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of dreams, trancending time & place, autobio in progress..

영적 성장을 위한 감성 수련

 

상실과 슬픔의 치유

 

문종원 지음

 

 

문종원

1992년 서울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미국 로욜라 대학에서 사목학을 공부했다. 평화방송 라디오 주간을 거쳐 현재 성령쇄신운동을 지도하고 있으며, 우울증 죄책감 걱정 두려움 분노 상실감 스트레스 등 부정적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영적 성장을 위한 감성 수련’과 ‘나 자신을 찾아서’ 를 기획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에 “길을 묻는 그대에게”, “우울증, 기쁨으로 바꾸기” 가 있으며, 옮긴 책에 “행복 찾기”, “기도 산책”, “우울증”, “걱정”, “스트레스”, “두려움”, “낙담”, “학대 받는 아이에서 학대하는 어른으로”, “느낌을 마주하라”, “스트레스, 말씀으로 사귀자”, “화, 제대로 내기”, “감정, 예수님께 가는 징검다리”,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신앙, 집착으로 열정으로”, “꿈, 하느님의 잊혀진 언어”, “영혼과 육체의 치유”, “내 일생의 치유”, “마음의 그림자”, “외로움과 영정 성정”, “사랑이 두려움을 만날 때”, “영적 지도 기법”, “정신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21세기 은사의 회복”, “자연, 그리고 인간 혼 1, 2” 등이 있다.

 

 

상실과 슬픔의 치유

2011년 1월 23일 교회인가

2011년 7월 20일 1판 1쇄 인쇄

2011년 7월 25일 1판 1쇄 발행

 

 

 

머리글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상실을 경험한다. 태어나면서 시작된 상실은 살아가면서 죽음과 질병, 가정과 재산, 직업을 잃거나 결혼이나 우정의 깨짐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날마다 크고 작은 상실을 겪으며 살아간다. 삶 속에서 늘 새로운 변화를 맞지만 그 변화는 언제나 피할 수 없는 상실감을 가져온다. 분명한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상실과 죽음이 필연적일 뿐 아니라 상실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다. 부모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 기대가 무너지며, 완벽한 부모가 되리라 생각했던 자신감과 희망을 잃어버린다. 또한 우리는 가진 것과 가치 있는 어떤 것을 빼앗기거나 그것 없이 살아야 할 때가 온다. 그 어떤 것이란 우리가 필요로 하고 바라며 기대하는 것이다.

상실을 겪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주위에는 아름답고 좋은 것이 많지만 삶의 고통스러운 상실을 겪으면 한 순간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변화와 분열이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친구나 가족을 잃는 쓰라린 경험을 한다. 때로는 부모가 갈라놓기도 하고 친구들 스스로 떠나기도 한다. 특히 죽음은 모든 상실 가운데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내 부모와 배우자, 자녀와 친구들 모두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똑같은 운명을 맞는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점점 더 크고 확실하고 절실하게 느낀다.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없음과 어떤 것을 선택하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함도 깨닫는다. 그러한 상실을 겪으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더 나아가 상실은 우리 존재와 인간 세상보다 더 큰 실체, 곧 우주의 존재 방식(상실과 성장, 죽음과 삶)에 대해 깨닫게 한다.

우리는 자연 안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여름날 그토록 짙푸르던 미루나무 잎도 가을이 되면 눈부신 황금빛으로 변한다. 또한 어둠과 침묵뿐인 고치 속에서 유충은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해 스스로 껍질을 벗는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재창조를 거듭한다. 끊임없이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성된다. 우리 몸 안에서 죽음과 삶, 상실과 성장이 계속되는 것이다.

물론 상실의 무게와 종류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어떤 때는 다양한 방법으로 뼈저리게 경험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떠한 상실이든 새로운 생명과 성장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사소한 배신감, 버림받은 느낌, 상실감의 충격은 매우 일반적이고 미묘해서 인식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은 점점 쌓여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되며 슬픈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실의 실재와 마주하면서 우리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것을 삶에 적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상실에서 회복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상실하고 회복하는 우리 삶의 과정에는 이른바 슬픔이라는 독특한 여정이 있다. 슬픔이 곧 회복은 아니지만, 슬픔은 우리가 겪는 많은 상실에서 회복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필수 요소이다.

슬픔은 상실의 고통스러운 실재를 직면하도록 도와주고, 상실이 삶을 이해하는 전환점이 되게 하며,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슬픔의 목적은 상실을 잊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껴안아 이해심과 자비와 용기를 기르도록 하는 데 있다.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치유의 길이 사람의 지문처럼 모두 다르며 저마다 독특하게 슬픔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가는 여정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각자 나름대로 사랑하는 사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상실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실감과 정서 변화를 느끼고 삶에 대한 믿음을 재정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곡 필요하다. 비탄에 젖어 사별의 아픔을 겪는 과정을 거치면서 상실의 상처에서 벗어난다. 빼앗김 비탄 아픔의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마태 5,4)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삶의 활력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을 세심하게 배려하시는 주님은 사별의 슬픔을 겪는 사람들한테 용기를 주신다. 예수님은 “그래, 슬퍼해라!” 하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슬픔이 지닌 유익한 잠재력을 아시며, 마침내 축복과 위로를 받으리라는 사실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슬퍼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비정하고 난폭해지면 무감각하거나 자제력을 상실함으로써 지신이 지닌 것들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신다. 또한 사별로 인한 슬픔은 정상적이고 필요한 과정이며 이를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도 아신다.

하느님은 사별이나 소중한 것을 상실하는 여정을 통해 우리에게 강복하신다. 물론 이 여정에는 고통과 모험이 따르지만 머지않아 우리는 풍성한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1 상실의 여러 모습

 

다양한 상실

 

상실이란 가치를 두는 어떤 것을 유지하거나 얻는 데 실패하는 것, 능력을 잃어버리거나 전쟁으로 인한 파괴를 경험하는 것 등 여러 의미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한 개인이 가진 어떤 것을 박탈당함을 뜻한다.  모든 심리적 변화는 실제적이거나 상징적인 상실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관계에서 변화를 겪으면 우리는 상실감을 느끼며 슬퍼한다. 상실은 정서적 경험이다.

존 제임스 John James와 레셀 프리드먼 Russell Friedman은 ‘슬픔이 말을 거네’ 에서 신뢰를 상실하는 사건은 평생 엄청나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부모나 신에 대한 믿음을 잃거나 인간관계에서 믿음을 잃는 것도 상실이라고 설명한다.

하워드 Howard는 상실을 비난이나 배척을 받았을 때 느끼는 자존심의 상실, 지갑이나 핸드백과 같은 물건의 상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등으로 설명한다.

르윈슨 Lewinson과 아치볼드 Archibald 는 사고나 후천성면역결핍증 AIDS 으로 인한 건강과 인간관계의 상실, 실직,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상실 등 다양한 상실이 있다고 한다. 또한 가정에서 구타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신체 상해뿐 아니라 상실로 인한 우울증,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를 보인다며 결정적 상실을 설명한다.

아치볼드는 ‘숨겨진 감정회복’에서 이처럼 다양한 상실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물건의 분실, 자동차 사고, 카메라가 부서지거나 개가 죽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대상이 있는 구체적 상실이다. 둘째는 사랑 야망 자존감 통제력처럼 가치 있게 여기지만 구체적이지 않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추상적 상실이다. 그리고 셋째는 상상으로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상실을 모두 경험하는 가상석 상실로, 이는 실제로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상실과 우울증이 발생할 환경을 조성하며 구체적 상실만큼 사실적으로 상실을 느끼게 한다. 이는 실제 일어난 상실이 아니기에 어떤 상실보다 다루기가 어렵다. 넷째는 실제 상실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곧 상실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때, 그 과정이 끝나기 전에는 슬픔이 가시지 않거나 우울을 경험하게 되는 위협적 상실이다.

따라서 상실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변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는 우울증의 원인이 되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에서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대상을 잃는 모든 것을 뜻한다. 이별과 거주지 이동으로 인한 생활방식의 변화도 상실이며 우울증의 원인이 된다. 애완동물의 죽음, 이사와 입학, 부인이나 남편의 죽음, 결혼과 졸업, 금단, 건강상의 큰 변화, 퇴직,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재정상의 변화, 기념일, 법적 문제, 자녀들의 출가와 같은 상실과, 신뢰와 안전감의 상실, 자신의 몸을 지킬 능력 상실(육체적 능력 상실 또는 성폭행)같은 것이 있다. 여기서는 중요한 상실을 여섯 가지 형태로 구분해 다루고자 한다.

 

소중한 물건의 상실

연지는 지금도 엄마 반지를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엄마는 연지가 세상에 태어날 때 돌아가셨다. 엄마 얼굴도 모르는 연지에게 아빠는 엄마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어 주었다. 연지에게 목걸이는 엄마였다. 재혼한 아빠와 새엄마 사이에 동생이 태어났다.

그런데 동생이 유난히 그 목걸이를 탐내 툭하면 싸우곤 했다. 새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아이들을 참다못해 연지가 잠든 사이 목걸이를 내버렸다. 목걸이가 없어진 사실을 안 연지는 소리 내어 울다 새엄마에게 야단을 맞았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아빠는 다른 좋은 걸 사줄 테니 잊어버리라고 했다. 연지는 자신이 잠들지 않았으면 목걸이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거라며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이 마치 또 한 번 엄마를 잃은 것 같아 몹시 슬펐다.

 

허버트 앤더슨 Herbert Anderson과 케네스 미첼 Kenneth R. Mitchell은 ‘우리의 모든 상실과 슬픔 All Out Losses, All Our Grieves‘ 에서 물질적 상실을 애착을 가진 물리적 대상이나 친숙한 환경에 대한 상실이라고 정의한다. 손때가 묻고, 추억이 서리고, 애정이 깃든 물건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우리가 소유한 물건이 모두 소중한 것은 아니지만, 그 중 어떤 것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특별히 소중한 것이 있다. 그래서 그 물건을 영원히 간직하려고 한다. 그 물건이 소중한 이유는 어떤 사람이나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것이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물건을 잃어 버리고도 그다지 마음 쓰지 않지만, 그 물건이 의미가 있거나 개인적으로 깊은 사연이 담겨 있으면 어떻게든 찾으려 한다. 이러한 물건을 잃어버리면 물질을 뛰어넘어 다른 세계와 연결된 상실을 경험한다.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에 고통이 뒤따른다. 잃어버린 물건을 대체한 것이 원래 가지고 있는 가치를 온전히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물건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면 그 물건의 가치와 상관없이 자신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만일 우리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리고 나서 별것 아닌 것처럼 축소해 말한다면, 상실로 인한 우울증으로 고통 받을 수 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슬픔을 느낀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랑이 깊고 손대가 묻은 것일수록 물질 상실에 따른 슬픔은 커진다.

잃어버린 물건이 고인이나 헤어진 사람에 대해 아직 남아 있는 슬픔을 다시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물건이 대변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물건이 다른 종류의 상실과 연관된 경우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 있는 감정을 자극한다. 이 감정들은 고인과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해결하게 하는 촉진제가 된다. 만일 우리가 물건에 담긴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슬픔은 치유되고 새로운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중요한 사람의 상실

엄마 아빠의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 아빠는 웃으며 인사를 하고 회사에 갔다. 그런데 아빠가 집을 나선 지 30분쯤 뒤 전화를 받던 엄마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고 서울 외갓집 가까이로 이사를 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언니가 내 앞에서 픽 쓰러지더니 일어나질 않았다.

잠시 후 할머니가 오셔서 119구급차를 불렀고 집에 도착한 소방대원은 왜 이렇게 늦게 연락했느냐며 언니가 이미 죽었다고 했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빨리 연락만 했더라고 언니는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몇 개월을 멍하지 지냈다. 마치 내가 언니를 죽인 것 같아 엄마와 할머니한테, 아니 누구한테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학교도 갈 수 없었고 언니가 쓰던 물건만 보아도 눈물이 났지만 엄마 때문에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직장도 그만두었지만, 우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며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다.

 

우리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좁게는 우리 내면세계에서도 영과 정신과 육이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가정에서는 부모 형제와 혈육 관계를, 사회에서는 공통된 가치관과 신념을 나누는 이웃들과 생존관계를 맺고, 나아가 인간의 근본적 존재 이유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관계 상실은 삶의 중요한 부분을 잃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삶을 함께하고 고통을 나누며, 아픔을 위로하고 대화하며, 경험을 나누는 존재를 잃는 것이다. 잃음은 소중한 사람들과의 물리적 대면이나 감정적 정신석 관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상실은 죽음 병 은퇴 실직 이사 이민 이혼 단교 거부 버림받음 실연 등과 관련이 있다. 여러 관계 상실 가운데 죽음에 의한 관계 상실에 가장 큰 고통과 슬픔이 따른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한 번은 죽은 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순리인데도 인간은 누구나 다른 상실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는다. 죽음은 먼저 간 사람에 대한 기억, 떠나버린 사람의 연락처,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 등 짧은 기간 안에 자신과 가버린 사람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할 것을 요구한다. 그 동안 맺어 온 긴밀한 관계를 사별의 아픔과 함께 정리해야 하는 남은 사람은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오는 상실

K씨 부부는 64년을 함께 살았다. 결혼 64주년이 가까웠을 무렵, 아내가 이름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남편은 줄곧 아내의 침대를 지켰다. 어느 날 오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를 간호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방에서 나가줄 것을 청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가 갑자기 죽은 것이다. K씨의 삶은 아내와 함께 쌓아온 것이기에 가까웠던 만큼 더욱 더 상처를 받았다. 그는 충격과 죄책감에 빠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오는 상실은 우리의 온 존재를 혼돈에 빠뜨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더욱 고통스럽다. 곧 사랑하는 사람이 떠남으로써 그와 연관되어 따라오는 온갖 상실로 고통이 더 커지는 것이다. 일상생활과 사랑하기, 잠자기, 식생활, 심지어 일하기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받는다. 흔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상실의 슬픔뿐 아니라 아직 이루지 못했거나 이루지 못할 것에 대한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상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으로써 생긴 슬픔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사는 것이 힘들고 건강도 급격히 나빠진다. 걸핏하면 눈물이 흐르고, 목과 가슴이 답답하다. 숨이 차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잠자는 습관이나 먹는 습관도 변한다.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잠을 자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불면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 전에는 삶의 방향이 분명했지만 어제는 달라졌다. 이전에는 자신의 신원이 분명했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는 것이 쉬웠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은 자신의 일부였다. 자신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서 있던 자리는 비어 있다. 그 빈자리만큼 일부분이 빠져나간 것이다. 언젠가는 과거의 나한테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겠지만 아직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 삶에는 빈자리가 생긴다. 식탁에서, 교회 옆자리에서, 식당에서, 집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는 비어 있다.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차를 타고 갈 때도 그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이 여전히 곁에 있는 것 같아 말을 건네거나 찾는 일을 멈추기까지 몇 주 또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예전처럼 일상생활이나 휴가 계획을 세우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기대와 꿈의 상실

야무지고 꿈 많은 숙자는 삼 남매 가운데 맏이였다. 그런대로 행복했던 가정은 숙자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대학을 가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숙자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숙자는 연약한 엄마와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가장 아닌 가장이 된 것이다.

아버지 병원비로 빚까지 녀 숙자는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못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열심히 벌어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엄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이제 한숨 돌릴 만하게 되자 숙자는 갑자기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휴직을 하고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다거나 어떤 존재가 되리라는 가능성을 상실하기도 한다. 특히 미래를 위해 설계한 것들을 포기해야 하거나 꿈을 미루거나 접어야 할 때 상실을 경험한다. 비록 미래에 이루어질 설계이고 내면적인 꿈이라 해도 그것을 포기해야 할 때는 현재의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상실이 되어 고통이 따른다.

아끼는 물건이나 소중한 사람의 상실은 어린 시절에 많이 일어나고, 기대와 꿈의 상실은 청소년기나 성인기에 많이 일어난다. 상실은 자신의 정체성과 연관되기에 허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기대와 꿈을 잃게 되면서 찾아오는 정신적 아픔과 고통의 흔적이다.

우리는 꿈을 먹고 자란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희망하고 계획하고 꿈을 꾼다.  우리 기대는 삶의 방향과 색깔을 정하며 그 실현을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때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계획에 인생을 바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꿈과 기대를 이루지 못한 실망을 중년이 된 이후에 체험하게 된다.

꿈을 잃는다는 것은 그 꿈의 실현으로 얻게 될 많은 것, 곧 기쁨 자신감 사랑 만족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각각의 꿈은 그와 관련된 많은 기쁨을 동반한다. 우리가 꿈의 태동과 죽음에 대해 심사숙고 하지 않으면 내면의 무의식적 실망감과 비애로 인해 적극적으로 새로운 꿈을 꾸고 현실적 계획을 세우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그 꿈과 연계된 감정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자신의 꿈에 대해 정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그 꿈에 부여한 힘이 어떤 것인지 바로 불 수 있다.

마땅히 실현되리라고 믿던 희망을 상실하면 슬픔과 함께 분노와 자책감도 뒤따른다. 하지만 자책은 이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감정은 받아들이고 표출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존중하게 되고 새로운 미래를 희망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재확인함으로써 선택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고 다시 한 번 실현 가능한 꿈을 꿀 수 있다. 이루지 못할 것이 분명하거나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루지 못할 것이 있음도 인정하게 된다.

 

기능적 상실

재문이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어느 날 약혼녀와 함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깨어나 보니 의식은 말짱한데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목 아래로 전신이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약혼녀는 떠나버렸고 어머니가 간호해 주었지만 모든 음식을 거부하며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다.

이렇게 몇 년이 흘러 세례를 받게 되었고, 생각을 정리하여 불러주면 어머니가 맞춤법도 틀린 글씨로 받아 적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손발이 되어주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다. 그 동안 믿고 의지했던 하느님이 자신이 그토록 미안해하고 사랑하던 어머니를 시집 한 권 바치기도 전에 데려가신 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워 신앙도 접었다. 세월은 흘러 컴퓨터가 등장했고, 입에 젓가락을 물고 컴퓨터 치는 것을 가르쳐 주던 성당 아가씨와 결혼도 했다. 물론 어머니 대신 천사 같은 아내를 보내주신 하느님과도 화해했다.

 

이 사례는 교통사고로 신체를 잃음으로써 생긴 고통을 극복하고 성장한 이야기다. 외부 충격으로 근육이나 신경 기능, 신체의 일부분을 상실하는 것이 기능적 상실이다. 기능적 상실은 종종 자율성 상실로 이어져 보고 듣는 것, 그리고 근육운동의 조절기능을 잃게 하여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기능적 상실의 고통으로 평생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배려하기보다 자신들의 궁금증이나 해결하려는 듯한 사회 분위기는 당사자의 마음을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한다. 따라서 이 사례와 같이 고통을 딛고 기능적 상실을 창조적 기회로 바꾸려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지지하며 돕는 사회적 환경이 필요하다.

 

직업과 역할 상실

은행 지점장이던 소연이 아빠는 평탄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착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을금고 감사를 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의 삶을 온통 뒤집어 놓고 말았다. 마을금고 직원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횡령하고 잠적한 것이다.

집을 정리해서 서울 근교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소연이 엄마가 백화점 판매직으로 나가면서 소연이 아빠가 살림을 했다. 결혼을 앞둔 풀 죽은 아이들과 힘들어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루 종일 좁은 집 안에만 있는 것이 답답했지만,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조직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도록 교육과 훈련을 받아 특정한 직분과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자의건 타의건 언젠가는 그 직분과 역할을 놓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분과 역할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과 직분 상실로 자아실현의 꿈이 상실되고 아픔과 고통을 겪는다. 역할과 직분을 중요시하는 성장 위주의 사회에서 갑작스러운 명퇴나 실직은 엄청난 충격을 준다. 모든 꿈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존재보다 행위에 중점을 둔 현대사회에서 더 그렇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행위의 중요성을 배운다. 우리의 존재 가치를 행위와 연계시켜 무슨 일을 하느냐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이렇게 행위가 삶을 이끌기에 이 세상을 헤쳐 나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업을 갖고 일정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과 역할은 우리 존재에 기여하고, 자신을 발견하고 가능성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일에서만 찾다가 갑자기 그 역할이나 직업을 잃게 되면 우울함 저조한 기분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 무력감이 생길 수 있다. 직업을 잃은 원인이 다른 사람한테 있을 경우엔 그 사람에 대한 분노로 힘들어진다.

은퇴 후 자신의 정체성이 없어진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되어 사는 법을 모른다. 직업이 자기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고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직업이나 역할이 자신의 정체성이 될 만큼 큰 영향을 주었기에 그것을 잃었을 땐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된다. 사실 우리는 직업이나 역할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자신과 직업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나중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를 위한 마음 준비가 될 수 있다. 존재와 관련해 자신이 하는 일에 얼마나 큰 가치를 두느냐가 주된 관심이어야 한다. 다른 상실과 마찬가지로 직업이나 역할의 상실도 우리 인격에 영향을 미치지만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할 기회가 된다. 상실의 현실과 그로 인해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가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상실의 고통과 자신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자아의식에 손상을 주는 영향력을 무력하게 할 수 있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상실감

 

아치볼드 하트는 상실에 대한 민감성은 인생 초기의 경험과 관련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상실을 많이 경험하면 그 후에 경험하게 되는 상실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져 더 많은 우울을 겪는다고 말한다. 극도의 좌절에서 오는 상실은 우울의 원인이 되며, 이러한 우울은 사랑하는 대상과 겪는 내적 시간 때문이다. 애착행동 이별 상실 등이 인간의 정서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과거 경험에서 오는 우울은 과거 경험과 관련된 상실을 느낄 때마다 나타날 수 있다. 중대한 상실 이후에는 몸과 마음이 상실에 대해 반응하고 대처하여 상실을 극복하게 하는 반응기제로 반드시 우울을 경험하게 된다. 우울은 상실한 대상을 놓아 보내는 방식에 적응하게 하고 상실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아치볼드 하트는 ‘숨겨진 감정회복’에서 반응성 우울증을 촉발할 수 있는 상실에는 실제적 상실, 추상적 상실, 상상 속 상실, 위협감에 의한 상실이 있다고 한다.

 

실제적 상실

이는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상실이다. 실제 대상이나 사람, 특권을 상실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실직과 착오로 인한 수상기회 박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또는 별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상실한 사람이나 사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모든 유형의 실제적 상실로 경미하거나 극단적 비참함을 느끼는 정도까지 다양한 우울증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 삶은 물질세계와 떼려야 뗄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여러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물질세계와 많이 이어져 있을수록 실제적 상실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상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다.

 

추상적 상실

어떤 상실은 실제적이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눈으로 보거나, 무게를 재거나, 측정할 수도 없다. 사랑의 상실, 자존감 상실, 희망이나 야망의 상실, 중요 직책의 상실, 권력이나 특권의 상실 등을 추상적 상실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실은 매우 추상적이지만 우울증을 촉발하는 힘은 다른 어떤 실제적 상실에 뒤지지 않는다. 추상적 상실은 실제적 상실보다 다루기가 더 어려우며 때때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상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울증은 해결되지 않는다.

 

상상 속 상실

우울증이 생기는 원인이 상상 때문인 경우도 있다. 상상 속 상실은 실제로 일어난 것도, 추상적 상실도 아니다. 실제로 상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마치 상실을 경험한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편집증적 생각은 상상 속 상실과 우울증의 주요 원인이다. 이런 상실은 가장적인 것이라 완전한 해결이 불가능하다. 상상 속 상실을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 검증이다. 상상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도록 밀어붙여야 하며, 필요하다면 올바른 물음을 던지거나 앞뒤가 맞고 제대로인지 주의 깊게 가늠해 보면서 자주 점검해야 한다.

 

위협감에 의한 상실

위협감만으로도 충분히 우울증을 일으킬 수 있다. 실제적으로 상실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상실에 대한 위협감은 우울증을 촉발하기에 충분하다. 삶은 위협으로 가득하다. 경기악화 노화 실직 배우자 명성 돈 벌 기회의 상실 같은 위협을 받는다. 위협감에 의한 상실은 종종 상상을 이용하기에 대처하기가 가장 어렵다.

 

 

여러 요인으로 인한 상실

 

허버트 앤더슨과 케네스 미첼은 상실의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피할 수 있는 상실과 피할 수 없는 상실

인간의 경험을 형성하는 많은 상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상실은 특별한 생활양식의 선택으로 생기는 것이기에 피할 수 있다.

 

일시적 상실과 영구적 상실

영구적 상실은 무엇인가가 정말 끝났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피하려 하지만 결국 잃어버린 사람이나 대상 없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반면에 어떤 상실이 일시적임을 알거나 그럴 것이라고 상상하면, 상실감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재결합을 상상하거나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환상을 가짐으로써 그리움의 강도는 증가된다.

 

실제적 상실과 상상 속 상실

실제로 상실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상실을 상상하는 경우도 있다. 내적,  심리적 상실은 그것을 슬퍼하는 사람만 알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단순한 상상일 뿐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다른 상실과 마찬가지로 실제적 상실이다. 그러나 상상 속 상실은 ‘자기기만 self-deception‘을 내포한다.

 

예견한 상실과 예견하지 못한 상실

예견한 상실은, 상실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또 하나의 중요한 슬픔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은 오랜 투병생활을 해온 사람의 죽음과 매우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갑작스런 상실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고 느끼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힘겹게 투병생활을 하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며 위로 받기도 한다.

