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Monthly Archives: July 2021

거의 제시간에 일어나면서 ‘아~ 어제는 조금은 이상한 날이었지.. 나의 몸이 조금 아프지..’ 하는 순간적 생각을 했다. 그 이상한 기분이 오늘 아침은 조금 다른 듯하고, 어제 저녁부터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오른쪽 어깨쪽지[나는 쭉지로 읽는다] 의 묘한 아픔도 조금 완화가 된 듯해서 조금 가볍게 일어났다

Ozzie도 기분 좋게 나를 반기고 온통 물기로 가득한 뒤뜰로 둘이서 걸었다. 한결 가벼운 느낌이 드는 토요일 아침, 이런 기분이 계속되기를 빌면서… 오늘은 맑고 덥다고 했지..했던 일기예보를 상기한다. 그래, 중복이 지났어… 중복다운 더위는 그대로 감상을 해야지, 불평하지 말고…

 

 Anger, Envy, Proud 이 구절이 자꾸 머리에 떠오른다. 이것이 나에게는 어떤 것인지… anger… 밖으로 튀어나오는 감정을 잘 다스린다고 자부하던 나도 이제는 자신이 없다. 비록 물리적인, 눈에 뜨이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숨길 수가 없을 때가 수도 없이 많아지고 있다. 그것도 ‘야비하게’… 싫다 싫어. 나의 문제는 ‘언어, 말’로 자신 있게 표현을 못하는, 안 하는 데 있다. 유일한 해결책은 ‘화’ 그 자체를 없애거나 줄이는 수밖에 없다. 원인부터 제거해야 한다. 왜 화가 났는지, 화를 안 낼 수 있는 길을 결사적으로 찾는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나의 본성이요 성격인 것이다.

Envy…  좋은 것, 나쁜 것… 어떤 것인가? 진정으로 내가 되고 싶은 것,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재물이나 세속적인 것들이면 나도 예외일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 탓인지 많이 포기한 것들 투성이여서 큰 문제는 아닐지도. 살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살아야 했던 사실에서 보기에 모든 것을 성취하면서 산 사람들을 지나치게 부러워 함은 지극히 정상일지도..

Proud…  나에게 자랑스러운 것들… 사회적으로 법을 따르며 사는 양순한 시민으로 살려는,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 하느님 공동체의 일원으로 할 일을 하는, 봉사단체를 통해 주위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려 사는 삶.. 이런 것들은 물론 자랑스럽다. 그 정도가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도를 지나친 proud가 나에게 있을까, 잘 모르겠다.

 

Ozzie와의 일상, 나에게도 삶의 활력을 주는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산책, 이것을 해야 나도 마음이 놓이고 그 녀석도 마음 놓고 푹 쉴 수가 있다.  이제는 보름이 훌쩍 넘어간 동안 아주 편한 여름휴가를 그 녀석은 즐긴다. 다음 주까지 하면 25일 이상을 우리 집에서 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좋은 일’ 중의 하나다. 새로니 3식구 조금은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오늘도 어제의 큰 화두가 이어진다. 연숙이 C, S 자매들과 긴 통화를 한 결과로 우리가 조금 더 자세히 크리스티나 자매의 임종전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랄만한 소식은 없었지만 우리의 의문은 조금 풀린 셈이다. 우리에게 그다지 큰 ‘[나쁜, 서운한] 감정’은 없었던 듯 보이는 것인데, 사실 그럴만한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시 한번 이 자매의 독특한 자존심, 아니면 ‘anger, envy, pride’ 중에서 envy 쪽의 결함을 보는 듯했다. 아픈 사람에게 무슨 큰 고매한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보통사람과는 다른 ‘신앙인’이 아니던가? 그런 신심의 혜택을 많이 누리지 못하고 간 듯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자아집착 의식이 끝까지 높은 곳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것을 보면 나는 거꾸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인데…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몸이 아파 죽겠는데 그것이 쉬울까, 모르겠다.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신문인의 이야기, 나이는 분명히 나보다 많을 듯한데… 갑자기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후에 쓴 깊이 있는 수필이었다. Boston Globe 신문에 게재된 것, 생각보다 자신의 신상을 솔직히, 자세히 밝히는 필자의 용기가 나는 정말 부러워진다. 그런 솔직함, 그것을 나는 부러워하고 나의 최대의 결함이라고 고백한다. 솔직함, 그것을 나는 나의 ‘개인적 일기’에서 문자화 할 수가 없고, 그렇게 현재까지 살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사실을 나는 내 자신에게 조차 고백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노력할 것이다. 나에게 조차 숨기는 사실들을 모조리 밝히려고 기를 쓸 것이다. 언제? 모른다, 오늘은 자신이 없고, 내일도.. 모레도… 하지만 올해 안에… 노력해 보고 싶다. 내 자신의 모습을 내 자신에게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진짜 모습을 모두에게.. 모두에게…

