다. 추잡한 정치인들은 이것을 철저히 이용하며 공생을 해왔다. Culture of Extreme을 기가 막히게도 자신들의 부와 연결시키며, ‘우매하고, 병신 같은 대중’ 들을 이리저리 이용해 먹더니, 결국은 big mouth에 의한 ‘아차!’ 의 실수2를 하고, 조금 살이 빠졌나 했더니 결국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른 인간들의 말에는 끄떡하지 않아도, 자기의 돈줄인 광고주가 하나 둘씩 빠져나가니 조금은 걱정이 되긴 할 듯하다. 이런 SOB를 나도 오랜 전에 한때는 열심히 그의 hate gospel을 들은 적이 있었다. 1994년, Gingrich revolution3때였나? 그 당시가 그의 radio talk show의 초기였는데, 그 때만 해도 지금 같은 미친놈 같이 과격한 정도는 아니었다. 보수적 정치철학을 기가 막히게 잘도 떠벌렸을 정도다.

Glenn Mad Beck
G. Beck, false prophet No.2

그것이 머리가 점점 벗겨지고, 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미친놈’으로 변해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과격 철학’에 빠지는 사람들이 그다지도 아직도 많았던가 하는 것이다. 김일성 개XX에 못지 않는 ‘과격한 폭력언어’를 구사하던 그에게 박수를 보내던 인간들은 도대체 어떠한 인간들이었을까? 

이 인간에 뒤지면 서러워할 다른 한 인간, Glen Beck이란 것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이들이 가공할 정도로 위험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이들은 바로 그들이 ‘보호하고 옹호’한다는 보수주의와 종교, 신앙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누누이 나오는 ‘거짓 예언자’들의 표상인 것이다.

 

  1. son of bitch, what else?
  2. 종교단체 임직원들의 건강보험에서 피임 보조를 찬성하는 증언을 하던 Georgetown University의 여학생을 slut(창녀?)이라고 떠벌임
  3. 1994년 의회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Newt Gingrich의 주도로 상하 양원을 장악한 것

삼일절과 왜(倭)

오늘은 3월 1일, 그러니까 삼일절이다. 왜 이렇게 생소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흡사 무슨 먼~나라의, 먼~옛적의 일로 완전히 남의 것처럼 느껴지고, 곧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잠긴다. 무언가 복잡한 심정이 됨을 또한 느낀다. 아직도 달력이 빨갛게 물들어 있음이, 분명히 고국의 ‘국경일’임이 틀림이 없다. 나의 코앞에 걸려있는 달력은 이곳 아틀란타 순교자 한국성당 것인데, 이곳 현지인 미국의 국경일에도 없는 빨간 날짜가 대한민국의 국경일들에는 요란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것이 이곳에 사는 대한민국출신 사람들의 국가의식이다. 이것에도 저곳에도 확실하게 소속감은 못 느끼는.. 그런 어정쩡한 자세.. 이런 자세에서 그들은 과연 삼일절은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올해는 삼일절 93주년이 된다. 1919년 기미년 삼월 일일, 이 1919년 기미년은 나에게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 나의 어머님이 바로 이해에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거의 1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 그러니까 살아계셨으면 올해 93세가 되실 것인가. 상고사만큼 오래 된 것도 아니지만, 나로써는 실감나게 상상을 할 수 없었던 오래 전의 역사다. 멀쩡한 독립국가를 꿀꺽해 버린 ‘왜(倭)놈’들과 얽힌 악연의 시절 때의 사건이었다. 93년이 지난 지금, 약한 사람들의 기억력은 희미해지고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소리를 실감하며 산다. 우리 민족에게 증오와 질시, 질투 대상의 화신이었던 일본은 그런 역할을 조금씩 옆 나라 ‘짱깨’ 들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과연 삼일절에는 무엇을 생각하며 보내야 하나?

내가 고국에서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삼일절 하루 종일을 거의 경쟁적으로 ‘왜놈 증오’하는 행사로 보냈다. 특히 국민학교 때인,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그것은 거의 광적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반일감정은 보기에 아주 원색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필요하면 ‘친일파’를 과감하게 중용을 할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 이후 그런 것은 눈에 띄게 완화가 되었다. 그 이유는 설명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이후의 정권에선 이런 삼일절 같은 ‘과거사’를 어떻게 대했을 까, 나는 거의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국경일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을 보니 조금 의아한 심정이다. 한글날이 없어져서 삼일절도 없어질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일까?

나는 지난 5년간의 ‘피상적인 일본공부’의 결과(대부분 텔레비전 프로그램), 과거 오해했거나 모르고 지냈던 것들을 지금은 많이 새로 알게 되었다. 특히 각종 전쟁으로 인한 그들 민간인들이 겪었던 고통이 사실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음도 그 중의 하나다. 오랜 기간의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완전히 자만심에 빠진 그들은 근래에 들어서 조금씩 주변의 나라, 특히 한때 그들의 ‘만만한’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미국보다 훨씬 전에 버블경제의 충격을 겪었고, 그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작년 3월의 천재지변으로 다시 한번 충격을 겪으면서 조금은 겸손해졌다고나 할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앞으로 한반도와 일본은 어떠한 관계로 이어가게 될 것인가, 혹시 기고만장한 짱깨를 공동의 적으로 의식하게 될 불편한 친구관계가 되지는 않을까?

 

지독한 부자(富者)들과 지나친 자본주의

¶  현재 진행되고 있는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향한 치열한 공화당 후보들의 debate와 이틀 전부터 시작된 2012년 스위스 다보스(Davos, Switzerland)의 World Economic Forum(WEF)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조금씩 복잡한 나의 심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선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것이다. ‘지독한 부자’에 대한 혐오감이다. 여기서 지독한 부자는 ‘돈 장난’을 해서 ‘지독히도’ 많이 번 부자들을 말한다. 자칫하면 ‘질투’로 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그들이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front-runner인 Mitt Romney의 ‘거대한 재산’은 아주 눈에 가시처럼 보인다. 과연 그가 99%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본인은 분명히 머리가 좋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참 힘들 것이다.

Warren Buffet같이 부자들이 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는 양심들도 있지만, 이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우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절대로 법적인 것 만이 아니다. 인간과 사회는 법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쟁점이 되는 것이 법 자체를 바꾸자는 의견이다.

그런데 이 법은 단순한 법의 차원을 넘어서, 숫제 자본주의 자체를 수정하자는 정도까지로 나갔다. 문제는, 그 것이 예전 같았으면 ‘배가 나온, 지독한 부자’ 들이 총 동원해서 반격을 할 텐데.. 이번에는 Occupy Wall Street 때문일까.. 비겁하게 눈을 깔고 관망만 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Davos에도 그들 특히 banker, investment fund manager같은 부류들이 대거 불참을 했는데, 내 생각에 그들은 ‘무서워서’ 못 온 것 같다. 나도 그런 ‘대중’의 의견에 100% 동감이 간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  I TOLD YOU SO department:  이 분명한 사실이 믿기는가? 바보 같은 iPxx customers & Apple Lover 들이여, 그대들이 꾸뻑~하고 흠뻑 빠져버린 iPxx (iPod, iPad, iPhone, iWhatnext?)$Apple company에 갖다 바친 돈이 얼마나 되는가? 46 BILLIONS! 이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아시는가?