 

 

2. 인생의 굴곡에 따른 상실

 

우리는 성장 단계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위기와 상실을 경험한다. 따스하고 평온한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나오면서부터 우리는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일곱 살이 되어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수업과 발표, 그리고 인간관계에 열중하게 된다. 결혼을 하면 익숙한 관계와 장소를 떠나야 하고, 마침내 노년에는 정들었던 지상 삶을 떠나야 한다.

 

유아, 유년기의 상실

아빠는 내가 열세 살 때 스물세 살 된 새엄마와 재혼했다. 친 엄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그 후 아빠는 정신을 놓고 살았고 할머니께서 나를 키우셨다. 한동안 죽은 사람처럼 지내던 아빠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 삶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예쁜 처녀를 만났다. 처음엔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엄마’라고 불렀지만 반항심이 일어나 나도 괴로웠고 새엄마도 많이 힘들게 했다. 일부러 친구들과 싸워 엄마가 학교에 불려 가게 했고, 아빠 앞에서 엄마의 흉을 과장해 늘어놓았으며, 엄마가 좋아하는 화장품을 실수로 가장해 쏟곤 했다.

아빠와 재혼한 새엄마는 냉대를 참아가며 내게 정성을 쏟았다. 그런 엄마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사춘기가 지나서다. 나 때문에 동생 갖는 것도 포기한 엄마의 사랑을 그때서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친 엄마, 열세 살 때까지 엄마 없이 산 외로움, 새 엄마와의 갈등과 화해는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엄마와 딸은 많은 말을 나눈다. 개념화된 말을 뛰어넘는 사랑의 언어이자 조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영원한 흔적을 남기는 침묵과 고요 속에서 나눈 언어다. 태아는 모태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무의식을 지배한다. 그래서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영향을 받는다. 마치 끊을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된 듯하다.

아마 보지 못했기에 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했을 것이다. 자신을 낳다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는 죄책감과 함께 슬픔의 감정이 따라왔을 것이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엄마를 찾게 되었을 때 크게 위기가 온다. 반쪽 사랑밖에 받지 못했다는 허전함과 고생하다 돌아가신 엄마의 정이 살아나면서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이 위기를 잘못 넘기고 많은 세월을 한숨과 눈물로 지낸 사람들이 많다.

이 사례에서 또 한 번의 위기는 새 엄마가 생기면서 찾아온다. 친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있는데 새로운 사람을 엄마라고 부른다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그것은 돌아가신 친 엄마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 요소가 사연 안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길고도 힘든 싸움이다.

이 과정을 극복하고 엄마를 받아들인 것은 삶에서 큰 전환점이 된다. 냉대를 받아가며 딸을 정성을 다해 키운 새 엄마, 반항과 온갖 불량스런 행동을 감싸 안으면서 아빠와 딸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끈 새 엄마의 배려와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 이 사랑은 하늘나라에 계신 친 엄마의 사랑과 새 엄마의 사랑을 연결할 것이다. 세상 끝날까지 남아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사랑에 빠질 때

아이가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상실감을 체험한다. 어머니와 애착 관계에 있다가 그 애착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곳 선더랜드 Margot Sunderland는 ‘상실을 경험한 아동을 도우려면’ 에서 부모와 함께 있는 아기들을 세심하게 관찰한 결과, 아기들이 생애 초기부터 사랑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모와 유아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분야에서 세계적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대니얼 스턴 Daniel Stern은 (면밀한 비디오 분석을 통해) 아기들도 사랑에 빠지며, 성장하면서 더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갖게 됨에 따라 여러 번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는 생후 2개월 반경부터 아기와 부모는 서로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몇십 초 또는 심지어 일분 이상 가만히 응시하기도 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유아들이 다른 물체를 볼 때는 그렇지 않다. 말없이 오랫동안 서로 눈을 맞추는 것은 성인한테서도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만일 두 성인이 5초 동안, 도는 그 이상 말없이 서로를 응시한다면, 그것은 싸울 때거나 성적 친밀감의 서곡일 것이다….. 입을 맞추는 것은 대체로 두 살 전에 배우고, 껴안는 것은 그보다 훨씬 전에 배운다. 동시에 아이들은 손으로 부모의 얼굴을 애무하고 어루만지는 것을 좋아한다. 부모에게 기대거나 안겨있는 동안에도 두 살 이전 아이들은 애정의 몸짓으로 보이는 골반 율동을 자주 한다.”

 

아이가 직면하는 죽음의 유형과 슬픔에 빠지는 상황

베르나르도 우Bernardo Woo와 제럴딘 웡 Geraldin Wong은 ‘슬픔에 빠진 아이들’ 에서 아이가 직면하는 죽음의 유형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부모의 죽음이다. 어린아이는 모든 감정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쏟아 붓기에 부모의 죽음은 아이에게 재앙과 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둘째는 조부모의 죽음이다. 조부모는 무조건적 사랑을 베풀고 보살펴 주는 존재로서 아이 삶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아이가 조부모와 맺은 관계의 질에 따라, 곧 친밀하고 사랑하는 관계였는지 아닌지에 따라 죽음에 대한 아이의 반응은 크게 달라진다.

셋째는 형제나 자매의 죽음이다. 아이는 늘 함께 생활하던 형제자매의 죽음으로 크게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슬픔 분노 당혹감 외로움 공포 불안 짜증 죄책감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가족 구성원이 죽으면 가족의 일상생활이 잠시 중단된다. 부모는 자식의 죽음으로 상심한 나머지 다른 자녀들을 돌보지 못한다. 이때 아이는 혼란스런 분위기와 넘치는 감정에 위축되고 형제나 자매를 잃어본 적 없는 또래 친구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자기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거나 자기가 무엇을 해도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넷째는 친구의 죽음이다. 친구, 특히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슬픔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는 애완동물의 죽음이다. 애완동물을 몹시 사랑한 아이의 경우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베르나르도 우와 제럴딘 웡은 아이가 슬픔에 빠지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오랜 병고 끝에 죽은 경우(예견된 죽음), 사랑하는 사람이 갑작스런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경우(예기치 못한 죽음),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하거나 살해 당한 경우(예기치 못한 죽음이자 특히 다루기 힘든 상황), 애완동물이 죽은 경우 등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외에도 아이가 슬픔에 빠지는 상황은 오랫동안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경우, 부모가 이혼하는 경우, 가족 전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경우(친구들을 그리워 함), 전학하는 경우, 학대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거나 화상을 입거나 흉터가 남은 경우(자기 몸이 훼손되었다고 느낌),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한 경우(전에 하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가족과 친구를 그리워함) 등을 예로 든다.

아이가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상실 가운데 하나는 부모의 죽음이다. 삶의 중요한 발달 단계에서 부모의 죽음은 물질적, 정서적, 정신적, 영적 지지의 상실이며, 자녀가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안정된 가정환경의 상실을 의미한다. 또한 보호자의 상실이며 본받아야 할 모델의 상실이다.

 

아이가 슬픔을 경험하는 시기와 반응

아이들은 통제하기 어려운 슬픔으로 충격을 받는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충격적 상실감에서 온 깊은 슬픔은 성장하기까지 지속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나 심리 치료 전문가들이 그 중요성을 일깨운다.

허버트 앤더슨과 케네스 미첼은 태아는 생명에 필요한 영양소와 환경을 제공하는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생존을 위한 완전한 의존 관계라고 설명한다. 아기는 엄마의 태반에서 떨어지면서(자궁의 애착관계가 끊어지면서) 첫 번째 분리를 경험하는데, 이는 슬픔의 근본적 차원을 설명할 수 있는 근간이다. 곧 슬픔의 근원은 인간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애착과 분리에 있다.

출생이란 아기가 독립적 삶을 시작하는 동시에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슬픔은 ‘애착과 분리’라는 한 쌍의 필연적 연관성에서 시작된다. 애착이나 상실 없는 삶은 없듯이 슬픔 없는 삶도 없다.

프로이트 Freud는 유아가 생후 처음으로 애착을 형성한 대상인 어머니와 맺은 관계에서 상실을 경험한 후 다른 대상을 찾지 못하고 상실된 대상을 내재화하면서 우울감이 형성된다고 했다.

대상 상실과 우울의 관계에서 대상 상실 모델을 정립한 에이브러햄 매슬로 Abraham Maslow는 어린 시절의 우울증은 상실이나 이별 등에 대한 반작용 또는 노여움, 죄의식이 내면화한 결과라고 한다. 대상관계 이론을 토대로 초기에 엄마와 관계를 맺었던 양상대로 타인들과도 관계를 맺게 되는데 초기의 애착관계가 단절되어 대상 상실을 경험하면, 후에 다른 대상들과 적절한 애착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생겨 우울증에 걸리기 쉽고, 성인기에 겪는 상실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외상을 되살려 우울 과정이 촉진된다고 보았다.

우울증의 첫째 과정의 특징은 구강기 동안 형성된 유아와 어머니의 애착관계가 지닌 취약성이다. 둘째는 실제 또는 상상적 대상 상실과 관련 있고, 셋째는 사랑하는 대상을 안으로 투사하여 대상 상실에서 오는 고통을 통제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사용하며, 넷째는 사랑하는 대상이 자기 안으로 들어왔으므로 대상 상실에 애증이 혼합되어 있으며 자기 안으로 투사된 분노감이 우울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생후 5,6개월이 지난 후부터 어린이는 일차 양육자와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떨어져 있게 될 때 좀 더 심각한 형태의 상실감을 경험한다. 아동 초기(5세에서 8세까지)가 되면 ‘미래’라는 시간적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이별을 하면 앞으로 엄마(또는 아빠)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시기의 아이는 대부분 가족의 죽음이나 이혼이 자기 탓, 자기가 행동을 잘못한 때문이라고 믿으며, 이에 대해 죄의식을 느껴 깊은 슬픔을 보인다.

이러한 어린이의 정서를 어른들이 관심 있게 들어주고 죄책감을 씻어주지 않으면 어린이의 슬픔은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확대되기 쉽다. 또한 7,8세 정도의 아이가 애착 대상인 일차 양육자와 이별을 하게 되면 깊은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 특성이 나타난다. 곧 살아 있는 양육자에게 과잉 의존 행동을 보이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거나 분리에 대한 공포 반응, 예를 들면 백일몽, 퇴행행동, 불면증, 악몽, 등교 거부, 상징적 도벽, 건망증, 친구 관계가 깨짐, 자주 물건을 깨거나 넘어져 다침, 지나친 두려움이나 지나치게 고분고분한 태도와 행동을 보인다.

베르나르도 우와 제럴딘 웡은 유아와 유년기 때 슬픔에 빠지는 아이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3세 미만의 어린아이는 죽음이나 이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실감은 느낄 수 있기에 중요한 보호자와 이별할 때 울고, 죽은 사람을 찾으며 슬픔을 표현하고, 잠자는 습관, 먹는 습관, 배변 습관에 변화가 생긴다.

4-6세 정도의 어린아이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제한적이어서 죽음을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죽음에 대해 많이 물으며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 지나치게 매달리기, 분노 발작, 울기, 슬픔 표현하기, 형제자매나 친구들과 싸우기, 버려질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 자다가 오줌을 싸고 손가락을 빠는 퇴행적 행동, 죽은 사람과 대화하고 그 사람이 아직 옆에 있는 듯 행동하기, 주변 상황에 무관심 등의 모습을 보인다.

7-9세의 저학년 아이는 유아기 아이보다 죽음을 잘 이해한다. 죽은 사람 (또는 애완동물)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지만 죽음이 자신을 비롯하여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의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신체적 증상(예를 들면 복통과 두통), 감정 기복, 친구와 가족한테서 물러남, 퇴행(자다가 오줌 싸기, 분노 발작, 보호자에게 매달리기), 등교 거부, 성적이 떨어지거나 짜증 내거나 화를 내는 등의 특징을 보인다.

10-13세의 아이는 점점 성숙해 가면서 어른과 비슷한 수준으로 죽음의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믿는 아이도 있다. 열두 살 정도가 되면 죽음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살아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또한 자신을 포함하여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책임감을 느끼고, 죽음의 영향을 받는 다란 가족을 보호하며, 특정한 감정을 유치한 감정이라고 생각하여 당당히 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상실로 인한 슬픔을 겪는 시기에 대해서는 발달 심리학자들 사이에 많은 이견이 있지만, 아동기 때 비탄하는 능력이 자아 기능의 한 부분으로 성숙한다는 데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올펜슈타인 Wolfenstein은 인간이 충분히 분화되는 시기인 청소년기까지는 애도하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는다. 한편 보울비 Bowlby는 6개월 된 유아들도 어른한테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비탄 반응을 경험한다고 하며, 퍼먼 Furman은 3-5세경에 애도하는 능력이 생긴다며 중간 관점을 취했다.

너지 Nagy는 같은 주제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아동기 애도의 개념적 단계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단계는 3-5세 경으로, 죽음을 고인으로부터 분리하여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둘째 단계는 5-9세 경으로, 죽음을 의인화하거나 때로는 회피할 수 있는 시기다. 셋째 단계는 9-10세 경으로,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시기다.

아이들은 인지적으로 대처하는 기술이나 정서적 능력과 죽음에 대한 이해 능력이 덜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상실과 관련된 다양한 정서 문제를 드러내는데, 이것은 신체적 문제나 비정상적 행동과 연결된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죽음으로 또래들한테서 많은 괴롭힘을 당하며, 사회적 문제를 더 많이 경험한다. 어린아이들은 부모가 죽은 후 4개월까지는 고인이 된 부모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느낌을 많이 갖고, 1,2년 동안은 부모 꿈을 많이 꾼다. 어린아이들은 죽은 부모가 ‘어딘가 멀리 떠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으며 더 자주 운다. 많은 아이에게 신체 증상도 나타나며, 어떤 아이들은 이러한 현상이 2년이나 지속되기도 한다.

 

아이가 슬픔을 겪는 과정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아이 삶에 매우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다. 아이가 부모를 잃었을 때 겪는 슬픔은 인생에서 맛보는 가장 쓰라린 아픔일 것이다. 유아와 아동들도 성인들처럼 흔히 사랑의 상처를 입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가장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이는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오며, 떠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위안을 줄 수 없는 듯이 느끼는 경험이다.

사람들은 흔히 유아와 아동은 상실의 슬픔을 성인만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경생물학이 보여주듯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유아와 아동은 부모와 깊은 사랑에 빠지기에 사랑의 상실로 인한 고통에 성인만큼이나 취약하다.

부모를 잃은 경우를 포함해 다른 죽음을 경험한 아이는 마땅히 슬퍼해야 한다. 아이는 삶이 안전하고 합리적이며 언제나 그대로라고 생각한 자신만의 세계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과 악, 행복과 슬픔 등 인생의 모든 것을 깊이 경험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소중히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삶을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하는 것, 웃음을 되찾는 것이다.

베르나르도 우와 제럴딘 웡은 성인들처럼 아이들 또한 정상적 슬픔의 과정, 곧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상적 슬픔이 비정상적 슬픔으로 바뀌면 이 다섯 단계의 감정 없이 생각과 감정이 표현되거나 인식되지 못하고, 슬픔의 과정이 정지하고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갑작스럽거나 비극적인 죽음, 곧 살인이나 자살, 끔찍한 사고나 갑자기 발견된 질병으로 인한 죽음인 경우엔 아이 또한 심한 충격을 받아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아이도 성인처럼 상실을 겪으면 슬픔 분노 죄책감 불안 등 다양한 감정 반응을 나타낸다. 상실의 고통을 다루는 아이의 능력은 성인 겪는 경험을 관찰함으로써 영향을 받는다. 만일 아이들이 비탄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어른을 보게 된다면, 아이들한테 유익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어른이 지나치게 비탄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도 자신의 감정에 놀라고 압도당하게 된다.

베르나르도 우 와 제럴딘 웡 은 아이는 부모가 죽음에 직면해서 보이는 반응에 민감하다고 강조한다. 부모가 슬픔에 압도당하면 아이는 부모의 격렬한 슬픔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슬픔의 과정 중 거부 단계에 있는 부모 때문에 아이가 혼란을 느끼거나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부모가 지나치게 슬픔에 빠져 있으면 아이가 무엇을 바라는지 지켜보지 못해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없다.

 

아이의 슬픔 작업 돕기

한쪽 부모가 죽게 되면 가족 역할에 변화가 온다. 이에 대한 적음 과정이 잘 진행되지 않으면 가족의 기능이 마비되고 사별 아동은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아이는 남은 한쪽 부모를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느껴 부모를 보호하려 하고, 부모를 위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고 싶어한다. 모든 게 완벽하면 부모가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는 척한다. 곧 가능한 한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는 감정을 억제하는 생존 전략을 세움으로써 강하고 끈기 있고, 웬만해서는 울지 않는 아이가 된다.

데이비드 David와 낸시 거스리 Nancy Guthrie는 ‘상실의 아픔을 딛고 서다’ 에서 아이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슬픔을 회피하지 않고 적절히 슬퍼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며, 아이들이 슬픔을 삭이는 데는 최소 2년 이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아이는 부모를 모델로 삼기 때문에 부모가 먼저 잘 적응해야 한다. 부모의 말도 중요하지만 부모의 행동은 아이의 삶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친다.

아이는 부모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직면한다. 부모 중 한쪽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경우 남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죽은 배우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그리운지 말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 대해 너무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과도한 집착은 아이의 마음 문을 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별 아동이 잘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별 부모의 적응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정신 건강이 아이들의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생존한 부모가 우울하거나 개인적 대처가 부적절할 때, 싸움과 다툼이 낮을 때도 아이들은 죽음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또한 아이들은 부모의 가식을 누구보다 잘 간파한다. 아이는 부모가 잘못된 방법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사람들한테는 잘 지낸다고 말하는 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 만일 가족의 상실에 적합하게 애도하지 못한다면, 그 영향은 가족 모두에게 치명적 상처를 남길 것이다.

아이의 슬픔을 돕는 사람은 아이가 어른과 다른 방식으로 상실을 슬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곳 센더랜드 는 어린아이들의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아이들은 종종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후에도 곧 다시 정상적인 삶을 계속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설명한다.

그 까닭은 유아와 아동들의 언어능력이 제한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운동 충동을 갖도록 발생학적으로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상실을 겪은 후에도 아동들은 여전히 달리고 뛰어넘고 올라가고 공놀이를 한다. 상실의 슬픔을 가만히 앉아 삭이면서 심하게 내향적이거나 우울한 것과 연관시키는 어른의 눈에는, 아동의 이런 활발한 행동이 슬프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아동이 그네를 타고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는 것을 보고 부모는 ‘음, 잘 적응하는 것 같군.’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아이는 이상 기류 속으로 들어간 비행기처럼,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내면에 깊이 잠재해 있던 슬픔과 욕구, 그리움 등으로 인한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다.

상담자나 돌보는 어른이 그 감정을 대면하도록 도움을 주려 하면 아이는 잠시 감정을 살짝 끄집어낸 후 다시 자신이 하던 놀이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어른들은 이러한 아이의 성향을 존중해야 한다. 아이는 그런 식으로 여러 번 우왕좌왕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실의 아픔을 겪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에서 겪는 아픔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아이에 맞추어야지 어른 마음대로 아이 감정을 좌우하려 하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아이의 방식대로, 아이가 바라는 시간에, 바라는 만큼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르나르도 우 와 제럴딘 웡 에 따르면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른 방식으로 상실감을 표현하고 대처하며,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고, 사람들과 다르게 보일까 두려운 마음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거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도 어른처럼 슬픔을 느끼지만 아직 표현력이 미숙해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데이비드 와 낸시 거스리 는 어른이 아이에게 솔직한 심정을 표현하도록 도와주면 슬픔을 극복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고, 부모 또한 속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아이들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진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슬픔을 겉으로 표현하도록 이끌고, 죽은 사람에 대해 너무 오래 이야기하지 않게 하라고 한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한번도 울지 않는다고 걱정하는데 사실 아이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운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슬퍼하는 방식은 어른과 다르다.

이와 반대로 죽은 사람에 대해 절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에 갔다는 말로 아이의 마음을 달래어 슬픔과 의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교 가정일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가 스스로 천국의 소망을 받아들일 대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마곳 선더랜드 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이한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심리적 메시지를 들려주라고 제안한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세상이 따뜻함과 빛깔을 잃어버린 황량한 겨울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따뜻함과 빛깔은 되돌아 온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한동안 삶을 원망하게 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편안해지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울거나 울고 싶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하염없이 운다.
  • 드러내 놓고 우는 것은 속으로 우는 것만큼이나 용감한 일이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위로해 줄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문제는 그 사람을 어떻게 찾는가 하는 것이다.
  • 아이들은 누가 친절하고 친절하지 않은지, 누가 고통스런 슬픔을 잘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지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그러울 필요가 있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게 너그러울 필요가 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경우, 내면은 매우 다르게 느낄 수 있다.
  • 헤어졌거나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은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보물과 같다.
  • 용기를 내어 깊이 사랑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더 많은 상처를 받는다. 지금 몹시 마음이 아프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아이는 부모의 죽음에 대해 곧바로, 그리고 직접 듣는 것이 좋다.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아빠는 멀리 가셨다”, “엄마는 하느님과 함께 쉬고 있다” 와 같은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를 떠나 보내기 위해서는 부모가 정말로 영원히 갔다는 것, 다시는 깨어나거나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한쪽 부모가 죽음으로써 가정 상황이 변하겠지만 서로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언제나 아이를 사랑하고 돌볼 것임을 확신시켜 주어야 한다. 또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산다는 것, 죽은 부모가 아이를 사랑했고 아이를 남겨둔 채 떠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것, 그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믿게 해야 한다. 아이한테 장례와 매장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설명하고 거기에 참여하도록 권하는 것이 좋다. 고인을 떠나 보내는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아이를 치유할 수 있지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생존한 부모의 행동은 아동기의 사별 과정에 중요하다. 결혼에 대한 만족도가 낮았거나 배우자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한 생존한 부모에게 사별로 인한 가족들의 다양한 변화는 건강 문제와 경제적 어려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규모가 큰 가족을 위한 책임감 등으로 스트레스를 일으킨다.

부모의 역기능은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한다. 죽음 이후 초기 몇 개월 동안 아이들은 사회적 후퇴, 심한 불안과 우울감, 수면 장애를 경험한다.

아이들은 사별 후 1,2년 동안 다양한 형태의 정서적 행동적 어려움을 나타내고,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며, 생활 사건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또래에 비해 성숙하지 않다고 느낀다. 또한 사별 후 2년까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경험하기도 한다.

사별을 경험한 부모가 자녀의 감정과 행동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모 자신이 슬픔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울한 상태에 있는 부모는 자신의 환경과 아이들을 실제보다 더 열악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아이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는 것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부모를 보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셋째, 생존한 부모는 아이가 실제로 행하는 것보다 더 잘하는 아이가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리다고 슬픔도 적게 느낄 거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슬픔은 아이들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 양태는 수면 장애, 악몽, 지나친 의존, 퇴행, 과잉행동 장애, 식욕 장애, 학교 문제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아이에게 우는 것은 건강한 것이고 도움이 되며, 노는 것도 행복을 느끼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돌아가신 엄마나 아빠도 그러길 바랄 것이라는 것도 함께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생존한 부모는 고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족들은 서로를 지지해 주어야 한다.

휴일이나 생일, 제사 또는 특별한 때가 되면 먼저 아이를 준비시키는 것이 좋다. 그런 때는 상실감이 더욱 클 것임을 알려준다. 남은 사람한테는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와 나비 등을 예로 들어 죽음을 통한 새로운 삶의 변화에 대해 설명해 주면 좋다.

 

상담자의 도움

아이가 상실의 슬픔을 회복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회피 단계다. 상실했다는 두렵고 무서운 사실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는 충격적 현실에서 일시적이지만 어느 정도 충격을 완화하는 보호막 역할을 하는 ‘정서적 마취’다. 둘째는 대면 단계다. 슬픔을 가장 깊고 크게 느끼는 단계다. 이 단계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아직도 상실에 대한 부정과 부인이 존재한다. 셋째는 회복과 재적응 단계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비통이 차츰 줄어들고 정서적 사회적 일상생활로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는 동안 아이에게 문제가 드러날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베르나르도 우 와 제럴딘 웡 은 아이에게 다음과 같은 징후와 증상이 나타나면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강조한다. ‘죽은 가족의 흉내를 낸다. 학교 성적이 크게 떨어진다. 학교에 가지 않으려 한다. 위로하는 행동이나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지지를 거부한다. 지나치게 슬퍼한다. 친구들이나 일상생활에 흥미를 잃는다. 수면이나 식습관에 큰 변화를 보인다. 악몽을 꾼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행동한다. 감정을 파괴적 방식으로 분출한다. 지나치게 신체 증상(두통, 복통)을 호소한다. 급격한 행동 변화를 보인다.

상담자가 사랑하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애도를 하도록 도와주고, 두려움과 걱정을 포함한 감정을 표출할 수 잇는 출구를 제공하며, 아이들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죽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바꾸도록 이끌고, 경험의 정상적인 한 부분으로서 죽음에 대해 토의하도록 한다. 또한 상담자는 아이의 행동 특성에 따라 좀 더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고, 한쪽 부모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인정해 주고 이해한다.

상담자는 아이가 현실 세계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아이가 ‘어린아이’처럼 되고 싶어하는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거짓말이나 훔치는 행동의 상징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이해를 아이한테 적절히 전달한다. 상징 대상자에 대한 미움과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도와준다.

