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송봉모

예수회 신부,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을 받고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 주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에 ‘성서와 인간’ 시리즈로 <상처와 용서>, <광야에 선 인간>, <생명을 돌보는 인간>, <고통, 그 인간적인 것>,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본질을 사는 인간>,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 <관계 속의 인간>, <회심하는 인간>,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 이 있고, ‘성서 인물’ 시리즈로 <집념의 인간 야곱>, <신앙의 인간 요셉>, <순례자 아브라함 1,2> 등이 있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을 위해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 의 영문판 The Lord Calls My Name도 펴냈다.

 

 

Contents

 

머리글 상처와 용서, 그리고…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은 <상처와 용서>의 개정증보판이다. 이 책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은 바오로딸출판사 편집장 수녀님의 제안 덕분이었다. <상처와 용서>가 나온 지 10년이 넘었으니 오늘에 맞게 개정증보판을 만들면 독자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상처와 용서>는 필자 자신이 5년에 걸친 심리치료와 개인성찰을 하고 또 사목자로서 상처 받은 이들의 신앙 상담을 하면서 나름대로 갖게 된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썼다. 그런데 <상처와 용서>가 책으로 나온 후 늘 한 가닥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필자의 전공이 심리치료나 정신치료가 아니라 성서학 이기에 그 점에서 미비한 것은 아닌가 해서였다.

필자는 <상처와 용서>가 출판된 후에도 지금까지 계속 개인적 관심에서 상처와 용서에 대한 전문서적을 읽어왔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전문서적을 읽으면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상처와 용서>에서 얘기한 내용이 전문가들의 견해와 상치되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미진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권위 있는 전문가들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통찰이 들어간 이론들이안에 함께할 수 있었다면 하는 점이었다. 그랬다면 독자들이 좀 더 깊은 자기 이해와 관계 개선에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편집장 수녀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필자는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을 쓰면서 다음 세 가지 점에 역점을 두었다. 하나는 방금 언급했듯이 심리학자와 정신치료자들의 학문적이고도 탄탄한 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이 실질적 도움을 받도록 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 점이다. 미움의 대상을 용서하고 사소한 상처를 더 이상 받지 않으려면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을 우리 안에 계속 계발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완성을 위해서도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은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이번 개정증보판에서는 이 주제를 독립 항목으로 다루었다.

세 번째는 처음에 쓴 <상처와 용서>에서 충분하게 다루지 못한 주제들을 더 깊이 있게 다룬 것이다. 그리고 미처 다루지 못한 새로운 주제들을 추가 보충함으로써 독자들의 더욱 깊은 이해를 돕고자 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것’이란 주제다.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독자들에게 낯설 수 있다.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감히 창조주 하느님을 용서한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삶이 고통스러울 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느님께 실망하면서 그분과의 관계에 소원하게 되고 심한 경우 적대감까지 느끼는 이들이 많다. 그러한 분들을 위해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 개정증보판이 독자들에게 상처와 용서에 대해 좀 더 깊고 폭넓은 이해를 갖게 하며 더욱 넓은 지평을 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들어가며 다시 행복하기 위하여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종할 수는 있다.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폴 마이어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수많은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이 아무리 많은 사람으로 어린 우리를 보호하고 돌보아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과 미성숙함으로 알게 모르게 수많은 상처를 주고 받는다. 우리 자신은 좋은 의도로 상대방을 대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의도가 상대방에게 이해 받지 못하고 무시될 때 우리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나아가 흑심이나 악의를 품은 사람들한테 피해를 받으면 우리 삶은 어느 순간 송두리째 무너지기도 한다.

 

우리 삶에서 어려움이 없을 수 없듯이 인간관계의 갈등도 피할 수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파괴적 언어와 충동적 행동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심지어 친밀한 관계를 박살내기도 한다. 다윗 왕과 그의 아니 미칼의 관계에서 이 점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친밀한 남녀 사이를 표현할 때 늘 남자 중심이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했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으며,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다는 식이다. 그런데 딱 한 차례 여자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사울의 딸 미칼은 다윗을 사랑하고 있었다.” (1사무 18,20)

미칼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버지 사울이 자객을 보내 다윗을 죽이려 하자 아버지를 거역하면서까지 그 음모를 다윗에게 알려 피신하게 한다. (19,11-17) 사울은 미칼이 다윗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팔티라는 남자에게 시집 보낸다.

훗날 사울이 전사하고 나서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칼을 데려오는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사는 여자를 데리고 와 자기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다윗은 달랐다. 그만큼 둘 사이의 사랑은 뜨거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이 얼마 가지를 못한다. 말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남만 못한 부부가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둘 사이가 갈라진 것은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날이었다. 다윗는 그 싸움에서 일전에 빼앗겼던 하느님의 계약의 궤를 되찾은 것이 너무 기뻐서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오며 옷을 벗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하지만 미칼은 성곽 위에서 다윗이 춤추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그리고 다윗이 내실에 들어오자 빈정거렸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 자기 신하들의 여편네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만하더군요!” (2사무 6,20: 필자 의역) 공주로 태어나 왕가의 법도를 익히며 자란 미칼의 처지에서는 다윗의 행위가 왕의 체통을 떨어뜨리는 행위였던 것이다.

미칼이 내뱉은 말은 다윗에게 거센 광풍과도 같은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 다윗은 아내의 빈정거림에 침묵으로 응하거나 화가 가라앉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아내가 자기에게 한 말 이상으로 심한 독설을 퍼부었다. “주님께서는 그대 아버지와 그대 집안을 다 제쳐놓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벌거벗고 춤을 출텐데 이번보다 더 경망하게 굴 것이라는 잔인한 말을 퍼붓는다.(6,21-22)

사실 다윗의 독설은 미칼의 비난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다윗의 독설은 미칼의 가장 아픈 곳, 하느님께 버림받아 적군의 손에 죽은 아버지와 세 오빠의 일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칼에게 대단히 잔인한 말이었다. 다윗의 독설에 이어서 나오는 성경구절은 “그 뒤 사울의 딸 미칼에게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 (6.23)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미칼의 불임을 보도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다윗과 미칼이 더 이상 부부로서 생화라지 않았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다윗과 미칼의 문제는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가장 아프고 기분 나쁜 말을 내뱉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관계를 깨뜨리는 극단적인 말은 피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서로가 먼저 상대방을 사랑해 주고 끝까지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특별히 부부처럼 가장 친밀한 간계 안에서 서로 돌보아 주고 배려하고 헌신하면서 백년해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많은 부부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안타깝게도 관계를 끝장내곤 한다.

 

특히 삶이 힘들고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할 때 서로 힘이 되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대 경우가 허다하다. 사업에 실패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겪거나 갑자기 자식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상처를 주고받다가 파경에 이르고 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결혼생활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애써왔는데, 이런 큰 불행을 당한 마당에 이혼을 주저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파괴적 심정에서. 둘째, 불행의 원인을 상대방 탓으로 보고 계속해서 상대방을 원망함으로써. 1 이 두 가지 이유를 좀 더 들여다보면, 부부가 살아오면서 쌓인 상처 덩어리들이 예기치 못한 불행 앞에서 한 순간 폭발하면서 이혼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 본성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가운데 하나는 내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탓하며 화풀이를 하고, 그 사람에게 내가 겪는 고통과 같은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2

 

삶이 어려울 때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모든 일이 순조롭고 행복한데도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 최고의 시간이 순식간에 최악의 시간으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것은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파괴력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기를 아끼고 이해해 주는 상대방을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도 사소한 일로 어느 순간 평화를 잃어버리고 상대방과 충돌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지난날 사랑하는 사람한테 버림받은 체험이 있기에 지금 만나는 사람한테서도 버림받지 않을까, 자기가 상대방에게 부족하지는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불안해하며 염려한다. 이렇게 불안해하고 예민해지다 보니 마음의 평화는 깨어지고, 별것 아닌 것으로도 상대방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면서 다툰다.

이렇게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언제든 기회가 되면 표면으로 떠올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상처를 전달하면서 행복한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대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치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며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들이 짊어진 짐을 발견하고

신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 존 왓슨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상처를 인식조차 못한다. 나아가 자기 안에 상처가 있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무의식적으로 어떻게든 살아 남고자 하는 생존 본능에서 형성된 자기 합리화이지만 충만한 생을 살아가기에는 장애가 된다. 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살면서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한 세상은 현세에 없다. 버거운 삶 속에서, 또 자신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고의든 아니든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쏟아놓으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러니 적어도 내 편에서 다른 이에게 상처를 덜 주고, 또한 다른 이한테서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러한 길을 부단히 개척해야 한다. 특별히 치유되지 않은 지난날의 상처가 현재 나의 삶에 파괴적 영향을 주지 않도록 그 상처를 잘 돌보아야 한다.

용서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상처가 있다면 치유해 주시는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신 다음 ‘네 병이 나았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가 구원받았다.’ 는 말을 자주 하셨다. 이런 점에서 구원은 곧 치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치유를 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나에게 상처 준 사람 또는 나 자신 그리고 상처 받은 상황을 용서하는 것이기에, 먼저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서로 가까이 다가앉자.

우리를 떼어놓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적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다만

불행하고 불쌍한 이들만 존재한다.

우리가 계속 누릴 수 있는 행복,

유일한 행복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서로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것이다.

– 로맹 롤랭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페 4,32)

 

 

1부  용서하기 위하여

 

그대의 원수에게는 용서를

그대의 적대자에게는 관용을

그대의 친구에게는 마음을

그대의 자녀에게는 모범을

그대의 부모에게는 효도를

그대 자신에게는 자기 존종을

인류에게는 박애를.

–  벨푸어

 

 

1.1  용서,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 두 가지를 들라면 그것은 죄를 안 짓는 것과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일 것이다. 조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기에 쉽사리 부서지는 존재다.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보지만 어느 고해신부도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또 죄를 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R.C. 스프라울 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그런데 죄를 안 짓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은 용서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체험으로 안다.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은 자연 그대로 살다가 아무 원한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런데 인간만은 그렇지 못하다.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다가 그대로 죽어 간다.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던 장사꾼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의 가게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들은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 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두 사람을 회해 시키려고 한쪽 상인에게 천사를 보내셨다.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리실 것이오.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자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주실 것이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천사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 경쟁자는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오. 그대가 금화 10개를 원하면 그는 금화 20개를 얻게 될 것이오.” 천사가 웃음을 지으면서 “이제는 화해하시오. 하느님은 이런 방법으로 그대에게 교훈을 주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상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제가 무엇을 바라든 다 그렇게 이뤄진다는 말씀이지요?” 하고 물었다. 천사가 그렇다고 하자 상인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3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옛말에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냇물에 새겨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사람들 대부분이 원한은 바위에 새기고 은혜는 냇물에 새긴다.

왜 용서하기가 어려운가?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이 분명 잘못했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나에게 상처 준 상대방을 용서한다는 것은 마치 상대방의 잘못된 행위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용서할 수 없다.
  • 나에게 상처 준 상대방을 용서하면 그 사람은 아무 죄의식 없이 살아갈 텐데 공연히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 같아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 나에게 상처 준 상대방을 용서해 주면 내게 벌어진 비극을 되돌릴 길이 없다.

 

위에 언급한 이유들을 제쳐두고라도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해 주면 내 자존심을 회복할 길이 없다고 보기에.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달마 대사는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으니.’ 라고 한탄했다. 용서를 못하는 것은 마음이 상처를 받아 오그라들어 옹졸해진 탓이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 중 대다수는 한때 얼마나 다정한 사이였던가!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 산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는 드물다. 설령 상처를 주었다 해도 별로 개의치 않고 금방 잊어버린다. 하지만 내가 잘 아는 사람, 친한 사람이 준 상처는 쉽게 잊을 수 없다. 한때 다정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바늘조차 꽂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굳어지고 오그라든다.

어느 잡지에서 신년 특집으로 유명인사 몇 사람에게 새해 소망을 물으면서 한 가지 이상안 질문을 했다. 새해에 제발 죽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당돌한 질문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저 사람만 없어져 주면 모든 게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4 내게 상처를 안겨준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런 부정적 감정이 생기는 것이 보통 인간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 익명

 

 

1.2  그래도 하느님은 용서하길 바라신다

용서한다는 것은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이다.

– 스미즈

 

용서가 그토록 어려운데도 왜 수많은 성인이 용서를 강조한 것일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무조건 용서할 것을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 앞에서 서로 용서하며 살겠다는 이 기도는 그저 입으로만 외우고 끝내는 기도가 아니다. 실제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기도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 6,14-15) 5

 

마지막 말씀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용서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성경에서 용서에 대해 하느님께서 가르치신 내용과 일치한다. 집회서 27,30-28,7에는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느낄 수 있으랴?)” 라는 말이 나온다.

하느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강조하신다. 예를 들어 부모한테 상처 받고 삐뚤어진 삶을 살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살인까지 저질렀지만 감옥에서 은총으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분의 조건 없는 용서를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버린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계속 품고 있는 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용서를 충만 히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을 때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 용서이기 때문이다.6

 

하느님과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은 절대적이다. ‘만일’ 이라든가 ‘하지만’ 이라든가 하는 핑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또 ‘상대방이 준비가 되면’ 이란 식의 조건도 붙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다.(마태 18,22)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란 말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뜻이다. 성경 숫자에서 7과 10은 완전수다. 7x10x7 을 하는 것이니 이는 절대적 완전수를 가리킨다.

스페인의 어느 수도원 성당 고해소 위에 달린 십자가의 예수님은 오른팔이 축 늘어져 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오래 전 이 고해소에 어느 신자가 와서 엄청난 죄를 고백했는데, 이때 고해신부는 다른 죄는 다 용서해도 그 죄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바로 그때 고해소 위에 걸려 있던 십자고상에서 예수님의 오른팔이 움직이면서 그 신자의 죄를 무조건 용서한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그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십자고상 예수님은 오른팔이 늘어져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 용서하라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느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의 통치 방식은 용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구원 사업의 정점이었던 십자가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여기에서 ‘저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유다, 유다 최고 법정(산헤드린), 그리고 빌라도이다. 유다는 스승 예수님을 팔아 넘겨 배반했고, 유다 최고 법정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식민통치자 빌라도에게 넘겨 배반했으며, 빌라도는 로마 제국법에 따라 정의롭게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해야 했지만 폭동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렸다.7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배반한 이들, 당신의 죽으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이들을 용서해 주시길 하느님께 청하셨다. 하늘나라의 왕이신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시기 전에 조건 없는 용서를 베푸신 것이다.

용서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당신 오른편에 매달린 사형수한테도 용서를 베푸신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살아생전 좋은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에게 예수님은 무조건 용서를 베푸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용서는 하느님의 왕국이 어떤 곳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요, 그 나라의 통치 방식은 용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의 왕국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용서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가 그분 왕국의 시민권자이기에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과 원수를 용서해야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주님께 용서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한테 진 사랑의 빚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용서받은 빚이다. 마태오 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드신다.

 

하느님 나라는 자기 한인들과 셈을 하는 왕과 같다. 왕이 셈을 시작했을 때,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불려 왔다. 만 탈렌트라면 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4조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다.8 그가 그 빚을 갚을 수 없자, 왕은 그는 물론 그의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빚을 갚으라고 한다. 그 사람이 왕에게 간절히 사정하자 왕은 자비를 베풀어 빚을 탕감해 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갔을 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빚지지 않은 사람을 만난다. 백 데나리온은 대략 700만 원이다. 4조에 해당하는 돈을 탕감 받은 사람이 700만 원을 빚진 사람에게 돈을 갚으라고 한다. 700만 원을 빚진 사람이 사정하며 시간을 더 달라고 하지만 감옥에 가둬 버린다. 그의 몰인정한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분개한다. 아무리 인정 없는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잔인할 수는 없다. 분노한 사람들이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다.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왕은 4조 빚을 탕감해 준 사람을 다시 불러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라고 추궁하면서 그를 감옥에 처넣어 버린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18,35) 참으로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우리가 다름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주님께 진 빚을 갚는 행위다. 우리말 주님의 기도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 원문을 보면 ‘저희에게 빚진 자들을 저희가 탕감해 주듯 저희 빚을 탕감하시고’이다. 우리말 주님의 기도에서 ‘용서’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빚’이라는 뜻인 오페이레마 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용서의 나라 시민들이고 주님께 용서의 빚을 지고 있기에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용서는 가장 하기 힘든 것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용서를 살아간 이들이 있다. 용서의 왕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간 그들을 떠올린다면 조금은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을까?

전례력으로 아기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기념한 바로 다음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테파노가 첫 번째 순교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이들을 위해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60)라고 기도하며 순교했기 때문이다.

스테파노 성인 이후에도 많은 이가 원수를 용서하며 죽어갔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죽기 직전 주님과 비슷한 기도를 드렸다. ‘오, 주님,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목을 자르는 집행인과 그 주위에 있는 참관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에게 잘못을 지우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9 또 토마스 모어는 자기 목을 자르는 이를 위로하며 말했다. “여보게, 날 죽이는 것을 언짢게 생각지 말게나. 우리 모두는 다 천국에서 기쁜 마음으로 만날 것이니 말일세.”

스테파노, 주님의 형제 야고보, 바오로 사도, 그리고 토마스 모어가 자기를 죽이는 이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용서의 왕 주님을 닮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진정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희망을 준다.

1945년 연합군이 나치가 세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를 접수했을 때, 그 안에 10만 여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나치가 모두 죽여버린 것이다. 그런데 한 아이의 시체 옆에서 이런 글이 적힌 종이쪽지가 발견되었다.

 

오, 주님.

선의를 보인 이들뿐 아니라

악의를 품었던 이들도 기억하소서.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고통만 기억하지 마시고

그 고통 덕분에 우리가 맺은 열매

동지애와 충정과 인간애

용기와 너그러운 인정

이 모든 것에서 자라난 넓은 마음도 기억하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심판 받을 때

우리가 맺은 이 모든 열매가

그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이처럼 용서를 살아간 영웅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우리에게 큰 자극과 위로가 되고 ‘저들처럼 나도 용서해 보아야지.’ 하는 분발심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영웅들만 용서를 실천한 것은 아니다. 몇 해전 여의도 광장에서 노는 어린이들을 향해 자동차를 몰아 여러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세상 사람 모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증오심에 사로잡혀 그런 몹쓸 짓을 했다. 이 사람은 잡히고 나서 더 많은 사람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이 사람이 언젠가부터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가 치어 죽인 피해자들의 유족 중 한 가족 덕분이었다. 이 가족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어린 자식을 졸지에 잃었음에도 그를 용서한다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감옥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그 흉악하고 잔인했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용서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용서가 사실 불가능하다. 하지만 용서는 주 예수께서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신 일이다. 주님이 용서의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도 주님의 도움으로 용서할 수 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이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1.3  용서는 자신을 위한 일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화가 나서 말한다. “그 사람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인간쓰레기라고요.” 그 사람이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망가져 주님과 함께 평화의 길을 걷지 못하기 때문이다. 10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화, 분노, 쓰라림, 적개심, 복수심, 모멸감, 우울함, 무가치 등 온갖 부정적 감정이 쌓인다. 이러한 감정이 가득 차게 되면 무엇보다 우리 몸이 견디지 못한다.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잠을 이룰 수 없고, 안절부절못하고…. .

가슴에 가득 차 잇는 화, 치를 떨게 만드는 분노는 우리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는 독소다. 이러한 독소가 스며들 때 우리한테는 내적 자유도 평화도 은총에 찬 삶도 없다.

우리가 독사에게 물렸다고 해보자. 우리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독사에게 물린 자리가 아니라 우리 몸에 퍼지는 독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은 남들이 준 상처라기보다 그 상처가 뿜어내는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이라는 독이다. 이러한 독소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면 어찌 우리 몸이 견딜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 중 4.2퍼센트가 화병에 걸려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화병이라 무엇인가? 화는 불 화火자다. 결국 화병이란 속에서 불이 나는 병이다. 정신의학에서 얘기하는 바, 화병은 화날 일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가슴에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다. 언제나 화가 가슴에서 끓는 병이다. 설거지하다 말고 갑자기 그릇을 내던진다거나, 프라이팬을 ‘꽝’ 하고 내려친다든가, 애꿎은 강아지를 발길로 찬다든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사건을 머리에 떠올린 순간 화가 나서 욕을 해대는 것 등이다.

 

어떤 분들은 가볍게 들을지 모르지만, 정말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면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지 상대방이 뉘우쳤기에 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자 티비츠 Dick Tibbits 는 용서의 치유력을 연구한 사람이다. 그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 몸과 마음의 강력한 관련성을 깨닫게 한다. 지금 당장 주먹을 세게 쥐고 5초 동안 있어 보라.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제 주먹을 펴라. 5초 동안 우리 몸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아는가?

대다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입을 꼭 다물고 팔과 등에 힘을 주고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숨까지 참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긴장하는 순간 의학적으로 소화기능은 느려지고, 심장 박동수는 늘어나고, 혈압은 높아지며, 면역 기능은 정지된다고 한다. 단순히 주먹을 쥐고 있어도 우리 몸이 이렇게 부정적 영향을 받는다면, 분노와 원한으로 치를 떨 때 우리 몸이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될지는 너무도 자명하다.11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용서와 몸의 건강은 정비례한다고 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화를 적게 내는 사람에 비해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세 배나 높다. 12 일단 화를 내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방출되고, 이 호르몬은 관상동맥에서 말초혈관까지 이르는 모든 혈관을 좁힘으로써 심장에 무리를 주고, 그 결과 심장병이나 심장마비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또한 이 연구조사에 따르면, 아무리 정신 없이 쫓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더라도 일로 인한 스트레스는 분노에 시달리면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강하지 않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삶의 필연적 스트레스이기에 ‘일반 스트레스’ 로 분류하지만, 화로 생겨난 스트레스는 건강을 해치기에 ‘나쁜 스트레스’ 또는 ‘유독한 스트레스’로 분류한다. 13

내가 상처 받는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일찍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이 세상에 상처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나만 화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면 그처럼 딱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설령 화병에 걸려 일찍 죽지 않는다 해도, 원망과 적개심의 포로가 되어 귀중한 인생을 허비한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짧고 소중한 인생을 충만 히 살지 못하고 넋두리만 늘어놓으며 허망하게 세월을 보낸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더 억울한 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잘못을 기억조차 못한다는 점이다.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잘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우리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이 이미 죽어버린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내가 바라는 대로 우리에게 용서를 청할 수 없다.

지금까지 15,000여 명의 말기 암환자를 치료한 암 전문의가 있다. 많은 환자가 몇 달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상태에서 소문을 듣고 이 의사를 찾아오는데 그들 가운데 54퍼센트가 5년 이상을 살고, 10년이나 15년 이상을 산 환자들도 적지 않다. 이 의사는 말기 암환자들과 첫 대화를 할 때 늘 같은 물음을 던진다. “용서하셨습니까?” 그러면 환자들은 십중팔구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아니, 제가 암에 걸린 것과 용서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전인격적 치료를 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속인 친구를 용서하셨습니까? 배우자를 용서하셨습니까? 자녀들을 용서하셨습니까? 부모님을 용서하셨습니까?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용서하셔야 합니다. 상속 문제로 형제들과 싸웠습니까? 그들을 용서하셨나요? 과거에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용서하셨나요? 지금까지 말씀 드린 이런 저린 일들을 용서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또 그는 환자에게 이렇게 권한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를 파괴할 뿐입니다. 우리 안에는 증오심과 분노와 복수심이 가득하죠. 그곳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출구가 있습니다. 그 문에는 큰 표지판이 달려 있지요. ‘용서하시오!’ 란 글귀가 적힌 표지판이 달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세요. 그러면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무거웠던 짐이 어깨에서 풀려 나갈 것입니다.”14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 작자 미상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지 않으려면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를 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주위 사람들이나 사랑하는 이들한테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지 않기 위해서다. 늘 불평 불만으로 가득한 이들과는 함께 지내기가 어렵다. 부정적 감정이나 생각만큼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 한 사람의 마음이 우울하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어두워진다. 늘 화를 내는 사람 옆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화를 먹으면서 살아간다.

당신이 불행했던 지난날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웃을 탓하고, 가족을 원망하고, 늘 분노에 차서 살아간다고 치자. 처음에는 당신의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려 주고 힘이 되어 주고자 했던 사람들마저 시간이 가면서 점점 당신을 멀리할 것이다. 계속 당신에게 지지와 격려를 주기에는 그들 자신이 너무나 지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에너지는 받아들이려 하고 그렇지 않은 에너지는 멀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결국 홀로 남겨진 당신은 배신감에 몸부림치게 되고 당신의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더 심해질 것이다.

40대 이후에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확률이 가장 큰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한다. 많은 중년 남자가 어느 날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거나 반신불수가 된다. 얼마나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한창 잘나가는 때에 어는 날 갑자기 장애인이 되어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어야 하다니.

