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讀後感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Part 1

2주일 대출기한이 수개월을 지나가면서 이 책을 우선 반납하여야 한다는 stress를 느끼며 이제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저곳을 훑어보고, 비교적 가볍게 접한 이 책에서 나의 재동 齋洞 동창, 김정훈 부제에 대해서 알게 되고 느낀 것을 정리한다.

신학생 김정훈
신학생 김정훈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사실은 정훈이가 어떻게 그렇게 일찍 타계 他界 를 했던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가, 그의 집안, 가족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신앙, 성소를 가지게 되었는지..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20대를 훨씬 넘은 시절부터 쓰여진 일기 형식이기도 하고 자기의 생각이 정성스럽게 담겨진 ‘문학적 냄새’가 나는 글로써,  꼼꼼히 ‘정독’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 대강 책을 훑으며 느꼈던 감정은 의외로 반갑지 않는 나의 반응이었다. “좋은 집안, 머리가 좋은 덕으로 선택된 선망의 대상으로 어려움과 고민 같은 것 별로 없이 유럽 유학 중, 좋아하는 등산을 하다가 조난사고로 운명”.. 비록 너무나 이른 인생의 비극적인 마감이지만 이러한 피상적인 이력서적인 눈에 쉽게 뜨이는 사실들 만으로는 정훈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김수환 추기경의 서문’이 실릴 정도로 큰 화제나 영원히 남을 만한 책으로의 가치가 될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물론 이 책을 계속 읽으며 이것은 나의 ‘너무나 성급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 김정훈 유고집의 제목인데.. 과연 이것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 궁금증은 19 쪽을 보면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이 대목은 김정훈의 신학교 영적 지도 신부인 Stefan Hofer신부의 추모의 글에 있는데 그 신부님은 김정훈이 조난을 당한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밤에 세르레스(Serles)에 등반하였던 적도 있었다. (중략) 베텔풀프(Bettel Wurf) 정상 정복자가 된 우리는 그 곳의 방명록에 우리들의 이름도 기록하였다. 베드로(김정훈)는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 말로 무엇인가 썼다. 내가 무엇을 썼는지 그에게 묻자 그는 독일어로 그 밑에 주를 달았다.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김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단순한 산에의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깊은 종교적 느낌 속에서 산을 찾고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회고’를 보며 생각한다. 정훈이는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등반을 했지만 단순히 산이 좋아서, 산이 그곳이 보이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통한 등반을 더 사랑하였던 듯 싶다. 나도 대학시절 참 산을 많이 찾아 다녔지만.. 어떨까, 종교적인 체험을 하였던 기억이 거의 없음에 정훈이의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생체험은 더욱 돋보인다.

 

¶ 정훈이의 가족관계는 어떤가? 이것은 사실 기본적인 호기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재동 동창생이지만 ‘공부를 잘 해서 경기중학교에 갔다’는 사실 이외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재동학교 졸업 후 중학교 시절, 파고다공원 수영장에서 그가 아이(아마도 동생)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남자 동생은 있었을 듯 하다. 이 책에 가족에 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간단히 이곳 저곳에 나오기에 한 눈에, 명확하게 알기는 힘이 들었다. 우선 자신이 묘사한 가정은 204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직동 김판사네 가정도 한국에서는 신앙으로 가꾸어진 훌륭한 이상적인 가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는 면들도 보인다. 아이들이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사리를 스스로 옳게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부모가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인생관과 신앙에 근거해서. 그런데 압도적으로 비중이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만 손보기가 어려워져 버린 난맥상이 드러나고 있다. (중략) 곧 아버님 돌아가신 지 10년째가 된다. 벌써 그렇게. 강산이 정말로 크게 변했다. 아버지의 그 보화를 캐내어 나눠 줘야 할 큰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 이 순간 확연해진다. (1975년 3월 10일)

이 글은 1975년 3월 10일 일기에 나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친구 클레멘스의 가정을 부러워하는 글 뒤에 나온 것이다. 그 친구의 가정이 부러운 이유 중에는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고 건강한 아이들, 높은 교육을 받은 것, 3남 2녀라는 것.. 이런 것과 더불어 잘 화합된 부모의 교육, 그것도 참된 신앙에 의한 것.. 이라는 사실. 아마도 김정훈의 가정도 이에 뒤지지 않았던 이상적인 가정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10년 전에 돌아가신 ‘김판사’ 아버님의 비중이 너무나 컸기에 가정은 ‘난맥상’이 드러났다는 판단이다. 그러니까.. 1965년 경에 아버님이 타계를 하셨으니까, 정훈이 경기고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혹시 그런 충격이 정훈이에게 깊은 성소의 뜻을 남긴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지위가 높고, 신앙심이 깊고, 가정을 사랑하는 아버님을 가진 정훈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로써는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히 천주교 가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천주교인이었을 정훈이네 가정, 혹시 대대로 내려온 ‘박해 받았던 가문’은 아니었을까? ‘비중에 컸던 아버지’에 대한 회고는 이곳 저곳에 나온다.

나가이 다카시의 ‘만리무영’에서 여러 대목을 읽었는데 느끼는 점이 많다. 우선 그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원만하고, 노력을 기막히게 많이 한 신앙인인 것을 알게 해 준다. 내게 특히 좋게 여겨지는 것은 그 글의 분위기와 저자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진지하고 신념에 찬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그러하고, 어투며 그 상황까지 어쩌면 그렇게 흡사할까. 공감 가는 점이 정말 많다. 자식에 대한 배려, 아내 생각 등도 아버지 경우와 같다. 동시에 그 사람의 아들들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는데, 많은 사람이 우리 집안이나 나에게 대해 갖는 기대와 주시도 그런 종류일 것이다. 불쌍하신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 아내를, 자녀들을 그대로 놔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에 젖으셨을까? 얼마나 우심 憂心 이 크셨을까? (1972년 6월 11일)

위의 일기에서, 아버지가 권해준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저자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좋은 점’들을 열거한다. 여기서 보아도 그 아버지는 정말로 존경 받을 만한 가장이었음이 짐작이 된다. 일찍 운명을 하신 아버지, 아마도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신 듯하다. 장남일 것 같은 정훈이, 이때부터 아마도 가장으로써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지 않았을까?

 

¶ 20대를 꽉 차게 살아오던 정훈이의 모습, 언행, 성품 등은 어땠을까? 이것은 친구들이 본 것이 아마도 제일 정확한 것이 아닐까? 일찍 타계한 친구를 보내며 친구 대표 ‘기헌’의 ‘조사’에 잘 묘사되어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기도하며 바랐던 대로, 평소에 너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친구들이 기대했던 대로, 너의 훌륭한 재능과 착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품이 더욱 닦아지고 완성되어 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이제 겨우 서른 해를 넘기고 가다니.. (중략)

너는 순진하고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어. 너의 신심 생활의 진보는 언제나 앞서 있었고, 너의 정신적인 사고력은 언제나 예리하게 우리를 압도했었지.

책 읽기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깊은 명상과 기도의 생활을 너는 얼마나 사랑했었니? 그러면서도 네 마음은 언제나 뜨거운 인정이 넘치고 있었다.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낀 너였는지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친구들에게 한결같이 잘 해 주었어. 특히 괴로운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 주고 싶어하던 너였지. 너의 특징인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두 눈을 껌벅거리던 너. 어떻게 해서라도 그 괴로움을 나누고 싶어 너는 애썼지.  (중략) 그러기에 친구이면서도 우리는 너를 존경하였고, 우리를 대신해서 큰 일을 해 주리라 믿었다. (중략) 착하고 아름답게 산 너의 영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백 배의 보상을 틀림없이 천국에서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너와 영결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1977년 6월 7일, 정훈이를 보내며.. 친구대표 기헌이가)

비록 고인을 기리는 조사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 정훈이의 이목구비, 면모, 표정, 성격 들이 직접 간접적으로 다 보인다. 나로써는 이것이 ‘성인’ 정훈이를 상상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기대를 받았던 ‘장래가 촉망되던 큰 재목’ 이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 가톨릭 신부와 여성, 신부 지망생 그러니까 신학생이었던 김정훈은 어떤 여성관, 여성 경험을 가졌을까..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멋진 남자’에게 여성과의 교제가 없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 나와 동갑(돼지띠) 이기에 1970년대 중반의 나를 생각하면 너무나 쉽게 상상이 가는 것이다. 다만 나의 background와 그 이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나와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었음을 생각한다.

우선 절대자 하느님, 예수님을 자연스레 알고 믿는 그, 완벽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유복한 가정.. 등을 생각하면 정말 ‘자격을 갖춘 멋진 여성’이 그의 주변이 있었을 듯 하다. 다만 이 유고집에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 J 라는 여성만이 눈에 뜨인다. 과연 J란 여성은 누구일까? 거의 한 chapter “J와 인생” 이 J 라는 여성에 관한 일기인 것을 보면 ‘신부와 결혼’에 대한 그의 결심에서 가장 심각한 인물이었음 에는 틀림이 없다.

J에 대한 나이, 출신배경, 알게 된 경위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집 식구들에게는 알려진 사람, 공개된 데이트였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신부를 지망하는 신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여성은 어떤 여성들일까? 결혼을 전제로 할 수가 없는 100% 순수한 지적인 만남이었을까? 계속되는 깊어지는 만남에 자신에게 제동을 거는 자신의 결심도 보인다.

J와의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 하고, 내렸으면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는 까닭’

1. 실험적인 사귐은 있을 수 없다.

2.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하게 됨.

3. 그녀를 위해서도 더 깊어지지 않는 것이 좋다. 실제로 나의 결론은 지어졌는데, 실행은 빠를수록 좋다.

4. 언젠가 끝에 가선 내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내 햄, 내 의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니 주님, 빛과 길을 주소서. 이럴 때 주님을 찾는다고 나무라지 마소서.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기에서 그는 ‘조직적’으로 차근차근하게 문제의 본질과 방향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문제의 심각함과, 어려움을 알고 그는 결국 ‘절대자’의 힘을 기대하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모습을 여기에 비추며 돌아본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는 절대로 혼자였다. 절대자가 절대로 나에게는 없었다. 혼자였던 나는 모든 것을 ‘나침반’이 없이 헤매며 허우적거린 세월들이었다. 나와 정훈이의 20대 중반은 이렇게 하늘과 땅만큼 멀리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은총을 일찍 받았던’ 영혼이었다.

곧바로 그는 J에게 쓴 ‘헤어짐의 편지’를 쓴다. ;7월 23일자 일기에 편지가 실려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이.. 이 편지는 일기인가 아니면 실제로 J에게 보내진 편지인가 하는 것이다. 이별의 편지, 참 balance와 courtesy, essence가 모두 있는 편지가 아닐까?

J씨 귀하,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있어야 할 순간이고 또 그 때는 빠를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이며 글 같은 것이 부질없는 것이고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글로 써야 제 뜻을 그래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주로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기존의 길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자기가 뜻을 정하고 온 가능성을 모으고 있는 터에 이와 상치되는 사상 (事象)을 지닌다는 것은 일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목표가 확실한데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은 저로써 더 이상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제 자신과 J씨를 크게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쓰라림만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항상 이것을 알면서도 갈팡질팡하며 생각을 모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기다린 거지요.

지금 이 글월을 쓰면서 저는 이 글의 의미가 엄청난 데 스스로 놀랍니다. 이는 우리의 사귐에 대한 결단일 뿐 아니라 저로서는 제 삶의 의미를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이 일방적이고, 제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고 또 회피가 아니냐고 하지 마십시오. 또 이 일이 그런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단안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냐고 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또 그런 만큼 얼마나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지를  J씨라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에 몇 번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를 만나고, 또 한 번 내린 결정은 단호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씨는 제게 너무도 과분하고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 심정도 몹시 단호함으로 차 있습니다. 아니, 단호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소도 아시고 또 9월에 학관에도 나가겠지만 제게 소식 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언젠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 말했다고 한 것처럼 저도 J씨가 그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그 동안 얘기했던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진정으로 빕니다.

– 김정훈

이 책은 그 동안의 우정에 대한 저의 기념의 선물입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별편지를 보면, 그의 확고한 결심을 J에게 전하며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이 정도만 아주 단호한 결심이 아니었을까? 이런 것으로 보아서 J라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정훈이를 만나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아주 나이에 비해서 성숙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9월에 학관에도 나간’다는 구절을 보아서 이들은 아마도 같은 ‘학관’에 다녔던 것은 아닐까? 학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대강 그 당시에는 ‘학원’이라는 말을 썼는데.. 학관은 종류가 다른 것이었을까? 마지막 구절에 ‘근본을 향한 고귀하고 투철한 노력을 … 용맹스럽게 전진하시기를..’ 이것으로 J라는 여성도 무슨 뚜렷한 목표를 향한 ‘지식층’ 여성이었을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이 ‘편지 일기’ 이후에도 그는 사실 J를 잊은 것이 아닌 것 같다. 계속 J를 만나며 그녀에 대한 글이 나오니까.. 아마도 서로가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의 가능성을 배제한’, ‘진정한 친구’로써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8월 21일의 일기는 J에 대한 끈질긴 미련과 자신의 필연적인 결심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J를 본 지 열흘이 지났다. 지난 금요일과 월요일에도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하면서도 보고 싶다.

그냥 당겨지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왠가? 누가 무엇이라 한다 해도 이런 마음은 참 순수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 현상이다.

간단한 기록으로 끝나려 했는데 또 길어진다. 내심에 잠겨 있는 것이 들고 일어나는 까닭이다. 파헤쳐 본다는 것도 힘에 겨웁다.  문제는 결단만이 해결의 관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결단을 내렸으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고,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결혼도 포기하고, J와 같은 사람과의 사귐도 금기(禁忌)인 신부가 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부행(神父行)을 결심한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어서일 터인데 과연 그런가? 어째서 내 단 하나뿐인 인생을 사제에다 걸었는가? 사제가 무엇인가? 그 본질을 분명히 보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비교적 분명하게 문제점들이 드러난다.