거기에 비해서 지난 10년 이상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벌던 $Microsoft조차도 년 수입이 $20 BILLIONS이고, 고철 컴퓨터의 대부, computer science를 독자적으로 창시한 IBM 조차 $25 BILLIONS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애플이 그렇게 억수로 돈을 번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벌고 있고, 그렇게 번 $$$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이 어떨까가 더 회의적이고 문제라는 것이다.

그 들은 현재의 상태를 결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허재판 전쟁으로 엄청난 돈을 뿌리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모조리 특허로 만들었다. $Apple company가 앞으로도 그들의 ‘대부’ S. Jobs의 그늘에서 계속 머문다면 역시 그들의 운명도 분명히 시간문제일 것이다. Jobs는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그의 국가 대통령인 Obama에게 ‘죽어도 iPxx 는 미국땅에서 만들지 않을 것(결국은 중국에서만)’ 이라고 단언을 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가 그런 생각으로 죽고 싶었을까 하는 측은지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이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경쟁국이며 잠재적인 군사적국인 ‘공산당 중국’의 착취적인 노동력을 이용해서 사상 초유의 이익을 추구하는 Jobs 의 집단, 완전히’무엇인가에 미친 영혼’을 보는 것 같아서 긴 시간을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슷한 배경의 억수 부자라도 MicrosoftBill Gates는 완전히 스펙트럼의 반대쪽에서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과연 누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일까?

 

Number 1 죽마고우, 유지호¶  나의 친척 같이 느껴지는 죽마고우 친구, 유지호를 생각하며 쓰기 시작한 글, 시작한지 이제 보름도 넘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면 다음날 아침에 꿈결에 새로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이 있어서 보충을 하고, 다음 날 또 새로운 것이 되 살아나고.. 그런 식으로 보름이 지난 것이다. 왜 이리 기를 쓰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기억하고 기록을 남기려 할까.. 생각해 보니 나도 조금 웃음이 난다.

혹시 내가 치매예방을 염두에 두고 두뇌운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하기야 그렇게 두뇌 운동을 하면 조금 치매방지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 동안 오랜 동안 잊고 산 것이 죄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갈 수록 기억이 새로워질 리는 만무하고, 지금이라도 기록을 어디엔가 남겨두면, 그 친구를 ‘죽기 전에’ 다시 소식을 들을 chance가 조금은 올라갈 것이라는 그저 희망에서 쓰기 시작한 것이고, 다시 들을 수 없다면 그저 그가 어디에선가 건강하게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월 이십일일, pancakes, Newt

¶  오늘은 일월 이십일일, 一月 二十一日, January 21st, 1.21 일이일 김신조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일 ..그리고 또한 나의 생일이다. 예순 네 번째의 생일이 조금은 피곤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오랜 세월이란 기분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내가 어렸을 당시 우리들의 생일축하문화는 딱 한가지였다. ‘입학시험 때는 절대로 먹지 않는 미역국‘을 먹는 것 이었다. 1%의 부자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99%는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한창 시작되던 60년대 말, 조금씩 나아진 경제사정 때문일까, 조금 생일 반찬이 복잡해 지긴 했지만, 생일 카드, cake, candle, presents같은 ‘서구식’ 생일 문화는 거의 없었다. 후에 미국에 와서야 그런 서구식의 ‘요란한’ 생일 문화가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최소한 결혼 전까지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우습게까지 보였다. 

B'day presents, book & DVDs사실은, 누가 나의 생일을 기억을 하고 축하해 주는 것이 조금은 계면쩍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것이 배우자가 생기고, 애들이 크면서 생일은 완전히 조금은 ‘느끼한 행사‘로 발전을 하고, 심지어 부담까지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고국도 ‘완전히’ 서구식으로 변한 것을 볼 수가 있어서, 이제는 ‘전통적’ 생일을 찾아보기는 이제 기억 속에서나 가능해졌다.

물론 전통적 생일이란 말이 거창하지만 ‘검소하게, 가난하게, 미역국만 먹는’ 그런 생일이 그리운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완전히’ 커지면서 다시 그런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 애들이 별로 ‘느끼한 행사’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생일cake이란 것, 어쩌면 그렇게도 맛이 없을까.. 먹기도 고역이고, 버리기도 아깝고.. 정말 곤란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나의 생일, 나의 소원대로 비로소 전통적 생일, 미역국만 먹는 생일을 찾게 되었다. 부수입으로 애들은 내가 좋아하는 역사에 관한 것들을 선물로 주었는데, 모두 ‘전쟁역사’에 관한 것들이다. 아빠가 하도 ‘전쟁영화’를 많이 보는 것을 보아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를 이세상에 보내주신 하늘에 계신 아버님과 어머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저의 어버이 날이기도 합니다.”….

 

¶  Pancake to the rescue: 우리부부는 적어도 10여 년 전부터 아침식사를 ‘절대로’ 거르지 않고, 양식 스타일(boiled eggs, toasted breads, sausage or bacon, fruits and veges and freshly brewed coffee) 로 먹고 점심은 밥과 국을 중심으로 거의 한식 스타일로 그것도 아주 많이 먹는다. 대신 저녁 식사는 정말 적게, 아니면 거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끝나고 난 이후에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완전히 습관이 되었다. 이유는 직감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니면 이곳 저곳에서 들어본 이론에 근거해서, ‘많은 양의 ‘저녁식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과일,야채의 양은 많이 늘어났지만, 전체적인 식사의 양은 조금 줄었다. 나이에 의해서 분명히 기본적인 운동량이 줄었기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My own Pancake breakfast

이런 식사의 습관은 분명히 일반적인 건강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방에 의한 체중증가‘를 억제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게다가 5년 전부터 아침식사는 내가 ‘혼자’서 만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보다 훨씬 바쁜 연숙을 도와준다는 근사한 명분으로 시작을 했지만 솔직히 한 달만 계속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큰 문제없이 현재까지 잘 버티고 있다.

양식 스타일의 아침식사에 무슨 손끝 맛이 필요하랴? 그저 ‘기계적’ 으로 하는 작은 ‘노동’에 불과한 것을..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pancake을 배우게 되었다. Frozen은 아니더라도 거의 instant화 된 것이라서 그렇게 보기보다 간단한 줄 그 동안 몰랐던 것이다. 판에 박힌 아침메뉴에 변화를 줄 수 있는 pancakes..