 

비가 매일 한차례씩 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부수적을 모든 초록색 식물들이 무섭게 자라는 것은 크게 반갑지 않다. 먹을 것이나 꽃나무들은 문제가 없지만 소위 말하는 ‘잡초’들이 문제다.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잘 자랄까? 이것을 가만히 놔두면 미관상 집의 ‘가치’가 떨어지니 정기적으로 깎아야 하는데 이렇게 더운 여름, 특히 햇볕이 쨍쨍한 오늘 같은 날은 정말 힘이 드니.. 남들처럼 gas power, self-propelled 가 아니고 electric cord를 일일이 끌고 다니는 것, 솔직히 주위에서 보면 내가 불쌍해 보일 것 같다. 하지만 air, sound pollution으로 주위를 괴롭히는 그들이 나는 더 불쌍한 것이다. 문제는 나이다, 나이… 언제까지 이런 육체적인 ‘노동’을 할 수 있을까? 아~ 10년만 젊었으면~ … 죽음이 화제인 요새 며칠, 나는 어떻게 임종을 맞이할 것인지 조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의 멘토..’ 교정, 재독을 보면서 ‘이냐시오’ 편에서 다음의 글에 관심이 간다. 이냐시오 영성의 출발점이라고 할까..

병상에 갇힌 이니고는 한 친척에게 책을 부탁했다. 그가 건네준 책은 신심 서적뿐이었고,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성인들의 삶에 매력을 느끼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도미니코 성인이 할 수 있었다면 나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게다가 하느님을 위해 큰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평화로운 느낌이 밀려들었다. 그는 여기에 ‘위안’이라는 낱말을 썼다. 반면에 군인으로서 성공하거나 어떤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상상을 하며, 전에는 뜨거운 열정이 북받쳤는데 이제는 ‘씁쓸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그는 이 씁쓸한 느낌과 위안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봉사의 길로 이끄시는 손길임을 점차 알아차린다. 이 평화로운 느낌이 하느님이 자신을 당신께로 가까이 끌어들이시는 손길로 감지한 것이다. 이 깨달음은 그가 영성 생활에서 ‘식별’을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는 길로, 이냐시오 영성에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올해 이냐시오 500주년을 맞이하는데, 이런 글을 읽으면 그 긴 멋진 역사도 이렇게 놀랍게도 간단한 계기가 원류가 되었다는 사실, 그것도 ‘책’에 의한 것, 등등은 아주 친근한 이야기다. 그래 책에 의한 것, 물론 요새는 영화나 인터넷 등등도 이런 것을 가능케 할 수도 있겠지만 제일 확실한 것이 책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책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런 세계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이 그렇게 자주 올까? 그것도 나에게? 하지만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그런 번쩍하는 영감을 주는 글귀를 나는 찾고, 기다린다.

위의 글에서,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이 나온다. ‘식별’, 바로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는 것, 와~ 하지만 이 이냐시오 영성이 그것을 도와 준단다. 그것을 나도 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나는 예수회, 그것도 James Martin신부의 책을 몇 권씩이나 사서 읽는다. 이런 노력이 ‘탈 레지오, 후 레지오’ 시기에 나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도록 할 것이다.