도한 아이에게 가벼운 신체 접촉으로 아이가 겪는 슬픈 상실의 감정을 인정하며 이러한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심리적 안정감을 회복하는 데 효과적이다. 앞으로 누가 자기를 돌볼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갖는 경우도 많기에 상실로 고통 받은 아이한테는 그러한 불안을 인정해 주고 앞으로의 양육에 대한 정보를 줄 필요가 있다.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놀이 미술 연극 음악 무용 동작치료 같은 다양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말 이외에 다른 매개체를 통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윌리엄 워든 William Worden은 ‘가족을 잃은 아이의 슬픔’에서 사별 아동을 돕는 구체적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는 개별 상담이다. 개별 상담은 주로 비지시적 놀이 활동을 활용하는데, 이때 아이는 각종 장난감 놀이나 게임을 하며 상담자와 상호작용을 한다. 이러한 놀이 상상력 창조적 활동을 하는 동안 아이는 갈등과 불안이 나타나게 된다.

상담자는 아이의 적응을 탐색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슬픔을 표현하도록 돕는다. 또한 죽음을 개념화하는 아이의 능력, 고인과 마지막 관계를 구축하는 능력, 그리고 생존한 가족들과의 관계 등을 탐색한다.

비지시적 놀이에 더하여 개별 상담을 활용하는 상담자는 심상적 기법을 활용한다. 아이에게 안정감이 생기면 특정 상황을 상상하게 한다. 아이는 시나리오에 나오는 사람과 상호작용을 한다. 예를 들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용서를 구하고, 미처 말하지 못한 감정을 표현하면서 고인이 된 부모와 상상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죽음 이후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슬픔을 다루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시나리오 장면은 다양하게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다. 가족 개입은 사별 아동들이 가족 안에서 슬픔을 풀어놓는 작업을 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가족 구성원이 함께 죽음에 대해 대화하고, 사별 후 가족 체계에 재적응하도록 배려한다. 개방적 의사소통은 가족이 죽음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게 하고, 가족 안에서 사회적 지지를 하며, 아이가 생존 부모한테서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가족 재적응을 가족 개입의 목표로 세운 가족 상담자는 가족 안에서 고인이 한 역할과 고인과 가족의 관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 베르나르도 우 와 제럴딘 웡 은 특히 비정상적 슬픔으로 고통스러워하거나 가족이 끔찍한 사고나 자살로 죽은 경우에는 개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둘째는 활용하기가 쉬운 미술 활동이다. 어린아이들은 대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크레용 종이 찰흙놀이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 활동은 여러 장점이 있다. 아이들은 부모가 돌아가실 당시의 엄청난 고통을 기억할 수 있다. 슬픔과 그 밖의 감정을, 관심을 보이는 어른과 나눌 수 있고, 아이가 경험했음직한 내적 혼란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미술 활동은 아이들에게 슬픔의 감정을 이해하게 해주는 좋은 도구다.

그림 그리기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걱정하는 것 그리기, 자신을 매우 힘들게 하는 것 그리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기,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 묘사하기, 사망한 부모나 형제 등과 관련된 좋은 기억 그리기, 최근에 꾼 꿈 그리기, 자신이 그릴 수 있는 가장 추한 그림 그리기, 가족 그리기, 부모가 사망하기 전과 현재의 자신 그리기,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 그리기 등을 들 수 있다. 찰흙놀이도 마찬가지다. 그림 그리기와 찰흙 조각에서 아이가 선택한 색감은 아이의 감정 상태를 반영한다.

셋째는 인형놀이다. 인형을 가지고 자기 대신 말하게 함으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과 감정을 투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어느 정도 안전한 거리를 두게 하여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활동이다.

넷째는 신문 기사를 쓰는 것으로, 좀 더 큰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이다. 고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 생각 물음, 고인과 관련된 자신의 꿈을 종이 위에 쓰게 한다. 시를 좋아하는 아이는 시를 신문에 실을 수 있다.

다섯째는 고인에게 편지 쓰기다. 그러나 상담자는 이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개념이 없는 아이들이나 사망한 부모 또는 형제가 ‘잠시 떠났다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혼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지 쓰기는 아이가 부모의 사망 전에 하지 못했거나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은 경우에 적절하다. 이러한 편지를 보관하거나 풍선을 이용하여 하늘로 날려 보낼 수도 있고, 땅에 묻거나 여러 방법으로 발표할 수도 있다.

여섯째는 추모 책 만들기 다. 이 활동은 글쓰기와 미술 활동이 잘 결합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추모 책은 고인에 대한 기억을 모아놓은 책이다. 아이들은 책 속에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써 넣거나 사진을 첨가할 수 있다.

데이비드와 낸시 거스리 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신앙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갈등을 겪으며, 우리가 생각과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하느님은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은혜를 주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하느님을 다시 신뢰하는 과정을 아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모는 의구심과 고통을 하느님께 가지고 가서 도우심과 치유를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이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하느님은 부모를 가족한테서 앗아가 버린 사고나 병을 우리만큼이나 미워하시며, 우리가 슬플 때 함께 슬퍼하신다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사진을 통해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림을 그리며 유품을 소중히 간직하도록 가르쳐 주어도 좋다. 나아가 시간이 흐르면 추억하는 기쁨이 상실의 고통을 대신하게 될 것 임도 알려준다.

 

 

청소년기의 상실

나는 동네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짓기 과외를 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가운데 ‘정민’이라는 중학생 여자아이가 있다. 공부도 잘하지만 마음 씀씀이가 더 예쁜 아이다. 정민이는 이해심도 많고 인정도 많고 생각도 깊고…, 어디 한 군데 모난 데가 없다.

그런데 며칠 전 오랫동안 지병을 앓던 정민이 아빠가 돌아가셨다. 아빠의 죽음 앞에서 정민이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아 보였다. 학교는 물론 과외수업에도 나오지 않고, 친구들과 엄마한테까지 말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나도 몇 번이나 찾아가 위로하려 했지만 만나주지 않는다.

 

사춘기가 되면 유아기의 순진함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악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유아기의 의존성과 성인으로서 독립성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지적-감성적 시야를 넓히게 된다.

위의 사례에서 청소년의 부모 상실로 인해 겪는 엄청난 충격을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어떤 아이가 상처 받지 않겠는가? 더구나 어린 학생은 더 깊은 절망감으로 빠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으로써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러한 스트레스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한다. 한마디로 복합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다.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에는 다른 시기보다 상처를 받는 강도가 더 크다. 신뢰하던 것이 무너지면 다른 부분은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주위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기에 학생이 겪는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상적이고 건강했던 학생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이 사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선생님이다. 사례에서 선생님이 몇 번이나 찾아가 위로하려 했지만 만나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래도 선생님의 애정 어린 배려와 관심이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별 효과가 있을까?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이에게 반항심만 더 키우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시기에는 선생님의 친절하고 조건 없는 사람이 학생한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너를 판단하고 여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다 해도 나는 너를 믿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님은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라는 말로든 다른 방법으로든 보여주어야 한다.

또 하나 이해해야 할 것은 이렇게 상실감에 빠져 기력을 잃은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실컷 슬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같이 하염없이 슬퍼하며 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위의 사례에서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한 사람도 선생님이다. 공감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도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전달될 때 정민이는 마음 놓고 슬퍼할 수 있다.

이런 관심과 애정 어린 관계를 통해 치유는 시작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슬픔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순간 잊어버릴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슬픔을 통해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할 것이다. 저 세상으로 갔지만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설 때 분명히 더 성숙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은 분명히 전달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이 치유하는 데 매개 역할을 할 것이다. 신뢰가 싹텄을 때 일상 안에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 좋다. 같이 여행을 하거나 시간이 안 되면 계획만이라고 짜보는 것도 방법이다. 다른 자그마한 일도 함께할 수 있다.

 

슬픔에 빠진 청소년의 특징

베르나르도 우 와 제럴딘 웡 에 따르면 슬픔에 빠진 청소년의 특징은 죽음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문제와 같은, 어른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를 책임지기도 한다. 또한 죽은 사람의 역할을 떠맡으려 하거나 어른처럼 행동하고, 통제력을 잃을까 두려워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항적 행동을 하는 청소년도 있다. 곧 위험한 행동(차가 오는지 보지도 않고 길 건너기 등), 무단결석이나 가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신체적 질병 호소, 약물이나 알코올 남용, 문란한 성행위 등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룹 치료와 상담

데이비드와 낸시 거스리 는 청소년은 어른들이 말하는 것보다 자신이 표현하지 못하는 심정을 다른 친구가 이야기하게 되면 또래의 말에 큰 영향을 받기에, 특히 그룹 치료가 십대 청소년에게 효과적이라고 제안한다.

그룹 치료를 통해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또래가 있음을 알게 되고 자기와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따라서 자녀가 바라지 않더라도 상담 받을 것을 권한다.

상담을 의뢰하는 것을 마치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어린이나 십대 청소년은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상황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일일이 부모에게 이야기하기 힘들어하기에, 또 친구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듣고 나면 보통 당황하는 반응을 보이기에, 청소년의 심정을 이해하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를 아는 상당 선생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런 편견 없이 청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슬픔의 회복

청소년 시기는 발달심리학에서 부모와 정서적 분리가 이루어져야 하는 시기다. 청소년들은 부모가 언젠가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청소년들은 장례식에 참석하는 기회를 갖게 되고, 장례식을 준비하며 고인의 몸을 보고, 장례식에서 거행되는 구체적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부모의 사망 후에도 부모가 돌아가시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특히 남자 청소년들은 상실로 인해 가족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더 잘 깨닫고 성숙하게 행동한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고인이 된 부모와 애착관계가 다소 줄어들지만, 고인이 소유한 물건을 가지 있게 여기고 소중히 간직한다. 부모의 죽음 이후 1년 동안 사별 청소년들은 건강 문제와 수면 장애를 겪을 수 있기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학습 문제, 집중력에는 별문제가 없으며 분노와 비행 非行 도 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가족 안에서 긴장과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사별 후 2년 정도가 지나면 대부분 정상으로 돌아온다.

 

 

청장년기의 상실

광고회사에 다니다 그만둔 지 한 달 정도 된다. 지금은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고 있다. 대학 진학 때부터 내 인생은 늘 내 의사와 상관 없이 흘러온 것 같다. 국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독어교육학과에 들어갔고, 소신 있게 지원한 잡지사 아르바이트 자리는 나를 따라 심심풀이로 지원한 친구에게 돌아갔다. 나는 24시간 편의점에서 시간만 축내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남자 친구도 내 쪽에서 호감을 가졌던 친구는 사귀지 못했다. 일일이 엇나간 내 삶의 면면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참 신기하다.

 

이 사례에는 몇 가지 중요한 상실이 있다. 사례 주인공은 대학을 들어갈 때도, 소신 있게 지원한 잡지사 아르바이트 자리도, 호감을 가졌던 남자 친구도, 광고회사에 다니는 것도, 하고자 하는 것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은 뜻대로 되지 않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은 일어난다. ‘내 인생은 늘 내 의사와 상관없이 흘러온 것 같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만 같다. 여기서 삶이 자꾸 어긋날 때 오는 상실감을 잘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실패로 인해 실망했을 때 그 감정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보려 하지 않거나 제대로 치유하지 않으면 계속 엉뚱한 것을 선택하게 된다.

사례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꾸었던 꿈을 잃어버렸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하리라는 기대를 잃어버렸다. 또 마음에 드는 남자 친구를 만나리라는 희망을 잃었기에 미래에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리라는 기대를 잃게 될 것이다. 아마 주인공이 나이 들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면 자신이 완벽한 부모가 되리라 생각했던 기대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한계를 지닌 사람들이고 잃음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경험한다. 사례 주인공은 상실에서 오는 슬픔을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슬픔이 감정의 깊은 곳을 자극하는 고통스런 작용임을 안다. 슬픔은 우리를 치유하고 성숙시키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이토록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슬픔을 직면하지 않고 가능하면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타이르듯 “어두운 면을 보지 말고 밝은 면만 보고 나아가자.”라든가, “그냥 웃어넘기자.” 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고통스런 과정을 외면하면 내적 성숙은 기대할 수 없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통을 겪는 이한테는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실패하고 실망했을 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상실을 경험하면서 겪은 감정을 대면할 때 진정으로 바라고 희망을 가지고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다음은 청년기에 겪을 수 있는 상실의 사례다.

나는 실연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도 내게 만나자고 한다. 언제든 부담 없이 친구로 말이다. 떠나자니 마음이 아프고, 계속 만나자니 가슴이 답답하다. 사랑이 이렇게 잔인하게 엇갈릴 수 있는가?

 

이삼십 대에도 상실의 과정은 계속된다. 애인을 만나고 직업을 갖는 기쁨 가운데도 상실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인류가 탄생하면서부터 있어온 사랑이 내 이야기가 되면 그 넓이와 깊이를 실감하게 된다. 그 강도도 매우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복잡하고도 미묘하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도망가려 할 때 미리 앞당겨 체험하는 상실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처음에는 외로움과 무력감을 불러오고, 불평과 불만에 싸이게 하며, 갈수록 자신에 대한 연민과 자기 학대로 이어지게 한다. 동시에 거부와 무기력도 따라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실감에서 오는 이러한 감정의 실재를 마주하는 과정 없이 더 깊은 내면의 실재를 알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앞당겨 체험하는 또 하나의 감정은 바로 슬픔이다. 슬픔은 우리 몸의 일부분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와 정신과 의식에까지, 우리의 안과 밖, 발가락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영향을 미친다. 슬픔에서 치유되려면 우리 자아를 총체적으로 치유해야 한다.

우리는 슬픔에서 도망칠 수 없고 무시할 수도 없다. 슬픔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슬픔의 여정 중에는 너무 속도를 내지 말고 그렇다고 기어가지도 말아야 한다. 자신에게 알맞은 속도로 걸어야 한다. 슬픔을 경험한 뒤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변한다. 이러한 새로운 삶의 방식은 어떤 면에서는 쉽고 부드럽고 친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는 많은 부분에서 어렵고 단절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실제로 슬픔에서 헤어나오는 과정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이 세상이 아직도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을 겪고 난 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다. 전쟁터에서 싸우고 집으로 돌아온 군인 같다고 할 수 있다. 전쟁터를 향해 행군하는 군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좁고 안전한 곳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은 좀 더 크고 위험한 곳임을 깨닫게 되고 한동안은 옛 친구나 가족마저 신뢰할 수 없다.

두려움은 슬픔에 따르는 고통으로 가장 불쾌한 경험 가운데 하나다. 상실에서 생기는 두려움은 최소한 두 가지 모습을 갖는다. 첫째, 상실 후에는 곧바로 자신이 위험에 빠졌다고 느끼게 되고 일에 대한 불안정이 두려움을 갖게 한다. 둘째, 상실은 자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연결된다. 또 다른 상실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실감에서 오는 고통의 실재를 인정하고 용기 있게 맞서는 것이다. 처음에는 고통이 너무 깊어 달아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고통을 거부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상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다시 말해 상실에서 오는 감정을 가볍게 보아 넘기는 것이다. 고통스런 감정과 맞서지 않고 달아나거나 상실을 끌어안는데 서 오는 아픔을 피하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아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상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고통을 축소하려 한다.

상실에서 오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슬퍼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슬픔을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때가 바로 새로운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전환점이 된다. 위험과 도전이 있지만 더 넓고 깊고 높은 세계를 발견할 것이다.

 

 

중년기의 상실

 

나는 불행은 한꺼번에 닥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하느님은 가혹한 분이 아니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나에게 너무나 가혹한 새해가 찾아왔다.

첫째 불행은 남편의 사고였다. 남편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는 그날따라 무슨 생각이었는지 취중에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갔다고 영업용 택시와 접촉 사고를 내고는 놀라 뺑소니를 친 것이다.

둘째 불행은 아이를 돌보아 주시는 아주머니의 사고였다. 꽁꽁 얼어붙은 우리 집 앞 언덕길에서 아이를 안은 채 그만 넘어진 것이다. 심신이 너무 지쳐 남편에게 투정하며 울기도 여러 번, 이제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건강하던 시어머님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맏며느리인 내가 병간호를 해야 하는데 아주머니와 아이 문제로 그럴 수도 없다. 몸이 피곤한 것은 견디겠는데 왜 하필 이런 일들이 꼬리를 물고 내게 닥치는지 정말 하느님께 섭섭하다.

 

중년이 되면 잃은 것을 계산해 보게 된다. 운동도 하고 인내심도 키워보지만 육체적으로는 젊은이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또 다른 상실감으로 슬퍼진다. 가임 능력도 사라진다. 자신이 열심히 일하던 일자리도 젊은이들 손에 넘어가고, 자식들도 성장하여 독립해 나간다. 또한 가지고 있던 꿈들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갑자기 끔찍하게 찾아온 예상하지 못한 많은 상실로 고통을 받게 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상실의 무게에 짓눌린다.

이 사례에는 여러 상실이 나열되어 있다. 남편의 교통사고, 아주머니의 사고, 시어머니의 뇌출혈 등 좋지 않은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사례 주인공의 표현 안에 고통이 스며 있다. ‘몸이 피곤한 것은 견디겠는데 왜 하필 이런 일들이 꼬리를 물고 내게 닥치는지 정말 하느님께 섭섭하다.’ 불행이 계속되면 하느님께 원망과 분노를 터뜨리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섭섭한 마음을 하느님께 아뢰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 놓아 외쳐도 좋고, 원망과 분노를 터뜨려도 좋다. 그렇다고 하느님께 무례를 범하라는 것이 아니다.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감정이다. 치유 과정에서 화를 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화를 누르거나 드러내지 않으면 정상적인 부분까지 좀먹어 들어간다.

우리는 하느님께 화를 낼 수 있다. 불안정한 삶과 믿기지 않지만 믿어야 하는 불행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한다.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무질서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필사적 노력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 화는 자기 연민에서 오기도 하지만 무기력함과 불안을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것이고 죄가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화를 내라고 재촉하고 그것을 붙들고 있지 말라고 했다.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이 아버지이며 아버지 중에 최고의 아버지임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부모는 우리를 알기에 화를 내는 것은 물론 우리의 느낌을 충분히 표현하도록 허락한다. 사랑하고 이해하는 부모한테 하듯이 하느님께 머뭇거리지 말고 화를 내면 그분은 받아주실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슬픈 감정을 쏟아내자. 다음 사례에서 우리는 상실을 마주하며 투쟁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큰 재난이 닥치기 전까지 나는 그저 남들과 다름없이 평범한 생활을 했다. 결혼 후 나는 임신을 했지만 잘못되어 유산했다. 이것이 내가 받은 첫 번째 큰 상처다. 나는 죽은 아이를 잊기 위해 몸부림쳤다. 슬픔을 떨쳐버리려고 그 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몇 년 후 다시 임신을 했고 딸을 낳았다.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두 번째 비극은 가장 친한 친구의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식물인간으로 3일을 지낸 후에 뇌사 판정을 받아 산소 호흡기를 떼어냈다. 친구와 가족은 슬픔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 했다.

세 번째 재앙이 일어났다. 여동생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집에 강도가 들어 세 조카를 살해한 것이다. 제부도 부상을 당했다.

연속적으로 일어난 재난으로 나는 육체적-감성적-영적으로 완전히 지쳤다. 죽은 아이에 대한 억눌린 슬픔이 잠재의식 안에 눌려 있다 폭발했고 자식을 잃은 친구와 여동생이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슬픔으로 인해 신체적으로 이상 증세가 나타났고 스트레스는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나는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기도도 할 수 없었고 하느님께 당신은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다시는 당신을 신뢰하지 않겠다고 항의했다.

 

다행히도 이 사례의 주인공한테는 친구가 있어 늘 함께하면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공감해 주었다. 휴가를 내어 도보여행을 같이했고, 친구의 권유로 상실에 따른 상담을 받았다. 그녀는 죽은 아이로 인해 깊이 깔려 있는 슬픔의 감정을 끌어내게 되었다. 피정에도 참석했고 여러 차원에서 노력했다. 처음에는 그러한 노력들이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 감정의 고통에 시달리며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모임을 찾아가 그 모임을 주관하는 사제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맬 때 감성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한 친구가 있으면 좋다. 친구의 도움이 치유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고통 속에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길고도 힘든 여정이다.

린지 R. 커티스는 ‘오직 여성들을 위하여’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눈물은 여자든 남자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훌륭한 치료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우는 것은 남자답지 않은 행동이며 눈물은 겁쟁이나 흘리는 거이라고 교육받았다. 그러나 우는 것은 웃음처럼 감성적 응답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눈물은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로 심신이 균형을 잃었을 때, 이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이나 감상에 머물거나 절제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슬픔을 극복하려면 먼저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그렇다고 오랜 기간 슬픔에 빠져 있어서도 안 되지만 슬픔 자체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슬픔을 표현하는 눈물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 눈물은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며, 운다고 믿음이 적은 것도 아니다.

 

 

노년기의 상실

남편 기일을 며칠 앞둔 이맘때면 늘 생각나는 일이 있다. 남편은 의사였다. 해방 이듬해 북한에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남겨놓고 홀로 월남했다.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을 50년 넘게 간직한 채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을 이기지 못하고 3년 전 하느님 곁으로 가버렸다.

해마다 이맘때면 통일동산과 임진각에 가서 어머님과 누이동생을 그리며 눈물을 흘리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돌아가셨을지도 모르는 어머님의 생신상을 차려 가곤 했는데 지금쯤 하느님 나라에서 모두 만나셨을까?

 

이 사례에서 주인공은 특별한 날, 곧 남편 기일에 남편의 생전 모습을 필름 돌리듯 회상한다. 해방 이듬해 북한에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남겨놓고 월남해 50년이 넘도록 기다리다 통일동산과 임진각에 가서 눈물을 흘리던 남편을 떠올리면서 주인공 또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남편이 죽은 지 3년이 되었어도 옛날을 생각할 때마다 감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곤 한다. 문제는 남편을 잃고 난 후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슬픔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이를 의연하게 견디는 ‘훌륭한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인간의 삶의 본질을 아시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들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시고 이 거부가 얼마 동안 희망을 북돋고 절망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음을 이해하신다. 그러나 오래 끌면서 하는 전체적인 거부는 희망과 승리를 찾아볼 수 없는 절망으로 이끌 뿐이다.

 

노인 문제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우리나라는 사회와 의식구조와 생활의 변화 등으로 다양한 노인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고도의 경제 발전과 의학의 발달, 생활수준 향상 등으로 평균수명이 높아지면서 노인 인구가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인다. 2008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3퍼센트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고, 향후 2018년이 되면 14.3퍼센트가 되어 본격적으로 고령 사회에 진입하게 되며, 또한 2026년에는 20.8퍼센트로 초 고령 사회에 진입하게 되리라 한다. 또한 2030년에는 65세 인구 노인 인구가 총 인구의 35퍼센트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년기에 이르면 시력도 청력도 떨어져 육체적 상실이 더욱 심화되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이 하나 둘 떠남으로써 외롭고 서글퍼진다. 인간은 출생부터 애정과 상실의 불가결한 관계로 이러한 슬픔을 인생 전반에 걸쳐 경험한다.

노인들은 건강과 경제적 상실, 소중한 이의 상실을 경험하며, 상실 경험이 높을수록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도 높아진다.

Kwan 의 ‘홍콩의 노인 자살 연구 A Revisit of Elderly Suicide in Hong Kong‘에 따르면, 노인들은 이전 삶의 주기 때는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삶의 문제, 곧 신체적 약화, 만성질환, 퇴직으로 인한 경제력 상실과 감소, 배우자의 죽음, 사회적 관계망 축소, 가치관 변화, 가족 기능 약화, 부양에 대한 인식 변화, 사회구조 변화 등 여려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가 적응 능력이 부족한 노인들한테 인간적 삶과 생존을 크게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로 인해 최근 노인 자살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노인 자살은 퇴직(직업 역할 상실), 건강 악화, 만성질환, 신체적-정신적 장애, 사회관계 범위의 축소, 배우자의 상실, 경제적 불안정, 가정 불화, 우울 증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고 한다. 특히 이러한 요인은 대처 능력이나 자원이 줄어드는 노인들의 스트레스를 더욱 높인다.

살아온 인생을 정리하면서 자아 통합을 추구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할 시기인 노년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체적-경제적-정서적 어려움을 동시에 겪으며 절망감에 빠진다.

노인에게 신체 건강은 곧 독립적 생활의 보장을 뜻한다. 건강을 평가하는 방법에는 객관적 활동성 제약의 정도를 측정하는 방법과 노인 자신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건강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다. 노인은 보편적으로 객관적 건강상의 어려움이 있다.

건강은 신제적 독립을 유지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삶의 목표를 추구하고 달성하는 데 필수 조건이다. 특히 노년기의 건강은 자립적이고 활기찬 노후 생활의 유지에 꼭 필요한 요소다. 건강의 개념은 신체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생물학적-심리적-사회적 측면 모두에서 최적의 상태를 의미한다.

노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만성질환은 관절염-고혈압-요통-좌골통 순이다. 남성 노인의 경우는 고혈압-관절염-요통-좌골통 순이며, 여성 노인은 관절염의 발병률이 가장 높게 나타나 성별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노인은 노화와 건강 약화에 따른 신체적 능력 장애와 만성질환으로 안정감에 위협을 받는다. 넓은 의미에서 노화란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사망 순간까지 계속되는 발달 과정으로, 이것은 생물학적 측면뿐 아니라 심리적-사회적-영적 측면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노화 현상은 주로 우리가 노년기라고 분류하는 연령층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노년기의 주요 특성으로는 먼저 신체적 기능의 감퇴 또는 노쇠를 들 수 있다.

노인들은 각종 장애로 사회관계와 사회 참여가 서서히 줄어들면서 고립감을 느낀다. 건강 악화도 노인 인구의 자살 위험을 증가시키는 이인으로 파악된다.