며칠 전 연숙이 집을 며칠 비웠을 때 톡톡히 진가를 발휘해서 거의 매일 아침 실습해서 먹었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도 질리지 않는다. 한가지 문제는 아직도 연숙이 만드는 것처럼 예쁘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 될 듯하고, 모양보다 맛이 더 중요하니까 큰 문제는 아니다.

 

¶  Romney & Gingrich: 롬니와 깅그리치.. 한글로 표기하니까 조금 ‘요상’한 느낌인데, 이것은 문자 문화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미국 대통령 감 후보 가능성이 현재 한창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물론 민주당은 오마바로 완전히 전투대열을 갖추고 현재 공화당 후보의 추세를 관망하고 있는 것인데, 그 동안은 완전히 코믹할 정도로 혼전을 거듭하더니 이제는 조금 무언가 보이는 지경이 되었다. 한 사람은 주지사 출신, 다른 사람은 연방국회의장 출신, 그러니까 아주 heavy급인 배경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다른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극과 극이라고나 할까.. 경제통이지만 조금 근시안적인 롬니, 예측불허 성질이지만 미국의 거대한 꿈을 실현하려는 역사통 깅그리치.. 과연 누가 그들의 선택인가?

그간 롬Gingrich-wins South Carolina니는 ‘실질적인 후보’로 여겨져 왔지만 조금 있으면 끝날 South Carolina Primary에서 그들은 완전히 neck-and-neck정도로 예측 불허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둘 중에서 고르라면 아마도 Gringrich가 아닐까.. 그는 역사를 잘 알고 있고, 옛적의 잘못을 다 인정하고, 보기에도 아주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신선함을 보여주는데.. 과연 어떨지? 한가지 더.. 그가 나와 같은 Catholic으로 개종을 한 것도 한 몫을 하지 않을까?

P.S., 극적인 역전승: South Carolina Primary 개표가 거의 끝나면서, 결국 Gingrich ‘놀랍고도, 압도적인’ 역전승이 확실시 되고 있다. 이것은 완전한 drama급에 속하는 것이고, 다음 차례, 1월 31일의 Florida Primary의 결과가 정말 흥미진진한 것이 되었다.

 

 

Birthday – The Beatles – 1967 – Beatles forever young!

 

Goodbye, Vanderbilt & Nashville

¶  Goodbye Nashville: 지난 주말에는 이번에 Peabody College at Vanderbilt University에서의 1년 반 teacher’s degree (석사과정)가 끝나고 졸업을 하게 되는 큰딸 새로니의 이사를 도우러 Nashville에 연숙과 다녀왔다. 물론 우리의 ‘짐 차’ Plymouth Voyager van을 가지고 가서 새로니 이사 짐을 모두 싣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작년 여름에 Washington DC에서 이사를 내려 올 때도 똑같은 과정을 겪어서 사실 조금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것 외에는 익숙한 것들이었다. 편도 3시간 반정도의 드라이브가 이번에는 덜 지루했던 것이, 처음으로 연숙과 같이 묵주기도를 하며 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장거리 드라이브는 ‘절대로’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도 했다. 

Vanderbilt off-campus Apartment, Westboro
일년 반을 산 off-campus 아파트 Westboro, Nashville

그 동안 집에 다녀갈 때마다 조금씩 짐을 가져 오곤 했지만 이번에는 주로 무겁고 큰 것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과연 다 가져올 수 있을까 우려를 했지만, 기가 막히게도 잘 싣게 되었다. 새로니는 일년 반 동안이나 Nashville의 off-campus apartment에서 혼자 살았지만, 요새의 일년 반은 예전의 한달 반 정도로 짧게 느껴져서 나중에 그곳에 그렇게 기억에 남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생각보다 짧은 일년 반이 지나고 보니, 우리로써는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것이 country music 의 본고장을 제대로 한번 못 보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 했으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조금 늦지 않았을까? 새로니는 이제부터 teacher’s job을 구해야 하겠지만, 하도 피곤한지 우선은 아무것도 안하고 휴일을 즐기겠다고 미리 선언..

다행히 동생 나라니의 condo가 비교적 커서 그곳으로 대부분의 짐을 옮겼고, 당분간 그곳에서 같이 살자고 해서 아마도 휴일이 다 끝나면 그곳에서 동생과 같이 있게 될 듯하다. 안정되고 편안한 ‘연방 공무원’ 자리를 걷어차고 ‘고생길’이 훤한 선생님의 길을 택한 큰 딸의 사명감 있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다른 편으로는 조금 측은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Go Serony Go!

 

New & Callista Gingrich at Capitol
Newt Gingrich와 현재의 부인

¶  Catholic Newton: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것인가? 최근 가열되고 있는 이곳의Republican Primary (공화당 예비선거)을 보며 이것이야 말로 ‘원숭이들의 서커스’ 가 아닌가 생각을 하며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한 마리가 박수를 받으며 올라가면 사소한 실수로 떨어지고, 다음 것이 올라가 똑같은 짓으로 떨어지고.. 한 마리 한 마리에게 한번씩 떨어질 기회는 차례차례로 주어진다.

완전히 떨어져 나간 놈(like the pizza man, Herman Cain)도 있고 나머지들은 현재 올라간 놈을 끌어 내리려 각가지 모양으로 날 뛴다. 이것이야 말로 서커스가 아닌가? 현재 높은 줄에 올라가 안 떨어지려 안간 힘을 쓰는 그래도 조금은 침착하고, 덜 미친 놈처럼 보인 것이 바로 Newt(Newton) Gingrich인 것이다.

이 인물은 1990년대에 House Speaker (연방 하원 국회의장)를 역임한 화려한 경력을 가졌고, 한때는 ‘지적이고, 혁신’적인 idea로 많은 주목도 받았지만, 그에 반하는 ‘지독히 이기적인’ 결혼, 이혼경력, 허세, 위선, 돈 문제로 항상 ‘도덕적 결함’의 대표적인 인물로도 지목이 되어서 미국 대통령이 되기는 힘든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번 공화당서커스에서 지독히 운 좋게 상승세에 있으니..내가 사는 곳 구역 연방하원이라 그는 낯 설지 않다. 언제는 가까운 supermarket Publix에서 wife ( 부인)와 grocery를 보고 checkout counter에 서있는 그를 본 적도 있었다. 비교적 서민적인 인상을 보여 주기도 했다.

사상이나 정책적으로 그는 사실 나머지 ‘미친놈’들 보다는 훨씬 온건파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그렇게 혐오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 속에서 헤매는 공화당에 이런 ‘실용주의자’는 나오기 참 힘든 상황인데, 그가 홀연히 물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대학교수를 역임한 ‘지식인’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감한 용기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가 생각하는 가톨릭의 ‘매력’은 내가 보는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또한, 그의 ‘이민법’에 대한 생각(제한적 사면)은 공화당 내에서는 거의 ‘치명적‘인 생각으로 또한 과감한 용기의 표현일 것이다. 그저, 그저, 인정머리 없이 여자들을 ‘걷어 찬’ 그의 ‘철없는’ 과거가 그의 현재에 가장 걸림 돌인 것이다.