내가 보는 신부에 대한 정의, 그 신원(身元)은? 고전적 정의로서는 내게 그 의미가 약하다.

위의 일기로 나는 그가 아직 신부가 되려는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을 안다. 하지만 계속 내면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적으로 생리적으로 끌리는 사랑을 느끼는 이성, 그것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어찌 간단히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과정에서 김정훈의 ‘결단의 힘’을 볼 수 있다. 한 인간인 여성에 대한 사랑, 관심, 끌림 등과 신부가 되려는 성소의식이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몇 개월로 1973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김정훈, 드디어 무서운 결단을 내리며 편지를 쓴다. 신부가 된다는 확고한 결심이다.

J씨 귀하.

이 시각을 위해 사귐을 해 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는 초조하리만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뜻밖의 이 글월을 받고 놀라시리라 믿습니다만 끝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가능한 근거는 우리가 하느님을 지고(至高)로 모시고 있고, 그 동안 J씨나 저나 거짓 한 점 없이 서로 성실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벌써 짐작을 하실지 모르나 정말 그렇습니다. 결단을 지금 내려야 합니다. 일찍이 저는 신부행(神父行)을 결단했습니다. 설령 각 사람에게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저의 그 선택에는 후회나 변함이 없습니다. J씨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J씨가 말한 뜻대로 그 동안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성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피치 못할 불성실의 시작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제가 J씨를 아끼는 그만큼 이 문제는 절실합니다. 이 문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어떤 식으로 가설을 세운다 해도 사실입니다. 이 점을 항상 의식한 저는 두려워하면서도 이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껏 회피하려 했으나 결단은 있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비참하고 단호한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가 쉬웠고, J씨는 어렵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 사귐이 그렇게 순수했던 것처럼 이 시작도 서로에게 순수해야 하고, 전적인 동의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J씨는 J씨의 길을 힘차고 명랑하게 가십시오. 저도 제 길을 용기 있게 웃으면서 가렵니다. 이상이 제가 쓰고 싶은 전부입니다. 사실 J씨는 이 글의 진의(眞意)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저의 집 전화번호도 알고 또 찾을 수도 있지만 저를 찾지 마십시오. 이별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저도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

1973년 12월 26일 김정훈

정중하고 진심이 우러나오는 글이지만, ‘영원히’ 남녀로써 헤어져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미련을 0%도 남기지 않고 그는 ‘결코 J씨를 찾지 않겠습니다.’라는 작별인사로 끝을 내는 그.. 얼마나 괴로웠을 결단이었을까? 그 나이에 나라면 ‘절대로 절대로’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해 1974년 봄 무렵 유럽 유학을 떠나는 그는 아마도 그 때서야 J씨를 조금은 더 쉽게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남녀관계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Part 2로 계속 됨)

 

HV’A/C’ emergency

Clunking OLD a/c condensers

Clunking OLD a/c condensers

 

HVAC Heating, Ventilation, Air Conditioning 일주일 이상 90도를 넘게 괴롭히던 올해 무더위의 첫 희생자가 나왔다. 희생자가 아니라 희생물이라고 해야 하나? 결과적으로, 우리 집 2층의 air conditioner (a/c)가 ‘찬바람’을 내 보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항상 묻는다.. 왜 하필 이때에.. 그러니까 why now?인 것이다. 조금 선선할 때 고장이 나지 왜 제일 필요할 때인가 말이다. 제일 무덥던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같이 ‘조심스럽게 평화로운 시간’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나의 머리는 거의 순간적으로 emergency mode로 바뀌며 비지땀을 흘리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럴 때마다 또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왜 남들은 이럴 때, 그저 간단하게 ‘업자, hvac contractor, repairmen’에게 전화 한 통으로 다 끝날 것들을.. 나는 이렇게 비지땀을 흘려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유는 간단하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내가 고쳐야’ 한다는 오기와 그에 따른 ‘낭비, 폭리를 일삼는 repair shot’들’을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하지만 a/c에 관한 것은 최근까지 나에게 ‘금기사항’이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전화를 한 것이 2~3년 전쯤인가.. 아래층 a/c에 문제가 생겼을 때, Coolray truck이 집으로 온 것.. 그 때 비록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고친 것은 outside condenser unit 속에 있는 ‘타버린 wiring’ 몇 개를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독히도 간단한’ 것,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일단 truck-rolling (repair truck이 찾아온 것)되면 그것에 대한 기본 charge를 내야 한다. 그 이후부터는 아예 여름이 되기 전에 색깔이 변하는 듯한 wiring은 내가 바꾸어 버렸다.

 

Dead blow fan motor

Dead blow fan motor

 

하지만 이번 것은.. 사태가 심각한 것, condenser unit의 blow fan을 돌려주는 motor가 죽은 듯.. fan이 돌지를 않았다. 결과적으로 overheating이 되고 system이 shut-down된 것이다. fan motor를 보니..  고장이 나게도 생겼다. motor label이 삭아버릴 정도로 ‘오랜 된 것’, 이런 것은 하루아침에 고장 나기 보다는 서서히.. 기증이 저하하는 것인데, 밖에 있는 것이라..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천천히 돌면’ 아마도 cooling function이 크게 저하했을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알 도리가 없다. 그저 여름만 되면 ‘올 여름에는 이것들이 잘 견딜까..’ 하는 불안감하고 싸우기도 한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의 머리’는 완전히 ‘비상 mode‘로 바뀌는 것이고 머리는 보통 때의 10배 정도로 잘 돌아간다. 위층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 그곳은 우리의 저녁 생활 공간이고, 잠을 자야 하는 곳, 그곳이 너무 더우면 아무 것도 못한다. 아래 층은 구조상 그렇게 더운 곳이 아니기에 여차하면 그곳으로 내려 오면 되지만, 귀찮은 노릇.. 그러니까 어떡하든지.. 고쳐야 한다. Replacement fan motor를 어떻게 당장 구하나.. ‘무리, 무리’.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순간적으로.. 아하~ 아래 층 a/c fan motor를 ‘빌려 쓰면’ 되지 않을까?

그런 쪽을 머리는 돌아가고.. 두 대의 condenser unit 를 자세히 살펴보니..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차이는 아래 층 것의 radiator 가 위 층 것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그러니까.. fan, fan motor같은 것이 ‘거의 같은’ 것이다. 즉시로 행동개시.. 아래 층의 motor unit (motor+ fan blade)를 빼 내어서 고장 단 위 층 것과 교체를 했다. 물론 이 작전은 motor자체가 고장 났다는 전제에 의한 것이다. 만약 motor가 아닌 다른 것이 원인이었다면 이 작전은 완전히 끝이 나는 것이다. 이 때 내가 하는 것.. 묵주기도 ‘비슷한’ 성모님의 도우심이다. 급하니까, 초자연적인 힘까지 동원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긴급작전은 100% 성공했다. 문제의 원인은 그러니까 ‘죽어버린 fan motor’에 있었다. 이 이후 아래층의 a/c는 완전히 shutdown이 되고 위층은 원래대로의 ‘시원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시간을 번 것이지만, 아래층의 온도가 83도까지 올라가고 그 결과 위 층의 a/c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돌아야 했지만 그래도 편하게 위 층에 머물 수가 있으니 불평은 없다.

이제부터의 문제는, replacement fan motor를 찾고 구해야 하는 것, 역시 Internet의 도움을 받아 under $100 로 order를 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고장 난 motor에 붙어서 꼼짝 을 안 하는 fan blade, 오랜 세월을 견디며 motor에 완전히 ‘붙어서’ 빠지지 않는 것이다. hammering을 하며 빼 내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거의 포기 단계, 해결책은 똑 같은 것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를 않다. 너무나 오래 된 것이라.. 없는가?

 

stuck & stuck fan blade!

stuck & stuck fan blade!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진 ‘미국 사람’들이 부지기수인가? Goolging 을 하면 해결책이 나온다. 아예 stuck fan blade를 빼내는 tool까지 ‘발명’ 이 된 것이다. 이것이 fan blade자체보다 더 비싸면 문제지만 의외로 affordable..  under $35, 이것을 쓰면 ‘아마도’ 쓰던 blade를 다시 쓸 수가 있을 것이다. 나의 plan에 의하면 이 모든 문제들은 $100 정도 선에서 해결 될 듯하다. 만약 ‘그들의 truck’이 굴러 나왔으면 얼마나 들까.. 아마도 $500  정도면 재수가 좋지 않을까?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소위 말하는 run capacitor의 역할이다. Condenser Unit에는 항상 이것이 붙어있고 이것의 기능은 두 대의 ‘중요한’ motors (1. compressor, 2 blow fan)를  smooth하게 start하는 것이다. 이것에 문제가 생기면 motor자체가 돌지 않을 수도 있고 수명이 단축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이것의 역할은 정말 중요한 것인데 의외로 그것이 싼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두 대의 condenser 모두 새것으로 바꾸기로 하고 order를 했다. 비록 고물 a/c 지만,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수명이 연장이 된다면 이 투자는 것의 ‘공짜’인 것이다.

Order한 것들을 기다리며.. 생각한다. 과연 우리 집 ‘고물 a/c들’,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proactive하게 고치거나 교체를 할 것인가? 이것은 분명히 budgeting이 절대로 필요한 spending이다. 만약 두 대 다 교체를 한다면 올 겨울 제일 쌀 때가 적기 適期 일 듯 하다. 다른 ‘공상’은 이런 것이다. In-house unit 가 비교적 새것이라서.. Outside unit자체는 내가 ‘혼자서’ 설치할 수는 없을까? 현재 단계에서는 ‘공상’이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research에 의하면 충분히 가능하게도 보인다. 위험부담은 무엇인가? 더 연구하면 분명히 새로운 ‘비밀’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dona nobis pac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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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a nobis pacem.. Grant us peace..  요새 평일미사에서 더 자주 듣고 말하는 ‘멋진  라틴 말’.. ‘평화를 주소서’..  왜 ‘이것’을 달라고 기도하는지 이해가 조금 간다.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dona nobis pacem

아뉴 데이, 퀴 톨리(스) 페카타 문디, 미세레레 노비(스).

아뉴 데이, 퀴 톨리(스) 페카타 문디, 미세레레 노비(스).

아뉴 데이, 퀴 톨리(스) 페카타 문디, 도나 노비스 파쳄.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have mercy on us.

Lamb of God, you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grant us peace.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

 

미국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주임 신부님이 교체되는 6월에 들어서 평일미사에 방문신부님들이 더 자주 오신다. 그 중에 ’40대’같이 보이는 ‘은퇴신부’님, Father Joseph, 나이에 비해서 너무나 젊고 패기가 만만해 보여서 왜 벌써 retire를 하셨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이분의 Mass를 ‘들으면’ 우리들도 같이 ‘뛰어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빠르고, 미사가 끝나고 나가시면 거의 뛰다시피 (실제로 jogging하신다)나가신다.

이분이 오시면 영성체 전에 하는 ‘Agnus Dei, 천주의 어린양, Lamb of God..’을 꼭 라틴어로 하시는데, 솔직히 나는 이 라틴기도를 듣기는 했지만 따라 하기에는 자신이 없다. 오늘, 이제야 Wikipedia의 도움으로 ‘정확한’ 라틴어로 알게 되었다. 그 중에 Dona nobis pacem.. 평화를 주소서.. 란 말, 미사가 끝나가며 진정으로 마음 속으로 바라는 매일 ‘청원 기도’가 되었다.

신앙이란, 믿음이란, 종교란 것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궁극적인,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겉으로의 평온함, 잔잔한 기쁨과 차원이 다른 저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믿음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걱정을 없애주는’ 느낌.. 그것이 진정한 평화일 것이다. 그러니까, 세속적, 환경적, 물리적인 요건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요지부동 搖之不動’ 적인 안전한 느낌..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지만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들은 비교적 어렵지 않은가.. 근래에 가끔 느낀다. 아~ 이것이 바로 ‘신앙선배, 교부’들이 그렇게 말하는 peace is flowing like a river (강물처럼 흐르는 평화).. 가 아니었을까? 진정한 평화는 (죽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비슷한 것은 어떤가?

지나가는 6월의 두 번째 주, 비록 ‘살갗이 타는듯한 바깥 일’ 로 육체적인 고통은 다른 때에 비해서 컸지만, 머리 속 깊은 곳의 평화는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니까.. dona nobis pacem을 계속 기억하며 지낸 것이다. 아마도 그만큼 나는 peaceful했을 것이다. 비록 나의 얼굴과 언동은 주위에서 보기에 불쾌했을지 몰라도.. 짜증나기 시작하는 90+ 더위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것도 하느님이 주신, 자연적 순리임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겠는가?