노인들은 생산기술의 발전과 변화로 젊은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강제 퇴직하게 되며 이로 인해 직업을 통한 사회적 역할이 상실되어 여가의 문제를 초래한다. 노인 인구는 많아지고 노동력은 제한되어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 간의 사업이나 직업 역할 수행에서 경쟁이 생기고 신체적-정신적 기능이 약화된 노인은 자연히 뒤처지게 된다.

노인들은 퇴직과 은퇴를 경험한다. 이는 노인들에게 직업 역할의 상실, 사회적 역할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후 소득원의 상실 또는 경제적 난관에 이르게 됨을 의미한다. 곧 역할 상실과 여가 활동의 문제다.

퇴직은 자기의 가치와 자아상을 뒷받침해 주는 직업 역할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노인에게 심리-사회적으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으며, 뚜렷한 역할을 하는 활동이나 여가 활동이 없으면 자아 상실감이 더욱 커지게 된다. 게다가 급속한 현대화 과정으로 전통적 가치관과 현대적 가치관이 혼재하고 있어 현대사회의 노인에게 적합한 역할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가치관이 형성되지 못했고, 따라서 노인 자신들이 기대하는 적합한 역할 모델이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심리사회적 갈등 문제다. 현대화와 관련된 요인과 함께 세대 간 교육 수준과 가치관의 차이는 부모 자녀 간 대화를 줄이고 노인을 가족과 집안일의 결정에서 제회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며, 특히 고부간 갈등을 더욱 심화할 수 있다.

나아가 핵가족화로 인해 지리적으로 멀어지고 부모 자녀 간 대화의 만남의 기회가 줄어들어 노인은 가족으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 노년기에 나타나는 사회적 특성은 대인 관계가 줄어들고 기존의 역할이 감소하는 것이다.

가정과 직장에서 역할을 상실하고 ‘의미 있는 타인’들과의 접촉과 관계가 줄어드는 것은 자신감과 자존감의 상실과 함께 노인들에게 큰 심리적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제도적 강압이나 타의로 어떤 역할에서 물러나게 되거나 대인적 접촉에서 멀어지게 되는 경우 자연히 소외감이 생긴다. 현실적으로 많은 노인이 이 같은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 실제로 가정과 직장에서의 역할 상실은 노인들에게 심리적 소외감과 고독감을 안겨주는 주된 요인이며 이는 노년기의 대표 정신질환인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사실 역할이란 한 사람의 자아 개념의 기초인데, 이러한 역할 상실은 결국 자아 개념과 사회적 정체성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된다.

노년기에 이르면 질병이나 퇴직 등으로 소득 감소를 보완하지 못함으로써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노인들의 경우 노후 생계를 위한 여유 자금을 저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활해 왔으며, 노후부장제도가 아직 미비하기에 가족 등 비공식적 지지망에 의존하여 기본 생계비를 마련하는 경향이 높다. 그러므로 노인들이 경험하는 경제적 상실이 자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노인들은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게 자신의 감정과 주관적 생각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일에 지구력과 적극성이 약해질 뿐 아니라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적응하는 데 매우 수동적이다. 또한 과거에 살아오던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행동의 조심성도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노인은 심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향과 욕구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첫째, 노인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과 영원히 잊힌다는 거에 대한 두려운 심리와 함께, 죽은 후에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다. 자녀-손자-재산-추억 등 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분신과 같은 것을 남겨주고 싶어하고 죽기 전에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싶은 욕구가 커진다. 곧 삶과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하려 한다.

둘째, 노인은 자신이 그 동안 터득한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 싶은 심리가 강하며 어떤 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남은 생애가 쓸모 있기를 바란다.

셋째, 사랑하고 친숙했던 인물이나 사물에 애착하는 심리적 욕구가 있다.

넷째, 노인은 현재를 중시하는 심리가 크게 나타나는데 시간이 흐르고 노화가 진행될수록 미래의 소망보다는 현재의 만족을 더 선호하게 된다.

다섯 째, 노인은 인생 전반을 자기 관점으로 평가하려는 강한 욕구와 함께 오랜 세월 온갖 고난을 극복했다는 성취감에서 오는 평정을 갖고자 하는 경향이 크다.

여섯 째, 아이처럼 모든 일과 사건에 호기심을 보이며 무엇이든 알고 싶어하고 참여하고 싶어한다.

그 밖에도 노인들은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타인과 친밀한 교제를 바라고 신앙 성숙과 자기 통합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로버트 해비거스트 Robert J. Havighurst 는, 노인한테는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서 곤란을 극복하고 정상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교육을 받고자 하는 대처 능력의 욕구, 활동이나 단체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표현적 욕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공헌적 욕구, 사회 전체의 변화와 흐름에 대해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고자 하는 영향력 욕구,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실감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고 파악하려는 초월적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

 

노년기의 죽음 문제

사별이란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을 말한다. 노년기에 사별을 하게 되면 슬픔-죄의식-후회-혼돈-목적 상실-동기나 흥미 상실 등과 같은 다양한 정서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특히 배우자와의 사별은 남녀 모두에게 슬픔-걱정-두려움 등의 부정적 정서 경험을 하게 하며 사망률이나 자살률을 높인다. 남성이 여성보다 고독감을 더 크게 느끼며, 사별 적응에도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년기에 경험할 수 있는 상실은 배우자와 친구의 죽음, 성인 자녀의 죽음이 있다. 노년기에는 노화에 따른 신체적-심리적-사회적-정서적 상황을 고려할 때, 혼자된 이들이 사별 후 겪는 역할 전환과 어려운 생활상의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적절한 도움 프로그램과 지지가 제공되어야 한다.

사별 가족이 나타내는 반응으로는 임종 전 가족들이 보이는 심리 상태(임종 환자의 심리 상태와 거의 비슷하다)인 충격-혼란-분노-미리 맛보는 슬픔, 자녀를 잃은 가족이 공허함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겪는 공허함-슬픔-아픔-한탄-비탄-스트레스-우울-외로움-불안, 죽음에 대한 충격인 부정-수용-무력감-상실감-공허함-황당함, 고인에 대한 그리움-착각-죄책감-식욕부진-실망-분노-사회적 격리 등이다. 이는 매우 복합적이고 부정적인 감정 요소들이며 사회구조, 개인적 상황과 환경 등에 따라 부정적 감정도 달라진다.

노년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별자한테는 죽음과 고인과 관련된 추억을 승화시켜 어떻게 현재의 삶을 건강하게 사느냐 하는 과업이 남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일생 동안 상실을 경험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상실은 가까운 이의 죽음이다. 노년기에 이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까이 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노년기에도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충격적이다. 그 반응은 여러 단계로 나타나며, 이러한 슬픔과 애도의 단계에는 적응과 위기, 또는 스트레스 과정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성숙된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이 과정을 잘 이겨내야 한다. 죽음의 원인, 형태, 사별의 상황과 지지 정도 등에 따라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이 다르게 나타나고 회복 기간도 차이가 난다.

노년기에는 주변에서 가까이 지내던 이들의 사별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오랜 결혼 생활을 해오던 배우자가 죽었을 때는 견디기 어려운 고독감을 느낀다. 배우자와의 사별 이외에도 자녀나 가까이 지내던 친척-이웃-친구와 사별했을 경우에도 함께 세상을 뜨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노년의 과업

노년이 되면 어려 가지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친구나 가족이 멀리 이사하거나 세상을 뜨기도 한다. 꿈꾸고 희망해 온 것들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만성 신경통이 나타나는 등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늙어감으로써 겪는 상실의 경험을 자신을 성숙하게 하며 남은 삶 동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닿는 대로 공헌하는 데 이바지하게 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참으로 허무한 것이 된다.

노인들은 육체적-정신적-영적 건강에 많은 위협을 받는다. 정신적 고독감은 물론 영적 고독감과 무력감, 쓸모 없는 존재라는 의식, 의미 없는 여가생활에 대한 절망감에 시달린다. 과거 지향적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희망적 미래가 실재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삶의 자세를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이끄는 신앙교육을 해야 한다.

우리 인생은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죽음을 향해 쉬지 않고 흐르는 삶에 대한 자각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상실은 젊은 시절부터 일어나지만 새로운 것에 관심을 빼앗겨 소홀히 여기다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다.

어떤 대는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일기 시작한다. 늙어가고 있음을 자각하면서 반항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노인들은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초월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라는 마지막 소명을 받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늙어가면서 겪는 상실을 직시하고 그에 따른 감정을 모두 받아들여 끌어안을 때 기회가 열린다. 늙어감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거나 더 많은 상실을 경험하며 성장하려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노년기 문제에 건설적으로 대면하는 것은 슬픔에 당면한 개인과 가족의 바람직한 적응뿐 아니라 밝고 건강한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3. 상실을 대하는 모습

 

민희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다. 민희는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어도 부모님보다 할머니의 사랑과 의견에 의지해 살았다. 민희가 아이를 낳았을 때도 할머니가 나서서 산후 조리를 했고 아이도 손수 길러주셨다.

그토록 의지하고 모든 것을 다 믿고 맡기던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면서 민희의 슬픔과 고통은 시작되었다. 3일을 꼼짝 못하고 누워만 계시던 할머니는 말씀 한마디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민희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고 이 세상에 자신을 위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밥맛도 없고 밖에 나가기도 싫었다. 평소 할머니가 쓰시던 스카프를 꼭 끌어안고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상실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다.

중학교 때 일이다. 선경이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선경이는 경선이라는 친구와 모든 것을 함께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특히 경선이네 형편이 어렵게 된 후에는 더 각별히 경선이의 처지를 살펴 보이지 않게 챙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경이가 학교 대표로 지방 도시에서 개최하는 음악제에 참가했다가 며칠 만에 경선이네 집에 들렀다. 그곳에서 선경이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던 경선이가 병원에도 가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지방에서 돌아오던 날 아무리 늦었어도 경선이네 집에 들렀다면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 마치 경선이의 죽음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 괴로웠고 경선이의 부모님과 친구들을 볼 낯이 없었다. 그렇게 친하다고 유난을 떨더니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다음 사례에서 주인공은 입양시킬 수밖에 없었던 친어머니한테 버림받은 고통을 내면에 지니고 살아왔다. 버림받음으로 인해 생긴 두려움은 평생을 간다. 허버트 앤더슨과 케네스 미첼은 어린아이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돌봄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 돌봄이 끊기는 일은 (특히 이것이 너무 빨리 일어날 경우)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의 시작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들은 버림받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생의 초기 기억은 애착과 상실에 대한 반응에 영향을 미치며 이 반응을 통제하게 된다. 인간은 버림받을 때 초기의 무력감을 재연한다는 것이다.

진국이는 어렸을 때 호주에서 살았다. 늘 자신의 생김새가 아빠 엄마나 주위 사람들과 다른 것을 의아하게 여기며 자랐다. 학교에 입학할 무렵 양부모님이 자신을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친어머니를 찾았다.

그런데 친어머니는 양부모님의 말과 달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진국이를 고아원에 보내고 얼마 후 재혼해 자식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진국이는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다시 한 번 버려진 것 같아 어머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호주에서 자라면서 받았던 이질적 느낌이 서럽게 밀려오면서 자신은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없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자신을 누구도 받아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진국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친어머니를 만나지도 않은 채 제3국인 미국으로 떠났다.

 

인간은 하루에도 수많은 감정을 느끼며 산다. 특히 고통스러운 감정을 대면하기 힘든 버거운 것, 초대받지 않은 친구와 같은 낯선 것으로 여긴다. 이 고통스런 감정이 미처 해결되지 않은 과거 사건이나 관계에서 오면 지속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 없이 살거나 성장할 수 없다. 감정은 이성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동반자다. 고통스런 감정이 회복되고 치유되지 않으면, 정신체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감정 가운데 특별히 상실로 인한 슬픔은 어떤 감정보다 강한 영향을 준다.

슬픔은 필연적으로 애정과 분리라는 이중적 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모든 상실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겪는 사람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똑같이 물건이나 사람, 직업이나 꿈을 잃었다 하더라도 상실을 겪는 사람의 정서는 저마다 다르다.

우리는 사람-물건-사상-가치-소망-역할 등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대상과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그것에 의미와 상징적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러한 대상과 관계가 끊어질 때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잃어버린 대상 자체라기보다 그것의 의미를 잃은 사실에 슬퍼하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같은 상실인데 겪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고통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데이비드 스위처는 슬픔이 주는 마음의 역동성은 불안이며, 그 모든 행동 반응은 이 불안과 관계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감정은 죄의식이나 우울증 또는 적개심으로 나타나지만 그 밑바닥엔 불안이 숨어 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모든 상실은 어린 시절의 분리 경험의 연속이라고 보며, 인간의 사회적 성격 때문에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깨닫는다고 말한다.

상실에 대해 각자가 겪는 바가 다르듯 그것을 대면하는 방법 또한 다르다. 어릴 때는 상실을 대하는 부모님의 방법을 모방하지만 성장하면서는 나름대로 방법을 터득한다. 그렇게 그 방법에 점점 익숙해지고 삶을 대면하는 정형 定型 이 되어 상실을 대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각자가 배운 대면하는 방법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나 조부모, 선생님들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에 그분들에게 배운 것이 나중에 잘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성인이 되면서 우리는 자신이 배운 것 가운데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시해 버린다. 상실을 대하는 좋지 않은 방법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면 “남자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계집애처럼 굴지 마라.” 등의 방법이 굳어져 상실을 겪을 때 슬픔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슬픔 단계의 다양한 이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사별 가족은 반드시 슬픔을 단계별로 겪는다. 학자들은 이러한 정서적 반응을 세 단계에서 여섯 단계로 나눈다.

슬픔의 세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충격-경고-거부다.

둘째는 결렬한 슬픔을 겪는 단계로 다음과 같은 요소를 동반한다. 계속적이고 간헐적인 거부, 심리적 고통과 고뇌, 모순이 되는 추구, 고통스런 감정과 충격, 잃음에 대한 생각에 몰두, 잃음에 대해 강박적으로 이야기함, 잃은 것을 강박적으로 되찾고자 함, 일어날 어떤 것을 막연하게 기다림, 목적도 없이 의구심을 갖고 쉬지 못함, 잃게 된다는 느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름, 일을 시작하는 데 무능력함, 시간이 정지된 느낌, 분열된 느낌, 삶이 보람이 없을 거라는 느낌, 특히 그 중에서도 정신병이 나타나리라는 두려움 등이다. 울음-화-죄책감-수치심-억제 또는 어린 시절의 행동과 느낌으로 되돌아가거나 전이한다. 무기력과 우울증, 희망이나 절망이 동시에 나타난다. 고통이 줄어들어 대처할 능력이 증가하며 잃음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잃어버린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셋째는 잃음과 슬픔의 통합이다. 이 통합이 순조로우면 다음과 같은 것이 수반된다. 잃음의 현실을 받아들여 신체적-심리적 안녕을 되찾고, 자주 그리고 격렬하게 우는 것이 줄어든다. 자존감이 회복되며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삶을 즐길 능력을 갖추게 되고, 경험을 통해 성장했음을 알게 됨으로써 기쁨을 누린다. 고통 대신 마음에 사무치거나 걱정하면서 기억한 상실감에서 회복되어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러한 단계를 구성 요소 별로 분류하는 것은 슬픔의 여정을 개념화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 요소는 분리되거나 연속해 정해진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겹치기도 하고 한 단계 안에 다양한 영역과 징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슬픔의 단계는 보통 부정과 고립-분노-타협-우울-수용의 여섯 단계(또는 반응)로 말할 수 있으며, ‘희망’의 단계를 추가하여 여섯 단계로 분류하기도 한다.

울펠트 Wolfelt는 ‘죽음과 슬픔 Death and Grief‘에서 슬픔을 겪는 과정은 사별 가족의 신체적-정신적-정서적-영적 측면에 지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고인과 맺은 관계의 정도, 죽음을 둘러싼 상황, 지지 체계와 관련된 상황, 개별 가족의 독특한 성격, 고인의 독특한 성격, 문화적 배경, 종교적 또는 영적 배경, 힘든 일이나 스트레스, 생물학적 성, 의식이나 장례식 경험 등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와이스 Weiss는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느끼는 강한 슬픔은 어릴 적 부모-자녀 사이의 애착관계와 같은 ‘중요한’ 애착관계에서만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린드먼 Lindemann은 슬픔을 겪는 과정을, 사랑하는 가족을 상실하고 애도하는 과정, 고인이 없는 환경에 재적응하기 위한 과정,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보울비는 슬픔의 네 단계로 무감각의 단계, 상실한 인물을 그리워하는 단계, 찾으려는 단계,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재조직 단계로 보았다.

울펠트는 슬픔의 차원을 회피 차원, 직면 차원, 조정 차원이라는 세 단계로 제시하는데 회피 차원에서는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놀람, 믿을 수 없음, 혼란, 안절부절못함, 실감 나지 않음, 무력감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직면 차원에서는 분리불안, 갈등, 폭발적 정서반응, 지속적 스트레스 등이 있으며, 조정 차원에서는 전환점에 도달, 통제력 회복, 새로운 정체성, 자신에게 관심 갖기 등을 포함한다.

스팬글러 Spangler는 슬픔의 수레바퀴 모델로 슬픔을 겪는 네 단계와 특징을 설명한다. 첫 단계는 무감각, 부정, 혼란, 격한 감정, 수면 장애이고, 둘째 단계는 분노, 공포, 슬픔, 과민함, 죄책감, 타협, 혼란이고, 셋째 단계는 무기력, 혼란, 우울, 위축, 무의미함, 외로움, 고독, 강한 번민, 무감각-무목적감, 느린 사고와 행동이며, 넷째 단계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의미, 수용감, 변화된 우선순위, 내적 평화와 평온, 친구와 가족에 대한 재 정의다.

데켄 Decken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서 사별 가족이 슬픔을 겪는 과정을 12단계로 제시하는데, 정신적 타격과 마비 상태, 부인 否認, 패닉, 부당함에 대한 분노, 적의와 원망, 죄의식, 공상과 환상, 고독감과 억울함, 정신적 혼란과 무관심, 체념과 수용, 새로운 희망(유머와 웃음의 재발견, 회복 단계), 새로운 정체성 형성 등이다.

데켄은 슬픔을 겪는 과정이 지역-습관-언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어느 정도 공통적 유형이 있는 것으로 본다.

첫째는 정신적 타격으로 충격에 의해 일시적으로 현실 감각이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된다.

둘째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셋째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직면하여 극도의 공황 상태에 빠진다.

넷째는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나면 슬픔과 함께 부당한 고통을 감내할 수 없다는 분노가 격렬하게 솟구친다.

다섯째는 주변 사람들과 고인에 대해 적의나 원망의 감정을 마구 터뜨린다.

여섯째는 죄의식이다. 이는 슬픔의 감정을 상징하는 반응으로 자신의 과거 행동을 후회하고 책망한다.

일곱째는 고인이 아직 살아 있는 듯한 생각에 사로잡혀 실제 생활에서도 이처럼 행동한다.

여덟째는 장례식이 끝나고 찾는 사람이 줄어들면 극복하기 힘든 고독한 적막감이 찾아온다. 점점 사람들이 싫어지거나 기분이 가라앉아 방에만 틀어박히는 일이 많아진다.

아홉째는 정신적 혼란과 무관심으로 하루하루 목표를 잃어버린 공허감과 무기력에 빠진다.

열째는 고인이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쓰라린 현실을 ‘분명하게’ 응시하며 죽음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열한째는 새로운 희망으로 유머와 웃음을 재발견한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희망의 빛이 빛나기 시작한다.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슬픔을 극복하고 새 생활을 향해 한 걸음 내딛고자 하는 희망을 뜻한다.

열두째는 회복의 단계로 새로운 신원이 형성된다. 슬픔의 과정을 극복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기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새로운 신원을 획득하여 더욱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뜻한다.

사별로 인한 슬픔의 과정이 반드시 이 단계를 모두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충격의 경험,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경험,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의 경험,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의 경험 등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실을 대하는 일반적 과정

 

일반적으로 슬픔을 대면하는 과정은 다음 여섯 단계를 거친다.

부정

나와 아버지는 병원 복도를 따라 응급실에서 대기실로 내려갔다. 두려웠다. 아버지의 얼굴이 긴장으로 일그러졌다. 복도에는 아버지와 내 발소리만 크게 울렸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두려운 소식이 간단명료하게 알려졌다. “우리는 당신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느낌, 눈물 그리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사실이 아니야. 엄마가 그럴 리 없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서서히 눈물이,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충격을 받고 외치는 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실을 처음 대면하게 되면 그것이 사실임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니, 믿을 수가 없어!”

“저런, 그럴 리가!”

이러한 반응은 변화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준다. 때로는 그 상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고집스럽게 부정하기도 한다.

슬픔의 과정은 여러 단계의 부정을 통해 진행된다. 각 단계에서 조금씩 더 깊고 고통스럽게 상실의 현실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머리로 받아들이고, 다음에는 감정으로, 마지막에는 삶의 양식을 드러난 현실에 맞게 조정한다. 이때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미루면 그 값을 치러야 한다. 계속 부인하느라 정서적 상처를 받게 되고 회복 또한 늦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한동안 상실을 거부하게 되는데, 이는 정상적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정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싫은 상황을 무시하려는 시도다. 고통을 달래기 위해 고통을 피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이미 일어난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태도가 줄어들면 고통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고통이 찾아오면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런 점에서 부인은 완충장치 같은 것이다.

처음에는 마치 텔레비전 소리를 줄여놓은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이 느낌은 섬뜩하면서도 비현실적이지만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상실자들은 이때를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는데, 충격은 전기단자가 있는 퓨즈박스와 같다. 전기단자에 많은 전선을 연결하면 전기가 나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당하면 충격 상태에 빠져 마음의 제어장치가 다시 작동할 때까지 지켜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복합적 감정으로 충격을 받아 일어나는데 마치 마취를 당한 것처럼 자연스레 일어나는 방어체계다. 이는 또한 상실감의 강도를 줄이며 상실 경험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방어체계는 신경계를 마비시키고 현실감을 방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시적으로 멍해지거나 마비 상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현상은 신체에 나타날 수도 감정적으로 멍하게 되는 수도 있으며 둘 다인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예상된 것이든 갑작스런 것이든 상실을 겪은 사람은 무감각한 상태를 경험한다. 만일 그 죽음이 갑작스러운 것이라면 무감각 상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허버트 앤더슨과 케네스 미첼은 초기 슬픔의 역동성으로 감정의 부재, 곧 감정적 벙어리 상태가 가장 많다고 말한다. 이러한 감정 상태와 함께 상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의 초기 단계에는 이미 일어난 일인데도 일어날 수 없다고 우기기도 한다.

충격을 받으면 이와 같은 비현실감-부인-무감각한 감정이 더해져 마음의 벽을 쌓고 시공간의 개념을 잊으며 정신이 나간 것처럼 목정 없이 헤맨다.

이런 상태는 경우에 따라 몇 시간 또는 며칠, 몇 주간씩 지속될 수 있다. 이런 상태를 마치 꿈속에서 사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무감각 시기가 지난 후에는 분리의 고통이 따라온다. 이 고통은 워낙 커서 차라리 충격 상태나 무감각의 첫 단계로 되돌아가고픈 생각이 들 정도다.

충격은 죽음이라는 낯설고 두려운,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을 이겨내는 데 완충 역할을 한다. 이것은 창조주가 마련한 신비스러운 보호 장치라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을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충격은 우리를 마비시켜 사별 여정을 준비하는 시간을 마련해 준다. 이 여정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움직여야 한다.

사별의 여정을 걸으면서 가끔은 충격을 느꼈을 때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는데, 이는 일반적 현상이다. 어떤 남편은 “제 아내는 2년 전에 죽었는데, 저는 여전히 아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이러한 느낌은 잠시 나타날 수 있지만 얼마 후에 사라진다.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지 못하면 화가 난다. 가까운 사람이나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우리는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한다. 관계가 남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관계를 영원히 유지하길 바란다. 그래서 그것을 잃어버리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화는 불쾌하고 성가시며 항의하는 감정이며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상처-두려움-무기력감 또는 죽음이 부당함을 선언하거나 누군가에게 대가를 지불하길 바라며 슬픔 가운데 항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때로 이러한 분노는 어떤 경고도 없이 갑자기 폭발하듯 표출되기도 한다. 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한꺼번에 폭발하거나 ‘서서히 타오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매우 예민해지기도 하고 오래 끌면서 쓰라린 고통을 체험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분노가 다이너마이트처럼 일촉즉발 상태에 있다.”

“사소한 일로 나는 엉망이 되었다.”

“신경이 곤두서 있다.”

“혼란스럽다.”

이처럼 화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현상이다.

화는 자신에게 고통이나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찾는다. 화는 주위 사람들에게 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상실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 예를 들어 까다로운 진단을 내린 의사, 마지막까지 치료에 힘쓴 간호사, 병원 직원과 친척, 심지어 상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자신의 슬픔에 무관심한 사람한테까지 화를 내기도 한다. 곧 사랑하는 사람한테 도움을 주지 못한 모든 사람한테 화를 내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화재나 홍수 피해자들은 자기 집을 보호해 주지 못한 경찰이나 소방관들한테 분노를 품기도 한다. 적절한 도움을 기대했는데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거나 지나치게 보호받거나 조종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그 상실을 받아들이라고 재촉하는 사람들이나 세상을 떠난 사랑했던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때로 자기들이 버림받았거나 희생자라는 느낌을 받는다. 한 여성이 이에 대해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먼저 저 세상에 가버린 남편에게 너무 화가 났어요! 남편은 살아 있을 때 집안 경제를 관리했거든요.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요. 그런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제가 해야 해서 얼마나 답답한지 몰라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죽은 사람에 대해 지나친 듯한 원망의 말은 확실히 자기연민에서 온다. 그러나 이 또한 무기력하거나 불안을 느끼는 데서, 혼자라는 데서 오는 화의 격렬한 표현이다. 이는 매우 정상적이며 죄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한테 화를 내기도 한다. 자신이 말하고 행동한 것이나 말하지 않았던 것, 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자신을 호되게 질책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러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자신들이 더 화를 내면서 화를 표현하지 못하도록 억누른다.