이런 비극적 시간에 배우자의 위로가 무엇보다 필요하건만 시간이 흐르면서 놀랍게도 많은 경우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의 배우자가 그를 떠난다고 한다. 왜 배우자가 그런 몹쓸 짓을 하는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살겠다고 결혼식에서 맹세한 서약은 어디로 갔는가? 그러나 그 배우자의 처지에서 보면 무조건 단죄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장애인이 된 이가 자신 안에 있는 엄청난 분노와 억울함, 적개심 등을 함께 사는 배우자에게 끊임없이 쏟아놓는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당신이 이혼의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래서 끊임없이 당신에게 상처를 준 과거의 배우자를 탓하면서 분노의 칼을 던진다면, 그 칼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당신을 찌르게 되고 주위 사람들은 증오와 화로 망가진 당신을 멀리할 것이다. 어떤 이성도 그런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신의 증오가 새로운 결혼 삶을 시작하기 위해 맺어야 할 인간관계를 모두 파괴하는 것이다. 15

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비유로 증오심이 가져오는 파괴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언젠가 가해자에게 던질 심산으로 새빨갛게 달군 돌멩이를 몸에 품고 다니는 것과 같다. 그러다 내가 지치고 내가 덴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을 문 채 놓아주지 않는 맹견 불독과 같다.’ 16

필자가 좀 더 과격한 비유를 든다면 ‘용서하지 못하게 만드는 증오심은 마치 발목이 삐었는데 그 아픈 발목을 자기 스스로 쇠몽둥이로 계속 내리치는 행위와 같다.’ 고 하고 싶다. 용서하지 못하고 원한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자신이 얼마나 미련한 짓을 하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한 사람이 얼굴을 찡그리고 무언가를 먹는다. 얼굴은 새빨갛고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그 사람 옆에는 매운 고추가 수북이 쌓여 있다. 고추를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그는 더욱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고추를 먹는다. 누군가가 마침내 묻는다. “왜 그렇게 매운 고추를 계속 먹는 거요?” 그 남자가 내뱉듯이 말한다. “혹시 단맛이 나는 고추가 있을지도 모르잖소.” 17

행여 단맛이 나는 고추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자기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매운 고추를 계속 먹다니 얼마나 미련한 사람인가? 우리가 자신의 상처를 움켜쥐고 원한에 사로잡혀 고통을 자초하며 살아갈 때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과거에 받은 상처를 떠올리면서 계속 아파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용서가 필요하다

심리학에는 ‘적대자와 동일시 원리’ 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무엇에 집중하는가에 따라 모습이 변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밤낮으로 미워한다면 어느새 그 사람과 닮게 된다는 것이다.

모진 시집살이를 하면서 시어머니한테 학대 받은 며느리는 거듭거듭 다짐한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절대로 우리 시어머니처럼 되지 말아야지.’ 그러나 막상 시어머니가 되면 옛날 자기 시어머니와 똑같이 행동하거나 더 심한 시어머니 노릇을 한다. ‘회초리로 맞은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몽둥이로 며느리를 때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처럼 미움에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아버지를 밤낮으로 미워하다 보면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서 같은 문제를 대물림 한다고 한다. 성장 과정 내내 아버지의 알코올 문제에 반응하며 살다 보니 아버지 모습에 너무나 익숙해진 것이다. 또 긴장이나 좌절감이 생길 때 적극적으로 푸는 방법을 습득해야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늘 술과 폭력으로 긴장이나 좌절감을 해결하는 아버지를 닮는 것이다. 비극이 대물림 되는 것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부모 중 한 사람이 알코올 중독자이고 자녀가 셋인 경우, 그 자녀들이 건강한 성장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 중 두 명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알코올 중독자와 결혼한다고 한다. 만일 부모가 알코올 중독자일 경우, 그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은 건강한 환경에서 성장하지 않는 한 거의 모두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고 한다. 18

악에 초점을 맞추면 그만큼 악순환의 고리는 끊기 어렵다. 아메바가 끝없이 증식되듯 똑같은 문제를 지닌 가정이 계속해서 증식된다.

우리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설령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바라본다 해도 계속 악만을 바라본다면 그 악의 영향을 받는다. 마더 데레사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에 동참할 것을 부탁 받자 이렇게 응답했다. “아니요. 전 동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평화를 위해 행진한다면 참석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 남 마음은 우리 안에서 냄새를 피우고 곪아 터지게 된다. 마치 꽃에 물을 주듯 상처에 미움이라는 물을 주면서 추한 모습과 냄새가 나는 꽃을 피우는 것이다. 상대방한테 받은 상처로 화를 끓이면서 그 상처에 매일같이 증오의 물을 주는 것이다. 내게 상처 준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을 다 차지하고 내 인생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리학자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19 당신의 마음을 집이라고 상상해 보라. 울화와 상처를 위한 공간을 얼마나 허락해 줄지 생각해 보라. 누구든 방을 세줄 때는 세 들 사람을 고르고 임대 조건을 정한다. 당신이 울화와 상처를 위해 방을 세주고 싶다면 어떤 방을 주고 싶은가? 가장 좋은 방, 햇살이 들어오고 더블침대가 있고 욕실까지 있는 방을 빌려주고 싶은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이 울화와 상처를 위해 마음속의 가장 많은 공간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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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학자들은 말한다.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마귀에게 자기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다.’ 마귀가 아무 때나 우리 마음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마귀는 들어오지 못한다. 그런데 미워하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 마음을 마귀에게 열어주는 순간이다. 우리가 일단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 다음부터 마귀가 우리를 데리고 논다.

‘마귀 운동장’ 에서 놀지 않으려면 미움이라는 악순환에서 뛰쳐나오는 수밖에 없다. 내게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의 뉘우침을 기다리면서 마귀 운동장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운동장을 뛰쳐나오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 곧 원한 뒤에는 복수심이 따라온다. 그리고 복수가 있는 곳에 평화가 공존할 수 없다. 1987년에 생긴 일이다. 항공기 승무원으로 일하던 버크 David Burke는 사건 당시 35살이었다. 그는 기내에서 술을 팔면서 받은 돈 중 69달러를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를 쫓아낸 사람은 그의 직속상관 톰슨 Ray Thomson이었다.

버크는 회사에서 쫓겨난 후 친구에게 자기의 분노와 억울함을 토로했고,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하게 하겠다면 44구경 총을 빌렸다. 그러고는 그의 직속상관이 타는 비행기 표를 샀다. 버크가 비행기에 탑승할 때, 그를 알고 있던 공항의 검문 직원은 그의 짐을 조사도 않고 통과시켰다.

버크는 톰슨을 죽인 다음 조종실로 가 조종사들을 쏴 죽였다. 비행기는 그대로 곤두박질쳤고 결국 비행기에 타고 있던 43명이 모두 죽었다. 한 사람의 어처구니없는 복수극에 애꿎게도 43명의 목숨을 앗아 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느님다운 일이요, 선을 선으로 갚는 일은 인간다운 일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악마다운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다운 일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다운 일이라고 한 것은, 짐승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나도 똑같이 갚아주는 것,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응답하는 것은 짐승과 같은 복수 욕구를 드러낸다. 21

우리가 ‘눈에는 누, 이에는 이’라는 생각으로 인생을 산다면 머지않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 눈이 멀 것이다. 피해자가 복수를 통해 가해자가 되면서 복수의 악순환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복수가 인류 역사를 지배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이 복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있다 해도, 용서하지 않으면 그 독소가 우리 몸을 망가뜨린다고 해도 어떤 이들은 여전히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용서보다 복수가 더 달콤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복수는 비록 순간적이지만 카타르시스를 준다. 문제는 이 카타르시스가 자신과 귀한 관계는 물론이요, 때로는 애꿎은 사람들의 삶까지도 망가뜨리는 독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이런 속담이 있다. ‘당신이 잔인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면 무덤을 두 개 준비하는 것이 좋다. 하나는 원수의 무덤이요, 다른 하나는 당신 자신의 것이다.’ ‘한 순간의 분노를 참으면 백 가지 슬픔을 면할 수 있다.’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상대방을 죽이고 싶으면 백까지 세라.’

이런 성경 말씀도 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마태 5,44)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줄 뜻을 품으십시오. …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7-19)

만델라 Nelson Mandela는 백인 정권의 핍박을 받아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된 다음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다. 27년이란 수감생활은 미움과 원한이 사무칠 만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해 주러 온 내빈들을 소개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처음 소개된 내빈들은 세계 각국에서 온 정계 요인이었다. 그 다음으로 소개된 사람들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지켰던 세 명의 간수들이었다. 하얀 백발의 만델라가 천천히 일어나서 세 명의 간수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취임식장에 있던 모든 내빈이 숙연해졌다.

만델라가 외친 말은 보복이 아닌 용서요, 징벌이 아닌 화해였다. 그는 27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면서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수감실에서 나와 바깥세상의 자유로 통하는 대문을 넘어설 때 분노와 원한을 감옥에 남겨두지 않는다면, 나는 여전히 갇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었기에 그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 나라에 복수와 앙갚음과 보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전진하여 인종 차별주의가 없는 남아공을 건설해야 합니다.” 라고 외칠 수 있었다.

계속해서 그는 대통령으로 국무를 수행하면서 어떤 자리에 있든 늘 자애롭고 밝은 웃음을 띠면서 용서와 화해 정책을 실행해 나갔다. 덕분에 우리는 잔혹한 흑인 차별이 있던 나라 남아공에서 지금까지 보복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의 자애롭고 밝은 웃음은 진정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웃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웃음이다. 22

 

1983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캘빈 존슨이란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국 재판 제도는 우리와 달라서 배심원들의 평결이 재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날 배심원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이들은 존슨이 무죄임을 알리는 증언이 있었음에도 유죄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존슨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존슨은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이 내 증인이십니다. 나는 잘못 기소되었습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억울함을 벗겨주시도록 날마다 기도할 것입니다.”

그 후 16년이 지나 존슨은 다시금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번에는 석방을 위한 재판이 열렸다. 유전자 검사 결과 진범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석방될 때 존슨은 성경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가 재판정을 나서는데 기자들이 몰려들어 질문을 퍼부었다. “존슨 씨, 당신을 16년간 감옥에 집어넣어 썩게 만든 배심원들과 재판관을 증오하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보복하고 싶지 않습니까? 모순이 많은 미국 사법제도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겠습니까?” 존슨이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증오하지 않습니다. 타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제 마음에 담고 있으면 그것이 저를 죽일 것입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사는 것입니다. 이제 저에게 필요한 것은 어서 일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23

 

용서는 겁쟁이나 하는 짓이란 소리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용서를 해보기나 했을까?

용서는 힘든 일이다.

용서는 끊임없는 자기 수양, 본능의 억제, 말조심

그리고 이 시대의 천박한 정신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 마리에타 재거

 

 

 

1.4  구체적으로 용서하기 위하여

 

용서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 프레드 러스킨

 

자문해 보자.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이렇게 끝없이 화를 내면서 신세타령을 되풀이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처 받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는 것인가? 만일 두 번째가 내 대답이라면 다음에 서술된 구체적인 용서 방법을 용기를 내어 실행해 보자.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며 용서하려면 먼저 결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시간이 약이다.’ 란 말을 종종 듣는다.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상처라도 시간이 가면 낫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는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음주운전자로 인해 남편을 잃고 오랜 세월 분노와 슬픔으로 살았던 부인의 말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상처가 아문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러진 팔이 붙는 것과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부러진 팔이 붙기는 하지요. 하지만 뼈가 제대로 붙지 않아 팔이 비뚤어지게 되죠. 또 팔이 너무 약해져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다시 부러지게 되지요. 바로 그거예요. 용서하지 않고 그냥 방치된 상처는 아물긴 아무는데 뒤틀리고 나약한 내면세계를 만들 뿐이지요.” 24

용서는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용서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결심을 하는 그 순간이 바로 용서의 시작이다. 용서란 주제로 철학을 연구한 네블렛 William Neblett은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용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25 그런데 사실 용서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상처 받은 인간의 감정을 고려할 때 참으로 힘든 얘기다. 하지만 종교적 행위로는 가능하다.

필자는 대학 시절 인종이란 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인종이는 신앙심이 깊고 착실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고3때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불량배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다. 인종의 부모님은 열심한 신자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안 가해자 학생들의 부모들은 여러 차례 인종의 부모님을 찾아와 예수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다. 인종의 부모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학생들을 용서하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했다.

그때 인종의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절대 당신 아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당신들을 보면 무척 괴롭습니다.”

인종의 어머니는 정말 하기 어려운 용서를 신앙 행위로 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용서를 하고 나서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 점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한 바로 그 주간 주일미사 중에 아들이 주님 품에 안긴 것을 환시로 본 것이다.

이 체험을 하고 나서 인종의 어머니는 비로소 가해자 학생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 속에서도 그 아들이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나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스티브 맥퀸이 연기한 실제 주인공은 프랑스의 알이 샤리에르다. 1931년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앙리는 파리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앙리는 실적에 눈이 먼 검사에 의해 무고하게 살인자로 체포되었다. 검사는 거짓 증인을 내세워 앙리를 살인자로 유죄판결 내리는 데 성공했다. 앙리는 자기 인생을 망친 검사에게 복수하고자 무려 아홉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고 결국 감옥생활 14년째인 1944년, 그의 나이 38세에 악마의 섬에서 탈출했다. 빠삐용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다음은 그가 탈출한 이후 실제 있었던 이야기다.

앙리는 탈출한 후 남미로 도망쳐 곳곳을 전전하면서 온갖 일을 하여 돈을 모았다. 프랑스 형법상 30년이 지나면 범죄시효가 만료되는데 그 30년이 되는 1961년에 55세가 된 그는 파리로 돌아갔다.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검사와 거짓 증인들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파리에서 그는 자기가 젊었을 때 다니던 거리, 부모님과 함께 걸었던 거리, 친구들과 놀던 장소, 특별히 그가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고 체포 당한 거리를 거닐면서 조금씩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복수를 포기하고 용서하겠습니다. 그 대신 다시는 저와 같은 비극적 사건이 생기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겼다, 앙리 샤리에르, 너는 자유롭고 사랑 받는 네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에 있다. 네 원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그들은 과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너는 여기에 있다. 마치 기적처럼. 그리고 지금 네가 확인하고 있다. 이 비극적 일에 관계된 사람 가운데 네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을.’

앙리 샤리에르는 복수하러 간 그곳에서 복수심에서 해방된 것이다. 37년 동안 자기라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이다. 26

인종 어머니 이야기와 앙리 샤리에르 이야기는 용서 과정에서 결심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잘 보여준다.

용기를 내어 용서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다. “용서하려고 결심하니 마음의 자유가 찾아오더군요.” 용서해야 우리는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용서해야 비로소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용서 신학’ 을 전개한 신학자 스미즈 Lewis Smedes 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하는 것은 60킬로 그램짜리 배낭을 지고 12킬로미터 정도 산을 오른 후 배낭을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은 죄수를 풀어주고 나서 그 죄수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용서할 때 우리가 자유롭게 풀어주는 노예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런 시가 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

“포로를 놓아주어라. 안 그러면 죽을 것이다.”

포로를 놓아주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정의는 어디에 있는데요?”

“포로를 놓아주어라.”

다시 한 번 이 외침을 듣는다.

포로를 놓아주라고?

나는 노력해 보겠다고 하는 수 업이 대답한다.

포로를 놓아주어라.

결국 나는 주님 은총에 의지하며

포로를 놓아주려 한다.

포로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포로는 바로 나였다.

– 루이스 스미즈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미움과 원한을 움켜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집착이 얼마나 우리의 진을 빼는지 모른다. 마음의 불행의 원인이 되는 집착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한 제자가 스승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스승님, 인생의 고뇌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방법은 없습니까? ” 스승은 제자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제자는 어리둥절했지만 스승의 뒤를 따라갔다.

숲에 이르자 스승은 “지금부터 너에게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고 말하고는 커다란 나무에 온몸을 밀착시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놔 달란 말이야, 이놈의 나무야. 제발 나를 놓아줘!” 제자는 스승의 행동에 놀라 달려가 스승을 나무에서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스승은 떨어지지 않았다. 제자는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오히려 스승이란 점을 깨달았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나무가 스승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이 오히려 나무를 꽉 붙잡고 놓지 않으면서 왜 나무에게 놓아 달라고 소리 지르시는 겁니까?” 스승은 빙긋이 웃으며 나무에서 팔을 풀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실제로는 세상 고통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 고통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지. 인간의 모든 고뇌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7

 

인간의 고통은 집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그 놈을 용서하지 않겠다며 이를 갈다가 원한 속에 죽는다. 대단한 파괴적인 집착이다. 용서는 정의의 문제가 아니다. 용서는 이유의 문제다. 정의만으로는 내 안의 상처와 울분을 치유할 수 없다. 파괴적 집착에서 벗어나 용서하기로 결심할 때 비로소 치유 과정은 시작된다.

 

 

용서하기로 결심한 다음에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자

이렇게 종교적 행위로 용서하겠다고 결심한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하느님과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원수를 용서하게 해 달라고, 상처의 아픔을 낫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가슴의 응어리를 주님의 자비와 관대함으로 바꾸어 달라고 청해야 한다.

앞서 얘기한 인종 어머님이 ‘나는 절대 당신네 아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한 말은 참으로 솔직한 표현이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인간적 감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니 용서하기로 결심한 뒤에는 하느님께 용서하게 해 달라고, 상처의 아픔을 낫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를 천천히 반복하면서 기도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주님의 기도’ 만큼 간결하면서도 의미 깊게 용서를 가르쳐 주는 기도문은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지난 후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이 폴란드 그리스도인들과 독일을 방문했다. 평화봉사단원 중 한 사람이 폴란드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었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마음이 있습니까? 그들은 독일이 폴란드인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해 용서를 청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합니다.”

폴란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부탁 앞에서 상당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에 한 폴란드인이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불가능한 일을 청하고 있습니다. 바르샤바의 모든 돌멩이가 폴란드인의 피로 물들었는데 어떻게 그들을 용서한다는 말입니까?”

그들이 평화봉사단원들과 헤어지기 전에 주님의 기도를 함께 드리게 되었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부분에 이르게 되었을 때, 모든 폴란드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멈추었다. 잠시 긴장이 흘렀다. 한 사람이 격하게 외쳤다. “나는 당신들에게 ‘그렇다.’ 고 대답해야 합니다. 더 이상 주님의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이 나에게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나의 원수 독일인들을 용서합니다.”

이 장을 마치면서 한 죄수의 고백을 들어보자. 28

내가 5년 동안 품어왔던 복수심과

내 삶의 생명력이었던 반항 정신은

그리스도가 통제권을 쥐시자 그 손아귀를 늦추었다.

그분은 조금씩 조금씩 나의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셨다.

때로 나는 감옥 마당에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찾은 기쁨과 평화를 음미했다.

창살과 담벽은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고성능 소총을 든 경비병들도 여전했지만

이제 나는 예전에 미처 몰랐던 내적 힘을 지닌다.

그 힘은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상처 치유의 열쇠는 나 자신에게

 

자기 연민은

다시 빠져나올 길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다.

당신이 빠지기로 선택했기에

꺼내줄 구조의 손길도 없다.

– 엘리자베스 엘리엇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주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기 전에 중요한 질문을 하신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5,6)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중풍으로 누워 있고 싶어 하루도 아니고 38년을 누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황당한 물음을 던지신다. 우리는 병이 낫고 싶다고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상처를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

우리 중에는 자기 상처를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동정을 받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든 자기 편이 되어 상처 준 사람들을 비난할 땐 기뻐하지만 동조하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을 비난한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상처가 낫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이다. 상처가 나으면 더 이상 그 상처를 준 사람을 계속 미워하고 괴롭힐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를 그대로 갖고 있으려는 또 다른 이유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심리치료자들의 말이다.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다 변화의 단계가 되면 돌연 치료를 멈추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제 막 개선이 일어나려는 상황에서 다시금 비참한 옛 모습의 편안함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익숙했던 고통을 떠나 변화할 때 맞이하게 될 미래의 불확실함과 그 불확실함이 가져다 주는 불안 때문에 새롭게 변화될 자신을 대면하기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29

이렇게 상처를 계속 지니고 있기를 바라거나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처에서 치유되느냐 안 되느냐의 열쇠를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한테서 찾으려 한다.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이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해야만 상처가 치유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평생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울증과 무력감 때문에 필자에게 면담을 하러 왔다. 그는 자녀들을 늘 비교했던 부모 때문에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제 부모님은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다른 형제들과 비교했고 부족하다 생각하면 저를 경멸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감 없이 사는 것은 다 부모님 탓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나이 50이 넘었고 부모님은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린 시절에 붙들려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불행의 원인이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옛말에 ‘못 되면 조상 탓이고 잘되면 다 내가 잘난 탓이다.’ 또는 ‘서툰 춤 꾼은 고르지 않은 바닥을 탓한다.’ 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내 상처가 다른 사람 때문에 생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처 때문에 불행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선택은 내 책임이다.

하느님은 훗날 천국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다. “애야, 너는 정말 그 몹쓸 사람을 만나 고생을 많이 했다. 네가 형편없이 살고 네 인생을 함부로 굴렸던 것은 다 그 사람 탓이지 네 책임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실 거이다. “얘야, 네가 참으로 그 몹쓸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구나.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해 네 안에 일어난 반응과, 그로 인해 네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은 네 책임이지 그가 책임질 사항이 아니란다.” 30

결국 삶은 선택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의 행동과 반응은 우리 몫이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도 삶을 대하는 태도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려는 신자답게 책임감, 분별 있는 사랑, 정직함, 온유함의 태도를 갖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인생의 날수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깊이와 넓이는 결정할 수 있다.

얼굴 모습은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얼굴 표정은 결정할 수 있다.

날씨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마음의 날씨는 결정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운명적 환경에 놓여

고통을 겪는다 해도

여전히 선택할 여지가 있다.

 

신학자 시맨스 David A. Seamans 는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았든 그 상처의 궁극적 책임은 우리에게 있음을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마치 베틀로 짠 복잡한 무늬의 융단과 같다.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 어렸을 때의 경험, 부모와 선생님, 친구한테 받은 영향, 인생의 모든 장애물, 이 모두가 베틀의 씨줄이 되고 그 위를 당신이 날줄이 되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날줄이 되어 왔다 갔다 하는 당신의 반응에 따라 인생이라는 융단이 짜인다. 당신은 당신이 취한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그치고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기 전까지는 당신의 손상된 감정은 절대 치료받지 못할 것이다. 31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다른 직업을 갖거나 더 나은 곳에서 살거나 다른 사람과 만나 결혼했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살았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근본 태도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외부환경이 변할 때 내 태도도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요 착각이다. 주변을 바꾼다고 늘 부정적으로 판단하던 나쁜 습관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펜을 바꾼다고 해서 글씨체가 바뀌지 않듯 새 직업, 새 집, 새 배우자를 얻는다 해서 내적 태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 태도를 지닌 사람은 어디에서 누구와 살아도 늘 부정적일 것이다.

1세기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자신의 좋지 않은 상황에 대해 남을 탓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고, 자신을 탓하는 것은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며, 다른 사람을 탓하지도 자신을 탓하지도 않는 것은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의 모습이다.’

내 안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주체는 오직 나 자신과 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뿐이다. ‘내 상처와 아픔에서 일어나기 위한 열쇠는 오직 나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내 원수가 나에게 용서를 청해서 상처가 나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주님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기쁜 소식은 이것이다.

당신의 태도만 바뀐다면

나쁜 소식이 기쁜 소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 로버트 슐러

 

 

나를 아프게 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했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앞으로 같은 상처를 나에게 주어도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값싼 용서다. (‘값싼 용서’ 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내게 상처 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것은 순전히 내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다. 상대방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더라도 그가 어떤 성장 배경과 상황에서 나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를 헤아려 보는 것이다. 특히 부부나, 부모와 자녀 사이처럼 운명적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이에서는 더욱더 상대방을 이해해 보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많은 경우 상처를 준 사람은 이미 그 사람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 피를 흘리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부모한테서 언어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사람이 나중에 커서 똑같은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했던 사람이 나중에 커서 똑같은 상처를 자기 가족에게 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해한다는 것이 상대방의 못된 행동을 용남하고 받아들여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음악가 리스트가 어느 도시에 머물렀을 때 생긴 일이다. 그는 호텔 로비에 붙어 있는 연주회 포스터를 보았는데 연주자의 약력을 보니 리스트의 문하생이라고 쓰여 있었다. 리스트는 ‘이 연주자가 누구일까?’ 오래도록 기억을 되살리며 애썼지만 도통 기억할 수 없었다.

한편 그 무명 연주자의 귀에 리스트가 그 도시에 머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연주자는 창백한 얼굴로 리스트를 찾아와 용서를 청했다. “저는 생계유지조차 어려울 만큼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연주 실력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라고 하면 레슨을 받으러 오는 학생들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음악회는 당장 취소하겠습니다.”

이러한 사과의 말을 들은 리스트는 그 연주자에게 자기 앞에서 한번 피아노 연주를 해보라고 했다. 그 사람이 피아노를 치고 나자 리스트는 여기저기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이제 당신은 내 제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가서 스승도 찬조 출연할 것이라고 말하시오. 하지만 당신이 내 제자라고 거짓 선전한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한 사람을 이해한다면, 특히 그의 불행한 사연을 이해하고 상처의 흔적을 연민과 동정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를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해의 가장 높은 단계는 상대방에게 연민과 동정심을 갖는 것이다. 32 달라이 라마가 중국 감옥에 18개월이나 갇혀 있다가 석방된 티베트 승려에게 이렇게 물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가장 두려웠던 것은 무엇인가?”