 

Under $100 deckover renovation 2016

Under $100 deckover renovation 2016

 

¶  Deck (Paint) surprise:  우리 집 손바닥만한 backyard (attached) deck, 무엇이 그렇게도 말썽이었던가? 언뜻 보기에, 일주일이면 ‘깨끗하게’ renovation을 할 것처럼 보였던 ‘손바닥’만한 것, 결국은 한 달이 걸렸다. 나는 결국 이번 job의 어려움을 너무나 underestimate한 잘못을 한 것이다. 반대로 overestimate했으면, 아마도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즐기며’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크게 실수한 곳은 deck floor자체가 아니고 deck railing, step등의 ‘복잡한, 골머리 썩이는’ miter cutting job이었다. 그 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cutting tool들을 쓰지 않아서 더욱 힘이 들었다.  이런 것과 더불어 ‘더 이상 cash’를 쓰는 것을 자제하며 cash와 time을 trade하는 기분으로 한 것이 역시 칠순이 다가오는 육체에 무리를 주었을지도 모르며, 피곤한 기분은 아무래도 나의 평온 감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surprise가 있었다. 바로 painting, 전에는 ‘자연스러운 나무색깔’을 고집하며 waterproofing정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floor lumber가 rotting하는 고역을 치른 것을 잊지 않으며 이번에는 ‘진짜 paint’를 하기로 하고 $10 discount sale을 하는 Memorial holiday 에 Home Depot에서 Deckover® deck paint 2 gallon으로 paint를 해 보니.. 이것이 보통 때 보던 그런 paint가 아닌 special paint로 거의 ‘죽’ 같은 정도로 끈적거리는 그런 것, 그래야 floor traffic을 견딘다고 하니.. 이런 것을 나는 그 동안 모르고 지낸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paint는 2nd coating이 ‘필수’라고 하는 사실.. 그러니까 보통 paint의 2배가 드는 것이다. roller가 아닌 brush를 쓰는 것도 고역이었고, railing, steps등을 estimate에 뺀 것도 잘못이었고.. 역시 나는 weekend ‘amateur’ 였던 것이다. 2nd coating 은 고사하고 한번도 ‘겨우’ 덮을 수 있었던 마지막 작업은 참 기분이 씁쓸한 그런 것.. 즐기며 일하겠다는 결심에 도전하는 잡스러운 surprise들.. 결국 나는 슬기롭게 manage를 못했다. 이것도 이번에 배운 것, 언제나 surprise에 대비하며, worst case를 항상 염두에 두라는 진리, 바로 그것이었다.

 

Ozzie fence up, Guitar evolving

Tobey fence 위에 Ozzie fence!

Tobey fence 위에 Ozzie fence!

 

¶  Ozzie Fence UP!  새로니가, 계획했던 대로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3주 Europe 여행을 떠났다. 철저하게 계획하는 성미대로 큰 문제가 없었지만 pet dog Ozzie를 우리가 3주간 봐 주어야 하는 것이 조금 문제였다. 우리만 믿고 안심하고 떠나는 것을 우리는 바라기에 최선을 다 해서 dog sitting을 하려고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리가 큼직하게 긴 (키가 큰?) 탓에 웬만한 장애물은 문제없이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 집의 backyard fence중에 길을 향한 fence는 10년도 전에 우리 집 Tobey 때문에 만든 3 feet 높이의 fence였다. Tobey는 다리가 유난히 짧은 종자기에 문제가 없었는데 Ozzie에게는 그것은 장애물도 아니었다. 전에 우리 집에 며칠 보아줄 때, 자기 엄마 (새로니)를 찾아 그것을 뛰어넘고 길 쪽을 돌진해서 우리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악몽이 있었다. 이번에 3주 동안 무슨 수를 써야 했고 그 대책이 바로 Ozzie Fence였다.

현재의 Tobey Fence 3 feet에 3 feet를 더해서 6 feet짜리 ‘임시 temporary’ fence를 세운 것이다. 50 feet steel welded wire를 사다가  Ozzie fence 를 ‘급조’를 했는데, 막상 하고 보니 Ozzie는 그것을 한 번 쳐다보고는 별로 넘겨다볼 생각조차 안 한다. 조금 맥이 빠진 기분이지만, 이제는 ‘사고로 길로 뛰어나가는’ 일이 없음이 거의 확실하기에 우리도 3주 동안 다리를 쭉 뻗고 잘 수가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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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itar club, evolving..  얼마 전부터 모이기 시작한 기타 클럽이 조금씩 ‘진화’를 하기 시작한다. 이런 모임에 관련이 된 것, 참 오랜만이라는 느낌, 그만큼 삭막한 세월을 보냈기에 그럴까, 아니면 이것이 hobby club이기에 그런 것일까? 소위 말하는 hobby club, special interest group, 동호회, 동아리.. 같은 말의 느낌이 ‘젊다’는 것이어서 이미 나의 세월은 그런 것을 훨씬 지났다는 쳐지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주 목적이 guitar를 배우는 것이기에 더 젊은 느낌인가..

처음에는 ‘기타 선생, instructor, teacher’로 생각들을 했지만, 나의 생각을 바꾸어서 guitar coach역할을 하기로 하였다. 한마디로 그들과 어울려 guitar를 서로 배우며 즐기는 것이다. 물론 현재 나의 역할을 거의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기본 technique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들과 어울려 ‘지속적’으로 모이는 것이다. 현재의 대부분 member들은 몇 년 전에 이미 ‘장기간 자주’ 모여서 ‘기타선생님’으로부터 기타강습을 받았기에 기타의 기본적인 경험을 다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 활동이 거의 없었던 듯 했고, 그 당시 경험은 주로 sing-along  ‘strumming’ style이어서 chord fundamental에 대한 것, 특히 개별적인 playing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인 것.. 한마디로 그들은 ‘다시 배우고 싶다’는 것이어서 실제적으로 다시 guitar 101으로부터 시작해야 입장으로 보인다. 소 그룹의 장점을 살리면 개별적인 coaching도 가능할 것으로 보여서 앞으로의 활동이 은근히 기대가 된다. 왜, 지금 이것을 내가 해야 하는가?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 그저 timing이 그렇게 나의 schedule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니.. 이것도 조금은 높은 뜻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Made it! Atlanta EC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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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나를 따라오며 유혹하던 Screwtape1을 당당히 물리치고 ‘하루 종일’을 Atlanta International Convention Center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보냈다. 그곳은, 이제는 완전히 classic이 된, 연례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EC) 가 열린 곳이다.

8:30 AM general procession starts..

8:30 AM general procession starts..

2011년부터 줄곧 ‘도장’을 찍었던 ‘초여름의 향연’, 아틀란타 성체대회, 작년에 나의 ‘게으름’으로 우리 둘 모두 참가를 못했었다. 못 갔던 이유는 있었지만 암만 생각해도 그것은 그럴듯한 유혹에 굴복 당한,  ‘핑계’에 불과했던 것, 나 자신은 속일 수가 없다. 그것이 화근인가. 올해에도 그런 ‘약점’을 이용한 각가지 유혹들.. 요란하고, 간교하고, 그럴 듯한 핑계거리가 줄줄이 나를 괴롭혔고, 거의 그것은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senior devil은 나의 어머니에게 굴복한 셈이 되었고, 그것이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뿌듯하게, 기쁘게 할 수가 없다.

작년에 나를 유혹했던 screwtape의 point는 “유명하고 멋지고, 잘나가는 speaker가 없는 것.. 무엇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을 하냐?” 정도가 될 듯하다. 너무나 나의 기대가 커서 생긴 유혹이었다. 그러니까 재탕을 방지하려면 그 expectation을 ‘하향 조정’하면 된다.  더 간단한 것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 무기로 올해의 유혹에 대비했지만, 역시 senior devil Screwtape은 경험이 많은 악마인가.. 다른 쪽을 공격을 한다. 성체대회가 열리는 날 이후에 나의 신경을 많이 쓰게 하는 schedule들이 몇 달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나를 괴롭힌 것이다. 한마디로 가벼운 마음으로 성체대회에 참가할 기분이 안 나는 것이다.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대회 전날 밤까지 나를 유혹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조금 ‘조직적’으로 대비를 했는지, 굳세게 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았고 하루 종일을 일 만 여명의 신앙 동료 catholic들과 보낼 수 있었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banner procession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 banner procession

이번에는 순교자 성당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도 참가하셨다.

이번에는 순교자 성당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도 참가하셨다.

올해는 이제까지 우리의 format을 조금 바꾸어서 순교자 성당bus를 안 타고 우리 차로, 대신 아침 더 일찍 출발을 해서 비교적 쉽게 parking도 할 수 있었다. 필요할 때 우리의 돌아오는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편하지만 bus를 타고 오고 가며 순교자 성당 교우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예상보다 적은 사람들이 bus를 탔다고 했고 김밥 점심을 같이 먹을 때 보니, 자기 차를 타고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비교적 일찍 도착했기에 우리는 ‘처음으로’ 대교구 소속 각 교회 공동체의 banner procession하는 것을 보았고 우리 순교자 성당 팀 banner group에는 주임 이재욱 요한 신부님과 같이 우리 부부도 낄 수도 있었다. 이것이 올해에 우리에게 신선한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Yakuza' Father Donald Calloway
‘Yakuza’ Father Donald Calloway

올해 성체대회 Atlanta Eucharistic Congress 2016은 어떤 쪽으로 기억에 남을까.. 소위 말하는 superstar급 speaker는 없었지만 (2년 전처럼),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신부님의 ‘인생역정’은 가히 올해 성체대회의 백미 白眉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 surfer, rockstar같은 인상을 주는 젊은 신부님, Father Donald Calloway, MIC 란 분이다. Donald란 말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서는데.. 하필이면 Donald일까..

알고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신부님의 ‘개인 신앙 여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 처음 알게 된 분이다. 아직도 신부가 되기 전의 ‘말 습관’들이 뚜렷이 남아있었기에 그의 ‘간증’은 더욱 더 믿게 되는 그런 것이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완전히 ‘패륜, 반항’ 적으로 자랐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근본적으로’ 아주 smart한 영혼이었음을 안다. 인상적인 것이.. 잠깐 일본에서 ‘전통적인 일본 조폭’ 야쿠자 생활을 했었다는 사실.. 물론 ‘백인 야쿠자’이었지만.. 각종 비행으로 ‘시설을 들락날락’ 했던 그에게 큰 변화는 부모가 ‘갑자기’ (그의 말에 의하면 하루 아침에) ‘매일 미사 가톨릭 신자’가 된 이후였다. 물론 그가 그런 사실을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던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 중에는 ‘성모님’의 역할이 중심적인 것인데 그에게는 거의 기적과 같은 ‘만남’이었다고.. 그는 그렇게 포근한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기적 같은 변화를 체험하게 되고 결국은 신학공부로 시작을 해서 사제로까지 변한다. 이것으로 그는 ‘머리가 좋은 불량소년’이었음을 알게 된다. 공부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끝에는 그 유명한 Mariology의 세계 권위인 University of Dayton에서 ‘성모신심학’ 학위까지 받고 그의 체험, 경험을 토대로 ‘묵주기도의 기적’에 관한 책을 간행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모신심의 대부 代父 인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장담을 한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물론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과 힘이 뒤에서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역할은 역시 그의 어머니의 기도였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성 모니카 (St. Monica,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아오스딩의 어머니)에 비유를 한다. 뒤에서 끊임없이 기도를 하신 것이다. 한때 마약과 rock music에 심취, 찌들어 자살이 다음이라고 장담한 그가 어떻게  Marian Fathers of Immaculate Conception (MIC) 신부님이 되었을까.. 이런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닐까? 그는 과연 제 2의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를 꿈꾸고 있을까? 자신의 ‘기적 같은’ 개인 체험이 그런 꿈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speaker 들도 나름대로 독특한 style과 주제로 힘을 썼지만 Fr. Calloway의 ‘체험에 저린 웃음’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분의 차례를 제일 마지막에 넣었을까? 비교적 지루하고 졸린 오후 였으니까.. 그 분의 책과 성지순례 안내서는 날개 돋치듯 없어졌고 나는 집에 와서 그 신부님을 더 알아보려는 googling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도 인상에 남는 사람은 power country singer Collin Raye와 함께 출연한 Andrea Thomas라는 젊은 여성, 가창력이 정말로 뛰어났고, 흡사 오랜 전의 Celine Dion같은 느낌을 주었다. Collin Raye의 독특한 power country는 물론 좋긴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크게 호감은 안 간다. 그의 style은 country와 Italian Tenor를 합친 것 같은 그런 것인데, 성체대회의 분위기에는 어떨까?

우리는 ‘전통적’으로 closing ‘vigil’ mass를 하고 오기에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많은 UN총회를 방불케 하는 각양각색의 교우들과 ‘장엄 미사’를 하는 것 독특한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집전 대주교님의 우렁찬 목소리도 좋고, 각종 언어로 행하는 ‘지향기도’도 색다르다. 하지만 몇 번이고 경험하는 것.. ‘한국어 기도’다. 기도하는 ‘자매님’들.. 기도 끝에 ‘we pray to the lord.’ 를 싹둑 빼버리고 하단을 하니.. 그 말이 나와야 끝난 줄 알고, ‘Lord, hear our prayer‘ 를 하려고 준비했던 모두들 그저 어리둥절.. 당황을 하니..  이것이 누구의 실수인가, 잘못인가.. 왜 꼭 한국 자매님들만 그런 것인가? 한 때는 어떤 수녀님까지 그런 실수를 해서.. 뒤에서 coach하는 staff들, 한국 자매님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Convention center의 엄청난 내부 시설과 크기에 버금가는 수많은 사람들, UN 총회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참 이곳에 각종 인종, 나라에서 온 사람들 많기도 하다. 하지만 뚜렷한 것은 역시 Hispanic의 막강한 power다. 물론 수 數적인 것이지만 그들은 모두 family 단위로 참가를 해서 더욱 인상적이다. 그에 못지 않게 Vietnamese power는 더욱 놀랍기만 하다. 한국 community에 비해 이민역사가 그렇게 길지도 않건만 특히 가톨릭 power는 인상적으로 크게 성장을 해서 벌써 커다란 성당이 2개일 뿐 아니라 성소자들도 속출, 신부, 사제, 수도자, 수녀들이 거의 없는 우리들에 비해 그들은 우리들 보다 훨씬 많다. 대교구가 그것을 모를까.. 그들을 위한 따로 program을 마련하고 그들만이 옆에 있는 건물에서 따로 모인다. 물론 closing mass에는 함께 하지만. 왜 월남과 우리는 그렇게 차이가 난 것일까?

이 closing mass에서는 다음 해 성체대회의 주제가 발표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video를 통해서 보여졌는데, 내년 주제 성경구절은 조금은 생소한 것: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구약, 여호수아기 24장 15절에서 나온 것이다. 2005년 ‘가톨릭 공용 성경’ 에 의하면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인데 문맥을 보면: “전에 살던 이집트의 신을 버리고,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눈에 거슬리면 오늘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을 하라” 라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말이다. 한 분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뜻 같다. 이렇게 2016년 성체대회가 막을 내리고 우리는 traffic 이 비교적 한산한 I-285 North를 질주, ‘유혹을 물리친’ 멋진 결과를 만끽하며 긴 하루의 피로를 푼다.