생각한다.. 혹시 혹시 이 인물이 지금 현재 미국에서 오바마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외의 생각.. 그렇게 미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지어다.

 

¶  Silver Bells: 이맘때가 되면 가끔 생각나는 것,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곡이 있다면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은 어떤 곡일까? 이 우리에게 친숙한 캐롤들은 물론 대부분 미국에서 불리고 알려진 것들이 육이오 동란 이후 미군들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진 것들이다.

하도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것이라 사실 이것들이 ‘남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하고 자라서 아직도 친근하기만 하다. 개신교의 찬송가 스타일 것들은 물론 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멋있던’ 것은 역시 그 이외의 것들이다. 예를 들면 영화 주제곡에서 나온 것들, 전래 민요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이런 노래들은 학교 다닐 시절(주로 고등학교, 대학교) 성탄절이 될 즈음이면 성탄 하루 이틀 전부터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 나오고 대부분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요란하게 나오곤 했다. 그 중에 Bing Crosby의 classic carol White ChristmasJingle Bells같은 것은 너무나 알려져서 한창의 젊은 나이에는 조금 진부하게, 그러니까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학 2학년 무렵, 1968년 경, 우리에게 새로운 carol Silver Bells가 서서히 알려지고 퍼지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부터 그 곡이 나에게는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된 것이다. 이유는 물론 확실치 않지만, 그 당시 우리시대를 대표하던 ‘통기타 듀엣, Twin Folios‘, 그러니까 송창식과 윤형주가 그것을 유행시키는데 일조를 해서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도 한다. 그들이 그 곡을 record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기억에 그들의 Silver Bells는 미국의 내노라 하는 가수들보다 훨씬 나았던 것이다. 최소한 그 당시 내가 듣기에.. 이런 확실치 않은 이유로 아직까지도 나는 이 곡을 소중히 추억한다.

 

Andy Williamsrendition of Silver Bells

 

200번째 블로그를 맞으며..

200번째 블로그, 지금 쓰고 있는 blog이 200번째 post가 되었다. 작년 말쯤에 100번째를 지났는데 일년이 되기 전에 다시 다음의 이백이란 숫자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이것을 시작할 무렵에는 일주일은커녕 한 달에 한번 쓰기도 힘들었다. 거의 수십 년 동안 쉬어온 ‘한글쓰기’가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특히 인터넷 출현 전에는 한글로 쓴 글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끔 보는 신문이 전부랄까..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터넷의 출현이 나에게는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다. 다시 한글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쓰게도 되었으니까. 사실 이 blog으로 나는 다시금 한글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정말 많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수식어들을 잊어 버렸다. 어쩔 수가 없다. 그런 것은 문화적이기 때문에 한글의 중심지에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잘 쓰려고 해도 어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0% 영어권 직장생활을 오래 한 여파로 솔직히 영어를 쓰는 것이 편하고 쉬울 때가 참 많았다. 그런 배경에서 다시 한글과 한국말을 쓰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아서 나도 적지 않게 놀랐다. 세월의 횡포여..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쓰는 한국말은 아무래도 너무나 직선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러니 그것을 한글로 쓰게 되면 정말 다시 읽기도 싫을 정도로 메마른 느낌인 것이다. 나의 blog은 그런 배경에서 쓰여진 것이지만, 나로써는 정말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한 것이다. 다음의 단계인 300번째 쯤 되면 조금은 더 ‘세련’된 문장이 되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해본다.

 

Hillary Clinton on TIME
Hillary Clinton on TIME cover

힐러리 클린턴, 이번 주 타임 매거진의 표지 기사가 힐러리 클린턴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이번에 리비아의 내전이 카다피의 피살로 끝나게 되면서 미국이 취한 신중한 개입의 성공이 힐러리 클린턴의 ‘빛나는’ 외교에 의한 것으로 보는 듯하다. 이번 리비아의 쾌거는 사실 유럽연합(EU), NATO와 미국의 신중하지만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개입의 성과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지상군이 전혀 개입을 하지 않고 ‘기술적’인 지원으로 일관을 한 것이고 그것이 완전히 성공을 했다. 어떻게 힐러리는 어려울 수도 있는 이런 공동전선을 구축했을까? 첨단기술을 완전히 이해를 하는 대표적인 신여성인 그녀는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첨단기술이란 대부분 social networking tools들, 대표적인 것이 twitter, facebook같은 것 들이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듯 하지만, ‘고리 타분할’ 수도 있는 덩치 큰 국무성의 최고 관리가 그런 것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것은 별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해외의 모든 미국대사관들에게 그런 social networking tools을 적극적으로 쓰게 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성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국무성에는 현재 192 Twitter feeds, 288 Facebookaccounts가 쉴새 없이 쓰이고 있다는 것인데, 옛날 생각에 ‘늙게만’ 보이던 ‘할아버지’ 국무장관들이 그런 것들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와 나이가 거의 비슷해서 항상 관심 있게 주시하고 있는 그녀, 참 매력적일 수도 있다. 이렇게 ‘머리 좋은 여자’ 힐러리, 과연 그녀는 장차 대통령이 되려는 생각을 어떻게 머리 속으로 조정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Dennis Ritchie, 1999
Dennis Ritchie, 1999

지난 10월에 C Programming Language의 ‘창시자’ 인 Dennis Ritchie가 타계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computer operating system의 할아버지 격인 Unix를 Ken Thompson과 같이 ‘발명’을 한 장본인 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만들어질 당시는 personal computer란 것은 아예 이름조차 없었고 대부분 IBM mainframe아니면 PDP minicomputer가 전부였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 시대를 모두 거치며 컴퓨터를 배워서 그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FortranCobol, Assembler 등이 programmer들의 전부였던 그 시절에 ‘대담하게도’ 거의 혼자서 C language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에 완전히 컴퓨터의 ‘표준 언어’가 될 줄은 그들은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나는 software engineer로 일 하던 내내 이것 한 가지로 ‘밥을’ 먹은 셈이 되었다. 거의 만능적인 ‘간결함’과 ‘적응성’을 가진 언어여서 business application서 부터 embedded system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안 쓰인 곳이 거의 없었다. 그뿐이랴.. Unix는 어떠한가? 이것은 C language보다 더 큰 파급효과를 남겼다. 지금의 Linux완전히 이것을 ‘베낀’ 것이고, Apple/Mac/OS도 이것을 조금 바꾼 것이다. 심지어 Microsoft쪽의 MS-DOS, Windows 같은 것도 기본적인 idea는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이렇게 보면 이것을 ‘만든’ Dennis Ritchie의 업적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올해의 Japan Award를 받아서 뒤 늦게 그들을 인정했지만, 아깝게도 ‘겨우’ 70세에 타계를 한 것이다. 내가 존경할 만한 한 computer pioneer가 사라진 것이다.