그 승려는 중국인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고 대답했다. 비록 중국 군인들이 그를 잔혹하게 고문하기는 했지만 중국인을 향한 연민을 잃는 것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잃는 것이요, 그 가치를 잃으면 증오에 사로 잡히기 때문이었다. 이 티베트 승려는 가장 높은 단계의 이해, 곧 원수를 향한 연민만이 자신의 선한 마음을 지키는 길임을 알았다. 33

또 달라이 라마는, 만일 어린아이가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하여 평생 일주일에 한 시간씩 연민에 대해 명상하는 것을 배운다면 전쟁과 폭력은 한 세대 한에 소멸되리라고 주장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나도 상대방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을 대할 때 우리 자신은 철저히 잘못이 없는 존재, 잘못을 아예 저지르지 않는 존재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사실 그런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사람들에게 주었는가. 상대방이나 나 자신이나 모두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면 원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그대들은 누구에겐가 잘못을 저지른다.

또한 그대들 자신에게도.

의로운 자가 사악한 자의 행위 앞에서

전혀 결백할 수 없으며

정직한 자가 그릇된 자의 행위 앞에서

완전히 결백할 수는 없음을.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

사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를 수 없다.

이들은 다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기에.

그대들 중 누군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려 한다면

그 남편의 마음도 저울에 달게 하며

영혼도 재어보게 하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려는 자는

그 죄지은 자의 영혼을 헤아리고 나서

채찍질할 것인가 고민하라.

정의란,

그대들이 기꺼이 따라가려는

법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로 뉘우침이 아니겠는가.

죄인의 가슴에서 뉘우침을 빼앗지 마라.

청하지 않아도 뉘우침이란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우며 스스로를 응시하도록 만드니.

– 칼릴 지브란

 

 

값싼 용서와 섣부른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값싼 용서’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애써 좋게 봐주는 것으로 저질러진 악을 외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나를 학대했어. 하지만 아버지도 인간이지. 아버지가 내게 잘못한 것은 그분의 인간적 결함 때문이야. 그분도 자기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다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했겠지. 아버지도 어렸을 때 나름대로 상처를 받았을 테고 자라면서 그런 인격을 갖게 되었기에 당신 자신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렇기에 아버지가 나한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로서 가져서는 안 될 이기적인 생각이야.’ 라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값싼 용서요, 애써 좋게 봐주는 태도다.

진정한 용서는 저지를 잘못이나 악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방금 든 예화에서 적극적인 용서의 태도는, ‘아버지가 나에게 한 짓은 어떤 이유에서든 잘못이야. 아버지는 내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아버지는 내게 더 잘해 줄 수 있었는데도 그런 잘못을 저질렀어. 내 인생에 큰 해를 입히고 상처를 주었어. 하지만 나는 이제 아버지를 용서할 거야.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혀 내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를 하려면 내가 상대방한테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에게 상처 준 상대방을 향한 유죄판결이 먼저 있어야 한다.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용서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34 스미즈는 말한다.

 

솔직한 감정분출과 정지간 유죄판결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용서도 없다. 우리가 악을 용서할 때, 우리는 악을 변명하지 않고 묵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질러진 악을 충분히 직시하고, 공포에 떨고, 아연실색하고, 그것에 대해 격노한다. 그런 다음에야 그 악을 용서한다. 35

 

어린 시절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아버지에게 혁대로 매를 맞으며 성장한 남자가 있다. 이제 그의 아버지는 나이 들어 힘없는 노인이다. 그는 여전히 과거의 끔찍한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도 자기 아버지에 대해 남들에게 얘기할 때, 어린 시절 자기 아버지는 이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자애롭고 따스했다고 말한다.

그는 스미즈가 말한 대로 아버지의 그 가혹한 행위를 ‘충분히 직시하고, 공포에 떨고, 아연실색하고, 그것에 대해 격노해야’ 하는데 아예 정반대로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분명 있었던 사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자기 합리화요 값싼 용서의 모습이다.

심리학자 서비 Robert Subby 는 이렇게 말한다.

 

상처에서 치유되기 위해서는 나를 낳아준 부모, 나를 키워준 이들에 대해 사실에 바탕을 둔 객관적 시선이 필수적이다. ‘내 부모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란 꾸밈이나, 옛날에 우리 가정이 이랬더라면 하는 바람에서 자기 식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실제 그대로의 과거를 바라볼 때 치유된다. 36

 

불가에서 종교적 깨달음의 여러 단계를 표현하는 유명한 명제가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것이다. 만물의 실상은 보지 못한 채 현상계에만 머물러 살아가는 범부한테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만물의 실상을 보려는 사람들, 곧 산과 물이 끊임없이 부식되고 풍화하면서 그 모양을 달리함을 깨닫는 사람들한테는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이렇게 본질의 세계를 바라보는 단계가 더 깊어지면, 그 다음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란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산과 물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무상하게 변한다 해도 눈에 보이는 그것은 분명 산과 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과정도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와 비슷할지 모른다. 내게 절대적 의지 처였던 아버지가 언젠가부터 아버지라기보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지만 이제 깊은 이해를 갖는 시점에서 아버지는 다시금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값싼 용서와 연관해서 ‘섣부른 용서’ 가 있다. 값싼 용서가 진정한 용서가 아니듯 섣부른 용서도 그렇다. 섣부른 용서란 서둘러서 성급하게 해버리는 용서를 가리킨다. 친밀한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 관계가 소원해지면 우리는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즉시 갈등을 해소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상대방을 성급하게 용서해 버린다. 특히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인 용서와 화해, 일치에 대해 잘못 이해하거나 강박관념을 갖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섣부른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서둘러 용서하면서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아픔을 억압하게 되는데 그 억압된 분노와 아픔은 나중에 더 강력한 파괴적 힘이 된다. 37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서둘러 가해자를 용서해 주면,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뉘우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윤리신학자 트레이시 Steven Tracy 는 말한다.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에게 계속해서 폭력을 일삼아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을 주는 것과 같다.’ 38

그러니 관계 안에 발생할 갈등이 당장에는 부담스럽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성급히 용서하지 말고 벌어진 사건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성급한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의 자기 존중감의 결여를 드러낸다.

성급한 용서는 덕이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

– J. 머피

 

 

용서의 완성을 위해서는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사실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많은 경우 상처 받은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내가 그런 상처를 받도록 행동했을까? 상처 받은 내가 바보지. 그런 나 자신을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운 몇 가지 거짓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39

 

  • 다른 사람의 행위는 정당화 할 수 있지만 자신의 행위는 그렇게 할 수 없다.
  • 자신의 실패는 인정할 수 없다.
  • 과거에서 도피할 수 없다.
  • 한번 저지른 일은 원상 복구할 수 없다.
  • 관대함은 타인에게 베푸는 것이지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 나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벌을 줌으로써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특별히 부모나 배우자한테 상처 받았을 때, 상처 입은 사람은 상대방을 미워하기보다 자신을 더 단죄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한테서 상처받아 그토록 비참하나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 사실은 자기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단죄하고 혐오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나 오빠 또는 친척 남자한테서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의 경우 대개는 가해자보다 자신을 더 미워한다. 가해자가 자기 몸에 손을 대었을 때 거절하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갖는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본시 더러운 피가 흐르기에 그렇게 허락했다고 단죄하면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아무런 힘도 없이 당했음에도 말이다.

한 젊은 여성은 5살 때부터 7살 때까지 무척이나 좋아하며 따랐던 친 오빠에게 여러 번 성추행을 당했다. 마침내 부모가 그 일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당시 일어났던 모든 불행이 자기 잘못이었다고 자책했다. 자기가 오빠 앞에서 도발적 춤을 춰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친 5살 때 ‘도발적’ 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어린아이는 금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초자아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에 ‘도발적’ 과 같은 단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오빠를 강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세워 오빠에게 면책을 준 것이다. 사건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었기에 자신을 처벌하고자 스스로를 끔찍이 미워했던 것이다. 40

자기를 용서해야만, 곧 가해자를 용서하고 자신을 용서해야만 비로소 용서가 주는 축복과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 과정은 완성되지 않는다. 41

그뿐 아니라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하는 사람은 그를 치유해 주시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다. 자기를 단죄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겠는가? 42

아무리 하느님께서 용서하려 해도 인간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용서는 무의미하다. 예수님을 팔아 넘기 유다를 보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죽이도록 넘겨준 이들 (또는 배반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 중 한 사람인 유다를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하지만 유다는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에 결국 자살해 버린다.

한편 자신을 용서한 이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다시 일어났다. 성경의 훌륭한 인물들은 다 스스로를 용서한 사람이다. 다윗, 베드로, 바오로, 간음한 여인 등.

이들은 본시 얼마나 부끄러운 죄를 지었던가!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베드로는 스승을 배반하고 저버린 죄를,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죄를, 그리고 간음한 여자는 성범죄를 지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자신을 용서하여 새롭게 태어났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통해,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았든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여인아, 너를 단죄한 사람이 있더냐?” 하고 물으시고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우리를 단죄하지 않았으니 우리도 스스로를 단죄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인간이기에 실수하고 실패한다. 우리 자신이 허점 많고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더 이상 자기 파괴적 행위, 곧 자기를 단죄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용서의 대상에

자신을 포함하지 않으면

용서로 인한 지속적 기쁨을 누릴 수 없다.

– 켄달

 

 

1.5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첫 번째: 용서하면 몸과 마음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용서라는 말 앞에 종교적 콤플렉스를 느낀다. 용서라는 말만 들으면 움츠러들고 자신이 없어진다. 왠지 위선자 같고, 엉터리 신자 같고, 하느님 앞에서 죄송스러움을 느낀다. 많은 신자가 이런 생각에 시달린다. ‘내가 정말 용서했는가? 그렇다면 왜 여전히 마음 아프고 섭섭한 것일까? 그래,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거야.’

용서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진정 용서했다면 더 이상은 그 사람 때문에 괴롭지 않아야 한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의지로 용서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용서하는 것이 서로 다름을 알아야 한다.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는 종교적 선택이요 결심이다. 용서는 신앙인으로서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결심하는 종교 행위다.

그런데 느낌을 포함한 몸 자체가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신앙의 이름으로 의지적 용서를 했어도 우리 마음은 여전히 아프다. 그래서 상처 준 사람을 갑자기 만나면, 얼굴이 굳어지고 상처는 다시 도진다. 43

나아가 받은 상처가 매우 깊다면 아무는 시간은 그만큼 더 걸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믿었던 사람에게 이용당했을 때,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을 때, 명예 훼손을 당했을 때 등등 이런 모든 상처는 시간이 걸려야 아물 수 있다.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계속 올라올 때마다 해야 할 일은 내가 상대방 때문에 아직도 아프고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마음 상태를 받아준다는 것은 평화를 얻기 위해 무척 중요하다. 만일 내 마음 상태를 받아주지 않으면 또 한 번 자신을 죽이는 셈이다. 곧 자신이 참으로 용서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자기 비판과 비난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방 때문에 상처를 받아 피를 흘리는 마당에 스스로 또 한 번 생채기를 내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는 종교적 행위로 용서하리라 결심할 수 있지만 느낌과 몸으로까지 상대방을 용서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마음은 스스로 그 온전한 교훈을 알아야 하며..

온 그라운드를 누벼야 한다.

마음은 직접 보거나 겪지 못한 것은 알지 못한다.

– 랠프 월도 에머슨

 

 

두 번째: 용서는 곧 화해다

많은 사람이 용서와 화해를 동일시한다. 그런데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용서했다고 반드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상대방과 관계없이 나와 나의 미래를 위해 내가 하는 것이다. 나 혼자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화해는 쌍방의 행위로 이루어진다. 진정한 화해는 상대방이 진심으로 자기 행위를 뉘우치고, 나에게 용서를 청하며, 내가 그를 진심으로 받아줄 때 가능하다. 화해는 양쪽이 관계를 다시 이어가기를 참으로 바라며 또 그러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할 때 가능하다. 44

우리가 주님한테 받은 명령은 용서이지 화해가 아니다. 45 물론 용서를 넘어 화해까지 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화해는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용서가 꼭 화해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성조 요셉의 경우를 보라. 형들이 그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을 때 형들에 대한 그의 원망과 원한이 얼마나 컸을까를 상상해 보라. 하지만 요셉은 어느 순간부터 형들을 완전히 용서했다. 46 우여곡절 끝에 요셉이 이집트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때 형들을 다시 만난다. 심한 기근이 7년간 계속되자 형들이 식량을 구입하러 이집트에 왔을 때였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알아보았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대신 형들을 거칠게 대하면서 그들이 변화되었는지 시험한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도둑으로 몰고, 또 시메온을 감옥에 가두면서 그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깊이 인식하고 진정으로 뉘우치는지 시험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처럼 그들을 시험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형들과 화해하기 위해서다. 만일 형들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요셉은 화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화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에서 용서는 나와 내 미래를 위해 하는 것이요, 원수와는 관계없이 나 혼자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자주 실수하는 것이 있다. 굳이 상처 준 상대방을 찾아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라고 말했다가 더 큰 상처를 입는 것이다.

필자가 만단 한 여성의 쓰라린 경험담이다. 그는 같은 공동체 자매한테 부당한 대접을 받아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오랫동안 그 자매를 멀리했는데 우연히 그 자매와 함께 기도회 봉사를 하게 되었다.

같은 봉사자끼리 사이가 안 좋은 것이 마음에 걸려 그 자매를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 자매에게 “우리 서로 용서하고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합시다.” 라고 말했더니, 상대방이 하는 말이 “그래, 당신 잘못을 당신이 알겠지?” 였다. 이 말을 듣고 그 자매는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용서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신 지상명령이지만 용서가 곧 화해는 아니다. 화해는 상당 부분 가해자의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과 반드시 관계를 재개할 의무는 없다. 다시 말해 용서한다고 해서 꼭 상대방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많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용서다. 주인공 여자 신애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그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간다.

거기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들이 유괴되어 살해당한다.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신애를 위로하든 이들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애는 교회에 나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가슴을 쥐어짜며 통곡하는 가운데 모든 것에는 주님 뜻이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그런데 신애를 교회로 인도한 사람들은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신자다운 모습이라고 설득한다. 그녀는 결국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마음먹고 교도소로 가면서 생각한다. 유괴범이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것이며, 자기를 보면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 빌 것이라고. 그런데 그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다.

유괴범은 무척 편안한 얼굴로 신애를 맞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도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너무나 평안합니다.” 그녀의 가슴은 아직도 썩어 문드러져 있는데 그녀의 아들을 죽인 자는 주님한테 용서받고 평화를 누리고 있다니.

면회 장소에서는 그저 멍한 채 아무 말도 못하던 신애는 밖으로 나오자 하늘을 향해 분노하며 절규한다. “나보다 누가 먼저 저 사람을 용서한단 말입니까? 내가 아직 저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이에요? 내 아들을 죽인 저 사람의 죄를 나 밖에 누가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후 신애는 신앙을 비웃고 하느님에게 도전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 신애(그리고 용서를 권한 교회 신자들)는 ‘용서라는 것은 가해자와는 관계없이 피해자 자신의 내면에서 홀로 이루어지는 고결한 작업’ 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결과 용서를 결심하기 전보다 더 큰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엔라이트 Robert Enright 는 성직자들의 강론에 등장하던 용서 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대표적 심리학자다. 그는 말한다. ‘내가 용서해야 하는 상대방과 개인적으로 접촉할 필요는 없다.’ 47

 

 

세 번째 오해: 용서했으면 다 잊어야 한다.

 

용서는 상처에서 독을 제거하는 치료제요

더 이상 같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예방제다.

– 로버트 D. 엔라이트

 

정말 용서했다면 과거의 상처를 다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48 용서를 했다 해도 과거의 상처를 기억할 수 있다. 나아가 꼭 기억해야 할 경우도 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공간적으로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똑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또 다른 가족에게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억해야 한다.

한 여인은 여덟 살 된 자기 딸이 자기 아버지한테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알고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외할아버지가 손녀딸을 성추행한 것이다. 그 또한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기에 그의 괴로움은 더욱 컸다. 문제는 그가 상처를 잊으려 했고 그 결과 아버지를 경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에서 일어나고자 무던히 애를 써야 했고 결국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를 용서하면서 아버지가 그에게 한 일도 망각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아버지의 범죄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용서를 했으면 다 잊어야 한다고 오해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아버지가 한 번도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간과했다.

결국 아버지는 그가 없는 사이 똑같은 행동을 자신의 손녀딸에게 저지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기억하고 자기 딸을 아버지한테서 보호했어야 하는데 잘못된 오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49

어떤 분들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하느님이 우리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듯 우리도 정말 용서했다면 상대방의 잘못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사야 43장 25절에서 하느님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씀하신 것을 글자 그대로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신다. 다만 우리의 악행을 용서하시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것은 우리 악행이 당신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곧 우리의 약함을 헤아리시고 당신 자비와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용서하지만 상처 준 사건을 잊지 않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계단에서 내려오다 넘어진 사람이 계단을 내려올 때 조심하는 것도 또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만일 넘어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덤벙덤벙 내려온다면 또다시 넘어져 다칠 것이다. 불에 덴 사람이 불을 조심하는 것은 또다시 불에 데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 상처에 대한 기억은 같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정신의학사 사스 Thomas Szasz 는 말한다. ‘멍청한 사람은 용서하지도 잊어비리지도 않는다. 순진무구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어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 50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지 않으면서 그 상처 체험에서 깨달음을 얻어 다시는 같은 상처를 받지 않도록 자신을 돌본다.

 

 

네 번째 오해: 중독자나 정신적 문제가 있는 병자와 관련된 오해

알코올 중독자, 도박 중독자, 성 중독자 같은 중독자들과 정신적 문제가 있는 병자들한테는 용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 중독자나 병자한테서 끊임없이 상처를 받는 사람이 신앙의 이름으로 참고 견딘다든가 묵인한다든가 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그런 값싼 용서로는 상대방을 참으로 용서할 수 없고, 서로에게 불행만을 자초할 뿐이다. 예수회 드멜로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사람이 여행 도중 차가 고장 나자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장 난 차를 밀기 시작했다. 밀고 또 밀고 해서 한 도시에 도착했다. 이 사람이 계속해서 고장 난 차를 밀고 간다면 그는 정말 바보일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보닛을 열고 점화 플러그를 바꿔 끼울 정비공이 필요하다. 고장 난 차를 밀고 목적지까지 갈 필요는 없다. 전문가가 필요할 뿐이다. 병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도박, 알코올, 성 중독자에게 우리가 베풀어야 할 것은 용서가 아니라 치료다. 51

 

알코올 중독자 남편을 둔 어떤 부인은 사랑으로 대하다 보면 언젠가는 남편이 술을 끊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이분은 중독이 얼마나 집요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잘 모른다. 중독이라는 것은 다만 육체만 중독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중독시키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국의 유명한 록그룹의 한 멤버가 마약 과다복용으로 숨을 거뒀다. 그가 복용한 마약은 레드럼 redrum 이란 헤로인이었다. 레드럼은 영어로 살인을 뜻하는 murder 를 거꾸러 쓴 것이다. 그의 사망 이유가 신문 방송을 통해 전해지자 거리의 마약 중독자들 사이에는 레드럼을 사려는 큰 술렁거림이 일었다. 마약 단속 경찰관의 말이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마약으로 죽었거나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 약을 사려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납니다. 그 약이 더 강력하여 흥분을 고조시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52

얼마나 미친 짓인가? 너무나 강력해서 목숨까지 해칠 수 있는데도, 그 마약을 사려고 안달이라니, 분명 마약의 노예가 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중독이란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 마약 중독의 예를 들었지만,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 중독은 물론 어떠한 종류의 중독이든 그 영향력은 집요하고 그 해악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중독자의 배우자라면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중독된 세계와 관련된 자료를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다. 읽으면서 중독자의 특성과 함께하는 가족이 갖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순진무구한 기대를 하지 않고 자신은 물론 중독 배우자와 가족을 지킬 수 있다.

중독자를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냥 봐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다. 토한 것을 스스로 치우게 하고, 발생한 문제에 직면하게 하며, 무책임한 행동의 열매를 스스로 거둬들이게 하는 것이다. 53

중독자에게 ‘만일 이런 일이 한 번만 더 생기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할 때는 실제로 그렇게 할 마음을 먹어야 한다. 단순한 경고가 아닌 실제 행동을 하게 되면 강력한 통제력을 갖고 중독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중독자는 허공에 메아리치는 경고가 아님을 알게 되어 관계를 유지하려면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에서 결단을 내린다.

한편 단순히 말로만 위협하고 실행은 하지 않는다면, 중독자는 안도감을 느끼며 중독 행위에 더 빠져들게 된다. 그러니 ‘만일 이런 일이 한 번만 더 생기면’ 이란 말을 할 때는, 더 이상 기회는 없다는 메시지가 상대방에게 분명히 전달되고 그렇게 할 굳은 각오가 서 있어야 한다. 54

 

습관적으로 배우자를 구타하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한테도 필요한 것은 용서가 아니라 치료다. 결혼한 이들 중 많은 이가 배우자한테 끊임없이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당하면서도 참고 견딘다. 상대방이 언젠가는 변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가정이 깨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명분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한 상대방의 폭력은 더욱 거칠어질 뿐이다. 참고 견딘다는 것은 감정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상대방에게 내가 그 폭력을 허락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행위가 된다.

심리학자이며 가톨릭 사제인 채준호 신부는 구타하는 남편의 심리세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 남자가 습관적으로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아내가 자기를 떠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이를 증명한다. 친구에게 툭하면 성질을 부리는 사람은 막상 친구에게 주먹질까지 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하면 친구가 떠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 성난 사람이 애꿎은 강아지에게 쉽게 발길질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강아지가 그에게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의 또 다른 심리는 아내를 자기 소유물로 여기는 것이다. 아내가 자기 ‘것’ 이기에 무슨 이유로든 자기 심기를 건드리고 화나게 만들면 남편으로서 마땅히 폭행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채준호 신부는 구타하는 남편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조언한다.

 

  • 언제든 떠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내한테는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러니 떠날 수 있음을 보여주어라.
  • 남편이 때리면 창피하다고 숨기지 말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알려라. 이는 내가 독립적임을 보이는 행위다.
  •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맞고만 있지는 않으리란 점을 보이는 것이다.
  • 재결합의 조건으로 치료를 받게 하라.

 

 

 

 

1.6  효과적인 용서 방법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분노와 울화의 운동장에서 뛰쳐나와 용서하려면 어떻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아래에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55

첫째, 베개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앉아라. 십자가는 용서의 강력한 상징이다. 하느님은 끝없이 배신을 일삼던 우리 인간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다. 예수님은 언어폭력을 당하고, 뺨을 맞고, 수치를 겪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 용서해 주셨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성호를 그은 뒤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맺힌 분노와 적개심과 한을 강렬하게 표현하라.

구태여 적절한 말을 고르려고 애쓰지 마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가슴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어라. 욕을 해도 좋다. 예를 들어 ‘그 놈의 자식, 염병할 놈, 개 자식, 죽일 놈의 새끼, 자동차가 지나가다 확 깔아버려라.’ 등.

상처가 치유되려면 화를 노출하는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의 평화를 다시 누리고 싶다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화와 분노, 적개심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 내어 표출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거룩한 십자가 앞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고 익숙하지도 않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그 분 앞에서 격한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가운데 마음은 순화되어 갈 것이다. ‘감정적 홍수’ 에 빠져 무분별하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감정 표출은 중요하다. 분노가 극에 달하고 참기 어려우면 주먹으로 옆에 놓아둔 베개를 쳐라.

 

둘째, 증오심에서 벗어나 맺힌 한을 풀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 드려라. 성급하게 용서하겠다는 결심이 앞설 필요는 없다. 다만 미움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결심을 표시하라. 피 흘리는 상처에 날마다 미움의 물을 주면서 화병에 걸리고 암에 걸려 더 이상 억울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바람을 말씀 드려라. 진정으로 미움의 운동장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더 이상 나의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면서 동정을 구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 드려라.

 

셋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라.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한을 품지 않고 사랑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당신의 한 맺힌 사건과 예수님의 억울한 사연을 비교해 보라. 당신이 아무리 큰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당신의 상처는 제 상처만 못합니다.’ 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무고하게 배척 받았다 해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큼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은 어떠한 불의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사건보다 더 불의하지는 않다.

또 하느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에게 그러한 비극이 일어났는지를 물어보라. 예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울부짖으셨다면,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어찌하여?’ 를 물을 수 있다. 예수께서 골고타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으신 ‘어찌하여?’ 는 우리의 모든 ‘어찌하여?’ 를 포함한다. 볼프 Pierr Wolff 는 말한다. “우리의 ‘어찌하여?’ 라는 물음은 주님의 ‘어찌하여?’ 를 통해 치유된다.” 56

넷째, 상처를 준 사건 속에 예수님을 초대하라. 그 이유는 과거의 상처에서 치유되기 위해서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한테도 해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에게 아픈 기억, 슬픔, 실망, 상처만을 남겼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그들이 지난 사흘 동안 겪은 아픈 체험을 다 들어주셨고 그들의 상처에 사랑으로 응답해 주셨다. 그러고는 당신 해석을 들려주셨다. 그로써 제자들의 마음은 뜨거운 감동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루카 24, 13-35)

이렇게 상처의 기억을 치유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의 과거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했는데도 상대방을 증오하는 마음이 계속 남아 있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기도 몇 번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 들기를 바란다면 무척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바람일 것이다.