 

  1. the senior devil in the Screwtape Letter by C. S. Lewis

Tobey, Tundra..

East Cobb Animal Medical Care 'Center'

East Cobb Animal Medical Care ‘Center’

 

¶  I’m sorry, Tobey!  일년에 한번씩 하는 annual ‘medical’ checkup for Tobey 그 날이 돌아왔다. 이렇게 veterinarian 을 일년에 한 번씩 가서 ‘법적인 의무’ 각종 vaccine shots, 특히 rabies shot..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이번에 어떤 surprise가 있을까? 암만 보아도 우리 11살 짜리 ‘small breed, 작은 개’는 우리 눈에는 별로 문제가 없는데 이곳에 가면 반드시 무언가 그들은 찾아낸다. 작년에는 ear infection이 우리를 놀라게 해서 2번이나 가야 했던 기억이고 그 만큼 $$$ 도 쓰고 해서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skin에 몇 군데 불룩 나온 것들도 걱정이 되지만 doctor의 표정을 보니 별로 문제가 아닌 듯해서 안심을 한다. 하지만 결국 올해의 surprise도 별 수 없이 ear infection 에서 걸렸다. 작년과 100% 같은 것으로 각종 test와 처방들.. 결국은 우리의 잘못인가. 왜 귀를 긁는 것과 냄새가 좀 난다는 것을 ‘모른 척’하고 지냈을까? 그들의 말에 보기보다 통증이 심했을 것이라고 해서 너무나 Tobey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달력을 보니 작년과 timing도 거의 같다. 일 주일 동안 우리가 받아온 처방으로 치료를 하고 다시 가서 test를 받고 그때야 법정 예방주사들을 맞는 것.. 귀찮은 일이지만, 어쩔까.. 우리에게 100% 생 生 을 맡기고 있는 귀한 동물, 우리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며, 내년의 checkup때에 이 녀석의 건강상태는 어떨까 걱정과 관심이 없을 수 없다. 인간나이로 Tobey는 환갑, ’60세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해서 조금 안심을 하기도 했지만 조금만 있으면 나의 나이를 넘어설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는.. 생각하니 조금 아찔해 진다. 동물들도 인간과 같은 영혼 같은 것이 있을까, 동물 신학은 없는가, 이제는 신학자들도 같은 공동체 환경에 사는 생명체에 조금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을까.. 무더운 초여름 낮에 나는 또 백일몽을 꾸고 있다.

 

¶ Wish had a Tundra: Home Depot에 가서 lumber나 siding같은 덩치, 특히 길이가 10’가 넘는 물건들을 살 때면 생각나는 것, ‘아, 나도 pickup truck같은 것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그런 것들이 필요할 때면 hauling하는 작업이 그것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제일 골치 아픈 때는 물론 siding같은 무겁고, 휘청거리고, 엄청 긴 것들이 필요할 때이다. 어떤 것은 16’를 육박하는 ‘키다리’들도 있다.

 

8' lumbers를 실는 것은 Voyager로도 큰 문제가 없다.

8′ lumbers를 실는 것은 Voyager로도 큰 문제가 없다.

큰 문제는 없지만.. 참 모습이 웃긴다.

큰 문제는 없지만.. 참 모습이 웃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truck은 아니지만 truck frame을 가진 mini-van, Plymouth Voyager가 가족여행 용으로 오래 전부터 있어서 그것이 그 동안 lumber-hauling하는데 쓰였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truck인가? 특히 Tundra같이 힘 좋고 큼직하고 멋진 ‘pickup truck’을 가지고 와서 그 많은 ‘길고 큰’ 물건들을 쉽게 실어 나르는 weekend handymen들.. 부럽기만 하다.

친지 ‘최형’에게는 근사한 Tundra가 있는데, 막상 그는 그렇게 ‘집 고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지 거의 lumber hauling 목적으로 쓰지를 않는 듯해서.. 참 세상은 불공평하구나 하는 탄식도 나온다. 집이 좀 가까우면 잠깐 빌려볼까 하는 만용 蠻勇도 생길 정도지만 Sugarloaf, 30+ miles이면 너무나 멀다. 

한 때 집 고치는 일에 푹 빠졌을 때, Home Depot를 자주 다녔을 때는 ‘고물 pickup truck’ 하나 사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지만.. 세월은 흘~러 흘~러 prime time은 다 지나가고, 칠순이 가까운 나이를 고려하면 이제는 아무래도 늦은 느낌이 든다. 역시, 역시 나는 15년 이상 우리 가족을 충실하게 실어 나르던, ‘power-train, body상태가 예외적으로 좋은’ 120,000+ mile 1999년 Plymouth Voyager에게 계속 부탁을 할 수 밖에 없나 보다.

 

Adieu 성모성월 2016..

5월의 포근한 느낌, 우리 어머니, 성모님, 그리고 나의 주위에 머물고 있는 ‘자매님’들.. 5월은 더욱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생각 속에서 ‘응석’을 부릴 수 있었던 진정 내가 좋아하는 ‘성모성월’이었다. 7순이 가까운 나이에 이렇게 ‘응석’을 부린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하지만 때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미리 알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 닥상’ 이라는 것, 나이를 먹는 혜택 중에 하나다. 신록의 나날들, 비록 가끔 가을처럼 느껴지는 싸늘한 며칠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름을 예고하는 각가지 자연적 현상들이 이제는 새롭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눈에 안 보이던’ 초록색깔의 생명들이 이제는 하나 둘 씩 늘어나서 아주 친근한 친구들이 되었다.

Yonsook's Saybrook Trail

Yonsook’s Saybrook Trail

텃밭을 사랑하는’ 연숙은 backyard의 ‘원시림 our own rainforest‘를 하나하나씩 ‘갈고 닦아서’ 드디어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멋진 ‘오솔길’을 만들어 주위에 자랑하기 바쁘다. 그렇게 모기에 물리며 땀을 쏟는 정성이 참 가상하다고 할까? 작년에 새로니가 Mother’s day 선물로 준 포도나무가 겨울을 견디고 살아서 올해는 드디어 arbor structure가 필요하게 되어서 부리나케 남아도는 조각 lumber로 만들었는데.. 이제는 부지런히 그곳을 푸른 모습으로 덮을 것을 꿈꾼다.

 

grape vine arbor structure up!

grape vine arbor structur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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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bey sniffing chicken-wing smelling charcoal

 

Memorial Day, 우리는 누구를 기리는 날인가? 자유세계를 지키던 미국 veteran들인가, 김일성 개xx와 싸우던 veteran들인가.. 조금은 혼란스럽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정의를 위해 싸우며 우리를 직접 간접으로 지켜준 영령들을 기리면 된다. 이날은 아이들이 모이지 못해서 우리 둘이서 전에 나라니가 만들었던 chicken wing 을 grill해서 둘 만의 Memorial Day를 보냈다.

2016년의 성모성월, 그런대로 열심히 살았다. Daily priority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고, 크게 아픈 적도 없었다. 쳐 저가는 느낌의 근육들을 제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도 ‘정상적’으로 했고, 친근한 느낌이 없는 고양이 가족이 새로 생겨난 것도 놀라워하고 돕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였다. 이들이 모두 creator의 creature라는 진리를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도 엄마가슴같이 포근한 달에 엄마와 아내를 졸지에 보내야만 했던 가족들과 슬픔을 나누기도 했던 것, 기억에 생생하다. 피하고 싶기만 했던 구역정치 상황도 본당과 교우들의 노력으로 안정세에 접어들어서 오랜 만에 구역 미사도 갈 수 있었고, ‘점심 부엌 봉사‘도 할 수도 있었다.

  그 와중에 가톨릭 전례력은 어김없이 부활시기에서 연중시기로 바뀌며  성탄을 예고하는 대림시기까지.. 여름과 가을을 보낼 준비를 하는, 이렇게 돌고 도는 것..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갑자기 찾아온 습기 섞인 무 더위에 잠을 깬 a/c 의 소음이 요란하게 들리는 5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6월 달엔 어떤 일들이.. 아니 가능하다면 2017년 5월은 어떨까 생각한다.

Closer to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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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r to Truth? 혹시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인가? 하지만.. 아니다. 예수님은 closer to truth 라고 하시지 않았고, 간단하게 I am the truth.라고 하셨다.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를 극명 克明 하게 보여주는 말 들인가? 철학적, 과학적으로 truth란 것은 어떻게 정의가 되어 있는가? 한가지인가, 여러 가지인가? 여기서의 Closer to Truth는 다행히 복잡한 정의가 불필요한 TV Program과 그에 연관된 website의 이름이다. 자기 나름대로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멋진 format’으로 마음껏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생각 좀하며 살라’는 교훈까지 주는 program이다.

PBS channel로 방영이 되지만 나는 commercial이건 public이건 근래 ‘완전히’ TV 보는 것을 끊었기에, 이것은 program website: www.closertotruth.com을 통해서 video-on-demand 로 편안하게 생각하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program에 대한 나의 견해는, science 특히 natural or applied science background를 가지고 신앙이나 철학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사람에게 이 program은 편안하고도 냉철하게, 폭 넓게,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생각하게 하는 topic들을 세계적 석학들의 view interview를 통해서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성서적 사실과 natural science’의 ‘사실적, 역사적 마찰’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나 같은 경우) 다시 한번 ‘진실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program의 tag line을 보면 어떠한 주제를 다루는지 간단하게 알 수 있다. “The Greatest thinkers exploring the deepest questions: Your Sources for Cosmos, Consciousness, Meaning” 이 정도의 introduction이면 얼마나 깊고 넓은 주제인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등장하는 the greatest thinkers란 누구인가? 일반에게 알려진 석학도 있고 전혀 생소한 얼굴들도 있다.  예를 들면: John Polkinghorne, Deepak Chopra, Michio Kaku 등은 나 정도도 알만한 ‘석학’들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생소한 얼굴들이다. 하지만 나의 제일 관심사는 이 program의 producer, host인 Robert Lawrence Kuhn이란 인물이다. 이 program전에 나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할 정도였다. 이번에 ‘알고 보니’ 조금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는 background의 소유자인 것이: 비록 natural science 배경 (life science)은 가졌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은 ‘돈에 관심이 많았던 money man’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가.. 돈을 억수로 벌고 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철학적, 신앙적인 눈이 뜬 것인가? 특히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나라 중에 하나인 ‘짱께, 중국’을 상대로 아니, 정권에 아첨하며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나를 실망하게 한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그가 만든 이 ‘심각하고 의미 있는’ TV program에 관한 것이니까.. 그렇게 실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는 ‘세계적 석학’들을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인류가 가진 가장 심각하고 심오한 주제를 그들과 거침없이 토론을 하니.. 참 ‘재주 꾼’임에는 틀림이 없다.

3가지 주제: Cosmos, Consciousness, Meaning 중에서 나의 깊은 관심은 역시 자연과학적, 거시적 물리학 Cosmology이고 다음은 자연과학과 신학을 함께 다루는 Consciousness 인데, 마지막의 Meaning은 주로 철학적인 것으로 내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분야다. 이 중에 ‘중간적’인 것, Consciousness 는 알면 알수록 정말 신비스러운 분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가슴과 마음을 활짝 열고 신앙적, 신학적인 것을 이해하려는 지금, 나에게 이 분야는 실제로 physical 한 것과 metaphysical한 것을 골고루 융합을 시킨다는 것으로 현재 내가 practice하고 있는 모든 ‘신앙적인 노력’이 결코 감상적이거나 신화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의 자아 의식이 과연 뇌 안에만 제한되어 존재하는 것일까? 뇌가 죽으면 의식도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 현재 나의 입장은,  의식은 뇌에만 존재하는 local적인 것이 아닐 것 그러니까 nonlocal 이라는 심증이다.

이런 ‘아슬아슬한’ 주제를 세계적인 석학들이 ‘무서움 없이, 거침 없이, 열린 마음으로’  이 program에서 토론을 하는 모습들 너무나 너무나 인상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열린 과학’의 도래를 진심으로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이런 추세들이 과학 특히 자연과학 background를 가진 ‘수세에 몰린 듯한’ 신앙인들에게 많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Memorial Weeken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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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을 떠보니 이번 주말이 Memorial weekend, 별로 큰 느낌 없이 ‘당한’, 기분이다. 이런 ‘휴일 주말’이 예전과 같이 기분을 좋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기야 full-retirement에서 특별한 휴일이 따로 있을까? 매일 매일이 휴일일 수도 있고 반대로 남들이 놀 때 일을 할 수도 있는, 그야말로 자유 중의 자유.. 하지만 ‘절제 moderation와 자기수련 self-discipline’이 빠지기 시작하면 이 자유는 완전한 ‘지옥’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만간 早晩間 변한다는 사실, 뼈저린 체험으로 안다. 나는 값 비싼 대가를 이미 지불했기에, 이제는 문제가 없다.

갑자기 ‘여름 같은 밤’이 들이닥친 지난 밤, 오랜만에 아.. 드디어 여름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습기가 잔뜩 섞인 바람 한 점 없는 안 보이는 air, 피부에서 땀을 날려보낼 기운이 떨어진 듯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공기가 움직여야 땀을 말리고, 이런 바람이 없으면 강제로 바람을 내게 해야 한다. fan 그것도 electric fan, 바로 ‘선풍기’가 필요한 바로 그때가 온 것이다. 밖으로부터 들리는 가라앉은 잔잔한 소음의 a/c compressor소리보다는 ‘앵앵’거리며 귀를 건드리는 귀여운 fan의 소리를 더 원한다. 창문을 열고 바닥에 누울 수 있다는 건 이맘때부터는 ‘특권’에 속한다. 더불어 벼락을 동반한 시원한 오후의 소나기나 소리 없이 내리는 굵은 물방울의 비.. 이것들이 모두 여름의 dreaming of white.. 인 셈이다.