이는 상실을 회복하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반면에 상실을 겪은 사람이 화를 포함한 모든 느낌을 표현하도록 허락하면서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면 상실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치유 과정에서 화를 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느님 백성이고 감정을 지닌 인간이다. 이 말은 화를 낼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오히려 화를 억압하거나 드러내지 않을 때 우울증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하느님께 화를 낼 수 있다. 상실로 인한 분노는 하느님을 향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신 듯한 느낌이 들기에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느님께 화가 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 분노하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방식대로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이거나 자기가 믿어온 것이 소용없는 것처럼 보여서일 수 있다. 불안정한 삶과 믿기지 않지만 믿어야만 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한다. 화를 내는 것은 무질서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필사적 노력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기에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상적으로 실천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화를 낸다. 하느님께 이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느님을 향한 분노는 유다인들의 전통 가운데 일부다. 탄식 시편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분노가 여러 이유와 함께 묘사된다. 슬픔으로 인해 하느님께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실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죄책감

우리는 흔히 무엇인가를 상실하게 되면 그것을 자초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는 죄책감에 빠진다. 개 목걸이를 풀어준 주인은 개가 자동차에 치여 죽은 것을 자신의 잘못이라며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친절하고 상냥하지 못한 사람은 노년의 외로움을 자초했다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상실이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다가온 경우에도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 암 진단을 받고는 자신이 바르게 살지 못해 이렇게 된 것이라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상실은 누구한테나 일어나는 것임에도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일반적으로 그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배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죄책감만 남는다.

죄책감을 느끼는 원인은 다양하다. 특히 상대방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될 때는 곧바로 죄책감을 갖는다. 때로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슬퍼하며 회한에 빠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는데 자신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생존자가 갖기 쉬운 죄책감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다 나중에는 자신을 원망한다. ‘내가 만일 ~했더라면’ 하는 식의 목록을 자신에게 적용하며 죄책감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만일 ~했더라면’이라는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다르게 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하여 일생을 괴로움 속에서 살게 한다.

‘만일 곧장 병원에 데려갔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고통스러우면서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러나 억지로라도 의사에게 데리고 갔다면…?’ ‘그날 밤 밖에 나가지 않았어야 했어. 뭔가 느낌이 이상했는데…’ ‘만일 여기가 아니라 종합병원으로 갔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중환자 대기실에서 마음 졸이며 지키기도 한다. 그러다 피곤이 밀려오거나 집안일이 걱정되면 가족 가운데 누군가를 부를 수 있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조금 나아진 것 같으면 잠시 나갔다 올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거나 죽게 된다면 당신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필경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비난하게 될 것이다.

‘만일 ~했더라면’ 이라는 죄책감을 계속 갖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조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비현실적 가정이다. 갖고 있지도 않는 힘과 통제력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가정하거나 삶과 죽음을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만일 이러한 죄책감이 지속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한 정신분석가가 허버트 앤더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틀리기 쉽고 도움이 필요하며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거부함으로써 죄책감에 시달리는 겁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죄책감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죄책감으로 고통스럽다면 당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목록과 배우자의 행동 목록을 만들어 보라. 그렇게 함으로써 균형 있는 시각을 얻고 죄책감을 덜게 될 것이다.

싸우지 않고 상처 주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많은 경우 후회할 일을 하고 후회할 말을 하면서 산다. 그러나 사랑하고 상처 주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가까워지고 친해진다. 상처를 주거나 실패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대로 사랑을 배울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죄책감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죄책감에서 벗어났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매주 기도 모임에 나가면서 사목자가 말한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울증

두 딸을 둔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 두 딸과 엄마는 목욕탕에 갔고 아빠는 집에 있었다. 작은딸을 먼저 씻긴 후 큰딸을 씻겼다. 그런데 24시간 운영하는 목욕탕이 물을 바꿀 시간이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종업원이 물을 빼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아이가 탕 속으로 들어갔다. 물이 빠지는 압력에 못 이겨 아이 발이 구멍에 빠지고 말았다. 아이의 발은 점점 깊이 들어갔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큰아이가 아빠에게 전화해 달려왔지만 손을 쓸 수 없었다. 119구조대원들이 와서야 아이를 구멍에서 빼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물을 너무 많이 마셔 죽고 말았다.

 

위성방송에서 방영된 실제 사례다. 아이를 잃은 뒤 인터뷰에서 부부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지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이의 부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망연자실해 있었다. 사랑하는 아이를 잃으면 부모는 상실감에 빠진다. 밥맛도 잃고 잠도 잘 수 없으며 살아갈 희망도 잃는다. 이것이 상실감 후에 겪는 우울 증상이다.

이러한 감정을 겪으면 처음에는 주변을 원망하게 된다. 왜 하필 그 시간에 목욕탕 물을 빼야 했는지 주인을 원망할 수 있고, 아이가 탕으로 들어갈 때 누군가 아이를 막았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며 사람들을 원망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감정은 자학으로 이어진다. 왜 하필 그날 그 시간에 아이를 목욕탕에 데리고 갔는지, 왜 아이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지 죄책감에 휩싸인다.

잃음은 우리의 정체성과 자존감, 미래의 행복에 대한 희망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렇게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점점 혼돈에 빠진다. 툭하면 울고 숙면을 취하지 못하며, 입맛이 없고 대인 관계가 단절된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잃거나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 할 때 우리는 우울해지며 두려움-분노-절망-혼란-외로움 등 여러 반응과 감정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이러한 감정을 얼마나 강하게 경험하는지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우리가 슬픔에 젖어 있다는 것은 잃어버린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일상 삶을 두꺼운 구름이 낀 것처럼 만든다. 우울증이 깊어갈수록 무력감 때문에 꼼짝할 수 없다. 그래서 피동적이 되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마치 깊고 어두운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추위와 외로움을 느낀다. 우울증은 우리에게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시야를 좁혀놓는다.

비크 Beak 에 따르면 우울의 주요 증상은 인지-동기-정서-신체적 측면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인지적 증상은, 자기는 무능력하고 열등하며 언제나 제대로 행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미래에 대해 부정적이고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견해를 갖는다. 동기적 증상은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다. 정서적 증상은 슬픔-불행감-절망감-외로움-무가치함-걱정-죄책감과 같이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정서 상태를 드러낸다. 흔히 슬픔을 가누지 못해 이야기하면서 계속 우는 경우가 있으며, 심하면 식욕과 성욕이 없어지기도 한다. 신체적 증상으로 식욕이 저하되어 체중이 현저하게 감소하는 경우가 많다.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 갔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행복하거나 즐거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울증은 한동안 달갑지 않은 친구처럼 우리 곁에 다가와 머문다. 우울증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귀중한 것을 잃었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신호다. 가족의 죽음으로 생기는 슬픈 감정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반응이다.

데이비디와 낸시 거스리는, 죽은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도 죽어서 떠난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고 끊임없이 주위에 이야기한다든지, 4주 만에 체중이 갑자기 줄었다든지, 슬픔이 지나쳐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표정이 없어진다면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고, 일상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정도라면 확실하게 우울증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너는 분명히 이겨낼 거야. 힘 내,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라고 용기를 북돋는 말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분노에 찬 상대방에게 격려한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리한 웃음을 강요한다면 상대방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다 집어치워.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우울증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때로는 혼자 흐느끼기도 하며 기억력도 떨어지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하기도 한다. 우울증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친다. 완전히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

우울증은 갑작스럽게 오기도 하고 서서히 오기도 한다. 안개가 낀 듯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완전히 바닥에 떨어진 느낌이 든다. 우울증은 소외감을 불러온다. 우울증에 걸린 한 중년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났으면 좋겠어. 세상 만사가 귀찮아. 혼자 있고 싶을 뿐이야!”

이런 감정은 매우 두려운 느낌이다.

데이비드와 낸시 거스리는 사별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대인 관계를 기피하는 경향은 사람들과 불편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서, 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정상적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한 동안은 숨어 있어도 괜찮지만, 그것이 습관이 된다면 일상생활로 되돌아와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영적 삶에도 영향을 미쳐 하느님을 대하던 태도까지 바꾸어 버린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인생의 해답을 알고 계시고 우리가 성공하길 바라시는 분이란 사실을 믿기 어렵게 되고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느끼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어떤 사람이 처절한 모습으로 동상처럼 서서 우울증에 딱 들어맞는 말을 했다.

“암울한 느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누구도 내가 느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어. 사랑의 하느님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하느님이 우리를 저버린 것 같이 생각된다. 또한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순간에는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

 

신체적 고통

우리가 슬픔을 겪는 동안 신체적으로도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식욕을 잃고 체중이 감소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무기력해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이와 반대로 지나치게 많이 먹는 사람도 있다. 또는 현기증이 나며 멍해지거나 심장이 두근거리고 통증을 느끼며, 호흡이 가빠지고 전신이 아프거나 월경 양이 많아진다. 간혹 기절하는 일도 생기고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기도 한다. 불면증-식욕 감퇴-체중 감소 등은 예견되는 ‘정상적인’ 슬픔 과정 가운데 하나다.

천천히 움직이거나 움직임이 거의 없는 것(지체 장애), 심각한 기능장애, 심지어 망자의 환상과 환청(환각 경험)과 같은 증상도 사별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정확히는 두 달 이내일 때만 그렇다. 이런 증상이 두 달 이상 계속된다면 ‘주요 우울장애’라 볼 수 있다.

한 중년 미망인은 남편이 죽은 직후부터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류머티즘이 재발했다. 사별한 사람들이 몇 년 안에 암과 같은 병에 걸리는 확률이 높다는 통계도 있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슬픔은 새로운 것을 파괴하는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는다. 상실이나 충격을 경험할 때 몸에 있는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채 그대로 두면 만성적 고통에 시달린다. 크리스버그는 이를 만성적 충격이라 부른다. 이러한 만성적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불안-긴장-두려움-신경증-분노-분개-슬픔-공허감-불이행-혼돈-죄책감-수치심 같은 증상에 계속 시달린다.

 

수용

일흔 후반의 노인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내도 남편을 떠나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노인은 가족의 손을 잡고 서로 사랑하며 돌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리는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죽음이 임박하기 전까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낸다.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면 아마 제도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엄습해 오고 죽음을 직면할 때 죽음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사랑하는 이와 사별하는 것을 받아 들였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내면과 바깥 삶의 부조화는 진실로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말한다.

우리는 가끔 노인들의 죽음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알던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가 영원히 살리라는 환상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환상은 서서히 수용하는 방향으로 간다.

우리의 사별 여정에는 많은 신호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수용이다. 사실 비탄의 과정은 수용을 위한 전 단계 작업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표지다. 우리는 상실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자신을 다시 긍정하기 시작한다. 어렵지만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예, 죽었어요. 그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어떤 날은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그가 갔다는 건 알지만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아내를 잃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죽은 것을 알아요. 이젠 그녀 없이 살아야 하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아내를 잃은 것을 마침내 받아들였다는 징표로 묘비를 세웠다. 이렇게 하자 비로소 그는 마음에서 아내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각자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좋은 기억과 시간, 느낌을 표현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수용이 자기 확신으로 연결될 때 우리는 성숙해진다. 남편의 죽음을 수용한 여인이 확신을 갖고 말했다.

“남편은 내가 계속 꿋꿋하게 살아가길 바랄 거예요. 남편 없이 살아가면서 나는 그 사람이 내게 준 것, 곧 나를 자유롭게 해 준 것을 받아들였어요.”

이것이 바로 수용이 주는 선물이다.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십자가 밑에서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한 백부장의 외침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과 수용과 확신을 담고 있다.

 

 

임종 환자가 거치는 단계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를 이렇게 말한다. 첫째는 부정 단계, 둘째는 죽어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분노 단계, 셋째는 타협 단계, 넷째는 우울 단계, 다섯째는 수용 단계이다. 알폰스 데켄 Alfons Deeken 은 여기에 기대하고 희망하는 단계를 덧붙인다. 영원한 생명,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의 단계다.

 

부정

죽음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자주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죽음’ 또는 ‘죽다’ 라는 말을 입에 올리려 하지 않는다. 임종에 가까운 대부분의 환자가 경험하는 첫 단계는 부정 denial 으로, 자신의 병이 치유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정은 환자의 말이나 행동에 나타난다. “아니야, 난 믿을 수 없어. 나한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라는 표현을 흔히 하게 되고, 진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 다니며 검사 결과가 다른 사람의 것과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부정 단계에서 하는 환자의 말고 행동의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곧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심각하지 않게 증상을 이야기한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며 어쩌다 죽음에 대한 말이 나오면 곧바로 말을 돌리거나 공개적으로 “나는 죽음을 믿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또 비의학적 치료법이니 신을 통해 치유 받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질병이나 증상에 대해 묻지 않는다. 증상이 자연히 사라지길 기대하면서 치료를 거부한다. 신체나 외모의 급작스러운 변화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질병을 가벼운 것으로 이야기하며 아직 죽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어떤 병인지 알지만 자신을 꼭 회복되리라 확언한다.

이럴 때 가족들은 환자가 부정의 단계에 있음을 알아야 하고, 환자한테는 부정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함을 이해해야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환자가 사실을 직면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환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좀 더 현실적 견해를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만일 환자가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다면 고통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것이다.

 

분노

‘하필이면 내가!’라고 말하면서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 병원 직원 도는 신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분노anger를 표현한다. 분노의 단계에서는 가족이나 간호하는 사람들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수시로 화를 내며 온갖 것에 불평하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분노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주위 사람들의 건강을 질투하는 것이며 자신은 곧 죽게 되고 사람들이 자기를 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기에 목소리를 높이고 불평하며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 가족이나 의료진이 환자가 분노하는 까닭을 생각하지 않고 예삿일로 받아들여 반응한다면 더 심한 분노를 일으킬 것이며 환자의 적대적 행동은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분노를 표현하도록 놓아둔다면 오히려 편안해하고 목적 없이 간호사를 자주 부르거나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존경과 이해와 관심을 받으며 그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을 알면 환자의 목청은 한결 낮아지고 성난 요구도 훨씬 줄어들며 자신이 아직도 가치 있는 사람, 보살핌을 받는 사람, 할 수 있는 데까지 활동이 허락된 시간임을 알게 될 것이다.

 

타협

첫 단계에서 슬픈 현실을 대면하지 못하고, 둘째 단계에서 사람들과 신에게 분노를 표현하던 환자는 타협 bargaining을 시도한다. 그래서 불가피한 사실을 어떻게든 연기하려 한다. 과거 경험으로 미루어 착실한 행동을 보이고 특별한 헌신을 하기로 맹세함으로써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생명을 연장하는 것, 며칠이라도 좋으니 통증이나 신체적 불편 없이 지냈으면 하고 소망한다.

타협은 대부분 절대자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언약은 비밀에 부쳐지거나 다른 말을 하다 언뜻 비치거나 원목 담당자에게 말한다. 자기 몸의 일부나 전체를 의학 발전을 위해 기증하겠다고 언약하는 환자들도 있다.

심리학적으로 언약은 죄의식과 관계가 있다. 가족이나 의료진은 환자의 행동이 미성숙하며 어린아이 같고 환상에 젖어 있으며 어른으로서는 적당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 소망을 묵살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정상이며 환자가 다음 단계를 위해 준비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울

회복 가망성이 없는 환자기 자기 병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고 증상이 더 뚜렷해져 몸이 현저하게 쇠약해질 때 환자는 더 이상 웃어넘기지 못한다. 초연한 자세와 무감동, 분노와 격정은 극도의 상실감으로 바뀌며 심한 우울증 depression 에 빠진다.

이 단계에는 두 가지 우울증이 있는데, 하나는 반작용적 우울증으로 과거나 현재의 손상과 관계된다. 곧 환자는 부모 없이 남게 될 아이들에 대해 또는 막중한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될 가족에 대해 걱정한다. 또 다른 우울증은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사람과 물건,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예비적 우울증인데, 이 단계에서 환자는 매우 조용히 있거나 울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환자가 슬픔에 젖도록 놓아두어야 하며 감정을 표현할 때는 옆에 가만히 앉아 잇거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주고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좋다. 이 단계에서 환자는 대화보다 자기와 같이 느끼고 슬퍼하며 옆에 있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수용

환자가 시간 여유가 있거나 앞서 기술한 과정을 거치면서 도움을 받았다면, 더 이상 자기 ‘운명’을 두고 분노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는 수용 acceptance 단계로 들어간다. 그 동안 자기가 느꼈던 감정을 털어 놓을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산 사람과 건강한 사람에 대한 질투와 분노를 이야기하고, 머지않아 자기는 소중한 사람들과 정든 곳을 떠나게 되리라고 한탄하며, 어떤 기대를 가지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볼 것이다.

환자는 대개 극도로 지치고 쇠약해지며 감정의 공백기를 가진다. 수용을 행복한 감정 단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통이 지나가고 몸부림이 끝난 후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이라고 보면 좋다.

 

희망

한평생 함께 살아온 사람의 죽음 앞에서 고통과 절망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우리가 상처 받고 더 깊은 고통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함께한 세월 때문이라기보다 그 사람과 그만큼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과 절망을 마주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며 무능력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손을 내밀 때 고통과 절망은 희망 hope으로 바뀐다.

이렇게 고통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 고통은 친구로 다가온다. 마음이 열리고 슬픔이 따뜻함과 기쁨으로 전환된다. 사별을 겪는 동안 우리는 상반되는 감정을 경험한다. 불안정을 느기는 것은 사별 여정에 변화가 있다는 징표이다. 이러한 긴장을 통해 상실과 미래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는 힘이 나온다.

우리가 경험하는 상반된 감정과 타협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만일 하나의 감정에만 의지한다면 사별 여정은 위험할 수 있다. 상반된 감정이 합쳐져야 하나의 완전함이 이루어질 수 있다. 밤이 없는 낮은 없다. 전쟁 없는 평화는 없다. 미움 없는 사랑은 없다. 절망 없는 희망은 없다. 죽음 없는 부활은 없다. 우리는 상반된 것들 사이에서 오래된 찬미가를 바칠 수 있다.

 

구원자 예수님, 저를 이끄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폭풍의 바다를 뛰어넘게 하소서.

제 앞에 파도가 출렁이고 암초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 해도와 나침반으로 저를 이끄소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 죽음을 준비하라고 하신 부분을 돌이켜 보자. 제자들은 그 말씀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고 거부했다. 이렇게 제자들 대부분이 임박한 죽음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듣지 않으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 거부하지 말고 준비하고 받아들여 죽음을 희망으로 바꾸라고 당부하신다. 우리 각자의 삶과 죽음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사도 바오로는 확신을 갖고 고백한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4 역기능 가정과 내면 아이의 상실

2년 전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매우 허탈했고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때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나를 그런 감정으로 몰아간 이유가 그와 헤어졌기 때문이라기보다 내 내면에 있는 어린 소녀를 잃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나는 밤마다 울다 잠이 든다.  ‘내 내면 아이의 상처가 깊은 만큼 그 아이가 치유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치유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사례는 이십 대 중반 여성의 상담 내용이다. 스물다섯 살 난 민지는 아버지가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으로, 학대 받는 전형적인 역기능 가정에서 자랐다. 십대 말, 그녀도 알코올 의존자가 되었고 4년 전인 스물한 살 때 치료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코올 의존자와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사람들을 위한 그룹 치료에 참여하면서 2년 동안 눈에 띄게 달라졌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고통을 겪으면서 이를 계기로 내면 작업을 시작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것 때문에 슬퍼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다른 잃음, 곧 내면 아이가 혹사당하고 학대 받았던, 아직 끝나지 않은 슬픔을 자극했다. 이것이 바로 슬퍼하는 것이 겉보기와 달리 그렇게 단순한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다. 물론 민지는 비록 불완전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내면 아이의 잃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불완전하다는 말은 지지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녀는 모임에 가입한 후 거의 1년 동안 그룹 치료를 신뢰하지 않았고 남자들한테 부당한 대우를 받아 생긴 강박현상을 자주 드러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진실한 이야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녀는 상호 의존적 자아와 반복되는 강박현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내면 아이가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자신의 어린 시절 슬픔을 여전히 갖고 있는 사람이 친구를 떠나 보내면서 겪은 사례다. 현재의 슬픔이 내면에 간직한 고통스런 감정과 연결되면서 슬픔을 자극하여 더 큰 슬픔을 표출한 예다. 역기능 가정에서 슬픔의 작업을 할 수 없어 슬픔을 마음에 지니며 평생을 살아온 이야기다.

 

희경이와 진희는 같은 아파트 같은 복도에서 거의 5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렇게 살다 갑자기 희경이네 식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진희는 너무 슬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이 위로하고 아이들이 기쁘게 해도 기쁨을 느낄 수 없었고, 어쩌다 미국에서 전화가 오면 잠시 위로를 받았지만 더 슬퍼지곤 했다.

그렇게 슬픈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진희는 마음속에서 한없이 울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았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까지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은 기억이 났다. 그때 엄마는 진희에게 울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친구의 장례식에도 무덤에도 가지 못하게 한 기억이 떠올랐다. 진희는 갑자기 모든 것이 슬퍼지고 고마 친구가 보고 싶고 불쌍해서, 또 그 동안 친구 무덤에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다음은 역기는 가정에서 자란 삼십 대 중반의 남성과 상담한 내용이다.

 

이혼한 서른네 살의 민수는 역기능 가정에서 자랐다. 그룹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섯 살 이전에 일어난 일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때쯤 아버지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셨기에 자연히 가족은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삼촌 집으로 배를 태워 보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이 어린 소년의 내면에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는 진짜 나를 버렸구나!’ 라고 생각했고, 어머니마저 저를 거부했다는 느낌에 슬프고 화가 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제가 특별히 모자란 것 같아 사람들 앞에 나설 수도 없습니다.”

그 후 몇 차례의 상담 끝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저를 버린 것에 대해 나름대로 터득한 한 가지 대응 방법은 너무 가깝게 다가가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어떤 여성과 가까이 지낼지라도 다툼이 길게 갈 것 같으면 제가 먼저 그를 떠날 겁니다. 그가 저를 버리기 전에 제가 먼저 그를 버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민수는 회복하는 데 중요한 쟁점인 버림받은 문제를 다루면서 상처와 화의 느낌에 대해 계속 작업해 나갔다. 민수는 어린 시절 부모한테 버림받은 충격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여기에 민수가 받은 상처, 특히 정서적 방임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첫째, 민수 어머니는 민수에게 왜 헤어져 살아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둘째, 민수는 그 나이에 받아야 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셋째, 다시 같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않아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다. 넷째,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외로움과 공포감을 느꼈다. 다섯 째, 어린 나이에 필요한 영양과 의학적-물리적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처 때문에 민수한테는 부정적 성격과 방어기제가 형성되었다.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는 적대적 성향, ‘상대방한테서 버림받지나 않을까?’라는 두려움, 언제든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상실감 등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방어기제로 주위 사람들과 진실한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고 깨지는 관계를 반복하고 있다. 민수가 어린 시절 겪었던 충격은 그것이 진정한 것이든 위협적인 것이든 상실이다.

 

내면 아이의 슬픔을 방해하는 것들

슬퍼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잘못된 효 인식, 다시 말해 부모님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곧 부모님과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화에서 보호하려는 것이다. 내면 아이를 발견하고 슬퍼하는 치유 여정에서 이는 분명 잘못된 것으로 이로 인해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생각은 ‘말하지 마, 믿지 마, 느끼지 마.’라는 것과 같다. 다음은 우리가 부모님을 보호하기 위해 슬퍼하는 것을 피하는 방법이다.

 

철저한 거부

“아, 내 어린 시절은 좋았어요.” 또는 “나는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알코올 의존자나 폭력적인 역기능 가정의 자녀 대다수가 어린 시절의 경험을 75퍼센트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회복 작업을 통해 거부했던 것들, 곧 슬퍼하지 않은 상실이나 충격을 서서히 발견하거나 뚫고 나가게 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듣는 것은 자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서 화를 낼 수 있고 슬픔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별일이 아닌 척하는 것

“그래요, 제 어린 시절은 어느 정도 불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모님도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과거 일인데 왜 끄집어 내어 분란을 일으키려 하지?” 라고 진정시키는 태도는 우리를 느낌에서 떼어놓고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는 데 필요한 슬픔 작업을 방해한다.

 

고통을 환상으로 보는 것

이는 정신분석이나 정신분석적으로 지향된 정신 치료로 회복하는 작업을 할 때 나타나는 일반적 투사다. 만일 충격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환상이라고 암시하여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거나 기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밀러는 상처를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면 내면 아이가 지닌 고통을 다시 한 번 무효로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은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어.’ 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부모를 싫어할 수 있지만 그들이 잘못한 것이 우리를 사랑하기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찾으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 막 울기 시작한 내면 아이를 한 번 더 거부하고 달래고 통제하는 것이다. 화난 아이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으면 아이의 참된 자아가 때어나 성숙해지는 과정이 손상된다. 혹사당한 것에서 자유로워지려면 화를 낼 필요가 있다.