맺힌 한을 푸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상처가 클수록 더 그렇다. 그 상처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까지 기도를 계속하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상처에서 자유로워진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치유는 과정이다. 상처가 하룻밤 사이에 깊어진 것이 아니라면 치유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하느님,

당신께서 제게 응답해 주시겠기에

제가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당신의 귀를 기울이시어

제 말씀을 들어주소서.

당신 자애의 기적을 베푸소서.

당신 오른쪽으로 피신하는 이들을

적에게서 구해 주시는 분이시여!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주소서.

– 시편 17

 

 

 

1부를 마치며

 

1부를 마치면서 용서와 관련된 핵심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아래에 열거한 내용은 용서 전문가들도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 용서는 의지적으로 결심함으로써 가능하다.
  • 용서란 상처에서 비롯한 울화와 분노의 악순환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 용서란 내면의 평화와 자유와 힘을 되찾는 것이다.
  • 용서란 상처 준 사람이 더 이상 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 용서란 나의 책임 아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용서란 상처를 치유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 상처를 준 상대방과는 상관이 없다.
  • 용서는 있었던 일을 잊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다시는 같은 일로 상처를 받는 일이 없도록 기억하는 것이다.
  •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우리는 용서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과 화해하거나 상대방과 헤어져 나만의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선택은 나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제비꽃을 밟으면

제비꽃은 우리 발뒤꿈치에

좋은 향기를 남긴다.

용서는 그 향기와 같다.

– 마크 트웨인

 

 

마음으로

자신을 단죄하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집회 14,2)

 

 

 

 

 

2 부  사소한 상처에 대하여

 

 

인생은 왕복표를 발행하지 않기에

한번 출발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 로맹 롤랑

 

 

이제까지는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껏 얘기한 상처는 ‘진짜 상처’다. ‘진짜 상처’ 라고 한 것은 편의 상 ‘사소한 상처’ 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진짜 상처’ 가 부당하게 대우받아 영혼 자체가 조각나는 심각한 상처라면, ‘사소한 상처’는 다른 이의 악의적 행위로 인한 상처라기보다 스스로 자초한 상처다. 곧 우리의 미성숙함 때문에 관계 안에서 흔히 받는 상처를 가리킨다.

우리가 진짜 상처를 받았다면 용서할 대상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소한 상처라면 사실 용서할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처를 자초한 우리의 미성숙한 태도를 인식하고 상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사소한 상처에서 해방되고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 위한 몇 가지 도움말을 제시한다.

 

 

 

2.1  기대하지 마라

 

상대방이 어머니처럼 나를 돌보고 헤아려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버려라. 기대한다는 것은 곧 실망하고 상처 받겠다는 것이다. 기대는 안개와 같다. 기대는 우리를 속이고 헤매게 만든다. 기대는 우리 마음을 멍들게 하고 관계를 파괴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방문 앞에 이런 팻말을 붙였다고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는 관계를 멍들게 할 뿐 아니라 그 관계조차 즐기지 못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부모는 자녀가 아기일 때 하루빨리 똥오줌을 가리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끝나면 어서 커서 학교에 들어가기를 기대하고, 사춘기가 되면 어서 그 시간이 끝나기를 기대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 좀 더 나은 대학에 가주기를, 그 다음에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기 를, 그 다음에는 좋은 배우자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부모들은 그게 무슨 잘못인가 하면서 의아해할 수 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당연히 걸 수 있는 기대가 아닌가. 물론 잘못은 아니다. 다만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끝없는 기대 속에 자녀의 미래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자녀의 미래만 바라보는 부모는 이 순간 자녀와 함께하는 관계를 즐기지 못한다. 자녀가 거치는 모든 단계를 함께하면서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갓난 아기 때는 갓난아기로서의 자녀를, 학창시절에는 성장해 가는 아이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누구한테도 기대할 수 없다. 부부 사이에서조차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정다웠던 부부 사이가 소원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자녀한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워야 할 부모와 자식 사이가 그릇된 기대로 벌어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배우자나 자녀한테는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지녀야 한다. 기대와 희망은 다르다. 기대는 나를 위한 것이고, 희망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기대는 언제나 채워지기를 요구하기에 채워지지 않으면 상처를 받는 반면, 희망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슬픔을 느끼긴 하지만 상처 받지는 않는다. 기대는 일방적 자기 중심의 바람이지만 희망은 상대방 중심의 태도이기에, 상대방이 정말 잘되기를 바랐다가 그렇게 되지 않아서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자녀에게 희망을 갖는 부모는 그들의 재능과 꿈을 먼저 헤아려 주며 바람직한 인생을 살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기대하는 부모는 자녀의 현실적 조건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엇이 되기만을 요구한다. 피만 보면 기절하는 자녀에게 의사 되기를 강요하거나 손가락이 짧은 자녀에게 피아니스트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복종은 하지만 그 자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여 문제가 되고, 반대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때는 부모가 배신감으로 가슴 아파한다. 결국 기대로 인해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고 상처를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

필지는 자기 자녀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네가 이번 학기에 공부를 잘해서 전액 장학금 받도록 날마다 기도하고 있단다.” 이러한 기도는 자녀에게 격려와 위안이 되기는커녕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를 줄 것이다.

 

자녀든, 친지든, 친구든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상처를 자초하는 태도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얼마나 쉽게 섭섭해하거나 배신감을 느끼는가!

며칠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전화 한 통 없고, 편지 하나 없으면 우울해진다. 챙겨줄 만한 사람들이 명절이 다가오는데도 선물 하나 하지 않는다든가, 주말인데도 아무도 함께 놀러 가자고 초대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은 쉽게 우울해지고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내가 상대방에게 베풀어 준 것과 상대방이 나에게 한 태도를 비교하게 된다. ‘왜 내가 늘 먼저 전화해야 하는가? 먼저 전화 좀 해주면 안 되나?’ ‘왜 매번 나만 식비를 내야 하는가? 저 사람은 왜 한 번도 나를 대접할 줄 모르는가?’ ‘지난 번 그 집에 방문했을 때 나는 얼마짜리 선물을 했는데 그 집은 겨우 이런 것을 갖고 오다니… .’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산 한 외국인에 따르면 한국인은 보상심리가 무척 강하다고 한다. 작은 친절을 베풀면 곡 무엇인가 보답이 오기를 기대하며 그렇지 않으면 섭섭해한다는 것이다. 또 한국인은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주면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57

상대방이 나를 어머니처럼 헤아려 주기를 바라면서 많은 기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친구나 친지들을 자주 판단의 도마 위에 올려놓곤 한다. 수많은 추측을 하면서 상대방을 이리저리 비판, 비난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암울해진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지는 만큼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언행에도 상처를 받는다. 별것 아닌 것에도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멀리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거부당하고 배신감을 느끼는 악순환을 겪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를 더 이상 받고 싶지 않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기대를 걸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사소한 상처는 다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우리 부모, 자식, 형제자매한테서 오는 경우가 흔하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나, 나와 함께 인생 여정을 걷지 않는 사람에게 상처 받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쉽게 잊을 수 있다.

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고 상처 받게 하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상처는 본시 친밀함을 먹고 사라는데, 이 세상에는 가족만큼 친밀한 사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를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또 그만큼 기대하는 바가 크기에 상처도 더욱 크고 깊게 받는 것이다. 58

상대방에게 자기 중심적 기대를 하면서 받는 사소한 상처들은 섬세한 사람들일수록 더 많다. 이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기 사랑을 퍼주고 싶어 애를 쓴다. 상대방이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섬세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호의를 상대방에게 무조건 퍼붓는다.

이렇나 사람이 받는 사소한 상처는 어떤 것들인가? ‘이제까지 나는 너를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는데 왜 너는 베푸는 데 그렇게 인색한가? 내가 지금 이러이러한 도움이 필요한데 그것을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는가? 네가 정말 날 사랑한다면 알아서 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레이 John Gray 에 따르면, 많은 여성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말해서 받게 되면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그 행위는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엎드려 절 받기라고 생각하다. 또는 상대방이 내 잔소리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해준 것으로 여긴다. 59

상대방이 어머니처럼 알아서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은 경우 마음이 부글부글 끓을 때가 되어서야 자기가 바라는 것을 표현한다.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해주기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할 수 없이 말하는 것이니 그 말이 곱게 나갈 수 없을 것이다. 60

상대방이 나를 헤아려 돌보아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무리한 바람이다. 내가 바라는 것을 말로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엎드려 절 받기가 아니요, 자존심 상하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이며 타당한 태도다.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바람을 상대방에게 표현해야 한다. 더 이상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남편이 결혼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섭섭해하는 아내들이 많다. 둘이 서로 죽네 사네 사랑하다 결혼했건만 그 신성한 기념일을 챙기는 것은 대부분 아내 몫이다.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면 아내는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줄 선물도 마련하고 애정이 가득 담긴 카드도 쓰지만 남편은 기억조차 못한다. 그리하여 그 좋은 날 아내는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그 다음 해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면 아내는 ‘어디, 올해도 결혼기념일을 잊기만 해봐라.’ 하며 벼른다.

결혼기념일같이 중요한 날을 잊어버리는 남성도 문제지만 표현하지 않고 기대만 하는 여성도 문제다. 여성만큼 섬세하지도 낭만적이지도 못한 남성은 일에 빠져들면 아무리 결혼기념일이라 해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니 기다리면서 화를 쌓기보다 남편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이 좋다. 말하는 것이 자존심을 덜 상하게 하는 길이다.

그래도 말하는 것이 엎드려 절 받기라는 생각이 든다면 달력에 붉은 매직펜으로 동그라미표를 해놓아라. 그래도 안 될 것 같으면 동그라미 옆에 중요하다는 뜻으로 별표도 해 놓아라. 그러면 남편은 이날이 무슨 날인데 이렇게 강조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 정도면 아무리 무심한 남편이라 해도 그날이 무슨 날인지 즉시 기억할 것이다.

자기가 바라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위해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믿기 때문이다.

 

 

2.2  추측하지 마라

 

우리는 자주 상황을 내 마음대로 추측하여 상대방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특별히 예민한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아는 척 하지 않거나 평소와 달리 서둘러 인사하고 지나가 버리면 무시 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진다. 상대방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자기에게 화가 난 것으로 추측, 판단하고 스스로 상처를 입는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그러한 상처를 준 상대방에 대해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아 마음속으로 비난한다. 이러한 우리 마음속 태도는 암암리에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심한 경우 반목까지 한다.

추측에서 나온 일방적 판단이 친밀한 관계를 얼마다 파괴하며 상처를 주는지 다음 상담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수회 신부요 심리학자인 포웰 John Powell 이 한번은 관계가 악화되어 찾아온 모녀를 상담하게 되었다. 61 상담해 보니 문제의 원인은 너무나 어이없고 하찮은 것이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녀들 앞에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엄마의 이런 모습에 사춘기 딸은 혼자서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다.’ 고 추측한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엄마에게 애인이 있을 거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엄마를 미워했다. 엄마에게 대들고 매사 반항적으로 행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을 잃어 고통스러운데 딸이 사사건건 대들고 반항하니 엄마 또한 딸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인이 남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남편이 죽기 전에 저는 남편 앞에서 약속 했습니다. 남편 몫까지 함께해서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고.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울지 않겠다고. 남편이 세상을 편히 떠나도록 이를 악물고 강한 모습을 보이겠다고. 그래서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아이들에게 아빠는 천국에 갔으며 죽음은 슬픔만이 아님을 깨닫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딸은 엄마가 울지 않았다는 사실을 엉뚱한 방향으로 추측하면서 엄마를 단죄했던 것이다.

만일 딸이 엄마에게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슬프지 않아? 왜 눈물을 흘리지 않아?” 라고 한 번만 물었더라면 그런 오해는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딸은 엄마의 고결한 뜻을 알고서 엄마를 더욱 사랑하고 신뢰했을 것이다.

 

왜 개와 고양이는 앙숙인가? 그것은 서로 감정 표현 방법이 다른데 각자 자기 처지에서 추측하고 판단하면서 갈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치켜들고 살랑살랑 흔들어 대지만 기분이 언짢으며 꼬리를 축 늘어트린다. 고양이는 반대로 기분이 좋을 때는 꼬리를 축 내리지만 성이 나면 꼬리를 하늘로 치켜세운다. 이렇게 감정 표현이 정반대이니 개와 고양이는 만나면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가 고양이를 만나면 개는 반갑다는 뜻에서 꼬리를 쳐들고 흔드는데, 고양이는 이런 모습을 보고 ‘저 녀석이 오랜만에 나를 만났는데 반가워하기보다 기분 나빠 하고 있구나. 저렇게 꼬리를 치켜들고 흔들다니.’ 하고 생각한다.

한편 고양이는 개를 만났을 때 반갑다는 뜻에서 꼬리를 늘어트리는데, 이 모양을 본 개는 ‘저 녀석은 왜 나를 보자마자 저렇게 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기분 나빠 하지. 못된 놈.’ 하며 마음이 상한다. 62

우리는 얼마나 자주 추측으로 이를 오해하고 제멋대로 판단하고 상처 받는지 모른다. 인류의 대표적 스승이라 불리는 공자님도 일순간 가질 수도 있었던, 그래서 남을 오해할 수도 있었던 추측 사건을 들어보자.

안회는 공자님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한번은 공자님이 안회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하룻길을 걸어 저녁 시간 숙소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무척이나 허기지고 피곤했다. 안회는 부엌에 들어가 서둘러 저녁 준비했고, 공자님은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열린 부엌문 사이로 안회가 밥을 떠먹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공자님은 즉시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감히 제자가 스승보다 먼저 밥을 먹다니. 더구나 내가 가장 아끼는 안회가 저런 짓을 하다니. 이것은 진정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안회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니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사연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안회가 상을 차려오자 넌지시 말했다.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꾸나.”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음식에 인간이 먼저 손을 대서는 안 되기에 이 점을 이용해 안회의 마음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스승의 제안에 안회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미 손을 대었기 때문에 이 음식으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밥이 다 되었나 보려고 뚜껑을 열었는데 바로 그 순간 하루살이 하나가 날아들어 밥 위에 앉았습니다. 제가 그것을 버리기가 아까워 먹어버렸습니다.”

만일 공자님이 사연도 알아보지 않고, 자신의 추측대로 안회를 판단하여 ‘이제부터 안회는 내 제자가 아니다.’ 하며 차갑게 대했다면, 안회는 스승이 무슨 이유로 자기를 멀리하는지도 모른 채 억울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의도를 추측할 때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한 친구가 늦게 오면 ‘그 애가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겼나 보다.’ 라고 생각하기보다 ‘얘는 늘 이렇게 늦는다니까.’ 하고 생각한다.

어느 여성이 유명한 외과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첫 번째 진료 날 그 환자가 다리를 절름거리며 병원에 들어오자 직원이 “선생님께서 갑자기 휴가를 연장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화가 난 그는 의사가 돈이 많아 아내나 여자 친구랑 휴가를 떠나 신나게 놀고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환자와 약속도 저버린 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일주일 후 마침내 의사를 만난 그는 휴가가 어땠냐고 퉁명스럽게 물어보았다. 의사가 “아주 좋았지요.” 하고 대답하자 그는 비꼬듯이 “당연히 그랬겠지요.” 했다. 그러자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일하는 휴가였지요. 소말리아에 병원 건립하는 일을 도와주었는데 그곳 상황이 끔찍했어요. 제 날짜에 맞춰 돌아올 수가 없었지요.” 63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나쁘게 추측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 모순이다. 똑같은 일도 내가 하면 정의고 남이 하면 불의다. 친구가 약속을 깜빡 잊으면 무책임하기 때문이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깜빡 잊으면 무척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가 내 업무와 관련해서 의견을 제시하면 나를 무시하고 경멸하기 때문이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내가 동료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이중 잣대를 들이민다. 우리가 남에게 어떤 행동을 했을 때는 결코 그를 괴롭히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똑같은 행동을 했을 때는 너무나 빨리 나쁜 의도라고 단정한다. 어찌 보면 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64

 

의 저자 게일 에반스는 CNN 부사장을 지낸 여성 심리학자다. 그에 따르면, 남성보다 여성에게 추측하는 경향이 더 많기에 그만큼 여성이 더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추측하는 경향이 여성에게 더 많은 것은 여성이 관계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객관적 사실도 개인 차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와 복도에서 만나 회사의 어떤 일에 대해 얘기하는 여성이 있다고 가정하자. 상사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듯 하더니 실례한다면서 갑자기 자리를 뜬다. 그는 상사가 자기 견해에 동의할 수 없거나 자기 견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자리를 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상사가 화장실에 가던 중 그를 만났고 볼일이 급해서 자리를 떴던 것이다. 65

방금 게일 에반스는 여성이 더 관계 중심적이기에 추측하는 경향이 더 크고 상처도 더 받는다고 했지만 남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이들을 멋대로 오해하고 추측하고 판단하는지 모른다. ‘이 녀석은 멍청하고, 저 녀석은 바보고, 이 남자는 무례하고, 저 여자는 교만하기 이를 데 없다.’ 라면서 상대방을 쉽사리 판단하는 일이 많다. 이것은 우리와 상대방이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임을 고려하지 않을 때 쉽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눔으로써 상대방이 나와 같을 수는 없다는 점을 알려준다. A 유형은 체계적인 사람을 가리키고, B 유형은 비체계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두 유형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

체계적인 사람 (A유형)은 예측할 수 있고 틀이 잡힌 일을 선호한다. 그들은 마감 시간이나 규칙, 질서와 정책 등에 잘 반응한다. 그들은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추진해 나갈 때 편안함을 느끼는 반면 계획이 중단되거나 바뀌면 좌절감을 느낀다. 그들은 가변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을 못 견뎌 한다.

한편 비체계적인 사람 (B유형)은 즉흥적인 것을 선호한다. 틀에 박힌 것, 규칙, 지정된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싫어한다. 그들은 계획을 세우는 일에 덜 적극적이며 하루가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것을 선호하고, 어떤 흥미진진한 일이 일어날지를 기대한다. 이들은 예측하기 어렵고 비조직적이다.

말하자면 A유형은 깔끔한 유형의 사람이다. 모든 것이 정리 정돈되고 깨끗이 청소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하도 깔끔해서 책상 위의 먼지까지 본다. 눈을 감고도 책상 서랍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안다.

라는 책의 주인공 류비셰프는 전형적 A유형으로 곤충분류학자, 유전학자, 동물학자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82세로 죽는 날까지 근 60년 동안 자신이 그날그날 소비한 시간을 항목별로 분 단위까지 헤아려 시간통계 장부를 적어둔 인물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964년 4월 7일, 3시간 15분간 알 수 없는 곤충 그림을 2점 그리다. 20분간 그 곤충이 어떤 곤충인지 조사하다. 2시간 45분간 슬라브에게 편지를 쓰다. 2시간 25분간 식물보호단체 회의에 참석하다. 10분간 이고르 에게 편지를 쓰다.’

하다못해 딸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소비한 시간도 기록한다. ‘딸의 시시콜콜한 질문에 허비한 시간이 22분.’ 사랑하는 딸의 물음에 응답하며 보낸 시간이 어찌 ‘허비한 시간’이 될 수 있을까?

류비셰프는 이렇게 시간을 쪼개서 살았기에 82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학술서적 70여 권과 단행본 백 권 분량의 연구논문을 남겼다. 동시에 1주일에 한 번 이상 연극이나 음악회 등 문화공연을 관람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친지와 친구들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거기다 잠은 하루에 10시간이나 잘 수 있었다고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류비셰프의 삶의 모습에 익숙함을 느낀다면 그는 전형적인 A유형일 것이고 갑갑함을 느낀다면 B유형일 것이다. B유형은 털털한 유형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리 방 안이 어지럽혀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

이렇게 A유형과 B유형이 서로 다른데, 그 다름을 이해하거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식으로 상대방을 추측하고 판단한다면 서로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만일 시어머니가 A유형이고 며느리가 B유형이라면, 며느리의 삶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나름대로 집 안 청소를 열심히 하고 정리정돈을 한다 해도 시어머니 마음에 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며느리가 A유형이고 시어머니가 B유형이라면, 시어머니가 연로하여 며느리가 집안 살림을 맡게 될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빡빡한 몰이해 속에서 힘든 노년을 보낼 수 있다.

그렇다고 A유형은 언제나 남을 힘들게 하고, B유형은 언제나 A유형에게 당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다 똑같은 유형일 수는 없으므로 서로 다른 유형끼리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인간관계는 각 사람의 성숙도와 기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체계적인 사람과 비체계적인 사람이 함께 살아가거나 일할 때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고 한편이 다른 편을 비난하거나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경우, 둘 사이의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기 기준에 따라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에 상대방의 다른 점을 즉시 잘못된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사실은 같은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행동할 뿐이지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르기에 갈등이 생길 수는 있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특별히 부부 관계든 고부 관계든 한집에서 같이 살아갈 사람들이라면, 사는 데 지장이 없는 한 상대방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며 사는 것이 성숙한 태도다. 여기서 밑줄을 그어야 할 말은 ‘사는 데 지장이 없는 한’ 이다. 사는 데 지장을 초래할 정도라면 서로의 다름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기성세대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행동 양식이나 인지구조가 그들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필지가 학생이었던 때는 교실에서 모자를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학교 강의실에서는 모자를 쓴 학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아침 9시 수업에는 모자 쓴 여학생들이 많다. 간밤에 늦게 자리에 들고 아침에 서둘러 오느라 부스스한 얼굴과 머리를 모자로 가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수가 모자를 벗으라고 한다면 그 학생은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도끼를 잃어버린 농부가 이웃집 청년을 의심했다.

그 청년은 도둑처럼 걸었고

도둑처럼 말했으며

도둑처럼 행동했다.

웃음 짓는 것도 도둑 같았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도 도둑 같았다.

청년이 상점에 가는 모습도

신문을 보는 모습도

신발을 꺾어 신은 모습도 모두 도둑처럼 보였다.

그런데 농부가 밭을 갈다

잃어버린 도끼를 발견했다.

그 다음부터 그가 이웃집 청년을 보았을 때

그 청년은 다른 청년들과 똑같이 걷고 말하며

똑같이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상대방이 나를 비난하거나 비웃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올라오는 경우처럼 상대방의 말이나 행위로 인해 부정적 느낌이 들 때, 즉시 예민하게 반응하기보다 잠시 자문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저렇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은지, 상대방이 힘이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하고 한 번쯤 살펴봐야 한다.

심리학자 로젠버그 Marshall Rosenberg 는 어떤 한 그룹에서 그르치던 중 매우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하는 마음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한 수강생이 혐오스런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돌렸다. 순간 로젠버그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내밀한 감정을 드러낸 사람은 상대방의 반응에 쉽게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젠버그는 심리 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그 사람의 행동을 제멋대로 추측하는 대신 직접 물어보았다. “혹시 제가 강의 중에 사적인 얘기를 하며 눈물을 보여서 불편하셨는지요? 강의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며칠 전 제가 울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며 울부짖던 아내를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상대방은 로젠버그의 추측과는 전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66

 

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러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다. 가게 안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직원이라고는 여고생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 하나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마침내 차례가 되자 어머니는 아이스크림 세 통을 주문했다.

그때까지 밀려오는 주문을 처리하느라 지쳐 있던 소녀가 마침내 폭발했다. “뭐라고요? 세 통이라구요? 이 통에서 아이스크림 퍼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하도 기가 막혀 그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화를 낼 뻔했다. “얘가 이게 무슨 소리야?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겠다는데 웬 짜증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그쪽이나 이쪽이나 기분만 나빠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았다. ‘저 아이가 왜 저럴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럴 거야.’ 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정말 힘든 날인가 봐요?” 하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적대감이 사라진 소녀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네. 저 혼자 하루 종일 일하고 있거든요. 아침 10시부터 지금까지 쉬지도 못했어요. 한 시간 전에 교대했어야 하는데 주인이 아직도 안 나타나네요.” 그 소녀는 아이스크림 세 통을 듬뿍 퍼준 다음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67

 

상대방이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내 처지에서만 추측하고 판단하여 상처 받는다면 그 상처는 내가 자초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용서는 (굳이 용서가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나와 타인의 서로 다른 행동 양식과 인지구조를 인정하는 데서 온다.

누군가 이상한 행동을 할 때, ‘저런 짓을 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군.’ 하고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고 ‘그래, 저건 저 사람이 사물을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임에 틀림없어. 무척 흥미롭군.’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인디언 속담이 있다. ‘어떤 사람의 행동 양식과 인지구조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아야 한다.’ 남의 신을 신고 1마일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발톱이 빠지고 피가 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을 신고 1마일을 가본다면 마침내 우리 자신의 가치 기준과 행동 양식과 전혀 달리 행동했던 상대방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항목을 마무리하면서 산수 공부를 해보자. 5-3=2 이다. 그리고 2+2=4 다. 무슨 말일까? 오해(5)할 때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세 발(3)만 물러서서 보면 이해(2)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2)와 이해(2)가 만나면 사랑(4)이 된다는 것이다.

 

손가락 지문이 다 다르듯이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독특하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내 관점에 끼워 맞추려 해서는 안 된다.

– 밀턴 에릭슨

 

 

 

2.3  인정과 애정을 구하지 마라

 

우리는 다른 이들한테서 인정과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갖는다. 물론 우리 모두는 인정과 관심, 사랑이 필요하다. 서로 존중하고 관심을 주고 지지하며 돌보아 줌으로써 풍요로운 생을 살아갈 수 있다.