 

드디어 올해  a/c unit cleanup, tune-up, test-up 할 때가 왔는가?

드디어 올해 a/c unit cleanup, tune-up, test-up 할 때가 왔는가?

매일 미사에도 조금 줄어든 사람들을 보며.. 아하.. 휴일에 여행들을 갔구나.. 그래서 더욱 holiday 기분이 든다. 우리는 집을 떠난 지 참 오래된 느낌.. 여행 예찬론을 귀따갑게 듣지만, 우리와는 그렇게 인연이 없나 보다. 여행을 간 듯이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 둘의 지론 持論 이다. 인생 자체가 ‘서사시’ 적인 여행이 아닐까? 새로니는 이제 학교가 방학이 되어서 완전히 몇 달 동안 자유인이 되고, 일 주일 후면 계획을 했던 ‘유럽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고, 덕분에 pet dog Ozzie 는우리 집에서 당분간 살게 된다. 몇 주일 동안 같이 살면 이 녀석 어떻게 변할까 주목이 된다. 항상 바쁜 나라니는 이번 짧은 주말, 친구와 Panama City Beach로 떠났다. 그곳은 우리 가족 오래 전 regular summer place였는데.. 그곳도 많이 변했을 것 같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backyard에  ‘연숙이-오솔길’이 새로 생긴, 우리의 ‘피곤하고 낡은 집, depression-era shack’이 최고의 summer place 다.

 

The Guitar Handbook

Scan10004-1오래~ 오랜 만에 이 ‘번쩍거리는 표지’를 가진 책의 먼지를 털고 책상 위에 꺼내 놓았다. 1990년경에 산 책이다. Atlanta 지역으로 이사온 즈음에 산 것인데, Internet 이 일반인들에게 ‘유행’하기 전이고, 그러니까 Amazon.com 같은 것은 물론 없었고, 집 근처에 있는 ‘정다운’ bookstore에서 산 것이다. 당시 나는 NorcorssDoraville 이 마주 닿는 곳, Pleasantdale road@I-85 (near Spaghetti junction) 에 직장, AmeriCom 이 있었고 그곳에서 5분 떨어진 Four Seasons Apartment에서 살 무렵이었으니까.. 거의 분명히 가장 가까운 Jimmy Carter Blvd에 있었던 Green’s Corner shopping center에 있던 Green’s Corner bookstore에서 샀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런 ‘조그만 책방’은 다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big-name bookstore가 나오기 전이었고 비교적 작은 local bookstore 가  ‘동네 근처’에 많았다.

이 guitar에 대한 책을 왜 그때 샀을까.. 아직도 머리를 굴리지만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때에 나는 분명히 ‘머리를 식히려’ 가끔 ‘고물’ YAMAHA acoustic guitar를 만지작거리며 살았을 것이고, 1969년 부터 연세대 같은 과의 ‘기타 귀재 鬼才’ 심재흥에게 자극을 받아, 등 넘어 배우며 즐기기 시작해서 그런대로 중년 때까지 명맥을 이어온 나의 ‘알량한’ 기타솜씨를 조금이라도 낫게 하거나 잊지 않게 하려는 ‘처량한’ 희망에서 그 glossy한 책을 샀을 듯 하다.

당시에 나는 그 책의 ‘사진, 그림들’을 다 즐긴 후에 곧바로 책을 덮고 서재의 깊은 곳에 내동댕이를 쳤는데.. 이유는 기타 technique 을 다룬 ‘소위’ magic technique 들은, 암만 보고 읽어도 알 수가 없는 난해한 것들 투성이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콩나물 대가리’들로 각종 전문용어를 쓰며 해설을 했던 기타 가르침.. 나에게는 한마디로 무용지물 無用之物 이었다.

그리고.. fast forward해서 25년 뒤에 그 책의 먼지를 털고 다시 나의 시야에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유는 25년 전과 같은 것, ‘혹시, 혹시, 혹시’ 이 책에 무슨 ‘하루아침에 기타 귀재가 되게 하는’ 그런 보물이 없을까 하는 가느다란 희망은 아니고.. 그럴만한 이유가 갑자기 생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성당에서 가밀라 자매님의 장례미사 후 식당, 본가설렁탕, 에서 만났던 레지오 은총의 모후 자매님 두 분이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말과 혹시 내가 시간이 될지를 물었었는데, 그 자리에는 진희아빠의 누님인 프란체스카 돼지띠 자매님도 있어서 일언지하 一言之下 로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이 ‘그룹’은 오래 전에 어떤 ‘기타 전문가’ 30대 청년으로부터 9개월 이상 강습을 받았다고 했고, ‘발표회’까지 했다는데 (이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진희아빠가 그 중에 하나였으니까) 아마도 그 이후에는 별로 활동이 없었고 실제로 ‘코드, guitar chord’도 많이 잊은 듯했다. 하지만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그 관심과 열의 (그들의 gesture나 face expression)를 나도 느낄 수가 있어서 나도 관심이 갔던 것이다.

우리부부의 레지오 ‘활동’도 이즈음에는 조금 덜 바빠졌고, 나도 자꾸만 rusty해지는 손가락이 근질근질하기도 했기에 이번에는 깊이 생각 안 하고 이것도 It’s Now or Never, Before it’s too late 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2주 뒤에 그러니까 지난 화요일 레지오 회합이 있던 날 드디어 ‘동호인’ 2명과 만나서 잠깐 나의 guitar 치는 style (acoustic, picking) 을 보여 주었고 그들도 큰 하자가 없는지 계속해서 모임을 추진하자고 했다.

그날 그 자매들이 가지고 나온 ‘강습 Note, 악보’ 잠깐 훑어보니, 다행히 나에게도 친근한, 생소하지 않은 곡들이 실려 있었다. 그러니까 늦어야 80년대 folk-ballad style 대부분은 아마도 70년대 ‘젊은이들의 노래’가 아닌가 싶었다. 그 정도라면 내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인데, 문제는 과연 이들이 지난번에 어떤 format으로 배웠냐는 것인데.. 아무도 친절히, 자세히 설명하는 자세가 아니어서 조금 실망을 했다. 그러니까.. ‘무조건, 적당히..’ 해 달라는 것인가?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내가 조금 성급하게 승낙을 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걱정이 든 것이.. 내가 반세기 전에 기타를 ‘치기’ 시작한 이후, 남에게 ‘정식으로’ 가르쳐본 적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부분 ‘등 넘어 로’ 배웠으니 그들도 등 넘어 로 가르쳐 줄 수가 있는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기타 경험자’를 가르칠까 하는 것,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이런 연유로 기타에 대한 개인적 추억과 역사를 더듬게 되었다. 사실, 앞으로 써야 할 memoir blog 중에는 연세대 3학년 시절, 1969년이 다음 차례인데 그 1969년 일년의 대부분이 guitar에 얽힌 것들이다.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들.. YMCA에서 하던 전석환 씨의 Sing-along-Y란 곳에도 갔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전석환씨가 가르치던 YMCA guitar class에서 한 달 강습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러니까 비록 등 넘어 배웠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정식으로 시작’은 한 셈이었다. 처음에는 통 acoustic기타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electric guitar로까지 발전을 했지만 결국은 통기타로 돌아와서 현재에 까지 이른 셈이다. 그러니까 나는 비록 intensive하게 배우고 멋지게 연주는 못 했어도 그 오랜 세월 한번도 이 것에서 멀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근래에는 즐기는 노래들의 chord를 악보를 안 보고 치는, 그러니까 완전히 ‘외우는’ 는 쪽으로 노력을 해서 많은 성과를 얻었다. 바로 이것이 끈기 있게 guitar를 ‘즐기는’ 비결이었음을 이제야, 황혼기에 깨달은 것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알았으니.. 게다가 나에게 배우겠다는 ‘자매님’들이 생겼으니 이것도 내실 흐뭇한 일이 아닌가? 간바로!!

 

P.S., 아래에 보이는 video, The ventureswalk don’t run은 당시 electric guitar를 배우는 사람들의 standard였다.  이들이 rock-style instrumental guitar 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다.

 

 

Walk Don’t RunThe Ventures – early 60’s

 

Feral Cat Family Baaaaaaa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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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 집 backyard shed 에서 출산 후에 계속 우리 집 backyard에서  살던 feral shed cat family (1 mom + 4 kittens)…  그날 하루 종일 섭섭하고 우리를 우울하게까지 했던 ‘그 귀여운 녀석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새벽에 쓸쓸한 심정으로 shed에 가보니.. ‘모두’ 돌아와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암만 추측을 해도.. 그들이 어디에 ‘하루 종일’ 갔다 왔는지 알 수가 없다. pet 특히 cat behavior의 ‘전문가’ 인 나라니에게 물어보니, 아마도 주변을 explore를 하려고, kitten들을 ‘훈련 시키려’ 외출을 했을 것이라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떻게 거의 24시간을 밖에서 보냈을까.. 먹이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지만 그런 궁금증 상관없다. 돌아온 것만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우리 집 식구가 돌아온 듯한 기분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안 떠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우리 집을 완전히 떠났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닐까? ‘공짜’ 먹이가 ‘보장’이 된 곳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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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이들이 밖에서 ‘활발하게 노는’ 모습을 back porch 안에서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들, 4마리의 모습이 다 다르고, 크기도 차이가 나기 시작하고, 활발한 정도도 다 다르다. 제일 활발한 녀석은 이제 shed옆에 붙어있는 높은 나무를 기어올라 shed roof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놀기도 한다. 제일 작은 두 녀석은 자기의 모습이 비슷함을 알았는지 서로 껴안고 누워있기도 하는데.. 그들의 모습은 정말 너무나 귀엽다.

문제는 이들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는 셈인가.. 아니면 우리 집을 결국 떠날 것인가?

결국, 의견들을 종합하면 아마도 시간이 되면 엄마가 떠날 것이라고, kitten들을 뒤로 두고..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동물들은 거의 모두 그렇게 살지 않는가? 자식들이 자립할 때까지 보아주고 떠나는 것.. 인간도 거의 마찬가지니까. 아니면.. 이 가족이 모두 이사를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또 없어져서 안 돌아오는 것이다. Case마다 다르니까 자신은 없지만, ‘아마도 당분간’, 식량이 풍부한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도 있고..

우리가 해 주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은: 이들의 ‘불임수술: neutering, spaying‘이다. 다시는 이들이 kitten을 더 못 낳게 하는 일, 이것이 불필요하게, 비 인간적으로 이들을 ‘죽일 필요 euthanasia’가 없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Internet을 찾아보니.. 이것도 하나의 ‘사회적 정의 운동’으로 되어서.. 정말 많은 사람들, 특히 cat lover 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작은 딸 나라니도 그런 쪽에서 한 몫을 하고 있었다. Kitten들은 최소한 6개월이 되어야 불임수술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시간이 조금은 있는 편이지만, 문제는 mommy cat이다. 그 녀석, 또 임신을 하면 문제가 아닌가? 그 녀석은 원래 밖에서 살던 녀석이라 trap하는 것도 큰 일이라.. 우리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이 kitten들에게 adopt family를 찾아 주는 것이다. 특히 제일 귀여운 이 때에 이들의 입양 chance가 높을 것 같다. 그래도 주위에 만나는 사람마다 알리고 있지만, 글쎄.. 예상보다 이 것이 쉽지 않다. 모두들 그렇게 바쁜지.. 특히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미국에 오래 살았어도.. 전통적인 고양이에 대한 allergy가 있는 모양이다. 개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이곳의 추세도 모르는가? 먹이와 litter box만 있으면 거의 ‘공짜’로 키울 수 있는 것인데..

 

Kittens gone, Pastor shock

¶  Kitten family gone: Backyard shed에서 태어난 4마리 kitten과 엄마 가 갑자기 오늘 아침부터 보이질 않았고, 하루 종일 밥과 물을 살펴보아도 없어지질 않고.. 나의 느낌이 이 5가족이 사라진 듯 하다. 우리 집에서 낳은 4마리 아기 고양이들과 엄마가 모두 귀신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 동안 밥을 엄청 먹기에 거의 바닥이 난 고양이 밥을 사러 내일 Costco에 가기로 계획까지 세웠는데.. 어떻게 이렇게 우리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갔단 말인가?