 

계명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함

십계명에서 ‘공경’하라는 말을 정확하게 해독하거나 번역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몇 세기에 걸쳐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를 ‘말대꾸하지 마라.’는 의미로, 또 어떤 사람들은 아이를 억누르라는 말로 해석해 왔다. 우리는 4계명을 ‘만일 내가 부모님께 화를 낸다면 하느님이 야단치실 거야’, ‘만일 부모님께 화를 낸다면 나는 악마나 나뿐 사람이 될 거야.’ 라는 식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제도화된 세상 종교들이 대부분 이러한 권고를 하는 데, 이는 내면 아이를 억눌러 우리가 건강한 방식으로 진실하게 상실을 헤쳐나가는 능력을 억압하는 것이다.

 

거부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만일 내가 분노를 표현한다면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도는 ‘그들은 나를 나뿐 아이 취급할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런 식으로 인식할 때 표현되어야 하는 진짜 두려움이다.

 

알려지지 않은 두려움이나 표현하는 느낌에 대한 두려움

‘진짜 나쁜 일이 일어날 거야. 내가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받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회복하기 위해 표현해야 하는 또 다른 진짜 두려움이다. 또한 ‘나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자신에게 대한 비난을 인정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화와 슬픔을 ‘부모를 용서한다.’ 라는 단순한 명목으로 피한다.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제는 그들을 용서할 거야.’라고 말하거나 자신의 참된 자아를 억누르면서 ‘나는 이미 용서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슬픔의 여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완전하게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슬픔의 여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비판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나쁜 거야!’ 또는 ‘감히 어떻게 부모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이 방법 가운데 하나나 몇 가지를 혼합한다. 그로 인해 상처와 화, 격분에서 부모를 보호하려고 참된 자아를 억눌러 불필요한 고통에서 회복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슬퍼하는 작업을 방해 받거나 슬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상처에서 해방될 수 없다. 잃어버린 것이나 사건으로 슬퍼하지 못하고 상처 받을수록 더 많은 화가 쌓인다.

비록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그런대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한다 해도 무기력하고 빼앗긴 것 때문에 여전히 화가 날 수 있다. 또한 상실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가 날 수 있다.

상담 받으면서 오히려 고통이 더 커졌다고 화를 낼 수 있고 심지어 슬픔 작업을 하도록 몰아간 상담자나 치료사한테도 화를 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제대로 화를 내고 슬픔의 안식처에 도달한 후에야 화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내면 아이의 상실 치유 작업

 

인간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간관계는 자신의 일부가 되며 자아 형성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파괴되거나 상처 입히는 관계가 될 때, 우리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며 그 슬픔의 깊이에 놀라게 된다.

우리는 소중하게 보존되고 깊어져야 하는 인간관계가 깨어질 때 오는 상실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상실에서 오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한테서 상처 입거나 소중한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분명 죽음의 형태다.

상대방과 관계가 끊어지게 된 배경은 상실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 배경에 자신의 잘못이 없을 경우에는 슬픔과 상실감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한다.

자신을 학대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한 슬픔과 용서의 여정은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여정을 서두르거나 몰아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와 화해함으로써 즉각적이거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라고 역설하는 치료사와 상담자도 있다.

그러나 그런 조급한 노력은 실제적으로 내면 아이를 발견하고 치유하는 데 장벽이 될 수 있으므로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또는 우리가 표현하는 것, 곧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하는 것들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혼돈과 상처, 무기력함을 느껴 최상의 유익을 얻지 못하고 자기 파괴로 끝맺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슬퍼하고 싶지 않아 온갖 방법을 사용하며 계속하여 슬픔을 거부한다. 슬픔을 합리화하고 느낌을 억압한다. 예를 들어 ‘나는 강하다’, ‘나는 혼자 그것을 해낼 수 있다.’  라고 자기 암시를 한다. 슬픔 작업을 하지 않은 많은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알코올이나 약물을 사용한다. 비록 이러한 방법으로 일시적 안정을 얻는다 해도 슬픔을 해소하지 못하면 고통을 연장할 뿐이다. 상실이나 충격을 인정하고 슬퍼할 때와 마찬가지로 슬픔을 피하기 위해서도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우리에게 슬퍼할 능력이 없으면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고통을 받는다. 슬퍼하지 않는 상실에는 기대-희망-믿음이 꺾임, 자존감의 상실, 즉각적으로 기분을 좋아지게 하거나 잠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코올이나 약물을 사용한 사건이나 관계, 현재의 관계 안에서 변화, 미래의 상실에 대한 위협, 과거에 불완전하게 발달된 단계가 있다. 상실은 알코올 의존자와 그와 관계 있는 사람 또는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회복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한다.

허버트 앤더슨과 케네스 미첼은 슬픔을 이기는 첫째 방법은 슬픔의 원인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한다. 곧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아동기 경험에 뿌리내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겪은 상실을 슬퍼하면서 고통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고통을 안고 살아가거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행위를 하여 모두를 불행하게 하고, 문제를 일으켜 끊임없이 위기를 겪게 할 수 있다. 이러한 파괴적 행위가 반복되는 것을 ‘반복적 강박현상’이라고 부른다.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반복해서 그런 불행한 일을 겪는 것이다.

반복되는 무의식적 충동이나 강박현상을 몇 가지씩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이 겪는 상실감의 정도와 대면 방식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상실감이 미미하게 드러난다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큰 상처를 안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느낌이 마비된 것처럼 또는 ‘전혀 느낌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는 불면증-아픔-고통-위장 장애 등과 같은 정서적-신체적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느낌은 왔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온전히 건강한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말이다.

슬픔 일을 극복하려면 상실을 확인하고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보울비 는 격렬한 슬픔은 충격이나 불안 또는 화로 시작되어 고통과 절망으로 이어지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결말을 내는 경로를 밝는다고 말한다.

심각한 알코올 의존자, 폭력을 행사하는 이, 온갖 방식으로 학대하는 부모나 사람들에게 상처 받은 이가 자신의 상처를 인식하고 치유한다는 것은 상처 입는 내면 아이를 발견하고 치유하는 공간과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다.

슬픔은 아프고 힘들게 하는 정신적-정서적 움직임이다. 슬픔은 너무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어떻게든 그 고통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슬픔의 고통을 뚫고 나가려면 슬퍼질 때 그 느낌을 바꾸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슬픔은 활발하게 일어난다.

슬픔과 비통한 일 앞에서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상처 받기를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도록 격려 받거나 허락 받지 못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더 큰 불행과 상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내면 아이를 치유하는 작업을 하면서 우리는 오래 전에 일어났던 슬픔이나 충격에 대한 작업을 피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지금이 슬픔을 털고 일어나 온전한 내가 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하게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내면 아이를 치유하는 데는 화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고 건강한 방법이다. 우리의 화를 들어주고 도와주는 치료사-상담자-스폰서-치료 모임이나 자조 모임 구성원, 신뢰할 만한 친구들이 있다면 더 확실하게 치유 여정을 걸을 수 있다.

 

 

5. 가족의 죽음 앞에서

 

가족은 함께 살며, 경제 협력과 재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 집단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이 되는 집단이다. 가족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성적 관계를 유지하는 성인 남녀와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자녀들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가족을 부부-자녀-부모 등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조직체로 보는 관점은 법적-생물학적 유대 그리고 동거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가족’이란 남편과 아내, 자녀로 구성된 단위로서 결혼과 생물학적 부모 됨에 기초한 집단으로 함께 살면서 정의적 유대, 보호와 지원 의무, 공동 정체성으로 통합된다.

김병오는 <상처와 슬픔의 치유>에서 가족은 부부의 결합, 자녀의 출생, 자녀들의 결혼과 분리, 비어 있는 보금자리 empty nest,  가족의 사별 등의 생활 주기를 따라 발달하고 해체된다고 말한다.

가족 발달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긴장이다. 취약한 가족일수록 스트레스를 견디는 능력이 약하고 내적 긴장을 잘 견디지 못한다. 가족의 응집력이 지나치게 약하면 ‘이탈’이 이루어진다.

가족 체계를 위협하는 것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가족의 죽음에서 오는 상실이다. 우리가 겪는 여러 상실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렵고 힘든 것은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내야 하는 남은 자족들의 고통이다. 이 고통은 먼저 간 가족에 대한 죄의식과 슬픔, 죽음에 대한 분노, 허탈감과 공허감과 무력감 등으로 깊은 우울증과 함께 약물로는 치료하기 힘든 심신증 心身症 을 비롯한 많은 부정적 감정이 얽혀 사별의 비애는 무척 큰 후유증을 동반한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와의 별거와 이혼, 상실 등 배우자와 관련된 생활 사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가장 크다. 특히 자녀를 자신과 같게 여기는 우리나라 부모들한테 자녀의 죽음은 가장 큰 스트레스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지극한 헌신이 일반적이기에 배우자 상실로 인한 스트레스 지수보다 자식의 죽음에 따른 스트레스가 훨씬 높다. 특히 자녀를 잃은 부모는 그 자녀를 남은 생애 동안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함께 공유해 온 애착과 기대를 모두 포기해야 하기에 상실감이 더욱 크다.

죽음은 생명윤리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하느님만이 삶의 최종 순간을 결정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생명의 반대 개념인 죽음은 그 자체로 단절이며 절망, 상실의 사건이다.

죽음이란 살아서 경험하는 능력의 상실이며, 가족이나 친지가 느끼는 고통과 슬픔의 상실, 죽은 후에 올 육신의 변화에 대한 공포의 상실, 부양가족을 돌보는 능력의 상실, 비교적 진통 없는 상태의 존재 상실이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는 사뭇 다르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음이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불안과 고뇌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다만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어떻게 순응할 것인지에 따라 삶의 모습은 달라진다. 비록 현대 의학이 인위적으로 죽음의 시간을 어느 정도 늦출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가족이나 나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자연스런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능동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춘 죽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임종자가 죽음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죽음을 넘어서는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도록 영적 도움을 주는 일이다.

인생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하루 사는 것이 곧 하루 죽은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늘 죽음을 받아들이며 가까이하는 자세를 갖는 게 중요하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게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므로 두려워하거나 낯설어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영원을 향해 활짝 열린 문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결정적 체험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렇게 죽음을 넣어서는 인간의 영속성을 강조하며 신앙 안에서 강한 희망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가까울 때,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감사와 축복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기쁘게 하느님께 나아가길 희망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부모를 잃은 슬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우리 형제는 부모님 중심으로 모였다. 이때 부모님은 때때로 있는 가족들의 갈등이나 분쟁을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중심에 계셨던 두 분이 모두 저 세상으로 가시자 우리는 구심점을 잃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 형제들은 그 동안 부모님께 서운하게 해드린 것이 아니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막내인 나는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부모님을 모시는 책임을 맡았다. 그래서 집사람과 나는 다른 형제들이 공평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화를 내고 원망했다.

 

같은 형제라도 부모님과 맺은 관계는 서로 다르며 각자가 간직한 기억이나 감정도 다르다. 출생 순서와 성별, 그리고 나고 자랄 때 환경이 달랐기에 부모와 맺은 관계 방식도 다르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기억하는 부모님의 모습과 추모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형제들끼리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긴장하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형제들은 같은 부모한테서 나왔기에 생김새나 건강, 크게 보아 성격까지도 닮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록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분들에 대한 기억이 계속 우리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부모님이 훌륭하든 고통스러운 기억밖에 남기지 않았든 부모님은 영원히 우리의 일부다. 그래서 형제들은 부모님께 받은 생물학적-심리적 영향과, 자라면서 기억의 창고에 쌓인 내용을 나눔으로써 자기를 인식하고 형제들 간에 좋은 유대를 형성하며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후에도 가족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죽음에 이르러 삶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남은 가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현실적인 가족의 구심점이 사라지기에 가족들이 다 함께 모이던 때를 그리워 하면서 일 년에 한 번 특별한 날을 정해 가족 모임을 갖고 기일 같은 특별한 날에 함께 모이면 좋다.

부모님을 잃은 경우 맞닥뜨려야 하는 가장 두려운 현실은 그 다음 차례가 나라는 것이다. 이는 그 동안 늘 미루어 온 것들을 시작할 기회, 특별히 가족 관계를 개선하여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자리를 잡고 그 역할을 수행하라는 초대일 수 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떤 일에서든 우리 자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부모님한테서 독립할 때와 마찬가지로 해방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부모님의 기대에 자유로워져 완전히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부모가 언젠가는 돌아가실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막상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면 자신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래서 부모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과거에서 단절되고, 현재는 편치 않고, 미래는 두려운 느낌을 가지고 되는 것이다. 부모는 언제나 우리 삶의 일부였기에 그분들의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과거의 큰 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부모는 갓난아이 때와 어린 시절의 생명줄, 곧 갓난아이 때부터 우리를 먹이고 길러주신 분, 우리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신 분이고, 어른이 되어서는 생물학적 관계와 함께 심리적 의존관례로 변한다. 부모의 인정과 충고, 지지와 격려가 우리를 지탱하게 한다.

이러한 관계는 살아서 뿐 아니라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된다. 아니, 돌아가신 후에 더 강하게 연결된다. 부모는 우리 마음과 유전자 안에 늘 함께 계시며 영향을 미친다. 부모는 우리가 모든 세대를 초월하여 태초의 첫 인류요 첫 부모인 아담과 하와와 연결되는, 곧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우리한테는 후손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줄 의무가 있다. 나와 부모, 나와 자손들에게 좋은 유대관계를 이어줄 의무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돌아가신 후 슬픔을 치유하는 것은 좋은 유산을 물려주는 계기가 된다.

리누스 문디 Linus Mundy 는 <부모님을 잃은 슬픔의 치유>에서 어떤 경우라도 부모를 잃는 충격은 심각하며, 슬픔은 너무 깊고 생생해서 반드시 슬픔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탄과 함께 버거운 짐을 벗었다는 안도감이 교차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또한 리누스 문디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이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기에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를 여윈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고 상당히 고통스럽기에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해 일어나는 많은 일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부모님을 여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존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한꺼번에 많은 것을 상실한 허탈감과 슬픔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다 해도 부모님과 맺는 관계에서 본다면 언제나 어린아이이기에 부모님의 죽음은 종종 다 큰 자식들한테도 버려진 느낌을 주고 공황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님의 죽음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부모님을 잃는 정서적 준비를 하기란 쉽지 않다.

부모님과 아무 문제 없이 완전한 관계를 맺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동안 쏟아낸 가혹한 말과 아물지 않은 깊은 불화와 상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으나 놓쳐버린 기회를 돌아보며 마음 아파한다. 그러나 그런 불안감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죄책감을 고착시키는 토양이 되고 화해할 기회를 잃게 한다.

우리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우리를 용서할 뿐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또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더 많이 매달리던 부모님께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못한 우리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비록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었지만, 우리 내면에는 언제나 아버지의 인정과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내면 아이가 있다. 그리고 아동기에 아버지의 인정이나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더 간절히 찾게 된다. 우리의 슬픔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부과된 어려운 일들, 예를 들어 부모님과 역할을 바꿔야 했던 것 또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요양시설로 옮기는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던 것 등에 정서적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에도 돌아가신 부모님은 우리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리라는 믿음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리누스 문디는 마음속 고통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해 느끼는 만큼 실컷 얘기하고 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친구들이나 형제 또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친구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냥 큰 소리로 ‘어머니’,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치유가 된다고 강조한다.

노인학 교수 레이 미심 신부는 연로한 부모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수록 자신의 늙음을 더 잘 준비할 수 있다고 한다. 부모님을 상상하면서 건강하고 바람직하게 늙어가는 방법, 어려운 시기에 친구와 가족들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 법, 죽은 뒤뿐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좀 더 좋은 동반자가 되는 법,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법 들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상실을 통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상실의 경험을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와 다른 사람에 대한 감수성을 성장시키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해서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일부를 묻어두고 삶의 새로운 장을 씩 시작할 때 새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중심이었고 가족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가족은 중심을 잃고 유대가 완전히 끊어졌다. 나는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호탕한 분이셨다. 늘 쾌활하게 웃으셨고,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집안에 웃음이 사라졌고 행복했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날마다 술을 마셨고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부수기도 했다.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되었다. 여자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이 너무 커서 다시는 그런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누스 문디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우리의 성공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구보다 가슴 아파할 사람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은 어떤 시합을 하든 무조건 우리가 이겨야 하고, 우리가 세상에게 가장 잘나고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이 최우선인 사람, 우리한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 우리가 없는 데서 우리를 자랑스러워하고 우리한테 최고의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리누스 문디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열광하는 최고의 팬, 가장 열렬한 옹호자를 일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또한 어머니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준이다. 어머니를 전혀 닮지 않았더라도 어머니가 자녀의 준거1가 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맨 처음 우리를 있게 한 사람, 우리의 자아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을 잃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당하는 위험에 눈감을 수 없다. 그러나 자녀들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신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의 노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된 후에도 어머니는 언제나 자녀들을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정서적 안정감, 보호막, 방패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리누스 문디는 어머니와 자녀 관계에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면 그것은 어머니와 얼굴을 맞대고 화해할 기회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며, 이는 희망의 상실이요 상황이 좋아질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에도 어머니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한테는 어머니만의 독특한 성격, 어머니의 힘과 지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실천하신 어머니의 모범이 남아 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전화나 편지를 하거나 직접 방문함으로써 자녀들이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어른이 된 자녀들은 어머니를 통해 자연스럽게 소식을 전하거나 서로의 안부를 묻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형제들을 서로 연결해 주던 끈이 끊어지게 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가족 관계를 유지하고 접촉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머니가 쓰던 향수를 사용하고, 어머니 옷을 입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사진을 액자에 넣어 아이들에게 선물함으로써 어머니를 기억하면 좋다.

어머니가 즐기던 음식을 어머니 방식대로 요리하는 것도 어머니를 기억하게 한다.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뿐 아니라 어머니 이름으로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어머니 산소에 나무를 심는 등 여러 방법으로 그분에 대한 기억이 살아 있게 한다면 어머니와 관계가 승화될 뿐 아니라 상실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삶의 많은 영역에서 상실을 느낀다. 우리는 종종 어머니 사랑을 시험하지만 그 사랑이 약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리누스 문디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우리는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을 상실하게 되며, 그 상실감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채워줄 수 없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자녀가 나누는 친밀감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접촉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한다.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어머니의 죽음은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는 손길과 따뜻한 품을 영원히 잃게 됨을 의미한다.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는 맹 복잡하다. 세상 어떤 어머니도 완전하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완벽한 자녀도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남은 가족들은 많은 고통을 겪는다. 특히 가족들 간에 불화가 있는 경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격렬하게 오래 지속된다. 다음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족들끼리 갈등을 겪는 30대 여성의 이야기다.

 

나는 결혼한 30대 여성으로 두 자녀의 엄마다. 친정어머니가 10년 전 암으로 돌아가시고, 3년 후에 아버지가 재혼하셨는데 1년 6개월 정도 행복하게 사시다 불행하게도 중품을 맞아 5년째 전심마비로 병석에 계신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너무 절망적이다.

그러데 아버지의 치료 방향이나 재산 문제로 새어머니와 의견 충돌이 극한상황까지 갔다.  아버지를 돌봐주시는 분이라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극도의 악화된 감정은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만나면 복잡한 감정 때문에 너무도 괴롭다. 아버지한테도 소홀하게 되니 불효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만나서 그 동안의 마음을 풀고 싶지만 지금 나한테는 너무도 어려운 과제다.

 

 

사례 주인공은 10여 년의 세월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0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상실감을 어떻게 처리했느냐 하는 것이다. 새어머니와 갈등 속에는 돌아가신 친어머니와 관계에서 오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많은 경우 이러한 과거의 관계가 현재 문제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특히 친어머니와 맺었던 관계의 양상이 새어머니와 맺는 관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익숙한 삶의 방식과 새롭게 도전해야 하는 환경이 교차하면서 두드러진다. 아버지가 재혼하여 산 1년 6개월이라는 행복했던 상황에서는 드러나지 않다 오랜 기간 병석에 누워 계시면서 잠재해 있던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아버지의 치료 방향이나 재산 문제로 그 동안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고 극한상황까지 갔다.’ 는 표현처럼 현실적 문제가 잠재해 있던 문제를 자극한 것이다. 이처럼 대립하고 갈등하는 상황에서는 십여 년이 지났어도 친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게 된다. 잊어버리려고 애썼지만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솟아난 것이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위기는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전심마비로 5년째 앓고 계시니 당연히 차도는 기대하기 어렵고 악화되기 쉽다. 이러한 경우 앞당겨 체험하는 상실감과 함께 ‘아버지한테도 소홀하게 되니 불효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고 한 것처럼 죄책감까지 겹쳐 더 힘이 든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두고 치료 방향이나 재산 문제로 옥신각신한다는 자체가 아물지 않는 곳에 다시 상처를 내는 행위인 것이다.

아버지가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그런 문제로 갈라져 싸우며, 극도로 악화된 감정으로 치닫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상식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재산 문제로 다투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다. 너무도 괴롭다고 말한 것처럼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이 자신에 대한 학대와 새어머니와 겪는 갈등으로 증폭된다.

무엇보다 새어머니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먼저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밀어두었던 슬픔의 문제다. 친어머니의 죽음에서 오는 슬픈 감정이 치유되어야 지금 병상에 계신 아버지와 앞으로 또 한번의 상실을 겪게 될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친어머니를 잃었을 때 남아 있던 상실감이 죽음 앞에 있는 아버지에게 연결되어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절망에 빠지고, 새어머니와 관계도 극도로 악화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특히 자신한테도 계속 상처만 남기게 된다. 그래서 지금의 갈등을 자신의 내면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부정적 감정이 극한상황으로 치닫고 괴롭고 지쳐 있는 상황이지만 과거에 있었던 어머니의 죽음과 미래에 있을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현실을 묵상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가족 전체를 사랑과 믿음이라는 차원으로 승화할 수 있다. 죽음은 우리 각자에게 겸손과 희망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의 묵상을 통해 다른 감정도 치유될 것이다. 새어머니와 겪는 갈등도 이런 측면에서 같이 보았으면 한다.

죽음과 슬픔을 깊이 묵상하고 준비해야 병상에 있은 아버지를 실질적이며 중요한 차원에서 도와드릴 수 있다. 가족이 합심하여 아버지가 죽음을 잘 준비하게 도와드려야 한다. 물론 아버지가 건강하게 치유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기에 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하루하루를 잘 살 수 있다. 죽음이라는 실제적이고도 신비에 싸인 세계를 묵상하면서 내면 깊이 묻어두었던 것을 끄집어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암으로 돌아가신 친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픔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 죽음에 대한 슬픔의 묵상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과 우리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뀔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말이다. 잃음이라는 실재와 마주하면서 우리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사람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잃음에서 회복하는 징표다.

슬픔을 통해 잃음의 고통스런 실재를 직면한다. 슬픔은 사람을 이해하는 전환점이 되며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슬퍼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실의 한복판에서 상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껴안는 것이다. 죽음을 겪고 난 후에 쓴 슬픔에 대한 글에서 존 보울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슬픔을 끌어안아 친숙해지고 유익한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상실의 고통을 겪는 이가 그에 따르는 감정의 격돌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 그 아픔을 수용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왜 그러한 상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숙고와 그 상실을 일으킨 책임이 있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 이러한 내적 갈등과 고뇌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언제든 자신에게 상실이 생길 수 있다는 것과 삶이 상실을 통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나는 외국에서 산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고생만 하다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심혈을 기울여 하던 사업도 잘 안 되고 몸도 마음도 지쳤다. 살아 계실 때 아버지한테 불평도 많이 했지만, 힘든 삶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고 우리를 키워주신 든든하고 강직한 아버지가 그립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아버지인데도 지금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 정도나 양상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다. 처음 아버지의 죽음과 대면했을 때 무감각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또 어쩌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자신을 열렬히 지지하던 팬이자 언제나 일을 올바로 처리하는 법을 알고 있는 분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함께 이 세상에서 버려진 느낌을 받는다. 만일 아버지와 특별히 가까웠다면 좋은 친구까지 잃은 것이다. 늘 강하고 크게만 생각한 아버지의 죽음은 충격이다.

다음은 익명의 저자가 쓴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글이다.

 

어느 가족이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계획을 짰다.

엄마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큰아들은 집안 청소

딸은 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작은아들은 카드를 그리기로 했다.

드디어 생일날 아침, 아버지가 직장에 나가시자

엄마와 아이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점심때 돌아왔다.

그리고 부엌에 가서 아내에게 물 좀 달라고 했다.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던 엄마는

“나 지금 바쁘니까 직접 따라 드실래요?” 라고 말했다.

거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큰아들에게

“아버지 실내화 좀 가져다 주렴.” 하고 부탁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저 지금 바쁜데 아버지가 갖다 신으세요.” 라고 했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

아버지가 집 안 여기저기를 장식하는 딸에게

“담당의사에게 전화 좀 해서

아버지가 평소 먹던 약을 처방해 달라고 해주렴.” 하자

딸은 “저 지금 바쁘니까 아버지가 직접 하세요.” 했다.

아버지는 힘없이 “그러지.” 하고는 이층 침실로 올라갔다.

그때 작은 아들이 자기 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뭐하니?’ 하고 아버지가 물었다.

작은 아들은 “아무것도 안 해요.”

근데 아버지, 저 혼자 있고 싶으니까

문 좀 닫고 나가주실래요?”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침대에 가서 누웠다.

드디어 저녁이 되고 파티 준비가 완료되었다.

엄마와 아이들이 침실에 들어와 아버지를 깨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죽음 후에 무감각이나 멍한 상태가 지나면 고통스런 감정이 따라온다.