 

처음으로 근육통의 귀찮음, 괴로움 같은 것을 경험한다. 이것도 나이 탓인가? 아무리 근육을 많이 썼어도 이렇게 아픈 것을 보면 단순히 근육이 피곤한 것이 아니고 어디에 근육이 뭉치거나 뒤틀렸는지도 모른다. 남들로부터 수없이 들어온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저절로 낫는 것인가? 특별한 약이 있나? 현재 바른 쪽 어깨 죽지가 제일 아픈 것을 보면 그곳이 문제점인가? 게다가 오늘 그쪽의 근육을 많이 또 썼으니, 그것이 더 나쁠 것일까?  현재 감기기운으로 심란한데다가 이것까지… Tylenol이냐 Theraflu냐 망설이다가 후자로 택했다.

2021년 summer reading 목록 중에서 제일 빨리 독서/필사가 끝난 책이 예수회 America magazine 편집장 James Martin신부의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원제: My Life with the Saints, 2006)’ 이다. 이 책이 최근에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닌 듯 싶다. 몇 개월 전에 Martin fever로 이름한 나의 초 超관심 기간 중에 이 신부의 책 4권을 거의 한꺼번에 산 적이 있었다. 그것들을 천천히 이것 저것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그의 문체와 지적 철학에 조금 적응하려는 의도였다. 이 예수회 신부는 news media상에서 가끔 ‘지나친 진보적 신부’라는 비판을 받는 것 외에는 별로 큰 관심을 끈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속단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결국은 Bishop Robert Barron에 못지않은, 아니 버금가는 미국 가톨릭 [거의] 차세대 최고 지성의 거목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연숙과도 나누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벌써 그분의 책 몇 권을 이미 읽었던 과, 이 책이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교리반 시절 선물로 받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한국어 번역본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이었다.

이제까지 성인전 종류의 책은 나에게 별로 손이 가지 않은 것들이었다. 기억 속에서도 그런 책들은 우선 오래된 낡은 책들, 하나같이 고통을 지나치게 묘사한 것들, 감히 다다르지도 못할 인간의 능력을 넘은 초인간들, 난해한 고유명사 투성이의 조잡한 번역… 등등으로 나는 가급적 그런 책들을 피하며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도 별로 선뜻 손이 안 가는 책이었는데, 이번에는 ‘이제는 친근한 모습의’ Martin 신부가 쓴 책이라는 것에서 느낌이 아주 달랐다. 조금은 ‘초현대적, 초이성적, 심지어 과학적’인 접근을 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전통적인 고리타분 하고 녹 냄새가 풍기는 그런 성인전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바로 나를 위해서 쓴 책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이 책의 원제는 ‘성인과 함께한 나의 삶, My Life with the Saints‘ , 하지만 성찬성[역자] 번역본은 ‘나의 멘토 나의 성인’, 왜 멘토란 말을 넣었을까?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성인’이란 말은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성인은 물론 그 외에도 성인 같은 삶을 산 사람들[토마스 머튼, 도로시 데이 같은]도 포함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그 ‘성인과 비슷함’을 멘토 mentor 란 단어로 표현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16명의 성인, ‘예비, 준’성인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의 특징,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 모두 Martin신부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 으뜸으로 다루어진 ‘성인’이 바로 토마스 머튼 트라피스트 수사신부님인데, 솔직히 나는 그런 사실에 아직도 동감을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화장실에서’ 몇 년간 읽었던 그의 대표작 Seven Storey Mountain 이란 자서전이 왜 그렇게 수많은 예비신부들의 ‘고전적’ 필독서가 되었는지 쉽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이유는 이 책은 솔직한 고백록일지는 모르지만 요점을 제외한 ‘군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 웬 고유명사들이 그리도 많은지, 본인에게는 익숙한 표현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한 것들인데 알고 보면 그런 것들이 모두 불필요한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머튼은 절대로 겸손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실망까지… 그래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99% 틀렸을 것이라는 것 [사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Bishop Barron과 Father Martin 모두가 그 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마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토마스 머튼과 그 칠층산을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마틴 신부의 글은 다른 각도로 그 책을 재조명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마도 다시 그 책을 읽을 때는 조금 더 겸손한 자세로 읽게 될 지도 모른다.

