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Family 40th Anniversary

 

 

Dear Father in Heaven,

As we celebrate the fortie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our parish, we thank you for the gifts that you have given us. Most importantly, thank you for the gift of love that brings so many people from such different backgrounds together as one family.

Please help us to learn by your Son’s example to continue to love and care for one another so that we may grow and welcome others into our Holy Family.

We ask this in Your sweet name,

Amen

 

Holy Family statue
Holy Family statue

오늘 2013년 7월 10일은 우리가족의 제1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가 본당 창립 4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여 저녁에는 ‘성대한’ 기념 미사와 행사가 열린다. 우리 가족이 이 성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제 거의 15년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 집에서 불과 5마일인 관계로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운 parish가 된다.

원래 거의 30마일 떨어진 도라빌(Doraville) 한국 본당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이 우리의 본당이었지만 1990년대 초에 그곳에서 벌어지고 목격이 된 ‘기가 막히는’ 사건들에 식상을 하고 완전히 주저앉아 (냉담) 버렸다. 그 당시 대신 가까운 미국 본당에라도 나가야 했었지만 최소한 나에겐 그렇게 해야 할 절심함과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참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애써’ 얻은 신앙을 거의 무시하며 살 태세였고, 속수무책, 수수방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일관하며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지금 생각을 하면, 나와 연숙은 그런 것에서 의견을 달리했고 최소한 영세를 받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거나 돕지도 않았지만, 반대도 안 했다. 완전히 나는 ‘교회 business’에서 손을 땐 듯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연숙이 미국 본당 Holy Family 성당을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위기감을 느낀 연숙이 집 부근을 뒤지며 찾아 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같이 googling의 혜택도 그 때는 기대 못하던 때였으니까…

행동이 빠른 연숙은 곧바로 아이들의 신앙 절차를 ‘최소한’ 빠지지 않게 주말 미사엘 (나를 제외하고) 나가기 시작하고 작은 애 나라니의 첫영성체, 두 아이의 견진성사를 모두 완료하였다. 그 때 나는 ‘돈 버는 가장’의 핑계로 간신히 C&E (Christmas & Easter) 신자로 위태로운 신앙생활로 일관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Holy Family 성당은 우리 가족에게 다가왔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나의 ‘완전한 본당’이 되었다. 10년 이상의 냉담을 깨고 그곳에서 Pastor, Father Edward Thein께 고백성사를 보고 최소한 Sunday Catholic 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사실 가족들과 미사를 가더라도 나만 영성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은 그 때가 참 괴로웠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곳은 명실공히 우리 가족의 ‘안정하고 안전한’ 신앙의 피난처가 되어갔다. 덕분에 영어미사와 미국인 미사 문화도 많이 익숙하게 되고 미국 천주교와 그 흐름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서 나는 더욱 자신을 가지고 ‘진짜 본당’인 한국 순교자 성당으로 조금씩 더 관심을 두고 그곳으로 향한 먼 여정의 길을 2011년 가을 그곳 소속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함으로써 디디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미국본당에서 여러 해 받은 경험들이 씨앗이 되었다.

미국 천주교가 지금 경험하고 겪고 있는 시련들, 이곳에서 고스란히 보고 느낀다. 유럽계 가톨릭 세력의 수축과 히스패닉 계열의 급 성장, 아시아 계의 ‘가톨릭 역수출’ 등등으로 사실 미국 천주교의 입장은 무슨 큰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빨리 오는 듯 하다. 특히 연방정부의 급속한 교회간섭 정책, 대법원의 동성결혼 ‘묵인’ 등은 1970년대 초의 낙태 합법판결의 파장을 훨씬 웃도는 그런 위기감을 주고 있어서 새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앞으로의 사목정책의 중요성은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나와 연숙은 작년 사순절을 계기로 이곳 미국본당의 ‘매일 미사’를 참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일년이 훨씬 넘게 실행하고 있다. 암만 생각해도 이 ‘쾌거’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 졌는가.. 암만 생각해도 나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저, 안 보이는 ‘힘과 손’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설명만 되 뇌일 수 있을 뿐이다.

Holy Family 성당과 사제관
Holy Family 성당(left)과 사제관

이곳 미국 본당도 미국 천주교를 반영하듯 Irish, Polish로 대표되는 ‘급속히 쇠퇴하는’ 유럽계 가톨릭은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새로운 ‘피’는 역시 ‘다른 곳: 히스패닉, 브라질’로 대표되는 중남미계열과 열기가 느껴지는 아프리카 대륙, 뜻밖의 복병 아시아의 월남(베트남), 필리핀, 한국의 신자들이 그 고령화를 상쇄하듯 메우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white-power가 이곳에서도 역시 퇴조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미사를 가는 덕분에 이곳의 regulars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정신자들, 열심한 신자들인 것이다. 역시 여자의 숫자가 압도적이다. 이것은 절대로 놀랄 일이 아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신자의 숫자 (남자에 비해서)에 나는 처음엔 ‘그게 정상이다’라고 일축했지만 지금은 사실 곰곰이 생각하고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보기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자랑스럽던 남성 동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생명의 불멸성을 이미 알고 태어났단 말인가?