 

 

배우자를 잃은 슬픔

배우자를 잃었을 때의 어려움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의 ‘왜?’ 라는 물음에 대해

배우자를 잃은 사람의 눈물

배우자를 잃은 사람의 전환된 삶

자녀를 잃은 슬픔

자녀 잃은 부모의 고통

자녀를 잃은 후의 부부관계

 

 

 

6. 잃음을 슬퍼하는 법

 

슬픔을 거부할 때

체면을 뛰어넘어 슬퍼하기

자신의 죄를 슬퍼하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기

슬픔이라는 감정

슬픔의 표현

슬픔의 작업을 하고 나서

 

 

 

7. 임종 환자와 사별자 돌보는 법

 

임종 환자 돌보기

사별 가족 돌보기

사별 가족 상담

 

 

8.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

 

슬픔을 겪을 때는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곁에 있어도 고통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한다. 이때 우리는 절실하게 하느님의 현존을 갈망한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갈망하고 하느님과 함께 씨름하며 하느님과 고뇌를 나누는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의 말도 우리 영혼에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만큼 우리를 위로하지는 못한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성령께서 특정한 구절을 가슴에 와 닿게 하실 때가 있다. 성경 말씀은 슬픔으로 부숴진 마음을 치유하고 고뇌의 시기에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한다. 하느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다.

사별의 아픔을 안고 믿음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는데, 이는 대단한 지혜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가능하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시간을 인내롭게 견뎌낸다면 고통이 정화되어 우리의 온 존재를 변화시키는 가장 위대한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다음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일곱 가지 주제로 표현한 것이다. 구약성경은 대체로 공동번역이 표현상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공동 번역을 더 많이 사용했다.

 

 

슬퍼하시는 하느님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 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요한 11,33-36)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를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변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르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요한복음 11장 33절에서 36절에서는 오빠의 죽음을 알리는 마리아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묘사하며, 루카복음 13장 34절에서는 예루살렘 사람들한테 거부당하신 예수님의 슬픔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친구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또한 사람들한테 거부당하자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슬퍼할 때는 ‘내면 깊이 있는 감성을 드러내는 때라 할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라는 장면에서 잘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사랑의 표시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슬플 때 마음을 굳게 먹고 자제할 것이 아니라 슬픔을 허락하여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것은 있는 그대로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고 진실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슬픔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슬픔은 죽음에 대한 독특한 반응이며 개인적으로 겪는 상실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루카복음에서 우리는 근본적 관계의 단절로 슬퍼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이러한 슬픔은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을 때처럼 명백한 것은 아니다. 이 감성적 실체는 영정적을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감성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거나 억압할 때, 또는 슬픔을 겪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때 혼란을 겪을 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슬퍼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께서 우시는 장면은 그분의 영혼이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던 슬픔과 고뇌의 시간에 일어난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정의 응답으로 슬픔을 표현하신다.

이는 우리가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행복하리라 생각하면서도 이제는 다시 못 볼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우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우리는 영적 차원에서 슬퍼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오빠 라자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이들과 같은 심정으로 우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는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라고 전한다.

또 다른 장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과 그곳에 사는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우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의 고통을 알고 슬퍼하신다. 만일 우리가 슬퍼하지 못한 채 슬픔이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다음은 거듭된 재난으로 슬픔을 겪은 이의 사연이다.

 

나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가장 친한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친구는 식물인간으로 일주일을 지낸 후 뇌사 판정을 받고 산소 호흡기를 떼어냈다. 친구의 가족들은 슬픔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나는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들이 겪는 아픔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 후 나는 그 충격으로 이상 증세가 나타나 밥을 먹을 수 없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스트레스로 정신적 문제가 발생했으며 무엇보다 하느님과 관계에 이상이 생겼다. 나는 하느님께 철저하게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어떻게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고통과 참상이 일어나도록 바라만 보고 계시는지 하느님께 항의했다.

 

이처럼 슬픔을 껴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실감을 극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고통이 따르기에 실망하게 되고 애를 쓰면서도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을 낸다. 상실감에 빠진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다. ‘하느님도 이런 슬픔에 빠진 나에게 실망하시는 것은 아닌지?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버리시는 것은 아닌지? 어리석은 행동 좀 그만하라고 다그치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하느님과 더 멀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의구심은 정상적인 것이다.

상실감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눈물은 치유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는 것은 웃음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눈물은 많은 스트레스로 정신적-육체적으로 균형을 잃었을 때 그 균형을 회복하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이나 감정에 머물거나 절제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토아 사상에서는 불행이 닥쳤을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눈물은 여자든 남자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훌륭한 치료제다. 삶에서 눈물은 치유에 가장 자연스러운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눈물, 고통과 상실에서 오는 슬픔의 눈물은 우리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치료제다. 불행이 닥쳤을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매우 좋다. 우리 삶에서 눈물은 치유를 위한 가장 자연스런 약이 될 수 있다. 사랑의 눈물도, 고통과 상실로 인한 슬픔의 눈물도 우리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치료제다. 하느님은 인류에게 눈물이라는 선물을 주어 고통을 치유하게 하셨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슬퍼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슬픔을 겪는 우리한테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위로와 위안을 준다. 시편 저자도 자신의 감정을 하느님께 있는 그대로 말씀 드렸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시편 22,2-3)

 

주님, 언제까지 마냥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시렵니까?(시편 13,2)

 

시편은 마음 깊이 슬퍼하는 울음과 우울한 기분을 실어 나를 이해해 주는 분께 탄원을 올린다.

 

셰익스피어 또한 <맥베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슬픈 말이라도 하세요.

말하지 않은 슬픔은 괴로운 가슴에 속삭여

그것을 갈기갈기 부숴버리니까요.

 

성경의 하느님은 몸소 슬픔을 겪고 고통을 감수하셨기에 우리가 슬픔에 빠졌을 때 우리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노심초사 하신다. 하느님이 우리 슬픔에 함께하신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우리가 상실에서 회복에 이르는 내적 여정을 걷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슬픔의 고통을 겪는 이한테는 ‘우는 사람과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슬픔의 고통과 비애를 나누고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 그분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상실에서 오는 아픔을 치유하려면 슬퍼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슬픔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상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식별하고 인정해야 하며 우리 자신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시는 주님을 찾아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의 상실에 주의를 기울이심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상실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거나 그 실재를 부정하시지 않는다. 하느님 체험의 여정을 이야기한 시편 저자는 우리가 다시 기쁨을 체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먼지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으며 당신의 진실을 알릴 수 있습니까?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가 되어 주소서.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이에 제 영혼이 당신을 노래하며 잠잠하지 않으오리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시편 30,10-13)

 

시편 저자는 하느님께 ‘저에게 기쁨으로 띠를 둘러주소서.’ 라고 청한다. 우리의 두려움과 우울함, 외로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이 우리 삶에서 가장 큰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실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 슬픔에 동참하여 함께 슬퍼하심을 아는 것은 슬픔을 겪는 우리한테 참으로 놀라운 일로 다가온다.

성경의 하느님은 스스로 슬픔을 경험하신 분이다. 당신께서 몸소 슬픔의 고통을 감수하셨고 슬픔에 빠진 우리를 도와주려고 노심초사하신다. 하느님이 우리 슬픔에 함께하신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상실에서 회복에 이르는 내적 여정을 계속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이다.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영과의 관을 쓰신 예수님은(히브리 2,9 참조) 우리 삶에 함께 하시면서 고통 당하는 우리를 위로하시며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게 하신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삶의 활력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바오로 사도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히브 2, 10)라고 위로한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신 것은 우리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라는 말씀은 짧은 문장이지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진정한 인간이 시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 슬픔을 어떻게 끄집어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럴 때 슬픔은 슬픈 사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된다. 우리에 대한 그분 사랑은 슬픔을 뛰어넘어 기쁨으로 바뀐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슬퍼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슬픔을 겪는 우리한테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위로와 위안을 준다. 눈물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나의 한탄을 기록해 두소서. 이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아 두소서.”(시편 56,8)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울고 싶을 때 실컷 우는 것도 필요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일 앞에서 “하느님, 당신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겪게 하십니까?” 하고 울부짖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너무나 고통스럽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도대체 이게 뭐냐?’, ‘제발 길 좀 열어주시라.’ 고 간청하는 것은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너무 울어 눈물조차 마르고 목소리도 잠겨 나오지 않을 때 하느님은 가만히 우리 뒤에서 어깨를 감싸주실 것이다. 우리 눈에서 영원히 눈물을 거두어 주실 분,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떠나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 주실 분, 이 세상 누구도 주지 못할 따뜻한 위로를 주실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음산하고 어두운 죽음의 장소인 무덤을 향해 이렇게 외치신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죽음의 심연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짙은 어둠을 뒤로하고 라자로가 걸어 나온다. 죽었던 라자로의 소생 기사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확인할 수 있다.

부활과 구원, 영원한 생명의 결정권을 쥐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란 사실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은 먼 훗날 우리가 삶을 마감하는 순간, 우리를 부활시키실 뿐 아니라 바로 이 자리,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초대하신다. 

 

 

상실감을 이해하시는 하느님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한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마르 5,21-34)

 

이 성경 말씀은 상실을 경험한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 안에는 슬픔에 젖은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종교 지도자 야이로로 그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 앞당겨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여인이다. 그 여인의 상실감은 오랜 기간 병을 앓아 의사에게 보이느라 가산을 탕진한 것에서 연유한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 시선을 끄는 부분은 깊은 슬픔에 잠긴 종교 공동체 지도자와 질병으로 끊임없이 시달리고 가산을 탕진한 가난한 여인 둘 다에게 마음을 쓰시는 예수님이다.

이 이야기 속 여인은 질병과 상실, 고통으로 신음한다. 심각하게 다가오는 상실감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급박한 상황을 만나면서 신체는 이에 잘 대응하기 위해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시킨다. 그러나 문제가 연속적으로 일어나 계속 대응해야 하면 아드레날린은 더 이상 분비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슬픔에 빠진 회당장 야이로의 말을 듣고 따라 나서신다. 이 이야기의 중심 테마는 예수께서 군중 속에 끼어 따라가던 가난한 여인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동네를 지나가시면서 중요하고 긴박한 요청을 감지하고 치유를 베푸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몸에서 일어난 것들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며 여인을 찾으셨다. 그리고 관심을 보이고 깨닫게 하며 축복하셨다. 예수님은 여인이 당신 사랑과 관심을 체험하도록 배려하신다.

이는 육체적 치유를 뛰어넘어 감성적-영적 치유로까지 이어진다. 다음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투쟁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나는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병환으로 오랫동안 앓으신 아버지가 누워 계셨는데, 나를 알아보시고 간신히 내 이름을 부르셨다. 아버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잠시 후 숨을 거두셨다.

누구보다 나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다. 아쉽고 서운한 감정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에 시달렸다.

 

우리는 상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갈 때가 종종 있다. 달리 표현하면 상실에서 오는 감정을 가볍게 보아 넘긴다는 말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에 맞서지 못하고 달아나거나 상실을 껴안는 데서 오는 아픔을 피하려 한다.

밤낮으로 다가오는 고통이 그 깊이를 더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실감에서 오는 고통의 실재를 인정하고 용기 있게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고통이 너무 깊어 달아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거부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상실을 겪은 초기엔 처절한 고통을 겪으며 부르짖는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허전한 그 자리,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 자리에 차가운 하루가 시작된다. 무정한 아침이 꿈을 깨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그 자리 안으로 끌어들여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어느새 자신은 사라져 버리고 암울한 밤이 된다.

어느 때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아무 의미 없이 흐르는 시간에 넋을 빼앗기고 일을 하면서도 건성으로 할 뿐이다. 처음에는 외로움과 무력감이 오고 불평과 불만에 싸이며 갈수록 자신에 대한 연민과 자기 학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거부와 무기력이 동시에 오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상실감에서 오는 감정의 실재를 마주하지 않고서는 우리보다 더 우리에게 마음을 쓰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물음과 함께 하느님을 찾게 된다면 상실은 회복된다. ‘오, 주님. 저에게 불청객으로 다가온 이 낯선, 거부하고픈 위기, 운명의 손짓이라고 속삭이는 이 위기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과정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용기 있게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를 기다리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상실에 주의를 기울이시며 그 상실을 통해 다가오는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울증에 귀 기울이시는 하느님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이까?

“네 하느님이 어찌 되었느냐?”

비웃는 소리를 날마다 들으며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

이것이 나의 양식입니다.

축제의 모임, 환희와 찬미소리 드높던 그 행렬,

무리들 앞장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일,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당신의 벼락치는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노호하고,

당신의 파도와 물결들이 뭉치가 되어

이 몸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야훼의 사랑 낮에 내리시면

밤에는 이 입술로 찬양을 올리리이다.

이 몸 살려주시는 하느님께 기도드리리이다.

나의 반석이시던 하느님께 아뢰옵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사옵니까?

이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나날을 보내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이옵니까?

네 하느님이 어찌 되었느냐고

날마다 원수들이 빈정대는 소리가

뱃속을 저며 들어옵니다.”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하는가?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나를 구해 주신 분, 나의 하느님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

(시편 42,1-4.7-11)

 

이 시편에서 우리는 우울증의 징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이 양식이 된다고 한다. 그는 상실감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으로 신음한다.)’뼛속을 저며 들어 옵니다.’) 또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소연한다.

시편 저자는 우울증으로 생기는 상실을 말한다. 그는 축제 모임에서, 환희와 찬미소리 드높던 그 행렬, 무리들 앞장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때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 축제 모임, 환희와 찬미소리 드높던 그 행렬 대신 그는 적들한테서 ‘네 하느님이 어찌 되었느냐?’ 하며 비웃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과 맺었던 관계에 대해 어리둥절해하는 듯하다. 저자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과 하느님한테서 떨어져 나가는 심정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느님이 그에게 베푸시는 끊임없는 사랑과 현존을 확신한다. 그래서 저자는 ‘하느님은 나의 반석’이라고 말한 다음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사옵니까?’ 라고 한다. 이는 우울증의 상황에서 슬픔에 젖어 고통 당할 때 생길 수 있는 영적 투쟁이다.

우울증에 시달릴 때 하느님이 때로는 멀리 계시는 듯, 때로는 가까이 계시는 듯 느낄 수 있다. 지성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상실감에 빠져 하느님에 대한 믿음까지 잃어버릴 수 있기에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라기보다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갖는 관계성에 있다.

상실에서 오는 우울증으로 영적 혼돈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우울증에 빠졌을 때 인식할 것은 하느님은 우리를 그냥 방치해 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울증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느님께서 나를 보살피시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우울증은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을 거라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내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우울증을 실패와 약함의 표시라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해야 하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대로 상실감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편 저자처럼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슬퍼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기에 이 감정을 극복해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영적 혼돈 가운데 성경 저자는 우울증으로 인한 감정의 흐름을 하느님께 말씀 드린다. 우울증에 빠지면 기도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내치실지 모른다며 걱정한다. 또는 하느님을 포함해 다른 사람에게 문을 닫을 수 있고 영적으로 고뇌하며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지나친 열망이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우울증을 영적 패배로, 개인적 약함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우울증은 집중력을 잃게 하고 무엇을 할 능력을 떨어뜨리며 자신을 불청객으로 생각하게 한다.

우울증에 빠졌을 때는 감정을 약간 떼어놓고 보는 것이 좋다. 부정적 감정에서 오는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달아나거나 고통에 파묻히는 것도 좋지 않다.

평소와는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적당한 시간을 내는 것이다. 너무 짧지도 그렇다고 너무 길지도 않게 말이다. 그 다음엔 새로운 추억 만들기를 한다. 무엇이든 다른 것을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다. 아니면 새로운 그림이라도 사라. 글을 쓰는 것도 좋다. 아니면 새로운 책이라도 읽어라. 여행도 좋다. 아니면 최소한 계획이라도 세워보라. 시를 읽고 좋아하는 구절에 줄을 그어보라. 슬픔이 몰려올 때는 다른 것을 하라.

우울에 빠지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지 몰라 당황하게 되고 이러한 자신을 보며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는 누구한테나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편 저자와 같이 성경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침묵하며 기다리는 용기를 가지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울에 빠졌을 때 하느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기 바라시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시편을 읽는 것이 좋다. 시편 전체가 감정의 흐름, 다시 말해 부정적 감정을 표현했건, 그것을 극복한 후 긍정적 감정을 표현했건 우울증을 겪는 환자가 공감할 수 있는 흐림이 있기 때문이다.

우울에 빠졌을 때 하느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안다면 하느님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하소연할 수 있다. 우리의 상실과 상실에서 오는 슬픔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이 우울증 한가운데 계심을 알 때 슬픔으로 인한 고통스런 여정을 계속 껴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슬픔에서 은총으로 이어지는 길은 하느님과 함께 걷는 길이다. 용기 있게 마주하고 인내롭게 기다릴 때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아픔의 시간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회복의 길은 모두에게 다르다.

언젠가 잠에서 개어나면 늘 떠올랐던 깊은 상처를 준 일들, 그래서 우리를 사로잡고 힘들게 한 것들이 서서히 물러나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후서 말씀처럼 말이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인내로이 대면한 시간이 약이 되었다! 주님 말씀 안에서 위로를 받고 강하게 되었다.

 

 

두려워하는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느님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마르16,1-8)

 

성경에 나오는 여인들은 상실을 경험한다. 여인들은 자신을 온전히 바쳐 신뢰하며 따르던 친구 예수를 잃게 되었다.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도 무너졌다. 무덤으로 가는 그들의 생각과 느낌은 복잡하고 아무 감각이 없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나마 보살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성적 마비 이면에는 극도의 슬픈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확실히 혼돈에 빠졌을 것이고, 개인적 안전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제자들은 위험에 처하자 어느새 달아나 버렸다. 그들이 영적으로 무너지고 비탄에 잠겼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악마가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슬픔에 젖어 있던 그들은 뜻밖에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보았고, 거기 있는 한 젊은 사람한테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한테 전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여인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은 부활에 대한 역설적 응답이다.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르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살아 계셨다. 그의 나라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슬픔에 잠긴 사람들한테는 이 기쁜 소식에 응답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 성경 말씀 안에 등장하는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도 슬픔에 깊이 빠졌을 때는 하느님의 권능에 온전히 감사 드리지 못할 때가 있다. 두려움은 현재나 미래에 대한 어떤 위협에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에 생긴다. 여인들은 그들이 말하는 ‘젊은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기에 위협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사건이 함축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미래에 해를 입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두려움은 자주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여인들은 도망쳐 나왔고 그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마르코복음 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최고의 매력은 끝 부분에 있다. 이 얼마나 극적인가! 떨면서 당황해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이 얼마나 놀라운 모험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할머니 방을 열어보았다. 나는 ‘할머니!’ 하고 불렀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놀라 할머니에게 다가가 숨을 쉬는지 살펴보았다. 할머니는 이이 숨을 거두신 뒤였다. 임종하는 순간을 가족 중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누가 누워있는 것을 보면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할머니를 잃었을 때의 두려움이 계속 삶에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사례는 사랑하는 할머니를 잃고 오랫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 중년 남자의 이야기다. 상실은 예리한 독침과 같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콕콕 찌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묻힌 무덤이 우리를 무겁게 내리누르며 가슴 한복판을 잔혹하게 파헤친다.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너무도 오랫동안 적들이 맹공을 퍼붓고 손아귀에 넣어 두려움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언제까지 수많은 날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로움에 휘말려야 하는가?’ 상실로 인해 감정적 고통으로 위협받는 두려움은 가장 기분 나쁜 경험 가운데 하나다.

상실에서 생기는 두려움은 최소한 두 가지 모습을 띤다. 하나는 곧바로 자신이 위험에 빠졌다고 느끼게 하는 불안감으로 두려움을 자아낸다. 다른 하나는 상실이 자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연결되어 또 다른 상실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을 느낄 때 자신을 영적 패배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려움을 떨쳐버려야 해. 하느님을 신뢰해야 해.’라고 생각하지만 불행하게도 ‘~을 하는 게 좋다.’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오히려 두려움을 더한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를 거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또다시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의심한다. ‘하느님도 슬픔에 빠진 나에게 실망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은 지금 내가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여기실까? 하느님은 내가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꾸짖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고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으시는 것은 아닌가?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라고 핀잔을 하시지는 않을까? 우리가 겪는 슬픔의 과정을 아시기는 할까?’

상실이 우리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할 때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 깨닫게 된 상실에서 오는 어려움을 다루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두려움에 대해 상당히 단순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아시기에 우리가 두려워할 때 내치지 않으시고 안절부절못할 때 당황하지 않으신다. 또한 하느님은 우리가 두려워한다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찾아 나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그 고통스런 감정을 하느님과 나누어야 한다. 그때 혼동과 두려움 속에서, 찢긴 가슴 한복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빛이 살며시 솟아오른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 14, 27)

 

 

외로울 때 함께하시는 하느님

 

나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는 주님께 애원합니다.

나의 애타는 마음을 고백합니다.

이 괴로움을 아뢰옵니다.

내가 숨이 넘어갈 듯 허덕일 때,

당신은 나의 앞길을 보살피십니다.

사람들은 나를 잡으려고

내가 가는 길에 덫을 놓았습니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걱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사옵니다.

도망칠 기마저 모두 막혔는데,

내 목숨을 근심해 주는 사람 하나 없사옵니다.

주님, 당신 향하여 소리 지릅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

이 세상에서 당신은 나의 모든 것.”

나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르짖는 소리를 귀담아들어 주소서.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이 몸을 건져주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합니다.

이 감옥에서 나를 살려내 주소서.

당신 이름 불러 감사 노래 부르리이다.

나에게 입혀주신 당신 은덕으로

이 몸이 의인들에게 둘러싸이리이다.(시편 142편)

 

시편 저자는 자신의 비참하고 외로운 처지를 호소한다. 외로움은 상실에서 오는 두려움을 증가시킬 수 있다. 상실로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를 지지해 주는 사람도 의지할 곳도 없다고 느낄 수 있다. 매우 빈번하게 사람들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한테 진단이나 처방을 제대로 받지 못해 미칠 것 같다는 느낌을 하소연한다. 공포는 극도로 필요한 부분을 홀로 감당해야 할 때 나타나는 일반적 반응이다.

시편 저자는 ‘이 감옥에서 나를 살려내 주소서.’ 라고 하느님께 청한다. 상실 후 외로움이 감옥과 같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더욱 깊이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며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냥꾼이 놓은 덫에 갇혔다는 느낌을 갖는다. 상실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 희망이라곤 없는 막막한 자신의 처지를 느낀다.

시편 저자는 외로움과 비참함, 희망이 없음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한다고 이야기한다. 하느님께 ‘당신은 나의 앞길을 보살피십니다.’ 라고 말하며 ‘당신은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한다.

어떤 사람들은 회복하는 시점에서 하느님 현존 체험을 못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겪는 동안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체험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다.

시편 저자는 다른 사람들과 갖는 관계에서 소외를 느끼거나 하느님 안에서 위로를 받는 상반된 체험을 한다. 여기서 하느님 현존 체험이 모든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시편 저자는 ‘도망칠 길마저 없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라는 두 가지 체험을 한다. 이는 역설적 표현으로 슬픔으로 감성의 흐름이 빠르게 교차하는 데서 나타나는 체험이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께 불평하며 문제를 말한다. 외로운 시기에 기도는 도움이 된다. 아무도 들을 수 없고 들으려 하지 않을 때 하느님은 들으신다. 말씀드릴 기력조차 없을 때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깊은 관심을 드러내며 주의 깊게 들으신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마음에 있는 외침을 귀담아들으시며 우리가 느끼는 것들을 속속들이 아신다. 기도는 회복하는 과정에 자리한다. 딱딱하고 형식적인 기도는 회복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진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치유가 된다.

우리 기도가 횡설수설하거나 뒤죽박죽일지라도 하느님께 들어 올려질 것이다.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아가 혼자라는 느낌은 더 심각한 고통을 낳는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데서 더 깊이 투신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기도로 증명되고 행동으로 표현되며 실 생활에서 드러난다.

시편 저자는 자기를 지지하고 사랑해 주는 공동체의 기쁨을 다시 맛보기 위해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면서 이렇게 끝맺는다. ‘이 몸이 의인들에게 둘러싸이리이다.’ 상실에서 회복하려면 우리를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이를 아신다. 하느님이 우리를 회복하시려는 목적은 우리가 단순히 개인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는 과정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사랑하는 더 강한 도구로 만들기 위함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고아들처럼 너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다가갈 것이다.” (요한 14, 18) “나의 현존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고 나는 너에게 안식을 줄 것이다.” (탈출 33,14) “확실히 나는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 28,20)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께 우리 처지를 아뢰자. 이 외침이 바로 기도다. 슬픔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지해 주는 모임을 찾고, 상담자 또는 사목자한테 도움을 얻으며, 친구들과 나누고 그들의 지지와 기도를 청해야 한다.

 

육십 대의 열심한 신자 부부는 금실이 좋기로 소문났다. 자녀들도 출가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아들이 맞벌이 부부라 손녀를 집에 데려와 함께 살았다. 손녀딸은 생활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을 못하게 되었다. 가족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남편이었고 손녀딸 또한 할머니를 찾아오라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이는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였다.

얼마 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이는 엄마 아빠와 함께 집에 가기를 거부하며 할아버지 품에 안겨 울기만 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울음소리에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외로움에 모든 의욕을 잃었다. 얼마 후 할아버지도 부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마저 잃은 아이는 극도의 불안과 외로움에 싸여 할머니 방에 쭈그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아 엄마 애간장을 태웠다.