 


참된 자아

 

나에게 있어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화와 구원의 문제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와 같다.

 – 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대학에서 미시 美詩 American Poetry 강의를 들을 때, 월트 휘트먼을 처음 소개받았다. 우리 젊은 교수는 휘트먼 예찬자이자 연구가였다. 그녀는 시인의 전기를 써서 호평을 받았다. 어느 날 그녀는 만일 우리가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거든 <나 자신의 노래 Song of Myself> 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하라고 말했다.

 

내가 나 자신과 모순되는가?

그래, 참 좋다. 나는 나 자신과 모순된다.

(나는 크고, 내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앉아 있나니.)

 

휘트먼은 이 시구로 또 다른 시인이자 신비가요, 수도승이요, 예술인이요, 평화 운동가요, 사제요, 영성 대가요, 교회 일치 주창자요, 선사 禪師 요, 성인인 토마스 머튼을 어렵지 않게 변호할 수 있었다.

머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모순이다. 자신의 주변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봉쇄 수도회 수도승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데, 그가 바로 트라피스트 수도승 머튼 루이스 OCSO the 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 (엄률 시토 수도회) 신부다. 떠돌이요 타고난 여행가이면서 정주 서원을 하고 미국 켄터키 주 외딴 산중에 터를 잡은 겟세마니 성모 대수도원에 정착하기로 작정한 사람. 자진하여 순명 서원을 하고도 수도 생활 상당 기간을 자기 수도회의 장상들과 부딪히며 보낸 사람. 자신의 소명에 반하지만 [필사주: 反인가, 반대로 魅惑인가? 정말 성의 없는 번역]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사람. 동양 종교들에 매혹당한 신심 깊은 가톨릭 회심자. 명예직과 훈장을 싫어하는 (아니면 싫어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려 노력하는) 저명한 문필가. 하루는 결코 한 줄도 더 쓰지 않겠다는 결단을 글로 쓰는가 하면, 며칠 후에는 출간된 자신의 또 다른 저서를 보고 느낀 기쁨을 글로 쓸 수 있는 사람. (그는 주목할 만한 한 일기의 도입부에서, 새로 나온 자신의 책 표지를 싸고 있는 올이 굵은 삼베가 당시 맨해튼의 현대식 나이트클럽에 사용된 천과 똑같았다는 점에 은근히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역설들, 이런 휘트먼풍의 다중성은 머튼을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변화무쌍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이르는 여정을 소상하게 기록한 1948년도에 출간한 회고록 <칠층산>은 사리를 아는 머튼조차도 예견하지 못한 출판계의 기현상이 되었다. 이 책은 수백만의 독자에게 관상 기도를 소개했고, 전후 미국 수도 생활의 쇄신을 예고했다. 평화에 관한 그의 글들은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의 전조가 되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자극은 지쳐 있던 한 미국인이 그리스도 신앙을 재정립하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책은 나를 재정리하는 데도 보탬이 되었다.

<칠층산>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알려면, 내가 머튼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얼마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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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일곱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영 대학 와튼 스쿨에서 수강했다. 내가 경영학을 공부하기로 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거니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는 이해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미술처럼 신나게 공부한 과목은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직업으로는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보았다. 일례로 나는 프랑스어를 무척 좋아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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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Pandemic 치하에서도 역경을 이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던 이 선인장,  오늘 피어난 것은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난산 難産의 모습이 아닐까… 생명의 신비는 이곳에도 역력하다. 달포 전에 며칠간 ‘다산 多産’을 자랑한 후 조용하더니 이렇게 마지막 꽃봉오리를 힘들게 보여준 친구, 내년 여름을 다시 기대한다.