 우리가족은 비록 이렇게 두 본당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형태의 신앙생활 그 나름대로 장점과 특징도 없지 않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많은 가톨릭 한인신자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많을 듯 하다. 20여 년 전에 유일한 한인공동체였던 순교자 성당이 ‘90% 이상 망가졌을 때’, 우리는 choice가 별로 없었다. 계속 나갈 것인가.. 아니면 냉담을 할 것인가..

나와 같이 간이 큰지 못한 인간들은 가장 쉬운 방법, 냉담을 택했을 것이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택했다. ‘분열’의 참담한 파괴 성을 그때 절감을 했지만, 나의 평화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그때 backup shelter(다른 본당)가 있었으면 100% 냉담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다 역사가 되었다.

 Holy Family 성당은 현재 우리가 사는 East Cobb county에 많은 ‘비교적 안정된’ 한인들의 비공식 피난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30분 drive거리에 있는 한인 순교자 성당이 조금 멀다 싶으면 10분 거리의 이곳이 항상 우리를 맞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사람들도 익숙해지고, 정도 많이 들었다. 고정적(regular)인 한인 교우들, 물론 여기도 대부분 젊은 자매님들이지만 그들과도 많이 얼굴도 익숙해져서 진정한 ‘영혼의 고향’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혹시라도 안 보이는 얼굴이 있으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와 연숙에게 이 Holy Family CC는 신앙의 징검다리 역할을 많이 해주었고, 계속 해 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우리가 도라빌 한인 순교자 성당에 더 많이 개입이 되면서 조금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것은 정말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기에 더욱 ‘맡기고’ 살기로 했다.

Guest Blog: 김인호의 경영·경제 산책 24

울란바토르와 연변 체험에서 얻어진 메시지는?

2013.07.10

거짓과 거짓말은 불완전한 인간이 지닌 악한 심성의 산물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로 악함을 누르고 선한 쪽이 이기도록 갈고 닦으면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에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명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명예교수

2007년 몽골국제대학(MIU)에서 여름계절 학기에 경영학을 지원해 달란다는 요청을 받고, 필자와 집사람이 경영전략과 기업윤리를 커버하는 과목을 공동으로 맡고 미국CPA 소지자로 회계학 전공의 경영학 박사인 필자 후배가 국제경영을 맡아, 집중강의로 진행되는 특별학사(學事)프로그램을 위해 울란바토르에 3주간 체류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몽고음식이 입에 맞질 않아 우린 비교적 자주 한식식당엘 가곤 했는데 당시 한국관광객이 많았던 탓이었는지 그곳에 의외로 한국식당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단골식당에서 식사하던 어느 날 15여명의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밀어 닥쳤다. 그 식당에는 이런 단체손님 때문이었는지 평소 때에도 홀 서비스를 맡고 있는 몽고아가씨 종업원들이 10여명 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날 한참 주문을 받느라 씨끌 뻑정했는데 주문이 끝나고 얼마 지나 음식이 나오자 또 한번 난리가 난 듯 큰소리도 나고 고함소리도 터지고, 식당주인 아주머니가 연방 미안하다며 주문한 손님들의 성질을 누구려 뜨리려 애쓰고 있었다.

필자는 어인 일인가 흥미롭기도 해서 가만히 그 소동을 지켜보았다. 소동은 손님 몇 사람이 당초 주문 내용을 바꾸는 바람에 주문 받은 몽고 아가씨가 얼떨떨해져서 주문한대로 음식이 안 나오고 딴 게 뒤죽박죽 나오다 보니 모처럼 여행 중에 특별히 먹고 싶었던 기대가 깨지는 바람에 손님들의 불평이 터졌던 것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손님들이 빠져나간 다음 필자가 그 여자주인에게 왜 그런 실수가 일어나느냐니까 이런 경우가 여기서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단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2007년 당시 몽고사람들은 어른이건 애들이건 머리회전(回轉)훈련이 별로 되어 있질 않아서 국내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도 하는 머리 회전이 여기서는 제대로 안 된단다. 그래서 자기도 처음엔 몽고 종업원들이 국내와 같겠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여러 번 낭패를 보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시킨 것은 시킨 대로 아주 잘 하는데, 한번만 변경하면 그때부턴 걷잡을 수 없이 헷갈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몽고인들이 대체로 센스가 약하고 집중력이 덜하면서도 정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15년 가까이 그곳에 살면서 느낀다는 여주인의 설명이었다.