문제는 인정, 관심, 사람을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고받으려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바라고 매달리는 데 있다. 상처를 받아도 좋고 이용당해도 좋으니 제발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흔히 인정받고 사랑 받으려는 욕망은 인간의 본성적 욕구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가 정말 남들의 인정과 애정을 본성적으로 갈망하는가? 자기 마음에 대고 가만히 물어보라. 내가 정말 무엇을 바라는지. ‘내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인가? 애정인가?’

그리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보라. 만일 내면이 따스해지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영혼의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허망한 세상, 곧 무상하게 스러지는 세상이 주는 느낌이다. 68

우리가 본성적으로 바라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이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살이의 온갖 근심 걱정에서, 죄에서, 죽음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나 비판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볼까 하고 눈치 보며 살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고 싶어하신 자유다. 이 자유를 불교 언어를 빌려 표현하면 ‘무애진인 無碍眞人’ 으로 살아가는 자유다. 곧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진실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유다.

하지만 인정과 애정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다는 환상을 지닌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다른 이들의 인정과 애정을 추구한다. 바로 위에 섰듯이 그들은 상처를 받아도 좋고 이용당해도 좋고 때로는 병에 걸려도 좋으니 남의 인정과 관심, 사랑만 받으면 된다고 믿는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어렸을 때 가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기억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가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앓아 눕지 않았는가? 누워 있는 나를 가족들이 측은하게 여겨 나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베풀도록 하지 않았는가?

어느 이비인후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꼬마가 중이염을 치료받느라 겨울방학을 꼼짝없이 병원에서 보냈다. 그 아이 엄마가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이 아이가 겨울방학을 끝내면서 방학숙제로 그 동안 쓴 일기를 제출했는데, 글쎄 일기에다 ‘겨울방학 동안 가장 즐거웠던 일은 중이염에 걸린 것이다.’ 라고 적었지 뭐예요.” 이 말을 들은 의사가 아이이게 “왜 아픈 것이 가장 즐거웠지?” 하고 묻자, 그 아이는 “제가 아프니까 온 가족이 관심을 쏟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거든요.” 라고 대답했다. 69

우리 생각에 어린아이들은 겨울방학 동안 여기저기 놀라 다니고 스케이트도 타고 하면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이 꼬마는 중이염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이 더 행복했던 것이다.

위의 사례는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다른 이들의 인정과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왜 젊은이들이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패거리를 지어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돈을 뺏는가? 또 자기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친구들과 어울려 대마초나 마리화나를 피우는가? 또 아무하고나 성관계를 맺고 파괴적 행위를 즐기듯 하는가? 자신의 삶과 미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가?

사실 그들 대부분도 자신들의 삶과 미래에 마음을 쓰고 있다. 하지만 소외되고 싶지 않은 마음, 어딘가에 소속되고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에서 지금 하는 행위가 위태롭거나 나쁜 행위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70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요구는 끝이 없다. 그러나 오늘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 해도 내일이면 다시 허기를 느끼게 된다. 아무리 많은 사람한테 인정받는다 해도 어떤 한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비참해진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큰 사람은 평생 마음에 허전한 공간을 갖고 다닌다. 그 공간을 다른 사람의 애정으로 채우고 또 채워 보지만 여전히 허전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애정 결핍에 걸린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일 뿐 그 사랑을 주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다. 다른 사람의 손에 자신의 정서적 안정을 내맡기기에 상대방에게 쉽게 이용당하여 상처를 받는다.

조사 결과 문란한 성생활을 하거나 바라지 않는 임신을 되풀이하는 미혼모들의 경우, 그들의 성행위는 다른 이의 관심과 애정을 받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정신분석학자 홀렌더 Mark Holender 는 바라지 않는 임신을 3번 이상 경험한 여성들을 인터뷰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성행위가 남자한테 관심과 돌봄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고백했다.

많은 사람이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상처 받고 고통을 받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애쓴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외로움과 공허함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외로움에 빠질 뿐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피곤하고,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 외롭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양다리를 걸치고 엉거주춤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인간관계를 고슴도치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느 겨울날, 고슴도치 한 쌍이 추위에 떨다가 서로 몸을 붙여 조금이라도 몸을 덥히려 했다. 그런데 서로 몸을 붙이려 할 때마다 가시에 찔려 몹시 아팠다. 그렇다고 서로 떨어져 있으려니 매서운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서로 몸을 붙이려 했지만 또다시 가시에 찔려 피가 났다. 71

 

고슴도치의 몸에는 약 3만 개의 가시가 있다. 고슴도치 가시는 다른 짐승이 공격할 때 그들의 몸을 뚫을 만큼 강력하다. 미세한 가시가 다른 짐승의 몸에 박히면 그 짐승의 체온에 의해 가시가 부풀면서 더 단단히 박힌다. 그러다가 상처가 곪고 심한 경우 독이 장기까지 퍼져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 고슴도치 암컷과 수컷은 서로 만나려면 가시를 누그러뜨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72 인간관계도 고슴도치와 비슷하다. 멀리 있으면 쓸쓸하고, 그 쓸쓸함을 벗어나고자 가까이 가면 상처를 받는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관심, 애정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런 것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다이어 Wayne W. Dyer 는 주변에서 가장 인정을 받는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인지 잘 관찰해 보라고 권한다. 73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사람은 고독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주위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인정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사실은 그 인정과 사랑을 구하거나 바라지 않는 사람이란 점은 얼마나 놀라운 역설인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모든 사람과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불편한 관계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위 삶과 두루 좋은 관계를 맺는 데서 오는 기쁨을 느낀다.

 

친하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가 아는 사람을 소개할 때 그 사람이 자기와 얼마나 친한지를 강조한다. 이런 이들치고 상처를 입지 않는 이가 없다. 앞서 말했지만 친밀함은 바로 상처의 텃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천도무친 天道無親, 곧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가까움 과 친밀함을 바라지 않는다.’ 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별해야 한다.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아쉬워한다는 것이요, 고독하다는 것은 사람을 아쉬워하기보다 홀로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고독이란 자신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공간이다.

왜 주님은 자주 외딴 곳으로 물러나 기도하셨는가? 왜 많은 교부가 사막에서 구도의 삶을 살았는가? 왜 많은 성직자, 수도자가 일 년에 한 번은 대 침묵 속에서 피정하는가? 이들이 일부러 고독을 택하는 것은 고독이 자기 반성과 성장의 시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은 사람들과 격리되어 홀로 있는 만큼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애정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환상을 깨자고 말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정과 애정 자체를 아예 요구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짝사랑을 하는 것은 내 자유지만 상대방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인정과 사랑은 상대방이 주면 받을 뿐이지 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남이 주었다 말았다 하는 것에 목을 매는가? 남들의 변덕스런 판단에 왜 자기 가치를 내맡기는가? 왜 남들이 멸시하면 스스로 못났다고 여기고, 남들이 비난하면 스스로 무용지물로 간주하면서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판단하는 이웃에 맡기는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며 사는 것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살아가는 자유인한테는 맞지 않다.

 

나는 고독한 날 좋아하네.

그날은 나에게 진정으로

하느님만을 바라볼 기회를 주네.

– 에이미 그란트

 

 

 

2.4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

 

 

다른 사람의 행동이

우리 느낌에 자극이 될 수는 있어도

원인이 될 수는 없다.

– 마셜 로젠버그

 

 

우리 안에는 어떤 모토가 있다. ‘나는 강해야 한다.’ ‘나는 완벽(완전)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내 사전에 이등은 있을 수 없다.’ 이런 것을 모토로 삼는 마음은 사소한 상처를 낳는 텃밭이다.74 상처를 낳는 텃밭이란 상처 받는 소지를 이미 자신 안에 갖고 있다는 소리다. 누군가가 또는 어떤 상황이 그 텃밭을 건드리면 상처를 받는다.

몇 년 전 프랑스의 유명한 요리사 베르나르 루아조가 엽총으로 자살했다. 그가 얼마나 유명한 요리사였던지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정규 뉴스 시간에 일제히 그의 죽음을 보도했다. 며칠 후에는 그의 생애에 대한 특집 다큐멘터리도 방영되었다. 그가 자살한 동기는 경영하던 식당이 프랑스 내 모든 식당의 등급을 매기는 평가기관으로부터 리본 하나만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27년간 그가 경영하던 식당은 늘 최고의 등급인 리본 세 개를 받았는데 자살하기 바로 전 해에 두 등급이나 아래인 리본 하나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베르나르 루아조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내 인생에 이등이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일등만 있을 뿐이다.’ 란 텃밭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식당의 등급이 두 개나 떨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으면서 그 동안 쌓아온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가 조금이라도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인정할 수 있었다면? 아무리 솜씨가 좋다 하더라도 언제나 정상에 있을 수는 없다. ‘베르나르 루아조는 오히려 지난 27년간 프랑스 최고 요리사로 군림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어야 한다. 어떤 요리사가 무려 27년간이나 최정상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나이 들어 비록 리본 한 개의 요리사로 떨어졌을지라도 평생 최고 요리사로 살아온 자신의 경륜과 솜씨로 봉사하며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리본 두 개를 잃었다 해서 인생 전체를 포기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 외에 아무도 없었다.’ 75

어떤 사람이 자기는 늘 명강의, 명강론을 해서 모든 청중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엄청난 상처의 텃밭을 지닌 것이다. 어떻게 매번 모든 이를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신이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조차 모든 이를 감동시킬 수는 없었다. 한번은 나자렛에서 말을 잘 못해(나자렛 동향민 처지에서) 매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루카 4,16-30).

누가 강론을 하든 듣는 이는 각자의 처지에서 나름대로 듣고 받아들이는 법이다. 또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전혀 감동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때로는 별 얘기도 아닌 것을 하면서 ‘나는 언제나 좋은 강론, 훌륭한 강의를 해야 한다.’ 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강론 때마다 상처를 입겠다고 작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처의 텃밭은 개인마다 여러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갖는 상처의 텃밭은 ‘나는 인정받아야 한다.’ 는 것이다. 이러한 텃밭을 가진 사람은 누가 자기 말에 반대하거나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자기 의견을 주입하려 한다. 그러는 가운데 상처를 자초한다.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조용히 자문해 보라. ‘만일 그들이 나를 인정하면 그 때문에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가?’ 물론 대답은 명백하다. 다른 사람의 인정은 나의 가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또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나를 입증할 필요가 있을까? 입증했다고 해서 그가 나를 존경할 것인가? 그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 그래, 이번에는 내 가치를 입증하려 애쓰지 말고 그가 좋을 대로 생각하도록 놔두는 편이 낫겠다.’ 76

이런 것을 심리학자들은 ‘자신과의 대화’라 하는데, 이를 토해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으려 애쓰고 눈치를 보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무의식 속에서 ‘나는 인정받아야만 한다.’ 는 테이프가 돌아갈 때마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모든 사람한테서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인정받고자 하는 노력은 내 삶을 악화시킬 뿐이다.’ 란 말을 자신에게 거듭 들려주어야 한다. 77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모임에 들어가 10명의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 중 6명은 무조건 우리를 싫어한다고 한다.78 ‘무조건’ 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 무의식의 그림자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겠다.

어떤 모습을 보이든, 어떤 의견을 내든,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이 언제나 60퍼센트 정도 존재한다면, 인정받지 못해 감정적 혼란을 느끼거나 상처 받을 이유는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격하는 모든 말에 답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책을 내가 읽는다 해도 나는 여전히 공격받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하면서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갈 뿐이다. 만일 그 결과가 좋다면 나를 비난하는 말은 무익해질 것이다. 반대로 결과가 나쁘면 수많은 천사가 나의 정당함을 증언해 준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79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두 열등감이 있다. 심리학자 아들러 Alfred Adler 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가 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사실 열등감이 주는 좋은 점도 있다. 우리는 열등감 덕분에 자신의 불완전함과 약함을 인정하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열등감의 텃밭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두 종류의 사람만 본다. 키가 작다는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키 큰사람과 키 작은 사람만 본다. 못생겼다는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만 본다. 학벌 때문에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자기보다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만 본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마음이 가고 편안함을 느끼지만, 반대 부류의 사람한테는 이유 없는 적개심이나 불편한 마음을 갖는다. 그리하여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맹목적 호의를 보이고,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맹목적 적대감을 보인다. 열등감이 성장을 위한 통로가 되기보다 상처의 텃밭이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상처의 텃밭은 어린 시절 부모에 의해 형성된다. 남아선호사상이 있는 집에서 딸로 태어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상처를 입는다. 이름마저도 ‘섭섭이, 말년이, 말자, 끝순이’ 식이다. 이름 자체가 ‘너는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거부된 존재임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여자이기에 상처의 텃밭을 갖게 되고 그로써 남녀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어떤 여성의 이야기다. 80 “저는 평소에 남편한테 참 잘해요. 하지만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의견이 다르거나 부부싸움을 할 때면 죽기 살기로 싸워요. 마치 끝장을 낼 것처럼 화를 내고 싸웁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제 쪽에서 먼저 화해하자고 청하는 법이 없습니다. 남편은 이런 저를 무섭다고 그래요. 완전히 정이 떨어진다고요. 남편은 제가 고집이 세서 그런 것 아니냐고 하지만, 사실 저는 다른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거든요. 사람들은 제가 파리 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달라요.”

이 여성은 상담을 통해 자기 내면의 문제점을 보려고 했을 때, 남편은 떠오르지 않고 시종일관 친정아버지 생각만 났다. 그러면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 인물이었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딸자식은 모두 소용없는 것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 밥이나 축내는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남녀차별과 아버지한테서 야단맞는 것에 진저리가 났던 그는 아버지와 정반대의 남자를 골랐다. 결혼 조건은 무조건 아버지와 다르면 합격이었다. 결혼 후 이제는 그 지긋지긋한 아버지와 완전히 이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텃밭으로 인해 남편을 아버지와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 남편이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가 여자여서 무시한다고 여겨 화를 냈다. 또 남편이 자기와 다른 의견을 내면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너 같은 계집애가 뭘 안다고 지껄여?’ 하는 식으로 들렸다. 그래서 화가 북받쳐 남편이고 뭐고 보이지 않았다. ‘절대 질 수 없어. 여자의 권리를 찾아야 해. 나는 절대 남자에게 지면 안 돼.’ 아버지한테 받은 상처 때문에 남편을 원수인 남자로 대하고 싸웠던 것이다. 또 아버지를 향해서는 한 번도 못 해본 말, 못 풀어본 억울함을 남편한테서 풀려고 했던 것이다.

 

상처의 텃밭은 대개 어린 시절에 형성된다고 했다. 한 집안에 ‘최고’가 모토이고, 최고가 아니면 집 안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는 분위기일 때, 그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내 생애에 이등은 없다. 내 생애에 실패는 없다.’ 란 텃밭을 갖고 살게 된다.

스무 살 된 대학생이 자살을 시도해서 병원에 들어왔다. 친구가 우연히 그의 방에 들러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젊은이의 아픔이 무엇이기에 찬란히 꽃피울 수 있는 미래도 포기한 채 죽으려 했는가?

이 젊은이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고 자기 분야에서 천재란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다. 그는 탁월하지 않으면 상대도 하지 않았다. 자신한테도 엄격했지만 자녀들한테도 엄격했다. 자녀들이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면 폭포처럼 칭찬을 퍼붓고 등을 두들겨 주었지만, 조금이라도 실망을 주면 멸시하고 차갑게 대했다.

이 대학생은 아버지의 기준에 도저히 맞출 수 없었다. 비교적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아버지가 생각하는 만큼 천재는 아니었다. 그는 최고 대학은 아니라 해도 남들이 인정해 주는 대학에 들어갔고 장학금까지 받았지만 아버지는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건 전체 학생들 가운데서 최고 성적이라 받은 장학금은 아니잖니? 네가 다니는 대학보다 다른 대학에 우수한 학생들이 더 많지. 그런 학생들과 경쟁해서 장학금을 받았으면 몰라도.”

이 젊은이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또 아버지처럼 천재는 아니라 해도 우수한 학생이었기에 그 대학에서 늘 A학점을 받았다. 그런데 그만 과목 하나에서 B학점을 받은 것이다. 그에게 전 과목 A학점을 받지 못하고 B학점 하나를 받았다는 것은 자기 인생이 실패했다는 것을 뜻했다. 이런 실패는 너무나 큰 절망으로 다가왔고 결국 자기 미래를 일찍이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이러한 텃밭을 어린 자녀에게 심어준다. 집집마다 중시하는 가치는 성공과 성취다. 부모는 자녀에게 ‘너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란다. 우리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인생의 승패는 꼭 최고가 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란다.’ 라고 말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대신에 ‘너는 꼭 성공해야 한다. 너는 꼭 그 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 란 말만 넘쳐난다.

 

유아 시절 또는 어린 시절 우리 내면에 각인된 가치관은 아무리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려 해도 여간 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얼마나 어려우면 ‘아기의 뇌는 큰 눈이 내린 뒤의 길과 같다.’ 고 비유하겠는가! 큰 눈이 내린 뒤 첫 번째 차가 지나가면서 길 위에 만든 바퀴 자국을 따라 다음 차가 지나간다. 또 다음 차가 그 자국을 따라 지나간다. 그리하여 바퀴 자국은 점점 더 깊어져서, 백 번째 차가 아무리 새로운 길로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다. 이미 골이 패어 형성된 바퀴 자국대로 자동차 바퀴가 미끄러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형성된 상처의 텃밭 덕분에 우리는 늘 같은 상처를 받으며 힘겹게 살아간다. 늘 같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상처에 길들여져 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어린 시절 우리 마음 안에 큰 눈이 내린 다음 수많은 차가 지나가면서 골 깊은 바퀴 자국을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통상 우리가 받는 상처들은 어느 정도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포웰은 ‘어느 누구도 우리 상처의 직접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있던 상처를 건드릴 뿐이다.’ 라고 말한다. 81

나는 어떤 상황에서 심란하게 반응하는데 다른 사람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 심란함의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 상처의 텃밭에 있다는 표시다.

 

상처의 텃밭과 관련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 하나는 그러한 텃밭이 어떻게 내 안에 형성되었는지를 보는 것이다. 만일 그 텃밭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새겨진 것이라면 그들이 제시한 기준은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객관적 판단을 내리고 스스로 올바른 가치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위에서 ‘아기의 뇌는 큰 눈이 내린 뒤의 길과 같다.’ 고 말했듯이 우리가 오랜 세월 상처의 텃밭에 길들여져 왔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 상처의 텃밭을 건드릴 때마다 문제는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인내하면서 상처의 텃밭을 돌보고 언젠가는 벗어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2.5  그림자 투사를 하지 마라

 

그림자란 의식하기가 부담스러워 거부하면서 무의식 상태에 버려둔 우리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그림자란 우리 의식이 빛을 향할 때 그 뒤에 드리워지는 무의식의 어둠이다.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나 자신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은 우리 무의식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면서 생긴다고 한다. 본시 그림자는 우리가 보기 싫어서 무의식 속에 가두어 버린 것인데, 이를 누군가 들추어 낼 때 분노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그 사람이 싫다.’ 란 말을 한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싫고 보기만 해도 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 사람만 보면 평소에 내가 의식하지 않던, 어쩌면 애써 외면하던 나의 그림자가 노출되어 화가 나는 것이다.

우리가 격렬하게 화를 내고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많은 경우 우리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마음에 안 들고 짜증이 난다든가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반응한다면, 내 안에 있는 그림자가 원인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내 의식 이면의 그림자를 건드리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참석했던 모임에서 유난히 나서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 꼴 보기 싫다면 아마도 내가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그 사람과 나는 서로 비슷한 그림자를 지닌 사람들이다. 자석은 같은 극끼리는 붙지 않는다. 인간의 그림자도 마찬가지다. 강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밀쳐내고, 잘난 사람이 잘난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밀쳐낸다. 내 그림자를 상대방한테서 보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자 융에 따르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까지도 받아들임을 뜻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림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림자가 있음을 의식하면서 그 그림자가 나를 통제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내 안의 그림자가 주체가 되어 내 온 존재를 끌고 다니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우리는 건강하고 통합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그 그림자를 긍정적으로 전화해야 한다. 내 안의 그림자를 긍정적으로 전환하려면 그 그림자에 의식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무의식이라는 어둠에 갇힌 그림자를 밝은 세계로 끌어내야 한다. 그림자를 직면할 때 그림자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 다른 사람에게 그림자를 투사하면서 상처를 주고받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소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상처는 우리의 미성숙한 모습이 문제가 되어 생겨난 상처라고 말했다. 사소한 상처를 더 이상 받지 않으려면 자기의 미성숙함이 무엇인지를 보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인정이 쉽거나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설령 인정한다 해도 문제의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 것은 그만큼 자기의 부족함을 대면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적으로 통합된 인간이 되려면 자신의 미성숙한 세계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 왜 내가 이런 상처를 반복해서 받는가, 나의 무엇이 문제가 되어 이렇게 가슴앓이를 하며 힘겹게 사는가 질문하면서 자신의 성장을 위해 정직한 대답을 스스로 찾도록 해야 한다.

 

상처 받은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아파하는 생명의 고통을 어루만져

그 아픔이 누그러질 수 있다면,

기진한 울새 한 마리를 도와

둥지에 다시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되지 않으리.

– 에밀리 디킨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3부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에 대하여

 

 

사소한 상처를 쉽게 받는 이들은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 감이 낮은 경우가 많다. 사소한 상처를 더 이상 받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은 운동을 하는 데 기초 체력에 해당된다. 어떤 운동을 하든 기초 체력이 전제되어야 하듯 통합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사소한 상처를 덜 받으려면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부분을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려 한다.

 

 

3.1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이 부족한 이들

 

자신을 향한 가혹한 비판으로

자기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삶의 원천인 신성한 힘

곧 그분의 힘과 연결되는 지점을 잃어버린다.

– 마셜 로젠버그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줄까? 이 세상에서 나를 온전히 사랑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런데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결점투성이로 여기면서 비하 卑下하고 단죄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절망과 부정적인 감정, 자기 연민 속에서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 실패한 인물로 간주해 버린다.

자기 비하와 단죄가 고착되어 ‘나는 원래 이렇게 생긴 사람이야.’ 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과시나 자기 팽창, 우월감으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포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자기 비하와 자기 단죄는 늘 ‘You are not OK.’ 란 소리를 듣고 자란 탓에 자기 안에 ‘I’m not OK.’ 라는 ‘낮은 자존감’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자존감이란 ‘자기 존중감’의 약자다. ‘존중’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귀하게 여기다, 존대하다, 높이 평가하다, 존경하다’ 등이다. 따라서 자존감이란 자기라는 한 인격체를 ‘있는 그대로’ 가치 있고 귀하게 대하는 것이다.82 나중에 또 설명하겠지만 자존감은 자기 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인 것과는 다르다.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섬세하게 느끼고, 자신의 내적 세계와 교감하며 산다. 이러한 사람은 외부 세계에 지배되지 않고, 왜곡된 죄의식이나 솔직하지 못한 합리화, 자기 변명을 하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사랑을 하는 이들은 업보의 원리를 살아간다. 기쁨과 즐거움,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리고, 중압감이 커도 그 긴장에 대면하여 서 있을 힘이 있다.

자기 신뢰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이들은 다른 이의 비판을 받아도 인내롭게 일을 처리한다. 심리학자 셀 Charles Sell은 이렇게 말한다.

 

그(그녀)는 “나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야.” 또는 “나는 절대 안 될 거야.” 와 같은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결정을 하지 못하고 질질 끄는 일도 별로 없다. 미안해할 일이 없는데도 계속 사과하는 일도 없고,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를 즐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그녀)의 내면은 거짓된 죄의식이나 우울이나 수치심에 차 있지 않다. 그(그녀)는 자신의 성취와 성공을 즐기며, 자신이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느낀다. 83

 

어떤 피정 지도자가 피정 참여자들에게 지정된 방에 한 사람씩 들어가 그 안에 잇는 사람과 5분간 대화를 나누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방에는 여러분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었던 사람, 여러분이 가장 위해 주어야 함에도 학대했던 사람, 가장 사랑해 주어야 함에도 미워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5분간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나오십시오.”

참여자 가운데 마흔이 넘은 여성이 있었다. 지난 세월 나름대로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가 되고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 여성은 ‘도대체 누가 방 안에 있길래 그러는 거야?’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얼마 후 꺼억꺼억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방 안엔 사람은커녕 액자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대형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보였다. 순간, 피정 지도자가 했던 말이 기억나면서 존재 깊이에서 이런 물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저 여자는 누구인가?’ 바로 내가 아닌가. 그렇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게 느꼈던 사람,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 나밖에는 나를 제대로 위해 줄 사람이 없는데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자신을 비하하며 살았던가?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해 주어야 함에도 얼마나 나를 싫어하고 있었던가? 도대체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굴며 살아왔을까?

이런저런 회한이 밀려오는 가운데 그 자매는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84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가장 작은 이들’ 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경우가 많다.