 

15분을 벌었다. 아침 radio clock시계는 분명히 59분 비슷한 것을 보았는데 일어나서 일어나 나와 보니 6시 45분도 채 되지 않은 것이다. 나의 시력이 떨어졌나… 하지만 횡재다, 15분이 어디냐?

모처럼 어젯밤에는 HF[Harbor Freight] cheapo ear plug을 끼고 잤는데, 역쉬~ 이것이 나에게는 최고다. 편한 잠을 잔 것이다. 이제는 noise machine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이것이 맞는다. 알맞고 편하게 소리를 차단 하고,  ‘비싼 것’과 다르게 후유증이 하나도 없다.

어젯밤에는 망각의 선상에서 오고 가는 꿈에 시달렸다. 고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 분명하지만 심리적으로 괴롭힌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잡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많지만 이것이야말로 ‘확실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case다. 왜 이럴까? 하루 종일 나의 기억력을 동원해서… 이것도 나의 다른 꿈 ‘악몽류’ [나의 시험걱정, 집이 수해로 무너지는.. 등등]중의 한 종류로 생각된다.

 

어제부터 뉴스에 보이는 ‘개XX [a.k.a Donald]’에 관한 것, 현역 합참의장 정도되는 사람의 주장에 관한 것, 우리 모두의 추측과 비슷하다. ‘천하역적’ 개XX가 선거패배 이후 쿠데타를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나는 은근히 놀란다. 이것,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미국의 최고위 군장성의 우려였다는 것은 정말 놀랄만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 개XX 가 그 정도로 미친XX는 못 된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위인도 못 되는… 그저 ‘세기의 SOB, 개XX’ 정도나 되는 쓰레기 급의 인간 정도가 아닐까?

 

쉴 수 있는 편한 금요일이 오늘은 다시 일을 하루 더 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상관없다. 사실 마음껏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진 것 뿐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점점 귀여워지는 ‘노랑머리’ 손자녀석과 있는 것이 왜 힘만 든단 말인가? 읽고 싶은 책을 편하게 읽을 짬이 없는 것, 그것 하나가 문제일 뿐이다.

새로니의 condo가 드디어 팔렸다고 한다. 참, 어렵게 노력해서 장만한 그 애의 ‘노력의 결정’이 바로 그 물건이었기에 결과적으로 그 노력에 보상을 보게 된 셈이다. 그 애의 financial eye는 상당한 것이라는 것을 이번에도 확인하게 된 셈이다. 이제 결혼으로 더욱 안정적인 ‘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가상하지만 그와 더불어 다른 쪽[higher perspectives] 의 눈도 서서히 뜨게 되기만 기도한다.

나라니 카톡, 아침은 McDonald’s 를 사 온다고, 산이 것만 준비하라고… 어제 Publix에서 우리 grocery를 한 보따리를 사다 주었는데… 가끔 낮에 75도로 맞추어 놓은 위층 thermostat가 생소하기도 하고 했지만 그래, 그것은 나의 오랜 세월의 습관이란다. 나의 이 traumatic habit은 역시 ‘원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서, 정당화할 자신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찌는듯한 더위는 분명히 아는데, 조금만 움직이면 온몸이 물기로 휩싸인다. 그래 이것이 바로 습도의 역할일 것이다. 땀이 증발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과학이다. 작열하는 태양의 복사열이 거의 양반인 요즈음, 아예 땀으로 젖는 것 나쁘지 않다. 이것은 fan으로 충분히 조절을 할 수 있으니까…