 

정직(正直)이라는 말이 나오니, 필자 후배교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논문심사 중에 있었던 일이라며 들려주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구두(口頭)심사 때 한 심사위원이 던진 질문에 잘 모르면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둘러대고 있는데 갑자기 ‘너, 거짓말쟁이(You are a liar)!’ 하며 고함치더란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박사학위는 이제 물 건너가는구나 생각하며, 지체 없이 잘못을 인정했더니만 ‘그래, 자네 이게 정직한 거야’ 하더란 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박사학위를 받고 상당 시간이 흘렀어도 그때의 그 경험은 그의 일상에서 늘 정직하자는 것이 생활신조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향수(鄕愁), nostalgia..

nostalgia, 노스탤지어1, 향수(鄕愁).. 사전2을 보면 이것의 뜻은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정도가 된다. 그렇게 힘든 뜻이 절대로 아닌 것이 누구나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가 ‘애독’하는 New York Times, the 신문에 ‘향수, nostalgia에도 과연 바람직한 것이 있는가?‘ 란 제목의 기사가 나의 눈을 끌었다. 이 제목을 보면 우선 향수란 것은 원래 ‘바람직하지 않은 것’ 으로 암시가 되어있고 그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향수, nostalgia란 용어는 의학적인 것도 있어서, 이것은 분명히 disorder (장애 障碍) 에 속하고 따라서 그에 따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의 어원은 ‘망향심 望鄕心’의 그리스어 nostos와 고통이라는 뜻의 algos가 합성된 말로서 17세기 어떤 스위스 의사가 ‘전쟁 중에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군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병’ 을 뜻하는 말로 시작이 되었다고 했고, 이후로 이 ‘병’은 부정적인 뜻으로 이해되고 쓰이고 있다.

향수(병) 연구 Constantine Sedikides
향수(병) 연구
Constantine Sedikides

이 기사의 ‘주인공’은 영국에 사는 그리스(희랍)계 (사회)심리학 교수 콘스탄틴 세디키데스 (Constantine Sedikides, University of Southampton, U.K., Ph.D Ohio State University, 1988) 인데, 그리스에서 대학을 졸업, 곧바로 미국 유학으로 사회심리학으로 연구를 계속, 현재는 영국의 University of Southampton에 재직하고 있는 사회심리학계의 권위자이다. 이런 배경이면 젊었던 시절을 포함해서 고향을 두 번씩이나 떠난 셈이고, 고향의 그리움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사회심리학적으로 파헤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날 고향 생각에 빠진 그를 보고 주위에서는 ‘우울증’으로 우려를 했지만, 그는 사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고 그가 느낀 것은 ‘고통적, 병적’인 것이 아닌 ‘포근함, 심지어 즐거움’에 가까운 것들이었고, 과연 고향과 지나온 과거가 앞으로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향수(병)이라 것은 꼭 부정적인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과연 향수(병)이 과거에 짓눌려 살아야 하는 고통인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를 사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주인공 자신의 느낌으로 출발된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학문적, 통계적’으로 10년 이상 연구가 되어서 그 결실을 맺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 그가 이런 향수(병)에 걸렸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이런 향수적 감정은 내 존재의 뿌리와 연속성을 느끼게 해 주고, 내 자신과 주변과의 관계도 긍정적으로 보게 해 주었으며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였는데.. 과연 나만 그런 것일까.. 하는 선에서 출발을 했다고 한다. 연구의 결과는 그가 느낀 그대로였다. 그 골자는:

향수적 감정은 고독과 지루함, 불안함과 맞서 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자신을 더 관대하고, 포용적이고 더욱 참게하며 특히 부부들은 공통된 향수, 기억 감정을 나누며 더욱 가까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 이 감정은 글자 그대로 우리를 훈훈하게 해 준다. 물론 고통스럽던 기억도 동반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이 향수감정은 우리의 인생을 더 의미 있게 보게 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도 덜 무섭게 느끼게 한다.