너무나 화창하고 가을같이 서늘한 일요일, 비가 그친 후 다시 backyard에 나가서 deck, grape trellis 등 일을 하였지만 계속 이 5 고양이 가족이 돌아오나 shed쪽에 신경을 썼지만.. 그렇게 뒹굴며 놀았던 shed 옆 마당은 고요하기만 하다. 너무나 기분이 이상한 나 자신에 내가 놀란다. 몇 주 동안 그 애들 밥을 부지런히 주며 보살폈던 하루하루가 선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왜 갔을까? 왜? 이것이 출산 후의 고양이 일가의 습성일까? 일단 kitten들이 건강하게 크면 이렇게 낳은 곳을 떠나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추측에는 어제 새로니의 pet dog, Ozzie가 들려서 backyard에서 짖어대며 떠들어 댄 것이 화근이었을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mom이 용단을 내려서 떠난 것일까? 너무나 서운한 마음, 괴롭기까지 하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면 그래도 정성스레 먹이와 shelter를 제공한 우리에게 ‘감사’하며 떠났을 것이라는 ‘억지 희망’을 갖는다. 언제라도, 먹이가 떨어지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  New pastor shock: 오늘 모처럼 동네 본당 Holy Family Catholic Church 주일 미사를 보러 갔다. 우리의 지정석이 있고 그 주위의 교우들 이제는 거의 고정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아는 얼굴이 안 보이면 그래도 관심을 가져줄 정도가 되어, 그야말로 정든 ‘미국 본당’의 역할을 유감없이 하는 곳이다. 3주 전에 Irish pastor Father Darragh Griffith 가 본당을 떠난다고 발표를 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하지만 10년이 넘게 주임신부로 계셨으니 (50세가 넘은 젊은 신부) 사실 크게 놀랄 것은 없다. 하지만 10년 이상 있었으니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것이 문제다. 6월 초에 떠나게 되고 Norcross (Peachtree Corners) 에 있는 본당으로 가신다고 했다.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서 사실 조금은 덜 섭섭하기도 했고, 새로 오시는 주임신부는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늘 주보를 보니 드디어 새로 오는 주임신부가 소개되어 있었다. 사진과 간단한 약력을 암만 보고 읽어도 시원스럽지 않은 점들이 있었다. ‘전통적인 신부님의 약력’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Atlanta Metro에서 가장 conservative한 ‘동네’인 이곳 East Cobb에 Cuba 출신인 Father Miguel.. 정말 이제 Irish power는 사라지고 있는가? 가장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얼굴이나 Hispanic 등이 아니고 Greek Orthodox Melkite background란 것이다. 기억에 Melkite 쪽은 celibacy (독신) 제도가 없는.. 그러니까 성공회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이 있는 신부라고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집에 와서 부리나케 googling을 해 보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 새 주임신부님.. 정말 colorful한 인생, 신앙 여정의 소유자였다. Cuba 에서 온 망명인사의 가정에서 자라고, 개신교 (침례교) 출신에다가, 다음에는 Episcopal Church (성공회)의 신부가 되더니, 이제는 Melkite로 변신, 결국은 Roman Catholic으로 오긴 했지만 Melkite의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 둘은 이 ‘난감한 소식’에 아연실색.. 어쩔 것인가? Wife가 있고 가정이 있는 천주교신부.. 라니.. 암만 생각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신부님이 아닌 것이다. 대주교가 미쳤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우려하는 것들이 다 이유 있게 설명이 될 것이라는 희망은 가지고 있다.

 

Cool rain, 4 shed kittens plus

¶ Rainy May Afternoon: Peaceful easy feeling.. cool, rainy waning May days: 이것이 요새 며칠간의 느낌이라면.. 한때 거의 90도까지 치솟았던 5월 초를 생각하면 요새 흐리고 빗발뿌리는 날씨들은 정말 의외라는 신선한 느낌들을 준다. 성모성월, 어머니 날, 어머니 기일, 온통 포근한 느낌의 5월이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잔잔하게 내리는 물방울들은 정말 peaceful easy feeling, 그 자체다. 다행히 올 들어 한번도 ‘시끄러운’ a/c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고물 중에 고물이 된 이 고철, 올해의 더위에 과연 견딜까.. 지난 몇 년간 이맘때면 항상 ‘점을 치던’ 습관이 올해에도 변함이 없다.

고요히, 잔잔히, 싸늘하게 내리는 5월 비..

고요히, 잔잔히, 싸늘하게 내리는 5월 비..

저물어 가려는 시원하게 비가 나리는 5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삭신을 쑤시게 하는’ 바깥 일들, 중노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그런 일들, deck finishing, garden structures, siding repair, new flooring, garage overhaul등등..   천천히 계획을 세워서 하면 큰 문제가 없을 듯하지만 문제는 expense.. 이것은 budgeting을 하지 않고서는 무리, 무리..

5월 말에는 우리 집의 다른 senior citizen doggie, Tobey의 annual medical checkup이 있는데, 이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 분명히 나이 탓으로 여러 가지 test를 하자고 할 것이고.. 항상 surprise가 도사리고 있음도 경험으로 알기에 신경이 쓰인다. 나와 같이 늙어가는 우리 집 ‘깡패’ Tobey.. 가끔 안아주면 서로가 쳐다보며.. 무언의 대화를 한다. 우리 참 정이 많이 들었다.. 누가 먼저 가던지 가는 곳에서 서로 또 만나자.. 라는 듯. 사람보다 나은 개들도 많은 이 세상이 이런 정든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언제가 서로 헤어져야 할 것을 생각하면 다시 우울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법칙이고 순리가 아닐까?

 

¶ Four Shed Kittens, weeks after: 우리 집 backyard에 있는 shed 밑에서 kitten 4마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있음을 지난 5월 초에 알게 되었음을 나의 5월 6일자 blog에 썼지만 그 이후의 ‘발전’에 관해서는 잊고 있었다. 그 몇 주(2주가 훨씬 넘은) 동안 우리의 온통 관심은 그 4마리의 ‘귀여운 (이 나이에 귀엽지 않을 리가 없지만)’ kitten에 있었다. 하루에 몇 차례씩 ‘식사공급’을 하면서 그들을 볼 기회가 있지만 아직도 낯을 가리며 숨기 일쑤다. 항상 엄마를 조심하며 접근을 하지만 생각보다 엄마는 최소한 우리가 ‘나쁜 놈들’이 아니란 것은 아는 듯 하였다. 그들에게 겁을 안 주려고 사진조차 찍는 것을 참고 있다.

밥을 어찌나 많이 먹던지.. 아마도 kitten보다는 엄마가 많이 먹을 것이다. Nursing mom cat은 평소보다 3배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이해가 간다. 주는 대로 시원스럽게 밥이 없어지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고, 하루 하루 다르게 커 보이는 kitten 4 sister, brother들 서로 장난을 치고 wrestling을 하고 엄마 품에 앉게 노는 모습들.. 나는 느낀다. 우리 집 아이들 세상에 나왔을 때를 생각하지만 그 때와 또 다른 것이다. 나이 탓인가, 신앙적인 믿음 탓인가.. 다르다. Pope Francis의 제2의 회칙 encyclical,  Laudato Si (On Care for Our Common Home, Earth, 아씨씨의 성 프란치스코 Canticle of the Sun 에서 나온 말)의 영향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가족이다. 생명이 있는 것이면 더욱 그렇다.

현재까지 우리 집 backyard shed의 밑 바닥을 자기 집으로 알고 편하게 nursing을 하는 ‘엄마’, 평소보다 덜 ‘외출’을 한다. 분명히 편하게 잘 먹을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먹이가 이곳에 없었으면 분명히 ‘산모’의 몸으로 먹이를 찾아 모험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자식들을 챙기는 고양이 엄마의 보호본능.. 그것이 그들의 본능적 사랑일 것이다. 시간이 되면 kitten들을 떠나겠지만 그 때까지는 ‘책임’을 지고 살필 것이다. 이보다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답답해짐을 느낀다. 동물보다 못한 인간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매일 매일 자라나는 아기 고양이들을 보며 많이 배울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Laudato Si 의 정신이고 무엇이 자비, 사랑인지를..

 

¶ 나르는 엄마 고양이: 고양이, 양양이의 얼굴들이 눈에서 아롱거리는 이때, 1960년 4.19 혁명 당시 미국 사진 화보잡지 LIFE magazine의 ‘이모저모, miscellany’ 란 에서 재미있는 사진과 짧은 기사를 보았다. 이것도 역시 ‘산모 고양이 엄마’에 대한 사진과 기사다. 동물 모성애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극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잡았다.

출산 날짜를 ‘잘못 잡아서’ 어느 테네시주 Tennessee 낙스빌 Knoxville 의 교통순경 patrol man 집 낮은 지붕 porch 위에서 kitten을 낳은 엄마 고양이 Puddy, 이들을 땅에서 보살피기 위해서 ‘공수작전’을 하려는 노력으로 지붕 옆에 있는 나무 가지로 3주된 kitten 한 마리씩, 모두 네 마리, 입에 ‘물고’ ‘비행’하는 장면.. 글에 의하면 그 엄마 고양이는 kitten 4마리 ‘모두’를 안전하게 땅으로 ‘안착’시켰다고 한다.  어머니, 엄마의 계절 5월에 보는 이런 모습들은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3주 된 kitten을 물고 나르는 엄마 고양이, Puddy

3주 된 kitten을 물고 나르는 엄마 고양이, Puddy

 

화창한 5월 두째 주말은..

¶  5월 13일.. 2016년 5월 13일 Friday.. 아하 ‘또’ Friday the 13th 인가.. 하였지만 곧 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금요일 13일은 맞았지만 문제는 5월 13일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맞다 바로 Fatima.. Fatima.. Portugal, 1917년 5월 13일인 것이다. ‘묵주의 성모님’으로 일컬어지는 파티마 성모님 정확히 99년 전 5월 13일에 3명의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셨다. 그리고 확고한 역사로도 자리를 잡았다. 당시 Lisbon의 유력 정부기관지였던 the Seculo에 보도가 되었을 정도로 큰 ‘사건’에 속했다.

기록(그러니까 역사)에 근거한 영화나 책들이 많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흥행성’을 의식한 영화들은 너무나 ‘색깔’들이 끼어있다. 근래에 발견한 ‘고서’ 중에 The True Story of Fatima 가 있는데 이 책은 주로 목격자 중 제일 오래 생존했던 Lucia수녀님의 증언에 의한 것이고 발현 당시 다른 일반인들의 증언에 의한 교회의 치밀한 발현승인 과정을 거친 것이라 거의 정확한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인 발현이었지만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 의미를 주는 것일까? 발현 성모님의 모든 예언들이 역사적으로 다 실현이 된 것을 보면 ‘등골이 써늘해 짐’을 느낄 때도 있다. 일관되게 비교적 간단한 요구사항을 요구하시는 성모님의 message들, 과연 쉽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 message 의 중심에서 초 현대의 세속세계는 내가 보아도 ‘너무나 너무나’ 멀어져 있고 무섭게 멀어져 간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성모님은 희망의 상징이다. 희망은 원하면 언제나 자비와 함께 우리가 받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닌가?

 

¶  마리에타 2구역 점심봉사: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구역미사에 이어서 곧바로 구역이 담당하는 ‘의무적’인 순교자 천주교회 본당 점심봉사 날이 다가왔다. 이것이 주는 stress로 구역장을 못하겠다는 의견도 많이 있을 정도로 사실 이것은 큰 일이다. 200여 개 이상의 serving을 예상하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 한마디로 장난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서 각가지 knowhow가 축적이 되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공식’같은 것도 있음 직하다.

우리는 advanced age라는 이유로 봉사의 의무에서 excuse가 되고 있었지만(우리가 희망하기에), 이번에는 조금 사태가 다르게 되었다. 구역이 둘로 나뉘고 우리가 속한 ‘반’은 숫자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특히 형제님의 숫자가 안심할 정도가 못되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이번에는 봉사하기로 하고 준비하는 날, 점심 봉사하는 날 full-time으로 일을 하였다. 솔직히, 기분 좋게 일을 해서 그런지 일은 비록 많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 동안 못 했던 미안한 심정도 어느 정도 위안을 받게 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지만 ‘호사다마 好事多魔’라고 하던가.. 모든 것이 끝나고 하얀풍차에 몇 명이 모여서 뒷풀이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즐겁지 않은 뉴스, persona-non-grata 를 접하면서 조금은 흥이 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고 main event자체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이 나서, 이틀간의 service는 우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  감사합니다, 예수님! 메주고리예:  매달 2일에 메주고리예에서 visionary Mirjana에게 ‘공개적으로 publicly’ 발현하시는 성모님, 이제는 게으르지만 않으면 Youtube를 통해서 주로 Italian pilgrim들과 함께하는 group이 찍은 video를 볼 수 있게 되었다. 5월 달은 초부터 무언가 바빠서 깜빡 하고 이것을 check하는 것을 잊었다. 이제야 보니.. 무언가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렸다. 바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하는 우리말 노래가 아니었던가. 비록 영어 accent가 섞였지만 아주 정확한 우리말 노래, 그것도 통역을 전담하는 형제가 유창하게도 불렀다. 어떻게 이렇게 우리말 노래가 불려지도록 주선이 되었을까? 추측에 대한민국도 ‘메주고리예 신심’이 상당해서 이곳 메주고리예에서도 인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완전한 나의 상상, 추측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은 상당히 높을 듯하다.

 

 
성모님 발현 – 메주고리예 2016년 5월 2일

 

¶  The Seekers: I’ll Never Find Another You 1967,  우연히 우연히 이 노래 video를 보게 되었다. 요새 비교적 잊고 살았단 나의 지난날의 추억이 나를 아득~하게 만든다. 나에게도 그런 꿈같던 시절이 있었지.. 하는 조금은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나만의 추억들.. 추억의 얼굴들.. 이런 것들이 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것, 특히 ‘유행가’와 연관이 되어서,  뇌세포 깊숙한 곳에서 꺼떡없이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옛 유행가를 그렇게 아직도 좋아하나 보다.

오늘 본 것은 Australian vocal group, The Seekers의 경쾌한 country style ballad ‘I’ll Never Find Another You‘. 가사야 큰 의미가 없지만 이 노래의 lead singer의 목소리가 이 노래의 tone과 style을 그렇게 classic으로 만들었나 보다. Judith Durham, 바로 이 그룹의 간판 격 ‘청순한 tone’.. 몇 년 뒤에 미국의 The Carpenters의 Karen Carpenter 가 바로 이런 독특한 음성의 소유자였고 역시 그녀의 모든 노래들, 주옥같이 역사에 남는다.

이 모두 1960년대 말 경이었다. 그 시절, 그 시절, 어떻게 time travel을 꿈 속에서라도 할 수 있을까? The Seekers의 경우, 그 lead singer, Judith Durham의 얼굴과 자태가 내가 한때 ‘좋아했던’ 어떤 아가씨와 그렇게 닮았다. 키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그 때의 그 노래가 그래서 그렇게 그리운가 보다.