오늘도 걸었다. 같은 코스로… 로난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특별히 힘든 것이 있다면, 이 녀석 조금 자라서 그런지 말을 듣지를 않는 것이다. 대부분이 이것 저것 마구 만지는 것, 이것은 NO란 말로 잘 안 통하고 녀석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것이 나는 잘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육아 기술이 아닐까? 새로니, 나라니 시절에 물론 나는 전혀 모르고 지냈기에 생소한 기술이다. 아이들 키웠던 엄마들의 노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아빠들, 돈은 번다고 하지만 사실 공짜로 아이들을 키운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swimming pool key card 를 사용할 때가 왔는데, 역쉬~ 모든 일에는 이렇게 hiccup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구나.. 이 card 를 지난 6월 초에 동네 home association 의 ‘봉사자’에게 받았는데 그 동안 쓸 기회가 없었다. 요새는 확실하게 믿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것조차 문제가 될 줄이야. 나라니, 로난, 연숙이 갔더니 ‘빨간 불’만 들어오더라고… 허~ 무슨 일을 이렇게 한단 말인가? 부리나케 연락을 했더니 몇몇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곧 해결하겠다는 text가 왔으니… 이번에는 가서 test를 해보는 것이 안전할 듯하다. 수영장에 들어갔던 소감은 아주 좋았다고… 그렇다면 나도 한번…. 하는 생각이 든다. 서늘한 때 가서 책이라도 볼 수 있다면…

 

오늘 밤에도 나에게는 드문 일, Ozzie와 같이 couch 에 누워서 ‘big screen TV’를 보았다. 어쩌면 이것이 그렇게도 생소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한가지 … 이런 것은 정말 시간이 우습게도 빨리 흐른다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아마도 소위 말하는 couch potato가 되는 것이다. 게으름의 상징… 최소한 나는 그런 것은 피하며 산 것, 하지만 대신 relax는 잘 못하며 산 것은 아닐까? 일장일단이 있는 것, 관건은 어떻게 중용지덕을 지키는가 하는 것이겠지. 이런 식으로 나가면 PC에서도 Youtube에 빠질 수도 있다. 오늘 밤에도 거의 한 시간을 이것으로 시간을 허비한 것, 정말 소용없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다. 조심, 조심…

 

신록의 계절 7월, 그것도 첫날… 그래 칠월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아니 떠올라야 할 것, 독립운동가, 시인 이육사 李陸史 님의 대표작 시, ‘청포도’다. 그래, 이 청포도의 멋과 맛이 바로 칠월인 것이다. 아마도 그 옛날 시골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 시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으로 느낄 듯하다. 공해에 찌들었던 옛날 60년대 서울의 추억에서 이 청포도는 한번도 맛을 볼 수 없었던 그림의 떡이었지만 이곳 우리 집에는 그런대로 볼 수도 있고 맛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초록색이 천지를 덮기 시작하는 칠월 달에…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오늘 아침에는 극히 드문 예로 연숙이 먼저 일어나서 침실을 나갔다. 거의 1시간이나 일찍이… 웬일일까? 혹시 또 불면 현상? 아니었다. 잠을 너무 잘 잤다고… 휴~~ 감사합니다. 습기로 가득 찬 대기권, 비록 끈끈한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관없다. 기온이 알맞게 낮아서 시원한 것이다. 어쩌면 이런 dream weather가 계속되는 것일까? 감사합니다.

이번 일요일이 Independence Day, 그래서 월요일은 휴일이다. 우리에게 휴일이 따로 있나, 매일이 그런데…  교성이 말대로 휴일의 즐거움이 사라진 지 수십 년… 그 기분을 살리려 기를 쓰지만 쉽지는 않다. 그래도 어제 오늘부터는 나도 같이 놀고 싶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점점 다가오는 새로니 아기 출산 때문인지 조금씩 나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조금씩 느낀다. 그것이 정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고생, 놀람이 없는 출산을 하기를 기도하지만… 그래도… 기도밖에 없다, 이런 때에는…

내일 서 아녜스 부부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이 분명히 취소가 되었기에 이번 휴일 주말은 주일미사를 빼놓고는 완전히schedule- free가 되었지만, 그래도 크게 다를 것이 없을까? 왜 이렇게 갑자기 심심한 느낌이 드는 것이고, 심지어 외로움이 엄습하는 것일까?  또한 ‘young senior’의 친목단체 등대회 사람들도 그립고, 무언가 그립지만 쉽게 수시로 손에 닿는 친구가 없으니… 이것이 외로움일 것이고, 우울한 감정일 것이다. 오르락, 내리락, 참 조화로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인생은 항상 이런 것인가?