 이 향수(병)이란 것은 지역적, 연령적 차이가 거의 없이 또한 생각보다 더욱 자주 겪게 된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예전, 특히 19, 20세기에는 이 감정(‘병’)이 실향민, 이민자들이 특히 많이 겪는 ‘이상 증세’라고 분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결과로는 이것은 ‘누구나’ 겪는 훨씬 보편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친구, 가족, 명절 휴일들, 결혼, 노래, 석양, 호수.. 등등의 추억으로 더욱 나타나고 특히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은 항상 ‘좋은 주인공’의 역할을 했다고 기억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이상 이런 경험을 하고, 거의 반수 이상이 일주일에 3~4번 겪는다고 한다. 특히 고독을 겪는 사람이 더 자주 겪는데, ‘향수 감정’이 그런 고독과 우울의 고통을 덜어 주며 그런 데서 빨리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로 향수가 그렇게 ‘좋은 면’도 있다면, 이것을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가장 빠른 방법 중에는 추억의 음악을 듣는 것이 있고 이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하며 정말로 이 ‘추억의 음악’ 효과는 대단해서 실제로 몸 자체가 따뜻해 진다고 한다. 간혹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하게 되면 ‘인생의 연속성’이 끊어지는 위험도 없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 오히려 과거와 현재,미래를 더욱 더 연결시켜주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연구 팀의 일원인 Dr. Routledge는 “향수 감정은 우리의 ‘실존 감’에 탁월한 도움을 준다. 내가 아끼는 귀중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그것이 우리가 의미 있는 생을 보내는 값진 한 사람 임도 일깨워 준다. 또한 많은 향수 감정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감정도 잘 처리한다.” 고 보고를 했다.

 다른 흥미로운 것은 이 ‘향수 감정’의 빈도나 심도는 젊은이에게 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떨어지다가 다시 올라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젊은이들의 경우,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그 이전의 시절을 회상, 음미하며 건강한 변화를 추구하며, 가족과 보냈던 크리스마스, 애완 동물과 학교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이럴 때 바람직한 것은 좋은 추억거리가 많을 수록 좋고, 이것은 거꾸로 살아가며 좋은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향수 감정을 잘 ‘이용’하려면, 가급적 기억 속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를 하며, ‘그때가 좋았지.. ‘하는 ‘함정’을 피해야 한다고 한다. 그 대신, ‘존재적인 방법’으로 그 때의 일들이 나의 현재에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도 극단적인 것만 피하면 ‘추억 향수의 감정’을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병적인 노이로제나 극단적 성향만 없다면 이런 향수적 감정은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 일주일에 2~3번 정도 빠지는 것도 좋고, 이것을 우리가 경험으로 번 값진 상품이라는 것도 기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다.

 이런 기사를 읽으며 나는 또 한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몇 년 전에 이런 ‘we didn’t know then..‘ 류의 ‘연구 보고기사’ 중에 ‘내성적인 사람들의 시대’ 란 조금 걸맞지 않은 제목도 있었고 나는 ‘신나게, 열심히’ 읽었다. 내가 내성적인 사람 중의 ‘대표’이기에 그랬을까? 생각보다 더 많았던 ‘동료 내성적 인간’들을 알고 흐뭇해 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내성의 장점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회 심리학’적인 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지역간에도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런 변화는 큰 것이 못 된다. 한마디로 인간은 대개 ‘공평’하다고 할까.. 그런 보편적 경험적 진리를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면 지금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이것도 ‘안도감’이었다. 일방적인 사회적 압박에 못 이겨 ‘나는 향수 감정 같은 것 별로 없다’ 하며 살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과거에 매달리는 ‘현재가 불행한 한심한 인간’이란 딱지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이 말하면, 나는 위의 연구 결과에 있듯이 일 주일에 몇 번씩이고 그런 감정을 느끼고, 어떨 때는 즐기고 산다. 그렇다고 나의 현재가 과거에 비해서 덜 행복하거나 심지어 비참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연구 보고와 같이 나는 조금 우울해지면 ‘일부러, 자연적으로’ 향수 감정을 이용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 자신 성격의 일부가 된 것 같다. 그런 ‘추억적 행복’도 없다면 아마도 위의 연구결과에도 있듯이 괴로운 감정을 더 느끼며 살았는지 누가 알랴?

 그러면서 나의 blog을 찬찬히 뒤돌아 보면, 역시 나는 ‘과거의 좋은 추억’들을 적극적으로 총동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현재를 더 의미 있게 ‘견디는’ 영양제가 된 것일까? 주변의 어떤 ‘골프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친지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왜 과거에 집착을 하느냐?‘ 라는 간단한 반응이다. 과연 그는 그의 ‘아름다운 추억’을 즐기지 않는 것일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나는 조금 평균이상으로 ‘향수 감정’을 겪고 있고, 그것으로 나의 ‘아픔’을 잊으며, 그것이 현재를 더 건강하게 살고 미래를 준비하는 원천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 어차피 원어 발음이 힘들면 간단하게 그냥 노스탈자 하면 더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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