 

지난 주말에 보스턴에서 열렸던 이화여대 북미주 총동창회, 연숙이 그곳에 다녀와서 날씨와 연관된 일화를 듣게 되었다. 거의 기록적인 10월의 폭설로 인해서 동창회가 열렸던 호텔이 정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동창회의 주 행사가 시작될 무렵에 정전이 되어서 끝날 무렵에 다시 복구가 되었다니.. 조금 타이밍이 기묘하지 않았을까? 완전히 비상등만 켜진 상태에서 그 커다란 행사를 한다고 상상을 해 보라.. 특히 식사준비도 완전히 혼란에 빠져서 많은 참가자는 main dish를 못 먹었다고 한다. 하기야 어찌하랴.. 이것은 완전히 Mother Nature의 자연적인 act of God인데..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추억에 남는 행사가 되었다고..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즐기고’, 사회를 보는 동창은 너무나 감정과 감격에 겨워서 ‘울었다’ 고.. 내가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였다. 특히 연숙은 너무나 오랜만에 총장 친구, 김선욱씨와 해후를 해서 사적인 시간을 즐겼다고 해서 나도 기분이 흐뭇했다.

 

Greedy Generation

지금 한창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지독한’ 불경기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젊은 세대,특히 25세부터 34세 사이의 세대의 높은 실업률이 우리 세대에 미치는 ‘예상치 않은’ 파급효과가 그 중의 하나다.

예전, 그러니까 최소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이의 세대면 거의 공식적인 retiring formula가 이미 있었다. 이 나이가 되면 겪은 두 가지 즐거움: 자녀들이 거의 직장을 가지고 집을 떠나게 되고, 집을 살 때 얻었던 loan을 다 갚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사실 크게 돈을 쓸 일이 없어지게 되는 즐거움이다. 그렇게 되면 젊었을 때 꼬박꼬박 돈을 부어놓았던 은퇴자금을 서서히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우선, 자녀들이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게 되어서,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거나, 아예 나가서 살 엄두를 못 내게 된 것이다. 이들이 주는 경제적 부담은 미지수지만, 아무래도 부모에게 부담을 줄 것이다. 그리고, 부동산 거품이 최고조에 달 했을 때 (8년 전), 많은 사람들이 겁도 없이 집을 저당으로 해서 은행에서 마구 돈을 빌려다 쓰곤 했다. 아예, 빚을 얻어서 투자를 하기도 했다. 부동산 거품이 완전히 빠지고, 그들이 집은 아직도 저당금 빚이 남아 있게 되었으니..

그들은 (우리세대) 이제 완전히 샌드위치처럼, 아래로는 자식들이, 위로는 집 저당금(mortgage)이.. 누르게 되었다. 예전처럼, 멋지게 은퇴를 해서, 골프를 치고, 크루즈 여행을 가고.. 하는 꿈들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것이 현재 baby boomer세대의 슬픈 현실이다.

과연,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이런 것을 미리 방지할 수 없었을까? 이런 것들은 근래, 그러니까 1990년대 초에 일본에서 이미 겪은 것이고,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1990년 초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부동산 거품과 그에 따른 경기침체..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왜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경제학자들이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과소평가 했던 것일까? 나는 경제학을 잘 모르니까 할 말은 없지만,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우선, ‘부-동-산’.. 에 관한 것은 다 싫다! 이것에 관련된 인간들도 하나도 멋진 인간들이 아니다. 대부분, ‘공짜’ 를 좋아하는 싫은 인간 군상들이다. 이렇게 손쉽게 먹으려는 심리의 표현이 바로 ‘거품’이 된다. 이것을 기생충처럼 파고들며 같이 쉽게 먹으려는 인간들, 은행, 융자 인간들.. 이들 부-동-산 인간들과, 은-행-융-자 인간들이 최악의 역할을 잘도 해냈다. 쉽게, 쉽게 벌려는 많은 불쌍한 인간들이 이 두 부류에 완전히 놀아나고, ‘공짜’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이 잘도 보호를 해 주었다. 이것이 현재 경제파탄의 실체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돈을 만들어서 한참 동안 흥청망청 쓴 것의 결과가 현재인 것이다. 이것이 경제구조의 결함일까, 인간의 근본적인 결함일까. 아니 둘 다일 것이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약삭바른 부류들이 너무 심하게 탐욕을 부린 결과인 것이다. 그 정도로 원인은 사실 간단했다. 지독한 탐욕.. 어찌 인간들이 그렇게나 욕심들이 많은 것일까? ‘정도껏’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어떻게 불과 2~3식구가 10명이 살아도 방이 남는 고래등 같은 백만 불짜리 집에서 살 용기가 나는 것일까? 뉴욕 Wall Street에서 잘나가는 곳에서 investment banker로 아들, 딸이 스카웃 되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나는 정말 정말 하나도 부럽지 않다. 그런 곳에서 과연 그들은 무엇을 배울까?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20년 전에 이미 일어난 ‘거품경기’에 대한 교훈을 어쩌면 그렇게 잊고 살았을 까 하는 것이다.

 

2011 첫 가을비 우산 속

어제는 루이지애나 로 부터 북상한 tropical storm ‘Lee’가 많은 비를 몰고 결국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알맞은 비 였으나, 덤으로 토네이도까지 주면서 지나갔다. 비는 예상보다는 적게 왔지만, 몇 주의 가뭄에 비하면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근처에 아주 작은 규모의 토네이도가 집 몇 채에 나무를 쓰러뜨렸지만, 이것은 다른 곳의 ‘대형 사고’에 비하면 아주 경미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오늘은 왔다. 올 것이 온 것이다. 기온이 급강하 하며 아주 음산한 비까지 뿌리는 하루였다. 이것이 바로 가을비의 전형이 아닐까? 몇 달 만에 다 잊어버렸던 ‘써늘함’을 처음으로 느낀 날이었다. 긴 팔, 긴 바지 옷들을 갑자기 찾아서 허둥대던 싸늘한 아침, 이제부터는 조금 ‘가을비 우산 속‘을 기대해도 좋은 계절이 된 것인지.. 기대가 된다.

 

미국 대통령, ‘바락 오바마..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 조금은 불쌍하다. 재수가 지독히도 없었나. 기대가 너무나도 컸었을 까? 제2의 지미 카터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poor Obama on Labor Day, 2011
poor Obama on Labor Day, 2011

8년간의 ‘머저리’ 부시(stupid Bush) 밑에서 거덜이 난 미국의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 후의 거의 이상적인 대통령 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희망과 현실이 어쩌면 이렇게 처참할 정도로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결국은 오바마는 지금 미국이 필요로 하는 인물의 자격에 미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가 제일 큰 ‘실수’를 한 것이 거의 광신적으로 그의 정책이 실패하기를 원했던 반대당을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나 ‘착하고, 타협적’으로 그들을 대한 것은 지금 보면 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들과 똑 같은 수법으로 ‘무자비하게’ 그 광신도들을 눌렀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실수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고, 시간적으로도 늦었다. 이제, 깡패 같은 공화당이 재집권을 하게 되면 그와 대다수 국민들이 원했던 ‘상식적인 정책’은 물 건너 갈 것이 너무나 뻔하다. 참, 암담한 미래가 보인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하루 하루 가까이 다가오는 것일까?