 

 
The SeekersI’ll Never Find Another You – 1967

 

Marietta Local 2, 구역 미사

이번 주 수요일 저녁, 초여름 같이 덥던 날 저녁에 오랜만에 마리에타 2구역 미사엘 갔다. 너무나 오랜만에 구역미사엘 가는 기분이 들어서 기록을 찾아보니 마지막으로 갔던 때가 작년 10월 달 C 마르코 형제 댁에서였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그 이후에 구역미사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면 우리는 가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가급적 구역 미사에 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 이유 중에는 (1) ‘비정상적으로, 미친 듯이’ 비대해진 구역이 재 조정되는 사실(2반으로 나누임)이 신부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는 중요한 자리라는 점, (2) 평소에 친근하게 느껴지는 돈보스코 형제 댁에서 열린다는 점, 이 포함되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거대, 비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나간 그야말로 sprawling suburb 처럼, 온갖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던 이곳을 나는 멀리서, 가끔은 가까이에서  ‘인과응보 因果應報, 자업자득 自業自得‘의 간단한 진리를 터득하고 터득한 터였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이 만든 재해였다. 저절로 생긴 재해가 아닌 것이다. 그 문제의 핵에는 몇몇 안 되는 사람이 항상 있었고, 그렇게도 우리는 멀리서 ‘무언 無言의 경고’를 했지만 self-correction할 시기를 놓치고, 결국은 갈 때까지 간 것이다. 뒤에 생각해 보니 역시 ‘진정한 기도’가 빠진 group의 말로가 아니었던가?  문제 핵심의 장본인은 결국은 피해자로 (a.k.a, persona-non-grata) 전락을 하고 한 동안 떨어져 나간 듯이 보였고 그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불안한 평화, 잠잠해진 듯 했다. 하지만 그 문제의 핵은 요사이 다시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다시 이 group 앞날은 불투명해질 수도 있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불어난 덩치’에 의한 문제는 비교적 직접적인 조직적인 방법으로 풀릴 수 있겠지만, ‘문제의 핵’에 의한 문제는 그 핵의 중심 인간들이 바뀌지 않는 한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구역의 비정상적인 덩치에 의한 문제는 이날의 미사에서 신부님의 sanction 비슷한 조치로 공식화 되었고, 거의 순간적으로 기본적인 모임에 관한 문제 logistics 는 풀린 셈이 되었다. 훨씬 전에 이런 조치로 문제를 풀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이제라도 단계적으로 풀어나간 새 구역장단들, 의미 있고, 큰 일을 했다고 본다. 

이제부터는 bubble-era mansion같이’엄청 커다란’ 집들에 비해서 depression-era 를 연상시키는 작은 우리 집에서도 구역모임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감회와 감개무량한 심정까지 들 정도가 되었고, 조금 더 오붓하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신앙중심적인 소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 작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날 한가지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이날 host, 돈보스코 형제가 연세대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새카만’ 후배 동문이었지만 반가웠다. 어떻게 내가 연세대 출신임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궁금할 것은 하나도 없다. 알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까.

p.s., 이 모임에서 우리 둘은 jumbo-size 양주 공급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외도를 한 셈이 되었고 다음 날, 하루 종일 nasty hangover로 고생을 해서 쓰라린 교훈을 얻은 셈이 되었다.

 

진정 나이가 든 것인가..

¶  온몸이 쑤신다. 유별나게 예전과 다르게 쑤신다. Tylenol을 계속 먹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진통제 역할밖에 못한다. 진정 나는 70이 바라보이는 늙은 몸의 소유자가 되고 있는가? 60세 만세론 에서 이제는 65세 만세론, 다음은 무엇인가, 70세 만세론 인가? 60세도 못 살고 60세 만세론을 주장한 이진섭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과연 나는 살 만큼 산 것일까?

Gym에서 운동을 하고 느끼는 통증과 완연히 다른 ‘괴로운’ 통증을 이번에 deck을 중심으로 한 육체적 노동을 ‘갑자기’하면서 톡톡히 겪는다. 거기다가 치통까지 겹치면 나는 숫제 화까지 겹치는.. 그런 것들은 과히 평화로운 시간들이 아니다. 어떻게 나는 이런 고통을 manage할 것인가? 기도에 의지하는 것은 조금 쳐지고, 나태한 방법일 듯..

 

¶  어제 돈보스코 형제 집에서 구역미사가 있었고, 거기서 예상치 않게 ‘쎈’ 술을 연숙과 같이 마신 것이 또 다른 통증, 피로감을 주고 있다. 기분이 좋게 마셨지만 그것과 상관이 없는가? 왜 이리 몸을 주체할 수가 없는가? 이것도 역시 70에 가까운 나이 탓인가? 조금은 슬프기도 하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그런 생각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3월로 끝이 난 우리의 봉성체 중심의 레지오 활동은 4월로 접어들면서 양상이 바뀌고, 조금 활동이 주춤해진 듯하다. 묵주기도가 이제는 안정적으로 120단을 유지하는 것만이 조금 위안을 줄 뿐이다. 활동은 어디로 갔는가? 어떻게 활동거리를 찾을 것인가? ‘단장’은 별로 그것에 대한 생각을 안 하는 것인가? 개인적인 활동거리를 생각하며 나는 성모님께 ‘가끔’ 기도하고 있다. 아직 분명한 응답이 없다. 나는 ‘여생’을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레지오에는 어떤 일들이.. 2명의 ‘이상한’ 자매들이 갑자기 들어 오더니 한 명은 다른 얼굴을 보이며 나가고 다른 한 명은 정말 ‘해괴한’ 행동으로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며 우리들을 우롱하고 있다. 나의 과잉반응인가.. 아닐 것이다. 나의 레지오 역사도 이제 꽤 되어간다는 증거인가? 어떻게 그런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까? 전혀 성모님의 사업에 도움이 안 될 것이 확실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기다리며  그 이상한 자매가 변하기만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너무나 나는 그런 모습에 실망을 하며 괴로움을 당하니.. 거기다가 최고 연장자라는 자리를 굳게 지키는 분, 여지없이 모든 role model의 인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겠지.. 그래 있는 그대로 보고, 큰 기대 하지 말고, 나나 잘하자..

 

¶  우리 집 shed 밑에서 새로 태어난 5마리의 양양이(kitten) 가족들, 4마리의 어린 생명을 보며 지나치게 나는 감상적, 철학적 심지어 신학적으로 된다. 내가 오래 전에 괴롭혔던 양양이 에게 사죄를 청하며 산지도 꽤 오래 되었지만 하느님은 나에게 보속으로 ‘양양이를 보면 나를 슬프게 만드는 벌’을 주셨다. 나는 너무나 눈물로 보속을 청하며 이 새로 태어나는 양양이들을 보살피고 싶다. 모든 생명은 다 나름대로 귀중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 가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배불리 먹이고 보호하는 것 이외에는 생각이 나질 않지만.. 

50+ 년 선종 善終, 돼지띠 자매

¶  다른젊은엄마의 장례미사: 오늘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는 ‘뜻밖의, 급작스러운’ 연도와 장례미사가 있었다. 모든 죽음이 어떤 면에서는 뜻밖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의 죽음은 내 주위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느낌’을 주는 Camilla 자매님의 죽음이었다. 지난 3월 사순절 막바지에 오랜 투병을 끝내고 선종을 한 다른 ‘젊은 엄마’ 보나 자매님의 기억이 생생한 이 마당에 또 한 명 자매님의 선종은 예기치 않았던 글자 그대로 ‘급작스런’ 죽음인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 같았다.

한창나이 쉰 을 갓 넘은 ‘젊은 엄마’의 죽음.. 불과 3일 전, Mother’s Day 하루 전에 급작스러운 엄마의 타계.. 그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로써는 도저히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학생나이의 두 따님의 심정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고향’같을 수도 있는(견진성사를 이곳에서 받았다기 에) 순교자 성당에서, ‘해맑은’ 한 토마스 신부님의 ‘젊지 않게 깊이 있고, 자상한’ 고별강론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유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리라..

비교적 앞 자리에 앉아서 고별미사 내내 나는 고인의 사진을 응시하며 생각을 한다. 60/70년대 통기타 folk singer였던 박인희씨를 연상시키는 그런 ‘청초’한 모습, 저렇게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떠나는 것.. 본인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가족들과 지인들의 놀라움과 슬픔을 한동안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우리 부부가 그런 처지를 당하면.. 상상을 한다. 그런 제로가 아닌 가능성을 매 순간 생각하며 살면 비록 피곤은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사랑스런 말이나 표정’으로 서로를 대할 것 같지 않을까?

고인의 큰 따님(순교자 성당 종교학교 교사였다고 함)이 사실 불과 일 주일 전 마지막 고인을 보았을 때 별로 좋은 않은 감정으로 헤어졌다고 후회를 했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찌 안 그렇겠는가, 아마도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난 날 다음날이 Mother’s Day임을 생각할 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비록 평소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교우 자매의 고별식이었지만 뜻 밖에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레지오 화요일’ 오후가 되었고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가족들끼리 틈이 날 때마다 ‘We love you라는 message를 교환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  돼지띠 프란체스카: 장례미사가 끝나고 ‘실로’ 오랜만에 가보는 ‘본가 설렁탕’이란 순교자 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뜻 밖에도 20년 지기 知己, 최형 (a.k.a.진희 아빠)의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님를 만나게 되어서 합석을 하게 되었다. 참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때도 오는가.. 최형은 비록 ‘전통적’인 가톨릭 교우이지만 Sunday Catholic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비해 누님인 프란체스카 자매는 매주 화요일 레지오 주회합 우리 바로 옆 방에서 모이는 다른 레지오의 부단장을 하는 비교적 활동적인 교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최형의 집에서 모임이 있을 때 가끔 볼 정도로 잘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주일 마다 얼굴을 보게 되기도 하고 꾸리아 월례회의에서도 우리의 바로 옆자리에 앉는 등 가까워진 느낌까지 들게 되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은.. 이 자매님, 비록 ‘누님’ 격으로 통했지만 나와 띠가 같은 ‘돼지띠’였다. 최소한 나와 동갑인 셈이 아닌가? 깎듯이 누님으로 대하던 것이 조금은 어색해지기도 하고,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식사까지 하게 되니 이제는 동갑친구 같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돼지띠를 만나거나 보게 되면 나는 이상할 정도로 정이 가는 것은 왜 그럴까? 2년 전까지만 해도 ‘전요셉’ 형제가 돼지띠 동갑으로 사귀게 되어서 나를 기쁘게 했지만 사귀자 마자 ‘영구귀국’을 해 버려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차에 돼지띠 ‘누님’이 나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친구누님으로 대할 것인가 돼지띠 동갑친구로 대할 것인가.. 조금은 혼란스럽기까지 하지만 이날 동석으로 식사를 하면서 ‘말이 통하고, 재미있는 자매’임을 느끼고 안심을 하였다. 동생 최형과 같이 서울 덕수국민학교 출신 임도 알게 되었는데, 나와 정확히 같은 해에 같은 서울 하늘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만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으니..

이날 같이 합석을 한 ‘자매님’들은 같은 레지오 단원들인데 우연히 이들 group이 몇 년 전 최형과 같이 기타 강습을 받았던 것을 알았는데, 다시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하더니 나보고 가르쳐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글쎄..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잘 모를 텐데, 꼭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으로 짐작을 하였다. 우선 생각을 해 보자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의 guitar솜씨로 남을 가르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나의 기타 솜씨는 완전히 ‘등 넘어 배운’ 정도인데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무언가 배우며 살고 싶은 건강하고 멋진 자매님들이 레지오에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고 기쁘기까지 했던 명랑했던 장례미사 후의 식사시간이 되었다.

 

성모성월, 성모의 밤, 그리고 어머니..

 
교황님 2016년 5월 지향기도

¶  성모성월:   Vatican Youtube에는 이제 매달마다 교황님의 ‘매달 지향기도 monthly prayer intention‘ video가 실린다. 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개월 밖에 안 되었지만 이제는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 짧지만 아주 심도 있고 호소력이 있는 교황님의 ‘구수한’ Italian comment는 영어자막이 곁들여져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달에는 ‘제대로 대우를 못 받는 농부들’ 에 관한 것이고 이달은 ‘별로 인정 못 받고 고생하는 세계의 여성들’에 대한 기도이다. 참 계절적으로 알 맞는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5월과 여성, 특히 성모님은 어쩌면 그렇게 느낌이 일치하는 것일까? 그래서 Mother’s Day, 가톨릭 전례력으로 성모성월, 성모의 밤.. 등등이 모두 5월에 함께 모여있는 것일까?우리 어머님의 기일도 5월에 있음이 한동안 나를 슬프게 했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니 이런 포근한 기분의 5월에 있음이 조금은 나를 위로하는 셈이 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을 노곤하게 만드는 첫 한가로운 느낌의 더위가 여름의 시작을 알리고, 재수가 좋으면 (나쁘면?) space heater를 켜야 할 정도의 싸늘한 아침도 이때에 꼭 있다. 지난 주말 경에 사실 아침에 central heating 이 요란하게 나온 적이 있었으니까.. 아마도 그것이 올 여름 전에 ‘마지막’ 난방의 소음소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첫 A/C (air conditioner)의 소음 소리를 들을 때가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이미 나의 office에는 ‘돗자리’가 자리를 잡았고 80도 이상을 웃도는 늦은 오후에는 pet dog, Tobey 와 함께 ‘오수 午睡’를 즐길 때가 되었다. 이런 5월의 모습들이 나를 즐겁게 한다.

 

 

¶  성모의 밤:  올해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성모의 밤 행사는 우리에게는 조금 느낌이 다른 경험이 되었다. 내가 우리가 몇 년 동안 보았던 성모의 밤은 대개 5월 말 쯤에 있어서  거의 여름 기분으로 바뀐 시점으로 조금은 싱그러운 5월의 향기가 희미해진 느낌이었고, 본당 대성전 안에서 ‘경직된 행사’를 하는 느낌으로 했었는데, 올해는 ‘정식으로’ 본당 성모 동산 앞, 그러니까 야외, outdoor에서 ‘진짜 성모의 밤’을 보게 된 것이다. 커다란 가정집 mansion 뒤뜰에서 결혼식을 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거기다 시간적으로 어두움이 잔잔히 가라앉기 시작하고, 향기로운 5월의 공기까지 성모동산을 신비롭게 감싸는 것, 정말 느낌이 새로웠다.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자랑스런 유산, 성모동산이 촛불 행렬을 기다리며..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의 자랑스런 유산, 성모동산이 촛불 행렬을 기다리며..