자기 비하와 자기 단죄는 파괴적이고 병적이며 비그리스도교적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 받는 자녀로 대하시는데 우리는 자신을 반대로 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인데 (12,20), 우리가 자신을 험하게 대하면서 기를 꺾어버리고 자신의 바람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여러 가지 무기를 써서 우리 영혼을 파괴하려 애쓴다. 마귀의 무기란 두려움, 분노와 앙심, 걱정과 죄책감, 자기 비하 등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강력한 무기이며 이중에서도 인간 영혼에 치명적인 강력한 무기는 자기 비하와 자기 단죄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모른다면 하느님이 끊임없이 들려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 생명으로 이끄는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이 점을 성경 인물을 통하여 살펴보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이 보이는 파란 광야에 도달했을 때 일이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모세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모두 키 큰 사람뿐이다. …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민수 13,32-33)

자신을 메뚜기같이 형편없는 존재로 본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비하다. 이러한 자기 비하는 하느님의 돌보심에 시선을 두지 못하게 만든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아니면 이 광야에서라도 죽어버렸으면! 주님께서는 어쩌자고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 하면서 아우성친다. (14,2-3) 그런데 정탐꾼 12명 주 칼렙과 여호수아만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밥입니다. …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14,9)

이렇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은 하느님의 손길을 본다. 하지만 자기 비하에 젖은 이들은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 그분의 계획을 보지 못한다.

 

 

3.2  낮은 자존감의 원인

 

열등감을 연구한 한 학자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태어나서 5년 동안 하루 평균 431개의 부정적 메시지를 들으며 자란다고 한다. 85

‘좀 조용히 못하겠니?’ ‘책장에서 책을 빼면 안 돼.’ ‘거기서 내려오지 못해?’ ‘안 돼, 너는 너무 어려서 할 수 없어.’ ‘이 어질러 놓은 것 좀 봐.’ ‘아유, 저 신발에 먼지 좀 봐.’ ‘지금 막 마루를 닦아놓았는데 또 더럽혔구나.’

이러한 부정적 메시지가 모두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것은 성장 과정에서 꼭 배워야 하는 것도 있다. 자신과 이웃의 경계가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은 아이에게 무엇이든 제멋대로 자기가 황이 되어 살아갈 수 없음을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메시지는 글자 그대로 아이의 인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 등신 같은 놈아.’ ‘아유, 저놈의 원수 덩어리.’ ‘왜, 쟤는 저렇게 칠칠치 못할까?’ ‘도대체 누구를 닮아 저렇게 멍청하지?’ ‘저런 놈을 아닌데.’

어디 우리가 자녀의 인격을 건드리는 부정적인 말만 내뱉는가? 가끔 화가 치밀면 아이들을 꾸짖다가 분에 못 이겨 매도 들지 않는가?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아기가 어른의 부정적 메시지를 얼마나 이해할까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다 알아듣는다. 한 살밖에 안 된 아기에게 장난으로 “너, 밉다.” 하고 말해 보라. 아기는 즉시 “앙.” 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성장할 때 우리는 ‘You are not OK.’라는 부정적인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특히 요즘 같은 경쟁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이걸 점수라고 받아 왔어?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한 번만 더 그러면 호적에서 파버린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애먹이더니 이날 이때까지 속을 썩이지 않는 날이 없다니까.’

‘우리 집안의 모든 문제가 다 너 때문이야.’

‘우리가 이혼하지 못하는 게 바로 너 때문이야.’

 

이러한 말들을 단순히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지적이나 교정의 말이 아니다. 아이의 자존감을 무참하게 꺾어버리는 말, 인격 자체를 비하하는 말이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한 마이 부정적인 말의 영향을 만회하려면 네 마디의 긍정적인 말이 필요하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네 사람이 좋은 얘기를 했어도 한 사람이 나쁘게 얘기하면, 그전에 네 사람이 한 얘기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86 만일 어떤 사람이 새 옷을 입고 밖에 나갔는데, 네 사람이 “참 예쁘다. 잘 어울리네.” 라고 했지만 한 사람이 “뭐 그런 옷을 입었어. 영 어울리지 않아.” 했다면, 그 사람은 당장 그 옷을 바꿔 입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칭찬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상처를 주는 비난의 말은 매우 짧은 말이라도 생생히 기억한다. 또 행동에 대한 지적보다 인격 자체에 대한 지적에 더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하여 ‘너는 요 모양이다.’ 란 인격적 비난을 받으면 언젠가부터 ‘나는 요 모양인 사람’ 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스티그마(낙인)효과’ 라 부른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You are not OK.’ 란 인격적 비난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그릇되고 부족하게 행동했기에 그러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었다는 판정을 스스로 내리면서 자신을 비하하는 쪽으로 변해가는 것이다.87 그래서 부정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말을 너무도 쉽게, 마치 습관처럼 내뱉는다. ‘나는 정말 바보야.’ ‘나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니까.’ ‘내가 하는 일이 다 그 모양이지.’

자신을 비난하는 말 가운데는 성장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비난하면서 썼던 말이 많다. 심한 경우에는 남이 나에게 했던 폭력까지도 그대로 빌려 쓴다. 예를 들어 부모가 ‘너는 왜 그렇게 못났냐?’ 고 비난할 때마다 머리를 때렸다면, 성장한 후에 자기 머리를 자기가 때리면서 ‘나는 참 못난 놈이야.’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 는 속담이 있다. 우리가 ‘망한다. 망한다.’ 고 하면 진짜 망하고, ‘죽겠다, 죽겠다.’ 하면 진짜 죽는다.

자신에게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치명적 파괴 행위다. ‘치명적’이라고 한 것은, 애초부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통합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나는 바보야, 나는 우유부단해, 나는 소심해.’ 라고 말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부족하고 실패한 존재’ 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기에 새로운 일에 도전할 용기도, 자신을 채찍질할 의욕도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입버릇처럼 말한 그대로 될 수밖에 없다.

아주 간단하지만 정말 믿기 어려운 실험이 있다. 한번 해보길 권한다. 누구든지 좋다. 팔을 옆으로 들어 올리라고 한 다음, 그 팔을 내릴 테니까 힘껏 저항하라고 해보라. 그러면 여간 해서는 그 팔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눈을 감게 하고 ‘나는 정말 약하고 쓸모 없는 사람이야.’ 란 말을 열 번 되풀이하라고 하고, 그렇게 말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주목하라고 한다. 그런 다음 눈을 뜨라고 한 후 위와 똑같은 실험을 하면 쉽게 그의 팔을 내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눈을 감고 ‘나는 강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란 말을 열 번 반복하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주목하라고 한다. 그리고 눈을 뜨게 한 다음 아까처럼 실험을 하면, 첫 번째 시도 때보다 더 팔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88

이 실험은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긍정적인 말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부정적인 말은 우리를 약하게 만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 말을 믿는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들려주지 말고 긍정적인 말 곧 돌봄의 말을 자주 들려주어야 한다.

 

‘내 모습 그대로 괜찮다.’

‘나를 돌보아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없어. 나는 아빠 하느님 안에서 특별한 존재야.’

‘하느님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진정 바라셨어.’

‘나는 이제부터 그분의 돌봄 속에서 내가 바라는 인생을 살 거야.’

 

 

 

3.3  자기 사랑은 이기심이나 자기 중심적 태도와 다르다

 

예수님은 무척 바쁜 공생활을 보내셨지만 쉬어야 할 때 쉬셨고,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할 때는 그렇게 하셨다. 당신 몸의 소리를 들으신 것이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기 전에 먼저 우리 몸의 소리를 듣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필요를 헤아리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결혼한 여성들 대부분은 자신을 돌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 이유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가족보다 자신을 먼저 돌보는 것이 이기적 행위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부로서 가족을 돌보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다만 여기서 얘기하려는 것은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은 채 가족만 챙기는 태도는 문제라는 것이다. 어쩌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좀 갖거나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하려 하다가도 즉시 심란해하고 죄스러움을 느끼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렇게 자신을 돌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여성들은 대개 자기 존중과 자기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들은 가족들의 느낌까지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가족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애쓰고, 가족 중 누군가 행복해 보이지 않으면 그것조차 마치 자기 탓인 양 자책하면서 상대방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까지 갖는다.

자기 존중감이 없고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여성은 자칫하면 자녀들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편을 자기 중심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자녀들은 엄마가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남편 또한 아내의 희생적 돌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이렇게 자녀와 남편한테 합당한 돌봄과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여성은 (그것조차 자기가 일방적으로 기대한 것이지만) 가족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고 공허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등한히 하고 오로지 가족들에게 희생적 사랑을 퍼부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뿐이다.

 

희생은 그 희생의 수혜자들한테서 감사하는 마음을 얻을지 몰라도 사랑하는 마음은 얻지 못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지 않고 희생하는 사람을 인정하기보다 쉽게 대하려는 경향이 있다.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자기 존중이 낮은 사람들은 의외로 에고 Ego가 강하고 자기 중심적이다. 이 말은 이들이 꼭 이기적이란 말이 아니다. 자신을 더 많이 바라보고 의식하기에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89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바람이 너무 커 그들을 기쁘게 하고자 또는 무조건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애를 쓴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거나 돌보는 데 익숙하지 않기에 철저히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 의존한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늘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 하는 칭찬 중독증에 걸려 있거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들의 행동은 인정받기 위한 것이다. 90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는 것이다. 이 계명 안에 세 가지 사랑이 담겨 있다.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 이 세 가지 사랑은 삼발 의자처럼 구성되어 있기에 그 중 어느 하나가 없다면 다른 것들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자기 사랑이 이웃 사랑보다 우선이다.

소방관들이 불을 끄러 갈 때에는 먼저 장비를 챙겨야 한다. 사다리와 물을 갖추어야 하고 불길에서 자기 몸을 보호해 줄 옷을 입어야 한다. 불을 끄고 다른 사람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부터 돌보아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자신을 존중하고 돌볼 줄 모른다면 그 또한 이웃을 제대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91

자기 사랑은 이기심이나 자기 중심적 태도와는 크게 다르다. 자기 사랑이란 바로 자신에 대한 인식, 자기를 보살피는 마음, 자기 존중, 그리고 책임감을 포함한다. 이러한 자기 사랑이 있을 때 다른 이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92

정신과 의사 스콧 펙 Scott Peck은 군대 내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뽑아 그 비결이 무엇인지 조사했다. 그의 연구 조사에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열두 명으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남녀 군인들이며 이들은 동료들보다 먼저 진급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부부 사이도 좋고, 자녀들도 학업 성적이 뛰어나고 학교생활에 작 적응하고 있었다.

스콧 펙은 이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세 가지’ 를 순서대로 적어보라고 했다. 그러자 특이한 점 두 가지를 볼 수 있었다. 하나는, 물음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였다. 가장 먼저 답안지를 제출한 것이 무려 40분이 지나서였다. 두 번째는, 열두 명 모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똑같은 답을 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도, ‘가족’도 아니요, 심지어 ‘하느님’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93 이들은 성숙하고 건강한 자기 사랑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은 것이다.

 

 

3.4 자기 존중감을 높이기 위한 노력

 

낮은 자존감을 향상시킬 방법은 없을까? 누구든 나이나 조건에 관계없이 자기 존중감을 향상시킬 수 있다. 낮은 자존감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나중에 습득된 것이기에 얼마든지 새로운 것으로 대치할 수 있다. 이러한 학습의 가능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므로 어느 때 시작하더라도 늦지 않다.

하지만 자존감이 한 순간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만성병처럼 오랜 동안 형성된 낮은 자존감일수록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웨인 다이어는 이렇게 말한다.

 

신경질적이고 비판적인 습관이 몸에 밴 것도 그러한 경험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존중하는 인간이 되려면 끊임없는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 94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라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은 귀한 존재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진심으로 믿고 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누군가 사도 요한에게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본질적 자아상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는 ‘나는 주님의 사랑 받는 자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

다음은 자존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성경구절이다.

 

  •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마태 5, 13)
  •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 5, 14)
  •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다. (요한 1, 12)
  • 우리는 그리스도의 벗이다. (요한 15, 15)
  •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시다. (로마 14, 15; 갈라 3, 26)
  •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다. (로마 8, 17)
  • 우리는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1코린 3, 16; 6, 19)
  • 우리는 주님과 결합되었다. (1코린 6, 17)
  •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다. (1코린 12, 27)
  •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2코린 5, 17)
  • 우리는 성도다. (1코린 1,2; 필리 1,1; 에페 1,1)
  •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다. (필리 3, 20; 에페 2,6)
  • 우리는 빛의 자녀요 어둠의 자식이 아니다. (1테살 5,5)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살아있는 돌이다. (1베드 2,5)

 

위의 성경구절을 자주 읽으며 음미하는 것이 좋다. 특히 자기 혐오나 자기 비하감이 들 때마다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한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수록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본래 신원에 맞갖은 행동을 할 수 있다.

 

자아상과 정체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자아상은 비교 경쟁사회에서 형성된 자기 모습을 가리키지만 정체성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모습을 말한다. ‘나는 못났다.’ ‘나는 재주가 없다.’ 등은 우리의 왜곡된 자아상이다. 이런 왜곡된 자아상만 바라보면 낮은 자기 존중감 속에서 살아가게 되지만,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할수록 건강하고 높은 자기 존중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이 당신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을

묵상해 본 적이 있나요?

당신이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여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이 당신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또 당신이 그분을 주님으로서,

벗으로서 선택하고 따라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예수님이 당신을 무척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  매닝 95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을 돌보라

구체적으로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자신에게 관대하게 대하고 나아가 자신을 좋아하고 즐기며 실질적으로 자신을 대접해 주는 것이다. 관대하게 자신을 대한다는 것은 어떤 실수를 했더라도 자신을 미워하거나 형편없는 놈이라고 욕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면 내 이름을 부르면서 ‘괜찮아. 다음부터는 더 잘할 수 있어.’ 라고 자신에게 말하라.

내 잘못된 행동과 나라는 존재를 구분하라. 썩은 사과 하나만 보고 상자의 모든 사과가 다 썩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을 모른다고 해서 내가 못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조종사가 아닌 한 대다수 사람들은 비행기를 조종할 줄 모른다. 불어 전공자가 아닌 한 대다수 사람들은 불어를 할 줄 모른다. 첼로 연주자가 아닌 한 대다수 사람들은 첼로를 연주할 줄 모른다.

내가 뭘 모른다고 해서 형편없는 사람, 잘못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을 멸시하고 비웃는 것은 다르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과 자신을 못난 존재, 무가치한 존재로 보는 것은 다르다. ‘이건 나에게 좀 벅찬데.’ 하고 말하는 것과 ‘나는 늘 이런 식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내가 그 일을 잘못했어.’ 라고 말하는 것과 ‘나는 정말 못난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전자는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행위로서 잘못한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을 미워하고 거부하면서 사실을 확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로텔라 Bob Rotella는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비하하는 부정적인 말만 하지 않아도 자존감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96

이제까지 관대하게 자신을 대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이는 것에 대해 말했다. 이제부터는 자신을 좋아하고 즐기며 또 실제로 자신을 귀하게 대접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이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 모두한테는 저마다 독특한 매력이 있다. 문제는 그 매력을 모르거나 자신 있게 표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처와 열등감 때문에 그러한 매력이 감추어진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매력, 아름다움을 건강하게 인식하고 스스로 즐기는 태도는 낮은 자존감을 높이는 데 꼭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독서를 좋아하는데, ‘나는 친구 만드는 기술도 없고 인기도 없어서 할 수 없이 책이나 읽는 거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낮은 자존감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참 멋있는 사람이야. 여가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영혼을 살찌우고 고독을 즐길 줄 아니까.’ 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즐기는 즐기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음식점에서 정말로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자신을 위하는 태도로 음식 값이 다소 비싸더라도 주문해서 먹는다든지, 계절이 바뀌어 적당한 옷이 필요하면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사서 입는다든지, 힘든 일을 한 다음에는 아무리 할 일이 쌓여 있더라도 자신을 위해 쉬는 시간을 갖는다든지 하며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손님 대하듯 정성으로 대접하며 즐기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

먼저 자신과 살에 빠져보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일을

먼저 자신과 함께해 보라.

근사한 음악을 골라줄 사람이 필요하면

스스로 안내 책을 읽고 음악을 골라보라.

혼자 영화를 보고 자신과 함께 온 것을 즐겨라.

자신에게 도취되어라.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면

다른 누구와 함께 있어도 즐거움을 느낄 수 없고

사랑에도 빠질 수 없다.

– 캐럴 스페너 라 러소

 

 

이웃과 자신을 비교하지 마라

낮은 자존감, 자기 비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쉽게 자신을 이웃과 비교한다. 그들은 자신이 영리한지, 가치 있는 사람인지, 매력적인지 일을 잘 수행하는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이들과 비교한다.

나 자신과 이웃을 비교하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은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오직 한 명밖에 없음을 깨닫고 언제나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97 인간의 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류가 이 세상에 창조된 이래 이제까지 똑같은 지문이 발견된 적은 없다. 내 지문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람의 지문과도 다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내 지문만큼이나 유일무이한 존재다. 내가 유일한 지문을 갖고 있는 것처럼 내 육체와 감정, 정신과 영혼도 유일하다. 특별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나는 하느님에 의해 유일한 존재로 태어났고 이 세상에 나만이 가져올 수 있는 특별한 어떤 것이 있다. 98 나라는 존재가 그분 사랑으로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축복인 것이다.

이러한 점을 잊지 않고 늘 가슴에 품고 있다면 우리는 이웃과 자신을 비교하는 행위를 그치고 자신의 고유함을 더욱 인식하여 스스로를 축복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피면 된다.

남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이런 도리를 이 봄철에 꽃에게서 배우라.

– 법정스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표현하라

자기 존중감을 가지려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 소리가 ‘아니다.’ 라고 하면 과감하게 ‘아니요.’ 라고 하고, 그 소리가 ‘예.’ 라고 하면 과감하게 ‘예.’ 라고 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이의 눈치를 보면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는 행위는 이제 그만두자. 우리 평화의 원천은 다른 이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 안에 있다. 99

내면의 소리를 듣고 따라간다는 것은 주체성을 갖고 산다는 것이다. 주체적이지 못한 이들은 우유부단하고 거절을 못하며, 자기 삶을 다른 이의 결정이나 판단에 내맡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해야 할 결정이나 판단 앞에서 자신이 없다. 작은 결정을 내리면서도 다른 이에게 묻고 또 물으며 나중엔 많은 사람이 준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헷갈려 한다.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안은 참 평화가 아니라 노예적 평안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잔잔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우유부단한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힘들어 한다. 이렇게 생겨난 부정적 감정이 쌓여 머리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구토가 나고, 잠이 오지 않는 등 생리적 현상까지 일어난다.

필자의 경우 지난 시절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착한 것은 좋은데 착한 것만큼이나 줏대가 없이 살아왔다. 얼마나 자주 ‘아니요.’라고 해야 할 때 ‘예.’ 라고 대답하고 나서 자신을 혐오하고 단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돌보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줏대를 갖고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거이 착하게 사는 것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는 우리에게 자유인이 되라고 한다. 드멜로 신부는 ‘착한 이들을 만들려는 종교는 사람들을 나쁘게 만들지만 자유로움으로 초대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착하게 만든다. 이는 자유로움이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내적 갈등을 다 부수어 버리기 때문이다.’ 100 라고 말한다.

필자는 더 이상 착하기만 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체성을 갖고 자유롭게 살아가려고 애쓴다.

삶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해본 결과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면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주체성이 강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3배나 더 높은 만족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01

 

 

관계 때문에 희생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대로 실천하라

노벨상 수상 작가 입센은 ‘천 마디 말도 한 가지 행동만큼 깊은 감명을 남기지 못한다.’ 라고 말했다. 자신의 뜻을 담은 행동은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력이 있다. 102 예를 들어본다. 한 학급에서 힘센 아이가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괴롭힌다. 괴롭힘을 당한 아이들은 힘센 아이에게 애원하고 울며 소리 지르거나 하소연한다. 하지만 힘센 아이의 괴롭힘은 계속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작은 아이가 몸집은 작지만 용기를 내어 힘센 아이의 괴롭힘을 거부하고 맞선다. 작은 주먹을 휘둘러 그 아이 얼굴을 때린다. 덕분에 그 작은 아이는 흠씬 두들겨 맞지만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아마도 힘센 아이가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놈은 나한테 그냥 맞고만 있을 놈이 아니야. 내가 이놈보다 덩치가 크지만 어쨌든 나도 한두 대 맞게 되니까 괜히 이놈 때문에 망신당할 필요는 없어. 다른 아이들이나 괴롭혀야지.’

이처럼 누가 나를 괴롭힌다면 거기서 벗어나는 효과적 방법은 애원이나 호소나 설명이 아니라 행동이다. 더 이상 괴롭힘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관계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행동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술주정뱅이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 나는 그런 사람과 5분 이상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지 않겠다.’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와 같은 행동 규칙을 정해 두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감정을 배설하고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훈계하려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당신은 내가 흥미 없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면서 여태 10분 동안 당신 혼자 말했다는 것을 아는지요?’ 라고 말하라. 그랬는데도 상대방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그 자리를 떠나라. 103

 

원칙을 갖고 행동할 때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먼저 가해자들의 반응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내가 행동으로 나를 보호하려 하면 가해자들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거나 선물을 하거나 기분을 맞추면서 내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시험한다. 그러니 자신의 원칙대로 행동하라.

두 번째, 상대방에게 단호하게 대처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마라. 상대방은 죄책감을 느끼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럴 때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라. ‘있는 그대로 솔직한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정말로 인연을 맺어도 좋은가?’ 웨인 다이어는 다소 강하게 말한다. ‘당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사람은 당신에게 기생충이나 마찬가지다. 기생충은 먹여주지 않으면 당신을 싫어한다.’ 104

 

지금까지 우리는 자기 사랑과 자기 존중감을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계발은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한테나 꼭 필요하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존중감의 계발은 영적 성장에 참으로 중요하다. 가톨릭 영성가 헨리 나웬은에서 영적 삶의 최대 유혹은 성공이니 인기나 권력이 아니라 자기를 존중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성공과 인기와 권력도 큰 유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낮은 자존감에서 나온 자기 거부는 훨씬 큰 유혹이다.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고 쓸모 없는 존재라는 소리가 내면에서 들려올 때, 우리는 더욱 성공과 인기와 권력을 움켜쥐려 한다. 우리에게 진짜 덫은 자기 비하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거나 흠잡을 때, 나를 거부하거나 혼자 남겨졌을 때, 우리는 즉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거 봐, 내가 못난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잖아. 나는 정말 쓸모 없는 존재야. 나는 버림받아 마땅해.’ 105

 

하느님은 무가치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니 우리가 낮은 자존감 속에서 스스로를 구제불능으로 여기면서 귀한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 43,6 공동번역)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에페 2,10)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 받을 것이다.

(루카 6, 37)

 

 

 

 

 

4부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것

 

 

신앙인들이 겪는 모든 고통스런 체험은

근본적으로 신학적 체험,

곧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다.

신앙인들은

아무리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도

시간이 흘러 고통이 가라앉고

심심이 회복되면

그 고통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본다.

** 메닝 추기경

 

 

 

4.1  상처를 준 하느님

 

이제까지 우리는 상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심각한 상처와 사소한 상처를 구분하면서, 심각한 상처의 경우에는 용서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사소한 상처의 경우에는 우리 자신이 더욱 건강해져서 더 이상 사소한 상처를 받지 않는 법에 대해 알아 보았다. 그런데 상처는 인간한테서 뿐 아니라 하느님한테서도 받는다. 상처를 준 하느님을 우리는 죽어라 미워하며 증오하기까지 한다.

독자 중에 하느님을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들은 인간이 하느님을 미워할 수 있다는 사살일 아예 부인하거나 자기 안에 그러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냉담 중에 있는 신자들이 있지 않을까? 냉담까지는 아니더라도 십자가를 향해 원망을 쏟아 붓는 이들을 보지 않는가?

사실 주변을 둘러볼 필요도 없다. 정말로 정직하게 우리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가끔은 하느님을 원망하는 자신이 있다. 하느님의 무관심과 무응답에 못 견디게 화가 난 적이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까지 얘기했지만 그래도 정말 하느님을 미워한 적이 없는 분이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 글을 계속 읽어보기 바란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고통 중에 하느님을 원망할 때 그 사람을 이해하고 도움이 되기 위해, 또 섣부른 충고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사고로 건장한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었다든지, 결혼한 지 2년밖에 안 된 딸이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든지, 친정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고통을 겪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마저 암 선고를 받았다든지, 몇 십 년 잘나가던 회사가 부도로 하루아침에 망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고 하자.

이 사람은 평소 이웃에게 해 되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공경하며 성실하게 살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간절히 울부짖으며 도움을 청했지만 하느님께 어떠한 응답도 받지 못했다면, 어찌 하느님에 대해 실망하고 원망하며 나아가 배신감까지 느끼지 않겠는가? 그리고 제삼자가 이들의 이런 마음을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예는 성경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라자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11,1-44)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한테 상처 받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는 오빠 라자로가 중병에 걸렸어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는지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냥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빠가 병들었다는 소식만 알리면 돼.’ 라고 생각했다. 이 점은 그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전하라고 한 말에 잘 나타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11,3) 이들은 어떤 간청하는 말도, 고쳐 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이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만을 전했다.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굳이 고쳐 달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고 서둘러 그들에게 가지도 않으셨다.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통보를 받고도 이틀이 지나도록 계시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다. 겉으로 보기에 예수님은 두 자매의 청을 거절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이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물렀다는 요한복음 11장 6절의 보도는 예수님이 라자로와 그의 누이들을 각별히 사랑했다는 바로 전 구절(11,5)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11,5)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11,6)

 

어떻게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위중한 상태인데 지체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병이 중해진 오빠를 보면서 예수님께 원망과 섭섭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도 기꺼이 고쳐주셨는데 그렇게 사랑하는 라자로야 당연히 고쳐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고 전했을 때, 그들의 오빠는 이미 죽어 무덤에 묻힌 지 4일이나 지났을 때였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우리는 낙담하고 상처받은 그들 마음을 쉽게 헤아려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의 이 구절은 우리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낼 때, 응답이 없는 하느님한테서 어떤 상처를 받는지 잘 보여준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통을 덜어 줄 모든 방도를 찾아보고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함께 고통을 나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고통 받는 인간을 위해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다면, 그런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신학자 홀 Douglas J. Hall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문제는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을 사랑한다는 점에 있다. 그 사랑이 우리 삶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분이 인간 고통에 관심을 가질 리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을 몹시 사랑하시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라 불리지 않던가. 그런데도 우리 고통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니 그것이 바로 문제가 아닌가!