돌아오는 일요일은 9월 11일이다. 뉴스에서 그것을 10년 동안 끊임없이 하지만 조금씩 낮아지는 정도로 취급을 했지만 역시 10이라는 숫자에는 약한 모양이다. 10주년이 된 나인-원-원.. 어찌 구급,비상 전화번호, 911과 같은 날이었을까? 이제는 10년 정도는 절대로 긴 세월이 아니다. 어제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10년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함도 느낀다. 나도 변했고, 늙었고, 주위도 꽤 변해 있다. 특히 정치, 사회적으로 미국이 겪었고, 변한 것을 보면 조금은 소름조차 끼칠 정도다. 그것은 미국만이 아닐 것이다. 직접, 간접적으로 미친 여파는 후세에 역사가들이 말을 해 줄 것이지만, 아마추어 역사학도가 되어서 생각을 해도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극단주의자들의 일시적 승리’,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는 웬만한 ‘끔찍한’ 것에도 그리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극단주의는 사회, 문화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유행처럼 번졌다. 그런 것들이 언제까지 가게 될까? ‘양순하고, 착한’ 다수들은 도대체 어디로들 숨었을까?

 

오일육(5.16) 군사혁명, 50년 전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 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왼쪽), 박정희(오른쪽)

 

오늘아침, 코앞의 달력을 보니 오늘이 5월 16일이다. 무심코.. 아하.. 박정희의 오일육 군사혁명 기념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작년 사일구(4.19)가 50년이 되었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곧바로 그러면 올해의 오일육이 50년이 되는구나 하는 조금은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반세기란 기간의 느낌이 그렇지만, 50년이란 것이 사실 그렇게 긴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늙어가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인간 10진법의 문화에 울고 웃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다.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며 남산가도를 질주하는 혁명군의 Sherman tank

작년 4월 19일 나의 blog은 분명히 4.19, 사일구 학생혁명 50주년을 회상하면서 쓴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중앙중학교 1학년 때였고, 5.16은 그 다음해인 1961년, 내가 중앙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날은 사일구 때와는 달리 아침부터 학교의 문을 아예 열지도 않았다. 사일구 때 최소한 등교를 한 후에 퇴교를 당했던 것에 비하면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일구 혁명은 4월 19일 낮에 그 열기가 절정에 달 했지만 오일육 혁명은 그날 새벽에 이미 일어난 상태였던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KBS가 유일한 라디오 방송이었을 것이고, 그 방송에서는 앵무새처럼 군사혁명 공약이 되풀이 되면서 방송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의 나이에 모든 것들이 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기억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고” 라는 혁명공약이었다. 물론 “국시”라는 말이 확실히 이해는 안 되었지만 “반공이 제일 중요하다” 라는 말로 들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의 반공국가였는데, 왜 이런 말을 제1의 혁명공약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학교 2학년 ‘어린아이’가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역시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못 가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며 우리들의 영웅, 산호의 라이파이를 보러 만화가게로 갈 수 있는 것만 생각해도 마음이 흥분 되었다. 국민감정을 의식해서였을까, 사일구 때의 계엄령과 다르게 비교적 자유로운 계엄령 치하가 시작되었다 (최소한 아이들의 눈에는).

달력을 다시 보니 역시 5.16에는 아무런 ‘표시’가 안 보이고 그 이틀 뒤인 5.18에는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이란 표시가 보인다. 그러니까 5.16 ‘군사혁명일’이란 것은 아예 기념일에서 조차 떨어진 모양이다. 호기심이 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언제부터 달력에서 5.16군사혁명 기념일이 없어지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들어갔을까. 역사는 흐른다. 절대로 멈춘 것이 아닌 것이다.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혁명주체세력 제1인자 박정희 소장, 1961

사일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아하던 “진짜” 탱크가 시내 곳곳에 보였지만 이번에는 아주 평화스럽게 보였다. 처음에는 장도영이란 이름만 요란하게 들렸고 박정희란 이름은 아주 나중에야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우선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회전체가 아주 ‘질서정연’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일구 이후에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는 데모대로 조용한 날이 없었기 때문일까. 비상계엄령 속에서 데모를 한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신선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는 느낀다. 사일구 이후에 전체적으로 퍼지던 지나친 자유의 공기를. 심하게 말해서 방종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해도 법과 질서가 유지가 될까 할 정도였다. 그 예로 내가 다니던 중앙학교에도 지나친 자유의 표현으로 ‘교장선생, 물러가라’ 하는 데모가 있었다. 사일구의 독재정권 타도가 일반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변한 것이다. 그 당시 중앙학교(중, 고교)는 심형필 교장선생님이 계실 때였다. 수학자로서 아주 선비 풍의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에게 ‘비리’가 있다고 데모를 하고 물러가라고 학생들이 요구를 한 것이었다.

물론 나의 나이로는 이해가 되지를 않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도 일반적인 시민의 자유는 많았다. 그래도 치안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일구 뒤에는 기본적인 치안에 문제가 보일 정도랄까.. 왜 그랬을까? 결국은 이승만 ‘부패정권’ 뒤에, 거의 통치력이 없는 과도정권에 공권력이 너무나 약했던 것이 아닐까?