 

 

Lewis’s Baaaak!  C. S. Lewis가 돌아오고 있다.  전에 마지막으로 내가 심취했던 Lewis는 언제였는가? 그것은… 찾아보자… 내가 사서 보았던  Lewis 저서들의 표지 뒤에 기록된 나의 친필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The Joyful Christian (127 Readings) – 11/9/2013 (순교자 성당 예비자교리반, at the Conyers Monstery)

Mere Christianity – 4/9/2015 (Lewis Fever!)

C. S. Lewis & Mere Christianity (Paul McCusker) – 4/9/2015 (Lewis Fever!)

그러니까… 2013년에 첫 번째로 읽기 시작한 셈이지만, 본격적으로 심취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4월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6년 만에 다시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지난 6년 동안 그에 대한 기록영화 등은 가끔 YouTube에서 보기도 했지만…

이번에 구입한 것은 정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신간 중의 신간인데다가 그의 저서 중 The Abolition of Man이란 거의 논문 급의 책을 주해한 것이고 bonus로 이 원서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또한 소위 ‘읽기 어렵다는 책’에 도전하는 것, 해 볼만한 것이 아닐까, 더 머리가 굳어져가기 전에… 이번 여름에 이것에 한번 도전해 보자….

 

만 이틀이 걸려서 ‘나의 멘토…’ 중에서 ‘마더 데레사’편의 독서, 필사가 끝났다. 데레사 편을 읽으면서 Martin신부의 견해, 느낌은 내가 100% 동감하는 것들이었다. ‘사랑으로 남을 돕는 일’이 주는 진정한 기쁨에 관한 것이다. 내가 어찌 이것을 모르랴? 지나간 10년 동안 내가 경험했던 갖가지 봉사활동이 나에게 주었던 것은 진정한 ‘중독성 있는’ 기쁨이었다. 그것을 지나간 몇 년 동안 나는 서서히 잃고 사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큰 아픔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직접적인 이유는 사회적 여건, 그러니까 Pandemic에 의한 것과, 그것에 따른 신심단체 활동 정지.. 그것이 치명타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신심단체가 ‘개인적 불화’로 우리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간 것… 정말 나에게는 가슴 아픈 상실의 연속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이런 상실에서 나 자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  오늘은 유난히 지나간 10여 년 동안 타계한 수많은 영혼들이 생각이 났다. 나에게 죽음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가르쳐준 그들… 언젠가는 만날 수도 있을까…

일생을 통해서 특히 근래에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바로 이런 ‘레지오 활동’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연령행사나 양로원봉사 들이 완전히 사라진 요새는 정말 앞이 안 보이는 막막한 심정이다. 성모님께 길을 보여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확실한 것은 거의 없으니… 성모님, 성모님… 도와 주소서… 이제 제가 할 봉사활동은 없습니까? 이제는 성지순례나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까?

 

새로니부부가 저녁때 iPhone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온 목적은 나의 account를 setup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사실 그렇게 반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세월, 세대의 흐름은 어찌할 수가 있겠는가? 특별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 이것은 그저 tool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내가 간접적으로 greedy Apple의 customer가 되는 사실은 못내 찜찜하기만 하다.

이제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새로니가 엄마가 되는 날이… 오늘 둘이 와서 보인 모습들은 젊은 부부의 그것이었다. 활달하고 긍정적, 이성적이었다. 걱정이 사라진다. 불필요한 걱정을 말고 그저 기도만 하며 기다리자.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늘 불현듯 일을 시작했다. 10년 역사의 workshop, tool shed 왼쪽 잡동사니를 치우기 시작하고 바른쪽에 오랜 세월 쌓여 있던 lumber들을 하나씩 치울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피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이것이다. 시작을 못하는 병 때문이었다. 그래, 오늘 같은 날 계획도 없이 시작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일단 시작했으니까 tool shed 주변의 정리와 미화작업은 이번에 꼭 끝나게 될 것이다. 다른 비상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제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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