어두움이 깔린 성모동산, 인자로운 눈이 어둠을 밝힌다

어두움이 깔린 성모동산, 인자로운 눈이 어둠을 밝힌다

열을 지어서 행진하는 장미꽃, 촛불들의 행렬의 위에 인자로운 미소로 내려다 보시는 성모님.. 머리 속으로 ‘분명히’ 성모님께서 지금 이 시간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리 앞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며 그린다. 비록 본당주최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성모신심의 본향인 레지오 단원들의 정다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고, 특히 예년에 비해서 더 레지오에 관심을 보이시는 본당신부님들의 모습도 다정한 어머님의 눈길과 더불어 더 5월 초의 향기로운 저녁 하늘을 포근하게 느끼게 했다. Never too late라고 이제나마 ‘진짜 성모의 밤‘을 보게 해 주신 성모님께 다시 한번…

 

¶  나의 어머니 날:  2016년 5월 8일, Mother’s Day, 어떻게 올해는 오래~전 어머니 날과 날짜가 같을까? 5월 8일.. 나의 시절에는 어머니 날이었지 어버이 날은 기억에 없었다. 이날은 여러 가지가 겹친 날이기도 했다. 2번째 일요일, 레지오 꾸리아 월례회의 날이라 오랜만에 주일미사를 아틀란타 순교자 성당에서 하게 되어서 비록 몇 주만이지만 새로운 기분으로 본당을 둘러보고 성물방의 도서실도 기웃거리고, 이제는 낯익은 담당 자매님에게 레지오 행동단원 입단도 권유해 보는 등, 기분을 새로이 하는 날이 되었다. 이제는 예의 낯익은 얼굴이 분명히 몇 분이 꼭 있어서 예전에 비해서 마음이 덜 불편하게도 되었다.옆 동네, 마리에타 1구역 담당의 $3 점심도 비록 한 그릇이었지만 맛은 아주 감칠맛나게 좋았다.

날씨도 기가 막히게 화창한 날 예전 같으면 ‘아이들의 강요’에 못 이겨 ‘끌려서라도’ 주인공인 ‘돼지 엄마’를 ‘모시고’ classy한 곳에서 외식을 하기도 했겠지만.. 글쎄.. 이제 모두들 ‘늙었나..’ 움직이는 것 귀찮다는데 거의 동의한 단계가 되었다. 올해는 idea가 바닥이 난 아이들을 ‘구제’하려 내가 volunteer를 해서 집에서 나의 ‘특기 요리’로 이날 오후를 보내게 되었다. 나의 특기요리는 평소에 ‘돼지 엄마’가 좋아하는 ‘lots of, lots of vegetable & ground beef stir fry‘ 라고 내가 이름을 붙인 이제는 거의 classic이 된 나만의 요리이다. 그저 ‘재료만 많으면’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는 요리.. 오늘의 main dish가 되었다. 아이들은 red wine, 손수 만든 chicken wing을 밖에서 grill하고, Doraville H-mart에 있는 ‘빵집’에서 사온 ‘덜 달고, 덜 큰, 알맞은’ cake등으로, 그런대로 ‘초 간단 超 簡單, 초 저가 超 低價’ 였지만 만족스런, 즐거운 Mother’s Day late luncheon이 되었다. 주인공은 아이들의 엄마인 ‘돼지 엄마’겠지만 나의 머리 깊숙한 곳에는 나의 heroine, 나의 어머니가 더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화창한 5월 8일 어머니 날이 되었다.

 

back-breaking time..redecking

우리 집 뒤쪽에는 ‘손바닥 만한’ open deck (no roof)이 하나 붙어 있다. 처음에 이사를 올 당시 이것을 보고 머릿속으로는 멋진 outdoor chair같은 것을 놓고 시원한 beer나 향기 나는 wine을 만지작거리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위치가 거의 북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아침에 해가 잠시 들고나면 나머지 시간은 분위기가 어두운 곳으로 변하는 흠이 있었다. 가끔 gutter라도 넘치는 폭우가 쏟아지면 그 빗물들이 완전히 마를 시간이 부족해서 제일 deck이 필요한 여름철에 바닥이 새파랗게 이끼까지 끼는 등.. 한마디로 눈의 가시가 되고 식구들의 냉대를 받으며 거의 방치까지 되기도 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이 위치에 deck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주인이 그저 ‘생각 없이’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우리가 이 집의 원래 주인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 위치에는 open deck은 맞지 않고 지붕이 있는 porch 형태가 맞는다. 물기가 문제가 되니까. 하지만 그래도 open deck이 필요한 이유는, open fire grill같은 것을 쓰려면 open space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랜 기간 빗물을 제대로 처리 못한 이유로 deck은 차츰차츰 그 윤기를 잃기 시작하고 파랗게 색갈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조금씩 썩는 것도 보였다. 항상 물기를 머금고 있는 표면은 흡사 skate 장 같이 미끄러워서 위험하기도 하고.. 모양새는 그야말로 목불인견 目不忍見..  4월이 지나가고, 날씨가 풀리면서 ‘운동 삼아’ deck floor board(마루조각) 하나를 뜯어보니..놀라운 사실,  아래쪽 면은 아주 ‘말짱’한 것이 아닌가?  거의 ‘새것’ 처럼 보이고 느껴진 것이다. 그러면.. 다시 모두 뜯어서 뒤집으면 ‘새 것’이 되는 것.. 와~~ 대 발견! ‘공짜’로 새로운 deck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공짜가 세상에 어디 있나? 이것을 모두 뜯어서 뒤집어 다시 만드는 것.. 모두 100% back-breaking hard-labor 임을 누가 모르랴? 하지만 free new deck이라는 꿈을 꾸며 대 장정의 첫 걸음을 내 디디었다. 계획으로는 ‘천천히, 나의 pace’로 하면 일 주일이면 끝 날듯 보였지만 그것은 조금 순진한 희망이었고 실제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았다. 각가지 hidden surprise를 누가 예상을 못 했으랴?

제일 힘들었던 step은 예상치도 못하게, deck board의 fastener들, 모두 deck screws들을,  remove하는 job.. 모두 deck screw로 만들어졌지만, 그 ‘놈’들이 요지부동 unscrew 가 쉽게 될 리가 없다. 세월의 풍상으로 모두 head들이 반들반들 달아서 screw driver가 물리지를 않는 것이다. common nail이면 이럴 때 간단하게 빠질 수 있지만 screw는 요지부동인 것이 태반이다. 결국 deck board들을 pry bar로 강제로 들어올리는 수 밖에 없고.. screw만 남으면 그것을 ‘강제로’ pliers 를 써서 거의 손가락의 힘으로 뽑아낸다. 이 과정에서 나는 ‘처참하게’, 완전히 뻗게 되었다.

결국 다 deck board들은 모두 빠졌지만 그것들은 rough sander로 손을 모두 보아야 하고 좋은 ‘제 자리’를 잡아서 고정을 시켜야 하는데 이 과정 역시 surprise 투성이다. 현재까지 거의 제 자리를 잡고 있지만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deck board 들의 ‘간격 spacing’이 충분해야 빗물이 제대로 빠진다는 ‘자명한’ 사실을 나는 전번에 decking을 할 때 잊고 모두 너무 ‘가까이 붙여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뜩이나 덜 마르는 위치에다 물이 더 빠지기 어렵게 내가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충분한 여유를 두고 충분히 빗물이 빠지게 만들게 되었다. 이것의 ‘교훈’은, 실수를 하더라도, ‘spacing이  넓은 것이 좁은 것 보다 훨씬 낫다’ 라는 사실이다.

이 일을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back-breaking job임을 절감하게 되었고 ‘고령의 나이’를 무시하고 너무 빨리 강행한 나의 실수도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짜’로 새 deck를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피로와 고통은 싹 사라진다. 이것도 요새 읽는 ‘안젤름 그륀 의 다시 찾은 기쁨’ 중에 하나가 될 듯하다. 이것도, 시간과 돈을 완전히 바꿔 치기 하는  요새 내가 사는 전형적인 방식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Kittens under shed

4마리 kittens과 mother가 이 shed 밑에..
4마리 kittens과 mother가 이 shed 밑에..

일주일쯤 되었나.. 근래 가끔 우리 집 앞에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최근에는 backyard에서도 보였던 가늘고 까만 색갈의 양양이(고양이)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backyard 이웃 David 집과 경계 fence에 붙어 있는 2010년경 ‘내가 만든’ shed 뒤 쪽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이후 shed에 쌓여있는 ‘공구’ 잡동사니 중에서 무언가 찾으려고 그곳에 가서 혹시나 해서 (직감적인가..) 뒤쪽을 보게 되었는데.. 아니~ 귀여운 kitten 한 마리가 나를 못보고 하품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놀라게 하지 않으려 부지런히 우선 그 자리를 피하고, 이 일을 어쩌나.. 혹시 우리 집에서 kitten을 낳은 것은 아니었던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몇 달 전이었던가.. stray pet animal에 관심이 지대한 나라니(둘째 딸)가 새로 난 kitten몇 마리(4마리, nicknames: A,B,C,D)를 일주일 동안 맡아 달라고 해서 빈 방에서 돌보아 주었던 적이 있었다. kitten들이 얼굴과 색깔에 상관없이 얼마나 귀여운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나의 나이 탓인지, 어찌나 ‘귀엽고, 슬프게’ 보이는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귀엽고, 슬프고.. 라는 상반된 감정, 기분이 특히 이상한 것이었다. 엄마와 떨어진 것,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까.. 하는 우려가 더 나를 생각하게 한 것이다. 나라니의 말이: 너무나 많이 태어나는 양양이들이 우려할 만한 것이라고 ‘경고’를 하며 우리들은 어떡해서든지 그들을 ‘길거리’에서 구해서 더 이상 kitten들이 ‘안락사’를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역설을 한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pro-choice 어쩌구 하며 ‘길길이 날뛰는’ feminist들의 이기적인 궤변과는 대조적인 진정 ‘every life is precious‘, humane advocates의 정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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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우리 집 방에서 뛰어 놀았던 그 몇 마리의 ‘아주 작은 양양이’들.. 예상은 했지만 정이 무섭게 들었고 보낼 때 기분은 너무나 쳐지는 것.. 연숙은 더 해서 하루라도 빨리 보내자고 한다. 동감이었다. 더 정이 들면 들수록 이별은 따라서 고통이 될 것이다. 그 후에 adopt가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그저 부디 행복하게 건강하게 수명을 다 살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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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이번에는 우리 차례가 된 것이다. 우리 집 property 안 에서 kitten들이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귀찮은 생각에 안 본 것으로 하며  연숙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그저 kitten을 낳은 어미가 잠시 우리 집에서 쉬는 것으로 ‘희망적인’ 상상을 하려고 했지만.. 역시 그것이 아니고 사실은.. shed의 밑 바닥 crawlspace에서 출산을 한 모양이었다. 그곳은 사실 양양이가 머물기에 안전하고 널찍한 곳이라서 우선은 안심이 되었지만.. 집 안에서 사는 양양이에 비해서.. 축축하고 어둡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원래 그런 환경이 그들에게는 자연적인, 정상이 아니던가?

내가 본 kitten은 분명히 한 마리였는데, 그들이 한번 출산에 몇 마리를 낳는다는 것을 알기에 문제는 과연 몇 마리? 그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집 안에 들어와서 멀리서 shed 주변을 지켜보았더니.. 와~ 아주 귀여운 세(3) 마리가 옹기종기.. 뒹굴며 어미 앞에서 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면 세 마리를 낳았던가? 암만 보아도 세 마리였다. 색깔이 모두 다르지만 같은 검정색 계통이었다. 너무 어려서 사람을 안 무서워 하는 듯하였지만 소리에는 민감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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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숙에게 고백을 하고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우선은 ‘먹이, dry food & water 를 주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장기적인 해결책은 떠오르지를 않는다. ‘산모’의 젖이 가장 중요하니까, 우선은 잘 먹어야 할 것이니까 집안에서 사는 우리 집 양양이 Izzie가 먹는 것을 아주 많이 주기 시작했는데, 내 놓자 마자 금새 밥이 없어졌고 자세히 보니까, kitten들도 같이 먹는 듯 했다. 그것은 ‘어른 밥’인데 어떻게 먹을까 했지만 아마도 먹을 수 있는 이빨들이 나온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 아닌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침 저녁 밥을 주러 갈 때나, 멀리서 shed 앞에서 엄마가 지켜보는 앞에서 ‘뒹굴고, 엉키고, 매달리며’ 노는 baby 들, 너무나 귀여운 모습들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가 아닌가.. 더 정이 들면 어쩌나, 그러면 보내거나 없어지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 일이 아닌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런 ‘사사로운’ 정에 약해졌나? website를 뒤져보니 우리 같은 situation너무나 많고 그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veterinarian 들과 이들이 더 이상 baby를 낳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며 animal shelter에서 ‘안락사’를 못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등, 정말 humane human들의 모습을 보고 코가 찡해지는 것, 어쩔 수가 없다.

문제는 앞으로 몇 주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쩔 것인가. Mother’s Day에 애들이 오면 분명히 무슨 좋은 idea를 줄 것으로 기대를 하지만.. 우선 website에서 본 idea, 장기적인 ‘숙박시설’, outdoor shelter를 만들기로 했다. 다행이 요사이 tool들과 아주 익숙해진 관계로 아주 크게 힘들 것 같이 않고, 나중에 얘 (kittens+mother) 들이 갑자기 이사를 가거나 아니면 adopt가 될 때까지는 우리의 책임이라는 ‘사명감’을 느끼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보기로 각오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