어쩌면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는 샤를 드푸코 Charles de Foucauld가 말했듯이 하느님을 참아주는 것일지 모른다. 전능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이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신문에서 땅이 쩍쩍 갈라진 대지 위에서 야속한 하늘을 원망 어린 눈길로 올려다보는 아프리카 여인의 모습과 말라붙은 그이 젖가슴에 매달려 울고 있는 피골이 상접한 어린아이 사진을 본다. 이 엄마가 바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비뿐이다. 어린 자녀들을 먹여 살리려면 곡식이 필요하고,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이 쩍쩍 갈라지도록 비를 내려 주지 않는 하느님을 이 아프리카 엄마 처지에서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2004년 12월 26일 남아시아에 지진해일이 덮치면서 몇 십만 명이 하루아침에 죽었을 때 한 신문 기자는 이런 글을 썼다.

 

만일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지진해일이 몰고 온 죽음과 파멸, 황폐 앞에서 아무리 믿음이 강한 신자라 해도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나는 하느님이 없다는 내 생각이 옳기를 바란다. 만일 하느님이 있다면 그 책임을 그가 져야 하기 때문이다. 106

 

앞에서 여러 번 소개한 용서의 신학자 스미즈 Lewis B. Smedes와 그의 아내는 아이를 갖기 위해 갖은 시도를 다 해보았다. 여러 차례 불임클리닉을 찾아 인공수정도 시도해 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아내가 임신을 했다. 그토록 바라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임신한 지 7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그는 부엌에서 간식을 먹고 있었고, 아내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달려가 보니, 양수가 터져 소파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급히 전화를 걸어 의사를 찾았더니 의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당장 부인을 데리고 응급실로 오십시오. 아무래도 조산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리 두 분에게 일러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는 기형아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십시오.”

스미즈는 아내를 담요로 감싸 안은 뒤 조심스레 차에 태웠다. 그러고는 병원을 향해 차를 몰면서 아기가 기형아로 태어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당신 괜찮겠어?” 하고 물었더니 아내는 즉시 대답했다. “괜찮아요. 기형아면 어때요. 우리 아기인걸요. 당신은요?” 그는 “난 모르겠어.” 하고 솔직히 말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아내는 즉시 분만실로 옮겨졌다. 두 시간이 흘러 마침내 의사가 얼굴을 드러냈다.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가까이 오는 의사를 보며 그는 심한 불안감에 떨었다.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은 그의 예측과 달랐다. “아기는 정상입니다. 모든 게 다 좋아요. 산모도 건강합니다.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 자, 어서 가서 아드님 얼굴을 보시죠.”

그는 너무나 행복한 소식에 놀라며 신생아실 유리창으로 간호사가 보여주는 아들을 보았다. 그의 머리카락과 뼈와 영혼에서 빚어진 혈육을 보았다. 무척 감동한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고는 아내와 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간 그의 아내는 아직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여서 태어난 아들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잠들어 있었고.

흥분과 기쁨으로 집 안을 청소하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이었다. 의사의 말투는 어두웠다. 그는 즉시 하느님의 달콤한 사랑이 쓴맛으로 변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아기가 숨을 잘 쉬지 못한다는 것이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 갔을 때 그의 아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는 하느님께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미치광이 장난인가? 한 순간 그를 한없이 행복하게 만드셨던 하느님이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절망의 바닥으로 내팽개치다니. 하느님께서 아기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기를 빼앗아 간 하느님을 증오했다. 그와 그의 아내가 아이를 상실한 슬픔과 공허감에서 벗어나고, 하느님을 향한 미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필요했던 것은 하느님에 대한 용서였다. 107

 

 

4.2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은 하느님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피조물인 내가 하느님을 용서하다니 말이 되기나 합니까?’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찬양과 감사를 받아야 할 분이신데 그런 붕을 인간이 용서하다니요?’

그들의 회의적인 질문이 신학적으로는 틀리지 않다. 하느님은 인간한테 용서받을 것이 없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다. 그분은 무조건적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이 세상과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수고하신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느님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에 대해 분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우리가 직접 겪는 고통 앞에서 하느님을 미워하고 원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분의 돌봄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시간임에도, 우리가 겪는 재난의 모든 책임을 그분에게 쏟아 붓고 원망하고 화를 내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이 고의로 그러한 고난을 주셨다고는 믿지 않지만, 그분이 그러한 고난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셨다고 믿기에 그분을 향한 실망과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분노, 미움, 원망이 마음에 있는 한 그분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단절되기까지 한다. 사실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을 그분과의 단절로 끝나지 않고 내 삶의 모든 가능성과의 단절로 이어진다. 신학자들이 흔히 말하듯 하느님은 우리 존재의 근거요 지평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께 대한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생명에 찬 삶을 다시 살아가려면 하느님을 용서해야 한다.

앞에서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 심신의 건강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느님을 용서하는 것도 그렇다. 다음 글은 두 심리학자와 암 병동 전문의가 공동으로 연구한 논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연구 결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 하느님을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하느님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분노와 실망의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면서 우울, 분노, 불안을 증폭시켰다. 반대로 하느님을 용서하는 사람은 불안과 우울의 정도에서 훨씬 낮은 수치를 보여주었다. 108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상처를 받으면 분노와 미움을 터뜨리다 결국 (이 장을 시작하며 인용한 매닝 추기경의 말처럼) 그분과 하나 되기까지 보통 다음 네 단계를 거친다. 그것은 하느님한테 상처 받음, 하느님을 미워함, 하느님을 용서함, 하느님과 하나 됨(화해함)이다.

 

첫째 단계는 자신이 하느님한테 상처 받았다고 인식하는 단계다. 여기서 상처는 스스로 자초한 상처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살려고 했는데도 받게 된 상처다.

예를 들면 담배를 피운 적이 한 번도 없고, 평소 운동도 열심히 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며 겸손하고 건강하게 살던 사람이 한창 나이에 폐암에 걸려 쓰러졌다면, 그와 그의 가족들은 하느님한테 상처 받았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원망할 수 있다.

또 평소 남을 해치기는커녕 좋은 일만 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갑자기 사랑하는 자녀가 불행한 일을 겪게 된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하느님한테 상처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이 하느님한테 상처 받았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첫째 단계다.

 

둘째 단계는 우리에게 그런 상처를 준 하느님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있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단계다. 하느님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만 어떤 경우 간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런 경우다.

 

저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저주를 받아라, “당신에게 사내아이가 태어났소!” 하며

아버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를 몹시 기쁘게 한 사람!

…….

그가 모태에 든 나를 죽여

어머니가 내 무덤이 되고

내가 언제까지나 모태에 있지 못하게 한 탓이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

–  예레 20,14-18

 

 

직접적으로 표현하든 간접적으로 표현하든 하느님한테 상처 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분께 화를 내고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설가 박완서 님이 쓴를 보면, 그분은 남편과 사별한 뒤 1년도 지나기 전에 마취과 전문의 과정에 있던 외아들을 잃게 되었다. 그때 그분은 하느님을 단순히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증오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온종일 하느님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하느님,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그 살의를 위해서도 하느님은 있어야만 해.

 

셋째 단계는 하느님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와 함께 고통을 겪으셨고 내 옆에 늘 계셨음을 깨달으며 그분을 용서하는 단계다.

당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울부짖으셨지만 하느님은 끝내 그 외침을 외면하셨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바로 그 하느님이 내가 고통 당할 때 나와 함께 피눈물을 흘리신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면서 그분을 용서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한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봉헌하자, 십대 시절 다이빙을 하다 척추가 부러지면서 전신이 마비된 타다 Joni Tada 는 삶의 비극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이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상처 받고 있을 때, 스펀지를 쥐어짜듯 뭔가가 당신 마음을 쥐어짤 때, 전심마비가 되었을 때, 남편이 얼마 전 당신을 떠났을 때, 아들이 자살했을 때, 당신에게 해답을 제시하려는 노력은 부질없는 짓이다. … 만족할 만한 유일한 해답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더 큰 고난을 생각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분은 모든 고통의 의미를 열어줄 열쇠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슬픔의 사람으로 충분하다. 109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느님이 나와 함께하셨다는 깨달음이 갑작스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은 첫째와 둘째 단계, 곧 고통의 어두운 터널을 거치면서 서서히 찾아온다. 조니 타다는 첫째와 둘째 단계를 거치는 데 무려 3년이 걸렸다. 그는 사고를 당한 후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 그런 재난이 일어났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하느님이 미워서 3년 내내 미친 듯이 화를 냈다. 하지만 자신의 결단과 가족, 친구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하느님은 자신을 버린 적이 없으며 늘 사랑하고 계셨음을 믿게 된다.

그러니 우리도 주변의 누군가가 하느님을 심하게 원망하거나 증오할 때, 이해하지 못한 채 섣부르게 충고하거나 지나치게 염려하는 태도는 삼가자. 상처 받아 피를 흘리는 그 사람은 지금 필요한 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첫째 단계(하느님에게 상처 받았음을 인식하는 단계)와 둘째 단계(하느님을 미워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현실 부정이든 신앙의 합리화든 셋째 단계(고통 중에 하느님이 함께하셨음을 인식하는 단계) 로 간다면 때로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시각장애인이 되었는데도 자신의 상태를 원망하기보다 그 사건 안에서 주님의 섭리를 보려고 한다면 대단한 신앙인처럼 보이겠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 지팡이를 짚는 것도 점자를 배우는 것도 거부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맞이한 사람이 첫째와 둘째 단계를 외면하고 곧장 셋째 단계로 건너가는 것을 영성 신학자들은 신앙의 합리화 행위라고 부른다. 신앙의 합리화란 우리 느낌이나 생각을 억누르고 몸이 따라오지 못하는데도 신앙의 이름으로 스스로 강요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니 누군가 불행을 당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무조건 권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표출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억압되어 언젠가는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단계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첫째, 둘째, 셋째 단계를 오가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결국 하느님과 화해하는 길로 나아간다. 고통이 남긴 힘겨운 결과를 인정하면서 더 이상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며 그 하느님과 하나 되어 남은 인생을 함께 살아가기로 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의 ‘용서’와 넷째 단계의 ‘화해’의 차이점은 이렇다. 셋째 단계의 용서는 나에게 일어났던 고통스런 사건 앞에서 그분에 대한 나의 용서를 가리킨다. 넷째 단계의 화해는 하느님은 여전히 내 삶의 인도자시며 영원한 행복을 주시는 분임을 믿으며 하느님과 함께 남은 순례의 길을 가기로 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네 단계 곧 하느님한테 상처 받았음을 인식함, 하느님을 미워함, 하느님이 고통 중에 함께하셨음을 인식하고 용서함, 하느님과 화해하면서 하나 됨을 용서의 신학을 최초로 전개한 루이스 스미즈의 이론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사람들 모두가 이 네 단계를 순서대로 거친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가 겪은 고통의 상황과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단계를 오가며 자신에게 필요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에 있든 불행 앞에서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격한 감정을 섬세하게 보살피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4부를 마무리하면서 영혼을 돌보는 사목자로서 특별히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 독자들 가운데는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커서 하느님을 용서한다거나 하느님과 화해한다는 말이 허황되게 들리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을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결국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절대자이신 하느님 없이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설령 어찌어찌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 강렬한 원망과 미움, 파괴적 에너지를 지닌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버겁겠는가! 지금은 고통의 회오리바람 속에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언젠가 그 광풍이 가라앉은 다음엔 자신의 존재 깊이에 있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마음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렇기에 희망을 잃지 말기를 진정 바란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다음 시를 가슴에 음미해 보면 좋겠다.

 

그대가 탄식하고 있다고 해서

그대를 지으신 분이 곁에 없다고 생각지 마라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그대를 지으신 분이 가까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지 마라.

그분은 우리 슬픔이 사라져 버릴 때까지

우리 곁에 앉아 신음하신다.

 

 

나가며 용서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 요한 14,27

 

 

 

우리 인생은 참으로 소중하다. 한번 흘러간 인생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평화 속에서 기쁘고 충만하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 저자 하루야마 시게오는 인간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곧 적절한 수면, 음식의 절제, 지속적인 두뇌 사용, 신체 운동, 성내지 ㅇ낳기, 마음의 평화 등이다. 특별히 마음의 평화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른 요소들이 충족되었다 해도 마음의 평화가 없다면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다. 시게오에 따르면 한 인간의 건강을 위해 마음의 평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55퍼센트나 된다고 한다.

마음의 평화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전인적 삶, 통합된 삶,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평화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샬롬(히브리오 샬롬)은 안녕과 행복과 친밀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교제 등의 의미가 두루 포함된 단어다.

마음의 평화는 상처의 치유와도 직결된다. 상처가 아물지 않는 채 피를 흘리는 한 평화는 멀리에 있다. 평화로운 삶을 누리려면 지금까지 다룬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 삶에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의 상처가 낫기 위해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 더 이상 사소한 상처들을 자초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실제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스콧 펙은에서 말한다. ‘훈련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조금 훈련하면 문제를 조금만 풀 수 있다. 전폭적 훈련을 하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인내다. 온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훈련에는 뼈를 깎는 인내가 요구된다. 쉽게 상처 받는 사람의 내적 모습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과도 같다.’ 는 말을 한다. 천성은 나한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미 천성처럼 되어버린 건강하지 못한 내적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을 형성하려니 뼈를 깎는 인내가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나자.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절대 실패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신 능력에 의지하여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새로운 시작의 연속이다.’ 란 말이 있다. 이 말이 중요한 것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해야 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도 바오로가 그랬듯이.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  필리 3,13-14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타는 요령을 설명하는 데는 일 분도 안 걸린다. 그러나 그 설명을 듣고 곧바로 자전거를 잘 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러 차례 넘어지는 실수를 거듭한 뒤에야 자전거 타는 법을 체득 體得하게 된다. 체득이란 몸으로 배운다는 뜻이다. 몸으로 배우려면 시간이 걸린다.

교육 이론에 따르면, 새롭게 배운 지식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 내용을 2백 번쯤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고 한다. 110 발레리나들은 몇 천 시간의 연습 후에야 비로소 겨우 발끝으로 설 수 있다고 한다. 국가대표 탁구 선수들은 날마다 탁구공을 2만 개씩 친다고 한다. 그러니 상처를 딛고 일어나 건강한 삶을 살아가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말했다고 해서 모두 듣는 것은 아니다.

들었다고 해서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했다고 해서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동의했다고 해서 모두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한 번 활용했다고 해서 모두 ‘습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의사 스콧 펙의 다음 말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많은 용기를 준다.

 

삶이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삶이란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삶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삶이 어렵다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삶이 어려운 것이라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삶에 대해 신음한다. 그들이 지닌 문제에 대해, 지고 있는 짐에 대해 신음한다. 마치 삶이란 쉬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에 신음하는 꼴이다. 그들의 신음소리 뒤에는 비현실적 믿음이 있다 자신은 절대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 되는데 부당하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살미란 문제의 연속이다. 우리는 삶의 문제 앞에서 신음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해결하기를 바라는가? 111

 

 

 

부록 1 용서를 구하는 기도

 

예수님, 당신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저 자신보다 더 저를 사랑하시고, 저의 행복을 바라시니 감사 드립니다. 이런 당신 앞에서, 특별히 당신 성체 앞에서 저는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구합니다. 저를 아프게 한 이들을 용서할 힘을 주십시오.

제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 질병과 정신적 고통을 당신의 징벌이라 생각했으니 오늘 제가 당신을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당신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제 가정에 슬픔을 주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주님, 저의 죄와 실패, 잘못과 나쁘다고 생각되는 모든 점에 대해 저를 용서하는 은총을 주십시오. 당신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당신을 경배하지 않고, 당신을 원망하며 십자가를 내팽개친 저를 용서합니다. 부모님을 괴롭히며 방탕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한 저의 모든 행위를 진실로 용서합니다. 이 순간 주님, 저를 용서하는 은총을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제 어머니를 용서하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화나게 하고, 저에게 성질 낸 것을 용서합니다. 저에게 소리 지르고, 제가 하지도 않은 잘못에 대해 비난한 것을 용서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편애를 용서하며, 저에게 멍청하고 밉고 어리석으며 못된 자식이라 하셨던 것을 용서합니다. 저를 바라지도 않았는데 실수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과 원수 같은 자식이라고 한 데 대해서도 용서합니다. 저는 어머니를 용서합니다.

저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았던 아버지도 용서합니다. 술에 취해 어머니와 다투고 살림살이를 부수고 우리 형제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행위를 용서합니다. 아버지가 저를 심하게 때린 것과 집을 떠난 것과 어머니와 이혼한 것을 용서합니다. 저는 오늘 진심으로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주님, 제 형제와 자매들도 용서합니다. 저를 거부하고 모함하며 화나게 하고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서로 다툰 것을 용서합니다. 자기 것만 챙기고 저를 내치고 이해하지 않았던 그들을 용서합니다.

주님, 배우자를 용서합니다. 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사랑도 관심도 없으며 대화조차 없는 제 배우자를 용서합니다. 저를 흠잡고 제 약점을 지적하고 저를 가슴 아프게 한 모든 말과 행동을 용서합니다.

주님, 제 아이들이 저의 말을 안 듣고 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부족한 것을 용서합니다. 또 아이들의 나쁜 습관과 주님께 대한 불손함을 용서합니다.

주님, 친척과 형제들을 용서하도록 도와주십시오. 특히 부모님을 못살게 굴고 가정에 분란을 일으켰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용서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또 재산분배 문제로 부모님에게 상처를 준 친척들도 용서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저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고 제 삶을 어둡게 만든 교회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용서할 힘도 주십시오.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저에 대해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이들을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저를 도와주기보다 방해하고 질투하는 이들을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주님, 저는 성직자와 교회 봉사자들을 용서합니다. 제게 불친절하고 차별대우한 그들의 행위와 편협한 마음을 용서합니다. 그들의 독선과 말만 앞세우는 위선, 지나친 권위의식을 용서합니다. 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지 못한 것, 신앙생활에 대한 의욕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 그들을 용서합니다.

예수님, 특히 저를 가장 괴롭혔던 한 사람을 용서할 은총을 구합니다. 제가 가장 용서하기 힘든 사람,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을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죄악에서 저를 자유롭게 해주시니 예수님, 감사합니다. 당신 성령의 거룩한 빛으로 저를 채워주시고, 제 마음속을 밝게 비추어 주십시오. 아멘.

 

 

부록 2  부정적 감정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길

 

앞에서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 갖게 되는 화, 분노, 쓰라림, 적개심, 복수심, 모멸감, 우울함, 무가치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몸이 아플 때 병명을 모르면 치료할 수 없듯이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도 마음 안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을 잘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부정적 감정에 대한 주제가 ‘상처와 용서’ 라는 내용의 흐름과 각도를 조금 달리하기에 부록으로 따로 다루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감정에 귀 기울이기

얀시 Philip Yancy는 감정을 이렇게 정의한다.

 

감정이란 일상적 삶에서, 대개는 상호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정서적, 신체적 반응이다. 당신이 새롭게 옷을 차려 입고 나갔을 때 어떤 사람이 멋지다고 말하면 기분이 좋을 것이다. 반면에 남자 친구 또는 여자 친구가 아무 연락도 없이 약속 장소에 늦게 나타나면 화가 날 것이다. 밤늦게 귀가해서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면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불안을 느낄 것이다. 성적표를 받았는데 성적이 생각보다 많이 떨어져 있으면 화가 날 것이다. 이렇게 감정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당신과 당신의 필요를 이해하며 또한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한다.112

 

 

때로 사람들은 상처 받았을 때 생기는 부정적 감정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그 강렬한 감정에 지배되어 통제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나 화 같은 부적적 감정을 억누르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적인 감정이라 해도 억누르지 말고 인정하며 귀한 손님을 모시듯 다루면 긍정적 힘이 될 수 있다. 한번은 드멜로 신부가 동료 예수회원 한 사람을 상담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대학에서 일하는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부하 직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번은 직원에게 폭행까지 행사해서 형사문제로까지 번질 뻔했다.

드멜로 신부가 그와의 면담 중에 “당신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군요.” 라고 말하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방을 나갔다. 그런데 한참 후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맞아요! 신부님. 저는 숨기는 게 있었어요. 그것은 저 자신도 잊고 싶었던 것이기에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파출부로 하루 16시간씩 일하면서 그를 키웠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드멜로 신부에게 그 사실을 처음으로 말하고 나서는 더 이상 상담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의 상처는 이미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드멜로 신부에 따르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아하!’ 하는 체험이다. 자기 안에 도사린 감정을 바르게 파악하고 ‘아하!’ 하는 깨달음이 올 때 변화와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113

 

 

부정적 감정의 족쇄

부정적 감정이 일어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드러내서 흩어버리는 것이다.이란 영화가 있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이 영화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주인공이 13살 때, 근처 교도소에서 탁옥한 죄수들이 집에 들어와 어머니와 여동생과 주인공을 성폭행했다. 이때 밖에서 돌아오던 형이 집 안에서 벌어지고 있던 사건을 보고 엽총으로 죄수들을 쏴 죽인다. 그런 뒤 주인공의 가족은 죄수들의 시체를 묻고 벽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이런 일을 하는 도중 주인공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러고 나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월이 흘러간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족들은 그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서로 간에 의사소통의 단절을 겪는다. 나아가 주인공의 형은 자살하고, 여동생도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하다 병원에 입원해 있고, 주인공은 착한 아내, 사랑스런 자녀들과 함께 살면서도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해 이혼 수속을 밟는다.

13살 때 있었던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억누르면서, 부정적 감정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한 주인공과 그 가족의 비극을 보여준 영화다.

상처 받은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면 심신의 건강에도 해롭다. 어떤 부부의 외동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당시 그 딸은 대학교 2학년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던 딸을 잃고 나서 이 부인은 이를 악물고 울지 않았다. 함께 신앙 생활하던 이들이 딸이 천당에 갔으니 울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기 때문이다. 딸이 좋은 데 갔는데 울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부인은 하늘나라에서 예수님과 복락을 누리고 있을 딸에게 누가 될까 봐 울지 않았다. 딸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에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런데 딸을 잃은 지 2년 8개월 후 이 부인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억눌러 놓는 감정이 결국 암으로 나타난 것이다.

정신과 의사 할로웰 Edward Hallowell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할 경우 1-2년 후에 깊은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를 ‘지연성 애도반응’ 이라 부른다. 상실 당시 거부한 슬픔이 그 사람을 옭아매고 있다고 1-2년이 지나서야 파괴적인 힘을 드리내는 것이다. 114

 

지금까지 보았듯이 우리가 상처 받았을 때 미처 감지되지 않은 부정적 감정이나, 감지되었다 하더라도 너무나 거북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억압할 때 생기는 파괴적 결과를 보았다. 우리가 자기의 부정적 감정에 섬세하게 귀 기울인다면 치유와 성장의 발걸음을 이미 내딛은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감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감정의 파악

감정을 인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을 인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강한 감정일수록 우리의 통제를 벗어날 뿐 아니라 그 감정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주로 이성만을 강조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우리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하루 중 언제 우울했는지, 왜 우울했는지, 언제부터 무기력에 빠졌는지, 왜 무기력해졌는지 인식조차 못한다.

상담을 하면서 자주 목격하는 것은, 내담자가 자신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상담자가 ‘참 힘드시겠군요.’ 하고 말하면 주르륵 눈물을 흘린다는 점이다.

드멜로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우울해하면서도 자기가 우울하다는 사실을 모르다가 뒤늦게 기쁨을 누릴 때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특히 감정 파악이 힘들다. 우리 대다수는 유교의 영향으로 가져야 할 감정과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의 목록표가 있다. 그래서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 올라오면 즉시 억눌러 버린다. 우리가 수없이 들으며 자란 다음과 같은 표현들은 우리 안에 감정목록표가 자연스레 자리 잡게 만들었다. ‘화 내지마,’ ‘소리 지르지 마.’ 흥분하지 마.’ ‘기분 나빠 하지 마.’ ‘울지 마.’ ‘크게 웃지 마.’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될 감정이다.

그런데 감정은 감정일 뿐, 좋고 나쁘다는 윤리성은 없다. 다만 부정적 감정으로 나쁜 행동을 선택할 때 그 행동이 윤리성을 띠게 될 뿐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지만 새가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다.’ 115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것을 억압하거나 혐오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원망을 일삼거나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문제다.

 

 

감정은 또 다른 감정을 일으킨다.