5.16 혁명 직후 시청 앞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대회, 1961

제일 극에 달한 것은 사회적인 것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는 자세히 들 알려지지 않았지만 휴전선 너머의 김일성이 이것을 보고 얼마나 침을 흘렸을까 하는 것은 절대로 지나친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은 후세에 다 사실로 들어났다. 과도정권은 분명히 반공정권이었겠지만 극에 달한 자유의 표현은 결국 남북화해, 남북협상이란 말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현실적인 반공법 위반이었는데.. 휴전선의 포격사정권에 있던 수도를 가진 정권에게 이것은 정말 위험한 것이었겠지만 일반 시민의 정서는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결국에는 학생들 조차, “가자 판문점으로!” 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조용해 졌다. 우리는 며칠 뒤 등교를 한 후에 긴급 혁명공약을 배우게 되었고, 일년 동안 만끽하던 ‘학원의 방종’을 되 돌려 주게 되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가, 그 동안 “스포츠 가리” 이발에서 완전히 “삭발”형으로 바뀐 것..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전통대로 머리를 다 중처럼 깎았다가, 사일구가 나면서 ‘자유’가 주어져서 스포츠머리로 바뀌었는데, 다시 원래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목격한 것이 중앙학교 구내에 하나 둘씩 들어섰던 ‘잡상인’들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들 들면, 이발소, 식당, 문방구 같은 것들이었다. 상인들에게는 큰 일자리가 없어졌겠지만 사실 이것은 잘 된 것 같았다. 학교 밖이면 몰라도 학원 내에 그런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느슨하던 극장의 학생입장도 아주 까다로워져서 웬만한 영화는 거의 다 ‘학생입장불가’가 되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던 깡패들도 줄줄이 잡혀 들어갔는데.. 조금 심했던 것은 일부  ‘정치깡패’들이 사형에 까지 처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대부분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오일육 군사혁명은 정권이 바뀌면서 해석도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짐을 안다. 군사혁명 10년 뒤인 1971년에는 거의 영구집권체제인 유신정권으로 바뀌고, 그 8년 후인 1979년에는 박정희도 부하에 의해서 사망을 한다. 속담에 “때는 때대로 간다” 라는 말로 그의 공과를 한마디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할까? 한때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그가 싫기도 했다. 나는 기껏해야 김신조 사건 이후에 대학에 생긴 교련에 대한 반대데모와 3선개헌 반대데모로 학창생활이 끝났지만 아내 연숙은 70년대의 유신체제를 반대한 거센 ‘운동권’에 끼어들게 되어서 모든 현장을 목격까지 했고, 경찰과 정보부의 감시 속에서 살았던 때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결혼 후에 나는 사실 고개를 못 들고 살았다. 데모만 나면 나는 ‘신나는’ 등산을 즐겼는데 반해서 연숙은 모든 것 잊고 최루탄 연기를 맞으며 살았던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 운동권 출신들이 줄줄이 현재 모든 정권의 요직에 있다. 심지어 일부는 거의 ‘빨갱이’ 흉내를 낼 정도가 되었다. 오일육에 대한 해석도 극과 극을 치닫고 있다. 그들이 항상 거의 의도적으로 언급을 안 하는 것은 그 동안 그들이 그렇게 동정하던 ‘북녘’ 정권이 어떻게 그들의 ‘인민’들을 통치해 왔던가 하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반대파 탄압을 언급하려면 조금은 그것도 언급하면 조금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먹고 입기 전에는 의미 있는 민주주의를 뒤로 미루겠다는 말은,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또한 반대로 박정희를 거의 ‘영웅시’하는 극우파들.. 그들이 사실 박정희의 진정한 의도와 업적에 먹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시청 앞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혁명 성공 후, 시청앞에서 육사생들의 사열을 받는 박정희 소장과 차지철 공수부대장

오일육 혁명 주체, 박정희 소장

이 검은안경 사진은 후세에 남는 오일육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의 신문으로 보는 오일육 쿠데타 모습들

 

50년 전의 신문으로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 조금 감당키 어려운 감정의 복받침과 싸우기도 했다. 글과 사진들.. 확실히 이것은 이제 역사가 되었고, 교과서에서 다시 배울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 신문들을 다시 보며 뚜렷하게 느끼는 것, 당시의 신문들.. 정말 중학교 2학년 생의 한자 실력으로는 읽고 이해하기에 역부족, 그러니까 거의 문맹에 가까울 정도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여기 나온 신문들을 보라.. 얼마나 많은 한자가 섞여 있는가? 또한 한글조차 50년을 거치며 맞춤법이 많이 변했음을 절감하고, 언어의 변천에 50년은 그렇게 짧은 세월이 아니라는 것도 느낀다. 하지만 그것 보다 사진을 보며 더 깊은 생각을 한다. 50년 세월 동안 내가 기억한 모습들은 너무나 현재에 적응이 되었는지, 그 당시의 모습들.. 너무나 꾀죄죄하고, 볼품들이 없다. 물론 그 당시의 유행과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조금 이해는 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당시 신문의 사진기술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잡한 사진 조판에다가, 50년이 지난 신문지.. 그것이 ‘생생하게’ 보일 리가 만무하니까.

 

오일육 당시 경향신문 석간

오일육 석간지는 유동적인 사태로 군 검열을 받지 않았다.

성공적인 무혈 쿠데타

의외로 평온한 전국 주요 도시의 분위기

서울 주요 거점에 진주한 혁명군들

오일육 낮, 어리둥절한 시민들과 군인들, 세종로,시청 근처

생생했던 역사 현장, 희미한 모습으로

그 당시 모습, 사실 이 사진보다 훨씬 더 깨끗했다

육군사관생도 혁명지지 궐기행진

쿠데타 직후 육사생들의 지지 궐기는 혁명성공의 촉진제였다

시청 앞에 집결한 육사생도들과 장도영 중장

시청앞에서 혁명지지 궐기대회, 혁명의 얼굴, 장도영 중장과 육사생들

5월 17일부터 군 검열받던 신문들

계엄령하에서 언론에 대한 군 검열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서히 등장하는 막후 1인자 박정희 소장

사실상 쿠데타 주역 박정희 소장, 장도영 중장과 기자회견에서

 


그 당시의 사회정서를 한눈에 보려면 영화광고를 보면 간단하다. 유행과 더불어 그 당시 최고 인기배우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서부영화와 대형 종교영화가 판을 치던 그 시절, 한국의 영화풍토는 지금 수준에서 보면 정말 아이들 장난과도 같았다. 한마디로 유치하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매력이었다. 여기의 영화광고를 보면서 손쉽게, 구봉서, 최은희, 신영균, 김진규, 허장강, 김희갑, 김혜정 등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당시 그들이야말로 국민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쿠데타 당시 상영되던 국산영화들

신상옥 감독이 한국 영화를 주름잡던 그 시절의 영화들

 

 

8월이 간다

지긋지긋한 8월이 드디어 간다. 벌써 어제 아침부터 시원한 바람이 산들거리는 듯 느껴지고 실제로 아침의 바깥 기온도 화씨 70도 밑으로 떨어졌다. 지난 세달 동안 계속 70도를 넘었으니까 이것도 조그만 뉴스 꺼리다. 그러니까 지구는 변함없이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증명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 중앙 57회 동기 회에서 교우 유정원의 모친상 소식이 왔다. 이제는 세월이 그렇게 된 모양인지 부모님 타계 소식 아니면 자녀들의 결혼식 소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친상의 소식은 나에게 더 진한 슬픔을 준다. 내가 7년 전에 이미 겪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불현듯 email로 나마 위로를 하고 싶어서 보냈다.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누구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애도기간이라 바빠서 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원이는 곧바로 회신을 주었는데, 내가 놀란 것은 내 이름(이경우)의 “경”자가 한자로 “빛날 炅”이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유정원의 “밝을 晶” 자를 기억하고 있다. 아득하게 무슨 time machine를 탄 기분이었다. 45년 이상 완전한 연락의 단절이 이렇게 쉽게 연결이 되는 것은 참 경험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 참 좋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중앙고교 추억 시리즈 마지막 편인 고3 편을 오늘 천신만고 끝에 ‘탈고’를 해서 올려 놓았다. 이미 예상은 한 것이었다. 기억력을 더듬는 것이 이번에는 그렇게 힘이 들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노력을 하니까, 그 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이 하나 둘씩 살아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잊을세라 부리나케 쓴 것이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우리 교우 친구들이 이것을 보고 그들의 기억도 같이 합세를 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큰 기대는 못 한다. 우리세대는 알려진 대로 digital generation은 절대로 아니니까.