 

이 사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부정적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다. 사별 가족이 상실로 인해 받는 감정적 고통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외로움이다. 뜻밖의 상실을 겪으면 사람들은 곧바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온갖 반응을 일으킨다. 친구들이 일주일이나 이주일 동안 상실을 겪은 이를 보살필 수 있지만 그의 가슴 한복판에는 여전히 외로움이 자리한다.

상실에서 오는 고통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외로움이 모습을 드러낼 때가 가장 힘든 시기다. 외로움과 싸우는 동안 사람들은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른다. 농담을 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건넬 수도 있다.

상실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까지 우리는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매우 충격적이며, 반응 또한 여러 단계로 나타난다. 이러한 슬픔은 적응 과정과 위기 과정, 스트레스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은 성숙한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며 성숙해지려면 이러한 과정을 잘 겪어야 한다.

또한 죽음의 원인과 형태, 사별의 상황과 지지의 정도에 따라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이 다르게 나타나고 회복 기간도 차이가 난다. C. S. 루이스는 아내가 죽은 다음 외로움을 겪으며 다음과 같이 썼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평소와 같이 대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나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무척 어색하다. 회사에서, 모임에서, 길에서 나를 만나면 사람들은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걸 알 수 있다. 나처럼 혼자 된 사람들은 관절염 환자같이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며, 그러한 과정에서 외로움이 물밀듯 밀려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외로움은 잃어버린 사람과 연관이 있는 날에 더하다. 사랑하는 사림이 곁을 떠나면 어떤 날에는 더 강하게 이세상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긴다. 특별한 날, 예를 들어 생일이나 기념일, 성탄절, 명절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 사람이 함께하지 않는 기념일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상실을 슬퍼해야 한다. 자신의 슬픔 앞에서 울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 손을 내밀어 함께 운다면 우리의 슬픔은 위로를 받고 외로움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느님과 싸우지 않는다면 상실에서 오는 부정적 감정은 득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고통을 주님과 해결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왜?’라고 외쳐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오랫동안 붙들고 있지는 말아야 한다. 고통을 파헤친다고 해서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라는 물음을 ‘주님, 빨리 도와주소서.’로 바꾸어야 한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치유해 주실 것임을 믿고 그 사랑을 마음에 새겨 시편 저자와 함께 기도하자.

 

당신을 신뢰하니 아침에 당신의 자애를 입게 하소서.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니

걸어야 할 길 제게 알려주소서.

원수들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당신께 피신합니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의 뜻 깨닫도록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의 선하신 영이 저를 바른길로 인도하게 하소서.

(시편 143,8-10)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에서 우리는 상처를 치유할 힘을 얻는다. 그리스도 안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어느 순간 눈물이 멈추었을 때, ‘왜?’라는 물음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렇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이런 특별한 날에 새로운 무엇을 이룰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시다.

(1 코린 15,57)

 

가슴 깊이 다가와 침울하게 만드는 날 주저앉거나 멍하니 있지 말고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인내할 용기를 내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으리라! 우리가 새 삶을 찾아 살게 되리라는 것을 저자는 잘 표현한다.

 

주님은 너그럽고 의로우시며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분,

주님은 소박한 이들을 지켜주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 주셨네.

내 영혼아, 주님께서 너를 잘해 주셨으니

평온으로 돌아가라.

정녕 당신께서는 제 목숨을 죽음에서,

제 눈을 눈물에서,

제 발을 넘어짐에서 구하셨습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산 이들이 땅에서.

(시편 116,5-9)

 

외로움이라는 부정적 감정은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고독이라는 긍정적 감정으로 바뀐다.  외로움과 달리 고독은 혼자 있지만 하느님 안에서 상실한 사람과 맺은 사랑을 돈독히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진다.

감정이 흔들리고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고 외로운 감정에 빠져들지라도, 손을 내미시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계속되는 희망의 증거를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외로움과 투쟁하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하느님이 위로해 주신다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시기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오,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 코린 1,3-4)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슬픔을 통해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 정녕 높으심을 나 분명 아나니

모든 신들 위에 계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하늘과 땅, 바다 위와 바닷속 깊은 곳 어디에서나

야훼께선 무엇이나 뜻대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땅 끝에서 구름이 올라가고 번개 치며 비가 쏟아지고

창고에서 바람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그가 하시는 일.

(시편 135,5-7)

 

(그분은)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터진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낱낱이 이름을 붙여주시는 분,

전능하신 우리의 주님 얼마나 크시냐.

그의 슬기 형용할 길 없어라.

(시편 147,3-5)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1 코린 15,55-57)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권능을 표현한다.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 상처를 싸매주시는 모습을 표현한다. 하느님이 우리 처지를 아시고 따뜻이 감사주신 체험을 묘사한 것이다. 고통 한가운데 있는 우리를 쓰다듬으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섬세한 감정으로 다가가는 순간, 무엇인가 움직이는 힘이 있다. 살며시 우리 마음을 건드리는 작은 소리, 우리는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용기를 낸다.

우리는 이것을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 체험 여정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다시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을 기쁨으로 채워주실 수 있다. 하느님은 절망과 희망, 기쁨과 슬픔, 웃음과 울음, 궁극적으로 우리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온 존재를 의탁할 수 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를 보여드려야 한다. 우리의 두려움과 우울, 외로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이 우리 삶에서 가장 큰 가치와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실 것이다.

필립 윌리엄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에서 구약은 죽음을 믿음을 지닌 사람과 하느님의 간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며,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느끼고 체험하게 하는 것이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낯선 것을 결국 우리를 하느님과 의미 있는 언약을 맺은 관계로 이끌어 주는 신비로운 것으로 본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나 말씀은 많이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죽음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삶과 충만함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하셨다. 그 죽음은 승리를 나타내는 부활로 극복되었다.

예수님은 죽은 후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을 믿는 사람 모두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하셨다. 사도 바오로는 죽음을 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적은 그리스도에 의해 격퇴되었다. 죽음은 우리의 적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1코린 15,57)라는 말은 우리에게 부활 승리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갖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비통함뿐 아니라 두려움을 경험한다.  죽음과 삶,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죽음이 삶을 빼앗아 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께서 ‘여인아, 너는 왜 그렇게 슬피 우느냐?’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 우리 삶은 승리로 전화되기 시작한다. 죽음의 신비가 희망으로 가는 통로가 되며, 이는 또 다른 시작이다.

 

피정 지도자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키가 큰 나무 아래 나는 너무나 왜소해 보였다. 우리는 얼마 안 되어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을 발견했는데 사람들이 살던 자취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피정 지도자는 우리에게 나뭇잎 아래 숨어 있는 들꽃과 양치류, 바위틈에서 자라는 향기로운 풀을 보여주었다. 그대 나는 가혹한 환경을 견뎌내게 하고, 아이를 잃은 암담한 상황에서도 성장하도록 이끄는 내적 힘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영혼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둥지를 트는 새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날 산들바람 속에서 강한 메시지를 느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 후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과 생명이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관계의 끝이 아니며,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리누스 문디의 ‘기도 산책’ 에 나오는 샤론 키드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겪은 체험을 적은 것이다. 우리가 겪는 슬픔은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잊어버리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기억 속에 묻어둔 꿈을 없던 것처럼 여기거나 죽은 사람과 이별을 까맣게 잊고 지낼 수 있다면 그만이지 하고 생각하는 안이한 방법으로는 상실에서 완전히 회복될 수 없다.

상실의 회복은 잃어버린 꿈과 죽은 사람과 맺은 관계를 새롭게 한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성장할 길을 찾을 때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 슬픔의 고통을 느낄 대 우리가 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새로운 관계를 이루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새로운 기쁨을 느낀다. 물론 이렇게 삶을 바꾸려면 고통이 따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맛보기 때문이다.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삶의 기쁨을 느끼면 어색하고 미안하고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곧 새로운 희망과 사랑에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하며, 언제든지 또 다른 상실을 겪을 수 있으므로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 자신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나 삶 저편으로 사라지면 깊은 상처를 남긴다.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깊은 상처다. 이 상처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누가 이 아픔을 이해하겠는가? 누가 이 아픔을 끌어안겠는가? 그렇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하실 수 있다.

 

 

치유하시는 하느님

 

주님, 제가 당신을 높이 기립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애원하자 저를 낫게 하셨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제 목숨을 저승에서 건지시고

저를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습니다.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거룩하신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 가니

저녁에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환호하게 되리라.

평안할 때 저는 말하였습니다.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

주님, 당신 호의로 저를 튼튼한 산성에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얼굴을 감추시자 저는 겁에 질렸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께 부르짖고

저의 주인이신 당신께 자비를 간청하였습니다.

“제 피가, 제가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이 무든 이득이 됩니까?

먼지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으며

당신의 진실을 알랄 수 있습니까?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가 되어주소서.”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이에 제 영혼이 당신을 노래하며 잠잠하지 않으오리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

(시편 30편)

 

 

시편 저자는 고통이 너무 깊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를 회상한다. 슬픔에 젖어 있는 동안에는 살 가치가 없고, 그래서 죽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하다. 상실감에 젖어 아무 희망도 없이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는 것만 같다. 육체적-감성적-영적 슬픔은 우리를 극도로 쇠약하게 만든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이 얼굴을 돌렸다고 생각하던 때를 기억한다. 그는 이 시기에 하느님께 마음의 노래를 불러드릴 수 없다고 묘사한다. 상실에서 회복되는 동안 하느님이 멀리 계신 것 같고 찬미노래도 부를 수 없다.

저자는 신학적으로 추상적 개념을 찾는 데는 관심이 없다. 슬픔의 시기에는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재 체험은 슬픔에 젖어 있는 동안 우리가 자주 겪는 것이며 만일 이를 무시한다면 회복하느라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건강한 관계처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본질적인 것에 뿌리를 둔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뛰어넘어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 하느님에 대한 현존 체험과 부재 체험 모두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재체험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에서 영적 잘못이나 부족한 믿음 때문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들은 슬픔을 겪는 동안 일어날 수 잇는 정상적 현상이다.

시편 저자는 또한 슬픔에 젖어 있던 시기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이 자신을 어여삐 여겨 도와주시던 대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슬픔을 겪는 과정에서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때때로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면서 겪는 쓰라린 고통이 하느님의 현존을 강하게 체험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심하게 혼란을 일으키는 영적 롤러 코스트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은 슬픔의 체험에 친근해지기 위해 피할 수 없는 한 단면일 것이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은 삶의 근간이 된다.

하느님은 당신 현존을 어느 시기에만 한정적으로 드러내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온유하고 인내하시며 영원한 사랑을 지니신다. 감성적이고 영적으로 굴곡진 우리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은 항구하게 우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신다. 도한 우리 삶의 긴 여정을 이끄신다.

시편 저자는 ‘저녁에 눈물을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이다.’ 하고 고백한다. 이 말씀처럼 눈물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슬픔은 우리 삶의 자연스런 일부일 뿐 무한정 지속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우리 삶에 실제로 관여하시기에 슬픔을 겪을 대 성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희망이 그렇게 쉽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시편 저자는 ‘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지!’ 또는 ‘너는 곧 극복할 거야’, ‘어두운 면보다 밝은 면만 보자.’ 라면서 상처를 축소하거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상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자.’고 하면서 하느님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자신의 체험으로 증언한다. 우리는 고통과 슬픔의 깊이를 허락할 때 회복하는 과정에서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하신 것을 여러 비유로 묘사하며 하느님께 아뢴다.

 

당신께서는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두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회복하는 순간, 이러한 비유 말씀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최고의 고백이 아니겠는가.

또한 시편 저자는 하느님을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춤으로’ 바꾸시는 분,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 옷으로 갈아 입히시는 분’ 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살면서 베옷을 입거나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던 때가 있다. 마침내 눈물을 멈추면 우리 앞에 서 계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옷을 입히고 춤을 추자고 초대하신다.

 

도보여행에 몇 번 참석하면서 전에 알던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친 경험을 살려 야생화와 여러 식물에 대해 설명하는 숲 안내자로 일했다. 그녀와 나는 도보여행을 좋아하는 것 말고도 슬픔에 깊이 잠긴 적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12년 전, 그녀는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섯 살 난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나는 숲 속을 걸으며 내가 체험한 치유에 대해 나누었다. 그녀 또한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숲 안내자로 일하며 체험한 것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늪지 미생물을 관찰하는 데 몰두하며 지칠 때가지 일했고, 슬플 때면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좋은 장소를 찾아가 울었다. 그녀의 치유는 자연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녀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해 봄 우리는 치유 도보여행의 첫째 그룹이 되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예전에 보지 못했던, 주변에 잇는 모든 생명을 새롭게 보도록 가르쳐 주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는 순간 야생화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색깔을 자랑이라도 하듯 자기를 펼쳐 보였다. 우리는 덤불을 헤치며 들꽃을 찾는 기쁨을 맛보았다.

들꽃은 늘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과 조물주의 손길을 잘 표현한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기신다. 하느님의 길은 항구하고 신뢰할 만하다.

나는 몇 년 동안 같은 길을 걸으며 이러한 과정을 보았다. 숲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라며 아름답게 살아 있다. 하느님은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임을 숲의 순환 구조를 통해 가르치셨다. 나는 이런 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한쪽이 꺾였지만 여전히 살아 잇는 나무 몇 그루를 보았다. 그 나무들은 새롭게 돋아나기 위해 상처 난 곳을 나무껍질로 서서히 덮으며 스스로 치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무처럼 회복하는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 삶의 공포가 우리 영혼에 상처를 주고 불구자로 만들지만,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우리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고통을 받을 수 잇지만 그 고통을 통해 성장하며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생존자가 될 수 있다.

 

이 사례는 샤론 키드가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다음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을 적은 글이다. 샤론 키드가 체험한 것처럼 숲을 걷는 도보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치유가 일어난다.

우리가 자연에게 다가가면 자연도 우리에게 다가오며 하느님이 그곳에 계심을 알고 체험하게 된다. 자연은 우리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자연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을 통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안에서 생명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 자연과 하나 될 수 있다. 샤론 키드는 우드슨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연은 아름다움을 지니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며 불쾌감을 누그러뜨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연과 함께 기뻐하며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에 몰입하라고 촉구한다. 자연은 하느님의 궁극적 아름다움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 화가 나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은 다른 방법, 곧 자연을 통해 말씀하신다. 자연은 하느님의 언어다. 자연은 하느님 사랑을 전해 주고, 하느님이 모든 창조물을 돌보심을 알려준다. 자연을 통해 우리는 죽음과 삶을 영원한 시각으로 본다. 숲은 사계절의 화려하고 예측할 수 있는 변화를 통해 영원성과 연결된다.

샤론 키드는 숲 속을 걸으며 순간순간 영원성과 연결된 자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그때 나는 시간이 멈추어 선 것처럼 느낀다.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자연의 흐름에 나를 맡긴다. 수많은 세월 동안 산과 그 안에 있는 나무들은 인간을 보아왔다. 그 시선으로 나도 바라본다는 것을 느낀다. 나무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으로 씨름하는 나를 지켜보며 웃음 짓는다.

나무들은 그 해답을 선조들의 지혜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속삭이며 의문에서 벗어나라고 재촉한다. 감추어져 있지만 어떤 면으로는 드러나 있는 해답을, 나무들과 함께하며  해답을 찾아낸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숲 속의 다른 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풀과 바위와 숲을 마음에 그린다. 그들의 존재 안에 감추어진 메시지를 찾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묵상할 때 하느님은 내 안에 감당해야 할 것들을 채워주신다.

 

 

샤론 키드는 필립 켈러의 ‘자연의 반영’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며 자연에서 하느님의 특성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만일 호기심을 갖고 멈추어 선다면 잔디와 살랑이는 바람에 몸을 흔드는, 반작이는 꽃잎에 새겨진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 라는 확고한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내 영혼은 안식을 누린다.”

슬픔으로 암울할 때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개입으로만 설명 될 수 있는 사건으로 당신 현존을 드러내신다. 슬픔에 휩싸여 헤어나지 못할 때, 그것을 먼저 경험하고 해방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된다. 하느님의 도구가 된 사람들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들에게 엄청난 슬픔 속에서도 이를 굳건히 이기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생명선이 되는 것이다. 편지와 방문과 그림, 우연히 발견한 아이의 귀고리, 슬픔을 닫기 일어난 많은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새로운 희망 메시지로 전달된다.

하느님은 당신이 우리와 늘 함께하심을 어던 표징을 통해 드러내신다. 상실감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면서 당신이 그와 함께한다는 신뢰를 심어주시며,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주신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사랑하던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때 영혼에게 기적 같은 치유가 일어나며 깊은 우울증에서 빠져 나오고 시작한다.

하느님은 극적인 방법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응답을 들어주신다. 이때 하느님의 응답은 더 큰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하느님, 당신은 왜 이 기도에는 응답하시면서 불행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샤론 키드는 이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 주 후 눈 내리는 추운 날 산책하면서 이물에 대한 답을 얻었다.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렸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기다릴 때도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인내가 필요했다. 내가 답을 얻을 때와 같이 길도 얼마 동안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 밑에 길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믿었고 내 물음에 답이 주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답은 내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하느님은 인생의 얼어붙은 시기에도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당신 자비의 아름다운 표징을 드러내시며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자연을 통해 하느님 치유의 손길을 느낀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한테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세계와 연결된다. 죽음은 사랑의 관계를 끊어놓을 수 없다. 하느님의 길에는 과거-현재-미래가 영원성과 연결된다.

창조 첫날 “빛이 있어라.” 하시어 빛이 생겼다. 원래 인간은 이 빛 속에서 영원성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나 죄를 지어 빛의 궤도에서 벗어났고 그때부터 시간과 공간의 단절이 왔다. 한마디로 인간은 영원성에서 벗어나 한계 속에서 살게 되었고 그 전형적 한계가 죽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우언성에 동참할 수 있다. 그분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영원성을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될 수 있고 지상에서 나누지 못한 사랑이 천상과 지상으로 연결되어 더욱 돈독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성과 연결되는 시작점이다. 우리가 과거에서 벗어나 움직일 때 우리 삶의 자리에 계신 주님과 함께 걸을 수 있다. 그리고 미래를 보게 된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 위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죽음은 우리를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 더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그러므로 부서진 우리 마음을 그분께 가져가 치유해주시게 해야 한다. 어느 날 우리는 웃으며 이야기할 것이다. “내 부서진 마음을 그분이 치유해 주셨다.”

 

 

9. 슬픔을 치유하는 법

 

존 제임스와 레셀 프리드먼은 ‘슬픔이 나에게 말을 거네’ 에서 상실감에 빠진 사람은 사소한 것이라도 스스로 올바른 결정을 할 때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상실에 따른 고통을 발견하고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치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다.

 

첫째, 치유는 기분이 나아지는 것이다.

둘째, 치유는 환경이 우리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환경을 주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치유는 당시 상처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넷째, 치유는 후회나 한탄 같은 고통스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고도 좋은 기억을 추억하게 한다.

다섯째, 치유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과 그런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여섯째, 치유는 사람들이 상실감에 대해 잘 몰라 한 말이나 행동을 용서할 수 있다.

일곱째, 치유는 자신이 겪은 상실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건강한 반응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치유에 대한 정의는 우리가 겪은 경험에 솔직하게 대처하게 한다. 상실감을 제대로 해결하면 가슴 아픈 일을 겪었을 때 깨어진 마음을 치유하고 슬픔에서 벗어나 모든 관계에 온전히 임할 수 있다. 감정의 앙금을 정리하고 그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게 된다.

 

 

고통에 목소리 내기

 

몇 해 전 그녀는 음주 운전자의 과실로 여섯 살 난 아들을 잃었다. 그녀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운전자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라 가슴이 답답했고 아이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신 하느님에 대해서도 야속한 마음이 들어 성당에서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었고 기도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암울하게 2년이란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한 친구의 간곡한 권유로 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그녀와 함께 기도했고 엽서를 보내고 여행을 같이했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자신의 체험을 나누어 주었고 그들이 도움으로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그녀는 지금 고아원에 봉사하고 소년 소녀 가장을 돌보며 지낸다.  자기 아이에게 쏟았던 사랑을 불쌍한 아이들에게 베풀며 열심히 활동한다. 그녀는 하늘나라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더 열심히 봉사하며 아이와의 사랑을 지상에서도 돈독히 하면서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하며 살아간다.

 

다음은 고통과 싸우면서 하느님을 만난 또 다른 사례다.

 

한때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떠오른 문단의 샛별이었던 창호에게 루게릭이란 희소병이 찾아왔다. 죽음의 그림자는 소리 없이 자리했다. ‘살아가는 기술’을 배워야 할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가 한 순간에 ‘죽어가는 기술’을 배워야 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그로 인한 좌절감과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신은 하루하루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 가는데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는 것을 보며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자신은 극심한 고통으로 번민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즐기고 떠들고… 모든 것이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다.

‘느닷없이 다가온 극심한 고통’ 앞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그에게 어느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왔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삶의 일부이며 결국 성장을 위한 신비’라는 깨달음이었다. 머지않아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사라지므로 미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落法)을 배우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현실적 불행 안에는 묘하게도 진정한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는, 역설적인 그리스도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통의 순간만큼은 하느님과 자신에 대해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겸손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손을 내밀게 되었다. 자기가 죽고 없어져야 온 존재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을 깨닫고 순간 순간 주어지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

 

 

다음 사례는 사고로 인한 처참한 현실을 극복하고 희망을 갖게 된 이야기다.

 

큰 사고로 자동차에 불이 났다. 정신을 차린 지선이 오빠가 불길에 휩싸여 기절해 있는 동생을 구출한 후 옷을 벗어 불을 끄려 했지만 곧바로 차가 폭발하고 말았다. 스물세 살 된 지선이는 온몸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음주 운전자가 낸 교통사고로 열한 번의 수술과 끔찍한 고통을 동반한 치료를 받았으나 예전의 곱던 얼굴은 찾아볼 수 없고 온몸이 화상으로 얼룩졌다. 그러나 죽을 번한 위기를 넘긴 지선이는 비록 겉모습은 사람들과 다르고 덤으로 사는 인생이 불편하기는 해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

삶은 소망이고 희망임을 확신하며,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자신을 사용하시리라는 걸 믿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달라진 삶과 얼굴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마음을 선물로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많은 것을 잃고 괴로워하는 장애인들의 상실감과 우울증을 치료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지금도 시련을 통해 얻은 축복의 보물로 화상을 입은 사람들을 위한 마을을 만들어 특수사목을 하고 싶어한다.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움츠러들거나 고통을 개인 문제로 돌리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파괴적 감정을 치유할 수 없다. 상실감으로 고통이 지속된다면 그 감정은 내면화되어 우울증이 되고, 그렇게 되면 개인이나 공동체에 치명적 폐해를 가져온다.

화이트헤드는 ‘마음의 그림자 Shadow of the Heart’에서 몇 천년 전 우리 신앙 선조들은 독특한 방법으로 우울증을 다루었다고 한다. 그들은  재앙과 혼돈의 시기에 목소리를 높여 호소했으며, 슬픔을 개인적인 것으로 묶어두지 않고 고통을 대중적 표현으로 바꾸었다.

우리는 애가 1장 12절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여, 살펴보고 또 보시오. 당신의 격렬한 진노의 날에 주님께서 고통을 내리시어 내가 겪는 아픔 같은 것이 또 있는지.”

슬픔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신앙 선조들은 자신을 폐쇄시키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고통에 목소리를 주어 자신이 겪는 고통을 하느님께 이야기했다. 시편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반복해 보여준다. “저는 탄식으로 기진하고 밤마다 울음으로 잠자리를 적시며 눈물로 침상을 물들입니다. 저의 눈은 시름으로 멀어지고 저의 모든 적들 때문에 어두워집니다.”(6,7-8)

구약의 선조들은 비탄기도를 통해 목 놓아 외쳤다. 이러한 원망과 신음소리로 하느님의 관심을 얻고자 했으며 하느님께 거듭 다가가 왜 그러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따졌다. 욥 한테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나 하느님께 말씀 드리리라. ‘저를 단죄하지 마십시오. 왜 저와 다투시는지 알려주십시오.'” (10,2)

성경 신학자 발터 브루게만 Walter Brueggemann 이 고찰한 것처럼 예언자들은 그들이 비탄에 젖어 있을 때 ‘지상에서 격렬한 열정으로 외치는 소리가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믿었다. 이것이 새로운 삶을 중재하는 말로 전해지고 공동체가 외친 고통의 목소리다.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시고 내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어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오물 진창에서 들어 올리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우시고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하셨네.

(시편 40, 2-3)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가 겪는 고통을 외쳐 대중화해야 한다. 여기 위기를 겪으면서 새롭게 자신들을 발견한 한 가정의 이야기가 있다.

 

자연을 통한 치유

기도를 통한 치유

기억을 통한 치유

기도와 산책을 통한 치유

슬퍼하기 7단계를 통한 치유

의지를 가져라

긍정하라

몸으로 느껴라

맥락화하라

무위의 길

유위의 단계

내맡김의 길

 

 

참고 문헌

 

** 지금도 ‘필사 筆寫’ 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Disclaimer: 여기에 실린 글은 copyright가 된 책, 기사를 ‘발췌, 전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한 개인이 manual typing을 한 것이고, 의도는 절대로 저작권 침해가 아닌, fair use의 정신을 100% 살린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제한,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었고, 목적은 단 한 가지 입니다. 즉 목적을 가진 소수 group (church study group, bible group, book club) 에게 share가 되었습니다. password protected가 되었는데, 만일 이것이 실패를 하면 가능한 시간 내에 시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 준거? 증거의 typo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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