우리가 한 가지 감정을 느끼면 그 감정은 다른 감정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지금 당신이 실직을 당해 우울하다고 하자. 인생의 목표를 상실했다는 생각에 우울해진 것이다. 이 우울함은 좌절감을 일으키고 좌절감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서 부당하게 당신을 내쫓았다는 생각이 드는 상사에 대해 뭔가 복수하고 싶다는 분노마저 느낀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상처 받고 내가 받은 상처만큼 다른 이도 아픔을 맛보게 하고픈 감정의 회오리 속에 휘말리는 것이다.

상처 받은 사람은 마치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자기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상처를 받는다. 상처의 연쇄반응, 곧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감정은 항구한 것이 아니다

어떤 감정도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는다. 어느 젊은 변호사가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내가 더 나은 상태가 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죽어버리든지 아니면 어떤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이 글은 많은 이가 존경하는 링컨 대통령이 젊은 시절에 쓴 것이다.

당시 그가 얼마나 절망하고 예민했던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칼이나 면도기 같은 날카로운 물건이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한다. 결국 링컨은 젊은 날의 어려운 시절을 극복해 내고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만일 젊은 날의 절망적 감정이 지속되었더라면 링컨은 만인이 추앙하는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116 감정이란 항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격렬한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이 내 안에 영원히 머물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서 때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다면 그 감정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의식적으로 자꾸 들려주어야 한다.

 

 

감정 자체가 바로 나는 아니다

불같이 화가 난다고 해서 그 화가 나 자신은 아니다. 지금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해서 그 슬픔이 바로 나는 아닌 것이다. 감정과 나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누군가가 나를 칭찬해 주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 날뛰다가, 나를 비판하는 말을 들으면 살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처럼 위축되어 버릴 것이다.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부정적 감정 때문에 자신을 형편없는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 안에 어두운 감정이 있어도 내 존재 자체가 어두운 것은 아니기에 나를 못난 놈, 바보 같은 놈으로 비하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최선을 다해 강의했는데, 청중 몇이 그의 강의를 비판했다고 하자. 그가 너무 낙담해서 두 번 다시 강의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강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또 어떤 여성이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그 음식을 별로 먹지 않자 ‘나는 음식도 제대로 못 만드는 변변치 못한 여자다.’ 하면서 자신을 꾸짖고 낙담한다면, 그는 음식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내 안의 부정적 감정 때문에 내 인격 자체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감정은 어디까지나 내 책임 아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이 내 존재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지 않다. 내가 불쾌할 경우 불쾌한 사람은 나 자신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 점을 간과하면 엉뚱하게 반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 몹시 화가 나 씩씩거리며 왔다 갔다 하다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쳤다 하자. 이때 책상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을 뿐 아무 잘못이 없다. 다만 내가 화가 나서 몸의 균형을 잃어 부딪쳤을 뿐이다. 그런데 ‘이놈의 책상…’ 어쩌고 하면서 그 책상을 걷어찬다면, 나는 화나는 감정을 바깥에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처음 책상에 부딪쳤을 땐 무릎만 아팠으나 이제는 걷어찬 발마저 아프다.

 

 

감정에 반응하지 않고 선택하는 태도

많은 경우 우리 행위는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 좌우된다. ‘네가 하는 짓은 보나 마나 뻔해!’ ‘너는 왜 이렇게 칠칠치 못하니!’ ‘너는 왜 이렇게 촌스럽니!’ 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금방 불쾌해지고 어떻게든 그런 말을 한 상대방에 대해 복수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내적 평화와 자유를 살아가는 최선의 길은 즉각 반응하기보다 여유를 가지고 선택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즉각적 반응을 하면 그만큼 평화를 잃지만 반응하지 않고 선택한다면 상처를 덜 받는다. 즉각 반응하지 않는 것을 심리학자 칼슨은 ‘누군가가 던진 공을 잡지 않는다.’ 라고 표현한다.

 

누군가가 던진 공을 반드시 잡을 필요는 없다. 친구가 다급한 전화를 해 오더라도 그 공을 즉시 받을 이유가 없다. 상대방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나를 끌어들이려 할 때마다 반드시 그것에 응답할 의무는 없다. … 우리가 다른 사람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느끼고 분개하지 않으려면 언제 어떤 공을 잡아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정말 바쁜 시간에는 전화를 받는 일같이 무척 단순한 일조차 공을 잡는 행위가 된다. 너무 바빠서 시간과 정력과 마음을 낼 수 없는데도 전화를 받음으로써 어떤 일에 연루돼 버린다. 모욕을 당하거나 비판을 받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반대의견이나 비평을 던질 경우 그것에 즉각 반응하면서 상처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떨어뜨리고 하루를 평온하게 보낼 수도 있다. 누군가가 문제를 던졌을 때 그것을 반드시 잡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은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방패다. 117

 

빼앗길 수 없는 단 하나의 자유는

선택의 자유다.

– 빅터 프랭클

 

 

화 또는 분노에 대한 이해

여러 가지 부정적 감정 가운데 화 또는 분노는 특히 자제력과 통제력을 잃게 하는 감정이다. 한없이 착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모며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무척 착하고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갑작스레 화를 내는 것은, 평소 내성적이고 소심한 그들이 자기 안에 있는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한꺼번에 분노로 터뜨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화 또는 분노에 대해 살펴보다.

많은 사람이 화 또는 분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화를 내면서 사람들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 벌건 얼굴로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것은 자기 약점을 드러낼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같이 성질이 난다고 그대로 드러내면 대체로 질이 ‘나쁜’ 사람 또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 더군다나 신자로서 화를 내면서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화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란 점이다. 그것은 그저 지금 나의 상태를 나타내는 하나의 계기판이며 정보일 뿐이다.

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우리 중 예수 그리스도한테 배울 수 있다. 예수께서는 여러 차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제자들에게 화를 내셨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해서는 ‘사기꾼, 위선자’ 라면서 화를 내셨고 그들에게 재앙이 있으리라고 선언하셨다. 수제자 베드로를 향해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화를 내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화를 억누르지 않으셨다. 그러니 우리가 화를 드러낸다는 것은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솔직해야 한다. 때로 우리는 자기 안의 부정적 감정을 정확히 보면서도, 남에게 표현할 때는 진짜 감정을 숨기고 다른 식으로 드러내고 얼버무린다. 생각해 보자. 나는 살아오면서 정말 화가 나는데도 웃은 적이 없었는지? 정말로 슬프고 마음이 아픈데도 실없는 농담을 한 적은 없는지? 마음으로는 이게 아니지 싶으면서도 엉뚱하게 남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 적은 없는지?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할 때 표현하는 감정들은 실제 감정이라기보다 본심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일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툭하면 화를 내는 사람의 경우 진짜 감정은 분노가 아닐 수 있다. 자신의 두려움이나 슬픔, 후회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화를 내는 것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잘 우는 사람들의 경우도 진짜 감정은 슬픔이 아닐 수 있다. 가슴속은 분노로 끓는데, 화를 낼 용기가 없어 슬픔으로 대신 표현하는 것이다.

 

나 전달법

화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울컥하는 마음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또는 몸이 반응하는 대로 화를 표현한다면 그 부정적 기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바라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anger'(분노)에 한 글자만 더하면 danger(위험)가 된다.

가톨릭 심리학자 마르틴 파도바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화를 적절하게 다루고 표출한다면, 화는 덕목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또한 당연히 그렇게 간주되어야 한다.’ 118

감정 표현이 파괴적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나 전달법’이다. 이는 현실요법에서 주창한 이론인데 감정을 표현할 때 더 이상 ‘너 때문에’ 란 측면에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몰아붙이거나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또 문제가 해결되려면 내가 아닌 상대방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19 그러면서 탁구공을 주고받는 것과 같은 관계를 이룬다. 남편이 공을 치면 아내가 받아 치고 아내가 공을 치면 남편이 받아넘기는 식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끊임없이 공격과 방어로 이어지면서 ‘심리 게임’을 한다. 심리 게임의 하나는 ‘만일 네가 그렇게 하지만 않았다면…’ 하는 식으로 상대를 비난하는 게임이다. 심리 게임은 순환적이고 반복적이다. 심리 게임을 중단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게임을 그만두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나는 더 이상 이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일어나면 그 게임은 중단된다. 120 더 이상 ‘너 때문에’ 란 표현을 쓰지 않고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나 전달법’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가 지난번에 약속에 늦더니 이번에도 늦었다고 가정하자. 그때, “야, 지난번에도 늦더니 오늘도 또 늦게 오면 어떡하냐?” 라고 하기 보다 오히려 “벌써 두 번째나 기다리게 되니까 시간도 아깝고 얼마나 화나는지 몰라.” 라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적절한 나 전달법 감정 표현이다.

효과적인 ‘나 전달법’에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상대방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둘째, 상대방의 행동이 나에게 미치는 구체적 영향을 표현한다. 셋째, 그 영향으로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 121

앞서 언급한 예문을 분석하면, ‘벌써 두 번째나 기다리게 되니까’ (상대방의 행동), ‘시간도 아깝고’ (나에게 미치는 영향), ‘얼마나 화나는지 몰라'(느끼는 감정)라고 할 수 있다. (나 전달법에 대한 전문서적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따로 구입해 읽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

(잠언 4, 23)

 

 


 Footnotes:

 

  1. 미주판 한국일보 1995년 9월 12일 자 장명수 칼럼에서.
  2. 에드워드 할로웰,(서울: 동아일보사, 2005), 165-168.
  3. W.R. 화이트,(서울: 바오로딸, 1993), 127-128.
  4. 박아청,(서울: 바오로딸, 1994), 135.
  5. 비슷한 말씀이 마르 11,25에도 나온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6. C. Watson, DeShazer(Spring Arbor, MI: Saltbox Press, 1991), 53.
  7. 복음서 저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베푼 용서의 대상(유다, 최고 법정, 빌라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려주고자 그 대상 다음에 ‘배반하다’란 동사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였다.’ 하는 식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배반하다’ 란 동사를 ‘넘겨주다’ 로 번역하여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었다.’ 로 표현했다.
  8. 1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치 임금에 해당하였다. 오늘날 노동자가 하루에 7만 원 정도 번다고 할 경우 6,000데나리온은 4억 2천만 원이다. 그렇다면 10,000탈렌트는 4조 2천억 원에 해당한다.
  9. 에우세비우스, De Martyribus Palestinae,8.
  10. Frank Minirth, The Healthy Christian Life(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8), 88; 에버렛 워딩턴,(서울: IVP, 2006), 32.
  11. 딕 티비츠,(서울: 알마, 2006), 102.
  12. 미국 심장학회,, 2000년 5월 호. 실제 인용은 딕 티비츠, 앞의 책, 104~105.
  13. 에드워드 할로웰,, 55~56.
  14. 폴 마이어,(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146~148
  15. 심리치료자 월러스타인 Judith Wallerstein 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혼한 사람 중 많은 이가 이혼한 지 10년이 지났어도 옛 배우자에 대한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여성의 경우 조사 대상자의 절반이, 남성의 경우 삼분의 일이 그랬다. Judith Wallerstein, Second Chances: Men, Women, and Children: A Decade after Divorce(New York: Tichor & Fields, 1996), 29
  16. David Augsburger, Caring Enough to Forgive(Ventura, CA: Regal Books, 1981), 12~13
  17. 아잔 브라흐만,(서울: 이레, 2008), 11~12
  18. 마태오 린, 데니스 린, 쉐일라 파브리칸트,(생활성서, 2003), 11~12. 다른 관점에서 조사한 사람은 미다닉이다. 그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둔 자녀가 비비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보다 알코올 중독에 걸릴 확률이 네 배나 높다. L. Midanik, “Familial Alcoholism and Problem Drinking in National Drinking Practices Survey”, Addictive Behavior 8(1993), 133-141.
  19. 러스킨은 심리학자 엔라이트처럼 용서 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또 다른 대표적 학자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교의소장이다. 용서 프로젝트 연구소에서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상처 준 사람 때문에 분노와 울화의 포로가 되어 모든 시간을 망쳐버린 지난 삶을 뒤로하고 내적 자유와 힘을 갖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관심 있는 독자들은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20.  러스킨은 어떻게 해야 울화와 상처를 잠재울 수 있는지 필요한 작업을 소개한다. 그가 소개하는 작업은 용서하는 실제적 방법이라기보다 우리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알아두면 나름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첫 번째 작업은 긍정적 채널에 주파수를 맞추는 훈련이다. 이 훈련은 상처에 붙들려 있기보다 적극적 세계에 시선을 두는 훈련이다. 자신의 해묵은 울화를 끊임없이 재탕하려는 태도를 끊고 박은 감정을 지니려고 애쓰는 것이다. 러스킨은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사람은 마음속 화면에 나타난 장면을 바라본다. 어떤 장면을 볼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한다. 울화 장면에 하루 종일 아니 인생 내내 주파수를 맞출 수 있고, 감사나 사랑, 기쁨과 같은 긍정적 채널에 주파수를 맞출 수도 있다. 리모컨은 우리에게 있다. 어느 누구도 우리 대신 리모컨을 조종하지 않는다. 당신이 늘 울화 채널에만 주파수를 맞춘다면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긍정적 채널이란 구체적으로 감사의 채널, 아름다움의 채널 등을 말한다.

     

    감사의 채널을 예로 들자면

    • 운전하는 동안 교통규칙을 지키는 운전자들에 대해 감사 드린다
    • 인생의 동반자가 있다면 그가 나를 돌보아 주고 염려해 줌에 감사 드린다.
    • 부모님이 내게 해준 친절한 일들에 감사 드린다.
    •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숨 쉴 때마다 살아 있음에 감사 드린다.

     

    아름다움의 채널을 예로 들면

    • 하늘이 얼마나 푸른지 올려다보고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신기한지 관찰한다.
    •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어린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본다.
    •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자연 프로그램을 감상한다.
    •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한다.
    • 잘 만든 요리의 멋과 맛을 즐긴다.
    • 꽃잎의 다양한 모습과 화려한 색을 즐긴다.
    • 동물원에서 다양한 동물의 세계를 보며 감탄한다.
    • 경외심과 감탄을 자아낸 장소를 기억한다.

     

    두 번째 작업은 감사의 호흡을 하는 훈련이다. 하루에 한두 번 바쁘지 않은 시간을 골라 호흡에 정신을 집중한다.

    1. 숨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에 주목한다. 숨을 들이쉴 때 배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게 한다. 숨을 내쉴 때는 배에 힘을 뺀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다섯 번 정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쉰다.
    2. 계속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한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다섯 번 정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 쉬면서 감사하다는 표현을 한다.
    3. 두 번 정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쉰 다음 끝낸다.

     

    세 번째 작업은 마음에 집중하는 훈련이다.

    1.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2. 숨에 주목한다. 숨을 들이쉴 때는 배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게 한다. 숨을 내 쉴 때는 배에 힘을 뺀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5분 정도 숨을 쉰다.
    3. 계속해서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며 아름다움과 평화를 느꼈던 장소나 진한 추억이 어린 장소를 떠올린다.
    4. 그 장소에 있었을 때 맛보았던 느낌들을 다시 체험해 본다. 아름다운 풍경, 바람소리, 눈부신 모습, 평화로운 광경 등 무엇이든 그때의 느낌을 되살린다. 집중이 어려우면 다시 깊은 숨쉬기를 반복한 다음 새롭게 시작한다.
    5. 10분 정도 다시 한 번 추억 어린 과거 체험의 세계에 머문 후 훈련을 끝낸다.

  21. 스펄전의 이야기는 다음 책에서 재인용됨. 옥한흠,(서울: 국제제자훈련원, 1989), 174
  22. 만델라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책에서 재인용됨. 미르바 던,(서울: IVP, 2007), 225.
  23. 이 예화는 다음 책에서 재인용됨. 김경수,(서울: 예루살렘, 2004), 70-71.
  24. 베브 스몰우드,(서울: 위즈덤로드, 2008), 28.
  25. W.R. Neblett, “Forgiveness and Ideals,”, Mind 83(1974), 269-275.
  26. 앙리 샤리에르의 실화는 다음 책에서 인용됨(연대는 필자가 다시 정리했음). 이재철,(서울: 홍성사, 1999), 173-175
  27. , 2005년 6월 호에서 인용.
  28. Harrold Morris, Twice Pardoned (W Publishing Group, 1986), 96.
  29. 스콧 펙,(서울: 열음사, 2004), 157; Martin H. Padovani, Healing Wounded Emotions: Overcoming Life’s Hurts (Mystic, CT: Twenty-third, 1993), 90.
  30. 크리스 터만,(서울: 나침반, 2001), 137.
  31. 데이비드 A. 시맨스,(서울: 두란노, 1994), 31.
  32. Everett Worthington, Forgiving and Reconciling: Bridges to Wholeness and Hope(Downers Groves, IL: IVP, 2003), 99
  33. 달라이 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책에서 재인용됨. 에드워드 할로웰,, 96
  34. Scott Peck, The Road Less Traveled: A New Psychology of Love, Traditional Values and Spiritual Growth(Touchstone, 1998), 42-43; 로버트 D. 엔라이트,(서울: 학지사, 2004), 36.
  35. Lewis Smedes, Forgive and Forget: Healing the Hurts We Don’t Deserve(San Francisco: Harper & Row, 1984), 79.
  36. Robert Subby, Lost in the Shuffle(Deerfield Beach, FL: Health Communications, Inc., 1987), 69.
  37. 에드워드 할로웰, 앞의 책, 86-87.
  38. 스티븐 트레이시,(서울: 이선교원, 2005), 314.
  39. 폴 마이어,, 128-129.
  40.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보이는 자기 단죄의 반응은 다음 두 책에 잘 소개된다. 가브리엘 뤼뱅,(서울: 알마, 2009); 데이비드 스툽,(서울: 예수전도단, 2005), 119-120.
  41. 폴 마이어, 앞의 책, 130.
  42. Terry Spy, “Christianity, Therapy and Forgiveness”, Forgiveness and the Healing Process: A Central Therapeutic Concern(New York: Brunner-Routledge, 2004), 47.
  43. Everett Worthington, “The Pyramid Model of Forgiveness: Some Interdisciplinary Speculation about Unforgiveness and the Promotion of Forgiveness”, Dimensions of Forgiveness: Psychological Research and Theological Perspectives, edited by Everett Worthington (Philadelphia: Templeton Foundation Press, 1988), 149.
  44. 딕 티비츠,, 폴 마이어, 앞의 책, 51-52; 데이비드 스툽,(서울: 예수전도단, 2005), 61-62; 손운산(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 31.
  45. 물론 복음서를 보면 주님께서 한 차례 화해할 것(마태 5,24)을 요구하셨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준 경우가 아니라 내가 형제에게 상처를 주어 그가 원망을 품는 경우다. 해당 성경구절을 읽어보라.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5,23-24)
  46. 이 점은 그가 맏아들 므나쎄를 낳고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고생과 내 아버지의 집안조차 모두 잊게 해주셨다.”(창세 41,51)라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모든 고생과 아버지의 집안을 잊었다.’ 란 말은 형들을 향한 부정적 감정이 더 이상 요셉의 마음 안에 없다는 점을 알린다. 곧 용서했다는 말이다.
  47. 로비트 D. 엔라이트,, 50; 김광수,(서울: 한국학술정보, 2007), 64.
  48. 로버트 D. 엔라이트, 앞의 책, 36.
  49. 데이비드 스툽,, 33-34.
  50. 딕 티비츠,, 133.
  51. 드멜로,(왜관: 분도, 1993), 177).
  52. 닐 앤더슨,(서울: 죠시선교회, 2005), 59-60.
  53. 찰스 셀,(서울: 두란노, 1992), 76.
  54. 돈 데이비드 러스터먼,(서울: 푸른숲, 2009), 238-239.
  55. 이 구체적 해결책은 필자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누군가가 상처 받은 이들에게 효과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제시한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기에 익명으로 남겨놓았다.
  56. Pierr Wolff, May I Hate God? (New York: Paulist, 1979), 35.
  57. 박상훈,(서울: 크리폼, 1994), 81.
  58. 딕 티비츠,, 66.
  59. 존 그레이,(서울: 친구, 1995), 280-281.
  60. 같은 책, 309.
  61. 이하 상담 내용은 다음 책에서 인용됨. 존 포웰,(서울: 바오로 딸, 1987), 107.
  62. 박상훈,(서울: 크리폼, 1994), 70.
  63. 더글러스 스톤 외,(서울: 21세기북스, 2003) 78.
  64. 같은 책, 79.
  65. 게일 에반스,(서울: 해냄, 2008), 5-6, 16.
  66. 마셜 B. 로젠버그,(서울: 바오출판사, 2004), 181.
  67. 샘 혼,(서울: 갈매나무, 2008), 25-26.
  68. 사실 인정받고 사랑 받으려는 욕구는 인간 본성의 요구다. 그럼에도 위 본문에서 그렇지 않다고 한 것은 더 높은 단계의 욕구를 목표로 두고 한 말이다. 심리학자 마슬로우 Maslow도 얘기했듯이 욕구에는 저급 단계에서 고급 단계에 이르는 여러 욕구가 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자유의 욕구, 자기 존중의 욕구, 자기 실현의 요구 밑에 있는 것이다.
  69. 생명의 삶 편집,(서울: 두란노, 1993), 187.
  70. 제임스 돕슨,(서울: 프리셉트, 1999), 33-34.
  71. 박상훈,, 74.
  72. 존 오트버그,(서울: 두란노, 2006), 24-25.
  73. 웨인 다이어,(서울: 행복한집, 2001), 121-122.
  74. ‘상처를 낳는 텃밭’ 이란 표현은 채준호 신부의 심리치료 이론에 나온다.
  75. 이재철,(서울: 홍성사, 2004), 97-98.
  76. 웨인 다이어, 앞의 책, 125; 같은 저자,(서울: 기원잔, 2002), 157.
  77. 크리스 터만,, 55.
  78. 웨인 다이어,, 115.
  79. 같은 책, 116.
  80. 주서택,,115-119.
  81. 존 포웰,(서울: 바오로딸, 1987), 153.
  82. 심리학자 브릭스 Dorothy C. Briggs는 자존감이란 ‘나는 사랑스럽다.’ 란 자기 신념과 ‘나는 가치 있다.’ 란 자기 신념의 결합이라고 본다. 브릭스의 이러한 견해는 다음 책에서 재인용됨. 변상규,(서울: 예향, 2009), 106.
  83. 찰스 셀,, 225.
  84. 김형준,(서울: SFC, 2005), 236-238
  85. 존 포웰,(왜관: 분도, 1995), 25
  86. 딕 티비츠,, 72.
  87. John Bradshaw,(서울: 학지사, 2004), 43.
  88. 수잔 제퍼스,(서울: 리더스북, 2007), 108-109.
  89. 데이비드 A. 시맨스,(서울: 두란노, 1994), 93-94.
  90. Martin H. Padovani, Healing Wounded Emotions: Overcoming Life’s Hurts, 66.
  91. 같은 책, 68.
  92. 같은 책, 101.
  93. 스콧 펙,(서울: 고려원미디어, 1995), 100-101.
  94. 웨인 다이어,(서울: 을유문화사, 1992), 54.
  95. Brennan Manning, A Stranger to Self-hatred: A Glimpse of Jesus (Denvill, NJ: Dimension Books, 1982), 103.
  96. 케빈 브렌플렉,(서울: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2006), 267.
  97. 웨인 W. 다이어.(서울: 기원전, 2002), 109.
  98. 윌 보웬,(서울: 세종서적, 2009), 119.
  99. Martin H. Padovani, Healing Wounded Emotions: Overcoming Life’s Hurts, 71.
  100. 드멜로,, 204.
  101. 데이비드 니벤,(서울: 청림출판, 2001), 112.
  102. 웨인 다이어,(서울: 21세기북스, 2006), 174-175.
  103. 같은 책.
  104. 웨인 W. 다이어,, 72.
  105. Henri Nouwen, Life of the Beloved(New York: Crossroad, 1992), 21.
  106. 제리 브리지스,(서울: 도마의 길, 2006), 16.
  107. 루이스 스미즈,(서울: 규장, 2004), 174-179.
  108. Julie Juola Exline, Ann Marie Yali, Marci Lobel, “When God Disappoints: Difficulty Forgiving God and Its Role in Negative Emotion”, Journal of Health Psychology(July 1999), 365-379.
  109. Joni Tada, Heaven(Grand Rapids, MI: Zondervan, 1995), 53-55.
  110. Greg Laurie, The God of the Second Chance: Experiencing Forgiveness(Dallas: Word, 1997), 168.
  111. Scott Peck, The Road Less Traveled: A New Psychology of Love, Traditional Values and Spiritual Growth, 15.
  112. 필립 얀시,(서울: 그루터기하우스, 2002), 26.
  113. 드멜로,, 198.
  114. 에드워드 할로웰,, 69.
  115.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이 말은 다음 책에서 재인용됨. Herbert J. Miles, Sexual Understanding before Marriage(Grand Rapids, MI: Zondervan, 1971), 157.
  116. 빅터 M. 파라친,(서울: 바오로딸, 2000), 26.
  117. 리처드 칼슨,(서울: 창작시대, 1998), 244-245.
  118. 마르틴 파도바니,(왜관: 분도, 2004), 57-58
  119. 김인자,(서울: 사람과 사람, 1997), 29.
  120. 스콧 펙,, 39-40
  121. 김인자, 앞의 책, 254.
Novem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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