Hurricane Katrina: 허리케인 카트리나..5주년이 되었다. 정말 지독한 것이었다. 아마도 카테고리 3급 이었을 것이다. 5년 전 그날(2005년 8월 29일), 미국의 큰 도시 하나가 자연재해로 완전히 물에 잠겼다. 공상과학 영화 같은 데나 나올듯한 각본이 현실화 된 것이다. 예측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재해라서 사실 대비하기는 불가능 했을 듯 하다. 1800여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곳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흑인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사망률은 이런 것에서도 다른 집단과 비교가 되지를 않는다. 흑인 대통령은 나왔지만 아직도 그들이 갈 길은 먼 것인가.

8월 달, 지독한 더위였지만 그런대로 집 일을 한 결과도 있었다. 나는 현재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전적으로 맡고 있고, 나머지 식사의 dish wash또한 나의 담당이다. 처음에는 시간도 걸리고 기분도 찜찜한 것도 있었지만 습관이 되고 나니 사실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나도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는 만족감일지도 모른다. 집안 일이란 주로 handyman(일당목수일) 들이 하는 일들이다. 나의 carpentry실력은 조금 초보를 면할 정도다. 하지만 시간에 별로 쫓기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큰 이점도 있다. 올 여름의 major project는 역시 아래층에 laminate floor를 까는 일이다. 보기에 그렇게 쉬운 것이 손을 대고 보니 완전한 monster였다. 8월 중순까지 dining room이 끝이 났다. 그 다음을 계속해야 했는데 floor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손을 보아야만 했다. 결국 subfloor를 뚫고 들어가는 대공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며칠 전에 끝이 나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마루공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사실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른다.

오늘 아침 New York Times에 기고된 한 논평을 보았다. 저자의 이름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Paul Wolfowitz 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neo conservative그룹에 속하는 ‘매파‘ 라고 할 수 있다. 이 논평은 이락 전쟁이 일단 끝나면서 한국전쟁과 비교를 한 것이다. 결론 부터 말하면 철수를 하되 상당수의 전투병력을 남기라는 것이고, 한국전쟁이 휴전이 되면서 미군이 상당히 남아서 전쟁의 재발을 막고 결과적으로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 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말은 되는 이야기다. 문제는 60년 전의 전쟁이란 것과, 전혀 다른 지정학적, 문화적인 조건 등을 어떻게 감안할 것인가.

 

Obama and Aging…

Religion of Humanity…… 나에게는 아주 생소한 말이다. 아마도 처음 들어보는 용어가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Religion of God에 대응하는 말인 모양이다. Religion 하면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게 보통이니까 아마도 이 말은 religion을 비유법 정도로 쓴 것일 것이다. 최근 10년 동안 나에게는 ‘기피대상’으로 변해버린 Conservative ‘Political’ Magazine  중의 대표적인 the Weekly Standard 의 cover title에서 이것을 다루었다.

이 magazine의 ‘지독한’ 보수성은 인정을 하면서도 이들이 또 ‘종교’의 이름까지 쓰면서, ‘학문적 냄새’를 피우며 Obama를 몰아세운다. 하나도 놀랄 일은 아니나, 이렇게 종교와 정치를 연관시키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참 지독한 친구들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사상적인 보수파, 극우파 들은 humanity란 말을 싫어하는 것 같다. 한마디로 ‘신’을 빼놓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주제가 “The Roots of Obama Worship: Religion of Humanity finds a 21st-century savior” 로 되어있다. 이 제목이 사실 그들이 하고 싶은 “We hate everything about you, Obama“의 ideology를 암시해 주고 있다.

이 article의 내용은 아직까지 자세히 정독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읽어보아도 그 ‘정체’를 짐작케 한다.  저자 (James W. Ceaser: a visiting fellow at the Hoover Institution and professor of politics at the University of Virginia) 의 의도와 주장은 간단하다. 취임 일 년 만에 지지도가 80% 에서 50%이하로 떨어진 것은 ‘미국 건국역사 이래’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상과 현실’을 ‘착각’한 Obama의 정책에 잘못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일반국민의 환상을 만족시켜줄 희망은 주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힘’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물론 대학교수가 쓴 것이기에 이론적인 배경이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아주 확실히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 저자도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시민’이기에 자기의 정치적인 주관성으로 한쪽 ‘편’을 드는 것은 이해를 할 수 밖에 없는 듯하다. 하지만 ‘변화’를 갈구하는 다수의 유권자를 Obama ‘숭배자’로 몰아 부치는 것을 보니 그의 설득력은 많이 떨어진다. 조금 더 자세히 읽은 후 나의 생각을 더 정리를 해야 할 듯하다.

오랜만에 US News &World Report magazine을 읽게 되었다. Issue는 2010년 2월호인데…… 이게 조금 놀랐다. 나는 Time이나 Newsweek같이 weekly magazine인줄 알았는데 monthly라서. 언제 부터 weekly에서 monthly로 바뀌었나, 확실치 않다.  이 잡지는 아주 오래전에는 Time, Newsweek등과 비슷하게 경쟁적인 잡지였는데 언제인가 부터는 그 conventional format을 많이 바꾸었다. 조금은 과장적인 coverage와 표지로 바뀌었고 America’s Top 100 Universities같은 ‘경쟁을 유발’ 하는듯한 자극적인 기사를 즐겨서 쓴다. 그게 오랫동안 계속되니까 이제는 완전히 그들의 ‘상품’으로 둔갑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유의 기사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 ‘순위’ 가 각 학교나 단체의 ‘목표’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번 February issue또한 ‘눈에 띄게 튀는’ 표지와 기사특집이다. “How to Live to 100“..이렇게 눈에 띄게 만드는 제목이 또 있을까?  거기다가 빠지지 않고 America’s 100 Nursing Home을 곁들인다. 주제는 물론 장수하는 비결이겠지만 골골하게 오래 사는 게 아니고 ‘거의’ 젊은이 못지않게 ‘씩씩’하게 오래 사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런 유의 기사는 어디에서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건 major national magazine에다가 최근 issue이니까 조금은 흥미가 간다.   두 가지로 요약을 하면: reduced calories, moderate exercise 그러니까 아주 상식적인 것이다. 적게 먹는 게 동물실험으로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으로 이미 밝혀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적당한 운동이 여러 가지 ‘노인병’을 방지하거나 늦춘다는 것도 많이 연구가 된 것도 사실이다. 현재 나의 생각도 거의 이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